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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강국 1

2019.02.26 조회 618 추천 2


 자원강국 (1)
 
 
 
 “······가망 없어요.”
 선우를 꿈에서 끄집어낸 것은 고모의 목소리였다.
 밖에서 난 소리는 처음에 뭉개져서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선우는 몸을 움직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선우는 고모가 자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쓰러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오랫동안 간호하면서 소망이 사라져 슬퍼서 그러는 거라고.
 가망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선우는 고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고모를 슬프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들려온 말이 선우에게 혼선을 안겼다.
 “아프기만 하지 죽지는 않잖아요. 쟤는 계속 헛된 희망만 품게 할 거라고요.”
 ‘응······?’
 저게 무슨 말이지? 선우는 자기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분명히 고모의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고모.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선우의 가족을 돌봐 주던 고모였다.
 결혼을 하고 자기 가정도 돌봐야 될 사람이 친정의 일로 너무 무거운 짐을 졌다고 생각해서 주위에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그런데 지금 선우의 귀에 들리는 말은 너무나 이상했다.
 지금 고모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면서 선우는 한순간에 정신이 확 들어버렸다.
 이제 잠기운 같은 것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몸을 일으켜 문 가까이로 다가가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선우에게는 그럴 기력이 없었다.
 “애, 듣겠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것 없어.”
 고모부의 목소리였다.
 선우는 고모부가 고모를 말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환자를 너무 오랫동안 돌보느라 고모의 심신이 완전히 지쳐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선우는 고모부에게 희망을 걸었다.
 “쟤는 왜 안 죽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사고로 쓰러졌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죽었다고요. 죽기 전까지 돌봤다는 걸 증명해야 보상금을 대신 받을 수 있다는데, 쟤는 벌써 일 년 넘게 버티고 있잖아요. 일 년이 뭐야. 다음 주면 벌써 일 년 반이 돼 가요. 저렇게 오래 버틸 줄 알았으면 그냥 두고 올 걸 그랬어요. 그냥 쟤네 부모만 데리고 올 걸.”
 “그래도 지금까지 해 온 게 있는데 좀 더 버텨야지 어쩌겠어. 우리가 쟤를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보내고 나서 며칠 안에 쟤가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당신은 화병이 안 나겠어? 나라면 화병이 날 것 같다고.”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요. 살아 있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아무것도 못하고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데 뭘 하자고 목숨을 붙들고 있는 건지.”
 고모의 목소리는 점점 더 또렷하게 들렸다.
 “거의 다 됐어. 어제 못 봤어?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웠는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잖아. 눈을 봐도 이미 끝나 가고 있는 게 보여. 그러니까 당신도 조금만 더 참아.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하루에 한 번 방에 들어가서 튜브로 죽을 넘겨주는 것뿐인데.”
 고모부는 고모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소름 끼친다고요! 정 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당신이 하든가!”
 “그게 그렇게 싫었으면 진작에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그래도 당신이 하나 남은 혈육이라고 정을 가진 줄 알았지.”
 “정은 무슨 정이에요. 데리고 있으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쟤 엄마랑 아빠한테 나온 보상금도 다 쟤가 상속을 받았으니까 선우만 죽으면 끝인 건데.”
 “내 말 믿어. 한 달을 넘기지는 못할 거야. 지난주에도 두 사람이 죽었어. 이제 독가스 누출 현장에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선우까지 세 명밖에 안 된다고. 다른 두 사람은 평소에도 워낙 건강한 사람이었다지만 선우는 그런 것도 아니잖아.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온갖 병치레는 혼자 다 했었다며.”
 “내일은 그 사람들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나을 기미가 있는지 죽어 가는 건지. 그 사람들을 보면 선우가 어떻게 될지 대충 감이 잡히겠죠.”
 “만약에 저 녀석이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당신은 선우를 포기할 거야? 나는 약이 올라서 그렇게는 못하겠어.”
 “그래도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혼자서 몸도 못 가누잖아. 새벽까지 돌보다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갑자기 죽었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할 거야? 사고 현장에 있었다가 죽은 사람들 중에 돌연사 비율이 높아. 정부에서도 부검 없이 곧바로 화장하는 데 동의를 한다고 하면 곧바로 보상금을 준다고 하더라고.”
 “······.”
 “응?”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줄곧 강경하던 고모가 갑자기 겁을 내는 것 같았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선우의 눈이 점점 크게 떠졌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기만 했다면 거기에 맞는 적당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선우의 몸은 충격적인 소식에 놀란 그 상황에서도 제대로 반응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선우 오고는 제대로 쉬어 본 적도 없지? 내일 여행이라도 가지 않을래?”
 선우의 고모부가 말했다.
 “여행요?”
 “여기에 있으면 마음만 불편할 거야.”
 “확실히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힌 거예요?”
 선우의 고모는 마음을 정하기가 어렵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그렇게 하자고. 우리도 우리 인생 살아야지. 지금까지 우리, 선우 놈만 보고 다 포기하고 살아왔잖아.”
 그때부터 갑자기 말소리가 뚝 끊겼다.
 자기들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너무 커졌다는 것을 깨닫고 한 사람이 입단속을 시킨 듯했다.
 
 선우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한 사람들이 고모와 고모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보상금? 셋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몇 명이었는데. 관광버스 두 대에 가득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죽은 거라고? 세 사람을 빼고 전부 다?’
 선우는 갑자기 몸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열감을 느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물 묻힌 거즈라도 물고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도움을 청할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였다.
 선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엄청난 말을 들었으면서도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셋뿐이라는 사실에 가장 충격을 받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겨우 셋.’
 ‘대체 무슨 이유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모부가 한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선우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일 고모가 집을 나선 후에 고모부가 자기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할 수가 없었다.
 마치 수술을 앞두고 마취된 환자처럼 온몸의 감각이 둔했다.
 선우는 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그것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어차피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것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야 고모부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제발. 제발 움직여 줘!’
 선우는 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건가? 엄마도 아빠도 돌아가셨고 내 옆에는 아무도 안 남았는데. 어차피 의미 없는 인생인데. 그냥 이렇게 끝내는 게 좋으려나? 혼자서는 죽을 힘도 없는데 죽여 준다면. 차라리 잘된 건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을 피하려고 버둥거릴 필요도 없는 것 아닐까?’
 선우는 어느덧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은 시절도 있었다.
 고모의 말대로 일 년 반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 선우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남들과 다를 것 없는, 그렇다고 크게 불만 가질 것도 없는 시절을 보냈다.
 사고가 났을 때 선우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지금쯤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명은 군대에 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임신을 했던 같은 반 아이는 아마 지금쯤 아이를 낳아 엄마가 돼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을 일찍 한 애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다 남의 얘기였다.
 그 아이들의 얘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었을 텐데 선우의 얘기는 어느 날 닥친 사고로 갑자기 멈춰 버렸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족 여행 상품권을 받았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한 말은 한 마디였다.
 
 ‘당신네 회사에서 어쩐 일이래?’
 
 아니, 한 마디가 더 있었다.
 
 ‘그걸 왜 당신한테 준 거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한테?’
 
 장난식으로 한 말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회사에서 왜 그런 선물을 마련했는지, 왜 하필 선우의 가족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진 건지 그때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본사에만 600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는 곳이었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선우의 아버지가 선택된 거였는지.
 선우가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어른들은 남자들을 중심으로 술을 마시며 통제에 따르지 않았고 시간을 어겼다.
 거기에서 벌써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몇몇 사람들 때문에 일정이 자꾸만 틀어지자 몇 번의 고성이 오갔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중재로 겨우 큰 싸움만 막아 놓은 채로 이동을 계속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 이런 데에 와야 하는 거냐고 한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분위기를 잔뜩 흐려 놓았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전부 들어오셨으면 문을 닫아 주십시오.”
 가이드가 그렇게 말했을 때 몇몇 사람은 그 말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왜 문까지 닫아야 하는 겁니까?”
 그도 그럴 것이, 안은 환기 시설도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온도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불쾌지수가 거기에 비례해서 급상승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을 시간에 혼자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하던 선우조차도 그때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무도 문을 닫으려고 하지 않자 가이드가 직접 실행에 옮겼다.
 문을 닫았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깥쪽에서 문을 잠그기라도 한 것 같은 소리였다.
 가이드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지 재빨리 다시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고 덩치 좋은 어른들이 나서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 분노를 가이드에게 쏟았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이드를 구타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했다.
 만약 그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냄새를 내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면 가이드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
 
 연기를 본 사람들은 옷과 팔로 코를 틀어막으며 119에 구조 요청을 했다.
 곧 도착할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기에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의 아버지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선우와 선우의 어머니에게 주고는 얼굴을 가리라고 했다.
 물을 찾아다니다가 가이드를 응징하러 간 남자의 가방에서 물병을 찾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병을 꺼내 선우에게 건네준 옷에 물을 뿌렸다.
 물을 조금 남겨서 아내의 옷에도 뿌리려고 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선우를 살려야 한다고 눈빛으로 모의를 했다.
 사람들이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전부터 두 사람은 거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 일은 그냥 쉽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선우가 없었다면 그들 자신도 패닉에 빠졌겠지만 자기들이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자식이 있다는 것 때문에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긴장한 채 사태를 주시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점을 확인한 선우의 아버지는 거기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선우와 아내를 피신시켰다.
 그래 봐야 밀폐된 공간에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곧 사람들이 올 거야.”
 선우의 귀에는 그 말만 들렸다.
 “아빠. 숨을 못 쉬겠어. 숨을 쉬려고 하면 아파.”
 선우가 힘겹게 말을 하자 선우의 아버지는 선우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선우의 엄마도 함께.
 선우는 왠지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좋은 아들이 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는 죄송하다는 말을 할 기회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 가는 것이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자기가 가스 중독으로 쓰러지게 될 거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든든하게 선우를 안아 주던 아버지의 팔에서도 점점 힘이 빠져 가는 게 느껴졌다.
 다른 모든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아빠······.”
 선우는 아버지를 불렀다.
 “엄마.”
 소리를 내서 어머니도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정말로 나왔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왔다.
 문이 열렸고, 그들은 빛과 바람과 함께 들어왔다.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건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질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의식을 가지고 몸을 가누며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선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우를 가운데 두고 마지막까지 꼭 끌어안고 있었다.
 “곧 올 거야. 선우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기다려. 곧 올 거야.”
 마지막 힘을 내서 선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응급실에서 세 사람은 각각 흩어졌다.
 선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보지 못했다.
 선우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이 먼저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고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그때 고모는 그 옆에서 선우에게 남겨진 보상금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었다.
 ‘엄마. 아빠······.’
 선우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다가 흘러내렸다.
 선우는 눈물을 훔쳤다.
 점점 감정이 격해지자 선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그의 감정을 북받치게 했다.
 흐르는 콧물을 닦으려고 티슈를 찾아 고개를 돌리다가 선우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면서 선우는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분명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선우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주먹을 쥐어 보았다.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일 년이 넘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근육들이 말을 듣고 있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몸이 완벽히 반응했다.
 일 년 반만의 일이었다.
 “아!”
 선우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는 바람에 황급히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고모가 선우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뒤에서 고모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네.”
 “무슨 소리를 들은 건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죠.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예요.”
 고모가 선우의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어머. 얘 울었나 봐요.”
 “울어? 눈물샘은 아직 고장이 안 났나 보지?”
 고모부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티슈 좀 가져와 봐요.”
 “놔둬. 놔두면 마르겠지.”
 “눈물은 닦아 줘야죠.”
 “왜? 눈물 보니까 짠해? 어울리는 짓을 해.”
 “당신은 말을 해도 참!”
 “왜? 나만 나쁜 인간이야? 나만 개새끼냐? 조금 전까지 당신이 했던 말은?”
 고모부는 대놓고 비웃었다.
 “어차피 걔는 아무 감각도 없을 거야. 그냥 나와.”
 고모부의 말에 고모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방을 나갔다.
 
