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1 ― 비극도, 기회도 느닷없이
이른 아침이었다.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필상이, 졸음이 가시지도 않은 눈을 한 채 거실 찬장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에 소금을 적당량 묻혀 낸 뒤, 곧장 입 안에 ‘쏙’ 집어넣어 한 차례 맛을 보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기 무섭게, 소금이나 설탕을 비롯한 조미료의 맛을 보는 것. 이는 필상이 느닷없이 ‘미각’(*味覺)을 잃게 된 뒤 생겨난 습관이었다.
“씨발···.”
대뜸 욕지거리를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손에 꼭 쥐고 있던 소금 통을 거세게 내던졌다. 채앵! 한데, 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온갖 집기를 던지고 부수어 대기 시작했다.
“왜! 왜! 씨발, 대체 왜 아무런 맛도 안 나는 건데···!”
한참 동안 난동을 피우던 필상이 제풀에 지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미각을 잃은 지도 어느덧 이 년째. 그는 끝이 보이질 않는 오랜 싸움 탓에 잔뜩 지쳐 있었고, 덕분에 결심을 완전히 굳힐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자.
***
본래 비극이란 게 으레 그렇다. 그 어떤 예고나 징후도 없이 살금살금 지척까지 다가와서는, 삶 자체를 아예 무너트려 버리곤 한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필상에게 찾아온 비극 역시 엇비슷했다.
처음에는 눈이 뻑뻑하고, 침침한 느낌이 들었던 게 전부였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증상이 ‘혀’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예민하기 그지없던 혀가 하루가 다르게 둔해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필상은 그제야 위험을 감지하고, 뒤늦게 병원을 찾았다.
―쇼그렌 증후군에 의한 미각 상실 증세입니다.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증세가 점점 더 심각해 질 겁니다. 치료를 통해 증상의 악화를 조금 지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완치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인 것 같군요···.
처음 증상을 느꼈던 그때, 당장 병원에 달려가 증상을 호소하고 치료를 받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초기에는 약물 치료를 통해 어렵지 않게 털어 낼 수 있는 ‘쇼그렌 증후군’이란 이름조차 생소한 병이 제 미각을 앗아 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프랑스 파리에서 간신히 요리사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제야 제 이름을 업계에 서서히 알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랬던 필상의 삶이 고꾸라지는 데는 불과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의, ‘수셰프’(*Sous-Chef:부주방장).
세계적인 셰프, 조엘 르뷔숑의 제자.
많은 투자자들이 눈독 들이고 있는 감각적인 요리사.
필상의 이름 뒤로 늘 따라붙곤 하던 여러 거창한 수식어들이, 순식간에 한낱 ‘과거의 영광’으로 전락해 버렸다.
미각을 잃은 지 일주일 만에 일하고 있던 레스토랑에서 해고되었다. 당연한 처사였다. 소금과 설탕의 맛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요리사에게, 주방 실무를 맡기려는 정신 나간 오너는 파리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또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인생이 바닥을 치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말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정리되었다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버텼다.
재기를 꿈꾸며 이를 악물었다. 평생을 꿈꿔 왔던 ‘셰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바로 직전이었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우선 지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거처를 옮겼다. 한 달 월세만 무려 950유로에 달하는 파리 시내 중심가의 아파트에서, 변두리에 위치한 ‘스튜디오’(*studio:원룸) 형태의 자그마한 집으로. 또, 좀처럼 운전하는 일 없이 차고에 방치해 두었던 폭스바겐 골프 차를 처분했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처분하는 단계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비참함을 맛볼 수 있었다. 여태껏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던 탓이었다.
뭐, 어쨌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본 결과, 향후 2년 정도는 일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란 나름 희망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다음부터는 오직 재활에만 전념했다. 매일 병원과 집을 오갔고, 시도 때도 없이 혀에 자극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행여나 재활에 악영향을 끼칠까 싶어, 이따금씩 즐기던 술, 담배마저 단칼에 끊어 버렸다.
그렇게 약속된 이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애석하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끔찍하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필상이, 저도 모르게 꺼낸 말이었다. 광대뼈는 불룩 튀어나와 있었고, 갈비뼈가 고스란히 엿보였다. 입술은 혈기가 돌지 않아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움푹 파여 있는 눈은 마냥 퀭할 따름이었다. 미각 상실이 섭식 장애. 즉, ‘거식증’ 증세를 동반했던 탓이었다.
뭐, 달리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던 식사가, 오직 생존만을 위해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무색무취의 양분덩어리를 억지로 씹어 삼키는 의무적 행위로 변질되어 버렸으니까.
이내 필상이 거울에 비친 제 두 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그는 더 이상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재활이란 이름의 길고, 고단했던 싸움이 그를 서서히 좀먹고, 변화시킨 것이다.
한 차례 묵은 숨을 토하듯 내쉬어 보인 필상이, 곧장 노트북을 펼친 채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 시작했다.
***
처음 프랑스에 발을 들인 것은, 딱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달랑 몇백만 원을 손에 움켜쥔 채로, 아무런 대책조차 없이 무작정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왕 요리를 배울 것이라면, 현지에서 배우는 게 낫지.’ 하는 생각만으로 덜컥 내려 버린 무모한 결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운 좋게 시세보다 싼값에 거처를 렌트할 수 있었고,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 ‘버스보이’(*Busboy:빈 그릇을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로 취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딱 일 년이 흐르고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해졌을 무렵, 필상은 그제야 주방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 뒤로, 여러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다. 잠잘 시간을 쪼개 가며 언어를 공부했고, 근무 시간에는 선배 요리사들의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일, 일, 일.
마치 더 나은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처럼, 오직 일에만 몰두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피부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몇 번이고 변화를 거듭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십 년 차에 접어들던 무렵.
“필상, 메종 드 조엘의 수셰프가 된 것을 축하하네.”
세계적으로 명망이 드높은 셰프, ‘조엘 르뷔숑’이 직접 운영하는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의 부주방장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수셰프. 즉, 부주방장직은 단순히 노력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셰프에게 ‘후계자’로 간택받을 수 있을 정도의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이들이, 오랜 시간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야지만 오를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상승세를 타고 나니, 덩달아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양인 수셰프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투자자들이 필상을 만나기 위해 평범한 손님으로 가장한 채 레스토랑을 찾곤 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뒤, 필상을 호출하여 입에 발린 칭찬 몇 마디를 늘어놓은 뒤 조심스레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필상.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개업해 드릴 테니, 셰프직을 맡아 주실 수 없겠습니까? 현재 급여보다 훨씬 큰 금액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물론, 매출에 따른 ‘로열티’(*Royalty)도 지급해 드릴 생각이고요.”
지난 십수 년간 꿈꿔 왔던 ‘셰프’라는 이름의 거룩한 타이틀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필상 역시 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신중히 투자자들이 내건 조건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여태껏 자신이 해 온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파리 어딘가쯤에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개업하며 셰프로 데뷔하게 될 것이고, 여러 매거진 및 평론가들과 투덕거리게 될 것이라고. 또 언젠가는 미슐랭 스타도 획득하고, 전 세계 각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의 지점을 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
“아들, 그럼 앞으로는 계속 한국에서 지내는 거니?”
어머니께서 불쑥 꺼내 든 물음 덕에 깊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시선은 손에 쥐고 계신 사과 한 개와, 과도에 고정되어 있을 따름이었고 말이다. 필상이 무어라 답하는 대신,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못 본 새, 부쩍 늙으셨네. 다들 시간이 야속하다고들 말하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서걱, 서걱. 그렇게 고요한 거실 안으로 과일 깎는 소리만이 잔잔히 울리기를 잠시.
