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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꾼이었다 1권 (1)

2019.01.28 조회 2,777 추천 25


 #프롤로그
 
 
 “지금 최후의 게이트를 닫기 위해 공격대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떠나는 뒷모습 그대로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합니다. 현장에서 김수련 기자입니다.”
 현장에 나온 기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뉴스 스튜디오의 기다란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세 명이 화면에 잡혔다. 카메라는 가운데 앉은 남자를 클로즈업했다.
 “공격대는 과연 최후의 게이트를 막을 수 있을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리스 길드 마스터 최영호 씨와 국제 게이트 관리협회 연구소장 신은진 소장님께 들어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아이리스 길드 마스터 최영호라고 합니다.”
 “네 최영호 씨 안녕하세요. 우선 이번 최후의 게이트 원정에 함께하지 못하신 점에 심심한 위로를 드립니다.”
 앵커의 말에 최영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붉어졌다.
 대한민국 길드 중 1, 2위를 다투는 길드의 마스터면서 공격대에 들어가지도 못했냐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 말이 최영호의 신경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런 최영호의 기색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한 말이었는지 앵커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대중에게 흥미로울 가십거리를 만들어야 높은 시청률을 낼 수 있으므로 노리고 한 발언이 틀림없었다.
 “감사합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최영호 씨는 이번 최후의 게이트 공격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앵커는 최영호의 감사 인사가 끝나자마자 재빠르게 최영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일단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길드에서도 최고의 팀원만을 가리고 가려서 골라 뽑았으므로 가능성은 충분해 보입니다만···.”
 “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예상한 질문이었는지 최영호의 입에서는 즉각적인 대답이 흘러나왔지만, 말꼬리를 슬그머니 흐리면서 관심을 유도하였고 앵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최영호의 말을 받아주었다.
 “이런 중요한 원정 같은 경우는 보통 짐꾼을 2군으로 꾸려 들어가기 마련인데 공격대 대장 드락쉬는 D 등급 최하위 헌터들 만으로 짐꾼을 편성했습니다.”
 앵커는 자신감에 찬 최영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해 주고는 반대편에 앉은 신은진 소장을 바라보며 화제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 논란은 처음부터 있었던 거 같습니다만, 그 덕에 우리나라에서도 짐꾼으로 이승호 씨가 유일하게 공격대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마냥 좋아할 게 아닙니다. 아마도 드락쉬는 확신에 차서 팀을 꾸렸겠지만, 전력이 모자랄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에 도움이 될 인원들을 편성해야 하는데 너무 자만심에 찬 거 같습니다.”
 앵커는 신은진 소장에게 배턴을 돌리려고 했지만, 최영호가 눈치 없이 중간에서 배턴을 가로채며 끼어들었다.
 “글쎄요 최영호 씨. 저는 그 의견에 찬성 못 하겠습니다.”
 자신이 말할 차례에 끼어든 최영호를 바라보는 신은진의 눈빛이 조금 거칠어졌다.
 “아, 신은진 소장님. 무슨 말씀이시죠?”
 “신은진 소장님께서는 이번 공격대 원정이 100% 성공한다고 보시나요?”
 앵커가 질문한 뒤 연이어 끼어드는 최영호를 약간 진정시키고는 다시 신은진 소장을 바라보았다.
 “이번 공격대 목표는 게이트 토벌이 아닌 게이트 차단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토벌과 차단,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앵커의 질문에 신은진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게이트 토벌은 게이트 너머 모든 적을 통솔하는 게이트 마스터를 처리해야 하지만, 게이트 차단은 게이트가 안정화되기 전에 게이트 핵을 파괴하여 빠르게 탈출하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게이트 핵을 빠르게 찾을 수 있는 ‘파인더’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해당 공격대에는 세계 최고의 파인더 무슈쿠슈가 있으므로 별문제 없이 게이트를 차단하고 복귀할 거로 예상합니다.”
 “무사 복귀할 예상 수치를 계산하셨다고 하시던데, 몇 퍼센트 확률인가요?”
 “변수가 많지만, 오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3일 동안 계산해본 결과 84% 확률로 무사 복귀가 가능합니다.”
 “고무적인 답변 감사합니다. 그럼 16%의 확률로 복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예상하신 바 있으십니까?”
 앵커와 신은진 소장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최영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가 섭외했는지 몰라도 초등학교 수업시간도 아닌데 계속해서 끼어드는 최영호의 모습에 앵커는 골이 지끈거렸지만,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네 최영호 씨, 말씀해 주세요.”
 “16%의 확률이 발생하게 되면 곧바로 게이트가 불안정해지므로 즉각적으로 토벌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때 인원들은 A급 헌터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며 저희 아이리스 길드 핵심 헌터들이 모두 다 참석할 예정입니다. 저희 아이리스를 포함해서······.”
 최영호의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앵커가 손을 들어서 말을 끊었다.
 “정보 전달에 감사하지만, 사족이 길어지는 거 같습니다. 짧게 정리 가능합니까?”
 “지금 들어간 공격대와 비슷한 수준을 지닌 헌터 인원 12배만 있으면 토벌 가능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A급 헌터는 2만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2만 4천 명이 있으면 토벌 가능하다는 비현실적인 말이다. 앵커와 신은진 소장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일단, 의견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지금 이승호 씨가 들어간다고 하니 잠시 화면 돌려서 보시죠.”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짐꾼들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게이트로 들어가는 대열의 후미를 비추어주었다.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군장을 등에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한 남자를 클로즈업해주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는 옷으로도 잘 가려지지 않는 다부진 몸이었다. 우락부락한 몸에 맞지 않게 순박해 보이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이승호 씨가 게이트에 입장합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모두 이승호 씨의 무사 귀환을 빌어주시길 바랍니다. 셋, 둘, 하나. 이승호 씨가 지금 막 게이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화면은 다시 뉴스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김수련 기자. 이승호 씨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헌터 경력······.”
 공격대가 모두 입장하자 앵커는 시청자를 잡아두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틀 뒤 공격대의 게이트 차단이 성공할 거라고 말했던 신은진 소장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다만 이승호는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수는 제법 많았다.
 돌아오지 못한 인원은 전부 ‘짐꾼’이었다.
 공격대장 드락쉬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공격대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게이트 핵까지 찾아가는 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핵을 파괴하는 순간 게이트 마스터가 폭주를 시작하며 모든 몬스터를 조종하여 총공격을 시작했고 최대한 짐꾼들을 보호하며 후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에 겁먹은 일부 짐꾼들은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다급히 흩어지던 인원 중 몇몇은 모아 게이트까지 돌파하였지만, 먼저 흩어진 인원들은 미처 게이트 밖으로 넘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수색을 시도하기에는 게이트 붕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실종자 수색은 하지 못하고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드락쉬의 공식 표명과 일부 생존 짐꾼의 증언에 힘입어, 공격대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짐꾼 문제는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사실 몰려오는 몬스터들에게서 도망친 것만 하더라도 대단히 성공적인 후퇴였다.
 분노한 게이트 마스터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인원만 희생하고 안정적으로 빠져나온 드락쉬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와 반대로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공격대에 참가했던 이승호는 몬스터들에게서 도망치다가 죽은 비겁자로 인식될뻔했다. 드락쉬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명령 전달을 제대로 못 한 자신의 잘못이라며 죽은 짐꾼들을 욕하지 말아 달라며 호소했다.
 도망치다 죽은 짐꾼들이 아닌 팀원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자신을 욕하라는 드락쉬의 인기는 나날이 치솟았다.
 최후의 게이트가 닫히고 헌터들은 일자리를 잃었지만, 어차피 게이트가 하나둘 닫혀가는 동안 다른 직업을 찾은 인원이 대다수였고 기존에 벌어 놓은 돈으로 적당히 놀면서 지내기에 문제가 없었다.
 강력한 능력을 지닌 헌터들은 대부분이 경호 직으로 이직했고 사회에 서서히 녹아들어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년 뒤,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 돌아오다
 
