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술 마시다 각성한 SSS급 던전 마스터 [E]

술 마시다 각성한 SSS급 던전 마스터 1권 (1)

2019.05.08 조회 507 추천 4


 # 프롤로그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런 게 없다.
 1년 전쯤, 나는 비전도 없는 비정규직 헌터 생활을 청산하고 대출을 받아 술장사를 시작했다.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게였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헌터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뜨기 시작한 연남동이었으니까.
 30년 전, 그러니까 던전과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에도 연남동은 핫한 동네였다고 한다.
 그때는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였다면 지금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는 헌터들의 쉼터였다.
 물론 연예인보다 잘 나가는 상급 헌터들은 오지 않았다. 그들의 놀이터는 강남이니까.
 나처럼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최하급 헌터들만이 연남동을 찾았다.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죽거나 밖에서 굶어 죽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의 피폐해진 심신을 잠시나마 달래 줄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들고 싶었다.
 초인으로 각성할 때 내게 주어진 재능은 연금술 하나였다.
 비전투계열이라 던전 공략 땐 큰 도움이 안 되는 재능이었다.
 재능의 숙련도는 초보자, 숙련가, 전문가, 고수, 대가, 전설, 신화 순으로 구분된다.
 연금술 숙련도가 신화라면 말 그대로 쇠뭉치로 금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난 초보자로 시작했고 10년간의 헌터 생활로 겨우 숙련가가 되었을 뿐이다.
 연금술 숙련가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생명력 물약이나 버프 물약 제작 정도다.
 그 이상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급 던전에서만 나오는 고가의 원료들이 필요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내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숙련도 향상에 집착하는 대신 재능을 엉뚱한 곳에 써먹기 시작했다.
 바로 싸구려 칵테일 제작이었다.
 비싼 술을 마실 돈이 없어서 싼 술에다가 이것저것 넣어서 마시던 게 화근(?)이 되었다.
 하급 던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용재료들을 술에 넣어 봤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게다가 약간의 치유와 버프 효과도 있었다.
 물론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도 죽기 십상인 던전에 술을 들고 들어갈 인간은 없었다.
 던전 관련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술꾼들에게는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술장사를 시작했다.
 건물주 할아버지는 평판만큼이나 인상도 좋았다.
 앞으로 재건축할 생각도 없다고 했고 임대료도 많이 올리지 않겠다고 했다.
 오히려 놀고 있는 건물을 써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초반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긴 해도 큰길만큼은 아니었다.
 처음 해보는 장사라 시행착오도 많았다.
 한 번 온 손님을 또 오게 만들어야 했으나 말처럼 쉽진 않았다.
 인테리어비용도 예상보다 많이 들었다.
 이자를 갚다 보니 생활비가 빠듯해져 또 대출을 해야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6개월 정도 지나자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손님이 늘었다.
 꾸준히 방문해 주는 단골도 생겼다.
 그만큼 매출도 늘어나 이자는 물론이거니와 원금도 조금씩 갚아 나갈 수 있었다.
 늘어나는 손님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 알바도 한 명 뽑았다.
 가게 주변에 다른 가게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님이 더 늘어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건물주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자식들은 물려받은 건물을 팔아 버렸다.
 새 건물주는 재건축을 하겠다며 임대차 계약 갱신을 거부했다.
 “건물이 너무 오래됐어. 이참에 싹 다 갈아엎어야지.”
 너부데데한 얼굴의 중년 사내가 말했다. 시커먼 얼굴에 기름기가 잘잘 흘렀다.
 가는 눈이 옆으로 쭉 찢어져 있었다. 인상이 사나웠다.
 “아직 9년밖에 안 됐어요. 지내는 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건물주는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했다.
 “아니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해! 당신이 건물 주인이야?”
 “사장님이 판단하실 문제도 아니죠. 안전진단 한 번 받아 보고 얘기하시죠.”
 “아니 이 양반이 빼라고 하면 뺄 것이지 뭔 말이 많아!”
 “여기 들어간 돈이 얼만데요. 1년 만에 나가라고 하면 누가 장사를 합니까.”
 돈만 들어간 게 아니었다. 시간과 노력도 함께 들어갔다.
 장사한다고 빌린 돈도 아직 덜 갚았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내 알 바 아니지.”
 “그냥 법대로 하시죠.”
 법대로 하면 4년은 더 있을 수 있다.
 재건축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경우는 예외다.
 하지만 불과 9년 전에 지은 건물이었다. 문제될 건 없었다.
 “젊은 친구가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래. 어디 법대로 한번 해보자고.”
 건물주는 법대로 하지 않았다. 우선, 임대료를 받을 계좌를 알려 주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월세를 왜 안 내느냐는 문자는 꼬박꼬박 보냈다.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도 동문서답 식으로 답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영업 중인 가게에 쳐들어와 왜 임대료를 안 내느냐고 난동을 피웠다.
 가게에 손님들이 있는데 전기와 수도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그 양반 이 바닥에서 아주 지독하기로 소문난 악질이에요.”
 하루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돈도 많고 빽도 많아요.”
 적당히 타협하고 나가라는 충고였다.
 인터넷에 글을 올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주목받기 힘들었다.
 건물주의 갑질로 인한 분쟁을 임차인의 ‘을질’로 매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웃한 가게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건물들이 하나둘씩 헐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하루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가게를 찾아왔다.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손님인 줄 알고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둘은 가게 안을 구석구석 둘러보기만 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응. 난 마음에 들어.”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메뉴판을 든 채 기다리고 있던 내게 남자가 대뜸 물었다.
 “언제 나갈 거예요?”
 “네?”
 “아저씨가 나가야 우리가 장사를 하죠.”
 “뭐?”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대뜸 반말을 했다.
 “밖에 공사하는 거 보이지? 이 골목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우리 아빠 거야. 아저씨 빼고 다 나갔다고. 혼자 버텨 봤자 오래 못 가.”
 나는 메뉴판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건물주 아들은 계속 나불거렸다.
 “적당히 좀 하고 보증금 챙겨서 떠나라고. 피차 그게 낫잖아. 안 그래?”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영업방해하지 말고.”
 건물주 아들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네. 갑니다요. 가게에 파리만 날리는구먼. 뭔 장사를 한다고 지랄이야.”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계속 그렇게 버텨 봐요. 어디 갈 데까지 가봅시다. 우리 아빠 돈 겁나 많아.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건물주 아들은 자기 애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느긋하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거지새끼도 아니고.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분명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옆에 있던 여자가 깔깔거렸다.
 어떻게 사람의 낯짝을 하고서 저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분 탓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법정에서 싸우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싸울 여력이 되는지는 의문이었다.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빚 때문에 제대로 된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었다.
 이겨도 상처뿐인 승리일 것이다.
 자리를 보전한다 해도 가게가 있는 골목길은 더 이상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온 동네가 공사판이 되었으니까. 단골들을 제외하고는 손님도 완전히 끊겼다.
 제대로 된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난 이미 망신창이가 되어있었다.
 ‘Closed’
 영업일이었지만 가게 문을 닫아 버렸다. 도저히 장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사장님!”
 알림 간판을 걸고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의 여성이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을 뽑으며 다가왔다.
 연갈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노을빛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알바 윤지혜였다.
 “어? 지혜 씨,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출근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오늘은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연락을 할 참이었다.
 “센터 일이 빨리 끝나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급 더 달라고 안 할 테니까요.”
 윤지혜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윤지혜는 인근의 대학에 다니는 대학원생이었다. 전공은 마도공학과.
 대학원생이니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잘나가는 학과니까 장학금이나 연구비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줄 알았다.
 게다가 낮에는 학교 내에 있는 마도공학연구센터에서 근무도 했다.
 그런데도 저녁마다 알바를 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으나 물어보진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네?”
 “사장님 표정이 안 좋아서요.”
 “들어가서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제가 일하는 게 마음에 안 드세요?”
 맞은편에 앉은 윤지혜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윤지혜는 일을 잘했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했다.
 손님이 많아서 정신이 없을 때도 실수 한 번 한 적 없었다.
 서빙 솜씨를 보면 이런 알바를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비가 오면 울적해져서 술을 마셨고 손님이 없으면 허전해져서 술을 마셨다.
 애초에 그러려고 차린 술집이었으니까.
 윤지혜는 나사 하나 빠진 사장을 대신하여 술집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가게의 비선 실세인 셈이었다.
 가끔 외모를 깎아 먹는 뿔테안경을 쓰고 다녀서 그렇지 안경만 벗으면 공대 여신이 된다.
 약간 선머슴 같은 데가 있어서 그렇지 성격도 털털하고 싹싹했다.
 붙임성 좋은 성격에 일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니 손님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아마 단골들 중 절반 정도는 윤지혜를 보기 위해 우리 가게를 찾을 것이다.
 손님들은 농담 삼아 그녀에게 ‘이모’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제가 우리 ‘이모’를 자르면 손님들이 절 죽이려고 할 거예요.”
 윤지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건물주 때문인가요?”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혜가 있을 때도 건물주가 여러 차례 찾아와서 깽판을 치곤했었다.
 일하는 데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 말을 아꼈지만 그녀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재계약하기 힘들 것 같아요.”
 “법대로 하면 사장님이 이기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분명 재판을 질질 끌면서 진이 빠지게 만들 겁니다. 가게를 지켜 내도 아마 빈털터리가 될 거예요. 동네가 이 모양이니 손님들이 올 가능성도 거의 없죠.”
 윤지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네요. 그동안 지혜 씨도 다른 일자리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자리 생기면 언제든 그만둬도 돼요.”
 윤지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일자리가 없어지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새 일자리 찾는 게 귀찮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평생직장도 아니고 고작 몇 달 일한 알바인데 반응이 좀 과한 거 아닌가.
 “나쁜 새끼······.”
 코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윤지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삭이지 못한 분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오히려 내 담담함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미안합니다. 나도 지혜 씨랑 같이 계속 일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아, 사장님이 왜 미안해해요. 이게 다 그 건물주 때문이잖아요. 개만도 못한 놈······.”
 윤지혜는 혼자 뭐라고 구시렁거리면서 계속 씩씩거렸다.
 생판 남인 데다가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라 데면데면할 수도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워낙 성격이 좋아서 친남매처럼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내 일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함께 속상해해 줬다.
 떠나보내기 아쉬운 사람.
 “사장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윤지혜가 훌쩍거리면서 물었다.
 “다른 곳으로 옮길 돈은 없으니 헌터 판으로 돌아가야죠.”
 “돌아가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건물주 위에 던전주
 
