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전쟁 1화]
독호 (1)
겨울 동안 눈 속에 파묻혀 긴 잠을 자고 있던 초목들이 기지개를 편 지 벌써 한 달. 숲은 새파랗게 물들었고, 소흥안령 밑의 초원도 푸른색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삘릴리~ 삘릴리~.
어디선가 목동의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한가로이 풀을 뜯던 말들이 일제히 머리를 쳐들고 두리번거렸다.
“야! 내가 일어나면 니들 죽는다. 어서 이쪽으로 와.”
숲 속의 나무 밑에서 앳된 목소리가 울리자 말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기름기가 도는 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갈색의 갈 기를 깃발처럼 날리며 달리는 말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오호홍, 극극극.
대략 10마리 정도의 말들이 숲 변두리에 있는 커다란 삼송나무 밑에 둥글게 모여들어서는 머리를 주억거리며 발로 땅을 파헤쳤다.
마치 주인에게 우리가 왔다며 아양을 떠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니들, 말 안 들을래? 내가 그랬잖아. 좀 있으면 흑곰새끼네 패거리가 온다고.”
또다시 울리는 앳된 목소리. 누가 들으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말들이 제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말들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소년의 곁으로 다가가 발로 땅을 파헤치며 콧김을 불었다.
푸르르.
목소리의 주인공은 겨우 일곱이나 여덟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은 남자의 피부답지 않게 하얗고 무척 깨끗했다.
그러나 얼굴의 절반이 머리카락에 가려서 두툼한 입술과 오뚝한 콧마루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윽, 그윽.
소년의 가까이에 있던 말들이 머리를 길게 빼고는 혀를 내밀어 그의 목과 얼굴을 핥았다. 마치 성난 주인에게 잘못을 비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년이 앞뒤에서 혀를 내밀어 핥아대는 말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룩아, 간지럽다. 이제 그만해. 응?”
우르르르.
말들과 장난을 치던 소년의 머리가 어느 순간 홱 돌아갔다.
땅이 부르르 흔들리고 말들이 달려오는 굉음.
학강현 쪽에서 달려오는 50여 마리의 말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소년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칫, 오늘은 아예 포위하겠다는 말이군.”
소년의 뒤로도 50여 마리의 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쐐기 같은 진형을 형성한 말들이 양쪽에서 질주하며 일으키는 먼지기둥이 목초지를 뿌옇게 뒤덮었다.
소년은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의 말은 겨우 10마리. 전면전을 벌이면 저 압도적인 숫자에 여러 마리의 말들이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주인집이 너무 큰 손해를 본다. 소년의 어금니가 꽉 물려졌다.
“좋아, 흑곰. 오늘은 피하지 않겠다.”
소년이 머리를 들자 얼굴을 가렸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눈이 나타났다.
조금 크면서도 심연의 호수같이 그윽한 눈. 소녀들이 본다면 얼굴을 붉힐 만큼 매력적인 눈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년의 눈빛은 파란 독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말들이 소년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100여 마리의 말들이 주변을 돌자 자욱한 먼지가 일고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흐흐, 독종. 오늘은 왜 도망치지 않았지?”
말 위에는 10여 명의 소년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말을 돌보는 목동들로 8세부터 12세 정도의 나이였다.
그중 소년에게 시비를 건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두 배나 컸다.
검붉은 얼굴에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척 봐도 완력이 대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목. 저 새끼, 말이 죽을 것 같으니까 도망치지 않은 거야. 다이샨의 말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놈이 저 새끼잖아.”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서서 말한 것은 나이는 꽤 들어 보였지만 두목이라 불린 아이보다 덩치가 반도 안 되는 매우 허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쯧, 흑곰의 밑구멍이나 핥아 주는 똥개새끼가 말이 많구나.”
“뭐야? 너 이 새끼, 정말 죽고 싶어!”
소년의 비웃는 말에 몸이 허약해 보이는 소년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무리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밑구멍을 핥아 준다는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똥개보고 똥개라는데 뭐가 잘못됐냐?”
“이, 이 새끼. 너 오늘 죽었어.”
똥개라 불린 아이가 분노로 이를 갈자 소년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어지며 차가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똥개, 그럼 앞으로 나서라. 앉아서 오줌 싸는 계집처럼 주둥이로 나불거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한판 붙잔 말이다.”
“이, 이 새끼가······.”
독종이라는 소년이 앞으로 나서자 똥개의 목이 순간 자라처럼 쑥 들어가며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독종 장길산!
그 이름은 이곳에서 말치기를 하는 목동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학북진은 40호 정도 되는 만주인과 50호 정도의 몽골인, 100호 정도의 한(漢)인, 그리고 80호 정도의 조선인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그중 조선인은 송화강 지류인 학수(鶴水)를 이용해 논을 갈아 벼를 심고, 한(漢)인들은 밭에 옥수수를 키웠다.
하지만 만주인과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말과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이곳 학북의 목초지는 언제나 목동들의 전쟁터였다.
이 목초지는 주인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주인과 몽골인의 목동들은 서로 싸움을 꺼렸다.
