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다시 쓰는 헌터사 [E](종료230728)

다시 쓰는 헌터사 1-1권

2019.02.28 조회 5,223 추천 29


 # 프롤로그
 
 2018년, 성혼이 출현하고 열여덟 세계가 도래하다.
 
 그리고 2118년.
 인류 최후의 저항군 기지가 공격받고 있었다.
 
 
 # 최후의 발악
 
 아론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
 그러면서 달려들던 괴물의 아가리에 대검을 처넣었다.
 퍼억!
 두툼한 검이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었다. 녹색 피가 선연하게 번지지만 괴물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등 뒤에 뻗은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러 아론의 목을 노렸다.
 가볍게 회피, 이어 왼손의 총을 겨누어 연발로 갈겼다.
 투타타타!
 지구 전역에서 악명 높은 대구경 권총, 처형자다.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에 괴물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뿌려지는 체액. 아론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걸 다 뒤집어썼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본다.
 ‘장갑(裝甲)이라도 갖췄어야 했는데.’
 아론의 자랑거리이자 저항군의 상징이며 외계종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장갑, 멸망왕.
 장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외계종들은 그런 단점을 기가 막히게 치고 들어왔다. 아론이 모종의 일로 밀실에 들어가 있어서 보고를 늦게 받았다는 점도 한몫을 했고.
 그나마 성혼 억제장을 작동시켜서 다행. 그게 아니었으면 대규모 성혼 발현에 모두 쓸려 나갔겠지.
 [아직 멀었나?]
 [못해도 24시간은 더 필요합니다!]
 [빌어먹을······.]
 텔레파시를 보내 보지만 돌아오는 건 부정적인 답변뿐.
 신음을 삼키던 그때, 멀찍이 어릿한 빛이 반짝였다.
 쭈앙!
 짓쳐 드는 적색 광선.
 평소라면 레이저 방패로 반사시켜 역공했겠으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아쉬운 대로 대검을 휘둘러 광선을 쳐 냈다.
 “쉬시시식!”
 그 틈을 노려 거대한 사마귀가 달려든다. 휘둘렀던 대검을 회수하지도 않고 허공으로 찔렀다. 그 바람에 사마귀가 대검에 꼬치처럼 꿰여 버렸다. 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외골격이 터지며 피떡이 되었다.
 “퉤! 벌레 같은 놈이!”
 혐오스러운 모습에 침을 뱉는 아론.
 장비가 없다고 얕보지 마라. 아론이야말로 충왕(蟲王)의 지식이 결집된, 장수풍뎅이의 힘과 사마귀의 잔혹함을 모두 갖춘 강화 인간 중의 강화 인간일지니.
 워낙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서일까,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방금 전의 사마귀는 충왕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존재라 서로 눈치를 보게 되었던 것.
 조금은 입 안이 씁쓸했다.
 ‘개 같은 외계종 놈들······.’
 방금 전 사마귀도 원래는 평범한 지구인이었다. 그런 자를 곤충들이 데려다 생체 개조를 통해 사마귀 전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 아론에게 그러했듯이.
 “허억, 허억.”
 “훅, 훅.”
 주위의 저항군 병사들이 숨을 헐떡인다. 모두 강화 인간이고 강력한 장갑을 갖추었으나 벌써 72시간째 이어진 혈전에 지치고야 만 것.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1시간? 2시간?
 다가오는 최후가 눈에 잡힐 듯 선하다. 아론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후의 계획만큼은 성공시킬 작정이었다.
 저벅저벅.
 소강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질적인 소음이 기지 광장을 달구었다. 자연히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세 명.
 인간은 인간인데 괴이한 용모를 한 작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사족 보행을 하는 로봇, 온갖 곤충을 합쳐 놓은 곤충 인간,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는 부정형의 괴물.
 아론의 입이 일그러졌다.
 허탈함과 분노가 버무려져 뚝뚝 떨어졌다.
 “세 총독 나으리들께서 힘을 합칠 줄은 몰랐군.”
 거짓말.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도록 유도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론이었으니까.
 사족 보행 로봇, 기갑 총독이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복수의 검을 잡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동의한다는 듯 충왕 총독과 혼돈 총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을 벗어났고, 누구보다도 성혼 수확에 앞장섰으면서 인간을 흉내 내는 꼬락서니에 욕지기가 올라왔다.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 총독을 노려보며 일갈을 터뜨렸다.
 “더 말이 필요한가? 덤벼라! 모조리 죽여 주마!”
 눈을 번뜩이는 아론.
 장갑은 없다.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지쳤다. 탄약도 거의 떨어졌고, 전신에 넘쳐흐르던 성혼의 힘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백만은 발군. 폭풍처럼 사위를 압도했다. 정면에 우글거리는 적들이 잠깐 움찔할 정도. 오직 세 총독만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아론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세 총독들은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적 아닌가. 괜히 티끌만큼이라도 부상을 입으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직이냐?’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세 총독도, 아론도 마찬가지.
 지금쯤 때가 됐는데······.
 과연, 저항군에 숨어 있던 비수가 아론의 등을 찔렀다.
 푸욱.
 “큭!”
 마지막 순간 몸을 뒤틀어 왼팔로 막았다. 그 순간 숨겨 두었던 문양이 빛을 발하여 타오르는 빛의 검을 막아 낸다.
 배신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무잡잡한 피부, 강인한 갈색 눈동자······.
 이미 눈치챘던, 그러나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훌쩍 다가왔다.
 “부사령관?”
 부사령관 다나카.
 하긴 이 정도 인물이 배신해야 최근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시도하는 작전마다 조기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나카의 눈에 잠깐 음울한 빛이 스쳤다. 그것도 잠깐, 두 팔을 날개 펼치듯 활짝 벌렸다.
 쾅! 콰콰쾅!
 푸른 천상의 화염이 장내를 휩쓸었다. 피아를 식별하고 오로지 적에게만 심판을 내리는 성혼. 본래 인류의 적에게 쏟아졌던 그 불꽃이 오늘은 저항군 병사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크아악!”
 “부사령관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등 뒤에서 가해진 일격에 누구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나마 성혼을 끌어모아 버티고는 있으나 풍전등화. 여기에 적들의 공격까지 쏟아졌다.
 괴물들이 달려든다. 곤충들이 덮쳐 온다. 기계들의 포격이 이어진다. 더구나 다나카가 발악하듯 공격을 날려 대는 바에야.
 눈물을 머금고 명령을 내렸다.
 “퇴각! 퇴각하라!”
 이곳 광장이야말로 마지막 방어선. 돌파당하면 더는 방어할 곳이 없다. 파멸을 직감하면서도 몸을 뺐다.
 들리느니 인간의 비명이요, 터지느니 인간의 피. 순식간에 저항군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저항군이 멸절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성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다나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놈을 잡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총독들이 몸을 날린다.
 가장 앞에 서서 쫓아온다. 뒤처진 저항군 병사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오로지 아론만을 노려보며 일직선으로 추격한다. 그들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듯하여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 든다. 간헐적으로 처형자를 쏘아 반격하는 아론.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탄환이 똑 떨어지고 만다.
 옆에서 달리던 저항군 병사가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인류여!”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폭사.
 폭주한 성혼이 파멸을 터뜨린다. 폭발이 세상을 휩쓸었다. 뜻밖의 자폭에 총독들이 순간 돈좌된다.
 “하찮은 수를······.”
 그러나 그뿐. 채 몇 초 지나지도 않아 털끝 하나 다치지도 않은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다시 추격해 오기 시작.
 몇몇의 저항군 병사들이 몸을 돌렸다.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본 후, 염원을 담아 아론에게 소리친다.
 “사령관님! 뒤를 부탁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쇼!”
 이어지는 폭발, 자폭, 죽음······.
 아론은 피눈물을 삼켰다. 무능력한 자신이 밉고, 그들을 속인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정말로 이 수밖에 없었을까.
 몇 번을 생각해도 이 방법뿐이었다. 이미 여섯 세계의 수중에 들어간 지구를 탈환하기란 불가능했으니.
 병사들이 스러져 갔다. 그래도 수백은 되었던 병사들이 이제는 거의 남지 않았다. 마지막 통로를 지나서 기지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했을 때는 오직 아론 하나만이 남았다.
 막 충왕 총독의 칼날손이 아론의 등을 잡아채려 할 때였다. 정면의 문이 열리며 포화가 쏟아졌다.
 투투투투투.
 둔중한 소음. 대구경 기관포였다. 충왕 총독의 손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아니?”
 어지간한 화력은 웃으면서 무시하는 충왕 총독이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포격이 정밀하게 충왕 총독을 쫓아갔다. 거의 수십 걸음은 물러서고 양팔을 방패로 변형한 다음에야 포격을 막을 수 있었다.
 충왕 총독이 곤충의 겹눈으로 문안을 주시했다. 은폐 장막을 꿰뚫어 본 다음, 신음처럼 한마디를 내뱉는다.
 “멸망왕?”
 어떤 연구실 안,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한 장갑.
 흑색으로 도색된 채 불길한 적색 문양을 새겨 놓았다. 어깨에 비죽 나온 포구가 섬뜩하다. 총독들조차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장갑, 멸망왕이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은 기갑 총독이었다.
 “무시해라. 원격 조종이다.”
 “성혼이 실려 있었는데?”
 “미리 충전만 시켜 놓으면 포탄에 성혼을 싣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이런, 속았구나!”
 충왕 총독이 노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아론은 이미 문안으로 들어선 뒤, 기계장치가 웅웅거리며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 충왕 총독이 두툼한 강철문을 찢어 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다른 두 총독과 다나카, 변이된 인간들이 따랐다.
 “사, 사령관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의 눈이 아론과 적들, 그리고 연구실 중앙의 푸른 차원문을 몇 번이나 왕복했다.
 자연히 적들의 시선도 푸른 차원문으로 향한다. 이제는 일반화된 차원문과 비슷하지만, 어쩐지 다른 느낌을 풍겼다.
 기갑 총독이 감명 깊다는 듯 손뼉을 쳤다.
 “놀랍군. 정말로 구현했을 줄이야.”
 “저거, 정말로 시공의 문이 맞나?”
 “맞아. 확실해. 열등한 지구인이라 무시할 게 아니군. 하긴, 하찮은 종족에게 성혼이 피어날 턱이 없지.”
 시공의 문.
 아론이 최후의 한 수로 준비했던 물건.
 혼돈 총독이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성혼이 개화하던 시기로 시공 이동 하여 역사를 바꾼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너희 종자의 작은 머리에서 나온 생각치고는 제법이다.”
 이어, 짧은 비웃음이 터졌다.
 “그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푸하하하! 우습구나. 그 어떤 종족도 성공하지 못한 게 시공 이동이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 불멸의 경지에 이른 자들도 잠깐 멈추거나 조작하는 게 한계다. 오늘 너희가 멸종하는 것은 모두 네놈의 오판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령관님······.”
 연구원들이 또다시 아론을 부른다.
 그걸 무시하고, 아론은 냉정한 눈으로 총독들을 노려보았다.
 그랬다.
 아론이 준비한 최후의 한 수.
 그것은 시공 이동이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시작되기 이전, 외계종들이 본격적인 마각을 드러내기 전의 시대로 기지 전체를 시공 이동 한 후 지구 전체의 각성을 촉구하여 인류의 자강(自强)과 독립을 이루자는 것.
 성공할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저항군에게는 10% 정도라고 공표했으나 실은 만분지일, 아니 억분지일도 못 되었다. 이래서야 도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차라리 자살행위라고 해야겠지.
 총독들이 거만한 태도로 아론을 주시한다.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한 모양.
 아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그것이야말로 아론이 의도했던 것. 별안간 대검의 손잡이를 비틀어 잡아당긴다. 두툼한 손잡이가 힘없이 딸려 나왔다.
 그대로 투척!
 “헛!”
 “이놈이, 어디서?”
 총독들이 부산을 떤다.
 치명적인 폭발물이라고 생각을 한 걸까.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방어막을 전개하기도 하고 전신을 갑옷 형태로 변형도 했다.
 죄다 광대놀음이었다.
 아론이 던진 손잡이는 성혼의 결정체도 아니고 폭탄도 아닌, 그냥 평범한 손잡이에 불과했으니까. 손잡이가 금속 바닥에 떨어지면서 땡그랑 소리만 낸 게 전부.
 총독들의 시선이 손잡이에 가 맺혔다. 성질 급한 충왕 총독이 분노를 터뜨리려는 찰나, 아론은 대검 손잡이 안에 숨어 있던 붉은 단추를 놈들에게 보여 주었다.
 연구원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 그건!”
 “사령관님! 안 됩니다!”
 여기까지 와서 뭘?
 주저하지 않고 단추를 꾹 눌렀다. 연구실의 흰 조명이 붉게 변하며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경고! 시공의 문이 곧 폭주합니다. 기지 내의 모든 인원은 신속히 퇴거하십시오.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120, 119, 118······.]
 “무슨?”
 “이게 뭐냐?”
 총독들은 당혹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태 파악이 얼른 안 되는지 붉게 물들어 가는 시공의 문과 아론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미친 사령관 새끼!”
 “튀어!”
 가장 먼저 연구원들이 벌 떼처럼 달아났다. 어설프게 괴물들 사이를 헤쳐 나가려다 목이 잘리고, 방해 역장이 펼쳐져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간 이동 기기를 사용했다. 폭주하는 시공의 문에 휘말리느니 죽음을 감수하는 것.
 아론의 입가에 맺힌 냉소가 짙어졌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시공의 문을 보던 다나카가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사, 사령관!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겁니까?”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하지만 더욱 차가워지는 미소가 무언의 긍정을 웅변하고 있었다.
 시공 이동?
 불가능하다는 건 아론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무리 저항군이 궤멸 직전이라고는 하나 100%에 수렴하는 확률로 실패할 작전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꾸었다.
 함정으로, 동반 자살로.
 마지막 가는 김에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계획을 했다. 배신자가 분명 고위층에 있을 거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정보도 적당하게 흘렸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계획의 진체를 알지 못하게 했다.
 “미친놈!”
 기갑 총독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어 네 개의 다리를 펼치고 추진 장치를 가동한다. 아까 추격을 할 때도 볼 수 없었던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머지라고 다를까. 곧 아우성을 치며 달아난다. 어쩌면 그리도 빠른지 몰랐다. 서로를 밟고 밟아 가며 한 치라도 멀어지려고 악을 썼다.
 아론은 멀거니 서서 그들을 보내 주었다. 딱 하나만 빼고.
 “커억!”
 다나카를 예의 주시하던 아론. 등을 돌린 순간 화력을 쏟아부었다. 멸망왕이 충전된 성혼을 폭발시키며 공격하자 다나카의 전신이 짓이겨졌다.
 “배신자는 용서할 수 없지.”
 죽음을 목전에 둔 와중에도 다나카의 목을 베어 냈다.
 그 와중에도 다나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지 입을 뻐끔거린다. 가장 질기다는 천상 성향의 성혼을 가진지라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고통스럽게 죽겠지. 혹시 모를 재생에 대비하여 몸만 완전히 불태웠다. 축구공처럼 홀로 남은 머리만 멀찍이 던져두었다.
 경고음이 실시간으로 귀청을 때린다.
 [60, 59, 58······.]
 이제 1분도 안 남았다.
 멸망왕의 강철발 위에 고된 몸을 앉혔다.
 “다 끝났구나······.”
 약 40년. 길고도 길지 않았던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저항군 마을에서의 출생, 생이별, 곤충 인간으로의 개조, 참전, 낙오, 기갑계의 생포, 생체 실험, 장갑 기사, 학살, 저항군 귀순, 고문, 전투, 승진, 저항군 사령관 취임까지······.
 그 결과가 현재. 여섯 세계에 무수한 타격을 입힌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은 저항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크크크.”
 아론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어떤 힘이 느껴졌다.
 강대한 세 종류의 성혼. 총독들이 자신의 힘을 발현해 시공의 문에 간섭하는 모양이었다. 최소한 자기들의 목숨만은 건져 보려고.
 ‘백날 해 봐라. 그게 되나.’
 시공의 문이 폭주하면 이 근방은 지옥이 된다. 이론상으로는 지구 전역을 덮을 수도 있었다. 뭐, 힘이 부족하니 기지 근처까지만 뻗고 말겠으나 총독들이 도주하기란 불가능.
 눈을 감았다.
 다가올 죽음을, 아니 죽음보다 더 비참할 미래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물과 기름 같은, 그래서 섞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세 총독들이 서로의 정신까지 공유해 가며 시공의 문을 안정시킨 것. 거기에 자기 부하들을 갈아 넣어 연료로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붉게 폭주하던 시공의 문이 푸른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작동했다.
 불완전하게나마, 애초 설정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나마.
 시공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었다.
 
