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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 무사 1권 (1)

2019.01.09 조회 1,360 추천 10


 #序
 
 
 
 제 이름은 안빈, 서안빈입니다.
 편안할 안安에 가난할 빈貧을 쓰지요.
 예, 농담 같지만 정말입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자식 이름을 지을 때 이 가난할 貧 자를 넣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뿐이지요.
 물론 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가난에 찌들어 고생 고생 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이름을 지으신 건 아닙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가장 좋아하셨던 말이 바로 안빈낙도安貧樂道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이름도 서안빈이 되었다는 것을 저를 키워 주신 숙부님께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중원 땅 어딘가에 서낙도徐樂道라는 아이가 살고 있다면, 분명 제 동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워낙 비밀스럽게 살다 가셔서, 당신도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숙부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어딘가 제 배다른 동생이 자라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가난할 貧 자가 들어간 제 이름보다는 촌스럽기는 해도 낙도라는 이름이 더 좋아 보입니다.
 
 뭐, 어쨌든 제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안빈낙도라는 말은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것이 뭐 나쁠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 안빈낙도라는 말이 아버지의 유언 같기도 하고 해서, 이 말을 따라 살려고 노력 중이기도 합니다.
 제가 평생을 일할 일터를 구하는 데도 안빈낙도라는 말을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할 제 일이 저는 꽤 마음에 듭니다.
 제가 어떤 일을 시작했냐고요? 아, 저는 무림맹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천하제일의 위력과 기세를 지닌 그 무림맹 말입니다.
 대단하다고요? 사실 뭐······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경비 무사입니다.
 오자誤字는 기연奇緣을 낳고······
 
 
 #오자誤字는 기연奇緣을 낳고······
 
 
 
 족히 천 명은 들어설 수 있을 듯한 연무장演武場.
 아직 아침보다는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몇몇 사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무림맹 경비대 제일 조, 쉰 명의 경비 무사들은 거대한 연병장 주위를 구호 소리와 함께 뛰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바퀴! 구호는 더 크게!”
 맨 앞에서 달리던 경비대 일 조 조장 장막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뒤따르던 경비 무사들의 입에서 커다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싸!”
 “감동 주는 친절 속에, 사랑받는 경비 무사!”
 “감동 주는 친절 속에, 사랑받는 경비 무사!”
 “맹도들은 가족처럼, 무림맹은 내 집처럼!”
 “맹도들은 가족처럼, 무림맹은 내 집처럼!”
 남들이 들으면 피식 헛웃음이 날 만한 구호를, 장막의 선창에 이어 수십 명의 사내들이 진지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씩씩하게 구호를 외치며 이열종대로 거대한 연무장을 달리던 사내들은 그 커다란 연무장을 한 바퀴 다 돈 후에야 연단 앞에서 멈췄다.
 사내들이 열을 정리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조장 장막이 앞으로 나섰다.
 “자, 모두 아침 구보하느라 수고들 했다. 오늘 하루도 맡은바 책임에 온 힘을 쏟아 주길 바란다.”
 잠시 말을 끊고, 장막은 사내들 중 앳돼 보이는 소년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늘부터 새로운 동료들이 합류했다. 괜한 텃세 같은 거 부리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 주도록. 업무 교육도 차질 없이 진행시키고! 그리고······ 서안빈!”
 “옙!”
 열의 맨 끝에 서 있던 소년이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분명 아직 청년이라 부를 만한 나이는 아니었기에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미성美聲이 섞여 있었다.
 “혹시라도 대장님의 위세를 업고 불성실하거나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을 시에는, 나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대장님께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절도 있는 자세로 있는 힘을 다해 대답하는 서안빈의 모습에, 장막의 얼굴에 살짝 뿌듯함이 스쳐 갔다.
 “그래, 그러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경비 무사들을 바라본 장막은 해산을 명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 친절!”
 거수와 함께 장막이 외치는 친절이라는 구호에 맞춰, 그의 앞 경비 무사들도 큰 소리로 답했다.
 “봉사!”
 큰 소리로 다 함께 친절·봉사를 외친 장막과 경비 무사들은 자세를 편하게 풀며 흩어졌다.
 옷깃으로 땀을 닦으며 자신의 업무 배정지로 발길을 옮기는 서안빈의 곁으로 푸근한 인상의 소년, 차소車消가 다가왔다.
 “야, 역시 뒷배가 좋으니까 처음부터 주목을 받는구나. 좋겠다, 인마.”
 “시끄러. 넌 방금 그게 좋은 일로 보이냐.”
 능글맞은 웃음으로 농을 치는 차소에게 서안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런 서안빈의 곁에 있던 한백漢伯이 어깨를 걸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경비대장님의 조카 녀석이 들어왔으니 조장님도 신경이 쓰이시겠지. 후, 그나저나 지겨웠던 훈련이 끝나고 드디어 일을 시작하는구나. 오늘 일 끝나고 축하주 한잔해야 하지 않겠어?”
 차소와는 정반대로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한백의 얼굴에도 웃음이 걸려 있었다.
 분명 서안빈에게 던진 권주勸酒의 말이었지만, 차소가 반색하며 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안빈이 너도 빼지 말고 같이 가. 그리고 이왕이면······.”
 “이왕이면?”
 “네 사촌 누이도 데려와. 우리 한번 다 같이 즐거운 자리를······.”
 눈가에 웃음을 건 차소의 말에 서안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서안빈과 차소를 보며 한백 역시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야, 이 주제도 모르는 녀석아! 무림맹에서도 손꼽히는 신진 여고수를 모셔다 놓고 어떻게 뭐, 수작이라도 걸겠다는 거냐?”
 “허허! 한백 네 녀석은 아직 이 차소 님의 능력을 몰라서 그런다니까. 여고수든 여승이든 대갓집 규수든, 나에게 걸리기만······.”
 신이 난 차소의 말은 한 소녀의 등장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네 녀석들은 여전하구나.”
 다짜고짜 싸늘함이 묻어 있는 말을 내뱉는 소녀는 분명 아름다웠다. 아직 새벽녘이라 태양의 빛도 거의 위세를 발하지 못했지만, 이 소녀가 내뿜는 빛은 사내들의 눈을 부시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아름다운 소녀의 등장으로 옆의 두 소년들의 얼굴에 당황함과 동시에 희색喜色이 도는 것과 달리, 서안빈의 얼굴빛은 어두워졌다.
 “쳇. 귀신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여긴 웬일이야.”
 “뭐라? 설마 지금 네 녀석들이 내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다는 거야!”
 서슬 퍼런 여인의 말에 차소는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차소를 옆으로 밀어내며 한백이 나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같은 것들이 봉황신녀鳳凰神女 하연희河嚥熙 소저의 이야기를 꺼내다니요. 저······ 그럼 저희는 이만, 두 분께서 이야기를 나누시게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백은 차소를 끌고 재빨리 사라졌다.
 사라지는 두 경비 무사를 바라보는 하연희는 여전히 그들의 존재가 못마땅한 듯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서안빈의 낯빛은 더욱 싸늘해졌다.
 자신의 친우들을 무시하는 하연희의 태도에 짜증이 난 서안빈은,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 대신 저 멀리 북망산의 안개 낀 한 자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이야?”
 “흥. 무림맹에 들어왔다고 하기에 한번 찾아와 봤어. 사내자식이 나이 열다섯에 시작한다는 것이 겨우 경비 무사라니······. 신검神劍께서는 네 나이 때 이미 이곳 하남 지방에서 적수를 찾기 힘드셨다고 하던데······. 아까 그 한심한 구호를 외치며 연무장을 달리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더라.”
 “남이사!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 나랑 무림맹주님이랑 비교하는 거야? 차라리 독수리와 파리를 비교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파리? 흥! 적어도 사내라면 목표를 높게 잡고······ 아니다, 관두자. 너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아무튼 무림맹 안에서 나를 비롯해 우리 가문 사람들의 체면을 깎는 일 없도록 조심해. 알았지?”
 소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순간은 아름다운 소녀 앞에서 사내의 자존심이 무참히 무너지는 일이다. 특히 소녀 스스로가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자존심을 뭉개 버리려 할 때는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라 하겠다. 혹여 그 소녀가 사촌 누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서안빈의 반응은 가벼운 콧방귀 한 번이 끝이었다.
 “쳇! 네 기준으로 보면 나는 이미 집안 망신이잖아. 그 유명하신 봉황신녀의 사촌 동생이 경비 무사라면 그렇지 않겠어? 어차피 이렇게 된 일이니까 그냥 계속 신경 끄고 살아. 이렇게 나 찾아오는 것도 너랑 네 집안 체면 깎는 일이잖아? 나는 조용히 지낼 테니까 앞으로 이렇게 얼굴 맞대지 말자고. 알았지? 그럼 난 이만. 일하러 갈 거야.”
 자신을 무시하는 하연희의 말에 역시 싸늘하게 답한 서안빈은 바로 몸을 돌렸다. 서안빈의 등 뒤에 서게 된 하연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잠깐! 저······.”
 서아빈은 자신의 설레는 첫 출근이 짜증 나는 사촌 누이로 인해 점점 망쳐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진짜······. 왜!”
 “······아버지는······ 잘······ 계셔?”
 하연희가 머뭇거리며 묻자, 짜증이 묻어나던 서안빈의 눈가의 힘이 살짝 풀렸다.
 “이것 참······ 그런 건 직접 찾아가서 물으면 되잖아. 부녀사이에 뭘······. 어차피 같이 무림맹에서 일하면서······.”
 퉁명스럽게 답하는 사촌 동생의 말에, 하연희의 얼굴에 야속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어머니께 들키기라도 하면······.”
 “후우······ 숙모님은 여전하신가 보네. 숙부님은 별일 없이 잘 계셔. 뵙고 싶으면 언제 몰래 한번 집으로 와. 적당할 때 내가 연락해 줄게.”
 차갑던 하연희의 얼굴에 밝은 기운이 어렸다.
 “정말? 그래, 그럼 그럴게.”
 하연희는 서안빈의 배려가 고맙고 또한 기쁜지 얼굴에 홍조를 띠며 살짝 웃음을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이 아름다운 사촌 누이를 잠시 바라보던 서안빈은 팔을 한번 크게 휘두르면서 뒷짐을 졌다. 그리고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난 일하러 갈게. 아, 근데 오늘 입은 옷 정말 예쁘다.”
 “어? 정말?”
 서안빈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하연희의 얼굴 위에 어렸던 붉은 기운이 더욱 진해졌다.
 “응. 옷·은· 정말 예쁘네. 물론 잘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다른 여인이 입었다면 정말 빛이 났겠어. 아, 해어화解語花 백리 소저 같은 분이었다면 정말 굉장했을 거야. 하하.”
 “······.”
 “그럼 나 진짜 간다.”
 돌처럼 굳어 버린 하연희를 뒤로하고 서안빈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즐거운 듯 눈웃음을 띤 서안빈의 등 뒤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 *
 
 아침 구보를 마친 장막은 땀을 닦아 내며 경비대 건물 안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가장 안쪽 커다란 탁상 앞에 앉아 차를 마시던 구원의 시선이 장막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관을 향해 장막이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간밤에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일 없었네. 아침 구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별다른 보고 사항은 없고?”
 “예, 대장님.”
 “그래, 알았네. 그럼 업무 시작하게.”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장막의 상관이자 무림맹 경비대장인 구원寇遠의 풍모는 무척 사내다웠다.
 짙고 어두운 갈색빛의 얼굴과 시원스럽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이 사람이 평범한 이는 아닐 것이라는 걸 알려 줬다. 특징 없는 흑의에 가려져 있어도 분명 그 옷 아래에 단단하고 강인한 육체가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 모금의 차를 넘긴 뒤, 구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안빈이는······.”
 “예? 아, 구보를 마치고 근무지로 갔습니다. 녀석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성실히 잘 해낼 것입니다.”
 장막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종일관 근엄한 표정이던 구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보였다.
 한데 그 미소 속에는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조카에 대한 뿌듯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 한편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지, 약간의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면 되겠지······.”
 
