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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1권 (1)

2019.01.29 조회 583 추천 3


 1. 입사
 
 
 
 
 
 
 
 
 
 
 민호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집을 뛰쳐나왔다.
 나이 스물여섯.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취업에는 실패했다. 엄마는 네 눈이 너무 높다며 매일 잔소리였고, 하나 있는 누나는 친구 중에 잘나가는 녀석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쓸데없는 소리로 귀찮게 했다.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식구들 그리고 평범함 이하의 자신. 모든 것이 싫어서 이판사판이라며 집을 나와 버렸다. 쉽게 말해 객기다. 덕분에 부모님의 지원은 하나도 기대할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편의점이나 게임방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꼭 가야만 하는 회사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곳으로 취업에 대한 눈높이가 바뀌었고, 2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아무 데나 좋다는 식이다. 하지만 대학 졸업 당시보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회사는 대학 졸업 예정자를 선호하다 보니, 졸업하고 2년 동안 줄기차게 아르바이트만 해 온 민호는 매번 낙방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민호가 회사 입장이라도 같은 방식으로 사원을 채용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민호는 꾸준히 이력서를 집어넣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실 민호의 눈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거창하게 사업을 벌려 한 달에 한 천만 원씩 벌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엄마의 푸념이나 누나의 무시, 아버지의 혀 차는 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왔을 뿐이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입버릇처럼 ‘내가 뭘 믿고 네놈을 낳아 미역국을 먹었냐.’, ‘미쳤냐, 내 친구를 너한테 소개해 주게. 망신살 뻗쳐.’, ‘동네 누구는 한 달에 300만 원 버는 직장인이란다.’라는 식의 비교들. 그렇게 기죽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도 현실은 괴로웠다.
 물론 여기에는 민호의 별 볼일 없는 이력도 한몫했다.
 개교한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대학의 인문계 출신.
 카이스트? 서울대? 연고대? 그 외 서울에 있는 각 대학들과 지방의 명문대들. 어째서인지 사회에는 그런 놈들 천지였다. 오히려 지방의 별 볼일 없는 대학 출신이 드물었다.
 그래도 남자가 체면이 있지, 처음부터 커트라인을 최하로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단지 그 정도의 자존심일 뿐인데 그것마저도 ‘네 이력 가지고는 그런 데도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공학계도 아니고 사회계도 아닌 인문계는, 상아탑에서는 어떨는지 몰라도 사회에서는 천덕꾸러기였다. 딱히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전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지식도 없었다.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그 어떤 대학보다 좁았다. 물론 따로 공부를 한다면 별개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고시에 매달린다. 그게 아니면 정말이지 한심할 정도로 암울하니 말이다.
 사실은 민호도 그러고 싶었다. 집에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지금쯤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9급에는 합격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가능성 없는 이야기다. 식구들 중 누구보다도 얄미운 누나가 ‘네가 그 머리로 공무원? 아서라.’라며 갈굴 테니까.
 그런 민호에게도 볕 들 날이 왔다. ‘한국 디멘션 개발’이라는 회사로부터 민호는 꼭 필요한 인재니 와 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결과였다. 한국 디멘션 개발이라는 곳은 연봉 3천이나 되는 기업이었다. 초봉이 그랬다. 함께 면접을 봤던 지원자들 중에는 고학력자들이 수두룩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한국 디멘션 개발.
 요상한 이름을 가진 이 회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뭔데 민호같이 형편없는 이력을 가진 남자를 뽑은 걸까? 뭔가 냄새가 났다. 그래도 민호는 거부할 수 없었다. 이번 추석에 집에 가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 아들이, 민호가 말입니다! 초봉이 연봉 3천이나 되는 회사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꼭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깨에 힘을 떡하니 주고, 특히 얄미운 누나한테는 ‘누나 친구들 따위 트럭으로 데리고 와도 안 받아 준다. 흥!’이라고 큰소리칠 생각이었다.
 한데,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나, 한국 디멘션 개발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 날 주임이라는 여자가 단상에 올라 이런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들의 교육을 맡은 고은지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본 회사는 사내 규율에 따라 강력한 보안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여러분들이 받을 석 달의 연수가 끝나면 회사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또한 석 달의 연수 기간에는 자택으로 귀가할 수 없으며 이후의 근무를 하는 데 있어서도 집과 떨어져 지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7기 신입 사원 여러분.”
 황당무계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연수를 받는 석 달 동안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연수가 끝나면 회사를 그만둘 수 없고 근무를 하면서도 집과 떨어져 지낸다니, 위험한 냄새가 났다.
 돌아가야 한다.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본능과 살아오면서 쌓은 이성이 경고음을 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호는 참았다. 마른침을 삼켜 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쑥덕대던 사람들 몇몇이 자리를 이탈하자 뒤이어 삼분의 이 정도가 장내를 빠져나갔다. 결국 남은 사람이 대략 20여 명 정도였다.
 “호오! 꽤 많이 남았네요, 올해는.”
 고은지라고 밝힌 주임은 뭔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민호는 이때 순간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신흥 종교이거나 ‘다단계’일지도 모른다고. ‘한국 디멘션 개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 말이다. 종교 이름치고는 좀 우습지만 세상의 한 귀퉁이에는 UFO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거야 귀여운 이야기고.
 “자, 그럼 따라오실까요? 아, 그리고 이제 와서 돌아간다고 해 봐야 소용없어요. 문은 밖에서 잠겼습니다.”
 확인 사살이었다. 민호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와서 그런 게 어딨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이 말렸다. 그래서 좋을 건 없다고. 조용히 기다렸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이는 오판이었다. 돌아가려고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시점에서 돌아가야 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일반적으로 빌딩에 설치되어 있는 크기의 세 배는 넘어 보였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옮길 때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보다도 넓었다.
 B10.
 층을 가리키는 곳에 불이 들어왔다. 고은지 주임이 버튼을 누른 것이다. 민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하 10층으로 가는 거니 당연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해서 말이다.
 평온했다. 수녀복을 입은 여자도, 중의 차림새를 한 여인도, 그 외 이상하게 차려입은 남자도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남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묘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명, 양복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호는 다가가서 슬쩍 말을 붙여 보았다.
 “잡담은 금지입니다, 신입 사원님.”
 매정하게 돌아온 한마디에 민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신입 사원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괜히 민망해져서 뒤통수를 긁는데, 고은지 주임이 몸을 돌렸다.
 “지금 가게 될 곳은 본사의 도서실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석 달간 도서를 정리하며 지정된 책의 내용을 전산에 입력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은지 주임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앞에서 석 달간 연수를 받을 거라고 했다. 연수를 받는데 도서관을 정리하고 책의 내용을 전산에 입력한다? 누구도 그런 일을 연수라고 하지는 않는다.
 결국 민호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네, 말씀하세요, 신입 사원 김민호 씨.”
 고은지 주임은 민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 네. 저기, 음······ 이런 거 물어보긴 좀 그런데요, 그게 연수입니까?”
 “네.”
 “어째서요?”
 “전산에 책의 내용을 입력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는 소리겠지요? 그것 자체가 연수입니다. 회사의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습니까?”
 민호는 일단 납득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책을 읽는 것이 연수라······ 책만 읽으면 회사의 일을 배우게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국 디멘션 개발 본사 지하 10층은 사실 도서관이 아니었다. 오래된 도서와 희귀 도서 그리고 여러 쪽지 같은 것들이 모여 있는 자료실이었다. 이걸 전산화하는 업무가 연수인 것이다.
 “자, 주목.”
 고은지 주임은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세어 보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지하 10층인데도 안테나가 서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있자 저쪽 안에서 두 명의 여자와 남자 한 명이 걸어왔다.
 “고 주임님 이제야 오셨습니까?”
 “살았어요.”
 “정말 상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나 같은 인재를 이런 일에······ 후우.”
 모두가 푸념이었다. 이제 민호의 불안감은 점점 증폭돼 심장박동마저 빨라졌다. 괜히 목이 말랐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고은지 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신입 사원 김민호 씨는 외부인이네요. 어쩌자고 남으셨을까. 하여간 겁먹지 말아요. 잡아먹는 회사는 아니니까. 이리 오세요.”
 고은지 주임의 말 곳곳에는 의심스러운 내용 천지였다.
 외부인? 어쩌자고 남아? 하여간 겁먹지 말고? 잡아먹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내용이 대체 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여기까지 왔으니 별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은지 주임에게 다가갔다.
 “박 대리.”
 고은지 주임의 호명에 안쪽에서 나온 남자 하나가 걸음을 옮겼다.
 “네, 주임님.”
 “11층 서고 B1 구역 업무 아직 안 했지? 가져와.”
 “에?”
 박 대리라고 불린 사내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이야기였다. 대리가 주임한테 머리를 숙인다? 민호는 뭘까 싶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회사가 있고 각각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을 수 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 버렸다.
 “잔말 말고 가져와.”
 “주임님, 하지만 거기는.”
 “박 대리.”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신입 사원 김민호 씨는 여기 있는 박 대리를 따라가세요. 그리고 나머지는 저를 따라옵니다.”
 고은지 주임의 말에 박 대리는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민호에게 다가왔다. 팔을 붙잡고 땅이 꺼질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민호 씨라고 했죠? 갑시다.”
 “네?”
 “민호 씨는 저와 함께 한 층 더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죠. 계단은 없으니까.”
 “네.”
 민호의 불길한 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11층 서고 B1 구역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래, 각양각색의 쪽지 뭉치와 어디서 가져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루마리들, 그 사이사이에 하드커버의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실 B1 구역만이 아니었다. 11층 전체가 그랬다.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여기는 위험합니다.”
 박 대리가 말했다.
 “예?”
 민호는 물음표를 띠웠다. 여기가 위험하다니? 책이나 종이가 칼 들고 덤비기라도 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뻔했다. 하지만 여기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 뭉치들과 기괴한 책들에는 손이 달리지도, 발이 달려 있지도 않았다. 다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굉장히 잔혹한 이야기가 실린 책인데 그 책을 읽으면 계속 웃게 된다거나, 굉장히 우스운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하염없이 울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11층은 상식 이상의 힘이 깃든 책과 종이 들을 모아 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B1 구역엔 저주받은 것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읽으면 사흘 내로 죽는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런 건 11층에 없었다. 다만 읽으면 조금 귀찮아지거나 부끄러워지는 정도였다. 그런 덕에 민호도 할 수 있었다. 할 수는 있는데 신입 사원 연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정식 직원의 업무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 잠은 이쪽에서 주무시고요, 밥은 하루에 세 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박 대리는 정말 사람 좋은 얼굴로, 연수라는 탈을 쓴 정직원의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민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는 책과 문서들 가운데서 지정된 것을 찾아 전산 입력하면 된다는 것은 어찌 됐든 저주를 받았느니 이상한 기운이 담겨 있느니 하는 설명은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뭘까? 대체 뭘까?
 민호는 박 대리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지하 11층에서 혼자 서류 정리라니.
 연봉 3천이라는 이야기부터가 수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뭐랄까, 이건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모르겠다.’
 민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박 대리가 알려 준 침소로 걸어갔다. 까놓고 말하면 침소라고 하기도 뭐했다. 하드커버의 책들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 시트가 깔려 있는 것뿐이었다.
 그게 잠자리고, 근처엔 화장실이 있었다. 불을 켜고 끄는 스위치도 있었다.
 “어쩌지.”
 민호는 일은 팽개쳐 놓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왜 이런 곳에 끌려왔을까,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배에서 벌레가 꾸륵 하고 우는데 박 대리가 왔다.
 “식사 가져왔어요, 민호 씨.”
 박 대리는 싱글벙글했다.
 “아, 네.”
 민호는 힘없는 얼굴로 일어나서는 박 대리에게서 식사를 받았다. 빵과 과일 그리고 잼이 다였다.
 할 말을 잃었다.
 “민호 씨?”
 박 대리가 굳어 있는 민호의 기색을 살피다 말을 걸었다.
 “저, 이게 무슨.”
 “저녁입니다.”
 “네?”
 “국물 같은 것은 튀니까요. 반입 금지입니다.”
 “물은요?”
 “아, 물요. 깜빡했네요. 먹고 계세요. 가져오겠습니다.”
 박 대리는 그저 웃으면서 일어났다. 민호는 속으로 ‘지금 장난하나! 이걸 저녁이라고 가져온 거야?’ 하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가자.’
 그래, 여기는 뭔지 모르지만 이상한 곳이다.
 민호는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연수가 시작되면 석 달 동안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며 퇴사도 불가능하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퇴사를 시켜 주지 않을 거면 죽이라고 윽박지르면 되지 않겠냐 싶었다.
 “다녀왔습니다.”
 박 대리는 1.5리터짜리 생수 두 병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이걸로 내일 아침까지 버티라는 말을 남기고는 일이 있다며 가 버렸다. 민호는 박 대리를 불러 보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냐, 이건. 장난하냐!’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민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연타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민호는 이게 뭐냐고 한참 성질을 내다가 배가 고파졌는지 박 대리가 가져온 음식들을 먹어 치웠다. 그러고 있으니 심심해졌다. 나갈 수는 없고 해서 주변에 널려 있는 책이나 종이 뭉치에 흥미를 두었다. 뭐가 적혀 있는 걸까······. 민호는 호기심에 함부로 만지면 위험하다는 박 대리의 말을 살짝 접어 두었다. 죽지는 않는다니 구경이나 하자는 심보였다. 업무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하나 집어 들어 펼쳤는데······ 그는 말문이 막혔다.
 어떤 것을 펼쳐도 본 적도 없는 문자가 한 가득이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누가 엿 먹이려고 일부러 꾸민 흉계가 아닌가 하고.
 하지만 진실은 박 대리가 민호에게 배지를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국 디멘션 개발은 정직원에 한해서 특별한 배지를 부여한다. 착용자는 어떤 언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만능 통역의 힘이 그것이다. 신입 사원들이 연수를 받고 있는 10층에서는 필요 없지만 11층에서는 꼭 필요했다.
 박 대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다음 날, 민호의 항의를 들은 박 대리는 서둘러 고은지 주임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민호가 11층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정직원의 배지가 필요하다고. 본래 연수생에게 배지를 주는 것은 사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은지 주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연수가 끝나면 정직원이 될 건데 뭘 신경 쓰냐며 그냥 배지를 주었다.
 “가져왔습니다, 민호 씨.”
 박 대리가 배지를 주었다. 기묘한 도형의 금색 배지였다. 민호는 이게 뭐냐고 물어보고는 후회했다. 정직원이 갖는 배지라는 말에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신이시여, 저를······ 아니, 나를 버리는 거냐? 썅!’
 가운뎃손가락을 불끈 치켜세워 신의 턱을 날려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불러들인 화라고. 이렇게 된 이상 이 기묘한 곳에서 잼과 빵, 과일을 주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우울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도서관에 국물이 튀는 음식은 반입 금지라지만 그래도 고기 비슷한 거라도 먹고 싶었다. 민호는 토끼나 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박 대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식사나 챙겨 주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할 일만 주면 다였다.
 “그럼, 여기 있는 목록 부탁드립니다. 오늘 내로.”
 “네?”
 “점심때 올게요.”
 박 대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아.”
 민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사실 서류라고 할 것도 없었다. A4용지 한 장 안에 담겨 있는 목록이 다였다.
 ‘가만있어 보자, 첫 번째는.’
 그렇게 민호는 한국 디멘션 개발에서의 첫 업무를 시작했다.
 
