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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빨로 마나 마스터 1권 (1)

2019.07.04 조회 347 추천 2


 # 프롤로그
 
 
 마법사.
 두서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부터 나의 꿈은 마법사였다.
 아마 여섯 살쯤이었던 것 같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을 되새겨본다.
 진홍빛 불길이 벌판을 뒤덮었다.
 초록색 들풀을 집어삼키며 불꽃은 타올랐다.
 그리고 커다란 날개가 만들어낸 바람 소리와, 귀청이 뜯어질 것 같은 흉포한 울음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와이번.
 당시 녀석과 조우한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나는 그것을 드래곤이라 착각했었다.
 사실 오랜 시간동안 내가 봤던 괴물을 드래곤이라 믿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드래곤이 아닌 와이번이란 걸 인정할 수 있었다.
 어쩌면 무용담을 부풀리기 위해 그렇게 기억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앞뒤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내가 왜 초원에 있었는지, 와이번과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와이번의 불꽃이 주변에 휘몰아치며 난생처음 죽음을 맞닥뜨렸다.
 순간순간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절망과 살갗 아리는 공포를 실감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이 끔찍한 기억은 곧 아련한 꿈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떨린다.
 와이번의 목구멍에서 치솟던 화염이 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녀석을 휘감아 올랐다.
 마치 살아있는 불의 뱀처럼.
 사냥꾼에서 사냥감이 되어버린 녀석의 눈동자가 죽음의 공포로 일그러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녀석은 자신이 뿜어낸 화염에 삼켜지며 재가 되어 사라졌다.
 허공에서 사그라드는 재와 형형색색 아름다운 불꽃.
 그 순간 모든 공포와 절망은 두근거리는 꿈으로 변했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시간이 멈췄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법사.
 내가 처음 본 마법사란 그런 존재였다.
 내게 끔찍한 절망이었던 와이번을 태워버린 압도적인 힘의 상징.
 정신이 들었을 때 나를 구해준 마법사는 떠나고 없었지만, 가슴속의 잔상은 여전히 남아 조금씩 피어올랐다.
 생명의 은인이기에 앞서 가슴속 불씨를 피워 올린 존재.
 그분처럼 멋진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꿈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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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 이 망할 자식,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형님! 이쪽에는 없습니다!”
 “이쪽에도 없습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씩씩거렸다.
 그중에서도 덩치가 가장 커다란 남자는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코끝을 찡그렸다.
 방금 ‘형님’이라고 불렸던 걸 보면 그가 가장 웃어른으로 보였다.
 “후우, 내가 원장님 앞에서 마법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또 그딴 소리를 지껄여? 아주 혼쭐을 내주겠어.”
 “형님이 참으세요. 원장님도 괜찮다 하셨는데 형님이 그러시면······.”
 “시끄러워! 이건 원장님 이전에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야!”
 키가 2미터에 가까운 이 남자는 수도원에서도 사납기로 소문난 디알로.
 디알로는 목의 굵은 핏줄을 세우며 콧김을 뿜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주변 남자들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까까머리에 잿빛 수도복 차림을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몽크, 그러니까 수도사들이었다.
 민소매 밖으로 드러나는 디알로의 튼실한 이두박근이 꿈틀거렸다.
 아마 그에게 걸리면 저 튼실한 근육들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었다.
 디알로는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수도원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도망간 인물이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돼있었는데 그가 찾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분을 못 이기고 발끝에 걸리는 바구니를 걷어찼다.
 퍽!
 “망할!”
 “형님!”
 그의 발길질에 감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다른 수도사들은 황급히 이를 주워 담았다.
 감정과 욕구를 절제하는 몽크치고는 더러운 성깔이 아닐 수 없었다.
 씩씩대며 분을 삭이지 못하던 디알로는 한숨을 뱉었다.
 땅이 꺼져라 깊은 숨을 뱉어도 그의 분은 풀릴 줄 몰랐다.
 ‘후우···. 저녁 식사 때 얼굴을 비추면 그냥!’
 “디알로. 여기 있느냐.”
 깊고 근엄한 목소리에 네 명의 까까머리가 고갤 돌렸다.
 이들은 동시에 고갤 숙이면서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예의를 갖췄다.
 검은색 수도복 차림에 길게 늘어진 흰 수염.
 다른 몽크들처럼 그의 머리도 까까머리였지만, 깊은 눈동자에서 나오는 분위기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증명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디알로조차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제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오늘이야말로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한 번만 눈감아주십시오.”
