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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황제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E]

황제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1권 (1)

2019.05.14 조회 342 추천 3


 # 내가 황족이라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이 마을은 이본 남작령에 편입된다. 세율은 70%다.”
 개시키.
 어쩐지 요 며칠 전부터 못 보던 녀석들이 주변을 기웃거린다 했다.
 애초에 최근 10년간 외지인이라고는 오지도 않던 곳에 못 보던 사람들이 보인다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마을 어르신들이 정말 드물게 본다는 사냥꾼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책에서만 봤던 체인 메일을 쫙 빼입고 온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남작인지 남색인지 하는 녀석이 이 주변에 자리를 잡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이본 남작님의 아버지이신 전 남작님의 묘를 만들기 위해 이 마을에서 인력을 징발할 예정이다. 조만간 사람을 보낼 테니, 명령을 잘 따르도록.”
 세금 70%에 인력 징발이라니!
 완전히 미친 건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달려들어서 빨간 들창코 자식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책에서만 봐왔던 체인 메일을 입고 있는 데다가 허리춤에는 1m가 넘는 숏 소드를 매달고 있다.
 아버지만 살아계셨어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2주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나 그립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다. 다음에 올 때는 예를 갖춰서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기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을을 둘러보더니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다.
 체인 메일을 입은 기사와 달리 다른 녀석들은 전부 가죽 갑옷을 입고 나무 방패를 들고 있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카아악, 퉷!”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마벨 할아버지가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마벨 할아버지, 이제 어쩌죠?”
 “니X랄, 어쩌긴, 뭘 어째. 내가 태어나고 나서도, 아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여기에는 저런 놈들 온 적이 없어. 그런데 칼을 들이밀고 세금을 내라고 해? 그리고 70%가 누구 애 이름이야? 그러면 우리 다 굶어 죽어!”
 얼마나 화가 난 건지 얼굴이 산수유 열매보다도 더 빨갛게 변한 것이 보인다.
 마벨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세금을 70%를 내는 순간 우리는 굶어 죽어야 한다.
 화전을 일부 일구고는 있지만, 마을에서 수확하는 작물로는 굶지 않는 게 고작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책에서 50%나 70%의 세금을 내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겪을 줄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아브힐 아주머니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다.
 “우리 이렇게 있다간 굶어 죽을지도 몰라. 그냥 산맥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닐까?”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 같았지만, 마벨 할아버지가 극렬히 반대했다.
 “헛소리하지 말어! 산맥 안쪽에 몬스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미하벨 아버지부터 그 위까지 검술 실력이 뛰어나서 여기서도 그나마 버틴 거지 산맥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몬스터 밥이 될 거야! 우리야 살 만큼 살았지만, 미하벨이나 미하벨보다 어린 애들은 어떡하라고?”
 “저도 그걸 몰라서 그러나요. 그런데 당장 몬스터보다 세금이 더 무서우니까 그렇잖아요. 가만히 앉아 있다 굶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뭐라도 해보는 게 나을까 해서 그러는 거죠.”
 아브힐 아주머니와 마벨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다 보니 괜히 찔린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까지 내 조상들은 전부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난 병X이다.
 물론 허약한 체질이라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한테 아무리 검술을 배워도 늘질 않았다.
 검에 마나를 불어 넣기는커녕 가문의 검법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다.
 그 탓에 지금 와서는 사냥이나 허약한 몬스터 처치는 아도흘르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이 담당했다.
 반면 나는 농사나 품종 개량 같은 거에 해박해서 마을의 전체적인 수확은 조금씩 늘어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70%라니.
 아무리 수확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건 정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닮았어야 했는데, 후유.”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너희 집안에 크게 신세를 졌어. 우리가 그나마 입에 풀칠하면서 사는 것도 미하벨 가문 덕분인데 우리가 어떻게 너를 뭐라 할 수 있겠냐.”
 마벨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미하벨, 일단은 저녁때 다들 회의를 해보는 게 어떻겠니?”
 아브힐 아주머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아주머니, 이따가 8시에 우물 앞으로 사람들을 좀 모아주시겠어요?”
 “나한테 맡기렴, 내가 원래 그런 건 잘하잖니.”
 “그럼 나는 이 기회에 묵혀놓은 술이나 풀어야겠다.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세금으로 뺏기느니 마을 잔치로 푸는 게 낫겠지.”
 반쯤은 해탈한 마벨 할아버지를 보며 난 쓴웃음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하.”
 벽에 걸린 아버지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버지처럼 강했으면 적어도 오늘 마을에 온 기사 정도는 손쉽게 제압했을 텐데 너무나 아쉽다.
 “아버지, 보고 싶네요.”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거짓말들이 떠올랐다.
 
 “미하벨, 그거 아니? 우리 집안은 원래 황제의 가문이란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황제의 가문인데 왜 이런 오지 산맥에서 궁색하게 살아요?”
 “하하하하! 그게 다 망해서 그런 거지. 우리 가문은 원래 3천 년 전에 대륙을 통일했던 브루고 황가의 적통이란다.”
 “브루고 황가요? 집에 있는 책에 나오는 그 브루고 황가요?”
 “그래, 그 브루고 황가.”
 “그런데 왜 망했어요?”
 “영원한 제국은 없는 법이란다.”
 “어휴, 예전에 황가였으면 뭐해요. 지금은 그냥 오지 마을 촌장인데. 아버지는 그래도 검이라도 잘 다루시지만 전 이게 뭔가요. 아마 제 대에서 우리 마을은 망할 거예요.”
 “그럴 리는 절대로 없단다.”
 이때 아버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래. 사실 우리 가문에는 비밀이 하나 있단다.”
 “무슨 비밀이요?”
 “초대 황제이자 황가의 1대 선조이신 브루고 님은 사실 이세계인이셨거든.”
 “네? 이세계인이요? 소설에나 나오는 바로 그 이세계인?”
 “그래. 그분은 대륙을 통일하고 200년간 통치하신 뒤, 후손에게 대륙을 물려주시고 떠나셨지. 그때 먼 훗날 자신의 가문이 망할 것을 대비해서 최소한의 안배 하나를 해두고 떠나셨단다.”
 “그게 뭔데요?”
 “그건 네가 더 크면 알 수 있을 거란다.”
 
 이때 아버지가 비밀이라고 하셨던 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거짓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최소한의 안배.
 그게 지금이라도 뭔지 알면 얼마나 좋을까.
 벽에 걸린 검에 손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녹슬지 않았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검을 닦은 적이 없었는데 검이 아주 깨끗했다.
 보석 같은 것은 전혀 달려 있지 않은 굉장히 수수한 검.
 나도 모르게 투박한 검을 집어 들었다.
 
 <이전 사용자의 사망을 확인. 새로운 브루고 황가의 핏줄을 확인하였습니다.>
 
 * * *
 
 “뭐, 뭐야!”
 깜짝 놀라 검을 떨어뜨렸다.
 툭.
 “응?”
 검을 떨어뜨렸으면 ‘따앙’이나 ‘텅’하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바닥에서는 마치 책이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책이잖아?”
 바닥에는 실제로 책이 떨어져 있었다.
 검은색 가죽 표지로 이루어진 책의 겉면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것이 보였다.
 “분명 검이었는데···?”
 책을 집어 들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자의 재능에 따른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아까만큼 놀라지 않아 책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동기화 완료.>
 
 [이름 : 미하벨]
 [유전 등급 : SSS(99.99%)]
 [직위 : 촌장(E)]
 
 <최고 순도의 유전 등급으로 인해 SSS급 재능과 특성을 부여합니다.>
 
 [재능 : 꿰뚫어 보는 자(Discerner)]
 [특성 : 부활, 구체화]
 
 “꿰뚫어 보는 자?”
 이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전 등급도 얼추 예상되었다.
 아마 브루고 님과 내가 얼마나 피가 이어졌는지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재능과 특성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재능부터가 이해되지 않는다.
 파라락.
 갑자기 책이 펼쳐지며 흰 여백에 무언가가 써지기 시작했다.
 
 [꿰뚫어 보는 자 :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관하여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활 : 자연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을 경우, 원하는 장소에서 부활합니다.]
 [구체화 : 브루고의 일기를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뭐?”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내 생각이 거짓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책에는 또다시 무언가가 쓰이기 시작했다.
 
 [나무 테이블 : 침엽수로 만들어진 테이블. 정성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손상도 7%)]
 
 내 바로 앞에 놓인 게 나무 테이블이고 내 시선도 잠깐 나무 테이블로 가긴 했다.
 “다른 걸 본다면?”
 슬쩍 어제 훈제해둔 토끼 고기를 바라보았다.
 
 [훈제 토끼고기 : 미숙한 기술이 느껴진다. (부패도 2%)]
 
 정곡을 찌르는 듯한 평가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만능이었던 아버지에 비교해서 나는 손재주 같은 건 정말 없다.
 ‘그런데 꿰뚫어 보는 자라는 특성이 정말인 거 같긴 한데···,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도흘르가 들어왔다.
 “야! 미하벨! 어떤 미친놈이 와서는 세금 70% 내라고 했다면서?”
 190cm는 넘을 법한 키에 100kg이 넘을 듯한 근육질의 몸.
 더벅머리에 덥수룩한 수염까지.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의 치안과 사냥을 담당하는 아도흘르다.
 “어, 왔어?”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책에는 여지없이 무언가가 좌르륵 적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름 : 아도흘르]
 [리더십 : C+]
 [무력 : A(~S+)]
 [지능 : D(~C)]
 [손재주 : B(~A+)]
 [화술 : C(~B)]
 [야망 : F]
 [친밀도 : 95]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어제 새벽에 엘리랑 계곡 가에서 했음.]
 
 “풉.”
 나도 모르게 뿜었다.
 
 * * *
 
 “뭐야, 왜 웃어?”
 “아, 다른 게 아니라. 어제 너랑 엘리랑 계곡에서 한 일이 생각나서.”
 일부러 돌직구를 던졌다.
 “헉! 봤어?”
 예상대로 아도흘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덩치는 곰 같은 녀석이 굉장히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려니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 엘리를 그렇게 따라다니더니만 결국 성공했네?”
 아도흘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자 아도흘르는 몸을 배배 꼬았다.
 “야, 너무 그러지 마. 이히히히.”
 “그래서, 어떻게 성공한 거야?”
 아도흘르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히죽 웃었다.
 “곰 한 마리 잡아서 엘리네 부모님께 드렸어.”
 “뭐? 곰을?”
 “야, 말하지 마. 마을 사람들한테 들키면 잔치하자고 한단 말이야.”
 원래 큰 사냥감을 잡으면 대부분 마을 잔치를 하는 데 쓰이긴 한다.
 하지만 아도흘르가 엘리를 얼마나 따라다녔는지 알기에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야, 야. 내가 그걸 뭐하러 말하겠냐. 친구 녀석이 장가가겠다는데 도와줘야지.”
 “정말?”
 “그럼!”
 
 [친밀도가 96으로 올랐습니다.]
 
 목소리가 들려 슬쩍 책을 바라보자 어느새 숫자가 변해 있었다.
 “그런데 엘리도 그걸로 만족한 거야? 엘리 부모님께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엘리 마음도 잡아야 했잖아.”
 “그냥 곰을 머리 위로 들고 엘리네 집까지 갔더니 내 팔짱 끼던데?”
 “네가 사슴이나 토끼 같은 거만 잡는 줄 알았다가 완전히 뿅 갔구먼? 크으! 부러운 자식!”
 옆구리를 조금 더 툭툭 치자 아도흘르는 마치 밧줄처럼 몸을 꼬다가 나를 툭 쳤다.
 “에이, 그만하라니까. 나 이만 간다!”
 퍽.
 벌컥!
 “크헉!”
 그냥 툭 친 거에 맞았을 뿐인데 나는 벽과 몸통 박치기를 해야만 했다.
 몸을 추스르는데 다시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도흘르가 들어왔다.
 “맞다!”
 “알아! 오늘 저녁 8시에 우물에서 다들 모이기로 했어. 그때 와.”
 “아, 오케이!”
 아도흘르가 다시 나가고 나서야 욱신거리는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후유.”
 몸을 벽에 박을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가?’
 다시 책에 글귀가 쓰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이상 책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본인의 현재 상황이 책을 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편리한 책이다.
 “가만, 그러면 부활도?”
 솔직히 말해서 도전하기에 굉장히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부활이라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컸다.
 ‘이 책에 있는 능력이라면 이번 일도 충분히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쩐지 가능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오지 중의 오지에 오는 귀족이라고 해봤자 지닌 능력이라고는 얼마 되지 않을 거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가진 능력에 익숙해진다면 충분히 이번 일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후유.”
 테이블 위에 놓인 칼을 하나 집어 들었다.
 불순물이 가득 섞인 칼이었지만 어쨌든 목을 찌르면 죽는 데는 충분한 수준이다.
 스륵.
 칼끝이 목젖까지 닿았다.
 딸그랑.
 그러나 난 결국 목을 찌르지는 못했다.
 아무리 믿음이 높다 해도 죽음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해가 크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겠지.
 “만약 부활 특성이 사실이라고 치고 부활 특성을 잘 이용한다면 해결할 수 있으려나?”
 검 하나 들고 이본 남작령에 쳐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키는 180cm지만 근육질이 아니라 70kg을 조금 넘는 나.
 그런 내가 1m가 넘는 숏 소드를 들고 낑낑거리며 휘두른다.
 당연히 가죽 갑옷이나 나무방패에 내 칼은 막힐 테고 조금 전에 보았던 체인 메일을 입은 기사가 나의 몸을 칼이나 창으로 토끼 꿰듯 꿰어버릴 것이다.
 
