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화령의 제왕 [E]

화령의 제왕 1-1권

2019.02.22 조회 1,985 추천 10


 제1장 불 이야기
 
 
 
 
 
 
 캔버스를 가득 채운 채 당장이라도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불꽃을 조심스럽게 다듬어 나가는 강유진의 손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붓은 어느 순간 멈춰지더니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명작이 분명한 그림이었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림을 노려보던 유진은 결국 신경질적으로 붓을 들어 캔버스에 X자를 마구잡이로 새겨 넣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벌써 찢었다가 다시 그리기를 수십, 수백 번이었다. 그림에 불의 기운을 집어넣으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그저 그림일 뿐 불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유진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과 씨름하고 계실 아버지를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 녀석아, 불이라고 하는 녀석은 다가가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자신을 우습게 보려 들면 가끔은 투정을 부리며 자신을 깔보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는 하지.”
 “그럼 아버지는 불을 이해한단 말이에요?”
 “내 수십 평생 불과 가까이하고는 있다만 감히 불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불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쨍그랑!
 말을 마친 아버지는 손에 쥐어진 망치로 가마에서 막 꺼낸, 푸른빛이 감도는 타오르는 불길이 상감된 도자기를 거침없이 깨 버렸다. 소년 유진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는 자기를 부수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왜 어렵게 만든 도자기를 깨 버려요?”
 “허허! 이 녀석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깊이가 없구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항상 말썽이라는 괴물이 쫓아다니지. 이런 건 가치가 없어.”
 쨍그랑!
 방금 깬 도자기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도자기가 또다시 산산조각으로 변해 바닥으로 흩어졌다.
 “고생 고생해서 만든 건데 너무 아깝잖아요!”
 아버지는 그런 유진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왜 우리 가문이 불의 정화를 얻으려 애쓰고, 세계 제일의 청자를 만들려고 하는지 들어 보거라. 원래 관요의 도공이었던 조상님이 임진왜란 중에 이곳 강진으로 피란을 오셔서 부서진 청자의 조각을 발견하셨지. 백자만 만드시다가 보게 된 청자의 아름다움이 어떠했겠느냐. 그때부터 완벽한 청자의 재현과 세계 최고의 청자를 만드는 것은 우리 가문의 숙명이 되고 말았다.”
 수북이 쌓여만 가는 도자기 조각들을 아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유진은 재미도 없는 조상들의 이야기나 하고 있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우리 가문의 조상님 중의 한 분이 민족의 정기를 받아 좋은 청자를 만들기 위해 화순의 운주사 천불천탑으로 가셔서 치성을 드리게 되었단다. 그때 우연히 어느 선사로부터 화령보결을 얻은 뒤로 우리 가문은 더욱 불을 잘 알고,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청자를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지.”
 마침내 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도자기마저 아낌없이 부숴 버리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쩝!”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가 부서지지 않고 팔리는 날은 어김없이 유진의 주머니에도 제법 두둑한 용돈이 들어오는데, 오늘은 틀린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쓸 만한 녀석을 건지지 못했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유진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신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연장들을 챙겼다. 말과는 달리 아버지의 얼굴은 서운하다거나 하는 표정은 전혀 없었다.
 “그만 돌아가자.”
 뾰로통해진 유진은 그저 말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집에 도착한 아버지가 목욕을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명상을 시작했다.
 유진도 아버지와 나란히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으나 조각으로 변한 도자기들 때문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나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화령심법을 배웠다. 화령심법을 가르칠 때의 아버지는 평소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매우 엄하셨다. 수련 도중에 자리를 뜨는 일 따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화령심법이란 대대로 도요지를 운영하는 집안에 내려오는 보물인 화령보결에 적힌 명상 수련법이었다. 화령심법은 모두 4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세상의 기운 중에 포함되어 있는 불의 기운만을 호흡법을 통해 체내로 흡수해 불과의 친화력을 높이는 것이다.
 극에 이르면 손가락 끝에 불이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가문에서 소중히 여기는 수련법이었다.
 특히나 가마에 불을 때고, 도자기에 미치는 온도의 변화에 극히 민감해야 하는 도공을 업으로 하는 가문으로서는, 수련을 하면 할수록 불의 성질과 온도 등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화령심법은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유진아.”
 혼란스러워진 유진이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고막에 파고들었다.
 “네, 넷.”
 화들짝 놀란 유진이 재빨리 대답했다.
 “모레가 네 엄마의 기일이구나.”
 ‘아! 정말로 그렇구나.’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본 유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아버지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어? 다른 때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터인데 웬일이지?’
 “유진아, 네 책상 서랍을 열어 보거라.”
 “제 책상 서랍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아버지는 다시금 명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랍 속에는 한 권의 낡은 책과 봉투가 들어 있었다.
 화령보결.
 아까 아버지가 했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제목의 낡은 책에는 네 개의 글자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독특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봉투에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라고 시작된 장문의 편지와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장문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유진의 눈가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하는 듯 입술을 악무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그림에 불의 기운을 집어넣을 수 없다면 어떻게 도자기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어 가업을 이을 수 있겠는가!”
 회상에서 깨어난 유진은 다시금 그림을 그릴까 싶어 붓을 들었다. 그러나 흐트러진 마음이 정돈되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정좌하고 화령심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익힌 것이라 금방 심법에 몰입해 들어간 유진은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명상 속으로 빠져 들었다.
 따르릉! 따르릉!
 막 무아경에 접어들 즈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명상에서 깨어난 유진이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 민기다. 바쁘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진에게 라이벌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김민기였다. 두 사람은 라이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민기의 숨 가쁜 목소리를 들은 유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소개팅이 있는데 어때?]
 “야야! 나 그렇게 한가한 놈 아니다. 끊자.”
 [유진아, 자, 잠깐만······.]
 민기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전화를 끊어 버리며 중얼거렸다.
 “소개팅이라······.”
 잠시 재잘거리는 여자들의 모습들을 떠올려 보던 유진은 금세 마음을 다스리면서 캔버스 앞에 앉았다. 머릿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떠올리며 그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스슥, 사사삭.
 삼매경에 빠져 그려 나가는 손길은 전과는 달리 거침이 없었다.
 화르륵! 화륵!
 완성된 불꽃 그림은 마치 닿으면 델 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색만 입히면 되는데.”
 그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색을 집어넣는 것이다. 어떤 색을 어떻게 집어넣느냐에 따라 그림의 생동감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물감을 짜려는 순간 인기척이 들려왔다.
 쿵쿵쿵!
 “유진아, 나 민기야. 문 열어!”
 ‘짜식! 소개팅에 나간다면서 여기는 또 왜 온 거야?’
 덜컥!
 “꺄악!”
 반바지만 달랑 입은 채 문을 연 유진은 여자의 뾰족한 비명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문을 밀어 닫았다.
 쾅!
 “빌어먹을 자식, 일행이 있으면 있다고 말할 것이지.”
 상의를 걸친 유진이 다시금 문을 열자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던 여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민기 혼자인 줄 알고 그만······.”
 “괜······찮아요.”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유진이 한쪽으로 비켜서자 민기와 여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기, 너 나중에 두고 보자.”
 “흐흐! 얼마든지!”
 유진이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집어 대충 방 안을 정리하는 동안, 민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어지러웠던 방을 대충 정리하고 허리를 편 유진은 서글서글한 용모의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미라 씨, 인사해요. 아까 말한 유진이라는 괴짜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최미라예요. 민기 씨가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유진입니다.”
 유진은 미라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민기를 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와우! 새로 그리는 그림이구나.”
 민기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을 쓰다듬으며 소리치자 두 여인의 시선도 캔버스로 향했다.
 “배경도 없이 불꽃만 달랑 있어서 그런지 그림이 참 특이한 느낌을 주네요.”
 “불에 미친 놈이에요. 그림을 그려도 불만 그리고, 여행을 가도 불이 있는 곳만 다니죠.”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일러바치는 듯 이야기하는 민기를 다시 한 번 째려본 유진은 미라를 향해 말했다.
 “그런가요? 이런! 내 정신을 보게. 손님이 왔는데 이러고 있다니······ 커피들 하시죠?”
 “야야! 커피보다는 우리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 오케이?”
 “난 찬성!”
 “저도 좋아요.”
 민기가 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여자들도 흔쾌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뜻하지 않은 방문객으로 인해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는 유진은 마지못해 민기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
 
 신촌은 언제나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한 곳이다. 밤이 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연인들끼리 서로 스킨십을 나누며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광경도 흔하게 접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
 “내가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그리로 갈까요?”
 민기의 파트너인 효진이 현대백화점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우리 천사가 가자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민기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화답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지하도를 건너 주점들이 늘어서 있는 먹자골목으로 들어설 즈음 갑자기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글쎄. 저쪽에 무슨 일이 있나 본데. 가 보자.”
 유진이 사람들이 뛰어가는 쪽으로 달려갔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저 앞에 보이는 건물에서는 검은 연기와 불꽃이 창문을 넘어 일렁거렸다. 건물 앞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동수야∼ 동혁아!”
 “어, 어떻게 해! 안에 아이들이 있대.”
 울부짖는 아주머니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은 유진은 시력을 돋구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건물의 창문 안쪽을 살폈다. 화령심법의 효능인지 불 속에 있는 사물을 보통 사람들에 비해 훨씬 또렷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민기와 두 여자가 도착했다. 평소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유진의 행동을 무수히 보아 온 민기였다.
 “유진아!”
 민기는 유진의 굳은 얼굴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유진은 화마에 휩싸인 건물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유진 씨!”
 “마, 맙소사! 저 사람 미쳤나 봐!”
 미라와 사람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를 뒤로한 채, 유진은 화령심법의 운기법에 따라 숨을 고르며 아이들이 있다는 건물을 향해 달렸다.
 화그르르르!
 거대한 화마는 유진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뜨거운 열기를 발산했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면 당황하기도 하련만, 화령심법을 운용하고 있는 유진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동수야! 동혁아, 어디 있니!”
 2층으로 올라간 유진이 목청껏 소리쳤지만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설마!’
 아이들이 질식했을 거라고 판단한 유진은 주변에 굴러다니던 맥주 캔을 따서 손수건에 적셨다. 그런 다음 그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뒤 바닥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는 두 명의 아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유진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휴우! 다행히 아직 질식하지는 않았군.’
 맥주에 젖은 물수건으로 아이들의 코와 입을 덮어 주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화그르르르!
 잔뜩 화가 난 화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거세져 있었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 나갈 수 있겠지만 아이들을 데리고는 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웃옷을 벗어 뜨거운 열기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한 유진은 화령보결과 시간에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손수건에 따라 내고 남은 맥주 캔을 흔들어 보니 서너 모금 정도의 맥주가 아직 남아 있었다. 유진은 사방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뚫어져라 살피더니 불길이 거센 곳 몇 군데에 맥주를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다.
 불길의 온도를 감안하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수도 있는 소량의 맥주임에도, 불길의 기세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은 실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유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화령보결에서 익힌 화력 조절법은 그 효과가 놀라울 뿐이군. 이제는 시간 싸움인가!”
 유진은 아이들을 자신의 앞에 눕히고는 정좌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화령심법을 운용했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면서 살갗이 쓰려 왔다.
 화령심법이 불을 제어하고 그 기운을 흡수하는 호흡법이라고는 하지만 무협이나 판타지가 아닌 이상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자 화령심법을 운기하는 것으로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졌다.
 우지직!
 유진은 잿더미가 되어 버린 탁자와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까지가 내 한계로군. 내 운명도 여기까지인가!”
 열기와 매캐한 연기로 인해 숨이 턱턱 막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불을 제어하기 위해 수백 년을 노력해 온 가문의 후손으로서 불 속에서 죽는다는 사실이 억울할 따름이었다.
 애애애앵!
 희미하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은 유진은 아이들 앞으로 엎어지며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어서 불길을 잡아! 어이, 자네는 2층 쪽으로! 어서 서둘러!”
 맹렬하게 뻗어 나가는 물 줄기에 의해 기세가 등등했던 화마도 차츰 위력을 잃어 갔다.
 “대장님, 저기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2층에서 불길을 잡아 나가던 소방대원이 아이들을 감싸고 엎어져 있는 유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게 정말이야?”
 2층으로 뛰어 올라온 소방대장과 소방대원들은 유진의 모습을 보고 경악성을 터트렸다.
 “마, 맙소사!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불길의 기세로 보아 유진을 비롯한 아이들은 잿더미가 되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유진을 중심으로 2미터 반경은 불에 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빨리 구급차에 태워!”
 소방대장의 외침에 소방대원들이 유진과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태웠다.
 “유진아!”
 민기가 유진을 부르며 달려갔지만 소방대원의 제지를 받았다. 유진과 아이들이 구급차에 오르자 구급차는 빠르게 화재 현장을 빠져나갔다.
 애애앵! 애애앵!
 