 
 문을 열자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나타났다.
 딱 벌어진 어깨에 2미터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까무잡잡하고 얽은 얼굴은 조각상처럼 각이 져있었다.
 빡빡 깍은 머리가 하얗다면 노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노안이었다.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우락부락한 근육이 드러났다.
 “안에 불이 켜져 있어서······.”
 사내가 낮게 깔리는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외모와의 달리 소심한 태도였다.
 “아, 형님이시구나.”
 사내의 이름은 박정도.
 내 가게의 첫 손님이자 최고의 단골이었다.
 다른 손님이 없을 때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민간 헌터 경력은 나보다 짧지만 그 전에 군부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었다.
 나이도 나보다 네 살이나 많았다.
 외모만 보면 인간흉기지만 답답할 정도로 예의바르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편하게 대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꼭 말을 높였다.
 서비스로 대접한 술이나 안주에 대해서도 기어이 값을 치르곤 했다.
 술도 엄청 셌고 진탕 마셨을 때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끔 술을 먹고 진상을 부리는 손님이 있으면 처리를 도와주기도 했다.
 “사실 오늘······.”
 윤지혜를 보내고 가게 문을 닫으려고 했었다. 장사할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박정도의 착잡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일 안 하고 놀려고 했어요. 술친구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박정도가 주뼛거리면서 물었다.
 “혹시 사장님 쉬시는데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닌가요? 그냥 다음에······.”
 나는 말을 자르고는 고갯짓을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섭섭하게. 한 잔 하고 싶어서 문 닫는 거라니까요. 잔말 말고 빨리 들어와요. 오늘은 돈 안 받습니다.”
 박정도는 깨끗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했지만 나는 맡을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피 냄새를.
 “와! 정도 오빠다! 안녕하세요.”
 윤지혜가 박정도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아, 지혜 씨도 있었군요. 잘 지냈어요?”
 난 윤지혜에게 물었다.
 “지혜 씨, 저는 오늘 형님이랑 술 한 잔 하려고요. 일당 계산 해줄 테니까 그냥 가도 돼요.”
 윤지혜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째려봤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 같이 한잔하겠다면 대환영입니다.”
 “콜!”
 윤지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술과 기본안주를 챙기러 부엌 쪽으로 갔다.
 같이 안주나 만들어 보려고 부엌 쪽으로 가려는데 박정도가 나를 붙잡았다.
 “사장님, 이거 오늘 구한 건데요.”
 박정도가 물병 하나를 건넸다.
 안에 든 주황색 액체가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일렁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샐러맨더의 눈물.
 마시면 불구덩이 속에서도 화상은커녕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다닐 수 있다.
 성냥불 수준의 불 마법을 화염방사기 수준으로 바꿔주는 건 덤이다.
 “이걸로 한 잔 만들 수 있을까요? 남는 건 그냥 사장님이 가지시고요.”
 가격은 최소 수십만 원. 시중에 물건이 별로 없을 땐 백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형님, 이게 얼마짜린데요. 저 이런 거 부담스러워서 못 받습니다.”
 박정도가 씁쓸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부탁 좀 합시다.”
 오늘 일진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샐러맨더를 잡다가 사람이 죽은 것 같았다.
 일용직 헌터들에겐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일거리가 생기면 급조되는 파티.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실력이 되어도 합이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고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한 상황.
 그런 사고들을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맨정신으로 일할 수가 없었다.
 박정도도 그걸 모르지 않았고 그런 걸로 마음이 꺾일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생면부지의 동료일지라도 애도의 술잔을 기울여 주는 게 그 나름의 방식일 뿐이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기똥찬 술을 만들어 올 테니.”
 
 * * *
 
 한창 신나게 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주량이 꽤 센 편인데 짧은 시간에 너무 달린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가게 안에 있었다. 술판을 벌였던 식탁이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윤지혜도 박정도도 보이지 않았다.
 꿈인가?
 꿈속의 세상은 잿빛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무채색을 띄고 있었다.
 이거 꼭 던전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끼이익.
 가게의 문이 열렸다. 소복을 입은 소녀가 문 앞에 서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로 인해 새하얀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누구?”
 소녀가 말없이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발을 보니 맨발이었다. 게다가 지면에서 약간 떠 있는 상태.
 심신이 피폐해지니 별게 다 보이는구나.
 소녀가 내 앞에 섰다. 그녀는 펑퍼짐한 소매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을 빼니 기다란 검이 한 자루 나왔다. 검은 칼집에 꽂혀 있었다.
 소녀가 검을 내게 내밀었다. 어이가 없어서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소녀는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주는 거야?”
 소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처연했다.
 나는 검을 받았다. 무게가 제법 나갔다. 길이는 자루까지 합쳐서 1미터 정도였다.
 소녀는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검을 칼집에서 뽑아내려고 했다.
 검은 날의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
 날에 별자리가 수놓아져 있다. 그 문양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잠깐, 이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딱히 꿈속에서 무슨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기분이 찝찝했다.
 너무 생생해서 꿈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술이 덜 깼는지 아직까진 비몽사몽이었다.
 눈을 반쯤만 뜬 채 박정도와 윤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 씨, 그거 그렇게 많이 넣으면 안 될 텐데······.”
 박정도는 바(bar) 앞에 앉아 있었다. 윤지혜는 바 뒤에 서서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완전히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사장님한테 배운 거니까.”
 칵테일 만들 때 힐끔거린 적은 많았지만 가르쳐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면허 조주사 윤지혜가 자신이 만든 정체불명의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윤지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쿨럭!”
 그녀는 사레가 들린 사람처럼 기침을 토해 냈다.
 그런데 그 기침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가 사그라졌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윤지혜는 놀라기는커녕 호들갑을 떨었다.
 “꺄아아! 됐다, 됐어. 오빠도 한 잔 마셔 봐요. 이거 완전 끝내줘요. 히히히!”
 윤지혜가 ‘용의 숨결’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칵테일을 박정도에게 권했다.
 아마도 샐러맨더의 눈물을 왕창 집어넣은 것 같았다.
 저 비싼 걸 하루 만에 다 써버리는구나.
 “아니, 지혜 씨 이걸 어떻게······.”
 박정도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게에 왔을 때에 비하면 확실히 얼굴이 풀려 있었다.
 “빨리요. 빨리! 원샷해 봐요. 원샷! 원샷!”
 윤지혜는 신이 나서 구령까지 넣어 댔다. 문득 내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잔잔한 행복감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술장사의 1차 목표는 당연히 돈벌이였다.
 그러나 사람 냄새나는 곳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날들이 쭉 이어지면 좋겠지만 이제 길어야 한 달이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탓에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살아야 했다. 형제도 없었다.
 고아 소년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착한 친척이나 부자는 소설에나 있는 법.
 눈칫밥을 먹어가며 온갖 차별과 멸시, 그리고 학대를 견뎌야 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버렸다.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헌터생활을 시작했다.
 헌터로서의 실력이나 재능은 평균 이하.
 던전에서 매번 살아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며 발버둥 치다 보니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서른 살이 되자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좀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시작한 게 술장사였다. 한동안은 정말 살맛이 났었는데······.
 “어? 사장님 일어났다! 사장님도 이리 와서 한잔해요. 해장술 마셔야죠.”
 취기 탓에 완전히 개구쟁이가 되어버린 윤지혜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칵테일 만들었어요. 사장님 것도 한 잔 만들어 드릴게요.”
 박정도가 자기가 들고 있는 술잔을 찰랑거리면서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마치 자기가 마시고 있는 술이 꽤 괜찮다는 듯이.
 샐러맨더의 눈물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술 색깔이 짬뽕 국물과 비슷했다.
 박정도는 내가 지금 막 깨어나서 좀 전의 상황의 못 본 줄 아는 모양이다.
 저 무쇠 같은 양반도 취하면 저런 장난을 치는구나.
 두 사람의 장단에 맞춰 주기 위해서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 순간 아래팔 안쪽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강한 통증이었다.
 취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사장님!”
 놀란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아래팔 안쪽에 새겨진 문신이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헌터의 인장.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7개의 점과 이를 잇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도공학의 결정체인 이 전자문신을 건드리면 망막에 상태창이 나타난다.
 생각이나 말로써 상태창 조작이 어려울 땐 전자문신이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는 키패드 역할도 한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10세 때 헌터 적성 검사를 받게 된다.
 인공적인 방법으로 일반인을 초인으로 각성시켜 헌터로서의 능력을 확인하는 검사.
 이 검사를 통해 헌터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판명이 나면 헌터의 인장을 새겨 준다.
 나라에서 헌터들에게 주는 일종의 면허증인 셈이다.
 고장이라도 난 건가?
 문신을 새긴 지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지금처럼 아프거나 빛난 적은 없었다.
 문득 좀 전에 꿈속에서 본 검에 새겨져 있던 별자리가 떠올랐다.
 그것도 인장과 마찬가지로 북두칠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꿈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박정도가 내 인장을 보면서 말했다.
 “상태창을 한 번 켜보세요.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키는 대로 했다. 망막에 메시지가 떴다.
 
 [2차 각성이 시작됩니다.]
 
 “형님, 혹시 각성을 두 번 하는 경우도 있나요?”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초인으로의 각성은 인생에서 한 번뿐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그런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박정도는 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난 헌터 생활 10년 동안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어쩌면 업계의 밑바닥에만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같은 판이어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정보의 질이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상태창엔 계속해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재능봉인이 해제됩니다.]
 
 ‘뭐?’
 
 [봉인되어 있던 재능들이 활성화됩니다. 고유재능 ‘육도의 귀왕(대가)’, ‘일곱별의 순례자(대가)’를 획득하였습니다.]
 
 “으악!”
 이번엔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나는 손을 들어 다가오려는 두 사람을 제지했다.
 “괘, 괜찮아요.”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2차 각성으로 신규 재능이 추가되었습니다. 특수 재능 ‘유목민 학살자의 검술(고수)’, ‘왕조 개창자의 궁술(고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이내 의식을 잃으면서 쓰러졌다.
 
 * * *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의 응급실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박정도와 윤지혜가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박정도는 무슨 돌하르방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눈만 감고 있었다.
 윤지혜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침까지 흘리면서 자고 있었다.
 “정도 형님, 지혜 씨?”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사장님! 몸은 좀 어때요?”
 “아픈 데는 없습니까?”
 두통도 경련도 없었다. 아직 좀 어리둥절한 것 빼고는 모두 정상이었다.
 “괜찮은 것 같군요.”
 윤지혜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다. 의사 선생님도 그냥 과음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어요.”
 ‘과음 때문이라고? 완전 돌팔이잖아.’
 “상태창은 어떤가요? 제대로 작동하나요?”
 박정도가 물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켜보았다.
 
 [2차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네. 이것도 정상이군요.”
 “혹시 2차 각성을 한 겁니까?”
 박정도가 물었다. 기절하기 전에 내가 2차 각성이 있냐고 물어봐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했으면 더 강해지는 거 맞죠? 축하해요, 사장님! 헌터 다시 하려고 하셨는데 정말 잘됐네요.”
 윤지혜가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박정도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축하드립니다.”
 
 [2차 각성으로 활성화된 고유재능 ‘육도의 귀왕’과 ‘일곱별의 순례자’를 타인에게 알릴 경우 재능사용이 제한됩니다.]
 
 ‘뭐?’
 이런 제약이 따르는 재능은 처음 봤다.
 다행히도 박정도는 더 캐묻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능력치와 재능에 관해서 묻지 않는 게 업계의 불문율이니까.
 “지금 몇 시쯤 됐죠?”
 내가 물었다.
 “아침 7시네요.”
 윤지혜가 답했다.
 “두 사람 여기서 밤샌 거예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해장이나 하러 갑시다. 제가 쏠게요.”
 
