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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Lv999의 귀환 [E](종료231004)

Lv999의 귀환 1권 (1)

2019.01.29 조회 4,846 추천 22


 #프롤로그
 
 
 
 
 
 베일 왕국의 남부, 이름 없는 숲속.
 퐁퐁퐁-
 새하얀 빛무리가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드디어 지구에 돌아왔다!”
 
 
 
 #1화 용병, 민하루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남기며 해가 지려는 시간, 베일과 산텐스의 국경인 톨킨산맥을 한 남자가 오르고 있었다.
 “젠장······ 군대에서 지겹게 탔던 산을 내가 또 타게 될 줄이야.”
 검은 머리의 남자, 민하루가 신세 한탄이라도 하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었고, 깎아지른 비탈을 오르는 그의 몸놀림은 분명 노련한 약초꾼의 그것이었다.
 
 ***
 
 S급 용병 민하루, 그는 용병이었지만 한량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자였다.
 일정하지 않은 기상 시간과 하는 일 없이 그저 단골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웃음을 짓는 한량.
 그날 역시 단골 술집으로 향하기 전, 용병 길드에 나가 잠시 몸을 축 늘어뜨릴 생각이었다.
 “도로시, 이 오라버니에게 꿀물 좀 주지 않겠니?”
 용병 길드의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민하루는 길드의 꽃이라 불리는 도로시에게 나른한 목소리로 주문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함이었다.
 “에휴, 무슨 잘난 일을 하고 다닌다고 아깝게 꿀물을 먹어요! 그냥 물이나 떠 드세요.”
 도로시는 투덜거리며 쉼 없이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금빛 액체를 물에 타는 것을 보면 꿀물인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본 민하루가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참, 성격이 이렇게 드세니 누가 데려갈까나? 그냥 오빠랑 결혼해서 살자니까?”
 “뭐예요?”
 도로시가 민하루를 노려보자 그는 시선을 피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얼굴이면 얼굴, 돈이면 돈, 실력이면 실력. 이 정도면 훌륭한 신랑감이지 않니?”
 “흥! 웃기시네!”
 스스로 금칠하는 민하루의 얼굴을 노려보던 도로시는 콧방귀와 함께 그의 앞에 금빛 액체를 탄 음료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낄낄거린 민하루는 꿀물을 쭉 들이켰다.
 “귀엽기는.”
 딱!
 “뭐야? 어떤 자식이······. 하하하, 길드장님 나오셨어요?”
 찰지고 맑은 소리를 발산하는 뒤통수 치기를 시전하며 등장한 길드장 예거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너 자꾸 남의 딸 놀릴 거야? 진짜 데려갈 거면 놀려도 되고.”
 길드장이나 소속 용병이나 능글거리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도로시가 그 말에 소리를 빽 질렀다.
 “아빠!”
 그 모습에 민하루와 예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딸이지만, 참 귀엽단 말이야.”
 “그러게요. 장인어른.”
 딱!
 예의 찰지고 맑은 소리를 다시 발산한 민하루는 예거가 툭, 하고 던진 종이를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너 일 좀 해라.”
 “에? 일이요? 아저씨가 저한테 직접 의뢰를 넣는 건가요? 뭐, 드래곤이라도 한 마리 잡아 와야 해요?
 민하루의 너스레에 예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읽어 보면 알 거 아니냐.”
 종이, 아니 의뢰서를 읽은 민하루가 입가에 어린 미소를 살짝 지우고는 입을 열었다.
 “뭐야? 잘못 주셨어요. 이거 B급 의뢰입니다. S급 용병에게 주기엔 너무 아까운 의뢰네요.”
 민하루가 말과 함께 손가락을 슬쩍 비비자 예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젊은 놈이 왜 이렇게 돈을 밝힐까.”
 “그게 전부잖아요? 잘 아시면서?”
 헤죽거리며 웃는 민하루를 보면서 예거가 인상을 썼다.
 “가 봐. 가서 얘기를 들으면 알 거다. 사람들한테 피해 안 가는 선에서 뜯어먹는 건 내가 눈감아 주마.”
 “계약서는요?”
 “뭐? 계약서! 이 자식이! 빨리 안 가?”
 “에휴, 갑니다. 간다구요!”
 계약서라는 말에 예거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며 민하루를 걷어차려고 하자 그가 잽싸게 밖으로 도망쳤다.
 
