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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전쟁 1-1권

2019.03.14 조회 2,606 추천 17


 독호
 
 
 
 
 
 
 겨울 동안 눈 속에 파묻혀 긴 잠을 자고 있던 초목들이 기지개를 편 지 벌써 한 달. 숲은 새파랗게 물들었고, 소흥안령 밑의 초원도 푸른색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삘릴리~ 삘릴리~.
 어디선가 목동의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한가로이 풀을 뜯던 말들이 일제히 머리를 쳐들고 두리번거렸다.
 “야! 내가 일어나면 니들 죽는다. 어서 이쪽으로 와.”
 숲 속의 나무 밑에서 앳된 목소리가 울리자 말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기름기가 도는 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갈색의 갈 기를 깃발처럼 날리며 달리는 말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오호홍, 극극극.
 대략 10마리 정도의 말들이 숲 변두리에 있는 커다란 삼송나무 밑에 둥글게 모여들어서는 머리를 주억거리며 발로 땅을 파헤쳤다.
 마치 주인에게 우리가 왔다며 아양을 떠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니들, 말 안 들을래? 내가 그랬잖아. 좀 있으면 흑곰새끼네 패거리가 온다고.”
 또다시 울리는 앳된 목소리. 누가 들으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말들이 제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말들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소년의 곁으로 다가가 발로 땅을 파헤치며 콧김을 불었다.
 푸르르.
 목소리의 주인공은 겨우 일곱이나 여덟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은 남자의 피부답지 않게 하얗고 무척 깨끗했다.
 그러나 얼굴의 절반이 머리카락에 가려서 두툼한 입술과 오뚝한 콧마루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윽, 그윽.
 소년의 가까이에 있던 말들이 머리를 길게 빼고는 혀를 내밀어 그의 목과 얼굴을 핥았다. 마치 성난 주인에게 잘못을 비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년이 앞뒤에서 혀를 내밀어 핥아대는 말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룩아, 간지럽다. 이제 그만해. 응?”
 우르르르.
 말들과 장난을 치던 소년의 머리가 어느 순간 홱 돌아갔다.
 땅이 부르르 흔들리고 말들이 달려오는 굉음.
 학강현 쪽에서 달려오는 50여 마리의 말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소년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칫, 오늘은 아예 포위하겠다는 말이군.”
 소년의 뒤로도 50여 마리의 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쐐기 같은 진형을 형성한 말들이 양쪽에서 질주하며 일으키는 먼지기둥이 목초지를 뿌옇게 뒤덮었다.
 소년은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의 말은 겨우 10마리. 전면전을 벌이면 저 압도적인 숫자에 여러 마리의 말들이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주인집이 너무 큰 손해를 본다. 소년의 어금니가 꽉 물려졌다.
 “좋아, 흑곰. 오늘은 피하지 않겠다.”
 소년이 머리를 들자 얼굴을 가렸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눈이 나타났다.
 조금 크면서도 심연의 호수같이 그윽한 눈. 소녀들이 본다면 얼굴을 붉힐 만큼 매력적인 눈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년의 눈빛은 파란 독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말들이 소년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100여 마리의 말들이 주변을 돌자 자욱한 먼지가 일고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흐흐, 독종. 오늘은 왜 도망치지 않았지?”
 말 위에는 10여 명의 소년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말을 돌보는 목동들로 8세부터 12세 정도의 나이였다.
 그중 소년에게 시비를 건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두 배나 컸다.
 검붉은 얼굴에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척 봐도 완력이 대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목. 저 새끼, 말이 죽을 것 같으니까 도망치지 않은 거야. 다이샨의 말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놈이 저 새끼잖아.”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서서 말한 것은 나이는 꽤 들어 보였지만 두목이라 불린 아이보다 덩치가 반도 안 되는 매우 허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쯧, 흑곰의 밑구멍이나 핥아 주는 똥개새끼가 말이 많구나.”
 “뭐야? 너 이 새끼, 정말 죽고 싶어!”
 소년의 비웃는 말에 몸이 허약해 보이는 소년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무리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밑구멍을 핥아 준다는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똥개보고 똥개라는데 뭐가 잘못됐냐?”
 “이, 이 새끼. 너 오늘 죽었어.”
 똥개라 불린 아이가 분노로 이를 갈자 소년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어지며 차가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똥개, 그럼 앞으로 나서라. 앉아서 오줌 싸는 계집처럼 주둥이로 나불거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한판 붙잔 말이다.”
 “이, 이 새끼가······.”
 독종이라는 소년이 앞으로 나서자 똥개의 목이 순간 자라처럼 쑥 들어가며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독종 장길산!
 그 이름은 이곳에서 말치기를 하는 목동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학북진은 40호 정도 되는 만주인과 50호 정도의 몽골인, 100호 정도의 한(漢)인, 그리고 80호 정도의 조선인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그중 조선인은 송화강 지류인 학수(鶴水)를 이용해 논을 갈아 벼를 심고, 한(漢)인들은 밭에 옥수수를 키웠다.
 하지만 만주인과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말과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이곳 학북의 목초지는 언제나 목동들의 전쟁터였다.
 이 목초지는 주인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주인과 몽골인의 목동들은 서로 싸움을 꺼렸다.
 자칫하면 아이들 싸움이 민족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 전부터 조선인이 목동이 되고 나서는 몽골인도 만주인도 모두 조선인에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소년을 쫒아내려고 싸움을 건 것은 몽골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의 싸움에서 몽골 아이들은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임전무퇴, 싸우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필사필승,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며 반드시 승리한다!’
 장길산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 지독한 독종이었다.
 처음에 우습게보고 나섰던 몽골인 말치기 두목 바투가 길산에게 물려 귀 반쪽이 날아갔고, 또한 다리도 부러져 두 달을 고생해야 했다.
 그에 격분한 몽골 목동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몰매를 놓았다.
 장길산은 한 달 동안은 방에 누워 있어야 할 만큼 그날 죽도록 맞았다.
 그리고 장길산은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목동들이 많을 때는 말을 몰아 도망쳤고, 혼자 떨어진 아이들만을 찾아 결투를 벌였다.
 그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죽어도 이기고야 말겠다는 투지, 거기다 죽을 결심까지 한 그에게 아이들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 다음부터 몽골 목동들은 장길산의 모습이 보이면 슬슬 피했다.
 하지만 장길산은 그대로 끝내지 않았다.
 “항복하라. 난 너희들이 항복할 때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
 그것이 독종 길산의 외침이었다. 기겁한 몽골 목동들은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그러자 길산은 몽골 목동들을 쫒아 다니며 도전했다. 그것은 괴이한 싸움이었다.
 숫자가 많은 몽골 목동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일기토(一騎討)로 달려드는 길산은 죽어라 그들을 쫒아 다녔다.
 그 집요함에 몽골 아이들은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명씩 길산과 싸우기로 합의를 봤다.
 저 조선인 독종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목동들의 두목이다!
 그것이 몽골 목동들의 합의였다. 하지만 독종을 이길 자는 없었다. 결국 최근에야 몽골 목동들은 길산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그런데 이제는 만주인 흑곰이 덤벼들었다. 사실 한 달 전부터 길산은 흑곰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흑곰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역병에 걸려 돌아가신 후, 갈 곳 없는 자신을 받아 들여 목동을 시켜 준 다이샨이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왜? 싸울 자신이 없냐? 똥개 새꺄!”
 사나운 투기를 풍기는 길산에게 온몸이 오그라든 똥개 도르친이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본 흑곰이 말에서 내렸다.
 “독종, 나와 붙어 보자.”
 길산의 무표정한 눈이 흑곰에게 돌아갔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길산이었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두목이 될 수 없지.’
 이것 때문에 도르친에게 도발한 길산이었다. 도르친은 머리는 좋지만 싸움은 잼뱅이었다. 도르친은 흑곰의 졸개다.
 그에게 도발했으니 흑곰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몽골 목동들과 싸우면서 길산은 한 가지 진리를 알게 되었다.
 떼로 덤벼드는 자들은 두목만 쓰러트리면 기세를 꺾어 놓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설사 졸개들이 항복하지 않아도 이후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더구나 흑곰 도이와 싸워 이긴다면 더 이상 초원에서 자기를 건드릴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흑곰, 난 싸움을 즐기지 않아. 하지만 피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와 싸우려면 내기를 해야 한다.”
 길산의 말에 도이의 눈이 커졌다.
 “내기? 무슨 내기?”
 “몽골족의 바투는 나와 싸움에서 내기를 걸었다. 지는 자는 동생이고, 이기는 자는 형. 자, 할 테냐?”
 “그, 그런······.”
 순간 도이는 말을 더듬었다. 몽골족은 자존심이 강하다.
 언제나 칭기즈칸의 핏줄이라고 하는 그들이 조선인 장길산에게, 그것도 4살이나 어린놈에게 동생을 자처했단 말인가?!
 “싫으면 그만둬. 그리고 니들, 용사의 가슴이 없으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길산이 한 마디 뇌까리고 몸을 돌리자, 만주족 아이들의 눈에서 파란 분노가 이글거렸다.
 감히 대륙을 석권한 누루하치의 후예들인 만주족에게 용사의 자격이 없다니?
 그것은 용사를 최고로 존경하는 만주족 아이들에게는 치욕이었다.
 “저 새끼, 죽여!”
 “두목, 저 새끼 죽이자.”
 분노한 만주족 아이들이 일제히 채찍을 꺼내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채찍의 끝에는 무거운 연추가 달려 있어 맞으면 팔다리가 부러진다.
 그때였다.
 우르르르.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지가 부르르 떨렸다.
 “휘익, 휘익.”
 몽골 목동들이 부는 날카로운 휘파람에 아이들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대지를 가르며 질풍처럼 달려오는 150여 마리의 말들. 몽골 목동들이었다.
 말떼 앞에는 15명의 아이들이 말머리에 몸을 바싹 붙이고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질풍처럼 달려오는 그들의 말이 일으키는 자욱한 먼지가 목초지를 구름처럼 덮었다.
 “바투다!”
 “사음(死音)이다!”
 먼 옛날, 칭기즈칸의 기병들이 환도를 치켜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할 때 불었다는 휘파람 소리. 당시 몽골군의 휘파람 소리를 사음, 즉 죽음의 소리라고 했다.
 그것은 휘파람 소리가 울리면 전투가 벌어졌고, 무자비한 몽골군의 환도에 적의 팔다리, 목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칭기즈칸은 없고 무적의 몽골군도 없지만, 휘파람 소리만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길산 형, 나 바투가 왔다.”
 만주족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바투가 일부러 큰소리로 말하며 말에서 날렵하게 뛰어 내렸다.
 ‘진짜였어!’
 ‘세상에, 바투가 독종을 형이라고 부르다니!’
 일순 만주족 목동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바투는 개의치 않았다.
 “어라, 지금 싸우려는 거야? 흐음.”
 바투가 허리에 손을 척 얹더니 도이를 사납게 노려봤다.
 “도이, 지금 네가 내 형에게 쪽수로 덤비겠다는 것이냐? 그럼 우리부터 꺾어야 할걸.”
 그러자 몽골 목동들이 일제히 외쳤다.
 “당연하지.”
 “감히 칭기즈칸의 형제를 건드리려고 하다니.”
 휘익, 휙휙.
 또다시 귀청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운 휘파람소리!
 몽골 목동들이 일제히 말 옆에 걸어 놓았던 방망이를 꺼내 들고 말 잔등에서 반쯤 허리를 일으켰다.
 전통적인 몽골 기병들의 싸움자세다. 길이가 1.5미터쯤 되는 방망이는 몽골족 아이들의 무기였다.
 그러자 만주족 아이들도 채찍을 손에 쥐고 돌격할 자세를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아이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살기를 뿌렸다.
 세계를 발말굽으로 짓밟은 칭기즈칸의 후예들과 중국 대륙을 기마병단으로 점령한 누루하치의 후손들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흥, 해 볼 테면 해 보자. 우린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님의 후예들이다!”
 “칭기즈칸! 무적천하!”
 몽골 애들이 외치자 만주족아이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 소리쳤다.
 “칭기즈칸? 흥, 우린 4억 중국인을 짓밟은 누루하치의 후손이다.”
 “만주무적! 무적팔기!”
 도이의 외침을 따라 만주족 아이들의 고함이 초원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두 민족 아이들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투지를 불살랐다.
 “좋아, 어디 덤벼 봐라.”
 아이들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올릴 때 길산이 그들의 한가운데로 나섰다.
 “멍청한 새끼들, 칭기즈칸이든 누루하치든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이 싸움에 죽은 사람을 들먹이지 마라.
 그리고 지금은 나와 싸우는 것이다. 도이, 싸울 거냐 말 거냐?”
 길산의 도발에 도이가 한 손을 들었고, 만주족 아이들의 함성이 일순 멈췄다.
 “좋아, 해 보자. 내가 이기면 넌 내 동생이다. 그리고······.”
 말을 멈춘 도이는 바투를 슬쩍 쳐다봤다.
 “내가 독종에게 이기면 바투, 너 역시 내 동생이다.”
 그러자 몽골 아이들은 눈을 부릅떴다. 사실 바투와 도이는 서로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길산에게 이기면 바투의 형이 될 수도 있다니 이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몽골 아이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이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 할 때였다.
 “모두 조용! 좋아, 네가 독종한데 이기면 형으로 모신다. 그러나 진다면 넌 내 동생이다.”
 바투가 도이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겠다.”
 바투와 대화를 마친 도이는 길산의 앞으로 다가섰다. 독종만 눕히면 자신은 이 목초지의 대장이 되는 것이다.
 ‘곰 같이 미련한 놈. 나도 이기지 못한 길산이다. 병신아.’
 이미 길산과 싸워 본 적이 있는 바투는 도이를 비릿한 눈으로 바라봤다. 길산은 독과 악, 깡으로 똘똘 뭉쳐진 아이였다.
 체격으로, 힘으로 이길 수 있었다면 벌써 바투가 이겼을 것이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바투의 귀에 길산의 차가운 말이 들려왔다.
 “흑곰, 싸움에서 지면 넌 내 동생이다. 그리고 싸움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단, 맨손 격투다. 인정하나?”
 “독종, 바투에게 이겼다고 나에게도 이길 것 같나? 난 자랑스러운 누루하치의 후예, 도이다.”
 길산의 말에 도이가 자신만만하게 으르렁 거렸다. 덩치로만 보면 마치 아이와 어른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싸움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흑곰, 간다!”
 순간, 길산이 허리를 숙이고 그대로 돌진했다. 마치 성난 고양이가 곰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다.
 도이는 두 다리를 쩍 벌린 뒤, 두 손을 움켜쥐고 달려오는 길산의 등을 거칠게 내리쳤다.
 퍼억.
 당장 쓰러질 것 같았지만 길산은 어깨를 틀어 충격을 완화한 뒤 깡충 뛰어 도이의 허리에 매달렸다.
