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개정판] 제로니스 [E](종료230728)

[개정판] 제로니스 1-1권

2019.04.18 조회 8,102 추천 39


 # 제로니스 1화
 
 살다 보면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다가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지금 이 잡화점의 주인처럼.
 “꼬마야, 참 안됐지만 거지한테는 해줄 게 없구나.”
 기워 입지 않았을 뿐이지 너덜너덜한 옷. 산발한 머리에 꾀죄죄한 얼굴.
 ‘쯧쯧, 아직 나이도 어린데······.’
 주인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거지 소년이 보통의 거지들답지 않게 전혀 흔들림 없는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 거지 아닌데요.”
 그러나 잡화점 주인은 조금도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 녀석아,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나가라.”
 “저 진짜 거지 아닌데.”
 거지 소년의 대꾸에 주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웬만하면 좋은 말로 내쫓고 싶었다. 그런데 이 거지 소년의 반응을 보아하니 좋은 말로 해서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잡화점 주인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 녀석, 썩 안 나가?”
 그러자 소년이 재차 항변하듯 말했다.
 “저 돈 있어요, 아저씨! 물건 사러 온 거라니까요?”
 “아, 글쎄 돈이고 뭐고 장사 방해되니까 썩 꺼지라고, 이 거지새끼야!”
 역시나 이쯤 되면 좋은 말이 나온다는 게 무리였다.
 아침 내내 손님도 없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웬 거지 놈이 와서 자꾸만 영업을 방해하고 있으니 더 짜증이 치미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물러서려는 기색이 없었다.
 “아저씨, 저 돈 있다니까요? 손님을 이렇게 무시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이 정도면 여태껏 상대해 온 수많은 거지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질긴 놈이었다.
 이제는 참는 것도 한계.
 결국 주인이 고함을 질렀다.
 “이 망할 놈의 거지새끼가 근데 뒈지려고 환장을 했나! 좋은 말할 때 안 꺼······.”
 험악한 표정으로 거친 언사를 이어 가던 주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소년이 금화 한 닢을 손바닥 위에 올려서 내민 것이다.
 순간적으로 주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해 갔다. 험악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방긋방긋 미소 짓는 환한 얼굴이었다. 눈망울도 초롱초롱해졌다.
 곧 주인의 입술이 열렸다.
 “무엇을 사시렵니까, 손님?”
 그야말로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음성.
 소년이 대꾸했다.
 “아니에요, 아저씨. ‘거지새끼’는 꺼져 드리죠. 사실, 살 게 적지 않았는데. 옷도 사야 하고, 신발도 사야 하고 그 외에도······.”
 소년이 말끝을 흐리며 그렇게 말하자 주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옷이나 신발 모두 가게에 있는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소년은 아직 어리니, 잘만 구슬려서 바가지를 씌우면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매상은 충분히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이 서둘러 말했다.
 “소, 손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가게로 말할 것 같으면 최고의 물품들만을 엄선해서 비치해 두고 있습니다. 가격과 멋과 성능, 그 모든 것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곳은 저희 가게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연코 말씀드릴 수 있습죠, 네!”
 
 소년은 180도 달라진 주인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빤했다. 자신을 호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소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후, 그런 속셈이시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자신이 살아온 세월은 50년도 넘었다. 물론 주인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겠지만.
 곧, 소년이 얼굴을 찡그린 채 킁킁거리며 말했다.
 “가게에서 무슨 곰팡이 냄새가 이렇게 나지? 이거 물건들 건조는 제대로 시키고 있는 건가요? 품질에 의심이 가는데.”
 주인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며 싹싹하게 말했다.
 “곰팡이라뇨, 손님? 우리 가게에서는 결코 그렇게 허술하게 물건을 관리하지 않습니다요. 곰팡이 냄새가 아니라 가죽 냄새일 겁니다요.”
 “가죽이요? 무슨 돼지가죽으로 만든 제품도 있나 보죠? 웬 비린내 같은 역겨운 냄새가 자꾸 나는데······. 이상하네.”
 “아이고 손님! 돼지가죽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이곳의 가죽들은 모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상품들입니다요.”
 소년의 태도가 갑자기 건방져진 느낌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하긴, 자세히 보니 나빠 보이지는 않네요.”
 인정하는 듯한 소년의 말에 주인이 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 자, 많이 깎아 드리겠습니다, 손님. 원하시는 물건이 있으시거든 편안하게 고르십쇼.”
 그러자 소년이 진열되어 있는 물품들을 유심히 훑어보더니, 고급 가죽 신발에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저 신발은 얼마나 하죠?”
 “허헛! 손님의 안목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저 신발이야말로 우리 가게에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원래는 35켄트인데, 아까의 일도 있고 하니 손님에게는 특별히 30켄트에 드립죠. 헤헤.”
 주인이 크게 선심 쓴다는 듯 말했지만, 소년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 그래요? 많이 파시고, 가게 번창하세요.”
 소년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돌아섰다.
 ‘저, 저 어린놈이······!’
 의외로 소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 손님! 잠깐 기다리십쇼. 더, 더 싸게 드립죠!”
 주인이 급하게 부르자 소년이 뒤돌아선 상태에서 씩 웃었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뒤돌아서는 척했다.
 소년이 아까의 신발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신발이 얼마라고요?”
 주인이 고민하는 척했다. 잠시 그 상태로 있던 주인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25켄트에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말을 맺기가 무섭게 소년이 짧게 대꾸했다.
 “10켄트.”
 “말도 안 되는······!”
 주인은 황당했다. 설마 소년이 이렇게나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제시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참고로 10켄트는 자신이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어 온 가격이었다.
 잠시 소년을 직시하던 주인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20켄트에 드리지요, 손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많이 파세요.”
 소년이 또다시 가차 없이 돌아섰다. 그러더니 곧바로 가게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인의 시선이 소년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20켄트면 정상간데, 그것도 싫다고?’
 호구인 줄 알았는데 소년은 결코 호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쉽긴 하지만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가게의 문을 나서며 말했다.
 “옷이나 신발 이외에도 배낭을 포함해서 여행에 필요한 장비가 엄청 많이 필요한데, 어디 가서 다 사지?”
 그 말이 주인의 아쉬워하는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딱 보니 소년은 여행을 시작하려는 느낌이었다. 즉, 옷이나 신발뿐만 아니라 여행 장비들을 세트로 구매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하루 매상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며칠분 매상을 단번에 올릴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장사가 잘 안되는 나날들이었다. 특히 이번 달은 심각했다.
 결국 주인의 입술이 빠르게 열렸다.
 “손님! 그냥 그렇게 가시면 어쩝니까? 18켄트에 드립죠! 드리면 되잖습니까?”
 그 말에 소년이 돌아서더니 짧게 말했다.
 “12켄트.”
 “그, 그건 말도 안 되는 가격입니다요. 가게 월세며 유지비, 인건비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잡니다요!”
 “13켄트.”
 “15켄트. 더 이상은 정말 안 됩니다요.”
 그제야 소년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 분이 정말 지독하시네요. 그 정도면 거의 안 남는 수준에서 드리는 것이니, 대신에 다른 물건도 많이 사주셔야 합니다. 정말이지 이건 거저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 그러죠. 다른 물품들도 이 신발처럼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필요한 여행 장비는 모두 이곳에서 구입하기로 하지요.”
 결국 소년은 모든 여행 장비들을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샀다. 마진이 별로 남지는 않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손님을 놓치기엔, 근래 장사가 너무 안됐으니까. 가정 경제에 타격이 갈 정도로.
 물건을 모두 구입하고 계산을 마친 소년이 잠시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계산대 앞으로 10켄트를 불쑥 내밀었다.
 “손님?”
 이미 계산은 끝났는데, 이건 무슨 의미냐는 듯 주인이 물어왔다. 그러자 소년이 대꾸했다.
 “나를 거지 취급하며 무시하고, 이후에도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지만 않았으면 다 적정가에 샀을 거예요.”
 주인이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근래 장사가 너무 안돼서 그러셨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시라는 의미예요.”
 그러자 주인이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안 받겠습니다.”
 “자존심······, 인가요?”
 “반성의 의밉죠.”
 주인의 대꾸는 의외였다.
 잠시 주인을 바라보던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돈은 더더욱 놓고 가야겠군요.”
 “소, 손님······.”
 주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이 곧바로 돌아서서 상점의 문을 향해 걸었다.
 “어린 손님, 이름이 뭐지요?”
 소년이 돌아보자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이 대꾸했다.
 “제로니스. 줄여서 제니스라고 해요.”
 
 ***
 
 씻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여관에 가야 했다.
 여관에서도 행색을 보고 쫓아내려 했지만, 서슴없이 돈을 내밀자 대우가 달라졌다.
 씻은 후에 식사를 하고 나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새로 산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시내 구경을 할 생각에서였다.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한 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
 이 이상한 세계에 넘어온 후로, 이렇듯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이었다.
 제니스는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세계에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많은 것들이 흥미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배경은 완전히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구나. 이 이상한 세계든, 한국이든.’
 한동안 돌아다니던 제니스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꺄아악!”
 갑자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프라노 톤의 비명이 어디에선가 울리자, 제니스가 곧바로 그 방향을 향해 달렸다.
 
 ***
 
 연인 관계인 듯한 남녀 한 쌍이 덩치 큰 사내들 몇 명에 의해 봉변을 당하는 중이었다. 덩치 큰 사내들은 다섯 명이었는데, 건달들로 보였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건달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이 연놈들아! 연애질하면 눈에 처뵈는 게 없냐? 왜 똑바로 못 걸어 다녀서 지나가는 ‘약한 사람’을 밀치고 그래?”
 그렇게 말한 건달은 덩치도 큰 데다가 인상도 흉악하여 전혀 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가 건달들 중에서 우두머리인 듯했다.
 연인 중에서 남자가 대꾸했다. 그는 매우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실수로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암, 용서야 해줄 수 있지. 안 그러냐, 얘들아?”
 두목의 말에 졸개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두목이 왜 용서를 해주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대신 그 계집이 나와 사귀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야. 크하하핫.”
 이제야 큰형님의 깊은 뜻을 알았다는 듯, 졸개들이 대꾸했다.
 “그럼요, 형님. 그 정도면 충분히 용서해줄 수 있겠는데요?”
 “솔직히 형님이 저 여자와 더 잘 어울리십니다.”
 볼수록 가관이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나서 봐야 괜히 연루돼서 함께 험한 꼴을 당할 게 빤하니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들을 하면서.
 곧 연인 중에서 사내가 떨면서 말했다.
 “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이,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거의 흐느끼듯 말하는 그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쯧쯧. 어쩌다 저런 인간쓰레기들에게 걸렸누.”
 “저 파트란 패거리에게 걸렸으니 저 총각 처녀도 참 불쌍하게 됐구먼.”
 “영주의 먼 친척이라도 되나? 저것들은 법도 없으니 원.”
 구경꾼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건달들이 악질인 데다가 상습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만했다.
 ‘하여간 문제야. 왜 어떤 사회든 저런 놈들은 꼭 존재하는 걸까?’
 제니스가 보니 여인의 생김새가 예쁘장하여, 건달들이 노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니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건달들의 행동은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두 놈이 여자를 꼼짝 못하게 잡고 있었고, 두목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는 계속해서 협박하고 있었다.
 “자, 어쩔 테냐? 네 애인은 그럼 오늘부터 이 어르신이 친히 접수한 후에 네놈이 했던 것보다도 더 예뻐해 주마!”
 “그, 그, 그건······! 제발 한 번만 봐주십쇼! 그것만은 안 됩니다.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얼라리요? 이 새끼가 꼭 얻어터져야 말을 처들으려나?”
 퍽!
 결국 남자가 두목의 솥뚜껑만 한 주먹에 맞고 거리를 굴렀다. 두목은 사정을 봐줄 기색이 없는지, 곧장 다가가서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아악!”
 “레온!”
 남자의 이름이 레온인 듯했다. 그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가려는 여인을 건달들이 거칠게 제지했다.
 “네년이 가만히 안 있으면 저 남자는 더 고통스러워질걸?”
 그러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여전히 구타가 이어졌다.
 퍽! 퍽!
 이미 얼굴 이곳저곳이 멍투성이였고, 입술이 터졌는지 핏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맞고 있는 레온이라는 사내를 지켜보는 제니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단지 힘이 없었기에 억울하게 당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모습들이, 저도 모르게 뇌리를 스쳐 갔던 것이다.
 ‘딱히 이유도 없이 참 많이도 맞고 살았지······.’
 특히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심했다. 싸움깨나 한다는 친구들은 단지, 잠깐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먹을 휘두르곤 했다.
 때리면 맞아야 했다. 맞는 와중에도 덜 맞고 싶어서 미안하다며 빌어야 했다. 왜 자신이 사과하고 있는 건지, 그런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굴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생각을 하던 제니스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건달들과 레온이라는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일은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이건, 이 이상한 세계건.
 그래서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아직 이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적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 때에 괜히 나서서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제니스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래도 이런 건 역시, 싫어.’
 
