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천룡전기 [E]

천룡전기 1권 (1)

2019.04.18 조회 2,560 추천 15


 #Prologue
 
 “아······ 몇 시냐······.”
 약간의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깬 사내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슬쩍 눈을 떠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울퉁불퉁한 천장과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풀 냄새에, 사내는 기분 좋게 돌아누웠다. 그리고 좀 더 잠을 청하려던 사내는 불현듯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며 부르짖었다.
 “어디냐, 여기!”
 모로 누워 있는 사내의 눈에 고풍스러운 모양의 탁자와 의자가 몇 개 와서 맺혔다. 벽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칼과 활, 갑옷처럼 군데군데 쇠붙이가 달려 있는 괴상한 모양의 두루마기······!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창호지를 바른 듯 불투명한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눈부시다. 사내는 연신 눈만 끔뻑거렸다.
 침대인지 온돌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바닥이 딱딱하고 괴상한 침상에서부터, 덮고 있는 이불과 입고 있는 옷.
 어느 것 하나 사내가 잠들었던 5평짜리 원룸과는 무관한 모습이다.
 “니미, 여기 어디냐!”
 짧은 욕설과 함께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사내는 무거운 고개를 내저으며 전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술도 먹지 않고 그냥 집에서 잤는데······.”
 갈수록 심해지는 두통에, 사내는 양손을 들어 관자놀이 부근을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연신 관자놀이 부근을 어루만지던 사내는 갑자기 두 눈을 뜨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여기저기 어루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양손을 눈앞에 놓고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 이건 내 손이 아니잖아! 계집애처럼 가늘지도, 부드럽지도 않아······!”
 놀란 사내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려고 하자 확실히 사내의 몸이 아닌 듯,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거울, 거울 어디 있어?”
 아무리 둘러보아도 눈에 뜨이는 것은 칼과 활, 갑옷처럼 군데군데 쇠붙이가 달린 두루마기뿐.
 결국 거울을 찾지 못한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워낙에 편식을 심하게 해서 뼈만 앙상히 남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적당히 근육까지 붙어 있는 탄탄한 몸! 물론 원래 자신의 몸에 비해서였지만······.
 ‘정말 과거로 왔다는 것인가?’
 
  * * *
 
 “이봐, 과거로 가 보고 싶은 생각 없어?”
 터무니없는 말이긴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는 그런 생각.
 “하하, 갈 수 있으면 좋죠. 원래 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과거로 갈 텐가?”
 “하하, 그럴까요?”
 터무니없는 물음에 터무니없는 대답.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 보내 주지. 어떤가?”
 “네, 네. 근데 저 지금 바쁘거든요?”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 * *
 
 “어디 보자,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그때 그 이상한 노인네가 말했던 날이 오늘인가? 후훗, 과거로 간다······. 좋지, 갈 수만 있다면야······.”
 문득 생각이 나서 피식 웃고는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낯선 곳.
 ······낯선 몸.
 
 
 #1. 그는 누구인가
 
 지정至正 11년(1351) 4월 경술에 환조桓祖가 병이 나서 훙薨하니, 수壽가 41세였다. 발해성渤海省 원주原州 옹운동甕雲洞에 장사 지내니, 곧 정릉定陵이다. 태조太祖께서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해 보매, 태조太祖는 정실正室의 아들이므로, 태조太祖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그러니까 그 노인네 말대로 과거로 오긴 왔는데, 영혼만 과거로 왔다······?’
 그럴듯하다.
 자고 일어나 보니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에 와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술만 먹으면 개로 변신을 하는 엄청난 능력자(?)들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다.
 ‘그런데 나 어제 술 안 먹었거든.’
 게다가 자고 일어나 보니 성형수술이 멋지게 되어서 얼굴이 바뀌고 몸이 바뀌어 버린 이상한 현실은 뭐라고 해석을 해야 하나?
 ‘피로 이어진 자로 살리라고 했으니까, 그럼 앞으로 내 조상님 중의 한 분으로 사는 건가?’
 궁금한 것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갈수록 두통이 심해지는 느낌에 사내는 양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지그시 누르면서 창가에 놓인 의자로 가 앉았다.
 ‘그럼 본래 내 몸은 죽은 건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사내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사내의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 갔다. 처마 끝에 매달린 파란 하늘이 흰 구름을 토해 내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연인처럼 감미롭게 사내의 몸을 감싼다.
 ‘하룻밤 사이 계절도 바뀌었네!’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천호千戶, 소장 안립安立이옵니다.”
 나른한 봄바람에 깜빡 잠이 들었던 사내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잠들기 전 모습 그대로다.
 고개를 돌리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남자 한 명이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내는 자신이 과거로 왔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몸이 바뀐 것은 분명한 이상, 일단은 자신이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미련은 그다지 남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만약 꿈이라면, 꿈인 그대로 즐기면 그만인 것 아니냐는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러니 우선은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기왕에 새로운 인생을 사는 거라면, 그토록 소망하던 여벌의 삶을 얻은 것이라면, 죽든 살든 까무러치든 이번만큼은 멋지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나이 겨우 서른에 마치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노인네처럼 쓸쓸히, 죽지 못해 살았던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리고 그 노인의 말대로 자신이 정말 과거로 온 것이라면, 본래의 자신과는 달리 이제 사내는 말 그대로 특별한 존재이니까.
 “천호······?”
 갑옷을 입은 남자가 건네는 나직한 목소리에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군데군데 단추처럼 둥그런 금속 물질이 박혀 있어서 얼핏 보고서는 그냥 갑옷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박물관이나 사극에서 보던 멋들어진 갑옷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가죽 재질로 보이는 두터운 갈색의 두루마기 모양이었는데, 거기에 단추처럼 둥그런 금속 물질이 띄엄띄엄 붙어서 영 볼품이 없다.
 ‘그래도 투구 하나는 정말 멋지군.’
 “천호······?”
 안립이라고 했던가.
 다시 그의 입에서 나온 ‘천호’라는 말에 사내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인가?’
 몇 번을 불러도 쳐다만 볼 뿐 대답이 없자, 안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천호, 정남丁男들을 소집하고 무기를 나누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름이 아니라 관직이군. 무관인가.’
 벌써 새로운 삶에 대해 두 가지나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천호라는 관직에 있고 안립은 그의 부하라는 것.
 ‘그럼, 말 놓아야겠지?’
 “말하라.”
 역시나 자신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음을 확인한 안립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리며 사내에게 말했다.
 “사교邪敎의 무리가 야루鴨綠(현대의 압록강)를 건넜습니다. 정남들을 소집하고 무기를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야루?”
 생소한 지명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안립이 말했다.
 “천호소千戶所 앞을 가로지르는 독로강禿魯江(현대의 평안도 강계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 동시에 그 일대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기도 하였다)이 끝나면서 합쳐지는 강줄기입니다.”
 야루, 독로강, 천호소.
 사내는 침착하려 애썼다.
 ‘독로강은 천호소 앞을 가로질러 흐르고, 야루와 합쳐진다.’
 안립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여 머릿속에 집어넣은 사내의 관심은 다시 사교라는 단어로 옮겨 갔다.
 긴장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내는 천천히 곁에 놓은 의자로 몸을 옮기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사교, 국가에서 금지하는 종교 단체. 그런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야루라는 강을 건넜다. 그래서 무기를 지급했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아무리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과거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더욱이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시대가 과연 과거의 어느 때에 해당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단추는 사교라는 종교 단체에 있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사교, 사교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봐.”
 사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한 빛을 보이던 안립은 곧 표정을 바로 하며 사내에게 말했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천호.”
 알아보겠다는 말에 사내가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안립은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아는 천호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니, 어떠한 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알아봐.”
 “예, 천호.”
 잠시 후, 안립이 몸을 돌려 나가자 이번에는 주전자가 놓인 나무 쟁반을 든 여자아이가 들어와 사내의 앞에 주전자와 조그만 사기그릇을 내려놓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사내는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가까이서 보니 안립과 마찬가지로 피부색이 몹시 까무잡잡하고 사극의 등장인물처럼 머리를 땋아 내린, 채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였다.
 소녀가 주전자를 들어 사내 앞에 놓은 사기그릇에 기울이자 연한 초록색 물이 흘러나와 그릇을 채웠다.
 이내 그것이 차茶임을 깨달은 사내는 긴장이 풀려 피식 웃고 말았다.
 찻잔을 집어 들며 이번에는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았다. 사내에게 익숙한 한복과는 모양이 매우 달랐는데, 재질이 무엇인지 몰라도 무척이나 거칠어 보였다.
 그제야 사내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나 한복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한복이라기보다는 예전에 보았던 <황비홍>이라는 중국 영화에서 나오는 청나라 사람들의 복장에 가깝다는 것이 사내의 솔직한 느낌이었다.
 ‘중국인가?’
 지금껏 야루라든지 독로강이라는 지명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소한 지명들과 한복과는 사뭇 다른 복식服飾을 근거로, 사내는 조심스럽게 이곳이 중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조금 전 안립과의 대화에서 사용한 언어는, 다소 어색하기는 하였지만 분명 우리말이었다는 생각에 사내는 잠시 판단을 미루어 두기로 하였다.
 
