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남천문 [E]

남천문 1-1권

2019.01.18 조회 2,067 추천 13


 #1장
 
 
 
 또각또각.
 한 필의 말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안장에 앉은 스물 후반 어름의 사내.
 입은 옷은 도문의 도사들이나 입는 도복이었고 등에는 한 자루 황검을 비껴 맸다.
 검 자루에 수놓인 또렷한 매화 문양.
 입은 도복 팔소매 테두리에도 역시 수놓아져 있는 매화 문양.
 화산.
 사내가 아홉 산 중 한 곳인 화산의 제자임을 모를 수 없는 문양이다.
 매화검협 서문양우.
 당대 화산 장문인 태황자의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두 사형제와 함께 차기 장문인직을 다투는 이다.
 그런 이유로 강호 후지기수들 중 상당한 유명세를 떨친다.
 잠시 뒤.
 “응?”
 서문양우가 눈을 반짝이며 손에 살짝 쥔 고삐를 당겼다.
 히, 히이잉.
 그러자 말이 낮게 울더니 우뚝 섰다.
 푸르르.
 머릴 좌우로 흔들어 투레질하는 말.
 서문양우가 선 좌측 방향을 돌아봤다.
 눈에 들어오는 높이 이 장 어름의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는 석비.
 푸른빛을 띤 이끼가 석비 곳곳에 자릴 잡았고 거미줄 같은 실금들이 석비 곳곳에 퍼져 있다.
 세워진 지 오래되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마
 
 석비 정중앙에 음각된 두 글자.
 “풋.”
 서문양우가 하마라는 글자를 보곤 실소했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
 조소를 담은 나직한 중얼거림.
 “백 년 전이라면 몰라도!”
 불과 백 년이지만, 강산이 변하고 세상인심이 변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세월이다.
 “이젠 그 누구도 지키지 않는 유명무실한 하마비가 용케 아직도 남아 있군.”
 눈살을 찌푸리는 서문양우.
 마음에 들지 않음을 감추지 않았다.
 사문 화산에 대한 자긍심과 제룡천부를 얕잡아 보는 오만이 매화검협 서문양우에게서 은근슬쩍 묻어났다.
 한때는 사문 화산보다 제룡천부가 위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당대 화산은 제룡천부에 꿀릴 것이 없다.
 석비를 응시하는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눈동자가 일순 회상의 빛을 머금었다.
 
 황량한 허허벌판이던 호북 당양평에 제룡천부를 세운 것은 일대 영걸 제룡천존 위지무제였다.
 지옥대전의 최종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제룡천부는 이후 삼십 년 동안 제룡천존 위지무제의 영도 아래 영화의 한 시대를 보내게 된다.
 천하제일!
 제룡천부 앞에는 늘 그런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제룡천부에 일대 위기가 닥친 것은 제룡천존 위지무제의 사후 삼 년이 되던 해였다.
 제룡패존 위지무승.
 의문의 사건, 사고로 위의 두 형이 급사하는 바람에 부주가 된 위지무승은 제룡천부를 일신에 담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부주가 되고 이삼 년은 그런대로 제룡천부를 이끌었다.
 그런데 삼 년을 갓 넘었을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하기 시작했다.
 황음무도!
 그 말이 생각날 정도로 막나가기 시작했다.
 부친 제룡천존 위지무제의 아들답지 않게 주색을 탐하기를 밥 먹듯이 하고 가진 권력을 마구 휘두르며, 미인이라면 남의 부인이라고 해도 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종국에는 사대봉신가의 부녀자들에게까지 손을 뻗었고, 심지어는 아미의 여승과 오대가문의 여인들까지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저히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어, 지옥대전 이후 힘을 길러 왔던 아홉 산과 다섯 가문, 그리고 사대봉신가가 연합해 들고일어났다.
 그 결과 호북 천문산에서 천문지약이란 이름의 회동이 이루어졌다.
 아홉 산, 오대가문, 사대봉신가.
 그들은 회동에서 제룡패존 위지무승은 축출과 그의 사촌 동생인 제천신존 위지덕양의 제룡천부 삼 대 부주 추대를 결정, 실행하였다.
 가신들에 의해 추대된 제천신존 위지덕양.
 그 위상이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마음고생이 적잖았던 제천신존 위지덕양이다.
 결국 그는 부주 위 계승 팔 년 만에 사망하고, 아들인 현 부주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제룡천부의 부주 위를 계승, 사 대 부주가 되었다.
 
 피식.
 싱겁게 웃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오만한 눈빛을 반짝이더니.
 “하!”
 두 다리로 말의 배를 가볍게 툭 찼다.
 히, 히힝.
 그러자 말이 말발굽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또각, 또각.
 걸어가기 시작하는 말.
 안장에 앉은 서문양우의 몸이 좌우로 미미하게 흔들렸다.
 
  * * *
 
 반 각 남짓 지났을까?
 저 멀리에 우뚝 서 있는 제룡천부의 정문, 남천문이 보였다.
 “흠.”
 서문양우가 잠시 탄 말을 멈추고 남천문을 바라봤다.
 남천문을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고유한 출입패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룡천부 소부주 위지호용.
 그가 초청하며 통행패를 보내 주었다.
 하나.
 그 패로는 동문과 서문, 각기 동천문과 서천문이라 불리는 두 곳을 출입할 수 있을 뿐 정문을 출입할 수는 없다.
 “흐음, 남천문이라.”
 중얼거리며 남천문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통행패를 가진 이나 제룡천부의 부주, 그리고 소부주만이 남천문을 지나다닐 수 있다.
 “한번 가 볼까?”
 심중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말의 배를 찼다.
 “이랴.”
 말이 그의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양 남천문을 향해 걸어갔다.
 또각, 또각.
 얼마 뒤.
 서문양우가 탄 말이 남천문에 가까이 다가고 있었다.
 바라보는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경탄이 어린 작은 눈빛을 띠었다.
 “역시 남천문은 위용이 남달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은 패기가 느껴졌다.
 누가 남천문을 세웠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다시없을 명공일 것이다.
 나무와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으니 말이다.
 은근히 제룡천부의 위세를 자랑하는 남천문에 이르러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말을 멈췄다.
 히힝.
 나직한 말 울음소리.
 잠시 남천문을 감상하는 그의 귀에 돌연 코골이가 들렸다.
 드르렁, 드렁.
 
 “응?”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상하는 데 훼방을 놓는 코골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는 코골이가 들리는 남천문 우측을 돌아봤다.
 성벽에 등을 기대고 낡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는 자.
 “허!”
 기가 막힌 매화검협 서문양우다.
 복색으로 미루어 보아 무슨 수문 위사 같은데, 명색이 제룡천부의 위용을 나타내는 남천문의 문지기가 저리 한심한 작자일 리 없다.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없다.
 코를 골며 한창 자는 자 외에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허, 거참.”
 긴가민가한 눈빛을 띠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그는 점심 끼니때가 되어 남천문이 잠시 닫히고 문장이라 불리는 수문장과 수문 위사들이 밥 먹으러 갔음을 몰랐다.
 “흠.”
 낮은 침음을 흘리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자는 자가 수문 위사?
 심히 의심스러웠다.
 “남천문을 어찌 저런 자가!”
 한 문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문.
 자고로 정문을 지키는 이는 그 용모가 반듯하고 예법을 알며 풍채가 여느 사람을 압도해야 하는 법.
 문파를 방문하는 이에게 주는 첫인상.
 한 문파의 정문을 지키는 자는 그 문파의 얼굴.
 하여 각별한 관심을 두고 신경을 쓰며 지객당이나 지객원과 같은 부처를 별도로 둔다.
 한데 당대 강호를 떨어 울리는 제룡천부의 정문을 저리 한심한 작자에게 맡기다니.
 “한심한.”
 나직이 중얼거리며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자는 이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여봐라!”
 “······.”
 대꾸를 대신하여.
 드르렁, 드르렁.
 코골이가 연이어 들렸다.
 “여봐라! 여봐라아아!”
 못마땅해 조금 더 언성을 높인 매화검협 서문양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역시나 코골이.
 드르렁, 드렁.
 발끈하여 눈을 치뜨는 매화검협 서문양우였다.
 “여보라니깐!”
 살짝 내기를 모아 음성에 실었다.
 그러자 쩌렁쩌렁한 외침이 자는 이의 귀를 때렸다.
 “뭐야!”
 신경질적인 음성.
 
  * * *
 
 달게 잘 자고 있었다.
 아리따운 천녀들과 요지에서 노니는 꿈을 꿨는데, 천녀들의 입맞춤을 한꺼번에 막 받는 찰나였는데.
 방해받았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눈에 보이는 안장에 앉은 놈.
 주위에 다른 이는 없다.
 “이!”
 성난 눈으로 날 깨운 놈을 쏘아봤다.
 “방금 전에 소리쳐 날 깨운 것이 그쪽?”
 “오냐, 바로 나니라. 봐하니 수문 위사인 듯한데, 속히 문을 열도록 해라.”
 놈이 말하며 눈짓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해라?”
 반문하며 놈을 빤히 바라봤다.
 “뭐 하고 선 게냐, 어여 문을 열지 않고서. 어허엄.”
 어럽쇼. 잘 자는 날 깨운 놈이 헛기침을 한다?
 봐하니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지가 무슨 어른이라도 된 듯이 조금 전부터 반말이야.
 어쭈, 처음 보는데 다짜고짜 말을 놓는다 이거지, 응.
 속이 쪼까 꼬인다.
 안장에 앉은 놈의 위아래를 가만히 훑어봤다.
 입은 도복, 좌측 어깨 옆으로 삐죽 나온 검 자루.
 ‘화산?’
 봐하니 화산 제자, 그것도 매화검수인 것 같은데.
 “지랄!”
 툭 상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매화검수라면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해도 돼?
 어쭈, 놈이 성난 눈빛을 희번덕이며 날 쏘아보네.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리 막말을 하는 것이야.”
 성내는 것을 보니 내가 방금 지랄이라고 한 말을 듣곤 꼭지가 돈 모양인데.
 “카아아아아······ 퉤에.”
 고갤 우로 돌려 침을 뱉었다.
 “저, 저어 무식한 놈!”
 놈이 아주 날 뭐 취급하네.
 노려봤다.
 “봐하니 천부를 찾아온 것 같은데.”
 “같은데에에?”
 어이가 없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한낱 수문 위사에 불과한 놈이 반말 짓거리를 한다 생각해, 속이 부글부글 끓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난 오른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으로 우측 귀를 후볐다.
 “통행패.”
 “뭐라?”
 “통행패, 제시하라고.”
 “네놈이 감히 나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어찌 보고서!”
 놈의 말에 잠깐 움칫했다.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규칙은 규칙.
 “보고 자시고 할 거 없고, 빨리 통행패나 꺼내 봐.”
 툭 말을 던졌다.
 “뭐가 어쩌고 어째!”
 놈이 붉으락푸르락하네.
 그러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고.
 “통행패 없음 꺼져.”
 뒤돌아섰다.
 “하아아암, 난 더 잘 거니깐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문으로나 가 봐.”
 “이노오오옴!”
 놈이 버럭 소리치더니.
 어라, 별안간 뒤에서 파공성이 들리네.
 휘이이익.
 뒤돌아봤다.
 “어쭈.”
 안장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는 놈이 날 향해 날렵하게 날아왔다.
 제법 날렵한 경신이다.
 창졸간에 내 머리 위 허공에 이르더니, 몸을 비틀며 내 얼굴로 오른발을 내찼다.
 쉬익.
 고갤 살짝 우로 젖혔다.
 그러자 놈의 오른발이 두어 촌의 간격을 두고 내 우측 귀를 스쳐 지나갔다.
 받았으니 돌려줘야지.
 ‘내가 먼저 공격 안 했거든. 이건 어디까지나 공세적 방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우로 몸을 빙글 돌렸다.
 더불어 말아 쥔 오른손을 신속하게 쳐올렸다.
 툭.
 튀어나온 중지.
 투골권!
 퍽.
 정확히 놈의 ‘똥꼬’에 중지가 깊이 박혔다.
 “크하아아아악! 캬아아아!”
 울리는 비명 소리 봐라.
 목청도 좋지.
 하긴 청정한 화산의 공기를 담뿍 머금었을 테니 목청 좋은 거야 당연한 거고.
 슈우욱.
 놈이 균형을 잃고는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음 안 되지.
 척.
 왼발로 땅을 강하게 밟고.
 휘익.
 몸을 날렸다.
 삽시간에 놈에게 이르며 오른발을 힘껏 차올렸다.
 슈아아아.
 지면을 낮게 스치며 치솟는 제비처럼 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곡선의 끝이 어김없이 놈의 사타구니에 닿았고.
 순간.
 퍼어억.
 절로 몸이 움츠러들 것 같은 둔탁한 타격성이 울렸다.
 뒤이어.
 “크아아아악!”
 비명이 길게 터져 나왔다.
 역시 목청이 좋아.
 어라?
 겨우 그걸로 입에 거품을 물어.
 어쭈구리, 눈깔 뒤로 돌아가는 거 봐라.
 콰당탕.
 땅에 떨어져 두어 번 뒹구는 놈.
 “어?”
 실신한 것 같은데.
 “뭐가 이렇게 약해?”
 고갤 갸웃거렸다.
 화산 매화검수라면 다들 절정을 코앞에 둔 초일류 고수 끝자락이라고 무위를 평가하는데.
 “화산 애들, 제자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무례한 것보다는 너무 약한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싸울 맛이 안 난다. 맛이!
 난 아직 몸도 안 풀었는데.
 “에이.”
 짜증 내며 뒤돌아섰다.
 뒷간 갔다가 뒤 안 닦고 나온 그런 기분이었다.
 “잘 자고 있었는데.”
 짜증에 막 딛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실신한 놈.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설치긴.
 그때.
 히힝.
 말울음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놈이 말을 타고 왔었지.
 말을 쳐다봤다.
 ‘저거 팔면 얼마나 주려나?’
 탐욕의 눈빛을 띠며 머릿속으로 돈 계산을 하는데.
 별안간 말이 투레질과 함께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푸르르.
 “흠.”
 목하 고민 중.
 “팔까? 안 그럼 출출한데 잡을까? 사실 말고기도 그리 나쁘진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출출했다.
 뭔가 먹었으면 했는데,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꿀꺽.
 말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어라, 저 말 시키가 갑자기 왜 우로 뒤돌아서?
 내게서 도망치려는 것 같은데, 확실히 사람보다 말이 엄청 민감하긴 한 모양이다.
 내가 자기 잡아먹으려는 걸 아무래도 알아챈 것 같은데.
 “그래 봐야 말 시키지.”
 도망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나.
 오른손을 들어 중지와 엄지를 붙였다가 가볍게 튕겼다.
 쉐에에에에에에!
 공간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메아리치고 한 줄기 지력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 * *
 
