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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왕기 - 1화

2019.03.21 조회 777 추천 5


 곤왕기 - 1화
 
 
 
 
 
 
 
 
 
 
 
 
 
 
 곤왕기 1권
 
 
 제1장
 
 
 눈이 내렸다.
 송(宋) 노인 말로는 팔십을 넘게 산 자기로서도 몇 번 보지 못한 큰 눈이라 했다.
 주모까지 나서 이런 날씨에 재를 넘는 건 무리라고 말렸지만 홍준(洪俊)은 부지런히 짐을 챙겨 주막을 나섰다.
 “어허, 그놈. 고집도 참. 구륜산(九輪山)에서의 폭설은 호환(虎患)보다 무서운 것이라 했거늘. 조금 늦게 간다고 네 할아비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그리 유난을 떠나그래.”
 송 노인의 타박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홍준은 웃음을 지었다.
 “산길은 눈을 감고서도 다닐 수 있으니 아무 문제없어요, 할아버지.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주머니도요.”
 “쯧쯧, 이놈아. 위험하대도 그러네.”
 혀를 차는 송 노인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 몸만큼 큰 봇짐을 멘 홍준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발을 뚫으며 달리다시피 걸었다.
 홍준은 마음이 급했다.
 송 노인의 말과는 달리 조부는 근래 들어 기력이 부쩍 떨어졌다.
 장에서 호피를 판 돈으로 옥주당(玉柱堂)에서 구입한 보약을 어서 조부에게 복용시켜야 했다.
 황 약사 말로는 이 약 한 첩이면 다 죽어 가는 늙은이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출 것이라 했으니 조부가 이번 거울을 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나서부터 십오 년을 제 집 안마당처럼 다닌 구륜산은 내린 지 반 시진도 안 되어 쌓인 눈 때문에 홍준에게 낯선 풍경을 보여 주었다.
 익숙한 길은 지워졌지만 홍준은 쉽게 방향을 잡았다.
 눈을 감고서도 갈 수 있다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정작 문제는 이미 허벅지까지 쌓인 눈으로 인해 걸음이 갈수록 더뎌진다는 점이었다.
 집이 있는 장선재까지는 날랜 걸음으로도 하루는 족히 걸리는 거리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을 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가던 홍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렇게 가다간 사나흘이 아니라 칠주야(七晝夜)가 걸릴지도 몰라.”
 모종의 결심을 한 홍준의 얼굴이 굳은 각오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홍준은 방향을 틀었다.
 평소에도 사냥할 때 말고는 거의 발을 들이지 않는 흑랑재로 향하는 홍준의 발길은 단호했다.
 흑랑재는 험하기 이를 데 없는 봉우리지만 그곳을 거치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기에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벌써 열흘이나 집을 비웠다.
 기력이 쇠한 조부가 혼자서 밥을 차려 먹을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바쁘게 달려 흑랑재의 깎아지른 절벽 밑에 다다른 홍준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수직으로 뻗어 있다가 중간부터 바위가 밖으로 튀어나온 괴이한 각도를 지닌 운단애(雲丹崖)는 그 덕분에 눈이 침범하지 않았다.
 홍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위를 탔다.
 이백 장에 달하는 운단애의 바위 턱까지 가는데 불과 이각 남짓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빠르게 오른 홍준은 중간에 나 있는 동굴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수백 장 아래로 추락해 몸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위험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 눈이 무너져 버리는 날에는 그에 휩쓸려 뼈도 추리지 못할 게 뻔하다.
 구륜산의 눈사태는 드물지 않다.
 홍준은 오른팔을 뻗어 신중하게 바위 틈새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하나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홍준이지만 다섯 손가락을 걸고도 심장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천장에 붙어 기어가는 도마뱀처럼 돌출된 절벽 아래 부분에 거꾸로 매달린 홍준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전진했다.
 다시 수직의 절벽이 시작되는 지점을 한 뼘 정도 남기고 홍준은 급히 바위에 몸을 밀착시켰다.
 위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소리는 거대한 눈덩이를 달고 내려왔다.
 흡사 하늘 한 귀퉁이가 통째로 무너진 듯 거대한 눈 더미가 공간을 덮으며 쏟아졌다.
 홍준은 바위가 눈사태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무너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손과 발을 박은 바위가 바람에 떨리는 종이처럼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던 눈의 폭풍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멎었다.
 긴 숨을 토해 낸 홍준은 힘을 냈다.
 그러나 그가 한 손을 빼 앞의 적당한 틈에 끼자마자 몸이 기우뚱거렸다.
 바위가 뒤에서 ‘쩍’ 하고 갈라지더니 그의 몸을 싣고 그대로 삼백 장 아래 바닥으로 낙하했다.
 