  * * *
 
 보통 사람은 물론 웬만한 무림인들조차 한 번에 뛰어넘을 방도가 없는 거대한 성벽.
 이 거대한 성벽이 현 무림, 아니 수많은 영웅들과 거대한 파벌들이 힘을 겨루고 피를 흘렸던 무림의 역사 속에서도 단연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런 거대한 무림맹 안에서 서안빈이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될 곳은 북문 제삼 경비 초소였다. 선임자인 조산백趙産栢이 칠 년째 일하고 있는, 한가하기 그지없는 이곳이 서안빈의 일터였다.
 서안빈이 속한 무림맹 경비대의 임무는 절대로 무림맹의 방어가 아니다.
 무림맹의 방어는 이른바 사단 중 하나인 현무단의 몫이었다. 그들이 성벽 위를 지키고, 무림맹을 드나드는 이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침략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무기를 들고 앞에 나서는 것 역시 현무단의 역할이다.
 경비대에 속한 경비 무사들의 역할은 한마디로 잡무雜務였다. 물론 이들도 침략을 염려하여 사고가 나지 않도록 미리 살피고 지키는 일을 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현무대 무사들이 하려 하지 않는 여러 가지 소소한 일들이 경비대의 주요 임무였다. 비록 경비 ‘무사’라고 불리며 칼을 차고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칠 년 동안 초소 근무를 해 온 조산백이 만난 난적亂賊은, 항상 초소 주위에서 맴도는 똥파리 세 마리가 전부였다.
 “안녕하십니까!”
 힘찬 인사와 함께 서안빈은 경비 초소 안으로 들어섰다. 기운 넘치는 신참의 등장에, 누가 보아도 ‘아, 정말 편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편한 자세로 서책을 보고 있던 조산백은 깜짝 놀라 의자 옆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이구야, 놀라라. 아무리 막 훈련을 마치고 배치를 받았다고 해도 기합이 너무 들어가 있는 거 아니냐.”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조산백은 슬슬 몸을 일으키며 서안빈을 맞이했다.
 “이번에 무림맹 경비대 제일 조 대에 입대한 서! 안! 빈!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그래, 네가 서안빈이구나. 대장님 조카라고?”
 “아, 예······.”
 “원래 세상 돌아가는 식이라면 오히려 내가 너한테 잘 보여야겠지만, 우리 대장님 성정이 그럴 분은 아니시니······. 어쨌든 잘해 보자. 조산백이라 한다. 평소에는 그냥, 편하게 형님이라고 불러라. 워낙 딱딱하고 귀찮은 건 싫어하는지라······. 뭐, 그냥 편한 게 좋지 않겠냐.”
 조산백의 입에서 ‘편한’이란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서안빈의 눈이 빛났다. 마치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는 듯.
 “당연하죠, 형님. 세상에 편안한 것보다 더 좋은 게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제 이름의 안 자가 편안할 안 자 아니겠습니까? 하하.”
 언제 그렇게 기합이 들어갔냐는 듯 넉살 좋게 대꾸해 오는 서안빈을 보며, 조산백은 특유의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래, 그렇지. 나는 오늘도 아침 근무 때문에 아침 구보를 못 나갔는데······ 조장님은 별일 없으시더냐? 아, 그리고 대장님도 별일 없으시고? 두 분을 뵌 지가 정말 오래돼서 말이다.”
 “두 분 다 별고 없으십니다.”
 “그래, 다행이군. 자, 그럼 일단 일을 시작해 볼까?”
 일을 시작하자고 말한 조산백은 처음 서안빈을 맞이하던 그 편안한 자세로 돌아갔다. 서안빈이 그런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조산백은 약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우리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업무는 각자에게 맡겨진 초소를 지키는 일이다. 초소를 지키면서 시시각각 발생하는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지.”
 “새로운 상황요?”
 “그렇지.”
 한마디로 대답한 조산백은 시선을 다시 원래 읽던 서책으로 돌렸다. 잠시 눈치를 보던 서안빈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저······ 무슨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말씀을 좀 해 주셔야······.”
 “응? 아, 그래그래. 신참인데 교육을 시켜야지. 흠, 일단 낮 근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은······ 가장 먼저 택배宅配가 도착하는 경우가 있겠구나.”
 “택······배 말씀입니까?”
 “그래. 사람들이 중원 방방곡곡은 물론 저 멀리 서장이나 천축에서 표국을 통해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우리 무림맹도들도 마찬가지란다. 업무에 바빠 부재중인 맹도들을 대신해 배달되어 온 물건을 받아 두었다가 나중에 잘 전달해 주는 것이 우리 경비 무사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던 서안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택배라······. 그 외에는 뭐가 또 있을까요?”
 “그 외에도······ 우리 구역 주변 환경이 너무 더럽다든가 하면 청소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고······. 아, 우리 초소의 길옆으로 심긴 나무들 보이지 않느냐? 가끔 저 녀석들 가지도 정리해 줘야 하고······. 그리고 야간 근무의 경우, 만취漫醉한 맹도가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부축해 처소로 모셔다 드리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구나.”
 말을 마친 조산백은 슬쩍 서안빈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설명을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안빈이 혹시 실망한 것은 아닌지 궁금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하는 경비 무사들을 많이 봐 왔던 조산백이었다.
 “형님······.”
 잠시 고개를 숙이고 뜸을 들이던 서안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희喜, 그야말로 기쁨이었다.
 “형님, 경비 무사는 정말 편한 직업이군요. 정말······ 정말 좋은 직업입니다!”
 “응? 그, 그렇지. 보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고 말이다. 하하······.”
 “저, 정말 열심히 한번 해 보렵니다.”
 “그, 그래······.”
 조산백은 이런 서안빈을 보며 뭔가 이상한 녀석이라는 느낌과 동시에 왠지 친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안빈은 조산백 뒤쪽으로 마련된 또 다른 의자에 걸터앉았다.
 “저······ 그럼 여기 이렇게 앉아서 무언가 새로운 상황이 생기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요? 하하! 저도 앞으로는 형님처럼 책이나 열심히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읽으시는지······.”
 “사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데는 서책만 한 게 없지. 이건 말이야, 삼백년 전 마교 고수가 남긴 책이란다. 뛰어난 수공手功의 소유자로 천하를 호령했던 마교수魔巧手란 분이 쓰신 거지. 이분은 오랜 시간 수련 끝에 무공의 끝을 본 후,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기에 대한 문제를 깊이 연구하셨지.”
 “오, 그렇습니까?”
 “너도 들어 보지 않았을까 싶다만······. 마교수의 변녀봉변남變女逢變男은 워낙 유명하지 않나.”
 “아! 변녀가 변남을 만났을 때! 그 작품이었군요. 안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다 읽으면 빌려 주마.”
 “감사합니다. 하하.”
 
  * * *
 
 사람들은 흔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시간이 빨리 지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서안빈은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데에 그리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건너편 객잔에서 사 온 만두와 소면으로 조산백과 사이좋게 점심을 때운 서안빈은 졸린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해 댔다.
 “하암! 정말 오전 시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네요. 평화로움 그 자체군요.”
 “요즘이야 그렇지, 뭐. 지금같이 무림맹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시절에야 무림에 시끄러울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사실 무림이 시끄럽다고 우리가 바빠지는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어디 보자······ 이제 곧 미시未時가 될 테니, 조금 있으면 내 교대 무사가 올 게다.”
 “아, 새벽 근무를 하셨으니 쉬실 때가 된 거군요. 그······ 이번에 오실 선배님은 어떤 분입니까?”
 “글쎄다. 이제 한 삼 년째 일하는 녀석이라는데, 다른 조에서 전출을 와서 나도 본 적이 없구나. 이름이 뭐더라······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 보는 굉장히 특이한 이름이었는데······.”
 탁자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공문들을 뒤지던 조산백은 종이 한 장을 찾아냈다.
 “어, 그래. 새로 올 녀석의 이름은 장무기張戊驥라는구나.”
 “예? 장무기라는 이름이 대체 어디가 특이합니까? 너무 흔해서 무림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한 이름인데요.”
 “아니야. 장무가 성이고, 기가 이름이라는구나. 엄청 특이하지? 그렇지?”
 “예? 동방東方, 독고獨孤, 사공司空 뭐 이런 복성複姓은 들어 봤지만······. 세상에 장무라는 성씨가 어디 있습니까!”
 조산백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한번 치켜올렸다.
 “난들 알겠나. 뭐, 조금 후에 오면 직접 물어보도록 해라. 그럼 나는 조금 먼저 일어나마. 가 볼 곳이 좀 있어서······.”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형님.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그래. 수고하고.”
 조산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걸음걸이에서도 여유가 넘치는 그의 뒷모습을 서안빈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 저 걱정이라고는 정말 한 푼(0.375그램)도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를 보라고······. 배울 점이 정말 많은 형님이야!”
 “흠.”
 작은 헛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서안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하얀 피부에 살이 뽀얗게 오른 통통한 체구의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서안빈은 사내를 보는 순간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잣거리 노점의 호빵을 떠올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내에게서는 정말 호빵처럼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 호빵······.”
 자신도 모르게 호빵이란 말을 해 버린 서안빈은 그렇게 당황한 상태로 굳어 버렸다.
 호빵 같은 그 사내는 서안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묵묵히 걸음을 옮겨 조산백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뒷짐을 진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마한 향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를 호빵처럼 보이게 했던 연기의 원인은 바로 그 향로였다.
 멍하게 서 있던 서안빈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버린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저······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입 경비 무사 서안빈이라고 합니다. 혹시 장무기 선배님이십니까?”
 호빵을 닮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장무가 성인 장무기는 몸을 돌려 서안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부탁한다. 그냥 편하게 선배라고 부르면 돼. 다만······ 몇 가지 주의해 줄 것이 있으니 꼭 지켜 주기 바란다.”
 그러면서 종이 한 장을 서안빈에게 건넸다. 조심스럽게 받아 든 종이에는 이런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一. 만의 하나 접촉이 가능한 신체 부위―손과 같은―는 항상 청결한 상태를 유지한다.
 一. 전염될 가능성이 있는 질병에 걸렸을 시, 상부에 보고하고 결근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게 하지 못할 시에는 오 보 이상의 거리를 두고 초소 밖에서 근무한다.
 一. 본인의 건강을 보조해 줄 물품들에 절대 손대지 않으며, 불평하지 않는다.
 一. 본인에게 보고 등의 이야기를 할 때는 타액이 튀지 않게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말한다.
 ······.
 
 장무기가 건네준 종이를 읽어 내려가던 서안빈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분명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랄 만한 일이었다.
 “저, 저기, 이게 다 무슨······.”
 “다 읽었어? 그대로 좀 지켜 주길 바란다.”
 “아니, 저, 그게······.”
 “입을 손으로 막고 말하라니까.”
 “아, 예? 아, 알겠습니다. 지키려고······ 노력하지요······. 근데 그 향은 대체 무슨······.”
 “수친향이란 거다. 후두喉頭에 염증이 생겼을 때 효과가 좋은 거지. 요즘 날씨가 차지면서 목이 좀 칼칼한 거 같아서 말이야.”
 서안빈의 물음에 장무기는 손바닥으로 향의 연기를 자신의 코로 끌어들이며 답했다. 호빵 같은 얼굴로 하얀 연기가 날아들자 그의 얼굴에 행복감이 어렸다.
 “아, 예······ 그러십니까.”
 이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서책을 읽고 있는 장무기 뒤에서 서안빈은 멀뚱히 앉아 있었다.
 조산백과의 시간이 무척 편하고 금방 지나간 것에 비해 장무기와의 시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불편함을 깨 보고자, 서안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 근데 정말 성이······.”
 서안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장무기의 답이 날아왔다.
 “정말 나는 장무씨야. 아버지께서 새로 만드신 성이지. 아버지 성 장, 어머니 성 무를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거야. 어머니의 성을 빼고 아버지 성만 이어받는 건 공평하지 않다나 뭐라나.”
 “하, 그게 정말입니까? 어머니 성도 이어받게 하려고 성이 장무가 되었다는 겁니까? 세상에 무슨 그런 해괴한······.”
 “나도 해괴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배 아버님 논리대로 한 몇 대 내려가다 보면 성이 한 열 글자도 넘게······ 장무식한자식 뭐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나도 안다니까! 흠. 내가 지금 목이 좀 아프니까, 업무 관계된 일 아니면 말 거는 건 좀 삼가 줘.”
 “예······.”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장무기는 서책을 보며 편안히 시간을 보내는 듯 보였지만, 서안빈은 아니었다. 유난스럽게 건강을 염려하는 이상한 선배와의 시간은, 서안빈에게는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런 서안빈의 괴로움을,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나 구해 주었다.
 “실례합니다.”
 작은 상자 하나를 든 청년은 눈치를 보며 경비 초소 안으로 들어섰다. 장무기에 앞서 서안빈이 후다닥 튀어나오며 청년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저는 유진 표국에서 나온 사람입니다만······. 배달해야 하는 물건이 있는데 받으시는 분이 부재중이셔서······.”
 “아, 택배 때문에 오셨군요. 저희가 대신 맡아 두었다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여기 서명 좀 해 주시면······.”
 표국의 사내가 건네는 붓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장부에 적은 서안빈은 살짝 장무기의 눈치를 살폈다. 장무기는 계속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수친향 앞에서 여전히 서책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저, 선배······ 이 택배는 어떻게 할까요?”
 장무기는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저었다.
 “그냥 두었다가 저녁때쯤 숙소로 가져다주면 되지. 아니면······ 지금 직접 찾아가 전해 줘도 되고······.”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지금 바로 전해 드리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저녁 시간에 가면 저도 퇴근한 후이니, 선배가 직접 배달하시려면 귀찮으실 테고······.”
 “그냥 둬. 그 정도야 내가 하면 되니까.”
 서안빈은 일단 장무기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저······ 사실, 소문을 들으니 요즘 무림맹 안에서 심한 감기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한번 걸리면 한 열흘은 앓아눕는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야? 어쩐지 계속 목이 칼칼하더라니······. 이럴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과의 접촉을 삼가야 해. 그럼 이 택배는 안빈이 네가 지금 전해 주도록 하자. 어디 보자······ 매풍검梅風劍 추 소협에게 온 것이군. 아마도 지금쯤 추 소협은 등룡단 연무장에 있을 거야. 무공 연마에 워낙 열심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라.”
 “등룡단 연무장이라······ 알겠습니다. 제가 잽싸게 다녀오겠습니다.”
 “그냥 바로 퇴근해.”
 “예?”
 “택배 전달하고 곧바로 퇴근하라고. 어디 병이라도 옮아오면 내가 곤란하니까. 거기까지 갔다 오면 분명 퇴근 시간쯤 됐을 거야.”
 서안빈의 입장에서는 장무기의 제안이 더없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다면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선배.”
 