 
 # 제로니스 2화
 
 생각을 마친 제니스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잠깐!”
 “그만둬!”
 거의 동시에 들려온 외침.
 제니스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 말고도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흠······.’
 의외로 어른이 아닌, 소년이었다.
 파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년이었는데, 현재의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눈동자를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니 구경꾼들도 놀란 기색이었다. 설마 어린 소년들이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분위기였다.
 건달 두목 또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들이라니.”
 건달 두목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데, 오늘은 이 형님이 바쁘니 특별히 봐주겠다. 얼른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쑥쑥 크렴.”
 타이르는 듯한 어조였지만 당연하게도 비아냥거림이었다.
 구경꾼들은 다행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어린 소년들이라서 걱정했는데, 어쨌거나 두목이 그냥 보내 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구경꾼들이 제니스와 파란 머리의 소년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얼른 도망쳐!”
 “빨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니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란 머리의 소년도 움직이지 않았다.
 “얘들아!”
 “에그머니나! 애들이 어쩌려고 저런담?”
 “저러다가 애들까지도 험한 꼴 당하겠어!”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며 저마다 그렇게 외쳐 댔다. 그럼에도 제니스와 파란 머리의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파란 머리의 소년이 건달 두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런, 저런. 나이를 먹었으면서 나잇값도 못 하는 불쌍한 작자들이라니. 짐승만도 못한 짓들이 하도 한심해서 이제까지의 죄는 특별히 용서해 줄게. 그러니 얼른 가서 사람 되는 법이나 배워 오시지?”
 건달 두목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낸 말.
 순간적으로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파트란 패거리를 상대로 어린 소년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경악한 것이다.
 구경꾼들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파란 머리의 소년을 바라볼 때, 건달 두목의 고함이 들렸다.
 “어린놈의 새끼들이 건방지게······!”
 건달들이 눈을 부라리며 파란 머리의 소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 제니스의 입이 열렸다.
 “맞아요, 우리는 어린놈의 새끼들이죠. 아저씨들은 양아치 새끼들이시고. 훗.”
 제니스는 마지막에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까지 뀌어 보였다.
 구경꾼들의 표정이 더욱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때쯤 건달들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목이 외쳤다.
 “이, 이······ 쥐방울만 한 것들이! 얘들아, 뭐 하느냐? 저 어린 새끼들을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두목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명은 파랑머리 소년 쪽으로, 다른 두 명은 제니스 쪽으로 달려들었다.
 파랑머리의 소년이 검을 뽑지 않고 검집째로 두 건달들을 상대하기 시작할 때, 제니스는 아랫주머니에 손을 넣은 상태로 다른 두 건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줄곧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제니스의 얼굴이 무표정해지더니, 눈동자가 깊어졌다.
 [사신무(四神武) 백호편(白虎編) 이장(二章)
 봉황각(鳳凰脚)]
 퍼버버벅!
 순간적으로 그런 소리가 났다. 동시에 제니스에게 달려오던 두 명의 건달들 중, 우측의 사내가 그대로 쓰러졌다. 제니스의 왼발이 그 사내의 무릎, 복부, 명치, 관자놀이를 차례로, 빠르게 타격한 것이다.
 우측의 건달이 쓰러질 때쯤, 제니스는 이미 왼발로 땅을 딛고 뛰어오른 상태였다.
 허공에 떠오른 그의 몸이 휙 회전하더니, 오른발 뒤꿈치가 좌측에서 달려오던 건달의 옆얼굴에 그대로 적중했다.
 퍼억!
 “컥!”
 외마디 신음과 함께 좌측의 건달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렇게, 두 명의 건달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둘 다 뇌를 울리는 충격을 받고 기절한 상태.
 구경꾼들의 표정은 멍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정도로 제니스의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제니스가 고개를 돌려 보니 파란 머리의 소년도 이미 한 명의 건달을 제압한 후, 나머지 한 명의 건달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나머지 건달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것 같았다.
 그때쯤, 건달 두목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제니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니스도 건달 두목을 응시하며 히죽 웃었다.
 건달 두목의 손이 허리춤의 단도 쪽으로 향한 건 그때였다.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빤히 보였다. 아마도 옆에 있는 여자를 붙잡고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뜻이리라.
 히죽 웃던 제니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아주, 뼛속까지 쓰레기구나.’
 또다시 제니스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사신무(四神武) 청룡편(靑龍編) 일장(一章)
 청룡잠행보(靑龍潛行步)]
 그 순간, 기이하게도 제니스의 몸이 흐릿해졌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제니스는 건달 두목의 뒤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그의 발이 단도를 꺼내 든 두목의 손목을 정확하게 가격하는 중이었다.
 퍽!
 휘익―
 단도가 멀리 날아갈 때, 제니스는 한 손으로 빠르게 여인을 밀쳐냄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건달 두목의 팔을 낚아챘다.
 그 직후, 제니스는 건달 두목의 팔을 등 뒤로 굽혀 올리며 꺾는 중이었다.
 “크으으으······.”
 두목이 고통을 못 이기고 신음을 흘릴 때, 제니스가 뒤에서 말했다.
 “이봐요, 양아치 아저씨.”
 “으, 응?”
 “응? 혓바닥이 짧으시군요. 상황 파악이 아직도 안 되시나 본데, 처음 보는 사이에 존댓말이 갔으면 존댓말이 와야죠. 아직도 내가 ‘어린놈의 새끼’로 보이시나?”
 제니스가 바로 말을 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아저씨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을 해야 할 텐데. 내가 설마 아저씨 정도 되는 인간의 목숨 하나 어떻게 못 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서 제니스가 두목의 팔을 더 꺾으니, 두목이 다시금 고통 가득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으윽! 그, 그만······!”
 “어허! 아직도?”
 “끄으윽, 아, 알겠습니······ 다. 그러니까 파, 팔 좀······!”
 이미 제니스의 놀라운 몸놀림을 본 데다가 제압까지 당한 상황이니 두목은 비교적 고분고분해진 모습이었다. 그제야 제니스가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빼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죠. 이제야 좀 들을 만하네요.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초면부터 그렇게 반말을 찍찍 해대면 상대방 입장에서 기분이 좋겠어요?”
 “······.”
 “대답이 없으시네요?”
 제니스가 다시금 손아귀에 힘을 주자, 두목의 입에서 또다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으윽! 아, 안 좋습니다······!”
 그러자 제니스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미소 짓더니 물었다.
 “근데 아저씨, 힘 센가 봐요? 얼마나 힘이 세기에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요? 아저씨보다 강한 사람한테 이렇게 당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서 그러시나?”
 두목은 이 어이없는 현실이 아직도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겨우 열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듯한 어린놈에게 이렇게 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특히 소년에게 한번 잡힌 팔은 아무리 풀어 보려 애써 봐도 풀리지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호리호리한 체구의 어린 소년인데, 어떻게 이렇게 힘이 센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칼 들고 뭐 하려고 했어요?”
 “그, 그건······.”
 건달 두목이 대꾸하지 못하자 제니스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곧 제니스의 빙글 회전하니, 그 순간 그의 발이 건달 두목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퍽!
 건달 두목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끄윽!”
 쓰러진 건달 두목을 향해 제니스가 천천히 다가갔다. 건달 두목이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기듯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때 제니스의 몸이 다시금 흐릿해졌다. 그 직후에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건달 두목의 정면,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헉!”
 깜짝 놀란 두목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제니스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짓더니 건달 두목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제니스의 손바닥이 건달 두목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컥!”
 단순히 뺨을 맞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건달 두목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건달 두목이 땅에 쓰러지자마자 제니스의 발이 건달 두목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퍼억! 턱―
 또다시 뒤로 날아간 건달 두목의 몸이 벽에 부딪친 후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제니스의 구타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들리는 건 구타음과 두목의 비명뿐이었다. 두목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이었고 제니스는 표정이 없었다. 이 순간 제니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살기였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건달 부하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지만, 압도적인 제니스의 기세 때문인지 누구 한 사람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구타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구경꾼들의 표정에도 염려가 담기기 시작했다. 원래는 일방적으로 소년을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악명 높은 파트란 패거리를 응징하고 있었으니까.
 한데 소년의 구타가 하도 일방적이고 가혹하니, 이제는 건달 두목이 죽는 건 아닌지 염려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경꾼 중에서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제니스를 말리는 이가 없었다. 제니스가 내뿜고 있는 무시무시한 기세 때문이었다.
 “저기요! 이제 그만하시는 것이······.”
 구타가 계속해서 이어지던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제니스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까 함께 나섰던 파란 머리의 소년이었다.
 제니스가 마지막으로 건달 두목을 발로 차버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란 머리의 소년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내내 제니스의 눈과 파란 머리 소년의 눈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파란 머리 소년의 곁에 다가간 제니스가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파란 머리 소년의 어깨에 친근한 척 어깨동무를 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 사시나요? 아니면 여행자?”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 속삭이는 듯한 그 목소리는 파란 머리의 소년에게만 들렸다.
 파란 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파란 머리의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행자······, 입니다만······.”
 “그러면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겠네요?”
 “예, 뭐······, 며칠 정도······.”
 “나도 이곳에 안 삽니다. 지나치다가 우연히 이 일에 말려들었죠.”
 그러자 파란 머리의 소년이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제니스가 피식 웃더니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둘 다 얼마 후에 이곳을 떠날 사람들이군요. 이 시점에서 나랑 내기 하나 할래요? 저 건달들이 나중에 저 연인들에게 해코지를 할까요, 안 할까요? 나는 무조건 해코지를 한다는 쪽에 걸 생각인데. 당신은 안 한다는 쪽?”
 그 말에 파란 머리 소년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감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여행 중일 뿐이고, 어차피 며칠 있지 않아서 이곳을 떠날 사람이었다. 다만 아까는 그 건달들이 너무한다 싶어서 끼어들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니스가 말했다.
 “내 말뜻을 이해했나 보군요.”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줄 작정입니다. 그래야 다시 이런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그때처럼 잘못 걸리면 죽을지도 몰라’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애초에 개입을 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한 번 개입한 이상 최대한 책임을 져야겠죠. 그럼.”
 제니스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아까의 그 건달 두목이었다. 파란 머리의 소년은 더 이상 제니스를 말리지 못한 채 멍하니 제니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쯤 졸개들이 건달 두목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보아하니 두목을 데리고 도망치려던 모양새였다.
 “아저씨들? 동작 그마안.”
 제니스의 목소리에 건달들의 동작이 그대로 굳었다.
 “어딜 가려고요?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던 참인데.”
 제니스가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건달 두목을 향해 다가갔다. 건달 두목은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고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표정이 왜들 그래요? 아저씨들이 아까 말했듯, 나는 한낱 어린놈의 새끼일 뿐인데. 누가 보면 아저씨들이 어린놈의 새끼한테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오해하겠네. 아까처럼 편하게들 해요. 이 세상 천지에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양 거침없이 행동하던 그 기개, 다시 보고 싶은데.”
 건달들의 표정이 더 큰 두려움을 담아 갔다. 제니스가 말을 이었다.
 “두목 아저씨! 이 어린 놈의 새끼의 재도전, 받아줄 거죠? 아까는 주먹다짐이라 별로 재미가 없었던 모양인데, 어때요? 이번에는 검술로 할까요? 그래, 검술이 좋겠네요.”
 이제는 군중들마저도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제니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주먹질과 발길질만으로도 저 건달 두목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패놓고는, 이제 무기를 사용하겠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제부터는 무기를 사용해서 저 건달 두목을 아주 저세상으로 보내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제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구경꾼들보다 다섯 명의 건달들이 느끼는 공포는 더욱 대단했다.
 제니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만있자, 검이 있어야 대결을 할 수 있겠군. 검이······.”
 다섯 명의 건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더니 제니스를 향해 빌기 시작한 건 그 순간이었다.
 “제,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제, 제발 자비를······.”
 덩치 큰 건달들이 어린 소년에게 무릎 꿇고 빌며 용서를 구하는 광경이 어색하기만 했다.
 “자아비이?”
 대꾸하는 제니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제니스가 눈매를 찡그린 채로 말을 이었다.
 “아까 저 남자가 한 번만 봐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 때, 당신들은 어떻게 했지? 봐줬던가? 약간의 자비라도 베풀어 줬던가?”
 말투마저도 싸늘했다. 표정과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할 뿐이었다.
 건달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제니스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제니스가 조용히 서너 걸음을 옮기더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도를 집어 들었다. 아까 건달 두목이 협박용으로 꺼냈던 단도였다.
 제니스가 단도를 들고 건달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는 누가 봐도 잔인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비 같은 거, 기대도 하지 마. 쉽게 안 끝내. 내가 성격이 좀 나쁘거든. 아, 안심해.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보는 눈이 많잖아. 대신, 평생 불구로 살게 만들어 줄게. 그 정도는 돼야 끝날 거야, 아저씨들. 한마디로, 이제 시작이라고.”
 물론 제니스는 더 이상 그들을 핍박할 생각이 없었다. 계획했던 대로 건달들에게 최대한 공포심을 심어 주기 위한 연출일 뿐이었다.
 그리고 제니스의 작전은 이미 충분한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건달들 중에는 우는 자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바지가 젖은 자들도 있었다.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 저기요!”
 문득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제니스가 고개를 돌렸다. 건달들에게 핍박받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제니스는 대꾸하지 않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이 또한 연출일 뿐이었다.
 여인이 제니스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 이분들도 충분히 알아들으신 것 같고······. 무, 물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여인은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태도였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말하니, 더 이상 연극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다시금 건달들을 노려보던 제니스가 이윽고 돌아섰다.
 ‘나머지는 그 파란 머리가 알아서 하겠지.’
 