 전각과 전각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루거각의 바다.
 그 바다 정중앙에 자리한 삼 층 전각.
 제룡천부 총관부.
 일직선의 두 방.
 앞의 방은 손님을 받는 용도고, 뒤에 있는 방은 업무를 보는 용도다.
 뒤에 있는 방.
 벽을 등지고 자리한 큼직한 서탁에 앉은 노인.
 제룡천부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
 늘 인자한 얼굴과 눈웃음을 짓던 눈이 일순간 확 변했다.
 휘둥그레진 눈동자, 대경이란 감정이 한입에 먹어치운 얼굴.
 “뭐가 어쩌고 어째에에에!”
 방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창의노사 매학림이 앉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대로한 모습.
 서탁 너머에 서 있는 마흔 중반의 중년인.
 총관부 선임서기이자 창의노사 매학림의 차자인 매승지.
 “······의전에서 말하기를······ 자칫 잘못되면 앞으로 사내구실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항문이 찢어지고 거시기가 너무 큰 타격을 받아설라무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두 사형제와 함께 다음 대 화산 장문인 후보로 거론되는 매화검협 서문양웁니다. 아버님······ 게다가 매화검협 서문양우는 소부주의 초정으로 우리 천부를 찾았다가 그리되고 말았습니다. ······서문세가주의 셋째 아들이고 보면······ 이 일이 화산, 서문세가에 알려질 경우, 틀림없이 화산과 서문세가가 이를 문제 삼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버님.”
 일다경 전에 남천문에서 일어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고해 바치는 매승지.
 짙은 곤혹에 싸인 그였다.
 “네 이놈!”
 “네?”
 어리둥절하여 반문하는 매승지.
 부친 매학림이 돌연 그를 야단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와 나는 지금 공무를 보는 중이야. 난 총관, 넌 서기. 알겠느냐?”
 노성을 지르는 창의노사 매학림.
 “네, 네에에.”
 움찔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매승지가 부친 매학림의 눈치를 봤다.
 ‘꼬장꼬장하시긴. 아무래도 앞으로 한 삼십여 년 정돈 끄떡없으시겠어.’
 기운이 펄펄 넘치는 부친이다.
 아마 장수하실 것 같다.
 부친이 여전히 정정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매승지다.
 그사이 총관 매학림이 우로 돌아서더니.
 홱.
 빠른 걸음으로 서탁을 벗어났다.
 성나 있음을 모를 수 없는 매승지다.
 “정경! 이 죽일 놈을 내 당장에!”
 노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곧바로 우측 벽으로 다가갔다.
 지켜보는 매승지.
 ‘설마?’
 그의 눈에 보이는 벽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괘장.
 위는 둥글게 말렸고 아래는 시원하게 쭉 뻗었다.
 전대 제룡천부의 부주 제천신존 위지덕양이 평생에 걸친 부친의 충직한 봉직에 고마워하며 하사한 것이다.
 제룡천부의 부주.
 단 일인을 제외하고 누구든지 수틀리면 두들겨 팰 수 있는 남다른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벽에 이른 매학림이 오른손으로 단단히 괘장을 움켜쥐고는 몸을 돌렸다.
 홰액.
 그러곤 삽시간에 나는 듯이 서 있는 매승지를 스쳐 지나갔다.
 “아, 아버님!”
 놀라 소리쳐 부르는 매승지.
 당혹감에 젖은 얼굴이었다.
 급히 고갤 돌려 방문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는 부친 매학림을 보았다.
 바람처럼 빠르게 방문에 이른 창의노사 매학림.
 콰앙.
 사납게 문을 열어젖히고는 냉큼 밖으로 나갔다.
 쌔애애애앵.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부친 창의노사 매학림.
 열린 방문을 바라보며 매승지가 중얼거렸다.
 “일 났네, 났어.”
 그런데 의외로 그의 행동이 느렸다.
 분명 다급한 상황일 텐데, 무슨 산책하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쩝.”
 입맛을 다시는 매승지. 회상의 눈빛을 반짝였다.
 “혹시나가 역시나네. ······정경, 그놈이 십 년 만에 돌아왔을 때, 내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어. 그놈이 어릴 때부터 오죽 말썽쟁이였어야지, 쯧쯧.”
 혀를 차는 매승지.
 사고를 친 황정경을 너무도 잘 아는 그다.
 아장아장.
 황정경이 걸음마를 떼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났다.
 “크크크큭.”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는 매승지.
 틀림없이 부친 창의노사 매학림이 괘장으로 황정경을 봄날 개 패듯이 두들겨 팰 것이다.
 “기왕이면 다리몽둥이를 토옥 부러뜨려 주시면 참 좋은데.”
 독백하는 매승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분기라는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서 살며시 새어 나왔다.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옛 기억.
 멈칫.
 걸음을 멈춘 매승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부르르.
 그와 함께.
 “죽일!”
 성난 눈빛을 희번덕였다.
 황정경과 관련하여 아주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십 년의 세월은 흘렀을 텐데, 여전히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도 남음이 있는 매승지다.
 천천히 부친 창의노사 매학림이 닫지 않고 나간 방문으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곧 방문에 이르러 밖으로 나가는 매승지의 눈에서 기대감이란이란 작은 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 * *
 
 남천문 우측.
 활활.
 타오르는 거센 장작불.
 타타타탁.
 불티가 불규칙하게 주변으로 마구 튀었다.
 성인 남자 가슴팍만 한 말 갈비가 떡하니 모닥불에 얹어져······.
 또, 또, 또옥.
 기름방울이 규칙적으로 장작불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화, 화, 화악.
 혀를 날름거리듯이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꿀꺽.
 맛깔스럽게 익어 가는 말 갈비에 대한 기대감과 식욕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군침을 삼키고 말았다.
 힐긋.
 우를 봤다.
 땅에 너부러져 내장을 드러낸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말.
 “맛이 있으려나?”
 중얼거리며 시선을 바로 했다.
 일순 멈칫거렸다.
 느껴지는, 그를 쳐다보는 몇몇 시선들.
 좌를 돌아봤다.
 서서 그의 눈치를 보는 다섯 무복인. 그중 한 사람, 운장대도 관승.
 중년의 연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외모였다.
 좌측 허리에 찬 한 자루 대도.
 외모와 대도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각별한 풍채를 자아냈다.
 지가 관운장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긴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다들 이들이 전혀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관운장처럼 기다란 수염을 턱에 붙이고 꼼꼼한 분장을 한 다음 오른손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서 있으면, 영락없는 관성제군이다.
 ‘캬아아아아.’
 어지간한 사람은 껌뻑 넘어갈지도 모른다.
 남천문의 수문장이 된 데에는 여느 사람과 각별히 다른 저 풍채가 한몫 단단히 했다.
 제룡천부의 얼굴.
 남천문.
 타 문파들보다 뭔가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남천문의 수문장인 운장대도 관승과 다섯 수문 위사들을 뽑을 때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관승의 뒤에 서 있는 네 무복인.
 수문 위사들이다.
 한데 각자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듣긴 들었는데 말이다.
 내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아서.
 히히히.
 실은 기억하는 게 귀찮아서지만.
 
 
 
 #2장
 
 
 
 “대두!”
 황정경이 운장대도 관승에게 소리쳤다.
 ‘어라, 절마가 움찔거리네.’
 “대답 안 하지.”
 “가주, 대두가 아니라 대돕니다, 운장대도!”
 자기 별호를 힘주어 말한다.
 가주에게 거리낌 없이 대꾸한다?
 간이 크거나, 그렇게 해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거나.
 뭔가 믿은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대두나 대도나 그게 그거지.”
 “가주!”
 “시끄러!”
 황정경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풍채 믿고 무공 수련 등한시하다간, 너 어느 날 그냥 훅 가는 수가 있어. 알겠어?”
 “······.”
 “대답 안 하지?”
 “가주, 저도 한 무공 합니다. 대도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래.”
 “네에에.”
 “그럼 나랑 비무할래?”
 “어데요!”
 운장대도 관승이 기겁하며 고갤 급히 내저었다.
 도리도리.
 싫어요!
 그런 뜻임을 모를 수 없다.
 피식.
 웃었다.
 “니 무공이 내 눈에 차면 대도라고 불러 준다.”
 “아, 예에에.”
 “무공 수련, 열심히 해.”
 “네에에.”
 건성으로 대꾸하는 운장대도 관승.
 ‘내가 신임 가주라고 대놓고 얕보는 건지. 아님, 내 간을 보는 건지. 그도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
 황정경은 내심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그거고, 술 가지러 간 놈은 왜 이렇게 안 와!”
 “간지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 각도 안 됩니다, 가주.”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 각도 느려.”
 “예?”
 “여기서 술 창고까지 뭐 그렇게 멀다고 아직이야.”
 운장대도 관승이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저 인간!’
 상대가 하늘 같은 가주라 뭐라 말하지는 못하겠고.
 속이, 속이 아닌 운장대도 관승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악명(?)을 널리 떨치더니만, 10년 만에 완전 개망나니가 돼서 돌아왔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불만 가득한 눈빛을 띠는 운장대도 관승.
 ‘왜에 남천문에 와서는.’
 미칠 노릇이다.
 가주면 가주답게 집무실에 앉아서 가내의 업무를 보든가, 아니면 무공 수련을 하든지.
 별안간 남천문에 나타나서는······.
 
 -나, 심심해.
 
