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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 엑스트라 1-1권

2019.02.18 조회 3,446 추천 27


 # 가야만 한다.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의문의 실종 사건.
 한두 명이 아닌, 수천, 수만 명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각에선 외계인의 납치가 아닌지 의심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특이점이 존재했다.
 실종이긴 실종인데, 거절할 수 있는 실종이라는 것.
 공식적인 단체 실종은 1976년부터 시작되었다.
 <자, 여기 실종될 뻔했던 분의 인터뷰를 해 보겠습니다.>
 <예.>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막, 눈앞에 반투명한 사각 창이 떠요. 거기 적힌 내용이 있는데 그리스로마신화로 가겠냐, 안 가겠냐, 물어봐요.>
 <예, 그럼 선생님께서 여기 계신 건 ‘안 가겠다.’를 선택해서인 거네요?>
 <그렇긴 하죠. 아직도 얼떨떨해요. 꿈에서도 나온다니까요.>
 띡― 장면이 전환되어 앵커가 보였다.
 <국민 여러분, 앞서 경험담과 같이 불현듯 눈앞에 알림창이 뜨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거절을 누르십시오. 거절을 누르지 않고 승낙을 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사라진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
 
 20대 중반의 게임 폐인.
 강태원은 막 게임 하나를 클리어했다.
 몇 달 전, 우연히 길을 가다가 주운 게임.
 공교롭게도 이름이 그리스로마신화였다.
 여하튼 꽤 오랜 시간을 걸쳐서 플레이했다.
 드디어 조금 전 게임을 끝내 버렸다.
 엔딩이 좀 엔딩 같지 않았던 것 같지만.
 화면이 까맣게 변했으니 끝난 거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까만 화면에 갑자기 하얀 글자가 새겨진다.
 [당신이 한 게임과, 초대장을 통해 갈 세상은 똑같습니다.]
 [1년 뒤, 신들과 괴물들이 현실로 갈 예정입니다.]
 [유일하게 게임을 클리어한 당신에게 인류를 구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초대장이 전송됩니다.]
 뭔가 싶었는데 실제로!
 현실에서는 가상현실게임에서나 볼 법한 초대장이 와 버렸다.
 허공에 붕 뜬 채, 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초대장, 낯설지가 않았다.
 ‘뉴스에서 매번 떠들어 댔던 그 디자인인데?’
 내용도 똑같았다.
 이걸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취급해야 할까?
 같은 이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임에서 선보고, 현실에서 후 조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무슨 상관이야.’
 제법 신기하긴 했지만 그뿐.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독특한 과정이었지만.
 초대장이 오는 것 자체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1976년부터 2027년 현재까지.
 그리스로마신화로의 초대장이 수시로 날아온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초대장이 오면 거절부터 눌러라!
 정부가 귀가 닳도록 해 대던 경고다.
 청년도 곧바로 거절을 누르려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다른 선택을 할 리가 없지.
 한데, 좀 이상했다.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없다, 없어! 없다고!’
 반드시 있어야 할 버튼이 없었다.
 ‘거절, 거절이 없어······.’
 눈을 감고, 뜨고, 비비고, 씻고 봐도.
 ‘없다······.’
 이 상황에 그다지 중요하진 않지만, 동의 버튼도 없다.
 [그리스로마신화로 가기 10분 전.]
 선택권이 없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냥 닥치고 가라.
 이거구나······.
 갑자기 벼락 맞고 죽지 않는 이상 강제로 가야 하지 싶었다.
 
 
 # 지하 감옥
 
 ====
 [이미 해 본 게임입니다.]
 [밸런스 조정을 위해 난도가 상향됩니다.]
 [당신의 직업은 좌천당한 엑스트라입니다.]
 [현재 지정된 엑스트라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습니다.]
 [과포화한 엑스트라 인구를 줄이기 위해 무작위로 일정량의 엑스트라를 소멸해 나갈 예정입니다.]
 [엑스트라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여 생존하십시오.]
 [존재가치 증명까지 남은 기간 : 일주일]
 *‘존재가치’는 엑스트라마다 다르게 적용됩니다.
 *‘존재가치가 있는 기간’은 엑스트라마다 다르게 적용됩니다.
 [게임 전반부 클리어 보상으로 특전이 주어집니다.]
 [특전 1. 엑스트라의 고유 능력이 내재됩니다.]
 [특전 2.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특전 3. 존재가치 증명까지 남은 기간을 알 수 있습니다.]
 ====
 
 삼면이 막힌 어두침침한 작은 방 하나. 그 안에 1명은 누워 있고 1명은 앉아 있었다. 누워 있는 쪽이 강태원이었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으으음?”
 강태원이 신음을 흘리면서 정신을 차리고선 일어섰다.
 시야에 반투명의 사각 창이 떠올라 있는 게 아닌가.
 
 ====
 [그리스로마신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111기입니다.]
 ====
 
 ‘정말 왔네··· 그나저나 111기라······.’
 1976년에 처음 실종된 사람들은 1기.
 강태원과 함께 초대를 승낙해 이번에 온 사람들이 111기겠지.
 ‘이거,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는데?’
 먼저 온 선배들이 있으면 나쁠 건 없다고 여겼다.
 찌릿―!
 옆에서 오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낯선 아저씨가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났나.”
 어째 당황하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오래 산 것처럼 굴었다.
 “당신은?”
 “난 최팽수다.”
 최팽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은키도 상당히 컸는데 서 있으니 무슨 거인 같았다. 살집도 두툼하고 근육도 빵빵한 게 게임으로 치면 탱커라고 해야 하나.
 강태원이 신기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최팽수가 말했다.
 “흠흠, 너도 승낙을 한 거겠지?”
 “예.”
 “아무것도 모를 나이도 아닐 텐데, 왜 초대를 승낙했지?”
 “그게, 자다가 실수로 눌러 버렸어요.”
 “크큭, 역시. 자발적으로 선택한 놈은 없겠지.”
 ‘솔직하게 말해 봤자.’라고 여겼다. 소득도 없을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았기에 거짓말을 했다.
 “아저씨는?”
 “난 술 마시다가 눌렀어. 하필이면 필름이 끊겨서 내가 누른 줄도 몰랐지.
 초대장에 대한 정보가 퍼질 대로 퍼진 뒤로는 이런 식의 이유로 오곤 했다.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 승낙해서 오는 이는 없을 테니까.
 최팽수가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거긴 쇠창살로 가로막혀 있었다. 꼭 감옥 같았다. 강태원의 시선이 거기로 향하자 최팽수가 말했다.
 “여긴 콜로세움 지하 감옥이야.”
 일순, 강태원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콜로세움이요? 로마의?”
 “그래, 그 콜로세움. 많이 들어 봤을 텐데?”
 강태원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럴 리가······.”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게임의 시작 부분 역시 감옥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절 위화감이 없었다.
 그런데 콜로세움이라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콜로세움은 시나리오 초중반부에나 입장 가능한 장소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최팽수는 제 할 말을 늘어놓는다.
 “그래, 놀랍지? 나도 놀랐단다. 한국에 있다가 버튼 하나 눌렀다고 로마로 오다니.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여기가 2027년의 이탈리아의 로마가 아니란 점이다. 여긴 기원전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시대―”
 강태원은 저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차츰 굳어 갔다. 누가 보면 점점 돌이 되는 줄 알 정도로.
 “너한텐 안된 소식이겠지만 여긴 지옥이나 다를 바 없다. 콜로세움은―”
 최팽수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저벅, 저벅.
 최팽수가 강태원을 보며 검지로 입을 갖다 댔다.
 ‘쉿.’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근육 없는 돼지 같아 보이는 간수였다. 간수는 열쇠고리를 달랑거리면서 문 앞을 지나다 말았다. 쇠창살 안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신입이 왔네?”
 참 웃기는 방식이었다. 간수가 신입이 왔는지를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알게 된다니. 그런데 나머지 둘의 반응을 보니 이게 당연한 듯했다.
 최팽수가 굽실거리며 말했다.
 “예. 온 지 5분도 안 됐습니다.”
 분명 상대는 서양인으로 보였는데 어째 대화가 통했다. 자동으로 통역되는 시스템인가 보다.
 간수가 가슴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휙 던졌다.
 “이거, 작성시켜라.”
 “예, 예.”
 간수는 수염을 매만지면서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최팽수가 바닥에서 종이를 들고선 강태원에게 전달해 주려다가 멈칫했다. 여전히 강태원의 얼굴은 창백해 있었다. 드디어 그걸 발견한 최팽수가 뻔히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요.”
 “아까 콜로세움 얘기 들었을 때부터 얼굴이 창백해졌는데? 혼란스러울 테니 충분히 이해하지만, 얼른 적응하는 게 좋아. 현실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는 듯하니까.”
 “그게 뭐죠?”
 “아, 이거 참가 신청서.”
 “네?”
 강태원이 최팽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제100회 1 vs 100 참가 신청서]
 강태원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1대100이라고?’
 결정적으로 저 신청서가 1대100 참가 신청서라는 점에서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좆 됐다.’
 강태원이 화들짝 놀라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
 [레벨 : 1]
 [근력 : 3]
 [민첩 : 5]
 [지력 : 0]
 [체력 : 100]
 [마력 : 0]
 ====
 
 ‘레벨 1로 무슨······.’
 1 vs 100은 콜로세움에서 유명한 이벤트다.
 단 1명이 100명과 맞붙는 경기였다.
 최팽수가 강태원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100이니까. 넌 초짜라서 아무도 기대 안 해. 그냥 뒤에서 보조만 맞춰 주면 돼. 나머지는 우리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하······.”
 그걸 몰라서 이렇게 얼빠져 있는 게 아니었다.
 상식적으론 1대100의 싸움에서 100이 무조건 유리하다.
 하지만 이건 상식이 통하지 않아서 문제다.
 1이 100을 압도할 수 있다면, 그깟 숫자가 대수겠는가.
 강태원은 이 경기에서 저 1인이 될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헤라클레스······.’
 올림포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아들이자 최강의 영웅이 아니던가.
 반대로 100인은 오합지졸뿐일 터였다. 최팽수의 레벨이 그리 낮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 봤자 호랑이 앞에선 고양이 신세겠지.
 이런 조합이라면 100명이 아니라 1,000명, 10,000명이 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려지는 그림이라곤 양민 학살이었다. 주최 측에서 바라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할 터였다. 그저 관람객들에게 단순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거겠지.
 희망을 품어 보고 싶었다.
 1대100이라고 1이 늘 헤라클레스로 고정되어 있던 건 아니지 않았던가.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으면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번 1대100경기는 제100회 경기로 한참 떠들썩했었다. 1회만큼이나 100회도 인상이 깊을 수밖에 없다.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는 것이다.
 강태원이 쓰게 웃었다.
 그제야 왜 자신이 게임 시나리오의 초중반부에나 갈 수 있는 콜로세움에서 그것도 레벨 1로 시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도 콜로세움에 저레벨이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1대100 신화를 위해 희생될 엑스트라로서 존재했을 뿐이지.
 ‘내가 엑스트라인 거야?’
 띠링―!
 