 “무리, 무리.”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100번을 부활한들 1000번을 부활한들 내 거지 같은 검술 실력을 생각해본다면 전혀 의미 없는 방법이었다.
 지금 당장 부활 쪽이 쓸모 있으려면 차라리 산맥 안쪽에 들어가서 사는 게 쓸모 있을 것이다.
 “맞아, 하나가 더 있었지. 구체화는 아마 일기라고 했던가.”
 무의식중에 책의 가장 앞 페이지를 보자 어느새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쪽 세계에서의 이름으로, 나 브루고는 훗날 몰락 황족이 될 나의 후손들을 위해 유물을 남긴다. 내가 남기는 이 ‘엠페러 소울’은 소유한 후손에게 적합한 형태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아···!”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브루고 님이 남긴 이 엠페러 소울이 나에게는 책으로 나타났다면 아버지에게는 검으로 나타난 것이다.
 
 <엠페러 소울은 동시에 한 명만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자가 사망할 때까지 타인이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나와 유전적으로 가장 일치할수록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가 강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증조할아버지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지 않은 거지?”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증조할아버지는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했었다.
 만약 증조할아버지가 황가의 부활을 원했다면?
 아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대륙 1위의 실력이라고 해도 황가의 부활은 힘들었겠지.
 
 <나 브루고가 원래 세계로 귀환하기 전 엠페러 소울을 남기는 이유는 하나. 모든 제국은 언젠가 멸망한다. 이는 브루고 황가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 브루고는 엠페러 소울을 가진 자가 황가의 부활에 연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엠페러 소울과 인연이 닿는 후손만큼은 몰락 황가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황가의 부활을 원하는 후손이 있을 수 있기에, 나 브루고의 기억과 경험을 엠페러 소울에 남긴다.>
 
 책의 서문은 여기서 끝이었다.
 브루고님의 말처럼 나 역시 황가의 부활을 딱히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증조할아버지처럼.
 마을 사람들이 문제없이 살아가게 해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럴만한 무력도 없고, 경험도 없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한숨을 내쉬며 페이지를 넘기자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몰락 남작 가문의 갑질>.
 
 * * *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온통 책에 집중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책을 향한 집중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름 : 마벨]
 [리더십 : B]
 [무력 : F]
 [지능 : C+]
 [손재주 : D]
 [화술 : B+]
 [야망 : F]
 [친밀도 : 85]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20대 시절, 마을 밖에 나가본 적이 있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음.]
 
 [이름 : 아브힐]
 [리더십 : D(~D+)]
 [무력 : E+(~D)]
 [지능 : C(~B+)]
 [손재주 : A(~S)]
 [화술 : B+(~A)]
 [야망 : D]
 [친밀도 : 77]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현재 피터와 바람을 피우기 직전 단계.]
 
 책에 나타나는 마을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능력치를 볼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상시에 생각하던 능력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을뿐더러 특이사항에 나타난 내용 역시 충격이었다.
 억세기로 소문난 아브힐 아주머니가 샌님으로 소문난 피터와 바람이 났다는 것도 신기했고 평생 토박이로 살았다고 생각했던 마벨 할아버지가 사실 밖에 나간 적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더불어서 친밀도 때문에 조금 아쉬운 것도 있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무래도 좀 충격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가장 큰 충격은 마을 사람들의 능력치가 아니었다.
 
 브루고 님의 일기.
 
 이것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브루고 님은 자신의 경험 혹은 신하들의 경험을 일기로 써두었다.
 그중에서는 현재 우리 마을이 겪고 있는 일과 비슷한 일들도 있었다.
 남작의 명령에 복종한 마을은 몇 년 뒤 대흉년 때 마을 인구의 80%가 아사했다.
 남작의 명령에 불복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남작이 보낸 추격자들에 의해 대부분 죽었다.
 결국, 복종도 도망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브루고 님의 일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인가.”
 브루고 님의 일기는 간접적으로 한 가지 방법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나는 아침부터 일찍 이본 남작령의 사병들을 기다렸다.
 어제 마을 여자들을 바라보던 녀석들의 눈을 보아하니, 분명히 시비 걸러 올 게 분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단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어제는 남작령의 사병들이 얼마나 강한지 몰랐기 때문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얼마나 강한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미하벨아. 어떻게 할 거냐. 나야 나이 먹어서 상관없지만 너나 다른 젊은 애들은 마을에서 나가는 게 낫지 않겠냐?”
 마벨 할아버지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말을 걸어왔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것이 얼굴이 시뻘겋다.
 하기야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할아버지 때부터 사계절 내내 술을 담갔다고 하시니 돌아가실 때까지 드셔도 술이 남을 것이다.
 “저희가 도망가면 남작이 마을 사람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여기서 있다가 굶어 죽을 순 없잖느냐. 어휴, 내가 술 담그는 기술이 아니라 네 아버지한테서 검술을 배웠어야 하는 건데.”
 뜬금없지만 마벨 할아버지의 능력치가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나이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마벨 할아버지는 입담이 좋은 사람이지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실제로 마벨 할아버지의 술은 독하지만, 맛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사람은 아주 좋다.
 사람 좋은 것, 이게 마벨 할아버지의 매력이다.
 “저, 저! 저 쓰부럴 것들 또 왔네!”
 벌떡 일어나서 사병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마벨 할아버지를 일부러 제지했다.
 “할아버지, 일단은 참으세요. 나중에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아무리 술에 취해도 상황 자체가 심각한지라 마벨 할아버지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섰다.
 “에이, 시펄. 저놈들 가면 불러.”
 집으로 들어간 마벨 할아버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남작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름 : 그레고리]
 [리더십 : C]
 [무력 : B]
 [지능 : D+]
 [손재주 : C]
 [화술 : D+]
 [야망 : C]
 [친밀도 : 0]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여자를 밝힘.]
 
 ‘완전 개밥인데?’
 
 
 # 남작은 개뿔
 
 
 아도흘르의 무력이 A인 것을 고려한다면 그레고리의 무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어제 그레고리를 봤을 때는 우월한 체인 메일에 나머지 한 손에는 메이스를 든 모습을 봐서 그런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만?’
 나는 빠르게 뛰어 아도흘르의 집으로 향했다.
 남작의 사병들은 아직 마을 입구로 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야! 야! 아도흘르!”
 “뭐야, 왜?”
 아도흘르의 손에는 피가 아주 범벅이었다.
 “뭐야, 너 소시지 만들어?”
 “어. 엘리네 부모님이 좋아하셔.”
 투박한 웃음을 짓는 아도흘르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골 촌구석 아저씨가 떠오르는 듯했다.
 나도 똑같은 시골 촌놈이긴 하지만, 아버지 때까지 대대로 물려 내려온 책들을 읽다 보니 남들보다 지식은 조금 더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냄새 맡고 왔어?”
 “내가 트롤이냐? 다른 게 아니라 너 저 칼 한번 집어봐.”
 “칼은 왜?”
 “글쎄,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 중요한 일이야.”
 중요한 일이라는 말에 아도흘르는 냉큼 칼을 집어 들었다.
 친구 사이이긴 해도 아도흘르는 내 말을 잘 따라주는 편이라 고맙다.
 
 [이름 : 아도흘르]
 [무력 : A(~S+)]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미하게 A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 같기도 한데···?’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야, 네가 사냥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무기가 뭐야?”
 “나? 나는 숏 스피어 쓰잖아.”
 “그거 한번 들어봐.”
 “알았어.”
 아도흘르는 뒷문을 열어 창고로 향했다.
 직업 특성상 창고가 집보다 컸기에 스피어를 보관하기에는 더 나았겠지.
 “이러면 돼?”
 아도흘르는 3미터짜리 숏 스피어를 한 손으로 돌더니 적당히 돌리기 시작했다.
 
 [이름 : 아도흘르]
 [무력 : A+(~S+)]
 
 “아하!”
 그런 거였다.
 왼쪽에 나온 평가는 ‘현시점의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나온 평가는 ‘모든 잠재력을 더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아도흘르가 특정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S+의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나름대로 기사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그레고리가 체인 메일에 메이스까지 입고 B인 것을 고려하면 아도흘르의 S+ 잠재력은 그야말로 기대할만한 수준이다.
 “야, 소시지 만드는 건 이따가 내가 도와줄 테니까, 잠시만 따라와 봐.”
 “이건?”
 아도흘르는 이왕 든 숏 스피어가 아쉬운지 빙글빙글 돌려댔다.
 “일단은 두고 와.”
 겨우 B밖에 안 되는 그레고리에게 아도흘르가 당할 리가 없겠지.
 처음부터 이쪽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 곤란하다.
 벌컥.
 책을 옆구리에 낀 나와 아도흘르는 동시에 문밖을 나섰다.
 그러자 마을 입구에 서서 영 불편한 표정을 짓는 그레고리의 모습이 보였다.
 ‘대가리가 멍청하니, 고생은 다리가 할 수밖에.’
 난 그레고리보다 그 뒤에 있는 부하들의 모습에 더 눈이 갔다.
 그레고리야 말을 타고 왔으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레고리의 부하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왔기 때문에 다리를 후들거렸다.
 이본 남작의 영지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는 무려 수십 킬로미터.
 가죽 갑옷과 나무방패라고 해도 이틀 연속으로 왕복할만한 거리는 아니다.
 아도흘르 같이 매일 산을 타는 녀석이라면 몰라도 그레고리 같은 놈이 기사인 이본 남작의 병사들이라면 더욱 뻔하겠지.
 “내가 분명 다음번에 올 때는 예를 갖추라고 했을 텐데?”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편이지만, 그레고리가 하는 말이 똑똑히 들려왔다.
 아도흘르 아직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저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게···, 오늘도 또 오실 줄은 모르고···.”
 아브힐 아주머니의 말에 그레고리가 인상을 팍 썼다.
 “이래서 하등한 것들이랑은 대화가 안 통한다니까, 킁!”
 콧김을 팍 내뱉는 그레고리의 모습에 뒤쪽 병사들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윗사람을 받들 줄 모르는 쓰레기들에게는 현실을 알려주는 게 최고지. 이본 남작님의 근위 기사인 나 그레고리가 허락한다. 마음껏 약탈하도록. 물론 마을 최고 미인은 나한테 데려오는 걸 잊지 말고, 흐흐흐.”
 그레고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도 크게 소리를 외치려 했다.
 그러나 강제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책에 글귀가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 촌장이든 황제든 지역을 다스리는 자는 때를 알아야 한다. 훗날 나을 수 있는 상처는 과감하게 받아들여라.]
 
 흡사 브루고 님이 내 앞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금 참으라고? 이익!’
 현실을 넘나드는 수준의 생동감만 아니었어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아도흘르만 해도 내가 옷을 붙잡지 않았다면 단박에 튀어나갔을 것이다.
 “뭐야, 미하벨. 왜?”
 “잠깐만···, 잠깐만···!”
 “뭔 소리야! 지금 저거 안 보여?”
 
 [아도흘르의 친밀도가 1 내려가 95가 되었습니다.]
 
 아도흘르가 손가락 끝에는 아브힐 아주머니의 앞을 가로막은 피터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히히히, 난 나이 먹은 쪽이 더 좋더라고, 뺏는 경우면 더 좋고.”
 아브힐 아주머니의 남편인 에이드리언 아저씨는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고, 바람 상대인 피터 아저씨가 아브힐 아주머니를 구원하는 꼴이다.
 물론 피터 아저씨도 온몸을 벌벌 떨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에이드리언 아저씨보다는 나았다.
 “그, 그만두시오! 아브힐을 건드리면 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용기를 낸 피터 아저씨를 바라보던 병사의 눈이 능글맞게 변했다.
 “오~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건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흉폭한 오크의 표정으로 변한 병사는 나무방패로 피터 아저씨를 후려쳤다.
 퍽
 “커헉!”
 피터 아저씨는 바로 옆으로 나동그라지며 몇 바퀴 굴렀다.
 “꺄악! 피터 씨!”
 아브힐 아주머니는 그런 피터 아저씨에게 달려가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병사는 그런 아브힐 아주머니의 옷을 끌어당겼다.
 찌익.
 아브힐 아주머니의 옷이 찢어지며 상체가 살짝 드러났다.
 “야, 미하벨!”
 아도흘르가 나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난 아직 가만히 있었다.
 