 선우는 이불 아래에서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점점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몸에서 시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몇 십 분이 지나면 고모가 튜브와 죽을 가지고 들어올 터였다.
 고모는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항상 선우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을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몸이 반응을 보인 지금 다시 고모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구역질을 일으킬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선우가 구역질을 한다면 고모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지 모른다.
 선우의 몸이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두 사람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될 거고, 보상금을 기다리며 견뎌 왔던 오랜 시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선우는 알 것 같았다.
 ‘지금 나가야 돼. 여기에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선우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귀를 바짝 기울인 채 조심히 일어섰다.
 
 선우는 일어나서 옷장을 열었다.
 한 벌뿐인 옷.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사 주신 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나선 여행길이 마지막 외출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돼 버리고 말았다.
 선우는 몸이 얼마나 버텨 줄지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다가는 고모부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창문을 열었다.
 고작 2층 높이였지만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막상 몸을 던졌을 때 선우의 몸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달렸다.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발바닥으로 지면을 밀어내는 것만 생각했다.
 몸이 한없이 가벼웠다.
 차가운 바람이 선우의 얼굴을 때렸고 몇 년 만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계속 달리는 게 무리라고 느껴졌을 때 선우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의 어느 곳도, 어떤 사람도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사고를 당하고 살아남았다는 두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 역시 선우처럼, 몇 분 전의 선우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일 터였다.
 그들의 보호자들이 선우에게 호의적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고모와 고모부가 걱정할 거라는 이유를 들면서 그들에게 선우를 돌려보낼 것만 같았다.
 선우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무작정 걸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천천히 걸었지만 그 걸음걸이까지 감출 수는 없다는 것을 선우는 알지 못했다.
 아직 선우의 그 걸음걸이를 기억하면서 그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
 
 “더 있다 가지 벌써 일어나려고 그러냐?”
 민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같이 앉아 있던 녀석들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오늘은 술이 안 받는다. 다음에 봐.”
 민기는 다시 앉을 생각은 없는 듯 가방을 매며 말했다.
 “하여간. 뭘 그렇게 튕겨. 한 번 모시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겨우 모셔 놔도 매번 이런 식으로 먼저 가 버리고.”
 “어쨌든 와서 얼굴은 보보여 줬잖아. 그랬으면 됐지. 감지덕지한 줄이나 알아라.”
 “그래라. 나와 줘서 고맙고. 나중에 또 연락할게.”
 민기의 팔을 툭툭 치면서 한 녀석이 말했다.
 “그래. 계산은 내가 하고 갈게.”
 “그럼 더 시킬 거야.”
 “됐어. 돼지 새끼들아.”
 민기는 계산을 하고 서둘러 호프에서 나왔다.
 계속 있다가는 일을 저지르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을 참기가 어려웠다.
 자신도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술자리에 참석하면 많이 마시지 않아도 취하게 된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민기는 오늘 그 자리에서 벌써 몇 번이나 테이블을 엎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별것 아닌 말이었고 민기를 겨냥한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녀석들은 아무렇지 않게 독가스 누출 사고 현장의 희생자들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사고로 희생당한 사람 중 한 명이 민기의 친구였다는 것을 그 녀석들이 알 리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언행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기는 그 얘기를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하지 않았다.
 자기 친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말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흥흥밋거리인 줄 알고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조르고 남의 불행을 안줏거리로 삼을 테니 말이다.
 민기의 생각은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기들 사는 것도 바쁜데 언제 그런 사람들까지 동정하겠냐는 거다.
 
 적당히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민기는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 있었다.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면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설 정도로 형편없이 취했다는 걸 안 것은 밖에 나온 후였다.
 그래도 용케 택시를 잡아타고 집 앞까지 돌아오는 데는 성공했다.
 “들어가면 나오기가 애매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내리면 안 될까요?”
 택시기사가 물었다.
 민기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택시비를 계산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민기는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흐린 형체를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제 친구랑 걸음걸이가 비슷했다.
 절대로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을 친구였다.
 “김선우!”
 민기는 제가 선우를 부르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선우일 리가 없었다.
 취하지만 않았으면 모르는 사람을 친구의 이름으로 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돌아보았다.
 걸음걸이만 보고 친구의 이름으로 외쳤을 때, 앞선 사람이 돌아볼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심지어 그 친구가 사고 현장에서 거의 반송장 상태로 발견되었다가 2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녀석이라고 한다면.
 그런데도 거기에 서 있는 녀석은 분명히 선우였다.
 민기는 저도 모르게 입이 크게 벌어졌다.
 “마, 말도, 말도 안 돼. 저 새끼! 선우야! 김선우!!”
 민기는 선우를 향해 달려갔다.
 취기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선우의 부모님 장례식장에 갔던 일까지 떠오르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
 