 * * *
 
 우리는 감자탕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자취를 하는 반지하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곰팡내가 풍겼다. 해가 떴는데도 채광이 나빠서 방안이 깜깜했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2차 각성으로 획득한 재능은 총 네 개.
 그중 두 개는 고유재능이었고, 두 개는 특수재능이었다.
 1차 각성 때 획득했던 연금술은 일반재능이었다.
 일반재능은 누구나 쉽게 획득할 수 있고 꾸준한 노력으로 숙련도를 향상할 수 있다.
 특수재능은 특정인을 통해서만 숙련도를 올릴 수 있다.
 그 대신 일반재능보다 효과가 월등히 뛰어나다.
 새 특수재능 ‘유목민 학살자의 검술’은 고려 시대 무신인 척준경의 검술을 뜻한다.
 ‘왕조 개창자의 궁술’은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의 궁술을 의미한다.
 척준경은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무사로 꼽히는 인물이었고 이성계는 신궁으로 불렸다.
 그들의 재능은 일반재능인 검술, 궁술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문제는 저걸 누구한테 배우느냐는 건데······.
 어떤 기술에 재능이 있다는 건 그 기술을 사용했을 때 그만큼 효과가 뛰어남을 의미한다.
 숙련도는 둘 다 고수지만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척준경의 검술과 이성계의 궁술을 배우려면 해당 기술의 전승자를 찾아야 한다.
 유명한 헌터들 중에 특수재능의 전승자들이 있기는 했다.
 내가 발치에도 못 갈 정도로 높으신 분들이라는 게 문제지.
 당장에는 뾰족한 수가 없으니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유재능은 또 뭐야? 나만 쓸 수 있다는 건가?’
 헌터협회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에서 고유재능에 관해 검색해 보았다.
 고유재능이라는 말 자체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재능 이름으로 검색해도 쓸데없는 정보밖에 없었다.
 육도가 불교에 나오는 여섯 개의 세계고 일곱별이 북두칠성을 의미한다는 것 정도.
 ‘뭔지도 모르는데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은 왜 붙은 거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 때쯤, 마치 내 궁금증에 답이라도 하듯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육도의 귀왕’을 사용하면 동아시아 지역의 던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던전을 건설하고 몬스터를 고용할 수 있습니다.]
 
 뭐?
 헛것을 본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상태창에는 여전히 같은 메시지가 떠있었다.
 ‘던전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던전 마스터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던전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없었다.
 
 * * *
 
 서기 2021년, 세계 각지에서 던전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던전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몬스터들 앞에 각국의 군대는 중과부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대한민국과 북한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멸망했다.
 때마침 생겨나기 시작한 초인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공공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세계정부가 수립되었다.
 전쟁을 통해 인류는 던전을 다스리고 몬스터를 부리는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과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칭하여 ‘위상(位相)’이라 불렀다.
 던전과 몬스터의 지배자답게 위상들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 명의 위상을 처치하기 위해선 최소 수십 명의 초인헌터들이 동원되어야 했다.
 위상들에겐 자아와 지성도 있었으나 그들은 결코 인류와 협상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위상들은 자신들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류를 혐오했다.
 신화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현존하는 인류를 모두 없앰으로써 세상을 정화하려고 했다.
 몬스터와의 전쟁은 사실상 몬스터의 배후에 있는 위상과의 전쟁이었다.
 2032년, 일군의 초인헌터들이 초거대 던전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 공략에 성공했다.
 헌터들의 수장인 한국인 권대의는 양대 위상인 ‘제우스’와 ‘오딘’을 쓰러뜨렸다.
 그 후 권대의는 ‘신살왕(神殺王)’이라 불렸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국제헌터연맹 초대 회장이 되었다.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 공략 후 전쟁은 총력전이 아니라 국지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던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정복대상이 아니라 관리대상으로 여겨졌다.
 세계정부는 승전을 선언하였고 던전 관리는 민간 헌터들에게 이양되었다.
 전쟁 후에도 세계정부 산하의 연구 기관인 ‘던전 컨트롤’은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던전을 완전히 없애거나 통제하는 방법을 연구해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던전을 통제할 수 있다고?’
 타인에게 발설 금지라는 조건이 없더라도 알려지면 왠지 잡혀갈 것 같았다.
 물론 던전을 조작하지 말라는 법률은 없었다. 지금까지 조작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남들은 목숨 걸고 들어가는 던전을 조작한다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쓰지 말아야 하나.’
 하지만 등급이 대가나 되는 재능을 썩히자니 너무 아까웠다.
 ‘시험 삼아 한 번 사용해 보는 건 괜찮겠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만두면 된다. 그 정도 현실 감각과 자제력은 있다.
 상태창을 켜서 ‘육도의 귀왕’을 활성화했다.
 <이면세계지도>, <이면세계탐색>, <이면세계진입>이라는 메뉴들이 나타났다.
 이면세계(裡面世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세계를 뜻한다.
 이면세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현실세계를 ‘표면세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면세계는 ‘이세계’와 같은 별개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세계와 겹쳐져 있다.
 그래서 지형지물도 거의 비슷하다.
 던전은 바로 이 이면세계에 존재한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이면세계지도>를 클릭했다. 눈앞에 낯익은 지도가 펼쳐졌다.
 내가 살고 있는 연남동.
 동이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행정구역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내 가게와 자취방이 있는 구역을 클릭해 봤다. 이름이 떴다.
 
 [연남동 던전 A.]
 
 뭐?
 내가 알기론 연남동에는 던전이 없었다. 가게 위치를 결정할 때 분명히 확인했다.
 어떤 지역에 던전이 있으면 그 지역 건물주들이 던전 관리자에게 안전 비용을 내야 한다.
 던전 관리자는 일종의 중개업자다.
 부동산중개인이 건물주와 임차인을 연결해 주는 것처럼 건물주와 헌터를 연결해 준다.
 부동산중개인은 양측에게 수수료를 받고 연결만 해준다.
 하지만 던전 관리자는 건물주에게 안전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월세를 받는다.
 던전은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한 번 공략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안전 비용을 받는 대가로 던전 관리인은 헌터를 고용해 던전을 수시로 공략한다.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안전 비용을 임차인에게 떠넘긴다.
 그만큼 던전이 있는 지역은 임대료가 비싸다.
 연남동, 그것도 구석진 골목을 고른 이유는 근처에 던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사이에 생겼을 가능성은 있다.
 이럴 땐 찾아봐야지.
 폰을 켜서 던전 관련 어플들을 검색했다.
 『던전in』, 『헌터천국』, 『공략넷』, 기타 등등······.
 헌터 생활할 땐 열심히 썼는데 가게를 하면서 지워 버렸다.
 어플 하나를 다시 깔아서 실행했다. 연남동으로 검색하자 지도가 나타났다.
 역시나 지도에 표시된 던전은 없었다.
 하지만 상태창에 나타난 지도에는 던전이 있었다.
 그 말인즉슨, 연남동에 미발견 던전이 있다는 것이다.
 “지화자!”
 흥분한 탓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던전에 대한 처분권은 발견자에게 있다. 요즘 세상에 던전은 노다지나 마찬가지다.
 경매를 통해 던전 관리자에게 파는 게 가장 흔한 방법이다.
 던전의 전리품이 괜찮을 경우, 유명 헌터 길드까지 경매에 뛰어들기도 한다.
 직접 관리자가 되어서 건물주들에게 안전 비용을 청구할 수도 있다.
 문제는 게이트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게이트 없이는 던전에 들어갈 수 없다.
 게이트는 던전에 몬스터들이 너무 많아서 과부하를 일으킬 때 생겨난다.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전에 게이트 생성의 전조로 현실세계에 차원균열 현상이 발생한다.
 이 차원균열을 발견해서 신고한 자가 던전의 발견자로 등록된다.
 연남동에 던전이 있다는 건 알지만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생길지는 몰랐다.
 몬스터 생성이 더딘 비활성화 던전이라 영영 게이트가 안 생길 수도 있었다.
 ‘잠깐, 다른 메뉴들도 있었지.’
 <이면세계탐색>을 활성화해 보았다.
 “으악!”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로 젖혔다.
 방 안에 좀비처럼 생긴 괴물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괴물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했다.
 ‘이면세계에 있는 녀석인가.’
 좀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반응이 없었다.
 코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이번에도 무반응. 마음 놓고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골이 상접, 피부는 잿빛. 눈이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었다.
 사극에서 빈농들이 입고 나오는 거적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녹이 슨 쟁기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소작농.
 한반도에만 나타나는 좀비 계열 몬스터.
 1티어 중에서도 최약체여서 있지도 않는 0티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수십 명씩 무리 지어 다니기 때문에 초보헌터들의 사망 원인 1순위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상태창을 꺼봤다. 예상대로 좀비가 사라졌다.
 ‘증강현실 같은 거구나.’
 <이면세계탐색>은 현실세계에서 이면세계를 훔쳐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이걸로 현실세계에서 안전하게 던전의 구조와 몬스터의 수, 종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게임으로 치면 맵핵이잖아. 개꿀인데?’
 이제 <이면세계진입>만 남았다.
 <이면세계탐색>으로 유추해 보자면, 이걸 사용하면 던전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면세계탐색>의 경우처럼 바로 이 자리에서 던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남들이 문으로 들어갈 때 벽을 뚫고 들어가는 셈인데······.
 ‘들어가면 게이트가 생기는 건가?’
 
 [‘육도의 귀왕’ 보유자가 던전을 공략하면 ‘던전 마스터’가 됩니다. 던전 마스터가 될 경우 원하는 위치에 게이트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아하.’
 머릿속에 ‘빅 픽처’가 그려졌다.
 <이면세계탐색>으로 던전을 조사한 후 안전한 장소에서 던전에 진입한다.
 던전을 공략해서 던전 마스터가 된 후 적당한 위치에 게이트를 설치한다.
 게이트로 인해 생기는 차원균열을 관리 센터에 신고하면 던전의 법적인 소유자가 된다.
 드디어 쥐구멍에 볕 들 날이 온 것이다.
 
