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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수저 재벌인생! 1권 (1)

2019.01.30 조회 16,465 추천 83


 #1화
 
 
 
 
 
 [다음 소식입니다. 국내 4대 기업의 올해 1분기 매출이 기록적인 수익을 기록하여······.]
 “크으- 돈 놓고 돈 먹기 아주 죽여주네.”
 재현은 작은 고시원 단칸방의 조명 아래에서 소주를 한잔 걸치면서, 언제 적 골동품인지 모를 CRT 방식의 TV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뉴스가 끝나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재현은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기 전 종이컵 여러 개를 나열하며 남은 소주를 조금씩 따랐다.
 몸을 욱여서 겨우 누울 침대 하나와 기본 구비된 TV 한 대, 그리고 벽면에는 꺼림칙함을 넘어 괴기스럽게도 보일 법한 사진 액자들이 가득한 재현의 월세 20만 원짜리 공간이었다.
 “할아버지 먼저 한 잔 받으시고, 그다음은 할머니······ 아버지······.”
 재현은 잠들기 전 으레 하던 대로 그 영정들 앞에 방금 전 종이컵에 따른 소주를 나열했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마가 끼었다고 볼 수 있는 굴곡진 삶이었다.
 원래 재현의 집은 부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중산층 이상은 되는 집안이었다.
 50년이 넘게 군납 쪽 일을 하시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집과 아버지의 아파트도 마련해주신 할아버지.
 고모와 작은아버지의 결혼 비용과 집까지 대주시면서 피땀 흘린 노력만으로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다고 자부하셨지만······ 그런 집안이 추락하는 데에는 날개가 없었다.
 “시대를 잘못 탔다고 해야 하나······ 괜히 옛날 생각나네요.”
 취기가 오른 듯 영정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재현이었다.
 재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집 안에 사람들이 들어와 빨간색, 노란색의 스티커를 마구 붙이기 시작했었다.
 이유는 작은아버지의 부도였다.
 실의에 빠진 작은아버지 집안은 어느 날 차 안에서 죄송하다는 유서만 남기고 조용히 호적에서 사라졌다.
 그로 인해 실의에 빠진 할아버지가 은퇴를 1년 앞두시고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죽은 작은아버지의 파산 빚을 부모로서 갚아주고, 남은 가족 인생은 챙겨주겠다며, 그 좋아하시던 술도 끊으시며 무리해서 악착같이 일하시다 생긴 비극이었다.
 불행은 불행을 몰고 왔다.
 2년간 기약 없는 할아버지의 병수발 도중에 화병이 나신 아버지의 간암 소식······.
 그렇게 수발에 수발이라는 꼬리를 문 집안일에 더해 직장까지 다니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과로사······.
 세상에 신이 있다면 대체 왜 이렇게 연달아 남의 가족들을 멋대로 데려가는 거냐며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 3년 단위로 벌어지는 줄초상에 점점 재현도 정신이 피폐해져갔다.
 학업도 전교권에서 놀던 재현은 만사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술과 담배에 절어 변변찮은 기술 없이 일용직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흙수저 고아 신세까지 전락했다.
 그 모든 것이 불과 10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 다들 천국에서 잘 지내시겠지. 나는 여기 지옥에서 아직 남은 거고······.”
 살아있는 것을 자학조로 중얼거리는 재현은 모든 영정 앞에 종이 소주잔을 보고는 한숨을 쉬면서 소주 한 잔을 비우고는 담배 한 대를 할아버지와 아버지 앞에 올려놓고 영정들을 어루만졌다.
 그저 착잡함만 묻어 나오는 재현의 얼굴은 당장 손끝만 살짝 가져다 대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재현은 조용히 침대 위에서 영정들을 위로한 잠자리를 가지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
 
 “와이 씨! 늦었다!”
 재현의 집에서 직장까지는 40㎞가 넘는 거리였다.
 직장이 외진 시골 쪽에 있는지라 7시 30분에 한 대 있는 출근 버스를 타지 못하면 지각하는 곳이었다.
 재현이 눈을 떴을 때 시간은 7시 22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그냥 후다닥 뛰쳐나갔다.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서 겨우겨우 차는 탈 수 있다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횡단보도 하나를 남겨두고 빨간불이어서 눈앞에서 달려가는 버스를 봤다.
 재현은 오늘 하루는 완전히 공쳤다고 생각했다.
 일단 현장 반장님에게 문자를 남기고, 한 번 삥 돌아가서 갈아타는 다음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출근 시간을 20분이나 지체한 채로 겨우겨우 갈산 공구 작업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어제 술을 얼마나 처먹었길래 또 늦은 거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금방 현장 갈게요~!”
 연신 소리쳐대는 팀장의 호통 속에서도 재빠르게 자리에 나와 작업모를 쓴 채로 대기실에 걸터앉았다.
 “거 짜식 일찍일찍 좀 일어나지. 월요일 아침부터 이게 뭐냐?”
 이 반장에 말에 재현은 멋쩍게 웃어보였다.
 이 반장은 처음 인력 사무소에 왔을 때부터 재현을 챙겨준 이 반장은 공사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노동자였다.
 언제나 점심에 컵라면을 사 가지고 오면, ‘노가다 하는 놈이 밥을 먹어야지 이게 뭐냐?’라고 타박하면서도 자기 돈으로 재현의 밥까지 사주는, 재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아저씨, 그게요. 어제 잠이 안 와서 한 잔 마시다가······.”
 “아이고, 이놈아.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 잔 된다. 그렇게 잠 안 오면 자기 전에 물이라도 한 번 빼고 눕던가.”
 이 반장의 말에 아침부터 굳어 있었던 재현의 입가에 풋- 하고 웃음기가 돌아왔다.
 “아, 무슨 물을 빼요, 물을!”
 “짜식! 얼른 피우고 준비해 인마. 4층에 비계 쌓을 거 두 개 오더 나왔어.”
 재현이 하는 일은 공사 현장에서 설비 및 건축 공사를 할 때 쓰는 비계 파이프 등을 쌓거나 상판 등을 설치하여 용접 및 철골 공사 준비를 해주는 일이었다.
 고아로 남았을 때 닥치고 먹고살 궁리부터 생각하고 할머니의 사망으로 받은 마지막 유산인 등록금 3백만 원 남짓한 돈으로 시작한 독립 인생의 첫 단추였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지방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과일 트럭 장사, 발전기 터빈 공사 노무자, 택배 상하차 물류, 컨테이너항만 노동자······.
 원래 힘쓰는 일을 못 하고 기술도 없는 문과 출신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다.
 “재현아! 너 이번엔 꼭 기술 배워야 된다?”
 이 반장은 재현과 같이 일을 하면서 보조로만 일용직으로 일하는 재현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산업 기사까지는 관련 일 3년 이상 해야 되는데, 기능사는 배우면 금방 돼. 용접이든 설비든 발전 기술이든 뭐든 배워둬. 거, 평생 노가다 데모도(보조)만 하면서 살 순 없잖아? 안 그래?”
 이 반장 역시도 원래는 건설 회사에서 과장급 대우를 받으시다가 이제는 일선에서 퇴직하고 현장 때마다 공사 식으로 1년에 3-4건만 프리랜서로 뛰는 수입이 4-5천은 된다면서 지금은 그냥 놀면서 하는 거라고 매일 설명하시는 분이었다.
 “야, 아저씨도 노가다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용접이고, 족장이고 있으면 다 불러준다. 지금이야 뭐 그냥 딸내미 등록금 시즌 때나 간간이 뛰러 나온다니까?”
 “예. 안 그래도 오늘 일 끝나면 책 좀 보려고요.”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재현 역시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방 속에 책을 두고서 퇴근 때마다 근처 카페라도 가서 읽어봐야겠다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때 재현과 이반장이 있는 4층 철골 공사 지점에서 그들을 다급하게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어이! 거기!!!”
 이 반장이 밑을 보자 빨간색 헬멧을 차고 안전 관리자 벨트를 차고 있는 이가 있었다.
 안전 관리자가 또 지랄을 하나 보다 싶은 이 반장은 일단 공구를 챙기고 재현과 같이 내려가자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헐레벌떡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안전 관리자를 본 이 반장의 표정은 점점 썩어 들어갔다.
 “아, 이 반장! 몇 번을 말해? 오늘은 본사에서 시찰 온다고 고층 작업 할 때는 꼭 안전벨트 차라고 했잖아?”
 말이 안전관리자지 실상은 산업안전기사 자격증 가진 1명의 통솔에 나머지는 그냥 일용직 중에서 몇 명 돌아가며 안전관리자 조끼랑 헬멧만 씌워놓고서 매뉴얼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돌아다니는 이들이었다.
 “벨트는 지랄! 마! 저거 안 보이나? 안전벨트 고리도 안 달렸는데 무슨 벨트를 채워? 걸려 자빠질 일 있어?”
 이 반장은 4층 난간 쪽을 가리키며 눈이 있으면 한번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
 확실히 용접 때 전류가 통할 어스 집게와 안전벨트를 다는 고리를 하나 용접으로 붙여달라고 며칠을 말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개선이 안 된 상황이라 이리 위태위태한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 그래도 어디 비계 파이프 연결된 데 적당히 걸어놓기라도 해야지. 이거 본사에서 봤다간 우리 전부 작살나는 거 몰라?”
 “아 시발! 그럼 니가 한번 해봐라! 뭐? 비계에 설치해? 여기에 걸고 떨어지면 몸이랑 비계랑 다 같이 우르르 나자빠지는데 다 죽을 일 있나?”
 이 반장과 안전관리자의 실랑이 이후로 이 반장은 오전 일은 아주 잡쳤다는 듯이 인상을 쓰면서 재현에게 내려가자고 일러두고는 흡연실로 나왔다.
 이 현장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위에서는 납기 내에 기한도 맞춰야 되고, 본사에서 내리는 갑의 오더 역시도 충실하게 하면서, 모든 것을 FM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단순 일용직인 재현이 봐도 이곳 사업부 상황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안전관리자도 일용직에게 돌아가면서 시키고, 소화기가 부족하니 낡은 소화기를 옆에 놓고 관리 라벨만 바꿔가며 화기 관리 시늉만 할 따름이고, 안전벨트를 전원에게 지급해도 그 안전벨트를 걸 데가 없어 ‘패션 엑스밴드’라는 별칭을 주고, 거기에 폐기물 처리도 모두 기본 마스크에 토시 몇 켤레 달랑 줬을 뿐 모두 일용직의 몫이었다.
 옛날엔 석면 같은 건 맨몸으로 날라도 문제없었고 거기 슬레이트에서 고기도 구워 먹었다나?
 “하여간 위 새끼들 시찰만 온다면 아주 난리야. 그 기신인지, 귀신인지 아주 와서 나한테 지랄만 해봐. 아주 저기 벽에다가 폐보온재 숨기고 공구리 친 거부터 죄다 긁어버릴 테니.”
 이번 공사를 전담하고 있는 기신산업이라는 기업에 대해 그야말로 있는 대로 욕을 해대는 이 반장이었다.
 이제껏 숱한 현장을 다니면서 일해 왔다고 하지만, 기신그룹같이 열악한 곳은 없었다.
 유리섬유 보온재 폐기물을 처리하는데 제대로 된 보호복도 없이 목장갑 두 개에 토시만 두껍게 차고 나오라고 한 게 불과 어제였다. 결국 그 상태로 폐기물을 전부 날랐다. 심지어 그것들을 전문 철거업체한테 맡긴 것도 아니고 빈 외벽 하나를 골라 내부에 쑤셔 넣고 콘크리트를 쳤다.
 “됐다! 그냥 커피나 한잔해야지. 재현이는 컨테이너로 공구 챙겨 먼저 가.”
 “예, 금방 챙겨 갈게요.”
 이 반장의 제안에 재현은 곧바로 달려갔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가지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재현은 오늘 작업 사진을 찍어 오라는 이 반장의 말에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재현이 현장에 도착하자 흡연실과 엘리베이터 앞에는 정장 차림에 새 작업모를 입은 사람과 현장 사업소의 높으신 분들이 여럿 보였다. 재현은 움찔하면서도 일단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정장 차림의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그 건설사 직원은 재현을 한번 싸늘하게 내려다보고는 옆의 현장 소장에게 물었다.
 “저거는 어디 현장 소속이야?”
 나이는 재현과 비슷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밑에 사람들을 슬쩍 들여다보며 한 반말에 50대가 넘는 현장 소장이 쩔쩔매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아, 예. 4층 현장 점검으로 비계 파이프 설치를 맡고 있습니다.”
 정장의 남성은 피식 웃으면서 재현을 바라봤다. 재현이 그의 헬멧에 쓰여 있는 ‘남규태’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가 갑자기 쏘아붙였다.
 “새끼가 뭘 쳐다봐? 네 작업 현장이나 올라가!”
 초면부터 굉장히 비우호적으로 틱틱 쏘아붙이는 바람에 재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장 외 각 간부들이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통에 재현은 이런데 끼지 말고 빨리 올라가야겠단 생각에, 일단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순간 갑자기 소장이 재현을 보며 말했다.
 “야! 네가 먼저 올라가면 어떡해?!”
 “예?”
 본사 간부로 보이는 남규태 때문으로 보였다.
 “저기······ 지금 곧바로 올라가야 될 작업 현장이······.”
 하지만 뒤에서 남규태가 기분 나쁜 썩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건설 시다로 보이는데 기술이 없으면 개념이라도 있어야지······.”
 남규태의 한마디에 곧바로 현장 소장이 곧바로 재현을 쥐어박았다.
 “야! 이놈아! 현장 보러 먼저 올라갈 분 계시는데 그걸 못 기다려?!”
 “아니, 전 그게······.”
 “뭐 이 새끼야? 어디서 어른 말하는데 말대꾸야?”
 분명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이 반장이 이야기했던 대로 몇 번이고 안전 지적으로 올린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들은 척도 안 했던 인물이 본사에서 재현 연배의 인물이 관련해서 물어본 것만으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심지어 털리는 것은 가장 말단인 재현이었다.
 재현은 가뜩이나 초면에 시비를 거는 기신산업의 남규태 때문에 그야말로 이유없이 뺨을 맞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결국 옆에서 계속 거들던 팀장이 해선 안 될 말까지 꺼냈다.
 “애새끼가 누구한테 배워 처먹어서 맨날 빠져나오려는 것만 생각하는지.”
 “······?!”
 순간 움찔하면서 주먹을 꽉 쥔 재현은 제발 이쯤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말이 점점 재현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고 있었다.
 “인마, 내가 너 사람 좀 만들어보려고 일 시키는데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당장 때려치워! 새끼야, 어디 일당직 노가다꾼이 이거저거 따지고 있어?”
 “저기······ 이건 좀 말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뭐?”
 평소 남한테 절대 싫은 소리 못 하는 재현이 순간적으로 분노가 올라서 내뱉은 항변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막 말하시는 거 아니냐고요. 저 역시도 열심히 일을 해야 되지만······.”
 그 순간 재현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턱과 뺨의 강한 충격과 함께 주저앉은 재현의 위로 낮게 내리깔리는 남규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 새끼가 어디 건방지게 목청을 높여?”
 “아앗..!”
 “이 미친 새끼가 아주 뒈질라고······.”
 고개를 든 순간 날아오는 발길질······ 재현은 그야말로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2화
 
 
 
 
 
 점심시간.
 