자칫하면 아이들 싸움이 민족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 전부터 조선인이 목동이 되고 나서는 몽골인도 만주인도 모두 조선인에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소년을 쫒아내려고 싸움을 건 것은 몽골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의 싸움에서 몽골 아이들은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임전무퇴, 싸우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필사필승,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며 반드시 승리한다!’
장길산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 지독한 독종이었다.
처음에 우습게보고 나섰던 몽골인 말치기 두목 바투가 길산에게 물려 귀 반쪽이 날아갔고, 또한 다리도 부러져 두 달을 고생해야 했다.
그에 격분한 몽골 목동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몰매를 놓았다.
장길산은 한 달 동안은 방에 누워 있어야 할 만큼 그날 죽도록 맞았다.
그리고 장길산은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목동들이 많을 때는 말을 몰아 도망쳤고, 혼자 떨어진 아이들만을 찾아 결투를 벌였다.
그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죽어도 이기고야 말겠다는 투지, 거기다 죽을 결심까지 한 그에게 아이들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 다음부터 몽골 목동들은 장길산의 모습이 보이면 슬슬 피했다.
하지만 장길산은 그대로 끝내지 않았다.
“항복하라. 난 너희들이 항복할 때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
그것이 독종 길산의 외침이었다. 기겁한 몽골 목동들은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그러자 길산은 몽골 목동들을 쫒아 다니며 도전했다. 그것은 괴이한 싸움이었다.
숫자가 많은 몽골 목동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일기토(一騎討)로 달려드는 길산은 죽어라 그들을 쫒아 다녔다.
그 집요함에 몽골 아이들은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명씩 길산과 싸우기로 합의를 봤다.
저 조선인 독종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목동들의 두목이다!
그것이 몽골 목동들의 합의였다. 하지만 독종을 이길 자는 없었다. 결국 최근에야 몽골 목동들은 길산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그런데 이제는 만주인 흑곰이 덤벼들었다. 사실 한 달 전부터 길산은 흑곰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흑곰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역병에 걸려 돌아가신 후, 갈 곳 없는 자신을 받아 들여 목동을 시켜 준 다이샨이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왜? 싸울 자신이 없냐? 똥개 새꺄!”
사나운 투기를 풍기는 길산에게 온몸이 오그라든 똥개 도르친이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본 흑곰이 말에서 내렸다.
“독종, 나와 붙어 보자.”
길산의 무표정한 눈이 흑곰에게 돌아갔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길산이었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두목이 될 수 없지.’
이것 때문에 도르친에게 도발한 길산이었다. 도르친은 머리는 좋지만 싸움은 잼뱅이었다. 도르친은 흑곰의 졸개다.
그에게 도발했으니 흑곰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몽골 목동들과 싸우면서 길산은 한 가지 진리를 알게 되었다.
떼로 덤벼드는 자들은 두목만 쓰러트리면 기세를 꺾어 놓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설사 졸개들이 항복하지 않아도 이후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더구나 흑곰 도이와 싸워 이긴다면 더 이상 초원에서 자기를 건드릴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흑곰, 난 싸움을 즐기지 않아. 하지만 피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와 싸우려면 내기를 해야 한다.”
길산의 말에 도이의 눈이 커졌다.
“내기? 무슨 내기?”
“몽골족의 바투는 나와 싸움에서 내기를 걸었다. 지는 자는 동생이고, 이기는 자는 형. 자, 할 테냐?”
“그, 그런······.”
순간 도이는 말을 더듬었다. 몽골족은 자존심이 강하다.
언제나 칭기즈칸의 핏줄이라고 하는 그들이 조선인 장길산에게, 그것도 4살이나 어린놈에게 동생을 자처했단 말인가?!
“싫으면 그만둬. 그리고 니들, 용사의 가슴이 없으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길산이 한 마디 뇌까리고 몸을 돌리자, 만주족 아이들의 눈에서 파란 분노가 이글거렸다.
감히 대륙을 석권한 누루하치의 후예들인 만주족에게 용사의 자격이 없다니?
그것은 용사를 최고로 존경하는 만주족 아이들에게는 치욕이었다.
“저 새끼, 죽여!”
“두목, 저 새끼 죽이자.”
분노한 만주족 아이들이 일제히 채찍을 꺼내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채찍의 끝에는 무거운 연추가 달려 있어 맞으면 팔다리가 부러진다.
그때였다.
우르르르.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지가 부르르 떨렸다.
“휘익, 휘익.”
몽골 목동들이 부는 날카로운 휘파람에 아이들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대지를 가르며 질풍처럼 달려오는 150여 마리의 말들. 몽골 목동들이었다.
말떼 앞에는 15명의 아이들이 말머리에 몸을 바싹 붙이고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질풍처럼 달려오는 그들의 말이 일으키는 자욱한 먼지가 목초지를 구름처럼 덮었다.
“바투다!”
“사음(死音)이다!”
먼 옛날, 칭기즈칸의 기병들이 환도를 치켜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할 때 불었다는 휘파람 소리. 당시 몽골군의 휘파람 소리를 사음, 즉 죽음의 소리라고 했다.
그것은 휘파람 소리가 울리면 전투가 벌어졌고, 무자비한 몽골군의 환도에 적의 팔다리, 목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칭기즈칸은 없고 무적의 몽골군도 없지만, 휘파람 소리만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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