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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에 맞고 모든 게 달라졌다! 1-1권

2019.01.29 조회 8,692 추천 52


 # 헤드샷 맞고 시작!
 
 따악!
 나무 배트가 내지르는 경쾌한 타격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배트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푸른 하늘 위로 높이 떠올랐고, 이내 곧 하얀색 작은 점으로 변했다가 점차 그 크기를 키우더니 내가 있던 그물망 너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아아!
 주변 사람들이 내지르는 기대에 찬 함성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내 귓가를 어지럽혔다. 빨간색 실밥 모양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올 만큼 커진 공은 나의 시야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양손은 자연스레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쭉 뻗은 나의 두 손을 지나쳐 사라져 버린 공.
 “아아······.”
 손아귀에 들어왔던 장난감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아쉬움에 진한 탄성을 내뱉었을 때였다.
 
 퍼억!
 뒤통수에서 화끈한 통증이 몰려왔다.
 “지수야!”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빠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고 내 두 눈에서는 주변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똥별이 떠올랐다. 그 별똥별들은 점차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곧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곤, 나를 그 안으로 확 잡아당겼다.
 
 
 # 꿈꾸는 소년
 
 와아아!
 “GO! GO!”
 “HOME RUN! HOME RUN!”
 방금과 비교조차 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함성에 파묻혀 명확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 유독 ‘홈런’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아득하게 파고 들어올 무렵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졌던 시야가 점차 또렷하게 돌아왔다.
 ‘어······ 여기가 어디지?’
 뜨거운 함성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지금 이상한 곳에 서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아빠와 함께 잠실 야구장 관중석에 앉아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관중석이 아닌 야구장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독이 바짝 오른 채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투수가 눈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꿈······ 이겠지?’
 내가 이렇게 꿈이라고 생각하는 아니, 확신하는 이유는 이 몸뚱어리의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지만 절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시각과 후각, 청각은 물론이고 옷 위로 느껴지는 각종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피부 감각까지 그대로 느껴져 내 몸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질 수도 없었기에 마치, 몸 안에 내가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 무척이나 답답했다.
 ‘시야는 마음대로인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몸뚱이가 쳐다보는 곳에 한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시야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지금 상황에서 딱히 할 것도 없고 우선, 나의 시야에 잡히는 것들을 살펴보았다.
 먼저 보이는 것은 마운드 위에서 옅은 회색 유니폼을 입고 ‘KC’라는 마크가 써진 파란 모자를 쓴 외국인 투수가 보였고, 그의 뒤로는 역시나 똑같은 유니폼 차림의 선수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저 멀리 거대한 전광판 너머로 무려 네 개의 층계가 있는 초대형 관중석이 있었는데,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중들이 가득 차 있었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시야에 담으려는 찰나, 나의 몸뚱어리가 힘을 급격하게 끌어 올리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 위로 글러브를 들어 올려 본격적인 투구 자세에 들어가는 투수가 왼쪽 디딤발을 가슴 높이까지 끌어 올리자 나의 몸도 왼발을 살짝 들어 체중을 오른쪽으로 모았다.
 이윽고 투수의 디딤발이 지면에 착지하는 순간 투수의 머리 위에서 팔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하얀색의 작은 공이 총알처럼 내게 날아들었다.
 
 “볼.”
 공을 보는 찰나의 순간,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직감한 것인지 머릿속으로 한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묘하게 낯이 익었다.
 ‘내 목소리 아냐?’
 지금처럼 항상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 소리가 내게 직접 말을 걸어온 듯 느껴졌다.
 
 이 혼란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몸뚱어리는 다시금 집중하고 투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왼발을 높이 들고 머리 위에서 공을 던지는 전형적인 오버핸드형 투수의 손에서 공이 쏘아져 나오자 이번에는 꿈쩍하지 않던 방망이가 허리 회전과 함께 부드럽게 돌아갔다.
 딱!
 “빗맞았군.”
 배트에서부터 시작된 강한 반발력이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지르르 올라오자 다시금 그 목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맞자마자 아는 것이지?’
 머릿속을 채우는 허무한 말투보다 맞추자마자 아는 느낌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오늘 컨디션이 꽤 좋군. 분명 쿨 존이었는데 말이야.”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분명, 빠르게 영어로 말했는데 마치 한국어를 듣는 것처럼 자동으로 그 뜻이 이해가 되었다.
 “음······.”
 이 몸은 장갑을 끼우는 척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말을 건 포수를 바라보았다.
 “얀센이 어제 술이라도 마셨나 보지. 평소보다 컨디션이 별로네.”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의 포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말하자 포수는 더욱 독이 오른 눈빛을 쏘아 냈다.
 “건방진 동양인 새끼.”
 “워, 워! 서로 그만들 하고 얼른 진행해. 자, 플레이 볼!”
 상대 포수는 이 몸의 조크를 농담으로 듣지 못한 듯 보였지만, 뒤에 있던 굵은 목소리의 구심이 대화를 끊자 뒷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영어 진짜 잘하네.’
 내가 말하고 있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발음부터 해서 입안에 영어가 짝짝 달라붙는 게 평소 싫어하던 영어가 왠지 꽤 재미있게 느껴졌다.
 
 홈 플레이트에서 벌어진 신경전에 큰 관심 없는 투수는 심판의 콜사인에 곧바로 다음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투 심!”
 무엇을 보고 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영상이 떠올랐다. 약간씩 배경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지금 던지는 투수의 영상이었고, ‘투 심’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에 대응하는 스윙 궤적과 타이밍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계산되었다.
 
 따악!
 공을 때리는 임팩트 순간, 아까와 달리 손바닥에서 별다른 느낌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통하고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 기분은 무척이나 상쾌하게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홈런이다!”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렸고 온몸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밤하늘을 타고,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는 하얀색 작은 공은 점차 점으로 변하더니 외야 뒤에 걸린 거대한 자동차에 톡 하고 떨어졌다.
 “자동차 한 대 생겼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나는 지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방금 공이 떨어진 곳에는 자동차를 전시한 줄 알았더니 그 차량이 움직였고, 그 위치에 GM이라는 마크가 큼지막하게 떠오르는 홀로그램으로 변하는 모습이 마치 공상 과학 영화를 보는 듯했다.
 게다가 관중석은 동양인이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된 외국인이었다.
 ‘메이저 리그인가?’
 이곳이 어디인지 혼란스러운 그때, 베이스를 모두 밟고 큼지막한 카메라가 반겨 주는 홈 플레이트로 돌아온 몸뚱어리가 카메라 렌즈를 향해 손 키스를 날렸다.
 ‘윽······ 병신 같잖아.’
 나의 욕지기가 들리지 않는지 이 몸은 무척이나 자랑스레 3루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보스.”
 입구 가장자리에 한 발을 걸치고 서 있는 단단한 체구의 백인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었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으로 가벼운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시커먼 남자들의 집단 린치가 이어졌다.
 “와아아! 이 미친놈아!”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이 몸이 마치 배구공이라도 되는 듯 강력한 스파이크를 펑펑 날려대는 선수단은 그 기쁨만큼이나 강하게 나를 치고 있었다.
 “엉덩이 찬 새끼 누구야?”
 헬멧이며 등짝이며 두드려대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누군가 엉덩이를 집어 차는 것에 울컥한 나는, 고개를 돌려 악다구니를 내뱉었다.
 “헬로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순박한 얼굴의 흑인이 보였다.
 “조디, 이 새끼가!”
 “워워, 진정해. 히트 포 더 사이클을 넘어서는 홈런 사이클의 전사여.”
 “아오! 선발만 아니라면······.”
 꽉 말아 쥔 주먹을 풀어 내자 파일을 들고 무언가 기록하던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이봐, 지. 셀레브레이션이 끝났다면 관중들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네.”
 
 와아아!
 두드려 맞느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관중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가 더그아웃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홈런을 쳤던 아까와 같은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나는 3루 홈 관중들에게 인사를 한 뒤, 1루에 있는 원정 관중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지수! 지수! 지수!
 홈과 원정 모두 구분하지 않고 관중석 모두가 한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외쳤다.
 ‘나라고?’
 모두가 외치는 내 이름에 등골에서 무언가 쭈뼛하고 솟아난 듯 오싹하면서도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때, 외야에서 홀로그램으로 만든 폭죽이 펑펑 터졌고 전광판에 [세계 최초의 홈런 사이클]이라는 거대한 글씨가 아로새겨졌다.
 [99. Ji Su]
 이후, 검은색 바탕 위 흰색 글씨로 SOX라고 쓴 유니폼을 입은 한 사내가 등장했다. 선이 굵은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등장한 남자는 배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필 영상이 사라지고 지금 나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한 손에 헬멧을 들고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지수! 지수!
 ‘내가 나이를 먹으면 저런 모습일까?’
 관중들이 내는 환호가 점차 멀어져가며 전광판 속 나의 모습도 점차 시야에서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멋진 꿈이었다.’
 아쉬움이 남지 않은 멋진 꿈이었다.
 
