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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인생 999회차 1권 (1)

2019.05.13 조회 5,324 추천 18


 # 프롤로그
 
 
 [역마(櫪馬)형이 선고되고 12번째 인생]
 
 1930년 잉글랜드 월드컵 U-15.
 남은 시간은 로스타임 1분.
 스위스의 마지막 공격에 앞서 이탈리아 U-15 감독 프란체스코 보르하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루카! 페널티 박스를 철저히 지켜야 해!”
 13살, 축구와 사랑에 빠진 이탈리안 소년 루카 보누치는 3-2-2-3 포메이션 전술인 WM시스템의 최후방 스위퍼 역할을 부여받아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쏴아아!
 300을 뚫어낸 상대 공격수를 향해 루카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발끝으로 공을 툭 쳐내서 터치라인 바깥으로 걷어냈다. 루카의 얼굴엔 그새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삐, 삐, 삐이이!
 주심은 경기 종료를 선언하고 1 : 0으로 이탈리아 승리를 알렸다.
 다음 날 루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역마(櫪馬)형이 선고되고 124번째 인생]
 
 199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인판틸A.
 12살, 축구를 사랑해 마지않는 소년 후안 파베르는 연습 경기 후 훈련장 한편에 주저앉아 동료들과 함께 인판틸A 감독 호세 마르티네의 말에 귀 기울였다.
 “불과 30년 전, 1960년대 축구는 매우 수비 성향을 띠고 있었다. 수비수는 수비 영역권에서 벗어나면 안 되었고, 공격수 역시 공세가 끝나면 수비에 가담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지향했지. 뭐, 공격이 끝나고 주도권을 빼앗겼으니 배후 공간이라도 철저히 메우겠다는 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보면 되겠군.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의 축구는 모든 부분에서 발전했다. 특히 전술적으로는 시냅스처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분화했지.”
 호세 마르티네는 고뇌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 턱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특히나 우리 라마시아는 현 바르셀로나의 감독인 요한 크루이프의 전술적 사상을 추구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명장 리멜스 미헬스에 의해 만들어진 거친 압박과 오로지 기술로만 몰아붙이던 직선적인 전술이 아닌, 머리를 활용한 보다 지능적인 전술이 구시대적인 틀을 깨고 라마시아에 적용하기 시작한 거지.”
 후안 파베르는 호세 마르티네의 연설이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나서야 훈련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집과의 거리를 불과 5m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날아든 야구공에 관자놀이를 직격당하며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역마(櫪馬)형이 선고되고 999번째 인생]
 
 대한민국 경남 진주시.
 1993년 12월 31일.
 
 새싹국민학교 운동장.
 “한아. 오늘 같이 퐁퐁 타러 갈래?”
 “오늘 엄마가 롤러스케이트 사주셨어. 집에 가면 동생 것도 있는데 같이 가서 타자!”
 “오늘 내 생일이야. 이따가 학교 마치고 오후 6시에 생일 파티 하니까 우리 집으로 꼭 와. 알겠지?”
 약 3달 전 이곳으로 이사 온 13살 소년 요한은 이맛살을 구겼다. 방학을 맞이해 혼자서 개인기술을 단련하는 와중 여지없이 꼬맹이들이 찾아왔다.
 “넌 어쩜 그렇게 축구를 잘해?”
 “나도 좀 가르쳐주면 안 돼?”
 “아빠가 혹시 축구 선수야?”
 요한이 짜증스러운 눈길로 흘겨봤음에도 불구하고 반 아이들은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계속해서 질문을 건넸다.
 ‘··· 귀찮은 것들.’
 그런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이 거슬리는 요한이다.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아이들은 더욱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여자아이들은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남자아이들은 우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각자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들먹이며 유혹한다.
 요한의 외모가 잘생긴 이유도 한몫했지만, 그보단 현란한 발재간으로 축구공을 다루는 능력에 뿅 간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한 번도 아이들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섞지 않았다.
 ‘어차피 끝날 인생이야.’
 지금 역시 요한은 아이들을 무시하며 휙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지루해, 허망해, 화가 나···. 짜증 나!’
 요한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말고 갑자기 교문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 그의 심정은 불안정했다. 당장 도로를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질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은 명부의 시왕이라 불리는 염라에게서 역마(櫪馬)형이라는 저주를 받아 원하지 않은 환생을 거듭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998번째 기억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요한은 오늘 하루가 마지막 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가장 짜증스럽고 원망스러운 건 삶이 고작 13년밖에 안 되는 시한부 인생과 다를 바 없다는 것. 13년을 꽉꽉 채운 것도 999번째 삶 중에서 단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황당한 건 환생 연도가 뒤죽박죽이라는 것. 1990년도에 죽었다가도 다음 날 깨어나면 1991년도인 풍경을 목격하곤 한다. 이전의 자신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어느덧 유유히 흐르는 남강이 한눈에 보이는 강터에 발을 들였다.
 “허억, 허억, 허억···!”
 요한은 허리를 반쯤 숙인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안 죽었네?’
 항상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광견병 걸린 개에 물려 11살 나이에 생을 달리하거나 로또 맞을 확률보다 떨어진다는 벼락을 맞고 즉사하는 등 신은 가차 없는 죽음을 선사해왔다.
 “큭큭 ···!”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리면 심장발작으로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다 대뜸 요한은 실소를 머금다 말고 하늘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X발! 이 엿 같은 인생 개나 줘버려!”
 요한을 지나쳐가는 어른들은 고작 13살 꼬맹이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인생을 논하자 비웃거나 혀를 끌끌 찼다.
 금세 붉어진 눈시울에 요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밤 11시 59분.
 1994년이 도래하기까지 불과 1분 전.
 요한은 벤치 한편에 앉아 추위 속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999번째 삶 속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삶이 지속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개새끼··· 농락하고 있어!’
 이왕 죽을 운명이라면 이렇게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죽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요한은 왼 손목에 찬 전자시계의 초를 알리는 숫자가 변화하는 걸 시시때때로 확인했다.
 그러다 약 3초가 남았을 때 그는 속으로 오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나긴 환생을 반복해오면서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 지 오래.
 그런데도 아쉬움이 남는 건 역시나 이번 생에서도 오랜 염원인 축구선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뒤늦게 깨달은바 이번 죽음은 얼어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 응?”
 두 눈을 질끈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뺨을 쓸어내리는 듯한 추위는 지속하였다. 이내 요한은 이상함을 느끼고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휘이잉 부는 칼바람과 밤하늘에 떠오른 노란 달은 영롱한 빛을 내고 있다.
 이어 그는 눈동자만 굴려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두 눈은 빠질 듯 커지고 말았다.
 “12시··· 1분?”
 
 
 # 죽지 않았다.
 
 
 풍만한 무언가가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잘 떠지지 않는 두 눈을 억지로 뜨자 곧 입안에 물린 게 젖꼭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엄마?’
 희뿌연 시야 속 영화배우 못지않은, 봄 향기 물씬 풍기는 장신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요한의 어머니다.
 힐끗 힐끗 눈동자만 굴리다 말고 요한은 미간을 좁혔다. 거실 한편에 자리한 소파 그 앞에 감색을 띤 테이블 그리고 반쯤 열린 베란다 너머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가 정원 잔디를 깎고 있다.
 ‘나··· 결국 죽은 건가?’
 12시를 넘겼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14살, 역마(櫪馬)형이 선고되고 단 한 번도 14년을 넘겨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후 집으로 돌아온 요한은 늦은 새벽까지 뜬눈으로 기다리고 있던 장신영에게 대판 혼쭐이 났다. 엉덩이를 매몰차게 맞는 순간에도 역마(櫪馬)형의 굴레에 벗어났단 사실에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잠들었던 것 같아···. 큭!’
 하지만 결국 죽음이 도래한 모양이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죽는 그 순간 요한은 파노라마 현상처럼 해당 생에 대한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고 의식은 점차 멀어진다.
 이후 눈을 뜬 순간엔 다른 공간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순간 진이 빠져버렸다.
 ‘이딴 식으로 날 농락할 줄이야···.’
 드디어 꿈에 그리던 축구선수로서의 염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한은 역마(櫪馬)형이 선고되기 전 한명기라는 그저 그런 축구선수였다. 독일 7부 리그인 블라우바흐에서 주전과 교체를 오가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필드 위를 누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뻤다.
 비록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 나지 않은 탓에 노력만으론 7부 리그가 한계였다. 그러나 언제고 프리미어리그, 라리가, 분데스리가, 세리에A를 누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늘 품고 다녔다.
 그의 나이 고작 21세였으니까.
 축구에 대한 강한 열망과 남들보다 세 배 더 노력한다면 서른 전에는 중하위권 클럽에라도 발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21살 여름 한명기는 뺑소니 사고를 당하며 일찍이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후 저승사자의 행정착오로 망각수를 마시지 않은 채 환생한 한명기는 염라에게 들통 나 일찌감치 어미의 뱃속에서 두 번째 삶을 빼앗겼다.
 ‘염라 이 개새끼···!’
 굳이 따지고 들자면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 행정착오를 저지른 건 저승사자였고 자신은 군대에 막 입대한 신병처럼 전투화 끈 하나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지옥으로 인계된 한명기는 염라가 보는 앞에서 망각수를 마셨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억이 지워지기는커녕 오히려 갓난아기일 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게 아닌가.
 문제는 바로 그다음이었다. 평소 인간들에게 호기심이 많은 염라는 망각수를 마시고도 기억을 잃지 않은 한명기에게 역마(櫪馬)형을 선고해버렸다.
 죄명은 망각수 거부죄.
 한명기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명에 크게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직도 그날 염라의 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장난스럽게 휘어진 눈꼬리, 새빨간 혀로 입술을 축이는 그 모습은 분명 실험용 쥐를 앞에 둔 정신 나간 탐구자의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
 어디선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요한은 순간 눈앞의 정경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며 곧 새로운 생이 도래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다시금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요한은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한아! 너 이 자식 언제까지 퍼질 나게 잘 생각이야?”
 ‘어, 엄마···?’
 
 * * *
 
 장신영은 머리끝까지 덮은 이불을 두 손으로 쥐고 한 번에 잡아당겼다.
 휘익!
 “허억?”
 요한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신영에 화들짝 놀라며 침대 머리 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한이 너···!”
 그런 아들의 반응에 장신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언제까지 엄마 속 썩이려고 그래? 어제도 학원 안 갔다며. 엄마가 모를 줄 알았니? 조금 전에 원장님한테 전화 왔었어.”
 “어, 엄마 맞아요?”
 요한은 장신영의 물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허깨비를 보는 듯 연신 두 눈을 끔뻑였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 죽은 게 아니야?’
 요한의 안색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대번에 파랗게 질렸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아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장신영은 침대에 무릎을 들이며 손을 뻗었다. 요한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한쪽 뺨에 닿자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어디 아파, 우리 아들?”
 그새 장신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바로 그때,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한쪽 눈가에서부터 또르륵 눈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곤 흠칫거렸다.
 ‘나 안 죽은 거지? 살아있는 거지?’
 이 감촉은 진짜다. 장신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익숙한 방 풍경, 반쯤 열린 방문 너머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구수한 된장찌개 향.
 “엄마!”
 ‘죽지··· 않았어! 나 안 죽었다고!’
 그 순간 요한은 와락, 장신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머! 얘,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장신영은 느닷없이 얼굴을 가슴에 파묻는 요한에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크흡! 거리는 아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이어 그녀는 전날, 아들에게 너무 모질게 혼을 낸 게 아니었나 하는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염라를 만난 직후부터 요한은 신을 증오했고 경멸했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할렐루야’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식탁 의자에 앉아 요한은 진한 된장찌개를 맛보곤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맛이야···!’
 혀끝에 감도는 찌개 맛에 살아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런데? 평소엔 맛없다며 투덜대더니.”
 식탁을 두고 마주 앉은 장신영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히 장신영의 음식은 소금을 왕창 쏟아부은 것처럼 짜다. 어차피 13년이라는 시한부 인생, 요한은 이번 생에서도 막장 아닌 막장 인생을 살아왔다. 정성스레 차려준 음식을 앞에 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등 온갖 상처 주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먹어본 된장찌개는 그 어떤 음식보다 달곰하고 맛있었다.
 “맛있어요. 맛있습니다!”
 요한은 순식간에 된장찌개와 밥 한 공기를 비워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요한은 빈 그릇을 장신영 앞에 내밀었다.
 “한 그릇 더 주세요!”
 “얘가 진짜 왜 이래? 너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장신영이 커다란 두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요한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배고파서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최고예요.”
 엄지까지 치켜드는 요한의 모습에 장신영은 어안이 벙벙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행복은 오래되지 않아 변질하였다.
 