 길산의 한 다리가 굵은 도이의 허벅지에 감겼고, 두 팔은 허리에, 머리는 배에 바싹 붙였다.
 마치 커다란 통나무에 매달린 다람쥐 같은 형상이었다. 그리고 길산의 무릎이 도이의 사타구니에 작렬했다.
 “자, 시작이다. 도이, 이를 악물어라. 아님 혓바닥이 잘린다.”
 퍼억퍼억퍼억.
 “어헝!”
 길산의 양어깨를 잡아 허공으로 치켜들려던 도이의 입에서 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흑곰의 비명이었다.
 “난 지지 않아, 흑곰. 네가 항복하면 살지만, 난 죽으면 죽었지 항복이라는 것은 모른다. 그리고 무릎을 꿇지 않으면 넌 평생 고자로 살게 될 것이다.
 장가도 못가고 말이야.”
 퍼억, 퍽퍽퍽.
 길산의 무릎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도이의 사타구니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도이는 길산을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쳤지만 도저히 떨어트릴 수 없었다.
 이건 몸에 달라붙은 악귀 같았다.
 “이, 이 독종 같은 새끼······.”
 “맞다, 흑곰. 난 독종이다. 넌 고자가 되든가, 아님 죽어라.”
 퍽퍽퍽.
 아프다. 아니, 거시기가 뭉개지는 것만 같았다. 지독한 극통이 꼬리뼈를 통과해 척추로 솟구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눈에서는 불꽃이 섬광처럼 번쩍거렸다.
 “크악!”
 흑곰이 입을 쩍 벌리고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흑곰의 허리에 몸을 바싹 붙인 길산의 무릎은 멈추지 않았다.
 퍽퍽퍽.
 “항복해, 흑곰. 몇 번만 더 차면 넌 불알이 터진다.”
 ‘흐흐, 시작됐다! 불알 터뜨리기!’
 바투는 으스스 몸을 떨며 발버둥치는 도이를 봤다. 아마 지금 도이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도 길산에게 낭심을 맞아 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바투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 던졌었다.
 게다가 길산, 저 새끼는 항복하지 않으면 죽일 기세였다. 지금 도이가 당하는 것을 보니 그때의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이제 박치긴데······.’
 바투는 길산의 마지막 일격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자기가 도이를 패는 것 같아 손에 땀마저 질척거렸다.
 그때 길산의 머리가 전광석화처럼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퍼억.
 “크헉.”
 정신이 해롱거리는 도이를 향해 다시 길산의 몸이 공처럼 튀어 오르며 두 번째 박치기를 날렸다.
 쿠당탕.
 도이의 커다란 몸이 땅바닥에 대자로 나뒹굴었다. 완전한 길산의 한판승이었다.
 일순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길산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한 명씩 둘러본 것이다.
 흠칫, 부르르.
 아이들은 길산과 눈이 마주치면 몸을 떨며 머리를 숙였다. 모두 길산의 싸움에 질려 버린 것이다.
 눈빛만으로 만주족 아이들을 제압한 길산이 도이에게 소리쳤다.
 “일어나, 흑곰. 불알은 아직 안 터졌다.”
 “끄응······.”
 가까스로 일어난 도이가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낭심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서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은 패자, 승자의 명에 따라야 했다.
 “흑곰, 더 해 볼 테냐? 이번엔 진짜로 두 알을 터뜨려 주마.”
 부르르.
 길산의 감정 없는 말투에 도이는 몸을 떨었다. 무섭다. 아니, 저 독기가 두려웠다.
 자신이 항복을 선언하지 않으면 저 독종은 분명 거시기를 뭉개 버릴 것이다.
 그제야 바투가 왜 항복했는지 알 것만 같다.
 도이는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만주족의 목동 두목 도이, 장길산을 우리 만주족의 형제로, 그리고 내 형으로 인정한다.”
 그 말을 끝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와아아!
 몽골족 목동들이 환성을 질렀다.
 길산이 이기는 바람에 바투가 동생이 되지 않은 것이다.
 “오늘의 이 약속, 죽을 때까지 잊지 마라. 도이, 넌 조선인 장길산의 동생이다. 그걸 잊는 순간, 넌 나에게 죽는다.”
 쿠당.
 그러더니 길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처음 도이의 망치와 같은 두 주먹에 담긴 힘은 길산의 몸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었다.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 준 긴장감이 풀리자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쯧쯧, 역시 천강마혼지체(天罡魔魂肢體)답구나.”
 그때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온몸에 털가죽을 뒤집어쓴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세요?”
 바투가 물었지만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길산에게 꽂혀 있었다.
 휘리릭.
 “어엇!”
 바투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노인이 마치 다람쥐처럼 말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바람이 스쳐가는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허허, 역시 천강마혼지체야!”
 어느새 길산의 앞에 당도한 노인이 길산의 몸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찔러 보고 만져 보며 히죽거렸다.
 “영감님, 그 손 당장 놓아요.”
 바투가 소리치며 방망이를 뽑아 들 때였다. 노인은 길산을 안고 말들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얘는 부상을 입었단다. 내가 고쳐서 보내 줄 테니 너무 걱정 마라.”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귀신이 움직이는 것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리자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내, 내 눈이 잘못된 거야? 아니면 우리가 지금 허깨비를 본 거야?”
 “에이, 귀신은 무슨?!”
 아이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마도 괴상한 성격의 의원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났지만 길산은 아이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그렇게 세월은 계속 흘러갔지만 사라진 길산은 나타날 줄 몰랐다.
 
 ***
 
 알래스카와 츄코트반도의 사이에 있는 해협에는 여러 개의 작은 무인도들이 있다. 이 무인도들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 문제를 유발할 수고 있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는 1970년에 이 섬들을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다만, 이 섬들을 누군가 사려고 한다면 두 나라가 절반씩의 이익을 나누기로 했다. 이 추은 곳에, 아무 자원도 없고 양대 강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섬을 살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가 협약을 맺은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제네바의 한 갑부가 이곳의 무인도를 샀고, 기상센터를 설치한 뒤 해류를 조사하는 직원들을 파견했다.
 섬을 북극의 기상 상태와 바다의 자원을 조사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쓴다는 말에 미국과 러시아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2039년 3월 1일.
 먹물처럼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는 을씨년스런 밤. 그 검은 하늘 위로 한 대의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생긴 모양으로 보아 스텔스 전폭기 F-22랩터였다. 그런데 뭔가 조금 달라보였다.
 크기도 더 크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형. 이 비행기는 세상의 뒤에 숨어 있는 원탁그룹이 비밀리에 주문 생산한 F-22랩터XX형이었다.
 F-22랩터XX형은 수직 이착륙을 할 수 있고, 조종사를 제외한 10명의 인원이 더 탑승할 수 있는 다목적 전폭기였다.
 이 비행기를 개발한 미국도 예산이 부족해 F-22랩터XX형의 생산을 중단했지만, 원탁그룹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F-22랩터XX형을 원탁그룹에서는 신의 날개라고 불렀다. 현존하는 전투기 중에서 가장 강한 하늘의 강자가 바로 이 신의 날개이기 때문이다.
 신의 날개 안에는 무심한 표정의 한천명 박사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박사를 블랙기지로 데려가기 위해 경호하고 있는 블러드나이트 요원 9명이 완전 중무장을 하고 앉아 있었다.
 ‘벌써 30년이 흘렀어.’
 지난 30년 동안 박사는 이들, 원탁그룹에 잡혀 새로운 무기를 연구했다.
 한천명 박사는 2012년에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방법과는 전혀 다른 공법으로 물에서 수소를 분리 및 저장하는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은 천재 박사였다.
 당시 세계는 고갈되어 가는 화석 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수소를 분리할 때 사용하는 전력이 생산하는 수소보다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천명 박사는 가장 싼값에 수소를 분리하는 방법을 내놓았고, 그로 인해 세계는 수소 연료 상용화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위대한 업적으로 한천명 박사는 노벨 수상자의 명단에도 올랐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했던가?
 어느 날 술에 취한 박사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모조리 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나중에야 겨우 정신이 든 박사는 피 묻은 자신의 손과 몸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미친 짓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미 벌어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의 동료들은 칼에 목이 잘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넌 후인 것이다.
 그 다음 날 아침, 전 세계의 모든 언론은 박사의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새로운 수소분리 저장 방법은 박사가 연구한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했다거나 그것을 박사가 가로채서 발표했다는 등 그 때문에 박사가 술을 먹고 살인멸구를 했다는 것이다.
 위대한 천재 박사가 하루아침에 철면피한으로, 살인자로 둔갑한 것이다.
 박사는 절망했고, 급기야 자살을 결심했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바로 원탁그룹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이었다.
 “우린 박사가 필요합니다. 박사님은 세계의 인류를 한 단계 발전시킬 위대한 발명을 했지요.
 우린 박사님에게 무제한의 자금을 대줄 것이며,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박사는 흥분이 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연구한 것은 수소 저장 방법만이 아니다. 또 다른 수많은 연구들이 완성 단계에 있었다.
 그것들을 세상에 내놓기도 전에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는 찬성했다.
 재판이 끝나고 박사는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그리고 청송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중대사건이 벌어졌다. 검은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호송버스를 습격하고 박사를 데려간 것이다.
 그때부터 박사는 원탁그룹에서 마련해 준 비밀 연구소에서 그들이 원한 연구를 계속했다.
 처음에 한천명은 이런 환경에 만족했다. 죄를 진 자신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원탁그룹이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박사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연구한 무기들은 너무 강했다.
 만약 그 무기들을 인류를 살상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건 악몽이었다.
 ‘후~! 난 잘못된 길을 걸어왔어. 이들은 악마들이야.’
 한천명 박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탁그룹.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
 이들은 세계의 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었고, 전 세계의 어느 곳이든 비밀요원들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었다.
 ‘더 이상 이들이 요구하는 무기들을 연구할 수는 없어.’
 마음을 굳힌 박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 박사가 가는 곳은 키르키스탄에 있는 블랙기지였다. 그곳은 원탁그룹의 연구 인력들이 비밀리에 연구를 하는 과학 기지였다.
 ‘개자식들, 그때 나에게 광신제를 먹인 것은 이놈들이었어!’
 사람이 광신제를 먹으면 정신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강한 살인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 때문에 박사가 동료들을 죽인 것이었다.
 그 사건을 원탁그룹이 꾸민 짓이라는 것을 30년이 된 지금에야 겨우 짐작한 한천명 박사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조종사의 악을 쓰는 소리가 비행기 안을 울렸다.
 “본부로부터 급보입니다. 우주에서 날아온 거대 운석이 지금 이곳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천명 박사는 악을 쓰는 조종사의 비명에 눈을 떴다.
 “뭐지?”
 그가 머리를 창밖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신의 날개가 맹렬한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기체가 흔들리고 몸의 하반신이 잘려 없어지는 것 같은 무력감. 마치 쏘아진 미사일처럼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삑삑삑삑.
 “비상경보, 여기는 신의 날개 3호기. 비상착륙을 요청한다. 허가해 주기 바란다.”
 조종사의 겁에 질린 목소리에 이어 응답이 곧바로 날아들었다.
 “신의 날개 3호기, 방금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다. 신의 창고는 해치를 개방한다.”
 밑을 내려다보던 한천명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얀 눈이 쌓여 있는 무인도의 산 위에 거대한 원형문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원탁그룹의 힘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무인도에 있는 저 지하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우르르르.
 생각에 잠겨 있던 박사는 비행기가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다시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착륙하라. 시간이 없다.”
 “알았다.”
 쿠쿠쿠쿠쿠.
 “저게 운석?”
 박사는 캄캄한 하늘을 불태우며 쏘아져 오는 거대한 불덩이를 봤다. 밤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눈앞이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스르르르르.
 드디어 F-22랩터XX형이 무인도의 지하로 내려섰다.
 ‘세상에!’
 박사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비행기는 회색빛 둥그런 벽을 따라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스르륵.
 ‘300미터는 내려왔을까?’
 박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검은 유니폼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짧은 소총을 든 두 명의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신의 창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이곳의 소장 모간 노스찰드입니다.”
 “한천명이오.”
 박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모간은 개의치 않았다.
 “하하, 원탁그룹의 천재 과학자이신 한천명 박사께서 이곳에 머무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그의 너스레에 한천명은 입이 썼다.
 이자들이 자신을 그만큼 환영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원탁그룹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곳이오?”
 한천명의 질문에 모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것을 본 한천명은 쓰게 웃었다.
 “말하기 힘든 비밀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한천명이 차갑게 돌아서자 모간은 손을 내저었다. 방금 본부에서 전문을 받은 모간은 깜짝 놀랐다.
 겨우 동양인 과학자에 불과한 한천명을 절대로 불편함이 없이, 최대의 성의를 다해 보살피라고 했던 것이다.
 그건 이자가 정말 귀중한 인재라는 뜻이었다.
 “아닙니다. 비밀이긴 하지만 한 박사님에게는 숨길 것이 없지요. 여긴 전 세계의 금과 보석을 모아 두는 곳입니다.”
 모간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람 일은 모른다. 만약 이자가 원탁그룹의 원로가 되면 그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이자는 천재다.
 살아서 출세할지, 그전에 죽을지는 모르지만 훗날을 위해 좋은 인상을 주는 것도 하나의 투자였다.
 “뭐라고요? 전 세계의 황금과 보석?”
 한천명이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자 모간은 빙긋 웃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런 곳이 한 곳 더 있죠. 다른 곳은 말할 수 없지만 이곳에 있는 황금만 10만 톤이 조금 넘습니다. 보석도 엄청나고요.”
 ‘말도 안 돼!’
 한천명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10만 톤이 넘는 황금이 이곳에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는 곧 인정했다.
 ‘원탁그룹은 전 세계의 금융을 틀어쥐고 있는 자들. 지폐를 주고 황금을 끌어 모은다면 지구상의 모든 황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한천명과 모간 노스찰드가 들어선 방은 신의 창고의 중앙통제실이었다.
 둥그런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운 화면들. 그 화면에 우주에서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불덩이가 보였다.
 “충돌 8초 전! 소장님, 운석이 날아오는 방향이 우리 신의 창고 쪽입니다.”
 “뭣이?!”
 박사와 이야기하던 모간이 깜짝 놀라 화면을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운석을 막을 힘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세상을 막후에서 주무르는 원탁그룹이라고 해도 말이다.
 “빨리 본부를 연결해라. 어서!”
 “옛, 소장님.”
 다급해진 요원들이 본부를 찾을 때였다.
 콰-콰르릉.
 천지가 개벽하는 것일까?
 우주의 심연에서 불쑥 나타난 거대한 운석이 알래스카를 직격했다.
 “으아악!”
 번쩍이는 하얀 섬광, 화산이 일어난 듯 뒤흔들리는 지하. 문제는 폭발과 함께 가해진 엄청난 압력이었다.