 ***
 
 귀찮은 의뢰라 대충 끝내고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갖고 의뢰자인 촌장을 찾아갔다가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웃기는 건 이 마을이 예거의 고향 마을이라는 사실이었다.
 “학연, 지연은 여기서도 고질적인 문제구만.”
 고작 산적 토벌에 자신과 같은 인재가 나서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이것은 소 잡는 칼로 메추리를 잡는 모습 아닌가?
 가슴 아픈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난데없이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촌구석까지 도대체 대장이 왜 왔을까?”
 “난들 아냐?”
 잽싸게 나무 위로 올라간 민하루는 토벌 대상인 산적으로 보이는 두 명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게. 천인장 하면서 월봉이나 따박따박 받아먹지 도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냐고.”
 “넌 이 지랄 같은 내전을 계속하고 싶냐? 천인장이든, 뭐든 언젠가 개죽음당할 게 뻔한데?”
 “하기야, 그건 그렇지.”
 “아무튼 대장이 먹고살게는 해 준다니까 너나 나나 따라온 거 아니냐.”
 “그래. 네 말이 맞다. 개죽음당할 바엔 이 짓거리도 나쁘지 않겠지.”
 두 명의 대화를 엿듣던 민하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천인장? 내전? 이것 봐라?’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산적들은 베일 왕국의 내전에서 탈영한 병사들인 것 같았다.
 ‘뭐, 그거야 확인해 보면 간단한 일이지.’
 충분한 소득을 얻은 민하루는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막힌 솜씨로 나무 사이를 이동한 민하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촌장이 이야기한 동굴을 발견했다.
 과연 촌장의 말대로 바위틈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 동굴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위치였다.
 민하루 역시 이곳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고, 교묘하게 숨어 동굴 앞을 지키는 보초병이 없었다면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섯 명이라.’
 산적의 숫자를 파악한 민하루가 희미하게 웃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뭐 중요한 거라도 지키나 봐?”
 갑작스럽게 숲속에서 등장한 외부인을 본 산적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저 새끼 뭐야?”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산적들이 무기를 뽑아 들 무렵.
 민하루가 한걸음에 거리를 좁히고는 자세를 낮춰 제일 가까이 있던 산적의 발을 걸었다. 그 바람에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그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낚아챈 민하루가 그대로 옆에 있던 산적에게 던져 버렸다.
 퍽!
 바위에 처박힌 자신의 동료들을 보면서 나머지 산적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들로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멍한 것도 잠시, 산적들은 다시 시작된 공격에 수숫대 부러지듯 쓰러져 버렸다.
 민하루가 산적 다섯을 처리한 시간은 그야말로 짧았다.
 이것이 바로 레벨 150 이상만 받을 수 있다는 S급 용병의 힘이었다.
 군사 훈련을 거친 병사였다고는 하지만 S급 용병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 재롱일 뿐이었다.
 “문제는 대장이라는 놈인데······.”
 엄청난 공적이 아닌 순수한 실력으로 천인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랐다면 보통 레벨 100 정도일 텐데,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오러 유저의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었다.
 천인장이란 직책을 가진 놈이 얼마나 많은 인원을 데리고 탈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고소한 냄새와 지글거리는 소리가 일품인 토끼를 구워 술판을 연 자리.
 세 명의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머금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형님은 참 대단하쇼!”
 그중 털보 사내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뭐가?”
 형님이라 불린 뱀눈 사내가 나른하게 되묻자 털보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에 이런 동굴이 있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안 거유?”
 털보의 질문에 뱀눈 사내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베론 대장이라고 알지?”
 “당연한 거 아뇨. 그 인간, 아가리로 거기까지 올라간 썩을 놈 아닙니까. 베일에서 군 생활 한 놈들치고 모르는 놈이 없잖소.”
 털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대를 찬 남자가 대답하자 뱀눈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원래 그 양반 부관이었잖냐.”
 “아, 맞다. 큭큭, 형님 원래 그놈 밑에 있다가 뇌물 먹은 거 걸려서 천인장으로 내려왔잖소. 거기다 형님 자리는 그놈이 아끼는 놈이 채 갔······.”
 “오늘 칼춤 한번 출까?”
 눈치 없는 털보 사내의 말에 뱀눈 사내가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일축했다. 그러자 털보 사내가 헛기침을 내뱉었고, 다시 뱀눈 사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그 자식 따라다닐 때 뭔가 이상하긴 했거든. 술이면 술, 여자면 여자, 그걸 다 구하는 게 말이지.”
 “그래서요?”
 “알고 보니까 그 자식한테 뒷돈을 주는 상인이 있더군. 그러니까 다 이해가 가더라고. 근데 이 상인 새끼가 더 이상한 거야.”
 “이상하다?”
 베일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베론이 무능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베론에게 돈을 주는 상인이 더 이상하다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이 상인 새끼가 돈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야. 뭐, 상인에게 돈 많은 게 이상한 건 아닌데. 수상한 건 이 자식이 파는 물건이 없다는 게 이상하더라구.”
 “호오. 그건 좀 수상하군요.”
 털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는 물건이 없는 상인, 그리고 그 상인이 돈이 엄청 많다? 뭔가 구린 냄새가 풀풀 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뒤를 좀 캐 봤더니 글쎄, 이 새끼가 암암리에 체르빌을 팔더라구.”
 “뭐요? 체르빌?”
 체르빌이라는 말에 털보 사내가 누가 들을세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 체르빌은 세계적으로 금지된 마약 아닙니까?”
 안대 남자가 한쪽만 남은 눈으로 심각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 워낙 중독성이 강해서 신대륙은 물론 네메시스 대륙에서도 금지된 물건이지. 그런데 말이야, 돈은 많고 삶은 무료한 귀족들에게는 암암리에 팔렸던 모양이야. 나도 들은 얘긴데, 밤일할 때 체르빌을 복용하면 뿅 간다고 하더군.”
 “허허허.”
 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지된 마약 이야기에 흥미가 동했는지 궁금증 어린 눈빛을 자신의 대장에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론 대장이 완전히 취해서 부축하는 나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라구. 바로 이 동굴의 이야기를 말이지.”
 뱀눈 사내가 야비하게 웃으며 말을 마치자 털보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동굴을 둘러보았다.
 “그럼 이 동굴이?”
 “그래. 검문 없이 두 왕국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거지.”
 뱀눈 사내는 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이 동굴의 존재는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였다.
 베일과 산텐스의 국경을 긋는 톨킨산맥은 그 산세가 너무 험했다. 덕분에 군사는 검문소를 제외하고는 형식적으로 배치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베일이나 산텐스나 이곳을 이용하여 침공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아무런 교전 없이 그대로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그러한 사안은 안중에도 없었다.
 “잠깐, 형님 그럼 내일 한다는 일이 설마?”
 “그래. 체르빌이다. 마을 놈들한테 뜯은 돈이랑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체르빌을 사서 튀는 거지.”
 이런 사정을 처음 들은 털보 사내는 처음에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형님이 큰소리를 쳤겠지. 근데 돈은 있수? 마을 놈들한테 뜯은 돈이 얼마나 된다고?”
 “너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상인 새끼를 어떻게 했을 것 같냐? 크큭, 베론? 그놈은 내가 그 상인 새끼를 꿀꺽 삼켰다고 생각하고 날 강등시켰지만 사실을 알면 아주 눈이 뒤집힐걸?”
 희번덕 눈을 뜨며 말을 하는 뱀눈 사내를 보면서 털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제 우리는 부자가 되겠군요.”
 그들에게는 나라에 대한 충성, 사람의 목숨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그러게. 부자가 되겠네.”
 지금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민하루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민하루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탈영병 셋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계를 했다.
 “누구냐!”
 한숨이 나올 정도로 일관적인 반응에 민하루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이죽거렸다.
 “너희들 탈영병이지? 도망쳤으면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살 것이지. 왜 애먼 사람들 괴롭히고 그러냐.”
 그런 민하루의 태도에 털보 사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새끼가 목을 잡아 뜯어 버릴까 보다! 누구냐고 묻잖아!”
 “그거 좋은 방법이군.”
 “뭐?”
 털보 사내가 의문성을 내뱉은 순간, 민하루가 순식간에 털보 사내의 앞에 나타나서 한 손으로 그의 목을 붙잡았다.
 “근데 목을 잡아 뜯으면 피가 너무 많이 날 것 같은데? 괜찮아? 나는 사실 그냥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털보 사내는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될 법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남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린 채 히죽거리며 웃는 민하루를 보면서 뱀눈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뱀눈 사내의 실력은 주변의 부하들도 인정할 만큼 대단했다.
 비록 강등당하긴 했지만, 중앙군의 천인장보다 더 강한 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무능한 베론도 부관으로 쓰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런 무력을 갖춘 뱀눈 사내조차 민하루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누, 누구십니까?”
 자연스럽게 말투가 바뀐 뱀눈 사내를 보면서 민하루가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내 정체는 왜 묻는 건데? 왜? 내가 패황(覇皇)이라고 말하면 믿을 거야?”
 “그, 그거야······.”
 패황은 카이트 제국의 황제로 두 대륙에서 가장 강한 존재 중 하나였다. 그런 인물을 입에 담자 뱀눈 사내가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자신의 손에서 컥컥거리고 있는 털보 사내를 그들에게 집어 던지며 차갑게 물었다.
 “근데 아까 듣자 하니 너희들이 뭘 거래한다고 하던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체르빌이라고 한 것 같은데?”
 “······!”
 민하루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안광에 산적 셋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야말로 고양이 앞의 쥐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2화 그 이름, 카이나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민하루 앞에는 세 명의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걸 몇 시간 후에 거래한다는 말이지?”
 그의 말에 무리의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쭈? 고개만 까딱? 좀 있으면 말 트자고 하겠다?”
 살기 어린 그의 말에 세 명이 다시금 자세를 고쳐 앉은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보던 민하루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체르빌 밀수가 있다고는 들었다만 이런 놈들까지 손을 댈 수 있단 말이지?’
 현재 체르빌은 두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는 물품이었다.
 그런데 탈영병에 불과한 이런 놈들까지도 체르빌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어딘가에 공급원이 있다는 건가?’
 물건이 있어야 밀수도 가능한 법.
 민하루는 누군가 체르빌을 대량생산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뭐, 그거야 나중에 처리할 문제고.”
 체르빌에 대한 생각을 대충 정리한 민하루가 다시 눈을 빛내며 세 명의 산적을 노려보았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제일 간단한 건 베일 왕국에 넘기는 건데······.”
 민하루의 혼잣말에 세 명이 움찔거렸다.
 그들은 탈영병 신분이었다. 왕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일 것이 뻔했다.
 “제, 제발! 그것만은!”
 “살려 주십쇼!”
 “착하게 살겠습니다.”
 갑자기 다급해진 산적들을 보며 민하루가 피식 웃었다.
 “왕국에는 다시 돌아가기 싫은 모양이지?”
 “그거야······.”
 “그럼 지금 내 손에 죽을래?”
 “······.”
 “그러게 왜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랬어?”
 “······죄송합니다.”
 “아무튼 내가 받은 의뢰는 너희들을 퇴치해 주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너희들을 왕국에 넘기는 수밖에.”
 그때 뱀눈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의뢰요? 혹시······ 용병이십니까?”
 “그런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민하루의 태도에 뱀눈 사내는 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야 민하루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고작 용병한테······.’
 상대의 정체가 용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 뱀눈 사내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민하루가 씨익 웃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왜? 고작 용병한테 당해서 열받아?”
 “네?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뱀눈 사내의 표정은 참혹했다.
 “그나저나 보수는 어떻게 챙겨야 하나. ······잠깐만, 너희들 몇 시간 뒤에 거래가 있다고 했지?”
 민하루는 이 B급 의뢰에서 보수를 어떻게 챙겨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묘수를 생각해 냈다.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지! 그 이야기는 너희 거래 상대들이 체르빌을 가득 싣고 온다는 얘기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는 민하루를 보면서 뱀눈 사내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카이나스 칸 시리우스는 올해로 700살이 약간 넘는 성룡이었다. 흉포한 레드 드래곤의 핏줄을 제대로 이어받아 동년배에 비해 유난히 레벨이 높은 그는 100년 전, 마지막 유희에서 염제(炎帝)라는 어마어마한 이명을 얻은 후, 이번에 새로운 유희를 시작한 참이었다.
 참고로 이번 유희의 목표는 고무고무 해적왕이 아닌 용병왕으로 그의 새로운 신분은 S급 용병이었다.
 이런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있는 그가 현재 맡은 일은 바로 한 상단의 호위였다.
 “도대체 이런 시골까지 와서 뭘 하겠다는 건지······.”
 산텐스 왕국에서 톨킨산맥까지 온 상단의 경로에 의문을 가진 카이나스가 혼잣말을 내뱉을 무렵, 그의 고용주인 제레미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보게.”
 “무슨 일이죠?”
 “이제 슬슬 거래 시간이네. 잘 부탁하네.”
 “이 밤에 말입니까?”
 “이번 거래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거든.”
 카이나스의 질문에 제레미가 씨익 웃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카이나스가 중얼거렸다.
 “구린 냄새가 풀풀 나는 거래로군.”
 용병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합법적인 일만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700년을 넘게 산 자신조차 모르는 동굴에 진입했을 무렵, 카이나스는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존재가 밝혀지면 큰일이 날 동굴에서 하는 거래였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간파한 것이다.
 그렇게 카이나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레미 상단이 짐마차를 이끌고 동굴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반대편에서 횃불을 든 4인조가 걸어왔다.
 “음? 처음 보는 얼굴이군?”
 제레미는 항상 거래하던 디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디노 님이 현재 수도에 일이 있으셔서 내가 대신 왔소. 대금은 확실하게 치를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뱀눈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자신이 죽여 버린 상인의 이름을 팔았다.
 그러자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전 때문에 상황이 지랄 같다고 하더니 그 때문인가 보군. 뭐, 나야 대금만 잘 받으면 되는 일이니까.”
 어차피 디노와의 관계는 거래를 하는 사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레미는 크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물건을 확인해 보게.”
 “알았소.”
 그때 누군가가 이미 제레미의 짐마차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고, 많기도 하다. 이게 다 체르빌이란 말이야?”
 민하루가 짐마차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면서 감탄을 자아내는 중이었고, 그 모습을 보며 제레미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까지 이 동굴에서 수도 없이 거래를 한 제레미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디노와 그의 거래에서 체르빌이라는 단어는 금기 중에 금지였다.
 그들이 거래하는 품목이 밝혀지는 순간, 인부들과 용병들까지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제레미가 뱀눈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 그게······.”
 뱀눈 사내 역시 설마 민하루가 이렇게 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민하루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제레미한테 있어서 그런 태도는 충분한 답변이 되었다.
 “이 자식들이!”
 제레미의 고성을 기점으로 그가 데려온 사내들이 칼을 뽑았다. 그들은 인부인 동시에 훈련을 받은 제레미의 사병들이었다.
 그때였다.
 쿵!
 제레미 쪽으로 걸어온 민하루가 진각을 밟자 동굴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동시에 그가 퍼트린 살기에 동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칼 내려놔라.”
 민하루가 제레미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그의 뒤에 서 있는 카이나스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뭐야, 이 아저씨. 일하라더니 진짜 드래곤 잡는 일에 보냈네? 이거 뭐 하자는 거야?”
 민하루의 살기 때문에 그의 혼잣말을 들은 이가 없었지만, 오직 카이나스만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그저 힐끗 본 것으로 자신의 정체를 파악한 민하루를 보며 카이나스가 살기를 뿜어냈다.
 “네 눈은 장식이냐? 인간이잖아. 그런 너는 뭐 하는 놈이길래 체르빌 밀거래 현장에 있는 거야?”
 자신의 살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건들거리는 민하루를 바라보면서 카이나스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내 조용히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 애로우.”
 과연 염제라 불리는 인물답게 그는 시동어만으로 동굴 전체에 수십 개의 파이어 애로우를 수놓았다.
 “해 보자고?”
 위협적인 마법에도 민하루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나스가 마음을 굳혔는지 마법을 발현시켰다.
 펑펑펑펑!
 수십 개의 파이어 애로우들이 카이나스가 지정한 대상에게 날아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대상에는 민하루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매캐한 연기와 살점이 타는 냄새가 동굴 안에 퍼질 무렵, 민하루가 화가 난 얼굴로 카이나스를 노려보았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민하루가 화가 난 이유는 아주 명확했다. 카이나스의 파이어 애로우는 민하루와 카이나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유희를 끝냈으면 이런 결과 정도는 예측하고 있어야지 않나?”
 카이나스가 그들을 죽인 이유는 바로 그의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고작?”
 심히 거슬리는 민하루의 말에 카이나스가 다시금 허공에 불화살들을 생성시키기 시작했다.
 파이어 애로우의 개수가 수십 개가 넘어갈 무렵, 민하루가 입을 열었다.
 “넌 안 되겠다. 내가 볼 때 교육이라는 게 좀 필요해 보이네.”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민하루의 도발을 그대로 받아친 카이나스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자 수십 개의 불화살들이 민하루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아까 같은 폭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팟!
 파이어 애로우들이 민하루의 몸에 닿을 무렵 수십 개의 불화살들이 일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카이나스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신기해? 앞으로는 더 신기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민하루가 카이나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퍽! 쾅!
 그러고는 카이나스의 뒤에서 나타난 민하루가 주저 없이 주먹으로 그를 날려 버렸고, 카이나스가 굉음을 내며 벽에 처박혀 버렸다.
 “윽! 이게 무슨!”
 폴리모프를 했더라도 그의 본질은 드래곤.
 인간의 형상에서도 발현되는 드래곤 스케일은 민하루의 앞에서 무용지물과도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고통이라는 감각에 카이나스가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났다.
 “오우! 맷집은 제법 되는가 보군. 그나저나 이거 타격감이 예술인데? 중독되겠어.”
 “으아아아!”
 상대방을 살살 긁다 못해 열불 터지게 만드는 민하루의 말에 카이나스가 허공에 거대한 불의 창을 생성시켰다.
 “마그마 스피어!”
 용암이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불의 창은 그대로 민하루에게 날아갔다.
 팟!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민하루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마그마 스피어 역시 민하루의 몸에 닿기 직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카이나스로서는 자신이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는 카이나스를 보면서 민하루가 차갑게 웃었다.
 “수작? 너는 이게 수작으로 보이는가 보지?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이라는 놈이 마약 밀매나 하는 주제에 말이지.”
 민하루가 처음 보는 드래곤을 이렇게 두드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가 말했던 드래곤은 대륙의 조율자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고작 유희를 하기 위해서 마약 밀매나 하고 있다니!
 펑!
 민하루의 주먹질은 다시 시작되었고, 카이나스는 아득한 고통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폴리모프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카이나스가 핏물이 고인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 기필코 산 채로 너를 씹어 먹겠다!”
 카이나스가 본체로 변하려는 것을 눈치챈 민하루가 그의 목덜미를 잡고서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건 안 되지.”
 그러고는 그것을 그대로 카이나스의 얼굴에 박아 버렸다.
 카이나스는 거대한 주먹이 자신을 삼키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또르르르.
 기절한 카이나스의 입에서 허연 이빨 여러 개가 굴러 나왔다.
 그 귀하다는 드래곤의 이빨이었다.
 