 “허허 아니다. 방금도 괜찮다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원장님! 이건 예의의 문제입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십니까? 녀석도 이제 열다섯인데 계속 어리광부리게 둘 순······!”
 “괜찮대도. 안토니오 수사가 찾으신다. 다들 내려가 보거라.”
 바짝 긴장한 수도사들과 달리 원장은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의 손짓에 디알로를 포함한 다른 수도사들도 하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이 높은 산 수도원장 체페슈 수사는 내려가는 네 명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윽고 감자 같은 머리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옆에 있던 바구니를 툭 쳤다.
 “다 갔다 이놈아.”
 그의 이야기에도 바구니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가 바구니를 다시 한 번 걷어차고 나서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형님들이 먼저 마법사를 욕했다고요······.”
 작은 목소리와 함께 바구니를 드러낸 소년이 나타난다.
 다른 수도사들처럼 까까머리에 검게 탄 피부를 가졌지만,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소년.
 체페슈는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킨 뒤 슬쩍 미소 지었다.
 “이놈아. 우리는 수도사니까 그렇지. 수도원에서는 수도사가 왕인 거 모르냐?”
 “하지만 드래곤을 잡은 수도사 이야기는 들은 적 없는 걸요? 드래곤을 잡는 건 언제나 마법사와 기사, 그리고 용사뿐이잖아요!”
 과거 불타오르는 평원에서 와이번을 만났던 소년.
 자기를 구해준 마법사의 인상이 강렬했는지 소년은 그날 이후 마법사의 꿈만을 키워왔다.
 다른 수도사들과 충돌하면서까지 꿈을 키워온 지 어느덧 9년째였다.
 몇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에 늙은 수사는 껄껄 웃었다.
 “껄껄! 그렇지! 용을 잡은 수도사는 왜 없나 몰라!”
 그의 웃음에도 소년의 시무룩한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체페슈는 품 안의 보자기를 펼쳤다.
 살짝 식었지만 노랗게 익은 감자 두 알이 소년에게 건네졌다.
 “나였다면 점심은 먹고 도망쳤을 게다. 네 형들도 점심은 먹고 널 쫓았는데 도망친다는 녀석이 굶고 다니면 어쩌냐, 시드.”
 “원장님···.”
 시드.
 네 명의 수도사가 찾던 이 소년의 이름은 시드였다.
 시드는 체페슈가 건넨 감자 한 알을 입에 넣고 야무지게 우물거렸다.
 점심도 거르고 도망 다니느라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감자 한 알을 해치운 소년은 나머지 한 알도 입에 쑤셔 넣었다.
 노랗고 알찬 알맹이만큼 입안엔 은은한 단맛이 퍼졌다.
 그새 감자 두 알을 해치운 시드는 원장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와 함께 내려가자꾸나. 내 옆에 있으면 저녁 시간까지 혼나는 일은 없겠지?”
 “네! 이번엔 저녁을 먹고 도망칠 게요!”
 “옳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게 그거다. 허허!”
 체페슈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높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토니오 수사를 돕던 디알로를 본 시드는 체페슈 옆에 붙었다.
 이내 디알로의 퉁명스러운 푸념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하여튼 원장님도. 그 자식 어리광을 다 받아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큰형님 디알로의 이야기에 다른 수도사들도 고갤 끄덕였다.
 하여간 매번 마법사가 되겠다는 막내가 귀여울 리 없었다.
 “그래도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안토니오 수사가 입을 열었다.
 빼빼 마른 몸에 동그란 유리 안경을 낀 남자는 빨래를 털며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되고 싶어도 시드는 마법사가 될 수 없잖아요? 선천적인 마나 용량이 낮아 일반인과 비슷한 정도죠. 나이를 더 먹으면 분수를 깨달을 겁니다. 그때까진 꿈을 꾸게 두어요.”
 그의 말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그저 말 잘 듣는 수도사와 말썽꾸러기 막내를 두고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꿈을 훼방하지 말라고 한 정도면 가벼운 선의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그 이야기를 당사자가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런.’
 체페슈는 꼭 잡은 손을 타고 오르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이 그날이길 바라진 않았다.
 한숨이 나오는 걸 참고 시선을 내리니 입술을 다문 소년이 보였다.
 사실 시드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도사들이 철권(iron fist)을 완성하고 기본적인 능력을 개방했을 때도 소년에겐 어떤 성과도 없었다.
 자신은 마법사가 될 거니 괜찮다고, 선배들과 같은 수도사 능력은 필요 없다고 핑계 대왔다.
 어쩌면 진작부터 자신에겐 마법을 포함한 수도사의 재능도 없었을지 모른다.
 마법사가 되겠다는 건 답답하고 부조리한 일상을 뒤집을만한 핑계였을 뿐이었다.
 체페슈는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점점 땀이 차고 힘이 들어도 놓을 수 없었다.
 지금 놓치면 소년을 영원히 잃을 것만 같았다.
 “흐윽!”
 마침내 서러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년이 울음을 터트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체페슈도 순간 손을 놓고 말았다.
 가슴 위로 차오르는 설움이 터져 나오며 열다섯 소년의 꿈이 무너져 내렸다.
 “시드야! 방금 말은 내가······.”
 안토니오가 입을 벌리기 무섭게 시드는 내려왔던 계단을 뛰어올랐다.
 단단히 벼르던 디알로도 인상을 찌푸렸고, 체페슈는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년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마나 용량이 낮은 소년 시드.