 한천명은 자신의 몸이 산산이 터져 나가는 것을 눈을 뜨고 지켜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결국 난 신의 벌을 받았구나! 하긴 이렇게 죽는 것도 다행이지.’
 콰르릉.
 두 번째 벽력음이 들리고 앞이 캄캄해졌다. 거대한 압력으로 머리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잠시 후, 신의 창고인 무인도의 지하에 있던 모든 생명체는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한줌 어육으로 변했다.
 어마어마한 운석의 대폭발이 지나간 후, 원탁그룹의 조사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았다.
 원탁그룹 의장 제우스 친전.
 운석이 떨어진 후, 신의 창고(무인도)는 흔적도 남지 않고 증발해 버렸음. 우리의 분석으로는 운석이 떨어질 때 일어난 폭발과 고열, 폭풍에 의해 섬 자체가 분해된 것으로 여겨짐.
 블랙조사단
 휘이잉, 휘잉.
 눈이 하얗게 덮인 들판. 따뜻한 남쪽 지방은 파란 풀들이 자라는 봄이지만 동북에서도 가장 추은 이곳 소흥안령의 밑에 있는 학북 지역은 아직도 추웠다.
 때는 1916년 4월.
 밤과 새벽이면 추위로 꽁꽁 얼음이 얼지만 해가 뜨는 한낮이면 땅이 질척질척해지는 4월 1일 저녁이었다.
 “워워워, 어서 들어가라.”
 머리가 하얗게 샌 만주족 다이샨은 말들을 우리에 몰아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50마리 정도까지는 말을 키웠지만 지금은 겨우 10마리밖에는 키울 수 없었다.
 풀이 없어서? 그건 아니었다.
 지금 만주는 장작림의 천하다. 장작림은 마적으로 일어나서 청군에 들어갔고, 봉천의 27사단 장군까지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공부는 못했지만 머리는 비상했다. 1912년 한족들이 멸만흥한(滅滿漢興)의 기치를 들고 중화민국을 수립하자 봉천성 순무사가 되었고, 지금은 동삼성(동북삼성)의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동삼성은 그의 군대만 가지고 통치할 수 없었다.
 천고의 밀림과 거친 산악들. 더구나 동북은 어느 때든지 칼을 들고 일어나는 북방 민족의 터전이다.
 그래서 대도시에는 총독 장작림의 군인들이 있지만 그 외의 지역들은 토호들과 유지들, 그리고 마적들의 관할 구역이었다.
 관군도 마적들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동삼성인 것이다. 특히나 흑룡강성은 험한 지형으로 인해 마적들의 천하였다.
 그 때문에 동삼성은 장작림이 맨 위에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지만 광대한 지역은 독립된 구역처럼 자치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일본의 막부시대 영지와 같이 동북의 영주들은 한 지방의 토호나 마적, 또는 무장 세력들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역 쟁탈전이 벌어지고,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인 것이다.
 학북은 학강현의 지현에게 세금을 바친다. 하지만 그 외에도 뜯어 가는 곳이 너무 많았다.
 현령에게 바치고, 토호에게 바치고, 보갑대에게 바치고, 유지에게도 바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적에게까지 돈을 바쳐야 하니 한 해가 지나면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잔돈 몇 푼뿐이었다.
 “휴우~, 망할 놈의 세상.”
 다이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의 나이는 65세. 그러나 마음고생으로 얼굴에는 주름살이 주글주글했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이 일을 어찌할꼬?”
 다이샨은 가슴이 답답했다. 몇 년 전부터 이곳 학북에는 혈랑대가 출현했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총을 가진 강력한 마적단이었다.
 그들의 습격에 보갑대가 막아섰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보갑대는 마을을 지키는 민병대였다. 마적들이 날뛰는 세상에 백성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돈을 내고 말도 내줬지만 보갑대는 제 구실을 못했다. 우선 총이 부족했고, 혈랑대처럼 강하지도 못했다.
 마적들은 신식총으로 무장하고 질풍처럼 달려든다. 그에 맞서는 보갑대는 신식총은 몇 자루 되지도 않았고, 나머지는 화승총이었다.
 그나마도 무기가 없어서 창이나 칼, 도끼로 무장했으니 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다이샨처럼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다이샨이 걱정하는 것은 얼마 전 마을에 왔던 혈랑대의 남파(마적 두목)가 한 말 때문이었다.
 놈은 그때 자신의 딸 완완을 보더니 한 달 내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첩으로 달라는 것이다.
 만약 주지 않는다면 놈들은 자기를 죽이고 완완을 잡아 갈 것이고, 그녀는 마적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혈랑대는 자신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 사람들이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래야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빠, 저녁 잡수세요.”
 그때 마당으로 후리후리한 키의 여인이 나왔다.
 붉은색의 만주족 전통 치포(다리 양옆이 갈리진 원피스)를 입고 흑단처럼 긴 머리를 왼쪽으로 늘어트려 댕기를 맨 여인은 미녀는 아니지만 해맑은 얼굴에 귀엽게 생긴 처녀였다.
 “오냐.”
 다이샨이 돌아서며 손을 털었다. 그러던 그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허억! 마, 마적?!”
 다이샨의 눈앞에는 언제 왔는지 담비털 모자를 쓰고, 곰가죽 옷에 누빈 솜조끼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이샨의 눈이 재빨리 남자의 모습을 훑어봤다.
 발에 신고 있는 가죽장화, 장작림의 동북군 기병들이 입는 승마복 바지. 사타구니가 허옇게 닮은 것을 보면 확실한 기병이나 마적이었다.
 다이샨의 눈이 빠르게 남자의 허리로 향했다. 허리에 빙 둘러져 있는 탄띠와 오른쪽 옆구리에 걸려 있는 대형 권총.
 저것은 분명 열 발짜리 탄창을 끼우는 마우저 권총이었다.
 그리고 왼쪽 허리에 약간 뒤로 걸려 있는 환도. 동북군의 기병이나 마적들은 말을 탈 때 거치적거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환도나 검을 저렇게 약간 허리 뒤쪽으로 찬다.
 그러나 환도의 손잡이는 왼쪽 허리 옆으로 나와 있어서 언제든지 쉽게 뽑아 사용할 수 있었다.
 동양의 도깨비(중국인들이 일본군을 저주해 부르는 말)들이 차는 군도와는 방식이 달랐다.
 그렇다면 이자는 분명 마적이었다.
 “왜, 왜 여기?”
 “안녕하세요, 다이샨 아저씨.”
 겁에 질려 몸을 떨던 다이샨은 마적의 입에서 나오는 맑은 목소리에 흠칫했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가 입만 뻥긋거릴 때 마당에 나와 섰던 딸 완완이 화살처럼 달려왔다.
 “길산 오빠? 길산 오빠 맞지?”
 어느새 마적 앞에 당도한 완완이 다급하게 물었다. 마적이 차분히 털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나타나는 얼굴은 앳되지만 이젠 청년이 된 길산의 모습이었다.
 “오빠! 길산 오빠!”
 완완이 그대로 길산의 품에 몸을 던졌다. 길산은 완완의 풋풋한 냄새가 나는 머리를 쓸어 줬다.
 “하하하, 완완. 이젠 처녀가 다 됐구나!”
 완완은 너무 기뻐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마만인가?
 엄마와 오빠가 없던 완완에게 길산은 친오빠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니 10년이 지나서야 나타난 것이다.
 “자네, 분명 길산이 맞는가?”
 다이샨의 눈에 뿌연 습막이 어렸다. 여덟 살 때 없어졌던 길산이 건장한 청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사실 그는 길산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헌헌장부가 된 길산을 보니 도저히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나? 완완이 자네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나?”
 다이샨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나무람이 섞여 있었다.
 원래 다이샨은 길산의 아버지와 친구였다. 길산의 아버지는 역병에 걸려 죽기 전 다이샨의 손을 잡고 어린 길산을 부탁했었다.
 그래서 집에 데려다가 말치기를 시켰다. 하지만 길산을 머슴처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이 순간만큼은 완완을 걱정하던 마음도 잊어 버렸다.
 “어서 들어가세. 어서.”
 “예, 아저씨.”
 그때야 완완이 머리를 들었다. 샛별 같은 그녀의 눈이 길산의 눈과 마주쳤다.
 “오빤 미워.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그녀가 응석을 부리듯 길산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동안 대흑정산에 있었거든.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어.”
 “대, 대흑정산?!”
 앞서 방으로 들어가던 다이샨이 깜짝 놀라 길산을 바라봤다.
 대흑정산은 소흥안령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곳에는 산신령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산이 높고 험해서 갈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길산이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니!
 “예, 사부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저씨.”
 “사부?”
 “예.”
 다이샨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그러고 보면 길산의 차림이 이상했다.
 권총과 탄띠, 그리고 환도!
 “그럼 자네 사부는 마적이었나?”
 방 안에 들어와 앉자, 다이샨이 길산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길산이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아뇨. 사부는 무술가였습니다. 그분에게서 무술을 배웠죠.”
 “무, 무술?”
 다이샨은 새삼스런 눈으로 길산을 바라봤다.
 무술. 예전에는 모두 무를 숭상해 검을 들고 무술을 수련했다. 만주족의 만주팔기에는 그런 강인한 자들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했다.
 총과 대포가 불을 뿜으면 수십 년 무술을 수련했어도 한순간에 끝장이었다.
 포탄과 총탄을 이길 수 있는 무술은 없다.
 그래도 무술을 수련하면 몸은 건강해졌을 것이니 조금 마음은 놓였다.
 “그럼 그 총과 환도는 무엇인가?”
 “이건 사부님이 쓰시던 것입니다. 사부님은 총과 환도도 사용했으니까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제가 물려받았습니다.”
 지금 만주는 어지럽다. 자기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법. 무술가라는 길산의 사부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군. 암튼 잘됐네. 이젠 어디가지 말고 여기서 살게. 이곳은 자네 집이야.”
 “고맙습니다, 아저씨.”
 길산은 가슴이 찡해졌다. 10년 만에 찾아왔지만 반겨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빠, 밥상 차려요.”
 부엌에서 완완이 소리친다.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처럼 그녀는 스스럼이 없었다.
 “응, 알았어.”
 길산이 네모난 상을 놓자 음식이 들어왔다. 검붉은 색깔이 나는 수수죽에 봄나물 채소로 만든 찬, 소금 한 접시. 그것이 다였다.
 “오빠 미안해.”
 완완이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산은 개의치 않고 공기에 죽을 퍼 담고는 젓가락으로 맛있게 먹었다.
 “아, 맛있다. 10년 만에 이렇게 맛있는 죽은 처음이네. 고맙다, 완완.”
 길산이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먹고 다시 그릇을 내밀자 완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한 공기 더 먹어. 오빠.”
 길산이 공기를 받아 머리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보는 다이샨은 가슴이 아팠다.
 길산이 어찌 모를까?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르고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던 길산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수죽을 보고 집안 형편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죽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고맙구나, 길산아. 살아 있어 줘서······.’
 길산은 머리를 공기에 파묻고 죽을 먹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이샨 아저씨집이 왜 이렇게 가난해졌지?’
 다이샨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말을 기르면서 밭도 가꾸었다. 원래 만주족은 벼농사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로 밭농사를 하는데, 기장이나 좁쌀, 수수쌀을 심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죽을 만들어 먹으며 개고기를 제외한 각종 고기를 먹는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그들의 조상으로 보는 누루하치가 개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길산이 사부에게 안겨 갈 때만해도 다이샨의 집은 자작농 수준이었다. 그리고 말 값은 비싸다.
 지금 동북은 난세고, 군대는 군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금 들어올 때 봤지만 말은 겨우 10마리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전염병이 돌았나?’
 전염병이 돌아 말이 많이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속에서 10년 동안 있었던 길산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길산이 입을 열었다.
 “바투와 도이는 아직 있나요?”
 “그들은 보갑대에 들어가 있지. 한데, 후~.”
 식사를 끝내고 담배를 꺼내 문 다이샨이 한숨과 담배 연기를 함께 내보냈다. 만주족은 담배를 몹시 즐긴다.
 기다란 대통 끝에서 다이샨의 마음처럼 파란 연기가 굴뚝처럼 뿜어져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요?”
 “그게 총남파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단다. 그래서 요즘은 보갑대에서 나오겠다고 하더구나.”
 “총남파요?”
 길산의 눈이 좁혀졌다. 동북은 각 지역의 마을마다 자경단 형식의 보갑대가 있고, 그 위에 여러 마을의 보갑대를 합친 연장회가 있었다.
 이를테면 마적이나 산적들, 떠도는 무장단을 막기 위해 여러 마을의 보갑대가 합친 형식이었다.
 이 연장회가 바로 학강현을 통치하는 무장 단체였다.
 그 연장회의 대장을 총남파라고 하고, 그 밑에 제1부총남파, 제2부총남파, 그리고 재정부남파가 있다.
 마을마다 있는 보갑대의 대장은 포두라고 하는데 바투는 포두이고, 도이는 부포두였다.
 또 연장회의 직속 무력 단체로 마을마다 순찰하는 보위단이 있는데 이것은 연장회의 순찰대로 그들의 대장을 남파라고 불렀다.
 “그래. 총남파가 마을 사람들의 돈을 부정하게 착복한다고 대들었다가 보위단과 충돌이 있었단다.”
 “흥, 연장회는 마적들과 똑같아. 그놈들은 우리 돈을 3중4중으로 뜯어 가고 있어. 모두 없애야 해.”
 부엌에서 그릇을 씻던 완완이 증오를 담아 말했다.
 ‘그렇군. 그래서 집이 이렇게 가난해졌어.’
 길산의 눈에서 순간적이지만 암흑의 빛이 번쩍 빛났다.
 현재 중국의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지만 동북은 수탈이 더 심했다.
 연장회가 돈을 걷어 가고, 흑룡강 성에 세금을 바치고, 마점산의 군대에 군비도 내야 한다.
 또 지현에게 바쳐야 하고, 마적과 무장단에게도 바치니 이것은 3중4중의 고통이 아니라 아예 그 몇 배였다.
 “어머나!”
 부엌에서 그릇을 씻던 완완이 몸을 웅크리며 자신도 모르게 질겁했다. 그녀는 급히 문 쪽을 바라봤다. 뭔가 으스스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이샨은 순간적으로 담배 대통을 떨어뜨릴 뻔했다.
 갑자기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던 것이다.
 ‘아차.’
 놀란 길산이 급히 마음을 가라앉히자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사라졌다.
 완완은 문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찬바람이 들어왔나? 깜짝 놀랐네!”
 “허허, 겨우 찬바람에 몸이 떨리다니. 이젠 정말 죽을 때가 된 모양이군.”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담배를 피우는 다이샨은 찬바람이라고 느낀 것이 바로 길산의 살기 때문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아저씨, 이제 좀 쉬겠습니다.”
 “그래라. 먼 길 오느라 많이 힘들었을 테니 푹 쉬어라.”
 “예.”
