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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황도제 1

2019.06.26 조회 4,140 추천 24


 검황도제 1
 
 서장(序章)
 
 
 나는 검황(劍皇)이다.
 세상에 아는 이 거의 없지만 내가 검황이란 건 틀림없는 진실이다.
 어쨌든 나는 검황이다.
 나 또한 자신이 검황이라는 사실이 낯 간지럽다.
 
 내 아버지는 도적이었다.
 녹림의 하급 무사였다.
 허리에 칼 차고 으스대긴 했지만 평생 단 한 사람도 죽여본 적 없는 보잘것없는 삼류 무사였다.
 이조차 어머니께서 해준 말일 뿐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부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사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돼 버린 운명대로 순응해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도적이었고 그 아버지도 도적이었다.
 참 너저분한 혈통이다.
 그런 내가 검황이 되었다.
 
 나는 바보였다.
 다섯 살이 돼서야 간신히 말문이 트인, 세상에 보기 드문 둔재였다.
 백치라고 보아도 무방한 덩치만 큰 바보였다.
 조막만 한 애들한테 코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주먹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겁쟁이였다.
 
 나는 한 세대에 하나둘 태어날까 말까 한 희귀한 절맥을 타고났다.
 그렇게 백치로 살다가 스무 살을 못 넘기고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사부를 만나면서 삶은 연장될 수 있었다.
 사부 역시 나와 같은 체질을 타고났고 사부의 사부를 만났기 때문에 검황이 되었다고 한다.
 초대 검황이 남긴 무공은 오직 이 희귀한 절맥을 타고난 사람만이 익힐 수 있다.
 그 덕분에 나는 검황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이 검황이란 사실이 잘 실감 되지 않는다.
 사부는 역대의 검황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명이 다했음을 직감하자 검황총(劍皇塚)으로 떠나며 미욱한 제자에게 유언 삼아 한마디를 남겼다.
 
 검황은 하늘 아래 가장 강하며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 때문에 가장 고독한 삶을 살다 가야 한다. 너는 평생 악도(惡道)를 징계하고 너 자신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너와 체질이 같은 아이를 거둬 검황으로 삼은 뒤에야 검황이란 이름이 주는 부담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행운을 비마.
 
 젠장, 사부 입가에 내내 감돌던 의미심장한 미소의 본색을 그때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사부께서 남긴 유지 중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이 있다.
 검황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며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세상 천지에 나 하나뿐이라는 고독감만큼 사람을 지치고 병들게 하는 것이 또 있겠는가.
 결혼을 해서도 안 되고 무림에 관여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검황이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거나 알려서도 안 된다.
 가진 힘을 남용해서도, 불의와 부정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반성을 미덕으로 삼아 끊임없이 수련에 정진해야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심한 억지가 어디 있겠는가.
 검황이란 신분은 축복이 아니라 천형의 굴레나 다름없었다.
 
 다 좋다. 하라면 까짓 거 못할 것도 없다. 백번 양보해서 납득할 수도 있다. 어차피 죽었어야 할 삶이 연장되었으니 채무 변제 정도로 여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지금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계율이 있었다.
 혼인하지 마라.
 피가 펄펄 끓어올라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청춘에게 이보다 더 절망적인 계율이 어디 있겠는가. 왜 결혼하지 말라는 걸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반발심이 줄어들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억지를 계율이랍시고 만들어 둔 이유도 기가 찬다. 검황은 약점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나. 약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검황의 직무 수행을 위해 정인이 생겨도 안 되고 피붙이는 더더군다나 안 된다. 아주 고약한 계율이 아닐 수 없다.
 빌어먹을!
 그런데 나를 더 황당하게 만드는 건 역대 검황들 중에 이 말도 안 되는 계율을 어긴 이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검황이 이어질 수 있었다며 나 역시 그 계율을 지키리라고, 사부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노인네의 신념은 너무도 굳고 단단한 것이어서 좀체 그 앞에서 말대꾸를 할 수조차 없었다. 하는 데까지 애써보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서 빨리 후계를 이어주고 이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한 세대에 고작 하나둘 태어날까 말까 한 희귀한 절맥을 마음먹었다고 뚝딱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하가 비좁다고 뒤지고 다녀야 한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사, 청춘이 다 가기 전에 제자를 거둘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만약 지금 이 심정을 고스란히 안은 채 사부에게 선택되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 스스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단호히 외칠 것이다.
 검황이 싫어요, 라고.
 
 
 1장 의원(醫員) 만취공(萬翠空)
 
 
 살을 가르고 몸속으로 이물질이 들어왔다 나간 느낌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휘륜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낯선 감정에 몰입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휘륜(徽輪)은 사력을 다했다.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차례로 베어 넘겼다. 단숨에 목을 자르고 배를 찌르고 사지를 절단했다.
 죽여도, 죽여도 이놈들은 줄어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구멍 난 꿀단지를 향해 꾸역꾸역 몰려드는 개미떼들 같다. 질릴 정도다.
 여기저기 작지 않은 상처들이 생기고 더해져 시간이 갈수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간다. 조금씩 흘러나온 피가 어느새 온몸을 적실 정도가 됐다. 피칠갑을 한 채 양손에 하나씩 든 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는 휘륜의 모습은 이곳이 지옥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보는 이들을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지혈하고 숨을 돌리는 그 잠깐 동안, 본적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각종 기형 병기들과 암기들이 새까맣게 주변을 덮어버렸다.
 내력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경제적으로 싸운다고 해도 이런 식이라면 하루를 더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점차 손에 든 병기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처음 겪어보는 위기감에 휘륜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
 
 휘륜은 전력을 다해 경공술을 펼쳤다. 여유가 있다면 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하며 도주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경황이 없었다. 거리를 벌리지 못하면 또다시 적도들에 둘러싸여 끝없는 소모전에 진력을 낭비해야 한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놔야 그나마 운기할 짬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꼴 보기 싫던 천선부(天仙府)의 늙은이들이 지금 이 순간만은 간절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딱 그 짝이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휘륜인들 어찌 알았으리요.
 산 하나를 막 넘어 골짜기로 진입하려는 순간 휘륜의 눈앞으로 한 사람이 귀신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신비인은 나타난 순간부터 휘륜을 향해 다짜고짜 맹공을 퍼부었다.
 휘륜은 긴장했다.
 이놈은 다르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강했다.
 자신을 능히 잡아둘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또 한 놈이 더 있었다.
 
 둘의 협공은 지금껏 휘륜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한 명씩 상대한다면 넉넉잡고 백 초식 안에 거꾸러뜨릴 수 있겠지만 둘의 협공은 당대 검황인 휘륜으로서도 벅찼다. 더군다나 현재의 휘륜은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데다 내력 소모가 극심해 최대치로 잡아도 쓸 수 있는 공력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가슴 아래쪽이 뜨끔했다. 이번에는 좀 큰 상처가 생긴 모양이다. 몸 안으로 한 놈의 칼이 쑤시고 들어왔다. 호신강기를 뚫고 몸에 구멍을 뚫어버리다니,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아프다. 눈물이 찔끔 나고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팠다.
 
 ***
 
 죽음을 재촉하는 듯, 시간은 점차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눈앞이 점차 가물가물,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휘륜은 뛰었다. 뛸 수 없으면 걸었고 걸을 수 없으면 굴러서라도 앞으로 전진했다.
 휘륜은 땅을 박박 기고 있었다. 한 뼘일지언정 더 가야만 했다. 멈추면 죽는다. 그 생각이 휘륜을 지배하고 있었다. 절대 못 벗어날 것 같았던 두 놈의 협공을 견뎌내고 기어코 살아남았다.
 한 놈은 더 이상 추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고 다른 한 놈 역시 내상이 심해 물러나는 걸 확인했다. 주어진 시간적 여유는 넉넉하게 잡아도 고작 한 시진 안팎일 것이다.
 여길 벗어나야 했다. 이런 순간에 적들과 조우한다면 십중팔구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렇게 죽기는 싫었다.
 ‘하늘 아래 최강이라는 검황이······ 고작 며칠 싸웠다고 두 놈을 상대 못 하고 이런 꼴이 되다니. 사부님이 이런 내 꼴을 보셨다면 뭐라 하실 것인가? 마교 놈들을 상대하면서 방심하다니······ 이런 꼴이 돼도 싸지.’
 휘륜은 점차 흐려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뭔가 억울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안으로 비릿한 눈물이 흘러들어온 것은. 찝찌름한 그 맛이 잠시나마 정신을 맑게 해줬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았다. 내 대에서 검황의 맥이 끊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륜아, 이 한심한 놈아. 이렇게 죽자고 그렇게 기를 쓰고 살아온 건 아니지 않은가. 힘을 내라. 넌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휘륜의 힘없이 감기는 눈앞으로 사부의 인자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이목구비조차 가물가물한 부모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휘륜이 태어나자 아버지는 칼을 놓아버렸다. 대를 이어 도적으로 살아왔던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깊은 산에서 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벗겨 내다 파는 사냥꾼이 되었고 사냥이 잘 안될 때는 땔감을 팔아 세 식구를 먹여 살렸다.
 그러나 한번 사파인은 영원한 사파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뒤에는 늘 그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정파인들은 끈질겼다. 손에서 칼을 놓아버린 아버지에게 그들은 모질었다. 매질을 당하고 간신히 풀려나긴 했지만 그 뒤로 거동조차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대신 세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휘륜의 기억에는 아버지가 일 년여 정도를 더 앓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그런 모자 앞에 사부가 나타났다. 그때 어머니는 위기감을 느끼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피난 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주변 정파인들 거동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어린 휘륜도 그런 어머니의 초조감과 불안감을 알아챘을 정도로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갔다.
 휘륜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꿈인 것 같았다. 꿈에서 만난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무척 행복해 보였다. 두 분은 칼 대신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어린 휘륜을 향해 환히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계셨다.
 
 ***
 
 만취공(萬翠空)은 자신의 팔십 평생, 이렇게 재수 없었던 날이 또 있었나 싶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산토끼 한 마리를 잡아다가 진흙을 발라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귀한 손님이 올 때나 조금 내놓는, 삼십 년이나 숙성시킨 미주(美酒)와 함께 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오랜만의 기름진 음식에 놀란 탓인지 단박에 체해버렸고 괴로운 나머지 결국 그 아까운 걸 모조리 토해놓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평소보다는 이르게 잠을 청했는데 온갖 해괴한 악몽에 시달리다가 가위에 눌리기까지 했다. 별일이다 싶었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눈을 감아봤지만 그 뒤로는 한숨도 더 잘 수가 없었다.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거늘 아랫배가 살살 아파 뒷간을 갔는데 완치된 지 이십 년이 넘은 치질이 다시 도져 혈변을 보고야 말았다. 오리걸음으로 뒤뚱거리며 밖으로 나와 앉아 있자니 새벽부터 까마귀 떼가 몰려와 주변에서 시끄럽게 울어댄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나 애써 털어내며 약초나 캐고자 인근을 뒤져보려고 집을 나섰다.
 