 
 
 #3화 짐 덩어리, 그 무게에 관하여
 
 
 
 
 
 “드래곤? 그 거대한 도마뱀 말하는 거야?”
 “그래.”
 “와우,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지?”
 “부여된 역할은 중재자, 균형을 잡는 것이지만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도취될 우려가 있지.”
 “애착이 있나 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 애착이 없을 리가 없지. 나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니까.”
 “그렇군······.”
 
 ***
 
 민하루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슬픔,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그래서 홧김에 두드려 팬 것이지만,
 “설마 드래곤이라는 놈이 이리 나약할 줄은······.”
 기절해 있는 카이나스를 보면서 민하루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 뒤로 카이나스는 다시 정신을 차렸지만, 민하루의 주먹 찜질에 다시 기절하는 등 반복적인 구타가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 이 자식!”
 퍽!
 “내가 기필코 너를 죽일 것이다!”
 쾅!
 카이나스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그래도 학습 능력이라는 것은 있는 모양인지 슬슬 민하루의 눈치를 보려는 카이나스였는데, 민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주먹을 쥐려는 찰나.
 “자, 잠깐! 잠깐만요!”
 카이나스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을 쳤다.
 “왜? 이제 대화를 해 볼 생각이 들어?”
 “······그렇다.”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굴욕을 참는 표정으로 카이나스가 간신히 대답했다.
 조금 더 때리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민하루는 그것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렇다? 네가 덜 맞았구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매 앞에서 장사 없다는 것은 만국 공통.
 “좋아. 그럼 드래곤인 네가 왜 체르빌 밀수에 관여하고 있는지 말해 봐.”
 “그, 그게······.”
 카이나스가 잠시 말끝을 흐리자 민하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 똑바로 안 해?”
 “네. 말하겠습니다. 시, 실은 저도 거래 물건이 체르빌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네가 팔 물건이 체르빌이라는 것도 모르고 왔다고? 너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민하루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자 카이나스가 질겁하며 대답했다.
 역시나 주먹의 힘은 위대했다!
 “저는 그저 용병으로 고용되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쇼!”
 “그래?”
 카이나스가 사정을 설명해도 민하루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아! 그래. 이게 있었지. 이거 보십쇼. 저 용병 맞습니다.”
 결국 카이나스가 용병 패를 보여 주자, 그제야 민하루가 그의 말을 믿었다.
 “뭐야? 그럼 넌 그냥 용병으로 상행 호위를 맡았을 뿐이라고? 얘들이 뭘 파는지도 모른 채?”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요약 잘하시는군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네가 호위할 상단이 뭘 파는지 관심도 없다고? 그건 조금 이상한데?”
 “알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 역할은 상단의 호위. 그것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체르빌을 파는 놈들인데, 저한테 그걸 알려 줄 이유도 없구요.”
 카이나스의 구구절절한 말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민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약간 모자란 놈 같은데······. 드래곤이 이렇게 멍청해도 되는 건가?’
 지금까지 자신을 때린 상대를 칭찬하지 않나, 그 고결한 드래곤의 자존심은 어디로 내팽개친 건지 술술 불어 버리는 태도하며······.
 분명 그녀에게 들었던 드래곤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자식을 어떻게 하지?’
 여전히 억울하다는 눈망울로 자신을 보고 있는 멍청한 드래곤을 보면서 민하루가 한숨을 내뱉었다.
 바야흐로 그에게 드래곤이라는 짐이 생긴 날이었다.
 
 ***
 
 민하루가 카이나스와 마을로 돌아오자, 촌장과 마을 사람들 전부가 나왔다.
 “정말 고맙네!”
 촌장이 민하루의 손을 부여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시골 노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민하루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촌장님?”
 “왜 그러는가?”
 “잠시 저 좀 보시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민하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촌장을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촌장의 입장에서 그는 마을을 구해 준 영웅이나 다름없었기에 전혀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촌장의 집으로 들어오자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던 민하루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알고 있었죠?”
 “뭘 알고 있었냐는 건가?”
 잠깐 촌장을 떠본 민하루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촌장님은 그 동굴에 산적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이 꽤 재미있는 동굴이더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촌장이 헛기침을 하며 잡아떼자 민하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르신다니 말씀을 드리죠. 그 동굴은 산텐스 왕국까지 뚫려 있는 비밀 동굴이었습니다. 단순히 산적들의 본거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더군다나 거기에서 밀수가 이루어지더군요? 근데 이상한 건 상인들의 태도였습니다.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니더란 말이죠.”
 담담히 말하는 민하루의 태도에 촌장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수상하긴 했습니다. 아무리 예거 아저씨의 고향이라곤 하나······ 고작 산적 퇴치에 절 보낼 이유가 없단 말이죠. 결국 뭔가가 있다는 얘기인데······. 와 보니 듣도 보도 못한 동굴이 있더란 말이죠. 너무 공교롭지 않아요? 마치 처음부터 이런 위험 요소가 있는 것을 알았다는 듯 S급 용병을 파견했다는 것이?”
 “······.”
 민하루의 말에 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한 그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을로 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제가 도달한 결론은 이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밀스러운 동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인들에게 통행료 비스무리한 것을 받고 있지 않을까?”
 말을 마친 민하루가 빙그레 웃으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
 “아닙니까?”
 민하루의 재촉에 결국 촌장이 거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꽤 똑똑하군.”
 그의 말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촌장의 말에 민하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우연히 발견한 그 동굴이 우리 마을의 밥줄과도 다름없다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뭔가?”
 “역시 얘기가 통하는군요. 제게 지급할 보수의 딱 세 배만 받겠습니다. 예거 영감님께 얘기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제가 S급 용병이거든요.”
 보수의 세 배.
 아무래도 적정선의 액수였는지 촌장은 잠시 갈등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지급하도록 하지. 돈을 꽤 밝힌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군.”
 아까의 고맙다는 태도는 사라지고 촌장이 민하루를 째려보며 말했다.
 “누가 그래요?”
 “예거 놈이 그러더구만. 대신 돈만 주면 일 처리는 확실할 것이라더니. 에잉. 젊은 사람이 돈 그렇게 밝히면 못써!”
 “······하하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민하루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동굴은 아직 무사한가?”
 “네. 이럴 것 같아서 무너뜨리진 않았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자네 말대로 그 동굴이 사라지면 우리 마을은 끝이라네.”
 “그런데······ 아닙니다.”
 순간 민하루는 그 동굴에서 체르빌이 거래되고 있는 걸 아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민하루에게 있어서 체르빌이라는 물건은 단순한 마약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에서 몇몇만이 알고 있는 체르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없애야 하는 물건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촌장이 체르빌 밀수에 관여되어 있는 인물이라면 민하루의 분노를 피하기 힘들 터였다.
 물론 눈앞의 노인은 분명 속물적인 인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약 거래를 눈감아 줄 정도의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촌장을 보며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처연한 눈빛을 잠시 비친 민하루가 촌장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시죠. 설마 마을의 영웅을 굶긴 채로 돌려보내시진 않겠죠?”
 “허허, 우리가 아무리 시골 사람이더라도 은혜 갚는 도리 정도는 안다네. 안 그래도 마을 아낙들이 거한 밥상을 준비하고 있네.”
 “좋습니다! 오늘 한번 죽어 보자구요!”
 아까의 살벌하던 대화는 어디로 간 건지 이내 의기투합한 노인과 청년은 어깨동무를 한 채로 문을 나섰다.
 다만 안에서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길이 없는 카이나스만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
 
 베일 왕국의 왕궁.
 장미를 좋아하는 델키디아 왕자의 취향에 맞게 수백 송이의 장미로 꾸며져 있는 이른바 장미궁.
 바쁜 걸음으로 그곳으로 향하는 이가 있었다.
 입구에 서 있던 근위병들은 그 인물을 보고서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인물이 왕국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왕자 저하.”
 어두운 궁 안, 거대한 왕좌에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델키디아 왕자를 보며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가? 샬롯 공작.”
 남자의 정체는 베일 왕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검호, 샬롯 공작이었다.
 노란 수선화가 수놓아져 있는 망토가 인상적인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데비 백작과 톰 자작이 미논 왕자님 진영으로 들어갔다 하옵니다.”
 “······그렇군.”
 “이로써 왕국 10대 기사단 중 일곱 개가 미논 왕자님의 손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린 자네가 있지 않은가.”
 베일 왕국의 10대 기사단 중 왕국 근위기사단보다 강한 기사단이 바로 샬롯 공작의 프라임 기사단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세가 불리한 것은 사실이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소수 정예가 아닙니다.”
 “그럼 어찌해야겠는가?”
 델키디아 왕자는 진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샬롯에게 물었다. 그에게 있어서 샬롯의 말은 곧 자신의 뜻이었다.
 “분명 수적으로 밀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비단 그것만은 아니겠지요.”
 “또 무엇이 중요하지?”
 나른한 목소리로 묻는 델키디아 왕자의 말에 샬롯 공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명분 역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명분? 이 내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명분은 제1 계승자라는 것뿐이라네. 허나,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귀족들의 움직임으로 증명된 것으로 아네만?”
 델키디아 왕자의 말대로 제1 왕자가 갑작스럽게 사고로 죽으면서 제2 왕자인 그가 제1 계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델키디아 왕자는 왕의 재목이라기보다는 병약한 학자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미논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델키디아 왕자는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분명 귀족들에게는 중요한 명분이 아닐 것입니다. 장자 계승이 뒤집힌 것은 비단 오늘내일의 일이 아니니까요.”
 “잘 알고 있군. 그럼 자네의 의견을 말해 보게. 무슨 명분이 중요하다는 건가?”
 말을 이리저리 돌리는 샬롯 공작의 태도에 델키디아 왕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내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국왕 폐하께서 실질적인 왕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 아닙니까?”
 제1 왕자가 사고로 죽으면서 현 국왕 베일 4세는 충격으로 사경을 헤매는 상태였다. 그게 벌써 5년째였다.
 “계속 말해 보게.”
 상당히 무례한 샬롯 공작의 발언이었건만, 델키디아 왕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의 말을 기다렸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왕위가 비어 버리는 상황이 오게 되면 저희의 명분이 더 강력해지지 않겠습니까? 당장 왕위 계승을 하셔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전도 의미가 없겠죠.”
 샬롯 공작은 꽤 담담하게 말을 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는지 지금까지 반응이 없던 델키디아 왕자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자네 지금?”
 “물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
 “하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가끔 일어나는 게 세상일인 법이죠.”
 샬롯 공작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말을 했지만, 델키디아 왕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4화 생존, 귀환에는 목적이 있었다.
 
