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 자아비판
꿈만 꾸는 무능한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있는 것이라곤 허망한 희망뿐. 하나 나에겐 희망을 이룰 한 움큼의 재능도 없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되는 것이 없다. 머리를 쥐어 싸고 고민해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이라곤 쌓여가는 고민과 절망뿐.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나을까?
그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 없이 나를 키워준 어머니와 항상 내 편이 되어준 누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결국 오늘도 폭식을 하고 만다. 마치 화풀이를 하듯이―.
그런 나에게 남는 건, 보기 싫은 지방 덩어리뿐이다. 만약 이 지방 덩어리를 재능으로 교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교환해 줄 수 있을 텐데, 킥,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안다. 그래도 상상은 자유지 않은가.
··· 상상만은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상상하며 꿈을 꾼다. 어마어마한 재능을 갖게 되어 세상의 인정을 받는 스타가 될 나의 미래를 말이다.
··· 정말 허망하고 씁쓸한 상상이다.
# 01.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여! 강 작가! 왜 이렇게 늦었어~!”
“··· 차가 막혔었어요. 바로 들어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래~ 그래~ 우리 작가님이 원한다는데 그래줘야지. 크흐흐~!!”
“······.”
준식 아저씨는 나보다 오랜 기간 레스토랑에서 일한 베테랑이다. 원래는 나와 같은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지금은 주방에서 고기 담당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운이 좋아 기술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준식 아저씨는 내가 웹툰을 그린다는 것을 면접에서 듣고 나에게 그림을 부탁했었는데, 내 실력을 본 후 매일 같이 놀려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말 정이 안 가는 사람이다.
“그럼 강 작가! 나 먼저 가볼 테니까 늦지 말라고~~”
“예···. 알겠습니다.”
끼이익―. 탁―!
문을 나가는 그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리고 싶지만 안 된다. 그랬다간 나만 힘들어지고 기껏 자리 잡은 알바에서 잘릴 수도 있다. 지금은 돈이 필요하니까 참아야 한다. 아무리 분하고 화가 나더라도 말이다.
“x발······.”
크게 욕도 못하는 현 처지에 분노하였지만 심호흡하며 참은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나와 같은 알바들이 분주하게 이동하며 일하고 있었다.
나는 홀(Hall)이 아니었다. 홀 서빙을 하려면 얼굴이나 키가 좀 돼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주방에서 설거지를 담당하거나 청소 등을 맡고 있었다. 마침 나와 같은 청소 담당인 준수가 있었다.
“안녕.”
“어, 형 언제 왔어요?”
“지금 막. 미안하다 차가 막혔어.”
“아니에요. 저도 이제 막 왔는걸요. 그보다 아까 준식 아저씨 탈의실에서 나오던데 또 형 놀렸어요?”
“··· 뭐, 그렇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응하고 싶었지만, 표정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지 준수는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형, 사장님에게 한번 말해보죠? 저 사람 맨날 형 놀리잖아요. 저것도 하루 이틀이지 거의 맨날 저러잖아요. 그러니까―.”
“됐어. 그랬다가 일 꼬이면 어떡하려고. 나 잘리면 너 혼자 설거지하고 청소해야 하는데, 자신 있어?”
그 말에 준수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이 닫힌다. 하여튼 표정에서 모두 드러나는 놈이다.
“··· 후우. 답답해서 그렇죠.”
“나는 괜찮아.”
착한 녀석이다.
원래 잘생기고 인기 많은 녀석은 싸가지도 없고 못된 놈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는데. 이 녀석을 보면 생각이 바뀔 것 같다. 덕분에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자, 일하자 일! 오늘도 손님 많네.”
“···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같이 사장님한테 말은 해줄 수 있으니까.”
“알겠다니까.”
내가 말을 돌리자 삐지려고 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다시 픽― 하고 웃고 말았다.
***
한바탕 설거지와 청소 전쟁이 일어났다. 정말 죽을 맛이다. 손님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많아질수록 설거지와 청소는 무한대로 늘어난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아침 10시부터 시작해 3시까지 끝도 없이 일하고, 1시간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고 다시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 7시가 되어 있다. 그렇게 일이 끝나면 또다시 1시간 동안 청소를 하고 나야만 드디어 오늘의 일이 끝난다.
“고생했어.”
“형도요. 아 참! 형, 오늘 한잔할래요? 홀 애들이랑 주방 애들 모아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형도 같이 갈래요?”
“··· 미안하지만 할 게 있어서 가야 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마시자.”
“아! 맞다. 형 만화 그린다고 했죠?”
“뭐, 정확히는 웹툰이지.”
“그거나 그거죠. 그보다 만화 제목이 대체 뭐예요? 맨날 물어봐도 가르쳐주지도 않고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나, 나중에 가르쳐 줄게. 지금은 보여주기 거시기하다.”
“쳇, 꼭이에요―! 나중에 알려주면 애들한테도 다 보라고 할 테니까, 말해줘야 해요.”
“알겠어. 빨리 가봐, 애들 기다리겠다.”
“예에, 내일 봬요.”
밝게 손을 흔들고 나가는 준수 녀석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아직 버스가 오기엔 시간이 조금 있어 나는 가방에 있는 노트와 펜을 꺼냈다. 나의 필수품이다.
슥― 스슥― 슥슥⎯.
이 순간이 좋다. 그저 노트와 펜만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 순간이 말이다. 흰 종이에 펜이 선을 그리며 내가 상상한 것을 펼쳐나간다.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들이 실현되어 내 눈앞에 펼쳐져 나간다. 너무나 즐겁고 기쁘다.
“우와~ 오덕이다.”
“······.”
즐겁고 기쁜 순간은 한순간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어느새 내 뒤에는 몇몇 학생들이 지나가며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졸라 기분 나쁘다~ 하여튼 기분 나쁘다니까.”
“저런 것들은 사회에서 다 사라지면 좋을 텐데.”
“야, 병신아! 다 들리잖아. 조용히 말해.”
“뭐 어때서? 기분 나쁜 걸 기분 나쁘다고 하는데?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잖아? 말하는 것에도 자유가 있다고!”
“하, 새끼. 언제부터 그런 거 지켰다고.”
“~~ 오늘부터.”
학생들은 내가 다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떠들며 지나갔다. 나는 주먹에 힘을 꽉 주며 분노를 참아야 했다.
“······.”
나도 안다. 지금 내 모습이 사람들에겐 비호감이라는 정도는.
뚱뚱한 것을 넘어 비대한 몸과 얼굴 여기저기에 나 있는 여드름.
눈이 나빠 쓰고 있는 안경과 지저분한 머리카락.
하루 종일 일을 하며 몸에 밴 음식 냄새와 땀 냄새까지―.
내가 생각해도 비호감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는 뻔할 뻔 자였다. 그렇다 해도.
“···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끝끝내 하지 못했던 말을 나는 나중에서야 뱉고 말았다.
비참하게시리······.
이런 내가 너무 싫다.
***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께서 나를 반갑게 반겨주신다.
“아들 왔어? 밥은 먹었고?”
“··· 생각 없어요. 어머니는 먹었어요?”
“나야 먹었지. 그보다 아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알바가 힘들어서 그랬나 봐요.”
“그래······.”
“······.”
아무래도 어머니는 나를 모두 꿰뚫어 보고 있나 보다. 내가 힘들어하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내 딴에선 신경 쓴다고 생각했는데 숨길 수가 없나 보다.
‘조심해야겠어.’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아직 할 게 있어서요.”
“그래, 알겠다. 어서 들어가 봐.”
“예, 어머니도 일찍 주무세요.”
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어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들.”
“예.”
“엄마는 항상 아들 편인 거 알지?”
“··· 예.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정말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계신다.
***
“······.”
스윽― 스윽―
“··· 후우~ 됐다.”
오늘의 분량이 모두 끝났다. 이제 올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개인 블로그에 지금 그린 웹툰을 올렸다. 로딩이 끝나고 무사히 올라간 만화를 살펴보며 내가 그린 작품을 감상하였다.
“··· 스토리는 괜찮은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상상력 하나만큼은 좋은 나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는 괜찮았다. 아쉬운 것은 그림이었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예쁜 캐릭터도 아니었고, 환상적인 배경도 아니었다. 그저 볼만한 그저 그런 수준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 생각과 독자들의 생각은 같았나 보다.
― 스토리는 괜찮은데···. 작가 그림 솜씨가 영······.
― 이 작가님은 좋은 스토리도 똥으로 만드는 똥손임 ㅋㅋㅋ~!!
― 제발 학원 같은 데 가서 좀 배워요~~! 제가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진짜~~~!
“··· 배워도 안 되는 걸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나도 잘 그리고 싶다. 내가 생각한 걸 그대로 그리고 싶다. 학원도 다녔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안 된다.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나.
··· 나도 좀 잘 그리고 싶다.
“빌어먹을!”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런 날에는 한잔하고 싶다. 차라리 오늘은 휴재하고 준수를 따라갈 걸 그랬다. 그러한 답답함 때문이었는지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방문을 나갔다.
“준현아? 어디 가니?”
“···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마음이 좀 답답하네요.”
“이 늦은 시간에? 안 나가면 안 될까?”
“··· 죄송해요, 어머니. 그런데 오늘은 좀 나가야 할 것 같아요.”
“··· 알겠다. 조심히 다녀오렴.”
“예.”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지금 나가지 않으면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나에게 말이다.
왜 나는 좀 더 잘 그릴 수 없는 것일까?
왜 나는 이런 불확실한 미래를 좇고 있는 것일까?
