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고급 아파트 펜트하우스엔 반겨주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집어 TV를 켠 시우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화면 속 열띤 토론에 시우의 미간은 급격히 좁아졌다.
-메이저리그 개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 팀을 주목해야 할까요?
-아메리칸리그에선 레이스와 에인절스, 내셔널리그에선 카디널스와 파드리스라고 봅니다. 팜 랭킹 상위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좋은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레이스와 파드리스는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군요.
-30개 팀 중에서 6개 팀이 아직 우승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메이저리그가 쉽지 않다는 거겠지요.
한숨을 길게 내쉬고 TV를 껐다.
큰 거실은 다시 정적만이 흘렀다. 눈을 감고 소파에 고개를 젖힌 시우의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시우.
오늘로 마흔 살의 나이.
20대 후반, 우연한 기회로 투자한 가상화폐로 수십억 원을 손에 쥐었다.
더 오를 거라는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고점에서 손을 털었다.
그리고 이어진 부동산과 해외선물거래는 시우를 현금만 천억이 넘는 재력가로 만들어 줬다.
운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 한 번의 투자실패도 없었다.
“오늘이 그날인가?”
처음엔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개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자의 문외한이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자 집 전체로 싸늘한 한기가 퍼졌다.
후우···.
입으로 허연 입김을 내뿜는 찰나의 순간, 시우의 앞으로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나타났다.
슬쩍 현관을 바라봤지만, 현관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있었다.
“오랜만이야. 이시우.”
“역시 개꿈은 아니었어.”
“이런, 졸지에 개가 될뻔했네.”
능글거리는 상대가 두렵다는 생각은 없었다.
웃음을 거두고 숨을 크게 내쉰 시우는 두려움에 떨던 그때와 달리 고개를 들어 상대를 똑바로 바라봤다.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앞의 사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그대로의 모습, 세월은 이 사내와는 무관해 보였다.
벌벌 떨었던 첫 만남의 공포와 달리 시우는 차분했다.
“계약을 지키라고 찾아온 거겠지?”
“뭐 그렇지. 선택은 네가 한 거잖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났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2년 만에 귀국한 시우를 기다리는 건 좌절감뿐이었다.
술과 여자,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릴 때 앞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리고 단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만들어 줄게. 너는 40세가 되는 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돼.>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뭐가 되었건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은 시우 자신이었다.
어떤 선택인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게 찝찝했지만, 그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던데, 혹시 후회하는 거야?”
사내의 비아냥거림에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후회해봐야 소용없잖아.”
“윽. 뼈를 세게 때리네.”
정곡을 찌르는 시우의 말에 사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사내의 과한 몸짓에 시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최고로 살아본 것에 만족해. 후회는 없어.”
“오호. 오늘 죽는다 해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시우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조건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떤 미친놈이 죽는 걸 선택해?”
“설마 죽으라고 하겠어? 농담이니까 긴장하진 마.”
“빨리 끝내자고. 뭘 선택하면 되는 거야?”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숨을 짧게 내뱉은 시우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사내의 말을 잘랐다.
시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사내는 미소를 거두고 시우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번 돈으로 앞으로 쭉 잘 먹고 잘살아.”
“뭐?”
“지금 가진 돈이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잖아. 이게 첫 번째 선택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투자계에선 미다스의 손이라는 칭송을 듣지만, 그게 자신의 능력이 아니란 걸 시우는 모르지 않았다.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도 축이 빠지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모든 자금은 투자로 묶여있는 상태, 줄 수 있으면 뺏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첫 번째 선택을 덥석 물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치사하게 준 걸 다 뺏지는 않아. 그렇다고 지금처럼 도와줄 생각도 없지만. 할 수 있겠어?”
놈에게 생각을 읽혔다.
당장 투자한 자금을 모두 거둬들이고 사업을 모두 접기까진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천억이란 돈은 휴지가 될 게 뻔하다.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 그게 마음에 걸렸다.
