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과 믿음
5시. 어스름하게 해가 뜨기 전, 이건은 이 시간을 좋아했다.
탁! 탁!
호흡은 일정하게, 왼발에 들이마시고 오른발에 내뱉는다.
새벽의 찬 공기가 폐부를 차갑게 스쳐 간다.
아침에 1시간 30분을 꼬박 뛰고 나서야 집에 들어가는 것, 벌써 3년째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쯤이면.’
어머니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할 것이다.
구수한 된장국의 냄새나 빵이 구워지며 나는 고소한 향기의 기억이 입에 침이 고이게 했다.
빵이든 밥이든, 아침에 뛰고 난 이건은 꽤 배가 고팠다.
물론 이 정도의 운동량이라면 배고플 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항상 빨라진다.
기대감을 안고 이건이 외쳤다.
“다녀왔습니다!”
보통과 다름없는 일상적인 인사와 함께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응?’
평소와 다른 싸늘한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비릿한 냄새에 이건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잡았다.
“엄마?”
이건의 부름에 들려온 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크르르르.
오싹.
소리를 듣는 순간, 고개가 그쪽으로 절로 향했다.
짙은 어둠 사이에서 빛나는 두 개의 안광이 보였다.
인간보다는 아주 낮게 깔린 그 빛은 이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개?’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들이민 그것은 분명 긴 주둥이를 가진 개로 보였다.
말라뮤트나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크르르르.”
침을 흘리며 이를 가는 짐승을 보며 이건은 생각을 고쳤다.
‘개가 아니라.’
회색 털의 늑대였다.
늑대는 붉은색으로 젖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심장이 쫄깃해지고, 발이 굳었다.
실제로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몇 분을 이렇게 멈춰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이건의 눈에 어머니가 입던 앞치마가 보였다.
파란색 바탕에 노란 해가 그려져 있는.
‘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마치 누군가 뺨이라도 때린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늑대로만 가득 차 있던 시야가 넓어지니, 피범벅이 된 셔츠와 흥건히 고인 피, 찢긴 살점이 보였다.
“커엉!”
그 순간, 늑대가 달려들었다.
“악!”
동시에 이건이 몸을 숙이고 앞으로 굴렀다.
반사적인 이 행동은 90%는 운이 작용했고, 그 덕에 이건은 살 수 있었다.
“크오!”
늑대는 일격을 실패한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다시 이건에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우아아악!”
당황해 목소리가 커지고, 간신히 무언가를 들어 늑대의 주둥이에 던졌다.
손잡이 부분이 바래서, 후줄근한 브리프케이스였다.
평소 아버지가 출근할 때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이었다.
‘올해 생신 때 어머니랑 함께 가방 선물하자고 했었는데.’
“아!”
외마디 소리를 내뱉고 나서야, 이건은 무의식적으로 피한 그 사실을 인지했다.
아니, 알아야 했다.
부모님이 죽었다.
19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던 존재의 죽음이었다.
소설에서처럼 마지막 숨이라도 붙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이건의 부모는 그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크릉!”
늑대가 다시 덤벼든다.
긴박한 순간에 이건의 두 눈에 담긴 빛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그건 명백한 분노였다.
“이 개새끼가!”
이건이 외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텅!
덕분이었다. 이건이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늑대의 공격이 빗나갔다.
앞발을 휘두른 그 일격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늑대의 발이 반쯤 바닥에 박혔다.
그 모습을 보고 이건은 조금이나마 냉정해졌다.
워낙 압도적인 힘을 본 탓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 늑대에 대한 살의를 접은 건 아니었다.
‘맨손으로는 안 돼.’
분노와 별개로 머리는 차가워졌다. 이건은 주방으로 달렸다.
스릉!
언제나 주방 위에 놓여 있는 칼집에서 가장 긴 식칼을 뽑아 들고, 뒤를 돌아보자.
타다닥!
늑대가 어느샌가 발을 빼 쫓아오고 있었다.
살의를 피우고 이를 드러내며 주둥이를 들이민다.
딱!
허공에 늑대의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푹 수그리며 공격을 피한 이건이 늑대의 밑에서 칼을 치켜들었다.
“뒈져!”
번쩍!
순간 빛이 보인 듯했다.
푸우우욱!
손에 든 식칼이 단숨에 밑동까지 박혔다.
그 힘에 손이 미끄러지며 이건의 손도 칼날에 베였다.
뚝.
“크윽.”
손바닥이 타는 작열감에 신음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피가 한 방울 떨어지고.
“끼이이잉.”
늑대가 구슬피 울었다.
목을 뚫고, 박힌 칼날은 완벽하게 적의 생명을 취했다.
아니,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그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는 이는 없었다.
이건은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또 다른 식칼을 쥐고 있었다.
끝이 뭉뚝해서 어머니가 곧잘 버리자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걸 들고 비정상적인 생명력을 발휘하는 늑대에게 다가간다.
퍽! 퍽!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긴다.
찌르고 또 찔렀다.
퉁.
망가진 칼날 위로 이건 자신의 피도 스며든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공구함으로 향했다.
늑대는 이미 생을 마감했지만.
빠각!
이건은 망치를 가져와 짐승의 머리통을 바쉈다.
쪼개지고, 찢어지고, 늑대의 사체가 갈기갈기 걸레짝이 되어갔다.
찌잉.
뇌를 꿰뚫는 듯한 기묘한 울림, 동시에 이건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강렬한 두통이 엄습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윽!”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니 적어도 볼썽사납게 넘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이건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탁. 주르르륵.
쓰러지며 뻗은 손이 벽에 닿고, 벽에는 위에서 아래로, 긴 한 줄기 혈선이 생겼다.
*
“야, 이런 경우 본 적 있냐?”
“···아뇨.”
먼저 말을 한 이는 30대 중반의 사내, 그는 눈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이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젓는 자신의 후배를 보고 사내가 재차 물었다.
그의 물음은 대답을 요구하기보다는 동조하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시발, 너 맨손으로 5등급 회색 늑대 잡을 수 있어?”
후배라 불린 사내는 그래서 그의 물음에 충실히 답했다.
“···아니요.”
“그럼, 능력자도 아닌데 잡을 순 있어?”
“에이, 말도 안 돼요.”
“그럼 이 새낀 뭐야? 하물며 이거 아직 애잖아.”
“글쎄요.”
“일단은, 데려가자.”
“어차피 이 판국에 놔두고 갈 수도 없죠.”
선배라 불린 사내가 이건을 둘러업었다.
“야, 시체는 치우고 와.”
“네.”
그러자 다른 사내 하나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팬시점에 있을 것 같은 네모난 종이상자였다.
그것도 겨우 손바닥만큼도 안 되는 크기였다.
“에, 어디까지가 늑대 피야?”
몬스터의 피가 남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모르겠다. 전부 가져가지, 뭐.”
쭈우욱!
그 작은 상자에 시체 두 구와 몬스터 사체가 빨려 들어갔다.
“가자!”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그가 답했다.
“네! 가요!”
*
이건이 눈을 뜨고 처음 본 건, 순백의 천정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넓지 않은 공간이 보였다.
흔한 TV도 없고 창문도 없는, 사방이 막힌 곳.
하지만 굳이 이곳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병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 명뿐이지만, 침대가 있고 그 침대에 누운 자신의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으니까.
위이잉.
한쪽에서 환풍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정신을 잃기 전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꿈?’
“아, 일어났네.”
끼익.
한 사내가 침대 옆, 접이식 철제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황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무의식적인 물음이 나왔다.
“여긴?”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리하지 마라. 지금은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부모님은요?”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서 물었다.
지금 이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모든 게 꿈이었다, 또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일이 거짓이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이건은 그 모든 일이 진실임을 알았다.
‘아니, 사실이라고 해도.’
그 시체 두 구가 꼭 자신의 부모란 법은 없다.
‘그럴 수 있어.’
이미 모든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도피를 위해 하는 그런 망상이었다.
“너, 봤을 텐데.”
사내는 냉정했고, 그는 굳이 이건의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이건은 턱을 덜덜 떨며 물었다.
“꿈 아니었나요?”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냉정한 표정과 맞물려 진실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사내가 준 가혹한 대답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건에게 사내는 가볍게 말을 건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머리가 좀 복잡하겠지.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하지.”
철컹.
의자가 접히는 소리가 나고.
일어난 사내가 검은 얼룩이 진 흰 벽에 접은 의자를 비스듬히 세워두고 나갔다.
‘일어나야 돼.’
하지만 의지만 있을 뿐, 행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감각은 희미했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위뿐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것도 중요치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었으니까.
주르르륵.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꾹 참고 입술을 깨물던 이건이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을 내지른다.
“아아, 아아악!”
부모를 잃은 아이, 그리고 그 참상을 실제로 본 소년의 포효였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좌절이었고, 우울함보다는 괴로움이었다.
사내가 돌아온 건, 이건의 울부짖음이 그치고도 30분이나 지나서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금 모든 감정을 소리와 표정으로 표현해야 하는 이건은 기진맥진했다.
그만큼 현재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한 셈이었다.
“괜찮나?”
“아니요.”
괜찮을 리가 없다. 이건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기운이 없다. 무엇보다 사내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시켜 준 사내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현실 순응은 빠른 편인 것 같은데?”
사내의 말을 들은 이건은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사방 누구든 가리지 않고 쏟아내야 할 울분과 화였다.
그 화를 풀기 위해, 째지는 고함이라도 지르려던 찰나였다.
이건의 외침보다 사내가 한 발 빨랐다.
“부모님 다시 살리고 싶지 않나?”
덜컥.
몸이 태엽인형이라면 지금 덜컥하고 태엽이 멈췄을 것이다.
지르려던 비명은 사라지고, 이건의 눈이 사내를 향한다.
‘···뭐라고?’
의문을 담은 이건의 눈이 그제야 사내의 복장을 살핀다.
깔끔한 검은색 정장 차림, 머리는 길지 않았고, 얼굴은 평범한 편이었다.
내심은 벌써 믿으면서도, 아니 믿고 싶었음에도.
이건은 그 기대감이 깨졌을 때의 괴로움이 싫어 반어법으로 물었다.
“농담하는 거죠?”
사내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부모를 잃은 사람의 앞에서 지을 얼굴도, 태도도 아니지만, 잘 어울렸다.
‘차가운 미소.’
솔직히 그의 미소는 얼음장보다 차가운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드르르륵.
벽에 세워 둔 철제 의자를 가져와 다시 척 하고 편 뒤.
궁둥이를 붙인 사내는 의자와 어울리지 않은 바른 자세였다.
“참고로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모두 진짜고, 실현 가능한 일이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안 믿는다면 기회조차 없겠지.”
사내가 말한 기회란 뻔했다.
부모를 이생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사실 지금 이건은 피라미드 회사가 다이아몬드 등급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고,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끌어들인다 해도 그들을 따랐을 것이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으니까.
철제의자에 앉은 사내의 말은 너무 절묘했다.
아이가 현실을 직시하고 절망에 빠져 무력감에 젖었을 때, 그 아이가 꿈에도 바라지 않던 제안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살리고 싶지 않나?
이건 객관식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지선다, ‘예’와 ‘아니오’의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건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고, 그는 그걸 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 냉막한 인상의 사내에게 이건은 답을 해야 했다.
그가 원하는 그 답을.
“믿어요. 살리고 싶어요.”
이건의 말에 사내의 얼굴에는 더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 괴물
“유이건, 19세.”
승원은 책상에 발을 올리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서류를 살폈다.
5등급 회색늑대를 죽인 아이.
죽였다는 사실만을 보자면, 큰일은 아니다.
‘5등급 몬스터야, 뭐.’
문제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죽였다는 게 특별하지.
승원은 버릇처럼 이건의 과거를 뒤졌다.
졸업한 초등학교, 중학교, 들었던 서클, 주변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없어.’
그 어디에도 훈련한 기록도, 그런 내용도 없다.
진짜 말 그대로 민간인이다.
평범한 아이, 그게 유이건이다.
‘다른 점이야 있지만.’
보통 아이와 다른 점은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꿈과 목표가 명확했다.
바라는 게 있고, 그걸 위해서 하루를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부지런했고, 학업성적도 좋았다.
흔히 말하는 천재, 영재는 아니지만, 수재 정도는 되는 아이였다.
탁.
승원은 책상을 소리 나게 내리쳤다.
결론이 났으니까.
그러니까, 아이에게서 자신이 보고자 했던 특별함은 없다.
