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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군주 1화

2019.04.15 조회 2,340 추천 7


 [야만의 군주 1화]
 
 
 
 
 
 도련님 (1)
 
 “도련님! 어휴, 내가 정말 못 살아!”
 보모의 애타는 부름에도 제 갈 길을 가는 아이. 뭐가 좋은지 ‘꺅꺅’거리며 도망치던 녀석은 얼마 못 가 넘어지고 말았다.
 “괘, 괜찮으세요?”
 “응···.”
 씩씩하게 몸을 털고 일어나는 녀석. 하지만 보모는 아이 몸에 다친 곳은 없는지 얼굴에 흉은 안 졌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 어머니한테 가는 거니까 얌전히 따라오셔야 돼요. 아셨죠?”
 하지만 보모의 충고는 이제 막 머리가 트인 아이의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근처에서 사냥한 짐승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전사들이 눈에 띈 것. 제멋대로 튀는 도련님 때문에 보모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하하, 훌란,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전사들의 대장 차클란이 육중한 몸을 일으킨다.
 우락부락한 인상에 육중한 덩치, 가운데 머리를 밀어버리고 옆머리만 길게 길러 땋은 변발.
 분주히 움직이는 입가에선 육즙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몇 번이나 봤지만 훌란은 아직도 이 차클란이라는 남자가 적응이 안 된다.
 “고, 고생은요 뭘···. 그럼 저는 이만.”
 “잠깐, 갈 땐 가더라도 도련님께 인사드릴 시간은 줘야지.”
 차클란과 그 휘하 부하들은 아이 앞에 정중히 머리를 조아린다.
 아이는 초원의 야만인 중 가장 큰 세력을 거느린 차카한의 막내아들 무클란.
 전사들은 당연한 예를 표한 거지만 훌란은 이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다.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나도 이거 하고 싶다.”
 “예?”
 “이거, 이거.”
 무클란이 손으로 가리킨 건 차클란의 변발.
 전사나 상류층은 10살이 넘으면 변발을 하지만 무클란은 이제 겨우 4살. 활동성이 많은 녀석은 길게 길러 뒤로 넘긴 댕기 머리를 귀찮아했다.
 “하하, 도련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10살이 되시면 제 손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차클란이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주변 전사들도 따라 웃었고, 훌란의 구겨졌던 입가에도 약간의 미소가 맴돌았다.
 “그건 그렇고 마님은 요즘 어떠신가?”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래서 지금 도련님 모시고 문안 가는 거예요.”
 “그래, 빨리 털고 일어 나셔야지. 도련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응.”
 
 ***
 
 무클란이 전사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던 그 시각.
 족장 차카한은 애첩 시오니의 천막에 있었다.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람이 기력을 회복했다니, 열일을 마다하고 달려왔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냐?”
 “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멈칫멈칫하던 차카한의 손이 시오니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쥔다.
 하지만 애첩의 어색한 웃음은 아까와 다를 게 없고, 차카한은 갈 곳 없는 오른손을 슬며시 거둬들였다.
 “엄마.”
 시오니의 어색한 표정은 아들 앞에서 녹아내렸다.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는 어머니의 애정표현에 무클란은 자지러졌지만, 곁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차카한의 얼굴엔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족장님, 라후만에서 사신이 왔답니다. 서두르시죠.”
 “그런가. 그럼 나는 먼저 가보겠네.”
 급히 자리를 뜨는 차카한과 그의 수하들.
 하지만 시오니의 또 다른 하녀 라만은 그 뒷모습을 증오의 눈빛으로 노려봤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쉿! 들으면 어쩌려고?”
 “내가 못 할 말 했니? 마님이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겁이 많은 훌란이 입단속에 나섰지만 라만은 개의치 않았다.
 “우리 아들, 엄마 보고 싶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시오니는 두 하녀의 말싸움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응.”
 “왜? 훌란이 못되게 굴기라도 했어?”
 “응.”
 친구와 말싸움을 벌이던 훌란은 펄쩍 뛰었다. 도련님 얼굴에 상처 하나 날까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이런 모함을 당하다니, 억울한 마음에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마님, 전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이에요.”
 “호호, 알아, 얘. 내가 널 안 믿으면 의지할 사람이 누가 있겠니?”
 “마님, 서운하네요. 저는 눈에 안 들어오시나요?”
 이번엔 라만의 질투.
 시오니가 말실수를 인정하면서 천막 안은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세 사람은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대화가 길어지자 무클란은 어머니 품에서 잠에 빠져들었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라만은 훌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그동안 도련님한테 해코지하는 놈들 없었니?”
 “아니,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사람들은 있었어.”
 “후우, 어쩌다 마님이 이런 곳에 끌려오셔서 눈치를···.”
 “쉿!”
 시오니는 급히 라만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차피 훗날 알게 될 일이지만 어린 아들의 순수한 마음에 벌써부터 독을 심어주고 싶진 않았다.
 “라만,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런 식으로 본심을 입 밖에 내는 건 좋지 않아. 앞으로는 조심해줘.”
 “예···.”
 “훗, 그것 봐. 너 언젠간 마님한테 한 소리 들을 줄 알았어.”
 친구의 핀잔에 뚱한 표정을 짓는 라만.
 하지만 시오니가 분위기를 잘 추스르면서 훈훈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
 
