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정복자 [E](종료230816)

정복자 1-1권

2019.01.03 조회 15,481 추천 79


 자승자박
 
 
 
 
 
 
 화창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뙤약볕에 기자들은 텁텁한 공기를 마시며 진땀을 흘렸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신입 티가 나는 기자가 베테랑 선배를 따라가며 투덜댔다.
 법원 구석 한쪽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던 베테랑 선배는 그런 후배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잖아. 조금만 참아 봐.”
 “새벽부터 6시간이 넘도록 기다렸는데도 안 오는 걸 보면 오늘도 허탕이라니까요?”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법원에서 소환장이 날아간 지가 언젠데, 오늘까지 안 오면 무시한다고 생각할 거야. 분명히 오늘 오는 게 확실해. 주위를 둘러봐라. 여기 있는 기자 놈들 중에 초짜가 보이나? 이 바닥에서 하루이틀 놀아 본 놈들이 아니니까 진득하게 기다리는 거지.”
 확실히 보기만 해도 경험이 느껴지는 기자들이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문, 후문에 자리한 기자들은 저마다의 촉을 가지고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을까요?”
 입이 근질거리는지 신입 기자가 설마하며 물었다.
 베테랑 기자는 그 말에 담배 연기를 길게 들이쉬다 내쉬더니 씁쓸하게 말했다.
 “회사가 성장하면 어떤 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예를 들면 타 회사의 방해라든가, 아니면 주식 공격. 또 아니면 사람과의 관계라든가 말이지. 그 모든 방해를 이기고 나서야 진정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지.”
 “그렇다면 산해그룹은 그 과정을 이겨 낸 게 아니라 해치운 거겠네요.”
 “지금 특종 기사를 보면 그렇게 이해가 되겠지.”
 베테랑 선배는 담뱃재를 떨어내며 자신이 쓴 기사의 일면을 쳐다봤다.
 
 [산해그룹, 강북 재개발 사업에 청부업자를 고용하다.]
 
