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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수호검주 [E]

수호검주 1권 (1)

2019.03.12 조회 1,561 추천 11


 # 서장
 
 
 
 수호검주守護劍主는 황제지검皇帝之劍인 함광含光, 승영承影, 소련宵練의 세 자루 검을 지킨다······.
 
 
 
 # 황제지검
 
 
 
 “군주께서 죽으라 하시면 신하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충忠!”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교차된 금의錦衣를 입고 있는 청년. 청옥처럼 빛나는 맑은 두 눈과 칼날 같은 검미에서는 매서운 북풍한설 속에서도 푸름을 유지하는 청죽靑竹의 기상이 보였다. 또 온화해 보이는 입술과 서글서글한 인상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따스함이 절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꿋꿋한 기상과 온화한 인상이 잘 조화돼 절세의 기품마저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남아로 태어났으면 뜻을 품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 한 조각 붉은 마음만 푸른 물 위로 흘러가면 그만인 것을.’
 서쪽 하늘부터 은은히 번져 오는 붉은 낙조를 바라본 청년이 자신 앞에 놓인 백색 약사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건청궁乾淸宮을 향해 절을 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 금의위 진무사鎭撫司, 폐하를 더는 모시지 못할 것 같나이다.”
 청년이 그리 말한 순간이었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청년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금의위 소속 내위들이 일제히 검 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하나같이 비분강개한 얼굴이었다.
 쿵! 쿵! 쿵!
 한 손에 검을 들고 있는 금의위 내위들이 그 상태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희가 황상 폐하께 직접 상주할 것입니다. ···승하하신 선제 폐하는 물론 금상폐하를 오늘까지 홀로 지켜 온 진무사 대인에게 사약을 내리시다니요.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내위들 주변을 몇 겹으로 에워싼 채 대기하고 있던 환관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금의위 내위들과 그 몇 배에 달하는 환관들이 모조리 검을 빼 들고 있어,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사약이 든 사발을 들고 있는 금의위 진무사 한소군韓昭君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내위들에게 소리쳤다.
 “멈춰라! 황상 폐하께서 나 하나의 목숨으로 모두의 죄를 사하겠다 하셨다. 내위들은 검을 집어넣어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진무사 한소군의 가을 서릿발 같은 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러나······.
 내위들은 차마 검을 집어넣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검을 집어넣는 순간, 그들이 하늘처럼 따랐던 상관은 하릴없이 북망산으로 떠나야 하기에.
 한소군은 이내 온화한 목소리로 내위들을 설득했다.
 “나의 마지막 명에 따라라. 이제껏 한 번도 내 뜻을 어기지 않았던 그대들이 아니던가.”
 부드럽지만 힘없는 목소리.
 이제 최후의 순간이 온 것이리라.
 “진무사 대인!”
 뚝!
 뚜욱!
 뚜우욱!
 철혈의 심장과 무적의 검으로 황제를 지켜 온 금의위 내위들의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차가운 대지를 적셨다.
 “슬퍼하지 마라. 이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다음 생에서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들과 나, 천지신명 앞에서 그리 약조하지 않았던가······.”
 비통해하는 내위들을 위로한 한소군은 지그시 눈을 감고 붉은 석양에 물들어 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선제 폐하! 신 한소군, 이제야 폐하를 따라가게 됐나이다. 너무 늦게 왔다 책하지 마시고, 그곳에서도 신으로 하여금 폐하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승하한 선제를 그리는 그의 마음이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되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림阿琳, 나를 용서해라. 끝내 너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떠나게 됨을······.’
 그는 마지막으로 십오 년 전 고향 소주蘇州를 떠나올 때 영원히 기다리겠다고 말했던 어린 정혼녀 진효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황상 폐하 만세!”
 벌컥벌컥!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사발을 들어 사약을 들이켰다.
 “진무사 대인, 흑흑흑!”
 쿵! 쿵! 쿵!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위들은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이마가 깨져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흥건히 흘러내린 피로 바닥이 진하게 물들었다.
 “폐하, 폐하······.”
 금의위 내위들은 진무사 한소군에게 사약을 내린 황제를 원망하며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소군의 신형이 차가운 대지 위에 허물어졌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객들의 검과 도, 창을 몸으로 받아 내며 승하한 선제를 지켰다. 자신에게 사약을 내린 당금 황제마저 마지막 순간까지 호위했다.
 금의위 진무사, 아니 당대의 수호검주守護劍主 한소군은 자신이 수호하고자 했던 군주가 내린 사약을 받고 쓰러졌다.
 
  * * *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곳은 극락인가, 지옥인가.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가장 처음 보이는 이의 얼굴.
 익숙하다.
 “진무사 대인, 깨어나셨습니까?”
 부드러운 갈색 비단에 검은색으로 양쪽 끝을 대고,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를 입고 있는 중년인이 손을 잡았다.
 “이 공공公公······.”
 자신의 양손을 붙잡고 있는 이는 분명 사례태감인 이수李壽 공공이었다.
 “혹여 진무사 대인이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릅니다. 진무사 대인, 황상 폐하의 어보성지御寶聖旨를 받으십시오.”
 성지라는 말에 곧바로 자세를 갖추려 했다.
 휘청!
 그러나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닌 한소군은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하려 했으나, 그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황상 폐하께서 예를 갖출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상태로 성지를 받으십시오.”
 이 공공이 비단 두루마리를 소군에게 건넸다.
 소군은 필사적으로 성지를 향해 절을 하고 양손으로 두루마리를 받았다.
 그러고는 경건한 태도로 어보성지를 펼쳤다.
 단아하고 빼어나다. 하지만 제왕의 힘찬 기상은 느껴지지 않는 섬세한 필체.
 
 군주와 신하이기 이전에 형제보다 더한 정리情理를 가졌던 소군에게 말하겠네. 그대가 선제 폐하를 지켜 준 것이 몇 차례며, 나의 목숨 또한 구해 준 것이 몇 번이던가. 내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선제 폐하께서도 승하하시는 그 순간까지 그대에게 고마워했다네. 그런 내가 어찌 그대를 버릴 수 있겠는가.
 
 소군은 성지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보며, 황제가 이 글을 직접 쓰며 눈물을 흘렸음을 알 수 있었다.
 “폐하······.”
 ‘짐朕’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칭한 황제의 성지는 계속됐다.
 
 나는 허약한 황제다. 북쪽 장성 너머에서는 몽고의 잔당들이 호시탐탐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며, 내 주위에는 온통 잔악한 간신배들뿐이다. 또한 호랑이 같은 숙부가 제위를 노리고 있으며, 그들은 여러 세력들과 결탁하고 있노라. 나는 백척간두의 신세로 어디 하나 편히 기댈 곳이 없노라. 내가 믿을 사람이 있다면 오직 소군, 그대뿐이노라. 선제 폐하께서도 이런 나를 두고 승하하시며 편히 떠나지 못했음을 그대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니라.
 
 황제는··· 힘이 없었고, 극도로 외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정녕코 그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그토록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리하지 못했노라. 그대가 자금성에 온 이후 하루라도 편히 쉬었던 날이 있었던가? 선제 폐하와 나를 위해 그대가 몸으로 막은 수십, 수백 검날의 상흔이 아직 채 지워지지도 않은 것을. 하지만 그대가 떠나면 나의 목숨 또한 극히 위태로워짐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그대를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염치가 없는 군주다.
 
 “아니옵니다, 폐하. 폐하께서 원하시면 신은 일백 번이라도 폐하를 위해 다시 죽을 수 있나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런 그대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약을 내려야 했던 것이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 같구나. 나는 정말 힘이 없는 무능한 황제다. 허나 어찌 그대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는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사약을 대신한 비방으로 그대를 잠시 잠들게 해 이렇게 보내게 되었노라. 이것이 최선이었구나. 그러니 그대는 이 염치없는 군주를 너무 원망하지 말지어다.
 
 어보성지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노라.
 
 싸늘한 기운이 귓전을 스쳐 갔다.
 
 그대가 쓰러지는 순간이 짐 역시 죽는 날이니라······.
 
 그 구절을 보는 순간 소군의 마음속에선 불덩이가 치솟아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폐하! 신이 폐하를 지켜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진무사 대인, 이러지 마십시오. 폐하의 마지막 뜻입니다. 이미, 이미··· 건청궁은······.”
 어보성지를 전한 이 공공이 울분을 토로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흑흑흑!”
 그러더니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한시도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이 공공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함은······.
 너무 늦게 알아챘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소군, 그대라도 범부凡夫가 돼 편히 살기를 바라노라. 짐 역시 다음 생에는 범부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구나. 그리고 황명으로 명하노니, 복수는 꿈도 꾸지 말지어다. 이는 그대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이노라.
 
 옥새가 찍힌 부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진한 눈물의 흔적! 이 성지를 내릴 때, 황제는 최후를 직감하고 눈물을 흩뿌린 것이리라.
 털썩!
 소군 역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폐하께옵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 공공은 무명천에 돌돌 말린 기다란 목함 하나를 건넸다. 형태가 꼭 검을 담고 있는 것과 유사했다.
 “이, 이것이 무엇인가······.”
 “황제지검이옵니다.”
 황제지검皇帝之劍.
 열자列子가 말하길, 은나라의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사용했다는 함광含光, 승영承影, 소련宵練의 세 자루 검을 황제지검이라 한다.
 세 자루 황제지검에는 세 가지 의미가 숨어 있었다.
 첫째는 천天.
 세 자루의 검이 하늘로부터 신권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정통 황제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地.
 하늘이 내린 재앙을 모인 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의미는 인人.
 전설로만 내려오는 황궁무고皇宮武庫의 지도인 동시에 열쇠라는 점이었다. 산처럼 쌓인 금은보화, 전설의 무공 비급, 만고의 영약들 그리고 절세의 신병이기들.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보물 창고가 바로 황궁무고였다.
 당대의 수호검주가 이 세 자루 검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다.
 “폐하······.”
 소군은 이미 세상에 없을 군주를 떠올리며 군주가 있던 방향으로 공손히 절을 했다.
 그의 머릿속엔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 소하객잔
 
 
 
 강소성江蘇省 소주.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물의 도시.
 하북성 북경에서 시작돼 절강성 항주에 이르는 사천오백 리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가 이어지는 곳. 그곳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다.
 최고급 비단 산지로 이름이 높고, 갖가지 산물이 풍부하다. 절세미인 서시의 눈물이 어린 곳이며, 천하에서 미인이 많기로 이름난 곳 소주.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유명하며 사치와 향락으로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곳.
 그리고 이곳은··· 한소군의 고향이다.
 “이 공공, 정녕 나와 함께 가도 후회하지 않겠는가?”
 며칠 동안의 마음고생으로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안색의 소군이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매끈한 턱을 가진 이 공공, 이수에게 물었다.
 “진무사 대인, 제 고향은 북경입니다. 그곳은 이미 역도들이 지배하고 있는 땅, 이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역도라······.”
 소군은 말과 동시에 낮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승하한 황상 폐하는 복수는 꿈도 꾸지 말라 명했다. 그러나 하늘을 거스른 역도들을······.
 “이 공공, 나와 함께 가면 위험할 수도 있네.”
 “세상천지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진무사 대인 곁만큼 안전한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일천의 자객으로도 진무사 대인 한 분을 어찌하지 못한 것을요.”
 이미 승하한 황제를 노렸던 무수한 자객들과 무림 고수들을 수호검주 한소군과 그 휘하의 내위들이 막아 냈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수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향후에는 내 곁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될 수도 있네.”
 승하한 황상 폐하의 복수,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해낼 것이다. 자신의 하늘을 죽인 역천의 수괴를 반드시 가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미천한 자 역시 한손 거들게 해 주십시오. 살아서 폐하의 복수를 해도 좋고, 죽게 되면 저세상에서라도 폐하를 모실 수 있게 될 터이니.”
 남자도 여자도 아닌 기괴한 목소리를 내는 환관 이수였으나 그의 충절만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가······.”
 소군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물의 도시 소주를 중심으로 관통하고 있는 운하, 대은하大銀河를 바라봤다.
 시대마다 관부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따로 있었으나, 소주 사람들은 이 운하를 대개 대은하라 부르곤 했다.
 “내 고향 마을은 대은하 인근이라네.”
 수호검주 한소군의 모든 것은 그가 수호검주가 되는 순간 공식 기록에서 모조리 삭제됐다.
 오직 황제만이 수호검주에 대한 사항들을 알고 있었기에, 황태자 시절부터 오랜 동안 황제를 지척에서 보필한 환관 이수조차 최근에야 수호검주의 본명을 알았을 정도다.
 그랬으니 소군의 고향에 대한 얘기 또한 처음 듣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불충을 저지른 신하이기도 하지만, 만고의 불효자라네. 부친과 모친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한 몹쓸 자식이지.”
 목소리에는 회한이 짙게 깔려 있었고, 그의 눈가에도 살짝 이슬이 고여 있었다.
 십오 년 전, 십 대 초반에 전대 수호검주의 제자로 들어가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지 못했다.
 부친의 임종 소식을 들은 그 순간에도 황상을 노리는 자객들과 피 튀기며 혈전을 벌여야 했다.
 이수가 그 말에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인, 대인이야말로 청사에 길이 남을 만고의 충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충신을 낳고 기르신 대인의 양친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셨을 것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소군의 후회는 계속됐다.
 “그리고 나는 내 정혼자까지 버린 못난 사내다.”
 “······.”
 “나는 참으로 못난 녀석이다······.”
 황제를 지키는 수호검주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화경의 고수가 됐고, 젊은 나이에 정삼품 무관인 금의위 진무사가 됐다.
 게다가 ‘수호검주 무적위無敵衛’라고 하면 날고뛴다는 무림인들조차 천하십대고수의 일 인으로 꼽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렇기에 역당들은 허약한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는 수호검주 무적위부터 제거해야 했다.
 수호검주가 지키는 황제가 직접 그에게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끝없이 압박했고, 그것이 결국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적위 소리를 들으며, 천하에서 손꼽히는 절대 강자가 됐다 한들 무엇 하겠는가?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거늘. 황상도, 양친도 그리고 연인까지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십오 년 전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 땅 소주를 떠나, 금의환향은커녕 만신창이인 몸뚱이로 철검 한 자루 달랑 차고 돌아온 것이다.
 “아림이 이런 나를 용서해 줄까······.”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난도질당한 듯 쓰린 느낌을 받았다.
 