 ====
 [본인의 주제를 파악했습니다.]
 [직업이 공개됩니다.]
 [능력이 개방됩니다.]
 [직업 : 좌천당한 엑스트라]
 [능력 : 약한 존재감]
 [능력 설명 : 현재의 존재감에서 조금 낮춰진 상태로 평상시에는 이 상태가 유지되나,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서 나서는 순간 약한 존재감이 해제됩니다.]
 [타인에게 존재감을 알려 경험치를 쌓을 시, 상위 단계의 능력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
 
 놀랄 것도 없었다.
 ‘환장하겠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단단히 꼬였다는 건 명백했다.
 본래라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강해진 뒤에 원래 있던 세계로 금의환향할 계획이었다.
 당연히 처음부터 시작할 줄 알았지, 초중반부터 시작할 줄 알았겠나? 그것도 엑스트라 포지션으로 시작되다니. 이거 시작하자마자 죽게 생겼다.
 강태원이 최팽수를 보았다.
 “혹시 아저씨는 직업이 뭐예요?”
 “나? 엑스트라지. 여기 있는 노예들은 죄다 엑스트라야.”
 “그렇군요.”
 상태창에서도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다.
 ‘엑스트라인 것도 서러운데 노예 신분이라니. 가관이네.’
 강태원이 물었다.
 “그럼 혹시 그냥 엑스트라인가요?”
 최팽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냥 엑스트라지. 엑스트라에도 급이 있나?”
 ‘예,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어봤다간 자신만 이상한 놈이 될 것 같았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최팽수가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포기하지 마라.”
 “예?”
 “엑스트라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아, 예······.”
 강태원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는 무슨, 이미 1대100을 어떻게 치를지 계획 잡아 놨는데.’
 사람이 절박할 때, 기댈 대가 아무 데도 없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
 ‘신.’
 강태원은 신의 힘을 빌릴 계획이었다.
 최팽수가 벽에 걸린 나뭇가지를 들고 휘둘러 보았다.
 휙― 휘휙.
 “진짜 칼은 경기에 나갈 때 지급될 거야. 그 전까지는 이걸로 연습해야 해. 검도를 배우거나 하진 않았지? 뭐, 어차피 레벨링 시스템이라서 소용없을 테지만. 어쨌든, 내가 하는 거 잘 봐! 아직 1대100 하는 날은 며칠 남았으니까, 내 교육을 충실히 따라 연습하면 기본기는 갖출 수 있을 거다.”
 보아하니, 최팽수는 1인이 될 자가 누군지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기야 주최 측에서 그걸 미리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는 순간, 100인의 사기가 시궁창으로 떨어질 테니까. 꿀잼 경기를 위해선 당일에 대면했을 때 알게 하는 게 좋겠지.
 ‘개새끼들.’
 참으로 웃기는 운명이었다.
 실제로 강태원은 게임에서 관객의 입장으로 이 경기를 관람했었으니까. 한 번도 학살당하는 100인의 노예들의 처지에 대해서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역지사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 비참한 운명을 알 리가 없는 최팽수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알량한 솜씨나 뽐내는 중이었다.
 ‘후, 어쩐담······.’
 이대로 있다간 개죽음당하게 생겼다. 잘은 모르지만, 여기의 죽음이 현실에서의 죽음일 테니까.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적이었다. 아니, 이곳이 현실의 일부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기에 마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다가올 운명과 미래를 알고 있지 않은가. 바꾸면 그만이다. 이미, 강태원이라는 존재가 여기서 시작을 하는 것부터가 바꿀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게 될 테니까.
 강태원이 다짜고짜 물었다.
 “1대100이 언제 시작하죠?”
 “한 달 남았지.”
 최팽수가 칼을 내리면서 대답했다.
 “한 달이라······.”
 불행 중 다행으로 성장할 기간 자체는 넉넉했다.
 ‘어디 보자···, 지금 헤라클레스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었지?’
 게임을 플레이하던 도중을 회상했다.
 ‘8살 정도 됐으려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얼추 그 정도로 봤었다.
 ‘8살······.’
 말이 8살이지 또래의 8살로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아기 때 헤라가 보낸 뱀을 잡아 족쳤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실낱같을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도 했다.
 영웅이 처음부터 영웅이 되진 않는다. 비범한 출생으로 시작되는 건 맞지만 성장 과정이란 게 엄연히 존재한다. 그 격차를 따라잡으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완숙한 경지에 오른 헤라클레스가 아닌 어린 시절의 헤라클레스라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야.’
 물론 0%에서 쥐꼬리만큼 오른 승률이겠지만 말이다.
 강태원은 헤라클레스가 어떻게 100인을 발라 버렸는지를 생생히 기억했다. 별것 없었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포효를 내질렀을 뿐인데 과반수가 나가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기세에 밀려 기절을 해 버린 것이다.
 현재의 강태원이라면 기절을 하는 쪽이지, 하지 않는 쪽에 서진 못할 터였다.
 그것부터 바꿔야 했다.
 상대와 싸우지도 못하고 지는 것만큼 억울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최소한 살이라도 비벼 보고 져야 덜 억울할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자의 기세에 밀리지 않으면 된다. 말이 쉽다.
 하지만 어떤 능력을 얻으면 가능했다. 그것만 있으면 최소한 아무것도 못 해 보고 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른바 초보자의 무지(無知).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구현해 주는 능력이다.
 아기는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아는 게 없고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태를 강제로 만들어 준다.
 무서운 걸 보고서도 마냥 무서움에 떨지 않게 해 주는 것이다.
 레벨 10이 되면 얻을 수 있다.
 물론 부가 조건이 붙는다. 안 그러면 개나 소나 초보자의 무지를 얻을 터. 강자가 억울하지 않겠는가.
 방법은 간단했다. 레벨 10이 될 때까지 능력치를 하나도 올리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아주 쉽지만, 아무나 가질 순 없었다. 레벨을 올리면 능력치를 올리는 건 습관이니까.
 ‘빠르게 레벨 10을 달성한다.’
 강태원은 일부러 순진무구한 척을 하며 최팽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입장에선 여기 처음 온 걸로 보일 테니 아는 게 없어야 정상이니까.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30분가량은 그걸 들어야만 했다.
 어차피 이 안에 있는 동안에는 레벨을 올릴 수가 없으니까, 시간을 때울 겸 겸사겸사 진행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간수가 찾아왔다. 문을 열면서 나오라고 신호를 했다. 모르겠다는 강태원에게 최팽수가 설명해 준다.
 “훈련장으로 가는 거야.”
 다른 말로는 레벨 올리러 가는 것이다.
 ‘훈련을 시켜 준다고?’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 각본처럼 100인은 전멸할 운명인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훈련을 시켜 준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간수를 비롯한 많은 관계자들은 이를 모르고 있을지도. 상위의 몇몇 관계자만이 알고 있겠지. 아니면 알더라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어찌 되었든 이건 형식적인 훈련이 될 터였다.
 저벅, 저벅.
 방에서 나와 복도에 들어섰다. 간수가 앞장서고 뒤를 따라가다가 좌측에 시선이 갔다. 어떤 방의 수염 난 아저씨가 최팽수에게 아는 척했다.
 “뭐야, 훈련 가는 거야?”
 최팽수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야지. 제퍼슨.”
 제퍼슨이 최팽수를 깔보는 듯한 어조로 웅얼거렸다.
 “가서 뭐 해. 어차피 이길 거.”
 최팽수가 언짢아했다.
 “아니.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나?”
 “그럼 100명이 1명한테 지겠어?”
 “우리가 참여하지 않아서 모를 테지만 듣기는 했을 텐데? 역대 1대100에서 항상 100이 져 왔다는 걸. 이번에도 그렇게 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가서 훈련을 해야지.”
 제퍼슨이 히죽 웃었다.
 “그래, 그러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할 말이 있네. 저번처럼 1이 100을 이길 정도라면 괴물이라는 거잖아. 훈련해 봤자 아니야? 어차피 질 건데. 이러나저러나 훈련할 필요가 없어요. 필요가.”
 제퍼슨의 말에 최팽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되었든 주어진 거라면 최선을 다해 봐야 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덜 후회할 테니.”
 “누누이 말하지만 난 안 간다.”
 “허허, 자넨 참.”
 최팽수도 더 이상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갈 길 가려고 하자 뒤에 대고 제퍼슨이 한마디 덧붙였다.
 “뭐,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이때까지 100명이 져 왔던 건 그들이 나약해서 그런 거라고. 내가 보여 줄 게. 훈련 하나도 안 하고 쉽게 이기는걸.”
 제퍼슨이 은근슬쩍 근육을 과시했다. 그래 봤자 최팽수보다 허접해 보였지만.
 최팽수는 우측의 누군가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 영섭이.”
 호리호리한 체격의 나영섭이 쇠창살을 잡은 채로 움찔거렸다.
 “왜 나오려다 마는 거야?”
 “그, 그게······.”
 더듬거리다가 나영섭이 제퍼슨을 힐끗 쳐다보았다. 제퍼슨의 말을 듣고선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허허, 참.”
 나영섭뿐만 아니라 훈련을 위해 감방에서 나오려던 몇 안 되던 자들도 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갔다.
 감방 안에 있던 자들이 최팽수를 말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최팽수 형님. 형님도 괜한 고생 안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맞아요. 전에 있던 100인들이 약했을 뿐이지, 이젠 다를 거예요. 싹 다 물갈이가 됐잖아요?”
 제퍼슨이 드러누우며 손을 흔들었다.
 “뭘 그렇게 말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게 놔둬. 난 한숨 푹 자야겠다.”
 제퍼슨은 훈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다.
 자기네들이 100% 이길 거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강태원이 조소를 지었다.
 ‘그 반대인 줄도 모르고.’
 순전히 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훈련을 하지 않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빠가 아들과의 팔씨름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듯이, 100명이나 되는데 1명과의 승부를 위해서 맹훈련에 돌입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 거겠지.
 그렇지만 최팽수가 언급한 대로 콜로세움 1대100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1대100에서 100이 진다는 것을.
 저 말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유경험자라면 또 모를까 자기네들과 똑같이 1대100을 해 보지도 않은 자가 그 위험성에 대해 말하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니, 설령 최팽수가 유경험자라 한들 이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퍼슨이 말하지 않았던가. 1대100에서 1이 이길 만큼의 실력자라면 100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할 테니 훈련이 무슨 필요냐고.
 막말로 죽을 날만 기다리자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틀린 판단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 대상이 바로 헤라클레스였으니까.
 
 ***
 
 어느새 훈련장에 도착했다.
 “응?”
 “더 이상 오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렇지, 이게 다야.”
 강태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포함해서 7명이다. 100명 중에서 7명이라니, 10%에도 못 미치는 수치였다. 그것도 최팽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레벨이 1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나왔을 터. 아마도 다음 훈련에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할 테지.
 강태원이 훈련장을 살펴보았다. 개판 5분 전이었다. 낡고 노후한데다 바닥에 금이 가 있어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린다. 하긴, 노예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진 않겠지.
 철커덕.
 갑자기 후방의 출구가 닫혔다. 문에 난 쇠창살 사이로 간수가 실실 쪼갰다.
 “그럼, 즐겁게 해 보라고!”
 그 말을 남긴 채 퇴장했다. 어째 불길함이 엄습한다.
 잠시 후.
 ―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린가 싶었다.
 최팽수가 칼을 든 손목을 풀면서 외쳤다.
 “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살아 나갈 수 있다. 레벨도 올리고 좋지. 안 그래?”
 우리가 열리며 늑대 무리가 찾아와 어슬렁거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보기만 해도 오금을 저리게 한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만남이 이러할까.
 꿀꺽―
 강태원이 침을 삼켰다. 게임에선 마우스와 키보드로 싸웠지만 이건 현실이었으니까.
 
 ***
 
 일주일마다 훈련을 했다.
 매 끼니가 형편없을 정도로 부실했지만, 악으로 깡으로 근근이 버텼다.
 그리고 1대100 경기가 하루 남았다.
 훈련 시간이 끝나 갈 무렵, 최팽수가 6명을 앞에다 세워 두고선 한마디씩 해 주었다. 대체로 오늘 잘했으니 내일 잘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강태원에게 오더니 안타까운 얼굴을 해 보인다.
 “솔직히 네가 제일 걱정이구나.”
 “······.”
 강태원은 최팽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다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레벨을 올렸다.
 그런데 유독 강태원만이 미흡해 보였다.
 다른 이들은 늑대를 쉽게 피해 내고 또 금방 죽인다. 제법 요령이 생긴 덕도 있겠지만 힘과 민첩이 올랐기에 가능한 것이다.
 반면, 강태원은 남들보다 몇 번을 더 물리고, 몇 번을 더 때려야 간신히 죽일 수 있었다.
 그 차이는 레벨이 오를수록 커져만 갔고, 기어코 최팽수의 근심까지 사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10이 되도록 능력치를 하나도 올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말만 레벨이 오른 거지 레벨 1이 처맞으면 심하게 아플 터였다. 능력치를 올리지 않으면 속 빈 강정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최팽수는 강태원의 더딘 성장력이 이해 가지 않았지만,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레벨이 올랐음에도 능력치를 하나도 안 올릴 줄은 말이다.
 “내일 넌 최후방에 있어라. 그래야 안전할 거다.”
 “예.”
 강태원은 상심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활짝 보조개를 띄며 웃는 중이었다.
 띠링―!
 