 열흘이 흘렀다. 얼떨결에 업무를 시작한 민호는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울면서 읽거나 슬픈 이야기를 폭소를 터트리며 읽는 건 약과였다. 홀딱 벗고 엉덩이로 이름 쓰면서 일을 하기도 하고 5초 단위로 울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 덕에 업무는 하염없이 밀려만 갔다. 식사 담당인 박 대리는 그런 민호를 보며 쓴웃음을 터트렸다. 이것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할 뿐이었다. 그에 민호는 ‘네가 내 심정을 알아!’라고 버럭 소리쳐 주었다.
 뭘 슬퍼하지 말라는 건지. 남은 문서 하나 읽을 때마다 심장이 두 근 반 세 근 반인데, 생글거리는 얼굴로 말하다니 너무 얄미웠다. 누나보다 더.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열흘 동안 고생하다 보니 조금은 익숙해져서 어지간한 상황에는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체념하듯이 ‘뭐, 이 정도야.’라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또 열흘이 지나 한국 디멘션 개발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민호는 계속 지하 11층 B1 구역에서 잼과 빵, 과일 몇 조각으로 연명했다.
 고기가 먹고 싶었다. 삼겹살과 고기 뷔페, 소갈비구이······.
 휴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들은 박 대리가 말했다.
 “연수 끝나면 드려요.”
 민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대체! 이 회사는 근로 기준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한 달이다, 한 달. 한 번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이 지하에서 요상한 문서들과 씨름하는 데 휴일이 없다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봉급은 높지 않습니까? 민호 씨 이력으로는 이런 직장 어림없어요.”
 박 대리가 놀리듯 말했다. 민호도 아는 사실이지만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이력이 나쁘다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 오늘도 수고하세요, 민호 씨.”
 오늘도 싱글벙글한 박 대리가 11층을 떠났다. 민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업무에 착수했다. 투덜거린다고 화낸다고 일거리가 주는 것도 아니고 고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연수가 끝나면 휴일을 준다니 일단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연봉 3천, 추석 때 집에 돌아가 큰소리칠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오늘도 일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시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이제 민호는 제법 일에 익숙해져서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하게 되었다. 읽으면 요상한 상태에 빠지는 문서들 따위 이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쌓여 있던 과제들도 제법 처리를 하게 되어서 박 대리의 칭찬을 들었다. 그로서는 꽤 의외의 일이었는지 몇 번이고 놀라기도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잠을 자는데 꿈에 어떤 늙은이가 나왔다. 그는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 차림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꿈속이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무시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마법사는 민호의 머리에 손을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고 얼마 있지 않아 민호는 이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잠을 자다가 돌연 손을 뻗어서는 ‘파이어 볼!’이라고 외친 것이다. 어느 날은 ‘아이스 커터!’ 또 어느 날은 ‘윈드 익스플로전!’이라고도 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러고 나면 알 수 없는 공식과 지식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뭘까?
 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꿈은 꿈이고 자면서 잠꼬대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업무에 충실했다. 그렇게 두 달 하고 절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진홍의 불꽃, 화염의 정령. 영원을 걷는 불길의 존재여. 여기에 등장하여 나와 계약하라.”
 꿈에서 지껄인 대사를 현실의 민호도 지껄이고 있었다.
 화륵!
 그때, 허공에 불길이 나타났다. 둥근 불길이 구슬프게 울더니 새의 형상을 갖추었다. 지하 11층 전체가 꽉 찰 정도로 거대했다. 그럼에도 책과 종이 뭉치들은 무사했다. 불은 불이되 물리적인 불이 아닌 것이다.
 “응?”
 민호는 눈을 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대가 나를 불렀는가, 인간?
 불길의 새가 말했다.
 민호는 어리둥절했다.
 -너는 엘마니움의 후계자구나. 사정은 알았다. 너의 힘이 되어 주지. 엘마니움과의 계약에 따라.
 그러고는 불길의 새는 자취를 감추었다.
 “꿈이지?”
 민호는 너무나 현실성 없는 상황에 다시 눈을 감았다.
 10분 후, 1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박 대리와 방화복을 입은 수십 명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발소리에 민호는 덜 깬 눈으로 일어났다.
 “후아암!”
 평온한 모습이었다.
 “민호 씨?”
 박 대리가 말했다.
 “네?”
 민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박 대리는 알겠는데 포위하듯 서 있는 방화복의 사내들은 누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 징후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리는 언제나와 같이 싱글거리지 않았다. 잔뜩 굳은 얼굴로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민호는 잠시 생각하다 꿈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차피 꿈이니 이상 징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거라고.
 그런데 웬걸, 박 대리는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버려서는 민호의 멱살을 잡았다.
 “대박이군요, 민호 씨! 엘마니움의 후계자가 되다니 말입니다!”
 민호로서는 사정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대박이라는 단어는 기분이 좋았다.
 대박이란다, 대박. 뭔가 왕거니를 건졌다는 뜻일 터였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좋은 이야기였다.
 엘마니움은 언젠가 어딘가에 존재했던 마법사다. 그 마법사는 어떤 세계와 경계라도 넘어 모든 진리를 깨달은 지고의 존재였다. 그의 유산은 한국 디멘션 개발이 엄중 보관하는 물건들 중 하나로, 지하 11층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소리다.
 한국 디멘션 개발 본사 지하 10층, 11층, 12층 등은 여러 사원들이 가져온 각종 자료를 모아 두는 장소였다. 그렇다 보니 어떤 내용의 문서들이 어떻게 모아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연수라는 이름을 빌려 전산화 작업을 마치려는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민호가 엘마니움의 유산과 접촉해 후계자가 되고 말았다.
 “박 대리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법사다 유산이다 하는 것이, 민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박 대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박 대리는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지하 11층인데도 잘만 터지는 모양이었다.
 “민호 씨.”
 “네.”
 “주임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가시죠.”
 “주임님?”
 “고은지 주임 말입니다. 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
 민호는 자신만 11층으로 보내 버렸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은지는 이지적인 인상에 키가 훤칠한 미인이었다. 성격도 그랬다면 좋을 테지만 박 대리의 말을 빌리면 사내에서 조심해야 할 인물,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건드리면 맞는다. 그래, 맞는 거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그럼 가죠, 민호 씨.”
 박 대리가 앞장섰다.
 
 차원 개발부 자재 관리과.
 기묘한 팻말에 민호는 생각했다. 차원 개발? 차원 개발의 자재 관리과? 대체 이 회사 정체가 뭐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상식에서 어긋나기만 해서 이젠 두통까지 일었다. 지하에서 문서를 정리할 때도 그런 생각은 늘 했다.
 지하 11층 B1 구역에 있는 문서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괴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일대기나 사건의 세부 사항이 적혀 있는 것에서부터 해서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의 정보가 적혀 있기도 하고, 혹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 전혀 알 수 없는 내용들도 있었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그런 문서를 모아서 쓸데는 없을 터였다.
 “사고 한번 제대로 치셨군요, 민호 씨.”
 민호를 맞는 고은지 주임은 무척이나 떫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민호를 따라온 박 대리의 얼굴에 시선이 꽂히더니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표정이 바뀌어 버렸다.
 “박 대리.”
 “네, 주임님.”
 “당신. 내년 오늘 제삿밥 먹고 싶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박 대리가 한 짓은 중대한 사칙 위반이라고. 알아?”
 “······.”
 “그럼 죽어야겠지?”
 “주임님. 침대에서 죽여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얼굴로?”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아무튼 그건 조금 있다 해결하기로 하고, 민호 씨는 이쪽으로 오세요.”
 박 대리와 입씨름하던 고은지 주임이 민호를 바라보았다.
 “네.”
 민호는 방금 일어난 살 떨리는 장면에 간이 오그라들었다.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어 버린 판도라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자질구레한 건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검사부터 받아요.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 하니까요.”
 고은지 주임의 말이 전혀 설명이 되고 있지 않았지만 민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서워서 묻지를 못했다.
 “그리고 박 대리는 조용히 따라오도록 해. 도망치면 알지?”
 “넵!”
 대답하는 박 대리의 목소리에는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민호는 경직되어 가는 분위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히 하고 있는 것이 좋다며 고은지 주임을 졸졸 따라갔다.
 인재 관리부 검사과.
 앞서 봤던 팻말과 마찬가지로 수상한 느낌의 문구였다.
 “들어가세요.”
 고은지 주임이 말했다.
 “여기는?”
 민호는 뭐 하는 곳인지 알고 싶었다.
 “들어가면 알아요, 신입 사원 김민호 씨.”
 고은지 주임은 친절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흰색 옷을 입은 두 명의 여자가 나와 민호의 양쪽 팔을 잡았다.
 “가요.”
 “민호 씨.”
 둘은 친절하게 말을 걸며 걸음을 옮겼다.
 “어?”
 민호는 불길한 느낌에 발에 힘을 주었다. 이유나 알고 가고 싶었지만, 두 여자의 힘은 남자인 민호의 힘 따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질질질.
 딱 그런 느낌이었다. 민호가 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고은지 주임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발을 돌려 박 대리의 멱살을 잡았다.
 “갈까?”
 언뜻 듣기에 고은지 주임의 목소리는 싱그러웠다. 아침 햇살이나 공기처럼.
 그러고는 차원 개발부 자재 관리과에 속한 창고 중 하나로 직행했다.
 달칵.
 창고의 문이 닫혔다.
 “저, 주임님.”
 박 대리가 말을 걸었다.
 “할 말 있어?”
 “살려는 주십시오.”
 “기각.”
 “······.”
 “직권을 이용해 봉인 관리 중인 엘마니움의 마법서를 반출한 죄는 커.”
 고은지 주임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그게 말이죠. 사실은 그냥 살짝 보고 갖다 놓을 생각이었단 말입니다. 애당초 11층에 김민호 씨를 보내 버린 건 주임님이지 않습니까. 원래 거긴 제가 일하는 곳이었다고요.”
 박 대리가 항의했다.
 “박 대리.”
 “네.”
 “그래서 결과는 어떻지?”
 “······.”
 “봉인 관리 중인 물건을 반출해서 연구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하진 않겠어. 엘마니움의 마법서 같은 건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말이지, 이렇게 걸려 버리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
 고은지 주임의 목소리에는 살의가 배어 있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일단은 입을 맞춰서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으로······.”
 박 대리는 필사적이었다.
 “성불해, 박 대리.”
 고은지 주임은 씨익 웃고는 박 대리의 명치에 무릎 차기를 날렸다. 내리치는 번개가 이럴까? 육안으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퍼퍼퍽, 퍼퍽!
 “으아아아악!”
 박 대리는 정말 죽도록 맞았다.
 