 사교의 무리에 대해 알아 오라는 명령을 받은 안립은 즉시 백호百戶들이 모여 있을 외소로 향했다.
 천호소는 크게 내소와 외소로 나뉘는데, 내소는 천호의 일가가 주거하는 천호의 개인적인 공간이고 외소는 천호가 공무를 수행하는 공간이다.
 내소와 외소를 이어 주는 월동문을 지나 정청正廳으로 향하던 안립은 때마침 천호소로 들어서는 수백호首百戶 나덕羅德을 발견하고 잠시 멈추어 서서 그를 기다렸다.
 이미 환갑이 넘은 나덕은 백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수백호의 자리에 있었는데, 관직에서 물러날 때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늘그막에 얻은 외동아들이 관직을 이어받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서 물러나지 못하고 있었다.
 꼬장꼬장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듯 깡말랐지만 두 눈에는 안광이 형형한 것이, 앞으로도 10년은 거뜬할 것 같은 나덕의 신형이 점차 가까워지자 안립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천호를 시위侍衛하는 것이 자네의 임무인데 외소에는 무슨 일인가? 천호께서 외소로 납시셨는가?”
 “아닙니다. 천호의 명命을 받고 왔습니다.”
 “음?”
 나덕의 두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자세히 말을 해 보라는 듯이 잠자코 안립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나덕에게 안립이 말하였다.
 “사교의 무리에 대해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사교의 무리에 대해 알아 오라 하셨다?”
 “예, 어르신.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흠······ 이미 경계를 넘어온 사교의 무리를 잡아들이라는 명은 없고, 다만 그들에 대해 알아 오라 하셨다?”
 알 수가 없다는 듯 나덕의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안립과 함께 정청으로 들어선 나덕은 천호의 빈자리를 힐끗 본 다음 자리로 가 앉으며 백호들에게 말했다.
 “다들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 다른 말은 할 것이 없고······ 천호께서 저들 사교의 무리에 대해 알아 오라 명하셨다는데, 누구 아는 사람 없는가?”
 “백련교白蓮敎라 하여 미륵彌勒을 믿는 자들인데, 교주는 한산동韓山童이라는 자로, 옛날 송宋나라 휘종徽宗 황제의 8대손을 자칭한다고 들었습니다.”
 대답을 한 것은 나덕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린白潾이라는 이름의 백호였다.
 백린은 나덕을 제외한 백호들 중 가장 먼저 관직을 이어받았기에 경험도 많고 사려 깊어 백호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때문에 백호들은 나덕이 관직에서 물러나면 백린이 뒤를 이어 수백호가 될 것이라 점치고 있었다.
 게다가 나덕은 본래 선대 백호 시절부터 수백호로 백호들을 진두지휘해 온 사람인지라, 백호들은 은연중에 그를 몹시 어려워하였다. 때문에 나덕과의 대화는 고스란히 다음 대代의 수백호로 점쳐지는 백린의 몫이었다.
 나덕 또한 내심으로는 백린을 다음 대의 수백호로 생각하고 이것저것 가르치며 살펴보는 중이었기에 백린의 대답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덕 자신도 이번에 동녕부東寧府에서 온 파발을 보고서야 사교의 무리가 난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았을 뿐 정작 그 무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백린의 말을 들으니 얼마 되지도 않는 사교의 무리를 쫓아 동녕부의 대군이 이곳까지 달려온 까닭 또한 짐작이 가면서 새삼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러날 때가 되었어······.’
 수백호란 백호들의 수장임과 동시에 그들의 주군主君인 천호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쳐 주고 뒷바라지하는 군사軍師의 역할 또한 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씁쓸한 생각과 함께 잠시나마 감상에 빠져들었던 나덕은 곧 좌우를 둘러보며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남송 황제의 8대손이라? 흥, 사교의 무리가 아니라 반역 도당反逆徒黨이 아닌가! 이거 아무래도 일을 잘못 벌인 것 같군.”
 “동녕부에서 대군이 나와 쫓고 있다 하였으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들이 양식을 빼앗기는 정도이겠지요.”
 백린과는 동갑내기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백호 임견미林見美의 말에 나덕은 인상을 찌푸렸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백호로서 천호를 보좌해 온 경험이, 이번 일이 그리 간단히 끝나지만은 않으리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동녕부에서 저들이 반역 도당인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파발을 보내오기로는 그저 사교의 무리라고만 하였으니, 이것은 공이 줄어들까 두려워한 까닭일 것이다. 동녕부의 장수들은 태반이 한인漢人으로 본성이 들개와도 같은 자들이니, 우리 백성들을 반역 도당으로 몰아 죽이고 공을 부풀리고자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던가! 백호들은 즉시 친병親兵을 이끌고 부락마다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모아 천호소로 피신케 하라.”
 “예!”
 백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명을 이행하기 위해 서둘러 정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백호는 천호께 가서 보고 들은 대로 고하라.”
 “예, 어르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안립마저 총총걸음으로 정청을 빠져나가자, 나덕은 앉은 채로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움직여도 온몸이 뻐근하고 결리는 것이, 역시나 늙었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각, 이유는 다르지만 역시 서글픈 생각이 들어 남몰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수백호 나덕의 명으로 3개월 전부터 천호의 시중을 맡고 있는 백호 백린의 장녀 백란白蘭이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먼 산이나 쳐다보다가 가끔 불경佛經이나 읽는 것이 고작이면서 무엇이 그리 고단했던지, 오늘따라 천호는 하루 종일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혹시나 무슨 사달이 난 것이 아닌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식은땀 한번 흘리지 않고 잔잔히 숨을 쉬는 것으로 보아 별다른 탈은 없는 듯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깨질 않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흔들어서 깨우자니, 어른들이 모두 천호를 하늘처럼 여기고 대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린것이 감히 천호의 몸에 손을 대었다고 책잡힐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백란은 난감하기만 했다.
 결국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살면서 평소 친남매처럼 지내는 천호의 호위扈衛 안립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안립 역시 얼마 전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백호가 되면서부터 천호의 호위를 맡게 된 풋내기인지라, 이런 경우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이, 어쩌면 좋아! 오라버니, 어떻게 좀 해 봐요, 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백란의 푸념에, 안립이 슬쩍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란아, 우리 이럴 것이 아니라 수백호 어르신께 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러다 천호께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너나 나나 어른들께 호되게 경을 칠 것 아니냐?”
 어른들에게 혼날지도 모른다는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백란은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나덕의 화난 얼굴이 떠오르자 금세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안 돼요! 안 돼요, 오라버니! 천호께서 오늘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걸 수백호 어르신께서 아시면······ 으앙, 어쩌면 좋아!”
 급기야 백란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천호가 잠에서 깨지 않는 것보다도 오늘 천호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을 나덕이 알고 혼날까 봐, 그것이 더욱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 부친인 백린이 사람을 보내와서 안립이 천호에게 고할 것이 생기자, 백란은 그것을 핑계 삼아 천호를 깨우기 위해 안립의 등을 떠밀어 처소로 들여보냈다.
 잠시 후 안립이 천호의 거처에서 나와 외소로 가는 길에 천호가 잠에서 깬 것을 알려 주자 백란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을 하였다.
 이내 천호가 잠에서 깨면 항상 차부터 찾는 것을 기억해 낸 백란은 서둘러 다기茶器을 챙겨 천호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사내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안립이 나가자마자 사내는 일단 방 안을 한번 뒤져 볼 생각이었다. 이것저것 뒤지다 보면 일기나 족보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르니, 그것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낼 요량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앞으로 갖고 살아가게 될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테니까.
 그런데 안립이 나가자마자 한 소녀가 들어오더니 사내의 앞에 찻잔과 차가 담긴 주전자를 놓고는 곁에 서서 당최 나가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사내는 본래 자기가 마음을 먹은 것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소녀가 얼른 밖으로 나가 주어야 마음먹은 대로 이것저것 뒤져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소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그저 말없이 사내의 곁에 서 있기만 하였다.
 가끔씩 찻잔을 비워 낼 때마다 조용히 차만 따라 주고 있으니, 사내는 몸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가라고 해 볼까?’
 사내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소녀가 곁에서 하는 것을 보아서는 하녀인 것 같지만, 아까 안립이 나갈 때 둘이 속삭이는 말을 얼핏 들었던 사내로서는 소녀에게 높임말을 써야 할지 낮춤말을 써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이것이 또 난감했던 것이다.
 ‘나가 보아라. 아니면, 나가 보십시오······?’
 다행히 안립은 들어오면서 자신이 누구라고 밝혔기에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어렵사리 추측이라도 할 수가 있었는데, 소녀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와서 차만 따르고 있으니 도통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결혼을 일찍 했다던데, 혹시 내 마누라 아냐? 어휴, 환장하겠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빈속에 연거푸 쓰디쓴 찻물만 들이마시는 한편 사내는 은근슬쩍 소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그냥 나가 줬으면 좋겠구먼, 거.’
 푸념이라고 해 봐야 달리 할 것도 없다.
 나름대로는 밀리터리 마니아라고 자부하고 있는 사내의 상식으로, 천호라는 벼슬은 그리 낮은 관직이 아니었다.
 천호니 만호니 하는 관직은,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여 부마국鮒馬國이 되면서부터 원나라의 영향으로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시대가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그 품계가 낮아지고 해당하는 자리가 점차 줄어들어서 결국 육군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수군에만 남게 된 비운(?)의 관직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4품과 5품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고위 무관직이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천호라는 고위 무관이 어느 날 갑자기 부리던 하녀에게 높임말을 쓴다면······?
 ‘글쎄,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것 같군.’
 그렇다고 하대를 하자니 안립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평대로 대화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소장 안립’이라고 하였다.
 이 시대에서는 완전무장에 해당할 갑옷에 투구까지 쓰고 있던 안립이 무관武官이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 그런 안립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소녀는 하녀가 아닐 확률이 높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급기야 사내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껍데기는 몇 살인지 몰라도, 사내의 알맹이는 이럴 땐 눈을 감고 아예 안 보는 것이 훨씬 덜 어색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닳고 닳은 서른 살의 현대인인 까닭이다.
 ‘아나, 이 안립이라는 애는 가다가 죽었나!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젠장!’
 난감하기는 백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차를 따르면 이내 혼자 있고 싶다며 손짓을 하여 자신을 내보내던 천호였는데, 오늘따라 가타부타 말도 없이 차만 마시고 있었다.
 물러가라는 말이 없으니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오도카니 곁에 서서 찻잔이 비워질 때마다 잽싸게 차를 따르며 천호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이 씨, 오라버니는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힝-!’
 열일곱 꽃다운 나이, 너무 오랫동안 서 있었더니 다리도 저리고 아파 오는데, 천호의 명이 있기 전에는 꼼짝도 못 하는 자신의 신세가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어 백란은 천호 몰래 한숨만 내쉬었다.
 
  * * *
 
 ‘정보는 힘이다.’
 사내는 정보가 필요했다.
 이제 새롭게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자신이 누구인지―이름, 직업, 가족 관계를 모두 포함하여―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이 시대는 과연 언제인지······.
 “백련교라······.”
 사내가 알기로 중국에서 백련교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두 번이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이 그 첫 번째이고, 청나라 말기 백련교의 난이 그 두 번째이다.
 “예, 천호! 지금 하남행성河南行省에서는 몇 년째 대하大河가 범람하고 흉년이 계속되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하의 범람으로 무너진 곳곳의 둑과 제방이 그대로 방치되어서 해가 갈수록 그 피해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무너진 제방과 둑을 다시 쌓기 위해 칙명勅命으로 부역을 동원하였는데, 그렇게 모여든 백성을 백련교의 교주 한산동이라는 자가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아울러 한산동이라는 자가 남송 휘종 황제의 8대손을 참칭할 정도로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홍건적의 난이다!’
 내심 부르짖으며 사내는 급히 머리를 굴려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것은 단지 두 차례에 불과하지만, 백련교는 그때마다 작게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바꾸어 놓았고 크게는 동아시아의 지배 질서를 바꾸어 놓았다.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李成桂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부터이고, 주원장朱元璋은 홍건적에서 세력을 키워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중국으로 치자면 원말명초元末明初.
 대충 기억을 정리한 사내는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과거로 온 이후 줄곧 궁금하던 두 가지 중에서 하나,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를 너무도 쉽게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무신 정권이 몰락하고 원나라에 항복한 뒤부터 고려에 몽골의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복장도 같은 식으로 생각하면 설명이 된다. 하긴 우리나라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가 볼에 연지를 찍는 것이나, 결혼하기 전에 댕기 머리를 하는 것도 그때 들어온 몽골의 풍습이 여태 남은 거라고 했던가?’
 자칭 ‘나름대로는 밀리터리 마니아’답게 사내는 이것저것 쓸데없이 아는 것은 많았지만, 정작 동아시아의 지배 질서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 아는 것 또한 별로 없었다.
 ‘아쉽네. 19세기면 딱 좋은데······.’
 하지만 홍건적의 난 이후 역사의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사내는 아쉬움을 접기로 했다.
 이 시기의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도 이 시대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닐 테고, 더욱이 노트북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가진 것도 아니니 그저 머릿속에 담긴 기억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자, 내가 누군지는 앞으로 살다 보면 차차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일단은 이것으로 접어 두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아서 고려를 부흥시켜 볼까······ 아니면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운 다음 정도전을 도와서 같이 요동 정벌을 해 볼까나······.’
 싱글벙글하면서 상상 속으로 빠져들던 사내는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이내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백련교 교주 한산동이 황하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던 안립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 사내가 사교, 즉 백련교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던 것은 백련교가 야루라는 강을 건너왔기에 정남들을 모아 무장시켰다는 안립의 보고를 받고서였다.
 그렇다면 백련교가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고려를 침입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어긋난다.
 “백련교가 야루를 건넜다고 했었나?”
 “예, 천호. 정남들을 모아서 무기를 나누어 주도록 하였고, 각 부락마다 돌면서 백성들을 천호소로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내의 다급한 물음에 안립은 대답을 하면서도 새삼스럽게 왜 그러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소 천호는 매사에 무관심하였다. 표정은 늘 냉막하기 짝이 없어서 그 속을 전혀 알 수가 없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그나마 대부분이 ‘나가 보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말도 많이 하는 데다 표정이 바뀌기를 몇 차례 거듭하니 안립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하였고, 눈치를 보아하니 곁에서 시중드는 백란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백성들은 왜 모으는 것이냐?”
 사내의 말에 안립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지금 반역 도당을 쫓고 있는 것은 동녕부에서 온 군사들인데, 동녕부의 장수들은 대부분이 한인이니 반드시 우리 백성들을 반역 도당으로 몰아 공을 부풀리고자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군에게 죽은 백성보다 원군으로 온 명군에게 죽은 백성이 더 많다는 말이 있다. 명나라의 장수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왜군과 싸우기보다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조선 백성들의 목을 베어 왜군의 목으로 둔갑시키곤 하였기 때문이다.
 동녕부 장수들의 대부분이 한인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민족의 왕조가 지배하는 원나라에서 이 정도면 한족의 왕조인 명나라에서는 더했을 거라는 생각에 사내는 쓴웃음이 나왔다.
 “누가 명한 것이냐?”
 “수백호 어르신입니다.”
 사내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동녕부의 군사들이란 다름 아닌 원나라의 토벌군일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이 나면 가장 힘들고 또 제일 먼저 희생당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반 백성들이다. 이 일대가 곧 전장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근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이곳 천호소일 것이니, 백성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한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적절한 조치라고 사내는 나름대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지금 사내에게 급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내가 하릴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백란은 계속해서 안립에게 눈치를 보내었다.
 이제는 다리가 아프다 못해 아주 감각이 없는 것이, 쥐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눈치를 주는데도 안립이 자신은 보지도 않고 생각에 잠긴 사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급기야 백란은 안립에게 두 눈을 부라렸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안립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백란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립은 백란이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백란이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문 쪽을 가리키며 고갯짓을 하자, 눈치 없는 안립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것이 나가고 싶다는 뜻인 줄은 모르고 문 쪽에 무엇이 있나 싶어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 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니 백란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안립이 문을 여는 소리에 사내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사내의 눈에 백란이 비쳤다.
 ‘줄곧 서 있기만 했으니 다리가 아프기도 할 테지.’
 백란의 표정과 안립이 문가에 서 있는 것으로 대충 상황을 짐작한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하녀는 아니지만 자신을 시중드는 사람으로 백란의 정체를 확정 지은 사내는, 백란에게 말했다.
 “이리로 와서 자리에 앉으라.”
 “예?”
 “줄곧 서 있었으니 다리가 무척 아플 것이다. 이리 와 잠시 앉아서 쉬어라.”
 당황해서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진 백란이 비틀거리며 사내의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자,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챈 안립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빈 의자가 하나 더 남은 것을 본 사내는 안립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호칭을 생략하고 가까이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안립 역시 다가와 빈자리를 채우자, 사내는 다시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와는 어긋나는 현실에,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찻잔을 향해 손을 뻗어 가던 사내의 뇌리에 문득 이곳이 고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사내는 당연히 이곳이 고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의 선입견일 뿐이었던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국제무역이 무척이나 활발해서 수도였던 개경 부근에는 벽란도라는 상설국제무역시장까지 있었다고 하니까, 그만큼 해외에 나가서 거주하는 고려인 또한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태껏 사내를 괴롭히던 문제는 깨끗이 해결이 된다.
 사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고려라고 한다면, 백련교가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고려를 침입한 것이 되어서 사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상당히 어긋난 것이 되지만,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라고 가정한다면 원래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의식중에 자신은 한국인이니 그 조상은 고려인일 터이고, 또한 고려인이라면 당연히 고려에 살았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내는 문득 허탈해져서 그만 웃고 말았다. 지금껏 무척이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들이 온통 허튼 짓거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허 참, 평생 고민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고민을 오늘 하루 동안 다 한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인터넷으로 검색 한 번만 하면 되는 간단한 걸 가지고 이렇게 머리 싸매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일 테지······.’
 그래도 기왕이면 확실한 것이 좋다는 생각에, 사내는 이곳이 고려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어차피 이곳 독로강이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라 할지라도 대충 어디쯤인지는 알아야 한다.
 잠시 궁리하던 사내는, 마침 앞에 놓인 찻잔이 시야에 들어오자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기는 고려 것이 가장 좋다.”
 “맞아요! 자기는 고려 것이 제일 좋아요!”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백란은 다시금 얼굴을 붉히고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언젠가 어머니께 들었는데, 자기 중에 비색翡色을 제대로 내는 것은 고려의 것이 으뜸이라 하셨어요······.”
 차츰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거의 들릴 듯 말 듯 하였다.
 아무튼 원하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사내는 백란이 ‘우리 고려’라 하지 않고 ‘고려’라 한 것에 주목했다.
 좀 더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 이번에는 안립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고려는 어떠하다 하던가?”
 “고려요? 글쎄요, 새 왕이 어린애라는 말은 예전에 들었는데······ 아! 최진崔進이라면 아마 아는 것이 좀 있을 겁니다.”
 “최진?”
 “예, 그 녀석 처가 고려에서 왔거든요.”
 사내는 ‘역시······!’라는 말을 꿀꺽 삼키며 다시 물었다.
 “그래? 고려 어디서 왔다던가?”
 스스로 생각해도 딱딱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아직 이 시대 말을 잘 모르니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사내는 되도록 말을 무척 짧게 하였다.
 “의주義州라고 하던가? 아무튼 야루가 바다로 흩어지는 곳인데, 삭주朔州 바로 아래라고 들었습니다. 야루만 건너면 바로 동녕부로 이어지니 온 고려 땅에서 몰려든 장사치들로 바글거린다고 하더군요.”
 ‘빙고!’
 