 
 # 2018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전신을 칼로 난자하는 것 같다. 혹은 불사르는 듯했다. 말로는 형언하기 힘든, 생체 실험을 당할 때보다도 극렬한 통증이 아론을 괴롭혔다.
 손을 허우적거리지만 잡히는 게 없다. 아니, 감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둠에 휩싸인 채, 영혼을 박탈당한 듯한 공허함에 젖어 세상을 부유했다.
 정신조차 흐릿해진다. 물에 녹는 설탕처럼 존재 자체가 스러진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저 머나먼 혼돈의 바다에 빠져 가던 때였다.
 우우웅······.
 기이한 진동이 아론을 일깨웠다.
 영혼 전체를 울리는 어떠한 울음. 더구나 저 어딘가에서 흐릿한 빛이 비쳐 오는 게 아닌가.
 ‘빛!’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실제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흐릿하던 의식이 점차 부상하게 된다.
 빛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그러다가 자꾸 흔들린다. 또다시 몸 전체에 통증이 엄습해 오지만 참았다. 어느 순간부터 얼굴의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집중하여 눈을 크게 뜨자, 마침내 눈꺼풀이 들리면서 눈 부신 흰 광선이 대뇌를 찔렀다.
 “으으으······.”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
 와락, 하고 벼락같은 외침이 고막을 때렸다.
 “X아! YY이 ZZ?”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의 조합.
 모르는 언어.
 아주 처음 듣는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실패. 목을 움직이려고 하자마자 목이 못 견디게 아파 왔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아론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덕택에 빛이 가려져서 아론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선명해진다. 망막 가득히 어떤 동양인 여성의 얼굴이 맺혔다.
 여성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현아!”
 역시 의미 모를 단어.
 하지만 아론의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 조용히 좀 해 봐.]
 응? 뭐라고?
 아론은 자신이 직접 말을 하고도 스스로 자기 입을 의심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언어야?
 중남미에서 태어난 덕에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영어에 고루 능통했다. 그러나 지금 내뱉은 언어만큼은 생전 처음 들어 본 종류였다.
 아니지.
 저항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면서 몇 번인가 들어 본 적이 있다.
 한국어라고 했던가?
 지금은 혼돈계에 완전히 먹혀 버린, 극동아시아에 위치했던 나라의 언어라고.
 아론의 눈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또 가상현실이냐······.’
 기갑계의 장기가 뭐냐.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인간을 세뇌하고 자기들 뜻대로 부리는 것 아닌가. 다만 잠시 생각한 후 이 추측에는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주한 시공의 문을 뚫고 자신을 수습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
 그렇다면 뭐지?
 단순한 백일몽? 혹은 착각?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
 머리를 스치는 오만 가지 상념에 아론의 얼굴이 쉬지 않고 꿈틀거렸다. 그걸 보던 여성이 별안간 주먹을 들어 꿀밤을 먹인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
 “아, 진짜. 아프잖아!”
 이제는 자연스럽다.
 가장 익숙하게 쓰는 스페인어를 쓰는 것과 비슷했다. 아론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혼이나 당하지.”
 “너······.”
 여성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다.
 역린을 건드린 모양.
 아론은 자연스럽게 사과를 했다.
 “미안. 내가 조금 심했지?”
 “후우, 환자라서 참는다. 나중에 퇴원하고 보자. 각오해!”
 여성이 꽉 쥔 주먹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순간 아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몸짓, 이 눈빛, 이 얼굴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어디서 봤지?
 ‘그래······.’
 생각났다.
 지금은 불살라진 저항군 기지 사령관실,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뒤에 아홉 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역대 인류 저항군 사령관, 혹은 뭇 영웅 중 가장 유명했고 큰 공을 세웠던 인물들의 사진이.
 그중 첫 번째.
 애경 장군.
 대한민국 출신, 1986년 출생, 여성, 거신 성향.
 인류 저항군의 초대 총사령관이자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저항 조직을 단일 조직으로 통합한 장본인. 2030년에 암살당하지만 않았다면 역사를 바꿨을 거라 전해지는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진보다 확연히 젊은 얼굴로 아론의 앞에 서 있었다.
 ‘맙소사······.’
 사실 아론이 가장 존경하기도 했던 인물. 그런 위인을 직접 눈으로 보니 얼떨떨한 한편 감격스러웠다.
 이건 꿈인가, 현실인가?
 옆에서 조잘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많이 아파?”
 누군지 모르겠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하지만 역시나 아론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삼촌은 괜찮아. 몇 밤만 자면 괜찮아질 거야!”
 “몇 밤? 다섯 밤?”
 애경 장군, 즉 김애경이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겨우 무릎께나 올까 싶은 꼬맹이. 노란 원피스와 머리의 노란 리본이 잘 어울린다. 아이를 보자마자 이름 석 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하은.
 김애경의 딸이자 이혼한 주태일의 피붙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자 저절로 주태일에 대한 혐오감과 주하은에 대한 애정이 솟구쳤다.
 ‘누나와 조카라니······.’
 아론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생이별했던 아론이다. 그 후로는 모두 생체 실험을 받아 곤충 인간이 되었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런 아론에게 누나와 조카라는 존재는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심장을 간질거리는 충만감, 편안함, 따스함······.
 맹세코 처음 느껴 본다.
 복잡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몸을 묻었다. 혼란이, 기묘한 감정이 아론을 잡아 끌고 있었다.
 김애경이 호들갑을 떤다.
 “야! 야! 괜찮아? 많이 아파?”
 “아니,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앉혀 줄까?”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김애경이 침대 아래에 설치된 손잡이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대 매트리스의 머리 부위가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앉는 자세가 된다.
 세상이 빙글 돌면서 끔찍한 고통이 재차 몰려온다. 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얻은 지식대로, 내면 깊은 곳에 의식을 침잠시키자 통증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은 현실인가, 꿈인가 하고.
 아픔이 느껴진다고 해서 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구를 점령한 여섯 세계 중에는 현실과 꿈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환상을 구축하는 자들이 많고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시공의 문과 자신이 최후를 맞이했던 상황의 앞뒤를 잘 따져 보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크크크크······.”
 웃음이 나왔다.
 아주 작은 웃음. 조금씩 커졌다. 나중에는 아예 몸을 들썩이며 웃게 된다. 전신이 결리며 아픔이 커졌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쩌렁쩌렁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성공했다!
 최후의 최후에 그저 미끼로 내걸었던 작전이 성공했다!
 시공 회귀.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통쾌한 기분이 작은 가슴을 꽉 채웠다.
 “야, 괜찮아? 왜 또 그래?”
 “삼촌?”
 김애경과 주하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특히 김애경은 침대 옆에 설치된 간호사 호출 단추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아론은 가볍게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니, 김현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 육체의 이름이었다. 기이하게도 아론의 영혼만 시공의 문을 넘어 김현의 육체에 깃든 것이다.
 ‘김현, 애경 장군의 동생······.’
 애경 장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김현이다. 따라서 원판 김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출신, 1990년 출생, 남성, 일반인.
 2018년 초에 성혼 폭주 사건에 휘말렸고 이후 쭉 병원 신세를 졌다. 그리고 2018년 5월에 병원에서 발생한 성혼 침식 사태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병문안을 왔던 주하은도 사망했고, 남동생과 딸의 죽음으로 김애경이 각성하여 영웅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잠깐만.
 김현의 눈이 꿈틀거렸다.
 죽는다고? 2018년 5월에?
 눈을 굴린다. 언뜻 병실 한쪽에 달려 있는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2018년 5월.
 날짜는 알 수 없었다. 일력도 아니고 전자시계도 아니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누나, 오늘이 며칠이지?”
 “날짜는 왜?”
 “그냥, 궁금해서.”
 “5월 4일이잖아. 내일 어린이날이라서 대공원 가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하은이가 화낸다.”
 “삼촌 나빠!”
 주하은이 입을 삐죽거렸다. 병아리처럼 귀여운 모습이지만 그걸 보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2018년 5월 4일, 그 날짜가 갖는 의미가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왔으니까.
 22세기에서 흔히 일컫는 피의 금요일.
 전 세계적으로 첫 번째 대침식이 벌어져 백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했다.
 다시 말해 오늘 김현이 죽는다는 뜻.
 ‘죽는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그런 감정은 진즉에 없애 버렸다. 문제는 기껏 최후의 도전을 성공시켜 놓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는 것.
 ‘왜 하필 오늘이냐?’
 계획대로 1월 1일이었으면 좋았겠지. 막 성혼이 출현했으면서 열여덟 세계가 도래하지 않은 시점이니까. 4개월간 준비하면서 피의 금요일을 대비할 수도 있고.
 하다못해 일주일 전, 아니 하루 전이기라도 했으면······.
 어쩔 수 없다.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대처를 해야지. 김현이야말로 온갖 악조건 속에서 인류 저항군을 꾸려 나갔던 인물 아닌가. 이까짓 시련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다.
 현재 시각, 저녁 7시 55분.
 “빌어먹을.”
 정말로 빌어먹을이다.
 김현이 아는 바에 의하면 피의 금요일은 한국 시간 기준 저녁 8시에 시작된다. 고작 5분 남짓 남은 셈.
 이 와중에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자시계가 07:56을 출력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 순간적으로 계산을 끝냈다.
 “누나.”
 “왜?”
 “나 믿어?”
 “응? 어······ 뭐, 그렇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데없는 말에 김애경이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김애경을 마주 보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 말 잘 들어. 곧 이 병원이 지옥으로 변할 거야.”
 “어······.”
 김애경의 눈에 불신이 떠오른다.
 “너 꿈꿨니?”
 하기야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있을 일을 열거했다.
 “다시 말할게. 내 말 잘 들어. 8시가 되면 병원이 지옥으로 변하고 귀곡성이 울려. 5분쯤 지나면 배에 구멍 뚫린 귀신이 우리 병실로 들어올 건데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지나가거든.”
 “그게 무슨······.”
 “내 말 들으라니까. 어쨌든 그때부터는 행동해야 돼. 20분이 더 지날 때까지 병실에 가만히 있으면 미친 의사가 찾아와서 나도 죽고 하은이도 죽어.”
 “뭐? 야, 너 미쳤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듣고 있던 김애경이 버럭 화를 낸다. 그 바람에 주하은이 놀라 딸꾹질을 했다.
 “엄마. 무서워.”
 울먹이는 주하은을 김애경이 감싸 안는다. 화가 났는지 호랑이처럼 두 눈을 부릅뜨지만 김현은 딱 한 마디만 했다.
 “시작됐어.”
 쿠구궁!
 때마침 천둥이 쳤다.
 기이할 정도로 창백한 벼락이 세상을 가로질렀다. 그로부터 세계가 개변하기 시작했다.
 점차 색을 잃는 세상.
 윤곽이 흐릿해지면서 빛과 그림자가 모호해진다.
 희미한 이명과 두통이 대뇌를 자극했다.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어어?”
 “엄마!”
 당황하는 김애경과 부들부들 떠는 주하은.
 오로지 김현의 두 눈만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 와중에, 예고했던 징조가 제 존재를 설파했다.
 “끼아아악!”
 귀곡성.
 피의 금요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세계가 고정되었다.
 차원의 저편, 혹은 성혼의 힘이 구축한 이면 차원으로.
 유명계(幽冥界).
 이 무채색 세상의 이름이었다.
 