  * * *
 
 1월 7일.
 어두컴컴한 방 안 요한은 커튼 사이를 벌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동자만 굴려 바깥 동태를 살핀 그는 곧 침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12월부터 시작된 방학은 2월 중순이 되어서야 끝나지만 14살이 된 요한은 3월 2일까지 쭉 휴식을 취하다 이후 중학교 입학식에 참여한다.
 하지만 요한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눈동자는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무릎 위에 얹어진 두 손은 정서불안에라도 걸린 것처럼 꼼지락거린다.
 ‘불안하단 말이지.’
 역마(櫪馬)형이 선고되고 998번째 인생 동안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근방에 야구경기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날아든 야구공을 맞고 사망, 침대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살던 당시엔 길을 걷다 말고 가림막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자판기에 깔려 죽은 적도 있지···.’
 그런 탓에 요한은 13년의 굴레를 벗어났다곤 해도 언제 어디서 죽음이 찾아올지 몰라 두려웠다. 마치 영화 <데스티네이션>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렇다고 마냥 집안 구석에서 움츠려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요한의 꿈은 확고했으니까.
 바로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
 ‘염라가 변심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정말 이 저주스럽던 역마(櫪馬)형이 종료된 건가?’
 염라는 역마(櫪馬)형을 선고할 때 기간을 한정하지 않았다.
 ‘암만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우선 최대한 몸을 사린 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간 요한은 대인관계를 소홀히 했다. 아버지 요영이 육군 장교인 탓에 1년 혹은 2년 주기로 이사해야만 하는 이유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요한이 스스로 썩 내키지 않았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 잉글랜드에서 살아가던 시절엔 그나마 몇몇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이는 개인기술 발전과 전술적으로 많은 것들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네덜란드에서 2001년 당시 10살이었던 요한은 유소년 클럽을 운영하던 원장의 아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친분을 만들었다. 목적은 하나. TIPS라는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에 참가해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 124번째 스페인에서의 삶에선 바르셀로나 라마시아에 소속된 인판틸A 감독인 호세 마르티네의 아들에게 접근해 라마시아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한은 바르셀로나의 전술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해나갔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열정을 보인 이유는 하나다.
 암담한 현실 속 유일한 돌파구가 축구였고, 축구에 관해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1994년 현재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지금 한국의 축구 시스템은 후진국 수준에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선진 수비 기술에 발끝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보이는 이때의 한국이 아니던가.
 중앙 수비수의 빌드업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시대였다.
 그로 인해 요한은 초등부 감독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축구부에 입부하지 않은 채 오직 혼자서만 개인기술 단련에 주력했다. 전술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이 가르쳐야 할 판이었으니까.
 거기다 현재 유소년 감독들의 사고방식은 모두가 그러하진 않겠지만 상당수 공격적인 재능이 없는 아이들에 한해선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을 감행할 정도다.
 ‘개선의 여지가 다분해.’
 수비수보다 공격수의 발굴에 주력하는 방식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말고 요한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그렇다곤 해도··· 우선은 중등부에 입부하는 게 가장 먼저야. 유소년 시스템에 관한 건 이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으니까.’
 털썩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요한은 이내 살포시 미간을 구기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 ··· 정말 안 죽는 거 맞지?”
 
 * * *
 
 시간은 물 흐르듯 지나갔다.
 3월 2일, 선진중학교 강당에서 입학식을 치른 요한은 1학년 1반에 배정되며 국민학교 때와 달리 아프다는 핑계도 없이 2주 동안 꼬박꼬박 등교했다.
 지난날의 요한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 국민학교 시절의 요한은 일찍이 반항기가 찾아온, 마치 중2병에 걸린 소년 같았다. 시시때때로 아프다는 핑계로 잦은 결석을 했고, 자신이 원해서 다닌 ‘축구 교실’도 발을 들였다가 단 1주일 만에 흥미를 잃고 무단결석을 일삼았다.
 “수비수는 수비지역에서만 있어야 한다! 너처럼 영역권을 벗어나선 안 돼!”
 이처럼 축구 교실 코치의 말을 들은 요한은 축구 교실이 조만간 망하리라 단언했다.
 장신영은 새벽부터 조깅을 끝내고 돌아온 요한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아들, 갑자기 모범적으로 구니까 너무 낯선데···?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지?”
 3개월째 장신영은 요한의 달라진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그런 물음을 건네곤 했다.
 요한은 싱긋 웃으며 의자를 뒤로 끌어다 식탁 앞에 앉았다. 아침 메뉴는 계란프라이 그리고 미역국이다. 아버지 요영은 RCT로 인해 2주간 작계 지역에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장신영은 가느다란 손으로 턱을 괴며 요한이 식사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의 얼굴은 매일같이 불만이 떠올라 있었다.
 계 모임에서 토로한 옆집 민수네처럼 아빠가 없는 사이 엄마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때리는 등 불효막심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장신영은 요한을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갔다.
 고작 13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마치 인생을 다 산 듯 늘 한숨을 푹푹 내쉰다. 거기다 의욕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자면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축구공을 다루고 있을 때면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그런데 14살이 된 이후부터 요한은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이전과 달리 방구석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새벽 6시면 일어나 골목 한 바퀴를 매일같이 달린다. 음식을 거르기 일쑤였던 지난날과 달리 오히려 음식을 더 달라며 금세 해치운 밥그릇을 내밀기까지.
 속을 썩이지 않는다는 데서 기뻤지만, 갑자기 아들이 확 바뀌었다는데 장신영은 싱숭생숭하면서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아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장신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잘 먹었습니다!”
 어느덧 식사를 끝낸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장신영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 시기 축구는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1983년 슈퍼리그가 개막한 초창기는 평균 2만여 명의 관중을 기록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러한 인기는 단발성이 지나지 않았다.
 ‘관중 수를 늘리기 위한 수작으로 자동차를 경품으로 내놓았을 정도였으니까. 경품 사이즈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관중 수도 급락했지.’
 요한은 999번째 인생 중에서 3번의 인생을 한국에서 보냈기에 K-리그 역사에 관해 익히 잘 알았다.
 ‘지금 시기쯤이면 5개 프로구단이 리그 경쟁을 치르고 있을 때겠네. 어쨌든 미래의 K리그가 될 이곳에서 기량을 썩힐 생각은 없으니까···.’
 2010년대 이후의 한국이라면 몰라도 90년대 한국 축구는 유소년 시스템부터 유럽과 갭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그렇기에 요한은 일찍이 협회에 눈도장을 찍어 유럽 연수를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교문을 넘어선 그때였다.
 “한!”
 뒤쪽에서부터 들린 우렁찬 외침에 요한은 살포시 눈썹을 늘어뜨렸다.
 “웬일로 일찍 왔냐?”
 뒤를 돌아본 요한은 장신영에게 보였던 천진한 표정 대신 서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올려다 봤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소년은 신나게 달려오다 말고 요한 옆에서 급하게 멈춰 섰다.
 “헥헥! 아침 일찍부터 훈련이 있거든. 어제도 말했다시피 금강대기가 날 기다리고 있다고?”
 다소 우쭐한 표정을 짓는 소년의 이름은 김진보. 선진중학교 축구부 감독의 아들이다.
 의도치 않은 인연이었다. 입학식 그날 옆자리를 차지한 것으로도 모자라 같은 반 짝꿍이 되기까지.
 특유의 쾌활한 성격을 지닌 그는 입학식 당일, 옆에 선 요한에게 뜬금없이 친구 하자며 손을 건넸었다.
 그간 대인관계에 소홀했던 만큼 요한은 이곳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관계 형성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며 그 손을 맞잡았다. 뒤늦게 그가 축구부 감독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올해 7월 금강대기 예선전이 있다고 했었지.’
 ‘금강대기’는 축구 발전을 위해 이번 해에 처음 창설된 중고등부 축구대회이다.
 ‘중고등부 각각 32개 팀이 참여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문득 요한은 눈동자만 굴려 살이 통통 오른 김진보를 올려다보았다.
 이 시기 중고등부 축구는 실력보다 학연, 지연, 혈연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뭐··· 2010년 이후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무엇보다 요한은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선진중학교 축구부의 선발 라인업은 대부분 15세, 16세의 소년들로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축구부 감독의 아들인 김진보는 입학한 그 순간부터 선진의 1순위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나름 선진중학교 내에선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봐야 하나···?’
 요한이 지켜본 김진보는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원들 사이에서 튀는 수준도 아니다. 스트라이커라는 이유만으로 상대 진영에 죽치고 있는 거저먹는 플레이어.
 스트라이커로서 위협적인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를 흔들 생각도 않는다는 게 요한이 내린 냉정한 평가였다.
 거기다 10개 중 단 한 개만이 유효슈팅을 기록할 만큼 타점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수준.
 하지만 마냥 김진보를 비난할 수도 없다. 창문 밖에서 내려다본 나머지 공격수들도 페널티 라인 위를 기웃거리며 공격 전개엔 아예 관여하지 않는 듯한 모션을 취했으니까.
 “아직 금강대기까지는 4개월이 남은 거로 아는데.”
 요한의 툭 내뱉는 듯한 물음에 김진보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금강대기는 말이지. 우리나라에서도 꽤 큰 규모의 축구 대회야. 학교의 명예가 걸린 건 둘째 치고 거기서 활약하면 동북고등학교 같은 축구 명문고 코치가 스카우트해간다고. 학교 성적 필요 없이 오로지 축구 실력으로 입학한다고 보면 돼. 더불어 축구협회 임원들도 참관하는 경기라 진짜 잘하면 해외 유학도 보내 준다고 아빠가 그랬어.”
 ‘아니, 지금 수준으론 예선전에서 조기 탈락하고도 남아.’
 요한의 혀를 끌끌 차는 듯한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진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 말고 그는 두 손뼉을 마주쳤다.
 “오늘 축구부 입부 테스트 볼 거지?”
 현재 선진중학교 축구부의 인원은 총 24명.
 김진보의 물음처럼 감독인 김보수는 오늘부터 축구부 입부 테스트를 열기로 정했다.
 모집인원은 단 4명.
 요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김진보의 표정은 전에 없을 만큼 환해졌다.
 “아빠에게 자랑했어. 우리 선진중학교에 특급 엘리트가 나타났다고 말이야.”
 요한은 지난주 금요일, 체육 시간에 펼쳐진 축구 게임을 통해 수비수로 활약했다. 그 경기에서 요한은 상대팀 스트라이커로 나선 김진보를 쇼트 태클과 슬라이딩 태클 등등 플레이를 보이며 꽁꽁 묶어버렸다.
 그 후로 김진보는 요한을 마치 사생팬처럼 늘 옆에서 따라다니며 축구에 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수비수가 공격을 수행한다는 건 전혀 생각 못 했어.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포항의 스타 홍명모가 간혹 너처럼 플레이하는 건 봤지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내가 가는 길목마다 네가 있을 수 있는 거지?”
 “너 혹시··· 눈이 머리에도 달려있고 그런 건 아니지?”
 간혹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을 건넬 때마다 요한은 ‘네 수준이 나보다 한참 떨어지는 것뿐이야.’라는 팩트로 김진보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선진중학교 축구부 감독인 김보수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2주간 창가에서 지켜본 축구부 운영방식은 꽤 부정적이다.
 창문 너머로 본 벤치엔 늘 붙박이 백업자원이 위치했고 11대11 연습경기 라인업은 고정 멤버들로만 구성했다.
 요한은 그간 패스, 드리블, 슈팅, 포지션 훈련 등을 쭉 지켜봐 왔다. 그리고 그는 벤치 멤버 중 충분히 선발자원보다 실력이 월등한 소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채 2주도 되지 않아 축구부 부원들의 개개인 실력을 가늠한 요한은 김보수가 학연, 지연, 혈연에 쉽게 얽히는 인물이라 조심스레 유추했다.
 “모집 인원이 4명이라고 들었어.”
 요한의 물음에 김진보는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인원만도 24명이라··· 거기다 상당수가 2학년, 3학년 선배들로 선발 라인업이 이루어져 있거든. 난 예외지만. 솔직히··· 나도 내가 재능이 아니라 운 좋게 주전 자원으로 올라섰다는 걸 인정해.”
 그 말은 1학년 신입 부원을 뽑아봤자 별다른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소리와 똑같았다.
 