 
 
 소하객잔笑河客棧.
 허름한 탁자 앞에 소군과 이수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입술 아래에 커다란 복점이 있는 점소이 하나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손님,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눈에도 눈치 빨라 보이는 점소이였다.
 “어미지향 소주에 오셨으니 풍부한 해산물 요리를 맛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점소이는 소주 특산의 해삼, 자라, 장어, 붕어 등이 들어간 요리부터 강소성의 새우와 전복, 오리 요리까지 일사천리로 소개했다. 그중에는 소하객잔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최상급 요리까지 포함돼 있을 정도였다.
 만약 소하객잔에서 취급하지 않는 요리를 시키면?
 ‘저 몰골로 비싼 요리를 어찌 시킬까?’
 빠른 눈치 하나로 버텨 온 점소이 왕이였다.
 ‘청초하인이 먹고 싶은데······.’
 소군은 속으로 어린 시절 좋아했던 새우 요리 청초하인을 떠올렸다. 그러나 강소성 동쪽 어촌 마을인 상해에서 소주까지 신선도를 유지하며 운송해야 하는 새우 때문에 상당히 값이 비쌌다.
 북경에서 이곳까지 조심스럽게 내려오느라 자신과 이수의 수중에는 이제 고작 철전 몇 문 남은 것이 전부인 상황.
 “백반에 소탕, 동피백채東皮白菜로 주게.”
 가장 값이 싼 음식들만 시킨 소군의 주문에 점소이 왕이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숙였다.
 철전 일 문이라도 수고비로 받는 것이 도리어 미안할 정도로 허름한 행색의 손님들이었다.
 ‘제아무리 수고비로 먹고사는 점소이라지만, 이런 자들한테까지 돈을 청할 수야 없겠지······.’
 점소이 왕이가 그리 생각하며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삼류 낭인 무사로 보이는 소군이 점소이 왕이에게 물었다.
 “은하표국銀河?局은 아직도 있는가?”
 그 소리에 점소이 왕이가 비웃음이 가득 섞인 어조로 반문했다.
 “서은하西銀河에 있는 염왕채閻王債 표국 말입니까?”
 염왕채라 하면 고리 사채를 말한다.
 소군이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번창했던 은하표국이 왜 그런 명칭으로?
 “맞네. 아직 있겠지?”
 그것을 묻는 소군은 적잖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있기야 있지요. 허나 곧 사하표국四河?局에 넘어간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은하표국은 전대 국주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소주 사대표국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적룡회에 빌려 쓴 염왕채 이자조차 갚지 못할 정도로 쫄딱 망해 버렸지요.”
 점소이는 남 망한 얘기 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표국 맏딸은 정혼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좋은 세월 다 보내고 처녀 귀신 되게 생겼습니다. 둘째 딸은 낭비벽이 워낙 심해 집안이 망해 가는데도 사치를 일삼고 있지요. 비단 상인의 첩이 된다든가, 기녀가 된다든가··· 아무튼 소문은 무성합니다. 그리고 외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도박에 미쳐 도박 빚만 은자 천 냥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고, 국주의 후처는 서은하에서 화냥년으로 유명하지요. 막내딸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별 소문이 없고. 한마디로 볼 장 다 본 집구석이지요.”
 “그런···가······.”
 점소이의 얘기를 들는 소군은 더할 나위 없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런 소군을 힐끔 본 점소이는 곧 괜한 시간 낭비했다는 듯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림의 집안이 그렇게 됐구나.”
 십오 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 모든 일이 전부 자신의 탓인 것 같아서 괴롭기만 했다.
 괴로워하는 소군을 보며 이수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황상을 지키는 무적의 방패 소리를 들었던 철혈의 수호검주였으나, 실제로는 그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인품의 소유자인지를 잘 알고 있는 이수였다.
 ‘예전부터 정이 많은 분이셨지요. 그래서 그 많은 이들이 그렇게 대인을 따랐던 것이랍니다.’
 이수는 진무사 대인을 위해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버렸던 금의위 내위들을 떠올렸다.
 ‘진무사 대인을 대신해 죽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던 내위들이 부지기수였지······.’
 쏟아지는 화살 비를 몸으로 막아 내며, 황성 내에서 터진 폭약 진천뢰로부터 진무사 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산화했던 젊은 내위들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내위들은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한다. 황권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 황제, 옥좌의 주인이 누구이든 일단 황위에 오르면 그때부터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친다. 그것이 내위의 불문율.
 새 황제가 등극한 후 바뀌는 것은 내위들의 총수인 금의위 진무사와 소수 지휘부들뿐. 내위들의 신분에는 전혀 변동이 없을 것이다. 아니, 새 황제는 그런 내위들의 충성을 받기 위해 그들을 이전보다 더 귀히 여길 것이 분명했다.
 황제가 바뀌며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은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전직 진무사 대인뿐이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이 사람 말이다.
 터벅터벅!
 하얀 면포 두건을 쓰고, 같은 면포로 만든 앞치마를 두른 숙수 한 명이 탁자로 걸어왔다.
 주방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는 숙수가 소군과 이수가 앉아 있는 쪽으로 온 것. 젊은 숙수는 탁자 앞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손님들께서 은하표국에 대해 물으셨는지요?”
 그의 물음에 소군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소군은 숙수의 얼굴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네모진 얼굴에 유달리 큰 눈, 사내다운 굵은 턱 선 그리고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얼굴까지.
 “아복阿福?”
 숙수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 던지며 반갑게 소리쳤다.
 “아군阿君이 맞구나. 은하표국 얘기를 물어보는 내 또래 사내가 있다기에 혹시나 했었다. 아군··· 살아 있었구나!”
 숙수 강복姜福이 십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죽마고우 소군의 몸을 들어 공중에서 빙빙 돌리며 반가움을 표했다.
 어린 시절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컸던 강복은 십오 년 전에도 이렇게 소군을 들어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곤 했다.
 “아군, 십오 년이나 소식이 없어서 네 녀석 죽은 줄 알았단 말이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놈이 어찌 소식 한 번 전해 오지 않았냐.”
 건장한 체구, 일가를 이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복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연방 눈물을 흘렸다.
 “아복, 숙수가 됐구나.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숙수가 되고 싶어 하더니.”
 “흐흐흐! 숙수가 되면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을 수 있지 않느냐?”
 강복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며 소군과 함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동안 뭐 하느라 소식도 없었던 거냐?”
 강복의 질문에 소군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수호검주로 살아왔던 지난 일 전부가 비밀이었고, 이제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철저히 숨겨야 했기에.
 수호검주 무적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새로이 용상에 앉은 황제는 어떻게든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수호검주 무적위를 죽이지 못하고, 새 황제가 어찌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새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 사람의 수 또한 늘어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곳저곳 떠돌았다. 그러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기고.”
 “그래도 그렇지, 소식이라도 전하지 그랬냐.”
 강복은 곧 죽마고우 소군의 행색이 극히 초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하고 세월의 풍파가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 객지에서 적잖이 고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어린 시절에는 소주 천재 소리를 들었던 아군인데······.’
 소군이 입버릇같이 했던 말처럼 검에 뜻을 두고 무림인이 되려 했을지도 모른다. 혹 무과에 응시해 무관이 되려고 노력했는지도.
 그러나 지금 보이는 초라한 행색은, 그 모든 일이 다 실패해 이제는 오갈 곳조차 없어져 고향 땅으로 돌아왔음을 조용히 웅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객지에서 고생하느니 고향에서 자리 잡고 다시 시작하는 편이 백배는 낫지. 그러니 나라도 소군에게 도움을 줘야겠다.’
 강복은 소군이 삼류 낭인 무사로 떠돌았거나, 무과에 응시했다 번번이 낙방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초라한 행색을 하고 돌아온 죽마고우 소군이 수호검주 무적위이며, 천하십대고수 중 일 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강복을 보며 소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림··· 소식은 알고 있느냐?”
 눈물 반, 콧물 반으로 뒤섞여 웃고 있던 강복은 소군의 질문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림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 그 좋은 혼처 다 마다하고, 온갖 몹쓸 일 다 겪으면서도 오매불망 네 녀석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벌써 십오 년이다. 이제라도 네가 돌아왔으니 기쁜 일이긴 하다만, 사정이 썩 좋지가 못하다.”
 강복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어울렸던 효림의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도 점소이 왕이의 얘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은하표국은 거의 망했고, 집안 꼴도 정말 우습게 됐다는 얘기였다.
 “아군, 너라도 이제부터 아림을 도와줬으면 싶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던 강복과 소군.
 그 모습을 보던 소하객잔의 주인 성춘삼은 못마땅한 표정을 한 채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염소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 춘삼이 말했다.
 “복이, 지금 주방에선 손이 모자라 난리인데 수석 숙수가 이러고 있으면 쓰겠나.”
 강복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춘삼 형님, 복이가 아니라 강 숙수라니까요. 숙수 소리 들은 지가 몇 년째인데 아직도 복이, 복이 그러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자꾸 구박하면 인근 백화루로 확 옮겨 버릴랍니다.”
 내용과는 달리 말투는 무척이나 장난스러웠다.
 그 소리에 춘삼이 화들짝 놀랐다.
 “배, 백화루? 아이고, 강 숙수 왜 이러나. 우리가 하루 이틀 봐 온 사이도 아닌데.”
 “흠흠!”
 연방 헛기침을 하던 강복이 웃으며 소군을 바라봤다.
 “보는 대로 나는 소하객잔 수석 숙수가 됐다. 자랑 같아서 민망하지만, 소주에서도 제법 알아주지. 그러니 배고프고 술 고프면 언제든 찾아와라. 춘삼 형님이 노랑이 기질이 있긴 하지만 천성은 대인이니까.”
 곁에서 듣고 있던 춘삼은 노랑이 소리에 잠시 인상을 구겼다가, 대인이라는 말에 활짝 웃으며 소군을 가리켰다.
 “강 숙수, 자네 친구인가?”
 “춘삼 형님, 제가 종종 말했지 않습니까? 소주 땅에서 천재 소리 듣던 불알친구가 하나 있다고 말입니다.”
 춘삼은 염소수염을 만지며 강복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 하나를 떠올렸다.
 “아! 지금쯤 좋은 자리 하나 떡하니 꿰차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던 그 한 거시기? 그런데 지금 행색은 영······.”
 춘삼의 눈이 초라한 몰골의 소군에게 향했다.
 춘삼이 보기에 소군의 모습은 잘 봐 줘도 떠돌이, 심하면 길거리의 부랑아 수준이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강복이 소군을 두둔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아직 운이 트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소군은 크게 될 친구입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강복은 여전히 소군이 크게 될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도 영······.”
 어린 시절 천재 소리 들었던 이가 어디 한두 명인가? 그러나 실제 그런 천재가 성공한 경우는 의외로 별로 없다. 게다가 이제는 나이도 적잖이 들어 보이는 소군이었다.
 춘삼의 눈에 소군은 볼 장 다 본 인물이었다.
 “흠흠, 나는 대소하객잔 주인인 성춘삼이라고 하네.”
 조금은 거만한 말투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소군은 그에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한소군이라고 합니다.”
 “그래. 강 숙수랑 친구라 하니 자네는 앞으로 나를 춘삼 형님이라고 부르면 될 듯하네.”
 ‘형님’ 소리에 소군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곁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수는 심사가 편치 못했다.
 황상 폐하가 승하하기 직전 ‘충절공忠節公’이라는 시호까지 내린 진무사 대인을 깔보는 눈빛과 무시하는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북경 최고급 객잔 주인 수백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한들 진무사 대인 앞에서는 모조리 바닥을 기어야 마땅하건만, 겨우 소주의 별 볼일 없는 객잔 주인 하나가 이리 거드름을 피우다니. 춘삼도 그 불쾌한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이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흠,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게 생긴 이 작자는 뉘신가?”
 초라한 행색을 한 소군의 일행이니 이수 역시 별 볼일 없는 인물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춘삼.
 “제가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이수 형님입니다. 얼추 춘삼 형님과 동년배로 보입니다만······.”
 고향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져서일까? 아니면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 탓일까? 소군은 스스럼없이 춘삼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이수를 소개했다.
 그런데······.
 “혀, 형님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대인께 형님 소리를 듣겠나이까.’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넘어왔던 이수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신분을 감춰야만 하는 상황, 그런 소리를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허허, 정말 거세라도 한 사람 같은 목소리구만그래.”
 춘삼은 그저 느끼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로서는 눈앞에 있는 이수가 진짜로 거세를 한 황궁의 환관이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춘삼이 계속 거만을 떨며 불필요한 말을 하고, 듣는 이수도 표정이 좋지 않자 강복이 슬쩍 말을 돌렸다.
 “춘삼 형님, 곧 서문세가 무사 분들이 오실 시각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소리에 춘삼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기세등등한 서문세가 분들에게 무례했다가는 크게 경을 칠 텐데.”
 춘삼이 호들갑을 떨었다.
 “복이, 자네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자네가 가장 바빠야 할 시간인데.”
 직전까지 강 숙수라고 부르던 춘삼이 다시 복이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십 년 이상 입에 익은 이름이라 그런지, 부르는 춘삼도, 그렇게 불리는 강복도 그쪽이 더 편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꿈을 이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기에 일부러 숙수라 불러 달라 했을 뿐이다.
 “걱정 마십시오. 재료 준비도 끝났고 다듬는 것도 다 마쳤습니다. 서문세가 손님들이 오시면 바로 요리해서 내놓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긴, 소주 땅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자네인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술을 내달라 했지? 바로 내오도록 시키겠네. 허나 자네는 한 방울이라도 입에 대선 안 돼.”
 “당연하지요. 일이 끝나면 따로 회포를 풀 것입니다.”
