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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너무 잘함 1권 (1)

2019.04.08 조회 4,742 추천 23


 #기적
 
 
 테마파크 연극 공연장.
 관객석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환호를 쏟아 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짱 재미있어어어!”
 “최고오오오오!”
 무대에는 인형 탈을 쓴 배우들이 있었다.
 그중 악당 공룡 인형 탈을 쓰고 있는 배우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인사한 후, 무대 뒤 분장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쓰고 있던 탈을 벗었다. 그러자 땀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글서글한 눈.
 뚜렷한 콧날.
 앙다문 입술.
 엄청 잘생겼다고 할 수 없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외모.
 하나, 오른쪽 뺨 주변의 피부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연우야.”
 “네?”
 “오늘도 수고 많았다.”
 연우는 활짝 웃었다.
 “형도 수고 많으셨어요.”
 분명 화상으로 흉진 얼굴이건만, 그 미소는 정말로 멋졌다.
 사람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와, 근데 오늘 연우가 와서 그런가? 아이들 반응 장난 아니더라.”
 “그러게나 말이야.”
 연우가 무대에서 하는 건 간단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해서 꼬리로 건물 소품을 휘젓고, 가면을 쓴 영웅이 나타나면, 그를 수세에 좀 몰다가 얻어맞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데, 신기한 게 있었다.
 다른 배우들이 악당 공룡을 연기하면 아이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연우가 공룡 연기를 하면 아이들이 주먹을 꾹 쥐고 극에 몰입한다는 것이었다.
 “근데 정말 신기하네. 탈 쓰면 누가 연기하는지 알 수도 없을 테고, 표정 연기하기도 어려울 거 아냐.”
 “그러게,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거 아냐?”
 사람들의 시선이 연우에게 일제히 쏠렸다.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단역배우 일을 하거나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이니 그 비법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궁금하세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미소를 씩 지었다.
 “근데 그게 영업 비밀이라서요.”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야유를 터뜨렸다.
 “그 비법을 공개해 달라!”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우우우우우! 같이 먹고살자!”
 연우가 그런 이들을 유들유들하게 상대했다.
 “아니, 맛집에서 비법 공개하는 거 보셨어요?”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려고 하자, 한 남자가 상황을 중재했다.
 “자, 자, 그만들 하고 씻을 사람은 씻고, 갈 사람은 어서 가는 걸로 해요.”
 사람들은 구시렁거리면서 샤워실에 들어섰다.
 연우도 샤워한 후, 머리를 말리고 사복을 입었다.
 그때, 연우의 폰이 울렸다.
 우우우웅.
 폰 화면을 확인하니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당신의 소원을 말하세요. 어떤 소원이든 들어드립니다.
 
 ‘또 스팸 문자네.’
 요새 자꾸 날아오는 문자였다.
 올 때마다 문자를 지우고, 발신 번호도 차단했는데, 문자가 자꾸 왔다.
 ‘무슨 김미영 팀장도 아니고.’
 연우가 투덜거리며 스팸 문자를 지우려고 할 때였다.
 한 문자가 날아왔다.
 
 -꽐라 형 : 오늘 만나기로 한 거 까먹지 마라.
 
  * * *
 
 명동 이자카야 술집.
 연우는 상당히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에 많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미리 시켜 놓으라 했으면 일찍 와야 할 거 아냐.”
 연우가 투덜거리던 그때였다.
 수상한 차림새를 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이렇게 입으니 누군지 모르겠지?”
 연우는 상대를 바라봤다.
 커다란 볼 캡, 선글라스, 흰 마스크.
 정말 수상한 차림새다.
 “누군지 몰라보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선 엄청 받기 좋은 패션인데요. 모자만 써요, 선글라스랑 마스크는 빼시고요.”
 그는 연우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쳇. 선글라스는 ‘엣지’의 상징인데.”
 그의 정체는 톱스타 송주혁이었다.
 요새 최절정 인기를 달리고 있는 주연배우.
 “근데 용케도 약속 안 잊어 먹었다? 평소에 시간 그리 안 난다더니······.”
 “저 대학생이잖아요. 지금 휴학해서 시간 나는 거고요.”
 “야! 누가 보면 네가 연예인인 줄 알겠다.”
 “대한민국 대학생이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참으로 뻔뻔한 대꾸.
 송주혁이 어이없는 미소를 흘렸다.
 “참 나, 그럼 내가 지금 전국에서 가장 바쁜 대학생을 만나고 있는 거야?”
 “네, 그렇죠.”
 “됐고, 인마, 요새 뭐 하면서 지내냐?”
 “그냥 아르바이트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아르바이트?”
 “뭐, 이런저런 거요.”
 연우와 송주혁은 서로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소주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짠!
 소주잔에 소주가 따라지고 비워지고를 반복했다.
 송주혁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지만, 연우는 끄떡도 없었다.
 “크! 너 진짜 술 세다.”
 “이제 겨우 석 잔째인데, 술 세고 할 게 뭐 있어요?”
 연우가 그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무슨 고민이 있어서 절 부른 거래요?”
 “고민이 있어야 꼭 만나나? 보고 싶어서 만나는 거지.”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야, 야, 기다려 봐! 그게 말이야······.”
 송주혁은 자기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연우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충분히 고민될 만하네요. 그럴 때는······.”
 송주혁은 연우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와, 덕분에 막혔던 게 뚫렸다! 넌 역시 최고야!”
 그가 엄지를 척 내세우는 것도 잠시 울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요새 연기하는 게 정말 심심하네. 날 끌어 줄 실력을 지닌 배우가 없어.”
 연기라는 건 상대 배우와 합을 나누며 호흡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상대의 연기력이 나쁘면 이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대단히 힘들다.
 주연들이 괜히 명품 조연 배우를 찾는 게 아니다.
 “너만 한······. 아니, 말을 말아야지.”
 연우는 쓴 미소와 함께 소주를 마셨다.
 잠시 후, 송주혁은 인사불성이 된 채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우리 연······우 진짜 개쩌는데······ 사람들이 안 ······.”
 연우가 혀를 쯧쯧 찼다.
 “술 마시려면 곱게나 마시지. 진상이야, 아주.”
 말과는 달리 그를 바라보는 연우의 눈빛은 따뜻했다.
 
  * * *
 
 30분도 채 되지 않아, 가게에 한 남자가 도착했다.
 송주혁의 매니저 이승환이었다.
 연우는 그와 함께 송주혁을 가게 주변에 주차된 밴에 끌고 간 후, 짐짝 싣듯 태워 버렸다.
 이승환이 연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우 씨, 죄송해요. 매번 이렇게 실례해서······.”
 “에이, 아니에요. 형이 저 만나려고 이렇게 시간 내는 건데, 저야 고맙죠.”
 연우는 송주혁이 자기의 조언으로 큰 성공을 거뒀기에 그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고맙다.
 요즘 세상에 자기가 성공을 거두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그는 그러지 않으니까.
 연우가 말했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이승환이 연우를 불렀다.
 “아, 그나저나 연우 씨.”
 “예?”
 “지난번에 부탁했던 거 말인데······.”
 그가 말한 부탁이란, 자기네 소속사 아이돌이 배우를 준비하는데, 그걸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연우는 딱 잘라 거절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시잖아요, 저 주혁이 형만 도와주는 거.”
 이승환은 아쉬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래도 혹시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연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잠시 후, 벤이 출발했다.
 연우는 차가 서서히 사라지는 걸 보고는 자취하는 원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알딸딸해서 그런가? 기분이 좋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연우는 사거리에 서서 신호등 신호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 연우의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바로 최고층 빌딩 위 대형 광고판에서 멋들어진 포즈를 잡은 남자 배우였다.
 연우는 그가 정말로 부러웠다.
 ‘와, 비교되네.’
 누구는 저렇게 얼굴을 드러내 놓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다른 누구는 인형 탈을 쓰는 얼굴 없는 배우에 불과할 뿐이고.
 또, 누구는······.
 ‘나도 저런 스타가 될 줄 알았는데.’
 어릴 때 연기를 우연히 시작했지만, 연기에 곧장 흥미를 느꼈다.
 또 정말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에 업계에서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그렇게 배우 일을 쭉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고로 얼굴에 정말 흉한 화상을 입게 됐다.
 이는 배우에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일.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받아 보지 않은 치료가 없었다.
 그러나 다 실패.
 그에 굴하지 않으려고 오디션도 다 봤다.
 그것도 죄다 탈락.
 그렇게 배우를 그만둬야 했고 그렇게 연예계를 떠났다.
 한데, 배우에 관한 미련은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테마파크에 가서 인형 탈을 쓰고 연기하는 것이고, 송주혁이 연기를 봐 달라고 하면 그의 연기를 봐주는 것이었다.
 ‘배우로 정말 성공하고 싶은데······.’
 그때 폰이 진동했다.
 폰 화면을 바라보니 스팸 문자가 또 와 있었다.
 
 -당신의 소원을 말하세요. 어떤 소원이든 들어드립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문자.
 그런데 지금만큼은 다르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마음이 울적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소원이라······.’
 연우는 입가에 미소를 피식 그리며 액정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얼굴이 낫고 싶고, 월드 스타가 되고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 * *
 
 원룸에 도착한 연우는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고 기묘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이란 끝없이 펼쳐진 뭉게구름 위를 쉬지 않고 걷는 것이었다.
 한데 신기한 게 있었다.
 지금 그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생히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니 정말 커다란 구슬 하나가 중간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 구슬은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연우는 그 빛에 이끌리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구슬에 다가가 손을 대는 순간!
 게임에서 볼 법한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의 간절한 소원이 접수되었습니다.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째 소원을 위해 특별한 능력이 발동될 것입니다.
 