 
 # 제로니스 3화
 
 그 길로 여관으로 돌아온 제니스가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방금 전에 건달들을 상대하던 일이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람을 상대로 무공을 사용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신무는 역시 대단했다.
 그 무공을 익히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의 동굴.
 바깥의 시간으로 따지면 2년에 불과했지만, 그 희한한 동굴 안에서 자신이 실제로 보낸 시간은 19년이었다. 19년 동안 오로지 무공만을 익혀야 했다.
 글자는 알겠는데 도저히 뜻이 이해되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무공이 어느 단계에서 막혀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 시간들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박성신! 많이 발전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는 양아치들만 만났다하면 얻어맞거나 간혹 도망가는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무공을 배워서 강해지니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다는 게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했다.
 ‘이젠 한국에서 살았던 전생의 시간들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 같네······.’
 침대에 누워 있는 제니스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일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벨키아드 대륙에는 여러 국가들이 존재한다.
 현재 이 대륙의 최강국은 유일무이한 제국인 루카드 제국이었다. 루카드 제국의 영토가 벨키아드 대륙 전체 면적의 4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최강국인 것이다.
 제국의 뒤를 잇는 강대국은 여러모로 슈라단 성국이었다. 성황이 통치하는 이 슈라단 성국은 슈라드교를 국교로 정하여 국민이 곧 신도인 국가다.
 그렇다 보니 슈라단 성국의 국민들이 보여 주는 단합심은 제국마저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참고로 대륙에서 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넓은 나라가 바로 슈라단 성국이었다.
 슈라단 국민들의 신앙은 성국에 위기가 닥치면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전쟁이 발발하면 더욱 그랬다. 그들의 광적인 신앙은 슈라드 신께서 허락한 성역에 침입하는 이단자들을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벨키아드 대륙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 세 번째로 넓은 나라가 바로 카니아 왕국이었다. 제국과 성국을 제외한 여러 왕국들 중에서 가장 영토도 넓었고 상대적으로 부강했다.
 카니아 왕국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슈라단 성국과 비견될 만한 강국이었다. 그러나 그즈음 벌어졌던 루카드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곡창지대들을 빼앗겨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대국에 속했다.
 제니스가 기묘한 계기로 이 세계에 오게 된 후로 지금까지 머물고 있는 곳도 바로 카니아 왕국이었다.
 대륙에는 카니아 왕국 외에 프라티안 왕국, 브랜샤드 왕국, 아이렌시아 왕국, 마즐란 중립 연합국 등이 존재했다.
 
 카니아 왕국의 남쪽에는 카네즈 산맥이라고 불리는 매우 험한 산맥이 솟아 있다.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골의 작은 마을.
 그곳에서도 제법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딴집에서는 현재, 잠을 깨우려는 자와 일어나지 않으려 하는 자 사이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제니스! 제니스! 일어나거라!”
 ‘아이고 할아버지······. 노인이야 새벽잠이 없겠지만 저 같은 어린애한텐 너무 이르다고요. 난 더 자야 한단 말이에요. 음냐······.’
 그러나 제니스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펄럭!
 노인이 제니스의 이불을 세차게 걷어 버린 것이다.
 “제니스, 얼른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모든 훌륭한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고 이 할아비가 몇 번을 말해!”
 근엄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노인이 바로 제니스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이고. 할아버지,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픈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요. 그러니 제발 잠 좀 자게 놔두세요. 으음······.’
 “예끼! 이 녀석! 얼른 안 일어나!”
 결국 노인이 고함을 지르니 제니스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고막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고함 소리였다.
 할아버지는 원래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는데 좁은 자신의 방에서 들으니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결국 제니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깨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제니스가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쩝. 연로하신 분의 기력이 저 정도니 분명 장수하실 거야.’
 제니스가 이 노인을 만난 건 6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 제니스는 꼬마 아이를 구하고 대신 덤프트럭에 치였던 한국인 청년 박성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겨우 어린아이 한 명 구하려고 덤프트럭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덤프트럭의 굉음과 급제동 소리.
 온갖 비명과 고함.
 그 많은 소리들이 들린 순간,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신기했던 건, 마지막 순간에 두려워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주변이 엄청나게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 정도였다.
 당시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 후에 눈을 떴을 때,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예닐곱 살 꼬마의 모습인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분명히 죽었을 텐데 왜 그런 모습이 되어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장소 또한 매우 생소한 곳이었다.
 더 신기한 건, 기억이었다.
 몸은 사진에서 봤던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인데, 최근까지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덤프트럭에 치일 당시까지의 모든 기억이 또렷이 존재했다.
 이 모든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런 게 현실일 리 없다.
 꿈일 것이다.
 한데,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게 너무 생생했다.
 굳이 살을 꼬집어 보는 식으로 확인을 하지 않아도 이게 꿈이 아님이, 현실임이, 자연스럽게 자각되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현실임을 확실하게 자각할수록 혼란도 커져 갔고 공포심도 커져 갔다.
 “으아아아아아―!”
 두려움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럴 리가 없어! 이건 현실이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인해 넋이 나가 있던 성신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다가온 한 명의 노인 때문이었다.
 경계하는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금발이 섞인 흰머리에 푸른 눈동자의 노인이었다. 백인 노인인 것이다.
 영문 모를 상황에, 정체 모를 곳에 떨어져서, 처음 마주친 사람이 백인 노인이라니.
 그렇다면 이곳은 북미나 유럽 쪽일까?
 순간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 있던 자신이 왜 갑자기 북미나 유럽에서, 그것도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깨어난단 말인가. 살면서 딱히 그쪽 지역과 관련된 일도 없었는데.
 차라리 이곳이 한국의 외진 산골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한국의 외진 산골에 기거하거나, 외진 곳을 돌아다니는 백인들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눈앞에 노인이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seii dhikno bpoahddejjy?”
 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 언어들은 아닌 것 같았다.
 성신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skaifqii yionuigyi mioivcza?”
 염려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언어였다.
 이에 성신은 여전히 경계하는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Do you speak english?”
 입시 위주의 영어만 배웠기에 회화에 능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미나 유럽 사람이라면, 설령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할지라도 저 정도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노인이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설령 자신이 영어에 서툴러도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한데 노인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전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노인이 또다시 뭔가를 말했지만, 여전히 성신은 노인의 언어가 어떤 나라의 언어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주저앉아 있던 성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로.
 손을 내민 성신을 노인이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업고 숲속을 한참이나 걸어 외딴집으로 데려왔다. 그 집이 바로 성신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이었다.
 
 노인의 집에서 지내게 된 후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다, 달이 두 개라니! 세상에······!’
 달 두 개가 몇 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떠오른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곳이 지구라면 달이 하나인 게 당연하다.
 즉, 이곳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
 처음에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점점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내면서 보니 노인이 사는 곳에는 전기, 전자 제품, 첨단 기계 같은 것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집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에 가 봐도 문명의 이기에 관련된 것들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성신은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이 자신이 살던 지구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현실을.
 
 노인의 집에서 지내게 된 성신은 부지런히 이곳의 말과 글을 배워 갔다.
 물건을 집을 때나 행동을 할 때마다 노인은 이곳의 언어를 반복해서 들려주며 언어를 가르쳤고, 성신은 노인의 발음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며 착실히 말을 익혀 갔다.
 성신이 여러 단어들에 점점 익숙해질 무렵, 노인이 성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로니스’라고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차례나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의도를 성신이 모를 리 없었다.
 그게 바로 노인이 지어준 이름인 것이다.
 성신이 그 이름에 익숙해진 후부터 노인은 ‘제니스’라는 애칭을 사용했다.
 의사소통이 조금이나마 익숙해졌을 무렵부터 노인은 문자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성신도 최선을 다해서 배웠다.
 그런 생활 속에서 노인과 성신은 자연스럽게 조손 관계가 되어 갔고, 그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 갔다.
 
 ***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시점부터 제니스도 조금씩이나마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사가 익숙해질 때마다 제니스는 알아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늘려 갔다.
 노인과의 생활이 적응된 후에는 대부분 가사를 제니스가 도맡았다. 은인에게 해야 할 당연한 도리였다. 노인은 새벽에 일어나기에 아침 식사 준비만 맡았다.
 그렇게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식사 준비, 텃밭 관리, 청소, 간단한 언어 공부 등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는 항상 노인이 가르치는 대로 검술 수련을 했다.
 다른 때는 항상 인자하고 부드러웠지만, 검술을 가르칠 때의 노인은 항상 엄격했다.
 처음에는 노인이 그저 재미 삼아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련의 강도가 강해졌다.
 최대한 군말 없이 버티며 지도에 따랐지만, 수련이 갈수록 힘들어진 탓에 하루는 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검술은 왜 배워야 하는 건가요?”
 “이 주변의 산지는 매우 험하고 인적이 드물어서 맹수와 몬스터가 많다. 어떤 놈들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지. 언젠가는 너도 사냥을 다녀야 할 테니, 평소에 꾸준히 수련해 놓아야만 만약의 상황에 처해도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느냐.”
 노인의 말에 수긍해서 꾹 참고 수련을 계속했다.
 하지만 제니스가 검술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노인의 수련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검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부터는 일과가 약간 바뀌었다.
 검술 수련이 오후 시간으로만 한정된 대신, 오전 시간에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검술 수련 시간이 줄어들었다 해서 훈련의 강도가 약해지지는 않았다.
 공부는 노인의 서재에서 이뤄졌다.
 초창기의 공부는 마을 잡화점에서 구입한 아동용 도서들을 섭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제니스가 아동용 도서들을 섭렵하는 과정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인 언어를 깨우치고 아동용 도서들을 모두 섭렵하기까지, 채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제니스는 한국에서 대학 생활까지 했던 청년이었다. 갑자기 어린 모습이 되긴 했지만 지적 역량과 사고 능력은 한국에서의 수준 그대로였다.
 당연히 이 세계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도 굉장히 빠를 수밖에 없었고, 언어가 익숙해진 후에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도 매우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노인의 도움이 필요했던 공부도, 일정 시점이 흐른 후에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다만 틈날 때마다 혼자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희한한 점은, 산골의 외딴집에서 혼자 사는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재에 각종 서적이 많다는 점이었다. 과거에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정치, 경제, 병법, 교양,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제니스가 그 서적들을 탐닉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진 공부 시간인 오전과, 모든 일과를 마친 밤 시간이었다. 그 외에도 노인이 사냥하러 나간 틈을 타서 항상 책을 읽었다.
 처음에 노인이 추천해준 책들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것들이었는데, 그 책들을 모두 독파하고 난 후에는 수준이 높은 책들도 차례로 섭렵해 갔다.
 “녀석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좋으나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제니스가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으면, 노인이 자주 저런 말을 하며 말릴 정도였다. 제니스 스스로도 살면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책에 파고들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책에 파고든 이유는 간단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이 세계에 대해 알아 간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이곳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소설이나 매체를 통해 간간이 접했던, 기사나 마법 같은 개념들이 존재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 제로니스 4화
 
 노인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3년이 흘렀을 무렵, 제니스는 이 세계의 말과 글을 거의 완벽하게 깨우칠 수 있게 되었다.
 몸은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머리에는 전생의 지식과 사고 수준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탓이었다.
 제니스는 틈날 때마다 노인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탐독했고, 그럴수록 이 세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져 갔다.
 종종 노인이 들려준 많은 이야기들 또한, 제니스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제니스는 이 새로운 세계에 점점 더 적응해 갔다.
 