 늙은 수도사로서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후우, 후우!”
 시드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만 남아있는 꼭대기는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찾는 은거지기도 했다.
 호흡을 조절하며 정상까지 오른 소년은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고, 자리에 일어나 주먹을 내질렀다.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하던가?
 마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재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건강한 육체엔 원활한 마나가 깃들기 마련이었다.
 물론 마법사들이 서클을 올리는 것과는 다른 요령이지만, 수도사들이 정신을 수련하고 육체를 단련하는 것도 기본적인 마나에 영향을 주었다.
 “하아, 하아!”
 잠깐 숨을 몰아쉬던 시드는 어색하게 자세를 잡았다.
 이내 체페슈 몰래 봤던 마법 서적을 떠올리며 팔을 타고 모이는 마나를 느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시드에게 아주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책에서 글귀 몇 마디를 읽고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분명 재능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만큼 책을 읽고 읽은 소년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이해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라락···.
 손을 타고 푸른 마나가 형태를 갖추었다.
 이내 싸라기눈 같은 얼음 결정이 모여들더니 요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허무하게 폭발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완성되지 못한 기본 마법 ‘아이스 볼트’였다.
 “후우, 다시!”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마나를 모았다.
 은은한 푸른빛이 모이며 주변 온도가 내려가는 찰나, 누군가 두꺼비집을 내린 것처럼 빛이 사그라졌다.
 그 빛처럼 소년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이것이 시드의 한계였다.
 선천적인 마나 용량의 부재.
 어설픈 ‘아이스 볼트’ 하나만 사용해도 그에겐 다음 마법을 위한 마나가 남지 않았다.
 시드는 손바닥 위의 감각을 되새기며 몇 번이고 ‘아이스 볼트’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닥나버린 마나는 응답하지 않았고, 고요한 침묵만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마 다음 마법을 시도하려면 한 시간은 족히 지나야 할 것이었다.
 “왜···.”
 소년은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를 땐 불합리함에 절망만이 느껴졌다.
 재능이 꿈과 노력을 배신하는 순간.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허무함이 몰려왔다.
 “왜!”
 마법을 아주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허락된 마법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아이스 볼트’가 전부였다.
 스스로의 꿈과 노력을 부정당한 깊은 슬픔이 가슴 언저리까지 찰랑댔다.
 당연히 성공할 거라 믿었기에 마음이 아픈 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
 콱!
 소년은 바들거리던 주먹을 내질렀다.
 크게 흔들리는 나무 아래로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물론 자기 상태는 신경 쓰지 않고 후려친 탓에 주먹에선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수도사 몽크로서 배워온 기본기 덕분에 나무도 멀쩡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흐끄윽······.”
 나무에 기댄 소년은 참아왔던 절망을 터트렸다.
 자신의 한계를 단정 짓는 운명에 울분이 터졌다.
 누군가 기회만 준다면 최선을 다할 텐데.
 마나 용량만 늘릴 수 있다면 10년 전 마법사처럼 타인을 도울 텐데.
 시드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쥐고 중얼거렸다.
 머리를 박은 나무 아래로 소년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이 있다면 기회를 주세요. 제발······. 이렇게 노력하잖아요.”
 절박한 바람에도 나뭇잎은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어?”
 그러나 이건 절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동화 속 과장된 이야기처럼 소년이 바라던 기회는 찾아왔다.
 곧 정신을 차린 소년의 눈앞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내려왔다.
 직사각형의 얇은 물체.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낯선 형태의 괴물체였다.
 샤아아···.
 스크롤이라고 하기에는 둥글게 말려있지 않았고 마도서라 부르기에는 너무 얇았다.
 그걸 보고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의문의 마도구’가 전부였다.
 물체는 엄청난 빛을 뿜으며 소년의 손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자신의 정체가 희망이라 밝히듯, 마도구는 경쾌한 팡파르 소리를 터트렸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음악과 불빛에 시드가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빰빠바 빰!]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20년 연속 고객만족 1위! 희망은행 통장 서비스 인사드립니다. 마나 용량이 적어서 고민인 당신! 마나를 저장해주는 데다 이자까지 쳐드린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놀라운 상품! 매진 임박!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더 보기’를 클릭해주세요!]
 