 연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그때 연우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연우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허억! 허억······!”
 거친 호흡과 함께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다.
 조그마한 공간, 침대, 수납장······ 그간 익히 보아 오던 자신의 방이었다.
 연우는 하하 웃으며 투덜거렸다.
 “와, 개꿈도, 무슨 이런 개꿈을······.”
 한낱 개꿈이라 치부하기에는 정말 이상했다.
 너무나도 생생했으니까.
 “아, 씨, 식은땀 흘린 거 봐.”
 어찌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몸이 홀딱 젖어 있었다.
 연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다 벗은 후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샤워기에 물을 틀다 거울을 본 순간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거울 속에 그간 보아 온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웬 낯선 남자의 얼굴이 보여서.
 그러나 연우가 그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평생 보아 왔던 자신의 얼굴이었으니까.
 “이, 이게 무슨······?”
 지금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제 얼굴을 한번 만져 봤다.
 “······!”
 거울에 비친 뽀얀 얼굴처럼 십수 년 동안 일그러져 있었던 피부가 매끈해져 있었다.
 ‘어, 어째서?’
 연우는 혼란에서 빠져나와 집 근처에 있는 피부과 병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 * *
 
 “허억, 허억······!”
 연우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병원 입구에 들어섰다.
 데스크 쪽에 있던 간호사가 연우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저기, 이런 말 하면 정말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요. 제가 어릴 때 얼굴에 정말 심한 화상을 입었거든요. 어느 정도냐면 피부가 완전히 일그러질 정도였는데······.”
 연우는 말끝을 잠깐 흐리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하룻밤 만에 화상 자국이 사라졌어요.”
 “예?”
 “듣기에 정말 이상하죠? 근데 하루아침 만에 사라졌다니까요.”
 “일단 진정하시고요.”
 “아, 예, 진정하도록 할게요. 후······.”
 간호사가 말했다.
 “화상 흉터가 어떤가에 따라 다를 수 있긴 한데, 그 정도로 심하면, 하루 만에 사라질 리 없죠.”
 “그렇죠. 저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 버려서······.”
 “음. 그럼 피부 검사하러 오신 거죠?”
 “아, 네.”
 일단 냉수부터 한잔 마시기로 하고, 진료표를 대충 작성했다.
 잠시 후, 연우는 간호사와 함께 피부관리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피부 확대경을 연우의 얼굴 오른쪽 부근에 대고는, 화면을 살피며 말했다.
 “화상 입은 흔적이 아예 없는데요?”
 “없다고요?”
 “네.”
 그 단호한 대꾸에 연우는 당황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 후, 병원에서 나온 연우는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혹여나 진단이 잘못된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다른 병원에서 똑같은 답변을 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연우는 원룸으로 돌아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와! 십수 년이나 있었던 화상이 어떻게 하룻밤 만에 사라질 수 있지?’
 자취방에 도착할 즈음 꿈에서 봤던 메시지 창이 불현듯 뇌리에서 떠올랐다.
 
 -첫 번째 소원은······.
 -두 번째 소원을 위해······.
 
 ‘그래, 분명 소원이라고 했어!’
 연우의 시선이 쥐고 있던 폰으로 향했다.
 폰을 켜서 문자 함을 확인해 보니 스팸 문자가 있는 건 여전했다.
 
 -당신의 소원을 말하세요. 어떤 소원이든 들어드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원을 빌었다고 해서 소원이 그냥 이루어질 리 없잖아!’
 그때였다.
 연우의 눈앞으로 웬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꿈속에서 봤던 메시지 창과 똑같은 형태였다.
 
 -당신은 한 시대에서 한 명만 선택받는 ‘시대의 선택’을 받으셨습니다.
 
 놀랄 것도 없었다.
 화상 자국이 멀쩡히 사라진 것에 엄청 놀랐으니까.
 다만 머리가 조금 아파져 올 뿐.
 
 -시대의 선택을 받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에 계속 도전해야 할 것.
 -누구보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자기만의 독보적인 길을 걸어가려고 할 것.
 
 연우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 조건을 통과했기에 시대의 선택이란 걸 받았고, 내 소원을 이룰 기회가 생겼다는 건가?’
 영화나 소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 얼떨떨하고 황당했지만, 어쨌건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 여기서 생각을 더해 봤자 머리만 아프니까.’
 연우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릿속이 명쾌해진다.
 ‘그나저나 특별한 능력이 발동된다고 했는데.’
 특별한 능력이라고 하니 괜스레 기대되기는 한다.
 ‘비행하는 거나 투명화나 뭐 그런 초능력 같은 건가?’
 그때, 연우의 시선이 책상 구석 쪽에 있는 대본집에 닿았다.
 그러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싱크로율 : 6
 -싱크로율 : 5
 -싱크로율 : 4
 
 ‘싱크로율?’
 연우의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싱크로율 : 배우와 배역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볼 수 있으며, 싱크로율이 높을수록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연우는 이 싱크로율이 지닌 가치를 곧장 알아봤다.
 ‘대······박이다!’
 배우들이 작품을 고를 때, 가장 먼저 고심하는 게 바로 배역이다.
 일단 캐릭터가 통통 튀어야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자신도 돋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배우들이 일단 좋고 멋진 캐릭터를 찾는 것에 혈안 되어 있는 것이다. 톱스타는 더더욱 그렇고.
 ‘그나저나 이거 다른 사람의 싱크로율도 볼 수 있으면 더 대박일 텐데.’
 물론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다.
 ‘일단 이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이를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테마파크 공연장.
 
  * * *
 
 테마파크 연극 담당 여직원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연우 씨의 사촌 동생이라고요?”
 “네.”
 연우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간만에 형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무척 아프더라고요.”
 “아. 저도 전화로 목소리 들었을 때, 많이 아프신 거 같더라고요. 몸은 좀 어떻대요?”
 “다행히 이제 열은 좀 가라앉아서······.”
 “그거 다행이네요.”
 그녀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녀가 고민하는 건 연우가 전화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저 대신 사촌 동생이 갈 건데, 정말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한번 맡겨 보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알겠어요.”
 연우는 입가에 미소를 씩 그리며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멍한 표정을 잠깐 짓고는 말했다.
 “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예?”
 “연우 씨 웃는 거랑 너무 닮아서요.”
 연우가 하하 웃었다.
 “그런 말 저도 많이 들어요. 그나저나 공연장 어디에 있나요?”
 “아.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때마침 갈 일이 있기도 하고요.”
 연우는 그녀와 함께 공연장으로 향하던 도중 고개를 갸웃했다.
 여직원이 곁눈질로 연우의 얼굴을 자꾸 훑어봤기 때문이었다.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연우는 화상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제 외모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변했는지 몰랐다.
 ‘뭐, 못생긴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게 공연장 대기실로 곧장 향했다.
 잠시 후, 연우는 대기실에 도착한 배우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워했다.
 “어? 어? 어?”
 “화상이 어떻게 사라졌지?”
 “여, 연우 씨 맞아?”
 여직원이 대신 대꾸했다.
 “연우 씨 사촌 동생이래요!”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심했던 화상 자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으니까.
 “와, 사촌 형을 진짜 많이 닮았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돈데?”
 “하긴 연우일 리가 없지······.”
 누군가가 말했다.
 “근데 연우 씨가 빠져도 괜찮을까?”
 “그러게, 애들 반응 또 안 좋으면 큰일인데······.”
 “메인이 빠지면 어떡해?”
 사람들이 걱정하자 여직원이 말했다.
 “연우 씨가 동생분 실력은 확실히 보장한대요.”
 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 씨가 그리 말했다면야······.”
 “뭐, 걱정은 없겠네.”
 “연우 씨 사촌 동생분, 오늘 공룡 연기 잘 부탁할게!”
 연우는 사람들의 말에 가슴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헛살지 않았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은 고까운 눈길로 연우를 바라봤었다. 한데 어떤 연기든 최선을 다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하면서 붙임성도 좋으니 사람들이 마음을 연 것이었다.
 사무실 여직원이 대본집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자, 자, 이제 공연 준비도 해야 하니까 각자 소품이랑 인형 탈 잘 챙기세요. 그리고 각자 대본 나눠 드릴게요.”
 사람들이 그녀가 나눠 주는 대본집을 집어 드는 순간, 그들 머리 위로 싱크로율이 떠올랐다.
 ‘오, 다른 사람 싱크로율 수치도 볼 수 있구나!’
 연우는 사람들의 싱크로율 수치를 바라봤다.
 일단 건물 소품을 들고 있는 남자는······.
 
 -싱크로율 : 1
 
 토끼 인형 탈을 들고 있는 여자의 경우······.
 
 -싱크로율 : 2
 
 가면 영웅을 연기하는 단역배우의 경우······.
 
 -싱크로율 : 4
 
 그리고······.
 악당 공룡을 연기하는 연우의 싱크로율은 5.
 ‘역시.’
 연우의 연기가 아이들에게서 호응이 좋았던 것은 비단 연기력 때문이 아닌 듯했다.
 싱크로율이 높은 배역을 맡은 것도 한몫한 모양이었다.
 ‘배역 고를 때 이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정말 좋겠다.’
 연우는 공룡 인형 탈을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이제 여기서 연기를 더 할 필요는 없겠지.’
 얼굴에 입은 화상 때문에 배우 일을 그만두기 전, 정말 많은 오디션을 봤다.
 그때마다 차가운 시선이 돌아왔다.
 사실 인형 탈을 쓰고 연기하게 된 것은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얼굴도 나았고 능력까지 생겼다.
 인형 탈을 더는 쓸 필요가 없을 터.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 탈을 뒤집어썼다.
 ‘그래, 오늘 공연을 끝으로 여기는 그만둬야겠어.’
 
  * * *
 
 연우는 백스테이지에 선 채,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들의 눈에서 보자면 유치한 공연.
 그러나 관객석에 있는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공연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무대 위로 으스스한 음악이 깔리고, 포그 머신에서 안개가 흘러나왔다.
 ‘내가 등장할 순간이구나.’
 연우는 몸을 뒤뚱거리며 무대에 등장했다.
 무대 천장에 달린 보더 라이트(Border light)에서 붉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파아아아아앗!
 연우가 관객석 쪽을 힐긋 바라보자, 아이들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마 붉은빛에 휩싸인 악당 공룡을 보고 있을 터.
 이내 연우는 아이들을 향해 머리를 크게 들썩거리고는 소품들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휙!
 다른 사람이라면 꼬리를 대충 휘둘렀을 것이다.
 이딴 어린이들이 보는 공연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연우는 악당 공룡에 완전히 빙의하며 꼬리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건물 소품이 와르르 무너지고, 토끼 탈을 쓴 사람이 바닥에 굴렀다.
 긴장감이 절로 자아졌다.
 어린아이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윽고 가면 영웅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곧장 연우의 발에 깔렸다.
 그것도 그냥 깔리는 게 아니었다.
 처참하게 깔려, 질근질근 밟혔다.
 연우는 승리자라도 된 것처럼, 팔짱을 끼고 몸을 크게 들썩들썩했다.
 그 얄미운 행동에 아이들은 극에 감정이입을 잔뜩 하고는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우! 악당이다!”
 “나빠!”
 “나쁜 놈이다!”
 연우는 어깨를 능청스레 으쓱였다.
 아이들의 야유가 더 짙어졌다.
 이윽고 연극 공연이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영웅이 일어서려고 할 때,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그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연우는 그를 피해 몸을 재빨리 움직이려고 했지만, 인형 탈을 쓰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아, 나 잡으면 안 되는데.’
 인형 탈을 착용한 상태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건 대단히 힘들다.
 누군가를 지탱할 여력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영웅 가면을 쓴 배우가 연우를 붙잡고 넘어졌다.
 연우의 몸도 기우뚱했다.
 그때 연우의 귓가로 사람들이 탄식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아아아아······.”
 “무, 무슨······!”
 연우는 바닥을 짚고 무게중심을 재빨리 잡으려고 하는데 머리가 허전한 걸 느꼈다.
 ‘설마······.’
 앞을 바라보니 공룡 인형 탈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미, 미친······!’
 연우가 관객석을 바라본 순간, 머릿속이 그만 텅 비어 버렸다.
 아이들이 무어라 소리치는데, 연우의 귓가에 이렇게 들려왔다.
 
 -와! 얼굴 병신이 연기한다!
 -나 같으면 연기 때려치우겠다.
 -독한 새끼, 언제까지 연기하고 있나 보자.
 
