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유병
강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는 건 처음이었다.
“개운하네.”
얼마나 개운한지 기지개 켜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니 배가 고파졌다.
“어마어마하게 배고프네.”
조금만 참아도 굶어 죽을 것처럼 배가 고팠다. 강진우는 급히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밥!”
한데 집안 분위기가 뭔가 좀 이상했다. 아니, 강진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초리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배는 고프니?”
“고, 고픈데?”
엄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한 번 흘리고는 다시 강진우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졌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속은 괜찮아?”
“에? 속? 속이 왜?”
“왜는 무슨 왜야! 넌 생각이 있니 없니? 고등학생이 그렇게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셔?”
강진우는 멍하니 엄마를 바라봤다. 술?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구보다 모범생이라고 자부하는 자신이 술이라니. 그것도 떡이 될 정도로 마셨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에이, 엄마 왜 아침부터 장난이야. 난 술을 입에 댄 적도 없다고요.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이렇게 멀쩡해?”
“쯧쯧쯧. 이제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구나. 이리 와서 밥이나 먹어!”
엄마의 말과 태도를 보건대 이건 절대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강진우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가만······ 그러니까 학교 끝나고 피시방에 가서 시원하게 롤 한 판 하고, 바로 나가서······ 횡단보도를 건넜지? 아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건너다가······!’
놀랍게도 그 이후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강진우의 기억은 딱 횡단보도 중간까지였다. 그 뒤로는 그저 새까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럼 정신을 잃은 채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단 말인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술 마시다 필름이 끊긴 것도 아니고 길 가다가 필름이 끊겨? 그게 말이 돼?’
강진우는 상을 차리는 엄마를 보며 물었다.
“엄마, 어제 나 몇 시에 들어왔어?”
엄마의 손이 딱 멎었다. 잠시 화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강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시.”
“에? 그렇게 일찍 들어왔어?”
“새벽 네 시가 일찍이야? 왜? 아예 아침에 들어오지?”
“헐! 새벽 네 시? 그때까지 술을 마셨다고? 내가?”
“냄새나 지우고 들어오든지! 공부하느라 힘들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북엇국을 식탁에 올렸다. 강진우는 그걸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허기가 지는지 지금은 대화를 할 여유도 없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아직 시간도 이른데.”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밥을 한 그릇 더 내려놓았다. 강진우는 그 밥까지 싹싹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학교에 가는 내내 사라진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어제 하루의 기억을 삭제해 버린 것만 같았다.
‘게다가 술이라니.’
강진우는 비교적 모범생이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중간 이상이었고, 결석 한 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했다.
당연히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술이라니,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자신이 그랬을 리 없었다.
그나마 엄마가 관대하게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아마 다른 애들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그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한 거지?’
어디서 뭘 한 건지도 중요했지만 대체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도 중요했다. 이러다가 또 정신을 잃고 어딘가를 방황하면 어쩐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닌 채로 강물에 뛰어들지 달리는 차에 뛰어들지 아니면 건물에서 뛰어내릴지 어떻게 알겠는가.
‘불안하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이런 병 하나 생긴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없긴 뭘 없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심한 정도가 아니다. 어떻게 하루 치 기억이 싹 날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부분 기억상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강진우는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스타일도 아니다. 워낙 낙천적이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타입이라서 다른 사람에 비해 스트레스가 현저히 적었다.
그렇게 고민에 휩싸인 채 학교에 도착한 강진우는 일단 자리에 가서 앉았다. 비교적 일찍 나왔기에 교실에는 애들도 몇 명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교실이 차츰 채워졌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정신이 온통 사라진 기억으로 가 있는데 수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강진우는 오전 내내 어제 사라진 기억을 복구하기 위해 보냈다. 물론 성과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이 드니 어마어마하게 배가 고팠다.
“정말 배 속에 그지가 들어앉았나? 왜 이래?”
아침에 일어났을 때와 아주 똑같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듯했다. 빨리 밥을 안 먹으면 굶어 죽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럴 리 없겠지만.’
강진우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식실로 가려는 순간 누군가 교실 문을 세게 열었다.
꽝!
교실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열린 문으로 누군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김기태였다. 성질도 더럽고 싸움도 잘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었다.
‘저놈에게 찍혀서 좋을 거 없지.’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저놈은 무섭고 더럽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 중 상책이었다.
‘어라?’
강진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기태가 자신에게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 없다. 기태와는 말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으니까. 즉,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란 뜻이다.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날 노려보는 거야? 살 떨리게.’
강진우는 일단 교실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태가 있는 쪽이 아닌 교실 뒷문으로 가려고 했다.
“거기 안 서냐?”
강진우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 기태를 쳐다봤다. 기태가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눈을 부라리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어? 나?”
강진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기태는 강진우 앞에 딱 서서 고개를 삐딱하게 꼬며 피식 웃었다.
“몰라서 물어?”
그럼 뭘 안단 말인가. 강진우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했다가 당할 꼴은 아주 뻔했다. 지금은 그저 참는 게 답이었다.
“어제는 즐거웠지? 응?”
“어제?”
강진우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어제는 기억에서 없는데 어제 즐거웠는지 슬펐는지 알 게 뭔가. 하지만 어제 기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걸 보면 아마 제대로 꼬인 것 같은데······.’
“왜? 이제 이렇게 코앞에서 보니까 슬슬 겁이 나냐?”
그럼 안 무섭겠냐?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안 무서웠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를 삶아 먹은 것도 아니고······ 이놈 하는 짓이 왜 이렇게 귀엽냐.’
당연히 귀여울 리 없다. 그런데 귀엽게 느껴지니 희한한 노릇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귀엽다기보다는 가소롭다는 게 맞다. 그래, 가소로웠다.
‘내가 정말 어떻게 됐나?’
강진우는 자신의 상태가 이상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기태가 한 발 더 다가왔기 때문이다.
기태는 자신의 얼굴을 강진우의 코앞으로 바짝 갖다 댔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제 했던 말 여기서 다시 해 보지? 응?”
삭제된 기억을 복구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저 무서운 놈과 무슨 일이 있어서 보호본능이 기억을 봉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태는 다시 뒤로 물러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교실에서 나가지 않은 아이들이 흥미로움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기태와 강진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와. 진짜로 뒤지기 싫으면 도망갈 생각은 말고.”
그렇게 말한 기태가 돌아서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강진우는 잠시 멍하니 기태를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교실에서 나갔다.
‘왜 나가는 거지?’
저놈 성질에 그 자리에서 받아 버렸어야 정상이다. 이런 일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기태가 상대를 끌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상대가 복싱부 주장이었다.
옥상에서 둘이 싸웠다고 하는데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고 있다. 복싱부 주장은 그 뒤로 복싱을 관뒀다. 부상으로.
‘헉. 뭐야, 그럼 나도 복싱부 주장처럼 만들어 놓겠다는 건가?’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데도 신기하게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여전히 기태가 가소로웠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태는 강진우를 옥상으로 데려갔다. 강진우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기태를 따라갔다.
옥상 한가운데 선 기태가 특유의 삐딱한 자세로 강진우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내가 그쪽으로 쫓아가면 진짜 뒤지니까.”
강진우는 기태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그 모습에 기태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어라? 안 쪼네? 역시 뭔가 있긴 있군. 난 또 그냥 범생인 줄 알았는데 어서 좀 놀았나 봐?”
강진우는 그 말에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 쫄긴 누가 안 쫄았단 말인가.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강진우와 기태가 마주 섰다.
기태는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다. 이런 기습적인 선빵이 기태의 특기였다. 예전 복싱부 주장도 이걸로 쓰러뜨렸다.
강진우는 기태의 주먹을 똑바로 쳐다봤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이 아주 똑똑히 보였다. 마치 느린 화면처럼.
한데 그 순간 저 주먹을 피할 최적의 방법이 보였다. 그리고 반격할 방법도 눈앞에 펼쳐졌다.
그저 단순히 주먹질을 치고받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환상처럼 눈앞에 그 광경이 쫘악 펼쳐졌다.
환상 속에서 강진우는 기태의 오른 주먹을 왼손으로 가볍게 흘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 검지를 기태의 목에 푹 찔러 넣었다.
목에 구멍이 뻥 뚫렸고 피가 분수처럼 쫙 쏟아졌다. 그리고 기태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환상 속에서 들려온 그 소리, 기태가 옥상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강진우를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기태의 주먹이 강진우의 뺨에 닿은 뒤였다.
빠악!
강진우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뺨에서 불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뒤져 이 새끼야!”
그 소리에 잠깐 흔들렸던 강진우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기태의 주먹이 연이어 쏟아졌다.
강진우의 눈에 또 환상이 펼쳐졌다.
환상 속에서 기태가 쏟아 내는 주먹을 한 손으로 탁탁 쳐 낸 강진우의 손날이 이번에는 기태의 목을 그대로 그어 버렸다.
기태의 목이 고작 손날에 잘려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목 없는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쿵!
그 소리가 또 강진우를 환상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온몸을 난타당했다.
기태가 연신 욕을 하며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내질렀지만 강진우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털썩.
결국 강진우가 바닥에 쓰러졌다. 기태는 그런 강진우를 보며 숨을 헐떡였다.