 “선우야, 이 자식!”
 민기는 창백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선우를 향해 달려가 붙잡았다.
 “선우야. 김선우. 너 김선우 맞지?!”
 민기는 선우의 흐릿한 눈빛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김선우. 너 괜찮은 거야?”
 “정······민기?”
 “김선우. 너 왜 이래? 괜찮아?”
 선우는 민기를 보자 온몸에서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듯 그 자리에 녹아내리듯 쓰러졌다.
 민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우를 둘러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몸조차 가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선우가 알 것 같지도 않고.
 “김선우. 집으로 데려다 줘? 고모님 댁으로?”
 민기는 자기가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아니. 거기는 안 돼.”
 선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거기는 안 돼.”
 선우는 그것으로 제가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이 그 말을 한 번 더 반복하고 의식을 잃었다.
 민기는 선우가 왜 그렇게 말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선우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선우를 데려다 침대에 눕히고 민기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사람이라고 봐주기 어려운 몰골이었다.
 진심으로 몇 년 간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선우에게서 나는 악취를 참아 내기도 어려웠으리라.
 선우가 목욕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은 욕조에 쑤셔 넣고 어떻게든 땟국물을 쭉쭉 빼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선우는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어?!”
 민기는 이제 선우의 대답을 기대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물었다.
 “내가 말해도 믿지도 못할걸?”
 선우가 말했다.
 “그래도 일단 말이나 해 봐.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민기가 말했다.
 선우는 담담하게 자기가 겪었던 일, 자기가 들었던 얘기를 민기에게 털어놓았다.
 민기는 선우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선우의 고모와 고모부는 민기도 잘 알고 있었다.
 좋은 평판을 얻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꾸몄을 거라고는 쉽게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선우는 민기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히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단 씻어. 그건 할 수 있지?”
 민기가 말했다.
 자기가 선우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 선우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는 척이라도 해 주지.
 “몰라. 손가락이 움직인 것도 거의 2년 만이야.”
 “씻다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으면 소리 질러. 건져 줄게.”
 “여기에서 혼자 살아?”
 선우가 물었다.
 “어.”
 “다행이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냥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어.”
 그랬는데 우연히 그게 여기였고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던 거냐고, 그걸 지금 나한테 믿으라는 거냐고 민기는 그렇게 말을 할 뻔했다.
 “어떻게 왔는데?”
 “뛰어서.”
 “뛰어서? 너, 지금까지 고모님 댁에 있었던 것 아니야?”
 “맞아.”
 선우는 피곤하게 이 자식이 뭘 이렇게 꼬치꼬치 묻나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기가 여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덴데 그 거리를 뛰어서 와? 혹시 그 사이에 이사했어?”
 “아닐걸.”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몸이 뜨거운데.”
 “네 말대로 씻어야겠다. 나한테서 냄새 심하게 나지?”
 자신의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느꼈는지 결국에는 선우도 제 몰골을 자각하고 물었다.
 “내가 사람이 좋아서 지금까지 입 꾹 닫고 있었는데 아주 미칠 지경이다.”
 민기가 말했다.
 “칫솔 남는 거 있어?”
 “응. 새 거 뜯어서 써. 거울 밑에 내놨으니까.”
 “고마워.”
 민기는, 손가락을 움직인 것도 거의 이 년 만이라는 녀석을 씻기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욕조에서 죽게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그래서 욕조에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있는 선우를 감시한답시고 욕실 문턱에 걸터앉아 이것저것 물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선우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장례식은 잘 치렀어.”
 민기가 말했다.
 “······.”
 “어머님, 아버님 진짜 좋은 분들이셨는데.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셨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괜히 슬퍼하지도 말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교만함이란 얼마나 대단한 거냐? 이 따위로 개고생을 하고 살면서도 살아남은 게 이긴 거라고 생각하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살아남은 게 이긴 거라고.”
 선우가 말했다.
 “······.”
 “사람들은 얼마나 왔었어?”
 “장례식장에?”
 “응.”
 “······많이.”
 “거의 텅 비었었나 보군.”
 “······.”
 “거짓말에는 영 재능이 없나 보다, 너.”
 “사실은······ 독가스 유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치료한 의료진들이 불분명한 이유로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민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정말로 그랬대? 아니면 그냥 헛소문이야?”
 선우가 놀라운 얘기라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가 가서 확인해 봤는데 헛소문은 아니었어.”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감염이라도 됐다는 건가?”
 “모르겠어. 그런데 일단 그런 소문이 도니까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오는 것도 꺼린 것 같고.”
 민기는 제 잘못도 아니면서 미안해했다.
 “치료한 의료진들이 교체되는 일들이 많았고 그렇게 사라진 의료진들이랑은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어.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 거야.”
 “무슨 이유로?”
 “거기까진 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어.”
 “어머님이 병원에 계시지?”
 “응. 이것도 다 엄마 통해서 알아본 거야.”
 “어머님도 모르신다는 거고?”
 “응.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는 하시는데······.”
 “혹시 어머님도 우리가 전염병에 걸린 거라고 생각하시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어. 엄마는······ 독가스가 단순히 사고로 누출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살포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인데. 나는 그 생각에는 동조 안 해.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로?”
 민기가 말했다.
 “어머님 생각은 어떤데?”
 “우리 엄마 말은 안 믿는 게 좋아. 어렸을 때부터 워낙 이상한 것들을 잘 믿었거든. 한동안은 외계인이랑 UFO에도 빠져 있었어.”
 “과학을 하시는 분이 특이하시긴 하네.”
 “지금도 내가 걱정하니까 거기에서 발을 뺀 것처럼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사실은 계속 믿고 있는지 모르지.”
 “그래도 말해 줘.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셔?”
 선우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다. 엄마는 항상 음모론자였어. 살아오는 내내.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할 너한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됐어. 그럼 내가 직접 어머님을 찾아가 뵈어야겠다.”
 “알았어. 내가 말할게. 이 개새끼야!”
 “······.”
 “구조가 왜 그렇게 늦어졌는지 엄마가 알아본 모양이야. 구급 차량이 현장에 일찍 도착하기만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대답을 기다리는 선우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구급 차량이 현장에 접근을 하려는데 몇 가지 장애 요소들이 있었대. 공사를 한다고 차량 통제까지 하고.”
 민기가 말했다.
 “우리가 올 때는 그런 게 없었는데?”
 “이상한 건 환자들을 싣고 나올 때는 그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져 있더라는 거야.”
 “그럼 그 사람들이 일부러 접근을 막으려고 그랬다는 거야? 구조 작업을 지연시키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게 다가 아니야. 교통사고도 났었대.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아서 교통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대.”
 “······.”
 “엄마는 그런 것들 때문에 독가스가 누군가에 의해서 살포된 거라고 생각해. 독가스가 누출된 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우리를 노리고?”
 선우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어머님은 다르게 생각하셔?”
 “우리 엄마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쯤 되면 내 친구들은 다 우리 엄마가 미친 것 같다고 하던데.”
 민기는 선우가 어떻게 생각할지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알았어. 이 얘기를 듣고도 네가 그런 말을 하는지 보자.”
 “걱정하지 말고 말해.”
 선우가 그렇게 말을 했지만 막상 민기에게서 대답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민기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더니 결심을 한 듯이 말했다.
 “화학 무기를 개발 중인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가스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돈지 알아보려고 실험을 한 거일 수도 있다는 거야.”
 “뭐?”
 “실제로 현장 주변에서 시약통을 본 것 같다고 한 사람이 있었대. 그게 정말이냐고 엄마가 너무 집요하게 추궁을 하니까 겁이 났는지 나중에는 잘못 안 것 같다고 하기는 했다지만.”
 “그럼 우리는 그냥 랜덤으로 정해진 피해자들이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어.”
 “······.”
 “김선우. 괜찮은 거냐?”
 민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 나 말고, 살아 있다는 사람. 그 사람들도 혹시 만나 봤어?”
 “나? 나는. 아니. 사람 간 감염이 된다는 말도 있고, 엄마가 나한테는 절대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지 말라고 당부를 했어.”
 “그럼 나랑 이렇게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런 식으로 옮지는 않을 거야.”
 “너도 그냥 그렇게 추측하는 것뿐이지?”
 “당연하지.”
 민기가 웃었다.
 “욕조, 막히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나가고 문 닫아. 때 밀게. 그리고 나. 배고프다.”
 “알았어.”
 민기는 문을 닫고 나와 식사를 준비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데리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러다가 갑자기 죽는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감정적으로 힘든 얘기를 듣는데도 얼굴에는 점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회복되는 사람의 모습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식탁이 얼추 다 차려졌을 때 선우가 나왔다.
 “욕실은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왔어.”
 “이제 사람 같다.”
 선우의 말에 민기는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선우와 다시금 만나게 됐을 때는 반가운 마음을 지독한 악취가 자꾸 방해하는 것 같았다.
 선우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에 한껏 감격할 수도, 안아 줄 수도 없었다.
 이제는 뽀송뽀송하니, 잘 씻겨 놓은 강아지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저렇게 저 녀석의 마음에 생겨난 상처도 씻겨 내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민기는 의자에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민기가 물었다.
 “몰라. 우선 내가 어머님을 만나 뵈어도 괜찮을까?”
 “모르겠다. 어른들이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잖아. 눈앞에 자기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문제의 해답이 어른거린다고 생각하면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솔직히 나는 네가 우리 엄마를 만나는 거 달갑지 않아. 단순히 좋지 않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민기의 솔직한 말에 선우가 웃었다.
 왠지 그 말이 200퍼센트 이상 이해가 되어 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밥 먹고 들어왔어. 어서 먹어라.”
 그렇게 말하고는 민기는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렸다.
 “어!”
 갑자기 민기가 소리를 질렀을 때 선우는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렸다.
 “야, 이거 네 얘기 같은데? 가스 누출 사고의 생존자가 납치당했대.”
 “납치?”
 “이 사람들, 너희 고모랑 고모부 아니야?”
 그러면서 민기는 화면을 선우 쪽으로 내밀었다.
 화면에는 실신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선우의 고모와 그 옆에서 눈을 가리고 서 있는 고모부가 보였다.
 리포터가 그 옆에서 선우의 납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쇼는 이제 적당히들 하지······.”
 선우가 역겹다는 투로 건조하게 말을 뱉어 버렸다.
 선우는 그냥 놔두면 이 일이 그대로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의 존재를 골칫덩어리로 여긴 사람들이었으니 알아서 사라져 준 것을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음 날 아침에 그 사건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선우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스가 나올 때 선우와 민기는 나란히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전 강의가 있기는 하지만 대충 빼먹어도 되는 강의라면서 민기는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우를 납치해 간 사람을 성토하는 선우의 고모부 얼굴을 화면으로 보았을 때 민기는 놀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란 말입니다. 도대체 그런 애를 누가 와서 데려간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탓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하루 종일 그 애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번갈아 가면서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딱 십 분 정도. 그 정도 잠깐 눈을 붙인 거라고요. 우리도 사람인데 몇날 며칠 동안 잠을 안 자고 어떻게 버팁니까. 그런데 잠깐 눈을 붙인 그 사이에 누군가 와서 그 애를 훔쳐 간 거라고요.]
 선우의 고모부가 소리를 질러 댔다.
 [훔쳐 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리포터가 물었다.
 [누가 훔쳐 간 거라고 해요? 납치한 거라고요. 그 애는 정말 불쌍한 앱니다. 이 방송을 보는 분 중에 혹시 우리 선우를 데려간 사람이 있다면 꼭 돌려주십시오. 그 애는 집에 돌아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부모를 잃고 제정신이 아니에요.]
 [김선우 군이 받아야 하는 급한 치료라도 있습니까? 범인이 이 방송을 보고 있다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김선우 군이 특이한 질병이라도 앓고 있습니까?]
 [그런 건······. 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먼지가 많은 곳에서는 숨을 잘 못 쉬어요.]
 [그렇습니까? 혹시 다른 것도 있습니까?]
 민기와 선우는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너. 천식 있어?”
 다음 뉴스로 넘어갔을 때 민기가 물었다.
 “먼지가 많은 곳에서 숨을 못 쉬었으면 내가 그 집에서 진작 죽었어야겠지. 내가 고모 집에 간 후로 내 방을 청소한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화면을 잘 보면 여기저기에 먼지가 십 센티씩은 쌓여 있는 게 보일 거다.”
 “그럼 천식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야?”
 “나를 훔쳐 간 거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 나를 돈으로 아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 나온 보상금도 나한테 상속이 돼 있으니까 내가 죽기만 하면 그게 전부 다 자기들한테 갈 거라고 생각해서 저러는 거라고.”
 선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너. 위험한 건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
 “만약에 누가 나를 발견해서 그 집으로 다시 데려가려고 하면 그때는 무슨 짓이든 해야지. 미친 것처럼 해서 정신병원으로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런데 어떤 병원에서 너를 받아 주려고 하겠어?”
 민기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응?”
 “말했잖아. 사람 간에 감염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났었다고.”
 “그래도 병원이면······. 환자가 치료를 요구하면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면 무슨 수로 입원을 할 건데? 병실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확인할 건데?”
 “······. 그런데 그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선우가 말했다.
 “내가 왜?”
 “고모부를 봐. 이미 제정신이 아니잖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면 너를 납치범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거야.”
 “네가 해명해 줄 거잖아.”
 “당연히 나는 네가 나를 도와줬다고 말하겠지만 고모부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서.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로 몰아가고 너를 납치범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을 거야. 자기들은 나를 위해서 인생을 희생한 사람들로 그려 갈 거고.”
 “허! 그럼 진짜 문제네.”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럼 어디로 가려고?”
 “그건 모르지. 그래도 어쨌거나. 여기에 있는 건 안 될 것 같아.”
 “아직 몸도······.”
 다 나은 게 아니잖아, 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철인 3종 경기에 바로 나간다고 해도 말릴 이유가 없을 것처럼 강해 보였다.
 “너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민기가 물었다.
 “왜?”
 정작 선우 본인은 그런 변화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었기에 멀뚱하게 물었다.
 “너 지금 매 순간 달라지고 있어. 매 초 다른 사람이 돼 가고 있는 것 같아.”
 민기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다 죽어 가는 환자 같았는데, 이제는 건강한 것에도 수치를 매길 수 있다면 건강함의 극치 곱하기 천만 정도 되는 것 같아.”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체력 측정 같은 걸 해 볼까?”
 “내가 그런 걸 왜 해?”
 “네 몸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알아보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하면 되는데? 방 백 바퀴를 몇 분 동안에 도는지 볼 거냐?”
 “아니면 간단하게 윗몸일으키기 같은 거라도. 매달리기를 하거나.”
 “그게······. 꼭 필요한 건가?”
 “네가 달라졌다는 걸 확인할 수는 있겠지.”
 “안 될 건 없는데. 그럼 당장 시작해?”
 “그럼 윗몸일으키기 먼저 해 봐. 그다음에는 팔굽혀펴기를 하자.”
 “좋아.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나는 일 년 반 만에 일어난 사람이니까.”
 “내가 너 훈련시켜서 국가대표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긴장할 것 없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괜히 무리하지도 말고. 알았어?”
 “알아. 무슨 말인지.”
 그러면서도 괜히 긴장이 되기는 했다.
 가볍게 훌훌 뛰어올라 보기도 했다.
 민기의 말대로 확실히 몸이 가벼워지기는 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가 잘 먹었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변화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가볍게 윗몸을 일으키던 선우는 곧 자신이 체력의 한계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슬슬 속도를 냈다.
 민기는 차분히 카운트를 하다가 나중에는 피차 그게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췄다.
 “계속······할까?”
 선우가 물었다.
 “힘들면 그만하고.”
 “그게. 별로 힘든 것 같지도 않다.”
 “그럼 계속 해보든가.”
 선우는 민기의 말을 따랐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 때, 이걸 계속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지쳐? 속도도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민기가 물었다.
 “그러게.”
 선우 역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건 그만하고.”
 “팔굽혀펴기 해?”
 “뭐. 그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렇긴 해.”
 둘은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느껴?”
 민기가 물었다.
 “모르겠어. 몸이 날아다닐 것처럼 가볍게 느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이건······.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때 체육 시간에 이 정도로 잘하진 못했는데, 몇 개만 하면 바로 몸이 꼬였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 훨씬 가벼워.”
 “너 걸음걸이도 굉장히 가벼워 보여. 몸을 누르고 있는 쓸데없는 무게 같은 게 안 느껴져.”
 “뛰어 보고 싶기는 해.”
 “나가는 게 괜찮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될 텐데.”
 “내가 이 상태가 됐으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기도 해. 일단 너는 나하고 멀리 떨어져서 있어. 만약에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내가 TV에 나온 실종자라고 생각하고 신고한다고 해도 너하고 관련됐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하긴. 너를 보고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 혼자 비틀거리는 걸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가 재워 줬다고 하면 되겠지. 우린 친군데. 안 그래?”
 선우가 말했다.
 일부러라도 안심하고 싶은 것처럼.
 “일단은 확인해 보자.”
 몇 겹으로 가리고 모자만 세 개를 겹쳐 쓰고도 모자라다는 듯이 민기는 고글까지 억지로 씌워 주었다.
 “안전한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알았어.”
 “너 괜히 사람들 시선을 끌지는 마. 우리끼리 있는 곳에서만 전력으로 질주하는 거야. 알았어?”
 “응.”
 “몸에 아직 다른 이상은 없어?”
 “이상은 모르겠고. 그냥 몸속이 엄청 더워. 칼날이 혈관을 따라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한 번씩 들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선우가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칼날이 훑고 돌아다니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겠냐?”
 “그리고 갑자기 확 뜨거워지기도 하고 그래. 안에서 누가 토치로 내 혈관 안에 불꽃을 일으키는 것 같아.”
 “끔찍하다. 당장 병원에 가야 되는 것 아닌가? 우선 엄마한테 가 볼까? 이 정도로 가리면 사람들이 못 알아볼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딱히 통증이 느껴지는 건 아니야. 그냥 더운 정돈데. 덥다는 게 막연히 피부에서 열기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혈관 속에서 끓는 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몸에 부담이 되는 것 같으면 곧바로 멈춰. 알았어?”
 “알았어.”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선우의 말대로 민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선우는 민기가 가는 대로 조용히 따라가기만 했다.
 누가 보더라도 일행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꼬불꼬불한 길을 거침없이 걷는 민기에게 선우가 다가가 물었다.
 “원래 이렇게 멀어? 놀이터가 있던데 왜 그건 그냥 지나쳐?”
 “거기에는 사람이 많아. 운동장도 작고. 올라가다 보면 제법 넓은 데가 나오거든. 사람도 별로 없고. 왜? 힘들어?”
 “아니. 놀이터에 가자고 해 놓고 그냥 지나치니까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한 생각? 어떤 거?”
 “혹시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네가 고모부한테 전화해서 나를 넘기는 대가로 돈을 받기로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뭐?”
 민기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농담이 통하지 않을 녀석한테 농담한 것을 후회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민기는 다시 선우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 떨어져서 걸어오라고. 너는 걱정할 게 없겠지. 고모부 집으로 돌아가도 이제 그런 몸이 됐으니까 얼마든지 도망쳐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씨발, 겁나 죽겠다고. 정말로 잡혀 들어가는 건 아닌가 해서.”
 “알았어.”
 선우는 아예 뒤로 돌아서서 몇 미터를 재빠르게 달려갔다.
 그렇게 또 멀찌감치 떨어져서 놀이터까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가서는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몸을 풀었다.
 놀이터는 민기가 말했던 대로였다.
 어지간한 것들은 갖춰져 있어서 선우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달리고 매달렸다.
 지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민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표정은 선우의 얼굴에도 드리워졌다.
 “나, 왜 아무렇지도 않지? 힘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의미가 없어서 이러는 것뿐이지, 계속 매달려 있으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너. 철봉을 뽑을 수도 있겠다?”
 민기가 물었다.
 “그럼 위험하지. 그랬다가 사람들이 철봉에 매달리면 크게 다칠 텐데?”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선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철봉을 힘껏 밀었다.
 철봉이 엿가락처럼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확연히 구부러졌다.
 “뭔가를 손안에 쥐고 바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왜 자꾸 그런 걸 시켜?”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선우는 적당하게 바술 만한 것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 같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산악용 나이프를 찾아내서 손아귀 힘으로 일그러뜨렸다.
 민기는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 몇 개로 칼날을 껌처럼 말아 놓은 선우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
 