 길산이 밖으로 나오자 완완이 손을 행주치마로 닦으며 말했다.
 “예전에 오빠 방에서 자. 그럼 내일 아침에 봐.”
 “그래, 잘 자라. 완완.”
 “응.”
 완완이 눈을 찡긋하더니 돌아갔다.
 “후~, 자칫하면 암철기(暗鐵氣)를 뿌릴 뻔했어.”
 암철기는 10년 동안 길산이 배운 암철마혼공(暗鐵魔魂功)의 기운이다.
 사부 쑤흐타이, 그는 길산에게는 세 번째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길산아, 내가 너에게 가르칠 것은 모두 다 가르쳤다. 나머지는 너의 노력에 달려 있을 뿐. 난 이제 마음을 놓고 눈을 감겠다.
 내 생애 마지막에 천강마혼지체를 만나다니. 크크크. 이건 암철문의 조사님들이 너를 내게 보내 주신 것이겠지.
 하늘나라에 가서 내 제자가 세상에 우뚝 서는 것을 보고 있겠다.
 길산아, 한 가지만 기억해라. 너의 편에게는 모든 것을 주고 적에게는 무자비해라.
 그것이 이 험한 세상을 오래 사는 비결이다.”
 그렇게 사부는 세상을 떠났다.
 “사부, 당신의 말을 명심하겠소. 하지만 말이요. 난 큰 욕심도 야망도 없소. 그냥 내 가족만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히 살고 싶소.”
 길산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흥, 조용히 살겠다고? 지금이 어느 때냐? 네가 나를 만났을 때가 1906년이니 지금은 1916년. 흐흐흐, 이제 동북은 피바람에 휩쓸린다. 그런데도 가만히 살겠다고?
 갑자기 길산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시끄러, 귀신영감.”
 길산이 소리쳤지만 머릿속의 귀신은 계속 말했다.
 -지금 시대는 그런 무술만 가지고는 가족을 지킬 수 없어. 총과 대포, 전차와 비행기 앞으로는 로켓이라는 무기도 나오고 핵폭탄까지 나온다.
 한 발만 떨어져도 나라가 통째로 없어지는 것이 핵폭탄이라고 하지. 그럼 네 가족은 무사할 것 같으냐?
 “이런 제기랄! 귀신영감, 계속 시끄럽게 굴면 아예 의식을 막아 버린다.”
 길산이 위협하자 머릿속의 귀신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한 마디 했다.
 -그래, 너 잘났다. 이 무식한 놈아! 하지만 알아 둬라. 내가 너의 머릿속에 있는 한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런데 내가 널 해롭게 하겠니? 에라이, 멍청한 놈아. 너 같은 놈이 어떻게 한국인, 아니 조선인이냐?
 어휴, 잘 들어라. 이 바보 같은 놈아. 네가 잘돼야 나도 잘되는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니? 네가 느끼는 것은 나도 같이 느낀단 말이다.
 방금 네가 먹은 수수죽도 난 함께 먹었고, 오줌을 싸면 나도 같이 느낀다.
 네가 처녀와 섹스 아니, 방사를 하면 나도 같은 기쁨을 느끼고,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프단 말이다.
 “어휴, 정말 지겨운 귀신영감.”
 머릿속의 의식을 차단한 길산은 자리에 벌렁 누웠다. 투덜거리면서도 사실 길산은 머릿속의 귀신에게 정이 들어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외롭던 길산과 친구가 된 귀신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귀신의 말을 생각하던 길산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한천명 박사라고 말하는 귀신을 만난 것은 길산이 암철마혼공을 수련한 지 1년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은 흡기를 하는 날이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흡기를 시작했다.
 1년 동안 운기를 하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길산이 암철마혼공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 기운은 참으로 신기했다. 기운이 일어나서 혈도를 따라 움직이면 단전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편했다.
 그때부터 길산은 잠자는 시간도 줄여 가며 운기를 했다.
 그런데 흡기를 한참 할 때였다.
 갑자기 무엇인가 강력한 기운이 공기 중에서 흡수되는 것 같더니 전회, 망라를 거쳐 염폭에 이르자 몸이 폭발하듯 들끓었다
 그리고 백회혈에 무엇인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 길산은 자신이 미친 줄 알았다.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괴상한 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리고 넌 누구냐?
 “나? 난 장길산이다. 그러는 넌 누구데 내 머릿속에 들어왔지? 혹시 귀신이냐?”
 길산의 질문에 귀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차근차근 말했다.
 -좋아.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너의 모습을 보니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러니 내 말을 듣고 네가 판단해라.
 길산은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 귀신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난 대한민국의 한천명이라는 물리학 박사다. 일단 여기가 어디며, 넌 무엇을 하는 얜지 말해 봐라.
 너 혹시 무속인이냐?
 “무속인? 그거 먹는 거야?”
 그때부터 길산과 한천명은 몇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길산의 설명을 들은 한천명이라는 귀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허허, 내가 과거로 왔단 말인가? 만주? 동북? 너는 조선인 장길산? 지금이 1906년이면 조선은 일제의 구둣발에 짓밟히고 있겠구나.
 이럴 수가! 이게 내가 지은 죗값인가?
 그 후 장길산은 시도 때도 없이 귀신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부터 그는 황당한 얘기를 했다.
 자신은 미래에서 왔고, 황금이 가득 쌓인 창고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길산이 권총을 쏘는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원시 무기라고 껄껄 웃었다.
 자기는 한 번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따라가서 맞히는 유도무기라는 것도 만들 수 있고, 멋진 자동차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길산에게 그냥 귀신의 허풍쯤으로 들렸다.
 믿을 만해야 믿을 것이 아닌가. 몇 개 나라를 살 만한 황금 창고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니.
 세상에 그런 창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한천명이라는 귀신이 이제 길산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것은 확실했다. 길산이 느끼는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귀신이고, 마음까지도 함께 하니 말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는 질색이었다.
 최근 1년 동안 그가 지겹도록 하는 말이 있었다.
 -길산. 넌 한국인, 아니, 조선인이다. 지금 조선은 일제가 강점됐어.
 내가 너를 돕겠다. 지금 세상에서 사용하는 총들보다 더 멋지고 위력이 강한 무기도 만들어 주마.
 전차도 대포도 비행기도 만들 수 있지.
 “그걸 만들어서 뭐 하게?”
 길산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면 한천명은 팔짝 뛰곤 했다.
 -뭐 하다니, 넌 조선인이 아니냐? 그 병기를 이용해서 군대를 만든 다음, 조선으로 가 쪽발이들을 몰아내야지.
 “내가 왜? 난 그냥 목동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럼 한천명은 야단을 쳤다.
 -이 멍청한 놈아! 넌 조선인이란 말이다. 네 뿌리인 조선에 있는 네 부모형제나 같은 사람들이 지금 쪽발이들에게 맞아죽고 찔려 죽는단 말이다.
 그런데도 가만있겠다고?
 “그렇지만 그들은 내 부모가 아냐. 내 친부모는 이미 죽었어. 그리고 조선인끼리도 서로 죽이고 물고 뜯는 것을 난 봤어.
 인간이란 다 제 이익에 따라 움직여. 민족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다 지들의 이익을 위해 씨부리는 거라고.”
 그럼 한천명은 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자식! 자신의 민족이 죽어 가는데 지만 잘살겠다고? 아휴, 내가 어찌 너 같은 놈의 머릿속에 갇혔을까?
 아이고, 조상님. 힘을 가지고도 사용할 수 없는 이 한천명, 어찌하란 말입니까?
 그럴 때면 길산은 의식을 차단하곤 했다. 하지만 의식을 차단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여섯 시간. 그 이상은 힘들다.
 길산의 수련이 끝나면 한천명은 집요하게 설득했다.
 황금창고를 알려 줄 테니 그곳에 가서 황금을 꺼내 오자. 그리고 공장을 세우고, 무기를 만든 다음 조선으로 가자.
 그럼 넌 조국을 해방시킨 영웅이 되고, 민족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거라고. 하지만 길산은 그런 말에 대꾸조차 하지도 않았다.
 영웅?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고?
 그따위 것들은 길산에게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길산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그 때문에 만주족 말도 알고, 한어(중국어)와 몽골어도 안다.
 학북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민족은 다르지만 서로 상관하지 않고 살아간다.
 더군다나 길산은 타 민족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며 민족이 다르다고 증오해 본 적도 없었다.
 비록 많이 싸우기는 했지만 아이 때는 누구나 다 그런 것이 아닌가.
 길산이 대꾸조차 하지 않자 한천명은 한동안 조용했다. 그래서 이상하다 했는데 또 쓸데없는 짓을 하라며 조르는 게 아닌가.
 그래도 길산은 그가 밉지 않았다. 또 머릿속 귀신영감은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도 말해 줬다.
 하지만 길산으로서는 그의 말 속에 있는 세상이 천국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조선에서 중국까지 비행기라는 것을 타면 한 시간이면 날아온단다.
 더구나 폭탄 한 발로 나라 하나를 없애고, 사람이 지구를 떠나 달에도 간다는 것은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의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아무래도 한천명은 신선이었는데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벌을 다 받으면 떠나겠지. 그나저나 이 자식들이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단 말이지.”
 빙긋이 웃는 길산은 바투와 도이를 생각하며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이곳은 만주족 다이샨의 집, 길산에게는 자신의 집과 마찬가지였다. 10년 만에 길산은 따뜻한 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야, 이 자식아. 너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길산은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와락 덮치는 바람에 눈을 떴다. 그를 덮친 것은 몽골족 친구 바투였다.
 이젠 청년이 된 바투의 어깨에는 장총이 걸려 있었다.
 “임마, 너 나에게 형이라고 한 것을 잊었냐?”
 잠에서 깨어난 길산이 말하자 바투는 싱글거리며 어깨를 툭 쳤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자식, 아직 잊지도 않고 있네. 야, 독종.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말 기쁘다.”
 “나도 좀 안아 보자, 바투.”
 뒤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주족 도이였다. 그는 몸이 더 커졌고, 얼굴은 완전히 털북숭이였다.
 도이는 일반인의 허벅지 같은 두 팔을 벌려 길산을 와락 껴안았다.
 “반갑다, 길산. 네가 살아 있다니. 연락이라도 좀 하지, 인마.”
 그가 슬쩍 어깨를 쳤는데 마치 망치로 친 것 같았다. 아마 길산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맞았다면 아프다며 방바닥을 굴렀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도이는 길산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탐색해 본 것 같았다.
 허나, 길산은 모른 척했다.
 “하하, 도이. 나도 반갑다. 그런데 너희들 출세했다면서? 정말 축하한다.”
 길산의 말에 기뻐서 싱글거리던 두 친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축하는 개뿔이. 난 보갑대를 그만두련다.”
 “아니, 왜? 보갑대가 있어야 마을이 안전할 것 아니냐?”
 “안전? 흥. 우리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어. 길산아, 우리 마을에 보갑대원이 20명이다.
 그런데 총이 몇 자룬지 아니?
 이건 나와 도이만이 가지고 있는 거야. 나머지는 호총(중국은 1850년대부터 뇌관을 국내 생산했다. 이 총을 만주 지역에서는 호총, 또는 만주 양포라고 부르기도 했다)이야.
 그것도 겨우 두 자루. 나머지는 칼과 창, 도끼야.
 그걸 가지고 어떻게 마적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겠냐?
 더 분한 것은 연장회에서 무기를 사서는 보위단에게만 준단 말이다. 그런데 그 보위단 녀석들은 마을이 마적들에게 약탈을 당한 다음에야 나타나지.
 그놈들이 가지고 있는 총은 이곳 22개 부락에서 돈을 모은 것으로 산 거야.
 그런데도 놈들은 사람들의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하지.
 놈들은 또 다른 마적이야. 차라리 그만두는 게 속 편하다.”
 “으음······.”
 너무 분해서 열변을 토하는 바투를 본 길산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 학북 지역은 송화강을 끼고 있어서 농사가 잘되며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그 22개 마을에서 모아 주는 돈으로 연장회는 또 다른 귀족층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너, 그 총 좀 보자.”
 길산의 말에 도이가 총을 벗어 줬다.
 -그건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으로 1891연식 모델이다. 7.62밀리로 5연발 볼트 연발식이지. 지금 시대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소총이다.
 곧바로 머릿속에서 한천명이 정보를 알려 줬다.
 “바투야, 그럼 총이 겨우 네 자루란 말이냐?”
 “그래. 그 마적 같은 놈들, 생각 같아서는 몽땅 쏴 죽이고 싶다.
 연장회의 총남파 그놈은 첩을 다섯 명이나 얻어서 매일 흥청거리며 산다.
 우리 돈으로 말이야, 개자식.”
 길산은 일어섰다.
 “너희 보갑대라는 곳에 한번 가 보자.”
 “거긴 왜? 너 혹시 보갑대원을 하려고?”
 바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하지만 길산은 담담하게 웃었다.
 “글쎄. 너하고 도이가 함께 있다면 보갑대도 해 볼 만하지.”
 “정말이냐? 좋아. 그럼 네가 포두(대장) 해라. 야, 도이. 너도 찬성이지?”
 “독종 길산이라면 난 무조건 찬성이다.”
 바투의 말에 도이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일순 길산은 가슴이 찡했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 그때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움질만 했는데, 지금은 자신을 진실한 친구로 믿어 주고 있었다.
 -봐라. 너의 친구들을 지키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싫으냐? 황금창고에서 황금만 꺼내 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시끄러!’
 길산의 귀찮다는 말에 한천명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이 과거로 왔다고 해서 황금창고도 같이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황금창고도 자신처럼 과거로 왔다면 왜적을 몰아낼 자금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이었다.
 -그래도 꼭 가봐야지.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그것이 한천명의 생각이었다.
 “오빠, 나가려고?”
 길산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완완이 물었다.
 “응.”
 “그럼 총을 가지고 가.”
 완완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길산의 무기들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본 바투와 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이건? 야, 독종. 너 어디에서 마적질 하다 왔냐?”
 바투는 길산의 마우저 권총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이건 사부가 남겨 준 것이다.”
 “사부? 그때 그 영감?”
 “그래, 그 노인이 나의 무술 사부였다.”
 “히야! 넌 확실히 운수가 좋은 놈이다. 무술까지 배우다니.”
 바투와 도이가 부러운 눈빛으로 길산을 흘끔거렸다.
 말없이 탄띠와 권총, 환도를 찬 길산이 걸음을 옮겼다.
 “오빠, 빨리 와.”
 “응, 걱정 마.”
 완완의 말에 대답한 길산은 다이샨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아마 말을 끌고 나간 것이리라.
 10년 만에 만난 세 친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마을을 가로 질러 보갑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저곳이 보갑대야.”