왜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왜 좀 더 어릴 때 노력하지 않은 것일까?
많은 생각이 들었고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리고 이젠 화가 다 나려 한다.
“··· 편의점이나 가자.”
이런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화를 눌러야 한다. 금방 편의점 앞에 도착한 나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힘들게 왔는데 문이 닫혀 있다.
“··· 공사? 왜 하필 오늘인데―!?”
정말 되는 거 하나 없다. 다른 편의점을 가려면 여기서 10분은 더 걸어야 하는데 차라리 안 가고 만다! 슈퍼에서 살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래도 좋으니까 화낼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제기랄···! 왜 되는 것 하나 없냐고!!”
너무 싫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사소한 일일 뿐인데 너무 화가 난다.
나를 항상 개무시하는 준식 아저씨가 너무 미웠다. 오늘 내 꿈을 비웃은 학생들이 밉다. 발전하지 않는 내 손이 너무나도! 정말······!
밉다.
정말로 밉다.
“끄으으··· 으윽··· 난··· 대체 왜 이런 거야······!”
바보같이 눈물이 난다. 너무나 분하고 분해서 눈물이 난다. 나는 사람들이 보고 있건 말건 눈물을 흘렸다. 정말 찌질하고 병신 같지만 울고 말았다.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울분이라는 이름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툭!
“으으으··· 응?”
그렇게 한심하게 울고 있던 내 어깨를 툭! 하고 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내 어깨를 내려다보며 다시 처량하게 소리치고 말았다.
“이 장갑은 또 뭐야!!”
안 그래도 심란하고 슬픈데 장갑은 또 뭔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장갑이었는데 내 눈에는 지금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바로 가죽 장갑을 들어 던져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핸드라고 해요~! 당신의 새로운 손이 되어 드릴게요!]
“··· 어?”
[링크를 시작하겠습니다. 1.2.3.4.5―! SUCCESS!! 무사히 링크가 완료됐습니다.]
“··· 뭐?”
[완료됐습니다.]
“··· 뭐?”
[후후후―.]
“뭐, 뭐야 이거······.”
기적과도 같은 만남의 시작이었다.
# 02.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삐삐삐―!
아침을 알리는 벨소리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벨소리를 끄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 아침인가.”
비대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샤워실로 향했다. 일단 물을 좀 빼고 물을 틀어 손을 씻은 후 세수를 하였다. 찬물로 세수를 하자 그제야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개운해지는 것 같다.
“후우~ 점점 일어나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아.”
일어났을 때보다 말짱해진 정신을 가지고 부엌으로 향하였다. 부엌에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과 쪽지가 하나 있었다.
[아들. 엄마 일 나갔다 올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해~ 알겠지~! ―아들을 항상 사랑하는 엄마가―]
“애도 아닌데. 이게 뭐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기뻤다. 동시에 미안했다. 어제 어머니는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셨을 거다. 그리고 이 못난 아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쪽지를 남겨주신 거다. ··· 가장 힘드신 건 어머니면서.
“··· 내가 좋아하는 반찬밖에 없네.”
계란말이와 돼지고기를 송송 썰어 넣은 김치찌개가 상을 채우고 있었다. 가짓수는 얼마 안 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밖에 없었다.
“··· 잘 먹겠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상을 차려주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계란말이를 집어 들었다.
“자 어디······. 어?”
순간. 계란말이를 집은 내 왼손이 보였다. 참고로 나는 왼손잡이다. 그리고 장갑 같은 건 절대 끼지 않는 사람이다. 애초에 가죽 장갑 같은 것도 키우지 않았다.
한데.
“··· 뭐야 이거?”
난 장갑을 끼고 있었다.
***
“내가 이런 걸 언제 꼈지?”
나는 장갑 끼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 유명한 시베리아 한파에도 절대 장갑은 끼지 않았다. 왠지 불편했고, 답답하기 때문이다. 한데, 장갑이 버젓이 내 왼손에 끼어져 있었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굳어있었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일단, 빼자.”
언제 장갑을 낀 건지. 이 장갑이 어디서 난 건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장갑을 벗으려 하였다. 안 그래도 나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왜, 왜 이래 이거!?”
한데 벗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고 애를 써도 벗겨지지 않는다. 마치 내 살과 장갑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순간 나는 공포를 느꼈다.
장갑 안에 본드가 묻어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아니면 뭔가 특수한 장갑이라 벗기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점점 불안해지고 있는 나와 다르게 장갑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이제 알바 갈 시간인데 왜 이렇게 안 벗겨져!!’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난 장갑을 제쳐놓고 일단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장갑도 장갑이지만 어머니가 정성 들여 차려준 밥상이었다. 남길 수는 없었다.
빠르게 밥 한 공기와 계란말이를 싹쓸이한 나는 물을 마시고 바로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도 버스를 놓치면 준식 아저씨가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랐다.
허겁지겁 나온 난 아슬아슬하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였고, 다행히 버스에 착석할 수 있었다.
“후우― 큰일 날 뻔했다.”
아침부터 전력 질주를 하느라 벌써부터 체력이 방전된 것 같다. 괜히 몸만 아프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람······.’
버스 안에서도 장갑을 벗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틈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그냥 손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점점 마음속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대체 언제지? 내가 언제 이런 걸······?’
의문이 계속되고 있을 때. 곧 목적지에 도착한 난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미칠 듯한 불안감이 계속 밀려왔지만 알바에 지각해서 욕먹는 것보단 났다.
한껏 피곤한 얼굴로 들어온 나를 보며 준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아침부터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요?”
준수의 말에 나는 아침부터 있었던 황당한 얘기를 들려주기로 하였다. 안 그래도 답답해 미치겠는데 누구에게 토로해야 그나마 괜찮을 것 같다.
“그게 말이야, 이 장갑이······.”
“장갑? 장갑이라뇨? 장갑이 어디 있는데요?”
“··· 뭐?”
“형, 장갑 가지고 왔어요?”
“······.”
준수는 분명 내 왼손을 보고 있었다.
***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 내 왼손을 보여줬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나를 이상하게 보거나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나중에는 준수가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에는 검은 가죽 장갑이 똑똑히 보인다. 한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걸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진짜 아픈 건가?’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고 무리를 했더라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헛것이 보이다니―. 진짜 뇌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걱정은 뒤로 미뤄놔야 했다. 주방 매니저 아영 누나가 말했다.
“준현아, 너 오늘 콜드(Cold) 쪽으로 좀 가야겠다. 단체 손님이 올 예정이라서 손이 부족해.”
“제가요!? 저번에 했다가 저 사고 쳤잖아요. 아무래도 전―.”
“그래도 해본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걱정 마. 할 수 있을 거야.”
“그, 그래도.”
“미안한데 나 지금 바빠서. 어쨌든 부탁한다.”
“아! 아영 누나!”
그대로 사라지는 아영 누나를 보며 난 미치는 줄 알았다. 고기 쪽인 핫(Hot)으로 안 가는 건 다행이지만, 생선이나 면 등의 섬세한 손재주를 요구하는 콜드 쪽은 고기보다 더 난감한 곳이었다. 저번에도 콜드 쪽으로 갔다가 실수투성이여서 오만 욕은 다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아 진짜. 미치겠다!’
속이 타들어 갔지만 더는 불만을 토해낼 수 없었다. 어찌 됐건 나는 알바생이고 그녀는 주방 매니저였으니까. 까라면 까야 했다.
내가 콜드 쪽으로 이동하자 몇몇 사람이 초반부터 미간을 모았다. 아무래도 전적이 있으니 믿음이 안 가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콜드 쪽을 총 관할하고 있는 호영 아저씨만은 사람 좋은 미소로 날 반겨주었다.
“준현아 잘 왔다. 오늘 잘 부탁하마. 그리고··· 저번처럼 실수하면 안 된다. 껄껄껄~”
농담조로 말하며 긴장을 풀어주려 하는 것 같긴 한데, 오히려 더 긴장된다. 호영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지만 일을 시작하면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지는 사람이다. 만약 저번처럼 실수하면 호영 아저씨의 보살 같은 미소가 염라대왕처럼 변할 거다.
긴장감 속에서 나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일이 시작되었다.
***
[1번 테이블에 크림 파스타 둘. 랍스타 샐러드 하나!]
[3번이랑 4번 연어 초밥 각각 둘에. 오징어 먹물 두 개. 3번 테이블에서 연어 초밥 위에 소스는 따로 달라고 합니다.]
[7번 테이블 주문 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스피커를 통해 신속히 전해지는 주문과 명령. 귀를 곤두세우며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요리를 진행하는 사람들까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기본 세팅과 접시를 나르는 등의 가벼운 일만을 하고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진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으으으!! 지, 진짜 죽을 것 같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더욱 위가 아파왔다. 아침에 먹었던 게 모두 쏟아질 것 같다. 하지만 아직 고비는 끝나지 않았다.
“준현아! 손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네가 기본 플레이팅만 좀 해놔라! 저번에 내가 가르쳐 준 거 기억하고 있지!”
“예? ··· 아 예!”
“좋아. 간단하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탁한다!”
“아, 알겠습니다······.”
‘부탁’이란 말이 왜 이리 부담스러운지 모르겠다. 곧바로 줄지어진 접시의 길을 보며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플레이팅하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일단 정해진 방식이 있기 때문에 큰 기틀만 같다면 약간 다른 정도는 흠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일부러 흠을 만들면 안 된다. 접시 안에 그림을 그리듯 보다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최선을 쏟아부어야 한다.
