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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배우의 페르소나 - 1화

2019.05.18 조회 80,215 추천 928


 맑은 날이었다.
 2002년 12월 10일, 월드컵 열기가 완전히 식지 않은 그 시절. 이재하는 대대장 앞에서 전역신고를 하고 부대를 나섰다.
 집에선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 왔어요.”
 어머니가 밝게 웃었다.
 “아구구, 우리 아들. 고생했네. 고생했어.”
 등허리를 토닥이며 재하를 집안으로 들이는 어머니.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재하는 집안에 떠다니는 향기를 음미했다.
 “하, 맛있는 냄새.”
 집밥.
 김치찌개.
 방에서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재하가 식탁 앞에 앉아 물었다.
 “수현이는요?”
 “촬영 나갔지.”
 재하가 밥숟갈을 뜨며 물었다.
 “힘들어하진 않아요?”
 “응, 재밌어해. 따라다니는 내가 힘들지. 어려서 너랑 수현이랑 정현이랑 종종 상황극이니 연극이니 하고 놀았는데... 기억나니?”
 “그야 수현이가 가져온 대본 맞춰준 거죠.”
 어릴 적 그들에게 연기는 ‘놀이’였다.
 다섯 살배기부터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수현이 가져오는 대본이 인형이고 장난감이었다.
 그 무렵을 회상하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덕분에 감독님한테 칭찬도 많이 들었어. 엄마가 수현이 따라다닌다고 너 학교 다닐 때도 신경 참 못 썼는데...”
 말도 안 된다.
 만약 수현의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재하는 영락없는 고아신세가 됐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래. 넌 항상 의젓했지.”
 어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잠시 재하를 응시하던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뭐하려고? 복학?”
 재하는 평범한 인서울 대학에 재학 중이다. 대충 성적 맞춰서 영문과에 들어간 터라 딱히 전공이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이대로 대학을 졸업하면 지금까지처럼 평범하게 취업하고 월급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어쩌면 운이 좋아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런 인생, 어쩐지 시시하다.
 ‘다른 게 없을까?’
 재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 수현이처럼 일찌감치 자기 길을 찾는 사람들은 정말 행운아다. 어려서부터 묵묵히 동생을 지켜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늘 부러웠다.
 재하는 자기도 모르게 싹트려는 감정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아직 복학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일단은 이것저것 생각 좀 해보려고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뭘 해야 잘할 수 있을지...”
 어머니는 미소지었다.
 “그래, 어련히 잘할까.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항상 그랬듯이.
 부모님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
 ‘어련히 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때론 부담이 되기도 했다.
 “네.”
 재하는 계속 밥술을 떴다. 일단 먹자. 생각을 비우고 오랜만에 맛보는 집 밥에 집중했다. 맛있었다. 이제 막 전역했는데 당분간은 이 모든 것들을 즐기고 싶었다.
 