 ***
 
 타닥타닥.
 지난번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 맡았던 특유의 향초 냄새가 자욱하게 코를 간질였다.
 ‘여기는 또 어디지?’
 아직 꿈이 깨지 않았는지 찐득한 물에 푹 담겨 있는 것처럼 온몸이 무기력했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정신을 사로잡고 있던 수마를 간신히 떨쳐내고 눈을 뜨자 또다시 낯선 공간에 와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하늘에 달려 있는 CCTV 화면을 보는 듯 공중에 붕 뜬 감각은 이곳이 또 꿈이라는 것을 쉽사리 유추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인가?’
 삼각형 모양의 건물 안, 꽤 넓은 실내 공간에 모든 사람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장례식장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앉은뱅이 식탁에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대다수가 고급 카메라를 하나씩 옆에 끼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때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과 다르게 안쪽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는데 그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의 시야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꽃으로 장식된 높이 쌓은 제단에는 두 명의 노부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사진을 보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때, 깊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 왔다.
 햇볕에 그을렸던 강인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한 방금 야구장에서 주구장창 보았던 그 남자였다.
 “지수 선수. 부모님 일은 안타깝습니다.”
 “그래요. 온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애도하고 있으니 힘내세요. 너무 혼자 슬퍼하지 마세요.”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당당하게 관중들의 환호를 받던 남자는 상아색 상복을 입은 채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뭐야?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내게 몸이라도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단으로 향했는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인 걸까?’
 사진 속 부모님은 환하게 웃고 계셨는데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흐른 듯 지금의 모습을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낯선 공간 그리고 이 거지 같은 꿈에서 빨리 깨고 싶었으나 나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눈을 질끈 감고 싶어도 감기지 않는 눈을 뜨고 억지로 이 모든 장면을 담아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
 목이 잠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울부짖었고 그때, 시야가 어지러워지더니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상복의 거슬거슬한 감각과 차갑고 딱딱한 바닥의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나의 시선은 제단 위에 놓인 사진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또······.’
 아까 야구장과 마찬가지로 몸속에 갇혀 버렸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이 사람의 감정이 격하게 전달되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득 차오르더니 얼굴이 왈칵 일그러지며 거칠게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란 감정.
 “흐아아아악!”
 이대로 슬픔 속에 영원히 파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상큼한 향기가 슬픔 속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왈칵 껴안는 포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자수 씨······.”
 “흐으읍.”
 나의 이름을 부르는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고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슬픔을 조금씩 보듬어 주었다.
 짙은 회색의 슬픈 감정 속에서 작은 빛줄기가 들어오더니, 조금씩 나를 슬픔의 바다에서 건져주는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 느낌을 가득 끌어안았다.
 그렇게 슬픔이 조금씩 진정되어 갔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눈을 뜨려는 순간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 수야.”
 무언가 울컥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야.”
 이 목소리······.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가슴속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들려 왔고 눈을 뜨자 꿈에서라도 매일매일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엄마! 엄마아아아!”
 ‘엄마 왜 울어?’
 지수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는 엄마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을게. 내가 잘못했어. 야구고 뭐고 다 때려칠게! 다시는 하지 않을게. 정말, 정말 미안해 엄마. 흐아아악!”
 나는 울부짖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분명, 내 입으로 터져 나오는 말인데 내가 아니었다.
 ‘엄마! 엄마!’
 이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엄마를 부여잡는 이 몸이, 내 몸이, 내가 하는 이 행동이 내가 아니었다.
 방금 꿈과 똑같은 느낌이다.
 ‘왜······ 내 몸인데! 이건 꿈이 아니잖아? 지금 꿈이 아니라고!’
 또다시 나는 몸 안에 갇혀 버렸다.
 “흐아아악! 으아아아악!”
 혼란스럽다. 미칠 것 같다.
 마지막 발악을 내지른 것은 나일까? 아니면, 이 몸일까?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이 든 나는 감았던 눈을 떠보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병원 특유의 하얀색 천장이었고 누워있는 나의 양옆으로는 하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도대체 왜 야구장에 우리 아이를 데려가서 저렇게 만드냐고요! 지수가 얼마나 놀랐으면 깨어나자마자 나를 붙잡고 그리 서럽게 우는지······. 흐윽. 거기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그 감정에 나도 이상하게 되어 가지고······. 봐요! 나 아직도 이상하잖아요.”
 “미안해 여보, 나도 파울 볼이 그렇게 날아올지 몰랐는데······.”
 커튼 밖으로 익숙한 두 명의 실루엣이 보였고 둘은 조곤조곤 다투고 있었다.
 “또······ 갇힌 건가?”
 아까 엄마를 껴안고 울며불며 난리 칠 때, 그 소름 끼치도록 몸서리쳐지던 기억이 떠올라 말부터 먼저 내뱉어 봤다. 다행히 아까와 달리 나의 의지대로 원하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지수야!”
 “일어났니?”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닫혀있던 커튼이 활짝 걷히면서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엄마와 함께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아빠가 안으로 들어왔다.
 덥석. 내 손을 잡는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고 나는 또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을 간신히 떨쳐내며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보았다.
 “어, 엄마. 흐으윽. 흐윽. 흐아아악!”
 다행히 내 손은 의지대로 움직여 엄마의 손을 꽉 붙잡았고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에 취해 다시금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래, 무서웠지? 내 아들,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
 끔찍한 기억이었다.
 분명 내 몸인데,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갇혀있던 그 느낌은 다시금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내가 아닌 나로 살까 봐, 몸뚱어리 속에 갇힐까 봐 무척이나 무서웠었다. 눈가에서는 연신 눈물이 쏟아졌는데 이건 무서움과 두려움 그리고 안도의 눈물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니? 이 엄마는 물 떠올게. 아빠랑 기다리고 있으렴, 알았지?”
 엄마의 품에 안겨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울음을 터트린 지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 진정이 된 내가 품을 벗어나자 엄마는 눈가를 훔치며 자리를 피했다.
 “지수야, 이제 괜찮은 거지? 아까 그 이상한 말들은······.”
 그때까지 소외되어 있던 아빠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는 때, 커튼이 활짝 걷히면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의사가 몇 명의 젊은 의사들을 대동하고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지수 학생이 일어났다면서요?”
 오른쪽 가슴에 [응급의학과 교수 황광철]이라고 써진 명찰을 달고 있는 의사는 무척이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가왔고 아빠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방금 일어났어요. 조금 이상한 말을 하긴 했는데······.”
 “이상한 말이요?”
 인자한 미소 뒤, 날카로운 안광을 숨기고 있던 교수가 안경을 치켜들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아빠는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흐음, 그렇군요.”
 “선생님 우리 지수는 괜찮은 건가요?”
 설명을 듣고도 교수님은 무언가 다른 말이 없었기에 아빠는 다급하게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야구장에서 후두부 그러니까 여기 뒷머리에 파울 볼을 맞아 의식을 잃었다고 차트에 적혀있는데, 병원에서 검사한 CT에는 별다른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구단에서 모든 검사를 다 해 보라고 해서 MRI까지 해 봤는데 뇌출혈 증세도 전혀 없었습니다.”
 “네에.”
 “제가 지수 학생에게 몇 개 질문을 해 봐도 되겠죠?”
 “그러시죠, 선생님.”
 차트를 보여 주며 설명하던 선생님은 침대맡에 앉았다.
 “그래, 지수 학생.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마지막 기억은 어디까지 나니?”
 “그게······ 야구장이었어요. 공이 저한테 날아오는 순간 정신을 잃었는데 꿈에서도 야구장이었어요. 꿈에서도 야구장이었는데······ 처음 보는 야구장에서 제가 홈런을 쳤어요. 관중들은 환호하고 제 이름을 불렀죠. 그러다가 장면이 변해서······.”
 “하하하. 기분이 좋았겠구나. 지수는 야구를 좋아하니?”
 “그게······ 아빠랑 야구장 갈 때는 싫은 느낌이었는데 이젠 왠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친숙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꺼림칙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꽤 많은 질문이 오갔다.
 
 “지수는 외과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충격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단기 기억상실증 증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대화에서 나는 이상한 기억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내 대답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아빠의 표정을 보아, 이를 전부 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사 선생님은 내게 기억상실증이라는 병명을 달아 주었다.
 “기억상실증이라는 건가요?”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와 의사 선생님의 최종 진단을 듣는 엄마가 하얗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기억상실증까지는 아닙니다. 원래, 기억을 상실한 경우에는 아예 해당 내용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데 지금의 경우는 마치 오래된 기억을 꺼내듯 결국엔 정확한 내용을 찾아냅니다. 충격 때문에 기억을 읽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진단을 들은 부모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일단, 기억을 빠르게 해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부모님께서 아이가 인지할 수 있게끔 꾸준하게 알려 주면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당장 의학적으로 큰 문제는 없으니 지금은 퇴원하셨다가 며칠간 내원해서 상태를 보도록 하죠.”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다른 환자에게로 갔고 남아 있던 젊은 의사가 다가와 퇴원 수속에 대해 알려 주었다.
 