“아들?”
어머니께서 대답을 재촉하듯 재차 건네 온 말에, 필상이 그제야 정신을 다잡았다.
“예, 아마 그럴 것 같아요.”
한 차례 “그래, 잘 생각했어.” 하고 답해 보이신 어머니께서, 재차 뒷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뭘 하든 연고 하나 없는 타지보다야, 고향 땅이 훨씬 낫지.”
다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필상이 애꿎은 눈을 벅벅 문질러 댔다. 고되게 느껴졌던 장시간의 비행 탓인지, 좀처럼 피로감을 떨쳐 낼 수가 없던 탓이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재차 물음을 건네 왔다.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계획은 있고?”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옴짝달싹하던 필상이, 끝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뇨,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장장 이 년에 걸쳐 진행된 마라톤을 완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완주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낙오된 느낌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으려나? 어쨌든, 오랜 꿈을 포기하겠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당장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 조급해할 것 하나 없어. 푹 쉬면서 신중하게 생각해 봐.”
“네, 그럴게요.”
그때, 어머니께서 무언가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아.” 하고 중얼거려 보인 뒤 덧붙였다.
“그리고 네 아버지 가게 말인데, 얼마 전에 부동산에 내놨다.”
“예···?”
“자꾸 먼저 가 버리신 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마치 머릿속에서 맹렬한 연쇄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번쩍, 번쩍. 섬광이 터지고, 우렁찬 폭음이 울려 대는 그런 폭발. 필상이 “왜요?” 하고 되묻는 것 같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인 어머니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품고 있어 봐야 애물단지밖에 더 되겠니?”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필상이 너도.”
잠시 말끝을 흐려 보이셨던 어머니께서, 조심스레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다시 일어서려면 비빌 언덕 하나쯤은 있어야지. 비록 큰돈은 안 되겠지만, 밑천 삼으면 뭐라도 하나 해 볼 수 있을 거야. 하다못해 자그마한 치킨집이라도.”
“······.”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네 탓이라 생각하지는 마라. 어차피 진즉에 해야 했을 일이야. 내가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 가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그리고 아마 네 아버지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다. 너희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잖니?”
그래, 그런 분이셨다.
이따금씩 통화를 할 때면 대화를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 나가고자 노력하시던, “아버지, 죄송한데 지금 많이 바빠서요.” 하고 퉁명스레 말하는 아들에게 늘 “그래, 이해한다.” 하고 말씀해 주셨던. 그러시고는 통화가 끊어지기 직전, 다급하기 그지없는 투로 “아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굶지 마라. 항상 응원한다.” 하고 몇 마디 응원의 말을 덧붙이곤 하시던 그런 분이셨다.
이내 필상이 괜히 고개를 돌려서는 TV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뉴스 속 앵커가 오늘이 여름의 시작인 ‘입하’(*立夏)라는 말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또, 그런 그녀의 가슴팍 밑으로는 한반도에 태풍이 상륙했음을 알리는 자막이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
그날 밤, 필상은 꿈을 꾸었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함께 ‘식당’을 운영하시던 때의 꿈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구슬땀을 뻘뻘 흘려 가며 요리를 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계산대 앞을 지키고 선 채 단골손님들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중이었다. 가게 안은 손님들로 마냥 북적였고, 왁자지껄한 소음이 연신 끊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필상은 그런 가게 안을 쏘다니며,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나르는 등의 간단한 업무를 거들었다.
부모님의 식당.
필상이 난생처음으로 ‘요리사’라는 꿈을 품게 되었던 곳이다. 처음으로 식도를 손에 쥐어 봤던 곳이자, 처음 화구의 뜨거운 불 앞에 서 보았던 곳이며, 또 난생처음으로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 냈던 곳이다.
꿈속에서의 필상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렁찬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고, 당찬 걸음으로 음식을 나르곤 했다. 한 번 지나가 버린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 필상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히 기백 번은 그리워했던 장소이자,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필상은 더더욱 처절히 움직였다. 꿈이 끝나지 않기를 갈망하며. 아니, 조금이라도 더 오래 존속되길 희망하며.
하지만.
“아―”
다시, 현실.
두 눈을 게슴츠레 떠 보이기 무섭게 누렇게 변색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자 낡은 매트리스가 “끼이익―” 하고 앓는 소리를 내보였다. 이내 필상이 제 양손으로 얼굴을 꼬옥 감싸 쥔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을 허무가 솟구쳤던 탓이었다. 맴 맴 맴, 매미 우는 소리가 창을 투과하여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뙤약볕 탓에 후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는 한여름이었다.
몹시 공허했다.
***
시간이 꽤 흘러, 한낮에 접어든 지금 역시 마찬가지. 여전히 간밤에 꾸었던 꿈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는 중이었다.
“아들. 자, 여기.”
어머니의 부름 덕에, 필상이 다시금 정신을 다잡았다. 이내 필상의 시선이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열쇠 꾸러미’로 향했다. 다름 아닌, 부모님의 식당 열쇠였다.
“어차피 팔려고 내놓은 가게, 뭐 하러 가 보게?”
“그냥···.”
한 차례 말끝을 흐려 보였던 필상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뒷말을 이었다.
“뭔가 아쉬워서요.”
간밤에 꾸었던 꿈 때문인 걸까? 세 식구의 추억과 향수가 매립되어 있는 공간이, 다른 이들의 터전으로 변모하기 전에 꼭 한 번은 들러 봐야 할 것 같다는 기이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집을 나섰다.
***
부모님의 식당은 고향 집이랄 수 있는 주택가의 연립 주택으로부터, 도보로 불과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요즘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단층 상가 건물. 먼지가 수북이 덮여 있는 허름한 간판 위로, ‘식구백반’ 이란 상호가 투박한 필체로 쓰여 있는 상태였다. 식당을 찾은 모든 손님들께, 제 식구에게 내어 줄 법한 푸짐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아버지의 또렷한 소신이 담겨 있는 상호였다.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간판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기를 잠시. 이내 녹슨 자물쇠를 해제하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불이 꺼진 가게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내 필상이 익숙한 손길로 벽면을 더듬거리다가 스위치를 찾아내 불을 켜던 찰나, 그제야 가게 안에 내려앉아 있던 어둠이 걷히며 내부의 전경이 오롯이 드러났다.
모든 게 기억 속 그대로였다.
비좁은 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이블도, 달랑 메뉴명과 가격만 적어 둔 간소한 메뉴판도, 어머니의 자리였던 계산대도, 처음에는 아버지만의 공간이었으나 훗날에는 ‘부자’(父子)의 공간으로 변해 버린 자그마한 주방도···.
가게 안이 바깥보다 훨씬 더 후덥지근했던 터라,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는, 야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반쯤 공개되어 있는 주방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필상아.’
아직도, 주방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미안한데, 냉수 한 잔만 가져다줄래?’
쉰내가 나는 축축한 수건으로, 얼굴을 흠뻑 적신 땀을 훔쳐 낸 뒤 그리 말씀하실 것만 같았다. 냉수가 담긴 컵을 건네 드리고 나면, 벌컥벌컥. 단숨에 잔을 비워 내신 뒤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만 같았다.
‘고맙다, 아들.’
그러고는 다시금 굵직한 손가락으로 야무지게 나물을 무쳐 내실 것만 같았다. 찌개를 끓이든, 생선을 굽든, 두툼한 고기를 썰든, 뭐라도 하실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도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씨익 웃어 주실 것만 같았다.
“아버지.”
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하지만, 필상은 답을 기다리듯 잠시 침묵했다.