 * * *
 
 “네?”
 소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객님? 은행? 통장 서비스?
 난생처음 듣는 낯선 단어 탓에, 그는 머릿속을 울리는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여성이었다.
 금녀의 공간인 수도원에서 15년 평생 남자들만 만나본 시드에겐 여성의 목소리조차 생소했다.
 “저기··· 통장님이라고 하셨죠? 혹시 천사님이신가요?”
 소년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머뭇거리며 꺼낸 이름은 경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단어였다.
 이런 어색한 질문에 수수께끼의 마도구는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 고객님. 지금 제 정체를 물어보셨는데요, 저는 희망은행 통장 서비스입니다. 좋은 상품이 있어서 소개해드리러 왔거든요?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더 보기’를 클릭해주시겠습니까?]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더 보기’를 눌러달라고 했다.
 친절하고 발랄한 말투에 시드는 호감을 느꼈다.
 곧 소년의 손가락이 허공에 떠있는 ‘더 보기’를 클릭했고,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밝은 문장이 터져 나왔다.
 
 [신규 상품 가입 페이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가입하실 상품은 마나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입니다.]
 
 “마나 입출금?”
 또다시 생소한 말이었다.
 시드는 멍한 표정으로 문장을 읽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선택할 기미가 없자 통장은 답답하다는 듯 이야길 이었다.
 
 [저희 서비스는 고객님이 사용하지 않아 남은 마나를 저장해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현재 고객님의 마나 최대 용량은 75마나 코인. 정확히는 75.3마나 코인입니다.]
 
 “75마나 코인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마나 코인?’
 시드는 자신의 마나가 대충 ‘75.3’이라는 숫자로 표현된다는 건 알아들었지만, ‘코인’이라는 단위도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가 읽어본 어떠한 책에도 마나의 농도를 ‘숫자’나 ‘코인’으로 표현하는 글은 없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마나라는 게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나?
 하나를 답할 때마다 다른 하나를 질문하는 소년이었지만 마도구 속 목소리는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고객’을 기필코 유치하고 말겠다는 굳센 의지마저 느껴졌다.
 
 [<마나 코인>은 저희 서비스에서 마나를 체크하는 단위입니다. 아이스 볼트 하나에 사용되는 마나는 약 92마나 코인. 숙련도와 개인 차이가 있지만 아이스 볼트는 현재 고객님의 마나로는 사용하기 힘든 마법입니다.]
 
 “아아! 그래서 제가 아이스 볼트에 실패한 거군요?”
 소년의 눈이 번뜩 뜨였다.
 방금 자신의 ‘마나 용량’을 ‘75.3’이라고 했는데, 아이스 볼트를 쓰는 데 ‘92’가 필요하다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말은 자신이 아이스 볼트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처참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러 나타난 만큼 통장은 씩씩하게 목소릴 냈다.
 
 [네~ 그렇습니다. 현재 고객님이 보유하신 마나는 12마나 코인. 앞으로 50분이 더 지나면 고객님의 최대 용량인 75마나 코인까지 회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깔끔한 수치에 시드는 고갤 끄덕였다.
 아이스 볼트를 시도한지 10분 정도가 지났으니 12만큼 마나를 회복했고, 앞으로 50분이 더 지나면 최대 용량에 근접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나니 목소리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통장’이라는 마도구는 사용하고 남은 마나를 ‘저장’해준다고 했다.
 그럼 자신의 최대 용량인 ‘75코인’의 마나를 가볍게 돌파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걸 깨닫기 무섭게, 마도구는 사글사글한 목소리로 대답을 기다렸다.
 
 [충분한 숙고가 끝나셨습니까? 저희 서비스는 언제나 고객 만족을 최우선 하며······.]
 