 ====
 [레벨 10까지 능력치를 하나도 올리지 않은 당신, 그 무지(無知)함에 대한 보상을 드립니다.]
 [초보자의 무지(無知)를 얻었습니다.]
 ====
 
 드디어 레벨 10이 되었다. 그동안 무시당하며 쓴소리만 들었던 나날들이 싹 잊혔다. 뛸 듯이 기뻤지만, 기쁜데도 티를 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르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지만, 여기까지만 올 게 아니라 더 나아갈 길이 있었으니까.
 과장 조금 보태면, 이제 겨우 헤라클레스와 눈 마주칠 수 있는 단계에 오른 것이다. 종국에는 그를 쓰러뜨려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죽는다. 1대100은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경기이니까.
 ‘오늘 밤이 관건이겠네.’
 강태원은 홀로 방으로 돌아왔다.
 첫날 이후로는 최팽수하고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1인 1방이었다.
 첫날에는 느닷없이 최팽수의 방에서 강태원이 나타났기에 빈방을 마련하느라 임시로 같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동안 올리지 못했던 능력치를 배분하기로 했다.
 [잔여 능력치 : 9]
 
 ====
 [레벨 : 10]
 [직업 : 좌천당한 엑스트라]
 [근력 : 3 ―> 5]
 [민첩 : 5 ―> 12]
 [지력 : 0]
 [체력 : 100]
 [마력 : 0]
 [능력 : 약한 존재감 / 초보자의 무지(無知)]
 ====
 
 레벨 1이 올라갈 때마다 배분 능력치가 1씩 주어진다. 근력에 2를 민첩에 7을 넣었다. 그렇게 분배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끼리끼리 싸울 게 아닌 이상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든 별 의미도 없었으니까.
 
 ***
 
 밤이 되었다. 그 어떤 소리도 없이 정적이 깔린 감옥과 복도, 그리고 방 안. 강태원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도 채 안 남았구나.’
 내일 오후 7시에 드디어 1대100 경기가 시작된다.
 다른 검투사들이 본격적인 대결을 하기 전에 하는, 분위기 띄우기용 오프닝 쇼라고 보면 되었다.
 그가 자지 않고 있는 건 비단 내일 일이 떨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자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대로 자면 크게 후회할 터였다.
 현재의 레벨은 고작 10에 불과하다.
 헤라클레스는 대략 60레벨 전후일 터.
 그의 레벨을 생각하니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네······.’
 8살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레벨인 것이다.
 ‘시작부터 60을 잡으라니······.’
 레벨 10인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서 보다 강해지는 방법이 필요했다.
 “여기 있나요?”
 강태원이 나직이 속삭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곁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계속 혼잣말했다.
 “헤르메스.”
 이름에는 힘이 있다.
 모든 이들의 이름에 힘이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급이 갖춰져야 한다.
 그중에서 최상급인 존재는 다름 아닌 신.
 신의 이름을 부르면 당사자가 알 수 있다.
 모든 신이 부른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다.
 그리고 부른다고 강태원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게 가능한 신을 둘, 알고 있다. 지금 부를 이는 그중 한 명이었다.
 “헤르메스.”
 방랑하는 신, 헤르메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듣고 보는 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지 않고 ‘이곳’ 어딘가 싸돌아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헤르메스?”
 응답이 없다. 그럴 수밖에.
 아무나 신의 이름을 외치진 않지만, 간혹 실수로 부르는 경우가 있을 터. 그럴 때마다 신이 의식하면 신도 참 피곤하지 않을까. 그걸 방지하고자 신은 대체로 자기만의 설정을 해 놓는다. 몇 번까지는 무시할 수 있게. 그 이상을 넘어간다면 어떨까.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계속해서 불렀다. 대답을 할 때까지. 집요하고 악착같았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이상하다? 헤르메스는 처음 부를 때에는 10번 부르면 나타나게 설정되어 있는데? 게임과 다른가?’
 그게 아니었다.
 띠링―!
 
 ====
 [약한 존재감으로 인해 외침이 신에게 들리려면 더 많이 불러야 합니다.]
 ====
 
 ‘어이가 없네.’
 쉽게 비유하자면 어른이 소리치는 거랑 애가 소리치는 것, 그 차이일 것이다. 강태원의 존재감이 약하다 보니 부르는 횟수마저도 더 많아야 하는 듯했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헤르메스―”
 총 20번 정도 불렀을 즈음해서 반응이 왔다.
 <방랑하는 자가 당신을 의식합니다.>
 방랑하는 자는 다른 이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헤르메스가 맞다.
 다만, 저렇게 본명을 감추는 것은 신들의 특성 자체가 이름을 밝히길 꺼려 하는 데에 있었다. 정식 계약을 하거나 하는 관계가 되지 않은 이상은 다른 신들도 다 저럴 터였다.
 <방랑하는 자가 신경질을 부립니다.>
 강태원이 풀썩 웃었다.
 ‘관심 끌기는 성공했군.’
 <방랑하는 자가 강림합니다.>
 ‘어쭈, 직접 오시겠다?’
 결코, 좋은 의도로 오는 것은 아니리라. 잔뜩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우쭈쭈, 달래 줘야겠군.’
 번쩍.
 눈부신 광채와 함께 헤르메스가 나타났다. 역시 속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다웠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을 신고, 두 마리의 뱀이 칭칭 감고 있는 지팡이를 든 미소년의 외모를 지녔다.
 
 ====
 [엑스트라 주제에 신을 불러냈습니다.]
 [그러나 신을 부름에 있어서 가장 난도가 낮은 축에 속합니다.]
 [헤르메스를 불러낸 행위의 존재감을 경험치로 환산합니다.]
 [약한 존재감(―) 경험치가 20 상승합니다.]
 [약한 존재감(―) 경험치 (20 / 200)]
 [신의 눈길을 받았습니다.]
 [약한 존재감(―)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
 
 강태원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헤르메스 님.”
 “엉? 너냐? 날 부른 게?”
 헤르메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강태원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웃으며 말했다.
 “제안을 하고자 해요.”
 “제안?”
 헤르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지도 않은 제안이라면 강태원을 한 대 치리라, 굳게 다짐했다.
 
 ***
 
 1대100 경기 당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 모두가 곤히 잠에 빠져 있을 때 복도에 장화 끄는 거친 소리가 났다.
 스으― 스으윽.
 “야, 일어나.”
 이내, 벼락 치는 듯한 굉음이 울린다.
 쾅― 콰콰쾅.
 간수가 몽둥이로 쇠창살을 치면서 지나간다. 참으로 불친절한 기상 알림이었다. 사실상 기상 알림을 들으면서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군대 훈련소 첫날에 버금갈 만한 최악이었다.
 강태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를 본 간수 불도크가 지나치려다 말고 시비를 건다.
 “어쭈? 요놈 봐라? 너 얼굴이 왜 그래. 잠 제대로 못 잤냐?”
 눈가에 자욱이 내려앉은 다크서클을 본 듯하다.
 “아닙니다······.”
 강태원이 힘없이 대답하자 간수가 피식 웃었다.
 “에헴, 아침이다. 든든히 먹고 오늘 파이팅 해야지! 크크크.”
 빵 한 쪼가리와 물 한 사발을 내던진다. 거칠게 내던진지라 사발에 담긴 물의 절반이 쏟아져 버렸다. 하도 많이 당해 와서 그런지 익숙해질 지경이다.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내가 손에 땀이 많아서 말이야. 크크크!”
 불도크가 실실 쪼개면서 다른 방에도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사라졌다.
 훌훌.
 강태원은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 털었다. 빵도 품질이 썩 좋지 않았다. 이거 먹는다고 배가 차진 않겠지만 안 먹는 것보단 나으리라.
 빵을 두 입 물었을 뿐인데 다 먹었다. 양과 질,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는 역대 최악의 빵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빵이야.’
 철커덩.
 각 방에서 문이 열렸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불도크의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오늘은 귀한 손님들이 오시는 날인 만큼, 특별히 씻을 수 있게 해 주마! 한 시간 동안 자유 시간이다.”
 “와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노예들은 날아갈 것처럼 기뻐했다. 목욕은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했으니까. 이들은 이곳에선 노예였지만 원래의 세계에선 현대인이다. 하루에 한 번 씻는 게 기본인 자들이 한 달에 한 번 씻게 되니 얼마나 불쾌했겠는가.
 강태원은 마냥 호의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 괘씸한 속내를 누가 모를 줄 아는가.
 ‘사람들 앞에 서야 하니 최소한의 악취는 제거하라 이거겠지.’
 노예들을 위한 게 아니라 관객들을 위한 것이리라. 죽은 뒤, 처리를 수월케 하기 위해 몸을 단정히 하는 것과도 다를 바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그걸 알려서 흥을 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차치하고서, 강태원은 씻을 수 있다는 기쁨이 그리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인해 잠을 푹 자지 못한 것이다. 기껏해야 2시간, 체감으로는 더 짧게 느껴졌다.
 ‘그래도 괜찮아. 컨디션이 최악인 게 낫지.’
 자면 죽고, 자지 않으면 살 수 있다.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살 수 있는데 잠이 대수겠는가.
 그렇지만 역시 이 정도로 안 자 본 적은 수험생 시절 이후로 오래간만이었는지라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이 씻을 때 잠이나 더 자 두기로 했다.
 강태원은 도로 누워 눈을 붙였다.
 씻는 데 주어진 시간은 단 1시간. 그럴지라도 2시간보다는 3시간 자는 게 낫겠지.
 화― 악.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강태원이 눈을 떠 상대를 확인했다. 최팽수였다.
 “잠이 부족했나 보군.”
 “예······.”
 “시간이 됐다네.”
 “벌써······.”
 “이제 움직여야 하지. 그 전에, 배고프지?”
 “아니―”
 꼬르륵―
 타이밍이 절묘했다.
 “자.”
 “아니, 이건······.”
 최팽수가 빵을 건네는 게 아닌가.
 “이걸 왜?”
 강태원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눈을 했다.
 “이거 먹고 힘내라고. 힘이 날 만한 양은 아니지만 말일세.”
 말 그대로 선의의 표시였다.
 남아도는 것도 아닌 1인당 손바닥만 한 빵 하나로 하루를 버텨야 한다. 그걸 다 먹어도 모자랄 판에 아예 다 준다? 이걸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전 괜찮―”
 강태원이 거절하려고 하는데 최팽수가 억지로 손에 쥐여 준다.
 “받아라. 아마도 이게 너에게 주는 마지막 빵일 것 같으니까. 그동안 고생했다. 훈련 동안 그래도 네가 제일 최선을 다했어. 비록 남들에 비해 성장 속도가 제일 느리긴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뭐, 내가 못 가르친 경향도 없잖아 있겠지······.”
 최팽수가 늘 희망에 찬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암울한 발언은 처음이었다.
 “마지막 빵이라뇨?”
 “듣고 놀라지 마라. 친한 간수가 있어서 들었는데, 우리가 싸울 1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하더군.”
 “예?”
 “나도 보통 인물이 아닐 줄 알았으니 그토록 훈련한 거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훈련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어. 어쩌면 진즉에 답은 나와 있었을지도 몰랐겠구나. 제퍼슨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거야······.”
 “······.”
 “헤라클레스. 그자가 1인이라 하더구나.”
 “······.”
 천하의 최팽수라도 가히 표정이 밝지 않을 만했다.
 
