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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숲 1-1권

2019.04.25 조회 1,715 추천 5


 프롤로그
 
 
 
 
 
 
 대전에 위치한 그린 에너지 연구소.
 아니 한때 그린 에너지 연구소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제는 원인모를 폭발 사고와 함께 폐허 밖에 남지 않았다.
 현재는 위험지역으로 선포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었다.
 한때 그린 에너지 연구소라고 불리던 폐허를 지키는 것은 경찰이 아닌 무장한 군인들이다.
 그것도 일반 병사가 아닌 특전사 대원들이 임시로 마련된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북 2-3초소’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나중길 하사가 말했다.
 “김 중사님. 저희 진짜 여기 왜 지키고 있는 겁니까? 남은 거라고는 다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 밖에 없는데···. 뭐, 훔쳐갈게 있다고···. 그냥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시면 안됩니까?”
 나중길 하사와 함께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김만중 중사가 말했다.
 “아 진짜! 나도 모른다고 몇 번을 말하냐! 엉뚱한데 신경 쓰지 말고 근무나 잘 서고 있어.”
 “에이, 그러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다 들었습니다. 박 대위님이랑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셨다면서요? 사적인 자리에서는 ‘형, 동생’ 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지통실에 계신 박 대위님이 미리 말씀해주신 거 있잖습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입도 뻥긋 안할 테니, 저한테만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십시오.”
 “어허, 그 자식 진짜. 나도 모른다고 몇 번을 말해.”
 “에잇, 그냥 말씀해주시면 될 걸. 그나저나 최전방도 아니고 대전에 무슨 위험한 일이 있다고 실탄까지 나눠주면서···.”
 나중길 하사가 불만을 토로하며 좌우를 경계할 때, 전방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다.
 놀란 나중길 하사가 초소에 마련되어 있던 야간투시경으로 전방을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발견한 나중길 하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헉! 저, 저게 뭐야? 김 중사님, 저거 보셨습니까?”
 또 다른 야간투시경으로 전방을 확인한 김만중 중사가 들고 있던 K-2C 소총으로 전방을 겨냥하며 말했다.
 “어, 그래. 나도 봤다. 아! 지통실! 지통실에 보고해!”
 “예!”
 나중길 하사가 북 2-3초소에 설치되어 있던 무전기를 집어 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지통실! 지통실 나와라! 여기는 북 2-3초소!-
 무전기 너머로 다소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지휘통제실. 북 2-3초소, 무슨 일인가?-
 -나, 나타났습니다.-
 나중길 하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무전기 너머의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타나다니? 뭐가?-
 -그, 그게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중세 갑옷을 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중세 갑옷? 짐승형태의 몬스터가 아니고?-
 상대편의 뜬금없는 말에 나중길 하사가 반문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짐승형태의 몬스터라니요?-
 -아니다. 그래서? 나타난 인간형 몬스터의 수는 총 몇인가?-
 -인간형 몬스터? 아! 그 중세 갑옷을 입은 수상한 놈들 말씀입니까? 그게 어두워서 확인이 잘 되지 않지만 대충 100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북 2-3초소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김만중 중사와 나중길 하사, 2명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무전 보고를 하고 있는 나중길 하사는 100명이 넘어가는 괴한들의 수가 너무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그런데 무전 보고를 받고 있는 지휘통제실의 간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괴한의 수가 많다는 보고에 다소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인간형 몬스터가 100마리나 된다고? 이거 대박이구만. 이제껏 한두 마리가 나타나는 게 전부였는데. 100마리나···.-
 -예? 도대체 무슨 말씀을?-
 나중길 하사는 혹시 자신이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꿈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꿈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한 나중길 하사가 자신의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얏!”
 아팠다.
 어찌나 세게 꼬집었는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가만? 그럼,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이야?’
 야간투시경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김만중 중사가 말했다.
 “나 하사. 지금 뭐하는 거야?”
 “예? 아니 그게···.”
 이 괴이한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나중길 하사는 변변한 변명도 하지 못했다.
 -북 2-3초소! 응답하라!-
 나중길 하사가 잠시 엉뚱한 짓을 하느라고 무전보고가 중단되자, 무전기 너머의 간부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나중길 하사가 다시금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는 북 2-3초소! 말씀하십시오.-
 -왜 갑자기 보고가 중단된 건가? 혹시 몬스터들에게 공격 당한건가?-
 -그건 아닙니다. 근데 아까부터 몬스터라고 하시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 김만중 중사 있나?-
 -예! 옆에 대기 중입니다.-
 -그럼, 됐다. 지금 바로 지원팀을 보낼 테니, 혹시라도 인간형 몬스터들이 자리를 이동하려고 하거나 공격하려고 하면 바로 반격에 나서도록.-
 -예? 그렇게 해도 됩니까?-
 -김만중 중사가 다 알고 있으니, 자넨 김만중 중사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그럼, 이만.-
 지휘통제실과의 무전을 끝낸 나중길 하사가 김만중 중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김 중사님. 혹시라도 인간형··· 몬스터? 하여튼 저 괴한들이 움직이면 바로 공격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원팀은 지금 즉시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
 “김 중사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음- 이제 나 하사도 알아야겠구먼.”
 조금 전까지 나중길 하사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김만중 중사는 자신들의 진짜 임무가 무엇이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극비의 임무이고 또 너무 황당한 일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다.
 극비임무라고 해도 외부인에게만 그런 것이다. 같이 근무를 서고 있는 나중길 하사에게까지 비밀로 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며칠 후면 정식으로 전 대원들에게 브리핑을 할 계획이었다.
 어쩌다보니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 나중길 하사 같은 특전사 교육훈련소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그야말로 초짜 특전사 대원까지 출동시켜, 임무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었다.
 나중길 하사도 이제는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김만중 중사가 이번 임무에 대해서 막 말을 하려고 할 찰나.
 중세의 유럽의 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지휘통제실이 인간형 몬스터라고 지칭한 괴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설명은 나중에 해주마. 일단은 쏴!”
 “예? 아! 예!”
 투다다다당! 투다다다당!
 김만중 중사와 나중길 하사의 K-2C 소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김만중 중사는 상황이 쉽게 종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기로는 이제껏 발견된 몬스터는 총에 아주 취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적들의 수가 100명은 될 것 같고, 중세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총을 이겨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 정도 숫자면 적들이 북 2-3초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정신없이 K-2C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김만중 중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김만중 중사를 따라, 정신없이 K-2C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던 나중길 하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허억! 김 중사님! 총이! 총이 통하지 않습니다!”
 나중길 하사의 말 대로였다.
 김만중 중사와 나중길 하사가 K-2C 소총의 탄창이 다 빌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는데, 적은 단 한명도 쓰러지지 않았다.
 김만중 중사가 K-2C 소총의 탄창을 새로 갈며 말했다.
 “씨발! 엿 됐다!”
 