 * * *
 
 나는 <이면세계탐색>으로 연남동 던전 A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천만 다행으로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는 소작농밖에 없었다.
 확인된 소작농의 수는 41마리. 하루 만에 공략이 가능한 소규모 던전이었다.
 통상적으로는 파티를 맺고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다고 소문낼 순 없으니 혼자 공략할 수밖에.’
 믿을 건 완벽한 준비뿐이었다.
 소작농의 정확한 위치까지 기입된 지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공략계획도 수립했다.
 훈련도 꾸준히 했다. 10년간 활동했지만 그 후로 1년간의 공백이 있었으니까.
 각성 후 2주 정도 지났을 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지혜 씨, 내일은 출근하지 마요.”
 가게 문을 닫으면서 윤지혜에게 말했다.
 “왜요?”
 “일이 좀 있어서 하루 쉴 거예요. 일당은 챙겨 줄게요.”
 “됐어요. 요즘 손님 없어서 일도 제대로 안 하는데요.”
 동네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하니 하루에 손님이 한두 명 올까 말까 했다.
 “여기 나오는 거 자체가 일이잖아요. 손님 없는 게 지혜 씨 탓도 아니고요. 앞으론 손님 많아질 거예요. 계속 일할 생각이라면 한가할 때 미리 쉬어 둬요.”
 윤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장님, 요즘 좀 이상해요. 혼자 멍 때리다가 히죽거리기도 하고. 무슨 좋은 일 생긴 거죠? 장가라도 가는 거예요?”
 ‘풉!’
 ‘빚밍아웃’하면 있던 여친도 도망갈 판인데 장가라니.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전 이쪽으로 갑니다. 지혜 씨도 조심해서 가요. 모레 봅시다.”
 나는 뭔가 더 물어보려는 윤지혜를 남겨두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내가 도착한 곳은 큰길가에 비치된 공용장비 거치대였다.
 롱 소드, 카이트 쉴드, 크로스보우, 플레이트 메일 세트. 합쳐서 ‘표준장비’라 불리는 조합.
 헌터들은 애정과 신뢰를 담뿍 담아서 ‘표준이’ 또는 ‘표주니’로 부른다.
 거치대에는 총 9묶음의 표준장비가 걸려 있었다. 대여할 수 있는 공유용 장비.
 이런 거치대는 연남동처럼 헌터들이 많이 모여드는 동네마다 하나씩 있었다.
 몬스터 침공 전에는 장비 대신 자전거를 빌려줬다고 한다.
 대다수의 헌터들은 전용장비를 사용한다.
 그러나 신입이나 하급 헌터들은 자기한테 맞는 장비를 구하기가 어렵다.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표준장비다.
 표준장비가 표준이 된 이유는 생존율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엔 나도 겉멋이 들어서 멋져 보이는 장비들을 이것저것 사용해 보았다.
 어차피 장비관련 재능도 없으니 뭘 쓰든 성능은 비슷비슷했다.
 그러다가 몇 번 크게 덴 후 그냥 표준장비를 고수하게 되었다.
 한창 활동할 땐 나만의 ‘표준이’를 가지고 있었다. 장사를 시작하면서 팔아 버렸지만.
 헌터의 인장을 거치대에 부착된 센서에 갖다 댔다. 전자문신답게 신용카드 기능도 있다.
 
 [1일 대여비용은 10만원입니다. 대여하시겠습니까?]
 
 하루에 10만원.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것 때문에 공사판에서 구한 쇠파이프와 맨홀 뚜껑을 검과 방패로 삼아 연습해야 했었다.
 결제가 완료되면서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월말에 날아올 고지서 폭탄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계획한대로 던전 마스터가 되지 못한다면 길바닥에 나앉게 될 판이다.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개당 5000원이나 하는 200밀리미터 생명력 물약을 8개 구매했다.
 개당 10,000원인 성수(聖水) 병 2개를 추가로 구입했다.
 병 10개가 플레이트 메일 세트에 포함된 혁대에 걸 수 있는 최대치였다.
 준비를 끝낸 후 이면세계탐색을 사용하면서 미리 봐둔 지점으로 갔다.
 몬스터들의 위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게 근처에 있는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시작지점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
 바로 앞에 아사한 소작농 하나가 반투명하게 보였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했다.
 1년 만에 들어가는 던전이었다. 게다가 혼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짬밥이 있는데 죽기야 하겠어?’
 <이면세계진입>을 활성화시켰다.
 “크르르르-”
 반투명하던 소작농의 뒷모습이 점차 뚜렷해지면서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위치를 확인하고 들어온 덕분에 안전하게 뒤를 잡을 수 있었다.
 이미 죽었고 잊힌 존재. 피부도 살색이 아니라 잿빛이었다.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형체가 사람인지라 볼 때마다 망설여지긴 했다.
 소작농이 서서히 몸을 틀었다. 눈이 없지만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 이면세계는 성역(聖域)이었다.
 몬스터를 연구하는 한 학자는 몬스터들이 침입자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싸우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으어어어-”
 소작농이 쟁기를 치켜들었다. 검으로 목을 베었다.
 “끄어억-”
 소작농이 검은 피를 쏟으며 비틀거렸다.
 텅!
 머리 위로 들어 올렸던 쟁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소작농은 머리통이 덜렁거리는데도 팔을 휘둘렀다.
 재빨리 카이트 쉴드를 들어 올려서 막아 냈다.
 캉!
 방패를 통해 전해지는 충격이 제법 컸다. 부실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기본적인 완력이 인발인보다 훨씬 강했다.
 방패로 버티면서 자세를 낮춰 소작농의 발목을 베었다.
 끄아악!
 소작농이 고꾸라졌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가슴께를 발로 밟았다.
 그리곤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푹!
 힘이 빠져나간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확실히 끝이었다.
 “휴우.”
 첫 시작치곤 나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실세계에선 골목길이었지만 이면세계에선 건물 내부였다.
 벽도 콘크리트가 아니라 흙으로 되어 있었다. 정면에는 나무문이 있었다.
 “크어어어어-”
 건물 밖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보나 마나 소작농들일 것이다.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쿵! 쿵!
 소작농들이 농기구로 벽을 두드렸다.
 드르륵! 드르륵!
 벽을 긁는 소리도 들렸다.
 콰직!
 쟁기 하나가 나무문을 뚫고 들어왔다. 문이 부서진 틈으로 소작농의 섬뜩한 얼굴이 보였다.
 침착하게 성수를 꺼내서 검에 부었다. 날에 떨어진 액체는 황금빛을 내기 시작했다.
 병이 빌 때쯤엔 날 전체가 황금색이 되었다.
 
 [무기에 빛 속성이 추가되었습니다.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들에게 추가피해를 줍니다.]
 
 빈 병을 집어던졌다. 예전엔 빈 병도 꼭 챙겼다. 팔면 1000원이니까.
 오늘부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내대장부라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성큼성큼 걸어가 나무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문 뒤에 있던 소작농이 뒤로 나자빠졌다.
 “크아아아!”
 수십의 소작농이 텅 빈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들고 있는 쟁기며 호미 등을 치켜들며 괴성을 질러댔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없는 소작농도 많았다. 아예 하체가 없는 치들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적응 안 되네.’
 “끄어어어-”
 팔을 뻗어 검을 넓게 휘둘렀다. 바짝 붙어 있는 셋을 한 번에 베었다.
 촤아아아-
 검이 지나간 자리에 잔상이 생기면서 황금빛의 알갱이들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끄악!”
 검에 베인 소작농들이 시커먼 가루가 되면서 녹아내렸다.
 이성이 있는 적들이라면 겁을 먹었겠지만 언데드라서 움츠러들진 않았다.
 나는 문턱을 디디고 섰다.
 앞으로 나가다가 뒤로 밀리지만 않으면 포위당하지 않고 두셋씩 상대할 수 있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방패를 두들기면서 소작농들에게 외쳤다.
 “드루와!”
 
 * * *
 
 [던전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문턱에 주저앉은 채 쟁기에 찍혀서 찌그러진 투구를 벗었다.
 대여비가 비싼 대신에 수리비는 없었다.
 엉덩이가 축축했다. 바닥에 내가 흘린 피로 된 웅덩이가 있었다.
 마지막 남은 생명력 물약을 꺼냈다.
 “으어어어!”
 팔을 움직이자 어깻죽지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물약을 들이켰다.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 들면서 고통이 가셨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마력이 0.1 향상되었습니다.]
 
 ‘웬일로 레벨이 다 오르네. 복귀기념인가.’
 헌터 생활을 청산한 이유 중 하나가 레벨 정체 때문이었다.
 
 [현재 능력치는 힘: 5.1 / 민첩성: 5.7 / 마력: 4.8 / 생명력: 5.5입니다.]
 
 기쁨도 잠시. 오랜만에 내 능력치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상태창에서 언제든 확인할 수 있었지만, 꼴도 보기 싫어서 잘 보지 않았다.
 초인의 능력 최대치는 10, 일반인은 5였다.
 능력치 평균이 9점대면 A급, 8점대면 B급······. 이런 식으로 내려간다.
 능력치가 하나라도 10점을 찍으면 S급으로 분류된다.
 반대로 하나라도 5점 미만이면 F급이 된다.
 나도 평균은 5점대여서 E급이어야 하지만 마력이 미달이라서 F급을 받았다.
 F학점을 학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F급도 제대로 된 초인 대우를 받기 힘들었다.
 ‘유사초인’이랄까.
 재능이 몇 개 더 생겼으니 급이 올라갈 순 있었다.
 하지만 저질능력치 탓에 재능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왜 헌터를 직업으로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시 상황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자립은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건 이거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F급 헌터는 전체의 90%나 되었다.
 능력치가 구려도 업계 평균은 된다.
 
 [고유재능 ‘육도의 귀왕’이 적용됩니다. 해당 던전의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던전의 이름을 정하시겠습니까?]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처럼 던전에는 이름이 있었다.
 비록 골목길 몇 개 합쳐 놓은 규모의 던전이지만 내 첫 던전이었다.
 문제는 내 작명 센스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가게 이름은 ‘딥 다크 던전’이었다. 처음 떠올렸을 땐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었다.
 윤지혜한테 대차게 까이기 전까진 내가 작명 천재인 줄 알았다.
 “이름이 그게 뭐예요! 쪽팔려서 친구들한테 놀러 오란 말도 못 하겠네.”
 그 이름으로 낸 공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 할 소린 아니었다.
 박정도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없이 웃기만 했었다.
 이번엔 잘 지어야 한다.
 
 * * *
 
 서대문구 던전 관리 센터의 연남동 담당자 이동훈은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네. 사장님.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차원균열이 발견되었으니 안전을 위해서 긴급대피명령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인근의 건물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서재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던전이 없다고 해서 투자한 건데 어쩌라는 거야!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어!”
 이동훈은 소리가 안 들리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진상들 앞에선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이봐, 당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예.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럴 때는 절차가 어떻게 되나?”
 “게이트가 열리면 저희 평가 팀에서 던전에 들어갈 겁니다. 공략은 아니고요. 안전 진단 평가를 위해서 잠깐 머무르는 겁니다. 등급 나오면 던전 관리자랑 안전 비용 협상하시면 돼요.”
 “등급에 따라 비용이 정해진단 말이지?”
 “네. 상한선이 정해지죠.”
 딸깍. 뚜뚜뚜.
 이동훈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던전이 정리될 때까지 여러 번 마주쳐야 하는데 벌써 암에 걸릴 것 같았다.
 화를 억누르며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인 술집에 도착했다.
 ‘Deep Dark Dungeon.’
 ‘이름 죽이는군. 다음엔 저기서 한잔해야겠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 센터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김상헌 씨입니까?”
 “네. 접니다.”
 김상헌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평범한 얼굴. 적당히 기른 머리. 중키에 다소 호리호리한 몸. 튀지 않는 옷차림.
 특색이 없는 게 특색인 것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빛만큼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차원균열은 어디에 있죠?”
 김상헌은 방금 던전에서 나온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다.
 “이쪽입니다.”
 술집 바로 옆 골목. 허공에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이동훈의 업무는 차원균열을 확인한 후 게이트 생성 시점을 예측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장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대략적인 게이트 생성 시점을 분석해 준다.
 그리고 게이트가 생성된 이후에 언제쯤 몬스터가 나올지를 예측해 준다.
 던전 관리자가 정해지면 관리자에게도 프로그램에 대한 접근 권한이 주어진다.
 이동훈은 스파크에 자신의 인장을 갖다 대었다.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던전 ‘건물주 지옥’의 게이트가 생성 중입니다.]
 