 한편, 차카한은 자신의 천막에서 라후만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고 있었다.
 다른 부족들은 소규모에 정처 없이 초원을 떠돌지만, 차카한이 거느린 부족은 인구 20만 명, 전사 2만이 넘는 대규모 부락을 이루고 있다.
 이 정도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선 사냥이나 약탈만으론 어려운 일. 그래서 이웃 국가 라후만의 용병으로 활약하며 식량을 지원받고, 사신을 통한 문화적 교류도 하고 있다.
 “지난 전투에서 차카한이 보여주신 활약에 국왕께서 아주 만족하고 계십니다. 이건 국왕께서 보내신 선물이니 사양 말고 받아주십시오.”
 사신의 수행원들은 화려한 수를 입힌 옷, 보석이 박힌 칼, 그 밖의 사치품 등을 탁상 위에 차곡차곡 올려놨다.
 하루하루가 배고픔, 추위와의 싸움인 초원에선 다 쓸모없는 물건들.
 하지만 차카한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사신에게 술을 권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놈들과 술자리를··· 치욕이구나.’
 사신도 이 자리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해도 야만인 소굴에 발을 들이다니. 거기다 이들이 마시는 술은 동물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거라 문명인을 자칭하는 사신의 입맛에 맞을 리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국왕께선 뭐라고 하십니까?”
 “예?”
 “그쪽에서 귀순을 청한 게 벌써 2년 전입니다. 이쯤 되면 답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차카한은 초원 생활을 청산하고 라후만의 귀족으로 인정받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숱한 전쟁을 겪었고, 이젠 초원에서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했지만 유랑 생활은 늘 불안했고, 언제 적의 습격을 받을지 몰라 다리 한 번 쭉 뻗고 자본 기억도 없다.
 차카한은 이 지긋지긋한 유랑 생활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라후만의 부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 글쎄요. 그건 제가 전해들은 게 없어 뭐라 드릴 말씀이···.”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꼭 좀 전해주십시오.”
 “예.”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사자.
 차카한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저들은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부려먹을 뿐, 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건 예전에 눈치챘다.
 지금까지 흘려보낸 세월이 억울해 설마 하는 생각으로 매달렸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족장님, 이젠 마음을 정하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던졌는데, 이런 돌덩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술로 속을 달래는 족장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수하들.
 하지만 모든 게 귀찮았던 차카한은 수하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술만 드신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족장의 엄명에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톡토아. 격한 전투를 거듭하며 한쪽 눈은 실명했고, 이젠 60이 넘어 전장에 서는 것도 버겁지만, 그동안 쌓은 연륜은 차카한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오늘은 좀 마시게 놔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마디만 하고 물러가겠습니다. 저들의 일원이 되겠다는 생각은 이제 버리십시오. 무의미한 전쟁에 더는 전사들을 희생시켜선 안 됩니다.”
 톡토아는 차카한에게 귀족의 지위를 주겠다며 접근한 라후만의 사자를 쫓아낸 전력이 있다.
 그것 때문에 한때 족장과 사이가 틀어졌지만 결과는 이 꼴.
 사람은 편할 길을 택하면 화를 입는다는 톡토아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자콩강에 대군을 주둔시키십시오.”
 자콩강은 라후만의 국경 근처. 지금 출발하면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
 문제는 라후만이 이 군사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 자칫하면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
 “라후만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자콩강 주변엔 우리가 멸망시킨 하노이의 잔당이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겁니다.”
 “···그들이 그 말을 믿겠나?”
 “믿지 않겠죠. 하지만 토벌대를 보낼 수도 없을 겁니다. 족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라후만은 정복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죠. 지금 사자를 보냈다는 건 전황이 그리 좋지 않으니 후방의 안전을 꾀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차카한의 눈빛은 야심으로 번뜩거렸다.
 술을 제법 들이켰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몸.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군대를 보내는 건 좋은데,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일단 하노이 잔당을 토벌하면 라후만 쪽에서 어떤 식이든 반응을 보일 겁니다. 우리는 아쉬울 게 없으니 머리를 굽히는 건 그쪽 아니겠습니까?”
 충돌은 최소화하면서 얻을 걷은 얻자는 것.
 라후만의 기만술에 속이 뒤집힌 차카한은 동생 누캄부에게 4천 명을 이끌고 자콩강에 주둔하도록 명했다.
 
 ***
 
 톡토아의 예상대로 라후만은 발칵 뒤집혔고, 왕은 신료들에게 대책을 강구했지만 앞뒤로 적을 맞은 상황에서 누구도 뾰족한 수를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더 많은 재물을 보내 달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야만인들에게 먼저 머리를 조아리자는 겁니까?!”
 “그럼 뭔가 대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반대만 하지 말고 대책을 내놓으시오, 대책을!”
 사분오열된 여론 앞에 라후만의 왕 보르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황도 좋지 않은데 야만인의 반란까지 겹치고 믿을만한 사람은 대부분 전장에 나갔으니, 지병인 두통이 재발할 지경이다.
 “다들 소란 떨지 마시오.”
 이때, 목소리를 높이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한 사람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르도의 동생 보르만.
 국왕의 근심 어린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야만인들이 국경을 넘을 생각이었다면 벌써 강을 건넜을 겁니다. 이건 하노이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우리 반응을 살피겠다는 수작입니다.”
 “그럼 그냥 지켜봐도 된다는 건가?”
 “아니요. 뻔한 수작이지만 아쉬운 건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손을 놓은 사이, 차카한이 주변 부족들을 하나둘 통합한다면 훗날 큰 화근이 되겠죠.”
 “그,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보르만이 주장한 건 영토할양. 상대가 국왕의 동생이라 고성이 오가진 않았지만 신료들의 반대는 거셌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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