 잠시 후,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안립과 백란을 내보낸 사내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족보나 일기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글씨나 그림은 물론이고 종이로 된 것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는데, 다만 겉에 ‘육도보설六道普說’이라고 쓰여 있는 얇은 책 한 권을 찾아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한번 읽어 보려고 펼쳐 보니 온통 한자로 쓰여 있어 눈만 아프고 어지러웠다.
 ‘아직 한글이 창제되기 전이니 당연한 건가? 앞으로 고생 좀 하겠네. 한자로만 읽고 쓰기를 해야 할 테니······.’
 영어라면 몰라도, 사내는 한자와는 영 인연이 없었다. 아는 글자도 몇 개 되지 않거니와 그나마 대부분은 눈에 익은 모양으로 읽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다. 쓸 줄 아는 한자라고는 이름 석 자를 포함해서 얼마 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도 자꾸 대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좀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육도보설》을 펴고 아는 글자만 하나씩 짚어 가던 사내는 곧 짜증이 나서 팽개쳐 버리고 말았다.
 “젠장! 흰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글자라더니, 빌어먹을!”
 문맹文盲이 되어 버렸다는 절망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내는 이내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행서行書니 초서草書니 하는 그림(?)들을 그제야 비로소 떠올린 것이다.
 ‘이런, 똥 밟았다!’
 비록 과거로 온 첫날에 불과하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오히려 바보가 된 느낌이니, 속에서 열불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 안을 분주하게 서성이던 사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아차 싶었다. 낮에 안립이 했던 말 중에 야루라는 말이 또 있었음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야루, 독로강, 천호소.
 ‘그렇게 되뇌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의주에서 야루가 바다로 흩어진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이곳 독로강과 의주가 야루라는 강으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의주가 사내가 알고 있는 의주와 같은 곳이라면 야루라는 강은 다름 아닌 현대의 압록강이 되는 것이니, 지금 사내가 있는 독로강이라는 곳의 위치를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제길, 의주라는 말에 너무 흥분했어!’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백란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안립과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는데, 새하얀 수염이 멋들어지게 자란 노인이었다.
 앉아서 함께 차나 들자는 사내의 말에 어제는 다리가 너무 아파서 염치 불고하고 앉았던 것이라며 극구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척 앉아 있던 백란은 노인을 보더니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인에게 인사했다.
 “수, 수백호 어르신을 뵙습니다.”
 노인이 바로 수백호임을 안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종달새처럼 귀엽게 재잘거리던 어린 백란이 나덕의 눈초리 한 번에 금방 파랗게 질려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못마땅한 까닭이었다.
 자연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자니 나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장 나덕입니다. 천호, 간밤에는 평안하셨는지요?”
 “평안하지 못하였다.”
 욱하는 성미를 못 참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는 했지만, 사내는 바로 후회했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처지가 지금 어떠한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공대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아랫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백란의 반응이나 어제 안립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실력자임에 분명한 나덕의 성미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나덕은 그것을 다르게 생각하였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허허, 천호께서 반역 도당의 일을 들으셨나 보군요. 실은 이 늙은이 또한 걱정이 되어 간밤에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백성들을 천호소로 모은 것이, 이 노인이 시킨 일이라고 했지?’
 생각을 마친 사내가 말했다.
 “백성들을 천호소로 모은 것은 잘한 것이다. 이리 와 앉으라.”
 순간 나덕의 눈이 빛났다.
 사내가 백란에게 손짓을 하여 그에게도 차를 따르게 하자 나덕은 사내의 맞은편으로 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늙은이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땅히 천호께 아뢰어 명을 받았어야 하는데, 늙은이가 급한 마음에 그만 실수를 하였습니다. 천호,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지만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찻잔을 집어 들며 급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 좀 해 놓는 것인데!’
 후회는 그렇게 해도 막상 생각해 봐야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새벽이 다 지나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다 해 보았지만, 결론은 당분간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뭘 알아야 면장을 시켜 줘도 할 것이 아닌가!
 밤새 고민한 결과, 사내는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알아도 역시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 시대에 대해서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보다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은 어느 정도 정보가 모이고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그때그때 부딪치는 일마다 적당히 얼버무려 임기응변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 낸 사내는 한자를 대충 섞어 사극 투의 말투로 나덕에게 말했다.
 “병가兵家의 일이란 급한 것이 대부분이다. 권한 밖의 일이라면 모르겠으나, 수백호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니 용서를 청할 일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는 선참先斬, 후보後報을 원칙으로 하되, 보고하는 것을 잊지 말라.”
 사내가 말을 마치자 나덕은 충격을 받은 듯이 잠시 멍청하게 있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취하며 말했다.
 “천호의 식견이 이와 같이 높으심을 모르고, 이 늙은이는 천호께서 어리시던 때만 생각하여 홀로 걱정하고 망령되게 굴었습니다.”
 갑자기 눈물까지 주륵 흘리는 모습에 놀란 사내가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나덕은 고개를 밖으로 돌리며 외쳤다.
 “안 백호, 게 있느냐!”
 “예, 어르신.”
 “즉시 정청으로 가서 백호들을 소집하고 선명宣命과 인신印信을 준비하라! 오늘부터 천호께서 친정親政하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사내에게 말했다.
 “자, 천호! 자리에서 일어나시지요. 이 늙은이가 모시겠습니다.”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수백호 나덕의 손에 이끌려 한참을 걸어가던 사내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흔한 현판 하나 붙어 있지 않는 전각 앞이었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대웅전처럼 생긴 건물이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단층이 아니라 이 층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이 바로 정청입니다. 선대先代 천호께서 살아 계실 때, 마지막으로 천호를 보신 것이 바로 이곳에서였습니다.”
 회한이 서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나덕의 모습에, 사내도 잠자코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사내가 새로 살게 된 이 몸에는 남모르는 사연이 많은 것 같고, 나덕은 그러한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나덕을 따라 정청이라 부르는 전각 안으로 들어서서 내부를 둘러보니 중앙에는 복도처럼 빈 공간이 있고, 공간의 좌우에는 약 30센티미터 높이로 나무로 만든 단壇을 놓은 다음 의자와 탁자를 몇 개씩 놓았는데, 중국의 태사의를 여러 벌 늘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면으로는 역시 나무로 만든 단이 약 1미터 높이로 놓여 있고 좌우와 정면, 삼면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중앙의 공간과 이어지게 하였다.
 계단 위에는 커다란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저곳에 앉을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으리라.
 “천호, 오르시지요.”
 나덕의 재촉에 사내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다 멈추어 서고, 가다 멈추어 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계단 아래 당도했다.
 이제까지는 나덕이 멈추어 서면 사내도 멈추어 서고, 나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내도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반복하였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사내가 걸음을 멈추어 서면 나덕도 곧 따라서 멈추어 섰다.
 정면에 마주 보이는 자리가 사내의 자리인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한 건 아니고 그저 천호소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천호인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아니겠냐는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니, 선뜻 계단 위로 올라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렇게 계단 앞에서 망설이고 서 있자, 곁에 서 있던 나덕이 말했다.
 “선대 천호께서 처음 저 자리에 앉으실 때에도 지금의 천호처럼 한참을 망설이셨지요.”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나덕은 여전히 회상에 잠긴 눈빛으로 말하였다.
 “늙은이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겠는가?’ 하고요. 늙은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하실 바를 하신 후 천명天命을 기다리십시오.’ 그러자 선대 천호께서 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시며 제게 말씀하시길, ‘나는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 이봐요, 할아버지! 좀 쉽게 얘기하면 안 되나? 젠장!’
 일단 자신의 자리라는 것은 알아들었으나, 뜻 모를 나덕의 말에 속으로 투덜거린 사내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서 계단을 올라갔다.
 몸을 돌려 의자에 앉으려다 문득 시선을 돌려 보니 주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지 알 듯도 하다.
 주위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나덕의 시선과 마주치자, 왠지 모를 숙연함에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 * *
 