 ***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입는 갑옷을 입은 자가 말했다.
 “응?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파르앙!”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예! 후작님! 파르앙, 여기 대령했습니다.”
 “파르앙, 여긴 도대체 어딘가?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건가?”
 사실 파르앙 역시 모르간 후작처럼 상황파악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혈질의 모르간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짧은 순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파르앙이 말했다.
 “그, 그게··· 아! 아마도 이것 역시 ‘악마의 숲’의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악마의 숲의 일부라고? 여기가?”
 모르간 후작이 별빛이 반짝이는 어두컴컴한 세상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울창한 숲과 나무는 도통 보이지도 않았다.
 캄캄한 밤이라서 주변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악마의 숲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모르간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말을 하려고 할 찰나, 파르앙이 먼저 선수를 쳤다.
 “후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악마의 숲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울창한 숲과 나무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이곳이 악마의 숲인 것이 확실합니다.”
 “으음- 그런가?”
 모르간 후작이 자신의 말을 믿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파르앙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자네 스승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자네가 내 옆에 있어서···.”
 파르앙은 면전에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모르간 후작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내색할 수가 없었다.
 카르만 제국의 실세 중에 한명인 모르간 후작과 4서클 마법사인 자신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신의 스승이라면 모를까 자신이 후작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내보이면 그 즉시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파르앙 역시 자신의 스승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르간 후작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붉은 매 기사단의 단장 필로만이 말했다.
 “후작님, 저 앞쪽에 인간이 만든 듯한 초소가 보입니다.”
 “응? 그래?”
 모르간 후작이 안력을 돋우어 다시금 전방을 주시했다. 경황이 없었던 조금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제법 위장이 잘되어 있는 초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초소 안에 숨어있는, 기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김만중 중사와 나중길 하사의 모습도 보였다.
 “음- 인간형 마수인가? 필로만.”
 “예! 후작님.”
 “기사들을 보내, 저 앞에 있는 인간형 마수들을 없애라. 그리고 이곳에 대한 정찰을 시작하도록.”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붉은 매 기사단의 단장 필로만이 뒤쪽에서 오와 열을 맞추고 있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은빛의 판금 갑옷과 타원형태의 방패 그리고 롱소드로 무장하고 있던 기사 5명이 북 2-3초소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당! 투다다다당!
 꽤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작은 무언가가 기사들의 판금 갑옷을 소나기처럼 때리기 시작했다.
 “응?! 이, 이건! 마수가 공격해온다! 방패 앞으로!”
 맨 앞에 있던 기사가 타원형태의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빗발치는 총탄을 막아냈다.
 십여 발의 총탄이 타원형태의 방패를 두들겼지만 타원형태의 방패에는 작은 흠도 나지 않았다.
 모르간 후작의 옆에 있던 4서클의 마법사 파르앙이 급하게 마법 주문을 외웠다.
 “라이트!”
 파르앙의 손에서 솟아오른 빛의 구체가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파앙!
 하늘 위로 떠오른 빛의 구체가 터지면서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나갔다. 순간 칠흑처럼 어둡던 세상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라이트 마법에 이어 탐색 마법을 펼친 파르앙이 소리쳤다.
 “후작님! 적들이! 적들이 몰려옵니다!”
 다급하게 외치는 파르앙과 달리 모르간 후작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미가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사자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스르르릉!
 모르간 후작이 자신의 애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여! 저 어리석은 마수들에게! 붉은 매 기사단의 용맹함을 보여주자! 카르만 제국과 글라더스 황제폐하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제국과 황제폐하의 영광을 위하여!”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모르간 후작의 말을 복창하며 각자의 무기를 하늘높이 치켜들었다.
 모르간 후작이 자신의 애검을 앞으로 휘두르며 말했다.
 “돌격!”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분주하게 움직이는 흰 가운의 사람들 속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한명이 있었다.
 느긋하다고 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변사람들이 워낙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나?”
 청록색의 작업복을 입고 있는 고연우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여! 고병장, 오늘도 수고가 많네.”
 고연우가 목소리가 들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최 팀장님.”
 고연우를 고병장이라고 부르며 인사를 하는 사람은 전산실을 책임지고 있는 팀장 최운호였다.
 최운호 팀장이 고연우를 향해서 다가오라는 뜻으로 손을 까닥거렸다.
 “왜 그러세요?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고 병장, 오늘은 청소하지 말고 휴게실에 가 있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청소 알바에게 청소를 하지 말고 휴게실에 가 있으라는 것은 알바를 자르겠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 청소 알바지, 그렇게 일이 힘들거나 더럽지도 않았다. 게다가 알바비 역시 다른 알바보다 2배나 더 많이 줬다.
 너무 좋은 알바이기에 잘린다는 것이 몹시도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제가 혹시 실수라도 한 건가요?”
 뜬금없이 알바를 자른다고 하니, 행여나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뭐? 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요? 그럼?”
 “고병장이 오해를 했구먼.”
 “예? 오해라고요?”
 “고병장, 자르려고 휴게실에 가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니야.”
 고연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왜?”
 “고 병장, 우리 연구소가 뭐하는 곳인지는 알고 있지?”
 “예. 석유를 대체할 무공해 신에너지를 연구하는 곳이라고···.”
 고연우가 아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 석유를 대체할 무공해 에너지를 연구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고연우 역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고 생각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 그동안 연구해온 신에너지의 실용화 실험이 있어.”
 “아! 그래서 다들···.”
 그제야 연구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어? 그런데 그거랑 저랑 무슨?”
 “오늘 실험이 엄청 중요하거든. 오늘 실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인류의 역사가 바뀌게 될 거야.”
 최운호 팀장의 설명을 듣고서도 고연우는 여전히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실험 때문에 다들 신경이 이만저만 예민한 게 아니야. 괜히 청소한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가뜩이나 예민한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아!”
 그제야 고연우는 최운호 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마냥 착하고 인내심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배움의 정도와 상관없이 작은 일에도 금방 짜증을 내며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중요한 실험을 하는 날이면 그 정도가 더 심해질 것이다.
 “하루 청소 안 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괜히 청소한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신경 날카로운 사람들한테 욕먹지 말고 휴게실에서 푹 쉬고 있어라. 생각 같아서는 집에 그냥 가라고 하고 싶은데, 위에서 실험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밖으로 보내지 말라고 해서 말이야.”
 “아, 예.”
 최운호 팀장의 말대로 중요한 실험이 시작되다보니 혹시라도 실험 데이터를 유출할까 싶어서 출입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
 ‘쳇,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오늘은 출근하지 말라고 하던가. 아니지. 오늘 이렇게 출근했으니까, 일당은 주겠지?’
 고연우의 이런 속내를 읽은 것일까?
 최운호 팀장이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출근했으니까 일당은 줄 거야. 아! 내가 말해놓을 테니까, 캡슐을 쓰려면 캡슐을 써도 좋아.”
 “예?! 캡슐을 써도 된다고요?!”
 캡슐이라는 말에 고연우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짜식, 그렇게 좋냐?”
 잔뜩 흥분한 고연우가 ‘그걸 꼭 입으로 말해야 하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최운호가 말한 캡슐이란 대진그룹에서 만든 가상현실 체험기를 말하는 것이다.
 2015년에 만들어진 이 캡슐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최초 출시 가격인 천만 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연우는 캡슐을 통해서 최초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유토피아’를 할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는 것이다.
 알바 하러 와서 일당도 받으면서 유토피아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던 고연우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캡슐 이용해도 돼요? 진짜요?”
 “그렇다니까.”
 “우와! 내가 캡슐을···.”
 고연우는 1년 전 상병휴가를 나가서 처음으로 캡슐과 유토피아를 접했었다.
 딱 그때 대진그룹에서 캡슐과 유토피아를 발표하며 대한민국 곳곳에 캡슐방을 만들던 시기였다.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컸던 고연우는 시간당 만원이라는 비싼 이용료에도 불구하고 캡슐방을 이용했다.
 그리고 시간당 만원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가격이 더 비싸더라도 이용할 생각이 있었다. 그만큼 리얼리티가 충만한 유토피아는 재미있었고 만족스러웠다.
 군인이라는 신분 탓에 마음껏 유토피아를 즐길 수 없었던 고연우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대 복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날짜를 세워가며 국방부의 시계가 어서 빨리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대일이 다가왔다.
 병장휴가 때도 캡슐방의 문턱이 닳도록 오가며 유토피아를 즐겼던 고연우는 제대와 집이 아닌 캡슐방부터 방문했다.
 얼마 후 비싸고 크기가 큰 캡슐을 대신해, 가정에서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보급형 가상현실 체험기 헬멧이 발표되었다.
 헬멧의 가격은 캡슐의 1/10 가격인 100만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캡슐방 이용요금이 은근히 부담이 되던 참이었다.
 시간당 만원이라는 요금이 비싸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랑비에 속옷 젖듯 통장 잔고도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고연우는 통장을 탈탈 털어 헬멧을 구입하는 것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구한 것이 지금의 그린 에너지 연구소 청소 알바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일도 쉽고 돈도 많이 주기에 가능하면 평생직장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연구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정직으로 채용만 되면 고액의 연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편의가 주어지는 것 같았다.
 참고로 군을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최운호 팀장을 비롯한 연구소 사람들은 고연우를 고병장이라고 불렀다.
 각설하고 고연우는 헬멧을 구입하고 난 후에도 여유가 되면 캡슐방을 출입했다.
 그만큼 캡슐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괜히 헬멧을 일회용 커피에 비교하고 캡슐을 세계최고의 커피라고 불리는 루왁 커피에 비교하는 것이 아니었다.
 휴게실은 일반 직원은 물론이고 고연우 같은 청소 알바도 이용할 수가 있었다.
 다만 휴게실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캡슐은 정직원이 아니면 이용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캡슐을 마음껏 이용하는 연구소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일을 하지 않아도 일당을 주고 심지어 캡슐까지 이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혹시 오늘이 내 생일인가?’
 알바 서류를 넣을 때, 생일을 잘못 기입하여 오늘이 생일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신에게 생일기념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기뻤다.
 최운호 팀장이 입이 찢어질 만큼 기뻐하는 고연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실험하는데 시간 좀 걸릴 테니까, 시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해.”
 “실험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려요?”
 “실험은 10분에서 15분이면 끝날 거야.”
 “그럼?”
 “말했듯이 중요한 실험이다 보니 본 실험에 앞서서 다시 한 번 모의실험도 하고 장비들도 꼼꼼히 체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거야.”
 “아, 그렇군요. 근데, 팀장님은 전산실 소속 아니에요? 실험이랑 무슨 관계가?”
 “내 말이!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꼭! 내가 있어야 한다고··· 에휴! 이래서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안 돼.”
 고연우는 최운호 팀장의 자화자찬에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고병장, 나대신 득템 해야 돼. 그리고··· 알지?”
 “싼값에 넘겨드릴게요.”
 “짜식, 곧 죽어도 공짜로 주겠다는 말은 안하네.”
 고연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헤헤헤.”
 “가봐!”
 “예! 그럼, 수고하세요.”
 최운호 팀장이 캡슐이 있는 휴게실을 향해서 번개처럼 달려가는 고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고병장한테 진짜 뭐 있는 건가?”
 청소 알바라고 하지만 일도 어렵지 않았고 돈도 다른 알바에 비해서 월등히 많이 줬다.
 당연히 알바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경쟁자들 중에는 연구소 직원들의 친척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청소 알바라면 직원의 친척 중에서 뽑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사람은 그린 에너지 연구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제대한 지 며칠 되지 않는 고연우였다.
 최운호 팀장을 비롯한 연구소 사람들은 어떻게 고연우가 뽑히게 된 건지 의문이었다.
 한때 연구소 사람들 사이에 고연우가 연구소 높은 사람의 인척이라는 말이 떠돌았었다.
 그동안 고연우와 가깝게 지내온 최운호 팀장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연우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집안 역시 평범, 그 자체였다.
 고연우의 실체를 알게 된 최운호 팀장은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청소 알바로 뽑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위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을 듣고는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출근한 고연우에게 일을 시키지 말고 휴게실에서 쉬게 하라. 단 오늘 일당은 일을 한 것처럼 결산될 것이다. 원한다면 캡슐을 사용하게 해도 좋다.-
 
 청소 알바인 고연우에게 일을 하지 않게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청소 알바인 고연우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지시사항을 내려줬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 청소 알바를 이렇게 신경 쓰는 회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만 봐도 고연우의 뒤에 회사와 관련된 막강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회장님의 숨겨둔···. 에헤이! 설마 그럴 리가.”
 최운호 팀장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연우와 더욱 친하게 지내며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전산실 팀장인 나한테 왜 청소 알바의 관리를 맡긴 거지?”
 생각하면 이것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잇! 모르겠다.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시킨 거겠지.”
 
 ***
 
 3시간 후.
 삐! 삐! 삐! 삐!
 아주 복잡해 보이는 기계에서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이 연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기계장치를 살피고 있던 연구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소장님! 제어가 안 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린 에너지 연구소의 소장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최운호 팀장을 쳐다보았다.
 “최 팀장! 아직인가?”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최운호 팀장이 말했다.
 “하드웨어들이 다 나간 것 같습니다. 소프트웨어로는 더 이상 제어가 불가능합니다.”
 연구소 소장이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준비는 완벽했는데 왜 이런 일이···.”
 연구소 소장 옆에 있던 수석연구원이 말했다.
 “소장님.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여기 있다가는 전부다 다 죽습니다.”
 “아, 알겠네. 연구소 전체에 대피령을 내리게.”
 “예!”
 수석연구원이 그린 에너지 연구소 전체에 비상경보를 울리는 빨간색의 비상벨을 눌렀다.
 애애애애애앵!!!! 애애애애애앵!!!! 애애애애애앵!!!! 애애애애애앵!!!!
 비상경보가 울리자,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지고 있던 연구원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최운호 팀장 등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연구소 소장은 제발 비상경보가 늦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의 바람은 무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번쩍!!!!!
 실험실 중앙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엄청난 섬광이 발생했다.
 곧이어 실험실에 있던 수많은 장비들이 실험실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블랙홀 같았다.
 아니 진짜 블랙홀이었다.
 실험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눈이 멀 것 같은 그 엄청난 빛마저도 빨려들어가는 듯 싶더니, 이제는 그린 에너지 연구소 전체를 시끄럽게 울리던 비상경보음 역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실험실은 곧 암흑천지로 변하며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빛과 소리마저도 빨아드리던 실험실에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과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사라졌던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나가며 그린 에너지 연구소를 집어 삼켰다.
 곧이어 그린 에너지 연구소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며 그린 에너지 연구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휴게실.
 “오! 이게 얼마만의 캡슐이냐.”
 그동안 휴게실의 커피를 뽑아먹을 때마다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캡슐을, 그것도 일과시간에 공짜로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던 고연우는 휴게실에 설치되어 있는 4대의 캡슐 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캡슐의 문을 열었다.
 캡슐은 얼핏 보면 관처럼 생겼지만 그 내부는 세상 그 무엇보다 편안하고 쾌적했다.
 캡슐의 바이오시스템이 생체리듬을 조율해주기 때문에 장시간 유토피아를 플레이해도 배고프지 않았고 소변이나 대변이 마렵지도 않았다.
 삐이-
 고연우가 캡슐에 눕자, 기계음이 들려왔다. 캡슐이 이용자의 전신을 자동으로 스캔하는 것이다.
 캡슐은 이 스캔작업을 통해서 이용자의 생체리듬을 파악하여 최적의 상태를 유지해준다.
 곧이어 나긋나긋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진그룹의 가상현실 체험기, 캡슐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면모드와 게임 이용모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모드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게임 이용모드.”
 
 [게임 이용모드를 선택하셨습니다. 현재 캡슐에 등록되어 있는 게임은··· 유토피아입니다. 유토피아를 플레이하시겠습니까?]
 
 “OK. 유토피아 접속.”
 
 [이용자님의 유토피아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유토피아에 접속합니다.]
 
 전신스캔을 통해서 고연우의 고유한 생체리듬과 망막을 알게 된 캡슐은 유토피아의 로그인 서버에 보관되어 있는 고연우의 생체리듬과 망막을 확인했다.
 
 [이용자님의 아바타 ‘란슬롯’을 활성화시키시겠습니까?]
 
 “란슬롯 활성.”
 
 [아바타 란슬롯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끝없는 모험의 세계, 유토피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캡슐에 내장된 여성의 음성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며 중세의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오! 시작이다!”
 고연우가 자신의 아바타 란슬롯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3시간이 흘렀다.
 부우웅!
 ‘Lv37의 방랑하는 오크’가 휘두른 몽둥이가 란슬롯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웃차!”
 아슬아슬하게 몽둥이를 피한 란슬롯이 오크의 옆구리를 투 핸드 소드로 베어냈다.
 그와 동시에 오크가 녹색의 피와 비명을 토해냈다.
 “크아아악!”
 “이때다! 반월베기!”
 노란 빛을 머금고 있던 란슬롯의 투 핸드 소드가 큰 호선을 그리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던 오크의 가슴을 베어냈다.
 푸가각!
 오크의 가슴이 수박처럼 쪼개지며 녹색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크아아아악!!”
 “죽어라!”
 투 핸드 소드를 고쳐 잡은 란슬롯이 오크의 쪼개진 가슴에 투 핸드 소드를 대못처럼 꽂아 넣었다.
 푸우욱!
 “커어억!”
 이윽고 생명력이 다한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철퍼덕 하고 쓰러졌다.
 란슬롯이 오크의 가슴에 박혀있던 투 핸드 소드를 뽑아냈다.
 승리감에 도취된 란슬롯이 양손으로 잡고 있던 투 핸드 소드를 하늘높이 치켜들었다.
 “아자!”
 징그러운 녹색 피를 흘리던 오크의 시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란슬롯이 사용하는 투 핸드 소드와 똑같이 생긴 투 핸드 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란슬롯이 바닥에 있던 투 핸드 소드를 잡았다.
 