 * * *
 
 입부 테스트는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 진행되었다. 게시판 모집공고를 보고 테스트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14명. 기존 축구부원들은 필드 절반을 차지한 채 코디네이션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필드라고 해봤자 모랫바닥이 고작이지만.
 요한은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관심도가 저조하군.’
 단상 위에 올라선 김보수는 한눈에 봐도 고집스럽게 생긴 남자였다. 펑퍼짐한 덩치에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사각 턱, 좁쌀만 한 뱁새눈은 단상 아래 일렬로 서있는 학생들을 마치 상품 가치 매기듯 흘겨본다.
 곧 김보수는 입을 열었다.
 “테스트 방식은 간단하다. 각 선호하는 포지션별로 위치해 현 부원들과 한 팀이 되어 1타임, 30분씩 테스트 경기가 있을 거다. 그중에서 재능이 있다 싶은 녀석들은 내가 지도하는 축구부 일원이 될 거고 재능이 없다 싶은 놈들은 그냥 아웃이야. 야, 임형수!”
 김보수의 부름에 단상 아래 있던 임형수 코치는 갑자기 휘슬을 불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왼쪽에서부터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원하는 포지션에 맞춰 서면 돼.”
 ‘축구부 코치는 저 사람 한 명뿐인가 보네.’
 요한이 본 임형수는 희멀건 피부에 각목처럼 빼빼 마른 체형을 갖추고 있었다.
 구기종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외관에 요한은 가느다랗게 길게 굽은 눈썹을 늘어뜨렸다.
 ‘뭐, 아르헨티나의 앙헬 디 마리아도 축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체형을 지녔으니까.’
 2번째 한국에서의 삶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비록 2003년도에 태어나 8살 나이에 공포 영화를 보다가 쇼크사로 사망했지만.
 ‘놀라지도 않았다고.’
 곧 학생들은 임형수의 말에 따라 왼쪽에서부터 각자 선호하는 포지션 자리에 섰다.
 요한은 수비수 포지션으로 향하며 입매를 늘어뜨렸다.
 ‘나 혼자로군.’
 14명의 지원자 중 8명이 공격수 포지션을 택했고, 4명이 미드필더, 1명이 골키퍼 포지션에 있었다.
 이어 임형수는 말했다.
 “앞 열부터 순차적으로 테스트를 거칠 거야. 공격수는 2명을 1개 조로 투입하도록 하지. 나머지 사람들은 저기 보이는 가림막 아래서 대기하고 있으면 돼. 수비수 포지션은 맨 마지막 열에 포함할 테니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어.”
 
 * * *
 
 A, B, C, D, E로 나눠진 축구부 지망생들은 적으로 대치하며 기존 부원들과 한 팀에 속한 채 테스트 경기를 치렀다.
 첫 번째 A, B팀 간의 경기는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공격수라고 해봤자 수비수를 흔들기보단 득점을 노리고 드는 데만 급급하다. 어떤 이는 노 마크 찬스에서 그것도 골라인과 불과 3m 이격한 거리에서 홈런을 때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포메이션은 기본 형태인 4-4-2 압박 시스템이었지만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진영은 완전히 흐트러졌다.
 그렇게 30분간의 경기가 끝나고 임형수는 학생들을 곧바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테스트 결과는 추후 통보.
 다음으로 C, D팀 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루하군.’
 요한은 E팀에 속했으며 차양막 아래 골키퍼 포지션을 택한 또래 소년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이름은 유지해. 여성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외관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골키퍼 포지션을 선택한 만큼 14살 또래 소년에 비해 머리 한 뼘은 더 큰 키에 생김새마저 다부졌으니까.
 “솔직히 난 저 선배보다 내가 훨씬 잘한다고 생각해.”
 유지해는 턱짓으로 골문을 지키고 있는 한 선수를 가리켰다. 40분째 죽치고 앉아 있다 보니 어느덧 요한은 유지해와 말을 터놓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요한이 보기에도 현 선진중학교의 주전 골키퍼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플레이를 펼치고 있었다. 장갑은 마치 기름 속에 퐁당 담갔다 꺼내기라도 한 듯 번번이 미끄러지기 일쑤에다 다이빙 동작도 영 시원치 않다.
 ‘다듬어지지 않은 모랫바닥인 이유도 한몫했겠지.’
 요한은 창문 너머 항상 연습경기를 가지기 전 부원들이 갯벌에서 조개 캐듯 웅크린 채 돌멩이를 찾아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런 바닥에서 무리하게 다이빙을 했다간 팔꿈치가 남아나질 않아. 그런데도 부족한 건 피차일반이군.’
 유럽 아약스, TIPS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에서 본 저 나이 때 골키퍼들은 움직임부터가 비교 불가였다.
 그때였다.
 철렁!
 임시 라인 마커로 그려진 아크 우하단부, 김진보의 콧발로 때린 슛이 그대로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 그물망을 흔들어버린 게 아닌가.
 “이얏호!”
 김진보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코너 플래그까지 달려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비상하는 야생 멧돼지와 흡사.
 “저거 봐. 정직하게 날아간 공이었는데 막지 못했잖아. 저 공격수는 골키퍼 정면을 향해 슈팅을 때린··· 아니 그냥 패스한 거야.”
 “그러네.”
 유지해의 지적처럼 비록 김진보는 운 좋게 노 마크 찬스를 얻었지만, 슈팅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지해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골라인 직전에 공이 바운드 되며 방향이 미세하게 틀어졌어. 운이 좋은 녀석인 것만은 분명하네.’
 요한의 생각처럼 평범한 회전율을 보이며 날아간 공은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다 말고 골라인 앞에서 바운드하며 교묘하게 방향이 틀어졌다. 이에 골키퍼는 가볍게 세이빙 하려다 말고 허둥대며 가랑이를 허용해버리고 만 것이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C, D팀 간의 경기도 끝이 났다. 그새 하늘은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요한은 3월, 으스스한 날씨에 자리에서 일어나 차양막 부근에서 가볍게 몸을 풀어주었다.
 그때였다.
 “나 골 넣는 거 봤지?”
 경기가 끝나자마자 김진보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달려와 다짜고짜 요한을 두 팔로 껴안으려 들었다.
 그 순간 요한은 허리를 가볍게 뒤로 젖히는 것으로 손길을 피해내며 단 한마디로 평가했다.
 “별로.”
 김진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이어 그는 가슴을 탕탕 때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지금은 이 정도 수준이래도 미래에 국가 대표가 될 몸이라고? 두고 봐! 앞으로 차근차근 성장해나가면서 이 왼쪽 가슴팍에 대한민국 국기를 꼭 달고 말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그래도 득점은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서 준비해!”
 감독의 외침에 기존 부원들은 약 10분간의 휴식 끝에 로테이션을 오가며 투입되었다.
 유지해는 요한과 한 팀에 속했다. 이전 팀들과 마찬가지로 포메이션은 4-4-2 시스템.
 그러나 경기가 시작된 순간 이전처럼 양 팀 진영은 포메이션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막무가내로 움직였다.
 포백을 구축하고 있는 수비수들은 페널티 라인 선상에서 기웃거리기만 뿐이었고, 2선 미드필더는 시시때때로 라인을 올라와 중원이 텅텅 비는 상황마저 비일비재하게 연출됐다. 이는 아군 팀도 다를 바 없었다.
 전반 11분.
 상대 공격수는 하프라인 선상에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드리블링으로 치고 들어왔다. 터치가 불안정한 드리블에 요한은 터치가 길어지는 순간을 틈타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쏴아아!
 “으윽!”
 나이스 인터셉트.
 상대 공격수는 요한이 갑작스럽게 발을 뻗자 당황하며 속도를 늦췄고 요한은 스터드로 공이 뻗어나지 않게 껴안듯 안으로 끌었다.
 이어 앞으로 고꾸라지듯 모랫바닥을 짚고 일어난 요한은 센터서클까지 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단상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김보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옆에서 임형수는 초조한 표정으로 감독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한국의 유소년 시스템에서 중앙 수비수의 주된 역할은 오직 수비가 아니던가.
 예외라면 포항의 에이스인 홍명모.
 그는 후방에서 다양한 패스 옵션과 공격의 시작점이 되어 일찌감치 유럽 복수 클럽의 타겟이 되었다. 그러나 지명도조차 없는 유소년들은 그러한 플레이를 펼칠 수 없다.
 한국 유스 시스템은 유럽과 달리 중앙 수비수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공격 상황 시 라인을 끌어올리면 뒷공간을 내어준다는 게 주된 원인이었다.
 그런 탓에 유소년 코치들은 공격 지향적인 수비수를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일찍이 하프라인을 벗어나지 않게 주입식 교육을 통해 습관화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태클을 시도한 이후 아군 진영 센터서클까지 곧장 드리블로 치고 올라갔다.
 “아니 저게 무슨···!”
 참지 못한 김보수가 요한을 향해 삿대질했다. 임형수는 초조한 표정으로 김보수와 요한의 플레이를 번갈아 보다 한순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요한이 센터서클까지 공을 몰고 가다 말고 왼쪽 사이드라인을 파고드는 동료를 향해 왼발 아웃사이드로 크게 휘어지는 로빙패스를 시도하는 게 아닌가.
 날아간 공은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 큰 반원을 그리며 정확히 동료의 발끝에 안착했다.
 “우와.”
 임형수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비록 상대 레프트백의 정면 태클에 금세 가로채기 당했지만, 요한의 빌드업 과정은 유연하고도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굉장해!’
 하지만 김보수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어쩌자고 벌써 겉멋이 들어서는 저런 위험한 플레이를 일삼는 거야?”
 “하지만, 방금 플레이는 정말 완벽했···!”
 “뭐?”
 “아, 아닙니다.”
 임형수는 김보수가 훽 하고 돌아보자 그새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김보수는 콧방귀를 끼며 투덜댔다.
 “테스트 경기이니 저런 플레이가 가능하지 실전에서 수비 진영을 이탈하면 금세 상대 공격수가 뒷공간을 노리고 들 거라고. 어디서 저런 개떡 같은 걸 배워서는 감히 내 앞에서 뽐내고 있어?”
 요한은 수비지역으로 빠르게 복귀하며 힐끗, 눈동자만 굴려 단상 위쪽을 돌아보았다.
 철제 의자에 앉아 있던 김보수는 어느덧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누군가를 향해 연신 삿대질을 날리고 있다.
 요한은 삿대질의 대상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 시기에 수비수는 오직 수비 지역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당연시하게 여겨왔을 시대니까.
 어찌 보면 감독에게 반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요한은 이후 두세 차례 더 기회가 포착될 때마다 하프라인까지 올라가는 과감한 플레이를 보였다.
 단상 위의 김보수는 자꾸만 수비지역을 이탈하는 요한에 펄쩍 뛰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포기한 듯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일 뿐.
 테스트 경기에서 굳이 감독의 심기를 건드리는 플레이를 보여서 좋을 건 없다. 그러나 요한의 프라이드는 확고하다.
 김보수의 후퇴한 전술에 곧이곧대로 따를 만큼 999번째 인생에서 쌓아온 긍지는 감히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니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진보는 15분을 남겨두고 필드 위로 나섰다.
 ‘적이로군.’
 김진보는 교체 투입되며 아크 부근에 있는 요한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천진해 마지않는 그 표정에 요한은 한쪽 눈썹을 늘어뜨렸다.
 