 [아도흘르의 친밀도가 5 내려가 90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상황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책이 나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때가 있다면, 그것밖에 없다.
 으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갈자, 재촉하던 아도흘르가 한 번 더 참았다.
 그리고 그때.
 “그레고리 님, 여기 그레고리 님을 위한 먹잇감을 데려왔습니다.”
 “놔! 놓으란 말이야!”
 때가 왔다.
 병사가 그레고리 앞에 데려온 사람은 악을 쓰고 있는 엘리였다.
 “지금이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도흘르가 오우거보다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저놈은 죽이진 마!”
 엘리가 위험에 빠진 걸 본 이상 아도흘르가 말을 들을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외쳤다.
 그레고리 놈이 살아있으면 분명 나름대로 유용할 거다.
 녀석들의 무력은 B에서 D까지 포진되어 있다.
 그나마 도구를 갖추고 D인 녀석은 실제로는 E에서 E+라는 얘기겠지.
 쿵!
 아도흘르가 크게 도약해서 그레고리 일당 앞에 착지하자, 지축이 뒤흔들리는 큰 소리가 났다.
 “뭐, 뭐야?”
 살짝 놀란 그레고리의 목소리와 함께 부하 한 명이 나섰다.
 “그레고리 님, 이따위 녀석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꼴에 그거 달렸다고 예쁜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하나 보죠. 이 년이 이 녀석한테 평소에 눈길이나 줬겠습니까?”
 “크하하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레고리 일당의 웃음은 1초도 가지 못했다.
 빠악!
 분노한 아도흘르의 주먹이 병사 녀석의 얼굴 정중앙에 꽂힘과 동시에 저승으로 영혼 하나가 날아갔다.
 안면이 움푹 함몰되고 두 눈이 터진 시체의 모습은 굉장히 참혹했다.
 그러나 평상시 몬스터의 시체를 많이 봐온 우리였던 터라 그렇게 놀라진 않았다.
 아마 그레고리 일당들에게 가진 적대감도 한몫하고 있을 테지.
 “쳐, 쳐라!”
 그레고리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아도흘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에서 본 것처럼 진형을 짜서 덤비는 게 아니라, 그냥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이 훈련을 제대로 받았나 싶을 정도였다.
 쐐액.
 아도흘르가 주먹을 날리자 병사 하나가 급히 방패를 들어 막았다.
 와지끈!
 나무방패는 그대로 박살이 남과 동시에 주먹은 그대로 병사의 상체에 도착했다.
 우드득!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병사는 저 멀리 하늘을 날았다.
 피거품을 물고 있는 걸 보니 100% 죽었겠지.
 “으, 으아아아!”
 나머지 병사 중 한 명이 다시 아도흘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병사도 옆구리에 주먹을 맞고는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여, 여자를 인질로 잡아!”
 그레고리의 말에 황급히 엘리를 데려온 병사가 엘리를 찾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안녕?”
 상황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가가고 있던 내가 씨익 웃으며 그 병사의 팔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끄아악!”
 자신의 팔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병사를 바라보며 난 엘리에게 외쳤다.
 “뒤로 피해 있어.”
 “으, 응!”
 엘리도 눈치는 있는지 귀로 엘리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천한 것들이!”
 마침내 그레고리가 나섰다.
 그러자 아도흘르는 흉흉한 눈빛으로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으헉!”
 그레고리의 바지에서 노란 물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말은 다치면 안 돼!”
 내 외침의 아도흘르의 눈빛이 그나마 평상시에 가깝게 돌아왔다.
 ‘역시 뼛속까지 사냥꾼이야.’
 아도흘르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다쳐도 되는 거지?”
 기대감 가득한 아도흘르의 눈을 바라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죽이지만 마.”
 정신이 돌아온 아도흘르라고 해서 그레고리가 이길 수 있단 건 아니었다.
 팟.
 쐐액!
 텅!
 점프, 주먹질, 강타!
 가벼운 삼박자로 이루어진 공격에 그레고리는 그대로 뇌진탕이라도 걸렸는지 말에 몸을 기대며 기절했다.
 “나머지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고급 정보는 그레고리가 가지고 있을 게 뻔하다.
 예전에 본 책에 의하면 인질을 지나치게 많이 두는 것도 군량에 큰 손실을 준다고 했다.
 그러니 책을 따를 수밖에.
 “으,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시작한 병사들이었지만, 아도흘르보단 빠를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고리를 제외한 여섯 명의 병사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이제 좀 진정 됐어?”
 내 말에 아도흘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런데 아까는 왜 말린 거야?”
 난 아도흘르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는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사람이 위험할 때 나섰다가 엘리가 위험할 때 못 구하면 안 되잖아.”
 
 [아도흘르의 친밀도가 10 올라가 100이 되었습니다.]
 
 매우 감동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도흘르를 바라보며 난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남작의 부하들을 죽였으니 이 일은 절대로 덮을 수가 없다.
 물론 가만히 있었으면 마을이 망할 것은 당연했기에 이번 행동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이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하는 것이다.
 ‘뭐···, 정해졌나···?’
 브루고 님이 물려주신 엠페러 소울과 나의 재능.
 그리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벌어진 이번 일.
 이건 하늘이 나에게 운명을 내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난 조용히 뒤를 돌았다.
 그러자 초조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엘리를 찾았다.
 “엘리.”
 “으응? 왜?”
 살짝 놀란 듯이 반문한 엘리를 향해 나는 싱긋 웃었다.
 “너는 사냥꾼의 아내가 되고 싶어, 아니면 기사의 아내가 되고 싶어?”
 
 * * *
 
 “기사의 아내?”
 엘리의 표정에 의아함과 동시에 흥미가 돋았다.
 “응, 기사의 아내. 산속에서 사냥꾼의 아내가 되어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아니면 마리아 할머니가 말해주신 키다리 기사 이야기의 신부가 되고 싶어?”
 마리아 할머니의 키다리 기사 이야기.
 산속에서 사는 평범한 소녀가 우연히 지나가던 기사의 눈에 띄어 나중에는 근위 기사의 신부가 된다는 이야기다.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려면 지금은 돌아가신 마리아 할머니나 어르신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어서 말로만 들어도 상상력이 매우 뛰어났다.
 아마 지금쯤 엘리의 머릿속에는 기사의 신부가 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겠지.
 “기사의 아내··· 가 되는 게 좋지 않을까?”
 “역시 그렇지?”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 아도흘르를 바라보았다.
 “아도흘르.”
 “어, 엉?”
 약간 꺼벙하게 대답하는 아도흘르의 모습에서는 조금 전까지 보인 초인적인 무력이 딱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박한 시골 청년이랄까?
 “엘리가 기사의 아내가 되고 싶대.”
 아도흘르의 표정에서 결연함이 비쳤다.
 무어라고 아도흘르가 대답하려던 찰나 마벨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엘리가 기사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것에 왜 아도흘르가 반응을 해? 혹시?”
 엘리와 아도흘르가 동시에 몸을 꼬았고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상황을 깨달았다.
 “아니, 언제 둘이 눈이 맞은 거야? 하나도 몰랐네?”
 마벨 할아버지의 너스레에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특히 아브힐 아주머니 같은 경우 에이드리언 아저씨가 아닌 피터 아저씨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애초에 자식도 없으니 별로 상관도 없으려나?
 짝짝!
 나는 손뼉을 두어 번 치며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여러분 잠시만요. 엘리와 아도흘르의 결혼은 중대사인 것이 맞지만, 지금은 더 큰 중대사가 있어요.”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긴 했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 미하벨. 어떻게 할 생각이냐?”
 마벨 할아버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아도흘르를 바라보았다.
 “아도흘르. 어떻게 할 거야? 엘리를 기사의 아내로 만들어주고 싶어?”
 아도흘르가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사가 되겠어!”
 “내가 널 기사로 만들어줄게.”
 “진짜?”
 “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이곳은 더는 조용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어요. 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그 위에서부터 살아왔던 곳이지만 결국 감시와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분위기는 더욱 다운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작령을 먹어버리죠?”
 “남작령을 먹는다고?”
 마벨 할아버지가 바로 반응했다.
 “네. 지금 보면 아시겠지만 이미 우리는 주사위를 던졌어요. 이 녀석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남작은 의심할 테고, 또 병사들을 보낼 거예요. 아마 더 많은 병사를 보내겠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가 이본 남작령을 먹는 거예요.”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갈렸다.
 한쪽은 ‘힘들지 않을까’였고 한쪽은 ‘죽더라도 해보자’였다.
 “나는 찬성이다, 미하벨. 어차피 나는 오래 살았으니 이제 와서 죽는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어.”
 마벨 할아버지는 찬성했다.
 “나도. 또 그런 일 당하는 건 싫어.”
 아브힐 아주머니 역시 동의했다.
 마벨 할아버지와 아브힐 아주머니가 먼저 나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동의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잘들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일이 잘못되면 도망가면 되니까요. 어차피 우리 조상님들은 다 맨주먹에서 시작했는데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요?”
 “그렇지, 미하벨. 말 한번 잘하는구먼. 그런데 우리는 뭘 하면 되겠누?”
 마벨 할아버지의 말에 난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여러분이 할 일은 한 가지에요. 인질 감시.”
 난 그레고리를 가리켰다.
 
 * * *
 
 따가닥. 따가닥.
 나는 한가롭게 이본 남작령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레고리가 타고 온 말은 의외로 훈련이 잘되었는지 새로운 주인의 손길을 별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 성과는 있었네.’
 비록 검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근력도 아도흘르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만 무엇이든지 조금은 할 줄 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 같은 경우 승마가 그렇다.
 예전에 마을에서 말을 두 마리 키웠지만, 병으로 두 마리 다 죽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마을에는 말이 없다.
 원래대로라면 이본 남작령까지 걸어가야 했겠지만 말을 타고 온 그레고리 덕분에 굳이 힘들게 걸어서 갈 필요는 없게 되었다.
 ‘땡큐, 그레고리.’
 걸어서 간다면 최하 반나절은 걸어야 할 거리였지만, 말을 탄 덕분에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말을 전력으로 몰아서 왔으면 훨씬 빨랐겠지만,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에 약간 여유를 가지고 왔다.
 ‘저긴가 보네.’
 저 멀리 촌락이 밀집된 지역이 보였다.
 산맥 쪽으로 올라갈 일은 있어도 산맥 아래로 내려갈 일은 딱히 없다 보니 느낌이 신선했다.
 대부분 집은 약간의 통나무를 기초로 하여 나뭇가지들을 얽어서 만든 움막에 가까웠고 일부는 흙집인 수준이었다.
 소수 통나무집이 있기야 하지만, 아무래도 산맥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데다가 근처에 마땅한 숲이 없어서 생긴 일인 듯싶었다.
 ‘산에서 사는 게 집을 짓는 데에는 또 유리하구나.’
 촤르륵.
 어느새 내 손에는 책이 놓여 있었고, 내 시선 역시 책에 떠오른 글자들로 향했다.
 
 [영지 명 : 이본 남작령]
 [영지 등급 : F]
 [민심 : F]
 [인구 : 437]
 [병력 : 14]
 [인구구조 : 항아리형]
 [특이사항 : 개방 조건1 - 영지점령, 개방 조건2 - 작위]
 
 ‘특이사항이란 걸 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가 보네.’
 문득 마을이 떠올랐다.
 ‘마을도 영지 처리가 되려나?’
 생각해보니 마을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적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돌아갈 때 한번 확인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F등급인 주제에 마을 어귀에 경비병은 한 명 세워놨네. 몬스터 방지용인가?’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산맥에서 생활하지 산맥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외침을 막는 용도라기보다는 탈출을 막는 용이라고 보는 게 옳다.
 소설에서 본 바에 따르면 영주들은 영지민들이 탈주하는 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다고 들었으니까.
 도망가고 나서 남은 가족들을 족친다고 해도 경비병 한 명 세워두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것은 확실히 차이나긴 하겠지.
 “멈춰라!”
 숏 스피어를 든 경비병이 양손으로 숏 스피어를 자신의 가슴께로 당기며 진입을 막았다.
 
 [이름 : 말로]
 [리더십 : E]
 [무력 : C+(C)]
 [지능 : D(D+)]
 [손재주 : D(C)]
 [화술 : C(C+)]
 [야망 : D+]
 [친밀도 : 0]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술을 좋아함.]
 
 마을 창고에 가둬놓은 그레고리에게서 이미 들은 정보지만 특이사항으로 확인하니 더욱 안심되었다.
 “어이구, 나으리. 저는 그레고리 기사님의 심부름으로 온 미하벨이라고 합니다.”
 비굴한 웃음과 함께 허리를 숙인다.
 거기에 손까지 비빈다.
 완벽한 아부의 자세.
 그러자 말로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탐욕스러운 쓰레기의 눈빛을 지었다.
 “그레고리 님이?”
 “네. 현재 그레고리 님은 저희 마을에서 축제를 즐기고 계십니다. 그레고리 님이 자신만 이렇게 즐기기는 아깝다면서 마을로 가서 부하들을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편지도 가져왔습니다.”
 “편지라고?”
 “네, 나으리.”
 양피지를 건네자 대충 읽는 시늉만 하던 말로는 양피지를 도로 건네주었다.
 ‘네가 까막눈인 건 이미 알아, 인마.’
 속으로 비웃었지만, 이 녀석이 알 리 있을까.
 “크흠, 그래, 들어가도 좋다. 그런데···.”
 “아이고, 당연히 있지요. 그레고리 님께서 아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오늘 마을을 지키고 있는 말로라는 경비병님이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부하니까 각별하게 신경 쓰라고 말입니다.”
 “그으래?”
 말로의 입이 귀에 걸렸다.
 나는 일부러 허둥거리며 말의 안장에 달아놓은 주머니에서 술과 소시지를 꺼내어 말로에게 건넸다.
 “이따가 같이 마을로 가실 수 있도록 제가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흠! 흠! 내가 꼭 가야겠다는 건 아니고···.”
 “어유, 아닙니다. 그레고리 님의 오른팔이신 분이 당연히 참석하셔야죠. 마을 사람들도 기뻐할 겁니다.”
 “하하하하! 그래, 그래. 이거 가지고 들어가라고.”
 말로는 꽤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검은색 명패와 함께 길을 비켜주었다.
 ‘소설이 의외로 현실에 잘 먹히는데?’
 지금 내가 사용한 대사는 물려받은 책에서 나온 대사를 많이 인용한 것이다.
 그레고리가 말로 녀석을 오른팔로 생각하는지는 내가 알 것 없고 확인할 수 없는 칭찬만 줄줄 늘어놨을 뿐인데도 효과가 굉장히 좋다.
 ‘역시 로맨스 소설에서 낯간지러운 말이 괜히 효과를 보는 게 아니었어.’
 이번엔 말을 타는 게 아니라, 말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영지 자체가 그렇게 큰 게 아니다 보니 걸어가는 게 시비에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응? 너 그 명패는 뭐냐?”
 지나가던 다른 경비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예, 나으리. 그레고리 님께서 심부름을 보낸 저 산맥 마을 사람입니다.”
 “그러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걸 보아하니, 마을에 입장할 때 명패에 따라 경비병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듯했다.
 아마 이 검은색 명패는 ‘건드리지는 마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실제로 마을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저 갑갑할 뿐이다.
 “꺄아아악!”
 “나으리, 제발 저희 딸을 놔주십시오.”
 “네 배때기로 소시지를 만들기 전에 닥쳐!”
 “야, 야. 그러면 안 돼. 남작님이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잖아. 크크크.”
 “어때, 어차피 다 늙은 놈 죽인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마을 여기저기에서 경비병들에 의한 문제가 일어났고 심지어 경비병들의 대화도 무척 더러웠다.
 “야, 말로 녀석 저번에 줄리에네 자식이랑 강제로 했어.”
 “뭐? 줄리에네 자식이랑? 그놈 그런 취미도 있었냐?”
 “그러니까, 그 자식 우리보다 훨씬 막 나간다니까.”
 시시덕거리며 이런 대화를 나누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다 보니 오히려 헛소리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귀신이야! 귀신이 나타났어!”
 마벨 할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비명을 내지르며 마을 대로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버님! 귀신 같은 건 없다니까요!”
 “아버지!”
 아들과 며느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필사적으로 따라 달리고 있었다.
 ‘늙으신 분이 체력도 좋네.’
 이런저런 광경을 보다 보니 마침내 남작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로 적당히 만든 다른 집들과 달리 이본 남작의 집은 흙이 좀 더 많긴 했지만, 돌과 흙으로 제대로 지어져 있었다.
 물론 책에 있는 삽화에서처럼 으리으리한 저택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저택만 돌집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주변에 이런 돌이 절대 흔한 것은 아니겠지.
 그레고리의 말로는 이본 남작령이 3년 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이걸 짓는 동안 영지민이 꽤 고생했을 것이다.
 “멈춰라.”
 마을과는 달리 굳게 닫힌 문 앞에 경비병이 한 명 더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검은색 패를 봤는지 날이 서 있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은 될 수준이었다.
 “아, 나으리. 저는 그레고리 님이 보낸···.”
 무어라고 말하려던 찰나 날카로운 채찍 소리와 한껏 비웃는 웃음소리가 귀를 파고 들어왔다.
 