 간이 설치된 구내식당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죄송합니다. 지금 밥이 떨어졌거든요? 지금 지어야 하는데, 한 20분 걸릴 것 같아요.”
 “뭐? 이런 시발 장난해?”
 밥심으로 일한다는 노동자들 앞에서 배식 수량 조절에 또 실패한 영양사들이 다급히 달려와 사과했다.
 하지만 그런 사과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유료 식당인지라 식대 5천 원 개별적으로 내고 사 먹는 데도 상태가 영 아닌 곳이다.
 12시부터 1시까지인 식당에 30분만 지나서 오면 걸핏하면 밥이 다 떨어졌다고 하고, 반찬류는 언제나 하나씩 빠지고, 그런데다가 식권은 있는 대로 받았다.
 그 상황에서 식판을 한바탕 뒤엎는 노동자 하나가 나오고, 연신 죄송하다고 하는 영양사 중 한 명이 급하게 라면이라도 끓여드리겠다고 했다.
 재현은 그 광경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썅, 오늘 하루 조졌다. 그냥 관두자······.”
 재현은 어차피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밥이 넘어갈 상황도 아니었다.
 휴게실로 들어가 빈속에 연기만 냅다 들이켜 배를 채우려는 듯 줄담배를 계속 물고 있는 재현.
 이미 다른 노동자들은 한술 배부르게 먹고 컨테이너 내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때 재현은 방금 전 맞았던 뺨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는 한탄과 동시에 자신들이 저지른 짓거리를 윗분들에게 손바닥 맞추는 걸로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책임을 전부 밑으로 돌리는 간부들, 거기에 말대꾸한다면서 구타와 폭언을 해도 당장에 고소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 등.
 CCTV도 없고, 휴대폰도 거둬 가서 당장은 신고가 불가능했지만 절대 이대로 당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30분간 담배만 태운 채 완전히 초췌해진 얼굴로 걸터앉은 재현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이 반장이었다.
 “야, 재현아. 식사는 했냐?”
 반갑게 인사하는 이 반장을 보고 재현이 그저 고개만 들어 응했다. 그에 이 반장은 이상하다 싶어 달려와 재현을 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냐?”
 “······아뇨.”
 “미치겠다! 기신산업 아들인가? 그 남······ 뭐시기 하는 새끼 때문에 아주 작업장 개판이야! 게다가 어린 새끼가 여기저기 다짜고짜 반말 찍찍 처하고, 멋대로 작업 지시 고치고······. 아효······ 재벌 아들이란 새끼들은 뭐 이리 개념이 없냐?
 재현은 이 반장의 말에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 반장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대략 짐작했지만 작업 시간이 다 되어 일단 말을 미뤘다. 재현과 이 반장은 오더 미팅을 위해 함께 컨테이너 사무실에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작업팀장이 모두를 확인하며 칠판에 오후 작업에 대해 설명을 했다.
 “오늘 이 반장네는 용접기 가지고 올라가서 5층부터 비계 라인에 고리볼트 하나씩 용접으로 설치해둬.”
 “네? 용접팀 안 부르고 우리가 가라고요?”
 “아, 이 반장 용접 잘하잖아. 지금 다른 쪽 일이 바빠서 그래.”
 이 반장의 표정이 다시금 구겨졌지만 일단 다른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 그다음 팀장이 한 이야기는 좀 더 큰 건이었다.
 “그리고 다들 들어. 내일부터 인원 교체가 좀 있을 거야. 다른 인력 사무소에서 추가 인원 들어오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인력 증원이 된다는 것은 반가운 소리였는지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용접에 관련된 장비를 가지러 갔다.
  재현이 홀로 남자 작업팀장이 불렀다.
 “김재현!”
 “예?”
 팀장은 곧바로 재현을 앞에 두고서는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명세서에 사인해라. 너는 오늘까지만 일하기로 계약이 바뀌었다.”
 “······?!”
 재현은 무슨 개소리냐고 따지려다가도 이내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때려치우고, 카메라로 얼굴 찍어 고소장이라도 제출할 거라고 단단히 이를 간 재현이었다.
 그리고 5층까지 올라가는 길.
 재현은 아무 말이 없었고, 이 반장은 재현과 같이 용접기를 들고 가면서 넌지시 물었다.
 “아까 소장하고 팀장이 뭔 일 있었냐?”
 “네?”
 “하이고, 아주 그냥 기신 사장 아들하고 한판한 것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봤을 때 그 인간들 오늘 백 퍼 회식 간다. 2차로 어디 노래방 잡고 봉투 나오고······.”
 “뭐, 위에선 그런 일 있겠죠.”
 “내가 여기저기 현장 다 다녀봤는데, 소장부터가 잘못됐어. 내 저 인간 예전에 그 어디냐, 온산 오피스텔 만들 때 봤던 현장 소장이거든? 그때도 철골 박는 거 철골 빼돌리다 걸린 인간인데······ 이 바닥에 어떻게 또 저 인간이 들어왔대?”
 건설 현장 내에서는 악덕 소장으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신이 나서 까대는 이 반장이었다.
 “단가 싼 거 바른다고 저런 인간들을 데려와 공사를 하니······.”
 그러면서도 일단 오늘 일만이라도 어떻게 하자고 하는 이 반장을 보며, 재현은 오늘 하루 있었던 정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 속에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이 반장님.”
 “왜?”
 “오늘 일 끝나면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그러냐? 오랜만에 술 땡기나 보네? 알았다. 이따 씻고서 형 차로 와.”
 재현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작별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일단은 오늘 4시간 정도 남은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5층에서 미리 다른 팀이 준비한 상판 위에 올라가 용접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밑에서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지게차 한 대가 올라왔다.
  재현과 이 반장은 의아해했다.
 “뭐야, 저거? 어따가 저걸 놓는 거야?”
 건설 현장 내에서 폐기 고철 등을 놓는 고철함을 지금 그들이 작업하고 있는 건물 옆에 놓고 있었다. 분명 전용 폐기장 건물이 있을 텐데 저걸 왜 지금 옮겨놓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때, 이 반장의 눈가가 점점 가늘어졌다.
 그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말했다.
 “저것들 설마 폐기장 깔끔하게 보이려고 딴 데다 쓰레기 빼놓는 거 아니야?”
 상시 폐기물 처리장은 50% 이상 빈 공간이 있어야 했고, 수시로 쓰레기 처리 업체를 불러서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불러서 하는 처리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윗선은 정말 한계 수치까지 꽉꽉 쌓아놓고서 살짝 씩만 치워가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일부 폐기물은 처리비가 비싸니까 벽 안에 숨겨서 콘크리트 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왔겠는가?
 어쨌든 연신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밑을 보던 이 반장이 지게차 운전과 신호원을 향해 크게 외쳤다.
 “마! 이 새꺄!! 어따가 지금 고철함을 놓는 기가?”
 그러자 저 밑에서 손짓을 하던 신호원이 곧바로 무전기를 통해 이 반장에게 알렸다.
 [삐빅- 이거 잠깐만 여기 놓는대요. 금방 치울 거예요.]
 “얌마! 우리 지금 작업하는 거 안 보이나? 대놓고 떨어져 뒈지라고 그거 밑에 설치해?”
 [아, 잠깐이면 돼요. 위에서 지금 폐기장 안에 뭐 쓰레기 빼내라고 해서 임시로 갖다 놓은 거예요.]
 자기 소관 아니라 그냥 위에서 시킨 거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신호원을 보고 이 반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성질 같아선 하이바 집어 던지고 나가고 싶은걸 꾹꾹 누르면서 용접기를 가동했다.
 보아하니 그 개념 없는 재벌 2세의 짓으로 보였다.
 “내 이거 달아놓고 당장 내려간다. 아니, 위에 작업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어따 저런 걸 가져다 놔? 지나가는 사람들도 위험한 걸······.”
 덤프트럭만 한 크기의 고철함에 안에 각종 날카롭고 녹이 슨 고철을 쌓아 놨다.
 고철함은 높이가 무려 2층에 달했다. 오늘 4, 3층 마치고 2층 작업하다 혹 걸려서 긁히거나 쓸리기라도 하면 자칫 파상풍 위험까지 있는 녹슨 고철들이었다.
 이 반장은 투덜거리면서도 얼른 끝내기 위해 용접 마스크를 쓰고 재빨리 안전 고리를 붙여나갔다.
 그러나 가뜩이나 출력도 안 좋은 고물 용접기라 여러 번 지졌으나 영 시원찮은데다가 제대로 불꽃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 반장이 마스크를 벗고는 재현에게 말했다.
 “재현아! 어스 집게 불량인가 보다! 딴 데 좀 걸어줘라!”
 금속 부분에 붙여 전류가 통하는 어스 문제라 판단한 이 반장이 옆의 재현에게 말했다.
  재현은 비계 상판 위에 걸린 어스 집게를 집으려 상판 위에 올라갔다. 다른 곳에 집게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근처의 적당한 철판을 찾아 손을 뻗었다.
 [쿠쿵-]
 그 순간 비계 파이프에 걸어뒀던 상판이 약간 들썩였다.
 재현은 순간적으로 뭔가를 집으려 했지만, 안전벨트 하나 차지 않은 상태에······ 그 뭔가가 되어줄 고리를 설치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
 그에게 남은 것은 추락뿐이었다.
 “······어?!”
 “야!!! 재현아!!!!!!”
 
 ***
 
 공단 내의 한 병원.
  공사 현장 봉고차에 다급히 실려 온 재현을 응급실에서 받았다.
 얼마나 심하게 다친 건지 타고 있던 자동차 안까지 피가 흥건했다.
  들것에 실려 오면서도 계속되는 출혈에 응급실 담당의와 간호사들은 다급히 수혈 준비부터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몸이 말 그대로 성한 데가 하나 없고 팔다리는 분쇄골절에 입에서는 피를 토하는 환자를 보고 의사가 물었다. 그러자 재현을 데려온 제일건설 2공구 현장 작업팀장이 우물쭈물했다.
 뒤이어 차를 대고 따라온 이 반장이 재현의 상태를 보며 분노와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외쳐댔다.
 “재현아 인마! 일어나!! 너 살아야 돼, 인마!!!”
 “화, 환자분이 어쩌다 이렇게······.”
 “공사 현장에서 떨어졌어요! 5층 높이에서······ 시발! 그것도 하필 바닥에 고철함 있는 곳에다······.”
 5층 건물 높이라면 맨몸에서 그냥 떨어져도 중상인데, 하필이면 여기저기서 자르고 깎고 녹슨 고철이 가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여기서 출혈을 잡아도 2차 감염이 될 가능성이 컸다.
 “으······ 으으으······.”
 아직 의식이 있는 재현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자 이 반장이 다시금 재현을 불렀다.
 “재현아!! 재현아!!!”
 “일단 수혈 이후에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보호자분에게 연락하시고, 빨리 조치를 취하셔야······.”
 “······없어요, 이놈.”
 “예?”
 이 반장이 측은한 얼굴로 재현을 내려다보았다.
 재현의 눈가에 피 대신 다른 액체가 살짝 고이고 있었다. 의사가 다시금 보호자 여부를 물었으나 답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작업팀장과 이 반장이 수술 동의서와 경위서를 쓰러 갔다.
 재현이 수혈을 받는 동안 간호사들이 고철에 베인 상처들을 소독했다. 치료받던 재현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길지 않은 인생에 살아있는게 지옥이라고 자조하던 삶이었지만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호흡기 속에서나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고······ 싶다······.”
 해보고 싶은 것 하나 없이 연달아 벌어진 장례로 가족들을 년 단위로 떠나보내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학 입학은 생활고로 포기.
 꿈은 많았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변변찮은 기술 하나 없이 공사 현장을 구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삶이었다.
 그나마 일이라도 잘한다면 모르겠지만, 군대도 면제될 정도로 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악에 받쳐 일하는 그를 두고 ‘아, 그래도 노력은 하는구나?’라고 인정해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여유를 잃은 채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욕을 하며 까칠하게 굴던 베테랑 노동자들. 그럴 때마다 재현은 잔뜩 의기소침해져 작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작아졌던 재현은 이제 마음에도 없지만 먹고살기 위해 했던 일로 인해 죽을 상황에 놓였다.
 “수술 준비합니다. 지금 당장 4층 수술실로 옮길 준비해!”
 한 번만······ 딱 한 번만 지금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다면 앞으로 남은 생은 보람차고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재현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병실 앞에서 대기하던 순간, 다시금 눈이 감기며 잠이 왔다.
 갑작스런 졸음에 재현은 부러진 손에 힘을 주며 고통이 뼈마디를 때리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희미한 생명의 끈을 잡고 버텼다.
 ‘옘병! 왜 하필 이때 떨어지고 지랄이야? 지랄이!’
 잊을 수가 없는 그 목소리······ 현장 소장이었다.
 ‘저······ 일단 인력 사무소 차로 실어 오기는 했습니다만, 저 정도면 연락을 해야······.’
 ‘야, 미쳤냐?! 정신 나갔어? 지금 우리 본사 시찰 아직 안 끝난 거 몰라? 전부 다 짤리는 꼴 볼래?’
 “······.”
 서서히 희미해져가는 재현의 의식 속에서도 그 이야기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럼 나머지 인원들은 어떡합니까? 다른 외부 노무자들은 몰라도 그 자리에 있던 이석규 그놈은 분명히 들고 일어날 겁니다.’
 ‘마, 그걸 일일이 이야기해야 돼? 대충 며칠 휴가 주고 다른 현장으로 보내버려. 외부 노무자 관리 못 한 그놈 책임도 있잖아!’
 ‘네, 알겠습니다.’
 ‘뭐, 그 떨어진 놈. 어차피 오늘까지였잖아? 게다가 가족 관계 보니 고아라며? 죽으면 딱히 합의금 줄 곳도 없지 않나?’
 “······.”
 재현은 모든 것을 다 듣고서 마지막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억울하다. 억울해 미칠 것 같다.]
 자신에 대한 평가는 이게 전부일 것이라 생각한 재현은 밖의 대화에 눈을 감았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저런 놈들 따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다고······.
 재현은 그런 원통함 속에서 한 많은 29년 세월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3화
 