 아련한 두통과 온몸에 가득한 열기를 느끼며 유진은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죽지 않은 것인가.’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으나 마음뿐이었다. 피부에서 전해지는 쓰라림으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으윽! 젠장! 더럽게 쓰라리네. 일단은 내 모험이 성공한 셈이로군.’
 눈을 떠 보려 했으나 떠지지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손가락이 조금 떨리는 것이 유진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러나 유진의 상태를 체크하던 간호사가 용케도 그것을 발견했다.
 “어머! 환자가 깨어나는 모양이네. 이 간호사, 어서 박사님께 알려!”
 유진의 상태를 체크하던 수간호사의 지시를 받은 이 간호사가 병실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유진의 담당 의사인 김형호 박사가 들어와 유진의 몸 상태를 살펴보며 말을 건넸다.
 “강유진 씨, 내 말이 들리면 손가락을 움직여 보세요.”
 유진이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였다.
 “잘했어요. 의식 세계로 돌아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 며칠 푹 쉰다고 생각해요.”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형호 박사는 간호사들에게 지시했다.
 “회복실로 옮기고 안정제를 투여해요. 환자가 다시 정신을 되찾을 때까지 누구도 면회는 안 됩니다.”
 김형호 박사는 소방대원에게 신비한 상황을 들은지라 혹시나 언론 등에서 찾아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다시금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린 유진은 회복실로 옮겨졌다.
 회복실로 옮겨진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유진은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 희미하나마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물의 초점이 잡히며 또렷해지자 좌우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머리야!”
 묵직해진 머리 때문에 좀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견디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피부에서 쓰라린 느낌을 받았던 유진의 시선은 자연스레 팔로 향해졌다. 1도 화상을 입어 벌겋게 변한 것 빼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덜컥!
 “일어나셨네요.”
 유진의 상태를 체크하러 들어온 간호사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들은 무사합니다.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에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하느님께서 아이들을 보호해 주신 것 같아요.”
 체온을 체크한 간호사가 유진의 몸에서 주사기를 빼내고 화상을 입은 피부에 뭔가를 발라 주었다. 짜르르 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저······.”
 유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간호사를 부르자 간호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호호! 퇴원하고 싶은 모양이네요.”
 “이상이 없는 것 같아서······.”
 “그건 의사 선생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에요.”
 간호사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거야 원!”
 나직이 투덜대던 유진은 죽음에 이르렀을 수도 있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며 화령심법의 경이로움에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소방대원이 불을 진압하며 2층으로 올라올 시간이면 이미 자신은 잿더미로 산화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불의 정화를 얻은 상태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유진은 피식 웃은 뒤 바닥에 정좌하고 화령심법을 운용해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
 
 병원 측의 배려로 이틀 동안 조용한 가운데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퇴원한 유진은 숙소로 돌아와 다시금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이미 그려진 불꽃에 색이 채워지면서 불꽃은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태우고 살아날 듯 꿈틀댔다.
 스스슥, 사삭.
 저녁 늦게까지 불꽃 그림에 색을 입혀 가던 끝에 마침내 색 보정만 남기고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휴우! 어디 보자······.”
 유진은 색 보정을 하기 전 그림과 두어 걸음 떨어져 색상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뒤로, 그는 핏줄 속으로 불덩이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가끔씩 받고는 했다.
 그날 이후 그림에 색을 넣는 작업을 하는 동안은 거침없이 붓을 놀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한 그림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흠! 괜찮아 보이는군.”
 새하얀 바탕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 그림은 스스로도 만족할 정도로 생기 넘쳐 보였다. 색 보정을 마치고 나면 그림의 완성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만족한 얼굴로 크게 숨을 들이키며 다시 캔버스에 다가가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응? 이 시간에 누구지.’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친한 친구인 민기라 할지라도 늦은 저녁에 찾아오는 법은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으로 다가선 유진이 상대를 확인했다.
 “누구십니까?”
 “······.”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연 유진은 상대를 확인하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미라 씨!”
 문 밖에는 최미라가 가슴 가득히 붉은 장미 한 다발을 안은 채 서 있었다.
 “병원에 가 보니 퇴원하셨다고 하기에 지나는 길에 들렸어요. 혹 방해가 되지는 않았나요?”
 미라가 장미 꽃다발을 내밀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천만에요. 방해라니요. 이, 이런! 내 정신 좀 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유진이 과장된 몸짓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미라가 안심했다는 듯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유진은 자신이 즐겨 마시는 오미자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오미자차의 그윽한 향이 방 안에 가득해졌다.
 “향기가 좋네요.”
 유진이 찻잔 두 개를 가지고 테이블로 다가와 최미라 앞에 앉았다.
 “하하! 기호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한약 냄새 비슷해서 좀 그랬는데, 자꾸 마시다 보니 좋더군요. 다섯 가지의 맛이 난다고 하는데 전 아직 한 가지 맛밖에 모르겠더군요.”
 찻잔에서 풍기는 향기를 음미해 보던 최미라는 한 모금 맛을 보고는 말했다.
 “맛이 참 특이하네요.”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커피를······.”
 “아니에요. 독특하고 좋은데요.”
 “하하! 그럼 다행입니다.”
 유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미라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종일관 유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반면 유진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선을 미라에게 둘 수 없었다.
 아마도 미라가 가슴이 깊게 파인 상의를 입고 있는 것이 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라는 그저 유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화재 현장의 불가사의한 일을 떠올리고 슬쩍 물었다.
 “유진 씨, 화재가 일어났던 날 말이에요.”
 “네?”
 “소방대원의 말로는 유진 씨가 쓰러져 있던 곳 주위는 불에 탄 흔적조차 없었다고 하던데······.”
 “아! 그거요. 제가 운이 좋았나 봅니다. 제가 쓰러진 곳에 불이 옮겨 붙기 전에 소방관들이 도착했으니까요.”
 “······그럼?”
 “우연히 일어난 일이죠. 제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유진이 말끝을 흐렸다. 미라가 물은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거니와, 자신도 그 일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막연히 화령심법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확신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말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유진의 대답이 실망스러웠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최미라는 고개를 돌리다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미라 씨! 왜 그래요?”
 “저, 저, 저!”
 불꽃 그림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던 미라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세상에!”
 착시 현상이 사라지면서 자신이 본 것이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직 미완성인 그림입니다. 보기 흉했다면 한쪽으로 치우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라······.”
 미라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제지하자 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는 그림이 아니라 진짜 불이 난 줄 알았어요.”
 “네? 진짜 불인 줄 알았다고요? 에이! 설마······.”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허공에 불꽃이 걸린 것으로 착각했어요.”
 미라는 몸을 일으켜 뭔가에 홀린 듯 불꽃 그림으로 다가갔다.
 “정말이지 대단해요. 그림에 생동감이 넘쳐요.”
 미라의 말에 유진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미라 씨, 칭찬이 너무 과합니다.”
 “색의 배치가 너무도 오묘해 착시 현상이 일어날 정도예요.”
 최면에 걸린 듯한 미라의 얼굴은 마치 여신의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미라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미라가 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갈망하는 그녀의 눈빛은 유진을 강하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미라 씨.”
 유진이 나머지 손을 뻗어 미라의 얼굴을 감싸 쥐자 최미라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른침을 삼킨 유진은 미라의 얼굴을 당겨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강렬한 키스를 기대했던 미라는 유진의 입김이 이마를 가볍게 터치하고 멀어지자 눈을 떴다.
 “푸훗!”
 “하하하하!”
 시선이 마주친 두 남녀는 무엇이 우스운지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두 남녀의 가슴 한쪽에 사랑이라는 나무가 싹을 틔우며 새록새록 자리를 잡아 갔다.
 
 
 졸업생들의 작품 중에서 수작들만 골라 전시한 미술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살아 숨 쉬는 불꽃 그림을 보려는 사람들은 유진의 작품 앞에 서서 넋을 잃고 말았다.
 “세, 세상에! 저런 작품이 만들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
 “누가 아니래! 저것 좀 봐! 꼭 손을 델 것 같잖아.”
 “오! 하나님! 내 생애에 이런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술에, 특히 미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유진의 작품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저 작품은 반드시 내가 사고 말겠어!”
 누군가의 외침에 유진의 작품을 감상하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갔다.
 “진아, 이거 파장이 크겠는데.”
 사람들이 작품 구입 신청을 하기 위해 몰려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말하는 민기의 표정에는 부러움과 질투의 빛이 뒤섞여 있었다.
 자신의 작품인 여인의 조각상은 유진의 불꽃 그림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어쩌면 화를 내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인데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비록 유진이 지상 최대의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기는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마음에 들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긴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미라가 허공에 불이 둥실 떠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경험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화령심법의 기운이 이 작품에 전해진 것인가?’
 유진은 친구인 민기가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런 요상스런 눈으로 쳐다보냐?”
 “축하한다. 앞으로 네 미래는 탄탄대로가 열린 거나 마찬가지다.”
 “글쎄.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 아닐까? 그나저나 미라가 왜 이리 늦는 거지?”
 “미라 씨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민기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멀리서 두리번거리며 유진을 찾고 있는 미라를 가리켰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을 실천해 보이기라도 하듯, 엷은 핑크색 정장 차림의 미라는 얼핏 보아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소리 질러 알리지 못하는 유진과 민기는 미라에게로 다가갔다.
 “미라 씨, 좀 늦었네요. 그런데 효진이는 어디다 내팽개치고 혼자 오셨습니까, 그래.”
 “어머! 나보다 먼저 출발한 것으로 아는데 아직 안 왔나요?”
 말을 하면서도 미라의 시선은 유진을 향하고 있었고, 유진도 그에 화답하듯 마음을 담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봐 주었다. 그 모습을 본 민기가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젠장!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어서 와서 소외된 나를 위로해 줘야 할 것 아냐!”
 민기의 투덜거림에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미라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 썰렁함마저 풍기는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말도 마요.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요.”
 “난리요?”
 “진이 작품을 본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난리 부르스를 치다가 진이의 작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몰려들 갔어요.”
 “어머! 그래요?”
 “심혈을 기울였다고 자부하는 내 작품은 저렇게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답니다.”
 민기가 자신의 작품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민기의 작품으로 시선을 돌린 미라의 눈에서 이채로운 빛이 번뜩였다. 세밀하게 만든 틀로 찍어 낸 것처럼 섬세하고,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 생동감 넘치는 나체의 여인상이었다. 그 섬세함과 생동감에 미라는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대단하네요.”
 “후후후! 유진이 작품만 아니었다면 눈길을 끌 만하죠!”
 “사실 저도 지금 나체 여인상을 조각하고 있거든요.”
 “아하! 그래서 미라 씨가 제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로군요.”
 “민기야, 저기 효진 씨 왔다.”
 유진이 말하기 전 이미 민기는 효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진 일행들에게 다가온 효진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들이밀며 두서없이 재잘거렸다.
 “아유! 차가 밀리는 바람에 늦었네. 이게 자기 작품이야? 이런! 유진 씨, 안녕하세요. 어머! 이 계집애, 나보다 빨리 도착했네.”
 “나도 지금 도착했어, 얘.”
 “그래? 그런데 왜 이리 썰렁해.”
 효진이 묻자 유진을 비롯한 일행들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며 양팔을 벌렸다.
 “······뭐야!”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림 한 점으로 일약 미술계의 풍운아가 된 유진은 고민 아닌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팔려고 전시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산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었다.
 “자기야, 무슨 걱정 있어?”
 어느새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이가 된 유진과 미라였다. 유진의 팔을 베고 누워 그의 머릿결을 쓰다듬던 미라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넌지시 물었다. 미라의 머리 밑에서 팔을 빼낸 유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내 작품 괜히 전시했나 봐.”
 “반응이 좋았잖아. 그런데 왜?”
 “나는 가업을 이어야 하거든.”
 뜬금없는 말에 미라도 가슴을 출렁이며 일어나 앉았다.
 “가업을 잇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후훗! 내 작품을 산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더군. 그것도 엄청난 가격으로 말이야. 허나 난 아버지께 내 작품을 보여 드리고, 내 작품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린 그림일 뿐이야. 가문의 숙원인 불의 정화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시험인 셈이지.”
 “불의 정화?”
 “응! 불의 정화.”
 유진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배워 왔던 화령심법과 아버지에게 건네받은 낡은 책에서 읽은 가문의 비화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라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이따금씩 지었지만 유진의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들어 주었다.
 “자기 가문에 그런 비사가 있을 줄이야!”
 “내 후대를 위해 반드시 불의 정화를 얻어야 해.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청자를 만들어 낼 거야. 내가 못하면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못하면 내 손자가······.”
 미라가 유진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들였다.
 “그런 일, 하지 않음 되잖아.”
 “물론 내 작품을 팔아 버리면 궂은일은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어. 허나 이미 나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불의 정화를 얻고 최고의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행의 길을 걸어야 해.”
 “불의 정화와 청자가 자기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 가다니, 이해가 안 돼.”
 “후우∼.”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 유진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에게 가문의 비서를 물려받은 순간 내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야. 나도 내 조상님들처럼 불의 정화를 얻고 최고의 청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지.”
 유진이 다시금 침대에 몸을 눕히자 미라가 유진의 가슴으로 쓰러져 왔다. 머리카락으로 인해 간질여지는 느낌이 좋았다.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유진이 돌연 미라를 끌어 자신의 몸 위로 당겼다.
 “어머!”
 “꼭 불의 정화를 얻고, 최고의 청자를 만들고 말 거야! 그래서 가문의 수백 년 숙원을 내가 이루고 말겠어!”
 이를 악물며 중얼거리던 유진의 손길이 더없이 거칠어졌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탓인가. 거칠기만 한 유진의 손길에 미라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비음이 토해졌다.
 “······자기야!”
 