 “천호를 뵙습니다.”
 계속되는 긴장으로 목이 타, 사내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며 심호흡을 계속하였다.
 ‘중국인들만 차를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고려인들도 차를 몹시 즐겼나 보군. 아니,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에 들어와서 살다 보니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인가?’
 잠시 딴생각을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긴장을 떨친 사내는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남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였다. 한 명씩 정청으로 들어올 때마다 사내가 앉아 있는 단 아래까지 왔다가 군례를 취하고는 좌우로 흩어져서 앉는다. 저마다 자리가 정해져 있는 듯,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그 사이로 시녀인 듯한 여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탁자마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는 가운데 정청 안을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자들의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사내에게 군례를 마친 남자들은 자리로 가 앉으며 투구를 벗어 저마다 앞에 놓인 탁자에 내려놓았다. 머리카락을 정수리에만 남기고 싹 밀어버린 다음 땋아서 묶고 늘인 변발辮髮이 드러났다.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처음 나덕이 자리로 가서 앉으며 투구를 벗었을 때에는 상당히 놀랐다.
 그러나 사내는 이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니 변발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사내의 머리 모양은 변발이 아니라 짧은 머리―마치 삭발을 했다가 다시 기른 것처럼 듬성듬성하게 자라난 모양이었다는 점이다.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아침나절 갑자기 찾아온 나덕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뭘 하려는 것인지 설명해 줄 때도 된 것 같은데, 나덕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자리에 앉아 차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덕의 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사내도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과 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니던 여자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자, 붉게 옻칠한 나무 상자를 양손에 하나씩 받쳐 든 안립과 한 중년인이 정청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나덕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서자, 장내에 있던 십여 명의 완전무장한 남자들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앞으로 나와 선다.
 이윽고 안립과 중년 남자는 사내가 앉아 있는 단 아래까지 뚜벅뚜벅 걸어와서 멈추어 섰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더니 이내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와 사내의 앞에 각각 하나씩 들고 있던 상자들을 공손히 내려놓고는 다시 뒷걸음질을 쳐서 계단을 내려갔다.
 두 사람이 놓고 간 상자들은 모두 뚜껑이 열린 채였는데, 하나에는 붉은 비단 두루마리가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맹수상像이 들어 있다.
 선명과 인신.
 선명은 일종의 임명장과 같은 것이고, 인신은 품계品階를 증명하는 신분증이자 동시에 관인官印이다.
 황제국皇帝國에서 선명은 칙지勅旨에 해당하고, 왕국王國에서 선명은 왕지王旨 혹은 교지敎旨에 해당한다.
 선명은 관리들에 대한 군주의 위엄과 지배를 상징하는 것으로, 관리가 교체될 때마다 군주가 새로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인신 또한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왕조가 인신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하였는데, 인장 제도가 정비된 한나라 이후로는 관리가 바뀌거나 품계가 바뀔 때마다 회수하였다가 다시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외는 습직襲職을 인정받은 일부 지방의 토호土豪들의 경우로, 이들에게는 인신을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허락하고 습직을 인정하는 내용의 선명을 별도로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들 토호가 자체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선명과 인신을 근거로 하여 후계자가 군주에게 습직을 요청하면 대개 새로 작성한 선명을 내리는 것으로 세습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습직을 인정받는 대부분의 토호는 주로 국경 지방에 자리한 토착 세력으로, 수도와의 거리가 상당히 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원칙대로 습직을 요청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선명이 오가는 사이에 해당 토호가 적국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배반하거나 선명을 기다리는 사이 내분이 벌어져 세력이 소멸하는 경우가도 많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토호의 후계자의 이름으로 작성된 선명을 미리 만들어서 해당 관청에 보관하고 있다가, 습직을 요청해 올 경우 별다른 사유―후계자가 바뀌었다든가 하는―가 없는 한 준비된 선명을 그대로 내주고 군주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선명과 인신은 본래 천호 가문의 것으로,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으신 천호께서 간수하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까지는 선대 천호의 명으로 부득이 이 늙은이가 간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호께서 공무를 살피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이시니 이제 본래의 주인이신 천호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나덕은 다시 사내가 앉아 있는 단으로 올라와 천천히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어 공손하게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개원로에 사람을 보내 천호께서 아버지의 관직을 물려받으셨음을 알리니 조감照勘하여 보내어 온 선명입니다.”
 주니까 받기는 받았는데, 사내는 아직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선명이라는 것이 일종의 임명장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을 하겠는데, 이 서찰로 된 선명은 뭐고 저 두루마리로 된 선명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때는 이랬고 저때는 저랬다 하는 등의 짧은 지식들만을 가지고 있는 사내가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무리였다.
 연신 고개를 흔들어 대던 사내는 일단 천천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속 지내다 보면 지금은 모르는 것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먹은 사내는 홍건적의 난을 떠올리고,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백성들을 천호소로 모이게 한 것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는가?”
 사내의 물음에 나덕이 대답하였다.
 “어젯밤부터 모여들기 시작하여서, 우선 천호소 인근 민가에 머물게 하고 있습니다.”
 “모자랄 것이다. 천호소 내에도 자리를 내고, 급한 대로 천막이라도 쳐서 머물게 하라.”
 “예, 천호.”
 “백련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백련교라는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나덕은 이내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반역 도당은 어제 야루를 건너오자마자 진을 치고 쉬었다가 지금은 삭주로 향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내 사내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원이 중국을 지배하는 지금, 자신이 남송 황제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나선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분명 대역 죄인이다. 따라서 그를 교주로 하는 백련교도 역시 반역 도당이 되는 것이고.
 삭주로 향하고 있다는 말에, 삭주 옆에 의주가 있다던 안립의 말을 떠올린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의주를 노리는 건가? 의주에서 뱃길로 달아나겠다는 건가?”
 “의주라 하셨습니까, 천호?”
 혼자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나덕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사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반역 도당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처럼 쫓겨만 다니다가는 전멸을 면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다로 달아나는 길뿐이다.”
 “아! 그렇다면 저들은 의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할 터이니, 토벌군이 움직이는 길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군요. 그러면 백성들도 모두 천호소로 피하게 할 것이 아니라 삭주로 통하는 길가에 있는 부락 백성들만 피하게 하면 되겠습니다.”
 백호 최진이 사내의 말에 탄성을 터트리며 의견을 이야기하자 백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천호의 말씀대로라면 반역 도당 중에 분명 길을 아는 자가 있다는 뜻인데, 모두가 길을 아는 것은 아닐 터, 만약 저들이 의주에 당도하기 전에 길잡이가 먼저 토벌군에게 잡혀 죽는다면 길을 잃은 반역 도당은 천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토벌군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니, 지금처럼 모든 백성들을 천호소로 피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정청이 소란스러워지자, 나덕은 한 손을 들어 장내를 조용하게 한 후 사내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천호의 뜻은 어떠한지요? 반역 도당의 행로를 예측하셨으니 방도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사내는 나덕에게 되물었다.
 “무슨 뜻인가?”
 퉁명스러운 사내의 말에 나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내가 말 그대로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도를 원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영혼이 바뀌기 전, 그러니까 본래의 천호는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고서도 세상의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서, 내소에만 틀어박힌 채 불경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다 때마침 백련교가 압록강을 건너온 날 하필이면 사내와 영혼이 뒤바뀌어 버린 것인데,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나덕의 눈에 비치기로는 그동안 죽은 듯이 지내던 천호가 갑자기 뛰어난 식견을 내보이니 달리 생각이 되는 것이다.
 천호가 그간 세상의 일에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워낙에 뛰어난 인물이어서 그랬던 것이고, 마침내 기회가 오자 이제야 슬슬 그 능력을 내보이는 것으로 좋게 생각을 해 보려는 것이다.
 큰 현縣의 주루나 다루의 이야기꾼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인 삼분사략三分事略이나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에도 나오지 않는가, 천하의 기재奇才인 방통龐統에게 일개 현령縣令의 직을 맡기자 술과 음音으로 세월을 보내었다고!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건만, 나덕에게는 사내에게 그렇게라도 일시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덕이 마침내 사내에게 말했다.
 “백성들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반역 도당과 토벌군이 모두 우리 경계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정청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수백호인 나덕의 일은 주로 백호들이 하는 일의 미비한 점을 지적하거나 보완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원래가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성미인 데다 경험까지 많으니 한 치의 빈틈도 보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나이 어린 천호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으니 다들 놀란 것이다.
 이제 생각에 잠기는 것은 사내의 차례.
 나덕이 묻는 방도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았지만, 단지 임기응변으로만 상황을 넘기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적다.
 머릿속에 제아무리 지식과 경험이 들어가 있으면 뭐하나,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정확한 정보가 뒷받침이 되어야만 그나마 쓸모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에는 관습이나 인습과 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무형의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다.
 백련교야 어차피 의주를 목적지로 하고 있으니 발목만 잡지 않으면 알아서 최대한 빨리 움직일 것이다. 따라서 구태여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문제는 토벌군이었다.
 나덕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일단 토벌군의 움직임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백련교가 독로강의 경계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백련교의 의도가 의주를 거쳐 바닷길로 달아나는 것임을 알려 주어서 허겁지겁 쫓아가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이다.
 말은 쉽지만, 당최 아는 것이 없으니 백련교가 독로강 밖으로 나갈 때까지 무슨 수로 토벌군의 움직임을 막을 것인지 어떻게 잔머리를 굴려 볼 건더기조차 없다.
 즉,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 몰라. 배 째!’
 상황 자체에 짜증이 난 사내는 내뱉듯이 말했다.
 “반역 도당이 삭주를 지날 때까지만 토벌군을 잡아 두면 그만 아닌가!”
 ‘토벌군을 어떻게 잡아 둘지는 댁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내는 인상을 찌푸린 채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사람들이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웅성거리는 사이에도 나덕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고, 사내는 그것을 고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순간, 나덕의 안색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과연! 그런 수가 있었군요! 오늘 이 늙은이가 천호 덕분에 안계眼界를 크게 넓혔습니다, 하하하!”
 ‘저 할아버지가 뭐래?’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인 듯해 괜히 우쭐해진 사내는 차를 홀짝거리며 나덕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나덕은 한참 동안을 그렇게 혼자 껄껄거리며 웃더니, 한 손을 들어 그때까지 웅성거리던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 모두에게 말했다.
 “임 백호는 즉시 천호의 명에 따라 잔치를 준비하라. 천호께서 토벌군을 위해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백 백호는 즉시 토벌군 진영으로 가서 천호의 뜻을 전하고 잔치에 초대하라. 반드시 응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나머지 백호들은 삭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부락 백성들을 서둘러 천호소로 피신하게 하라. 쌀 한 톨, 물 한 모금 남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외 다른 지역의 백성들 중 이미 천호소로 피한 자들은 내버려 두고 아직 부락을 떠나지 않은 백성들은 계속 머물게 하라. 천호께서 친정하시고 처음으로 내리시는 명이니, 명을 이행함에 있어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예!”
 나덕이 자신의 명이라며 장내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을, 사내는 얼떨떨하게 보고 있었다.
 그사이 명을 받은 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가고 정청에는 안립과 나덕 그리고 사내, 세 사람만 남았다.
 사내는 상황을 어떻게든 잘 넘긴 것 같으니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어서 심통이 난 표정이고, 안립은 말 그대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 나덕은 연신 무릎을 두드리며 무어라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다.
 “수백호.”
 “예, 천호.”
 대답을 하면서도 연신 싱글벙글거리는 나덕의 모습에 사내는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말하였다.
 “피곤하니 이만 쉬어야겠다.”
 “예, 천호. 토벌군 장수들을 상대하려면 피곤하실 것이니 일찍 쉬시지요.”
 “응?”
 자리에서 일어나 단을 내려오던 사내는 나덕의 말에 의아한 듯 반문하였으나, 곧 말귀를 알아듣고서는 홱 돌아서며 안립에게 말했다.
 “가자!”
 