“똑똑하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것 같은 그런 아이였다.
죽은 부모는 아이를 볼 때마다 뿌듯했을 것이고, 아이는 그런 부모의 기대를 충족해줬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회색 늑대를 잡았을까?
‘시간이 되면 한번 만나보고 싶군.’
물론 그의 바람과 달리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원의 입장에서는 접근하기가 굉장히 곤란한 사람의 손에 아이가 있었으니까.
*
“내 이름은 김도민이다.”
“네.”
“넌?”
“네?”
“서로 소개부터 해야지.”
“유이건이요.”
“나이는?”
“열아홉이요.”
도민은 이건의 침대 앞에 서 있었다.
팔락.
그는 파일을 하나 들고 와 연신 넘기며 질문을 했다.
이건은 그 질문에 얌전히 모두 답해야 했다.
‘필요한 일이겠지?’
부모를 살리는 데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도민의 입에서 ‘포기하자’는 말이 나오는 게 더 무서웠다.
아니면, ‘그건 사실 지독하고 못된 장난이었어.’라고 한다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것이다.
아니면, 절망에 빠져 괴로움에 몸부림치겠지.
“키는?”
“한 180cm 정도 될 거예요.”
“정확히는 181cm네.”
“조금 더 컸나 보네요.”
“몸무게?”
“73kg요.”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그 외에도 신변잡기에 관한 질문이 줄을 이었다.
이건은 신중하고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본래 꿈이 마라토너였나?”
사내, 김도민이 보는 서류에는 3년 동안 아침에 10km 이상을 달렸던 기록이 있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라는 특이사항도 함께 말이다.
“아뇨.”
하지만 이건이 고개를 저었다.
도민이 그걸 보고 돌려 질문했다.
“그래? 달리는 게 특기이자 취미라고 하던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그게 꿈이었어요.”
이건의 본래 속마음이었다.
달리기든, 뭐든 올림픽에 나가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새삼 도민을 보며 이건은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그 부모를 돌려준다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든, 천하의 악당이든 현재 이건에게는 가장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금메달리스트?”
“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달리는 거였고요.”
“으흠.”
그런데 그렇게 의지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이건은 그를 쉽게 믿지 못하고 있었다.
‘특이한 사람.’
이건은 도민을 보며 생각했다.
잘 웃지만, 입가와 광대뼈만 움직인다.
도민이 이건을 보고 웃을 때, 눈은 항상 그대로였다.
차갑고 시린 눈.
이건은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주변 사람의 기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일종의 육감이 발달한 건데,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곤 했다.
그래서였다.
그를 믿어야 이 모든 일이 의미가 있음에도, 부모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목적이 걸려 있음에도.
선뜻 완벽하게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탁!
도민이 들고 있던 파일을 닫았다.
“좋아. 기절하기 전은 기억하나?”
“네. 두통이 있었어요. 머리가 아주 아팠던 게 마지막 기억이에요.”
“그 전은?”
“부모님 시체를···.”
“아,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네. 감사합니다.”
그 순간은 아직 이건에게는 트라우마였다.
도민이 그걸 고려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건으로서는 그 일은 최대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도민은 쉴 틈 없이 다시 질문했다.
“그럼 그 늑대는 기억나지?”
“네. 덩치가 큰, 정말 늑대였어요? 처음에는 개가 아닐까 했거든요.”
“아니야. 늑대 맞다.”
“아, 정말요?”
놀라는 이건을 보고 도민은 요구했다.
“그 늑대를 어떻게 죽였는지 얘기해줄 수 있을까?”
도민의 태도에는 은근한 강압이 있었지만, 이건은 애써 그런 느낌을 털어냈다.
그리고 되도록 차분하게 그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반쯤 미쳐 있었고, 이건이 한 얘기가 완벽하게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았지만.
도민은 묵묵히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망치로 쳤어요.”
이건의 말이 끝나자, 도민의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칼을 들고 찔렀더니, 그냥 푹 하고 들어갔다고?”
“생각나는 무기가 부엌칼밖에 없었어요.”
가정집에서 무기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하다.
문제는 지금 이 일을 19세 소년이 했다는 거지.
“좋아. 얘기는 잘 들었다.”
말하고 도민이 오른 손목을 들었다.
‘시계를 오른손에 차는구나.’
은빛으로 빛나는 그 시계는 감히 이건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가로 보였다.
시간을 확인한 도민이 입을 열었고.
“난 내일 다시 오마. 그때까지는 쉬는 게 좋겠다.”
이건은 급하게 물었다.
“아, 네. 그런데 제 몸이 안 움직여서요. 혹시 마취제 같은 걸 맞은 건가요?”
도리도리.
“아니다. 그건··· 내일 설명해주마.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도민이 밖으로 나가고, 적막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이건은 자기도 모르게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도 없고, 흔한 TV도 없다.
위이잉.
환풍기 팬이 돌아가지만, 오히려 그 소리가 더 섬뜩했다.
몸이라도 움직이면 웅크리기라도 할 텐데.
목 아래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에 눈이 갔다.
‘여기에 마취제가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지독한 단체에 잡혀 온 걸까?
그리고 지금 부모님의 부활을 미끼로 자신이 속은 걸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무언가를 제공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뭘 위해서? 장기밀매라면 그냥 떼어 가면 그만이다.
그런 일은 도시 괴담처럼 들었을 뿐, 이건에게는 아주 먼 얘기였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거고.
고작 열아홉 살의 소년, 이건이 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그에게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관두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선택은 이건이 아니라 도민이라는 그 남자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병실이 아니라 감옥 같아.’
그런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여러모로 보아 이곳은 치료라기보다는 감금을 위한 곳으로 보였다.
그의 눈이 도민이 나간 출입구 손잡이로 향한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 잠금장치가 보인다.
흔한 열쇠 구멍도, 안에서 잠그거나 열 수 있는 장치도 안 보인다.
밖에서 가두면 아무것도 못 하는 그런 형태였다.
이건은 애써 불안함을 털었다.
‘아닐 거야. 우선 부모님을 살리는 것, 그것에 집중하자.’
*
‘그 시계는 얼마일까?’
이건의 집은 그리 잘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편도 아니었다.
고3 수험생을 위해 생일선물로 30만 원가량의 시계를 선물할 정도는 됐으니까.
어릴 때부터 시계를 좋아한 이건은 도민이 찬 시계의 가격이 궁금했다.
‘최소 C사 제품인 것 같던데.’
사소한 고민을 하는 건 이건의 정신이 이완하는 데 도움이 됐고.
덕분에 이건은 고통과 공포보다는 호기심을 먼저 꺼낼 수 있었다.
‘아, 시계 상표 잘 볼걸.’
덜컹.
이 방의 문은 어떻게 된 건지 열리면 꼭 소리가 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이 눈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일종의 간병인으로 40대 중반쯤 되는 여인이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의 물음이 허공을 때리고, 돌아갈 곳이 없어 사라졌다.
그녀는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건도 혹시나 해서 물은 거지,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건 꽤 끔찍한 태도여서 공포를 일으켰지만, 정작 이건은 그것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녀가 전신의 옷을 벗겨 닦아주고 대소변까지 다 치워주니까.
거기에 음식을 떠먹여도 준다.
‘아, 진짜 흑역사다.’
인간의 정신은 유연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아픔도, 슬픔도 금방 극복해낸다.
거기에 이건에게는 지상목표가 있었다.
부모님을 살려야 한다는.
덕분에 이건은 빠르게 자기 페이스를 찾아갔다.
물론 완전하게 슬픔을 털어낸 건 아니지만, 적어도 희망을 품고 그 슬픔을 뒤로 밀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특별해야 믿을 수 있지.’
그리고 이 여자의 태도도, 김도민이 비밀이 많고 음흉한 것도.
일견 안심이 되기도 했다.
사람을 살린다고 하면서 성수를 이건의 머리 위에 뿌리거나 강령이라며 영혼을 불러온다고 촛불을 밝혔다면 그 순간 바로 절망했을 것이다.
잘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이건은 믿음이 생겼다.
‘이들은 특별해.’
자신을 가둔 이들은 특별하니까.
단 하나, 공포심을 키우는 건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평생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여인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서, 또 문이 열렸다.
덜컹.
하루 만에 온다던, 김도민이었다.
오른손에 회색 파우치를 들고 무테안경을 쓴 그는 이건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지?”
“아, 저 언제 움직일 수 있죠?”
막 그 생각을 하던 참이니, 질문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그건 나도 모른다.”
도민은 쉬지도 않고 답하고, 바로 철제의자를 펴 앉았다.
“지금 해 주는 얘기, 전과 같다. 믿어야 의미가 있을 거다.”
그리고는 회색 파우치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딸깍.
노트북의 화면이 켜지고 커다란 화면에서 곧 동영상이 나왔다.
“꺄아아악!”
여인이 도망간다. 그걸 찍고 있는 남성도 쉴 새 없이 뛰는 중인지, 카메라 앵글이 아래위로 세차게 흔들렸다.
그냥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날 정도지만, 그 상황의 급박함이 한낱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영화라면 바로 상이라도 쥐여 줄 것이다.
그만큼 현실감이 살아 있는 영상이었다.
“뛰어, 수현아! 뛰어! 헉헉!”
빙글빙글빙글.
뛰다가 넘어졌는지, 카메라 앵글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졌는지, 비스듬히 화면이 돌아갔다.
“음.”
이건이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그 화면의 구석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냥 그림자로 보이던 형체가 앞으로 걸어 나온 순간, 이건은 그것이 몸집이 큰 짐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날카롭고 강인한 발톱이 보인다. 그건 마치 칼날과도 같았고, 도저히 짐승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강철 같은 털들이 피부 위를 덮고 있었다.
저 생물이 곰이든, 다른 짐승이든 그들의 가죽은 고가에 거래되는 모피다.
인간들은 개털만 아니면 다 걸치고 다니니까.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놈의 가죽은 강철 심으로 만든 가죽 같았다.
단단함과 그 가죽의 날카로움이 화면 너머로도 느껴졌다.
화면의 끝, 그 짐승과 마주한 곳에서 뒤로 넘어져 고개를 치켜든 남성이 보였다.
그 사내의 눈에는 절망과 공포,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가랑이 사이로 물이 흐르는 것도 보였다.
끔찍한 공포에 몸이 굳고, 실금한 사내의 눈은 그 짐승의 팔을 보고 있었다.
그건 그 사내를 향한 단두대였다.
그 사내의 동공이 짐승의 팔을 따라가고.
슉.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똑 하고 사내의 목이 날아갔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그리고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치지지직.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네가 본 건, 이틀 전의 일이다.”
영화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건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상대했던 그 늑대와 같은 종류라고.
자신이 상대했던 늑대는 앞발로 바닥을 깨는 괴력을 지녔다.
새삼 자신이 어떻게 그놈을 죽였는지 놀랍기 짝이 없다.
그리고 동영상 속 짐승은 괴물의 사생아 같은 그런 특이한 존재였다.
“이게 뭐죠?”
이건의 물음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대신 도민은 그를 보고 물었다.
“문제, 지금 네가 본 건 무엇이었을까?”
주섬주섬 노트북을 다시 챙기고, 들고 온 파우치에 넣은 도민은 가만히 이건의 대답을 기다렸다.
짐승, 야생동물.
그 어느 것도 답은 아니었다.
도민의 물음에는 답이 있었고, 이건은 자신이 그 답을 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타고난 감이, 지금 김도민이 하는 얘기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유이건 본인에 관한 얘기라면, 지금은 실제로 부모를 부활시키는, 사람을 살리는 종류의 얘기다.
그만큼 특이하고 신비롭고,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일.
그래서 이건이 답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괴물?”
# 감금
“정답. 괴물이다.”
미소조차 짓지 않고 도민이 수긍했다.
“지금 이 영상에서 나온 것, 괴물이다. 그리고 네가 그 침상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직시해야 할 현실이기도 하지.”
만일 지금 이건의 몸이 자유로웠다면, 분명 심장이 두근거리고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뒤 도민은 어려운 얘기를 했다.
그 얘기는 그리 짧지 않았다.
도민은 말을 하며, 이유와 상황에 관해 설명했고 일어나는 일의 여파에 대해서 사견을 밝혔다.
근 3시간을 들은 이건은 그걸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 도민이 전해 준 얘기는 너무 중요했다.
이것이야말로 부모를 부활시키는 시초, 게임으로 치자면 연계 퀘스트의 첫 장이었다.