 검사는 현대 의료 장비를 이용한 건강진단부터 시작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의식에 이르기까지, 약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그 결과 민호는 ‘마법사가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을 받게 되었다. 불덩이를 날리고 사물을 얼리고 파괴하는 바로 그 마법사였다.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민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법사란다, 마법사. 게임이나 만화에 나오는 그 마법사 말이다. 그것도 전설에나 등장하는 엘마니움인가 하는 대마법사의 후계자라고 했다. 굉장한 일이었다. 하찮은 민호의 이력서에 자랑할 만한 이력이 추가된 셈이다.
 뭐,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추석 때 집에 가서 ‘엄마 나 마법사 됐어! 굉장하지?’ 이랬다가는 주걱으로 얻어맞을 터다. 서른이 다 된 게 헛소리한다고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도 기밀누설죄로 가만있지 않을 테고.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나았다. 일단 직급이 대리로 오르고 연봉도 그에 맞춰 상승했다. 입사하자마자 횡재한 셈이었다.
 차원 개발부 자재 관리과 김민호 대리.
 기분 좋은 칭호였다. 그리고 한국 디멘션 개발이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차원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적인 이동으로 갈 수 있는 우주의 어느 곳도 모두 같은 차원에 속했다. 그리고 물리적인 이동으로 갈 수 없는 세계를 다른 차원이라고 부른다. 각 차원은 무수히 겹쳐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한다. 그들 중에는 때때로 멸망한 차원들도 존재했다.
 멸망한 차원에는 지구에 필요한 많은 자원들이 있었다. 광석이나 석유 혹은 귀금속 같은 것 말이다. 때로는 희귀한 기술도 있었다. 이쯤 설명했으면 눈치챘겠지만, 한국 디멘션 개발은 멸망한 다른 차원에 가서 기술이나 여러 물질을 확보하는 회사였다. 가끔은 특정한 이유를 가지고 해당 차원을 재개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디멘션 개발이라는 이름이었다. 올해가 창립 7주년 되는 해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검사를 마친 민호는 한국 디멘션 개발 본사의 부속 건물인 기숙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네, 나갑니다.”
 민호가 나가 문을 열었다.
 “민호 씨, 축하합니다. 대리가 되었군요.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 대리였다. 어제만 해도 양팔에 깁스를 하고 얼굴은 멍투성이였는데 오늘은 멀쩡했다. 민호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이유를 물었다.
 “돈의 힘입니다. 역시 치료술이 좋긴 좋아요.”
 박 대리는 고은지 주임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아 사지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열두 대나 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았다.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휴식을 취하다가 어제 치료술을 받았다.
 한국 디멘션 개발 지하 1~3층엔 정직원들이 이용하는 여러 업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치료술사 안나의 집’이라는 곳인데 어떤 상처든지 돈만 내면 순식간에 낫게 해 주는 가게였다. 돈이 좀 들어서 그렇지 효과는 탁월하단다.
 이야기를 들은 민호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친 그날 치료받으면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면 주임님께 또 맞아요. 김 대리도 이제 한식구가 되었으니 기억해 둬요. 주임님께 맞으면 일주일은 그대로 버텨야 해요.”
 박 대리의 이야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민호는 일단 선배 박 대리의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리고 오늘 환영회 말인데, 근사한 곳으로 갈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요.”
 “네.”
 “그럼 슬슬 준비하고 가죠.”
 “알겠습니다.”
 민호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환영회는 박 대리가 말한 대로 정말 근사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고급 양주와 안주들이 즐비하고 예쁜 아가씨들이 양옆에 앉아서 시중을 들었다.
 ‘세상은 대체 뭘까?’
 그러나 민호의 마음은 복잡했다. 지금 민호와 고은지 주임 그리고 자재 관리과 소속 직원들이 있는 곳은 어떤 세계의 휴양지였다.
 어떤 세계의 휴양지가 뭐냐면, 말 그대로 어떤 세계의 휴양지다. 개발 관리부에서 사원 복지를 위해 한 멸망한 차원의 파편을 재개발했다. 라스베이거스가 울고 갈 정도의 화려함과 쾌락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디멘션 개발 사원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물론 가끔은 다른 목적으로도 이용된다.
 아, 여기서 잠깐. 차원의 파편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 즉 하나의 차원이 멸망한다는 것은 차원에 속해 있는 동물이나 문명 등이 멸종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차원 그 자체가 파괴된다는 소리다.
 무슨 소린가 하면, 하나의 우주가 유리 깨지듯 조각조각 나뉜다는 것이다. 부서진 차원의 파편은 차원들의 경계를 떠다닌다. 그러다 다른 세계에 흡수되기도 하고 그냥 소멸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튼, 차원의 파편은 흐름이 정지했다. 여기서 흐름이란 인과의 선을 뜻한다. 어떤 지역의 차원이 부서질 무렵 한여름의 정오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 지역은 영원히 한여름의 정오다. 가을은 물론이고 밤도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소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특별히 생활에 불편함을 겪지는 않는다. 기온이나 물의 양, 초원의 상태 등 모든 것이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인간들의 생활까지는 아니다.
 인간들은 그 상황에서 싸울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연구를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정지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상태 유지라고 보는 편이 좋았다. 차원이 깨지면 그렇게 된다. 인과의 흐름이 고정되어서 변함이 없다. 인간과 같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들만이 세상이 이상해져 버렸다고 알 수 있었다.
 “안 드세요, 김민호 대리님?”
 지금 민호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자도 어떤 차원의 파편에서 넘어온 유민이었다. 고양이 귀와 꼬리 그리고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다. 덤이지만 착 달라붙는 원피스가 아주 돋보이는, 매력적인 몸매의 여자였다.
 “으응?”
 민호는 다른 세계 다른 종족 여자의 시중에 위축된 반응을 보였다. 같은 인간 여자의 시중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판에 다른 종족이라니 난감한 이야기였다.
 고양이 귀와 고양이 꼬리를 가진 이 여자는 묘인족이라고 불렸다. 한국 디멘션 개발에서 멋대로 붙인 명칭이었다.
 이쯤 되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국 디멘션 개발의 직원은 거의 신과 같았다. 직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여기 아가씨들은 사족을 못 쓴다. 재수가 좋아 사원과 결혼을 할 경우 한국에 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술법을 사서 한국의 시민권을 살 수 있었다. 아니면 중계를 통해 상태가 양호한 차원의 파편으로 이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돈을 많이 번다면 한국 디멘션 개발에 의뢰해 차원의 파편을 재개발할 수도 있었다.
 “이쪽에도 있어요, 김민호 대리님.”
 이번에는 다른 쪽의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악마 꼬리와 박쥐 날개 같은 귀를 가진 여자였다. 이들은 서큐버스라고 불리는 종족이었다. 고위 서큐버스는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그런 존재는 없었다. 여기는 사원들을 위한 레저 시설로 사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자는 배제되기 때문이었다.
 “아, 응.”
 민호는 서둘러 잔을 비우고 서큐버스 일족 아가씨에게 내밀었다.
 “김 대리 술 잘 먹네.”
 고은지 주임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양옆에 미남을 끼고 있었다. 공손하게 내미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술이 가득 차 있는 글라스를 한 번에 들이켰다. 굉장히 호방한 인상이었다.
 “하하.”
 민호는 그냥 웃어 버렸다. 술을 잘 먹어서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시중드는 자리가 처음이다 보니 굳어 버려서 그냥 주는 대로 마시고 있었다. 평소라면 쓰러져도 벌써 쓰러졌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 데는 남자로서의 오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박 대리는 이미 한참 전에 쓰러져서 아가씨들과 함께 자리를 이탈한 상태였다.
 “그럼 한잔할까?”
 고은지 주임이 잔을 내밀었다.
 “예?”
 “건배.”
 “아, 네.”
 민호는 서둘러 잔을 들었다.
 쨍.
 맑은 소리가 울리고, 둘은 나란히 술을 마셨다.
 “자, 한잔 따라 봐.”
 고은지 주임이 잔을 내밀었다.
 “네.”
 민호가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이번에는 고은지 주임이 민호에게 술을 따랐다.
 그리고 원 샷. 다음에는 서로 술을 채워 주고 원 샷. 또 원 샷.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민호는 고은지 주임이 주는 대로 전부 받아 마셨다.
 ‘윽. 뱅글뱅글.’
 그랬더니 시야가 이쪽저쪽으로 회전했다.
 “김 대리님? 김 대리님!”
 옆에서 보고 있던 이 세계의 여자들이 민호를 불렀다.
 쾅.
 민호는 대답하지 못하고 바로 고꾸라졌다.
 
 민호는 아름다운 인형들로 치장된 방에서 눈을 떴다. 묘인족 아가씨가 어젯밤 술에 떡이 된 민호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왔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술만이 아니라 하룻밤까지 처음부터 계산이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한 척 자리를 빠져나왔는데 민호는 처음이어서 이 사실을 모르고 버티다 고은지 주임과 대작을 하게 된 것이다.
 고은지 주임은 남자들이 가는 2차를 상당히 싫어했다. 하지만 세상의 반은 남자라고, 남자들은 그런 서비스를 좋아했고 또 고은지 주임의 상관은 물론 동료, 부하들 중 남자는 많았다. 더구나 자신의 돈을 쓰는 것도 아니다. 다 회사 돈이다. 자신이 싫다고 부하나 상사, 동료에게 그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술로 남자를 죽여 버린다. 그럼 2차를 가도 일은 치르지 못할 것 아닌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러한 사정을 고은지 주임의 주변 남자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아, 머리야.”
 민호는 숙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셨어요?”
 옆에 있던 묘인족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분홍색 머리에 앙증맞은 고양이 귀, 커다란 눈망울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아.”
 민호는 시야에 들어온 묘인족 아가씨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꿈이 아님을 알았다.
 “일어나셨네요. 숙취 해소제 가져올게요.”
 묘인족 아가씨는 침대를 빠져나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뒷모습이 뇌쇄적이었다. 팔 하나로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허리에 도톰한 둔부 그리고 가슴의 실루엣이 보였다. 뒤에서도 슬쩍 보일 정도니 상당한 글래머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민호의 물건은 반응이 없었다. 술을 너무 마신 탓이다.
 ‘으으.’
 그래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뭐가 어쨌든 너무 괴로웠다.
 “여기요.”
 묘인족 아가씨가 잔 하나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다. 뒷모습에서 알 수 있었듯 묘인족 아가씨는 정말로 글래머였다. D컵? G컵? 아니면 F컵 정도? 그럼에도 처진 기색이 없고, 꼭 탐스러운 두 개의 천도복숭아 같았다.
 “으응.”
 민호는 금방 눈을 뗐다. 여자의 환상적인 몸매는 안중에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숙취 해소제 쪽이 절실했다.
 “너무하세요. 어젯밤 안아 주시지도 않고. 무슨 술을 그리 마시셨어요? 몸에 안 좋아요.”
 묘인족 아가씨가 말했다. 너무나 상냥한 목소리에 민호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환상적으로 어긋나 있는 아주 바람직한 여성의 몸을.
 “······.”
 민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는 숫총각이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몸, 그것도 잡지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이 울고 갈 정도의 몸매는 민호의 사고 회로를 한 방에 정지시켰다.
 “안고 싶으세요?”
 “으응?”
 “호호. 서비스해 드릴게요.”
 묘인족 아가씨는 한 걸음 민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민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묻어 버렸다. 부드럽게 위로 아래로 문지르고는 민호의 뺨에 키스를 해 주었다.
 민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묘인족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술만 덜 드셨어도 더 진한 서비스를 해 드렸을 텐데 아쉬워요, 김 대리님.”
 묘인족 아가씨는 거기서 딱 선을 그었다. 아무튼 지금은 낮이고 민호는 출근을 해야 했다. 더구나 낮의 서비스는 따로 돈을 받아야 했다.
 “응? 아, 응.”
 민호는 서둘러 정신을 챙겼다.
 “참, 메모 있어요. 박 대리님께서 일어나면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응.”
 묘인족 아가씨는 쪽지를 읽는 민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몇 시?”
 민호가 물었다.
 “에. 지구 시간으로는 12시 40분 정도예요.”
 “컥.”
 “김 대리님?”
 “큰일 났다. 10시까지 오라고 적혀 있는데. 이런!”
 민호는 벌떡 일어나서는 옷을 챙겨 입었다. 벌써 몇 시간이나 늦은 건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김 대리님, 이쪽이에요.”
 그사이 묘인족 아가씨도 옷을 챙겨 입고는 앞장섰다. 민호는 신입 사원이니 길을 잘 알려 주라는 고은지 주임의 당부가 있었다.
 “응.”
 민호는 묘인족 아가씨의 뒤를 따랐다.
 “김 대리님.”
 “응?”
 “제 이름은 아르예요. 잊지 마세요. 언제든지 아르는 김 대리님을 환영할게요. 또 오세요.”
 아르라고 자신을 밝힌 묘인족 아가씨는 명함 하나를 민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은 민호는 손을 감싸는 따뜻한 감촉에 잠시 넋을 잃었다.
 