 
 
 제2장 갈등
 
 
 
 
 
 
 몇날 며칠을 고민했는지 화령심법을 수련하는 유진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까칠해져 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나 텁석부리가 되었고 얼굴 피부는 거칠다 못해 말라붙은 땅거죽을 연상케 했다.
 “후우!”
 언제까지고 감겨 있을 것만 같던 유진의 눈이 떠졌다.
 꽤 오랫동안 화령심법에 집중한 탓일까.
 까칠한 얼굴과는 달리 두 눈은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그래! 옳은 결정이다. 내 작품을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평가를 받아 보자. 내 작품에 불의 기운이 스며들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두둑!
 몸을 일으키자 경직되어 있던 뼈마디가 되찾은 자유에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화령보결의 화기도인술로 몸 안의 기를 움직여 경직된 몸을 풀어낸 유진이 시계를 보더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 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언제부터인가 미라의 휴대폰 컬러링은 김동률의 <취중진담>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보세요.]
 “나야.”
 [웬일이야. 자기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미라를 아버지께 인사시킬 생각이야. 괜찮지?”
 [······.]
 뜻밖의 말에 미라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우선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내가 그리로 갈게.]
 딸칵!
 미라가 전화를 끊자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진이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자 담배 연기에 익숙해진 세포들이 활기를 띠었다.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 갈 때 즈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지?”
 핸드폰에 찍힌 것은 전혀 낯선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유진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핸드폰의 슬립을 밀어 올렸다.
 “여보세요.”
 [혹시······ 강유진 씨 맞습니까?]
 매우 굵직한 목소리는 감정이 전혀 스며 있지 않아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전화를 끊어 버릴까 하는 심정도 들었지만 우선 상대에 대한 궁금증이 앞서 그냥 대화해 보기로 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난 오성그룹 회장님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는 박철상 실장이라고 합니다.]
 “오성그룹이요? 전 오성그룹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무슨 일로······.”
 [전화로는 좀 그렇고, 만나서 이야기 좀 했으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서 뵐까요?”
 시간과 약속 장소를 메모한 유진이 핸드폰을 닫고 크게 심호흡하며 중얼거렸다.
 “내 작품 때문인가? 헛수고들 하고 있군.”
 다시금 담배를 꺼내 문 유진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게만 보였다.
 
 “미라가 늦는 것을 보니 차가 많이 막히는 모양이로군.”
 오성그룹의 사내와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오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빈도가 잦아졌다. 그렇게 10여 분을 더 기다리던 유진은 숙소를 나서다가 오피스텔 로비에서 미라와 맞닥트렸다.
 “자기야, 내가 좀 늦었지? 미안! 차가 너무 많이 밀리는 바람에 그만······.”
 “괜찮아.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오성그룹 회장이 보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오성그룹 회장이 왜?”
 “글쎄. 그거야 뭐 만나 보면 알겠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어느덧 약속 장소에 도착한 유진이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건장한 사내 둘이 다가왔다.
 ‘조폭들 같은데 뭐지?’
 머리를 짧게 깎은 사내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척 보는 순간 조직폭력배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혹시, 강유진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큰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가시지요.”
 ‘역시 조폭들이었군.’
 딴에는 정중하게 말한다고 한 것이지만 유진이 듣기에는 상당히 거북했다. 특히나 큰형님이라고 언급한 대목에서는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미라 역시 상대들이 조직폭력배라는 것을 감지했는지 손을 뻗어 유진의 손을 힘껏 잡았다.
 잠시 후, 유진과 미라는 왜소한 체구에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에게 안내되었다.
 “하하하! 강 선생,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자! 앉으시지요.”
 큰형님이라는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유진과 미라를 맞아 주었지만 그의 웃음 속에는 상대로 하여금 주눅을 들게 하는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크지 않은 키지만 다부진 몸매와 뱀처럼 사나운 눈초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유진과 미라가 사내의 맞은편에 앉자 사내의 눈짓을 받은 건장한 사내들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전화 드렸던 박 실장입니다.”
 무슨 부서의 어떤 일을 하는 실장인지도 없이 그냥 막연히 자기를 실장이라고 소개한 그는, 오성그룹의 회장과 관계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라도 한지 자세부터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은 배알이 꼴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어 간단히 용건만 물었다.
 “저를 보자고 한 용건이 무엇인지?”
 “강 선생, 회장님께서는 선생의 작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강 선생의 후원을 맡으실 의향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쎄요. 선뜻 와 닿지 않는 말입니다만.”
 유진의 말에 미라가 가만히 유진의 손을 잡았다. 박철상의 눈에서 번뜩이는 광채에 두려움을 느낀 모양이었다.
 “강 선생의 작품을 회장님께 넘긴다면 강 선생의 앞날은 탄탄대로가 될 것입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작품은 팔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으음!”
 박철상은 어금니를 깨물며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힘을 사용해 빼앗을 수도 있는 일을 어렵게 풀려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회장님께 넘길 수 없다는 뜻입니까?”
 간신히 예의를 갖추며 묻는 그의 눈길에서는 여차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난폭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살기에 가까운 팽팽한 긴장감이 실내를 에워쌌다.
 유진은 그런 박철상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화령심법의 기운을 북돋우며 마주 노려보았다. 그런 유진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박철상은 자신의 몸이 불에 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조폭의 길에 든 이래 수십 번의 패싸움과 수백 번의 칼부림을 벌이면서 전국 조직의 보스가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국에서 선두를 다투는 대기업인 오성그룹의 회장이 인정하고 측근에 둔 채 비합법적인 문제들의 처리를 맡길 만큼, 그의 조폭으로서의 전적은 화려했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 동안에 무시무시한 적들과 수도 없이 마주쳤지만, 지금처럼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위축되고 살갗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령심법의 영향으로 일단 눈싸움,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게 된 유진은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가 해야 할 말을 꺼냈다.
 “제 작품은 일종의 시험작으로, 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험작이라면?”
 유진을 노려보는 박철상의 말투가 거칠고 짧아졌다.
 “제가 왜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 작품을 팔 생각은 없습니다. 제 뜻을 전했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진이 일어서자 미라도 박철상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순간 박철상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젊은 사람이 상황 판단을 영 못하는군.”
 “글쎄요. 제 앞길 정도 스스로 판단할 이성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유진이 미라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들을 박철상에게 안내했던 사내들이 앞을 막아섰다. 박철상은 머릿속으로 유진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유진의 움직임이 싸움을 전문적으로 하는 싸움꾼의 그것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절도가 배어 있었다. 더구나 그의 눈빛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들이 몰려 있는 이런 고급 식당에서 그와 부딪치는 것보다는 똘마니들에게 사시미 자루를 쥐어 준 뒤에 싸움을 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냥 보내 줘!”
 살기가 깔린 박철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건장한 사내들이 움찔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고개를 돌려 박철상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유진이 밖으로 나가자 건장한 사내들이 박철상에게 다가갔다.
 “애들 풀어서 담가 버리더라도 그 작품을 내게 가져와.”
 “알겠습니다. 큰형님!”
 나가는 사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철상의 눈에서는 예의 뱀처럼 차가운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유진의 숙소로 돌아온 미라의 목소리는 아직도 긴장되어 있었다.
 “자기야, 뒤탈이 없을까?”
 “걱정도 팔자셔! 요즘 어떤 세상인데 깡패 새끼들이 설쳐! 그런 걱정일랑 말고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갈 준비나 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전문적인 싸움꾼인 조폭 무리들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내심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의 힘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 의해 강제적으로 배웠던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엉거주춤 서서 태양의 기운을 몸 안에 모으는 태양신장, 그 뒤에 굳은 몸을 풀고, 그 뒤 태양의 기운을 몸에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했던 화령무라는 이름의 도인술, 점토를 반죽하는 과정에서 화기를 불어넣기 위해 하던 화령수라는 손놀림과 큰 반죽 덩어리를 발로 밟으며 춤추듯 움직였던 화령보라는 발놀림 등등······
 그런 것들이 사람을 제압하는 무력이 되고, 그 근본을 이루는 힘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산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배운 것들이 남들은 돈을 줘서라도 배우려고 하는 무술의 일종임을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뒤, 불이나 태양과 관련된 장소나 물건을 찾아 여행을 다니면서였다.
 