 [ 강철의 투 핸드 소드(등급 : 매직)]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제법 날카로운 투 핸드 소드. 마법의 기운이 약간 서려있다.
 무기타입 : 양손검
 공격력: 35~45
 옵션: 최소공격력 +5
 내구도: 80/80
 사용제한: 레벨 35. 양손기사.
 
 “응? 매직?! 오오!”
 획득한 아이템은 마을에서 출발하기 전에 1골드 주고 산 매직등급의 투 핸드 소드였다.
 유토피아의 아이템의 등급은 노멀-매직-레어-유니크-레전드로 나누어져있다.
 사실 매직 등급은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저레벨인 란슬롯에게는 상대적으로 좋은 아이템이었다.
 “앗싸! 1골드 벌었다!”
 란슬롯이 오랜만의 득템에 좋아할 때, 머릿속에서 어떤 메시지가 울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오! 렙업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운이 좋지? 로또라도 사야하는 거 아냐?”
 아바타 란슬롯의 레벨이 36이 되었다.
 유토피아가 서비스 된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소위 말하는 최상위 랭커의 평균레벨이 85~90이다.
 그리고 중위권의 평균레벨이 75~80정도 되었다.
 그에 비하면 레벨 36은 그야말로 저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연우의 경우 얼마 전까지 군인이었던 탓에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내 기필코 복학하기 전에 랭커들을 따라잡고 만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복학하기 전까지 중위권만 따라잡아도 소원이 없었다.
 “레벨도 올랐고 1골드짜리 양손검도 먹었고 오크도 잡았으니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갈까?”
 퀘스트로 잡아오라고 한 ‘Lv37의 방랑하는 오크’는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렙업에 목말라하던 란슬롯은 오크가 보이지 않으면 다른 몬스터를 때려잡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몬스터를 때려잡은 덕분에 56칸의 인벤토리가 각종 아이템으로 가득 찬 상태이다.
 그 중에 제일 값나가는 것이 조금 전에 획득한 ‘강철의 투 핸드 소드(등급: 매직)’였다.
 나머지 아이템들은 그야말로 잡템으로 다 팔아도 1골드가 될까 말까 했다.
 고레벨 유저에게는 1골드가 껌 값도 되지 않았지만 저레벨 유저인 고연우에게는 제법 큰돈이었다.
 이래저래 기분이 좋았던 고연우가 ‘룰루랄라’ 거리며 마을을 향해서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던 찰나.
 삐이! 삐이! 삐이! 삐이!
 
 [경고! 외부의 위험요소가 발견되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서비스를 강제종료···.]
 
 “응? 뭐라고?”
 치이이익!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새소리를 대신해, 시끄러운 노이즈가 들려왔다.
 그리고 울창한 숲과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로 꾸며진 주변 배경이 뒤흔들리며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곧이어 산채로 불에 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캡슐 밖의 그린 에너지 연구소에는 요란한 경고음과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고연우는 캡술 안에 있던 탓에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곧이어 거대한 화마가 고연우가 있는 캡슐을 집어삼켰다.
 캡슐은 천 만 원의 가치를 하듯, 거대한 화마 속에서도 이용자 고연우를 보호했다.
 만약 고연우가 캡슐 안에 있지 않았다면 거대한 화마에 뒤덮이는 순간, 온몸의 살이 다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캡슐이 이용자를 완벽하게 보호한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화마에 노출된 캡슐은 그 뜨거운 열기에 의해서 가마솥처럼 익어가고 있었다.
 그 뜨거운 열기는 캡슐 내부에 있던 고연우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고연우가 뜨거운 열기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려고 할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고연우가 있던 캡슐을 포함한 그린 에너지 연구소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으아아아악!!!!!”
 여전히 고통어린 비명을 토하고 있는 고연우.
 거대한 폭발과 함께 캡슐이, 그린 에너지 연구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연히 고연우도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고연우는 여전히 살아있는 채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아! 나 때문에! 미안하구나. 이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지금은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부디···.]
 
