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그날 이후.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인류가 쌓은 문명은 빛을 잃었으며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등장하니, 인간관계에 있어 양심과 윤리를 따지는 일이 적어졌다.
국가 체제는 붕괴하고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법이 강제력을 잃으면서, 자연스레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었고 인권은 바닥에 떨어졌다.
*
1. 서바이벌 시작
-2020년 4월 4일 강릉시 옥천동 H마트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카트를 밀었다.
매주 토요일은 마트에서 장을 보는 날이다.
토요일의 마트는 어느 시간대나 붐비기 마련이지만, 좀처럼 집 밖을 나설 일이 없는 직업을 가진지라 이때만이라도 사람 구경하는 셈 치고 번잡스런 마트를 누볐다.
연애도,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내가 홀로 자취생활을 하며 누리는 기쁨이라곤 미식뿐이다.
덕분에 카트엔 각종 식료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4인 가족용 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양이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마지막으로 카트에 간식거리까지 때려 넣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술 더 안 사도 되겠지?”
“이 이상 먹으면 죽어, 병신아.”
계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옆을 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남녀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좋을 때네.’
내 나이 서른.
사회에선 많다고 볼 수 없는 나이지만,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에 비하면 아저씨인 건 분명하다.
덕분에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그들이 조금이나마 부러웠다.
‘응?’
그런데 문뜩 대학생들 사이에서 겉도는 듯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이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필 정도로 굉장한 미인이었으나, 마치 혼자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중간중간 여학생들이 조심스레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학교 선배거나 복학생 또는 재수생인 모양이다.
그때, 우연히 해당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흠···.”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마치 당신을 쳐다본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상품을 보고 있었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 여자 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렸고,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상품들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결코, 모쏠이라 이성에게 쫀 것이 아니다.
괜한 오해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띡!
마트 직원의 바코드 찍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계산이 완료된 물건을 카트에 담아 박스 포장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척. 척. 척.
블록게임처럼 물건을 박스 안에 말끔하게 정리하는 솜씨는 프로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좋아.’
아무도 관심 안 가질 일에 혼자 만족감을 표하고는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면 한 주의 가장 큰 행사를 끝마치게 된다.
그런데···.
“잠시만요!”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확 좁아진 공간.
누군가 했더니, 아까 그 녀석들이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대학생들.
‘이 새끼 보소?’
엘리베이터를 전세를 낸 것도 아니고, 누구나가 이용 가능한 공간인 건 당연하지만, 한 남학생이 내 카트를 손으로 밀며 공간을 확보한 바람에 나는 벽과 카트 손잡이 사이에 끼인 형태가 되어버렸다.
순간 짜증이 확 솟구쳐 카트를 밀고 있는 남학생에게 한마디 하려 했다.
“저분 끼인 거 안 보여? 왜 남의 카트를 미는 거야? 어이없는 새끼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아까 눈이 마주쳤던 여학생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려 퍼졌다.
덕분에 시끌벅적하던 공간은 침묵에 물들고 나조차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녀의 지적에 신나게 카트를 밀던 녀석이 무안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착각일까?
남학생의 눈가가 촉촉해진 느낌이 든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내가 관심을 표하던 상대에게 이런 독설을 들으면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말 것이다.
“네···.”
짜증이 동정심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그녀 덕분에 나는 불편함에서 벗어났고 조용히 주차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저거.”
하지만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주차장엔 더욱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스르륵.
그건 ‘푸른 빛 가루’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허···.”
당혹스럽게도 주차장의 모든 차량이 영문모를 푸른 빛 가루에 뒤덮여 분해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직 할부가 많이 남은 내 애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쿵!
너무도 기이한 장면에 한 남학생이 손에 들린 박스를 바닥에 떨구고, 나도 끌고 있던 카트를 놓쳤다.
-꿀꺽.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이어서 내 손을 벗어나 혼자 굴러가던 카트도 상품째로 푸른빛이 되어 증발해버렸다.
“도망쳐.”
무심코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짧은 대사.
“으아악!”
그 말은 기폭제가 되어 모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왔던 길을 내달렸다.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된 지하 주차장.
다른 고객들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때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재난 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 옆에 마련된 비상구의 문을 열었고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내 뒤를 따랐다.
-타타타닥!
생존 본능이란 걸까?
평소엔 운동 부족으로 조그마한 언덕을 올라도 숨이 찼지만, 지금은 한걸음에 두세 계단씩 쉬지 않고 뛰어올랐다.
‘대체 이게 뭐야!’
지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비상식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잠시 후 1층에 도착한 나는 인파를 뚫고 마트 건물을 나섰다.
“허···.”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푸른빛에 물든 도시와.
[시스템 조율 중.]
하늘을 가득 채운 이질적인 문자였다.
‘꿈을 꾸는 건가?’
혹시 싶어서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릿한 통증이 밀려올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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