 “일단은 집으로 가자. 그리고 엄마를 만나 보자고.”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섰다.
 “잠깐. 가기 전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가스가 누출됐다고 했을 때 그 가스에서 열기가 느껴졌어? 화재 현장에서 뜨거워진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이 느껴졌냐고.”
 민기가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 호흡하는 게 고통스러웠다는 건 기억나. 숨을 쉬기는 해야 되는데 그 가스를 들이마시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저절로 숨을 차단하게 됐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허둥대다가 나도 모르게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아.”
 “다른 사람들 반응은 어땠어?”
 “숨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다가 피를 토했어. 억지로 물속에 잠긴 거랑 똑같은 상황이었어. 물을 먹어도 안 되고 숨을 안 쉴 수도 없는 상황.”
 다시 그 일이 떠오르자 선우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살아남은 사람이 두 명이 더 있어. 알지?”
 민기가 말했다.
 “응.”
 “그 사람들을 만나 보는 게 좋겠다.”
 “나도 그러고 싶어.”
 “네가 만나는 건 위험할 거야. 내가 만나 볼게. 아마 엄마가 너를 돌봐 줄 수 있을 거야. 네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겠지만 네가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 줄 수는 있을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지.”
 “그래.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고.”
 “좋아.”
 “너. 힘을 조절할 수는 있는 거지? 네 힘이 얼마나 세진 줄 모르고 내 손을 잡았다가 내 손을 으스러뜨리는 일 같은 건 안 일어나겠지?”
 “해 볼까?”
 “됐어.”
 민기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선우가 제 두 손으로 서로 깍지를 꼈다.
 “힘 조절은 되는 것 같아.”
 “어쩌다가 그런 일들이 생긴 거지? 사고 현장에서 마신 이상한 가스가 네 체질을 완전히 바꿔 버린 건가?”
 “그런데 그동안은 왜 잠잠했던 거지?”
 “계기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게 계기가 됐다고?”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으니까.”
 민기가 말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는 있지만 민기 역시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
 