 * * *
 
 던전 관리 센터에 차원균열을 신고해 던전 최초발견자로 인증을 받았다.
 내가 뚫어 놓은 게이트를 내가 발견했다고 신고하니 기분이 찝찝하기는 했다.
 범죄소설 클리셰인 ‘신고 한 놈이 범인’이 된 꼴인가.
 던전 관리자는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헌터경력이 10년이라 인터넷으로 2시간짜리 교육 동영상만 보면 된다.
 차원균열을 확인한 이동훈 팀장은 게이트가 생성되자마자 안전 진단 평가를 하겠다고 했다.
 그 날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내일 아침이면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나는 자취방의 싸구려 매트리스 위에 누운 채 상태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상태창에선 내 던전 ‘건물주 지옥’의 지도가 떠있었다.
 <던전 관리>를 사용한 결과였다.
 하위 메뉴로 <건물 건설>, <몬스터 고용>, <던전 탐방>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말이 던전이지 건물 몇 개만 덩그러니 있는 평지에 지나지 않았다.
 지휘소 역할을 하는 회관, 교역에 이용되는 장터, 아사한 소작농을 생산하는 오두막 10개.
 방금 생산한 따끈따끈한 소작농들이 녹색의 점들로 표시되었다.
 <던전 탐방>를 사용하니 지도 대신에 던전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타났다.
 카메라가 달린 드론을 조정하듯이 던전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살펴볼 수 있었다.
 오두막에 장터, 어슬렁거리는 소작농들을 보니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건물들이 유난히 칙칙해 보이고 주민들이 죄다 시체들이라는 점만 빼면 그랬다.
 던전 하면 딱 떠오르는 미로 같은 동굴이나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첨탑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니 게이트가 안 생겼지.’
 다행히 골드는 넉넉했다.
 상태창에 숫자로만 나타나는 ‘골드’는 건물을 짓거나 몬스터를 고용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 내는 건지 몰라도 매일 세금 명목으로 1,000골드씩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을 수 있는 건물도 만들 수 있는 몬스터도 별로 없었다.
 몬스터는 소작농뿐이고, 건설도 게이트생성과 원래 있던 장터의 업그레이드만 가능했다.
 
 [새로운 종류의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회관을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회관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영토를 확장해야 합니다.]
 
 옆 동네 던전을 공략해서 땅덩어리를 넓히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던전의 안전진단평가가 당장 내일이었다.
 안전등급을 낮게 받으면 그만큼 건물주에게 청구할 수 있는 안전 비용도 낮아진다.
 아쉬운 대로 소작농을 백 명 가까이 뽑아 놓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전략만 잘 세우면 나 같은 F급 헌터 혼자서도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던전이 너무 허접해서 등급 매기러 왔다가 공략까지 해버리면 그냥 똥값이 된다.
 ‘게이트 생성을 좀 늦출 걸 그랬나.’
 하지만 가게의 임대차 계약 종료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안전 비용을 가지고 건물주와 협상을 해본다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협상이 틀어지더라도 안전 비용만 잘 나오면 빚도 갚고 가게도 옮길 수 있으니 만사 오케이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장터 업그레이드뿐인데.
 이러나저러나 앞으로도 함께 할 던전이었다.
 골드도 넉넉하니 미리 업그레이드한다고 나쁠 건 없겠지.
 <건물 건설>을 선택해서 장터를 업그레이드했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 옆에 덮개를 덮은 마차 몇 개가 나타났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름과 설명이 나타났다.
 
 [용병캠프: 골드만 있으면 생산시설 없이도 몬스터를 고용할 수 있습니다.]
 
 ‘어?’
 용병캠프를 선택해 보았다.
 몬스터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박정도보다도 큰 키에 피부가 푸르스름했다.
 눈썹이 짙었고 눈동자가 빨갰다.
 머리에 뾰족한 뿔이 돋아 있었다. 손에는 돌기가 달린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도깨비?’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머릿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
 ‘저는 용병캠프를 운영하는 도깨비 길달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면세계에도 지성을 갖춘 몬스터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몬스터를 대면하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어, 음······. 혹시 용병 좀 고용할 수 있을까?’
 용병캠프 담당이라고 했으니 물어볼 건 이것밖에 없었다.
 ‘물론이죠.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게 이 길달 아닙니까. 한 번 살펴보시죠.’
 눈앞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고블린>, <스켈레톤>, <슬라임>.
 서양 쪽 몬스터들이고 죄다 1티어였다. 이런 걸로는 어림도 없다.
 ‘좀 더 센 건 없냐?’
 ‘마스터의 던전 규모에 맞춰서 제시해 드린 겁니다. 더 센 녀석들을 고용하시려면 던전 규모를 키우셔야 합니다.’
 ‘되는 일이 없구먼. 저것들이라도 데려와야 하나. 소작농이랑 도긴개긴인데.’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뭔데?’
 길달은 싱글벙글하면서 뜸을 들인다.
 ‘말해.’
 ‘무작위 용병 뽑기라는 게 있습니다. 던전 규모와 상관없이 센 놈을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운만 좋다면 말이죠.’
 여기서도 가챠가 유행인가.
 ‘얼만데?’
 ‘10,000골드입니다.’
 ‘거의 전 재산인데······.’
 ‘마스터의 운을 한 번 시험해 보시죠. 이걸로 대박 나신 분들도 많습니다.’
 평소라면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을 쓸데도 없었다.
 
 * * *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서대문구 던전 관리 센터의 센터장이 이동훈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센터장님, 이건······.”
 쾅!
 센터장이 손으로 자기 책상을 내려쳤다.
 “내가 자네한테 사기를 치래? 그냥 좀 쉽게 가자는데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이동훈은 이를 꽉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서재철인가 뭔가 하는 그 진상이 이렇게 끗발이 좋은 줄 몰랐다.
 그냥 돈만 많은 졸부인줄 알았는데 며칠 사이에 센터장을 구워삶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말이 통할 상황도 상대도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나.”
 이동훈이 숙이고 들어가자 센터장도 화를 좀 누그러뜨렸다.
 “거기 원래 던전이 없던 곳이잖아. 보나마나 별 거 없을 거야. 빨리 가서 처리해.”
 센터장의 요구사항은 안전 비용이 낮아지도록 등급을 최대한 낮게 잡으라는 것이다.
 물론,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조건이 붙었다.
 그 말인즉슨, 문제가 생기면 이동훈의 탓이라는 거였다.
 “네. 잘 알겠습니다.”
 이동훈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센터장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던전 관리 센터의 직원은 헌터인 동시에 공무원이었다.
 민간 헌터에 비해 벌이는 시원찮지만 그만큼 수입이 안정적이었다.
 S급 헌터들에겐 그딴 걸 왜 하느냐는 소리를 듣지만 F급 헌터들에겐 꿈의 직장이었다.
 이동훈 역시 던전 관리 센터 직원이라는 자리를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을 때면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다.
 불의를 보면 외면할 줄 알았고 매사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살아왔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가다간 조만간 사고가 터질 거고 자기한테도 불똥이 튈 거라는 점이다.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그렇게 울분을 삭히며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아홉 명의 파티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넷은 이동훈의 부하였다. 나머지 다섯은 두 개의 민간 업체에서 파견된 직원들이었다.
 공정성을 위해서 던전 관리 센터와 두 개의 민간 업체가 함께 평가에 들어간다.
 하지만 대개 이 업체들은 중소기업들이었다. 보통 던전 관리 센터가 하자는 대로 따라 줬다.
 그래야 다음번에도 일거리가 떨어지니까.
 “늦어서 미안합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균열은 어느덧 타원형의 게이트가 되어 있었다.
 ‘던전이 잘되면 덩달아 대박 나겠군.’
 이동훈은 게이트 옆에 있는 술집 ‘딥 다크 던전’을 보면서 생각했다.
 던전에서 살아남은 헌터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게 술이다.
 던전 발견자이면서 게이트 앞에 술집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술집 사장의 행운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동훈은 던전을 똥값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그가 받은 명령이었으니까.
 게이트를 통과한 일행은 단층건물의 지붕 위에 도착했다.
 그들은 옥상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게 던전이라고?”
 이동훈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오두막 몇 개가 전부인 촌락. 검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였다.
 몬스터라곤 백여 마리의 소작농뿐.
 이름도 희한한데 안에 있는 내용물도 희한한 던전이었다.
 일이 쉽게 풀려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센터장에게 대든 일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숙이고 들어갈 걸.
 “티, 팀장님!”
 이동훈의 부하 한 명이 물었다.
 “왜?”
 부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냥 검은 산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뭘 보라는 거냐?”
 이번엔 파견 나온 직원이 외쳤다.
 “사, 산이!”
 그제야 이동훈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산이 움직여?’
 바위로 되어있던 검은 산이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산이 아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어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팀원 중 힐러가 보호막을 우산처럼 전개해서 우박을 막아 냈다.
 “윽! 오래는 못 버팁니다!”
 힐러가 인상을 쓰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쏟아지는 우박의 기세가 매서웠다.
 “크르르르-”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움직이던 산에서 거대한 바위가 솟아났다.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동훈은 알 수 있었다, 그게 바위가 아니라 머리통이라는 것을.
 5층짜리 건물만한 머리통에서 새하얀 이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새빨간 눈이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짓눌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어, 으어, 으아아아악!”
 공포와 위압감에 이성을 잃은 일행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일행들의 비명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동훈이 악을 쓰며 외쳤다.
 “모두 튀어!”
 