 나선 길에 막(莫)노인을 만났다. 두 사람은 오랜 지기였다.
 한 사람은 의원이고 한 사람은 무림에서 명성을 쌓은 전대의 은거 고수였지만 두 사람은 처음 대면한 날부터 죽이 맞아 금세 친해졌다.
 둘 다 정붙이고 살 피붙이 하나 없는 처지였기에 서로를 의지하면서 지냈다.
 만취공이 약초를 캐러 나선 길이라며 운을 떼니 막노인은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면서 서고(書庫) 정리를 해주겠다고 나선 꼴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지만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취공은 든든했다.
 수 시진을 뒤졌는데도 약초는커녕 그 흔한 더덕이나 버섯, 산나물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별스럽다. 평소에도 두 사람은 희귀한 약초를 캐고야 말겠다는 일념 따위는 제쳐놓고 산중 경치에 넋을 놓으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허탕을 칠만도 했다.
 이만 돌아가자며 조르던 막노인이 걸레 조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처참하게 찢긴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선 만취공과 막노인은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오 척 단구의 자그마한 체구에 단추 구멍보다 작은 눈과 주먹만 한 매부리코. 조갯살 두 개를 포개놓은 것 같은 두툼한 입술을 지닌, 외양은 보잘것없는 만취공이었지만 천하에 이름 높은 이 시대 최고의 신의를 키워냈을 정도로 의술에는 비할 바 없이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었다.
 막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런 외진 산중에서 저리 험한 꼴로 저승문을 넘은 시체를 보다니 참으로 별일이로군. 산짐승에게 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껏 별의별 환자와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니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철석간담(鐵石肝膽)의 만취공도 괴인의 상처에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통 사람 같으면 골백번 숨이 끊어지고도 족할 중상을 입고도 아직 깔딱깔딱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머리 검은 짐승에게 당한 거로구먼. 자네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네만 사람 죽이는 칼부림을 두고 예(禮)니 학(學)이니 도(道)니 지껄여대는 종자들을 보자면 의원의 입장에서 토악질이 다 나올 지경이지.”
 아무리 격의 없는 친구 사이라지만 평생 무공 일도에 매진해 온, 무림인인 막노인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괘씸하게 여길 법도 한데 막노인은 만취공의 발언을 그다지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막노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아직 숨이 멎진 않았군. 어떻게,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상처가 전신 곳곳에 가득 퍼져 있었지만 사발만 한 구멍이 가슴 한 치 아래에 뻥 뚫려 있었는데 그 상처가 치명적이었다. 피 색깔이 거무죽죽한 걸 보고 만취공은 고개를 저었다. 진맥을 해볼 것도 없었다. 맥이 뛰고 있다고는 하지만 산 사람으로 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을 생으로 묻어줄 수 없는 노릇이라 가만 지켜보던 만취공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진맥을 해보았다. 반 식경 가까이 맥을 짚어보던 만취공은 시체나 다름없는 사내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대고 이리저리 헤집어보았다. 놀랍게도 내부는 깨끗했다. 장기 손상이 전혀 없었다.
 “허. 참으로 희귀한 일이로군. 이런 상처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도 놀라운데 이 정도로 큰 상처가 났다면 응당 몸 안을 휘저어놓았을 법한데 피부만 갈라지고 속은 멀쩡하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
 막노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래? 한번 보세.”
 상처 부위를 이리저리 만져보던 막노인이 침음을 흘렸다.
 “으음. 아무래도 이놈을 옮겨야겠네.”
 “살리든 죽이든 그래야겠지?”
 막노인이 한 말을 만취공은 달리 해석했다. 막노인이 옮겨야겠다고 한 건 정체 모를 괴인의 몸에 난 상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수는 몸에 난 상처만 보고도 가해자의 무공 수위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막노인은 괴인의 몸에 난 상처가 그 자신으로서도 감당하지 못할 고수의 솜씨임을 알아보았고 그 때문에 살짝 긴장하는 기색까지 내비친 것이다.
 만취공은 벌어진 상처 부위를 실로 꿰매고 금창약을 바르고 주변에 시침해 지혈했다. 사내를 들쳐업은 건 막노인이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만취공의 집이었다. 사내의 체구는 무척이나 커서 자그마치 육 척 오 촌(1미터 95센티미터)은 가뿐하게 넘을 것 같았다. 만약 막노인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오 척 간신히 넘는 만취공으로서는 이 큰 사내를 집까지 업고 올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육 척이 넘는 당당한 체구에 무공을 익힌 탓인지 팔십 훌쩍 넘은 노인네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름 위를 나는 듯 발걸음도 가벼운 막노인을 보며 만취공은 내심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내 사내를 방에 들이고 물을 끓여서 깨끗한 천으로 전신을 닦아냈다. 피에 젖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말끔하게 닦아내고 보니 얼굴이 훤한 것이 사내다운 풍모가 엿보였다.
 만취공은 두 손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사내의 상세를 돌보기 시작했다.
 
 ***
 
 중원에서 특별히 신성시되고 있는 다섯 개의 산. 즉, 오악(五岳) 중에 가운데 있다 하여 중악으로 불리는 숭산(嵩山)에는 소림사(少林寺)가 있다. 그 숭산에서 가장 유명한 봉우리는 소실봉(少室峰)이다. 유명한 이유는 소림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소실봉이 손에 잡힐 듯 멀지 않은 태실봉(太室峰)에는 유난히 귀한 약초가 많아 약곡(藥谷)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약곡은 과거 약선으로 숭앙받았던 태허자가 거처를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질뿐, 그 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약곡에 귀한 약초가 많다는 것 역시 문헌상의 기록일 뿐, 요즘은 약초꾼조차 찾지 않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약곡 오른편은 험준한 바위들이 줄지어 서서 인사라도 하듯 안쪽으로 굽어 있었고, 왼편은 다소 완만하지만 숲이 우거져 있어 낮에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태실봉으로 향하는 지류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약곡에 두 노인이 따스한 양광을 받으며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삼백여 평의 초지 위에 허름한 모옥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고 두 노인은 집 앞 바위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봄을 재촉하는 따뜻한 기운이 천지사방에 충만하지만 깊은 산중인 탓에 태양이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소실봉 소림사에 기거하고 있는 막(莫)노인은 만취공의 십오 년 지기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만취공에 비해 막노인은 육 척이나 되는 거구였다. 떡 벌어진 어깨에 곰과 같은 허리와 차돌 같이 단단한 근육의 소유자였다. 특히 두 눈 사이를 가르고 지나간 큼지막한 흉터가 그의 인상을 사납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소림사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였다. 침입한 적도들을 감당하기 벅찼는지 평상시에는 모습조차 볼 수 없었던 전대의 고승들이 가세해 손을 쓰고 나서야 간신히 외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미 꽤 많은 수의 승려들이 죽거나 다친 이후였다. 소림사의 고승과 함께 나타나 활약을 한 이가 바로 막노인이었다.
 소림사 승려들은 막노인을 그저 불심이 깊은 노인쯤으로 여겼을 따름이었다. 그의 신분을 제대로 아는 이는 소림사의 방장을 비롯한 몇 명의 고승들뿐이었다.
 소림사에도 의술에 조예가 깊은 승려들이 차고 넘쳤지만 방장은 굳이 만취공을 모셔오게 해 부상 정도가 심각한 승려들을 치료하게 했다. 방장의 요청에 소림사를 방문한 만취공은 의승들이 도저히 살릴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중상자들까지 모조리 살려냈다. 그때부터 소림사 승려들은 만취공을 신의라고 부르며 공경했다. 당시 그 장면을 목도한 막노인의 충격도 꽤 큰 것이었다.
 험한 강호를 행도하는 강호인이라면 원치 않아도 잦은 분란에 연루되기 일쑤였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살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솜씨 좋은 의원을 알아두고 왕래를 하는 일은 제 생명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그 어떤 의원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만취공에게 막노인은 감탄을 넘어 존경의 념을 품기에 이른다.
 그 뒤로부터 막노인은 틈만 나면 소림사를 빠져나와 만취공이 머물고 있는 태실봉의 모옥을 찾아오곤 했다. 막노인은 만취공을 찾아올 때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산사에 머무는 노인이 어디서 구했는지 반드시 술과 고기를 들고 왔고 두어 시진 환담을 나누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벌써 십오 성상이 흐른 것이다.
 “만가야,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이번에는 틀린 거 같다. 살려내기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마음을 비워라. 세상에는 애써도 안 되는 일이 수두룩하지 않더냐.”
 만취공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막노인은 별 대꾸 없는 만취공을 슬쩍 흘겨보며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복은 있는 놈이야. 인세에 보기 드문 삼백 년 넘은 산삼을 꿀꺽했으니 호강도 그런 호강이 또 있을까. 저승길 노잣돈 대신으로 준 셈인가. 그러게 진작 술이나 담그자고 할 때 내 말대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침을 삼키며 아까워하는 막노인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고 만취공은 진심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대꾸하는 음성에 노기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사람 목숨 살리는 데 삼백 년 아니라 천 년 된 산삼인들 아까울 게 무어냐. 그리고 아직은 모른다. 속단하긴 일러. 살았다 할 수도 없지만 죽은 것도 아니다. 이놈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게다가 본신의 잠력을 모조리 끌어내 쓰는 바람에 스스로 상세를 치료할 여력이 부족해서 그 꼴로 우리 눈에 발견된 게지. 피가 그 정도로 빠져나갔다면 바로 죽었어야 마땅한 일이거늘 지금껏 숨이 붙어 있는 것도 기적이다. 곧잘 사람의 의지란 게 상식 밖의 기적을 불러오는 일은 허다하지 않더냐. 어제까지만 해도 비관적이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막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놈이 치료를 시작한 지 열흘이 훌쩍 지났다. 아직 맥도 제대로 잡아놓지 못했는데 살아날 수 있다고 보느냐? 애당초 시작도 말았어야 할 놈을 네놈이 붙잡고 늘어지는 탓에 진즉 명부에 이름을 올렸어야 할 목숨이 아직도 이승에 매여 있거늘, 편하게 보내주는 게 낫지 싶다.”
 “제 놈이 살 운명이면 살 것이고 죽을 운명이면 죽겠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니 이제 지켜볼밖에. 스스로 맥을 놓고 포기하지 않으니 난들 어쩌겠느냐. 의원은 사람의 몸에 난 병을 고칠 뿐이지, 삶과 죽음에까지 관여하지는 못한다.”
 사실 막노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죽은 듯 누워 있는 청년에 대한 관심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불가사의한 놈이야. 몸에 난 상처들만 해도 그래. 단순히 병기에 의한 상처들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 나이 먹도록 그 정도로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상처를 본 적이 없다. 상처 부위가 너무도 깨끗해. 절세 고수들이라고 추앙받는 검왕들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자연스럽고 완벽한 상처 자국을 만들지는 못할 거다.”
 시체나 다름없는 청년의 전신을 깨끗하게 닦아낸 후 만취공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 위험한 놈을 발견했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상처의 크기에 비해 절단면이 너무 깨끗해. 어느 정도의 능력자기에 저런 상처를 몸에 새길 수 있을까? 악운을 불러올 수도 있는 놈이야. 괜히 엉뚱한 일에 연루돼 네놈에게 화가 미칠까, 난 그게 걱정이다.”
 막노인의 말처럼 만취공도 그런 불안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살 만큼 산 이 늙은 목숨에 연연해 나더러 살아 있는 생목숨을 모른척하고 내다 버리라는 거냐!”
 만취공이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막노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이왕이면 조심하란 얘기지.”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라. 난 지금껏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일신에 미칠 화를 따져 모른 척해본 적 없다.”
 “그럼 알지, 잘 알고말고. 네놈이 천고에 드문 의인이라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또 내가 알지 않느냐. 헐헐. 대쪽 같으니라고. 뭔 농담을 못하겠네.”
 만취공은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는 모옥으로 발길을 향했다. 멀어져가는 만취공을 바라보며 막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성질머리 하고는. 제 놈 걱정해서 한 소린데 팩 토라져서 성깔을 부리기는.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 별난 놈이야.”
 