사람이 예쁘고 멋있어 보이게 화장을 하는 것처럼!
“··· 후! 됐다.”
예전보다는 괜찮은 것 같다. 그때는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을 거다. 다행히 지금은 예전보다 손이 빨라졌고 보다 질이 올라갔다. 그러나.
‘빨리 할 수가 없어!’
늦어도 3분 안에는 여기 있는 접시를 모두 플레이팅해야 했다. 하지만 미숙한 내 기술로 그것이 가능할 리 없다. 내가 호영 아저씨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 미치겠네. 이걸 대체 어느 세월에 하지.’
[지금부터 보조에 들어가면 될까요?]
“···? 응?”
[이미지(Image) 해주세요. 상상하는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예요.]
“··· 뭐, 뭐야 이게?”
머리에서 고아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어젯밤.
나는 단아하며 고아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나는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운 나와 달리 자신을 ‘핸드’라고 소개한 그, 아니 그녀가 말했다.
[마스터를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마스터와 저는 이제부터 운명 공동체예요.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언제든지 힘이 되어 드리겠답니다.]
“······.”
[아, 참!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가르쳐 드릴게요, 일단 저는―.]
“··· 내가 많이 피곤했나? 이제 헛소리까지 들리네?”
[··· 마스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진짜 힘들었나 봐······.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마스터······?]
“마하반야바라심경······.”
[······.]
***
“······.”
[그 뒤로 제 말에 응답도 안 해주시고~! 너무해요. 마스터!]
“어, 어제 그, 그게, 헛소리가 아니었다고?”
[헛소리라니요! 저는 핸드라고요! 마스터를 위해서 힘이 되어드리는 핸드!!]
“··· 그게 뭔데?”
[후후후! 드디어 궁금해지셨군요. 저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마스터가 이미지 하는 모든 것을요~! 원하신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고요~!]
“예를 들면?”
[예를 들자면······.]
“강준현! 빨리해! 언제까지 꾸물거릴 거야!”
“!! 아, 아! 죄, 죄송합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핸드’라는 녀석의 목소리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말이다. 다시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끝도 없이 이어진 접시의 행렬.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깜깜한 현실 속에서 다시 핸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지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대체 뭘 이미지 하라는 건데?!”
[무엇을 이미지 해도 상관없어요. 일단 상상력이 중요해요. 마스터가 접시를 채워가는 상상을요. 만약 그게 안 된다고 하면 다른 사람도 괜찮아요. 예를 들어··· 저기 있는 정호영이라는 사람을 이미지 하셔도 돼요.]
“··· 그, 그러니까··· 상상만 하면 된다고?”
[예. 나머지는 모두 제가 커버해 드릴게요.]
“······.”
평소였다면 이런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급했다. 마음도 정신도 몸도 말이다. 그리고 결국 핸드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 일단, 한번 믿어볼게.”
[후회하시지 않을 거예요.]
“······.”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는 상상했다. 내가 플레이팅을 하는 상상이 아니었다. 바로―.
‘호영 아저씨.’
내가 아는 한 가장 빠르고 섬세하게 플레이팅을 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내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작할게요.]
내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 03. 내 손에서 기적이 펼쳐진 날
파스타를 맡고 있는 기진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저 형, 진짜 괜찮을까?’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형이다. 둔한 데다 손까지 느리다. 민폐만 끼치고 실력도 없다. 솔직히 좋아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양반이다. 기진은 찜찜한 기분에 자꾸 눈을 흘기며 슬쩍 그를 보았다.
‘저번에도 내가 저 형이 똥 싼 거 치웠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아주 따져서라도··· 어?’
기진은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플레이팅 된 접시를 말이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열 접시 전부가 말이다.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기진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준현을 보았다.
***
‘빨라! 빠르다고!’
[마스터. 이미지를 멈추시면 안 돼요.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요.]
‘아, 아! 미, 미안······.’
[괜찮아요. 마스터가 실수해도 제가 다 커버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고, 고마워.’
[천만에요~!]
내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남의 손 같았다.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일절 실수도 없다. 어느새 빈 접시는 사라져있었다.
‘··· 내가 이걸 해냈다고?’
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왼손에 있는 검은색 장갑··· 아니 ‘핸드’를 보았다.
‘너··· 는 대체······.’
[후후후~! 마스터!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답니다. 방심은 금물이에요!]
‘어, 어··· 아, 알겠어.’
그녀의 충고를 나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날 나는 주방에 있는 누구보다 완벽하고 빠르게 일을 하고 있었다.
***
“오늘 정말 잘해줬다. 아주 잘하더구나.”
“그, 그냥 뭐··· 운이 좋았어요.”
“하하, 그게 운이라고? 농담도 잘하는구나. 준현아··· 나를 속일 필요는 없단다.”
“!? 예에?! 무, 무슨!?”
“이 녀석! 혼자서 열심히 연습했었구나! 껄껄껄! 녀석, 저번에 실수하고 노력 많이 했구나. 기특한 녀석 같으니~!”
“아아아··· 예, 예, 뭐 그, 그렇죠. 하하하······.”
순간 핸드에 대해서 들킨 줄 알았다. 하지만 호영 아저씨는 내가 열심히 연습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쿡쿡 찔린다.
‘왠지 치트키를 쓴 느낌이란 말이지.’
내가 하긴 했지만 내가 안 한 것 같은 느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비겁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꼼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상을 하였고,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 신기했어.’
파스타를 담을 때는 호영 아저씨를 이미지 했다.
재료를 다듬을 때는 가장 손이 빠른 창호 아저씨를.
루를 만들 때는 미영이를.
접시를 세팅할 때는 기진이를.
가장 일을 잘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이들만을 이미지 하였다. 그러자 할 수 있었다. 수전증이 있던 사람 마냥 떨리던 손도 떨리지 않았고, 호흡이 가빠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평소였으면 곡소리가 나왔을 텐데 몸이 오히려 가벼웠다.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단아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당연해요. 마스터가 이미지 한 사람들은 흔히 맡은 일에선 프로라고 할 수 있는 이들밖에 없었어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는 이들을 흉내 냈으니 체력도 별로 떨어지지 않는 거죠~]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냥 상상했을 뿐인데. 그 정도로 흉내 낼 수가 있는 건가?’
[인간의 뇌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저장한답니다. 무엇보다 마스터는 이곳에서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관찰하고 보게 되었을 거예요. 아무리 겉핥기식으로 봤다고 해도 뇌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저는 마스터의 상상과 뇌가 저장한 기억을 최대한 정리하며 도움을 드린 거지요.]
‘그,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뇌가 저장한 기억을 이용한다니. 현대의 과학기술론 불가능한 일이다.
‘··· 아니면 내가 몰랐을 뿐이고. 원래 가능했다는 건가?’
NASA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워낙 숨기는 게 많은 곳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불가능한 일일 텐데? 대체 얘는 뭐지?’
[핸드입니다.]
‘··· 내 생각을 읽지 말아줄래?’
[저와 마스터는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는 마스터에게 해가 될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요.]
‘······.’
진짜 얘는 뭘까?
***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계속해서 핸드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너는 뭐고 대체 정체가 뭐냐?’
‘혹시 외계인이나 귀신이 아니냐.’
‘무슨 과학 단체에서 만들어진 무기가 아니냐.’는 등 무수한 질문을 날렸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그저―.
[핸드입니다.]
― 가, 전부였다. 그 뒤로도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먼저 포기한 건 나였다. 아무리 물어봐도 핸드라고만 하니 무슨 방법이 없다. 그래서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너를 벗을 수는 없는 거야?”
[··· 음. 마스터의 손이 잘리거나 생을 마감하신다면 가능은 합니다만······.]
“응, 벗지 말란 거구나.”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세균이 생기는 즉시 박멸하고 있답니다. 항상 청결을 유지하니 왼손의 건강은 걱정 마세요.]
“그, 그래. 고, 고맙다. 하, 하하하······.”
[별말씀을요~]
도저히 내 말뜻이 전해지지 않는다. 뭐, 일단 그건 됐다고 치고.
“너는 어떤 걸 할 수 있는 거야? 무슨 기능이라도 있어?”
[뭐든지요. 마스터가 상상하는 모든 게 가능하답니다. 물론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만요.]
“손······?”
[예를 들자면 아까와 같은 경우를 생각하시면 돼요. 이미지 하는 것으로 주방 일을 했듯이 원하신다면 요리를 하실 수도 있어요. 물론 이런 경우엔 방대한 상상력이 필요해요. 요리라는 건 단순한 일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과 경험이 필요하니까요. 아무리 이미지 해도 최대한 겉모습만 똑같지 진짜 요리는 되지 못하죠.]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말이야. 그림 같은 것도 가능한 거야?”
난 지금까지 가장 궁금했고 기대한 부분을 살며시 물어보았다. 그리고 핸드는 내가 기대한 이상의 대답으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예술적인 부분은 저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어요! 원한다면 그림, 조각, 원예, 목공, 서예부터 시작해 무엇이든지 가능하―.]
“대박!”
핸드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할까.
나는 얼른 확인해보고 싶다는 다급함에 피곤한 것도 잊으며 뛰었다. 평소 빠르게 뛰면 무릎이 시려서 잘 뛰지 않았는데 지금은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
그 말이 고통조차 잊게 하였다.
***
어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저 얼른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타블렛을 보며 펜을 쥐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똑같아요. 이미지 하세요. 마스터가 그리고 싶은 것을요. 그럼 나머지는 이 핸드가 도와드릴게요.]
“아, 알겠어.”