“후욱! 후욱! 너 이 새끼 앞으로 매일 죽었다고 생각해. 이딴 놈인 줄 알았으면 이리로 데려올 필요도 없었는데. 뭐, 내일부터 애들 앞에서 밟아 주지. 특히 세나 앞에서.”
기태는 그 말을 남기고 옥상에서 내려갔다.
강진우는 기태가 옥상을 떠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멍투성이였지만 아프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 강진우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조금 전 봤던 그 환상이었다. 환상 속에서 강진우는 기태를 두 번이나 죽였다.
“대체······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강진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
기태가 다녀간 뒤로 아무도 강진우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은 짜증을 담은 눈으로 강진우를 노려봤다.
기태가 강진우를 찍었다는 얘기는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 아마 앞으로도 기태가 매일 이 반으로 찾아올 것이다. 강진우를 괴롭히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마다 공포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다들 그걸 짜증 내는 것이다. 일단 기태와 한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싫었다. 그건 굉장히 위험했으니까.
일단 눈이 돌아가면 주변에 누가 있건 신경을 쓰지 않는 게 기태였다. 잘못하다 애먼 주먹이나 흉기에 맞을 수도 있었다.
몇몇은 짜증을 냈지만 대부분의 시선은 불쌍함이었다. 그런 기태에게 찍혔으니 앞으로 학교생활이 진짜 고달파질 테니까.
‘아마 나 같으면 당장 전학을 갈 텐데.’
다들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강진우는 기태에 대한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강진우의 뇌리에는 옥상에서 본 환상과,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수업이 모두 끝났다.
강진우는 영혼 없는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기태가 또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충분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몇 명은 피시방이라도 가자고 해 줄 텐데 오늘은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강진우는 그렇게 복도를 지나 건물에서 나갔다. 그리고 교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차츰 머리가 맑아졌다. 아니, 머리는 원래 맑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저 골치 아픈 문제를 옆으로 밀어 둔 것뿐이었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제야 오늘 기태에게 맞은 곳이 쑤셔 왔다.
“엄마가 걱정하겠네.”
강진우는 혀를 차며 교문을 나섰다.
“강진우!”
교문을 나서자마자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강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교문 옆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세나였다. 순간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세나는 학교에서 제일 유명한 아이였다. 인형 같은 외모와 굴곡진 몸매,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착하기까지 하니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아이였다.
세나와 강진우의 관계는 기태와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는 사이, 즉, 잘 모르는 사이였다.
한데 그런 세나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저렇게 잘 안다는 표정으로 다가온단 말인가.
강진우가 그렇게 의문의 물음표를 머리 위에 찍고 있을 때, 세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었다.
세나는 강진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듯이 살폈다. 누군가 그렇게 자신을 빤히 바라보면 당연히 부끄러운 법이다. 더구나 상대가 세나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강진우가 살짝 얼굴을 붉히려는 찰나, 세나가 말했다.
“너, 어제 했던 말 진심이야?”
또 어제야?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 세나
세나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저런 눈웃음을 보면서 어제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할 수는 없었다.
강진우는 세나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할 말이 없으니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설마 기태?”
강진우는 세나의 말에 점점 더 어제 일이 궁금해졌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세나와 기태가 함께 얽혀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 어제 얘랑 술을 마신 건가?’
궁금했지만 어제 나랑 술 마셨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자신이 어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그 말에 세나가 풋 하고 웃었다.
“당연하지. 네가 집까지 바래다줬잖아.”
집까지? 설마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우리 집에서 밥까지 먹고 갔으면서 그런 걸 물어?”
세나가 살짝 눈을 흘겼다. 강진우가 농담처럼 얘기한 거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진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나네 집에 들어갔다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설마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런 건가?’
의문과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세나는 그런 강진우의 눈빛을 조금 오해했다.
“앞으로는 안 돼. 어제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네 억지를 받아 준 거야.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어. 알았지?”
강진우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설마 아무도 없는 집에 함께 있었단 말인가? 그럼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그런 중요한 기억이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강진우는 탐색하듯 세나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혹시 그 이후의 일도 얘기해 줄지 모르니까.
“아무튼 앞으로 조심해. 기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런데 너 정말 괜찮겠어?”
강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제발 어제의 기억이 돌아오면 좋겠지만 그럴 기미가 안 보이니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집에 가는 거야?”
고작 떠올린 말이 그거라니. 강진우는 속으로 자신을 구박하며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의 예쁜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응.”
“데려다줄게.”
어제도 했다니 오늘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세나의 반응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고개를 저은 것이다. 그리고 약간 옆을 바라봤다.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하셨어.”
아빠? 강진우는 헉 소리를 억지로 참으며 세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 갈게. 내일 봐.”
세나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까만 차를 향해 뛰어갔다.
강진우는 그런 세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세나가 차에 탈 때까지.
***
세나는 뒷자리에 앉아 차가 출발하는 것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강진우는 여전히 교문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세나야, 누구? 같은 반 친구?”
아빠의 질문에 세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아, 쟤? 같은 반은 아니고 그냥 친구야.”
그러자 아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남자친구?”
그러자 세나가 손을 휙 내저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이, 그런 거 아니야. 아직은.”
세나는 뒤에 앉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빠의 입가가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걸 보지 못했다.
“아직은? 그럼 가능성이 있는 친구네?”
“글쎄······ 아직 잘 모르겠다.”
잠시 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빠, 안 가? 학원 늦겠어.”
“아, 그래. 가야지. 간다, 가.”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학원을 향해 가는 중간에 세나 아빠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세나야, 아빠 생각에는 말이다.”
“응?”
“남자친구 말이야.”
“남자친구?”
“세나는 아빠 딸이니까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우리 세나, 아직은 공부에 더 집중할 때라는 건 알지?”
“아이참, 아빠!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아빠 공부 얘기 지금 처음 하는 거 알지? 오늘 엄청 이상해!”
“하하. 이상하긴. 그냥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지. 알았다. 그만하자.”
“아빠, 설마 아까 진우 때문에 이러는 거야?”
“진우? 아, 아까 그 남자애 이름이 진우구나.”
세나가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룸미러를 통해 아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세나 아빠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라니까. 아, 학원 다 왔다. 그럼 이따 학원 끝날 때쯤 데리러 오마.”
“아빠 회사는?”
“오늘은 안 들어가도 돼. 외근 끝나고 바로 퇴근하기로 했거든.”
“뭐, 알았어. 나야 아빠가 데리러 오면 좋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빠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세나 아빠는 세나가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세나가 안 보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우라고 했지? 오케이. 어떤 놈인지 한번 알아봐야겠군.”
아까 얼핏 봤을 때 얼굴에 멍과 상처가 있었다. 평범한 학생이 얼굴에 그런 흔적을 남기고 다니지는 않을 것 아닌가.
세나 아빠의 얼굴에 온갖 걱정과 근심이 어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예쁜 딸을 가진 아빠가 죄지. 죄야.”
***
강진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일이 떠오르지 않자, 일단 잠정적으로 포기했다.
당장 드러난 일은 기태가 자신을 찍었다는 것과, 세나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가만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를 잘 봐서 대처하면 되잖아?’
실제로 오늘 그렇게 했으니 앞으로도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어제 일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만들어 간 관계가 더 중요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가.
강진우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어제 일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까 기태와 있을 때 봤던 그 환상이 더 심각했다.
어찌나 생생한지 한순간이나마 기태가 진짜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도 그게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겁은 났다. 한데 누군가를 죽이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데도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환상이라서 그런가? 보통 그럴 때는 토하고 막 그러던데.’
물론 영화에서나 본 장면이고 소설에서나 보던 이야기이기에 그게 진짜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한데 그 순간은 마치 그게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살인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을 뿐이다.
“아, 버스 정류장.”
생각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버렸다. 강진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늘은 그냥 걸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집까지 그렇게 먼 것도 아니었고, 오늘은 좀 생각할 것도 많아 그냥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강진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온몸을 젓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다.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이게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는 뭐 그런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던 강진우의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냥 척 봐도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드러낸 것이 분명한 팔뚝에 문신이 가득했다. 그렇게 온몸을 문신으로 도배한 덩치가 무려 일곱이었다.
중요한 건 그 일곱 명의 덩치들이 강진우를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놈들이 왜 날 노려보지?’
강진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는 저놈들이 노려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뜻인데 대체 왜 저러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설마 이것도 어제 있었던 일의 연장이야?’
어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술 때문에 저놈들과 뭔가 시비라도 있었을지 모른다.
기태가 자신에게 한 행동을 보면 기태하고도 시비가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런 정신 상태라면 저놈들과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진우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 덩치들과 자신 사이에는 8차선 대로가 있었다.
‘차도 씽씽 달리고 있는데 설마 저기를 가로질러 오지는 않겠지?’
오려면 일단 10미터쯤 이동해서 신호등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하기 전에 몸을 빼면 그만이었다.
“헉!”
강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내뱉었다. 저 미친놈들이 8차선 대로를 가로질러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빵빵!
경적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그놈들의 걸쭉한 욕설도 함께 울렸다.
“아따 귓구멍 뚫리겄네. 야이 XXX야! 차 싹 뒤집어 버리고 끌어내 눈깔에 먹물을 쪽 뽑아 버리기 전에 조용히 안 해!”
더 이상 경적이 울리지 않았다. 일곱 명의 덩치는 당당하게 대로를 건넜다. 강진우를 노려보면서.