 그렇게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점심 무렵.
 톡!
 “아얏!”
 갑자기 뭔가가 이마를 때렸기에 제니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스푼을 들고 있었다.
 “이 녀석아, 밥은 안 먹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게야? 얼른 먹어야 오후 수련 하지!”
 점심 밥상 앞에서 제니스가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 오전에 읽었던 책 때문이었다.
 그런 제니스의 속내를 알기라도 한다는 듯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또 책을 읽고 흥미로운 게 생긴 모양이구나.”
 “예, 뭐······.”
 “이번엔 또 뭐냐?”
 “고대 역사와 지리에 관한 책을 읽었거든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벨키아드 대륙이고, 머나먼 동쪽에 카시아드 대륙이 있는 거잖아요? 둘 다 같은 별에 존재하는데도 서로 오갈 수가 없다는 게 신기하잖아요.”
 “황천의 띠 때문이라는 걸 너도 알잖느냐.”
 “예, 알죠. 그 황천의 띠라는 현상도 너무 신기하고요.”
 두 개의 달이 뜨고, 기사와 마법이 존재하고, 몬스터들이 존재하는 것 외에도 이 세계에는 신기한 게 많았다.
 가장 놀라운 게 바로 이 별에 존재하는 황천의 띠라는 현상이었다.
 그 황천의 띠라는 현상으로 인해, 서대륙이라고 불리는 벨키아드 대륙과 동대륙이라고 불리는 카시아드 대륙은 각각 정해진 반구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 같은 별에 살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이다.
 황천의 띠는 이 별을 세로로 가르는 초자연적 기후 현상이다. 대륙과 대륙 사이의 대해(大海)를, 천둥 번개를 동반한 강풍과 폭풍우 지대가 항상 가로막고 있다고 한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강풍과 폭풍우 지대가 이 별의 경도 중앙을 따라 항상 순환하고 있어, 그 지대를 황천의 띠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두 대륙이 대해를 사이에 두고 육로로는 전혀 연결되지 않아 있다 보니, 이 세계에서 왕래를 위한 유일한 수단은 바닷길밖에 없다.
 그런데 그 바닷길을 황천의 띠가 완전히 막고 있기에 같은 별에 살면서도 대륙 간의 왕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책에 보니까 고대 마법의 시대 때에는 이곳 벨키아드 대륙의 사람들이 카시아드 대륙에 갔다 온 적이 있었다고 했어요. 당시에 작성된 카시아드 대륙에 대한 문헌들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되어 있더라고요. 고대 마법의 시대 이후에 계속된 일차, 이차, 삼차 대륙 전쟁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제니스가 읽은 ‘고대 마법의 시대에 관한 연구’라는 책에 기술된 내용이었다.
 그 책에 따르면 고대 마법의 시대 당시는 통일 제국이었다. 통일 제국 아래에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마법이었고, 그로 인한 마법 문화가 창달했던 시기라고 한다.
 마법사들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와중에 뛰어난 마법사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도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제대로 공부했구나. 허허.”
 “그때 말고는 왕래한 예가 없는 거예요? 가령 기적같이 황천의 띠를 통과해서 왕래한 예라던가······.”
 제니스의 말에 노인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모험가나 탐험가들 중에 시도해본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황천의 띠에 휘말린 후에 돌아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구나. 그 근처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람은 있었어도.”
 “아······.”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제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대 마법의 시대 때, 마법사들이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쳐서 카시아드 대륙에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 공간 이동 마법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거예요?”
 “암,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이지.”
 “그럼 요즘도 그런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어요?”
 제니스가 궁금함 가득한 눈동자로 묻자 노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많지.”
 “우와!”
 “그러나 난이도가 있는 마법이라서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들만이 구사할 수 있다. 시전하는 마법사의 역량에 따라서 공간 이동의 거리가 더 늘어나거나, 횟수가 늘어나거나,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거나 하지.”
 “아하!”
 그 후,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제니스가 다시 물었다.
 “고대 마법의 시대에도 마법사들이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서 왕래했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 거예요?”
 “들어보니 공간 이동을 하려면 목적지의 정확한 좌표가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연구를 통해서 마법사들이 카시아드 대륙 쪽의 안전한 좌표를 분석해 내도, 실제로 공간 이동이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아마도 황천의 띠가 모종의 방해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지.”
 노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대 마법의 시대 당시의 마법사들은 현대의 마법사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뛰어난 마법 실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최상위 마법사들을 단순 비교해도, 당시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 경지라는 8클래스 마법사들이 여러 명 존재했다더구나. 그러나 지금은 8클래스 마법사가 단 한 명도 없지. 7클래스 마법사가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시대인데, 그조차도 대륙에 두세 명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 당시와 지금의 역량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거지.”
 “즉, 당시의 마법사들은 황천의 띠가 방해 작용을 해도 그걸 넘어서서 카시아드 대륙으로 공간 이동 할 실력이 있었던 거고, 현재의 마법사들은 그 실력이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한데 찬란한 마법의 시대라고 불렸던 그 당시조차도, 카시아드 대륙에 방문했던 예가 두어 차례밖에 없었다고 하더구나.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던 게지.”
 “그 이후에 벌어진 1차, 2차, 3차 대륙 전쟁에 의해서 고대 마법의 시대는 막을 내린 거고요?”
 “그래. 그 후에는 각국의 관심도 자국 우선주의와 영토 확장 쪽으로 치우치면서 기사의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평화롭고 찬란했던 고대 마법의 시대 후에는 카시아드 대륙과의 교류도 완전히 단절된 거고.”
 그 후에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하다가 제니스가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카시아드 대륙은 어떤 대륙일까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으니 이곳 벨키아드 대륙과는 문화가 많이 다를 것 같아서요. 혹시 할아버지는 그 대륙에 대해 들어본 게 있으세요?”
 “당시에 방문했던 기록이 소실되었는데 이 할아비라고 어찌 알겠느냐. 다만 구전되어온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지.”
 “우와! 뭔데요?”
 제니스가 흥미를 보이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 세계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쓰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처럼 체계화된 마법이 아니라 주술 비슷한 능력이라고 들었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조차도 극소수라지 아마.”
 “아.”
 “대신 우리 대륙으로 따지면 기사에 비교될 수 있는, 무력이 강한 존재들이 매우 많다고 하더구나. 비교를 하자니 기사에 비교한 거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사와는 다른 자들이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검이나 창을 포함한 수많은 무기들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 기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싸운다고 하니까.”
 “어떻게 다른데요?”
 제니스의 눈동자에 더욱 강한 호기심이 담겼다.
 노인이 대꾸했다.
 “이곳의 기사들은 대부분이 검과 방패를 동시에 쓰면서, 검으로 적을 공격하고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는 방식의 전투를 한다. 물론 양손 검 등의 양손 무기를 쓰는 기사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부분이 한 손 무기와 함께 방패를 동시에 쓰지. 그게 공수에 있어 가장 균형 잡힌 방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전에 얘기해준 적이 있었지?”
 “예.”
 “하지만 그곳의 강자들은 방패를 전혀 쓰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그냥 무기만 쓰는 거지. 양손 무기를 쓰기 때문에 방패를 쓰지 않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이 한 손 무기를 사용하는 데도 방패를 쓰지 않는다는 게야.”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강하다고 하더구나. 당시에 마법사들을 호위하기 위해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기사들 몇 명이 동행했는데, 대결을 해보니 그쪽 세계에서 겨우 사오십 위권 강자들과 호각을 이루는 수준이었다더구나.”
 “와! 그들의 전투 능력이 대체 어떻기에······!”
 “구전되어 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방어의 개념 차이가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방패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막는 개념이 우선인데, 그들은 피하는 개념이 우선인 듯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날렵해서, 우리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모양이야. 그들은 멀지 않은 거리라면 거의 나는 것처럼 재빠르게 움직인다고도 들었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우와······!”
 “아마도 마법이나 주술 쪽의 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는 대신, 신체 능력을 극대화해서 전투를 치르는 방식으로 특화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나. 뭐, 이건 이 할아비의 개인적인 생각이다만.”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제니스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저한테 가르쳐 주시는 검술도 한 손 검을 쓰지만 방패를 쓰지 않는 방식이던데······.”
 “허허. 그들처럼 대단한 검술이 아니니 들뜨지 말거라. 별 볼 일 없는 가전 검술일 뿐이다. 다만 카시아드 대륙을 방문했던 기사들 중에, 그들의 검술을 연구하고자 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아마 이 할아비의 가전 검술도 당시의 연구에 뿌리를 둔 검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든다.”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제니스가 다시금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인에게 물었다.
 “따로 가전 검술이 있을 정도면 할아버지의 가문도 어느 정도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뜻일 텐데, 할아버지의 가문은 어떤 가문이었나요?”
 “아까도 말했잖느냐. 말이 가전 검술이지 별 볼 일 없는 검술일 뿐이다.”
 제니스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너 이 녀석, 이미 검술 수련 시작 시간이 지났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이런 식으로 농땡이를 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렷다?”
 “아, 아니에요!”
 “마저 밥 먹고 치우고 뒷마당으로 나오는 시간까지 10분! 조금이라도 늦으면 오늘은 저녁 수련도 있을 줄 알아!”
 
 ***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맹수나 몬스터들에게서 충분히 자신을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검술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혹독하다 싶을 정도까지 수련을 시켰다.
 또다시 검술 수련이 너무 힘들다고 노인에게 말하려 하던 즈음의 어느 날 새벽.
 소변이 급해서 일어났다가 마당에서 검무를 추는 노인의 모습을 보았다. 매일 늦잠을 자는 탓에 평소에는 접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노인의 그 모습은 달빛과 조화되어 너무나도 멋있었다.
 검이 공간을 수놓을 때마다 달빛에 반짝이며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냈다.
 노인의 검은 부드럽고 자유롭게 움직이다가도 갑자기 빠르고 강맹하게 나아가곤 했으며, 그러다가 또다시 부드러워지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시종일관 눈을 감은 노인의 표정은 고고하고 여유롭기만 했다.
 마치 신선이 하강한 듯하여 한동안 넋을 놓고 그 모습만 바라보기만 했다. 노인이 검무를 끝냈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을 정도였다.
 ‘저런 게······ 별 볼 일 없는 가전 검술이라고?’
 그럴 리 없었다.
 아직 검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신이 보기에도 노인의 검술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수련시키려 한다면,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새벽, 노인의 그 모습을 본 이후로 제니스는 더 이상 검술 수련이 고단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제니스가 노인과 함께한 지 사 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다만, 저렇게 대단한 검술을 보유한 노인이 왜 이런 산중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는지가 매우 궁금하긴 했다.
 생각해 보면 노인은 여태껏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조차 얘기해준 적이 없었다. 궁금해서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준 적이 없었다.
 노인에게 사정이 있겠거니 해서 한동안은 묻지 않았었는데, 이미 함께 산 세월만 4년이었다.
 이쯤이면 대답해 주겠거니 싶어서, 어느 날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정말 저한테 할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안 알려 주실 거예요? 심지어 성함조차도?”
 “허허, 녀석. 거참 끈질기구나.”
 “끈질기다기보다 이건 기본 문제라고요. 그때 할아버지가 거둬 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그 산속에 버려져서 죽었을 거예요. 제가 그런 고마운 분의 성함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겠어요? 게다가 함께 지낸 지 4년이나 됐다고요. 4년!”
 하지만 역시나 노인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잊었다.”
 “예?”
 “이름 같은 것은 이미 잊었다. 나이를 너무 먹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왠지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순간적으로 서글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손자의 부탁이니 끈질기게 기억해 보세요.”
 “기억 안 난대도, 욘석아.”
 이쯤 되면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노인은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4년간 봐왔기에 노인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에휴.”
 “요, 요 쪼그만 녀석이 한숨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노인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라. 그러니 서운하다 생각하진 말거라.”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니스는 궁금했던 두 번째 사안에 대해서 물었다.
 “검술 말인데요. 저는 아직 검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할아버지의 검술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아요. 그날 새벽에 검무를 추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죠.”
 “허허. 별 볼 일 없는 가전 검술이래도.”
 “그럴 리 없어요. 잡화점 파킨슨 아저씨가 그랬어요. 할아버지가 잡아온 사냥감에는 모피로 이용할 수 있는 부분에 상처가 나 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뛰어난 사냥꾼들이라면 누구나 그 정도는 한다.”
 “하지만 이름난 사냥꾼들 중에 그 누구도 할아버지가 잡아 오는 수준의 사냥감들을 잡아 오지는 못한다던데요? 특히나 할아버지가 잡아 오는 사냥감들은 모두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인데, 그 정도로 깊은 산 속에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결국 그 강력한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여유롭게 생존할 수 있어야만 그런 사냥감을 잡아 올 수 있는 것이다.
 “파킨슨 아저씨가 그랬어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기사들 중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기사 정도는 되어야 할아버지처럼 이쪽 산지의 깊은 곳까지 드나들 수 있을 거라고.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사냥꾼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허허······, 그 사람이 별 얘길 다 했구나.”
 “할아버지가 원래 이곳 주민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터를 잡으셨다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다들 할아버지가 이곳에 오기 전에 뭔가 대단한 일을 하셨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뛰어난 기사였다거나 경험 많은 용병이었다거나.”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음에도 노인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먼 서쪽 하늘을 한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제니스. 이 할아비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단다. 마찬가지로 이 할아비도 네가 어디에서 태어난 누구인지, 어린 네가 어떤 이유로 그런 깊은 산속에 버려져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중요시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이고, 가족이라는 사실이지.”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우리는 가족이다. 그렇기에 이 할아비는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네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 이 할아비가 몇 년이나 더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남겨진 그 시간이 길든 짧든, 그 시간이 너와 내게 있어 더 의미 있는 시간이길 바랄 뿐이다.”
 “좋은 말씀인 건 알겠는데, 결국 아무것도 말씀해 주기 싫으시다는 거네요?”
 제니스가 농담기 가득한 얼굴로 묻자 노인이 제니스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말했다.
 “욘석아. 그런 거 궁금해할 시간에 검술 수련이나 더 해! 요사이에 슬슬 요령 피우면서 수련하는 걸 이 할아비가 모를 줄 알았지? 벌로 오늘은 저녁 먹은 후에도 검술 수련이다. 알겠느냐?”
 “하, 할아버지. 그것만은!”
 “어림없다, 욘석아.”
 그렇게 그날 제니스는 결국 노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검술 수련만 해야 했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시간은 흘러갔고, 제니스가 이 세계에 떨어진 후로 7년이 지났을 때 노인은 숨을 거뒀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계에 떨어졌을 당시의 나이를 여섯 살로 규정했으니, 제니스의 나이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 제로니스 5화
 
 가족.
 그랬다. 가족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노인, 아니 할아버지는, 이 이상한 세계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이자 가족이었다.
 그런 존재가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제니스는 한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한국의 가족들 생각이 나곤 한다. 자신의 죽음에 부모님은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그저, 지금의 자신이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겨 내려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가족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가족들을 위해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만의 생활에도 점점 익숙해져,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솔직히 검술 수련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줄이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최소한의 수련 시간만큼은 꾸준히 지켰다.
 검술 수련 시간을 줄인 대신 독서 시간을 늘렸다.
 이제 자신은 이 세계에 혼자 남게 되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달라진 일상은 사냥 정도였다.
 사냥은 언제나 할아버지의 몫이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사냥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데, 제니스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 이 작은 산골 마을에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검술이 있으니, 사냥을 통해 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과연 자신의 힘으로 사냥이 가능할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사냥을 나가 보니 초식 동물 위주의 사냥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겨우 13살에 불과한데도 수월하게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의 7년간 꾸준히 해 온 강도 높은 수련 덕분이었다.
 단련된 신체와 단련되지 않은 신체 사이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13살이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신체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던 어느 날 아침.
 평소답지 않게 아침 일찍 일어난 제니스는 여느 때보다 도시락을 넉넉히 챙겨서 산속으로 향했다.
 특별히 도시락을 넉넉하게 챙긴 이유는 더 깊은 산속으로 사냥을 가기 위함이었다. 이제 인근의 산지는 매우 익숙해졌기에 새로운 사냥터를 개척하려는 목적이었다.
 익숙했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선 후부터 제니스는 큰 나무 위주로 표식을 남기며 조용히 나아갔다. 제니스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삼림은 더욱 빽빽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나아가던 제니스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저, 저건······! 흰 사슴!’
 그간 사냥을 다니며 잡은 사냥감들 중에는 사슴도 많았지만 흰 사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새하얀 털이 녀석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는데,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부분은 은색으로 빛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몸집마저도 자신이 지금껏 봐왔던 일반 사슴들보다 더 컸다.
 모피 가격까지 고려하면 충분히 귀한 사냥감이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 제니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분명히 녀석이 이쪽으로 도망쳤는데······.’
 너무 욕심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모피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다가 그만, 녀석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그 후로 도망치는 녀석을 추격하다 보니 지금의 이곳이었다.
 “헉, 헉, 후우, 후우우······.”
 호흡을 고르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와 넝쿨들이 더욱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흰 사슴을 추격하는 것도 무리였다.
 “에휴.”
 귀한 사냥감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지만 단념할 건 단념해야 했다.
 ‘그나저나 너무 깊이 들어왔어.’
 되돌아가는 제니스의 귓가에 ‘쏴아―’ 하는 폭포 소리가 들렸다.
 맑은 물이라면 목이라도 축여야겠다는 생각으로 다가가 보니 제법 굵은 물줄기가 보였다. 이 물줄기가 낭떠러지를 만나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이 맑았기에 일단 목을 축인 후, 물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낭떠러지 근처로 향했다.
 낭떠러지의 끝자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폭포의 높이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우와! 20미터? 아니, 30미터쯤 되려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광경이 제법 웅장하긴 했지만, 고소 공포증 때문인지 이내 아찔해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 차리고 얼른 돌아가자.’
 그 생각으로 몸을 돌린 찰나, 제니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모, 몬스터? 어느새······!’
 다른 때였으면 소리만으로도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폭포 소리로 인해 녀석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책들 중에는 ‘몬스터 백과’라는 책도 있었다. 그림과 함께 각 몬스터의 특징을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그 책을 통해서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피부색은 푸르스름한 색 중에서도 기분 나쁜 종류의 푸른색이었고, 덩치는 거대했다. 손에는 조악하지만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저, 저게 바로 그 트롤······?’
 아무리 검술 수련과 체력 단련을 많이 했다지만 트롤은 제니스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몬스터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였다.
 혼자서는 어떤 몬스터를 만나든 일단 도망치라는 게 할아버지의 평소 가르침이었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상대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트롤은 그 무지막지한 힘도 힘이지만 재생력이 좋다. 그래서 어지간한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납게 덤벼드니, 혹시라도 발견하면 조용히 그곳을 벗어난 후에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 알겠지?”
 
