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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인생역전, 삼류피디 [E]

인생역전, 삼류피디 1-1

2019.02.14 조회 2,417 추천 19


 목차
 
 1장. 꿈 깨
 2장. 깨어난 삼류피디
 3장. 퇴원
 4장. 먹방 BJ
 5장. 불법 성인 방송국
 6장. 방송국 입성?!
 
 
 
 
 
 1장. 꿈 깨
 
 “한 번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김정겸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반질반질한 머리는 땀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
 
 “일개 PD한테 고개를 숙이시다니. 어서 일어나세요.”
 
 김정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킨 PD는 딱 보기에도 이제 갓 30대 후반에 접어든 젊은 PD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겸은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노동호 PD.’
 
 PD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PD 생활을 시작해 불과 10년 만에 PD계의 신화가 된 남자.
 더 대단한 것은 그 신화가 신화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란 점이었다.
 
 “저한테 고개를 숙이시지 말고, 사장님께서 자르신 FD한테 가셔서 고개를 숙이셔야지요.”
 
 김정겸의 두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하지만 동호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차갑기까지 했다.
 
 “너,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비정규직 FD 하나를 회사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해고했기로서니······.”
 
 대단한 이슈로 인해 이곳에 온 것이면 모른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국의 사장인 김정겸 사장이 이곳까지 와 PD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는 고작 FD 하나를 해고했기 때문이었다.
 촬영 중에 사고를 당해 입원한 FD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뽑고 그 FD를 해고했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고용과 해고가 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김정겸이 사장으로 있는 방송국에 끼친 여파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직도 배가 부르신 모양이네요.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걸 보면.”
 
 동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동시에 동호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BSK 드라마, 교양, 예능 PD, 외주업체, 작가 다 올스탑 시켜.”
 “예.”
 
 동호의 가장 친한 동생이라는 상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김정겸 사장의 얼굴이 새카맣게 죽었다.
 
 “그리고 나, SBC랑 BCM 새로운 방송 들어간다. 기획안 들어온 것 중에 내가 골라 놓은 걸로. 스케줄 잡아.”
 “네!”
 
 상민의 두 눈이 반짝였다. 동호가 PD로 방송 프로그램을 맡으면 그 프로그램은 무조건 그 날의 시청률의 절반을 넘게 잡아먹는다. 동호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일개 PD가 한 방송국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에 예전 같으면 웃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방송을 만드는 제작 인원들이 동호의 한마디면 모두 두 손을 놨다. 그러면 그 방송은 당장 그날부터 난리가 난다.
 그리고 그것은 시청률 폭락과 이익으로 이어지고, 광고가 빠져나가며 사장 자리에 위태해진다. 회사의 운영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사, 사과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동호의 한마디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김정겸 사장은 부당하게 해고당한 FD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하고 사과문을 내며 고용 보장을 해주겠다는 것을 수차례 넘게 동호에게 말한 뒤에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크히히히. 꼴 좋다.”
 “30대 후반인 놈이 웃음소리가 그게 뭐야.”
 
 상민이 씩 웃으면서 동호에게 말했다. 동호는 픽 웃었다. 상민은 이 웃음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형 방송국 사장들이 담합해서 보이콧하면 어쩌려고?”
 
 동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송 다 펑크 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그래. 개 같은 사람을 부려먹으면 그만큼의 대우는 해줘야지.”
 “하긴. FD들이 좀 고생하는 건 아니지.”
 
 방송을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노예처럼 부려먹는 게 FD들이다. 도제 형식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정작 그들 중 PD가 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형. TBC 랑 NBC에서도 기획안 보내왔는데. 어째?”
 “일단 보고 결정하지 뭐.”
 
 TBC랑 NBC라면 대한민국 지상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 최대의 방송사다. 그런 곳의 기획안이 쓰레기처럼 동호의 수많은 기획안 중 일부로 책상 위에 놓였다.
 
 전설의 피디 노동호 그의 먼 훗날 모습이다.
 
 ***
 
 “자, 위하여!!”
 
 배가 불룩 나오고 머리가 반쯤 까진 개피디의 선창에 회식에 참여한 스태프들이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뭐가 그리 기분 좋은 것인지 벌겋게 술이 오른 개피디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하하호호거리며 웃었다.
 
 “크으······.”
 
 동호는 쓰게만 느껴지는 소주잔을 탕하고 내려놓으면서 입가를 훔쳤다. 오늘따라 소주가 너무나도 썼다. 마치 식도를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뜨끈한 기운이 쑥하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뜨거운 소주도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개피디의 얼굴만 봐도 그냥 상사고 뭐고 소주잔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후우······.”
 
 동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정규직 조연출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으로, 악마의 유혹처럼 이번에는 꼭 정규직 조연출이 될 수 있게 해준다며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했던 개피디에게 아이디어를 헌납한 것이.
 
 실력도 없는 놈이 학벌과 연줄로 버티고 있으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가 국장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면서 좋아하는 개피디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개새끼······.”
 
 동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나도 작은 나머지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게 딱 동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속이 열불이 나도 말할 수 없고, 옳지 않은 것을 봐도 장님이라 생각해야 되며 이상한 걸 들어도 귀머거리다라며 되뇌일 수밖에 없는.
 
 계약직 조연출.
 
 성골과 진골인 방송국 정규직 조연출이 아닌 계약직으로 일하는 조연출.
 
 게다가 인서울을 나왔으면 육두품이라도 됐을 테지만 동호는 고아였기에 장학금을 주는 지잡대로 대학을 갔다 왔기 때문에 이쪽에서는 거의 불가촉 천민급.
 
 여러 가지로 차별을 받았지만 동호가 가장 참기 힘든 건 바로 이런 도둑질이었다.
 
 “야, 노똥!”
 
 비틀거리며 개피디가 옆에 와 동호의 어깨에 척하고 손을 얹었다. 동호는 부글거리는 속을 참으며 겉으로 웃었다.
 
 “예, 피디님.”
 
 이게 현실이고 사회였다.
 
 자신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아이디어가 좋아도 지잡대 출신의 계약직이었고, 개피디는 능력 하나 없고 아이디어도 없어도 인서울 출신의 정규직이었다.
 
 “얌마, 걱정마. 다음에는 꼭 정규직 될 수 있게 해줄게. 그때도··· 알지?”
 
 벌써 세 번째였다. 성질 같아서는 일어나 소주를 머리 위에 부어버리고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동호는 꾹 참았다.
 
 동호는 꼭 피디가 되야 했다.
 
 그래야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호는 차라리 직장에 들어가면 먹고 살기 쉬웠을 길을 굳이 이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예.”
 
 동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겁게 대답했다. 소주잔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동호의 손끝은 하얘져 있었다.
 
 “이번에야 네가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고··· 정규직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니잖아? 그렇지?”
 
 개피디가 능글맞게 웃으며 동호의 어깨를 팡팡쳤다.
 
 정규직.
 
 이 얼마나 멀고도 높은 이름이란 말인가.
 
 계약직과 정규직의 차이는 단순히 받는 봉급에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체감으로 느끼면 거의 하늘과 땅 차이 수준이었다.
 
 “좋은 아이디어 팍팍 내란 말이야. 그럼 내가 씨피님한테 잘 말씀드릴게.”
 
 개피디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자 두툼한 가슴살이 혐오스럽게 출렁였다.
 
 “아직 부족해. 알지? BSK에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개피디가 동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하지만 동호는 계약직 3년 차였고 이렇게 아이디어를 개피디에게 빼앗긴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게다가 오늘은 정규직 전환 면접이 있는 날이었는데 FD로 들어와 있던 새파랗게 어린놈이 국장과 연줄이 있다고 면접장에서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걸어 나오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개피디는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었다. 동호가 넘긴 아이디어를 받을 때는 간이라도 내어줄 것 같이 굴던 개피디다. 이번 면접만 바라보면서 죽자고 청춘을 바친 대가가 바로 탈락이었다. 면접장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가만히 있는 것.
 
 누구는 국장과 연줄이 있어서 면접장을 제집마냥 편하게 들락날락 하는데, 자신은 죽어라 일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바쳐 봤지만 결국 계약직이다.
 정말 개 같은 사회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라고. 어?”
 
 “네, 알겠습니다. 피디님.”
 
 하지만 그래도 동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분을 삭히며 고개를 숙이는 일밖에 없었다. 동호의 스펙으로는 정규직 공채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렇게 계약직으로 비비면서 정규직 전환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과연 그때까지 얼마나 저 개새끼한테 아이디어를 바쳐야 할까.’
 
 동호는 단연 발군이었던 자신의 아이디어도 스펙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쳐 번번이 고꾸라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노 조연출.”
 
 그렇게 회식 자리가 두 시간여 지속되고, 개피디가 얼큰하게 취해 인사불성이 되자 자리가 파할 시간이 됐다.
 
 작가 중 한 명이 동호에게 비틀거리는 개피디를 짐짝 건네주듯이 떠넘기고는 말했다.
 
 “이 피디님 잘 모셔다드려. 알았지?”
 
 “예? 하지만 전 댁이 어딘지도······.”
 
 매일같이 동호는 1차만 하고 눈칫밥에 쫓겨 나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피디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 리 없었다. 지잡대와 같이 술도 마실 수 없다며 동호를 번번이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가들이나 스태프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피디를 데리고 가는 것이 그들에게도 부담이었는데 오늘은 개피디가 빨리 취한 나머지 동호가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피디님이랑 좀 친해져봐 이 기회에. 알았지?”
 