 자전거를 빌려 텐트 하나 싣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산섬인 제주도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용암 동굴인 만장굴을 비롯해 수많은 오름들과 한라산 등을 둘러본 유진은 성산 일출봉을 찾았다. 텐트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일출을 보기 위해 봉우리를 올랐다.
 일출봉의 한쪽에 관광객들을 위해서 둘러쳐진 난간에 기대어 해가 뜨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라는 지형적 특성과 일출봉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으로 인해 알 수 없는 감흥을 느끼게 되어, 태양신장을 수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화산으로 이루어진 분지답게 일출봉은 관광용 난간 쪽을 제외한 모든 땅이 유채꽃과 풀들로 덮여 있었다. 난간의 아래쪽은 난간의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그곳에 자리 잡은 유진은 마보의 일종인 태양신장의 자세를 갖추며 수련을 겸한 해돋이 구경에 들어갔다.
 기분 탓인지 그날의 수련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깊은 명상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그때 몇 명의 청년들이 유진이 내려온 길을 따라 난간 아래로 내려왔다.
 “어? 저거 뭐야? 이런 데서 저게 뭐하는 짓이냐?”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기가 줄줄 흐르는 청년들 중의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외치자, 주변의 다른 청년들도 그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제각기 떠들어 댔다.
 “야, 특이한 자세네.”
 “그러게! 얘 무슨 도사나 무술의 고수 같은 거 아닐까?”
 “크크크, 이런 데서 이러고 있으면 다 도사고 무술의 고수냐?”
 “흐흐흐흐, 하긴 그렇지!”
 이로 인해 유진의 입정 상태는 깨어졌고, 오랜만에 맛보는 깊은 명상의 세계에서 화령심법의 성취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태양신장의 자세를 풀고 일어서는 유진은 절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입정 상태가 깨진 아쉬움이 컸던 탓이었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인상 쓰네.”
 “그러게 말이야. 서울서 제주도까지 와서 조용히 관광이나 하고 가려고 했더니 성질을 건드네.”
 “무술의 고수니 뭐니 했더니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네. 죽으려고 환장했나! 이 쉐리, 눈 안 깔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청년들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은 화가 팍 치밀어 올랐다. 무언가 화를 표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오른손이 안에서 밖으로 원을 그리며 바로 앞에 있는 젊은이의 가슴을 밀어 쳤다.
 팡!
 손바닥으로 배구공을 후려친 듯한 소리가 울리며 젊은이가 뒤로 2미터 정도 나가떨어졌다. 태양신장을 수련한 뒤끝이기 때문이었을까. 유진의 몸에선 화령무의 동작 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펼쳐졌고, 그 끝에 자신을 화나게 한 청년이 있었던 것이다.
 “어! 이놈 봐라!”
 주변의 다른 청년들이 긴장하며 유진을 잡기 위해 다가섰다.
 아직 화가 잔뜩 치밀어 있는 상태였던 유진은 화령무의 동작들을 연속으로 펼쳐 냈다. 십 수 년의 수련으로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발은 화령보의 방위를 밟으며 청년들에게 다가섰다. 두 손은 엇갈리고, 휘둘러지며 청년들의 몸 곳곳을 후려치거나, 밀쳐 냈다.
 “하앗!”
 팡!
 “훗! 차앗!”
 파앙! 퍽!
 유진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질 때마다 청년들은 하나씩 쓰러져 갔다.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사방으로 나뒹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으윽!”
 “아이구, 아야!”
 청년들은 자신이 맞은 부위를 움켜쥐고 비척비척 일어나면서 상황을 살폈다. 동료들이 자기와 같은 꼴로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본 청년들은 자신들이 유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제길!”
 “엄청 세네!”
 “튀, 튀자!”
 한 청년의 말은 너무 강한 상대에 대한 두려움에 물들어 있던 청년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는 복음과도 같았다. 그들은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난간 위쪽을 향해 도주해 버렸다.
 그날의 일로 인해서 유진은 자신의 무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아버지 몰래 화령보결 내의 수련법들을 무술로 바꿔 생각해 보고,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련을 했다.
 그 뒤에도 여행을 다니다가 몇 번 텃세를 부리는 불량배들이나 양아치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때는 강도를 조절하기 위해서 애써야 할 만큼 그가 배운 것들은 무술로서의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유진이 생각을 하는 동안 미라는 장난기 가득한 그의 말에 긴장이 풀어졌는지 비로소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하기야 자기 말대로 깡패들이 활개 치는 세상은 아니지······.”
 “그럼 당연하지. 그건 그렇고, 우리 다음 주에 강진에 내려가자.”
 갑작스런 말에 미라가 당황스러워했다.
 “다, 다음 주에?”
 “미라도 다음 주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
 미라가 말끝을 흐리자 유진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아버지도 미라를 보면 마음에 드실 거야.”
 “정말?”
 “그럼! 내 여자를 보는 눈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거든! 미라를 처음 본 순간 ‘내 여자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분명 아버지도 ‘너는 내 며느리다’라고······ 아얏!”
 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미라에게서 떨어지며 옆구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쳇! 나 그만 갈 거야.”
 입을 삐쭉이 내민 미라가 홱 돌아서 문 쪽으로 걸어가자 유진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려세우고 그녀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알지?”
 “나······도······ 사랑해요.”
 뜨거운 입맞춤으로 유진의 숨결을 한껏 체내에 간직한 미라가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유진은 박철상의 날카로웠던 눈매를 떠올리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졌다. 유진의 우려와는 달리 첫날과 둘째 날은 아무런 탈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철컥! 철컥!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전해지자 부스스 눈을 뜬 유진은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한다는 감지하고는 온몸의 털이 곤두섬을 느꼈다.
 ‘놈들인가.’
 콜록! 콜록!
 유진이 짐짓 기침을 해 인기척을 보내자 문에서 들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유진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그런 것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면 불의 정화를 얻기 위한 수련을 싸움 기술로 변질시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목검 하나 만들어 보지 않았다. 그저 간단한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 화령무를 검법으로 변형해 휘둘러 보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진은 구석에 세워져 있는 야구방망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야구방망이를 집어 든 유진이 문으로 다가가 목청을 높였다.
 “누구야!”
 후다닥!
 누군가 황급하게 달아나는 소리에 용기를 얻은 유진이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휘이잉!
 복도를 타고 들어온 시원한 밤바람이 유진의 얼굴을 간질일 뿐이었다. 고개를 슬며시 내밀고 좌우를 살피던 유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닫고 걸어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박 실장이라는 놈이 보낸 것들이 분명할 텐데······ 이것들이 다시 되돌아오려나.”
 침대로 되돌아와 누운 유진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천장만 올려다보며 온갖 상념에 시달렸다. 그러는 가운데 또다시 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철컥! 철컥!
 잠에서 막 깨어나 세포들의 움직임이 느릴 때와는 달리 세포활동이 활발한 상태의 움직임은 확연히 달랐다. 튕겨지듯 일어나 야구방망이를 들고 문으로 다가선 유진은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들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철컥! 철컥! 철커덩!
 마침내 철옹의 요새가 뚫리듯 굳게 잠겨 있던 문이 개방되며 시커먼 물체가 들어섰다.
 “에잇!”
 휘익! 퍼억!
 “어이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꼬꾸라지자 뒤를 따르던 두 개의 검은 물체에서 뭔가 번뜩이는 광채가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유진은 이를 악물고 야구방망이를 들어 막고 휘두르며 검은 물체를 공격했다. 그들이 야구방망이를 막고 주춤거리는 것을 본 유진은 이웃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고함을 질렀다.
 “강도야! 도둑이야!”
 “뭐해! 저 새끼, 어서 제압해!”
 처음 꼬꾸라졌던 사내가 고함치자 번뜩이는 광채가 허공을 가르는 가운데, 유진의 고함을 듣고 사방에서 인기척과 도둑을 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기미! 철수해!”
 누군가의 입에서 욕설이 튀면서 사내들이 복도로 내달리자 유진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뒤쫓았다.
 “거기 서지 못해!”
 “미친놈아, 너 같으면 서겠냐?”
 “이 새끼들아, 거기 서!”
 남달리 달리기가 빠른 유진이 도주하는 사내들을 쫓고자 했다면 잡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혼자서 회칼을 지니고 있는 조폭들을 제압하는 일이 쉽지 않기에 뒤쫓는 것을 포기했다. 유진이 숙소로 돌아오자 경비들을 포함한 이웃들이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젊은이, 괜찮은가?”
 “유진 씨, 다치지 않았어요?”
 “어머! 어머! 유진 씨 알고 보니 무척 용감하네.”
 유진의 옆방에 살고 있던 젊은 부부가 감탄사를 연발하자 머쓱해진 유진이 머리를 긁으며 웃음을 보였다.
 “여러분들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누구요?”
 자신의 그림을 노리는 조폭들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글쎄요. 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자! 모두들 돌아가십시오.”
 유진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자 경비원이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뿔뿔이 흩어지자 경비원이 조폭들이 사라진 복도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저렇게 설치고 다니다니! 내 경찰서에 신고를 해 놓지. 조심하게.”
 “네. 놈들이 또 올지도 모르니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돌아서는 경비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진도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문에 등을 기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힘으로 오성그룹을 상대한단 말인가.’
 혼자서, 그것도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이 저 거대한 오성그룹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작품을 박철상에게 넘겨줘 버릴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협박조차도 이겨 내지 못하고 어찌 불의 정화를 얻을 수 있단 말이냐. 불의 정화를 얻는 일은 이보다 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다. 협박에 못 이겨 내 작품을 넘겨준다는 것은 불의 정화를 포기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유진은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정체불명의 사내들의 습격을 받은 이후로 야구방망이는 유진의 분신이 되어 버렸다. 어디를 갈 때나 그의 손에는 야구방망이가 쥐어져 있었고 친구들은 유진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
 
 강진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유진은 자신의 작품을 아버지에게 보여 준다는 생각으로 결혼 초야의 새신랑처럼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옆자리에 동승한 미라는 고속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시종일관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옛 전통을 잇고 있는 유진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일에 심적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미라야, 우리 커피 한잔 하고 갈까?”
 “아니야! 생각 없어. 그나저나 자기 아버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어쩌지.”
 “걱정 마. 내가 말했지? 아버지도 미라를 좋아하실 거야.”
 “그랬으면 좋으련만······.”
 유진과 미라는 나란히 뚝방길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진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미라의 긴장은 더해만 가는 가운데 검은색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뚝방을 가로질러 왔다. 그리고 그 뒤를 몇 대의 승용차와 레저 차량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부우우웅!
 “이런 젠장! 미라야, 뛰어!”
 “왜? 무슨 일이야!”
 “어서 뛰기나 해!”
 유진이 미라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뚝방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린들 승용차보다 빠르겠는가. 곧 승용차에 의해 뚝방 가장자리로 몰린 유진이 미라를 감싸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끼이익! 끼익!
 덜컹! 덜컹!
 차들의 문이 열리고 박철상과 회칼, 쇠 파이프, 목검 등을 손 마다 하나씩 쥐고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강 선생, 뭐가 그리 급하시오. 응?”
 “이, 이게 무, 무슨 짓이요!”
 “태워!”
 박철상의 지시를 받은 건장한 사내들이 유진과 미라에게 다가서자 유진이 언성을 높였다.
 “멈춰!”
 “강 선생의 여자 친구는 잠시 우리가 데리고 있지. 선택은 강 선생의 몫이야.”
 “뭐야! 미친······.”
 “뭐 하는 거야. 어서 태우지 않고!”
 박철상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건장한 사내들이 유진을 제치고 미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악! 유진 씨! 놔! 놓으란 말이야!”
 “이 자식들이!”
 “강 선생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작품인 모양이로군. 강 선생 스스로가 그것을 줄 때까지 아가씨는, 흐흐흐······.”
 박철상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꺼내 유진의 발 앞에 던졌다. 미라의 팔을 잡고 있던 사내들이 미라를 승용차에 태우려 하자 미라가 발버둥치며 고함을 질렀다.
 “놔! 유진 씨, 살려 주세요. 놔! 놔, 이 새끼들아!”
 “성격 한번 대단하군. 좌우간 강 선생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소.”
 으드득!
 유진의 악다문 입에서 섬뜩한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며칠 동안 분신처럼 가지고 다녔던 야구방망이를 놓고 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맨손으로 흉기를 잔뜩 들고 있는 저들과 싸워서 미라를 구해 낼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터엉!
 박철상이 차에 오르자 검은색 승용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뚝방을 가로질러 갔고, 그 뒤를 차량들이 줄지어 따라갔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멀어져 가는 차들을 노려보던 유진이 털썩 주저앉으며 절규했다.
 “으아아아!”
 