 
 
 
 
 민하루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이건 꿈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그는 또다시 멸망해 가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슈우우-
 유성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들리면서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 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네메시스 대륙의 천신과 마신들이 지구를 멸망시키는 순간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으며, 신들의 권능에 의해 더 많은 사람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어떤 이는 전신이 부패되어 죽었으며, 어떤 이는 업화의 불꽃 속에서 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민하루의 가족들이 있었다.
 민하루는 데미안이 간신히 살린 마지막 지구인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가족과 세계가 사라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때까지 무신론자였던 민하루는 생각했다.
 만약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모든 것이 끝난 후, 가족의 죽음에 슬퍼하던 민하루는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을 눈물로 흘렸다. 그러다 지쳐서 혼절하고, 다시 깨어나 울었다.
 그렇게 울 만큼 운 민하루는 마침내 허망한 눈빛으로 멍하니 주저앉았다.
 데미안은 민하루가 그러는 동안 가만히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세계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민하루에게 어떠한 말도 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피어난 것은 바로 분노였다.
 원초적인 질문.
 ‘왜 나의 세계가 멸망당해야 하는가?’
 ‘어째서 나의 가족은 죽어야 했지?’
 분노로 인해 핏기 가득한 눈으로 질문하는 민하루를 바라보며 데미안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모든 것은 신들의 욕망 때문이었다.
 데미안에 의해 태어난 신들은 인간의 믿음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신들의 힘 역시 강해졌다.
 그렇게 네메시스 대륙의 역사가 몇만 년 흘렀을 때였다.
 신들은 생각했다.
 ‘네메시스 대륙은 이미 포화 상태이다. 인간의 번식력은 무한하니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면 되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지구 침공의 명분이었다.
 인간들의 새로운 번식장으로서 지구가 선택된 것이다.
 ‘고작? 고작 그따위 이유 때문에 한 세계가 멸망당해야 한다고?’
 모든 것을 들은 민하루는 다시 허탈해졌다.
 데미안의 세계에 갇힌 민하루는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을 정리해 갔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신은 분명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신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의 욕망으로 내 세계가 무너졌다면 나 역시 내 욕망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민하루는 데미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바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
 그에게 신들을 멸할 힘을 줄 것을 요구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데미안은 민하루의 요구에 슬픈 눈으로 응했다.
 그리고
 그렇게 300년이 지났다.
 
 ***
 
 지독하고도 아련한 꿈을 꾼 민하루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우윽······.”
 속이 뒤집어졌는지 민하루가 하얗게 변한 얼굴을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아이고! 손님, 안에 토하시면 안 됩니다!”
 “우에엑!”
 후드득 건더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마차 밖에서 들리자 그 모습을 보며 마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술 취한 손님은 안 받는 건데······.”
 보다 못한 카이나스가 등을 두드려 주자 속에 든 것을 모조리 비워 낸 민하루가 퀭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젠장, 시골 사람들이라 그런가······. 술 무지하게 세네.”
 “민하루 님이 약한 게 아닐까요?”
 카이나스가 토를 달자 민하루가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동굴 안에서와는 달리 입가에 묻은 하얀 액체 때문에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근데 무슨 악몽이길래 그렇게 소리를 지릅니까?”
 입가를 소매로 쓱 닦던 민하루가 놀라며 물었다.
 “뭐? 내가 소리를 질렀어?”
 “네. 소연이? 그 사람 이름을 계속 부르던데요?”
 카이나스의 입에서 죽은 여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민하루가 일순 얼어붙었다.
 “······.”
 “누군데요?”
 “······내 여동생.”
 “아······. 예뻐요?”
 모든 남성체가 그러하듯 카이나스가 자연스럽게 질문하자 민하루가 피식 웃었다.
 “예쁘냐고? 예쁘지. 아니, 예뻤지······.”
 민하루가 과거형으로 바꿔 표현하자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눈치챈 카이나스가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민하루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 좀 줘 봐.”
 “여기요.”
 카이나스가 건네준 물을 한 번에 들이켠 민하루가 이제야 살겠는지 한숨을 내뱉었다.
 “마차를 타는 게 아니었어.”
 “베르카 마을이면 마차 타도 3일 정도 걸리지 않아요?”
 “마법으로 가면 되잖아.”
 “아, 마법도 할 줄 아세요?”
 카이나스의 멍청한 물음에 민하루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너 드래곤 아니야? 네 마법으로 가면 되잖아.”
 “네? 저 공간 이동 할 줄 모르는데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게······ 사연이 있습니다.”
 “사연?”
 갑자기 카이나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자 민하루가 귀를 기울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저는 드래곤 사회에서도 알아주는 개성적인 드래곤이거든요. 네메시스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최초의 드래곤이 바로 접니다.”
 죽은 여동생 얘기를 꺼냈던 탓에 분위기를 바꾸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스스로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건지 카이나스가 에헴, 하고 으스대며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민하루는 저 입에 자신의 주먹을 밀어 넣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공간 이동을 할 줄 모르신다?”
 “모른다기보다······ 배울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게 맞겠죠.”
 “이런 염병. 이거 완전히 반푼이 드래곤이구만?”
 “반푼이라니요? 남들이 하는 건 하기 싫은 개성적인 드래곤이라고 불러 주실래요?”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카이나스를 보며 민하루가 주먹을 올렸다가 한숨을 내뱉으며 탄식했다.
 “하아······. 이제는 때릴 가치도 없다.”
 “그거 저한테 좋은 거겠죠?”
 “······제발 닥쳐.”
 한마디로 카이나스를 일축시킨 민하루가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일단 데려는 왔다만 이 자식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직접 매만져 주기도 했고 본인한테 들어 보니 꽤 이름 날릴 정도로 무력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건 민하루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미안하다. 네 삶을 살아라.’
 
 왜일까, 갑자기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은.
 팔짱을 낀 채로 자조적으로 웃은 민하루가 자신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카이나스를 바라보았다.
 “너 이번에 용병왕이 목표라고 했지?”
 지난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민하루가 카이나스의 말을 기억하고는 물었다.
 “뭐, 일단은 그랬죠. 지금은 모르겠지만.”
 “원래 유희라는 게 그렇게 목표를 정해 두고 움직이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가진 것은 무료할 정도로 넘치는 시간뿐인지라 이번 유희에는 무엇을 해 볼까 하는 포부 정도죠.”
 “너 약간 재수 없다. 갖고 있는 건 넘칠 정도의 시간이라니.”
 “하하······.”
 민하루의 일침에 카이나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남는 건 시간뿐이다 이거지?”
 “······그, 그런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카이나스가 불안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그럼 나하고 일이나 하자. 안 그래도 슬슬 움직이려고 했거든.”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몹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나스를 보며 민하루가 씨익 웃었다.
 “이 세계를 바꿔 보려고.”
 민하루의 그 미소에 카이나스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생물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위기 감지 능력이었지만, 이때 카이나스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거대한 계획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
 
 3일 뒤, 민하루와 카이나스가 길드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민하루가 용병 길드에 들어서며 활기차게 외쳤다.
 “도로시! 서방님 오셨다.”
 딱!
 “난 허락한 적이 없는데, 누가 서방님이야 자식아!”
 뒤통수를 부여잡고 죽는다는 민하루를 보면서 카이나스는 충격을 먹었다.
 세상에! 드래곤조차 두들겨 패는 남자의 뒤통수를 때리다니!
 솔방울만 한 눈으로 카이나스가 예거를 쳐다보았지만, 예거는 당연하다는 듯 민하루에게 말을 걸었다.
 “일은 제대로 했냐?”
 “아, 맞아. 그거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요.”
 언제 맞았냐는 듯 민하루가 예거의 팔을 붙잡고 길드의 구석으로 향했다.
 “뭐야? 뭔데 그래?”
 예거의 짜증에도 민하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거를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도 알고 있었죠?”
 “뭘?”
 낮은 목소리에도 예거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민하루가 눈을 가늘게 떴다.
 “톨킨산맥에 있는 비밀 동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마을 출신인 길드장님은 알고 있었어요. 그죠?”
 민하루의 끈질긴 질문에 결국 예거가 실토했다.
 “아, 자식. 그래, 알고 있었다. 근데 그게 왜!”
 “그럼 거기서 체르빌이 거래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어요?”
 언제나 장난기 넘치는 민하루였지만, 이번 질문만큼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
 그 분위기에 압도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예거가 대답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산적 퇴치에 불과한 의뢰. 그런데 길드장님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절 보냈단 말이죠. B급 의뢰에 S급 용병을 보낸 판단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민하루를 보며 예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제비들이 알려 주더구나. 내 고향이 체르빌 밀수 루트로 이용되고 있다고.”
 제비는 정보 길드원들을 부르는 은어였다.
 “아무튼 미안하다. 네가 체르빌을 끔찍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비밀 유지가 중요한 일이라······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더구나.”
 민하루가 이 세계에 귀환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예거였기 때문에 그는 진정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촌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아냐, 그분은 모르실 거다. 제비들이 알려 준 정보는 꽤 고급이었어.”
 “네. 그러시더군요.”
 “그래. 모르······ 뭐?”
 “슬쩍 떠봤는데 모르시더라구요.”
 말을 하며 빙긋 웃는 민하루를 보면서 예거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식이!”
 “하하하.”
 예거가 주먹을 들어 때리려고 하자 민하루가 그것을 피하며 웃었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신데 저렇게 멀뚱멀뚱 서 있는 거야?”
 아까부터 신경이 쓰인 카이나스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예거가 민하루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음······. 글쎄요. 일종의 부하랄까요? 일단 그 정도만 알고 계세요.”
 민하루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예거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묻지 않았다.
 “그래. 아무튼 고생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네. 아! 쟤도 당분간 같이 지낼 겁니다.”
 민하루가 턱으로 카이나스를 가리키자 예거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예거와 대화를 끝낸 민하루가 도로시를 한 번 더 놀리고는 카이나스와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는 길드 건물 2층에서 생활했는데 그게 벌써 3년째였다.
 “건물이 신기하네요? 용병 길드에서 생활하시는 겁니까?”
 계단을 오르면서 카이나스가 묻자 민하루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까 그 양반이랑 같이 사는 거야. 애초에 같이 살 작정으로 이 건물을 지은 거고.”
 “네?”
 “원래 유명한 용병이었는데, 날 만나고서 은퇴했고 덕분에 같이 살게 된 거지. 아! 아까 그 여자애는 도로시라고 하는데, 미래의 내 아내니까 건드리면 죽인다?”
 민하루가 눈을 부라리며 엄포를 놓자 카이나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뭐야? 그 말은 우리 도로시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해 보겠다고?”
 “······.”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나스가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민하루가 껄껄 웃었다.
 “넌 옆방 쓰면 돼. 나중에 여관으로 바꾸려고 지은 건물이라 빈방은 많아. 그럼 쉬어라. 내일 보자.”
 “네. 쉬세요.”
 민하루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카이나스는 주먹을 들고서 입을 열었다.
 “아오! 저걸 진······.”
 그때 민하루가 문을 벌컥 열고는 얼어붙어 있는 카이나스를 멀뚱멀뚱 보았다.
 “나 귀 밝다.”
 한마디 툭 내뱉은 민하루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카이나스는 들어 올렸던 주먹을 살포시 내리고는 총총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젠장······.”
 