  * * *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무림맹답게 그 조직 역시 방대했다. 무림맹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사단四端을 비롯해 맹주 직속의 최강 부대인 의검단, 중원 방방곡곡의 모든 정보를 담당하는 신이대神耳隊, 무림맹에 속한 무림 집단 원로들의 모임인 장로회 등 수많은 단체가 무림맹의 깃발 아래 존재했다.
 이 중에서 등룡단은 강호의 후기지수들 중 훌륭한 가문의 핏줄과 출중한 무공 실력을 지닌 이들을 선발해 만든 단체였다. 한마디로 강호의 귀족貴族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모임이 바로 등룡단이었다.
 서안빈은 무림맹에서 오랫동안 일한 숙부를 둔 덕에 무림맹 안의 지리에는 누구보다 밝았다. 무림맹 외곽의 경비 초소에서 맹의 핵심부로 이동하는 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는 것은 물론 초행初行이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지만, 서안빈은 별문제 없이 등룡단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등룡단 건물 안에 들어선 서안빈의 귓가에 기합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이 연무장인가 보군.’
 서안빈이 소리를 따라 들어선 널따란 연무장에서는 두 청년 무사의 비무가 한창이었다. 꽤 살벌하기까지 한 두 사람의 비무를 열댓 명의 젊은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도刀와 검劍이 태풍 속에 휘몰아치는 빗방울처럼 정신없이 서로의 빈틈을 찾아 날아드는 모습에, 서안빈도 잠시 넋을 잃고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았다.
 그런 서안빈의 등 뒤로 한 사람의 인영이 다가왔지만, 서안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뭘 하는 놈이냐.”
 “끼악!”
 살며시 다가온 사내의 갑작스러운 말에 서안빈은 자신도 모르게 계집아이나 낼 법한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 소리 때문에 비무를 지켜보던 이들은 물론이고, 비무 중에 잠시 숨을 고르며 상대의 빈틈을 찾던 두 청년도 서안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몰린 서안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저, 그것이······ 저······ 저는 북문 제삼 경비 초소에서 근무 중인 경비대 소속 서안빈이라고 합니다.”
 “경비 무사가 이곳 등룡단에는 무슨 일이냐?”
 서안빈은 그제야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신장과 두 뼘은 더 넓은 어깨를 지닌 건장한 이 청년의 정체를 서안빈은 분명 알고 있었다.
 ‘제산수除山手 담우광啖優光!’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였지만, 담우광의 이름은 이미 무림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워낙 유명인이었기에 서안빈도 숙부를 따라다니며 멀리에서나마 몇 번 보았다.
 권을 수련하면서 부순 돌의 수가 만萬을 헤아리고, 그 덕에 아예 산 하나를 없앴다고 해서 제산수라는 별호를 가지게 된 사내였다.
 무엇보다 담우광은 장차 권왕拳王의 뒤를 이을 만한 인재 중에 첫손가락에 꼽혔다. 강호의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무림맹 사룡四龍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수십 년간 강호를 떠돈 한 노검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검객劍客은 잔잔한 물과 같고, 도객刀客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같으며, 권객拳客은 하늘을 향해 뜨겁게 치솟는 불과 같다.
 
 모든 권객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노검객이 말한 권객들의 성정性情은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불같은 성정의 권객을 보는 것은 저잣거리에서 만두 장수를 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담우광의 성정도 다른 권객들처럼 불과 같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물론 서안빈도 그에 대한 풍문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서안빈은, 이런 자들에게는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매풍검 추 소협께 배달되어 온 물건을 전해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곳에 오면 뵐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헛! 택배 때문에 온 친구군. 어이! 건일이!”
 담우광이 큰 소리로 부르자, 비무를 구경하던 이들 속에 섞여 있던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서안빈의 손에 들린 택배의 주인공, 매풍검 추건일秋健一이었다.
 서안빈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추건일의 모습을 보며 다른 무엇보다 우선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외모가 호랑이나 늑대의 그것을 닮았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추건일은 분명 미남자라 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곱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얼굴 윤곽과 시원하게 뻗은 콧날, 너무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아름다운 붉은빛 입술을 지닌 사내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한 눈과 서늘한 기운을 띤 눈빛은 서안빈에게 무서움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친구가 자네에게 배달해야 할 물건이 있다는군.”
 담우광의 말을 받으며 서안빈이 앞으로 나섰다.
 “제삼 경비 초소의 서안빈 경비 무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추 소협께 표국을 통해 상자가 하나 배달되어 왔습니다. 혹 급하게 쓰실 물건은 아닐까 해서 이렇게 전해 드리러······.”
 서안빈의 말을 듣는 추건일의 눈은 여전히 싸늘했다.
 “겨우 상자 하나 배달하는 일로 연무를 방해했다는 건가.”
 “예? 아니, 그게······.”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서안빈에게서 추건일은 상자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상자 겉에 적힌 글자들을 살피던 추건일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상자를 다시 서안빈에게 건넸다.
 “나에게 온 것이 아닌 듯하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분명 무림맹 추건일이라 쓰여 있던데······.”
 “내 이름에 쓰는 건은 힘쓸 건健이다.”
 서안빈이 다시 상자를 살펴보니 建이 적혀 있었다.
 “아, 여기에는 일으킬 건建이 적혀 있군요······.”
 서안빈과 추건일의 대화가 이어지는 중, 어느새 그들 주위로 몇몇 청년들이 다가와 참견을 시작했다.
 “흠. 자네 이름이 힘쓸 건에 한 일 자였구만. 하나에 힘쓰다라는 건가······. 일으킬 건建에 한 일 자였어도 좋았을 뻔했으이. 건일建一. 자네도 매일 아침에 한 일 자 같은 막대 하나를 일으키지 않나. 물론 아침 외에도 그럴 때가 있겠지만. 크하핫!”
 주위 공기를 얼어붙게 할 만큼 썰렁한 농담을 치며 다가온 청년의 외모는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다. 유달리 하얀 피부는 둘째 치고, 흑발의 청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은발의 소유자였다.
 서안빈은 이 특이한 외모의 청년을 알고 있었다.
 ‘냉공자冷公子 백문우白文宇!’
 마천魔天을 무너트리는 데 큰 공을 세운 북해빙궁의 소공자로, 중원에선 보기 힘든 무시무시한 빙공의 소유자였다. 빙공 하나로 무림맹 최고의 후기지수들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당당히 사룡의 한자리를 차지한 사내였다.
 하지만 정작 냉공자라는 별호로 불리기 시작한 이유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빙공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나 주위 분위기를 얼어붙게 하는 그의 어이없는 농담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냉공자 백문우의 농담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재미도 의미도 없는 썰렁한 농담을 주저 없이 내뱉는 백문우가 우스웠는지, 주위 청년 무사들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데 백문우의 농담도 주위 무사들의 웃음도, 분명 추건일에게는 그리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에게 온 것이 아닌 듯하니 도로 가져가도록.”
 “저······ 추 소협, 보내시는 분이 실수로 오자誤字를 쓰신 듯합니다. 두 건 자(健과 建) 모두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내게는 이런 물건을 보낼 이들이 없다. 그만 돌아가거라.”
 차갑게 몸을 돌려 다시 연무장으로 향하는 추건일을 보며 서안빈은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는 추건일의 옷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짝 잡아 일단 추건일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할 심산이었다.
 “추 소협, 겨우 한 끝 차이 아닙니까, 분명 이 택배는 소협께······ 크헉!”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안빈의 손끝이 추건일의 옷깃에 닿는 순간, 추건일이 손을 휘둘러 그를 후려쳐 버린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후려침이 아니었다. 서안빈은 택배 상자와 함께 최소한 다섯 장丈은 뒤로 굴러갔다. 분명 내력이 실린 발경發勁이었다.
 “건일이! 이게 뭘 하는 짓인가! 무공도 모르는 경비 무사에게 이 무슨······!”
 곁에 있던 담우광이 소리쳤다. 인상을 쓰며 추건일을 나무라는 듯했지만, 정작 저 뒤편에 쓰러져 있는 서안빈을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백문우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큰 웃음을 터트렸다.
 “건일이 이 친구, 내 농담이 자네 신경을 거스르기라도 한 것인가. 경비 무사를 상대로 추태일세. 크하핫!”
 추건일은 여전히 냉막한 표정이었다. 다만 그의 눈빛에 잠시나마 당혹감이 스쳤다는 것을 알아챈 이는 없었다.
 “건방지게 내 옷깃을 잡으려 한 저 녀석의 잘못입니다.”
 이 말과 함께 추건일은 몸을 돌려 연무장 바깥으로 향했다. 확실히 더 이상 무공 연마를 할 기분은 아닌 듯했다.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는 추건일의 앞을 한 명의 사내가 살짝 막아섰다.
 청향검靑香劍 진하기陳夏期였다.
 화산문주 진충陳忠의 셋째 아들인 이 청년도 담우광, 백문우와 함께 무림맹의 사룡으로 꼽혔다.
 사룡 중 두문불출하며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머지 한 명을 제외한 이 세 명이 등룡단에서 우두머리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셋 중에서도 진하기가 은연중에 대장 노릇을 하곤 했고, 모두 어느 정도는 이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무슨 짓이야. 네놈은 체통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냐.”
 추건일은 대답이 없었다.
 자신을 사선으로 막아선 진하기를 바라보지 않은 채, 앞에 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는 추건일이 진하기는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흥! 근본 없는 녀석이 체통이란 것을 알 리가 있나. 이래서 천한 것들을 등룡단에 들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천한 것들 둘이서 오랜만의 연무를 망쳐 버리다니······ 쯧.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불만 가득한 낯짝을 계속 등룡단에 들이고 싶다면 말이야.”
 화를 낼 만도 하건만, 추건일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진하기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바로 그의 앞을 지나쳐 사라질 뿐이었다.
 그런 추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하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흥! 눈엣가시 같은 녀석. 자, 오늘 연무는 여기까지 하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세.”
 추건일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는 진하기를 따라 그 자리에 있던 청년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 * *
 
 빠른 걸음으로 등룡단 건물을 빠져나온 추건일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그는 벽에 기대어 크게 숨을 한번 뱉어 냈다. 그러고는 서안빈을 나뒹굴게 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는 자신이 벌인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추건일은 절대 서안빈을 다치게 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자신을 멈춰 세우려는 서안빈을 그저 살짝 밀쳐 내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서안빈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공을 사용해 버렸다. 그것도 절대 다른 이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그 무공을.
 순간적으로 기혈을 틀어 위력을 감소시키지 않았다면 분명 큰 사단이 났을 것이다. 서안빈의 나약한 몸뚱이는 물론 등룡단 건물의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뻔했다. 그랬다면 분명 추건일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을 것이고, 그건 추건일 자신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크흑. 쿨럭.”
 추건일은 식도를 거슬러 올라오려는 사혈死血을 억지로 눌러 막았다.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현한 무공을 막기 위해 무리해 기혈을 뒤틀었기에 작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보통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무공을 발현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하의 추건일이 일개 경비 무사에 불과한 서안빈에게 위협을 느꼈을 리가 없다.
 추건일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살아가던 자신이 해 버린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대한 생각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러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날의 실수가 아버지와 자식, 즉 세대를 넘어 피로 얽힌 잔인한 운명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젠장! 이게 다 어처구니없는 택배 때문에······. 설마 ‘그곳’에서 나에게 택배를 보내지는 않았을 테고······. 그래, 무림맹 한구석에 나와 비슷한 글자의 이름을 지닌 녀석이 있었던 거겠지······.”
 