 연우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입술이 툭 터지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다이노소! 사, 사람이었어?”
 “다이노소 악당인 줄 알았는데······.”
 “엄마! 엄마! 탈이 벗겨졌어!”
 연우는 시선을 돌려 이 사태를 유발한 장본인을 바라봤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네가 이 모든 걸 수습해야 하는 역할인데, 사고를 일으키면 어떡하냐!’
 마음 같아서는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젠장!’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 연기를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 뿐!
 ‘내가 여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곳은 처음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하나 연우가 이곳에 와서 연기를 열심히 하면서 소문이 점차 퍼졌고, 사람도 점점 찾아오게 됐다.
 더군다나 오늘의 공연을 끝으로 연우는 이곳을 그만둘 생각이다.
 고작 이딴 사고로 마지막 공연이 망하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던 그때, 기막힌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 그거다!’
 
  * * *
 
 ‘어휴, 내가 왜 이곳에 와야 하는 거람?’
 캐스팅 에이전트 액터 스타즈 소속 캐스팅 디렉터 한예리는 툴툴거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건 테마파크로부터 한 요청이 들어와서다.
 그 요청이란 자기네 공연 규모를 늘려 갈 예정이라 배우들이 필요한데, 적당한 배우들이 있으면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즉, 그녀의 할 일이란 공연 규모를 조사하고 배우들을 몇 명 뽑으면 되는지 계산하는 것이었다.
 ‘힝, 내가 하고 싶은 건 현장 실무인데.’
 별수 없다.
 2년 차 신입인데,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어? 관객들 수가 꽤 되잖아?’
 어린아이들이 보는 공연에 어째서 이런 많은 사람이 오는지 그녀는 궁금했다.
 그 이유가 어째서인지는 공연이 시작되고 난 후, 한 배우가 등장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와, 저 공룡 탈 쓴 배우 연기 되게 잘하네.’
 동작 하나하나가 간결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그녀는 아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이 공연이 인기 많나 보구나!’
 어느새 그녀 또한 아이들과 같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렇게 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악당 공룡 탈을 쓴 배우의 머리에서 탈이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 냈다.
 “아아아······.”
 정말 안타까웠다.
 인형 탈이 벗겨지는 건 인형극에서 치명적인 사고나 다름없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공연이 이대로 끝날 줄 알았다.
 한데 이상한 게 있었다.
 그녀가 주목하던 배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 것이다.
 ‘설마?’
 
  * * *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뭐야? 사고인가?”
 “공연 중단된 거 같은데?”
 “아, 괜히 보러 왔잖아!”
 “에이, 씨! 시간 내며 보러 온 건데!”
 몇몇 이들은 짜증을 내며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들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인형 탈이 벗겨진 배우가 허리를 숙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당황한 건가?”
 “머리 탈 주워서 쓰려고 하는 거 아냐?”
 이내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남자가 인형 머리통을 앞에 두고서, 무언가 찾으려고 하는 걸 보고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 와중에 연기하려는 거야?”
 “와. 진짜 대단하다······.”
 사람들은 이채 어린 눈길로 배우를 바라봤다.
 저 배우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기대가 된 것이다.
 그 시선의 주인공인 연우는 속으로 웃었다.
 ‘사람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어!’
 탈을 곧바로 쓰지 않는 건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는 지금 이 상황을 절대 수습하지 못하니까.
 그때, 한 남자아이가 외쳤다.
 “저쪽에 인형 탈 있어요!”
 연우는 그 음성을 듣고서도 들리지 않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바로 앞! 더 앞이요!”
 연우는 손을 더듬더듬하다 남자아이가 말해 준 곳을 짚었다.
 물론 엉뚱한 곳이었다.
 “여긴가?”
 아이가 답답해하며 말했다.
 “거기 말고! 바로 앞에요!”
 이번에도 엉뚱한 곳을 짚었다.
 “여기도 아닌가?”
 “거기 말고······!”
 “정말 이상하네······. 내 머리 어디 있는 거야!”
 연우가 생각한 방법이란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한편 지금 상황을 코믹하게 끌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나서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난 것이다.
 “저기요! 저기!”
 “저기에 있다니까요!”
 “잘 좀 봐 봐요!”
 “아, 여기?”
 이번에는 연우는 손을 제대로 짚었다.
 한데 인형 머리통이 손에 툭 맞고 나가떨어졌다.
 연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외쳤다.
 “이봐! 친구! 여기 있다면서!”
 웃기게도 인형 탈 머리통은 연우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모두가 아는데 연우만 모르는 상황.
 사람들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바보다! 바보!”
 “푸하하하핫!”
 “와, 대박이다. 진짜!”
 연우는 투덜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어른 관객들은 지금 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몇몇 아이들은 연우가 진짜 모르는 줄 알았다.
 “거기 아래에 있어요!”
 “아래!”
 연우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지 않고, 좌우를 둘러봤다.
 아이들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래! 아래!”
 “아래 있다니까요!”
 “우리 말 좀 들어 봐요!”
 그제야 아이들의 말에 반응하는 연우.
 “아, 아래에 있나?”
 고개를 아래로 향하기 전에, 발로 인형 탈을 툭 차 버렸다.
 물론 티가 나지 않게 찼다.
 연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인형 탈은 없었다. 이번에 인형 탈이 굴러간 곳은 연우 옆이었다.
 연우는 머리를 헝클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진짜 내 머리 어디 있는 거야!”
 그 우스꽝스러운 연기에 장내에 있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연우는 슬랩스틱코미디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패턴을 이미 두 번 바꿨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그 패턴에 익숙해진 상황.
 패턴을 바꿔 봤자, 똑같은 상황에 불과하니 금세 흥미를 잃을 게 뻔했다.
 ‘이쯤이면 됐다!’
 연우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걸 알고는 두 손을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이거 참, 내 머리 탈을 찾아야겠는데,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 거 같고, 누가 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연우가 관객석 쪽을 넌지시 바라보자,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연우는 한 젊은 부부와 함께 있는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그 아이는 맨 처음 연우에게 말 걸었던 씩씩한 남자아이였다.
 “거기 씩씩하면서 잘생긴 어린 친구,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남자아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에 쏠리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 지훈이요!”
 연우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훈아, 지금 머리 탈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네 눈에는 보이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같이 찾아볼까?”
 “네!”
 연우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무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때, 관객석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손뼉을 쳤다.
 짝. 짝.
 사람들이 손뼉을 따라 쳤다.
 짝. 짝. 짝.
 인형 탈을 찾는 건 금방이었다.
 연우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하이파이브!”
 아이가 연우의 손을 향해 하이파이브했다.
 짝!
 연우가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장내에 있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연우의 미소가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남자아이를 무대로 보낸 후, 머리 탈을 쓰고는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 고마워요! 덕분에 악당으로 잘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 능청맞고 익살맞은 연기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와, 대박이다, 진짜!”
 “거참, 연기 맛깔나게 잘하네!”
 이윽고 공연이 다시 시작됐다.
 끝나는 건 금방이었다.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와아아아아아!”
 “진짜 멋지다!”
 “최고오오오오!”
 연우는 그 박수갈채를 들으며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해냈구나!’
 처음에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야겠다는 위기감에서 연기를 시작했었다.
 한데 어느 순간 연기를 즐기고 있었다.
 ‘얼굴 드러내 놓고서도 연기 잘하잖아!’
 물론, 화상 자국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곧바로 펼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나 연우는 그간 연기를 펼칠 때마다 돌아오던 차가운 시선과 계속 싸워 왔다.
 또 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다듬어 왔다.
 즉, 불굴의 의지와 그간 해 왔던 노력이 위기의 상황과 만나자 극적인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연우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는 걸 느꼈다.
 ‘아아아, 내가 해냈어!’
 입에서 환호가 절로 터져 나왔다.
 “으와아아아앗!”
 지금의 이 무대 영영 잊을 수 없을 거 같았다.
 배우 이연우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기에.
 연우가 기뻐하는 것도 잠시 연극 공연 배우들이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연우 씨! 정말 최고야!”
 “그 상황에 어떻게 그 생각을 한 거야!”
 “진짜 연기의 신이야! 연기의 신!”
 연우를 껴안던 사람들은 연우의 얼굴을 보고 주뼛거렸다.
 “아, 참. 연우 씨 아니지.”
 “미안해요.”
 “물론 말도 안 되긴 한데, 진짜 연우 씨인 거 아니지?”
 연우는 그들에게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어떻게 연우 형이겠어요.”
 연우는 이들에게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설령 말해 주더라도 그건 먼 훗날일 터.
 그때 한 여자가 다가와 말 걸어 왔다.
 “저기 안녕하세요.”
 연우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봤다.
 ‘아까 남자아이를 무대로 데려올 때, 박수를 보냈던 여자네.’
 여자가 말했다.
 “연기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일단 제 소개부터 드려야겠네요.”
 여자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명함이 어디 있더라······. 어? 잠시만요.”
 가방 구석을 뒤적뒤적하며 명함을 찾기 시작하는데, 기다리고 있자니 한참 걸릴 거 같았다.
 연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와. 연우 씨 사촌 동생 여기서 일해도 될 거 같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연우는 하하 웃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연우 형이 있는데, 그건 좀 그렇네요.”
 오늘로 테마파크 공연을 그만둔다는 연우의 결심은 변함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연기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더더욱.
 그때 사무실 여직원도 연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와. 아까 가슴이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공연 컷할 수도 없고······. 진짜 난감했는데 정말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저도 정말 깜짝 놀라는 바람에······.”
 연우가 사람들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즈음, 가방을 한참 뒤적거리던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와 명함을 내밀었다.
 “저, 저기!”
 연우는 명함을 받고는 힐긋 바라봤다.
 
 -캐스팅 에이전트 액터 스타즈
 -Casting Director 한예리
 
 ‘오, 여기는!’
 연우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송주혁에게서 독특한 시스템을 지닌 캐스팅 에이전트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예리가 말했다.
 “혹시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일해 볼 생각 없으세요?”
 연우가 대꾸했다.
 “한번 생각해 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 * *
 
 연우는 테마파크 사람들이 뒤풀이하자는 걸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왕 작별하는 거 미련도 남기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목표를 향해 다시 달려갈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낫고, 능력도 얻었고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당당히 펼칠 수 있는 것도 확인했으니, 꿈을 향해 곧바로 달려가는 건 당연지사!
 문득 연우의 시선이 대본집으로 향했다.
 