 그가 신문을 보고 있는 사이 갑자기 기자들이 어수선해졌다.
 “산해그룹이다!”
 한 기자의 외침이 도화선이 되어 기자들이 법원 안으로 들어오는 고급 세단으로 달려갔다.
 “선배!”
 신입 기자의 외침에 베테랑 선배가 서둘러 장비를 챙겼다.
 “빨리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해!”
 “알겠어요!”
 두 사람은 부리나케 앞으로 달려갔다.
 산해그룹에서 고용된 경호원들이 기자들을 제지하는 사이, 기자들이 법원 입구 근처에 노란색 테이프를 X자로 바닥에 붙였다.
 찰칵! 찰칵! 찰칵!
 정지한 산해그룹 측의 차를 향해 셔터가 매섭게 터졌다.
 기자들은 차 주인이 어서 나오길 기다렸다.
 “씨발 놈들!”
 셔터 소리가 번개처럼 들려왔다.
 산해그룹의 오너인 강만식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김용준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쥐새끼들을 보게. 먹이가 떨어지니 재빠르게 물고 있잖아.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군.”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입가는 약간 굳어 있되, 눈빛은 결연하고 자세는 당당해야 합니다. 저희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자의 마음을 가져야 기자들도 의구심을 가질 겁니다.”
 김용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변호사는 그 말에 속으로 욕지기를 삼켰다.
 혐의가 모두 드러난 상태에서도 거짓을 호도하는 그들의 뻔뻔한 낯짝이 가증스러웠지만, 그들이 내미는 돈을 받아들인 자신 역시 가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가셔야 합니다.”
 변호사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김용준은 그런 변호사를 쳐다봤다.
 “대형 로펌이라고 해서 믿고 고용했더니,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드는군.”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변호사라고 다 똑똑한 건 아닌가 보군. 지금 바깥을 봐. 기자들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우릴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안 보이나? 저들은 우리를 가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바깥으로 나서야 할까? 그따위 속마음을 감춘 평범한 얼굴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김용준의 날카로운 말에 변호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저 변호사는 해고하시죠.”
 “자넨 나오지 말게.”
 “회장님!”
 외치는 변호사를 강만식 회장은 싸늘하게 쳐다봤다.
 “자넨 이제 우리 팀이 아니야. 더불어 자네 로펌과의 일정도 취소하겠네.”
 “대체 저 자식이 뭐기에, 저놈의 말을 들으시는 겁니까?”
 “내가 누구냐고?”
 변호사의 항변에 김용준이 싸늘하게 웃었다.
 “명함은 산해그룹의 부장이지만 회장님의 최측근이자 해결사야. 법과 합의로 해결하려는 너희 족속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지.”
 “대, 대체 무슨!”
 변호사의 어이없는 얼굴을 무시하고 김용준이 말했다.
 “가시죠. 이 싸움은 저희가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러세.”
 강만식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용준이 먼저 반대쪽 문을 열었다.
 셔터 소리가 울리는 소리에 그는 잠시 기자들을 응시했다.
 결연하고 분기탱천한 얼굴.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분분한 열연에 기자들이 잠시 멈칫하고 쳐다볼 정도였다.
 그는 이어 매우 슬픈 얼굴로 반대쪽 차 문으로 걸어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나서는 강만식 회장은 무척 결연해 보였다.
 산해그룹 오너의 등장에 셔터가 바빠졌다.
 “회장님! 한 말씀 해 주시죠!”
 “대체 어떻게 된 사건입니까!”
 “청부업자의 자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정된 자리에 선 강만식 회장은 다수의 물음에도 꿋꿋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다 잠시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산해그룹의 회장이자 한 가족의 가장이며 여러분과 같은 시민으로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맹세코! 청부업자를 고용한 적이 없으며, 이 모든 사실은 저를 둘러싼 중상모략임을 분명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강만식 회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주먹은 부르르 떨렸고, 다시 든 얼굴은 좀 더 숙연해졌다.
 “저는 억울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만식 회장이 움직였다.
 기자들이 한 말씀 더해 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김용준과 강만식 회장은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어땠나?”
 “반신반의하는 걸로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증인과 대면을 하셔야죠.”
 “그들이 보고만 있을까?”
 “생각이 있습니다. 저만 믿으시죠.”
 김용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강만식 회장의 등장에 법원도 어수선해졌다.
 일반 검사가 맡기에는 중차대한 사건인지, 부장검사가 나타나 그들을 인도했다.
 “증인 대면을 신청하겠소.”
 강만식 회장의 말에 부장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저희들도 지켜본다는 가정하입니다.”
 “물론이요.”
 심문 이전에 결백부터 입증하겠다고 난리 치면 검사들도 함부로 나서기 뭐하다.
 워낙에 거물급 인사인지라 그들의 발언에 힘을 실어 줄 수는 없어도 배려는 할 수 있었다.
 강만식 회장과 김용준은 검사들을 따라 법원 내 구치소로 향했다.
 이번 사건의 증인은 놀랍게도 청부업자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는 형식의 뉘앙스로 자백을 했는데, 그 자백 가운데 산해그룹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법원과 연락망이 있는 기자들의 귀에도 들어갔고, 이 소식은 전 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산해그룹은 그동안 서민의 이미지를 잘 활용한 광고 전략으로 기업 호감도 조사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사회 환원에도 앞장서 모범 기업이라는 말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청부업자 한 명 때문에 산해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청부업자를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검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철창을 사이로 강만식 회장, 김용준 그리고 청부업자 이춘식이 대면했다.
 “어이구, 회장 나리께서 친히 납시셨군.”
 이춘식은 40대 후반의 거무스름한 털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강만식 회장을 반겼다.
 “이······!”
 강만식 회장은 이춘식을 보며 욕지거리를 뱉으려다 자신의 팔을 잡는 김용준의 표정에 뱉고 싶은 말을 삼켰다.
 “왜? 뭐라고? 할 말 있으면 하슈. 나는 당신네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강북 일대의 재개발 사업에 산해그룹이 끼어들었고, 이른바 못 박기 세입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그중에는 조폭들도 있었고, 의뢰를 받고 일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부 김용준이 해결했다.
 김용준은 구슬리고 때로는 협박으로 해결했는데, 개중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자들은 눈앞에 있는 이춘식이 해결했다.
 음주 사고, 낙사, 심장마비 등은 전부 김용준의 지시에 의해 이춘식이 해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발목이 되어 그룹 전체를 무너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춘식.”
 그는 분기에 대답 못 하는 회장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이춘식은 옆에 있는 젊은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뉘슈?”
 “산해그룹의 회장님과 같이 있으니 회사원이겠지.”
 김용준은 자신을 본 적 없는 이춘식을 향해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좀 해도 되겠나?”
 이춘식은 김용준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슈.”
 “강선, 신진, 북산, 신을.”
 김용준은 자신이 아는 대형 그룹을 일일이 읊었다.
 이춘식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뭐하는 거요?”
 “당신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지. 북산그룹의 이름을 거론할 때,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군. 역시 북산이었습니다, 회장님.”
 김용준의 말에 강만식이 주먹을 움켜쥐었고, 이춘식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북산그룹이 무슨 상관이지?”
 “질문은 끝났습니다, 부장검사님.”
 그의 말을 무시하며 김용준이 뒤에 있는 부장검사에게 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부장검사가 물었다.
 “북산그룹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이춘식에게 사주를 한 자들 말입니다.”
 “사주라뇨?”
 “어느 멍청한 청부업자가 법원에 쳐들어와서 자백을 하겠습니까? 사람 하는 일에는 뭐든지 속셈이 있는 법입니다.”
 김용준은 그 말을 끝으로 강만식 회장과 함께 심문실로 갔다.
 그사이 새로 고용한 로펌에서 변호사가 찾아왔고, 그들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강만식 회장과 동석했다.
 김용준은 그사이 복도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오! 김용준 부장! 오랜만이네.”
 전화 밖 목소리가 반기고 있었다.
 김용준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이쯤 하시죠. 북산그룹의 신흥철 이사님.”
 -그게 무슨 말인가?
 “이춘식이 자백했습니다. 북산그룹에서 저희를 무너트리려고 한다고요.”
 -뭐라고?
 전화 밖 목소리가 살짝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춘식이라니? 자네 회사의 사정은 딱하게 됐지만, 우리는 그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네.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러는 건진 몰라도, 자네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네.
 “하하하! 신흥철 이사님, 자꾸 이러시면 정말 재미없을 수가 있습니다.”
 김용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강북 재개발 사업권을 빼앗겼다고 이러시는 것 같은데, 북산그룹이라고 고고한 선비처럼 깨끗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룹은 그룹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 원칙 아닙니까? 정말 갈 때까지 가 볼까요?
 -흥! 회사가 위태로우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평정심부터 되찾고 나중에 얘기하세.
 뚜뚜뚜!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김용준은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다른 번호에 연락했다.
 “나다. 북산그룹의 사생아가 술집에서 사람 죽인 거 있지? 그거 북산그룹 신흥철 이사에게 메일로 보내. 아, 그리고 우리 쪽 기자들에게 미리 기사 터트릴 준비 하라고 해. 조만간 박 터지는 싸움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전화를 끊은 김용준은 이윽고 다른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입증된 혐의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인맥이었다.
 산해그룹은 막강하고, 그 뒤를 받쳐 주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그룹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지 않을 것이다.
 김용준은 휴게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사건을 어떻게 몰고 갈지 방향을 정하고 이미지 회복을 위한 구상을 그려 넣고 있었다.
 당분간 회사의 이익을 포기하고서라도 이미지 회복에 힘을 실어야 한다.
 지금쯤이면 법원 간부들도 북산그룹의 이름이 운운되자 웅성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룹 싸움이 시작되면 모두가 몸을 사린다.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소식통을 접하기 전까지 강만식 회장에 대한 심문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춘식, 돈은 마약과도 같아.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죽는 길에도 뛰어들게 되거든.”
 김용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룹이 건네는 큰돈에 빠진 이춘식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바로 배신이다.
 면전에서 웃음까지 지으며 태연자약했으니, 돈이라는 마약에 아주 제대로 빠진 듯했다.
 하나, 이제 그 마약은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될 것이다.
 이춘식을 살려 둘 수 없었다.
 김용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쉬고 있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해 보니 북산그룹의 신흥철 이사였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는 게 뭔가?
 신흥철 이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메일을 확인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김용준은 그 말에 화가 치솟았다.
 “원하는 것? 내가 뭘 원해서 이메일을 보냈는지 아십니까? 이미 당신들 선에서 해결하는 것은 글렀습니다. 국민들이 알아 버렸으니까. 이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겁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아주 잔혹한 싸움! 누가 먼저 무너지느냐의 게임이니 배팅 한번 제대로 해 봅시다.”
 달칵!
 이번엔 김용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장 신흥철 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말 좀 듣게!
 그의 목소리는 매우 긴박했다.
 -우리 쪽에 법조계 인사들이 꽤 많네. 반드시 해결해 주지.
 “이미지는? 우리들 이미지는 당신들이 지불하는 액수로도 해결이 안 될 정도로 타격을 입었어. 이러면 곤란하지.”
 -이춘식을 병신으로 만들면 돼!
 전화를 끊으려던 김용준은 신흥철 이사의 말에 솔깃했다.
 “병신? 어떻게?”
 -정신병자로 만들면 되는 거야. 청부업자인 동시에 약물중독자고 환각 증세를 자주 유발하는 진단서를 만들면 되지. 그가 지껄인 목소리는 대부분 헛소리로 치부하게 하는 걸세.
 “법원에서 협조할까?”
 -검찰 총장과 회장님이 사돈 관계라네. 내 말대로 이뤄질 테니, 산해그룹의 회장님 고생 그만시키고 나오게.
 “가급적이면 오늘 중에 끝냈으면 좋겠는데?”
 -젊은 친구라 그런지 추진력이 좋군. 알겠네. 그렇게 하지.
 달칵!
 김용준은 전화를 끝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키운 회산데, 누가 감히 건드려?”
 자신이 키운 건 아니지만 스스로 지킴이가 되어 회사를 성장시킨 것은 사실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미지를 활용해야겠군. 회사의 성장에 탄력을 받겠어.”
 김용준은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복도를 빠져나갔다.
 며칠 뒤, 산해그룹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회사의 이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춘식은 마약중독자이자 정신착란 증세까지 있는 환자로 치부되었고, 입증되었던 혐의는 자연스럽게 무효화되었다.
 강만식 회장은 이를 계기로 더욱더 깨끗한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천명했고, 국민들은 그런 산해그룹을 좋게 바라봐 주었다.
 급감했던 매출은 반등했고, 주식은 널뛰기를 하며 국가 1위 이미지의 브랜드를 확고히 구축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자네 덕분이네.”
 강만식 회장은 내려갈 줄 모르는 주식 보고서를 받고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김용준은 고개를 숙이며 눈빛을 빛냈다.
 “감사합니다.”
 “역시 자네가 있어야 회사가 안전해지는 것 같네.”
 강만식 회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소식 들었나? 근래 박 이사가 몸이 안 좋다는군.”
 “안타깝군요. 한창때는 정정하셨는데 말이죠.”
 “그러게 말이야. 건강도 안 좋은데 계속 일을 할 순 없는 모양이야. 고향 시골집으로 내려가 쉬겠다는 걸 붙잡을 순 없지. 문제는 박 이사의 빈자리를 누가 채우냐는 건데······.”
 간 보듯 말끝을 흐리던 강만식 회장이 넌지시 김용준을 쳐다봤다.
 “그 자리는 자네가 적임자인 것 같군.”
 “제가 어찌······.”
 김용준은 그 말에 놀란 얼굴로 겸양을 떨었지만, 강만식 회장은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우리 회사는 이제 외부의 견제를 받고 있네. 강경하고 확실한 일 처리를 하는 데 있어서 자네만 한 사람이 없어.”
 “감사합니다, 회장님.”
 김용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나이 36세.
 오너의 가족이 아닌 이상 그의 나이라면 대리 진급도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통 사회의 속성이다.
 하지만 김용준은 초고속 승진을 이뤄 냈다.
 그것도 무려 회사의 대표 이미지라는 이사를 직함으로써 말이다.
 조용히 회장실을 나온 김용준은 잠시 자신의 승진을 체감하지 못했다.
 산해그룹의 이사!
 아직도 실감이 되지 않았다.
 대기업의 이사급이면 대한민국 1% 안에 드는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됐어!”
 김용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며 전진한 결과가 결실을 맺은 기분이었다.
 “이렇게만 쭉 가자.”
 김용준의 눈이 타듯이 이글거렸다.
 승진을 위해, 아울러 자신의 성공을 위해 더러운 일을 마다 않고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자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용준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인간이 한 번 살지 두 번 사는가.
 다시없을 기회가 내려오는데 잡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다가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산해그룹이라는 금동아줄이다.
 이제 승승장구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날 술 한잔 안 할 수가 없지.”
 날이 서서히 저물자 김용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비서가 일어서며 물었다.
 “퇴근하시게요?”
 “먼저 갈 테니 신 비서도 일찍 쉬어요.”
 기분이 좋으니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밖에 없다.
 김용준의 미소에 신 비서도 마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 이사님.”
 김용준은 그 말에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짓고는 건물을 빠져나와 단골 바 <bar>로 향했다.
 “늘 시키던 걸로 한 잔.”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시킨 김용준은 콧소리를 흘렸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가만히 있는 그의 옆으로 아리따운 여자가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긴 생머리에서 풍겨 나오는 샴푸 향이 김용준의 마음을 흔들었다.
 평상시에는 냉철한 분석가처럼 모든 일에 예민하던 그였지만, 오늘처럼 기쁜 날에 눈이 크게 뜨이는 미인이 다가오자 마음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제게 있어 특별한 날입니다. 바텐더, 이 아가씨에게도 칵테일 한 잔 주게.”
 “고마워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어떤 특별한 날이죠?”
 칵테일 잔을 부딪치며 술잔을 기울이다 여자가 물었다.
 김용준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승진했습니다. 아주 높은 직책으로.”
 “어머! 정말 특별한 날이군요. 그런데 그 좋은 날에 왜 혼자 있는 건가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으니, 좋은 날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죠.”
 “어머, 미안해요.”
 김용준이 고아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사과했다.
 말투가 고아하며 예의가 바르다.
 그는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괜찮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서 혼자가 편합니다.”
 “정말 편한가요?”
 그녀가 상체를 다가서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앵둣빛 입술에 김용준의 목울대가 크게 넘어갔다.
 “당신같이 매력 있는 분은 예욉니다.”
 “호호호!”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호감 있는 젊은 이성이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뜨거운 정사를 마치고 누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김용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자신은 포대기에 감싸인 갓난아이였고, 고아원 원장은 심술맞게 생긴 여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청소, 설거지, 노가다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고아원장은 그를 종갓집 하인처럼 일을 부려 먹었고, 약하고 어린 용준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변변찮은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사춘기 시절에 고아원을 뛰쳐나와 자연스럽게 불량배들과 어울렸다.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 날 같이 놀던 불량배 녀석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하고 있는데, 사고 가해자가 나타났다.
 그는 아주 고급 승용차를 타고 있었고, 가까이 가기 어려운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불량배의 아버지에게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수표를 꺼내 뭔가를 적어 내밀었다.
 그러자 성을 내던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숙였다. 가해자는 조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 당시 용준은 매우 발끈했다.
 종이 쪼가리로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가해자의 뒤를 쫓아 고함을 질렀다.
 친구를 살려 내라고.
 그러자 자신을 물끄러미 보던 가해자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수표를 내밀었다.
 그 수표에 쓰여 있던 액수는 무려 200만 원이었다.
 200만 원!
 당시 시세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자신이 그 돈을 받으며 아무 말도 못 하자 가해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는 사라졌다.
 용준은 그제야 돈이 갖는 힘을 알았다.
 돈이 있으면 사람도 죽일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때부터였다.
 자신이 출세하기로 마음먹기로 한 순간이.
 간신히 학교를 나와 입사한 산해기업은 입사 경쟁보다 더 치열한 전쟁터였다.
 당시 IMF도 터져 버리는 바람에 어떻게든 책상이 빠지지 않도록 눈치까지 살피느라 더욱 피가 말라 갔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업을 하기 위해 토지를 확보하려 하면 이를 미리 알고 알 박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때문에 회사의 성장이 지지부진했다.
 용준은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강만식 사장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고, 용준은 일사천리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때부터 사장의 눈에 띄어 지금까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일을 하다 보니 할 짓 못할 짓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용준은 떳떳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해지자는 그의 모토가 아니었다.
 약자는 구슬릴 수 있을 때까지 구슬렸고, 강자는 무자비하게 치워 버렸다.
 양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의 쾌감과 비슷했다.
 강자에게 강할 수 있다는 건,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조직폭력배의 이권 개입이었다.
 그 당시 용준은 그 조직의 보스를 납치해 아주 잔인하게 죽이고 그의 시체를 분해하여 중간 보스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이후로 산해그룹이 나서는 일에 어떠한 조직폭력배도 개입하지 않았다.
 산해그룹이라는 이름은 곧 대한민국 최고가 되었고, 용준은 그 최고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다.
 이제 남은 일은 더욱더 앞으로 치고 올라가는 길뿐이다.
 산해그룹 회장, 강만식의 자식 농사는 대부분 실패했다.
 회장의 자식들은 다른 재벌 2세와 다르게 머리도 멍청했고 무능력했다.
 용준은 또다시 꿈을 꾸게 했다.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라면 그들을 치워 버리는 것도 머지않았고, 강만식 회장은 자신에게 그룹을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촤아악!
 즐거운 꿈을 꾸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에 물세례가 쏟아졌다.
 “허억!”
 얼음처럼 차가운 물세례를 받고 용준은 눈을 번쩍 떴다.
 “이제 눈을 떴나?”
 아직 실감 나지 않는 듯 눈을 깜빡이는 그의 시야에 북산그룹의 신흥철 이사가 뒷짐을 진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준은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그의 방 안이었는데, 낯선 창고 안 의자에 앉은 자신은 밧줄에 결박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성취를 완벽하게 이루기 전까지는 방심해선 안 되지. 예를 들면 술, 여자, 돈 같은 것들 말이지. 자네의 경우는 전부 포함되겠군.”
 신흥철 이사의 차가운 말에 용준은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씨발 년!”
 용준이 욕을 내뱉자 신흥철 이사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옛말에 남자는 아랫도리 간수를 잘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신흥철 이사님.”
 용준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갑자기 절 왜 납치하십니까?”
 “자네에게 볼일이 있어서지. 그냥 부르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좀 험하게 부르게 됐군.”
 “그냥 부르시지 그랬습니까. 저흰 좋은 술친구가 아닙니까. 이건 예의가 아니죠.”
 “미안하지만 곧 죽을 사람에게 예의를 차릴 정도로 바른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지.”
 신흥철 이사의 말에 용준은 흠칫했다.
 “절 죽이시겠다구요?”
 “천애 고아에 일가친척도 없으니 추궁할 사람들도 없지. 북산의 인맥은 자네에 대한 수사를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으니, 사회적 이슈로 남을 일도 없을 거야.”
 “하하하! 신흥철 이사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자네야말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이건 장난이 아니야.”
 신흥철 이사의 서늘한 눈빛에 용준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언제부터 북산이 이렇게 더러워졌습니까? 내가 죽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습니까?”
 “자넨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어.”
 “북산의 사생아 말입니까?”
 “그래.”
 신흥철 이사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어. 자네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난 기사를 터트리지 않았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신흥철 이사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분은 평상시엔 조용하고 차분하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술집에서 흥분해서 칼을 휘둘렀단 말이야. 왜 그런 걸까? 사람이 술을 마시면 흥분하니까? 평상시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나서?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외부의 개입이 있었더라고.”
 용준은 침을 삼켰다.
 신흥철 이사가 그런 용준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분이 마신 술잔에 사람의 성향을 공격적으로 유도하는 약물이 투여되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칼은 테이블 바닥 밑에 있었고 말이야. 모든 과정이 다 예측된 준비였어. 그러니까 무대가 마련된 거지.”
 “누가 꾸민 일인지는 몰라도 아주 독한 사람이군요.”
 용준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신흥철 이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가 아니라는 건가?”
 “설마요! 제가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반문하던 신흥철 이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멀찍이서 문이 열리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한 남자가 검은 정장을 입은 자들에게서 끌려왔다.
 “이 새끼는 알겠지?”
 용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자신의 심부름꾼 중 한 명인 유석준이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용준은 일단 잡아떼었다.
 그러나 유석준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저 개새끼가 시켰어요! 우린 돈만 받고 일했습니다.!”
 “그렇다는군.”
 “연기도 정도껏 치시죠. 저렇게 사람을 반 죽여 놓고 강요하면 대통령도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습니다. 이러지 마시죠.”
 “너의 그 가증스러운 태도가 정말 역겹군. 정말 모르는 사람인가? 네 차명 계좌에서 저놈의 계좌로 입금된 금액이 얼만지 10원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시치미 뗄 수 있을까? 그분은 아직도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넌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인 거야.”
 신흥철 이사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용준은 혀를 찼다.
 “제길, 전부 알고 있군요.”
 “자넨 너무 독해서 일을 그르쳤어.”
 신흥철 이사가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만약 자네가 조금만 신중하고 조금만 더 조심성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아울러, 산해그룹의 회장님도 자네에게서 실망하지 않았을 테고.”
 “뭐? 그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용준의 얼굴이 돌변했다.
 신흥철 이사가 혀를 찼다.
 “자네는 엄밀히 산해그룹 사람이라네. 자네 회장의 허가가 없었다면 함부로 이리로 끌고 오지도 않았을 거야.”
 “회장님이 날 제거하라고 했단 말인가?”
 “우리가 뒤에서 구슬렸지. 넌 위험한 놈이라고. 북산그룹의 사생아를 살인자로 만들었으니까. 애초에 우리가 산해그룹을 공격한 것도 미리 합이 맞춰져 있었던 거야.”
 용준은 충격을 받았다.
 “일부러 그랬다고? 그리고 회장님은 알고 있었다고?”
 “그래. 자네를 시험하기 위해 강수를 둔 거지. 만약 자네가 북산그룹을 협박하는 데 사생아를 이용하지 않고, 그룹의 이사 자리를 거절했으면, 회장님은 자넬 믿었겠지. 하지만 야심만만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은 자네의 본성을 아셨으니, 자네가 위험해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모든 게 계획되어 있었다는 말에 용준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 개새끼! 내가 산해그룹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감히 나를 개새끼 취급해!”
 “아직 현실을 이해 못 했군. 자네가 스스로 위험에 빠진 거야. 불구덩이에 뛰어든 자네 때문에 모든 일이 이렇게 벌어진 거야.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게 어떤가? 아, 곧 죽을 테니 후회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군.”
 빙긋 웃던 신흥철 이사가 검은 정장이 건네는 가방을 받아 열었다.
 그 안에는 주사기가 들어 있었는데, 주사기 안에는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건 우리 산하의 제약 회사가 개발한 수면약인데, 일정한 양 이상으로 맞으면 치사량에 가깝게 되지. 아마 이 정도가 치사량일 거야.”
 “신흥철 이사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내가 죽는다고 득 될 건 없을 겁니다. 산해그룹을 파멸시킬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재계 넘버원으로 서고 싶지 않습니까?”
 용준은 이미 모든 경우의 수가 다 틀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신흥철 이사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개인적으로 사생아라곤 하지만, 우린 그분이 북산그룹의 중요한 인력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자네가 다 망쳐 놨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신흥철 이사는 신중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가 자신을 죽이기로 맘먹은 이상 반드시 죽일 생각인 게 분명했다.
 애걸복걸해도 소용없다. 김용준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끝이었다.
 “저항하지 말게. 발버둥 쳐 봤자 결과는 똑같으니까.”
 푸욱!
 “끅!”
 주사가 투여되고 용준은 신음을 흘렸다.
 ‘제길, 이렇게 죽는군. 아직 못 해 본 일이 너무 많은데.’
 용준은 회한을 담아 씁쓸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음의 징조가 서서히 그의 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감는 그의 귓전으로 신흥철 이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다음 생에 태어나거든, 자네의 그 야심만만한 인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겠네.”
 