“가게, 내놨대요. 얼마 전에.”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뭐, 어머니께서 잘 판단하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렇게 방치해 두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새로 입점하게 될 가게 영업 시작하고 나면, 저도 한번 와 볼까 봐요. 괜히 전처럼 북적이는 모습이 보고 싶더라고요.”
주절주절 두서없이 말을 이어 나가던 필상이 돌연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돌연 가슴이 쓰라려 왔던 탓이었다.
마치 뜨겁게 달군 자갈을 몇 움큼 삼켜 내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후끈댔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 사실 포기했어요.”
이내 필상이 제 고개를 푹 떨굼과 동시에, 재차 “정말 죄송해요.” 하고 덧붙였다.
그저 노력했을 뿐이다.
죽을 만큼 성공하고 싶어서,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던 것뿐이다.
그런데, 왜?
그간의 노력이 무색해질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대체 왜 벼랑 끝에 내몰린 신세가 된 것일까?
그토록 노력해 온 삶의 종착지가 고작 여기인 것일까?
“한심한 말이라지만, 요즘 들어 부쩍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자그마한 식당 안으로 늘 구수한 밥 내음과, 찌개 향이 진동하던 그 시절로. 여장부처럼 시원시원한 성격의 어머니께서, 고봉밥을 듬뿍듬뿍 담아내 손님들께 내주곤 하시던 그 시절로. 미닫이문을 열고 식당 안에 들어서면 아버지께서, “아들, 밥은 먹었어?” 하고 물으시며 맞아 주시던 그 시절로···.
또, 세계 최고의 요리사라는 거창한 꿈을 꾸며 아버지께 요리를 배우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사무치도록.”
나직이 뱉은 말이 멎어 들던 때였다. 돌연 가게 바깥쪽에서 ‘쏴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듯 보였다. 문득 어저께 우연히 보았던 뉴스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분명 태풍이 상륙했다고 했었지. 필상이 멍하니 가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콰앙―!
돌연 휘몰아친 거센 비바람 탓에 가게 출입문이 부서질 듯 닫혀 버렸다. 화들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였던 필상이, 이내 제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다름 아니라, 돌연 묘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뭐지···?’
마치 자신과 세상이 아예 격리되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질적인 느낌. 하나, 그 기묘한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돌연 극심한 두통이 엄습해 온 탓이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맹렬한 고통이었다. 이내 필상이 양손으로 제 머리를 꽉 감싸 쥐었다. 연달아 심장이 터질 듯 뛰어 대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종지에는 벽면에 거치된 낡은 시계를 기점으로 울리던 초침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을 괴롭히던 고통과, 소음이 모두 멎어 들기 시작하던 무렵. 필상은 지독한 어둠에 휩싸였다. 무저갱 끝자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짙은 어둠이었으나, 희한하게도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죽음이란 게 이런 형식이지 않을까? 필상은 그 광활한 어둠 속을 헤엄치듯 부유했다. 온몸의 감각이 말소된 것만 같았다. 마치 뇌가 제 기능을 다하고 멈춰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어떤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시간 감각조차 무뎌져 버렸다.
이윽고···.
귓가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두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소란이 아니었다. 족히 열댓 명이 될 법한 인원이, 잔뜩 흥이 올라 대화를 주고받을 때나 형성될 수 있는 소란스러움이었다.
그때, 또렷한 목소리가 그 소란을 비집고 들어왔다.
“필상아.”
뭐지? 익숙한 음성이다.
“필상아.”
아, 그래 이건 분명···.
아버지다.
아버지의 목소리다.
이내 필상이 지그시 감고 있던 두 눈을 조심스레 떠 보였다. 눈앞에 아버지께서 서 계셨다.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시큼한 향이 날 것만 같은 수건으로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을 닦아 내고 계셨다.
“미안한데, 냉수 한 잔만 가져다줄래?”
이내 필상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주변을 한번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시간 만에 햇빛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부시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부모님의 식당이다.
좁은 가게 안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들 반주 삼아 걸친 소주 몇 잔 탓에 벌게진 얼굴을 한 채, 제 일행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내 필상이 고개를 휙휙 돌려 가며, 주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대기 시작했다.
꿈인가?
일순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혹시 부모님의 식당 테이블에 납작 엎드린 채, 저도 모르는 새 깜빡 잠들기라도 했던 게 아닐까? 그 달콤한 단잠 속에서 행복하기 그지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꿈이 아니야.’
꿈이라 치부하기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소음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아버지도, 계산대 앞에 선 채 장부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계신 어머니도, 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꿀꺽.
마른 침을 한 번 삼켜 내 보인 필상이 애써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그러고는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윽고, 지척에 다다른 뒤에는 그 넓은 품에 와락 안겨 버렸다.
“허허, 것 참. 다 큰 녀석이 갑자기 왜 이래?”
답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했다. 하나, 입술을 옴짝달싹하는 게 고작이었다. 목이 메어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을 열고 무어라 말을 하면, 속에 멍울진 무언가가 ‘톡’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버지···.”
이내 아버지께서 솥뚜껑처럼 큼지막한 손으로 등을 쓸어내려 주기 시작하셨다.
“아들, 괜찮아?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버지께서 걱정스러운 눈을 한 채, 연신 필상에게 물음을 건네고 있는 지금. 가게 한쪽에 설치된 자그마한 TV 뉴스 속 앵커가 오늘이 여름의 시작인 ‘입하’라는 말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또 그런 그녀의 가슴팍 밑으로는 한반도에 태풍이 상륙했다는 문구가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극이 그랬듯, 기회 역시 느닷없이 찾아왔다.
# Chapter2 ― 변화의 조짐
꿀꺽―
침을 한 번 삼켜 내 보인 필상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장장 십수 년에 달하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오게 된 지도, 어느덧 오늘로 일주일째다. 하지만, 필상은 여전히 자신에게 일어난 ‘회귀’라는 이름의 기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달리 생각해 본다면 응당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상식만 가지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마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회귀 이전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한낱 ‘꿈’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정말 꿈이었던 거라면,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쯤 되겠네.’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곧장 노트를 펼쳤다. 메모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 필상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렇게 애꿎은 볼펜 끄트머리만 질겅질겅 씹어 가며, 펼쳐 둔 노트를 하염없이 째려보고 있기를 잠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말자.’
머리를 싸맨 채 고민을 거듭한다 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설령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 어떻게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이유’나 ‘원리’를 밝혀낼 수 있다고 쳐 보자. 그럼, 그다음에는? 다시 회귀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간구하기라도 할 것인가? 절대 아니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으니 말이다.
‘마음 편히 받아들이자. 이건 기회야.’
못다 이룬 채 포기해야 했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자, 후회로 얼룩졌던 삶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다. 그토록 갈망하던 기회를 손에 넣었으니, 쓸데없는 고민에 시간을 할애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게, 백배는 옳은 일이리라.
‘계획. 그래, 일단 계획부터 한번 세워 보는 게 좋겠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필상이, 곧장 노트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슥, 스슥―
―우선, 지금은 2013년 5월 11일이다.
장장 이십 년에 달하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시기로 돌아오게 됐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정말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나이다. 다시금 펜을 쥔 손을 움직여서는, 무언가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슥, 스윽―
―1. 세계 최고의 셰프 되기.
못다 이룬 채 포기해야 했던 꿈이다.
과연 이번에는 이룰 수 있을까?
고민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할 수 있어, 무조건.”
