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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

2019.04.01 조회 119,550 추천 1,355


 어두운 미로에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달리던 나는 문득, 추격하는 발소리가 멎은 것을 눈치채곤 이를 악물었다.
 내 추적자들은 무척 끈질긴 놈들이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그들이 추적을 그만뒀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과연. 황급히 랜턴을 들어서 어둠을 쫓아내자 옆구리의 상처가 아주 성대하게 터져있었다.
 내가 지나온 길을 붉게 물들이는 선지피.
 역시 붕대와 지혈제 정도로는 한참 모자랐던 것 같다.
 
 당장 치료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도망이나 치고있다니.
 나는 이번에야말로 죽겠다 싶어서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에 주저앉았다.
 만에하나 기적적으로 출혈이 멎는다 해도 갈 곳이 없다.
 인류는 이미 미로도시의 모든 거점을 잃어버렸다.
 
 '내 주제에 여기까지 버틴게 용했지.'
 
 옆구리의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고 있자, 혁대에 매달려있던 랜턴의 불빛이 자꾸만 깜빡거렸다.
 아마 기름이 다 된 것이리라.
 불빛이 몇 번 더 점멸하더니 이내 암흑이 찾아온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잘게 떨었다.
 반면 선혈을 뿜어대는 상처는 아주 뜨겁다.
 수명이 빠르게 바닥나는 것을 느낀 나는 힘 없이 상태창을 띄워봤다.
 
 '상태창.'
 
 [이주원
 
 레벨 : 74
 랭킹 : 1명 중 1위.
 
 스킬...]
 
 
 이 반투명한 메세지 창은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라 주변을 밝혀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나는 능력치나 스킬 따위에서 눈을 돌리곤 랭킹에 집중했다.
 
 '1명 중 1위라. 이미 나 빼고 다 죽은건가?'
 
 미로도시로 통하는 게이트가 지구에 나타난지 약 10년.
 인류는 결국 모든 거점을 빼앗기고 멸망했다.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사실 나는 매번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죽을 때가 되자 후회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인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역시 베히모스를 너무 늦게 잡은게 컸나? 덕분에 무한평원도 금방 빼앗기고...'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있자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해봤지만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것만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에는 탐험가로서 갈고닦은 감각이 원망스럽다.
 
 그로부터 약 30초 뒤.
 내 심장은 정지했다.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나는 호화롭고 웅장한 건물의 안쪽에서 눈을 떴다.
 
 원형의 재판장에서는 날개 달린 천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 망치를 들고 법복을 입은 천사가 나를 내려다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재판번호 53247번. 미로도시에 남아있던 마지막 인간족의 재판을 시작합니다."
 
 내가 뭘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주변에 늘어선 시선들 중 내 편의 것은 없다.
 변호사는 커녕 검사조차 보이지 않는다.
 판사 복장의 천사가 내 반응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으며 담담히 읊는다.
 
 "피고 이주원은 8년 전 미로 도시에 진입한 뒤로 53인의 동족이 죽도록 방치했으며, 24인의 동족을 직접 살해했습니다. 또한 무한평원의 베히모스를 예정보다 3개월 이상 늦게 사냥했으며 그로인해 인류의 멸망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네? 잠깐만요. 제가 무슨..."
 "정숙하십시오. 비록 2만 마리 이상의 적대적 이종족들을 사냥했으나, 피고의 나태함이 일으킨 결과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관은 이주원에게 구더기로의 환생 137회를 선고합니다."
 
 죽자마자 재판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구더기로 되살아나게 생겼다.
 이놈들이 진짜배기 천사일리는 없지만, 죽은 나를 끌고 온 것으로 보아 그만한 능력을 지닌 것은 확실하다.
 줄기차게 떠들어대던 판사는 그제서야 내게 발언을 허락했다.
 
 "본 판결에 이의가 있으십니까?"
 "제가 베히모스를 잡기 싫어서 안 잡은게 아닌데요?"
 
 나는 아까부터 꾹꾹 눌러담았던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동족 살해 건은 그렇다 쳐도 베히모스를 늦게 잡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꼬투리다.
 평소에 5등급만 받던 학생이 서울대를 들어가지 못했다고 나무라는 꼴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인류 최후의 탐험가였던 것은 맞지만, 결코 최강의 탐험가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운과 요령이 좋았을 뿐.
 나보다 강한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판사는 내 항변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미모를 지니고 있지만 표정과 태도가 차갑다 못해 무기질같다.
 
 "본관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피고 이주원이 미로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만한 능력을 줬습니다."
 "네?"
 