 강복의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은 춘삼이 곧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팔자걸음으로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춘삼 형님은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그래서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간혹 처음 보는 사람 속을 긁어 놓기도 하지. 하지만 정말 좋은 형님이야. 나랑은 이 객잔 열 때부터 고생도 같이했고, 지금까지도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어.”
 오갈 데 없는 고아들, 그대로 두면 필시 굶어 죽거나 도적이 될 아이들을 거둬 객잔에서 일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아나 노인 등 불쌍한 이들을 돕고, 아픈 이들에게는 약값을 보태 주는 등 많은 선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훌륭한 분이구나.”
 소군의 말에 강복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림은 찾아갈 거지?”
 “그래야지.”
 당연히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무슨 면목으로 만나야 할지 고민이었다.
 집안끼리 혼약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꼬맹이 시절부터 지금까지 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자신을 기다려 온 정혼녀 효림을.
 “휴우!”
 소군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강복이 그 한숨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 마라. 힘든 때 너라도 아림 곁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겠냐? 그리고 소군 네가 돌아왔으니 우리 은하표국 악동들도 다시 모여야지.”
 “그 녀석들은 잘들 있겠지?”
 “흐흐흐! 몇몇은 가정을 이루고 어엿한 가장이 됐지. 간혹 모이면 네 얘기도 했었다. 만나면 다들 반가워할 거다.”
 그렇게 그동안 밀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객잔 문이 활짝 열리며 검을 든 일련의 무리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소주의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경장을 차려입은 다섯 명의 젊은 남녀와 역시 비단 화의를 입은, 눈매가 매서운 중년인 한 명이었다.
 특히 이 중년인은 균형 잡힌 탄탄한 체구에 잘 벼린 한 자루 검 같은 예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초절정의 고수!’
 지난 세월 황상을 노렸던 무수한 자객들을 사전에 감지하기 위해 극도로 발달한 본능과 감각을 유지해 온 소군이었다.
 그런 소군이기에, 최대한 기세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중년인을 보자마자 그가 어느 수준인지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허나 그가 초절정의 고수이든 아니든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
 자신은 이제 자객으로부터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랬기에 소군은 유달리 눈에 띄는 화의 중년인에게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조 사매, 이 객잔이 겉보기에는 허름하나 이곳 숙수의 솜씨 하나는 일품입니다. 잉어찜과 튀김, 회, 어죽으로 된 사품 잉어 요리와 포어탕鮑魚湯은 어미지향 소주에서도 가히 일절이라 할 만하지요.”
 비취를 박은 영웅건을 이마에 두르고 허리에는 옥대를 찬 데다 비단 포초혜까지 신고 있는 귀공자가 소하객잔의 음식, 숙수 강복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소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가 자리를 잡은 정도가 아니라 제법 성공한 듯 보였기에 기쁠 수밖에 없었다.
 “허, 거참. 이왕 칭찬할 거면 조금 더 크게 해 주지. 흐흐흐!”
 강복 역시 그 소리에 적잖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군, 이제부터 바삐 준비를 해야 할 듯싶다.”
 “그래.”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라. 일 끝나면 같이 아림이 보러 가자. 나도 그 애 본 지 꽤 됐거든.”
 강복은 말을 마치고는 주방으로 바삐 움직였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군은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이 있었구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 모든 것을 잃었다 느꼈던 소군이다. 하지만 아림이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친구들도 변함없이 고향 땅을 지키고 있었다.
 ‘황상의 복수를 하기 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 준 친구들과 잠시나마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다. 비통하게 떠나신 황상 폐하도 이런 나를 이해해 주실 것이리라.’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아니, 혹 십 년이 될지도.
 자금성 내부에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기인이사와 황당할 정도의 괴물 같은 존재들이 황제를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천하십대고수 중 몇 명이 동시에 황제를 노리지 않는 이상에는 턱도 없는 일.
 자금성은 그런 곳이고,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인간 방패들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하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군이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내 휘하에 있던 내위들과 검을 섞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 황제 곁을 지키고 있는 내위들 상당수가 자신이 거느렸던 이들이다. 친형제 이상의 정리를 나눴던 그들의 목숨을 취하면서까지 황제를 노릴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철옹성처럼 보이더라도 조그만 구멍이라도 생기기 시작하면 당금 황제에게도 언젠가 틈이 생길 것이다.
 참고 또 참으며 그때를 기다릴 생각이다.
 ‘그 전까지는 고향 땅에서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겠지. 그리고 그동안만이라도 아림을 위해 살 것이다.’
 그사이 점소이 왕이가 푸짐한 음식들을 탁자로 날랐다.
 “우리는 간단한 것을 시켰는데······.”
 그러자 점소이 왕이가 연방 굽실굽실하며 말했다.
 “강복 형님의 친구 분이라고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랬습니까. 형님께서 이리 대접하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은 기미를 보이던 왕이가 이제는 정반대로 달라져 계속 굽실거리며 사각 탁자 가득히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또 시키실 일 있으면 부르십시오. 당장 달려오겠습니다.”
 “알았네.”
 “그리고 강복 형님에게 이 왕이 얘기 좀 잘해 주십시오. 헤헤.”
 지금 보니, 고작해야 열여섯 남짓밖에 안 된 듯했다.
 “기회가 되면 그리하겠네.”
 그 소리에 왕이가 방긋 웃으며 물러났다.
 형형색색의 탕湯, 채菜, 육肉, 어魚 요리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소주 특산의 쌀밥에서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게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돌았다.
 “오늘 입이 호강하겠구나.”
 소군은 그러며 이수에게 말했다.
 “이 형님, 드시지요.”
 실제로 이수의 나이가 소군보다 열 살 이상 많았기에 소군이 그를 다시 한 번 형님이라 칭했다.
 신분을 감춰야 하는 사정을 잘 아는 이수였기에 이리 부르는 이유를 이해는 할 수 있었으나 역시나 형님 소리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그리하지요, 동생님.”
 이수가 어색한 말투로 답했다.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음식들을 맛보고 술잔을 나누던 소군이 술병을 들어 다시 이수에게 권했다.
 이수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들었다.
 “이 형님, 동생이 올리는 술잔인데 한 손으로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요.”
 알고는 있지만 직접 행하려니 너무나 어색했다.
 호박색 술이 잔에 가득 차자 이수도 소군의 잔을 채워 줬다. 좋은 안주에 좋은 술에, 두 사람은 오랜만에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술이 몇 순배 더 돌았다.
 “한 잔 더 하시지요.”
 소군이 다시 한 번 이수에게 술을 권했다.
 “도, 동생, 곧 은하표국에 가 본다고 하지 않았소?”
 술이 조금 들어가자 이수는 ‘동생님’에서 ‘동생’이라고 하는 등 말투도 반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어색한 사이를 푸는 데는 술이 최고라 했던가?
 “그래서 이리 술을 권하는 것입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혼녀 효림에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소군이었다. 술기운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그녀를 마주 대할 자신이 없는 것이리라.
 “아-! 이 사람이 아둔했소.”
 그렇게 정신없이 술을 주고받자 술병이 곧 바닥을 드러냈다.
 “이, 이런!”
 소군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이 우형愚兄이 바로 주문하겠소.”
 이수가 추가로 술을 더 시켰고,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동생, 고향에 돌아왔으니 금의를 걸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본래 한소군은 황제로부터 공公의 시호까지 받았으니 그에 합당한 복식을 갖춰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황실 기록에서 지워져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래도 고향에 돌아왔는데 지금 입고 있는 허름한 마의麻衣는 너무하다는 생각이었다.
 “금의환향을 한 것도 아닌 것을요. 그냥 이대로 가겠습니다.”
 술이 올라오는지 볼이 불그스름하게 변한 소군이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소군의 귀에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호통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보았던 다섯의 젊은 남녀와 화의 중년인이 자리하고 있던 대형 원탁 근처였다.
 열 사람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고풍스러운 원탁에서 한 귀공자가 일어서 객잔 주인 춘삼에게 연방 호통을 치고 있었다. 춘삼은 허리를 숙이며 사죄하고, 반면에 곁에 서 있는 숙수 강복은 뻣뻣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우리를 어찌 보고 감히 이따위 음식을 내온단 말이더냐!”
 청년은 요리가 담긴 접시를 객잔 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다시, 다시 요리를 준비할 것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춘삼은 계속해서 굽실거렸다. 그러나 숙수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강복은 귀공자의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껏 귀한 분들 모시고 왔는데 탕에서 돌멩이가 씹히다니. 이런 몹쓸 곳을 소개한 내가 이분들 앞에서 어찌 낯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갓 스물이나 됐을까 한 귀공자가 연방 호통을 치며 막말을 해 댔다. 그러자 이번엔 옆에 있던 또 다른 귀공자가 빈정댔다.
 “이런 삼류 객잔에 오는 것이 아니었어. 어찌 알겠는가, 음식에서 벌레라도 기어 나올지.”
 그 소리에 춘삼이 바로 입을 열었다.
 “손님, 저희 객잔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숙수부터 점소이까지 청결과 위생을 강조, 또 강조하는······.”
 “뭐라? 지금 겨우 삼류 객잔 따위 운영하는 비천한 작자가 내 말에 토를 달고자 함이더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찰싹!
 순간, 공자가 나이로는 거의 아버지뻘인 춘삼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와당탕!
 춘삼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객잔 바닥을 험하게 뒹굴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춘삼 형님!”
 크게 놀란 강복이 춘삼을 향해 달려갔다.
 “나, 나는 괜찮아. 그러니 어서 손님께 사죄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가에 이슬이 고일 정도로 분한 듯, 춘삼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강복이 벌떡 일어섰다.
 “공자님! 저희 소하객잔에서는 단 한 번도 음식에서 돌멩이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포어탕에서 진정 돌멩이가 나왔다면··· 숙수인 제가 손목을 자르겠습니다!”
 “뭐라고? 천한 것이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서문세가의 대공자를 노려보는 것이냐!”
 자신의 이름보다도 가문의 이름과 거저 타고난 지위부터 입에 올리는 서문세가의 대공자가 다시 한 번 손찌검을 했다.
 찰싹!
 강복의 고개가 완전히 돌아갈 정도로 강한 손찌검이었다. 강복 역시 입술이 터지며 피까지 줄줄 흘렸으나 다시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주방에서 요리할 때 돌멩이가 들어갔다면 제 손목을 자르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숙수에 불과하나 그것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주방 보조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음식에서 돌멩이가 나온 적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조리했고, 내기 전에 몇 차례나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확인까지 했다. 돌멩이는 절대 주방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하나가 일부러 포어탕에 돌멩이를 넣고 시비라도 걸고 있다는 말이냐? 당당한 서문세가의 대공자가 너 같은 비천한 것에게 이런 꼼수를 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서문세가의 대공자 서문비호가 이치를 따졌다.
 그러자 곁에 있던 또 다른 귀공자, 절강성 항주의 신창양가 자손 양후량이 조소를 보냈다.
 “흐흐흐! 혹 압니까? 저 미련한 숙수 놈이 정파의 뛰어난 후기지수인 서문비호 형님을 암살하기 위해 일부러 돌멩이를 넣었을지.”
 “하하하! 그럼 저 숙수 놈은 떠오르는 정파의 신성인 비호 형님을 해하기 위해 마교에서 보낸 자객이라도 되려는가? 그렇다면 너무나 어설픈 자객이로구나.”
 조금은 낯선 억양을 구사하는 광동진가의 공자 진호룡이 한껏 조롱의 말을 던졌다.
 “돌멩이를 누가 넣었는지에 상관없이 비천한 숙수 따위가 감히 서문세가의 대공자에게 일일이 말대꾸를 하다니요.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지요.”
 서문세가의 그늘에서 소주제일표국으로 성장한 사하표국의 후계자 사문향은 강복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그리 언변이 뛰어나지 못한 강복은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소주 땅의 패자인 서문세가의 대공자가 한낱 숙수인 자신에게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시정의 잡배처럼 음식 값을 떼먹기 위해 행패를 부리거나 억지를 피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찬찬히 이치를 따져 봐도 주방에서 돌멩이가 섞여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훨씬 옳았다.
 ‘설마 내가 실수한 것인가······.’
 그런 생각에 강복이 한참이나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스르릉!
 서문비호가 돌연 검 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포어탕에서 돌멩이가 나온 것은 엄연한 사실. 그런데 너는 그에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주방에서 돌멩이가 나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네 녀석은 끝끝내 그 사실을 부인하며 사죄를 하는 대신 억지를 부렸다. 네 녀석이 말한 대로 손을 잘라 거짓을 말하는 자가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만천하에 보이겠다.”
 서문비호가 그렇게 다짜고짜 검을 들어 막 강복의 손목을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사형!”
 일행과 함께 원탁에 앉아 있던 절세미녀가 그런 서문비호를 제지했다.
 그 소리에 서문비호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사매, 내 손이 잔인하다 탓할 것이 아니다. 이자가 처음부터 사죄를 했으면 나 역시 마땅히 용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자는 도리어 억지를 부리며 손목을 자르겠다 강짜를 부리지 않았느냐? 억지를 부리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이런 미천한 것들에게는 따끔하게 가르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강복의 손목을 자르려고 다시 한 번 검을 치켜들었다.
 강남에서 검의 명가로 알려진 서문세가의 장자이며, 무림에서도 강남금검江南金劍이라는 별호를 가진 촉망받는 후기지수 서문비호.
 그의 실력이라면 서 있는 상대의 손목만을 노려 잘라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검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본 강복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숙수로서의 인생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숙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미각과 후각이었으나, 그다음은 역시나 손이었다. 요리를 하는 손이 없다면 숙수로서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
 손목이 잘려 숙수의 삶이 끝나기 직전인 강복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한 사람을 바라봤다.
 ‘아군, 너는 어찌 이리 변해 돌아왔느냐······.’