 * * *
 
 24분.
 아군 진영에서 미드필더가 공을 소유함에 따라 요한은 페널티 에어리어 대각으로 위치를 옮겼다. 이는 한 단계 전진한 사이드백과 미드필더에게 더욱 나은 패스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또한, 상대 공격수가 침투할 것을 대비한 삼각 포진.
 상대 선수 입장에선 일정한 간격으로 선수들이 에워싸듯 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만큼 쉽게 돌파할 수 없다.
 하지만 함께 출전한 센터백은 페널티 에어리어에 못 박힌 채 요한을 향해 대뜸 성질을 부렸다.
 “인마! 너 왜 그쪽으로 가? 이리 안 와?”
 한 학년 선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가볍게 무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왼쪽 사이드 부근, 상대 선수는 커트 아웃으로 풀백을 제치자마자 문전 안으로 얼리 크로스를 시도했다.
 그때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기웃대던 김진보는 기회를 틈타 요한에게 소리친 동료의 뒷공간을 파고들었다.
 “헛!”
 이어 김진보는 공이 한 번 바운드 되는 순간을 노려 하프 발리킥을 펼쳤다.
 하지만,
 툭!
 “무슨···!”
 김진보는 그만 두 눈이 빠질 듯 커지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 요한이 달려와 발끝으로 슈팅 궤적을 틀어버린 게 아닌가.
 공은 그대로 크로스바 위로 붕 뜨고 말았다.
 삐이이-!
 임형수가 휘슬을 불며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요한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털어내며 단상 아래로 향했다.
 요한은 이 경기에서 6차례에 걸친 인터셉트와 2개의 클리어링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경기 중 요한을 향해 소리쳤던 선배가 한순간 입을 꾹 다물며 눈치를 볼 정도.
 “테스트 결과는 내일 정오에 게시판에 공지할 예정이니 이만 돌아가도 좋다.”
 김보수는 앞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말하더니 끝에서 요한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곤 뒤돌아섰다. 임형수는 일일이 학생들에게 다가가 수고했다며 다독였다.
 임형수는 마지막으로 벤치 한편에 앉아 축구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는 요한에게 향했다.
 “조금 전에 보여준 로빙패스는 굉장하던데? 어디서 축구를 배운 거야?”
 요한은 드레싱을 다시 한번 매듭지으며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독학이요.”
 “독, 독학? 독학치고는 상상 이상이던데? 아무튼, 비록 다른 아이들은 포메이션에 한정되지 않은 움직임을 보였지만 내가 본 너는 포지션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어.”
 임형수는 한층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격 시 움직임도 좋았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라인을 높이 잡았잖아? 아니, 거의 하프라인까지 올라가 공격을 주도했다고 봐도 무방해. 동료 미드필더가 전방 지역에서 공을 소유하고 있을 때 센터서클까지 올라간 건 백패스를 받기 위함이었겠지? 상대 선수들의 라인을 흔들어놓을 공산으로 말이야. 패스, 패스, 패스로 탄산음료 흔들 듯!”
 요한은 한편으론 임형수의 전술분석 능력에 작게나마 경탄했다.
 “역습 상황 시엔 위험할 수 있는 플레이지만 난 그런 과감성을 좋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홍명모인데 그 선수는 정말···!”
 “야, 임형수!”
 임형수는 김보수의 외침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 말고 그는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만 가볼게. 좋은 소식··· 있을 거야.”
 끝말을 늘어뜨린 임형수에 요한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완전히 잡혀 사는 모양이네.’
 
 * * *
 
 다음날.
 요한은 등교 후 건물 한가운데 있는 전체 게시판에서 테스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자리에 있어서 펄럭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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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지 사항 >
 공격수 : 정해인
 미드필더 : 정해민
 수비수 : 요한
 골키퍼 : 유지해
 * 오후 1시 입부식 예정. 단상 앞으로 집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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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 김보수가 말했던 대로 선발된 인원은 4명. 당당히 수비수 포지션에 이름을 올렸지만, 요한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때 표정만 봐서는 절대로 뽑을 것 같지 않았는데 말이야.’
 김보수는 요한의 공격 지향적인 플레이에 연신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기에 애초에 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축구부원이 되지 않는다 해도 다른 루트를 통해 얼마든지 유럽 진출을 꾀할 수 있으니까.
 비교적 무난한 루트가 바로 선진 중학교 축구부 부원이 되는 것일 뿐.
 입부식은 예정대로 오후 1시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는 기존 부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게 전부.
 단상 위에 올라선 김보수는 서 있는 것조차 귀찮은지 철제 의자에 앉아 새로 입부한 소년들의 얼굴을 노려보듯 살펴봤다. 그 특유의 뱁새눈이 요한의 무심한 얼굴에 닿았을 때는 명백한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어 눈살을 찡그린 그는 운동장 한편에서 지그재그 형식으로 코디네이션을 설치하고 있는 임형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임형수! 준비됐냐?”
 “네, 네! 준비됐습니다.”
 임형수가 양팔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으로 김보수는 단상 아래 집합한 선수단에 말했다.
 “오후 훈련은 코디네이션을 활용한 상 하체 밸런스 및 스피드 훈련이다. 이후 연습경기를 가질 예정이니 임형수 코치의 지시에 따라 성실히 수행하도록 해. 그리고 오늘 새롭게 부원이 된 선수들은 한 명씩 나와 1대1 면담을 가질 거니 호명하면 째깍 달려오도록.”
 그 말을 끝으로 김보수는 운동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감독실로 향했다.
 공격수 정해인부터 감독실에서 김보수와 1대1 면담을 했다. 20분에서 30분간 이어진 기나긴 면담 끝에 정해인은 감독실을 빠져 나와 1분 차이로 태어난 동생 정해민과 바통을 터치했다.
 두 사람은 누구든 쌍둥이로 볼 만큼 외모부터 신체까지 쏙 빼닮았다.
 코디네이션 훈련은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부원들은 임형수가 20분간 휴식을 부여하자마자 저마다 헉헉거리며 모랫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요한은 크게 숨을 고르며 앉는 것 대신 발목을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돌려주었다.
 훈련은 딱히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요한이 꼬집은 선진 중학교 축구부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전술 이해력.
 어제만 하더라도 선수들은 각기 따로 노는 듯한 고집스러운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몇몇 소년들은 좌우를 살피지 않고 전진만 하다 볼품없게 볼을 탈취당하기 일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개개인별 맡은 바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부터 바로잡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제 정말 멋졌어.”
 어제부로 알게 된 유지해가 엄지를 치켜들며 다가왔다. 요한이 아무런 대답 없이 한쪽 눈썹을 늘어뜨리기만 하자 유지해는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테스트 경기에서 말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난 몇 차례 실점을 허용했을지도 모르거든.”
 빈말임이 분명하다. 어제 오후 유지해의 골키퍼로서 플레이 모션은 1대1 트레이너를 통해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든 체계적인 움직임투성이 아니던가.
 공격수들의 위치에 따라 니어 포스트, 파 포스트를 사이에 끼고 슈팅 공간을 좁힌다. 역습 상황 시엔 빠른 판단력으로 뛰쳐 나와 황급히 볼을 걷어내기까지.
 슈팅 궤적을 예상하고 위치를 유연하게 옮겨가는 움직임은 단기간에 보여줄 수 없는 기교다.
 블로킹 능력도 중등부 레벨에선 수준급.
 ‘뭐, 물론 상대 레벨이 초보자 수준이었지만 말이야.’
 곧 요한은 툭 내뱉듯 말했다.
 “사탕발림 소리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응?”
 “어느 축구부 출신이지?”
 뜬금없는 물음에 유지해는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요한을 알게 된 지 고작 이틀.
 유지해는 묘하게 위축되게 만드는 그의 서늘한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어야만 했다.
 ‘무슨 눈빛이 저리 살벌해···?’
 유지해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곧 요한은 눈매를 늘어뜨리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봉래국민학교였던가. 아마 넌 거기 출신이겠지?”
 “그, 그걸 어떻게?”
 봉래국민학교는 진주에서도 축구 명문으로 가장 손에 꼽히는 사립학교였다.
 학교 이사장이 축구광이라는 소문이 나돌 만큼 유독 축구부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쏟아부을 정도.
 메디컬 코치와 포지션별 전담 코치가 존재할 만큼 해당 학교는 경상남도 내에서까지 입소문이 나 있었다.
 요한은 좌우로 고개를 까딱이며 목을 풀어주었다.
 “정적이었거든.”
 “정적···이라고?”
 이어진 요한의 대답에 유지해는 이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한은 반대편으로 가져간 오른쪽 팔꿈치를 왼손바닥으로 꾸욱 누르며 말을 이었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움직임 말이야. 물론 여기 있는 아이들과 비교해선 확실히 어빌리티가 남다른 면이 있지만, 너무 순진한 움직임을 보여주었어. 한 가지 예로 들자면··· 어제 코너킥 상황에서 네 위치가 어디였는지 알아?”
 유지해는 고개를 저었다. 테스트 경기에서 코너킥 상황만도 수어 번 연출되지 않았나.
 요한은 왼팔도 똑같이 반대 방향으로 뻗어 팔꿈치를 꾸욱 눌러주었다.
 “보통의 골키퍼는 코너킥 상황에서 골문 중앙보다 앞서게 되고 몸의 무게중심 역시 앞에 잡혀있게 돼. 하지만 네 위치는 골라인의 중앙이었고, 상대 선수가 코너킥을 차는 동시에 불리상태인 선수들 틈으로 뛰어나갔어.”
 “그야 당연히 펀칭을 시도하기 위해서···!”
 요한은 유지해의 말을 도중에 가로챘다.
 “펀칭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넌 6차례 걸친 코너킥 상황에서 모두 똑같은 포지션을 고수했어.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아? 높이 뜬공같이 제공권 다툼에서는 우위를 점할지는 몰라도 낮게 깔리는 크로스와 코너라인과 가까운 박스 안으로 이어지는 크로스엔 취약점을 보인다는 거야. 습관처럼 중앙을 선점하는 그 버릇··· 프로 무대에선 금방 들통나버린다고. 그런 일관된 모션은 상대가 네 움직임을 일찍이 파악해서 노리고 들 공산이 커. 당장 내가 적으로 만났더라도 코너킥 상황에서 낮게 깔린 크로스를 시도해 네 뒷공간을 노리고 들었을 거라고.”
 이어진 요한의 말에 유지해는 순간 뭉툭한 쇠붙이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맛봤다.
 “아마도 네 전담 코치였던 사람은 제공권 장악 능력에 초점을 둔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 말해주고 싶네.”
 누구 하나 자신의 위치 선정에 대해 이렇다 할 지적을 해준 적이 없었기로서니 요한의 발언은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한! 이제 네 차례야!”
 때마침 정해민은 면담을 끝내고 요한을 향해 소리쳤다. 이에 요한은 스트레칭을 멈추고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지해를 가볍게 지나쳐갔다.
 