 그게 바로 트롤에 대한 할아버지의 언급이었다.
 말로만 들을 때는 그렇거니 했는데, 녀석들을 직접 보니 덜컥 겁이 났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도망쳐야 한다.
 문제는 도망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폭포 아래쪽을 구경하느라 낭떠러지 끝에 있던 순간에, 하필이면 녀석들이 자신을 포위한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몸이 덜덜 떨리며 무릎이 후들거렸다.
 아무리 봐도 녀석들 사이로 빠져나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물줄기의 건너편 쪽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가뜩이나 수영도 못하는데 물줄기의 중심부가 제법 깊었기 때문이다.
 저 물줄기를 보니, 설령 수영을 할 줄 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근래 일대에 비가 내렸던 터라 유속이 상당히 빨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영에 능해도 저 유속이라면 반대편 물가에 닿기도 전에 폭포에 휘말릴 것이다.
 좌측 후방은 폭포. 우측 후방은 물줄기.
 그리고 전방은 트롤 세 마리.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두려움으로 인해 몸을 벌벌 떨던 제니스가 한순간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느새 뽑아 든 검의 손잡이도 꽉 쥐었다.
 어차피 뒤쪽으로는 도망칠 방법이 없다.
 살려면 어떻게든 트롤들 사이로 틈을 만들어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윽고 지척까지 다가온 트롤들 중에서 중앙의 녀석이 제니스를 향해 몽둥이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부웅―
 휘둘러진 몽둥이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제니스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기울여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간담이 서늘했다.
 피하긴 피했는데 겨우 피한 탓이다. 그만큼 트롤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힘과 스피드가 엄청났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 온 수련이 아니었다면 그나마도 못 피했을 터였다.
 부웅―
 이번에는 왼쪽에 있던 트롤의 공격이었다.
 막으면서 반격을 하고, 그러면서 틈을 만들어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다.
 한데 막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트롤의 저 무지막지한 파워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니스는 뒤로 살짝 물러나며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계속되는 트롤들의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공격을 피할 때마다 제니스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어느새 장딴지까지 물에 잠겼다.
 그쯤 되자 점점 커져 가던 두려움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다.
 이어진 두어 차례의 공격을 피하고 나니 어느새 허리 어림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아직 어리고 신장이 작다 보니 금세 그렇게 된 것이다.
 반면, 트롤들은 키도 크고 뭍에서 가까워, 아직 무릎도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부웅―
 중앙에 있던 트롤의 몽둥이가 제니스의 어깨를 노리고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그 공격을 옆으로 피하던 제니스의 몸이 갑자기 휘청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헙!”
 물속의 미끄러운 돌을 밟은 것이다.
 첨벙!
 그대로 물속 더 깊은 곳으로 빠져 버린 제니스는 허우적댈 뿐,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열심히 손발을 휘저어 봐야 점점 폭포 쪽으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트롤들도 더 이상은 물속으로 쫓아 들어오지 않았지만, 제니스에게는 이미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붙잡을 만한 나뭇가지도 없었고, 물줄기 위로 튀어나온 바위 따위도 없었다. 게다가 어느새 물속에서 발이 닿지도 않을 정도의 깊이까지 빨려 들어온 상태였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고함을 지르며 물속에서 열심히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점점 폭포와 가까워져 갈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는 생각에 두려움도 더욱 커져 갔다.
 “으아아아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오오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온몸을 지배하니 살려 달라는 외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 깊은 산속에서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이윽고 폭포에 다다른 제니스의 몸이 그대로 폭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려움 가득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끝으로 제니스는 의식을 잃었다.
 
 ***
 
 또옥― 또옥― 또옥―
 귓가에 그런 소리들이 들림과 동시에 감겨 있던 제니스의 눈매가 살짝 움찔거렸다.
 “으음······.”
 작은 신음과 함께 제니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제니스의 고개가 갸웃했다.
 “으음?”
 분명히 눈을 떴는데도 불구하고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제니스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던 제니스의 눈동자가 한순간 번쩍 떠졌다.
 “앗!”
 그제야 자신이 직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분명히 폭포에서 떨어졌었는데?’
 그 폭포에서 떨어져서 살아남은 건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임을 감안하면 이곳이 이승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이 이상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때도 딱 이런 느낌이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
 이윽고 제니스가 누워 있는 상태에서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착착착!
 그 직후 제니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살아 있다. 확실했다.
 ‘다행이네.’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일단 다행이지만, 저승이 아닌 것도 다행이었다.
 ‘만약 저승이었다면 할아버지와 만나게 될 텐데, 열네 살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놓고 창피해서 어떻게 봬? 게다가 엄청 혼났을 거 아냐?’
 평소에는 인자한 분이셨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항상 엄격했던 할아버지였다.
 검술 수련에 소홀했던 것부터, 깊은 산속으로 사냥을 나갔던 것까지, 엄청나게 혼났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그 생각을 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주위는 여전히 어둡기만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옥― 또옥― 또옥―
 처음에 들렸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공간을 울리는 중이었다.
 ‘아마도 동굴······.’
 추측을 하는 와중에도 시력을 돋워 주변을 살피다 보니, 아주 조금씩이나마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으니 아주 가까운 곳은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분간할 수 있게 되었고, 잠시 후 제니스는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동굴 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밝힐 수가 없었기에 동굴 탐사에는 시간이 제법 오래 소모되었다.
 어두웠기에 매 순간마다 극도로 집중해야 했고, 그래서인지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동굴은 꽤 컸다.
 눈으로 전체를 확인한 게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타원형 비슷한 공간으로 추정되었다. 곳곳마다 작은 돌멩이들을 수직으로 던져서 확인해본 결과 외곽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천장도 제법 높았다.
 바위로 이뤄진 동굴이었고, 공간의 중앙쯤에는 제법 넓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제니스는 외곽까지 꼼꼼히 살펴본 후, 일단 물웅덩이 근처로 돌아왔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통로 비슷한 곳은 딱 한 군데.’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일단 통로가 몇 개나 있는지를 파악한 후, 방향 기준을 잡고 나서 하나씩 탐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외곽을 다 돌아보니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뿐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통로가 밖으로 통하지 않는다면······.’
 그 생각을 하던 제니스의 시선이 바로 앞에 있는 물웅덩이로 향했다.
 분명히 폭포 아래로 떨어졌었다.
 그러니 당연히 폭포에 휩쓸렸을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에 눈을 떴던 곳도 바로 저 물웅덩이 바로 옆이었다. 깨어났을 때 옷도 모두 젖어 있었다.
 그렇다면 물웅덩이를 통해 이곳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봐야 한다. 그 아래에 수로가 있어, 폭포 인근의 물줄기로 이어질 것이다.
 그 수로를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간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려면 이곳에서 수영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수영을 터득한다 해도 문제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시커먼 물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통로를 찾는단 말인가.
 그렇기에 아까 발견한 동굴 안의 통로는 매우 중요했다.
 ‘제발 밖으로 통하는 통로여야 할 텐데.’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동굴 안의 그 통로 쪽으로 향했다.
 통로로 다가가는 도중에 다시 한번 확인해 봤는데도 동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위와 이끼뿐이었다. 식량 비슷한 것조차 전혀 없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제니스는 아까 발견한 동굴 안의 통로가 외부로 통하는 통로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윽고 통로의 입구에 도착한 제니스가 어둠 속에서 앞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 제로니스 6화
 
 “마, 말도 안 돼······.”
 제니스의 통로 탐사는 의외로 빠르게 종료되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전진했기에 정확한 거리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길어 봐야 오륙 미터쯤에서 통로가 막혀 버린 탓이었다.
 “제, 젠장! 젠장! 젠자아앙―! 빠져나갈 수도 없고, 식량도 없고,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오오오!”
 답답함과 절망이 뒤섞인 외침이 동굴 안을 여러 차례 울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진 제니스가 막혀 버린 통로의 벽면에 기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평평한 바위에 등을 기댄 후, 자포자기하며 뒷머리를 동굴 벽면에 댔을 때였다.
 “아악!”
 제니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평평한 줄로만 알았던 벽면이라서 무심코 뒷머리까지 댔던 것인데, 유독 뒷머리에 닿는 부분만 벽면이 볼록 튀어나와 있어, 그곳에 찧은 것이다.
 “이 씨바! 이건 또 뭐야아아!”
 짜증이 몰려왔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욕설까지 절로 튀어나왔다. 욕설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짜증을 참지 못한 제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볼록한 벽면을 발바닥으로 차버렸다.
 “에이, 썅!”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은 후, 근처를 서성이며 생각했다.
 ‘죽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전생에는 스물네 살에 사망.
 환생한 이생에는 겨우 열세 살에 사망.
 폭포에서 떨어져 내릴 때도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그땐 어느 순간 정신이 아찔해져서 이런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었다.
 또다시 두려움과 절망감이 몰려왔다.
 허무했다.
 ‘하긴, 이번 생 자체가 이상하긴 했지······.’
 원래 한국에서 죽었던 몸이다.
 사실, 죽은 후에 이런 식으로 환생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환생이나 윤회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경우처럼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환생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니까.
 그렇기에 어찌 보면 이번 생은 보너스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다만, 아무리 보너스 같은 생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마감하게 된다는 게 억울했다.
 제니스가 짧은 순간 동안 그런 식의 수많은 생각들을 할 때였다.
 우우우웅―
 갑자기 동굴 안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뭐, 뭐, 뭐야?”
 제니스로서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굴이 무너지려는 건가 싶었던 탓이다.
 얼른 통로의 측면 석벽으로 이동하여 웅크리고 앉았다. 반사적인 생존 본능이었다.
 그때였다.
 쩌어억! 쿵!
 갑자기 바로 옆에 있는 벽면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닌가.
 ‘헉! 저건 내가 아까 기댔던 바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기대고 있다가 발로 차버렸던, 통로의 막다른 벽면에 있던 바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니스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잔뜩 웅크린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젠장! 발로 한 번 찼다고 저게 무너져? 이게 말이 되냐고오오!’
 굶어 죽을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매몰돼서 이런 식으로 죽게 될 줄이야.
 두려움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에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웅크리고 있기를 잠시.
 뭔가가 이상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던 동굴 안이, 어느 순간부터 정적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눈을 떠보니 일대에 뿌연 먼지만 자욱했다.
 소매로 코를 막는 와중에 제니스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그 직후,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먼지 가득한 어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이 무너져 내린 쪽의 공간에서 비치는 빛을.
 