 
 
 
 
 재현은 공사 현장에서 발을 놓치고 떨어지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점점 더 촉박해지는 공사 시간, 재촉하는 관리자들과 계속되는 철야 잔업 근무, 피로 속에서 흐트러진 집중력과 다 썩어버려 제구실도 하지 못한 안전벨트와 지급 받을 때부터 금이 가 있던 헬멧 등. 복합적인 상황이 겹쳐 생긴 불행한 사고였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죽음조차 묻혀버린 현실.
 난간에서 떨어졌을 때 그 순간은······.
 
 ***
 
 “와이 씨! 안 돼!!!”
 재현은 죽어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천장의 샹들리에였다.
 “······뭐야?”
 일단 재현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서 거꾸로 처박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몸을 뒤척여 일어나서 다시 자리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몸 이곳저곳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거리는 것이 아직 제대로 나은 상태가 아닌 듯했다.
 게다가 병실치고는 침대가 지나치게 화려한 데다 주변의 가구들은 재현이 봐도 엄청난 고급 명품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살아 있······ 크으윽! 뭐 이리 몸이 쑤셔? 일단 간호사라도 불러야······.”
 주변을 둘러보며 좀 일으켜달라고 누굴 부르려는 순간, 방 안에서 들린 소란에 후다닥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아이구, 세상에?! 재현아! 재현아!!!!”
 재현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다닥 달려와서는 밖의 사람들을 부르며 자신의 손을 부여잡는 이를 보고 재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하, 할머니?”
 할머니였다. 부모님을 잃고 숱하게 고생하던 어린 시절에 자신을 돌봐준 할머니가 눈앞에 있었다.
 “아이고 재현아! 그래, 할미 여기 있다, 재현아!!!”
 할머니는 깨어난 손주를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어 방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애 어떻게 된거야?! 어?! 우리 아들 어떻게 되었냐고!!”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온 중년 남성이 재현에 눈에 들어왔다.
 배짝 마른 몸에 환자복을 입고 머리를 민 채 호흡기에 의지하던 모습이 아닌, 거대한 덩치에 양복을 입고 풍성한 머릿결을 자랑하는 그분.
 “아······ 아빠?”
 “재, 재현아······.”
 두 눈에 눈물을 흩뿌리면서 달려들며 재현을 끌어안는 중년의 남성은 바로······ 재현의 아버지였다.
 재현은 와락 끌어안긴 채 아버지의 온기를 느끼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혹 이곳이 저승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가 어째서······?”
 재현은 설마 이곳이 저승이고, 저승에서 돌아가셨던 가족들을 모두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안겨 있던 재현을 보고 아버지가 곧바로 외쳤다.
 “밖에 아무도 없어?! 아, 뭐 해? 빨리 한 박사 불러오고, 우리 아들 일으키지 않고!”
 재현의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거실에 있는 이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잠시 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는 빠짝 마른 몸 여기저기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재현의 몸을 조심스럽게 옮겨 침대에 반듯이 눕혔다.
 재현은 아직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깨어난 현재 상황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살아 있고, 죽었던 가족 모두가 다 살아서 자신과 같이 있다.
 자신의 담당 주치의라 불린 한 박사가 오기 전까지 재현은 그 짧은 시간에 주변과 자신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한 박사 역시도 그렇게 오랜 시간 누워있던 소년이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또렷한 정신을 보이자 신기해 하면서도 집 안에 비치한 의료기구들로 하나하나 재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담당 주치의인 한 박사를 만난 재현은 막 알아낸 정보들을 종합해 모르는 것은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물론 몸 상태에서도 테스트가 있었다.
 연하곤란이 있는지 물을 마시게 하고, 재현이 쉽게 물을 마시자 간단한 빵 종류도 씹게 해봤다.
 재현은 역시나 능숙하게 음식을 삼켰고, 그로 인해 소화기관은 놀랍게도 정상적인 반응에 눈이 번쩍이는 주치의였다.
 두 눈의 초점 테스트와 청각 테스트, 마지막으로 MRI까지 촬영까지 했다.
 
 ***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지금 재현의 몸 상태는 팔다리에 근육이 빠진 것 외에는 아주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재현 역시도 잠깐 지나쳐 본 TV와 달력으로 인해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년도, 시간은 바뀐 게 없지만 29세였던 그가 19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릴 적 불행한 병과 사고로 차례대로 돌아가셨던 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가족들이 전부 다 살아서 자신과 같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집안 분위기로 보아······ 여긴 어마어마한 부잣집이라는 것도 눈대중으로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박사가 최종 진단을 하는 시간, 재현이 다시 깨어난 대저택 안의 방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재현과 재현의 아버지, 재현의 할머니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재현 도련님의 상태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재현의 상태에 대해 꼼꼼하게 진료한 한태성 박사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설명으로는 재현을 10년간 치료해온 주치의라고 한다.
 그는 먼저 재현의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진과 차트를 주었다.
 하지만 재현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보다가 차트를 내려놓고는 물었다.
 “난 이런 거 모르겠고,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요? 확실히 나은 거 맞지? 한 박사! 그것 좀 말해달라니까...”
 가타부타 없이 그냥 본론만 말하라는 모습에 재현은 움찔했고, 곧바로 할머니가 아버지를 막아섰다.
 “아이고! 그런다고 의사 선생님 차트를 왜 던져?”
 “아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재현은 몸 상태고 뭐고 여기서 한 번 더 뿜을 뻔했다.
 예전부터 아버지는 할머니를 뵐 때면 할아버지 앞을 제외하고는 절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 왜 아빠는 할머니를 그렇게 부르냐고 물을 때마다 아버지가 머쓱해했던 기억이 나자, 이건 현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한테······.”
 그러자 흠칫한 아버지는 얼굴이 빨개져서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금 할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음, 그래, 알았어······. 어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재현이 상태가 더······.”
 세 가족의 말을 듣고 멍해진 한 박사는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재현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재현 도련님의 몸에 있던 종양은 모두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완치 판정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요? 진짜 이젠 더 이상 안 아프다 이거지?”
 “네, 검사 결과 정말 문제없습니다. 정말 기적이라는 게 있군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묻는 아버지를 향해 한 박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멘······.”
 하늘 위를 향해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할머니를 보고 재현은 씁쓸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새벽 기도 가시다가 계단에서 사고나셨는데······.”
 과거 그 일로 자신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끝내 합병증과 패혈증으로 인해 돌아가셨던 걸 떠올린 재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간 우리 아들 못 고친다고 내가 당신네들 그렇게 타박을 했는데······.”
 “하하, 그렇죠. 저도 의사로서 재현 도련님이 완치된 것을 보니 정말로 기쁩니다.”
 “근데, 내 아들이 사람들을 기억 못 하는 이유는 어떻게 된 거요? 이 녀석 내 얼굴 보자마자 놀라서는 기겁을 했다니까!”
 재현은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해 몰랐지만, 아버지를 보고 놀란 표정이 남들에겐 그렇게 보였었나 보다.
 한 박사는 차트를 보고는 그런 재현의 상태에 대해서도 아버지에게 설명했다.
 “몸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었지만, 아마 후유증으로 인해 일부 기억이 사라진 것일 수 있습니다. 신경 정신적 문제인지라 이것에 대해서는 약물 치료보다는 가족의 도움이······.”
 “기억상실증? 아니 그런 후유증도 있던가?”
 “아무래도······ 뇌종양 수술 이후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상황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한 박사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재현을 보고서 측은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박사는 아직은 발이 제대로 뻗어지지 않아 휠체어를 써야겠지만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휠체어에 타려 했다. 그 순간 덩치 큰 아버지가 재현을 끌어안아 휠체어야 앉혔고, 그 충격에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결국 재현이 비명을 터트렸다.
 “크으윽······.”
 “미안, 재현아. 많이 아팠어? 아빠가 좀 살살 앉힐걸.”
 “아니요. 괜찮아요······.”
 “많이 아픈 것 아니야? 다들 뭐해? 한 박사 진통제 하나 준비하고, 애 눕혀야겠다고!”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아버지······.”
 재현은 눈을 감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재현의 아버지는 피식 웃더니 커다란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숙인 채 눈을 맞췄다.
 “딱딱하게 아버지가 뭐야? 약속대로 옛날같이 아빠라고 친근하게 불러줘야지.”
 “······아!”
 재현은 방금 그 말에 뒤통수를 한 대 크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남들같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딱딱해 보이니까 그냥 편하게 아빠라고 부르라던 그 말은 분명 재현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숱하게 들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던 그때의 말이 다시 생각나자 재현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아빠!”
 “자자- 저녁 준비나 하자고! 안 그래도 너희 엄마한테 말했으니 바로 내려올 거다!”
 “아! 엄마가······.”
 재현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듯이 외치고는 벽시계를 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엄마는 아직도······ 공무원이신가요?”
 재현의 어머니는 원래 계약직으로 들어간 기능직 공무원이었으나, 10년 전 있었던 전염병 대재앙 당시 보건방역 업무를 하시다가 몇 날 며칠 집에도 못 들어오는 나날이 이어졌었다.
 그리고 그다음 재현의 가족들이 맞이한 것은 ‘과로로 인해 그만······’이라는 시청의 말과 1주일간 중환자실에서 고생하시다가...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묻자 재현의 아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엄마가 공무원 하고 있지. 서기관님인데.”
 재현의 엄마가 공무원이라는 것은 같은 듯 했다.
 차이라면 10급 계약직 기능직공무원에서 행정고시 출신의 4급 서기관으로 고위공무원 이라는게 다르긴 했지만.
 “자! 오늘 하루 깨어난 뒤로 정신없겠다. 방에 데려다줄 테니 쉬고 있어. 엄마 곧 올 테니까.”
 휠체어에 탄 채로 방에 돌아온 재현은 아빠에게 안겨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덮어준 아버지가 잠시 나갔다 오고 잠시 뒤에 어떤 젊은 여성과 들어왔다.
 귀 위까지 단정하게 올린 업헤어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은 재현 아빠의 부름에 다가오더니 침대에 누워 있는 재현의 옆에 앉아 그를 지켜봤다.
  재현은 처음 보는 미모의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하얀 얼굴에 굳게 닫힌 입술, 화장은 옅지만 톱스타 여배우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미모, 거기에 재현이 과거 좋아했던 딱 비서 스타일의 여성인지라 재현의 눈이 계속 집중되기에 충분했다.
 “누구....?”
  재현의 아빠는 웃으면서 그 여성에게 말했다.
 “손 비서! 우리 아들이야! 보다시피 이 녀석이 드디어 깨어났다고!”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그래! 그래서 자네에게 발령 첫 날부터 수고스럽겠지만, 일단 비서실 말고 이곳에서 내 아들 녀석 케어 좀 해 줄 수 있는가? 이거에 대해선 회장님에게도 내가 이야기 하겠네.”
 “네. 알겠습니다.”
 감정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답 하는 손 비서를 보고서, 재현의 아빠는 웃으면서 물었다.
 “정말이지? 그럼 연봉도 기존보다 3배는 쳐 주겠네. 가정부 같은 일이겠지만 수고스러워도 해 주겠나?”
 “-문제없습니다. 저는 어떤 역할이라도 호산가에서 일 하는 것이니······.”
 “아무튼 그래. 곧 우리 사모님 오기 전까지 서로 이야기들 나누라고. 재현아! 너도 인사해라, 우리 호산가의 비서실 소속의 손아진 대리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친구가 너를 보좌해 줄 거야.”
 재현의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재현의 방에서 나갔고 두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저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재현 쪽이었다.
 갑작스럽게 깨어난 뒤로 비서과 사람이라고 여성 한 명을 붙여주니 어느 쪽이던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묵묵한 차림의 손 비서는 재현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아니······ 그게······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나요?”
 살아생전 여자와의 인연은 제로라고 할 수 있는 재현은 취향에 딱 맞는 미인을 보고서 그대로 굳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손 비서는 재현의 그런 더듬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주었다.
 “손아진이라고 합니다. 제일그룹 비서실 소속에 있다가 이제는 도련님의 비서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제 비서로 배치된 게······.”
 다짜고짜 생긴 인사이동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전 어느 영역도 괜찮습니다. 도련님”
  “그렇군요. 실례지만 나이가······?”
 “올해 스물다섯입니다.”
 “좋을 때군요.”
 “······예?”
 순간 재현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입을 막았다.
 “아, 죄송······ 저 지금 실수한 거죠?”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하하, 저기 원래는 어떤 업무셨죠?”
 “김주혁 사장님의 스케줄 관리 및 회계업무였습니다.”
 ‘그거 엄청 빡센 거 아니냐?’ 라고 생각한 재현은 도대체 이 집안이 어떻게 되는데 아빠가 젊은 개인 비서 붙는 일에 사장님 소리 들을까? 궁금해졌다.
 재현은 이곳에 대한 정보도 알 겸 아진을 보고는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요청했다.
 “스마트폰 검색을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다룰 수 있어요.”
 스마트폰은 그래도 다를 바가 없겠다 싶었던 재현은 인터넷으로 이곳저곳을 뒤져보았다.
 그리고 포털사이트의 기사나 정보 등을 보고 이곳은 자기가 기억하던 이전과는 뭔가 묘하게 역사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재현은 마치 이 상황을 인터넷 지식인에라도 물어보듯이 ‘눈떠보니 다른 집안에서 태어났다’라거나 ‘죽고 나서 갑자기 다른 집안’ 등으로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될 소리를 마구잡이로 검색했다.
 아진은 깨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미친 듯이 검색해대는 도련님을 보고는 의아했지만,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포털에서 그런 걸 검색한다고 명쾌하게 답변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재현이 포털사이트를 돌아볼 때 눈에 띄었던 단어가 하나 있었다.
 [다차원 우주]
 현재 자신이 사는 세계와 다른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세계, 누구는 그것을 평행우주라고 하고, 또 누구는 차원이동이라 부른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 단어가 나온 것은 어떤 영화 홍보 때문에 나온 공상과학 부문의 짤막한 기사.
 ‘에이, 설마······ 이건가? 아니야, 잠깐! 일단 그 전에 지금 내 상황에 대해서부터 알아봐야겠어.’
 어안이 벙벙해도 상황 파악은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한 재현이 먼저 아진에게 물었다.
 “저기······ 아진 씨?”
 “예. 도련님.”
 “제가 그러니까, 깨어난 뒤로 많이 기억을 못 하는 게 많아서 그런데······.”
 “예, 말씀하시죠.”
 “몇 가지 물어보는 거······ 대답해줄 수 있나요?”
 그러자 아진은 잠시 눈을 돌리더니 이내 재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4화
 