비록 과정이 험난할 것 같기야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만약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자신은 이전의 삶에서 쌓아 둔 ‘경험’이란 무기를 지니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동안 여러 레스토랑의 주방을 거치며 오랜 시간 동안 부딪히고, 깨졌으며,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적어도 전생에 비해서는 수십 배. 아니, 족히 수백 배는 훨씬 더 유리한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지.’
어영부영 중간쯤 가는 요리사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자신은 지금 ‘세계 최고의 셰프’를 꿈꾸고 있다. 앞으로 자신이 경쟁하게 될 상대는 귀여운 또래 요리사 지망생들이 아니라,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셰프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내 필상이 다시금 상념에 젖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어떤 길이 가장 쉽고, 빠르게 꿈에 다가갈 수 있는 효율적인 길인 것일까?
일단 다시금 레스토랑에 말단 직원으로 입사한 뒤, 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명성을 쌓고, 세계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커리어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개업한 레스토랑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는 이력이다. 언제든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부품. 즉, 직원으로 일했던 이력은 사실상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직접 돈을 모아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장장 8년이란 시간 동안, 매달 백만 원이라는 금액을 꼬박꼬박 저축한다 한들 9600만 원을 모으는 게 고작이다. 그래 봐야 채 1억이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죽기 살기로, 이를 악문 채 모은 1억이란 돈이 수중에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 푼돈으로는,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태원이나, 가로수길, 강남을 비롯한 수도권 내 주요 상권의 경우 기본 권리금 자체가 평균적으로 2억 원대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
고로, 직접 돈을 모아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건 불가능.
‘결국, 답은 하나뿐인 건가?’
필상이 다시금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2.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수억 원가량의 투자금을 끌어올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지기.
유명해져라, 그럼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앤디 워홀’이 했다고 믿는 말이다. 실제로 앤디 워홀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저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만 놓고 보더라도 그랬다.
‘TV 쇼에 출연한 뒤 인생이 바뀐 셰프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스스로를 상품화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유명세를 갖추고 나면 거액의 투자금을 끌어오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 다행히, 시기도 나쁘지 않다. 마침 한창 쿡방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대중들의 요리에 대한 관심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으며, 국내 유명 셰프들의 인지도와 영향력 역시 덩달아 상승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셰프와 엔터테이너를 결합한, ‘셰프테이너’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을까?
현재 손에 쥐고 있는 여러 카드들을 영리하게 잘 활용한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인지도를 얻어 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전생의 경험을 통해 얻은 성취를, 재능으로 포장해 버린다든지···.
‘일단 이 부분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자.’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학교.
현재의 자신은, 아직 고등학교 1학년 1학기조차 끝마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말인즉, 앞으로 무려 2년 반에 달하는 시간을 학교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낮은 목소리로 연신 “학교, 학교, 학교···.” 하고 중얼대던 필상이, 다시금 노트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기 시작했다.
슥, 스슥―
―3. 최대한 빠르게 부모님을 설득하고, 학교 자퇴하기.
아직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정해진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에 묶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야, 검정고시로 취득하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하냐는 것인데···.’
뭐, 눈 한 번 꼭 감은 채로 온갖 생떼를 다 부린다면 어떻게든 그만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 연령이 마흔에 근접하는 와중에 방바닥에 ‘대’(*大) 자로 드러누워서는 “엄마, 아빠! 나 학교 가기 싫어! 무조건 그만둘 거야!” 하고 떼를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두 분 부모님이, 그리 꽉 막힌 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도 천천히 고민해 보자.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을 만한 결과물을 보여 드린다면, 예상보다 쉽게 허락해 주실지도 모르니까···.’
한창 상념에 젖어 들어 있던 필상이, 돌연 고개를 돌려서는 벽면에 거치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어느덧 저녁 일곱 시, 부모님의 식당 ‘식구백반’이 한창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을 바쁠 시간대였다.
‘잠깐이라도 나가서 도와 드려야겠다.’
결심을 굳힌 필상이, 제 노트 위에 글귀 한 줄을 추가로 적어 넣었다.
슥, 스슥―
―4. 후회가 남지 않는 인생 살아가기. (가장 중요!)
그러고는 노트를 제 책상 서랍에 잘 넣어 둔 뒤 곧장 집을 나섰다.
***
“아이고, 아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계산대 앞에 서 계시던 어머니께서 부리나케 달려 나오셔서는 물었다.
“집에서 쉬고 있지, 뭐 하러 나왔어?”
무어라 답하려던 찰나였다. 어머니께서 두 눈을 게슴츠레 떠 보이시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건네 오셨다.
“알겠다! 용돈 받으러 왔구나? 또 PC방 가려는 거야?”
“아뇨, 그게···.”
필상이 손사래까지 쳐 가며 무어라 답하려던 때였다. 어머니께서 돌연 앞치마 주머니 속에 손을 ‘푹’ 찔러 넣으시더니, 구깃구깃하기 그지없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주시며 재차 말씀하셨다.
“아들, 노는 건 좋다만 밥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
이내 필상이 한 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맞아.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는 용돈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가게에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않았었지.’
그렇게 제 손에 쥐어진 지폐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기를 잠시. 이내 필상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그게 아니라 가게 일 좀 도와 드릴까 해서 온 거예요.”
“으, 응? 가게 일을···?”
“네. 어차피 집에 있어 봐야 빈둥빈둥 시간만 죽일 텐데요, 뭐.”
말을 마친 필상이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좁은 식당 안이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웨이팅’(*waiting:입장 대기)이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라지만, 가격 대비 꽤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는 백반집으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지라 점심, 저녁 시간대에는 늘 이렇게 손님이 몰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아이고, 우리 아들. 기특하기도 해라. 정말 다 컸네, 다 컸어. 저녁은? 아직 안 먹었으면 네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아녜요, 괜찮아요. 있다가 식사하실 때 같이 먹으면 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제가 어떤 일을 도우면 좋을까요?”
말을 마친 필상이 일거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한 차례 “음···.”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이신 어머니께서 재차 답하셨다.
“아들,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어쩌지? 아들이 딱히 도울 만한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예? 손님이 이렇게 많은데요?”
“응. 주문이 잔뜩 밀려 있어서 그렇지, 보다시피 홀은 한가하거든. 정 돕고 싶으면 잠깐 쉬다가, 이따가 손님들 우르르 빠질 때 정리나 조금 거들어 주면 될 것 같은데?”
이내 필상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그럼 주방 일을 거들어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 딱히 네가 도울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
어머니께서 나긋한 투로 꺼낸 말에, 필상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을 흘려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아버지께 정식적으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에 들어섰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영부영 학창 시절을 흘려보내다시피 하다가, 그즈음이 되어서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아버지께 요리를 한번 배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근근이 가게 업무를 거들며 요리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고 말이다.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럴 명분이 없었다. 괜히 도와 드리겠다고 억지를 부려 봐야, 오히려 불안해하실 게 분명했고 말이다.
‘쩝, 도와 드리지 못해 아쉽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별수 없겠네.’
***
저녁 아홉 시 무렵에 들어서자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바깥으로 나서던 찰나. 어머니께서 빈 테이블 한 개를 꿰차고 앉으시며, 말문을 여셨다.
“에구구···.”
이내 필상이 그런 어머니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어머니, 매일 이렇게 일하시려면 정말 힘드시겠어요.”
“아냐, 그래도 오늘은 아들 덕에 편하게 일했잖아?”
말을 마친 어머니께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신 채, “아들, 고마워.” 하고 덧붙이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의 가게 일을 거들어 드린 적이 없었다.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에야 근근이 나와 조금씩 일을 도왔을 뿐.
‘앞으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나와서 도와 드려야겠다.’