 * * *
 
 동방의 요르문간드.
 저명한 몬스터학자 데이비드 로스 교수가 한반도 고유종인 ‘강철이’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강철이가 북유럽 신화에서 세상을 멸망시킨 요르문간드에 비견할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철이는 용이 되는 것에 실패한 후 타락해 버린 이무기였다.
 생김새만 놓고 보면 뱀과 비슷하였으나 비늘이 검었고 네 개의 다리와 수염이 있었다.
 비늘의 일부분은 쇳조각에 덮여 있었다.
 이무기인데도 용처럼 비행능력이 있었다.
 항상 우박과 돌풍을 동반했고 화염폭풍이나 강철폭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크기가 커졌는데 성장에 제한이 없었다.
 몬스터와의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아파트단지만한 강철이가 목격되기도 했다.
 전투력만 놓고 본다면 용보다 더 강력했다.
 명실상부 한반도 최강의 몬스터였고 10티어로 분류되었다.
 “그 놈이 밖에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습니까.”
 이동훈은 센터장에게 말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보기만 했는데 네 명이 병원에 실려 갔다.
 나머지도 똥오줌을 지리면서 나왔다. 지금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온몸이 떨려왔다.
 만약 그때 강철이가 제대로 덤볐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못할 것이다.
 “음······.”
 센터장은 오만상을 썼다. 아마 서재철한테 받아먹은 게 있어서일 거다.
 무리해서 안전 비용을 낮췄다가 관리자가 헌터를 구하지 못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에라도 강철이가 던전 밖으로 튀어나오면 계엄령이 떨어지고 군대가 출동한다.
 책임자들은 옷을 벗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최소 무기징역이고 대개는 사형이다.
 “알겠네. 던전 관리자는 어떻게 되었나?”
 “발견자가 직접 하겠답니다. 헌터 활동경력이 10년이니 교육이수만 하면 됩니다.”
 “건물주들이랑 미팅하는 건?”
 “오늘 오후입니다.”
 “규정대로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 * *
 
 “아이고,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못 보던 사이에 신수가 아주 훤해지셨습니다.”
 나는 잔뜩 비꼬는 투로 건물주에게 인사를 했다. 이름이 서재철이라고 했던가.
 서재철은 예상대로 똥 덩어리를 삼킨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데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안 오셨나요?”
 자리에 앉으면서 던전 관리 센터의 이동훈 팀장에게 질문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보다 십년은 늙어 보였다. 못 볼 걸 본 모양이다.
 “다 오셨습니다.”
 사실 알면서 물어봤다. 던전 게이트 근처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서재철의 소유였으니까.
 나는 서재철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본인도 잘 알 것이다, 이제 자신이 을이 되었다는 것을.
 이 모임은 던전 관리 센터에서 주관하는 건물주와 던전 관리자 간의 안전 비용조정회의였다.
 “다 오셨으니 시작하도록 하죠. 다들 어느 정도 아시겠지만 정리하는 의미에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동훈은 서류를 넘기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내용의 서류가 나와 서재철 앞에도 놓여 있었다.
 심심풀이로 서류를 훑어보면서 이동훈의 설명을 들었다.
 “새로 발견된 던전 ‘건물주 지옥’에서 10티어 몬스터인 강철이가 발견되었습니다.”
 “잠깐, 던전 이름이 왜 그런 거요?”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던전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던전 게이트를 조사하면 이름이 나타나죠. 이번 경우도 등록되어 있던 이름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국제규정입니다.”
 서재철을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하겠습니다. 강철이 외에는 한국형 좀비인 소작농뿐이었습니다.”
 서류를 보니 내가 세운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명피해 없이 등급은 최고로.
 “강철이 때문에 정찰시간이 짧았습니다. 추가로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몬스터를 제외하더라도 던······.”
 성질 급한 서재철이 이동훈의 말을 자르면서 물었다.
 “아, 그래서 돈을 얼마나 내라는 거요?”
 이동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건물 한 채당 1,000만 원입니다.”
 표정관리를 잘하는 걸 보니 서재철 같은 인간들을 여러 번 다뤄 본 것 같았다.
 “뭐, 뭐라고?”
 서재철의 표정이 강철이의 피부만큼이나 어두워졌다.
 ‘금싸라기 땅이라고 마구잡이로 사들여서 있는 사람들 다 쫓아내더니 꼴좋다.’
 이동훈은 다분히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서재철 씨는 현재 해당 지역 건물 스물두 채를 모두 소유하고 계시는군요. 관리자 김상헌 씨는 건물주 서재철 씨에게 매달 최대 2억 2000만 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쾅!
 서재철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침을 튀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참다못해 내가 한 마디 쏘아붙였다.
 “거 참 더럽게 시끄럽네.”
 “뭐!”
 서재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행인 줄 아세요. 임대료는 건물주 마음이지만 이건 상한선이라도 있잖아요.”
 서재철은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나는 그런 서재철을 무시한 채 이동훈에게 물었다.
 “팀장님, 우리 사장님께서 이쪽 분야를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제가 설명 좀 드려도 될까요?”
 “네. 원하신다면야.”
 “사장님, 현재 한국에서 강철이랑 싸워 볼 수 있는 사람이 딱 네 명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 몸값이 얼마인지 압니까. 던전 한번 들어가는 데 최소 1억이에요. 1억.”
 서재철은 씩씩거리면서도 내 말을 들었다.
 “그 친구들도 확실하게 잡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위험한 만큼 돈도 오르겠죠. 못 하겠다고 하면 외국에서 그만한 사람 구해 와야 합니다. 그 콧대 높은 양반들 찾아다니면서 밀고 당기고 해야 하는데 위험수당 챙겨 주고 나면 저한텐 남는 것도 없어요.”
 설명은 내가 하고 있는데 서재철은 내가 아니라 이동훈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보쇼. 이 팀장. 던전은 광산 같은 거 아니오? 거, 돈 내고 들어가는 던전도 많잖소.”
 “그건 던전이 안정화되고 전리품 정보가 확실해지는 경우에만 해당이 됩니다. 아직 이 던전은 그런 단계가 아닙니다.”
 현대 이전의 사냥은 노동이었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잡아서 돈을 벌었다.
 현대의 사냥은 일종의 스포츠다. 사냥꾼은 사냥터 지기에게 돈을 내고 사냥감을 잡는다.
 돈을 받고 들어가는 던전과 돈을 내고 들어가는 던전의 차이도 이와 비슷했다.
 “아직 몬스터 생성 주기도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공략 보고서에 따라서 안전 비용이 달라질 순 있습니다.”
 이동훈이 서재철을 달랜답시고 한 말이었다.
 나라도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임대 수입으로 한몫 챙겨 보려고 했는데 돈 대부분을, 어쩌면 그 이상을 내야 하니까.
 게다가 아직 건물도 덜 지었다.
 “돈을 못 내면 어떻게 되는 거요?”
 “임대료 못 내는 거랑 똑같습니다. 계속 연체되면 강제집행 들어갑니다.”
 서재철의 멘털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아니 이런 건 자연재해 아니오? 나라에서 책임져야 할 걸 왜 개인한테······.”
 사실 최근에는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몬스터 침공이 시작된 지 거의 40년이 되었다. 웬만한 던전은 모두 발견되었다.
 신생 던전은 가뭄에 콩 나듯이 나타났다. 그래서 관련 법률도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애당초 위험천만한 던전 관리를 민간에 이양한 것도 배상금을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끝난 후 위험한 애물단지가 된 헌터들을 재사회화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안전 비용 대출은 있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공략이 꾸준히 이루어져서 던전이 안정화 되면 안전 비용은 낮아질 수 있습니다.”
 물론, 난 던전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뽑기로 얻어 걸린 크고 아름다운 이무기를 뺀다면 어디 보이기 쪽팔리는 수준이었으니까.
 애초에 던전도 아니었지.
 진짜 던전답게 만들어서 안전 비용을 높이면 서재철은 못 버티고 나가게 될 것이다.
 그때쯤 되면 부자가 되어 있을 누군가가 헐값에 내놓은 건물들을 모두 사들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사장님, 보아하니 사정이 딱하신 거 같군요. 제가 편의를 좀 봐드릴 수는 있습니다.”
 서재철이 모두 털고 나가 버리면 안전 비용 받아 낼 사람이 없어진다.
 안전 비용을 못 받더라도 던전이 터져 나갈 일은 없겠지만.
 “무, 무슨 말이요?”
 서재철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 했던 짓거리들이 있으니 못 믿을 만도 했다.
 이동훈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아직까진 서재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배를 가르기 전에 황금알을 남김없이 뽑아낼 생각이었다.
 “저랑 쓰셔야 할 계약서가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서재철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입을 열었다.
 “임대차 계약 말하는 거요?”
 나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갱신해 주시고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형편을 봐 드리죠. 사장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재철의 얼굴에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
 ‘별로 어렵지 않으면 진즉에 해 주지. 속이 시커먼 인간 같으니. 갑자기 빡치네.’
 “아, 까먹을 뻔했군요.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 * *
 
 ‘술과 안주는 셀프.’
 가게 안쪽 벽에 잘 보이도록 써 놓았다.
 맥주나 소주는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면 되고, 기본안주도 알아서 가져가라고 꺼내 놓았다.
 무려 KOSTCO에서 사온 프레첼이다. 짭조름한 것이 맥주랑 함께 먹으면 환상적이다.
 ‘주방장의 불법 파업으로 인해 요리 안주 주문 불가’
 주방장은 나다. 귀찮아서 그랬다.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칵테일이 한 잔에 백만 원!’
 이러면 안 시키겠지.
 가게도 지키고 역으로 사악한 건물주에게 안전 비용으로 매달 1억씩 받게 되었다.
 더 뜯어 낼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짐 싸서 도망갈 것 같아서 봐줬다.
 1억도 던전 덕분에 조만간 이 동네가 엄청 뜰 거라는 말로 달래서 받아 낸 것이다.
 평생 구경도 못 해 본 큰돈을 매달 받게 되었다. 돈 들어오자마자 빚부터 갚아 버렸다.
 짜릿한 승리감과 갑작스러운 풍요로움은 내 모든 근로 의욕을 앗아가 버렸다.
 가게는 지인들이랑 축하파티를 할 요량으로 열어 놓은 것이었다.
 “징그러운 인간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장이 장사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는 만석이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모두 길드의 에이전트들일 것이다.
 던전을 경매에 안 올렸더니 이렇게 몸소 찾아와 주셨다.
 다들 내 단호한 태도에 한 발짝 물러나 술만 마시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월급이 세 배로 오른 윤지혜는 구석진 곳에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 이래도 돼요?”
 나는 안면근육의 구십 퍼센트를 동원해 윙크를 해주었다.
 “사장이 놀 땐 알바도 놀아야지.”
 문이 열리더니 곰처럼 거대한 사내가 들어왔다. 박정도였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에 웬 뿔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사티로스의 뿔?’
 나팔처럼 불면 뿔 안에 술이 생겨나는 아이템. 술맛도 일품이었다.
 뿔마다 약간씩 다르긴 한데 일 년에 열 번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다.
 ‘저걸 오늘 까는 거야?’
 심장이 벌렁거리고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박정도는 윤지혜와 인사를 나눈 후 내가 있는 바로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오늘은 손님도 많군요.”
 “전부 던전 사러 온 사람들이에요. 가게 앞에 ‘던전 안 팔아요.’라고 써서 붙여 놓으려고요.”
 박정도가 껄껄 웃었다.
 “이제 보니 사장님은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군요. 그 드물다는 2차 각성에 이렇게 가게 옆에 던전까지 생겼잖습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솔직히 기분 째진다. 그래도 티 내기에는 좀 그렇다.
 “그냥 무덤덤하네요. 천운을 타고났으면 진작 형님처럼 상급 헌터가 되었겠죠. 이렇게 늦복이라도 터졌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간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으나 함께 활동한 사람들에 말에 따르면 박정도는 A급이었다.
 박정도는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습니다. 아, 이건 축하의 의미로 가져왔습니다.”
 내가 계속 힐끔거린다는 걸 눈치채고는 뿔을 건넸다.
 “이 귀한 걸 가져오시다니. 몇 번이나 나오죠?”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달릴 것이다. 그게 이 뿔에 대한 예의였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박정도가 놀랐다는 투로 물었다.
 “사티로스의 뿔이잖아요.”
 “사장님은 그냥 헌터로 복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지식이 아깝습니다.”
 내가 헌터 판에 대해 좀 빠삭하긴 하다.
 “그냥 잡지식이죠.”
 내가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나저나······. 칵테일값이 좀 올랐군요.”
 박정도가 벽에 써놓은 문구를 보고 난감한 듯 말했다.
 “VVIP한테는 공짭니다.”
 윤지혜가 지겨워졌는지 기지개를 켜면서 다가왔다.
 “끄응.”
 “다 썼어요?”
 내 질문에 윤지혜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험 기간에 친구한테 공부 많이 했냐고 물어보면 짓는 표정이었다.
 “우리 술은 언제부터 마셔요?”
 윤지혜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이미 마음속에서 공부가 떠나 버린 모양이다.
 “아직 한 명이 안 왔어요.”
 박정도와 윤지혜가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양반은 못 되네. 저기 오는군요.”
 건물주의 아들놈이었다.
 “오늘부터 일할 새 알바입니다.”
 