‘중요한 것은 능력자, 그리고 괴물.’
그리고 경계.
“그래서 사실 네가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대감이 커지고 있긴 하지.”
도민이 말했고, 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게도, 세상에는 인간을 적대하는 무리가 인간 외에도 있었다.
일면 괴물, 몬스터라고 불리는 게임에서나 나오던 그런 생물들이었다.
이건이 그 사실을 직시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이미 늑대를 상대했고, 도민이 보여 준 영상이 신빙성을 더했으니까.
세상에는 괴물이 있다.
그건 금세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그 괴물에게 침식당한 피식자들인가?
아니다, 그들에게 대항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을 지칭하는 말도 있었다.
능력자.
그리고 이것이 이건의 몸이 마비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는 거네요.”
“그래, 하지만 깨어나면 능력자로 각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했듯이,”
“부모님을 살릴 방법이 있다는 거죠?”
도민의 말을 끊고 묻자, 그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부활을 논했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일어나고 적응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능력자가 되기 전, 어떤 계기로든 그들은 전신이 마비된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위뿐.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가진 힘이 특별하고 강해진다.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 이건은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인지했고, 지금 도민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계약서다. 읽어보고 사인해.”
“제가 아직 손도 못 움직여서요.”
“일어나는 날, 그날 해라.”
도민이 차가운 눈으로 웃었다.
여전히 이건은 그의 눈이 섬뜩했다.
하지만 같이 웃었다.
살아야 했고, 부모님을 살려야 했다.
그리고.
‘너무 움직이고 싶다.’
꿈틀거리지도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이건은 하루라도 빨리 몸을 일으키길 바랐다.
*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건은 진저리가 났다.
‘TV라도 주든가.’
한창 피 끓는(?) 19살 남자에게 이런 반강제적인 수도승의 생활은 맞지 않는다.
‘아니 안 맞는 게 아니라 괴로울 정도지.’
더구나 도민이라도 자주 오면 모를까.
묵묵부답, 절대 대답하지 않고 그럴 낌새도 보이지 않는 간병인만 오가는 곳이다.
‘미쳐버릴 것 같은데.’
우습게도 부모를 잃은 슬픔보다, 당장 이곳에 갇힌 생활 덕에 이건은 미칠 것 같았다.
감금은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지만, 정신은 어리고 몸은 자란 남자에게는 더 없이 최악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자 처음에는 TV와 컴퓨터, 스마트폰을 간절히 바라던 게 단순해졌다.
대화할 상대만 있다면, 그게 살인마든 아니면 목적을 감춘 냉혈한이든 상관없었다.
‘도민이 형 와라. 도민이 형 와라. 도민이 형 와라.’
그 사람이 무슨 음흉한 흉계를 꾸미든 말든 이건은 하나만을 바랐다.
대화를 나눠 줄 사람 말이다.
김도민 씨, 김도민 님, 하던 호칭도 어느새 도민이 형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부른 건 아니었다. 이건 혼자 그렇게 불렀을 뿐.
그만큼 정신이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덜컹.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문을 노려보는 중, 그 문이 열렸다.
“도민이 형?”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이 튀어나오자 아차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김도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이라고 묻는다면 답할 가치도 없었다.
이곳에 와서 본 사람은 김도민과 간병인 둘뿐이었으니까.
“김도민이 누구한테 형으로 불릴 정도로 만만한 성격은 아닐 텐데. 특히나 업무 중에 말이야.”
그러므로 지금 이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짧게 자른 까칠한 검은 수염에 긴 회색 코트를 입었는데, 늘씬한 몸과 큰 키 덕에 잘 어울렸다.
‘소위 말하는 킬링핏이 저런 거구나.’
“근데 여기 문에 누가 이런 장치 해놨냐? 오갈 때 나 여기 있소, 하고 알려주는 건가?”
그의 물음에 대한 답보다 이건은 인사를 건네는 걸 택했다.
이대로 두면 끝없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가 사라질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상대가 누굴까 하는 궁금함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말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일주일이 넘도록 입을 봉하고 산 이건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유이건이지?”
“네!”
예상과 다른 이건의 태도를 보고 승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의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무언가 있다는 촉이 왔다.
그래도 겉으로는 태연했다. 오늘은 사실 정말 유이건이라는 아이를 보고 싶어 왔을 뿐이니까.
“어디 보자, 한 30분 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나 들어볼 수 있을까?”
‘되게 친하게 구네.’
친근한 태도가 싫은 건 아니다. 이건은 오히려 도민보다 이 사람이 더 선량한 사람이라는 감이 왔다.
‘뭐, 감이라고 그게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눠 준다는 거다.
가뭄 속에 단비와 같았다.
도민이 자신과의 일을 특별히 비밀이라고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꼼짝도 못 하는 자신을 찾아올 정도면.
‘이 사람도 지금 상황과 상관있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이건은 서슴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오호, 그러네.”
“맞다.”
“그 여자에게 말을 거는 건 관둬라. 애초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니까.”
적절한 추임새를 넣는 사내는 청자로서 훌륭한 태도를 보여줬다.
그리고 좋은 정보도 얻었다. 간병인 여자는 정말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런데 그렇다고 눈도 안 마주칠까?’
다른 이유가 없지 않고서야 그럴 순 없다.
이건은 어리고 순수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이건은 새삼 승원을 바라봤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이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걸 그제야 인식한 이건이 급하게 의자 쪽으로 눈길을 줬다.
몸을 쓸 수 없으니 생기는 버릇이었다.
사람은 얼굴로도 표현하고 지시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 중이고.
“아, 의자에라도 앉으세요.”
“권유치고는 너무 빠른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원은 드르륵 하며 의자를 끌고 와 펼쳤다.
그리고선,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근데 누구세요?”
의자에 앉는 걸 권유하는 것만큼이나 질문도 늦었다.
수다를 떨고 싶다는 욕구, 혼자라는 소외감을 해소할 수 있는 존재가 너무 그리웠던 탓이다.
“차승원이라고 한다. 도민이랑 같은 곳에서 일하지.”
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가 보네.’
이건이 보기에 둘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지만, 때론 반대 성향의 사람에게 끌리기도 하는 법이니까.
“능력자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면, 재밌는 질문을 해 줄까?”
“네? 어떤?”
“능력자가 전신 마비에 걸리는 기간, 웜-업이라고 부르는 이 기간이 가장 길었던 건 며칠일까?”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과 맞물리기에 궁금했다.
*
이건이 아는 거라고는 누워 있는 시간이 긴 만큼 ‘특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만으로 갑자기 힘을 얻고 강해진다?
실제 능력자에게 묻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 이런 것들이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정작 이건은 벌써 하루 이틀이 아님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90일이다.”
‘90일.’
생각보다는 길다. 전신 마비가 된 채로 90일을 버티는 것.
‘끔찍한데.’
지금도 솔직히 간신히 산다. 이곳은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지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자극이 적고, 즐길 거리가 전무했으니까.
“도민이는 너와 내가 대화하는 걸 그리 반기지는 않을 거다. 뭐, 지금쯤이면 내가 여기 온 것도 알 테지만.”
씁쓸한 미소를 짓는 승원에게는 남모를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요?”
정작 이건에게는 그게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당장 며칠이나 이렇게 누워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으니까.
“난 가보마. 시간 되고 심심하면 또 올지도 모르고. 그리고 저 문은 고치라고 해두지. 너 문 열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겠다.”
“맞아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이건도 평소에 한 생각이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요구해도 될 위치인지 몰랐다.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사람을 가둬 뒀으면 요구사항을 들어줘야지.”
그렇게 말하고 승원이 문을 나섰다.
이건은 승원이 나가며 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가뒀다고?’
이건은 가만히 눈을 들어 천정을 바라봤다.
역시나 자신은 갇혔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환자를 이렇게 관리하는 경우는 없다.
‘능력자라서?’
열 수 없는 문과, 창문 없는 공간.
집에서 ‘그 일’이 있고 난 뒤 만난 사람은 세 명이다.
김도민, 간병인, 그리고 차승원.
‘그중 하나는 이름도 모르는군.’
몸도 갇혔지만, 자신을 가둔 사람들은 이건의 정신마저도 감금하길 원했다.
장기가 떼이는 망상부터 갖가지 상상이 머리를 지배하려 했다.
이건은 끔찍한 생각이 떠오르는 걸 애써 지웠다.
‘어서 일어나고 싶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그저 공포에 움츠릴 수조차 없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맑은 물을 눈에서 흘려보내는 것뿐이었다.
*
“차승원 과장님.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시면 곤란한데요?”
“후배가 될 놈 얼굴 한 번 본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승원의 앞에 선 이가 머리를 긁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그 후배가 아니니까.
“왜? 도민이가 쥐 잡듯 잡고 싶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하는 말에 사내는 반박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으로 이곳에 있으니까.
“하여간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시죠. 과장님 말대로 그 ‘김도민’ 과장님이 신경 쓰고 있는 거잖습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도 과장님하고 저, 그리고 김도민 과장님뿐입니다. 기밀 유지도 부탁드리고요.”
감사과 직원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복도의 끝, 자판기 앞이었다.
보통은 친목이 있는 사람끼리 커피라도 한 잔 마시는 곳이지만.
감사팀 직원도, 승원도 잠시 대화를 하는 장소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삑, 위이이잉.
자판기 버튼을 누르자, 커피 한 잔이 금세 나왔다.
승원은 커피를 뽑아, 한입 후루룩 마셨다.
‘커피는 역시 믹스지.’
한국인이 만든 정말 세계적인 발명품이다.
달달한 맛을 느끼며 승원은 도민의 의도를 추측해봤다.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정보가 너무 적었다.
‘무슨 생각이냐, 김도민?’
속을 알 수 없는 놈, 그리고.
‘절대 손해 볼 일을 하지 않는 놈이지.’
그게 승원이 아는 김도민이었다.
*
침대에 누워서 미칠 것 같은 시간들, 이건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라가 되어가는 시간이 보름을 넘기자.
“오늘은 어때?”
도민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왔다.
“똑같아요.”
그리고 이건은 벌써 3일이나 같은 대답을 했다.
손가락은 움직이느냐? 감각은 돌아오느냐?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걸 느끼는 건 없느냐?
이런 질문들이었다.
거기에 대답하고 이건은 TV와 그것도 아니라면 라디오 등을 줄 수 없느냐 물었지만.
도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네가 누워 있는 곳은 일반적인 곳이 아니다. 그런 물건은 반입할 수 없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마치 TV가 사람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TV는 그렇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종류의 물건이지만.
지금 도민이 말하는 투는 그보다 더하다.
‘좋아.’
그런 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놀이거리를 포기한다면.
이건은 묻고 싶은 것이 또 있었다.
“그럼, 부모님은 어떻게 살리는 거죠?”
금단의 질문이었을까? 사실 이건은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거짓은 아닐까 하는 의심.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살릴 수 없다면 이건 자신은 다시 그 절망 속에 빠져야 할까?
지금 밝은 모습을 되찾은 건, 이 모든 일을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런 부분에서 도민은 신뢰를 줬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점이 이건에게는 가장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고.
“그건 깨어나면 상의해야 할 부분이지. 내 이름을 걸고 말하지만, 거짓은 조금도 없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네 부모의 시신은 냉동보존이 되어 있고, 우리가 보관하고 있다.”
울컥, 왜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오려 하는지.
그 끔찍한 참상을 직접 봐서일 것이다.
“좋아요.”
이건은 감정을 삼키고 답했다.
믿는다,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
‘참자.’
지루함도, 사지가 결박당해 미칠 것 같은 이 순간도.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공포도.
인간의 정신은 유연하지만, 약하기도 하다.
이건이 가장 두려운 건, 사실 부모를 살릴 수 없다는 사실보다 영원히 이대로 갇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부모를 살리겠다는 목표와 목적이 있음에도, 감금이 주는 공포는 작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호흡이 달려서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갈 것 같았으니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일어나기만 한다면.”
‘일어나기만 한다면?’
도민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뒷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건 이룰 수 있을 거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도민이 나갔다.
문에서 나는 소리는 정말 수리되었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들은 말도.’
자신이 바라는 걸 이룬다. 그것이 이건을 이곳에서 버티게 해주는 힘이니까.
“이봐.”
그리고 도민이 나가고 30분도 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자주 오시네요. 형님.”
언제부터 형님인가? 보름 중 도민보다 더 자주 찾아오는 게 승원이었다.