그때, 막 주방 바깥으로 나온 아버지께서 나직이 말을 건네 오셨다.
“아들,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제 저녁 먹어야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만 해.”
이내 잠시 고민하듯, “음···.” 하고 침음을 흘려 대던 필상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아버지. 혹시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해도 될까요?”
“응? 네가?”
“네. 그냥 하루쯤은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가게 안으로 돌연 정적이 내려앉기를 잠시. 어머니께서 환한 미소를 머금으신 채, 사뭇 밝은 투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한번 해 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아들이 차려 주는 밥을 먹어 보겠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한 차례 호탕한 웃음을 흘려 보이시고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말씀하셨다.
“녀석, 기특하긴. 아빠가 도와줄까?”
“아뇨. 혼자 한번 해 볼게요.”
“흠, 화구 쓰는 법은 알고?”
“네, 어깨너머로 진즉 다 배웠죠.”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럼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마냥 의기양양한 투로 답해 보인 필상이, 두 분 부모님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본 뒤 되물었다.
“혹시 드시고 싶으신 메뉴 있으세요?”
이내 어머니께서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시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제일 자신 있는 메뉴로 한번 해 봐.”
두 분 부모님 모두 필상이 차려 줄 ‘저녁상’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은 듯 보일 따름이었다. 아니. 기대는커녕 엉성한 김치볶음밥이나, 검게 그을린 계란프라이 정도를 내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
주방 안에 발을 들인 필상이 한 차례 긴 숨을 내쉬어 보였다. 주방에 들어선 게 얼마 만이더라? 비록 정확한 기간을 헤아릴 수는 없다지만, 아주 오랜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회귀 이전의 삶에서는 미각을 잃은 뒤로 단 한 번도 주방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회귀를 겪은 뒤에도 정신을 추스르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터라 미처 요리를 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낯설게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늑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뭐랄까? 마치 정말 오랜 여행을 마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하면 적합하지 않을까?
“어디 보자···.”
작게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냉장고 문을 열고는, 천천히 재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저 간단히 한번 슥 둘러본 게 전부인데, 이런저런 요리의 레시피들이 머릿속에 연쇄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가급적 간단한 요리를 하는 게 좋겠지?’
괜히 처음부터 고난도의 요리를 선보였다가, 둘러댈 말을 찾느라 고생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내 필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곳 식구백반의 인기 메뉴인 ‘김치찌개’와, 매일 밑반찬으로 나가곤 하는 ‘계란말이’를 선보일 요량이었다.
우선 화구의 불을 켠 뒤, 팬을 올리고 기름을 살짝 둘렀다. 기름이 어느 정도 달아올랐을 무렵, 곧장 돼지 목살과 잘 익은 김치를 넣자 “치이익―” 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울렸다. 이내 필상이 정성스레 목살과, 김치를 볶아 내기 시작했다.
이는 아버지께 전수받은, 김치찌개 비법 중 하나였다.
―필상아, 처음부터 물을 넣고 김치를 끓이면 무를 수밖에 없어. 김치 특유의 아삭한 식감을 끝까지 살리려면 미리 한 번 볶아 내고 짧게 끓여 내는 게 좋아.
돼지 목살 역시 마찬가지.
―목살을 한 번 볶아 내지 않고 끓이면, 조리 시간이 길어질뿐더러 기름기가 과해져. 김치와 함께 한 번 볶아 낸 뒤, 다시 끓여 내야 찌개의 기름기도 적당해지고 조리 시간도 단축되지.
목살과 김치가 어느 정도 노릇하게 익었을 무렵, 필상이 뚝배기에 물을 받아서는 화구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칼을 손에 쥐었다. 물이 끓어오르기에 앞서, 찌개에 넣을 밑 재료를 모두 손질해 두기 위함이었다.
‘오랜만이네.’
고무 재질의 ‘그립’(*Grip:손잡이) 부분이 손에 착 감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본래 칼질은 자전거 타기나, 수영과 엇비슷한 맥락이랄 수 있다. 머리는 잊어도, 몸은 절대 잊지 않는다.
우선 찌개에 넣을 두부 반 모를 네모반듯하게 썰어 냈다. 그다음에는 마늘을 손바닥으로 세게 찍어 눌러 으깼고, 마지막으로···.
기다란 대파를 어슷하게 썰어 내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닥―
도마와 칼이 빠르게 맞닿으며, 듣기 좋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던 순간. 홀 테이블에 앉은 채 쉬고 있던 필상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방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보, 이거 칼질하는 소리 맞죠?”
“그, 그런 것 같은데···.”
한 차례 말끝을 흐려 보였던 아버지가, 이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방 안에 들어서던 순간.
“허···.”
저도 모르게 감탄 어린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벌써 칼질을 끝마친 것일까? 필상은 이미, 끓어오르고 있는 물 속에 손질한 식재료를 하나씩 투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녀석, 혹시 우리 모르게 따로 연습이라도 하고 있던 건가···?’
조리대 위에 놓여 있는 대파를 보기 무섭게 든 생각이었다. 어슷하게 썰어 낸 대파의 크기가, 놀랍도록 일정했던 것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혹시 기계로 썰어 낸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내 아버지가 팔짱을 낀 채 필상의 조리 과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반면 필상은 어찌나 조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듯 보일 따름이었고 말이다.
‘이제 찌개는 끓기만 하면 완성이네.’
필상이 곧장 계란말이를 만들 준비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볼’(*Bowl:접시)에 계란 몇 개를 깨트려 넣은 뒤,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을 최대화하기 위해 우유를 살짝 섞고 잘 저어 주었다.
그러고는 곧장 기름을 골고루 두른 팬 위에 계란 물을 끼얹은 뒤, 마치 ‘스크램블드에그’를 조리할 때처럼 젓가락으로 마구 휘저어 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포슬포슬한 식감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맨 처음 끼얹은 계란 물은 계란말이의 중심이 된다. 처음 끼얹은 계란 물을 스크램블드에그의 형태로 익힌 뒤, 말아 준다면 특유의 식감이 훨씬 배가되는 것이다.
반면, 그 광경을 몰래 엿보고 있던 아버지는 마냥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리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노라니, 뭐랄까? 동작 하나하나에서 능숙함을 넘어선, 노련함이 느껴지는 듯했던 것이다. 모든 동작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 흐르듯 유려하게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필상이 완성된 계란말이를 접시에 옮겨 담아내기 시작하던 찰나.
“아들, 혹시 먼저 맛 좀 봐도 될까?”
아버지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방금부터.”
“네, 드셔 보세요.”
아버지의 시선이 김치찌개로 향했다.
‘거참, 먹음직스럽게 잘 끓여 냈네···.’
납작하게 썰어 낸 두부와, 숭덩숭덩 썰어 낸 두툼한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끓인 찌개가 뚝배기 속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꿀꺽. 저도 모르는 새, 입 안 가득 고여 버린 침을 한 번 삼켜 내 보인 아버지가 곧장 찌개를 한술 크게 떠서는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연달아, 노릇하게 익은 계란말이까지 숟가락으로 잘게 잘라 내 맛을 보았다.
필상이 제 입술을 한 번 핥아 내고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입에 맞으세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맛있다. 잘했네.”
짤막하게 말해 보인 아버지께서, 넋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엷게 떨리는 투로 재차 덧붙이셨다.
“정말 잘했어.”
전반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는 ‘깔끔한 맛’이었다.
일단, 찌개의 국물.