 해 질 무렵, 토벌군이 독로강에 도착하였다는 전갈이 왔다.
 독로강은 독로강천호소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일대의 지명이기도 하다.
 안립은 토벌군의 장수들이 곧 당도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내를 백호방白虎房으로 안내하였다.
 백호방은 백호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의사청과 같은 곳이다. 정청은 그 구조상 사내보다 지위가 높거나 비슷한 사람을 맞이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하였다.
 사내와 토벌군 대장의 자리는 백호방으로 하고, 나머지 백호들과 토벌군 장수들의 자리는 백호방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마련하였다는 안립의 보고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천막을 치고 탁자와 의자를 내오는 등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사내는 안립의 안내에 따라 백호방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윽고 토벌군의 장수들이 잔치 준비를 마친 천호소로 들어서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였다. 토벌군의 대장인 나하추納哈出가 사내와 같은 천호라는 말을 이미 들어서였다.
 “나하추요. 공의 환대에 감사드리오.”
 사내는 나하추의 말에 주춤하였다. 상대가 직접 이름을 밝혔으니 사내도 그래야 하는데, 아직까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잠시 당황하였던 사내는 곧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로 소개를 대신하였다.
 “먼 길을 오신 손님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소? 초대에 응해 주어 감사할 따름이오. 자, 이리로 오르시오.”
 다행히도 나하추는 사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을 트집 잡지 않고 껄껄 웃으며 사내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사내와 나하추, 두 명의 천호들이 백호방으로 들어가 마련된 자리에 앉자, 토벌군의 장수들과 독로강의 백호들도 저마다 자리를 찾아 앉고는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공, 술과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공의 기쁨이라 하였으니, 나에게도 그런 기쁨을 주시지 않으려오? 내 집은 동녕부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으니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라 했으니 마땅히 그리하리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라! 하하하! 그것 참 좋은 말이오! 하하하하!”
 나하추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사내도 어느덧 긴장이 좀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또한 술잔은 기울일수록 제맛인 게지요.”
 “하하하하! 이 나하추, 태어나서 지금껏 들은 말 중에 이처럼 마음에 쏙 드는 말은 처음이오!”
 나하추는 사내의 말이 정말 마음에 든 듯,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술을 권했다.
 “자, 자! 공,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공께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속을 다 시원하게 하는구려.”
 별것 아닌 말 한마디마다 껄껄 웃으며 지나치게 좋아하는 나하추의 모습에 사내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나하추가 권하는 술을 받았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면서 자연히 주고받은 이야기에 따르면, 거뭇거뭇한 수염 때문에 스물대여섯 살은 넘은 것으로 알았더니 나하추는 올해 갓 스무 살이라고 하였다.
 그제야 사내는 나하추의 과장되게 호탕한 모습이 아직은 어린 나이 때문임을 눈치챘다. 사내는 슬그머니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저 나이 때 어땠더라? 일단은 상당히 감상적이었던 것 같고, 쓸데없이 고집도 많이 부렸었군.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아,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숙맥이었더랬지! 이론은 빠삭했지만 맘에 드는 여자만 봐도 정신을 못 차렸어. 음, 또 뭐가 있었더라? 뭐든지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즉흥적이면서도 딴에는 자존심도 무지 강했고······.’
 ‘순진한 청소년 이용하기’ 작전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사내는 간간이 나하추의 말에 대꾸를 하며 속으로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잔머리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예의 과장되게 호탕한 모습으로 연신 술잔을 비워 내던 나하추는 사내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슬쩍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타사보르塔思不花 공,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시오?”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 사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타사보르임을 알게 된 사내의 입꼬리가 슬며시 휘어지며 하늘로 솟구친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몽골 이름이라는 생각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여태 나하추를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했던 것들은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참 우습지 않소?”
 “에?”
 뜬금없는 소리에 나하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타사보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타사보르는 손에 쥔 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잠시 뜸을 들이다 결국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것 말이오. 나는 분명히 이런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내가 알던 나는 내가 아니고,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되어 있었소. 그런데 말이오, 정말 우스운 것이 또 있소.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는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더란 말이오. 백 년도 못 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면서 말이오.”
 말을 마친 타사보르는 급히 술잔을 기울여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 입가에 흘러내리는 술을 오른손으로 쓰윽 닦아 내면서 씹듯이 내뱉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알겠는가!”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타사보르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주변에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불을 밝히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커흠!”
 나하추가 헛기침을 하자 타사보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하추는 자세를 바로 하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정중한 모습으로 타사보르에게 말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이 나하추는 배움이 부족하여 공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다만 공의 말씀 속에는 내가 예전에 뵈었던 달라이 라마의 설법처럼 깊은 현기가 서려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 수가 있었소.”
 잠시 말을 멈추었던 나하추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타사보르의 두 눈에 시선을 맞추고 말을 이어 나갔다.
 “공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깨달았소. 나는 어려서부터 말을 타고 사냥하기를 즐겼소. 나이가 들어서도 달라진 것은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냥을 하거나 기녀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 고작이었소. 말로는 위대한 대칸大汗의 가르침에 따라 살겠노라 하였으나, 항상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척만 하였기에 현명해지지 못했소. 공신功臣의 후예로 부족함이 없으나, 집안이 나빠 아무도 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였소. 공의 말씀처럼,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알아주겠소.”
 나하추는 처연히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의도한 바도 아니었고 서로의 이유도 달랐지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나하추가 저토록 동감을 하니 타사보르도 나하추에게 알 수 없는 호감이 생겨났다.
 어느덧 친해진 타사보르의 백호들과 나하추의 장수들이 서로 어울려 웃고 떠드는 것을 내려다보며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잔의 술을 나누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퍼져 나오는 천막 위로 떠오른 달을 보면서 연신 술잔을 홀짝거리던 타사보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하추 공.”
 “예, 타사보르 공.”
 “출발을 며칠 미루어 주실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말투마저 공손해진 나하추가 되물었다.
 “토벌군의 장수들 중에 한인이 많다고 들었소.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소.”
 나하추 역시 한인 장수들의 폐해를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금세 타사보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출발을 며칠 미루는 것은 일이 아니나, 군령軍令을 받고 온 처지인지라 반역 도당을 손 놓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반역 도당은 고려로 향하고 있소.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 의주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달아나려 할 것이오. 내 휘하의 백호 하나를 길잡이로 붙여 주겠소. 이미 척후들이 저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고 그들이 가는 길의 백성들을 모두 피신시켜서 쌀 한 톨 남겨 두지 않도록 하였으니, 지름길로 먼저 달려가 삭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친 반역 도당을 들이치면 단번에 모두 잡아들일 수 있을 것이오.”
 타사보르의 말에 나하추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공께서 이미 계책을 모두 세워 놓으셨는데 마땅히 그에 따라 실행을 하여야지요. 사실 요녕성에서부터 쉬지 않고 저들을 쫓아오느라 병사들도 많이 지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루쯤은 독로강에서 쉬게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며칠이나 쉬게 하면 될는지요?”
 “사흘이면 될 것이오.”
 “예, 공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나하추가 자신에게 공대를 하고 있음을 깨달은 타사보르는 쓰게 웃으며 나하추에게 술을 권했다.
 
 다음 날 나하추가 휘하 장수들에게 독로강에서 사흘간 머무르겠다고 하자, 한인 출신 장수들은 심하게 반발했다.
 원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신분제도를 유지하였으나, 출신 민족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지배 민족인 몽골족은 당연히 최고의 신분이었고, 회교도 색목인들이 제2신분,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원나라에 속하게 된 화북의 백성들을 한인이라 하여서 제3신분 그리고 옛 남송 출신의 한족들이 남인이라 불리면서 제4신분으로 제국 하층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대칸은 이러한 차별 정책을 상당히 완화하여, 과거를 통해 남인들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때문에 남인들은 주로 문관으로 진출하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하층 군인 계급을 이루고 있던 화북의 한인들을 비롯하여 백여 년 만에 관직의 길이 열린 화남의 남인들은 출세에 몹시도 목말라 하였다.
 그만큼 공을 세우는 일에 집착하였는데, 그것이 과하여서 없는 공을 만들어 내거나 작은 공을 큰 공으로 부풀려서 보고하니 최근 조정에서도 이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이미 계책을 세워 두었다. 그리고 사흘 후에는 급속 행군할 것이니, 병사들을 충분히 쉬게 하여 무리가 없게 하라.”
 직위로 한인 출신 장수들의 반발을 꾹 눌러 버린 나하추는 곧 타사보르가 있는 독로강천호소로 향했다.
 “추, 추!”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도 나하추는 급히 말을 재촉하며 달렸다.
 별로 나눈 이야기도 없었건만, 그저 묵묵히 술만 마시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타사보르의 신기한 이야기에 반해 버린 나하추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호위로 따라온 나얀티무르那延帖木兒에게 말고삐를 넘기며 마중 나온 독로강의 장수에게 물었다.
 “타사보르 공께서는 어디 계시냐?”
 “아직 처소에 계십니다. 지난밤 술을 과하게 하셨는지라······.”
 나하추가 찾아왔다는 말에 황급히 뛰쳐나온 최진의 대답에 나하추는 멈칫했다.
 “그래?”
 “예, 장군. 본래 저희 천호께서는 술을 드시지 않는데, 어제 과음을 하셨는지라······.”
 왠지 기분이 좋아진 나하추는 싱글거리며 최진에게 말했다.
 “흠, 그럼, 기다리겠다. 내가 기다린다는 말을 고하지 말고, 공께서 깨시거든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고하여라.”
 타사보르나 나하추나 관직은 다 같이 천호이다.
 그러나 나하추는 몽골도만호부에 속하여 말 그대로 1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당당한 천호이고, 타사보르는 이름만 천호―정확히 말하자면 일개 세후世侯에 불과하다. 그런데 몽골도만호부에 속한 천호인 나하추가 자신의 주인인 타사보르에게 이렇듯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니 최진도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으쓱해졌다.
 “예, 장군!”
 대답을 한 최진은 곧 내소로 달려갔다.
 아무리 나하추가 기다릴 터이니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할지라도, 그가 가진 천호라는 위세가 타사보르가 가진 천호라는 위세보다 더욱 큰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편 최진의 보고로 나하추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타사보르는 나하추를 내소로 안내하라 한 다음 간단히 씻고 차를 준비하게 하였다.
 
 “이거, 제가 너무 일찍 찾아왔나 봅니다.”
 타사보르가 권한 자리로 앉으며 나하추가 송구한 듯 말을 건네자 타사보르는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기쁨이지만, 이른 아침,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하는 차도 내게는 큰 기쁨이라오.”
 “하하, 공께서 이 나하추의 얼굴에 금칠을 하십니다그려.”
 본래 타사보르의 나이는 스물한 살로, 나하추보다 불과 한 살 많은 나이였다.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신분이 비슷하고 나이가 비슷하면 친구로 어울리는 것이 통례, 그런데 타사보르보다 불과 한 살 어린 나하추가 타사보르에게 깍듯하게 공대를 하며 예우하자 곁에서 차 시중을 들던 백란 또한 놀랐다.
 타사보르야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서른 살이었으니 나하추가 자신에게 공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주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 까닭이었다.
 백란이 보기에 두 사람은 대화를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묵묵히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보던 타사보르가 몇 마디를 하면 나하추는 그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물론 타사보르가 평소에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손님을 마주한 채로 가만히 차나 마시다가 생각나면 몇 마디씩 툭툭 던지듯이 말하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타사보르나 듣고 있는 나하추 모두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는 것 같으니 상관은 없을 듯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백란은 입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나하추 공은 이번 토벌이 끝나면 바로 동녕부로 돌아가시겠지요?”
 “예, 생각 같아서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이렇게 공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내고 싶습니다만, 군령을 받고 온 처지인지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드디어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하추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하였다.
 타사보르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나하추에게 말했다.
 “그저 시간 날 때 한 번씩, 유랑 삼아 오시면 되는 거지요.”
 그러자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이 나하추는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타사보르에게 말했다.
 “참, 동녕부에 있는 제 집에 꼭 한번 오시기로 한 약속은 지키시는 겁니다, 꼭이요!”
 “꼭 한번 찾아가겠소.”
 다시 한 번 다짐을 받고서야 나하추는 안심을 했다는 듯이 타사보르 쪽으로 잔뜩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하며 껄껄 웃었다.
 “그나저나 타사보르 공께서도 그 크신 재주를 대칸을 위해 쓰셔야 할 것인데, 조정이 이토록 어지러우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아무리 이 시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도,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이었던 몽골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던 타사보르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충분히 진압하고 토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분으로 인하여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린 타사보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골에서 차나 마시는 사람에게 무슨 재주가 있겠소? 다만, 눈앞의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을 두고 다투다가 종국에는 천하를 잃게 될 것이니 그것이 걱정이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록 조정에 간신들이 날뛰며 대칸의 이목을 흐리고 있다고는 하나, 감히 천하를 논하시다니요!”
 순식간에 얼굴이 뻘게지면서 꾸짖듯이 말하는 나하추의 모습에, 타사보르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왕조 국가에서 천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하추가 자신을 잘 따르는 것을 보고는 긴장이 풀어졌음을 내심 자책하며 타사보르는 아무래도 적당히 사기(?)를 좀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가며 생각을 정리한 타사보르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기天氣를 아시오?”
 “예?”
 여전히 얼굴이 뻘겋게 달아 있는 그대로, 타사보르가 한 말이기에 참는 모양인지 씩씩거리고 있던 나하추의 두 눈이 금세 뚱그레졌다.
 그의 눈에 비친 타사보르는 하늘도 놀랄 재주를 감춘 채 은거한 현자의 모습. 타사보르의 입에서 나온 천기라는 말이 나하추에게는 예사롭게 들리지가 않는다.
 곁에서 차를 시중하던 백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모른 채, 나하추가 바로 기대하던 반응을 보이자 타사보르는 왠지 웃음이 나와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을 애써 참았다.
 천천히 찻잔을 집어 들고 입가에 대며 시간을 끈 타사보르는 시선을 먼 산에 두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영년永年에서 일어난 난은 곧 들불처럼 천하로 번져 갈 것이다. 온 천하가 불에 타도록 조정의 권신權臣들은 내버려 둘 것이다. 마침내 그 불길이 눈앞에까지 이르고서야 비로소 그 불길을 잡고자 할 것이다. 다행히 저들의 교주를 붙잡았을 때 그 불길은 곧 꺼질 듯이 보일 것이나, 이미 화덕火德을 입은 불길이 쉽게 꺼지겠느냐! 조정의 권신들은 군사를 거둬들이고, 여전히 대칸의 눈과 귀를 가릴 것이다. 그로써 다시 되살아난 불길이 천하를 집어삼킬 것이니, 그때부터 푸른 늑대의 후예들은 상처입고 쫓기게 될 것이다.”
 