 
 # 유명계
 
 유명, 곧 저승.
 귀신들의 세상이다. 실제 저승과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생명력을 빼앗기고, 종래에는 유령에게 빙의당하여 목숨을 잃게 된다.
 “이, 이게 뭐야?”
 김애경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본다.
 1년만 지나도 영웅 중 영웅으로 성장하고, 원체 담대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그저 일반인.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누나, 나 휠체어.”
 “응? 아, 알았어.”
 손을 내밀자 김애경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김현을 껴안아 침대 옆의 휠체어에 앉힌다.
 그래, 휠체어.
 김현의 눈이 순간적으로 병실 한쪽 이름표를 훑었다.
 [김현]
 [M/27]
 [2018.1.19]
 [척수 손상]
 엎친 데 덮친 격.
 김현은 하지마비 장애인이었다. 몇 달간 재활 치료를 하기는 했으나 혼자서는 일어서는 것마저 버거웠다. 오늘의 지옥을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다.
 끼이익.
 그대로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에서 과도를 꺼냈다. 겨우 몇 시간 전 김애경이 사과를 깎았던 물건이었다.
 “삼촌, 무서워.”
 음영 없는 얼굴로 칼을 꺼내는 게 무서웠는지 주하은이 울먹거린다.
 대답할 여유도 다독일 시간도 없다. 대신 김애경을 보며 말했다.
 “5분 지났어.”
 [으흐흐흐······.]
 거의 동시에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주하은이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김애경이 주하은을 와락 끌어안을 때, 그것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김현이 예고했던 배에 구멍이 뚫린 귀신.
 나이 든 남자 귀신이다. 음침한 회백색 그림자 같은 형체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한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것이 울음을 흘리며 작은 병실 안을 곧장 가로질렀다.
 김애경과 주하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김애경이 주하은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주하은이 꺽꺽대다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 버린다.
 귀신이 병실 안을 지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0초. 그러나 그 10초 사이에 김애경이 10년은 더 넘게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귀신이지. 뭐긴 뭐겠어.”
 여상(如常)스럽기만 한 말투. 김애경이 눈가를 찌푸렸다.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내가 5분 전에 했던 말 기억해?”
 “5분 전에? 설마!”
 김애경의 눈이 커졌다. 5분 전 김현이 자신과 주하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
 반사적으로 딸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게 된다.
 “움직여야 돼.”
 “어디로?”
 “나만 믿어.”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전생의 아론이 가장 존경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애경 장군이다. 당연히 애경 장군이 생전에 남겼던 모든 기록물을 탐독했고, 다른 이들이 애경 장군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몽땅 찾아 읽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애경 장군의 비망록.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토씨 하나까지 다 생각이 났다.
 [우리는 겁에 질려 병실에 숨어 있었다.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이 무서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실수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병실을 벗어났어야 했는데······ 5년 전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당시의 나에게 한마디의 충고라도 남길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 주고 싶다.
 도망치라고.]
 “꺄아아악!”
 바깥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벌써 8시 7분.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 8시 25분까지 병실에 남아 있다간 미친 의사에게 습격을 받는다.
 “밖으로 나가자.”
 “밖으로?”
 “응. 여기 있으면 나도 하은이도 죽어.”
 김애경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기절해서 안겨 있는 주하은을 한 번 내려다보고 씩씩하게 일어났다. 김현은 그런 김애경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하은이는 나한테 맡겨.”
 “알았어.”
 셋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김애경이 탄식을 했다.
 “이건 대체······.”
 평소 보던 단조로운 광경은 온데간데없었다.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복도가 곡선으로 뒤틀어져 달팽이 껍질 보듯 변형되었다. 왼쪽은 끝없이 낙하하여 무저갱으로 통하고, 오른쪽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나마 오른쪽에는 희미한 빛이 있어 끄트머리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자연스럽게 김애경이 오른쪽으로 발길을 튼다.
 원래 환자 휴게실이 있고 병원 출구로 향하는 방향.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김현은 오른손을 들어 제지했다.
 “누나, 반대야.”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응.”
 “끼아아악!”
 김현이 말을 하기 무섭게 또 절규가 터졌다.
 복도로 나와서 들으니 확실하다. 왼쪽, 지금은 무저갱으로 연결된 곳처럼 보이는 간호사 스테이션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김애경이 몸서리를 쳤다.
 “저길 가자고?”
 “응. 살길은 저곳밖에 없어. 저기로 가야 돼.”
 “알았어.”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어쨌든 김현의 의견에 따른다. 김애경도 바보는 아니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길게 입씨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경사가 가팔라진다. 처음에는 조금 가파른 정도였던 게 거의 수직까지 떨어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시각적으로는 절벽을 내려가는 것처럼 보여도 꼭 평지를 걷는 것처럼 전진한다는 점이다.
 유명계가 가진 특성 중 하나. 감각과 실제 공간과의 괴리. 특히 시각을 믿어선 안 될 때가 너무나 많다.
 “이거 이상하네······.”
 주변에 빼곡해야 할 병실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기괴하게 일그러진 무저갱 복도만 펼쳐질 뿐. 그나마 시커먼 어둠에 휩싸여서 근방 수 미터 너머 물체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누나.”
 “왜?”
 “호신술 할 줄 알지?”
 “당연하지. 나 유도랑 권투 오래 배웠잖아.”
 “잘 알지. 아주 잘 알지. 그걸 곧 써먹을 때가 올 거야.”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쨌든, 알았어.”
 원역사에서 김애경이 끝끝내 살아남았던 이유 중 하나.
 김애경은 똑똑하기도 똑똑하고 신체적 능력도 발군이었다. 아무 성혼 없이도 신체 건장한 성인 남자 둘쯤은 찜 쪄 먹을 정도였으니까.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덕택에 주위의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허황한 바람 소리까지······.
 꿀꺽.
 김애경이 별안간 침을 삼켰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소음이 뚝 끊어져 버린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
 김애경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 뭐야?”
 “조심해! 누나, 앞!”
 “어어?”
 무언가 나타났다.
 바람에 펄럭이는 희끄무레한 어떤 것.
 화악 펼쳐진다.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며 단번에 김현을, 아니 김현이 안은 주하은을 덮쳐 왔다.
 어둠에 잠긴 가운데, 유리알 같은 외눈과 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서늘하게 뇌리에 박혔다.
 “안 돼!”
 김애경이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놀란 와중에도 손을 내민다. 십 년 넘게 수련한 그대로, 덮쳐 오는 인영의 멱살을 붙잡고 크게 회전시켰다.
 뻐억!
 “커헉!”
 짧은 신음이 토해졌다.
 바닥에 처박힌 남자가 버둥거렸다. 타격이 컸는지 입에서 게거품을 줄줄 흘린다. 김애경이 남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머, 선생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떡 진 머리에 여드름투성이 얼굴, 그리고 의사 가운. 다름이 아니라 김현의 병동 주치의였다. 당장 7시쯤에 와서 지친 얼굴로 어디 안 좋은 곳 없냐고 회진을 하고 가지 않았나.
 “이걸 어째!”
 생사람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김애경이 부산을 떤다. 급히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할 때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걸 보고 김애경이 흠칫 놀랐다.
 남자의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으니까. 검은자위는 사라진 가운데 흰자위 가득 까만 핏줄이 서 있었다. 더구나 김애경의 손이 허리에 닿는 즉시 입을 크게 벌리고는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다.
 “크아악!”
 “뭐······.”
 김애경이 뻣뻣이 굳는다. 연속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궁지에 몰리고야 만 것.
 그걸 놓칠 리가 없다. 남자가 용수철 튀어 오르듯 일어난다. 두 손으로 김애경의 양어깨를 꽉 붙잡고 허연 목줄기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 순간 김현이 움직였다.
 푸욱.
 아까 챙겼던 과도를 정확히 남자의 목에 박아 넣은 것이다. 근력은 부족하고 자세도 좋지 못했지만 그걸 상쇄하는 경험이 김현에게 있었다.
 남자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몸이 파르르 떨린다.
 입에서 피 섞인 침을 뚝, 뚝, 흘리더니 비로소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김애경과 여전히 과도 손잡이를 쥐고 있는 김현을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나는 무슨 짓을······.”
 그리고 침묵.
 앙상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거의 김애경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김애경이 무심코 남자를 안았다가 비명을 지르며 저리 밀어냈다.
 “꺄아아아악!”
 “왜 그래?”
 “왜, 왜냐니, 너, 사, 사람을 죽였잖아!”
 김애경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평소에는 호랑이처럼 자신감 넘치던 눈동자는 이미 없다. 있다면 겁먹은 사슴 한 마리뿐.
 “넌 아무렇지도 않아? 너, 내 동생 맞아?”
 방금 전 경험이 섬뜩하긴 했나 보다.
 김현은 어스름하게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냐고?
 가만히 손을 들어 본다. 과도를 찔렀던 바로 그 손이다. 어느새 피에 젖었고, 김애경이 그러하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영혼은 아론의 것이지만, 육체는 김현의 것이니 생전 처음 겪는 살인에 반응했나 보다.
 비로소 김애경의 눈빛이 진정된다. 조금은 안도하면서, 대신 설명을 요구하는 기색으로 김현을 주시했다.
 그럴 시간은 없다. 대신 널브러진 남자를 가리켰다.
 “저거 봐.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응? 어?”
 남자를 돌아본 김애경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저기 넘어진 시체를 보라. 냄비 안에서 끓는 죽처럼 부글부글 거품을 쏟아 내지 않는가. 그 거품이 시체를 뒤덮더니 멀건 액체처럼 변해 사라졌다. 종래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의사 가운과 면 셔츠, 바지 등등 옷가지 종류만 남겨 놓고서.
 심지어 김현의 손에 묻었던 피도 마찬가지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놀랄 노 자.
 김애경이 두 눈을 비볐다.
 “내가 헛것을 봤나?”
 “헛것 아냐. 현실이야. 사람이 아니긴 해도.”
 실은 거짓말이다.
 남자는 인간이며 김현의 병동 주치의가 맞았다. 단, 10여 분 전 유령에게 빙의당하기 전까지만.
 유명계가 이래서 무섭다. 이 침식된 세계에서는 유명계의 유령들이 호시탐탐 산 자의 육신을 노린다. 그리하여 정신력이 낮아지고 한계 이하로 떨어지면 빙의하여 괴물로 태어난다.
 ‘하은이한테 별일이 없어야 하는데······’
 김애경 모르게 슬쩍 하은이를 내려다보았다.
 원역사에서도 그랬다.
 지금 시점에서 기절한 하은이는 미친 의사의 습격에 치명상을 입고 얼마쯤 후에 빙의당하여 소악마로 변모한다. 김애경은 어떻게든 하은이를 구하려 했으나 역부족.
 일단 치명상은 피했지만 어린아이는 원체 유명계의 빙의에 저항력이 낮다. 최대한 빠르게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누나, 저거 좀 뒤져 봐.”
 “저걸? 왜?”
 “나 믿는다고 했잖아.”
 “끙······ 나중에 다 얘기해 줘야 된다.”
 “그건 걱정 말고.”
 생각 같아선 직접 하고 싶지만 하지마비 신세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확인하긴 어렵다.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사 가운과 옷가지를 뒤적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거 이상하네.”
 “왜?”
 “이거 봐.”
 김애경이 물건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안경.
 병동 주치의가 쓰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1시간 전만 해도 평범한 물건이었는데 지금은 기이하게 변화했다.
 희한하게 한쪽 안경알이 흐릿한 은빛을 뿜어내는 것. 자연히 이 무채색의 세상에서 안경알 홀로 도드라진다.
 “무슨 느낌 없어?”
 “무슨 느낌?”
 “아무것도 아냐.”
 은빛으로 물든 물건, 저게 바로 성혼이다.
 성혼은 각자 어떤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 성향이 접촉하는 자의 성향과 맞으면 특별한 느낌을 선사한다. 손가락에 전기가 통하거나, 속이 메스꺼워지거나,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식으로.
 안경알의 성혼은 김애경과는 성향이 안 맞는 듯하다. 비망록에서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쳐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 것.
 “나한테 줘 봐.”
 “여기.”
 김애경이 손을 뻗어 안경알을 건넨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드는 찰나 찌릿한 느낌이 전신을 관통했다.
 적합 성혼!
 손만 대도 흡수될 정도로 합치되는 성향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강력했다.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채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흡수해도 될 정도로.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안경알을 입으로 가져가서는 힘껏 깨물었다.
 까드득!
 이게 무슨 짓이냐고?
 간단하다.
 성혼을 흡수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
 먹으면 된다.
 무엇이든 좋다. 생물이든 돌멩이든 안경알이든 씹어 먹기만 하면 소화되어 자연스럽게 흡수가 된다.
 그 과정에서 입이나 식도, 위장에 상처가 나는 건 어디까지나 사소한 문제. 위장으로 넘어가는 즉시 성혼을 담은 물체가 승화하면서 순수한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김현은 안경알을 아주 꼭꼭 씹었다. 거의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다. 덕택에 입 안이 넝마처럼 변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야! 너 미쳤어?”
 김애경이 놀라 펄쩍 뛰었다.
 예상했던 반응. 플라스틱 조각을 꿀꺽 삼키며 밀어 달라 손짓하자 김애경이 투덜거린다.
 “아 진짜. 나중에 설명 제대로 안 해 주기만 해 봐.”
 끼기기긱.
 휠체어 바퀴가 돌아가며 거친 신음을 토했다. 마찰음을 자장가 삼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배 속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른다. 정신이 혼몽해진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불쑥 어떤 개념들이 떠올랐다.
 아직은 모호한, 태초의 알과 같은 상태.
 다만 이때 김현의 눈이 빠질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저절로 눈물이 나면서 세상이 시커먼 어둠으로 물든다. 이 현상에서, 김현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냈다.
 ‘투시 종류구나.’
 나쁘지 않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건 병법의 기본이니까. 이계 기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통증이 점차 심해진다.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통증이지만 견딘다. 아니, 내부를 또렷이 관조한다. 자연히 혼돈의 얼룩처럼 구겨져 있던 성혼이 차츰 제 모습을 드러냈다.
 네모난 창이요, 글자이면서 하나의 틀.
 익숙했다. 묘한 그리움을 느끼며 틀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따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품에 안은 하은이를 내려다보니 그제야 흐릿한 글자 같은 게 틀 안에 맺힌다.
 