 “저기 잠깐만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꿈꾸던 소원이 이루어졌음에도 소년의 가슴 한구석은 두근거렸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이 ‘통장’을 사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읽어온 책에서 선물을 주는 존재는 크게 두 종류라 했다.
 불쌍한 이를 가엽게 여겨 구원해주는 천사.
 절망의 끝에 선 사람을 달콤한 거짓말로 속여 영혼을 탐내는 악마.
 여러 이야기로 각색되어 전승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공통적인 교훈을 전해주었다.
 ‘대가 없는 행운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통장은 밝은 목소리로 이야길 이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고객들 중엔 고객님처럼 상품을 의심하시는 분들이 있었답니다. 그만큼 좋은 상품이라는 걸 자부합니다. 그럼 하단에 있는 이용약관을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약관을 읽은 뒤 동의하시면 해당 상품이 발급됩니다.]
 
 “엇.”
 소년의 눈앞에 빽빽한 문장이 떠올랐다.
 빛을 머금은 듯 은은히 빛나는 글씨에 소년은 마음을 빼앗겼다.
 복잡한 문장이 끝날 때면 사각형 공란이 떠오르고, 그런 약관이 네 개나 존재했다.
 시드는 빽빽한 문장에 집중했다.
 해당 상품은 타인에게 양도 및 임의적인 폐기가 불가능하다느니, 몇 가지 목적으로 고객의 신체 상태를 파악하고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데 동의해달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다행히 걱정한 것처럼 ‘마법을 사용하는 대가로 영혼을 내놓아라!’하는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이에 소년의 깐깐한 질문은 계속됐다.
 “저기, 제 개인 정보를 수집한다는 문장이 궁금합니다.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혹시 저한테 원하시는 게 있나요? 제가 갚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꼭 갚을게요. 속이지 말아주세요.”
 이게 어디 열다섯 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란 말인가!
 이런 귀찮은 질문 공세에도 통장의 말투는 친절하기만 했다.
 
 [<통장 서비스>는 피험자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체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객님의 성장 데이터를 수집함으로 얻는 이득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죠.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테니 의심을 거두세요.]
 
 역시 프로는 다르다고 해야 하나?
 사실 여기까지 들은 이상 더 의심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기회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던져둔 꼴이었고, 소년은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침내 약관 옆에 있던 버튼을 체크하자 커다란 문구가 떠올랐다.
 시드는 떨리는 순간을 만끽하며 입을 벌렸다.
 
 [해당 상품에 정상 가입되셨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상품을 애용해주시길 바랍니다!]
 
 팡!
 “헉!”
 이 문구를 마지막으로 눈앞의 빛이 사라졌다.
 손에 남은 ‘통장’만이 그 순간이 꿈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었다.
 시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마도구를 들었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글씨는 오른쪽 구석으로 치우쳐져있었다.
 “아아 이거 책처럼 넘기는 게 아니구나?”
 통장 읽는 법을 배운 시드는 페이지를 아래서 위로 올렸다.
 흔히 책을 만드는 데 이용되는 고급 양피지나 종이와 달리, 단단하고 매끄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희망은행은 고객님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시드 님] [계좌번호 : ****-***-****]
 [예금과목 : 무제한]
 [해당 통장은 타인에게 매매하거나 양도할 수 없습니다.]
 
 통장의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름이 새겨진 부분과 마법진으로 봉인된 오른쪽 상단의 ‘서명란’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계좌번호’라고 하는 생소한 항목이 있었는데, 무슨 문자로 쓰여 있는지 이해하려 해도 내용이 읽히지 않았다.
 아마 특별한 마법이 걸려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어마어마한 마도구를 얻었음에 기뻐하며 시드는 통장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내용] 입금
 [찾으신 금액]
 [맡기신 금액] *21
 [잔액] *21(체페슈 수도원)
 
 통장을 펼치기 무섭게 간략하게 정리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사각형 통장은 메시지 창에 공명(共鳴)하듯 은은한 빛을 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이것이 통장이 자랑하던 ‘마나 저장 기능’임을 깨달았다.
 ‘입금’이라는 건 지금 가진 마나를 통장에 넣었다는 의미일 테고, ‘맡기신 금액’은 통장 속으로 들어간 마나량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잔액’이란 통장 안에 남아있는 마나의 총량!
 심지어 마나를 저장한 위치까지 표시되는 기능에 가슴이 떨린다.
 “신기한 물건이네. 아이스 볼트를 사용하는 데 마나가 얼마나 필요하다고 했지? 조금 모았다가 쓰면······.”
 