 「정형외과 과장 이연주」
 
 선우와 민기는 그 문패가 달린 문을 등지고 걷고 있었다.
 “어디 가셨지?”
 혼잣말을 하던 민기가 간호사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무작정 인사를 했다.
 “엄마를 보러 왔는데요. 왜 문이 잠겨 있죠?”
 “수술 들어가셨어요. 나오실 시간 거의 됐으니까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오시면 아드님이 와서 기다린다고 말씀 드릴 테니까요.”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휴게실에 가서 어디에 앉을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민기의 어머니 이연주 과장이 들어왔다.
 “어. 아들. 무슨 일이야?”
 시원한 목소리로 연주가 물었다.
 “시간 좀 있어요, 엄마?”
 “얼마나? 많이는 안 되는데. 왜? 친구 인사시켜 주려고?”
 연주는 예리하게 보이는 눈을 빛내면서 그 눈에 웃음을 담은 채 선우를 바라보았다.
 “반가워요, 만나서. 민기 엄마예요.”
 “네, 안녕하세요.”
 선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같이 커피 마시고 들어가면 되겠다. 내가 쏠게. 그런데 이름이?”
 선우를 바라보며 연주가 물었다.
 선우는 민기를 바라보았다.
 “그게 엄마······. 얘가 선우야.”
 “뭐?”
 “선우라고. 내 친구 선우. 엄마도 알잖아.”
 “그렇지. 내가 다시 물어본 건, 그 선우라는 아이 소식을 방금 인터넷으로 봐서 그러는 건데.”
 “그래. 알아. 엄마가 뭘 봤을지. 그건 다 거짓말이야.”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거기에는 선우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고 나왔거든. 그런데도 부검도 하지 않고 화장을 해서 장례를 치를 거라더구나.”
 “뭐라고?”
 민기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치듯 물었다.
 놀란 사람은 민기뿐만이 아니었다.
 선우는 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오늘은 일찍 들어갈 수 있는데 집에 가 있을래?”
 “그럴게.”
 “너. 조심해야겠다. 그렇지?”
 연주가 말했다.
 “죽은 애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그건 안 되는 일이거든?”
 “알았어.”
 “그래. 하긴. 뭔가 이상했어. 실종됐다는 애를 갑자기 찾은 것도 그런데, 그 애가 또 갑자기 죽었다니. 그런 애를 바로 화장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고.”
 “······.”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살아 있잖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연주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례식이 언제래요? 어디에서 한대요?”
 선우가 물었다.
 “왜? 네 장례식장에 가 보려고? 그것도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가 봐야죠. 고모랑 고모부는 저희 가족 보상금을 가로채려고 그러는 거라고요. 그 알량한 보상금을 말이에요.”
 선우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알겠어, 어떤 심정인지. 그래도 내 생각에는 네가 거기에 무작정 들이닥치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여기저기 알아볼 테니까 너희들끼리 위험하게 다니지는 말아라. 알았니?”
 “네.”
 선우는 순순히 대답했다.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래. 그럼 먼저 가 있어. 늦지 않게 갈 테니까.”
 “엄마. 그런데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것도 있어.”
 민기가 그렇게 말을 하고 조용히 연주를 불렀다.
 “왜 사람을 앞에 놔두고 속닥거려?”
 연주가 물었다.
 “선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 때문이지.”
 “내가 뭘?”
 “엄마가 이상한 반응을 보일까 봐 이러는 거라고.”
 “내가 뭘?”
 “선우는······. 엄마, 내가 어제 선우를 봤는데 그 전까지 일 년이 훨씬 넘도록 침대에 누워만 있었나 봐.”
 “그러다가 어제 갑자기 일어난 거라고?”
 연주의 눈이 빛났다.
 “응. 심지어 달려왔어. 그 거리가 엄마, 30킬로미터가 넘을 거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자기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러고는 쓰러졌어.”
 민기는 말을 하고는 연주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내가 부축해서 집까지 겨우 데려갔고. 그런데 그 이후부터가 이상했는데. 아니. 이상한 일은 그 이전부터였어. 어쨌든 선우가 막 달라지는 거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애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 달리는 것도 빠르고 지치기는커녕 괴력이 생겼어.”
 민기가 말을 이어 나갔다.
 “흠. 재밌는 얘기네. 그런데 너하고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는 대개 내가 말하는 쪽이고 네가 듣는 쪽이었던 것 같은데.”
 “들어 봐, 엄마. 선우가 갑자기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건 고모랑 고모부가 선우를 죽이려고 해서 그런 거였어.”
 “민기야. 그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였어. 혹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얘기하려다가 네가 화낼까 봐 잠자코 있었어.”
 “아무튼 지금은 그렇게 됐어. 그래서 우리는 선우가 어떤 상태인 건지 자세히 알고 싶어. 혹시 정밀 검사 같은 걸 받아 볼 수 있을까?”
 “여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거잖아. 맞지?”
 “응. 우리 생각에는 선우가 사고를 당했던 게 이거랑 연관된 것 같거든. 만약에 그 사고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선우를 계속 쫓고 있는 중이라면.”
 “위험해지겠지.”
 연주가 말했다.
 “엄마가 선우를 지켜 줄 수 있는 거지?”
 “내가 무슨 수로?”
 연주는 정직하게 말했다.
 가끔 어린애들은 어른들을 너무 믿어서 탈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 정도 컸으면 더 이상 어리다고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어른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민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다른 어른들이 싸 놓은 똥을 내가 치워야 되는 건데?”
 “엄마는 선우를 돕고 싶어. 엄마 눈을 보면 다 안다고. 우리가 어디로 가면 될지 알려 줘. 다른 사람들한테 정보가 샐 염려 없이 선우가 검사받을 수 있는 병원이 어딘지.”
 “선우가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확신하는 거니?”
 “아니라도 어쩔 수 없어.”
 “하긴. 너도 많이 각오한 것 같긴 하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 할 애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이건 진짜 중요한 일이야, 엄마. 선우는, 선우는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고. 선우가 죽은 줄 알았을 때 내가 어땠는지 알잖아.”
 민기는 절박하게 말했다.
 “알았어. 꼭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전화한다고 어지간히 구시렁거리겠다.”
 연주가 전화를 거는 동안 선우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민기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 볼 수 있지? 나 좀 빌려줄래?”
 갑자기 멈춰 선 선우가 말했다.
 “그걸, 보려고?”
 “봐야겠어.”
 민기가 연주를 바라보자 연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라면 알려 주라는 뜻이었다.
 선우는 민기의 스마트폰으로 고모부의 얼굴을 보았다.
 고모부의 옆에는 가증스런 얼굴로 통곡을 하고 있는 고모의 모습도 보였다.
 [왜 우리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요. 오빠랑 새언니를 잃고 마지막 남은 애였어요. 선우는 우리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고요. 그런데 그런 선우까지 실종되더니 주검이 돼서 돌아왔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요. 선우 없이요. 선우 없이 어떡해요! 지금까지 모든 삶을 선우한테만 맞춰 왔어요. 선우를 돌보느라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고요!]
 ‘······.’
 [선우를 죽인 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반드시 잡아서 선우를 위해서 복수해 줄 거란 말입니다!]
 선우는 고모부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하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한 사람이 홀랑 화장을 해 버렸다는 말인가?
 어차피 선우의 시신도 아니었겠지만.
 “그런데 대체 누구 시신을 불태운 거지?”
 민기가 연주에게 물었다.
 “정부에서는 생존자들이 빨리 죽기를 바랄 텐데, 시신 하나 구해다 주는 게 어려웠겠니? 무슨 일만 생겨도 사람들이 가스 누출 참사랑 연결시키면서 정부의 정책 실패를 얘기하는데.”
 “엄마. 엄마랑 내가 선우 장례식장에 가는 건 상관없지?”
 “상관없지.”
 “선우가 그 사람들 고소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지. 그 사람들이 선우 시신이 아닐 걸 알고도 보상금을 타려고 했다면.”
 “선우를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들이야.”
 “그러면 살인 예비로 고소할 수도 있고. 도와줘?”
 “네. 도와주세요.”
 선우가 말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니? 끝까지 가 볼 생각?”
 “무서울 것도, 잃을 것도 없잖아요. 그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한테까지 나쁜 짓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런 생각까지 들어요.”
 “네 생각이 그렇다면 도와줄게.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거야.”
 “왜요?”
 “선우 너는 네가 사라진 후부터의 행적을 설명해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잖아. 이럴 경우에는 보건 당국이 너를 격리시킬 수도 있어.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일지는 너도 예상이 되겠지?”
 “사람들한테 감염시킬 수 있다고요?”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복수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야. 영리하게 굴어야 한다는 뜻이지.”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네 장례식장에 네가 나타날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줄 수는 있을 거야. 작게 인터넷 방송을 하는 사람을 알아. 그 사람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할게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발아래에 거치적거리는 것부터 하나씩 치워 가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면 돼. 알았니?”
 “좋아. 그럼 우리 모두 각자 할 일을 하자. 강민기. 너는 휴학할 생각 아니면 강의 빼먹지 말고.”
 “네. 알았어요.”
 “이럴 때만 존댓말이지. 집으로들 가 있어. 어차피 오늘 당장 검사를 하진 못할 테니까.”
 연주의 말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민기는 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참다못한 선우가 자기는 괜찮다면서 버럭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거봐, 안 괜찮은 거야.”
 “대체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짐승 같은 고모랑 고모분데도 자꾸만 화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그 사람들이랑 잘 지냈던 때의 일이 떠올라.”
 “자연스러운 일이야.”
 “너는 내가 어떻게 했음 좋겠어?”
 선우가 물었다.
 “네 귀로 다 들었잖아. 너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라면서. 그러면 가만히 놔두면 안 되는 거지. 처벌받게 하는 게 맞는 거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걸까. 나는 정말, 나는 정말 그냥 평범하기만 한 애였잖아.”
 선우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모르겠다. 어쨌든 잘될 거야. 무기 없이 떠밀려 나간 건 아니잖아.”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네가 거기 사는 줄도 몰랐는데 어쩌다가 네가 사는 곳으로 달려가게 된 걸까?”
 “그러게. 사실 내가 거기에 사는 건 엄마 빼고 아무도 모르거든. 엄마가 너한테 텔레파시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셨나 보다. 엄청 감사한 일이네.”
 웃음기 없는 선우의 말에 민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꼭 자기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지.]
 연주가 연락을 했을 때 지석이 한 말이었다.
 “나도 자기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우리 민기한테도 그렇게 말했지. 분명히 그렇게 말할 거라고 말이야.”
 [좋아.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그게 말이지, 나도 잘 몰라.”
 [이연주 과장님. 꽤나 심심하신가 봅니다. 놀 사람이 없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런데 왜 나한테 전화한 거야?]
 “네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영상기사니까.”
 [그 말이 맞아. 나는 그냥 영상기사야. 촬영하고 스캔하는 게 다잖아.]
 “아니라는 거 알아. 영상이 보인다고 모든 사람이 전부 문제를 알아내는 건 아니라는 거. 우리 둘 다 알잖아. 지석 씨 같은 실력자가 필요해.”
 [이 과장, 혹시 어디 아파? 다른 사람 모르게 이 과장 문제를 알아보려고 그러는 거야?]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지석이 물었다.
 “아니. 하지만 거의 거기에 버금갈 정도로 중대한 문제야.”
 [누구 일인데 그래?]
 “내 아들의 유일한 친구. 다시는 못 만날 거라 포기하고 슬픔을 견디며 지내왔다고. 민기 말이야. 중학교 1학년 때 제 아빠 죽고 나 말고는 누구하고도 얘기하지 않던 애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처음 사귄 친구야. 그런데 그 애가 사고를 당해서 떠나 버렸어. 아니지, 떠나 버렸었어.”
 [떠나 버렸다는 게 죽었다는 의미야?]
 “아니. 격리라고 해야 할지, 감금이라고 해야 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독가스 누출 사고 현장에 선우라는 애가 자기 부모랑 같이 있었어. 그 애 부모는 며칠 못 견디고 바로 죽었고, 선우는 오랫동안 거의 식물인간처럼 지냈대. 그 애가 민기 친구야.”
 [또 그 독가스 누출 사고 얘기야?]
 “그래, 또 그 얘기야.”
 [왜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왜냐하면, 그래야 내 아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아이가 제대로 살아 돌아와야 내 아들이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살아 있는데도 끊겨 버린 삶이라는 걸 알아?”
 [······.]
 “됐다. 다른 데 알아볼 거야. 끊어.”
 연주가 말했다.
 [기다려. 이사 간 건 아니지?]
 “······그건 왜 물어?”
 [집으로 갈게. 집 앞으로 나와. 거기에서 얘기하자. 술 냄새가 나는지 일단 그것부터 확인해야겠어.]
 “······도와주겠다는 거야?”
 [음모가 있다고 믿고 있잖아.]
 “지석 씨는 안 믿잖아.”
 [그래도. 너 혼자 음모를 파헤치기에는 머리가 좀 딸리지 않아?]
 “용량의 한계를 느끼고 있기는 했는데.”
 지석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연주는 그를 믿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지석은 무척이나 심란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 일 없으면 낮잠이나 자라고 쏘아붙이고 연주의 일에서 관심을 끊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이곳까지 와 버린 후였다.
 연주가 나오는 걸 보고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지석을 보고 연주도 그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서서 얘기를 시작했다.
 “뉴스에도 나왔던 애야.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그래. 생존자가 셋밖에 없는 데다 민기 친구라고 할 만한 애는 걔밖에 없겠더라.”
 “고모부가 죽이려고 했대. 움직이지도 못하는 애를.”
 “움직이지 못했다면 어떻게 도망친 건데?”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래서 지석 씨 도움이 필요한 거고.”
 “가스에 노출되면서 뭔가 변화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그걸 찾아봐 줘.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얘기는 꺼내지도 못해. 내가 얘기를 백 분의 일도 진행하기 전에 귀를 닫아버릴걸?”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지석의 말에 연주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미 늦었어.”
 “그래서 나를 택한 거지? 내가 또 이 과장 하자는 대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서.”
 “당연하지. 그럼 다른 이유가 있겠어? 애들 데리러 가자. 바로 해 버릴 수 있지?”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할 게 없지.”
 “좋아.”
 지석은 당최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연주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 올랐다.
 “음모에 대해서 더 알아낸 건 없어? 가스 누출 사고에 대해서.”
 연주가 안전벨트를 하는 것을 보고 지석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일단 선우 고모랑 고모부는 조카 몫으로 나온 보상금을 노리고 있기는 하지만, 사고 자체랑은 관련이 없어. 그 사람들이 사고를 직접 일으켰을 가능성은 없어.”
 “그렇겠지. 얘기를 대충 들어 봐도 그렇게 큰 스케일의 사건을 일으킬 만한 깜냥이 안 되는 것 같더구만. 만약에 돈을 노리고 한 짓이었으면 딱 선우라는 애네 가족만 대상으로 해서 교통사고를 내거나 불을 질렀거나 했겠지. 일부러 이렇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일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거잖아.”
 지석이 말했다.
 “선우가 실종되고 나서 선우네 고모랑 고모부가 조카를 다시 찾았다고 했어. 그동안 선우는 우리 민기랑 같이 있었는데 말이야. 두 녀석은 선우가 실종됐다는, 정확히는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리고 선우가 죽었다는 소식까지 같이 들은 거야. 민기가 지내는 집에서. 주검으로 발견되기는 했지만 선우가 맞다고 말이지. 고모랑 고모부란 사람은 서둘러서 조카 장례식을 마치려는 생각인 것 같더라고. 부검도 원하지 않는 거야. 아무도 원하지 않았을 거야.”
 “빨리 끝내 버리고 싶었겠지. 많은 사람이 한뜻으로 말이야.”
 “이런 말 듣기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증명해 줄 사람들을 만났었어. 그 뒤에 말을 바꾸기는 했지만.”
 연주가 말했다.
 “뭐래? 정말 화학무기를 만들려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지석이 물었다.
 지석도 그 일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주만큼이나 큰 의혹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연주가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지석은 자신이 연주의 호기심을 결코 잠재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주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민기의 친구까지 관련되었다고 하니 앞으로 연주를 막을 방법은 더더욱더 없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그런 것 같아.”
 연주가 대답했다.
 “선우라는 애는 어떻게 된 거야?”
 “평균을 훨씬 넘어서는 신체 반응을 나타내고 있어. 맥박도 심장 박동도 정상이 아니야. 그런 애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런데도 살아 있다는 거지?”
 “심지어 굉장해. 당장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다고 해도 금메달을 휩쓸 것 같아. 다른 선수들이랑 비교도 안 되는 실력 차이로.”
 “그때 누출됐던 게 생화학 가스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사고 주변에 일찍이 폐쇄된 생물학 연구소랑 생산 공장이 있었다는 거 알았어?”
 지석이 물었다.
 웬만해서는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말이었다.
 자기가 한 말이 연주의 호기심에 불을 댕길 거라는 것을 지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가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지석은 차라리 진실에 빨리 도달하게 해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연주는 놀란 얼굴로 지석을 바라보았다.
 그런 얘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냐는 원망 섞인 표정이었다.
 “오래전에 폐쇄된 거라 몰랐을 거야.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한테 우연히 들었어. 거기에 그런 시설들이 있었다고.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 이 과장한테서 그 얘기를 들으니 생각이 나는데.”
 지석은 연주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재빨리 말을 끝냈다.
 “만약에 어떤 바이러스나 세균이 퍼진 거고, 그 잠복 기간이 아주 길었던 거라면?”
 연주는 금방 생각을 이어 갔다.
 “선우라는 녀석 몸이 오랫동안 그것과 맞서 싸우다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건지도 모르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 볼 방법은 없을까?”
 “나도 그럴 생각은 했었어. 그런데 다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었더라고. 아니면 이 나라를 떠났거나.”
 “그래도 죽지는 않은 거네. 어떻게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알아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았더라고.”
 지석은 자기가 하는 말이 연주를 얼마나 자극할지 알면서도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거의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는 남의 사정에는 관심도 갖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지석을 바라보았다.
 “그 일에 왜 관심을 가졌어? 그 사고에 뭔가 음모가 있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을 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더니.”
 “그냥 우연히. 그 근처에서 살았다는 사람을 알게 됐고 그 주변에 생물학 연구소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까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겠다 싶더라고.”
 “단순히 그런 것 때문에?”
 “그럼? 언젠가 이 과장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내가 정보를 모으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건가 보지?”
 “생화학 가스라면, 많은 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여기가 왜 이렇게 막히지? 이 길이 막히는 길이 아닌데. 어디서 사고가 났나?”
 연주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말했다.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이 유독 불길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우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뛰었다.
 등에 업힌 민기의 입에서는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는 생각에 선우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내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멍청하게!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죽지 마, 강민기!”
 선우가 고함을 쳤다.
 “나는 대충 숨겨 놓고 너 혼자 도망쳐. 나를 업고 뭘 어쩌려고 그래. 이러다가 잡히면 너는 완전히 끝나는 거야. 너를 쫓아오는 사람들, 못 봤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민기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상관 안 해도 돼!”
 선우는 입을 다물고 등에 업힌 민기의 몸을 한 번 추어올렸다.
 만약에 민기가 잘못된다면 선우는 영원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런 짓을 했던 건지. 절대로.
 