 
 “형, 여기처럼 게이트 게이지가 0인 곳은 뭐였지?”
 동생은 손에 든 게이트 게이지 탐사기에 0이라고 표기가 되자 기억나지 않아 형에게 물어보았다.
 “길드장 님이라고 불러.”
 “형이랑 나랑 꼴랑 2명인 길드에서 길드장 부길드장 하고 싶어? 소꿉장난도 아니고.”
 ‘딱!’
 감히 형 말에 기어오르려 하는 동생의 정수리에 꿀밤을 한 대 먹여주었다.
 “지금은 2명이지만 언젠가는 100명 넘는 중형 길드까지 성장할 거라고. 지금부터 적응해야지.”
 “아 왜 때려. 퍽이나 성장하겠다. 고작 C급 주제에.”
 동생은 난데없이 맞은 꿀밤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너도 C급이야. 입 닥치고 빨리 확인이나 하자.”
 “여기처럼 게이트 게이지 0인 곳은 뭐냐니까?”
 게이트 게이지를 흔들면서 형에게 보여주자 형은 한심하다는 듯 동생을 바라보았다.
 “뭐긴 뭐야, 몬스터가 없는 던전이지. 기억 좀 해. 그러니깐 우리가 채광 용품만 챙겨서 들어온 거잖아.”
 “이것 봐, 몬스터를 사냥해서 빨리빨리 강해져야지 무슨 이런 게이트만 따오는 거야.”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형에게 동생은 하루빨리 몬스터들을 때려잡아 강해지고 싶었는데 이런 던전만 따오는 형이 원망스러워서 투덜거렸다.
 “야, 이런 것도 못 따오는 길드 흘러넘쳐. 잡소리 말고 빨리 따라와.”
 투덜대는 동생을 위로하면서 앞장서서 게이트를 넘어갔다.
 게이트를 지날 때 동반되는 멀미와 허공을 걷는듯한 부유감 속에서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발끝에 느껴지는 딱딱한 바닥의 감촉에 눈을 다시 떴다.
 형은 눈을 뜨자마자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빛에 의존해 주변을 살피다가 어두운 동굴 안에 서 있는 인영의 모습에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으어어억!”
 “드디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기어서 게이트를 다시 넘어가려고 하는 찰나 우두커니 서 있던 인영이 어느샌가 형의 앞을 막아섰다.
 이어서 동생도 게이트를 넘어오자 자신의 형 앞에 허름한 망토를 두른 남자가 보였다.
 형이 자신이 들은 한국어에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눈앞에 보인 단편적인 상황만으로 판단 내린 동생이 야구 배트 휘두르듯 곡괭이를 휘둘렀다.
 “죽어!”
 자신과 형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어야 할 이 게이트 안에 있는 생물체는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곧바로 곡괭이를 등을 보인 남자를 향해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곡괭이가 후두부에 닿기 직전,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형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크게 헛스윙한 동생은 형을 해치지 않고 일으켜 세워주는 남자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수상한 남자의 행색을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산발한 머리와 덥수룩하게 자른 수염으로 인해서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해진 옷들 사이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근육은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했다.
 넘어진 형의 어깨를 잡고 단숨에 일으킨 악력만 봐도 자신과 힘에서 차이가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다행히도 적대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형은 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정신을 차렸고 스스로 뺨을 짝짝 소리 나게 때리며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다리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섰다.
 “아휴, 놀랬잖아요. 여기 게이트는 저희 엔솔 길드에서 할당받은 게이트인데, 잘못 들어오신 거 같습니다. 어디 길드 소속이시죠?”
 “저기 게이트 너머는 한국인가?”
 형의 질문에 수상한 남자는 역으로 질문을 하였다.
 “당연히 한국이죠. 그쪽도 저기로 들어왔을 거잖아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해 주었지만,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어서 나가주세요. 채굴할 게 있는지 모르겠네, 혹시 먼저 다 캔 건 아니죠? 그럼 불법입니다.”
 남자의 침묵에 어색함을 떨치며 나가 달라고 채근하다가 혹시나 몰래 들어와서 채굴한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보았지만 남자는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혹시 나가면 게이트 입구는 어디에 있지?”
 남자의 질문에 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자신이 들어온 곳도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당연히 분당천 옆이죠. 기억상실이라도 걸렸어요?”
 형의 말에 남자는 대답 없이 팔짱 끼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미소 지었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굉장히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마도 광물은 없을 거다. 대신 선물을 주지 이길 따라 왼쪽으로 계속 꺾다 보면 선물이 있을 거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광물이 없을 거라는 말과 동시에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그 말에 형은 남자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워낙에 신속하게 나가는 바람에 붙잡지도 못했다.
 형은 어차피 채광 장비도 없고 딱히 짐이 없어 보였기에 게이트를 따라 나가지는 않았고 넘어질 때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었다.
 “왜 넘어져 있었어. 저 사람 죽일뻔했잖아.”
 옆으로 다가온 동생이 아찔했던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인마, 실수로 들어온 사람일 수도 있는데 다짜고짜 휘두르냐 미친놈아!”
 “··· 아니 형이 넘어져 있으니깐, 공격이라도 받았나 싶어서.”
 형의 질책에 약간 의기소침하게 대답하는 동생은 조금 억울했다.
 자기 딴에는 형이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해서 달려들었는데, 형이 몰라줌에 서운하기까지 했다.
 “내가 공격이라도 받아서 졌는데, 네가 이긴다는 보장이 있냐? 도망쳐야지.”
 그 말뜻을 이해했지만 쑥스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동생을 더욱더 채근하였다.
 “내가 도망치면 형 뒤지게 내버려 두라고? 개소리하지 말고 앞장서 걸어가기나 해.”
 형의 마음을 이해한 동생이 멋쩍게 얼굴을 붉히며 툴툴대자, 그런 동생을 바라보다가 동생의 머리를 헝클고는 웃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머리 망가진다며 투덜대며 따라오는 동생을 이끌고 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자가 알려준 왼쪽 길을 쭉 따라서 걸어가 보았다.
 동굴은 어두웠지만, 곳곳에 횃불이 걸려있었고 공기가 잘 통하는지 앞에서 바람이 계속 불어왔는데 어느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이질적인 냄새가 풍겨왔다.
 “형, 이거···.”
 “그래, 피 냄새야. 일단 전부 다 내려놓고 무기로 쓸만한 곡괭이만 들어. 천천히 가보자.”
 동생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형은 게이트 게이지를 굳게 믿었다.
 벽에 걸려있는 횃불을 손에 쥐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점차 짙어져 가는 피 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형은 뒤돌아 갈 생각은 전혀 없는 거 같았다.
 얼마나 더 가야지 이 냄새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는 건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왼쪽으로 한 번 더 꺾자 넓은 공동이 보였다.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몬스터들의 찢어 발겨져 있었는데, 피는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고 시체는 몇 겹이나 쌓여있었다.
 “혀···. 형.”
 “다 죽은 거 맞아. 미동하는 녀석조차 없어.”
 “그게 아니라, 우웩.”
 비릿한 혈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듯 동생은 결국 토를 해버렸다.
 “사내놈이 비위가 이렇게 약해, 우웩.”
 콧속을 진동하는 혈향과 동생이 게워낸 곳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섞여 형제는 연신 속을 비우고 있었다.
 속에 있는 모든 음식을 게워내던 형제는 더는 나올 것도 없는 상태에서, 위액까지 게워내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쓰린 목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닦았다.
 형과 동생은 이내 고개를 들어 눈물, 콧물 범벅이던 서로의 보고는 동시에 폭소를 터트리고 한참을 웃다가 형은 진정하고 들어온 입구로 동생을 이끌고 발걸음을 돌렸다.
 “야, 나가서 장비 좀 챙겨오자.”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내가 갔다 올 테니깐 그럼 게이트 입구에서 지키고 있어. 어차피 몬스터 해체하려면 마스크도 좀 사 와야겠다.”
 신이 나서 게이트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형의 머릿속에 문득 몬스터들의 사망 흔적과 남자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저 몬스터들 그 남자가 죽였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형, 그런데 왜 게이트 게이지가 0이었지?”
 게이트가 생성되면 발견자는 협회에 신고하고, 협회에서는 게이트 게이지로 측정한 뒤에 적합성을 따져서 할당받는 길드에 넘겨주고 해당 길드에서 재확인하고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어떻게 된 건지 게이트 게이지가 0이었던 이곳에 몬스터들이 있었다는 점에 의구심이 들었다.
 “협회에서 측정하기도 전에 그냥 들어와서 다 잡은 건가 보지.”
 “그런가?”
 형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자 동생도 그런가 싶었다.
 “그렇겠지. 그런데 부산물도 안 챙긴 거 보니 돈 많은 헌턴가 봐.”
 “언뜻 보니깐 몬스터들한테 마석은 없는 거 같던데···. 형, 그래도 저것들 다 팔면 돈 좀 되겠지?”
 “당연하지.”
 히죽히죽 웃으면서 게이트 입구까지 도착한 형은 게이트를 빠져 나와 도축할 도구를 챙기기 위해서 집으로 부리나케 차를 몰고 돌아갔다.
 형은 몬스터들의 사체를 해체하여 벌어들일 돈에 눈이 멀어서 이미 자신보다 먼저 나온 남자는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가 무기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 * *
 
 지하철역 계단에 앉아 있으면 행인 중 열 명 중 한 명은 돈을 쥐여 줄만한 몰골의 남자는 게이트에서 나온 뒤 택시를 타려고 도로에서 연신 손을 흔들어 대었다.
 하지만 빈 차라고 표기되어있는 택시들은 속도를 줄이다가도 그의 몰골을 보고는 지나치기 일쑤였다.
 한참을 자리에 서서 기다렸지만 멈추는 택시는 없었다.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결국 지나치려는 택시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택시기사가 거지 몰골을 한 남자를 주시하고 있던 터에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다행히 남자를 치지는 않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돌았어?”
 기세 좋게 차에서 내리면서 욕을 한바탕 내뱉었지만, 남자의 허름한 옷 아래 우락부락한 근육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흠칫하면서 빠르게 뒤돌아섰다.
 “내가 급하지만 않아도 어! 눈 똑바로 뜨고 다녀!”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봐준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차에 빠르게 올라탔지만, 이미 남자는 조수석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기사는 빠르게 문을 잠갔지만, 남자는 손잡이를 연신 당겼다.
 “문 열어요.”
 “아···. 요, 욕 한 건 미안합니다.”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여 사과했지만, 남자는 손잡이를 놓을 기색이 없었다.
 “가진 돈은 없지만 마석은 좀 있습니다.”
 “헌터이십니까?”
 택시기사가 마석이라는 말에 살짝 창문을 내렸다.
 “마석을 드릴 테니 관악구청까지 부탁드립니다.”
 “아휴, 최하급 마석이라도 부산까지도 가능하죠. 총알처럼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남자는 택시기사의 말에 중급 마석을 꺼내려다가, 슬그머니 품에 다시 넣어두고 최하급 마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마석을 보자마자 택시기사는 빠르게 문을 열어주었고 남자가 타자마자 신나게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게이트 너머에 있다 보니 금전 감각이 둔해져서 택시비를 얼마나 낼지 몰랐는데, 기사가 알아서 최하급 이야기를 꺼내주어 다행이었다.
 게이트 너머에 있는 동안 마석 대부분을 먹어치웠지만, 중급 이하는 자신이 먹어치워도 효과가 미미했기에 먹지 않고 먹이기 위해 챙겨둔 게 조금 있어서 다행이었다.
 택시기사는 마석을 보자 곡예처럼 운전하여, 30분 만에 관악구청 근처까지 왔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신호에 걸린 참에 남자는 내렸다. 기사의 손에 최하급 마석을 쥐여주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헌터님 몸 보중하세요.”
 헌터로 활동한 적은 없지만 애써 부정하지 않으며 가볍게 인사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기억을 더듬어서 집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예전과 너무나도 바뀌어버린 길거리는 낯설기만 했다.
 차가운 11월 도로 바닥을 맨발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벅저벅 걸어 다니며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었다. 주택가로 들어가서 걷다가 어느 집 앞에 섰다.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겠지’와 같은 기약 없는 다짐으로 속앓이하면서 버텨온 보람을 이제야 느끼는 듯했다.
 집 앞에 놓인 화분 아래에 손을 넣어보니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차가운 열쇠 뭉치가 있었다.
 그 감촉에 눈물이 핑 돌 거 같았지만, 눈에 힘을 주어 억지로 참아내고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린 다음 대문을 밀었다.
 달칵,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군데군데 녹슨 경첩이 녹 부서지는 소리를 동반하고는 대문이 열렸다.
 남자는 문을 연 채로 잠시 심호흡하더니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 대문을 넘었다.
 대문을 넘어서 1층 현관으로 다가가자 집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보 왔어?”
 현관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기어코 참았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불투명한 현관문 너머 거실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한 한 인영이 서서히 다가왔다.
 “민주 아빠 뭐 해요. 이 양반이 문까지 열어 줘야지 들어오려나.”
 문은 열고 나온 여성은 할머니라 불릴 만한 60대 초로의 여인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나온 여성은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굳었다.
 남자는 오랜 시간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며 입안에 맴도는 말을 가까스로 내뱉었다.
 “어··· 어머니.”
 