 저녁때쯤 수현이가 녹초가 돼서 돌아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예뻤다.
 “오빠!”
 재하를 발견한 수현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어. 왔어?”
 “뭐야 뭐야! 왜 말도 안 했어?”
 “네가 너무 바빠서 몰랐던 것 아닐까?”
 재하가 짓궂게 말하자 수현이 머쓱해졌다.
 “아, 미안... 그래도 달력이 써놨어! 오빠 군대 있을 때 편지도 많이 보냈고. 오빠가 답장을 안 했지.”
 눈을 흘긴다. 재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답장하다 이수현이 내 동생인 게 걸리면?”
 “그게 뭐?”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순진한 계집애...
 “선후임 등살에 못 살지. 학교 다닐 때도 그래서 숨긴 거고.”
 “내가 창피해?”
 “너무 자랑스러워서 탈이다. 나만 자랑스러우면 괜찮은데 다들 너무 큰 관심을 보이니까.”
 그제야 수현이 슬쩍 웃었다.
 “그건 나쁘지 않네.”
 “스타 가족의 숙명이랄까?”
 “그거 하지 말라니까.”
 얼굴을 찡그린 수현이 방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아버지가 짐을 산더미처럼 들고 들어왔다. 그는 짐을 받아드는 재하를 향해 말했다.
 “고생했다.”
 “아버지가 다녀오셨어요?”
 “오늘 휴가라서.”
 “피곤하시겠어요.”
 “뭔 놈에 대기를 그렇게 오래 하냐? 정말 이 짓도 만만치가 않더라.”
 소파 아래 앉아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쉬울 줄 알았어? 우리가 얼마나 고생인데.”
 “암, 암. 그렇고 말고.”
 수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나 연기 잘하지, 아빠?”
 “나 깜짝 놀랬다는 거 아니냐. 우리 딸 연기력이 아주... 추워죽겠는데도 불평 한 마디 안 하고. 프로야, 프로! 감독님도 아주 예뻐 죽더만.”
 “감독님이 워낙 시크해서 그렇지 나 좋아해.”
 수현이 밝게 웃으며 코를 훌쩍였다. 춥긴 추웠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고생한 건 금방 잊는다. 칭찬을 받으면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기분이 좋아진 수현이 재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빠, 이제 뭐하려고?”
 “다들 그걸 묻네.”
 “궁금하잖아. 인생 2막인데!”
 “뭐 그리 거창하게.”
 재하가 쓰게 웃었다.
 “고민해 봐야지.”
 “오빠도 연기 한 번 해봐. 옛날에 했을 땐 나보다 잘했던 것 같은데?”
 “내가 언제?”
 “기억 안 나? 나한테 영화도 추천 엄청 많이 해줬잖아.”
 “영화는 지금도 좋아해.”
 “연기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 대본 근처도 안 가봤지. 다 옛날 일이야.”
 그 말에 수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내가 연기 하고 있으니까 오빠 시작하면 도와줄 수 있는데.”
 애는 애다.
 “마음만 받을게.”
 어차피 수현이가 꽂아줘 봐야 얼마 못가 밑천 드러난다. 연기를 해본지가 까마득하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스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명색이 오빠란 놈이 동생 등골이나 빨아먹을 수는 없다.
 “그럼 오빠, 현장 한 번 놀러올래?”
 수현이 못내 아쉬운지 물었다.
 “현장?”
 “응. 나 연기하는 거 보여주고 싶어서.”
 이건 재밌겠는데?
 평소에도 영화를 즐겨 보니까.
 심지어 중학생 때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 1일 1영화를 했다.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것보다 혼자 심야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재하다.
 “현장이 어딘데?”
 “때마침 서울.”
 어머니도 거들었다.
 “우리끼리 데이트도 할 겸 좋겠다.”
 “난 출근해야 돼서.”
 아버지가 질색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발을 뺐다. 꼭 출근이 아니라도 안 갔을 거다. 오늘 현장 따라갔다가 호되게 고생한 모양이니까.
 “아쉽네. 당신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겠더라고. 우리 색시 호강시켜주려면 열심히 돈 벌어야지.”
 평소보다 비장미가 넘친다.
 피식 웃은 어머니가 수현에게 눈을 돌렸다.
 “네 아빠가 아주 학을 뗀다, 얘. 오늘 NG 많이 났어?”
 “난 아니고 현석 오빠가.”
 고현석.
 유명한 아역배우다.
 “고현석도 나와?”
 재하가 묻자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완전 양아치로. 평소 이미지랑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어.”
 “평소에 어떤데?”
 “완전 양아치. 대박이지.”
 “....”
 수현이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연예계 소식을 전해주었다. 연예인 성격도 알 수 있었다. 재하는 굳이 궁금하지 않았지만 듣다보면 재밌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어지간한 친동생 친오빠 관계에선 매일같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전투가 일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심지어 서로 아예 무관심한 경우도. 그것에 비하면 재하와 수현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뭐, 다른 점이 있다면 진짜 친남매지간은 아니지만... 한 지붕 아래서 친남매처럼 10년을 지냈으면 친남매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머니, 아버지, 수현이.
 모두 재하를 한 핏줄처럼 대해주었다.
 “엄마, 그날 운전은 제가 할게요.”
 어머니가 빙그레 웃었다.
 “아들 오니 좋네.”
 