 
 
 #5화 이별, 남겨진 자가 더 괴롭다.
 
 
 
 
 
 민하루가 길드에 도착한 그날 밤.
 “오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민하루가 눈을 떴다.
 “뭐야? 도로시야 아무리 오빠가 좋아도 그렇지 이런 야심한 시각에······.”
 도로시의 얼굴을 확인한 민하루가 습관처럼 농담을 던지는 찰나, 그녀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빠가, 아니 길드장님이 찾으세요.”
 “이 시간에?”
 “네. 빨리 내려가 봐요.”
 이불을 걷어찬 민하루가 방을 나서려다가 멈추고는 도로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하지 마. 이 오라버니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알았지?”
 “······네.”
 민하루의 손길에 붉게 물든 도로시의 얼굴을 보고서 피식 웃은 그가 방을 나섰다.
 1층 길드에 들어서니 여러 용병들과 예거가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 야밤에 무슨 일이에요? 나라가 망하기라도 했대요?”
 분위기를 바꾸려 민하루가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는데, 그의 농담에도 장내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하루야. 나 좀 보자.”
 평소에 늘 자신을 이 자식이라고 불렀던 예거가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민하루의 표정이 굳었다.
 길드장 방으로 들어온 둘은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고 예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방금 제비가 왔다 갔다.”
 “무슨 일인데요?”
 분위기로 파악하건대 꽤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한 민하루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는구나.”
 “네? 갑자기요? ······그런데 그게 왜요?”
 할 말은 아니었지만, 국왕이 죽은 것과 예거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은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였다.
 “······살해당하셨다고 하는구나.”
 예거의 입에서 살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민하루는 자신이 왜 새벽에 불려 나왔는지를 깨달았다.
 “범인은 누구래요?”
 “미논 왕자님이라고 하는구나.”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지겠군요.”
 “후우······.”
 민하루의 정리에 예거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거죠?”
 민하루는 그의 한숨을 제대로 이해했다.
 예거는 지금까지 내전과 관련된 어떠한 의뢰에도 민하루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예거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신들에 의해 멸망당한 마지막 지구인 민하루.
 데미안에 의해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 세계로 귀환한 민하루가 만난 최초의 인간이 바로 예거였다.
 당시 모종의 사건으로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예거를 구해 준 이후 예거와 도로시, 셋이서 이곳저곳을 다닌 민하루는 예거에게 자신의 모든 일을 말해 주었고, 예거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전부 믿어 주었다.
 그 뒤, 민하루의 권유에 의해 베르카 마을에 자리 잡은 그들은 용병 길드를 열어 생활하고 있는 중이었고, 자신의 인생을 살라는 데미안의 마지막 말에 따라 민하루는 나름대로 충실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예거는 그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민하루를 절대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아직도 판단을 하지 못하겠구나. 너를 보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미논 왕자면 길드장님과도 관련 있는 분이잖아요.”
 드비어 예거, 근위기사단 소속이었던 그가 용병으로 추락하게 된 것은 제1 왕자의 사고 이후였다.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왕궁에서는 제1 왕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가 필요했고, 바로 예거가 재수 없게 그 책임자로 선정되었을 뿐.
 귀족들은 제1 왕자 사망의 책임을 물어 예거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오직 미논 왕자만이 그를 감싸 결국 기사 작위를 파직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 그때 왕자님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으셨다면 난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널 보내기엔······, 정말 몸만 예전 같아도 내가 나서는 건데······.”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지 예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이, 은퇴한 노인네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요.”
 그를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 민하루가 장난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거의 얼굴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민하루는 빙그레 웃었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슬슬 움직이려고 했거든요.”
 “뭐? 너 설마······?”
 떠나려고 하는 것이냐는 말을 예거는 끝내 뱉지 못했다.
 “아예 떠나는 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저한테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는 거.”
 “야! 너······.”
 민하루가 해야 하는 일이 뭔지 알고 있는 예거가 얼굴을 굳혔다.
 그러다가 민하루의 얼굴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고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그분의 마지막 말씀을 잊은 거냐?”
 “······.”
 민하루가 입을 다물자, 예거가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복수? 중요하지. 그러나 그분의 말씀처럼 네 인생도 중요하지 않겠냐? 누가 말한 것처럼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네 인생을 오로지 복수에 바친다면······ 부모님도 슬퍼하시지 않겠어? 난 그걸 생각해 보라는 거다.”
 예거가 민하루의 손을 붙잡은 채로 설득하자,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민하루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순간 민하루의 처연한 눈빛과 마주한 예거가 얼어붙었다.
 “저는 데미안이 말한 것처럼 살 수 없어요.”
 “······왜?”
 “전 그날 이후, 오로지 한 꿈만 꾸고 있거든요. 부모님과 여동생이 죽는 모습, 내가 평생을 살아왔던 세계가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만 감으면 떠오르고 비명 소리가 들려와요.”
 “······.”
 “네. 제 인생도 중요하죠. 전 그래서 하려는 거예요. 제발 이 빌어먹을 꿈 좀 그만 꾸려고요. 저도······ 살려고 하는 겁니다.”
 결국 민하루가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후우······.”
 항상 장난기 많은 민하루였기에 예거는 그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물론 민하루가 필사적으로 숨긴 탓도 있었다.
 예거와 도로시는 그에게 있어서 300년 만에 생긴 가족이었으니까.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겨우 감정을 추스른 민하루가 예거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젠장, 며칠 좀 쉬다가 말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 아무튼 급한 일이잖아요. 빨리 의뢰서나 주세요.”
 코를 쓱 훔치며 민하루가 머쓱하게 말하자 예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다.”
 “아저씨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고개를 숙인 예거를 보면서 탁자에 놓여 있는 종이를 챙긴 민하루가 일어섰다.
 문을 열려던 민하루가 여전히 자신을 보지 못하는 예거를 잠시 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꼭 돌아올게요. 장인어른.”
 더 있다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지 민하루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자 예거가 고개를 들고는 담배를 물었다.
 손에 묻은 눈물 때문인지 젖은 담배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
 
 300여 년 전, 천신족과 마신족의 전쟁인 신마 전쟁이 일어났다.
 신들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이유로 새로운 세계에서 전쟁을 벌였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그 세계를 인간에게 주었다.
 신대륙이 바로 그것이었다.
 새로 생긴 대륙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진정 신이 주었다는 의미로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 새로운 세계를 신대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네메시스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넘어온 이들은 다양했다.
 농노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 온 이들도 있었고,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 온 개척자들도 있었으며, 자신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병사들을 데려온 어떤 제국의 이황자도 있었다.
 신들이 열어 준 최초의 게이트 이후, 대마법사(大魔法師) 미리안 가필드가 대륙 간 이동 마법진을 마탑에 만들어 왕래가 가능해지자 신대륙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신대륙 곳곳에 왕국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복 전쟁과 국교 선정을 위한 종교 전쟁이 빈번하게 발발했다.
 그렇게 3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신대륙은 평화의 시기를 맞은 상태였다.
 
 ***
 
 “넌 그걸 믿어?”
 베르카 마을을 빠져나온 민하루가 카이나스의 얘기를 듣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뭘요?”
 얘기를 잘 듣다가 짜증을 내는 민하루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짜증이 곧 주먹으로 변할 수 있었기에 카이나스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 신들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신마 전쟁을 벌이고, 그 땅은 인간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개소리를 믿느냐고.”
 “그건 믿고 말고 할 이야기가 아닌데요. 여러 역사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 각 신전에서도 그렇게 주장을 하······.”
 카이나스의 말을 끊은 민하루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전은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 그런데 네가 아는 신들은 그런 존재들이냐? 막 인간을 어여삐 여기는 그런 존재들이야?”
 “그거야······.”
 신들이 현세에 강림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신들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카이나스로서는 민하루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세계의 수호자라는 드래곤이라는 놈이 생각하는 게 이리 얄팍해서야······.”
 “아니, 제가 뭘 잘못했다고······.”
 민하루는 혀를 차며 카이나스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잘 들어. 내가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 주지.”
 “진실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벙벙한 카이나스를 보며 민하루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나스와 우연히 만난 이후, 그를 자신의 계획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한 민하루는 그가 세계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면 카이나스 역시 자신의 뜻에 동조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드래곤이었으니까.
 데미안이 그들 종족에게 부여한 역할을 그는 수행해야 할 테니까.
 잠시 데미안을 떠올린 민하루가 잔뜩 굳은 얼굴로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카이나스에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신대륙이라 불리는 이 세계는 신들에 의해 멸망당한 지구라는 곳이고, 자신이 그 세계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을.
 어스름한 새벽이 가시며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었고, 그제야 민하루의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카이나스의 반응은 데미안에게 얘기를 들었던 민하루와 비슷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기에 처음에는 부인했으나, 이야기가 계속되자 경악했고,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변했다.
 “······죄송합니다.”
 카이나스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네가 뭘 미안해? 아니, 왜 미안해?”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민하루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죄송하네요. 별생각 없이 건너온 이 세계가 그런 곳인 줄도 몰랐다는 게 죄송하고, 우리 세계의 신들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도 죄송하고······ 아무튼 그냥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왜? 개성적인 성격이라 드래곤 최초로 건너온 거라며?”
 민하루의 농담에 말문이 막힌 카이나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나스는 정말이지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이 그저 축복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종족은 가지지 못하는 유구한 시간과 더불어 선천적인 마나 보유량 때문에 가지고 있는 높은 레벨은 그들을 오만하게 만들었다.
 허나 민하루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드래곤이라는 종족에게 부여된 역할은 군림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랑 세상을 바꿔 보자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이나스를 보며 민하루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훗날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그날의 대화로 세계의 본질을 알아 버린 염제(炎帝)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심은 그가 진정한 용왕(龍王)이 되는 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6화 위기일발, 미논 왕자!
 