 같은 계약직인 작가가 하는 말에 동호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3년차 계약직 AD는 메인작가급 앞에서도 을 중에 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호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 눌렀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감정이 쉽게 격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지난 3년간 동호가 방송계에 있으면서 배운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집에 가야 하나.”
 
 동호는 낑낑거리며 개피디를 부축해 자신의 옥탑방으로 향했다. 없는 살림에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기에 옥탑방은 볼품없었다.
 
 그렇게 헉헉대며 개피디를 방에 눕힌 동호는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씻기 위해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나왔지만 보일러를 틀 수 있는 시간은 저녁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참고 몸을 닦았다.
 
 “후우······.”
 
 차가운 물로 몸을 씻자 꿈틀거리던 분노와 술기운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동호는 문을 열고 나왔는데 술에서 깬 것인지 일어난 개피디를 보고는 흠칫 놀랬다. 개피디가 일어나 스탠드 하나를 켜놓고 동호가 책상 위에 깜박 잊고 올려놓은 기획안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피··· 피디님! 이건 안 됩니다.”
 
 동호가 개피디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러자 개피디가 게슴츠레 한 눈으로 동호를 쳐다봤다.
 
 “내놔. 임마.”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야 이 새꺄.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후배꺼 한번 보겠다는데. 어?”
 
 개피디가 동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동호는 매몰차게 그런 개피디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술을 취한 개피디였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개피디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어쭈? 날 쳐?”
 
 “친 게 아니라······.”
 
 동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개피디는 동호의 변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야. 그딴 쓰레기 같은 거. 보라고 해도 안 봐 임마. 그래도 미운 정이라고 대학도 허접한데 나왔으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불쌍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이 자식이 말이야······.”
 
 저러면서 동호와 계약직 조연출에게 갈취해간 아이디어가 한 트럭이었다. 동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충 봤는데 그거. 정말 쓰레기다. 나니까 이렇게 말해 주는 거야 임마.”
 
 개피디가 동호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피디한테 보여주면 욕먹어. 알아? 그딴 거 잘못 보여주면 너 바로 모가지야 임마.”
 
 동호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이 기획안은 동호가 쓴 것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함께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었다.
 
 동호가 어린 시절, 결혼 전까지 방송 피디가 꿈이어서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한 엄마와 함께 만들었던 기획안이었다.
 
 동호의 아이디어로, 거기에 엄마가 살을 붙여서 만든 그 프로그램.
 
 생활고로 인해 동호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호의 엄마는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아무것도 없는 병원 안에서 항생제를 맞으며 병마와 싸우던 엄마의 유일한 낙이 바로 방송이었다.
 
 동호는 엄마가 맨날 들여다보고 있는 텔레비전을 옆에서 앉아 함께 봤고, 맨날 아파하던 엄마가 유일하게 웃음을 지을 때가 텔레비전이란 것을 알고는 결심했었다.
 
 엄마를 위한 방송을 만들겠다고.
 
 어린 아이의 치기였지만 엄마는 함께 어울려 줄 수 없는 아들에게 방송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옆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온 것이 바로 저 기획안이었다.
 
 엄마의 손 글씨와 엄마의 정성이 녹아 있는 바로 그 낡은 기획안.
 
 그런데 저 개피디는 동호의 엄마의 정성이 녹아 있는 그 기획안을 쓰레기라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하십쇼. 이 피디님. 취하셨습니다.”
 
 동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술에 취한 개피디는 전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 새끼가 말이야. 어디서 하늘같은 상사가 말하는데 말대꾸야. 어? 너, 기분 나빠? 기분 나쁘냐고!”
 
 개피디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동호의 이마를 밀었다. 동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딴 종이 뭉치는 찢어버려 이 새끼야!”
 
 탁!
 
 개피디가 동호의 손에서 기획안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찢으려고 하자 동호가 개피디를 밀쳤다.
 
 “윽!”
 
 우당탕탕!
 
 문 쪽에 서 있던 개피디가 바깥으로 벌렁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지금 나 쳤어? 어? 이 새끼야!!!”
 
 동호는 바닥에 떨어진 기획안을 주워들었다. 그런 동호의 멱살을 개피디가 달려들어 붙잡았고 동호와 개피디가 한 덩어리가 되어 옥상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너 해고야 이 새끼야! 내일 출근하지 마!”
 
 개피디의 폭언에 동호의 눈에 번쩍하고 번갯불이 튀었다. 동호는 몸을 재빨리 돌려 일으키며 개피디를 깔고 위에 앉아 주먹을 치켜들었다.
 
 한 손에는 기획안이 들려 있었고 동호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한 방 먹이고 정말 그만둘 생각으로.
 
 하지만 버둥대는 개피디의 얼굴과 기획안을 보니 주먹이 힘없이 툭하고 떨어졌다. 도저히 칠 수 없었다.
 
 엄마의 앞에서 호기롭게 외쳤던 처음이자 마지막 약속이었는데.
 
 여기까지, 3년 동안 어떤 수모를 겪으면서 버텼는데 여기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개피디가 술에 취했으니 대충 재워서 내일 멀쩡히 보내면 오늘 일을 기억을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자 동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순간, 어디서 힘이 솟은 것인지 동호의 밑에 깔려 있던 개피디가 배를 크게 튕겼다. 그러자 힘을 빼고 있던 동호의 몸이 휘청거렸다.
 
 “저리 꺼져 이 새끼야!”
 
 개피디가 손으로 허우적대다가 동호의 얼굴을 확하고 밀었다. 그러자 동호가 크게 균형을 잃으면서 비틀거렸다.
 
 턱
 
 나쁜 일은 함께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비틀거리던 동호의 발이 개피디의 두툼한 허벅다리에 걸렸고, 동호의 몸이 그대로 옥상의 난간을 넘어갔다.
 
 옥탑방 자체가 불법으로 만들어져 있던 곳이기 때문에 옥상의 난간도 간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동호는 자신의 귓가를 스치며 멀어지는 옥상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억울하다는 생각이었다.
 
 죽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떨어질 줄 알았으면 그래서 죽일지도 모른다면 개피디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먹여주지 못한 것이 억울해진 것이다.
 
 꾸욱
 
 동호는 떨어지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한 손에 들린 기획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쿵!
 
 ***
 
 동호는 스포트라이트가 환하게 비추고 있는 무대 위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얹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뒤에서는 동호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동호가 뒤를 쳐다보자 대한민국 연예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 동호를 향해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동호는 자신에게 향한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의 모습이 대한민국 전역으로 전파를 탄다는 것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카메라 뒤에만 있어봤지 본격적으로 앞에 나선 적은 없었다.
 
 동호는 따갑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까만 무대 위로 한 발자국 씩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따라 움직였고 도처에 자리 잡은 카메라들이 전부 동호만을 위해 움직였다.
 
 ‘풀. 바디. 클로즈.’
 
 동호는 습관적으로 카메라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동호가 바닥 시절부터 이 업계에 구르며 남들보다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달달 외워야만 했던 것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과실을 맺어 결과물만을 눈앞에 놓고 있었다.
 
 백상예술대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한국PD대상 올해의 작품상에 이어 두 번째로 받는 영예로운 상이었다.
 
 항상 카메라 뒤에만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이기에 더욱 뜻깊은 상이고, 드라마와 교양을 제외하면 예능PD로서는 거의 처음 수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명예로운 상이다.
 
 동호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오르며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생부터 시작해 분노와 슬픔, 기쁨과 즐거움까지.
 
 동호를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호는 천천히 자신에게 가까워져오는 마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샥
 
 “···어?”
 
 동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서 허무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마치 발이 달린 듯 동호의 손길을 거부했다.
 
 “이거 왜 이래?”
 
 동호가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마이크는 마치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동호의 손길을 재차 피했다.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동호는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 마이크 잡는 것을 포기하고 뒷짐을 졌다.
 
 그냥 말해도 마이크를 통해 오디오가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호가 뒷짐을 진 순간 마이크 스탠드가 강풍에 휘말린 듯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하늘 높이 사라졌다. 동호가 멍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깔깔깔깔~
 
 으하하하~
 
 그런 동호를 보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가만히 MC를 보던 대한민국 최고의 진행자가 큐시트를 찢어버리고 동호에게 크게 소리쳤다.
 
 “자,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으하하하!”
 
 낄낄낄낄~
 
 으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동호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탁하고 떨궜다.
 
 “시바. 아 시바 꿈.”
 
 
 
 2장. 깨어난 삼류피디
 
 
 
 꿈틀.
 
 감겨 있는 동호의 눈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은 그것을 못 본 듯 계속해서 서성거렸다.
 
 “일어나 형.”
 
 상민은 눈을 감은 채 시체처럼 누워 있던 동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술도 많이 안 마시는 사람이 왜 그때 술을 마신거야.”
 
 옥상에서 떨어진 동호의 몸을 발견한 것은 상민이었다. 상민은 동호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친형제는 아니지만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동호가 BSK에 계약직 조연출로 있는 동안 상민은 계약직 FD로 들어왔었다. 계약직이라는 공감대가 있고 개피디라는 최악의 상사 밑에서 일한다는 공감대가 있어 빠르게 친해진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는 고아였다.
 
 그래서 아주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것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게다가 서로 돈을 아끼기 위해 선뜻 같이 월세방을 합칠 정도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상민이 소품을 나르다 소품에 깔리는 사고가 발생해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면회객도 하나도 없이 우두커니 누워 있는 상민에게 유일하게 찾아온 사람이 바로 동호였다. 동호는 한 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상민을 챙겨주러 왔다.
 