 복장을 아주 뒤집어 놓는다.
 어릴 때 자주 남천문에서 놀았으니, 가주 황정경에게는 추억의 장소일 것이다.
 ‘잠깐 둘러보며 옛 추억에 젖었다가 그냥 돌아가지, 왜 디비 자냐고.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왜에에에, 소부주 위지호용이 초청한 매화검협 서문양우에게 고자가 될지도 모르는 엄한 중상을 입힌 거냐고? 사람, 미치고 팔딱 뛰게.’
 후폭풍이 엄청 꺼려지는데.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골로 보내고 그가 타고 온 말을 잡아 지금 말고기를 구워 먹으려는 가주 황정경.
 ‘내겐 재앙이야. 재앙.’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조마조마했다.
 고갤 들어 하늘을 보는 운장대도 관승.
 ‘가주······.’
 전대 가주 금신천왕 황철목을 생각하며 애틋한 감정에 젖었다.
 호부에 견자!
 제룡천부의 이들이 그런 눈으로 네 봉신가 중 하나인 황가의 새 가주 황정경을 바라본다.
 운장대도 관승을 보던 시선을 정면으로 바로 했다.
 한편 황정경은 장작불에 의해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지는 말고기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아주 맛깔스럽게 익어 가며 식욕을 아주 강하게 자극하는 냄새를 솔솔 풍겼다.
 두어 번 깜빡이는 눈동자.
 ‘흠.’
 돌연 급사한 부친이 생각났다.
 ‘주화입마는 무슨!’
 그리 죽을 아버지가 아니다.
 주화입마 따윌 당할 리가 없다. 일신 무위가 초절정 말을 목전에 두었는데, 그런 고수가 주화입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부친이 익힌 독문무공은 금신나한신공.
 지금은 사라진 저 남소림의 삼대신공 중 하나다.
 불문 무공은 설사 주화입마에 들었다고 해도 시간을 두고 꾸준히 수련하면 주화입마 따윈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심후하고 정심하다.
 ‘게다가 최근 내가 먹는 음식에 미량의 갈왕독분이 들어 있었어.’
 독공을 익히고 있지 않았다면 당했을 것이다.
 미세한 갈왕독분이 체내에 쌓이고 쌓였다가 불특정한 시기에 폭발하듯 작용하여 자신을 한 줌의 핏물로 녹여 버릴 것이다.
 ‘갈왕이라 불리는 만년 묵은 독지네의 독을 말려 가루를 낸, 독문에서 절독 중 절독으로 치는 갈왕독분은 구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데, 으음.’
 뭔가 있다.
 ‘내가 모르는 이면의 뭔가가 제룡천부 내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중심에 우리 황가가 있을 것이고.’
 생각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 때문에 의도적으로 분탕질을 치려 한다.
 마구 들쑤시고 흙탕물을 만들어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 것들을 모두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릴 것이다.
 ‘혼수모어!’
 예측불허의 어지러운 변수의 장을 만들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지.’
 눈을 반짝이며 장작불을 하염없이 주시했다.
 백 년 전에는 강호 제일이자 최강의 세력이었던 제룡천부.
 하지만 백 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내부적으로 서서히 곪아 가고 있다.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모든 상황을 흐트러뜨려 놔야 해!’
 곳곳에 변수를 만들어, 그 변수를 통해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수면 아래에 있던 것들이 동요할 것이고,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할 것이니까.
 그 점을 감안하면!
 씨이이익.
 소리 없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쌔에에에에엥
 경공을 시전,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각들 사이를 지나치는 제룡천부의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
 한 줄기 바람인 양 남천문을 향해 일로 직진했다.
 그런 매학림을 지나가던 이들이 보곤 화들짝 놀랐다.
 다들 당황하여 영문을 몰라 했다.
 “어?”
 “초, 총관 어른.”
 “어럽쇼.”
 “어딜 저리 급히 가시지?”
 “평소에 점잖게 걸어 다니시는 분이 어째서?”
 다들 의구심이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참 후.
 쌔애애애애액.
 종잇장 찢듯 허공을 찢는 파공성이 들렸다.
 운장대도 관승, 네 수문 위사가 파공성에 부지중에 몸을 움찔거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들 뒤돌아봤다.
 “초, 총관 어른!”
 소스라치게 놀라는 운장대도 관승.
 “흑.”
 “저, 저 어른이.”
 찢어져라 눈을 크게 뜨는 네 수문 위사.
 다들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엄청 빠른 속도로 허공을 지나며 덮치듯 다가오는 총관 매학림.
 그 기세가 성난 파도와 다를 바가 없다.
 한편 황정경 역시 파공성에 돌아봤다.
 “왔네.”
 피식 웃었다.
 황정경은 시선을 바로 하고 오른손에 쥔 소도를 앞으로 뻗었다. 맛있게 구워진 말고기 덩어리에서 고기 한 점을 발라냈다.
 스, 스, 스으으.
 고기 한 점을 소도에 얹어.
 후후.
 입김을 분 다음 막 입에 넣으려는데.
 “황정경! 그놈 어딨어! 어디 있냐고!”
 천지를 위진시킬 기세의 노성이 연이어 들렸다.
 “히익, 초, 총관 어른!”
 매학림의 기세에 눌린 운장대도 관승이 허둥지둥했다.
 “총관 어른을 뵙습니다.”
 술심부름을 다녀온 수문 위사를 포함한 다섯 수문 위사가 공손히 매학림에게 인사했다.
 뒤이어 운장대도 역시 매학림에게 인사했다.
 정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우물우물.
 입에 뜨거운 고기를 조심조심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그러며 왼쪽 땅바닥에 있는 호리병을 들어 입에 대고 몇 모금 마셨다.
 연후 다시 왼쪽 땅바닥에 내려놓는데.
 “네 이놈! 황정경!”
 대로한 외침과 함께 살벌한 눈초리가 확 느껴졌다.
 ‘훗!’
 실소했다.
 보나 마나다. 매 영감,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
 천천히 좌를 돌아봤다.
 “체, 매 영감, 기운이 엄청 넘치네. 소실 하나 더 들여도 되겠어.”
 이죽거렸다.
 “네 이노오오옴!”
 총관 매학림이 머리 높이 괘장을 들며 정경에게 몸을 날렸다.
 슈와아악.
 바위에서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대호가 따로 없다. 공간을 접어 버리듯 단숨에 정경에게 이르렀다.
 ‘호오.’
 매 영감의 경공이 장난이 아니다. 절정에 이른 경공. 그리 말해도 하등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부아아악.
 괘장이 허공을 찢으며 정경의 머리로 떨어졌다.
 직격!
 실린 힘이 가히 천 근이라 말해도 무방하다.
 공력을 적잖게 실은 탓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기가 괘장에서 넘실거렸다.
 공력의 바탕이 되는 내기의 흐름이 완연히 정경의 감각에 잡혔다.
 인간의 감각을 짐승의 감각에 육박하도록 끌어올려 주는 무공.
 야수감각도!
 그 수련 덕에 당대 천하 무림에서 감각에 있어 정경을 능가할 이는 단연코 없다.
 턱.
 한순간 무심히 왼손을 들어 매학림의 공력이 실린 괘장을 잡아챘다.
 ‘욱!’
 괘장에 실린 공력이 정경의 왼 손아귀를 엄습했다. 손아귀가 찢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영감탱이, 내공이 장난이 아니네.’
 평생 내공만 수련했는지, 공력이 이만저만 강맹한 것이 아니다.
 정경은 그런 매 영감의 공력을 받아넘기며 황급히 풀어 헤쳤다.
 한편 당혹감에 젖어 눈을 치뜬 매학림.
 ‘흐윽.’
 놀람이 그의 얼굴을 질주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머금은 놀람을 밀어 내며 부정이란 감정이 슬며시 새어 나왔다.
 ‘이, 이놈이!’
 육 성 공력.
 절정 초입에 이른 무위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한데 황정경의 왼 손아귀에 잡힌 괘장은 요지부동이다.
 즉 황정경이 절정 초입 이상의 무위라는 말이 된다.
 그것이 믿기지 않는 매학림.
 하여 자신도 모르게 부정이란 감정을 내색하고 말았다.
 씨익.
 정경은 웃으며 매학림을 똑바로 봤다.
 “매 영감.”
 “너어······.”
 “제룡맹약 제삼 항.”
 툭 말을 던졌다.
 그러자 매학림의 눈동자가 밋밋하게 흔들렸다.
 동요하고 있었다.
 “제룡위지가를 포함하여 네 봉신가의 영역은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다!”
 매 영감의 동요가 한층 짙어졌다.
 “괘장에 특권을 부여한 것은 위가! ······그 특권이 유효한 것은 위가의 영역 내!”
 “네놈이!”
 매 영감이 화를 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자기도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어디서 화난 척하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어 말했다.
 “남천문은 우리 황가의 영역.”
 “놔라, 이놈아.”
 “괘장의 특권은 우리 황가의 영역 내에서는 안 통해.”
 통보하듯 말하며 괘장을 잡은 왼 손아귀에 공력을 모았다.
 일순.
 퍼억.
 잡힌 괘장이 산산이 부서지며······.
 후두두.
 부서진 파편들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흐억!”
 소스라치는 매학림.
 충격적인 봉변(?)에 말문이 막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정경을 쳐다봤다.
 픽.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한편.
 뜨악!
 운장대도 관승과 다섯 수문 위사는 눈에 보이는 광경에 크게 놀랐다.
 대경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믿겠어!
 -내가 뭘 잘못 본 것 같은데.
 -자네 봤어?
 
 서로 돌아보는 그들의 눈에서 그와 같은 무언이 넘실거렸다.
 다들 매학림의 괘장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괘장을 가주 황정경이 부숴 버렸다.
 괘장에 특권을 부여한 것은 전대 부주 제천신존 위지덕양.
 괘장을 부순 것은 그가 부여한 특권을 부순 것이고, 예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발 나아가 제천신존 위지덕양을 인정치 않으며 위지가 역시 인정치 않고······.
 제룡천부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와 틀 역시 인정하지 않겠다는 천명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반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황정경.
 매학림은 돌연한 상황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설마!
 괘장을 부숴 버릴 줄이야.
 실려 있는 그의 공력도 공력이지만, 충격을 받은 것은 황정경의 의도 때문이다.
 
 -더는 제룡천부의 질서를 따르지 않겠다!
 
 제룡위지가를 중심으로 네 봉신가가 제룡천부를 형성했다.
 우문, 백리, 철가, 황가.
 백 년 전에는 네 봉신가가 제룡위지가에 맹종에 가까운 충성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백 년이란 세월이 그 충성심을 빛바래지게 만들었다.
 특히 이 대 제룡패존 위지무승.
 무도한 그의 행보가 네 봉신가의 충성심에 회복하기 어려운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그 이후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제룡위지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걸으려는 사대봉신가다.
 그중 일부는 제룡천부를 노리고 있다.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삼대에 걸친 위가의 부주 위 독점.
 
 -우리라고 제룡천부의 부주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위가와 네 봉신가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 매학림이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네 봉신가가 제룡천부라는 틀을 유지하는 것은 명분과 실리 때문이다.
 천하 무림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자 노선을 걸으며, 자신들의 가문을 천하제일가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갖추려 한다.
 절세 무공, 천하를 오시하는 부, 누구나 부러워할 인재들, 문파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뇌들 등.
 한 문파가 ‘천하제일’을 논하는 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갖춰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주군을 배신한 가신가!
 천하 무림인들이 거부감을 표할 정도로 경원시한다.
 그 때문에 배신하지 않았다는, 천하 무림인들이 공감하고 인정할 만한 명분을 확보하려 하는 네 봉신가다.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
 “······.”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운장대도 관승과 다섯 수문 위사들, 그들은 가주 황정경이 괘장을 부숴 버린 것에 기함할 듯 놀랐다.
 “헉!”
 “컥!”
 다들 입을 크게 벌리고 대경실색했다.
 뒷일이, 엄청 걱정되는 그들이다.
 ‘마······맙소사!’
 ‘부, 부쉈어!’
 ‘저럴 줄 알았어. 재앙이 달리 재앙이겠어.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쥐가 날 정도로 머리가 아픈 운장대도 관승.
 그런 이유로 그는 머리를 숙이며 양손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머릴 쥐어뜯을 듯이 양손으로 자신의 머릴 힘주어 움켜잡았다.
 ‘어떻게 해에에에?’
 그사이 정경은 입안에 있는 말고기를 마저 씹었다.
 우물우물.
 이어 매 영감을 힐금거리며 툭 말을 던졌다.
 “그만 돌아가지. 으응, 매 영감.”
 매학림의 약을 올렸다.
 그가 머릴 숙여 손에 쥔 부서진 괘장을 보더니, 사시나무가 바람에 떨리듯 몸을 떨었다.
 부들부들.
 심중에 치솟는 분기를 가누기 힘든 모양이다.
 일순 매 영감이 분노에 찬 눈으로 정경을 쏘아보았다.
 정경은 그가 뭔가 무리를 할 것 같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매 영감. 난 제룡황가의 당대 가주라고. 천부의 총관인 매 영감이 가주인 날 어떻게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
 침묵하는 매 영감.
 필사적인 자제력을 발휘했다.
 정경은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며 정면을 바라봤다. 엄청 남은 말 갈비.
 “후레아들 같은 놈!”
 매 영감이 몹시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응, 난 후레아들이야.”
 정경은 아주 거리낌 없이 매 영감의 말을 인정해 버렸다.
 “너어, 정말!”
 매 영감의 속이 엄청 뒤집히는 모양이다.
 정경은 보란 듯이 오른손에 쥔 소도를 뻗었다.
 다시 고기 한 점을 발라내어 입김을 분 다음 조심조심 입에 넣었다.
 질겅질겅.
 정성을 들여 꼭꼭 씹었다.
 “매 영감.”
 매학림을 보지 않고 장작불을 보며 말했다.
 “난.”
 “······.”
 “제룡천부가 싫어!”
 정경은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굳게 입을 다물고 심신을 추스르는 데 주력하는 매학림.
 “언제까지 제룡천부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어.”
 “······.”
 “봉신가라는 굴레는 내 아버지로 끝이야.”
 최후통첩을 하듯 말을 건넸다.
 슬쩍.
 매학림을 흘겨봤다.
 “내 아들에게 봉신가라는 굴레를 넘겨주고 싶진 않거든.”
 말과 함께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씨이익.
 동요하는 매 영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두 눈동자가 상당히 흔들렸다.
 ‘후후후.’
 이로써 제룡천부 내에 파란이 일 것이다.
 평지풍파!
 과연 누가 움직일까?
 ‘궁금해지는데, 큭큭.’
 내심 키득거렸다.
 한편 매 영감은 침묵하며 정경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예고된 풍파!
 아마 그것을 심중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 * *
 