 ====
 <진단>
 [이름] 주하은 [성별] 여성 [나이] 4
 [건강] 양호 [상태] 기절
 [순환] 정상 [호흡] 정상 [소화] 정상 [배설] 정상
 [근육] 정상 [골격] 정상 [혈액] 정상 [분비] 정상
 [정신] 미약 [중추] 정상 [신경] 정상 [생식] 정상
 [양안] 정상 [피부] 정상 [이비인후] 정상
 ====
 
 진단 성혼······.
 김현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 습격했던 미친 의사의 속사정이 추측됐기 때문이다.
 분명 최근에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남몰래 눈물도 흘렸겠지. 그 진한 감정이 안경알에 깃들었고 성혼 침식 사태를 맞아 새로운 성혼을 잉태했다.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훌륭한 의사가 됐을 수도 있는 인물. 하지만 하필 정신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유명계에 접어들었으니 살아남기란 처음부터 그른 일이었다.
 ‘이건 필요 없어.’
 의사들에겐 보물과도 같은 성혼이지만 전투에는 쓸모가 없다. 차라리 전생에 쓰던 성혼으로 변형하는 게 낫겠다.
 정신을 재차 집중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완전히 끊었다.
 약한 육체와 삐걱거리는 소음이 방해했으나 사뿐히 무시. 전생에서는 하반신이 실시간으로 갈리면서도 새로운 성혼을 각성했던 김현이다. 이것쯤은 웃으며 치워 버릴 수 있었다.
 틀이 변형된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뚜렷하게······.
 아울러 틀 안의 개념과 운명까지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변형을 마친 다음 틀 안에 자신의 손을 비춰 보았다.
 
 ====
 <능력>
 [이름] 김현 [성별] 남성 [나이] 27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하지마비
 [근력] 6 [체력] 6 [민첩] 7 [감각] 9
 [혼력] 8 [의지] 8 [통찰] 8 [위엄] 7
 [성향] 요정, 환수
 [성혼] 별의 관찰(요정, 3★)
 ====
 
 별의 관찰!
 성공적인 재현이다. 3성 등급이면 첫 성혼치고 등급도 높았고. 다만 전생에 각성했던 [기계신의 주시] 성혼과는 조금 다른 성싶었다. 아마 육체의 성향 차이 때문이겠지.
 본래대로라면 몇 가지 촉매와 장치를 동원해야 이 정도 결과를 얻을 수 있으나, 김현의 정신력이 워낙에 단단한 까닭에 이런 성과를 낸 것. 김현 외에 누가 있어 1성짜리 성혼을 재조립하여 3성 등급 성혼을 각성할 수 있을까?
 ‘요정 성향이구나.’
 전생에서는 충왕, 기갑 성향이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 다르다. 뭐, 어쨌든 좋은 일이다. 김현이 아는 지식을 이용하면 성향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나저나 능력치가 아주 처참하다. 근력과 체력은 6이고, 제일 높은 능력치가 9에 불과하다니? 평범한 성인 남자가 10 정도 판정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약하기 짝이 없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휠체어를 미는 김애경의 팔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히 틀 안의 글자들이 뭉개졌다가 다시 맺혔다.
 
 ====
 <능력>
 [이름] 김애경 [성별] 여성 [나이] 32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11 [체력] 12 [민첩] 12 [감각] 9
 [혼력] 13 [의지] 15 [통찰] 12 [위엄] 11
 [성향] 거신, 시원
 [성혼] 없음
 ====
 
 대단하다.
 의지가 15······ 그것도 일반인인 지금 이 정도면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성향도 그렇지. 늙은 세계인 거신계(巨神界)와 어린 세계인 시원계(始原界)를 동시에 담지 않았나. 서로 떨어져 있으면 그냥 강하기만 한 힘이지만 같이 휘두르면 처음과 끝, 시작과 종말을 함께 갖는 어떤 것이 된다.
 “저, 저기요!”
 누군가 둘을 소리쳐 불렀다. 뭔가 해서 보니 간호사. 귀신 석상처럼 일그러진 간호사 데스크 뒤에 숨어서 김현과 김애경을 보고 있었다.
 “어?”
 그제야 김애경이 탄성을 지른다. 시야가 워낙 좁은 탓에 간호사 스테이션에 도착한 것을 지금 깨달은 것.
 “정신 차려.”
 살짝 핀잔을 주고 간호사를 확인했다.
 음영 없는 얼굴. 두 눈이 불안하게 떨린다. 그리고 발밑에 옅은 그림자가 끼어 있었다.
 유령도 아니고 빙의되지도 않았다는 뜻.
 “안녕하세요, 이세희 선생님.”
 아는 사람이라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몸서리치도록 평온한 말투에 이세희가 겁먹은 기색을 흘린다.
 “어······ 김현 님 맞으세요?”
 “맞습니다.”
 빠르게 주위를 확인.
 아니나 다를까.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다.
 본래 간호사 셋이서 근무하던 곳이다. 그 셋 중 하나만 살아남았고 둘은 시체가 되었다. 그것들을 확인한 다음에야 날카로운 피비린내가 코끝으로 파고들었다.
 “우욱!”
 김애경이 한쪽 벽에 손을 짚고 구역질을 했다. 아까 남자의 경우엔 피도 함께 증발하면서 피비린내가 옅어졌으나,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아 비위를 자극했던 것.
 반면 김현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여기로 올 때부터 이와 같은 상황을 예측했으니까.
 ‘미친 의사가 여기서 나왔지······’
 병실에서 들었던, 그리고 막 복도로 나왔을 때 들었던 비명이 바로 간호사들의 것이었다. 이세희는 운 좋게 액운을 피했으나 원역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미친 의사에게 살해당하여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연히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꽤나 인재였다.
 