“본체는 안 오시고요?”
승원의 몸은 반투명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투영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발은 반쯤 떠서 허공에 둥둥 떠 있으니.
이건은 처음 승원의 이런 모습을 봤을 때 기겁했던 것이 기억날 정도였다.
# 오륜
“이제는 처음처럼 놀라지는 않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죠.”
“도민이 왔다 갔지?”
“오늘도 무탈하게 물을 거 묻고 떠났죠. 아, 그런데 정말 그 늑대를 잡은 게 대단한 거 맞아요?”
저번에 승원이 왔을 때 자신이 갇혀야 되는 이유, 그걸 물었었다.
승원은 그 회색 늑대를 맨손으로 잡아서 그렇다고 했다.
“대단한 거지.”
“그런가요?”
승원은 내심 고개를 저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능력의 일부를 사용한 모습이라 다행이었다.
자신의 표정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기는 힘들 테니까 말이다.
이건의 눈이 회색빛으로 물든다. 오랜 감금과 자유를 거세당한 생활은 사람의 활기를 뺏는다.
아무리 명확한 목표가 있더라도, 사람의 의지는 물에 깎이는 바위처럼 마모되기 마련이다.
그런 이건을 보고 승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웜-업 중 얻은 경험을 얘기해 줄까?”
“정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거예요?”
“그럼 갑자기 ‘어, 움직이네.’ 이럴 것 같으냐?”
자신감 있는 미소의 승원은 자연스럽게 허공에 앉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흐릿한 그 형체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허공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아, 내가 온돌 생활을 즐겨서, 기괴해도 이해해라.”
물론 그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었다.
“내 능력의 경우, 보면 알겠지만 이런 종류다. 더 묻지는 말고. 본래 타인에게 능력을 완벽하게 밝히는 건 금기다. 전에도 말했지?”
“안 물어요.”
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의 말대로 벌써 여러 번 들은 얘기였다.
그 대답에 승원은 편안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난 이런 거였지, 허구한 날 누워서 TV만 보는데 뭐가 신나겠어? 거기에 누가 오지 않으면 채널도 바꿀 수 없는데. 지랄맞고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차라리 내가 둘이 돼서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을 때.”
“···싶을 때?”
얘기를 적절하게 끊는 걸 보면, 그는 좋은 스토리텔러였다.
“또 하나의 내가 옆에 생겼다.”
“또 하나의 나?”
“그래. 그때부터는 지낼 만했지. 적어도 대화할 상대는 생겼으니까.”
“그거 정신병의 일종 아니에요?”
“지금 네 눈앞에서 내 능력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하하하.”
이건은 승원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트렸다.
많은 어려움이 있고, 괴로움이 함께하는 이곳에서 승원과의 대화는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
눈을 껌뻑이면 날짜를 세던 이건은 오늘이 36일째인 걸 알았다.
물론 그가 세지 않아도.
“오늘도? 36일째인데?”
매일 오는 도민이 알려준다.
그는 30일이 넘어가자 이건을 보며 눈에 띄게 기쁨을 드러냈다.
수천 개짜리 직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은 나한테 뭘 바라는 걸까?’
계약서? 이건의 처지에서 보면 한낱 종잇장일 뿐이다.
나이 열아홉에 무슨 도장을 찍고, 사인을 해봤을까?
그런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계약’은 무조건 지켜야 할 사항이 아니라, 그냥 ‘이런 거 해야 돼’라는 권유 정도다.
“알았다.”
그렇게 말하고 도민이 뒤돌아섰다.
이때쯤부터였다.
‘왜 안 오는 걸까?’
승원이 찾아오지 않은 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물을 수도, 물을 곳도 없었다.
결국, 하루를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 이건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넙죽.
간병인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그녀가 자신의 몸을 보는 것도 익숙해져, 부끄러움도 생기지 않는 날들.
110일째였다.
“···오늘도?”
이때의 도민은 눈에 띄게 흥분했다. 평소의 차가운 말투와 눈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최장이 90일이라고 했나?’
승원이 해줬던 말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차라리 눈앞의 도민처럼 기대감을 갖고 흥분하고 싶다.
문제는 이건 자신은 조금도 일어날 것 같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흥분한 도민과 달리 이건은 서서히 절망이라는 어둠에 먹혀가고 있었다.
전신의 자유를 잃고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는 이건은 점점 눈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도민은 그런 모습을 보며 빈말이라도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나도 차라리 분신이라도 있었으면.’
이건은 그런 생각을 곧잘 하곤 했다.
이틀에 한 번은 눈물을 보이며 잠들었다.
아무도 없는 밤, 오늘도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잠든 밤이었다.
번쩍하고 눈을 떴다.
‘방금 잠들었는데.’
잠에서 깨는 것,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잠드는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괴로움도 없었으니까.
“근데.”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순백의 공간이었다. 허공 한쪽에 창문이 있다는 게 특이했고.
50인치가 넘는 대형 TV도 보였다.
순백의 공간인데 푸르른 하늘이 보였고, 그곳에는 갖가지 모양의 구름이 떠다녔다.
‘이런 꿈이라면 백번도 환영하지.’
그렇게 말하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이 움직여?”
손뿐 아니라 발도, 어깨도, 다리도 모두 움직였다.
“우와! 최고다!”
점프하며 외치고 주변을 질주했다. 120일, 넉 달 만에 사지의 자유를 찾은 소년은 방방 뛰어다녔다.
“이야호!”
달리는 걸 취미이자 특기이자 목표로 잡은 이였다.
그저 뛰는 것만으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훨훨 날아갔다.
해방감에 모든 걸 토설하는 그 움직임이 멈춘 건 한참을 달리다 발견한 특별한 조형물 때문이었다.
누가 조각했는지는 몰라도 정성을 들인 모양이었다.
“오륜···.”
이건의 눈앞에는 오륜이 있었다.
올림픽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원.
푸른색, 노란색, 검은색, 초록색, 빨간색의 고리.
자신의 꿈이자, 모든 것이었던 그것.
그게 눈앞에 있었다.
“이게 왜?”
다섯의 색을 갖춘 원에 이건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파직!
노란색의 원에 손을 갖다 댔을 때였다.
정전기의 열 배는 될 법한 전류가 흘렀다.
“앗, 따가워!”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이건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생겼다.
방금 흐른 전류 덕에 손끝이 검어졌음에도, 이런 통증은 무시할 만했다.
오히려 변하지 않고 고정된 상황이야말로 이건에게는 우울함을 가져다주는 일이니까.
파지직하고 남은 전류가 원을 타고 흘렀다.
‘다른 건 안 그런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이끌려 이건은 오륜에 다시 손을 올렸다.
붉은색의 고리에 손가락을 대자.
우우우웅.
원이 진동하며 이건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거부한다고?”
오륜이 입이 있어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 원에 손을 올리자 명백한 의지가 들렸다.
‘무슨.’
이 정도가 되면 다른 원들에도 손을 안 뻗어볼 도리가 없다.
검은색의 고리에 손을 뻗자, 이건은 순간 음습한 공포를 느꼈다.
공포영화를 보고 난 후 마치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휘릭.
단숨에 뒤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정의 원은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만지려는 의지를 발할 때마다 끔찍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거 진짜 묘한데.’
푸른색의 원은 시원한 청량감과 함께 포용력이 느껴졌다.
“음. 이건 좋은데.”
그 느낌에 원을 계속 쓰다듬자, ‘적당히 해!’ 이런 말이 들려오는 듯하더니 손을 튕겨낸다.
“···너희 혹시 살아 있는 건 아니지?”
이건이 자기도 모르게 오륜에게 말을 걸었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마지막 초록의 고리에 손을 얹자, 이건의 심상에 특이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짙은 안개에 섞여 그 모습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누구지?’
이건은 더 집중하려 했지만, 그 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초록의 고리는 따뜻했고, 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초록의 고리는 이건을 무시했다.
다른 네 개의 원은 분명 감정의 흐름이 있었다.
붉은색은 오만했고, 푸른색은 시원시원했다.
노랑은 전류가 흐르는 덕에 오래는 못 만졌지만, 팔딱팔딱 뛰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세상에 활개 치고 싶다는 그런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검정은 ‘나 함부로 건들 수 있겠어? 감당되겠어?’ 이런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이건은 한동안 오륜을 만지작거리고 관찰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이건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노랑 너는 성격이 급한 것 같아? 맞지?”
허공에 이건의 목소리가 울리자, 노랑 고리가 파지직 하며 답이라도 하는 듯 반응한다.
“검정 너는 음흉해. 본색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편이고.”
그래서 만지는 이에게 공포를 선사한다.
이건은 양손 끝이 검게 그을리면서도 노랑의 고리를 수없이 만졌다.
하지만 검정은 감정을 자극해 자신에게 손대기 꺼리게 했다.
“파랑은 쾌활하고 시원한 성격인 것 같고.”
가장 거부감이 적은 고리다. 사람으로 치자면 꽤 호쾌한 사람일 듯했다.
“빨강이 너는 함부로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걸 싫어한다 이거지?”
다섯의 고리 중 유일하게 물리적으로 손길을 거부한다.
그 밀어내는 힘이 꽤 대단해서 손끝도 대지 못했다.
“초록이 너는 상대를 깔보는 경향이 있고.”
오륜을 만지며 이건은 마치 사람을 대하듯 했다.
실제로 말을 걸 때마다 다섯의 고리는 특유의 반응을 보이니.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건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좋아. 시간은 많아. 우리 더 친해져 보자고.”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이건이 오륜을 보고 입을 열었다.
*
자신이 얼마나 잤는지 곱씹는 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이곳에는 시계도, 밖을 볼 수 있는 창문도 없으니까.’
위이잉 하고 자신이 있음을 알리는 환풍기를 제외하고는 적막한 공간이다.
지루하고 미칠 것 같은 공간이지만, 순백의 공간에서 오륜을 관찰하고 나서는 이건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사람에게 집중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꽤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 이건의 눈에 병실의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열흘 만인가?’
김도민이었다.
그는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이건의 앞에 와서 전과 같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감각은?”
“아직요.”
짧은 단어로 이뤄진 대화지만 서로의 뜻을 전달하기는 충분했다.
도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220일째.’
움직이는 전조라도 보여야 했다.
도민의 눈에 깃든 실망감이 보이자, 이건은 꿈에 관해 얘기를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별일이 아니라면?’
부모를 구할 유일한 희망인데 거기에 자신이 찬물을 끼얹을 순 없다.
‘아직 시간이 있을 거야.’
자신을 타이르며 이건은 마음을 다잡았다.
만일 승원이 말한 대로 이게 능력자가 깨어나는 조짐이라면 어떤 변화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또 오마.”
도민이 병실을 나서며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리를 움직여 봐야겠다.’
다음에 도민이 올 때면 분명 희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이건은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몇 번이나 꿈의 세계에 들락날락 하다 보니 하루에 16시간 이상 잠이 들었다.
깨어 있는 시간은 고작 8시간.
하지만 누워만 있기에 그것도 곤욕이다.
‘차라리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네.’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이 멀어지고,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다시 순백의 공간을 배경으로 오륜이 보인다.
“헤헷.”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현실보다 더 생생한 이곳이 이건 자신이 있을 곳이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오륜···.”
이 다섯 개의 고리에 대한 비밀을 밝히고 싶었다.
굳은 의지를 보인 이건의 손이 다시 오륜에게 향했다.
# 신안
“끙.”
신음을 흘리며 이건은 갖은 짓을 다 했다.
만지고 때리고 심지어 핥아도 봤다.
‘어떻게 해야 이 녀석들이 반응하지?’
오륜을 본 지도 보름이 지났다.
하지만 이 다섯의 고리는 처음과 같았다.
반응은 하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슬슬 초조함이 느껴질 정도다.
“약도 오르고.”
그 말에 노랑 고리가 파직하며 스파크를 보인다.
“내 방법이 잘못된 거냐?”
우웅.
붉은 고리가 진동을 일으킨다.
‘알 수가 없네.’
이건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옆으로 누워 팔에 머리를 기대고 오륜을 지켜봤다.
가끔 진동이 울리거나 전류가 흐르는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분리는 안 되나?’
이제까지 한 번도 따로 떼어놓으려 한 적은 없었다.
오륜은 항상 그 자체로 하나였으니까, 따로 떼어 낼 생각 따위는 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섯 개의 고리가 반응이 다른 걸 보며 전부 개성이 있는 것이다.