 말을 타고 가던 길산은 바투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마을의 뒤편 산 밑에 넓게 울타리를 친 곳에 귀틀집(통나무로 지은 집) 한 채가 있었고, 마당에는 10여 마리의 말들이 건초를 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귀틀집 처마 밑에는 보갑대원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여기저기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털모자를 쓰고 솜옷에 솜바지를 입은 청년들은 창이나 칼, 도끼를 옆에 세워놓은 채 화투를 치고 있었다.
 이건 보갑대가 아니라 무슨 패잔병 무리 같았다.
 “저들이 보갑대원이라고?”
 일순 길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런 자들이 어떻게 학북의 1,500명 목숨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학북은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을 합쳐 270호에 거의 인구가 1,500명가량 된다.
 그들을 지켜야 할 보갑대가 저런 꼴이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저러니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길산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나타났을 때 다이샨이 놀라서 벌벌 떨던 것도 다 원인이 있었다.
 바로 저런 놈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너무 한심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모두 사기가 없거든.”
 길산의 표정을 살피던 바투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패잔병보다 못해. 아니, 비루먹은 당나귀새끼도 저렇진 않다.”
 길산의 냉정한 말에 바투와 도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만주족이나 몽골족은 말을 사랑하는 민족들이다.
 그들에게서 말을 떼어 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때문에 만주족이나 몽골족은 말의 숫자로 부를 가늠하고, 처녀들도 그런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그런 이들에게 당나귀라고 하는 것은 수치 중의 수치였다.
 “야! 이 시발 놈들아. 모두 일어서!”
 바투가 달려들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보갑대원들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들의 눈에 말을 타고 들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모두 일어섰지만 다섯 명만은 앉아서 태연하게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너희들은 안 일어서?”
 바투가 소리치자 그들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어이, 오늘은 뭐 잘못 먹었나?”
 “크크크, 어제 국화방에서 돈을 잃은 모양이지.”
 “킬킬, 그런가? 그거 참 안 됐군.”
 국화방은 작부들이 있는 색시집이었다. 그곳에서 아편을 하기도 했고, 도박을 하기도 했다. 앞날이 암울한 남자들은 그곳에서 값비싼 아편을 빨고, 싼값에 여자를 안는다.
 바투나 도이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아니, 보갑대 전부가 그렇다고 봐야 했다.
 길산의 눈에 냉랭한 기운이 어렸다.
 “저들은 누구지? 바투.”
 길산의 질문에 바투는 힘겹게 대답했다.
 “저들은 장작림의 군대에 있었던 자들이야. 마적단에 있었던 자도 있고, 또 조선독립군에 있었던 자도 있어.”
 “조선독립군?”
 일순 길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조선독립군에 있었던 자라면 조선인이 아닌가?!
 그때 한쪽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자가 느물거리며 말을 던졌다.
 “포두나리, 만주어로 말하면 우리가 섭섭하지. 차라리 한어(중국어)로 말하든가? 배우지 못한 난 기분이 안 좋구려.”
 그는 몸집이 다부진 자였는데, 조선말을 하고 있었다.
 “뭐야? 너 한번 해 보자는 거냐!”
 바투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조선인은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왜, 또 총을 꺼내려고? 그래 봤자 사격으로 날 이길 수는 없을걸.”
 그는 말하면서 옆에 세워 놓은 활을 쥐었다. 아마도 활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너, 이······.”
 바투가 말을 더듬으면서 씩씩거렸다.
 “저자는 조선독립군에 있다가 도망쳐온 자야. 활을 귀신처럼 쏴. 총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자지.”
 도이가 길산에게 말해 줬다.
 ‘저자들이 보갑대의 말썽꾸러기들인 모양이군.’
 길산의 짐작대로 저들 5인방은 보갑대의 불평분자들이었다. 하지만 싸움이 일어나면 그 누구보다 용감한 자들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바투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당신, 활을 잘 쏘는 모양이군. 난 바투의 의형이다. 나와 한판 붙어 보겠는가?”
 “네가 바투의 의형?”
 조선인이 깜짝 놀라 길산을 쳐다봤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길산은 겨우 20대로 보였다.
 그런데 바투의 형이라고?
 더구나 놀라운 것은 저 어린 자식이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 조선인이냐?”
 “솜바지, 나 만난 적 있나? 말 한 마디 때문에 밥숟갈을 놓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이다.”
 솜바지란 말에 조선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만주에서 솜바지란 은어는 촌놈, 또는 바보라는 뜻이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크크크, 젊어서 그런지 화끈하군. 좋아. 어떤 내기를 할까? 넌 총이 있지만 보다시피 난 이것밖에 없다.”
 조선인이 활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얼굴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휘릭.
 길산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조선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난 조선인 장길산이다. 전직 목동이고, 별명은 독종. 넌 이름이 뭐냐?”
 “난 유철만. 예전에는 독립군 소대장이었고, 별명은 삼살사(三乷死)다.”
 유철만의 비릿한 미소에 길산은 담담한 눈으로 바라봤다.
 삼살사, 세 개의 화살이면 반드시 죽는다는 별호가 흥미로웠다.
 “좋아, 삼살사. 나와 겨뤄서 지는 자는 이긴 자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어때?”
 “그거 좋지. 국화방의 도화를 달라고 해도 주마. 애송이.”
 삼살사는 크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도화는 국화방의 기녀로 삼살사의 정부였다. 삼살사는 그녀를 국화방에서 빼내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크크크, 저 애송이. 오늘이 죽을 날인가 보군.”
 “그러게 말일세. 감히 삼살사에게 도전하다니.”
 키득거리며 말하는 나머지 네 명은 한족 같았다. 언어뿐만 아니라 그들의 두상에서도 그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길산은 그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 총으로? 난 이 활이면 충분하다.”
 삼살사가 길산의 옆구리에 있는 총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길산이 머리를 흔들더니 환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니, 난 이 환도로 상대하겠다.”
 “기, 길산아!”
 “그건 안 돼. 길산아!”
 바투와 도이가 동시에 소리쳤다. 유철만의 화살은 매섭다. 그런데 겨우 환도로 대결하겠다니? 하지만 길산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내가 여기서 너에게 달려가는 동안 넌 화살을 쏘면 된다. 화살의 숫자는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네 앞으로 달려갔을 때까지 나를 맞추지 못하면 넌 죽는다.”
 길산의 말에 유철만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자신이 누군가, 독립군에서도 알아주던 삼살사다. 세대의 화살을 날리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그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로군. 죽이진 않겠지만 병신을 만들어 주마.’
 비릿한 웃음을 지은 유철만이 세 개의 화살을 걸어 길산을 겨누었다.
 거리는 겨우 20미터 정도. 이 거리에서 화살을 맞히지 못한다면 그건 궁사(弓師)도 아니다. 하지만 길산은 여전히 약간 다리를 벌린 채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자, 간다.”
 삼살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핑핑핑.
 그의 손에서 세 발의 화살이 빛처럼 날았다. 역시 삼살사의 활솜씨는 빠르고 정확했다. 사람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길산을 봤지만 곧 입을 떡 벌렸다.
 길산이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죽으려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길산은 지금 암철기를 퍼뜨려 화살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두 발의 화살이 쏘아져 오고, 그 뒤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온다.
 길산의 얼굴에 그려지는 희미한 미소. 그것을 본 삼살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놈은 이제 피할 수가 없다.
 이미 화살은 길산의 코앞까지 접근했고, 속도 또한 바람처럼 빨랐다.
 ‘미친놈. 허풍쟁이였군!’
 하지만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허풍을 치다가 죽는다면 그것도 저 어린 애송이의 팔자가 아니겠는가?
 그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길산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자 흰빛이 번쩍 빛났다.
 팅팅팅.
 “엇!”
 “와아아~!”
 어느새 뽑힌 환도가 세 발의 화살을 모조리 쳐냈다.
 정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보갑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삼살사는 재빨리 세 발의 화살을 장전했다.
 보갑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삼살사는 재빨리 세 발의 화살을 장전했다.
 그리고 다시 쏘았다.
 핑핑핑.
 그때 길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살사, 난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다. 이제 목을 늘여라.”
 팟팟팟팟.
 길산이 갈지자를 그리며 달려갔다. 그것을 본 사람들의 눈이 일순 커졌다. 마치 비호(飛虎)가 상대를 덮치는 것 처럼 길산의 돌진은 무섭도록 빨랐다.
 “이럴 수가, 어떻게?”
 삼살사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20미터나 되던 공간이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줄어들고, 어느새 길산의 신형이 눈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에잇!”
 다시 삼살사의 손에서 화살이 날아갔다.
 “앗!”
 보갑대원들의 비명이었다. 거리는 불과 3미터 정도. 이건 얼굴에 대고 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천하의 명궁인 삼살사가 쏜 화살이라면 끝장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곧 그들의 비명은 탄성으로 바뀌었다.
 길산의 손이 교묘하게 휘둘러지더니 환도가 삼살사의 목으로 빠르게 날아든 것이다.
 “와아!”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살사가 쏜 마지막 세 발의 화살은 길산의 왼손에 잡혀 있었고, 환도는 삼살사의 목에 붙어 있었다.
 부르르.
 삼살사는 몸을 떨었다. 그는 분명히 봤다.
 화살이 얼굴에 박히려는 순간, 길산의 손이 휘둘러지면서 화살을 잡았고 몸이 섬전처럼 육박했다.
 그것이 얼마나 빠른지 미처 다시 화살을 걸 사이도 없이 차갑고 섬뜩한 환도가 그의 목에 닿았다.
 ‘이, 이자는 무술의 고수다!’
 삼살사 역시 거의 20년 동안 화살을 수련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에 길산은 분명 무술을 수련한 자였다.
 “삼살사라고 했나? 이제 내기 조건을 말할 때가 됐군.”
 “나, 날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삼살사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넌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리고 난 내 편은 함부로 죽이지 않아.”
 길산이 삼살사의 목에 닿아 있던 환도를 도갑에 넣었다.
 스르렁, 철컥.
 흠칫.
 이제 길산이 삼살사를 죽일 거라 생각했던 보갑대원들이 숨을 죽이고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길산의 환도가 자기의 목에 닿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겼으니 너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겠다. 듣겠나?”
 “뭐든 말해라. 내 목숨을 달라고 해도 주겠다.”
 삼살사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이 마을의 보갑대원이다. 맞나?”
 “마, 맞다.”
 “한 달에 봉급을 얼마나 받지?”
 “은화 1원이다.”
 은화 1원이면 길림관표(동북의 지폐) 100전이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동북에서는 좁쌀 한 섬에 20전, 농민이 1년 농사를 지어 버는 돈이 겨우 은화 10원 정도였다.
 그러나 그 돈에서 이런저런 가렴잡세로 뜯기고 나면 남는 돈은 보잘 것 없었다. 그렇지만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보갑대원들에게는 많다고 할 수도 없는 돈이었다.
 마적들은 아무리 궁하다고 해도 한 달에 은화 3원 정도는 받는다.
 그러니 무슨 싸울 생각이 나겠는가?
 ‘흠, 사기가 떨어진 것이 적은 봉급 때문일 수도 있겠군.’
 길산이 중얼거리자 머릿속의 한천명이 말했다.
 -돈은 더럽지. 하지만 돈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좋은 일도 많은 법이다. 그래서 황금이 중요한 법이야.
 ‘귀신영감, 제발 그 황금 애기는 그만해. 지겨우니까.’
 -내 말은 사실이다. 정말 황금이 있다니까!
 한천명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길산이 얄미웠는지 버럭 화를 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말을 말지.’
 애써 한천명의 말을 무시한 길산이 삼살사를 바라봤다. 담담하고 투명한 눈빛, 길산이 입을 열었다.
 “삼살사, 넌 나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 그 빚의 대가로 마을 사람들을 지켜라. 진정한 마음으로 말이다. 네가 받는 은화 1원의 봉급은 마을 사람들이 주는 것이니 당연하다.”
 길산의 말에 삼살사는 물론 다른 보갑대원들도 멍해졌다.
 보갑대원들도 내기를 한다. 그래서 이기면 돈을 요구하거나 부하가 될 것을 강요한다.
 그런데 길산은 전혀 다른 요구를 하고 있었다.
 “알겠소, 독종.”
 삼살사의 말이 정중해졌다.
 길산은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느낀 것이다.
 퍼엉, 펑펑.
 “엇, 포두! 마적단입니다.”
 하늘에 파란색의 폭전(爆箭)이 연달아 세 개나 터지고 있었다. 저것은 위급 상황시 보초를 서는 보갑대원들이 터뜨리는 신호용 화살이었다.
 “모두 출동 준비! 어서 서둘러.”
 대원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린 바투가 길산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지시를 받은 보갑대원들은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바투, 마적이냐?”
 “응. 그런데 폭전이 세 개나 터지는 것을 보면 숫자가 많은 것 같아. 함께 가주겠니?”
 바투의 눈에 간절한 빛이 어려 있었다.
 “당연하지. 우린 친구다.”
 “고맙다, 길산.”
 바투는 한시름 놓았다. 방금 본 길산의 솜씨는 귀신같았다.
 그런 길산이 함께 간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보갑대원들을 태운 말들이 맹렬한 속도로 울타리를 벗어나 마을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
 
 보갑단이 있는 곳에서 마을의 입구인 학골까지는 대략 10리 구간이다.
 그곳에 보갑대의 잠복초가 있었다. 잠복초라고 해서 땅을 파고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질풍처럼 달려온 말들이 도착하자 나무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내렸다.
 그는 온 몸에 나뭇잎을 꽂아 사람이 아니라 나뭇단처럼 보였다. 환경에 맞게 위장한 것이다.
 “어디냐? 몇 놈이야?”
 도착하자마자 바투가 급하게 물었다.
 “놈들은 20여 명인데 모두 신식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목초지 쪽으로 갔습니다.”
 “목초지?”
 바투는 마적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에 일단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그때 길산이 물었다.
 “지금 목초지에 목동들이 있나?”
 “예. 아마 30명 정도는 될 것입니다.”
 보갑대원은 처음 보는 길산을 의문스럽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문득 길산의 머리에 오늘 아침 말을 끌고 나간 다이샨이 생각났다.
 “바투, 평상시에 다이샨 아저씨가 어디로 말을 끌고 가지?”
 그 말에 바투는 화들짝 놀랐다. 다이샨도 목초지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기,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에 다이샨 아저씨가 목초지로 가는 것을······.”
 말을 하던 보갑대원은 깜짝 놀랐다. 길산이 말의 배를 걷어찼던 것이다.
 오호홍!
 기겁한 말이 투레질을 하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그것을 본 바투가 소리쳤다.
 “야! 길산아, 놈들은 스무 명이야. 작전을 짠 다음에······. 이런 제기랄.”
 길산에게 소리치던 바투가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벌써 길산의 말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길산에게 다이샨은 부모나 같은 사람. 만약 마적 놈들이 다이샨에게 뭔가 해코지라도 했다면 독종은 생사를 돌보지 않고 달려들게 뻔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마적들은 모신나강 소총이나 38식 일본제 보병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길산이 무술을 배워서 몸이 빠르다고는 해도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바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초지는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없는 광활한 초원 지대이다. 최신 총으로 무장한 마적 떼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겨우 4자루의 무기를 들고 달려든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신들은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보갑대가 아닌가?!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된다. 하지만 난 가겠다. 길산은 내 의형이니까. 도이는?”