 먼지가 어느 정도 가신 후,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제니스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통로의 막힌 벽면이 무너지며 드러난 것은 하나의 공간이었다.
 새롭게 드러난 공간의 천장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구슬이 박혀 있어, 그 안쪽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바닥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아담한 연못도 보였다. 그 공간 자체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딱 보기에도 인위적인 공간.
 제니스가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공간의 입구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지잉―
 “헉!”
 입구를 넘어설 때 미묘한 이질감이 들었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입구가 뚫려 있는데도 뭔가를 통과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입구 안쪽 공간으로 들어오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입구 안쪽은 공기의 밀도가 전혀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실제로 안쪽으로 들어와서 바깥쪽을 보니, 입구 부분이 얇은 빛의 막 같은 것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와! 이게 대체 뭐야?”
 놀랍고 신기한 와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누가 이런 곳에 이런 시설을······.’
 이곳은 인적이 없다시피 한 깊은 산속이다. 게다가 이 동굴은 더더욱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 힘든 곳이다.
 그런 장소에 누가, 왜 이런 공간을 만들어둔 걸까.
 제니스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간 안을 자세히 살폈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동굴 안의 이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높고 넓었다.
 “우와!”
 사발을 엎어 놓은 형태의 공간이었는데, 넓이는 족히 지름 10미터 이상 되어 보였고, 천장은 자신의 키보다 네댓 배는 높아 보였다.
 밖에서 잠깐 봤듯, 공간 안의 가장자리에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여러 식물들이 자라는 중이었다. 이런저런 풀들도 보였고, 버섯 비슷한 것들도 있었고, 작은 나무에 맺혀 있는 열매들도 보였다.
 풀이나 버섯이나 열매들 모두 독성을 띤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기에 일단 손은 대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는 밖에서 목격했던 연못이 마련되어 있었다.
 동굴의 벽면 구멍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물이 연못에 머물다가 근처에 있는 동굴 구석의 바닥으로 다시 흘러 나가고 있었다. 이 또한 인공적으로 누군가가 만들어둔 시설이었다.
 “우와······!”
 계속 놀라며 이리저리 둘러보는 와중에 제니스의 시선이 동굴 벽면의 한 곳에 머물렀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길을 끌었던 시설.
 바로, 반듯하게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문이었다. 입구의 반대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가니, 문 옆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둥근 돌이 보였다.
 ‘개폐 장치인가?’
 그 생각을 하며 손으로 둥근 돌을 눌러 보니 눌러지지가 않았다.
 잠시 동안 둥근 돌을 바라보던 제니스의 눈매가 좁아졌다.
 아까 이 공간을 발견하기 전에, 벽면에 몸을 기댔다가 뒷머리를 부딪쳤던 기억이 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만져 봤던 그 돌도 분명히 이것과 비슷한 크기였고, 비슷하게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뒷머리를 찧었을 때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발바닥으로 강하게 찬 후에는 벽면이 무너졌었지?’
 그 생각을 하던 제니스가 이윽고 발바닥으로 둥근 돌을 강하게 찼다.
 그르르르릉―
 공간 안이 약하게 진동하며 바위 문이 옆으로 열렸다.
 “오호! 역시!”
 문이 완전히 열린 후, 제니스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그르르르르릉―
 쿵!
 어디선가 진동이 울리는가 싶더니 육중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건, 처음에 이 공간으로 들어온 입구 쪽이었다.
 “헉!”
 입구의 천장 쪽에서 떨어져 내린 반듯한 석벽에 의해 공간의 입구가 아예 닫혀 버린 것이다.
 빠르게 입구 쪽으로 달려간 제니스가 닫힌 석벽을 두드려 보고 발로 차봤지만, 석벽에서는 미세한 진동이나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냥용 배낭에 들어 있던 단검까지 꺼내서 입구의 석벽을 찍어 보았지만 미세한 흠집 정도만 생길 뿐이었다.
 그만큼 단단하고 두꺼운 석벽인 것이다.
 석벽의 주변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 봐도 개폐 장치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니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와, 완전히 갇혀 버린 거야······?”
 털썩!
 결국 제니스가 공간 입구의 석벽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제니스가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간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이 이상한 공간 안에 완전히 갇혀 버린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당장은 이곳을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다시금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봐야 할 건, 이곳이 인공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깊은 산속의 오지에, 누군가에게 발견될 확률도 매우 희박한 장소에, 누군가가 이런 공간을 만들었다.
 그 정확한 목적이야 아직 알 수 없으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골탕을 먹이고자 했다면 굳이 이런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다.
 게다가 딱 봐도 공들여서 만든 공간이었다.
 천장에 박혀서 공간을 밝히고 있는 빛나는 돌은 딱 봐도 값어치가 상당해 보였다. 아까 잠깐 열어 봤던 또 다른 석실에도 그 돌이 박혀 있다.
 공간 안에 있는 연못의 물은 필경 폭포 쪽의 물줄기를 이용했을 테니 식수일 것이다. 게다가 하수 처리까지 되어 있다.
 공간 가장자리를 둘러싼 화단 또한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굳이 이곳에 독초를 재배할 목적이었으면 저렇게 화단에까지 공을 들일 필요가 있었을까?
 가장 신기한 건, 입구 바깥쪽의 동굴에 비해서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곳의 공기였다.
 불쾌하거나 답답한 느낌이 전혀 없고 오히려 상쾌했다.
 게다가 공간 전체의 온도가 따뜻하여 포근한 느낌이었다. 신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입구의 석벽이 닫힌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딱히 위험한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일단은 이곳을 샅샅이 조사해 보는 게 우선이겠지.’
 이대로 갇혀서 설령 못 나가게 된다고 할지라도, 버틸 수 있을 만큼은 최대한 버텨 봐야 할 테니까.
 
 서성이며 그런 생각을 하던 제니스가 이윽고 아까 열었던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석실의 천장에도 빛나는 돌이 박혀 있는 가운데, 아까는 경황 중이라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그곳의 광경이 보였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방이었는데 바위를 깎아서 만든 침상과 탁자, 의자 등이 보였다.
 ‘뭐야? 조각가야?’
 간단한 가구들이지만,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의 구석진 곳에는 돌로 만든 매우 커다란 상자가 있었다.
 커다란 석함 앞으로 다가가서 보니, 뚜껑 부분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들이 작고 빼곡했다.
 글자는 두 가지 문자로 병기되어 있었다.
 하나는 이 이상한 세계에서 자신이 배운 바로 그 문자였는데, 다른 하나의 문자가 제니스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 한자?”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 세계에 한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뚜껑에 새겨진 문자는 위쪽이 한자였고 아래쪽이 이 세계의 글자였다.
 
 [어서 오라, 절대검성(絶對劍聖)이라 불렸던 나 백리천(百理天)의 전인(傳人)이여!]
 
 ‘절대검성? 이런 말은 무협 소설 같은 데나 나오는 것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제니스는 계속해서 문자를 읽어 나갔다.
 
 [내가 이 이상한 땅에 오게 된 건, 이 땅의 마법사라는 사람들이 세 번째로 내가 살던 나라에 방문하고 나서 돌아갈 때, 작은 실수에 의해서였다. 그 사람들을 배웅해 주던 나는 그 마법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법진’이라고 하는······.]
 
 한자만으로 적혀 있었다면 읽기가 어려웠겠지만, 이 세계의 문자와 병기되어 있었기에 글귀를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제니스는 한국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한자 공부를 남들보다 훨씬 많이 했었다. 매우 보수적이었던 친할아버지의 강권 때문이었다.
 유치원생일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 내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한자를 배워야 했다.
 수시로 할아버지가 내는 시험을 쳐야 했고, 통과하지 못하면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물론 통과했을 때의 보상만큼은 확실했다. 할아버지한테서 받은 용돈만 해도 쏠쏠했으니까.
 억지로 배워야 했던 한자였지만, 덕도 많이 봤다. 학창 시절에 국어나 한문 같은 과목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항상 고득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뚜껑에 새겨진 글자들은 어차피 이 세계의 문자로 병기되어 있었기에 한자를 몰라도 읽는 데 큰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제니스의 경우에는 한자를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더 이해가 빠른 면도 분명히 존재했다.
 
 뚜껑 부분에 음각되어진 글자들을 모두 읽은 제니스의 눈매가 좁아졌다.
 뚜껑에 쓰여 있는 내용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윗줄에서 스스로를 밝힌 백리천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백리천이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무림맹주라고 소개했다.
 ‘하! 무림맹주라니······.’
 무협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용어였다. 그래서 처음에 그 부분을 읽을 때는 허황되다 여기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에는 흥미가 일어서 끝까지 읽긴 했다.
 뚜껑 위에 쓰여 있는 내용은 여러모로 제니스를 놀라게 했다.
 일단, 이 백리천이라는 인물은 동대륙이라 불리는 카시아드 대륙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고대 마법의 시대 때, 이 대륙의 마법사들이 카시아드 대륙에 방문했던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새겨진 내용에 따르면, 이곳 벨키아드 대륙의 인물들이 카시아드 대륙에 방문했던 건 총 세 차례라고 되어 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고대 마법의 시대에 관한 연구’라는 책에 기술된 내용과 비슷했다.
 백리천은 실수로 카시아드 대륙에서 이곳 벨키아드 대륙에 오게 된 사람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벨키아드 대륙인들의 3차 방문 당시, 백리천은 무림맹주라는 지위 때문에 이 대륙의 마법사들을 배웅해 주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벨키아드 대륙으로 복귀하기 위해 마법진을 발동시키던 그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백리천의 어린 손녀가 신기했는지, 갑자기 그 마법진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백리천이 마법진 안에 들어간 손녀를 빼 주던 찰나에 마법진이 발동되었고, 그도 결국 마법사들과 함께 이 세계로 빨려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법사들이 그를 카시아드 대륙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마력 증폭 도구들을 모으며 다시금 준비 기간에 들어갔을 즈음에, 통일 제국이 와해되며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그 직후 대륙 전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전란에 휩싸였고, 전쟁으로 인해 마법사들은 저마다 친분이 깊은 군주들 아래로 뿔뿔이 흩어졌다.
 백리천은 어떻게든 카시아드 대륙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본인의 강한 무력이 있기에, 뛰어난 마법사들이 속한 국가들을 은밀히 도우며 어떻게든 마법사들을 다시 모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백리천이 스스로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 이 넓은 대륙 전체를 동분서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뛰어난 마법사들 중에서도 전사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남아 있는 마법사들이 다시 모일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진 것이다.
 대륙의 전란은 10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고, 백리천도 자신이 살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점점 인식하게 된다.
 게다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노인이었던 그는, 이 세계에서 10년을 보내며 더 늙은 상태였다.
 결국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판단한 그는 은거를 결정한다. 가뜩이나 그의 강한 무력을 탐낸 군주들이 어떻게든 그를 전쟁에 이용하려고만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던 차였으니, 결정은 빨랐다고 한다.
 그래서 은거한 곳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이 대륙의 역사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그 시기가 바로 제 1차 대륙 전쟁기였을 것이다. 그 후에 곧바로 2차, 3차 대륙 전쟁으로 이어졌었다.
 이 대륙의 역사를 돌이켜 봐도 결국 백리천은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에휴······.”
 백리천에 대한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이었다.
 백리천이 딱하기도 했지만, 심정적으로 크게 공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도 자신처럼 다른 세계의 인물인 거니까.
 놀라운 점도 있었다.
 ‘무림이라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거야?’
 무협 세계는 영화나 TV 또는 소설에서나 접해본 세계였다. 당연히 상상의 세계라고만 여겼었다.
 물론, 아직은 백리천의 말과 그가 살았다는 무림이라는 세계에 대해 온전히 신뢰할 단계는 아니었다. 어떤 미치광이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적어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리천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예전에 할아버지가 해줬던 이야기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당시에 할아버지는 카시아드 대륙의 강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그곳에서는 사오십 위권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건지 의아했었다.
 한데 카시아드 대륙이 무협에 기반을 둔 세계라고 한다면 할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는 것이다.
 아직 백리천이 무림인이라는 걸 확신할 단계는 아니지만, 제니스의 마음은 이미 믿어 보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차피 제니스 본인이 마법이나 몬스터 등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환생한 마당이니, 무협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부할 수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제니스가 또 놀란 점은 카시아드 대륙의 문자였다.
 백리천은 분명히 이 별에 존재하는 카시아드 대륙의 인물인데, 그가 쓴 문자가 한자라는 점이 신기했다.
 뚜껑에 새겨진 글귀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했다.
 
 [연자여, 이 안에 담겨 있는 것들 중에 맨 위에 있는 얇은 서적을 먼저 일독하길 권한다.]
 
 
 # 제로니스 7화
 
 이윽고 제니스가 뚜껑을 열었다.
 과연, 안에는 몇 권의 서적과 검은색의 두꺼운 팔찌 비슷한 물건이 보였다.
 제니스는 일단 쌓여 있는 서적을 조심스럽게 그대로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검은 색의 팔찌를 올려놓았다.
 두 가지 물건을 꺼내고 보니 아래쪽에 또다시 나무 상자 두 개가 보였다. 그것들까지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목함은 하나는 작았지만 하나는 컸다. 큰 목함은 심지어 무겁기까지 해서 꺼내기 위해 상당히 힘을 써야 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 상태가 매우 멀쩡했다.
 이 대륙의 역사에서 고대 마법의 시대라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점인데, 그때부터 보관되었던 물건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다. 심지어는 바래 있지도 않아서, 아마도 처음 이 책을 만든 상태 그대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서적은 총 여섯 권이었다.
 맨 위에 있는 서적은 얇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다섯 권의 서적은 상당히 두꺼웠다.
 ‘일단 맨 위에 있는 서적부터 읽어 보라고 했지?’
 오랜 시간 보존되어 있었으니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실제로 만지면 바스러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책은 보이는 것만큼이나 멀쩡했다.
 제니스가 집어 든, 맨 위에 있는 얇은 책에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아래쪽에 있는 책들의 표지를 살펴봤는데, 나머지 책들에는 모두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첫 장을 넘기니 내용이 보였다. 역시나 이 대륙의 문자와 한자가 병기되어 있었고, 글씨는 석함 뚜껑에 새겨진 필체와 같은 필체였다.
 
 [이제 나의 생이 사그라져 가고 있음을 점점 실감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나, 나는 이미 그곳에서 많은 것을 누렸기에 여한은 덜하다.
 모든 미련을 버렸지만 막상 마지막 순간이 되니, 내 삶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나의 무학을 남기고 싶은 미련만큼은 버리지 못하겠구나. 내 무학이 이 대륙에서 쓰이면 너무 강력할 수도 있기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인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장소를 물색하여 이곳을 택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영영 이곳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한다면 그것도 인연이고 운명이겠지.
 이 대륙의 문자와 내 고향의 문자로 병기해서 기록은 하고 있지만, 실상 내 고향의 문화와 문자에 대한 이해도가 적다면, 이 책들을 통해 내 무학을 제대로 깨닫기에는 약간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깨달음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첫 장의 내용을 모두 읽은 제니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람과 동시에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어이없게 트롤들 때문에 폭포 아래로 떨어져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살아남았다. 그 후에는 이 동굴 안에 갇혀서 또 꼼짝 없이 죽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상황 반전이 될 수 있는 기회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강해질 수 있다는 백리천의 말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게 기분 좋았다.
 백리천의 기록을 쭉 읽어본 결과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점 정도는 충분히 느껴졌고, 그가 모종의 목적에 의해 이 공간을 만들었다면 분명히 빠져나갈 방법도 마련해 두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제니스의 눈은 어느새 다음 장의 내용을 훑고 있었다.
 
 [이 석함에 들어 있는 것들은 모두 그대를 위한 선물이다.
 먼저, 이 책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권의 책은 나 백리천의 무학을 총망라하여 정리해둔 것들이다. 이곳을 발견한 그대가 필경 이 대륙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니, 최대한 이 대륙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끔 풀어서 기록하였다.
 내 고향의 무학과 이 대륙의 무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에 처음에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꾸준히 탐독하며 깨달으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은 반드시 쌓여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당연히 강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느낌의 필치였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강해질 수 있을지 아닐지는 당장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백리천의 기록을 읽으면 읽어 갈수록 그에 대한 신뢰도가 점점 쌓여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이상한 공간에 완전히 갇혀서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제니스가 책장을 넘겼다.
 