 ***
 
 TV에서는 계속해서 고모와 고모부의 얼굴이 나왔다.
 사람들의 관심이 왜 그렇게 거기에 많이 쏠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카메라를 보고 거짓 눈물을 쏟는 두 사람을 보면서 선우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앉았다가 TV를 켰을 때 얼굴에 화장까지 한 고모부가 선우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 비비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다듬어서 새로 그리고 입술까지 붉게 칠한 고모부의 역겨운 모습을 보면서 선우는 크게 동요했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처조카를 위해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희생을 하면서 정성을 다해 돌봐 왔다며 사람들의 동정을 받더니, 고모부는 거기에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조카가 벌써부터 그립다며 눈물을 뿌려 대는데 선우는 당장이라도 면상에 주먹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한 말을 다 들었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생각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소름이 돋았다.
 민기는 참으라고 했지만 선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놀이터 근처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던 걸 기억해 내고 선우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모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기는 선우를 잡지도 못하고 멀리에서 그런 선우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선우가 전화를 하자 고모부는 단번에 선우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고모부가 받은 충격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선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누워 있었고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명확한 발음으로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고모부는 이게 무슨 장난인가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선우에게 지금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 거냐고,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물었다가, 주위 사람을 의식했는지 이상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처조카를 잃고 상심한 사람한테 이런 전화를 하는 거냐면서 울먹였다.
 선우는 고모부가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모부가 우리 엄마랑 아빠도 죽인 것 아니에요? 보상금 때문에? 아니에요? 나를 죽이려고 한 거 다 알아요. 들었다고요!”
 한참 소리를 질러 대다가 반응이 없어서 보니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할 말을 하고 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 선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힘없이 풀 죽은 모습으로 천천히 민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는데 멀리 민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혼자 있어야 할 민기를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민기의 친구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민기가 그들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다가 제압당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민기를 억지로 끌고 가려던 남자들은 계속해서 저항하는 민기를 발로 걷어찼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민기의 배로 남자들의 거친 발길질은 계속해서 날아들었고, 한 남자는 민기의 얼굴을 거침없이 짓이겼다.
 “강민기!”
 선우가 고성을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선우를 향했다.
 “도망쳐. 도망쳐, 김선우! 어디로든 가, 빨리!”
 민기가 소리를 질렀지만 선우에게는 그딴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민기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은 선우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려왔다.
 그러다가 자신들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잠시 움찔하는 것 같더니 다시금 선우를 향해 내달렸다.
 선우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두 사람을 향해 달렸다.
 피하기는커녕 정확히 두 사람의 중간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선우가 괜한 공명심으로 친구를 구하겠답시고 스스로 굴복하며 들어온 거라고 생각했는지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이 예상한 것과 달랐다.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날아온 선우의 두 주먹이 한 사람의 코뼈를 주저앉히고 다른 남자의 얼굴뼈는 부순 채 안구를 짓이겨 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얼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고서 비명을 질렀다.
 남은 남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놀란 모습이었지만 그런 경험이 낯설지 않았는지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선우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주먹이 날아들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먼저 주먹을 날리자 선우는 가볍게 주먹을 피하고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선우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혔다.
 선우는 아직 비틀거리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지독한 비명 소리가 나왔지만 결국에는 그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거친 숨이 목구멍 속으로 급하게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선우는 민기를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을 더 보내 주십시오. 지금 김선우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아뇨. 움직이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강해졌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선우의 뒤에서 한쪽 눈을 잃은 남자가 스마트폰에 대고 소리치는 게 보였다.
 선우는 그 남자를 노려보다가 민기에게 다가갔다.
 민기의 꼴은 처참했다.
 인정사정도 봐주지 않고 남자들이 민기의 얼굴을 밟고서 짓이겼던 까닭에 얼굴이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들은 가까스로 일어나 선우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죽을 정도로 맞은 것은 아니니 곧 쫓아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패거리들에게 도움까지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업혀, 강민기.”
 선우가 민기에게 등을 보이면서 말했다.
 “어쩌려고!”
 민기는 제 앞에 드러난 선우의 등에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선우는 민기의 손을 잡아다가 억지로 제 어깨에 걸치고 자루를 들 듯이 민기를 업었다.
 “너를 노린 사람들이야. 너를 잡아갈 거라고. 그러면 너는 죽어!”
 민기가 소리쳤다.
 “그러라지.”
 선우는 민기를 업은 채로 뛰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뛰었다.
 등에 업힌 민기의 입에서는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는 생각에 선우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내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멍청하게!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죽지 마, 강민기!”
 선우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대충 숨겨 놓고 너 혼자 도망쳐. 나를 업고 뭘 어쩌려고 그래. 이러다가 잡히면 너는 완전히 끝나는 거야. 너를 쫓아오는 사람들 못 봤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민기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상관 안 해도 돼!”
 선우는 입을 다물고 등에 업힌 민기의 몸을 한 번 추어올렸다.
 민기는 남자들이 선우가 있는 곳을 아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나한테 다가와서 너를 아느냐고 물었어.”
 “나를 아느냐고?”
 “그래.”
 “그래서? 안다고 했어? 멍청하긴.”
 “모른다고 하기는 했는데 거짓말이 어색했나 보지. 너 어디에 있느냐고 하더라고.”
 “내가 멍청했어. 그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나는 그냥 고모부한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한 것뿐인데.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바로 알아내고 온 거지?”
 말을 하면서 선우는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절감했다.
 “그 사람도 거기에 같이 있었나 보지.”
 민기가 말했다.
 “많이 아프냐? 많이 다쳤어?”
 “아니. 그냥. 상처만 요란하지.”
 