‘떼볼까?’
생각이 일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손을 뻗어 초록의 고리를 잡았다.
떼어내겠다는 생각과 함께 당겼을 뿐인데, 고리가 쉽게도 떼어졌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고 초록의 고리가 잡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진동했다.
“윽!”
팔이 덜덜 떨려 고리를 놓치자, 중력의 법칙에 따라 고리가 밑으로 떨어진다.
파삭.
그리고 초록의 고리가 깨졌다.
“어?”
놀란 이건이 고개를 숙이자, 고리의 잔해가 땅에 스며들고.
쭈우욱!
이건의 발밑에서부터 땅이 솟는다.
“우와왁!”
주변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땅이 솟고 천정이 깨지고 하늘이 나타난다.
그 모든 게 단 몇 초 만에 이뤄지는 신비에 이건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만 봤다.
콰콰콰콰!
어느새 생긴 폭포에서 물줄기가 쏟아지고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생겼다.
주변의 풀들이 생생하게 돋아났으며, 내리쬐는 햇볕에 눈이 부셨다.
“···이건 대체.”
어안이 벙벙한 이건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 방송 같아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울림이었다.
‘보이나?’
집중해서 들으니, 간신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뭐야!?”
놀란 이건이 주변을 둘러보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평평한 바위 위, 내려갈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곳이 넓어서 누가 숨을만한 곳이냐 하면, 고작 3평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쓰던 방 정도의 크기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그 바위 옆의 있는 풀잎이 가지에서 떨어져 나풀거렸다.
그 풀잎은 마치 의지가 있는 듯 움직이더니 이건의 오른쪽 눈을 가렸다.
“웃!”
긴장한 이건이 놀라 풀잎을 떼었다.
그 후 더 기겁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봐야 했다.
“···누구?”
연두색 머리칼을 적당히 기른 사람이 녹색의 동공을 빛내며 눈앞에 떡하니 있었으니까.
그는 가죽으로 된 책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있었다.
‘중국 모바일 게임 RPG 주인공 같은데?’
흔한 양산형 모바일 게임에서 이펙트를 팍팍 터트리며 나타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현실에서 이러고 다니면 미친놈이나 날라리 양아치 같겠는데.
막상 지금 이건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애타게 불러놓고 누구냐고 묻는 건 무슨 취미지?”
이건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내가 불렀다고?’
오른쪽 눈에는 상이 맺혀 상대가 보이나 왼쪽 눈에는 여전히 허공만 보인다.
그 특이한 감각도 놀랄 판인데.
상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치 서로가 아는 사이인 것 같다.
자신의 눈에 붙었다 떨어진 풀잎을 보며 이건은 그걸 들어 왼눈에 붙였다.
“그렇게 머저리는 아니군.”
그제야 이건의 양쪽 눈에 상대가 명확하게 보였다.
결과를 보면 원인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건은 남자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유가 풀잎 때문이라 추측했고, 그 생각은 맞았다.
‘더럽게 잘생겼네.’
독특한 머리칼과 동공의 색깔도 이 남자의 아름다움을 감출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부분의 독특함이 미모를 더해준다.
옆구리에 낀 책과 그의 분위기가 묘한 조화를 일으켜, 이지적인 미남의 형태를 연출했다.
“너 초록이냐?”
결과를 보며 원인을 추정한다.
잎사귀를 눈에 비비며, 이건은 자신이 깨먹은 초록의 고리가 이 일이 일어난 이유라 생각했다.
이건의 물음에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와, 웃음만 봐도 기분이 더러운데?’
상대가 조소를 머금으며, 이건의 눈을 직시했다.
“다시는, 다시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은 신안이다.”
그 박력에 이건의 고개가 자동으로 끄덕여졌다.
“응.”
*
“보아라.”
이제 이름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신안이 이건에게 요구했다.
‘뭘 또 보라는 거야?’
“참으로 느린 놈이구나.”
이건이 고개를 모로 꺾으며 반문을 던진다.
“응?”
“안 보이나?”
“뭐가?”
“내면을 보는 법조차 모른단 말이냐!”
움찔.
나무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듣는 비난은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봐.”
물론 이건도 그리 만만한 성격은 아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 이건의 과거도 꽤 파란만장했으니까.
하지만 이건이 어떤 반항도 하기 전 신안의 손이 움직였다.
운동도 꽤 했고, 다른 사람보다 운동신경만큼은 뛰어나다고 생각한 이건이지만.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그건 호흡과 호흡 사이를 끊고 들어온 일격이었으며.
안다고 해도 반응하지 못할 종류의 움직임이었다.
푹!
“악!”
두 눈이 찔린 이건이 양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물과는 다른 액체가 볼을 타고 흘렀다.
“이런 미친!”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건이 욕설을 뱉고.
신안은 그 앞에서 냉정한 녹색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면조차 보지 못한다면 너와 할 얘기는 없다.”
머리를 들어 상대를 찾으려 해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상태라면 싸워도 이길 수 없다.
결국, 이건은 화를 삼키고 씩씩거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보아라.”
그의 귀에 신안의 평온한 목소리만이 울렸다.
*
“신기하네.”
내면의 거울을 보라. 처음 신안이 자신의 두 눈을 찔렀을 때는 화도 나고 황당했지만.
막상 첫 번째 능력을 깨우치고 나니, 그런 감정들도 눈 녹듯 사라졌다.
심상에 거울을 띄우고 그곳에 자신을 비춘다.
그러면 이건의 눈에는 자신의 ‘능력’의 현 상황을 볼 수 있는 창이 뜬다.
‘무슨 게임 같아.’
유이건.
근력 - 미정
순발력 - 미정
고유능력
신안 - F랭크
시력 향상. 스테이터스 확인 가능
‘미정’이라고 나와 있는 것은 아직 웜-업 기간이 끝나지 않아서라고 했다.
웜-업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기대감이 뒤따랐다.
‘이제 얼마 안 남았겠지?’
당연한 기대였다.
승원이 언젠가 말해준 대로, 능력자로 깨어나기 전의 전조라 생각했으니까.
자리에 누운 지 근 300일이 가까워졌지만, 희망이 코앞에 다가왔기에 이건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
김도민은 이건을 포기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웜-업 기간이 길수록 특별한 능력자라고는 하지만, 300일이 가까워지니 포기할 법도 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그냥 죽이기에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마침 상부의 명령도 ‘보존’이라고 했다.
그는 풀어 둔 시계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끝난 일, 더 붙잡고 있어 봤자 무의미하다.
그는 전화를 들어 바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나흘 뒤.
이건은 자신의 눈을 덮는 기묘한 기계를 봐야 했다.
“이건 뭐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얼굴에 기계를 씌우려는 남자는 처음 보는 이였다.
“김도민 씨는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말해 줄 수 있는 건 뭔데요?”
이건이 뾰로통한 얼굴로 묻자, 남자가 기계를 씌우려던 손을 멈췄다.
“닥치고 그냥 잠이나 자.”
“······네?”
“이 모자란 새끼야. 넌 능력자가 아니야. 어떤 능력자가 200일 넘도록 웜-업에 들어가겠냐? 멍청한 놈아. 김도민 팀장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거다.”
“아니, 틀렸어요. 제가 도민이 형한테 잘 말할 테니까, 그를 불러 줘요!”
이제 능력을 깨우치고 있다. 자신은 얼마 안 있어 일어날 수 있다.
김도민이라면 그걸 알아줄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살리기로 약속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남자는 이건을 보고 마음껏 비웃었다.
“웃기고 있네. 내가 너 같은 놈 많이 봤지. 닥치고 잠이나 자라. 그리고 이걸 누가 지시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왜라는 물음이 목구멍에서 솟아오른다.
남자의 말은 명백했다.
김도민의 명령에 움직였고, 이건은 이제 용도폐기라는 것을.
남자는 거친 손길로 얼굴에 기계를 덮었다.
그러자 곧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기계의 힘인지, 곧바로 졸음이 쏟아진다.
자신이 언제 잠이 드는지도 모르는 채, 이건은 정신을 잃었다.
남자는 일을 끝내고 병실을 나섰다.
김도민의 집무실을 찾아가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그가 책상에 앉아서 남자를 보고 고개를 까닥였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김도민은 그걸로 유이건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김도민에게는 유이건이라는 놈 이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
김도민은 이건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능력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그리고 부활이라는 단서를 알 게 된 것.
그렇다면 김도민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은 할 수 있다.
부모를 다시 살릴 수 있었다.
오륜을 보고 신안이란 존재를 만나고 나서 이건은 확신했다.
자신의 능력의 원천은 바로 이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선택의 기준이 되어준 육감이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보이나?”
그리고 신안은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라는 요구만 한다.
‘한결같은 놈이네.’
좌절은 사치고, 절망은 개나 줘야 한다.
이건은 자신이 할 일을 명확하게 인지했고.
그건 곧바로 이 능력을 모두 깨우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난 언제쯤 일어나지?”
이건이 묻자 신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르다. 묻기도 이르고 듣기도 이르다. 잠자코 보기나 해.”
그 편협한 강요에도 이건은 불만을 뱉지 않았다.
‘알았다고.’
어쨌든 자신의 능력 개발을 위한 일이다.
멀리 떨어진 절벽을 보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기도 하며 이건은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자신의 얼굴에 씌운 기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건은 이 세계로 들어온 채 다시 현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지만, 좋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쨌든 자신은 이곳에서 배우고 익힐 것들이 산재하니까.
“보이나?”
며칠째, 신안의 독촉 때문인지 평소의 이건이라면 도저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의 절벽에 쓰인 글자가 보였다.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건 경멸의 대상이다.”
쓰인 글자를 읽자, 그제야 신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평소에 자주 짓던 조소가 아니라 만족하는 미소였다.
“좋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좋아!’
성취하고 발전한다는 건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그리고 그것이 명확하게 보인다면 인간의 성취욕은 한껏 고조되기 마련이고.
“다음은 뭔데?”
“다시 보는 것이다.”
‘···죽으라고 같은 것만 반복하는구나.’
*
불규칙적으로 놓인 돌을 한 번 보고 그대로 놓으라 하고, 광망이 어리는 신안의 눈을 보고 눈싸움을 한다.
이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무슨 효용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묵살한다.
대한민국 중, 고등학교보다 심한 주입식 교육이다.
일단 배우고 활용은 나중이다.
“자.”
똑같이 배치된 돌을 보고 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튜토리얼은 끝이다.”
“···튜토리얼?”
‘지금까지 한 게 고작 튜토리얼?’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은 공부도 꽤 한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학업에 열성을 보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물론 신안이 가르치는 걸 과연 학업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가끔 그와 대화하다 보면 그의 폭넓은 지식과 다양한 생각의 방향은 절로 손뼉을 치게 만들었다.
그 덕에 기억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고, 지혜와 지식이 수치화된다면 높은 수치를 기록할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이건은 꽤 고등한 두뇌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다.
“아둔한 녀석 가르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그리고 신안은 단 한 번도 자세한 설명도, 칭찬도 하지 않았다.
“아, 그러십니까?”
“물론이다!”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저렇게 받아치는 걸 보면, 가끔은 정이 떨어지지만.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응?”
그 인사를 끝으로 신안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어이?”
녹색으로 물든 주변 풍광이 녹아내리고, 이건은 자신의 발밑이 푹 꺼지는 감각을 느꼈다.
“야!”
발밑이 붕 뜨며 이건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동시에 그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렸다.
# 강체
쿵!
“윽!”
절로 신음이 흘렀다.
녹아내린 풍광이 사라지고 이건이 떨어진 곳은 예의 순백의 공간이다.
“와, 신안. 이 개새끼.”
없는 마당에 욕이나 지껄였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오륜에서도.
“녹색이 없어졌네.”
깨진 녹색의 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고 싶은 그로서야 다음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노릇이다.
신안이 보라 했던 것 중 한 줄기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건 경멸의 대상이다.
이 말은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건 나태함의 상징이라 하는 말이며, 힘이 있으면서 쓰지 않는 건 혐오의 대상이라는 말과도 상통했다.
‘김도민.’
원망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을 버린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갑작스레 허공에 김도민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부모를 살리고 싶나?’
그가 묻는다.
물론! 자신은 그리 대답할 것이다.
‘아니, 넌 자격이 없다. 용도폐기다.’
그리고 김도민이 고개를 젓는다.
“웃기지 마라.”