 [밀봉되어 있는 두 개의 목함 중에서 작은 상자에는 영약이라는 것이 들어 있다. 영약은 내 고향에서 연단술을 통해 제조하는 것인데, 이곳의 표현으로 하자면 일종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륙의 곳곳에 존재하는 귀한 약재들 중에서 내 고향의 약재들과 효능이 비슷한 것들을 모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연단술을 바탕으로 제조하였다. 견본을 복용해본 결과 내가 고향에서 제조했던 것 이상으로 효능이 있었으니, 그대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함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효능이 적당한 영약이라면 일반인이 복용해도 신체가 매우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내가 제조한 영약은 진귀한 것으로, 약의 기운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후에 복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대는 앞으로 내가 남긴 책들을 통해서 무공을 익히게 될 텐데, 내 무공은 내공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공을 이 대륙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기사들이 쓰는 오러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한 개념상으로 비슷하다고 표현했을 뿐, 내공과 오러가 같지는 않다.
 둘 다 체내의 힘을 발현하여 강력함을 더한다는 부분은 같지만, 연공 방법도 다르며 발출 방식도 다르다. 이는 차후에 그대가 내공을 익힌 후, 오러 능력자들을 만나면 충분히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제조한 영약은 어느 정도 내공을 익힌 후에 복용해야 안전하게 약기운을 다스릴 수 있으며 그 효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가 있으니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아도 된다.
 이 석함은 반영구적인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 그대가 연 후부터 보존 마법이 풀리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밀봉된 목함도 반영구적인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 열어 보지 않는 한 마법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석함에서 발견한 서적들의 상태가 멀쩡하다면 목함 안에 있는 내용물도 멀쩡할 테니, 영약의 보존 상태에 대해서는 서적의 상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영약에 대한 내용은 두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었다.
 ‘책들의 상태는 멀쩡하니 저 안에 있는 내용물도 멀쩡하다는 얘기고······. 왜 이렇게 내용물들의 상태가 좋은가 했더니 강력한 보존 마법이 걸려 있던 거였군.’
 어느새 백리천의 기록에 빠져든 제니스가 또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대가 앉아 있는 이 공간은 특별한 공간이다.]
 
 그 장의 첫 글귀를 읽은 제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석함 안에 있었던 나머지 두 개의 물건, 즉 흑색의 두꺼운 팔찌 비슷한 물건과 커다란 목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것에 대한 언급 없이 다른 내용으로 넘어간 탓이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제니스는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먼저, 이 공간은 나 혼자 만든 공간이 아님을 밝혀 둔다.
 이 동굴을 발견한 후 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설계를 하고 기초 공사를 시작하려는 와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처음 그의 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 대륙에서 존재감만으로도 나를 숨 막히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아득하고 깊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정체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아닌 자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그가 정체를 밝혔다. 그는 이 세계의 용이라고 했다.
 세상에 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가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기세 자체가 인간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른 대륙의 인물인 내가 이 대륙에 넘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흥미가 생겨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동고동락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주로 그가 우리 대륙에 대해 궁금한 걸 물으면 내가 답해 주는 식이었다. 그는 우리 대륙의 문화와 내가 익힌 무공 등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다.
 나는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그 또한 나를 존중해 줬으니, 서로를 존중하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백리천을 점점 더 신뢰하고 있지만 방금 읽은 부분은 절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이 세계의 용이라면 드래곤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드래곤은 이 세계의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종족이라고 했다. 실제로 제니스 자신이 읽은 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한데 갑자기 드래곤이라니.
 그 드래곤을 실제로 만났다니.
 ‘이거, 지금까지 읽은 내용들도 순전히 다 허풍 아냐?’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일면 납득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백리천의 말을 사실대로 믿는다고 가정하면, 석함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들은 거의 2,000년 전의 물건들이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보존 마법으로 인해 내용물들의 상태가 멀쩡하다.
 즉, 그 오랜 세월 동안 멀쩡히 유지되었을 만큼 보존 마법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이 정도로 대단한 보존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면 시전자의 마법 경지는 어느 정도일까. 아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경지의 마법적 능력을 가진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백리천이 만났던 존재가 드래곤이라는 말도 아예 믿지 못할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생각을 하던 제니스가 다음 장을 읽어 갔다.
 
 [그는 내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이 비밀 공간을 만드는 계획에 대해, 재미있을 것 같다며 큰 흥미를 보였다. 그렇게 그와 함께 이 공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결국 내가 알고 있는 기관진식, 진법 등에 대한 지식에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마법적 능력이 더해져 이 공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기관진식은 내 고향에서 쓰이는 신묘한 토목건축술이며, 진법은 이 세계에서 쓰이는 마법진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진법과 마법진은 엄밀히 다르다.
 양 대륙 최고 수준의 지식과 기술, 나의 막대한 내공과 진원진기, 그리고 그의 무궁한 마법적 능력이 더해지니, 이 공간은 애초에 내가 계획했던 것과는 아예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다.
 기(氣). 이 대륙의 표현으로 바꾸면 마나라는 말로 대체된다는 바로 그 기운이 이 공간 안에 가득 담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마나의 밀도가 매우 높은 이 공간은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의 흐름을 띠게 되었다.
 시간의 동굴.
 바로, 그가 이 공간에 붙인 그 이름처럼.]
 
 ‘시간의 동굴?’
 방금 전의 내용을 읽고 나니, 문득 이 공간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신비한 느낌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데, 이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어떠한 막 같은 걸 통과한 느낌을 받았었다.
 게다가 이 공간으로 들어선 후, 처음에는 숨쉬기도 약간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은 적응이 되었는지 딱히 불편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여전히 너무 허황된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자신이 겪은 차원 이동과 환생의 현실 또한 한국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허황된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은 직접 이 현실을 겪고 있는데도.
 허구든 진실이든, 이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일단 백리천의 말을 믿어 보는 수밖에.
 어쨌거나 이곳의 시간 개념이 바깥 세계와 다르다는 말을 들으니 다음 내용이 매우 궁금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공간은 시간의 흐름이 매우 확장된 상태라고 했다. 대략 바깥의 시간으로 1년이 흐를 동안, 이곳에서는 10년에 준하는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이 상대적인 시간이기에, 노화의 진행 속도 또한 그 시간에 맞춰 상대적인 흐름을 보일 것이라 했다. 예를 들어 그대가 이곳에서 30년을 보내고 나간다 해도, 바깥세상에 있는 그대의 지인들은 3년 지난 그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의 말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그대는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미안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 목적으로 이곳을 설계했다.
 결국 그대는 어차피 내가 설정한 최소한의 목표치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 이곳에 갇혀서 영영 나가지 못할 것이라며 절망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곳의 탈출 시설을 아무리 힘없는 아녀자라 해도 결국은 극복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정해 두었다. 그대의 재능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대는 외로움을 못 이기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기에 급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특별한 환경 속에서 주어진 수많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대는 이곳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선택은 그대의 자유지만, 나는 그대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충분한 수준이 된다 해도 최대한 오랫동안 이곳을 활용하길 권하고 싶다. 어차피 그대가 이곳을 한 번 빠져나가고 나면 이곳은 영영 폐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읽은 제니스가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절망이라······.’
 절망했었다.
 트롤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았을 때도 절망했었고, 이 이상한 동굴에 떨어졌을 때도 절망했었다. 그 후, 이 이상한 공간에 갇혀 버린 직후에도 절망했었다.
 그때 절망했던 이유는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거니까.
 제니스가 눈동자에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제니스가 다시 눈을 뜨고 책장을 넘겼다.
 
 [그대가 필시 장시간 갇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이곳에도 그만큼의 준비를 해두었다.
 일단, 이곳에 구획별로 심어져 있는 식물들은 매우 특별한 것들이다.
 당연히 모든 게 식용이며, 기본적으로 뿌리만 멀쩡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들이다. 특히 열매들은 금방 다시 열린다고 한다.
 애초에 나는 먹는 사람의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들로 그에게 부탁했고, 그는 며칠간 이 대륙의 많은 곳들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식물들을 구해다 주었다.
 실제로 내가 복용해 보니 효능이 충분했다. 이 공간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자라고 있었다면, 첫 수확물들의 경우에는 내공 증진 효과도 매우 클 것이라 예상한다.
 빨리 자라는 것들이지만 아껴서 섭취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들이 자라나는 속도가 그대가 섭취하는 양을 못 따라갈 경우를 대비하여 커다란 목함을 준비해 두었다.
 큰 목함 안쪽에도 따로 보존 마법이 걸려 있으며, 그 안에는 많은 양의 벽곡단이 들어 있다. 벽곡단은 곡물과 약재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섭취하면 허기를 달램과 동시에 내공 증진에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고향의 제조법에 따라, 이 세계의 곡물과 약재들 중에서 가장 비슷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식물들이 자라는 속도를 확인하면서 섭취하는 양을 적절히 조절하면 될 것이다.]
 
 큰 목함에 대한 설명까지 들으니 더욱 안심이 되었다.
 내용물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작은 책자를 마저 읽기로 했다.
 
 [흑색의 팔찌는 내 분신과도 같은 물건이다. 우리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보이자, 무인으로서의 내 평생을 함께한 물건이다.
 원래는 팔찌가 아닌 다른 형태의 물건이다. 그가 마법을 불어 넣어 그 형태로 변하게 했다.
 그 팔찌의 형태는 내공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주입하면 팔찌는 원래의 형태로 변할 것이고, 그 상태에서 내공을 완전히 회수하면 다시 팔찌의 형태로 돌아올 것이다.
 나중에 그대의 내공 경지가 오르면 자연스럽게 팔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에게는 아주 좋은 선물이 될 테니, 궁금하면 더욱 정진하여, 더 빨리 확인해 보도록. 정체를 확인한 후에는 늘 지니고 다니게 될 것이다.]
 
 ‘전혀 다른 형태의 물건?’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마법을 불어 넣어 만들었다면 마법 무구라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팔찌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도, 현재로서는 도무지 원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특별한 점도 없고 대단한 물건이라는 느낌도 없이, 그저 검고 두껍고 투박한 팔찌일 뿐이었다.
 ‘이게 무슨 물건으로 변하든, 평상시에 이렇게 팔찌 형태로 차고 다녀야 하는 거면 디자인 좀 신경 써서 만들지. 거참.’
 그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은 제니스가 팔찌를 내려놓고 다시금 책자를 집어 들었다.
 어느새 얇은 책자는 중반을 넘어서 있었다.
 중반부터의 내용은 나머지 다섯 권의 책에 대한 설명들이었다. 그 책들의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익히는 순서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일기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공간을 완성한 그는 드래곤과 함께 공간 이동으로 빠져나가서 조용히 생을 마감할 것이라 했다.
 
 [나와 인연의 끈이 닿은 그대가 부디, 강력한 힘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길 바랄 뿐이다. 그럼 그대의 무운을 빈다.]
 
 얇은 책자의 내용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책자를 모두 읽은 제니스는 먼저 큰 목함의 밀봉을 열어 그 안에 있는 내용물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목함을 열자마자 한약재 느낌의 향이 전해졌다. 냄새가 청량하여 변질되었다는 의심이 들지는 않았다.
 백리천의 말마따나 벽곡단의 양은 많았다. 하나하나의 크기는 달걀 반절 정도였는데, 그런 것들이 커다란 목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맛은 봐야지?’
 마침 배가 고팠기에 벽곡단 하나를 집어서 입안에 넣으니, 한약재와 곡물의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딱딱하여 입안에 넣고 오랫동안 오물거려야 했다.
 ‘역시 맛은 별로네.’
 어차피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맛까지 기대하는 건 사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한 알만으로도 포만감은 어느 정도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아예 배부르게 하나쯤 더 먹을까 하다가 제니스는 이내 고개를 젓고 목함을 닫았다.
 제니스가 이어서 나머지 책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무위조화심법(無爲調和心法)]
 [사신무(四神武) 청룡편(靑龍篇)]
 [사신무(四神武) 백호편(白虎篇)]
 [사신무(四神武) 주작편(朱雀篇)]
 [사신무(四神武) 현무편(玄武篇)]
 각각의 책들을 대충 살펴보니, 각종 기묘한 자세가 그려진 그림들과 함께 이런저런 설명들이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책자에 소개되어 있던 내용대로였다.
 책들을 대충 들춰 본 제니스가 가만히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었으면 더 이상 백리천의 말을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차피 그의 말을 의심하여 따르지 않는다 한들, 딱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방도도 없다.
 강해지는 것에 대한 큰 욕심은 없지만, 언젠가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그의 뜻을 따라야 한다.
 ‘언제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지.’
 그러려면 백리천의 의도대로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리라.
 이윽고 다시금 고개를 내린 제니스가 무위조화심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는 그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렇게, 시간의 동굴 안에서의 기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 제로니스 8화
 
 버섯은 맛은 별로인데 포만감은 가장 나은 편이었다.
 줄기를 먹는 식물들은 평범한 맛이었고, 식물들 중에서 맛있는 건 열매들 정도였다. 열매가 열리는 식물들이 많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벽곡단이 담겨 있는 목함은 열지 않은 채, 제니스는 일단 구획마다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차례로 섭취하며 연명했다.
 백리천의 권유대로, 벽곡단은 그 후에 식물들이 자라나는 시간을 체크하며 간간이 섭취하기로 했다.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공간이기에, 몇 시간 잤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얼마나 깨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나서 배운 대로 수련을 하고 수련을 하다가 지치면 잤다. 눈이 떠질 때 깨어났다.
 ‘무위조화심법’이라는 책에는 호흡법을 통해 내공을 축척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혈도, 십이경맥, 운기행공, 소주천 등의 내용들이 적혀 있었는데,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제니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노력해 나갔다. 그림에서 보여 주는 자세를 유지하며 오랜 시간 동안 호흡법을 익히려 애썼다.
 무위조화심법은 백리천의 무학을 익히는 데 기본이 되는 내공 공부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꾸준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백리천의 가르침대로 하다 보면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도 언젠가는 이해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
 
 도무지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공간에서도 세월은 흘러갔다.
 시간의 동굴 안에서 제니스는 산발한 괴인이 되어 있었다.
 가장 힘든 건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었다.
 그 외로움을 떨쳐 내기 위해 미친 듯이 무공을 수련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한계까지 몸을 움직이다가 체력이 방전되면 알아서 잠에 빠져드는 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무공이 늘어 가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두 번째 행복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벽을 넘어설 수 없어서 답답했을 때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조바심을 내지 않고 여태껏 익혔던 것들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탈진해서 쓰러질 정도로.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벽들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이미 수백 번도 더 읽은 책들은 더 이상 읽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통째로 외워졌으니까.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동굴 안에서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
 
 평소라면 일어나자마자 씻고 그 직후부터 곧바로 운기조식을 시작하는 제니스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일어났지만 침상에 그대로 누워, 머리 뒤로 팔을 돌려 깍지를 낀 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니스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반듯한 천장의 벽면이었다.
 