 민호는 오후 2시가 돼서야 자재 관리과 사무실로 돌아왔다. 차원을 넘을 때 시간이 흐른 탓이다.
 “김 대리, 지금 몇 시?”
 고은지 주임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몇 시?”
 “2시입니다.”
 “4시간 지각했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죄송합니다.”
 민호는 망가진 카세트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고은지 주임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민호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멱살을 잡았다.
 “김 대리.”
 목소리엔 살기마저 담겨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민호의 목청이 커졌다.
 “그 말은 실컷 들었는데?”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소리고.”
 “죄송합니다!”
 “어제 그렇게 좋았어? 아가씨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근무 시간까지 제치고 논 거야? 응?”
 “그런 일 없습니다!”
 “김 대리.”
 “······.”
 “솔직히 말해. 응? 나 그렇게 쫀쫀한 상사 아니다. 어때? 좋았어?”
 고은지 주임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민호를 몰아세웠다. 이를 듣고 있던 사무실의 여러 동료들은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신입이 첫날부터 신고식을 단단히 치른다고 말이다.
 “아, 아닙니다.”
 “기분 나빴어? 하긴 했다는 소리네.”
 “네?”
 “술에 떡이 돼도 여자 안을 정신은 있었나 보지? 좋았겠다. 그치?”
 “그런 일 없습니다!”
 민호는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목청을 높여 대꾸했다. 그렇게 30분을 휘둘리고 나니 고은지 주임이 본론을 꺼냈다.
 “따라와.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그때는 병원에서 업무 보게 만들어 줄 거니까 조심하고.”
 “네.”
 민호가 고은지 주임을 따라간 곳은 자재 관리과에 속해 있는 봉인 관리실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강력하고 특별한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장소로, 자재 관리과 직원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자, 이제부터 이건 김 대리 장비야. 회사 물건이니 잃어버리지 마. 김 대리가 천년을 살면서 일한다고 해도 살 수 없어.”
 고은지 주임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엘마니움의 유산이 들어 있었다. 로브, 장갑, 망토, 지팡이, 펜던트, 반지 그리고 두꺼운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장비요?”
 민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응. 엘마니움의 후계자니까 주는 거야. 자세한 성능과 효과는 아무도 모르니까 알아내서 보고서 작성해. 그리고 말이지, 파트너 결정에는 시간이 걸릴 거야. 그동안 수련해 둬. 죽기 싫으면.”
 “수련 말입니까?”
 “응. 마법사니까 마법은 써야 할 거 아냐. 제대로 수련해 두지 않으면 실전에서 죽을걸. 솔직히 김 대리가 죽는 거야 상관없지만 외부 사원이 죽어 버리면 곤란하거든.”
 고은지 주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민호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민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라?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네. 괜히 대리 연봉이 6천이 아냐. 좌우간 일은 하다 보면 알 거고, 일단은 수련이야. 앞으로 일주일은 출석 도장만 찍고 수련이나 해.”
 말하는 게 생각해 준다는 투였다.
 “주임님.”
 “왜?”
 “뭘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 책 있잖아. 눈은 장식이야?”
 “아.”
 “그리고 수련관은 따로 있으니까 거기 가서 하고. 정 모르겠으면 7층에 있는 상담실 찾아가 봐.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알려 줄 거야.”
 “네.”
 “그럼 가 봐. 나도 일이 있어.”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엘마니움의 마법서≫.
 민호가 받은 책의 이름이었다. 머리말에는 ‘연자에게 나의 유산을 남긴다. 부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라며 저자 엘마니움의 넋두리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대충 넘기니 ‘입문 편’이 나왔다. 마법이란 무엇인가, 마법의 종류, 마법의 구성 등 마법사가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이 실려 있었다.
 한번 쭉 훑어본 민호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내용 자체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런데 산이 물이 될 수도 있고 물이 산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산이 물은 아니며 물이 산은 아니다.’라는 식이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어려운 수학 공식이나 알 수 없는 도형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입문 편을 넘기니 목차가 나왔다.
 “응?”
 목차는 공통과 화염, 달랑 두 가지만 적혀 있었다. 민호는 코웃음을 치며, 책은 두꺼운데 내용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충 훑어보는데,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책의 삼분의 이가 백지였다. 연습장인 걸까 싶어서 펜으로 낙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무슨 수를 써도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희한하네.”
 민호는 태우거나 물에 빠뜨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회사의 물건이니 잃어버리거나 하지 말라는 고은지 주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기본 수행부터 해 볼까? 가만있어 보자,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다고 했지. 명상법이네. 앉아서 혹은 누워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고르며 긴장을 풀고 우주와 하나가 되어라?”
 대충 내용을 요약한 민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우주와 하나가 되라니, 뚱딴지같은 요구였다.
 인간인 민호가 무슨 수로 우주와 하나가 된단 말인가.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어서 한참 고민을 하다 일단 누웠다. 눈을 감고 긴장을 풀며 호흡하니 잠이 왔다.
 다음 날.
 눈을 뜬 민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명상을 한답시고 잔 것이 어제 오후 6시 경이었다.
 “뭐야, 이건!”
 만 하루, 24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말았다.
 “배고파.”
 민호는 기숙사에 비치되어 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당연히 텅 비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본사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 먹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이번엔 앉아서 명상을 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어제처럼 자 버리면 곤란하니 말이다.
 한데 또 자 버렸다. 어김없이 만 하루 만에 깨어나 인스턴트식품으로 배를 채우니 오기가 생겼다.
 “커피를 마시자.”
 커피를 듬뿍 넣은 블랙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고 앉아서 명상을 시작······ 또 잠이 들었다. 24시간 만에 정신을 차려서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장난하냐? 장난해? 김민호, 너 죽을래?”
 스스로에게 협박을 한 민호는 배에서 들리는 벌레 소리에 마트로 갔다. 그리고 또다시 인스턴트식품으로 배를 채우고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자지 않을 수 있지?’
 곰곰이 생각하던 민호는 박 대리를 불렀다. 명상을 하려고 하니 잠들면 깨워 달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명상을 하다 잠이 드는 마법사가 어디 있냐며 면박을 주었다.
 “부탁드립니다, 박 대리님.”
 민호는 부끄러웠지만 마땅히 부탁할 사람도 없어서 머리를 숙였다.
 “아니, 부탁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지 말고 명상실에 가서 하는 건 어떻습니까? 거기라면 무서운 스님이 계시니 졸지 않을 겁니다.”
 “명상실요?”
 “네. 수련관 5층에 있는데 모르세요?”
 “네.”
 “그렇구나. 안내해 드리죠. 따라오세요.”
 박 대리는 민호를 수련관까지 안내했다.
 수련관은 본사 건물만큼이나 규모가 컸다. 지하 10층, 지상 12층. 명상실, 상담실, 대련실, 장비실, 시뮬레이션 방, 릴렉스 방 등 수련과 연관이 있는 여러 시설이 있었다. 민호는 박 대리를 따라 명상실에 갔다.
 “흠, 자네는? 사원증을 제시하게.”
 수염이 덥수룩한 중이 민호에게 말했다.
 “사원증요?”
 민호는 어리둥절했다.
 “명정 스님, 저 친구는 아직 사원증이 나오지 않았어요. 오늘은 편의를 좀 봐주시죠.”
 옆에 있던 박 대리가 사원증을 내밀며 알은척했다.
 “흠······ 그렇다는 것은 저 친구가 바로 그 친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박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갈!”
 명정 스님은 냅다 불호령을 내렸다.
 “큭.”
 민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명정 스님, 그러지 마시고······ 저 친구 명상하다가 잠든다고 고민이랍니다. 덕이 높은 명정 스님께서 곤란에 빠진 중생을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습니까.”
 박 대리는 혀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잘도 둘러댔다.
 “그래?”
 명정 스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네, 스님.”
 “좋다. 그럼 오늘만이다. 다음부터는 사원증을 가지고 와야 할 거야.”
 “네. 제가 주임님께 얼른 가서 말하도록 하지요.”
 박 대리는 연방 웃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거기 자네, 이리 오게.”
 명정 스님은 민호를 지목했다.
 “네.”
 민호는 순순히 명정 스님의 뒤를 따랐다.
 명상실은 하나의 넓은 공간이었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가구나 잡기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사람도 없었다.
 “아무 데나 앉아서 시작하게.”
 그렇게 말한 명정 스님은 손에 죽도를 들었다. 죽도엔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쓰여 있었다. 민호는 맞으면 아프겠다며 오늘은 명상을 잘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앉아서 30초나 지났을까? 눈앞에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악!”
 민호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다 부처님의 자비일세.”
 민호의 고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명정 스님이 죽도를 휘두른 것이다.
 “다, 다시 하겠습니다.”
 민호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눈앞에 또다시 불꽃이 튀었다. 다음에는 꽉 채운 1분을 버텼고 그다음에는 1분 10초를 넘겼다.
 이런 식으로 하룻밤이 지나자 5분을 견딜 수 있었다.
 “자네.”
 보다 못한 명정 스님이 민호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마법사 말고 다른 걸 선택하면 어떻겠는가?”
 “······.”
 “돌아가게.”
 그렇게 민호는 명상실에서 쫓겨나 기숙사로 돌아왔다.
 “으아! 힘들어. 대체 이게 뭐야. 뭐냐구!”
 불평을 늘어놓은 민호는 한참을 투덜거리다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호흡을 조절하고 긴장을 이완하자 그대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민호는 이번에도 24시간을 잤다. 그러고 나니 뭔가 화가 치밀어, 기본 수행 따위 그만둬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엘마니움의 마법서의 ‘공통 편’을 좀 읽다가 어려워서 ‘화염 편’으로 넘어갔다.
 ‘이건 할 만하겠는데.’
 공통 편은 마법사 엘마니움이 직접 만든 마법 체계로 민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염 편은 어렵지 않았다. 주문에 소모되는 마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해 보자.”
 민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꽃을 만들어 내는 주문부터 시전했다. 결과는 대성공, 라이터의 불꽃 정도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마법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민호는 다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수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며칠 가지 않아 몇 개의 화염 마법을 습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습득한 마법을 기반으로 응용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펑!
 용감한 초보 마법사의 모험은 기숙사 벽을 날려 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덕분에 민호는 다시 한 번 진단을 받게 되었다. 초보 마법사가 일으킬 수 있는 사고가 아닌 탓이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민호가 잠을 자면 그동안 몸은 마력을 축적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는 민호의 무의식 속에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했고 철저한 조사 끝에 마법사 엘마니움의 의식의 잔재임이 판명 났다. 사실은 철저한 조사까지도 아니다. 엘마니움의 마법서 머리말에 적혀 있었다. 그 외에도 민호가 알아야 하는 여러 가지 정보가 있었다. 민호가 귀찮다고 대충 넘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해프닝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유야무야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민호의 파트너가 결정되었다. 이름은 윤아영. 현무궁의 소유자이며 활 솜씨가 귀신같은 열여섯 여중생이었다. 이에 민호는 무슨 열여섯 살 소녀하고 팀을 짜느냐고 투덜거렸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도리어 박살이 났다. 민호가 날려 버린 기숙사 벽 배상 문제로 연봉이 깎인 고은지 주임이 눈에 불을 켜고 민호에게 한번 죽어 볼 테냐며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민호에게 첫 번째 임무가 떨어졌다. 파트너 아영과 함께 ‘갑-2742’라고 명명된 차원의 파편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2. 첫 출장, 갑-2742
 
 
 
 
 
 
 
 
 
 
 금요일, 일반적인 샐러리맨들은 주말의 휴식을 기대하며 조금은 느슨해지는 날이다. 하지만 민호는 아쉽게도 일반적이지 않아서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파트너 아영은 내일과 모레 학교를 쉰다. 그에 맞춰 갑-2742라고 불리는 차원의 파편에 가게 되었다. 조사와 생존에 필요한 도구, 그 외에 차원에서 돌아올 때 필요한 장비 등 챙길 것이 많았다. 빠진 것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고은지 주임에게 불려 가 주의 사항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박 대리를 위시한 자재 관리과 직원들이 무사히 다녀오라며 조촐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다음 날.
 민호는 세면을 하고 엘마니움의 유산들을 꺼냈다. 로브를 입고 망토를 걸치고, 지팡이를 들고 또 목걸이와 반지도 착용했다. 거울을 보니 영락없는 마법사였다. 차원의 파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엘마니움의 후계자로서 유산을 착용하라는 고은지 주임의 당부가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었다. 작은 체구의 깜찍한 인상의 소녀가 왔다. 민호의 파트너 윤아영의 등장이었다. 키는 억지로 우겨서 140 정도고 몸무게는 30대 중반으로, 가녀린 아기 새 같은 인상이었다. 어깨에 멘 커다란 활만 없다면 말이다.
 윤아영은 현무궁이라고 하는 신기의 주인이었다. 민호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보통 사람이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우연찮은 이유로 현무궁과 계약, 현무궁의 주인이 되었다.
 “반갑습니다. 김민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영 양.”
 민호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저씨, 나이 많죠?”
 하지만 아영은 달랐다. 민호는 척 봐도 아영보다 나이가 많았다. 일단 한국 디멘션 개발의 정식 직원이 될 정도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와! 진짜 아저씨네.”
 “······.”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어리잖아요. 그리고 파트너고.”
 아영은 깜찍한 어조로 좋게 말해 주었다. 민호는 여자라고는 고은지 주임만 상대해서인지 아영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으응, 그래도 돼?”
 그래도 확인 차 물었다.
 “응. 아저씨는 우리 담임하고 나이가 같은걸.”
 “그래?”
 “응.”
 “알았다.”
 “그럼 가요, 아저씨.”
 아영이 민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영은 차원의 파편에 가는 게 처음이 아닌지 움직임이 매우 능숙했다. 민호가 신입임을 감안하여 나름대로 베테랑을 붙여 준 모양이다.
 열여섯 살 여중생이 베테랑?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 디멘션 개발이라는 회사부터가 농담 같았다. 그러려니 하는 편이 좋았다.
 