 [아이스 볼트. 현재 고객님의 숙련도로는 92마나 코인이 소모됩니다.]
 
 “깜짝이야! 통장 서비스님 아직도 계셨어요?”
 떠난 줄만 알았던 목소리에 시드는 화들짝 놀랐다.
 곧 친절했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온다.
 
 [저는 고객님의 상품 사용을 보조할 시스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인물이 목소리 톤만 바꿔서 말하는 기분이었지만, 앞으로도 누군가 함께해준다는 말에 미소가 번졌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스··· 시스템? 시스터? 혹시 수녀님과 관계가 있으신가요?”
 
 [전혀 다릅니다.]
 
 “그렇구나.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시스··· 누님!”
 통장을 품에 넣은 시드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갑작스레 얻은 행운에 가슴 떨렸지만 이젠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주먹 모양이 새겨진 나무를 지나던 그때, 누군가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이크, 다른 형님들인가?’
 시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다른 수도사들이 벼르고 있지 않았던가.
 슬쩍 발을 옮겨 나무 뒤로 숨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페슈 원장이다.
 “시드야. 거기 있냐?”
 “원장님!”
 우울하게 있던 것도 잊고 소년의 밝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의에 빠진 소년을 달래러 올라온 체페슈는 의외로 밝은 목소리에 눈썹을 들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걱정했음이 분명한 스승의 등장에 시드는 공손히 고갤 숙였다.
 소년의 밝은 모습을 본 체페슈도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 마음은 좀 풀렸느냐? 그렇게 웃으니 보기 좋구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괜히 제가 그런 모습을 보여서··· 어?”
 고개 들던 시드는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반응에 체페슈도 누가 따라왔나 싶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러냐? 뒤에 뭐라도 있냐?”
 “아, 아니에요 원장님. 딸꾹질이······.”
 시드는 배시시 웃었다.
 사실 시드가 이렇게 놀란 건 통장과 계약한 후 확실히 달라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412,400]
 
 체페슈 수사의 머리 위.
 소년의 눈에는 숫자로 표시되는 마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법을 전공하지 않은 수도사임에도 그의 마나 용량은 어마어마했다.
 체페슈 머리 위로 빛나는 숫자에 시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도 통장과 계약하면서 얻은 능력인가 보다.
 “왜 그러냐? 내 머리에 뭐라도 있냐?”
 체페슈는 정수리를 매만졌다.
 다른 수도사들처럼 까까머리지만 탈모가 진행된 정수리엔 밝은 태양빛이 빛나고 있었다.
 갑작스런 능력에 놀랐지만 시드는 재빨리 고갤 저었다.
 소년의 손가락이 향한 건 마침 흘러가던 뭉게구름이었다.
 “아, 아니요! 원장님 뒤에 구름이 너무 예뻐서······.”
 “구름? 그렇지. 여기 오면 구름이 참 예쁘단 말이야.”
 체페슈는 소년의 머릴 쓸었다.
 두 사제(師弟)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구름을 바라봤다.
 나무에 움푹 파인 정권 흔적을 보니 늙은 수사의 마음이 아렸다.
 이제 마법사에 대한 꿈을 버리고 평범한 수도사가 되라고 하려는 찰나, 소년의 밝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원장님. 혹시 마법사 중에 남의 마나를 볼 수 있는 분이 있었나요?”
 “마나?”
 철없는 질문에 체페슈는 숨을 삼켰다.
 다 포기하고 마음을 정리한 줄 알았더니 또 마법 이야기였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건 책망이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던 답을 찾았다.
 “어디 보자··· 마나를 농도로 보거나 색이 다르다고 하던 이들은 있었지. 그것도 6서클이 넘는 마법사였을 게다. 그건 왜 물어보냐? 내 눈에 네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으려고?”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시드는 해맑게 웃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로 ‘마나가 숫자로 보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신했다.
 마법사에게 남은 마나가 얼마인지, 어떤 마법이 얼마만큼 마나를 소비하는지 알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고서클 마법사에 가까워진 셈이었다.
 