 
 # 뜻밖의 발견
 
 
 “어이, 서재훈이, 지금부터 네 이름은 짬찌다. 알간?”
 나는 세상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건물주 아들내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녀석은 지난번엔 반말을 찍찍하더니 지금은 공손하게 머리까지 조아리면서 술을 받았다.
 나도 또라이지만 건물주 서재철은 나보다 더한 상또라이인 것 같았다.
 가게의 임대차 계약 갱신이야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였다.
 안전 비용을 낮춰주는 데 그걸 조건으로 내세우자니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을 내 밑에서 1년 동안 일하게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2차 각성 날, 찾아와서 시비를 건 게 자꾸 떠올라서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어차피 아들이 장사하고 싶어 하지 않느냐고 덧붙이긴 했다.
 그래도 자식을 볼모(?)로 삼겠다는 건데 서재철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조건을 내걸었던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짬찌가 뭐예요?”
 윤지혜가 물었다.
 우리는 손님들이 모두 떠난 후, 가게 문을 닫고 우리들끼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임대차 계약 갱신 기념 파티 겸 우리 재훈이 환영파티.
 박정도가 나를 대신해서 답했다.
 “‘짬 찌끄레기’의 준말입니다. 군대에서 신병들을 부를 때 쓰는 비속어에요.”
 바른생활 사나이인 박정도는 나의 치졸한 복수극이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반면에 윤지혜는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자기 밑에 한 명 들어왔다고 싱글벙글했다.
 “짬찌야, 너 근데 몇 살이냐?”
 내가 서재훈에게 물었다.
 “24살이요.”
 나의 진정한 고유재능인 ‘꼰대질’이 활성화되었다. 숙련도는 아마 신화쯤 될 것이다.
 “여기 있는 누나는 몇 살로 보이니?”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할 운명의 퀘스천.
 “어? 누나······였어요?”
 이런 능구렁이 같은 새끼를 봤나.
 윤지혜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인마,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 누님은 걸음마를 마스터하셨다. 어쨌든 여기서 네 사수니까 알아서 잘 모셔.”
 그다음엔 윤지혜에게 말했다.
 “일하다 아주 사소한 실수만 해도 패요. 복날에 개 패듯이. 내가 전부 책임집니다.”
 서재훈이 흠칫했다.
 “알았어요. 사장님만 믿을게요.”
 윤지혜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너 아버님이랑 별로 안 닮은 것 같다.”
 곱상한 얼굴의 서재훈을 보고 있자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탐욕의 화신처럼 생겼는데 아들놈은 완전히 기생오라비였다.
 “네.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나이 먹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진짜구나.
 서재철도 젊었을 땐 잘생겼었을 것이다.
 서재훈도 아직 젊어서 그렇지 계속 아버지처럼 살다 보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음······정의의 사도인 내가 갱생시켜 줘야겠군.’
 “막내야, 이 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헌터계의 대들보 같은 분이시다. 우리 가게 최고의 단골이시기도 하지. 술을 주문하시면 반드시 삼보일배하면서 갖다 드려야 한다.”
 박정도가 후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전 항상 바에만 앉으니까요. 멀리 갈 필요 없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자주 보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서재훈이 뻘쭘해 하면서 박정도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자, 이제 입가심은 어느 정도 한 것 같으니 본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박정도가 사티로스의 뿔을 꺼내면서 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박정도는 나팔처럼 뿔의 끝부분에 입을 대고 힘껏 불었다.
 나팔소리 대신 물소리 같은 게 들렸다.
 “우와, 이거 뭐예요?”
 박정도가 잔을 채워 주자 윤지혜가 물었다.
 “돈 주고도 마시기 힘든 좋은 술입니다. 일 년에 몇 잔 안 나와요.”
 내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박정도가 사티로스의 뿔로 잔을 모두 채워준 후 내게 한마디 하라고 했다.
 “아, 왜요? 형님이 하세요.”
 박정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젠장. 이런 거 잘 못하는데.’
 “이번 생은 완전히 망한 줄 알았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정도 형님, 지혜 씨. 힘들 때나 좋을 때나 항상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 덕분에 사람답게 사는 것 같네요. 앞으로도 이렇게 쭉 함께하자고요.”
 박정도와 윤지혜가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재훈아.”
 “네?”
 “네 아버지가 훼방 놓기 전까진 우리 가게 장사 잘됐다. 여기 두 사람이 증인이야.”
 서재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낯빛이 어두웠다.
 “장사 재미삼아 하려는 게 아니고 제대로 해보려는 거라면 여기서도 분명 배우는 게 있을 거다. 잘 부탁한다.”
 서재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지난번엔······죄송했어요.”
 “새끼, 싱겁기는. 앞으로 잘해. 자자, 술 식기 전에 빨리 마시죠. 이거 언제 마셔 보나 목 빼고 기다렸다고.”
 “건배!”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 * *
 
 이번에도 취해서 잠들어 버렸다. 이번엔 소녀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요즘 왜 이렇지. 건강검진 받아 봐야 하나.’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저 인간들이 비정상이야.’
 박정도의 말로는 사티로스의 뿔에서 나오는 술이 바카디 151보다 독하다고 했다.
 그럼 공업용 알코올 수준이잖아? 그런데 다들 멀쩡해?
 “이번에도 각성할까요?”
 윤지혜가 나를 보면서 박정도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허허,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2차 각성도 드문데 3차 각성이라뇨. 그리고 원래 2차 각성도 던전에서 싸우다가 생기는 거예요.”
 옆에 있던 서재훈이 물었다.
 “초인각성 말씀하시는 거죠?”
 윤지혜가 답했다.
 “응. 우리 사장님은 취중각성이 특기거든.”
 딱 한 번 한 것 가지고 특기랄 것까지야.
 
 [고유재능 ‘일곱별의 순례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뭐야?’
 
 [해당재능은 유사환각 상태에서만 활성화됩니다.]
 
 ‘유사환각? 취할 때만 쓸 수 있다는 건가. 무슨 재능이 이따위야.’
 
 [전승스킬 <수호별 읽기>를 사용합니다. 대상의 수호별에 기록된 운명을 열람합니다. 대상이 지닌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내 시선은 윤지혜를 향해 있었다.
 
 [이름: 윤지혜 / 랭크: S급 / 클래스: 힐러 / 수호위상: 정약용]
 
 내가 알기로 윤지혜는 초인이 아니었다. 헌터 적성 검사 때 각성하지 못했다고 했다.
 ‘근데 S급이라고? 수호위상은 또 뭐야? 위상이 도와주기라도 하나.’
 이어서 윤지혜의 능력치도 나타났다.
 
 [힘: 8.8 / 민첩성: 9.4 / 마력: 10.0 / 생명력: 8.8]
 
 ‘마력이 10? 진짜 S급 능력치잖아.’
 아직 술이 덜 깼나 싶어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어? 사장님 일어났다! 오늘은 각성 안 해요?”
 윤지혜가 나를 보고 헤벌쭉 웃었다.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내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자 박정도가 걱정이 됐는지 내게 다가왔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나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박정도를 바라봤다.
 
 [이름: 박정도 / 랭크: S급 / 클래스: 탱커 / 수호위상: 이순신]
 
 ‘박정도는 원래 A급인데?’
 
 [힘: 9.5 / 민첩성: 8.7 / 마력: 8.9 / 생명력: 10.0]
 
 박정도가 심각한 얼굴로 계속 쳐다보기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뭐야, 이것들은? 무서워······.’
 위상들 중에서는 이순신과 정약용처럼 역사적 인물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면세계를 일종의 사후세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실존 여부가 불확실한 전설 속의 영웅들과 달리 위인 출신들은 인류에게 우호적인 편이었다.
 ‘유목민 학살자의 검술’과 ‘왕조 개창자의 궁술’ 같은 특수재능도 그 뿌리는 위상들이었다.
 하지만 이순신과 정약용은 위상과의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장님은 왜 술만 마시면 자꾸 뻗어요? 센 척만 하고 완전 약골이라니까. 자, 어서 한 잔 더 해요. 술도 자꾸 마시다 보면 늘어요.”
 윤지혜가 술잔을 건넸다. 나는 생각이 복잡해져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래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나와 눈이 마주친 윤지혜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약간 얼이 빠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사장님은 랭크가 어떻게 되세요? 각성 두 번 하면 엄청 강해지는 건가요?”
 옆에 있던 서재훈이 물었다. 나는 서재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메시지가 떴다.
 
 [이름: 서재훈 / 랭크: A급 / 클래스: 암살자 / 수호위상: 홍길동]
 
 “재훈 씨,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헌터 업계 불문율이에요.”
 박정도가 지적하자 서재훈이 고개를 숙이며 뒷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막내야. 넌 랭크가 뭐냐?”
 내가 하지 말라는 질문을 하자 박정도가 오만상을 썼다.
 “저요? C 나왔는데요.”
 
 [힘: 8.8 / 민첩성: 9.6 / 마력: 9.8 / 생명력: 8.8]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A급의 능력치였다.
 “좋겠다. 그 정도면 헌터로 돈 잘 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윤지혜의 질문에 박정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헌터가 되고 싶었는데요.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못 하게 했어요. 그런 거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고요.”
 서재훈은 약간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상태창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본 것들은 이 사람들의 잠재능력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얻게 될 능력이라는 건데······.
 문제는 그 능력을 어떻게 얻느냐는 것이다.
 내가 본 정보들 중 수호위상과 관련된 내용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고유재능과 스킬의 이름으로 유추해 봤을 때 이 수호위상이 열쇠일 가능성이 컸다.
 해당 위상과 조우하면 나처럼 봉인되어 있던 능력들이 깨어날지도 몰랐다.
 아니면 던전에서 싸우다 보면 각성할지도 몰랐다.
 박정도의 말로는 2차 각성은 주로 던전에서 싸우다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인간들을 던전에 데려가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안전이 100퍼센트 보장되는 던전이 하나 있었다.
 ‘한 번 굴려 봐?’
 “여러분.”
 박정도, 윤지혜, 서재훈이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길드 하나 만들래요?”
 