 다음 날.
 제룡천부에 전날 남천문에서 일어난 일이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쯧쯧!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황가의 소가주가 돌아와 새로 가주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깐.”
 “문제 생기는 거 아냐?”
 “문제야 당연히 생기지. 봉신가를 거부했잖아.”
 “그나저나 앞으로 우리 제룡천부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지 않아?”
 “총관 어른이 황가의 신임 가주 때문에 앓아누우셨다던데.”
 “일 났네, 났어.”
 “옛날에 얼마나 악동이었어. 말썽 부렸던 것을 생각하면, 어휴.”
 “어려서부터 지 꼴리는 대로 다 했잖아. 오죽하면 전대 황가의 가주가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멀리 내보내셨을까?”
 “맞아, 남천문에서 총관 어른께 한 언행만 봐도 잘 알 수 있잖아.”
 “누가 아니래.”
 “우환이야, 우환!”
 다들 황정경에게 학을 뗐다.
 이제까지 조용하던 제룡천부에 평지풍파를 불러온 황정경.
 “결론적으로 총관 어른이 황가의 가주에게 당한 셈이 되는 건가?”
 “별수 있으셔? 황가의 가주가 막나가는데야, 무슨 수가 있겠어?”
 “어제 총관 어른이 힘없이 괘장을 내리시고는 뒤돌아서셔서 맥없이 총관부로 걸어가시는 모습이 보기에 참 짠했다던데.”
 “쯧쯧! 총관 어른도 나이가 드실 만큼 드셨어. 슬슬 은퇴 준비를 하셔야 할 텐데.”
 “자네, 아까부터 자꾸 혀를 차며 침을 튀기는데 말이야.”
 “어라, 지금 내게 시비 거는 거야?”
 “아,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주위에 서 있는 사람 생각을 해 달라 이거야.”
 “어쭈! 이젠 성질까지.”
 “고마해라, 니들 그러다 싸우겠다.”
 “가만히 있다가 니들 왜 이래?”
 “싸울 이유로 싸워, 그게 싸울 이유가 되냐? 응?”
 제룡천부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제룡황가의 신임 가주 황정경을 두고 입방아를 찧어 댔다.
 아주.
 아주 열심히.
 
  * * *
 
 중차대한 사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기 화산 장문인이 될 가능성이 다분한 매화검협 서문양우다.
 게다가 당대 서문세가의 가주 홍염검주 서문화평의 셋째 아들이다.
 그런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제룡천부 정문, 남천문에서 뻗어 버렸다.
 화산과 서문세가가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제룡천부의 수뇌들이 긴급 소집되어 회의에 들어갔다.
 일명 제룡천부 평의회.
 제룡천부의 모든 의사 결정이 내려지는 의사청 안팎이 시끌시끌했다.
 안에서는 칠 인의 수뇌가 옥신각신 중이고.
 밖에서는 그들과 함께 온 호위 무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수군댔다.
 “골 때리지.”
 “두말하면 잔소리지.”
 “킥킥킥!”
 “왜 웃어?”
 “사람하고는.”
 “크크큭! 너, 너무 웃겨서 말이야.”
 함께 모여 있는 세 사람.
 진필성, 한자명, 언기욱.
 그들은 각기 속한 부서는 달랐지만 같은 제룡천부 내에서 오랫동안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안면이 익혀졌다.
 한자명, 언기욱이 웃는 진필성을 쳐다봤다.
 진필성은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한자명, 언기욱을 마주 봤다.
 “끅끅! 천하의 매화검협이 자칫 하다가는 고자가 될지도 모른다니, 웃기잖아.”
 “풋!”
 “크크크큭!”
 한자명과 언기욱이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눈치가 보였다.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천부로 초청한 이가 소부주 위지호용이다.
 그런 서문양우를 황정경이 그리한 것은, 달리 보면 위지호용에게 개망신을 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 * *
 
 한편 의사청 정중앙에 있는 큼직한 원탁에 둘러앉은 일곱 명은 하나같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다들 탁자 남쪽에 앉은 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에게서 답을 구하기라도 하듯.
 위룡궁주 사중현.
 그들 일곱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다.
 또한 일곱 명 중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입김이 가장 강한 이이기도 하다.
 위지가에 속한 그의 휘하에 제룡천부 최강의 전투 집단 위룡척마단이 있기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중현.
 슬며시 앉은 여섯 명을 천천히 둘러봤다.
 “허, 험.”
 헛기침을 하고 점잖게 말하자.
 “왜들 날 보시는 겐가?”
 그의 왼쪽에 앉은 독룡각주 장파풍이 입을 뗐다.
 “어떻게 하실 참이십니까?”
 “무엇을 말하는 겐가?”
 “정녕 몰라 그리 반문하시는 겝니까?”
 “그게 좀.”
 난색의 눈빛을 띠는 사중현.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왜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모를 수 없다.
 그의 우측 두 번째 의자에 앉은 흑풍루주 요추광이 좌중을 쓸어 봤다.
 “화산, 서문세가와 불편한 일이 생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룡궁주 사중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귀라부주 진승이 흑풍루주 요추광의 말을 받았다.
 “문제는 당사자가 다름 아닌 황가의 신임 가주라는 겁니다.”
 흑풍루주 요추광의 얼굴이 대번에 와락 이지러졌다.
 언짢음을 보란 듯이 내보이는 그다.
 그러자 귀라부주 진승의 우측에 앉은 활생원주 소윤걸이 말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참, 황가를 제외한 다른 세 봉신가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으신 겝니까?”
 좌중을 둘러봤다.
 “휴.”
 위룡궁주 사중현이 한숨을 쉬더니.
 “황가의 영역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관여할 수 없다는 통보를 평의회에 들기 전에 받았소이다.”
 “그럼 얘기는 다 끝난 것 아닙니까?”
 위룡궁주 사중현의 우측 첫 번째 의자에 앉아 있는 백인각주 양일기가 말하고 나섰다.
 그에 좌중에 앉은 이들이 백인각주 양일기를 쳐다봤다.
 흠칫하는 양일기.
 “사대봉신가의 영역은 위가를 포함하여 우리 천부의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답답한 것이외다. 천부를 세우신 제룡천존 위지무제 님께서 초대 봉신가의 네 분 가주님과 맺은 맹약이······!”
 위룡궁주 사중현이 답답함을 피력했다.
 일종의 치외법권처럼 네 봉신가의 영역은 철저히 보호(?)받고 있다.
 “하아아.”
 “끄응.”
 “머리가 아파 오이다.”
 좌중에 있는 이들이 한마디씩 말하며 눈살을 찡그렸다.
 답이 없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륵.
 위룡궁주 사중현을 포함, 일곱 수뇌가 방문을 쳐다봤다.
 들어서는 장년인.
 “허허, 다들 뒤가 마렵소이까? 왜 그리 앓는 소리들을 내시는 게요.”
 말하며 원탁으로 걸어왔다.
 “부주.”
 “어서 오십시오.”
 일곱 수뇌가 서둘러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벌떡, 벌떡.
 장년인.
 제천무존 위지천문.
 당대 제룡천부의 부주인 그가 원탁 북쪽으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병약한 몸(?) 탓에 거처인 조양궁에서 칩거하며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였다.
 초대 부주 제룡천존 위지무제, 이 대 부주 제천신존 위지덕양.
 윗대 두 부주가 단명했다.
 암살, 독살 등.
 두 부주의 단명을 두고 이런저런 낭설들이 많았다. 하지만 감히 그것을 입에 올리는 천부의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일어나 선 일곱 수뇌.
 그들은 심중으로 의문을 느꼈다.
 눈에 보이는, 걸어가는 제천무존 위지천문.
 병약하다는 말과 달라도 너무 다른, 건강한 모습이라 일곱 수뇌는 의구심의 눈빛을 띠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잠깐이란 시각이 지난 후.
 위룡궁주 사중현이 앉은 제천무존 위지천문에게 남천문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
 말없이 경청하던 제천무존 위지천문.
 “황가의 가주 문제로 평의회가 열렸다기에 와 보았더니, 휴우우. 가주가 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런 일을!”
 중얼거림에서 곤혹이란 감정이 배어 나왔다.
 일순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입에서 천만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망할!”
 “부, 부주!”
 “그, 그게······.”
 “허······!”
 좌중의 일곱 수뇌의 얼굴이 급변했다.
 황당!
 그 감정을 다들 온몸으로 피력했다.
 부주로서의 위엄이 일순 무색해졌다.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다니.
 일곱 수뇌는 얼빠진 눈으로 제천무존 위지천문을 바라보았다.
 황당하다!
 무안한지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헛기침했다.
 “흐, 흠. 이 일과 관련해 황가의 가주에게 뭐라 할 수가 없으니.”
 “······.”
 입을 다문 일곱 수뇌가 눈을 반짝이며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입만 바라봤다.
 뭔가 해결책을 내놓을 것 같아 다들 기대감에 찼다.
 그런데······.
 “우린 뒤로 빠집시다.”
 “예에에에?”
 “네?”
 “컥!”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일곱 수뇌들.
 엉뚱해도 이리 엉뚱할 수가 없다.
 지금 자신들이 바라보는 이가 제룡천부를 이끄는 부주인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태연한 제천무존 위지천문.
 “이번 일은 황가와 화산, 서문세가가 풀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그의 물음에 일곱 수뇌가 움칫하더니, 서로 돌아봤다.
 눈을 깜빡이며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말을 곱씹는데.
 “그럼 난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말과 함께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앉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모습에.
 “부, 부주!”
 “아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잠깐만!”
 일곱 수뇌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제천무존 위지천문을 붙잡으려 하였다.
 한데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동작이 예상외로 빨랐다.
 일곱 수뇌가 잡을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바람처럼 휭하니 의사청을 나가 버렸다.
 “부주!”
 “잠시만!”
 “아, 아니!”
 일곱 수뇌는 진한 당혹감의 눈빛을 띠었다.
 잡아야 하는데 잡지 못한 제천무존 위지천문.
 두 눈 뜨고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왤까?
 털썩.
 서 있던 위룡궁주 사중현이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제 나도 모르겠소. 다들 알아서들 하시오.”
 천장을 힐긋 보며 말하더니, 일어나 방문으로 걸어갔다.
 “아니, 위룡궁주, 왜 그러시는 게요?”
 “잠시만 서 보시오.”
 “이리 가면 어쩌자는 것이오.”
 좌중에 남은 여섯 수뇌가 위룡궁주 사중현을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돌아보지도, 뭐라 말 한마디 하지도 않고 위룡궁주 사중현이 방문에 이르더니,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돌아보는 여섯 수뇌들. 허탈한 얼굴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다들 그런 감정을 내비쳤다.
 어떻게 하지?
 여섯 수뇌가 그와 같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 * *
 