 만취공의 손에는 약탕기와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약탕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탕약의 색은 독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새까맣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막노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죽은 듯 누워 있는 청년의 상체를 살짝 일으켜 세웠다.
 “이리 줘봐라. 내가 먹일 테니.”
 실없는 농담을 해서 심기를 건든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네는 막노인에게 만취공은 못 이기는 척 약사발과 수저를 내밀었다. 다물어져 있는 입술을 억지로 비집고 수저가 몇 번인가 드나들었다. 막노인은 환자의 목을 뒤로 젖힌 후 몇 개의 혈도를 살살 어루만지며 능숙하게 약물이 식도 안으로 흘러들어 가게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만취공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이 녀석의 몸에 깃든 내공이 얼마나 되는 것 같으냐?”
 막노인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첫 만남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막노인은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말해준 적 없지만 그의 평소 언행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식견은 단순히 오랜 세월을 산 것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가끔씩 저도 모르게 노출하는 재간들 역시 만취공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볼품없어 보이는 막노인을 대하는 소림사 고승들의 태도가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점도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두 사람은 십오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분을 나눴지만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할 순 없었다. 굳이 감추고 싶어 하는 걸, 물을 생각도 없었고 두 사람의 우정에 그런 일신에 얽힌 비밀은 하등 상관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취공 역시 막노인에게 차마 밝히지 못한 일신상의 내력이 있지 않던가.
 어쨌든 막노인이 무림의 숨은 기인이며 그가 터득한 무공의 수준이 범상하지 않다는 건 짐작하고 있는 만취공이었다. 약을 다 먹인 막노인이 청년을 다시 원래대로 반듯하게 눕히고 나서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이놈 몸속에 어마어마한 내력이 깃들어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이 안 간다. 원래 내공이란 것이 가사 상태에서 진체를 다 아는 건 불가능하다. 단전과 경맥 곳곳에 잠재돼 있는 내력이 얼마나 더 될지 모르는 일이지. 그런 걸 감안한다면······ 이놈은 현 무림에서도 보기 드문 괴물이 틀림없다.”
 “그 정도란 말인가? 그럼 그 내력 덕분에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많이 보아야 스물다섯을 안 넘었을 나이에 이 정도 내력을 성취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한데, 세상에는 왕왕 믿지 못할 신비한 일이 벌어지곤 하니깐. 또 그런 놈이 이 꼴을 하고 누워 있는 것도 납득이 잘 안 가는 부분이기도 하지. 어쨌든 여러모로 불가사의한 녀석이야.”
 얼굴을 제외하고는 온통 붕대로 칭칭 감아놓아 맨살이 드러난 부분을 다 합쳐도 손바닥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 막노인은 드러나 있는 맨살을 손끝으로 콕콕 찌르며 말을 이어갔다.
 “이 몸을 봐라. 쓸데없는 근육이 하나도 없다. 무공 수련을 하다 보면 한 방향으로 치우치기 십상이라 이놈처럼 완벽한 몸을 가지기가 쉽지 않지. 쓸모없이 비대하기만 한 근육도 아니고 잔 근육을 촘촘하게 키워낸 것만 보아도 이놈이 어떤 수련을 했을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지. 하여간 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몸이다. 내 평생 이처럼 완벽한 무골은 본 적이 없다.”
 막노인의 말에 만취공 역시 동의했다. 육 척 오 촌이나 되는 보기 드문 큰 체구를 지녔는데도 둔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완벽하게 균형을 갖춘 신체 비율과 부드러운 근육들이 적당하게 전신을 감싸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헌 붕대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막노인의 눈에 다시 이채가 서렸다. 그 역시 처음에 청년의 상처를 대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막노인은 그 상처들이 알려주는 두 가지 정보에 주목했고 거기서 도출된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잠깐, 만가야.”
 상처와 그 주변을 매만지던 막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이 흑반들이 무언지 알겠느냐?”
 그러고 보니 상처 주변에 옅게 서려 있던 흑반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붕대를 감아가던 만취공의 손이 멈췄다. 만취공은 두 손으로 살을 누르고 비틀어보며 흑반의 상태를 살폈다.
 “이건 마치 중독 증상과 흡사하군. 중독은 아닌데······ 알 수 없군.”
 막노인은 그간 답을 찾지 못했던 의문들에 나름의 추론을 덧대기 시작했다.
 “나도 내 짐작이 틀리길 바란다만······ 만약 내 생각대로라면 이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만취공은 막노인의 음성이 잔잔하게 떨리는 걸 보고 의아해졌다. 그가 이토록 심각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만취공에게 막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제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강기에 의한 상처다.”
 “강기라고 했느냐?”
 “그래. 강기다.”
 “하지만 강기에 의한 상처 주변부는 불로 지진 것 같은 흔적이 남는 게 일반적이거늘······ 이건 그와 다르다.”
 “그런 상처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
 “무극검왕의 애제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 그때 보았지.”
 “······그랬군.”
 오악 산장 중 중악인 바로 이곳, 숭산 태실봉에 자리 잡고 있는 무극산장에 몇 차례 만취공이 초대된 적이 있었고 그 후로 자주 왕래한다는 사실을 막노인은 그제야 상기해냈다.
 막노인은 만취공의 강기에 대한 견해에 얼른 수긍했다.
 “네 말대로다. 보통의 강기라면 불로 지진 것 같은 상처가 생기는 게 맞다. 그러나 강기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삼백 년 전 한 사람에 의해 무당파가 멸문의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흉수였던 마검 태공악은 강기를 실전에서 자유롭게 쓸 정도의 고수였다고 한다. 그에게 당한 사람들의 상처는 너무도 깨끗하게 잘려 살이 찢기거나 쓸리고 밀린 흔적이 없었으며 피가 흐르지 않고 얼어붙는 기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강기 중에서는 특이한 현상을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할 수 있지.”
 “흐음. 그럼 이 흑반은?”
 “그건 사기나 마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문제는 거기 있다. 이처럼 강기에 사기나 마기를 깃들게 할 수 있는 능력자가 과연 무림 전체를 통틀어 몇이나 되겠느냐. 이건 마기가 분명하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건 현 중원의 문파나 고수의 솜씨가 아니다.”
 점차 심각해져 가는 막노인과 달리 만취공은 무림의 얘기가 나오니 입을 딱 닫아걸고 듣고만 있었다. 아는 게 쥐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무래도······ 해남도에 있다는 일월신교, 아니 마교의 무공에 의한 상처 같아. 게다가 이 상처는 입신의 경지인 극마지경의 고수 솜씨인 것 같단 말이야. 백여 년 넘게 중원에 나타난 적 없던 마교의 흔적이 이곳 숭산에서 발견되다니. 혹 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우려스럽군.”
 만취공은 막노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팔십 평생을 살면서 강기에 의한 상흔을 자주 본 것도 아니지만 이 흑반이 그처럼 심각한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별일 아닌 것 같고도 과장하길 좋아하는 막노인의 평소 성정을 생각하면 괜히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만취공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막노인을 쏘아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막노인은 만취공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또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더 큰 의문이 생긴다. 이 녀석의 몸에 난 상처의 수만 보더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대부분이 강기에 의해 생긴 상처들이다. 그런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의 내부는 멀쩡하다. 뼈나 내장이 상한 곳이 하나도 없다. 상대가 이 녀석을 죽이지 않으려고 이런 상처를 남긴 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은 한 가지뿐.”
 만취공은 어느새 막노인의 말에 흠뻑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다음 말을 재촉하는 몸짓이나 다름없었다.
 “이 녀석의 내부가 멀쩡한 것은 호신강기 때문일 것이다.”
 “호신강기? 그게 뭐냐?”
 “쉽게 설명하자면 방어막 같은 거지. 신체의 일부분에 의식적으로 강기막을 형성해 외부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신공절학이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냐?”
 “천만에. 입신의 경지가 아니면 꿈도 못 꾼다.”
 “너도 못하냐?”
 “쪽팔린 얘기지만······ 못한다. 흉내를 내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흉내에 불과하겠지. 흠흠.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
 “너 저번에 소림사 방장이랑 붙으면 하루 반나절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지 않았더냐? 그럼 그 소리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냐?”
 “어허! 호신강기란 것이 개나 소나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란 소리일 뿐이다.”
 “그럼 넌 개나 소 중의 하나겠구나.”
 “이놈이 말을 해도 꼭······ 관두자. 하여간 이 녀석이 호신강기를 펼칠 정도의 고수였는데 이 지경이 된 걸 보면 이놈을 이 꼴로 만든 자들도 그에 필적하는 고수들이겠지.”
 “한 명이 아니고?”
 “상처를 보면 최소 두 사람 이상이다. 하나는 아니다.”
 만취공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이 녀석을 발견한 곳에서는 어떤 격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이 녀석은 이런 상태로 격전이 벌어졌던 곳에서 거기까지 이동했다는 말이 된다. 네 말대로 이 녀석이 호신강기를 쓸 수 있는 고수이고 그런 고수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자들과 생사격전을 펼쳤다고 치자. 왜 그 흉수들은 이 녀석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지 않은 게지?”
 막노인은 확신에 차서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필시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그놈들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도저히 추격을 할 수 없는 상태였거나, 아니면 죽었을 수도 있지.”
 납득이 가는 견해였다. 어쨌든 지금은 막노인의 상상력을 예찬하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붕대를 새것으로 교체한 뒤에 만취공은 진맥을 했다. 여전했다. 차도가 없었다.
 맥은 간신히 느껴질 정도로 느리고 약했으며 불규칙했다. 이 정도라면 수 시진 내에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 청년은 그걸 열흘이나 견디고 있는 것이다. 만취공은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청년을 홀로 남겨두고 방을 빠져나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2장 회생(回生)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막노인은 만취공의 처소를 찾았다. 청년의 죽음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매일 찾아올 기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만취공의 모옥을 불쑥 찾아왔다.
 “만의원, 만의원 있어?”
 생기발랄한 소녀의 음성이었다. 나이 어린 소녀가 제집 종놈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만취공을 불러대고 있었다. 방에 막노인과 함께 있던 만취공은 그 음성이 들린 순간 낯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신을 이렇게 무례하게 목 놓아 부를 사람은 하늘 아래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간 만취공은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군주님.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행차십니까?”
 화려한 궁장 차림을 한 아리따운 소녀가 마당 가운데 서 있었다. 뒤로는 시비 하나와 호위 무사 셋을 거느리고 있다.
 방년 열일곱 살인 소혜군주(小慧郡主)는 보국왕(保國王)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시끄러운 정쟁과 난세를 평정해 현 황제를 옹립하고 치세를 튼튼히 한 불세출의 용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보국왕은 합비(合肥)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합비왕이라고도 불린다. 왕부와 친왕부를 통틀어 이런 대도시를 식읍으로 내린 경우가 없었는데 그것만 보아도 보국왕에 대한 황제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했다.
 원래 보국왕의 선조는 명나라 초기, 고려에서 이주한 유민이었는데 당시 적도들로부터 명태조 주원장의 목숨을 구해낸 공을 인정받아 왕호를 하사받았다. 식읍이라고 해봐야 원래는 합비 남서부에 위치한 서성(舒城)인근의 삼백 호 남짓이 고작이었고 그 징세만으로는 지방 호족보다 별반 나을 게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대대로 이 집안의 자손들은 타고난 무사로 칭송받을 정도로 무명을 드날렸고, 휘하에도 용맹한 무사들이 많았다. 보국왕이 현 황제를 위기에서 구해낼 때도 고작 오백 기의 기마병대로 일만에 달하는 적도들을 뚫고 황제를 구해냈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런 합비왕부는 적어도 합비와 안휘 지역에서는 황제 부럽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충성하는 지사와 무사들이 몰려와 왕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이런 합비왕부의 전통을 숭상하고 기리고자 어느 이름 모를 화가가 그린 고려 무사도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기린아이자 권력자인 보국왕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이 숭산 태실봉에, 그것도 약곡의 허름한 모옥 앞에 나타났으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렸을법한 일이었다. 기실 그녀가 태실봉을 찾기 시작한 지가 반년쯤 되었다.
 부친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왕부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그녀 역시 강호의 기인, 고수들과 교분을 쌓는 일을 무척 즐겨하고 좋아했다. 약골보다는 강골을 좋아했고, 지혜로운 선비보다는 용맹한 무사를 더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런 그녀가 현 무림의 정점에 서 있는 오악 산장에 관심을 두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악 산장 중 하나이자 중악 숭산에 터를 잡고 있는 무극검왕을 찾아온 소혜군주는 거기서 만난 한 무사에게 호감을 느끼고 곧 친한 사이로 발전했다. 천하 사내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게 된 그 행운아는 다름 아닌 무극검왕의 애제자인 능한성(凌寒星)이었다. 그 뒤로 소혜군주는 생각날 때마다 숭산을 찾았고 며칠씩 머물다 가곤 했다.
 커가면서 소혜군주의 관심은 왕부 내 무사에게서 강호의 고수들로 옮겨갔다. 어렸을 적부터 강호 무림의 고수들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고 명성이 자자한 고수와 명문 대파라면 가리지 않고 방문했다. 기실 그녀가 무극산장을 유독 여러 번 찾게 된 건 무극검왕의 인간적인 매력과 그의 검법에 반한 탓이지 강호 호사가들의 입방정처럼 능한성 때문이 아님은 확실했다.
 아이처럼 뽀얀 살결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큰 눈망울이 인상적인 이 미소녀는 풍기는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족함 없이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탓에 예의도 없는 편이며 모든 걸 제 편의 위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도 다분했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유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때문이었다. 소혜군주는 한 손을 허리에 척 얹고서 다른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까딱거리며 당차게 말했다.
 “만노인, 내가 일전에 부탁했던 거 어서 내놔.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
 작고 가녀린 하얀 손을 바라보며 만취공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군주마마, 무엇을 이르는 것인지 소인은 당최 모르겠습니다.”
 소혜군주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새 잊어버린 거야? 이럴 줄 알았어. 내력 손실을 보충하고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환약을 만들어 준다고 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시침을 떼겠단 거야?”
 ‘어이쿠!’
 만취공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나가는 말로 그런 약조를 한 것 같았다. 만취공은 진땀을 흘리고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소인이 늙어서 건망증이 심해진 탓입니다. 군주님의 지엄하신 명을 거역할 요량으로 늑장을 부린 것이 아니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수일 내로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다음에 또 잊어버리고 그때 가서 다른 핑계를 댈 게 틀림없어.”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반드시 만들어놓겠습니다. 이번에는 어김없이 대령하겠습니다.”
 “정말이지?”
 “물론입니다, 군주님. 믿어보십시오.”
 “좋아. 한 번 더 속아보지 뭐. 대신 이번에 약속을 어긴 죄로······ 예전에 말한 바 있던 간단한 침술이라도 가르쳐줘. 소림사 방장 스님이 만의원의 구명지침술(救命之鍼術)이 천하에서 보기 드문 비술이라고 하던데.”
 “네?”
 만취공의 단추 구멍보다 작은 눈이 잠시나마 커지기라도 한 듯 쪽 찢어진 건 그녀의 부탁이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이다.
 침술이란 것이 그리 쉽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설사 총명함이 하늘에 닿아 속성으로 익혔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디다 써먹겠는가. 괜히 어디 가서 엄한 사람 붙잡고 침이라도 놨다가는 생사람이라도 무사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사람 목숨을 하늘 아래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만취공으로서는 당최 들어줄 수 없는 분부였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딱 거절하지도 못하는 건 저 어여쁜 얼굴에 노기가 서리면 감당할 수 없는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문이 덜컹 열리며 눈치 없는 막노인이 느릿하게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소혜군주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너는 누구지?”
 방안에서 잠시 졸다 나온 탓에 밖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으며 지금 만취공이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조차 상황 파악이 안 된 막노인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생판 처음 보는, 그것도 어린 계집한테서 뒷목이 저릴 만한 이런 하대를 들을 줄이야 몰랐기 때문이리라. 뭐 요런 발칙한 것이 있나 싶어 그는 상대를 살피기도 전에 핏대부터 세웠다.
 “어느 집 계집아이가 이리 방자하더냐. 고얀 것. 감히 어른 앞에서 그 무슨 말버릇이냐! 어서 썩 사죄하지 못할까! 버르장머리 없는 것 같으니라고!”
 생각지도 못한 호통에 움찔 놀란 소혜군주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서고야 말았다. 지금껏 자신에게 이런 호통을 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목소리가 워낙에 크고 우렁찼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혜군주도 놀랐지만 만취공의 놀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취공은 막노인을 바라보며 눈짓 발짓, 손짓을 다 동원해서 그가 지금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알리고자 애썼지만 허사였다. 이 눈치 없는 노인은 그저 두 눈을 멀뚱거리며 수상쩍은 태도를 보이고 있는 만취공을 쳐다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네놈 어디 아픈 게냐? 며칠 애를 끓이고 신경을 쓴다 싶더니 결국에는 실성한 게로구나. 쯧쯧.”
 챙.
 청아하고 맑은 그 소리는 질 좋은 쇠끼리 마찰을 일으키며 내는 소리였다. 바로 검을 뽑아든 것이다. 소혜군주의 호위 무사들이 검을 빼들고 당장이라도 막노인의 목을 벨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걸 본 만취공이 마음이 다급해져 사정 설명 대신 소혜군주 앞에 납죽 엎드리고 봤다. 그런 뒤에 목이 터져라 외쳤다.
 “군주님!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나서 군주님 안전에서 망령된 말을 했나이다. 모르고 저지른 죄이오니 부디 아량을 베푸셔서 선처하시길 간청하나이다.”
 만취공의 입에서 군주라는 호칭이 나오자 그제야 막노인은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챘고 저도 모르게 울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요 여자아이가 바로 무극검왕조차 설설 기게 만든다는 합비왕부의 장중보옥이었구나. 골칫덩이를 건드렸군.’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선 막노인도 얼른 허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록 세속의 예의와 법도에 아랑곳없이 살아온 자유로운 몸이라 기실 마음속으론 반성하는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번잡함을 피해 보려는 것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라는 합비왕의 세도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합비왕이 비록 강호 인사나 세력이 큰 문파들과 교분이 있고 영향력 또한 지대하여, 그와 원수를 지면 중원에서 발 디딜 틈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까짓 후환을 무서워할 막노인은 아니었다.
 그가 몸을 낮추는 건 어디까지나 소림사의 입장을 고려해서였다. 수십 년간 지내온 소림사에서 이런 일로 쫓겨날 일은 없겠지만 소혜군주가 마음먹기에 따라 소림사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허리쯤 굽히는 게 무어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
 막노인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제 잘못을 시인하고 나섰다.
 “소인이 눈이 어두워 귀인을 눈앞에 두고서 알아보지 못했나이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푸시어 이 미천한 늙은 것을 용서하소서.”