 감물을 먹인 삼베옷을 입은 텁석부리 사내가 일손을 멈추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후! 나 역시 아버님의 전철을 밟을 때가 온 것인가. 그나저나 유진이 이 녀석이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왜 이리 마음이 어지럽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인가.”
 텁석부리 사내는 유진의 아버지였다.
 아들이 며느리가 될 여자와 함께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이 짊어지고 있는 업보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그런지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
 ‘왔구나.’
 유진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상기되어 있었다.
 덜컹!
 문이 열리자 아버지는 작업을 멈추고 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화사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어서 오너라.”
 “······아버지!”
 울분에 차 있는 유진의 모습에 아버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게로구나.”
 “미라가······ 미라가!”
 “미라라면 네가 말하던 아이가 아니냐. 헌데 무슨 일이냐?”
 “크흐흑!”
 유진이 참고 있던 울분을 터트리자 유진에게 다가간 아버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 미라, 미라가!”
 “그래, 그래!”
 아버지가 유진의 손을 이끌고 작업장을 나섰다. 60살 먹은 노인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듯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작업장을 나서는 유진도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방으로 이동한 유진은 아버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유진이 그림 통에서 꺼내 준 그림을 받아 든 아버지는 그림을 펼쳐 보고 나서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꽃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했고, 당장이라도 캔버스를 태우고 세상으로 뛰쳐나올 듯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던 아버지였기에 감탄사를 터뜨리거나, 놀라움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흐흠! 그러니까 이 작품을 노리는 자들이 미라를 납치했단 말이냐?”
 “네.”
 “쯧쯧쯧! 이 녀석아, 이 따위 그림이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자신의 여자를 그렇게 만든단 말이냐!”
 “······.”
 아버지의 호통에 유진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바로 인과관계라는 괴물이다. 너는 그것을 저버렸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제가 그린 그림에 불의 기운이 스며 있는가를 확인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쯧쯧! 아직도 애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깟 그림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다시 그릴 수 없다면 그것을 어찌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또한 이 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애가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이냐! 어허, 참!”
 아버지의 말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박철상이 미라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 그림을 줘 버렸어야 옳았다. 결국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그림을 지나치게 중요한 것으로 믿게 만들었고, 그런 자신의 욕심 때문에 미라가 받게 될 마음의 상처는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들의 심정을 읽은 아버지는 아들의 그림을 다시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진아!”
 “네.”
 “너는 왜 이 그림에 불의 기운이 스며 있다고 생각했느냐? 애비의 눈에는 그저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잔재주만 보이는구나. 불의 기운을 집어넣으려는 집착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연스럽지가 못해!”
 “······하, 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격에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는 말이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불의 기운에 관한 한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따라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눈에서 실망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이 그림을 가져다주고 미라를 데리고 오너라.”
 “아버지!”
 미라를 데리고 오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아버지의 입이 굳게 닫혀 버렸다.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유진이 그림을 들고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세상이 무너져도 떠질 것 같지 않던 아버지의 눈이 떠졌다.
 ‘유진아, 대단하구나. 한낱 그림에 불의 기운을 집어넣다니, 이 애비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네가 정말로 장하구나. 그렇지만 그 그림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며느리 될 아이보다 소중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느냐.’
 
 ***
 
 “헉헉헉!”
 온몸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혈인이 된 사내가 구릉지대를 가로질러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볼트란 산맥을 향해 내달렸다. 사반트 제국과 마라 왕국의 경계를 이루며 마라 왕국을 감싸고 있는 볼트란 산맥은 하룬 산맥과 더불어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두두두두!
 사내가 막 구릉지대를 넘는 순간 일단의 기마대가 구릉지대에 도착했다.
 “놈을 놓쳐서는 절대 안 돼! 목! 목이라도 가져가야 한다.”
 “자작님, 놈이 갈 곳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이 좋아! 여기서 추격대를 분산한다. 자네들 둘은 계속 구릉지대를 넘게. 나머지는 나를 따라라!”
 추웅∼
 우렁차게 복명한 기마대가 둘로 갈라졌다.
 “놈이 볼트란 산맥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척살하라! 이랴!”
 소수의 기마대로 볼트란 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대형 몬스터인 오우거라도 만나게 되는 날이면 운명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작이라 불리는 인물의 우려대로 기마대에 쫓기는 인물은 이미 볼트란 산맥 깊숙한 곳에서 오크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르르르!
 “오! 신이여! 우리 사반트 제국을 이대로 버리시나이까.”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도주하던 사내는 오크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가오자 탄식을 내뱉었다.
 몸만 성하다면 능히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무리지만, 지금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오크들의 먹잇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사내가 검을 바로 세우자 으르렁거리던 오크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크아앙!
 휘익! 써걱!
 케엑! 크악! 캬오오오!
 동료의 목이 날아가자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두어 마리의 목을 벤 사내는 급격하게 힘이 빠져나가며 검조차 휘두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신이시여! 내 운명과 모든 것을 바치리다. 부디 혼란에 빠진 사반트 제국을 지켜 주소서.”
 [모든 것을 바친다고 했는가.]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것은 오크들뿐이었다.
 [그대의 권리를 모두 포기한다면 그대의 염원을 들어주겠다. 나를 따라 외쳐라! 그대의 속박을 해제하노라! 어서 외쳐!]
 “그, 그대의 속박을 해제하노라!”
 캬오오오!
 얼떨결에 고함을 친 사내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오크들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크의 날카로운 손톱이 훑고 지나갔는지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이 전해졌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오크의 밥이 될 수 없다고 결심한 사내는 검으로 자신의 목을 겨눴다. 순간 검을 쥐고 있는 팔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퍼억! 우욱!
 쨍그랑!
 검이 떨어지며 맑은 쇳소리를 내는 동시에 사내가 정신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사냥에 성공한 오크들이 꽥꽥거리며 사내를 음식 삼아 막 식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사내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던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에서 그 보석의 색깔보다도 더 붉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한 빛과 그 안에 가득히 서려 있는 뜨거운 마나의 기운을 느낀 오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우우우웅! 파앗!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빛이 강렬해지더니 거대한 형상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크크크! 크하하하! 3천 년! 3천 년 만에 드디어 나 이프리트가 자유를 되찾았노라! 우하하하! 미물들이 감히 나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 자를 해하려 하다니, 모두 재가 되어라!”
 휘르르릉! 화악!
 콰르르릉!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불꽃이 비상했다. 사내를 먹으려던 오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갔다.
 “내게 자유를 준 그대의 염원을 들어주겠노라. 정령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영혼이여! 여기 이 자의 육체에 봉인되어라!”
 촤촤촤촤촤! 화그르륵!
 이프리트의 의지에 따라 정신을 잃은 사내의 몸이 만지면 델 정도로 붉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사내는 커다란 불의 형상으로 바뀌어 갔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차츰 잦아들면서 불길에 휩싸인 거인도 차츰 투명하게 변하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사내에게서 피어나던 불도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주검처럼 엎어져 있는 사내 주위만 시커멓게 그을린 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
 
 아버지의 말대로 불꽃 그림을 가지고 나온 유진은 박철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유진입니다.”
 [하하! 마음의 결정을 한 모양이오.]
 “원하는 그림을 넘겨주겠소.”
 [현명한 결정을 했군. 그럼······.]
 박철상이 말한 약속 장소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불문곡직 약속 장소로 달려가자 초췌한 모습의 미라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미라야!”
 “유진 씨!”
 “괜찮아?”
 박철상이 능글맞은 웃음을 날리며 미라 앞으로 나와 두 남녀의 재회를 방해했다.
 “아아! 눈물겨운 광경이군. 재회의 기쁨은 천천히 나누라고!”
 “내가 왔으니 미라를 풀어 주시오.”
 유진이 그림을 허공에 흔들며 말하자 박철상이 뒤에 있는 사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풀어 줘!”
 사내들에게서 풀려난 미라가 유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잠시 미라의 등을 두드려 준 유진이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난 당신들을 믿지 못하겠소. 우선 미라의 안전이 중요하니 미라에게 승용차를 내주시오.”
 “우리를 믿지 못하시겠다. 이거 좀 섭섭하군. 고객한테 이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과연 그럴까?”
 유진이 주머니에서 터보 라이터를 꺼내 스위치를 누르자 박철상의 안색이 홱 변했다.
 “주인이 팔고 싶지 않으면 고객 또한 없는 법!”
 “자, 잠깐! 차를 내주지!”
 박철상이 차 키를 던져 주자 유진이 미라에게 고갯짓을 했다.
 “유진 씨!”
 “미라, 시키는 대로 해! 어서 이곳을 나가!”
 “······유진 씨!”
 “난 괜찮아! 이 그림이 내 손에 있는 이상 안전하니까 걱정 말고 어서 가!”
 유진이 재차 고함치자 자동차 키를 주워 든 미라가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어서 가!”
 부르릉! 부웅!
 미라를 태운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진이 차가운 시선으로 박철상을 노려보며 말문을 열었다.
 “내 한 가지만 묻지. 당신 정말로 오성그룹 회장이 보낸 사람인가?”
 “거 젊은 사람이 의심이 많구먼!”
 “후후후! 오성그룹의 회장쯤 되는 사람이 당신들처럼 막무가내인 사람을 곁에 두다니!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주인이 물건을 팔지 않으면 고객도 없는 법! 이 그림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그림이었소.”
 딸칵! 치익!
 “안 돼! 뭐 하는 짓이야!”
 유진이 라이터 불을 댕겨 미련 없이 그림에 불을 붙이자 박철상이 고함을 지르며 제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옮겨 붙은 불은 삽시간에 그림을 태우기 시작했다.
 “후후후! 내 오성그룹 회장에게 좀 따져 물어야겠소. 으하하하!”
 화그르르르!
 “뭐해! 그림을 빼앗지 않······ 뭐, 뭐야?”
 박철상을 비롯한 사내들은 믿지 못할 광경에 넋을 잃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불이 붙은 그림은 그림을 태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유진의 몸에 옮겨 붙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진은 자신의 몸에 불이 붙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박철상 등을 노려볼 뿐이었다.
 화그르르르!
 “세, 세상에! 어, 어찌 이런 일이!”
 파아앗!
 “하하하! 재가 되어 허공에 흩어져라!”
 퍼억!
 유진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는 듯, 손에서 활활 타오르던 그림이 폭발하면서 불꽃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아아아! 괴, 괴물이다!”
 박철상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는 순간 유진의 몸에서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밝은 붉은빛이 폭사되었다.
 화아아악!
 “으아악!”
 “크아아악!”
 유진의 몸에서 폭사된 붉은빛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박철상을 비롯한 그의 부하들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그와 함께 유진의 몸에서 폭사되는 붉은빛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우우웅! 화아아악!
 번쩍! 퍼억!
 한순간 유진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를 감싼 채 폭사되던 붉은빛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제3장 화령의 탄생
 
 
 
 
 