 제룡천부 소부주 위지호용의 거처 자룡궁 심처.
 성난 외침이 터졌다.
 “그게 말이 되냐고! 어엉!”
 원탁에 앉은 소부주 위지호용이 우를 쳐다보며 화냈다.
 서 있는 자룡궁 총관 장고용.
 “그것이, 말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그는 소부주 위지호용의 눈치를 봤다.
 “뭐라? 말이 된다고?”
 “네, 소부주님. 황가의 신임 가주 황정경이 제룡천존 위지무제 님과의 맹약을 언급하였습니다.”
 “그건······.”
 “그에 평의회의 수뇌들이 이렇다 할 대처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인이 생각하기에도 황가의 가주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위지호용이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곤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양우, 그를 초청한 것은 다름 아닌 나야. 그런데 남천문에서 그와 같은 봉변을 당하였으니, 내 채면이 뭐가 되냐고?”
 언성을 높이며 크게 화내는 위지호용.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설사 털고 일어난다고 해도 남천문에서 그와 같은 일을 당하고 양우가 어떻게 강호 행보를 하겠느냔 말이야!”
 위지호용의 성난 외침.
 친우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걱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바닥에 떨어진 그의 체면과 위상 때문인지 쉬 분간하기 어려웠다.
 “화산과 서문세가에서 이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야. 그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나올지 모르느냔 말이야!”
 소리치는 위지호용.
 진한 언짢음이 물씬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아마 가만 안 있겠죠?”
 총관 장고용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소부주 위지호용이 앉은 의자를 박찼다.
 일어나 서더니, 상체를 숙여 서탁에 있는 붓통을 잡았다.
 “지금 내 염장을 질러! 어어엉! 내 염장을 지르는 거냐고!”
 반쯤 이성 잃은 어조로 벼락 치듯 고함쳤다.
 휘이익.
 총관 장고용에게 날아가는 붓통.
 거리가 가까워 붓통이 이내 총관 장고용에게 이르렀다.
 한데 총관 장고용이 붓통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붓통이 강타했다.
 퍼억.
 붓통이 바닥에 떨어져 떼구루루 굴렀다.
 “아아아아악!”
 진짜인지 아님 연기인지, 총관 장고용이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며 길게 비명을 질렀다.
 조금 좌우로 몸을 비틀거리는 그.
 그사이 위지호용이 원탁을 빠져나왔다.
 곧장 비명을 지르는 총관 장고용에게 이른 소부주 위지호용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인간아!”
 “소, 소부주.”
 “불난 집에 기름을 뿌려도 유분수지. 네가 지금 날 약 올리는 거야, 뭐야?”
 멱살이 잡힌 총관 장고용.
 얼굴에서 손을 떼어, 멱살 잡은 위지호용의 두 손목을 잡았다.
 “소, 소부주.”
 당혹감이 그득 어린 목소리로 연거푸 위지호용을 부르는 총관 장고용.
 그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위지호용.
 제룡천부의 소부주로서 모자람이 많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콰당탕.
 방바닥에 패대기쳐진 총관 장고용. 당혹감에 흠뻑 젖은 얼굴이었다.
 “소, 소부주님! ······소부주님!”
 다급한 목소리로 위지호용을 연거푸 불러 댔다.
 “죽어! 엉! 나가 죽어 버리라고!”
 위지호용이 소리치며 총관 장고용을 마구 짓밟았다.
 패대기쳐지며 가로 누운 장고용은 저항하지 않았다. 위지호용의 짓밟힘을 감내했다.
 퍼퍼퍼퍼퍽!
 거센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아아악! 소, 소부주님!”
 총관 장고용이 멈춰 달라는 마음을 담아 비명을 질렀다.
 “죽어, 죽어, 죽어어어!”
 연거푸 소리치는 소부주 위지호용.
 거의 반쯤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정신에 모종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3장
 
 
 
 
 해가 저문다.
 저 멀리 지평선에 반쯤 걸린 태양.
 강렬한 불길처럼 노을이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였다.
 아득한 저 끝에 노을이라는 거대한 띠가 드리워진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천천히 고갤 들어 보는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암천.”
 중얼거리며 지평선을 봤다.
 “적하.”
 무심히 재차 중얼거렸다.
 “암천적하일까, 아니면 적하암천일까?”
 문득.
 반짝.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피식.
 나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의외네.”
 뜻밖의 소득이었다.
 슥.
 왼손을 옆으로 뻗었다.
 말고기를 먹을 때,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 때문에 다 마시지 못한 술.
 호리병을 들어 마개를 열고는 입에 물었다.
 꿀꺽, 꿀꺽.
 거침없이 술을 들이마셨다.
 “크으으!”
 입에서 호리병을 떼고 오른손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지는······ 노을이라······.”
 제룡천부가 생각났다.
 “백 년이라면 충분해.”
 많이 버텼다.
 겉으로는 제룡위지가를 중심으로 사대봉신가가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반목 중이다.
 언제든지 기회만 된다면 제룡천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사대봉신가다.
 그런 사대봉신가를 제룡위지가가 은연중에 강하게 옥죄며 구속하고 있다.
 땅과 하늘을 불태우는 것 같은 노을을 지그시 바라보며 간간이 호리병을 입에 물었다.
 “제룡천존 위지무제.”
 제룡천부를 세운, 개파 조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지금 바라보는 저무는 해와 같은 당대 제룡천부지만, 제룡천존 위지무제가 제룡천부를 세웠을 당시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위세를 자랑했었다.
 당시 제룡천부는 ‘천하제일문’이었다.
 아홉 산과 다섯 가문을 발아래에 두고, 왕처럼 강호에 군림했었다.
 “그의 출신이 어디였을까?”
 뇌까렸다.
 제룡천존 위지무제.
 그의 사문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위지가에는 전해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제룡천존 위지무제와 함께 제룡천부를 만들었던, 사대봉신가의 초대 가주들.
 그들 역시 알지 못했다.
 제룡천존 위지무제의 사문, 독문무공, 가문의 족보 등.
 일련의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네 봉신가의 초대 가주들을 규합, 세력을 일구고 그 세력으로 당시 마도제일세였던 천년마가를 무너뜨린 입지전적인 일대 거인!”
 솔직히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제룡천존 위지무제를 존경했다.
 맨손으로 제룡천부와 같은 세력을 일군 것은 범인이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꿀꺽, 꿀꺽.
 호리병을 입에 물고 거침없이 술을 마셨다.
 
  * * *
 
 화접궁.
 현 제룡천부의 부주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딸이자 소부주 위지호용의 손위 누나 위지상아의 거처.
 화려하고 우아한 규방.
 큼직한 동경을 앞에 놓고 스물 후반의 여인이 앉아 있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그녀는 침의 차림이었다.
 화사한 옷을 입은, 시녀로 보이는 세 여인이 바삐 규방 안팎을 오갔다.
 등 뒤에 서 있는 시녀에게 머릴 맡긴 위지상아.
 뚫어져라 동경을 바라보며 간간이 머리를 만지는 시녀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그때마다 머리를 만지는 시녀는 공손히 대답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손을 놀렸다.
 한편 두 시녀가 위지상아가 앉은 원탁으로 각종 장신구와 옷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위지상아는 마음에 드는 장신구와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고른 장신구는 원탁 한쪽에 가지런히 놓였고, 옷은 원탁 우측에 있는 옷걸이에 걸렸다.
 잠시 뒤.
 머리를 만지던 시녀가 위지상아의 눈치를 보며 수다 아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소저, 아, 글쎄 매화검협이 황가의 신임 가주에게······. 쫘아아악! 대자로 뻗었다지 뭐예요.”
 그새 가까이 다가온 두 시녀가 수다에 끼어들었다. 그 바람에 머리를 만지던 시녀의 수다가 멈춰졌다.
 “그것도 그거지만요, 평의회에서 그 일을 논의했는데······ 속수무책이라네요.”
 “아주 쌤통이에요. 그 사람 매화검협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천부에 올 때마다 소저께 착 달라붙어 좀 치근덕거렸어요. 이번에 아주 제대로······.”
 시녀들의 수다를 듣는 위지상아.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은은히 반짝였다.
 세 시녀의 수다.
 그것은 간접적인 정보 수집 및 청취였다.
 제룡천부 내에서 도는 소문!
 누가 누구를 어떻게 했느니,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누군가가 뒤로 무엇을 받았고 등등.
 온갖 잡다한 것을 시녀들이 알아와 위지상아에게 말해 주었다.
 “네 봉신가에 대한 것은 없느냐?”
 동경을 보며 위지상아가 물었다.
 그러자 머리를 만지던 시녀가 움칫하더니······.
 “예에, 근래 봉신가들이 조용해요. 무슨 근신을 하는 것처럼요.”
 “그래?”
 “네.”
 “네 봉신가의 소부주들은?”
 “별반······ 소저께 말씀드릴 것이 없어요.”
 “흠, 그래.”
 “네.”
 “그들에 관한 말을 들으면 즉시 내게 와서 말해 줘야 한다.”
 “네에.”
 머리를 만지던 시녀가 대답하며 위지상아의 우측 어깨 너머로 살짝 얼굴을 내보였다.
 동경에 비친 그녀의 얼굴.
 “······.”
 위지상아가 말없이 왼손을 뻗었다.
 그녀는 옥귀걸이 한 쌍을 집어, 머릴 만지는 시녀에게 건넸다.
 잽싸게 받아 든 시녀.
 “감사해요, 소저.”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위지상아는 계속 동경을 바라봤다.
 한편 두 시녀가 위지상아의 머리를 만지는 시녀를 바라보며 부러움의 눈빛을 띠었다.
 위지상아에게는 정보이지만, 시녀들에게는 수다를 떠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가로 지금 본 것처럼 위지상아가 그녀의 장신구나 다른 값비싼 것을 준다.
 그것을 받는 맛에 시녀들이 박씨를 물어다 주는 제비처럼 부지런히 정보(?)를 알아 와 말해 주었다.
 시녀들은 사대봉신가 중 한 가문으로 위지상아가 시집을 갈 것이라 내심 예상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위지가와 사대봉신가의 결속.
 시녀들도 은근 그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녀들의 예상을 위지상아가 은근 부추기기도 했다.
 사대봉신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하아아아아.’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는 위지상아.
 부친 제천무존 위지천문을 생각했다.
 몇 년 전.
 부친이 그녀를 사대봉신가 중 한 가문으로 출가시키려 했다.
 그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부친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제룡천부의 실정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부친이 죽어 가고 있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티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족히 10년은 된 것 같구나. 나를 죽이려는······. 교묘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알아챘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한 후였다. 구명천잠대법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틀림없이 사대봉신가 중 한 곳일 게다. ······네 동생 호용이가 내 뒤를 이어 부주의 위에 오르자면 적어도 두 봉신가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야 한다. ······대대로 백리가의 직계 딸은 우리 위지가와 태중 혼약으로 위지가의 안주인이 되어 왔다. 그러니 상아 네가······.
 
 이미 봉신가 한 가문, 백리가는 확보되어 있다. 네가 혼인함으로써 다른 한 봉신가를 잡아야 한다.
 적어도 두 봉신가!
 남동생 위지호용이 제룡천부의 부주 위를 승계하기 위한 정략혼을 강요받은 위지상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 가는 부친 체천무존 위지천문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당부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몇 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위지상아.
 세 시녀의 수다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슬프고 울적하여 자신의 운명(?)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강렬한 분노를 느낄 뿐이다.
 돌이킬 수 있다면 돌이키고 싶지만 불가능한 현실이니,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거부하면 제룡천부가 갈가리 찢어지고 위지가는 무력해진다.
 네 봉신가가 위지가가 존재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에.
 섬기던 왕이 죽어야 그 신하가 왕 행세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감정이 죽어 가고 마음 역시 뒤따라 죽으며 차가운 여인(?)이 되어 가는 위지상아.
 어느새 자신의 얼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덧씌운 그녀다.
 사후를 걱정하며 감당할 수 없는 불안에 떠는 부친.
 제천무존 위지천문.
 그 어디에서도 일대 패자로서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한 가문을 책임진 가주일 뿐이다.
 그것이 형용할 수 없이 서글픈 위지상아였다.
 그런 그녀와 부친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마음을 모르고 뒤틀린 행보를 걷는 남동생 위지호용.
 매화검협 서문양우.
 그를 일부러 초청하여 누나 위지상아와 엮으려 했다.
 화산, 서문세가.
 두 힘을 배경으로 둘 수 있다.
 그리 여긴 남동생 위지호용의 행태에 한심함을 느껴 최근에는 아예 상대해 주지 않았다.
 남매가 서먹서먹해진 지, 남보다 못해진 지 꽤 오래되었다.
 차가운 꽃!
 빙화 위지상아!
 무심히 동경을 보던 위지상아.
 의도한 것이 아닌데, 무심코 황정경을 생각하게 되었다.
 남천문에서의 일을 들은 까닭에.
 그 순간.
 “풉!”
 그녀도 모르는 사이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세 시녀가 위지상아의 실소에 흠칫, 움칫거리며 돌아봤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위지상아.
 정색하듯 얼굴 표정을 바꿨다.
 무표정하게, 무심히.
 동경을 바라보는 위지상아의 눈동자.
 알아보기 힘든 아주 작은 이채가 일순간 나타났다 사라졌다.
 ‘정······경······.’
 남동생 위지호용, 그녀, 다른 네 봉신가의 아이들.
 모두 어울려, 다 함께 제룡천부가 좁다고 여기저기를 몰려다니며 장난치고 놀았었다.
 우두머리 역할을 한 것은 천하에 다시없을 악동, 황정경이었고.
 나이 열두 살 때, 황정경이 홀연히 천부에서 자취를 감춘 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 황정경이 부친 황철목의 급사로 십 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전에 황가의 새 가주가 되었다.
 제룡황가의 가주 황정경.
 그야말로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
 거리낌 없고, 거침없으며, 한없이 자유롭다!
 그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바대로 세상을 사는 것 같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시건방을 떨고 싶으면 시건방을 떨고.
 ‘무애, 무통.’
 내심 중얼거리는 위지상아.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좋게 말하면 무의 극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나쁘게 말하면 이성이 아닌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짐승에 다름 아니다.
 ‘이번 일을 네가 의도적으로 저질렀든 우발적으로 저질렀든······ 아버님과 호용이, 우리 위지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만큼은 네가 하지 않았으면 해, 정경아!’
 속으로 중얼거리며 동경을 보는 위지상아.
 동경에 비친 그녀의 얼굴, 무표정하고 차갑다.
 냉정한 얼음 꽃, 빙화!
 