 강복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자신의 위기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낭인 무사 소군을 간절함과 실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니, 서운함을 넘어 일종의 분노마저 치솟았다. 자신의 손목을 자르려는 서문비호보다 친구의 위기를 외면하는 소군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컸을 정도다.
 그런데 그때, 철저하게 강복의 시선을 외면하던 소군의 눈이 서문비호와 그 일행에게 향했다.
 소군의 깊은 눈이 다섯 명의 젊은 남녀들을 담담하게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주변에서 강하지만 절제된,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자루 검을 일으키리라!’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그 기세는 곧 마음의 검[心劍]이 돼 떠올랐다.
 객잔의 회색빛 허공에 떠오른 마음의 검은 곧 푸른 장막으로 화하더니 다섯 남녀를 향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컥!”
 검으로 막 강복의 손목을 잘라 버리려던 서문비호가 가장 먼저 입에서 왈칵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크윽!”
 “커억!”
 그에 이어 양후량, 진호룡, 사문향까지 연달아 피를 쏟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읍!”
 그들과 동행하고 있던 절세미녀, 강남제일거부로 알려진 양주 강남금상회주의 무남독녀 조하연 역시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 신음성은 계속 터져 나왔다.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
 고수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했던가?
 공간을 격하고 이들에게 쏟아져 온 엄청난 기운의 정체는 거대한 살기였다!
 조하연은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기운의 격랑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허공에 피분수를 뿜어 대며 죽어 가거나 완전히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극한의 두려움이 쉴 새 없이 몰려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고 있는 패도적인 기운!
 공포, 그 자체였다.
 살기는 하나의 기운으로 그치지 않고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살기이되 뚜렷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한 자루 예리한 검!
 퍽! 퍼퍽! 퍼퍼퍽!
 존재하지 않으나 분명 존재하는 검이 이들의 장부를 연달아 격타하기 시작했다. 정적 속을 뚫고 그들의 폐부를 후려치는 한 자루 검의 강렬한 기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백을 지닌 이가 아닌 이상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컥!”
 서문비호가 다시 한 번 피를 왈칵 쏟아 냈다.
 경박하고 거만하기 그지없는 그였으나 그래도 무공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명문 세가의 자손으로 무공 기초가 튼튼하고, 후기지수 중에는 나름 성취를 이룬 서문비호가 온몸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간신히 소리쳤다.
 “노, 노선배에게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는 힘겹게 포권을 하며 객잔 안에 숨어서 이처럼 진노하고 있는 선배 고인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전설상에서나 나올 법한, 검을 잡은 이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심검의 경지라는 사실을!
 이렇듯 선명하게 심검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라면 천하십대고수 중에서도 상위의 고수. 그런 고수들은 전부 세수 육칠십을 헤아리는 무림 원로들이었다.
 그리고 천하십대고수 중 특별히 신마神魔나 성승聖僧, 검성劍聖이나 도제刀帝, 투신鬪神의 다섯 사람을 가리키는 환우오천존?宇五天尊 정도의 절대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경지였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 자신에게 살기를 폭사하고 있는 인물이 환우오천존 중 하나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세가의 강호 말학 서문비호가··· 노선배를 뵙습니다······!”
 서문비호는 서문세가라는 이름까지 거론하며 필사적으로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옥죄고 있는 이 거대한 압력은 전혀 사라질 줄 몰랐다.
 조금전 서문비호를 말렸던 절세미녀 조하연 역시 내력을 끌어 올려 이 패도적인 기운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내력을 끌어 올려도 지금 당장 숨통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이 엄청난 기운.
 자신의 스승이자 천하십대고수 중 일 인인 그분에게서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살기였다.
 하연은 이 기운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눈앞에 환상이 떠오르고, 환청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상과 환청 다음에는 영원한 죽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터.
 정녕 이렇게 영문조차 모르고 끝나야 한단 말인가?
 ‘아버지, 어머니······.’
 조하연은 속으로 외치며 마지막 남아 있던 한 조각 의식의 끈을 놓으려 했다.
 그때였다.
 “갈喝!”
 불문의 사자후 신공에 못지않은 거대한 일갈이 객잔 입구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서문비호 일행을 옭아매던 심검의 사슬이 단숨에 풀렸다.
 일순간이나마 심검을 무력화시킨 엄청난 일갈의 주인공은 객잔 입구에 서 있었다.
 다섯 남녀와 동행하고 있었으나, 잠시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던 화의 중년인. 그는 다시 객잔에 들어오자마자 단박에 주변에 흐르고 있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져 비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일행.
 그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 때문임을 직감하고 깨뜨리기 위해 대갈을 터트린 것이다.
 화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객잔 안을 둘러봤다.
 자신의 일행 외에 객잔 안에 있던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무형의 살기를 유형화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임과 동시에, 그 살기를 특정인에게만 자유자재로 폭사시킬 수 있는 화경化境의 고수라는 얘기!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일행을 공격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했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런 존재에게 일단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일.
 중년인은 우선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서문연주가 고인을 뵙소!”
 오행검법五行劍法으로 이름 높은 검의 명문이며, 강소성의 패자이기도 한 서문세가 최강 고수 서문연주. 그는 이미 강남제일검의 칭호를 받은 무림의 초절정 고수였다.
 절대적인 신위를 자랑하는 천하십대고수에는 들지 못하나 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최강으로 꼽히는 검객이 바로 오행신검 서문연주였다.
 “······.”
 서문연주가 포권을 하며 정중히 자신을 소개했으나, 객잔 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싸늘한 침묵과 함께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는 내력을 끌어 올려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서문연주가 인사드리오!”
 그러나 역시 반응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척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초절정 고수 서문연주만은 이제껏 자신이 겪어 본 것 중 가장 위력적인 한 자루 검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느끼고 있었다.
 꿀꺽!
 그 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른침을 연방 삼켜야 했고, 손이 다 바들바들 떨렸다.
 이런 느낌··· 생전 처음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천하십대고수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강남제일검 서문연주가 지금 이 순간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후우웁!”
 그는 호흡을 크게 가다듬었다.
 ‘누가 뭐라 하든 나 역시 한 자루 검을 든 무인. 심검을 이룬 절세 고인과 검을 섞어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할 만하다. 생과 사는 그다음 문제, 지금 이 순간 검 한 자루에 나 서문연주의 인생 전부를 걸겠다!’
 그러고는 온몸의 내력을 일순간 폭발시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검조차 뽑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옥죄어 오는 기운이 강력했기에.
 마음의 눈을 통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본 순간,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의미를 잃고 사라졌다.
 한 자루 검과 자신이 들고 있는 또 한 자루의 검!
 이 넓은 세상에 오직 그 두 가지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강렬한 두 자루의 검이 찬란한 은빛 광채를 흩뿌리며 주변의 모든 색을 일순간 퇴색시켰다.
 무한의 회색 공간.
 거리의 느낌도, 공간의 느낌도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오직 검과 검만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띠이잉!
 검이 울부짖고 있다.
 검이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있다.
 검이 일순간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다.
 서문연주의 검 끝이 일순간 부르르 떨린다.
 뚜욱!
 그리고 검신이 두 동강 난다.
 챙그랑!
 두 동강 난 검신의 한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며 청명한 금속성을 일으킨다.
 피투성이가 된 서문연주의 손에서 튕겨 나온 반쪽짜리 검이 허공을 향해 떠오른다.
 검객이 검을 놓쳤다.
 그렇다 함은··· 강남제일검 서문연주의 패배! 승부가 찰나에 갈리고 만 것. 그렇게 패배한 서문연주였으나 그의 표정은 의외로 무척 밝았다.
 탁!
 검을 잡고 있는 손아귀에서 여전히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서문연주는 정중히 포권을 했다.
 “이 서문연주, 절대 고인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서문세가를 방문해 주십시오. 이 서문연주와 서문세가 전체가 고인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청하겠나이다.”
 가르침.
 무인들이 가르침 운운할 때는 그 안에 종종 도전하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러나 지금 서문연주는 검의 길을 가는 자로서 심검이라는 지고 무상의 경지를 펼친 이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었다.
 “꼭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성의를 담아 또 한 번 간곡히 청한 서문연주가 자신의 부러진 검을 들었다.
 절세 신검은 아닐지라도 명검임이 분명한 자신의 애검이 깨끗하게 절단 나 있었다.
 ‘이것이 심검인가······.’
 그는 그 절단면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죽을 때까지 수련해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지고의 경지로다.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강남제일검으로 불리며 이제는 천하십대고수에도 도전할 실력을 갖췄다는 생각마저 해 왔던 자신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오게 된 이 객잔에서 커다란 가르침을 받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찰나였으나, 서문연주는 정체를 숨긴 신비 고인에게 수백 합 이상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생사결의 승부가 아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 고인이 무명소졸에게 사사하는 지도비무指導比武였다.
 초식의 형形부터 검로劍路와 검의 흐름, 기의 흐름 그리고 검의 오의까지, 모자랐던 부분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기연, 이런 것이 바로 기연이었다!
 수십 년 동안 홀로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한 시진이라도 직접 고인의 지도를 받는 것이 어떻게 더 중요한 것인지를 이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강남제일검 서문연주는 단 한 번의 지도비무로 한 계단 성장할 수 있었다.
 서문연주는 지도비무를 통해 받은 가르침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기며 조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객잔 안을 유심히 살폈다.
 비단 상인으로 보이는 일행, 풍류공자와 여인들, 삼십 년 이상은 족히 해로했을 것 같은 정겨운 노부부 그리고 허름한 행색의 청년과 턱에 수염 하나 나지 않은 중년인.
 이 객잔 안에는 조카 일행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고, 자신의 검이 두 동강 나자 겁에 질린 그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중 아무것도 모르는 듯 유유히 술을 마시고 있는 청년과 중년인.
 ‘술에 만취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서문연주는 유달리 눈에 띄는 그 청년과 중년인의 얼굴을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그러며 추가로 객잔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얼굴 또한 또렷하게 기억했다.
 신비의 고인이 서문세가를 방문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먼저 찾아가 가르침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세가 전체의 커다란 홍복이 될 것이다. 그 고인이 도와준다면 서문세가는 강남제일세가를 넘어 천하제일세가로까지 불릴 수 있을 것인데······.’
 그러나 순간, 서문연주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심하게 자책했다.
 ‘아, 순수한 검의 길을 가는 자로서 이 무슨 속된 생각이란 말인가! 서문연주야, 세속의 명리와 욕망을 탐하는 그런 좁은 마음이 지금껏 검의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온갖 갈등 속에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일행 앞에 섰다. 그는 그나마 상태가 좋은 조카 서문비호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대체 이번에는 또 무슨 경박한 행동을 한 것이더냐!”
 자질은 무척 뛰어나나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속을 끓였던 조카다.
 “그, 그것이······.”
 심검을 알아보고 경황 중에 용서를 구하기는 했으나 그 이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서문비호.
 “네가 장조카만 아니었다면 세가 청심각淸心閣에 집어넣고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 마음부터 바로잡게 했을 것이다!”
 헌앙한 외모에 헌칠한 키, 그리고 달콤한 미성美聲을 가진 미공자 서문비호는 세가 여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특히, 세가의 가장 큰 어른인 태상 부인이 장손 서문비호를 한없이 감싸고돌았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무슨 잘못을 하든 오냐오냐하며 어른들이 다 받아 주니, 인품이 한 세가의 주인이 되기에는 크게 모자란 채로 성장하고 말았다.
 ‘태상 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매로써 가르쳤어야 하거늘.’
 후회, 또 후회하고 있었다.
 검화劍話.
 검의 대화를 통해 서문연주는 심검을 구사한 고인이 자신과 일행을 크게 질책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꾸짖는 검의 대화, 심검을 구사할 정도의 심득을 얻은 고인이 꾸짖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사실과 평소 경박하고 극히 오만해 여러 물의를 일으켜 온 조카의 행실을 따져 추측하니 곧바로 답이 나왔다.
 서문비호가 주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을 했을 것이다.
 ‘꾸짖는 것으로 끝내고 도리어 나에게 가르침을 내렸을 정도니, 그분은 마인은 아닐 것이다. 허나 정도에 누가 있어 이렇듯 패도적인 검을 구사한단 말인가?’
 자신이 직접 상대한 기운은 환우오천존 중 소림 출신인 성승의 기운도, 남궁세가 출신으로 부드럽고 화려한 검을 구사하는 검성의 검도 아니었다.
 패도적이기는 했으나 거칠고 야수적인 투신의 느낌과도 분명 달랐으며, 마성魔性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마의 검도 아니었다.
 ‘대체 어떤 고인인가······.’
 그는 계속 고민했으나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서문비호에게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다.
 “장조카, 앞으로 자중, 또 자중해야 할 것이다!”
 서문비호는 평소에도 자신에게 유달리 엄하게 굴고 사리 분별이 확실한 숙부 서문연주를 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숙부에게 꾸지람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일단 그러겠노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근처에서 놀라 주저앉아 있는 숙수 강복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오늘 일은 다 저 비천한 녀석 때문이다.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심한 내상을 입은 서문비호가 속으로 이를 박박 갈았다.
 