두근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능을 보았을 때보다 더 떨렸고, 처음으로 야동을 보았을 때보다 흥분됐다.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가, 간다!’
이미지 하였다.
지금껏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 캐릭터를 상상해본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모두 상상했다.
내가 원했던 깨끗하면서도 화사한 분위기의 배경을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다.
상상하는 것만이 한계였고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세상을 이미지 하였다.
내가 원하는 주인공은 잘 생기기보단 남자다우면서도 어딘가 날카롭게 생긴 청년의 모습이었다. 곧은 눈동자와 의지를 품은 검은 눈동자. 굳세게 닫힌 입과 두터운 눈썹. 피부는 구릿빛이 감도는 건강한 피부색이었다. 분위기는 진중하면서도 믿음직스러워야 했다. 다른 이에게 신뢰를 주고 누구에게나 용기를 북돋아 줄 그런 남자 말이다.
세상은 무인도였다. 험악한 짐승들과 우거진 숲이 가득한 정글 같은 무인도. 내가 원하는 무인도는 초록색만 찍찍 바른 그런 정글이 아니다. 실감 넘치고 색감이 살아있는 그런 정글을 원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그리려고 해도 불가능했고. 도저히 손에 닿지 않았다. 어떤 프로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이상향을 펼쳐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현직 작가들도 해내지 못할 그런 이상향이―.
“···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에서 펼쳐졌다.
***
이건 기적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손으로 해냈다. 지금까지 상상만 했고 계속 원했던 세상이 펼쳐졌다. 꿈이 아닌지 의심부터 갔다.
짝―!
“··· 아프네.”
뺨을 때려보았다. 꼬집어보기도 하였다. 일어서서 방방 뛰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느껴진다.
아픔이― 고통이― 감각이―!
이건 꿈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었다.
“··· 지, 진짜로 이걸 내가 그린 거··· 맞지?”
[그럼요. 마스터가 그리신 거예요.]
“내, 내가 해낸 거 맞지?”
[예에! 해내셨답니다.]
“···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벌컥!
“무슨 일이니!?”
“준현아?”
어머니와 누나가 방에 들어와도 나는 함성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기뻐서.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난 멈출 수 없었다.
핸드가 무엇이든 이제 상관없다. 악마여도 상관없고, 무기라 해도 상관없다. 절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핸드는 나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진 보물이었으니까.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함성을 질렀다.
# 04. 만화로 배운 복싱도 쓸 만하다
핸드가 준 행복은 하루가 지나가도 내 입꼬리를 내려가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없이 풍족해지는 충족감 때문에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진짜 대박이다! 대박이라고!’
“형? 좋은 일 있어요?”
준수가 보기에도 내 기분이 좋아 보이나 보다. 하긴 내 스스로 주체가 안 되는데 어쩌겠는가.
“그냥, 조금 좋은 일이 있었어.”
“에이이이~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말해봐요.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알아야죠. 궁금하게.”
“하하하. 나중에 말해줄게.”
‘말해도 믿어줄지도 의문이지만.’
핸드에 대해 말해도 믿어주기는커녕 미쳤다고 정신병원에 전화나 안 하면 다행일 거다. 지금은 그냥 대충 둘러대고 시치미 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준수는 내 변명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를 계속 채근하며 장난을 쳤다. 나도 기분이 좋아 장난을 받아주며 어울렸는데 순간 호통이 들려왔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일 안 하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아! 알겠습니다.”
“예에!”
“자식들이 말이야! 빠져가지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준식 아저씨는 시비를 연달아 걸며 눈을 흘겼다.
‘왜 이러지 이 인간?’
장난을 쳤다 해도 너무 과민 반응이었다. 솔직히 억지에 가까운 태도다. 이미 손님들도 빠져나가는 분위기였고, 주방이나 홀도 대부분 여유로운 분위기다.
한마디로 이건 생떼다.
“갑자기 와서 웬 시비래? 자기도 쉬고 있으면서.”
“나도 몰라. 그리고 평소에도 시비조인 사람이잖아. 이상할 것도 없지.”
“그렇긴 한데······.”
“아까 주방 매니저님한테 혼났거든. 그래서 저래.”
“응? 아, 은비구나.”
평소 주방에서만 살고 있는 그녀가 조금은 여유가 있는 것인지 다가왔다. 준수와 꽤 친하게 지내는 그녀는 자주 우리··· 라기보단 준수에게 말을 거는 편이었다.
준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응? 혼나다니? 무슨 일 있었어?”
“준식 아저씨가 스테이크를 여러 장 태웠어. 만약 바빠서 실수한 거면 넘어가겠는데. 고기를 태운 이유가 어이가 없는 거여서.”
“뭔데?”
“들어온 손님 중에 모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보러 갔다나 봐. 그래서······.”
“헐~ 미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나도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평소 성격은 모나지만 일할 때만큼은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자리를 따냈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이제 더 떨어질 감정도 없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래에는 아래가 있는 법인가 보다.
‘··· 됐어, 저런 인간에게 신경 쓸 시간도 아까운 법이야.’
그 생각을 끝으로 난 준식 아저씨에게 신경을 껐다.
***
평소라면 일이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다름 아닌 연말 회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아직 많은데.’
어제는 기본적인 캐릭터만 그려보았다. 이제는 흐름과 구성을 생각하며 그려볼 생각이었다. 추가로 데생을 넣어보며 네임을 그려볼 생각이었으나······. 여기서 빠지면 눈치 없는 놈 되는 것이고 사회성 없는 놈이 되는 거다. 여기선 조용히 참가하는 것이 맞다.
‘··· 핸드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참지 뭐.’
그리 생각하며 가벼운 실소를 흘릴 때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수야. 우리 같이 C월드 가자~ 재밌을 거야.”
“그래 애들 모아서 다음에 가자.”
“에이, 그러지 말고 둘이서 가자.”
“어? 아니, 그래도 둘이서는 좀······.”
“에이이이이~ 같이 갈 거지?”
“어? 어어··· 하하.”
민지는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애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애였다. 홀 서빙을 하고 있는 애였는데 생긴 것도 예쁜 데다 귀염성도 넘쳐서 손님 중에 민지를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을 정도였다.
최근 준수는 민지에게 노골적으로 대시를 받는 중이었다. 민지를 노리던 남자 스텝들은 부러워 죽으려 하지만 준수는 난감하다며 웃음만 흘렸다. 솔직히 왜 저렇게 거부하는 태도인지 모르겠다.
‘선남선녀라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잘 어울리는 커플이 사귀면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은 별다른 질투심이나 감정은 없기에 두 사람의 연애를 응원하는 쪽이었다.
‘뭐, 내가 낄 일은 아니니까.’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시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을 때, 아영 누나가 다가왔다.
“준현아, 혼자서 마시면 맛있어~? 누나도 좀 주라~!”
“··· 아영 누나. 취했어요?”
“아니, 안 취했는데~~”
안 취했다는 사람이 왜 혀가 꼬부려지고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카리스마 있고 단호한 말투인 그녀가 술만 마시면 저렇게 되는데,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회식에 참가한 사람 중에는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참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역시 술이 원수라니까.’
내가 쓰게 웃으며 술을 건네자 그제서야 아영 누나가 얌전해졌다. 누나는 내 앞에서 얌전히 술을 마셨는데 난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 누나도 이상해. 왜 나 같은 놈한테 매일 말을 걸어주는 건지······.’
나도 이미 안다. 내가 호감이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과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도. 그나마 준수나 호영이 아저씨가 가끔 말을 걸거나 소소한 장난을 쳐줄 뿐이지 그 이외의 사람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나마 나이대접해 준다고 인사를 해주는 정도?
한데 아영 누나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 대해줬고,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주며 가끔 연락도 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상이었기에 금방 지워버리고 말았다.
‘저 누나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을 좋아하겠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듣기로는 외국 미슐랭 스타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재벌들에게 전속 요리사가 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밥 먹듯이 받았다고 한다. 영어는 기본이고 추가로 6개 국어가 가능하다고 한다. 정말 끝내주는 스펙과 능력이었다.
그뿐 아니라 3년 만에 레스토랑을 지금의 자리에 앉힌 것도 그녀의 능력이라고 한다.
뛰어난 능력과 압도적인 스펙, 우월한 외모와 몸매. 그리고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면서 레스토랑에 넘버 2라는 점까지! 남녀 구분 없이 그녀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민지가 남자에게 인기 많은 여자 아이돌 같은 느낌이라면, 아영 누나는 누구에게나 동경 받는 여배우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되었다.
‘··· 약간 부담스럽네.’
이러한 대단한 이가 관심을 주니 내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거부하는 것도 실례되는 일이니 뭐라 할 수도 없다.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던 중 그녀가 운을 떼며 입을 열었다.
“들었어, 너 이번에 잘했다면서? 호영 아저씨가 칭찬하더라.”
“··· 뭐, 운이 좋았지요.”
“운은 무슨! 그게 운으로 될 일이니. 열심히 연습해야 되는 일이지. 이 누나도 알아, 그게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건지.”
“하하하··· 감사합니다.”
“히히히~ 준현아! 이 누나는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노력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주면 좋겠어. 알겠지~?”
“··· 알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그래~! 이 누나가 응원할게.”
마음이 따스해졌다. 부담스러운 건 똑같지만 이렇게 응원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준현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고마움을 미소로 표현하며 다시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여~! 강 작가~!”