강진우가 선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도망이었다. 저렇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조폭들이랑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강진우는 그대로 뒤돌아 달렸다.
“으악! 서둘러!”
자기가 도망치자마자 조폭들이 그렇게 소리쳤다. 강진우는 더욱 힘껏 달렸다. 이제 확실해졌다. 저놈들은 자신을 노리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잡히면 아마 죽을 것이다. 강진우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
기태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건들거리며 걸어갔다. 그의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아 진짜 짜증이 안 풀리네.”
원하던 대로 오늘 강진우를 흠씬 두들겨 팼는데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 자리에서 그냥 박살을 내 버리는 건데.”
원래라면 사람이 많건 적건, 또 나중에 경찰이 오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때 보여 준 강진우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였다.
“내가 무서워했다고? 고작 눈빛을?”
인정하기 싫었다. 고작 그런 놈의 눈빛이 무서워서 주먹을 날리지 못하고 세나를 데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니.
그때 바로 때리지 못한 것보다 무서워했다는 그 사실이 더 짜증 났다.
“내일은 더 밟아 줘야겠어.”
오늘 화를 다 못 풀었으니 내일은 진짜 제대로 밟아 줄 생각이었다.
“그냥 밟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지.”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어제 자신이 느꼈던 그 두려움을 강진우가 고스란히 겪어야만 한다.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아주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 주마.”
강진우뿐 아니라 세나까지 한꺼번에 엮어서 무릎을 꿇릴 생각이었다. 강진우가 두려움과 치욕에 떠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아마 알아서 무릎을 꿇을 것이다.
자신 있었다. 자기가 항상 해 오던 일이었으니까.
내일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많이 풀어졌다. 기태는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기태의 눈에 팔뚝에 문신을 드러낸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뭐지? 삼거리파 같은데?”
물론 삼거리파와 기태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삼거리파는 기태가 앞으로 몸담아야 할 첫 번째 조직으로 찍어 놓은 곳이었다.
물론 거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 같은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이고 계획이긴 했지만 기태는 자신 있었다.
한데 그런 삼거리파 조폭들이 험악한 얼굴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으니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기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물론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
강진우는 진짜 죽어라 달렸다. 그리고 조폭들은 그런 강진우를 끈질기게 쫓아갔다.
조폭들이 계속 뭐라고 소리쳤지만 달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강진우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방향이나 길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조폭들이 어찌나 끈질기고 빠른지 조금만 방심해도 잡힐 것 같았기에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당연히 쫓는 조폭들도 점점 지쳐 갔다. 하지만 그 추격전에도 끝은 있었다.
길 같은 건 전혀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기만 한 강진우가 막다른 길로 접어든 것이다.
끝이 막혀 있는 길이었는데, 그 길의 마지막에는 폐공장이 있었다.
“아······ 진짜 열라 힘들게 달려왔는데······.”
강진우는 투덜거리며 일단 폐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혹시 안에 가면 숨을 데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한데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숨을 데는커녕 변변한 건물도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강진우는 일단 더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 부지가 제법 넓으니 이 안에서 어떻게든 도망 다니다가 기회를 봐서 밖으로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잠시 후 일곱 조폭이 들어왔다. 그들의 덩치는 물론이고 표정이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정말 엄청났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일곱 조폭이 서로 거리를 살짝 벌리며 넓게 포진한 채 강진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코끼리 다리 같은 양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암담했다.
‘저 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넓게 포진해서 다가오는 바람에 멀찍이 돌아서 도망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왠지 잘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이놈들을 상대로 치고받으며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한데 싸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순간, 눈앞에 또 환상이 펼쳐졌다.
강진우는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가운데 있는 덩치 앞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강진우의 두 손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손날을 세워 조폭 하나를 말 그대로 썰어 버린 것이다.
조폭의 팔다리가 날아갔고, 목까지 날아가 버렸다. 눈 한 번 깜짝할 순간에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다.
한 명을 처리한 강진우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두 손끝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쭉 빠져나가더니 양옆에 있던 두 조폭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그렇게 세 명을 처리한 강진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저 가볍게 걷는 것뿐이었는데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순식간에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나머지 네 명을 죽여 버렸다. 사방이 피바다로 변했고, 그 한가운데 강진우가 서 있었다.
“헉!”
강진우는 멍하니 환상에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깊숙하게 환상에 빠졌다.
‘이거 이러다가 무슨 일 나는 거 아냐?’
이러다가 정신병이라도 생기는 거 아닌지 불안했다. 아니, 어쩌면 벌써 병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강진우가 그렇게 멍하니 있는 동안 일곱 조폭이 강진우 앞에 도착했다. 이젠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맞아 죽든지, 아니면 이 악물고 싸우든지 선택할 때가 되었다.
‘어차피 죽을 거 한 대라도 때리자. 안 억울하게.’
그것이 강진우의 마음이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표정도 달라졌고 눈빛도 달라졌다.
강진우의 강렬한 눈빛이 일곱 조폭을 쭉 훑어봤다. 그 순간 그들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동시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형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강진우의 표정이 다시 멍해졌다.
이 아저씨들아, 척 보기에도 내가 당신들보다 최소 다섯 살은 어려 보여. 얻다 대고 형님이야.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젠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 기태
기태는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빠끔 내밀어서 폐공장 안을 살폈다. 그리고 일곱 조폭이 강진우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는 광경을 지켜봤다.
‘마, 말도 안 돼······.’
삼거리파 조폭은 제법 유명했다. 성질 더럽고 잔인하고 수틀리면 일단 칼부터 꺼내고 보는 악질들이었다.
한데 그런 놈들이 고작 고등학생 한 명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것도 형님이란다.
상대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한데 상대가 바로 그 강진우였다. 어떻게 강진우가 저 자리에 서서 조폭들의 인사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뒤로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거리가 좀 있었는지라 명확히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을 약간 감수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가까이 다가가기로 했다. 기태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공장 안에는 숨을 만한 곳이 거의 없었기에 정면에 보이는 강진우의 시야에서만 벗어나는 게 제일 중요했다. 옆으로 이동해 벽에 붙어 있으면 저 조폭들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것이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대놓고 숨은 적이 있기에 떨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막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옆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강진우가 갑자기 막 달리기 시작했다.
“어?”
기태는 깜짝 놀랐다. 강진우가 공장 입구로 곧장 내달리는 바람에 그대로 들켜 버리고 만 것이다.
“비켜!”
강진우의 외침이 울렸지만 기태는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툭!
결국 강진우의 몸이 기태의 팔에 스쳤고, 기태는 빙글 돌아 바닥에 엎어졌다.
“이 새끼는 또 뭐야?”
어느새 우르르 몰려온 일곱 조폭이 자빠진 기태를 둘러쌌다. 기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너 뭐냐?”
조폭 중 하나가 사나운 표정으로 물었다. 기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방금 강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쳐다봤다.
“조, 조금 전에 나간 놈 치, 친구인데요······.”
“아······ 그냐. 네 친구 확실허냐?”
기태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들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면 강진우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형님이라고 인사를 해? 왜?’
“왜 대답을 안 해? 내가 우습게 보이나?”
“그, 그게 아니라······.”
“긴말할 것 없고, 너 좀 맞아야 쓰겠다.”
“예?”
기태가 채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무수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기태는 채 일어나지도 못한 채 몸을 웅크리고 밟혀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조폭들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밟았다.
그렇게 얼마나 밟았을까. 이내 다들 때리는 걸 멈추고 기태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어. 그래서 쪽팔리게 인사까정 했거든? 그런데 네 친구가 냅다 도망치잖아?”
조폭은 그렇게 말하고 쭈그려 앉아 기태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자, 그럼 내가 우째야 쓰겄냐?”
기태는 대답할 힘도 없었다. 다행히 대답은 물어본 조폭이 대신해 주었다.
“친구 놈을 조지는 거지. 그래도 살살 했으니까 참을 만했지? 승질 같아서는 이걸 좀 썼어야 하는디 학생 같아서 봐준 겨.”
조폭은 잠깐 꺼냈던 칼을 다시 품에 넣고는 기태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니까 이 복수는 네 친구헌티 해라. 알겠제?”
기태는 조폭이 하는 말이 계속 거슬렸다. 사투리와 서울말이 뒤섞여서 정말 어설픈 말투로 들렸다. 한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왠지 물불 안 가릴 것 같았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분명히 칼이라도 맞을 것 같았다.
“우리가 바빠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그니까 너도 언능 돌아가 봐라. 친구 찾아서 조지는 거 잊지 말고. 혹시 친구가 너보다 쌈 잘하면 병 하나 들고 뒤에서 조져. 다 골로 가게 되어 있응게. 알겄지?”
기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자신이 강진우보다 더 세다느니 하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조폭들은 그 말을 남기고 근처에 침을 찍찍 내뱉고는 공장을 떠났다.
기태는 조폭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주저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새끼······ 아주 죽여 버린다.”
기태의 모든 분노는 강진우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무서운 조폭들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놈들도 나중에는 손봐 줄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좀 많이 흐른 뒤에 말이다.
***
강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를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봤다. 공원 앞이었다. 이 공원을 관통하면 집까지 3분 거리였다.
“대체 뭐지?”