 
 
 # 비무초친
 
 
 
 이수는 조용히 술을 들이켜고 있는 소군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대인께서 그리하신 것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소군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어 마음의 검을 일으켜 강복을 돕고 서문비호 일행을 징치했다. 죽마고우의 위기였고 적당히 술기운도 오른 상태라, 오만한 그 일행의 단전을 폐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될 그런 벌을 내리기에는 서문비호 일행의 죄가 그에는 미치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서문비호가 혹 강복의 손목을 잘랐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또한 서문연주의 검과 마주한 순간 검화를 통해 서문연주가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연배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무공 수위도, 모든 것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묵묵히 검의 길을 가는 자라는 동질감은 있었다. 그래서 몇 수 가르침을 내린 것이다.
 자신보다 근 스무 살이나 위인 서문연주에게 가르침을 내린다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으나, 자신 또한 배울 점이 있다면 어린아이에게라도 배울 생각이니 그리 저어되는 일도 아니었다.
 곧 입술이 터져 이빨이 몇 대 나간 숙수 강복이 걸어와 탁자 앞에 앉았다. 그는 다짜고짜 잔에 술을 따르더니 연거푸 입 안에 쏟아 부었다. 그러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소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서웠던 것이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는 소군을 보며 강복이 술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내 기억 속의 너는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면 결코 회피하는 그런 놈이 아니었다. 세월이 너의 재능뿐만 아니라 그런 천성마저 퇴색시킨 것이냐?”
 강복은 섭섭했다.
 소주에서 위세 당당한 서문세가의 대공자에게 반박한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아무리 뼈다귀가 굵고 기개가 있다고 믿는 강복 자신이라 해도 말이다.
 하여 내심 아차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야 숙수의 자존심을 걸고 서문세가 공자에게 대들었으니 결과가 어찌 되든 후회는 없을 것이다. 손이 잘리면 숙수의 인생은 끝일 것이나, 젊고 건강한 놈이 무엇을 하든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문제는 자신이 서문비호에게 화를 당하게 되면 곁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죽마고우 소군까지 휘말려 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고, 또 명확하게 기억하는 소군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결과는 전혀 생각지 않고 친구를 위해 무작정 검을 뽑아 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소군은 자신이 손목을 잘리게 된 상황에서도 철저히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강복은 친우 소군이 위기에 처하면 기꺼이 목숨마저 버릴 각오가 돼 있다고 생각했건만, 소군은 그러지 못하다고 느꼈기에 서운하고 화가 난 것이다.
 “너에게도 나름 사정은 있겠으나, 나는 오늘 크게 실망했다. 어린 시절 소주제일검이 될 거란 칭찬이 자자했던 네가 소주제일비겁자가 돼 돌아왔구나.”
 쾅!
 격한 심정에 소군을 거칠게 쏘아붙인 강복이 술잔을 세게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일후에 따로 아림을 만나겠다. 멀리는 못 나간다!”
 비겁자가 돼 돌아왔다고 생각한 소군에게 강복이 축객령을 내렸다.
 강복이 그렇게 떠나려 할 때, 서문연주와 서문비호 그리고 절세미녀 조하연이 그에게 다가왔다.
 자세한 사정을 들은 서문연주가 강복에게 사과를 하라며 서문비호를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강복 앞까지 온 서문비호는 계속 주저했다. 숙부 서문연주가 두렵기는 하나 하찮은 숙수 나부랭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짓은 결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한창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를 뻗치고 있는 당당한 서문세가의 장손으로서 어찌 한낱 무지렁이 숙수 따위에게 사과를 한단 말인가?
 사실 포어탕에 돌멩이를 넣은 것은 바로 그, 서문비호였다.
 소하객잔을 소개하고 자신들을 이리 안내한 것은 사하표국의 후계자인 사문향.
 서문비호는 평소 사문향이 사매 조하연을 바라보는 끈적끈적한 시선이 싫었다.
 소주제일표국인 사하표국의 후계자라 하나 서문비호가 보기에는 그도 서문세가의 거대한 그늘 아래 살아가는 종복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종복 주제에 감히 주인인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매 조하연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치근덕거리려 하다니.
 그래서 고작 이따위 곳을 소개했냐며 사문향에게 크게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포어탕에 돌멩이를 넣은 것이었다. 돌멩이가 나온 것은 전적으로 이런 삼류 객잔을 소개해 준 사문향의 탓이라 책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그도 숙수의 손목까지 자를 생각은 없었으나 천박한 숙수 놈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대꾸를 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강복의 손목을 자르려 했던 것이다. 숙수에게 손은 제이의 생명이라는 것쯤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러다 일이 커졌다. 재수 없게도 하필 심검의 고인이 객잔 안에 있어 일이 이리 꼬인 것이다.
 ‘그래, 그저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걸 가지고 숙부는 이 서문비호가 천박한 숙수 놈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강요하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장조카!”
 뻣뻣하게 고개를 든 채 인상을 구기고 있는 서문비호를 보며 서문연주가 노기를 내비쳤다.
 “숙부님······.”
 서문비호가 아랫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저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서문비호는 억울한 심정에 순간 객잔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숙부가 나에게 너무하는 것이다. 내가 저런 무지렁이 따위 백 명을 죽인다 한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숙부는 아버지께 빼앗긴 가주 자리에 아직도 원한을 품고 대신 나를 이리도 구박하는 것이다. 나는 숙부가··· 싫다!’
 세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꾸짖는 서문연주에게 원망이 가득한 서문비호였다.
 사과를 하러 왔던 서문비호가 갑자기 객잔을 뛰쳐나가자 난감해진 쪽은 서문연주였다. 그는 강복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내 사과로 족할 리 없으나 일단 나라도 사과드리겠소. 추후에 조카 녀석을 데려와 사과를 시킬 터이니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하오.”
 강남제일검 서문연주의 사과였다.
 강남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그의 명성이나 엄청난 실력으로 볼 때, 그가 고개까지 숙여 가며 사과를 하는 것은 대단한 무게를 지닌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오행신검 대협!”
 평소에도 기개 있는 검객 서문연주를 존경해 왔던 강복이 그에게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답례했다.
 ‘서문 사형은 역시······.’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강남제일거부의 무남독녀 조하연은 객잔을 뛰쳐나간 서문비호를 떠올리며 그리 생각했다.
 조하연은 서문비호와 서문세가에서 동문수학하는 사형제 사이였다. 하지만 이는 무공을 익히려 하기보다는 강남제일세가를 통해 인맥을 쌓으려는 의미가 더욱 컸다.
 조하연에게는 본디 다른 스승이 있었고, 서문세가에서의 짧은 수련을 끝마치는 것을 기념해 오늘 이 자리도 마련한 것이었다.
 조하연은 서문비호를 절대 사형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서문비호는 아니었다.
 서문비호가 매일같이 노골적으로 끈적끈적한 눈길을 보내오는데 조하연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 시선만으로도 무척 부담스러워하던 차였다.
 한때는 서문세가의 장손인 서문비호 정도면 자신의 짝으로 크게 모자라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 일도 그렇고 평소 모습을 봐도 부족한 면이 많았다.
 조하연이 강복을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조하연이라고 해요.”
 ‘강남땅에 금류하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강남제일거부 금류하金流河 조일산의 무남독녀라면 콧대 높고 지극히 오만할 법도 했다.
 그러나 그렇듯 대단한 신분을 가진 조하연은 일개 숙수에게 깍듯이 예를 갖췄다.
 “가, 강복이라고 합니다.”
 “이 일에 저 또한 관련이 없다 할 수 없으니 사과드리겠습니다.”
 조하연은 자신 또한 서문비호의 일행이었기에 나름대로는 이번 일에 책임이 있다 여겼다.
 “소저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강복은 그나마 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실상 서문연주나 조하연에게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자, 자, 사과의 의미로 이 서문연주가 술 한잔 사겠소이다.”
 분위기가 나아지자 서문연주가 탁자 앞에 앉아 점소이 왕이를 불렀다.
 왕이는 강남제일검 서문연주라는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아껴 뒀던 명주를 꺼내 와 서문연주 앞에 대령했다.
 그러고는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지 계속해서 눈치를 보던 왕이가 곧 크게 결심한 듯 서문연주에게 청했다.
 “오행신검 대협!”
 왕이의 말에 서문연주가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신가?”
 “그, 그게··· 한 가지 청이 있사온데······.”
 “주저하지 말고 말해 보시게.”
 왕이가 크게 용기를 내 자신이 입고 있는 옷 앞섶을 내밀며 말했다.
 “이곳에 수, 수결手決을 부탁드립니다요!”
 “수결이라?”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서문연주.
 “그, 그렇습니다. ‘미래의 강남제일검 소하신검 왕이 소협에게, 당대의 강남제일검 오행신검 서문연주가’라는 글과 함께 대협의 수결을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조하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
 절세의 고수는 이야기꾼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과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소년, 소녀부터 장삼이사들까지, 자유로이 강호를 활보하며 무위를 뽐내는 고수들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왕이는 자신의 우상이자 평소에도 무척 동경하던 강남제일검 서문연주의 존재를 수결로나마 간직하고 싶은 것이었다.
 서문연주 입장에서는 고수가 사람들에게 수결을 해 준다는 얘기는 들어 본 바 없으나, 그렇다고 왕이의 부탁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미래의 검객을 꿈꾸는 소년과 청년을 유달리 아끼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그였다.
 스윽! 스윽!
 서문연주가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미래의 강남제일검 왕이 소협에게’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수결을 해 줬다.
 “푸! 어쩌면 소하신검 왕이 소협으로 인해 무림 고수들이 일반인들에게 수결을 해 주는 일이 전 중원에 유행할지도 모르겠는걸요.”
 조하연은 무척 유쾌한 성격인 듯, 직전까지의 무거운 분위기는 모두 잊고 쾌활하게 웃었다. 청량감을 주는 절세미녀인 그녀가 맑게 웃고 있으니 우울한 분위기마저 화기애애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가, 감사드립니다.”
 왕이가 꾸벅 절을 했다.
 비록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점소이에 불과하나 내심 강호의 고수가 돼 대협으로 불리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왕이였다. 그런 그이니 강남제일검의 수결을 보자 크게 감격스러웠다.
 ‘나 또한 언젠가는······.’
 왕이는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자신의 앞에 강남제일검 서문연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 천하십대고수 중 일 인이 조용히 앉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그와 몇 차례나 얘기를 나눴다는 것을.
 드넓은 천하에 그 적수가 없다는 천하십대고수 중 일 인인 무적위, 군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충절과 지조로 강호인들뿐만 아니라 유학자들과 천하의 남녀노소 모두 존경해 마지않는 수호검주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왕이는 아마 까무러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그의 뒤편으로 세 명의 젊은 청년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문비호와 함께 강남오룡江南五龍으로 불리는 양후량, 진호룡 그리고 소주 토박이이자 안내를 맡은 사문향이었다.
 소군이 발한 심검에 커다란 내상을 입어 모두들 파리한 얼굴들이었고,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대협, 저희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서문연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청년 또한 무례한 언사를 했기에 처음에는 따끔하게 혼을 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서문비호처럼 함부로 검을 빼 든 것도 아니고 조롱을 한 것에 불과했기에 그 생각은 그냥 속으로 삼켜 버렸다. 게다가 자신이 어른이기는 하나 가문이 다른 청년들을 서문비호를 대하듯 심하게 질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녀석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우리 세가 또한 다음대가 걱정되나 신창양가와 광동진가, 사하표국 역시 그 세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서문연주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다음 대 청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 청년이 힘없이 밖으로 나가자 서문연주는 강복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더니 소군에게도 술을 권했다.
 “소협, 한잔 받게나.”
 서문연주는 행색이 초라한 소군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눈빛이 맑다. 정기가 서려 있으며 의지가 굳어 보인다. 그리고 근골 또한 극히 빼어나다. 허나 태양혈이 평평하니 내공을 익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구나.’
 서문연주가 사과를 한 연후에 굳이 이렇게 술까지 대접하겠다 나선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객잔 안에 있을지도 모를 신비 고인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고인은 아무래도 소동이 벌어졌는데도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이 청년 일행이 가장 유력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살펴보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서문연주는 소군을 한참이나 보더니 짐짓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저 나이에 반박귀진返撲歸眞의 경지에 도달했을 리는 없을 터. 이 청년은 아니구나.’
 그래도 혹시 몰라 청년의 얼굴은 단단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세상이 언제나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혹 모른다. 눈앞의 이 청년이 정말 기를 모조리 갈무리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달한 절세 고수일지도.
 “나는 서문연주라고 하는 사람이네.”
 서문연주가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소군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소생은 한소군이라고 합니다.”
 그에 이어 이수도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서문연주는 극히 안목이 뛰어난 사람. 온갖 탁기가 감도는 이수보다는 몸 전체에서 청정한 기운이 절로 풍겨 오는 소군에게 집중했다.
 무명천으로 돌돌 말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검이라 짐작한 서문연주가 물었다.
 “보아하니 한 소협도 검에 뜻을 둔 것 같은데, 어느 분께 사사했는가?”
 무림에서 사문이나 스승의 이름은 극히 중하다. 어떤 스승에게 사사했는가에 따라 대접이 천양지차일 정도로.
 “어린 시절 서은하의 비천무관에서 수련을 하고, 무과에 필요한 것들을 여러 분들에게 배웠습니다. 그러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스승님들이 계시다 할 수 있습니다.”
 “비천무관이라면 소림 속가에 속하는 곳이 아닌가?”
 소군은 그렇다 답했다.
 자신이 전대 수호검주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비천무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정혼녀 효림이 기다리는 은하표국과 함께 꼭 한번 찾아가야 할 곳이 바로 비천무관이었다. 서문연주는 자세히 살필수록 유달리 빼어나 보이는 소군과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눈 후 생각했다.
 ‘군문에 들고자 했었나 보군. 저토록 뛰어난 근골을 가진 한 소협을 진즉에 발견했다면 어린 시절에 우리 세가에 입문시켜 직접 가르쳤을 것을. 아쉽구나.’
 나이를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십 대 초반은 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미 몸의 혈이 막히고 탁기가 그득해 지금부터 빼어난 심법을 익히더라도 쉬이 대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무골을 발견하기가 극히 힘든 것을 감안하면, 서문연주의 아쉬움은 더욱 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탐이 나는구나. 지금부터라도 체계적으로 수련하면 가능성이 아주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문연주는 신비 고인으로 유력하다 생각했던 소군을 한참이나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전에 느꼈던 그 압도적인 기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쉬이 볼 수 없는 빼어난 근골의 소군을 제대로 가르쳐 보고 싶다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겨났다.
 “무림에 뜻이 있다면 어느 때라도 나를 찾아오게. 내 성심성의껏 자네를 이끌어 주겠네.”
 제자가 되겠다 하면 자신이 직접 제자로 받아 성심성의껏 가르칠 요량이었다. 그만큼 탐이 나는 청년이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소군은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호의를 표하는 서문연주에게 정중히 답했다.
 ‘오행신검이 강남제일검이라더니 틀린 얘기는 아니구나.’
 그러면서도 예리한 안목을 가진 서문연주에게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지 않도록 한층 더 조심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곁에서 듣고 있던 조하연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조하연이라고 해요.”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비단결처럼 하늘거리고, 재기가 넘치는 두 눈동자는 흑요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미녀가 많다지만, 보는 것만으로 이처럼 청량감을 주는 유쾌 발랄한 미녀가 흔할까?