 
 오크 무리의 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던 사내의 손가락이 새카맣게 몰려든 개미에 반응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수십 년을 먹고 살아도 될 만큼 커다란 먹이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개미들은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고 화들짝 놀라 사내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미세한 떨림은 곧 확연한 움직임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전기에 감전된 무엇처럼 몇 차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엎어진 몸이 뒤집어졌다.
 “으으으!”
 개미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얻어먹으려던 작은 곤충들은 물론이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개미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신음만 흘리고 있던 사내의 눈이 슬그머니 떠졌으나,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인지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구나.’
 사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은 뒤, 두리번거리며 주위 환경을 살폈다.
 ‘뭐, 뭐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박 실장 이놈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내는 이프리트에 의해 영혼이 뒤바뀐 유진이었다. 유진은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라이터로 그림에 불을 붙인 것까지는 생각이 났지만,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부자유스러운 느낌에 무심코 고개를 내리다가 자신이 중세에나 입었을 법한 군장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림에 불을 붙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박철상이 그림을 태워 버린 것에 대한 복수로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라 짐작한 유진은 욱신거리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주변 사물을 확인했다.
 ‘크윽! 더럽게 아프군. 그나저나 놈들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온 거지? 미라는 안전하게 돌아간 건가. 응? 뭐야. 우리나라에 이런 나무도 있었던가?’
 눈앞에 펼쳐진 활엽수들을 발견한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장기를 산 속에서 보낸 유진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대한민국에서 자생하는 나무들은 아니었다.
 열대 지방에 자생하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뭇잎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크고 넓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검을 발견한 유진은 엉금엉금 기어가 검을 잡았다. 검에 의지해 몸을 일으킨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곳에 버려졌군. 내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먼 타국으로 이동시켰을까! 나와 무슨 놀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우선은 몸의 상처를 돌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유진은 쩔룩거리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살펴보고,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사방은 야자수 같은 거대한 활엽수들과 이름 모를 풀과 꽃, 칡넝쿨 같은 넝쿨나무들로 가득 찬 밀림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하루 이틀에 이 밀림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손에 쥔 검으로 이름 모를 넝쿨들을 자르고 걷어 내며 앞길을 헤쳐 나가던 유진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아름드리나무에 등을 기대 앉아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작품에 불을 붙인 이후부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놈들이 내게 마취약을 사용했다고 해도 국외로 이동시키기는 쉽지 않다. 혹시 오성그룹이 직접 관여를 했다면······. 이거야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구나.’
 유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우선 거치적거리는 이 무거운 갑옷부터 벗어야겠군.”
 갑옷을 벗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잡아 뽑으려고 당겨 봤다.
 철컥! 철컥!
 무언가가 걸려서 서로 고정을 시키는 듯 쇳소리만 날 뿐 갑옷은 벗겨지지가 않았다.
 “뭐가 이리 복잡해.”
 이곳저곳을 더듬은 후에야 비로소 연결 고리라 짐작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고, 간신히 갑옷을 몸에서 떼어 낼 수가 있었다.
 철커덩!
 무거운 갑옷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한결 홀가분해진 유진은 무심코 얼굴을 쓰다듬다가 무성한 수염이 만져지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이 수염은! 맙소사! 이, 이 머리카락은 또 뭐지?”
 경황 중에 발견할 수 없었던 치렁치렁한 황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유진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의 색깔도 색깔이거니와 지금처럼 치렁치렁하게 길려면 3∼4년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은 수염이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었다.
 “내, 내 몸이 이게 도대체······.”
 도무지 일련의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해도 생각처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처음 해 보는 말인 것처럼 발성기관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는 듯 입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이건 꿈이야! 꿈일 뿐이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유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많은 거리를 이동한 탓일까. 눈을 감자 피로감이 엄습해 들어오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접한 유진은 그저 감각이 시키는 대로 서서히 몽환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여기가 어딜까?”
 상처에서 전해지는 통증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만큼 행동도 자유로워진 유진은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고 흐릿하게만 보이는 대지를 거닐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크하하하!]
 “누, 누구요?”
 마치 고막을 터트려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커다란 웃음소리에 놀란 유진이 다시금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웃음소리는 마치 깊은 산중의 메아리처럼 전혀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조금 전과는 다르게 발음도 자연스러웠다.
 [너는, 나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의지에 의해 차원을 넘어 왔느니라.]
 “이프리트?”
 그 이름을 되뇌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유진은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거인을 발견하고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너는 죽었어야 할 영혼이었다. 네 영혼이 차지하고 있는 육체의 염원에 따라 내가 너를 그 육체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죽을 운명이라니······.”
 박철상에게 그림을 주지 않고 불태워 버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미라가 차를 타고 달아난 상태였다. 그들이 자신을 죽인다면 그 피해가 오성그룹의 회장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조폭들이라 해도 그 정도의 상황 인식은 가지고 있을 터였다.
 [크크크! 한낱 미물인 인간 따위가 어찌 신계의 이치를 다 알겠느냐. 신계의 이치에 접근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네 몸이 어찌 될지 너도 모를 수밖에! 아무튼 나는 너에게 육체를 준 자와 약속한 대로 기회를 준 것뿐이다. 기회를 주었으니 네 운명은 네 스스로 개척하라! 크크크크!]
 “자, 자, 잠깐만!”
 불길에 휩싸인 거인이 차츰 투명하게 변해 가자 유진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 안 돼! 자, 잠깐만 기다리란 말이야!”
 허공을 마구 휘젓는 유진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프리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유진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유진의 눈이 어느 순간 번쩍 떠졌다.
 “안 돼!”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다.
 “제, 젠장! 무슨 꿈이 이렇게 더럽냐.”
 이프리트라고 밝힌 불길에 휩싸인 거인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치렁치렁한 머릿결을 의식한 유진은 다시금 현실 세계로 되돌아왔다.
 황금색이 감도는 머리카락을 만지며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어디서부터 정리해 나가야 할지 몰랐다. 그러는 와중에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꼬르륵!
 “젠장맞을! 지금 밥 달라는 소리가 나와!”
 유진은 공연히 아랫배를 내려다보면서 투덜거렸다. 투덜거림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뱃속의 밥벌레들을 달래는 것이 우선인지라 몸을 일으켜 주위에 요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으나, 허기를 달래 줄 것은 고사하고 먹을 만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간간이 나무에 매달린 이름 모를 열매들이 눈에 띄기는 했으나, 그것을 딸 방법도 방법이거니와 독성을 함유한 열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먹을 것을 찾아 비틀거리며 헤매는 가운데 이글거리던 태양도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미치겠군. 이러다가는······.’
 어둠 속에서 산속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밤을 지새울 만한 적당한 곳을 물색하던 중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던 유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검을 꼬나 쥐고 동굴 입구를 살폈다. 다행히 깊이가 얕아 짐승들에게조차도 버려진 동굴이었다.
 “어쨌든 밤이슬은 피할 수 있겠군.”
 꼬르륵! 꾸르르륵!
 긴장이 풀어진 탓인가. 또다시 뱃속의 밥벌레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면서 허기가 몰아쳐 왔다.
 “젠장맞을! 짐승들로부터 몸을 지키려면 우선 불부터 피워야겠군.”
 터보 라이터를 꺼내려 주머니를 뒤지려던 유진은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터보 라이터는 고사하고 주머니조차 없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자신에게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 산속이라 땔감은 많았다.
 문제는 무슨 방법으로 불을 지피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유진은 마른 나뭇잎과 잔가지, 그리고 제법 굵은 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운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으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후후! 내가 이런 방법으로 불을 지피게 될 줄이야.”
 화령보결에는 불과 관련된 모든 지식과 경험, 지혜들이 남겨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돌이나 나무를 이용해 불을 지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은 실제 이런 자연물을 이용해 불을 지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화령보결의 방법만이 자신의 생존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화령심법이 불을 제어하는 심법인 만큼 불을 지피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화령심법을 끌어올렸다. 화령보결의 내용을 떠올리며 굵은 나무에 가는 나뭇가지를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비비기 시작했다.
 불과 3, 4분이나 지났을까.
 피시시시시!
 “뭐, 뭐야!”
 야릇한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자 불을 피우려던 당사자인 유진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아무리 화령심법을 사용했다고 해도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이토록 쉽게 불이 일다니······.”
 이런 상황이 화령심법의 덕인가 싶어진 유진은 문득 화령보결에 적혀 있는 화령심법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화령보결의 으뜸은 바로 화령심법이니라.
 첫 단계의 연정화기는 체내에 불의 기운을 쌓는 것이다. 체내에 불의 기운을 담음으로써 나쁜 기운을 태워 없애 심신을 단련시키는 것이 연정화기, 즉 화기지도이니라.
 두 번째는 연기화신으로 체내에 축적된 불의 기운을 제어하는 심법으로 이 단계를 통해 불의 강약 조절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며 불의 정화를 얻는 기초가 된다.
 이 단계를 일컬어 화신지도라 하느니.
 세 번째 단계는 연신환허라 부른다. 그 경지를 다른 말로 화허지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불의 정화를 얻는 단계이다.
 연신환허, 몸 안에 가득한 불의 기운을 모두 비우고, 연기화신을 이루는 데 깨달았던 깨달음마저 모두 비워야 비로소 화허지도를 이룰 수가 있다.
 화허지도에 이르면 화에서 공을 이루고, 공에서 화를 만들 수 있게 되니, 내가 불이요, 불이 곧 내가 된다. 그것이 바로 불의 정화이다. 또한 우리 가문의 업보를 풀 수 있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인 연허합도에 대해서는 아비도 함부로 거론할 수 없다. 가문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연허합도! 즉 화령지도에 오르면 의지로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의지만으로도 능히 태산을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선조들 중에서 최초로 화령지도에 든 분은 우리 배달민족의 시조이신 한웅천왕님이시다. 화령지도의 기운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다.
 그렇기에 한웅천왕께서는 자연의 힘을 대표하는 존재들인 우사, 운사, 풍백을 수하로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또 한 번 화령지도에 드신 분이 계시다. 저 지나족조차도 전쟁의 신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치우천왕이시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던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비록 연정화기를 공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박 겉핥기 정도에 불과하다. 그 정도로는 이렇게 쉽사리 불을 일으킬 수 없다. 이상한 일이로군.”
 기이한 현상으로 인해 상처에서 전해 오는 통증은 물론이고, 배고픔마저 잊어버렸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유진은 짚이는 것이 있어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화그르르르!
 화령심법을 운용하자 공기 중에 흩어져 있던 화(火)의 기운들이 마구 체내로 쏟아져 들어옴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이, 이 무슨 해괴한 일이냐!”
 허공을 움켜쥐어 보았으나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을 굳게 다져 먹은 유진은 다시금 명상에 들어갔다. 화령심법을 운용하자마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화의 기운들이 호흡을 통해 체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끝까지 가 보자는 심정으로 묘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유진의 뇌리에는 커다란 불의 형상이 만들어져 가면서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갔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불꽃은 가까이 갈수록 그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유진이 걸어가는 정신의 길에는 좌우에서 그의 키의 세 배가 넘는 불의 장벽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집어삼키려다가 무언가에 부딪쳐 튕겨 나가곤 했다.
 얼마를 걸은 것일까.
 유진은 마침내 커다란 불꽃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불꽃으로부터 무엇이든지 재로 만들어 버릴 듯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유진은 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유진이 두 팔을 한껏 벌리자 거대한 불꽃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더니 은은한 진동을 일으켰다.
 우우웅! 웅! 웅!
 콰아아아!
 어느 순간 거대한 불꽃이 맹렬한 속도로 유진을 향해 덮쳐들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콰드드드드! 콰앙!
 츠츠츠츠츠!
 거대한 불꽃의 폭발로 만들어진 진공상태가 주위의 모든 화기를 빨아들였다. 유진이 지나온 길 좌우로 만들어진 불의 장벽도 남김없이 빨아들이더니 투명한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양팔을 벌리고 있던 유진의 눈동자가 불꽃으로 변해 갔다.
 