 “지수 아버님, 정말 죄송합니다. 퇴원 절차는 저희가 다 조치를 했으니 그냥 가시면 됩니다.”
 “아뇨, 주의를 못 한 제 책임이죠.”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달음에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구단 직원이라 소개한 남자와 아빠가 퇴원 수속에 대해 다툼을 벌일 때까지 엄마는 옆에서 언짢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럼, 저희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지 제 번호로 연락 주세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납 창구에서 옥신각신하던 아빠는 엄마의 눈초리에 조용히 꼬리를 말았고 우리는 그제야 병원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오빠! 우리 지수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데······ 당연히 그쪽에서 병원비를 내야죠. 그걸 왜 내겠다고 하고 있어요? 아무리 그쪽 구단 팬이라도 이럴 땐 그쪽이 내는 게 맞는 거예요.”
 “아니, 지영아. 그게 사고잖아. 고의도 아니고 우연히 다친······.”
 “오빠! 만약 우리 지수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난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미칠 것 같은데······.”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엄마와 아빠는 작게 실랑이를 벌였다.
 애정 행각을 벌이거나 지금처럼 싸울 때에는 마치 남매처럼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이야기했는데 나는 두 분이 민망하지 않게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잔상이 이곳의 풍경을 낯설지 않게 알리고 있었다.
 “지수야, 찾는 거라도 있니?”
 익숙한 느낌에 주변을 살펴볼 때 아빠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 저 여기 온 적 있어요?”
 “어릴 땐 몇 번 와 봤는데 최근엔 큰 병원에 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치 여보?”
 아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직도 삐져 있는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 지수 병원은 신촌에 있는 세아대 병원으로 다니죠. 여긴 강남이잖아요? 집에서 멀어서 지수랑 와 본 적 없어요.”
 “그런가?”
 엄마는 헷갈려 하는 아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야말로 이 사람 저 사람 장례식 때문에 많이 와 봤겠지만 우린 아니에요.”
 엄마의 말에 무언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싹하고 두려운 그 느낌 때문에 등골이 쭈뼛 섰다.
 그러고 보니 낯설지 않은 삼각형 건물이 꿈속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야? 와 본 적도 없다며?’
 혼란스러웠다.
 “우, 우리 빨리 집으로 가요. 여기 더 있기 싫어요.”
 나는 부모님의 팔을 잡아끌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
 
 택시가 집에 도착하자, 나와 엄마만 내리고 아빠는 택시에서 내리지 않았다.
 “야구장에 차 있으니까. 들렀다가 가게로 갈게. 당신은 오늘 나오지 말고 지수를 봐 줘. 하아······ 괜히 싫다는 놈 억지로 데려가서 이런 꼴이나 당하게 하고.”
 아빠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회에서 떨어져서 침울해 하던 아이 기분 풀어 주려고 시간 냈던 거잖아. 오빠는······ 좋은 아빠야.”
 “하아, 좋은 아빠라······ 지영아, 지수 데리고 먼저 들어가.”
 쓸쓸한 표정의 아빠가 가고 난 뒤, 엄마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오래된 철제 대문이 쇠 긁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고 널따란 마당과 함께 고즈넉한 벽돌집이 눈에 담겼다. 외할아버지가 지었다고 하는 2층 벽돌집은 세월의 향기를 담아 더욱 그 자태가 고왔는데 집을 보니 여러 가지 아련한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멍멍!
 그때 마당 한쪽에서 격렬하게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반기는 하얀색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진돌아!”
 아직 다 자라지 않았음에도 그 크기가 꽤나 큰 강아지였는데 왜, 내 기억 속에서는 진돌이가 가출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시키겠다며 목줄을 풀고 물에 담그려는 순간, 열린 대문 틈 사이로 도망친 녀석은 다음 날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었는데······.
 “살아있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나는 진돌이에게 달려가 녀석을 끌어안았고 헥헥거리며 나를 핥는 진돌이의 숨결을 느끼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 지수야 멀쩡한 진돌이가 왜······.”
 “아, 아니에요. 엄마 들어가요.”
 아까부터 나의 모든 행동을 의아하게 여기던 엄마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내 팔을 붙잡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지수야, 혹시 너······ 이상한 게 보이거나 그······ 꿈에서 누군가 나타나서 이상한 말을 한다거나······.”
 말하기 민망한지 아니면 곤란한지 무언가 곤욕스러운 표정의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그래요. 예전에 티비에서 봤던 일이 꼭 직접 겪었던 일 같고 그래서 그런 걸 거예요.”
 “그, 그래. 혹시라도 이상한 게 느껴지면 엄마한테 꼭 말해 줘야 한다. 알았지?”
 “네.”
 “그럼 들어가자.”
 더 이상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나는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층계를 올라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의 집 안 모습과 함께 추억의 냄새가 나를 훅 덮쳐 왔다.
 “정말 좋다.”
 
 ***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학교 교문 앞에서 차를 세운 아빠는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았고 나는 그런 아빠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며칠간 학교 안 가도 된다니까······.”
 “괜찮아요.”
 “그래, 괜찮다니까 보내지만, 혹시라도 어디 좀 안 좋거나, 또 이상한 기분이 들거든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야 한다. 알았지?”
 “알았어요. 얼른 가세요. 집에 가서 오픈 전까지 좀 더 주무세요.”
 어제 가게로 돌아가 늦은 시간까지 정리하고 돌아온 아빠는 몇 시간 못 주무셨을 것이 뻔했기에 나는 그런 아빠가 차로 태워다 준다고 했을 때 계속 거부했는데 결국 이렇게 학교까지 오게 되었다.
 “가게는 명준 아저씨랑 영숙이 이모가 열잖니, 아빠는 괜찮아. 그리고 이건 이따가 훈련 끝나고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알았지?”
 아빠는 지갑을 열더니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거부하면 실망할 게 뻔히 눈에 보여, 나는 아빠가 주는 용돈을 넙죽 받아 들고 차에서 내려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짓단이나 소매가 널널한 옷의 감촉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나와 똑같은 옷차림에 색색의 가방을 둘러멘 남학생들이 교문 안으로 떼 지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에 나도 그 행렬에 끼어 학교 건물로 향했다.
 
 “우리 반이 어디더라? 일 학년은 삼 층이었던 것 같은데······ 삼 반이라고 했었나?”
 건물로 들어서 계단을 올라 삼 층에 서자 복도에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고 나는 소란한 그 틈 속에서 [1―3]이라고 써진 푯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여기인가? 일 학년 삼 반은 맞는데······.”
 교실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떠드는 학생들을 보자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기억에 남는 얼굴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교실 안으로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쑥! 교실 앞에서 중얼거리면서 안 들어가고 뭐 해?”
 제 팔로 목덜미를 와락 감싸 안은 채 교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녀석은 나보다 훨씬 크고 삐쩍 말라 있었다. 마른 놈이 무슨 힘이 이렇게 센 것인지 나는 힘들게 녀석의 품을 빠져나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은 딱 보아도 개구쟁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는데 지금까지 무척이나 낯설어 외로움을 느끼던 곳에서 왠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해 내자 그 반가움이 배가되었다.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빤히 쳐다보자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나에게 물었다. 분명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왜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지······. 기억의 파편 속에서 힘겹게 녀석의 이름을 찾아 헤매다 결국 찾아냈다.
 “이호준!”
 “그래, 나 이호준이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고 이 망할 놈의 쑥갓아!”
 쑥갓······.
 이 별명은 얼마 만에 들어 보는 것인지 왠지 무척이나 낯간지러웠다.
 “푸흐흐. 쑥갓이라니, 야! 완전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추억 속에서 간신히 찾아낸 호준이의 이름을 떠올리자 그에 관한 기억이 퍼즐처럼 쫙 맞춰졌다. 같이 육상 특기 선수로 학교에 입학해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나보다 뒤늦게 육상을 그만두고 유학을 갔던 것까지 기억났다.
 “잠깐, 너 유학 안 갔어?”
 “미친놈.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 유학은 그렇고 이게 얼마 만이라니, 토요일까지 같이 훈련해 놓고 어제 하루 안 봤다. 재미없는 개그 하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라.”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더 이상 긴 대화가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내 자리는 어디였지?”
 “기억상실증 코스프레 그만하고 여기에 앉아라. 책상에 이름까지 떡하니 써져 있잖아? 글씨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큭큭.”
 교탁 바로 앞에 있는 책상을 가리키는 호준은 나를 보며 그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보였다.
 “금발 미녀 쌤 얼굴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자리라서 좋겠다. 뭐, 마녀의 침도 같이 날아오는 자리지만 큭큭.”
 “금발? 엘렌?”
 “엘렌은 누구야? 샐리 쌤이잖아.”
 금발 하면 엘렌이 아니었나?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답고 적극적이던 여자가 머릿속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담임 선생님의 조회가 끝나자 아이들은 다시금 그 특유의 활발함을 되찾고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BRIDGEWAYS]
 옆에 아이들이 꺼내 놓는 것과 같은 파란색 책을 펼쳐 보니 한글은 단 한 글자도 없고 온통 영어로 쓰여 있었다. 본래 나라면 절대 한 문장도 읽을 수 없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영어 문장들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Hello everyone?”
 한참 책을 들여다보는 사이 입가에 환한 미소를 가득 피우며 교실 안을 밝게 비추는 금발의 여자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Hello Shelly.”
 여자 아이돌 가수 공연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남자로 가득한 교실에서 샐리의 손짓 하나에 아이들 모두가 집중하고 목소리는 무척이나 우렁찼다. 샐리 선생님은 우리들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교탁에 책을 활짝 펼쳐 놓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Where did we get up to last time?”
 간단한 인사말에는 쉽게 대답한 아이들이었지만 조금 길어진 문장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들. 나도 저 무리에 끼어야 했지만, 이상하게 샐리 선생님의 질문이 이해가 되었다.
 ‘분명··· 진도를 묻는 것 같은데.’
 활발하게 진행될 것 같던 수업이 처음부터 꼬이는 모습이 나타나자 샐리 선생님은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띠며 아까보다는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에 신경 써서 다시금 말했다.
 “Where did we get up to last time?”
 교실 안에 흐르는 고요한 적막감.
 샐리 선생님은 잔뜩 풀죽은 모습으로 바뀌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안쓰러워서 나는 책상 위치를 바꾸라고 했던 옆자리 남자아이에게 슬쩍 진도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우리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어?”
 “응? 교과서 말하는 거야? 우리 지난주에 34쪽까지 했어.”
 역시나 다른 아이들처럼 멍하니 있던 옆자리 남자아이는 나의 물음에 의아해하면서 대답했다.
 “We were at page 34.”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두가 조용히 샐리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교실에서 나는 선생님께 당당하게 말을 걸었다.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적막한 교실 안에서 코앞에 앉아있던 내가 대답을 하니 샐리 선생님은 유달리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Oh! What’s Your name?”
 “My name is JISU.”
 부드러운 손길로 이름을 묻는 선생님께 나는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샐리 선생님은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잘했다고 등을 쓰다듬어 주곤 이어 수업을 진행했다.
 나의 대답 이후 샐리 선생님은 미국인 특유의 활발함을 되찾고 수업을 진행했는데 대부분이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형제가 있느냐, 엄마·아빠의 성함은 어떻게 되느냐, 친구 이름은 무엇이냐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는데 대게 질문은 나에게 집중되었다.
 아이들은 분명 알고 있지만 부끄러운지 아니면 막상 입 밖으로 영어가 쉽게 나오지 못하는지 더듬거리는 반면 나는 영어로 대화하는 것에 막힘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해 온 사이처럼 나중에는 샐리 선생님과 둘만 있는 것 같이 수업 내내 대화가 이어졌다.
 ‘이 여자······ 교육 방식이 완전 과외 선생님 같잖아?’
 영어에 서투른 학생들을 위해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발음하고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다시 또박또박 발음해 주는 등 쉽게 수업을 진행했는데 아이들 하나하나에 맞춰 가면서 진행하는 방식이 꽤나 익숙했다.
 그러면서 수업이 막힌다 싶으면 내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는 샐리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으니 점점 영어가 무척이나 친근해져 갔다.
 