강진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큰형님이 찾는다고 했지?’
큰형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조폭임이 분명했다. 당연히 만나 봐야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긴 했는데······ 과연 어디까지 먹혔을지.”
확실히 먹혔다. 조폭들은 강진우가 모른 척하는 걸 보고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판단했다. 그저 닮은 사람일 거라고 여긴 것이다.
어제 봤던 강진우의 모습이나 태도와 지금의 그것과 괴리가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물론 강진우는 조폭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무작정 도망쳤다. 조폭들이 빈틈을 보인 사이 말이다.
도망친 이유 중 하나는 조폭들의 눈빛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거기 그냥 있었으면 곱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 두드려 맞았겠지. 어쩌면 불구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이 맞을 매를 기태가 대신 맞았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나저나 아까 공장에서 마주친 거 기태 아닌가? 아니, 좀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워낙 다급한 순간이었고, 도망치는 데 급급했기에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이 기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설마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잠깐 걱정해 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조폭들이 기태를 왜 건드린단 말인가.
일단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강진우는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공원으로 들어섰다.
공원을 절반쯤 갔을 때였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서서 강진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진우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뭔가 있어. 누구지? 설마 또 어제?’
분위기를 보니 강진우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한데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서 기다리는 걸까? 만일 강진우가 버스를 탔다면 이 공원을 지나칠 일은 없었다.
즉, 강진우가 이리로 올 거라고 미리 알았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식하게 무작정 기다렸거나.
사내는 무표정하게 강진우를 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강진우는 굳이 묻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저 사내의 목적은 강진우였다.
강진우는 잠시 고민했다. 만일 상대가 조폭이었다면 그냥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평범했기에 경계심이 옅어졌다.
강진우는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강진우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왜 모른 척하는 겁니까?”
사내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미미하게 눈썹이 꿈틀거린 것 같았지만 그게 표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강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사내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는 거다. 물론 저 사내에게 그렇게 말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지만.
“우리 제안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까?”
‘제안? 게다가 우리라고?’
저 사내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제안이라니, 그건 또 뭐란 말인가.
‘대체 하룻밤에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진 거야?’
고작 어제 하루였다. 그것도 하루 온종일이 아니라 오후부터 새벽까지였다.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긴 시간도 아니었다.
한데 그 시간 동안 기태와 시비를 벌였고, 세나의 집까지 가서 뭔가를 했으며, 조폭들과 엮였다. 게다가 술까지 마셨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저 이상한 남자와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왠지 더 있을 것 같아 불안했지만 애써 그 생각을 던져 버렸다. 그래선 안 된다. 이걸로 끝이어야 했다.
“설마 술김에 대충 들은 건 아니겠지요? 어제 분명히 반쯤은 승낙한 걸로 봤는데, 아닙니까?”
강진우는 입을 다물고 사내를 빤히 쳐다봤다. 일단 대답할 말을 찾아야만 했다.
‘가장 쉬운 걸로 가자.’
마음을 정한 강진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순간 사내의 눈썹이 사납게 요동쳤다. 얼굴의 다른 근육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눈썹만 움직이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괴했다.
‘설마 저 사람 눈썹만으로 표정을 짓는 건 아니겠지?’
강진우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거든요. 누군지 몰라도 저랑 상당히 닮은 모양이던데······.”
사내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다. 왠지 평온한 느낌이었다. 감정이 착 가라앉은 것 같았다. 강진우가 안도하려는 찰나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거짓말까지 하시는군요.”
“아닌데요.”
강진우는 단호히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제의 나를 내가 모르는 나로 정의하면 누군지 몰라도 그저 닮은 사람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강진우가 워낙 빠르고 단호히 대답을 해서인지 사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왠지 저게 혼란스러운 표정인 거 같지?’
설마 했는데 정말로 눈썹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분명히 거짓에 더 가까웠는데 이젠 진실 같군요. 일단 그 말을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제안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전 그 제안이 뭔지도 모른다니까요.”
사내의 눈썹이 위로 크게 올라갔다.
“그 말은 제안이 뭔지 궁금하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뭔가 말려들었다. 강진우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거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딱 세 번입니다.”
“세 번?”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는 한 번에 1억씩 총 3억.”
순간 강진우의 사고 회로가 정지해 버렸다.
“어, 억?”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에 1억이라니.
“하, 하고 싶다······.”
강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주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일 그 돈이 있다면 엄마도 좀 편해지지 않겠는가.
사내의 눈썹이 더욱 위로 치솟았다. 최고로 올라간 줄 알았는데 거기서 더 올라가다니. 이건 이것대로 놀랍다.
‘저게 좋다. 기쁘다. 뭐 그런 뜻인가?’
“그럼 받아들이는 겁니까?”
사내의 질문에 강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 번에 1억을 준다면 그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주 특별한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섣불리 수락할 수 없었다. 그 제안이 뭔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 잊을 뻔했군요. 이건 어제의 대가입니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강진우는 얼결에 봉투를 받았다. 사실 좀 궁금하기도 했다. 봉투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수표를 꺼낸 강진우는 눈을 크게 떴다.
“헉!”
1억짜리 수표였다. 강진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봤다. 하지만 사내는 언제 사라졌는지 그 자리에 없었다.
강진우는 수표를 다시 봉투에 넣고 크게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공원 어디에도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떨떨하면서도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1억이라니. 상황만 딱 놓고 보면 누가 와서 1억짜리 수표를 주고 도망간 거 아닌가.
“이거 뭘 어째야 하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어제 일이 정말 궁금해졌다. 대체 이 수표는 어째야 한단 말인가. 이걸 엄마에게 드리면 과연 좋아하실까?
“처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내가 1억을 벌 수 있을 리 없잖아?”
이걸 은행에 가져가는 것도 문제였다. 과연 고등학생이 1억짜리 수표를 내밀면 거기서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있지 않으면? 이건 그냥 받은 거잖아. 정당한 대가로.”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런 거 같았다.
결국 강진우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봉투를 품에 넣은 다음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이 봉투는 당분간 봉인이다.
***
파란만장한 하루가 지났다. 워낙 겪은 일이 많고 하나하나 범상치 않았는지라 일찍 잤다. 더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또 눈을 번쩍 떴다. 마치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자다가 깼다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그냥 앉았다가 일어나는 정도?
“이건 좋은 거 맞지?”
아마 다른 고등학생들은 다들 아침마다 고생할 것이다. 이렇게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을 번쩍번쩍 뜨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제 겪은 일 때문이거나 혹은 그제의 기억을 잃어서이리라.
“아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강진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 굶어 죽는 거 아냐?”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찍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기졌다. 어떻게 이렇게 배가 고플 수 있단 말인가.
“이거 혹시 무슨 병은 아니겠지?”
배고픈 병이 뭐가 있을까? 나중에 검색이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엄마! 밥!”
당당하게 외치고 나간 강진우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또 심상치 않았다.
강진우는 덜컥 겁부터 났다. 설마 어제 내가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한 건 아니겠지?
한데 엄마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니 어제랑은 좀 달랐다. 어제는 한심한 아들을 보는 눈이었다면 오늘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하는 질린 표정이었다.
“어······ 왜?”
“너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먹어? 진짜 배가 고파?”
“고, 고픈데?”
고픈 정도가 아니라 아주 쓰러질 것만 같다. 말할 힘도 없었다. 빨리 밥이 필요했다. 밥! 밥! 밥!
하지만 들려오는 엄마의 대답은 강진우에게 절망을 선사해 주었다.
“없어.”
“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없다니? 엄마 밥 안 했어?”
“안 하긴! 평소보다 훨씬 많이 했지! 남은 밥까지 아까 싹 먹었잖아!”
“싹 먹어? 누, 누가? 설마······.”
강진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엄마는 한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스 불을 줄였다.
“기다려. 뜸 들이는 중이니까. 아직 시간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그제야 강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알라뷰.”
“그나저나 너 더 크려나 보다. 그렇게 먹어 대는 걸 보면.”
“그, 그래? 내가 그렇게 많이 먹나?”
“운동을 해서 그런가?”
“운동?”
“아까 운동한다고 나갔다 왔잖아. 무슨 운동 하는 거니?”
“어? 그, 그냥 달리기.”
“그래. 공부도 좋지만 운동도 꼭 필요해. 자고로 몸이 건강해야 뭐든 잘되는 법이야. 잘 생각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해 봐. 밥은 얼마든지 해 줄 테니까. 알았지?”
“어? 어······ 그럴게.”
대답은 건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잠든 사이에 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분명히 자고 일어났다. 한데 그 틈에 또 깨어나서 뭔가 이상한 짓을 한 모양이다.
‘운동에 밥까지······ 아니, 진짜 운동을 하긴 한 건가?’
설마 또 나가서 사고라도 친 건 아니겠지? 어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강진우는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돼!’
이제부터는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이건 정말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진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알아봐야만 했다. 아직 방법은 없었지만.
***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도착한 강진우는 교실 분위기가 어제와는 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뭐지? 설마 김기태 때문에 날 왕따시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불안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왠지 그런 모든 것들이 다 가소롭게 느껴졌다.
한데 가만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뭔가를 함께 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다가가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앉아 있었다. 아니, 솔직한 마음은 좀 귀찮았다. 어쩌면 이제 곧 기태가 올지도 모른다.