 * * *
 
 고개를 돌리니 오크 한 마리가 젊은 남자의 등을 채찍으로 마구 후려치는 중이다.
 “크헤헤헤, 이놈! 이놈!”
 그리고 그 옆에는 트롤 한 마리가 손뼉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오빠, 너무 약하잖아. 좀 더 세게!”
 “그래? 알았어!”
 쫘악!
 “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지만, 오크는 채찍질을 계속했다.
 이런 나의 시선이 보였는지, 경비병이 으르렁거렸다.
 “뭘 보는 거냐?”
 “아, 죄송합니다. 나으리, 다른 게 아니라 그레고리 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양피지를 건네자, 경비병은 눈을 지그시 모으고는 양피지를 반복해서 바라보았다.
 ‘글을 약간은 알지만,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닌 모양이네.’
 내 예상이 맞는 듯,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의민지는 알겠다. 들어가면, 하인이 안내해줄 거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작님의 자제분들을 볼 때는 각별하게 주의하도록. 혹시라도 조금 전과 같은 눈빛으로 다시 볼 때는 저곳에 묶여 있는 게 바로 네가 될 것이다.”
 “예, 예. 정말 죄송합니다.”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자, 마음에 들었는지 경비병이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들여보내 주었다.
 말은 자연스럽게 경비가 맡게 되었는데, 아마 알아서 꺼내먹을 걸 꺼내 먹겠지.
 ‘오크와 트롤이 자식이라니, 어후···.’
 아들이라는 것은 살이 있는 대로 쪄서 볼살이 흔들릴 지경이었고, 딸이라는 것도 배가 가슴보다 몇 배는 더 나와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애먼 영지민 하나를 저렇게 직접 족치는 것을 보면 결코 인성이 바르게 자랐을 리가 없다.
 실제로 책이 보여주는 ‘특이사항’을 보면 영지민을 비롯한 하층민을 고문하는 게 취미고, 고문하다가 죽인 전적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만약 곧이곧대로 굽히고 들어갔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저기, 남작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내 말에 걸레질하고 있던 50대 여자가 측은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못 보시던 분인데···.”
 “아, 네. 산맥 쪽에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 마을이 있었나요?”
 “네. 남작령 같은 거에 편입되는 것은 마을이 생긴 이후로 처음이네요.”
 “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여자는 정신이 퍼뜩 든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따라오세요.”
 여자는 앞장서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잠시 걷자, 늑대 모피가 걸린 문이 보였고, 여자는 그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뭐냐?”
 듣기만 해도 살이 잔뜩 찐 것 같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나왔다.
 “남작님, 산맥 마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러냐? 들어오라고 해.”
 남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자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귓속으로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세요···.”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여자는 이미 총총걸음으로 사라진 후였다.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저는 산맥 마을에서 그레고리 님의 심부름으로 온 미하벨 이라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자, 남작은 ‘킁’ 하고 돼지 웃는 소리를 냈다.
 “그레고리가?”
 남작의 대답에 고개를 살짝 들은 다음 다시 끄덕였다.
 “예, 여기 편지가 있습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작의 모습이 보였고, 동시에 책에 남작의 평가가 주르륵 적히기 시작했다.
 
 [이름 : 다비드 드 이본]
 [리더십 : E]
 [무력 : F+]
 [지능 : D+]
 [손재주 : F]
 [화술 : E]
 [야망 : A]
 [친밀도 : 0]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사실상 몰락 귀족, 베라트 후작에게 설득당해 몰락 귀족 출신들이 허울뿐인 작위만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인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쓰레기 같은 능력치가 다 있지?’
 과장 좀 섞어서 전체 능력치가 평균 F 수준이었다.
 거기에 야망은 A인 것이, 이본 남작의 욕심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만···, 특이사항 상태가 좀 이상한데?’
 신기하게도 특이사항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슥.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을 갖다 대자, 정신이 어딘가로 쭈욱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교역을 통해 구한 북극곰의 모피가 양탄자처럼 깔린 방.
 이곳은 왕국 최고의 실세 중 한 명인 베라트 후작의 서재다.
 50대 초반의 나이지만, 젊은 시절 이웃 나라에 공포를 안겨 주었던 은발의 검수가 바로 베라트 후작이다.
 지금도 윤기가 흐르는 은발과 관록 있는 날카로운 얼굴에는 카리스마가 철철 넘쳤다.
 베라트 후작은 30년 숙성시킨 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무심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라트 후작과 책상, 그 앞에는 다비드가 넙죽 엎드려 구원을 구하고 있었다.
 “베라트 후작님.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다비드의 간절한 요청에도 베라트 후작의 얼굴색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따스했다.
 “다비드,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네의 아들과 딸이 건드린 사람이 하필이면 벤자민 공작가의 하인이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랜 하인의 친척이었지. 이곳 수도에서는 천한 것들을 건드린다고 해도 각별하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있었기에 목소리만 들은 다비드는 계속해서 사정하기 바빴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그런 줄 몰랐습니다.”
 일이 벌어진 이상 몰랐다는 말은 절대 변명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베라트 후작 역시 이러한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비드의 지혜는 암투가 쏟아지는 수도에서 살만한 수준이 절대 되지 못했다.
 “그래, 자네는 몰랐겠지. 그래서 자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수대에 오른 것이고 말이야. 안타까워···, 자네 아버지는 꽤 좋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후작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의지할 곳은 후작님밖에 없습니다.”
 눈물과 콧물로 모피를 더럽히는 다비드의 모습에 베라트 후작은 인상을 썼지만, 목소리 톤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래, 다비드. 난 자네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지. 그래서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해.”
 “기, 기회 말입니까?”
 다비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된 돼지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그래, 이제 자네가 남작이 되는 거야. 다비드 드 이본 남작. 어떤가?”
 “제가··· 남작이요?”
 다비드의 아버지는 남작이었지만, 다비드는 남작 작위를 받지 못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다비드는 아무리 운이 좋아도 돈 좀 있는 서민이 될 게 뻔했다.
 이것도 운이 정말 좋은 경우고, 실제로는 자신과 자식들도 교수대에 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 내가 벤자민 공작님에게 직접 가서 교섭을 보도록 하지. 자네가 벤자민 공작님에게 성의를 좀 보인다면, 남작 작위도 잇게 될 테고, 좀 외진 지역이지만 봉토도 받게 될 거야. 그곳에서 시간을 좀 보낸다면, 나중에 잠잠해졌을 때 자네를 반드시 부르도록 하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나를 못 믿겠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러면 일단 집으로 돌아가게. 조만간 내가 사람을 보내서 자네 집 창고의 열쇠를 받으러 가지.”
 “열쇠를··· 요?”
 베라트 후작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벤자민 공작님을 설득하는 게 어지간한 성의로 될 것 같은가? 작위를 유지하고, 새로운 영지를 받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텐데?”
 “아, 아닙니다.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비드는 베라트 후작에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에 저택을 떠났다.
 잠시 뒤, 베라트 후작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5급 마법사 조나스가 베라트 후작의 옆에 홀연히 나타났다.
 “천한 놈의 오물이 묻어버렸군요.”
 조나스의 손짓 한 번에 다비드의 오물들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인을 시키면 될 텐데, 괜히 손을 쓰게 해 미안하군.”
 “아니요. 저런 머저리의 오물이 제 숨결에 들어오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부르실 생각입니까?”
 조나스의 얼굴에는 다 안다는 듯한 즐거운 웃음이 걸려있었다.
 “크크크, 그럴 리가. 마리우스도 안됐어. 하나뿐인 자식이 저 수준인 데다가, 손주들도 하나 같이 쓰레기들뿐이니 말이야. 기껏 중앙으로 오더니 결국 목숨도 재산도 거의 다 잃고, 자식들은 변방 오지로 가게 됐군, 그래.”
 “감히 후작님과 공작님 사이에서 줄을 탄 죄지요. 사실 후작님과 벤자민 공작님은 정말로 각별한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베라트 후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헉!’
 나는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정신을 퍼뜩 차렸다.
 머릿속에서 보인 영상은 이본 남작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손주들이 한 일을 계기로 이본 남작의 아버지인 마리우스 남작이 처형당했고, 다비드, 아니 이본 남작이 이곳으로 좌천된 거였어.’
 아까 마당에서 이본 남작의 자식들이 하는 짓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더욱더 편해졌는데?’
 이본 남작의 능력은 매우 형편없다.
 거기에 중앙의 유력자에게 완전히 버려졌다.
 그렇다는 건, 이본 남작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문제 생길만한 건 전혀 없다는 이야기다.
 그저 세금만 징수인에게 꼬박꼬박 내면 전혀 신경도 안 쓰겠지.
 “흐음, 오우거를 잡았다고? 그리고 지금 연회 중이고?”
 편지를 다 읽었는지 남작이 입을 열었다.
 영상의 길이는 꽤 긴 편이었지만, 현실에서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네, 그렇습니다. 저희 마을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오우거 하나가 골칫거리였는데, 때마침 그레고리 님이 오셨습니다. 다른 병사들은 다 겁먹고 도망치는데, 그레고리 님이 남작님의 명예를 우습게 만들 순 없다며 용감히 달려드시고는 머리통을 메이스로 부수셨습니다.”
 지금 남작이 들고 있는 편지는 그레고리가 쓴 게 맞다.
 가위를 어떤 부위에 갖다 대고 부탁을 하니 아주 친절히 또박또박 써준 편지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그레고리가 그렇게 용감할 리가 없거든?”
 남작의 의심에 나는 일부러 몸을 과장되게 떨었다.
 “솔직히 말해봐.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저, 그게···. 그레고리 님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퍽!
 남작의 발길질이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컥! 죄, 죄송합니다! 그레고리 님 보다는 당연히 남작님이 높습니다!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크흠!”
 남작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레고리 님이 오셨을 때부터 연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레고리 님이 조금 취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오우거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정답이지. 그놈이 오우거를 보고 맨정신으로 달려들 리 없어. 한 마디로 운 좋게 잡았다 그거지?”
 “네. 오우거를 잡고 생긴 전리품을 남작님에게 바치려고 하는데, 들고 갈 인원이 부족하다고 병력을 최대한 많이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엿들은 건데···.”
 말을 흐리자 바로 남작이 눈을 부라렸다.
 “쓰읍!”
 “어차피 숨겨봤자 남작님한테 들킬 테니 바치고 많이 받는 게 낫다고도 하셨습니다.”
 “흐흐흐흐, 그레고리답구먼. 그래, 그 녀석이 그렇게 원한다면 보내줘야지. 이걸 들고 병사들한테 말해서 데려가라. 그 녀석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니 찾는 건 알아서 찾도록.”
 남작은 붉은색 수실로 장식된 패 하나를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남작을 노려보았다.
 ‘조만간 보자. 개자식아.’
 옆구리를 비비며, 조금 걷자 아까 보았던 여자가 보였다.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의 이름은 책에 의하면 레아였다.
 아까와 달리 시간 여유가 꽤 있었기에 나는 레아 씨에 관한 정보를 탐독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옆구리를 비비고 있는 모습이 걱정스러운 건지, 레아 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아아, 괜찮아요. 그런데 레아 씨.”
 난 목소리를 낮추며 레아 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남작의 사병 중에 착한, 아니 최소한 영지민들을 건드리지는 않는 녀석들이 있긴 한가요?”
 당황해하는 레아 씨를 향해 난 그레고리의 수염 더미를 보여주었다.
 
 * * *
 
 “이, 이건!”
 “보시면 아시겠죠? 수염이 워낙 특이하니까요. 그레고리 녀석의 수염이에요. 뭐, 피부도 조금 뜯겨 나왔지만요.”
 낮게 속삭였기에 다른 사람에게 들릴 리는 없었다.
 애초에 레아 씨와 남작을 제외하면 저택 안에 있지도 않다.
 문 앞의 경비병을 제외하면 나머지 경비병들은 마을 여기저기에서 패악질을 저지르기 바쁘다.
 “분명 색깔이나 생김새는 ‘그놈’ 수염이 맞는데···, 그럼 도대체···.”
 난 레아 씨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저희 마을에 온 7명 중, 그레고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죽었어요. 이따위 쓰레기 같은 놈에게 굽실거릴 생각은 없거든요. 레아 씨가 원수를 갚고 싶다면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어요.”
 