하나 훈훈한 공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 명의 훼방꾼의 등장으로 말이다. 술에 잔뜩 취한 준식 아저씨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강 작가~! 요즘 필 받았나 봐~? 일 잘한다며. 그런데 너는 꿈이 웹툰 작가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그림 그리는 걸 노력해야지, 왜 다른 거에 힘을 쏟아붓고 있는 거야? 이제 꿈은 포기한 거야~~? 아하하!!”
“······.”
“하긴 재능이 없으니까 때려칠 때가 됐지~ 재능 없는 놈은 뭘 하든 안 되니까~! 안 그래~? 하하하!!!”
동의를 구하고 하는 말이라면 이 아저씨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좋았던 분위기가 날아갔다. 훈훈했던 공기도 싸늘해졌다.
싸늘한 공기는 점점 주변으로 퍼져나가 아영 누나의 눈을 치켜뜨게 하였다. 준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하였고 호영 아저씨의 눈썹을 떨리게 하였다.
주변 사람의 눈초리 또한 좋지 않았다. 준식 아저씨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 안타까워서! 정말 이제 다른 꿈 찾아봐, 너 재능 없어. 그냥 다 때려치우고 공장이나 들어가서 일하는 게 너한테 좋은 일이라니까! 내가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
“마준식 씨. 닥치고 꺼져요! 분위기 흐리지 말고.”
“이라···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고 꺼지라고 했어요. 왜요? 귀가 잘 안 들려요?”
“아, 아영이 누나.”
“아영 씨······.”
사람들이 기겁했다. 순간 폭언에 가까운 아영 누나의 말에 영하까지 내려갔던 온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준식 아저씨의 얼굴 온도는 폭염에 가깝게 올라가며 붉어질 대로 붉어지고 있었다.
“너, 너, 너너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고 꺼져? 이 나이도 어린 게 어디 어른한테―.”
“어른도 어른 같아야 대접해주는 거예요. 나이 먹은 거? 벼슬 아니에요.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어야 대접해주는 거지요! 그리고 마준식 씨는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 어른이 아니고요. 그러니까 제발 닥쳐주세요!”
“이, 이이이이!! 어린년이 어디서―!”
“그러는 당신은 왜 막말인데! 나보다 직급도 낮은 인간이!? 직급대로 따져 볼래?”
숫제 반말까지 나왔고 준식 아저씨는 손이 나가려 하였다.
“이게―!!”
“자! 자자! 진정하고! 두 사람 다 그만 흥분해. 그리고 아영아, 말이 너무 심하다. 그래도 어른한테.”
“······.”
주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른인 호영 아저씨에 만류에 아영 누나도 더 말하지 못하고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준식 아저씨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비릿한 눈으로 아영 누나를 보며 다시 입을 떼었지만······.
“거 봐, 호영이 형님도······.”
“닥쳐라가 뭐냐. 그냥 입을 다무세요~ 하고 정중히 말해야지. 그래도 예의는 차려서 말해. 알겠지?”
“!?”
“풋! 아, 알겠어요. 후후.”
“!!”
준식 아저씨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주변인들은 뭔가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호영 아저씨와 아영 누나를 보았다.
자신의 편이 없다는 걸 깨달은 준식 아저씨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거칠게 뛰쳐나가며 욕을 퍼부었다.
“에이 x발! 뭐, 이런 x도 없는 개 같은 x발!!”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갖가지 욕을 내뱉으며 준식 아저씨가 식당을 나갔다. 그 누구도 나가는 준식 아저씨를 잡지 않고 통쾌한 웃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아영 누나는 멍하게 있던 나에게 브이를 하며 멋진 미소를 보였고 나도 그런 누나를 따라 웃음을 머금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내일부터 어떻게 보시려고······.”
“됐어, 어차피 그 양반 이번에 사장님이 자르기로 했으니까.”
“예!?”
그녀의 폭탄선언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스텝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아영 누나는 새삼스럽게 뭐냐며 우리를 보았다. 그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 양반 솜씨도 괜찮고, 경력도 오래된 거야, 나도 알고 사장님도 알고 있지, 그래도 인성이 글러먹었잖아~? 너희도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지 저 아저씨가 준현이 무시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지?”
[······.]
“추궁하는 거 아니야. 그냥 확인하는 거지. 뭐, 반응을 보니 다 알고 있던 모양이네. 어쨌든 저 아저씨가 물 흐리고 있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준현이한테 그러는 것도 있었고, 여자 알바한테 찝쩍거린다는 것도 들었어. 들어보니까, 저 아저씨가 성희롱했다는 말도 있던데. 진짜야?”
그 말에 우물쭈물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손을 들며 말했다.
“지, 지금은 그만뒀는데. 보영이라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걔가 홀에서 서버 하던 애였는데 걔 엉덩이 슬쩍 만지는 거 본 적 있는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저도 예전에―.”
“분명 그때―.”
사람들의 폭로전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많은지 듣기도 힘들 정도였다. 설마 이 아저씨가 이 정도로 많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 줄은 몰랐는지, 아영이 누나도 그렇고 호영이 아저씨도 그렇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작 잘랐어야 했구먼.”
“이 아저씨 진짜 막장이었네.”
“······.”
듣고 있던 나도 놀랐다. 설마 이 정도로 민폐를 끼치고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잘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이 아저씨 잘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감방 들어가는 거 아니야?’
왠지 모르게 생각만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었다.
***
파란이 있었던 회식이 끝나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난 곧바로 정류장을 향해서 뛰었다.
‘빨리 가서 시험해봐야지!’
빨리 뛴다고 해서 버스가 빨리 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계속 움직이고 싶었던 손이었다. 일 초라도 빠르게 움직여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내 손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말이다.
“헥, 헤헥, 헥헥! 다, 다른 건 모르겠고. 운동도 해야겠다. 체력이 이래서야―.”
건강이 곧 모든 것이라 했다. 그림은 이제 핸드 덕분에 해결됐다 해도 몸이 엉망이면 비극이 생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출렁이는 살을 이제는 없애보고 싶다.
‘나도 건강한 몸 좀 가져봐야 하지 않겠어. 이제부터 운동이다!’
“야! 강준현!”
“······?”
“너 때문에 내가 진짜! 너 오늘 내가 가만 안 둔다!”
“!?”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사람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아까 전만 해도 회식 자리에 있다 암묵적으로 쫓겨난 준식 아저씨였다. 준식 아저씨는 어디서 가지고 온 건지 모를 쇠 몽둥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아저씨의 눈은 심하게 풀려 있었고,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난 한 것도 없는데 왜 저 지랄이야!?’
자기가 먼저 시비 걸고 다른 사람한테 욕먹었으면서 자신에게 분풀이하러 오다니.
‘뭐, 저런 양반이 다 있어!’
내가 어이없어 할 때 준식 아저씨는 버럭, 하고 소리 지르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너 이 새끼 거기 가만있어라 x발!”
“제, 젠장!”
후욱―!
나는 머리 위를 지나가는 몽둥이를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준식 아저씨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준식 아저씨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거기서 이 새끼야!!”
“왜 나한테 난리에요!”
“네가 다 나빠! 이 새끼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이러다간 진짜 큰일이 날 것 같다. 그때.
[아무래도 마스터의 체력과 속도론 저자를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아요. 싸우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뭔 소리야! 내가 어떻게 싸워!”
자랑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 격투기를 배워본 적도 없다. 그런데
싸우라니.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걱정 마세요 마스터. 마스터께서는 여유롭게 이미지만 해주세요. 저번처럼만 하시면 돼요.]
“저, 저번처럼!?”
[예. 이미지 하세요. 잘 싸우는 상상을 하셔도 돼요. 아니면 누군가의 흉내를 내도 된답니다.]
“휴, 흉내.”
순간 떠오르는 한 가지 이미지. 그리고 떠오른 이미지가 내 몸을 움직였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내가···. 어? 하! 너 지금 뭐 하냐?”
“그, 글쎄요?”
“이 새끼가 복싱 자세를 잡아? 왜? 나 이겨보려고?”
“··· 모, 모르겠는데요.”
“이 새끼가!!”
후웅―!
다시 휘둘러오는 몽둥이.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이미지를 멈추지 않았다. 그건―!
‘잽!’
훅!
주먹을 뻗었다.
# 05. 인터넷 스타가 되던 날
퍽―!
“꺼억―!”
“!?”
후욱― 퍽!
후욱― 뻑!
훅― 퍼벅!
주먹이 움직였다.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빠르고 힘 있게! 멈추지 않고 뻗어갔다.
주먹은 쉼 없이 준식 아저씨의 얼굴을 타격했다. 가벼운 잽일 뿐이었다. 한데도 준식 아저씨는 피하지 못했다. 맞으면서도 독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는데 바람을 가를 뿐, 나는 손이 가는 대로 공격을 피했다. 내가 마치 프로 복싱 선수가 된 느낌이다.
‘난 한 번도 복싱을 배워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전에 내가 이미지 한 게 되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이미지 한 것은 복싱이었다. 싸움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기도 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복싱을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보았던 그 만화의 주인공은 키도 작고 성격도 유약했지만. 강한 주먹과 근성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엔 챔피언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미지 한 복싱. 즉 선수의 이미지는 그 만화 주인공의 이미지였다.
‘이게 되네?’
잽을 쓰다가 라이트 레프트를 찔렀다. 그다음엔 스트레이트를. 그 후에 훅을.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총동원해서 가격했다. 준식 아저씨가 실 풀린 인형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눈이 풀려가고 있을 때. 난 마지막 일격을 넣었다.
“!”
이를 악물고 넣은 가젤 펀치! 주먹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으로 알았다. 이건 제대로 들어갔다.