 조하연은 청정한 수림과 같은 느낌의 미녀였다.
 “혹시··· 강남제일거부인 금류하 조일산 대인의 무남독녀가 아니십니까?”
 그래도 객잔 생활을 하며 이것저것 들은 것이 많은 강복이 놀랍다는 눈으로 조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더군요.”
 조하연이 순순히 인정하며 소군을 힐끔 훔쳐봤다.
 허름한 행색이나 눈빛만은 자신이 보아 온 어떤 인물보다 맑게 빛나고 있는 저 남자는 어떤 미동도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들으면 상인이 쌓은 부 따위 대단할 것도 없다며 고고한 척하거나, 황금의 무게에 짓눌려 곧바로 비굴한 표정을 짓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도 아니면 내 미모에 혹해 음심을 표출하거나······.’
 조하연이 보고 있는 청년 한소군은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조하연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강남제일거부 아니라 그 할아비의 할아비라 할지라도 한소군에게 경외감을 주기는 어려웠다.
 소군은 천하를 지배하는 군주, 하늘의 아들이라는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그것도 두 대에 걸쳐 호위한 인물이었다.
 물론 조하연의 미모 역시 그야말로 하늘이 내렸다 할 정도로 빼어났다. 하나 소군은 자금성 구중심처에서 황제의 성은만을 기다리며 몸단장을 하던 꽃 같은 비빈들을 매일같이 보았다.
 황제의 여인들, 천하의 미녀들뿐 아니라 황실의 천금이며 천하제일미라는 평이 자자한 자하 공주 또한 보아 온 그이니, 조하연의 미색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사정을 전혀 알 리 없는 조하연은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소군으로 인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남자가 다른 남자들처럼 나를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 데에 왜 화가 나는 거지? 이는 나답지 않은데······.’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정이 차가운 이성을 압도했다.
 그리고 특유의 장난기도 동하기 시작했다. 조하연이 젓가락 통에서 한 무더기의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차라라락!
 탁자 위에 젓가락들을 무질서하게 흩트려 놓았다.
 “열일곱 개의 젓가락입니다. 이를 삼등분해, 서문 사숙에게는 이분지 일을, 강 숙수에게는 삼분지 일을, 그리고 여기 이수 어른께는 구분지 일로 분배해 보시겠습니까?”
 이전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청년을 만나게 되자 오기와 함께 장난기가 동한 것. 그래서 극히 간단한 산술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 문제를 하나 내놓은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전장과 상단에서 일할 사람을 뽑을 때 이 문제를 처음 내놓는다.’
 조하연의 부친이기도 한 강남제일거부 조일산이 생각해 냈다는 간단한 제산除算(나누기) 문제였다.
 “물론 젓가락을 부러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 문제를 본 서문연주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젊은 시절 자신을 처음 대면한 금류하 조일산이 이 문제를 내놓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천 권의 서책을 읽어 지식을 많이 쌓은 자보다 이 간단한 문제를 풀어낼 재치를 가진 이가 더 필요하다 했던가?’
 알고 보면 실상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하나 갑작스럽게 당면하면 의외로 까다로웠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풀지 못했지.’
 서문연주는 청년에게 문제를 내놓은 조하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은 서문세가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다지만, 조일산이 중원 천지에서 뛰어난 스승이란 스승은 모조리 초빙해 최고의 교육을 시킨 재녀가 조하연이다.
 시詩, 서書, 화畵는 물론 산술과 기문 진식, 심지어는 의술에도 적지 않은 공부가 있었다.
 ‘처음에는 장조카 비호와 연을 맺었으면 했지만··· 하연을 품기엔 비호의 그릇이 너무 작지.’
 속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탁자 위에 흩어져 있는 젓가락에 다시 눈길을 돌렸다.
 열일곱은 이로도, 삼으로도, 구로도 제산이 되지 않는 수다. 그러니 보통의 방법으로는 절대 풀 수가 없다.
 간단한 재치를 알아보는 것이었으나, 평소에 넓은 사고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이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문제.
 그런데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청년은 무심한 얼굴로 젓가락 통에 남아 있던 젓가락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러더니··· 툭!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열일곱 개의 젓가락들 위에 한 개의 젓가락을 던졌다.
 “······.”
 젓가락을 부러뜨리지 말라 했으나, 젓가락 하나를 임시로 더해 이로도, 삼으로도, 구로도 나눠지는 공통수 십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열여덟 개의 젓가락 중 아홉 개를 서문연주에게, 강복에게 여섯 개를, 이수에게 두 개를 주면 총 열일곱 개다. 임시로 더했던 젓가락 한 개를 다시 원상태로 빼면 열일곱 개를 질문에 맞게 배분하게 되는 것.
 어찌 보면 이는 억지 산법이었으나, 질문을 받은 상대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이만큼 적격인 문제도 없다.
 곧 조하연이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떨었다.
 “아잉! 이렇게 쉽게 풀어내면 문제를 낸 내가 민망하잖아용!”
 장난기 못지않게 애교도 많은 조하연이 은근슬쩍 손으로 탁자를 가볍게 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열여덟 개의 젓가락이 순간 객잔의 허공으로 일제히 떠올랐다.
 쉭! 쉬익! 쉬이익!
 곧 간결한 소리가 들리고, 조하연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상큼한 박하 향이 물씬 풍겨 왔다.
 타타타탁! 타타타탁! 타타타탁!
 열여덟 개의 젓가락이 총 예순네 개의 도막으로 나눠져 일정한 형태를 이뤄 탁자 위에 꽂혔다.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술병과 여러 개의 술잔 사이로 도막이 꽂히자마자 잔에 든 호박색 술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하게 변하고 만 것.
 ‘진陣이로구나······.’
 서문연주는 기문 진식에 능하지는 않으나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연이 펼친 진이 천지 만물의 생기를 일순간 빨아들였으니 술의 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할 수밖에.’
 서문연주의 생각대로 이것은 진이었다.
 그것도 보통 진이 아니었다.
 무림에서 일절로 꼽히는 팔괘천지생멸진八卦天地生滅陣!
 오행五行과 팔괘八卦의 다섯과 여덟의 조화가 각기 만나 사십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구궁九宮과 뒤섞여 삼백육십의 천지조화를 품는다. 삼백육십의 천지조화는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상극相剋을 이루니 칠백이십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이 태극太極으로 귀일하니 결국에는 총 일천사백사십 종의 길을 이루는 것이다.
 일천사백사십 종의 길 중 일천사백삼십구 종의 길은 모조리 사문死門이며, 오직 한 개의 길만이 생문生門인 난해하기 그지없는 진이었다.
 첫 문제가 재치 있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이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간단한 산술이었다면, 두 번째 팔괘천지생멸진의 생문을 찾는 것은 기문 진식은 물론 역경과 관련 학문에도 능통해야 가능한 것.
 팔괘천지생멸진의 생문을 일다경 안에 찾아낼 수 있는 인물은 드넓은 중원 천하에서도 채 열 손가락을 넘기지 않을 터였다.
 ‘혹 하연이가 금류하의 비무초친比武招親을?’
 “흠······.”
 생각이 그에 미치자 서문연주가 절로 낮은 신음성을 토했다.
 소군은 거무죽죽하게 변한 술을 보며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가 지금 자신을 노골적으로 시험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내색하지 않고, 입고 있는 마의의 널따란 소맷자락으로 탁자 위에 형성된 진의 한 귀퉁이를 툭 건드렸다.
 쉬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순간적으로 스쳐 가더니 술잔에 담긴 술들의 색깔이 다시 부드러운 호박 빛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그 광경에 조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천하십대고수 중 일 인이자 고금제일술법사로까지 불리는 동방자東方子의 팔괘천지생멸진을 초라한 행색의 청년이 소매 바람 한 번으로 간단히 파훼해 버렸으니 놀랄 수밖에.
 하연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탁자 건너편의 소군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탁!
 “이런, 이런!”
 소군은 탁자 위에 있던 술잔 하나를 소맷자락으로 건드려 술을 쏟았다. 그러더니 바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술잔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다니, 소생이 만취했나 봅니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키다가는 큰 실수를 할 것 같으니 소생은 이만 일어날까 합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 보이는 소군이 가볍게 포권을 했다.
 “아복, 오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미안하다.”
 소군은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는 친우 강복을 보며 사과했다. 그러나 자신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비겁하게 나서지 않았다 오해하고 있는 강복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소군은 씁쓸한 눈으로 그런 강복을 바라봤다.
 ‘아복, 내 사정을 이해해 달라 하지는 않겠다. 다만 네가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하게 될까 그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친우 강복만은 소박한 행복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소군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 봐야 강복의 명만 짧아질 뿐이었다.
 “미안하다, 아복.”
 재차 사과했으나 강복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대신 답은 다른 이에게서 나왔다.
 “비연검 조하연이 한 소협께 비무를 청합니다!”
 조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소군에게 정중히 비무를 청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던가?
 아버지 조일산을 닮아 사람 보는 안목이 유달리 뛰어난 조하연은 눈앞에 있는 한소군이라는 이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비연검飛燕劍 조하연.
 세상에는 강남제일거부인 금류하 조일산의 무남독녀이자 서문세가의 제자로만 알려졌으나 실상 그녀의 스승은 따로 있었다.
 강남 곳곳에서 조일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의 인맥은 대단했고, 기인으로 알려진 천하십대고수의 일 인인 동방자와도 연을 맺을 수 있었다.
 동방자는 무림에 단순히 술법사로만 알려졌지만 실상은 무당파 출신으로, 검에도 대단한 조예를 가진 기인이었다. 조하연은 동방자의 무기명 제자였고, 그녀의 진실한 실력은 겉멋만 든 서문비호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이가 어려 내력은 떨어졌지만, 애초에 총명하게 태어난 그녀의 검법 성취도는 동년배 사이에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조 소저, 소생은 무과에도 번번이 낙방한 후 삼류 낭인으로 떠돌다 낙향한 무명소졸입니다. 조 소저와는 검을 섞을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거절이었다.
 “비연검 조하연이 한소군 소협께 다시 한 번 비무를 청합니다!”
 쾌활한 절세미녀 조하연의 목소리에서 장난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소생은 조 여협의 검에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한 번의 거절.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자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조하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남제일거부의 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고,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하는 것에 익숙지 못한 조하연이다. 그녀의 천성은 나쁘지 않았으나 나이도 어리고 세상 경험도 일천해 소군의 거절을 곧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르릉!
 조하연이 검 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검병을 잡고 검신을 거꾸로 해 땅으로 향하게 한 상태에서 또다시 청했다.
 “삼배기수三拜起手의 예로 비무를 청합니다!”
 ‘세 번 절한 후에 손을 쓴다.’는 의미의 삼배기수는 상대에게 세 번 정중하게 비무를 청하는 것.
 삼배기수의 예를 다한 후에도 비무에 응하지 않으면 상대는 천하의 비겁자나 마인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명문 정파의 무인이라면 삼배기수의 예라는 말에는 무조건 비무에 응하기 마련.
 대신 삼배기수의 예를 먼저 언급한 당사자가 혹여 비무 중에 상대의 검에 죽게 되더라도 그의 지인이나 사문에서는 절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소군 스스로는 단 한순간도 무림인이라 생각한 적이 없지만 스승은 무림인이었기에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술이 과해 나 자신을 너무 드러냈구나!’
 첫 번째 문제야 그렇다 쳐도, 자신을 시험한다는 생각에 순간 발끈해 진을 파훼한 것은 큰 실수였다. 아무리 취기가 올랐다 해도 자신의 능력을 순간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둔하기 그지없는 행동인 것이다.
 간단한 도발에 능력의 끝 자락이라도 비춘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과 허명에 집착하고 있었던가?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소군이 힘없이 말했다.
 “소생은 천하의 비겁자이니, 부디 삼배기수의 예를 거둬 주십시오.”
 천하의 비겁자!
 소군은 이전부터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군주를 따라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홀로 살아남았으니 하늘 아래 그 이상 가는 비겁자는 없으리라고. 그러나 조하연은 요지부동이었다.
 “삼배기수의 예를 다했으니, 소녀의 검이 무정하다 탓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하연의 검 끝이 잠시 흔들렸다.
 쉭!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꿰뚫으며 검신이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은은하게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것이, 내력을 담은 게 분명해 보이는 검. 그 검 끝이 당장에라도 소군의 목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살기가 없다.’
 소군 정도의 절세 고수라면 상대의 검에 살기가 담겨 있는지 정도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소군은 잔뜩 겁먹은 것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쉬익!
 예리한 기운을 담은 하연의 검 끝이 소군의 목에서 한 치도 안 되는 지점까지 날아오다 순간 멈췄다. 쭉 뻗은 하연의 팔에 들린 푸른 검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렸다.
 소군이든 하연이든, 몸에 조금만 힘을 주면 목이 꿰뚫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쿵!
 만취한 강복이 술잔을 탁자에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군, 또 한 번 실망했다. 너는 정녕 비겁자였던 것이냐?”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검에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질끈 눈을 감아 버린 소군을 보며 강복이 말했다.
 아닐 거라 믿었건만, 연달아 비무 요청을 피하고 상대가 공격을 해 오는데도 꼼짝도 못 하는 소군의 모습.
 이제는 단순한 실망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천재 한소군이 이렇듯 영락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며, 안타까움에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강복은 소군의 모습에서 황제를 지키는 수호검주, 천하십대고수 중 일 인이라 할 만한 모습은 결단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연아, 그만 해라.”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던 서문연주가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문연주 역시 한소군이라는 청년의 진면목을 보고 싶었기에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칫 애꿎은 사내의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소군이 천천히 눈을 떠 검을 들고 있는 하연을 바라봤다.
 순간 소군의 맑은 눈동자와 하연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현기玄氣가 담긴 검. 도가의 검을 익혔구나. 그것도 제대로 된 검을! 무당의 검이던가······.’
 천하에서 가장 많은 무공을 알고 있으며, 하늘 아래 가장 많은 초식을 품고 있는 당대의 수호검주 한소군은 그렇게 판단했다.
 ‘눈빛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 두려워서 눈을 감은 것이 아니다. 한 소협은 내 검에 살기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피하지 않은 것이다.’
 조하연은 한없이 깊고 맑은 한소군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한 소협··· 당신은 누구신가요······.”
 조하연이 당장에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한소군의 깊고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대신, 한소군은 볼썽사나운 나려타곤의 초식을 펼쳐 바닥을 뒹굴며 조하연이 들고 있는 검의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무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라면 수치스러워 사용하지 않는다는 나려타곤으로 객잔 바닥을 뒹구는 소군의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한소군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 말없이 소하객잔의 문을 나섰다. 그런 그를 이수가 조용히 따랐다.
 그러자 조하연은 한소군을 보며 소리쳤다.
 “금류하의 비무초친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한 소협, 당신은 언젠가 비무초친을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조하연은 어느새 본래의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얼굴로 돌아와 소군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무할 생각이 들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나 한 번 물면 절대 안 놓는 끈질긴 여자거든요!”
 그러면서 조하연이 유쾌하게 웃었다.
 ‘한 소협,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반드시 밝혀내고 말 거예요.’
 조하연은 가볍게 주먹을 쥐며 흥미롭기 그지없는 청년 한소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 * *
 