 
 #2. 그가 변하다
 
 처음에 독로강의 토지가 좁고 산이 깊으니, 백성이 살기가 좋지 않았다. 태조太祖가 둑을 쌓아 토지를 넓히고 농사를 가르치니, 사방에서 일정한 재산恒産이 없는 사람이 많이 왔다. 태조太祖가 조정朝廷에 이 사실을 알리니, 중서성中書省과 요양성遼陽省에서 모두 관원을 보내오고, 고려高麗 정동성征東省에서도 관원을 보내왔다. 삼성三省이 회합하여 새로 온 사람과 그전에 있던 사람을 분간하여 백성을 등록시켰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토벌군을 환영하는 연회가 있고 나서 정확히 사흘 뒤에, 나하추가 이끄는 토벌군은 타사보르 휘하 백호 최진의 안내를 받으며 삭주로 향하는 지름길을 달렸다.
 전속력으로 기동하여 백련교보다 먼저 의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를 잡은 나하추의 기병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마침내 백련교의 무리를 발견하고 먼저 길을 지나가게 한 다음 불시에 후미로 들이닥쳤다.
 삭주 역시 독로강과 마찬가지로 산악 지대인지라 삭주에서 의주로 향하는 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의주 쪽으로 완만하게 내리막길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기병 본래의 돌격력에 지형상의 이점으로 배가된 돌파력으로 백련교의 후미로 밀어닥친 나하추의 기병들은 곧 백련교의 대열을 관통하듯 가로질러 사방으로 흩어지는 백련교도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의주를 통해 뱃길을 따라 본진으로 달아나려 했던 백련교의 교도들은 오랜 도주로 심신이 모두 지친 데다, 나덕이 백호들을 지휘해 삭주로 통하는 관도 주변의 주민들을 모두 천호소로 피신하게 하면서 빈집에는 쌀 한 톨 남기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에 굶주린 상태였다.
 때문에 나하추가 이끄는 토벌군의 돌격이 시작되자마자 백련교도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저항하거나 달아나는 것조차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덕분에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 만에 전투를 마친 나하추는 추격조를 편성하여 도주한 백련교의 무리를 뒤쫓는 한편 전장을 정리하고 진을 세우게 했다.
 “어떤가, 대단하지 않아?”
 아직 전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나하추는 겔(몽골의 이동식 천막 주택)로 들어서자마자 투구를 던지듯이 벗어 놓으며 오랜 벗이자 부하인 나얀티무르에게 말했다.
 나얀티무르 역시 전투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타사보르 공의 지혜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천기를 읽는다는 소문이 틀림이 없나 봅니다, 장군.”
 그날 곁에서 차를 시중들던 백란의 입을 통해 처음 타사보르가 천기를 읽는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모두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였지만, 백란을 불러 앉히고 조목조목 물어 가던 수백호 나덕과 백린은 타사보르와 나하추의 대화 내용에 이르러서는 침음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백란에게는 이후 함구緘口하도록 명하였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 다음이었다.
 천기라는 말에 잠시 이맛살을 찡그리던 나하추는 바닥에 놓인 앉은뱅이 의자로 가 앉으며 말했다.
 “나는 지혜로운 타사보르 공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가 천기를 읽는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나얀티무르는 나하추의 곁에 놓인 앉은뱅이 의자로 가 걸터앉으며 조용히 나하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은 비록 일개 천호에 불과하지만, 나하추는 대원제국大元帝國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후예로 장차 아버지의 관직을 물려받아 도만호都萬戶가 될 몸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지, 나하추는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스며드는 햇빛에 비친 나하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던 나얀티무르가 슬쩍 운을 띄웠다.
 “장차 타사보르 공을 어찌 대할 것인지 생각하시는 겁니까, 장군?”
 “그렇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함께하여서인지 곧잘 자신의 생각을 읽어 내곤 하는 나얀티무르의 말에, 나하추는 슬쩍 웃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타사보르 공은 분명 자신의 입으로 천기를 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읽은 천기를 믿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하추가 말끝을 흐리자, 나얀티무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타사보르 공이 읽은 천기가 옳다고 여겨지시는 겁니까?”
 “그렇다. 지금 조정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건대, 그가 읽은 천기가 옳은 것 같다. 그래서 고민이다.”
 나하추의 말에 나얀티무르는 문득 타사보르가 읽었다는 천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닥치지 않은 미래를 궁금해하고 또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성인 까닭이다.
 “대체 타사보르 공이 읽은 천기가 무엇이기에 이리도 고민을 하시는 겁니까?”
 나하추는 묵묵히 생각에 잠긴 채 나얀티무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쇠심줄 같은 그의 고집을 알고 있기에, 일단 한번 입을 다문 이상 나하추가 입을 여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는 사실을 나얀티무르는 잘 알고 있었다.
 치미는 궁금증을 가슴 한곳에다잡으며 나얀티무르는 나하추에게 말했다.
 “타사보르 공이 읽은 천기가 무엇이든, 그가 읽은 천기가 옳은 것 같다면 마땅히 그에 맞추어서 대비하면 될 일입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천기를 읽는 타사보르 공의 도움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타사보르 공이 제아무리 천기를 읽어 내는 대단한 재주를 가졌다고는 하나, 그는 호구戶口 1천도 안 되는 조그만 땅을 다스리는 세후에 불과합니다. 도만호께 청하여 장군께서 그에게 적당한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를 장군의 사람으로 하는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얀티무르의 말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 나하추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렇군, 그래! 그 생각을 못 했어! 천기를 읽는 그를 내 사람으로 한다면, 우리 가문이 이 지긋지긋한 변경을 벗어나 경사京師(경기京畿. 수도 인근 지방)로 가는 것도 일이 아닐 것이야!”
 타사보르와의 대화 이후 줄곧 해 오던 고민을 나얀티무르의 조언으로 단번에 끝내 버린 나하추는 그러나, 끝끝내 타사보르가 읽었다는 천기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아서 나얀티무르를 서운하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진을 걷게 한 나하추는 나얀티무르에게 토벌군을 이끌고 동녕부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소수의 호위병만을 거느린 채 타사보르가 있는 독로강으로 향했다.
 올 때에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느라 2천이 넘는 인원으로도 불과 하루가 걸리지 않은 길이었지만, 토벌을 마친 이상 급할 것 없는지라 보통의 속도로 달리니 호위병만을 거느린 단출한 일행인데도 불구하고 삭주를 출발한 지 이틀 만에야 독로강천호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 그동안 수백호 나덕의 도움을 받으며 독로강의 군사와 행정을 파악해 가고 있던 타사보르는 정청에서 나하추가 소수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당도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나덕에게 물었다.
 “최 백호도 함께 당도하였을 것이니, 우선 최 백호부터 만나 보는 것이 순서일 테지?”
 “예, 천호. 그러나 나하추 장군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단 그놈이 무슨 속셈으로 여기까지 다시 왔는지 그것부터 알아야겠지.”
 척후들의 보고로, 타사보르를 비롯한 독로강의 사람들은 이미 나하추가 삭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을 세웠으니 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동녕부로 돌아갈 것으로만 알았던 나하추가 소수의 기병만을 거느린 채 독로강으로 되돌아온 까닭이 궁금해지는 것은 나덕도 마찬가지였지만, 나하추를 그놈이라고 칭하는 타사보르의 말에 기겁을 하였다.
 “천호!”
 “왜?”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타사보르의 표정에서, 그가 무엇인가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나덕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나하추 일행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도록 하는 한편 급히 최진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정청에서 내소로 자리를 옮긴 타사보르는 최진이 들어오자 우선 수고했다는 말로 위로하며 차를 권했다.
 “그래, 대승이었다지?”
 “예, 천호. 반역 도당 중에서 살아서 달아난 자가 거의 없고, 베어 낸 수급이 수천이었습니다. 토벌군 장수들 중에 천호의 이름을 흠모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난 남자들에게는 흥미 없어.”
 “예?”
 심드렁한 말에 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이내 자신이 또 말실수를 하였음을 깨닫고 타사보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최진에게 물었다.
 “그보다, 나를 흠모하는 놈들이 많다니, 무슨 소리냐?”
 “그날 전투가 끝나고 장수들끼리 모여 치하하는 자리에서 장수들이 나하추 장군의 군략을 칭송하자, 나하추 장군이 자신은 천호께서 세우신 군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야 사실을 알게 된 토벌군 장수들 중에 천호의 뛰어난 군략을 흠모하는 이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아!”
 대답을 하면서도 존경의 눈빛을 감추지 않는 최진의 모습에 멋쩍어진 타사보르는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대었다.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계책을 써서 나하추를 천호소에 붙잡아 두었던 사실만으로도 타사보르가 천기를 읽는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로, 백호들은 내심 어린 천호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사이 나하추에게 병략을 알려 주기까지 하여서 나하추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최진의 말에, 백호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더욱 멋쩍어진 타사보르는 말없이 차만 홀짝거렸다.
 “한데, 나하추 장군이 동녕부로 돌아가지 않고 천호소로 온 까닭이 무엇이더냐?”
 타사보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린이 최진에게 물었다.
 최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글쎄요······ 천호께서 계책을 세워 주신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으니 사의謝意를 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닐까요?”
 “내내 함께하였으니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것이 있었을 것 아니냐?”
 백린이 재차 묻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최진이 말하였다.
 “아, 그러고 보니 독로강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하추 장군의 부장인 나얀티무르라는 자가 저에게 와서. 천호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없는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물어 온 적이 있습니다.”
 “천호께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지는 않으셨지만 천호의 공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선물을 하여서 입막음을 하려나 봅니다.”
 최진의 말에 백린이 의견을 덧붙이자 일리가 있어 보였다.
 “흠, 그렇다고 해도 직접 올 것까지야 없지 않나? 입막음을 하려는 것이라면 우선 동녕부로 돌아가서 준비를 한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순서이지 않겠나? 더군다나 부하들은 먼저 동녕부로 돌아가게 하고, 혼자 소수의 호위병들만 거느린 채 빈손으로 찾아올 까닭은 더더욱 없지 않은가?”
 타사보르가 반박하자 여태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나덕이 최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어라 대답하였더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잔뜩 긴장을 한 최진은 주위의 눈치를 보며 주뼛거리다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르신. 우리 독로강은 산이 많고 토지가 척박하여서 백성의 숫자도 적지만 천호 가문에서 대대로 선정을 베푸셔서 부족한 것이 없고, 천호께서도 다만 불경을 즐겨 읽으실 뿐 물욕이 없으시니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장군을 직접 만나 보시기 전에는 알 수가 없겠습니다, 천호.”
 나덕의 말에 타사보르도 동의하였다.
 타사보르는 최진에게 말했다.
 “최 백호는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터이니, 어서 가서 쉬도록 하라. 어차피 우리끼리 암만 머리를 맞대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봐야 직접 부딪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대고 걱정을 할 때는 하더라도, 일단은 접어 두는 것이 좋겠다.”
 타사보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백호들은 타사보르의 손짓에 밖으로 물러갔다.
 백호들이 모두 사라지고 백란과 단둘이 남은 것을 확인한 타사보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란아.”
 “예, 천호.”
 “내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함부로 옮기지 말거라.”
 독로강천호소 내에서 타사보르가 갖는 권위는 가히 일국의 왕이나 황제와 맞먹는 것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던가. 평생 가야 먼발치에서 그림자 한번 바라보기도 힘든 황제보다는, 각자의 영지에서 일상생활을 통해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세후의 존재가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선조차 주지 않고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는 타사보르에게, 백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용서를 청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천호.”
 겁에 질린 채로 울먹이며 바닥에 꿇어앉는 백란을 내려다보며 타사보르는 천천히 찻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안립은 타사보르의 호위를 맡고 있는 관계로 백란과 함께 그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그런 안립이 며칠 전 곧 혼인을 하게 될 처자의 사주四柱라는 것을 들고 와서는 타사보르에게 궁합을 봐 주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 덕분에 타사보르는 자신이 천기를 읽는다는 소문은 물론이고, 나하추의 관심을 끌기 위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난스럽게 했던 말들이 모두 천호소 내에 파다하게 퍼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나하추가 돌아가고 난 뒤, 그렇지 않아도 장난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며 내심 찜찜하게 여기고 있는 참이었다. 아무리 둘러서 말했다고는 하지만 원나라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되었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대역죄로 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나하추에게 자신이 했던 말들이 소문으로 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사보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의 객기를 참지 못한 결과로 말 한마디에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부딪친 것이다.
 수백호 나덕을 불러 상의한 다음 급히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하추가 동녕부로 돌아가지 않고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바로 독로강으로 온 것을 두고 그 이유를 짐작하고자 백호들을 모아 급히 회의를 한 것도 사실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나하추가 인사차 들렀다고 하면서 소수의 기병으로 안심시킨 다음, 뒤에 숨겨 온 토벌군으로 들이친다면 이곳 천호소는 불과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막냇동생보다도 어린 나이인 백란이 바닥에 꿇어앉아 연신 용서를 청하며 흐느끼는 모습이 내심 안쓰럽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로서도 쉽게 용서한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물론 애당초 그렇게 위험한 발언을 함부로 한 자신의 잘못이지만, 타사보르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야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적실 여유도 있지만, 막상 자신이 위기에 처하면 자신의 안위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인 것이다.
 그런 자기 자신에 더욱 짜증이 치민 타사보르는 찻잔을 내던지며 백란에게 말했다.
 “용서를 청할 것은 없다. 다만, 앞으로는 내게 용서를 청할 일은 하지 말거라.”
 “예, 천호. 흑흑.”
 겁에 질려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연신 흐느끼는 백란을 밖으로 내보낸 타사보르는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애써 잠을 청해 보아도 나하추가 찾아온 까닭이 궁금하여 불안한 마음으로 뒤척거릴 뿐,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타사보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아침이 밝고 백란이 들어와 차를 올리자, 타사보르는 뜨거운 찻물을 후후 불어 마시며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엎질러진 물인데 주워 담을 재주가 없다면 의연한 모습이라도 보여야 되지 않을까? 빌어먹을! 의연한 모습은 무슨 얼어 죽을 의연한 모습!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침착하자, 침착!’
 어제의 일로 잔뜩 주눅이 든 백란이 보거나 말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 동안 방 안을 서성거리던 타사보르는 나하추가 뵙기를 청한다는 안립의 말에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모셔라.”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나하추의 둥그런 얼굴이 들어서자 타사보르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시오, 나하추 공.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 들었소. 감축드리오.”
 “부끄럽습니다. 모두가 타사보르 공께서 도와주신 덕분인걸요.”
 “하하, 이 몸이 한 일이 무에 있다고 그토록 겸양을 하시오? 나는 단지 공에게 우리 천호소에서 사흘간 머무르기를 청하였을 따름이오.”
 “아닙니다. 공께서 일러 주신 계책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토록 쉽게 반역 도당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에 동녕부로 돌아가는 대로 타사보르 공의 공功 또한 적지 않음을 추밀원樞密院에 고할 참입니다. 공과 같이 뛰어나신 분께서 이토록 황량한 곳의 나얀那顔으로 계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제색호계諸色戶計상으로는 타사보르 역시 엄연한 나얀이다. 그러나 영지의 규모가 워낙에 작고 거느린 군사의 숫자 또한 얼마 되지 않다 보니, 보통 나얀이 아닌 세후로 불리는 것이다.
 그런 타사보르를 나얀이라 부르며 은연중 격을 높여 주는 나하추의 말에 타사보르는 무덤덤하게 대답하였다.
 과거로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나얀이니 세후니 하는 들어 본 적도 없는 말들을 다 이해하고 있겠는가. 이래서 시골 면장이라도 알아야 해 먹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안 될 말이오.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공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나하추 공이지, 이 타사보르가 아니오. 공께서는 이 타사보르를, 하지도 않은 일로 공을 탐하는 소인배로 만드실 참이오?”
 “아닙니다, 아니에요. 타사보르 공,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나하추의 반응에 타사보르는 내심 그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아서 한시름을 놓았다.
 그제야 나하추를 여태 세워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사보르는 손을 끌어당기며 자리를 권했다.
 타사보르는 백란이 새로 찻잔을 가져와 나하추의 앞에 놓고 차를 따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자신이 너무 과민한 생각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불안해하던 마음이 어느새 조금씩 무뎌지면서 졸린 느낌이 든다. 타사보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냄비 근성이라는 건가?
 현대에서는 원래 커피를 즐겼던 타사보르지만, 커피가 아직 동양에 소개되기 이전인 이 시대에 살아가려니 커피 대신 차를 애용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에는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도 많았다고 하니 어쩌면 커피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타사보르 공.”
 자신을 부르는 나하추의 말에 타사보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반공대半恭待가 아직은 영 어색하고 익숙지가 않은지라,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나하추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뭣하지만, 독로강 천호를 그만두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난데없는 나하추의 제안에 타사보르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띠룩거렸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나하추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공과 같이 뛰어나신 분께서 이토록 척박한 곳의 나얀으로 계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얀으로서 체통과 권위를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좀 더 더 크고 부유한 곳으로 영지領地를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호라, 나얀이라는 말은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와 같은 것인가 보군. 그렇다면 원나라도 봉건제도를 유지했다는 것인가? 아니지, 이 독로강 천호라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으니까 일종의 세습 봉건제라고 할 수 있겠군. 그렇군, 말만 다르지 내용은 거의 비슷해. 그렇다면······.’
 이는 완전히 타사보르의 착각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봉건영주에 해당하는 것은 세후이다. 나얀은 그중에서도 평소 무력을 갖추는 것을 허락받은 일종의 봉건 군사 영주들만을 따로 일컫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만 살펴서는 별다른 차이 없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세후와 나얀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세후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사사건건 다루가치達魯花赤(원의 지방장관)의 감시와 지휘 감독을 받았다.
 그에 비해 나얀은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대신 면세免稅에 가까운 혜택을 받았다. 대칸의 명령이 있을 경우 언제라도 군대를 동원하여야 하는 의무에 대한 보상이다.
 또한 습직襲職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루가치들의 간섭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으니, 그야말로 독립적인 하나의 작은 왕국에 해당한다.
 아무튼 그런 착각에도 불구하고 나하추가 서둘러 독로강으로 온 이유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서임을 깨달은 타사보르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현대로 치자면 이제 갓 고등학교를 마치고 졸업하였을 나이인 나하추가 이 정도라면, 수백호 나덕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은연중에 경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타사보르의 내심이야 어떠하든지, 나하추는 타사보르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입을 다물자 자신이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니었나 자책하였다.
 나하추의 눈에 비친 타사보르는 그야말로 뛰어난 식견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피해 은둔하는 현자賢者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의 명망 높은 귀족가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지혜로운 사람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받았는데, 이것은 칭기즈칸成吉思汗이 후세를 위해 남긴 말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하추 역시 개국공신의 후예로 그러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라 현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지혜로워지기 위해 애썼다. 처음 나하추가 타사보르를 만났을 때, 타사보르의 말에 자세를 바로 하며 귀를 기울였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다만 타사보르가 나하추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여태껏 나하추가 만나 보았던 현자들은 대부분이 불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말들은 대부분이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어떻게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실제 사람이 사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뜬구름 잡는 소리’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반면 타사보르의 말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경건하면서도 어렴풋이나마 그 뜻을 짐작은 할 수는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혜라는 것이 전쟁에서 어떠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직접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타사보르가 좀체 입을 열지 않자, 조바심이 난 나하추는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타사보르 공, 굳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강권하지 않겠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타사보르는 나하추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사과했다.
 “이런, 미안하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공께 실례를 범하였구려.”
 “아닙니다. 공께서 탈속脫俗한 분이심을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 어려운 부탁을 드린 제가 잘못이지요.”
 “아니오. 곰곰이 공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소. 대단할 것도 없는 사람을 이토록 높이 사 주시는 공에게 오히려 감사드려야 할 일이오. 다만 영지에 관한 것은 답을 드리기가 곤란하구려.”
 영지를 옮길 수도 있다는 어조를 느낀 나하추는 다시 한 번 기대를 품고 타사보르에게 물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분명히 이곳 독로강은 척박하고 사람도 적은 곳이오. 그러나 누대에 걸쳐 우리 가문을 믿고 살아온 사람들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새로운 영지로 옮겨 가실 때 백성들 또한 거느리고 가시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나하추가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타사보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소? 나라에서 허락할지도 모르거니와, 설사 나라에서 허락한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적지 않은 재물이 소요될 것인데,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는 옷 한 벌에 불경 한 권이 전부라오.”
 물론 거짓말이다. 독로강이라는 지역 전체가 타사보르의 것이나 다름없는데, 타사보르의 전 재산이 그것뿐일 리가 없다. 그러나 실제 타사보르가 당장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탈속한 데다 욕심까지 없는 현자(?)의 모습에 더욱 반해 버린 나하추는 침까지 튀기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공께서 무욕한 분이시라고는 하나, 옷 한 벌에 불경 한 권이 고작이라니요! 제가 동녕부로 돌아가는 대로 재물을 좀 챙겨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하나마 필요하신 곳에 보태어 써 주십시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부족한 것이 없소. 나하추 공의 그 따뜻한 마음만 받도록 하겠소.”
 타사보르의 말에 나하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그가 겪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적당한 재물과 권력을 나눠 받은 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나하추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따랐다. 이른바 현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나하추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타사보르처럼 아예 재물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내가 참 큰 인물을 만났구나!’
 그날 하루 종일을 타사보르의 곁에서 보낸 나하추는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동녕부로 향했다.
 