 고통에 몸부림치던 고연우의 뇌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유토피아의 시스템 메시지와 비슷한 울림이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에 휩싸여 있던 고연우는 그런 이상한 울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연우의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번쩍!!!!
 갑자기 눈이 멀 것 같은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고연우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으~”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고연우가 정신을 차렸다.
 의식을 잃기 전에 느껴졌던 그 지독한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의식을 잃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뒤늦게 그때 들었던 말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어? 뭐지?”
 분명 의식을 잃기 전에 캡슐로부터 위험요소가 발견되어 사용을 중단한다는 메시지가 들렸었다.
 고연우는 당연히 유토피아와의 접속이 끊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울창한 숲과 햇빛을 막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긴 나무들.
 여긴 의식을 잃기 전 ‘Lv37의 방랑하는 오크’를 사냥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접속이 안 끊어진 건가?”
 고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다시 살필 때.
 “쿠아아아앙!!”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쿠아아앙!”
 고연우를 발견한 오크가 선공(보이면 무조건 공격)몬스터답게 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이크! 어?!”
 여전히 유토피아에 접속하고 있다고 생각한 고연우는 늘 하던 대로 아바타 란슬롯을 움직였다.
 평소 같았으면 오크의 몽둥이 공격을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빠아악!
 오크의 몽둥이가 아바타 란슬롯 아니 고연우의 몸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윽!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바타 란슬롯의 몸이 평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느껴지는 감각 역시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건 마치···.”
 처음 유토피아에 접속할 때 느꼈던 그런 낯설음이었다.
 고연우의 실체 키는 175㎝이고 아바타 란슬롯의 키는 185㎝이다.
 고연우와 아바타 란슬롯은 단지 키만 차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체조건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처음 유토피아에 접속해, 아바타 란슬롯의 몸을 움직일 때, 상당한 낯설음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십여 분 정도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니 아바타 란슬롯의 몸이 진짜 자신의 몸처럼 느껴졌다.
 한번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면 그 감각을 계속 기억하는 것처럼 나중에 유토피아에 접속해도 처음 느꼈던 그 낯설음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처음 유토피아에 접속할 때 느꼈던 그 낯설음이 다시금 느껴지고 있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고연우가 자신의 몸을 낯설어하고 있는 사이에 오크는 친절하게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몽둥이찜질을 가해왔다.
 퍼어억! 퍼어억! 퍼어억! 퍼어억!
 회피는커녕 방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고연우는 혹독한 매질에 죽을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씨! 이러다가 진짜 죽는 거 아냐?”
 생명력 게이지가 15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다.
 오크의 몽둥이 공격 3번이면 생명력 게이지가 0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유토피아에서는 아바타가 사망할 경우 경험치 10퍼센트와 장비의 내구도가 대폭 하락하게 된다.
 다행히 고연우는 조금 전에 렙업을 한 상태이다.
 유토피아의 경우 마이너스 경험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방금 렙업을 한 상태에서 죽게 될 경우 10퍼센트의 경험치 하락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냥 죽을까?”
 지금 죽어봤자 경험치 손해 없이 장비의 내구도만 하락한다. 1골드짜리 아이템을 먹었으니 내구도 수리비용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 또 한 번 공격을 당해, 생명력 게이지가 10퍼센트로 줄어든 고연우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천하의 고연우가 이렇게 얌전히 죽을 수는 없지.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해보자.”
 고연우는 아직까지 이곳에서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오기가 발동한 고연우는 일단 10퍼센트로 줄어든 생명력 게이지부터 회복시키기로 했다.
 원래 사용하던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한 손에 든 고연우가 인벤토리에 있던 하급 체력 포션을 꺼내었다.
 고연우가 하급 체력 포션을 마시려고 할 찰나.
 부우웅!
 오크가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몽둥이를 휘둘렀다.
 유토피아의 경우 공격행위를 통해서 적이 포션을 마시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이크!”
 하급 체력 포션을 마시려고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고연우가 제법 무게가 나가는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손에서 놓았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바닥을 뒹굴어 오크의 몽둥이 공격을 피해냈다.
 일시 후퇴를 선택한 고연우가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하급 체력 포션을 급하게 들이켜다.
 꿀꺽! 꿀꺽!
 몸 안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생명력이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덤벼라! 이제부터가 진짜다!”
 생명력 게이지를 80퍼센트까지 회복한 고연우가 인벤토리에서 조금 전에 획득한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꺼내었다.
 부우웅!
 오크가 또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고연우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휘둘렀다.
 여전히 몸의 움직임이 낯설어서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적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빈틈을 공격하는 전투 방법을 쓰기에는 무리였다.
 이럴 때는 방어를 무시한 채, 공격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좋았다.
 퍼어억!
 서로를 공격하려고 하던 오크의 몽둥이와 고연우의 강철의 투 핸드 소드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으라차차차!”
 고연우가 기합과 함께 젖 먹던 힘을 쥐어짜냈다.
 그 덕분일까?
 강철의 투 핸드 소드와 ‘X’ 자로 교차된 오크의 몽둥이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쿠아아앙!
 오크 역시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다시금 힘을 주었다.
 “지금이다!”
 조금 전까지 오크와 힘 대결을 펼치던 고연우가 강철의 투 핸드 소드에서 힘을 빼며 옆으로 비껴났다.
 “쿠릉?”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오크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쏠려갔다.
 고연우가 이틈을 놓치지 않고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짧게 휘둘러 오크의 옆구리를 베어냈다.
 서걱!
 “쿠아아앙!”
 오크의 비명소리와 함께 녹색의 피가 튀었다.
 “반월베기!”
 고연우의 강철의 투 핸드 소드가 빈틈을 보이고 있는 오크의 등을 사정없이 베어냈다.
 기회는 이때라는 듯 고연우가 계속해서 공격 스킬을 발동시켰다.
 “모아치기! 강력한 일격! 앗싸! 쿨 타임 끝났다. 반월베기!”
 콰아앙! 파아아앙! 서걱!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듯한 폭음과 함께 녹색의 피가 유전처럼 터져 나왔다.
 “쿠아아앙!”
 오크가 몸을 돌리며 고연우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마무리!”
 고연우가 오크의 목에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박아 넣었다.
 푸우욱!
 오크는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스르륵 무너졌다.
 곧이어 ‘Lv37의 방랑하는 오크’의 시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철퍼덕!
 쉬지 않고 오크를 몰아붙였던 고연우가 지쳤다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악! 하악! 왜 이렇게 피곤하지?”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유토피아는 움직임이 많을수록 피로도가 쌓이는 시스템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피로는 너무 심했다.
 아무리 리얼리티를 강조한다고 해도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유토피아에서는 적에게 공격을 받으면 그 고통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진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아, 내가 공격을 받았구나.’ 하는 인식이 느껴질 정도의, 말 그대로 무늬뿐인 고통이 느껴진다.
 거듭 말하지만 리얼리티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서 정말로 현실과 똑같은 고통이 느껴지면, 누가 그 게임을 하려고 하겠는가.
 피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아, 몸이 지쳐가고 있구나.’ 하는 무늬뿐인 피로가 느껴져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현실에서 토할 것처럼 격하게 운동을 하고 난 후에 느껴지는 그 지독한 피로감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잘못된 게 확실해.”
 처음보다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몸의 움직임이나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게 느껴졌다.
 호흡을 고르며 휴식을 취하던 고연우의 눈에 보상 아이템이 들어왔다.
 “쳇.”
 10루인짜리 하급 체력 포션을 마셔가며 잡은 ‘Lv37의 방랑하는 오크’의 보상 아이템은 50덴짜리 동전하나였다.
 참고로 유토피아의 게임머니의 단위는 덴- 루인- 골드로 구성되어 있다.
 덴이 최하위 단위로, 100덴이 되면 1루인이 되고 100루인은 1골드가 된다.
 웬만큼 호흡을 고른 고연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50덴짜리 동전을 주웠다.
 그리고 도망칠 때 일부러 손에서 놓은,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집었다.
 “어휴, ‘강철의 투 핸드 소드’ 안 나왔으면 적자날 뻔 했네.”
 상위 랭커 아니 중위권만 되어도 체력 포션을 물처럼 마시며 사냥을 하지만 고연우 같은 저렙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 먹어야 하는 것이 체력 포션이다.
 그렇게 해서 돈을 악착같이 모으지 않으면 레벨에 걸맞은 제대로 된 장비를 구입하기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35레벨이 되면서 무기부터 해서 장비를 싹 다 바꾼 상태다.
 그 덕분에 남아있는 돈이 5 루인도 되지 않았다.
 40레벨에 또 장비를, 최소 매직 등급으로 바꾸려면 지금부터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렇게 회수할거 다 회수한 고연우는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로그아웃을 하기로 했다.
 몸도 너무 지쳤고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게임도 좋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래, 로그아웃했다가 아무 일도 아니면 다시 접속하면 되잖아. 로그아웃!”
 유토피아에서는 로그아웃을 외치면 비전투 상황일 때, 머릿속에 ‘로그아웃을 시작합니다.’ 라는 메시지와 함께 10에서 역으로 카운트가 시작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런 메시지가 울리지 않았다.
 “어? 왜 이러지? 로그아웃! 로그아웃!!”
 여전히 이곳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고 있던 고연우는 목이 터져라 ‘로그아웃!’을 연발했다.
 하지만 로그아웃 카운트는커녕 시스템 메시지도 들리지 않았다.
 “이거 뭐야? 안 되겠다. 운영자 호출! 영자 나와! 영자님! 제발! 나와 주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높아졌던 고연우가 애원하듯 운영자를 호출했지만 이 역시도 묵묵부답이었다.
 “왜 로그아웃이랑 운영자 호출이 안 되는 거지? 설마, 진짜 큰 사고라도 난 거 아냐?”
 불안감이 극에 달한 고연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헉! 저건 또 왜 저래?”
 원래 고연우가 ‘Lv37의 방랑하는 오크’를 잡던 사냥터 뒤쪽에는 마을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이 있어야 하는 부분에 울창한 숲이 우거져있었다.
 “아아악! 이럴 줄 알았으면 귀환서라도 사둘 걸.”
 유토피아는 게임답게 사냥터에서 마을로 한 번에 이동하는 귀환서 아이템을 팔고 있었다.
 다만 그 귀환서의 가격이 너무 높아서 고연우 같은, 게임머니에 허덕이는 저레벨 유저는 사용하기 부담스러웠다.
 “쿠아아앙!”
 그 사이에 ‘Lv37의 방랑하는 오크’가 다시 리젠 된 것일까?
 울창한 숲 너머로 오크의 괴성이 들려왔다.
 “젠장!”
 평소 같았으면 ‘Lv37의 방랑하는 오크’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이상했다.
 몸의 감각도 낯설고 너무 피로하기도 했다.
 또 다시 죽기 살기로 덤벼서 오크를 쓰러뜨릴 정신도 체력도 없었다.
 순간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내구도 수리비용이 얼만데, 일단 도망가자.”
 싸움을 포기한 고연우는 일단 사라진 길 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길은 비록 사라졌지만 길이 있던 곳으로 가다보면 마을이 나올 것 같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몬스터에게 공격당할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마을에는 다른 유저들이 있었다.
 마을의 유저들에게 정보를 얻거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고연우는 낯설고 지친 몸을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이 울창한 숲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을이 나오기만을 바라며 얼마나 달렸을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울창한 숲이 드디어 끝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울창한 숲이 끝나면 꿈에도 그리던 마을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마을은커녕 인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NPC?”
 상단으로 보이는 일단의 NPC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상단 호위 퀘스튼가? 유저도 있으려나?”
 지금 고연우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 혹은 도움을 줄 유저였다.
 40명은 되어 보이는 상단 일행을 살피던 고연우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귀찮게 됐군.’
 유토피아의 인공지능은 매우 우수하다. 그냥 봐서는 NPC와 유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NPC의 대화처리 능력도 뛰어나, 가벼운 대화로도 NPC와 유저를 구분할 수 없었다.
 현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고연우는 돌직구 멘트를 날려, 저들 중에 있을지 모르는 유저를 찾아내기로 했다.
 고연우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배가 불룩한 사내가 말했다.
 “기사님. 혹시 저희에게 무슨 용무라도?”
 그 순간 고연우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뭐지?’
 고연우는 순간 자신의 귀가 어떻게 되어, 사내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잘못들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거듭되는 혼란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고연우가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 헉!”
 스스로의 말에 너무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고연우.
 ‘내,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 단일서버로 운영되고 있는 유토피아는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는 글로벌 게임이다.
 세계최초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인 유토피아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통역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다.
 그 덕분에 외국인과도 언어의 문제없이 유토피아를 즐기는 것이 가능했다.
 유저의 말을 실시간으로 통역해주는 통역 프로그램 덕분에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은 일부러 한국어를 할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한국인 역시 일부러 영어 혹은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가 한 말은 절대 한국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통역 프로그램을 통해서 통역된 말도 아니었다.
 사내의 말은 맹세코 난생처음 듣는, 지구상에 저런 언어가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낯선 언어였다.
 그런데 고연우가 그 낯선 언어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고연우 본인이 그 낯선 언어를 능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뭐지? 내가 언제 이런 말을 배웠지?’
 그렇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은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여기에 난생처음 듣는 낯선 언어에 대한 문제까지 더 해지자, 정말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고연우가 그렇게 혼란스러워할 때, 고연우에게 말을 걸었던 배불뚝이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기사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분명 낯선데, 너무나도 익숙한, 그야말로 모순덩어리의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낯선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고연우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틀며 고통스러워할 때, 상단의 호위를 맡은 용병으로 보이는 자의 얼굴 역시 묘하게 뒤틀렸다.
 헨리 마샬.
 겉보기에는 50대로 보이지만 실제 그의 나이는 42살이다.
 헨리 마샬은 한때 루이지아 왕국 20대 상단 중에 하나인 마샬 상단의 상단주였다.
 헨리 마샬은 전 상단주였던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29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상단을 물려받았다.
 헨리 마샬은 어려서부터 상단의 일을 해오기는 했지만 상재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상인으로써의 욕심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5대째 내려오는 상단을 루이지아 왕국 10대 상단으로 키울 야심을 아니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상인으로써의 재능이 없는 자가 욕심만 많다보니 일이 뜻대로 풀릴 리 만무했다.
 나름 포부를 가지고 진행시켰던 대형 거래가 틀어지면서 이득이 아닌 엄청난 손해만 보게 되었다.
 의욕과 욕심만 앞선 채, 철저한 사전준비 없이 급하게 일을 진행시킨 결과였다.
 그나마 상단의 재무가 튼튼하기에 큰 손해를 입고도 상단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때라도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정신을 차렸다면 최소한 루이지아 왕국 20대 상단의 지위는 지켰을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한 헨리 마샬은 또 다시 욕심을 부려, 대형 거래를 덜컥! 계약해버렸다.
 이번에야말로 대형 거래를 성사시켜 앞선 거래의 손해를 만해하고, 상단을 더욱 크게 키우겠다는 야심의 발로였다.
 그런데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헨리 마샬은 더 이상의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이번에는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그런데 상행도중 뜻하지 않게 오우거와 조우하게 되면서 겨우 마련한 물건은 물론이고 상단인원들까지 죽는 대형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또 다시 대형 거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어마어마한 위약금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까지 하게 되었다.
 위약금과 피해보상금액이 어마어마했지만 루이지아 왕국 20대 상단인 마샬 상단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철저한 사전준비로 이번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헨리 마샬이 과욕을 부려, 사채를 끌어다 썼다는 것이다.
 사채의 무서운 점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원금보다 이자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던 현금을 위약금과 피해보상금으로 모두 지불한 상단은 그 사채 빚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비록 상단주인 헨리 마샬이 주도한 2번의 대형 상거래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휘하의 상인들이 주도하는 상거래는 무사히 마쳐, 며칠만 더 있으면 돈이 들어올 참이었다.