 막상 막노인이 이렇게 나오자 만취공이 더 놀랐다. 소림사 방장 앞에서조차 허리를 굽히지 않던 막노인의 비할 데 없이 고고한 자존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취공은 걱정이 된 나머지 살짝 고개를 들고 소혜군주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만 꽤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막노인에게 가타부타 언질도 없이 만취공에게 시선을 줬다.
 “만노인, 오늘은 도저히 침술 배울 기분이 안 나니 내일 다시 찾아올게.”
 소혜군주를 몇 번 대하고 나서 가진 느낌은 그녀가 소문과 같이 그리 막돼먹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보면 역정을 낼 만도 한데 그냥 넘어가지 않는가. 다만 그녀는 자존심을 세우느라 용서한다는 그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럴 때는 얼른 기분을 맞춰주는 편이 좋다.
 만취공은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소혜군주에게 화답했다.
 “그리하십시오. 내일부터 성심성의껏 지도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침술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하찮은 손장난이 아닙니다.”
 “그런 걱정은 마. 난 뭐든 새로운 걸 배우길 좋아하니깐. 흥미가 있고 재미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어.”
 흥미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결단코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 만취공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소혜군주가 과연 며칠 만에 포기하고 손을 털까를 잠깐 생각해보았다. 군주가 정말로 작정하고 침술을 배우고자 나선다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리 큰 걱정은 안 됐다. 지금은 호기심에 몸이 달아 배우겠다고 하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금세 지쳐서 나가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깊이 빠지기 전에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만들어야겠군.’
 바로 그때였다.
 덜컹!
 문 하나가 덜커덩거리며 열렸을 뿐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적어도 몇 사람에게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만취공과 막노인 뿐만 아니라 마당에 있는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몇 사람의 얼굴이 급변했다.
 방문 크기가 작은 탓에 상체를 살짝 숙이며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만취공과 막노인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누워 있던 시체가 당당하게 제 발로 걸어 나오니 입을 딱 벌리고 다물 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사내는 제집에서 오수를 즐기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사람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그 모습만 보고서 조금 전까지 시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 말을 믿을 것인가.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어 사내의 몸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내는 사람들의 놀란 모습에는 아랑곳없이 침착했다.
 “어느 분이······ 저를 치료하셨습니까?”
 만취공도 막노인도 어느새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있었는데 둘 중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막노인이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만취공을 가리켰다. 눈이 부셨는지 사내는 큰 손을 펴서 눈앞을 잠시 가렸다.
 사내는 만취공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요란하지 않은 간단한 인사말이었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 진정이 담겨 있었다. 만취공은 기적 같은 일에 얼이 빠져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막노인이 첫마디를 가로채 간 것은 그가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몸은 괜찮은가?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멀쩡할 리가 없을 텐데. 정말 괜찮나?”
 몇 마디의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내는 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견딜 만합니다.”
 그제야 만취공이 제정신을 차렸다.
 한편 이 수상쩍은 괴인물의 등장에 소혜군주와 수행원들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소혜군주는 사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처럼 묘한 느낌을 주는 사람, 더군다나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일단 그는 컸다. 왕부의 위사대 부대주 왕이가 육 척 이 촌가량 되는 체격을 자랑해도 아무도 그 앞에서 견줄 자가 없었는데 지금 눈앞의 사내는 그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소혜군주의 눈이 야릇한 빛을 담은 것은 순간이었다.
 ‘왕이는 뚱뚱한 거구로만 보였는데 이 사람은 그보다 더 큰 것 같은데도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늘씬하게 보여. 게다가······ 저 눈, 저 눈은 너무도 위엄이 서려 있고 게다가 신비하구나. 깊고 따듯한 것 같지만 달리 보면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지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사자 같고 호랑이 같은 사내야. 이 자는 틀림없이 멋진 무사일 거야.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제야 소혜군주는 사내가 붕대만을 걸친 민망한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곁에 선 시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소혜군주도 당황하며 슬며시 눈길을 피하고야 말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만취공이 사내 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다시금 확인했다.
 “정말 괜찮은가?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이 느껴지진 않는가? 가슴이 평소와 다르게 빠르게 뛴다든가······ 그도 아니면 현기증은 없는가?”
 “아닙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물지 않은 상처 부분이 따끔거리는 것 빼고는 별다른 통증은 없습니다.”
 사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만취공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다행이야, 참으로 다행일세. 내 집에서 산송장 하나 치우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는가? 정말 하늘이 도우셨구먼.”
 사내가 물었다.
 “의원이십니까?”
 사실 사내가 그리 물은 것은 남다른 통찰력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가 처음 눈을 뜨고 본 것은 약탕기와 천장과 벽면에 가득 묶여 있는 약초들과 갖가지 약재 더미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깨어난 것 자체를 기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일조차도 대단하게 여겼다.
 “역시 단번에 알아보는군.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건 진즉 알았지만 역시 대단······.”
 말하다 말고 만취공이 말끝을 흐리며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자신이 결례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비록 연소하다지만 자신이 함부로 대해도 될 사람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막노인의 추론대로라면 눈앞의 젊은이는 천하에 드문 신인이어야 할 터. 그런 사람이 범상한 신분일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겉모습만 저럴 뿐, 나이 백세가 넘은 노신선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거 초면에 무례를 범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려. 공자의 성함은 어찌 되시오?”
 만취공이 갑자기 존대로 고쳐 묻자 연유를 아는 막노인은 그 심정을 십분 이해했지만 다른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소혜군주는 이 묘한 어울림에 온갖 호기심이 동했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사내는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휘륜이라 합니다.”
 “휘······ 륜? 휘씨 성도 있었소? 희귀성이로군요. 나는, 아니 저는 만취공이라고 하오. 그냥 만노인이라 부르면 되오. 다행히 내 눈에 띄어 치료를 한 것일 뿐, 내 의술 덕분에 공자께서 깨어났다고 생색을 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오.”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그, 그래도 어찌······. 흠, 흐흠. 정말 그래도 되겠는가?”
 참견쟁이 막노인도 얼른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며 제 존재를 사내에게 각인시키고자 애썼다.
 “나는 막노인이라 부르면 되네. 여기 만가와는 막역한 벗이지.”
 휘륜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잠시 대화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소혜군주가 초인적으로 발휘하고 있던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참지 못하고 애먼 만취공을 물고 늘어졌다.
 “만노인, 본 군주를 언제까지 이렇게 마당에 세워둘 거야?”
 그녀는 유독 ‘군주’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그건 만노인과 막노인을 위한 친절이 아니었다. 보통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면 으레 태도가 변하기 마련인데 이 사내는 예외였다. 그는 그 말을 못들은 건지 태도에 변화가 없었고 심지어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는 것이다.
 소혜군주가 이곳을 찾아온 건 오늘까지 합쳐 고작 세 번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산장에서 보았다. 그 세 번조차도 제집 안으로 청하여도 한사코 거절하더니 만취공은 군주가 오늘따라 유별나게 군다고 생각했다.
 만취공은 이 귀찮은 불청객을 속히 보내고 휘륜에게 궁금한 것을 캐볼 마음이 간절했는데 그런 계획을 방해받게 되자 내심 안달이 났다. 그렇다고 군주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만취공은 제 허름한 집을 가리켜 보였다.
 “군주님, 누추하지만 잠시 드시겠습니까? 뜨거운 차라도 한잔 올리겠습니다.”
 “사실 지금 무척 바쁜 일이 많지만 만노인의 성의도 있고 하니······ 그럼, 그럴까?”
 소혜군주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대답하고는 오히려 만취공보다 앞서 모옥을 향해 걸었다. 조금 전까지 휘륜이 누워 있던 방이 아닌 그 옆방 문이 활짝 열린 순간, 소혜군주는 코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고야 만다.
 “이게 무슨 냄새야! 아유 고약해.”
 순간 만취공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젠장,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약재실보다는 이 방이 그래도 깨끗해서 청한 것이거늘······.’
 하는 수 없이 만취공은 약재실로 군주를 이끌었다. 약 냄새 때문에 다른 냄새가 가려져서인지 소혜군주는 이번에는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침실로 쓰는 곳이 아닌지라 그곳에는 침상이나 탁자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옆방에서 탁자와 의자 두 개를 가져와야 했고 소혜군주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만취공이 차를 가지러 나간 사이에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소혜군주가 막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막노인이라고 했지?”
 “네, 군주님.”
 “약초꾼이야?”
 의원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환자 아니면 약초꾼밖에 없을 거라 단정 짓고 보는 그 단순함에 막노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그 앞에서 시시콜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귀찮은 나머지 막노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 뒤 만취공이 소반에 찻잔과 찻물을 받쳐 들고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의 절반을 약재 더미들이 차지하고 있는지라 호위 무사 셋과 시비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군주의 특별한 명이 없었다면 호위 무사들도 방안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신원이 불명확한 사람들과 군주를 함께 두는 것이 께름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사코 군주가 말리는 바람에 차마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방안에는 찻잔에 물 따르는 소리만이 흐를 뿐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소혜군주는 방안의 풍경이 낯설어서인지 호기심을 갖고 이리저리 살펴보기 바쁜 눈치였지만 기실 그런 것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지금 소혜군주의 관심은 오직 특이한 이름과 특이한 외모와 매우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에게 쏠려 있었다. 안 그런 척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방안의 나머지 세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막노인은 막노인대로 만취공은 만취공대로 휘륜에게 궁금한 게 많아서인지 입이 자꾸만 달싹거리는 걸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혜군주 때문에 터놓고 물어볼 상황도 아니다.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저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해 어색해하고 있는데도 휘륜은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게 궁금한 게 많으실 줄 압니다.”
 소혜군주는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고 두 노인은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그렇지만 이내 휘륜이 한 말로 인해 다시 어두워지고야 말았다.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지라 소상히 밝히지 못하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그런가? 누구든 말 못할 사정이 있겠지. 개의치 말게. 나는 자네가 이렇게 깨어나 준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사람일세. 안 그런가, 막가야?”
 “그,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질문은 오히려 휘륜에게서 먼저 흘러나왔다.
 “여긴 어딥니까?”
 “어디라니? 여긴 내 집이지.”
 “깊은 산중인 것 같은데 어느 산입니까?”
 “아하, 그런 뜻이었구먼. 여긴 숭산 태실봉 중턱일세.”
 휘륜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게 떠올랐다. 그것은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의문이 다소 해결된 눈빛이기도 했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용케 수백 리나 벗어났던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군.’
 휘륜은 자신이 언제까지 여기에 눌러앉아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둘 중 하나가 비록 중상을 입었다고는 해도 내상을 치유하는 순간부터 다시 추적을 계속할 가능성이 크다. 둘은 모두 마교의 교주들이라고 했다. 둘 중 하나는 나처럼 소생했을 수도 있다. 다시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편이 낫겠다.’
 휘륜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수 일 간의 추적과 도주, 그리고 생사를 건 격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순간 죽음을 직감했고 이렇게 다시 멀쩡하게 살아날 줄은 그 자신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런 기적 같은 소생에 기뻐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에 대한 부담감과 근심이 휘륜을 무겁게 짓눌렀다.
 ‘마교에서 어찌 천선부와의 접선 장소를 알았을까? 수백 명의 협공이었다고는 해도 내가 이처럼 무력하게 당하다니.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큰일 날 뻔했구나. 아무리 그들이 마교의 교주라는 신분이라지만 사부께 들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마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무공이 고강해졌단 말인가. 이제는 그들과 내 처지가 역전되겠구나. 사부님의 근심이 현실로 닥치게 될 줄이야.’
 휘륜은 제 앞에 놓인 찻잔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런 휘륜의 무거운 마음을 비집고 한줄기 청아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나는 소혜라고 해. 휘륜이라고 했던가? 어느 문파의 제자지?”
 소혜군주가 반짝이는 눈망울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휘륜은 지금껏 그녀가 상상해오던 이상적인 무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면 정확히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 소혜군주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소혜군주는 그런 신선한 충격을 준 이 사내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소혜군주가 알고 있는 왕부의 무사들과 강호 유수의 문파 제자들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들은 소혜군주 앞에서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으며 절도와 품위가 있었다. 그들은 잘 훈련되고 규격에서 벗어나지 않는 절제된 행동거지를 보였다.
 ‘그런데 이 자는 많이 달라.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 같아. 야성의 느낌이 너무도 강해. 묘한 매력이 있어.’
 그것이 첫 번째 소감이었다. 그 생소한 느낌이 소혜군주의 호기심을 자극시켜 과도한 관심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휘륜은 눈앞의 여자아이가 군주라는 특별한 신분이라는 것을 아까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지내왔을 것이다.
 휘륜은 이런 관계에 익숙하지 않았다. 세상의 예법과 동떨어져 살아온 지 오래된 탓도 있거니와 그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좋을 위치에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휘륜은 생소한 감정 상태가 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만취공은 세상에 순응해오면서 살아온 사람의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 눈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는 분명했다.
 휘륜은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소속된 문파는 없습니다.”
 “그럼 낭인이네. 부상이 꽤 컸나 봐. 어디서 누구와 싸움을 한 거지? 감당하지 못할 강적이라도 만났어?”
 휘륜은 질문을 퍼붓는 군주가 철부지 같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 눈은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은가.
 “잘 보셨습니다. 당적하지 못할 적을 만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처지에 다행스럽게 이분 신의를 만난 덕분에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왜 혼자 떠돌지? 혹시 멸문의 화라도 당한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무림의 낭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몸을 의탁할 주인을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야?”
 일일이 장단을 맞춰주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자기에게로 향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휘륜은 그 방향을 군주에게 되돌려주었다.
 “군주님께서는 어찌 이런 심산에 머물고 계십니까?”
 소혜군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상 밖의 반응에 휘륜은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나? 본 군주는 일찍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어. 그 약속을 지키자면 강호의 무사들을 두루 겪어보아야 하거든. 마침 이곳에는 현 무림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오악 검파 중의 하나인 무극산장이 있잖아. 그래서 잠시 머물고 있는 것뿐이야. 어때? 무극산장이 궁금하다면 구경시켜 줄 수 있는데 내가 안내해줄까?”
 소혜군주는 들떠 있었다. 휘륜이 그러자고 하면 당장에라도 손을 잡고 이끌 기세였다. 휘륜은 소혜군주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단박에 꿰뚫어보았다.
 “군주님, 제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아직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 명은 다음에 들어 드리지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소혜군주는 실망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금세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보니 내가 아픈 사람을 두고 눈치 없게 굴었군. 그럼 편히 쉬어.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깐.”
 소혜군주의 의미심장한 말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일조차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사소한 일에도 호기심이 왕성했으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걸 감안하면 휘륜을 대하는 태도 역시 유별날 게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호의를 가지고 대해준다면 만취공이나 휘륜 입장에서도 나쁜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무극산장에서 최고의 귀빈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군주가 원하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무극산장에서 다 들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혹 휘륜을 수상쩍게 여겨 심문이라도 해보라며 언질이라도 넣는다면 당장 휘륜은 물론이고 만취공까지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취공은 그런 악운이 닥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소혜군주는 자기가 한 말처럼 이내 모옥을 떠났지만 곧 호위 무사의 손에 선물이라며 무언가를 들려 보냈다.
 풀어놓은 보따리 안에서 나온 건 깨끗한 무복 한 벌이었다. 아마도 무극산장의 제자들이 무공 수련 때 입는 것인 듯, 가슴 쪽에서 수실을 뺀 흔적이 보였다. 휘륜은 소혜군주가 이처럼 세심한 면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휘륜의 체격을 고려해 가장 큰 의복을 골라 보냈지만 품이 그리 넉넉지는 않고 딱 맞는 정도였다. 검은색 무복을 갖춰 입은 휘륜의 모습을 보고 만취공과 막노인은 내심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무인상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중룡(人中龍)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3장 막무가내 군주
 