 [축하한다. 이 벽면의 글씨가 보인다는 건 그대가 이미 60년 공력, 즉 1갑자의 내공을 쌓았다는 뜻이다. 1갑자 내공의 안력이 생긴 후부터만 이 벽면의 글씨가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대에게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무학만큼은 남기고 싶다는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애먼 그대가 고생한 꼴이니 미안한 마음도 매우 크다.
 그 힘든 시간을 버텨 내고 성과를 이룬 그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바이다. 그대가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해도, 오히려 그대가 나를 저주하고 싶다 해도, 나는 그대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곳에서 얻은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그대의 뜻에 달렸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책자에서 밝혔듯,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데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대가 항상 기억하길 바랄 뿐이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벽면에 미세하게 새겨진 글귀였다.
 매일 누워서 보던 천장이었지만, 실제로 1갑자의 내공을 얻기 전까지는 벽면에 저런 글귀가 새겨져 있는지조차 전혀 몰랐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 글귀를 확인하며 제니스가 엷게 웃었다.
 사실, 저 벽면에 새겨진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던 건 매우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으면서 최대한 이곳에서의 생활을 유지해 온 것이다.
 백리천의 권유에 따라, 이왕이면 시간의 동굴에서 얻을 수 있는 시간적인 이득을 최대한 챙기겠다는 일념으로.
 ‘바깥세상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이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식물들 위주로 섭취하면서 벽곡단은 최대한 아껴서 섭취했는데, 그 벽곡단마저 모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작은 목함에 담겨 있던 영약까지 꺼내어 복용했다.
 백리천의 권유에 따라 일부러 늦게 복용한 것이다. 약기운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영약을 복용한 후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꾸준히 운기조식만을 취하며 약기운을 내공으로 변환하려 애썼다.
 그 결과 30년 공력, 즉 반 갑자의 내공을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었다. 백리천의 말마따나 굉장한 영약이었던 것이다.
 영약의 효과까지 더해져서 제니스가 쌓은 내공은 총 120년 공력, 즉 2갑자였다.
 ‘아직 내가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것은 현무편의 중반부와 후반부뿐이고······.’
 현무편은 검법이며, 사신무의 최종 단계이다.
 제니스가 현재까지 완벽하게 익힌 건 현무편의 초반부까지였다. 중반부는 익혀 가는 중이었고, 후반부는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다.
 백리천이 현무편에 언급한 바에 따르면, 중반부부터는 깨달음의 경지에 속한다고 했다. 죽어라 수련만 한다고 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백리천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제니스는 이왕 시간의 동굴에 있는 동안 현무편의 중반부와 후반부까지 완벽하게 익히려 했다. 하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젠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게 별 의미가 없겠지.’
 결국 시간의 동굴을 나가기로 결심하고, 이제 실행에 옮기려 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침상에서 일어선 제니스가 석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마지막에는 석함 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사부.’
 당연하게도 직접 본 적이 없고, 매우 오랜 세월을 격한 채로 희한하게 맺어진 인연이지만, 백리천은 고마운 존재였다.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죽을 뻔했고, 동굴 안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굶어 죽을 뻔했다.
 하지만 백리천이 만든 이 신비한 공간을 발견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강한 힘까지 얻게 된 것이다.
 사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엷은 미소를 띤 채로 한동안 석함을 바라보던 제니스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돌 탁자 위로 올라섰다. 그 후, 천장에 박힌 야명주를 떼어 사냥용 배낭에 담았다.
 나갈 때 챙겨 가라고 권한 것도 백리천이었다. 어차피 권하지 않았어도 떼어 갔겠지만, 바깥세상에 다시 나갔을 때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친절하게 메시지까지 남겼던 것이다.
 석실의 야명주를 떼어낸 제니스는 지체하지 않고 바깥 공간으로 향했다.
 눈에 담기라도 하듯 그 공간을 천천히 훑어본 제니스가 이윽고 사냥용 배낭에서 단검을 꺼냈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자마자 제니스가 가볍게 땅바닥을 박찼다.
 그저 가볍게 발을 굴렀을 뿐인데도, 제니스는 자신의 키의 네 배 높이쯤 되는 천장까지 매우 쉽게 도달했다.
 푸욱!
 단도가 천장의 바위에 깊숙이 박혔고, 제니스는 단도의 손잡이에 의지한 채로 천장의 야명주를 떼어 냈다.
 몇 차례 그 과정을 반복하자 천장에 박혀 있던 야명주들이 모두 회수되었다.
 야명주들을 배낭에 담으니 금세 공간 안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그 상태에서 제니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이 공간의 입구 쪽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이었지만 걸음을 옮기는 제니스는 거침이 없었다. 제니스는 실제로 어두운 흑백 화면을 보는 느낌으로 그 공간 안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2갑자 내공으로 인해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분이었다.
 이윽고 제니스가 공간을 막고 있는 거대한 석벽 앞에 다다랐다.
 막상 이 공간을 벗어날 생각으로 거대한 석벽을 바라보니 처음으로 이곳에 갇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이 두껍고 단단한 석벽은 아무리 발로 차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며, 단검을 쑤셔 봐도 거의 흠집조차 나지 않았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엷게 미소를 지어 보인 제니스가 팔에 차고 있던 흑색의 팔찌를 한 차례 바라보았다.
 마치 팔목 보호대처럼, 팔목의 많은 부분을 감싸고 있는 팔찌.
 백리천은 이 팔찌가 원래는 다른 형태의 물건이라고 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주입하면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제니스는 이미 이 팔찌가 원래 어떤 물건이었는지에 대해 한참 전에 알아낸 상태였다.
 이윽고 제니스가 팔찌에 내공을 주입했을 때였다.
 우우웅―
 팔찌가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다른 형태의 물건으로 변했다.
 그렇게 드러난 물건은 하나의 검이었다.
 팔찌의 색과 똑같은 칠흑색의 검.
 1미터 남짓인 그 검의 형태는 약간 특이했다.
 일단 검신(劍身, 검의 몸체)과 검병(劍柄, 검의 손잡이)과 호수(護手, 검신과 검병 사이의, 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부분, Guard)가 일체화된 검이었는데, 검신을 타고 내려와 자연스럽게 이어진 호수가 마치 전투기의 날개처럼 아주 조금 튀어나온 형태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주입하면 팔찌가 검으로 변하게 되니, 볼 때마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영(無影).
 그게 바로 백리천이 이 검에 붙인 이름이었다.
 검병을 잡은 채로 잠시 무영을 바라보던 제니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천장과 닿아 있는 거대한 석벽의 상단이었다.
 ‘천장 높이에서 한 뼘 아래, 정중앙이라고 했지.’
 자신의 키보다 서너 배 높이쯤 되는 부분이었다.
 목표한 위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제니스가 바닥을 가볍게 박찼다.
 쑥 솟아오른 제니스의 몸이 돌문의 상단에 거의 다다랐다고 생각되었을 무렵.
 무영에 서늘한 빛이 맺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목표했던 지점을 찔러 갔다.
 푸욱―
 무영이 손잡이 윗부분까지 깊숙이 박혔다.
 그 직후, 한 발로 석벽을 박차며 무영을 뽑아낸 제니스가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휘리릭― 척!
 제니스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공간이 울리며 진동음이 들렸다.
 그르르르르르르릉―
 석벽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제니스가 이윽고 사냥용 배낭을 집어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제니스가 내공을 완전히 회수하자 무영은 어느새 팔찌의 형태로 돌아온 상태였다.
 후욱―
 공간을 빠져나오다 보니 또다시 얇은 막을 빠져나온 듯한 특유의 느낌이 들었다. 호흡도 어색하고 이질적인 느낌이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해야 했다.
 제니스가 공간을 벗어나서 통로를 천천히 걸을 때쯤.
 그르르르릉― 쿠웅!
 뒤쪽에서 그 소리가 들리자 제니스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공간의 입구를 막고 있던 석벽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이제 저 공간 안쪽도 ‘시간의 동굴’로서의 기능은 급속도로 사라질 것이다. 백리천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될 것이라 했다.
 한동안 석벽을 바라보던 제니스가 이윽고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폭포에서 떨어진 후, 처음으로 자신이 깨어났던 공간.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이기에 예전에는 조심스럽게 기어다니다시피 했던 곳이었지만, 현재의 제니스는 산책이라도 하듯 편하게 걷는 중이었다.
 제니스가 이윽고 동굴 중앙 부근의 물웅덩이에 다다랐다.
 그 앞에 서서 웅덩이를 바라보며 제니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었던 곳이었는데, 결국 이곳으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수로를 통해 폭포 아래의 못에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 수로의 중간쯤부터는 역방향으로 수압이 작용한다고 했고.’
 즉, 수로를 통해 들어오기는 매우 쉬우나 나가기에는 매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잠시 물웅덩이를 바라보던 제니스가 이윽고 여행용 배낭에서 가장 작은 야명주 하나와 사냥용 밧줄을 꺼냈다.
 밧줄을 이리저리 매듭지어서 야명주를 고정한 제니스가 그것을 이마에 댄 채 머리 뒤쪽으로 묶었다.
 광부들이 안전모에 조명을 단 것 같은 모양새가 되자 제니스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사냥용 배낭을 멘 제니스가 지체하지 않고 물웅덩이 안으로 입수했다.
 
 쏴아아아아아아―
 높은 폭포수가 줄기차게 떨어져 내리는 연못의 수면 위로 하나의 인영이 떠올랐다.
 “푸아!”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인영은 다름 아닌 제니스였다.
 매우 어설프게 헤엄을 치며 뭍에 다다른 제니스가 자갈밭 위에 앉아서 호흡을 골랐다.
 “후우. 후우우.”
 거칠게 숨을 몰아쉴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갑자의 내공이니 그나마 이 정도였지, 그 전에 수로를 빠져나오려 했으면 몇 번쯤은 실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영을 할 줄 알았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며 머리를 흔들어서 물기를 어느 정도 털어낸 제니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캬아아아아!”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이며, 얼마 만에 쐬는 햇볕인가.
 얼마 만에 느끼는 싱그러운 바람이며, 얼마 만에 맡는 풀과 나무의 냄새인가.
 이제야 비로소 자유라는 생각에 가슴이 온통 설렜다.
 한동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니스의 시선이 문득 폭포 위쪽에서 멈췄다. 폭포는 역시나 까마득히 높았다.
 ‘내가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었구나······.’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제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폭포 근처의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 후, 수직으로 뻗어 있는 절벽 위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가만, 저길 올라가려면······.’
 마음속으로 알맞은 무공이 떠오르자마자 제니스가 진기를 일으켰다.
 [사신무(四神武) 청룡편(靑龍篇) 오의(悟意)
 청룡승천(靑龍昇天)]
 그 직후.
 파바바바바바밧!
 순간적으로 제니스의 몸이 솟구치듯 절벽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올라가는데도 평지를 뛰는 듯, 그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순식간에 절벽 위에 도착한 제니스의 표정에 놀람이 가득했다.
 ‘세상에······! 내가 이 높은 곳을 이렇게 쉽게, 순식간에 올라왔던 말이야?’
 시간의 동굴 안에서는 천장 높이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제대로 펼쳐볼 수가 없었다.
 솔직히 방금 전에 무공을 펼치기 전에도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었다. 잘 안 될 경우에는 절벽의 중간중간에 봐둔 지점에서 멈췄다가 다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단번에 올라와 버린 것이다.
 신기했다.
 ‘오! 사부가 무림맹주였다는 게 허풍이 아니었군요!’
 속으로 백리천을 향해 고마움을 표한 제니스가 절벽 위에 서서 한참 동안 아래쪽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바깥세상에서는 몇 년이나 흘렀을까?’
 시간의 동굴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키도 자랐고 목소리도 굵어졌지만 아직 성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도 청소년기일 텐데,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건지 매우 궁금했다.
 ‘가서 확인해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제니스가 이윽고 경공술을 펼치며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제로니스』 1-2권에 계속>

댓글(4)

n7*************    
와대박20년전 진짜 재밌게 보던책인데...이거 보다잠못자고 다음편 빌릴려고 책방 문여는 시간 기다릴고..추억돋네요
2019.05.22 06:44
말해뭐해    
오랜만에 보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사신무 보자마자 윽..
2021.09.09 10:06
광개토태제    
사신무 무슨편 ㅠㅠ 참고볼려다가 유치해서 못보겠다. 딱 쉬셔오동 같은 사람들한테 맞아죽기 쉽상이네 ㅋㅋ
2021.09.12 18:50
너솔    
ㅋㅋ 딱 중딩수준 코미디 판타지 돈아깝다
2021.10.07 13:29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