 ***
 
 쪼르릉! 쪼롱! 쪼롱!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동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지난밤 특별한 경험을 했던 유진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몽환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화기도인술인 화령무를 가볍게 펼치기 시작했다. 화령무를 통해 몸속의 화기를 전신 사지백해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력한 힘이 온몸 가득 느껴졌다.
 더구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는데 몸을 움직여도 전해지는 고통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유진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체념해 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밤 해결하지 못한 허기는 여전히 밥벌레들의 아우성을 불러왔다.
 꼬르륵!
 “애들아, 조금만 참아라.”
 검을 들고 동굴을 나서다가 불을 지폈던 도구들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불을 꺼트리면 다시 피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 태우고 남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씨에 대고 바람을 불어 불씨를 살려 냈다.
 불이 강하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절하고는 이미 숯이 된 곳에는 재를 끼얹어 언제든지 재만 들춰내면 불씨를 살릴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러고 나자 사냥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내가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 고수도 아니고, 사냥 도구도 없이 검 한 자루로 사냥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면 우선 사냥 도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로군.”
 유진은 옆에 있던 검을 손에 쥐고는 동굴까지 온 길을 더듬으며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곳을 찾아 헤맸다. 수림이 우거진 곳이라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검으로 아름드리나무에 표식을 남기며 이동하던 중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잉! 끼잉!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 보니 사슴 한 마리가 쓰러져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어떤 맹수에게 당했는지 어깨 부분의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가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 모양이로구나. 안타깝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유진은 상처 입은 사슴의 경동맥으로 예상되는 곳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날카로운 쇠붙이가 단백질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켁!
 사슴의 비명 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유진은 사슴의 목에서 검을 뽑은 뒤, 그곳에 입을 가져다 댔다. 깊은 산속에서 세상과 잘 접촉하지 않으면서 살아오신 조상들 때문에, 아버지도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직접 사냥을 하셨다. 덕분에 유진도 아버지를 따라 몇 차례 사냥을 해 보았다. 덩치가 큰 사냥감을 잡으면 첫 번째로 하는 것은 목을 따고 피를 빼는 일이었다.
 물론 그 피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는 사냥감의 목에 입을 대고 피를 마셨고, 남은 피는 자루에 모아서 굳히면 선지가 되어 귀한 음식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유진에게도 피를 마셔 보라고 했지만, 어렸던 유진으로서는 빨간 피를 직접 빨아 먹는 일은 무리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유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빙긋 웃으시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일이 먼저였다. 비릿한 혈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목구멍으로 넘어갔지만 참아야 했다.
 벌컥 벌컥!
 뜨끈한 사슴의 피를 한참 들이마시고 났더니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새로운 활력이 솟아올랐다. 사슴의 피로 배를 실컷 채운 유진은 피가 모두 빠진 사슴의 시체를 둘러메고 동굴로 돌아갔다.
 갑옷으로 사냥 도구를 만든다고 해도, 언제 이런 큰 사냥감을 잡을 수 있을지는 기약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당분간은 이 사슴으로 연명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슴을 동굴 안에 넣고, 나뭇가지를 꺾어 잘 가린 뒤 다시금 갑옷을 찾으러 갔다. 천신만고 끝에 갑옷을 모두 찾은 유진은 그것들을 한데 모아 엮어서 동굴로 가져왔다.
 철그렁!
 “휴우 힘들다. 이제 무엇부터 해야 할까!”
 사슴을 해체하여 말려서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게 하는 일과, 사냥 도구를 만드는 일 중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먼저 사슴을 해체하기 쉽게 손칼부터 하나 만들어야겠구나.”
 결정을 내린 유진은 손칼을 만들 쇠붙이를 고르기 위해 갑옷을 살폈다. 갑옷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동그랗게 만들어진 쇳조각이 보였다.
 쇳조각은 빠지지 않도록 못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무언가 도구를 쓰기 전에는 빼기가 쉽지 않게 만들어졌다. 검을 이용해 구부러진 못을 펴서 겨우 쇳조각을 분리시켰다.
 반달처럼 날씬하게 휘어진 모습이 손칼로 쓰기에 아주 좋아 보였다. 밖으로 나가 숫돌로 쓸 만한 돌을 하나 주워 와서 쇳조각을 뾰족하고 날카롭게 갈았다.
 손이 베일 정도로 날을 세운 뒤에 옷의 한쪽을 찢어 내 잘 감으니 그럴듯한 손칼 한 자루가 만들어졌다. 이불로 삼아도 될 만큼 커다란 활엽수의 잎을 몇 개 떼어 와서 바닥에 깔고는, 아버지가 하시던 것을 떠올려 가며 사슴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발라냈다.
 내장은 썩기 쉬운데 이곳의 날씨는 무척 습하고 무더운 편이었다. 언제 또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잘 썩는 내장이라고 해서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 내장을 나뭇잎에 잘 싼 뒤, 동굴을 나섰다.
 비탈이 진 계곡 쪽으로 내려가 보니 졸졸거리며 흐르는 개울물이 보였다. 개울물이라고 해 보았자 실처럼 가는 물 줄기였다. 그러나 유진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먹을 수 없는 것은 버리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씻어서 다시 나뭇잎에 쌌다. 동굴로 돌아와서 나뭇가지에 내장을 꿰고, 걸쳐서 곱창 구이를 해 먹었다.
 “소금은 없지만 학교 앞에 있던 맛있다고 소문난 곱창집의 곱창 구이보다도 맛있구나. 쩝쩝······.”
 곱창 구이로 배를 완전히 채운 다음, 본격적으로 사슴의 해체에 들어갔다. 손칼로 칼집을 낸 뒤 가죽을 뜯다시피 벗겨 내서 손질한 다음 그늘에 말려 놓았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연 배우 톰 행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해야 할 테니까. 가죽도 놔두면 쓸 데가 생길 것이다.’
 사슴 고기는 엉덩이 살처럼 결이 있는 부위는 결을 따라 최대한 얇게 잘라서 햇볕에 널었다. 말려서 육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포를 만들기 어려운 부위는 뭉텅뭉텅 잘라 놓았다.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도록 훈제를 할 생각이었다.
 “사슴 한 마리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바르고, 고기를 자르는데 하루 종일 걸리는군. 이제 나뭇가지를 모아서 훈제만 만들면 대충 일이 끝나겠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혼자서 툴툴거리긴 했지만 길도 없고 사람도 없는 밀림 깊은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먹을 것을 챙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무는 해를 보면서 여기저기 널어 놓았던 고기들을 거둬서 동굴 안에 보관하고는 훈제를 하기 위한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울 생각이었으니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모닥불 위에 거치대를 만들어 고기를 올려놓으니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자, 훈제는 오랫동안 굽기만 하면 되고, 이제 또 무엇을 해야 하나?”
 주변을 둘러보니 주워 온 갑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로 동물을 사냥할 사냥 도구를 만들어야 봐야겠군.”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 갑옷에서 쇳조각들을 떼어 내던 유진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벌겋게 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때 밀림의 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우연히 동굴의 옆을 지나가던 오크 두 마리였다.
 취이익! 취익!
 뭔가 김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악취가 코를 찌르자 유진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제기랄! 저것을 저팔계라고 해야 할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던 오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구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놈인데!”
 유진은 한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깊은 충격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눈앞의 몬스터들은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중이었기에, 그는 긴장으로 침을 삼키며 왼손에 든 나뭇가지를 내밀어 불꽃을 오크 쪽으로 향하게 했다.
 취익! 취익!
 오크 두 마리는 특유의 콧바람을 불어 대며 손에 쥔 몽둥이를 들어 유진을 위협했다. 그러한 오크들의 모습은 섬뜩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오크들은 불붙은 나뭇가지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크르르릉! 크아악!
 오크들은 유진의 손에 들린 불과 검에 신경이 쓰여 다가서지 못했고, 유진은 오크들의 등장으로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다. 오크 두 마리라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양쪽은 서로 쉽사리 먼저 공격하지 못한 채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 저것들도 나에게 어느 정도 겁을 먹은 것 같으니 최대한 사납게 행동해서 쫓아내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유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검을 불끈 쥐었다.
 “이얏!”
 유진의 검이 모닥불의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면서 호선을 그리고 오크들의 가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오크들은 사냥을 하던 중이 아니었고,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횅하니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유진은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으아아아!”
 유진은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절규하고 말았다.
 사막 한가운데 물 한 모금 없이 내던져진 것보다 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해 있던 유진은 차츰 정신을 차렸다.
 “휴우, 우선 상황을 정리해 보자. 이곳은 박 실장이라는 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 분명하다.”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자 믿기지 못할 상황들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었다. 자신이 중세의 갑옷을 걸치고 있고 해괴한 돼지들을 목격한 이상, 자신이 살던 세상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불의 정령왕의 말대로 내 영혼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려면 우선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이 정리되자 유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으로 향했다. 중세에 사용했던 검에 대해 문외한인 유진은, 검의 길이가 1.2미터 정도란 사실만으로 한 손 검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검을 집어 들고 동굴을 나선 유진은 그동안 익혀 온 화령무를 검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화령무는 태양신장으로 얻은 화기를 몸에 갈무리하는 춤으로, 진기도인법이자 체술이었다.
 태양신장은 민족 고유의 독특한 하체 단련법이자 단전호흡법으로 말에 걸터앉는 자세라고 하는 마보의 일종이었다.
 화령무는 더구나 무기를 들고서도 수련할 수 있는 것으로, 유진은 아버지 몰래 나무 막대기를 들고 검법을 수련하듯 수련을 해 왔기 때문에 검으로 펼치는 화령무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진짜 쇠로 만들어진 검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이 한 자루의 검과 검으로 펼치는 화령무, 즉 화령검무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모닥불에서 가늘게나마 피어오르는 불의 기운을 흡수하며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세게 허공을 베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의 손에 들린 검에서는 모닥불에서 반사된 붉은빛이 번득였고, 화령검무는 차츰 신명 나는 춤사위로 변해 갔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50여 차례 세다가 그만둔 지가 한참이었다. 계절이 바뀌지 않는 듯 기후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습하고 무더웠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려는 열정으로 시작된 수련은 화령심법에 반응하는 마나로 인해 전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체내에 축적된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나는 어느 순간부터 유진의 의지와 동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유진은 또 다른 시험의 장에 도전하고 있었다.
 “오늘은 반드시 검에 불의 기운을 실어 보리라.”
 마음을 굳게 다진 유진이 수련장으로 변해 버린 동굴 밖 오른 편 공터로 이동했다. 원래부터 있던 공터가 아니라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잘린 나무들로 인해 만들어진 조그마한 빈 공간이었다.
 “흐읍!”
 크게 심호흡한 유진이 화령심법을 일으키자 체내에 축적되어 있는 불의 기운들이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일어나는 열기가 삽시간에 모공 구석구석까지 퍼지며 감각이 극대화되어 갔다.
 “이야아압!”
 [아니야! 아니야!]
 기합을 내지르며 검에 불의 기운을 실어 가던 유진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몸을 낮추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휘이잉! 파라라락!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제 헛소리까지 들리는구나.”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금 화령무의 자세를 잡아 가려는 순간 어린 여자아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바보! 그것이 아니라니까.]
 “누구냐!”
 [······.]
 “누구냐고!”
 유진이 언성을 높이자 더 이상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혼란스러워진 유진은 더 이상 수련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냥을 할 요량으로 갑옷에서 떼어 낸 쇳조각으로 만든 화살과 활을 챙겨 드는 순간, 들리지 않았던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은 바보야.]
 ‘미치겠군. 이거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그리고 주인님이라니? 내가 무슨 변태도 아니고······.’
 내심 투덜거리던 유진은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반지에 박힌 보석에서 기이한 빛이 서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또 뭐지?’
 [뭐긴 뭐야. 바보!]
 “엥?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반지를 내려다보면서 묻자 생각대로 반지의 보석에서 흐르는 빛이 변화를 보였다.
 [난 주인님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어서 주인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내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건 나도 몰라.]
 “그렇구나. 그럼 넌 누구지? 그리고 왜 반지 속에 있지?”
 [몰라. 난 주인님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야.]
 ‘내가 만들었다고? 이거 정말 돌아 버리겠군.’
 “내가 만들었는데 왜 이제야 말을 하는 거니?”
 [몰라. 사실 내가 만들어진 것은 한 석 달쯤 되었어. 그런데 주인님의 기운이 약해서 대화를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가만! 석 달 전이라면 화령심법에 의해 체내에 축적된 기운이 반응을 보일 때 아니야? 그렇다면······.’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뭐가 있지?”
 [······웅! 나는 불! 불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유진은 머리에 띵한 충격을 받았다.
 “서 설마! 네가 정말 화령이냐?”
 [화령? 불의 정령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화령보결에 수록된 전설 중에서 화령심법이 극에 이르러 화령지도에 이르면 화령이 나타난다고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화령심법의 제1단계인 연정화기의 방법으로 화기지도를 수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화령이 나타났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연정화기의 단계에서 정령이 나타나다니······.’
 유진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화령보결의 불의 정화에 대한 수련을 되새겨 보고 있는 동안, 유진의 생각을 읽은 여자아이의 앙증맞은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흐응, 주인님의 생각은 틀렸어. 몸 안에 불의 기운을 품게 되면 나 같은 정령이 나타나는 거야.]
 “그래? 그럼 너는 어디서 온 누구냐?”
 [나? 나는 화령! 주인님이 이름을 지어 줬잖아!]
 “아니, 그것이 아니고, 내 반지에 머무르기 전에는 무엇을 하던 존재인가, 또 어디서 왔는가 하는 걸 묻는 거야.”
 [우웅! 그건 나도 몰라! 그냥 주인님이 불의 기운을 모아 어느 순간 나를 만든 거야. 나도 내가 왜 이 반지 안에서 태어났는지는 몰라.]
 유진은 화령의 말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화령보결에 쓰여 있는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군. 다른 세상이라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건가?’
 [그게 아니야. 주인님의 생각을 살펴보니까 주인님이 있던 곳은 물, 불, 바람, 땅의 기운이 모인 마나가 너무 적어서 정령을 부르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몸 안에 담고 있는 불의 기운의 양과 그 기운을 조절하는 능력에 따라서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의 네 단계를 지나게 돼. 그때마다 그 등급에 해당하는 불의 정령을 부를 수 있지. 그리고 그 단계를 벗어나서 몸 안에 있는 불의 기운을 비울 수 있게 되면, 불의 정령왕이라는 화령왕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거야.]
 여자아이 목소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연정화기의 단계에서 하급과 중급의 불의 정령을 부를 수 있고, 연기화신의 단계에서 상급과 최상급의 불의 정령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단계를 뛰어넘어 연신환허의 단계에 들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고 했다.
 “정말이냐? 연신환허에 이르면 화령왕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고? 그럼 저번의 그 화령왕을 불러내서 내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알 수 있게 되겠구나!”
 [맞아. 하지만 틀려.]
 “그게 무슨 말이냐?”
 [주인님이 화령왕을 불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은 맞지만, 세상에는 하나의 정령왕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주인님이 전에 만났다는 화령왕이 다시 나타날지, 아니면 또 다른 화령왕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만 아마도 보통은 다른 화령왕을 만나게 될 걸.]
 “그, 그럴 수가! 그럼 나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야!]
 “뭣! 그럼 돌아갈 수 있단 말이냐?”
 [응, 주인님의 생각 중에서 화령심법이라는 수련법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면 가능해.]
 “마, 마지막 단계라면 연허합도의 수련을 하는 화령지도?”
 [그래. 명칭과 뜻이 조금 안 맞기는 하지만 바로 그거야. 화령지도! 그 단계에 이르면 불의 정령왕들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는 화령의 제왕이 돼. 그러니 다른 세계로 가는 것도 가능하지.]
 “그, 그렇지만 인간은 화령지도의 경지에 오를 수 없어!”
 [바보, 주인님! 주인님의 생각 속에도 이미 두 명이 화령지도에 올랐는걸!]
 “응? 한웅천왕님과 치우천왕님?”
 [그래, 그 사람들도 한 걸 주인님이라고 못한다는 법은 없잖아.]
 유진은 자신의 힘으로 과연 배달국의 천왕 중에서도 두 분만이 오른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회의감에 빠져 들었다.
 [이곳은 주인님이 살던 세계와는 다르잖아. 그러니 힘을 내.]
 “그건 그렇구나. 네 말대로 힘을 내 보자꾸나.”
 [주인님, 힘내! 내 능력을 보여 줄까?]
 “응? 으응! 그, 그래!”
 [꺄르르르! 잘 봐! 주인님 검에 불의 기운을 실어 줄게.]
 화악! 화그르르르!
 간드러지는 웃음과 함께 유진이 들고 있는 검이 활활 타올랐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유진은 검에서 열기를 느끼지 못하자 반신반의하며 한쪽에 쌓아 놓은 나무로 가져갔다.
 [주인님은 역시 바보야! 그 불은 주인님의 힘으로 만든 거야. 그러니 당연히 뜨거움을 못 느끼지. 꺄르르르르! 바보!]
 화령의 말대로 쌓아 놓은 나무들은 검에서 전해지는 불꽃에 닿자 한순간에 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혼자서 놀라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그저 닿기만 했을 뿐인데 재로 변할 정도라면 당장이라도 산을 내려간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들려온 목소리에 실망하고 말았다.
 [아직 내가 기운이 약해서 하루에 한 번 정도밖에 내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
 “그렇다면 내가 수련을 하면 할수록 네가 강해지는 거냐?”
 [꺄르르르! 맞아. 그러니까 어서 수련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줘.]
 “그랬었군. 좋아. 앞으로 너를 부를 때 화령이라고 부르겠다.”
 [화령? 그게 내 이름이야? 아이! 좋아라! 꺄르르르르!]
 실체가 눈앞에 있다면 콱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화령의 웃음엔 매력이 넘쳐흘렀다.
 화령과의 대화는 유진에게는 커다란 활력소가 되어 화령보결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게 해 주었다.
 