 * * *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시지? 친척들은 무얼 하나?”
 책상 앞에 자리한 철제 의자에 앉자마자 건넨 김보수의 첫 마디. 요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직업군인입니다.”
 “오호, 직업군인? 하사관 아니면 장교?”
 “장교이고 소령입니다.”
 “오오, 그럼 돈 좀 버시겠구먼.”
 요한은 대답 대신 입매를 늘어뜨렸다. 김보수는 조금 전까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환해졌다.
 하지만 이어진 출신 질문에 요한이 학군 출신이라고 답변하자 그새 김보수는 흥미를 잃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으음, 군인 뭐, 나쁘지 않은 직업이지. 평생직장으로 삼기에도 뭐··· 아무튼, 그건 됐고. 어제 너의 플레이에 관한 건데 말이야.”
 김보수는 곧장 주제를 전환하더니 중역 의자에 축 늘어지게 앉으며 눈살부터 찡그렸다.
 “어느 축구부 감독이 그렇게 플레이 하라고 가르쳤지? 봉래? 명신? 아니면 촉석국민학교 축구부 감독이 그렇게 가르치던?”
 유럽 아니 세계 최고라고 봐도 무방한 아약스 암스테르담 유스 클럽, 요한 크루이프의 철학이 스며든 바르셀로나의 라마시아, 브라질 상파울루 유스 클럽을 두루 거쳐 배웠다고 한들 믿어줄 리 만무하다.
 이에 요한은 짧게 답변했다.
 “독학입니다.”
 “독···학?”
 김보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짧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어쩐지 막 날뛴다 하고 싶더니만!”
 삿대질하는 게 습관인지 김보수는 혀를 쯧쯧 차며 요한을 향해 검지 끝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어 김보수는 쓴소리를 거침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수비수 그것도 센터백의 빌드업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도 안일한 짓인지 알고는 있나? 네가 포항의 홍명모도 아니고 홀딩이 나서도 욕먹을 짓을 한 차례도 아니고 수차례 보여줬다고. 수비수로서 갖춰야 할 건 딱 정해져 있어. 탁월한 위치 선정으로 인한 인터셉트! 상대 공격을 태클로 걷어 내거나 키가 크면 제공권으로 승부를 보는 거야! 피지컬은 기본적으로 받쳐줘야겠지!”
 김보수는 말을 하면서 점차 목소리를 높였다. 요한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내는 그의 모습에 잠자코 귀 기울였다.
 “빌드업은 미드필더에게 어울리는 역할이지 수비가 결코 가로챌 게 아니란 소리야. 물론 억울할 테지. 어제 테스트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상은 분명 놀라웠으니까. 하지만 명백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그건 고작 테스트 경기였어. 금강대기처럼 명예와 우승컵을 걸고 싸우는 대결에서도 그런 전개가 먹히라고 보나? 아니, 절대 아냐! 오히려 네가 하프라인까지 올라와서 수비벽에 구멍이 발생하고 마는 거라고. 그 구멍을 동료들이 메꾼다고 생각해봐. 일 처리를 남에게 미루는 것과 뭐가 다르나? 그런데도 내가 널 뽑은 이유는 간단해. 개선의 여지가 보였으니까. 트래핑이나 볼 터치, 패스 부분에서 가산점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그러니까 앞으로 코치 말 잘 듣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라오면 훌륭한 수비수가 될 수 있단 소리야.”
 끝에서 김보수는 선심 썼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센터백의 주된 역할에 관해선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빌드업은 모든 선수들에게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요한은 딱 잘라 말했다. 김보수는 순간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어 두 눈을 연신 끔뻑거렸다.
 “뭐, 뭐라고?”
 “공격 지향적인 센터백은 아군에 더욱 다양한 공격 루트를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조금 전에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본적인 수비수로서 주된 능력이 갖춰졌다는 전제 아래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요한은 씨익 하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였다.
 
 
 # 새판 짜기
 
 
 “현재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전술은 기껏해야 ‘킥 앤 러시’입니다. 조금 더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뻥축구’죠. 사이드 진영 혹은 스트라이커가 전방으로 달려드는 타이밍을 노려 수비수나 미드필더가 공을 뻥! 차버리는 거예요. 중간 과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죠. 지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를 만나 전패했습니다.
 상대가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전패했다 하더라도 1점 차, 2점 차 아쉬운 패배였으니까요. 하지만 거기엔 홍명모라는 리베로가 존재한 이유가 컸죠.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마치 독일의 마티아스 잠머(Matthias Sammer)처럼 스위퍼 역할을 100% 해냈으니까요.”
 김보수는 책상을 마주 보고 앉은 요한의 말에 선뜻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이놈··· 14살 맞아?’
 서슬 퍼런 시선은 눈을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술 지향에 대한 반박은 화살촉처럼 김보수의 살갗을 푹푹 찔러댔다.
 “감독님이 추구하는 킥 앤 러시 전술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1990년 월드컵을 앞둔 국가 대표팀은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전에서 5전 3승 2무라는 무패 성적을 냈죠. 감독님이 지향하는 전술로 말입니다. 뭐,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가장 선호하는 전술 운영 방식이 되어버렸지만, 문제는 세계에선 먹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유럽인이나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체격이 클 뿐만 아니라 피지컬, 스피드, 유연성 등 기본 신체 능력부터가 비교 불가죠. 킥 앤 러시란 수비 지역에서 웅크려있다가 한순간 기회를 포착해 전방으로 쇄도해서 공격수에게 롱볼을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도중에 인터셉트 될 가능성이 60% 이상이죠.”
 “그거야 틈틈이 호흡을 맞추다 보면···!”
 “아니요. 호흡과는 무관합니다. 한국이 선보이는 킥 앤 러시는 역습이 아닌 탓에 이미 상대 진영엔 수비수, 미드필더가 각자 위치에 포진한 채 블록을 형성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건 튼튼한 성벽을 향해 단지 칼만 들고 돌파하려는 어쭙잖은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진정한 ‘킥 앤 러시’라면 역습 상황에서도 빌드업 과정은 필수예요.”
 “허··· 참!”
 김보수는 14살 소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냉철한 시선과 예리한 발언에 혀가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요한의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압박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대책은 빌드업입니다. 수비수가 공격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며 배후에 구멍이 생긴다고 하셨죠? 이는 분명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구멍의 크기는 킥 앤 러시가 더욱 절대적이죠. 3선이 빌드업 전개로 올라갈 시 2선 미드필더 자원 간의 간격은 자연스레 촘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 공격수 입장에서는 공간이 좁혀들어 역습을 지향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킥 앤 러시는 오히려 상대에게 역습의 시발점을 제공해줄 수도 있는 도박과도 같은 전술이에요. 아아, 정정하죠. 우리보다 몇 단계 높은 레벨에 있는 유럽, 남미를 상대로는 역습을 시도하게끔 링 구석으로 물러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자살입니다.”
 
 1대1 면담 이후 약 한 달 가까이 김보수는 요한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요한은 패스, 슈팅, 드리블 훈련이 끝나고 난 뒤 연습 경기에서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를 임형수 및 몇몇 선수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감독의 강경책이다.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선수에게 출전 불가라는 카드를 꺼내 강제적으로라도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끔 만드는.
 요한에게 선택지는 단 두 개.
 숙이고 들어올 것인지 아니면 벤치에서 경기를 관전하기만 할 것인지 말이다.
 김보수가 요한을 한동안 방치해 버리자 김진보는 연신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제2의 홍명모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특급 유망주를 이렇게 벤치만 데우기만 해도 되는 거냐고!”
 그 누구도 제2의 홍명모라 부른 적은 없다. 이웃 형제지간이라고까지 불리는 촉석중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 후반 15분 교체 아웃 된 김진보는 벤치에서 쉽사리 분을 삭이지 못했다.
 “네가 버티고 있었다면 스코어가 저렇게 벌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김진보의 말대로 현재 스코어는 0 : 4.
 대패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골키퍼 유지해는 경기 시작 30분까진 두 차례 멋진 클리어링을 선보일 만큼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곧 사달이 일어났다. 세이빙 미스로 페널티 대각으로 공을 흘려보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더니 이를 포착한 상대 공격수에게 득점을 허용해버린 것이다. 한순간 멘털이 날아간 유지해는 후반전 포함 5분 간격으로 4점을 내리 퍼주고 말았다.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욕이 넘쳐 보였던 유지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어느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은 연약한 소년이 골문을 지키고 있다. 요한은 그런 가엾은 골리를 응시하며 입매를 늘어뜨렸다.
 ‘비단 골키퍼만의 문제는 아니지.’
 현재 선진중학교 축구부는 촉석중학교 축구부를 상대로 4-4-2 기본전형을 갖춘 상태.
 압박 전술에 특화된 시스템이었지만 전방 공격진들은 상대가 볼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압박을 취하는 모션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촉석중학교 축구부 선수들은 더욱 여유로운 패스 플레이를 펼치며 순식간에 선진중학교 진영 깊숙이 파고들었다.
 ‘애초에 2선 미드필더 자원은 센터 하프가 아닌 스트라이커처럼 시시때때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멍청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어. 그러니 중원이 텅텅 비는 현상이 발생하고 수비 대비 상대 공격 숫자가 많아지면서 수적 열세를 가져갈 수밖에 없지.’
 말 그대로 어디서든 득점을 노리고 들 수 있을 만큼 선진의 수비벽은 붕괴하기 직전.
 이럴 때에는 중원에서 완전히 점유율을 잃은 미드필더 중 가장 형편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선수를 교체 아웃 하거나 포메이션 변화를 꾀해야 한다.
 물론 요한이 보기엔 미드필더진 전체를 갈아엎어야 할 판이었지만!
 그러나 김보수는 상대팀 감독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 채 임형수만이 터치라인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김보수 감독은 상대 팀 감독과 담소를 주고받기에 여념 없을 터.
 그때였다.
 “코치님!”
 느닷없는 김진보의 목소리에 임형수는 움찔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 응?”
 김진보는 궁둥이를 떼고 옆에 앉은 요한을 가리켜 대뜸 외쳤다.
 “저희 아빠도 없는 데 요한이 투입하죠! 우리 한이라면 이 치욕을 갚아 줄 수 있다고 보는데요!”
 두 눈에 힘을 팍 주며 외치는 김진보에 요한은 으,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후반 18분, 남은 시간 고작 22분을 남겨둔 상황에서 교체해봤자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아닌 이상 4골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다. 거기다 혹여나 스트라이커로 출전해 4골을 내리퍼붓는다고 한들 상대 공격수는 더블스코어로 점수 차를 벌여놓을 게 뻔했다.
 센터백으로 출전할 경우 더는 스코어 차가 벌어지지 않게 막아낼 자신은 있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게다가 임형수는 김진보의 요청에 요한의 눈치를 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
 “그, 그게 말이지. 조금 전에 너에 관한 교체 지시는 감독님이 사전에 나한테 말씀해 두고 가신 거였거든. 금강대기 예선전을 앞두고 서브 자원 기량도 점검할 겸··· 하지만 요한에 관한 교체 지시는 전달받지 못해서.”
 “하지만 지금 감독은 저희 아빠가 아니라 코치님이잖아요!”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너도 알다시피 감독님께서는 미리 짜놓은 플랜을 누군가 개입하는 걸 엄청 싫어하시잖아.”
 “그럼 왜 맨날 요한은 벤치에 앉혀 두는 거죠? 교체로 출전해봤자 고작 3분여 남겨두고 투입하고!”
 “음, 글쎄. 그건 나도 잘··· 아마 감독님 전술 지향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러니까···.”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듯 작아진 임형수는 난처한 듯 뺨을 긁적이더니 애써 김진보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감독님을 한 번 설득해볼게.”
 김진보는 벤치에 털썩하고 주저앉으며 볼멘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경기는 후반 막판 상대 공격수의 중거리 포와 함께 0 : 5 선진중학교 축구부의 대패로 끝이 났다.
 복귀를 위해 학교 버스에 탑승한 선수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특히 5골을 허용한 유지해는 맨 끝 좌석에 앉은 채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주 형편없는 경기력이었다.”
 버스가 서서히 출발하자 김보수는 좌석 손잡이를 버팀목 삼아 입을 열었다.
 “공격수는 더욱 적극적으로 상대 수비수한테 볼을 빼앗으려 들어야 해. 미드필더는 공간이 보인다 하고 싶으면 사이드든 중앙이든 패스를 연결해야지! 수비수들은 대체 뭐했나? 상대 공격진이 그렇게 파고들 동안 막을 생각은 않고 번번이 뒷공간을 허용해주기나 하고 말이야!
 너희는 벽이야. 골문을 가로막는 벽이라고! 공이 발밑에 있으면 걷어낼 생각을 해야지 뭘 멍청하게 망설이고 있어? 그리고 유지해! 너 인마, 좀 잘한다고 선발 출전시켜 줬더니 공중볼 처리를 그딴 식으로 해? 어디 기름통에다 손을 담그기라도 했냐? 엉? 그리고 수비수가 중구난방으로 날뛴다 하고 싶으면 네가 나서서 조율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인마?”
 그는 임형수의 구두 보고만 듣고 이렇듯 신랄한 비난을 펼쳤다. 김보수의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구석에 자리한 유지해의 고개는 점점 더 땅으로 처박혔다.
 요한은 창밖을 응시하다 말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후 선진중학교 축구부는 5차례에 걸쳐 다른 학교 축구부와 연습 경기를 했고 촉석중학교 축구부 결과까지 포함해 0승 1무 5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2 : 2 무승부를 한 망진중학교와의 경기를 제외하곤 나머지 5경기에서 3점 차 이상의 스코어가 벌어질 만큼 선진중학교 축구부의 수비력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 * *
 
 6월 1일.
 금강대기 예선전을 한 달 앞두고 선진중학교 축구부는 또 한 번 촉석중학교와 친선 경기를 열었다.
 경기를 이틀 앞두고 김보수는 이전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했고, 선수들은 저마다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힘겹게 훈련을 소화했다.
 “헤엑, 헤엑, 헤엑!”
 포지션별 훈련을 끝으로 20분간 휴식이 부여되자마자 김진보는 혀를 내민 채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
 요한은 제자리에서 발목을 돌리다 말고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유지해였다.
 자신감이 흘러넘쳤던 이전의 모습과 달리 마주한 유지해는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어깨를 움츠러든 채다. 눈 밑엔 거무스름한 빛이 어리기까지.
 그도 그럴 것이 유지해는 지난 촉석중학교 축구부와의 연습경기 이후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거듭된 연습경기에서조차 실점을 허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김보수의 노골적인 비난에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거다.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유지해를 보며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짤막한 물음에 유지해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다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내, 내 상대가 되어줘!”
 