 ***
 
 “자, 자, 두 줄로 서라.”
 불도크가 노예들의 줄을 세우고선 어딘가로 향했다. 1대100 경기가 1시간 전인 상황.
 다들 1시간 뒤의 일은 꿈에도 모른 채 들떠 있었다.
 아직 최팽수가 대전 상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은 듯했다.
 뭐, 그것만 제외하곤 들뜰 만했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석방을 해 주기로 했으니까.
 100명이 단 1명만 이기면, 석방.
 그런 만큼, 이들에게는 경기 1시간 전이라기보다는 석방까지 1시간으로 다가올 터였다.
 지하 3층에서 지상 1층으로 향했다. 기다란 복도를 어느 정도 가다가 한 문 앞에 섰다.
 [선수 대기실]
 그 앞에 서더니 간수가 뒤로 돌아섰다.
 “자, 1인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다.”
 그 말에 강태원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헤라클레스랑?’
 경기장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 그보다 일찍 만난다? 어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간수가 문을 열어 두고선 안으로 들어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노예들은 한 치의 거리낌 없이 입장했다. 기세로 인해 안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무리가 없었다. 상대가 기세를 낮춘 뒤였으니까.
 ‘8살에 기세를 조절할 줄 알다니, 역시.’
 안으로 들어가자 웬 꼬맹이가 의자에 앉아 있고 웬 아줌마와 그 옆에 동물, 아니 켄타우로스가 서 있었다.
 강태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신기하네.’
 켄타우로스는 반인반마, 하체는 말이고 상체는 인간이었다. 영화나 게임에서나 보던 존재를 직접 두 눈에 담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으랴. 스마트폰만 있었다면 당장 사진을 찍었을 터였다.
 강태원이 단박에 켄타우로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케이론이겠군.’
 일명 영웅 제조기.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아킬레우스, 악타이온 등등. 그리스로마신화의 거의 모든 영웅들의 스승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잡은 걸로 유명해질 테세우스만이 유일하게 제외일 정도였다.
 헤라클레스가 어릴 때이니 한창 케이론 아래에서 ‘참교육’을 받고 있을 터, 제자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따라붙은 거겠지.
 그리고 그 옆에선 여인은.
 ‘알크메네.’
 헤라클레스의 어머니다. 어느 어머니가 안 그렇겠냐마는 자식 사랑이 끔찍하겠지.
 이들을 보는 노예들은 눈을 이리 굴렀다, 저리 굴렀다 했다. 누가 자신의 상대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터였다.
 늙은 아줌마일 리도 없고, 8살짜리 애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켄타우로스란 말인가? 다들 은연중에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케이론은 무심한 눈초리로 입구로 들어오는 노예들을 주시했다.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간수.”
 짧은 외마디에 간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자들은 누구인가? 설마, 내 제자와 맞붙게 될 자들인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오게 했지? 시합 전에 만나는 건 규정 위반일 텐데?”
 간수는 케이론의 싸늘한 눈초리를 피하고선 알크메네의 눈치를 살폈다.
 알크메네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케이론, 제가 그러라 시켰습니다.”
 케이론의 눈이 알크메네에게 향했다.
 “어째서?”
 “충고를 남기기 위해서지요.”
 “뭐요?”
 알크메네는 케이론을 무시한 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대충 노예들을 빙 둘러보았다. 불결하다는 감정이 저변에 깔려 있는 눈길이었다.
 “노예들아, 잘 들어라. 오늘 경기에서 너희들은 전심전력을 다 할 필요가 없다.”
 “······!”
 노예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며 말이 이어졌다.
 “내 아들의 뜻대로 장단만 맞춰 주면 된다.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해라. 괜히 쓸데없이 나대다가 내 아들한테 생채기 하나라도 났다간, 내 네놈들에게 죽음으로 그 대가를 물을 것이다. 알겠느냐? 물론 내 아들이 네까짓 놈들에게 다칠 리는 절대 없을 테지만 말이야. 호호호.”
 일순,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강태원이 이를 바득 갈았다.
 ‘정신 나간 년.’
 노예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비단 알크메네가 건방진 소릴 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까닭이 컸다.
 ‘저 꼬맹이가?’
 노예들은 어처구니없었다. 상대가 켄타우로스가 아니라 한낱 꼬맹이라니.
 “우리보고 저런 애랑 싸우라고?”
 “가당키나 한가?”
 불식간에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워졌다.
 “자자! 조용히 해라!”
 불도크가 제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아직까지도 노예들은 꼬맹이의 정체에 대해선 모르는 듯했다. 하기야 21세기 사람 중 헤라클레스를 실제로 만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을 터. 저 소년이 헤라클레스라는 걸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걸 전혀 모르는 노예들은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되었지 싶었다. 비겁하긴 하겠지만 성인보다는 어린애가 훨씬 상대하기 수월할 테니까.
 그중에서 강태원과 최팽수만이 굳은 얼굴이었다.
 알크메네가 말했다.
 “네놈들이 아무리 미개하다 한들 내 말을 잘 알아먹었으리라 믿는다.”
 다들 화딱지가 났지만, 어느 하나 나서지 못했다. 간수 중에서 잘나간다는 불도크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대인 만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때였다.
 나선 것은 다름 아닌 헤라클레스였다.
 “엄마!”
 그 나이대 애같이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나 상관없어.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야지.”
 1대100인데 저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했다. 100의 입장에서 저러는 거가 아닌, 1이 저러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이건 노예들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자기 수준에 맞추려면 최소한 노예 100명은 되어야 정정당당하다고 여기는 걸 테니까.
 그가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사력을 다해서 저랑 붙어 줘요. 그렇지 않으면 다치는 걸로 끝나지 않고 죽일 거예요.”
 노예들이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의 말이라 여겼는지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최선을 다해 주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알크메네가 헤라클레스의 양어깨를 붙잡고 설교했다.
 “애야. 여기서 힘을 뺄 건 없단다. 이건 단지 아버지에게 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 주는 쇼일 뿐이란다. 그래서 내가 이런 머저리 같은 자들을 네 상대로 내세운 거란다.”
 그 얘기를 듣고선 케이론이 험악한 얼굴을 했다.
 “뭐요?!”
 
 
 # 1대100
 
 알크메네의 말을 들은 케이론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알크메네는 무엇 때문에 케이론이 화났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케이론이 다그치듯 외쳤다.
 “다시 말하시오.”
 알크메네가 눈을 치켜뜨며 당당히 물었다.
 “뭘 말하라는 거죠?”
 “저자들을!”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노예들을 가리켰다.
 “알크메네 당신이 선발한 거요?”
 알크메네가 고작 그것 때문이냐는 투로 답했다.
 “그런데요? 무슨 문제 있나요? 이봐, 불도크.”
 “예.”
 불도크가 잔뜩 주눅이 들었다.
 “문제 있나?”
 “아뇨······.”
 케이론이 고함을 쳤다.
 “뭐요? 문제가 없단 말이요? 선수 선발까지 개입을 했는데도?”
 “난 그럴 ‘권한’이 되니까 하는 거지, 권한도 없는데 이러겠어요? 케이론은 나서지 마세요. 콜로세움에서의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알크메네가 헤라클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신한 척했다.
 “헤라클레스. 이런 엄마가 자랑스럽지?”
 헤라클레스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케이론이 분노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이렇게 사사건건 개입을 하시면 어쩐단 말이오? 이런 승부조작은 콜로세움의 신성한 법으―”
 알크메네가 말을 잘랐다.
 “이봐요, 케이론! 내가 나 하나 잘되자고 이럽니까? 우리 모두가 잘되자고 그러는 거잖아요. 우리 아들이 털끝 하나도 안 다치고 이기면, 콜로세움의 기록을 갈아 치우는 거라고요! 사상 최연소 소년,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100명의 성인을 쓰러트리다! 이렇게 소문이 날 거란 말이지요! 그럼 당신의 명성에도 이로울 거라고욧!”
 알크메네의 말에 케이론은 이마를 팍 쳤다.
 “이게 헤라클레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여기오? 이 아이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소. 이번 승부로 성장할 기회를 어머니 손으로 꺾어 버리는 행위라는 걸 왜 모르오?”
 “그럼 내가 내 아들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다 이거예요? 우리 아들이 시원하게 확 휩쓸어야지, 보는 사람도 통쾌하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걸 보고 싶어요? 요즘 대세는 통쾌함이에욧! 고구마를 먹은 것 같이 목메는 상황은 누가 바라욧! 우리 같은 상류층이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정말!”
 더 이상 말싸움하기 싫었는지 케이론이 엄포를 놓았다.
 “으으! 이건 명심하시오. 이 경기가 끝나는 대로 헤라클레스는 나한테 넘기시오. 내가 따로 데려가서 키우겠소. 더 이상 당신 밑에서 크게 놔둘 수가 없겠소.”
 “누구 맘대로! 내 손을 떠난 적이 한시도 없단 말이에욧!”
 “제우스의 허락도 받았소.”
 “그럼 나도 제우스에게 말해야겠어욧!”
 “그러시던가.”
 “당신의 제자이기 전에 내 아들이라고!”
 “아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얼른 당신 손에서 빼내 와야겠군. 자식을 망치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우고선! 헤라클레스가 배울까 봐 겁나는군.”
 둘은 한동안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티격태격했다.
 강태원은 이를 보면서 현대에 맞춰진 역할극이 떠올랐다.
 전형적인 대기업 갑질 사모님과 곧은 신념을 지닌 선생,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헤라클레스.
 기가 센 사람들 사이의 헤라클레스가 어떤 의미로는 딱해 보였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랄까.
 그러나 문제 될 건 없었다. 저런 환경에서 보통 새우라면 등이 골백번은 터져도 모자람이 없겠으나, 저 새우는 특별했으니까. 고래보다 더 몸집이 비대한 황금 새우였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저런 식으로 알크메네의 곁에서 떨어지는 거였군.’
 모든 이들이 그렇듯 부모의 곁에서 떨어지는 날이 온다.
 헤라클레스는 저렇게 알크메네의 품에서 벗어나 케이론의 밑에서 제대로 된 영웅 수업을 받게 되는 듯했다.
 ‘헤라클레스에겐 잘된 일이지.’
 그러는 한편, 간수가 노예들에게 말했다.
 “자자, 우린 나가자.”
 노예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등 떠밀리듯 나가면서 머릿속에 하얘졌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으니 그럴 만했다.
 ‘헤라클레스라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1인이 헤라클레스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
 