쿵!
준식 아저씨는 눈이 뒤집히는 동시에 몸을 허우적거리며 다운됐다. 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주먹을 보았다. 워낙 연약한 피부여서 그런지 살이 까지고 갈라져 있었지만 괜찮았다. 따끔거리는 고통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이긴 거다.
“이겼다아아아아!!!!”
지금까지의 모든 울분이 담긴 주먹으로 그를 이겼다. 모든 걸 갚아주었다. 너무 속이 시원했다. 경찰서에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의 감동을 즐기고 싶었다.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거리에는 CCTV가 작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먼저 폭행을 가한 것은 준식 아저씨라는 것이 판단되었고 나는 정당방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나 너무 심하게 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조금 다툼이 있었는데, 누구에게 연락을 받고 온 건지 아영 누나와 호영이 아저씨 그리고 사장님이 와서 진술을 해줬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온 나를 사람들이 걱정해주었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미안해. 괜히 내가 자극해서―.”
“아니야. 저 아저씨가 이상한 거지.”
“내가 잘 합의했으니까 너한테 불똥 튀길 일은 이제 없을 거다. 그러니까 이제 너무 걱정 말거라.”
“감사합니다.”
“그보다 준현아. 진짜 네가 준식이 아저씨 제압한 거야? 흉기까지 들고 있던 사람을?”
“그, 그냥 운이 좋았어요. 군대에 있을 때 복싱을 배운 적이 있는데 도움이 됐나 봐요.”
“?? 그래?”
흉기를 든 사람을 주먹으로 제압한다. 대단한 일이다. 웬만큼 싸움 좀 한다는 사람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데 그 보통 아닌 일을 자신이 했다고 하니 신기해할 만도 하고 의심할 만도 하였다.
‘믿는 것도 신기한 거지. 경찰들도 못 믿던데.’
내 몸이 운동하는 사람 몸은 아니다. 강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유약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경찰도 처음엔 내가 거짓을 말하는 줄 알고 계속해서 추궁까지 하였다.
억울하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웃음이 터지려 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아무튼 핸드에 대해선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야 하니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 정말 지독한 하루였어.’
그날 사장님에게 위로금과 1일 휴가를 받은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의식을 놓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난 죽을 듯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끄윽―! 아악!!!”
온몸이 아팠다. 움직이면 몸에 전기충격기라도 닿은 것처럼 저릿저릿하였다. 극도의 근육통을 느끼며 나는 죽음을 맛보고 있었다.
“이, 이게 뭐, 뭐야!?”
[마스터께서 너무 무리하신 탓이에요. 체력도 약하고 몸도 허약한 마스터의 몸으로 무리한 동작을 계속 이미지 하셨으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나마 저의 도움이 있었기에 몸이 망가지진 않았지만요―!]
“지, 지금 자랑이나 할 때··· 으으윽―!”
너무 아팠다. 미치도록 아팠다. 이렇게 아픈 것은 또 처음이다.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것으로 알 수 있었다. 핸드를 사용하기 위해선 몸을 움직이는 자신의 스펙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이, 이걸 고마워해야 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준 준식 아저씨를 생각하며 애매한 감정이 생기는 나였다.
***
만 하루를 고생하고 병원까지 가서 물리치료를 받은 후에야 나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 상태는 최악인 것인지 고통이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일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까스로 알바를 온 나였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직 통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굳게 마음을 먹은 난 주방으로 향하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도 꽤나 많은 시선이. 고개를 돌려 앞을 보자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보였다. 몇몇 이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돌리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왜 저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의문을 느낄 때 준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준현이 형!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어, 어? 아. 준식이 아저씨 얘기 들었나 보구나.”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나 보다. 내가 의문이 풀려 고개를 끄덕이자.
“형. 다친 데는 없어요? 그 인간 흉기 들고 설쳤잖아요. 무지하게 위험해 보이던데―.”
“괜찮아 괜찮아. 운 좋게 피했어. 그보다··· 응? ‘보이던데?’”
이상했다. 왠지 준수의 말투가 자신과 준식 아저씨가 싸운 걸 직접 본 듯한 말투였다.
“진짜 걱정했어요. 갑자기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서 저도 봤는데. 설마 형일 줄은 꿈에도 몰랐죠. 저랑 애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거 아니에요.”
“자, 자―! 잠깐!? 뭐!? 인터넷?!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예? 형 몰랐어요?”
“뭘?”
“형이랑 마준식 그 인간이랑 싸운 동영상, 지금 미튜브에 쫙 깔렸어요. 보니까 어제 올라오자마자 30만 찍던데요?”
“······.”
“형?”
“······.”
··· 아무래도 내가 위험한 상황 때 동영상만 찍고 있던 개새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미튜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다. 여러 동영상을 찍어 올리거나 스트리머들이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며. 세계 인구 중 40억 가까운 인구가 접속하고 있는 최대의 사이트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사이트에 자신이 싸우는 모습이 올라갔다고 한단다. 그것도 무단으로 말이다. 정말 더러운 기분이다.
“형 걱정 마요. 신고하면 되니까.”
“내가 화가 나는 건! 그 자식이 날 도울 생각도 않고 동영상만 찍었다는 거야! 뭐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다 있어!”
“동영상 보니까. 이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하고 있었네요. 이 사람 방관죄로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 한국은 방조죄는 성립되지만 방관죄는 성립이 안 된다고 하더라.”
“무슨 차인데요?”
“인터넷에서 찾아봐.”
동영상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내가 준식 아저씨와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 도망가는 것, 공격을 피하는 것, 자신이 반격하는 것까지 모두 찍혀 있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는 거다.
자칫 잘못했으면 자신이 크게 다칠 수 있었던 상황에 말이다. 난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는 경험을 해야 했다.
“후우―.”
“그, 그래도 초상권 침해로 동영상 내리면 되니까 너무 열 내지 마세요.”
“··· 후우, 그래. 알겠어.”
그런 식으로 진정하고 차근차근 속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아영 누나가 다가왔다.
“여~ 강 복서~! 어때 몸은 좀 괜찮아?”
“··· 누나도 그거 봤어요?”
“지금 인터넷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데 안 봤을까 봐~? 그보다 대단하더라. 대충 배운 게 아니던데? 내가 알고 있는 동생이 복싱 하는데 너 동영상 보고 프로가 아니냐면서 의심까지 했다니까.”
“··· 제가 복서할 몸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 신기한 거지. 진짜 대단하더라.”
“맞아요. 저도 놀랐다니까요. 형 복싱은 언제 배웠어요? 완전 챔피언급이던데.”
아까만 해도 걱정 어린 시선만 보내던 준수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아직 어린 남자에게 있어 싸움이라는 건 흥미로운 주제였고, 복싱이라는 것은 남자의 로망이 존재하는 격투기였다. 그런 흥미로움의 원천이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 거다.
“··· 그, 그냥 군대에 있을 때 약간 취미로 배운 거야.”
“취미로 이 정도 실력을 쌓는다고요? 형, 진짜 복싱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응원해드릴게요!”
“준현아. 사람이 재능을 썩히면 안 되는 법이야.”
“······.”
있지도 않은 재능에 대한 오해를 사게 된 나였다.
***
사람들의 태도는 약간씩 달라졌다. 여자는 아영이 누나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아무도 다가오지 않지만, 남자들 같은 경우엔 대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떻게 이긴 건지나 복싱은 언제 배운 거냐에 대한 거였는데, 난 계속 군대를 팔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자신에게 복싱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녀석들도 몇 있었다.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핸드야, 혹시 복싱 가르칠 수 있어?’
[가능할 것 같으세요?]
‘··· 그렇지? 안 되겠지?’
그렇게 약간의 주목과 난감한 물음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중.
“준현아. 사장님이 찾으시던데 한번 가볼래.”
“사장님이요?”
“응, 뭔가 부탁할 게 있다는데.”
“? 저한테 무슨···?”
“글쎄?”
내가 의아해하며 사장님에게 갔을 때 난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준현아. 그림 하나만 그려주지 않을래?”
“··· 예?”
인생 처음으로 그림 의뢰를 받는 순간이었다.
# 06. 내가 화산(華山)을 그린 날
사장님의 말은 이거였다. 손님의 눈을 확 끌며 흥미를 끌게 해줄 그림을 원하는 것이었다. 대충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는데 왜 하필.
‘나지?’
사장님도 내 실력은 대충 알고 있을 거다. 준식 아저씨 때문이라도 모를 수가 없다. 삼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내 실력을 말이다. 물론 핸드가 생기면서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게 됐지만 사장님은 알 리가 없다. 그런데 그림 의뢰라니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뭐, 나도 니 실력 대충 알긴 아는데. 못 그리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프로를 쓰려면 돈도 많이 들고 요구도 많잖아. 차라리 잘 아는 너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뭐··· 상관없긴 한데요. 제가 맡은 파트는 어떻게······.”
“물론 빼줄게. 대신 너무 늦거나 놀고 있으면 월급 깎을 거다.”
“그거야 당연한 거죠. 그것보다는··· 음.”
과거의 나였다면 이런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실력에 대한 자신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제가 있어요.]
이제 둘도 없는 파트너가 있었다.
응!
“할게요. 대신 어떤 식으로 그려줬으면 좋겠는지 말해주세요. 뭐라도 주제가 있어야 빨리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알겠다.”
***
‘라고 당차게 받아들인 건 좋았는데··· 이건······.’
“형 이런 종류 그려본 적 있어요?”
“할 수 있겠니?”