 뒤쫓던 사람들은 둘로 줄었다.
 눈을 얻어맞은 사람은 쫓기를 포기하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저 새끼, 죽으려나?”
 선우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날렸는데, 눈을 맞은 것 같았어.”
 “눈을?”
 “그래서 제대로 못 걷는 건가? 안 보여서?”
 선우는 민기를 한 번 더 추어올렸다.
 “어떻게 하지? 택시를 탈까? 어머님 댁으로 가도 될까? 위험해지려나?”
 “일단은 택시가 다니는 큰길까지는 가야 되는데. 너, 아직 괜찮아? 안 힘들어? 나 업고 뛰는 거?”
 “안 힘들어.”
 “그런 것 같긴 하다.”
 그때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차가 두 사람을 쫓았다.
 차가 등장하자 그때까지 선우를 뒤쫓던 두 남자는 뛰는 것을 포기했다.
 그걸로 보았을 때 갑자기 나타난 차에는 그들의 일행이 타고 있는 듯했다.
 “갈수록 태산이네. 꽉 잡아라.”
 선우는 민기에게 그렇게 말하고 전력으로 달렸다.
 차를 타고 쫓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선우는 곧바로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차가 멈췄다.
 지축을 흔들듯이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을 때 민기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들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쫓아오던 사람들은 슬슬 속도를 늦추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선우가, 그 앞에 높게 나타난 남의 집 담벼락을 뛰어넘을 재주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강민기.”
 선우가 민기를 불렀다.
 민기는 대답을 해 주고 싶었지만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머릿속이 희미해질 지경이었다.
 선우가 뛸 때마다 통증이 일어서 아파 돌아 버릴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선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꽉 잡아, 민기야.”
 민기는 호흡을 한 번 정리하고 선우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자기는 괜찮으니까 내려놓고 혼자서 도망치라고.
 저 사람들도 아무 상관없는 자기한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라고.
 그리고 너 혼자라면 저 높이의 담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이 자식은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민기를 업은 채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민기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선우의 목에 꽉 매달렸고 선우는 자기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중력이 자신을 놔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못 잡아 주니까 네가 알아서 매달려!”
 선우가 말했다.
 그 소리가 민기에게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따위 말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선우가 저를 잡아 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대로 떨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선우는 손을 뻗어서 간신히 담장을 붙잡았다.
 “흐어어어어어엇······차!”
 담벼락 위에 올라서 있는 선우의 모습을 본 사람들조차 그 장면을 믿지 못했다.
 민기는 어느 쪽을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는 너무 아찔한 골목이 보였다.
 저리로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선우는 갈등하는 기미조차 없이 뛰어내렸다.
 설마 낙법을 하지는 않겠지?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몸이 다시 쿵쿵 들썩였다.
 선우는 어느 새 바닥에 착지해 다시 뛰고 있었다.
 “김선우.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나,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거든. 계속 이렇게 가기는 힘들어.”
 민기가 말했다.
 “알았어. 그래도 조금만 참아. 차를 잡을게.”
 선우는 민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많이 힘들어? 많이 아파?”
 “그런 건 아니야.”
 민기가 말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선우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뒤에서 나는 소리에 돌아보니 몇 명이 다시 쫓아오고 있었다.
 추가로 동원된 인원은 처음에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민기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한테 데려다 줄게. 알았지? 너 죽으면 나한테는 아무도 안 남아. 제발 죽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병신같이 굴어서. 나 때문에. 이번 한 번만 봐줘. 민기야. 이번 한 번만 견뎌 줘. 진짜 미안해. 제발 살아만 줘!”
 선우는 쉼 없이 중얼거리며 민기를 업은 채로 달렸다.
 민기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선우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대답이 들려온 것은 아니지만 제 어깨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힘으로 선우는 민기가 정신을 놓은 게 아닌 것을 알고 그나마 안심을 했다.
 뒤쫓는 사람들과의 거리는 계속 멀어졌다.
 그 사람들은 전력을 다해 뛰었지만 결코 선우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선우는 마구 달리다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계속 달리다가는 민기에게 더 큰 통증과 부상을 안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우는 방법을 생각하려고 고심했다.
 차를 세우자.
 차를 잡아서 도와 달라고 하자.
 선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달리는 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나갔을 때 선우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는 브레이크를 잡지도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김선우!!”
 민기의 목소리가 선우의 귀청을 찢을 듯했다.
 선우의 무릎이 차에 부딪쳤고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운전자는 그제야 선우를 발견했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 댔다.
 화를 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
 무서워서 지른 비명이었다.
 화를 내는 것도 상대방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이지, 갑자기 차에 뛰어들어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한테 화를 내는 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자기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는 그 말만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갑자기 뛰어든 사람을 탓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선우는 태연하게 일어났다.
 그때까지 선우가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민기의 몸에 더 이상의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어차피 차에 부딪친 몸은 아프지도 않았다.
 멀리에서 차가 오는 것을 봤을 때 선우는 이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너를 붙잡아 줄 수 없으니까 알아서 꽉 잡으라는 말만 민기에게 겨우 해 놓고 선우는 일어섰다.
 운전자는 미칠 지경이었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난, 머리 두 개 달린 꼽추 같은 것이 차에 부딪쳤다가 차 지붕 위로 올라가 한 바퀴를 구르고 길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시간상으로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는 귀를 바짝 기울였다.
 처음에는 방방 소리를 질러 댔지만 이제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하면서 차 문을 열었을 때 그의 뒤쪽에서 그 이상한 형체가 일어섰다.
 “흐아아악!”
 운전자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저희 좀 태워 주세요. 친구가 다쳤어요.”
 머리 두 개 중에 하나가 말했다.
 “괜찮······아요? 차에 치인 것 아니에요?”
 운전자가 물었다.
 “괜찮아요. 저희는 안 다쳤어요. 이 상처는 지금 다친 건 아니에요. 얘가 병원에 가야 되는데, 저희 좀 태워 주세요.”
 운전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사람을 죽이지 않아서.
 그리고 자기가 친 사람이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이 아니라서.
 운전자의 허락을 받고 선우는 차 문을 열었다.
 “타, 민기야.”
 민기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차에 올랐다.
 어떤 자세도 편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선우의 무릎도 엉망이었다.
 “너, 괜찮은 거냐?”
 민기가 물었다.
 “어. 나는 멀쩡해.”
 팔도 다 까진 것 같았지만 민기는 선우의 말을 믿었다.
 운전자는 차를 출발시키고 룸미러로 두 사람을 살폈다.
 “둘이 싸웠어요?”
 그가 물었다.
 “무슨 야쿠자도 아니고. 친구끼리 이렇게까지 싸우겠어요?”
 선우가 말했다.
 운전자의 다소 긴 듯한 시선에 선우는 후드를 재빨리 뒤집어썼다.
 선우의 머리가 민기의 귀 쪽으로 다가갔다.
 “나를 알아본 것 같아. 내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었잖아. 코너를 돌 때 내려서 도망칠 테니까 너는 병원으로 가. 알았지?”
 민기는 그 생각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운전자가 선우를 알아보았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계속 뒤따라갈게. 너만 위험에 처하게 두지 않을 거야.”
 선우가 말했다.
 “지금 네가 내 걱정 할 때냐?”
 “네 걱정 할 때지. 너는 다치면 아프잖아.”
 선우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코너를 도느라고 차가 속력을 늦추었을 때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운전자는 더 이상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체념한 표정을 짓고 차를 세웠을 뿐이었다.
 민기는 어색하게 있다가 열려져 있는 문을 닫았다.
 “가?”
 그가 물었다.
 “네······.”
 “······.”
 자기를 알아본 것 같다는 선우의 생각은 오해였을 뿐, 운전자는 혹시 자해 공갈단이 아닌가 해서 살핀 것뿐이었다.
 “아저씨, M병원 응급실로 가 주실 수 있을까요? 택시도 아닌데 이렇게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민기가 공손하게 말했다.
 “아냐, 아냐. 내가 사람을 쳤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병원에 도착하면 세차비도 드릴게요. 지금은 지갑이 없고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돈 가지고 나오시라고 할게요.”
 “아니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정말로 아까 차에 부딪친 데는 괜찮은 거야? 어떻게 안 다칠 수가 있는 거야?”
 “직접 부딪친 건 아니라서요.”
 민기가 말했다.
 말 좀 그만 시켰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덕분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어서 고마웠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내가 친 줄 알았어. 소리도 들었던 것 같았거든. 부딪치는 소리. 그런 일 처음 당해 봐.”
 “아닐 거예요. 아마 잘못 들으셨겠죠. 아니면 환청이거나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아픈 것 같으면 치료 다 받아. 보험 처리 하면 되니까. 그리고 내가 내일쯤 병원으로 다시 찾아갈게.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아까는 진짜로 놀랐어. 그런데 같이 있던 친구는 어떻게 된 거야?”
 “그 녀석이 원래 좀 그래요.”
 “특이한 친구네. 다친 건 아니겠지?”
 “네.”
 운전자는 사이드미러에 자꾸만 선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12시간 전에 맥주 두 잔을 마신 게 전부였다.
 나오기 전에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서랍에 항상 넣어두던 약을 챙겨 먹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 약 때문인가?
 그는 자기가 음주 운전으로 걸리게 될까 봐서 점점 걱정이 들었다.
 아니면 어떻게 저 녀석이 차와 똑같은 속도로 뛰어오는 걸로 보인다는 건가.
 점차 그의 시름이 깊어졌다.
 