 경기까지 30분 남짓 남은 시간. 본래라면 사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여야 했다.
 그러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한 뒤, 사기가 땅바닥을 뚫고 지하로 추락하는 도중이었다.
 “우린 다 죽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암울함이 짙게 깔린 선수 대기실. 대다수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걸 둘러보며 최팽수가 나직이 말했다.
 “내 이럴까 봐, 아무 말 못 하고 있었지.”
 “······.”
 강태원이 다소 굳은 어투로 말했다.
 “저 명상 좀 할게요.”
 “응? 그러게.”
 최팽수는 생각했다. 강태원도 저번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척 긴장하고 있겠노라고.
 ‘그래, 헤라클레스를 보기 전에는 당당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보고 나니 알겠지?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걸 말이야.’
 강태원이 명상을 하려는 것은, 어쩌면 죽기 전 짧은 인생이나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는 거라고 여겼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강태원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누구던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자가 아니던가.
 그런 자와 승부를 펼칠 수 있다. 승패와는 관계없이 그 점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최고조에 달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돌입했다.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헤르메스와 내적 연결을 시도했다.
 한편, 최팽수가 벌떡 일어났다. 노예들 중 몇몇이 이에 관심을 보였다.
 “이보게들. 이러고 있어도 달라질 건 없네. 우리는―”
 제퍼슨이 끼어들었다.
 “또 그놈의 희망 타령하려고 하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이보게. 난 그런 의도로―”
 “그래, 우습겠지. 우리가 우습게 보일 거야. 하자는 대로 안 따르고 훈련도 안 했으면서 결국 이렇게 되니까 꼴좋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제퍼슨. 궁예질은 작작 해라.”
 “궁예? 궁예가 뭔데?”
 “이거다, 이놈아!”
 최팽수가 제퍼슨의 왼쪽 눈에 냅다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으아, 이 새끼. 미쳤나? 미쳤어? 간수! 불도크 간수!”
 하지만 불도크는 오지 않았다.
 최팽수가 제퍼슨의 목을 부여잡고 들어 올렸다.
 번― 쩍.
 매서운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며 말했다.
 “나한테 비꼬는 건 좋다네. 그렇지만 동료들 사기를 계속해서 깎아 먹겠다면, 그 전에 자네 명줄을 깎게 될 걸세. 알겠는가?”
 “어··· 어어.”
 제퍼슨은 꼬리를 내린 강아지가 되었다.
 퍼어억―
 최팽수가 제퍼슨을 집어 던졌다. 그래도 나중에 쓸 전력이라 이건지 아예 패대기치지는 않았다.
 최팽수가 손을 털면서 조용해진 노예들에게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헤라클레스라,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한 상대이긴 하지. 그렇지만 지금의 헤라클레스는 우리가 들어 왔던 그 영웅의 모습이 아니네. 어린 시절이지 않나. 8살에 불과하지.”
 “그, 그그그그그렇지만······.”
 나영섭이 소심하게 말끝을 흐렸다. 헤라클레스와 싸울 생각에 벌써부터 떨리는 듯했다.
 최팽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최악만을 생각하진 말자고. 듣자 하니 1대100도 처음이라더군. 쪽수로 밀어붙이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
 나뒹굴고 있던 제퍼슨을 곁눈질했다.
 “저 친구가 희망 타령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헛된 것처럼 느껴지는 희망으로 많은 역사가 뒤바뀌었다네. 희망을 가지세. 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줄 걸세.”
 강태원이 잠깐 그들의 대화를 듣고 판단했다.
 저들의 시점에서 아주 근거 없는 희망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신화를 알고 있다고 한들 8살의 헤라클레스가 정확히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는지는 모를 수밖에 없을 터.
 100명이면 해볼 만하다는 착각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기 때 뱀을 죽여 본 적이 있다는 걸 알 테지만 그거랑 이거는 또 별개의 상황으로 치부할 수 있을 테고.
 그러나 강태원은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서 8살의 헤라클레스의 저력을 아는 이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그로 인해 지난밤, 의도적으로 헤르메스를 불러내지 않았던가.
 지금도 강태원은 헤르메스와의 내적 연결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준비는 됐어요?
 ―전부 된 건 아니지만, 아니! 그보다 아직 30분 남았잖아! 뭐가 그리 급해! 그리고 너 지금의 상태도 약골은 아니잖아!
 ―약골이 아닌 정도로는 부족해요. 서둘러 주세요. 저도 목숨이 걸린지라.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말고 기다려 봐!
 ―예, 예.
 강태원은 헤르메스와의 내적 연결을 끊고선 눈을 떴다.
 헤라클레스와의 결투.
 현재의 레벨로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터. 그 나름대로 준비는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걸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었다.
 어젯밤, 강태원이 헤르메스를 부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콜로세움의 지하 감옥에 올 줄 알고 있었고 때에 맞춰서 부른 것이었다.
 내일 있을 1대100 경기.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제우스가 필시 참석할 터였다. 자신의 아들인 헤라클레스가 활약한다는데 놓칠 리 만무했으니까.
 헤르메스는 그 점이 못내 걸렸을 것이다. 지하 감옥에 무수히 많은 영혼들이 있을 테니까.
 그는 영혼의 안내자였다. 기본 강령대로라면 그때그때 영혼이 생길 때마다 저승으로 인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농땡이를 피웠다. 그러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이다.
 내일 제우스가 온다면 콜로세움 지하의 영혼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는 걸 알아차릴 터, 몇 달 치 꾸지람을 모아서 들을 게 뻔했다. 어쩌면 자격 박탈까지도 갈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
 그러니 그 전날에 이렇게 미리 들러서 영혼들을 싹쓸이해 가려고 했었다.
 그 와중에 강태원이 미친 듯이 불렀고 의식해 나타난 것이었다.
 
 ***
 
 강태원은 헤르메스에게 제안했다.
 “헤라클레스와 싸웠던 영혼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해 줘요”
 “응?”
 자신을 불러내 놓고 한다는 소리가 다소 황당했다.
 “제정신이냐? 감히 인간 따위가.”
 “내일 제가 누구랑 싸우게 되는지 아세요?”
 “알다마다.”
 “제가 쓰러뜨려 드릴게요.”
 “뭐?”
 헤르메스는 일순 당황했다.
 “헤라클레스 꼴 보기 싫죠?”
 “흠.”
 헤르메스는 정곡을 찔린 듯 헛기침을 했다.
 “조, 좋아하진 않지.”
 그는 늘 헤라클레스를 시기, 질투했었다.
 자신이나 헤라클레스나 정실부인인 헤라의 자식도 아니고 같은 혼외 자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제우스의 바람기로 인한 사후 뒤처리 따위의 잔심부름이나 맡은 반면, 헤라클레스는 최고의 교육과 환경 속에서 애지중지하면서 자라게 했다.
 이런 차별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물론 자신은 올림포스의 신이고 헤라클레스는 일개 인간이긴 하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신이 인간보다 못한 사랑과 대접을 받는 셈이니까.
 욕하는 시어머니보다 가만히 있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차별하는 제우스보다 비교 대상이 되는 헤라클레스가 밉상이었다.
 그런 마음속 깊은 감정, 열등감을 강태원이 콕콕 찌르고 있으니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강태원이 말했다.
 “제가 골탕을 먹여 드리죠. 올림포스 최고의 신이 보는 앞에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무시하고 깔봤던 일개 노예에게 처 발리는 모습이 얼마나 통쾌하겠어요?”
 헤르메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실룩였다. 그러다가 강태원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하고선 얼른 표정을 바꿨다. 무표정해진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 그 자식을 혼쭐내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강태원의 위아래를 훑어보고선 뇌까렸다.
 “그래서 도움을 달라는 거지요. 영혼과 대화를 시켜 주세요.”
 “그러면 해결돼?”
 “당연하죠. 그리고 헤르메스 님도 내일까지 영혼 처리 다 하시려면 힘드실 텐데 그 짐도 덜어 드리죠. 저한테 영혼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면 웬만큼 의심하지 않는 이상, 저승에 가지 않은 영혼이 있다는 걸 모를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뇌피셜이에요.”
 “뭐? 뇌피셜? 뭔 소리야.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뇌피셜이에요.”
 “아이 씨. 내가 졌다. 뭐 아무렴 어때. 그나저나 어떤 영혼? 설마 이곳의 모든 영혼과 대화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모두 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많은 영혼과 교류를 하긴 해야겠죠. 협조해 주세요.”
 “음, 좋아.”
 “감사합니다!”
 “어이, 잠깐! 이건 명심해! 내가 헤라클레스를 망신 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이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네가 딱해서 아량을 베풀어 주는 거야. 알겠지?”
 강태원이 히죽 웃었다.
 “당연하죠. 위대하신 헤르메스 님.”
 협상은 체결되었다.
 헤르메스는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콜로세움 지하 감옥의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데 열중했다. 곳곳에 여러 영혼들이 저승에 가지 못한 채 남겨져 있었다. 그들을 일렬로 세워 강태원의 감방으로 데려갔다. 새벽의 때아닌 면접 행렬이었다.
 “자자, 한 줄로 서.”
 그리 말하고선 헤르메스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 하는 짓인지······.’
 강태원은 들어오는 대로 한 명씩 대화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대다수가 검투사 출신이었다.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자들.
 강태원이 뽑고자 하는 영혼의 선별 기준은 간단했다.
 본래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지 못하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계된 최악의 환경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자들.
 그런 자들은 의외로 많았다.
 누군가는 대회 전날 식사가 나오지 않고 굶은 채 경기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또 다른 이는 아무 이유 없이 간수에 의해 폭행을 당해, 다리 한쪽을 절은 채로 싸워야 했다.
 공통점은, 상대는 최상의 컨디션에 고급 무기와 방어구를 두른 소위 잘나가는 도련님이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알크메네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아들의 업적과 명성을 세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비겁한 술수를 쓴다.
 언제부터인지 콜로세움은 본래의 위용을 잃고 변질되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통해 최고의 검투사를 가리는 게 아닌, 그저 금수저의 업적을 세우는 하나의 수단이자, 형식적인 등용문으로 변한 것이다.
 을의 입장에선 그걸 알면서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갑을 위해서, 갑에 의해서,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태원이 줄줄이 선 영혼들의 손을 일일이 맞잡아 주었다.
 “그간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억울해서 차마 눈도 감지 못하셨을 테지요.”
 강태원이 눈가를 비볐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고개를 뒤로 돌리며 눈물을 훔치는 척, 했다. 실제로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연기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방법을 준비해 놓았다.
 척.
 그의 엉덩이 뒤편에 놓인, 사발에 담긴 미량의 물. 목말라 뒤질 것 같으면서도 마시지 않고 남겨 두었던 소중한 물. 드디어 쓸 시기가 도래했다.
 첩, 처처척!
 신속하게 손가락으로 물을 적시고선 눈알에 묻혔다. 그러면서 눈을 감은 채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영혼들과 마주했다.
 눈을 뜨자마자,
 줄줄줄.
 눈물이 흘렀다.
 철철철.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다량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화장했으면 번졌을 만큼.
 이 어설픈 연기에도 영혼들은 속아 넘어갔다.
 강태원은 속으로 활짝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눈물을 보였네요. 보시다시피, 전 콜로세움에서 가장 나약합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내일 싸워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닌 헤라클레스입니다. 저도 곧 여러분들처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영혼들은 공감했고 가여워했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강태원이 흐느끼며 말했다.
 “절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라도, 그 억울함을,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영혼들이 앞다퉈 응답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널 도울 수 있는데?
 ―우리가 도와줄게. 더 이상 우리 같은 억울한 자가 나와선 안 돼!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까!
 강태원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카운트다운을 끝내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에게 당신들의 경험과 힘을 빌려주시겠습니까?”
 