 ====
 <능력>
 [이름] 이세희 [성별] 여성 [나이] 26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7 [체력] 9 [민첩] 10 [감각] 11
 [혼력] 12 [의지] 12 [통찰] 11 [위엄] 10
 [성향] 천상
 [성혼] 없음
 ====
 
 천상 계열 성향!
 그것만으로도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된다. 흔하디흔한 성스러운 빛 성혼만 하나 얻어도 유령들을 간단히 퇴치할 수 있으니까.
 자연히 질 좋은 보급품 보듯이 이세희를 보게 되었다. 그게 무서웠는지 이세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그게······.”
 “별일 없으면 저희랑 같이 가시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는데, 서로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름 사교적으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세희가 오히려 더 겁을 집어먹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니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슬그머니 물러서는 이세희. 곁눈질을 하여 복도 저편을 살핀다. 여차하면 도망치려는 생각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벽을 뚫고 목과 팔다리가 꺾인 귀신 하나가 튀어나온 것. 공교롭게도 이세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꺄아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
 귀신이 히죽 웃는다. 눈을 굴리며 이세희 앞으로 날아오더니 위협하듯 입을 쩍 벌렸다.
 다 썩은 치아 사이로 시커먼 목구멍이 드러난다. 하필이면 목젖 너머에 훤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세희가 비틀거리더니 입에 거품을 물었다.
 “으으으······.”
 가지가지 한다.
 김애경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현은 나직이 혀를 찼다. 아무리 귀신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이런 하급 유령에게 겁을 먹으면 어쩌자는 건가.
 끼리릭.
 의도적으로 휠체어 바퀴를 힘껏 굴린다. 거친 소음이 일그러진 세계를 때렸다. 유령이 김현을 돌아본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90도로 고개를 꺾은 채 끄어억 하고 웃는다. 괴이한 미소, 번뜩이는 눈이 어우러져 음습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주 보며 비웃어 주었다.
 물리력도 못 쓰고, 빙의도 못 하는 최하급 따위가 무슨? 이것들은 일종의 배경 같은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마음만 제대로 지키면 아무 짓도 못 하고 물러난다.
 [으흐흐흐······.]
 같잖게 보는 마음을 느꼈나 보다. 유령이 한 번 흐느껴 울고는 휙 사라졌다. 오로지 희미한 메아리만 흔적처럼 남았다.
 “으으으······.”
 이세희가 간호사 데스크에 몸을 기댔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게 용했다.
 하지만 마냥 그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휠체어 바퀴를 굴려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옆까지 접근했는데 반응이 없어서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어 주었다.
 “아야! 왜 그래요?”
 “정신 좀 차려요. 누나도 이리 와.”
 “알았어.”
 김애경이 파리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할 말이 많다는 눈으로 김현을 보더니 입술을 짓씹는다.
 “이것도 네가 알던 거였어?”
 “당연하지.”
 “후, 좋아. 나중에 들을 게 또 늘었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비망록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나가는 방법은 단 하나, 병원의 중심에 위치하는 성혼의 핵을 제거하는 거였다. 특수한 성혼이나 장비가 있다면 외곽에 구멍을 뚫어 탈출도 가능하나 지금으로선 선택이 불가능했고.
 길은 안다. 비망록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이 상태로 성혼의 핵에 접근해 봐야 죽도 밥도 안 된다. 21세기의 여러 매체에서 다루듯, 그런 중요한 물건에는 지킴이가 딸려 오기 때문이다.
 “선생님. 기계실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기, 기계실은 왜요?”
 “필요해서요.”
 원역사에서 김애경은 첫 성혼을 병원의 기계실에서 얻었다. 아쉬운 점은 당시에 이미 김현과 주하은을 잃은 뒤라 반쯤 미친 상태에서 병원을 헤매다 기계실에 도달했다는 점. 그래서 비망록에 상세한 정보를 남기지 못했다.
 간호사인 이세희라면 알겠지. 비록 이 세계가 괴이하게 변형되긴 했어도 갈림길은 근본이 되는 병원 건물을 따르니 더듬어 찾아가면 도달할 수 있다.
 이세희가 새하얀 얼굴로 김현을 본다. 파리한 기색의 김애경을 보았다가, 다시 무덤덤한 김현을 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김현 님은······ 김현 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그렇잖아요. 지금, 지금······.”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물음.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그럼 울까요?”
 “네?”
 “선생님. 주위를 둘러보세요. 지금 상황이 정상적으로 보입니까?”
 손가락을 한 바퀴 크게 돌린다. 이세희의 두 눈이 손가락을 따라 왔다.
 두말할 것도 없다. 세상 전체가 무채색으로 변해 있지 않은가. 이걸 보고도 큰일이라고 느끼지 못하면 그건 바보 천치다.
 “하지만, 하지만······.”
 이세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났을 때 흔히 보이는 반응, 현실 부정.
 입씨름할 시간이 없다. 김현은 오른손 검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만. 양자택일하세요. 저희랑 같이 가실 겁니까, 따로 행동하실 겁니까?”
 “저는, 저는······.”
 “따로 행동하신다고요? 알겠습······.”
 “같이 갈게요!”
 이세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고는 스스로 자기 목소리에 놀란 듯 제 입을 틀어막는다.
 김애경이 김현에게 눈빛을 보낸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남매라 그런지 눈빛만 봐도 상대 마음을 아는 모양이다. 내심 신기해하면서도 품에 안은 하은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하은이가 걱정이야.”
 “하은이는 또 왜?”
 “아까 봤던 그 의사 말이야. 왜 그렇게 됐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유령은 심신이 미약한 상태의 사람에게 빙의해서 괴물로 변하거든. 지금 하은이가 그 상태잖아.”
 김애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 보았던 미친 의사의 모습이 하은이의 여린 몸 위에 겹쳐진다. 칼에 찔리고 멀건 액체로 변해 사라지던 마지막 장면까지도.
 “안 돼!”
 발작하듯 소리쳤다.
 “가자, 얼른!”
 급히 김현의 휠체어를 잡아끈다. 마음만 급해서 휠체어 바퀴가 잘 안 움직일 정도.
 손을 뻗어 김애경의 팔을 콱 움켜쥐었다. 제법 아플 텐데 미동조차 없다. 휠체어를 들다시피 하여 잡아당기는 걸 한마디로 제압했다.
 “조용.”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
 “뭔가 있어.”
 긴장감이 부풀어 오른다.
 김애경도 이세희도 말이 없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정면을 주시할 뿐.
 그러나 유명계의 제한된 시야에서 뭘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2미터만 벗어나도 깜깜이가 되니까.
 김현이 뭔가 있다는 알아챈 건 순전히 별의 관찰 성혼 덕분이었다.
 [□▲◎]
 방금 전 어둠 속을 본 순간 네모난 틀이 꿈틀거리며 글자를 만들려고 했다. 비록 어둠 탓에 바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람이든 귀신이든 뭔가 있다는 뜻.
 품에 숨겨 둔 과도에 손을 가져갈 때 어릿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 있수?”
 다소 걸쭉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
 “하아.”
 “휴우.”
 김애경과 이세희가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잠시 후 어둠을 뚫고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짜리몽땅한 몸. 김현도 아는 사람이었다. 저번 주엔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었지. 붙임성 좋게 병원 이곳저곳을 쏘다녔고.
 이세희가 반가워하며 소리쳤다.
 “박경자 님!”
 “이 선생님? 살아 계셨네요! 전 저 혼자 남은 줄 알고······.”
 박경자의 얼굴에도 또렷하게 안도한 기색이 떠오른다. 반면 김현은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 같아도 별의 관찰 성혼이 그게 아니라고 속삭였으니까.
 [빙의귀]
 네모난 틀을 통해 보이는 괴물의 이름. 얼마 전 조우했던 미친 의사와 동류였다. 박경자라는 저 여자도 유령에 씌어 괴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
 흑백의 세상이라 김애경과 이세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박경자가 입은 환자복을 잘 보면 소매 끝과 정면에 치덕치덕 얼룩이 묻어 있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검은색이 아닌 적색이었을 얼룩이.
 그러나 여기서 감정을 내비치는 건 하수. 이성을 유지하는 빙의귀라면 명백히 상위의 개체 아닌가.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필패다.
 김현도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 김씨 총각! 그러게. 그 애가 조카야?”
 박경자가 김현이 안고 있는 하은이를 보았다. 이내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어쩌다 이런 어린애까지 휘말렸대. 아이는 괜찮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박경자. 얼굴에 안쓰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인지 엄마인 김애경도 별로 경계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뻗어 오는 두 팔.
 고개를 숙인다. 셋의 시야에서 얼굴이 빗겨 나자 비로소 본색이 나타난다. 시야의 사각에서 입을 한껏 벌린다. 인간의 것이 아닌, 상어의 것과 같은 치아를 드러내며 그대로 하은이를 물어뜯는다.
 “크아아악!”
 그러나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목덜미를 엄습한 것. 척추를 관통하는 충격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난다.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가져가니 작은 과도의 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박경자가 타는 듯한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어떤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눈.