 
 
 
 
 두두두두두두
 마차 한 대가 거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잘 닦인 관도가 아닌지라 바퀴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마부는 더욱 거칠게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을 호위하듯 10여 명의 기사들이 같이 말을 몰고 있었다.
 갑옷 여기저기에 화살이 꽂힌 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그들을 그 누구도 왕국의 왕자를 호위하는 병력으로 보지 않을 것 같았다.
 “미논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마차 안에 탄 두 인물 중 한 명인 루카스 백작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미논 왕자를 바라보았다.
 피에 잔뜩 절어 있는 붕대로 허벅지를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는 미논 왕자였지만, 눈빛만은 환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눈빛을 뿌리며 미논 왕자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근위기사단까지 장악했을 줄은 몰랐네.”
 “아마 샬롯 공작의 입김이 작용한 모양입니다. 근위기사단의 단장인 네이션은 샬롯 공작의 제자가 아닙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베일의 수호자라는 인물이! 크윽!”
 흥분하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졌는지 미논 왕자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미논 왕자님! 안 되겠습니다. 마차를······.”
 그러자 루카스 백작이 당황한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대로 가다간 사달이 날 거라 생각한 루카스 백작이 마차를 멈추라고 하려는 찰나, 미논 왕자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까짓 상처쯤은 괜찮네! 그것보다 지원 병력은 있는 건가?”
 “······.”
 지원 병력을 묻는 미논 왕자의 말에 루카스 백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은 현재 국왕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쫓기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 병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있던 병력들 역시 프라임 기사단과 근위기사단의 습격에 괴멸이 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미논 왕자가 국왕을 죽였다는 소문이 왕국에 퍼지자마자 미논 왕자의 진영에 있던 이들 태반이 델키디아 왕자 쪽으로 넘어갔다.
 정말이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지금 호위하고 있는 병력 역시 루카스 백작의 기사단으로 남은 것은 이들이 전부였다.
 “후······.”
 루카스 백작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참혹한 표정으로 현 상황을 파악한 미논 왕자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지금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혹시 자네 영지로 가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니네.”
 갈 곳이 뻔한 상태에서 그들이 루카스 백작의 영지로 간다면 영지민들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미논 왕자는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지금은 자신의 코가 석 자인 상태였다.
 어떻게든 루카스 백작의 영지에 도착해서 병력을 모아 다시 수도로 가야 했다.
 비록 그 끝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때였다.
 푸슝!
 철 화살이 마차를 몰던 마부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화살비가 미논 왕자의 일행을 덮쳤다.
 슉슉슉슉슉슉슉!
 “습격이다!”
 “왕자님을 보호하라!”
 기사들이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마차를 보호하려 했지만, 마부와 더불어 마차를 몰던 말들 역시 죽으면서 마차가 뒤집어졌다.
 콰광!
 나무로 만들어진 마차가 뒤집어지더니 굉음을 내며 박살 났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한 습격자들이 어둠에서 몸을 드러냈다.
 “프라임 기사단!”
 암습자의 기본인 복면조차 하지 않고서 자신의 소속을 여실히 드러낸 그들을 보며 살아남은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자가 있나?”
 부단장인 헤임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뒤에서 철 화살이 날아와 소리친 기사를 죽였고, 헤임과 함께 등장한 프라임 기사단이 남은 기사들을 정리했다.
 덜컥.
 루카스 백작의 기사단이 모두 정리가 되었을 무렵, 마차의 잔해 속에서 피 칠갑을 한 루카스 백작이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는 기절한 미논 왕자가 있었다.
 “호오, 명줄이 꽤 길군?”
 그 모습을 본 헤임 백작은 흥미롭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었다.
 “헤, 헤임! 네놈이 지, 지금 역모를 저지르겠다는 것이냐!”
 입에서 피를 토하며 일갈을 내뱉는 루카스 백작을 보며 헤임 백작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역모는 네놈들이 저질렀지. 감히 국왕 폐하를 시해하지 않았느냐.”
 “미논 왕자님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너희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내가 근위기사단도 아닌데 말이지.”
 헤임이 조롱하듯 킬킬거리며 웃자 옆에 있던 프라임 기사단들도 웃기 시작했다.
 그 치욕적인 모습에 루카스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내 비록 여기서 죽더라도 구천을 떠돌며 너를 저주할 것이다!”
 피가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일갈을 터뜨리는 루카스 백작의 저주에 섬뜩할 법도 했지만 헤임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재미있겠군. 일평생 심심할 걱정은 없겠어.”
 말을 마친 헤임이 돌아서며 프라임 기사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그래? 그럼 이것도 재미있으려나?”
 자신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낯선 목소리에 헤임이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반응하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건 시도일 뿐이었다.
 퍽!
 칼을 뽑으려던 헤임이 그대로 날아가 몇 그루의 나무를 관통하며 사라졌고, 굉음이 들린 자리에는 웬 사내가 주먹을 내뻗은 자세로 서 있었다.
 철컥철컥!
 과연 왕국 제일의 기사단답게 프라임 기사단은 부단장이 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대열을 짜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헤임을 날려 버린 남자가 그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숨을 헐떡였다.
 “잠깐, 잠깐만. 후우······. 쉬지 않고 뛰었더니 숨이 차네. 이거 운동 부족인가? 후우······.”
 무릎을 잡고서 숨을 몰아쉬던 남자, 민하루가 이제 숨통이 트이는지 오른손으로 땀을 훔치며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루카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
 너무 황당한 일이 벌어진 탓인지 루카스 백작이 입을 헤 벌리고 멍청히 서 있자 민하루가 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기요!”
 “······네?”
 “저쪽에 기절하신 분이 미논 왕자님?”
 “그,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상대가 헤임을 날려 버린 것으로 보아 적군은 아니라고 판단한 루카스 백작이 여전히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정체를 물었다.
 “예거 아저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용병을 고용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용병? 예거? ······서, 설마! 드비어 예거를 말하는 겁니까?”
 기억 저편에서 예거를 떠올려 낸 루카스 백작이 놀라며 말하자 민하루가 반색했다.
 “오! 아시나 보군요. 그럼 어쨌든 용병을 고용하신 거 맞죠?”
 “도움을 청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용병 고용을 들먹이는 민하루의 말에 루카스 백작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민하루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아, 그럼 갈까요? 고용할 거요? 말 거요?”
 평소 그의 품성대로 자연스럽게 말투가 변해 버린 민하루의 재촉에 루카스 백작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하, 하겠습니다!”
 루카스 백작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떨어진 셈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된 겁니다. 보수는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 일단 얘들부터 정리해야겠죠?”
 마치 봉을 잡았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은 민하루가 뒤를 돌아 그때까지도 얼어 있던 프라임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섣불리 공격하지 않은 것은 칭찬해 주지. 근데 마지막 기회도 날려 버린 것 같지 않아?”
 “······뭐라고?”
 방패에 몸을 밀착시킨 채로 헤임의 부관이 되물었다.
 성격이 안 좋긴 했지만, 헤임은 프라임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상대는 그런 헤임을 일격에 날려 버린 인물이었다. 따라서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논 왕자를 죽이는 것이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주면 아무리 그 자식이 굼벵이 같아도 도착하지 않겠냐는 말이지. 안 그러냐? 카이나스.”
 슉!
 민하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뒤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하루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헉헉. 그렇게 혼자 가 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잘 쫓아왔으면 됐지. 어쨌든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더 늦었으면 확 패 버리려고 했거든.”
 “······.”
 며칠 그와 시간을 보낸 카이나스는 민하루의 저 농담 같은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대장은 내가 날려 버렸으니까, 부하는 부하가 상대해야겠지?”
 카이나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루카스 백작에게 걸어가는 민하루를 보면서 카이나스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도대체 제가 왜 부하······.”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십, 구, 팔······.”
 카이나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숫자를 세는 민하루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인 카이나스가 양손에 불길을 일으키며 프라임 기사단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양 떼들 사이에 난입한 늑대의 모습이 이러할까.
 카이나스는 간만에 스트레스를 풀 상대를 만난 듯, 마법이 아닌 맨손으로 프라임 기사단을 상대했다.
 어지간한 화살도 막는 그들의 갑옷이었지만 카이나스의 손에 종이같이 찢겨져 나갔고, 방패도 뚫는 그들의 철 화살은 한 대도 카이나스를 맞힐 수 없었다. 오히려 날아든 화살을 잡아챈 카이나스가 그대로 그것을 날려 화살을 날린 기사의 미간에 박아 버렸다.
 베일 왕국 제일의 기사단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상대는 두 대륙을 받치고 있는 칠주(七柱) 중의 하나인 염제였다.
 “으악!”
 “살려 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한 프라임 기사단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카이나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놓치는 순간 날아올 민하루의 주먹이 무섭기도 했지만, 간만에 스트레스를 풀 기회였기에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퍼진 카이나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프라임 기사단의 숫자를 하나하나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구만? 자식, 많이 쌓이긴 한 모양이네. 내가 너무 갈궜나?”
 잔인한 살육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민하루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풀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이내 남 일로 치부해 그쪽에 신경을 끈 민하루가 미논 왕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살아 있죠?”
 순간 루카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희를 구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분은 베일의 왕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시길.”
 루카스 백작의 단호한 음성에 민하루가 피식 웃었다.
 “좋아요. 난 그런 태도 좋아합니다. 부하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충성심이죠. 저 자식은 그게 없어서 문제란 말이죠.”
 카이나스를 힐끗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민하루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루카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아쉬운 건 그쪽 아닙니까?”
 “······.”
 직설적인 민하루의 말에 루카스 백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하루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더 솔직히 말해 줄까? 나는 이 양반이 누명을 쓴 왕자든, 정말 국왕을 시해한 범죄자이건 관심 없어. 그런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는 이유는 단 하나야. 옛날에 이 양반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도와줬기 때문이지. 그거 하나 때문에 내가 당신들을 도와주는 거야. 막말로 나는 당신들이 여기서 죽어 나자빠져도 아무런 상관없어. 다만 그렇게 될 경우 그 아저씨가 슬퍼하겠지. 난 오직 그걸 막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그 엿 같지도 않은 예의 강요하지 마. 그것도 힘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거야.”
 “······.”
 어느 순간 말투마저 변해 버린 민하루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고, 루카스 백작이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하루가 표정을 풀면서 히죽 웃었다.
 “자, 그럼 일단 왕자님부터 옮길까요?”
 “······그러시죠.”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민하루를 보는 루카스 백작의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몇 마디 나누진 않았지만, 왕국의 귀족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루카스 백작은 민하루라는 인물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정치로 다져진 그의 사람 보는 눈은 꽤 정확했다. 그리고 그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자, 위험한 인물이다.’
 
 
 
 #7화 계획, 적의 적은 아군이다.
 
 
 
 
 