 
 
 
 
 환생하다
 
 
 
 
 
 
 귀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통증 때문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탓에 뒷골이 당겨 왔다.
 “으윽!”
 용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오오오!”
 “깨어나셨다!”
 갑자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용준은 시야를 확인하려고 눈을 천천히 떴다.
 환한 빛이 들어오자 그는 눈을 잠시 깜빡였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 뭐지!”
 “영주님이 깨어나셨다!”
 “어서 치료사와 신관을 불러들여라!”
 “영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뭐, 뭐라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용준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중세 시대의 복장 차림으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도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얼굴로.
 “당신들 누구야! 여긴 대체 어디야!”
 용준은 격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 반응에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리거나 굳은 얼굴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심을 돋우던 용준은 맞은편에 보이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창문에 비치는 얼굴이 자신이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 이, 이게 뭐야!”
 용준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기절했다.
 
 “뭐라구요? 기억을 잃었다구요?”
 “예. 깨어나시자마자 저희들이 누구냐며 소리를 지르시더니 그대로 혼절하셨습니다.”
 “아주 성과가 없지는 않군요. 좋아요. 계속 계획을 진행하세요.”
 “예.”
 
 ***
 
 용준이 다시 깨어났을 땐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기절하기 직전에 겪었던 일이 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주위의 풍경이 결코 현대식 가구 구조가 아니었다.
 50평은 넘을 듯한 방의 크기를 시작해서 바닥은 고급스러운 재질의 목재가 사각 나이테 형태로 세심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오른쪽의 창가를 제외하면 벽마다 초상화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위로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눈부신 천장이 보였고, 침대는 더블 침대를 붙여 놓은 것처럼 커다랬다.
 “여긴 대체 어디지? 한국은 분명히 아닐 거야. 아까 전의 사람들은 마치 중세 복장을 코스튬 한 것 같았어. 맙소사, 박물관에서나 보던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다니! 아마 직접 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거야.”
 용준은 너무나 하얘 닿으면 묻어 나올 것 같은 침대를 벗어나 창가 쪽에 비치된 전신 거울에 다가갔다.
 “이, 이게 나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거울 앞에는 백금발의 호리호리한 미소년이 서 있었다.
 커다란 눈은 별을 담은 것처럼 빛났고, 콧날은 날카롭게 뻗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우윳빛 피부에 말끔한 턱 선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는데, 가히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목젖이 아니었으면 여자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미모였다.
 너무 계집아이 같은 모습이라 용준은 얼굴을 찌푸리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몸을 홱 돌렸다.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해. 다행히도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어. 어쩌면 그들과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지도 몰라. 문제는 이 몸의 주인은 대체 어디로 갔냐는 거지. 죽어 버린 건가? 그래서 내가 이 몸에 들어온 건가?’
 용준은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영문 모를 일이다.
 분명히 자신은 죽었다. 힘이 빠지고 의식이 흐려졌으며 눈을 감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중세 시대가 그의 눈앞에 등장했다.
 ‘일단 나는 죽은 게 맞아. 침착하자. 일단 내가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이곳부터 파악해야 해.’
 용준은 천천히 가정을 내리며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나는 지금 전혀 새로운 세계. 혹은 중세 시대의 유럽에 왔어. 무슨 재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말을 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도 있지. 아마 이 몸에 남아 있는 기억으로 인해 그런 것 같고. 지금 이 몸의 신분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 유감스럽지만 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해.’
 냉철하던 상황 판단력은 녹슬지 않았다.
 용준은 현재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일단 적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이게 꿈이든 뭐든 상관없어. 난 누군가의 몸에 들어와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살아 있다는 거야. 그래, 난 살아 있어. 그게 가장 중요하다.”
 용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지, 아니면 한 많은 영혼이 구천을 떠돌다 시대를 거슬러 누군가의 몸에 들어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용준은 그 사실에 무척 만족했다.
 