 * * *
 
 유지해의 말은 “나 좀 살려줘~”라는 처절한 외침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요한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딱 한 번 끄덕였다. 오히려 그 쿨내 나는 반응에 주위에 있던 소년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을 정도.
 옆에서 대자로 누워있던 김진보는 켁, 하고 사레들린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보아온 요한은 누구를 위해 선뜻 나설 만큼 동정에 치우치지 않는 남자였으니까.
 요한은 정규 훈련이 끝나자마자 골키퍼 훈련을 진행하기로 했다. 유지해는 체력이 바닥인 상태에서 곧바로 실시되는 포지션 훈련에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요한의 ‘금강대기에서 주전으로 뛰고 싶지 않아?’라는 발언에 금세 열의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요한이 유지해의 요청에 응한 이유는 하나다.
 ‘금강대기 예선전을 무사히 넘기려면 골키퍼부터 교정이 필요해.’
 이왕 선진중학교 축구부에 입부한 이상 요한은 금강대기에서 고등부 혹은 협회 관계자에게 눈도장을 반드시 찍어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포지션별로 포텐셜이 조금이라도 뛰어나 보이는 녀석들을 대상으로 단련을 시켜야겠지. 물론 센터백 포지션은 제한하고 말이야.’
 요한이 분석한 관점으로 선진 축구부에 가장 문제시되는 포지션은 바로 중앙 수비수다.
 주전 센터백은 현재 선진중학교 축구부 주장 김판석과 그의 한 살 어린 동생 김판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기조차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초짜 중의 초짜.
 스위퍼로서 세컨볼을 처리하는데도 서툴기 그지없고, 상대 공격수가 돌파해 오면 겁부터 집어먹는 게 표정에서 드러날 정도였다. 그나마 형인 김판석은 상대가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 압박하려 드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생인 김판무는 그마저도 실종된 허수아비.
 무엇보다 두 사람은 골키퍼의 조율에 일절 따르지 않는 독불장군 모드로 나섰다. 그 탓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유지해였다.
 ‘그간 보아온 김보수의 성향대로라면 공식 경기에선 주변 눈치 때문이라도 교체를 강행할 수밖에 없을 테지. 애초에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렇듯 유지해의 튜터링 요청에 응한 건 미래를 위한 새판 짜기 때문.
 “먼저 가볍게 인사이드킥이야.”
 페널티 마크 존으로 공을 끌고 간 요한이 말했다. 유지해는 골라인 중앙에 위치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자세를 웅크렸다. 몇몇 부원들은 벤치에서 호기심이 동한 눈길로 두 사람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중엔 김진보도 포함돼 있었다.
 곧바로 요한은 세 발자국 뒤로 물러나 달음박질치듯 인사이드킥을 시전했다.
 펑!
 크로스바보다 높게 떴다고 싶은 순간 공은 반원을 그리며 모서리 사이로 교묘하게 빨려 들어갔다.
 철렁!
 “허억?”
 유지해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이빙을 위해 몸에 일정한 바운드를 준 상태. 슈팅 방향은 크로스바 정면이었고 펀칭으로 걷어내기 위해 무릎마저 팽팽하게 구부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1m 지점에서 공은 허리를 비틀 듯 방향을 틀어 좌측 포스트와 크로스바 사이를 파고들었다.
 “방금 건 아웃프런트킥이었어.”
 이어진 요한의 발언에 유지해는 억울함이 한가득 담긴 표정을 보였다.
 “조금 전에 분명 인사이드킥이라고!!”
 “어떤 공격수가 바보도 아니고 슈팅 스킬을 알려줘?”
 요한은 유지해가 입을 우물거리다 말고 그물망에 걸린 볼을 굴려주자 스터드로 툭 하고 멈춰 세웠다.
 “네 장점은 페널티 마크, 페널티 에어리어 좌우 모서리 등 상대 공격수가 슈팅을 시도하는 지점에 따른 가장 세이빙을 취하기에 적절한 위치를 선점해놓는다는 거야. 이는 반복된 트레이닝으로 통해 머리가 아닌 몸이 적응한 정적인 움직임이지. 물론 크로스 상황 시 위치 선정은 교정이 필요하지만.”
 요한이 지켜본 유지해는 크로스 상황 시만 제외하고는 위치 선정과 캐칭 훈련이 필요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모범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너무 모범적이라서 문제지.’
 요한은 고개를 거듭 끄덕이는 유지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두 가지야. 크로스 대비 위치선정과 슈팅 스킬에 따른 대응법.”
 “하지만··· 상대 공격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은 슈팅 스킬에 대처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프로 선수들의 경우 경기 며칠 전, 구단 측에서 상대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한 자료를 제공해줘. 예를 들어 마크 오베르마스라는 공격수의 경우 상대 수비수의 압박이 많을 경우 슈팅보단 정확도 떨어지는 크로스를 남발하는 버릇이 있지. 이에 따라 아군은 맨투맨 디펜스로 마크 오베르마스의 단점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공략을 펼쳐. 마찬가지로 공격수마다 선호하는 슈팅 스킬은 제각각이야. 하지만 지금처럼 자료를 받지 못한다면 슈팅 동작을 외워두는 거야.”
 “슈팅 동작을 외워···?”
 요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조금 전에 보였던 아웃프런트 킥을 펼쳐 보였다. 철렁하고 그물망이 흔들리자 유지해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자료를 통해 상대 공격수의 슈팅 동작을 분석한다면 저마다 특이점이 있어. 아웃프런트킥을 찰 시 두 팔을 크게 들어 올린다거나, 누구는 인사이드킥에서 왼팔을 앞으로 쭉 뻗기도 해. 그러나 공통된 것도 있지. 지금처럼 아웃프런트 킥은 발등 외측으로 공의 측면을 차는 슈팅 스킬이거든. 그로 인해 발등 외측을 맞고 날아간 공은 회전이 걸리며 아웃사이드로 휘어지게 되는 거야. 다시 한번 줘봐.”
 요한의 지시에 유지해는 빠르게 공을 굴렸다. 그와 동시에 요한은 펑 하고 굴러온 공을 발등 내측으로 냅다 때렸다.
 철렁!
 “방금 건 인사이드킥.”
 요한은 발을 무릎 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발의 안쪽 면으로 볼을 차는 방식이야. 그로 인해 슈팅 시 발끝이 바깥쪽으로 나가게 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거야.”
 요한은 말을 하다말고 검지 끝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콕콕 찌르듯 가리켰다.
 “네 두 눈으로 슈팅이 시도되기 전에 빠르게 어떤 스킬인지 인지하라는 거.”
 말은 쉽다. 요한도 이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렇듯 1대1 골키퍼 훈련에서야 반복 숙달한다면 발동작에 따른 슈팅 스킬을 예측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11대11 정규 경기에선 상대 선수뿐만 아니라 아군 수비수까지 조율해야 하는 마당에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수를 상대로 슈팅 스킬을 예측하기란 버겁다.
 그런데도 굳이 슈팅 동작을 익히라고 강조한 것은 이 훈련에 따라오는 부산물 때문.
 바로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의 향상.
 14세, 한창 성장 시기에 놓여있는 나이가 아니던가.
 요한은 이러한 훈련을 통해 충분히 선방 퍼센티지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덤으로 압도적인 동체 시력을 통해 슈팅 스킬과 방향마저 예측한다면 더없이 좋은 선수로 성장할 터.
 곧 요한은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 * *
 
 그날 이후 정규 훈련이 끝날 때마다 요한은 유지해를 상대로 1대1 골키퍼 훈련을 병행했다.
 유지해가 요한에게 튜터링 요청을 했을 때 주변 부원들의 반응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간 요한은 팀 훈련에 임할 때도 동료들과 사적인 농담 한 번 주고받지 않을 만큼 오직 훈련에만 열중해왔다.
 거기다 주변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으스스한 기운이 풍겨 부원들은 대부분 요한과 동떨어져 훈련에 임했을 정도가 아니던가.
 그런 얼음장 같은 요한에게 튜터링을 요청한 이유는 하나.
 선진중학교 축구부 부원들 중 그 누구보다 킥 능력이 정교하고 날카로웠으니까.
 “아웃프런트킥!”
 요한의 외침과 함께 유지해는 골라인 좌측에 있다가 파 포스트로 꽂히는 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치익!
 “크윽!”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공은 포스트 바깥 데드라인으로 굴절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요한은 왼발 인프런트킥을 보여주었다.
 “흐윽!”
 유지해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고 일어섬과 동시에 골문 좌측 상단으로 뚝 떨어지는 공을 향해 개구리점프 하듯 다이빙을 시도했다.
 그러나
 철렁!
 손을 채 뻗기도 전 볼은 반원을 그리며 그물망 안으로 뚝 떨어졌다.
 체중이 옆으로 쏠린 유지해는 무릎부터 지면에 떨어지며 입매를 비틀었다. 낙법을 한다고는 했지만, 모랫바닥인 탓에 통증이 고스란히 무릎을 타고 전달된 것이다.
 벤치 한편에 앉아 구경하던 부원들은 요한의 빠른 세기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정교하기까지 한 슈팅 스킬에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굉장해! 저건 그냥 스트라이커 아니야?”
 “왜 그런데 수비수 포지션을 택한 거지? 진짜 저 정도 킥력 수준이면 스트라이커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쌍둥이 형제 정해인과 정해민의 중얼거림에 옆에 앉아있던 김진보가 괜스레 뿌듯한 기분을 맛보며 입을 열었다.
 “에헴!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한이는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라고. 그러니 고작 저 정도에 놀라기는 일러.”
 
 * * *
 
 7월은 눈 깜짝할 사이 찾아왔다.
 감독실에서 선진 축구부 조별예선 대진표를 받아든 김보수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선전이라 경상남도 내에서 랜덤으로 선정된 대진표였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F조 : 울진중학교, 창원중학교, 통영중학교, 선진중학교
 
 “이런 니미럴! 세 팀 다 지난 경상남도 도지사배 대회에서 16강 이상 진출한 팀들이잖아!”
 담배를 꼬나물다 말고 김보수는 손에든 파일철을 바닥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임형수는 움찔 어깨를 떨며 겁에 질린 눈길로 더듬거렸다.
 “어, 어찌할까요? 각 팀들에 관한 정보 수집부터···!”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새끼야!”
 김보수는 눈알을 부라리며 임형수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야, 임형수!”
 “네, 넵!”
 “네 직책이 뭐야?”
 “서, 선진 축구부 코치입니다!”
 임형수는 그새 차렷 자세를 취하며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이에 김보수는 혀를 쯧쯧 차는 것과 동시에 삿대질을 해댔다.
 “넌 인마, 선진 축구부의 자랑인 수석코치이자 전력분석관이야. 더불어 내 오른팔이고! 그런데 그딴 멍청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 대진표 발표 났으면 뭘 해야 해? 당연히 발바닥 불나도록 뛰어다니며 각 팀들에 관한 정보 수집부터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묻고 있는 거냐고, 앙?”
 “죄,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자시고 얼른 나가서 정보나 캐와! 예선전까지 앞으로 20일 밖에 안 남았다고! 언제 엔트리 짜고 전술 구상할래? 당장 안 나가?”
 “네, 넵!”
 임형수는 황급히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고는 뭉툭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문을 반쯤 열다 말고 임형수는 도리어 문을 닫았다. 이에 김보수는 와락 표정을 찡그렸다.
 “또 뭐야?”
 임형수는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저기··· 혹시 엔트리 구상하실 때 한이도 포함되는 겁니까? 엔트리 최대 인원수가 25명이라고 들었는데 저희 부원은 28명이라··· 하하.”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김보수의 잔뜩 짜증이 치민 말투에 임형수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제가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저희 선진 축구부에 한이 만큼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는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감독님 전술 지향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계속 벤치에만 앉아있는 게 조금 불합리한 게 아닌가 싶어서···! 흐, 흐익?”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아든 재떨이에 임형수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달아나듯 감독실을 빠져나갔다.
 