 * * *
 
 “아······. 아이고, 내 새끼 맞네! 왔어! 왔어! 어딜 갔다가 이제야 왔어!”
 신발도 채 신지 못하시고 맨발로 달려 나와서 아들을 부둥켜안으며, 연신 등을 두들기는 어머니의 손에 가슴 한편이 따듯해지면서 아려왔다.
 “어디 보자 내 새끼,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내가 죽은 게 아니지? 아니야, 죽어서라도 봤으니깐 됐다 됐어.”
 주름진 두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붙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겨 바라보는 어머니의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다 대고 연신 얼굴을 만져보며 확인을 하는 어머니를 보니 가슴이 더욱 찢어지는 듯했다.
 “어머니, 제가 돌아온 게 맞아요. 죄송해요.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남자는 어머니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모자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서로를 보듬었다.
 “멀쩡히 살아왔으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죽지 않고 돌아올 줄 알았어, 정말 돌아올 줄 알았어. 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추우실 텐데 안으로 들어가요.”
 맨발로 서 있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워 남자는 거적때기와 다름없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는 어머니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몰골이 이게 뭐야, 기껏 살아 돌아왔더니 얼어 죽겠구나. 어서 들어가자.”
 그제야 어머니는 남자의 몰골을 확인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맨발로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알아채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와서 바닥을 만지더니 가장 따뜻한 방바닥에 아들을 앉혀놓고도 연신 얼굴과 몸을 더듬으며 멀쩡하게 돌아온 건지 연신 확인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남자는 죄스러운 마음이 더해졌다.
 “다친 데는 없지? 추운데 거적때기 하나 걸치고, 얼마나 추웠니. 잠시만 기다려보려무나.”
 “어머니, 저 안 추워요. 그것보다 제가 오랫동안 씻지를 못해서 조금 씻을게요.”
 그 말에 어머니는 무릎을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따뜻한 물 틀어줄게, 잠시만 앉아 있어. 밥은? 배고프지? 엄마가 김치찌개 해줄까? 너 김치찌개 좋아했잖아.”
 “네······.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정말 먹고 싶었어요.”
 “그래, 앉아 있거라. 다행히 밥은 있네. 김치찌개 금방 만들어 줄 테니 씻고 와. 한 상 떡 하니 차려주마.”
 남자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늙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어머니가 김치찌개를 해주시는 동안 화장실로 들어가서 오랜 기간 씻지 못한 몸을 정갈하게 씻기 시작했다.
 몇 개월 동안 씻지 못한 몸은 탕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때가 술술 밀려 나왔고 머리는 샴푸를 몇 번이나 짜내어서 감아야 거품이 제대로 일 정도로 기름기 범벅이었다.
 “아들, 문 앞에 옷 놔뒀어.”
 그 사이 어머니가 입을 옷들을 화장실 문 앞에 두고 가셨다.
 간단한 샤워를 하려고 했지만, 워낙 오래 씻지 못한 몸은 샤워만 삼십 분이 걸렸다.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못했지만, 말쑥하게 면도하자 20년 전 게이트 너머로 떠났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얼굴이 나타났다.
 사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특이하게도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마석을 워낙 많이 먹어 그런 건가 싶었지만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었다.
 깔끔하게 샤워를 끝마치고 나와 문 앞에 놓여있는 옷들을 주워 입었다. 반듯하게 정리한 수염과는 다르게 미친놈처럼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수건을 두른 채로 부엌으로 향했다.
 “어서 앉아.”
 수북하게 쌓아 올린 밥공기에서 그릇에 미처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어머니의 애정이 느껴졌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찌개를 향해 숟가락을 내밀려고 했으나 다시 눈물이 터져버렸다.
 게이트 너머에서 혼자 버티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이 입안에 들어가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밥 식겠다. 아들 어서 먹어. 찌개가 정말 맛있을 거야.”
 어머니도 눈시울을 붉힌 채 아들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눈물과 찌개를 같이 입에 넣고 이 맛을 잊지 않겠다는 듯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삼키고는 고개를 들어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정말 맛있어요.”
 “그래, 그만 울고 이것도 먹어봐.”
 먹이를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어미 새처럼 어머니는 손수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서 아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셨다. 그가 반찬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다 보니 현관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은 왜 활짝 열어둔 거야? 여보, 어디 갔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머니의 얼굴이 달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나 집에 있어요. 어서 들어와 봐요. 누가 왔어요.”
 “우리 손녀들 왔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입에 있던 밥을 단번에 삼키고 거실로 나갔다.
 “응? 신발이 없는데? 누가 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민주와 손녀의 신발을 찾던 아버지는 부엌에서 나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아버지, 저 돌아왔습니다.”
 “아따 시방 내 아들 맞는겨? 워메 이게 뭐시 당가. 꿈 아닌겨?”
 아버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30년 전에 고쳤다고 생각했던 사투리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한쪽 신발은 벗고 다른 쪽 신발은 신은 채로 거실로 뛰어들어 아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아들의 얼굴을 찰흙처럼 주물럭대던 아버지는 목이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워메, 으째스까. 마누라 시방 요게 꿈은 아니지라.”
 “우리 아들 맞아요. 승호가 돌아온 거예요.”
 아직 승호의 얼굴을 주무르고 있던 아버지는 집안 가득한 김치찌개 냄새를 맡더니 그가 밥을 먹다 말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부엌으로 승호를 이끌고 가서 자리에 앉혔다.
 “아들 잘 돌아왔어, 어서 밥 먹어. 밥 먹고 이야기하자.”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추가로 한 공기를 더 먹으면서 어머니가 손수 담근 총각김치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밥공기가 비자마자 밥공기를 더 채워주려는 어머니를 만류하자 노릇노릇 구워주신 김치전도 입에 넣어주셨다. 혹여나 목이 막힐까 놓아주신 수정과도 한 사발 들이켜고 나니 배가 불러왔다.
 “어머니 여기까지 먹을게요. 더는 배불러서 안 넘어가네요.”
 “그럼 사과 깎아줄게, 홍시도 있는데 먹을래?”
 “어머니, 사과만 주세요.”
 “그래, 거실로 가자.”
 거실 소파를 두고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앉았다.
 아버지는 한쪽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승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사과를 깎다가 손을 베일뻔했다.
 “어머니, 주세요. 제가 깎을게요.”
 “아니다 아냐, 엄마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승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깎느라 사과는 살이 뭉텅뭉텅 잘려나갔다.
 “어떻게 살았니?”
 어머니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어주며 물어보았다.
 “어머니 제가 멋진 거 보여드릴게요. 사과랑 칼 잠시만 줘보세요.”
 어떻게 살았냐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 사과랑 칼을 줘보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아들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쥐여주면서도 한번 손을 감싸 쥐고는 아들의 온기를 느껴보았다.
 그런 어머니를 포근하게 한번 바라보자 손을 놔주셨다. 그는 과도를 오른손에 사과를 왼손에 쥐었다.
 “자, 잘 보세요.”
 승호가 사과를 위로 던지자 사과는 어느새 붉은 옷을 벗어 던지고 하얀 속살을 수줍게 드러내었다.
 “······ 참 사과를 이쁘게 깎는구나.”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알 수가 없기에 어색하게 칭찬을 해주시는 어머니를 보고 씩 웃어주었다.
 “하하, 저 게이트 너머에서 몬스터들 몇 마리 때려잡으면서 지냈어요. 약한 녀석들이 대부분이라서 이렇게 무사히 넘어온 거고요.”
 승호 손에 죽어간 몬스터들이 들었다면 뼛조각도 벌떡 일어날 만한 이야기였다. 20년 동안 승호의 손에 죽어간 몬스터들은 수십만 마리를 우습게 넘어갔다.
 물론 처음에는 숨어서 지냈지만, 돌아갈 방법을 아무리 찾아다니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이 점차 강해졌고 게이트 너머 세상은 승호라는 재앙을 겪었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서 게이트 너머의 땅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게이트의 비밀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접근한 상태였다.
 “몬스터를 잡았다고? 승호야 너 짐꾼이지 않았어? 헌터 자격증을 땄어도 짐꾼만 하기로 했잖니?”
 “저 혼자 게이트 너머에 남겨졌는데 헌터고 짐꾼이고 다 무슨 상관이에요. 헌터가 없으니 제가 잡아서 살았어요.”
 “게이트 너머는 어떤 곳이니, 자세히 좀 들어보자.”
 어머니가 승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물어보자 승호는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승호는 1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다녔는지 떠들고 다니며 그가 사는 세계에 돌아간다면 모두가 우러러보도록 자랑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는, 돌아온다면 자신이 얻은 힘들을 적당히 뽐낼 생각이었다.
 5년 전부터는 돌아간다면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면서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영웅담처럼 뽐내기나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오기 얼마 전부터는 얻은 힘이 없었던 일이 되어도 좋으니까 제발 돌아갈 수만 있기를 소원했다.
 “그냥 여러 종류의 몬스터들이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살아가는데, 자기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딱히 공격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여기저기 숨어서 다녔어요.”
 몬스터들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 공간은 없었다.
 한쪽 세력이 커지면 다른 한쪽을 공격하였고 다른 한쪽이 약해지면 상대를 공격해서 잡아먹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주변 몬스터들을 죽여 자신의 영역이 커진다면 사실 그 어떤 몬스터들의 영역보다 승호의 영역이 더 컸을 것이다.
 그가 게이트에 머문 지 10년이 지날 무렵 승호를 피해서 몬스터들이 숨어다니기 바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부모님이 알 턱이 없으니 부모님의 마음을 풀어드리고자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이 아비는 네가 안 죽을 줄 알았어. 내가 협회 놈들이 사망 확인증에 사인하라고 하는 걸 기필코 살아있을 거라며 거부했다. 아직 실종 신고는 돼 있으니 내일 가서 실종 신고 해제하자.”
 “그런데 아버지, 우리 공격대가 성공한 거 맞죠? 최후의 게이트는 닫혔지 않아요?”
 승호의 말에 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말도 마라, 10년 전에 게이트가 또 열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네요.”
 승호가 넘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게이트가 다시 열리면서 그가 갇혀있던 게이트 너머와 연결되었기 때문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뭐가 다행이야, 김 서방도 그거 때문에 죽었는데!”
 하지만 승호의 말에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김 서방? 고개를 갸웃하면서 어머니를 바라보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행여나 민주나 애들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되니깐 말해주는 거야, 네가 게이트로 떠났을 때 이미 민주가 임신 중이었어.”
 아버지는 어머니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3년 전에 차를 몰고 올림픽 대로를 지나고 있는데 눈앞에 게이트가 열렸어. 김 서방은 그대로 게이트 너머로 돌진해버렸지. 그래서 졸지에 민주가 과부가 돼버렸으니깐, 행여나 민주나 애들 앞에서 다행이라는 말하지 말아라.”
 “네, 아버지···.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동생 민주가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게이트 발생으로 인한 사고사라니.
 “운이 없던 게지, 하필이면 올림픽 대로에서 달리는 차량 바로 앞에 게이트가 나타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 다행히 몬스터에 먹힌 게 아니라서 장례는 잘 치렀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민주는 어떻게 지내요?”
 남편을 잃고 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자 어머니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셨다.
 “마트 계산대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지. 김 서방 보상금 나온 거로 애들 대학 보내기 빠듯할 거 같다고 한 푼 두 푼 버느라 요즘 집에도 자주 안 오는구나!”
 “민주 애들은 그럼···.”
 “딸만 둘이야, 다행히 민주 안 닮고 김 서방 닮아서 둘 다 이뻐.”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김 서방이 어지간히 인물이 뛰어났나 보다.
 어머니는 민주 이야기를 할 때는 가슴이 아파 보이셨는데 손녀들 이야기에 신나신 듯했다.
 “딸년보다 손녀들이 더 자주 찾아온다. 네 아버지 입고 있는 저 바람막이도 손녀 둘이 용돈 모아서 생일 선물이라고 사온 건데, 동네 돌아다니면서 자랑을 석 달 동안 하셨어. 빨래하고 채 다 마르지도 않은 걸 입고 나가서 감기 걸려 오기도 하고.”
 “무···. 무슨 소리를, 내가 옷이 없어서 그렇지!”
 “그 바람막이보다 비싼 옷 장롱에 10벌은 더 있는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실까?”
 부모님 두 분이 아웅다웅하시는 모습을 보니 입가에 자동으로 미소가 그려졌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두 분 옷 사드릴게요. 제가 사드리는 것도 오래오래 입고 다니세요.”
 승호의 말에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아서라, 네가 지금 돈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어머니, 저 돈 많아요. 아니 많아질 거예요.”
 승호의 자신감에 찬 목소리에 부모님 두 분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두 분 다 왼쪽으로 고개를 넘기시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승호는 방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한쪽에 벗어둔 거적때기를 들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 지저분한 건 왜 들고나오니, 버리게 저기 베란다에 던져 놓고 와!”
 어머니가 타박했지만, 승호는 꿋꿋하게 거실로 들고나와서 거적때기를 뒤집자 도대체 어디에 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수많은 마석들이 쏟아졌다.
 간간이 최하급과 하급 마석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중급 마석이었고 부모님도 이를 알아보셨다.
 “스······. 승호야 이게 다 뭐냐?”
 “제가 20년 동안 뭐 했겠어요. 아, 제가 잡은 건 몇 마리 안 되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남은 시체를 뒤적거려서 얻은 거예요.”
 그럴 리가 없었다.
 몬스터끼리 싸워서 상대를 죽인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상대의 마석을 꺼내서 삼키는 게 모든 몬스터들이 공통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내부에서는 대부분이 동족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지금 시세는 잘 모르는데, 중급 마석이면 제법 비싸지 않아요?”
 