 -싱크로율 : 6
 -싱크로율 : 5
 -싱크로율 : 4
 
 ‘싱크로율을 볼 수 있는 이 능력 최대한 활용해야 해.’
 그리고 이 능력이 정말 극대화될 때는 바로 오디션을 볼 때다.
 연우가 지금 생각하는 오디션은 딱 두 개다.
 엔터테인먼트 소속사 오디션.
 작품 배역 오디션.
 ‘일단 소속사 오디션은 푸시를 고려하자면 중견급 이상을 봐야 해.’
 그러나 중요한 건 소속사 오디션을 보는 게 아니다.
 바로 오디션을 통과한 이후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신인 배우에게 오는 기회는 없어. 설령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자사 아이돌에게 기회가 먼저 가겠지.’
 요즘에 배우가 되고 싶으면 아이돌부터 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마디로 아이돌 전성시대다.
 ‘아이돌 배우가 판치는 촬영 판에서 신인 배우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물론 ‘끼워 팔기’라는 게 있다.
 소속사 주연배우가 작품에 들어가면 TO가 생기는데, 그 주어진 자리를 통해 들어가는 거다.
 소위 ‘꼽사리’.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촬영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주연이나 조연 오디션을 보는 건······.’
 이것도 과감히 패스다.
 한때 유명했던 아역 배우에게 주연과 조연을 줄 정신 나간 감독과 PD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남은 건 딱 하나!
 연우의 시선이 아까 받은 명함으로 향했다.
 연우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명함 하나 받았는데요.”
 
 
 #시작하다
 
 
 다음 날 오후, 액터 스타즈 앞에 도착한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캐스팅 에이전트계의 공룡답네.’
 건물의 층수는 무려 10층이나 됐다.
 일반적인 캐스팅 에이전트라면 이 정도의 규모를 지닐 수 없다.
 ‘대부분의 캐스팅 에이전트는 단역배우들만 작품에 꽂는 아웃소싱 업체이기 때문에 열악할 수밖에 없지.’
 그러나 이곳의 경우 높은 수익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톱스타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몸값이 높은 배우들이 바로 이곳, 액터 스타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건 한 시스템 덕분이지.’
 그 시스템이란 바로 등급 시스템!
 ‘등급은 연기 실력에 따라 A, B, C, D, E로 나누어지지.’
 단순히 이 등급 분류 때문에 잘나가는 게 아니었다.
 바로 캐스팅 우선권이라는 특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보통의 우선권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감독이나 PD의 작품에 100% 들어갈 수 있는 티켓!
 물론 이 티켓은 아무나 거머쥐지 못한다.
 인기가 많아야 하는 건 물론 뛰어난 연기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액터 스타즈에서 일하는 배우들은 어떻게든 상위권에 들려고 기를 쓴다.
 ‘이 때문에 액터 스타즈는 배우계의 용병 회사라고 불리기도 하지.’
 그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건 간단하다.
 연기 실력을 기르고, 유명해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연우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뛰어난 연기 실력과 배짱이 있기에.
 ‘그래,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연우는 당당한 포부와 함께 액터 스타즈에 씩씩하게 들어선 후, 304호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한 여자 직원이 연우를 바라봤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한예리 씨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이리 오시면 됩니다.”
 연우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접견실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한예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도왔다.
 “아, 감사합니다.”
 책상에 상자를 올려놓는데, 묵직한 소리가 났다.
 “이게 어제 이야기한 대본집이죠?”
 “네.”
 연우는 상자 안에 제법 많은 대본집이 들어 있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걸 어떻게 하루 만에 준비한 거지?’
 그녀와 통화를 끝낸 게 어젯밤이었다.
 한나절이 지나긴 했지만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터였다.
 한데 이를 준비했다는 건······.
 연우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제와 다르게 생기가 없어 보이고 눈밑이 퀭했다.
 ‘밤샜나 보구나.’
 연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거 성의를 봐서라도 이따 피로 회복제 하나 사 줘야겠네.’
 물론 고생한 거랑 그녀와 함께 일하는 건 별개다.
 “일단 영화랑 드라마 위주로 챙겼어요. 보시면 알겠지만 다 따끈따끈한 신작이고요. 장르도 다양해요!”
 “한번 읽어 봐도 될까요?”
 한예리가 흔쾌히 대꾸했다.
 “그럼요!”
 아마 그녀는 연우가 대본을 왜 보려고 하는지 100% 이해 못 할 것이다.
 일단 연우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한번 읽어 보라고 하는 것일 터.
 연우는 상자에서 대본집을 하나하나 꺼냈다.
 
 -싱크로율 : 1
 -싱크로율 : 2
 -싱크로율 : 1
 
 ‘아······.’
 연우는 실망했지만, 그 기색을 숨기고 대본집을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싱크로율이 낮게 뜬 이유가 있었다.
 ‘캐릭터가 하나같이 다 약해. 존재감도 없고.’
 대본집을 넘기는 연우의 손놀림은 빨랐다.
 작품 속에서 배역의 비중이 정말 없기 때문이었다.
 거의 공기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싱크로율이 낮은 배역은 의미가 없어.’
 최대한 싱크로율이 높은 배역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능력의 효율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방법이니까.
 연우는 대본집을 덮으며 말했다.
 “혹시 다른 작품은 없나요?”
 “더 있죠. 잠시만요.”
 한예리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책상 밑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엇차!”
 연우는 깜짝 놀랐다.
 ‘어?’
 
 -싱크로율 : 3
 -싱크로율 : 4
 -싱크로율 : 3
 
 ‘아까보다 수치가 높아졌잖아?’
 연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단계별로 준비해 놓은 건가?’
 어제 연우는 최대한 많은 대본을 보여 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한데 그녀는 대본을 분류까지 해 놓는 것도 모자라 연우에게 딱 어울리는 배역을 찾아 놓은 것이다.
 ‘설마 이 여자 날 본 순간 어떤 배역을 맡으면 좋을지를 바로 떠올려 낸 건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대본을 보다 보면 배역의 이미지와 연우의 이미지가 언뜻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여자······ 진짜 대단하네.’
 배우를 보고 어떤 배역이 어울리는지 판단하는 눈.
 이는 캐스팅 디렉터라면 꼭 갖춰야 하는 필수 능력이었다.
 그때, 한예리가 말했다.
 “역시 이 대본들도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연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이 대본들도 마음에 안 든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긴 어제 공연을 보면서 연기 연습을 정말 많이 했겠다 싶더라고요. 이런 평범한 배역에 성에 찰 리가 없으실 테죠.”
 연우가 아니라고 말문을 열려던 그때, 그녀가 미소를 씩 지었다.
 일순간 광기가 번뜩이는 건 어째서일까?
 그 미소와 마주한 연우는 움찔했다.
 “이거는 진짜 마음에 드실 거예요. 제가 이거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기를 썼거든요, 후후!”
 그녀는 허리 쪽에서 비장한 태도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대본 세 개.
 연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열심히 하셨어요.”
 그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에요. 열심히 했다는 건 제 입에서 나와야 한다고요!”
 그녀의 두 눈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참······.’
 그 뜨거운 성의를 봐서 연우는 대본을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녀에게서 대본 세 개를 받아 들자, 연우의 눈앞으로 싱크로율 수치가 떠올랐다.
 
 -싱크로율 : 3
 -싱크로율 : 4
 
 그때, 연우의 눈이 번뜩였다.
 
 -싱크로율 : 5
 
 연우는 대본을 차례대로 훑어보는 척하다가 싱크로율 5짜리 대본의 정보를 한번 훑어봤다.
 
 -제목 : 新 <태양을 그리는 달>
 -장르 : 사극
 -방송사 : KNS
 -시놉시스 : 엇갈린 운명을 지닌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게 됐다.
 -PD : 강대원 PD (대표작 : <가을 연가>,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걷는 왕녀>)
 -배역 : 조연 호연의 호위 무사 단역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어째서 단역인 거지?’
 악당 공룡 다이노소의 싱크로율이 5였다.
 ‘어린이 공연이기는 했지만, 다이노소는 거기서 조연이었는데?’
 한데 지금의 배역은 작품 내에서 대사 한두어 마디 치는 단역이었다.
 이내 연우는 그 이유를 수긍했다.
 ‘하긴 싱크로율은 배역과 얼마나 어울리는지 보여 주는 거니까.’
 이번에 대본을 읽어 보기로 했다.
 연우는 속으로 감탄사를 토해 냈다.
 ‘오······!’
 그의 이름은 경천.
 말수가 없는 과묵한 사내였지만, 뜨거운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나이!
 ‘이거 마음에 드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수치 높은 거 더 찾아보고, 없으면 이거 해야겠다.’
 한예리가 말했다.
 “대본 계속 보시는 거 보니 그게 마음에 드나 봐요?”
 “네, 좋네요.”
 한예리가 예스를 외쳤다.
 “아자아아아아!”
 이내 그녀는 몸을 축 늘어트리며 의자에 앉는데, 해냈다는 생각에 탈력감이라도 온 듯했다.
 “아아,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에요.”
 ‘마음에 안 들 수가 있나!’
 정말로 마음에 든다.
 연우는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수수료로 얼마나 책정해야 하지?’
 캐스팅 디렉터의 경우 배우에게 일감을 물어다 주는 대가로 20%에서 30% 정도 되는 수수료를 떼어 간다.
 한데, 그녀 정도 되는 능력자라면 30% 아니 40%를 요구해도 충분히 떼 줄 용의가 있었다.
 그때, 한예리가 기묘한 말을 했다.
 “저 근데, 저와 함께 일하려고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수임료는 받지 않을 거예요.”
 ‘응?’
 연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는 볼을 긁적였다.
 “그게 저 감독님들이랑 PD님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작품 뽑은 것도 회사에 들어온 거 보고 뽑은 거지.”
 그 이야기에 연우는 혀를 내둘렀다.
 ‘미친, 작품 하나하나 다 봤다는 거잖아.’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째서 그녀가 이렇게 많은 대본을 단숨에 들고 올 수 있었는지.
 그녀는 연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수임료를 받는 건 프로가 아닌 거 같아서요.”
 연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계약 못 하겠네요.”
 “네?”
 “저는 자기 몫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욕심이 있는 이라면, 이 제안을 덥석 물었을 테다.
 그러는 연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람 등골 빼먹는 것.
 그리고 호구가 되는 것.
 이 두 가지는 정말 싫어하는 거니까.
 연우가 말했다.
 “일단 20% 정도로 책정하는 것으로 하고, 수익이 발생하면 더 들고 가세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해야 할 건 그녀가 아니라 연우다.
 “그러면 정말 같이 일하는 거예요?”
 ‘아, 이거 웃기네.’
 뭔가 역할이 뒤바뀐 거 같아서 웃음이 나올 거 같다.
 연우가 대꾸했다.
 “네.”
 “이예예예!”
 그녀가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손뼉을 짝 쳤다.
 “아. 맞아요! 이건 대사 치는 단역이라서 AD한테 데모 영상 하나 보내야 하거든요.”
 “혹시 여기에 데모 촬영하는 곳도 있어요?”
 “그럼요!”
 잠시 후, 연우는 그녀와 함께 촬영실로 이동해 데모 영상을 여러 번 찍었다.
 그중 가장 잘 나온 데모 영상을 AD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 * *
 