 갑-2742라고 명명된 차원의 파편의 어딘가.
 사방이 나무였다.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는 맑았다. 새소리가 들리고 민호는 비디오카메라를 꺼내서 촬영을 시작하였다.
 “우우. 뭐야, 왜 이런 곳으로 떨어진 거야.”
 아영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민호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차원 이동 의식으로 도착한 장소는 어디를 어떻게 둘러봐도 숲 한가운데였다. 이제부터 약 열흘간 갑-2742 차원의 생태계와 지적 생명체의 존재 여부 등을 조사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참으로 막막했다.
 “아저씨,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민호도 감이 오질 않았다.
 “맞다. 아저씨 조사 임무 처음이랬죠?”
 “응.”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내가 지켜 줄게요.”
 아영은 가슴을 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겨서 키가 140인 소녀가 지켜 준다고 하니 성인 남자인 민호로서는 기분이 복잡했다. 그래도 납득은 하고 있었다. 아영의 프로필과 고은지 주임의 당부 때문이었다.
 ‘내가 백 명이 있어도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 아마?’
 그랬다. 아영은 보기와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듣기에는 외부 사원이라고 불리는 자들 대부분이 그렇단다.
 한국 디멘션 개발에는 크게 내부 사원, 외부 사원 이렇게 두 종류의 사원이 있다. 내부 사원은 민호와 같이 회사에 소속되어 연봉을 받는 자들이고 외부 사원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소환되어 일을 처리하는 프리랜서였다. 내부 사원처럼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사칙에 매여 있지 않고 마음대로 사회에서 다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외부와는 격리되어 생활하는 내부 사원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하하.”
 민호는 아영의 말을 대충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죽치고 있는다고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나무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얼마나 가야 숲이 끝나는 걸까. 민호는 점점 숨이 가빠 왔다. 현무궁 하나만 챙긴 아영과는 달리 민호에게는 짐이 많았다.
 조사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식료품에 야영 장비, 돌아가는 데 필요한 장비까지 해서 자신의 몸의 두 배는 될 만한 배낭을 지고 있었다.
 “아저씨, 도와줄까요?”
 보고 있던 아영이 물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민호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하나 민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이 어린 소녀에게 짐을 맡길 수는 없었다.
 “싫어요?”
 아영이 확인 차 물었다.
 끄덕끄덕.
 민호는 말할 기운도 아끼고 싶었다.
 “아저씨 생각보다 귀엽다.”
 아영이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민호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열두 살이나 어린, 그러니까 띠동갑인 소녀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귀엽다? 민호가? 어디가? 글쎄, 여태껏 여자 손목 한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한 경력답게 민호는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스타일도 그저 그랬다.
 “풋.”
 아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귀엽다는 말에 멈춰서 얼굴을 붉히는 민호의 반응이 순진하고 귀여워서였다.
 “으응?”
 민호는 재빨리 정신을 회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영은 그게 또 재미있어서 웃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땅을 박찼다. 번개처럼 민호를 가로막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요.”
 아영이 말했다.
 “뭘?”
 “등에 메고 있는 거.”
 “왜?”
 “에휴.”
 “응?”
 “하여간 줘 봐요. 아저씨는 마법사잖아요.”
 “응, 뭐······.”
 민호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마법사는 마법사인데, 마법사가 뭐 어쨌다는 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빨리!”
 아영이 재촉했다.
 “이거 무거워.”
 “알고 있어요.”
 “아니, 그래도······.”
 “아저씨.”
 “응?”
 “바보죠?”
 “······.”
 “하여간 내놔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간지럼 태울 거예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영의 손이 움직였다.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민호는 간드러지는 소녀의 손짓에 기겁했다.
 “히이이익.”
 간지러운 건 둘째 치고 놀라서 죽을 뻔했다.
 “이런 건 힘이 센 사람이 드는 거죠.”
 그 틈을 타서 아영이 민호의 배낭을 뺏었다. 우겨서 140인 체구로 민호가 메고 있던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민호의 몸집보다 더 큰 배낭이 공깃돌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
 민호는 말문이 막혔는지 반응이 없었다.
 “가요, 아저씨.”
 아영은 민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으응.”
 민호는 놀랐지만 서둘러 정신을 챙겼다. 띠동갑의 어린 소녀가 자신도 버겁게 메고 있던 배낭을 한 손으로 들고 걸음을 옮겼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 현실이라지만 이건 꼭 만화 같았다. 140센티미터에 약간 모자라는 체구의 소녀가 자신의 두 배는 넘을 법한 배낭을 한 손으로 톡톡 튕겨 대면서 걷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성인 남자인 민호의 자존심은 잔뜩 구겨져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아저씨.”
 아영이 불렀다.
 “응?”
 “아저씨는 어쩌다가 입사하게 되었어요? 원래 일반인이었다면서요.”
 “아, 그거야 뭐······ 어쩌다 보니까.”
 민호는 얼버무렸다. 파트너라고 하지만 자신의 빈곤했던 과거를 설명하기는 싫었다. 그것도 띠동갑의 여중생에게 말하는 것은 더욱.
 “나는 있잖아요······.”
 하지만 아영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현무궁의 주인이 되었고 외부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는지 털어놓았다. 파트너인 민호를 신뢰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화답하듯 민호도 궁상맞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푸하하. 그게 뭐예요, 아저씨!”
 그리고 비웃음을 받았다.
 “큭.”
 신음을 삼킨 민호는 ‘역시 말하는 것이 아니었어.’라고 중얼거렸다.
 “아저씨.”
 “왜?”
 “이 근처에서 쉬는 것이 좋겠어요. 차원의 파편에서는 흐름이 정지되어 있으니까 밤이 되기를 기다려도 밤은 안 와요.”
 아영이 짐을 내려놓았다. 현재 민호와 아영이 서 있는 장소는 여전히 숲 속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나무들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언제쯤 끝나는 걸까 생각하던 민호는 아영이 짐을 내려 두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러지, 뭐.”
 건성으로 대답한 민호는 짐에서 텐트를 꺼냈다. 일인용으로 아영이 사용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영은 민호에게 쓰라고 하고는 물과 마른 식량을 챙겨서는 근처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어떻게? 무협 영화에 나오는 고수들처럼 나무 기둥을 밟으면서.
 민호는 그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숲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나무 위였다.
 “아저씨, 고개 들지 말아요.”
 “······!”
 민호는 아영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시점에서 고개를 들어 버렸다. 희미하지만 딸기 무늬가 있는 아영의 하얀 속옷을 보고 말았다.
 “변태.”
 아영이 한마디 쏘아붙였다.
 “미, 미안.”
 민호는 재빨리 고개를 수그리고는 텐트로 들어갔다. 광속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1분 정도 있다 슬그머니 나와서는 물과 마른 식량 그리고 눈가리개를 챙겼다.
 “시간 되면 깨워 줄게요. 푹 자요, 아저씨.”
 아영은 민호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 마른 식량으로 배를 채우던 민호는 어쩐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도 많고 남자고, 더구나 외부 사원을 보호해야 할 대리가 거꾸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경력으로 따지면 아영이 선배였다. 직급이나 나이나 성별은 어찌 됐든 민호로서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조사 임무에 할당된 시간은 약 열흘, 갑-2742와 지구의 시간 차를 감안해서 나온 기간이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지났는데도 민호와 아영은 아직도 숲 속에 있었다. 새는 있는데 짐승은 없고 나무는 있는데 풀이나 버섯 혹은 열매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걷다가 시간이 되면 먹고 쉬고 또 일어나서 걷고 그리고 8일째 점심 무렵 드디어 끝이 보였다.
 “와!”
 아영이 탄성을 질렀다.
 “드디어 끝이구나.”
 민호도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응, 아저씨.”
 “하아! 힘들었다.”
 “동감.”
 “가자.”
 “응.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숲 밖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아영이 주의를 주었다.
 “응.”
 민호는 아영의 말을 새겨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숲 밖에 펼쳐져 있을 세계가 궁금해진 것이다.
 한데 앞서 숲을 빠져나간 아영이 순간 우뚝 서서는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게 보였다. 민호는 뭘까 싶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이, 이건.’
 민호는 머리가 아파 왔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초원 위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 한 그루, 동물 한 마리 없었다. 무지막지하게 넓은 숲 다음에는 무지막지하게 넓은 평원인가? 이런 거나 찍으라고 비디오카메라까지 준 줄 아냐고 호통 치는 고은지 주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저씨.”
 말을 거는 아영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응?”
 민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걷다가 돌아갈 거 같죠?”
 “응.”
 “가요.”
 아영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는 전보다 삼분의 일로 크기가 줄어 버린 배낭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현무궁이 있었다.
 그 뒤를 민호가 따랐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그저 펼쳐져 있기만 한 초원의 풍경에 질려 버린 까닭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상으로 저녁이 되었다. 하지만 주위는 환했다. 태양은 서쪽 하늘로 기울어 있었는데, 공기가 따뜻했다. 아무래도 한봄의 어느 날 오후 4시 정도에서 차원이 깨진 모양이었다.
 “쉬었다 가요.”
 아영이 말했다.
 “응.”
 민호는 서둘러 텐트를 치고 마른 음식을 꺼냈다. 이제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애초부터 열흘 치밖에 가져오지 않은 탓이다. 좀 더 많이 가져오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러고 있으니 아영이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초원이니 들어가서 쉬려는 모양이었다.
 “들어오지 마요.”
 아니나 다를까, 안에 들어간 아영이 말했다.
 “응.”
 민호는 처음으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노숙이라고 해도 밤이 돼서 날이 추워지는 것도 아니고 이슬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비가 올 리도 없다. 기온도 따뜻해서 대충 아무 데나 누워 자도 될 법했다. 덤으로 모기도 없었다.
 ‘일 좀 할까.’
 민호는 비디오카메라의 배터리 잔량과 테이프를 확인했다. 양쪽 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한쪽에 놓아두고는 노트를 꺼냈다. 주변 지형을 묘사해서 적어 두고 태양의 위치를 기록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진도 찍었다. 이미 비디오카메라로 찍었지만 그래도 찍어 둬야 했다. 규칙이었다.
 “흠, 이쯤 했으면 됐을 테고.”
 정리를 마친 민호는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영이 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잠깐 둘러보고 올게.”
 그러고 텐트를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정도를 둘러보았으나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럼 나도 쉴까?’
 민호도 텐트 곁으로 와서 휴식을 취했다.
 9일째.
 민호와 아영은 오늘도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풍경은 너무나 단조로워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되자 지평선 끝에 점이 하나 나타났다.
 “어? 아저씨, 저거 보여요?”
 아영이 물었다.
 “아니.”
 민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맞다. 아저씨는 마법사지.”
 아영은 궁사로서, 좋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민호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보였다.
 2시간 후.
 이젠 민호의 눈에도 점이 보였다. 하지만 아영에게는 마을이 보였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이었다.
 “아저씨, 어떻게 할래요?”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물은 것이다.
 “가야지, 별수 없잖아.”
 민호는 이것도 일이라고 판단했다.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을이라면 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을은 폐허였다. 두텁게 쌓아 올린 성벽 곳곳은 파괴되어서 기능을 상실했고 안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완파되어 터만 남아 있거나 어떤 곳은 반파되어 내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전쟁이라도 있었던 걸까?”
 민호가 굳은 음색으로 물었다.
 “그렇겠죠, 뭐.”
 아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부서진 차원의 파편 대부분이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정지해 버린 흐름에 살고 있는 지적 생명체들은 혼란에 빠져 서로 싸우고 자멸한다. 보통 얼마 안 되는 생존자와 그들 문명의 잔재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차원도 있었다. 가끔이지만.
 민호도 자료를 읽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게 되니 느낌이 달랐다. 폐허가 된 도시와 마찬가지로 민호의 기분도 착잡해졌다.
 “아저씨.”
 아영이 불렀다.
 “응?”
 “무언가 있어요.”
 “뭐?”
 “섣불리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어 역시.”
 아영은 투덜거리고는 민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방을 한쪽에 내려 두고 현무궁을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부웅.
 반투명한 파란빛 기운이 화살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궁은 화살이 필요 없는 활로, 본래 어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문화유산이었다. 아영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소풍으로 갔다가 현무궁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도록 하자.
 “뭐, 뭐가 있는데 그래.”
 민호는 허둥지둥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딜 봐도 폐허밖에 없는데 아영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민호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지팡이를 꾹 쥐었다. 여차하면 마법을 사용할 기세였다.
 “우가!”
 “우가가! 우가!”
 그때, 원시인이나 낼 법한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녹색의 피부를 가진 그리고 네 개의 송곳니가 외부로 튀어나온 이족 보행 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잡해 보이는 활과 창을 들고는 민호와 아영을 겨누고 있었다.
 “오르크 족이에요. 설마 여기에서 또 마주칠 줄이야. 생기다 만 주제에 말까지 하고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짜증 나는 녀석들.”
 아영이 지친다는 얼굴로 신경질을 부렸다. 나타나기 전만 해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타난 지금은 긴장이 풀려 버렸다. 보고 있던 민호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오르크 족은 무엇이며 어째서 아영이 저리 행동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냥 죽엇!”
 돌연 아영이 소리쳤다. 땅을 한번 굴러 하늘로 솟구치더니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그리고 활시위를 놓았다. 이어지는 환상의 속사. 손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파란빛 화살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크아악.”
 “아악.”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오르크 족 녀석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에 민호는 어이를 상실했다.
 ‘이거, 나 같은 놈 백 명이 있다고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잖아.’
 외부 사원이 어째서 괴물이라 불리는지 민호는 깨닫게 되었다.
 착.
 아영이 착지했다.
 “끝.”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
 “으응?”
 “혹시 봤어요?”
 “뭘?”
 “뭐냐니요.”
 “아니. 그렇게 물어도.”
 “으음.”
 아영은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민호를 살펴보았다. 공중에서 현무궁을 사용할 때는 치마가 펄럭여 속옷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아영에게 진심으로 바지를 입으라고 말해 주었다. 아영이 바지보다는 치마를 선호해서 그렇게 고집할 뿐이다.
 “그나저나 굉장하네. 공중에서 그런 식으로 움직이다니. 하지만 그럴 거면 바지를 입는 편이 좋아.”
 민호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냅두시죠! 흥.”
 아영은 삐친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렸다.
 ‘뭐냐.’
 민호는 갑자기 아영이 삐쳐 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불안해졌다. 무엇을 잘못한 걸까,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아저씨.”
 “응?”
 “이만 물러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왜?”
 “녀석들은 단체로 몰려다니는 것이 특징이라서 곧 다른 녀석들이 올 거예요.”
 “그렇다면 가야지.”
 아영과 민호는 들어왔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부서진 성벽의 틈으로 막 나아가는데, 그때 수백의 오르크 족과 마주쳤다.
 아영과 민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저씨.”
 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고 있던 배낭도 바로 옆에 놓아두고는 현무궁을 장전했다.
 “응?”
 “달리기 잘해요?”
 “······.”
 “아저씨 파이팅!”
 슥.
 아영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굳어 있던 민호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부서진 성벽 위에 서 있는 아영을 발견했다.
 파파팟.
 현무궁에서 파란빛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민호와 아영을 가로막던 오르크 족 녀석들을 차례대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녀석들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조잡해 보이는 활로 화살을 쏘고, 들고 있던 창이나 칼을 던졌다. 물론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아영을 맞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민호는 달랐다.
 “으아아아!”
 민호는 괴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간발의 차이로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흉기들에 가방은 버려두고 지팡이 하나만 겨우 챙겼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몇몇 오르크 족 녀석들이 직접 덤비기 시작하자 도망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저씨, 뭐해요? 마법은 뒀다 국 끓여 먹을 거예요?”
 저기 위에서 아영이 소리쳤다. 그녀는 그녀대로 화살을 날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호를 쫓는 오르크 족 녀석들을 쓰러뜨리며 착실히 녀석들의 수를 줄였다.
 ‘그래, 마법이 있었지.’
 민호는 홱 몸을 돌려서는 아영을 바라보았다.
 “엄호해 줘.”
 “알았어요.”
 아영은 민호의 요청대로 민호의 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간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래 봬도 마법사다!”
 의기양양하게 소리친 민호는 불덩이 다섯 개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무작정 오르크 족을 향해 날리고는 이어 또 불덩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사방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하는데, 오르크 족은 물론이고 근처 건축물들까지 휘말렸다.
 콰콰콰, 콰쾅.
 화광이 충전하며 폭음이 울렸다.
 “꺄아아악!”
 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민호가 날린 불덩이들 중 하나가 아영이 서 있는 성벽의 잔재 아랫부분에 적중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시간을 두고 민호의 머리 위에 엄청나게 큰 불덩이가 나타났다. 이리저리 허둥대던 오르크 족 녀석들도 ‘우아아! 이 아저씨가 미쳤나. 어딜 맞히는 거야!’라며, 소리 없는 괴성을 지르던 아영도 기가 질릴 정도의 크기였다.
 “크크크.”
 하지만 민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협하는 미지의 적을 날려 버리겠다는 생각에 그만 도를 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기숙사를 반파시킨 그 마법을 이판사판이라고 시도하였고 성공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설명해 줄 수 있다.
 ‘장비발이다, 장비발.’
 “슈퍼 울트라 메가톤 파이어 볼!”
 민호가 말했다. 저 무지막지한 크기의 불덩이 이름이었다. ‘슈퍼, 울트라, 메가톤, 파이어 볼······’이란다. 너무 조잡해서 뭐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작명 센스였다.
 콰콰쾅.
 민호가 던진 거대한 파이어 볼은 보기에도 질릴 정도로 천천히 날아가 지면에 부딪쳤다. 그리고 반경 20미터에 달하는 크레이터를 만들며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아아악!”
 민호 역시 그에 휘말렸다. 불덩이가 무지막지하게 큰 탓에 멀리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악.
 그걸 아영이 투덜거리며 뒤에서 받아 주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괴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하하.’
 민호는 푸른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죽는다고, 이걸로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하고 세상과 안녕이라는 인사를 나누겠다고,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아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저씨, 미쳤어요?”
 “으응?”
 “됐어요.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번엔 넘어가죠.”
 “하하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래요?”
 아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짜증을 꾹 눌러 삼키고 있었다.
 “응?”
 “가방요, 가방.”
 “아.”
 민호는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식량이나 물이나 아저씨가 애지중지 관리했던 조사 도구라거나 보고서는 둘째 치더라도 차원 이동할 때 쓰는 의식 도구도 있었잖아요.”
 “······.”
 “어떻게 할 거냐고요.”
 아영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찾아보자. 찾아보자고. 혹시 알아? 뭐라도 남아 있을지. 아하하.”
 민호는 일단 웃음으로 때우고는 ‘슈퍼 울트라 메가톤 파이어 볼’이 날려 버린 장소로 걸어갔다.
 곧 한 바퀴 둘러보고는 아영에게로 돌아갔다.
 “뭐 찾았어요?”
 아영이 물었다.
 절레절레.
 “그렇죠?”
 끄덕끄덕.
 “이제 어떻게 할래요?”
 묵비권 행사.
 “아저씨.”
 “······.”
 “바보!”
 아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호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지만 충격을 줄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으갸갸.’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좌우간 예상 시간까지 돌아가지 못하면 구원이 올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요. 그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돼요.”
 “구원이?”
 “몰라요? 사원 배지에는 사원이 실종되면 찾을 수 있도록 발신 기능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후.”
 아영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나이도 많은 남자에다 본사 대리인 민호가 아영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건 반대였다.
 “미안하다.”
 민호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않고 그런 마법을 시전했으니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런 말은 됐어요. 문제는 이제부터예요. 말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구원이 온다고. 문제는 식량도, 마실 물도 없어져 버렸으니 그때까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아영은 침착했다.
 “그게······.”
 “그게?”
 “하하하.”
 민호는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만 늘어서 있는 숲과 넓은 초원 그리고 폐허에서 물과 식량을 구할 방법 따위, 하나도 몰랐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죠, 아저씨?”
 “하하하.”
 “웃으면 다예요?”
 “하하하.”
 “에휴, 할 수 없죠. 이런 바보 아저씨와 팀이 된 것도 제 팔자니.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토 달지 마세요. 알았죠?”
 아영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응.”
 민호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질리네요. 아무래도 오르크 족이 더 있는 것 같아요.”
 아영의 안색이 변했다. 기척을 감지한 탓이다. 하지만 오르크 족이 아니었다. 폐허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씩 나왔다.
 “안녕하시오. 데부르크의 시장 라일이라고 하오.”
 머리가 하얗게 샜고, 등이 구부정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아영은 슬쩍 민호를 향해 눈짓했다. 이런 일은 자신보다는 민호가 낫지 않겠냐는 신호였다.
 “네, 반갑습니다.”
 민호가 나섰다. 차원의 파편에서 사람을 만날 때 지켜야 할 유의 사항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데부르크의 시장 라일과 대화를 나누었다. 다소의 거짓말, 입바른 소리 등이 섞인 덕에 라일은 흔쾌히 식사와 잠자리 등을 제공했다.
 이에 아영은 민호에게도 괜찮은 점이 있구나 싶었다.
 