 다년간의 용병 생활로 인해 응급처치를 잘 아는 민하루가 미논 왕자와 루카스 백작을 대충 치료한 뒤, 그들은 제일 가까운 마을에 도착한 상태였다.
 “후우······.”
 자다가 갑자기 불려온 의원이 소매로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루카스 백작이 끙끙거리며 물었다.
 “치료는 잘된 건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응급처치가 잘된 건지 상처에 비해 피를 덜 흘린 게 컸습니다.”
 “······.”
 의원의 뒤에서 에헴 헛기침을 하는 민하루가 눈에 들어왔지만, 루카스 백작은 바로 무시해 버렸다.
 그러자 민하루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을 보며 카이나스가 황당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대충 상태는 안정된 것 같습니다. 약을 지어야 하니 저는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자신이 치료한 사람이 왕자라는 것을 몰랐지만, 자연스레 하대하는 루카스 백작과 미논 왕자의 옷차림을 보고 귀족이라는 것을 알아챈 의원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게.”
 루카스 백작의 말에 의원이 방을 나가자 민하루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앉았다.
 “자, 그럼 계획이나 들어 볼까요?”
 “계획? 무슨 계획 말입니까?”
 민하루의 엄포 이후에 그에게 계속 존댓말을 써 온 루카스 백작이 되물었다.
 “계획이 있으니까 이틀 밤낮을 도망친 거 아닙니까?”
 “······.”
 “설마······ 계획도 없이 일단 살자고 도망친 건 아니겠죠?”
 민하루의 말에 할 말이 없는지 루카스 백작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곧이어 현재 상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염병······.”
 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병력 자체가 전무하다는 말입니까?”
 루카스 백작의 말을 정리하듯 카이나스가 물어보자 루카스 백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자인데, 이렇게까지 힘이 없을 수 있나? 따르던 귀족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혼잣말인 듯 내뱉는 카이나스의 말이 비수가 되어 루카스 백작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명분이 이래서 중요한 거야.”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민하루가 누워 있는 미논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분이요?”
 “귀족들은 미논 왕자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어.”
 “왜죠?”
 “그가 국왕 시해 사건의 범인이니까.”
 “사실이 아니잖아요?”
 카이나스가 답답하다는 듯 되묻자 민하루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지.”
 민하루의 말에 듣고 있던 루카스 백작이 소리쳤다.
 “왕자님은 결코 그러신 분이 아니오!”
 “그래. 그건 이쪽 생각이죠. 그래서 이 행위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야.”
 “그 말씀은?”
 동그랗게 눈을 뜬 카이나스가 되묻자 민하루가 조용히 말했다.
 “누명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전의 명분을 저쪽이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은 미논 왕자를 도울 수 없어. 아니, 변호하는 말조차 할 수 없지. 그랬다간 반역자로 낙인찍힐 테니까.”
 “······바로 맞혔네.”
 현실을 냉철히 분석한 민하루의 말에 지금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미논 왕자가 부스스 눈을 뜨며 말했다.
 “왕자님!”
 깨어난 미논 왕자를 보면서 루카스 백작은 눈물이라도 흘릴 듯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로 보아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나 보군. 그나저나 자네는 누군가?”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킨 미논 왕자가 민하루를 보며 물었다. 그 눈빛을 잠시 살핀 민하루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옛 인연이 보낸 도우미라고나 할까요?”
 “그게 무슨 소린가?”
 “드비어 예거라는 사람이 날 보냈습니다. 일개 용병이죠.”
 “용병?”
 상황 파악이 안 된 미논 왕자가 반문하자 루카스 백작이 귓속말로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미논 왕자를 보면서 민하루는 씨익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자가 프라임 기사단을?”
 “네.”
 루카스 백작의 무거운 대답에 미논 왕자가 얼굴이 굳은 채로 민하루를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그나저나 그이가 아직 날 기억하고 있었군.”
 예거를 떠올린 미논 왕자가 씁쓸하게 웃자 민하루가 냉큼 끼어들었다.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자긴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고 항상 말씀하시더군요.”
 “그저 희생양이 필요한 상황에서 죄 없는 이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라네.”
 “그때 왕자님의 선택이 이렇게 보답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럼 된 거죠.”
 “그렇지······.”
 민하루의 보답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자신의 처지를 상기한 미논 왕자가 자조적인 표정을 내비치자 분위기를 환기할 겸 민하루가 대화 주제를 바꿨다.
 “자자, 그럼 이제 다음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용병을 고용하셨으면 써먹으셔야죠?”
 예거의 부탁에 의해 미논 왕자를 구하긴 했지만, 민하루는 이 일에 철저히 수용적인 태도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루카스 백작에게도 말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미논 왕자의 안위였지 그의 복권(復權) 따위가 전혀 아니었다.
 “일단 루카스 백작 자네의 영지로 가도록 하지.”
 “왕자님, 제 영지에는······.”
 루카스 백작은 보유하고 있던 기사단을 전부 잃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의 영지에는 300여 명의 사병들이 전부였다. 물론 그들은 오러 같은 것을 다룰 줄 모르는 일개 병사들이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하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샬롯인지 머시탱이가 가만있지 않겠죠.”
 미논 왕자는 자신의 말을 받은 민하루를 보며 눈에서 이채를 빛냈다.
 “맞네. 분명 영지민들을 대상으로 협박할 것이 분명하네. 그러니 우리는 그곳이 사지라는 걸 알더라도 가야 하네.”
 “예? 설마······.”
 루카스 백작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눈빛을 보내자 그것을 보고 있던 민하루가 혀를 찼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요. 이미 왕자를 죽일 병력을 정체를 숨기지도 않은 채 보낸 인물들입니다. 더군다나 왕자님은 기필코 당신 영지에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왕자님.”
 “잘 알고 있군.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누명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네.”
 “그런!”
 루카스 백작의 탄식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방 안 가득 침묵이 퍼져 갈 때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카이나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베일 왕국의 국교가 모데우스교 아니던가요?”
 난데없이 국교를 묻는 카이나스의 질문에 루카스 백작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소만.”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죠?”
 “갑자기 뭔 헛소리야? 성직자들이 뭘 하고 있겠어? 기도하고 있겠지.”
 카이나스가 한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지 민하루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몇 번의 주먹다짐으로 인해 이쯤 되면 찌그러질 법도 한 카이나스였지만, 이번만은 다른 듯했다.
 “역사적으로 신전이 이런 전쟁에 개입한 적은 많습니다. 더군다나 국교로 선포한 왕국에서 왕이 살해당하고 내전이 일어났는데, 모데우스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음?”
 카이나스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민하루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민하루가 길드에서 떠나기 직전에 받았던 정보에는 모데우스교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잠깐, 혹시 델키디아 왕자가 신전까지 포섭한 겁니까?”
 대답은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루카스 백작의 입에서 나왔다.
 “그건 아닙니다. 애초에 델키디아 왕자님은 모데우스교의 신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오히려 호크마의 교리를 따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라? 이것 봐라?”
 루카스 백작의 대답에 떠오른 것이 있는지 민하루가 턱을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왜 그러는가?”
 민하루의 그런 태도가 답답한지 미논 왕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왕자님은 모데우스교의 신도이십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오히려 역질문이 들어오자 미논 왕자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네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카이나스. 모데우스교의 성기사들은 어떻지?”
 이번에도 미논 왕자의 질문을 무시한 민하루가 고개를 돌려 카이나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성기사들이 어떻냐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라든가 특성 말이야. 모데우스라는 신이 가지고 있는 권능에 따라 성기사들도 제각기 다를 것 아니야.”
 “네. 잘 알고 계시네요. 색욕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모데우스는 사실 밤의 여신으로 그 신도들은 달의 힘을 숭상합니다. 성기사들 역시 월광(月光)의 권능으로 강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요?”
 “그래? 그 말은 곧 꽤 강력한 병력이란 말이지?”
 “그렇죠. 제한적이긴 하지만 호크마나 베르제의 성기사들에 비해선 꽤 강한 편이죠.”
 “이보게!”
 자신을 무시한 채로 계속 대화를 하고 있는 둘을 보며 미논 왕자가 호통을 쳤다.
 그때였다.
 짝!
 “하하하하! 그렇군!”
 지금까지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루카스 백작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러자 화를 내려던 미논 왕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루카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또 왜 그러는 건가?”
 “왕자님! 정말로 신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나 봅니다!”
 아까 미논 왕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은 루카스 백작이 아직까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미논 왕자의 손을 잡으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민하루가 팔짱을 낀 채로 씨익 웃고 있었다.
 
 ***
 
 3일 후, 아침.
 루카스 백작의 영주 성 앞에 네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하네.”
 미논 왕자가 민하루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힘 있게 말했다.
 “저라도 같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루카스 백작이 불안한 표정으로 민하루를 바라보았다.
 “혼자가 더 편합니다. 그리고 혼자 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아······.”
 걸림돌밖에 안 된다는 민하루의 완곡적인 표현을 알아들은 루카스 백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던 민하루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는 카이나스에게로 옮겨 가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너! 사고 치지 마라!”
 “제가 앱니까? 뭔 사고를······ 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던 카이나스가 민하루의 살벌한 표정을 보고는 바로 말을 바꿨다.
 “그리고 훈련 잘 시켜! 내가 돌아왔을 때도 병사들 여전히 어리바리하면······.”
 민하루가 말끝을 흐리자 카이나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뒤에 이어질 말은 아마도 ‘지옥을 보여 줄 테다.’ 등이었을 것이고, 그 지옥은 물리적인 타격에 의한 고통 지옥일 것이 뻔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쇼. 그리고 오실 때 선물 사 오시구요.”
 “내가 여행 가냐!”
 “그 정도로 맘 편히 다녀오시라는 말이었습니다.”
 “어휴······.”
 결국 크게 한숨을 내뱉은 민하루가 고개를 돌려 미논 왕자와 루카스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걸음은 이내 광속의 질주로 변해 버렸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민하루를 보면서 미논 왕자는 맑은 눈빛을, 루카스 백작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고, 오직 카이나스만이 두 손을 번쩍 들며 소리를 질렀다.
 “만세! 드디어 자유다!”
 그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헉!”
 만세를 부르고 있는 카이나스 앞에 어느새 민하루가 서 있었고, 결국 카이나스는 민하루에게 발길질을 당하고야 말았다.
 “결국 얻어터지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카이나스를 뻥뻥 차고 있는 민하루를 보며 왕자와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과연 이들을 믿어도 될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8화 섭외, 첫 번째 단추
 
 
 
 
 
 수도에 있는 샬롯 공작의 저택.
 샬롯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쾅!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평소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인 샬롯 공작이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는 책상을 부술 듯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그러자 그의 앞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헤임 부단장을 포함한 스무 명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
 믿기지 않는 소식에 샬롯 공작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자리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더 자세하게 보고해 보도록.”
 “헤임 부단장은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내장이 파열된 채로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고, 나머지 단원들은 현장에서 모두 즉사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말은 뭔가? 설마······ 헤임이 일격에 죽었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추측인데······, 헤임 경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 역시 일격에 죽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심지어 저희 기사단의 화살에 맞아 죽은 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꽤 강력한 인물인 듯싶습니다.”
 “인물이라니? 흉수가 하나라는 말인가?”
 “현장에서의 보고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
 부단장인 헤임은 샬롯 공작의 제자로 무려 180의 레벨을 갖고 있는 이였다.
 머지않아 소드 마스터가 될 인물을 일격에 죽인 것도 모자라 스무 명에 불과하지만 왕국 최강이라 불리는 자신의 기사들을 홀로 상대했다?
 “빌어먹을······.”
 물론 샬롯 공작 역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베일 제일검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미논 왕자를 죽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필적하는 새로운 강적이 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알았다. 최대한 흉수에 대한 정보를 더 캐 보도록.”
 “예. 알겠습니다.”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샬롯 공작이 부하를 돌려보냈다.
 이윽고 부하가 방을 나가자 샬롯 공작이 한숨을 내쉬고는 방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책장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책 한권을 뽑았다.
 우르릉.
 그러자 놀랍게도 책장이 반으로 열렸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샬롯 공작은 그 모습이 익숙한 듯 계단으로 내려갔고, 그의 걸음마다 벽에 박혀 있던 마나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원형 계단을 따라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은 꽤 깊은 모양이었다.
 샬롯 공작이 그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지하 공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실패했다.”
 [뭣이?]
 “아마도 미논 왕자가 새로운 인물을 영입한 듯하다.”
 [그 정도는 예측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것 아니었나?]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지. 보낸 병력도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는데 모조리 당한 것으로 보아 꽤 강력한 인물을 포섭한 모양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대로 포기하겠다는 건가?]
 으득.
 상대의 도발적인 말에 샬롯 공작이 어금니를 물었다.
 “계약은 확실한 것이겠지?”
 [네가 실패하지 않는 한.]
 “그래야 할 것이다. 난 이 계획에 모든 것을 걸었으니까.”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인 샬롯 공작이 엄포를 놓고는 뒤돌아 계단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지자 어둠 속에서 광소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야지. 영혼을 팔았는데, 못 할 것이 없겠지. 크하하하.]
 우웅거리는 진동만이 어둠 속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
 