 자신도 상민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혼자일 때 아픈 것이 얼마나 서러운지 안다면서 잘 챙겨주었다.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받은 호의가 동호였기 때문에 상민은 동호를 거의 친형처럼 생각했다.
 
 비록 개피디는 특유의 그 개새끼 같음을 발휘하여 산재 처리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곧바로 상민을 대체한 인력을 뽑았고, 상민은 방송계에 학을 떼고 나와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그 날도 야간 알바를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이였는데, 불은 켜져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옥상에서 떨어진 동호를 발견한 것이다.
 
 “6개월째야 형. 이제 그만 일어나.”
 
 상민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난 6개월 동안 동호를 매번 찾아온 상민이었다. 혹시라도 동호가 눈을 떴을 때 자신마저 없다면 그가 느낄 감정이 어떨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몸에 아무런 이상은 없는데 대체 왜 일어나지 않는 거야.”
 
 처음에 실려 왔을 때 입었던 외상은 깔끔하게 고쳐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문제는 동호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란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동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점점 눈가의 경련이 강해지더니, 눈꺼풀 안에서 동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호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은 격자무늬로 짜 맞춰진 아주 새하얀 천장이었다. 동호는 잠시 두 눈을 깜빡였다. 저것이 무엇인지 인지가 되지 않았다.
 
 “으으······.”
 
 “혀··· 형! 형! 형!!!!!”
 
 동호는 입을 벌려 말을 하려 했지만 끔찍한 신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낯익은 얼굴이 불쑥 눈앞에 드리워졌다.
 
 동호는 그 얼굴을 기억해내기 위해 얼굴을 찡그렸다.
 
 “형. 나 알아보겠어? 나 상민이야. 상민이! 나 알아보겠어?”
 
 한 쪽 눈을 찡그린 동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앳된 얼굴의 상민이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의사를 부르겠다며 후다닥 뛰어나갔다.
 
 ‘의사? 여기··· 병원인가?’
 
 상민이가 했던 말 중에 ‘의사’란 단어가 있었다. 동호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통증에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꿈에서 동호는 어린아이의 몸이 되어 있었다.
 
 이상한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다락방 안. 그 안에 무릎을 꿇고 앉은 비쩍 마른 체형의 아이의 손은 꼬질꼬질했고 사방에서는 사각거리며 벌레와 쥐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선명했다.
 
 하지만 동호는 황홀한 눈으로 깡마른 자신의 손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불꽃을 쳐다봤다.
 
 나무를 비벼 만든 불이 아니라 허공에 탁하고 피어오른 듯한 아름답고 찬란한 그 불꽃을 쳐다보는 순간. 그와 동시에 동호는 자신의 심장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강렬한 기운과 함께 또다시 정신을 까무룩 잃었다.
 
 ***
 
 동호의 눈이 다시 떠졌다.
 
 자신이 왜 정신을 계속해서 잃는지, 그러고는 깨어날 때마다 왜 다른 곳인지 동호는 인지하지 못 했다.
 
 검.
 
 정신을 잃었다 깬 동호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려치는 검을 보고는 본능에 따라 급히 몸을 굴려 피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푸욱!
 
 동호는 마치 수 년간 그런 일을 했던 것처럼 저절로 몸을 움직여 틈이 드러난 적에게 검을 박아 넣었다.
 
 동호는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방에 피들이 난무하고,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며 꺼져가는 생명과 그 생명을 노리며 입맛을 다시는 까마귀들로 가득한 곳.
 
 철퍽!
 
 그 와중에도 동호는 전장의 광기에 취해 다짜고짜 창을 들고 달려드는 적의 목을 롱소드로 정확하게 끊어내며 디딤발이 피에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순간적으로 동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검에 의해 목이 떨어져나간 자의 얼굴은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수염도 노란색이었고 주변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도 생김새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을 더 키우기도 전에 동호는 뜨끔한 느낌과 함께 심장 어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소란스러움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뜬 동호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낯익은 무명천으로 만든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동호 옆에서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동호는 그 소리를 듣고는 발아래 깔린 가마니를 뜯자 쌀이 쏟아져 내렸다. 동호는 늘 그래왔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손짓을 했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은 이들이 사람들을 줄 세워 쌀을 한 바가지씩 퍼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흥겨운 듯 노래를 불렀고, 동호도 그 노래에 취해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갈수록 축제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한 아름 바가지에 쌀을 안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동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동호는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췄다.
 
 ***
 
 번쩍!
 
 “허억······.”
 
 동호는 헛숨을 크게 들이키며 눈을 번쩍 떴다.
 
 어지럼증이 느껴지며 하얀 격자무늬의 천장이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때 눈부신 빛과 함께 낯선 여자가 동호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형! 정신이 들어?”
 
 “끄응······.”
 
 동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지럼증이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앉은 채로 백 바퀴 정도는 탄 듯한 느낌이었다.
 
 “환자분이 의식을 완전히 차리셨네요.”
 
 의사는 동공 반응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6개월간 코마 상태에 빠져 있던 환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래도 안정을 취하셔야 되니까 면회는 딱 10분만 하세요.”
 
 의사는 부드럽지만 엄격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민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어디야.”
 
 동호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목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동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병원이야 병원. 기억 안나?”
 
 상민이 동호에게 말했다. 동호는 뻣뻣한 목을 살짝 돌려 상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톡 치면 눈물이 주르륵하고 흐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병원이라고? 내가 왜······.”
 
 동호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막혔던 둑이 터진 것처럼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동호는 그 기억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그 쓰레기 같은 새끼.’
 
 거만한 표정으로 기획안을 들고 술이 취한 채 욕을 해대던 개피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획안에 대해 욕하던 개피디의 언사와 그것으로 인해 개피디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옥상에서 떨어진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때 한 방 먹여줬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개피디를 한 대도 때려주지 못 했다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 확 되살아났다.
 
 “기억··· 나.”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왜 발을 헛디뎌서 거기서 떨어졌어.”
 
 상민은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동호는 상민의 말에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내가··· 술을 마셨다고?”
 
 “응. 형 몸에서 술 냄새가 많이 났다던데··· 그것도 기억 안 나? 개피디네 팀 회식했다면서.”
 
 상민이 말했다. 동호는 인상을 썼다. 개피디 얼굴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어서 한 잔 마시기는 했다. 그 한 잔의 소주가 마치 독주를 마신 것처럼 독하기는 했지만 절대로 술에 취해 발을 헛디딜 정도는 아니었다.
 
 “개피디는? 개피디는 뭐라는데?”
 
 “그 새끼··· 말도 마.”
 
 상민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상민도 개피디라면 동호 못지않게 이를 갈았다.
 
 원래 동호와 상민이 만나게 된 계기는 개피디팀에서였다. 그때 동호는 AD였고 상민은 진행팀의 막내 FD 였다.
 
 삼류대학에 방송아카데미도 다니지 않았지만 소위 말해 방송 센스가 있는 동호를 개피디는 죽도록 질투하고 미워했다. 그래서 조연출임에도 불구하고 FD들이 하는 일을 해야 했던 동호와 막내 FD로 이것저것 실수만 일삼는 상민이 친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호는 상민이 자신처럼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에 친동생처럼 살뜰하게 돌봤고 상민도 그런 동호를 친형처럼 따랐다.
 
 그런데 상민은 개피디 때문에 방송가를 떠야만 했었다.
 
 개피디가 세트장 최종 확인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방송을 진행했다가 출연자가 크게 다칠 뻔한 사고를 모두 막내 FD인 상민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그 소품에 대신 깔린 것이 심지어 상민임에도 불구하고.
 
 “회식 후에 일어난 사고는 회사의 책임이 없다면서··· 이미 형 자리에 다른 조연출 채용했대.”
 
 동호가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악랄하기로 유명한 놈이다. 하지만 자신을 밀어 떨어뜨린 것은 개피디가 아니던가.
 
 “진짜 한 대 후려갈겼어야 하는 건데.”
 
 동호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과 있었던 일은 쏙 빼버리고, 동호가 투신한 것처럼 개피디가 말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
 
 동호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이 떠오르자 상민이 손을 내저었다.
 
 “진정해 형. 형 지금 절대 안정이야. 알았지?”
 
 상민은 거듭해가며 동호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상민은 동호 앞에서 당분간 개피디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퇴원할래.”
 
 동호는 천장을 쳐다보다가 상민에게 말했다. 상민이 화들짝 놀랐다.
 
 “안 돼 형! 말도 안 돼! 형 지금 6개월 만에 깨어난 거야!”
 
 “그러니까 퇴원해야지.”
 
 “안 돼!”
 
 상민은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이어진 동호의 말에 상민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병원비는? 네 사정도 뻔 한대. 보나마자 빚 졌을 거 아니야.”
 
 무려 6개월 간의 병원비다. 게다가 코마 상태기 때문에 초반에 여러 비용이 추가적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둘 다 무연고에 상민은 방송국을 나간 후 일용직을 전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동호는 하루라도 병원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걱정마 형.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빨리 회복하기나 해.”
 
 “···네가 무슨 수로.”
 
 동호가 상민을 쳐다봤다. 하지만 상민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말뿐이었다.
 
 “너가 무슨 수로. 말도 안 되는··· 큿!”
 
 몸을 일으키려던 동호가 통증을 느끼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기겁한 상민이 동호의 어깨를 눌러 눕혔다.
 