 ***
 
 “들어오세요.”
 차분한 목소리에 문을 다시 두드리려던 손이 멈칫했다.
 “목소리가 차분하시네?”
 듣던 것과는 많이 달라 오클레앙 영지의 서기관 마스케노 준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의 중년인을 쳐다봤다.
 “그렇군요.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나 봅니다.”
 영지의 회계를 담당하는 재무관 알폰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던 용준은 고개를 돌려 나타난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 명은 백발을 뒤로 넘긴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배가 터질 것처럼 튀어나온 대머리 중년인이었다.
 “앉으세요.”
 용준은 그들을 보며 방 가운데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아, 예.”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더니 중간에 놓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용준은 상석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시선을 참지 못한 재무관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묻자 용준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난 두 사람을 모릅니다.”
 “역시!”
 의아하게 바라보던 서기관이 탄성을 뱉으며 무릎을 쳤다.
 “소문대로 기억을 상실한 게 맞으시군요.”
 “기억?”
 용준은 그의 말을 되뇌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내가 그들을 몰라도 될 변명을, 알아서 만들어 주었구나.’
 하기야 이 몸의 원주인이라면 그들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모르쇠로 일관하자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가장 실현 가능한 가정을 내세웠으니 용준으로서는 다행인 셈이다.
 “그렇습니다. 전 기억을 잃었으니 두 분은 자기소개를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낮춰 주십시오, 영주님. 저희들은 영주님을 받드는 가신들입니다.”
 서기관이 정중하게 말했다. 곁에 있던 재무관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영주님. 영주님이 사고를 당하시기 전에는 저희에게 마음껏 하대를 하셨으니 지금 이 상황은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요?”
 용준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가 사는 대한민국은 극존칭이 매우 발달해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존칭을 섞는 게 기본 예의지만, 이곳에서 용준은 그들의 상관이니 나이가 적건 어리건 하대를 하는 게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용준의 기억만 가진 채 그들에게 함부로 하대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건 차차 개선해 나가죠.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용준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약속한 듯이 침음성을 흘렸다.
 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마스케노 리토입니다. 저는 오클레앙 영지의 서기관을 맡고 있습니다.”
 “서기관이 하는 역할이 뭐죠?”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책임지는 역할입니다.”
 “중요한 직책이네요.”
 “예,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용준이 배불뚝이 중년인을 쳐다봤다.
 “저는 알폰소 필레입니다. 영지의 회계를 맡고 있는 재무관입니다.”
 “두 사람의 직책이 상당히 높군요.”
 용준은 적지 않게 감탄했다. 영지를 꾸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회계와 행정을 두 사람이 맡고 있는 셈인 것이다.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과분한 직책을 맡았죠.”
 마스케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용준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처음 깨어났을 때의 분위기를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물었다.
 “깨어났을 때 왜 내가 누워 있었죠?”
 분명히 창가에 비쳤던 자신의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던 걸로 기억했다.
 무슨 사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저들이 기억상실증이라는 변명을 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음,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사고?”
 용준의 되물음에 알폰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필이면 말이 날짐승에 놀라 날뛰지 않았으면 낙마하실 일이 없었을 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흠흠.”
 마스케노가 못마땅한 얼굴로 헛기침을 흘렸다.
 용준은 둘의 분위기를 보고 수상함을 감지했다.
 ‘재무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기관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복잡한 사연이 얽힌 것 같았다.
 “그랬군요.”
 용준은 일단 납득하는 시늉을 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알폰소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나저나 기억을 잃으셨으니 회복에 박차를 가하는 게 좋겠습니다. 영지는 저희들이 잘 이끌어 갈 테니 영주님께선 좀 더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군요.”
 용준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기억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나는 백지상태입니다. 내 이름은 물론이고 가족조차 기억하지 못해요. 나는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입니다. 분부만 내리신다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알폰소가 얼른 대답했다.
 “일단, 도서관은 없습니까?”
 “도서관이 뭡니까?”
 마스케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용준은 속으로 크게 안타까워했다.
 ‘여긴 도서관이 없구나.’
 “책이 많이 비치된 곳을 묻는 겁니다. 가능한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런 곳이라면 전대 영주님의 서재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곳에 비치된 책이 가장 많이 있죠. 하인들에게 미리 일러둬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세요.”
 용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축객령을 내리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내 이름이 뭐죠?”
 마스케노가 몸을 돌려 공손히 대답했다.
 “블래터 델 오클레앙이십니다.”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걷던 용준은 하녀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골치가 아팠다.
 ‘잘생겨도 피곤하군.’
 잘생긴 걸 넘어 아름다울 지경이니 하녀들은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여깁니다.”
 하인이 공손한 자세로 서재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용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특유의 책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벽마다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못해도 만 권 가까이는 되어 보여 용준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여기서 이 세계의 지식을 습득해야겠다.”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장 가까운 책꽂이에 꽂힌 책을 꺼내 들었다.
 
 ***
 
 “여긴 대체······.”
 책장을 넘기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용준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 세계에 대해 두 가지 가정을 내세웠다.
 과거의 중세 유럽이다.
 혹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용준은 그 두 가지 추측 중에 중세 유럽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그가 사는 곳은 지구이니까.
 그런데 중세 유럽이 전혀 아니었다.
 칼과 마법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정신력을 극대화해서 적을 벤다고? 그럼 뭐가 다른 건데?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어. 마법은 정말 놀랍군. 마나<mana>가 이 세계를 이루는 중심이고 근간이라니. 정말 새로운 세계에 온 것 같군.”
 인간의 능력이 자신이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호풍환우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는 용준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도무지 넘기면 넘길수록 판타지의 세상에 온 것 같다.
 드래곤, 수인족, 정령, 엘프 등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이들 이종족은 인간의 대륙과 멀리 떨어져 교류가 거의 없다고 한다.
 드래곤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던 책의 구절에 ‘드래곤의 침범은 재앙과 파멸을 부른다.’라고 서술한 점이 눈에 띄었다.
 “국가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고? 핵폭탄이라도 되는 거야?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명체가 다 있지?”
 그가 살았던 현대에도 드래곤이라는 개념이 있긴 하지만 전부 허구다.
 다만, 서양의 드래곤은 아시아의 용과 달리 사악하고 포악한 이미지로 이 세계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파괴력은 비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정말 놀랍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투성이였다.
 용준은 몬스터라는 제목의 책을 펼쳤다.
 그리고 탄성과 감탄을 뱉으며 책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
 
 “영주님의 성격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어떻게요?”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마스케노를 존중하더군요.”
 “블래터가?”
 “예.”
 “블래터의 머리가 정말 이상해진 게 맞는 모양이군요. 신경질적인 겁쟁이 블래터가 그렇게 되다니. 호호호, 정말 웃긴 일이군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마스케노는 아직 중립을 지킬 모양입니다.”
 “흥. 그 노인네는 정말 귀가 없고 눈도 없나 보군요. 대세를 거스르다니 어리석군요.”
 “어떻게 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한다는 거죠? 당연히 제거해야죠.”
 “마스케노는 오랫동안 영지에 일하면서 신망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를 제거했다간 행정 관료들이 들고일어날 겁니다.”
 “누가 그를 말했나요?”
 “설마?”
 “맞아요. 정신 나간 영주는 필요 없죠.”
 “제거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요. 그를 쫓아낼 생각이에요. 공식적으로!”
 
 ***
 
 “배가 고프네.”
 계급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책을 읽던 용준은 허기가 져서 책을 덮었다.
 일어난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
 “배가 고프니 서재로 음식 좀 가져다줘.”
 “예.”
 하인은 공손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가운데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많은 자였지만 용준은 그에게 말을 높일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보다 더 확고한 계층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평민에게 말을 높이면 귀족의 명예가 실추되고 다른 귀족들에게 지탄을 받는다 하니, 알아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
 용준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해 둔, 책의 정보를 정리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해지는 방법에는 마법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서재 전체를 둘러봐도 마법 서적은 없었다. 배울 방법이 막막하니 다른 식으로 알아봐야 했다.
 “그나저나 내 암기력이 이렇게 좋았나? 읽은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니.”
 용준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다 스스로도 놀란 능력에 감탄을 했다. 옛날에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듯이 사고를 빠르게 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몸의 주인이 기억 능력이 좋은 것 같았다.
 “블래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미소년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대인 관계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겠지만, 남들에게 알고 있는 대로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듯싶었다.
 똑똑똑!
 “영주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용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녀의 메이드 복장이 신기했다.
 서재 안으로 들어온 하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용준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다가오더니 쟁반에 놓인 샌드위치와 물컵을 내려놓았다.
 용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좀 부실한데?”
 “영주님께서 평소 드시는 식사 양입니다. 필요하시면 더 가져올까요?”
 “아니, 됐어.”
 용준은 고개를 젓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빵에 고기가 살살 녹았다.
 “맛있네.”
 식사를 하던 용준은 문득 하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뭘 그렇게 빤히 보지?”
 “앗! 죄, 죄송합니다.”
 하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 그게······.”
 하녀는 우물쭈물하다 양손을 꼭 쥐더니 용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영주님이 살아남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마워.”
 용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에 열중했다. 고맙다는 말에 하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름이 뭐지?”
 용준이 하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녀가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더듬거렸다.
 “리엔이에요.”
 “그래, 리엔.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좋겠어.”
 “네!”
 “난 어떤 사람이지?”
 “네?”
 리엔이 당황해하자, 용준은 자세히 설명했다.
 “내가 사고를 당한 것은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내 기억이 사라져 버렸어. 그래서 사고를 당하기 전의 내 자신을 모르겠어. 너라면 사고당하기 전의 블래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거 아냐?”
 “그, 그게······.”
 리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용준이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나쁘게 말해도 상관없어. 아니, 최대한 솔직하게 말해 줘. 그게 나를 돕는 길이야.”
 “그래도 될까요?”
 리엔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용준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그럼 제가 들은 바대로 말씀드릴게요.”
 리엔이 천천히 말문을 뗐다.
 “영주님은 무척 멋진 분이시지만, 장미의 가시처럼 성격이 무척 날카롭다고 했어요. 독선적이기도 하고 신경질적이기도 했대요.”
 “그래서? 아는 것이 있으면 전부 꺼내 봐.”
 “네. 영주님은 누군가 자신이 옆에 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대요. 언제나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야 했고, 누군가 뒤에 서 있는 걸 가장 싫어했대요. 그리고······.”
 “그리고?”
 “무척 소심하셔서 밖에 나가지 않고 항상 방 안에만 계셨어요.”
 용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부실한 몸의 근간은 평소 생활의 됨됨이 때문이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몸이 마르고 야위게 된 것이다.
 “그만, 됐다. 내가 어떤 놈인지 확실히 알겠어. 다른 이야기를 듣는 게 좋겠다. 지금 오클레앙 성을 쓰는 사람은 누가 있지?”
 “네?”
 “가족 말이야. 아버지나 형제, 혹은 남매가 있을 거 아냐.”
 “영주님은······.”
 리엔은 그 말에 답하기를 주저했다.
 용준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왜?”
 “영주님의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배다른 형제가 있어요.”
 “그렇군.”
 용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자신이 영주라고 불릴 때, 내심 이 몸의 아버지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말해 봐. 어떻게 된 건지.”
 리엔의 말은 이랬다.
 블래터는 루크 오클레앙과 레이나 콘도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이나 콘도르는 명망 높은 후작가의 영애였지만 자식을 낳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몸이 약해서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구혼하는 이가 없었으나, 유일하게 블래터의 아버지, 루크 오클레앙 남작이 그녀에게 청혼해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임신을 하고 자식을 낳은 뒤 시름시름 앓던 레이나 콘도르는 죽고 말았고 비탄에 빠진 루크 오클레앙은 술김에 한 여인과 동침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여인이 문란하기로 소문난 레지나 백작 가문의 영애였고, 동침을 빌미로 루크는 재혼을 하게 된다.
 시엘라 레지나는 남자아이를 낳았고, 영지는 별 탈 없이 돌아가다 얼마 전 루크 오클레앙이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자신이 남작 위를 받으면서 태풍 전의 고요함이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정말 잘 아는구나?”
 리엔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정보에 용준은 적잖이 감탄했다.
 “적어도 영주성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하녀들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용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겠군.”
 윗사람들의 시중을 드는 직업이다 보니, 듣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입방정은 고스란히 하녀들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비밀은 혼자 아는 것보다 공유하는 것이 좋다고, 하녀들은 저들끼리 모여 그렇게 입방정을 떠는 것이다.
 “넌 쓸모가 많구나.”
 용준이 지그시 리엔을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 감사해요.”
 “네 말대로라면 시엘라 레지나는 내 적이군.”
 리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의 입방정에 오클레앙 남작이 시엘라를 적으로 인지해 버린 것이다.
 “그, 그런 말씀은······.”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하녀들끼리 떠드는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군. 말해 봐. 내가 낙마한 사고는 시엘라가 꾸민 짓인 것 같나? 난 그렇다고 본다.”
 “그, 그건 저도 자세히······.”
 “리엔, 넌 나를 도와줘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리엔, 나를 봐.”
 “여, 영주님.”
 리엔의 얼굴이 달달 떨려 왔다.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그녀의 걱정을 읽은 용준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떨지 마라, 리엔. 네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날 도와준다면 나 역시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일종의 거래이자 약속이지. 지금의 난 풍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위태로워. 아무것도 없는 내게는 조력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네가 그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제, 제가요?”
 “그래. 내가 죽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여, 영주님이 죽는다구요?”
 리엔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쳐다봤다. 용준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을 들어 보니 적이 사방에서 나를 조여 오는 기분이 들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 말대로 될지도 몰라.”
 “제가 어떻게 영주님을 도와 드려요?”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기억을 잃은 내게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 주렴.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아, 알겠어요.”
 “좋아. 넌 이제부터 내 전속 하녀다. 가서 하녀장을 불러와라.”
 “네.”
 리엔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서재를 나갔다.
 그런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던 용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신흥철 이사의 말대로 되었군. 내 야망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야.”
 남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계층구조에, 자신은 유리한 고지를 밟을 수 있는 귀족이라는 위치에 있다.
 “정말 흥미롭군.”
 용준은 눈빛을 빛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왕이 될 수도 있다.”
 만인의 정점을 찍는다.
 용준은 저도 모르게 전율이 흘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철저하게 블래터로 살아 주겠다. 김용준으로 살던 세계에서 내 꿈은 남들 위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 난 이곳을 정복해 최고가 되어 주겠어!”
 김용준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고 다짐했다.
 그의 목표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
 