 그 돈이면 충분히 사채 빚을 갚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사채업자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채업자의 배후에 있는 귀족이 손을 써, 마샬 상단의 자금유입을 막아버렸다.
 귀족의 압박을 받은 거래처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되며 대금지급날짜를 자꾸만 미룬 것이다.
 그 사이에 사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루이지아 왕국 20대 상단이라고 불리는 마샬 상단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헨리 마샬은 아무리 사채라고 해도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며 항의했지만 사채업자의 배후에 있는 귀족에 의해서 모든 항의가 묵살되고 말았다.
 오히려 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를 뒤집어쓰며, 막대한 보상금까지 지불해야 했다.
 너무 억울했던 헨리 마샬이 평소 친분 있던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상대 귀족의 힘이 너무 막강해, 다들 헨리 마샬의 부탁을 외면했다.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헨리 마샬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식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사채 빚 대신 5대째 내려오던 상단을 사채업자 아니 배후의 귀족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억울함이 골수에 사무쳤던 헨리 마샬은 언제고 복수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상단을 넘겨주고 나니, 그동안 옆에서 알랑방귀를 끼던 자들이 곁을 떠나거나 모른 척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수중에 남아있는 돈도 몇 푼 되지 않았다.
 그 돈을 종자돈삼아서 재기하기는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자신은 상인과 맞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헨리 마샬은 호구지책으로 작은 땅이라도 사서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런데 가진 돈이 너무 적다보니 지력이 좋거나 넓은 땅은 물론이고 평범한 농지도 구할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헨리 마샬은 과거 친하게 지냈던 로이덴 영지의 집사 쿠르를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작은 땅을 구입했다.
 그나마 지력이 좋아 언제나 평작 이상은 한다고 알려진 로이덴 영지의 땅이라면 작은 땅이라도 먹고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집사 쿠르가 판 땅은 사실상 버려져 있던 변두리 황무지였다.
 자신은 더 이상 마샬 상단의 상단주가 아니라는 사실과 세상인심이 이렇게 야박하다는 것을 재차 깨닫게 된 헨리 마샬은 그 황무지 땅이라도 어떻게든 개간하여 먹고 살기로 했다.
 이때 헨리 마샬의 나이 30살.
 불과 1년 만에 루이지아 왕국 20대 상단인 마샬 상단을 날려먹고 평범한 농민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12년 전에는 농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생초보 농사꾼 헨리 마샬은 어느덧 베테랑 농사꾼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탓일까?
 한때 미동자 소리까지 들었던 헨리 마샬은 원래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그렇게 고생을 한 덕분에 황무지였던 땅을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는 밀밭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농사일을 하느라 몸은 조금 고단하지만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또 먹고사는 것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헨리 마샬의 막내아들 바락(7살)이 밀밭에서 조금 떨어진, 아직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은 황무지에서 놀다가 금 조각을 주워 온 것이다.
 처음에는 지나가던 누군가가 흘리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바락이 금 조각을 주웠다고 말한 곳으로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돌도 너무 많고 지력이 너무 약해, 힘들게 개간해봤자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였다.
 그런데 그 땅을 조금 파보니, 금광석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땅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헨리 마샬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어깨춤이 절로 덩실거리는 것만 같았다.
 농사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하지만 편하게 살 길이 열렸는데 굳이 힘든 일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상단 일을 다시 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또 자신에게서 상단을 빼앗아간 귀족에게 복수할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상단을 가지고 있을 때도 그 귀족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었다. 그때의 그 귀족은 12년 전보다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복수니 뭐니 하고 떠들고 다녔다가는 금광은 물론이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헛된 복수보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기로 작정한 헨리 마샬은 신께서 주신 금광이라도 잘 관리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로이덴 영지의 영주 에드몬드 백작이 헨리 마샬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금광을 빼앗아가려고 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이덴 영지는 지력이 좋아서, 루이지나 왕국 전체에 흉년이 들어도 평작 이상의 수확을 하는 곳이다.
 그동안 로이덴 영지를 찾아오는 상단에 밀을 비롯한 농작물을 팔던 에드몬드 백작은 좀 더 욕심을 부려, 영지 직속의 상단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상단이라는 것이 무조건 만든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지 인맥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또 직속 상단을 만드는 것이 처음이기에 경험 있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기도 했다.
 에드몬드 백작은 그 조언자로 헨리 마샬을 선택했다.
 비록 헨리 마샬이 마샬 상단의 상단주 자리에서 물러난 지 12년이 지났다고 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에드몬드 백작이 뒤에서 받쳐주기만 하면 과거의 인맥이 되살아날 것이다.
 특히 이번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헨리 마샬에게 쏠리고 있었다.
 에드몬드 백작은 그런 관심을 이용해, 영지 직속 상단의 인지도를 높일 심산이었다.
 다시는 상단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헨리 마샬이지만 에드몬드 백작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는 못했다.
 영주는 그 영지의 법이며 절대 권력이다.
 자칫 에드몬드 백작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참살 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맹세를 깨고 다시 상단 일을 하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헨리 마샬이 어떤 식으로 상단주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던 에드몬드 백작은 갈등하는 헨리 마샬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주었다.
 그렇다고 헨리 마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는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자신이 뒤에서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또 금광 개발에 필요한 장비와 인원을 무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그동안 이게 문제였다.
 금광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개발할 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었던 헨리 마샬은 예전에 알던, 자신을 외면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며 돈을 빌리고 있었다.
 사실 자신의 처지가 어려울 때 자신을 매몰차게 외면했던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몬드 백작이 비용을, 그것도 무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에드몬드 백작이 상단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오면 더 이상 상단 일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하자, 헨리 마샬은 오랜 맹세를 깨고 다시금 상단 일을 하기로 했다.
 금광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헨리 마샬의 몸은 제법 날씬하고 단단했다.
 그런데 금광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빌리기 위해서 이사람 저사람 만나며 잦은 술자리를 하다 보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술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에드몬드 백작의 직속 상단의 일을 본격적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농사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번 튀어나온 배는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과거 대형 거래를 주도하다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헨리 마샬은 처음부터 무리해서 일을 진행시키지 않고 소규모로 조금씩 거래를 넓혀가기로 했다.
 에드몬드 백작은 뒤를 확실하게 봐주겠다며 이윤이 크게 나는 대형 거래를 부탁했지만 헨리 마샬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로이덴 영지의 직속 상단 일에 본격적으로 끼어들게 된 헨리 마샬은 오늘도 상단을 이끌고 상행을 나서는 중이다.
 이번 목적지는 로이덴 영지와 이웃하고 있는, 철광석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롱마이어 영지이다.
 상대적으로 농사짓기 어려운 땅을 가지고 있는 롱마이어 영지에 로이덴 영지의 품질 좋은 농작물을 비싸게 팔고 롱마이어 영지의 질 좋은 철광석을 싼 값에 구입할 계획이다.
 헨리 마샬이 이끄는 상단이 목적지인 롱마이어 영지와 반나절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 우거진 수풀을 해치며 은빛 그림자가 쑤욱! 하고 튀어나왔다.
 “적이다!”
 “몬스터다!”
 “전투준비!”
 상단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용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은빛 그림자를 향해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용병들이 저마다의 무기로 은빛 그림자를 공격하려고 하던 찰나, 그들을 이끌고 있는 용병대장 무스가 용병들을 제지시켰다.
 “기다려!”
 “대장, 왜 그래?”
 선수필승!
 일단 보이면 무조건 먼저 공격해라. 그래야지 살아남는다.
 용병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철칙이다.
 용병들은 그 철칙에 의해서 은빛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공격을 하려고 했다.
 설사 그렇게 해서 엄한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일이 잘못되어 자신들이 죽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용병대장 답게 눈썰미가 좋았던 무스가 용병들을 진정시켰다.
 “기다려 봐.”
 “왜 갑자기··· 헉!”
 무스의 명령에 불만을 토로하던 용병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 귀족?!”
 배운 것 없는 용병들이 보기에도 은빛 그림자는 보통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록 투구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신화 속의 영웅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존귀함이 풍겨져 나왔다.
 비단 얼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은빛 그림자가 입고 있는 은빛의 갑옷 역시 고풍스러운 멋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위엄이 느껴졌다.
 게다가 한손에 들고 있는 투 핸드 소드에서도 강한 힘과 함께 전사의 투지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저런 얼굴에 저런 고가의 무구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귀족, 그것도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고위 귀족일 확률이 높았다.
 저런 고위 귀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용병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참수를 당할 수도 있었다.
 “역시 대장이야. 그 짧은 시간에 어찌 그걸 다 알아보고.”
 “그나저나 저런 고위 귀족이 여긴 웬일이지?”
 “아직 어려보이는 걸로 봐서는 철부지 도련님이 영웅소설에 심취해서 가출한 것은 아닐까?”
 “흠- 생긴 건 진짜 신화속의 영웅처럼 멋들어지지만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자유로운 용병생활이 부럽다며 집을 가출해서 찾아온 도련님도 있었잖아?”
 “아, 노숙 한번 하고는 못하겠다고 집으로 돌아간 애송이?”
 “푸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용병대장 무스가 시답지 않는 잡담을 나누고 있는 용병들을 조용히 시켰다.
 “시끄럽다. 주둥이는 나중에 놀리고 마샬 어르신이나 모셔와.”
 “예!”
 잠시 후, 마차에 타고 있던 헨리 마샬이 용병과 함께 걸어왔다.
 “무스 대장, 무슨 일이기에 날 부른··· 헉! 귀, 귀족?!”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은빛 그림자 그러니까 고연우를 발견한 헨리 마샬은 고연우가 고위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용병대장 무스가 작게 속삭였다.
 “얼굴이나 갖추고 있는 무장으로 봐서는 절대 평범한 귀족가문의 자제분은 아니십니다. 귀족 분들이 저희 용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괜히 제가 먼저 나서기 보다는 어르신께서···.”
 “흠- 무슨 말이지 알겠네. 잘했네. 예의와 체면을 따지는 귀족 분께 무례를 하면 안 되지.”
 귀족을 상대하려면 최소한 같은 귀족이거나 그 일행의 책임자가 직접 해야만 했다.
 자칫해서 귀족도 아니고 일행 중에서 서열이 낮은 자가 귀족을 상대했다가 귀족이 불쾌감을 느껴 해코지를 가할 수도 있었다.
 귀족에게 마샬 상단을 빼앗긴 경험이 있던 헨리 마샬은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고연우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 최대한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기사님. 혹시 저희에게 무슨 용무라도?”
 걸어 다니는 조각이라고 불려도 손상이 없을 정도의 미남이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 헉!”
 무슨 이유에서인지 은빛 갑옷의 미남이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왜 저러시지? 혹시 어디 아프신가?’
 그러고 보니 은빛 갑옷의 미남의 얼굴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은빛 미남의 몸이 좋지 않아서 저런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다른 이유에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일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던 헨리 마샬이 다시금 정중한 자세를 취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기사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고위 귀족의 자제로 보이는 고연우가 오만상을 다 쓰며 가만히 있자, 사정을 모르는 헨리 마샬은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답답하기는 상단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드몬드 백작이 수족으로 쓰라며 붙여준 행콕이 다가와 헨리 마샬에게 속삭였다.
 “어르신, 그냥 우리끼리 가죠.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우리 일행도 아니었고···. 그냥 모른 척 하고 가시죠.”
 헨리 마샬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허! 자네는 영주부 사람이라면서 귀족의 생리를 그렇게 모른단 말인가?! 나중에라도 우리가 그냥 간 것을 꼬투리 잡아서 치도곤을 내려고 하면 그땐 어쩔 건가?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집안의 자제분 같지 않나? 행여나 에드몬드 백작께서 감당하시지 못하실 가문의 분이면 그땐 정말 큰일 나는 걸세!”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역시 한때 루이지아 왕국 20대 상단을 이끄시던 분답습니다.”
 예전에 말아먹은 마샬 상단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무안해진 헨리 마샬이 헛기침을 했다.
 “어험.”
 이렇게 헨리 마샬을 비롯한 상단의 일행들이 아무런 말도 없는 고연우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에 고연우는 고연우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저들 중에 유저도 없는 것 같고.’
 상단 호위 임무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시간을 얼마나 줄이는가에 따라서 보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저 상단 일행 중에 유저가 있었다면 상단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헨리 마샬을 시작으로 자신의 눈치만 살피는 상단 일행들의 모습으로 보아하니 저들 모두가 NPC임에 틀림없었다.
 고연우는 일단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쳐두기로 했다.
 지금은 마을로 돌아가 정보를 수집하거나 유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혹시 이 상단의 목적지가···.”
 이윽고 고연우가 말문을 열자, 고연우의 눈치만 살피던 헨리 마샬이 재빨리 대답했다.
 “저희 상단은 롱마이어 영지를 목적지로 하고 있습니다.”
 “롱마이어 영지?”
 낯선 언어처럼 처음 듣는 지명이다. 유토피아의 세계는 누구도 그 끝을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당연히 고연우가 그 모든 지명을 다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근방은 고연우의 주 사냥터이다. 당연히 근방의 지리에 대해서는 ‘빠삭’ 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롱마이어라는 영지나 마을은 처음 들어보았다.
 ‘아, 이것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일단은 롱마이언지 뭔지 하는 곳에 도착하는 게 우선이다.’
 여전히 자신이 유토피아를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고연우가 물었다.
 “그럼, 그 롱마이어라는 곳은 어딥니까?”
 “아, 롱마이어 영지를 모르십니까?”
 롱마이어 영지는 철광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루이지아 왕국의 귀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롱마이어 영지를 모른다는 말에 약간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 잘생긴 얼굴과 너무 고급스러워 보이는 은빛의 갑옷 때문에 귀족을 사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고연우는 애초에 자신을 귀족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헨리 마샬을 비롯한 상단 사람들의 일방적인 착각일 뿐이었다.
 “롱마이어 영지가 어디냐고 하면··· 잠깐, 혹시 롱마이어 영지로 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고연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잘됐습니다. 저희도 롱마이어 영지로 가던 길이니 함께 가시지요.”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주변의 지형이 모두 달라졌다. 사실 헨리 마샬이 롱마이어 영지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해도 찾아가기 힘들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단 관계자가 먼저 나서서 같이 가자고 하니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이거 혹시 돌발 퀘스트인가?’
 아쉽게도(?) 퀘스트 알림 창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퀘스트는 아니었다.
 ‘나 참, 이런 상황에서도 퀘스트 생각을 하다니. 이런 게 게임중독인가?’
 이제 뭔가 길이 보인다고 생각한 고운여가 알아서 저자세를 취하는 헨리 마샬을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고위 귀족의 자제로 생각되는 고연우가 상단에 합류하자, 용병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뒤틀렸다.
 “대장 어떻게 할 거요? 내가 보기에도 고위 귀족의 자제 같은데. 괜히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용병대장 무스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하는 수 없지. 계획을 바꿔서 돌아갈 때 처리하기로 한다.”
 “그거 좋은 생각이요. 일도 일이지만 우리 목숨부터 챙겨야 하니. 돌아갈 때 정리하면 되겠네. 그나저나 마샬 녀석 운이 좋은데?”
 용병대장 무스가 고연우와 헨리 마샬이 타고 있는 마차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흥, 결국 죽을 운명이야. 그게 며칠 지연됐다고 운이 좋기는.”