 
 다음 날 휘륜은 만취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땔감을 구해오고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피웠으며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정성을 기울여 만든 요리를 대접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떠난 후를 대비해 몇 년 치 땔감으로도 충분할 양을 모옥 뒤편에 쌓아놓은 뒤, 통나무를 이어붙이고 진흙을 발라 만든 지붕을 그 위에 세워두었다. 비가 오더라도 땔감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모든 일을 정오가 되기 전에 해치웠으니 만취공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휘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낡은 모옥의 지붕을 수리했고 무너진 토벽도 다시 손봤다. 집 가까이에 있는, 혹 무너질까 싶은 바위들을 빼내 한곳으로 치웠고 집 양옆으로 수로를 만들어 폭우가 내려도 피해가 없도록 방비했다.
 만취공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인지라 휘륜이 그렇게 애쓰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미안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말린다고 휘륜이 작심한 일을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깨끗이 치운 뒤에 차를 끓여와 가져온 휘륜 앞에서 만취공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게 정말 얼마만의 호강인지 모르겠군. 힘들지 않은가?”
 휘륜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거 원,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과거 제자와 함께 있을 때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늘그막에 분에 넘치는 호사를 다 누려보는군.”
 그러고 보면 휘륜에게도 사부와 지냈던 정겨웠던 시절이 있었다.
 ‘발을 씻겨 드리면 그리 좋아하셨는데······.’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휘륜은 찻잔을 만취공 앞에 내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자분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그리우신가 보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니네. 그놈이 워낙 쇠고집이고 융통성도 없고 다정다감한 면도 없어서 썩 좋지만은 않았지. 그래도 그놈이 다른 뜻 품지 않고 정진하여 못난 스승의 경지를 비웃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제자인 셈이지.”
 만취공의 얼굴에는 제자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자주 찾습니까?”
 “일 년에 한 번은 얼굴을 보이지. 워낙 바쁜 녀석이라 찾아오지 말라는데도 고집을 부려 부득부득 먼 길을 찾아오는 게 달갑지만은 않네.”
 휘륜은 만취공의 말을 듣는 중에도 아까부터 모옥으로 다가서고 있는 한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고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보폭과 발걸음 소리, 그리고 거기에 실린 무게를 따지며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떤 심리 상태인지까지 따지는 건 휘륜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만가야!”
 덜컹!
 막노인이었다.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덜컹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방문객은 막노인이 유일했다. 만취공은 담담하게 그를 맞아들였다.
 “오늘은 유난히 일찍 왔구나.”
 “그런가? 헐헐. 달리 할 일이 있어야지. 사실은 소림사 늙은 땡초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귀찮게 하기에 내빼 버렸다. 그래 자네는 좀 어떤가? 어제보다도 혈색이 더 좋구먼. 하여간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친구로군.”
 “어르신도 기운이 넘쳐 보이십니다.”
 막노인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만취공이 질문을 했다.
 “왜? 소림사에 또 무슨 일이 있더냐?”
 “무림이야 하루라도 잠잠할 때가 있느냐. 늘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지.”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또 무슨 사달이 났기에 그러지?”
 “합비에서 한 젊은이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것 때문에 꽤나 시끄러운가 보더라.”
 “별일일세. 험한 강호에서 사람 하나 죽어나갔기로서니 소동이 벌어진단 말이냐?”
 “그게 죽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게지.”
 “허허, 거참. 그래 그 귀한 목숨은 누구 것이었는데?”
 막노인은 만취공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휘륜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눈여겨보았지만 기대감과는 달리 별 호기심도 없이 태연하기만 하자 적잖게 실망했다.
 휘륜과는 달리 만취공의 반응은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세가 동맹의 일원이기도 한 어느 세가라더라······ 가만있자, 생각 좀 해보게. 내가 늙긴 했나 보군.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이놈의 건망증은 어찌 고칠 방도는 없나? 아, 이제 생각났다. 우문세가(宇文世家)의 적손이 변을 당했다더구나.”
 귀 기울여 듣던 만취공은 대경실색했다.
 “우문세가의 적손이라면 설리의 오라비가 아니냐?”
 “설리? 아이고 이 미련한 놈 좀 보게나. 그러고 보니······ 그렇군. 어쩐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더라니 바로 그거였군. 허어 어쩐다? 그 애의 상심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겠어, 쯧쯧.”
 만취공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 역시 긴 한숨을 토해내는 게, 심상찮은 반응이었다.
 “후유. 참 모질게도 불운이 계속되는군. 삼대에 걸쳐 그런 변고를 당하다니······ 설리 그 심성 착한 애가 어쩌다······.”
 만취공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걸 보고 막노인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잠시 뒤 평정심을 되찾은 만취공이 막노인을 재촉했다.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얘기해봐라.”
 “현임 우문세가의 가주가 적손이 생존해 있는 관계로 소가주를 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고 있다는 소문이 많았지. 그런 차에 적손이 정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합비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으니 당장 누가 의심을 받겠느냐.”
 만취공은 이를 앙 다물며 말했다.
 “열에 아홉은 그 요사스런 요녀의 짓이겠군.”
 “봐라. 너만 해도 당장 그년을 지목하지 않느냐? 그간 육대 문파가 뒷자리로 물러나 있는 사이에 세가 동맹이 정파를 주도해왔고 작금의 무림이 정파 세상이 된 것도 전적으로 그들의 공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느냐. 그런데 이번 사건의 배후에 다른 사람도 아닌 현임 우문세가의 며느리이자 세가 동맹의 주축 중 하나인 동방세가의 여식이 흉수로 의심받게 되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세가 동맹을 비난하는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지.”
 “허. 그렇다고 증거가 없는 일에 드러내 놓고 비난할 문파나 인물이 누가 있으려고. 게다가 설사 증거가 드러났다 해도 그 요녀 하나의 죄상을 세가 동맹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키기엔 억지 같다.”
 “헐헐헐.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지금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가 동맹이 잘한 일도 많지만 무엇보다 큰 실수가 있었지. 그들은 이권을 독점하며 그걸 나누는 데 인색했다. 그 불만이 쌓였다가 엉뚱한 사건으로 터지려고 하는 게지. 어떤 일이든 핑곗거리가 필요했는데 마침 그 불씨를 당겨줄 일이 생긴 게지. 더군다나 이만큼 구색을 갖추기도 쉽지 않지. 설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뿐인 오라비까지 변고를 당한 게 누구 때문이냐? 동방세가의 여식이 파혼을 당한 앙갚음으로 정혼자의 사촌 동생에게 시집을 갔고 그 뒤로 차례로 죽어나가지 않았더냐. 드러내놓고 말을 못할 뿐이지 다들 뒤에서는 동방세가가 흉계를 꾸몄다는 걸 모르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 그런데도 세가주와 소가주, 그리고 마지막 남은 적손까지 비명횡사했는데 세가 동맹에서는 그 사건을 조사해보기는커녕 요사스런 계집의 시아버지이자 우문세가주의 동생이기도 한 현임 세가주 편만 들고 있다. 현임 세가주가 우문세가를 통째로 삼켰을 때도 세가 동맹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축하 사절을 보내 공인하는 추태를 보였지.”
 휘륜은 가만 듣고만 있었다. 처음 듣는 얘기지만 살짝 흥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지만 이 정도로 흥미를 자아내는 사연도 드물 듯싶었다.
 휘륜이 처음으로 관심을 드러내며 질문을 했다.
 “정혼자에게 파혼을 당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 그 사촌 동생에게 시집을 간 후 차례로 삼대를 멸해 그 원한을 갚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 요녀가 보통내기가 아니지. 원래 그 계집이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 온갖 추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었거든. 처녀일 때부터 악독한 심성과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했지. 오죽하면 강호동도들이 동방지낭(東方智囊)이란 멀쩡한 외호를 두고 사갈독심(蛇蝎毒心)이란 별호를 새로 지어 붙여 뒤에서 험담했겠는가. 사소한 다툼으로 멸문시킨 군소 문파가 한둘이 아니고 그 요녀 때문에 신세 망친 청년 기협들이 또한 한둘이 아니지. 그런데도 그년이 동방세가의 여식이니 아무도 손을 못 댄 거지. 언젠가는 터질 줄 알았어.”
 이번엔 만취공이 물었다.
 “그런데 그 일 하고 소림사 고승들이 널 귀찮게 하는 것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게냐?”
 막노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잘난 척을 한다.
 “말도 마라. 육대 문파 사이에 어떤 묵계가 있었는지 내 도움이 꼭 필요하다며 방장이 얼마나 조르는지.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이번엔 그 늙은이가 아예 작심을 하고서 고집을 꺾을 기색이 안 보여.”
 “뭘 도와 달라는 건데?”
 “세가 동맹에서 이번에 정파 후기지수들을 모아 후대의 정파를 책임지게 할 조직을 만들 생각인가 보더라. 그건 핑계일 뿐이고 세가 동맹에서 뭔가 흉계를 획책하는 것 같단 말이야. 육대 문파는 그런 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에 일조하겠다고 나선 상태이고.”
 “무림인들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흉계가 있는 줄 알면서 왜 육대 문파는 발을 들이려는 게지?”
 “그야 육대 문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 때문이지. 이번 입안 자체가 후대에 이르기까지 세가 동맹에 의한 현 무림 구도를 정착하고 더 공고히 하기 위한 시도로 보이니 육대 문파에서도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 거지. 세가 동맹으로 넘어간 정파 내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려면 지금이라도 무림의 일에 나서야 하는 게 육대 문파 처지다. 방장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기지수들의 각축장이 되어 정파의 발전에 기여를 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공산은 적다고 본다.”
 “방장이 너더러 뭘 해 달라는 건데?”
 “글쎄. 나를 신생 조직의 총교두로 추천한다지 않더냐?”
 만취공은 솔직히 그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가 대단한 사람일 거란 생각은 평소에도 갖고 있었지만 그만한 중책을 맡길 정도의 고수였나 싶었던 것이다. 육대 문파와 세가 동맹이 연합하여 후기지수를 뽑는다면 그런 인재들을 가르칠 교관들도 정파에서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고수들을 총책임지고 지휘하는 총교두의 직책을 맡아 달라 했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막노인의 의기양양해하는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니 왠지 숨겨놓은 신비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 같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허. 이놈 보게. 내가 언제 네 앞에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더냐?”
 “거짓말을 하진 않아도 과장은 좀 하는 편이었지.”
 막노인은 뜨끔했는지 아니라고 부인하진 못했다.
 “그래. 내가 가끔 사소한 뻥은 쳐도 생판 관련 없는 헛소리는 하지 않는다. 네놈이 이룬 의술의 경지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무림에서 어느 자리에 가도 절대 꿇리지 않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왜, 이번에도 뻥 같으냐?”
 “어. 좀 심한 뻥 같다.”
 “허. 헛살았구먼, 헛살았어.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는 놈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가 천하를 위해 무슨 큰일을 한다고. 역시 거절하길 잘했어.”
 그가 하는 수작질을 보고 있자니 더 의심이 생긴 만취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막노인을 노려봤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심장이 오그라든 막노인은 게슴츠레한 만취공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흠흠. 너 그 눈빛의 의미가 뭐냐?”
 “사실대로 털어놔 봐라. 네가 무림에서 그리 대단한 위치에 있다면 명성도 그에 못지않을 게 아니냐? 외호라도 얘기해봐라. 혹 내가 귀동냥으로라도 들었을지 누가 알겠느냐.”
 “흠. 뭐 그런 걸 가지고. 됐다, 일없다. 너만 해도 그렇지 않더냐? 네 의술이 천하에 첫째 둘째를 다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 되느냐? 고작 소림사의 고승들하고 무극산장의 몇 명뿐이지 않더냐? 그런데 네 제자인 성수신의는 반대로 천하에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 봐라. 이것만 보아도 사람의 명성이란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는 법이다. 네 제자 놈이 너보다 의술에 더 뛰어난 건 아닌데······.”
 만취공이 막노인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뛰어난 거 맞다.”
 만취공의 단언에 오히려 막노인이 당황했다.
 “침술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침술도 조만간 뛰어넘겠지만.”
 “그, 그러냐? 흠, 좋겠다. 잘난 제자를 둬서.”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갑자기 만취공이 심각해졌다.
 “혹 설리에게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겠지?”
 “글쎄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온 눈이 우문세가에 집중돼 있으니 당장에는 별일이 없겠지만 요녀의 무모함은 정평이 나 있을 정도니 안심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설리 그 아이는 무공도 배운 적이 없으니 후환이 될 거라 여기진 않으리라 보는데.”
 “어디 그 요녀가 후환이 두려워 적손을 제거했겠느냐. 죽은 설리의 아버지가 사갈독심을 거절하고 평범한 집안의 여식을 사랑한 일 자체가 그 요녀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테니······ 그 피를 이은 설리를 과연 내버려 둘까?”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낼 방법 말이다. 소림사로 데려다 놓으면 안심해도 될 것 같은데.”