 * * *
 
 “한이가 벤치에 앉아만 있다는 게 이해 가지 않습니다.”
 유지해의 말에 김보수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7월 6일, 금강대기 예선까지 앞으로 16일 남은 시점부터 날마다 선수들이 찾아와 항의 아닌 항의를 던지고 있다.
 대체로 항의의 주된 내용은 요한이 벤치에만 앉아있는 게 불합리하다는 것.
 “뭐라고?”
 김보수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반문하자 유지해는 움찔 어깨를 떨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었다.
 “한이는 우리 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선수입니다. 그 녀석이 포백 중심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상대 공격수는 벽을 마주한 기분일 거예요. 그러니···!”
 “네 역할이나 잘해. 남 신경 쓰지 말고. 안 나가?”
 김보수는 유지해의 말을 가로채며 버럭 성질을 부렸다. 이에 유지해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다 말고 꾸벅 고개를 숙이곤 감독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선수들은 자꾸만 찾아왔다.
 그리고 금강대기 주최 측에 엔트리 명단을 제출하는 날이 왔을 때,
 벌컥!
 아들인 김진보가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듯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접객용 소파에 앉아 컵라면을 맛보고 있던 김보수는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켁, 켁! 이 자식이 노크도 없이 막 들어오고 난리···!”
 “한이 엔트리 명단에 꼭 넣어주세요!”
 김진보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김보수는 옆에 둔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쓰라린 목을 주물렀다.
 “내 앞에서 분명 요한 그 녀석 이름 거론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녀석은 발전이라고는 없는 녀석이라고. 팀의 피해만 입히는 녀석을 뭐 때문에 그렇게 옹호하는 건지, 쯧쯧!”
 김보수는 정말로 이해 가지 않았다. 개인 능력 면에선 선진 축구부원들 중 가장 뛰어날지 몰라도 추구하는 전술상은 늙은이처럼 배배 꼬인 소년이 아니던가.
 고작 14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감독의 전술적 운용 능력을 비판하는 거로도 모자라 자신의 방식을 들먹이며 교정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감독보다 위에 있는 선수는 없다고!’
 어찌 보면 요한을 벤치에 앉혀 두는 것과 이번 엔트리 명단에서 제외하려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막상 엔트리 명단을 제출하는 당일, 김보수는 조금은 망설이는 기색을 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선진 축구부의 중앙 수비수는 거의 자동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처참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거기다 며칠 사이 코치를 포함해 7명에 이르는 선수들이 요한을 주전으로 기용할 것을 요청해왔다.
 이제는 자신의 아들까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반발한다.
 “요한이 없으면 우리 팀은 F조에서 최하위 성적을 기록하고 말 거예요. 아빠가 그랬잖아요? 지난 도지사 대회에서도 예선 탈락했다며 이번 대회에서도 탈락하면 수치라고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덧붙이자면 김보수는 이번 대회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기록할 경우 해임당할 가능성이 크다.
 사립인 선진중학교 이사장이 유망주 육성에 관심이 많은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학교 간의 자존심 문제가 가장 컸다.
 “이번 대회에 거는 기대가 크니까 잘 좀 해봐요.”
 며칠 전 이사장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김보수는 그새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옆에서 김진보는 꾀꼬리처럼 계속해서 요한이 주전으로 기용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요한의 킥 정확도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수준이에요. 뭐··· 딱히 축구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어도 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잖아요? 비록 짧은 시간 간간이 교체되는 수준이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임팩트는 상상 이상이란 말이에요! 상대 공격수가 아예 페널티 에어리어를 뚫지 못했다니까요? 눈앞에 무슨 장벽이 있는 줄 알았어요, 정말!”
 이쯤 되면 벤치에만 앉아있는 요한이 선수들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 정도로 신뢰하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김보수는 짜증이 치민 표정이었지만 손을 휙휙 저으며 말했다.
 “고민 좀 해볼 테니까 이만 나가봐.”
 “저, 정말요?”
 “그렇다니깐. 그러니 어서 나가서 훈련이나 열심히 해, 자식아.”
 다음 날.
 요한은 학교 전체게시판에 게재된 금강대기 엔트리 명단을 확인하며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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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W : 정해인, 조민옥, 김진보, 김용수, 박창헌, 이용환, 김성주, 김종현, 박상현
 MF : 정해민, 박경수, 허정래, 정용환, 유창주, 이을옹
 DF : 김판석, 김판무, 오연득, 김평국, 조민영, 이태근, 강민기, 요한
 GK : 조병길, 유지해
 이상 2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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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비수 이름 가장 마지막에 자신이 이름이 게재된 것을 보며 요한은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김보수 감독이 자신을 엔트리 명단에 기록하여 올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아빠가 요즘 성적 압박을 받고 있긴 한 것 같아. 저번에 이사장님이 직접 감독실에 방문하셨는데 16강 진출을 바라셨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더라고.”
 요한은 지난날 있었던 김진보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 외골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하긴··· 급여와 직결된 부분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엔트리를 구상할 순 없었겠지.’
 그간 요한은 사전 계획했던 대로 센터백 포지션을 제외한 공격수, 미드필더, 골키퍼 포지션에 대한 튜터링을 진행했다. 부원들은 정규 훈련이 모두 끝난 이후 운동장에 남아 요한의 훈련방식에 성실히 따라와 주었고, 그들은 점차 요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갔다.
 이는 유지해의 스타트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 부원들은 요한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유지해가 한 눈에 보기에도 발전된 수준을 보이자 축구선수로서 꿈을 키워나가던 부원들 또한 하나둘씩 요한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뭐, 엔트리에 들었다고 한들 당장 김보수가 날 주전으로 기용하진 않을 테지. 예선 첫 경기에서 대패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때였다.
 툭, 하고 누군가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엔트리 명단 떴네?”
 옆쪽에서 치고 들어온 소년을 돌아보며 요한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73cm의 키에 밤톨 머리,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소년은 다름 아닌 선진 축구부의 미드필더 이을옹. 그는 요한이 충분히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수준을 지녔음에도 벤치에만 앉아있어 의문을 표했던 인물이기도하다.
 무엇보다 이을옹은 앞으로 몇 년 뒤, 부천 SK에서 윤정한, 윤정준, 김기도와 함께 핵심으로 활약 삼아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해 대한민국 국가대표 최다 공격 포인트를 달성하게 되는 레전드였다.
 요한은 그를 처음 발견하고는 솔직히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었다.
 원래라면 이을옹은 강원도 삼척군 황지읍 태생으로 1995년, 만 20세 나이로 프로 실업팀인 <한국 철도>에 입단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현재 이을옹은 경상남도 진주시 선진중학교 축구부의 벤치 멤버.
 딱히 매우 놀라지 않았던 이유는 지난 998번째 인생에서도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547번째 인생에선 9살 때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 말고 아주리의 위대한 풀백이라 불리는 지안루카 잠브로타와 친구의 연을 맺기도 했으니까.
 환생을 반복해오면서 요한은 선수들의 일대기 또한 일부 변경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 만나본 레전드리 선수들과 달리 이례적인 일이라면 출생연도마저 바뀌었다는 정도.
 ‘마치 축구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같아.’
 선수의 능력치뿐만 아니라 출생지까지 바뀌는 것은 달랐지만 그렇다고 크게 벗어나는 수준도 아니다.
 “우오오! 나 엔트리 명단에 올랐네?”
 이을옹은 뒤늦게 자신의 이름이 게재된 것을 확인하며 기쁨에 겨워했다.
 “벤치만 데운다 했는데··· 역시 내가 없으면 선진 축구부는 안 돼.”
 딱히 과장된 것도 아니다.
 전성기 시절의 이을옹은 정교한 킥 능력으로 패싱, 슈팅, 크로스 등에 장점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는 센터 미드필더, 레프트, 라이트 윙어, 풀백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 축구 선수이기까지 하다.
 이는 선진 축구부 내의 연습경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타고난 재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이지. 어쨌든 이번 생에서의 포텐셜은 꽤 좋게 설정된 모양이야. 아니, 애초에 한국의 레전드이니 당연한 건가.’
 바로 그때 툭 하고 이을옹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요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오늘 방과 후에 분식집이나 가자. 학교 앞에 떡볶이 1인분에 200원 하는 분식집이 생겼거든. 형이 사줄게.”
 
 * * *
 
 7월 22일.
 금강대기 조별 예선, 선진중학교와 울진중학교의 대전은 눈 깜짝할 사이 찾아왔다. 경기는 진주시 신안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에서 진행되었다. 원래라면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강남축구공원에서 치러져야 한다. 그러나 구장 보수공사로 인해 도별로 새롭게 경기장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F조에 속한 팀이 모두 이곳 공설운동장에서 경기를 진행하는 만큼 선진중학교 축구부는 홈 경기라는 이점을 안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 36분.
 스코어 0 : 2.
 선진중학교 축구부는 울진중학교 축구부를 상대로 반코트 당하다시피 아군 진영에 막혀 이렇다 할 공격 전개를 펼치지 못했다.
 간간이 김진보가 유지해의 펀칭에 굴절된 공을 받아 미들 서드에서부터 드리블을 시도했지만 불과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상대 수비수에게 가로막혔다.
 바로 그때였다.
 4-4-2 전형에서 레프트 포워드로 출전한 정해인은 아크 우하단, 왼쪽 사이드에서 연결해준 크로스를 가슴 트래핑으로 받아내며 잽싸게 터치를 길게 가져가 상대 수비수를 제쳤다. 이어 정해인은 슈팅 공간이 확보되자마자 강력한 인스텝 킥을 시전했다.
 하지만,
 펑!
 “이런···!”
 긴장한 나머지 발등이 아닌 발끝에 맞은 공은 골대 위를 한참 벗어나 홈런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에 터치라인 주위를 맴돌던 김보수는 악에 받친 표정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야, 정해인! 거기서 콧발을 차면 어떡해 인마! 집중 안 할래, 응?”
 한편 요한은 이을옹과 함께 엉덩이로 벤치를 데우며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내가 박경수랑 허정래보다 못한 게 대체 뭐야?”
 그렇게 투덜대는 이을옹의 표정은 탐탁지 않았다. 박경수와 허정래는 이을옹의 포지션 경쟁자다.
 두 사람 다 센터 미드필더 역할을 행하고 있었지만, 요한이 보기엔 미드필더가 아닌 공격수 못지않은 전방 침투를 시시때때로 선보인다. 그 탓에 역습 상황 시 순식간에 중앙이 뚫려 아군 진영까지 상대 공격진의 침투를 번번이 허용하고 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탐욕적인 플레이가 아닌가.
 “이럴 거면 나는 왜 엔트리 명단에 포함한 건지··· 이러다 엉덩이에 뾰루지 생기겠네.”
 “곧 투입될 거니 걱정하지 마.”
 요한의 차분한 말에 오히려 이을옹은 이해 가지 않는 얼굴로 반문했다.
 “넌 왜 이렇게 담담한 거야?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 저기 지가 수비수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플레이하는 김판 형제보다 네가 적어도 두 배 이상은 잘한다고. 그런데 감독님은 널 벤치에 앉혀 두기만 하고 있어. 억울하지도 않아?”
 “억울하지.”
 이을옹의 발언에서 정정하고 싶은 부분은 딱 한 가지다. 갭 차이가 두 배 이상이 아니라 몇십 배 이상 차이 난다고.
 그러다 곧 요한은 분에 겨워 씩씩대는 이을옹을 향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래도 잠자코 지켜봐.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 파는 법이니까.”
 