 언제나 과묵한 도이가 총을 벗어 장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투, 걱정 마라. 길산이 가는 곳에는 나 도이도 간다.”
 “나도 가겠다, 포두.”
 그 말의 주인은 명궁 유철만이었다. 일순 바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는 유철만이었다. 그런 그가 나선 것이다.
 “고맙소, 유형.”
 “고마울 것 없네. 난 독종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바투는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유철만 저 사람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다.
 “우리도 가겠네.”
 “암, 자네만 보낼 수는 없지. 우린 생사를 같이하는 5인방이 아닌가.”
 5인방의 한인들이 앞으로 나서며 도끼와 창을 치켜들었다.
 “우리도 가겠습니다, 포두.”
 나머지 보갑대원들까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본 바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명령을 우습게 여기던 대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길산의 일에는 모두 나서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좀 전에 길산이 보여 준 신위 때문일 거라 바투는 생각했다.
 ‘포두는 역시 독종, 네가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결심을 한 바투가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럼 가자. 전속으로!”
 눈이 녹아 질척한 땅에 말들이 달려가자 흙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아저씨가 위험해.’
 길산은 화살처럼 달리는 말 위에서도 마음이 조급해 가만있기 힘들었다.
 ‘만약 아저씨에게 작은 상처 하나라도 낸다면 너희들은 단 한 놈도 살아가지 못한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던 길산은 앞쪽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아이를 봤다. 검은 양가죽 옷을 입고, 뾰족한 양털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몽골 목동이었다.
 “얘, 말 좀 묻자.”
 길산이 몽골어로 말하자 긴장하던 목동의 눈에서 안도의 빛이 일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너 목초지에서 오는 길이냐?”
 “예, 그곳에 마적단들이 왔어요.”
 목동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아이는 보갑대에 이 사실을 알리려 달려가던 중이었다.
 “누가 잡혔니?”
 “완완 누나의 아버지가 매를 맞고 있어요.”
 “뭐? 다이샨 아저씨가?”
 “예. 누나를 마적단에 시집을 보내라고 하면서요.”
 아이는 말을 하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길산의 몸에서 끔찍할 정도의 살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추, 추워!’
 아이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길산이 말에 박차를 넣었다.
 “죽인다. 절대로 살려 두지 않는다.”
 그의 눈에서 암흑의 동공이 열렸다. 그것은 끝도 없는 지옥의 무저갱이었다.
 
 ***
 
 퍽.
 “허억!”
 다이샨은 부러진 다리의 아픔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남파(마적 두목)님에게 시집을 오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단 말이다. 한 마디로 호강을 한단 말이지. 그런데 왜 말을 안 들어. 엉?”
 그의 뒤에는 19명의 마적들이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혈랑대의 5조장 문탁진은 애써 화를 억눌렀다. 이놈의 영감은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절대로 완완을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문탁진은 쓰러져 고통에 신음하는 다이샨의 앞에 앉아 말채찍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영감, 계속 거절하면 마을에 가서 네 딸을 직접 잡아간다. 그럼 여러 사람들이 죽겠지. 그래도 좋으냐?”
 문탁진의 협박에 다이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딸을 마적 두목에게 줄 수는 없었다. 완완은 다이샨의 모든 것이었다. 그 애를 낳고 어미가 죽었을 때 다이샨은 완완을 안고 젖동냥을 다녔다.
 그때 조선인 여인들이 젓을 주지 않았다면 딸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생하며 소중하게 키운 딸을 흉악한 짐승들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이놈들, 목숨이 아까워서 자식을 짐승에게 내주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어서 죽여라. 하지만 내 복수는 누군가가 반드시 해 줄 것이다.”
 “크크크, 복수? 그 허접한 보갑대가 말인가? 크하하!”
 문탁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부하들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보갑대, 웃기는 일이다. 문탁진의 5조가 이곳으로 온 것은 보갑대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따위 허접한 놈들은 자신들 5조만으로도 충분히 쓸어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장회와 암암리에 손을 잡고 있는 혈랑대 남파는 되도록 일을 조용히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동북의 도독, 순무사, 지현들은 모두 마적들과 결탁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치안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동북의 마적들은 대충 계산한다 해도 거의 백만이 넘는다.
 그들은 평소에는 제각기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서로 반목을 하지만, 마적 전체가 위험에 처하면 통문을 돌려 한데 뭉쳐서 정부군에 대항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작은 세력이 아니었다.
 반대로 마을들의 연합체인 연장회는 마적들과 손을 잡는 것이 유리했다.
 이곳 학북마을이 속한 연장회 총남파는 학강현에 있다.
 그자는 학강현 22개 부락의 명줄을 쥐고 있었다.
 이른바 마적들로부터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만약 마적이 없어진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수탈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그 때문에 연장회와 마적단은 공생공사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다이샨이 말한 누군가는 보갑대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아들과 같은 존재인 길산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했다. 자신보다 몇 살이나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무릎 꿇리던 아이.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완완이 그 얘와 함께 있다면 다이샨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복수를 해 주리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다이샨이 아는 길산은 그런 아이였으니까.
 ‘빌어먹을! 그냥 쳐들어가서 잡아오면 편할 것을.’
 문탁진은 속으로 투덜거리긴 했지만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혈랑대 120명을 움직이는 남파는 성격이 포악했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자신의 아들이라도 목을 베는 위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탁진으로서는 이 늙은 영감이 스스로 딸을 바치게 만들어야 했다.
 “잘 들어, 영감. 우리가 마을에 쳐들어가지 않는 것은 영감의 딸과 남파님이 맺어지면 사돈이 되기 때문이야.
 그런데 영감은 그렇게 마음이 넓은 우리 남파님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있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서로 협력하자고.
 어차피 딸은 어느 놈에게든 줘야 할 것이 아닌가. 영감이 데리고 살수는 없잖아?”
 문탁진이 여우의 웃음을 지으며 다이샨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갈 다이샨이 아니었다.
 “그 애에게는 남자가 있다.”
 “뭐? 나, 남자가 있어? 감히 남파님의 여자에게 간부(奸夫)가 생겼단 말이지?”
 문탁진은 다이샨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누구냐? 감히 어떤 잡놈이 남파님의 여자를 가로챘냐? 어서 말해!”
 “내 딸이 마적의 여자라고? 이 더러운 놈들, 어서 죽여라. 퉤!”
 다이샨이 내뱉은 침이 문탁진의 얼굴에 철썩 묻었다.
 “이 만주족의 잡종 같은 영감태기! 내 네놈을 때려죽이고 만다.”
 벌떡 일어난 문탁진의 장화발이 다이샨의 옆구리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컥.”
 퍽퍽퍽퍽.
 눈이 뒤집힌 문탁진은 차고 밟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자 말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짜악, 짜악.
 말채찍이 다이샨의 몸에 떨어지며 솜옷을 갈가리 찢어 발겼고, 피부를 물어뜯었다.
 “윽, 으윽.”
 “어느 놈이냐? 누가 감히 그 계집의 남자냐? 말하지 않으면 네놈은 여기서 맞아 죽는다.”
 휘익.
 사납게 채찍을 들어 올리던 문탁진은 희미한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먼 곳에서 한 마리의 말이 질풍처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이샨이 맞는 것을 킬킬거리며 구경하던 마적들도 자신들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말을 쳐다봤다.
 “저건 만주족?”
 점점 가까워지는 말 위에 앉아 있는 남자의 옷차림은 분명 만주족의 기마병 차림이었다. 그러나 보갑대원은 아니었다.
 문탁진은 학북마을 보갑대원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구냐? 서라!”
 부조장 양철두가 모젤을 겨누며 소리쳤지만 말은 멈추지 않고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것을 보던 문탁진은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저놈이?’
 그의 눈이 쓰러져 버둥거리고 있는 다이샨에게로 돌아갔다.
 과연 다이샨이 고통에 버둥거리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달려오는 말의 기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호, 저놈이 남파님의 여자를 가로챈 놈이란 말이지?’
 문탁진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쏴 죽여라!”
 그때 다이샨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길산아, 오지 마라! 완완을 데리고 도망쳐. 어서! 컥.”
 다이샨의 얼굴을 거칠게 걷어찬 문탁진이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감, 우리 혈랑대에게 반항한 자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 둬라.”
 탕, 탕, 탕, 탕.
 모신나강, 38식 보병총, 모젤이 일제히 총탄을 날려 보냈다. 숨을 곳이 없는 초원에서 20여 자루의 총이 발사하는 탄환을 피할 길은 전무했다.
 “크크크, 어리석은 놈. 안을 계집이 없어서 감히 남파님이 찍은 여자를 품어? 넌 들개처럼 여기서 죽어야 한다. 네놈의 목을 잘라 마을 입구에 걸어······ 응?”
 곧 총알에 온몸이 구멍이 나 피를 쏟으며 시체가 될 거라 생각한 문탁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말 위에서 기수가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말의 엉덩이를 때려 초원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보였다. 말이 빠르게 질주하더니 근처 숲 속으로 사라졌다.
 “흐음, 이런 상황에서 말을 살려? 지 죽을 걱정은 안 하고?”
 그가 고개를 꺄우뚱거릴 때였다. 남자가 갑자기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저, 저놈이!”
 문탁진은 기가 막혔다. 사람이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니?!
 그때 일제히 사격소리가 울렸다.
 탕탕탕탕.
 하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총알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하지만 달려오는 자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속도를 내고 있지 않은가?!
 탕탕탕탕.
 그때서야 문탁진은 놈이 이상한 모양으로 달려온다는 것을 알아봤다.
 마치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총알이 쏘아질 때마다 그 놈의 몸이 흔들렸다.
 그런데 그 몸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부하들이 겨눠서 쏘는 총알은 그자의 잔상만을 꿰뚫고 있었다.
 “이놈들아! 그건 허상이다. 똑바로 겨눠 쏴.”
 길산은 적이 30미터 거리 내에 들어오자 환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렁.
 투명한 칼날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탕탕탕탕.
 마적들은 기겁을 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빠르며, 마치 구름과 바람을 타고 움직이듯 한단 말인가?!
 놀란 그들이 잠시 주춤거릴 때, 길산의 허리춤에서 마우저 권총이 뽑혀 나왔다.
 탕탕탕탕.
 갈지자로 달리며 길산이 쏜 총알은 순식간에 선두에 있던 4명의 마적들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다.
 “크악! 캐액!”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그들의 이마에는 동전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것을 본 문탁진은 혼이 날아나는 것 같았다.
 한 명도 아니고 4명 모두의 이마를 정확히 명중시키다니?!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사격술이다!
 문탁진의 온몸이 공포로 부르르 떨렸다.
 ‘무, 무서운 놈이다!’
 겁에 질린 그는 부하들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쏴라! 쏴 죽이란······ 컥!”
 소리치던 문탁진의 이마에도 구멍이 뻥 뚫리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귀, 귀신같은 솜씨다!”
 부조장 양철두는 조장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뒤로 나뒹구는 것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놈을 주, 죽여라. 어, 어서!”
 하지만 그때는 이미 길산이 마적들 속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그때부터 양철두는 굳어진 몸으로 한 마리 야수의 살육을 지켜봐야 했다.
 “으악! 아악!”
 촥촥촥촥.
 길산의 환도가 뿌연 빛을 그리며 번쩍일 때마다 마적들의 목이 둥실 떠오르고, 몸통이 사선으로 잘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뱃속의 내장들.
 “으아악!”
 공포에 질린 마적들이 총을 집어 던지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노한 길산의 눈앞에서 도망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탕탕탕탕.
 왼손에 쥐어진 권총이 불을 토하면 제일 먼저 달아나던 놈의 머리통이 박살이 나고, 환도가 번쩍 빛을 뿌리면 팔다리가 잘려진다.
 겁에 질려 꿇어앉은 자도,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빌던 자의 머리도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 살려 주세요.”
 양철두는 다리가 떨려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지금까지 마적질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고 죽인 그였지만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지금 부하들의 몸을 개나 돼지처럼 단칼에 베어 버리는 저 사내는 사람이 아니라 살육에 미친 노호하는 호랑이였다.
 “길산아, 그만 멈춰라.”
 우뚝.
 총을 버리고 항복하던 자들까지 무자비하게 베어 버리던 길산은 다이샨의 목소리에 몸을 멈췄다. 그리고 머리를 돌렸다.
 ‘헉!’
 다이샨은 숨을 들이켰다. 길산의 눈은 사람의 눈 같지 않았다. 암흑의 어둠이 이글거리는 눈빛. 다이샨은 그 눈빛에 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길산 본인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천강마혼지체다.
 천강마혼지체는 한 마디로 하늘이 내려 준 강한 신체와 악마의 혼을 가진 자를 말한다.
 인류 역사에 서술된 기록들을 보면 고대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칭기즈칸 같은 인물들은 모두 천강마혼지체였다.
 분노한 길산의 몸에서 지금 뿜어지는 악마의 투기에 맨 정신으로 견딜 사람은 전무했다.
 “다이샨 아저씨, 괜찮아요?”
 “응? 으응, 난 괜찮다······.”
 다이샨이 그제야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방금 본 길산의 눈빛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섬뜩하면서도 온몸을 굳어지게 하는 살기. 그것은 다이샨이 일생 동안 처음으로 겪은 무서운 기운이었다.
 “상처부터 치료해야겠어요.”
 길산이 다이샨을 부축할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길산아!”
 제일 선두에서 미친 듯이 말을 달려온 바투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쩍 벌렸다.
 사방에 흐르는 걸쭉한 피, 잘려진 머리통들과 팔다리들. 끔찍한 것은 몸통이 두 동강난 시체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쏟아진 창자에선 아직 더운 김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5명의 마적들은 오줌을 지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세상에!”
 “몽땅 해치웠어!”
 뒤따라온 보갑대원들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구토를 간신히 참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봤다. 신식총을 가진 마적 20여 명이 단 한 명에게 몰살되었다.
 그들은 말을 달려오면서 길산이 야수처럼 날뛰는 것을 똑똑히 봤다. 조금 멀기는 했지만 이곳은 시야가 탁 트인 초원이다.
 보갑대원들은 길산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번뜩이는 환도를 휘두를 때의 길산은 마치 성난 호랑이와 같았다.
 “역시 넌 호랑이다. 독종 호랑이, 독호(毒虎). 으하하!”
 너무 큰 놀라움에 멍하니 서 있는 도이와 달리 바투는 길산에게 다가와 커다란 두 손으로 어깨를 치며 말했다.
 “바투, 아저씨를 좀 데려가라.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
 “응? 아, 알겠어.”