 
 홍준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평시라면 이 높이에서 떨어지는 건 몸이 산산조각 남을 의미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돌로 된 바닥이 아니라 눈으로 덮인 땅이 그를 맞을 것이다.
 눈이 충격을 완화시킨다고 하더라도 무사하긴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머리와 척추를 보호해야 했다.
 다행히 등에는 두툼한 봇짐이 있다.
 같이 떨어지는 바위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정신을 잃었다가 바위가 얼굴이라도 덮치는 날에는 좋은 꼴을 보기 힘들 테니까.
 몹시 두려웠지만 홍준은 공중에서 가까스로 몸을 돌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거리를 잘 파악해 지면에 닿기 전에 몸을 돌려야 했고 동시에 그를 덮칠 바위에 대비해야만 했다.
 허리춤에서 목곤(木棍) 두 개를 꺼내 든 홍준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계획한 대로 눈으로 된 둔덕에 가까워지자 몸을 회전해 등짐으로 부딪혔다.
 시차를 두지 않고 그의 위에 떨어진 바위를 목곤을 휘둘러 필사적으로 쳐 내며 홍준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홍준을 맞이한 것은 암흑이었다.
 홍준은 자신을 감싼 눈이 흑색 일색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수백 장 아래로 떨어지고도 살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쁠 따름이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홍준은 몸을 꿈틀거려 보았다.
 온몸이 부서진 듯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기적적으로 뼈가 부러진 곳은 없음을 알고 안도한 홍준은 깊은 눈 속에서 자맥질을 하듯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왔다.
 밖은 밤이었다.
 눈이 검은색이 된 것이 아니었다.
 언제 폭설이 쏟아졌냐는 듯 맑게 갠 밤하늘에 초승달이 예쁘게 떠서 홍준의 생환을 반겼다.
 달을 향해 미소를 지어 준 홍준은 서슴지 않고 운단애에 다시 도전했다.
 그의 동체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열다섯에 불과했지만 강철같이 단련된 그의 신체가 고통을 이겨 내고 운단애의 정상에 이른 것은 오른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운단애를 정복하고서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어두운 밤길을 내달린 홍준은 새벽이 밝아 올 무렵 장선재에 도착했다.
 모옥으로 가는 길에 홍준은 흠칫 놀라더니 목곤을 빼 들었다.
 땅을 덮은 백설이 순결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어지럽게 눈을 헤치고 나간 흔적이 확연했다.
 외지고 외진 곳이라 약초쟁이들은 물론이고 사냥꾼들조차 좀체 찾지 않는 이곳에 방문객이라니.
 게다가 하루 동안 내린 대설로 인해 길도 사라진 산중이 아니던가.
 평소 외인을 극도로 경계하던 조부의 성정에 비추어 볼 때 이 난잡한 자국들이 좋은 징조는 아님이 분명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단숨에 모옥으로 달려간 홍준의 눈에 익숙한 마당과 그 마당 한가운데에 누운 낯선 인영이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되는 법.
 홍준은 머리가 잘려 목이 없는 시신의 주인이 조부임을 알아보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부는 왼손 약지와 무명지가 없다.
 정신이 반쯤 나간 홍준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키며 대답을 해 줄 길이 없는 자를 불렀다.
 “할아버지.”
 조부는 홍준이 무공을 드러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가을부터 쇠약해진 조부가 겨울 들어 혼자서는 거동하기도 어려울 만큼 상태가 악화되지 않았다면 홍준은 대호(大虎)를 사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옥주당의 황 약사가 노환을 앓는 이에게 특효라고 자랑한 회춘보양단(回春補養丹)은 약초를 판 돈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비쌌다.
 조부에겐 수련동(修練洞)에 잠시 다녀온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선 것이 열흘 전이었다.
 호랑이를 찾아 잡는 데 이틀이 필요했고, 삼백 리 떨어진 장터까지 가서 호피를 팔고 약을 구입하는 데 다시 닷새가 걸렸다.
 그러고는 밤에도 한 시진밖에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불과 사흘 만에 구륜산에 당도했다.
 그토록 서둘렀건만 정작 보약을 먹어야 할 이가 그사이 차디찬 시체로 변해 버렸다.
 홍준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추슬렀다.
 이렇게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달빛 아래 안력을 돋운 홍준은 몸을 일으켜 사라진 조부의 두부(頭部)를 찾았다.
 구석구석 뒤졌지만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실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홍준은 조부의 사체를 방으로 옮겼다.
 조부가 왼 팔목에 착용했던 강침통(剛針筒)이 그대로인 걸 확인한 홍준은 흉수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임을 알았다.
 아무리 힘이 떨어지고 경황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조부가 강침을 발사할 겨를도 주지 않고 단숨에 머리를 벤 자이다.
 신법을 구사하기엔 무리였겠지만 엄지와 중지만으로 사용이 가능한 강침통을 쓰지도 못하고 당했다는 건 조부를 해한 자가 보통을 훨씬 넘는 무인이란 뜻이다.
 홍준은 조부의 몸뚱이에 절을 하고 다시 안았다.
 평소 조부가 볕을 즐기던 뒷마당의 풀밭을 파 그를 묻는 홍준의 눈에서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폭포가 되었고 초라한 무덤이 완성된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오열을 하며 홍준은 약속했다.
 “소손(小孫) 준, 그자의 머리를 가지고 곧 돌아오겠습니다, 할아버지. 평안히 쉬십시오.”
 목곤 네 개와 철곤(鐵棍) 두 개만을 챙긴 홍준이 정든 모옥을 나선 것은 그가 들어와 조부를 발견한 지 겨우 반 각이 지난 후였다.
 