 
 # 던전 관리자 위에 던전 마스터
 
 
 길드를 만들자는 내 제안은 당연히 술김에 나온 헛소리로 치부되었다.
 서재훈 왈 “아버지가 헌터 하지 말래요.”
 윤지혜 왈 “지금 저만 일반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박정도 왈 “······ 취하셨군요.”
 그렇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들리려면 내 고유재능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고유재능의 사용이 제한될 것이다.
 일단은 내 고유재능의 쓰임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집 근처 국밥집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소주를 한 병 비웠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약간 취기가 감도는 정도. 그리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일곱별의 순례자’를 떠올렸다.
 
 [고유재능 ‘일곱별의 순례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그 다음엔 <수호별 읽기>를 사용했다.
 
 [해당 스킬은 자신에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제기랄.
 나에게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딴 건 없었다.
 이번엔 발코니로 나갔다.
 안전 비용을 뜯어내자마자 반지하 단칸방에서 같은 동네의 고급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정남향의 유리벽이 있었고 밖에는 발코니가 있었다.
 나는 발코니에서 길을 내려다보면서 수호별 읽기를 사용했다.
 방이 3층에 있어서 행인들의 얼굴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머리 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를 한 병 더 깠다.
 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시간 동안 관찰한 결과, A급 2명에 C급 4명, D급 5명을 발견했다.
 C나 D급까지는 연남동에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A급은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잠재능력을 보는 것이기에 관찰한 사람들의 현재 랭크가 F급일 수 있었다.
 수호위상과 고유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수호위상이란 걸 찾아보았으나 고유재능처럼 정보가 아예 없었다.
 특수재능을 최초로 보유한 자들이 위상들과 일종의 사제관계를 맺었었다는 얘기는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전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 위상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신생 던전과 마찬가지로 최근엔 위상과 관련된 뉴스도 거의 없었다.
 ‘접어야 하나.’
 뭔가를 해 보려고 해도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니 진행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술자리에서 봤던 상태창 메시지들이 눈앞에 계속 어른거렸다.
 S급 두 명과 A급 한 명. 정체불명의 재능과 뭔가 있어 보이는 스킬들.
 국내에 S급은 딱 네 명이 있었고 그들의 몸값은 모두 억 소리가 날 정도였다.
 잠재능력을 끌어낸 박정도, 윤지혜, 서재훈이라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숟가락 얹어서 돈 좀 만지는 거지.
 물론 지금도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을 좀 만져 보니 알 것 같았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걸.
 나는 고개를 돌려 옆 동네인 연희동에 있는 고급 아파트단지를 바라보았다.
 옥상에 거대한 정원과 헬기 이착륙장이 있는 으리으리한 아파트였다.
 이름이 골든 팰리스라고 했다.
 ‘그래.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나도 저런 데서 한 번 살아 봐야지.’
 세 번째 소주병을 깠다.
 
 * * *
 
 ‘던전 안 팔아요.’
 분명 가게 문 앞에 그렇게 써놓았는데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한 번 더 말해야 했다.
 “던전 안 팔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그 영업용 스마일엔 영혼이 눈곱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차라리 가면을 쓰고 다니지.
 오늘도 가게는 던전 브로커들로 만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쌀쌀맞은 태도에 본론을 꺼낼 엄두도 못 낸 채 술만 팔아 주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이 남자는 베짱이 두둑했다.
 “강철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오늘만 해도 그 질문을 백 번쯤 받은 것 같군요. 내일은 가게 문 앞에 이 말도 적어 놔야겠네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강철이를 안전하게 잡으려면 국내의 S급 헌터 4명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겁니다.”
 ‘우리 애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거 같은데? 애초에 잡을 생각도 없고.’
 “보아하니 4대 길드 중 한 곳에서 나오신 것 같은데······.”
 다들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당당히 걸어오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꺼냈다.
 새치기한 셈인데 누구도 찍소리하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거물일지도 몰랐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어디 소속인지 한 번 맞춰 보시죠.”
 “관심 없어요.”
 남자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신경을 계속 긁어 놓는데도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로봇인가.’
 남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신광 길드 에이전트 최우영’
 한국에는 소위 4대 길드라는 것이 있었다. 불행히도 한국인이 세운 길드는 없었다.
 외국의 유명길드에서 한국에 세운 지부 4곳을 4대 길드라 불렀다.
 일본계인 신광, 중국계인 천우, 러시아계인 이스크라, 미국계인 임페리움.
 각각 S급 헌터를 한 명씩 데리고 있었다.
 “저희 신광에서는 ‘건물주 지옥’의 가치를 100억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억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일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윤지혜와 서재훈도 움찔했다.
 특히, 서재훈은 좀 전부터 온 신경을 이 대화에 쏟고 있었다.
 내가 던전을 팔아 버리면 아버지가 안전 비용을 내야 할 대상이 신광으로 바뀐다.
 나야 구멍가게 사장이라 적당히 봐줄 줄도 알지만 신광은 얄짤 없을 것이다.
 악착같이 뜯어내서 못 버티고 나가게 만들 것이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최우영을 꼬나보았다.
 강철이를 잡더라도 무엇이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강철이의 사체(死體)가 수십억에 거래되기는 했다.
 ‘그래도 100억은 좀 오버인 것 같은데······.’
 성장이 정체된 S급 헌터의 레벨업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강철이가 나왔으니 뭔가 더 나올 거라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액수가 너무 컸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천하의 신광이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팔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은 그러시겠죠.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편하신 시간에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밑밥만 깔아 놓고 가는 모양이었다.
 신광이 침을 발라 놓았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퍼포먼스 같기도 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최우영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박정도와 문 앞에서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박정도 헌터님. 여기서 또 뵙게 되는군요. 잘 지내시죠?”
 박정도의 굳은 얼굴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네. 뭐 그럭저럭. 그럼······.”
 박정도는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최우영이 갑자기 싸늘해진 눈빛으로 박정도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가게 밖으로 나갔다.
 박정도가 윤지혜와 서재훈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후 바 앞에 앉았다.
 축하 파티 후 일주일 만이었다.
 박정도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인상을 구겼다.
 “방금 나간 양반이랑 구면인가 보네요.”
 “별명이 ‘살모사’인 작자입니다. 엮이지 않는 게 좋아요.”
 “별명이 왜 그 모양이에요?”
 “아주 유능한 직원이니까요. 가지지 못한 것은 없애 버린다는 게 신광의 모토입니다. 저 자는 그 모토를 철저하게 따르는 직원이고요.”
 박정도 말에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진흙탕에 발을 담근 기분이랄까.
 앞으로 골치 아픈 일에 얽힐지도 몰랐다.
 “형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여전히 얼굴을 풀고 있지 않는 박정도에게 물었다.
 재수 없는 인간이랑 마주쳤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얼굴 구길 사람은 아닌데.
 ‘최우영이랑 질긴 악연이라도 있나?’
 박정도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공략에 실패했습니다.”
 “형님이요?”
 박정도가 그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네.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뜻밖이었다. 박정도 정도의 헌터면 공략에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론 A급 헌터에게도 위험한 던전은 많았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공략 가능 여부를 예측하는 안목도 그만큼 좋아진다.
 이것저것 따져 보고 견적이 나오지 않으면 아예 안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묵묵히 박정도가 즐겨 마시던 블랙 러시안을 한 잔 만들어 주었다.
 박정도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였다.
 동료라고 해 봤자 일거리에 따라 급조된 파티의 멤버들이었다.
 하지만 박정도는 명예를 중시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동료들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지독한 상실감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아마 박정도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가 혼자 살아남은 건 비겁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강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분간 술을 좀 줄여야겠군요.”
 박정도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칵테일을 마셨다.
 던전이 터지면 던전 관리자가 건물주에게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내야 한다.
 심한 경우엔 쇠고랑을 차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헌터들이 공략에 실패하면 던전 관리자에게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말했잖아요. VVIP는 공짜라고요. 그래도 오늘은 좀 천천히 마셔요. 가게 끝나고 저랑 제대로 마십시다.”
 윤지혜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박정도가 그걸 보더니 옅은 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이번에 일이 좀 안 풀려서요.”
 서재훈까지 슬금슬금 합류했다.
 “어디 던전인데요?”
 내가 물었다.
 “연희동 쪽입니다.”
 “골든 팰리스?”
 그 아파트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얘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박정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 한복판에 게이트가 있습니다. 근데 그리로 들어가질 못했어요.”
 던전 공략을 하는데 게이트로 못 들어갔다니.
 “왜요?”
 “아파트 주민들이 반대해서요. 헌터들을 못 들어오게 하더군요.”
 옆에 있던 윤지혜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던전 공략해 달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런 셈이죠. 주민들이 던전 관리자에게 매달 안전 비용을 지급하면, 던전 관리자는 헌터들을 고용해 주기적으로 던전을 공략하고요. 그런데 헌터들이 단지 내로 들어오면 아파트의 품격이 훼손된다면서 못 들어오게 막더군요.”
 헌터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랭크에 따라 극과 극이었다.
 잘 나가는 상위 10퍼센트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는 슈퍼스타였다.
 유명한 연예인과 정치인들 중에 최상급 헌터 출신이 꽤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90퍼센트에 속하는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폐인 취급을 받았다.
 위험천만한 일을 하면서도 푼돈을 받으니까.
 벼랑 끝에 내몰린 경우가 아니라면 직업으로 택하지 않는다.
 이 때문인지 하급 헌터는 막장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생겨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략하라고 시켜 놓고 게이트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 사기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아파트 단지 밖에 있는 던전이랑 단지 내에 있는 던전이랑 이어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밖에 있는 던전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일이 꼬였던 거군요.”
 박정도가 속이 타는지 대답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건 던전 관리자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윤지혜가 물었다. 상식적으로도 그게 맞았다.
 “계약서 뒷장에 던전 관리자가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내용이 한 줄 들어가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겠죠.”
 전업 헌터라면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들어가는 던전이었다.
 들어갈 때마다 두툼한 계약서 뭉치를 받게 된다. 제대로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수 및 보상 규정 같은 것들은 첫 페이지에 자세하게 써놓는 게 관례였으니까.
 뒷장에 빡빡하게 써 놓은 관련 규정 같은 것들은 항상 똑같으므로 잘 안 보게 된다.
 일일이 다 확인하면 한 시간이 넘을 것이다.
 던전에서 몇 번 굴러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를 갈면서 박정도에게 물었다.
 “그 던전 관리자 새끼 이름이 뭐예요?”
 ‘감히 우리 가게 단골을 건드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