 다음 날 촬영은 방배동에 위치한 한 놀이터에서 진행됐다. 한산한 밤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돌리며 관심을 보였다.
 촬영차를 줄줄이 세워놓고 장비를 설치하는 스태프들을 신기한 듯 응시하던 재하가 물었다.
 “이거 무슨 작품이에요?”
 “한국예대 연출과 졸업작품.”
 “에게? 대학 작품에 수현이가 나와요? 드라마에서 주인공 아역을 몇 번이나 했는데.”
 “방송은 방송이고 영화는 영화니까. 이번 졸업작품은 ‘충무로 기대주’로 손꼽히는 유찬범 감독 작품이기도 하고... 수현이도 영화 진출하고 싶어서 출연하기로 한 거야.”
 얼마나 수현이를 따라다니셨으면.
 어머니 대사만 보면 매니저 뺨쳤다.
 “방송이랑 영화랑 달라요?”
 “음. 업계가 분리된 느낌이지?”
 그때 수현이가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축구로 치면 영국리그랑 스페인리그의 차이?”
 “비유 죽이는데?”
 “오빠가 축구 좋아하니까.”
 수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남매라기보다 형제나 자매처럼 재하가 뭔가에 관심을 가지면 곧잘 따라하던 수현이다.
 피식 웃은 재하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닿은 곳.
 유찬범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원래 학생 역할 단역이랑 보출(보조출연) 여섯 명 섭외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명단을 흔들자 앞에 서있던 조연출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지금 장난해?”
 유찬범은 평소 부드러운 성정을 가졌지만 현장에만 들어서면 호랑이였다.
 특히 지금처럼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땐.
 성난 호랑이다.
 “죄송합니다...”
 연출부 조연출을 맡고 있는 후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한 명 차인데...’ 라는 말 따위는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유찬범이 얼마나 완벽주의인지 알고 있었기에, 작은 오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엑스트라 한 명.”
 유찬범이 뜨거운 안광을 쏟아내며 말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
 “...아닙니다.”
 “명화에 점 하나 잘못 찍으면 별 볼일 없는 그림 되는 거야. 편하게 즐기는 건 관객이지 우리까지 편하게 찍으면 되나?”
 “....”
 “디테일이 전체를 만든다. 그런 인식도 없이 영화 찍는 놈 필요 없어. 넌 빠져라. 영민이가 대신 조연출로 들어와.”
 “예, 선배님.”
 김영민이 앞으로 나서며 눈을 빛냈다. 방금 조연출에서 잘려나간 후배 스태프는 고개를 숙인 채 현장을 떠났다.
 유찬범 감독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졸업작품. 상업영화 입봉작에 이름 올릴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찬범은 영영 그를 부르지 않을 터였다.
 “한 명 채워야지.”
 유찬범이 중얼거렸다. 문제가 생기면 후회하기보단 해결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 주위를 훑으며 등잔 밑에서 대안을 찾고자 했다. 그런 그때 무심코 차에서 내리는 아역배우 이수현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짧게 빛났다.
 “저거 누구야?”
 수현의 앞.
 훤칠한 비주얼의 남자가 서있었다.

댓글(35)

독GO    
전설의 귀환~^^기대할게요~
2019.05.18 22:15
블루티풀    
오오 작가님 새로운작품 기대합니다!
2019.05.18 22:51
한사람은    
저거누구야 ????? 원래 이렇게 말하나요? 싸가지 밥말아드셧구만
2019.05.23 14:36
CENTER    
작가님 신작축하드립니다 쪽지가 안왔어욧!!ㅋ
2019.05.26 14:14
ol**    
법의 제왕은 그냥 접으신건가여?
2019.05.28 19:08
10000LAB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작품 끝나고 차기작으로 구상 중입니다! __
2019.05.28 19:30
musado0105    
잘 보고 갑니다. 건 필하세요^^*
2019.05.31 09:57
규염객    
감독이 아직 예대 다니나보네요.
2019.06.02 02:31
OLDBOY    
잘 보고 있습니다.
2019.06.05 21:20
띨빵큐라    
커피브랜드와는 무슨관계시지 ㅋ
2019.06.0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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