  * * *
 
 한편, 텅 비어 버린 연무장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추건일의 의도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서안빈이었다.
 이미 추건일을 비롯해 연무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꽤 오랫동안 죽은 듯 누워 있던 서안빈의 몸이 이제야 꿈틀거렸다.
 “쿨럭······.”
 기침을 하며 일어서는 서안빈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내상을 입어 저 몸속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온 죽은피였다.
 몸을 움직이려는 서안빈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젠장! 이런 미친놈들······. 사람 하나를 죽일 뻔하고서도 돌봐 주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고 사라지다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서안빈은 지금의 사태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았다. 무림맹의 핵심부, 그중에서도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등룡단원들이라면 충분히 이러고도 남았다.
 중원 무림을 위협할 만한 세력도 없고 사파도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가는 지금은 정파 무림의 천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황이 이럴수록 강호江湖의 도리道理는 오히려 예전만 못했다. 무림맹 안에서도 강하고 약함이 예의禮義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들 안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고 무시하는 터에, 하찮기 그지없는 경비 무사 하나는 그들의 눈에 지나가는 강아지와 별 차이가 없었으리라.
 서안빈은 이런 현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졌어도 별문제 없이 넘어갔을 거란 예상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숙부가 그냥 넘어갔을 리는 없겠지만, 무림맹의 무인들은 그리 큰 문제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무림맹에서는 무조건 몸조심해야 한다는 걸 깜빡하다니······ 내가 미친놈이었지. 으······ 이게 내상이라는 건가? 속에서부터 아주 미치겠군.”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는 서안빈의 눈에, 거의 부서진 채 땅에 뒹구는 택배 상자가 들어왔다. 저 택배 때문에 자신이 이 몹쓸 일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젠장!”
 서안빈이 택배 상자를 힘껏 걷어차자, 상자는 한쪽 벽에 부닥쳐 산산조각 났다.
 “크헉.”
 갑자기 몸을 움직인 데다 화까지 쏟아 낸 탓에, 서안빈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크나큰 고통이 밀려왔다.
 “젠장······ 일단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군. 근무 첫날부터 일진이 아주 개차반······ 응?”
 그 순간, 부서진 택배 상자들 사이에서 또르르 소리를 내며 작은 자기병 하나가 굴러 나오는 것이 서안빈의 눈에 들어왔다. 보통 호리병 크기만 한 청색 자기병의 그 범상치 않은 모습은, 서안빈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뭐야, 이건······.”
 병을 집어 든 서안빈은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어 보았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서안빈에게는 꽤나 익숙한 향이었다. 지금 그의 기분을 달래 줄 수 있는 세상 유일한 그것이었다.
 “술이잖아! 쳇, 이깟 술 한 병 때문에 내가······ 젠장! 건일인지 건어물인지 그 녀석은 분명 자신과는 관계없는 거라고 했으니······.”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서안빈은 병 속의 술을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복숭아의 달콤한 향 같으면서도 무화과의 상큼한 향과도 유사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향기가 서안빈의 입안에 가득 찼다.
 “키야! 이거 꽤 괜찮은데! 표국까지 동원해서 택배로 보낼 만해! 흥, 추건일 그 녀석은 먹을 복이 없는 녀석이구만. 응? 윽······.”
 입에 쓴 것이 몸에는 좋고, 입에 단 것이 몸에는 나쁘다고 했던가. 입에서는 그렇게 상쾌함과 달콤함을 선물해 주던 병 속의 술이 배 속으로 들어가자, 잠시 가라앉았던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 심하게.
 “아, 젠장! 일단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겠군. 후우······ 숙부가 아시면 안 될 텐데······. 분명 또 난리를 치실 테니······.”
 
  * * *
 
 무림맹 북문에서 나와 곧장 동쪽으로 일각一刻 정도 걸으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을 만한 너른 마당을 지닌 집 한 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집이 바로 무림맹 경비대장 구원과 그의 조카 서안빈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서안빈은 집 안의 동정을 살폈다. 두리번거리며 기척을 살피는 서안빈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택배 안에 있던 술을 먹은 후 더욱 심해진 고통은 식은땀이 나게 했으며, 얼굴의 핏기 또한 빼앗아 갔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숙부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서안빈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다쳐 들어오는 일에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던 숙부였다. 언제나 자신의 안위보다 조카의 안위에 더 노심초사하곤 했다. 서안빈은 이제 어른 소리를 들을 만큼 자랐는데 또다시 숙부에게 심려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곧장 방으로 향하던 서안빈이 약간 마음을 놓고 방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예의 익숙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아, 걸렸네······.’
 “숙, 숙부······ 하하. 아직 안 주무셨나 봅니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오늘 근무는 잘 마쳤······.”
 구원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서안빈에게 한발 다가서는 구원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얼굴의 그 상처는 무엇이냐? 게다가 안색은 또 왜······.”
 추건일에게 맞아 구르면서 생긴 서안빈의 얼굴 상처에 일단 눈이 갔고, 동시에 평소 같지 않은 창백하고 핏기 없는 안색과 비라도 맞은 듯 옷을 흠뻑 적시고 있는 식은땀도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저······ 제가 근무를 서다가 넘······ 넘어지는 바람에······.”
 “빈아, 그건 다섯 살짜리 아이가 밖에서 얻어터지고 왔을 때나 하는 변명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구원의 얼굴에 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서안빈이 절대 잘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친자식인 하연희보다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며 키워 준 숙부였다. 그런 숙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아······ 저, 그것이······.”
 서안빈은 방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최대한 담담한 척했지만, 왠지 아버지나 다름없는 숙부 앞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새삼스레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렇다고 울먹이거나 하는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서안빈은 자신의 감정을 누르기 위해 애썼다. 물론 그의 뜻대로 잘되지는 않았지만.
 구원은 조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서안빈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도 구원은 잠시 동안 이전과 같이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참 뒤에 입을 연 구원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후우!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하거라. 내가 내상약을 가져다주마. 잠시 있거라.”
 예상보다 조용한 구원의 반응에 오히려 서안빈이 놀랐다.
 서안빈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숙부가 분명 먼저 조카의 조심성 없는 행동을 혼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추건일에게 불같이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서안빈이었다. 하지만 구원은 굳은 듯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예······ 숙부님······.”
 방문을 열고 나선 구원의 눈에 밤하늘과 수많은 별들이 들어왔다.
 저 별들만큼, 저 별들보다도 훨씬 빛나던 영웅들이 각자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시절을 구원은 기억하고 있었다. 혈투가 벌어진 그 치열한 경계에서 함께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도 그 영웅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별과 같은 영웅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비추던 사람을 돕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열과 성을 다했다.
 “후우! 형님. 형님 아들이 어디서 허접스러운 녀석들에게 얻어터지고 왔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다른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형님 아들이······. 크! 형수님의 당부만 아니었어도······.”
 알 수 없는 한탄의 말을 꺼내 놓은 구원은 안채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내 멈추고 말았다.
 그는 다시 서안빈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그것도 이전과 다르게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온 숙부를 보고 서안빈은 분명 놀란 것처럼 보였다.
 “숙부······.”
 “이리 와 보거라, 빈아.”
 구원은 다가오는 서안빈의 팔을 잡아 맥을 짚었다. 잠시 후, 구원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서안빈의 상태는 구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몸 안의 기운들이 하나의 흐름 없이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손을 쓰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흉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의술에 조예造詣가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구원은 서안빈의 상태가 꽤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공도 모르는 아이에게 대체 무슨 독한 수법을 썼기에 이리도 엉망이 되었단 말이냐. 추건일이라고 했느냐? 그 녀석이······.”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구원의 눈가에 살기殺氣가 스쳐 지나갔다. 무공을 제대로 익힌 적이 없는 서안빈마저도 분명 눈치챌 만했을 정도였다.
 “안빈아, 잘 듣거라. 네가 오늘 입은 내상을 치료해야겠다. 의원을 찾아가 맡겨 보아도 되겠지만, 내가 내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터이니 잘 따라 하도록 해라.”
 “예······ 숙부.”
 구원은 서안빈을 정좌正坐하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을 명했다.
 “빈아, 너도 경비대에 들어오기 전에 몇 가지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예. 오십 일 동안 무림맹의 기본적인 무공을 배웠지요.”
 사실 서안빈이 배운 것은 무공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것들이다. 그저 일반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을 정도의 호신술을 배웠을 뿐이다. 물론 구원은 어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 칠성심법七星心法과 복호권伏虎拳 정도를 배웠을 것이다. 그중 심법에 대해 기억하고 있느냐?”
 “예······.”
 무림맹에서 경비 무사들에게 가르치는 심법은 사실 토납법 정도라고 봐야 했다. 내공을 키워 무공을 시전하게 하는 심법이라기보다는, 몸을 보保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소림 무공에 뿌리를 둔 복호권 역시 이미 강호에 널리 퍼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비전과는 거리가 먼 권법이었다.
 “내가 너에게 지금 가르쳐 줄 심법도 기본적인 이치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구원은 서안빈의 뒤로 돌아가 자신의 손을 조카의 등으로 가져갔다.
 “긴장할 것 없다. 그저······ 앞으로 네 몸속에서 움직일 기운들을 잘 느끼면 된다. 애써 기운의 흐름을 기억하려 할 것도 없이, 기운을 친숙하게 여기면 될 것이야.”
 조금 긴장해 있는 서안빈의 뒤에서 구원은 크게 한번 숨을 마신 뒤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서안빈은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 오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건······.’
 신주身柱에서 시작된 기운은 대추大椎를 지나 머리로 흘러들어 왔다. 그러고는 곧 몸 구석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기氣가 자신의 몸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서안빈은 매우 편안했다.
 서안빈이 자신의 몸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 생소한 기운을 거부감 없이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처럼 자신을 평생 길러 준 숙부의 그것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구원에게 받았던 그 편안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 따뜻함은 대체······ 무언가 그리운 느낌이다. 어떻게 된 거지?’
 구원의 손이 서안빈의 등에서 떨어졌다. 구원이 이끌지 않는데도, 서안빈은 자연스럽게 몸속의 기운을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알려 준 심법을 단번에 익혀 버린 서안빈을 두고 놀랄 만도 하건만, 구원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형님 아들이오. 형님이 아둔했던 나를 수십 일이나 붙들고 가르쳐 익히게 했던 항수심법沆邃心法을 단 한 번에 해내는구려. 형님이 그랬듯이 말이오.’
 흐뭇한 시선으로 서안빈을 바라보던 구원의 시선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조카를 거쳐, 모든 인연이 시작되었던 그 과거로 이어져 갔다.
 