  * * *
 
 자정이 한참 지난 야삼경.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한 빛이 있었다.
 부는 밤바람에 좌우로 흔들리는 빛이 닫힌 제룡천부의 정문을 매우 흐릿하게 밝혔다.
 타, 타, 탁.
 불티가 불규칙하게 사방으로 튀는 소리가 났고, 지펴진 모닥불에 비스듬히 늘어뜨려진 몇몇 가느다란 나무 꼬치.
 꼬치의 고깃덩이가 모닥불의 불길에 노릇노릇 잘 익어 가는 중이다.
 모닥불을 마주하고 땅에 앉아 하염없이 불길을 바라보았다.
 향후의 행보를 생각하며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데.
 문득.
 쫑긋.
 나도 모르게 미세하게 귀를 움직이고 말았다.
 밀어 올리는 눈썹. 흘겨보는 좌측.
 누군가가 기척을 죽이고 다가오고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기감에 기가 잡힐 법도 한데, 의아할 정도로 기감이 무색해졌다.
 적어도 나와 동수이거나 나보다 고수!
 즉각 상대의 무위를 점쳤다.
 지금 이 시각에 홀로 있는 날 방문한다?
 살순가?
 적!
 즉각 머릿속에서 그 상념이 작렬했다.
 주의와 경계.
 두 감정이 폭발하듯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의식을 단전에 모아 내기를 운용, 공력을 발하여 무공을 구사할 태세를 갖췄다.
 긴장 탓일까?
 부지불식간에 얼굴을 경직시키고 말았다.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기감이 예사롭지 않다는 감정을 내게 안겨 줬다. 긴장감에 온몸의 근육이 미미하게 굼틀거렸다.
 터벅······터벅.
 나직한 소리.
 갈고 다듬은 고련의 정연함이 느껴졌다.
 한데 소리가 귀에 익다. 누구의 걸음인지 대충 알 것 같다.
 훗.
 속으로 실소하며 흘겨보던 시선을 모닥불로 주었다.
 미동하지 않고 앉은 자세를 유지.
 온몸에 무심함을 두르고, 내기를 일으켜 전신 경맥으로 주천시켰다.
 그사이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고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장년의 연배로 보이는 사내.
 있는 듯 없는 듯.
 기묘하게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에 동화되어 있음을 모를 수 없다.
 평범한 장년인의 외모.
 별다른 특징이 없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외모일 뿐이다.
 “한데서 자면 너.”
 “······.”
 “고뿔 걸린다.”
 날 걱정하는 낭랑한 장년인의 음성.
 “······.”
 답하지 않았다.
 장난?
 조금 이상한데. 생뚱맞다.
 씩.
 장년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터벅, 터벅.
 내가 앉은 모닥불 맞은편으로 걸어왔다.
 이르러 서더니 땅바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털썩.
 난 그를 보지 않았다. 무심한 눈으로 계속 모닥불을 응시했다.
 슥.
 모닥불로 손을 내미는 장년인.
 꼬치 중 가장 잘 익은 것 하나를 집더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제가 먹을 겁니다.”
 툭 말을 던졌다.
 찌이익. 우물우물.
 장년인은 내 말을 무시했다.
 아예 들리지 않는 척하며 꼬치의 고길 이로 물어뜯으며 씹어 갔다.
 뜨거울 텐데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새삼 한서불침이란 말이 생각난다.
 ‘설마?’
 한서불침이란 경지가 어디 그리 쉬운 것인가?
 하지만 눈앞의 상대라면.
 당대 무림 천하제일을 구가하는 제룡천부의 당대 부주, 제천무존 위지천문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쩝쩝 짭짭 우걱우걱 우물우물 냠냠 쩝쩝.
 나, 참.
 정말 시끄럽게도 먹는다.
 제천무존이란 별호는 둘째 치고, 제룡천부의 당대 부주가 저리 경망스럽게 고길 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와 동종의 인간 같은데.
 확 깨네, 크크크.
 당대 천하 무림 제일인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일대 종사.
 근데.
 먹는 모습이 한 마리 돼지 같으니, 이거야 원.
 겉과 속이 다르게.
 겉으로는 침묵하며 무심히 앉아 있었고, 속으로는 제천무존 위지천문에 관해 생각했다.
 물론 그를 주목, 주의하면서다.
 꽤 시간이 흘렀다.
 체천무존 위지천문이 꼬치를 거의 다 먹어 치웠다.
 달랑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입맛을 다셨다.
 “쩝.”
 하나 남은 꼬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식탐과 아쉬움이란 감정이 얼핏 떠올렸다.
 슥.
 남은 꼬치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죽고 싶으십니까?”
 그를 도발했다.
 발끈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발.
 더불어 내기를 일으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츠으으읏.
 멈칫.
 그와 거의 동시에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뻗던 손을 멈췄다.
 그러곤 무지 아쉬운 눈으로 달랑 하나 남은 꼬치를 바라보았다.
 “난.”
 “······.”
 “니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주군이라고.”
 슬쩍 웃는 제천무존 위지천문.
 “세상에 공짜 밥은 없죠.”
 “······.”
 “이리 찾아오신 것을 보면, 다른 이들 몰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빨랑 할 말을 하고 가시죠.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가 사대봉신가가 섬기는 위지가의 당대 가주라는 것은 불변.
 ‘일단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적어도 사 대에 걸친 네 가신가 중 황가의 당대 가주가 나니까.
 그사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야심한 밤에 산책을 나왔을 것 같으냐?”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말하며 언짢은 눈빛을 띠었다.
 “맹약, 아니었습니까?”
 “놀고 있네. 니가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그리 만든 것은 그가 상아를 찝쩍거린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냐?”
 “······.”
 “내 말이 틀렸으면, 어디 틀렸다고 말해 봐라.”
 제천무존 위지천문의 말에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편 내게 물음을 툭 던지고 내가 침묵하는 사이, 남은 꼬치 하나를 냉큼 집어 들었다. 내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우걱, 쩝쩝, 냠냠.
 아주 맛있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허어얼!
 내가 발끈해 눈을 치뜨자.
 “상아.”
 “······.”
 “좋아하냐?”
 꼬치를 먹는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툭 물었다.
 봐하니 내가 동요하기를 바라고 던진 물음인 것 같은데, 받았으니 당연히 답례가 있어야겠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아 누님은 어릴 때 동무.”
 “······.”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닙니다.”
 도전적인 눈으로 제천무존 위지천문을 바라보았다.
 “꼬칫값.”
 “······.”
 “어떻게 셈하실 겁니까?”
 내 물음에.
 “외상!”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즉답했다.
 나, 어이가 없어서.
 “지금 장난하십니까?”
 “빚으로 돌려.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
 히죽 웃는 제천무존 위지천문.
 그새.
 꼬치를 다 먹어 치웠다.
 망할!
 스윽.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일어나며 냉엄한 눈빛을 띠었다.
 “화산!”
 “······.”
 “피는 보지 마라.”
 “······.”
 “천문지약!”
 “······.”
 “골치 아파져.”
 일어난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우로 돌아섰다.
 “상아를 갖고 싶으면, 우리 위지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증명해 보여라. 하면!”
 “······.”
 “내가 승낙할지도 모르지.”
 난 고갤 들어 그를 봤다.
 “저는 말입니다.”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멈칫 서더니 날 돌아봤다.
 “스스로 목에 족쇄를 차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래.”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말하며 빙긋 웃더니.
 “두고 보면 알겠지.”
 묘한 여운을 주는 말과 함께 시선을 바로 했다.
 그러곤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그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황가가 위지가의 개 노릇을 하는 것은 이제 내가 끊어 낼 겁니다!’
 중얼거리며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기분이 더럽다!
 제천무존 위지천문에게 내가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쳐 내기 어렵다.
 오른손을 들어 벅벅 머리를 마구 긁으며 흐트러뜨렸다.
 영······ 아니다!
 
 
 
 #4장
 
 
 
 활생원.
 제룡천부의 의전에 딸린 곳으로, 주로 중상자들을 수용한다.
 현재 활생원에는 환자가 거의 없다.
 덕분에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병사 전체를 사용 중이다.
 마치 독방처럼 덩그러니.
 정경이 조금 과하게 손(?)을 썼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고자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한 사나흘 심하게 고생은 하겠지만,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아마도······ 엄청 부끄럽기 때문에 계속 중상자인 척하는 것이 틀림없다.
 막말로 쪽팔리는 일이 아닌가?
 명색이 매화검협이라 불리는 당대 강호 신진 고수의 선두 중 한 사람이자 후기지수 중 후기지수라 불리며 차기 화산 장문인 후보들 중 하나다.
 그런데 남천문에서 당했다?
 사문 화산과 가문 서문세가의 명망에 누를 끼치고도 남는 일이다.
 그러니 얼굴을 들고 어떻게 제룡천부를 걸을 것이며, 제룡천부의 이들을 보겠는가?
 그 정도로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낯가죽이 두껍진 않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문 화산이나 집인 서문세가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계속 중환자인 척하고 있으니 그런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지난 며칠 동안 제룡천가의 수뇌 몇 명과 소부주 위지호용이 문병을 왔었다.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제룡천부에 왔을 때마다 함께 어울렸던 황가를 제외한 삼대봉신가의 소가주나 그들의 직계, 방계의 몇몇 이들도 문병을 왔다.
 차마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척하며 가까스로 엄청 무안하고 창피한 처지를 간신히 넘겼다.
 아무도 없는 깊은 밤의 병사.
 “······.”
 고즈넉할 정도로 조용했다.
 홀로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며 남천문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중인 매화검협 서문양우.
 빠드드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부서져라 혼신의 힘을 다해 갈고 또 갈았다.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한 것이 아니다.
 ‘절대 이대로는 못 돌아가!’
 맹세하듯, 내심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자존심이 상해도 너무 상했다. 죽어도 이렇게는 끝낼 수는 없다.
 ‘반드시!’
 보복을 하고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진면모를 보여 주며 알려야 한다.
 전날 남천문에서 그와 같은 일을 당한 것은 자신이 방심해서 그렇다고.
 ‘아, 아니지, 그놈이 날 암습해서. 미처 암습당할 줄 모르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우연히 당한 것뿐이야.’
 자신이 당한 굴욕을 합리화하여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꼬오오오옥!’
 마음속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문득.
 ‘응?’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
 매화검협 서문양우는 급히 자는 척했다.
 촛불이 꺼져 어두운 병사. 달랑 그 혼자 누워 있다.
 그런 이유로 덜컥 겁이 나는 매화검협 서문양우다.
 ‘혹시······.’
 모를 일이다. 천부의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 입을 영원히 봉하려 할지도.
 아닌 말로 자신만 없으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생각하는 동안.
 드륵.
 병사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누워 있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응?’
 의문을 느끼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소리 나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고수? 아니면 소리가 나지 않는 특별한 신을 신었나?’
 문득.
 ‘설마 살수?’
 누워 있는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일순 긴장했다.
 걸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신을 주로 신는 것은 살수나 도둑 들이다.
 도둑이 훔쳐 갈 것이 하나도 없는 병사에 숨어들 이유는 없다.
 유력한 것은 살수.
 하면?
 ‘서, 설마······ 나, 날 죽이려고!’
 그렇지 않아도 겁을 내고 있었는데, 그 겁이 한층 증폭되는 매화검협 서문양우였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당장 누워 있는 병사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화산 매화검수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리라.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 기회를 봤다.
 한편 누군가가 누운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우측 머리맡에 이르러 섰다.
 느낌이 싸했다.
 얼굴과 상체에 드리워지는 음영.
 머리맡에 서 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자가 지금 내려다보고 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자신의 생각대로 머리맡에 서 있는 이가 살수라면.
 ‘주, 죽은 목숨!’
 일어나야 하나? 이대로 계속 자는 척해야 하나?
 내심 고민하며 목전에 이른 죽음에 엄청 긴장한 매화검협 서문양우.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마조마.
 매화검협 서문양우는 죽음이 주는 공포(?)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한데 잠깐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
 머리맡에 서 있는 이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어라?’
 어안이 벙벙해진 매화검협 서문양우.
 심중으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서 확인해 볼까?
 아님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을까?
 머리맡에 서 있는 사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까지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잠시간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파르르.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을 살며시 밀어 올렸다. 불상의 반개한 눈처럼 아주 가늘게 눈을 떴다.
 ‘이판사판!’
 벌떡 일어나려는 찰나.
 “허어어억!”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숨넘어가는 헛바람을 삼켰다.
 휘둥그레 뜨인 눈.
 대경이란 감정이 머무는 얼굴.
 온몸으로 엄청 놀랐음을 나타냈다. 그의 눈에 보이는 한 사람.
 