 
 
 
 
 재현은 조용히 생각했다.
 백번 양보해서 자신의 현재 상태가 어찌어찌 죽은 뒤에 다른 우주든 차원이든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치자.
 하지만 이전까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그리고 자신을 도련님이라 부르며 집 안에 박사라 불리는 주치의 의사가 상주하는 것, 집 안에 있는 장식들만 봐도 눈치챌 수 있었던 것.
 가족들과 친척들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 있고, 자신도 그 일원이라는 것은 자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19살의 고등학생인 자신에게까지 미모의 여성 비서까지 전담으로 붙여준 것은 슬슬 위화감이 들었다.
 그래서 어차피 대외적으로는 부분적으로 기억이 사라졌다고 하니 궁금한 것에 대해 마음껏 물어봤다.
 그 결과, 재현은 상상 이상으로 터무니없는 집안에 환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현이 먼저 물어본 것은 자기 집안의 대외적인 역사였다.
  그리고 아진은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재현의 증조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쓰는 초대 호산 김태우 회장의 창업으로 시작해, 현재 할아버지인 김천호가 회장으로 있는 제일그룹, 작은할아버지인 김인호가 회장으로 있는 천지그룹, 그 외 호산문화재단, 장학재단 등등을 거느린 국내를 넘어 세계 톱 10 안에 드는 재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대재벌 가문이었다.
 몇 번을 반복해 들어도 이게 사실이라는 현실에 처음에는 작게 웃었지만 점점 더 입이 커지고 진심으로 박장대소하게 되었다.
 옆에 아진이 없었다면 이불 속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침대에서 뛰면서 평소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만 들어도 진짜 숨 막히네요.”
 “도련님? 설마 이것도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아, 아뇨. 이게······ 그······ 단지······ 뭐랄까? 들으면 들을수록 언제나 소름 돋는 이야기랄까요?”
 그 상황 속에서 ‘사실 이게 현실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호산가 도련님이라고 자신을 칭해주는 것을 듣자니, 이건 정말이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 아까 SF영화 홍보 차 나온 그 기사와 같이 차원 이동인지 다른 우주에서 태어난 건지는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자신은 흙수저 고아 일용직 근로자가 아닌, 나이 또한 10살이나 어려진 상태로 새 삶을 받은 그 대재벌 호산가의 도련님 김재현이라는 것이다.
 난 이걸로 충분하니 이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것이 없다! 라고 외치고 싶은 재현이었다.
 그때 방 밖에서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분주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재현의 아빠가 들어왔다.
 “재현아! 엄마 왔다!”
 “아······! 정말요?”
 재현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도 잊은 채 헐레벌떡 자리에 일어나려 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재빨리 아진이 달려들어 재현을 끌어안았다.
 “우억?!”
 푹신하면서 좋은 향기가 나는 아진의 품속에서 정신을 차린 재현이 화들짝 놀랐지만, 아진은 침착하게 재현을 안아 휠체어에 조용히 앉혀줬다.
 초면에도 나이스 바디에 정장 차림이 굉장히 어울리는 전문직 커리어 우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막상 끌어안기자 한층 더 그 촉감을 가지고······. 재현은 순간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며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아직 걷기 힘드신 몸이니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아진과 당황하는 재현을 보고 재현의 아빠는 키득거리면서 손짓했다.
 “스킨십 그만하고 얼른 나와.”
 어찌어찌 겨우 밖으로 나온 재현은 헐레벌떡 저택이 있는 평성시까지 내려온 엄마를 보고 그야말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재현아!!”
 “엄마······.”
 재현의 엄마는 곧바로 재현을 끌어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재현은 말없이 그 포옹을 받으며 엄마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은 이 상황에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엄마였다.
 그에 재현은 장례식 이후에 평생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약속 따위 다 필요 없다는 듯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진짜······ 꿈은 아니겠죠?”
 “그래. 엄마는 믿었어. 우리 아들이 꼭 건강하게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
 한참을 안겨 있다가 겨우 진정한 엄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재현은 많은 이야기로 다시 한 번 모자의 사이를 굳게 만들었다.
 “기적이라는 게 정말 있구나. 우리 아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다시 깨어나다니. 하······ 그간 생각만 하면.”
 자신이 식물인간 상태로 있었던 시간은 년 단위의 세월이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잔병치레가 잦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고 피를 토하더니 고열이 끓는 상태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이후 몸 안에서 이런저런 종양이 발견되었고, 특히 뇌에 생긴 암세포들이 위험했었다.
 그렇게 종양을 제거하고 그 뒤로 의식만 유지한 채 기약 없는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재현이 깨어난 뒤 허락된 음식은 죽과 빵이었다. 하지만 이후 재현은 보통 식사를 하길 원했고, 주치의인 한 박사는 기름진 음식은 안 된다는 당부를 남기고 허락했다.
 “그래, 아들!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뭐든 다 해줄게.”
 “아이고 어멈아, 애 상태를 봐서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어 줘야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정신은 또렷하게 깨어났다고는 하나 재현은 아직 휠체어 신세로 손발만 겨우 움직이고 젓가락도 제대로 들기 힘들어 했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면서 재현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말했다.
 “어머, 미안해 재현아. 엄마가 너무 기뻐서 아들 몸 상태도 확인 못 하고 너무 나갔어.”
 “아뇨, 그래야······ 우리 엄마죠!”
 재현이 활짝 웃으면서 한 말에 일순 가족들의 입가에서도 웃음이 피었다.
 아버지가 재현과 엄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다들 우리 가족이지!”
 일단 저녁 이야기가 나오자 재현의 머릿속에 어렸을 적 가족들이 식사하던 단란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그게 뭐였더라. 가족들이랑 마지막으로 다 같이 먹었던 음식이······.”
 “응?”
 재현의 말에 갑자기 급 잠잠해지다가 어느새 할머니와 아빠, 그리고 엄마까지 재현이 쓰러지기 전까지를 기억하는 이들이 재현을 바라봤다.
 재현은 그들이 모두 그때의 가족들과 같은 느낌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여긴 부잣집이니까 맛본 적 없는 엄청나게 고급 음식을 가져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운 가족들과의 식사라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을 때 엄마가 가정부 아주머니를 부르면서 말했다.
 “이걸...먹을 수 있으려나? 아주머니 소면 준비해 줄 수 있을까요?”
 “네? 소면이요?”
 “국수를 만들어줄 거예요. 우리 아들이 좋아하던 비빔국수로!”
 “한 박사! 얘 소면같은 밀가루 음식 먹을 수 있겠어요?”
 “음, 괜찮을 겁니다. 연하장애에 대해서는 검진 결과 전혀 문제없는 것으로 나왔고, 빵도 섭취한 것으로 보아 글루텐에 대해서도 섭취와 소화가 가능합니다. 너무 많이 드시지만 말고 적당히 맛 볼 정도로만 오붓한 식사 하세요.”
 그 순간 재현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부 똑같잖아....지위만 바뀌었지. 전부 같아.’
 재현이 엄마의 얼굴을 보자 엄마가 재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가 어떻게 잊겠어? 자기 전에 매콤한 음식을 먹고 싶다고 야식으로 가져왔던 건데······.”
 정확히 맞았다.
 과거에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일가족이 모였을 때 재현의 집에서의 특식은 엄마가 만들어준 국수였다.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언제나 완벽했던 재현의 엄마는 가족들이나 재현이 입맛이 없다고 할 때마다 특제 국수를 만들어준다면서 소면을 삶아 특유의 양념장으로 비빔국수를 만들어주셨었다.
 남들에겐 별거 아니겠지만, 재현에게는 미친 듯이 그리운 소울 푸드가 되어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고, 여기 있는 모두의 신분이 바뀌어 과연 엄마가 그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했는데, 재현의 엄마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왕이면 우리 아들하고 옛날에 많이 먹었던 그 양념장 만들어볼까? 엄마가 금방 준비할게, 아주머니 양념장 만들 재료하고 지금 당장 소면 빨리 삶아놔요.”
 “예, 사모님!”
 재현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집에 있는 가정부들에게 각종 재료들을 준비하라고 일러뒀다.
 그리고 재현과 다른 가족들이 식사를 기다릴 때, 별안간 재현의 아버지가 전화를 하며 누군가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네! 정말이입니다! 정말 깨어났어요! 재현이 아주 건강하게 깨어났고, 한 박사 말로도 기적적인 완쾌라고 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내려오시겠다고요?”
 
 누군가에게 다급히 건 통화를 끝낸 재현의 아버지는 할머니와 재현, 아진이 있는 거실에 앉아 곧바로 말했다.
 “저녁은 빨리 먹어야겠어, 아버지가 곧바로 내려오신다네요.”
 재현 아버지가 말한 아버지라면 호산가의 현 가주이자 호산가 내에서도 가장 거대한 세력인 제일그룹의 회장 김천호 회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현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손자들에게 사랑은 극진했고 마지막까지 모든 가족을 도우려고 했던 집안의 거대한 기둥이신 분이었다.
 “당연히 와야지! 손주가 깨어났다는데 어서 봐야 할 게 아니야.”
 먼저 내려와서 옆에 계신 재현의 할머니도 거들자 더욱더 분주해 지는 것은 현재 이 저택에 있는 고용인들이었다.
 당장 재현의 옆자리에 있는 아진부터도 스마트폰을 꺼내 스케줄을 체크하고 있었고, 청소를 시작하는 가정부들과 밖에 나가 마당을 쓰는 기사 실장까지도 모두 분주해졌다.
 재현에게 있어서는 막간에 스마트폰을 들고 이리저리 자료를 체크할 시간이었다.
 재현 자신의 일가친척의 이름을 검색한 것이었다.
 거대 포털사이트에서 재벌가의 기업인이나 교육인, 정치인 등의 프로필이 소개되듯 그분들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야 그대로지만 신분은 다들 천지차이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찾은 재현은 그 뒤로 제일그룹에 대한 자료들도 찾았다.
 알려진 기업은 있어도 제일그룹이라는 이름은 분명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없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제품 라인업과 사업 영역, 그리고 기업의 역사를 보면 재현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정보와 완전 같지는 않아도 묘하게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거기에 기존에 알던 브랜드 몇 개는 인수합병으로 제일의 산하에 있었다.
 “다른 세상치고는······ 대체 역사 같은 곳이네 여긴.”
 몸은 망가져 있어도 머리는 그 추락사고 이후로도 전혀 무리 없이 생생하게 돌아가는 상황. 그러니 최대한 알아내야 할 건 알아내야 했다.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도련님! 주방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얼마 안 있어 아진이 재현의 방에 들어오더니 직접 휠체어를 밀며 주방으로 안내했다.
 “도련님이 주문하신 식사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고마워요.”
 “이게 제 일입니다.”
 휠체어로 주방 식탁에 앉은 재현은 할머니, 아빠, 엄마가 모두 앉은 자리에서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를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 식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언제나 혼자 먹어서 제대로 먹지도 않고 라면이나 빵으로 때우던 그때가 생각났다.
 그런 감성에 젖어 있을 때, 재현이 바랐던 국수가 자리에 하나하나 올라왔다.
 할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재현의 자리에 올라온 식사자리
 재현이 바란 대로 삶은 소면에 삶은 달걀과 고기, 그리고 참기름에 고추장이 들어간 비빔국수였지만 재현의 비빔국수에는 다른 국수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들과 다른 고명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이었다.
 “아, 국수에······.”
 “걱정 마 재현아, 엄마가 우리 아들 위해서 오이는 다 빼놨으니까.”
 “······.”
 어렸을 때 오이를 먹을 때마다 구토를 해서 알레르기로 인해 언제나 어떤 음식이든 간에 오이를 빼는 아들을 봐왔던 엄마였다.
 그 식성은 그 이후로도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면 계속 말하던 재현만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재현은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것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알고 배려가 된 식사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고서 재현의 음식을 준비한 엄마였다.
 그런데 자기 자리에만 빠진 오이를 보고 재현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 많이 먹어! 모자라면 얘기하고.”
 그때 재현은 과거에 수많은 상을 치렀을 때도, 사기를 당했을 때도,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서 술에 취했을 때보다 눈물을 보였다.
 그것도 식사 자리에서 멈추지 않을 기세로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토록 바라던 화목한 가정에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꽃길만 걷게될 거라 생각했지만, 재현이 깨어났다는 이야기에 그닥 긍정적이지 못한 일가친척들도 있었다.
 