그것도 문제였다. 그놈을 대체 어쩐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당연히 강진우는 당황했다.
‘뭐지? 이제부터 시작인가?’
나름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강진우 앞으로 스마트폰 세 개가 동시에 나타났다. 다가온 아이들이 내민 것이다.
“뭐야?”
퉁명스런 강진우의 말에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진우야. 이거 너 아냐?”
“응?”
강진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내민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다들 같은 동영상을 띄워 놓고 있었다. 멈춰 있는 사진을 보건대 도로였다. 아주 익숙한.
‘여긴!’
강진우는 서둘러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동영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횡단보도였다. 거기를 학생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명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진우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명히 자신이었다.
# 동영상
채수영은 오늘도 손에 작은 캠코더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 그저께 같은 대박을 터트려야 하는데.”
그저께 우연히 찍은 그 영상은 정말이지 대박이었다. 아마 앞으로 평생 다시 찍기 어려운 영상일지도 몰랐다.
채소영은 남들보다 감이 좋았다. 그녀는 감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건 그저 감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정확히 말하면 감이 아니라 불길함이었다.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징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이용해 불길한 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장면을 영상으로 찍었다.
어떤 불길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기에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찍을 수는 있었다. 멀리서 불길한 자리를 계속 주시하면 되니까.
채수영은 그런 사고 영상을 내다 팔았다. 요즘은 팔기도 쉬운 세상이 되었다. 일종의 프리랜서였다. 물론 돈벌이는 잘 안되지만.
그런 일을 하는 게 좋지는 않았다. 왠지 남의 불행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가끔은 그렇게 찍은 영상으로 뺑소니범을 잡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냥 목격이 아니라 생생한 영상으로 남았으니 얼마나 수사가 편해지겠는가.
그렇게 사고 현장만 찍던 채수영은 그저께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채수영은 당시의 상황이 여전히 생생했다.
“불길해도 아주 불길해. 막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마······ 안 되겠지?”
보통 이 정도로 불길하면 반드시 사람이 죽었다. 그 정도로 큰 사고가 터진다는 뜻이다.
가끔 아주 운빨 터지는 사람은 사고에서 살짝 빗겨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채수영은 캠코더를 작동시켰다. 불길함이 극에 달한 걸 보면 아마 조만간 저곳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날 것이다.
“무단횡단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막아 주지 뭐.”
그게 채수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통행량이 제법 되는 횡단보도였기에 이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신호가 절반쯤 지나갔을 때,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걸어갔다.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으니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데 채수영은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직감했다. 이렇게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캠코더로 지나가는 학생을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큰 트럭 한 대가 미친 듯이 돌진했다. 아마 신호도, 길을 건너는 학생도 못 본 모양이었다.
채수영은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건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주 처참한 사고 현장이 될 것이다. 그녀조차 몇 번 겪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큰 사고 말이다.
끼이이이익!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타이어 파열음이 들렸다.
꽝!
차는 멈췄지만 학생은 트럭에 정통으로 부딪혀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
안타까운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채수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영상을 찍는 것 외에는.
허공에 붕 떠오른 학생이 갑자기 몸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균형을 잡고 바닥에 가볍게 내려섰다. 마치 금메달을 딴 체조선수 같은 동작이었다.
“어?”
채수영의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저렇게 정통으로 트럭에 부딪히고서 멀쩡히 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도 걸어가다가 옆을 들이받았다. 저건 보지 않아도 최소 사망이었다. 한데 저 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잡아야 돼!”
채수영은 캠코더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학생을 쫓아갔다. 저 학생을 따라가면 진짜 대박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는 사이 트럭 운전수가 내렸다. 하지만 채수영은 그를 지나쳐 학생을 따라갔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빵빵!
경적이 요란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몇 발만 더 가면 대박인데.
그리고 그 순간 채수영이 따라가던 학생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어? 어디 갔어?”
분명히 캠코더를 떼지 않았다. 끝까지 쫓았다. 자신의 몸조차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 학생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한데 화면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채수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그녀의 눈에 높이 뛰어올라 건물 벽을 박차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캠코더를 들었다.
두 건물을 번갈아 박차며 위로 쭉쭉 올라가고 있었다. 저건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그 남학생은 그렇게 건물을 넘어갔다.
채수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가 사라진 건물 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빵빵!
“너 미쳤어! 안 비켜!”
경적과 욕설이 쉴 새 없이 쏟아졌지만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잡고 싶다······.”
저 사람의 영상을.
채수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마치 어딘가에 정신을 빼앗긴 좀비처럼.
채수영은 고개를 휘휘 저어 회상에서 벗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어쩌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그제 찍었던 영상을 다시 확인해 봤다. 다시 봐도 예술이었다.
이러니 조회수가 폭발하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 대박이 나긴 났다. 아마 이대로 가면 이번 동영상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천만을 훌쩍 넘을 수도 있었다.
“좋아. 힘내자!”
채수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그런다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운을 바라는 것 외에는.
거리를 배회하던 채수영의 눈에 커피숍이 보였다. 아니, 그 커피숍 앞에 펼쳐진 횡단보도가 보였다.
“가만, 저 횡단보도를 또 건너지 않을까?”
그 생각을 떠올린 채수영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이런 바보! 바보! 바보! 멍충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 말은 이 근처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뜻이고 즉, 이 횡단보도를 자주 이용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서 죽치고 기다리면 되는데!”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비록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냥 고등학생 같지가 않았다.
상당히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채수영의 감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말이다.
채수영은 서둘러 캠코더를 가방에 넣고는 횡단보도 바로 앞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 여기서 잠복이다!
***
동영상을 보던 강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사고 장면이었다. 기억이 날아간 이유를 이제야 알아냈다.
‘사고였다니. 어? 저건 또 뭐야?’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가볍게 착지하는 모습은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다.
화면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동영상을 찍는 사람이 쫓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진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대단하네······.”
강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건물을 번갈아 박차며 위로 올라가는 모습은 그저 놀랍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저게 나라고?’
저건 분명히 자신이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저런 능력이 없었다.
이내 동영상 속의 강진우가 건물 옥상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거 너 맞지?”
“이거 뭐야? 너 혹시 영화 찍어? 오디션 본 거야?”
“영화 홍보 맞지? 무협 영화야?”
“이거 어떻게 찍은 거야? 와이어 맞지?”
“특수효과라니까!”
저마다 한마디씩 하니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강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 아냐.”
“어?”
“아냐?”
“에이, 그럴 리가. 딱 봐도 넌데?”
“왜? 아직 비밀이야?”
하지만 강진우가 할 말은 딱 하나뿐이었다.
“이거 진짜 나 아냐.”
“정말 아니라고?”
하지만 믿는 사람은 몇 없었다. 다들 의심과 의미심장함이 뒤섞인 눈으로 강진우를 바라봤다.
강진우는 당당했다. 이건 정말로 자신이 아니었다. 사고 전까지는 분명히 자신이었지만 사고 이후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저러고 다니면서 사고를 쳤다 이거지?’
강진우는 굳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다른 동영상은 없어?”
어쩌면 다른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었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긴, 이것도 보통 우연이 아니지.’
저 순간 누군가가 동영상을 찍었다는 건데, 미리 사고가 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고서야 가능한 구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짜라고 믿는 거구나.’
확실히 그런 정황을 끼워 맞춰 보면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만일 CCTV 영상이었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멍청하긴, 일단 저기에 먼저 가 봤어야 하잖아.’
사실 그건 어제 해야 했었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이고 모든 일을 대충대충 흘리는 평소의 성격이 나쁘게 작용했다.
강진우는 오늘 저 횡단보도에 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저 동영상을 찍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구도로 저렇게 찍었다는 건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게 자신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선생님 오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다들 우르르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진우는 당연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다.
“시간 잘 가네.”
딴생각을 해서 그런지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 자신에게 닥친 또 다른 문제점 하나가 떠올랐다.
‘아, 기태! 오늘도 오려나?’
아마 오늘은 오자마자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릴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몰라도 무섭지는 않았다. 그 생각이 들자 아까 본 동영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게 진짜 그런 능력이 있는 거 아닐까? 아니면 왜 기태가 안 무섭겠어?’
기억은 안 나지만 본능은 자신의 능력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잡다한 생각이 갑자기 일시에 날아가 버렸다.
“으악! 배고파!”
진짜 어마어마하게 배가 고팠다. 아침보다 더 심했다. 이 허기를 없애려면 급식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어쨌든 먹자. 배고파 쓰러지겠네.”
이러다가 급식실까지 가는 도중 굶어 죽는 건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가 고팠다.
‘이것도 이상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먹었다고······.’
하나하나 따져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대충대충 넘겼는데, 오늘 동영상을 보고 난 다음부터 그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머릿속을 맴돌았다.
강진우는 일단 급식실로 달려갔다. 남들보다 더 빨리 먹고 싶었다. 굶어 죽기 전에 말이다.
급식실로 가는 도중 몇몇 아이들이 강진우를 알아보고 힐끔거렸다. 아마 그 동영상을 안 본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진우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반이나 강진우를 잘 아는 선생님 몇 명뿐이었다.
하지만 개중에 눈썰미가 아주 뛰어난 사람은 강진우를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신이 없으니 그저 힐끔거리는 것이다.