 * * *
 
 “허허허.”
 “여보, 웃지만 말고 휴대전화로 검색 좀 해봐요.”
 어머니의 말에 허허 웃기만 하시던 아버지가 품에서 네모난 플라스틱을 꺼내셨다.
 “아버지 그게 뭐예요?”
 “응? 휴대전화지. 아, 모르겠구나. 요 녀석 가르쳐줘야겠는데?”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승호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으셨다.
 “이게 스마트폰이라는 거야. 여기가 화면인데 이곳을 누르면 화면에 이렇게 불이 들어온단다. 그리고 손가락을 여기 올리면 지문 인식 기능으로 나만 쓸 수 있지. 어때? 신기하지.”
 “아! 아까 안 그래도 택시 타고 오는데, 이거랑 비슷하게 생긴 게 길도 찾아 주더라고요.”
 “그건 내비게이션이라는 건데 이걸로도 할 수 있단다. 이걸 이렇게 누르고. 자, 주변이 이렇게 나오지?”
 “와! 이게 다 뭐죠? 집 주변이에요?”
 “그렇지. 젊어서 그런지 이해가 빠르구나. 자, 여기에 목적지를 적으면 거기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을 찾아 준단다. 요즘엔 예전처럼 지도랑 표지판 보고 찾아갈 필요가 없어.”
 승호는 자신이 사라진 사이 발달한 환경에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저기 벽에 걸려있는 저것도 스마트폰이에요?”
 “뭐? 하하하, 요놈아. 저건 TV야.”
 “네? TV가 뭐 저렇게 얇아요.”
 “예끼! 두께가 요만한 TV도 나오는 세상인데 요즘에는 저 정도면 골동품이지.”
 아버지는 엄지와 검지 사이를 3cm정도 띄어 그 정도 두께의 TV도 출시된다고 승호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거짓말로 놀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게 발전한 기술에 승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휴, 여보, 가격 검색이나 해.”
 “아차, 늙으면 자주 깜박깜박한다니깐. 자 승호야 여기 이걸 누르면 네이X로 들어가지는데 요기서 중급 마석 시세라고 치면 나올 거야. 자, 한번 쳐보거라. 한 번씩 누르면 글자가 입력되니까 한번 천천히 적어보렴. 그렇게 치고 이걸 눌러서 찾아보면······ 옳지, 여기 최저가 물품부터 나오지?”
 중급 마석은 최저 가격이 3468만 원이었다.
 “몇 개만 팔면 집도 한 채 사겠네요?”
 승호의 말에 어머니가 깔깔 웃으셨다.
 “아이고, 우리 승호한테 물가부터 가르쳐야겠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니 방으로 들어가서 지갑을 들고나오셨다.
 그리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승호로서는 처음 보는 지폐였다.
 “이게 천 원, 오천 원, 만 원, 오만 원 지폐란다. 오만 원 권은 처음 보지?”
 “와···.”
 그 후로도 밤이 늦도록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듯 20년의 공백을 채워주기 위해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부모님과 함께 경찰서에 찾아가서 실종 신고를 취소하러 왔다고 하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신우의 신원을 조회하던 경찰들이 한순간 분주해졌다.
 “경위님? 이거 뭐죠?”
 “뭐길래 그래? 어? 어?”
 실종 신고를 취소하러 온 사람은 분명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신원을 조회해본 결과 실종신고가 들어간 건 20년 전이였다.
 모니터 화면 속에 인물 사진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분명 동일인물인 게 틀림없었다.
 실종 신고한 당시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 사실에 어리둥절했지만, 실종 사유를 읽고는 더 황당해서 연신 모니터와 승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 본인 맞으시죠?”
 실종 신고 해제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하므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지만, 승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굉장히 동안이시네요···. 그리고 실종 사유가 ‘게이트 안에서 실종’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맞습니다. 어제 돌아왔습니다.”
 “주현아, 잠시만 처리하고 있어. 나 화장실 좀.”
 “네, 알겠습니다.”
 승호의 실종 신고 취소 처리를 담당하던 주현 경사는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면서 신우의 손에 인주로 지문을 찍어서 서류에 찍고 주민등록증을 돌려주었다.
 “이승호 씨. 주민등록증도 갱신하셔야 합니다. 실종되셔서 미갱신에 관한 과태료가 부과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이후로 6개월 이내에 재발급하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될 테니 이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경사는 모든 처리가 끝나자 주민등록증을 돌려주면서 친절하게 주민등록증까지 갱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신우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승호네 가족이 경찰서를 나갈 무렵 화장실을 갔다 온다던 경위가 다시 돌아왔다. 뭔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주현아. 아까 실종신고 취소하러 오신 분들 어디 가셨어?”
 “아, 처리 다 하고 귀가하셨습니다.”
 최원우 경위의 말에 주현 경사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려 대답해 주었다. 순간 최원수 경위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 벌써?”
 “넵, 빠르지 않습니까?”
 “아오, 빨라서 좋겠다. 나간 지 얼마 됐어?”
 “삼분 정도 전에 나갔습니다.”
 “아오 씨, 알겠어. 나 화장실 좀.”
 화장실을 다녀왔으면서 다시 화장실로 향하는 최원수 경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실종 신고 취소를 도와주기 위해서 볼일을 끊고 돌아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관심을 끊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운 최원수 경위는 밖으로 나가서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최 경위님?”
 “박 기자님, 목표가 경찰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 진짜, 제가 몇 분만 붙잡아 달라고 했잖아요. 2분이면 도착하는데.”
 휴대전화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짜증스러움이 가득 묻어있었다.
 “통화 끝내고 돌아오니 벌써 나갔더라고요. 그래도 지금 빠르게 연락 돌려서 집 주소 찾아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일단 알겠습니다. 그래도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기사 따내면 한잔 사겠습니다.”
 “아휴, 박 기자님 제가 그런 것 바라고 연락드린 거겠습니까. 아무쪼록 좋은 기사 쓰시길 바랍니다.”
 “예. 들어가세요.”
 “네, 그럼.”
 최 경위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거칠게 집어넣더니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여 마신 뒤 머금은 연기를 내뿜었다.
 “후···. 어차피 박 기자 종친 거 같은데 여기저기 뿌려볼까.”
 게이트에 홀로 남겨진 남자의 20년 만의 극적인 귀환.
 정말 매력적이다 못해 치명적일 정도로 맛있는 먹잇감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기자라면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박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었다. 하지만 이미 대상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럴 때는 여기저기 먹이를 뿌려야 했다.
 최 경위는 빠르게 판단을 끝낸 뒤 한 모금밖에 빨아들이지 못한 담배를 끄고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 신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아휴 제가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드리나요. 하하, 다름이 아니라···.”
 그 시각 경찰서에서 나온 승호네는 친절한 경찰관의 조언에 따라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으려고 했지만 찍어둔 사진이 없었기에 사진도 찍어야 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에 머리부터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러 부모님과 함께 주변 미용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예순이 훌쩍 넘으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승호가 계획한 오늘 일정의 장소를 함께 돌아다니면 몸이 축나실 거 같았다.
 “어머니, 아버지. 미용실만 같이 갔다가 집으로 먼저 돌아가세요.”
 “무슨 소리니, 엄마랑 같이 다녀 아들.”
 “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신데. 저 오늘 동사무소 갔다가 헌터 협회도 가야 하고, 어제 말씀해주신 민주 일하는 곳도 잠시 찾아가 볼 거예요.”
 부모님께는 민주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를 해놓았다.
 전화로 말해주는 것보다 직접 얼굴을 보고 한번 안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잃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필 왜 게이트에 남편을 잃었을까. 오빠조차 오빠다운 역할을 해보기도 전에 게이트 너머로 잃어버렸는데.
 “그럼 동사무소까지만 같이 가자꾸나. 어차피 요기 근방이니깐. 응?”
 애원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 알겠다고 말했다.
 마침 골목을 지나면서 길의 우측을 바라보니 미용실이 하나 보였다. 신우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미용실을 향해 걸어갔다.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거리를 달리는 차들이 무척 세련되었다. 길을 지나는 아가씨들은 모두 예뻐 보였다.
 20년간 여자는커녕 사람 자체를 못 보았던 승호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아들, 결혼해야지.”
 아들의 심정을 눈치채었는지 어머니가 슬쩍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어머니, 저 아직 직업도 못 구했는데······. 일단 직업을 구해야 당당하게 결혼하죠.”
 “그래 맞다, 사내자식이 직업이 있어야 당당하지!”
 승호가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옆에서 승호를 거들어 주셨다. 어머니는 노총각 아들의 결혼이 걱정되었지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가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이렇게 잘생겼는데 20살 연하랑도 결혼해도 되겠어.”
 솔직히 승호의 얼굴은 미남이라기보다는 호남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부정해서 뭐 하겠는가.
 승호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어주고는 미용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 미녀와 야수가 오셨네요?”
 딸랑거리며 문이 열리자 미용실을 청소하던 30대 중반의 원장님은 어머니와 손을 잡고 나란히 미용실로 들어오는 승호를 보고 농담을 건넸다.
 관리가 전혀 안 돼 있는 승호의 머리는 아프리카 초원을 거닐고 다니는 사자와 비교해도 손색없었기에 던진 농담이었다.
 이어서 아버지도 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손님으로 보이는 승호에게만 집중하였다.
 “손자분 머리 자르시러 오신 거죠? 이쪽으로 오세요.”
 승호를 가운데 자리로 이끌어 앉히자 어머니가 옆으로 다가와서 미용사가 신우의 머리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 저기 자리에 앉아 계셔요.”
 다리가 아프실까 봐 앉아 계시라는 승호의 말에도 어머니는 손사래 치며 자리를 고수하셨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손자라고 생각했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우리 아들이 참 동안이죠?”
 승호가 어머니라고 부르자 원장님은 깜짝 놀라며 승호와 어머니를 번갈아서 쳐다보고는 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아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아휴, 정말 제 아들이랑 동갑처럼 보이네요. 제가 아들이 하나 있는데 올해 중3이에요. 그런데 덩치가 산만 하고 여간 밥을 많이 먹는 게 아니라서, 이번 달 걔 식비만 70만 원이 나갔어요. 어머니 아들분처럼 몸이 좋아서 덩치가 큰 게 아니라 더 속상하네요.”
 원장은 승호의 어머니가 승호를 늦둥이로 낳아 애지중지할 것으로 생각해서 입에 발린 말들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흉보는 동시에 승호 몸이 좋다는 칭찬을 섞기 시작하자 어머니의 표정이 꽃 피듯 활짝 피었다.
 “호호, 그렇죠. 우리 아들이 올해 마흔두 살인데 피부도 곱고 몸도 좋고 잘생기고, 참 동안이죠?”
 “어머니, 저 마흔세 살이에요.”
 “요즘에는 만 나이로 말하는 거야.”
 분무기를 내려놓던 원장님이 승호와 어머니의 대화를 듣고 깜짝 놀랐다.
 “진짜 40대세요? 어머, 저보다 오빠시네. 어쩜 이렇게 피부가 좋아요? 비결이 뭐예요?”
 “제가 피부가 좀 좋죠? 마석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거 같네요.”
 원장님의 칭찬에 승호도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승호가 마석을 먹었다는 말을 듣고 원장은 깜짝 놀랐다.
 “헌터세요? 휴 ,다행이네! 가위 망가트릴 뻔했네요. 헌터시면 미리미리 말씀을 해주셔야죠.”
 “헌터면 뭐가 달라요?”
 미용사는 신우의 머리로 향하던 가위를 다시 가위집에 집어넣고 둘둘 말아 정리하고는 미용실 안쪽으로 가서 다른 가위집을 가지고 와서 펼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승호는 의문이 들어서 원장에게 물어보았지만, 원장은 왜 이런 것도 모르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헌터 아니세요?”
 “어, 일단 D급이긴 한데요.”
 ‘20년 전 등급이지만요.’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승호를 향해 원장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뒤에 말을 삼키는 승호의 표정을 보고 원장은 그 의미를 다른 뜻으로 이해했다.
 “D급이 뭐 부끄러운 건가요? D급 헌터도 헌터 전용 가위로 머리를 잘라야 해요. 일반 가위로 자르면 가위 날이 망가져서 물어주셔야 하는데, 미용 가위 가격이 커트 비용보다 비싸서요.”
 원장의 말에 승호는 슬금슬금 불안감이 커졌다.
 “혹시, 이 가위는 안 망가지나요?”
 “A급 헌터들도 이 가위로 머리 잘라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위는 머리카락을 고작 몇 가닥만을 잘라내고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면서 멈추었다.
 “어? 어?”
 가위를 손에 든 채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하는 원장의 반응에 승호는 쓴웃음을 지었고, 오른손을 가운 사이로 들어 올렸다.
 “가위를 제 손에 쥐여주시고 잘라야 할 위치에 가져다주시면 제가 자르겠습니다.”
 처음 겪는 사태에 벙 쪄버린 원장은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승호의 목소리에 고가의 헌터 전용 가위를 넘겨주었다.
 오른손으로 가위를 쥔 승호의 팔을 들어 가위를 잘라야 할 머리카락 위치에 가져다 놓고 머리를 가위 사이로 넣어주었다.
 “자르시면 돼요.”
 원장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잘려나가는 머리카락과 가위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위 날 부분에 무언가 서려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서려 있는 무엇인가는 금세 사라졌고 원장은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TV에 나오는 A급 이상 헌터들도 길게 유지 못 하는 마력을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 쓴다고? 어제 늦게 자서 그런지 헛것이 보이네. 오늘 일찍 문 닫고 집에 들어가야겠다.’
 