칼칼함, 시원한 풍미, 또 적당량의 기름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무게감까지. 삼박자가 고루 갖춰졌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맛이었다. 김치와 돼지 목살을 따로 한 번 볶아 내 준 터라, 찌개에 사용된 김치 역시 무르지 않고 적당히 아삭한 식감을 자랑하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계란말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감이 어찌나 보드라운 것인지 입에 넣는 순간 녹아내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지경이었다. 계란 물에 적당량의 우유를 섞어 내고, 중심부를 스크램블 형태로 조리해 낸 덕에 완성된 맛의 하모니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내 아버지께서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되물었다.
“필상아, 김치랑 목살을 따로 한 번 볶아 낸 거 맞지?”
“맞아요.”
“이유는?”
한 차례 어깨를 들썩여 보인 필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전에 보니까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따라 해 봤더니,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알겠던데요?”
“그래? 왜 그렇게 하는 것 같아?”
“김치가 무르지 않고 아삭한 식감을 유지하더라고요. 또 기름기가 살짝 억제되서 그런 건지, 적당히 무게감 있는 맛을 낼 수도 있고요.”
“정답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 치고는 꽤 쓸 만한데?”
한 차례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인 아버지께서, 이번에는 수저 끄트머리로 계란말이를 가리켜 보이며 되물었다.
“보니까, 계란말이는 중심부를 스크램블드에그 형태로 만들었던데? 계란 물에 우유를 조금 섞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네, 맞아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잖아요? 중심부를 스크램블드에그 형태로 요리하면 포슬포슬한 식감이 더 살아나는 것 같고, 우유를 살짝 섞어 주면 부드러운 식감이 더 살아나는 것 같더라고요. 맞죠?”
아버지께서 한 차례 “크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을 흘려 보인 뒤 답했다.
“그래, 맞다. 맞아.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내일 당장 주방으로 출근해도 손색이 없겠는데?”
“과찬이세요. 아버지, 그나저나 일단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떨까요? 음식 다 식겠어요.”
이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아버지께서 사뭇 밝은 투로 답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필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먼저 주방을 나섰다. 이내 우두커니 선 채로 그런 필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한 차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란 물에 우유를 섞어 내는 것.
확실히 계란 요리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을 배가할 수 있는 방법이라지만, 초보자에게는 절대 권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일단 계란 물과 우유의 정확한 배합을 맞추기가 어렵다. 설령 운 좋게 배합을 잘 맞춘다 해도 마찬가지. 우유가 첨가된 계란 물은 쉽게 타 버린다. 노련하게 조리하지 못한다면, 곳곳이 검게 그을린 계란말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노란빛을 띤 먹음직스러운 계란말이를 완성해 냈다. 이는 명백한 노력의 흔적이었다.
‘녀석, 아무래도 우리 모르게 꾸준히 연습이라도 하고 있던 건가 본데···.’
정순오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먼저 ‘요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이유는 자못 간단했다.
자신의 직업을 대물림해 주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요리사.
고된 직업이다. 남들에게는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내주어야 하지만, 정작 자신은 주방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허겁지겁 끼니를 때워야 하는. 또 업무 강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급여 탓에, 늘 박봉에 시달려야 하는 그런 직업이다.
욕심일 수도 있겠다만, 적어도 제 아들만큼은 남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는 쉴 수 있는 직업을 갖길 바랐다. 다 떠나서, 적어도 삼시 세끼만큼은 느긋하게 앉아 먹을 수 있는 직업을 갖길 바랐다.
그렇게, 정순오가 한창 상념에 젖어 들어 있던 찰나.
“아버지, 얼른 나와서 드세요!”
필상의 부름에 “어, 그래. 지금 나간다.” 하고 답해 보인 정순오가, 곧장 주방 바깥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테이블 한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필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들, 혹시 요리하는 게 재미있어?”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런 정순오를 바라보고 있던 필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나직이 답했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의외로 엄청 재미있네요.”
“그래. 그럼 됐다.”
짤막하게 답해 보인 아버지, 정순오가 괜히 과장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자, 어디 우리 아들이 해 준 밥 한번 먹어 볼까?”
벌써부터 걱정하기엔 시기상조랄 수 있는 문제였다. 아들은 아직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취미 삼아 간간이 요리해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먼 훗날에라도 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존중해 줄 요량이었다.
제 자식이 최대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 주는 것.
딱 거기까지가, 정순오가 생각하는 부모의 역할이었다.
***
식사가 시작된 지 채 십 분이나 지났을까? 두 분 부모님께서, 밥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빠르게 비워 내셨다.
“와, 정말 맛있는데? 아들, 이제 아버지 쉬는 날 대신 나와서 일해도 되겠다.”
필상이 멋쩍은 듯 “과찬이세요.” 하고 답해 보이자, 어머니께서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재차 말했다.
“아니, 정말이야.”
그러고는 아버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이내 아버지께서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답했다.
“뭐, 잘 배워서 거들어 주면 나야 편하고 좋겠지. 평소에는 조금이나마 덜 바쁘게 일할 수도 있을 테고, 또 나 쉬는 날이라도 가게 문 닫아야 하는 게 아니니까 마음 편히 쉴 수도 있을 것 같고···.”
한창 말을 이어 나가던 아버지가 고개를 슬쩍 돌려서는 필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 이 정도 요리를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한두 달 정도면 무리 없이 가게 내의 모든 메뉴를 조리할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필상의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필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마냥 덤덤한 투로 답했다.
“저는 좋아요. 사실 저도 배워 보고 싶었거든요.”
어머니가 한 차례 화색을 해 보이며 “그래? 잘됐네.” 하고 답해 보이던 찰나, 아버지께서 사뭇 진중한 투로 되물었다.
“아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녜요. 정말 전부터 배워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왜 진작 말하지 않고?”
“가뜩이나 바쁘신데 괜히 번거로우실 것 같아서요.”
이내 어머니께서 재차 말씀하셨다.
“그래, 정말 잘 생각했어. 지금도 곧잘 하는 것 같으니 금방 배우겠다. 네 아버지께 잘 배워서 ‘요리 대회’라도 한번 나가 봐.”
그 말에 필상이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침음을 흘려 보였다.
‘그러게, 대회가 있었지! 왜 대회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
단연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무수히 많은 요리 대회가 존재한다. 비록 태반이 ‘팀’(*Team) 단위로 경쟁하는 단체전 형식이라지만, 꼼꼼히 잘 찾아본다면 분명 개인전 형태의 대회 역시 더러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만약 자신이 요리 대회에 출전해 썩 괜찮은 수준의 성적을 거둔다면? 분명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로 한번 알아봐야겠다.’
필상이 한창 상념에 젖어 들어 있던 찰나, 아버지께서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들을 차곡차곡 겹쳐 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대회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확실히 소질이 있는 것 같기는 하네. 어쨌든, 맛있게 잘 먹었으니 설거지는 아빠가 할게.”
“아녜요, 아버지. 오늘은 제가 설거지까지 다 할 테니까, 차라리 TV라도 보면서 쉬고 계세요!”
손사래까지 쳐 가며 다급한 투로 말해 보인 필상이, 아버지께서 들고 있던 식기를 빼앗다시피 낚아채서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이내 그런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두 분 부모님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허, 여보. 필상이가 그새 철이 들었나 봐요. 가게 일을 돕질 않나, 밥을 차려 주질 않나···.”
“그러게 말이야.”
두 분 부모님 모두,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머금고 계신 채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철부지라 생각했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꽤나 반갑게 느껴지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필상이, 곧장 제 방에 자리한 컴퓨터를 켰다. 앞서 결심한 대로, 자신이 출전할 만한 ‘요리 대회’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모니터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으나, 딱히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쩝, 마땅한 대회가 없네···.’