사실 강진우는 학교에서는 그 동영상보다는 기태에게 찍힌 사람으로 더 유명했다. 고작 하루인데 그 소문이 벌써 파다했다.
강진우는 모든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지금은 고작 남의 시선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된 얘기가 들려오면 귀가 기울여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이 그랬다.
“기태 오늘 결석했다며?”
“어. 안 나왔던데?”
“무슨 일 있대?”
그렇게 말하며 마침 지나치는 강진우를 힐끗 쳐다본 남학생이 다시 물었다.
“보통 이런 일 있으면 학교 안 빠지잖아.”
“몰라. 아프다던데?”
“아파? 김기태가?”
“내가 알 게 뭐야.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뭐 무슨 쌈질할 일이라도 있나 보지. 저번에도 한 번 그랬잖아.”
“하긴······.”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멀어져 갔다. 강진우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어갔다.
“안 나왔구나. 어쩐지. 일단은 잘된 일인가?”
귀찮은 일 하나가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할 일도 많고 머리도 복잡한데 말이다.
기태가 아프다는 말에 문득 어제 일이 떠올랐다. 그 일곱 조폭에게서 도망칠 때 살짝 스쳤던 사람이 어쩌면 진짜 기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조폭들에게 맞은 건가?’
강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 버렸다. 기태의 일은 사실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너무 비중이 작았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쌓여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 품에 고이 모셔져 있는 1억이라든가.
그 1억을 떠올리니 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걸 건네준 희한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을 만나야겠어.’
어제는 당황하기도 했고 감당하기 어려울 거 같아서 모든 일에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마음가짐이 좀 달라지니 어느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급식을 다 먹었다. 몇 숟갈 뜨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비어 버린 것이다.
“아······ 모자라네.”
강진우가 빈 식판을 보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강진우에게 다가왔다. 강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이 커다래졌다.
세나였다.
“여기 앉아도 되지?”
강진우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세나가 생긋 웃고는 마침 비어 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어머, 벌써 다 먹었네?”
그렇게 말한 세나가 강진우의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모자라? 내 거 좀 나눠 줄까?”
“어? 그, 글쎄.”
강진우가 차마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자, 세나가 알았다는 듯 다시 생긋 웃고는 자신의 밥을 대부분 강진우의 식판에 덜어 버렸다. 다른 반찬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거면 되거든.”
“고작 그거?”
“이 정도 몸매 유지하는 거 쉬운 일 아니다. 그리고 난 밥보다는 다른 걸 더 많이 먹거든.”
세나가 또 미소 지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강진우는 잠시 멍하니 세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식판의 밥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우와. 너 정말 잘 먹는다.”
세나는 잠시 강진우가 먹는 걸 바라보다가 자신도 조금씩 음식을 먹었다.
강진우가 워낙 빨리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세나가 일부러 맞춘 건지 동시에 식사가 끝났다.
“하아.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네.”
“설마 아직도 모자라는 건 아니지?”
강진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모자랐다. 지금까지 먹은 것의 두 배는 더 먹어야 배가 찰 것 같았다.
‘정말 급한 불만 끈 느낌이야.’
대체 어쩌다 배 속에 거지를 키우게 되었을까. 문득 품에 있는 1억을 몽땅 식비로 쓰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튼 잘 먹었다. 고마워. 이 식판은 내가 치울게.”
강진우는 세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식판 두 개를 들고 일어났다.
“같이 가.”
세나가 강진우 옆에 바짝 붙었다. 강진우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편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게 확연히 보였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얼굴은 이제 괜찮아 보이네?”
세나의 말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긴 했지만 사실 이건 신기한 일이었다.
어제 기태에게 맞은 상처와 멍이 깨끗하게 나았다. 잠들기 전까지는 그대로였는데, 자고 일어나니 없어져 버렸다.
‘내가 자는 동안 분명히 뭔가 있었어. 새벽에 일어나 운동했다는 것도 그렇고······.’
강진우는 CCTV라도 달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정작 옆에 있는 세나와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 뭐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
“그냥 복잡한 일이야.”
“동영상 때문에?”
강진우가 굳은 표정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생각해 보면 그저께 기억을 잃었을 때 세나도 함께 있었다.
“그거 너 맞지?”
강진우가 대답하지 않자 세나가 또 미소 지었다.
“내가 널 못 알아볼 리 없지. 훨씬 멀리서 찍었어도 알아봤을걸?”
순간 강진우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보다 어떻게 찍은 거야? 와이어? 아니면 CG?”
강진우는 세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지금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이렇게 보면 알아?’
눈을 통해 상대의 진심을 알아낸다는 건 영화나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진짜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세나는 진심이었다. 묘한 확신이 들었다.
“이따가 얘기해 줘. 오늘 시간 되지?”
강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어제 1억을 건넸던 남자가 떠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럼 이따가 봐. 오늘 나 데려다줄 거지?”
어렵지 않았다. 세나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도 집에 아무도 없거든? 이따 라면 먹고 갈래?”
강진우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세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세나가 까르르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뭐가 그렇게 심각해? 아하하하!”
그렇게 웃고는 후다닥 멀어져 갔다.
뒤돌아 달려가는 세나의 새빨간 귓불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 당신이 잠든 사이에
‘라면······ 라면······.’
머릿속에서 라면 먹고 가라던 세나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세나가 큰 의미를 두고 그 말을 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남자 아닌가.
세나의 말 덕분에 점심시간 이후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수업에 집중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세나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강진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묵묵히 걸었다. 이렇게 세나와 나란히 걷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오늘 기태 안 왔더라?”
“그렇더라고.”
“일단은 다행이다. 그치?”
“뭐······ 그런가?”
솔직히 강진우는 여전히 기태가 두렵지 않았다. 칼이라도 하나 들고 온다면 모를까.
“기태 얘기는 이제 하지 말자.”
강진우의 말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진우를 바라봤다.
“아직 우리 얘기도 별로 한 게 없잖아.”
세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풋 웃었다. 그러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강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너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알고 있는데. 넌 아닌가 봐?”
“응?”
강진우는 당황한 눈으로 세나를 바라봤다. 많이 알고 있다고? 세나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누군가 말해 줬다는 거고, 그 누군가는 강진우 자신일 확률이 제일 높았다.
‘그럼······ 그날 얘기해 준 건가?’
기억을 잃은 하루. 그날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 그날의 일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보면.
“정말 모르나 보네. 너, 생각보다 인기 많아.”
“아······ 그래? 뭐? 인기? 내가?”
그냥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려던 강진우는 세나의 말을 그제야 이해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본 세나가 또 입을 가리고 풋 웃었다.
“뭐야, 농담이었어? 무슨 농담을 그렇게 간절히 믿고 싶게 해?”
강진우는 그렇게 말하고 세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데 세나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갑자기 웃음이 뚝 멎었다. 그리고 당황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뭘 보고 이러는 거지?’
강진우는 세나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검은색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누구의 차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안다.
차 문이 달칵 열리고 운전석에서 멋들어진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내렸다.
“아, 아빠?”
세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자, 세나가 더 당황해 물었다.
“오늘 출장이라고 안 했어?”
세나 아빠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미소까지 짓자 그림이 따로 없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세나 아빠에게로 몰렸다. 물론 대부분 여자였다.
“시간이 좀 미뤄졌어.”
사실은 미뤄진 게 아니라 미룬 거였지만 그런 사소한 걸 세나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출장 준비하려면 바쁠 텐데 여기까지 온 거야? 나 보려고?”
세나 아빠는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아빠가 출장 어디로 가는지 얘기했던가?”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디로 가는데?”
세나는 그렇게 물으며 슬쩍 옆에 있는 강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파리.”
“파리? 프랑스?”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은 세나가 최근 꼭 가 보고 싶다고 종종 아빠에게 말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마침 출장 기간이 짧아서 너랑 같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왔지.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는?”
세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진우를 보며 말했다.
“아, 내 친구 강진우. 저번에 얘기했지?”
세나 아빠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리고 강진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구나.”
강진우는 황급히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았다.
“아, 안녕하세요.”
설마 세나 아빠랑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어? 세나 아버님······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닌데?’
손이 은은히 아플 정도였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그리 꽉 쥐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손에 느껴지는 악력이 클 뿐이었다.
강진우는 또 당황해 세나 아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세나 아빠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 세나 잘 부탁해. 아직 고등학생이니 학생 신분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도 되겠지?”
은근한 압박이 느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강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믿지.”
세나 아빠는 힘을 한 번 꽉 준 후,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세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물었다.
“같이 가려면 차에 타라.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하니까.”
세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할 때, 강진우가 먼저 나섰다.
“세나야. 라면은 다음에 먹자.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하네. 할 일도 좀 있고.”
세나는 그렇게 말하는 강진우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차에 타 버렸다. 세나 아빠는 세나가 차에 타자 강진우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예. 안녕히 가십시오.”
강진우의 정중한 인사에 세나 아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이내 차가 출발했다.
차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강진우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라······.”
나직이 중얼거린 강진우가 발걸음을 옮겼다. 세나가 가고 나니 그동안 잠시 미뤄 뒀던 생각들이 뇌리에 차곡차곡 채워졌다.