 하녀장에게 리엔을 자신의 전담 하녀로 쓰겠다고 지시한 용준은 다시 그녀를 방으로 불러들여 하얀 종이를 소파 앞에 놓인 탁자에다 펼쳐 보였다.
 “영지를 운영하는 관리들 중 네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모조리 말해 봐.”
 “저도 전부 알진 못해요.”
 “다 몰라도 괜찮아. 중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만 알려 줘.”
 “예.”
 리엔은 용준이 시키는 대로 자신이 아는 선에서, 영지를 꾸리는 관리들을 말해 갔다.
 서기관 마스케노. 재무관 알폰소. 치안관 베니토. 외교관 마커스. 그리고 레드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단장 로이드가 오클레앙 영지의 중요 인사들이었다.
 이자들이 가문의 대소사를 주관하고 책임진다.
 “시엘라 레지나는 어떤 역할이지?”
 “잘 모르겠지만 몇 분이 레지나 님을 따르고 있어요.”
 “그게 누구지?”
 “알폰소 재무관님과 마커스 외교관님 그리고 기사단장 로이드 경이에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제 친구가 레지나 님의 전속 하년데 그 세 분이 주로 티타임에 오시거든요.”
 “내 배다른 형제는 뭐 하지?”
 “그분은 지금 로이드 경에게 기사 수업을 받고 있어요.”
 “이름이 젠트 오클레앙이라고 했나?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나와 닮았나?”
 “아뇨. 전혀 달라요. 그분은 체격이 크시고 얼굴도 전혀 닮지 않았어요.”
 “그래? 아버지를 많이 닮은 건가?”
 용준은 방 안에 걸린 초상화 중에 루크 오클레앙의 이름이 쓰여 있는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선친은 선이 굵지 않은 전형적인 문사 타입이었다.
 “뭐, 그렇다 치고······ 나를 따르는 자들은 없나?”
 “그건 모르겠어요.”
 “내 사람이 필요해.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으음.”
 리엔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다 박수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지하 감옥에 계신 분들이 있어요.”
 “지하 감옥? 죄를 지은 범죄자들은 필요 없어.”
 “아니에요. 그분들은 모함을 받아 갇힌 거예요. 물론 범죄가 아주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저희들끼린 안타까운 사람들이 갇혔다고 수군거렸던 적이 있어요.”
 “그래?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어?”
 “네!”
 
 
 
 
 
 사람을 얻다
 
 
 
 
 
 
 교도관은 난처한 얼굴로 감옥 앞에 서 있었다.
 “귀하신 분이 올 곳이 못 됩니다.”
 “열어.”
 “그게 저기······ 곤란합니다.”
 명령을 내렸음에도 교도관은 미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용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블래터! 넌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영주가 명령해도 불복하는 부하들을 만들어 놓은 거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적을 탐독한 결과, 이 세계의 신분제도의 장벽은 높았고, 귀족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교도관은 귀족이자 오클레앙의 주인이 명령을 했음에도 곤란해하면서도 결코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
 ‘이젠 내가 바꿀 것이다.’
 용준의 눈동자에 스산함이 스쳤다.
 “네 이름이 뭐지?”
 “예? 제 이름 말입니까?”
 얼굴이 두툼하고 체격이 큰 교도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한슨입니다.”
 “성이 없군?”
 “예. 전 평민입니다.”
 “그래?”
 용준은 한 걸음 앞장서 교도관의 앞에 섰다. 키가 작아 올려 봐야 했지만 그의 표정은 당당했다.
 “나는 블래터 델 오클레앙이다.”
 “아, 알고 있습니다.”
 한슨이 주눅 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준은 한슨이 눈치챌 수 있도록 눈빛에 살기를 심었다.
 “열어!”
 “네, 네!”
 용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겁을 먹은 교도관 한슨이 재빨리 허리춤에 달린 열쇠 꾸러미를 꺼내 철문에 가져다 댔다.
 끼이이익!
 오랫동안 방치한 듯 녹슨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슨이 작게 중얼거렸다. 들으라고 한 소리가 분명했지만 용준은 못 들은 척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님, 빨리 올라오셔야 합니다.”
 한슨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용준에게 말했지만, 그는 아주 천천히 올라갈 생각이었다.
 지하 감옥은 일층 구조였다.
 영지민이 많고 범죄가 많은 타 영지에는 수십 층까지도 내려가는 지하 감옥이 있었지만, 오클레앙 영지는 작은 남작령이다. 사람이 적은 만큼 범죄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일자로 뻗어 있는 복도 양 좌우로 철창이 칸칸이 늘어서 있다. 철창 사이의 벽 위로 횃불이 걸려 있어 어둡지 않았지만 복도만 비치고 철창 안은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용준이 감옥 안으로 들어서자 철창 안의 죄수들이 난리를 피웠다.
 “빌어먹을 누구야!”
 “오! 저 얼굴 좀 봐!”
 “아이야, 이리 오렴. 이 아저씨, 손 한번 잡아 주지 않으련?”
 검은 손이 철창 사이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음담패설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데, 전부 정신병자들 같았다.
 “클레이든이 누구지?”
 “흐흐흐, 클레이든이 뭐야? 먹는 거야?”
 “이리 가까이 오면 알려 줄게.”
 “이 오빠의 품에 안기렴.”
 가는 미성 탓인지 용준을 완전히 여자로 오해하는 모습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병사들을 시켜 다 죽여 버릴까 고민하는데 지하 감옥 가장 안쪽에서 낮은 중저음이 들려왔다.
 “나를 왜 찾소?”
 ‘저긴가 보군.’
 용준은 걸음을 옮겨 지하 감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가장 끝 철창 방에 서자 안쪽에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억!”
 “당신이 클레이든인가?”
 “그,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난 블래터 델 오클레앙이다. 이 영지의 영주지.”
 “브, 블래터! 저, 정말로 당신이 블래터요?”
 “맞아. 그나저나 얼굴이 안 보이는데, 철창 안쪽으로 좀 더 와 봐.”
 “······.”
 용준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 철창 안으로 다가온 몰골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더럽군. 순간 거대한 쥐가 생각났어.”
 시커먼 넝마를 둘러쓰고 얼굴에 수북이 난 털을 본 용준은 그렇게 말했으나, 클레이든은 멍한 얼굴로 용준의 얼굴을 빤히 보기만 했다.
 “왜 그러지? 내 얼굴이 이상한가?”
 “크흐흐흑.”
 클레이든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흘렸다.
 “왜 그러지?”
 용준은 당황스러웠다. 클레이든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이 격해졌는지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크허어어엉.
 “휴, 도저히 대화를 나누지 못하겠군.”
 클레이든은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용준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보자 딸꾹질을 하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미, 미안하오.”
 “하루 종일 우는 줄 알았어. 왜 울었지?”
 “나도 모르게 그만.”
 “좋아, 클레이든.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당신은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지?”
 “그렇소. 그 빌어먹을 루크의 아들이겠지.”
 “허!”
 선친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이는 이 영지 내에 클레이든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부르는 거지?”
 “죽게 만들었으니까.”
 “뭐라고?”
 희미하게 중얼거리던 클레이든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고개를 치켜들더니 고함을 질렀다.
 “레이나 님을 죽게 만들었으니까!”
 
 -클레이든 경은 레이나 님의 호위 기사였어요. 그런데 레이나 님이 출산한 뒤 돌아가시자 광분해서 오클레앙 남작님을 죽이려고 했어요.
 