 야산의 산책로를 따라 달리는 연우의 등은 흠뻑 젖어 있었다.
 “허억, 허억······!”
 산 중턱에 도착한 연우는 각종 운동기구가 놓인 곳으로 들어섰다.
 기다란 지지대에 몸을 지탱한 후, 버터플라이 자세로 몸을 아래로 내렸다 올리는 걸 반복했다.
 “후우, 후우!”
 버터플라이를 5세트 반복한 후, 자세를 돌려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냥 다리를 까닥거리는 게 아니었다.
 등과 배 쪽 근육에 최대한 자극을 주면서 움직였다.
 그 운동도 5세트를 끝낸 후, 연우는 곧장 두 발을 어깨 너비만큼 벌리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바로 스쿼트였다.
 이어서 연우는 손바닥을 횡격막 부근에 댔다.
 “후우!”
 숨을 들이쉬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연우는 숨을 횡격막 아래쪽까지 보낸 후, 소리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끌어 올리는 느낌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중후한 저음이 나왔다.
 “아아아!”
 연우는 숨을 쉬고, 소리를 내뱉는 식으로 음을 반 음씩 올려 나갔다.
 “아아아!”
 피치가 올라가자 혀끝을 아랫니에 놓았다.
 이는 혀를 이완시키는 동작.
 이리하는 건 피치가 올라가면, 혀가 긴장하기 때문이었다. 혀를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발성 훈련도 다 끝낸 연우는 휴대해 온 보온 물통에서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것으로 목을 풀어 주었다.
 달리기를 통한 체력 훈련, 코어 중심의 근육 운동, 발성 훈련 등등.
 이는 연기자라면 해야 하는 필수 훈련이다.
 연우는 이 훈련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 왔다.
 연기자 일을 그만뒀음에도 이를 계속해 온 건, 아역 배우로 한창 활동할 당시 매일매일 훈련한 게 몸에 익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스트레칭으로 몸 구석구석을 풀고는 핸드폰을 힐긋 바라봤다.
 ‘그나저나 대체 연락은 언제 오는 거람?’
 데모 영상을 촬영제작사 측에 보낸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싱크로율 5가 넘는 걸 찾을 수도 없었고······.’
 그때, 호주머니에 넣어 둔 폰이 부르르 떨렸다.
 폰 화면을 봤더니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한예리 씨 : 연우 씨, 데모 영상 통과했어요!
 
 메시지 내용을 본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씩 맺혔다.
 
  * * *
 
 다음 날.
 연우는 새벽 일찍 여의도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앞에 주차된 버스 한 대가 보였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단체 버스였다.
 연우는 손목시계를 힐긋 바라봤다.
 ‘다섯 시네.’
 아직 해도 안 뜬 시간이지만,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어서 춥지는 않았다.
 대략 삼십 분이 흐르자 사람들이 슬슬 모여들었다.
 죄다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때, 한예리가 헐레벌떡 뛰었다.
 “허억, 허억! 많이, 기다렸어요?”
 연우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뇨. 방금 저도 도착했어요.”
 연우의 나이는 26.
 그녀의 나이는 24.
 두 살 차이가 났지만,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업무 관계다 보니 그게 서로에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차나 타러 가죠.”
 “네.”
 연우가 말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셨겠어요. 피곤하죠?”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예 뻗을 거 같아서 오늘내일 연가 썼어요.”
 “어? 저 맡는다고 회사에 보고 안 올렸어요?”
 한예리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게 저는 아직 배우를 담당하면 안 돼서······.”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회사 내규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
 그 한숨에 직장인의 애환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힘내요, 예리 씨.”
 연우가 피로회복제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히히 웃으며 음료를 받았다.
 연우는 한예리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했다.
 한 시간하고도 오십 분을 달려 촬영장에 도착했다.
 촬영장.
 ENG 카메라가 돌아가고,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곳.
 연우에게 있어서 그곳은 전쟁터였다, 제 감각과 철저하게 싸우는 곳이었기에.
 그 싸움은 간단했다.
 훌륭한 연기를 펼치면 감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고,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면 패배한 것이다.
 연우는 그 싸움에서 오는 스릴과 흥분을 즐기고는 했었다.
 그 때문에 촬영장에 발을 들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두근.
 두근, 두근!
 
 -지금 느낌 정말 좋아! 이대로 한 번 더 가 보자고!
 -아, 이거 부족한데.
 -한 번만 더 가 보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연우 씨, 왜 그리 미소를 지어요?”
 연우는 상념에서 번뜩 깨어나 옆에 서 있는 한예리를 바라봤다.
 “아, 이전에 이곳에 와서 연기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가 잠깐 떠올라서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구나······.”
 연우는 촬영장 내부를 한번 둘러봤다.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사극 드라마에서 볼 법한 건물 몇 채다.
 4층 높이나 되는 전각 건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와 건물.
 으리으리한 궁전 내부 등등.
 ‘작품 내에서 자주 나오는 장소인가 보네.’
 어느 드라마건 오픈 세트장에서 많이 촬영한다.
 그러나 사극 드라마의 경우 오픈 세트장에서 매번 촬영할 수 없다.
 ‘바로 촬영 규모 때문이지.’
 대관비, 인건비, 촬영비와 같은 고정 비용과 각종 부대 비용과 같은 가변 비용 등등.
 그 모든 비용을 합치면 정말 장난 아니다.
 즉, 그 비용을 조금이라도 더 절감하기 위해 작품에서 주로 나오는 장소의 경우 세트장에 따로 지어 놓고 촬영하는 것이다.
 그때,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키 그립팀 어서 움직입시다.”
 사람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지미집 카메라, ENG 카메라, 붐 마이크 등 각종 촬영 장비를 열심히 운반했다.
 “거기 스태프분, 선 밟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그때 그는 연우를 발견하고는 연우 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오! 안녕하세요!”
 한예리가 연우에게 말했다.
 “AD 조민욱 님이세요.”
 ‘아, 조연출이구나.’
 연우와 한예리는 그에게 가서 인사하기로 했다.
 연우는 90도 폴더 인사를 했고, 한예리는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호위 무사 경천을 맡은 이연우라고 합니다.”
 “처, 처음 뵙습니다. 액터 스타즈 소속 캐스팅 디렉터 한예리입니다.”
 AD 조민욱이 웃음을 돌연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연우는 그가 왜 웃음을 터뜨리는 건가 싶어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하, 정말이지······.’
 “예리 씨.”
 “예?”
 한예리는 연우를 바라봤다, 대체 왜 부르나 싶어서.
 연우가 슬쩍 고갯짓을 했다.
 그녀는 그 고갯짓을 따라 자기 손을 바라봤다.
 “아, 아니, 이게 왜?”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지갑.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죄, 죄송합니다!”
 “아, 죄송할 거 아닙니다. 이렇게 인사를 받아 보긴 처음이네요.”
 AD는 하하 웃고는 연우에게 말했다.
 “그보다 데모 영상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그가 연우를 알아보는 건, 단역 캐스팅이 그의 담당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우가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성함이 이연우 씨라고 하셨죠?”
 “아, 예.”
 “되게 멋진 이름이네요.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죠.”
 연우는 앞으로도 본명을 쭉 쓸 작정이다.
 아역 배우 때는 예명을 썼기에, 이연우라는 이름이 알려진 적은 없었다.
 또, 그 당시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180도로 다른 것도 있고, 연우를 알아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설령 있다 한들 그건 극소수에 불과할 터.
 즉, 본명을 써도 무방하다는 소리다.
 “그럼 이따 뵙도록 할게요.”
 AD 조민욱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현장을 다시 정리하러 갔다.
 한예리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와, 조연출님이 이렇게 인사할 정도라니. PD님도 알아보시는 게 아닐까요?”
 연우는 순간 웃을 뻔했다.
 ‘PD는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그는 지금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다. 게다가 조연 배우들까지 신경 써야 할 텐데, 한낱 무명 배우에게 줄 관심 따위 없었다.
 연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덤덤했다.
 ‘어차피 PD의 관심이야 촬영에 들어가서 얻으면 되니까.’
 그때, 한 스태프가 나타나 외쳤다.
 “엑스트라 배우분들, 그리고 단역배우분들, 메이크업 받으시고 복장 받아 가세요.”
 연우가 한예리에게 말했다.
 “전 다녀올 테니까 잠시 대기하고 계세요.”
 “다녀오세요!”
 연우는 곧장 분장실로 가서 메이크업을 받은 후 분장도 받았다.
 그 분장이란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였다.
 그리고 의상실에 가서 무사 복장을 받고, 탈의실에서 갈아입었다.
 보통 사극 복장 입는 건 대단히 어려운데, 이 복장은 곳곳에 찍찍이가 있어서 입기 쉬웠다.
 잠시 후, 연우는 탈의실에서 나왔다.
 폰을 만지던 한예리는 장내에 등장한 연우를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세, 세상에. 완전 대박인데요.”
 검은 삿갓.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무사 복장.
 허리에 찬 가검.
 그야말로 호위 무사 그 자체 같았다.
 한예리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혹시 삿갓 들어 올려 주실 수 있어요?”
 “삿갓요?”
 “네.”
 연우는 그녀의 요청대로 삿갓을 살짝 들어 올리자 매력적인 외모와 서늘한 눈매가 드러났다.
 한예리가 숨을 들이켰다.
 “헉!”
 연우가 그녀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정말 멋있어요.”
 “아, 그래요?”
 연우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제 외모를 봤을 때 딱히 잘생겨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냥 멋있다고 하니 그러려니 할 뿐.
 “그보다 저희 인사드리러 가요.”
 “무슨 인사요?”
 “스태프분들한테요.”
 “아아! 맞네요!”
 인사를 하는 건 중요하다.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무명 배우라면 그 기본을 더더욱 지켜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 했는데 딱 한 사람에게 하지 못했다.
 바로 강대원 PD!
 그는 어디에 있는 건지 모습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촬영은 시작할 생각도 않고 있었다.
 한예리가 내심 투덜거렸다.
 ‘생각했던 거보다 대기 시간이 기네.’
 사실 촬영은 PD 마음대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연이나 조연 배우가 와야 시작된다.
 그래서 단역 및 엑스트라 배우 들은 촬영 현장에 일찍 와서 준비하는 것이다.
 그들이 촬영장에 오면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그들이 늦게 도착하고 있어서 지금 촬영이 지연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이 오기까지 시간이 다소 남아 있으니까.
 어쨌건 자리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다.
 그 때문에 다른 배우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데 연우는 짜증 하나 내지 않고,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평불만 터뜨릴 시간에 대본 한 번 더 보는 게 훨씬 생산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연우는 대본을 보면서 오늘 촬영할 연기 장면을 머릿속으로 돌려 보고 있었다.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만 연기하면 너무나 밋밋해. 캐릭터도 너무 평면적이고.’
 그렇다고 눈에 띄기 위한 연기를 할 수 없다.
 ‘그러면 단칼에 NG가 나겠지.’
 NG는 한낱 단역배우에게 치명적이다. 절대 NG가 나서는 안 된다.
 ‘역시 배역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해.’
 연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단순히 지키는 호위 무사인 게 아니라······.’
 그때 한예리가 말을 걸어 왔다.
 “그나저나 연우 씨, 이 드라마에 누구 출연하는지 아세요?”
 연우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대충요.”
 한예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수다나 떨면서 심심함을 달래려고 했는데, 그게 단칼에 무산되니 아쉬운 것이었다.
 이윽고 연우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였다.
 선글라스를 낀 한 여자 연예인이 매니저와 함께 장내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감탄사를 토해 냈다.
 “되게 예쁘네.”
 “쩐다, 쩔어.”
 “와······.”
 한예리도 감탄사를 터뜨렸다.
 “우와, 정말 예쁘다.”
 그러나 연우는 입가에 미소를 슬며시 띠고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출연이 확정되고 난 후, 연우는 드라마에 누가 출연하는지 알아보던 도중 깜짝 놀랐다.
 이전에 같이 촬영한 적이 있는 아역 배우 출신의 최보람이 출연한 걸 봤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녀의 호위 무사가 되어 그녀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 건가?’
 문득 그녀를 보고 있자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쟤 맨날 코 질질 흘려서 내가 자주 닦아 주고 그랬는데.’
 도도한 여배우가 된 그 코흘리개는 지금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인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연우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사성은 여전하네.’
 이윽고 최보람은 연우에게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연우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같은 인사라도 그 의미가 달랐다.
 그녀는 연우가 정말 누군지 모르고 한 인사지만, 연우의 경우 그녀를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한 인사였으니까.
 그때, 최보람에게 인사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람 씨!”
 그녀는 90도 정각 인사를 했다.
 “앗! 안녕하세요, 강 PD님!”
 강대원 PD는 엄지를 척 내세웠다.
 “지난 대본 리딩 때도 그렇고, 시간은 칼같이 지키시네요! 크! 역시 보람 씨야!”
 “이렇게 대기하고 계신데 늦게 올 수 없죠.”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PD님, 전 그럼 준비하고 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강 PD는 장내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슬슬 촬영에 들어가 볼까 하는데. 호연 호위 무사 경천 배우분, 이리 와 주세요!”
 연우가 한예리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저 가 볼게요.”
 한예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파이팅!”
 