 오크들과의 만남 이후로 사냥을 나설 때는 언제나 긴장감이 감돌았다. 화령검무를 집중적으로 수련한 결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검을 등에 메고 엉성하게 만든 활을 쥔 채, 사냥에 나선 유진은 사냥감들이 눈에 뜨이지 않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어째서 사냥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
 고개를 돌리면 저만치 풀을 뜯고 있는 초식동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오늘은 왠지 사냥감들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더 멀리 가 봐야겠군.”
 유진은 동굴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 보았다. 그때 돌연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크워어어어!
 “허억! 이건 또 뭐지?”
 너무나 엄청난 괴성에 아연실색한 유진은 아름드리 고목나무로 올라 괴성이 들린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한지라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뿐이었다. 괴성의 주인공을 확인하지 못한 채 나무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언뜻 시커먼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유진은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저, 저건 뭐지?”
 숲에 가려 언뜻언뜻 보이는 물체는 어림잡아도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괴물이었다. 괴물이 다가오자 유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꿀꺽!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괴물은 양손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모조리 부수며 다가왔다.
 쿵! 쿵! 우지직!
 크워어어어!
 “저, 저건! 반지의 제왕에서 나왔던 트롤인가 오우거인가 그 괴물하고 비슷한 녀석이다!”
 유진에게 다가오는 것은 중형 몬스터인 트롤이었다. 재생력이 뛰어나 녀석들의 피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되며 질긴 가죽 또한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그야말로 돈 덩어리인 몬스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트롤을 잡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소드익스퍼트 중급 이상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간신히 잡을 수 있을 만큼 포악하고 사나운 녀석이 바로 트롤이었다.
 웬만한 도검에는 상처도 나지 않는 질긴 가죽은 기본이고, 설사 가죽에 상처가 난다 하더라도 부글거리며 끓는 피는 순식간에 그 가죽을 재생시켜 원래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근육과 뼈는 질기고 억세서 자신의 팔뚝과 비슷한 굵기의 나무는 팔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수수깡처럼 부숴 버린다.
 그뿐이 아니었다. 탄력 넘치는 근육은 자신의 키보다 높은 점프를 가능하게 했고, 빠른 몸놀림은 네 발 달린 맹수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마주친다면 살아남기 힘든 괴물인 것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코를 벌렁거리던 트롤은 유진을 발견한 듯 괴성을 지르며 유진이 올라 있는 고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쿠웅!
 “우웃!”
 거대한 덩치에 부끄럽지 않을 충격이 전해졌다. 워낙 큰 나무인지라 단박에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충격이 그대로 유진에게로 전해졌다.
 “어, 엄청나다!”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주변의 가지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땅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유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트롤은 단박에 부러지지 않은 아름드리나무에 화가 났는지 괴성을 지르며 나무에 계속 충격을 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맛있는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집착에 사로잡혀서인지 몰라도 트롤은 광포한 행동을 보였다.
 쿵! 쿠웅!
 제아무리 덩치가 큰 트롤이라 할지라도 아름드리나무는 부러트리지 못했다. 약이 바짝 오른 트롤은 온몸을 동원해 나무에 충격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유진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뭔가를 결정했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유진은 재빨리 나뭇가지를 타고 옆 나무로 이동해 땅으로 내려왔다.
 크르르르르!
 유진이 땅을 딛고 노려보자, 트롤은 광포한 행동을 보였던 조금 전과는 달리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젠장! 더럽게도 크네.”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세운 유진은 트롤의 덩치에 압도당했다. 눈앞의 먹잇감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심하던 트롤이 마침내 괴성을 지르며 돌진을 감행했다.
 캬오오오! 쿵! 쿵!
 휘익!
 “우웃! 빠르다.”
 어느 틈엔가 코앞에까지 다가온 트롤의 무지막지한 손톱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유진은 재빨리 화령보를 밟으며 트롤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검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그르르르!
 모든 생명체가 불을 무서워하듯 트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트롤은 유진이 쥐고 있는 검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자 멈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검에서 이는 불이 결코 강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 다시금 무지막지한 손톱으로 유진을 후려쳤다.
 “젠장맞을! 이판사판이다.”
 이를 악문 유진은 불길에 휩싸인 검으로 트롤의 거대한 손톱을 막아 갔다.
 까강!
 나름대로 쇄도해 들어오는 트롤의 손바닥을 노린 것이지만 결과는 트롤의 날카롭고 두툼한 손톱과 마주쳤다. 찌르르한 충격이 전해지자 화들짝 뒤로 물러난 유진은 화령에게 소리쳤다.
 “화령, 네 기운을 검에 불어넣어라.”
 [······그, 그건!]
 화령이 유진의 말에 망설임을 보였다. 피나는 수련을 했다고 해도 아직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사용할 수 없는 파워였다. 그런 만큼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의 파워를 사용하라는 유진의 말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화령, 뭐 해!”
 [주인님, 그냥 도망가는 게 어때?]
 “뭐, 뭐라고? 그냥 도주하라고? 이걸 그냥 확!”
 유진과 화령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트롤이 양팔을 마구 휘저으며 유진을 압박했다.
 “화령, 너 나중에 두고 보자.”
 [······.]
 무지막지한 트롤의 공격을 피하며 간간이 역습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피나는 수련을 거친 끝에 검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그 기운이 상대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순간을 몇 번 넘긴 유진은 다시금 화령에게 고함쳤다.
 “이놈아,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냐. 어서 네 기운을 내 검에 불어넣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토라진 여아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맴돌더니 유진의 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츠츠츠츠츠! 퍼억!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검에서 시퍼런 불길이 거세게 솟구쳤다.
 “좋아, 이야아아!”
 검에서 뿜어지는 불길이 강해지자 자신감을 얻는 유진이 기합성을 지르며 화령무의 묘한 각도로 허공을 내리그었다. 화령의 기운이 스며들기 전에 비해 유진의 움직임은 배 이상 빠른 스피드를 보였다.
 스윽! 써걱!
 검을 타고 섬뜩한 느낌이 전해지면서 악취가 확 하고 풍겨 왔다. 뭔가를 베었다고 느낀 순간 어느덧 유진은 저만치 뒤로 물러났다.
 끄아아아아! 쿠웅!
 엄청난 괴성과 함께 트롤의 몸이 육중한 덩치에 맞게 커다란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나이스! 이 녀석, 이제는 내 차례다.”
 유진이 힘이 나는 듯 검을 움켜쥐고 트롤에게 다가서려고 하자, 트롤이 검에 잘린 가슴과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워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는 트롤의 가슴과 배의 상처가 녹색의 거품이 부글거리더니 스르륵 아물고 있었다.
 유진의 놀람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라도 반 토막이 날 만큼 강한 공격이었는데, 트롤에게는 그저 잠깐 고통을 주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화령의 기운도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유진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해괴한 상황에 넋을 잃고 있을 때, 화령의 목소리가 유진의 고막을 때렸다.
 [주인님, 튀어!]
 “뭐? 뭐라고?”
 [튀라고! 살고 싶으면 어서 튀어!]
 “어, 어엉! 그, 그래!”
 후다다닥!
 유진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내달렸으나, 아직 가슴과 배가 완전히 붙지 않은 트롤은 으르렁거리며 멀어지는 유진의 뒷모습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트롤은 움직이지 않아야 상처가 더 빨리 아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트롤로부터 멀어진 유진이 달리는 것을 멈추고 양팔로 허벅지를 짚으며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또다시 트롤의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아!
 “헉헉! 제, 젠장맞을! 이리 오지 마!”
 트롤에게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동굴을 알려 주게 될 것을 염려한 유진은 최대한 동굴에서 먼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밀집한 나무들을 부러트리며 쫓는 트롤과 나무 사이로 달리는 유진과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멀어졌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