 “흠.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소림사를 위시한 육대 문파가 비록 당금 무림의 정세에 직접 간섭하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세가 동맹에 비하면 약세인 것은 사실이지. 게다가 세가 동맹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잊었어? 오악 검파가 비록 무림 정세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지켜왔고 드러내놓고 세가 동맹을 지원한 적도 없지만 오대 검왕이 세가 동맹의 주축 세가 출신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되지. 만약 육대 문파와 세가 동맹이 대립하게 되면 그때도 오악 산장이 엄정한 중립을 지킬 수 있을까? 내 생각이지만 그건 좀 의심스럽단 말이야.”
 “그건 네 기우일 거다. 무극검왕만 해도 이미 사소한 인간의 정에는 초월해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제 스스로 채운 족쇄를 거부할 생각은커녕 그걸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어.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게다.”
 “과연 그럴까? 무극검왕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네 명의 검왕 모두가 그러리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때 만취공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실존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검황이라는 이름을 제 확신의 근거로 삼았다.
 “오악 검파의 다섯 수장들이 무림에 처음 등장하며 자신들을 검황의 시종이라고 했다지. 검황의 존재가 족쇄로 남아 있는 한 저들은 정파인들 사이의 알력에는 관여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막노인은 코웃음 쳤다.
 “넌 검황이 실존 인물이라고 보느냐?”
 만취공은 놀라워했다. 웬만한 용기 갖고는 저런 말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일이었다. 검황을 부정하는 건 오악 검파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고 오대 검왕과 대적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검황이 가상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검황은 수백 년 이상 무림에서 전설처럼 전해져온 이름이었다. 한 번도 무림사에 정식으로 등장하지 않은 검황이란 존재가 왜, 어떤 경로로 그렇게 확고하게 무림인들 사이에 인식되어 있는지조차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랬던 그 존재가 다섯 검왕의 입을 통해 현존하는 실존 인물임이 밝혀졌을 때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다섯 검왕은 등장과 함께 자신들을 가리켜 검황의 시종들이라고 했고, 검황의 명령을 수행하고 무림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씩의 검법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명문 대파 출신도 아닌 그들이 갑자기 천하제일의 검법을 익혀 나타났을 때 다들 검황이 실제로 있나보다고 했다. 그랬지만 그 후로 수십 년이 지나도록 검황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막노인은 제 생각을 솔직히 털어놨다.
 “오악 검파는 검황이라는 신비한 가상 인물을 배후에 둠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그들이 비록 시대에 드문 검법들을 익혔고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절세고수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다섯 사람의 힘만으로 전통적인 대파들의 결집된 힘을 능가하진 못하지. 허나 오대 검왕이 자신들보다 더 위대한 고수가 후견인으로 있다는 태도를 취하자 대파들은 그들을 감히 견제할 엄두조차 못 냈다. 그런 장치가 결국 지금의 무림 판도를 만들어 냈다고 본다.”
 제법 설득력 있는 견해였다. 하지만 검황이 실존한다는 쪽에 만취공은 더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검황의 존재는 만취공에게 있어 무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한 최초의 대상이었다. 무림과 인연을 맺은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검황 얘기를 듣고 자란다. 만취공 역시 그중 하나였다. 비록 무공에는 별다른 인연도 없었고 성취를 이루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검황은 결단코 버릴 수 없는 이상향이자 막연한 안식처였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검황은 마지막 위안이었고 그런 확고함은 신앙과도 같았다. 당금 무림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검황이 배후에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세가 동맹이 여기까지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상 그들의 성장을 가속시키고 더불어 안전망이 되어 준 것은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검황이라는 존재였다.
 세가 동맹이 오악 안쪽을 정파의 세력권으로 결정하고 거사를 진행하면서 숱한 사파와 흑도 문파를 멸문시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태도가 불분명한 문파들까지 사파로 몰아 해체시키거나 멸문시키는 과정에서 정파 내에서조차 적잖은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를 깡그리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세가 동맹의 바람과 계획대로 오악 내에는 더 이상 사파라고 부를만한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정파가 역사상 최강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공은 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가 동맹에 대한 우려의 시선은 잔존해 있었다.
 세가 동맹은 틀림없는 정파 태생이었고 정파를 수호한다는 목표를 지향해왔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통제될 수 없는 그들의 오만함은 갖가지 시비들을 양산했다. 거기에 세가 동맹 후기지수들은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그들만의 귀족 문화를 만들어냈는데 그게 또 남들의 눈에는 비난거리가 됐다.
 어떤 세력이든 균형을 이루고 견제가 되는 대체 세력이 존재할 때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세가 동맹과 힘을 견줘볼 정파 내 세력이라고는 육대 문파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대 문파는 너무 오랜 기간 잠들어 있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설사 그들이 이제 잠에서 깬다 해도 열세를 만회하긴 힘들어 보였다.
 만취공과 막노인의 대화는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휘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뒷마당으로 간 휘륜은 사방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나뭇조각들을 바라봤다. 휘륜의 손이 슬쩍 움직인 순간 십여 장 내에 흩어져 있던 나뭇조각들이 실로 묶어 누군가 잡아끈 것처럼 모조리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귀신이 놀랄만한 신기였다.
 수백 개가 넘는 나뭇조각들이 얌전하게 내려앉은 자리는 아궁이 앞이었다. 휘륜은 아궁이 안으로 일부를 밀어 넣고 불을 붙였다. 이번에도 역시 손도 대지 않았는데 저절로 불이 붙어 타올랐다. 불 앞에 앉은 휘륜은 일렁이는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현 무림의 정세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내 인생이 험로라는 건 각오한 바지만 이처럼 막막한 기분이 될 줄은 몰랐군. 어떻게 해서든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확실한 승산이 있기 전까지는 꼬리를 잡혀서는 안 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저들은 함부로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아니다, 아니야. 이제는 그런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다.’
 휘륜은 답답했다.
 ‘사부님, 전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부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자의 능력만으로는 저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결전에 임했지만 결국 한계를 절감해야만 했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건 휜륜이 진작부터 알고 있던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길이기에 오래전에 버려졌다.
 ‘도제(刀帝), 도제의 후인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도제가 당시의 결전으로 죽은 게 확실하다면 그가 어딘가에 남겼을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한 단서를 갑자기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휘륜은 자신이 상처 입은 호랑이처럼 느껴졌다. 호랑이가 늑대 떼의 추격을 피해 태어나고 자라난 산을 떠나 이 산 저 산으로 옮겨 다니는 신세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휘륜은 거침없이 타오르고 있는 불꽃의 기세를 보며 주먹을 힘껏 쥐었다.
 ‘나는 검황이다. 검계(劍界)의 반역자들과 마교의 마두들 따위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낸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검황(劍皇)!
 휘륜이 바로 무림인들이 그렇게도 찾길 바라는 검황이었던 것이다.
 검황의 입장에서 조금 전 막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 무림에서 검왕이라고 불리는 다섯 사람은 분명 휘륜의 사부인 29대 검황의 시종들이었다. 그들에게 한 가지씩의 검법을 전수한 것도 전대의 검황이었고 사명을 맡긴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들로 인해 오히려 큰 혼란이 빚어진다면 그들의 목숨을 거둬들여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검황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그보다 더 급하고 중차대한 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휘륜은 자신이 상대했던 마교의 고수들을 차례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고작 둘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합공은 휘륜을 사지에 빠트릴 만큼 위력적이었다.
 휘륜은 한계에 봉착해 있어 더 이상 강해지길 바랄 수 없었지만 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질 것이란 사실이 휘륜을 두렵게 했다.
 ‘저들이 이처럼 갑자기 강해진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난 실패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결국 성공했다 쳐도 지나치게, 그리고 급격하게 강해졌다. 그랬기 때문에 사냥감 주제에 사냥꾼을 찾아올 수 있었겠지. 저들이 강해진 반면에 나는 한계점에 도달해 있다. 중단전(中丹田)의 무공은 상단전(上丹田)의 무공에 약세라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다. 초대 검황의 비전이 둘로 나뉘지만 않았다면 진작 마교는 뿌리 뽑혔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었다.
 초대 검황은 최강이었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능력은 결코 한 사람이 이어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 무공을 두 개로 쪼갰고 두 사람에게 전했다. 도제가 탄생한 배경이었다. 검황과 도제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였으며 검계의 반역자가 나올 때마다 둘은 힘을 합했다. 둘이 합한 힘은 초대 검황에 미치지 못했지만 검계의 반역자를 처단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한 여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휘륜은 이십일대 검황과 이십대 도제 간의 반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새로운 검계의 반역자는 영리했다. 그는 검황과 도제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미인계를 적극 활용했다. 둘을 떨어뜨린 뒤에 하나씩 처단하기로 한 계획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두 사람의 능력을 경시했다.
 첫 번째 실패 이후로 검계의 반역자는 방법을 바꿨다. 그는 힘을 더 키워서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 검황과 도제를 각개 격파할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그는 다른 검계의 반역자들과는 다르게 어둠 속에 숨어 힘을 키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가 택한 가장 안전한 장소는 다름 아닌 마교가 태어나고 지금껏 숨 쉬고 있는 해남도(海南島)였다.
 마교 총본산은 역대의 검황들도 손대기 껄끄러워하는 곳이었다. 검황은 해남도를 벗어나 중원으로 들어오는 마교도들을 처단하거나 검계에 있는 금마옥(禁魔獄)으로 보내 가두는 것으로 마교의 중원 침공을 견제해 왔다.
 검황의 손을 벗어난 검계의 반역자들은 이후로도 마교로 흡수되었고 마교의 힘은 점차 더 강해졌다. 그에 반해 한 번 갈라선 검황과 도제가 다시 힘을 합치는 일은 없었다. 후대에 두 번째 격전이 벌어져 도제가 위기에 빠졌고 검황이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도제의 행방은 그 뒤로 알 수가 없었다.
 마교는 점차 강해지고 있었지만 검황의 후인들은 정체돼 있었다.
 휘륜의 스승이기도 한 이십구대 검황은 검계의 반역자들을 품 안에 안은 마교가 무림에 비밀리에 관여한 흔적을 포착해냈다. 검황의 선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마교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다섯 사람을 택해 검법을 전수했고 그들에게 검황의 시종임을 자처하게 해 저들을 끌어들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계책은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오대 검왕과 그들이 일궈낸 세력의 등장으로 검계의 반역자들이 무림에 파종해 둔 세력의 기반이 날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삼십대 검황 자리에 오른 휘륜은 검계의 반역자들이 마교 안에서 독자적인 조직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마교의 울타리를 넘어 중원을 넘보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에 저들을 완전하게 뿌리 뽑으려고 했다.
 엄밀히 말해 검황은 혼자가 아니었다. 검계와 마교가 생겨났을 시점부터 존재했던 천선부(天仙府)는 검황과 검계 사이의 연락책을 맡고 있었고 마교의 동태를 감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검황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휘륜은 천선부와의 접선 장소에서 처음 마교도들과 조우했다. 그때부터 수 일을 쫓겨 다니며 싸워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맞닥뜨린 마교의 교주들 두 명의 합공은 휘륜 혼자서 상대하기엔 벅찰 지경이었다. 만약 그 전투에서 휘륜이 목숨을 잃었다면 검계가 세상에 나왔을 것이고 마교와의 전면전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지금 상태가 유지되는 편이 좋다. 추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중심을 지키고 있는 한 세상은 지금처럼 평화로울 것이다. 그러자면 내가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검계의 반도들을 처단하고 나아가서는 마교의 중원 침공을 막아내는 길은 검황이 저들에게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뿐이다.’
 