 [이름 : 레아]
 [친밀도 : 50]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남작 자식들에 의한 채찍질로 남편, 아들, 딸이 모두 죽었음. 외부에는 공포에 질려 계속 일하는 것으로 보이나 남작을 죽일 기회를 보는 중.]
 
 [레아의 친밀도가 20 올라가 70이 되었습니다.]
 
 “정말 남작을 죽일 건가요?”
 “물론이죠. 원한다면 남작의 자식들에 대한 처분은 레아 씨에게 맡길 수도 있어요. 남작은 영주의 자질이 없어요. 만약 우리 마을이 남작의 밑으로 들어갔다간, 얼마 안 가서 굶어 죽을 게 뻔하죠.”
 레아 씨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의 친밀도가 10 올라 80이 되었습니다.]
 
 “맞아요. 우리 영지의 세율은 70%지만 실질적으로는 90%나 다름없어요. 남작의 부하들이 행하는 수탈이 너무 심해서···. 저도 가족을 잃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으흐흑···.”
 레아 씨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고통 무엇인지 알 거 같아요. 비록 시간을 되돌려줄 순 없지만 제가 레아 씨의 복수는 도울 수 있을 거예요. 혹시 남작 부하 중 그레고리를 제외한 기사가 더 있나요?”
 레아 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어요. 저를 비롯한 영지민들은 처음부터 여기에 살았던 게 아니라 마리우스 남작님의 영지에서 징발된 사람들이에요. 기사도 그레고리 놈만 겨우 데려온 거로 알고 병사들도 별로 없어요.”
 병사들의 수 자체는 이미 특이사항으로 알고 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영지민들에게 그래도 우호적인 병사는 혹시 있나요?”
 잠시 생각하던 레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 있어요. 켄틴, 사임, 빅터요.”
 “그 세 사람의 생김새를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켄틴은 일단 붉은 장발에···.”
 레아 씨는 설명을 마치고 나서 내게 질문을 해왔다.
 “그런데 이건 왜 물으세요?”
 “애먼 사람까지 전부 죽일 순 없잖아요?”
 
 [레아의 친밀도가 5 올라가 85가 되었습니다.]
 
 “저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빨리 원수를 갚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돌아갈 거니까 늦어도 모레 밤까지는 모든 일이 끝날 거예요. 레아 씨는 그냥 평소처럼 생활해주시고 다른 영지민들한테도 절대로 말하지 마세요.”
 “절대로 말 안 할게요.”
 레아 씨가 발설할 경우와 발설하지 않는 경우에 따라 계획이 조금 다르지만, 발설해도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레아 씨라는 사람을 신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판단 척도 정도는 되겠지.
 “그럼 모레 만나도록 하죠.”
 찡긋 윙크를 날리며, 난 남작의 저택을 나섰다.
 
 * * *
 
 “나리들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주십시오.”
 내 말에 남작의 사병들은 유쾌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벌써 도착이야? 늦게 도착해도 돼~ 이렇게 술 있고 먹을 게 있는 데 뭐가 불만이겠어?”
 마벨 할아버지의 술이 정말 톡톡히 빛을 발하는 상황이다.
 마벨 할아버지의 술은 사실 다른 사람의 술에 비하면 맛이 없다.
 그러나 이본 남작령에서 만들어지는 술보다는 맛있다.
 애초에 술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의 양과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도 재료가 부족하면 맛이 안 나오는 것처럼 솜씨가 아무리 떨어져도 재료가 풍부하면 맛이 나오는 법이다.
 “마을로 가면 신선한 고기로 바로 통구이를 드실 수 있을 테니 더 즐거우실 겁니다.”
 헤헤거리며 웃어주자 사병들은 더욱더 신이 난 듯했다.
 “이야, 미하벨이라고 했지? 영지민들은 이런 붙임성이 전혀 없어서 만날 때마다 짜증만 났는데 이거 아주 진국이 남작님 밑으로 들어오게 되었구먼!”
 “그러게 말이야. 혹시 거기 우리가 기뻐할 만한 유흥도 존재할까?”
 “어유, 당연히 있지요. 늠름하게 생기신 여러분들이라면 충분히 유흥을 즐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크헬헬헬!”
 아주 좋아 죽으려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가득 흘렸다.
 비록 말은 여기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녀석에게 잠시 빼앗겼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2km 정도인가?’
 마을과의 거리가 얼추 500m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봇짐에서 붉은색 깃발을 꺼내 흔들었다.
 “어라? 그건 뭐냐?”
 코가 붉게 변한 병사 하나가 살짝 풀린 눈으로 물어왔다.
 “아, 이건 몬스터를 꼬리에 달고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산맥 초입이라 험하지는 않다고 해도 가끔 몬스터가 나타나거든요.”
 “아, 그래? 몬스터 따위 우리가 얼마든지 처치해줄 수 있지! 이 마을 무척 운 좋은 거야.”
 “듣기만 해도 든든합니다. 나리들.”
 물론 뻥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아도흘르와 약간의 계획을 짰다.
 흰색 깃발이면 일단 대화하기로 말이다.
 그리고 붉은색 깃발은···.
 “자, 여러분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좋아! 빨리 유흥을 시작하자고!”
 “네, 지금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나는 부리나케 녀석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도흘르가 녀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아도흘르가 드물게 트롤을 잡을 때나 쓰는 투박한 대도를 손에 쥐고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병사들 사이를 휘저었다.
 “뭐, 뭐야?”
 “으악!”
 “컥!”
 오는 도중에 술도 꽤 먹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대응은 매우 굼떴다.
 덕분에 매우 빠르게 남작의 사병들은 전멸했다.
 10명을 죽이는 데 20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다.
 “야, 치우자!”
 아도흘르의 외침에 평상시 아도흘르와 함께 사냥 다니는 친구들이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시체라고는 하지만 마을에서 사람이 죽는 일쯤이야 당연히 있고 평상시 몬스터나 가축 사체를 자주 보는 녀석들인지라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마을 사람들도 크게 충격받지는 않은 듯했다.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이라면 모를까 쓰레기들의 죽음에 충격받을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그만큼 죽음의 위기를 가까이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으니까.
 “뭐야, 결정 난 거야?”
 “어. 오늘 밤부터 난 남작이고 넌 기사야.”
 “오오오!”
 아도흘르는 마음에 든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도흘르에게 욕심이 없다는 점 이것이 정말 좋았다.
 아마 다른 녀석이었다면 내가 남작을 한다는 데에 조금 불만이 생기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도 아도흘르가 전적으로 나를 밀어주는 데다가 내가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을 읽고 쓰는 덕분에 다른 사람들 역시 내 계획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참, 그럼 이 녀석은 어떻게 해?”
 아도흘르는 창고의 문을 열며 그레고리를 가리켰다.
 수염을 뜯어내느라 턱 피부는 왕창 뜯겨 나갔고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되어 있는 걸 보니 내가 남작령으로 떠난 후 아도흘르가 따로 손봐준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도흘르는 자신이 들고 있던 대도를 그레고리에게 던졌고, 그레고리의 머리는 사과가 두 쪽 나듯이 쪼개졌다.
 “후련하지? 그럼 가볼까?”
 “어!”
 유쾌하게 대답하는 아도흘르를 뒤에 달고 나는 다시 남작령으로 향했다.
 
 * * *
 
 “헙!”
 깜짝 놀라는 레아 씨를 향해 난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대 보였다.
 그러자 레아 씨는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저택 구석에 레아 씨의 방이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창문으로 들어오면 되니까.
 정문은 경비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창문은 어쩔 도리가 없다.
 더군다나 지금 영지에는 병사가 3명밖에 없다.
 책이 보증한 확실한 수치다.
 켄틴, 사임, 빅터 밖에 없다는 얘기겠지.
 “레아 씨 지금부터 켄틴, 사임, 빅터를 불러와 줄 수 있겠어요? 어떤 이유든 상관없어요.”
 “음···, 어렵진 않을 거예요. 남작님 명령이라고 하면 되니까요.”
 “최대한 빨리 부탁드릴게요. 가능하면 셋이 동시에요.”
 “네.”
 레아 씨가 자리를 비운 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수록 좋다.
 이 책에는 그동안 만난 사람들의 능력치가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으니까.
 혹시 저번과 같은 영상체험을 또 하는 것도 괜찮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책에 글귀가 쓰이기 시작했다.
 
 [군주란 덕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으나 덕을 행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군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아···!’
 말을 보는 순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허울을 좇다가 실리를 놓치지 말라는 말.
 분명히 이 뜻이겠지.
 내 마음속 어딘가에 분명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아니다.
 난 착하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맹목적으로 착한 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책에는 다른 글귀가 쓰이기 시작했다.
 
 [군주는 공평한 존재가 아니다. 또한, 친절한 존재도 아니다. 한 명의 백성에겐 가까울지라도 백 명의 백성에겐 멀어져야 한다.]
 
 ‘그래, 이것도···.’
 지금이야 내가 레아 씨가 필요하다 보니 친근하게 했지만, 조만간 레아 씨에게도 거리를 둬야 할 상황이 분명히 올 거다.
 적어도 일반적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대해야 하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을 촌장 역할을 하던 나라면 마을 사람 하나하나와 친분을 공개적으로 다져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결정이야 마을 사람들과 같이 공동으로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곳 남작령을 접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최소 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통솔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것도 오로지 내 개인적인 결정을 통해서.
 실제로 물려받은 책들의 이야기를 봐도 군주의 모습은 위엄 있게 그려지지 순박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대외적으로 그려지는 모습은 말이다.
 ‘하마터면 잘못된 길을 걸어갈 뻔했어.’
 경각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자 방으로 세 명의 병사와 레아 씨가 들어왔다.
 병사들은 이쪽을 확인하자마자 기겁하고는 무기를 들려고 했다.
 “다치지 않게 제압해.”
 아도흘르는 전혀 반문하지 않고 병사들을 제압했다.
 마침 근처에 짚을 묶는 데 쓰는 밧줄이 있었기에 병사들을 묶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남작님한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
 병사 중 하나가 외쳤지만, 아마 남작의 방까지 소리가 닿는 일은 없을 거다.
 서로 끝과 끝에 방이 있으니까.
 “그게 정말 네가 바라는 건가?”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연 병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병사는 고민이 되는지 얼굴을 흐렸다.
 “옆에서 있던 네가 가장 많이 봤을 것이다. 남작이라는 자가, 남작의 부하라는 자들이 백성들 피를 얼마나 빨아먹는지.”
 다른 병사들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정말로 부패한 귀족 밑에서 열심히 수탈하다 죽은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남작이 여기에 왜 내려왔는지 아예 모른다고는 하지 않을 테지?”
 병사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병사들이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을 섞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패한 귀족의 발로 살았던 병사로 기록되고 싶다면 지금 죽여주지, 하지만 나를 따르겠다면 역사를 바꾼 영웅으로 기록되게 해주마.”
 병사들은 전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맨 처음 입을 열었던 병사가 다소 공손해진 어조로 물어왔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오래전에 멸망한 브루고 황가의 적통, 미하벨 드 브루고다.”
 
 * * *
 
 “브루고···?”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본 적 있어. 오래전 대륙을 통일했다던 제국 이름이 브루고였어.”
 아는 사람이 나왔다고 해서 분위기가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국 이름이 브루고인걸 떠나서 저 사람이 브루고 황가 후예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믿고?”
 “맞아. 거기다 브루고 황가의 후예인 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오래전에 멸망했다며? 심지어 이런 오지 중의 오지인 영지에서 시작한 사람을 따르라고?”
 이쯤에서 난 잡담을 끊기로 했다.
 “당연히 별로 상관없지.”
 “에···?”
 병사들은 하나 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브루고 황가의 이름으로 너희한테 따라오라고 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나도 처음부터 너희를 영웅으로 만들어줄 수 없다. 영웅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를 따르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해주마. 너희들 아내와 자식이 배곯지 않는 삶.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현실적인 문제로 끌고 내려오자 경비병들의 눈이 흔들렸다.
 이 녀석들은 영지민들을 수탈한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다른 병사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빈곤한 생활을 했을 터.
 “영지민들을 수탈해서 너희에게 주겠다는 게 아니다. 나를 따라오고,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해라. 그다음 너희가 떠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지금의 나는 이런 병사들을 부하로 삼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병사들조차 부하로 삼지 못한다면 나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고 이 녀석들을 부하로 만드는 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다.
 “정말··· 마음에 안 들면 떠나도 되는 겁니까?”
 “물론. 만약 너희 세 명이 전부 나를 거절한다면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지. 너희 셋만 남아서 남작의 명령을 따르면 될 거다. 나머지 녀석들은 전부 죽였으니까.”
 “주, 죽였다고요?”
 “그래. 나는 부하가 필요하지 쓰레기가 필요한 게 아니거든.”
 “그럼 저희는 왜 안 죽이는 겁니까?”
 “너희들은 최소한 영지민을 착취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많은 수의 오합지졸보다는 소수의 엘리트가 낫거든.”
 “엘리트···.”
 병사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영지민들이 얼마나 알아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남작과 다른 병사들은 눈앞의 녀석들을 병신 취급했을 게 뻔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자신들을 인정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겠지.
 “난··· 이분의 부하가 되겠어.”
 “저도 되겠습니다.”
 “저도요.”
 세 명은 동시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좋아. 지금부터 너희들은 내 부하다. 아도흘르!”
 내 외침에 아도흘르는 번개처럼 사라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을 끌고 나타났다.
 눈퉁이가 밤탱이가 된 것을 보니 아도흘르가 손봐준 모양이다.
 “너, 너는 산맥에서 온 심부름꾼!”
 남작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는 외쳤다.
 그러나 난 남작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아도흘르.”
 퍽!
 “쿠엑!”
 남작 입에 곧바로 재갈을 물렸다.
 “자, 이제 너희들의 마음을 가로막는 건 완전히 사라졌을 거야. 그렇지? 켄틴, 사임, 빅터.”
 이름까지 불러주자 세 사람은 완전한 복종의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첫 임무를 내리겠다. 남작의 아들과 딸을 포박해오도록.”
 “예!”
 세 사람은 아도흘르가 나갔을 때처럼 용기를 충전하여 밖으로 나갔다.
 “레아 씨.”
 “네? 네!”
 레아 씨는 사뭇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는 긴장했는지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나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저는 이 영지를 이 단계에서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 위에 군림해야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죠?”
 레아 씨는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빠르니 좋네요. 물론, 제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난 아도흘르를 바라보았다.
 “아도흘르. 영주와 기사는 기본적으로 상하 관계야.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공적인 자리에서는 우리는 군주와 기사 관계가 되는 거야. 괜찮겠어?”
 아도흘르는 검지로 구레나룻을 몇 번 긁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엘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거지?”
 “약속할게.”
 “그럼, 상관없어.”
 아도흘르의 대답과 동시에 책에 새로운 내용이 기재되었다.
 