 
 
 #5화
 
 
 
 
 
 “여보세요? 어······ 어······ 어 그래. 그랬다고?”
 성북동 저택 안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사모님, 호산 문화예술관의 김주연 관장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얼굴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다 전화를 끊었다.
 “하아아...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전화를 끝낸 뒤, 갑자기 한숨을 길게 내쉰 주연은 뭔가 맘에 안 드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일인데요? 어머니?”
 소파에 앉은 채 계속 머리를 잡고 생각에 빠진 어머니를 보고 아들 최재국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주연을 바라봤다.
 182㎝의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격,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귀족적인 외모를 가진 주연의 아들이자 호산가 장녀의 장남이라는 자리까지 갖춘 자.
 재국이 평소보다 더 고민이 많은 어머니 옆에 앉았다.
  주연은 아들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랑스런 자신의 장남을 보다가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재국아, 지금 재국이 할아버지한테 연락이 왔어. 재현이가 깨어났대.”
 “네? 정말요? 축하할 일이네요, 재현이가 깨어나다니.”
 재국은 사촌 형으로서 어렸을 때 봐왔던 사촌 동생이 언제나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다시 기운을 차렸다는 말에 기뻐했다.
 하지만 주연은 조카가 깨어났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고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지금 아버지가 평성으로 내려가셨다고 하더라고.”
 “회장님이······.”
 중병을 앓고 있던 사촌 동생이 깨어나고 할아버지인 회장님이 내려가셨다는 말에 미소를 띤 재국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모자 사이에 내려앉았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주연이었다.
 “······아버지가 내일 재국이가 맡는 첫 사업장 방문하시기로 했었지?”
 “네. 갈산 사업부 공사 현장이었죠.”
 “못 갈 것 같다고 전해달라 하셨어.”
 “······이런 그렇게 됐군요.”
 자신에게 직접 전화가 아닌 어머니 주연을 통해 들은 이야기.
 “갈산이면 바로 평성 옆 동네인데.”
 주연은 아버지인 김 회장이 야속하다 생각해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재국 역시도 일순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 담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요. 회장님이 재현이를 본 뒤에도 업무가 있으시니.”
 사촌 동생이 나았다는 걸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해진 재국이었다.
 그는 재현이 나았다고 해도 마냥 좋아할 수만 없었었다.
 그런 재국의 손을 꼭 붙잡으며 아들을 향해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주연의 몫이었다.
 “재국아. 일단 지금 아버님이 재현이 댁에 계실 테니, 너도 지금 둘쨋집 찾아가 보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아버님에게 얼굴도장 찍어야지. 누가 뭐래도 호산가의 가주와 제일그룹의 회장은 네 몫이 되어야 하니까.”
 주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아들이 그룹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심양면으로 모든 것을 지원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것은 장녀 주연 일가뿐만이 아니었다.
 
 ***
 
 “아, 그래! 재현이 녀석 깨어났대, 이제 완전 다 나았다고!”
 김 회장의 2남 제일중공업 김주민 사장은 조카의 투병이 이제 다 끝났다는 소식에 곧바로 자신의 아들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지금 비행기 잡았으니 여기서 한국 가려면 한 3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뭐라고? 재오야, 너 사업은 어떡하고?”
 분명 중국 고위 사업가들의 호화 요트 발주 입찰 경쟁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던 재오였다.
  중국행 비행기인데 급하게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아들 재오의 말에 주민은 혹시라도 트러블이 생길까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걱정과 달리 재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재현이 깨어났다는데 큰형이 가야지, 사업이 중요합니까?]
 “이 자식아! 너는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입찰 끝냈습니다. 12억 1,500만 위안, 그러니까 한국 돈으로 1,997억 원으로 4대 계약 성공했어요.]
 “뭐? 중국 간 지 얼마나 됐다고?”
 [협상이 좀 지지부진하긴 했는데, 재현이 깨어났다는 말에 제가 밍기적거릴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었죠.]
 그렇게 말은 하지만 중국에 잠시 출장 좀 다녀오겠다고 인사하고는 한 대에 2천억에 가까운 거대 요트를 판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데 그런 요트를 무려 4대나 팔아서 8천억 원가량의 자금을 제일중공업에 선사한 재오였다.
 그는 재현이 깨어났다는 첫 전화를 재국에게 받은 뒤로 2시간 만에 중국에서의 할 일을 마쳤으니 막내 사촌 동생을 보러 지금 달려오겠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가서 하겠습니다, 아버지.]
 통화를 마친 재오는 미리 준비된 전용기에 몸을 싣고는 자리에 앉아 편하게 누우며 미소를 지었다.
 “재현이 그녀석... 지금 깨어났단 말이지······.”
 몸이 약한 동생이 깨어나고, 분주하게 이곳저곳에서 전화기에 불이 났다.
 재오는 곧바로 도착하면 재현에게 먼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재오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 망할 자식. 하루만 더 늦게 깨어났으면 대당 3천억도 가능했는데.”
 
 ***
 
 “재원아! 너 뭐 만드는 거냐?”
 “죽 좀 쑤고 있어요. 어차피 남는 불판인데 잠깐만 만들게요.”
 “전복죽? 야, 우리 메뉴에도 없는 걸 왜 만들어? 너 이거 자연산 전복 사 온 거냐? 아이구, 돈도 많다!”
 “집에서 가져온 거니 문제없습니다!”
 중화요리 프랜차이즈 기업인 용궁반점 동대문점의 사장은 갑자기 냄비 하나만 쓰겠다면서 자신의 요리 실력을 전복죽 만드는 데 유감없이 보이는 재원을 보며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 주려고 그렇게 열심히 만드는 거냐?”
 “집안일이 좀 있어서요.”
 “뭐 집안일? 왜? 집안에 누가 많이 아파?”
 호산가의 분가인 천지그룹 회장의 손자이자 본가 제일그룹 회장의 종손자이지만 현재는 동네 식당 중에 하나인 용궁반점에서 일하는 부주방장 김재원은 신이 나서 냄비를 더 놀리고 있었다.
 “사촌이 하나 있는데요, 몸이 엄청 아픈데 오늘 깨어났대요. 그래서 죽 좀 만드려고요.”
 “캬~ 사촌 챙겨주려고 회사 식기 가지고 죽을 다 만드는 거냐? 하여튼 우리 재원이 아주 그냥 우애가 넘친다, 넘쳐!”
 “그야 당!연!히! 형으로서 요리하니까 만들어주는 거죠.”
 사장은 뭐라 하다가도 아픈 동생을 위한 거라니 손님 많이 올 저녁 시간 재료 준비나 잘해두라는 말만 하고는 조용히 카운터로 갔다.
  신이 나서 주방에서 냄비를 흔든 재원은 전복죽과 입맛에 맞을 양념까지 잘 포장해서는 자신이 생각해도 흡족한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크- 전복죽 맛 좋고~!”
 포장하고 남은 전복죽 한 숟갈을 뜨고 난 뒤 입맛을 다신 재원은 포장된 전복죽 도시락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역시 갓 깨어난 환자에겐 역시 영양가 많이 담은 죽이지.”
 주방 안에서 재원의 손은 점점 더 빨라졌다.
 
 ***
 
 한편 평성시에 위치한 김천호 회장의 본적이자 별장은 유례없을 정도로 눈물과 웃음이 나오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아이고 이것아! 이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이렇게 다 야위었냐?”
 호산가의 현 가주, 제일그룹의 김천호 회장은 병이 깊어 생사를 넘나든다는 막내손자가 완치되어 깨어났다는 말에 모든 일을 다 제쳐두고 친히 노구를 이끌어 내려왔다.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손자를 보고는 와락 끌어안았다.
 재현 역시 우주는 달라도 오랜만에 느끼는 할아버지의 감촉을 느끼며 그대로 미소와 함께 할아버지의 품을 받아들였다.
 과거에 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갖은 고생을 다 하시고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 하에 자신을 희생하셔서 많은 재산을 모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은퇴를 얼마 앞두시고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고생이란 고생만 다 하신 다음 돌아가셨는데, 여기서는 그 성실함과 뚝심으로 모두의 위에 계신 재벌 대회장님이 되어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할아버지······.”
 “오~ 그래그래, 우리 재현이! 할애비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다 얘기해라. 내 뭐든지 들어줄 테니.”
 죽었다가 살아난 손자를 본 김 회장은 지금 재현이 말한다면 그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다짐했으나 손자는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해요.”
 사실 어린 나이에 떠났던 가족들을 살아서 다시 보는 것만 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른 참이었다.
 거기에 그 가족들은 어마어마한 대재벌이 되어서 재현이 앞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게 살 수 있는 환경까지 만들어주었다.
 “그래······ 하지만 앞으로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이 할애비에게 연락 하거라. 앞으로 나도 자주 내려올 테니.”
 재현에게 일러둔 김 회장은 그 뒤로 재현의 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아범과 어멈은 오늘 여기서 묵고 올라갈 테냐?”
 “예, 아버지. 오늘은 재현이하고 같이 있어야지요.”
 “오늘 뿐이냐, 며칠 더 있어. 어차피 엑스포 프로젝트는 이석우 하고도 이야기 끝냈다.”
 “...예?”
 담담하게 이어진 김 회장의 말에 순간 재현의 아빠는 일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바로 아버지이자 회장님 앞에서 표정을 고치고 재현의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 저 그건······.”
 “이것 봐, 뭘 그리 우물쭈물해?”
 아들이 깨어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벌어진 좌천 통보는 제일그룹의 계열사 제일전자의 김주혁 사장을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이것 봐, 이미 이 동네 진학 준비해놓고 어쩔 셈이야? 애 상태 보고도 당장에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아?!”
 일순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 나오자 재현을 포함해 집에 있는 모두가 움찔했고, 재현의 아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 그게 아니라······.”
 “왜? 이석우가 싫어? 그럼 주민이에게 맡기게 해 줄까?”
 동생 김주민 대표에 이야기까지 나오니 주혁은 애써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아버지.”
 “그럼 아들하고 좀 쉬다 올라 와! 한 박사한테 이야기해서 재현이 재활 운동 꾸준히 시키고, 보약도 좀 알아보고.”
 “예. 알겠습니다.”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재현의 아빠가 할아버지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게 드러났다.
 일순 분위기가 삭막해졌을 때, 갑자기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진이 일어나 곧바로 문으로 다가갔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곱슬거리는 머리에 두 손에는 쇼핑백을 든 한 청년이었다.
 “짜잔 저 왔습니······ 오 큰할아버지?!”
 “재원이냐?”
 재원은 일이 끝나자마자 재현이 먹일 죽을 가지고 온 참이었다. 그랬다가 예상치 못하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김 회장을 발견한 재원은 화들짝 놀라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큰할아버지.”
 “그래, 그래도 네 녀석이 빨리 왔구나, 여기 앉아”
 “아, 네······ 큰할아버지.”
 재원 역시 어려움이 묻어나는 모습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재현은 눈앞에 나타난 재원을 보며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재원이 형?”
 “어······ 어 기억하는 구나! 그래! 오랜만이다, 재현아.”
 재원은 재현의 엄마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아 가져온 선물을 재현에게 건네줬다.
 “얼른 기운차리라고 죽 좀 쑤어 왔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아, 고마워. 재원이 형.”
 재현이 쇼핑백을 열어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전복죽과 동치미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 회장이 재원을 내려다보며 슬쩍 물어봤다.
 “재원이 너, 아직도 요리한다고 남의 가게 주방일 하고 있는 게냐?”
 “예? 아, 예. 요리도 배우고 인생 공부도 할 겸······.”
 “네 집안은 어쩌고? 호산가의 손자라는 자리가 남의 집 주방일 하는 것보다 못마땅한 게야?”
 “아, 그것도 있지만, 지금 일이 더...”
 우물쭈물하면서 방금 전의 재현의 아빠처럼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재원.
 재현은 할아버지의 엄청난 아우라가 묻어 나오는 집안에서 엄청난 한기가 돋아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됐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우리 막내 손자 챙겨주려 가져온 것이니. 사례는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할아버지의 비서가 지갑에서 수표 두 장을 꺼내 재원에게 건네줬다.
 재원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죽 값에다 올라갈 때 차비 해라.”
 “아, 아닙니다. 큰할아버지. 형으로서 동생한테 준 거니.”
 “받아, 이 녀석아! 너희 집 청담동이잖아! 평성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김 회장은 종손자인 재원에게 억지로 수표를 건네주고는 재원에게도 차 한 잔 건네주라고 주방에 일러뒀다.
 뒤이어 다시 들린 차임벨 소리, 이번에도 아진이 달려가고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아버지의 장남 재오였다.
 "재오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재오까지?"
 문이 열리면서, 중국 상해에서 막 한국으로 돌아온 재오가 곧바로 집 안에 들어왔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오자마자 곧 바로 김 회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그 뒤로 재현의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는 재현과 재원에게도 인사하는 재오였다.
 “그래, 어떻게 중국에 있다더니 금방 왔구나?”
 “저도 왔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인물인 고모의 장남, 최재국 역시 가장 늦었지만 김 회장이 있을 시간에 나타났다.
 “재오, 재국이, 재원이...그리고 재현이. 모두 다 모였구만.”
 김 회장은 지금 들어온 세 명의 방문자들을 한 번 흐뭇하게 둘러봤다.
 김천호 회장의 장녀 김주연 호산 문화예술관장의 아들 최재국.
 차남 김주민 제일중공업 사장의 아들 김재오, 종손자이자 현재는 남의 집 부엌일을 한다는 김재원.
 그리고 이제 막 깨어난 뒤로 건강을 되찾았다는 장남 김주혁의 아들 김재현까지.
 네 명의 집안 손자들을 모아 놓은 김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자, 일단 차부터 가져오고 이야기 해 볼까?"
 