 ***
 
 막노인과 만취공이 소림사로 간 사이에 두 사람이 모옥을 찾았다. 소혜군주와 젊은 미청년 하나였다. 미청년은 드물게 화려한 비단 장삼을 걸쳤는데 가슴 부분에 금실로 무극(無極)이라 새겨 넣었다. 이마엔 쓴 청건(靑巾)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운데 금사로 새겨진 무극이란 수가 유난히 화려했다.
 모옥의 주인인 만취공이 보이지 않아도 소혜군주는 별반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다시 모옥을 찾은 건 다분히 휘륜을 보고자 함이 컸다. 소혜군주의 옷차림이 어제와는 달리 간단한 경장 차림인 것도 무척 이색적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청의경장에 긴 머리를 틀어 올려 옥잠을 꽂은 모습은 그녀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어제의 모습이 화려함의 극치였다면 오늘의 모습은 발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가지 않겠다는 휘륜을 억지로 무극산장으로 이끌었다. 같이 온 미청년은 무극검왕(無極劍王) 고신철한(高辛鐵漢)의 애제자인 능한성(凌寒星)이었다. 바로 소혜군주가 근래에 호감을 지니고 있다 소문난 그 사내였다.
 능한성의 외모는 눈길을 끌만큼 출중했다.
 무극검왕은 고신세가 출신이다. 고신세가 출신이지만 그의 제자들 중 고신세가 사람은 고작 한 명뿐이었다. 그는 혈육의 정에 기대거나 특혜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거리를 둔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냉정하게 대했다. 물론 고신세가가 무극검왕 덕분에 세가 동맹에서도 주축이 될 수 있었고 지금의 위치를 가질 수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무극검왕 고신철한은 마음에 드는 기재가 있으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산장으로 불러들여 곁에 두었고 삼 년 이상을 지켜보면서 재능과 품성을 살핀 후에야 무공을 전수했다. 대다수는 무기명 제자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중 특별한 몇 사람은 기명 제자로 발탁됐다. 능한성은 이 년 만에 무기명 제자가 되었고 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기명 제자가 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기명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어린 스물세 살이었는데 고신철한이 내심으로 가장 큰 기대를 품고 있는 제자라고 외부에 알려져 있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받는 자였다.
 처음 소혜군주가 휘륜에 대해서 말했을 때에는 별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두 번 거듭 그를 언급하자 조금 관심을 가지긴 했다. 이참에 함께 가서 보자며 조르기 시작했을 때 군주의 마음속에 생각보다 더 깊이 그 사내가 각인됐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 첫 대면을 한 능한성의 솔직한 심정은 경계심과 적대감이었다.
 사형들을 대할 때도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기명 제자들을 두고 비교한다는 것쯤 모를 리 없었고 그런 세인들의 평가에 대해 능한성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대범하게 받아넘겼다. 한 번도 질투하거나 조급해하는 모습을 들켜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성품이 워낙에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사형들에 비해 다소 뒤처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련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자신이 최고가 될 거라는 믿음이 강했기에 여하한 경우라도 대범하게 웃으며 넘기려고 노력해왔다.
 ‘그런 내가 처음 본 사람 때문에 초조감을 느끼다니. 결코 소혜군주 때문이 아니다. 기분 나쁜 놈이다.’
 능한성은 자신의 이런 심경 변화가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내심은 결단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시종일관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휘륜을 대했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엔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휘륜공자의 체격은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탁월한 것 같습니다. 정말 욕심나는 신체 조건입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골격 하나만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처음 본 사내가 몸이 탐난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대답을 할 것인가.
 휘륜은 쓴웃음을 지었을 따름이다. 소혜군주는 마치 제 무공을 뽐내기라도 하듯 날쌘 노루처럼 바위 위를 빠르게 뛰어갔다. 능한성은 한 걸음 뒤에 처져서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걷고 있는데도 소혜군주보다 여유가 넘쳤다. 하긴 두 사람의 무공 차이는 워낙에 크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휘륜이었다.
 무공을 드러내기에도 감추기에도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외부로 강력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능한성에 비하자면 휘륜의 기세는 평범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골격만은 어떤 무사라도 감탄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쳤으리라 의심을 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휘륜은 담담하게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능한성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경공술치고는 지나치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속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어울릴 듯하니······ 내가 괜한 경쟁심을 품었던가? 별것도 아닌 사람이었군.’
 