 오른손에 쥔 굵고 긴 몽둥이를 머리 높이 치켜들었다.
 “맞자!”
 말과 함께 몽둥이를 내리쳤다.
 쉬잇.
 낮은 파공성.
 빠아아아악.
 몽둥이가 일어나려는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우측 어깨를 때렸다.
 “크아아아아악!”
 찢어지기 직전인 양 매우 크게 입을 벌린 매화검협 서문양우.
 벌린 입안 깊숙이 자리한 목젖이 마구 떨렸다. 터져 나오는 비명이 온 병사를 일순간 그득 메웠다.
 매우 큰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다.
 일어나려던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가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 이어졌다.
 부와아악.
 공간을 가르는 쾌속한 파공성.
 몽둥이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속도와 파공성이다.
 콰자자작!
 두 다리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파골성이 울리고.
 “크아아아아악!”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계속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로눕혔다.
 말린 새우의 자세.
 조금이라도 느끼는 고통을 덜려는 대응이다.
 매에는 장사 없다!
 그 말처럼 계속된 가격에 결국.
 우두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례하여.
 “으아아아아악!”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비명이 이어졌다.
 처절한 비명?
 그리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맞을 것 같다. 병사 안이 서문양우의 비명으로 그득해졌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몸이 섬뜩하리만치 난폭한 구타에 충실히 반응했다.
 몸이 위아래로 튀고 좌우로 뒤척여졌다.
 으스러지는 다리와 어깨.
 금이 가고 부서지는 흉골과 늑골.
 좌우 옆구리에서 내장을 파고드는 충격.
 일련의 모든 것이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그저 당하기만 하던 매화검협 서문양우.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일순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놀라운 허리 힘을 발휘했다.
 벌떡!
 천만뜻밖이다.
 순수한 허리 힘?
 에이, 반동을 조금 이용한 것 같은데.
 아무튼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몽둥이가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얼굴을 강타했다.
 콰앙.
 공력이 실려 있다면, 일순간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머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몽둥이에는 공력이 실려 있지 않았다. 순수한 체력만 동반한 까닭에 머리가 터지는 것은 면했다.
 하지만 입이······.
 발로 두부를 밟은 것처럼 짓뭉개졌다.
 후두두둑.
 네다섯 개의 이가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사타구니로 연거푸 떨어졌다.
 주룩, 주룩.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핏줄기.
 구타에 자연스럽게 비명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입이 어떻게 되었는지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
 몽둥이에 실린 힘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얼굴을 강타당한 충격에.
 우당탕탕.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뒤로 나가떨어지더니.
 떼굴떼굴.
 바닥을 굴렀다.
 그 바람에 깔린 요가 엉망으로 접혔다.
 쾅!
 벽에 부딪친 후 바닥에 너부러져 버린 매화검협 서문양우.
 정경은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멀었어.”
 감정을 배제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벅저벅.
 매화검협 서문양우에게 이르러 다시금 몽둥이를 휘둘렀다.
 부우웅.
 공기를 가르며 몽둥이가 활시위가 연상되는 호선을 그렸다.
 퍼, 퍼, 퍼, 퍼, 퍽.
 연거푸.
 아주 골고루.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몸을 구타했다.
 홍두깨로 다듬이질하는 것처럼 아주 골고루 가격하며 다져 놨다.
 뼈가 부서지는 쇄골과 파골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병사에 울려 퍼졌다.
 감당하기 버거워도 너무 버거운 고통에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결국 의식을 놓고 말았다.
 혼절!
 그럼에도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속이 풀릴 때까지,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구타했다.
 분풀이다.
 제천무존 위지천문에게 당한 것 같은 꿀꿀한 기분.
 그걸 조금이라도 풀 생각이었다.
 병사에서 크고 작은 소리가 울림에도, 충분히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음에도 그 누구도 달려오는 이가 없었다.
 소리가 병사 안을 벗어나지 않음이 미루어 짐작됐다.
 언제부터인가 구타 소리가 묘한 규칙성을 띠기 시작했다.
 절구를 찧듯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쿵 떡, 쿵 떡.
 띵 가, 띵 가.
 일정한 운율과 박자를 탔다.
 확실한 보복은 상대를 주눅 들게 한다!
 
  * * *
 
 다음 날.
 맑고 화창한 초가을의 기분 좋은 아침.
 제룡천부의 의전에 속한 이들은 여느 날과 똑같은 일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병자라고는 달랑 매화검협 서문양우밖에 없는 활생원으로 한 시비가 들어섰다.
 병사의 병사들을 돌보며 의술을 배우는 반쯤은 의녀인 시비 홍이.
 양손에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아침 끼니, 죽이 있는 쟁반을 들고 조심조심 입구를 지나 병사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이윽고 방문에 이른 홍이가 낭랑하게 말했다.
 “아침이에요.”
 “······.”
 조용.
 홍이가 고갤 갸웃거리며 의구심이 어린 작은 눈빛을 띠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중얼거리더니 목청을 조금 높여 재차 말했다.
 “아침이에요!”
 “······.”
 조용.
 의아한 얼굴의 홍이.
 그녀가 활생원 병사에 오는 시각은 거의 동일하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방문 앞에서 말하면, 들어오라고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대꾸했었다.
 그런데 오늘.
 두 번이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들어오라는 말이 없다.
 재차 고갤 갸웃거린 홍이가 쟁반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을 방문으로 뻗었다.
 손가락 한마디의 간격.
 방문을 조금 열고 안을 훔쳐봤다.
 찰나.
 “꺄아아아아악!”
 자지러지는 홍이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와장창창.
 쟁반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릇이 부서졌다. 그에 죽이 바닥에 엎어졌다.
 
  * * *
 
 의전이 발칵 뒤집혔다.
 수뇌와 의원, 그리고 의전에서 일하는 다수의 남녀가 활생원으로 몰려들었다.
 여느 아침처럼 별반 다를 것 없는 아침밥을 먹던 활생원주 소윤걸.
 그가 채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부리나케 병사로 달려왔다.
 그가 이르렀을 때, 병사 앞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사람 하나 아주 소 잡듯이 잡았다면?”
 “말 말게, 얼마나 엄청나게 잡았는지, 하 의원 말로는 온몸의 뼈가 죄다 부서지고 으스러졌다네.”
 “허······. 매화검협 하면 다음 대 화산 장문인이 될 가능성이 크지 않는가?”
 “말해 뭐 하나, 이 사람아. 소부주님이 초청할 정도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허 참, 초청한 소부주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네그려.”
 “그나저나 명성이 그리 대단한 매화검협 서문양우가 어찌 저리 형편없이 당했을까?”
 “사람하곤.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대항을 하겠나?”
 “하긴, 반격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게야.”
 한쪽에 모여 선 의전의 시비들이 서로 쑥덕댔다.
 “다음 대 화산 장문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응? 그렇대.”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이 맞았대?”
 “에이, 거짓말.”
 “얘는.”
 “하 의원님이 당한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살펴보고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주 제대로······. 일방적으로 구타당했다고 하셨다고.”
 “그런데 누가 그랬을까?”
 “그러게.”
 “분명 우리 천부의 사람일 텐데.”
 “혹시······?”
 “히이익!”
 한 시비가 황급히 오른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동그랗게 뜨인 눈.
 매우 놀란 얼굴.
 그녀를 쳐다보는 다른 시비들.
 “설마 황가의 새 가주님은 아니시겠지?”
 “에이, 설마.”
 “얘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잖아.”
 “맞아, 남천문에서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그리하셨잖아.”
 “그런데 황가의 새 가주님은 왜 그러셨대?”
 “난들 아니.”
 “그분, 설마 미치신 것은 아니시겠지?”
 “쉿!”
 “말조심해, 얘.”
 “조용히들 해! 원주님이 와 계셔!”
 시비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활생원 입구를 쳐다봤다.
 입구를 등지고 선 활생원주 소윤걸.
 “어허어어엄!”
 크게 헛기침하자 운집한 이들이 급히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자 병사로 이어지는 길이 생겼다.
 활생원주 소윤걸이 점잖은 걸음걸이로 병사로 다가갔다.
 저벅저벅.
 
  * * *
 
 병사로 들어서는 활생원주 소윤걸.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묻자.
 병사 바닥에 눕혀진 매화검협 서문양우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한 의원이 일어났다.
 주변에 앉거나 서 있던 네 명의 남녀가 서둘러 일어나거나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의전 소속 의원 하상범이 돌아섰다.
 그러곤 방에 들어온 활생원주 소윤걸에게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원주님?”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해 보······.”
 활생원주 소윤걸이 머리를 드는 의원 하상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보곤 흠칫거리며 섰다.
 “히이익!”
 그도 모르는 사이 기겁할 듯 놀라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해연한 얼굴의 활생원주 소윤걸.
 적잖게 놀란 모습이다.
 이해한다는 심정을 얼굴에 띤 의원 하상범.
 “지금으로서는 저리하는 수밖에 달리······ 일단 뼈가 붙기를 기다리며 꾸준히 탕약을······. 성형술과 정형술에 일가견이 있는······ 그 두 사람에게 맡기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의전에 속한 동료 두 의원을 추천하며 매화검협 서문양우를 돌아봤다.
 크고 작은 다수의 막대를 몸의 각 부위에 댔다.
 칭칭.
 무슨 미라처럼, 깨끗한 하얀 천으로 전신을 둘둘 말듯이 감쌌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눈, 귀, 발가락 정도다.
 “허, 험.”
 말아 쥔 오른손을 들어 입가에 대고 헛기침하는 활생원주 소윤걸.
 의원 하상범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쳐다보는 매화검협 서문양우.
 조금 전 보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칠 뻔했다.
 
 -누가 여기다 시체를 갖다 놨어어! 입관하려면 빨리빨리 입관해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해야 할 거 아냐아아!
 
 활생원주 소윤걸의 눈에 보인 매화검협 서문양우는 딱 시체였다.
 