 * * *
 
 ‘흠······.’
 다시 말이 없어진 제자를 보며 체페슈는 고갤 갸웃거렸다.
 시드가 꿈을 접은 건지 접지 않은 건지 감이 오질 않으니 뭐라 달래야 할지 몰랐다.
 “내려가요 원장님. 괜히 신경 쓰셨죠?”
 “응? 괜찮다 이놈아. 껄껄!”
 열다섯 소년의 미소에 체페슈도 껄껄 웃었다.
 지금 당장 결론짓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미소를 지킬 수 있는 게 그에겐 큰 기쁨이었다.
 두 사제는 이전처럼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혼자 있는 사이 기분이 풀렸는지 소년의 얼굴엔 근심 한 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원장님. 우리 매번 하던 약속, 아직 그대로죠?”
 “응?”
 “파이어 볼을 쏘면 수도원을 나가도 된다 하신 거요.”
 “파이어 볼?”
 늙은 수사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소년이 안타까우면서 장하기도 했다.
 그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며 애써 웃어 보였다.
 “물론이지 이 녀석아! 내 앞에서 파이어 볼을 한 발만 쏴도 아카데미에 입학시켜준다니까? 이거 내 제자 중에 첫 번째 마법사가 나오겠구나! 껄껄!”
 “거짓말하기 없기에요?”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거 봤냐?”
 비록 제자를 달래기 위해 웃은 거지만 늙은 수사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있었다.
 
 [파이어 볼. 현재 고객님의 숙련도로는 963마나 코인이 소모됩니다.]
 
 ‘963코인’으로 쏠 수 있는 단 한발의 파이어 볼.
 다음 날까지 마나를 꼬박 모아야 쏠 수 있는 숫자였지만, 이미 파이어 볼에 대한 글귀를 읽어본 시드에겐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다.
 이전에도 잠시 언급했듯 시드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다.
 스승 없이 책만 읽어도 마법을 시도할 수 있는 재능.
 그것이 빛을 발하려는 순간이었다.
 
 * * *
 
 퍽! 퍽!
 투박한 괭이가 흙을 할퀴었다.
 두꺼운 팔에 연결된 괭이는 검사의 검처럼 땅을 파고들었다.
 디알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갈았다.
 고르게 헤집어진 흙은 만만치 않은 작업을 홀로 처리한 그의 성실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후우.”
 투박한 괭이로 산 중턱을 모조리 개간한 남자는 숨을 돌렸다.
 등 뒤로 보기 좋게 일궈진 흙을 보니 미소가 절로 번졌다.
 “형님! 디알로 형님!”
 마침 저 위에서 한 남자가 달려왔다.
 식사 담당 수도사 머피였다.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할 머피가 달려오자 디알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커다란 근육만큼이나 두꺼운 턱과 눈썹도 움찔거렸다.
 “뭔 일이냐. 벌써 점심 먹으라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시드! 시드가 말입니다! 파이어 볼을 쏜다고 원장님 앞에 섰습니다!”
 “파이어 볼?”
 디알로의 목구멍으로 뜨뜻한 숨이 새어나왔다.
 어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다시 까불고 있다.
 사실 어릴 때부터 해온 일상이지만, 열다섯까지 철들지 못한 막내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긴 아침부터 산 중턱을 갈아버릴 정도로 성실한 디알로에게 ‘마법’이란 뜬구름은 눈엣가시일 만했다.
 그는 괭이를 내려놓고 땀을 닦았다.
 머피는 시드의 행동을 책망하며 괜히 구시렁거렸다.
 “그러니까 어제 본때를 보여줬어야······.”
 “됐다. 올라가자 머피.”
 “예!”
 둘은 계단을 오르며 시드가 ‘쏘아 올린다’는 파이어 볼을 구경하러 갔다.
 담담하게 입술을 씰룩거리지만 디알로가 분노하는 덴 이유가 있었다.
 과거 디알로도 꿈을 키우던 소년이었다.
 어릴 적부터 기사의 꿈을 키우며 장군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검술을 배우고 검기를 익히는 등,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도 냈으니 그 열정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열다섯 되던 해엔 체페슈의 응원까지 받으면서 수도로 향했다.
 근성과 노력만 있다면 뭐든 가능하리라 믿었던 시절.
 그러나 그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은 역겨웠지.’
 그는 시드가 꿈꾸는 모든 게 부질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헛된 꿈을 부풀리는 막내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지도 몰랐다.
 “형님! 오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형님!”
 “그래. 파이어 볼은 쐈다냐?”
 “지금 쏜답니다! 어차피 실패하겠죠. 애초에 그릇이 작은 놈이잖아요.”
 일과도 팽개친 수도사들이 본당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홉 명의 식구들과 체페슈, 안토니오 수사를 확인한 디알로는 싱긋 웃었다.
 체페슈는 오묘한 눈으로 시드를 내려 봤고 안토니오도 난처한 얼굴이었다.
 “흥!”
 디알로는 콧방귀를 뀌며 팔짱꼈다.
 오늘이야말로 저 눈엣가시를 흠씬 두들겨 패줄 작정이었다.
 꼿꼿이 선 시드는 가슴을 펴고 원장을 응시했다.
 체페슈도 이전과 달라진 시드를 느꼈다.
 하지만 마나는커녕 수도사의 재능도 없던 소년이 하루아침에 마법을 사용할 리 없었다.
 그저 철없는 막내의 아집일 거라 생각하며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준비되면 해보거라.”
 “옙!”
 체페슈의 말투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철없는 막내의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마음만 커졌다.
 시드는 숨을 뱉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떴을 땐 통장의 담담한 메시지가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잔액] *1,533(체페슈 수도원)
 