 “형 6개월이야 6개월. 그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고. 정밀 검사해서 몸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재활부터 받아야 돼.”
 
 “젠장······.”
 
 동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직도 목에서는 쇳소리 같은 듣기 거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통장에 있는 돈으로 일단 지금까지 네가 낸 거 갚아.”
 
 “알았어, 형. 걱정마.”
 
 상민은 빙긋 웃으며 동호를 안심시켰다. 동호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또다시 몰려오는 수마에 정신을 까무룩 잃었다.
 
 ***
 
 동호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놀라 눈을 떴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움직이기에 불편했을 뿐, 지금처럼 누군가 온몸을 칼로 쑤신 것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으으으······.”
 
 저절로 악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빠져나갔다. 하지만 동호는 그 순간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닌데?’
 
 이 정도의 아픔이라면 동호는 누군가 도와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 했는데 몸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다.
 
 지익지익······.
 
 허벅지와 배를 바닥에 깔고 기어가는 것인지 그곳이 쓰라렸다. 동호는 너무 아파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싶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이 된 것처럼 동호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안 죽어.”
 
 동호는 낯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동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몸의 주인이란 것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나··· 나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죽어서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라도 됐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분명 아니었다. 동호는 그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지금은 아프기만 한 몸도, 마치 동호의 몸이었던 것처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꿈!’
 
 동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서양인들에게 저절로 몸을 움직여 검을 찌르고, 피하던 그 꿈.
 
 꿈이었지만 동시에 그렇게 행동하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장면이 생각이 났다. 그것을 자각하자 동호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한 사람의 일생이 스며들었다.
 
 ‘에반 크리스··· 18세. 크라수트 제국령 마할룸 공국 그리폰 기사단 수습 기사. 제이미 바론 경의 몸종.’
 
 이 몸의 주인은 에반 크리스라는 18세의 소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제국의 기사란 생소한 직업이었지만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
 
 두꺼운 철 갑옷을 입고 마상에서 적을 위해 싸우는 중세 시대의 살인 기계. 동시에 주군에게 충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도로 많은 예술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 기사.
 
 “제이미 바론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에반은 그의 선임 기사인 제이미 바론에 대한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출시키고 있었다.
 
 ‘어깨. 가슴. 등. 허벅지 네 군데.’
 
 동호는 에반이 네 군데에 검상을 입고 산비탈을 굴렀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 기억이 녹아드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동호는 자신이 에반이 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동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모든 고통이 동호에게도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이정도면··· 정신 못 차려야 하는데.’
 
 그러나 동시에 동호는 다시 한 번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 21세기를 살아가는 동호라면 이 정도의 상처면 고통에 정신이 나가 아무것도 못해야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통이 상당했지만,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정신력이 강해진 것 같았다.
 
 “제이미 바론!”
 
 으르렁거리는 에반은 상처 입은 한 마리의 늑대 같았다. 네 군데의 자상 중 무려 두 군데가 선임 기사라 생각했던 제이미에게 입은 상처였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복수를 해주마. 갈기갈기 찢어서 개밥으로 던져줄 것이다.”
 
 에반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아버지에 의해 기사의 몸종으로 팔려왔다.
 
 농부의 아들인 에반은 근골과 자질이 괜찮았기 때문에 무난히 그리폰 기사단의 몸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때가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열 살도 넘게 어린 에반의 재능을 본 선임 기사인 제이미가 질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그리폰 기사단의 단장이자 소드마스터인 바할 경이 에반의 근골과 자질이 자신에 버금간다고 말한 이후 질투는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제이미는 수련이란 명목으로 에반을 구타했고 굶겼으며 교육조차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실력이 늘지 않는 에반이 사실은 재능이 없었다는 소문을 성 안에 퍼뜨렸고 그리폰 기사단의 기사가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이 말은 사실 확인도 없이 진실이 되어 에반은 짐덩어리가 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은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곁눈질로 배운 그리폰 기사단의 검술을 몰래 배웠고, 악착 같이 성장기에 몸을 불리기 위해 도둑질을 해서라도 음식을 훔쳐 먹으며 버틴 결과 몸종이 된지 8년 만에 수습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몸종들이 적당한 영양분 섭취와 기본적인 검술로 5년 안에 수습 기사를 달았기에 8년 만에 수습을 단 에반은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제이미 바론을 제외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에반이 수습 기사가 되자 제이미 바론은 천재성이 언제 나올지 몰라 그를 질시하여 이제 막 수습을 단 에반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에반은 찰거머리처럼 살아남았고 그럴 때마다 에반의 실력은 무섭도록 늘었다.
 
 마참내 에반이 전장에서의 공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어 기사들 입에 오르내린 순간, 제이미는 전쟁터에서 에반을 뒤에서 습격에 베어버리고 산기슭 아래로 걷어찼다.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고 몬스터가 떠도는 곳이라 그곳에 들어가 살아나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에반은 그렇게 산비탈을 굴러 다 죽어가는 몸으로 산비탈의 바닥까지 도달한 것이다.
 
 “후우··· 후우······.”
 
 에반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여실하게 드러내며 동굴 안에 상체를 기댔다. 동호는 신체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비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에반은 그렇게 간신히 일으킨 상체를 동굴 벽에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동시에 동호는 생소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간지러운 벌레가 들어와 기어 다니는 듯, 무언가가 뱃속에서부터 시작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생소한 기분에 동호가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그 꾸물거리는 기운에 동호는 눈을 크게 떴다.
 
 ‘···마나?’
 
 에반은 수습 기사라면 누구든지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마나로드를 익혔다. 마나로드는 마나를 쌓을 수 있는 적합한 신체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피로를 해소하고 몸을 회복시키는데 효과가 좋았다.
 
 물론 상급 기사나 최상급 기사가 되면 배울 수 있는 것에 비교하면 초라했으나, 지금은 그것만이 에반의 생명줄이었다.
 
 ‘마나로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나을 수 있다고? 이런 상처들이?’
 
 동호는 경악했다.
 
 에반의 상처는 누가 봐도 위중했다. 그럼에도 에반의 지식은 기초적인 마나로드로도 몸을 충분히 추스를 수 있다고 하고 있었다.
 
 ‘따뜻하다.’
 
 동호는 아까까지만 해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이제는 쿡쿡 쑤시는 정도로만 느껴지고, 온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그 효능에 눈을 크게 떴다.
 
 ‘아······.’
 
 그 따뜻함에 동호는 가물거리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눈을 스르르 감았다.
 
 ***
 
 번쩍!
 
 “뭐지?”
 
 동호는 눈을 부릅떴다.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은 하얀색 격자무늬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아니면 사물이 분간이 안 됐을 것이다.
 
 잠시 기다려 어둠에 눈이 적응되자 동호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 시계를 쳐다봤다.
 
 “오래도 잤네.”
 
 아까 일어났을 때 바깥이 밝았으니 낮이다. 그런데 지금 시계의 시침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네. 아니, 꿈 맞나?”
 
 동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잠에서 방금 깬 탓인지 머리가 상쾌했다. 그러자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꿈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분명히 진짜였는데······.”
 
 동호는 검상에서 느껴지는 그 끔찍한 고통이 선명했다. 그것이 가짜고 꿈이라면 너무 현실적인 꿈이고 고약한 꿈이다.
 
 꿈에서 현실처럼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상처를 입다니.
 
 “···다 기억나는데.”
 
 에반의 모든 기억과 지식을 동호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것 때문이라도 그것이 꿈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었다.
 
 “이게 꿈이라고?”
 
 동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분명 에반 크리스 안의 동호는 제정신이었다. 꿈이 아니고, 꿈처럼 흐릿하지도 않았다. 마치 방금 전에 겪은 것처럼 모든 기억이 선명했다.
 
 “개꿈이지 개꿈이야. 그런 게 어딨어.”
 
 하지만 동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피디가 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 상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상식에 의문을 던지는 수준이 아니라 상식으로 설명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외과적인 조치 없이 자신의 몸을 관조하는 것만으로 몸이 치유된다니.’
 
 동호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아마 빨리 여기서 퇴원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이 그런 식으로 승화가 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내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동호는 눈을 다시 떠야만 했다.
 
 약기운에 의해 잠이 들었지만, 똑같은 꿈을 똑같이 꿨기 때문이다.
 
 정말 토씨 하나 틀림없이.
 
 동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 꿈까지 놀리냐? 난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옴짝달싹 못하는데 꿈에서는 그렇게 몸이 나으니까 좋아? 좋냐고!”
 
 동호는 듣는 상대도 없는 허공에 대고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이내 기운이 달려 헐떡였다. 그렇게 분기가 가라앉자 동호는 변의를 느꼈다.
 
 “···큰일났다.”
 
 변의가 느껴지자 잠이 확 달아나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역이었다. 특히 이런 변의의 경우에는 심했다.
 
 기저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동호는 소변 줄을 꽂아 소변은 해결했지만 대변 같은 경우에는 기저귀를 차야 했고 그것을 간병인이 관리해야 했다.
 
 하지만 간병인을 쓸 처지가 되지 않으니, 그 처리는 자연스레 간호원에게까지 내려갔다.
 
 “부르자. 간호사를 부르자.”
 
 동호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누워 있어 굳은 몸은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장활동은 활발했는지 변의가 점점 더 심해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러면 간호사에게 부탁해 화장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수 있다.
 