 ***
 
 “See you again. Bye~”
 “Thanks Shelly.”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샐리 선생님이 나가자 일단의 무리가 나의 곁으로 달려왔다.
 “오 올~ 지수. 영어 좀 하는데?”
 수업 전 나와 말을 섞던 호준이가 제일 먼저 나에게 다가와 어깨에 떡하니 팔을 올려놓고 말했다.
 “쉬운 단어로만 말했지. 어려운 단어들은 나도 잘 몰라. 이후에 대답 완벽하게 한 게 별로 없어.”
 호준의 팔을 밖으로 밀어내며 대답하자 근처로 다가온 다른 아이들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미친놈. 지난주까지 쌜리 쌤 수업만 되면 벌벌 떨었으면서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대본이라도 준비했냐?”
 “발음 죽여주던데 썰티풔.”
 “크하하하하.”
 ‘누구지?’
 이제 학교에 조금씩 적응이 되나 싶었는데 또다시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나에게 친한 척 다가온 두 명의 얼굴이 낯설지는 않지만, 막상 이름과 얼굴 매치가 잘되지 않았다.
 이렇게 막말을 쉽게 하는 것을 보니 꽤나 친했던 아이들 같은데 기억에서 그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 맞다. 아까 담탱이랑 이야기하던데 뭐냐? 너 어디 아프냐? 그 뚱보 마녀가 조퇴를 다 언급하고 웬일이래?”
 “뚱보 아니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배가 그렇게 보이는 걸 거야.”
 호준이 뚱보라고 말하자 내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분명 여름방학 때 출산했던 것 같은데 이후 2학기에는 다른 선생님이 우리 담임을 맡았고······ 근데, 왜 또 이런 기억이 나는 것일까? 눈앞의 아이들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단편적인 미래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있었다.
 
 “야, 오늘 날짜가 며칠이냐?”
 “오늘? 6월 4일 월요일이다.”
 “하아······.”
 어제도 오늘도 달력을 확인했기 때문에 분명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자꾸 지금처럼 불쑥불쑥 미래의 일이 떠오르는 것일까?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또렷하게 떠오르는 사건들이 무섭게 느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지만 분명 그 시기가 오면 똑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건 느낌이 아닌 확신이다. 내 기억이니까······.
 “야, 너 진짜 어디 아프냐?”
 “모르겠다.”
 “왜 그런데?”
 내 표정이 꽤나 안 좋았는지 아이들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어제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어제 아빠랑 야구장 갔다가 파울 볼 맞고 기절했는데 그 뒤로 기억이 가물가물해. 의사가 단기 기억상실증이라고 하던데 그 뒤로 기억이 이상하다. 뒤죽박죽된 것 같기도 하고 미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억상실증이면 기억상실증이지. 단기는 뭐고 미래가 보이는 건 또 뭐냐?”
 “그, 글쎄?”
 호준이의 질문에 어물쩍 대답하자 옆에 있던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나 못 알아보는 거야?”
 “나는? 나는?”
 호준과 달리 두 놈은 걱정보다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는데 머릿속으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녀석들의 교복 가슴에 떡하니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고 읽었다.
 “박진혁, 김시후. 내가 병신도 아니고 모를까 봐 겁나냐?”
 가슴에 박혀 있는 이름표나 가리고 물어보든가 애들은 역시나 애들이다. 명찰이 아니었으면 둘의 이름을 절대 말하지 못했을 텐데.
 “에이, 괜히 기대했네.”
 “기억상실증 아니잖아. 재미없어.”
 “헐······.”
 기가 막혔다. 친구가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걱정해 주기는커녕 지들 자기들 재밋거리가 되기를 바라는 놈들이라니 제대로 된 친구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기억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뼉다구한테 잘만 말하면 훈련 빠질 수도 있겠네?”
 “뼉다구라니? 누구야?”
 애들의 잡담에 뼉다구가 들어갔는데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어젯밤 부모님이 나를 붙잡고 끊임없이 기억을 환기시켜 줘서 내가 아직 육상부로 뛰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런 세세한 것은 부모님도 모르시는 것인지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
 “얘 진짜 이상하네? 기억상실증 맞네. 으하하하. 개뼉다구를 모른대!”
 “우와 대박!”
 이제야 재미있는 포인트를 발견했는지 두 명은 나를 둘러싸고 기억상실증에 대해서 격렬한 토의를 하자, 나는 둘을 무시하고 호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진짜 괜찮은 거냐?”
 다른 둘과는 확실히 다르다. 녀석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어봤고 나는 어깨만 까닥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본인이 괜찮다면 괜찮겠지. 뼉다구는 우리 육상부 코치 말하는 거야. 학교 운동부 코치 우주성. 국대 출신이라지만 돈 졸라 밝히고 여자 코치들한테 껄떡대는 걸로 유명한··· 아! 그럼 이것도 기억 안 나려나? 요새 뼉다구가 일 학년들 전국 체전 성적 개판이라고 매일 운동장 뺑뺑이만 돌리잖아. 몰라?”
 뺑뺑이라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지난번 일산에서 한 전국 체전 있잖냐, 나는 뭐 장거리 두 종목 갈아 마셨고 저기 박진혁은 투포환 예선에서 떨어지고 김시후는 중거리 역시나 갈아 마시고 너한테 기대했는데 너도 그 뭐냐 넘어졌잖아······. 그래서 뼉다구가 빡쳤는지 우리들 체력이 약하느니 어쩌느니 결국 매일 운동장 뺑뺑이만 돌리고 훈련은 쥐뿔도 없고 아 말하니까 욕 나오네.”
 “난 벌써 토 나올 것 같아.”
 “아우 시바! 개뼉다구 새끼.”
 호준이의 설명에 두 떨거지들이 죽을상을 했다.
 
 전국 체전······.
 마치 오래된 기억에서 꺼내듯 하나하나 단편적인 기억들이 모아졌다.
 고양 종합 운동장에서 열린 소년 체전.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그날, 트랙이 조금 미끄러웠지만 100m 예선을 강행했고, 첫 번째 예선은 다행히 쉽게 넘겼지만 두 번째 예선에서 1등으로 달리다가 결승점을 코앞에 두고 미끄러졌었다.
 무릎은 시퍼렇게 멍들고 손바닥은 긁혔는지 피가 나고 그랬는데 몸 아픈 것보다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은 것은 그때 아무도 나를 일으켜 세워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승점에서 다른 코치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우리 코치는 나를 보고 혀를 차더니 싸늘한 시선과 함께 고개를 돌렸었다.
 분명 기억난다.
 “우주성······. 그 쓰레기 새끼.”
 “그래! 기억나나 보네.”
 