 “타사보르라, 그가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더냐?”
 “예, 아버지. 지금껏 제가 보아 온 그 어떤 현자보다도 뛰어났습니다.”
 “흠, 그래. 네가 그리 보았다면 그렇겠지. 그러나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인 중에는 분명 인물도 많지만, 저 홍씨들과 같은 자도 많다.”
 “예, 아버지.”
 원나라의 귀족들은 명망 높은 가문일수록 현자를 숭상하였다.
 몽골이 나라 없이 부족 단위로 북방을 떠돌던 시절 그들의 유일한 스승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몽골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던 부족의 현자들이었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용맹하기만 하던 용사들이 지혜로워지기까지 하여서 지고 있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대칸, 칭기즈칸도 말하지 않았던가. 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툭타脫脫는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아들 나하추를 바라보았다.
 나이 열다섯이 되고서도 철딱서니없이 천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계집질만 하기에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휘하의 천호로 삼아 군문軍門에 집어넣었지만, 아들은 전혀 달라지는 바가 없었다. 도리어 녀석을 꼬드겨 졸졸 따라다니며 단물을 뽑아 먹는 천한 한인 놈들이 나하추의 천호라는 관직을 앞세워서 저지르는 패악질만 나날이 심해지던 차였다.
 그런데 어디서 현자를 알아보고 그 도움으로 공을 세우기까지 하였으니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흐뭇해진 툭타는 아들을 일깨워 준 현자에게 보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얀白雁.”
 “예, 도만호.”
 “독로강 천호에게 재물을 좀 보내 주도록 하게, 넉넉히.”
 “예, 도만호.”
 “아, 그리고 쓸 만한 영지가 없는지도 알아보게. 독로강과 가까운 곳으로.”
 “영지라 하시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얀이 되묻자, 툭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도 듣지 않았는가?”
 “하나, 독로강 천호는 고려 출신입니다. 고려인을 백성으로 원할 것인데, 그러자면······.”
 나하추에게 나얀티무르가 있다면 나하추의 아버지 툭타에게는 바얀이 있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함께하여 온 까닭에 툭타와 바얀의 관계는 나하추와 나얀티무르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바얀이 말끝을 흐리는 까닭을 알아들은 툭타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바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쌍성雙城(고려의 옛 동계에 해당하는 지방. 정식 명칭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쪽은 안 됩니다. 쌍성 일대의 고려 출신 세후들은 도만호께서 말씀하신 저 홍씨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쌍성의 고려 출신 세후들에게서 영지를 빼앗아 타사보르에게 내린다면 그들은 당장 고려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불측하게도 심양왕瀋陽王을 다시 세우고자 시도할 것입니다. 차라리 야루 건너의 땅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로강과 이어져 있으니, 본래의 백성들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가 만약 공자의 말씀대로 현자라면 거기다 재물만 좀 보태 주어도 주변의 부족들을 제압하여 다스리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일석삼조一石三鳥지요.”
 그제야 원하는 답이 나온 듯, 툭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기왕이면 관작도 올리는 것이 좋겠군. 잘만 하면 동북의 말썽꾸러기들도 자연 제어가 될 테니 말이야! 이것도 일석삼조一石三鳥야, 하하하!”
 “하하하!”
 툭타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자, 바얀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바얀이 말한 일석삼조는 단지 나하추의 청을 들어주면서도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동녕부에서 가까운 여진족까지 제어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툭타의 일석삼조는 거기에 더하여서 동북 일대의 여진족을 제어할 방파제를 세운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자신의 주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바얀은 통쾌하게 웃었다.
 