 리엔의 말이 떠올랐다.
 대충 사정을 알 것 같았다.
 “내 어머니를 사랑했군.”
 정곡을 찌르자 분노로 이글거리던 클레이든이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움찔했다.
 “내 말이 맞나?”
 용준이 묻자 클레이든은 가늘게 떨며 흐느꼈다.
 “그래. 너무나 사랑했다. 너무 사랑했어. 그녀는 내게 공기와도 같았다. 그녀의 곁에 있어야 나는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오클레앙 남작이 내 삶의 전부를 앗아 가 버리더니 죽게 만들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오클레앙 남작을 저주할 것이야.”
 용준은 절규하는 클레이든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당신의 저주가 통했나 보군. 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뭐라고? 죽었다고?”
 눈을 껌뻑이는 그를 바라보며 용준은 약간의 허구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말하더군. 당신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돌아가시기 직전엔 편한 얼굴로 말하셨다는군. 이제야 레이나를 만날 수 있겠다고.”
 “······.”
 “내가 원망스럽겠군. 어머니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날 죽이고 싶나?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날 저주하고 싶나?”
 “······당신에겐 하고 싶지 않소.”
 “왜? 내가 어머니를 닮아서?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 넌 적어도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겠군. 난 그마저도 없다.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클레이든, 네 추억 속에 있는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용준은 일부러 슬픈 눈빛으로 클레이든을 쳐다봤다.
 그 눈빛을 읽고 동요하는지 클레이든이 더듬으며 말했다.
 “레이나 님은 천사 같은 분이셨소. 그분은 야위고 늘 창백하셨지만 웃음은 잃지 않으셨소. 하루는 내게 무슨 꽃을 좋아하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소. 잘 알지 못해 적당한 꽃을 대었는데, 레이나 님은 그 꽃을 찾아 주기 위해 하루 종일 꽃밭을 뒤지다가 몸살이 걸려 오랫동안 앓으셨소. 그러면서도 내게 좋아하는 꽃을 찾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지. 미안하다고.”
 클레이든이 말하다 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레이나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만 그분을 더 뵙고 죽고 싶었소. 그런데 레이나 님과 쏙 빼닮은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니 내가 죽을 때가 된 것 같소. 루크가 그랬듯이, 나도 레이나 님의 곁으로 갈 수 있겠군.”
 “클레이든, 넌 죽을 수 없어.”
 용준은 그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오?”
 “정반대야. 날 살리기 위해 온 거야.”
 클레이든의 눈이 커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날 해하려는 자들이 있어. 그리고 내 주위엔 아무도 없지. 이대로라면 내가 죽는 날도 머지않았어.”
 “당신은 오클레앙 남작이잖소. 어떻게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요?”
 “사정이 길다. 날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선택을 해라.”
 “난 죽음을 다짐한 사람이오.”
 클레이든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날 위해 돌아가셨다. 그분의 죽음을 헛되이 할 생각인가?”
 용준은 클레이든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음.”
 클레이든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용준의 말이 맞았다.
 그의 죽음을 방치하면, 죽어서 레이나 님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클레이든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레이나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클레이든, 이것 봐. 내 아들이야. 내가 낳은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
 보따리에 감싼 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그녀는 클레이든을 쳐다봤다. 클레이든은 그녀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클레이든, 이 아이를 지켜 줘.”
 “레이나 님!”
 비통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
 루크 오클레앙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안은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레이나가 눈을 감자 클레이든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할 거야?”
 용준의 물음에 클레이든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자신에게 아이를 부탁한다는 레이나 님의 얼굴과 블래터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클레이든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용준은 내심 걱정을 하다 손쉽게 충성을 약속받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난 정말로 위기에 처했어. 지금 당장 꺼내 주진 못하더라도 곧 이곳을 나가게 될 테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 둬.”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클레이든은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기사 출신이니 시간만 주어지면 예전의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다음 상대를 찾아볼까?”
 용준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그대로 돌려 맞은편 철창으로 걸어갔다.
 “다 듣고 있었지?”
 “······.”
 “모르는 척하지 말지? 아까부터 숨소리가 거칠어. 아마도 나와 클레이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겠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묻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클레이든처럼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 쉽게 영주님께 충성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뭐라고?”
 용준이 기가 찬 표정으로 어처구니없어하자 곧바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영주님이 지하 감옥에 오신 이유가 시엘라 남작 부인의 손을 타지 않은 인재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까?”
 정확히 자신의 현주소를 파악해 내자 용준은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시엘라를 알고 있구나?”
 “예. 덕분에 지하 감옥에 갇혀 있죠.”
 “무슨 짓을 저질렀지?”
 “그녀에 대한 투서를 썼는데, 재수 없게 걸리는 바람에 누명을 써서 지하 감옥으로 왔습니다.”
 “시엘라를 건드려? 배짱 하난 좋군.”
 “출세하려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했는데, 상대를 잘못 건드렸죠. 전대 영주님이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적당한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백작가의 여식이었더군요. 덕분에 죽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 가둬지는 형벌을 받았죠.”
 “재수가 없었네?”
 야망을 위해 시엘라를 건드린 배포가 마음에 들었는지 용준이 빙글거렸다.
 “예. 그런 제가 억울해 보였는지 하늘이 두 번째 기회를 주시네요.”
 “내가 두 번째 기회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좋아, 기회를 줄 테니 내가 왜 널 꺼내야 하는지 말해 봐.”
 “전 사고 회전이 빨라서 상황 판단 능력이 탁월합니다. 영주님의 두뇌가 되어 영지를 경영하는 데 빈틈과 차질 없이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네. 그런 것 가지곤 날 설득시킬 수 없어.”
 “하지만 극한에 처한 영주님의 입장에선 솔깃한 제안 아닙니까? 게다가 전 시엘라를 싫어합니다. 영주님이 찾는, 시엘라의 손이 닿지 않은 인재로서 충분하다고 말씀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두 번째 기회는 날아갔네. 유감이야.”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용준은 빙긋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철창 안에 있던 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절 보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괜히 왔어. 난 말 많은 자를 중용하지 않아. 그리고 궁지에 몰린 내 처지를 언급하면서 협상을 하려 했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자신을 밝히지 않은 거야. 난 기회주의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 그런!”
 “나를 농락하려고 들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용준은 그를 일별하고 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멈췄다.
 “로스틴은 어디에 있어?”
 그러자 철창 안쪽에서 후다닥 소리가 나더니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드러냈다.
 “제 바로 왼쪽 감방입니다. 그리고 전 레온이라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좋은 태도야. 느낀 게 있나 봐?”
 “물론입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봐서.”
 애원하는 레온을 무시하듯 지나간 용준은 옆 감방의 철창 앞에 섰다.
 “로스틴?”
 “꺼져!”
 “······.”
 
 -로스틴 님이 가장 설득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는 상단의 주인이었는데, 돈이 많다는 걸 알고 영주님이 누명을 씌워서 그의 돈을 전부 빼앗고 지하 감옥에 가뒀어요.
 -아버지가?
 -아뇨. 블래터 님이요.
 