 ***
 
 띵―동―댕―동.
 기다리던 수업 종료 종이 울리자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었다. 곁으로 다가온 친구 무리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올림픽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올림픽에서 우리가 예선은 가뿐하게 통과할 거라는 말이야.”
 통통하면서 눈빛은 똘망똘망하게 살아 있는 귀여운 인상의 진혁이 녀석이 자랑스레 축구 대표팀 명단을 읊으며 예선 통과를 자신하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매가 여리여리한 시후 녀석이 반대하고 나섰다.
 “대표팀 선발 논란도 많고 올림픽 예선이 멕시코, 스위스라며? 안 돼. A팀이라면 몰라도 올림픽팀은 둘한테 져.”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시후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진혁이 녀석은 절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그리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어린 나이대 선수들이 더 잘해!”
 “해보자 이거야?”
 서로 싸우려고 하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에 집중했다. 올림픽 축구라고 하니까 자연스레 축구 경기들이 그려졌다.
 “예선 힘들게 통과해서 8강에서 개최국 영국 단일팀을 만나서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4강에서 브라질 만나서 왕창 깨지고 3, 4위전에서 일본을 만났던가? 어쨌든 동메달 딴 것 같은데······.”
 “얘 뭐래냐?”
 “미친 거 아냐?”
 싸우던 두 놈이 황당한 듯 나를 바라보았고 그나마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호준이마저 내 어깨의 손을 올리곤 조근조근 반박했다.
 “지수야, 나도 예선 통과를 기대하긴 하지만 메달은 좀 아닌 거 같다.”
 “그래, 그리고 이번 우승은 누가 뭐래도 영국 아니면 브라질이야. 잉글랜드가 아니고 영국 단일팀이라고! 대박 아니냐? 크크.”
 “그리고 무슨 일본이 3, 4위전까지 올라가? 얘, 쪽바리 아냐?”
 진혁과 시후도 뒤이어 뭐라고 그랬는데 나의 기억은 전혀 변함없이 축구대표팀 동메달을 기억했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집으로 안안 가냐?”
 “육상부 훈련해야지. 뼈다귀 나오기 전까지 옷 갈아입고 몸 풀어야 해. 안 그럼 또 지랄할 거야.”
 “아우! 주말 동안 편히 쉬나 했는데 또 훈련이야.”
 축구 이야기에서 어느새 뼈다귀 욕으로 대동단결한 우리는 서둘러 가건물로 향했다.
 운동부 편의 시설을 갖춘 중학교는 얼마 없기에 개인 라커와 작은 샤워실이 딸려 있는 가건물은 우리 학교 운동부의 큰 자랑이었다.
 나는 내 기억대로 라커룸 문을 열었다. 후끈한 열기와 남정네들의 시큼한 땀 냄새가 가득한 공간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를 확 잡아끌었다.
 “뭐 해? 거긴 야구부 라커잖아. 우리는 저쪽 끝이야.”
 “어?”
 “얘 진짜 이상하네.”
 “그러네? 야구부 라커 문을 여는 게 무척 익숙했어. 나 순간 쟤가 야구부인 줄 알았네. 크크.”
 이곳이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일까? 옷 갈아입은 뒤 장비 창고에서 라인 통 가져다 선 긋고 그물망 설치하는 게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아이들 손에 이끌려 [육상부]라는 푯말을 달고 있는 건물로 들어갔고 흐릿한 기억 속 존재하던 낡은 라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수]
 흰색 바탕에 내가 직접 써넣은 검은 글씨체가 보인다. 라커로 다가가자 자물쇠가 있었는데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비밀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4683.
 찰칵! 라커를 열자 체육복 하나가 정갈하게 걸려 있고 아래에는 선크림이며 아대며 각종 운동 용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빨리 입어. 뼉다구 나올 시간 다 됐어.”
 옆에서 재촉하는 호준이의 목소리에 나는 교복을 벗어 빈 옷걸이에 걸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선크림을 꺼내 얼굴과 팔다리에 열심히 펴 발랐다.
 “가자.”
 대충 정리를 끝낸 것을 확인한 호준이가 선창했고 뒤이어 들어온 몇몇 아이들과 함께 열 명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고 나는 문 앞에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상의에 [서울명운중학교]라는 고딕체 글씨가 써진 유니폼.
 무척이나 낯설었다.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난 짧은 반바지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했고 나풀거리는 민소매 상의 유니폼은 상당히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왜 이렇게 낯설지? 낯설다, 나······.’
 이런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지수, 뭐 해? 나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 첫 번째 대면은 강렬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달궈진 모래알 위로 열기가 훅하고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근육이 찢어져 터질 것만 같은 순간을 몇 번이나 넘겼고 자꾸만 축축 처지려고 하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헉. 헉.
 턱까지 차오는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구령대 쪽을 바라봤다.
 구령대 천장이 가려 주는 그늘 아래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가느다란 몸매의 고통의 원흉이 보였다.
 흰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운동복을 입고 눈에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다.
 ‘우주성 개새끼! 방망이만 있었다면 저놈을······.’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스윙 연습을 하는 야구부의 배트를 잠시 쳐다보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들 힘조차 없을 것 같다.
 벌써 몇 바퀴째인지, 열다섯까지 세다가 포기한 게 한참 전이다. 이미 학교에는 운동부 인원을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
 구령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뼉다구는 그제야 멈추라고 지시했다.
 “야! 박진혁. 누가 그따위로 퍼지래? 처눕지 말고 마무리 운동 안 하냐?”
 뼉다구의 호통에 바닥에 드러누웠던 진혁이 다시 일어나 우리와 함께 마무리 운동을 시작했다.
 뼈다귀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양팔을 가득 벌렸다가 모으는 심호흡을 하고 무릎과 발목 그리고 어깨와 손목을 풀어 주면서 마무리 운동을 모두 마무리했다.
 “자, 수고했다. 오늘은 이제 들어가라.”
 십 분여간 마무리 스트레칭을 마치자 우리는 그대로 근처 스탠드에 기어 올라가 하나둘 널브러졌다.
 
 “후아, 헉! 헉! 죽을 거 같아.”
 “시바!”
 “······.”
 다른 놈들은 한마디씩 할 힘이라도 남아있었는지 각양각색의 거친 입담을 과시했고 나는 그저 말없이 들숨 날숨만 내쉬었다.
 헉. 헉.
 머리가 핑핑 도는 듯했다.
 운동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억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남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누워서 푹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헉. 헉. 지수야, 너 오늘따라 이상해.”
 바로 옆에 누워 있던 호준이 나를 툭 치더니 말했다.
 “헉. 헉. 뭐가?”
 “너······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잖아?”
 두 눈에 걱정을 가득 담은 호준의 질문에 대신 대답한 것은 날카로운 눈매의 시후였다.
 “헉. 헉. 전에도 돌다가 토했잖아. 오늘은 그때보다 낫네.”
 시후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헉. 헉. 나 하나 챙기기도 힘들어.”
 사람인지 바닥에 깔린 카펫인지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 모습의 진혁이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답해 주지 않았다.
 
 “개뼉다구다.”
 숨을 고르고 있던 그때, 진혁의 낮은 외침에 우리의 시선은 일제히 학교 본관 출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평상시의 추리닝이 아닌 검은색 정장을 쫙 빼입은 뼈다구가 휘파람을 불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개뼉다구 오늘 선보나 봐.”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아이들이 앉아서 뼈다구를 쳐다보자 우리의 시선을 느낀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뒷정리하고 다들 집에 가 봐. 난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간다. 내일 보자!”
 “네.”
 뼉다구가 사라진 방향으로 육상부 아이들 모두가 한마디씩 욕지기를 내뱉었다.
 “망해라.”
 “한눈에 보자마자 차일 거야. 분명해.”
 “저 새끼는 평생 혼자 살 거야.”
 평소 욕을 하지 않는 호준부터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두 놈까지 망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나의 의견은 달랐다.
 “난 잘되길 바란다.”
 “뭐야? 쑥. 이 배신자 같으니라고.”
 “이봐 친구들, 진짜로 망하면 내일 훈련 어떻겠어? 하아······. 난 벌써 눈앞이 깜깜해진다.”
 나의 보충 설명에 눈을 흘기던 아이들이 일순간 경직되었다.
 “시발! 나 지금 소름 돋았어!”
 “난 울렁거리고 있어.”
 “······.”
 세 명의 각각 다른 반응에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육상 그만두고 확 야구부로 옮겨 버릴까?”
 “진짜?”
 “아 몰라!”
 그저 홧김에 한 말이었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진짜냐?”
 “얘가 왜 이렇게······.”
 호준의 말인 줄 알았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낀 다부진 체격의 야구부 코치님이 서 있었다.
 “어? 코치님, 안녕하십니까.”
 그를 보자마자 나는 자연스레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오냐, 안녕하다마다. 그나저나 진짜 야구부에 들어오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만?”
 “그게······.”
 난 대답하지 못했다.
 저 멀리서 훈련하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야구가 끌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무언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화나서 그냥 내뱉은 말이지? 남자는 자고로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해.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속담을 들어 봤지? 그리고 우리 야구부는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받아 주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들어오고 싶다고 아무나 들여보내 주면 이미 전교생이 야구부겠다.”
 야구부 코치님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 눈에 불꽃이 튀었다.
 “우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거든요!”
 “그까짓 빠따질이 뭐가 어렵다고!”
 아이들의 빈정거림에 코치님은 넌지시 웃음을 띠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야구부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 입단 테스트나 한번 봐 볼래? 우리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다면, 내가 방금 했던 말은 사과하지.”
 “좋아요! 그까짓 입단 테스트야.”
 진혁과 시후의 대답으로 집에 가기 전, 우리 육상부에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다.
 