대부분이 팀 단위로 경연을 치르는 단체전 형식이었고, 간혹 보이는 개인전 형식의 대회는 특정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해 요리를 선보여야 하는 소규모 대회였던 것이다. 그렇게 애꿎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가며, 여러 사이트를 뒤져 보기를 잠시.
‘어? 찾았다!’
필상이 한 차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
다름 아니라,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요리 대회였다. 필상이 원하는 대로 개인전 형식이었으며, 총 두 개 부문으로 나뉘어 있는 형태였다.
일단 첫 번째 부문은 현직 요리사들이 실력을 겨루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 부문이었다. 또, 그다음 두 번째 부문은 요리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경쟁하는 ‘영 셰프’(*Young Chef) 부문이었고 말이다.
이내 필상이 ‘시상 내역란’을 꼼꼼히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프로페셔널 부문]
대상―15,000,000원.
1등―10,000,000원.
2등―5,000,000원.
3등―3,000,000원.
이내 필상이 저도 모르게 “오···?” 하고 감탄을 흘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금이 훨씬 센 편이네?’
시에서 주관하는 요리 대회이기 때문일까? 이 정도면 국내 요리 대회치고는, 더군다나 단체전이 아닌 개인전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상금이 상당히 파격적인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반면···.
‘확실히 영 셰프 부문은 상금이 형편없네.’
[영 셰프 부문]
1등―3,000,000원.
2등―1,500,000원.
3등―500,000원.
애써 우승을 거머쥐어 봤자, 상금이 고작 300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제세공과금까지 제하고 나면, 훨씬 더 적은 금액이 될 게 분명했고 말이다. 영 셰프 부문 수상자들에 한하여 부상 명목으로 후원 단체인 한원대학교 조리학과 입학 지원 시, 가산점을 준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기재되어 있었으나 필상과는 전혀 무관한 대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직 상금만을 목표로 출전을 결심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뭐랄까? 액수가 지나치게 차이 나는 터라, 괜히 의욕이 부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어라? 잠깐만···?”
이내 필상이 이채를 머금은 눈을 한 채, 주최 측 홈페이지를 낱낱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문득 기발한 발상이 떠오른 탓이었다. 영 셰프 부문의 상금이 적어서 문제라면, 프로페셔널 부문으로 출전하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이윽고, 필상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미성년자는 프로페셔널 부문으로 출전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조항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이윽고.
딸깍―
모니터 화면 위로 ‘참가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나자, 필상이 한 차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금세 참가 신청을 마친 상태였다. 물론 ‘영 셰프’ 부문이 아닌, ‘프로페셔널’ 부문으로 말이다.
프로페셔널 부문은 현역 요리사들을 위해 마련된 경쟁의 장인 만큼, 수상 확률이 훨씬 더 적어질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선택을 한 이유?
간단했다.
필상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의 ‘수셰프’직을 역임했던 바 있는, 프로 요리사가 아니던가? 비록 자만일 수도 있다지만, 꽤 규모 있는 국내 대회일 뿐이다. 어떤 부문에서든 상패를 거머쥘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상금 액수도 차이가 나고, 영 셰프 부문보다야 프로페셔널 부문 상패를 보여 드리는 게 부모님께도 면이 서니까···.’
애초에 영 셰프 부문으로 출전하여, 자라나는 새싹들의 기회를 빼앗고 꿈과 희망을 짓밟는다는 게 영 양심에 걸리기도 했고 말이다. 이내 한 차례 기지개를 켜 보인 필상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가, 자신의 재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 주리란 확신 덕에 피어오른 미소였다.
# Chapter3 ― 스포트라이트
“아들, 김치찌개 2인분.”
“넵!”
우렁찬 목소리로 답해 보인 필상이 곧장 김치찌개를 조리하기 시작했다. 대회 참가를 결심한 뒤로 어느덧 며칠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필상은 식구백반에 존재하는 모든 메뉴를 홀로 조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필상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지만, 글쎄? 아버지는 마치 물 위에 놓인 스펀지처럼, 자신의 가르침을 모두 빨아들이는 필상을 지켜보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거참, 정말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네.’
설명 한 번이면 충분했다. 한껏 집중한 채 설명을 듣다가 “제가 한번 해 볼게요.” 하고 말한 뒤, 가르쳐 준 요리를 곧잘 만들어 내기 일쑤였던 것이다. 단연 겉모습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맛 또한 뛰어났고 말이다.
재능.
지난 며칠간, 정순오가 필상을 보며 수도 없이 떠올렸던 단어다. 이쯤 되니, 진작 요리를 배워 보라 권하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리 필상의 재능을 알아차렸더라면? 진즉 제대로 된 요리를 배울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학원을 보내든, 관련 학부가 마련되어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시키든, 빚을 져서라도 유명 요리사에게 체계적인 레슨을 받을 수 있게끔 해 주든 하는 방식들로 말이다.
‘아니지, 아니야. 괜한 욕심부리지 말자.’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변덕이 으레 그렇지 않던가? 갑작스레 불이 붙었던 것처럼, 언제 어떻게 사그라져도 이상할 게 없다. 일단 당분간은 이대로 지켜보다가, 스스로 요리를 진지하게 배워 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온다면 그때 가서 고민을 시작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봐, 정 사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간단히 걸친 소주 몇 잔 덕에 볼이 살짝 발그레해진 단골손님이 건네 온 물음이었다.
“응? 뭐가?”
이내 단골손님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어째, 아들이 내주는 음식이 훨씬 더 맛있는 것 같은데?”
같은 자리에 앉은 일행들이 저마다 몇 마디씩 거들어 주었다.
“그러게. 그나저나 아들 한번 잘 뒀어. 얼굴도 훤칠하니 잘생겼고, 부모님 돕겠다고 매일같이 식당 나와서 일손도 보태 주고···.”
“부럽다, 부러워. 대학생 된 우리 아들놈은 매일 전화해서 하는 말이 용돈 좀 부쳐 달라는 말밖에 없는데 말이야.”
그렇게 한참 동안 단골손님들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정순오가, 고개를 슬쩍 돌려서는 필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던 순간. 정순오의 두 눈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등잔만 해졌다.
“아, 아들. 너, 지금···.”
“네?”
다름 아니라, 아들의 손에 들려 있는 ‘책’ 때문이었다.
―쉽고, 빠르게 배우는 이탈리아어.
이내 정순오가 한 차례 심호흡을 해 보이고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너, 지금 설마 공부하고 있는 거야?”
“네. 한가할 때마다 틈틈이 해 보려고요.”
“마, 맙소사···.”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아들이 아니던가? 근래 들어서는 하교 후 식당 일을 돕고 있다지만,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정 무렵이 될 때까지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따금씩 처참한 성적표를 내밀며 사인을 해 달라고 할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건만···.
“여, 여보! 빨리 와 봐!”
“무슨 일이에요?”
“필상이가 지금 공부를 하고 있다고!”
“뭐, 뭐라고요―?”
다급한 걸음으로 주방 안에 들어선 권순향이, 필상의 손에 들린 책을 보자마자 “허···.” 하고 낮은 침음을 흘려 보였다. 딱 한 사람, 필상만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고 말이다.
“다들 왜 그러세요? 학생이 당연히 공부를 해야죠.”
“그래, 그렇지. 그건 그런데···.”
한 차례 어깨를 들썩여 보인 필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실은, 알아보니까 괜찮은 요리 서적들은 대부분 번역이 안 된 원서라고 하더라고요. 또 나중에 요리를 제대로 배우려면 외국에 나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외국어 공부라도 미리미리 해 둘까 싶어서요.”