 “앗흥!”
 “흐응!”
 작게 들리긴 했지만, 원색적인 음성들이곳곳에서 들려오는 공간에 민하루가 뻘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얘기는 들었다만 진짜로 합법적으로 매춘을 하는 모양이군. 이거 참······.”
 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이곳은 바로 베일 왕국 수도에 있는 모데우스교의 신전이었다.
 모데우스가 색욕의 신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기사를 제외한 모데우스의 사제는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몇몇 사제들은 돈을 받고 몸을 팔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죽은 국왕이 이런 교리를 좋아해서 왕자와 공주를 일곱 명이나 낳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문화적인 충격으로 입을 벌린 채 신전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사제 한 명이 민하루에게 다가왔다.
 “대사제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나요?”
 “아, 네. 여기 이걸 전해 주시면 아실 겁니다.”
 민하루가 미논 왕자에게 받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사제는 그 편지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더니 이내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민하루가 거대한 신전을 보면서 ‘이게 다 매춘으로 올린 건물이라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아까 갔던 사제가 다시 돌아왔다.
 “대사제님께서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같이 올라가시죠.”
 대사제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대접이었다.
 “그러시죠.”
 계단을 따라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간 민하루는 방 앞에 서 있는 성기사 둘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꽤 쓸 만하네.’
 이윽고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대사제가 민하루를 반겼다.
 “어서 오시게.”
 대사제는 외갓집에서 볼 법한 호호할머니였는데, 인상이 좋은 것으로 보아 왕년에 한 미모 했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편지의 주인 대신 온 민하루라고 합니다.”
 방 안에 있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의식한 민하루가 미논 왕자라는 표현 대신 편지의 주인이라고 지칭하자 대사제가 씨익 웃었다.
 “내 손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모두 자리 좀 비켜 주게.”
 “예. 대사제님.”
 겨우 둘만 남게 되자 대사제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미논 왕자님께서 보내셨다고 들었네만?”
 “네.”
 “편지에는 미논 왕자님의 직인과 더불어 잘 부탁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네만, 도대체 뭘 부탁한다는 말인가?”
 이런저런 인사말도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대사제의 시원스러운 성격이 마음에 드는지 민하루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신전이라고는 하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이네.”
 노인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는 대사제의 반응에 민하루가 짐짓 속으로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민하루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 바로 말씀드리죠. 대사제님이 미논 왕자님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직설적인 민하루의 말에 대사제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이거 참 재미있는 친구구만?”
 “제가 그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래. 그럴 것 같네. 아무튼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모데우스 님을 믿는 신도들이라네. 베일 왕국이 내전으로 복잡해진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나설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더욱이 국왕 폐하를 살해했다는 미논 왕자를 도울 순 없지 않겠는가?”
 “대사제님도 그 허황된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나야 왕국에서 발표한 이야기를 믿을 뿐이라네.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못 믿을 건 또 뭔가?”
 음흉하게 웃는 대사제를 보면서 민하루가 씨익 웃었다.
 역시 생각한 대로 만만찮은 노인네였다.
 “그럼 베일 왕국의 국교가 바뀐대도 계속 믿으실 겁니까?”
 민하루의 도발적인 말이 끝나는 그 순간, 순식간에 대사제의 표정이 굳었다.
 “젊은 친구가 말조심하는 게 좋겠군. 국교가 바뀌긴 왜 바뀐단 말인가? 방금 자네의 말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다네. 난 여기서 성기사들을 부르고 싶지 않아.”
 대사제의 차가운 경고에도 민하루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에서 국왕으로 추대될 사람은 델키디아 왕자일 겁니다.”
 “그렇겠지.”
 “델키디아 왕자님이 호크마의 교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왕궁의 공공연한 비밀이죠.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국교라는 것이 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베일 왕국의 국교가 바뀌게 되면 대사제님이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지······.”
 “그만!”
 민하루의 말은 대사제의 노호에 끊기고야 말았다.
 대사제는 극도로 분노한 상태인지 눈썹이 푸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민하루를 노려보던 대사제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대사제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것인가?”
 한 음절마다 분노가 가득 들어 있는 대사제의 말에 민하루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디까지나 델키디아 왕자가 국왕이 되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 순간, 대사제가 흠칫거리며 소리쳤다.
 “그 말은?”
 “네. 미논 왕자님께서 약조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흠······.”
 드디어 민하루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대사제가 상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민하루가 앞에 놓여 있던 차 한 잔을 비울 동안 대사제는 여전히 고심하는 듯했다. 반면 민하루는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에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성기사들이란 말이군?”
 결국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대사제가 본론을 꺼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까는 내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같이 말하던 대사제가 미논 왕자의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있자 민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듣는 귀가 있다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황을 아신다니 말씀드리자면 시간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민하루의 재촉에 대사제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것 하나만 묻지.”
 “말씀하시죠.”
 “우리가 합류한다면 이길 수 있는가? 이건 한 나라를 상대하는 일이네.”
 성기사들이 일반 기사들보다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일반 기사들이 아니었다.
 베일 왕국의 근위기사단이 있었고, 최강이라는 프라임 기사단이 있었다. 게다가 그 외의 다른 병력까지 합치자면 그 병력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한 나라를 상대한다는 대사제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단 하나 정정해 드리죠. 우리는 그 모든 병력들을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상대해야 할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국왕 폐하께서 승하하시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전세는 미논 왕자님이 더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미논 왕자님이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전세가 바뀐 것이죠.”
 “계속 말하게.”
 “원래 미논 왕자님 진영에 속해 있던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된 거란 말입니다. 명분 자체가 저쪽에 있는 이상 미논 왕자님 편을 든다고 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모데우스의 성기사들이 우리 편에 붙는다면 상황이 다시 바뀝니다.”
 민하루의 말에 대사제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즉, 우리가 돕는다면 그 귀족들이 다시 미논 왕자님을 돕는다는 말인가? 과연 그럴까? 자네 말대로 명분은 저쪽이 유리한 상태인데?”
 “네. 하지만······ 적어도 델키디아 왕자 쪽을 돕진 않겠죠.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
 대사제는 그제야 민하루의 말을 이해했다.
 애초에 미논 왕자를 밀던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그러다가 미논 왕자가 국왕 시해범으로 지명되자 가차 없이 버린 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논 왕자가 신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면?
 그들은 갈등할 것이 뻔했다. 델키디아 왕자를 돕자니 그들은 애초에 미논 왕자 편에 있었다는 낙인이 있었다. 그렇다고 미논 왕자 쪽에 붙기엔 명분도 약했고, 전쟁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민하루에겐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막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한 델키디아 왕자 측 병력의 약화.
 바로 이것이 민하루와 루키아 백작의 생각이었다.
 “후후후······.”
 대사제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민하루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분노 어린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단은 어디로 보내면 되겠는가? 루키아 백작의 영지로 보내면 되는가?”
 승낙이나 다름없는 대사제의 말에 민하루가 만족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뇨. 일단은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섣불리 병력이 움직이게 되면 저쪽에서 대응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군.”
 “제가 왕자님께 이 사실을 전한 후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움직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나저나······ 미논 왕자님은 꽤 괜찮은 인물을 얻었군. 자네 혹시 종교가 어떻게 되나?”
 종교가 없다고 하면 바로 성기사로 임명할 것 같은 대사제의 태도에 민하루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전 지금 용병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데미안 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데미안이라면······ 그렇군. 알겠네. 아무튼 연락을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데미안이라는 말에 흠칫 놀란 대사제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예상했는지 민하루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한 후, 신전을 빠져나온 민하루가 신전을 뒤돌아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일단 첫 번째는 해결되었고······. 두 번째가 문제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민하루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9화 예거, 입장 차이의 미묘한 관계 (1)
 
 
 
 
 
 “이것 참······.”
 수도에서 모든 볼일을 마친 민하루가 현재 서 있는 곳은 그에게 있어서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베르카 마을이었다.
 코를 쓱 훔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하루가 익숙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 후에나 올 것처럼 떠나 놓고 고작 며칠 뒤에 다시 오게 될 줄은······.”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낄낄거리며 웃던 민하루가 결국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도로시, 오빠 왔다!”
 떠나던 날과 마찬가지로 길드 안에는 많은 인원이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난데없는 민하루의 등장에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너······ 뭐야?”
 그중 가장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역시나 예거였다.
 “하하하······. 그게 사정이 있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왕자님은?”
 도대체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눈빛으로 황망하게 민하루를 바라보던 예거가 허탈하게 물었다.
 “오빠!”
 그때 도로시가 달려와서 민하루에게 안겼다.
 “어이쿠, 야! 다 큰 처녀가 이렇게 몸을 날리면 어떡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던 민하루는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도로시가 그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탓이었다.
 “······그래. 안 죽고 왔다.”
 결국 민하루가 도로시를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고, 그 모습을 보며 예거가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
 
 며칠 전, 민하루는 미논 왕자와 이동 중에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그럼 도대체 자네 레벨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미논 왕자 역시 한평생 검을 휘둘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민하루에게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자신은 기절한 상태였지만, 눈앞의 이자는 왕국 최고 기사단인 프라임 기사단의 부단장을 일격에 날려 버린 강자였다.
 “음······. 대충 200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대답하기에 썩 난감한 듯, 민하루가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미논 왕자에게 있어서 더한 충격인 모양이었다.
 “그럼 마스터란 말인가?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그런데 왜 자네 같은 강자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건가? 나는 민하루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네만?”
 검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의 목표인 소드 마스터. 레벨에 따른 그 기준점은 바로 200레벨이었다.
 “하하······. 제가 어딘가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쭉 용병 일을 해 왔습니다.”
 소드 마스터는 어느 왕국에 가도 바로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실력자였다. 순간적으로 미논 왕자의 눈빛에서 탐욕을 읽어 낸 민하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논 왕자 역시 그런 민하루의 반응을 읽었는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무튼 자네 같은 용병이 있는 줄 알았으면 괜히 귀족들을 포섭했나 보군. 그냥 용병이나 고용했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함인지 미논 왕자가 농담을 던지자, 민하루가 그 농담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왕자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요?”
 그때 옆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루카스 백작이 심각해진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왜······ 그러는가?”
 영문을 모르겠는지 미논 왕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루카스 백작은 여전히 진지한 눈빛이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죠.”
 “이런 강자가 있는 줄 알았으면 용병을 고용할 거라고 이야기했네. 귀족들의 기사단이 아무리 강해 봐야 마스터만 하겠냐는······ 잠깐만······. 자네 혹시?”
 말을 하던 미논 왕자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얼굴이 심각하게 변해 버렸다.
 “예! 왕자님! 바로 그겁니다!”
 
 ***
 
 “······뭐야? 그럼 왕자님이 용병을 고용하시겠다고? 직접?”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예거가 황당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런 셈이죠.”
 오랜만에 온 집이 좋은지 민하루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예거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 자식이! 지금 이 얘기가 장난인 줄 아나!”
 결국 한 대 맞은 민하루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 왜요! 아오······ 아파라.”
 한숨을 푹 내쉰 예거가 담배를 한 대 물고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 왕자님이 용병을 고용한다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길드장님은 어차피 미논 왕자님 도우실 거잖아요. 그래서 나 보낸 거 아닙니까?”
 민하루가 입을 샐쭉 내밀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맞아.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뜻이지.”
 “네?”
 “그건 길드장으로서 내린 결정이 아니고, 내 개인적인 은혜를 갚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베일 왕국의 내전은 제1 왕자 서거 이후, 국왕이 쓰러지면서 발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때는 소규모 교전만 있을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용병들이 자신의 칼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민하루가 말하는 도움, 그것은 본격적인 내전에 용병이 나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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