 ***
 
 노예들은 선수 대기실에서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따사로운 햇볕을 맞이하며 나간 그곳에는
 널따란 원형 석판이 깔린 무대가 있었다.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층마다 앉아 있는 관객들이 보였다. 얼핏 봐도 빈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만석이었다.
 이 시대엔 콜로세움, 검투사들의 경기가 로마의 최대 행사이자 일종의 대규모 문화 공연이었다.
 거기다 헤라클레스까지. 콜로세움에선 첫 경기였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더더욱 인기 만점이었다. 제우스 신까지 행차하니 그리스, 로마의 이목이 다 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로 치면 톱스타가 주연에 무대 인사를 나왔고, 아버지가 대통령에다가 응원 차 관객석에 앉은 격이리라.
 노예들이 경기장으로 올라오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재미있게 한바탕 싸워다오!”
 “최선을 다해라!”
 “응원한다!”
 강태원이 속으로 뇌까렸다.
 ‘잘도 이기겠네.’
 하기야, 관객이었던 강태원도 당시 이들이 노예라는 것만 알았지 얼마나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싸워야 하는지는 당해 보고 알았다. 관객을 탓할 것은 없었다.
 척, 처처척.
 누군가 무대 위로 향했다.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360도로 회전하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제100회 콜로세움 경기의 사회를 맡은 시아스라고 합니다!”
 무언가 마법이 걸린 건지, 확성기로 말하는 듯 웅웅 울려 모두의 귀에 쏙쏙 박혔다.
 짝, 짜짜짝.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쏟아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
 “자, 우선, 오프닝 쇼에 앞서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일순, 시끄럽던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틀어 두었던 동영상을 정지시킨 듯, 음소거를 한 듯,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척, 처처척.
 공기의 흐름이 변한다.
 대기의 기운이 달라졌다.
 턱― 하니 숨이 막힌다.
 절로 머리가, 몸이, 무거워졌다.
 무언가 이질적인 현상과 감각이 온몸을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이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세가 어디선가 전해진다. 수만 명이 있는 와중에도 어딘지를 딱 잡을 수 있었다.
 특별히 마련된 VIP석. 그곳에 몇몇 존재들이 서서 가볍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자를 강태원은 똑똑히 보았다.
 ‘제우스······!’
 분명 관객들을 위해 기세를 한없이 낮춰 두었을 터였다. 단지 존재만으로도 이 정도의 기세를 내뿜을 수 있다니,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관객들이 꼼짝을 하지 못했다. 얼어붙은 듯, 돌이 되어 버린 듯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높고 거룩한 존재가 손짓을 하는데도 강제로 무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마음 같아선 예의와 격식을 차리고 싶어 미치겠지.
 제우스가 이를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어이쿠. 이거 기세를 낮춘다고 낮춘 건데도, 부족했구먼. 흐흐흠. 이쯤 하면 됐나?”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곰팡이 핀 지하 단칸방에서 쾌적한 바깥으로 나왔을 때라고나 할까.
 좀 전에는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평소와 다를 게 없게 되었다.
 기세를 거의 0에 수렴하게 하자, 장내에 숨통이 트이는 소리가 연이어 퍼졌다.
 강태원은 제우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포동포동하게 오른 살에, 덥수룩하게 머리부터 턱까지 내려오는 수염. 전형적인 4, 50대 중년 아저씨였다.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무서운 신인지를 누구보다 익히 알고 있는 그였다.
 ‘저자가 1년 뒤에 우리 세계로 침공을······.’
 다시 한번 몸서리쳐지는 순간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제우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반갑구나. 로마의 시민들이여, 그리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군. 뭐, 그리스나 로마나 거기서 거기지 뭐. 그리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어젯밤에 또 큰 건 하나 했지. 뭐였냐면―”
 “이봐요. 제우스.”
 이를 지켜보던 제우스의 정실부인 헤라가 핀잔을 주었다.
 “여기가 당신 자랑질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작작 해요!”
 “아, 아아.”
 제우스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그래. 대중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내 위상이 한껏 올라갈 텐데 참······.”
 제우스가 기세를 한없이 낮춰 준 덕택에 족쇄가 풀린 듯,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우스를 향해 폴더 인사를 했다. 저 북쪽 나라를 보는 듯한 엄격함과 숙연함이었다.
 강태원을 비롯한 노예들도 예를 갖췄다. 왠지 저 신이라면 고개 숙이지 않은 한 명을 즉각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자자, 다들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니 여기까지 하지. 재미있게 보고 웃고 즐기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짝, 짝짝짝짝짝―――!
 제우스가 손짓했다.
 그러자, 사회자 시아스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자, 귀중한 자리에 참석해 주신 제우스 신께 감사드리며, 오프닝 쇼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우선, 양측 선수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시아스가 노예 측을 바라보았다.
 “100인의 노예 군단입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발탁된 이들로 지하 감옥에서 간수들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라고 하는데요―!”
 지랄들 한다, 지랄을 해. 강태원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도껏 양념을 치면 몰라도 저렇게 티 나게 쳐 버리니 화가 나기는커녕 헛웃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시아스가 좌측을 쳐다보았다.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노예들이 나올 때보다 훨씬 더 열광적인 환호성!
 ―네에! 드디어 이 무대의 주인공,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군요!
 헤라클레스가 위풍당당하게 무대 위로 펄쩍 뛰어 올라왔다. 손을 흔들거나 하는 쇼맨십을 보여 주진 않았지만, 모두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이야, 나왔다. 나왔어!”
 “어쩜 저리도 용맹할까!”
 “귀엽다, 귀여워!”
 “멋있구먼!”
 “보여다오! 너의 힘을······!”
 관객들의 소리가 줄어들지를 않았다. 적절한 선에서 시아스가 끊었다.
 ―자, 과연 1대100! 100 대 1! 어느 쪽이 이길 수 있을까요?
 “사회자 양반, 당연한 걸 묻지 말라고!”
 “헤라클레스!”
 “난 여기에 1,000만 롬을 걸었다고!”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
 ―예, 역시 많은 분들이 헤라클레스를 응원하시는군요!
 거의 모두가 헤라클레스를 응원했다.
 100인의 노예를 응원하는 쪽도 소수지만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8, 100인의 노예 쪽이 2의 비율이라고 할까.
 그냥 경기였다면 헤라클레스만을 응원했을 터.
 그렇지만 여기 온 관객들은 단순히 구경만 하러 오는 것은 아니다.
 콜로세움 스포츠 도박인 ‘로로’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기는 쪽에 돈을 걸고,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배당금을 챙기는 승부 도박!
 실질적으로 거금이 걸린 로로는 본 경기에서 하겠지만, 오프닝 쇼인 1대100에서도 소소하게나마 용돈 벌이는 할 수 있을 터였다.
 대다수가 헤라클레스에게 배당을 걸었다. 그 때문에 이긴다 한들 그리 많은 롬을 챙길 수는 없다.
 반면, 100인의 노예에 건 쪽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서인지 극히 소수였다. 그렇지만 만약 이긴다면 어마어마한 롬을 챙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까닭에, 100인의 노예들을 응원하는 소수파도 존재했다.
 “이겨라! 노예들아!”
 “100명인데 지는 건 아니겠지?”
 “반드시 이겨야 한다!”
 “너희들을 믿는다!”
 대다수가 이들을 어리석다고 욕했다. 헤라클레스가 설마 질 리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콜로세움에선 이번이 첫 무대였지만 이전에 각종 대회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경험이 있었다. 소년체전뿐만 아니라 성인체전에서도, 승리를 밥 먹듯이 했던 그였다.
 그렇기에 만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상태였다. 100명과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못 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늘 그랬듯이 이길 거라고.
 부아― 아아아앙―!
 경기가 목전에 왔음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각자 무기와 방어구를 골라 주십시오! 단 하나만 가지고 무대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경기 무대에 올라가기에 앞서, 탁상 하나가 보였다. 그 위에는 각종 병장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노예들이 그곳으로 가서 병장기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칼, 창, 도끼, 그럭저럭 구색을 갖춰 놓았지만, 상당히 오래된 데다 관리까지 되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이런 걸로 싸우라는 건가.’
 강태원은 어처구니없는 한편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걸 제쳐 두고 순수하게 무기 유무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 불공평한 건 아니리라.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나오니까.’
 헤라클레스는 1살 때 뱀을 목 졸라 죽이고 5살 때 곰을 패대기쳤다. 나중에야 주무기인 곤봉을 쓰지 어린 시절에는 맨손 격투가 스타일인 것이다.
 다른 노예들을 포기라도 한 듯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 무대 위로 향한다.
 반면, 강태원은 천천히 무기를 둘러보았다.
 ‘도와주세요!’
 <영혼들이 함께합니다.>
 <영혼들이 병장기를 살핍니다.>
 <영혼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놓습니다.>
 <최상의 의견으로 좁혀 나갑니다.>
 <자신 있는 영혼이 나섭니다.>
 띠링―!
 <진베이클의 경험을 물려받습니다.>
 화― 아아악.
 강태원의 뇌리에 무언가가 깊숙이 침투했다. 색다른 감각이었음에도 온전히 받아들였다. 결코, 자신을 해롭게 하지 않을 거란 강한 자신감을 안고서.
 이윽고, 전혀 몰랐던 경험과 지식이, 정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지식백과 한 권을 정통으로 독파한 것처럼
 알림 문구 그대로, 진베이클의 인생 그 자체가 그에게 스며들었다.
 진베이클은 제32회 콜로세움 1대100경기, 100인의 노예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장장이 아버지를 따라 대장간을 운영하며 각종 재료로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었다
 그런 그인 만큼 당시에 무기와 방어구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었지.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탁상 위에 진열된 쓰레기만도 못한 병장기와 방어구를 보며 진베이클은 중얼거렸었다.
 ―썩은 무기들만 있군. 상관없다. 그럼 덜 썩은 걸 고르면 되니까. 더 썩은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그 미세한 차이마저도 느끼느냐 아니냐에 따라 명줄의 길이가 달라질 수 있는 법.
 강태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에는 무심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무기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분명, 똑같은 무기였다.
 그런데 왜 다르게 보이는 걸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누군가는 사과를 단순히 먹기만 할 줄 알지만,
 누군가는 그걸로 스마트폰 기업의 상징성을 갖게 했다.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포괄적으로는 좋지 않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무기들이 저마다의 미묘한 장단점과 특징이 있었다.
 그 특징 중, 나에게 맞는 것만으로 골라내면 되리라.
 위잉―
 눈을 빛냈다.
 세심하게 무기를 살폈다.
 창 하나를 요리조리 휘둘렀다가 내려놓고 도끼로 허공을 베기까지.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옷을 입어 보는 손님과 흡사했다.
 평소의 강태원이었다면 대충 하나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강태원은 무척이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마침내,
 척.
 진베이클이, 아니 강태원이 최종 판단을 내렸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움직이던 손이 인형 뽑기의 버튼을 누른 것처럼 쭉 아래로 내려간다.
 “음, 이거면 되려나.”
 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베이클이 동의합니다.>
 <진베이클이 만족합니다.>
 방어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골랐다.
 한 손에는 칼을, 또 다른 손에는 방패를 쥔 그가 무대 위로 향했다.
 선수 101명 중에서 가장 늦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사회자가, 99인의 노예들이, 헤라클레스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번개의 신의 시선이 내리꽂힙니다.>
 제우스까지, 그를 보았다.
 띠링―!
 
 ====
 [엑스트라 주제에 제우스의 눈길을 받았습니다.]
 [제우스의 ‘3초 눈길’을 끈 존재감을 경험치로 환산합니다.]
 [약한 존재감(―)의 경험치가 52 상승합니다.]
 [약한 존재감(―) 경험치 (72 / 200)]
 [약한 존재감(―)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
 