 * * *
 
 후반전 양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후반 10분 만에 내리 두 골을 허용하며 순식간에 스코어는 0 : 4까지 벌어졌다.
 “이런 X같은···!”
 이쯤 돼서 김보수는 거의 반쯤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금강대기 협회 관계자 몇몇이 경기를 참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보수는 성난 황소처럼 당장이라도 필드 위를 달려갈 듯 소리를 질러댔다.
 “야 이 새끼야! 왜 거기서 멈춰있다 스틸 당하는 건데! 뻥 찼어야지 왜 고민을 하고 있냐고! 아오, 답답해서 정말!”
 욕지거리의 대상은 김판석의 한 살 어린 동생 김판무다. 김판무는 한층 기죽은 표정으로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대는 김보수에 움찔움찔 어깨를 떨어댔다.
 후반 15분.
 결국, 참다못한 김보수는 교체 지시를 강행했다. 이을옹은 임형수가 벤치 쪽으로 다가오자 한층 기대 어린 표정으로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나,
 “오연득, 들어갈 준비해.”
 김보수에게 교체 지시를 전달받은 임형수는 조금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오연득의 투입을 전달했다.
 중앙 수비수 자원인 오연득은 열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벤치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젠장.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했는데··· 잘못 파고 있는 거 아니야?”
 이을옹의 투덜거림에 요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초에 이번 라운드에서 투입될 거라는 기대 따윈 안 했어.’
 
 김판무가 교체 아웃되고 오연득이 투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경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한은 상대 공격수가 어태킹 서드에서 스위칭 플레이를 오가는 것을 보며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스위칭 플레이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군.’
 울진중학교 축구부는 생각 외로 발기술과 주력이 좋은 공격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탓에 스위칭 플레이에 이은 리턴 패스 동작에서 아군 수비진은 롤러코스터에 몸을 실기라도 한 듯 버벅거리는 엉성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였다.
 요한은 상대 레프트 윙어가 오프 더 볼 침투로 순식간에 페널티 대각을 파고들자 눈살을 살포시 찡그렸다. 하프라인 선상에서부터 침투할 동안 견제하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김판석··· 저 녀석 수비진을 조율할 생각 따윈 없는 모양이군. 애초에 그럴 시야조차 갖추지 못했겠지만.’
 선진중학교 축구부 선수 대부분은 라이트 사이드를 타고 돌파를 시도하는 레프트 윙어에 방향과 시선이 쏠려있었다.
 뒤늦게 이를 인지한 유지해가 황급히 검지 끝으로 레프트 윙어를 가리켜 소리쳤다.
 “판석이 형! 저 녀석 마크 좀···!”
 그와 동시에 상대 라이트 윙어는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다 말고 문전 안으로 얼리 크로스를 띄웠다.
 김판석은 유지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마크 선상을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그러다 문전으로 향하는 볼에 황급히 뒷걸음질 치듯 머리를 들이민다.
 “이씨···!”
 유지해는 자신의 조율지시에 따르지 않은 김판석을 원망하며 골라인 중앙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잽싸게 우측으로 다이빙을 시도했다.
 문전으로 향한 볼이 페널티 박스까지 파고든 레프트 윙어의 발끝에 제대로 전달된 것이다.
 툭!
 치익!
 다행히 레프트 윙어의 다이렉트 슈팅은 유지해의 힘껏 내뻗은 손끝을 맞고 데드라인을 벗어났다.
 유지해는 멋진 선방을 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 섞인 표정으로 김판석을 향해 몇 마디 내뱉었다.
 “형, 제발 좀, 부탁 좀 할게. 웬만하면 조율지시에 따라줬으면 좋겠어. 방금 건··· 공간을 너무 허용해버렸잖아.”
 그러나 김판석은 오히려 두 눈을 부라리며 반발했다.
 “뭐 이 새끼야? 지금 나더러 네 지시를 따르라고?”
 “아니, 형 내 말은···!”
 “주장은 나야. 수비 조율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러니 신경 꺼라. 뒈지기 싫으면.”
 멀리서 두 사람 간의 다툼을 본 이을옹은 투덜대다 말고 킥킥거렸다.
 “저 녀석 봐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있잖아.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지만 정말 가끔은 뒤통수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니깐.”
 이을옹의 말처럼 선진 축구부의 수비라인은 조금 전 상황에서 왼 측면을 완전히 허용해버리고 말았다. 레프트 풀백 김평국은 아예 오른쪽 측면에서 돌파가 진행되자 영역을 이탈한 채 센터백 김판석보다 앞선 위치로 나아가 블록을 형성.
 ‘김판석은 아예 왼 측면을 등지고 있었지. 일차적인 판단 오류는 레프트 풀백의 영역 이탈이야. 하지만 충분히 중앙 센터백이 달려들어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 무엇보다 수비 조율에 따르지 않는 건 문제가 커.’
 골키퍼 유지해가 수비 조율에 힘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현재 선진중학교 축구부의 감독과 코치를 제외한 선수단에서 김판석의 발언권은 가장 강력했으니까.
 ‘사공인 척하는 애송이 하나 때문에 수비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꼴이네.’
 결국, 금강대기 조별예선 경기 스코어는 0 : 4. 울진중학교 축구부의 첫 승으로 끝이 났다.
 그마저도 유지해의 4차례 걸친 클리어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스코어.
 김보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머지 상대 감독과 인사치레도 없이 곧장 게이트를 빠져나가 버렸다.
 라커룸에서 본 유지해의 표정은 썩 밝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진 수준은 아니다.
 축구 좀 볼 줄 안다 싶은 사람이라면 그가 이번 경기에서 얼마나 뛰어난 선방률을 보였는지 알 터.
 “네 덕분이야. 처음엔 나 정말··· 이대로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생각을 고쳐먹었어. 반드시 노력해서 꼭 한국을 대표할 넘버원 골키퍼가 되고 말 거라고.”
 유지해의 말에 라커룸에서 짐을 챙기던 요한은 한쪽 눈썹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네 잠재능력이 뛰어난 덕분이겠지. 난 방향타만 수정해준 것밖에 없어.”
 딱히 감사함을 바라고 도와준 건 아니었기에 유지해의 진심이 담긴 표정이 조금은 거북스러웠다.
 거기다 998번째 인생을 뒤져봐도 유지해가 국가 대표로 승선했다는 기억은 존재치 않는다.
 ‘확실히 중등부 레벨에선 상위에 속하긴 하지만 여긴 개울가 수준 밖에 안 돼. 뭐··· 내가 이 팀에 속한 만큼 이 녀석 미래도 바뀔지 모르겠지만.’
 
 * * *
 
 7월 24일.
 창원중학교와의 2라운드를 앞두고 선진중학교 축구부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추가 훈련을 병행했다.
 “이건 너무하지 않냐?”
 코디네이션을 활용한 상하체 밸런스 순번을 기다리다 말고 뒤쪽에서 이을옹이 투덜거린다. 앞서있던 요한은 입매를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어릴 땐 매사 불만인 성격을 지녔었나 보네. TV에서 봤을 땐 무지 남자다웠는데.’
 이을옹이 불만을 터뜨린 이유는 눈앞의 코디네이션 훈련을 진행하는 자가 감독이 아닌 코치라는 점 때문이다.
 김보수는 애당초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자자, 앞으로 5분만 더 하고 20분간 휴식이야. 그 뒤에 연습경기를 가지도록 하자고.”
 김보수가 없는 상황에서 임형수는 한층 경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한은 자신의 순번이 오자 달음박질치며 지그재그로 접시콘을 지나쳤다.
 약속한 5분이 지나고 선수들은 예정대로 20분간 휴식을 부여받았다.
 “어흑! 다리가 후들거려···!”
 김진보는 그새 체력이 몽땅 빠지며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요한은 늘 그래왔듯 제자리에 서서 가볍게 몸을 풀어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요한은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붙인 상대를 돌아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임형수···?’
  평소처럼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지만, 옆에서 떵떵거리던 김보수가 없다는 것만으로 두 눈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곧 요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임형수를 따라 감독실로 향했다.
 감독실에 들어선 순간 임형수는 요한에게 접객용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어 임형수는 스테인리스 컵에다 정수기 물을 따른 이후 요한에게 건넨다.
 이어 임형수는 한층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랑 을옹이··· 억울한 심정 충분히 이해해.”
 ‘고작 그 이야기 때문에 부른 건가?’
 김보수와 달리 임형수는 선수를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녔다. 김보수의 기에 눌려 비록 코치로서의 발언권은 제대로 행세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형수는 간간이 선수단이 보는 앞에서 김보수를 향해 허를 찌르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무의식중에 나오는 자신감에 찬 행동.
 지난 울진중학교 축구부와의 대전에서도 임형수는 터치라인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김보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시점에 김판석을 교체 아웃하고 요한을 투입하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요한에게 포백 아래를 보호하는 최후방 스위퍼 역할을 부여하는 거죠. 한이를 활용해 불안한 센터백들을 커버하고, 나아가 한이에게 자유도를 주어 역습 전개를 펼치는 겁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당시 그렇게 말하는 임형수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의견은 김보수가 버럭 성질을 부리는 바람에 의견으로만 남았다.
 요한은 임형수의 판단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보았다.
 포백 아래를 보호하는 스위퍼 역할을 부여받는 것과 동시에 자유도를 줄 경우, 요한은 확실히 넓은 시야와 활동반경을 과시하며 수차례 역습 기회를 얻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할게.”
 임형수는 앉은 상태에서 이마가 테이블에 딱 붙을 만큼 허리를 숙여 거듭 사과했다. 요한은 그런 그의 태도가 불편했지만 애써 모른 척 굴었다.
 “무엇 때문에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모를 리가 없지. 일종의 차별 같은 거잖아. 솔직히 말해서 너희 두 사람은 우리 선진축구부 선수단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어. 그럼에도 벤치만 데우고 있지. 그러니··· 다음 라운드만큼은 내가 꼭 감독님을 설득해서 너희들을 선발 명단에 넣도록 할게.”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요한은 예의상 ‘감사합니다’라고 답변했다.
 
 * * *
 
 7월 26일.
 창원중학교 vs 선진중학교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이 찾아왔다.
 전반 31분, 스코어 0 : 0 상황에서 김판식이 상대 공격수가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자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한다는 것이 그만 발목을 접질리고 만 것이다.
 요한은 벤치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며 입매를 늘어뜨렸다. 옆에서 이을옹은 혀를 끌끌 찼다.
 “저거 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저게 무슨 슬라이딩 태클이야? 달려들다 말고 혼자서 발을 헛디딘 거잖아, 멍청하게.”
 김보수는 김판석이 필드 위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자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다 이내 이를 악물며 돌아섰다.
 “야, 요한! 어서 준비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연출에 요한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 울진중학교와의 대전과 달리 라인을 최대한 내린 채 역습 형태의 전형을 갖춘 선진이다.
 일방적인 공세에 공격수 할 것 없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밀집된 육탄방어를 펼쳤기에 실점 없이 스코어는 0 : 0.
 충분히 버티고 있는 상황인 만큼 요한은 자신이 아닌 또다시 오연득이 투입되리라 예상했다.
 ‘··· 임형수 코치가 감독을 설득하기라도 한 건가?’
 “안 나오고 뭐 해? 뛰기 싫어?”
 이어서 김보수가 버럭 성질을 부리자 뒤늦게 요한은 씨익 하고 하얀 이를 드러냈다.
 ‘어쨌든 꽤 심각하게 목이 말랐던 건 분명하네.’

댓글(3)

lj*****    
초반부에 300을 뚫어낸 공격수가 무슨 말인가요?
2019.10.20 08:41
다크라이    
음.. 잘쓰긴했는데 중간부분에 너프되는게 뜬금없긴하네요. 스포츠물로 재미는 있습니다.
2020.10.17 23:27
포도마을    
쓰리백 아닐가여
2020.10.1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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