 [이름 : 아도흘르]
 [충성도 : 100]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레아 씨는 80이었고, 켄틴, 사임, 빅터는 70이었다.
 ‘합리성 정도로 부하를 만들었을 때는 70이 된다는 건가? 만약 강제로 부하를 만든다면 이것보다는 더 낮다고 보면 되겠네.’
 때에 따라서 앞에서는 고분고분하지만, 실제 충성도는 엄청 낮은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잠시 기다리자, 남작의 아들과 딸이 밧줄로 포박된 채 들어왔다.
 남작처럼 입에 재갈을 물린 덕분에 귀찮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채찍으로 맞던 사람은 집에 보냈습니다.”
 “데리고 따라오도록.”
 내 말에 아도흘르를 비롯하여 레아 씨와 부하들이 남작과 남작의 아들, 딸을 데리고 내 뒤를 따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지.’
 영지민들을 어떻게 사로잡을지에 대한 계획은 얼추 세워졌다.
 아마 세운 계획대로 하면 문제없이 영지를 접수할 수 있을 것이다.
 파라락.
 갑자기 책이 펼쳐지며, 저절로 시선이 책으로 향했다.
 
 [합리적인 세율 책정법 1.]
 
 * * *
 
 고맙게도 마을 광장에는 적당한 크기의 돌로 만든 단상이 있었다.
 끽해야 계단 3개 정도의 높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울퉁불퉁한 단상 위에 남작과 남작의 아들, 딸만 신발을 벗겨서 세워놓자 굉장히 불편한 듯 연신 발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이 보였다.
 이러한 모습에 영지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와 광장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 명, 그다음엔 이십 명, 그다음에는 오십 명.
 백 명이 넘어간 시점에서는 영지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지배할 정도였다.
 일부 영지민이 무슨 일인가 질문하려고 시도하긴 했지만, 아도흘르의 살벌한 눈빛에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얼추 삼백 명이 넘는 영지민이 모였다 싶은 시점에 난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영지민들을 조용히 시켰다.
 마치 무언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삼백 명이 동시에 조용히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얼마 전에 나를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지막이 입을 열자, 영지민들이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이곳 영지를 감찰하러 내려온 감찰관, 미하벨이다.”
 감찰관이라는 말에 영지민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내가 거짓말한다고 해서 영지민들이 진실을 가려낼 방법은 없다.
 “본 감찰관이 영지를 둘러본바. 이본 남작에 의한 폭정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특히 이본 남작은 영지민의 생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빼앗아 중앙에 도착할 세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본 감찰관은 명령받은 대로 이본 남작을 처벌하고 새로운 영주가 되게 되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본 감찰관이 영주가 된 첫날 너희들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
 아도흘르에게 눈짓하자 아도흘르가 큼직한 포댓자루를 묶은 끈을 풀더니 위로 들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은 그레고리를 비롯한 남작 사병들의 머리다.
 “그동안 법을 어기고 전횡을 일삼은 것에 대한 대가다. 앞으로도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십 개에 달하는 머리를 본 영지민들은 몸을 떨었지만, 속 시원하다는 표정도 일부 섞여 있었다.
 다만, 죽은 사병의 가족들은 그저 공포에 질린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애초에 사병의 전횡을 통해서 나름대로 호의호식을 해왔기 때문에 후환이 두려운 것이리라.
 “처형된 사병들 가족의 처분에 관해서는 내일 결정할 것이다. 만약 개인적인 복수를 하거나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이는 본 영주에 대한 불복으로 알고 극형에 처하겠다.”
 영지민들은 다시 한번 두려움에 떨었다.
 “또한, 앞으로 70%의 세율이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그동안 전횡을 일삼았던 경비병들을 처형했으니, 앞으로는 이들을 통해서 영지의 일이 돌아갈 것이다.”
 켄틴과 사임, 빅터를 가리키자 영지민들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환호성을 쳤다.
 적어도 자신들을 괴롭힌 적이 없는 남작의 사병만 남았다는 건 확실히 지금보다는 좋아진다는 얘기였으니까.
 “마지막으로 남작과 남작의 가족들에 관한 처분이 남았다.”
 영지민들의 목구멍에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이 자들에 관한 처분은 이미 정해졌다. 너희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한 사람당 마른 장작 하나를 가져오도록.”
 영지민들은 맨 처음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두 번 말하는 순간 너희들은 지옥을 볼 것이다.”
 서슬 퍼런 압박에 영지민들은 부랴부랴 전력으로 뛰어 각자 장작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장작을 빅터에게 시켜 남작의 가족 근처에 적당히 쌓게 했다.
 장작을 쌓을 즈음 발도 묶었기 때문에 남작도 남작의 아들, 딸도 그저 ‘읍읍’ 거리는 소리만 낼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화르륵.
 어느새 아도흘르가 횃불에 불을 붙여 가져왔다.
 또한, 켄틴이 장작에 기름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남작의 비명이 다급해졌다.
 “아도흘르.”
 내 말에 아도흘르가 횃불을 레아 씨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레아 씨도 이내 무슨 뜻인지 깨닫고는 눈에 독기가 서렸다.
 “내 남편! 아들! 딸의 원수!”
 레아 씨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영지민들이 공감한 듯 안타깝다는 시선을 레아 씨에게 보냈다.
 “읍! 읍읍! 읍!”
 남작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그 말은 레아 씨에게 닿지 않았다.
 휙.
 마을 광장에 피어오른 불은 오래도록 지속했다.
 
 * * *
 
 영지로 올 때 같이 온 친구는 다시 마을로 돌려보냈다.
 아마, 다음번에 올 때는 엘리를 데리고 오겠지.
 덕분에 영지에는 나와 아도흘르, 둘만 남게 되었다.
 “미하벨,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어떤 거?”
 남작의 저택에 둘만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와 아도흘르는 스스럼없이 대화했다.
 “세금을 계속 70%로 받아야 하는 거야?”
 당연히 있을 법한 질문이었다.
 “응.”
 “왜? 우리 마을에 70% 부과한다고 했을 때는 문제였잖아.”
 “일단 30%는 중앙에 바쳐야 해.”
 “나머지 40%는?”
 “이곳 영지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 마을보다도 더 낙후됐지?”
 “응.”
 “나머지는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에 쓸 생각이야.”
 “아, 그렇다면야.”
 아도흘르는 바로 수긍했다.
 “그런데 미하벨.”
 “응?”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야? 뭔가 허전한데···.”
 “네가 생각해도 그래?”
 “응. 마리아 할머니가 말했던 기사라는 게 이거인지 잘 모르겠어. 여긴 완전 시골이잖아.”
 아도흘르다운 생각이라는 말에 픽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 좀 더 나아가볼까?”
 “난 잘 모르겠어. 그런데 일단 이게 기사가 된 거고, 엘리의 바람이 이루어진 거라면 난 좀 더 네 옆에 있을래.”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게 해줄게.”
 아도흘르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래, 이왕 엠페러 소울을 사용한 거 여기에서 끝내기는 브루고 님께 너무나도 죄송하지.’
 아까도 먹은 마음이지만, 이 길을 걸어가자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증조할아버지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수였는데도 주변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분명 선조 중에는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 있는데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사람도 있었겠지.
 황제의 핏줄을 떠나서 능력이 있는데도 주변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다.
 모두를 지킬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만큼은 확실하게 지켜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졌다.
 어쩌면 아버지의 검을 만진 순간부터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부하들의 능력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어.’
 책을 펼치자 또다시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정말 황제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미 정해진 일이지.’
 속으로 마음먹자 갑자기 책에 보라색 보석 하나가 그려지더니 튀어나왔다.
 
 [F등급 타임 스톤을 획득하셨습니다.]
 
 
 # 뜻밖의 횡재
 
 
 ‘타임 스톤?’
 책에 그려진 보석은 어느새 책 밖으로 튀어나왔다.
 
 [F등급 타임 스톤 : 통일 황제 브루고의 신력이 담긴 보석. 11일 이상 걸리는 일의 기간을 10일 줄여준다. 단, 작업자가 3명 이상일 경우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여러 곳에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 나머지 속성은 엠페러 소울과 같다.]
 
 ‘작업 기간을 10일이나 줄여준다고?’
 그야말로 엄청난 물건이다.
 10일 이상 걸리는 일이라고 한다면 역시 집을 짓는다거나, 농사, 대장간과 관련된 일에서 엄청난 효율이 나올 게 분명했다.
 ‘브루고 님도 이러한 힘으로 대륙을 통일하셨던 건가?’
 브루고 님 이후로 단 한 명도 대륙을 통일한 패자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럴 법하긴 했다.
 하지만, 브루고 님의 신력이 담겨 있다는 글귀가 있는 거로 봐서는 브루고 님의 안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지금 당장 나에게 더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 * *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아도흘르와 사임을 불렀다.
 그리고는 사임의 능력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름 : 사임]
 [리더십 : E]
 [무력 : D+(B)]
 [지능 : C+(~B+)]
 [손재주 : C]
 [화술 : D(~C)]
 [야망 : D]
 [친밀도 : 30]
 [충성도 : 70]
 [특이사항 :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음.]
 
 “아도흘르.”
 “예.”
 공적인 자리였기에 아도흘르는 나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지금부터 11일 동안 사임을 철저하게 훈련 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사임은 어리둥절한 반응이었지만, 아도흘르는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됐구나, 사임.’
 아도흘르가 같이 사냥 다니는 친구들을 어떻게 훈련 시키는지 아는 나였기에 사임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철저하게 훈련 시키라고 했으니 아마 식사 시간마다 토할지도 모른다.
 “가자.”
 아도흘르는 사임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아도흘르의 고함과 함께 사임의 죽어가는 소리가 저택 바깥을 가득 채웠다.
 
 [F등급 타임 스톤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훈련 시간이 1일로 줄어듭니다.]
 
 결과는 내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
 기다리는 동안 허송세월할 순 없었기에, 난 빅터를 시켜 영지민들이 순서대로 나를 보러 올 수 있도록 명령했다.
 현재 영지의 병력은 아도흘르를 포함해서 겨우 네 명.
 아무리 시골 영지라고는 하지만, 굉장히 부족한 숫자다.
 최소한 15명 정도는 되어야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것이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병력을 얘기하는 것이지, 영지의 중간 관리자도 여럿 뽑아야 한다.
 분명 영지민들 중에서도 여러 가지 재능 있는 녀석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직접 만나보고 뽑아 쓰기로 했다.
 만약 타임 스톤의 효율이 진짜라고 판명이 난다면 인재 육성도 그만큼 쉬워지겠지.
 “영주님, 일단 30명 정도 데려왔습니다.”
 “그럼 다시 30명 정도 더 데려오도록. 나머지는 내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하고 나간 빅터를 뒤로 하고 차례대로 영지민들을 독대했다.
 처음 내가 보여준 모습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영지민들은 대부분 나를 어려워 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편했다.
 군주와 백성이 지나치게 가까우면 독이 된다고 하였으니까 말이다.
 군주는 신화적, 전설적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신비성이 다소 희석되더라도 이렇게 독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아, 안녕하십니까.”
 바로 바닥에 넙죽 엎드린 남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이름 : 엔조]
 [리더십 : D]
 [무력 : F+(E)]
 [지능 : B(~B+)]
 [손재주 : D]
 [화술 : D]
 [야망 : E]
 [친밀도 : 20]
 [충성도 : 영지민]
 [특이사항 : 이본 영지로 징발되기 전, 종종 근처 작은 상단의 일을 돕곤 했음.]
 