 
 
 #6화
 
 
 
 
 
 “그래 몸은 좀 어때, 김재현?”
 이곳에 오기 전까지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던 재오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사촌 동생의 쾌유 기념으로 온 것이니 축하의 의미로 다가왔다.
 재현 역시 작은아버지의 아들로 나이 차이는 좀 났지만 어려서부터 각종 장난감이며 게임기 등을 물려줬던 재오를 기억한지라 웃으면서 화답했다.
 “이젠 괜찮아졌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재오 형.”
 “건강이 최고다. 앞으로는 병치레 없이 자라야지.”
 재오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4명의 손자 중 가장 큰 체격을 가진 장손 재오는 자신과 대비되게 수척한 몸에 초라한 모습으로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시는 재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재국 역시도 한마디 거들면서 재현에게 한마디 해줬다.
 “앞으로 운동도 좀 하고, 먹을 것도 좀 많이 먹고, 빨리 기운 차려서 학교도 다시 가야지.”
 “어, 1년 쉬었는데 3학년으로 가나 2학년으로 유급하나?”
 재오와 재원은 재국의 말에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재국은 이미 오기 전부터 계산하고 있었던지라 느긋하게 말했다.
 “그 전에 치료 잘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봐야지.”
 가서 인사하고 오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로 미리 대기시켜둔 차를 타고 오면서 한 박사와 통화하고 재현의 부모님에게도 안부 전화를 했다. 그를 통해 재현이 깨어나면서부터 있었던 일들에 대해 모두 듣고 대략적으로 분위기를 파악해둔 참이었다. 덕분에 그는 여유롭게 대화를 풀어나갔다.
 “재국이가 동생에 대해 잘 아는구나.”
 “아닙니다, 회장님.”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지며 담담하게 말하는 김 회장의 말에 일순 재국은 할아버지의 칭찬이 못내 흡족한지 밝은 얼굴로 화답했다.
 “주연이도 예전부터 사람 챙기는 건 잘했지. 지 작은동생 놈과는 참 다르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재현에게는 고모인 주연과 사촌 형 재국에 대한 칭찬과 동시에 작은집에 대한 디스를 했다.
  그 순간 재오가 회장님 앞에서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은 채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저희 아버지도 주변분들 챙기는 일은 잘 하십니다. 배려심도 좋으시고······.”
 “그놈이 무슨! 어릴 때부터 아주 인정머리가 없었는데!”
 세상에 어떤 자식이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 욕을 하는데 그걸 조용히 넘어가겠는가.
 하지만 그 욕을 하는 당사자가 할아버지라면 차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와의 험악한 관계를 잘 아는 재오였다.
 여기서 할아버지의 말을 거들게 되면 패륜이고, 반박하면 감히 회장님에게 대들어 찍히는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재현 역시 지금의 냉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과거의 기억으로도 재오 형네의 작은아버지 댁의 사업 욕심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빚보증으로 집안이 몰락한 기억이 있는 터라, 여기에 대해서는 조용히 침묵했다.
 재오 형과의 사이는 좋았었고, 그 일이야 다 지난 일이라고 하지만 역시나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트라우마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화제는 돌려야 되겠다 생각해서 이 세계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촌 형의 존재, 재국에게 물었다.
 “재국이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어, 나? 갈산 2공구 현장.”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한 재국이었지만, 그 순간 재현은 심장이 멎는 듯 한 충격과 함께 일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가, 갈산······.”
 “왜 그래, 재현아?”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자신이 지난 생에 죽게 된 그 장소라니······.
 “큭······.”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안에 한 박사 없어?!”
 갑작스런 재현에 반응에 안에 있는 모두가 소란스러워졌고, 재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다급하게 주치의 한 박사를 찾았다.
 하지만 재현은 힘겹게 손을 들어 만류했다.
 “아니, 괜찮아요. 잠깐 근육이 놀랬는지 두통이······.”
 “저기 다들 뭐하는 거야? 한 박사가 진통제 처방해놓은 것 어딨는데?”
 재현의 아버지의 외침에 가정부 한 명이 다급히 찬장에 가서 처방전 약을 물과 같이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 쭉 들이켠 재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 평생 잊을 수가 없을 악몽일 것이다.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이틀 전까지도 일했던 곳이었다.
 그곳 현장의 부실한 안전 장비와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던 부실시공, 그리고 안전 불감증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으니 어찌 그곳을 모르겠는가.
 만약 그 관계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뒷책임 생각 안 하고 그냥 턱에다가 주먹을 한 방 먹여버리고 싶은 심정만 가득한 재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심정을 보일 상황이 아니다.
  거기에 기신그룹이라는 곳이 아닌 바로 자신의 집안의 사업이라고 하니 모든 게 달라져 있기도 했다.
 재현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는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 재국이 형이 말했었지? 갈산 2공구?”
 “음? 어, 어 그래! 현재 내가 본사랑 거기 사업소를 오가며 관리를 하고 있거든.”
 재국은 순식간에 대화의 흐름을 자신에게 던진 재현에 말에 대답하며, 회장님을 향해 자기 PR을 하듯이 알렸다.
 “회장님, 갈산 2공구 현장 건설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아마 완공 기간 동안 무사고로 끝날 수 있습니다.”
 “무사고로 끝낼 수 있습니다! 가 아니라 그렇게 끝내야지!”
 순간 말실수를 했다 싶어 재국이 곧바로 대답을 하려는 찰나 김 회장은 이번엔 재국을 보면서 재국에게 물었다.
 “그래, 어쨌건 공사 현장이 아주 순조롭다고?”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내가 오늘 재현이 보러 오고는 내일 곧바로 일이 생겨 출국을 하는 통에 네 현장에 들르지 못해 확인은 못하겠다만, 조만간 한번 불시에 찾아가 볼 테니 그때 보자꾸나.”
 김 회장의 말에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의 재국이었지만, 이내 굳은 의지로 대답했다.
 “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게 잘하겠습니다. 회장님.”
 “음, 그래, 지켜보마.”
 재국은 회장님이라고 경어까지 쓰면서 고개를 숙였고, 김 회장은 그렇게 모두가 삭막한 분위기를 가진 속에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시간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차- 난 이만 가보련다. 당신도 이제 슬슬 들어와야지.”
 재현과 같이 있던 할머니와 같이 일어난 김 회장은 그간 손자를 간병하겠다며 이 평성의 별장에 함께 있었던 할머니도 같이 올라가자고 청했다.
 재현의 할머니는 재현을 마지막으로 한번 끌어안고는 인사를 했다.
 “재현아, 이 할미도 인제 가봐야겠구나. 다음에 또 올 테니까 그때까지 건강해야 한다.”
 재현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김 회장 부부가 문을 나서려 하자 재현의 부모님과 집안의 가정부들, 재오, 재국, 재원 역시 모두 일어나 재현의 부모님에게 인사하고는 할아버지를 따라가려고 했다.
 “왜 다들 따라 나와? 젊은 애들끼리 좀 더 있다 가지?”
 “아닙니다. 재현이도 아직 많이 피곤할 텐데 저희가 오래 있으면 답답하겠죠.”
 재국의 말에 김 회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주변을 보더니 손자들에게 물었다.
 “다들 어떻게 올라갈 게냐?”
 “재오 형이랑 재원이는 차를 타고 와서 서울로 올라가면 되고, 저는 갈산 2공구에 숙소가 있으니 인근에서 택시를 잡으면······.”
 “갈산이면 같은 방향이잖아! 타라, 거기까진 태워주마.”
 “감사합니다, 회장님.”
 재국은 곧바로 김 회장의 옆에 같이 차를 탔고, 재오와 재원과도 인사를 하면서 짧은 거리지만 이 차에 탄 것에 대해 깊은 환호를 했다.
 그렇게 모두의 배웅 속에서 한바탕의 소란이 지나갔다.
 “······아! 진짜 우리 아들내미 깨어났다고 축하를 하러 온 건지. 아버지 보고 점수 따러 온 건지.”
 주혁은 영 기분이 나쁜 듯 중얼거리다가 김 회장의 차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날 밤 자신의 침실에 누운 재현은 하염없이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오랜 기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 깨어났다는 자신의 몸은 그야말로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걸을 때마다 뼈마디가 들쑤시고 온몸에 전기가 오른 것 같이 찌릿한 상태.
 스마트폰을 통해 포털사이트 뉴스나 이것저것 검색을 해봐도 현실이 맞았다.
 불과 어제, 아니, 몇 시간 전 병원에서 다 죽어가던 천애고아 흙수저인 자신이 역시 다 죽어가다가 깨어난 재벌가 도련님에 가족들까지 모두 살아 있는 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게다가 시간대 역시 맞아 어제의 방송 프로그램과 오늘의 뉴스 또한 똑같아 시차가 엇갈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서도······.”
 그러면서 재현이 자신도 몰래 스마트폰을 두들겨 검색한 곳은 재국이 그렇게 할아버지 김 회장 앞에서 소개를 했던 갈산 2공구 현장이었다.
 재현은 혹시나 싶어 ‘갈산 2공구 사고’라고 치거나 ‘갈산 2공구 추락’ 등을 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검색어를 살펴봐도 부동산 투자 정보의 경제신문이나 재국에 대해서 ‘호산가 손자의 첫 사업 현장’ 등으로 정장 차림의 재국의 사진과 같이 재국에 대한 소개만 있는 기사 몇 개가 전부인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오히려 연관검색어로 나오는 ‘갈산 2공구 일당’이나 ‘갈산 현장 노가다 알바’ 등을 눌러보니 초보자에게도 일당 10만 원대라는 임금도 나쁘지 않은 곳으로 보였다.
 “······한번 가볼까?”
 자신이 한 번 죽었던 곳이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재현은 그곳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서핑만으로 얼마나 시간이 훌쩍 흘렀다.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이 가까워져 있었다.
 재현은 물 한잔 마시고 자려다가 주변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목이 찌릿했지만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문까지 걸어가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일단······ 운동부터 해야겠어.”
 전담 트레이너를 붙여달라고 하든, 근육 보충제를 왕창 사달라고 하든 간에 걷거나 뛰는 데까지 무리 없도록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자 조그만 거실 등 하나를 빼고는 저택이 온통 캄캄했다.
 재현은 그 거실 등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 정수기를 찾으려는 찰나, 재현은 그곳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위스키 몇 병과 얼음이 세팅되어 있는 테이블에서 하염없이 붉은빛 위스키를 들이켜며 한숨만 푹푹 쉬고 계셨다.
 옛날에도 그렇게 하루 종일 술만 드시다가 결국 그 술로 인해 사람 잡으신 과거의 아버지가 생각나 재현은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냈다.
 “아빠······?”
 재현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얼굴이 벌게져 한눈에 봐도 만취 상태인 아버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재현에게 손짓했다.
 “안자고 뭐 했어? 몸도 안 좋을 텐데.”
 “아니, 그냥 물 좀 마시러······ 요.”
 “그래? 잠깐 앉아봐.”
 술상이 놓인 테이블 아래 재현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30년산 위스키가 수두룩해 재현은 침을 삼켰다.
 옛날에 월급 받으면 저거 한 병 꼭 먹어보겠다고 다짐했었지만, 바에서 한 병당 100만 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갑을 부여잡고 그냥 맥주로 끝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네가······ 히끅, 몸이라도 멀쩡했으면, 한 잔 따라주는 건데. 몸 건강할 때 내가 진짜 좋은 술로 가르쳐줄 테니까 얼른 몸 추슬러야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언더락 잔에 얼음을 채우고 물을 따라 재현에게 건네주더니 위스키와 같이 건배 제안을 했다.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재현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인상 쓰고 있던 아버지가 점점 표정을 풀더니 미소를 지으며 재현을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 이렇게 다시 아빠랑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 아들인데······.”
 눈가에 눈물까지 살짝 고인 재현의 아버지는 위스키 잔을 들이켜고는 한숨을 내쉬었고, 재현은 말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도 아버지의 잔을 채워줬다.
 “힘들다, 재현아. 너희 할아버지 문제도, 누나도, 주민이놈 일도 그렇고······ 경영이란 게 뭔지. 조직이란 게 뭔지!”
 분에 못 이겼는지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이내 아들의 얼굴을 보더니만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부러트렸다.
 “저기······ 할아버지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나나 누나나 주민이나 전부 맘에 안 들어 하셨다. 내가 아무리 성과를 내서 인정받고 싶어 해도······ 영 못마땅해 하셔서 내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데······.”
 흐느끼듯 읊는 아버지의 말에 재현은 확실히 예전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가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재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나 하나만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너는······ 너는 무슨 죄냐? 내 아들이란 이유로 손자 놈들까지 누가 자기 자릴 물려받을 거냐면서 경쟁을 시키는데······ 하, 진짜! 사람이 어쩜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거냐??
 재현은 아까 밤에 모였던 사촌 형들, 재국과 재오, 재원 등의 행동을 보고 눈치 챈 것이 있어 입술을 작게 물었다.
 분명 사업소 하나를 맡은 재국이나 중국 출장 중에 계약을 마치고 급히 할아버지가 오신단 말에 달려온 재오 등을 보면 분명 손자 세대에서도 피 말리는 경쟁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병치레가 잦았고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고교생 신분이어서 그들과의 경쟁에서 멀어진 상태일 것이다.
 “내가 잘 물려받아······ 우리 아들 건강해질 때 직접 가르쳐서 호산가 제일그룹 자리 앉혀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점점 한숨을 내쉴 때 재현은 조용히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빠, 저도 한번 해보죠.”
 “······으응?”
 “재국이 형이나 재오 형처럼요. 저도 한번 해볼게요. 호산가의 일이라는 것, 그래요! 까짓것······ 저도 재국이 형이나 재오 형보다 더 대단한 성과 만들어보죠!”
 재현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자 눈물이 고여 있던 아버지가 피식 웃더니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몸부터 추스르고 그런 말을 해, 자식아. 말만 들어도 아빠한테는 큰 힘이니까.”
 하지만 재현의 눈은 진지해져 있었다.
 그는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하며 아버지가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생각했다.
 어차피 다시 태어나 모든 게 부족할 것 없는 풍족한 재력에 가족들까지 있는 새 삶. 지금은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재현이었다.
 