  * * *
 
 강 PD는 연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역시 우리 민욱이가 배우 보는 눈이 좋다니까!”
 그는 연우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마스크도 정말 준수한 편이고, 몸도 좋아 보이고.’
 연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오. 방금 진짜 경천 같았어요.”
 그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나저나 검은 쓸 줄 알아요?”
 “그리 잘 쓰는 건 아니지만 대충은 쓸 줄 압니다.”
 연우가 검을 쓸 줄 아는 건, 과거 한 사극 드라마 때문에 액션 스쿨에 가서 잠깐 배운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리 잘하는 건 아니다. 얼추 태만 낼 정도지.
 강 PD는 그 대답에 만족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연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경천의 액션 신은 전혀 없지.’
 경천이 호위하는 연화 상단의 여주인 호연이 극 중에서 그리 큰 비중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 경천 또한 비중이 클 리 없었다.
 물론 강 PD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연우에게 검 쓸 줄 아는지 물어본 건 한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는 좋은 신호였다.
 강 PD가 말했다.
 “일단 따라오세요.”
 “네.”
 연우는 그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방 세트장이었다.
 그곳에는 서재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강 PD가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보람 씨가 저 책상에 앉을 거예요. 그럼 단역배우분께서는······.”
 그가 질문했다.
 “그보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연우입니다.”
 “그렇군요. 연우 씨는 보람 씨 뒤에 계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강 PD가 고개를 끄덕인 후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보람 씨 준비되면 슛 테스트 한번 들어가 보자고!”
 잠시 후.
 최보람이 하늘거리는 한복을 입고서 장내에 등장했다.
 사람들이 감탄사를 토해 냈다.
 “우와!”
 “여신이다, 여신!”
 “대박!”
 연우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가 코흘리개였던 시절이 자꾸 떠올라서.
 한데, 최보람은 그런 무덤덤한 반응이 거슬린 건지 연우를 힐긋 바라봤다.
 ‘뭐야, 이 남자?’
 그때 강 PD가 그녀를 부르고는 숏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곧, 슛 테스트 들어가 볼까 하는데요. 처음에는 원 숏으로 쭉 찍다가, 투 숏으로 찍을 겁니다. 원 숏일 때는 바스트 숏 위주로, 투 숏일 때는 웨스트 숏으로 잡겠습니다.”
 “알겠어요.”
 최보람이 방 세트장에 들어선 후 자리에 앉았다.
 연우는 그녀 뒤에 서고는 숨을 한차례 골랐다.
 “후······.”
 손이 살짝 떨려온다.
 긴장해서가 아니다.
 속에서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다.
 본의 아니게 이 바닥을 떠났지만, 연기 자체를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더 노력해 왔고, 누구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해 왔다.
 마침내 그토록 서고 싶었던 자리에 서게 됐으니 가슴이 벅찰 수밖에!
 그러나 그 기쁜 감정에 취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가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연우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러자 부풀었던 감정이 차츰 식어 갔다.
 ‘지금 이 자리는 단순히 연기를 펼치는 자리가 아니야. 배우 이연우가 누군지 보여 주는 자리.’
 연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곧, 난 호위 무사 경천이 되어야 해!’
 연우는 눈을 감고서 배역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눈빛이 돌변해 있었다.
 다른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그때, 연출팀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들고 ENG 카메라 앞에 섰다.
 강 PD가 크게 외쳤다.
 “레디! 액션!”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쳤다.
 탁!
 ENG 카메라가 돌아갔다.
 촬영이 시작됐다.
 연우는 뜸을 잠깐 들였다가 찻주전자에 담긴 차를 찻잔에 따랐다.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연우는 그녀에게 찻잔을 내민 후, 대사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가씨, 차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 중저음의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이었으니까.
 강 PD는 귀를 쫑긋했다.
 ‘오. 뭐야? 이 딕션은?’
 딕션의 수준이 어지간한 주연급 배우와 붙여 봐도 꿀리지 않을 정도, 아니 뛰어넘는 수준이다.
 ‘허, 거참, 저런 딕션을 지닌 배우가 단역이라니.’
 놀란 건 최보람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그러나 그녀는 놀란 걸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태도로 차를 홀짝이고는 대사를 내뱉었다.
 “음. 좋군요.”
 연우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깔끔한 촬영 장면이겠지만, 강 PD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연우의 연기에서 그의 이목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시선!
 ‘대체 뭘 바라보고 있는 거지?’
 강 PD는 연우의 시선을 훑어 갔다.
 ‘보람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 연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냥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동경하는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때, 연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거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분명 미세한 떨림이었다.
 그러나 격정적인 떨림이기도 했다.
 강 PD는 눈을 빛내며 카메라 스크린을 바라봤다.
 ‘음. 짝사랑하는 남자의 눈빛인데, 호위 무사 경천이 호연을 짝사랑했던가?’
 경천의 설정은 이렇다.
 주먹을 쓰던 왈패 출신, 다른 왈패와 차이가 있다면 그에게 의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호위 무사가 된 것은 무공의 고수를 만나 무공을 익혔고, 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상단에 들어간 것이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호위하다 보면 그런 감정이 싹트기 마련이니까.’
 강 PD는 혹시나 해서 대본을 펴 봤다.
 ‘역시 행동 지문이 없어.’
 그렇다는 것은······.
 ‘저 배우 배역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냈군!’
 연기를 할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캐릭터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 방법이야 간단하면서 무식하다.
 캐릭터의 대사를 수없이 읽어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캐릭터가 절로 자기의 것이 된다.
 강 PD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 배우는 정말 사소한 연기로 캐릭터를 살려 냈어.’
 캐릭터 연기가 사느냐 죽느냐, 그건 디테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단역배우들은 저런 미세한 부분에 신경 잘 안 쓰는데······.’
 그들이 신경 쓰지 않는 건 자신들은 대단한 배역을 맡은 게 아니니, 주목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단한 착각을 하는 거다.
 카메라로 보면 그런 무성의함이 정말 잘 보이니까.
 ‘한데 저 배우의 연기에는 그런 무성의함이 보이지 않아.’
 강 PD는 그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암,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있을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이상한 게 있었다.
 아까부터 저 남자 배우에게 포커싱이 절로 향한다는 거다.
 ‘이거 보람 씨를 찍어야 하는데.’
 계속 남자 배우를 찍어 대서 다시 처음부터 테이크를 찍어야 했다.
 ‘뭐, 어차피 슛 테스트이기도 하니.’
 강 PD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쳤다.
 “컷!”
 연우는 그 신호에 배역 몰입에서 빠져나온 후 제 연기를 곧장 점검해 봤다.
 ‘썩 나쁘지 않았지만 힘을 더 뺐어야 했어.’
 하마터면 연기에 힘을 세게 줄 뻔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작위적인 연기가 나오니, 잘하려고 해서는 안 돼.’
 그때, 최보람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딕션 좋으시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에게 크게 관심 없다는 듯 삿갓을 고쳐 썼다.
 한데 그런 태도가 도리어 그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연우를 바라봤다.
 강 PD가 말했다.
 “슛 테스트였는데,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주변 사람들도 그의 말에 동감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예리가 소리를 질렀다.
 “이예예예! 우리 배우님 최고!”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확 쏠리자 그녀는 제 실수를 그제야 깨달았다.
 “헉!”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연신 숙여 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만 흥분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하하 터뜨렸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자기 배우가 인정받으니 신나는 거지.”
 “재미있는 아가씨네.”
 다들 그녀가 나쁜 뜻으로 소리 지른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부끄러움은 연우가 감당해야 할 몫일 뿐.
 ‘어휴, 어째 내가 다 부끄럽냐?’
 연우는 그녀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 PD가 웃음을 크게 터뜨리고는 말했다.
 “하하하하핫! 유쾌하신 분이시네요! 다시 한 번 숏에 들어가 보죠.”
 연우와 최보람이 자리를 다시 잡았다.
 연출팀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들고 ENG 카메라 앞에 섰다. 강 PD는 카메라 스크린을 바라보며 외쳤다.
 “레디! 액션!”
 연출팀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쳤다.
 탁!
 이내 강 PD는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에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그의 시선은 최보람에 향해 있었다.
 한데 어느새 연우에게 향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연우의 동작 하나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니까.
 그리고 연우는 지금 경천이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을 잔뜩 한지라 정말 미칠 듯이 괴로웠다.
 어찌나 캐릭터에 몰입한 건지 연우의 눈에 최보람이 호연으로 보일 정도였다.
 연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호위 무사 경천, 아니,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운명을 느꼈어.’
 운명.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그 법칙에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헤어 나올 수 없다.
 그건 옭아매는 속박 같은 것이기에.
 그 덕에 연우는 지금 속이 정말 답답했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고백이나 하면 속이 편할 거 같은데······.’
 그러나 고백할 수 없다.
 경천은 그녀를 지키는 호위 무사이기에.
 ‘그녀는 내가 감히 연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 존재.’
 경천이 어둠이라면, 그녀는 태양이다.
 어둠은 태양 가까이에 다가가면 녹고 만다.
 그러니 먼 발자취서 태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연우는 그녀와 떨어진 거리를 바라봤다.
 ‘겨우 한 발자국.’
 이 떨어진 거리는 물리적으로 얼마 안 됐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연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쩌면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걸지도 모르지.’
 그때 벽 쪽에 걸린 거울에 연우의 얼굴이 비쳤다.
 연우는 각도 때문에 이를 볼 수 없으나 강 PD는 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살짝 내렸어.’
 그는 중얼거렸다.
 ‘의식적으로 안 보려는 거 같기도 하고, 외면하는 거 같기도 하고.’
 연우가 아랫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물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체념한 건가?’
 강 PD는 이번 연우의 연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 연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했어!’
 배우는 막연한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
 화가 너무 나면 그냥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웃음을 터뜨린다든지, 어이없어하는 실소를 흘린다든지 구체적인 감정 포인트를 표현해야 했다.
 즉, 연우가 눈동자를 움직인 것도, 시선을 내리깐 것도 아랫입술을 벌렸다가 다문 것도 감정 포인트를 표현하기 위한 외부 행동인 거다.
 ‘크! 정말이지 감정 연기가 장난 아니야.’
 강 PD는 연우의 감정 연기에 푹 빠졌다.
 ‘정말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남자라······.’
 지독한 아이러니다.
 하나, 그 아이러니 때문에 아릿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아아······.’
 그는 그 여운을 만끽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문득 알아차렸다.
 ‘이런! 또 저 친구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잖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 비중 좀 늘리면 정말 좋은 거 같은데······.’
 물론 이 생각에는 그의 사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도 듬뿍!
 ‘일단 고민 좀 해 봐야겠어.’
 강 PD가 크게 외쳤다.
 “컷! 이번 것도 좋았어요. 한 번만 더 가 봐요.”
 촬영을 다시 한 후, 그는 연우와 최보람을 불렀다.
 “오케이! 배우 두 분 이리 와 주세요. 모니터링 한번 해 봅시다.”
 이 모니터링은 필수 작업이었다.
 배우들의 연기가 어땠는지 연출가와 배우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최보람은 모니터링을 하던 도중 깜짝 놀랐다.
 ‘뭐야? 이게 이 남자의 연기라고?’
 그녀가 연기할 때, 앵글상 연우가 펼치는 연기를 볼 수 없었다. 한데 이게 무슨······.
 그녀는 연우를 힐긋 바라봤다.
 ‘지, 진짜 단역배우 맞는 거야?’
 연우도 모니터링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물론 그녀와 다른 의미에서 놀란 것이지만.
 ‘와. 얘는 어찌 된 게 지금도 연기를 못하는 거지?’
 물론 아역 배우로 활동할 시절보다 정말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는 했다.
 그러나 연우가 봤을 때 부족한 부분들이 정말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기를 여태껏 했으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얘가 당시 잘나갔던 건 예뻐서였으니까.’
 아무래도 그녀가 비중 없는 호연을 맡은 건 그런 이유인 듯했다.
 얼굴마담이나 하라고.
 