 “일어나라.”
 “네!”
 “이름이 뭐지?”
 이미 알고 있지만, 일부러 물어보았다.
 “엔조라고 합니다.”
 “현재 영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남들처럼 농사짓고 있습니다.”
 “영지에 오기 전엔 무슨 일을 했지?”
 엔조는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똑같이 농사를 짓긴 했습니다만, 틈이 나면 근처 상단으로 가서 금전 출납 업무를 도왔습니다.”
 “금전 출납업무를 했다고?”
 “예. 아무래도 제가 농노라서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 어려운 신분인 데다가 우연히 상단 중간 관리자와 인연이 닿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글은 얼마나 알지?”
 “어려운 단어까지는 모릅니다만, 상단 업무에 필요한 단어들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엔조의 얼굴이 갈수록 밝아졌다.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못 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숫기 없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아버지한테 훈련받던 시절에는 꽤 주눅 든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훈련을 중단하시고 책을 맘껏 읽게 해주시면서 지금과 같은 성격이 되었다.
 아마 엔조 역시 비슷한 경우겠지.
 모처럼 자신이 자신 있는 업무에 관해 이야기하니 신이 났을 것이다.
 “상단 업무는 적성에 맞았나?”
 “최소한 농사보다는 나은 거 같습니다.”
 “만약 영지의 재정관리를 맡게 된다면 어떨 것 같나?”
 엔조가 바로 반색했다.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영지의 재물에 관심을 보이는 거라면 횡령했을 때 어떻게 될지는 알 텐데? 그리고 현재 영지의 사정상 봉록을 조금밖에 줄 수 없다.”
 엔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농사가 싫습니다. 남들보다 체력도 약하고 힘도 부족합니다. 먹여주고 재워주시기만 하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엔조의 표정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서 기다려라.”
 “그, 그럼···?”
 “기다리라고 했다.”
 짐짓 엔조를 노려보자 엔조는 화들짝 놀라 넙죽 엎드려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저 녀석은 중간 관리를 하기에는 다소 좀 부족해 보이는 데 말이야. 흠···.’
 하지만 재정을 관리하는 데에는 꽤 쓸만해 보였다.
 “일단은 후보로 둬야겠어.”
 양피지에 엔조의 이름을 적으려고 하던 찰나 책이 자연스럽게 펴지며 엔조의 주석이 추가되었다.
 
 [이본 영지의 재정 관리를 맡길지도 모름.]
 
 ‘편리하네.’
 양피지는 영지의 가축 숫자가 많지 않다 보니 사실 함부로 쓰기가 곤란하다.
 조만간 영지의 재정 관리를 기록하여 남길 것을 고려하면 양피지를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집이 황가의 후예일 가능성이 확실히 있긴 하구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책을 볼 때는 책의 가치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영주 자리에 앉아서 양피지의 가치를 생각해보니 집에 있는 책의 가치가 천문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 한 마리에 겨우 책 10페이지가 나오니, 어휴.’
 팔면 꽤 돈이 되기야 하겠지만 추후 중간 관리자들의 교육을 생각하면 함부로 팔 수도 없었다.
 애초에 조상님들의 유품을 팔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피지의 낭비를 막아주는 엠페러 소울이 새삼 고마웠다.
 “다음.”
 엔조 이후 80명 정도의 영지민을 보면서 3명의 병사를 새로이 뽑을 수 있었다.
 병사들을 뽑는 기준은 간단했다.
 야망이 너무 높지 않을 것.
 무력이 높거나 잠재력이 높을 것.
 특이사항에 긍정적으로 적혀있을 것.
 실제로 이 기준으로 뽑고 나니 충성도가 적어도 60 이상은 되었다.
 개중에는 80도 있고 말이다.
 ‘휴, 오늘은 이 정도로 해볼까?’
 식사도 집무실에서 대충 딱딱한 빵과 물로 대충 했기에 밖은 어느새 캄캄한 저녁이 되었다.
 오늘은 그믐달이라 바깥이 더욱 빨리 어두워졌다.
 그러나 저택 바깥에서는 아직도 용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닐까 몰라.’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가자, 엘리가 훈련 시키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보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며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혹시 생각이 바뀌면 오겠다나?
 반면 엘리는 아도흘르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아도흘르와 엘리 역시 나와 같은 저택에서 현재 생활 중이기에 이곳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안 추워?”
 사임이 이곳의 대화에 집중할 여력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평범하게 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응.”
 한동안 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중, 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도흘르가 즐거워 보여.”
 “그래?”
 “응. 마을에 있을 때는 그저 나한테 잘 보이려는 것으로 즐거워했던 거 같은데, 여기서는 아도흘르가 좀 더 활력을 찾은 것 같아.”
 “원래보다 더 활력을 찾으면, 완전히 곰인데?”
 “푸훗.”
 엘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마을을 떠난 걸 후회하진 않아?”
 “언제든지 돌아가면 되니까. 그리고 그 날 네가 했던 말처럼 나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그래. 아도흘르가 꼭 이루어줄 거야.”
 “그게 아도흘르지.”
 포근히 웃는 엘리의 시선에는 아도흘르가 가득 담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 시선에는···.
 “어쭈! 발이 보인다! 빨리 안 뛰어? 발에 흙자루 하나 차고 달릴까?”
 “아닙니다악!”
 반쯤 죽기 직전인 사임의 모습이 유독 애처로워 보였다.
 ‘힘내라, 사임.’
 
 * * *
 
 거의 새벽까지 훈련받은 사임을 질질 끌며 아도흘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명령하신 훈련을 전부 끝냈습니다.”
 “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타임 스톤의 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분명 11일을 훈련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아도흘르는 하루 만에 훈련을 끝냈다며 데려왔다.
 그렇다는 건 타임 스톤이 관계자의 인식까지 자연스럽게 바꿔놓는다는 이야기다.
 이건 엠페러 소울의 효과와도 일치한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책을 읽든 다른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편리하면 편리했지 절대 해가 될 능력은 아니다.
 더불어서 효과 역시 확실했다.
 
 [이름 : 사임]
 [무력 : C(B)]
 
 원래 D+였던 사임의 무력 등급이 한 등급 올라 C가 되었다.
 잠재 한계가 B인 만큼 C까지 오르는 것은 효과가 빨랐던 모양이다.
 “사임, 훈련은 어떤가. 받을만한가?”
 내 물음에 사임은 잠시 아도흘르의 눈빛을 살폈다.
 그러자 아도흘르는 사임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입으로는 웃었다.
 만약 사임이 ‘힘듭니다’, ‘못 받겠습니다’ 같은 말을 한다면 오늘 사임은 달을 못 볼지도 모른다.
 “바, 받을 만··· 합니다.”
 “음, 그래. 훈련을 받을만하다니 다행이야. 그렇다면 계속해도 되겠군.”
 방긋 웃는 아도흘르와 달리 사임의 안색이 시꺼멓게 죽었다.
 “아도흘르.”
 “네!”
 “오늘부터 순번을 정해 11일씩 병사들을 훈련 시키도록. 사임은 이미 훈련을 마쳤으니, 빅터가 괜찮겠어. 이후에는 중복 없이 훈련 시킬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아도흘르. 자네는 나가보게.”
 아도흘르는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반면 사임은 ‘살았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 감사하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 내일부터는 순번이 돌아올 때까지 적당한 훈련과 함께 근무를 잘 설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나가고 나서, 레아에게 잠시 들르게.”
 “예!”
 우렁차게 대답한 사임은 밖으로 나갔다.
 아마 레아 씨를 만나고 나면 입이 찢어지겠지.
 마벨 할아버지에게서 술을 좀 받아왔기 때문에 훈련이 끝난 녀석들에게 잠 푹 잘 수준으로는 줄 수 있었다.
 ‘자, 그럼 나도 내 할 일을 해볼까?’
 타임 스톤을 아도흘르의 일에 적용하자마자, 난 다시 영지민들을 면접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반나절 정도 지났을 때.
 ‘이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재목을 볼 수 있었다.
 
 * * *
 
 눈앞에 있는 50대 중반의 남자.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세 개 있고 얼굴 곳곳에 잔주름이 보인다.
 그만큼 긴 세월 고생해왔단 거겠지.
 하지만 얼굴 그리고 행동에 온화함이 적당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체념 섞인 온화함?’
 오히려 체념이 조금 섞여 있었기에 마음에 들었다.
 
 [이름 : 파브리스]
 [리더십 : A]
 [무력 : C+]
 [지능 : A]
 [손재주 : B(~A)]
 [화술 : A]
 [야망 : F]
 [친밀도 : 50]
 [충성도 : 90]
 [특이사항 : 영지민들의 존경을 받는 자. 영지 사람들의 평온한 생활을 제1 목적으로 하고 있음. 남작을 제거해준 것에 관한 효과로 인해 마음속으로 복속된 상태며 현재 충성도가 높음.]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공손하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파브리스를 향해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네, 파브리스.”
 엔조를 봤을 때와 달리, 일부러 아는 척을 했다.
 “저를 아십니까?”
 “물론이지. 지금 하는 일이 자네 같은 자를 찾기 위한 일이니까.”
 파브리스는 조용히 나의 말을 경청했다.
 중간에 말을 자르지 않는 것도 좋고 기다릴 줄 아는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브리스 한 명만 포섭하면 다른 영주민들을 상대하기 매우 편이해진다는 점이 중요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영주와 영지민 사이에는 중간 다리가 있어야 하지. 난 그 자리에 자네를 염두에 두고 있어. 이본 남작을 감찰할 때, 자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어떤가?”
 파브리스는 너무 빠르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대답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만, 제가 그런 일을 맡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나?”
 파브리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공손히 고개를 저었다.
 “능력은 될 거로 생각합니다.”
 “그럼 어떤 이유로 고민하는 거지?”
 “사실, 전 원래 자유민입니다.”
 책 아래에는 파브리스에 대한 신상이 좀 더 자세히 적혀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속 말해보게.”
 “도시에서 귀족가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가정교사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담당하는 학생 집에서 귀중품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제가 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조용히 파브리스를 바라보자,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저는 귀족의 물건을 훔친 죄로 자유민에서 농노로 강등되었고 이후 마리우스 남작의 소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지요.”
 “그렇군.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 네?”
 “나는 자네가 중간 관리자의 역할을 잘할 거로 생각하고, 그래서 자네에게 제의한 거야. 그런데 자네는 지금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군.”
 파브리스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그게··· 영주님은 제가 도둑인 것을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설사 제가 모함을 받았다고 해도···.”
 “자네가 진짜 도둑이건 가짜 도둑이건 그건 관심 없어. 내게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야. 그깟 별 시답잖은 과거 때문에 인재를 놓칠 만큼 난 어리석지 않아.”
 “영주님···.”
 파브리스의 눈에는 감동이 어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네. 하겠는가?”
 공손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파브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영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나가서 레아를 찾아가게.”
 “알겠습니다.”
 파브리스가 나간 뒤 나는 다시 한번 더 책을 보았다.
 파브리스는 정말로 도둑이 맞았다.
 병든 아내의 약값이 워낙 비싸 파브리스의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뭐, 개인의 탐욕이었다면, 잠시 고민했겠지만.’
 책을 덮은 뒤 밖을 향해 외쳤다.
 “다음.”
 능력 있는 영지민을 찾는 일.
 마치 모래사장에 숨어있는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다.
 
 * * *
 
 “휴, 이 정도면 끝인가?”
 장장 6일 동안 영지민들을 확인한 끝에 인력을 보충할 수가 있었다.
 근위기사로는 아도흘르.
 중간 관리자로는 파브리스.
 재정관리자로는 엔조.
 병사는 기존 3명을 포함해서 총 17명으로.
 단순 병사가 아니라 분야별 잡무에 능한 녀석들 위주로 구성했다.
 마구간 관리나 병장기 관리 같은 것 말이다.
 또한, 병사들의 집을 영지 곳곳에 고루 분산시켰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영지민들이 병사의 집으로 달려가 신고하고, 신고받은 병사는 저택으로 달려오는 방식이다.
 이사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게, 애초에 집마다 짐이라고는 나무나 점토로 된 식기 말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군다나 집들 대부분이 그게 그거라서 영지민들도 병사들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브루고 님의 기록이 정말 큰 도움이 됐어.’
 병사들을 영지 곳곳에 고루 배치한다는 것은 정말 생각도 못 했던 개념이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책들에 있던 이야기에서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실리적인 정책.
 브루고 님이 괜히 황제가 된 게 아니었다.
 ‘브루고 님은 무력도 강했으려나?’
 나 역시도 아버지에게 들은 짤막한 내용 외에는 잘 알지 못했으므로 알 방법은 없었다.
 엠페러 소울 역시 브루고 님의 무력에 관해서는 딱히 알려주는 게 없다.
 ‘몰라도 상관없으려나?’
 이유가 어쨌든 파브리스 덕분에 영지의 민심도 안정되었고 자리 잡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는 생각에 기지개를 쭉 켜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내 손은 책을 잡고 있었고, 빠르게 내 눈앞으로 책을 이동시켰다.
 
 [10명 이상의 부하들에게 적절한 업무를 부여하였습니다. ‘패밀리어’ 특성을 보상으로 얻습니다.]
 [패밀리어 : 충성도가 100인 부하에 한 해 실시간으로 무엇을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부가 특성은 엠페러 소울과 같습니다.]
 
 ‘호오?’
 뭔가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먼저 아도흘르를 생각하면서 패밀리어 특성을 쓰려고 해봤다.
 
 “아이, 참···. 근무시간이잖아. 온종일 훈련 시켰는데 안 힘들어?”
 “괜찮아. 오히려 난 이걸 참는 게 더 힘들어.”
 “아흥···.”
 