  * * *
 
 그는 구원이라는 두 글자 이름 외에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었다. 질긴 목숨이 이 손 저 손을 거쳐 이어져 갔고, 예닐곱 살이 되던 해에는 작은 정원에 팔려 왔다. 도검刀劍을 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소년 구원은 자신이 있는 곳이 무가武家라는 것을 알아챘다.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은 지 이틀이 지났다.
 깨끗한 옷을 입혀 주고 먹을 것도 넉넉히 주는 이곳이 오히려 더 불안한 구원이었다.
 세상은 한 번도 그에게 자신이 한 것 이상의 대가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흘린 땀과 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보상만 던져 주곤 했다. 구원은 별 이유 없이 잘 대해 주는 이들이 자신에게 나중에 무언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 여겼다.
 한 여인의 손에 이끌려 그는 자신 또래의 한 사내아이 앞에 서게 되었다. 다정한 표정의 여인은 구원에게, 앞으로 시동으로서 그 소년을 하늘같이 모시라고 했다.
 자신의 주인이라 하는 소년을 처음 보는 순간 구원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그 소년이 미웠다.
 평생 티끌만큼의 부족함도 느껴 보지 못한 듯 여유가 넘치는 얼굴. 세상에 선택받은 자신은, 앞으로 구원 같은 천한 것은 생각지도 못할 대단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
 그 얼굴이 싫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무엇이든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가질 수 있는 소년은, 구원의 마음속 상처를 건드렸다.
 소년은 구원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검을 닮은 나무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덤벼 보라고 말했다.
 구원은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명령이라며, 죽을힘을 다해 덤비라고 했다.
 결국 구원은 죽을힘을 다해 덤볐지만, 소년의 몸에 스치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나가떨어졌다. 구원은 눈앞의 소년이 무가의 자식이기에 무공이란 것을 배웠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 곱게 자란 샌님에게 자신이 이렇게 당할 리가 없다고 구원은 믿었다.
 “어이, 어서 일어나서 제대로 좀 덤벼 봐. 나는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무공은 하나도 쓰지 않고 있어. 너랑 다를 바 없는 조건이라고.”
 구원은 분했다. 거의 눈물을 떨구기 직전이었다.
 그런 구원 앞에서 소년은 등을 돌렸다. 재미없다는 말과 함께.
 구원은 목검을 들어 그 소년을 내려치고 싶었다. 등을 완전히 돌린 후였기에 분명 한 대 시원하게 갈겨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런다면 눈앞의 소년에게 정말로 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등을 돌렸던 소년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며 소년이 말했다.
 “어이, 나는 네 녀석이 마음에 든다. 너······ 강해지고 싶지 않냐?”
 구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해지게 해 줄게. 대신······ 너······ 내 동생 해라.”
 아이들의 눈은 유난히 동글하게 마련이다. 그 동글한 눈을 더 동그랗게 만들며 놀라는 구원에게 소년은 다시 말을 건넸다.
 “자, 형님이라고 불러 봐.”
 “혀, 형······ 형님.”
 이날 이후, 소년은 구원을 항상 동생이라 불렀다. 하지만 구원이 그를 형님이라 부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구원은 그 순간부터 그를 자신의 주인主人이라 생각하며, 주군主君이라 불렀다. 구원이 다시 그를 형님이라 부른 것은, 이곳 이승에서의 인연이 끝난 뒤였다.
 
 그로부터 수 년 후.
 구원은 동굴 속 연무동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가문의 비전을 익히려 용의 문양이 새겨진 서씨 가문의 지하 연무동에 들어간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주군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최소한 수십 일은 걸릴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의 주군은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동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예의 그 웃음 가득하고 밝은 표정으로 구원을 바라보았다.
 “어이, 동생! 이번에 배운 건 정말 끝내줘! 정말 최고라고!”
 “주군, 설마 벌써 익히신 겁니까?”
 “기본은! 우리 집안 수많은 선조들이 익혔지만, 아무도 끝까지 완성하지는 못했다더라. 이제 시작이지, 뭐.”
 “축하드립니다.”
 “어쨌든 말이야, 이번에 익힌 건 항수심법이란 건데······ 정말 굉장하다고. 하하.”
 “그렇습니까?”
 “동생, 항수가 무슨 뜻인지 알지?”
 “넓고 깊다는 것이겠지요.”
 구원에게 주군이라 불리는 소년은 정말 신이 난 듯했다.
 “그래. 세상은 말이야, 항상 넓고 깊은 것들이 이기게 되어 있는 거라고. 마음이 넓은 놈, 속이 깊은 놈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단 말이지. 항수······ 넓고 깊음······. 이 심법을 익히면 정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내가 특별히 동생에게도 가르쳐 줄게.”
 “제가 어찌 가문의 비전을······.”
 “강해지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자, 일단은 어서 이 칙칙한 곳부터 벗어나자고. 하핫.”
 
  * * *
 
 한참 동안 과거를 돌아보고 있던 구원은 다시 시선을 서안빈에게 가져갔다.
 편안한 표정에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은 서안빈은 여전히 운공 중이었다. 그야말로 무아無我의 지경에 이르기라도 했는지, 서안빈은 숙부가 인도해 준 길을 따라 끊임없이 기운을 움직였다.
 구원은 조카의 옆을 끝까지 지켰다.
 자연스레 운공을 마친 서안빈이 다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후우······ 숙부······.”
 “그래, 수고했다.”
 이 말과 동시에 구원은 서안빈의 맥을 짚어 보았다. 과연 아까보다는 기혈이 훨씬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불안정한 기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강한 기운인 듯하면서 동시에 약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듯하지만 어느새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신비한 기운들이 서안빈의 몸속에 흐르고 있었다. 전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희한한 기의 움직임에 구원은 분명 당황했지만, 심각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익히는 자의 자질이나 성정에도 영향을 받는 신비한 항수심법이었기에, 서안빈에게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이라 여기며 위험할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아직 내상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이리라 여겼다. 물론 서안빈이 추건일의 택배에서 얻은 수상한 술을 먹은 것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흠. 별문제는 없을 것이야. 항수심법이라면 안빈이의 내상을 금세 고쳐 주겠지. 열다섯이나 되어서 배운 심법이 안빈이에게 무공을 익히게 해 주지도 않을 것이고······ 형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닐 것이야.’
 “안빈아, 아직 혈맥이 불안정하니 당분간은 조심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오늘 배웠던 심법의 운공을 게을리하지 말고. 그러면 금세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불편했던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헌데 어쩐 일로 숙부님이 제게 무공을······.”
 “무공이랄 것도 없다. 그저 너의 몸을 치료해 주기 위해서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서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내일 근무도 있을 터이니······.”
 “예, 숙부님.”
 구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안빈의 방을 떠나려 했다. 그런 그를 서안빈의 말이 붙잡았다.
 “저, 숙부······. 가르쳐 주신 이 심법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이름이라······ 그런 것은 알 것 없다. 그저 건강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운공하거라.”
 말을 마친 구원은 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옛 영웅들을 떠올리게 했던 별들은 조금씩 위치를 바꾼 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항수심법의 이름이 알려져서는 안 될 테지. 몇몇 사람들은 바로 형님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 테니······. 빈이가 누구의 아들인지가 알려진다면······.’
 그런 일이 생겼을 때의 결과를, 구원은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
 
 중원의 모처某處.
 청아한 비취색의 찻잔으로 멋진 향을 지닌 찻물이 흘러들어 왔다. 찻잔을 집어 드는 백발노인의 표정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향이 좋구나.”
 “감사합니다, 장로님.”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채, 노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하산아, 맡긴 일은 잘 처리했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공자님께 잘 전달이 되었을 겁니다.”
 “무림맹 안으로 의심받을 만한 물건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습니다. 저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허허실실이라······.”
 노인 앞 청년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예. 보통 물건인 듯, 표국을 통해 공자님께 택배로 보냈습니다.”
 “그 귀한 마도주魔桃酒를 택배로?”
 “그렇습니다. 이미 표국에 확인해 본 결과, 공자님께 잘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을 겁니다.”
 “흠. 그래, 그랬구나. 전혀 의심받지 않고 마도주를 전달하다니······. 과연 좋은 방법이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다시 입으로 찻잔을 가져갔다. 다시 한 번 차의 진한 향을 음미한 노인은 다정한 눈길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하산아, 네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절대 너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덕분이 아니다. 주위에서 분명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겠지만,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알겠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낙하산落河珊, 낙씨 가문의 명예를 걸고 소공자님의 대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깟 작은 일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노인과 청년은 둘 다 흡족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잘못 쓴 글자, 즉 오자誤字 때문에 그 귀하다는 마도주가 추건일이 아닌 한 경비 무사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훗날 진실이 밝혀진 후로 이 낙하산 청년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평화平和의 끝은 고생苦生의 시작
 
 
 
 하루 이틀.
 아침인 듯싶더니 점심이 되고, 점심인 듯싶더니 어느새 저녁이 찾아오는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서안빈은 며칠 전에 호되게 당했던 그 사건을 잊은 채, 이런 반복되는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금세 나을 듯했던 내상은 쉽사리 낫지 않았다. 남는 게 시간인 서안빈인 만큼 시간이 날 때마다 운공을 했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큰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불안정한 기혈이 안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혈색은 오히려 예전보다 좋아졌고 운공의 효과인지 몸도 가벼워진 듯해, 서안빈은 큰 문제라 생각지 않았다. 숙부인 구원도 마찬가지였다.
 “흐암-!”
 새벽 출근을 위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오던 서안빈의 눈에, 밖으로 나서는 구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숙부, 어디를 이렇게 일찍부터······.”
 “일찍 처리할 일이 있어 먼저 나가마.”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구원이 찾은 곳은 경비대 건물의 집무실이 아니었다.
 무림맹 핵심부의 한 인적 없는 골목에 자리를 잡은 구원은 발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어 섰다. 모습을 보아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잠시 후 골목으로, 청년으로 보이는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마침 기다리던 이였는지, 구원은 그에게 다가섰다. 앞으로 다가서는 구원을 보고, 청년은 걸음을 멈춰 섰다. 다름 아닌 매풍검 추건일이었다.
 추건일은 구원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이신지······.”
 “안녕하시오. 나는 무림맹 경비대장 구원이라 하오.”
 추건일은 구원이란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비록 경비 무사들과 경비대는 하찮을지 몰라도, 그 경비대장은 꽤나 비범한 인물이라는 소문은 무림맹 안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추건일이라 합니다.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그렇소, 추 소협.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추건일의 눈에서 경계의 빛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로 저를······.”
 “며칠 전에 경비 무사 하나를 만난 적이 있을 거요.”
 추건일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경비 무사 서안빈의 모습이 스쳐 갔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비대장까지 나서서 자신을 추궁할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일 때문에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그 아이는 제 조카 되는 아이외다.”
 추건일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그랬군요. 그 일은 저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것은······ 복수라도 하려 하시는 겁니까?”
 “같은 맹도끼리 복수라니요. 그저······ 명망 높은 추 소협과 비무라도 한번 해볼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을 뿐이오.”
 “하하······ 비무 말씀입니까? 저는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경비대장 따위와의 비무는 양에 차지 않는 게요? 아니면······ 경비대장 따위에게 얻어터져 피를 보진 않을지 걱정이라도 되는 게요.”
 구원의 도발에 넘어갈 만큼 추건일이 얕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된 이상 구원과의 대결이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걸 알 뿐이었다.
 “정 그러시다면······.”
 검을 꺼내 드는 추건일을 보며 구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살며시 웃음을 보이는 모습이, 분명 평소의 구원을 생각하면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구원은 웃음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그리 길지 않은 곤봉 하나를 꺼내 들었다. 추건일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원래 봉을 쓰시는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은 이게 용도에 맞을 것 같아서 말이오.”
 추건일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피차 오래 끌 필요는 없으니······ 먼저 가겠습니다.”
 
  * * *
 
 일다경 후.
 구원은 처음 골목을 찾았을 때보다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는 한판의 비무를 벌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만약 구원의 뒤에서 바닥에 엎어진 채 꿈틀거리고 있는 추건일의 모습이 없었다면,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을 정도였다.
 정신을 잃었는지 고통이 심한 것인지, 전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추건일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던 구원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아, 아버지······.”
 서안빈의 사촌 누이이자, 구원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봉황신녀 하연희였다.
 어머니 천외옥녀 하약란何若蘭과 구원이 살벌한 다툼 끝에 갈라선 이후, 왕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녀父女가 되어 버린 구원과 하연희. 그녀는 성마저 어머니를 따라가야 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무림맹 안에서 지냈지만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연희구나.”
 딸아이와 마주 선 구원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딸과 오랜만에 조우한 기쁨이 어찌 아비에게 없겠냐마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없이 날뛰기가 망아지 같은 하연희였지만, 아버지의 그런 표정 정도는 헤아릴 수 있었다.
 “어쩐 일이냐,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 그것이······.”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던 하연희의 눈에, 저 뒤쪽 골목에 여전히 쓰러져 있는 추건일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쓰러져 있는 추건일을 보고도 하연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늦었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연희, 설마 너도······.”
 하연희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과연 부녀지간은 부녀지간인지, 하연희 역시 구원과 같은 방법으로 서안빈의 복수를 해 주려 했던 모양이다.
 “그게······ 추건일 저자에게 안빈이가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어제야 듣고서······. 그래도 한 식구인데······.”
 “그래······.”
 둘 사이에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둘 다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눈빛과 차가운 새벽바람이 서로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럼······ 잘 지내거라. 건강하고······.”
 “예······ 아버지. 저 나중에 한번 찾아뵈어도 되겠지요?”
 “······그래, 그러려무나.”
 구원이 먼저 발걸음을 떼어 떠났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하연희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 곁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까지 계속······.
 