 무극산장은 약곡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다. 약곡의 모옥에서 무극산장으로 가자면 태실봉 허리를 빙 둘러서 가야만 했다. 태실봉 중턱에 위치한 무극산장은 다섯 채의 전각과 대문과 담장에 붙어 있는 행랑이 전부였다. 무극산장에 머무는 인원은 시비와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을 포함해 고작 백여 명 남짓 정도였으니 이 정도의 규모면 충분한 크기였다. 그런데도 유난히 작게 보이는 이유는 당금 무림에서 무극산장이 누리고 있는 지위 때문이었다.
 다섯 개 중 세 개의 전각은 품자 형태로 세워져 있고 나머지 두 개는 독립되어 따로 떨어져 있었다. 산장 안에는 세 개의 정원과 한 개의 연무장이 있을 뿐이었다. 연무장은 첫 번째 전각 앞이었는데 거기에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웃통을 벗어젖힌 장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수련이 한창인 연무장 근처를 세 사람이 지나가는데 휴식 중인 제자들 몇 명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태반이 능한성보다 연장자로 보였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정중하게 예를 차리는 것이었다.
 어느 문파나 그 문파만의 엄중한 예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개의 명문정파가 고수하는 예법은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들어온 순서대로 항렬이 붙기 마련이고 한 번 정해지면 좀체 변동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무극산장에는 제자들의 항렬도 없었고 일대, 이대로 나눌 수 있는 구분도 없었다. 단 하나 있다면 기명 제자와 무기명 제자의 차이뿐이었다. 먼저 들어왔든, 늦게 들어왔든 무기명 제자는 기명 제자를 깍듯이 윗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 오악 검파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산장 중에 유일하게 무극산장만이 제자들로만 구성돼 있었다. 다른 산장들의 경우에는 기명 제자와 무기명 제자와는 별개로 소수의 정예화 된 장주 직속의 수하들이 존재했다.
 승려처럼 머리를 빡빡 민 장한 하나가 능한성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능사형, 아까부터 대사형께서 찾으셨습니다.”
 “대사형께서? 무슨 일로?”
 올해 서른세 살인 장덕보는 열다섯 살에 무극산장에 들어왔으니 올해로 19년 차였다. 그런데도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리고 연차로도 9년이나 늦은 능한성에게 사형이라고 부르는 신세임에도 전혀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것까지는 소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검명각에 계시니 속히 가보십시오.”
 대사형 포천(包遷)은 올해 오십이 세다. 기명 제자들과 무기명 제자들을 다 합쳐서 가장 나이 많은 제자였다. 무극검왕이 첫 번째로 받아들인 제자라는 점에서 그는 세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무극검왕의 대제자라는 신분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유약한 인물로 정평이 났고 이런 세간의 평가는 산장 내의 평가와 별 차이가 없었다.
 무림에서도 그에게 자비검(慈悲劍)이라는 외호가 붙을 정도로 그의 성품은 어질기 그지없었다. 사제들에게는 존경을 받는 대사형일지 모르지만 한 문파의 대제자로는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도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릴 뿐 반박하거나 분개해 하지도 않았다.
 대제자인 포천보다는 이 제자인 고신천강(高辛天)이 대외적으로는 더 유명했고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더군다나 무극산장의 유일한 고신세가 사람이기도 했다. 고신천강은 현 고신세가주의 친조카였으며 무극검왕에게는 손자뻘이 된다. 올해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사실상 대제자인 포천을 능가하는 무극산장의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능한성은 다른 사형제들이 포천을 좋아하며 따르는 데 반해 그를 무능한 사람의 표본쯤으로 여겼고 속으로 업신여기는 마음도 컸다. 고신천강의 직속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입안의 혀처럼 구는 능한성은 고신천강에게 유독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늘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지만 그중에 영특하기로 두드러지는데다 자신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표하는 막내 제자를 멀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능한성의 본능적인 처세술은 무극산장의 실세이자 장차 무극검왕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고신천강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휘륜과 소혜군주를 남겨두고 검명각(劍鳴閣)으로 뛰어 올라간 능한성은 포천을 보자마자 인사를 하다가 멈칫거렸다. 대사형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어둡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져서 길게 뻗은 것이 무척 독특한 포천은 검법을 수련하는 검사의 전형적인 몸매와는 거리가 먼 푸짐한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배가 불룩 나온 것 역시 후덕한 인상에 한몫하고 있었다.
 그가 조금 전까지 뒤적거리고 있던, 탁자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은 무극산장의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기재해 놓은 출납 장부와 물품 명세서들이었다. 포천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서 능한성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사형, 무슨 일이신데 낯빛이 그리 어둡습니까?”
 포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그 앞에 툭 던지며 말을 했다.
 “이걸 봐라. 그걸 보고 나면 내 얼굴이 왜 어두운지를 저절로 알 것이다.”
 사형이 내민 서류들을 뒤적여보던 능한성의 얼굴도 급격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우려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그는 서류 뭉치들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어쨌다는 말씀이신지······.”
 “넌 그걸 보고서도 그딴 소리가 나오느냐?”
 “무슨 연유로 역정을 내시는지 소제는 도통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정말 내가 스승님께 직고해야 되겠느냐?”
 능한성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내심으로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대사형, 작은 일을 크게 키워 어쩌실 작성이십니까?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시는 겁니까?”
 “뭐, 뭐라고! 네놈이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몰라서 물으십니까? 이만한 일로 분란을 조장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닥쳐라, 이놈!”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사형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이사형의 명예에 누가 되고 오점을 남기길 원한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스승님께서도 그리 썩 달가워하진 않으리라 소제는 확신합니다.”
 “네놈이 사제를 등에 업더니 이제 대사형인 나는 안중에도 없는가 보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대사형께서도 현실을 직시하시는 편이 이로울 듯싶어서 드리는 말씀일 뿐입니다. 무극산장의 미래가 누구 손에 달려 있는지 헤아리시어 이번 일을 크게 벌이는 건 결국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길임을 깨닫길 바랄 뿐입니다.”
 “고얀 놈! 지금 사제는 어디 있느냐?”
 “이사형께서는 본가에 일이 있다며 내려가셨습니다. 당분간 얼굴 뵙기 힘들 겁니다. 출타하신 틈을 타 대사형께서 일을 크게 벌인 걸 알면 무척이나 서운해하시겠군요.”
 “웬만하면 나도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액수가 너무 크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이 금액은 다른 곳에서 끌어와 메우기엔 너무 커. 내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액수다. 그러니 스승님께 알릴 도리밖에 없다.”
 능한성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게 아니겠지요. 금액이 큰 게 아니라 다급하지도 않은 전각 보수로 불필요한 지출을 늘린 탓 아닙니까? 전 대사형께서 의도적으로 이리하신 걸로 생각됩니다만······.”
 “네놈이 지금 이 일이 전부 내 탓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어쨌든 이사형이 돌아오실 때까지 덮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이 사실을 또 누구에게 발설하셨습니까?”
 “네놈이 처음이다.”
 “불행 중 다행이로군요. 이렇게 하지요. 제가 반절을 어떻게 해서든 끌어올 테니 나머지는 대사형께서 메우십시오.”
 “으음.”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으시리라 믿겠습니다.”
 “어딜 가느냐?”
 “이만한 일로 수선 떨 필요 없습니다. 무극산장의 대제자답게 품위를 지키십시오. 소제는 급한 용무가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서 나가는 능한성의 등에 대고 포천은 힘주어 말했다.
 “네 녀석이 내게 이렇게 대할 줄은 진정 몰랐구나. 한때는 그렇게 살갑게 굴더니 네 녀석이 어쩌다 이리되었더냐?”
 걸음을 멈춘 능한성의 입술을 비집고 차가운 일성이 흘러나왔다.
 “그때는 대사형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이지요. 소제는 체질적으로 무능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또한 별 능력이 없는 사람이 단지 먼저 사부님과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제자의 지위를 누리는 것 역시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벅차면 그만 포기하셔도 누구도 나무랄 사람이 없음을 유념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럼 소제는 이만.”
 포천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이로 치면 아들뻘 간신히 되는 어린 사제에게서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서 어찌 진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포천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리석은 놈. 네놈이야말로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스승님께서 이사제같이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인 녀석을 후계자로 삼을 거라 생각하다니······ 넌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려면 한참 멀었다. 게다가 넌 이사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장담하건대 너야말로 비참하게 버려지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는 게 나을 것이다.”
 
 
 4장 비무(比武)
 
 
 능한성이 대사형인 포천과 함께 이 제자인 고신천강이 벌여놓은 일을 어찌 수습할지를 논의하고 있던 그 시간에 소혜군주는 휘륜을 안내해 무극산장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고 있었다. 열 걸음쯤 떨어져 따라오는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고도 남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그녀를 보면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호호. 흥미롭지? 고수들의 세계는 그처럼 신기한 세상이란 말이야. 그때부터 난 무림의 세계에 과연 어떤 고수들이 더 있는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졌단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가본 문파는 스무 군데가 넘어. 명성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곳도 있었지만 여기 무극산장처럼 홀딱 빠지게 할 만큼 대단한 곳도 있지. 난 세상 사람들이 다섯 개의 산장을 일러 오악 검파라고 부르며 숭상하는 이유를 몰랐는데 여기 와보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됐어. 이들은 여러 면에서 확실히 달라.”
 휘륜은 어쨌든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어떤 점이 다르게 보였습니까?”
 “우선 무공의 고강함과 독특함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 다른 타 문파와는 달리 검법만 수련하는 검문이란 점도 마음에 들지만 오직 하나의 검법에만 매진하는데도 그거 하나로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 점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해.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하나를 알더라도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건 무극산장의 역사가 아직은 일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최고, 최강의 무공 하나면 족한 거 아니겠어? 산장의 제자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배우고 수련하는 무극 검법인데도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재질이 달라 성취 역시 달라지니 참 신기한 일이지. 무극 검법이야말로 세상에 많고 많은 검법들 중에 최고인 것 같아.”
 “누가 무극 검법을 최강이라고 하던가요?”
 “흐음. 물론 그 말은 여기 사람들에게 들은 거지만······ 본 군주는 그 말에 동의하고 싶은 심정이야. 무극 검법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검법은 본 적이 없거든. 장주께서 직접 보여준 무극 검법은 정말 화려하고 대단했지.”
 휘륜은 속으로 생각했다.
 ‘무극 검법은 대표적인 중검(重劍)이다. 화려할 리가 없지. 군주에게 그리 보였다면 그건 아마 여기 장주가 군주를 위해 특별히 배려한 것이겠지.’
 사실 휘륜만큼 무극 검법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무극 검법뿐만 아니라 다섯 검왕의 독문 검법들은 모두가 휘륜의 스승이 직접 전수한 검법들이다. 당연히 휘륜도 알고 있는 검법들이었다.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춘 소혜군주는 휘륜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난 네 무공을 보고 싶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왠지 이곳으로 따라오는 내내 찜찜했던 게 바로 이런 일이 생기리란 예감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곳은 휘륜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 온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꺼려지는 일이었는데 무공까지 보여 달라고 하니 난처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수위를 조절해서 펼친다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휘륜이 걱정하는 건 혹시라도 여기 장주가 그 모습을 보게 되면 기껏 정체를 감추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몸에 익은 검초들의 특징이 배어 나오기 마련인데, 무극검왕 정도의 고수가 그걸 보고 무심히 넘길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게 휘륜은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이거 참. 이 막무가내인 군주를 더 상대해주기엔 무리가 있군.’
 휘륜은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품기에 이르렀다. 지금 한가하게 노닥거릴 심적인 여유가 휘륜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휘륜의 속마음도 모르고 기대에 차서 바라보는 소혜군주의 눈빛은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휘륜은 그 눈을 똑바로 본채 딱 잘라 말했다.
 “제 무공은 보잘것없습니다. 보시면 실망할 것입니다.”
 “그래도 좋아. 보고 싶어.”
 ‘허······.’
 “보여줄 거지?”
 이 소녀의 애절한 눈빛과 뽀얀 살결,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녀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리라.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다.
 휘륜은 소녀의 마력적인 흡입력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청을 오히려 귀찮아하고 있었다.
 연무장 앞까지 오는 내내 조르는 소혜군주의 부탁을 웬만하면 들어줄 만도 한데 휘륜은 한사코 거절했다.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휘형, 제가 부탁을 해도 안 되겠습니까?”
 산 넘어 산이었다. 철없는 소혜군주야 그렇다 쳐도 말리는 게 마땅한 능한성까지 그런 부탁을 하고 나서니 영 탐탁지 않았다. 휘륜은 연무장으로 다가서고 있는 능한성이 애써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 얼굴에 수심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아봤다.
 대사형이 찾는다는 소리에 득달같이 달려갔던 능한성이 돌아와 자기편을 들어주자 소혜군주는 신이 나서 휘륜을 조르고 나섰다. 여기서 더 거절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원래 무림인들 사이에서 한쪽이 청한 비무를 거절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심각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서로의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문파의 수장 같은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그런 부담감이 없는 문하 제자들끼리는 곧잘 비무를 통해 무공의 고하를 겨뤄보는 일이 흔했다. 결국 휘륜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군요.”
 소혜군주는 손뼉을 치며 좋아라했다. 수백 회 이상의 비무를 관전한 소혜군주가 이처럼 신나하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귀빈인 소혜군주를 위해 무극검왕이 기명 제자들 중에 가려 뽑아 비무를 친견할 기회를 몇 번 주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들떠 있지는 않았다. 군주의 그런 태도는 다소 수그러들었던 능한성의 휘륜에 대한 본능적인 경쟁심을 재차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저와 비무를 해보지 않겠소?”
 능한성의 뜻밖의 제안은 소혜군주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안 돼. 두 사람은 실력 차이가 많이 날 테니 무기명 제자 중에서 고르는 게 좋겠어.”
 소혜군주의 그 말은 능한성의 실력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휘륜을 걱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능한성은 후자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더 오기가 생겼다.
 “어떻습니까, 휘형. 저랑 한 수 겨뤄보시지 않겠습니까?”
 능한성은 무림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무극산장의 기명 제자 신분이다. 그에 비해 휘륜은 성명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 소졸이다.
 그나마 지금 능한성이 휘륜을 대함에 있어 최소한의 예를 차리는 건 소혜군주의 손님이라는 배경이 작용한 탓이 컸다. 약간은 도발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휘륜은 그가 무례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강호에서는 명성과 배분, 실력이 그 사람의 지위와 신분을 결정한다. 능한성이 휘륜에게 함부로 대해도 누구 하나 그걸로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휘륜은 능한성과의 비무를 거절했다.
 “능공자와의 비무는 제겐 다소 벅찬 일입니다. 다른 분을 추천해 주십시오.”
 휘륜의 거절은 겸손이라기보다는 비굴하게 비칠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기명 제자와의 비무였다. 기명 제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능한성을 눕혀버린다면 문제가 커지겠지만 그에 못 미치는 무기명 제자라면 그런대로 별 주목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리라.
 그들의 대화는 가까이에서 수련에 몰두하고 있던 다른 제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생판 처음 보는 외부인과의 비무라면 제자들 사이의 경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무라도 무극산장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반드시 이겨야했다. 지금 연무장에는 마흔 명 남짓 되는 인원이 수련 중이었는데 그들 중에 기명 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기명 제자들과 무기명 제자들은 공평하게 무극 검법을 사부에게 직접 전수받았다. 무극 검법의 초식을 연구하거나 수련할 때는 연무장처럼 훤히 드러나 있는 곳에서 하지 못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연무관이나 태실봉 일대에 자유롭게 흩어져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금 연무장에 있는 제자들은 무극 검법이 아닌 다른 여타의 검법을 수련하거나 원래의 초식이 아닌 자기만의 변초를 구성해 연습하고 있었다.
 비록 정식으로 수련하는 무공은 무극 검법이었지만 현재 이곳 무극산장에는 천하에서 모은 갖가지 무공 비서들이 가득했다. 무극산장의 제자라면 원하는 대로 열람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익혀도 무방했다.

댓글(5)

n1***********    
선발대없음? 황제의 검은 어릴때 볼만하게 봤던 기억이있는데
2019.07.08 06:48
da********    
전 주인공 이름 휘륜에서 나갑니다. 완벽한 중2병 이름이네요.
2019.07.15 09:20
뒷산호랭이    
읽지를 못하겠네여 정세 설명 왜이렇게 길죠? 전형적인 TMI TMT 네요 너무 옛날 스타일이에여
2019.08.03 22:42
threeon    
어후...
2019.10.09 14:14
겸도    
완결안난책인지알았으면 읽지도 않았을텐데 읽고 후회합니다 10권이면 완결일줄알았지 난!!
2019.11.1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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