  * * *
 
 촬영을 좀 더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쉬는 시간을 가졌다.
 대략 한 시간 정도 흐르니 배우들이 촬영장에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명품 조연으로 알려진 배우들.
 연우는 그들이 누군지 곧장 알아봤다.
 ‘저 배가 튀어나온 중년 아저씨 조민환은 사극 드라마에서 장군으로 자주 나오는 배우고, 마른 아저씨 김달수는 드라마에서 주로 죽는 역할로 나오고, 그리고 또······.’
 연우는 연예계를 떠났었지만, 연기에 관한 관심을 아예 접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배우들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이들을 아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인사해야겠네.’
 연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호위 무사 경천 배역을 맡은 이연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민환 김달수 그리고 오형식.
 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연우를 바라봤다.
 “오.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되게 씩씩하게 인사하네.”
 그들은 하하 웃으며 연우를 바라봤다.
 먼저 알아서 다가오는 후배를 마다할 선배는 없다.
 더군다나 세 사람은 단역배우 출신, 연우가 인사하러 오니 정말로 반가웠다.
 배불뚝이 배우 조민환이 말했다.
 “이야, 그건 그렇고 복장 멋지네. 나도 20년, 아니 10년만 젊었어도 저런 거 딱 입는 건데.”
 바짝 마른 남자 김달수가 말했다.
 “못 하는 말이 없네. 10년 젊었어도 저런 옷 못 입어!”
 세 남자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우도 따라 웃었다.
 조민환이 말했다.
 “그럼 촬영할 때 봐요.”
 “이따 봐요, 후배님.”
 세 사람은 왁자지껄 떠들며 분장실로 향했다.
 연우도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한 젊은 남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연우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 남자는······?’
 분명 처음 만난 사람인데, 굉장히 낯이 익었다.
 이내 연우는 그를 어디서 봤던 건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전광판······.’
 화상이 낫기 전날.
 연우는 술에 취한 채 초고층 빌딩의 전광판에 멋들어진 포즈를 잡은 한 남자를 봤었다.
 그 남자가 바로 그였다.
 연우는 그와도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여기까지는 평범한 인사였다.
 그런데 그는 연우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어보고는 본척만척했다.
 연우는 자신을 투명 인간처럼 취급하는 그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뭐야?’
 그때, 강 PD가 장내에 등장했다.
 그는 남자를 보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오. 윤민우 씨, 어서 오세요!”
 연우를 외면했던 남자는 강 PD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도 모자라 미소까지 활짝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PD님!”
 명백한 사람 차별에 연우는 어이가 없었다.
 ‘허?’
 그때, 업무상의 이유로 자리를 잠깐 비웠던 한예리가 연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연우 씨, 뭐 하세요?”
 연우가 대꾸했다.
 “배우분들한테 인사드리고, 이제 촬영 준비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연우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윤민우 씨네요.”
 “유명한 톱스타예요?”
 한예리가 미소를 피식 흘리며 대답했다.
 “에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즘 잘나가기 시작한 배우인데.”
 그녀의 설명을 들으니 어이가 더 없어졌다.
 ‘아니, 무시를 당해도 저딴 연예인병에 걸린 신인한테······.’
 한예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그냥요.”
 말과는 달리 연우의 눈빛은 차가웠다.
 
  * * *
 
 싸가지 신인 배우와의 대면도 잠깐, 연우는 세트장 내부에 있는 4층 전각 세트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운데가 사각형 형태로 뚫린 구조네.’
 촬영하기 편리한 구조였다.
 더군다나 한쪽 벽면을 아예 뚫어 놓아서 내부가 훤히 보였다.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도 있고.’
 연우는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한지 갓등도 많이 달려 있고, 비싸 보이는 도자기와 비단에다가······.’
 세트장 내부에 장식된 소품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 게 보였다. 그 덕에 세트장을 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몇백 년 전에 있었던 건물을 보는 듯했다.
 ‘곧 여기에서 촬영한다니.’
 연우가 감탄을 터뜨리던 그때, 최보람이 말을 걸어 왔다.
 “저기요.”
 “네?”
 연우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헛기침했다.
 “연우 씨라고 하셨죠?”
 “네.”
 “흠흠, 전 최보람이라 하고요. 잘 부탁드릴게요.”
 갑자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네? 부탁요?”
 최보람이 미소를 싱긋 지으며 말했다.
 “그게 저희가 같이 호흡을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파트너이기도 하고.”
 연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단번에 이해했다.
 ‘아아.’
 간단히 말해 이왕 한 팀이 된 거 한번 잘해 보자는 거다.
 연우는 허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소인 경천, 성심성의껏 아가씨를 모시겠습니다.”
 참으로 재치 있는 리액션.
 최보람은 웃음을 쿡 터뜨리고는 우아하게 말했다.
 “한번 지켜보겠다.”
 두 사람은 웃음을 쿡쿡 터뜨렸다.
 지금 이 놀이는 연기자들만이 할 수 있는 콩트.
 연우가 미소를 활짝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니까 재미있네요.”
 최보람은 그 미소를 본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헛기침하며 말을 더듬었다.
 “크으으음! 그, 그러네요. 이, 이제 저는 대본 좀 볼게요.”
 “네.”
 연우는 그녀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보다 그 자식은 어디 있는 거야?’
 때마침 윤민우가 장내에 딱 등장했다.
 머리에 건을 둘러쓰고 푸른 비단옷을 입고서 말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연우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맡은 배역은 이지겸. 이 판서의 아들.’
 그의 설정은 이렇다.
 완전 개망나니!
 ‘사람 성격이 극 중 캐릭터의 성격이랑 비슷한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문득 그의 싱크로율이 궁금해졌다.
 그때,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윤민우에게 대본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대본을 만졌다.
 
 -싱크로율 : 3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분명 이지겸은 극 중에서 비중이 꽤 있는 조연이었다.
 한데, 그런 거치고 싱크로율 수치가 너무 낮다.
 ‘그래도 4나 5는 되어야 하는데.’
 연우는 대본을 바라보고 있는 최보람의 싱크로율을 바라봤다.
 