 민호는 실수로 없애 버린 가방의 자료를 대신하기 위해 시장 라일을 비롯한 데부르크의 주민들과 친분을 다졌다. 인근의 대략적인 지리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에 대한 정보를 캤다. 그 외에도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알아냈다. 동시에 오르크 족의 산발적인 침입에 맞서 싸웠다. 파트너 아영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라일과 주민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터라 일단은 협조했다. 그러는 사이 주민들은 민호를 영웅적인 방랑 마법사라고 기억하게 되었다. 슈퍼 울트라 메가톤 파이어 볼은 지상 최강의 마법이 되었고 아영은 마법사를 지키는 무적의 가디언이 되어 있었다.
 민호와 아영이 데부르크에 머문 지 보름째 되던 날, 헬기 한 대가 성 부근 초원에 착륙했다. 한국 디멘션 개발에서 구원이 온 것이다. 민호는 이를 알아보고 아영과 함께 서둘러 뛰쳐나갔다. 그리고 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고은지 주임의 얼굴을.
 “그래, 남은 있는 대로 걱정시켜 놓고도 신수가 훤해 보인다. 그치?”
 목소리는 상냥하나 그 안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주임님, 여기에는 사정이.”
 “사정은 침대에서 여자랑 하는 거고.”
 “주임님.”
 “좋아, 알았어. 이 자리에서는 참을게. 너를 보고 있는 이 세계의 주민들을 봐서. 보고서는?”
 “그게.”
 민호는 어물거리며 눈치를 보다 마지못해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이 세계의 종이로 작성한 보고서였다.
 “뭐야?”
 고은지 주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임님, 일단 진정하시고.”
 민호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야, 모두 내린다. 실시.”
 고은지 주임이 헬기 안에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그러기가 무섭게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전부 뛰어내렸다. 조종사까지도.
 “김 대리, 올라와.”
 “네?”
 “아니면 내가 내려갈까?”
 “아니요.”
 “문 잠그는 거 잊지 말고.”
 “네.”
 민호는 하라는 대로 헬기에 올라 문단속을 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고은지 주임의 발이 날아들었다.
 “켁.”
 정확하게 민호의 목을 밀어붙였다. 그 힘에 민호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헬기의 문까지 밀려났다. 납작포 신세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 자식아, 내가 네 뒤치다꺼리 하려고 주임 됐다고 생각해?”
 고은지 주임의 입에서 쌍소리가 나왔다.
 “아, 아, 켁! 아닙니다.”
 “아니지?”
 “네.”
 “그런데 나한테 무슨 원수가 있어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 거냐. 응? 네가 입사해서 지금 몇 번이나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건데.”
 “죄, 죄송합니다.”
 “죄송? 말이면 다야?”
 “······.”
 “그래서 말도 안 하겠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네 녀석이 죽었을까 싶어서 하던 일도 집어치우고 부랴부랴 왔는데. 김 대리, 어떻게 할 거야? 응? 어떻게 할 거냐고!”
 민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좋아. 일단 보고서부터 보겠어.”
 고은지 주임은 다소 화가 풀렸는지 발을 치웠다. 민호는 세차게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숨을 골랐다.
 ‘저건 여자도 아냐.’
 민호는 속으로 고은지 주임을 욕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민호가 작성한 보고서를 전부 읽었고 차후 사정을 물었다.
 “그게요······.”
 민호는 와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고은지 주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바로 옆차기를 날렸다.
 “켁!”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민호가 밀려나 헬기 문에 부딪쳤다. 휘청하고 헬기가 요동쳤다. 고은지 주임은 민호를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더니 심호흡을 했다. 여기에 온 것은 민호를 쥐어 패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호와 아영을 구하고 뒷일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회사 가서 보자.”
 여기서는 참겠다는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으이그.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죄송합니다.”
 민호는 그저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아영은 돌려보내고 김 대리는 나하고 당분간 여기 있기로 하자고. 현지인하고 친분이 생겼다니 이용을 해야겠지.”
 고은지 주임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이용이오?”
 민호는 의아했다.
 “그래, 차원의 파편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경우 그들과 거래를 해야 탈이 없으니까. 김 대리는 아직 모르겠지만 좀 복잡한 문제가 있어.”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이 세계에서는 내가 김 대리 애인인 걸로 해 두지.”
 고은지 주임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네?”
 민호는 등골이 오싹했다.
 “허튼 생각하면 그 시간부로 두개골을 열어 버릴 거니까 그리 알아. 한 번만 말하겠어. 착각하지 마. 모두 업무의 일환이야. 놀랄 틈 있으면 어째서 이런 게 업무에 들어가는지 배울 생각부터 해.”
 “아, 네······.”
 “그럼 우선 말부터 맞출까.”
 “네.”
 민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고은지 주임은 아영을 헬리콥터에 태워 돌려보내고 민호의 애인 행세를 시작했다. 민호를 어찌나 사랑하는지, 민호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밤에 같은 방에서 머무르게 되면 선을 넘어오면 죽인다든가 민호 같은 놈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데부르크 시민들의 뇌 구조는 이해할 수 없다든가, 이래서 수준 떨어지는 문명에는 오고 싶지 않았다든가 등 말이 많았다. 물론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민호뿐이었다. 데부르크 시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고은지 주임을 아주 착하고 내조 잘하는 민호의 여자로 생각했다.
 ‘말하고 싶어. 말하고 싶어. 주임님의 진짜 모습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
 민호는 회사에서의 고은지 주임을 알기 때문인지 더욱 그녀가 가증스러웠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열었다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건 저 불여우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진짜 모습은!’ 하면서 떠들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었다. 민호는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은지 주임은 민호만큼이나 데부르크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졌다.
 “김 대리.”
 “네.”
 “이제 김 대리의 역할은 끝났어. 내일 돌아가. 데부르크 사람들에게는 임시로 떠나는 것으로 하고 이유는 적당히 둘러대.”
 고은지 주임이 말했다.
 “네.”
 “그리고.”
 “그리고?”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김 대리의 그 알량한 목숨이나마 아깝다면 말이야. 그게 좋을 거야. 그게.”
 고은지 주임은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은 굳어 있었다.
 “넵!”
 민호는 즉답했다. 고은지 주임이 데부르크에 머무르면서 했던 여러 행동들은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안주로 삼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역시 목숨은 아까웠다. 민호가 고은지 주임이라도 알려지기 싫을 터였다.
 “그리고 이거 받아.”
 고은지 주임이 서류 봉투 하나를 주었다.
 “이게 뭡니까?”
 “잔말 말고 이거 가지고 차원 개발부 부장실로 가. 주면 알 거야.”
 “부장실입니까?”
 “왜? 불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왜 과장님을 거치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
 “예, 뭐······.”
 “김 대리.”
 “네.”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일이 많은데, 그래도 알고 싶어?”
 “아니요. 됐습니다.”
 민호는 그대로 한발 물러나 버렸다.
 “아니, 말해 줄게. 김 대리도 알아야 협조를 할 테니.”
 그걸 고은지 주임이 추격해 왔다.
 민호는 순간 당황했다. 말해 줄 거면 그냥 말해 주지 왜 쓸데없는 말로 위협을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류 봉투 열어 봐.”
 “봐도 됩니까?”
 “보라고 했어.”
 고은지 주임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봉투 안에는 고은지 주임의 글씨로 작성된 A4용지 몇 장과 민호가 손수 작성한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내용은 주로 데부르크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 사고방식에 관해서였다. 그러나 마지막 한 장은 달랐다.
 “주임님, 이건.”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보면 알겠지?”
 “네.”
 “차원의 파편은 말이야, 사람이 오래 살 만한 장소가 아냐. 다행히도 갑-2742는 영원한 오후 4시 경이니 어떻게든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는 없어. 밤이 있고 낮이 있는 정상적인 차원이 좋은 거야. 어떻게든 해야겠지. 그리고 이 땅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니까 권리는 그들에게 있어. 인사부가 알면 화를 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강요는 하지 않겠어, 김 대리.”
 고은지 주임의 말에는 진심이 있었다. 민호는 그동안 나쁘게만 생각했던 고은지 주임에 대한 이미지가 다소 묽어졌다.
 “알겠습니다. 차원 개발부 부장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잘 선택한 거야. 고마워.”
 민호는 순간 굳어 버렸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아뇨. 주임님도 고맙다는 소리를 할 줄 아는구나 싶어서요.”
 “뭐가 어째?”
 고은지 주임은 얼굴을 붉히더니 주먹을 뻗었다. 용서 없는 스트레이트 한 방에 민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지막 한 장에 적혀 있던 내용 때문이었다.
 데부르크 시장 라일과 그 시민들은 차원의 파편 갑-2742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과 인간에게 호의적인 지적 생명체를 대표해서 차원의 파편 갑-2742의 모든 자원을 대가로 갑-2742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과 인간에게 호의적인 지적 생명체를 완전한 차원으로의 이주를 희망한다고 되어 있었다.
 즉, 한국 디멘션 개발에 보내는 정식 의뢰서인 것이다. 보증인으로서 ‘차원 개발부 자재 관리과 주임 고은지, 대리 김민호’ 이렇게 두 개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고은지 주임은 이것을 위해 민호의 애인 행세를 하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던 것이다.
 