 게이트를 통과한 사람이 기묘한 능력을 각성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나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미로도시에서 8년을 굴렀는데 각성의 각 자도 느끼지 못했다.
 
 애써 인내심을 발휘하는 듯한 표정의 천사가 바보를 타이르듯 말한다.
 
 "저희가 내려준 능력은 창술의 재능입니다. 피고 이주원은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수준의 창술을 선물받았습니다. 창을 대충 휘두르기만 해봐도... 아니, 손에 쥐기만 해봐도 깨달을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정보 전달을 위한 대화가 어느샌가 타박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제서야 천사들의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들은 지구에 게이트를 열고 우리를 불러들인 장본인들이리라.
 
 멍청하기 짝이 없는 타박을 듣자 가시 돋힌 목소리가 나온다.
 
 "어떤 병신이 미로도시에서 창을 씁니까?"
 
 미로도시.
 인류의 마지막 개척지.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곳은 장병기를 휘둘러대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짧고 간편한 칼이나 둔기를 사용하며, 초보자들이 가끔씩 총 따위를 쓴다.
 무한평원처럼 특수한 지형이 아니라면 장병기가 등장할 여지 자체가 없다.
 8년 동안 구르고 구른 탐험가인 내가 창을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을 정도다.
 
 천사는 내 항변을 묵살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녀석은 생명체라기 보다는 일종의 로봇 같은 느낌이라서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는다.
 
 "피고는 베히모스의 대항마로 선택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인류는 멸망하고, 그라운드 제로까지 다른 종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인류에게 투자한 저희로선 경악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결과입니다."
 
 꿋꿋이 내 탓을 해댄 녀석이 그제서야 본론을 꺼낸다.
 미로도시의 투자자 정도 되는 놈들이 그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불러들인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저희는 피고 이주원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거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운명을 완수하십시오. 8년 전으로 돌아가서 미로도시의 끝에 닿으시면 피고에게 선고된 형을 취소해드리겠습니다."
 
 구더기로의 환생과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회귀.
 둘 중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내 표정이 떨리는 것을 본 천사들이 엄중히 경고하듯 덧붙였다.
 
 "피고를 돌려보내는 것은 중대한 규칙위반입니다. 다른 투자자들에게 들키면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겠지요."
 "첫 번째와는 많은 것이 달라질겁니다. 피고 이주원, 자신 있으십니까?"
 "애초에 제가 가장 잘 할 것 같으니까 이렇게 불러들인거 아닌가요?"
 
 내 반문에 침묵으로 긍정하는 천사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봬도 변변한 재능조차 없이 인류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몸이다.
 이번에는 인간을 초월한 재능까지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정확히는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거지만.'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낸 천사들은 지체없이 자리를 옮겼다.
 원형의 재판장이 도미노 마냥 와르르 무너져내리더니 이내 묵직한 디자인의 금고가 나타난다.
 
 은행 건물 하나를 통째로 넣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금고에 보관된 것은 단 하나.
 작고 매끈한 구형의 돌맹이 뿐이다.
 아마 미로도시에서 발견된 아티팩트 중 하나겠지.
 
 "저것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미로도시의 끝에 닿아주십시오."
 
 답지 않은 말까지 해가며 나를 배웅하는 천사들.
 나는 금고의 중앙에 있던 돌을 꽉 쥐곤 시야가 점멸하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말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113)

아녀니    
구데기로 환생하는게 더 편해보이는데...
2019.04.02 16:37
Aassd    
구더기는 싫은 레후..
2019.04.03 18:09
와이카카    
기대하겠습니다
2019.04.03 20:05
와일드볼트    
구더기 환생한다길래 나중에 장수풍뎅이 되서 뿔로 창술쓰는 신선한 전개인줄 알고 기뻤는데 그냥 평범한 회귀물이었어..
2019.04.05 12:24
k6174_bakadlwjddls12    
장수풍뎅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9.04.05 23:06
규류선생    
그냥 회귀물이었네
2019.04.06 04:58
이과혼    
이 아저씨 또 창술이네
2019.04.06 13:13
코끼리피리    
천사들이 알못이네
2019.04.06 15:51
파이로    
멋대로 줘놓고 못알아냈다고 탓하고 구데기만든다고 하다가 기회준다고 과거로 돌아가 다시 하라고 하고 그걸 좋다고 수긍하는 주인공 - 간추리면 이정도인가..
2019.04.13 16:49
hawaawaa    
니들이 직접해!!
2019.04.1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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