 “이야, 얘들은 뭔가 체계적으로 배우네. 우리는 개뼉다구가 맨날 뺑뺑이만 돌리는데 말이야.”
 “시바, 너희들은 스타트 자세라도 봐 주잖아. 난 투포환 던지는 방법은 지도 모른다면서 영상 몇 개만 달랑 던져 주고 혼자 훈련하래.”
 일정한 프로그램에 맞춰서 훈련하는 야구부를 보며 시후와 진혁이 부러운 감정을 담아 말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 육상부 일 학년 사총사들! 왼손잡이 있어?”
 양손 가득 무언가 한 아름 들고 다가온 야구부 코치님은 우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있어? 없어?”
 박력 넘치는 코치님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는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코치님은 우리 네 명의 손에 글러브 하나씩 들려 주곤 착용하는 방법과 공 던지는 방법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 이건 초보자용 연식구라고 하는데 말랑말랑해서 맞아도 크게 다치지 않으니 안심하고 저기 구석에서 두 명씩 짝지어서 캐치볼을 해봐라. 우리 아이들 하는 거랑 똑같이 따라 하면 될 게다.”
 “이까짓 공놀이야 쉽지.”
 시후는 자기 똘마니 같은 진혁을 데리고 캐치볼을 시작했고 나는 호준의 자세를 봐 주었다.
 “호준아, 넌 공을 어깨로 던지는 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손목 스냅으로 던진다고 생각해야 해. 공은 절대 어깨로 던지는 게 아니라, 던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손목을 툭 하고 채듯이 공을 던져 주는 거야.”
 이상한 자세로 공을 던지는 호준에게 1:1 코칭을 해 주자 호준의 던지는 자세가 조금씩 나아졌다.
 “힘들다.”
 “캐치볼 처음 하면 원래 힘들어.”
 “호오, 육상부에도 훌륭한 인재가 있었구먼.”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세월의 풍파를 보여 주는 기다란 흰 수염과 초승달 모양의 두 눈에 인자함이 가득 담긴 야구부 감독님을 보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오, 나를 알아보는구먼. 이 유니폼 때문인가? 요즘 배가 나와서 유니폼이 잘 맞지도 않는데 허허허. 우리 학생 이름은 뭔가?”
 “지수입니다. 지금은 육상부 일 학년 단거리 선수입니다.”
 “지금은이라······. 자네 야구부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다.
 “저 멀리서 캐치볼하는 자세를 보아하니 야구를 조금 해 본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배워 볼 생각은 없나? 육상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보장하지.”
 “저, 그게······.”
 내가 망설이자 야구부 코치님이 중간에 끼어들어 감독님께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호오, 내기라 참 재미있군. 허허허. 좋은 구경거리겠어. 이 코치, 아이들 던지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엔 치는 모습을 한번 볼까?”
 “네, 감독님. 준비하겠습니다.”
 야구부 코치님의 지시 아래 야구부원들은 몸풀기 운동을 끝내고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홈 플레이트 쪽에 거대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어이! 육상부 사총사, 이리로 와 봐라.”
 코치님의 부름에 홈 플레이트 쪽으로 가니 타격 케이스라 불리는 이동식 백네트가 설치되었고 마운드 쪽에도 투수 보호를 위한 그물망이 설치되었다.
 “자, 지금부터 아까 말한 내기를 해야겠지? 저기 마운드에는 우리 야구부가 던질 것이고 너희들 중 한 명이라도 안타를 친다면 육상부가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사과하고 음료수랑 간식을 사 줄게. 단, 너희가 안타를 하나라도 못 칠 경우에는 오늘 야구부의 뒷정리는 육상부 사총사 너희들이 하는 거다. 어떠니?”
 “좋아요!”
 나를 포함한 네 명 모두의 동의를 얻은 뒤, 야구부 코치님은 몸풀기가 끝난 야구부 인원 중에 한 명을 불렀다.
 
 ***
 
 팡!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세 번째 타자 호준이 녀석이 전력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지만, 공 끝에 스치지도 못하면서 육상부의 세 번째 공격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시바! 저 새끼 왜 저렇게 빨리 던지는 거야? 누구 죽이려고 하나?”
 백네트 뒤에서 움찔거리면서도 절대 그 입은 다물지 않는 진혁이 투수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어이, 넌 엎어졌잖아.”
 “그건 말이지.”
 첫 번째 타자로 나서 빠른 공을 보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던 진혁은 앞으로 평생 놀림거리가 생겨 버렸다.
 “후, 지수 네 차례다. 야구부 애들은 이걸 도대체 어떻게 치는 거지? 진짜 무섭네······.”
 호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헬멧을 벗어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보기엔 투수가 아닌 것 같은데······.”
 “뭐?”
 묘하게 강한 아이들 자존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뒷말은 삼켰다.
 “지수라고 했던가?”
 “네, 코치님.”
 호준에게 헬멧과 배트를 건네받아 타석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야구부 코치님이 나를 제지했다.
 “네가 치기 전에 투수를 좀 바꿔도 괜찮겠지? 얘가 너무 많이 던져서 다른 일 학년으로 바꿀게.”
 육상부 한 명당 두 타석을 봤기에 꽤 많이 던지긴 했다.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오상식이 마운드로!”
 “알겠습니다!”
 이미 준비를 했던 것인지 검은색 양말을 바짓단 밖으로 끌어내어 일명, 농부 패션을 한 야구부원 한 명이 마운드로 뛰어갔다.
 “마지막 승부는 단순하게 하면 재미가 없겠지?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승부를 보자! 아웃 카운트는 세 개인데 수비 내용을 포함한다. 안타는 아웃 카운트 소비 없고 수비에 잡히거나 삼진당했을 때만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는 것으로 하자.”
 “네, 괜찮습니다.”
 감독님은 나에게 동의를 구했고 이어 큰 목소리로 야구부원들에게 지시했다.
 “이 학년들 수비 위치로! 에러 낼 경우에는 운동장 열 바퀴 돌릴 테니 모두들 집중해라!”
 코치님의 말이 끝나자 야구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자리를 잡았다.
 “어이, 마운드에 있는 그물망도 치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나는 천천히 타석으로 들어갔다.
 
 “일 학년 안녕?”
 “어? 아, 안녕?”
 “아따, 이놈이 삼 학년한테.”
 “죄송합니다.”
 타석에 들어서자 쪼그려 앉아 있던 포수가 나에게 인사를 걸었기에 자연스레 대답했는데 대처가 잘못되었었다.
 “잘해 봐. 마운드 위에 상식이 저놈은 비실비실해 보여도 차세대 에이스 투수이니까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코치님이 뒤로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플레이 볼!”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 투수는 거침없이 첫 번째 공을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공의 위력은 상당했다. 밖에서 보던 것과 직접 타석에서 보는 공의 차이는 마치 어린 왕자에서 주인공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다가 몸통을 만질 때의 그 경악과 꽤나 흡사한 느낌이 들었다.
 “오금이 저리지 않니?”
 투수에게 공을 돌려주던 포수가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어이, 용찬이 시끄럽다.”
 “코치님. 육상부의 도전에 대한 토크입니다.”
 “시끄러워.”
 “쳇.”
 심판을 보는 코치에 의해 막힌 포수는 중얼거리며 쪼그려 앉았다.
 ‘반드시 친다!’
 포수의 빈정거림에 오기가 발동해 나는 배트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이윽고 머리 위로 글러브를 들어 올리는 와인드업 자세의 투수를 보며 마치, 그 꿈의 기억처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 나갔다.
 투구 폼이 큰 투수의 자세에 맞춰 나 또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지면으로 내딛고 크게 배트를 휘둘렀다.
 