 리엔과의 대화를 떠올린 용준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젠장, 블래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난 전혀 모른단 말이야.’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블래터 델 오클레앙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자신에게 이 정도 고난은 감수해야 했다.
 “난 얼마 전에 낙마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하! 그래서 잘못이 없다?”
 “그건 아니지.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려고 왔다.”
 “그딴 개소리 집어치워라. 내 인생을 망가트려도 유분수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잡설을 늘어놓는 거냐!”
 “잘 생각해 봐. 당신의 인생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갇힌 시간보다 더 큰 보상을 안겨 주겠다.”
 “개소리 말고 꺼져!”
 ‘쉽지 않겠네.’
 곰곰이 생각하던 리엔은 다시 레온의 감방으로 걸어갔다.
 “레온, 로스틴이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알지?”
 “물론입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영주님을 오랫동안 저주했었죠.”
 “그래. 그럼 잘 알겠군. 내게 한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줄 테니 내가 다시 올 때, 로스틴이 내 말을 경청할 수 있게 만들어 놔.”
 “예? 하지만 그는 영주님에 대한 원한이 큽니다.”
 “알아. 그러니까 그 원한을 줄여 놔.”
 “영주님은 기억을 잃으신 게 맞습니까?”
 “남의 말 엿듣는 건 정말 잘하는군. 맞아, 그러니까 예전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지금 이 지하 감옥에 들어와 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너희들과 대면하면서.”
 “그렇군요. 제가 로스틴을 최대한 설득해 보겠습니다. 하루 종일 옆방에서 떠들어 대면 마음을 돌릴 겁니다.”
 “미움이나 사지 마.”
 ‘이제 초석은 깔아 놨다.’
 남몰래 한숨을 내쉰 용준은 복도를 지나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철문을 열자 문밖에서 여러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준은 말없이 그들을 둘러봤는데,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재무관 알폰소가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보자 대충 감이 왔다.
 ‘이놈들이 시엘라의 측근들이구나. 지하 감옥에 다녀온 나를 우르르 둘러싼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나 보군.’
 아마도 레온과 관련된 일인 것 같다.
 “지하 감옥엔 왜 들어갔지?”
 에워싸며 용준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중 가장 앞에 나와 있는 청년이 용준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용준은 그를 보며 되물었다.
 “넌 누군데 나한테 반말이지?”
 “뭐?”
 기세등등한 얼굴로 쳐다보던 청년이 용준의 말 한마디에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재무관 알폰소가 기겁하며 속삭이듯 용준에게 말했다.
 “그분은 영주님의 이복형제이신 젠트 오클레앙이십니다.”
 “아, 그렇군. 내 배다른 형제군. 그런데 정말로 닮지 않았네?”
 용준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선이 가는 유약한 인상인데, 젠트 오클레앙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키가 180은 돼 보일 정도로 장신인 데다 선이 굵고 기본적으로 단단해 보였다.
 “초상화를 보니 오클레앙은 뼈가 굵은 가문이 아닌데, 너는 좀 특이하군. 모친의 피가 더 강했나 봐?”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젠트 오클레앙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별로. 그런데 말이 짧네? 나는 네 형이자 오클레앙의 주인이다.”
 “네 주제에 오클레앙의 주인이라고? 천만에, 넌 멍청한 겁쟁이야!”
 ‘애는 애군.’
 체격은 성인 정장은 찜 쪄 먹을 정도로 컸는데, 속이 좁은 건지 도발에 쉽게 말려드는 건지, 상하의 구분에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나야 좋지.’
 “방금 날 모욕한 건가?”
 용준은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젠트는 자신의 비아냥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입가를 말아 올리며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너 같은 겁쟁이에겐 모욕조차 아깝다. 넌 그냥 예전처럼 방구석에 숨어서 다신 나오지 않는 게 오클레앙 영지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아.”
 “젠트 님!”
 알폰소가 기겁하며 그를 만류했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용준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노려보면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젠트 오클레앙, 지금 당장 너를 귀족 모욕죄로 처벌하겠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엄연히 오클레앙의 주인이다. 너는 지금 나뿐만 아니라 나를 영주로 임명한 나의 아버지, 그리고 오클레앙 가문 전체를 모욕했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 이자를 묶고 지하 감옥에 가둬라!”
 “웃기지 마라! 난 단지 널 모욕한 거야!”
 “오클레앙의 주인을 모욕한 거지.”
 애송이는 애송이다. 젠트 오클레앙은 개소리 말라며 고함을 질렀다.
 지하 감옥 앞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몰렸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알폰소가 그를 보며 반색하며 다가왔다.
 “베니토! 영주님을 말려 주시게.”
 ‘베니토? 저자가 치안관인가 보군.’
 젠트와 눈싸움을 하던 와중에 염소수염에 차돌처럼 단단하게 생긴 중년인을 보자 속으로 반색했다.
 리엔에게 듣기로 그는 영지의 병력을 두고 기사단장 로이드와 자주 충돌하는 자다.
 즉, 그는 시엘라의 측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주님, 무슨 일인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알폰소의 말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그는 용준과 눈이 마주치자 다가왔다.
 “저 무례한 자가 나와 영지를 모욕했습니다. 당장 밧줄로 묶어 지하 감옥에 가두세요.”
 “젠트 오클레앙 님은 가문의 일원이 아닙니까? 선처를 베푸시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단지 저놈을 모욕한 거라고!”
 젠트가 길길이 날뛰며 용준을 가리키자 알폰소가 창백한 얼굴로 젠트를 만류했다.
 “젠트 님! 그만두십시오!”
 “죄를 뉘우칠 생각이 전혀 없군. 정말 내가 선처를 베풀기를 원합니까?”
 “흠.”
 베니토는 심각한 얼굴로 블래터와 젠트를 번갈아보았다.
 그러고는 결심을 했는지 표정을 굳히고 젠트에게 다가갔다.
 “젠트 님, 무례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주십시오.”
 “뭐야! 나를 죄인 취급하겠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거 놔!”
 베니토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팔을 꽉 잡았다. 악력이 센지 팔이 잡힌 젠트는 옴짝달싹도 못했다.
 체구는 약간 작았지만 힘은 베니토가 우위에 있는 듯했다.
 그때, 일단의 기사들을 동반한 중년인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멈춰라!”
 “로이드!”
 베니토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용준은 베니토의 말을 듣고 붉은빛이 감도는 플레이트 갑옷을 전신에 착용한 중년인을 쳐다봤다.
 벌어진 턱 선에 눈빛이 왕방울처럼 큰 자였다. 다부진 체구에 튼튼한 몸을 가진 자라 그런지 달려오는 모습에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베니토, 지금 무슨 짓이냐!”
 로이드는 씨근덕거리며 당장이라도 검을 꺼낼 듯이 위협했다.
 “젠트 님은 영주님을 모욕한 죄로 체포되는 것이니 상관하지 마라.”
 베니토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용준을 쳐다봤다.
 “영주님, 지금 이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롭니다. 젠트는 날 모욕했습니다. 이는 곧 나의 가문 전체를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의 죄는 합당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문을 모욕한 것이 되는 겁니까?”
 로이드는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지금의 내 신분이 오클레앙 가문의 주인이기 때문이죠. 내 말을 아직도 이해 못 하겠습니까?”
 그제야 로이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베니토가 젠트를 끌고 가려 하자 몸을 날려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베니토가 눈썹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로이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용준에게 말했다.
 “영주님, 한 번만 선처를 베푸시죠. 젠트 님은 아직 치기 어린 소년이 아닙니까? 영주님의 위치를 몰라 말실수를 하였으니 용서해 주시죠.”
 “난 이미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니토!”
 “비켜!”
 베니토가 으르렁댔다. 그러자 로이드가 더 험악한 얼굴로 베니토와 마주쳤다.
 “미친 거냐? 감히 누굴 끌고 가려는 거냐?”
 “영주님을 모욕한 죄인을 끌고 가는 거다. 왜? 저번에 영지민들에게 행패를 부린 기사처럼 감싸 줄 거냐?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 막는다면 네놈도 지하 감옥에 가둬 버릴 것이다.”
 “미친놈. 해 봐!”
 “못 할 것도 없지!”
 두 사람의 눈빛이 살기로 그득해졌다. 젠트도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치안관과 기사단장의 험악한 대치에 병사들과 기사들도 각자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양편에 갈라섰다.
 ‘누가 더 셀까?’
 용준은 두 사람의 싸움을 예상해 봤다.
 수적으로는 병사들이 더 많았지만, 아무래도 잘 훈련된 기사들을 제압하기엔 무리일 것이다.
 용준은 클레이든이 생각났다.
 리엔의 말을 빗대자면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고 한다.
 실제 싸우는 걸 보지 못했으니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다.
 이런 무력 싸움에 그가 있다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모두 멈추세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약고처럼 험악하던 분위기가 한 여인의 목소리에 깨졌다.
 “시엘라 님!”
 로이드가 원군을 맞이하는 장수처럼 그녀를 보며 반색했다.
 ‘시엘라?’
 모세가 기적을 부리듯 갈라지는 사람들 사이로 나타나는 여인을 보고 용준은 안력을 돋웠다.
 ‘뱀 같은 여자군.’
 가슴이 움푹 파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위로 땋아 올려 묶었고, 가느다란 몸매에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옆으로 어느새 사라진 알폰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정황을 늘어놓고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사고가 난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 간만에 보는구나, 블래터.”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용준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시엘라는 전 남작 부인이자 자신의 양모였으니 좋건 싫건 그녀를 대우해 줘야 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지 못했는데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예전에는 나를 그렇게 피하더니.”
 그녀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자 용준은 미소를 더욱 짙게 뿌렸다.
 “사람은 항상 변하지 않습니까? 아마, 낙마 사고가 제게 긍정적인 계기를 불어넣은 것 같습니다.”
 “좋은 변화구나. 재무관에게 듣고 왔다. 젠트를 풀어 주지 않으련? 사이가 좋지 않다 할지라도 형제가 아니니?”
 “유감입니다.”
 용준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떨친 뒤 베니토에게 소리쳤다.
 “베니토! 죄인을 끌고 가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시엘라가 강하게 외쳤다.
 “블래터!”
 “왜 그러십니까?”
 그녀가 노려보자 용준도 마주 노려봤다. 한동안 기 싸움 하듯 대치하던 두 사람은 시엘라가 먼저 제풀에 지쳐 호소하듯 말했다.
 “정말 이럴 거니? 젠트가 그렇게 싫은 거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감정적인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습니다.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걸 보니 감정적인 요소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구나.”
 “오해입니다.”
 “나는 네 어머니다.”
 시엘라가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용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나는 오클레앙의 수장이자 영지의 주인입니다. 당신이 내게 명령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원하는 게 뭐지?”
 “클레이든, 레온, 로스틴.”
 “레온은 안 돼!”
 “과거는 덮겠습니다.”
 “약속할 수 있겠니?”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시엘라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휴, 이번엔 물러가마. 하나, 다음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자비로우시군요.”
 빙긋 웃은 용준은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의 모욕에 잠시 화를 참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오클레앙 가문의 일원이기에 이번 한 번은 참고 넘어가겠다.”
 “과연 시엘라 님이군.”
 “그러게, 예전이랑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은 용준의 판결에 수군거리며 사라졌다.
 “그를 풀어 주세요, 베니토.”
 “알겠습니다.”
 양손을 묶었던 밧줄이 풀리자 젠트는 한참을 용준을 노려보더니 시엘라, 로이드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를 왜 풀어 주셨습니까?”
 사람들이 물러남에도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베니토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용준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이 정도로 저들이 고꾸라질 것 같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베니토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벗어났다.
 
 ***
 
 시엘라의 개인 별채에 네 사람이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영주가 미친 것 같습니다.”
 로이드가 이를 자근자근 씹으며 말했다.
 농락당한 것에 어지간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사람이 저렇게나 바뀔 수가 있다니, 놀랍군요.”
 알폰소는 시엘라 앞에서도 당당한 영주를 떠올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현장에 없었던 외교관 마커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알폰소가 자세히 설명했다.
 “허허, 로이드 경의 말대로 영주가 미쳤나 보군.”
 입이 벌어진 마커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시엘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차분한 태도였는데, 아마도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실 겁니까?”
 “마커스의 생각은 어떻죠?”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습니다. 영주의 변화를 마스케노와 베니토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영주의 무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제가 전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작은 영지에 홀로 있는 겁쟁이 영주를 처리하는 방법은 바로 이겁니다.”
 로이드가 불퉁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목을 손날로 그었다.
 “쉽고 빠르며 아주 간단한 일이죠.”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결코 안 되네.”
 마커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로이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된다고 말만 하지 마시고 구체적인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이 사람아! 영주의 모친이 누군지 모르겠나?”
 “콘도르 후작가는 여기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시엘라 님의 레지나 가문이 저희를 비호해 줄 겁니다.”
 “그게 문제라는 거야.”
 마커스의 일침에 로이드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문제라뇨?”
 “우리가 영주를 암살했다고 치세. 그리고 대충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레지나 가문을 끌어들이면 콘도르가 어떻게 생각할까? 지리상으로 콘도르는 오클레앙과 멀지만 레지나는 가깝지.”
 “예? 콘도르가 레지나를 공격한다는 겁니까?”
 “사랑하는 외손녀의 손자가 죽는다면 콘도르 후작은 복수의 대상을 찾을 것이 분명하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오클레앙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레지나를 가만둘 것 같나?”
 “설마요.”
 “절대 설마가 아닐세. 콘도르 가문은 병약한 오클레앙 전 남작 부인을 무척 사랑했다고 하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모친을 아주 빼닮았지.”
 “······.”
 “이제 무슨 상황인지 알겠나? 우리는 오클레앙 남작을 무력으로 물러나게 만들어선 안 돼. 콘도르 후작이 실망할 정도로 나약한 면을 끌어내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야 해.”
 마커스의 말에 다들 침묵으로 일관했다.
 시엘라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마커스, 콘도르가 정말 오클레앙을 주시하고 있나요?”
 “예. 저도 얼마 전에 입수한 정보입니다. 영주의 낙마 사고를 이후로 콘도르의 눈이 오클레앙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이젠 오클레앙 남작에게 힘으로 겁을 주는 방법은 포기해야 합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클레앙 남작이 스스로 무너지는 겁니다. 도저히 영지를 이끌어 나갈 능력이 부족하다고 영지민들에게 인식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시엘라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클레이든, 레온, 로스틴. 이 세 사람이 곧 풀려날 겁니다.”
 “예?”
 “남작이 그들을 필요로 하더군요.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마커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클레이든과 레온은 절대 안 됩니다.”
 “레온의 과거는 묻지 않기로 약속한 조건으로 풀어 주는 건데, 클레이든은 누구기에 안 된다는 거죠?”
 “그는 전 남작 부인의 호위 기사입니다. 영주에게 힘을 주어선 안 됩니다.”
 “그래요? 얼마나 갇혀 있었죠?”
 “영주의 나이만큼 갇혀 있었습니다.”
 “그럼 괜찮겠군요. 그 정도 시간을 보냈으면 이미 폐인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죠, 로이드?”
 로이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 기사 따위 단숨에 해치울 수 있습니다.”
 “이보게, 클레이든은 보통 기사가 아니야.”
 “제가 폐인을 이기지 못할 것 같습니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로이드가 불퉁스럽게 쳐다보자 마커스는 난처했다.
 무력에 있어서만큼은 로이드를 존중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넬 믿네.”
 “그럼 됐네요. 조만간 영주가 그 의견을 발의할 테니, 그대로 받아들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로이드만 남고 모두 물러나 주세요.”
 시엘라의 말에 마커스와 알폰소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별채를 빠져나갔다.
 “로이드, 난 오늘 건방진 영주 때문에 무척 화가 나 있어요. 제대로 날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어요.”
 둘만 남자 흥분한 시엘라가 순식간에 드레스를 벗고 알몸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피가 쏠린 로이드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지하 감옥에서 떠난 용준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잘되셨나요?”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던 리엔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용준은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은 그럭저럭 해결했는데, 로스틴이 문제야.”
 “그래도 두 분이 남작님에게 마음을 돌렸다니 다행이네요.”
 “이게 다 리엔 덕분이지 뭐.”
 “헤헤.”
 공치사가 부끄러운지 리엔이 아이처럼 웃었다.
 용준이 소파에 앉으며 리엔에게 손짓을 했다.
 “리엔,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와 봐.”
 “무슨 일이신데요?”
 먼지떨이를 내려놓은 리엔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와 앉았다.
 “혹시 마법에 대해 알고 있어?”
 “마법요?”
 리엔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였다.
 “물론이죠. 마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난 기억을 잃었잖아.”
 “아, 그러네요.”
 용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혹시 그 마법,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네? 영주님이 마법을요?”
 리엔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영주님이 마법을 배우신다구요?”
 “왜? 난 마법을 배우면 안 돼?”
 “그건 아닌데, 마법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왜?”
 “제가 알기론 마나를 느끼지 못하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들었어요.”
 “마나?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어쩌고 하는 그것 말이지? 혹시 내 재능은 마법과 연관이 없나?”
 “전 모르겠어요.”
 “재능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마나를 익히는 사람이 있고 못 익히는 사람이 있어?”
 “네. 아주 극소수의 타고난 자들만 익힐 수 있대요.”
 “마나를 느끼는지 안 느끼는지는 어떻게 알고?”
 “마나구라는 도구가 있는데, 손을 올려서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할 수 있대요.”
 “그러니까 그 마나구에 대한 감응력을 확인받지 않으면 마법을 배울 수 없다는 얘기네?”
 “예.”
 “서재에 가 보니까 마법서가 없던데, 따로 취급하는 거야?”
 “물론이죠. 마법서는 엄청 귀해요.”
 “얼마나 비싼데?”
 “음. 잘 모르지만 고위 마법서 한 권은 성채 하나 값이라고 했어요.”
 리엔의 태연한 말에 용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성채? 맙소사, 우리 영지에 성채가 있나?”
 “오클레앙은 작은 영지라 성채가 없어요. 목책은 있지만.”
 “정말 비싸군.”
 “그래서 마법사가 되기란 평민들에겐 꿈과 같은 일이에요. 모두가 그 마나구에 손을 대기를 원하죠. 만약 마나 감응력이 있다면 마법사가 되는 거니까.”
 “마법사라. 정말 익히기 쉽지 않겠군. 일단 그 마나구에 마나 감응력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용준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복수를 위해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마법이라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다.
 용준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힘을 쟁취해야 했다.
 “돈을 벌어야겠네.”
 그 전에 영지를 장악해야 했다.
 재무관과 외교관 그리고 기사단장이 시엘라의 손에 있으니 영지를 자신의 뜻대로 경영할 수 없다.
 “할 일이 많네. 천천히 시작해 보자고. 리엔, 가자.”
 “네? 어디요?”
 “서재. 공부라도 해야겠어.”
 “아직 청소를 못 끝냈는데.”
 “내가 청소나 시키자고 널 전속 하녀로 둔 줄 알아?”
 용준은 머뭇거리는 리엔을 억지로 끌었다.
 