이건이 읊조리자 허공을 유영하는 환영이 사라진다.
김도민은 이건을 도울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건을 외면했다.
‘뭐,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지.’
그렇다고 이건이 도민을 혐오하거나 경멸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 것처럼.
도민이 이건을 돕지 않을 자유가 있듯이, 이건도 그를 혐오하고 경멸한 자유가 있었다.
생각을 접고 이건은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지금 할 일은 명확하니까.
“자, 다음 페이지로 가보자고.”
푸른색의 고리가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건의 손이 그 고리를 잡았다.
*
푸른 절벽 사이. 이건은 좌우를 둘러봤다.
신안과 함께했던 곳은 협소했지만, 가슴은 탁 트이는 곳이었다.
협곡 위에서 밑을 바라보는 형태였으니까.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푸른색의 절벽이 양옆을 가로막고 앞뒤로 작은 길이 나 있는 공터였다.
음산한 공기와 차가운 냉기가 서리는 곳인지라, 이건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춥다.’
“이봐, 그렇게 움찔거리다가는 얼어 죽는다?”
들리는 곳으로 이건의 고개가 돌아가자, 블루블랙의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보였다.
“파랑이지?”
“···너 신안에게 그렇게 물어보다가 욕 안 먹었냐?”
먹었다.
하지만 상대의 이름을 모두 색으로 외웠으니, 절로 그런 호칭이 튀어나온다.
“강체다.”
그 오륜이란 것들은 모두 미모가 출중한지.
강체란 이도 뛰어난 미소년이었다. 여리여리한 몸에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외모지만.
자신감 있는 미소와 푸른빛이 은은하게 도는 피부는 그를 꽤 강인하게 보이게도 했다.
‘평범한 놈은 없다 이거지.’
“유이건이다.”
“신안에게 들어서 알 테지만.”
“잠깐!”
신안과 참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정작 자신의 상태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준 것이 없다.
“그 들었다는 것에 뭐가 포함된 거지?”
“허.”
강체는 고개를 저었다.
“신안 이 자식, 말 안 했구나? 뻔하지, 뭐. 아직 때가 이르네, 어쩌네 하면서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은 거겠지! 빌어먹을 자식! 그때를 왜 지가 정해?”
신안이 자신에게 가끔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항상 이르다고는 했지.’
그나저나 강체는 수려한 외모와 달리 나오는 말이 꽤 거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이건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영 기분이···.’
신안은 그래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기라도 했지.
강체는 아무리 봐도 십대 중반 정도다.
그런데 손가락을 까닥여서 이건을 부른다.
‘중학생한테 삥 뜯기는 기분이라고.’
“잘 들어. 난 두 번 얘기하는 건 질색이니까.”
그는 폴짝 뛰어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고, 그 앞에 이건이 섰다.
“너, 나한테 배울 것이 있는 건 알지?”
신안에게 배웠던 것의 반복일까?
“신안을 통해서 배운 것이···.”
“틀려! 그 자식은 그 자식이고, 하, 진짜. 아무것도 얘기 안 했구나. 너 웜-업에서 깨어나는 조건이 뭔지 못 들었지?”
“···!”
불끈.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일어나고 싶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분명 능력을 깨우치는 과정임은 분명하지만.
정작 누구에게 확답을 들은 적은 없었다.
“잘 들어. 우리 다섯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면 네 웜-업은 끝난다.”
“···다섯?”
“오륜. 이미 알고 있잖아.”
다섯 개의 고리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다?
이건은 새삼 그 사실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
“다섯의 인정을 받고 일어난다. 단순하지?”
‘그러니까 오륜은 내 능력을 개발해주는 선생 같은 건가?’
그리고 그 능력을 깨우치면, 긴 시간 누워 있던 이건의 잠도 끝이 난다.
“후.”
숨을 한 번 내쉬고 이건이 눈을 빛낸다.
“좋아!”
새삼 자신에게 다짐하는 행위였다.
목표를 정한 인간은 무섭게 몰입하는 법.
이건은 우선 일어나는 걸 목적으로 삼고자 했다.
“역시, 남자라면 호쾌한 맛이 있어야지.”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고는 강체가 폴짝 하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정작 배움을 청하려는데 상대 외모가 영 아니올시다였다.
“근데 너 몇 살이냐?”
이건이 묻고 강체가 피식 웃었다.
“알아서 뭐 하게?”
동시에 그의 몸이 무섭게 앞으로 치고 들어온다.
이건의 눈이 순간 녹색의 광망으로 물들었다.
상대를 보는 것, 그것이 첫 번째다.
신안과 수없이 했던 말 중 하나가 떠오르고 이건은 강체가 뻗는 손을 막고자 몸을 틀며 팔을 뻗었다.
“어쭈?”
그런 목소리를 은연중에 들었던 것 같다.
빙글.
하늘이 돌고, 다리가 허공을 노닐었고.
쿵!
머리를 바닥에 들이박고서야 이건은 눈을 뜨고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몸이 허공을 돌아서 그대로 떨어졌다.
대자로 누운 그의 귀에 다시 강체가 말했다.
“신안이 보는 걸 가르쳤지? 난 네게 박투를 가르칠 거다. 고로, 몸으로 고생할 시간이란 말이지.”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던 추위가 어느새 가셨다.
“오냐.”
이건이 불끈 주먹을 쥐며 몸을 일으켰다.
이래 봬도 고등학교 시절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맞고 다닌 적이 없는 몸이시란 말이다!
*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발차기에 이건이 양팔을 교차한다.
뻑!
“윽!”
신음이 절로 흘렀다.
‘팔에 금 간 것 같은데?’
“아프다고 한눈팔면 골로 간다?”
강체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몸을 틀었지만, 어느새 그의 주먹이 이건의 명치에 꽂혔다.
퍽!
“욱!”
먹은 것도 없지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몸을 새우처럼 말고 꿈틀거리자, 강체가 손을 탁탁 털었다.
“많이 아파?”
이건은 때때로 저렇게 순진하게 묻는 강체의 얼굴을 짓밟고 싶었다.
신안이 대화와 일종의 테스트를 통해 가르치고 숙달시키는 타입이라면.
강체는 모든 걸 몸으로 해결했다.
“다시.”
이곳이 좋은 점이라면 어떤 상처도 10분이면 말끔하게 낫는다는 점.
배고픔도 없고 수면도 필요 없다.
추위를 느끼는 것도 강체의 말을 빌리자면 ‘기운’이 모자라서라고 한다.
벌써 40일. 둘은 잠도, 식사도 필요 없기에 수없이 대련을 해오고 있었다.
주먹을 쥐는 법조차 때리면서 가르치기에 고된 행군이었지만.
‘효과는 분명히 있다는 거지.’
왼발을 내밀어 강체의 시선을 끌고, 그가 반응하는 걸 보며.
왼 주먹을 짧게 뻗는다.
퉁!
주먹이 공기를 때린 소리가 울리고, 그 충격파가 고스란히 강체의 귓속을 흔든다.
인간의 형체를 지닌 이상 세반고리관에 충격을 받으면 균형을 잃기 마련이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동시에 우측 주먹으로 턱을 노린다.
그러자 강체는 이마를 내려 오른 주먹을 막고.
뻑.
동시에 손을 뻗어 이건의 옷깃을 잡아챈다.
‘젠장!’
강체의 오른발이 이건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자, 급하게 손을 내려 막을 수밖에 없었다.
툭! 뻑!
초근접 거리에서 타격음이 울리고 이건의 몸이 흔들리더니 허물어졌다.
“방금 공격은 꽤 괜찮았어. 근데 많이 아파?”
‘아, 죽여 버리고 싶다.’
남성의 상징인 고환이 터지는 경험을 한 이건은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아무리 십 분만 지나면 몸이 회복된다고 해도 몸 여기저기가 부서지는 경험은 단연코 유쾌하지 못했다.
“머리를 쓰는 거 좋은데, 그거 박투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 않아. 남자라면 모름지기 본능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지.”
순진한 십 대의 얼굴로 잘도 저런 소리를 한다.
사회에서 저런 놈을 만났다면 분명 중2병 말기라고 했을 거다.
“오냐.”
이건이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방금까지 있었던 고통이 환각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급소 보호 잘하라니까?”
강체가 노리는 건 언제나 일격필살.
그걸 맞으면 숨도 못 쉴 만큼 괴롭다.
“오냐!”
외치며 이건이 다시 달려들었다.
아마도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테고.
강체가 말한 다섯에게 인정받는 일도 요원할 테니까.
*
강체를 만난 후 370일째.
이건의 장저가 강체의 턱 끝을 스쳤다.
틱.
겨우 끝에만 스쳤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강체가 균형감을 잃고 다시 초근접 박투를 시도하려 할 때, 이건이 뒤로 물러나며 채찍 같은 하이킥을 날렸다.
그러자 오른손을 귀 옆에 대고 정확하게 타격을 막는다.
‘징한 놈!’
하이킥을 먹인 다리를 회수하며 미들킥, 다시 막히고 재차 로우킥.
삼단 콤보로 상대를 유린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안쪽으로 몸을 말고 들어간다.
강체가 이건보다 체구가 작기에 그 안에 파고들려면 몸을 돌돌 말아야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건이 강체의 발을 밟았다.
“합!”
동시에 기합과 함께 어깨와 등으로 상대의 전면을 갈긴다.
일종의 철산고와 같은 고법이다.
누구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수없이 많은 대련을 통해 자연스레 익힌 기예였다.
고법에 맞은 강체의 몸이 붕 떴다.
그리고 이건은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팔꿈치를 뻗으며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빡!
‘됐다!’
370일! 길었던 대장정의 끝에 강체의 양팔을 부러뜨린 것이다.
“아파!”
강체가 외치며 공중에서 몸을 빙글 돌려 내려 차기를 시도했다.
‘흥!’
이건은 팔을 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어차피 체중 차이가 있기에 이 공격은 무의미하다.
작은 체구에 비해 힘이 엄청난 강체지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무시할 수 없다.
체구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한 근력 덕에 보통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공격이 주를 이루는 게 옳았다.
위에서 밑으로 향하는 공격은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워버리니까.
물론 상식적인 면에서 이건의 생각은 맞았다.
촤악!
문제는 상대가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아 문제지.
“우아악!”
내려 차기에 이건의 양팔이 물에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바닥에서 팔딱거렸다.
잘린 팔의 단면으로 피가 분수처럼 솟았고, 강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아파?”
“우아아악! 죽여 버린다.”
이건이 생애 처음으로 이성이란 걸 잃어본 날이었다.
*
“어쨌든 이걸로 통과라는 거지?”
이건은 자신의 양팔을 흔들며 말했다.
정말 십 분 만에 완전하게 회복되는 자신의 몸을 보면 신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긴 그동안 수없이 작살난 몸이다.
‘그래도 잘린 건 처음인데.’
“응. 통과.”
팔을 자른 게 미안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강체는 명확한 자신의 기준이 있었고, 이건은 오늘 그 기준을 통과했으니까.
“근데 마지막 그건 뭐였어?”
“용력.”
강체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말해준다.
외모와 달리 시원시원한 성격이다.
“일반적인 힘을 뛰어넘고 싶다면 언젠가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하는 힘이지만. 지금 당장은 얻고 싶어도 무리야.”
“왜?”
“웜-업이 끝나야 가능한 일이니까.”
“아!”
“그리고 난 다른 이들과 달라서 깨어나면 바로 쓸 만한 기술을 전수해 줄게.”
“응?”
그러면서 강체가 다가와 배시시 웃는다.
‘뭐?’
남자를 보고 얼굴이 빨개지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이건이 고개를 돌린 사이.
강체의 팔이 이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억!”
“잠깐만.”
“야, 야.”
급하게 부르는 이건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강체의 팔이 빠졌다.
“모든 육체는 먹는 힘이 중요하지. 나중에 깨어나게 되면 내 힘을 확인해봐.”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은 하나같이 다 변태들이야.’
정상적인 놈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그럼 나갈까?”
또 바닥이 허물어질까 싶어서 밑을 바라보자, 갑자기 주변 경물이 빠르게 뒤로 사라져간다.
“또 봐.”
강체가 사라지고 주변의 다시 순백의 공간으로 바뀌자.
“돌아왔네.”
이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건을 패스한 셈이니까.
# 신속
유이건.
근력 - 미정(훈련 시 상승)
순발력 - 미정(훈련 시 상승)
고유능력
신안 - F랭크
시력 향상. 스테이터스 확인 가능.