 “너, 너!”
 이를 갈지만 빙의귀의 특성상 육체가 손실되면 버틸 도리가 없다.
 무릎을 꿇는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차츰 무너져 내렸다.
 잠시 침묵.
 “당신!”
 이세희가 불을 토하듯 소리 질렀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 미쳤어?”
 반면 김애경은 조용하다. 짚이는 게 있는지 입을 닫고 박경자의 시신만 노려본다.
 이세희가 발작하듯 이를 갈았다. 손을 뻗어 어깨를 잡는데 원체 앙상한 몸이라 꽤나 아팠다.
 “경찰에 신고할 줄 알아! 이 미친 새끼야! 어떻게 사람을 죽여? 미친 새끼! 개새끼! 씨발 새끼!”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아예 자기 머리까지 쥐어뜯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 김애경이 이세희의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
 “선생님,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저 새끼 보호자라고 지금 저 새끼 편드시는 거예요?”
 “편드는 게 아니라요, 저길 보세요.”
 “뭘요?”
 “저게 인간 같아요?”
 그 의미심장한 말에 이세희가 움찔했다. 이어 김애경이 가리키는 대로 박경자의 시신을 주시했다.
 역시나 시체가 부글부글 끓는 게 보인다. 금세 멀건 액체가 되어 사라지는 장면도 함께. 남은 것이라곤 역시 옷가지와 잡동사니가 전부였다.
 이세희의 눈이 흔들렸다. 김애경이 이세희를 부득불 끌고 가서는 잔해를 뒤졌다. 잠시 후, 환자복 속에서 작은 은빛 가죽 지갑을 하나 발견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간단해요. 사람이 아닌 건 죽으면 물로 변해요.”
 “물로 변한다고요? 말도 안 돼!”
 “눈으로 봤잖아요? 현실에서 눈 돌리지 마세요.”
 역시 애경 장군은 애경 장군. 상황 적응이 빠르다.
 이세희가 입을 닫았다. 머리를 휙휙 돌려 김현과 김애경을 번갈아 보는 게 아직도 혼란스러운 모양.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 볼래?”
 “응, 여기.”
 가죽 지갑을 받아 들고 차분히 관찰했다. 네모난 틀 안에서 몇 개의 글자가 꾸물거리며 일어난다.
 [대지의 인내(거신, 1★)]
 대지의 인내······.
 김현도 아는, 상당히 좋은 성혼이다. 1성 등급에서는 체력과 지구력이 조금 증가하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행성을 부술 일격도 버틸 정도가 되니까.
 다만 지금 상황에서 쓰기는 아쉽다. 유명계의 괴물들은 물리적 공격에 강점을 가진 경우가 드무니까. 차라리 원역사대로 공격력을 확보하는 게 낫지.
 계획대로 가자, 계획대로.
 “가자.”
 “응.”
 김애경이 다시 휠체어를 끈다. 그러면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김현을 보는 게 가죽 지갑을 만졌을 때 기이한 감촉을 느꼈나 보다.
 다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설명해 주리라 기대한 것. 하지만 여기 그럴 인내심이 없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예요?”
 이미 기가 죽어 기어들어 가는 말투.
 무시할까 하다가 온정을 베풀어 주기로 했다.
 “냄새요.”
 “냄새?”
 “네. 그 괴물이 가까이 올 때부터 피 냄새가 확 났어요.”
 “아······.”
 그제야 머리를 끄덕인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알려 주지, 하고 꿍얼거리지만 사실 불가능했던 일이다. 빙의귀가 당장 눈치를 채고 본색을 드러냈을 테니.
 구불거리던 복도가 길게 앞쪽으로 뻗었다. 한쪽에는 태산처럼 솟은 탑이, 또 한쪽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세희가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엘리베이터 타야 되는데 이상하네요.”
 “엘리베이터 타는 건 자살행윕니다. 원형 통로 있죠? 거기로 가죠.”
 원형 통로는 바로 정면이다. 쭉 뻗은 복도. 이세희가 망설이다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길이 이상한데요······.”
 “괜찮습니다. 원래 세계가 침식되면 공간 왜곡은 당연히 일어나요. 갈림길만 제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침식이요? 공간 왜곡?”
 당연히 설명해 주질 않았다. 밀어 달라고 손짓만 하자 이세희가 한숨을 쉬고는 휠체어를 힘껏 밀었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바닥 위를 휠체어가 쭉쭉 나아간다.
 다행히 빙의귀를 더 만나는 일은 없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귀신들만 몇 번 마주쳤을 뿐이다. 처음에는 이세희가 찢어져라 비명을 올렸으나 김애경이 담담하게 반응하는 걸 보고는 결국 적응했다. 세 번째쯤 마주쳤을 때에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여유까지 부렸다.
 “여기서 오른쪽이요.”
 “이번에는 올라가네요.”
 “네. 왼쪽 문은 1층으로 나가는 문이고 오른쪽 문이 내려가는 문이었으니까요. 이렇게 가는 거 맞죠?”
 이세희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김현은 이 길이 맞는다고 대답해 주고는 서두르자고 손짓을 했다. 머릿속으로는 비망록의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긴 복도에 있었다. 비통함을 안고서, 쓰라림을 뼈에 새긴 채 달리고 또 달렸다. 기이하게도 그곳에서는 괴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긴 복도와 올라가는 길, 낭떠러지, 평원을 지나자 거대한 맥동이 나를 불렀다······.]
 기계실은 지하 4층에 있다. 김애경은 그곳에서 첫 성혼을 얻었다. 10년 뒤에는 7성 등급으로 성장하는 거신 성향 성혼, 황혼의 일격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제 여유를 찾았는지 이세희가 묻는다. 김현이 입을 다물고 있자 김애경도 슬쩍 거들었다.
 “나도 궁금하다. 왜 다른 사람들은 볼 수가 없지?”
 “갈렸으니까.”
 “응?”
 “차원이 분할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자세한 건 나중에 가르쳐 줄게.”
 김현이 입원한 병원은 나름 300병상을 넘는 상당한 규모의 종합병원이다. 당연히 입원한 환자도 많고 방문한 보호자, 그리고 근무 중인 간호사와 의사, 직원도 많았다.
 그럼에도 사람을 보기 힘든 건 간단하다. 말 그대로 차원이 나뉘면서 조각조각 난 것. 같은 차원에 있는 자들만이 서로 만날 수 있다.
 예외가 있다면 괴물들. 유명계의 주민이 되면 분할된 차원을 자유롭게 오고 가게 된다. 산 자의 기척을 느끼면 순식간에 추적하여 쫓아오는 것.
 단호한 어투에 더는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왜곡된 공간을 걷는다. 그리하여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꾸아앙······.
 멀리서 거대한 울림이 벽을 타고 다가왔다.
 “어······.”
 김애경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오르가슴을 느끼기 직전처럼 강렬한 자극을 느낄 테니까. 심장은 두근거리고 열이 달아오르면서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릴 터. 지금부터는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왜 이러지?”
 김애경이 혼란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앞을 한 번 보더니 스스로의 뺨을 찰싹 때린다. 이어 김현이 안고 있는 딸, 하은이를 내려다보고 눈을 부릅떴다.
 살짝 검어졌던 얼굴이 도로 회백색으로 변한다. 성혼의 유혹을 스스로 떨쳐 버렸다는 뜻. 김현은 솔직히 말해서 감탄했다. 합치 성혼의 매혹을 거부한다는 건 보통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누나, 참을 필요 없어.”
 “뭐? 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 말에 김애경의 얼굴이 설핏 풀린다. 그것도 잠깐, 단호하게 쳐 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어떤 것에게 휘둘려서가 아니라.”
 “그럼 그렇게 해.”
 한발 물러섰다. 김애경의 말이 맞으니까.
 그저 성혼에게 매혹되어 흡수하는 것과 자신의 중심을 단단히 지키면서 흡수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조금은 흐뭇한 기분이 되어 김애경을 보았다.
 아이돌을 보는 듯한 눈빛에 김애경이 미쳤냐는 눈치를 준다. 그 놀랍도록 친누나다운 반응에 그저 웃고 말았다.
 기계실에 가까워졌다. 이제는 세계 전체가 울렸다. 어둠으로 가득 찬 복도를 지나치자 웅혼한 은빛이 온통 쏟아진다.
 “앗!”
 이세희가 탄성을 질렀다.
 정면.
 그것이 있었다.
 거대한 심장.
 무채색의 세상에서 홀로 밝게 빛나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그것.
 원래 병원 건물보다 더 큰 것 같다. 사람의 심장을 확대한 모양새로 세차게 박동했다. 한 차례 뛸 때마다 세계 전체가 밝아지면서 기이한 힘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이건 대체······.”
 김애경이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별거 아니다. 성혼의 침식이 일어나기 전까지 저 심장은 일개 발전기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이 발전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사람의 생명이 묻고 눈물도 서렸다. 그 한 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3성급 성혼으로 변모한 것이다.
 김애경의 눈이 심장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처음 지하 4층에 들어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매혹을 느끼고 있겠지.
 “후우.”
 짧은 한숨.
 그것으로 매혹을 훌훌 털어 버렸다. 어느새 안색이 창백해진 하은이를 한 번 보고는 김현에게 묻는다.
 “내가 뭘 하면 돼?”
 “그냥 가서 저거 만져. 그러면 돼.”
 “그게 전부야?”
 “응. 손대고 나면 몸이 뜨거워질 텐데 한 가지를 강하게 소망해야 돼.”
 “뭘?”
 “글쎄. 누나가 가장 바라는 걸 원해야지.”
 일부러 구체적인 개념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상상력과 간절함을 제약하여 독으로 작용할 테니.
 “후웁.”
 긴장되는지 심호흡을 한다.
 “다녀올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김애경.
 이세희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까요?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저희 둘이라면 몰라도 누나는 괜찮아요.”
 과연 어떤 성혼을 얻을까.
 심장으로 형상화된 성혼은 3성 등급, 황혼의 일격이다. 원역사에서 김애경은 황홀경에 빠진 상태로 심장에 접촉하여 그 성혼을 얻었다. 하지만 김현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강력한 정신력으로 성혼을 재구축하여 강화 및 변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김애경은 원역사와 달리 딸 주하은을 뒤에 둔 채 심장에 접촉한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두고 봐야 알 일.
 김현은 아릿한 기대감을 품고서 김애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미숙한 영웅이자 마음속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의 등을.
 이윽고 김애경이 심장에 손을 댔다.
 빛이 터졌다.
 