 여자 간호사에게 대변을 볼 테니 화장실까지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것도 심히 얼굴 팔리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기저귀에 싸고 그것을 간호사가 발견해 치워주는 것보다는 천 배는 더 나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동호가 이를 악물고 어깨를 움직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팔은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6개월 만에 깨어난 몸에 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 힘은 엉뚱하게도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제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드르륵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
 
 푸드드득··· 푸득······.
 
 그와 동시에 동호는 참고 참았던 것들을 내뿜었다. 그 소리에 정기 검진을 위해 들어오던 간호사가 멈칫했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완전 똥 밟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똥을 밟은 것이 아니라 치워야 한다는 것이지만.
 
 모든 정신이 또렷하게 깨어난 동호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엉덩이가 불쾌하게 뜨끈한 것은 둘째 치고,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수치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간호사의 얼굴 표정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심해졌다.
 
 “아··· 후우······.”
 
 간호사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동호는 차라리 이럴 바에는 죽는 것이 낫겠다 라고까지 생각했다.
 
 ‘시바, 시바··· 이 빌어먹을 몸뚱아리. 차라리 죽고 싶다. 죽고 싶어!’
 
 동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아니었다. 모멸감과 수치심이 동호를 괴롭혔다. 그러자 그 순간 자신의 몸이 이렇게 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개피디에 대한 복수심이 불쑥 치솟았다.
 
 ‘한 대도 못 때린 거··· 내 반드시 한 대 때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호의 눈이 불타올랐다. 간호사에 의해 하의가 시원해지고 있었지만 동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개피디에게 잘못이 있었다.
 
 화악~!
 
 그러자 그 순간 복수와 분노가 어우러지면서 강렬한 목표가 설정이 되었다. 그러면서 동호의 의지가 불타오르자 동호는 순간적으로 전신이 뜨거운 열탕에 들어갔다가 냉탕에 들어간 것 같은 나른함이 불처럼 번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동호의 의식이 단박에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는 그런 와중에도 분명히 느꼈다.
 
 마나로드.
 
 꿈속에서 에반 크리스의 몸에 들어가 느꼈던 바로 그 기운.
 
 그 기운이 지금 동호의 전신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더 길게 생각하기도 전에 동호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던 간호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리고 그냥 잠들어?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지?”
 
 ***
 
 “한 번 더 해보면 알겠지.”
 
 동호는 의지를 다졌다.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사건을 모두 처리해준 것인지 하반신이 보송보송했다.
 
 ‘빌어먹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이내 동호는 의욕을 불태웠다.
 
 꿈틀!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던 동호의 발가락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꿈속의 그 기운이었어.’
 
 잠을 깨고 일어났는데 회복력이 그 시간동안 비약적으로 높아졌을 리 없다. 그렇다면 동호가 겪은 특이점이라면 바로 그 기운이었다.
 
 온탕에 들어갔다가 냉탕에 들어갈 때처럼 전신에 느껴지던 그 찌릿찌릿한 나른함.
 
 ‘한 번 해보면 돼. 손해 볼 것 없잖아.’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해보면 됐다. 에반 크리스의 기억이 모두 동호의 머릿속에 있으니, 그중 시험 삼아 하나를 해보면 된다.
 
 만약 그것이 꿈이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꿈이 아니라면 정말 동호의 몸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마나로드.”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동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나로드다.
 
 “신체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했으니까. 되면 빨리 퇴원할 수 있겠지.”
 
 6개월 동안 침대에서 생활한 동호는 하루라도 빨리 퇴원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병원비도 걱정인데 재활 기간까지 오래 걸리면 상민이 그 돈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바로 느낄 수 있는 건가?”
 
 에반 크리스는 천재였기에 기초 마나로드로도 곧바로 마나를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동호도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었다.
 
 한 번 느꼈다곤 하지만 잠결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해보자.”
 
 굳게 결심한 동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동시에 에반 크리스의 몸에서 느껴졌던 간지러운 기운을 느껴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
 
 눈을 감은 동호는 어디론가 빨려드는 것처럼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이게 몸이 피곤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치 술을 마시고 누웠을 때처럼 침대가 동호의 몸을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어지럼증에 동호가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뜨려는 찰나, 동호의 눈가가 움찔했다.
 
 ‘···어?’
 
 동호는 무언가가 자신의 손등을 간지럽혔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게 이불이 자꾸만 닿아서 그런가 싶었는데, 마치 강아지가 핥는 것처럼 양쪽 손등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그건가?’
 
 발바닥 쪽에서도 간지러움이 느껴지자 동호는 긴가민가했다. 에반의 경우에는 몸속에서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몸 바깥에서 느껴졌기 때문에 헷갈렸다.
 
 ‘들어와.’
 
 동호는 몸이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참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손등과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무언가는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마치 막혔는데 어디로 들어 가냐는 듯 동호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으으.’
 
 부르르.
 
 동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흡사 뱀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뱀보다 훨씬 얇았다. 바람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것이 동호의 몸을 타고 올라와 목까지 도달했다.
 
 ‘서··· 설마. 얼굴로 들어오겠다고?’
 
 동호는 덜컥 겁이 났다. 이게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얼굴, 그러니까 입이나 콧구멍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인 듯, 기운은 거침없이 동호의 목을 타고 올라 입과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으아아!’
 
 동호는 입을 벌려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입이 벌려지지 않았다. 입술을 간지럽히는가 싶던 것이 동호의 닫힌 입속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아··· 아··· 아?”
 
 동호의 몸을 타고 오른 그것은 동호의 입에 들어오자 솜사탕처럼 녹아 없어졌다. 그것이 목 안쪽을 타고 내려가는 생생한 감촉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동호가 소리를 내자 그제야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어? 어?”
 
 그렇게 입과 콧구멍으로 들어와 사라졌던 기운은 동호의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에반에게서 느껴졌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집중을 해야 느껴질 정도였지만, 동호는 손끝과 발끝에서 퍼지는 따뜻함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아주 추운 겨울 날 노천 온천에 들어가 차가움과 뜨거움의 오묘함을 즐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움직여야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호는 에반의 지식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에반의 마나로드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있었고, 동호는 그 경험과 지식대로 따뜻함을 움직였다.
 
 손끝과 발끝에서 시작된 따스한 기운이 종아리와 팔뚝을 거쳐 허벅지와 어깨까지 올라왔고, 어깨까지 올라온 기운은 동호의 정수리를 훑었고 허벅지를 거쳐 아랫배까지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리고 정수리까지 올라온 따스한 기운은 내려갔고, 아랫배까지 올라온 기운은 계속해서 올라가다 두 기운은 동호의 명치에서 만났다.
 
 ‘뫼비우스 띠처럼. 끊어지지 않게 흘러야 한다고 했어.’
 
 두 기운이 만났을 때 동호는 집중했다. 에반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마나로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몸속의 마나로드가 강물처럼 끊어지지 않고 흘러야 한다고 했다.
 
 ‘천천히··· 천천히.’
 
 동호가 정신을 집중하자 명치에서 만난 따스한 기운들이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 근간은 같은 동류였기에 둘은 쉽게 엉켜들었다.
 
 에반이 알고 있던 것이 기초 마나로드였기에 동호에게는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에반이 더 상위의 마나로드를 알고 있었다면 마나로드를 인도해줄 경험자가 없는 동호의 몸은 이 부분에서 크게 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흐르지 못하는 마나로드는 폭주해 다시 몸 바깥으로 나가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상위의 마나로드 일수록 되돌아오는 반사 작용은 컸다. 하지만 기초 마나로드의 경우는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두 번 다시 마나로드를 만들 수 없을 뿐, 몸에 가해지는 충격은 거의 없었다.
 
 ‘성공이다.’
 
 동호는 명치에서 서로 교차한 기운들이 원래 가던 방향으로 오르내리면서 돌기 시작하자 에반의 몸에서 느꼈던 따스함을 다시 느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안 좋은 거라고 했는데······.’
 
 동호는 전신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렇다는 말은 전신이 다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6개월 동안 침대 생활을 한 것에 대한 여파이다.
 
 ‘몸이 엉망이네 정말.’
 
 자신의 몸을 관조하던 동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마나로드의 따뜻함에 잊고 있었는데,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됐기 때문이다.
 
 아니면 꿈이 현실이 됐거나.
 
 “······.”
 
 타임슬립이나 이런 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많이 봤어도 에반 크리스라는 인물은 전혀 접점이 없었다. 아니, 그곳이 지구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했다.
 
 “기사가 마나로드란 걸 썼다는 건 역사에도 없잖아.”
 
 기사란 존재가 중세 유럽에 있었다는 것은 학교를 다니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마나로드 같은 것을 사용했다는 것은 배운 기억이 없다.
 
 이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그렇다는 말은 동호가 에반 크리스라는 존재의 몸속에 들어가 꿈이라고 착각한 것들을 현실로 겪었다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복수? 아니면······.”
 
 동호는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차라리 자신이 억울해 복수를 대신 해달라며 동호를 불렀으면 말이라도 될 것이다.
 
 “에반이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손에 복수를 맡길 사람은 아니지.”
 
 잠깐이나마 에반 크리스의 머릿속까지 훤히 들여다본 동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던 동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은 배신당하고 팽 당했다는 것밖에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질투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동호와 에반 크리스 사이의 접점은 없었다.
 
 “일단 몸부터 원상태로 돌리고, 그 다음에 단서를 찾아보자.”
 
 괜히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낀 동호는 상념을 털어버렸다. 어찌됐든 자신의 몸이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면 에반 크리스의 지식을 가져왔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개피디 기다려라.”
 