우려 섞인 두 사람의 말에 난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풍경화라··· 거 참.”
일단 맡긴 맡았는데 이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캐릭터나 배경에 대한 공부, 생각은 많이 해봤다. 하지만 풍경화에 대한 상상을 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뭐가 그리 어렵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일단 리얼리티가 살아있어야 한다.
만약 설원(雪原)이라고 한다면 쌓여있는 눈과 눈이 뒤덮여 있는 대지. 그리고 그것을 조성하고 있는 풍경과 하늘.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그려야 하며 색감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리얼리티를 살릴 기술과 경험도, 지식도 없었다.
‘··· 이게 가능하려나?’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져가는 나였다. 그러나.
[문제없다고요! 재료만 준비해주세요.]
내 파트너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물론 이미지도 중요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미지 해주셔야 해요. 그렇게만 한다면 제가 다 알아서 해드릴게요~]
너무나 든든한 파트너였다.
[후후후~♪]
***
일단 내가 선택한 풍경화는 매화(梅花)였다. 그것도 약간 난도 높은 매화산. 매화꽃이 활짝 핀 산을 도전하기로 하였다. 난 수많은 이미지 화면을 보며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상상하였고, 결국 하나의 이미지에 도달하였다.
흔히 무협지에 소재로 쓰이는 화산(華山). 매화로 뒤덮여 있는 암산(巖山)의 이름이었다. 그곳은 봄이 되면 매화로 뒤덮이며 그 아름다움은 중원에서도 으뜸이며 최고 중에 하나라고 불릴 정도라고 항상 쓰여 있었다.
약간 난도가 높았지만 내가 상상한 무수한 이미지와 자료를 통해 내가 상상한 가상의 화산을 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핸드야. 정말 이것만 있으면 할 수 있을까?”
[충분해요. 마스터의 이미지만 확실하다면 이상할 일은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래.”
[그럼요~]
자신감 충분한 핸드의 말에도 난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일단 재료부터 그랬다.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붓 2개. 액체 물감 이외엔 써본 적 없는 나에겐 어색한 고체 물감. 듣도 보도 못한 마스킹액. 그리고 전문가용 이글 연필까지―.
지금껏 사용해보지도 않은 재료와 도구를 보며 난 한숨부터 내쉬었다.
‘일단 지금 예산으로 살 수 있고, 최대한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것들로 사긴 샀는데··· 진짜 가능하려나?’
내가 찾고 조사해서 준비하긴 했는데 영 믿음이 안 갔다. 진짜 이 재료만으로 풍경화를 그릴 수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그래도.
‘핸드가 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한번 시도해보긴 해야겠지.’
다른 것은 못 믿어도 핸드만큼은 믿어야 했다.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기적을 보여준 핸드였다. 그런 핸드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핸드야 잘 부탁한다.’
[예 마스터. 저만 믿어주세요.]
***
‘잘하고 있으려나?’
아영은 슬쩍 걱정이 되었다. 준현이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의 그림 실력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데 풍경화를 그리다니. 확실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아마 사장님도 준식 아저씨 일로 준현이에게 보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의뢰라는 형태로 그림을 부탁한 걸 거다. 아마 못난 그림이 나온다고 해도 충분한 사례금을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그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슬쩍 보고 올까?’
걱정이 되니 일에 집중이 안 된다. 아영은 다른 이에게 손질하고 있던 재료의 마무리를 부탁하고 준현이 작업하고 있는 방으로 슬쩍 가보았다.
작업에 방해될까 살며시 들어간 아영은 집중해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준현을 볼 수 있었다.
‘짜식~! 열심히 하네.’
그림 실력은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역시 보기 좋았다. 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준현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나가려고 하던 순간.
‘못 그리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말은 해줘야··· 어?’
순간 아영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리곤 멍하게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저, 저게 뭐야!?’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매화산이었다.
***
난 복싱에 이어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몸을 부여잡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 고통이란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기적이 고통마저 잊게 하였으니까.
매화가 살아 움직이듯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매화가 산을 뒤덮었고, 매화나무가 생기를 토하며 숨을 내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굳건한 암산에서 진중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있었다. 도저히 일반적인 물감으로 가능한 그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기법이 들어간 것인지 짐작이 안 간다.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어야 이 정도의 작품이 탄생할지 짐작이 안 간다.
그저 압도적인 작품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고 넋을 놓게 하였다. 난 떨리는 손과 후들거리는 몸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숨 쉬는 방법조차 잊고 핸드를 말없이 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미지 한 사람이 나이긴 하더라도 이건 말도 안 되었다. 처음 과정과 마지막 과정만 있을 뿐, 중간 과정은 아예 빠져 있었다. 그저 상상하고 이미지 하자 내 손이 움직였고 내가 이미지 한 것을 완성에 가깝게 탄생시켰다. 이건 모든 예술가의 노력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림이든 서예든, 조각이든 도자기든, 모든 것에는 기법이 존재한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과정과 기술, 경험이 필요하다. 한데 핸드는 그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완성에 가깝게 이르게 한다. 그 무엇이든 말이다.
이건 한마디로 말해서―!
‘기적’
“··· 그 어떤 것이든 상상한 것을 이루게 하며 탄생시킨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
공포를 넘어 전율마저 일었다. 도저히 자신이 가질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욱!
‘빼앗기고 싶지 않아!’
대단한 것임을 알았기에, 더욱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았기에 더욱 욕심이 일었다. 이 기적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고!’
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더욱 많은 분야에 도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
“허··· 거참. 난 그냥 대충 걸 수 있는 그림이면 됐는데. 이건 뭐······.”
“명화(名畵)를 그려놨는데요.”
“이거 내가 전시회에서 본 그림보다 잘 그린 것 같은데··· 더 멋진 것 같기도 하고··· 음.”
사장님.
호영 아저씨.
오너 셰프.
우리 가게의 삼대장이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이 내 그림을 보며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난 한편으로 뿌듯하면서도 그린 방법을 설명할 수 없다는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다행히 내가 걱정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보니 준현이 너, 만화가 아니라 이런 예술 쪽에 재능이 있었구나~!”
“이 녀석, 의외에 재능이 있어.”
“화백 한 명 탄생하는 거 아니야~? 하하!”
“······!”
칭찬의 행렬 속에서 난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내가 쓴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 아영이 누나가 내 등을 치며 물었다.
“준현아. 진―짜! 대박이다! 너 진짜 길을 돌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하하······.”
“나중에 유명해지면 나 잊으면 안 된다. 이것보다 더 멋진 그림 꼭~~! 그려줘.”
“하―하―하―하.”
난감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나였다.
***
결과적으로 내가 그린··· 아니, ‘우리’가 그린 그림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일단 손님들이 내 그림을 보며 칭찬 일색을 늘어놓았고, 감탄하며 SNS나 트위터 등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 이거 화산파 아닌가요? 제가 상상했던 화산파가 그대로 펼쳐져 있는데요!
⤷ 응 아니야~^^
⤷ 무협지 너무 많이 보신 듯······.
⤷ 인정합니다. 이건 화산파입니다. 이 그림 대체 어떻게 그린 거임? 유명한 화백이 그린 거임?
― 일반인이 그린 거라던데, 대체 뭐 하는 사람? 이 사람은 당장 예술계로 가야 하는 것 같은데······.
― 숨겨진 은거 기인이 나타났다!
― 그림을 찬양해라!
― 우와아앙~!!
⤷이 글은 인도에서 시작된 글이며 지구 반 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안 적으시면 불행이······.
··· 어찌 됐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반응을 보인 것은 일반인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그림을 안다는 이들은 이 그림이 일반적인 시중에서 파는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곤 누구 한 명 할 것 없이 정말 대단한 실력이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
―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 분명 뛰어난 기술이다. 잘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 하지만 느껴지는 힘이 없다.
― 그저 잘 그리기 위해 한 것일 뿐. 열정과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 원숭이도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뿐 진짜가 될 수는 없다.
― 뛰어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다. 완성된 작품도 훌륭하다. 하지만 다음에는 그린 작가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기술과 상상력을 칭찬하고 있었지만 그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운과 열정이 없으며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하였다.
‘이건 그냥 의뢰를 받고 가게를 꾸미려고 내놓은 그림이지, 뭔가 의미가 있어서 그린 건 아니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 뭔가 뜻을 넣고자 하고 힘을 넣고자 했으면 그림은 좀 더 달라졌지 않을까 싶다. 대신 완성도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 그린 그림보단 더욱 따스한 느낌이 있었을 거야.’
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그림을 보았고, 다음을 기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모전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
# 07. 주인공은 눈앞에 있다
“···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건 반드시 나가야 했다. 공모전이라니 지금 자신의 실력을 평가하고 점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날짜가 어디 보자··· 두 달은 남았네. 아직 시간은 충분해.”
충분하다 해도 절대 이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 철저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몸도 만들어 놔야 해.”
지금까지 핸드를 사용하며 안 것이지만, 핸드는 거의 만능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충분한 지식과 이미지만 있다면 아마 컴퓨터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드는 중간 과정에서 몸에 과부하, 즉 무리가 따른다.
솔직히 이건 어떠한 것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가벼운 그림이나 물건을 옮기는 일은 그래도 덜 힘들지 모른다. 예시가 있고 충분한 지식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만화를 그리는 일은 다르다. 예시는 없다. 오직 ‘내가’ 그리는 이미지로 나만의 그림체로 그려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이미지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갈지, 정신에 얼마나 과부하가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과 체력이 필요할 것이다.