  * * *
 
 무림맹 북문 제삼 경비 초소에는 여전히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았다. 서안빈은 추건일과 관련된 택배 사건 이후에 어떤 어려움도 없이 잘 생활하는 중이었다.
 물론 건강을 너무나도 걱정하는 심허증心虛症 환자이자 성이 ‘장무’이고 이름이 ‘기’인 이상한 선배 때문에 간혹 당황할 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루한 일상이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을 때쯤, 서안빈은 초소 건너편 객잔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만병의 온상인 쥐를 초소에서 보았다며 소동을 부린 장무기 덕분에 이제야 주린 배를 채우는 서안빈이었다.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하여튼 이상한 선배야. 그래도 뭐, 재미있기는 하니까. 크큭······.’
 장무기 생각에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만두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서안빈의 눈에, 객잔으로 들어서는 한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안빈은 그의 행색을 보고 그가 무얼 하는 노인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기수.
 객잔이나 저잣거리를 떠돌며 이야기를 팔아 연명하는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출입이 까다로운 무림맹이었기에, 무림맹 밖의 저잣거리처럼 쉽게 전기수들을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전기수에 객잔 안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가로운 오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전기수 노인은 객잔 가운데 탁자 위에 걸터앉으며 한두 번의 헛기침으로 주변의 시선을 단번에 모았다.
 호리호리하게 볼품없이 마른 몸과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삐죽삐죽 난 수염을 지닌 이 노인은, 객잔의 손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무림맹도 여러분, 저는 지나가는 이야기꾼이외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이야기판을 한번 벌여 볼 터이니, 부디 즐겁게 들으시고 불쌍한 이 노인네가 가엾은 목숨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작은 성의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흠!”
 이 말과 함께 낡아 빠진 대나무 통 하나를 앞에 놓는 노인에게 몇몇 손님들이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자아, 여러분. 무슨 이야기가 좋겠습니까? 무난하게 칠존七尊과 마천魔天 그리고 사견四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한번 해 볼까요?”
 노인의 말에 한두 명 정도는 한숨을 내쉬며 ‘또 저 이야기인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머지 손님들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고, 수백 번을 들었어도 재미있는 이야기, 노인이 꺼내 놓으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저 멀리 신강 땅에서 자신들을 마천이라 부르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마의 하늘로 온 중원을 덮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지요. 또다시 혈궁血宮이나 흑천부黑天府 같은 시시껄렁한 세외 세력이 중원 무림의 저력을 모른 채 겁도 없이 덤벼 오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허나! 마천이 청해성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곤륜파를 무너트리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란 신공을 지닌 곤륜파가 단 하룻밤 안에, 그것도 겨우 수십 명의 무인들에게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이 중원 땅에 전해졌습니다. 천상의 신선인 양 유유히 하늘을 날며, 지옥의 신장인 양 벼락같은 장을 뿜어낸다는 곤륜 문도들이 그리도 쉽게 무너졌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천에 대한 소문과 함께 온 중원에 긴장감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시작에 불과했지요. 마천이 모습을 드러낸 그날 이후! 중원은 그야말로 마魔의 바람에 휩싸여 피를 흘리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고, 인심 좋아 보이는 객잔 주인이 가져다준 엽차로 목을 축였다.
 “후우. 마천이 하나둘 중원 무림 문파들을 무너트리자, 중원 무림은 마천에 대항하기 위해 무림맹을 결성했습니다. 정파와 사파는 물론 북해빙궁 같은 세외의 세력까지 무림맹의 깃발 아래 모였습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고 들이 바다의 물결처럼 끊이지 않던 무림이지만, 모든 무림인들이 하나의 깃발에 모이기는 기나긴 무림 역사 속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구파일방과 흑도십삼천黑道十三天, 심지어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까지 무림맹 안에서 하나로 묶였지요. 소림 방장 대정大正 선사와 사파의 거두였던 구천마제九天魔帝가 나란히 거대한 연단에 서서 무림맹의 탄생을 선언하던 순간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살아 있는 신화였던 대정 선사와 구천마제가 손을 맞잡은 채 마천의 타도를 외치고, 그 뒤로 수많은 중원 무림의 고수들과 무림인들이 함께 함성을 내지르던 그 순간······! 저같이 별 볼일 없던 자도 가슴이 뜨거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객잔의 손님들을 쓱 한번 둘러보았다.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 더 굉장한 무언가의 한 부분이 되는 건······ 그건 굉장히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특히 우리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는 말입니다. 하핫.”
 노인의 말에 객잔 안의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무림맹에서 일하고 있어도, 이렇게 외곽 객잔을 찾는 부류는 대부분이 서안빈과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대단한 일을 하기보다는 이른바 잡무雜務를 맡아 하는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정말 무림맹이 발족하던 날에는 모든 중원 무림인들이 당장이라도 중원 무림이 마천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천은 강했습니다. 너무나 강했지요. 사파 무림에서 신처럼 군림하던 구천마제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으며, 백보신권百步神拳으로 천하제일인이란 자리를 오랫동안 놓지 않았던 대정 선사도 두 팔 모두와 다리 하나를 잃고 정신 나간 광인狂人이 되어 초라하게 소림으로 돌아갔습니다. 중원 무림이 마천에 이렇게 처절하게 당한 것은 모두 아시다시피······ ‘그자’ 때문이었습니다.”
 ‘그자’라는 말이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손님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 버렸다. 그들의 얼굴을 굳게 만든 것은 분명 공포였다.
 “우리는 ‘그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마천의 우두머리였던 그를 우리는 그저······ 마중마魔中魔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워낙 비밀스럽게 우두머리의 존재를 숨기던 마천이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그자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나타난 자리에서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대정 선사도······ 그의 정체를 말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꿀꺽.
 서너 명의 손님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다. 중원인들, 특히 무림과 관계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그 시절의 공포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싸움은 오 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중원 땅 중에 하남과 산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천의 사악한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지요. 정말 그때 우리 중원인들이 가졌던 공포는, 부족한 제 솜씨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난세亂世는 영웅을 낳게 마련! 이대로 중원 무림을 정체불명의 마천에 빼앗기고 마는 것인지,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었던 그때! 젊은 영웅들이 스스로의 힘을 모아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분들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잘 아실 듯합니다. 하하.”
 객잔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작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그 젊은 영웅들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중원 무림의 위기에서 정파 무림의 젊은 고수 일곱과 사파 무림의 젊은 고수 일곱 그리고 세외 지역의 젊은 고수 하나······ 이 열다섯의 소영웅少英雄들은 그들 스스로 뭉쳐 마천척살대魔天刺殺隊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마중마 그자와 그의 핵심 수하들이었지요. 물론 이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이 이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힘겨운 싸움 속에서 네 명의 동료를 잃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에게 큰 위기는 역시······ 네 명의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 네 명의 배신자들을 우리는 지금 네 마리의 개, 사견이라 부릅니다. 갑작스레 마천의 편에 붙어 버린 이 네 명은 모두 사파 출신의 젊은 고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배신으로 현재 칠존의 자리에 올라 계시는 모든 분들이 허망한 죽음을 당할 뻔했습니다. 현재 무림맹주이신 신검께서 만약 그 자리에 없으셨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검을 필두로 끝까지 살아남으며 대공大功을 이룬 일곱 영웅은 결국 우리 중원 무림을 마천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게 됩니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이 칠존의 영웅담英雄譚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노인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을 때, 서안빈의 앞에는 더 이상의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안빈은 노인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듯,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 값을 치르고 나가려는 서안빈에게 노인이 큰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보시오, 젊은 손님! 이야기는 이제부터인데 어디를 가시는 게요.”
 “저는 아직 근무시간입니다.”
 “허허, 그렇다면 이 늙은이를 위해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 삯이라도 주고 가는 게 어떻겠소?”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는 노인에게 서안빈은 손을 휘저으며 싫다는 뜻을 표했다.
 “저한테는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하핫.”
 이야기꾼답게 무척 넉살이 좋은 노인을 뒤로하고, 서안빈은 객잔을 나섰다.
 서안빈이 이야기꾼 노인에게 주는 한 푼 동전이 아까워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내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듣곤 하던, 사악한 마천과 위대한 칠존 그리고 배신자 사견의 이야기를 서안빈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별 이유도 없이 말이다.
 “쳇. 알 게 뭐야. 일이나 하러 가야지!”
 