 동호가 이를 바드득 갈며 마나로드를 운용했다.
 
 개피디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동호의 눈은 놀랍게도 제이미를 떠올리며 이를 갈던 에반의 눈과 닮아 있었다.
 
 
 
 3장. 퇴원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이에요!”
 
 동호가 잠들면 에반 크리스의 몸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경험한 지 열흘이 지났다.
 
 하지만 그 사이 동호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동호의 앞에서는 놀랍다는 표정이 역력한 의사가 차트를 넘겨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6개월 동안 코마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치고는 회복 속도가 경이로울 정도에요. 웬만한 20대 초반의 운동선수보다도 몸이 건강해졌어요!”
 
 맨 처음에 동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동호의 눈에 작은 랜턴을 비추어 동공 반응을 확인했던 여의사였다.
 
 그 여의사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여러 가지 수치와 그래프가 복잡하게 표시된 차트를 넘겼다.
 
 “이제 정상인 겁니까?”
 
 “정상이다마다요. 이건 학계에 보고해도 될 정도라구요.”
 
 여의사는 흥분해서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동호는 그런 여의사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
 
 맨 처음에 회복 기간을 최소 두 달로 잡았던 것보다 여섯 배는 당겨진 열흘 이란 시간 만에 동호는 완벽하게 회복됐다.
 
 아니, 회복됐다는 것도 모자라 몸이 더 좋아졌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당연하지. 그 생고생을 했는데······.’
 
 동호는 지옥 같았던 재활 훈련 과정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병원에서 짜준 프로그램이 힘들다는 것이 아니었다.
 
 동호가 마나로드로 몸의 회복력이 빨라지자 또다시 에반 크리스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꿈속의 에반 크리스의 상처도 나아 있었는데 에반 크리스는 약해진 몸을 인적이 없는 산골짜기 아래서 수련을 하며 단련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최소한의 음식물만 섭취하면서 마나로드를 운용한 턱에 상처는 나았지만 그동안 축난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에반은 수습 기사 기간 동안 배웠던 전신을 단련하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별 다른 기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맨몸만 있으면 됐다.
 
 동호는 덕분에 축난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훈련법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인 지옥이 시작됐다.
 
 마나로드로 몸의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죽어라 기사 훈련법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재활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토가 나올 것 같은 그 훈련법을 참아낸 것이다.
 
 다양한 자세의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그리고 각종 전신 운동법과 태권도 같은 맨손 무술을 다 하면 꼬박 두 시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에반은 반드시 그 운동을 한 다음에 마나로드를 운용해야 한다고 머리에 인이 박히도록 외우고 있었다.
 
 운동하면서 찢어진 근육이 재생되면서 질겨지고, 그 과정에서 마나가 흐르는 로드, 마나로드가 넓어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마나로드를 운용하고 나면 다시 운동을 했고, 끝나면 마나로드를 운용했다. 하루 24시간을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렇게 운동을 했다.
 
 “미친 짓이었지······.”
 
 에반 크리스에게는 제이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강한 원동력이 있었다면, 동호에게는 돈이라는 강한 원동력이 있었다.
 
 만약 하루 입원비가 얼마인지 알지 못했더라면 그렇게는 못 했을 것이다.
 
 ‘6인실인데 십 만원이라니.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군.’
 
 어쨌든 동호는 덕분에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아니, 회복하는 것을 넘어서 여의사의 소견대로 20대 초반의 한창 때의 운동선수 급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근골격량이··· 누가 보면 다시 태어나신 줄 알겠어요.”
 
 의사는 차트를 보며 감탄했다. 동호의 근골격량이 어마무시하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흡사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 볼 수 없는 수치에 여의사는 혀를 찼다.
 
 “원무과에 가서 그동안의 병원비 결제하시고, 그 다음에 나가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안정을 더 취하시고 한 달 뒤에 다시 오세요. 검사 한 번 더하게.”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진료비가 아까워 다시 오지 않을 테지만 동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원무과에 내려간 동호는 그 사이에 상민이 결제를 다 했다는 소리에 더 이상 돈을 낼 필요 없이 나와야 했다.
 
 “상민이가 어디 갔지?”
 
 오늘 퇴원할지도 모른다 하여 퇴원 수속 밟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상민이 왔었다. 마지막으로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해야 해서 동호만 들어갔는데, 상민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 저기 있네.”
 
 병원 바깥으로 나온 동호는 상민이 차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상민을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차 앞에 상민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팔에 용 문신을 한 덩치 두 명이 상민의 머리를 일수 가방 같은 가죽 가방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빨리 돈 갚으라 그랬지? 내 돈 내놔.”
 
 “죄··· 죄송합니다. 이번 주 내로 이자는 꼭 내겠습니다. 조금만 더 말미를······.”
 
 “너 말미주다가 내 모가지 말미가 없게 생겼어. 내놔. 어? 아니면 각서 쓴 데로 콩팥 하나 떼러 가던가!”
 
 험악하게 생긴 덩치는 안이 다 비치는 노란 선글라스를 쓰고 목에는 두꺼운 금 목걸이를 메고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94년산 낡은 하얀색 프린스를 꾹꾹 밟는 덩치의 행동은 위협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상민은 허리가 굽어져라 숙여댔다. 하지만 덩치들은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상민의 복부를 가격했다. 컥하는 소리와 함께 상민이 무릎을 꿇었다.
 
 꾸욱.
 
 무릎을 꿇은 상민의 뒤통수를 구둣발로 밟자 상민의 얼굴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쳤다. 그 모습을 본 동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개새끼들이!”
 
 “뭐야 저 새끼는?”
 
 동호가 팔을 걷으면서 달려들자 덩치들이 고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호의 몸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개 사료를 먹으며 몸을 불린 덩치들보다는 작았다.
 
 그때 상민이 덩치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하··· 한번만 봐주십쇼. 방금까지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 형님입니다. 돈은 제가 꼭 갚겠습니다.”
 
 “뭐야. 저 새끼가 그 새끼야? 피 한 방울도 안 이어졌는데 왜 돈을 저런 놈한테 쏟아부은 거야?”
 
 노란 선글라스를 한 덩치가 상민의 뒤통수에 올려놨던 발을 내렸다. 동시에 동호는 팔을 걷어 부치면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형! 형 참아! 형! 제발.”
 
 “야! 놔! 놓으라고!”
 
 언제 일어 난건지 상민이 동호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덩치 두 명은 우습다는 눈빛으로 동호를 내려다봤다.
 
 “저 개새끼들이 감히 내 동생 머리에······.”
 
 “감히? 이 새끼 봐라.”
 
 노란색 선글라스를 쓴 덩치가 저벅거리며 다가왔다. 험한 세상을 살아와서 그런지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매서웠지만 동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단편적이라곤 하지만 에반 크리스의 투쟁의 삶과 경험이 머릿속에 녹아 있었고 실제로 전쟁터도 에반의 몸을 통해 경험한 동호다.
 
 조폭들이 쓰는 사시미가 아니라 온전히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용도의 무기에 몸을 베이는 고통도 느껴본 동호였다.
 
 그런 동호의 정신력은 주먹이나 쓰는 사채업자의 기세를 간단하게 받아낼 정도로 단단해져 있었다.
 
 “너. 네놈 새끼 때문에 동생이 저 고생하는 거야. 네놈이 6개월 간 누워 있는 바람에 병원비 내느라고. 그런데 어디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이.”
 
 “······.”
 
 동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상민이 어떻게 자신의 병원비를 댔는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상민은 동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
 
 노란색 선글라스의 덩치가 동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그 몸 잘 아껴뒀다가 다 나으면 돈이나 갚아 저 새끼랑 같이. 어?”
 
 “얼만데!”
 
 동호가 눈을 부라렸다. 살기와 독기, 오기가 뒤섞인 눈빛이 번뜩이자 덩치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방금 퇴원했다는 동호에게 눈빛으로 밀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가 동호의 이마를 세차게 손가락으로 한 번 밀고는 말했다.
 
 “오천이다. 새끼야.”
 
 “오천? 이 미친······.”
 
 “제3금융권에서 빌리려면 그 정도 이자는 각오했어야지. 안 그래?”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는 히죽 웃었다. 돈 이야기를 꺼내자 살벌했던 동호의 기색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동호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이천에서 삼천 정도 빌렸을 것이다. 하지만 사채란 것이 원래 그렇다. 그 돈이 뻥튀기 불어나듯 이자가 마구 붙는다.
 
 그나마 이자라도 갚으면 이자가 또 다른 이자를 불러오지 않았을 테지만 상민의 사정이란 것이 뻔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상민은 이자는 엄두도 내지 못 했을 것이다.
 
 “너 기다려. 이 새끼야.”
 
 동호가 눈을 부라렸다. 동시에 동호는 몸을 돌려 병원 밖으로 뛰어나갔다.
 
 타다닥!
 
 “형! 뛰지마! 형!”
 
 뒤에서 상민이 동호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동호는 이미 병원 건너편에 있는 은행까지 뛰어간 후였다.
 
 “아따. 저 새끼 달리기 한번 빠르네.”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달리는 동호의 속도가 표범처럼 날쌔고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호는 분노와 자괴감에 자신이 상상도 못할 속도로 뛰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 한 채 은행 ATM기에 현금 카드를 집어넣었다.
 
 “······.”
 
 하지만 잠시 후, 동호는 패배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잔고 9890원.
 
 만 원도 채 뺄 수 없는 돈이 동호의 현금 카드 안에 든 전부였다.
 