 큰입을 벌리고 머리를 끄덕이던 바투가 보갑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와 너, 둘이서 다이샨 아저씨를 후송해. 조심해라. 알았지?”
 “걱정 마셔, 포두.”
 그들은 대답을 하면서도 길산을 힐끔 쳐다봤다. 다이샨은 길산이 부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달려와 흉신악살 같은 마적들 20여 명을 허수아비 썰듯 죽인 사람이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다이샨을 데리고 사라지자, 길산은 꿇어앉은 마적들에게 다가갔다.
 “두 번 묻지 않겠다. 혈랑대의 본거지가 어디지?”
 길산의 물음에 꿇어 앉아 있던 마적 하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것이······. 컥!”
 도갑에 들어가 있던 환도가 번쩍 빛을 뿌렸고, 마적의 목이 툭 떨어져 내렸다.
 데구루루.
 “으으으······.”
 공포에 질린 마적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학질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보갑대원들도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길산의 가차 없는 손속, 번갯불처럼 번뜩이는 환도 앞에 그들은 오금이 떨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삼살사 유철만이었다. 그는 지금 온 몸의 신경이 터질듯 펄떡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발도, 길산의 온 몸에서 풍기는 투기, 그리고 무자비한 처형.
 적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한 마디로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런 면에서 길산은 유철만이 중요시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내였다.
 ‘역시 멋진 사내로군!’
 유철만은 무심한 표정으로 다른 마적에게 다가가는 길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디냐?”
 “예? 어디를 물으십니까? 뭐든지, 컥!”
 또다시 번뜩이는 뿌연 칼날, 마적의 머리가 깨끗이 잘려 떨어졌다. 그러자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부조장 양철두가 발작하듯 외쳤다.
 “마, 말하겠습니다. 혈랑대는 소로봉에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엉엉.”
 마적들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길산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것이 마적들에게는 염라대왕의 얼굴보다 더 무서웠다.
 “몇 명이나 있지?”
 “예, 총 230명 중에 혈랑대는 121명이고, 잡혀온 여자들은 109명이 있습니다. 그중 100명의 여자들은 혈랑대의 성욕의 대상이고, 나머지는 부엌에서 음식을 합니다.”
 부조장 양철두는 말을 한 뒤 길산의 눈치를 열심히 살폈다. 하나, 길산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환도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판단한 양철두는 또다시 빠르게 입을 놀렸다.
 “그, 그리고 남파의 정실부인이 한 명 있고, 첩이 열두 명 있습니다. 또 산채의 뒤에는 감옥이 있는데, 그곳에는 조선독립군 처녀 한 명이 갇혀 있습니다.”
 “조선독립군?”
 그제야 굳게 다물려 있던 길산의 입이 열렸다. 그것이 기쁜 듯 양철구는 사력을 다해 대답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자신도 먼저 죽은 부하들처럼 목이 잘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 군자금을 모집하던 처녀인데 며칠 전에 연강구에 갔던 남파에게 잡혀왔습니다.”
 “왜 가뒀지?”
 길산이 또다시 물었다. 양철두는 길산의 물음이 부처님의 말보다 더 기뻤다.
 잘만하면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주 미인이었습니다. 해서 남파가 첩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차라리 죽이라고 하면서 수청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남파가 그녀를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굶겨서 항복을 받으려는 것이지요.”
 말하면서 길산을 쳐다본 양철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길산이 머리를 끄덕인 것이다.
 “남파는 돈이 생기면 절대로 부하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는 금고를 자기 방 지하에 숨겨 두고 있는데, 그의 친위대가 밤낮으로 경비하고 있습니다.
 해서 혈랑대원들은 한 달에 겨우 은화 2원을 받습니다.”
 말을 끝낸 뒤 양철두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산의 얼굴을 보니 만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들려온 길산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인가?”
 “예? 아, 아닙니다. 또, 또 있습니다.”
 양철두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차하면 명년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이 될 수도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만 했다.
 “남파는 학강현 연장회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만나러 가기 때문에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뭐라고? 연장회와 손을 잡고 있다고?”
 옆에 서 있던 바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예. 하지만 연장회의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연장회에서 정보를 보내 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린 그 정보를 토대로 공격을 합니다.
 이건 남파의 친위대로 있는 제 친구가 말해 준 것입니다. 정말 한 치도 거짓이 없는 사실입니다.”
 양철두의 말에 보갑대원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연장회가 뒷구멍으로는 마적들과 손을 잡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혈랑대의 무장 상태는?”
 모두가 놀라서 웅성거렸지만 길산은 여전히 담담했다.
 “모두 38식 보병총과 모신나강 소총, 모젤 권총, 그리고 러시아제 맥심 기관총이 한 정 있습니다.”
 “뭣이? 맥심 기관총!”
 기관총이라는 말에 독립군 출신 유철만이 깜짝 놀라 물었다. 독립군도 기관총을 구입하려고 애를 썼지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 혈랑대의 남파는 원래 합이빈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의 장교였습지요.
 1912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생기자 남파는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해 마적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러시아에서 들여온 맥심 기관총 한 정을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랬군.”
 사정을 알게 된 유철만이 입맛을 다셨다.
 -길산, 맥심 기관총은 중요한 무기다. 지금 시대에 그걸 가지고 있으면 방어전에서는 확실하지.
 여태까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한명천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러나 길산이 대답을 않자 한천명은 다시 잠잠해졌다.
 “이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다 말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마적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길산. 이들은 그냥 살려 주자.”
 살려 주자고 말하던 바투는 그만 눈을 부릅떴다. 길산의 환도가 번뜩이며 남은 한 명의 마적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컥!”
 쿵, 털썩.
 겨우 살아남은 양철두만이 눈을 뒤집고 입으로 거품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저놈은 끌어다 가둬, 바투.”
 “후우~.”
 바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길산은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은 아랑곳없이 말을 타고는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포두. 독종, 아니 독호가 잘한 짓이야. 잡아가야 쓸모도 없고, 가둘 감옥도 없잖아?”
 한숨을 쉬는 바투에게 유철만이 말했다.
 “하지만 저들은 항복했고, 다시는 마적질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믿나?”
 “······.”
 유철만의 반박에 바투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마적들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자자, 어서 시체들이나 묻고 총을 가지고 돌아갑시다.”
 그 말에 보갑대원들은 와락 달려들어 시체를 묻고는 총들을 회수했다. 20정의 신식소총과 모젤 권총. 이것을 돈으로 살려면 엄청난 자금이 든다.
 그러고 보면 오늘 학북 보갑대는 엄청난 전리품을 노획한 셈이었다.
 소로봉은 소흥안령의 산맥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다. 바로 학강현의 뒤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마적들은 둥지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새벽 5시, 동북의 밤은 춥고 길다.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발굽에는 천을 감은 말들이 보였다.
 말들의 털에는 하얀 서리가 맺혀 있었다.
 “독호야, 우리만으로 가능할까?”
 바투가 근심 어린 눈빛으로 옆에서 뚫어지게 앞을 보고 있는 길산을 쳐다봤다.
 불과 100여 미터 앞에 혈랑대의 산채가 있었다.
 혈랑대 놈들은 아주 기묘한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곳은 소로봉의 남쪽으로 삼면이 절벽이고, 한쪽만 열려져 있었다. 공격하려면 통나무로 만든 목채를 통과해야 하니 바투로서는 난감했다.
 적은 성처럼 만든 목채 안에 기관총까지 가지고 있었고, 120명이나 된다.
 그런데 공격하는 보갑대는 겨우 20명에, 보병총이 전부였다.
 그것도 마적들에게 길산이 빼앗은 것이었다.
 “바투, 인간이 마음먹어서 못할 것은 없다. 걱정 마라. 우린 반드시 이긴다.”
 길산의 나지막한 말에 바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산이 이긴다고 하자 왠지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바투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보갑대원들의 얼굴에 겁이 아니라 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총을 꽉 쥔 손들, 눈에서 끓어오르는 싸움에 대한 열망. 그것은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의 분출이었다.
 ‘햐아~! 대원들이 달라졌어!’
 이 모든 것이 바로 길산 때문이었다. 오늘 낮에 벌어진 혈랑대와 길산의 싸움을 본 대원들은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던 피와 열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바투는 목초지에서 맹수처럼 날뛰던 길산의 모습을 떠올렸다.
 달리고 튀어 오르고, 허공을 제비처럼 뱅그르르 돌며 왼손에 쥔 권총이 불을 뿜으면 마적들이 허깨비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가장 압권은 적들 사이를 누비며 도를 휘두를 때였다. 마적들의 목이 날아가며 초원은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정말 한 마리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았다.
 목초지에서의 싸움이 있은 후, 보갑대원들은 길산을 독호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길산을 얼마나 동경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이제 독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를 것이다!’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바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차가운 북방의 공기가 폐부 속으로 밀려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독호가 하자는 대로 하면 이길 수 있어!’
 시체를 정리하고 보갑대에 돌아왔을 때, 길산이 혈랑대를 쳐야 한다고 말을 꺼내자 바투는 까무러칠 뻔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치지 않으면 마적들이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말에 보갑대원들은 겁에 질려 버렸다.
 그때 길산은 이렇게 말했다.
 “난 학북마을을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곳에 소중한 가족들이 있다.
 언제까지 당하며 살려 하는가? 그 누구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
 연장회? 보위단? 그들이 마적들과 결탁했다면 학강현 22개 부락은 마적들의 먹이나 다름없다.
 오늘은 다이샨이 당했지만 내일은 누가 당할지 모른다.
 바투, 너의 누나가 놈들에게 치욕을 당할지도 모르고 도이, 네가 사랑하는 처녀가 끌려갈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누구도 예외라고는 없다.
 그런데도 움츠리고 살겠는가?
 남자라면, 용사의 후예라면 내 가족, 내 여자는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
 그 말에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조선독립군 출신인 유철만이었다.
 “독호, 난 당신을 따라가겠다. 남자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자 5인방이 우르르 일어섰다.
 “우리도 가겠다. 혈랑대가 아무리 강해도 독호, 당신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오.”
 “맞아. 나도 가겠소.”
 5인방이 앞으로 나서자 남은 보갑대원들 역시 모두 나섰다.
 “나도 가겠소. 시발, 내 아내를 마적들이 유린하게 놔둘 수는 없지. 독호, 당신에게 내 목숨을 걸겠소.”
 “나도 가겠소!”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끓어오르는 바투였다. 마적단 20명만 나타나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어쩔 바를 몰라 하던 보갑대다.
 그런 그들이 한순간에 변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친구, 길산 때문이었다.
 ‘자식, 이젠 네가 대장이다. 학북마을을 너에게 맡기마!’
 바투는 입술 끝을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길산이 학북마을의 포두가 된다면 마을은 안전할 것이다. 그는 무서울 것이 없는 독호니까.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목책의 문을 열겠다. 그럼 그때 들어와라.”
 “응,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바투는 길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너무 걱정 마라. 바투.”
 길산이 움직이려 할 때였다.
 “나도 함께 가겠다, 독호.”
 낮에 마적단을 치겠다고 길산이 말했을 때부터 유철만은 길산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길산은 유철만의 이글거리는 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따라와라, 삼살사.”
 “고맙다.”
 무엇이 고마운지 모르겠지만 유철만은 그렇게 말했다.
 숨을 죽인 채 보갑대원들은 은밀히 움직이는 두 명을 바라봤다.
 새벽 어둠 속으로 두 사람은 안개처럼 사라져 갔다.
 퍽. 우두둑.
 목책 옆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던 마적이 눈을 번쩍 떴지만 곧 처절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길산이 마적의 입을 막고 목을 한 바퀴 돌려 버린 것이다.
 “가자.”
 개처럼 혀를 내민 채 죽은 마적을 소리 없이 눕혀 놓은 길산이 고양이처럼 앞쪽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혈랑대의 산채에서 제일 뒤에 있는 내부였다. 양철두의 자백에 의하면 이곳에는 혈랑대 남파와 그의 첩들, 그리고 자식들과 친위대가 있는 곳이었다.
 친위대는 일단 유사시 산채를 지휘하는 우두머리였기에 길산은 그들부터 처리하려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휘익. 척척.
 길산이 나무로 만든 담장을 넘어 발끝으로 마당에 뛰어내리자, 단검을 손에 쥐고 등에는 활을 멘 유철만이 날렵하게 뒤따라 뛰어내렸다.
 길산의 입술 끝이 비틀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유철만, 조선독립군에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잘 단련된 육체와 발끝으로 걷는 움직임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든든한 조력자가 길산에게 생긴 셈이다.
 툭.
 그때 길산의 어깨를 유철만이 살짝 건드렸다.
 길산이 머리를 돌리자 유철만이 손짓으로 어둠 속에 우중충하게 솟아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남파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창고였다. 머리를 끄덕인 길산이 마당을 가로 질렀다.
 ‘대체 어떤 무술을 수련했을까?’
 유철만은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도 이런 일에선 남에게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길산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란 생각이 들었다.
 길산은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야수와 같았다.
 “큭.”
 앞쪽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문을 지키는 친위대원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가 기다리고 있자 어둑한 곳에서 나타난 길산의 손짓이 보였다.
 유철만이 소리 없이 달려갔다.
 “이제 안채로 들어가 대장을 잡는다. 내가 들어갈 테니 삼살사, 넌 이쪽으로 오는 놈이 있으면 처리해.”
 “알겠다.”
 머리를 끄덕인 길산이 안으로 사라지자 유철만은 등에서 활을 내려 손에 쥐었다.
 곧 세 개의 화살이 시위에 걸려 어둠 속을 노렸다.
 누구든지 안으로 들어서면 소리 없이 날아간 화살에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저놈들은?”
 길산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붙어 섰다. 세 명의 혈랑대가 안채를 순시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놈들이 양철두가 말한 남파의 충견들이군.’
 남파는 친위대도 잘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안채에는 그자의 충견으로 불리는 6명이 있는데, 놈들은 밤낮으로 3명씩 조를 이뤄 남파를 지킨다고 했다.
 지금은 새벽 4시. 이 시간에도 자지 않고 순찰을 돈다는 것은 저들이 진짜 충견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거리는 약 30미터 정도. 길산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이보세요. 저놈들이 저 앞쪽으로 가면 어둠 속에 잠겨요.”
 아주 작게 속삭이는 듯한 말에 길산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그러나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기파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굵은 쇠창살을 박아 놓은 감옥이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쌍의 눈이 보였다.
 ‘조선독립군?’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두 명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새가 없었다. 길산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여자가 말한 곳, 그곳은 놈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는데 지붕의 어둠 때문에 은신하기에 좋았다.
 하지만 길산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암철풍운신법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움직이며 소리도 없다.
 스스스스.
 길산의 몸이 바람이 스치듯 세 명의 등 뒤로 접근할 때, 감옥에서 내다보고 있던 두 여인의 눈에는 경악이 어려 있었다.
 그녀들은 아마도 처음으로 사람이 저렇게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으리라.