 * * *
 
 “자, 턱 조금 더 당기시고.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좋습니다. 한 번 더. 네, 됐습니다”
 사진 기사가 승호의 증명사진을 포토샵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슬그머니 사진 기사 뒤로 다가갔다.
 “저기 기사 양반, 가족사진도 하나 찍고 싶은데···”
 “아휴 저야 좋죠. 어머니, 아버지 이쪽으로 앉으세요. 옷은 그대로 입고 찍으실 건가요? 저희 옆집에 한복집 있는데 이쁘게 한복 차려입고 찍으시면 아주 좋겠는데요?”
 “지금 화장도 안 해서···”
 한복을 차려입고 찍지 않겠냐는 사진 기사의 말에 어머니는 손사래 쳤다.
 “지금도 아주 이쁘신데요. 아쉽지만, 다음에라도 찾아봬 주시면 감사하죠. 자, 그럼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버지도 좀 더 붙으시고, 아들분 체구가 너무 건장하셔서 안 되겠네. 방석 좀 더 깔게요.”
 사진 기사는 넉살 좋게 이야기하면서 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가족사진이 좀 더 다정하게 보일 수 있도록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주었다.
 “가족사진 크기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배달 가능하죠?”
 “물론이죠.”
 “그럼 저기 걸려있는 액자로 해서 맞춰주세요.”
 어머니가 벽 한편에 걸려있는 아크릴 액자를 가리키며 주문하자 사진 기사의 입이 찢어지게 커졌다.
 “아휴 알겠습니다. 가격은 12만 5천 원인데 5천 원 빼서 깔끔하게 12만 원에 배달까지 해드리겠습니다. 주소 적어주시고, 여기 증명사진입니다. 서비스로 10장 더 넣어드렸습니다.”
 승호는 친절한 서비스에 앞으로 사진 찍을 일이 있으면 이곳에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았고 깍듯하게 자신을 대접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주변 분들에게 많이 홍보해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더 고맙죠. 살펴 가세요.”
 머리를 자르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사진관을 나오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코앞이었다.
 동사무소는 이미 반대 방향으로 와버렸기에 내일 가겠노라 말하자 어머니가 시무룩해지셨다.
 “아들, 그럼 점심 먹을까? 배 안 고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에 밥집을 훑어보았다.
 “먹고 싶은 거 뭐 있어?”
 아무거나 먹고 싶다고 하면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할 게 뻔했기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항상 자식들에게 맞춰주었던 어머니였기에 도통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따뜻하게 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요? 수육이랑 같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돌아오면 꼭 먹고 싶었던 음식인 돼지국밥을 먹자고 권했는데 어머니는 자신이 먹고 싶었던 음식이라며 연신 손뼉 치셨다.
 국수를 먹자고 했어도, 감자탕을 먹자고 했어도, 어머니의 반응은 똑같았을 테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주변 국밥집 중 가장 맛있는 곳이 있다며 골목 사잇길로 앞장서서 걸어가셨다.
 오전 내내 돌아다녀서 무릎이 아프실 텐데도 내색 하나 없으시고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걸 먹이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석을 팔아치우면 관절에 좋은 약도 사드리고 보약도 한 첩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앞장서서 안내한 국밥집은 정말 간판에서부터 전통이 느껴졌다.
 족히 30년은 되어 보이는 간판을 보다가 문을 열면 미닫이문에 바퀴가 떨어져서 쇠끼리 마찰하는 높은 쇳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가게였다.
 하지만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이 가득 차 있어서 방앞 툇마루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손님이 나가자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자신 있게 데리고 온 가게답게 국물은 깔끔했고 깍두기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식사는 끝났지만, 어머니는 젓가락을 깨작거리면서 밑반찬을 뒤적거리고 있으셨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이렇게 시간 끌수록 승호 늦게 돌아오는 거 몰라?”
 어머니가 승호와 떨어지기 싫어서 슬몃슬몃 뭉그적거리고 있자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아버지의 말 그대로 볼일이 늦어질수록 늦게 돌아오는 게 당연했는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볼일 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알겠지? 아들, 저녁 준비해놓고 있을게.”
 바닥에 언제 궁둥이를 붙이고 있었냐는 듯 빠르게 일어나서 계산을 마치고 갔다 오라고 손짓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빨리 갔다 올게요.”
 “그리고 여기, 택시 타고 갔다 오거라. 거리가 멀어서 걸어서 갈 거리는 아닐 거다.”
 아버지는 지갑에서 현금을 전부 꺼내서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었다.
 사실 지하철을 타도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빨리 다녀오라며 돈을 넉넉하게 주시는 아버지도 사실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셨나 보다.
 “아버지, 너무 많이 주신 거 같아요.”
 “택시 타고 다닐 거 생각해서 아슬아슬하게 준거야. 얼마 안 되니깐 행여나 돌려줄 생각하지 말고. 마석 다 팔고 나면 이 아비한테 용돈 안 줄 거야?”
 아버지가 으름장을 놓으며 짐짓 화났다는 듯 표정을 바꾸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빨리 다녀올게요, 집까지 모셔다 드릴···”
 “아니다, 이 양반이랑 천천히 산책도 하면서 갈 테니깐 어서 다녀오렴.”
 빨리 다녀오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말에 어색하게나마 웃어드리고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로 나갔다.
 차도로 가는 도중에 중간중간 뒤를 돌아봤는데 어머니가 우두커니 서서 손을 흔들어주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니 빨리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제와 다르게 말쑥하게 차려입고 머리까지 손을 본 덕에 택시는 곧장 잡혔다.
 “헌터 협회 서울 중앙지부로 가주세요.”
 아버지가 알려주신 데로 서초구에 있는 중앙지부로 출발하였다.
 서울에만 헌터 협회 지부는 3개가 있었지만, 서초구에 있는 중앙지부가 가장 컸다.
 사실 그쪽으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집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20년 전에는 서울 헌터 협회라고 불렸는데 명칭도 있어 보이게 바뀌었고 건물도 4층짜리 빌딩이 아니라 몇 층인지 헤아리기도 힘든, 목이 아플 정도로 높은 건물로 바뀌었다.
 물론 건물 전체를 사용하는 건 아니었지만.
 로비로 들어가서 건물 안내도를 천천히 읽고 있으니 승호의 옆으로 경비원이 다가왔다.
 “무슨 볼일로 오셨나요?”
 “헌터 등록증 재발급받으러 왔습니다.”
 “저런, 어쩌다 잃어버리셔서···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예전에 발급받은 헌터 등록증은 모두 종이로 되어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플라스틱으로 된 카드를 사용한다고 했다.
 자신이 사용했던 카드라고는 공중전화 카드가 전부였다. 어색하지만, 요즘은 카드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처리한다고 했다.
 카드도 현금처럼 상용이 가능한 시대라고 이야기 들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물론 자신이 게이트를 넘어가기 전에도 카드라는 게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4층까지 멋들어지게 만들어 놓은 계단을 따라 3층에 올라서자 안내 데스크라고 적힌 곳이 눈앞에 보였다.
 “안녕하세요, 헌터 등록증을 재발급하러 왔습니다.”
 “번호표 뽑고 기다려주세요.”
 접수처 직원의 말에 손을 내밀었지만, 직원은 멀뚱멀뚱하게 쳐다보았다.
 “번호표 주세요.”
 “푸하하, 재밌으신 분이네. 이러면서 제 번호 따려고 그러는 거죠? 저 남자친구 있어요.”
 “네? 번호를 딴다뇨? 번호표 주시면 기다리겠습니다.”
 “아, 1절만 하세요.”
 그때까지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는 승호를 바라보며 접수처 직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뒤편에 번호표 뽑아서 기다리시라고요. 여기서 기다리셔도 처리 안 해드려요.”
 그제야 뒤를 돌아본 승호의 눈에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이 흰색 기계에서 종이를 뽑는 게 보였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 기계를 살짝 살펴보다가 종이를 천천히 잡아당기니 번호가 찍힌 종이가 나왔다.
 “367번 손님 6번 창구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에 승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한 남성이 숫자가 6이라고 적혀있는 창구로 다가갔다.
 창구 위에는 367이라는 붉은색 번호가 점멸하고 있었다.
 그제야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파악한 승호는 여유 있게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며 구경하였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탤런트급으로 이쁜 아가씨들이 많았기에 눈이 절로 즐거웠다.
 옷 또한 똥 싼 바지와 멜빵바지가 주로 유행했던 당시와 다르게 어마어마하게 짧은 바지로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는 아가씨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행복함에 못 이겨서 감히 자신의 허락도 없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광대를 억누르며 십 분쯤 기다렸을까, 자신의 번호를 호명하는 안내 방송에 4번 창구로 갔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4번 창구에는 이쁜 아가씨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맞이해주었다.
 “헌터 등록증 재발급하러 왔습니다.”
 이쁜 아가씨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에는 20년간 홀로 살아온 기간이 너무 길었기에 애써 시선을 피하고는 애꿎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성함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6자리 불러주세요.”
 “이승호라고 합니다. 주민등록번호는 760105입니다.”
 “네?”
 얼굴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정보를 입력하려던 창구 여직원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어보았다.
 “이승호, 760105입니다.”
 “아··· 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생각했던 여직원은 다시금 말해주는 승호의 말에 키보드를 두드려 써넣고는 조회를 하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모니터와 승호를 연신 번갈아 바라보던 여직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승호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창구 앞에 놓인 팸플릿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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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을 잡아끄는 팸플릿을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아까 사라진 창구 여직원이 한 명의 남성을 이끌고 자리로 찾아왔다.
 “이승호 씨 본인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혹시,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승호는 주머니에서 아직 갱신하지 못한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주자 여직원은 처음 보는 주민등록증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헌터 협회 서울 중앙지부 대외 관리부장 최명수라고 합니다. 안쪽으로 가셔서 이야기하시죠.”
 아버지의 말대로 귀찮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하더니 이런 걸 두고 말씀하셨던 거 같았다.
 “헌터 등록증 재발급은 여기서 하는 거 아닙니까?”
 “아, 그렇긴 하지만 이승호 씨는 다소 특이하신 경우라서 안쪽에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매우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저자세로 승호와의 대화를 원했으나 이런 데 시간을 빼앗기기보다는 부모님과 1초라도 함께 있고 여동생을 1분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재발급이 바로 안 되면 그냥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승호는 시간을 잡아먹는 게 아까워서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승호가 일어남과 동시에 남자는 승호의 소매를 간절하게 붙잡았다.
 “아, 아닙니다. 바로 됩니다. 그럼 여기서 발급하는 동안만이라도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반들거리는 머리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어떻게든 붙잡고자 하는 모습에 마음이 다소 약해진 승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남자는 여직원에게 눈치를 줬다.
 “에··· 혹시 증명사진 있으세요? 새롭게 발급해야 하는데, 예전 사진이라. 너무 흐릿하네요.”
 아침에 찍어둔 증명사진을 품에서 꺼내서 건네주었고 여직원이 스캔하는 사이 남자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승호 씨,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재발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수준이면 대답해 드리죠.”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어제요.”
 “바로 협회로 찾아 주시지 그랬습니까.”
 다그치는듯한 말에 승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생면부지인 당신보다 부모님을 먼저 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험악한 분위기에 남자가 어쩔 줄 모르며 사과하자 승호는 인상을 풀었다.
 “뭐, 나름 바로 온 거로 생각하는데요. 넘어온 지 24시간도 안 지났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흥분을 해서 실례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남자를 바라보지 않고 대꾸하자 남자는 더욱더 쩔쩔매었지만, 그래도 질문을 멈추지는 않을 기세였다.
 “어떻게 돌아오신 건가요?”
 “분당천 게이트로 넘어왔습니다.”
 승호의 말에 분당천, 분당천이라고 소리 내어 남자가 중얼거렸다.
 마침 스캔이 끝난 여직원이 승호 앞으로 다가와서 앉았지만, 옆의 남자 때문인지 말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분 신경 쓰지 말고 재발급 계속 진행해주세요.”
 “아··· 네, 재발급 비용 5만 원 되겠습니다. 오늘 바로 찾으러 오실 거면 오후에 오시고···”
 말을 하던 여직원은 옆의 남자가 얼굴로 인상을 쓰면서 좀 더 시간을 끌라는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내고 있어서 어쩔 줄 몰랐다.
 “장난치지 마라, 죽는다.”
 승호가 죽음을 입에 담으며 죽일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철근처럼 무거워졌고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대는 남자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풀어주었다.
 “꼭 오늘 찾으러 와야 합니까.”
 “아, 아뇨··· 3개월 이내로만 찾으러 오시면 돼요. 아, 그런데 등급 재측정은 안 하실 건가요?”
 승호의 시선에 겁이 들어 움츠러든 여직원이 모기가 기어들어 가는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승호 옆에 서 있는 부장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는 어필을 하기 위해 헌터 등급 재측정을 권해보았지만, 승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이트 너머의 몬스터들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등록증은 다음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5만 원 여기 있습니다.”
 창구 여직원의 권유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5만 원을 건네주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빠르게 협회 건물을 빠져나갔다.
 