 따앙!
 ‘조금 빨랐다.’
 마치 누군가 내게 조언이라도 해주듯 머릿속으로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육상부 아이들이 내지르는 환호에 주위가 분산되었다.
 “오오오!”
 “아깝다잉.”
 백네트 뒤에서 나의 타석을 지켜보던 녀석들이 잔뜩 흥분해서 탄성을 내질렀는데 녀석들 말대로 방금 친 타구는 왼쪽으로 크게 휘어져서 외야에 설치된 높은 그물망을 맞히고 말았다.
 “파울! 투 스트라이크.”
 우쭐한 마음에 심판을 보고 있는 코치님을 살펴보니 그다지 크게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조금 하는데? 조심해야겠군.”
 3학년 포수가 날을 세워 말을 걸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의 눈빛을 피했다.
 포수와 마찬가지로 생글생글 웃던 투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곤 그 자리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다음은 변화구가 올까?’
 앞선 두 개 모두 직구였을 게 분명했다. 변화구라고 하면 눈에서 크게 벗어날 텐데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패스트 볼이라고 생각했다.
 ‘직구 타이밍!’
 야구 게임을 보면 지금이 변화구 타이밍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지만, 투수의 저 고집스런 표정과 사인을 받은 뒤,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며 직구를 예상했다.
 이윽고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투수가 큼지막한 폼으로 공을 던졌다.
 타앙!
 ‘제길······.’
 타이밍은 정교하게 잘 맞췄지만, 배트 중심에서 빗맞고 말았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공은 하늘 높이 치솟기만 했고 2루수가 손쉽게 공을 잡아 냈다.
 “원 아웃! 원 아웃!”
 포수가 일어나 수비들을 독려했고 나는 끓어오르는 투기를 조금 진정시켰다.
 ‘투수 표정이······.’
 잔뜩 흥분했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주변 시야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 상태로 마운드 위를 바라보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한 투수가 보였다.
 “플레이 볼!”
 심판을 보는 야구부 코치님이 경기를 재개하라는 지시를 보냈고 이후, 얼굴이 붉어진 투수는 연신 볼만 세 개를 던졌다.
 그렇게 크게 벗어나는 볼 세 개를 던진 뒤, 투수는 조금 진정되는 듯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네 번째 공을 던졌다.
 ‘한가운데!’
 왼발을 높이 들었다가 지면에 단단히 고정하고 뒤이어 오른팔이 벌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배트를 크게 휘둘렀다.
 따앙!
 이번에는 정확하게 배트 가운데 맞은 공은 외야를 향해 쭉 뻗어 나갔다.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를 가로질러 펜스까지 굴러간 공을 바라보며 1루를 향해 뛰었다.
 “어이, 어디 가?”
 1루 베이스를 크게 돌아 2루로 향하려고 할 때, 1루수가 팔을 붙잡고 물었다.
 “네?”
 “지금이 경기 중이냐? 크큭.”
 “푸하하하. 웃긴 놈이네.”
 근처에 있던 2루수와 1루수가 크게 웃자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으윽. 죄,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대로 뒤돌아서 타석으로 돌아갔다.
 “크크크. 아주 야구가 체질이구만. 우리팀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
 집어 던진 방망이를 나에게 건네주는 포수가 말했다.
 “으윽. 죄, 죄송합니다.”
 “야구는 치고 달리라고 있는 것이지. 그렇죠, 코치님?”
 포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뒤에 있던 코치를 바라보자 코치님은 마스크를 벗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 지수라고 했나? 야구 처음이라고 했지?”
 “네. 아빠랑 캐치볼은 몇 번 해 봤어요. 또래랑 이렇게 해 본 적은 없습니다.”
 “확실히 재주가 있네. 아 맞다. 어이! 육상부 사총사 이리 와 봐라.”
 야구부 코치님은 나를 옆에 세워 두고 육상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까 무례하게 말했던 점, 진심으로 사과할게.”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우리는 엉거주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고, 주변에 있는 야구부 부원들이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허허! 이놈들아 뭐 그렇게 눈을 흘기냐? 잘못했으면 인정해야지. 우리 이 코치가 잘못한 게 맞아. 허허허, 그나저나 저 친구는 물건이구만.”
 옆에서 흥미롭게 지켜보던 감독님이 야구부를 향해 호통치며 다가왔다.
 “그려, 그려, 이 코치가 사과를 했으니 내기는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고 이 할애비가 궁금한 게 있는데 들어줄래?”
 “네?”
 “지수라고 했지? 저기 있는 우리 에이스가 한번 던지고 싶다던데 상대해 볼래?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허허허.”
 사람 좋은 표정으로 허허 웃는 감독님은 구석에서 공을 던지면서 몸을 푸는 투수를 가리켰다.
 “저······.”
 “할게요! 저희도 보고 싶어요.”
 “저도요.”
 “얘들아······.”
 내가 답하기 전에 시후랑 진혁이 먼저 대답해 버렸다.
 “지수 학생은 할래? 말래?”
 감독님은 은은하게 거절하지 못할 분위기를 이끌었다.
 “할게요.”
 “허허허허. 만약 우리 에이스한테 안타를 뽑아내면 내가 너희들에게 치킨 한 마리씩 사 주마!”
 “우와아!”
 아이들이 환호했고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운드 정리하고 투수 교체!”
 야구부 코치님의 지시에 또다시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1학년 투수가 내려가고 연습을 마친 투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냉정한 표정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은 꽤 무서워 보였는데 그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자 무서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펑!
 좀 전의 투수보다 20km/h쯤은 상승한 속도로 포수 미트에 박히는데 그 소리가 대포를 쏘는 것처럼 귓가를 어지럽혔다.
 “어이, 꼬맹이. 우리 에이스 공도 한번 쳐봐라. 그럼, 우리 야구부로 들어왔을 때 내가 특별히 예뻐해 주지.”
 “네에?”
 “내가 널 찜했다고. 짜샤!”
 “이놈아, 같은 부도 아니고 다른 부 후배를 괴롭히려고 작정했냐? 잔말 말고 포수나 봐! 그리고 너 오늘 특별 교육이다. 거기서 직구를 또 던지는 놈이 어디 있어?”
 포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치님이 포수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코치님, 너무하십니다. 상식이 녀석 성격 잘 아시잖아요? 지 싫어하는 공은 죽어도 던지지 않으려고 하는 놈인데 저도 뭘 어떻게 합니까?”
 “삼 학년이 일 학년한테 질질 끌려가냐?”
 “허헛! 포수란 원래 유한 분위기를 이끄는 팀의 잔소리꾼이자 재담꾼이라고 강조하신 것은 코치님이었습니다만?”
 “닥치고 공이나 받아.”
 “예이, 예이.”
 가만히 서서 둘 사이의 대화를 듣는데 이런 분위기는 상상도 못 했다.
 ‘부럽다······.’
 뼈다귀랑 저렇게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텐데 이곳은 달랐다.
 “온다.”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포수 선배가 경고를 보내 주었고 투수의 투구 모션이 시작되었다.
 간결한 투구 폼으로 공을 던지려나 싶을 때, 이미 날아오는 공은 포수의 글러브로 굉음을 내며 빨려 들어갔다.
 팡!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바짝 들어온 공은 나를 스치고 지나간 듯싶었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는 판정이었다.
 “암, 이게 바로 우리 에이스님 공이지. 어때? 좋지? 다음에는 바깥쪽 패스트 볼 하나 던져 줄게, 아까처럼 쳐봐. 밀어 친다는 느낌으로 치면 우중간을 가를 수 있을 거야.”
 “어이, 용찬이! 트래시 토크 작작하지?”
 포수가 나에게 말을 걸자, 야구부 코치님이! 끼어들었다.
 “코치님, 이것도 포수의 심리 싸움 중에 하나라고요. 방해하지 마세요. 심판이라면 조용히 판정만 하시라고요.”
 “허허, 네가 그러고도 오늘 살아남을 것 같아?”
 “히히. 몰라요.”
 포수가 자꾸 말을 걸자 헷갈리기 시작했다.
 ‘진짜 바깥쪽일까? 방금 몸쪽은 직구였나? 휘어지지 않았나?’
 모든 게 트릭 같았다. 계속 속고 있는 이 느낌은 무척이나 답답했는데 상대 투수는 이에 아랑곳없이 다음 공을 준비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팡!
 “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정말 빨랐다. 와인드업 자세도 아닌 세트 포지션 상태로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 드는 순간 숨었던 공이 쓰윽 하고 갑자기 튀어나온 느낌이다. 이번에는 봤다. 끝부분이 살짝 휘어져서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바깥쪽에서 더욱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변화구였다.
 “호오. 요놈 물건이구만. 꿈쩍도 안 하네. 야! 선배 민망하게 대답도 안 하냐?”
 “죄, 죄송합니다.”
 ‘어쩌라고!’
 이렇게 대들고 싶었지만, 상대는 3학년이었다. 그것도 코치님과도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성격 좋은 선배라서 대들었다가는 어떻게 갈굼 당할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죄송할 것은 없고, 자, 다음은 몸쪽 패스트 볼이 갈 거야. 이번엔 진짜야.”
 팡!
 “스트라이크.”
 진짜다. 포수의 말을 듣고 반대로 생각했다가 몸쪽으로 바짝 들어오는 공에 놀라 배트를 내지도 못했다. 그대로 허리 높이로 스치고 지나가듯 포수의 미트로 빨려 들어가는 공은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할 공이다.
 “쯧쯧. 후배님 챙겨 드리려고 이 선배가 부단히 노력하는데 후배님은 차려 준 밥상을 그대로 걷어차는구나.”
 아까부터 계속 말 거는 포수가 신경 쓰여서 투수에 전혀 집중을 못 하고 있다. 저 입에 지퍼를 채워 닫아 버리고 싶은데 이제 심판을 보던 코치님도 말릴 생각이 없는지 볼 카운트를 부르고 입을 다물었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몰렸다. 포수는 계속 쫑알대지 투수는 던지는 그 순간까지 공을 숨겼기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도 힘들었다. 나는 쫑알대는 포수에게 시선을 떼고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세트 포지션 상태에서 모자 아래 으스스한 표정으로 포수 미트만 바라보는 투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왼발을 지면에서 살짝 떼고 그대로 앞으로 쭉 뻗으며 동시에 팔이 뒤쪽으로 숨어 버렸다.
 ‘온다!’
 나는 바짝 기세를 끌어 올려 하체를 단단히 고정시켰고 투수의 손에서 공이 보이는 순간 몸쪽을 직감하고 오른쪽 팔을 옆구리에 단단히 붙였다. 팔꿈치까지 갈비뼈 있는 곳에 바짝 끌어당기고 그대로 배트를 힘차게 돌렸다.
 
 따앙!
 정확한 타이밍에 맞은 공은 3루 라인을 타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파울!”
 심판을 보고 있는 코치님은 파울이라고 외쳤고 또다시 트래시 토크가 이어졌다.
 “허허. 잘 치네? 어이 꼬맹이 야구 좀 했나 봐? 초등학교 때 선수였어? 일 학년 맞아? 어떻게 일 학년이 우리 에이스 공을 한 번에 딱딱 맞출 수가 있지? 이거 진짜 치기 힘든 공인데. 다음번에는 바깥쪽을 노려야겠어. 이거 쉽게 생각하다가 꼼짝없이 당하겠는걸?”
 포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깥쪽을 향해 앉는 것이 느껴졌다. 일부러 인기척을 크게 내면서 바깥쪽으로 앉는 포수. 무척이나 신경 쓰였지만, 왠지 느낌상 바깥쪽이라면 아까 그 변화구가 올 것 같고 아니라면 분명 몸쪽의 패스트 볼일 것 같았다.
 다시금 투수에게 집중했고 감춰졌던 투수의 팔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바깥쪽임을 직감했다. 눈에서 멀게 느껴지는 코스로 공이 날아올 때 나는 반사적으로 배트를 내밀었다. 무척이나 늦은 타이밍이었지만 공을 끝까지 눈으로 좇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배트에 맞출 수 있었다.
 타앙!
 배트에서 묵직한 울림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욱신욱신 저릿한 느낌이 올라왔는데 아픈 것보다는 커트로 삼진을 면했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허허허. 이거 나의 말발이 안 먹히다니. 너 좀 하는데?”
 포수의 말이 대번에 짧아졌다. 말수가 줄어든 포수는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죽였고 나는 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만 해도 포수의 말소리로 몸쪽이나 바깥쪽 어디에 앉아 있는지 대충 감이 잡혔는데, 말도 없이 움직이는 기척도 죽이니 아예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투수는 아무 표정이 없었고 다음 공을 던질 채비를 했다.
 팡!
 “볼.”
 이번에는 몸쪽 바짝 붙는 볼이었다. 내가 발걸음을 뒤로 뺄 정도로 바짝 붙어 왔다. 명백한 위협구였지만 반항할 수는 없었다. 코치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포수도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기세를 끌어 올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미안. 맞힐 생각은 없었어. 어차피 서 있어도 안 맞았을 거야.”
 포수는 투수에게 공을 뎐져 주며 대충 대답했고 다시 자리에 앉아 기척을 죽였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심판을 보고 있는 코치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투수는 지금과 다르게 잔뜩 기세를 끌어 올렸다. 지금까지 별다른 표정 없이 쉽게 쉽게 던지는 듯싶었는데 투수의 눈매가 날카롭게 느껴지는 순간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
 