 “컥. 윽.”
 암철풍운신법으로 고양이처럼 놈들의 뒤로 다가간 길산의 주먹이 두 명의 뇌호혈을 강타하고 한 명의 목을 잡아챘다.
 두 명이 쓰러지는 순간, 너무 놀라 입을 벌리려던 놈은 극심한 고통에 버둥거렸다. 그러나 고통은 순간이고, 곧 어둠이 눈앞을 덮쳤다.
 소리를 못 지르게 목울대를 잡아 뽑은 길산의 손이 그의 관자노리를 가격한 것이다.
 뇌가 파괴된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먼저 맞은 자들도 동시에 쓰러졌다.
 하지만 소리는 없었다. 길산이 그들의 몸을 받아 눕혔기 때문이다. 길산의 고개가 감옥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두 쌍의 눈이 보였다.
 ‘다음은 친위대의 막사다.’
 길산이 소리 없이 막사 쪽을 향해 땅을 박찼다.
 막사 안의 친위대까지 모조리 죽인 길산이 혈랑대 남파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그로부터 약 5분이 흐른 뒤였다. 이제 이 안채 쪽에 살아 있는 자는 남파뿐이었다.
 나머지는 남파의 첩과 자식들뿐이다.
 이건 무슨 냄새지?’
 길산의 코로 비릿하면서도 약간 지린내 같은 냄새가 스며들었다.
 희미하게 비쳐드는 새벽빛 속으로 캉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아마도 남파와 그의 부인, 아니면 첩일 것이다.
 길산이 성큼 다가가 남파를 툭 쳤다.
 “뭐야? 헉!”
 잠결에 웅얼거리던 남파는 기겁했다. 목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 이것은 분명 강철의 섬뜩함이었다.
 “소리치면 죽는다, 남파.”
 눈앞에 떠 있는 두 눈동자. 혈랑대의 남파 황엽충은 눈을 부릅떴다.
 대체 이놈은 누구란 말인가? 다른 어디도 아닌 혈랑대의 내부에까지 들어와 목에 비수를 겨누다니?
 “일어나라.”
 황엽충은 베개 밑에 넣어 뒀던 모젤을 꺼내 왼손에 쥐었다. 입을 막았던 손이 떼어지자 황엽충은 길산을 쏘아봤다. 아무리 봐도 옷이 만주족이었다.
 “누구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컥!”
 길산의 왼손이 번뜩이더니 목에 충격을 받은 황엽충이 침상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숨도 못 쉬고 바동거렸다.
 “황엽충, 또다시 잔머리를 굴리면 이번에는 대가리를 부순다. 알았나?”
 낮지만 섬뜩한 목소리, 황엽충은 급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놈은 일반적인 도적이 아니었다.
 그때 잠에 들어 있던 황엽충의 첩이 눈을 떴다.
 어둑한 방안에 서 있는 남자, 길산의 모습이 보이자 옆자리를 본 첩은 비명을 질렀다.
 “누······ 캑.”
 모젤 권총의 손잡이에 맞은 그녀는 흰자위를 보이며 벌렁 뒤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그녀의 허연 허벅지와 두 다리 사이의 검은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새 황엽충과 정사를 치르고, 알몸으로 자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산은 그녀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황엽충을 잡아 일으켜 뒷목을 쳤다.
 “컥!”
 “앉아라, 황엽충. 혈을 풀었으니 이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허튼짓을 한다면 당장 죽는다. 그리고 친위대는 이미 몰살됐다.”
 “허억.”
 황엽충은 숨을 들이켰다. 황엽충이라는 이름은 혈랑대 중에서도 친위대의 몇 명만 알고 있었다. 그 외는 그냥 남파라고만 불렀다.
 그런데 침입자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친위대가 몰살했다니?
 친위대 20명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단 말인가?
 그럼 저자 한 명이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황엽충의 등판으로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어느 의적단입니까? 우리를 흡수하려 한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황엽충의 말에 길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적들은 지들끼리는 의적단이라고 한다.
 또 강한 자가 약한 마적단을 흡수해 통합하는 일이 많았다.
 이자도 지금 다른 마적단에서 자신의 마적단을 흡수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길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네가 반항하지 않고 부하들을 무장 해제시킨다면 생각해 보지. 그러나 명심하도록. 허튼 짓을 하면 넌 살아남지 못한다.”
 길산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지자 황엽충은 목이 부러져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당장 부하들을 깨우겠습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기관총좌는 어디에 있지?”
 물론 기관총좌가 대문이 있는 망루에 있다는 것을 양철두의 자백을 통해 이미 길산은 알고 있었다.
 “대문 위의 망루에 있습니다.”
 “좋아, 거짓말은 하지 않는군. 그럼 가자.”
 자리에서 일어선 길산이 황엽충의 목을 찔렀다.
 “윽!”
 목이 뜨끔하더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황엽충은 온 몸에 소름이 듣는 것만 같았다.
 ‘이자는 무서운 고수다!’
 무술에 능통한 자는 혈이라는 것을 찔러 말을 못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겪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황엽충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이런 자 앞에서 만용을 부리다가는 순식간에 황천에 간다는 것을 그는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걸어라.”
 밖으로 나온 길산은 감옥 쪽을 봤다. 반짝거리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라.”
 감방 문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비틀어 버린 길산이 문을 열고 말하자 두 명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한 명은 솜바지에 솜옷을 입은 여인으로 조선독립군이라는 그 여자 같았다.
 다른 한 여인은 값비싼 모피 옷을 입은 여인으로 지방 토호의 딸이거나 고관의 여식 같았다.
 “네가 조선독립군인가?”
 길산의 물음에 양태머리를 한 여인이 깜짝 놀라 쳐다봤다.
 “당신은 누구죠?”
 하지만 길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모젤을 꺼내 던져 줬다.
 “독립군이라면 총을 사용할 줄은 알겠지?”
 “예.”
 총을 쥐자 그녀는 이제야 풀려났다는 것을 실감했는지 얼른 장탄을 했다. 아주 능숙한 솜씨였다.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길산이 황엽충을 끌고 나가려고 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함께 싸우······.”
 하지만 길산은 벌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뒤였다.
 “독호, 어떻게 하겠나?”
 “난 이자를 데리고 망루로 올라가겠다. 넌 지금 밖으로 나가서 대문이 열리면 대원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라.”
 “알겠다.”
 삼살사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날이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달려 나갔다.
 ‘이놈들은 마적들이 아니다.’
 황엽충은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놈들의 말은 결코 마적들이 아니었다.
 ‘누구지? 조선독립군?’
 황엽충은 조선말을 모른다. 하지만 저들이 방금 한 말은 분명 조선말이었다. 얼마 전에 잡혀 왔던 조선독립군의 여자와 비슷한 말.
 그러나 자기를 끌고 가는 이놈은 진정 무서운 자였다. 괜히 반항을 했다가 목이라도 부러지면 인생 끝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지금까지 악착스럽게 돈을 모은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큰 밑천을 잡아 관내(중국 본토)로 들어가면 그 누구도 자신이 마적질을 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관내에서 땅을 사고 부자로 살면 그만이 아닌가?
 그러자면 당장은 이자가 하는 대로 따라야 했다.
 “아니, 남파님. 왜 여기를? 컥!”
 망루에 있던 마적은 황엽충이 올라오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푹 꼬꾸라졌다.
 그건 옆에 있던 세 명의 마적도 마찬가지였다.
 길산의 옆구리에서 번개처럼 뽑혀진 환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으으으······.’
 황엽충은 목구멍으로 가래 끓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을 붙잡은 놈이 무서운 사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자비한 성격인 줄은 몰랐다.
 황엽충은 몸서리를 쳤다.
 “자, 이제 부하들을 비상 소집시켜라. 반항하면 바로 죽일 테니 알아서 하도록.”
 혈이 풀린 황엽충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는 지금 죽을 것 같다는 공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하들? 그런 것들은 애당초 돈을 모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죽든 말든 자기만 살아나면 그만이었다.
 “종은 제가 칠게요.”
 그때 계단 밑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리며 두 명의 여자가 올라왔다.
 감옥에 있던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길산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뒤를 따라오고 있는 그녀들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 처녀가 망루로 올라서자 길산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얼굴이 환해진 그녀가 망루에 있는 종의 끈을 붙잡았다.
 땡땡땡.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소로봉 정상에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비상이다! 마당에 모여라.”
 “빨리 빨리 서둘러!”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마당으로 마적들이 저마다 총을 들고 달려 나왔다.
 “뭐, 뭐야? 적인가?”
 마당으로 달려 나온 마적들은 사방을 둘러봤지만 적은 없었다. 그들의 눈이 종소리가 울리는 망루에 쏠렸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두목인 남파가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발, 새벽에 준비 상태를 검열하는가?’
 ‘개새끼, 똥개 훈련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혈랑대의 남파는 기분이 나쁠 때면 가끔 비상 소집을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제일 늦게 모이는 조는 하루 종일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했다. 조장들이 급해졌다. 늦으면 눈 덮인 산에서 속옷만 입고 벌을 서야 하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들아. 빨랑 움직여!”
 “빨리 줄을 맞추지 못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조장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망루까지 들려왔다. 내려다보고 있는 황엽충은 똥줄이 탔다. 이제 보니 이놈들은 소수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무력으로 밀고 들어왔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소리치고 싶어도 다시 혈을 짚여서 아무리 입을 벌려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독립군.”
 “예?”
 마적들이 마당에 정렬하는 것을 기막힌 눈으로 보고 있던 독립군 군자금 조달대의 대장인 박미정은 화들짝 놀라 길산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맥심 기관총을 잡고 있어서 넓은 등만 보였다.
 “총소리가 울리면 내려가서 대문을 열어.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 대문을요?”
 그러나 그녀에게 대답한 것은 기관총의 둔중한 음향이었다.
 투투투투투투.
 “세, 세상에!”
 박미정은 눈을 부릅떴다. 마당에 정렬해 자신들의 두목을 쳐다보던 마적들을 향해 기관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날벼락이었다.
 “끄악! 으아악!”
 마적들이 손을 휘저으며 무더기로 쓰러졌다. 50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 그 거리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던 마적들은 미처 반항을 할 새도 없었다.
 투투투투투투.
 기관총탄은 추호도 사정이 없었다.
 허공을 잡으려고 버둥거리다 쓰러지는 자, 너무나 다급해서 도망치다가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 엎어지는 자, 머리통에 정통으로 맞아 허연 뇌수를 쏟는 자.
 이곳은 지옥의 도살장이었다.
 “뭐 해, 빨리 대문을 열어!”
 “예? 아, 예!”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넋이 나가 있던 박미정이 사다리를 구르듯이 내려가 달려갔다.
 “언니, 함께 가요.”
 옆에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여인이 박미정을 따라 달려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짚어서 땅에 떨어져 내렸다.
 쿵.
 하지만 그녀는 엉덩이가 아픈 줄도 몰랐다. 그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참혹한 도살극에 온 몸이 중풍이 온 듯 떨렸고, 길산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한시라도 그의 옆에서 떨어질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가고 싶은 것이 그녀였다.
 “어서 와서 나 좀 도와줘.”
 박미정이 통나무로 만든 대문을 안간힘을 쓰며 당기는 것이 보였다.
 “예, 언니.”
 벌떡 일어선 여인은 정신없이 달려가 통나무 문을 당겼다.
 삐거덕.
 처음에는 잘 안 열리던 문이 일단 열리자 갑자기 확 밀렸다. 밖에서 몇 사람이 문을 미는 것 같았다.
 “어마나!”
 “에고고.”
 두 여인이 동시에 양옆으로 나뒹굴었다. 그 순간, 눈보라가 들이닥치며 말발굽 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아~.”
 두두두두두두.
 눈을 번쩍 뜬 박미정은 총과 칼을 든 기마병들이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이미 마당에는 마적들의 시체가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겨우 살아남은 몇 명의 마적이 도망치고 있었다.
 촤악. 촥촥.
 “으악! 아악!”
 그러나 그들도 돌진해 들어온 기마병들이 따라가서 가차 없이 칼로 베어 버렸다.
 “모두 죽였어! 세상에······.”
 박미정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인생에 이처럼 많은 시체를, 그것도 단 몇 분 만에 100여 명의 사람들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이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녀의 눈이 망루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호무적!”
 “독호무적!”
 “우와와와~!”
 기마병들이 총을 들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것만 같았다.
 지금 이곳은 인간도살장이었다.
 피가 도랑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고, 총에 맞아 쏟아진 허연 뇌수와 갈가리 찢긴 시체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의 부하들은 만세를 부르고 있다.
 ‘그래, 저들이 죽이지 않으면 반대로 죽었겠지.’
 조선 독립을 위해 독립군에 들어간 미정이었다. 그런데 싸움판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독립군은 아직까지 이런 대규모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조선인들이 사는 곳에 가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허리에 권총을 한 자루 차고 돌아다니며 독립군에 참가하라고 선동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도 장작림의 군대나 마적들이 나타나면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는 목에 힘을 주고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독립군도 두려워하는 마적들을 마치 파리처럼 쓸어 버렸다.
 그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투, 산채를 수색하라. 세 명씩 조를 지어서. 그리고 총과 탄약은 모두 걷어 모아라.”
 “예, 대장!”
 보갑대 20명 전체가 외쳤다. 그 소리에 산채가 들썩한다. 모두의 얼굴에는 흥분이 어려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연장회도 해내지 못한 일을 보갑대가 했다.
 그들이 한 일은 겨우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몇 명의 마적을 찍어 죽인 것이지만 어쨌든 혈랑대를 몰살시킨 것은 사실이다.
 사다리를 타고 마당으로 내려선 길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투와 도이가 달려들어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독호, 대승이다. 혈랑대를 몰살시켰어. 우리가 말이야.”
 “바투, 우리가 아니라 길산이다.”
 옆에 있던 도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바투가 눈을 흘겼다.
 “자식아, 그거 내가 모르냐? 그래도 이건 학북 보갑대가 한 일이야. 독호는 우리 친구니까.”
 “뭐, 그거야 그렇지.”
 도이가 큰 머리를 주억거렸다.
 “자,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고 안을 수색해. 그리고 황엽충의 방 지하에 돈이 있어. 그걸 꺼내와.”
 “알았어.”
 두 사람은 마당을 쿵쿵 울리며 달려갔다. 길산은 피가 흐르는 마당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들을 죽인 것을 후회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죽이지 않는다면 학북의 사람들은 놈들에게 계속 당하고 살 것이다. 앞으로도 학북의 사람들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치 않을 길산이었다.
 ‘일단 연장회의 첩자가 누군지 알아야겠지.’
 “황엽충, 일어나 나를 따라와라.”
 “예······.”
 길산이 혈을 풀어 줬어도 반쯤 정신이 나가서 앉아 있던 황엽충이 후다닥 일어섰다. 그에게 길산의 음성은 저승사자의 목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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