 ***
 
 “이게 오클레앙이야?”
 용준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고 입을 벌렸다.
 “네.”
 “손톱만 하군.”
 왕국 전체를 기준으로 그린 지도인지라, 오클레앙의 영지는 손톱 중에서도 새끼손톱만큼 그려져 있었다.
 “콘도르는 정말 크네.”
 “칸젤 왕국에서 가장 커요.”
 왕국의 중앙에 위치한 수도에서 북부에 위치한 콘도르 후작령은 오클레앙의 몇 배나 되는 크기였다.
 “레지나도 크군. 게다가 가깝잖아?”
 남부에 위치한 레지나는 오클레앙과 콘도르의 사이에 있었다. 앞뒤로 영지들이 보이긴 했지만, 오클레앙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리엔, 콘도르와 레지나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콘도르가 이기지 않을까요?”
 “왜?”
 “콘도르 가문엔 칸젤 왕국 제일의 기사가 있으니까요.”
 “기사? 기사 한 명으로 어떻게 우세를 점쳐?”
 “뛰어난 기사 한 명이면 전쟁의 전세도 바꿀 수 있어요.”
 “뭐? 그게 가능해?”
 “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어요.”
 “어떤 일?”
 용준은 궁금증을 키우며 물었다.
 “콘도르 가문의 가신 중 한 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콘도르에서 기사 한 명을 보내 그 반란을 순식간에 잠재웠대요.”
 “대체 얼마나 세기에 혼자서 반란을 막는 거야?”
 “저는 싸우는 모습을 실제로 못 봐서 잘 알진 못해요.”
 “기사가 그렇게 세질 수도 있어?”
 “물론이에요.”
 “호! 이거 마법만 답이 아니었군.”
 용준은 크게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다.
 이 세계는 육체의 능력도 마법처럼 상상 이상의 힘을 보이는 듯했다.
 “육체 능력이 발달하면 다수의 적도 상대할 수 있게 되는 거군.”
 “포스<force> 레벨도 중요하죠.”
 “응?”
 “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포스? 그게 뭐지?”
 “포스는 기사들에게 있어 마법사가 받아들이는 마나 같은 기운을 말하는 거예요.”
 용준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런 게 있단 말이야? 마법사처럼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네.”
 “그러면 말이야, 기사와 마법사가 붙으면 누가 이기지?”
 “기사가 이길 때도 있고, 마법사가 이길 때도 있어요.”
 “비슷하단 말이지?”
 “네. 그렇게 보시면 돼요.”
 “그렇단 말이지?”
 용준은 내심 크게 반겼다. 그러면서 리엔에게 물었다.
 “그 포스라는 거, 배우는 데 제약이 있어?”
 “어떤 제약요?”
 “마법사처럼 마나에 대한 감응력을 느끼지 못하면 배울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아, 포스는 그런 게 없어요.”
 “그럼 누구나 다 배울 수 있어?”
 “물론이죠. 다만, 시간이 걸려요.”
 “포스를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단 말이야?”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포스를 익히는 건 어렵지 않은데 쌓는 건 어려워요.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5포스 이상을 올리지 못해요.”
 “5포스? 그게 뭐야?”
 “포스 레벨이에요. 5단계로 구분되는데, 가장 낮게 쌓은 포스부터 등급이 나뉘어요.”
 “5포스가 가장 낮다는 말이구나. 그 수준은 어느 정도지?”
 “5포스는 일반인보다 조금 뛰어난 수준이에요. 사실, 별 차이가 없다고 보셔도 돼요.”
 “뭐? 그 정도 수준이면 뭐하러 포스를 익혀? 그럼 가장 위인 1포스는 어느 정도 수준인데?”
 “역사에 딱 한 사람이 1포스였는데,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였어요.”
 “드래곤 슬레이어!”
 용준은 신음을 터트리며 깜짝 놀랐다.
 얼마 전까지 드래곤의 위용에 대해 자세히 탐독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더 컸다.
 “자세히 말해 봐.”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슬픔의 숲에서 마왕과 결탁한 드래곤이 인간의 왕국을 침범했대요. 아무도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 한 번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검만 수련한 ‘엘시드’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일격에 드래곤의 목을 베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어요.”
 “일격에 드래곤의 목을 베었다고?”
 63빌딩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거대한 드래곤의 목을 일격에 베다니.
 용준은 자신이 비과학적인 세계에 왔음을 그제야 실감했다.
 “그자가 유일하게 1포스란 말이야?”
 “네.”
 “정말 대단하구나!”
 포스와 마법의 세계.
 용준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중 하나라도 익히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전혀 문제없겠지?”
 “물론이에요. 수준이 오를수록 그 가치는 더 높아져요.”
 “그러고 보니 오클레앙엔 마법사가 있어?”
 “아뇨. 마법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주로 돈이 많은 영주나, 상단 밑에서 일하는 편이에요. 아니면 자기들이 만든 마법 아이템을 내다 팔든가.”
 “마법 아이템? 그게 뭐지?”
 “물건에 마법을 불어 넣어서 특별한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든 것들을 뜻해요. 마나가 없거나, 마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일상에 유용한 것들이죠.”
 “마법은 참 신기하구나.”
 용준은 마법사가 영지에 없다는 말을 듣고 무척 아쉬워했다.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작고 가난한 영지라 그런지 마법사는 보기 힘들었다.
 “포스를 익힌 자들은 전부 기사야?”
 “네.”
 “그들의 포스는 어느 정도나 돼?”
 “저는 모르겠어요. 눈으로 봐선 알기 어렵거든요.”
 “그래? 클레이든이 빨리 와야겠어.”
 포스에 대해 안 이상, 기사단장 로이드에 대적할 사람이 필요했다.

댓글(13)

무천강    
잘 읽었어요. 즐거운 명절보내세요.ㅎㅎ
2019.02.03 16:24
나이트워크    
절대보지마세요 비추 갈수록 산으로 가다가 그냥 꼬나박습니다 돈아까워요 절대 전권 대여 하지마세요 초반만 그럴듯 하고... 설정 스토리 엉망임
2020.03.19 23:24
선비홍빈    
기자들이 테이프를 왜 붙임? 그건 법원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님?
2020.03.29 12:52
tr****    
도서관을 설마 한글로 불렀을리는 없을거고 저들의 말로 했을것인데 못알아듣는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도서관이라는 말을 어떻게 저들 말로 알까?
2020.10.06 05:56
k7********    
이런것 왜 봐야 하는지..
2020.10.08 03:38
maru9    
설정이 억지에다 그나마 앞뒤도 안맞고 주인공은 왜케 주절주절 말이많나요 잔인한것도 뜬금없이 급발진하고 안참아야할때 참고 기준이 없어요
2021.05.21 11:44
무당거미24    
이걸 왜 대여 했을까 후회 막심
2021.06.03 09:29
의지사나이    
ㅋㅋㅋ 내가 왜 댓글도 안보고 봤을까요... 제목이 정복자인데 전혀 제목과 맞지 않습니다. 독자를 우롱하는 수준입니다. 사자왕 레오나르 끝까지 못이기고 그년한테 암것도 못해보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왕국은 커녕 후작도 못넘고 죽습니다. 정복자가 아닙니다. 패배자 실패자가 제목에 어울립니다. 이거는 제목으로 독자를 낚았기 때문에 스포로 알려드립니다. 볼지 말지는 알아서 하세요 ㅋㅋㅋ
2021.11.18 12:16
장콩    
작가 연애한번도 안해보신거같음 ㅋㅋ 3권에서 역해서 탈출...
2021.11.29 17:05
태극산수    
읽어보겠습니다
2021.12.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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