 마차에 올라탄 고연우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원래 유토피아에서는 투구를 쓰고 있어도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또 유토피아의 옵션을 어떻게 설정해놓는가에 따라서 투구를 장착하고 있어도 투구를 쓰지 않은 것 같은 효과를 줄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해 유토피아에서는 굳이 투구를 벗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전투를 비롯한 일반적인 행동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투구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피로도 그렇고 투구도 그렇고. 왜 이렇게 진짜처럼 느껴지지?’
 유토피아는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답게 리얼리티가 충만했다.
 그렇다고 해도 게임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기에 진짜 현실과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부분이 존재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모든 것이 게임이 아닌 진짜 현실처럼 느껴졌다.
 ‘설마, 진짜로···.’
 고연우가 막 어떤 결론에 도달하려고 할 찰나.
 맞은편에 앉아있던 헨리 마샬이 말을 걸어왔다.
 “저, 기사님. 아, 제가 성함을 잘 몰라서 기사님이라고 칭했습니다. 만약 그게 불쾌하게 들리셨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성함을···.”
 “예? 아, 제 이름 말입니까? 전 란슬롯이라고 합니다.”
 고연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바타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아, 란슬롯님이셨군요. 란슬롯님은 남자인 제가 봐도 참 잘생기셨습니다. 부럽습니다.”
 아바타 란슬롯이 잘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고연우가 괜히 뿌듯해지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렴, 무려 3시간을 공들인 얼굴인데.’
 유토피아는 유저 한 명당 하나의 아바타만을 생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바타에 대한 유저들의 애정이 더욱 각별했다.
 이왕이면 잘생기고 예쁜 아바타를 가지고 싶었던 유저들은 장시간 공을 들여, 자신의 아바타를 초절정 미남과 초절정 미녀로 꾸몄다.
 물론 몸매 역시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만큼 완벽했다.
 헨리 마샬이 예술품을 감상하듯 고연우의 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햐~, 사람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잘 생길수가 있지? 저건 사람 얼굴이 아니라, 신께서 빗어놓은 예술품이네. 예술품이야. 추수 직전의 황홀하게 빛나는 황금빛 밀밭을 연상시키는 저 황금빛 머리하며,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에메랄드빛 호수를 연상시키는 우수에 찬 저 두 눈은 또 어떻고. 저건 신께서 진짜 황금과 에메랄드를 사용해서 만든 게 분명해. 그뿐인가. 대륙에서 가장 높고 아름답다고 알려진 오라크 산맥처럼 시원시원하게 뻗은 저 코하며, 여인의 입술을 부르는 듯한 묘한 마력의 입술은 또 어떻고. 남자인 내가 봐도··· 꿀꺽! 이 정돈데, 여자들은 어떻겠어? 아마 거지 옷을 입혀놔도 여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거야. 아, 부럽다. 세상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나도 저런 얼굴로 살아봤으면.’
 마냥 부럽다는 표정으로 고연우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던 헨리 마샬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헨리 마샬은 고연우와의 만남을 또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절대 외모와 어지간한 귀족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무구를 봐서는 고위 귀족임에 틀림이 없었다.
 고위 귀족은 헨리 마샬이 마샬 상단의 상단주로 있을 때, 돈을 짊어지고 만나러가도 만날 수 없었던 그런 존재이다.
 만나기 어려운 만큼 친분을 쌓아놓기만 하면 뒤가 든든해지는 것이 고위 귀족이다.
 헨리 마샬은 고연우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일단 고연우의 가문만 알아놓으면 이후 오늘 일을 핑계 삼아 가문으로 고연우를 찾아가거나 만남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예? 가문이요?”
 ‘뭐지? 왜 갑자기 가문을 묻는 거지?’
 헨리 마샬을 비롯한 상단 사람들이 자신을 고위 귀족의 자제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고연우는 헨리 마샬의 물음이 의아스럽기만 했다.
 ‘아! 혹시 이 NPC들이 나를···.’
 뒤늦게 헨리 마샬을 비롯한 상단 일행들이 자신을 귀족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연우.
 ‘어쩐지. 처음 보는 날 롱마이언지 뭔지 하는 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지를 않나, 마차에 태우기까지 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날 귀족으로 오해하고 있었군.’
 유토피아는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답게 자유도가 높아서 게임 내에서 유저가 유저 혹은 NPC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그 사기가 발각이 되었을 때는 그에 걸맞은 확실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유토피아의 수많은 사기사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사기가 바로 귀족 사칭이다.
 유저의 경우 레벨이 낮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 퀘스트를 통해서 귀족이 될 수도 있다.
 일단 귀족이 되면 NPC들이 해당 유저를 대하는 자세부터가 달라진다. 그리고 상점을 이용할 때 귀족신분을 내세우면 할인을 받기도 하고 보상이 높은 퀘스트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무조건 상대방이 귀족 유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다보니 유저는 물론이고 NPC 역시 귀족 유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기꾼 유저는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가짜 귀족 인장 아이템을 만들어 귀족 행세를 하며 상점에서 아이템을 구입할 때 할인을 받거나 NPC에게 아이템이나 게임머니를 뜯어내기도 했다.
 대신 사기라는 것이 밝혀지면 전 재산 몰수와 함께 감옥형을 받게 된다.
 감옥형을 받게 되면 아바타가 감옥에 갇힌 상태가 된다.
 그때는 정말 감옥에 갇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고 있어야 한다.
 감옥형을 받은 거의 모든 유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해, 아바타를 삭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아바타를 키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나는 다른 유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헛된 망상을 품은 유저들 때문이다.
 참고로 잡히기 전에 사기로 얻어낸 아이템과 게임머니를 다른 유저에게 팔거나 넘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 팔렸거나 넘어간 아이템과 게임머니는 곧바로 회수가 된다.
 만약 현거래가 이루어졌을 경우, 게임회사가 사기꾼 유저에게 직접 연락을 넣어, 돈을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말이 요청이지, 만약 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진짜 사기혐의와 영업 방해 등의 혐의로 민사와 형사로 소송을 당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현실의 감옥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다.
 각설하고 귀족을 사칭할 생각이 없었던 고연우는 오해가 커지기 전에 사실을 바로잡기로 했다.
 “저기···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고연우의 자백(?)이 너무 큰 충격이었던 걸까?
 이제껏 정중한 자세를 취하던 헨리 마샬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약과였다.
 헨리 마셜 옆에 앉아있던 행콕은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삿대질까지 했다.
 “뭐?! 그럼, 우리 상대로···.”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헨리 마샬이 길길이 날뛰는 행콕을 붙잡았다.
 “어허. 자네 지금 뭐하나?”
 “어르신! 어르신도 지금 듣지 않으셨습니까! 아! 글쎄, 저놈이···.”
 헨리 마샬이 고연우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이 친구가 지병이 있어서, 이렇게 가끔씩 발작을 하곤 합니다. 양해해주십시오.”
 헨리 마샬이 몸으로 행콕의 흉측한 얼굴을 가리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헨리 마샬이 목소리를 낮추자, 흥분했던 행콕 역시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감히 우릴 상대로 귀족 사칭을 한 저놈을 당장 쫒아내야 하는거 아닙니까? 아니지! 다시는 귀족 사칭을 하지 못하게 단단히 혼을 내야 합니다.”
 이쪽 세상에서 귀족을 사칭할 경우 특별한 재판절차 없이 바로 사형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고연우가 자백을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고연우는 이쪽 세상의 말만 할 줄 알았지, 이쪽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다.
 헨리 마샬을 비롯한 사람들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 사실이 금방 들통 나고 말 것이다.
 일반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도 다 아는 일반 상식을 모른다는 것이 발각되면 그 정체 역시 금방 드러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귀족을 사칭했다는(물론 헨리 마샬 등의 일방적인 오해이지만)것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누가 그걸 모르나. 만약 아닐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기 입으로 귀족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그렇지. 자기 입으로 귀족이 아니라고 했지. 그럼, 반대로 평민이 자기 입으로 ‘나, 귀족이요.’ 라고 하면 진짜 귀족이 되는 건가?”
 “예? 그야 당연히···.”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는 사정 때문에 귀족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만약 그럴 경우, 나중에라도 우리가 험하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우리를 해코지 하려고 한다면 그땐 어쩔 건가?”
 헨리 마샬의 말대로 귀족이 아닌 줄 알고 막 대했는데, 나중에 진짜 귀족으로 밝혀지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럼, 저분이 진짜 귀족이라는 말씀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확신은 할 수 없네, 다만.”
 “다만, 뭡니까?”
 “저 얼굴을 보게.”
 행콕이 옆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어, 고연우의 조각 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연우의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은 몇 번을 봐도 감탄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햐- 잘생기기는 겁나게 잘생겼네요.”
 “잘생기기만 했나. 존귀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얼굴뿐인가. 갖추고 있는 무장은 또 어떻고. 저런 엄청난 무구는 마샬 상단 시절에도 구경하지 못했던 것들일세. 자네 생각에 저 얼굴에, 저 엄청난 무구를 지닌 사람이 평민 같은가?”
 행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고연우를 고위 귀족이라고 오해한 이유가 저 잘생기고 존귀한 얼굴과 엄청난 무구 때문이었다.
 얼굴이야 천 번 아니 만 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저 엄청난 무구는 평민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귀족이면서 저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아니 왜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라고?”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사람의 사정은 알 수가 없는 거라고. 어쩌면 우리가 귀찮게 할까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걸 수도 있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힘이 있는 사람 곁에는 어떻게든 그 사람의 덕을 보려는 사람들이 꼬여들기 마련이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들 역시 고연우와 어떻게든 친분을 쌓아, 나중에 인맥으로 이용하려고 했었다.
 아마도 고연우는 사전에 그러한 것을 막기 위해서 귀족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것 일거다.
 헨리 마샬과 행콕은 그렇게 생각하며 또다시 고연우를 고위 귀족이라고 오해했다.
 한편 헨리 마샬과 행콕의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본 고연우는 나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지? 저 반응은?’
 유토피아의 일부 NPC 중에서 고레벨 유저를 귀족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이때 NPC에게 곧바로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면 이 역시도 귀족 사칭으로 몰려, 감옥형을 받게 된다.
 다만 의도적으로 귀족 사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인정되어 전 재산은 몰수당하지 않는다.
 다.
 고연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때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NPC가 먼저 오해를 했기에 그 오해를 풀면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행콕의 반응을 보니 그냥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까딱하다가 마차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매타작을 당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진짜 여기서 쫓겨나면 안 되는데.’
 이곳의 지리를 전혀 알지 못하기에 여기서 쫓겨나게 된다면 롱마이어 영지는 물론이고 가까운 인가를 찾는데도 얼마의 시간이 걸릴 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그냥 귀족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로그아웃도 되지 않았고 운영자 호출도 되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귀족 사칭으로 감옥을 가게 되더라도 일단은 마을로 돌아가 다른 유저를 만나야 했다.
 뒤늦게 생각이 여기에 미친 고연우는 섣부른 자백을 후회했다.
 한번 귀족이 아니라고 했으니 NPC들은 당연히 그렇게 믿을 것이다.
 고연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골머리만 썩히고 있을 때, 헨리 마샬이 다시금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아하하하. 귀족이면 어떻게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이것도 인연이니 마을까지 함께 가시죠.”
 ‘응? 갑자기 또 왜 저러지? 뭐, 나야 좋지만.’
 호떡 뒤집듯 금방 바뀐 헨리 마샬과 행콕의 반응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단 다른 유저가 있는 마을까지 간다는 것이 중요했던 고연우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근데 이상하기는 해.’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유토피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잇, 아냐. 난 지금 유토피아에 있는 게 맞아. 여기가 유토피아가 아니면 어디란 말이야? 소설처럼 내가 다른 세상으로 차원이동이라도 했다는 거야? 에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끝내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던 고연우는 헨리 마샬을 통해서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망상이 진짜인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저··· 혹시 신의 대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예? 신의 대리인이라니요? 그게 뭡니까? 아! 혹시 성녀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헨리 마샬의 말은 고연우의 불안감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고연우가 말한 신의 대리인이란 유저를 지칭하는 말이다.
 유토피아의 NPC들은 유저가 신의 대리인이기에 죽어도 바로 부활하고 또 신을 대신해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의 모든 NPC는 신의 대리인인 유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헨리 마샬은 신의 대리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것은 곧 의심하던대로, 이곳이 유토피아가 아니며 헨리 마샬 또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NPC가 아니라는 뜻이다.
 ‘말도 안 돼! 그럼, 정말로 내가 차원 이동을 했단 말이야? 그것도 유토피아의 아바타 란슬롯의 몸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된 고연우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을 때야, 진짜 내 이야기가 아니니 주인공이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런데 소설에서나 가능할 법 한 일이 실제로, 그것도 자신에게 일어나니 황당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무엇보다 집에 계시는 부모님과 여동생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냐! 이건 절대 현실이 아니야! 이건··· 그래! 꿈이야! 꿈!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충격에 빠진 고연우는 현실을 극구 부정했다. 하지만 고연우가 부정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을 알게 된 고연우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맞은편에 있던 헨리 마샬과 행콕 역시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연우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던 행콕이 헨리 마샬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어르신, 저분이 갑자기 왜 저러시죠? 혹시 제가 아까 한 행동 때문에?”
 “으흠-, 나도 잘 모르겠네. 그나저나 저분이 갑자기 저러니, 나도 괜히 불안해지는구먼.”
 이제껏 고연우에게 정중한 모습을 보였던 헨리 마샬이 이정도인데, 고연우에게 고함을 질렀던 행콕은 어떠하겠는가.
 고연우의 사정을 알 리 없던 행콕은 롱마이어 영지로 가는 내내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알아버린 고연우는 너무 큰 충격 때문인지, 롱마이어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덩달아 고연우의 눈치만 살피던 헨리 마샬과 행콕 역시 롱마이어 영지에 오는 내내 입도 뻥끗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상단이 롱마이어 영지의 ‘어머니의 정성’이라는 여관에 도착했다.
 무조건 고연우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헨리 마샬은 여관에서 제일 비싼 1인 특실을 고연우에게 배정해주었다.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고연우는 반사적으로 여관 종업원이 안내하는 대로 움직였다.
 “여기가 우리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입니다.”“어?”
 “식사는 조금 후에 방으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홀로 방에 남겨진 고연우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유토피아가 아니라, 다른 세상이다? 난 어떠한 이유에서 내 아바타인 란슬롯의 몸을 가지고 차원이동 했다? 아! 씨발! 이게 말이 돼?!”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연우가 거듭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할 때.
 “윽!”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아니 갑자기라기 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발생하는 생리현상이었다.
 “뭐?! 내가 소변이 마렵다고?!”
 캡슐이 생체리듬을 조정해 주기 때문에 장시간 유토피아를 플레이해도 소변이나 대변이 마렵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아바타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설사 지금 이게 현실이라고 해도, 고연우는 아바타 란슬롯의 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변을 볼 수가 없었다.
 “아! 씨! 나보고 어쩌라고!”
 소변이 마려워도 소변을 볼 수 없는 몸으로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고연우는 이래저래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윽! 도저히 못 참겠다!”
 방광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고연우는 반사적으로 특실에 마련되어 있던 화장실로 향했다.
 너무 소변이 마려웠던 고연우는 순간 자신이 아바타 란슬롯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바지를 내렸다.
 “헉! 이게 뭐야!”
 갑옷과 바지를 벗고 나서야 자신은 소변을 볼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깨달은 고연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바타 란슬롯에게는 없어야할 ‘그것’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며 잔뜩 성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이제는 ‘그것’까지 완벽하게 갖춘,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라고 할 만큼 완벽한 몸이 되었지만 현실을 극구 부정하고 싶었던 고연우는 이렇게 외쳤다.
 “아아아악! 누가 이걸 달라고 했어! 큰 거 필요 없으니까 그냥 집에 보내줘!!!!”
 