세나에게 했던 말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니었다. 꼭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
강진우는 딴생각하지 않고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사실 지금은 딴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물론 아무리 고민해도 성과는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성과가 있을 만한 고민이 아니었다. 이 고민을 끝내려면 사라진 하루의 기억을 되살려야만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억지로 기억을 짜내곤 했다. 그것 역시 아무 성과가 없었고 말이다.
집에 도착한 강진우는 방에 들어가 가방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자······ 이제 어쩐다······.”
일단 강진우가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냥 모른 척하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든 진실을 파헤쳐 보는 것이다.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진우가 아무리 긍정적이고 대충대충 산다고 해도 이런 찜찜함을 남겨 놓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파헤치기로 결정을 내리니 이제 그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좋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단 강진우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내가 운동을 했다고 했지? 그러니까······ 한 여섯 시쯤이겠지?”
그래야 아귀가 맞는다. 엄마가 발견해야 하니 엄마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일 테니까. 아마 그쯤일 것이다. 아니면 10분 정도 이르거나.
“과연 또 운동을 할까?”
사실 정확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엄마도 그저 운동을 하러 나간다고 했지 강진우가 무슨 말을 하고 나갔는지 정확히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진짜 운동을 하러 나갔는지 아니면 또 무슨 사고를 치러 나갔다 왔는지 알 게 뭔가.
잠시 고민하던 강진우는 컴퓨터를 켰다.
“좋아.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 보자.”
아마 그게 현재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이리라. 강진우는 모니터 위에 매달린 웹캠을 확인했다.
컴퓨터를 살 때부터 붙어 있던 건데 아직까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강진우가 하려는 일은 단순했다. 자는 동안 동영상 촬영을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정말로 자신이 일어나는지, 또 그때 상태는 어떤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어쩌면 그걸 보면 기억을 되살리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도 조금 있었다.
강진우는 몇 번이나 확인해서 웹캠의 각도를 잘 맞췄다. 정확히 침대를 비롯해 그 근방을 모두 찍을 수 있게 해야 했다.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것부터 해 보고 더 머리를 굴려 새로운 방식을 찾아낼 계획이었다. 집 주변에 CCTV를 설치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돈이야 1억이나 있으니······.’
그 생각을 떠올린 강진우는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외투를 바라봤다. 그 1억은 여전히 저 외투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아우. 복잡해!”
강진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언제까지 저 1억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렇게 준비하다 보니 정작 얼마 남지 않은 시험공부는 조금도 못 했다.
강진우는 잠시 공부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정신 이 기분에 공부는 무슨 공부란 말인가.
“컴퓨터 켠 김에 딱 한 판만 하자.”
그날 강진우의 하루는 게임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
아침이 되었다. 강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뜸과 동시에 찾아오는 극심한 배고픔은 덤이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드니 일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강진우는 황급히 침대를 박차고 나와 컴퓨터부터 확인했다.
“오케이!”
웹캠은 여전히 제대로 작동 중이었다. 이제 저장된 동영상을 확인할 차례였다.
어쩌면 오늘은 움직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될 때까지 할 테니까.
동영상을 띄우고 시간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자그마치 6시간이 넘게 저장된 영상이었다. 그렇기에 앞부분은 정말 대충 진행바를 툭툭 클릭해서 넘기고 새벽을 집중적으로 확인했다.
“어?”
강진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까지 미동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던 자신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강진우는 동영상 재생 속도를 정상으로 맞추고 집중했다.
영상 속의 강진우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목을 돌리고 팔다리를 움직여 몸을 풀었다. 그러다가 컴퓨터 쪽을 슥 쳐다봤다.
순간 강진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상 속의 강진우가 뭔가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진우는 고개를 돌려 웹캠 쪽을 쳐다봤다.
화면을 통해 강진우가 이쪽의 강진우를 바라봤다. 강진우는 마치 화면 속의 저놈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 같아 가슴이 섬뜩해졌다.
화면 속의 강진우가 씨익 웃었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화면 속 강진우의 시선이 웹캠에서 책상 위로 움직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스마트폰을 집었다.
“어?”
강진우는 황급히 책상 위를 확인했다. 스마트폰은 원래 그 자리에 고이 놓여 있었다.
안도한 강진우는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그 안의 강진우는 어느새 스마트폰을 든 채 웹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치 거기에 뭔가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 강진우가 방에서 나갔다. 밖에서 엄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음질이 그리 좋지 않아 엄마의 말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진우의 대답은 분명히 들려왔다. 마치 일부러 자신이 들으라고 하는 듯이.
―운동.
아주 단순명료한 단어였다. 한데 뭔가 좀 묘했다.
강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화면 안의 강진우를 따라 중얼거렸다.
“운동. 운동. 운동!”
달랐다. 말투가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아마 강진우도 대충 넘겼다면 몰랐으리라. 하지만 워낙 이상한 점을 찾으려 집중하는 중이었기에 그 미묘한 차이를 잡아냈다.
“설마 말이 서툰가?”
강진우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양팔로 몸을 감싸고 팔을 슥슥 문질렀다. 섬뜩했다.
잠시 화면을 보고 있다가 대충 시간을 보고는 영상을 뒤로 툭툭 넘겼다. 그러자 다시 강진우가 방 안에 등장했다.
강진우는 화면을 다시 조절해서 정확히 저 안의 강진우가 집에 들어오는 시점을 잡아냈다. 화면에서 나오는 강진우의 목소리는 정말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또렷했다.
―엄마, 밥.
이것 역시 말투가 이상했다. 하지만 엄마가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강진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부르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 강진우는 웹캠을 보며 다시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손에 든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원래 자리에 놓았다.
강진우는 화면 속의 자신이 다시 침대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동영상을 껐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배터리가 확 줄어 있었다. 분명히 전원을 연결해 뒀기에 배터리가 떨어질 일이 없었는데 이렇다는 건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했다는 뜻이었다.
강진우는 천천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동영상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배터리를 많이 소모할 만한 건 그것뿐이 없었다.
강진우는 평소에 사진을 좀 찍긴 해도 동영상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한데 동영상이 하나 있었다. 전혀 찍은 기억이 없는 동영상이.
강진우는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동영상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화면 가득 동영상 하나가 펼쳐졌다.
어둑어둑해서 처음에는 뭐가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곧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뒷산인가?”
뒷산 중턱에 있는 공터가 분명했다. 정상에 있는 공터에 운동기구가 설치된 것과 달리 아무것도 없고 비좁아서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화면에 공터와 나무, 바위만 있었다. 하지만 이내 강진우가 나타났다.
화면 속의 강진우는 동영상을 촬영하는 스마트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답답하게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 뭐라고 좀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강진우는 투덜거리며 동영상에 집중했다.
화면 속에서 강진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팔을 슬쩍 들더니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발을 움직였는데, 그렇게 움직이니 마치 느릿한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대체 저게 뭐 하는 거지? 탈춤 연습하는 건가?”
강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화면 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휘이잉!
춤을 추는 강진우의 손짓에 따라 바닥에 흩어져 있던 낙엽 부스러기가 휙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법 같았다.
손과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의 낙엽들이 떠올라 함께 춤을 췄다.
이내 강진우는 허공에 회오리 치는 낙엽 속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쉬이이이!
어느 순간 낙엽이 일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회오리 치게 하던 힘이 사라진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바닥에 차분히 가라앉은 것이다.
그 중심에 강진우가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양손은 가슴 위까지 높게 들어 합장한 채였다.
강진우가 눈을 떴다. 그러자 눈에서 마치 섬광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면을 향해 씨익 웃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화면이 덜컥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여 방금 전 강진우가 서 있던 곳을 비췄다.
바닥에 흩어진 낙엽이 보였다. 한데 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마치 낙엽으로 만들어진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중심을 크게 감싼 것 같았다.
화면을 지켜보던 강진우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동영상이 끝나 화면은 그저 새까맸지만, 그래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게······ 나라고?”
학교에서 친구들이 보여 줬던 동영상과는 다가오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강진우는 정신을 차리고 동영상을 다시 틀었다.
화면 속의 자신은 정말로 멋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다 보니 화면 속의 춤사위가 점점 눈에 익었다.
“이거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한 거구나.”
화면 속의 자신은 같은 동작을 네 번이나 반복했다. 그중 낙엽이 날아올라 회오리 치고 용을 그린 것은 마지막 한 번뿐이었다.
마치 이렇게 반복하면 마지막 그걸 할 수 있다고 보여 준 것 같지 않은가.
“나도 저걸 할 수 있을까?”
그 말을 중얼거린 순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왠지 그걸 해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계속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이렇게 했던가?”
강진우는 방 한가운데 서서 화면 속의 춤사위를 따라서 해 봤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아. 어렵고 배고프다.”
어마어마한 허기가 몰려왔다. 대체 이 배고픔을 어쩐단 말인가.
“이러다 피둥피둥 살찌는 거 아냐?”
강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 밥!”
그렇게 평소와 아주 약간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
강진우는 밥을 먹고 뒷산으로 향했다. 사실 시험공부를 해야 하지만 강진우가 생각하기에 그보다는 이게 더 급했다.
산에 도착한 강진우는 공터로 달려갔다. 어차피 오르는 길 자체가 산책로에서 떨어져 있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숨이 찰 정도로 달려 도착한 공터의 바닥에는 동영상에서 봤던 그 용문양이 분명히 있었다. 낙엽으로 그려진 용 말이다.