 다음 날, 민호는 서류 봉투를 들고 본사로 돌아와 차원 개발부 부장실을 찾았다. 고은지 주임이 말한 대로 부장님께 직접 서류를 건네주었다.
 “흠······ 공을 세웠군, 김 대리.”
 “아닙니다.”
 “딸이 신세를 지고 있네.”
 “네?”
 “하여간 앞으로 기대하지.”
 차원 개발부 부장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나가라며 손짓했다. 민호는 뭔가 아리송한 기분이 들어 박 대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물었다. 차원 개발부 부장의 딸이 누구냐고.
 “아, 김 대리 몰랐구나. 그거 고 주임님이에요.”
 그렇다, 차원 개발부 부장의 딸이 바로 고은지 주임이었다.
 민호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여간 무사 귀환 축하해요. 이따가 한잔 어때요? 오랜만에 거기로.”
 “거기요?”
 “전에 환영 파티 때 양쪽에 아가씨.”
 “아.”
 “그럼. 이따 봅시다.”
 “에? 잠깐만요. 박 대리님, 저 거기 갈 여유 없어요. 박 대리님!”
 민호가 항의했지만 박 대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있는 동료 대리들에게 오늘 어떠냐며 제안하기 바빴다. 대부분은 민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
 결국 민호는 저항을 포기했다.
 
 술집. 양쪽에서 다른 종족의 어여쁜 아가씨들이 시중을 드는 한국 디멘션 개발 정직원들만의 공간.
 하지만 어여쁜 아가씨들은 없었다.
 자재 관리과 대리들이 민호를 가운데에 놓고 한 잔씩 술을 권하면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고은지 주임과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민호는 고은지 주임에게 입막음을 당한 터라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실수로 배낭을 날려 버린 사정은 이야기를 했다.
 “그야 그럴 수 있지. 처음이니.”
 “아무리 마법사가 되었다고 해도 말이야.”
 “첫 전투는 본래 실수의 연발인 법이야. 기죽지 말고 앞으로 잘하면 돼.”
 그렇게 입을 연 동료들은 자신들이 첫 임무에 나갔을 때를 떠올리며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러기를 1시간, 민호는 대리들의 관심사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술을 마시며 안주를 집어먹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재 관리과의 대리들은 대부분 아니, 전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박 대리는 염동력을 사용하는 에스퍼고 최 대리는 결계술사다. 그 외의 사람들도 모두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김 대리, 슬슬 말하는 것이 어때요? 주임님과 보낸 둘만의 시간이 어땠는지 무지무지 궁금하거든요.”
 박 대리가 불쑥 화제를 전환했다.
 “예에?”
 민호는 깜짝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게, 고 주임이 은근히 김 대리를 마음에 두는 눈치던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면 벌써 죽었지.”
 다른 대리들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입에 담았다. 민호는 심장이 벌렁거려서 말문이 막혔다.
 ‘고은지 주임이 나를?’
 고은지 주임이야 외적으로 보면 미인이다. 늘씬하고 가슴도 풍만한 편이고 피부도 곱다. 조금 사나운 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웃고 있을 때는 귀여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일단은 상사다.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악질 상사. 물론 민호는 고은지 주임이 가지고 있는 다른 면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연애 감정까지는······ 글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리님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아주 진지하게.
 “드디어 말할 생각인 겁니까?”
 박 대리가 물었다.
 “저를 죽일 생각이십니까? 주임님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니. 대체 저를······ 저를. 크윽.”
 민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지, 진정, 진정하세요.”
 박 대리가 서둘러 진화 작업에 나섰다. 이어 다른 대리들도 진정하라고, 자신들이 지나쳤다고 사과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오해 사기 싫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아요.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때는 수습 못 합니다.”
 하지만 박 대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민호와 고은지 주임이 갑-2742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박 대리님.”
 민호는 때려죽여도 말할 수 없었다.
 “네, 김 대리님.”
 “날 죽이세요. 그냥 죽이라고요.”
 “저, 저기?”
 “크허헝.”
 민호는 그냥 울어 버렸다. 그도 모자라 양주를 병째 집어 입에 물었다. 꿀꺽꿀꺽, 반 정도 남아 있던 값비싼 양주가 단숨에 바닥났다.
 “크! 좋다!”
 그것을 끝으로 민호는 쓰러졌다. 그 모습에 대리들은 생각했다. 민호가 고은지 주임에게 입막음당했다는 것을. 그만한 일이 갑-2742에서 있었던 것이다.
 
 
 
 
 
 
 
 
 
 
 
 
 
 
 3. 그녀의 분노와 추석 연휴
 
 
 
 
 
 
 
 
 