 * * *
 
 “힘플러스 중계점으로 가주세요.”
 민주를 만나기 위해서 협회 건물을 빠져나온 뒤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로서는 짧은 거리 손님보다 이렇게 긴 거리를 이동하는 손님이 달가웠다.
 하지만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손님의 표정이 풀어지기 전까지 조용히 운전만 하면서 한참을 길을 내달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화가 누그러진 듯해 보였고 대화를 시도했다.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네? 아, 네··· 제가 얽히기 싫은 곳이 있는데··· 왠지 계속 얽힐 거 같네요.”
 “저런, 원하지 않는 상황에 말려드는 것만큼 귀찮은 게 없는데.”
 “맞습니다.”
 대화를 끊는듯한 간결한 승호의 말에 기사는 조용히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게 나을 때도 있어요. 흐름을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다가 주변에 물이 막 튈 수도 있어서··· 주변도 생각해야 하죠. 제가 살아 보니깐 그래요.”
 “아, 네···”
 “하하, 아니면 그 흘러가는 흐름 자체를 완전히 막아버려야죠.”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기사는 짐짓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어색해진 공기를 바꾸고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일상 이야기를 하는 라디오 속 대화를 들으며 어느새 택시는 힘플러스에 도착하였고 승호는 택시비를 내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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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플러스가 위치한 건물 내부로 들어온 승호는 화려한 1층 내부 인테리어에 기가 눌렸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서 무빙워크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무빙워크를 타고 내려가서 계산대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민주는 보이지 않았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면서 계산대 주변을 맴돌자 이를 지켜보던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사람을 찾습니다.”
 승호의 말에 직원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객 서비스 센터 쪽으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지금 보호하는 아이는 없는데, 혹시 나이와 입은 옷 등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닙니다, 제가 찾는 사람은 여기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오해하는 직원에게 손을 휘저으며 아니라고 설명하자 직원은 입을 살짝 벌리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찾으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민주라고 합니다.”
 “아, 민주 씨는 잠시 안쪽에서 쉬고 있는데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불러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들어간 곳을 등지고 고객 서비스 센터 앞에 서 있는데, 직원 휴식 방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성아랑 시아가 올 시간이 아닌데?”
 문을 열고 나오는 동생의 목소리에 뒤돌아 볼뻔했지만, 극적인 감동을 위해 조금 더 기다렸다.
 “민주 씨, 이분이야.”
 “누구시죠?”
 민주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자신을 알고 찾아온 사람의 뒷모습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의 모습이었다.
 대답 없이 가만히 있던 남자는 고개를 잠시 숙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잘 지냈니?”
 “아아아악!!! 아아악!!”
 민주는 대답 대신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서 그대로 팔과 다리로 승호를 감싸며 매달렸다.
 “민주야, 정말 오랜만이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사람들이 놀라서 바라보았지만, 민주와 승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승호는 새끼 코알라처럼 매달린 민주를 한 손으로 떨어지지 않게 엉덩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들었지, 고생했어.”
 슬슬 주변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승호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인, 자신의 왼쪽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민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계속해서 매달려있던 민주는 진정이 되었는지 승호를 감쌌던 팔다리를 슬쩍 풀었고 승호도 민주를 바닥에 내려놓아 주었다.
 “킁, 오빠는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네.”
 민주는 그제야 승호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넌 아줌마가 다 됐네.”
 “아직 새댁 소리 듣거든!”
 민주는 승호의 말에 시뻘게진 눈을 흘기며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처음에 승호를 안내해준 직원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민주의 팔뚝을 찔렀다.
 “민주 씨, 퇴근해.”
 “아, 감사합니다. 오빠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천천히 나와.”
 천천히 나오라고 했지만, 부리나케 뛰어 들어가는 민주의 모습을 보니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여유롭게 대형 마트를 구경해 보려고 했지만, 다소 아쉽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5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민주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얼굴이 아주 땀범벅이네, 땀범벅이야.”
 승호의 말에 민주는 옆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땀을 닦았다.
 “오빠, 요 위에 1층 카페에 가서 이야기하자. 곧 성아랑 시아가 올 거야. 조카들 얼굴도 한번 봐야지.”
 “그래, 그래.”
 민주는 승호와 팔짱을 낀 채로 무빙워크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1층에 도착한 민주는 승호를 이끌고 카페로 들어갔다.
 “여기 다방 맞지?”
 카페에 들어가자 승호가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뭐? 깔깔깔, 옛날로 치면 다방이 맞긴 하지. 요즘은 카페라고 해.”
 “아, 그래? 그런데 아가씨들이 굉장히 많네.”
 “그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거야? 자, 주문해.”
 순간 민주는 오빠가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할까, 아니면 옛날 방식으로 주문을 할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오빠에게 먼저 주문을 시켜 보았다.
 “저는 둘둘셋이요.”
 “네? 둘둘셋?”
 승호의 주문에 아르바이트생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어보자 뒤에서 지켜보던 민주가 빵 터지고 말았다.
 “아하하하하, 오빠, 아하하하하. 아 웃겨. 그냥 카푸치노랑 카페라테 하나 주세요. 먹고 갈 거예요.”
 “카푸치노랑 카페라테 하나 주문받았습니다. 8700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건네는 민주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승호는 민주가 건네준 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고 자신을 바라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진동벨을 챙긴 민주가 혀를 빼쭉 내밀었고, 승호는 밀물처럼 몰려드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일부러 말 안 해준 거지.”
 민주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살짝 누르면서, 장난을 걸자 민주는 어릴 적에 항상 장난치면 이렇게 자신을 살짝 혼내어주던 오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모습에 민주는 아까 흘려서 다 없어진 줄 알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흑···”
 “어? 어!? 많이 아팠어? 미안, 괜찮아?”
 난데없이 눈물을 터트리는 민주를 보며 당황한 승호는 얼른 달래주었다.
 힘 조절을 잘한 거 같았는데, 우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빠, 아냐. 킁, 자리에 앉자.”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는 오빠의 손을 살며시 밀치며 창가로 다가가서 자리를 잡았다.
 “엄마, 아빠 보고 온 거야?”
 “응, 어제 돌아왔어.”
 “와, 너무해. 나한테 전화도 안 해주고 이렇게 늦게 찾아온 거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반응을 보니깐 성공적인 거 같아서 기분 좋네.”
 “뭐야? 하, 참내··· 그래도 돌아왔으니깐 봐준다. 이야기 좀 해봐. 어떻게 돌아온 거야? 거기선 또 어떻게 지냈어?”
 승호는 겪었던 일들을 어제 부모님께 들려 드렸던 이야기 정도로 축소하고 미화해서 민주에게 들려주었다.
 “고생했네··· 20년 동안 외로웠지? 계속 혼자였어?”
 민주의 말에 승호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고 민주는 안쓰러운 마음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승호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승호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민주는 입구에서 들어오던 딸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재잘거리면서 카페 앞을 지나치던 시아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헉! 언니! 저기 봐.”
 시아가 가리킨 카페 안에는 엄마가 웬 남자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렁그렁 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새아빠 생기는 거 아냐? 뭐야, 저 분위기?”
 “가자.”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두 딸은 아빠를 잊지 못했는데 엄마가 갑자기 바람(?)피우는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성아가 거칠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 위에 달려있던 종들이 깨질 듯이 딸랑거렸다.
 박력 넘치는 모습에 카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성아와 시아에게 몰려들었고 성아는 고개를 치켜든 채로 당당하게 엄마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발소리에 승호가 뒤돌아보니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일부러 땅을 발로 찧듯 다가오는 여학생 두 명이 보였다.
 화가 난 듯 다소 상기된 얼굴조차 예뻐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새하얀 피부와 갸름한 얼굴 가운데 솟아오른 오뚝한 콧날 아래 뭐가 불만인지 앙다문 입술 그리고 그와 대조적인 커다란 눈망울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치솟아 올라간 눈썹까지 남자 열에 열은 고개를 한 번 더 돌려 쳐다볼 만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화가 난 듯한 얼굴 덕분에 생기가 돋보여 보였고, 살아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는 아이는 동생으로 보였는데 그나마 키가 작고 볼살이 있어서 그렇지 몇 년만 지나면 언니를 그대로 닮을 거 같은 아이였다.
 탁.
 바닥에 일부러 발소리를 내면서 승호와 민주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멈춰 서서 승호를 날카롭게 째려본 다음 민주를 쳐다보았다.
 “엄마, 분위기 좋다?”
 여학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민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안 닮았잖아!”
 “거, 미안하게 됐네요!”
 승호는 민주가 감싼 손을 빼서 민주와 멈춰 선 여학생들을 검지로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민주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면 꽥 소리 질렀다.
 “허 참, 어떻게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네가 성아니? 이야기 많이 들었어, 맘고생 많았겠구나.”
 승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아의 손을 잡아주려고 했지만, 성아는 손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려주었다.
 “제 이야기를 들으셨다니 불쾌하네요. 나이도 젊으신 거 같은데, 뭐 때문에 우리 엄마 만나는 거죠?”
 “에?”
 승호와 민주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런 승호를 바라보는 성아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경멸하는 감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우리 엄마 돈 별로 없어요. 허튼 생각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요.”
 아이고 골이야.
 승호는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개를 휙 돌려서 민주를 바라보았는데, 민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숨까지 참는 듯했고 민주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성아야, 그게 아니고···”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마요.”
 “깔깔깔깔.”
 해명하려는 승호의 말을 차갑게 끊자, 민주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드라마 같은 상황에 카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해있었는데 승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지금 뭐가 좋다고 웃어? 아빠 배신하고 바람피우다 걸리니깐 실성했어?”
 “아하, 아하하··· 요년아. 엄마 능력 좋지?”
 웃다가 숨이 차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던 민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지만, 오해를 풀기는커녕 더 장난치고 싶었나 보다.
 승호는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싶은 마음에 그냥 커피를 홀짝였다.
 “엄마, 너무한 거 아냐? 아빠 죽은 지 3년밖에 안 지났어. 그런데 뭐?”
 귀까지 빨개진 채로 민주에게 소리치는 승아를 보고 있으니, 아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거 같았다.
 하긴 아버지를 잃었을 때는 한참 사춘기 감성이 풍부한 소녀였을 텐데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그리울까 싶었다.
 “민주야, 장난 그만 쳐.”
 “애들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장난 좀 쳐봤지. 인사해. 너희들 새아빠는 아니고, 외삼촌이야.”
 민주가 그렇게 말했지만, 성아와 시아는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성아와 시아는 귓속말로‘엄마한테 남자형제가 있었어?’,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냐, 실종이라고 했던 거 같았어.’ 등의 이야기를 귓속말로 나누었지만, 승호의 귀에는 잘 들렸다.
 “애들한테 얼마나 신뢰가 없으면 이렇게 의심을 하냐?”
 시아와 성아의 말을 엿들은 승호는 민주에게 뭐라 했지만, 민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의심이 많아야 해. 잘한다! 우리 딸들!”
 앉은 채로 주먹을 쥐고 양손을 들어 올리자, 성아와 시아가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성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쓴 채 고민에 빠진 모습이 어찌나 귀여워 보였는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을뻔했지만, 찌릿하고 째려보는 그 모습에 손을 그대로 들어서 자신의 뒤통수를 긁어버렸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주머니에 주민등록증이 아직 있는 걸 깨달았고 꺼내서 성아에게 건네주었다.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잡을 때 더러운 물건을 쥔다는 듯 손끝으로 붙잡는 걸 보고는 시무룩해진 채로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 주소 알지?”
 “···이거 가짜 아니에요? 이런 주민등록증이 어디에 있어요. 이거 봐요.”
 승호의 주민등록증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자신의 교복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들더니 곧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네.”
 “그야 당연··· 그것보다 이거 가짜 맞죠?”
 “딸, 외삼촌 맞다니까. 오빠, 그런데 주민등록증 이거 써도 되는 거야?”
 민주의 말에 승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장난친 건지 아직도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카들이 못내 야속하기만 했다.
 “내일 가서 바꿀 거야, 오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빴어.”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은 성아와 시아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주민등록증을 챙겨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볼게, 내일 동사무소 갔다가 부모님이랑 같이 올게.”
 “오빠, 폰 번호 좀 줘.”
 “내가 전화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쓸 줄도 몰라.”
 “와··· 오빠 되게 할아버지 같아, 같이 사러 가자. 요즘에는 거지도 다 핸드폰 들고 다녀”
 거지와 비교하는 말에 승호의 자존심이 상했다.
 “··· 폰 사려면 뭐 필요해?”
 