  * * *
 
 나하추가 동녕부로 돌아가자 타사보르는 독로강의 행정과 군사 등을 본격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타사보르는 독로강의 나얀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땅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재정의 수입과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선은 영지인 독로강의 실정을 먼저 간단히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계획을 세우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일을 시작한 타사보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인구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타사보르는 상당히 애를 먹었다. 당시 사용되던 호戶 혹은 호구라는 단위를 타사보르는 현대의 세대라는 단위와 단순히 단어만 달랐지 의미는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호구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다.
 타사보르의 영지인 독로강천호소의 호구는 모두가 군호軍戶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도 명색이 나얀인 까닭이다.
 군호軍戶의 경우 1호戶는 조세와 군역을 담당하는 정남丁男이 최소한 한 명 이상 있는 가구 셋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한 명의 정남은 병역을 직접 담당하고 나머지 두 명은 그에 필요한 비용과 부담을 담당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병역을 치르지 않는 정남 두 명이 병역을 치르는 정남 한 명의 필요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필요 비용이란 정남이 군역을 이행하게 됨에 따라 생계가 막연하게 된 가구가 필요로 하는 생계 비용과, 군역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갑주와 무기 등을 구입하고 관리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戶를 단순히 현대의 세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독로강의 인구를 파악하려 하였으니 자연 앞뒤가 맞지 않을 수밖에.
 나덕의 보고에 따르면 독로강의 호구는 모두 540호였다.
 따라서 타사보르의 계산에 의하면, 1가구당 4인 가족으로 생각하고 계산해 보아도 독로강의 전체 인구는 2,16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잇따르는 보고에 의하면 친병, 즉 타사보르의 사병만 1백 명이고 거기다 이번 백련교도의 일로 소집되어서 무장을 하고 아직 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정남의 수가 540명이라고 하니, 모두 합하면 640명이었다.
 전체 인구 2,160명 중에 640명이 병사라면 인구의 30퍼센트가 병사라는 말인데, 현대에서는 물론 이 시대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지는 인구구조다.
 과연 현대에 비해 성인 남자의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이 시대에 군역을 담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젊은 성인 남자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설사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재정수입의 대부분을 농업생산력에 의지하였던 이 시대에 과연 모든 성인 남자를 군대로 편성하는 미친 생각이 과연 통할까 하는 생각까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정수입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혹시 독로강에는 성인 남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산업이 발달하였나 싶어 주의 깊게 들어 보았더니, 약초 채집과 수렵에 종사하는 인구가 대부분이다. 그보다 좀 더 쉬우리라 여겨지는 농업에만 종사하는 인구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보고를 들을수록 자꾸만 계산이 틀리고 말도 안 되는 결과만 도출되자, 결국 타사보르는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그만!”
 정청 안이 대번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면서 백호들이 타사보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생각한 대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제 성미를 못 이겨 폭발해 버리는 타사보르의 본래 성격이 나오고야 만 것이다.
 한참을 혼자 씩씩거리며 앉아 있던 타사보르는 결국 벌떡 일어나더니 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고도 성미가 가라앉지 않는지 단 위를 한참 동안 서성거리던 타사보르는 문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럴 때 담배를 한 대 피우면 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흥분도 가라앉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담배를 구해 피우려면 앞으로 5백 년은 더 살아야 할 테니, 애꿎은 차나 홀짝거리는 것으로 애써 성질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개도 물어 가지 않을 타사보르의 빌어먹을 성질머리에 애꿎은 시녀들만 죽을상이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타사보르가 차를 찾자 겁에 질린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안립을 제외한 백호들 중에서 가장 막내인 최진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눈치를 보며 타사보르의 발길질에 날아간 탁자를 집어 슬그머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본래 백호들 중에서는 막내인 안립이 하여야 할 일이지만, 안립은 타사보르의 호위를 맡고 있는 몸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성질이 가라앉은 타사보르는 곧 분위기가 삭막해진 것을 깨달았다.
 과거로 온 지 겨우 열흘도 지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이곳 독로강에서만큼은 자신의 지위가 왕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타사보르는 더 이상 처음처럼 주위의 눈치를 보거나 조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랬더니 불과 열흘이 못 되어서 본래의 못돼 먹은 성격이 튀어나온 것이다.
 아마 타사보르의 영혼이 과거로 오기 전, 현대에서 그처럼 외롭게 살았던 것에는 이런 성격 탓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데다, 가끔 이렇게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괜한 주변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곤 했으니까.
 그런 반면에 평소에는 무척 조용한 데다 꽤나 잔정이 많고, 한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 한없이 퍼 주는 성격이었기에 그를 잘 알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그가 성질을 부려도 그러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를 잘 알지 못하거나 한 번쯤 이런 일로 관계가 꼬여 버린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로 정신 나간 놈이지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한 타사보르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들어 가고픈 심정이 되어,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헛기침을 하면서 나덕에게 물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독로강의 호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가? 아니, 호구에 속한 사람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가?”
 “말씀드린 것처럼 독로강의 호구는 모두 540호이고, 1호는 적어도 세 명의 정남으로 되어 있으니······.”
 “잠깐!”
 “예, 천호.”
 늙어서 이 무슨 고생인지, 타사보르가 다시 변덕을 부리자 나덕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멈추었다.
 나덕의 말을 멈추게 한 타사보르는 다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조금 전 1호는 최소한 세 명의 정남으로 되어 있다는 나덕의 말에서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젠장, 아직 한참 멀었다! 빌어먹을!’
 언제나처럼 역시나 또 허튼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타사보르는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뻘게지는 것도 모른 채 다시 계산을 시작하였다.
 ‘1호가 최소한 정남 세 명으로 되어 있으면 540호는 최소한 정남 1,620명이라는 얘기네. 그럼 그중에 3분의 1은 병역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생계에 종사한다는 건가? 빌어먹을, 이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비로소 호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타사보르는 이제껏 보고받은 것들을 새로 이해한 호구를 바탕으로 다시 계산해 보았다.
 전혀 무리가 없었다. 자신이 왜 호구라는 것을 당연히 현대의 세대와 같은 것이리라 생각하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상 그가 알고 있던 호구는 일반적인 호구 제도에 따른 것이고, 나덕이 말한 호구는 칭기즈칸이 확립한 원나라의 제색호계에 따른 군호軍戶인 데서 온 차이였다.
 말로는 다 같은 호구이니 헷갈릴 수밖에.
 독로강에 속한 540호는 대부분 봄과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가을과 겨울에는 수렵이나 약초 채집을 하면서 살아간다. 때문에 산간마다 10여 호 정도씩 부락을 이루어서 떨어져 살고 있었다.
 농사만 짓는 호구는 의외로 적어서, 천호소 주변 30여 호를 비롯한 1백여 호에 불과하였다.
 독로강이 현대의 평안도 북부의 어느 지방이라고 파악하고 있던 타사보르는 아무래도 산악 지대이다 보니 농토가 적어서 그럴 것으로 추측하였고, 어느 정도는 맞았다.
 타사보르가 이해한 대로 다시 계산을 해 보면, 호구가 540호이므로 정남이 있는 가구는 1,620가구, 1가구당 네 명으로 계산하면 전체 인구는 대략 6,480명이었다.
 여기까지 계산을 하고 보니 타사보르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나덕에게 물었다.
 “여자들만 있는 가구는 어찌 되는가? 그들도 호구에 포함이 된다면 고초가 심할 것인데······.”
 “제색호계에 따르면, 집안에 여자들만 있거나 수레바퀴보다 작은 남자만 있는 경우에는 호구에 포함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수레바퀴보다 작은 남자?”
 “예, 천호.”
 ‘수레바퀴보다 작은 남자’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인 듯 나덕은 따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타사보르는 한참을 혼자 궁리한 끝에야 ‘수레바퀴보다 작은 남자’라는 말을 수레바퀴보다 키가 작은 어린 남자아이나 장애로 인해 제구실을 못하는 성인 남자로 추측해 냈다.
 호구라는 것도 이해를 하고 보니 나름대로 공평하면서 일관성도 있고, 무엇보다 호구 수만 정확히 알면 재정이 뒷받침될 수 있는 병사의 수가 바로 산출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타사보르는 그제야 비로소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에 대해 군대를 천호, 만호 등으로 나누었던 편제에서 찾아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눈앞에 닥친 현실로 이해한 것이다.
 모든 것을 머릿속에만 집어넣고 기억하기에는 무리가 있는지라, 타사보르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붓으로 백호들이 보고하는 내용을 한글로 따로 적어 가며 정리했다.
 지난번 나하추와의 대화로 타사보르는 자신이 배운 적도 없는 몽골 말을 쓸 수 있음을 알고, 이것이 몸의 본래 주인의 기억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나하추와 대화를 나눌 때, 분명 보통 때 말하는 것과는 달리 어색하였지만 머릿속에 그때그때 필요한 단어가 떠올랐던 것으로 보아 몸의 본래 주인이 몽골 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몽골 말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결론지은 타사보르는 내심, 그렇다면 자신이 한자를 별로 많이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자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르던 글자들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으로 보아, 몸의 본래 주인도 한자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공부를 안 한 건가?’
 백호들이 저마다 조그만 책자를 하나씩 들고 살펴 가면서 대답을 하는지라, 이렇게 일일이 물어 보고 대답을 들어 가면서 업무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백호들이 들고 있는 저 책자들을 수거해서 읽어 보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 하는 생각이 어느새 엉뚱한 곳으로 새고 말았다.
 타사보르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들려오는 보고들에 집중하였다.
 “하면, 농사를 짓는 백성이 적은 것은 토지가 적은 까닭도 있지만 물이 부족해서라는 말인가?”
 타사보르의 물음에 백린이 대답했다.
 “예, 천호. 천호소 주변에는 독로강이 흘러서 그나마 물이 풍부하지만 부락마다 고작 샘물 하나를 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농사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요는 어떻게든 물만 끌어 올 수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락이 많다는 것이군.”
 “예, 천호. 그러나 우리 독로강은 산이 깊고 험하여서 물을 끌어 가는 것이 다른 영지들보다 몇 배나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흠, 그럼 강가에 있는 부락들이 아니면 농사짓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겠군.”
 “강을 끼고 있다고 해서 모든 부락이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물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땅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지요. 때문에 농사를 짓는 부락은 대부분 지세가 비교적 평탄한 천호소 인근의 부락들입니다.”
 “그럼 압록강, 아니 야루 건너편은 어떤가? 그곳도 농사를 짓기에는 어려운가?”
 “천호, 그곳은 독로강 밖입니다만······.”
 “그런가.”
 타사보르가 풀이 죽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나덕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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