 
 
 #7화
 
 
 
 
 
 밤길을 달리는 대형 세단 뒷좌석에 타고 있는 노신사, 호산가의 가장 큰 어른이자 제일그룹의 황제인 김천호 회장은 영 좋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모자란 것들······.”
 김 회장이 눈을 감은 채 내 뱉은 한마디였다.
 “아이고, 그만 좀 하소! 대체 뭐가 그리 맨날 못마땅한 거요?”
 재현, 재국, 재오의 할머니인 한 박윤자 여사가 남편을 향해 내뱉었지만 김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뒷좌석 케이스에서 시가 상자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시가를 베며 불을 붙였다.
 “하나같이 맘에 드는 놈이 없어! 조카가 앓다가 깨어났다는데 제 아들 하나만 달랑 보낸 딸년이나! 손주가 아프니 같이 좀 있으라니까 지 실적 뺏길까 봐 아픈 제 자식도 내팽개치고 회사일 있으니 올라오겠다는 큰 아들 녀석이나! 아예 연락도 하나 안 하고 중국 가 있던 손주까지 왔는데도 당사자는 안부 하나 없는 인정머리 없는 작은 놈이나!”
 이제는 80이 넘은 나이지만 어느 때고 부모의 눈은 같은 가보다. 아직까지 기대를 채우는 자식이 없음에 김 회장은 한숨과 함께 시가 연기를 연거푸 뿜어냈다.
 “괜히 또 그러시우! 주연이나 주민이가 진짜 생각이 없으면 자기 아들들을 보냈겠소? 이제 그만 자식들 인정을 할 때도 됐잖아요?”
 “보내긴 뭘 보내! 알아서 그 녀석들이 내 눈도장 찍으러 온 거지! 자기가 낳은 자식들 50년 넘게 동안 봐오면서 아직도 몰라?”
 보통 사람이라면 65세 전후에는 은퇴를 준비하고, 70세가 넘으면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모든 일은 자식들에게 맡기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게 노년을 보내는 최고의 인생이겠지만, 김 회장은 아니었다.
 그 또한 72세 정도의 나이 때 그런 노후를 즐기려고 후계 구도를 생각하며 이제는 장년이 되어 각자 전무고, 사장이고, 부회장이고 직책을 가졌던 세 자식에게 지분을 나눠 주고 그들을 밀어주려 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키워놓은 이놈의 자식새끼들이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궈놓은 호산재단과 제일그룹을 놓고 싸워대는 통에 그룹을 삼국지로 만들어 버렸다.
 김 회장은 그에 분노하며 다시 경영에 참가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선에서 물러나 자식들과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자식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84세의 나이에 뇌출혈 수술까지도 한 번 겪은 몸 상태에도 노구를 움직이며 왕성하게 그룹 전반에 대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 그만 좀 해요. 이러다가 다시 쓰러질 수도 있어요. 콜록콜록- 그놈의 양담배도 좀 끊고.”
 “아, 그거 참- 알았어, 알았다고! 끄면 되잖아!”
 가시 돋친 말을 마음껏 내뱉던 김 회장은 부인의 기침 소리에 혀를 차면서 시가를 끄고는 문을 열었다.
 평창동의 자택까지 가는 차 안에서 김 회장은 창밖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서울 한복판을 지나가는 동안 평생을 바쳐 쌓아온 수많은 도심의 마천루와 아파트 단지들, 자신의 소유인 빌딩들이 보였다.
 김 회장은 그 건물들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기억을 하며 읊어나갔다.
 “저 빌딩도 슬슬 다시 지을 때가 됐군, 76년에 지었을 때만 하더라도 최고가였는데······.”
 30층 규모의 고층 빌딩을 보고는 말했다.
 그는 그 뒤로 보이는 건물들을 완공하거나 혹은 매입했던 건물들을 보면서 가격과 규모까지도 모두 기억했다.
 “저기 저 건물 아직 그대로구만, 옛날 생각나는군······. 주연이가 어디서 허우대 하나 데리고 결혼 허락받으러 왔을 때 쫓아냈던 건물이잖아.”
 그러자 부인도 고개를 돌려 그 건물을 보고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위를 참 모질게도 대했수. 호산가의 사위라는 것을 밝히지 말고 10년 안에 자력으로 올라오면 그때 인정하겠으니 지금은 나가라고······.”
 “나 만큼 챙겨준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도 최소한 애 키우며 살 집은 두고 시작하라고 5천만 원 줘서 보냈잖아!”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그때 생각이 떠오르자 일순 흐뭇한 미소가 살짝 돋아난 김 회장이었다.
 “그래도 재국이가 그 똘똘한 아비와 어미를 닮아서 두각을 드러냈어.”
 28살의 나이에 벌써 공사 현장 하나를 현장감독하고 있는 손자를 생각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김 회장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작은 사돈댁 근처인 것은 아시우?”
 “알지! 그 영감탱이! 주민이 놈을 두고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끌고 나왔잖아?”
 상대방 역시 당시에 알아주는 재벌가였던 성화그룹 회장의 딸인지라 속도위반으로 배부터 부른 상태로 끌려왔을 때, 김 회장이 직접 무릎을 꿇고 사과했던 일이었던지라 더욱더 기억에 남았다.
 “재오가 신동 소리 안 들었으면 호적 파버릴라고 했었지.”
 “또, 또 손주한테 끔찍한 소리 하신다!”
 “사고 쳐서 낳은 애라 아주 있는 대로 긁어버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똑 부러지는 아들이 태어났나 몰라? 어렸을 때부터 정말 그 녀석 키우는 재미가 있었지.”
 막내에게 태어났지만, 그래도 가장 연장자인 재오였다.
 사촌 동생을 보러 중국에서부터 사업 도중에 여기까지 곧바로 달려온 재오를 떠올리며 김 회장은 잠시 눈을 감고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와서 직접 요리까지 해 온 재원이 녀석도 말이야.”
 직접적인 직계 손자가 아닌 동생의 손자, 즉 종손자이지만 호산 일가 중에서는 자기네 일가보다는 본가 쪽에서 더 어울리던 녀석이었다.
 “자질은 뛰어난데······ 왜 쓰잘데없는 남의 집안 부엌데기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 녀석이 요리 따위 말고 경영에 관심을 가졌다면 당장 불러서 내가 직접 데려다가 키우고 싶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손자를 여럿 두고도 동생의 종손자까지도 탐을 내는 김 회장이었다.
 “그리고 이제 오늘 깨어난 재현이······ 그 녀석 말이야.”
 몇 년간 잔병치레에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앙상해진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깨어난 뒤로 녀석의 눈을 봤을 때, 김 회장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봤었다.
 “호산 재단 장학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애를 붙여줬으니, 그 녀석도 이제 한번 지켜봐야지.”
 “큰아들 장남이니 역시 신경이 쓰이는 거요?”
 “나이는 그럴 때가 됐지. 뭐, 그 상태로 어떻게 몸을 가눌 수는 있겠냐만······ 녀석, 몸 잘 추슬러야 할 텐데.”
 김 회장은 집에 슬슬 가까워지는 길목에서 마지막으로 도심지에 있는 거대한 마천루를 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과연 아버지가 세우고, 내가 끌어 올린 이 제국에 어떤 녀석이 먼저 오려나?”
 가장 먼저 올라온 손자에게는 특별히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권한,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담은 제왕학까지 가르쳐 완전무결한 후계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한 김 회장이었다.
 과연 그중에 누가 먼저 올라올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지만 말이다.
 
 ***
 
 “끄으으윽······ 끄하아아아~~~!!”
 재현은 양팔로 철봉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았다. 곁에 있던 아진이 후다닥 달려왔지만 손을 뻗어 제지했다.
 “아니······ 됐어요. 일어날 수 있어.”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재현의 만류에도 아진은 재현을 붙잡고 일으켜줬다.
  재현은 부축을 받으면서 힘겹게 의자까지 걸어가 앉았다.
 “아이고, 죽겠다! 완전 늙은이 몸이네.”
 “······아직 19세십니다.”
 “아니, 나이를 떠나서······.”
 몸 상태가 안 좋다, 안 좋다 말만 들었는데 이건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그야말로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몸인지라 비틀거리면서 걷는 연습부터 다시 해야 할 정도였다.
 혼자 걸을 때마다 양다리가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찌릿하면서 비틀거렸다.
 깨어난 뒤로 재활 운동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몸에 좋다는 영양제와 5성 호텔급 요리를 삼시세끼 먹으면서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편의를 받았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모든 게 제공되는 재벌가 손자의 삶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배경이 엄청나도 일단 몸부터 제대로 움직이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면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뛰는 것까지 하려면 한 2주 정도 되려나요?”
 “재활 여하에 따라 다르겠지만, 재현 도련님의 의지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하죠.”
 아진은 그런 재현에게 음료수를 건네줬고, 한 잔 받아 마신 재현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담배 안 피운 지 3주 됐나?”
 과거의 재현은 담배가 없으면 2시간을 못 버티는 금단현상이 심했으나 여기 와서는 신분에 건강 상태까지 술과 담배는 입도 못 대는 상황이었다.
 이참에 금연을 해야지, 라는 마인드는 없으니 천상 1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재현이었다.
 “아빠는 올라가신 건가요?”
 “예, 새벽 6시에 일어나셔서 곧바로 출근하셨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없으셨나요?”
 지난날 새벽까지 술에 취한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면서 꼭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위해 호산가와 제일그룹의 후계자 자리에서 두각을 드러내겠다고 손가락까지 걸면서 약속을 했었다.
 그 기억이 나서 물어봤더니 아진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님께서 도련님 머리맡에 꼭 냉수를 가져다 놓으라고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큭······.”
 다 기억하고 있으셨던 것 같아 재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빠랑 엄마는 당분간 서울에서 지내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사장님과 사모님 모두 업무 관련으로 결정하셨고, 당분간이라 해도 주말마다 들르겠다 하십니다.”
 그리하여 가정부와 아진, 그리고 몇몇 수행 기사가 재현을 보좌하며 사는 상태가 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현이 말하면 뭐든지 들어주지만, 재현은 될 수 있으면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도맡아 하려고 노력했다.
 “도련님 말이 맞습니다. 다른 도련님들이 앞서가시는데 도련님도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엥?”
 지난번 사촌 형들을 보고 별다른 위화감은 크게 못 느꼈지만, 혹시 자신이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는가 싶어 물었다. 그러자 아진은 고개를 흔들면서 재현의 궁금증에 대해 설명해줬다.
 “이것은 사장님께서 전해주신 말이었습니다. 현재 회장님은 재현 도련님에게도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도련님들은 벌써 대학을 졸업하시고 호산가에서 활약하고 계시니까요.”
 “하긴······.”
 “그러니 회장님께서 빨리 몸을 추스르고 호산가의 사람으로서 몸가짐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아직도 현실에서 동떨어진 기분이지만, 재현의 집안은 호산재단의 창업자 김태우 초대 회장의 일가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4세대의 손자들은 이미 각자 다른 곳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호산미술관 관장이자 제일그룹의 쇼핑/유통/물류 부문을 총괄하는 고모 일가의 아들 최재국, 제일그룹 중공업/철강/군수업을 맡는 작은아버지 일가의 아들 김재오, 대표이사 사장 직위로 무역/전자/미디어 부문의 자신의 아버지, 제일그룹의 분가인 천지그룹의 장손인 김재원까지.
 “그 외 다른 도련님, 아가씨들도 있지만 회장님이 눈여겨보시는 건 도련님을 포함해 네 분입니다.”
 회장님, 그러니까 재현의 할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4명의 손자, 그중에 재현 역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학생의 신분이면서, 당장에 자기 발로 제대로 걷지도 못해 가장 후계자 레이스에서 뒤처진 상태였다.
 “옛날엔 형들하고 참 친했는데······.”
 하지만 과거 생각을 하다 보니 어째 떠오르는 것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서 상갓집에서만 만나서 가볍게 소주 한 잔씩 주고받은 기억이 대다수였다.
 재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후계자 경쟁만 아니라면 다들 좋으신 분들이십니다.”
 “잘 아시네요.”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제멋대로 호산가에 대해 평가했습니다.”
 아진의 사과에 재현은 별거 아니란 투로 넘어가고는 다시 일어나 홀로 걸으며 재활 철봉을 잡았다.
 “점심까지만 합시다. 그리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요?”
 “외출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줘요.”
 재현은 있는 힘을 다해 철봉을 부여잡고 다시 한 번 스스로 걷기 위해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려는 아진에게 먼저 일러뒀다.
 “기사 아저씨에게 말해줘요. 2시부터 갈산 2공구 사업소로 간다고요.”
 