“진짜였어.”
이제 더 이상 의심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밝혀내야 한다. 자신의 몸을 움직인 놈의 정체를 말이다.
강진우는 근처에 있는 넓적한 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용문양을 그리며 흩어진 낙엽을 내려다봤다.
“대체 이놈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나직이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동영상을 확인했다.
화면 안에서 느릿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솔직히 이걸 보고 있으면 이놈의 정체가 뭔지, 또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나도 이걸 하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강진우는 움직임을 다시 확인했다. 제법 복잡했지만 외우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머리가 좋았나?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쉽게 움직임을 외울 수 있었다.
기억이 제대로 된 건지 동영상을 통해 다시 확인한 강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낙엽으로 그려진 용문양 한가운데 섰다.
강진우는 느릿하게 팔다리를 움직였다. 될 때까지 하고 말리라.
어느새 해가 중천을 지났다. 아침 일찍 나와서 지금까지 동영상 속의 동작을 반복한 것이다.
“헉헉. 내가 생각해도 진짜 대단하다. 벌써 몇 시간이야?”
한두 번 하면 지겨워서 못 할 줄 알았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네 시간이 넘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진우는 아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에 그려져 있던 용문양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대신 어지러이 흩어진 낙엽만 있었다.
“난 안 되네. 대체 뭐가 다른 거지?”
같은 몸으로 하는데 왜 자신은 안 되고 동영상 속의 저놈은 된단 말인가. 분명히 동작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걸 알아내지 않으면 저걸 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아······ 배고파.”
네 시간이나 산에서 연습하는 바람에 점심때가 지나 버렸다. 한창 집중해서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멈추고 나니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지금 당장 밥을 먹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뒤룩뒤룩 살찌는 거 아냐?”
강진우는 산에서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살이 찌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평소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살이라는 게 어디 하루 이틀 만에 찌는가. 이렇게 먹다 보면 어느새 체중이 불어나 있고 지방과 군살이 몸 곳곳에 덕지덕지 달라붙을 것이다.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달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토요일이지만 엄마는 출근했기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밥솥을 열어 보니 밥이 한가득 있었다. 강진우는 그걸 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 마음으로는 이 밥을 몽땅 먹어 치울 수도 있을 듯했다.
잠시 흐뭇한 표정으로 밥을 보던 강진우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 이건 뭐 거지도 아니고······.”
자조적인 말투와 달리 행동은 빠르고 힘찼다. 커다란 대접을 꺼내 거기에 밥을 한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간단한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식탁에 내려놨다.
그야말로 밥을 폭풍처럼 흡입했다. 무려 세 대접을 먹어 치우고 나서야 숟가락을 놓았다.
가득했던 밥솥의 밥은 벌써 절반이 넘게 사라져 버렸다.
“뭐지? 이건? 허기만 간신히 가셨네.”
밥을 그렇게 먹었는데 배가 부르지 않았다. 그저 배고픔이 사라진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두 대접까지는 여전히 배가 고파서 정말 허겁지겁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세 대접을 비우고 나서야 간신히 허기가 사라진 것이다.
“병원에라도 가 봐야 하나?”
강진우의 표정에 걱정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작해 볼까?”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볼 작정이었다. 최소한 낙엽으로 승천하는 용은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강진우는 주먹을 한 번 불끈 쥔 다음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당연히 뒷산이었다.
***
토요일은 하루 종일 뒷산에서 보내는 바람에 정말 일찍 잠들었다. 그렇게 몸을 혹사했으니 얼마나 피로가 쌓였겠는가.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났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눈을 번쩍 뜨면서.
강진우는 몸 여기저기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아주 가뿐했다. 근육통이나 피로는 전혀 없었다.
“이거 하나 마음에 드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이렇게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알람도 안 켜 놨는데 말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엄마가 밥을 차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강진우 먹으라고 차리는 상이었다.
‘뭐지? 설마 오늘은 새벽에 안 일어난 건가?’
오늘은 굳이 웹캠을 켜지 않았기에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배가 엄청나게 고팠으니 식탁에 앉았다.
“아침에 무슨 운동 하는 거니?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지?”
엄마의 질문에 오늘도 새벽에 나갔다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별로 무리하는 건 아냐. 몸 생각도 좀 해야지.”
“내일부터 도시락이라도 좀 싸 줄까? 급식만으로 모자라지 않아?”
“도시락?”
“그래. 어제 밥솥 보고 엄마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그 많은 밥을 다 먹니? 너 그러다 살찐다.”
강진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어제는 자신이 생각해도 좀 심하다 싶었다. 밥솥을 몽땅 비우는 바람에 저녁을 엄마가 또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하고도 저녁을 또 먹었다. 즉, 어제는 저녁을 두 번 먹은 셈이었다.
“그래서 운동하잖아. 아마 괜찮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자신 없었다. 이렇게 처먹는데 살이 안 찌면 그게 정상인가?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아침을 먹었다. 엄마는 요즘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뭔가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식비 많이 들 텐데 다행이네.’
돈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1억이 떠올랐다. 여전히 외투 안주머니에 있는 1억 말이다.
‘나도 참······ 그 큰돈을 맨날 가지고 다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냐.’
어쩌면 너무 큰돈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감이 없으니 내 돈이 아닌 것 같기도 했고.
“잘 먹었습니다.”
강진우는 밥을 후다닥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었다. 습관적으로 동영상을 틀려던 강진우의 손가락이 딱 멎었다.
“또?”
동영상 파일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오늘 새벽에 찍은 게 분명했다. 날짜와 시간이 딱 그랬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새 동영상을 눌렀다. 화면 가득 동영상이 펼쳐졌다.
오늘은 어제 것과는 좀 달랐다. 처음부터 강진우가 등장한 것이다.
강진우는 시작하자마자 화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숨.
“숨? 숨쉬기 말하는 건가?”
화면 속의 강진우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한데 그 간격이 좀 묘했다.
계속 같은 방식으로 호흡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진우는 똑같이 따라 해 보기로 했다.
“후으으으읍!”
숨을 천천히 길게 들이마셨다가 숨을 딱 멈추고 다시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우우.”
그 간격은 점점 더 길어졌다. 숨을 더 오래 마시고 더 오래 참고 더 오래 내뱉었다. 그 모든 과정이 아주 천천히 이어졌다.
화면 속 강진우는 그렇게 호흡의 변화 자체를 다섯 번 정도 보여 준 다음, 다시 춤을 췄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 찍어서 그런지 아니면 호흡을 미리 알려 줘서 그런지 동작과 호흡을 어떻게 일치시켜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걸 세 번 반복한 다음 다시 본격적인 춤을 추었다.
연습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부드러웠다. 사방의 낙엽이 허공에 떠올라 함께 춤을 추었고, 용이 되어 휘몰아쳤다.
화아악!
낙엽이 일제히 흩어지며 바닥에 뿌려졌다. 이번에는 굳이 동영상으로 확인시켜 주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바닥에는 낙엽으로 용문양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동영상이 끝났다.
강진우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느끼며 서둘러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 엄마의 말이 들려왔지만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일단 밖으로 내달렸다.
당장 해 보고 싶었다. 동작은 어제 온종일 반복해서 이제 굳이 동영상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호흡을 일치시킬 차례였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안 될지 모른다. 숨겨진 다른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 하나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어느새 강진우는 어제의 그 공터에 도착했다. 바닥부터 확인했다. 낙엽으로 그려진 용문양이 보였다.
“좋아. 이번엔 내가 이걸 만든다.”
강진우는 일단 동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호흡부터 확실히 마스터해야만 한다. 그래야 동작에 호흡을 맞출 수 있다.
호흡의 길이가 핵심이었다. 어느 동작에서 숨을 마시고 어디서 멈추며 어디서 뱉는지만 알면 생각보다 간단히 호흡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강진우는 빨려들 듯 동영상에 집중했다. 호흡 방식은 금방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호흡과 동작을 맞추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단하고 이상했다. 이런 복잡한 동작과 호흡을 이렇게 간단히 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설마 정말로 머리가 더 좋아졌나?”
아니면 동작을 외우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왜 유명한 춤꾼들은 아무리 어려운 동작도 한 번만 보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강진우는 외운 동작과 호흡을 잘 기억하려 애쓰며 공터 한가운데 섰다.
강진우를 중심으로 거대한 용문양이 펼쳐져 있었다.
용문양을 휙 훑어본 강진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동작과 호흡을 맞춰 본 다음 천천히 팔을 움직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처음에는 동작과 호흡을 정확히 일치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어차피 일정 이상의 속도가 나오지 않으면 낙엽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동영상에서 그러했듯이.
동영상과 마찬가지로 세 번을 반복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호흡을 맞춰 봤다. 그렇게 하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이젠 훨씬 더 빠른 동작으로 이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진우의 동작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호흡도 그에 맞춰 빨라졌다.
속도가 붙으니 연습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움직임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정말로 어려웠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강진우는 온 신경을 집중해 빠르게 동작을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손끝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강진우는 깜짝 놀랐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고 춤에 집중했다.
점점 움직임과 호흡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온 정신이 춤 그 자체에 녹아들었다.
그 순간, 바닥에 죽은 듯이 깔려 있던 낙엽이 위로 휙 떠올랐다.
<『마신전설』 1-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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