강체 - F랭크
근력 향상. 포식 보유.
‘그 고생을 했는데 F?'
그나마 신안과 강체 자체에 특별한 설명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그걸 들어줄 사람도 없다.
“다음에는 어떤 변태를 골라볼까?”
남은 오륜 중, 노랑 고리가 스파크를 뿜고, 붉은 고리가 미친 듯이 진동했다.
검은색 고리만이 가벼운 울림으로 그 존재감을 표했다.
“아, 미안. 듣고 있는 걸 깜빡했네.”
붉은 고리는 자신을 거부하고 검은 고리는 자신이 거부감이 든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지만, 손을 태워 먹어도 차라리 노란 고리가 낫다.
이건은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강체와 수없이 지내 온 날들 덕분에 단련된 손아귀가 노란 고리를 잡아 뺐다.
파지지직!
전류가 온몸을 지질 듯 퍼지고, 이건은 그걸 가차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파삭.
다시 고리가 깨지고 바닥에서부터 노란색의 동심원이 그려진다.
“우와.”
절로 감탄이 일었다.
작은 원으로부터 퍼져나간 기운은 주변 경물을 바꿨다.
넓디넓은 평야였다.
그리고 작은 오두막 한 채.
단숨에 바뀐 주변 경관을 뒤로 한 채 이건의 눈이 오두막으로 향했다.
끼이익.
문에 달린 오래된 경첩에서 소리가 났고, 그곳에는 잿빛 머리칼을 한 남자가 나왔다.
‘역시나.’
곧게 선, 코와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이였다.
나이는 많이 봐 줘도 30대 초반.
신안이 이지적인 미남이었고, 강체가 미소년이었다면.
지금 나온 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절로 호감이 드는 외모였다.
“반갑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노랑이지?”
“신속이다.”
신안과 강체와도 다르다. 신안은 사람을 내려다보며, 철저하게 가르치는 태도를 고수했고, 강체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그리고 신속은 뭐랄까?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형 같다고나 할까?
“일단 차라도 한잔할까?”
먹는다는 행위를 잊은 지 벌써 2년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그의 말에 감회가 새로웠다.
“좋지.”
이건이 그를 따라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신속은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앉아.”
드르륵.
의자를 당겨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바깥에서 보기보다는 넓은 장소였다.
한쪽에는 주방처럼 싱크대가 있고, 조리기구가 벽에 걸려 있었고.
반대편에는 침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원목 테이블이 이건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자.”
그리고 신속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나무 컵에 따라서 가져왔다.
“아, 음. 고마워.”
새삼 이런 대우에 익숙하지 않은 이건이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신속은 가볍게 웃으며, 자신도 차를 입에 댔다.
꿀꺽.
“음?”
맛이 참 기묘했다.
그리고 곧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괜찮아?”
대답하려는데 입이 굳었다. 곧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과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첫 번째 수업이다. 타인이 주는 걸 함부로 먹지 말 것.”
‘이런, 시발. 역시 이 새끼들은 전부 변태야.’
*
“후아.”
10분. 다시 몸이 회복되자, 신속이 그 앞에서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오두막 밖으로 끌려 나온 이건은 그를 보고 욕할 마음도 들지 않을 정도로 그는 웃는 낯이었다.
“괜찮아?”
“너 변태지?”
말하며 손을 뻗었다. 당하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
옷깃을 잡아챘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열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리고.
“야! 그건 반칙이지.”
탕!
총성이 울렸다.
“윽.”
이건이 몸을 수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정확히 대퇴부를 관통한 탄환이 이건의 뒤,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어디서 총을?”
“사람이 만든 무기 중 가장 훌륭한 살상력을 지닌 게 바로 총이지. 다른 이들과의 시간이 어떨지 모르니,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괴로울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가장 잊기 힘든 시간이 되리라고 장담하지.”
‘아니, 그런 거 장담하지 마.’
웃는 얼굴로 사람에게 총을 쏘고 독을 먹인다.
사이코패스도 한 수 접고 갈 놈이었다.
“단단히 미쳤구나.”
“칭찬 고맙다.”
탕!
말과 함께 다시 총성이 울린다.
“왁! 그만 쏴!”
아무리 회복된다고 해도 고통은 여전하다.
“총구의 방향을 보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 피해.”
탕!
가차 없는 총격이 한동안 평원을 울렸다.
90일. 신속은 총만 쏴댔고, 결국 이건은 총구의 방향을 보고 총알을 피하는 신기를 강제로 익힐 수 있었다.
“사실 총알 피하는 건, 가볍게 몸 풀기고. 지금부터가 진짜지.”
“뭐가 몸 풀기라고?”
미친 듯한 시간이었는데도, 저리 말하니 정말 이건이 지금까지 한 일이 별거 아닌 것 같았다.
“날 잡아 봐라. 이건, 우리 사이의 거리가 10m 이상이 될 때마다 난 널 사출 무기로 공격할 것이다.”
“뭐?”
“그럼 12초 후 시작하지.”
“어이?”
“질문은 받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신속이 뛰었다.
달리는 거라면 이건도 자신 있었다.
마라토너의 속도가 느리다는 놈이 있다면 머리통을 쥐어박아 줄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속도로 오랜 시간을 달린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절대로 느리지 않다.
하지만 신속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번개나 다름없네.’
피융 하고 총알처럼 달려가는데 잡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거리가 벌어지자.
슉!
그가 석궁을 쐈다.
“야!”
몸을 틀어서 피하고 이건이 앞으로 달렸다.
‘단거리 선수처럼 저렇게 뛴다면 난 지구력으로 승부한다.’
본래 타고난 체력도 체력이고 강체와의 훈련을 통해 육체 자체가 업그레이드된 이건이다.
그는 신속을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땅을 박찼다.
*
근 여섯 시간을 뛰었다. 팔뚝에 날아온 표창을 잡아 뽑으며 이건은 팔이 마비되는 걸 느꼈다.
‘독도 발랐어?’
신속은 빨랐다. 그리고 잘 달렸다.
‘이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노란색 번개가 평원을 내달리고, 이건은 죽으라고 그를 쫓았다.
“이건, 그러다가는 이곳에서 평생 못 나간다?”
“빌어먹을!”
이건이 힘을 끌어올려 달렸다. 힘을 아껴서 잡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스퍼트하듯 속도를 올리고 신속을 쫓았다.
“좋아, 그런 자세야. 다른 건 몰라도 반응은 빨리빨리 하라고. 아니면 내 총구가 계속 불을 뿜을 거야.”
실제로는 총이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쓰면서 용케도 저런 소리를 내뱉는다.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면 힘이 빠져나가. 호흡을 조절해.”
달리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슉슉!
표창과 다트, 석궁의 볼트, 구슬.
다양한 것이 날아들고, 이건은 그것을 가까스로 피하며 달렸다.
“더 빨리. 그렇게 느려서 뭐가 되겠어?”
신안과 강체는 그래도 숨이라도 쉬면서 했다.
근데 신속은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1분도 쉬는 꼴을 못 봤다.
‘좋아.’
신속이 저렇게 빨리 달린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건은 신안에게 배운 대로 신중하게 그의 움직임을 살피고 강체에게 배운 육체를 컨트롤하는 기술로 그를 카피했다.
쭉!
호흡을 베끼고, 달리는 근육의 움직임을 카피하자.
이건의 몸이 두 배는 빠르게 앞으로 쏘아진다.
“오, 따라올 테냐?”
그리고 신속이 더 속도를 올린다.
그걸 보고 다시 카피.
그러면 다시 신속은 더 빠르게 달린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추격전이다.
만 30일을 그렇게 달렸다.
호흡이 끊어질 듯 숨이 차오르면 신속의 호흡을 따라한다.
그러면 달리면서 체력이 회복되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거라고, 친구!”
‘친구는 개뿔!’
숨이 턱 끝이 아니라 뇌를 태울 정도로 차오르는 경험만 스무 번이 넘자.
이건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뛰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 겨우 10m 앞으로 다가와 있는 신속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건을 보고 신속의 눈에서 노란 번개가 튀었다.
파아앙!
그리고 소닉붐을 일으키며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폭풍에 이건의 몸이 뒤로 밀려 날아가고 그는 그대로 대자로 쓰러졌다.
‘이곳에서는 잠을 안 자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온몸의 힘을 모두 쏟아 붓자 자기도 모르게 잠이 솔솔 왔다.
그리고 이건은 그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놓았다.
*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에 이건이 눈을 떴다.
거기에 잿빛 머리칼에 미소 천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가 보였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체력이 형편없네.”
단연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괴물 같은 체력이라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그래서 계속 술래잡기를 하면 되는 거냐?”
“잘 아네. 너와 내가 할 일이 그거야. 술래잡기. 하지만 조건은 있지. 난 기다리는 걸 잘 못 해. 할 일은 빨리 처리해야 하고.”
“그래서?”
“100일이 지나도 내 몸을 못 건드리면, 넌 탈락. 난 널 허락해주지 못해.”
그 말인즉슨, 웜-업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신안과 강체는 변태도 아니고 가혹하지도 않았다.
진짜는 여기 있었다.
“좋아.”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일단 가고 봐야지.
왜 갑자기 이런 문장이 떠올랐을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처리하자고. 그게 잘못되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신속의 영향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신안과 있을 때는 그의 영향을 받았고, 강체와 있을 때는 또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강체를 처음 봤을 때는 머리를 굴렸고, 신속을 처음 봤을 때는 서슴없이 손을 썼다.
‘이들의 성격도 나에게 투영되는 걸까?’
“시간 많아? 그럼 쉬었다 오고.”
그렇게 말하고 신속이 다시 뛰었다.
으득.
이를 악물고 이건이 다시 움직였다.
*
단 한 번도 뛰는 걸 지겨워한 적이 없었건만.
이건은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98일째, 신속만큼은 아니지만 이건의 몸이 빛살로 비유할 만큼 빨라졌고.
신속은 그보다 더 빨라졌다.
‘이대로는 안 돼.’
자신이 빨라진 만큼 상대도 빨라진다.
그렇다면?
신안의 힘과 강체의 힘을 빌린다.
이건은 드넓은 평야에서 신속의 동선을 살피고, 자신이 그와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그렸다.
동시에 허벅지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펑!
바닥의 흙이 사람 키만큼이나 솟고, 이건의 몸이 한순간 신속을 상회했다.
물론 이 방식은 길게 오래 쓸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강체에게서 육체를 컨트롤하는 법을 배웠지만, 이건 미봉책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속을 잡지 못하면 100일 커트라인은 무리였다.
펑! 펑! 펑!
바닥에 거인이 지나간 것 같은 자국을 남기며 이건의 몸이 순간 단숨에 신속을 압도했다.
‘닿아라!’
간절히 바라며 손을 뻗자, 거기에서 신속의 속도가 한 번 더 빨라진다.
‘그런 방식으로는 안 돼. 차라리 처음이 낫겠어.’
처음?
이건의 두뇌가 평원에 처음 온 날부터 하루하루를 스캔한다.
신속의 방식을 카피했던 그것이다.
이건의 눈이 녹색의 광망을 뿌리고, 다시 신속의 움직임을 카피한다.
그리고 재차 도약하듯 땅을 박찬다.
소음도 없이 바닥을 박차고, 이건의 몸이 바람을 타듯 허공을 유영했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동시에 몸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끓어올랐다.
파지지직!
전신에 뇌전이 깃들어 몸 안의 세포를 깨운다.
사실 신속이 빠른 건 당연했다. 달리는 방식과 몸을 쓰는 힘이 다르니까.
그리고 이건이 그 힘을 일부나마 사용하자.
신속이 제자리에 멈췄다.
탁.
그의 몸에 이건의 손이 닿고,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연다.
“통과.”
# 용력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다룬 힘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이건은 근 하루를 누워 있어야 했다.
십 분 만에 회복되던 몸이다.
그런데도 만 하루를 누워 있어야 했으니 자신이 사용했던 게 무엇이었든지 보통 힘은 아니었다.
“이 정도 부작용은 예상했다.”
그의 옆에서 신속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한다.
지친 이건이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무슨 부작용?”
“내가 빠른 이유, 그 힘을 사용했으니까.”
알 수 없는 소리에 이건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강체도 나름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말했겠지만, 그의 힘의 근원이 용력이듯, 내 힘의 근원은 뇌력이다.”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이건의 양팔을 자른 강체의 입에서 나온 단어였다.