 
 # 그들의 각성
 
 그것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시신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심상에 직접적으로 그려지는 빛. 그래서 무채색이 아닌 본연의 색채를 뿌려 댄다.
 용광로와 같다.
 어쩌면 황혼을 보는 듯하다. 긴 후광을 드리운 채 스스로의 존재를 사방에 우짖고 있었다.
 거대한 화염이 김애경의 주변을 불태웠다. 강렬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이세희가 급히 자기 얼굴을 가렸지만 김현은 뜨거움을 감수하고 김애경을 지켜보았다.
 ‘힘내십쇼, 애경 장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배 사령관인 아론이 되어 김애경을 응원했다.
 보여 달라고.
 황혼의 일격도 훌륭한 성혼이지만 한층 강화했으면, 혹은 변형하여 더 대단한 성혼을 얻었으면 했다. 그래서 스스로의 클래스를 증명했으면 싶었다. 그래야 간신히 헤쳐 나갈 정도로 앞으로 놓인 길은 험하고도 험하니까.
 김현의 염원이 닿은 걸까. 붉기만 하던 색채가 점차 일렁이기 시작했다.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이어 은은한 하늘색으로 물든다.
 성공이구나.
 저절로 달뜬 미소가 떠오른다.
 보아하니 강화까지는 안 된 모양이다. 대신 성혼의 계열이 180도 반전된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번 성혼의 변형에 성공한 이상, 앞으로 성혼을 흡수할 때 더욱 쉽게 재구축하여 각성할 테니.
 무엇보다 기쁜 것은 김애경 스스로 자신의 정신력을 증명했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쾌거였다.
 “하아아······.”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푸르게 일렁이던 빛이 소용돌이치면서 김애경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김애경이 비틀거린다. 숫제 한쪽으로 쓰러지기까지.
 털썩!
 “보, 보호자분!”
 이세희가 화들짝 놀라 김애경에게 달려간다. 반대로 김현은 느긋하기만 했다. 천천히 휠체어 바퀴를 굴려 다가가며 김애경의 상태를 확인했다.
 딱 한 항목이 바뀌었다.
 [성혼] 서리거인(거신, 3★)
 응?
 하늘방패나 얼음성벽도 아니고, 서리거인?
 대박, 그냥 대박도 아니고 초대박이다.
 서리거인은 전천후 능력의 성혼이었다. 공격과 방어 어디든 쓸 수 있었다. 여러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쓰기도 좋았다. 더구나 나중에 가면 거신계 성혼의 특징, 거인화도 가능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를 거둔 것. 김현은 속으로 김애경에게 응원을 보냈다.
 ‘역시 장군님이십니다.’
 “누나, 괜찮아?”
 김애경을 흔들어 깨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난다.
 “으으, 머리야······ 어떻게 됐어?”
 “성공했어.”
 “진짜? 아니, 그런데 내가 뭘 한 거야?”
 하긴 김애경은 자신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김현은 천천히 주먹을 쥐어 내밀었다.
 “주먹 쥐어 봐.”
 “이렇게?”
 “응. 그리고 주먹에 정신을 집중해.”
 “정신을?”
 “지금 몸 안에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 그걸 주먹으로 밀어 봐. 그냥 혈관 따라 이동한다고 생각해도 돼.”
 하급의 기법이지만 아주 원초적이고 간단한 방법이니 초보자에게 적합했다. 첫 성혼을 변형할 정도로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무난히 실행하겠지.
 시키는 대로 김애경이 주먹을 내민다. 꽉 쥔 채 두 눈으로 주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기온이 내려가는지 으슬으슬했다.
 쉬이익.
 기이한 음색이 김애경의 주먹에서 새어 나왔다. 동시에 싸늘한 빛 같은 게 뿜어진다. 현실에서라면 파란색일, 유명계여서 차가운 흰색으로 보이는 그것.
 이세희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엄마야!”
 마지막으로 새하얀 냉기가 흘러나와 김애경의 주먹을 감쌌다. 혼력이 부족하고 기술이 미숙해 제대로 된 발현이라 하기는 힘들어도 이거 한 방이면 어지간한 악귀쯤은 한 방이다.
 김애경도 놀란 얼굴로 자기 주먹을 보았다. 그러더니 다른 손을 퍼런 주먹에다가 갖다 대고 몸을 턴다.
 “앗, 차거!”
 “우와, 이거 뭐예요? 설마 초능력?”
 이세희가 눈을 빛냈다. 급기야 자기 손을 가져가려고 해서 급히 제지했다. 무방비 상태로 김애경의 서리 주먹에 노출되면 동상 입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대신 환자복을 짧게 잘라 김애경의 주먹에 가볍게 접촉시킨다. 그 즉시 환자복이 꽁꽁 얼어붙었다. 심지어 두 손으로 가볍게 비비자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까지.
 김애경도 이세희도 입을 쩍 벌린다. 김애경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게 초능력······.”
 2018년 5월 4일 현재, 지구에서 초능력은 더 이상 생경한 힘이 아니다. 1월 1일부터 성혼이 출현하였고 간혹 성혼을 흡수하여 각성한 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장 김현만 해도 성혼 폭주 사태에 휘말려 이 지경이 된 거 아닌가.
 물론 대부분 1성 등급인 만큼 초능력은 전반적으로 평가절하 당하고 있다. 각성자의 수가 적어서 더 그렇고.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움직이자.”
 “어디로?”
 “방사선실. 지하 1층이었죠? 선생님, 안내해 주세요.”
 “알았어요.”
 이세희가 김현을 힐끔거리면서 휠체어를 밀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방사선실로 향한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김현.
 방사선실에는 성스러운 축복 성혼이 잠들어 있다. 2성 등급 성혼이며, 이걸 김애경이 받을 경우 이 성혼 세계의 지킴이조차 맞상대가 가능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세희가 이걸 흡수해서 각성할 수가 있느냐는 것.
 ‘강제로라도 시키는 수밖에.’
 김현은 착잡한 눈으로 하은이를 내려다보았다. 김애경이 걱정할까 봐 굳이 말하진 않았으나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머리카락 사이 드러난 이마에 언젠가부터 힘줄이 돋아났으니.
 이제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하은이가 유명계의 귀신에게 빙의되어 괴물로 변한다.
 ‘그럴 수는 없지.’
 전생의 아론은 냉정했다. 아니,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린아이 몇쯤은 가볍게 희생시키곤 했다.
 하은이마저 그럴 수는 없다. 친조카 아닌가. 하은이의 싸늘해지는 체온을 느낄 때마다, 상태를 확인하러 눈을 내리깔 때마다 염려와 조바심을 느꼈다.
 물론······.
 아론의 빙심(氷心)은 언제든 김현의 감정을 뒤덮을 수 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러지 않을 뿐이다.
 “빨리 가죠. 누나도 더 밀어 줘.”
 “왜?”
 “묻지 말고, 빨리.”
 김현의 말에 담긴 다급함을 읽은 것일까. 휠체어 전진하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진다.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다행스럽게도 너무 늦지 않게 방사선실에 도착.
 이곳도 특이했다. 그리 넓지 않은 내부에 비석들이 빼곡했다. 모두 음영 없는 회색인데, 딱 하나 한쪽 구석에 은빛으로 물든 것이 하나 있었다.
 크기가 커서 안경알 때처럼 먹어 치우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선생님.”
 “네?”
 “저거 한번 만져 보실래요?”
 “제가 왜요?”
 뜬금없는 제안에 이세희가 경계심을 보인다.
 딱 봐도 수상한 비석이니 이세희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아까 저희 누나가 심장에서 초능력 얻는 건 보셨지요?”
 “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상당히 강력한 초능력이 깃들어 있어요. 선생님이 그 초능력을 얻으시고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
 초능력을 가지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나 보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김현을 마주 본다.
 “초능력을 가지라고요? 진짜요?”
 “예.”
 “왜 직접 가지지 않고요?”
 김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하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겠지.
 물론 저걸 흡수해서 요정계나 환수계의 성혼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은 있다. 문제는 김현의 능력치 중 혼력이 8에 불과하다는 점. 3성 성혼인 별의 관찰을 얻은 것만으로도 포화 상태였다. 여기서 영혼을 쥐어짜다시피 해야 성혼 하나를 더 각성할 것이다.
 그러느니 성스러운 축복을 온전히 각성할 천상 성향 각성자를 하나 더 영입하는 게 낫다. 온갖 삿된 것과 악한 것의 천적이 바로 천상계 성혼이니.
 “제가 가질 수 없는 종류여서요. 아까 심장이 저희 누나한테만 반응하는 거 보셨죠?”
 “그랬나요?”
 “네. 초능력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특질 같은 게 있어요. 그 특질이 맞는 사람만 흡수할 수 있고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그걸 알아보는 게 제 초능력입니다.”
 “아······.”
 이세희가 납득한 기색을 흘렸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까지 김현과 김애경이 보인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니까.
 잠시 입을 오물거린다. 김현과 은색 비석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잘 안되더라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 초능력을 얻는 건 문제가 없어요.”
 확신에 찬 말투에 이세희도 용기를 얻었다.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머리를 끄덕인다.
 “해 볼게요.”
 이어서 비석으로 다가가는 이세희.
 김현도 휠체어 바퀴를 굴려 옆에 가서 섰다. 이세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품속에 손을 넣는다.
 차가운 물체가 잡혔다.
 과도.
 사람의 피를 두 번이나 묻힌 녀석이 또다시 섬뜩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뭘 하려고?
 김애경이 눈으로 그렇게 묻는다. 김현은 그냥 보고 있으라며 머리를 휘저었다.
 그리고 이세희가 비석에 손을 가져갔다.
 “앗!”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재빨리 떼어 낸다.
 “왜 그러시죠?”
 “어, 느낌이 이상해요.”
 “어떤 식으로요? 전기가 찌릿하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속이 메스꺼우세요?”
 자세히 묻자 이세희가 묘하게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부끄러워하는 태도. 거기서 짚이는 게 있었다.
 “오르가슴을 느끼셨나 봅니다.”
 “무, 무슨 소리예요!”
 이세희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김현 입장에서는 좋다. 합치 성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극도로 적합하다는 뜻이니.
 ‘신필종은 보통 적합이었지······’
 원역사에서 성스러운 축복을 가져갔던 자의 이름이다. 김애경은 우연히 신필종과 만나 동행했고, 어떤 빙의귀와 싸우다가 수세에 몰려 여기까지 도망쳤다. 그 후 신필종도 부상을 입어 피를 쏟았는데, 그 피가 하필 성혼 비석으로 쏟아져 성혼을 흡수하게 되었다.
 그렇다, 피.
 입으로 삼킬 수 없는 큰 물체는 피를 매개로 하여 성혼을 흡수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피의 양과 상처의 크기는 적합 정도에 따라 달랐다.
 김현은 가만히 이세희의 손을 붙잡았다.
 “왜, 왜 그러세요?”
 “선생님. 조금 아플 겁니다.”
 이어 과도를 들어 인정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꺄아악!”
 길게 울리는 비명.
 김현의 얼굴은 냉정했다. 사실 크게 휘두른 것 같지만 피륙을 살짝 벤 게 전부. 이만하면 성혼을 각성하는 도중에 자연 치유 될 것이다.
 이세희가 반사적으로 팔을 크게 휘저었다. 힘을 역으로 이용해 비석에다가 몰아붙인다. 상처 난 손바닥이 정확하게 비석에 가 닿았다.
 우우웅.
 이런 소리가 들렸다.
 이세희가 길게 달뜬 신음을 흘린다. 얼굴이 거뭇거뭇한 게 홍조가 어린 게 분명했다. 비석에 달라붙어 몸을 비비 꼬았다. 그런 이세희를 버려두고 뒤로 물러났다.
 세상이 무채색이라 그렇지, 안 그랬으면 꽤나 선정적인 장면이 됐겠다.
 김애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저랬어?”
 “아니. 누나는 합치 성혼이라 저렇지 않았지.”
 “합치 성혼은 또 뭐야?”
 “나중에, 나중에.”
 “그놈의 나중에는 진짜······.”
 어느새 이세희의 각성도 끝나가고 있었다.
 비석에 어려 있던 은색은 심상 속에서 황금색으로 변화했다. 흐릿한 황금빛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이세희의 양손에 스며든다. 그리하여 손등에 선명한 날개 문양을 새긴 다음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방금 전 손바닥에 낸 상처가 회복된 것은 불문가지. 별의 관찰 항목에도 새로운 글자들이 떠올랐다.
 [성혼] 성스러운 축복(천상, 2★)
 “아······.”
 각성의 열락이 지나가고 이세희가 아쉬움 가득 찬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그 여운이 남았나 보다. 신기한 듯 자기 손을 내려다본다. 이어 손을 살짝 구부리며 정신을 집중.
 연한 백금빛이 뿜어졌다. 아까 김애경이 성혼을 발현하는 걸 봐서 그런지 바로 따라 한 것. 단능(單能) 성혼이 전천후 성혼보다 발현하기 쉽기도 하고.
 “우와.”
 이세희가 나지막이 감탄을 토했다. 자기 손을 폈다 쥐었다 돌렸다를 반복하며 신기한 물체 보듯 구경을 한다.
 톡톡 두드리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김현과 눈을 맞췄다.
 “아, 김현 님. 감사합니다. 제가 초능력자가 될 줄은 몰랐어요.”
 이세희가 방긋 웃었다.
 “뭘요. 저도 필요해서 그렇게 한 건데요. 먼저 우리 하은이한테 초능력 좀 써 주세요.”
 “알았어요.”
 하은이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서툴게, 그러나 분명하게 흰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김애경이 가슴을 졸이며 하은이를 보았다. 김현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파도가 몰려오지만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한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하은이의 상태를 주시했다.