한데 지금의 나에게 노력할 수 있는 정신과 체력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핸드가 없으면 난 여전히 삼류 작가에 불과한 돼지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 두 달. 두 달 안에 몸을 만들면서 새로운 작품 구성을 만든다.”
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선포하였다.
***
한 여성이 묘한 눈을 하고 땀을 닦고 있었다.
‘저 사람 오늘도 왔네.’
정은주는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자신처럼 저녁만 되면 헬스장에 오는 남자는 벌써 일주일 째 트레드밀(Treadmill)만 하고 있었다. 흔히 콩글리시로 런닝머신이라고 부르는 기구에서 일주일간 매일 두 시간 동안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보단 좀 낫네.’
처음엔 헛구역질을 해대며 침까지 흘리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다. 정말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험해 보였고, 보기에도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나 일주일간 포기하지 않고 독기와 근성을 보이는 모습에서 뭔가 집념마저 느껴졌다.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과연 저 남자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정은주가 사내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어디선가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큭크~ 저 새끼 또 왔어.”
“하여튼 꼴사납다니까. 뭣도 아닌 놈이 운동한다고 까불긴.”
“그러니까. 완전 병신.”
“솔직히 저 새끼보단 내가 열 배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럼 난 백 배.”
“니들이 백 배면 난 천 배다 병신들아 흐흐흐!”
“지랄하지 마 새끼야~~!”
찌질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대화. 정은주는 사내를 비하하고 있는 자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한심한 사람들.’
저들을 안다. 매일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들을 훔쳐보는 사람들이다. 비싼 돈 들이고 와서 운동은 하지 않고 매일 음담패설과 장난만 치는 무리들.
한 번씩 자신을 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바퀴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한심한 쓰레기들이었다.
정은주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비대한 몸과 여드름 가득한 얼굴은 확실히 호감이 가는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도록 진중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고, 열기와 독기가 깃든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두 가지 요소가 사내를 빛나게 하였다.
‘··· 겉멋만 든 녀석들보단 1억 배는 더 나아.’
정은주의 걸음이 처음으로 사내에게 향했다.
***
‘뭐, 뭐지!?’
헥헥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던 내 앞에 나타난 눈이 휘둥그레지는 미녀를 보며 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잠시 누군가 싶어 생각해보았는데 그녀는 헬스장 여신으로 통하는 여인이었다.
‘이, 이 사람이 왜?’
처음엔 나도 그녀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민낯임이 분명한데도 빛이 나는 외모와 우월한 몸매를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하나 금방 관심을 껐다. 내가 아무리 호감을 가져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내 목표는 체력을 키우고 몸을 만드는 것이지 여자를 사귀는 것이 아니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시도 빠지지 않고 노력을 해야 할 때였다. 여자에게 관심을 둘 시간은 없었다.
··· 한데 갑자기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랑은 아니지만 모태솔로인 나였다. 가족을 제외한 모든 여자에게 숙맥이나 다름없었고. 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당황하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건 그녀였다. 그녀가 차분한 말투로 충고했다.
“··· 저기요. 그렇게 운동하시면 몸에 무리가 따라요.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운동하시는 걸 추천해드릴게요.”
“아··· 아, 그러니까······.”
“정은주라고 해요. 실례지만 너무 막무가내로 하시는 것 같아서······.”
“아, 강준현입니다. 그, 그러니까···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조언을 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저, 저야 감사하지만······.”
“그럼 실례하고 말씀드릴게요. 일단 런닝 말인데요. 너무 무리하고 계세요 조금 시간을 줄이셔도 될 것 같네요. 차라리 근력 운동을 하시는 게 몸에 무리가 덜 올 거예요. 그리고 물을 자주 마시는 것 같으신데 물도 너무 자주 마시면 안 돼요. 그리고 또―.”
“······.”
그녀. 아니 정은주는 정말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껏 주먹구구식으로 했던 내 운동과 다른 정말 체계적인 방법. 뭔가 머리를 깨게 해주는 조언이었다. 진지하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 또한 진지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날 놀리려거나 사기를 치려고 다가온 게 아니야. 진짜 날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이건 행운이다!’
헬스 트레이너에게 도움을 받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정말 좋은 징조이다!
‘이분 말씀을 잘 기억해 놔야 해!’
난 정은주의 말을 한마디도 잊지 않기 위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전문적이었다.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트레이닝이 전문가보다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내 한계를 나 자신보다 더 잘 파악하며 운동을 시켜주었다. 그렇다고 무리를 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운동이 끝나면 무릎이 아프고 하늘이 노랗게 빛났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운동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엉망이었는지를 일깨워주는 부분이었다.
그녀와의 운동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 이건 나조차 예상 못 한 것이었는데, 거의 한 달가량을 그녀와 함께 운동하였다. 여자와, 그것도 이런 미인과 같이 운동을 하는 기적을 누리면서 난 주변 남성들의 눈총을 살 수밖에 없었다. 뭐, 질투와 시기만으로 이런 미인과 운동할 기회를 얻은 것은 싼값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1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110kg가 넘었던 내 몸은 97kg가 되어 있었다. 겨우 한 달 만에 13kg을 뺀 것이었다.
“이건 기적이 아니겠죠?”
“다 준현 씨가 노력해서 이뤄낸 거예요. 그러니까 기적이 아니에요. 모두 노력과 땀으로 일궈낸 대가일 뿐이죠.”
“가,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남은 1개월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후후 뭐··· 특별히 제가 지도해드리죠. 하지만 이제부터 강도를 올릴 거니까 각오하세요. 그리고 만약 도망가면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후후후~ 믿어보도록 할게요.”
나보다 어린 그녀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으나 전혀 굴욕적이지 않았다. 나를 가르쳐주고 지금까지 함께 운동해준 그녀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무리하게 운동을 하다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은인이었다. 건강을 찾아준 은인!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준 정은주를 보며 난 마음속 깊이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빚을 갚아야지!’
훗날 빚을 갚을 사람이 늘었다.
***
공모전을 준비하며 난 일단 예선전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선전은 이메일을 통해 심사를 받는 과정이다. 한마디로 여기서 떨어지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심사를 위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며 콘티를 그려보았다.
하지만.
“으음······.”
침음이 나왔다. 적당한 아이디어를 찾으려 계속 시도해보았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림이나 퀄리티는 괜찮았다. 내용도 무난했고 말이다.
하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내용이 좋은 사람도 널리고 널렸고 말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임팩트 있는 스토리와 캐릭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화시킬 주제였다.
문제는······.
‘적당한 게 없어. 다 고만고만해.’
판타지나 학원물은 최근 주춤했다. 너무 많은 내용이 쏟아지고 있는 판국이었고 똑같은 내용을 복사하듯 찍어내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밖에 드라마, 일상, 에피소드, 옴니버스, 연애, 코믹, 스릴러, 시대극까지 여러 장르가 있고 신화에 대한 얘기까지 있다.
그중에 어떠한 것을 할지가 문제인데 도저히 좋은 주제와 장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난한 판타지나 학원물로 가자니 무섭고··· 무슨 좋은 게 없네.’
그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여보세요.”
[[아, 형. 저예요 준수! 지금 애들끼리 한잔하러 왔는데 형도 오세요. 지금 아영이 누나도 오고 다른 사람도 거의 다 왔어요. 형도 와서 한잔하고 가요.]]
“··· 내가 거기를 가서 뭐하겠어. 괜히 뻘쭘하지.”
[[에이~ 그러지 말고요. 형! 요즘에 공모전 땜에 머리 아프다면서요. 여기 와서 한잔하고 머리도 좀 쉬어주고 그러세요~ 너무 고민만 해도 머리 아프잖아요~]]
“··· 뭐,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오겠다는 걸로 알고, 형 것까지 주문해놓을게요, 꼭 오세요.]]
“준수······.”
[[―――]]
“이 녀석······.”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형을 챙겨주는 동생이 있으니 든든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참 애매한 기분이다.
‘확실히 준수 말대로 이대론 머리만 아플 뿐이지.’
난 결국 픽― 하고 웃으며 패딩을 입었다.
***
술자리에 가니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안면이 있는 이도 있었고 모르는 이도 있었다. 어색한 자리를 피하며 난 준수가 있는 자리로 갔다.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
“원래는 간단히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뭐―.”
“네가 닥치는 대로 모이라고 한 건 아니고?”
“에이~ 형, 제가 모이라고 한다고 모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모인 거지.”
“글쎄,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에 준수는 만화로 따지면 주인공 같은 녀석이다.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다. 일이 끝나면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을 하며 논다고 한다. 그래선지 몸에 근육이 적절하게 잡혀 있는 체형이다. 한마디로 여자들이 딱 좋아할 요소가 모여 있는 녀석이란 거다.
그뿐인가, 이 녀석은 성격도 좋다. 활발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 말도 매끄럽게 잘한다.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할 줄 안다는 거다. 모두에게 호감을 살 성격이다.
특히 홀 스텝 중 가장 인기가 많은 민지와 쿡에서 가장 어리고 예쁜 은비. 이 두 사람이 준수를 은근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만약 집안까지 좋다면 이 녀석은 정말 완벽한 주인공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녀석은 없을 정도로!
‘자기는 자기를 모른다더니··· 이 녀석이 딱 그러네.’
난 어이없는 마음에 소주로 마음을 달래려 했다. 한데 순간 머리를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주인공······.”
“형 뭐라고요?”
“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응?”
“······.”
이 순간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가장 쉽게 상상하고 구현화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멀리 볼 필요도 없었던 거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신의 장갑을 얻다』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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