인간을 벗어나게 해주는 그 근원, 신속에게는 또 다른 힘인 뇌력이 있었다.
*
“바보.”
신속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은 오두막에서 몸을 뒤튼다.
아슬아슬하게 이건의 손끝이 신속의 몸을 스쳤다.
간단한 훈련 중이었다. 서로의 등을 먼저 건드리는 쪽이 이기는.
‘언제?’
어느새 등에 자신을 미는 힘을 느끼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
오두막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 이건은 뇌력을 제대로 쓸 순 없었지만, 신속의 호흡과 움직임을 복사해서 그와 엇비슷한 동작을 보일 순 있었다.
그리고 신속도 굳이 이건보다 월등하게 빠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빨리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신속은 주변의 지형을 쓸 줄 알았다.
이건이 아직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건 뇌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넌 느려도 너무 느려. 이렇게 하다가는 며칠을 이곳에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빨리 좀 하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재촉하는데, 압박감이 느껴졌다.
통과라고 해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더니, 신속은 아직 이건에게 할 말도, 가르쳐야 할 것도 많아 보였다.
“2차원적인 움직임에 널 가두지 마. 그러면 영원히 쫓길 뿐이야.”
오두막은 좁다. 신속이 자신의 등까지 오는 과정을 다시 자세히 살피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생긴 것과 딴판으로 그는 매우 성격이 급했고.
급한 성격인 만큼 필요한 말들도 자주, 반복적으로 내뱉는다.
녹색의 광망을 뿌리며 눈이 빛나고 이건의 머리가 쉼 없이 회전한다.
아마도 신안을 먼저 만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이 세계에 갇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안에게서 배운 것은 이건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도약과 3차원적인 움직임.’
방금도 아슬아슬하게 잡을 듯했다. 무언가 실마리가 보였다.
천장과 벽을 땅을 밟듯이 움직인다. 일반적인 속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무리겠지만.
단숨에 상대의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의 속도라면 가능하다.
빨라지는 것 이상으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뜻에 충실히 따라줄 뿐이다.
탁! 탁!
이건의 몸이 벽을 밟고 천정을 밟아 사방에 잔영을 만든다.
신속이 그 움직임을 보며 자신도 사방팔방 족적을 남기며 움직인다.
말 그대로 위, 아래 할 것 없이 흙 묻은 신발이 신속의 집 안에 흔적을 남긴다.
짝!
등을 노리고 손을 뻗었는데, 정작 마주한 건 상대의 손바닥이다.
“이제야 좀 쓸 만하네.”
상대의 고약한 가르침에도 칭찬은 가뭄에 단비처럼 보람을 느끼게 한다.
‘묘한 이들이야.’
“자, 그럼 다음으로 가보자.”
신속에게 쉬는 시간이란 ‘기절’, 또는 ‘죽기 직전의 부상’, 두 가지 상황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은 땅에 궁둥이 붙일 시간도 없이 그의 인도에 따라 끌려 다녔다.
“너무 급해.”
이런 불평을 뱉어도.
“내가? 실제로 급한 건 나보다 너일 텐데?”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그의 말이 맞으니까. 이건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고 싶다.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든, 눈 깜짝할 새 코를 베어 가든.
빠른 건 나쁜 게 아니다.
너무 급하다고 하는 것도 고된 트레이닝에 대한 시위지, 실제로 그리 생각한 건 아니었다.
“자.”
‘이런 준비는 언제 하는 걸까?’
온종일 같이 붙어 있는데도 이건 모르게 준비할 시간이 있나 보다.
그의 앞에는 열 개의 자기 잔이 놓여 있었고, 각각의 잔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담겨 있었다.
“마시라고?”
첫 만남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신안과의 시간은 그에게 가공할 기억력을 선물했고, 보통은 축복인 그 힘은 고통의 순간을 떠올릴 때는 불행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선 냄새를 맡아라. 열 잔, 모두 독이다.”
“···굉장히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하는데?”
“뇌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알면 독 따위는 무시할 만하지. 하지만 그 전에 이런 독 나부랭이에 죽을 것 같아 알려주는 거다. 신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저렇게 사람 좋은 얼굴로 용케 독이 든 잔에 코를 처박으라 말하는구나.’
그렇다고 반항할 생각도 없다.
어떤 건 비릿하고 어떤 건 시큼하다.
냄새만 맡아도 현기증이 도는 게 있는가 하면, 향기롭다 못해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향도 있다.
“모든 독은 특유의 향과 맛, 색을 지닌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다. 냄새를 맡고 맛보고 독을 찾는다. 뭐, 첫날에 먹어 봤으니 알겠지만, 제대로 못 해서 마시면 꽤 즐거운 경험이 될 거다. 어서 해.”
이건은 내심 고개를 저으면서도 선뜻 손을 뻗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우는 것이 낫다.
꿀꺽.
입에 침을 고이게 하던 그 찻잔이었다.
“독한 놈일수록 좋은 향을 뿜어내기도 하는 법이다.”
신속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건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제길.’
첫날 마셨던 독보다 더 괴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명멸 현상이라고 하던가? 마치 스크린이 깜빡이듯, 주변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암흑이 한 번 주변을 감싸고, 다시 흐릿하게 주변이 보인다.
“윽.”
신음과 함께 검은 피가 입가를 타고 흐른다.
“눈을 멀게 하고 내장을 상하게 하는 독이다. 먹자마자 눈에 바로 충격을 준다. 용케도 제일 독한 걸 골랐구나?”
*
독이란 건 사람을 좀먹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이건은 자신의 몸으로 그걸 배웠다.
독이 가득 찬 찻잔을 입에 들이붓는 과정을 120일을 넘기자.
“이건 무리야. 먹으면 고생할 것 같아.”
향을 맡지 않고도 육감으로 독을 골라내는 수준에 다다랐다.
“이것도 싫다.”
‘좋다, 싫다’의 감정으로 표현되는 그 감각은 신속도 놀라게 했다.
“용한 무당 같은데?”
어릴 때도 자주 듣던 소리다. 이상하게 육감이 발달한 아이였으니까.
“하여간 스무 잔 전부 독이면서 한 잔은 정상이라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능멸하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니고, 거짓을 쉽게도 말한다.
“통과.”
신속은 가볍게 말하고 또 뛰었다.
어차피 그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나 주저함은 없다.
거짓이든, 폭력적이든, 기본적으로 빠른 길이라면 그걸 택한다.
그게 신속의 방식이었다.
“따라와.”
그의 수업방식은 단순했다.
될 때까지 시도하라.
그 덕에 몸이 축나는 것 같지만, 이곳에서 이건의 상처는 기본 10분이면 낫는다.
뇌력을 썼을 때는 만 하루를 누워있었지만, 정작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독을 먹어도 10분이면 멀쩡해졌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효율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신속은 말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웃을 일은 아니지.’
그 고통은 모두 이건 자신에게로 돌아오니까.
“자, 여기다.”
오두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온 신속은 바닥에 있는 부분을 밟고 말했다.
우우우웅!
동시에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평원의 바닥이 열린다.
‘어이?’
그러더니 바닥에서부터 매트릭스 무기고를 연상케 하는 선반이 올라왔다.
대략 3m 길이, 1m 50cm 너비의 선반 80개.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것들은 죄다 사출 무기다.
슬링 샷부터 시작해서 석궁, 거기에 RPG-7(대전차 로켓포)도 보인다.
“와, 이걸 사람이 들고 쏠 수 있나?”
“강체 놈이라면 가능하지.”
이건이 가리킨 곳은 보통 전투항공기에 달려 있는 개틀링 포였다.
“···이걸 사람이 들고 쏜다고?”
“보통은 저걸 들고 쏘면 후폭풍이나 반동에 네 몸이 산산조각 날 테니, 괜한 시도는 하지 마라. 뭐, 다른 무기에 익숙해지면 쓰는 요령이 붙을지도 모르지.”
‘요령이 붙는다고 사용할 수준이 아니지 않나?’
“자, 자.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천년만년 있는 건 아니지. 우선은 이것부터 시작하자.”
말하며 신속이 무언갈 던졌다.
탁 하고 낚아채니, 적당한 크기의 짱돌이다.
“원하는 곳에 맞추는 거다.”
솔직히 이 정도쯤이야,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신안과 강체, 신속을 거쳐 현재까지 이건이 해낸 훈련은 사실상 사람이 견디기 힘든 종류의 트레이닝이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동체 시력과 근력, 근지구력 등 육체 능력이 몰라보게 향상되었다.
“어디를 맞출까?”
“저기.”
신속이 말하며 하늘 위를 가리킨다.
그의 손을 따라 하늘을 바라본 이건의 눈에 한 줄기 노란 선이 구름을 뚫고 가르는 게 보였다.
“뭐?”
아무리 봐도 맞출 만한 게 안 보인다.
“저거, 뇌조라고 불리는 내 애완 새야. 맞추면 돼.”
“저거 그냥 데코레이션 아니었어?”
한 줄기 노란 선을 보고 누가 생물을 상상하나 싶다.
“내 애완 새라니까. 자, 시작!”
‘이건 뭐.’
자신 있었다.
손에 든 건 고작 돌멩이지만, 100m가 떨어진 표적을 들이밀어도 그 표적을 박살 낼 자신이.
움직이는 신속을 맞추라고 하면 호되게 노릴 작정이었다.
“어서 하라고, 시간이 없어.”
“진짜!”
짜증이 솟구치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가른다’고 표현할 만한 노란 선을 맞추라는 거다.
“염병!”
돌을 던지자 쐐애애액 하고 허공을 가른다.
물론 새 근처에도 못 갔다.
*
퉁!
샷 건을 발사하자 허공에 불꽃이 튄다.
철컥!
노리쇠를 당기자 탄피가 연기와 함께 튀어 올랐다.
퉁! 퉁!
그리고 연속으로 발사하자 허공에서 연속으로 불꽃이 튄다.
동시에 노란 선이 이건을 노리고 날아온다.
뇌력을 일으키자, 이건의 눈에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그대로 몸을 휘돌려 뇌조의 공격을 피했다.
정확히 자신이 공격한 횟수만큼, 뇌조의 공격을 피하자.
“삐이이이익!”
뇌조가 거친 기음을 발하며 번개가 돼서 다시 허공으로 치솟는다.
“좋아.”
신속을 만나고 450일째, 이건은 빨리 달리게 되었으며, 독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무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짱돌로 새를 맞추는 작업은 정말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하다 보면 된다. 시간 낭비하느니 한 번 더 해 보라는 신속의 말이 맞았다.
결국, 무지막지한 개수의 사출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 마지막인데. 개틀링 포 한 번 쏴 볼래?”
보기만 해도 묵직하고 드는 것조차 무리인 무기다.
하지만 호기심은 생겼다. 몇 달을 탄약의 향기를 맡고, 쇠의 냄새를 맡으며 지냈다.
이곳에 있는 무기 중 대인 휴대용의 정점이다.
‘사실 저걸 일반인이 휴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전투기에 붙이는 일종의 자주포 같은 거다.
대인 휴대용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너무 과격하고 무식하지만, 실제로 들고 다니게 개조가 되어 있는 물건이다.
“좋아!”
신속과 지내며 망설임 따위는 없어졌다.
유명한 등산가는 산이 있기에 오른다 했고, 이건은 이제까지 다뤄 본 무기 중 정점에 있는 것의 방아쇠를 당겨 보고 싶었다.
이건은 불끈 양팔 근육을 불태우며 개틀링 포를 들었다.
“후흡!”
“오, 힘 좋고!”
신속의 응원을 받으며 이건은 뱃속에서부터 웅심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까짓 거!”
텅!
그리고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눌렀다.
‘쏘기 편하게 되어 있네?’
아마도 방아쇠를 당기는 형태로는 불편해서 누르는 형태로 구조를 바꿨나 싶었다.
개틀링 포는 일반적으로 5초 이상 발사하지 않는다.
굳이 마찰열로 인해 총열과 약실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정도 연사속도면 충분할 정도로 포탄이 나가기 때문이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
“우아아아악!”
반동을 통해서 포 전체가 떨리자, 이건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갈 듯했다.
그 순간, 뱃속에서 한 줄기 힘이 솟았다.
‘이 정도쯤이야!’
앳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강체?’
뱃속에서 솟은 힘이 전신에 퍼지며 이건은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았다.
탄피가 사방에 날리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용력?”
그런 이건을 보고 신속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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