 ***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봤는지 알아?”
 지석이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절대로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연주는 민기와 통화가 되지 않아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얘가 이렇게 오래 전화를 안 받지 않을 텐데. 무슨 일이지? 집에도 없는 것 같고. 불은 다 켜져 있는데.”
 연주는 민기를 만나지 못하고 오게 된 게 못내 아쉬웠다.
 “집에서 보기로 했으면 집에 있어야지!”
 연주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기 위해 일부러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이 과장, 저길 좀 보라고. 내 생각에는 저 애가 선우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지석이 다시 말했을 때 연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는 선우를 발견했다.
 “어머, 세상에! 빨리 따라가. 클랙슨을 울려 봐. 아니, 그러지는 말고. 괜히 놀라서 사고라도 날지 모르니까 선우 옆으로 가면 속도를 줄여. 내가 부를게.”
 주위가 어두웠던 탓에 선우의 모습은 다시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지석은 연주의 주문대로 전속력으로 달려 선우를 따라잡았다.
 “선우야. 김선우!”
 창문을 내리고 연주가 부르자 선우는 뜻밖의 만남에 연주를 보고 울음을 쏟아 낼 뻔했다.
 “어디 가는 길인지는 모르지만 타, 선우야.”
 연주가 말하자 선우가 차에 올랐다.
 연주는 자리를 옮겨 선우의 옆에 앉았다.
 “어머니, 앞에 가는 차에 민기가 타고 있어요. 민기가 다쳤어요. 저 때문에요. 제가 멍청한 짓을 해서요.”
 “무슨 말이니, 선우야? 혹시 우리 민기가 지금 납치라도······ 당했다는 거니?”
 “아뇨.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요. 낯선 남자들한테 공격을 당했는데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대요. 그래서 제가 계속 업고 갈 수가 없어서 차를 세워서 태웠어요.”
 “왜 민기만? 너도 같이 타지 그랬어?”
 “차에 탄 사람이 저를 알아본 것 같아서요.”
 “······일단은 그럼 저 차를 세우고 민기를 이 차에 태우면 되는 거지?”
 “네. 병원으로 가야 돼요. 민기가 다쳤어요.”
 선우가 말했다.
 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을 바라보았다.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다시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의 몸도 엉망이었지만 선우는 자기가 다쳤다는 사실은 깨닫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주가 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묻자, 선우는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제가······! 제가······!”
 선우는 꺼억꺼억 흐느끼는 와중에도 결국 제가 해야 할 말을 마쳤고, 연주는 네 잘못이 아니라면서 선우의 등을 쓸어 주었다.
 “고마워. 우리 아들을 지켜 줘서. 내가 오늘 일은 절대로 안 잊을게.”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요?”
 선우가 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만약에 정말로 그게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세상에는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에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도망쳐 버리는 사람이 훨씬 많아. 너는 네 몸이 이렇게 되도록 민기를 도와줬잖아.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한 거야.”
 지석이 솜씨 좋게 앞차를 따라잡아 신호를 보내고 그 차를 갓길로 유도했다.
 앞차 운전자는 이제 더 이상 놀랄 일도 없고 놀랄 기운도 없다는 듯이 차를 갓길에 댔다.
 연주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민기도 차에서 뛰어내려 연주에게 달려왔다.
 “엄마!”
 “어어······ 세상에!”
 연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깨물었다.
 민기는 자신의 얼굴이 지금 어떻게 보일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엄마.”
 “괜찮은 거니?”
 “네.”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지석이 민기를 태우고 온 운전자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고 그를 먼저 돌려보냈다.
 지석이 민기에게 다가가자 민기는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는 지석을 기억하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상처는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지석이 연주를 위로하며 말했다.
 “민기야, 가서 치료 잘 받아.”
 선우가 다가와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 너는 어딜 가려고?”
 “나는······ 너랑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너랑 같이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다시 너를 찾아내서 나를 내놓으라고 할 것 같아.”
 “그래도 너 혼자서 뭘 어쩌려고?”
 민기가 말했다.
 민기는 선우를 말려 달라는 표정으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연주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야, 너는 언제든지 우리한테 올 수 있어. 알지?”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움을 느꼈다.
 “엄마,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딨어? 선우가 갈 데가 어딨다고. 어?”
 민기가 고함을 질렀다.
 “가 있을 만한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반지하 방이 있긴 한데······.”
 지석이 선우에게 말했다.
 “도움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선우가 말했다.
 “그래. 거기에 가 있으면 아줌마도 마음이 편하겠다. 민기가 퇴원하면 아줌마가 민기랑 같이 선우 너를 보러 갈게.”
 “네.”
 “병원에 가는 길에 내려 줄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주소는 가면서 알려 줄게.”
 지석이 말했다.
 “그냥 저한테 주소만 알려 주세요. 민기는 병원에 빨리 가야 돼요. 이 자식이 센 척은 하지만 지금 엄청나게 아플 거예요.”
 선우의 말에 연주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은 재빨리 주소를 적어 주고 열쇠와 함께 선우에게 건넸다.
 “내 핸드폰 가져가.”
 지석이 구닥다리 핸드폰을 꺼내 주자 선우가 머뭇거렸다.
 “아저씨한테도 필요하잖아요.”
 “어차피 이 번호를 아는 사람도 없어.”
 “나는 알잖아.”
 연주가 말했다.
 “이 과장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이 과장이랑 같이 있는 동안에는 이 핸드폰이 필요하지도 않아.”
 민기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고 선우는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민기를 바라보았다.
 “후딱 나아라. 어?”
 “후딱 나으면, 또 나를 업고 날아다닐 거냐?”
 “멀쩡해진 놈을 내가 왜 업어?”
 “나을 테니까. 너도 조심해.”
 “알았어.”
 자기가 먼저 이곳에서 떠나야 이들도 병원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지 선우가 몇 번 뒤를 돌아보다가 이내 달려서 사라져 버렸다.
 “참내.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차를 출발시키면서 지석이 말했다.
 “그 사람들, 누구인 것 같았어?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 아무 말도 안 했어?”
 연주가 물었다.
 민기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죽을 뻔했다는 두려움이 갑자기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이제는 안전하다는 사실에 서러움까지 북받쳤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일이었다.
 이유 없이 여러 사람한테 맞기만 했어도 놀랐을 텐데, 그 사람들은 자기를 죽일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잘했어, 민기야. 정말 잘 참았어.”
 연주가 민기의 고개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하고 하염없이 민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반지하 방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지석이 차에서 내리자 현관문이 열리고 안에서 선우가 나왔다.
 선우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쭈뼛거리면서 걸어왔다.
 “이제 오세요?”
 “응.”
 “민기는······ 괜찮아요?”
 선우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응.”
 “다행이네요.”
 “그래.”
 “들어가서 쉬세요, 아저씨. 방 내 주셔서 감사해요.”
 선우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지석은 선우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한창 꿈 많을 나이인데 어쩌다가 그런 모진 일을 겪게 됐을까. 게다가 이제 쫓기는 신세까지 됐다.
 지석은 선우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배는 안 고파?”
 지석이 물었다.
 “괜찮아요.”
 “고프다는 뜻이네. 나도 배고픈데 들어가자.”
 “저는 괜찮아요.”
 “라면이나 끓여 줘.”
 “······네.”
 라면을 먹는 동안 지석은 선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선우는 지석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과장이랑 얘길 해 봤는데, 우리는 사고 현장에서 누출된 게······. 누출? 사실은 살포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겠죠, 살포요.”
 “거기에 유해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바이러스요?”
 선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직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단계는 아닌데, 그걸 확실히 하려면 남아 있는 생존자들을 만나 볼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저도 그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어요.”
 “선우 네가 직접 만나는 건 아직은 위험하겠지. 오늘 일도 있고 말이야.”
 “······.”
 “너무 낙심하지는 마라. 나도 네가 너 하나를 지키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건 의심하지 않아. 그러니까 다시 기회가 올 거야.”
 “제가 망친 것 같아요, 아저씨.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 수도 있었는데, 고모부가 화장한 걸 보고 그것 때문에 빡쳤어요.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까지 발랐더라고요. 카메라에 잡힐 걸 알고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자기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동정이나 사 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거라고요. 나 불쌍해요, 나 방금 애를 잃었어요, 위로해 주세요, 그러는 것 같고. 무슨 짓을 한 사람인지 다 아는데. 그래서 참을 수가 없어서······. 지금은 후회해요. 제가 전화를 걸어서 퍼붓는다고 기분이 풀리는 것도 아닌데. 민기만 다쳤고요.”
 선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어.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실수하고 평생 그걸 반복하지.”
 “저 때문에 민기가 다쳤어요.”
 “그래도 민기는 너를 비난 안 해.”
 “그래서 더 기분이 안 좋아요.”
 “갚아 줄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이 과장 말로는 선우, 네가 살아나 준 것만으로도 민기한테 큰일을 한 거래.”
 “네?”
 “나중에 민기한테서 직접 들어라. 내일은 우리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좀 하자. 저녁에 와.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 해야 하니까.”
 “네.”
 선우는 왠지 길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지석을 바라보았다.
 연주와 지석을 만난 후로 하나씩, 하나씩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몸에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없어?”
 지석이 물었다.
 “혈관을 따라서 용암이 흘러가는 것 같았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몸에서 통증은 안 느껴져? 민기 얘기로는 담에서 뛰어내리고 차에 부딪치고 꽤 큰 충격을 여러 번 겪었다는 것 같던데.”
 “아프지 않아요.”
 “내가 걱정할까 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네. 이상할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질 않아요. 이게 좋은 게 아닌 거죠?”
 선우가 물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네 경우에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저씨, 이런 말을 아저씨한테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저도 후회하는 걸 취미로 가진 사람은 아닌데요.”
 “어?”
 “마지막 날에 아빠한테 심한 말을 했어요.”
 “나한테 말하지 않아도 돼. 나는 부모는커녕 다른 사람 남편이었던 적도 없어. 네가 말해 봐야 이해도 못할 거고 남을 위로하는 데도 취미가 없다.”
 “알았어요.”
 “나는 가족을 많이 잃었어. 가족이 많았거든. 형이 셋, 누나가 둘, 동생이 하나였으니까. 할머니, 이모, 어머니, 형 둘, 누나 하나, 동생이 모두 나보다 먼저 죽었어. 계속 잇따라서 말이야. 사는 게 게임 같더라. 유전 질환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늘 두려워하며 살았어. 그러면 뭐가 안 좋은 줄 알아?”
 지석이 물었다.
 “뭔데요?”
 방금 자기가 엄청난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선우가 물었다.
 “곧 죽을 거라는 것도 모르고 심한 말을 하는 일이 자꾸만 생긴다는 거야. 나중에는 자책하기도 지겨워져서 생각을 바꿨지. 먼저 죽어 버린 사람이 잘못한 거라고.”
 “편했겠네요.”
 “좋아. 오늘은 네가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으니까 특별히 너한테만 비밀을 말해 줄게.”
 지석이 선심 쓰듯이 말했다.
 “뭔데요?”
 “이 과장하고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는데 이 과장한테 청혼을 하려고 했었어. 반지까지 사 놨는데 둘째 형이 죽었어. 큰형이 걸렸던 병으로. 확진을 받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국······.”
 “······.”
 “그래서 결국 청혼을 못 했거든?”
 “말 안 하셔도 알겠어요.”
 “나는 이 과장을 혼자 남기고 갈까 봐 청혼을 못 했는데 무모하게 용기를 낸 남자는 나보다 훨씬 빨리 저세상으로 떠났지.”
 “민기네 아버지요?”
 “응.”
 “그래서 이 얘기의 결론이 뭐냐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고 포기하지는 말라는 거요?”
 “아! 그거야말로 괜찮은데?”
 “그럼 아저씨가 말하려고 했던 건 뭐였는데요?”
 “포기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거.”
 “사이코패스 같아요. 아니, 스토커.”
 “그래. 네 말 들으니까 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 얘기의 결론은 그냥 네가 말한 걸로 하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두려워해서 포기하지는 말자는 걸로. 일찍 자자. 소파도 불편하지 않을 거야.”
 지석이 말했다.
 “아니에요. 내려가서 잘게요.”
 “습해. 여기에서 자. 어차피 나는 새벽에 일찍 나가니까 여기서 푹 자. 그리고 저녁에 내가 전화하면 그때 나와.”
 “네.”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기는 한데, 사실 이걸 이대로 놔두면 내일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거든? 당장 치료해야 되는 심각한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너는 어때?”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중에 많이 아프면 말해. 그러면 치료해 줄게. 아프지 않으면 네 재생 능력을 한번 확인해 보자고.”
 “네.”
 “그래. 자라.”
 “네.”
 선우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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