 터덜터덜.
 
 동호는 달려갈 때의 기세와는 다르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돌아왔다. 그런 동호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난 또 돈이라도 가지러 가는 줄 알았지. 이자가 조금 센데 말이야.”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는 빙글거리면서 깝죽댔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후려쳐 버리고 싶었지만 이런 사채업자들은 아마 치료비까지 얹어서 더 난리를 피울 것이다.
 
 “갚는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갚는다.”
 
 “그건 얘한테도 많이 들은 소리고.”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는 빙글거리며 계속해서 동호를 긁었다. 동호의 기를 완전히 죽여 놓겠다는 술수였다. 돈을 받아내야 하는 상대가 이렇게 드세게 나오면 사채업자들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빌리지 말고 그냥 뒈지던가. 왜 괜히 살아나서 창창한 애한테 사채를 쓰게 해. 사채를··· 쯧쯧.”
 
 노란색 덩치는 혀를 차며 일수 가방으로 동호의 가슴팍을 밀었다. 상민이 울컥했지만 동호는 눈빛으로 상민을 제지했다. 상민이 이를 악무는 것이 동호의 눈에 들어왔다.
 
 “···갚는다고.”
 
 “그래. 오늘은 퇴원했다니까 그 기념으로 이만 가줄게. 딱 한 달 준다. 뭐라도 해봐야 쳐 맞아도 덜 아프지. 돈 없으면 그렇게 쳐 맞아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알았지?”
 
 빠악!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는 끝까지 동호의 속을 긁으며 가죽 일수 가방으로 동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건 아프기보다는 사람의 수치심을 극대화시켰다. 동호는 울컥하는 감정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 때문에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흘렀다.
 
 “몸 조심해라. 그래야 돈 다 갚지. 그럼 간다. 알았냐?”
 
 마지막으로 상민의 머리까지 일수 가방으로 한 대 후려친 노란색 선글라스 덩치가 휘파람을 부르며 사라졌다.
 
 “···집에 가자.”
 
 “끄윽··· 흑··· 흑······.”
 
 한참을 말이 없이 서 있던 동호는 상민에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상민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울기 시작했다. 동호는 그런 상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생 많았다 그동안. 이제는 이 형이 다 알아서 할게.”
 
 “흑··· 흑······.”
 
 이십 대 초반인 상민이 자신이 정신을 잃은 6개월 동안 얼마나 큰 부담감에 시달렸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6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리며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가족 외에는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걸 피도 이어지지 않은 상민이 동호에게 해주었다.
 
 그만큼 상민에게 동호는 친형이나 다름없었고, 동호에게도 상민은 피만 안 이어졌다 뿐이지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 외면을 받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서로 기댈 수 있는 그런 서로의 버팀목.
 
 “일어나 임마. 사내자식이 질질 짜고 말이야.”
 
 동호가 상민을 억지로 일으켜 어깨동무를 했다.
 
 “형이 꼭 갚는다. 넌 걱정 마.”
 
 “형이 돈이 어디 있다고.”
 
 상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호는 이를 악물었다.
 
 “있어. 너에게 사채를 빌리게 만든 놈. 그리고 날 그렇게 만든 놈.”
 
 “뭐?”
 
 상민의 두 눈이 커졌다. 동호의 머릿속에 개피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에반 크리스의 회복 훈련은 맨몸으로 하는 훈련에서 이제는 주변의 사물을 이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현대의 웨이트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에반 크리스는 주변의 돌과 굵은 통나무를 잘랐고, 질긴 줄기를 꼬아 끈을 만들어 전신을 자극할 수 있는 운동법을 만들었다.
 
 꿈에서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리다 깬 동호는 가뿐한 몸으로 일어났지만, 이내 자신이 왜 그런 꿈을 꿨는지 이제는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노동호 씨!”
 
 “예!”
 
 “···푸흡”
 
 “풉!”
 
 동호의 이름에 주변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다들 비슷한 처지에 이름 가지고 웃는 것 때문에 동호는 주변을 째려봤지만 이내 어깨를 쭉 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인력 업체 직원의 뒤를 따라 반장의 차에 탔다.
 
 “나, 참··· 내가 이름이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태어났나.”
 
 노동호.
 
 노동을 위해 태어난 이름 같기도 하고, 북한의 노동 미사일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빨갱이 이름이란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것보다도 동호는 에반 크리스의 몸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경험들이 동호가 오늘 해야 하는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에 그곳에 금세 정신이 팔렸다.
 
 ‘공사 현장에서 노가다하는 거랑, 에반 크리스가 돌 들고 나무 드는 거랑 똑같잖아!’
 
 다른 점이라면 동호는 돈을 받는다는 것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퇴원하자마자 바로 일용직을 시작하려 했지만 상민의 결사반대로 일주일을 억지로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주일을 그냥 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 동안 매일 꿈에서 에반 크리스의 기사 훈련법에 고통을 함께 받아야 했다. 그래도 기사 훈련법을 억지로 매일 했기 때문에 몸이 빨리 회복되고 있었으며 매일한 만큼 이제는 제법 익숙해 졌었다. 근데 그 고통이 줄어들 찰나 기가 막히게 다음 꿈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으드득.’
 
 그때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렸다.
 
 개피디.
 동호를 그렇게 만든 이 모든 일의 원흉. 당연히 동호는 일주일 동안 소장을 만들어 경찰에 개피디를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싸늘했다.
 
 [혐의 없음.]
 
 ‘주변에 CCTV도, 블랙박스도 없어서 불분명하다고?’
 
 동호는 이를 악물었다. 동호가 사는 곳이 낡은 빌라 위의 옥탑 방이었다. 동네 자체가 낡은 빌라들이 가득했다. 그 때문에 CCTV가 없었다. 낡은 빌라촌인만큼 차를 제대로 세워둘 곳도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차도 거꾸로 세워져 있었던 터라 CCTV에 찍힌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개새끼.’
 
 개피디를 떠올린 동호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개피디가 고용한 변호사가 동호에게 와 그냥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 혐의도 없는데 계속 진행하다가 무고죄로 콩밥 먹여 버릴 수 있다고.
 분하지만 동호는 개피디에 대한 복수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소를 끌고 갈 만한 돈도,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잡는다. 아니, 다른 식으로라도 네놈한테 복수하고 만다.’
 
 그때 끽하고 차가 멈춰 섰다. 차가 멈춰서면서 동호는 속으로 이를 갈던 상념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고 뚱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지게 드시고. 지금 5층에서 공구리 쳐야 되니까 두 포대씩 날라.”
 
 차에서 내린 공사 반장은 무턱대고 말부터 놓았다. 하지만 이쪽의 관례가 그런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동호는 군말하지 않고 지게를 멨다.
 
 ‘하아··· 돌아오기 싫었는데.’
 
 외주 제작사로 들어가 계약직 FD로 방송 현장에 뛰어들기 전에 동호는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었었다.
 
 악착 같이 공부해서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지만, 방세와 생활비는 방학 동안에 노가다를 통해 세게 당겨서 버는 것밖에는 학생 신분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흠.”
 
 동호는 지게 위에 포대를 올려놓는 느낌이 들자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지게가 전혀 무거워지지 않았다. 동호가 의아해하던 찰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요. 한눈팔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러다 다쳐요.”
 
 “···에?”
 
 동호가 의아해 하며 뒤를 돌아봤다. 동호가 멘 지게에 시멘트 두 포대가 어느새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한 포대에 40kg니까 두 포대면 80kg.
 
 그런데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학창시절 메고 다니던 책가방 수준의 무게만 느껴졌다.
 
 “너무 가벼운데요. 더 얹어주세요.”
 
 “···하아.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러다 골병들어요. 끝까지 많이 나르실 거 아니면 돈도 더 안 주고.”
 
 그건 동호가 제일 잘 알았다. 처음 노가다를 하러 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바로 자신의 체력을 모르고 초반에 다 불태워 버린다는 점이었다.
 
 공사 현장은 다섯 시에 정확히 끝나고, 밥시간도 정확하게 준수한다.
 
 그 이유는 그만큼 이 일이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체력을 제대로 모르고 처음부터 불태웠다가는 점심시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리타이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저도 압니다. 근데 가벼워서 그래요. 한번 해보고 무거우면 안 하죠 뭐.”
 
 포대를 얹어주던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꼭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놈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
 
 동호는 포대를 한 개 더 추가로 얹었다. 그러자 약간의 무게가 느껴지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동호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인부가 포대를 하나 더 얹어주었다.
 
 “4개면 160kg인데 어떻게 사람이······.”
 
 “괜찮네요.”
 
 인부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그것은 동호처럼 오늘 이곳에 처음 왔기 때문에 간단한 시멘트 포대 나르기에 동원된 다른 인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동호가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 탓이었다.
 
 휘청거리거나, 무게에 당황할 법도 한데 동호는 이제야 묵직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로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바위를 드는 거에 비하면······.’
 
 160kg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등과 허리, 다리의 힘으로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무게를 견뎌줄 지게와 단단한 줄도 있었다.
 
 에반 크리스가 맨 손으로 100kg에 육박하는 바위를 손으로 들었다 내렸다 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160kg의 시멘트 포대라고는 하지만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5··· 5층까지 가야됩니다. 안 넘어지게 조심해요. 잘못 넘어지면 뒤에 있는 사람까지 다치니까.”
 
 “예. 예.”
 
 동호는 머리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건물 안으로 지게를 메고 들어갔다.
 