 
 그냥은 못 준다 (1)
 
 
 
 
 
 
 “이게 진짜 현실이란 말인가?”
 시원하게 소변을 본 고연우는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현실을 아무리 부정해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기만 하다가 횡액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살아야 했다. 살아만 있으면 어쩌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 소설에서도 마지막 순간에는 다들 집으로 돌아가잖아? 나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설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에게는 아바타 란슬롯의 몸이 있었다.
 얼굴, 몸, 그것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절대 미남 란슬롯의 몸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토피아의 인벤토리와 스킬이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었다.
 “그래, 이쪽 세상에 대해서 아직은 아는 것이 없지만 아바타의 능력만 있으면 남부럽지 않게 살수도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불안감이 옅어지면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다.
 “일단은 이쪽 세상에 대한 정보 수집이 먼저다.”
 세상은 말만 통한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바타 능력이 있다고 해서 절대 무적이거나 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아바타 능력을 과신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수도 있었다.
 “아바타의 능력은 감춰야겠어.”
 소설에서도 보면 실력의 3푼을 숨기라는 둥 비장의 한수를 늘 준비하는 둥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숨겨두었던 3푼의 실력이 목숨을 구명해준다.
 이 기괴한 현실을 받아드리기로 한 고연우는 일단 숨길 수 있는 것은 숨기고 드러내서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은 것은 드러내기로 했다.
 그렇게 현실에 순응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똑똑똑!
 “손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여관 종업원이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밥부터 먹을까.”
 이것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다. 먹지 않으면 진짜로 죽는 현실이다.
 이럴 때 일수록 배를 든든하게 채워놔야 했다.
 헨리 마샬이 특별하게 손을 썼는지, 여관 종업원이 가져온 음식이 꽤나 맛있었다.
 “근데, 헨리 마샬이 왜 이렇게 잘해주지?”
 자신의 자백(?)으로 귀족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특실까지 잡아주는 것을 보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뭘까? 혹시?!”
 불현듯 자신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3시간 공들여 만든 란슬롯의 얼굴을 넋을 잃고 쳐다보던 헨리 마샬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남자를··· 좋아하나? 으으으-.”
 생각하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분위기를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가만!”
 이곳은 귀족이나 평민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는 노예 계급도 존재한다.
 고연우처럼 얼굴 잘생기고 몸 좋고 그것까지 완벽한 사람의 경우 아주-아주, 비싼 값에 팔릴 것이다.
 자신에게 온갖 편의를 다해주면서 방심을 유도한 뒤에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난생처음 보는 자신에게 이렇게 잘 해줄 리가 없었다.
 “아, 이거 어쩌지?”
 상단이 롱마이어 영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해가 완전하게 저물어 사방이 컴컴했다.
 전기가 없는 세상이라서 그런지 가로등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여관 밖은 바로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지금쯤이면 헨리 마샬과 상단 일행들도 저녁을 먹거나 잠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아니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도망이야. 그리고 헨리씨가 정말로 날 노예로 팔려고 한다고 볼 수도 없잖아. 무엇보다 상단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어.”
 자신을 속여서 노예로 팔려고 한다기보다는 행여나 자신이 화를 낼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고연우가 한손에 들고 있던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게다가 나에겐 이게 있잖아.”
 무엇보다 고연우의 몸은 아바타 란슬롯의 몸이었다.
 처음에는 몸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유토피아에서는 저레벨의 몸이지만 이쪽 세상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체화된 란슬롯의 몸이라면 상단을 호위하던 용병들과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고연우는 헨리 마샬과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헨리 마샬의 방을 알지 못했던 고연우는 일단 1층으로 내려가 상단 사람이나 여관 종업원에게 헨리 마샬의 방을 물어보기로 했다.
 “응? 무슨 일이지?”
 1층으로 내려오니 상단의 용병들이 누군가와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
 용병대장 무스를 비롯한 용병들의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상대편 역시 인상이 참으로 험악했다.
 상대편 중의 누군가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휘리리리릭!
 그런데 하필이면 그 단검이 위층에서 막 내려오던 고연우를 향했다.
 “응?”
 보통 사람 같았으면 갑자기 단검이 날아오는 것이 꽤나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고연우는 그리 많이 놀라지 않았다.
 “이게 바로 아바타의 힘이구나!”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빠르게 날아가는 단검이 고연우의 눈에는 천천히 날아오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고연우는 원래의 자신의 몸이 아닌 36레벨 아타바 란슬롯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몸과 정신의 싱크로율이 백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터억!
 고연우가 빠르게 날아오던 단검을 피하는 것도 아니라, 손으로 그냥 잡아버렸다.
 단검이 날아가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단검으로 쏠렸다.
 자연스럽게 그 단검이 노리고 있는 고연우에게로 시선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들 고연우가 단검에 맞거나 급히 몸을 숙여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빠르게 날아가던 단검을 그냥 손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말이 쉽지 날아오는 단검을 손을 잡는 것은 베테랑 기사들도 하기 힘들 일이다.
 고연우의 묘기같은 손놀림을 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마냥 놀라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감히 그걸 잡아! 어디 이것도 잡아봐라!”
 단검을 던졌던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고연우를 향해서 또다시 2개의 단검을 던졌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무슨 짓이야!”
 날아오는 단검을 손으로 잡음으로 해서, 자신의 몸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가중된 고연우가 들고 있던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짧게 휘둘렀다.
 티잉! 티잉!
 강철의 투 핸드 소드에 맞은 2개의 단검이 좌우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단검의 사내가 더욱 격분하며 소리쳤다.
 “야, 저 새끼 잡아!
 단검의 사내의 일행들로 보이는 자들이 고연우를 향해서 우르르 움직였다.
 “어허! 우릴 빼놓으면 섭섭하지!”
 용병대장 무스와 용병들이 고연우를 공격하려는 적들의 측면을 공격했다.
 고연우의 등장만으로 용병들과 적들 간의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고연우가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면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한 단검의 사내가 소리쳤다.
 “젠장! 너희들 사람 잘못 건드렸어!”
 단검의 사내가 고연우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특히 너, 얼굴 반반한 놈! 뒤통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단검의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여관 밖으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용병들이 그들의 뒤를 쫓으려고 하자, 용병대장 무스가 제지했다.
 “그만둬,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야. 하물며 지금은 시야를 확보하기 힘든 밤이야. 괜히 뒤쫓아 갔다가 반대로 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상단 거래도 끝내지 않았잖아. 괜히 시끄럽게 일을 키웠다가 거래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아.”
 용병대장 무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각자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렇게 대충 상황 정리가 끝나자, 1층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헨리 마샬이 고연우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아,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그게···.”
 헨리 마샬의 상단이 롱마이어 영지에 도착할 때는 해가 막 저물려고 하는 초저녁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약속된 거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헨리 마샬은 일단 ‘어머니의 정성’이라는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오는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고연우를 1인 특실로 먼저 올려 보낸 헨리 마샬은 거래할 물품을 여관의 창고에 넣어두고 일행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그때 영지의 건달로 보이는 자들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건달들은 여관 주인을 보며 보호비를 내라고 협박을 했다.
 건달들의 행위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용병대장 무스가 건달들을 막아 세우면서 건달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다른 일도 아니고 건달들에게 시달리는 여관 주인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생긴 일이라고 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긴 걸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용병대장 무스를 비롯해 용병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험악하기에 처음에는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역시 사람은 얼굴로 판단할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라도?”
 “아, 아닙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던 고연우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불편한 게 있으며 말씀만 해주십시오.”
 여전히 고연우가 고위 귀족이라고 오해하고 있던 헨리 마샬은 최대한 저자세를 취하며 고연우의 눈치만 살폈다.
 “아, 그게···.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제 방에 가시죠.”
 이렇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헨리 마샬이 자신을 속여서 노예로 팔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용병들도 생각보다 착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던 고연우는 일단은 헨리 마샬 혼자만 방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 싸움을 할 줄 모르는 헨리 마샬을 인질로 삼아 도망칠 계획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여전히 고연우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헨리 마샬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연우의 1인 특실로 향했다.
 1인 특실로 들어온 고연우는 들고 있던 강철의 투 핸드 소드를 내려놓았다.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잡을 수 있게 바로 옆에다가 내려놓았다.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돌려서 말하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혹시 저한테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신 겁니까?”
 “예? 아, 그건···.”
 헨리 마샬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역시나 흑심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연우의 손이 옆에 비스듬하게 세워놓은 강철의 투 핸드 소드로 향했다.
 “사실 전 알고 있습니다.”
 헨리 마샬의 의미심장한 말에 강철의 투 핸드 소드로 향하던 고연우의 손이 멈췄다.
 “알고 있다니··· 뭘 말입니까?”
 