  * * *
 
 의검단 건물은 무림맹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천심각天心閣 바로 뒤에 위치한다.
 무림맹의 핵심 인물들이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회당會堂과 맹주의 집무실이 있는 천심각 뒤로 의검단 건물이 자리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어떤 이의 명령도 받지 않고 오직 맹주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며, 맹주의 호위 역시 맡고 있는 의검단이었다. 맹주와 항상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했다.
 의검단 건물로 추건일이 들어섰다.
 아침에 분명 구원에게 떡이 되도록 당했지만, 겉으로는 정말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서려는 추건일의 표정은 그렇게 멀쩡하지 못했다. 표정만큼이나, 그의 몸 상태는 엉망인 상황이었다.
 ‘젠장······ 정말 대단한 재주군. 그 정도로 때려 놓고 겉으로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다니······. 대체 구원이란 자는······.’
 구원에게 워낙 엉망으로 당했기에 최소한 하루 정도는 숙소에서 쉬고 싶던 추건일이었지만, 선풍검仙風劍 노의량魯義亮의 부름에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의검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의 고수인 노의량과 추건일은 두 해 전 사제師弟의 연緣을 맺었다.
 노의량이 추건일을 제자로 받아들이며 등룡단에 넣어 준 것은, 분명 재능은 있지만 별 볼일 없는 중소 문파 출신인 추건일이 무림맹에 들어와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추건일의 사정을 이해한 노의량의 배려였다.
 그 자신도 신극문神極門이라는 작은 시골 문파 출신이었기에, 추건일을 단순한 제자가 아닌 자식처럼 여기며 돌봐 주었다.
 “스승님, 건일입니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노의량의 집무실 앞까지 도착한 추건일이 스승을 찾았다.
 “들어오너라.”
 노의량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차가웠고,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읍하는 추건일에게 노의량은 엄한 눈빛을 보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다름이 아니라······ 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불렀다. 너를 찾아온, 무공도 모르는 경비 무사에게 해를 가했다는 게 사실이냐!”
 추건일은 금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서안빈과의 일에 대해 악평惡評을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경비 무사 따위야 몇십 명씩 죽어 나간다고 해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이 무림맹에서 내쫓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추건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무림맹의 무인들은, 몇몇 주요 문파나 가문 바깥에서 뛰어난 인재가 나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건일아, 나는 그 소문이 너를 시기하는 녀석들이 퍼트리고 다닌 것이란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항상 가르치지 않았느냐!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힘을 과시하는 자는 절대 진정한 강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부님께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반성의 빛을 보이는 추건일을 향한 노의량의 시선이 조금은 풀렸다.
 “네가 잘못한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매번 너를 핍박하는 저들과 다를 것이 없단 말이다. 알겠느냐?”
 “예, 사부님.”
 “알아들었다면, 네가 다치게 한 그 경비 무사를 찾아가 직접 사죄를 하고 오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의량은 현재 무림맹에 몇 남지 않은 진짜배기 무인이었다.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인 그가 의검단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맹주의 신임을 받는 것은 그의 무공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인다운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럼 그만 가 보도록 해라.”
 추건일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한데 그가 밖으로 나서기 위해 열려 하던 문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사부님,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무림맹에서······ 단 한 수에 저를 제압할 수 있는 고수가······ 많겠습니까?”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제자의 모습은 스승에게 언제나 귀여워 보이게 마련이다.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너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너도 이미 많이 강해졌다. 흔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룡이니 어쩌니 하지만······ 장담하건대 너도 그들에 뒤지지 않을 것이야. 어쩌면······ 넘어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일단 연무에 더욱 정진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추건일은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깊게 절한 후 방을 빠져나왔다.
 ‘아무리 내가 ‘그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노의량의 말대로 날 그리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이는 전 무림을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 않을 테지. 겨우 경비대장 자리에 있는 자가······ 대체 그자의 정체는······.’
 구원에게 당해 엉망이 된 몸의 통증 때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경비대장에 대한 머리 아픈 생각 때문인지, 추건일의 준수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장무기와 근무를 설 때 서안빈은 아무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하늘같은 선배가 원하는 청결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쓸고 닦고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귀찮게 여길 법도 하건만, 서안빈은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장무기가 시키는 일들을 하다 보면 오히려 시간이 더 빨리 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서안빈은 초소로 들어서며 장무기에게 말을 건넸다.
 “식사하고 왔습니다. 뭐 또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선배.”
 “없어, 없어! 으······ 젠장······.”
 서찰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든 장무기는 인상을 찌푸린 채 투덜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서안빈의 물음에 장무기는 종이를 구겨 버리며 답했다.
 “표국에 의뢰해서 설도雪桃라는 귀한 복숭아를 구하려고 했는데······ 최근에 누가 설도를 싹 쓸어가 버려서 구할 수가 없다는구나.”
 “설도요?”
 “만년설로 뒤덮여 어떤 생물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산 정상에서 자라는 복숭아를 설도라고 하지.”
 “오! 그런 게 정말 있습니까?”
 “내가 없는 걸 구하려고 하겠어? 물론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보통은 이맘때에 금 스무 냥이면 하나 정도 구할 수 있었는데······ 쳇!”
 금 스무 냥이란 말에 서안빈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금 스무 냥이면 은자로는 이백 냥. 앞으로 한 달 꼬박 일해 은자 여섯 냥을 받게 될 서안빈에게는 감히 입에 담기도 힘든 돈이었다.
 “금 스······ 스무 냥요?”
 “그래. 하지만 올해는 웃돈을 더 얹어 준다고 해도 구할 수가 없다는군. 쳇! 대체 어떤 녀석들이 설도를 다 쓸어가 버린 거야!”
 “대체······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아무래도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서안빈보다 장무기가 받는 돈이 더 많을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금 스무 냥을 대수롭지 않게 쓸 정도는 아니었다.
 “이봐, 안빈이.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친구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즉! 건강 앞에서는 돈이고 친구고 필요 없다는 거지!”
 ‘그런 뜻이 아닌 듯한데······.’
 “설도 하나를 잘 달여 먹으면 겨울에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금 스무 냥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지.”
 “그······ 그렇군요.”
 “그리고······ 우리 집은 좀 사는 집안이야······.”
 “아, 예······.”
 이 대화를 끝으로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서안빈은 이 알 수 없는 선배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장무기 역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 중인 것으로 보였다.
 딱!
 장무기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며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거였군!”
 “깜짝이야! 무슨 일입니까?”
 “왜 설도가 자취를 감췄는지 알겠어. 누군가가 마도주를 만든 거로군!”
 “예?”
 “설도와 금무화과金無花果, 천년설삼千年雪蔘 그리고 금와金蛙 가루······ 이런 재료들로 만드는 일종의 영약이야. 그래······ 그러고 보니 천년설삼과 금와 가루를 찾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지. 지난봄에 몸이 허한 듯해서 금무화과로 차를 만들어 먹으려 했을 때도······ 누군가 금무화과를 싹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고. 마도주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설도가 이렇게 동이 날 리가 없어. 나머지 것들도 마찬가지고.”
 서안빈은 멍한 표정으로 장무기에게 무언가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눈빛을 받은 장무기가 귀찮은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귀하다는 신비의 과실인 설도와 금무화과 수천 개······ 그 자체만으로도 무림인들이 탐욕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천년설삼과 금와 가루······ 이런 귀한 재료들로 빚어낸 술이 바로 마도주야. 만약 이걸 만든다면 무림인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 정도로 귀한 영약이지. 무림인들은 일 갑자의 내공을 얻는다는 소림 대환단보다 이 마도주를 몇 배는 더 원할걸.”
 “오, 그렇습니까? 그 마도주인가를 만드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군요. 수만금은 들어갈 거 같은데요?”
 “하하! 수만금 정도로는 마도주 한 방울 정도나 만들 수 있을까? 훨씬 큰 돈이 들어가지. 수천 개의 과실로 빚어내도 겨우 자그마한 병 하나 정도나 채울 수 있을 테니까. 이봐, 안빈이. 보통 영약이라 부르는 것들의 가장 큰 단점이 무언지 아나? 바로 한 번에 너무 강한 기운을 얻게 된다는 거야. 순식간에 몸 안으로 일 갑자, 이 갑자의 공력이 들어오는 건 참으로 버티기 힘든 일이지. 만년하수오 같은 것을 먹고 단번에 고수가 되었다는 전설 속 인물같이 되는 것은 정말 천의 하나, 만의 하나의 확률이라고. 한데 마도주의 멋진 점은 말이지······ 한꺼번에 강한 기운을 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그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기운을 전해 준다는 거지. 마도주의 기운은 음용飮用한 자의 혈맥을 따라 돌다가 운공을 시작하면 적당한 기운을 그자의 단전에 쌓아 준단 말이야. 어떤가, 대단하지?”
 마도주라는 수만금이 들어가는 술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것은 사실이었지만, 서안빈은 그 마도주라는 것이 내공을 쌓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는 것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대체 이 장무기라는 선배는 설도니 마도주니 하는 것에 대해 어찌 그리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굉장하군요. 근데 선배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십니까?”
 “건강을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알게 된 거야. 어쨌든 마도주를 만드는 자들이 있다니······. 마도주로 엄청난 무인이라도 만들어 내려는 것일까? 무림에 괴물 같은 자가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럼······ 오랫동안 조용했던 이 무림이 무척 시끄러워질지도 모르지······.”
 “그렇습니까? 후우! 부디 그 마도주라는 것이 안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무림이 시끄러워지면······ 우리에게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얼버무린 장무기는 평소대로 의자에 앉으며 서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 대단하다는 마도주를 마신 주인공인 서안빈 역시 그 뒤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멀뚱히 앉아 있던 서안빈은 장무기가 매일 열심히 보고 있는 서책에 눈이 갔다.
 “저······ 선배, 보시는 그 책은 뭡니까?”
 “아, 이거? 청낭서.”
 “청낭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 같은데······.”
 “들어 봤을지도 모르지. 엄청 유명한 사람이 쓴 책이니까.”
 “아, 그래요? 누가 쓴 겁니까?”
 “화타.”
 “에? 화타요? 그 화타?”
 “응.”
 “아! 화타가 쓴 의서醫書······ 청낭서······. 대체 그걸 어디서······ 제가 알기론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후우······ 이봐, 안빈이.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게 무척 많다고.”
 “아, 예······.”
 “‘건강, 아는 만큼 지킨다.’라는 말도 못 들어 봤어? 건강관리를 위해서는 평소에도 의서를 봐 두는 게 좋다고.”
 “그렇군요······.”
 점점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장무기를 보며 서안빈은 고개를 저었다.
 
  * * *
 
 서안빈이 경비 무사라는 일을 점점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노처녀 혼례식 남은 날짜 세기보다 정확한 퇴근 시간이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정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 중 하나였고, 서안빈은 그걸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덧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가 유시酉時를 지나 술시戌時(19시∼21시)가 되자 서안빈은 어김없이 경비 초소를 나서서 집으로 향했다.
 나름대로 보람찬 하루를 보낸 서안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림맹 북문을 지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 안빈!”
 고개를 돌린 서안빈의 앞에는 경비 무사 동기인 차소와 한백이 서 있었다.
 “오늘은 도망가지 말고 같이 한잔하자고. 이것저것 쌓인 것도 많았을 텐데, 한잔하면서 풀어야지.”
 차소의 권유를 서안빈은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해, 그러니까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시작한 음주飮酒는 서안빈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몸 상태가 걱정되어 술을 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잔하고 싶지만······ 참아야지. 지금 상황에서 술을 먹었다가는 건강을······ 헉! 나도 점점 장무기 선배처럼 되어 가는 건가.’
 “너희도 알잖아. 내 몸이 지금 술 마실 상태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몸을 완전히 추스르고 나면 거하게! 한잔하자.”
 몸을 사리는 서안빈의 모습에 인상을 쓰는 차소와 달리 한백은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럼 얼른 좀 나으라고. 우리가 정말 괜찮은 주점을 알아 놨으니 다음에는 같이 가자.”
 “그러자고. 야, 차소! 그렇게 삐친 척 말라고. 나야말로 정말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단 말이야.”
 “삐친 이 형님의 화를 풀려면 너희 사촌 누이랑 한번 어떻게······.”
 한백은 실없는 소리를 하는 차소를 아예 끌다시피 데리고 사라졌다. 물론 손을 흔들며 다시 한 번 서안빈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훗, 녀석들······.”
 서안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이 그리 대단한 녀석들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즐겁고 언제나 착한, 한결같은 녀석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욕식기인欲識其人 선시기우先視其友(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먼저 그 친구를 보라)라 했거늘. 네 친구들은 정말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이구나. 뭐, 심성은 다 착해 보이기는 한다만.”
 갑작스레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린 서안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노인장은 아까 객잔의 전기수 아니십니까?”
 전기수 노인은 대답 없이 촐싹거리는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 노인이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던 서안빈은 다시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볼일이라······. 그렇지. 너에게 볼일이야 아주 많지. 아주 많아.”
 서안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낮에 잠깐 보았을 뿐인 이 노인이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서안빈이 재미있다는 듯 그리고 서안빈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노인은 예의 그 촐싹거리는 웃음을 쏟아 냈다.
 “클클······ 얘야, 일단 너는 나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단다. 아주 많이 배워야 하지.”
 “저, 대체 무슨 말씀인지······.”
 “나를 모른다고 하지 말거라. 우리는 이전부터 분명 알고 있었으니······. 그리고······ 앞으로 못다 한 일들을 마쳐야 하고······ 또한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아야지. 클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깡마른 노인.
 그 순간 서안빈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그렇구나! 이 노인이······ 안타깝게도 매병?病(일종의 치매) 같은 것에 걸린 모양이구나. 아까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무지 멀쩡해 보이던데······. 쯧, 원래 매병이라는 게 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니까, 뭐······.’
 서안빈의 표정이 바로 친절하게 변했다. 매병에 걸린 노인들은 마치 아이 같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 서안빈은 동네 꼬마 아이들을 달래는 듯이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 혹시 함자나 사는 동네가 기억나세요? 손자 같은 분과 저를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어르신과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사는 곳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역시 심성 하나는 확실히 선한 서안빈이었다. 불쌍한 노인을 챙겨 주려 친근하게 다가섰다.
 그런 서안빈을 노인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집에 데려다 달라 했더냐?”
 “예예, 잘 알겠으니 집이 어디신지부터······. 노인장이 없어져서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신도 온전치 않으신데 이렇게 싸돌아다니면 안 되는 겁니다. 아셨지요? 자, 일단 어디 사시는지부터 잘 기억을 한번 해 보세요.”
 노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한 손을 잡고 다정히 부축해 오는 서안빈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사악.
 그러던 어느 순간, 서책을 보다 책장이 넘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와 함께 서안빈의 옆에 있던 노인이 사라졌다. 눈앞에서 귀신이 곡할 노릇을 겪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안빈의 위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너는 나를 전증癲證(역시 치매의 일종) 걸린 늙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클클.”
 고개를 위로 든 서안빈은 그대로 까무러칠 뻔했다.
 좀 전까지 부축하고 있던 노인이 어느새 그의 어깨에 발을 걸치고 꼿꼿이 서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무게마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사악.
 다시 작은 소리와 함께 노인이 서안빈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서안빈의 손을 잡아채 맥을 짚었다.
 “어이쿠! 원이 녀석, 무공은 전혀 안 가르쳐 놓다니······. 그래도 먹이기는 좋은 걸 먹였나 보구나. 대장의 심법도 조금 가르친 거 같고······.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안빈아, 너는 오늘부터 나에게 무공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강해져야지. 암, 그래야지.”
 뜬금없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노인에게 손을 잡힌 채, 서안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늙은이는······.’
 “저, 어르신.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셔서 왜 이러시는지······. 제가 왜 어르신께 무공을 배워야 합니까?”
 “무공을 배우는 것이 싫다는 것이냐? 좀 더 실력을 보여 줘야 하나. 클클.”
 “제게 무공은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 없는 칼부림 속으로 제 소중한 목숨을 던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숙부님이 제가 무공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만의 하나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숙부님께 배워도 충분할 것입니다.”
 “원이에게? 클클. 그 녀석에게 무얼 배울 게 있겠느냐. 노부老父에게 배우는 게 백번은 이익이지.”
 서안빈은 구원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 안에서도 숙부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어려서부터 보았다.
 지금이야 뜸하지만 비밀이라고 퍼진 구원의 실력을 가늠하고자 무림맹 고수들이 가끔 찾아와 숙부와 비무를 가졌었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압도적인 구원의 승리였다.
 약간의 비웃음과 함께 서안빈은 말했다.
 “저희 숙부를 아시는 분인가 보군요. 허나 노인장께서는 숙부의 실력은 모르시나 봅니다. 어쨌든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서안빈은 노인을 지나쳐 원래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내심 노인이 따라오거나 해코지를 해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긴장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던 서안빈은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서안빈은 약간의 꺼림칙한 느낌을 남긴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서안빈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진 건물의 지붕에 서서 바라보던 노인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되뇌었다.
 “너는 네 운명의 길을 가야 한다, 안빈아. 쉽지는 않겠지만······ 내 뜻을 따라야 할 것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 * *
 