 
 # 구직활동
 
 
 승호는 손에 들린 스마트폰의 화면을 연신 켰다 끄기를 반복하였다.
 어제저녁 내내 아버지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어색한 스마트폰 터치 화면을 연신 두드려보았다.
 아침 일찍 동사무소로, 아니 이제는 주민센터라고 부르는 곳으로 홀로 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걸어갔다.
 어머니는 어제 너무 무리해서 걸었던 탓이지 몸살에 걸리셨고 아버지가 병간호를 자청하셨다.
 6개월 동안의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 유예 기한이 남아 있었지만, 사회 활동을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발급받는 게 좋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서 떠밀리듯 집을 나오게 되었다.
 주민센터 업무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았기에 승호는 한적한 거리를 유유자적 걸어 다녔다.
 “코톡, 코톡, 코톡”
 주머니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서 어색하게나마 확인해보니 민주한테서 코톡이 왔다.
 어제 폰을 개통하자 민주가 가장 먼저 깔아준 ‘코코아톡’이라는 앱이었는데, 대화방 역할을 한다고 했다.
 
 - 이민주 : 오빠, 우리 애들이 사과하는 사진 보냈어, 왼쪽이 성아고 오른쪽이 시아야
 
 민주가 보내온 사진을 손가락으로 클릭하자 긴 머리를 바닥에 늘어트린 채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보였다.
 뒤통수만 보였기에 설명을 안 해줬으면, 누가 누군지 모를뻔했다.
 
 - 이승호 : 어
 - 이민주 : 대답이 왜 그렇게 짧아? 불만스러워?
 - 이승호 : 예럽
 - 이민주 : 뭐?
 - 이승호 : 어렵다
 - 이민주 : 많이 써봐야지 늘어나지. 오빠, 조카들이랑 코톡하다 보면 엄청나게 빨리 늘걸?
 - 이승호 : 나중
 - 이민주 : 알겠어, 다음에 애들 만나면 이쁘게 봐줘~ 애들이 아빠 생각해서 한 행동이니깐, 너무 미워하지 마~
 - 이승호 : 너나
 
 민주와 코톡 하면서 어지간한 몬스터를 잡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땀들을 삐질삐질 흘렸다.
 스마트폰 터치스크린과 힘겨운 사투를 마치고 나서 주머니에 이 흉악한 스마트폰을 찔러놓고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길거리를 거닐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각은 9시를 훌쩍 지나가 버렸고, 뒤늦게나마 주민센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민센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외로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이 제법 있었다.
 승호가 들어가자 묘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수상한 공기가 맴도는 주민센터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입구에 서서 곰곰이 어디서 느꼈던 기시감인지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서 떠올려 보았다.
 협회.
 그곳에서 느꼈던 다소 불쾌한 기억이 떠올렸고 주민센터에 앉아 있는 한 인물에게서 그와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의심하며 바라보자 의심은 확신이 됐다.
 승호는 그길로 바로 뒤돌아서 주민센터를 빠져나갔다.
 혹시나 따라오지는 않는가 싶어서 감각을 확장해보았지만, 불쾌한 시선의 주인공은 여전히 주민센터 안에 있었다.
 자신이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경찰관, 협회 사람, 부모님과 민주, 그리고 조카들까지.
 하지만 가족이 제보했을 리는 없으니 경찰이나 협회에서 정보를 흘렸다는 건데··· 어느 쪽이든 귀찮게 되었다.
 마석을 팔려면 어떻게든 협회를 통해야 하였고 경찰을 족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근 20년간 화가 나면 몬스터를 잡아 죽이던 습관으로 인해서 승호가 서 있는 골목 어귀는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차올랐다.
 털썩
 앞에서 걸어오던 이십 대 초반의 여성이 온몸을 짓눌려오는 살기에 정신을 잃으며 순식간에 쓰러졌다.
 승호는 그 광경에 아차 싶어서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를 갈무리하고 순식간에 쓰러진 여자에게 달려갔다.
 쓰러진 여자를 똑바로 눕혔지만, 여자의 몸에 닿은 손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도와주세요!!”
 여자의 심장이 멎어버렸다.
 죽이는 법은 알았지만 살리는 법은 몰랐던 승호는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 시각도 아닌 9시를 훌쩍 넘기 골목 어귀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주변에서 조금 전까지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여자를 안고 주민센터로 뛰어 들어갔다.
 “심장마비입니다! 도와주세요!”
 여자를 안고 주민센터 유리문을 밀치며 달려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주민센터 직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원 중 젊은 한 남성이 창구를 멋들어지게 한 손으로 짚고 넘어오더니 승호가 안고 있던 여성을 바닥에 눕히고 고개를 젖힌 뒤 기도를 확보하고는 여자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호흡 없고, 맥박 없고.”
 상태를 파악하자마자 고개를 들어서 바로 옆에 있던 승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119에 신고해주세요, 수아 씨 제세동기! 도와주실 분 계십니까. 번갈아 가면서 해야 합니다!”
 남자 직원의 일사불란한 지시에 승호는 아직은 어색한 스마트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 여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승호가 들어온 중앙계단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도와달라는 직원의 말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실 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지적인 외모의 30대 초반 남성이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 사람이다.
 “저도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가슴 옆과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서른”
 “훕! 훕!”
 몇 번을 반복하였지만, 여자의 심장은 다시 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는 사람에게 피를 말리는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 여자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땀범벅이 되어버린 직원은 그 광경을 놓쳤지만, 뒤에서 안절부절 지켜보던 승호는 감각을 여전히 활성을 시켜 둔 채였기에 바로 알아차렸다.
 “움직였습니다!”
 승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가 가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은 크게 환호성을 질렀고 최초에 사라졌던 수아라고 불렸던 여성이 중앙계단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수아 씨, 제세동기 왜 안 가져다 줬어요!!”
 “그게 뭔지 검색해보고 있었어요···”
 땀범벅이 되어버린 남자 직원의 호통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 말을 들은 남자 직원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모르면 물어봤어야죠!!”
 “살았으니 됐잖아요!!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더 큰소리를 지르는 수아의 반응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그 사이 구급차가 도착하였고, 황급히 구급대원들이 달려왔다.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모두가 빙 둘러선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환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재빠르게 한 명이 달려 들어왔고, 연이어 들것을 손에든 구조대원이 따라 들어왔다.
 땅에 누워서 숨을 가늘게 몰아쉬는 여성을 발견한 구급대원은 초동 조치를 훌륭하게 취해준 직원과 30대 시민 한 명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미약하게 의식을 차린 여성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면서 여성을 들것에 올린 뒤 구급차에 실어서 병원으로 호송했다.
 “수아 씨는 나 좀 보지.”
 직원 중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소리 지르던 여자 직원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심폐소생술을 도와주었던 실 테 안경의 남자가 자신이 놓아둔 서류용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어제저녁 최신 기기들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한 승호는 노트북을 실제로는 처음 봤기에 호기심 어린눈으로 남자를 관찰했다.
 땀에 절어버린 셔츠를 입은 남자는 아직도 땀이 나는지 단추를 몇 개 더 풀어헤치고 연신 자판을 두들기는 모습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자신은 스마트폰도 힘겹게 누르는데, 저 많은 자판을 피아노 연주하듯 유려하게 눌러대는 모습이 하나의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인터뷰 가능할까요?”
 “저요?”
 구경하던 승호에게 갑자기 말을 건네자, 승호는 슬쩍 뒷걸음질 치려고 하였다.
 “네, 조그맣게 기사를 쓸 생각인데 협조 가능할까요? 여성분 어디서 발견하셨고, 어떻게 여기로 데리고 오실 생각을 했는지 등 간단하게 답해주시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제 밥벌이를 도와주신다면 약소하지만 소정의 상품권도 드리겠습니다.”
 땀범벅인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다소 약해졌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발생한 이번 일을 도와주었기에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선에서 인터뷰에 응해주기로 했고, 하겠노라 말하자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옆에 서 있던 주민센터 직원도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기에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하였다.
 “어떻게 바로 뛰어넘어올 생각을 하셨나요? 심폐소생술을 배우게 된 계기는?”
 기자는 승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업무를 봐야 하는 직원을 우선 인터뷰하였다.
 짧게 인터뷰하고 적당히 살을 붙여서 문구를 작성해둔 기자는 이어서 승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쓰러진 여성분을 발견하고 여기까지 안고 오는 게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처음에 어떻게 발견하게 되신 거죠?”
 “요 앞을 지나가다가, 제 앞에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 여성분이 운이 좋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로 모시고 올 생각을 하셨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승호는 머뭇거렸지만, 약간의 거짓을 섞어서 대답해 주기로 하였다.
 “사실 조금 전 동사무소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두고 온 게 있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순간 승호의 대답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자의 머릿속에 어떠한 번뜩임이 지나갔다.
 20대 초반, 주민센터가 아닌 동사무소, 190cm를 살짝 넘긴 키와 우락부락한 몸. 어색한 말투.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오셨던 건가요?”
 “개인적인 볼일입니다.”
 대답을 회피하는 승호의 모습에 기자는 좁쌀만 한 의심이 사과만 하게 커졌다.
 “알겠습니다. 혹시 심폐소생술을 배우신 적은 없나요?”
 “네··· 만약 배웠다면 저도 도와드렸을 텐데 죄송스럽네요.”
 “아뇨 죄송할 건 없죠··· 그런데 혹시 군대 다녀오셨나요?”
 갑자기 왜 군대 이야기를 물어보는지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자는 미끼를 너무 갑작스럽게 던졌나 싶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군대로 시작해서 군대로 끝나기에 살살 양념을 치기 시작했다.
 “이야, 어려 보이시는데, 군대 빨리 갔다 오셨나 봐요.”
 승호는 너보다 10년은 빨리 갔다 왔을 거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억지로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해병대? 육군?”
 “육군으로 갔습니다.”
 “복무신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승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기자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과만 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갑자기 왜 웃는 건지 이유를 모르는 승호에게 기자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대더니, 주변에 들리지 않게 승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승호 씨, 진짜 인터뷰할 수 있겠습니까?”
 