 
 
 #8화
 
 
 
 
 
 집 안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간다면 보통 고풍스런 음식이 있는 레스토랑이라든가, 문화예술을 즐기는 극장이나 카페, 아니면 바다나 평소 가고 싶은 여행지를 간다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 의식도 없이 지내다가 깨어나서 아직도 걷기도 힘든 소년이 비서를 데리고 가자고 한 곳은······.
 “갈산 사업부라니, 여기서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정말 그곳을 가시는 겁니까?”
 “후계자니까요.”
 할아버지의 4명의 손자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는 재국이 담당하는 공사 현장을 한 번 둘러보면서 자신과 같은 후계자인 사촌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대단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아······ 시발! 역시 거기 맞네!”
 재현이 떨어졌던 그 공사 현장 방향과 똑같았다.
 점점 가까워진다는 말이 들릴수록 재현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후우······ 젠장······.”
 공사 현장에서 한 번 죽었던 트라우마 때문일까?
 점점 더 가팔라지는 심호흡에 양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순간 아진이 운전하는 차가 샛길로 가 멈춰 섰다.
 “······후우.”
 “도련님 안색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
 “원하신다면 곧바로 한 박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아진의 걱정스런 질문에도 재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의 자신은 흙수저로 공사판 현장에서 실수로 추락해 죽은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 아니, 세계적으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재벌 가문의 손자였다.
 그런데도 공사 현장에 간다는 것을 기억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요. 조금만 잠시······ 좀 쉬면 될 것 같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몸 상태는 제가 판단할 테니까 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말할 테니.”
 “······알겠습니다.”
 아무리 두려워도 극복해야 했다.
 어차피 지난 일,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곳에 일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현장만 둘러보는 것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숨좀 돌리면 될 거에요.”
 “좋습니다. 도련님이 그렇게 말하시니 조금만 쉬었다 가겠지만, 계속 상태가 안 좋아지시면 제 판단으로 한 박사님께 연락하고 모시겠습니다.”
 조금 쉰 뒤 갈산 2공구 공사 현장에 도착한 재현은 하마터면 들어가기도 전에 그 자리에 쓰러져 오열할 뻔했다.
 “젠장, 다시 보니 진짜...”
 헬멧을 가지러 갔던 아진은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재현을 보고 한 박사에게 전화하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재현이 곧바로 아진의 손을 낚아챘다.
 “도련님?”
 “괜찮아요. 하이바 주고, 작업장 들어가 보죠.”
 아진은 불안한 기색이 가득하면서도 재현의 말에 마지못해 공사용 안전모를 건네었다.
 “하이바라니······ 그런 현장 용어는 언제 배우신 겁니까?”
 “······음, 인터넷에서?”
 어쨌든 공사용 헬멧, 재현의 말로 [제일건설]이 적힌 하이바를 쓰고서 때때로 아진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공사 현장에 도착한 재현은 한 곳 한 곳을 꼼꼼히 둘러봤다.
 “그나마 그 기신이란 놈들은 없어 다행인가······.”
 이전과는 다르게 이곳은 제일건설의 사업소로 등록이 되어 있었고, 그 기신인지 하는 녀석들의 이름은 볼 수 없었다.
 아진이 미리 이야기해두어서 소장 이외 간부들이 재현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딱 얼굴에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라는 것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소장은 재현을 보고 일단 인사를 하고 재현이 원하는 대로 안내했다.
 “도련님이 직접 확인을 하러 오셨군요, 저희 공사는 잘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그렇군요. 재국이 형이 맡는 곳이니······.”
 “최 실장님이 많이 고생하고 계시니 재현 도련님까지 오시지 않아도······.”
 ‘적당히 둘러보다 가라’라는 말을 완곡히 돌려 말하는 현장 소장을 보면서 재현은 짚고 있던 지팡이로 현장 소장의 머리를 후려치고 ‘이 새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하면서 마구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
 
 [옘병! 왜 하필 이때 떨어지고 지랄이야? 지랄이!]
 [대충 며칠 휴가주고 다른 현장으로 냉큼 치워버려. 외부 노무자 관리 못 한 그놈 책임도 있잖아!]
 [뭐, 그 떨어진 놈. 가족 관계 보니 고아라며? 죽으면 딱히 합의금 줄 곳도 없지 않나?]
 
 ***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울분이 터졌으면 다시 태어난다면 저놈에겐 필히 복수할 거라고 한까지 맺혔던 인간일까.
  다시 보니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그런데 놈은 뻔뻔스럽게 ‘최재국 실장님도 아니고 귀찮게 여긴 왜 왔냐?’ 하는 투였다.
 이미 재국 쪽 라인을 탔다는 분위기의 현장 소장을 보고 재현은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었다. 재현은 ‘마음껏 털어주마!’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현장이었다.
  재현은 숱하게 일했던 이곳 생리를 잘 아는 터라 별다를 바 없이 담담하게 현장을 보여주는 현장 소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안전관리자는 얼마나 되죠?”
 갑작스런 질문에 소장은 당황하면서도 이내 옆에 있는 간부가 알려줘 대답했다.
 “예, 총 20명의 안전관리자가 현장을 둘러보고,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안전 지적을 올리게 되는······.”
 “20명이라······ 그럼 비율이 어떻게 됩니까?”
 재현이 말을 끊으며 묻자 2공구 소장은 당황하며 무엇을? 이란 표정을 지었다. 재현은 지금 막 돌아다니는 빨간색 헬멧을 쓰고 [안전패트롤]이라 써진 안전벨트를 차고 다니는 안전관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전관리자 정규직 비율이요. 분명 20명이 제일건설 직영 안전관리자여야 할 텐데, 혹시 저 중 일용직 임시 안전관리자가 섞인 건 아니겠죠?”
 “네?”
 여기서부터 귀찮음이 묻어나던 현장 소장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공사 현장의 안전관리자는 건설사가 직접 관리하게 되지만, 일부 사업체의 경우 일용직 근로자에게 안전관리자 조끼와 헬멧을 씌워 현장이나 둘러보라고 시킨다든가, 높으신 분이 돌아다니라고 옷을 입혀 보내는 일이 간혹 있었다.
 불과 한 달 전 이곳에서 철야 후 서류 작업 잔업을 하며 서류를 보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당시 재현은 안전관리자 채용 명단과 프로젝트 계약직 정규직 현장 근무자 명단 파일을 모두 봤었다.
 ‘20명 전문 안전관리자 채용으로 써놓고 실제론 10명에 나머지 10명은 적당히 임금 나눠 먹고 과장이나 팀장 옷 입혀 돌아다니게 했잖아.’
 “저, 도련님······ 저기 그게······.”
 재현은 짐작대로라 생각하며 공사 현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나마 정식 안전관리자도 산업안전기사 자격 가진 인물이 얼마나 되겠어?”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무리를 했는지 발목과 무릎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했지만, 걱정스럽게 부축하려는 아진까지 뿌리치고는 이를 악물고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나약한 도련님이 어느 순간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한마디씩 입을 열 때마다 주변 제일건설의 관계자들이 공포에 휩싸일 정도였다.
 “보일러하고 배관 설치할 때 가스켓은 뭘 씁니까?”
 “네······? 가스켓이요?”
 “배관이나 밸브에 대한 공사를 할 때 접촉면에 누수와 부식을 막기 위해 이음면으로 쓰는 공사용 가스켓! 사전 설명이라도 해드려요?”
 재현이 가스켓에 대해 묻자 소장은 절대 이 도련님이 놀러 온 게 아니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네?! 그거야 물론······.”
 “네! 그렇죠. 석면 가스켓은 안 쓰시겠죠. 그거 퇴출된 지가 언제인데! 그럼 금속류예요? 고무류예요?”
 “고, 고무류입니다. 러버 가스켓입니다.”
 “단가 싼 거 쓰시네요. 여기 엄청 중요한 공사 현장이라 들었는데.”
 메탈류 가스켓보다 싼 고무류의 가스켓을 쓴다는 말에 재현이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공사 현장의 감독들이 공포에 휩싸기 충분했다.
 그렇게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걸었던 재현이 멈춰 선 곳은 작업 현장 중 한 곳이었다.
 공사용 비계가 가득 쌓여 있고, 인부들이 아시바 파이프를 설치해서 위에서 작업 중이었다.
  재현은 손짓으로 공사하는 인원들을 모두 내려오게 한 뒤로 그들의 장비 상태를 슬쩍 바라봤다.
 “2m 이상 높이에선 안전벨트 다 착용하고 있는 게 맞죠?”
 “······네, 무, 물론 그렇습니다.”
 “안전벨트가 총 몇 개 구비되어 있나요?”
 “그, 그것이······.”
 당황하는 소장의 옆으로 팀장 한 명이 다가와 속삭였다.
 재현이 한숨을 내쉴 때 소장이 대답했다.
 “처, 천 오백 개 신품으로 구비되어 있습니다.”
 “하~ 그래요? 제가 어제 알아본 결과 여기 일용직 인부 포함해 2천명 분량의 일당을 주고받던데요?”
 “네, 넷?!”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이 여기 근무할 때 안전벨트 부족하니 알아서 차라면서 맨몸으로 난간에 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아시바 위에 저 커다란 욕조 같은 건 뭡니······ 하아~~ 아아아!!!! 시발!!!! 어떤 미친 새끼가 여기다가 고철 제적장을 만들어놨어?!! 바로 위에 비계 설치해서 난간 작업자들 있는 현장에다가!!!!”
 차근차근 비리를 잡아 조져주겠다고 다짐했던 재현이지만 자신이 떨어졌던 현장을 보자 눈물이 뿜어져 나오며 감정이 최고조로 폭발했다.
 그 순간 갈산 2공구 사업소장을 포함한 관리직군부터 아진까지도 당황해서 재현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재현은 여기서 끝날 생각이 없었다.
 “저, 도련님······ 뭔가 이건 착오가 있는······.”
 “아, 닥치시고! 마지막으로 하나 묻자! 폐자재는 어따가 처박았냐?”
 “네······ 넷?! 그것은 규정대로 수거업체를 따로 시켜서 처리를······.”
 그때 재현이 분노에 가득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벽에 겨우 기대고는 떨리는 손으로 아진을 가리켰다.
 “도련님.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아진 씨! 소장님한테 요청해서 오함마 하나 가져와줘요.”
 “네? 오함마?”
 “슬레지해머!!!”
 공사용어로 말해서 모르기에 FM대로 공구 이름을 말해주자 간부 몇 명이 후다닥 달려갔고, 얼마 안 있어 큼지막한 슬레지해머가 두 자루 왔다.
  재현이 직접 그것을 잡으려 했지만 방금 전까지 걷는 재활 운동만 한 상태로는 무리였다.
 재현은 그것을 아진에게 건네주고는 벽에 기댄 채로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그리고 소장을 보면서 한마디 했다.
 “2공구 현장 소장님.”
 “네! 도련님······.”
 “이 사업소 공사 맡으시면서 절대 부끄럼 없이 공사하셨다고 자부하쇼?”
 방금 전까지 공사 현장에 치부를 있는 대로 까발려놓고서 한 질문이었다.
  아들뻘도 안 되는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계속 시달리려니 소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곳 제일건설의 회장 손자이니 일단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조용히 보내고 보자는 생각에 다시금 친절한 얼굴로 화답했다.
 “하하, 네. 도련님께서 직접 현장을 보시면서 많이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 본데······ 현장에 몇몇 작은 실수가 있는 것을 빼고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기, 나머지 일은 제가 최 실장님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드리고 지적 사항에 대해서는 바로 시정 조치를 할 테니 이제······.”
 “그만!”
 재현은 구구절절 이어지는 현장 소장의 말을 끊더니만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짜 끝까지 거짓말이구나. 지금이라도 잘못 인정하고 시인했으면 내 처지 바뀐 것도 생각해 넘어가려 했는데······.”
 “네? 그게 무슨······?”
 재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아진에게 슬레지해머를 쥐여 주더니 외쳤다.
 “아진 씨! 이 벽 내려쳐요!!!”
 재현의 외침에 아진은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힘차게 슬레지해머로 벽을 내려쳤다.
 보통의 25세 여성 직원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해머질로 인해 시멘트와 타일로 이뤄진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깨어진 벽의 모습이 드러날 때, 재현이 아진을 멈췄다.
 그러곤 비틀거리며 균열이 생긴 벽에 다가가 그것들을 헤쳐내고는 안으로 손을 뻗었다.
 이 순간 제일건설의 간부들은 2공구 소장을 포함해 피부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재현이 깨진 벽에서 보온재 대신 꺼내든 물건들을 보고는 그것들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여기 보온재는······ 악취가 심하군요. 거기다가 지정폐기물로 보이는 게 있는데······.”
 “도, 도련님 그게 그러니까······.”
 "그래서 이게 뭐야?"
 "저 도련님...제가 처음부터 다..."
 재현은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분노한 눈으로 공사현장 소장에 대해 말했다.
 “이게 뭐냐니까?”
 “......도련님.”
 “이게 뭐냐고 왜 말을 못 해? 이 새끼들아!!!!”

댓글(3)

ma******    
참나ᆢ앞에 조금보다가 댓글남긴다, 집안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잘모르겠지만 집에 각종의료기기와 MRI까지 있다고? MRI는 너무 나간거 아닌가? 그리고 오늘 발령받은 초짜비서가 대리직함 달고있고 집안일케어한다고 출근첫날부터 연봉의 3배를 준다라니ᆢ말이좀되는 소리를 지껄여야 어느정도 공감을하지, 뭔놈의회사가 막장회사냐? 소설 참개념없이 쓰네ᆢ
2020.10.02 09:17
슬슬슬    
꾸역꾸역 읽었는데 갈수록 말이 안됨
2021.01.26 12:51
좋아좋아요    
ㅋㅋ 댓글보고 안봄..
2021.10.0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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