 5층까지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데 엘리베이터를 쓸 리 없었다. 동호는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그라인더가 돌고 용접 불꽃이 튀기는 곳을 지나 묵묵히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후읍.”
 
 동호는 에반 크리스의 지식을 되살려 호흡을 조절했다. 기사 훈련법의 가장 기본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호흡이다.
 
 검이나 몸의 움직임과 호흡이 일치해야 리듬과 박자가 살아나고 체력 소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동호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한 발자국씩, 묵직한 시멘트 포대를 지고 5층까지 날랐다.
 
 “후우.”
 
 5층에 다다른 동호가 조절하던 호흡을 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훈련만큼이나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휴식이다.
 
 근육도 찢어지고 회복되고를 수도 없이 거치고 나야 커지고 단단해지듯, 폐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아주 좋아.”
 
 동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빨리 회복하기 위해 에반 크리스의 지식과 경험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지금 와서는 완전히 그것에 맛이 들려 버린 동호였다.
 
 날이 갈수록 몸이 좋아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바로 재산이지.’
 
 무연고에 믿을 만한 백 하나 없는 동호에게는 몸이 바로 재산이었다.
 
 “허. 뭐야. 네 개야?”
 
 동호가 지게를 내려놓자 인부가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동호는 씩 웃어보였다.
 
 “나를 만하네요.”
 
 “···이따 오후에도 보자고.”
 
 감탄할 만도 하건만 과연 인부들을 모두 베테랑이었다. 이런 식으로 초반에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오후에 방전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팍팍 나르니까 보기에는 좋네.”
 
 다른 인부가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빼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일단은 보기 좋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괜히 뻗지 말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더 고생이니까.”
 
 이미 동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부분을 걱정하며 인부들이 말했다. 동호는 가뿐히 한 손에 포대 하나씩을 들고 순식간에 시멘트 포대를 한쪽에 쌓아뒀다.
 
 “어디 한번 보세요. 그리고 잘 나르면 반장님께 한 말씀씩 해주시고.”
 
 동호는 씩 웃었다. 인부들이 한번 지켜보겠다는 표정으로 동호를 쳐다봤다. 동호가 일용직 임금을 받는 것은 반장이 결정한다. 인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어줘도 동호가 받을 임금이 늘어날 것이다.
 
 “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날듯이 말하며 동호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이제 막 두 번째 사람이 5층에 도착했을 때, 동호는 벌써 시멘트 포대를 또다시 네 개를 이고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세 시간.
 
 다섯 시간이 지나도 동호의 페이스는 떨어지지 않았다. 5층만이 아니라 6층, 7층까지 사용할 시멘트 포대를 전부 날랐기 때문에 인부들도 동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 무슨 몸이 강철인가 봐.”
 
 “발도 빠르고, 체력도 좋고. 쓸 만한 놈이네.”
 
 건물 안 공사 현장에 참여하는 이들은 일종의 전문직 기술자들이다. 동호나 다른 사람들처럼 자재를 나르는 사람들이 하루 만에 바뀌는 반면 그들은 일종의 계약직으로 건설 과정 내내 참여한다.
 
 그들의 눈에 동호가 든 것이다.
 
 “후우.”
 
 하지만 아무리 동호라고 해도 힘이 안 들 리 없었다. 단지 병원을 퇴원하고 난 뒤에도 꾸준히 에반 크리스의 훈련법을 따라했기 때문에 몸에 체력이 남은 것뿐이었다.
 
 “대단하긴 하네.”
 
 동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반 크리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모든 기사들이 기초로 배우는 훈련법을 자신의 몸에 딱 맞게 맞췄다.
 
 그리고 놀랍게도 에반 크리스가 자신의 몸에만 맞게 변형한 훈련법이 동호의 몸에도 딱 맞았던 것이다.
 
 “야!”
 
 동호가 5층에 마지막 시멘트 포대를 날랐다. 다른 사람이 한 번 나를 때 동호는 세 번을 왔다 갔다 했다. 한 번에 나를 때도 네 포대씩을 날랐으니 두 포대씩 나른 사람과 비교하면 동호가 나른 시멘트 포대의 양이 여섯 배나 많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5층에서 공구리 작업을 하던 인부가 동호를 불렀다.
 
 “예!”
 
 공구리 작업도 하고, 미장 작업도 하는 박 씨가 부르자 동호가 쪼르르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대학교 내내 일용직을 전전했기 때문에 이 공사 현장에서 반장 다음으로 목소리 큰 사람이 박 씨라는 것을 진작 눈치챘기 때문이다.
 
 “너, 일 잘하더라?”
 
 “뭐··· 헤헤.”
 
 동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웃었다. 웃는 낯을 해서 나쁠 것 하나 없다. 게다가 이런 노동자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말보다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동호는 이미 오전에 자신의 능력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런 일 많이 했나 봐?”
 
 “대학교 때 학비 벌려고 자주 했어요.”
 
 “에이, 그냥 그 정도가 아니던데? 나는 무슨 슈퍼맨이나 배트맨 보는 줄 알았다 야.”
 
 박 씨는 동호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고 내려갔다. 박 씨는 동호를 함바집으로 데려갔다.
 
 “한창 잘 먹을 때지. 아까 먹는 거 보니까 체할 것처럼 먹더만.”
 
 “하하하.”
 
 동호는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에반 크리스의 기사 훈련법은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소모한다. 소모되는 칼로리보다 더 많은 열량을 섭취해야 몸을 키울 수 있다.
 
 자연의 것, 그대로를 먹어야 하는 에반 크리스는 정말 손에 닥치는 대로 먹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음식 산업이 발전한 현대에서는 얼마든지 적은 양으로도 높은 열량을 내는 음식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먹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양을 동호는 먹어줘야만 했다.
 
 아마 쉬는 시간에 지급되는 빵과 우유를 동호가 거의 서너 개를 해치운 것을 박 씨가 본 것이리라.
 
 “먹어. 여기서 먹는 건 공짜야.”
 
 “···네!”
 
 퇴원한 뒤로도 몸이 급격하게 회복되고 더 좋아지면서 늘 배가 고팠다. 하지만 현재 동호의 상황에서는 많이 먹는 것도 사치였기 때문에 참았는데, 함바집에서는 돈을 신경 안 써도 됐다.
 
 텁!
 
 밥을 산더미처럼 쌓아온 동호를 보면서 박 씨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쇠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동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 씨를 비롯한 인부들은 동호가 제대로 먹기 시작하자 입을 떡 벌렸다.
 
 “밥이 참 맛있네요.”
 
 거의 머슴밥의 두 배를 퍼온 동호는 5분 만에 식판 하나를 순삭했다. 그러고는 넉살좋게 함바집 아주머니한테 식판을 다시 내밀었고, 아줌마는 총각이 서글서글하다며 또다시 밥을 잔뜩 퍼줬다.
 
 와구와구
 
 “와··· 새끼, 배 속에 거지라도 들었나. 밥 처음 먹어?”
 
 “마··· 쩝쩝··· 맛있습니다. 쩝쩝.”
 
 동호의 몸은 강렬하게 열량을 갈망하고 있었다. 운동선수에 버금간다며 의사가 감탄할 정도로 몸이 좋아졌지만 그것도 부족한 듯했다.
 
 에반 크리스가 하는 것처럼 100kg짜리 바위를 팔 힘으로만 들어 올릴 정도는 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 먹어가면서 먹어라.”
 
 박 씨는 그런 동호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은 두 포대씩 나르는 시멘트를 네 포대씩 나르는 것을 보며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먹는 밥의 두 배를 퍼왔어도 두 배는 더 일을 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호가 세 번째 식판을 비우자 박 씨는 물론 다른 인부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사람 새끼여? 곰 새끼여?”
 
 “일당보다 밥값이 더 나오겄네 그래.”
 
 다들 고된 일을 하기 때문에 먹는 양 자체가 일반인에 비해 최소한 1.5배는 됐다. 하지만 동호는 그런 사람들의 세 배를 먹고 있었다.
 
 “정말 맛있네요 아주머니.”
 
 “호··· 호호. 저··· 정말 잘 먹네 총각.”
 
 함바집 아주머니도 질렸다는 눈으로 네 번째 식판을 가득 채워줬다. 아니, 이렇게 되니 동호가 어디까지 먹는지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챱챱챱
 
 와구와구
 
 참 복스럽게 먹는 동호였지만 그게 식판으로 네 번이 되다 보니 사람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처음 받은 것처럼 음식물을 쓸어 담는 동호를 보면서 박 씨가 더듬거렸다.
 
 “거··· 거참. TV에 나오는 그 연예인들보다도 많이 먹네. 머··· 먹방이던가. 뭐시기.”
 
 박 씨는 더듬거리며 이름을 생각해냈다. 요즘은 희한한 것들이 TV에 나와 인기를 끌었다. 연예인들이 나와 먹는 것을 잔뜩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게 다 인터넷에서부터 시작된 인기라고 했다.
 
 “먹방이요?”
 
 동호가 박 씨의 말을 듣고는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박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몇 개 본 적은 없지만 너보다 많이 먹는 놈들은 못 본 것 같은데.”
 
 “하하하.”
 
 동호는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순간 동호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박 씨의 말에서 무언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 배부르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일단 지금은 밥을 먹고 오후 일을 하는 것에 집중을 해야 했다.
 
 “커피 한잔하지?”
 
 “좋습니다!”
 
 동호가 넉살 좋게 웃으면서 박 씨를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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