 ***
 
 “자!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1대100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시작은 아니었다. 시작이 되었음에도 양측 모두 활발히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서 있을 뿐이었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100명의 노예들은 다짜고짜 들이댔을 터.
 그렇지만 상대가 헤라클레스인 걸 알아 버렸기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헤라클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많은 싸움을 해 왔다.
 그렇지만 1 대 다(多), 그것도 100명을 동시에 상대해 본 적은 난생처음이다.
 때문에, 그도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지 않고선 100인의 노예들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강태원은 최팽수의 조언대로 최후방에 섰다. 다른 노예들도 이에 대해 반박하지 못했다. 공식적으론 이 중에서 가장 약한 게 그였으니까.
 그는 멀찍이서 전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의외인데.’
 시작하자마자 최팽수와 자신을 제외한 98인은 나가떨어졌어야 정상이다. 게임에선 그러했으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은 것은,
 ‘기세를 낮춰 주었군.’
 헤라클레스가 의도적으로 기세를 낮춰 주었다. 100인의 노예의 수준에 걸맞게.
 이쯤 되니 그가 언급했던 정정당당함이 마냥 거짓은 아님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세만큼은 동등하게 해서 승부를 보자 이거겠지.
 그 때문에 초보자의 무지를 쓸 필요가 없어졌다.
 ‘허 참. 기껏 초보자의 무지를 익혔건만······.’
 강태원이 머쓱한지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렇다고 초보자의 무지를 익힌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건 헤라클레스가 아니더라도 초창기에는 쓸모가 있을 터. 만나는 족족 자신보다 기세가 드세면 드셌지 약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라도 헤라클레스가 기세를 높일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유리하다고 여겼으니 저런 여유를 부리는 게 가능하지,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기세를 높일 수 있을 터였다. 기세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불리해졌다 싶으면 곧바로 태세 전환을 해 오겠지.
 까닥.
 헤라클레스가 도발을 해 왔다.
 “아저씨들? 안 올 거예요? 제가 가길 바라는 거예요?”
 “······.”
 노예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오지 말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5만 관중에게 비아냥거림을 들을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한편.
 “제가 가도록 하지요.”
 헤라클레스가 땅을 박찼다.
 타― 아아앙.
 공기를 찢으며 달려온다.
 노예의 선두와 맞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척에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헤라클레스가 노예 2명의 다리를 냅다 걸어 넘어뜨렸다.
 꽈당―
 넘어진 노예의 복부를 살포시 밟아 주고선 뛰어올라 발차기로 4명의 노예들의 얼굴, 목, 가슴 등의 부위를 휩쓸고 지나쳤다.
 채찍을 거하게 얻어맞은 듯 다들 회전을 하면서 나가떨어진다. 그 여파로 주위의 멀쩡한 자들도 걸려 넘어졌다. 나름대로 갖춰진 진영이 파괴되었다.
 헤라클레스는 한 번 잡은 분위기를 놓아주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폭풍같이 경기장을 휩쓸고 지나쳤다.
 그가 지나가는 길의 노예들은 불도저가 밀고 지나간 밭처럼 구겨지고 짓밟혔다.
 어느 하나 이에 맞서려는 자들도 없었다.
 술래잡기 술래 피하듯 눈치를 보며 뒤로 내빼기 일쑤였다.
 그렇지 않아도 훨훨 뛰는데 날개를 달아 준 격이다.
 완전히 그의 무대로 만들어 준 것이다.
 ‘참나, 칼이라도 휘둘러 보지······!’
 강태원은 괜스레 인상을 구겼다.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 보지 어떻게 한 번 해 보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어 버리다니.
 ‘그랬구나.’
 강태원은 한발 늦게 헤라클레스의 의중을 읽었다.
 헤라클레스는 아량을 베풀고자 기세를 낮춰 준 게 아니었다.
 굳이 기세를 쓰지 않아도 되니까 안 쓰는 것이다.
 봐라, 알아서 공포에 떨고 움츠러들고 있지 않은가.
 물론 기세를 쓴다면 손 하나 까딱이지 않고 결판을 볼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시시하다 이거고, 즐기고 있는 거겠지.’
 기세를 써서 손쉽게 발라 버리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런 적이 더러 있었을 터.
 이번엔 색다르게 오직 손과 발로, 무력으로만 이겨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맞다는 듯, 헤라클레스는 노예들을 쓰러뜨리면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보는 이에 따라선, 특히 당하는 이라면 사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심하게 재미있겠지.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 테지.
 30명, 40명, 50명, 건드리는 족족 쓰러지는 중이었다.
 “이봐! 다들 이러고 있을 건가?”
 최팽수가 목청껏 외쳤다.
 “우리가 산송장인가?”
 다들 양심에 찔렸는지 움찔거리며 최팽수를 보았다.
 “싸워 보지도 않고 죽는 것만큼 억울한 게 또 어디 있는가? 그 한을 어떻게 풀 수 있겠나? 다신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다 같이 힘을 합치자! 한번 해보자고!”
 헤라클레스가 불현듯 멈춰 섰다. 최팽수를 보면서 흐뭇해했다.
 “그래! 저 아저씨의 말을 들으세요! 덤비세요! 다 같이! 죽을 때 죽더라도 해 볼 거 다 해 보고 죽어야죠! 사람이라면!”
 최팽수의 독려와 헤라클레스의 광역 도발이 겹쳐지자,
 “그래, 해보자!”
 “한번 해보자고!”
 어디 꼭꼭 숨기기라도 했다는 듯 저항심이 남은 이들에게 생겼다. 뭐라도 해 보려는 듯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을 담아서,
 후― 우우욱.
 노예들이 헤라클레스를 중심으로 빙 둘러 감쌌다.
 원형으로 감싼 형태이기에 헤라클레스에겐 사각지대가 생겨났다.
 당장 후방에 큰 공백이 생겼다.
 그쪽에서 칼을 내지르면 즉각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우리라.
 그렇게 여겼다.
 후웅―
 바람을 가르며 노예들이 칼을 내질렀다.
 전후좌우, 전 방향에서.
 헤라클레스는 그보다 일찍이 뛰어오른 뒤였다.
 그가 노예들의 키보다 높이 뛴 뒤에, 좀 전까지 있었던 자리에 칼이 들어왔다.
 빈 허공을 찌른 형국.
 헤라클레스가 중력에 의해 내려오며 한데 모인 여덟 칼날의 끝에 발을 딛고 섰다.
 서커스단의 묘기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노예들은 그의 묘기를 위한 도구로 취급되는 듯한 불쾌감에 급히 칼을 회수했다.
 쉬이익―
 동시에 헤라클레스도 다시 뛰어올라 무작위로 선택된 어떤 노예의 정수리 위에 한쪽 다리를 얹었다.
 상체를 숙여 노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반대로 뒤집힌 헤라클레스의 얼굴이 갑자기 정면에서 튀어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으아아아아악!”
 사신과 접대를 하기라도 하듯, 노예가 경악에 물들며 걸음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악착같이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고, 이내 괴성은 멎어 버렸다.
 목이 비틀린 것이다.
 꽈―직.
 헤라클레스가 펄쩍 뛰어 다른 이의 몸에 옮겨 탔다. 그렇게 하나씩 목숨을 앗아 갔다. 또다시 대학살극이 자행되었다.
 남은 이가 10명이 채 안 되었을 무렵.
 강태원이 헤르메스에게 내적 연결을 걸었다.
 ―헤르메스,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쉴 새 없이 하고 있으니까 제발 좀! 기다려 달라고!
 ―어서요!
 강태원이 선수 대기실에서부터 계속해서 헤르메스에게 재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혼 동기화 진행 상태였다.
 영혼의 동기화.
 인간에게 영혼을 심는 복잡 미묘한 작업을 뜻한다.
 이게 완료가 되어야 강태원이 영혼의 경험과 힘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현재 강태원과 동기화가 된 영혼의 개체 수는 13명이었다.
 그 안에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자 무기 전문가였던 진베이클도 포함된다.
 어젯밤, 강태원의 면접에 통과한 영혼은 총 231명. 현재까진 불과 13명의 동기화가 끝난 뒤였다.
 즉, 13명의 힘과 경험을 골라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강태원은 판단했다. 헤라클레스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선별한 100명의 영혼의 경험과 힘이 한데 모여야 가능할 것이라고.
 [현재 동기화가 완료된 영혼의 수 (17 / 231)]
 금방 4명이 더 불어났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부족한 건 변함없었다.
 그러는 사이 10명의 노예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중이었다.
 쓰러지는 노예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머지않아 강태원 차례가 올 터였다.
 ‘제발, 제발······.’
 척, 처처처척.
 방금 또 한 명이 쓰러졌다.
 이제 남은 이는 단 3명이었다.
 헤라클레스와 최팽수, 그리고 강태원.
 헤라클레스가 최팽수의 앞에 섰다.
 “아저씨, 아까 말 멋있게 하던데요?”
 “자네한테 그런 얘길 들으니 기쁘군.”
 헤라클레스가 최팽수의 어깨너머에 있는 강태원을 힐끗 쳐다보다가 도로 최팽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만 해치우면 사실상 경기 종료네요.”
 강태원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
 그렇지만 그 발언에 대해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누가 봐도 강태원은 만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키가 큰 것도, 몸집이 비대한 것도, 근육이 빵빵한 것도, 강인한 의지를 지닌 것도, 그 어느 것도 뛰어난 점이 없어 보였으니까.
 최팽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헤라클레스는 최팽수의 레벨을 확인했다.
 레벨은 자신보다 1이라도 높으면 물음표로 뜬다.
 반대로 자신보다 1이라도 낮으면 공개된다.
 “확실히, 다른 분들에 비해선 레벨이 높아요. 그래 봤자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지만요.”
 헤라클레스가 이죽거렸다.
 “한번 확인해 볼까요? 가장 큰 도토리는 맛이 좀 다를지?”
 헤라클레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기세를 높였다.
 그의 기준에선 아주 살짝만. 최팽수의 기준에선 비슷하게.
 타탓―
 타앗.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쿠― 우우우우웅!
 강태원이 둘이 붙는 걸 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어떻게 됐어요?
 헤르메스가 답했다.
 ―1명 더 동기화가 다 되어 간다. 일단 있는 영혼들로 버텨 봐.
 ―오케이.
 막상 말을 그렇게 했지만, 아주 자신 있지는 않았다.
 [자르크와의 동기화율 (54%)]
 ‘자르크.’
 헤라클레스와의 결투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일전에 헤라클레스와 맞붙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강태원이 정면을 응시했다.
 최팽수가 뒤로 넘어간다.
 쿵―――――――――――――
 헤라클레스가 손을 털었다.
 “아, 진짜. 시시하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선 쥐꼬리만큼은 재미있었어요.”
 강태원은 내심 최팽수에게 고생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헤라클레스의 머리가 산발이 됐고 어깨와 손등과 무릎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최팽수와의 전투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헤라클레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진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걸 혼자서 한 게 아닌가.
 노예 중에선 최팽수가 안목이 있다. 그도 판단을 했겠지.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헤라클레스를 못 이긴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몸을 던진 까닭은 다음 타자인 강태원을 위한 마음이리라.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헤라클레스의 체력을 깎아 놓은 것이지.
 
 ====
 [‘감히’ 엑스트라 주제에 장차 영웅이 될 주신의 아들과 정면으로 마주 보았습니다.]
 [‘8살’ 헤라클레스의 ‘실망 어린 시선’을 받아 낼 수 있는 존재감을 경험치로 환산합니다.]
 [약한 존재감(―) 경험치가 21 상승합니다.]
 [약한 존재감(―) 경험치 (93 / 200)]
 [약한 존재감(―)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
 