 * * *
 
 승호는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서 기자의 입을 뭉개버릴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었다.
 “··· 밖으로 나가죠.”
 승호의 말에 기자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금 적은 기사는 당장에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승호의 인터뷰를 추가해서 대충 휘갈긴 뒤 올려버렸다.
 이미 주민센터 밖으로 나간 승호의 뒤를 황급히 따라가느라, 미처 가방에 넣지도 못한 노트북과 코트를 손에 들고 일어섰다.
 “다들 고생하십시오.”
 허겁지겁 주민센터를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아침부터 큰일을 겪은 직원들을 뒤돌아보면서 살갑게 인사했다.
 주민센터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온 기자를 승호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어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실까요?”
 “앞장서세요.”
 기자는 깍듯하게 물어보았지만, 승호의 대답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승호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었다.
 차를 주차해놓은 곳으로 승호를 데리고 간 기자는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절대 비밀 엄수하겠습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으실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꼭 약속 지키겠습니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할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인터뷰를 하고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문까지 닫아준 기자는 서둘러 운전석으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저는 최민종이라고 합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말씀 편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것보다 어디로 갈 거예요?”
 민종은 시간을 보고는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기에는 시각이 애매하였고 카페에 남자 둘이 아침부터 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갈 곳 마땅히 없으면, 헌터 협회 서울 중앙지부 근처 다방으로 가죠. 볼일도 있고.”
 민종이 고민에 빠져있자 승호는 겸사겸사 헌터 등록증도 찾고, 택시비도 아끼기 위해서 협회 근처로 가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 알겠습니다.”
 부산까지 가자고 하였어도 달갑게 출발했을 정도로 기분이 들뜬 민종은 신나게 액셀을 밟았다.
 10시가 약간 지난 시각의 카페는 한적했다.
 “어떤 거 드시겠습니까?”
 “우유 들어간 커피”
 “알겠습니다.”
 가장 구석자리로 들어가서 앉은 승호는 민종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고, 승호의 주문을 참고하여 민종은 계산대로 가서 카페라테 2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물어볼 거 있으면 빨리 물어봐. 점심은 집에 가서 먹을 거야.”
 점심을 1시에 먹는다고 하여도 3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협회에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이야기할 시간은 더욱더 짧을 것이었다.
 마음이 다급했지만, 어제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 내내 노트북 내에 작성해 두었던 질문 파일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 굉장히 불쾌하실 거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뵌 점 뒤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됐어,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승호를 바라보며 민종은 오해를 조금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기레기는 아닙니다. 승호 씨의 게이트 너머의 생존도 궁금하긴 하지만, 제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겁니다.”
 “뭔데?”
 “최후의 공격대에서 핵을 파괴한 뒤에 어떻게 된 겁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승호는 허를 찔린 듯 바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최후의 공격대는 분명 성공적으로 게이트를 닫기는 했지만··· 승호 씨와 마찬가지로 짐꾼이었던 헌터들 대다수가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이야기 들었어.”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민종은 천적들에게서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경계를 서는 미어캣처럼 연신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누군가 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였다.
 “사실, 드락쉬···”
 민종이 주변을 살피다가 아무도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을 하는 순간.
 웅~~~ 웅~~~
 울리는 진동벨에 민종은 기겁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벨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계산대 쪽으로 걸어갔다.
 곧 계산대에서 건네받은 트레이 위에 올려진 카페라테 2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진동벨에 놀라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서 수줍게 웃었고 자리에 앉는 민종이 조금 전했던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드락쉬가 모든 짐꾼을 죽인 거로 생각됩니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하는 민종의 말에 승호의 눈썹이 파도치듯 크게 꿈틀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최후의 공격대에서 돌아온 짐꾼은 이승호 씨를 제외하면 모두 죽었습니다.”
 민종의 엉덩이는 이미 의자에서 반쯤 떨어졌을 정도로 승호를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민종의 얼굴이 다소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슬며시 뒤로 빼던 승호가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한순간에 몸이 굳어졌다.
 “뭐?”
 민종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부 죽었습니다. 사고, 자살, 테러 등등 돌아온 12명의 짐꾼은 각기 방법은 다르지만, 1년 6개월 사이에 모두 죽었습니다. 그중 자살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럼 그 말은···”
 너무나도 확신에 찬 민종의 말에 자연스럽게 승호도 목소리를 낮췄다.
 “네, 맞습니다. 자살 당했습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그 말에 승호는 잔뜩 굳어졌던 표정을 풀면서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그럼 소설 쓴 거야?”
 “지금까지는 모든 게 가설이지만··· 혹시 게이트에 들어가신 그날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떠올리기 싫은 그 날의 악몽을 민종이 건드리자 승호의 웃었던 얼굴이 휴짓조각처럼 구겨졌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시면, 어딘가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민종의 말에 승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20년간은 없어서 못 피웠고, 돌아온 뒤는 끊어버린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며 운을 떼지 못하던 승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날은···”
 
 * * *
 
 "핵이 부서졌다! 짐꾼들은 최전방 뒤에 바짝 붙어서 뛰어"
 게이트 핵을 파괴한 뒤, 환호성을 지를 작은 틈조차 없었다.
 게이트 마스터는 흉측한 외모와 거대한 덩치로 인해서 흔히 근접 전투를 펼치는 몬스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대한 마력을 지닌 심연의 주인 발록이었다.
 게이트 마스터와 정신적으로 연결된 게이트 핵이 파괴되자 발록은 모든 마력을 방출하여 게이트 내부 전역으로 뿌렸고, 모든 몬스터에게 게이트로 향하는 드락쉬 공격대를 공격하게 했다.
 승호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피해 공격대 중앙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짐 다 버려!”
 뒤에서 들려오는 드락쉬의 목소리에 짐꾼들은 모조리 등에 멘 짐들을 던져버렸다.
 주변에서 짐을 버리자 승호도 마찬가지로 등에 멘 짐들을 던져버렸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달려갔지만, 뒤따라오는 몬스터들은 거리를 조금씩 좁혀오기 시작했다.
 파괴한 게이트 핵을 더 확실하게 파괴하려고 한 것인지, 드락쉬는 핵 속에서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멀어져 가는 공격대를 뒤늦게 쫓아왔다.
 드락쉬는 앞서 떠난 공격대를 향해 압도적인 속도로 뛰어왔고 공격대 뒤를 바짝 뒤쫓는 몬스터들 뒤를 잡았다.
 수많은 몬스터들을 단독으로 돌파하면서 대열 후미에 붙은 드락쉬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몬스터들을 처리하였다.
 “내가 막아줄 테니, 다들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승호는 대열 가장 후미에서 몬스터를 막으며 외치는 드락쉬가 하는 말은 알아듣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드락쉬 목소리에 담겨있는 의지는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되었다.
 리더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한 그의 모습에 얼마 안 되는 힘이라도 보태주고 싶었지만, 개죽음이나 마찬가지일걸 알기에 차마 달려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락쉬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는지 후미에서는 지속해서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에 발이 꼬인 것일까, 승호가 발을 헛디디며 땅을 한 바퀴 굴렀다.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발목을 크게 접질린 건지 왼발을 땅에 내디딜 때마다 망치로 못을 박아 대는듯한 통증에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한 발로 뛰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게이트까지 남은 거리는 아득했고 주변에 잠시 몸을 숨길 곳을 찾기 위해서 눈을 재빠르게 돌려보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발록 휘하 몬스터 중 가장 깔끔한 체를 하는 뱀파이어들이 원시적으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화장실이 있었다.
 구덩이에 나무판 2개를 올려놓고 그 위에서 변을 보았는데, 얼마나 오래 사용한 화장실인지 똥구덩이에 똥이 가득 차서 나무판자에 똥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앞으로 뛰어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옆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몇 번이나 사람들과 부딪칠뻔하면서 가까스로 똥구덩이에 도착한 승호는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았다.
 하지만 각자 살아남기 바쁜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고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몬스터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똥구덩이에 몸을 담갔다.
 머리를 제외하고 모두 구덩이에 담그고는 구덩이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어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가장 최전방은 몬스터들을 뚫기 바빴고, 양쪽 측면은 나무가 우거져서 몬스터들도 운신이 힘들어서 소형의 작은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쉬이 공격하지 못했다.
 소형의 작은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최하급 몬스터들이었고 가끔 하나씩 하급 몬스터들이 섞여 있었지만, 측면의 몬스터들은 공격대에서 손쉽게 처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후미였다.
 드락쉬가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일진광풍처럼 휘몰아치며 거칠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정작 죽은 몬스터는 몇 없었다.
 오히려 몬스터들은 둘러싸인 드락쉬를 스쳐 지나가서 뒤처져있는 짐꾼들을 사냥했지만, 드락쉬는 자신의 주변 몬스터들만으로도 힘겨워 보였기에 도저히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똥통에서 주먹을 부서질 듯 움켜쥐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저 멀리 발록이 거짓말처럼 저 큰 덩치로도 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발록에게 도망치기 위해 폭풍을 뚫고 나가는 배처럼 공격대는 거칠게 앞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승호은 떨려오는 공포감에 몸서리치며 목까지 똥구덩이에 담갔고, 더는 공격대를 볼 수 없었다.
 간간이 고함과 찢어지는 듯한 비명,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발록의 날갯짓 소리만 들려왔다.
 더는 비명을 들을 수 없어 똥 범벅이 되어버린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 * *
 
 “···내가 본 건 그게 다야. 내가 본 마지막까지 드락쉬는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헌신적인 영웅의 모습이었어.”
 눈을 감은 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승호의 말에 민종은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요.”
 “그래, 드락쉬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대단했어.”
 “아뇨, 승호 씨가 정말 대단하다는 말입니다. 똥구덩이에 들어가서 살아남을 생각을 했다니···”
 민종의 말에 승호는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눈을 번쩍 떴다.
 “뭐?”
 “비꼬는 게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살아서 이렇게 돌아온 게 대단한 거죠.”
 승호는 민종의 말에 되물어보았지만, 민종의 어투에서는 전혀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정말 드락쉬도 대단하네요. 그곳에 홀로 남겨진 승호 씨조차 속을 정도로 사람들을 기만한 거잖아요.”
 “왜 계속 드락쉬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거야?”
 자신의 기억 속에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옛이야기 속 헌신적인 영웅과도 같던 그 모습을 퇴색하려고 하는 민종이 탐탁지 않게 보였다.
 민종은 승호의 반응에 손가락을 네 개를 쫙 폈다.
 “가장 먼저 첫 번째, 왜 짐꾼을 2군 개념으로 만들지 않았죠? A급이 헌터가 그 당시에 부족했다고 하지만 짐꾼까지 편성하지 못할 만큼 적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야, 같은 A급으로 평가받는데, 짐꾼 취급당하면 기분이 나쁘니까?”
 사실 D급으로 이루어진 짐꾼은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드락쉬가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도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굳이 자신의 주장대로 D급 헌터만으로 짐꾼을 꾸렸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도망친 짐꾼들이 욕을 먹었지만, 사람들의 머리가 식고 나자 결국은 드락쉬가 죽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 왜 짐꾼을 핵 근처까지 데리고 갔을까요?”
 “게이트 뒤편에 놔뒀다가 몬스터들이 공격하면···”
 승호는 말끝을 흐렸다.
 짐꾼이 D급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게이트 뒤편에 놔두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최후의 게이트 내부에서 짐꾼은 짐꾼이 아니라 짐 그 자체였다.
 “세 번째! 왜 드락쉬가 혼자 뒤에 남아서 핵을 파괴했을까요? 차라리 그 정도 돌파력이면, 앞에서 드락쉬가 뚫고 뒤에서 다수의 인원이 짐꾼을 지켜주는 게 훨씬 안전했을 텐데.”
 맞는 말이었다. 드락쉬의 몸은 하나였고 도망치는 길을 드넓었다.
 아무리 빠르게 드락쉬가 움직였다고 한들, 모든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네 번째! 왜 드락쉬는 늙지 않을까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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