 북경 자금성 건청궁.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신권으로 구주팔황, 하늘 아래 십만 팔천 리를 다스리는 황제.
 건청궁 옥좌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황제가 은빛 갑주를 입고 있는 무장을 보며 물었다.
 “그러한가?”
 은빛 갑주의 무장이 명료하게 답했다.
 “재차 확인했습니다.”
 허약한 전대 황제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당금 황제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수년 동안 짐을 가로막았던 수호검주는 그리 쉽게 갈 인물이 아니지. 하하하하!”
 황제는 크게 웃었다.
 “조카에게 그를 죽이게 하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짐을 따르는 수십만 대군의 진군을 수년 동안 홀로 막아섰던 일세의 영웅을 그리 보내서는 안 될 일이지. 암, 그래서는 안 되고말고.”
 황제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황 도독, 중원 십만 팔천 리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검주를 찾으라.”
 “존명!”
 황명을 받은 금의위 대도독이 곧바로 어전을 나섰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아무리 사약을 내렸다 한들 천하의 수호검주가 그리 허망하게 죽었을 것이라고는.
 단지 나약한 황제에게서 검주를 떼어 내고, 거사를 행할 동안만이라도 그가 자신을 막지 못하게 시간을 벌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검주가 살아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도 했다.
 대도독이 어전을 나가자 곁에 시립하고 있던 늙은 환관 하나가 황제에게 물었다.
 “황상 폐하, 검주를··· 거두시려는 것이오니까?”
 황제의 마음을 가장 잘 읽는다는 사례태감 오립신이었다.
 “너는 진즉에 짐의 속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더냐?”
 오립신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신하 된 몸으로 당연한 일이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고, 한왕漢王으로 책봉돼 자금성을 일시 떠나 있을 때도 늘 동행했던 환관 오립신이었다. 어쩌면 평생 자신의 곁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은 이 오립신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립신아.”
 사례태감이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하대를 했다. 황제가 진심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 폐하.”
 “한때는 번번이 짐의 길을 막는 검주를 증오했었다. 검주만 없었다면 몇 년은 빨리 짐의 뜻을 펼쳤을 것이니.”
 조카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황제는 용상의 한 귀퉁이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
 “검주가 뜻을 바꿔 이제는 짐을 지켜 준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느냐?”
 “······.”
 오립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짐은 아직도 편히 잠들지 못한다. 조카를 죽이고 오른 제위다. 이 용상에는 아직 핏물도 채 마르지 않았어. 짐은 두렵다. 역천逆天을 통해 제위에 오른 천자는 당연히 하늘의 징치를 받을 것이기에.”
 “폐,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문약하나 선군이었던 조카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패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장성 너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몽고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선군보다 패왕이 필요한 시대라고 짐은 믿었다. 그렇기에 훗날 하늘의 징치를 받을지라도, 조카를 죽인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사명을 다할 때까지 짐이 쓰러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주가 짐을 지켜 줘야 한다.”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천하에 그 누가 있어 검주를 쓰러뜨리고 짐에게 올 수 있겠느냐? 검주가 짐을 지켜 준다면 장성 너머 수십만 몽고 기병들에 포위돼 있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느니라.”
 오립신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황실 역사상 최강의 고수이자 충절의 상징인 수호검주다.
 ‘그는 한 번 섬긴다 다짐하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공신이랍시고 폐하 주변에서 떡고물이나 주워 먹으려 드는 간신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지. 허나 그가 과연 폐하를 섬기겠는가?’
 “그 역시 내위다. 옥좌를 두고 다투는 것에는 관여치 않지만, 일단 옥좌의 주인이 가려지면 그 주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내위!”
 쾅!
 황제가 옥좌 귀퉁이를 내리쳤다.
 “짐이 직접 설득할 것이다! 그가 짐의 뜻을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설득할 것이다.”
 황제는 수호검주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 * *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불리는 장성 수비의 핵이며, 북방에서 자금성이 있는 북경으로 가는 제일차 관문인 하북성 산해관山海關.
 히이이잉!
 산해관의 한쪽 귀퉁이에서 보통 말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거마가 우중충한 하늘을 향해 말발굽을 들어 올렸다.
 전신을 묵색의 마갑으로 둘러치고 있는 거마의 안장에는 역시 전신을 묵색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칠 척 거한이 타고 있었다.
 한 손에는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의 중량감이 느껴지는 묵철의 참마도斬馬刀를 들고, 다른 손에는 사 척 크기의 사각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등에는 성인 남자만 한 크기의 복합강궁複合强弓을 멨다. 시위에 화살 대신 창이라도 재어 쏘아 댈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강궁이었다.
 갑주는 물론 참마도와 사각 방패, 복합강궁까지 모조리 묵색으로 통일돼 움직일 때마다 검은 폭풍이 몰아치는 것만 같은 위압감을 주는 인물.
 “황상 폐하가 승하하셨다. 그리고 황제지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마에 타고 있는 거한, 묵갑신墨鉀神이 어둠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고삐를 당겼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강소성 소주로 간다. 그곳에서 황제지검을 회수하고, 수호검주로서의 사명을 다하리라.”
 북방에서 또 한 명의 수호검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은하표국
 
 
 