 ‘아 씨바, 굳이 저놈의 엑스트라 주제에라는 말을 왜 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말 안 해도 안다고!’
 거기다 이전에는 있지 않았던 ‘감히’라는 수식어까지 추가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더 기분 나쁘게 생겼다.
 강태원이 한숨을 쉬었다.
 덩달아, 헤라클레스도 강태원을 보더니 한숨을 푹푹 토했다.
 “에휴, 마지막에 김이 팍 새네.”
 강태원이 한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응?”
 “말로 하자.”
 “뭐라고요?”
 “아니면, 5분 뒤에 붙을래? 좀 쉴 시간 줄게.”
 “필요 없어요.”
 “그걸 거절해? 내 호의를?”
 “엄마가 그러던데. 호의는 강자가 약자한테 베푸는 거라고.”
 “그건 그래. 근데 누가 강자인지를 정해 버린 거야? 너무 이른데? 너 후회할걸?”
 “뭐라는 거야.”
 “나 시간이 좀 더 필요해서 그래. 줄래?”
 “싫어요. 갑니다!”
 헤라클레스가 강태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태원이 뒷발을 떼며 슬쩍 들어 올렸다.
 발목을 120도로 휙― 꺾었고 전신을 비틀었다.
 몇 센티미터 옮겼을 뿐인 가벼운 스텝.
 그럼에도 헤라클레스를 비켜 지나치게 할 수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지나가다 말고 급히 속력을 줄여 멈춰 섰다.
 휘릭―
 뒤돌아서며 강태원을 째려보았다. 의외라는 듯한 반응의 눈빛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태원 스스로도 자못 놀란 기색이었다.
 혼자였다면 피하는 게 늦어져 헤라클레스와 정면으로 들이받았을 터.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따로 있었다.
 [영혼들이 함께합니다.]
 18명의 동기화 된 영혼 중 하나, 호르페오.
 100미터 달리기 3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당대의 그리스, 로마를 통틀어 인간 중에서는 그의 민첩함과 반응 속도, 반사 신경을 뛰어넘는 자가 없었다.
 그의 경험과 능력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기에 강태원은 헤라클레스의 질주를 흘려보낼 수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속도가 느린 건 아니었다.
 오로지 속도만을 놓고 보자면 훨씬 빨랐다.
 단지, 호르페오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런 센스나 기교 없이 무식하게만 빨랐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호르페오는 경험이 있었고.
 헤라클레스는 경험이 부족했다.
 그 차이가 조금 전의 한 수를 판가름 한 것이었다.
 “오호,”
 헤라클레스가 멋쩍게 웃었다.
 “운이 좋았어요.”
 강태원에게 엄지를 추켜세워 줬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말하듯 칭찬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말에 힘을 주고선 힘차게 땅을 박찼다.
 휘― 휘휘휙!
 강태원이 한 끗 차이로 또 피해 냈다.
 헤라클레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야?’
 첫 번째 돌진은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듯 뛰어든 거였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빈틈이 보여 회피를 허용한 거라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것은 사력을 다한 것이었다. 달리다가 숨이 끊어져도 될 만큼, 모든 것을 걸었던 뜀박질이었다.
 그것뿐이랴, 이번에는 피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선 강태원의 발이 꺾이는 각도까지 나름대로 계산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가가지 못했다.
 자석의 N극과 N극처럼 닿으려 하면 멀어진다.
 ‘말도 안 돼.’
 이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안다. 저건 오롯이 강태원의 실력인 것이다.
 “하, 대단한데요?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 수가 있죠?”
 진심을 담은 감탄이었다.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에게 있어 상대는 누가 되었든 뛰는 놈뿐이었다. 자신은 늘 나는 놈이었고. 설마 그 위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존재감도 없던 게, 이상하게 거슬려!’
 헤라클레스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 봤자 달라질 건 없다고 여겼으니까.
 상대가 실수하지 않는 한, 이 대치 국면은 변함이 없을 터였다.
 헤라클레스가 더 이상 접근해 오지 않자, 강태원은 발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발목에 슬슬 무리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무 휙휙 꺾었어.’
 폭발적인 스피드와 방향 전환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쪽에서도 똑같이 응수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무리가 온 게 아닐까 싶었다. 막 동기화가 완료되었을 시점이라 따로 준비 운동을 할 시간이 없었던 영향도 크리라.
 ‘피하고 있을 뿐인데도 이렇다면?
 본격적으로 맞붙었을 때는 신체에 꽤나 충격이 가해질 걸로 예상되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도 적잖게 놀라는 중이었다.
 처음의 돌진을 막을 때에는 호르페오의 경험과 능력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지만 전력투구로 덤빌 때부터는 그의 영혼만으로는 모자랐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3명의 육상 선수의 동기화가 진행되었다. 헤르메스가 농땡이 피우지 않고 분주히 작업을 해 준 덕택이었다.
 총 4명의 경험과 능력이 합쳐지자, 헤라클레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는 듯한 장관을 연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영혼과 동기화를 맺을 테니 곧 헤라클레스와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있겠지.
 비유하자면, 그는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물론 헤라클레스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발목에 무리가 가진 않았을 테니까.
 서로가 동시에 성장한다면 최종적으로는 더 빨리 성장하는 쪽이 승기를 잡을 터. 그 결과는 쉽사리 예측 불허였다.
 ‘미치겠다!’
 헤라클레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 해도 닿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강태원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
 ‘기회는 올 거야. 반드시!’
 급한 마음 품을 건 없었다. 접근을 못 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언제까지고 쫓고 쫓기는 모양새가 유지되지는 않을 터.
 승부를 보려면 종국에는 맞붙어야 한다.
 그때가 되면······.
 힘으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접촉하는 순간, 힘이란 무엇인지 가르쳐 줄 요량이었다.
 
 ***
 
 “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헤라클레스가 전혀 못 따라잡고 있어!”
 “아니야,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있을 뿐이야. 기회만 따르면······.”
 “운이 안 좋네.”
 “운? 헤라클레스가 운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그건 저 노예도 마찬가지잖아. 노예도 헤라클레스에게 다가가길 무서워하는데―”
 “내 돈!”
 “걱정 마. 결국엔 헤라클레스가 이길 거야.”
 “믿어 보자.”
 “못 믿겠어.”
 경기장이 시끌벅적해졌다. 강태원이 헤라클레스의 추격을 시도 때도 없이 따돌리는 진풍경으로 인해서였다.
 이때까지 헤라클레스가 보여 준 모습은 완전무결, 속전속결이었다.
 달리는 족족 목표물을 앞섰고 노리는 족족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색다를 수밖에.
 그것도 잠시,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확 식어 버렸다.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이 조용해졌다.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났던 까닭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제우스가 앉아 있는 VIP석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경기를 보러 온 존재, 헤라클레스의 아버지 제우스가 있었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슬러 봤자 하등 좋을 게 없었다. 모두가 합죽이가 되어 입 닥치고 경기를 보았다.
 실제로 제우스는 짐짓 표정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목이 자신에게로 쏠린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관중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투덜거리는 여성, 알크메네였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아아아아― 내 아들! 내 아드으으으으으을!”
 케이론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알크메네 부인, 제발 좀. 차분해지시오. 경기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오. 그런데 누가 보면 헤라클레스가 밀리는 줄 알겠소.”
 “그럼,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어요? 내 아들이 저 천한 놈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양을 줄이는 게 아니라 아예 굶겼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케이론이 버럭 성을 냈다.
 “아니, 식사량까지 조절을 했단 말이오?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케이론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아무리 제우스의 와이프라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할 터인데?’
 알크메네가 익룡 소리를 냈다.
 “내 아들을 위해서 내가 못할 게 뭐 있어요? 난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오오오오옷?”
 알크메네가 멈칫하며 어딘가를 보았다.
 케이론도 그녀의 눈길을 따라갔다.
 제우스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저 노예가 움직였어?”
 움직이는 거야 늘 움직여 왔다. 중요한 건, 그 움직임이 어떤 의도를 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강태원에 대한 관심이 가장 지대한 건 당연히 경기장에서 마주 보고 있던 헤라클레스였다.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뭐지?’
 그토록 도주만 했던 강태원이 온다. 그것도 다른 방향이 아닌 자신에게로?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지만, 막상 찾아오니 이상했다.
 엄밀히 표현하면 저 행동은 변수였으니까.
 그랬기에 헤라클레스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긴장의 끈이 당길 대로 당겨질 무렵.
 강태원이 헤라클레스의 지척에 다다랐다.
 헤라클레스는 피하지 않고 기다렸다.
 강태원은 헤라클레스와 얼굴을 마주 볼 즈음에서 귓가에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르크와의 동기화율 (100%)>
 기다렸던 영혼과의 동기화가 진행되었다.
 헤라클레스와 맞붙었던 적이 있었던 경험자!
 그는 살아생전, 쭉 헤라클레스의 전투를 보며 분석을 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맞붙기까지 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영혼보다도 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강태원이 찰나의 순간 자르크의 기억을 들춰 보았다.
 ―네가 이 구역에서 제일 강하다던 자르크냐?
 한 여성의 목소리, 강태원은 그녀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알크메네였다.
 ―자, 어떠냐, 헤라클레스? 네 연습 상대로 데려왔단다. 한번 붙어 보렴.
 알크메네의 곁에는 작금의 헤라클레스(8살)보다는 훨씬 더 앳되어 보이는 헤라클레스(5살)가 있었다. 그가 자르크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잘해 봐요!
 그랬다.
 자르크는 헤라클레스의 스파링 상대로 붙어 본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에이, 아저씨. 제법 재미는 있었지만, 너무 빨리 끝났어요.
 헤라클레스가 자르크를 이기고 나서 했던 말이었다.
 자르크는 쉽사리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붙어 보자. 내가 방심했다.
 돌아오는 건 차디찬 냉대였다.
 ―에이, 지금 실력으로는 안 돼요. 더 실력을 기르고 오세요. 그 실력으로 무슨······.
 이때 자르크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었다.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헤라클레스를 어리다고 무시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더 실력을 기르고 오세요.
 헤라클레스가 흘리듯 했던 말을 주워 담고,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그래, 실력을 기르고 오마.
 그 이후로 쭉 헤라클레스가 나가는 경기마다 관전했다.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모색했다. 스펙 자체가 뒤떨어지면 다른 걸로 해결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62번째 경기를 분석하던 중,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해 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아, 안 돼! 난. 난,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있단 말이야!
 자르크의 가문이 몰락했다. 줄을 잘못 서 버린 것이다. 온 가족이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게 콜로세움 지하 감옥에 처박혔다. 간수들의 고문으로 인해 반병신이 된 상태로 검투사 대결에 나갔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원통하고 분했다.
 불공정한 시합에서의 패배도.
 헤라클레스와 미처 붙지 못한 것에도.
 많은 것이 미련이 남았다.
 조금만 더 빨리 분석을 끝마쳤더라면, 완벽한 상태에서 헤라클레스와 붙었더라면.
 후회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헤라클레스에 대해 분석한 결과는 빛을 보지 못하고 영영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왔다.
 헤라클레스와 다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헤르메스의 인도를 받아 강태원과 마주했을 때는 또 성가신 일이 생기겠구나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강태원은 구세주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신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듯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평생의 한이었던 것이, 그 숙원이 드디어 이뤄지려고 하는 것이다.
 <자르크가 고마워합니다.>
 자르크는 강태원에게 감사했다.
 비록 자신이 직접 헤라클레스와 붙을 수 있는 건 아닐지라도. 아무렴 어떤가.
 자신의 연구 성과의 영향으로 이길 수 있다면, 그건 자신이 이긴 거나 다름없는 것이리라!
 
 ====
 [살아생전 자르크는 헤라클레스의 행동을 분석하여 크게 42가지로 나뉜다고 정의 내렸습니다.]
 [42가지의 대표적 행동과 대처 요령이 강태원에게 스며듭니다.]
 [자르크의 힘과 경험이 강태원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
 
 강태원이 벼락을 맞은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촤라르륵!
 헤라클레스가 흠칫하면서도 예정대로 동작을 전개했다.
 <자르크가 경험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헤라클레스는 오른손잡이이다. 특히 우측 쇄골을 겨냥할 확률이 78%에 달한다.
 헤라클레스는 강태원의 상반신 중, 우측 쇄골을 노렸다.
 강태원이 부드럽게 이를 흘려보냈다.
 <자르크가 경험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헤라클레스는 최소 2회에서 최대 3회 정도 간을 보고 그다음 일격에 힘을 쏟아붓는다. 그것만 피할 수 있다면 반격의 여지는 충분하다.
 ―반격을 바로 하기 전에 상대에게 여태껏 하지 못한 경험을 심어 주자. 그러면 헤라클레스는 반드시 당황한다.
 ―예전에 그는 왼쪽 손목에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다른 부위는 몰라도 거기를 잡는다면 힘이 약한 나라도 적어도 비등한 힘겨루기는 가능하리라.
 쨉, 쨉― 원투 쓰리!
 헤라클레스가 두세 번 간을 보다가 정통으로 한 대 날렸다.
 후― 욱.
 로켓처럼 치고 들어오는 손길!
 강태원이 가슴을 틀며 손길을 흘려보내는가 싶더니,
 차― 아아악!
 헤라클레스의 왼쪽 손목을 붙잡는 게 아닌가?!
 헤라클레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실패한 일격, 도로 손을 거두려고 하는데―
 빠아앗―
 근육이 활발히 꿈틀거렸다. 강태원이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데에 대한 반항이었다.
 빠직―
 강태원이 손목을 꺾으려 했지만, 헤라클레스의 완력이 한 수 위였다. 오히려 헤라클레스가 반대 방향으로 확 꺾어 버리는 게 아닌가.
 강태원은 뼈가 부러지지 않게 버티다가 순간적인 힘으로 확 반대 방향으로 돌려 원위치 시켰다.
 다시 꺾으려는 헤라클레스.
 빨랫감을 짜듯 팽팽한 힘겨루기였다.
 강태원이 손목을 놓아주면서 헤라클레스를 밀쳐 냈다. 넘어뜨릴 기세로 한 것이지만 헤라클레스의 장딴지가 이를 허용치 않았다.
 반작용으로 강태원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강태원과 헤라클레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찌릿―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신화 속 엑스트라』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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