 ***
 
 건달들의 난입으로 인해서 중단되었던 저녁식사를 마친 용병대장 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대장, 왜 벌써 일어나는 거요?”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야지!”
 “난 됐으니까, 너희들이나 실컷 마셔라. 돈은 내가 내마.”
 “오오!”
 “정말?”
 “그럼 우리야 고맙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시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목숨처럼 생각하는 술을 쏜다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신이 난 용병들이 평소 알고 있던 술의 이름을 대며, 끝없이 주문을 늘어놓았다.
 용병들의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휩쓸린 상단 사람들 역시 술을 주문하며 음주를 즐겼다.
 그 사이에 용병대장 무스가 조용히 여관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병대장 무스가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시커먼 그림자 몇 개가 그의 뒤를 덮쳤다.
 “형님!”
 용병대장 무스에게 형님이라고 말한 자는 놀랍게도 조금 전 여관에서 싸웠던 건달들이었다.
 용병대장 무스가 얼굴을 구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형님이라니! 항상 입조심 하라고 했지!”
 “거참,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먼. 알았수다. 우리 아지트로 갑시다.”
 용병대장 무스는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건달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아지트에 도착한 건달패의 두목 크랭이 말했다.
 “형님, 아까 그 ‘걸조’는 누구요?”
 “걸조? 그게 무슨 말이냐?”
 “걸조란 ‘걸어 다니는 조각상’을 말하는 거요. 아까 내 단검을 손으로 잡은 그놈 말이요.”
 “아, 그 귀족?”
 “역시 귀족이었어. 어쩐지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그나저나 그런 놈이 있다는 말은 없었잖소?”
 “그렇게 됐다.”
 “그럼, 그 걸조 때문에 헨리 마샬이라는 놈이 아직 살아있는 거요?”
 용병대장 무스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원래 용병대장 무스는 롱마이어 영지 근처에서 헨리 마샬을 살해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고연우가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살해 계획이 뒤로 미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했던 건달 두목 크랭은 약속했던 대로 용병대장 무스를 만나기 위해서 ‘어머니의 정성’으로 향했다.
 용병대장 무스가 헨리 마샬을 죽이면 건달 두목 크랭이 부하들과 함께 뒤처리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관에 도착해보니, 죽었어야 할 헨리 마샬이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달 두목 크랭은 즉시 용병대장 무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용병대장 무스가 둘 사이에서 사용하는 신호를 보냈다.
 건달 두목 크랭은 용병대장 무스가 시키는 대로 여관에 보호비를 뜯으러 온 것처럼 위장했다.
 그와 동시에 용병대장 무스가 건달 두목 크랭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 모든 것은 용병대장 무스의 음모였다.
 갑자기 나타난 고연우 때문에 헨리 마샬을 죽이지 못한 용병대장 무스가 건달 두목 크랭과의 싸움을 빌미로 헨리 마샬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고위 귀족 고연우는 1인 특실에 올라간 상황이다.
 용병대장 무스는 고연우가 없는 틈을 노려, 건달 두목 크랭과의 혼란한 싸움을 틈타 헨리 마샬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1층으로 내려온 고연우로 인해서 또다시 헨리 마샬을 살해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어떡하긴. 상단 거래 끝내고 돌아갈 때 쓱싹! 해야지.”
 “오, 그러면 되겠군요. 역시 형님의 잔머리는···.”
 용병대장 무스와 건달 두목 크랭의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쯤, 기사들이 착용하는 판금 갑옷을 입은 사내가 건달들의 아지트로 들어왔다.
 “헨리 마샬이 아직 살아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용병대장 무스와 건달 두목 크랭이 기사로 보이는 자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큰형님.”
 “형님, 오셨습니까.”
 “인사는 됐고. 정말 헨리 마샬이 아직 살아있냐?”
 건달 두목 크랭이 떠넘기듯이 용병대장 무스를 쳐다보았다. 용병대장 무스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입니다.”
 용병대장 무스의 설명을 들은 롱마이어 영지의 수석기사 오와트가 말했다.
 “진짜 귀족인거 확실해? 어느 가문사람인데?”
 용병대장 무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것까지는···.”
 수석기사 오와트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 멍청한 새끼! 어디서 얼빵하게 사기를 당하고 와서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 고위 귀족?! 넌, 귀족들이 혼자 다니는 거 봤냐! 기사가 없으면 종자라도 데리고 다니는 것이 귀족이다! 하물며 고위 귀족이면! 어휴, 내가 그동안 이런 멍청한 놈과 일을 하고 있었다니. 이제껏 살아있는 게 용하다, 용해!”
 용병대장 무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 분 아니 그 새끼! 귀족 맞습니다.”
 용병대장 무스가 건달 두목 크랭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 너도 말 좀 해줘.”
 “예? 무스 형님, 저한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전 아까 여관에서 한번 본 게 전붑니다. 그 한번으로 그놈이 진짜 귀족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야! 너도 그놈 얼굴 봤잖아!”
 “보기야 봤죠. 근데, 내가 우리 왕국의 귀족 얼굴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네가 보기에는 그게 사람 얼굴로 보였냐?”
 다시금 고연우의 인간 같지 않는 얼굴을 떠올린 건달 두목 크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걸조’ 그놈이 잘생기기는 엄청 잘생겼죠.”
 수석기사 오와트가 말했다.
 “걸조? 그게 그놈의 이름이냐?”
 “아뇨. 그게···. 그놈이 ‘걸어 다니는 조각상’처럼 잘 생겼다고 해서···.”
 “에라이, 이놈이고 저놈이고!”
 수석기사 오와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건달 두목 크랭을 쳐다보았다.
 “큰형님이 못 보셔서 그래요. 그놈 얼굴 보면 제가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이해가 된다니까요.”
 “됐다, 내가 사내새끼 얼굴을 봐서 뭐하려고.”
 수석기사 오와트가 용병대장 무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봐라.”
 “아, 예. 크랭도 말했다시피 그놈 얼굴이 정말 끝내줍니다. 평민으로써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런 얼굴이라니깐요. 무엇보다 그놈이 입고 있는 갑옷이랑 들고 있던 투 핸드 소드는 어지간한 귀족은 구경도 하기 힘든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야, 너도 그놈이 입고 있는 갑옷이랑 투 핸드 소드 봤지?”
 건달 두목 크랭이 용병대장 무스의 말이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기사 오와트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는 몰라도 귀족인 것은 확실하다?”
 “예. 헨리 마샬 그 작자가 그 귀족한테 연줄을 대려고 어찌나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던지. 그렇다고 같이 있는 그 귀족까지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랬다가 나중에 일이 커지면 괜히 우리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상단 거래 끝내고 돌아갈 때, 쓱싹! 하려고 하는데, 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자기 딴에는 잔머리를 잘 굴렸다고 생각한 용병대장 무스가 칭찬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수석기사 오와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수석기사 오와트는 그런 무스를 칭찬하기 보다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 자기만의 사색에 빠졌다.
 피부가 벗겨질 듯, 계속해서 자신의 턱을 매만지던 수석기사 오와트의 손이 멈췄다.
 수석기사 오와트가 뱀처럼 음흉하며 차가운 두 눈을 번뜩였다.
 “고위 귀족이라··· 어쩌면 더 잘 된 걸지도 모르겠군.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고위 귀족이라는 놈을 이용해보자. 야, 너희들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일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해야 한다.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날에는 나는 물론이고 너희들까지··· 알지?”
 
 ***
 
 어머니의 정성 1인 특실.
 고연우가 정색을 하며 헨리 마샬을 쳐다보았다.
 “알고 있다니··· 뭘 말입니까?”
 헨리 마샬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솔직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짐작하고 계시는 대로, 어떻게든 란슬롯님과 친분을 쌓아서 인맥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그러니까 내게 잘해준 이유가 친분을 쌓아서 인맥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거라고? 하지만 난 귀족이 아닌데?’
 “저기··· 제가 귀족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잊으신 겁니까? 전 친분을 쌓아서 인맥으로 사용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도대체 뭘 알고 계시다는 겁니까?”
 “저같이 하찮은 장사꾼이 주제도 모르고 인맥을 쌓으려고 하자, 그에 대한 대비로 귀족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신 거 아닙니까? 저도 한때 잘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하며 지금과 같은 일을 종종 경험했었습니다. 더 이상 귀찮게 해드리지 않을 테니,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연우는 그제야 헨리 마샬이 여전히 자신을 고위 귀족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계속 귀족이라고 우겨? 아니야. 그러다가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비록 헨리 마샬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이곳 세상에서도 귀족 사칭은 큰 범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헨리 마샬이 오해하고 있는 대로 계속 귀족을 사칭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당분간은 편하게 지낼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특히나 자신은 이쪽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다. 사기를 치려고 해도 뭘 알아야 사기를 칠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귀족을 사칭했다가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괜히 어물거려서 오해가 깊어지게 만들기 보다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그렇게 생각한 고연우는 다시금 자신의 진짜 신분에 대해서 자백을 하기로 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전 귀족이 아닙니다.”
 고연우가 거듭해서 귀족이 아니라고 말하자, 헨리 마샬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신은 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정말 귀족이 아니십니까? 하지만 그 엄청난 얼굴하며 그 어마어마한 무구는···.”
 “지금은··· 귀족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귀족이었습니다. 대략 50여 년 전쯤에 가문이 몰락했습니다.”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헨리 마샬을 비롯한 상단 사람들에게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이걸 바꿔 말하면 신분이 낮으면 그만큼 대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평민의 위상이 생각 이상으로 나쁘다는 것을 직감한 고연우는 평민보다는 신분이 더 높은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평민이라고 밝혔다가 가지고 있는 무구들을 훔쳤다는 누명을 쓸 것 같았다.
 헨리 마샬이나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로 봐서는 그럴 확률이 높아보였다.
 그래서 자신을 몰락귀족이라고 소개를 한 것이다.
 단순히 신분이 좀 더 높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몰락귀족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몰락귀족이라고 말한 것에는 또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
 “할아버지 때 가문이 몰락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 할아버지께서 가문의 사람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힘을 키워 다시금 가문을 일으켜 세우실 요량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비롯한 가신들까지 모두 죽고 저 혼자만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저 혼자 산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괜히 혼자서 산속에 있다가 저마저도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말로만 듣던 바깥세상이 궁금하기도 해서 이렇게 산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뭐, 그 다음은 아실 겁니다.”
 “아, 그랬군요.”
 헨리 마샬이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가지고 있는 무구들은 가문이 온전할 때 가지고 있던 것이군. 그렇지 않아도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분이 종자나 노예도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였군.’
 “가족을 잃었다니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습니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연우의 너무나도 그럴싸한 거짓말에 감쪽같이 넘어간 헨리 마샬.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그동안 산속에서만 생활하다보니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니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 앞이 캄캄합니다.”
 ‘좋았어. 이렇게 이야기해놓으면 이쪽 세상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
 그동안 산속에서만 생활하여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몰락귀족의 후예.
 나름 설정을 잘 잡았다고 생각한 고연우가 속으로 매우 흡족해했다.
 “흐음-, 그러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실 저에게···.”
 헨리 마샬이 얼마 후면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할 금광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저 보고 그 금광을 관리해달라는 겁니까?”
 “예. 아! 제 제안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은 체면과 명예를 아주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돈을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 못지않게 돈을 밝히는 족속이 바로 귀족이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니 돈을 너무 밝히면 속물처럼 보일까 싶어서 내색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고연우가 비록 몰락귀족이라고 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같은 귀족도 아닌 평민인 자신이 그것도 돈으로 고용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니 귀족의 체면과 명예를 생각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헨리 마샬의 그런 걱정과 달리 고연우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금광의 관리자라.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자를 하는 동안 이 세상에 대한 지식과 돈을 모으면 되겠군. 근데, 헨리 마샬은 왜 처음 보는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이젠 고위 귀족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는데, 계속해서 호의를 베푸니 또다시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헨리 마샬에게는 헨리 마샬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다.
 ‘몰락 귀족이라고 해도 귀족은 귀족. 란슬롯 경이 말한 것처럼 세상물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란슬롯 경 혼자서는 절대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헨리 마샬에게는 금광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끊어지기는 했지만 돈으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나름의 인맥도 있었다.
 이 두 가지만 잘 이용한다면 고연우의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었다.
 ‘란슬롯 경은 그동안 산속에서만 생활했다고 했으니 홀몸이 분명해. 당연히 여자에 대해서도 잘 모를 테고. 이런 란슬롯 경에게 내 딸 에이미를 붙여준다면···.’
 헨리 마샬에게는 올해 16살이 된 첫째 딸 에이미와 13살이 된 아들 피터 그리고 7살짜리 막내아들 바락이 있었다.
 헨리 마샬은 고연우와 자신의 딸 에이미를 어떻게든 엮어줄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고연우가 절세 미남이기는 하지만 산속에서 생활하느라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제법 미색이 출중한 자신의 딸 에이미를 은근슬쩍 밀어붙이면 고연우도 홀라당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헨리 마샬이 이유 없이 자신의 딸 에이미와 고연우를 이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금광이 개발되기 시작하면 온갖 똥파리들이 뭐 하나라도 주워 먹으려고 몰려들 것이다.
 에드몬드 백작이 바람막이가 되어준다고 했지만 그래봤자 그 역시 남이다.
 하지만 사위는 다르다. 사위도 가족은 가족이다. 특히나 고연우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혈혈단신이다.
 의지하고 기댈 곳이라고는 헨리 마샬 밖에 없으니 헨리 마샬에겐 가장 이상적인 사위인 셈이다.
 몰락귀족이라고 해도 평민보다는 끗발이 세다.
 똥파리들이 평민인 헨리 마샬은 쉽게 건드려도 몰락귀족인 고연우는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 사이에 금광에서 벌어드린 돈으로 고연우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면 더더욱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고연우는 몰락했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장인인 자신을 더욱 고맙고 어렵게 생각할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연우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후, 귀족가문의 대소사를 자신이 관장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대외적인 신분은 여전히 평민일지 몰라도 사실상 귀족이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고연우가 몰락귀족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여기까지 계산을 마친 헨리 마샬은 어떻게든 고연우와 자신의 딸 에이미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래, 란슬롯 경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윗감이야. 우리 딸 에이미, 이렇게 잘생긴 신랑을 소개시켜준 아빠한테 평생 고마워해야한다!’
 그렇게 헨리 마샬이 자신만의 원대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 어머니의 정성 1층에서는 난리가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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