 쏴아아.
 “야구 재밌네?”
 “그런 듯. 우리 육상보다 훨씬 재미있더라고.”
 샤워기 아래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로 더러워진 몸을 씻어 내는 아이들은 오늘 하루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뼈다귀는 맨날 운동장 뺑뺑이 돌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야구부는 훈련을 무척 재미있게 하더라. 퉤, 퉤. 으악 샴푸 먹었다.”
 “크하하하. 바보 같은 놈.”
 머리를 감으며 말을 하다가 입안으로 샴푸가 들어간 진혁이 바닥에 연신 침을 뱉어 대는 가운데 옆에서 시후가 웃겨 죽는다는 듯 웃다가 자기 발바닥으로 침이 튀니까 욕지기를 내뱉었다.
 “아 시바!”
 “지수야, 너무 기죽지 마.”
 어느새 금방 씻었는지 수건을 들고 샤워실을 나서던 호준이만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 그래! 야구부 개놈들 지수가 나서니까 삼 학년 에이스를 올리냐? 뒤에서 듣는데 말수가 없어서 조용한 에이스라고 불린대. 벌써 여러 고등학교에서 입학 제의가 올 정도로 엄청난 선배라던데 너랑 승부 볼 때 왜 올렸대? 아주 우리가 만만하지. 아 짜증 나려고 해.”
 샴푸를 다 뱉어 냈는지 제법 똑똑한 말을 하는 진혁이 녀석이 분통을 내자, 옆에서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지수랑 승부 볼 때 처음 올린 투수가 오상식이잖아.”
 “오상식?”
 “옆 반 애야. 그놈도 특기생으로 입학한 애라고 하더라고.”
 “아! 그 재수 없는 새끼? 이제 기억난다. 전에 급식실에서 줄 서는데 새치기하는 거 졸라 패 주려고 했는데.”
 진혁은 주먹을 쥐고 섀도복싱을 하는 포즈를 잡았다.
 “아서라. 야구부 애들 끈끈한 놈들이라서 우르르 달려올걸?”
 “우리도 육상부잖아!”
 “일 학년은 우리 넷이 전부인데 뭘 어떻게 싸워?”
 “비겁한 놈들!”
 진혁과 시후가 만담을 벌일 때, 나는 재빨리 몸을 헹구고 수건을 챙겨 들며 샤워실을 나섰다.
 “괜찮냐?”
 어느새 옷을 입었는지 머리를 말리고 있던 호준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 분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삼진은 면했잖아.”
 “푸훗. 에이스 공을 그렇게 받아 쳤다고 감독이 너 야구부 입단하라고, 야구 센스가 굉장하다고 하던데? 근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
 호준이의 질문에 조금 전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투수가 잔뜩 기세를 올려 공을 던질 때 나는 번트를 댔다.
 프로 야구 경기를 보면 쉽게 대던 번트가 실제 대 보니 그리 쉽진 않았는데 마침, 운이 따라 줘 배트에 맞은 공은 파울 라인 밖으로 벗어나지 않아 스리 번트 아웃은 면했다.
 나는 앞쪽으로 구르는 공을 보면서 나의 최대의 장기를 살려 득달같이 1루로 뛰었고 아슬아슬하게 죽었다.
 “아까는 진짜 아깝더라. 번트가 옆으로 조금만 빗나갔다면 일루에서 살았을 텐데 너무 정면으로 갔어.”
 “투수가 던질 때, 옆으로 빠지길 바랐는데 잘 던지더라.”
 “에이스라잖아. 그리고 공보다 사람이 빠를 수는 없지.”
 이후로도 나를 주인공으로 한 아이들의 수다가 이어졌고 호준이 나에게 다가왔다.
 “끝나고 야구부 감독님이 너만 부르던데 무슨 얘기했어?”
 “뭐······ 야구부에 들어오지 않겠냐? 이런 이야기도 하고 그 상황에서 왜 번트를 댔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삼진당하기 싫어서요. 이렇게 말했지.”
 “크크크. 너답다. 너란 녀석은 자존심 하나만큼 더럽게 센 놈이었지.”
 “승부욕이 강하다고 말해 줘.”
 호준에게 대충 대답하고 조금 전 감독님과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야구에서 바로 그 생각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아니?”
 마치 손자를 대하듯이 내 등을 쓰다듬은 감독님이 말했다.
 “그게 바로 팀 스포츠 정신이란다. 내가 죽지 않고 어떻게든 출루해서 바로 뒤 타자에게 연결시켜 주는 것이 팀을 위한 정신이지. 번트라는 게 희생이란 의미와 기습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모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팀이란다.”
 “그리고 내가 만약, 상대 팀의 감독이었다면 지수 학생 네가 무척이나 껄끄러울 것 같더구나. 분명······ 번트 타이밍은 아니었는데 번트를 댔고 투수 정면이었지만 일루에서 경합이 벌어졌으니 네가 좌타자였다면 무조건 살았다. 내 진심으로 말하마, 넌 야구에 재능이 있어. 우리 야구부에 들어오지 않겠니?”
 나이가 지긋하신 감독님께서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데리고 간 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칭찬을 넘어섰다.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괜찮으니 찾아오렴.”
 진심으로 나를 원하는 눈빛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야구······.’
 무척 흥미로웠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가슴 한구석에서 야구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함께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싫다? 좋다?’
 정말 모르겠다.
 끌림과 거부감이 동시에 드는 이상한 기분은 정말이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지수야! 너 아까 용돈 받았다고 했지? 피방 가자!”
 “롤!”
 그때, 샤워실에서 문을 벌컥 열고 나온 알몸의 두 놈들이 물을 뚝뚝 흘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미친놈들아! 다시 청소해야 하잖아, 들어가!”
 나는 걸레 자루를 집어 들며 녀석들을 샤워실로 밀어 넣었다.
 “피방 잊은 건 아니지?”
 다시금 얼굴 빼꼼히 내미는 진혁이 보였다.
 “간다고!”
 저놈들 때문에 생각이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
 
 “끄응.”
 입안이 텁텁한 느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 무슨 꿈을 꾼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푹 잔 것 같다. 요새 계속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잠을 설쳤는데 오래간만에 푹 잔 느낌이 들어 무척이나 개운했다.
 “목마르다.”
 입안이 텁텁한 느낌을 넘어 목 안을 간질이자 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휴우······.”
 1층으로 이어지는 층계를 내려가려는 순간, 밝은 불이 켜진 아래층에서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지수 아빠, 이거 어떻게 하죠?”
 엄마의 말소리에 이어 드르륵하고 현관 미닫이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빠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이것 좀 봐요. 지수가 가져다 놓은 것 같은데······.”
 “가정 통신문이네, 육상부 우 코치?”
 지금의 상황이 꽤나 익숙한 듯 아빠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운동부 선생들이 촌지 바라는 거 하루 이틀 아니잖아? 초등학교 선생들에게도 엄청 돌렸는데.”
 “아니, 그게 촌지가 아니라. 어휴.”
 “왜 그래?”
 엄마의 한숨 소리에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번에 여름방학 때 전지훈련인가를 간다나 봐요.”
 “중학생이 되었으니 전지훈련을 떠날 수도 있지. 왜 비용이 좀 많이 들어?”
 “지수한테 쓰는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이것 좀 봐요.”
 엄마의 말이 끝난 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런 개뼉다구 같은! 뭐야 이거? 우리보고 전지훈련 비용 일부를 부담해 달라고? 그게 뭐, 팔백만 원?”
 아빠는 잔뜩 화가 난 듯 무언가 종이 구기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냉장고 소리와 함께 벌컥벌컥 냉수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아니, 여름 전지훈련을 가는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한 달 동안이나 체류할 숙박비랑 식비를 우리보고 대라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아빠는 다시금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여보, 지수 깨겠어요.”
 “아우! 그놈의 육상, 육상! 우리 아이가 재능이 있다고 해서 놔뒀더니 코치가 우리를 아주 호구로 보고 있나 보군. 돈쯤이야 쉽게 던져 줄 수는 있지만, 우리 아이를 인질로 잡은 것처럼 나오다니 으으, 짜증 나!”
 “일 학년인데도 이러는데 앞으로 학년이 올라가면 얼마나 더 이럴지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아으! 가서 짓패버릴 수도 없고 아휴, 자식 가진 부모가 죄인이지, 죄인.”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타오르던 갈증도 잊은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
 ‘자식 가진 부모가 죄인이다.’
 이 말에 가슴속에서 울컥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엄마, 아빠한테 부담을 주면서까지 육상을 계속해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요새 육상에 대한 회의감이 계속 들었는데 무언가 묵직한 돌덩이가 여기에 더해진 것 같다.
 
 <『야구공에 맞고 모든 게 달라졌다!』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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