 심신미약 상태로 유명계의 기운에 노출된 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은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
 몇 시간 만에 낸 목소리.
 “하은아!”
 김애경이 울음기 섞인 외침을 토해 낸다. 이어 격렬하게 껴안자 하은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간지러워.”
 옆에 있던 이세희도 살포시 웃음을 짓는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나, 천진한 어린아이의 웃음이 이 기괴한 상황에서 한 가닥 활력소가 된 것.
 그러나 김현은 웃을 수 없었다. 별의 관찰을 통해 보이는 어떤 글자 때문이다.
 [상태] 빙의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빙의!
 혹시, 빙의귀가 되었냐고?
 그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비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유령이 이미 하은이의 육체에 깃들었고, 차츰 점령해 나가고 있다고 할까.
 지금 축복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5분만 늦었어도 빙의귀가 됐을 터. 한번 빙의귀가 되면 고위 각성자가 오지 않는 한 돌이키기 불가능하다.
 ‘서둘러야 돼.’
 시간은 벌었지만 유명계에 오래 있으면 결국 축복의 힘도 반감된다. 어서 탈출해야 했다.
 이쯤 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어째서 방사선실에 먼저 와서 축복부터 챙기지 않았는가 하고.
 이유는 간단했다.
 속으로 시간을 헤아린 후 둘을 불렀다.
 “누나, 선생님.”
 “왜?”
 “네?”
 “5초 뒤 작은 지진이 일어납니다. 바로 여기, 방사선실에서요.”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뚱딴지같은 소리.
 이세희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김현의 예언이 현실화되었다.
 그그그그긍.
 방사선실 전체가 진동했다. 말 그대로 작은 지진. 황급히 자세를 잡는 이세희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
 “그리고 3초 뒤 비석이 빛나기 시작하지요. 5초가 더 지나면 비석에서 유령들이 솟구칠 거고요.”
 이 또한 실현된다. 이세희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김현의 초능력에 대해 점차 실감하는 것.
 휠체어에 앉은 왜소한 체구의 김현이 기이하게도 커 보였다. 지금까지의 경험 탓에 슬슬 의지하게 되었다고 할까. 김현이 은연중에 의도하기도 했고.
 김현은 이세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초능력, 준비하세요.”
 “네, 넵!”
 수간호사에게 명령을 받은 것처럼 빠릿빠릿하게 외친다. 자신도 모르게 힘을 끌어 올리는 이세희. 무채색 음울한 세계에 백색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유령들이 떠오른다. 휘청휘청 넘어갈 듯 춤을 춘다. 귀곡성이 아스라이 메아리친다. 짧은 군무를 마치고 바다 거품처럼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 거대한 사마귀 알 군집 같은 것을 형성. 동시에 별의 관찰 성혼이 놈의 정체를 잡아냈다.
 [운무귀]
 상당히 강력한 유령이다. 원역사에서도 애경 장군은 일행 하나를 잃고 신필종이 성스러운 축복을 각성한 다음에야 잡아내는 데 성공했지.
 그러나 22세기를 살았던 아론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운무귀의 정석 공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선생님, 지금!”
 “네!”
 이세희가 힘껏 두 팔을 떨쳤다. 황금색 광선이 일직선으로 뿜어진다. 밧줄처럼 길게 늘어져서는 운무귀를 단단히 결박했다.
 아직 완벽히 결합하지 못한 상태. 운무귀의 육체가 구름처럼 뿌옇게 변했다. 동시에 운무귀 중심에 검은 보석 같은 것이 언뜻 드러났다.
 고개를 돌렸다. 마침 이쪽을 보던 김애경과 눈이 마주친다.
 이심전심. 눈빛만으로 마음이 통했다.
 김애경이 어깨를 길게 잡아당긴다. 허리가 유연하게 돌아간다. 뒤로 힘껏 당긴 팔이 전생에서 그렇게나 돌려 봤던 어떤 영상을 연상시켰다.
 무수히 많은 외계종을 때려잡았던 그 기술, 멸망포를.
 언뜻 감격의 기색이 눈가를 스칠 때 김애경이 마침내 일권을 때려 넣었다.
 꾸르르릉.
 맑은 잿빛 광선이 튀어나간다. 날아가며 공기를 얼린다. 수증기가 응결한다. 그 끝에서 송곳처럼 변하여 운무귀의 핵에 박혔다.
 콰직.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
 서리 송곳이 지닌 힘이 일거에 쏟아졌다. 연약한 운무귀의 핵으로는 그걸 버틸 수가 없다. 잠깐 흔들리나 싶더니 유리창처럼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종료.
 운무귀의 몸이 흩어졌다. 사마귀 알 같던 게 드라이아이스 연기로 변한 듯한 모양새다. 김애경이 짧은 한숨을 토하고, 그때까지 김애경에게 달라붙어 있던 하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이거 뭐야?”
 “응? 아, 엄마 초능력이야.”
 “진짜?”
 “그럼.”
 하은이가 또 초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른다. 김애경이 난처한 얼굴로 김현을 보았다. 김현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제야 웃으며 마술사 장난치듯 빛과 얼음을 하은이에게 보여 주었다.
 살며시 휠체어 바퀴를 끌었다. 운무귀가 남긴 잔해로 다가서면서,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태연해.’
 아무리 축복을 받았어도 하은이가 잘 웃고 쾌활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 세상이 무채색이고 괴상한 괴물까지 나타났으니 울고 무서워해야 정상인데도.
 일단 유명계를 벗어나고 생각하도록 하자. 이세희에게 부탁해 잔해를 뒤지게 했다. 모래 더미 같은 잔해에서 작은 은빛 돌이 하나 나왔다. 별의 관찰이 재빨리 돌에 숨어 있는 성혼을 파악한다.
 [유령탄(유명, 2★)]
 원역사에서는 박준이 얻었던 성혼.
 파멸권 김애경, 신의 신필종, 유령 사냥꾼 박준.
 이 3명이 피의 금요일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나머지, 거의 1천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 그래서 더 충격이었고, 이 세 명은 향후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의 각성자를 대표하게 된다.
 김현은 은색 돌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성향이 전혀 다르니 당연한 일.
 ‘서리거인이랑 성스러운 축복만으로는 부족해.’
 황혼의 일격이 서리거인으로 바뀌었다는 게 크다.
 두 성혼을 비교하면 서리거인이 조금은 우위. 다만 유령 대상 한정으로 황혼의 일격이 더 효과적이다. 황혼의 일격은 불과 용암의 속성을 지녔으니까. 유령들을 얼음으로 때리는 것보단 불로 지지는 게 낫지 않겠나.
 그렇다면 보조적으로 공격할 수단이 필요하다. 아니, 원역사에서 유령탄이 그랬던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찔끔찔끔 주의나 끄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뜻.
 돌을 매만졌다. 앞으로 있을 일을 그려 본다.
 서리의 힘을 휘어 감고 돌진하는 김애경. 흐드러지게 빛나는 성스러운 힘. 그리고 그 앞에서 일렁이는 잔혹한 어떤 그림자······.
 김현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
 ‘희생은 불가피해.’
 하긴 원역사에서도 각성자 여섯이 덤벼서 셋이 죽었다. 아무리 공략을 알고 있어도, 인류 저항군 총사령관의 영혼을 담고 있어도 한계는 명확했다.
 힘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다른 각성자들을 모집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만큼 시간이 더 소요되고 설령 영입한다 한들 나중에 문제가 되니 꺼려졌다. 김현은 신필종과 박준이 끝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고심 끝에 마음을 결정. 자신을 보고 있는 김애경과 이세희에게 한 번씩 눈길을 준 다음 그대로 입에다가 돌을 털어 넣었다.
 이어서 이해 못 할 짓을 저지른다. 과도를 들어 입에다 쑤셔 넣고 마구 휘저은 것. 간신히 아물어 가던 입 안이 또 만신창이가 되었다.
 “야! 또 왜 그래?”
 “기, 김현 님!”
 두 여자가 비명을 터뜨린다.
 침착한 것은 하은이 하나가 전부. 무슨 일 있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김현을 주시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문은 뒤로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입에 넣은 돌이 점차 뜨겁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여타의 성혼이 그러하듯 김현의 피에 반응하는 것.
 인간의 피, 그것도 당사자의 피야말로 성혼을 흡수할 때 쓰기 가장 좋은 매질.
 충분히 입 안에서 굴리면서 각성할 성혼을 고른다.
 ‘내 성향은 요정과 환수, 이 둘이었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환수다. 요정의 불꽃보다는 환수의 화염이 유령들에게 더 효과적이니까.
 자연히 한 환수를 연상하게 된다.
 붉은 깃털, 창천을 노니는 날개, 고고한 울음.
 주작(朱雀).
 남방의 수호신이자 불새인 주작이라면 황혼의 일격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작의 성혼을 얻는다 해도 문제. 휠체어 신세를 지는 상태에서 뭘 어쩐단 말인가. 휠체어 타고 다가가서 과도를 휘둘러? 돌멩이를 주워서 던져?
 방법은 하나뿐.
 ‘미끼가 되자.’
 옛 사냥꾼들은 사냥을 할 때 함정을 주로 썼다고 한다. 그만큼 자주 쓴 게 독이 든 미끼였다. 활이나 창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다.
 품을 뒤적였다. 아까 박경자 빙의귀를 잡고 나온 가죽 지갑을 꺼낸다. 왼손을 지갑 위에 포갠 후 과도로 단번에 내리찍는다.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이세희가 울음 섞인 투로 외친다. 얼른 달려들어 말리려는 것을 김애경이 막았다.
 “그냥 보고 계세요.”
 “하지만······.”
 “뭔진 몰라도 생각이 있을 거예요.”
 김애경은 김현을 믿었다.
 어제까지의 김현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나서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김현이라면, 자신만만하게 길을 인도하던 김현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 그럴까요?”
 이세희가 멈칫했다. 김애경이 고개를 힘껏 끄덕인다.
 “그럼요.”
 그사이 김현은 지난한 작업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번 각성은 힘겹고도 어려웠다. 이미 포화 상태인 상황에서 억지로 새로운 성혼을 이끌어 내는 것이고, 바탕이 되는 성혼도 성향이 전혀 맞지 않았으니.
 특별한 촉매나 기기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아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100% 실패했겠지.
 “후우.”
 몇 분간의 혈투 끝에 짧은 한숨을 토했다.
 부상이 채 회복되지 않았다. 벌린 입 옆으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현 님! 괜찮으세요?”
 이세희가 급히 달려왔다. 붕대도 뭣도 없지만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아주고 상처 입은 손도 잘근 싸매 주었다.
 “감사합니다.”
 김현은 자신의 손을 보고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성혼] 기린의 생명(환수, 3★)
 유령탄을 기본으로 하여 대지의 인내로 방향을 틀어 새롭게 성혼을 고정하여 각성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
 [혼력] 12
 새로운 성혼도 성혼이거니와 기존에는 8에 불과하던 혼력이 12까지 상승했다. 이만하면 어디 가서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모두 김현이 의도한 대로.
 슬슬 이 괴상한 세계를 탈출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
 “말씀하세요.”
 “지금부터 이 세계의 지킴이를 잡으러 갈 겁니다.”
 “지킴이?”
 생소한 단어에 둘이 의문을 표했다. 김애경의 손을 잡고 있던 하은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지킴이가 뭐야?”
 “글쎄. 삼촌이 알 것 같은데?”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야.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축이기도 하고. 지킴이를 잡으면 모든 게 끝나. 세계가 붕괴하면서 지구로 돌아가는 거지.”
 “뭐? 진짜?”
 “정말이에요?”
 김애경과 이세희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반면 하은이는 여전히 아리송한 낯빛이었다.
 “엄마, 뭐가 끝나?”
 “응, 곧 집에 갈 거야. 하은이도 좋지?”
 “대공원은?”
 “어······ 그럼, 그럼. 대공원도 가야지.”
 “신난다!”
 하은이가 좋다고 방방 뛰었다. 김애경이 흐뭇하게 그걸 지켜본다. 이세희도 옅게 미소를 지었지만 김현만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가 잡을 지킴이는 혈귀라는 놈입니다. 좀 괴상하게 생긴 놈이라서 보면 놀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알았어. 어떻게 하면 돼?”
 “누나는 그냥 초능력 쓰면서 혈귀랑 싸워. 그러면 돼. 대신 센 놈이니까 절대 방심하지 말고. 한국 챔피언이랑 스파링한다 생각하고 싸우란 말이야.”
 “한국 챔피언? 장난 아니네. 알았어.”
 “그리고 선생님은 저랑 누나, 하은이한테 초능력 쓰시고 뒤에 물러나 계세요. 그러다 제가 신호하면 아까처럼 초능력 날리는 겁니다.”
 “네! 맡겨만 주세요!”
 이세희가 주먹을 꼭 쥐고 의지를 다졌다. 하은이가 옆에 다가와 매달린다.
 “삼촌. 나는, 나는?”
 잠깐 고민하다 임무를 주었다.
 “하은이는 여기 간호사 선생님 지켜 드려. 알았지?”
 “엄마 지키면 안 돼?”
 “엄마가 하은이보다 세잖아.”
 “우웅······ 그럼 간호사 선생님 지킬래!”
 하은이가 이세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세희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김애경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럼 출발하죠.”
 목적지는 병원장실.
 두어 시간 안으로 세계의 지킴이 혈귀와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유명계의 사자도.
 
 <『다시 쓰는 헌터사』 1-2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