“두 번째 선택은 뭔데?”
“가진 돈을 다 포기하겠다는 거야?”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거 같아서.”
첫 번째 미끼를 물지 않아서인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 사내의 미소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시우의 재촉에 사내는 다시 생글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2005년으로 돌아가는 게 두 번째 선택이야.”
“뭘 돌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섰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시우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이시우. 우투우타, 신장 193cm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고구속 152km, 평균구속 145km의 파이어볼러. 주무기 포심에 체인지업과 커브까지 습득. 한국 고교야구와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을 평정,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 스카우트들의 러브콜 쇄도.”
“뭐 하자는 거야?”
시우의 반발에도 사내는 꿈쩍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KBO의 설득을 뿌리치고 미국 진출 결심. 양키스, 다저스, 매리너스, 데블레이스와 물밑 접촉 후 양키스와 계약금 220만 불에 마이너리그 계약 체결.”
“그만해!”
“더블A까지 올랐지만, 폼이 오르지 않고 고질적인 컨트롤 문제로 구단의 관심을 받지 못함. 슬라이더 위주의 무리한 투구로 어깨에 심각한 부상까지 겹치면서 2년 만에 팀에서 방출.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9년 동안 폐인으로 산 것은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사내를 노려보는 시우의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과거였다. 그런 시우에게 사내는 쐐기를 박았다.
“자만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 너 이상으로 날고기는 놈들이 수두룩했으니까. 자만심이 절망으로 변하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던 거고.”
“할 말 다 끝난 거야?”
“야구 시즌만 돌아오면 매일 술을 마시는 이유가 뭐야?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서가 아닌가? 돈은 현실이고, 야구는 네 꿈이지. 현실과 꿈, 선택은 당연히 네 몫이야.”
시우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도 술을 한잔 걸치면 혼자서 실내야구장을 찾는다.
그건 메이저리거로 성공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
돈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슴 한구석에 맺힌 허전함은 커졌다.
메이저리거.
다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진 꿈, 지금도 비만 오면 쑤시는 어깨를 시우는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다시 돌아간다면···.’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눈앞에서 놓쳤던 꿈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아 놓은 막대한 돈이 시우의 발목을 잡았다.
‘현실과 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잔인한 놈.’
시우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메이저리거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순간, 시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까지 나한테 왜 이런 호의를 베푼 거지?”
“선택하면 말해줄게. 이젠 시간이 별로 없어.”
작은 틈조차 주지 않는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놈이 원하는 건 절대 첫 번째 선택이 아니다.
줄 수 있으면 뺏을 수도 있다.
10년 넘게 돈맛을 보여준 건 다시 뺏을 때의 쾌감을 높이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역시 그 방법밖에는.’
시우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원했던 꿈, 어마어마한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아쉬움.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는 앞에 선 사내를 쳐다봤다.
“두 번째.”
“오호. 번 돈을 다 날리는 건데 후회 안 해?”
“돈은 다시 벌면 되거든.”
시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굵직했던 거래를 잊을 정도로 나쁜 머리는 아니었다.
야구라는 꿈을 다시 좇으면서 돈이라는 현실도 놓치지 않는 선택,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시우는 두 번째 조건을 선택했다.
그건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내는 씩 웃고는 양어깨를 슬쩍 올렸다 내렸다.
“나쁜 머리는 아니네.”
“이제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왜 나야?”
“나도 널 선택하기 위해 오랫동안 개고생을 했어. 그러니 너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알았으니까, 왜 나를 선택한 건지 말하라고. 아···.”
사내의 손이 흥분한 시우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자 시우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흰자를 드러내고 파르르 몸을 떠는 시우를 사내는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난 너한테 올인했어.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야.”
서서히 투명해지는 사내의 몸이 발부터 천천히 사라졌다.
동시에 시우의 오른쪽 어깨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거실엔 정신을 놓고 파르르 몸을 떠는 시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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