 
 달이 자취를 감추고 사위가 어둑해지더니 또 눈이 내렸다.
 홍준을 인도하던 눈밭의 흔적이 순식간에 지워져 갔다.
 구륜산 일대는 제 손바닥처럼 환한 공간이었지만 홍준은 한순간 혼잡한 장터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소동(小童)처럼 당황했다.
 무작정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홍준은 잠시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겼다.
 모옥이 있는 장선재는 산길을 헤매다 우연히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흉수(凶手)는 틀림없이 길잡이를 앞세웠을 터였다.
 그의 집을 아는 이는 다 합쳐도 열을 넘지 않았고, 야밤에 눈길을 헤쳐 가며 길을 열 정도로 지리에 밝은 이는 셋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흔적으로 보건대 흉수가 향할 가능성이 큰 곳은 옥주(玉柱)가 아니면 장가촌(張家村)이다.
 옥주에는 길(吉) 노인이 살고 장가촌에는 일대 최고의 사냥꾼 장팔(張八) 아저씨가 있다.
 홍준은 우선 가까운 옥주로 향했다.
 구륜산 자락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옥주엔 스물네 채의 초옥이 있는데 길 노인은 그중 가장 후미진 곳에서 아들 내외와 살았다.
 홍준은 길 노인의 방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그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어르신. 저, 홍준입니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지 길 노인이 즉시 방문을 열었다.
 육십 대에 접어들었지만 팔다리에 젊은이 못지않은 팽팽한 근육을 지닌 길 노인이 걱정스런 음성을 뱉었다.
 “네가 이 시각에 어인 일이냐?”
 어두워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길 노인은 홍준의 숨이 몹시 가쁜 것을 알아차렸다.
 “여쭤 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혹시 오늘 밤 저희 집에 다녀가셨는지요?”
 “이런 날씨에 거기에 갈 턱이 없지 않느냐? 무슨 일이더냐?”
 홍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말 많은 길 노인에게 잡혀 시간을 허비하긴 싫었다.
 장가촌까지는 꼬박 세 시진을 달려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홍준은 지체하지 않고 장팔의 집을 찾았다.
 이름처럼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가촌엔 네 명의 장팔이 있었는데 사냥꾼 장팔은 그중 제일 유명했다.
 힘이 워낙 장사인 데다 사냥 솜씨마저 탁월해서 구륜산 인근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장팔의 집에서 장팔을 불렀을 때 홍준을 맞이한 사람은 그러나 그 장팔이 아니었다.
 “흑곰 아저씨는 어디 갔습니까?”
 장팔의 별명을 대며 홍준이 묻자 이름이 역시 장팔인 사십 대 장한이 대답했다.
 “그 형님은 요 며칠 집에 오지 않았다. 아마 두르기 마을에 있을 게다. 그나저나 이 야심한 시간에 형님은 왜 찾는 게냐?”
 홍준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미간을 모았다.
 “그럴 일이 있습니다.”
 뒤도 보지 않고 떠나는 홍준의 뒤통수로 성의 없는 대답에 기분이 상한 장팔의 욕설이 날아왔지만 홍준의 발길을 잡지는 못했다.
 홍준은 장가촌에서 팔십 리는 더 가야 하는 두르기 마을로 내달렸다.
 내친걸음이었다.
 자그마한 단서라도 얻길 기대하면서 길도 없는 길을 달린 홍준이 두르기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아스라이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혹한의 날씨에 땀으로 범벅이 된 홍준의 발길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도박장과 주루를 겸한 객잔이었다.
 술과 도박을 계집의 속살보다 좋아한다고 소문난 장팔은 홍준의 예상대로 고주망태가 된 채 식탁에 코를 박고 있었다.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지만 홍준은 굳이 장팔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술이 깨려면 따뜻한 실내보단 추운 바깥이 낫다.
 축 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장팔을 홍준이 흔들어 깨웠다.
 “나를 보시오, 아저씨.”
 억지로 깬 장팔은 홍준의 딱딱한 얼굴을 보더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 모습에 홍준은 제대로 짚었음을 알았다.
 “눈을 뜨시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말해 주시오. 어서.”
 
 
 찬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나서 장팔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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