 
 다음 날, 지구 시간으로 12시쯤.
 민호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귀여운 방에서 정신을 차렸다. 옆에는 고양이 귀와 고양이 꼬리를 가진 여자가 있었다. 전에 민호를 담당했던 묘인족 아가씨, 아르의 방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아르가 민호에게 물었다. 오늘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민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뇌쇄적으로 풍만한 가슴이 민호의 팔을 압박해 왔다.
 “으.”
 하지만 민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숙취가 뇌를 헤집으며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숙취 해소제 가져올게요.”
 아르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여전히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민호는 정신을 차리려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요.”
 “으응.”
 그러고는 아르가 내민 숙취 해소제를 먹었다.
 잠시 후, 정신이 들자 시간을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크, 큰일 났다.”
 아르는 허둥대는 민호에게 옷가지를 챙겨 주었다. 민호는 번개처럼 옷을 차려입고는 아르에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아르가 손을 뻗어서는 민호를 잡아당겼다.
 “에?”
 민호는 어리둥절했다.
 쪽.
 그사이에 아르가 민호의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러곤 손을 흔들며 다음에 또 오라고 했다.
 “아, 네.”
 건성으로 대답한 민호는 곧장 회사로 향했다.
 자재 관리과 사무실에는 고은지 주임이 있었다. 민호는 총알같이 튀어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누차 말했겠지만, 말로만 죄송하다면 다야, 김 대리?”
 고은지 주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죄송합니다.”
 민호로서는 그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고은지 주임은 민호를 슬쩍 노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민호는 그래서 돌아가도 되나 싶었는데, 발을 돌리는 순간 고은지 주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가라고 했어?”
 민호는 그 말에 다시 발을 원위치시켰다.
 “······.”
 그야 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휴휴. 애정이 감도는 활기찬 사무실.”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사무실에서 근무 중인 여러 대리들 중 하나였다.
 “김 대리.”
 고은지 주임이 불렀다.
 “넵.”
 민호의 대답에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고.”
 고은지 주임이 일어났다. 민호는 뭔가 불안한 느낌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쉬지 않고 갈궈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그냥 따라오라는 것이 무척이나 수상했다.
 자재 관리과 제2 창고.
 달칵, 문이 닫혔다.
 “저, 주임님.”
 “김 대리, 이쪽으로 서 봐.”
 민호는 순순히 고은지 주임이 가리키는 장소로 움직였다. 순간, 고은지 주임이 달려들더니 멱살을 잡고 밀어붙였다.
 “내가 우습게 보이지?”
 살기가 충만했다.
 “죄,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술 먹고 늦게 오지 않겠습니다.”
 민호로서는 짚이는 바가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김 대리가 여자들이 서비스하는 술집에서 술 먹고 늦게 왔다고 화가 난 게 아니야. 알아?”
 “그럼요?”
 “오랜만에 본사에 출근하니 박 대리가 그러더군. 김민호 씨와 어디까지 진행되었냐고. 이게 무슨 말일까?”
 “예에?”
 “모른다고 시치미 떼진 않겠지? 내가 분명 말했을 거야. 무슨 얘기도 하면 안 된다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김 대리 입은 무거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고은지 주임은 몰아세우거나 쏘아붙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 아니요, 주임님. 뭔가 착오가······.”
 “착오?”
 “전 말한 적 없어요. 없다고요.”
 민호는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진심으로 부정했다.
 “그럼 내 귀가 장식이라는 뜻이야?”
 “아, 아닙니다.”
 “그러면 김 대리가 말했다는 뜻?”
 “아닙니다.”
 “아닙니다 외에는 할 말이 없어?”
 “아닙니다.”
 “그래. 곧 죽어도 이실직고는 못 하겠단 말이지? 대리들한테 붙잡혀서 술집에 끌려갔다고 이야기 들었어. 그 상황에서 술을 머리 꼭대기까지 마셨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고은지 주임은 민호를 손톱만큼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정말입니다, 주임님.”
 “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지.”
 “뭔가, 뭔가, 오, 오해가.”
 “그래도 일 처리는 제대로 해서 조금은 남자답게 봐 주려고 했는데, 좋아. 각오해, 김 대리.”
 그러고는 고은지 주임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민호는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신 나게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도 목숨이 위험하면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민호는 양다리에 깁스를 하고 복대를 한 채로 기숙사 방에 누워 있었다. 팔과 턱은 움직일 수 있어서 그나마 먹고 싸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입술이 1미터는 튀어나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얻어맞을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게 무슨 꼴이람. 에휴. 무슨 놈의 여자가, 빌어먹을. 지가 상사면 상사지. 그리고 대리들도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거야.’
 그렇게 속으로 계속해서 꿍얼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가 울렸다.
 “김 대리, 들어갑니다.”
 박 대리였다. 서류를 한 아름 가져와서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저, 그건.”
 민호가 물었다.
 “아, 민호 씨 일감이에요. 주임님이 갖다 주라고 해서.”
 “······.”
 “하하. 삐치셨구나. 너무 마음 상하지는 마세요. 저래 봬도 주임님, 민호 씨 때문에 골치깨나 썩었다고요.”
 박 대리가 무슨 일인지 고은지 주임 편에 섰다.
 “뭐가요.”
 민호는 잔뜩 볼멘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법 배운다고 틀어박혔을 때 기억나요? 왜, 찾아와서 말했잖아요. 명상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잠에 든다고.”
 “네.”
 “그때 주임님이 출석 체크는 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민호 씨는 하지 않았죠. 그걸 주임님이 적당히 처리했는데 민호 씨가 기숙사 벽을 부수는 바람에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들통 났어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하하, 이런.”
 박 대리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박 대리님은 분하지 않으세요?”
 민호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그냥 여러 가지로.”
 “하하. 모든 것에 만족하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비하면 천국이죠.”
 박 대리는 적당히 받아넘긴 후, 그럼 일이 있어 가 본다며 발을 돌렸다.
 “후우.”
 민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슬쩍 서류 더미를 바라보고는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며칠 있으면 추석 연휴가 시작이다. 집을 뛰쳐나와서 지금까지 간간이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찾아갈 생각이었다. 고연봉의 직장이 생겼으니 부모님과 친척들을 볼 낯이 생긴 것이다.
 ‘참자, 조금만 참자.’
 민호는 고은지 주임에 대한 화를 억지로 삭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자신을 가르쳤구나 하고.
 “일하자. 하라니까 해야지.”
 반쯤 일어나서 움직이려고 하는데 갈비뼈가 따끔거렸다. 고통이 뼈를 타고 전신의 세포를 자극했다. 민호는 이를 악물고는 책상 쪽으로 움직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참, 김 대리.”
 박 대리였다.
 “네.”
 “깜빡 잊고 전하지 않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뭔데요?”
 “하기 좀 어려운 말인데, 납득할 수 없을지도 몰라도,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박 대리는 머뭇거렸다.
 “말씀하세요.”
 민호는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고 나가 줬으면 싶었다.
 “이번 추석 말인데요.”
 “네.”
 “자재 관리과 당직이 김 대리하고 주임님으로 결정 났어요.”
 “엑?”
 “몸조리 잘하시고요, 부디 주임님과 화해하세요. 그 편이 좋을 겁니다.”
 박 대리는 그리고 문을 닫았다. 민호는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 고은지 주임이 추석 연휴 동안 자재 관리과 당직을 선다니 말이다. 아리송해서 곰곰이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처음 듣는데. 정직원이 당직이라니 말이야.’라고 생각하다가 ‘여기가 어디냐, 한국 디멘션 개발이지.’라며 납득해 버렸다.
 그리고 딱 5초 후.
 “아 씨.”
 민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집에 돌아가 어깨에 힘 좀 줘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가지 못한다니, 욱하고 성질이 치밀었다.
 “안 해!”
 민호는 도로 침대에 누워서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아, 빌어먹을 내 인생! 어디 두고 보자고!’
 그렇게 이를 악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직업의식이라는 것이 뭔지, 민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 고은지 주임이 나쁜 건 나쁜 거고 일은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부터 잘못을 따지자면 하찮은 이력을 가진 민호에게 있었다. 학생 때 조금만 더 공부를 해서 좋은 이력을 가졌으면 이런 요상한 직장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시간은 흘러 추석 연휴 전날이 되었다. 박 대리는 일찍 출근해서는 오늘 집에 다녀온다며 힘내라는 말을 해 주었다. 민호는 그 말이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어쩌랴, 박 대리가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아는데. 웃는 얼굴로 고향에 잘 다녀오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곤 오후 7시 정도가 되었을 즈음이다.
 똑똑.
 “누구세요.”
 민호가 노크 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나야, 민호 씨.”
 아는 목소리인데 말투가 미묘했다. 민호가 아는 그 사람은 민호를 언제나 ‘김 대리’라고 부르지 ‘민호 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신입 사원 연수 왔을 때를 제외하고.
 “들어오세요.”
 민호는 일단 들어오게 했다. 그 사람이든 아니든 찾아온 사람을 문전 박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호가 아는 그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민호 씨, 일 많이 했네.”
 늘씬한 키에 이지적인 인상, 웃는 모습이 귀여운 고은지 주임이었다.
 “아닙니다.”
 대답하는 민호의 반응은 어색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고은지 주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악감정도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일단 치료부터 하지. 부탁해, 안나 씨.”
 고은지 주임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흰색 옷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뿔테안경을 쓰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케이. 맡겨 줘요.”
 안나라고 불린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펴는데, 주사기가 각 손에 네 개씩 총 여덟 개가 쥐여 있었다.
 본사 지하에서 치료술사 안나의 집을 운영 중인 바로 그 안나였다.
 “헉.”
 민호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금 아플 거예요. 그래도 참으세요. 남자니까.”
 안나는 미소를 짓고는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인정사정없이 민호의 몸에 주사를 놓았다.
 “끄아아악!”
 별안간의 충격에 민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10분 정도 있으면 깨어날 거예요, 은지 씨.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안나는 민호의 방을 나섰다. 고은지 주임은 그녀를 배웅하고는 민호가 처리한 서류를 손에 들었다. 잘되어 있나 확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처리된 것은 많지 않았다. 아직 민호가 차원 개발부 자재 관리과 업무에 서툰 탓이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괜찮아졌네.”
 고은지 주임은 ‘그럭저럭’이라는 인상으로 미흡한 부분을 보완해 주었다. 그러고 민호가 깨어날 때쯤 돼서 한쪽에 내려 두고는 정말로 못 봐 줄 정도의 서류 몇 개를 들었다.
 “끄응.”
 민호가 깨어났다.
 “몸은 어때?”
 고은지 주임이 물었다.
 “네? 아, 괜찮은데요.”
 “그럼 깁스를 깨야겠지?”
 “네.”
 톡.
 고은지 주임이 민호가 하고 있는 깁스에 손가락을 튀겼다. 살짝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웬걸, 10초도 지나지 않아 깁스가 후두둑 부서져 내렸다.
 ‘헉.’
 민호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근데 민호 씨, 일 처리가 너무 서툰 거 아냐?”
 “네?”
 “이거 보라고.”
 고은지 주임은 들고 있던 서류를 민호에게 보여 주며 하나씩 차근차근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주었다.
 ‘뭐, 뭐지? 알 수가 없어.’
 민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의 상황은, 그러니까 좁은 방에서 여자 상사가 허리를 숙여 남자 부하 직원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자 상사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냄새를 마구 뿌리고 있다. 더구나 그 여자 상사는 남자 부하 직원을 개 패듯 패서 다리몽둥이를 분지르고 갈비뼈를 하늘나라로 보낸 장본인이었다.
 “민호 씨, 듣고 있는 거야?”
 고은지 주임이 태클을 걸었다. 민호의 주의력이 산만해졌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민호는 서둘러 정신을 챙겼다. 뭔지는 모르지만 고은지 주임이 하는 대로 놔두자고 판단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잘 들어. 이런 기회 다시는 없을 테니까. 내가 특별히 가르쳐 주는 거야.”
 “네.”
 민호는 이유 없이 불길해졌다. 고은지 주임의 행동이 특혜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저녁은 먹었어?”
 고은지 주임은 민호의 기분 따위는 알지 못했다.
 “아뇨.”
 민호는 아무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단 일부터 끝내고 먹자.”
 “주임님은 고향 안 갑니까?”
 “고향? 나하고 민호 씨하고 당직인 거 잊었어?”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묻는 거야?”
 “죄송합니다.”
 “으이그.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그 말 좀 안 할 수 없어?”
 고은지 주임이 투정 부리듯 쏘아붙였다.
 할 말이 없어진 민호는 그냥 뒤통수만 긁었다.
 “하여간.”
 고은지 주임은 화제를 돌려 민호에게 서류 작성 요령을 가르쳤다. 그런 다음에는 청소도 해 주고 민호에게 어디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치료술사 안나의 집에 가자고 말이다.
 ‘대체 뭐지. 뭐냐고. 불안하게.’
 민호는 그녀답지 않게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저, 주임님······.”
 “응?”
 “어째서 저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요전에는 다짜고짜······.”
 “거기까지만 해, 민호 씨.”
 “네.”
 “그리고 지금은 업무 시간이 아니니까 주임님이라 부르는 것도 금지. 추석 당직 기간에는 은지라고 부를 것.”
 “켁.”
 민호는 눈이 커졌다. 분명 오늘 아침에 해는 동쪽에서 떴다. 기숙사 안에 있었기에 실제로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무 소동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라는 걸 감안하면 분명 그럴 것이다.
 “뭐지, 그 반응은?”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내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는데 설마 존칭을 사용하면서 뒤에 ‘은지야.’라고 말할 생각?”
 “······.”
 “아니면 그냥 근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김 대리라고 부를까?”
 “아니요. 아니, 아니. 으, 으, 은지, 은지야.”
 민호는 한동안 버벅대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흡했다. 고은지 주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은지야? 난 민호 씨 친구가 아닌데. 내가 민호 씨라고 부르니 민호 씨도 은지 씨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아, 죄송합니······ 아, 아니, 미안. 은지 씨.”
 “좋아. 됐어.”
 “······.”
 “하아, 좋아.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미안해, 민호 씨. 그때는 내가 머리에 열이 올라서 민호 씨 말을 믿지 않았어. 나중에 최 대리가 그러더라고. 민호 씨는 아무 말 안 했다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라며 양주 한 병을 원 샷하고 쓰러졌다고 말이야.”
 다소 과장이 섞여 있는 이야기였지만 대부분은 현실과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아.”
 민호는 감을 잡았다.
 “그랬는데 내가 실수로 당직에 이름까지 올려서 추석 연휴도 빼앗고. 뭐랄까, 그래서 내가 주는 상이랄까.”
 고은지 주임은 이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덤으로 민호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 요상 야릇한 분위기에 민호는 문득 고은지 주임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고은지 주임이 실은 굉장히 여성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으응. 나, 나야말로 오, 오해하게 해, 해서 미안.”
 그래서 민호도 대답을 하는데 말을 더듬고 시선을 돌렸다. 양쪽 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라는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요상한 분위기였다.
 “아무튼 그래서, 그러니까, 그런 거야.”
 고은지 주임은 말의 대부분을 생략해 버렸다.
 “으응.”
 민호는 뭐가 그래서, 그러니까, 그런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좌우간 끄덕끄덕했다.
 “아무튼 밥부터 먹자.”
 “응.”
 둘은 허둥지둥 분위기를 수습하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지속하다가는 뭔가 이상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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