 콸콸콸. 콸콸콸.
 소하객잔을 나와 교교한 달빛 아래를 걷고 있는 소군의 귓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날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
 도시 전체가 운하와 수로로 연결돼 있는 물의 도시 소주에서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소군은 이수와 함께 말없이 여러 골목을 돌아 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휴우!”
 정문 위에 은하표국이라고 쓰인 현판을 올려다보며 소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갈등하더니 조심스럽게 정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똑똑똑!
 “······.”
 안에서 반응이 없자 소군은 다시 한 번 두드렸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자 그때서야 겨우 문이 열리며 허리가 굽은 한 노인이 느릿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주름살이 온 얼굴을 뒤덮고 있고,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올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노인.
 소군은 십오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오 노야······.”
 십오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 노인이었다. 못 본 사이 확실히 주름살이 늘긴 했지만 은하표국에서 일을 거드는 오 노야가 확실했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맞는데, 젊은이는 뉘시오?”
 주름진 얼굴에 비해 목소리는 아직도 정정했다.
 “오 노야, 저 아군입니다. 한운학 선생 댁 아들인 아군요.”
 그런데 오 노야는 가는귀가 먹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시라? 학당 하던 운학 선생? 운학 선생 죽은 지가 언젠데 여기서 운학 선생을 찾아?”
 그러자 소군은 보다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그 선생 아들인 아군입니다.”
 다행히 그 소리는 제대로 들었는지, 오 노야가 졸린 눈을 번쩍 뜨며 소군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이나 뚫어지게 소군의 얼굴을 살피더니 순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까 어릴 때 얼굴이 남아 있구만그래. 큰아가씨랑 정혼한 그 아군이로구나.”
 “맞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소군을 향해 오 노야가 한없이 정겹게만 들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헐헐헐! 살아 있었구만. 다들 죽었다 그래도 나는 믿지 않았지. 내가 아는 아군은 쉬이 죽을상이 아니었거든. 헐헐헐!”
 그는 진정으로 소군을 반가워했다.
 “오 노야, 아림을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가는귀가 먹어 그 소리를 제대로 들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세상 경험이 많은 오 노야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아채고는 소군의 손을 이끌고 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한때 소주사대표국 중 하나로 불렸던 은하표국은 내부가 무척 넓었다. 그러나 곳곳에 심어 놓은 정원수는 제대로 손질이 되지 않아 제멋대로였고, 바닥을 이루는 벽돌 사이사이에는 잡초만이 무성했다.
 그리고 낡은 전각 중 일부는 제때 수리를 하지 못해 금방이라도 무너지지는 않을까 불안감마저 일으킬 정도였다.
 ‘은하표국이 이리도 기울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백여 장 정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아직 불을 밝히고 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희미한 불빛을 통해 흔들리는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오 노야가 그 그림자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큰아가씨, 잠시 나와 보실 수 있겠습니까?”
 오십 년 이상 은하표국에서 일한 오 노야의 청에, 불빛을 통해 비치던 여인의 그림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림자의 주인은 오 노야의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을 알기에, 안에서 대답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라 생각해 곧장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등에서는 절로 식은땀이 흐르고, 움켜쥔 주먹에서는 벌써부터 땀이 흥건하게 배어 있었다.
 긴장, 소군은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터벅터벅!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아담한 체구의 여인 하나가 소군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림······.’
 철부지 소녀일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지만, 소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벼운 경장 차림의 여인도 안에서 걸어 나오다 어느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딱 멈춰 섰다.
 너무나 놀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여인.
 십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소군과 효림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귓가에서 뭔가가 계속 윙윙거렸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
 지금 이 시간 두 사람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귓전을 스쳐 가는 바람결이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이는 꿈이 아닌 현실.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것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소군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바라봤다. 소군도 여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빼어난 미인이랄 수는 없지만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 단아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아직도 소녀다운 순수한 귀여움이 남아 있는 얼굴. 빼어난 절세미녀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활짝 웃을 때면 눈웃음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효림이었다.
 “아림······.”
 한숨처럼 내뱉은 말과 함께 소군의 눈가에 막 이슬이 고이려던 참이었다.
 효림이 고운 손으로 소군의 얼굴 곳곳을 찬찬히 만져 갔다. 마치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인해 보겠다는 듯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꿈이 아님을 확신한 효림은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 소리쳤다.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는 줄 알았잖아!”
 효림의 작은 주먹이 소군의 넓은 가슴을 향했다.
 퍽! 퍽! 퍽!
 효림은 소군이 원망스러운 듯 그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그런 효림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러자 소군이 그녀를 힘차게 품에 안았다.
 “왜 이제 왔어··· 왜 이제 온 거야······.”
 소군의 품에 안긴 효림은 소군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 이제는 노처녀 소리마저 듣는 효림이었다.
 아버지는 표행에 나갔다 실종되고, 시아버지가 될 운학 선생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몇 해 전 죽었다. 그리고 정혼자인 소군은 여러 해 동안 소식 한 번 없었다.
 주변에서는 홀로 남은 자신에게 소군은 죽었을 테니 이제라도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라며 계속해서 권했었다.
 괜찮은 집안에서 여러 차례 혼담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효림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기를 또 몇 해.
 이제는 그런 혼담도 끊겼고, 종종 재취 자리나 첩실로 들어오라는 얘기나 듣고 있던 차였다.
 특히 소주 뒷골목을 꽉 잡고 있는 적룡회주 상문장이 효림에게 첫눈에 반해 계속해서 첩으로 들어오라 하고 있어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때에 마침내 정혼자인 소군이 돌아온 것이다.
 “미안하다. 너무 늦게 돌아와서······.”
 소군은 효림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동안 돌아올 수도, 소식조차 전할 수도 없는 몸이었다 하나 효림에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혹 그동안 나 두고 다른 여자랑 살림 차린 건 아니지?”
 효림은 간혹, 소군이 다른 곳에서 이미 혼인을 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헛된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소식 한 번 전하지 않은 거야? 왜? 왜?”
 묵묵부답.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효림에게만은 자신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밝히고도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답답한 소군은 서러운 듯, 기쁜 듯 한없이 울고 있는 효림에게 약속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 주마.”
 철부지 꼬마 소군이 아닌, 당대의 수호검주 한소군이 이렇게 약속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수호검주 한소군이 지켜 주는 이를 감히 해할 수 없다는 사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 나 한소군이 너를 지켜 주마······.’
 소군은 속으로 끝없이 다짐했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정혼녀 효림에게 그는 수십, 수백 번이나 그 말만을 반복했다.
 
  * * *
 
 강소성 양주에 본국을 둔 강남금상회江南金商會의 소주 총타. 강남제일거부인 금류하 조일산이 이끄는 강남금상회는 강남에서 생산되는 미곡의 유통을 오 할 가까이나 관여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이익이 남는 소금 전매권을 조정에서 위탁받은 상태고, 강남 특산인 소주 비단과 차茶 거래에 있어서도 남다른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경항대운하를 관리하는 조방漕幇에도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강남 제일로 불리는 양주대전장과 양주표국 등도 소유하고 있었다.
 강남의 한 문사는 강남금상회가 강남땅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가리켜 이렇게도 표현했었다.
 
 -태어나서부터 금상회가 유통시킨 쌀밥과 소금으로 하루 세 끼를 먹기 시작해 금상회가 제조하고 유통시킨 차를 마시고, 소주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지. 자라서는 양주대전장에서 돈을 융통하며, 양주표국에 물건을 맡겨 운송을 시키면 안심할 수 있다네. 노년에는 강남금상회의 배를 타고 남북을 잇는 경항대운하를 지나 유람을 떠나는 것이 큰 복락 가운데 하나일세. 그리고 죽어서는 자신의 상여가 강남금상회 소유의 땅을 지나야만 땅에 묻힐 수 있는 법이지.
 
 강북에 비해 거대 문파나 절대 고수의 수가 적은 강남 무림을 일통한 세력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한 강남 상계는 이미 금류하 조일산에 의해 일통된 지 오래였다.
 장강 이남의 상계를 강남금상회가 장악하고 있다면, 강북에서는 만금상회萬金商會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강북과 강남을 제패한 두 상회는 이제 동서로 흐르며 대륙을 가르는 장강 상권 지배와 차 유통 사업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렇게 강남금상회와 만금상회는 강호의 정파와 마도의 대립만큼이나 여러 부분에서 각을 세우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서로를 생애 최고의 호적수로 인정하기도 했다.
 강남금상회의 소주 총타는 소주 특산인 비단 거래를 중점으로 행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상권 지배도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중소 상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홀로 상권을 독점했다가는 추후에 분명 독이 돼 돌아올 것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중년 사내.
 사십 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깔끔해 무척 젊고 활력이 넘치는 이 사내의 이름은 윤상하였다.
 윤상하는 강남금상회의 소주 총타주였다.
 “중용의 도를 지키며, 모두와 화합해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 장사의 기본이란 얘기죠?”
 윤상하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조하연이 말했다.
 그러자 윤상하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단다. 독점을 해 제멋대로 가격을 올리게 되면 얼마간은 이익이 나겠지. 하지만······.”
 “결국에는 상계의 기력을 약화시키고, 백성들에게는 부담을 가중시켜 상권의 파탄을 가져온다. 그러니 백성들의 사정이 어려우면 이익을 박하게 얻고, 사정이 좋아지면 조금 더 후하게 가져오는 것이 상도이며, 중용의 도다.”
 조하연의 답에 윤상하가 연방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근본은 그러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강남 상권을 독점하는 세력이 나오면 조정의 눈초리가 매서워지기 때문이지. 천하를 지배하는 현실적인 세 가지 힘인 권력과 무력, 금력 중 금력이 한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여기기 때문이다.”
 강남 상권을 일통했다는 강남금상회였으나 실제 상거래에서의 전체적인 지배력은 오 할 안팎을 오가도록 교묘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금상회가 강남 상계를 완전히 지배할 정도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도를 지키며, 더불어 조정의 눈치 또한 보고 있기 때문.
 윤상하는 조일산 대인의 무남독녀이자 후일 금상회의 회주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조하연에게 틈만 나면 상도의 끝 자락이라도 보여 주려 노력했다.
 그 얘기를 차분히 들으며 맞장구를 쳐 주던 조하연이 윤상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혹시 은하표국이란 곳을 아세요?”
 강복에게 물어 소군이 은하표국으로 향했을 것이란 얘기를 들은 조하연이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상하가 답했다.
 “은하표국? 알고는 있다만, 이제 거긴 표국이라 할 수도 없는 곳이야. 곧 사하표국에 넘어갈 것이다. 그 가치라 해 봐야 표국 건물 값과 땅값이 전부인데, 은자 삼천 냥 수준일 거야. 그나마도 적룡회에 빌려 쓴 염왕채를 갚고 나면 표국을 팔더라도 손에 은자 한 냥 쥐기 힘들겠지.”
 은하표국이 한때 소주 사대표국 중 하나였고, 남달리 기억력이 뛰어난 윤상하였기에 대략이나마 사정을 알고 있었다.
 “아저씨, 우리가 은하표국을 매입하려면 얼마나 지불하면 될까요?”
 그 소리에 윤상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표국이라 할 것도 없이 달랑 건물만 남은 은하표국 따위를 매입해 봐야 득 될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나라면 매입하지 않을 것이다. 은하표국을 매입하려는 사하표국 역시 그곳을 표국으로 운영하려는 것이 아니라 건물 일부분을 수리해 도박장으로 만들려는 것이니까.”
 “그래도 매입을 한다면요?”
 “건물과 땅 자체는 은자 삼천 냥 가치는 하겠지만··· 그러나 이문이 박한 곳에 은자 삼천 냥을 묶어 두느니 다른 장사를 해 돈을 굴리는 편이 열 배는 나을 것이다.”
 “그런가요? 하지만 제가 볼 때 은하표국과 관련된 장사는 최소 은자 만 냥, 어쩌면 은자 백만 냥짜리일지도 몰라요.”
 조하연의 말에 윤상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은자 백만 냥짜리라··· 흠······.”
 윤상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어려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나 조하연은 다재다능한 재녀였고, 잘만 다듬으면 강남금상회의 주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아이였다.
 그런 조하연이 ‘은자 백만 냥’을 언급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연이가 딱히 무슨 장사를 하는 것은 아닐 터. 게다가 최근 서문세가에서 수련을 쌓았던 하연이의 상황을 덧붙여 생각하면 십중팔구는 무인과 관련된 얘기일 것 같구나. 그런데 서문세가에 은자 백만 냥짜리 무인이 있었던가? 세가의 최고수인 서문연주 대협이라 해도 대인의 평가에 따르면 높게 쳐줘야 십만 냥짜리라 했거늘. 은자 백만 냥짜리라면 적어도 화경에 이른 무인이라는 얘기인데······.’
 장사 중에 최고는 역시나 사람 장사였다. 굳이 진시황을 왕위에 올린 춘추전국시대의 대상 여불위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사람 장사만큼 이문이 엄청난 장사도 없었다.
 그랬기에 금상회주이자 상인인 조일산은 종종 무인을 은자로 구분하곤 했다.
 일류 고수는 은자 천 냥의 가치가 있으며, 절정에 달한 무인은 은자 만 냥의 값어치가 있었다. 초절정 고수는 은자 십만 냥이라는 거액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은자 백만 냥짜리라 하면?
 조금 과장을 섞어, 작은 성省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는 가치의 무인이라면······.
 “은하표국에 천하십대고수라도 있더냐?”
 그리 묻는 윤상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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