  * * *
 
 얼마 후.
 제룡천부 총관부.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이 서탁에 앉아 아침 일과를 보고 있었다.
 일순.
 콰아앙.
 부서질 듯 방문이 열리며 매승지가 황급히 뛰어들었다.
 “아······버······님!”
 총관 매학림의 집무실이 떠나가라 고성을 지르는 매승지.
 황황급급한 얼굴이었다.
 “깜짝이야!”
 놀란 총관 매학림.
 급히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뛰어 들어온, 서탁으로 황급히 다가오는 아들 매승지를 성난 눈으로 노려봤다.
 “아버님! 아버님!”
 연거푸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을 부르는 매승지.
 매우 급해 보였다.
 “이놈아! 내가 니 애비라는 걸 천부 사람들이라면 죄다 알아아아!”
 고함치는 매학림.
 그만 좀 불러라!
 그런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언행에 서탁에 이른 매승지가 머쓱해했다.
 “아, 아버님.”
 “그만 좀 부르고 무슨 일인지나 속히 말해 봐.”
 아침.
 같이 총관부로 출근한 아들 매승지다.
 한데 난입하듯 그의 집무실에 뛰어들었다. 필시 다급한 사정이 있는 것이리라.
 서탁에 앉아 눈을 부라리는 총관 매학림.
 멀뚱멀뚱.
 부친 매학림을 보는 매승지.
 “······.”
 말없이 뒤돌아섰다.
 막 발을 떼려는 매승지의 귀에.
 “너, 어딜 가?”
 어리둥절한 부친 매학림의 음성이 들렸다.
 스윽.
 뒤돌아보는 매승지.
 “듣고 싶지 않으신 것 같으셔서 그냥 가려고요.”
 “뭐야?”
 창의노사 매학림의 눈썹이 치솟았다.
 성난 얼굴.
 화난 것이 한눈에 보였다. 하지만 태연자약한 매승지다.
 “저, 그만 가 보겠습니다.”
 뒤돌아보던 시선을 바로 하며 한 발 내디뎠다.
 “네놈이!”
 언성을 높이는 매학림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돌아보는 매승지.
 “말씀드릴까요?”
 “끄으응.”
 매학림이 앓는 소리를 내며 오른손을 들어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가까이 와!
 무언의 손짓에 매승지가 웃었다.
 씨이이익.
 늘 당하기만 하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부친 매학림의 우위에 있다.
 그것이 심중으로 무척 기분 좋은 그다.
 잠깐이란 짧은 시각이 지났다.
 서탁에 앉은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이 가만히 아들 매승지를 바라보았다.
 서탁 너머에 서서 흥분한 목소리로 활생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매승지.
 단정적으로 범인(?)으로 황정경을 지목했다.
 “그놈이 아니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틀림없다!
 매승지는 황정경의 어릴 시절을 거론했다.
 “······지금은 총관인 백리보가 장난이 심하다고 그때······. 발끈한 정경, 그놈이 불을 질러······.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상하진 않았지만, 전각 하나를 홀랑 다 태워 먹지 않았습니까? 그 때 금신천왕 황철목이 백리가에 얼마나 머리 숙여 사과했습니까? 그 점을 생각하면······.”
 심증을 부쩍 강조하는 매승지.
 “······.”
 말없이 듣고만 있는 창의노사 매학림.
 이윽고 매승지의 말이 끝나자.
 “승지야.”
 “예에, 아버님.”
 “이리 가까이.”
 “네?”
 반문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매승지.
 ‘뭔가 이상한데?’
 딱히 꼬집어 ‘이것이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이럴 때는 주의해야 하는데.’
 경험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경계심을 끄집어냈다.
 “가까이 오라니깐.”
 부친 매학림이 채근했다.
 멈칫거리는 매승지.
 “아, 예에.”
 왠지 가까이 가기가 꺼려졌다. 뭔가가 자꾸 머릿속에서 말했다.
 ‘거리를 둬! ······거릴 두라고! 으응.’
 석연치 않았다.
 찝찝한 것이 딱 뭔가 잊은 것이 있는데, 무엇을 잊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위험한 일이 곧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주춤거리며 서탁에 앉은 부친 매학림 가까이 가기를 주저하는 매승지.
 “어허, 이리 가까이 오라니깐. 무얼 하는 게야.”
 부친 매학림이 다소 화난 목소리로 재차 채근했다.
 “이 아비의 말이 안 들리는 게냐?”
 본격적으로 화내려는 부친이라 매승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자꾸 드는 건지.’
 내심 주저라는 감정이 한층 짙어지고 강해짐에도 불구하고 매승지는 부친 매학림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말았다.
 일순.
 휘익.
 매학림의 왼손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매승지의 우측 귀로 뻗었다.
 덥석.
 잡자마자 혼신의 힘을 다해 아들 매승지의 귀를 비틀었다.
 “아아아아아악!”
 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충실히 반응하는 매승지.
 집무실이 떠나가라 크게 비명을 질렀다.
 “네놈 나이가 지금 몇이더냐? 어찌 공사를 명확히 구분 못 하는 게야. 어디서 함부로 이 아비를 불러. 내 누누이 집무실에서 일을 볼 때는 이 아비를 총관 어른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
 “아아아악······ 아, 아버님! 아픕니다, 아프다고요.”
 “니놈은 서기야. 그런데 어딜 함부로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고 총관의 집무실에 뛰어 들어와.”
 “아, 아버님, 아픕니다, 아파요.”
 “서기가 총관을 만나려면 사전에 허락을 구해야 함을 네가 몰라? 정녕 모르냐고?”
 “아, 아버님, 그, 그게, 급해서. 너무 급해서. 아아악. 아버님께 빨리 알려 드리려고 그런 겁니다, 아아악!”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급히 말하는 매승지.
 ‘이럴 줄 알았어. 이상하다 싶었다니깐. 가까이 다가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속으로 엄청 후회했다.
 어쩐지 꺼림칙하더라니.
 “아아아아아악! 아버니이이임!”
 의도적으로 지르는 비명을 보다 높였다.
 아프니 좀 봐주십시오.
 그런 의중을 넌지시 내보였다.
 하지만 부친 매학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잡아 비트는 힘을 더 늘렸다.
 “슬하에 자식을 둘이나 본 놈이, 어찌 그리 공사를 구분하지 못해. 언제까지 이 아비가 네 뒤를 봐줘야 하는 게냐? 응?”
 “아아아아악! 아버님, 정말 아픕니다, 아파요. 제발 귀 조 옴.”
 통사정하는 매승지였다.
 하나 매학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들 매승지의 우측 귀가 떨어질 것처럼 매우 우악스럽게 계속 비틀었다.
 슬하에 자식까지 둔 아들이지만, 아비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머리에 흰 눈이 내려 백발이 되어도 아들은 아들.
 하는 모든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고 늘 부족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자식이란 존재이고 부모의 마음이니.
 결국.
 “자, 잘못하였습니다, 아버님. 아아아악, 아버님.”
 매승지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잘못하였다는 말이 나왔을 때에야 매학림이 아들의 귀에서 손을 뗐다.
 “고이얀 놈.”
 분이 풀리지 않은 양 좀처럼 가시지 않는 노기 띤 어조로 말했다.
 “아흐으윽.”
 매승지는 황급히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며 양손을 들었다.
 양손으로 우측 귀를 마구 문질렀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엄청 아팠다.
 부친 매학림을 응시하는 매승지의 눈길에서 원망이란 감정이 은근슬쩍 배어 나왔다.
 “커허어어어엄.”
 헛기침하며 앉은 자세를 고치는 총관 매학림.
 은근 점잔을 떤다.
 ‘정말!’
 부친 매학림에게 심중으로 불만을 품는 매승지였다.
 ‘아버지만 아니면 그냥 확 받아 버리는 건데.’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그가 들은 것을 부친 매학림에게 알리고픈 마음에 그만 앞뒤 가리지 않고 부친의 집무실에 뛰어든 것인데, 그걸 몰라준다.
 내심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다름 아닌 부친이니.
 
 
 
 #5장
 
 
 
 한참이란 시간이 지났다.
 고갤 숙여 탁자를 보던 총관 매학림이 일순간.
 타아아앙!
 오른 손바닥으로 서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앉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매우 성난 얼굴이었다.
 “이 찢어 죽일 놈이!”
 노성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는 짓이 정도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지 않았는가?
 이미 중상을 입은 이를 한밤중에 찾아가 무작스럽게 구타하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매학림 그가 생각하기에, 용서를 하려고 해도 용서가 안 되는 무도한 짓이라 크게 역정이 났다.
 과한 노기에 황정경이 왜 그랬는지, 그 연유를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매학림이었다.
 한편 안전이 담보된 거리를 두고 부친 매학림을 응시한 매승지.
 눈에 보이는 부친의 모습에 찔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아버님,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어찌하긴 뭘 어찌해에에에!”
 매학림이 아들 매승지를 쳐다보며 버럭 소리쳤다.
 한층 몸을 더 찔끔거리는 매승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경이 그놈은 어찌 되었건 황가의 가줍니다. 아무리 아버님이나 저보다 연하고,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정리가 깊고 두텁다 하나 천부의 공식 서열을 감안하면, 저나 아버님보다 정경이가 아무래도 위가 아닙니까?”
 조심조심 말을 잇는 매승지.
 진한 꺼림이 그의 얼굴과 눈을 뒤덮었다.
 사대봉신가!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로 짓눌러 옴을 심중으로 느끼는 그다.
 이를테면 부주 제천무존 위지천문이 왕인 셈이고, 사대봉신가는 제후이며, 그와 부친 매학림은 왕의 신하라고나 할까?
 문제는 그 제후들이 하나같이 왕권을 넘보고 그 힘과 세력이 왕의 위엄을 능히 누르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압감을 느끼는 매승지.
 한편 일어나 선 매학림이 서탁 좌우를 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은 매승지였다. 하여, 부친을 눈여겨보며 은연중에 긴장의 눈빛을 띠었다.
 그런 매승지의 귀에 부친 매학림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활생원은 황가의 영역이 아니렷다.”
 바르르.
 일순 부지불식간에 매승지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너! 잘 걸렸다!
 그런 무언이 생각나는 부친 매학림의 중얼거림이다.
 그사이 부친 매학림이 우로 돌아서더니 일순 째려봤다.
 슥.
 ‘힉!’
 그 찰나 부친 매학림의 눈길에 경기하듯 놀란 매승지.
 뭔가 아주 불길한 느낌이 확 드는 것에, 무슨 기름을 뒤집어쓴 불길이 일순간에 화아악 솟구치는 것 같은 불길함에.
 꿀꺽.
 매승지가 그도 모르는 사이 몸을 움츠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튀는 황가의 가주 황정경.
 억지로라도 눌러 놔야 한다. 자칫 감당하기 벅찬 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그러는 동안 매학림이 손을 들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매승지.
 궁금증이 깃든 눈길이다. 품속에 쑥 들어간 부친의 손.
 무엇을 꺼내려는 걸까?
 호기심, 기대감, 궁금증 등 몇몇 감정이 매승지의 가슴속에서 삽시간에 뒤엉켰다.
 스으으.
 부친 매학림이 꺼낸 것은 패였다.
 중앙에 금박이 입혀진 ‘총관령’이라 쓰인 세 글자가 양각된 목각 패.
 제룡천부 총관부의 수장인 총관 창의노사 매학림을 상징한다.
 휙.
 매학림은 망설임 없이 꺼내 아들 매승지에게 던졌다.
 휘이익.
 포물선을 그리며 품속으로 날아오는 패를 얼떨결에 받아 쥔 매승지.
 “아, 아버님.”
 당황하여 부침 매학림과 쥔 패를 번갈아 봤다.
 어안이 벙벙한 매승지의 얼굴.
 매학림이 언성을 높였다.
 “당장 집법원으로 가서······ 내 영이라 전하고······ 집법원주 양인명에게 일러. 집법십이사자를 정경 그놈에게 보내라 하여라.”
 “예예?”
 깜짝 놀라 반문하는 매승지.
 “아버님!”
 곤란하다는 속내가 어린 어조로 부친 매학림을 불렀다.
 “아버님, 정경이는 사대봉신가 중 황가의 가줍니다. 집법원이 건드릴 수 있는 지위나 신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이 사대봉신가와 해당 네 가주에 관한 것은 평의회를 거쳐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제룡천부가 개파될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져 온 묵시적인 규약인데, 어찌······?”
 납득할 수 없음을 은근 내보이는 매승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버님.
 그와 같은 무언을 건넸다.
 “이 한심한 놈아!”
 갑자기 매학림이 버럭 고함쳤다.
 화들짝거리는 매승지. 당황이라는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표출하고 말았다.
 그런 매승지의 귓전을 때리는 부친 매학림의 외침.
 “지금이 정경, 그놈을 징치할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임을 몰라?”
 “아, 아버님.”
 “내가 네놈이 말한 것을 몰라 집법원으로 널 보내는 줄 아느냐?”
 “하, 하면······.”
 “이 미욱한 놈아!”
 연거푸 고함치는 부친 매학림을 매승지가 영문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조사!”
 “네?”
 “조사하는 게야. 평의회에 올릴 사안에 관해서!”
 불끈.
 말끝을 강조하는 매학림.
 눈을 연이어 깜빡이는 매승지.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리송하다.
 매승지가 얼떨떨한 얼굴과 눈으로 부친 매승지를 계속 보았다.
 “뭘 하고 우두커니 선 게야. 당장 집법원으로 속히 가지 않고!”
 “아, 예에. 예, 갑니다, 가요.”
 서둘러 대답한 매승지가 뒤돌아섰다.
 문으로 걸어가는 매승지를 본 매학림이 버럭 외쳤다.
 “굼벵이처럼 걷지 말고, 준마처럼 뛰어!”
 “예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주 소리쳐 대답하며 후다닥 뛰기 시작하는 매승지.
 ‘뭐가 뭔지?’
 부친 매학림에 대한 불만이 ‘쪼까’ 생기는 그다.
 곧 방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런 방문을 응시하며 매학림이 중얼거렸다.
 “이놈! 어제 당한 개망신을 이번에는 아주 톡톡히 되갚아 주마! 감히 제룡천부의 살아 있는 귀신이라 불리는 나, 매학림을 그렇게 망신을 줘! 빠드드득!”
 전날을 생각하며 이를 가는 매학림.
 게다가 괘장이 부서져 특권이 그만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여러 가지로 황정경을 아주 단단히 별렀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