 “······ 미안, 아도흘르.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야.”
 빠르게 생각을 파브리스로 바꾸었다.
 파브리스는 레아에게서 임무를 받는 순간 충성도가 100이 되었다.
 내가 ‘생각 있는 영주’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과거를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아도흘르와 더불어 충성도가 100인 둘뿐인 사람이다.
 물론 친밀도까지 100인 것은 아니지만.
 ‘파브리스가 일을 어떻게 하려나.’
 파브리스를 떠올리자 마을 광장에서 사람들 앞에 서 있는 파브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영주님께서 ‘영지민들이 영지 생활에 있어서 불편한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영지민들은 지금 나 파브리스에게 어떤 불편한 일이 있는지 기탄없이 말을 하도록. 나 파브리스가 영주님에게 책임지고 전할 것이며 영주님이 생각하시기에 충분히 이유가 있는 일은 영주님이 친히 해결해주실 것이다.”
 다소 노인이 말하는 티가 나기는 했지만, 파브리스의 목소리는 음역의 조절이 굉장히 뛰어났다.
 그렇다 보니 영지민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나도 손을 들기 시작했다.
 ‘뭐, 이 정도 보면 되겠지.’
 요 며칠간 파브리스를 관찰한 결과 꽤 솔선수범하게 일했다.
 덕분에 나는 영지민들 위에 쉽게 군림할 수 있었다.
 반면 아도흘르 같은 경우 영지민과 친근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번쩍 들어준다든지, 밭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를 낑낑대며 옮기는 걸 단숨에 옮겨준다든지 하는 것으로 상당히 영지민들의 인기를 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가 질투하는 것은 아니다.
 아도흘르가 평상시 내 옆에 딱 붙어서 호위를 하다 보니 아도흘르가 괜히 충성하는 게 아닐 거라며 영지민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아도흘르는 새로운 창이 생겼다.
 그것도 산맥에서 쓰던 조잡한 창이 아니라 진짜배기 창 말이다.
 마벨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방랑할 때 멋으로 들고 다니던 창을 아도흘르에게 물려주었다.
 ‘보존’ 마법이 걸린 창이었기 때문에 상태가 매우 좋았고, 강철로 만들어져서 아도흘르 역시 매우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 높아진 텐션은 모조리 병사들의 훈련으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지금도 아도흘르는 병사 한 명을 붙잡고 맹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나도 파브리스가 요청사항들을 모아오면 집중해서 확인해봐야겠네.’
 파브리스를 기다리며 잠시 육체 단련을 하고 있으니 어느새 파브리스가 문을 두드렸다.
 “영주님, 파브리스입니다.”
 “들어오게.”
 조용히 들어온 파브리스는 공손하게 파피루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귀족들의 과외를 하던 파브리스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신은 파피루스를 썼는데 이걸 이본 영지에 와서도 재배하고 있었다.
 덕분에 당장 급한 기록 소요는 이걸로 해소할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집이 조금 잠긴다고?”
 “네, 현재 일부 집들이 다른 집들에 비교해 약간 낮은 곳에 지어져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렇군. 세금을 줄여 달라? 이건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지?”
 “죄송합니다. 그 영지민은 제가 따로 각별하게 주의 주도록 하겠습니다.”
 “음.”
 90% 가까이 수탈당하던 것을 70%로 내려줬는데도 더 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영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수 있었다.
 그러나 파브리스가 먼저 나서겠다고 했기 때문에 일단은 넘어갔다.
 “······ 귀신을 잡아달라는 게 왜 이리 많은 건가?”
 생각해보니 이본 영지에 처음 왔을 때도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한 명이 귀신이 나타났다면서 뛰어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꽤 오래전부터 귀신을 봤다는 노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저 역시 귀신을 본 적이 있었고요.”
 “노인들만 봤다고?”
 “네. 그래서 예전에 제가 전 영주한테 이야기했지만, 노인들이 헛것을 보는 것이라면서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흠···. 파브리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 의중을 모르는 파브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조사를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그러해. 이렇게 여러 명이 귀신을 봤다고 주장하는 거라면 단순 헛것을 본 게 아닐 가능성이 크지. 이 일에 관해서는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단순히 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묘한 예감 그리고 책이 이번 일에 나설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특이사항 : 노인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 * *
 
 저택으로 향하자, 한창 병사를 굴리고 있는 아도흘르의 모습이 보였다.
 “아도흘르.”
 “네.”
 아도흘르는 곧바로 공손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훈련받는 병사 역시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리기는 했으나 ‘헥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을 몰아쉬기 바빴다.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손을 가볍게 휘저어주자 병사는 몸을 반쯤 돌려 호흡을 골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부터 할 일이 있으니 훈련은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잠시 미루도록.”
 “알겠습니다.”
 훈련을 중단한다는 말에 병사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돌아와서 훈련은 너부터 재개한다.”
 그러나 아도흘르의 말에 다시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이 참 볼만하다.
 “아, 알겠습니다.”
 “씁!”
 아도흘르가 인상을 팍 구기자 병사는 바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우렁차게 외쳤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아도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된 건가?”
 “그렇습니다.”
 “가지.”
 내친김에 파브리스도 불러 함께 귀신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향했다.
 귀신을 본 영지민들의 말을 모아본 결과 귀신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나타나는 듯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귀신이 나타나는 날이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보도록 하지.”
 큼직한 바위가 여러 개 뭉쳐있어서 몸을 숨기기 쉬운 장소가 있었다.
 나와 아도흘르 그리고 파브리스는 바위에 기대고 앉아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들 지루할 법도 했지만 둘 다 전혀 지루하지 않은 듯, 문제의 장소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아도흘르는 사냥꾼 출신이었지.’
 덫에 사냥감이 걸리기만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그 습관이 어디 갈 리 없었다.
 파브리스 역시 가정교사 일을 했던 만큼 이러한 일에 집중력이 뛰어날 것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러나 내가 둘과 비교하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책 덕분일 거다.
 내친김에 나는 책을 펼쳐 다시 한번 영지의 정보를 체크했다.
 
 [영지 명 : 이본 남작령]
 [영지 등급 : F]
 [민심 : C]
 [인구 : 423]
 [병력 : 18명]
 [인구구조 : 항아리형]
 [특이사항 : 노인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영지 등급은 변화가 없었지만, 민심이 C까지 올랐다.
 낮다고 하면 낮다고 할 수 있었지만, 기존에 F였던 것을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인구는 남작의 병사와 남작을 처단하면서 줄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눈 여겨봐야 할 것은 개방 조건을 달성한 특이사항이었다.
 개인의 특이사항은 고정적이지 않고 종종 변화했다.
 가령 레아 씨 같은 경우는 [현 상황에 대체로 만족 중.]이라는 식으로 특이사항이 변화했다.
 그렇다는 건 영지의 특이사항 역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이사항이 대부분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번 일을 해결할 경우 분명 영지에 뭔가 도움 되는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 좋은 일이 뭔지 궁금하단 말이지.’
 이러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끈덕지게 기다린 끝에 파브리스는 귀신을 볼 수 있었다.
 
 * * *
 
 “으헉!”
 어둑어둑해져서 달빛에 의지해야 간신히 시야가 확보될 시각.
 파브리스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아도흘르의 물음에 파브리스가 몸을 덜덜 떨며 저 앞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 안 보이십니까? 귀, 귀신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귀신? 안 보이는데?”
 아도흘르는 파브리스가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는지, 검지를 들어 자신의 귀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아니, 저게 안 보이신단 말입니까?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피를 줄줄 흘리는 저 귀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딨는데, 안 보여. 영주님, 영주님은 저기에 있다고 하는 귀신이 보이십니까?”
 아도흘르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보이는데.”
 “허, 참.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같이 가까이 가보자고. 영주님, 다녀와도 됩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아도흘르는 영 내키지 않아 하는 파브리스를 끌고 저 앞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파브리스가 방향을 잘못 가리킨 것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돌리던 도중,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저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각에 혼자 뭐 하는 거지?’
 어차피 귀신이든 괴물이든 아도흘르가 직접 움직였으니 해결은 시간문제다.
 그렇다 보니 나는 오히려 혼자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청년에게 더 호기심이 갔다.
 거리가 꽤 되다 보니 책에 딱히 쓰이는 것은 없어서 누구인지 빨리 알 수는 없었다.
 바스락. 바스락.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 밟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만큼 내 호기심도 커졌다.
 ‘왜 혼자 이 시간에 나와서 있는 거지? 혹시 여자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이 부근은 최근에 귀신이 나오기로 영지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터라 굳이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약속을 잡은 건가? 혹시 귀신 사태의 범인이 연인인 건가?’
 그러나 이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파브리스가 묘사한 귀신의 모습과 저기에 있는 청년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그러나 잠시 뒤, 내 의문은 풀렸다.
 
 [이름 : 엘리엇]
 [리더십 : E]
 [무력 : F(F+)]
 [지능 : A+]
 [손재주 : A]
 [화술 : D]
 [야망 : B]
 [친밀도 : 0]
 [충성도 : 아직 부하가 아닙니다.]
 [특이사항 : 세속적인 가치에는 관심이 없음. 마법이란 학문 그 자체를 탐구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으며, 자신이 흥미를 보인 대상에게 꽤 집착하는 모습을 보임.]
 
 ‘저놈이구나!’
 ‘이런 산간벽지에 무슨 마법사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특이사항을 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사람의 특성은 워낙 다양한 데다가 마법사라는 부류의 특이성을 생각해보면 저런 녀석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귀신 소동을 일으키는 거지?’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말을 걸지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엠페러 소울이 엘리엇이라 가르쳐준 녀석은 약간 경직된 모습을 보이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흠.’
 잠깐 곯려볼까 하는 생각에 나는 일부러 바지춤을 내렸다.
 그런데도 엘리엇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호오?’
 솨아아아아아!
 내친김에 방출까지 해보았지만, 엘리엇은 인상만 찌푸릴 뿐 요지부동이었다.
 분명히 엘리엇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고, 그윽한 냄새까지 나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야, 안 더럽냐?”
 “이런, X! 너 다 보이면서 이 짓 한 거냐?”
 엘리엇은 단박에 쌍욕을 하며 나를 밀쳤다.
 그러나 워낙 힘이 약하다 보니 내가 밀리는 게 아니라 엘리엇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런, 괜찮아?”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주려고 하자, 엘리엇은 내 손을 뿌리치며 스스로 일어났다.
 “염병할, 너 제정신이냐? 뻔히 알면서 사람한테 오줌을 싸?”
 “아니, 전혀 안 움직이길래 언제까지 안 움직이나 보려고 했지. 설마 끝까지 안 움직일 줄 누가 알았겠어?”
 “아, 썩을!”
 “마법으로 세탁하면 되잖아?”
 “세탁은 할 수 있어도 기분이라는 게 다르다고! 사람 오줌이 묻었던 옷이라는 생각이 계속 날 텐데 멀쩡하게 입을 수 있겠어?”
 “그거야 네 사정이고.”
 “그렇지 내 사정···.”
 무언가 수긍하려던 엘리엇은 또다시 버럭 소리쳤다.
 “그게 네가 할 말이냐?!”
 “못 할 이유도 없으니까. 네가 내 영지민들에게 끼친 피해는 생각 안 해?”
 “피해라니?”
 “네가 나이 먹은 영지민들 상대로 일부러 귀신이 보이게끔 했잖아. 아니야? 아도흘르는 귀신을 못 보고 파브리스만 본 걸 보면 각이 나오네.”
 “으윽···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뭐가 어쩔 수 없었는데?”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갈수록 이해 안 가는 대답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나이 든 사람들을 그렇게 놀라게 하면 여기저기에 제물이라는 핑계로 먹을 게 생겨. 난 그걸로 연명하면서 산다고. 대체로 곡식 가루 정도밖에 없어서 짜증 나긴 하지만 말이야. 이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가 마법으로 여기 영지민들 싹 다 죽여 버릴까?”
 엘리엇의 양손에 홍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아도흘르가 번개 같은 속도로 옆구리에 파브리스를 끼고 나타났다.
 “미하벨! 파브리스가 그러는데 갑자기 귀신이 사라졌대!”
 “헉!”
 엘리엇은 헛바람을 들이켬과 동시에 손에서 불을 없애버렸다.
 “왜? 다시 만들어보지?”
 “비겁한 놈···.”
 아마 나는 마법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도흘르의 경우는 마법을 쓰기도 전에 제압당할 것 같았던 모양이다.
 “미하벨, 이 녀석은 뭐야?”
 아도흘르의 말과 동시에 엘리엇의 모습이 사라지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엇이 사라지기 직전 아도흘르가 엘리엇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으아악!”
 엘리엇은 낮은 비명을 질렀지만, 딱히 아도흘르가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다.
 단지 마법을 써서 어디론가 도망치려는 것을 잡았을 뿐이니까.
 “야, 안 때려. 그리고 어딜 도망가. 도망가서 또 귀신 소동 일으키려고?”
 “크으윽···.”
 슬슬 자존심을 건드려줘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엠페러 소울이 이 녀석을 알려줬다는 건 이 녀석을 영입하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라는 얘기겠지.
 조금 전에 싹 다 죽인다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죽일 생각이라기보다는 협박하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마법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고 능력도 나쁘지 않다.
 반면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그렇다는 건···.
 “에휴, 됐다. 가라. 어차피 나한테도 들키는 걸 보니 마법 수준은 뻔할 뻔 자겠네. 귀신 소동 일으키려면 마음껏 일으켜. 신경 안 쓸 테니까.”
 “뭐?”
 엘리엇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마음껏 소동 일으키라고.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잖아.”
 “이, 이, 빌어먹을 자식이···. 네가 마법에 관해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내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알아? 6급 마법사야, 6급 마법사. 마음만 먹으면 백작급 귀족 영지에서 대우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다고!”
 “그런데 왜 거기서 생활 안 하는데?”
 “크윽···.”
 뭔가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린 간다.”
 미련이 없는 것처럼 등을 돌려 걷자 아도흘르 역시 엘리엇을 놓아주고는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좀 가벼운 모습을 보인 것 같군.”
 파브리스에게 이야기하자 파브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정교사 일을 할 때 귀족들끼리는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저와 영주님은 신분 차이가 나니 지금처럼 대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파브리스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넌 왜 따라오냐?”
 엘리엇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대답하진 않았다.
 이후로 잠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고 또 잠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엘리엇은 계속해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성공인가?’
 책을 들어보자 엘리엇에 관한 내용이 소폭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 : 엘리엇]
 [친밀도 : 30]
 [충성도 : 0]
 [특이사항 : 일반적인 충성도와는 상당히 다른 충성도. 취급 방법이 약간 독특하다.]
 
 무슨 의민지 꼬집어서는 말은 못 하겠지만, 어렴풋이 알 것만은 같았다.
 이렇게 저택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기다리던 빅터가 황급히 달려와 나에게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 왔다.
 “영주님, 이웃 영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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