 그날 밤, 자정이 막 지난 시각.
 검은 야행복을 입어 더욱 호리호리해 보이는 한 인영이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무림맹 외곽에 자리 잡은 숲 속으로 몸을 숨긴 인영은 쓰고 있던 복면을 벗어 던졌다.
 낮에 서안빈에게 수상한 말들을 건넸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노인은 팔 쪽에 상처를 입은 듯, 검은 야행복 위로 붉은빛이 번졌다.
 “젠장······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닌데······.”
 노인의 계획은 간단했다.
 한밤중에 서안빈의 집을 방문(?)해 기습적으로 간단하게 구원을 제압하고, 자신이 더 우위에 있음을 서안빈에게 증명한다. 그리고 서안빈에게 반강제로 무공을 배울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천천히 왜 그가 무공을 배워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가 짊어져야 할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는 반드시 구원을 제압해 물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왜 그가 무림맹에 자리를 잡고 있는가, 대체 왜 서안빈에게 무공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나 등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많았다.
 만약 구원이 자신과 반대의 길을 가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제거해 서안빈에게서 떼어 놓아야 했다.
 사실 이 노인이 서안빈을 찾아내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간단했다. 서안빈과 구원이 무림맹에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서도 안 될 터인데, 같은 지붕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노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단번에 구원을 제압하려 했던 노인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구원은 그의 기습을 막아 냈고, 곧바로 반격까지 해 왔다. 구원의 한 수에 노인은 다쳤고, 그 순간 노인은 구원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나저나 구원 그 녀석, 무지막지하게 강해졌군. 아니, 원래 강했나? 하긴 대장도 그랬지······.”
 노인은 과거 구원에 대해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수백 년의 나이를 지닌 나무들이 우거져 검은 천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숲 속의 밤. 몇 명의 사내들이 작은 모닥불 옆에 앉아 있었다.
 품위라고는 전혀 없는 삐죽삐죽한 수염을 길렀으며, 그 수염에 어울리게 깡마른 중년인은 버릇인 듯 작은 단도 한 자루를 손가락 사이에서 놀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준수한 청년이 나뭇가지로 모닥불 속의 나무를 솎으며, 별 같은 작은 불씨들을 만들어 밤공기 사이로 날렸다.
 “이봐, 대장.”
 자신보다 족히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대장이라 부르는 것이, 중년인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했다.
 “왜?”
 “내가 말이지, 궁금한 게 하나가 있어.”
 “말해 봐.”
 일렁이는 모닥불은 시시각각 청년의 얼굴빛도 변하게 했다. 모닥불 빛을 받으며 미소를 띠는 청년의 모습은 싸늘한 밤공기를 잊게 할 만큼 따뜻했다.
 “대장이 생각하는 중원에서 가장 강한 사람 세 명만 대 봐. 누구누구일까?”
 청년은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나.”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전혀 놀라지도 못마땅해하지도 않았다.
 “그렇겠지. 그럼 나머지는?”
 “두 번째도 나. 그리고 세 번째도 나.”
 “아니, 무슨 대답이 그러우? 천하에는 대장밖에 없다 이거요?”
 “네가 보기에는 아닌가?”
 그런 청년을 잠시 바라보던 중년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클클. 그렇기는 하네. 천하제일의 자객이자 도둑놈의 대장인데,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클클.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네. 가장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는 누구요?”
 청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 동생, 원이.”
 “엥? 대장네 집을 지키고 있는 그 몸종 녀석?”
 “몸종이 아냐. 내 동생이라니까.”
 “아무래도 아끼는 녀석이니 싸우기가 껄끄럽다, 그거요?”
 “꼭 그런 것은 아냐. 그 녀석······ 정말 강하다고. 마음먹고 싸우면 나도 긴장해야 될걸.”
 중년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흠. 나는 솔직히 못 믿겠소.”
 “가끔 사람들 중에는 지켜야 할 것들 앞에서 본연의 힘 이상을 발휘하는 녀석들이 있어. 원이 녀석은 그런 녀석이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끝을 모르고 강해질 녀석이지.”
 “그렇소? 흠······.”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던 노인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대장은 헛소리 같은 건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 후우, 이제는 어쩐다······.”
 구원이 만들어 준 상처를 싸매며 노인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의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그렇다면······ 클클.”
 
  * * *
 
 한편, 서안빈의 집에서는 구원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기습을 감행한 이는 절대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동시에 전혀 기척을 찾아볼 수 없는 솜씨는 예전에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일 리는 없다. 그분은 분명······ 그때 돌아가셨어.’
 하지만 구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공격한 이가 누구냐가 아니었다. 이번 일이 서안빈의 안위에 영향을 주느냐가 문제였다.
 자신의 한 수에 자객이 도망을 가자, 구원은 그 뒤를 쫓지 않았다. 바로 서안빈의 방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이런 소동에도 서안빈은 곤히 잠든 상태였다.
 ‘역시 나를 노렸다는 것인가. 대체 누가······? 만약 오늘 찾아온 자가 전부가 아니라면······. 그런 자가 하나만 더 있어도 안빈이의 안위를 보장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무림의 검객에게는 검劍이 삶의 의미일 수 있으며, 상인들에게는 돈이 삶의 의미일 수 있고,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 중인 서생들에게는 정치政治가 삶의 의미일 수 있다.
 구원에게 삶의 의미는 오직 한 가지였다.
 서안빈의 안위와 행복.
 이것뿐이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안빈이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
 
  * * *
 
 다음 날 아침, 숙부와 나란히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서안빈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안빈아.”
 “예, 숙부.”
 “무림맹 안에 맹도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아느냐?”
 “아,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경비대 무사들도 들어갈 수 있는 숙소가 있단다. 잠시 동안 거기서 생활을 해 보도록 해라.”
 서안빈은 놀랐다.
 지금까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과보호해 온 숙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집 밖에 나가서 살아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숙부······.”
 “사내라면······ 짧은 기간일지라도 혼자 살아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 달 정도만 혼자 힘으로 살아 보도록 하여라. 좋은 경험이 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숙소 배정 같은 것은 내가 처리해 주마. 오후쯤에 연락이 갈 것이다.”
 서안빈은 숙부가 정말 자신에게 독립심을 길러 주기 위해 갑자기 집을 떠나 살아 보라고 권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서안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설마······.’
 서안빈은 앞에 앉아 있는 숙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구원은 그리 영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 서안빈 자신을 아끼며, 자신의 안위를 숙부 본인의 그것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숙부가 자신을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보내려 한다는 것. 서안빈이 생각했을 때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하나였다.
 ‘여자다!’
 전쟁과도 같던 싸움 끝에 숙모가 떠난 후, 서안빈은 숙부 곁에 여인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십 년 가까이 여인들을 멀리하며 지내 오던 숙부였다.
 ‘하긴 많이 참으셨지. 나를 딴 곳에 보내 놓고 누군가를 불러들이실 모양이군. 후훗. 숙부, 건투를 빕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잘되실지는 모르지만······ 후훗.’
 이상야릇한 눈빛을 보내는 서안빈을 보며 구원은 다만 이 어리뜩한 조카가 자신의 보살핌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할 따름이었다.
 
  * * *
 
 무림맹 북문 제삼 경비 초소에서 작은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침 구보를 마치고 사랑스러운 일터로 나선 서안빈이 그 작은 콧노래의 주인공이었다.
 “어이구, 안빈이 너 아침부터 기분이 날아가는구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하핫. 형님. 뭐, 좋은 일은 아니고 말입니다, 숙부님께서 한두 달 정도 혼자서 살아 보라고 하시지 뭡니까. 독립이랄까요······ 후훗.”
 조산백은 서안빈이 즐거워하는 이유를 알아챘다.
 “허허, 그래. 네 나이 때에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법이지. 자유롭게 말이다. 그렇지만 너도 나이 먹어 봐라. 아무도 없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으로 쓸쓸히 들어가는 기분은······.”
 경비대에서 유명한 노총각인 조산백은 별거 아닌 대화 중에 갑자기 목이 메는 듯했다. 쓸쓸하게 혼자 늙어 가는 노총각 조산백은 그만큼 처량한 신세였다.
 “그, 그렇습니까. 형님도 곧 좋은 사람 만나실 겁니다. 제가 한번 중매 자리라도 알아볼까요?”
 “정······ 정말이냐?”
 “예. 뭐, 저도 저희 마을 분들이나 저잣거리 상인들······ 뭐, 좀 아는 데가 있으니······.”
 “안빈이······ 이 형님은 과부라도 상관없다! 어디 참한 여인 있으면······.”
 “크흠!”
 조산백의 간절한 부탁은 누군가의 등장으로 끝을 맺지 못했다. 헛기침 소리가 나는 곳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본 조산백은 화들짝 놀랐다. 조산백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잔인한 손 속으로 서안빈을 공격한 추건일. 바로 그였다.
 “추 소협, 누추한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
 조산백의 목소리는 분명 주눅 들어 있었다. 이미 경비 무사를 아무런 이유 없이 한 번 공격한 적이 있는 무림 고수였다.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저는······ 뒤의 경비 무사 분께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잠시 저분과 따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만······.”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혹시 다시 해코지를 하러 오신 거라면 제가 옆에 있어 줘야 합니다.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추 소협 앞에 제 후배이자 동료인 안빈이를 혼자 둘 수는 없지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조산백의 얼굴에 ‘한번 붙어 보자’라는 대단한 패기 같은 것이 보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두려움 없이 담담했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으로 이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무림 고수 추건일 앞이었다. 그렇지만 위태롭고 급하다고, 매번 바뀌는 상황에 따라 동료와 후배에 대한 마음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정도는 확실히 지킬 줄 아는 사내가 바로 조산백이었다.
 서안빈은 그런 선배이자 형님 조산백이 꽤나 믿음직해 보였다.
 제법 건방진 말을 해 대는 경비 무사 조산백을 보며 추건일은 속으로 웃었다.
 ‘흥. 이곳 무림맹은 오히려 경비 무사 중에 제법 무사다운 녀석들이 있군······.’
 “저는 오늘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지난 저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추건일이 이렇게 말했지만, 조산백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사과를 하러 왔다는 추건일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그 콧대 높은 등룡단원이 경비 무사에게 고개를 숙이러 왔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괜찮을 것 같습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서안빈까지 나서자 조산백은 잠시 고민하다가 걸음을 옮겨 초소 밖으로 나섰다. 마지막까지 추건일을 향한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조산백이 사라지자 서안빈이 한 발짝 추건일에게 다가섰다.
 “후우! 추 소협, 사죄를 하러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서안빈이라 합니다만.”
 “그렇군요. 그날 저의······ 잔인했던 손 속은······ 정말 저의 의도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제 자신도 모르게 무공이 발현된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당신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정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한마디로 몸이 반응했다고나 할까요.”
 “······.”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을 만한 추건일의 말에, 서안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흐흠. 이상한 생각은 마십시오. 단지······ 정말 당신에게 해를 끼친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저의 실수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안빈은 잠시 추건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지금 추건일의 얼굴은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사내의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미 잊은 일입니다. 추 소협의 그 사죄의 말씀, 잘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추건일은 서안빈에게 허리를 굽히며 깊게 읍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경비대장님께도 제 사죄의 말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서안빈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추건일을 바라보았다. 그런 서안빈의 모습에 추건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을 때쯤, 추건일의 뒤쪽으로 불청객 하나가 등장했다.
 “허허. 네 녀석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었더냐? 허접스러운 놈들만 만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제법 쓸 만한 녀석도 있구나.”
 어제 느닷없이 서안빈을 찾아온 정체불명의 노인이었다. 서안빈은 모르지만 어젯밤 구원을 습격하기도 했던 그가, 다시 서안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 노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추건일은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입을 열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힘을 쏟아 상대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떡이 되도록 때리고 유유히 사라진 구원.
 지금도 본연의 힘을 모두 개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눈치를 못 채게 자신의 뒤를 빼앗은 이 노인.
 추건일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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