이내 두 분 부모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마냥 덤덤히 받아들이고 넘기기엔, 지나치게 큰 변화인 듯 보일 따름이었다.
“그럼, 저 주문 들어오기 전까지 공부 좀 할게요.”
“응? 어어, 그래. 알겠다···.”
그렇게 대화가 일단락된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식용유 통 위에 걸터앉은 채 공부를 하고 있던 필상이, 괜히 제 머리칼을 긁적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부모님께서 보여 주신 지나치게 과한 반응 탓에,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공부 좀 하는 게 그렇게까지 놀라실 일인가···?’
필상이 갑작스레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사뭇 간단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서양 요리의 중심지라 일컫곤 하는 두 곳이다. 서양 요리의 모든 틀이 구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며, 여태껏 무수히 많은 레시피와 기법이 파생된 곳이기도 했다.
또 애초에 쓸 만한 내용을 다룬 요리 관련 전문 서적이나, 논문들이 둘 중 한 곳에서 최초 발행되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말이다.
요리에도 분명히 ‘트렌드’(*Trend)라는 게 존재한다.
요리 역시 다른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유행에 뒤처진다면 낙오되기 마련이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정보를 입수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원서를 독해할 수 있을 수준의 영어와 불어. 또, 이탈리아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보면 되는 것이지 않냐.’라고?
멍청한 발상이다. 일단 요리 서적들 중 태반이 업계 종사자들만 관심을 기울이는 ‘비인기 서적’인지라, 번역본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몹시 길뿐더러 심지어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다. 심지어 번역본이 나온다 하더라도, 실무에 대한 기반 지식이 전무한 번역가의 손을 거치는지라 오역이 섞여 있는 경우가 다분했고 말이다.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이 세 개 국가의 언어는 ‘세계적인 셰프’를 꿈꾸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 요건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만약 이 정도 노력을 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꿈의 크기를 줄이고 적당한 실력의, 적당한 요리사를 꿈꾸며, 적당량의 노력만 하며 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그 정도 각오로는 절대 세계적인 셰프라는 꿈을 이룰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한 가지 꼽아 보자면 지난 삶에서의 노력과, 오랜 유학 생활 덕에 영어와 불어는 이미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탈리아어 같은 경우 기초적인 문법은커녕, 간단한 단어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뭐,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분명 진전이 있겠지.’
한 차례 “후우···.” 하고 숨을 내쉬어 보인 필상이, 홀 벽면에 거치된 시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속에 품고 있는 꿈의 크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주어진 시간을 분 단위, 아니. 초 단위로 쪼개 써야 할 것이다.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는 것으로 정신을 다잡은 필상이, 다시금 교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늦게 나선 터라, 평소보다 퇴근이 한참 늦어졌다. 청소를 비롯한 이런저런 마감 업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자정이 넘어선 야심한 시각이 되어 있던 것이다.
“하암―”
한 차례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해 보인 필상이, 침대가 아닌 책상 앞으로 향했다. 다름 아니라, 잠들기 직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오늘부로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의 참가 접수가 마감되었으니, 주최 측 공식 홈페이지에 1차 현장 예선 관련 공문이 게시되었을 게 분명했다.
딸깍, 딸깍―
이윽고, 손에 쥔 마우스 버튼을 연신 눌러 대던 필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떴네.”
[제7회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 ‘1차 현장 예선 진행 방식 및 심사 기준’ 안내]
1. 경연 시간은 총 60분으로, 출전 선수의 용모와 복장. 조리 과정 및 위생, 자세와 태도, 준비 자세, 조리 시간, 기술, 맛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2. 참가자분들은 당일 주최 측에서 발표한 주제에 부합하는 요리를 선보여야 합니다.
또한 식재료 역시, 주최 측에서 현장에 구비해 둔 식재료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3. 단, 조리 도구는 예외적으로 개인 물품 사용을 허가합니다.
이내 필상이 미간을 살짝 꿈틀거려 보였다.
‘흠, 1차 현장 예선에서는 참가자들의 기본기를 시험해 보겠다는 건가?’
이는 ‘사전 준비’가 아예 불가능한 구조의 진행 방식이랄 수 있었다.
1차 현장 예선 당일이 되기 전까지는 주최 측이 어떤 주제를 내놓을 것인지, 또 어떤 식재료를 구비해 놓을 것인지 알 도리가 아예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미리 대책을 세울 방도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몇몇 참가자들은 미리 이 사실 탓에, 사색을 하고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기본기에 자신이 없다면, 결과를 오롯이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반면, 필상은···.
오히려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중이었다.
있는 그대로 평가받는 것.
아주 마음에 드는 진행 방식이었다.
“그래. 명색이 ‘프로페셔널’ 부문인데, 이렇게 진행해야지. 아주 깔끔하고 좋네.”
주최 측의 결정이 다른 참가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지 모른다지만, 글쎄? 적어도 필상의 입장에서만큼은 양팔을 벌려 환영해 마땅한 일이었다.
어차피 기본기라면 자신 있다. 더군다나 필상은 본래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 준비와 더불어, ‘중요한 일’ 한 가지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데, 대회 진행 방식 덕에 이제 그 중요한 일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회 준비와 동시에 진행하고자 마음먹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잠시간 제 양손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필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감각···.”
미각을 잃었던 때 이후, 요리와 오래 떨어져 있던 탓인지, 아니면 회귀의 영향 탓인지는 알 수 없다.
감각이 무뎌졌다.
칼질, 팬 돌리기 등. 반복적으로 행하던 일들은 몸이 기억하고 있다지만, 감각은 별개의 문제였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복구해야 한다. 둔해진 혀와, 이제는 전과 달리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손의 감각. 또 침전물처럼 기억의 수면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린 무수히 많은 지식들을 다시 건져 내야 하는 것이다.
회귀 이전, 전성기 시절 필상의 감각은 잘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온갖 양념과 향신료로 범벅이 된 음식 속에 들어간 식재료가 평범한 양파인지, 몹시 흡사한 맛을 지닌 ‘샬롯’인지, 혹은 ‘펜넬’인지 확실히 가려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만으로 요리를 할 수도 있었다. 알고 있는 식재료들을 머릿속에서 섞고, 조리한 뒤 꽤 그럴싸한 샘플을 뽑아낼 수 있었다. 정확도 역시 훌륭했다. 직접 조리해 보면 상상했던 것과 엇비슷한 맛을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는 오랜 시간 훈련을 반복한 덕에 얻어 낼 수 있던 감각이다.
절대 쉽게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이내 필상이 차분한 눈으로 책상 한편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의 1차 현장 예선 당일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딱 한 달 남짓.
‘한 달이라···.’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기엔 상당히 촉박한 기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 필요한 만큼의 감각을 되찾기엔 일절 부족함이 없는 기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 ‘예열’(*豫熱)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아마 예열이 완료될 무렵이면 자신의 화려한 복귀전이 시작될 것이다. 기묘한 일이었다. 주방이 전쟁터라면, 나는 패잔병 신세가 되어 전장을 떠난 패배자에 불과할 것이다.
한데, 왜일까? 도망쳐 온 패잔병 주제에 다시금 전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아니지.
달리 생각해 본다면 응당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패잔병에 불과하다지만, 아주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승부사로 살아왔으니 말이다.
이윽고.
필상의 두 눈 위에 이채가 서렸다. 주먹에 돌연 불끈, 힘이 들어갔다. 또, 연달아 스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대되네.’
서울시 전국 요리 대회의 1차 현장 예선까지, 딱 한 달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회귀해서 스타셰프』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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