 -싱크로율 : 4
 
 ‘······어휴, 보람이 보다 낮다니.’
 그녀에게 이런 말 해서는 안 되는데, 그녀는 극 중에서 병풍 역할이었다.
 한데, 그보다 낮다는 건······.
 ‘배역을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네.’
 연우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때였다.
 연우와 윤민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윤민우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부럽지?’
 연우는 순간 열이 뻗쳤다.
 ‘아오. 저걸 그냥······!’
 마음 같아서는 면상에 주먹 한 방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당장 사이다를 터뜨리는 것에 불과했다.
 ‘진정한 사이다는 촬영할 때 한 방 먹여 주는 거지.’
 연우도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윤민우가 몸을 들썩거리며 제 얼굴을 감쌌다.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나 욕하고 있겠지.’
 저 등신 같은 새끼, 자기 비웃는 줄도 모르고 웃는다면서 말이다.
 알기나 할까?
 자기 자신이야말로 등신이라는 걸.
 연우는 차가운 눈빛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둬.’
 잠시 후에 있을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대체 뭘 건드린 것인지.
 그때, 강 PD가 AD 조민욱과 함께 장내에 등장했다.
 “자, 자, 이제 촬영 들어가 볼 건데요! 이번 촬영은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요! 서 있는 위치나 촬영 동선부터 해서 말이죠!”
 그가 이어 말했다.
 “우리 AD가 배우분들 위치와 촬영 동선을 알려 드릴 겁니다.”
 강 PD 뒤에 서 있던 조민욱이 나섰다.
 “따라오세요.”
 배우들은 AD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연우도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1층 계단을 올라, 2층에 금방 도착했다.
 AD 조민욱이 말문을 열었다.
 “일단 보람 씨는 메인 카메라가 찍는 위치에 앉으시면 되고요. 다음으로 연우 씨는 T 테이프 붙은 곳에 서시면 돼요.”
 이어서 그는 나머지 배우들에게 자리 위치를 알려 주었다.
 “조민환 선배님과 오형식 선배님의 경우에는······.”
 배우들의 수가 꽤 되다 보니 자리를 잡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사이 강 PD는 ENG 카메라가 매달린 사다리차에 올라타고는 메가폰에 대고 외쳤다.
 “자, 이제 숏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단 풀 숏으로 찍다가 윤민우 씨 원 숏으로 찍기 시작할 건데요. 보람 씨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에서 투 숏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숏에 관한 설명이 끝나고 난 뒤, 리허설을 한 번 하고는 곧장 촬영에 들어가기로 했다.
 연출팀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들고 ENG 카메라 앞에 섰다.
 강 PD가 크게 외쳤다.
 “레디! 액션!”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쳤다.
 탁!
 사람들이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최보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차를 유유히 마시고 있는데, 그녀 혼자만 다른 공간에 있는 듯했다.
 뭐랄까.
 그녀 스스로가 세상을 왕따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연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얘가 특별한 아우라는 있네.’
 그때, 객실 반문이 활짝 열리며 남자의 괴성이 울렸다.
 “술 더 가져와!”
 그 괴성의 주인공은 윤민우.
 이내 그는 객실에서 나와 몸을 비틀거렸다.
 그야말로 망나니 그 자체.
 연우는 그의 연기를 보며 냉정히 평가했다.
 ‘배역 이미지와 잘 안 어울리긴 해도 연기는 어느 정도 하네.’
 한데 캐릭터를 단순히 연기하는 거 같지가 않다. 뭐랄까,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본성을 끄집어내어 연기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저렇게 선전하는 것에는 칭찬해 줄 만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그의 연기는 연우의 기준에서 ‘평범’한 것에 불과했다.
 “술 더 가져오라고! 술!”
 윤민우가 소리를 지르는 걸 멈췄다.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시고 있는 최보람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어? 뭐야, 엄청 예쁘잖아?”
 그가 최보람 쪽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야!”
 최보람은 말없이 차를 마시는 걸 반복했다.
 그 태도란 술 마신 개 따위에 줄 관심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안 들려?”
 윤민우가 소리를 버럭 질러 봤지만, 그녀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건 여전했다.
 이내 그는 두 눈이 뒤집히는 걸 실감 나게 연기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연우가 그의 손을 툭 잡았다.
 “넌 또 뭐야?”
 윤민우는 신경질을 내며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연우는 정말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잡았으니까.
 “이거 안 놔?”
 윤민우는 정말 열이 받았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단역배우가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으니 말이다.
 “아! 진짜!”
 그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연우의 눈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어······.”
 분명 다음 대사를 내뱉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윤민우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입술을 어떻게든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대사가 아니었다.
 “······히끅!”
 그는 황급히 딸꾹질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히······끅!”
 딸꾹질이 계속해서 나왔다.
 강 PD가 외쳤다.
 “컷!”
 윤민우가 눈을 질근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히······끅!”
 강 PD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런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죠.”
 좌중에 있는 대부분이 그의 딸꾹질에 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배우도 사람이니 딸꾹질할 수 있지, 뭐.’
 ‘윤민우 씨 신인이지만 연기 잘하는데······. 저런 실수를 다 하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구나.’
 그러나 강 PD는 윤민우가 딸꾹질을 내뱉은 게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촬영하던 도중 극도의 두려움에 질린 그의 표정을 카메라 스크린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바로 연우 씨와 대치하던 순간이었는데······.’
 강 PD는 연우를 힐긋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연기를 했기에 윤민우 씨가 그렇게 겁먹은 거지?’
 윤민우는 신인 배우이기는 하나 연기를 괜찮게 하는 편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몹시 당황할 정도라니······.
 강 PD는 입술에 혀를 축였다.
 ‘대체 뭐 때문이었는지 어서 확인해 보고 싶어.’
 지금 윤민우의 실수 따위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단역배우의 연기가 더 중요했다.
 “촬영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는 배우들이 자리를 다시 자리 잡은 걸 바라보고는 외쳤다.
 “레디! 액션!”
 ENG 카메라가 돌아갔다.
 강 PD는 매의 눈동자로 카메라 스크린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각 프레임 안에 연우의 손이 윤민우의 손을 붙잡는 부분이 들어왔다.
 ‘으음, 좋아, 좋아.’
 그때, 강 PD는 카메라를 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러자 연우의 눈매가 드러났다.
 여기서 더 건드리면 죽이겠다는 눈빛!
 그 위험천만한 맹수의 눈빛과 마주한 순간 강 PD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뭐, 뭐야!’
 그때 이상한 소리도 났다.
 “히······끅!”
 그 소리는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관심은 연우의 눈빛에 확 사로잡혔으니까.
 이내 강 PD는 결심했다.
 ‘그래! 저 친구 비중을 좀 더 늘려야겠다!’
 
  * * *
 
 “컷!”
 강 PD가 말했다.
 “촬영 남으신 배우분들 남으시고, 촬영 끝나신 배우분들 가셔도 됩니다. 잠시 쉬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촬영이 없는 연우와 최보람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연우는 강 PD에게도 인사하고는 윤민우를 힐긋 바라봤다.
 그는 지금 움직일 생각을 않고, 멍한 상태로 있었다.
 입까지 반쯤 벌린 것으로 보아 정신이 살짝 나갔다고 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수군덕거렸다.
 “그렇게 평소에 기세등등하더니······.”
 “저 배우 평소에 연기 잘하던데······. 오늘은 NG 진짜 많이 내더라.”
 심지어 ‘딸꾹질 장인’이라는 말도 사람들 입에서 나왔다.
 연우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러게 사람 함부로 무시하지 말아야지.’
 불쌍할 것도 없다, 자업자득이니.
 그때, 한예리가 연우에게 피로회복제를 내밀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배우님!”
 “아, 감사합니다. 예리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어휴, 뭘요! 전 구경만 한 게 다인데요!”
 한예리가 킥킥 웃었다.
 “와, 딸꾹질 그렇게 오래 하는 거 처음 봤어요.”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무 이상하단 말이에요.”
 “뭐가요?”
 “보통 그렇게 NG 나면 PD님이 화내시지 않아요? 근데 계속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껄껄 웃기만 하시고.”
 연우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정 감탄했다.
 ‘눈치가 영 꽝이네······.’
 물론 그녀는 위치상 연우의 연기를 볼 수도 없었고, 모니터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란 게 있다.
 모니터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그 눈치로 연우가 딸꾹질을 일으킨 장본인이란 걸 알아차렸다.
 한데 그녀는······.
 “연우 씨가 생각하기엔 대체 뭐 때문인 거 같아요?”
 연우는 말끝을 흐렸다.
 “글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연우 씨도 모르나 보네요. 대체 뭐 때문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연우는 터질 거 같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일단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렇게 탈의실로 향하는데 최보람과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인사했다.
 “고생하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아, 저기요.”
 연우가 최보람을 힐긋 바라봤다.
 “다음 촬영 때 봬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후 그녀 말고도 조민환, 김달수 그리고 오형식과도 마주쳤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연우를 칭찬했다.
 “알고 봤더니 이 친구 대단한 연기자였어.”
 “알아서 인사하러 올 때 알아봤어. 얼굴에서 막 광채가 났다니까.”
 조민환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우리가 선배가 아니고 후배가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오형식과 김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아까 연기하는 거 보는데 그 눈빛이 아주 그냥!”
 조민환이 말했다.
 “그나저나 대화 좀 더 하고 싶은데, 후배님 이제 가야 하지?”
 “아, 예.”
 “이렇게 짧게 보니 되게 아쉽네.”
 “그러게 말이야.”
 “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야.”
 연우가 하하 웃었다.
 “다음에 긴 대화 나눠요, 선배님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연우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탈의실에서 원래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의상실에 가서 촬영 복장을 반납하려던 그때, AD 조민욱이 연우를 은밀히 불렀다.
 “저 연우 씨, 잠깐 이리 와 보세요.”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볼일이나 약속 때문에 급히 가셔야 하나요?”
 “아뇨. 무슨 일 때문이신지······.”
 AD가 말했다.
 “아.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강 PD님께서 연우 씨를 급히 찾으시거든요.”
 ‘PD님이 어째서 날······?’
 연우는 한예리와 함께 촬영장 안에 있는 영상작업실로 향했다.
 한예리가 말했다.
 “PD님이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걸까요?”
 “가 보면 알겠죠.”
 영상작업실 안에 들어서니 강 PD가 미니 소파에 앉아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강 PD가 말했다.
 “편하게 앉으세요.”
 “아, 예.”
 연우와 한예리는 자리에 앉았다.
 “냉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시원한 홍차?”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저, 저도······.”
 강 PD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 테이블에서 커피 두 잔을 타고는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받고서도 마실 생각을 안 했다.
 이 자리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자리이기에.
 강 PD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마시라고 준 커피인데, 안 마시면 어떡해요?”
 “아, 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연우가 커피를 마시려던 그때, 강 PD가 말했다.
 “연우 씨의 비중을 한번 늘려 볼까 해요.”
 연우는 커피를 내뿜었다.
 “······풉!”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갑자기 훅 들어와서 당황했다.
 그래도 손으로 입을 재빨리 가렸기에 커피가 분수처럼 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예리가 티슈를 황급히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연우는 티슈로 커피를 닦아 내며 강 PD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강 PD가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워낙 급작스러운 이야기라 당황하셨을 테니까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런 인간적인 모습도 있군.’
 촬영에 들어갔을 때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가 이런 식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색달랐다.
 ‘참으로 신기한 매력을 지닌 친구야.’
 그는 속으로 훗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끔 가다 단역인데도 그 배역에 픽스된다든지, 그 비중이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배역에 픽스되는 경우는 왕왕 있는 일이지만, 배역 비중이 늘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그 비중이란 게 늘어난다고 해서 확 늘어나는 건 아니지만, 지금 그의 제의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연우는 헛기침한 후 말문을 열었다.
 “크흠!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어째서 제 비중을 늘리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강 PD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거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반응인데?’
 그는 제안했을 때, 연우가 바로 덥석 물 줄 알았다.
 여태 배우들에 이런 제안했을 때, 열에 아홉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 배우는 감사하다고 말한 후 정중하게 한발 물러났다.
 그는 연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인 거 같은데, 처세가 정말 노련해.’
 문득 연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졌지만, 그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은 뒤로하기로 했다. 지금 이 자리는 그런 걸 물어보는 자리가 아니니까.
 강 PD가 말문을 열었다.
 “솔직하게 물어보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대답하죠.”
 연우가 그를 바라봤다.
 “기대됩니다.”
 “······기대요?”
 “예, 드라마가 방영되고 난 뒤에 있을 사람들의 반응이요.”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야 아는 거 아닌가?’
 한마디로 지금 뚜껑을 열어 보기도 전이다.
 미리 김칫국부터 마실 필요 없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대충 알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일을 해 오면서, 그동안 연구해 온 게 있습니다. 바로 장면 단위별 시청자들 반응입니다.”
 강 PD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간 정말 많은 연구를 했기에, 이제 장면만 봐도 어느 정도 반응이 올지 정확하게 압니다.”

댓글(2)

용쉐프    
서홍님의 톱스타그자체 카피 작인가요??
2020.03.18 12:58
승윤承奫    
리메이크입니다 ^^.. 연재회차에 십 몇화 부근에 가보시면 그런 댓글들 있습니다
2020.03.19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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