 ‘좋아.’
 시드는 가슴팍에 넣어둔 통장을 의식하며 숨을 골랐다.
 마법을 사용하기 전, 서클이 있는 심장 근처에 자신을 놔달라는 통장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파이어 볼 하나에 필요한 마나는 963코인. 어제부터 모은 마나는 1533코인. 필요한 마나는 충분해. 할 수 있다. 힘내자.’
 고요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소년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체페슈 원장은 진지한 얼굴로 이를 응시했다.
 ‘해보자.’
 소년은 손을 모으고 심장 주변을 휘도는 마나를 느꼈다.
 눈을 감고 이미지에 집중하니 심장을 둘러싼 희미한 원 하나가 들어왔다.
 시드는 원에 집중하며 마나를 흘렸다.
 차마 선명하다고 하지 못할 이 원 하나가 소년의 미약한 재능을 나타냈다.
 1서클.
 마법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고고고······.
 심장을 휘감은 서클이 회전하며 가슴과 손을 타고 마나를 흘린다.
 가슴팍의 통장은 그런 서클에 반응하며 저장한 마나를 흘렸다.
 이내 전기가 오르듯 짜릿한 감각이 손끝을 자극하고,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거대한 힘이 몸을 타고 올랐다.
 소년은 벅찬 순간을 만끽하며 파이어 볼에 필요한 영창을 만들었다.
 그의 손 위로 선명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을 상징하는 원.
 복잡한 직선이 뭉치고 뒤엉키며 형태를 만든다.
 ‘오호?’
 체페슈는 그것이 ‘진짜 마법’임을 깨달았다.
 분명 어젯밤까지 없던 마나가 소년의 몸을 타고 오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마나를 짜내고 마법진까지 만들었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마법의 이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법은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물론 서클이 거듭되고 마법에 익숙해질수록 이 과정은 빨라지지만, 난생처음으로 마법에 ‘성공해가는’ 시드는 이 순간을 음미했다.
 이빨 사이로 꼭꼭 씹히며 단맛을 자아내는 쌀밥처럼.
 마법이란 은은한 단맛을 가지고 있다.
 척!
 마침내 소년의 오른팔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마법진 안에서 선명하고 붉은색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성공할 거라 믿지 않았던 디알로와 다른 수도사들도 입을 벌렸다.
 바로 그 순간.
 시드는 생애 처음으로 마법에 성공했다.
 “파이어 볼!”
 
 [내용] 출금
 [찾으신 금액] *963(파이어 볼)
 [맡기신 금액]
 [잔액] *570(체페슈 수도원)
 
 [정상 처리되었습니다.]
 
 콰앙!
 선명한 불덩이 하나가 하늘로 치솟았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매끄러운 화염구에 수도사들은 고갤 들었다.
 새로운 마법사의 탄생을 축하하듯, 쏘아올린 파이어 볼은 하늘 높이 올라 흩어졌다.
 마치 불꽃놀이 같은 화려함이었다.
 “우와······.”
 “저··· 저거 진짜야?”
 마나를 모조리 짜낸 만큼 소년은 기운 빨리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나 마법을 성공한 뿌듯함에 피로감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성공했다는 감동과 앞으로 시작될 운명에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시드가 성공할 거라 믿지 않았던 체페슈도 입을 벌렸다.
 곧 정신을 차려 제자를 바라봤을 때, 한 명의 마법사가 되어 불씨를 피어 올린 예전의 풋내기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드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훑고 싱긋 웃었다.
 “아카데미 입학. 시켜주시는 거죠?”
 
 * * *
 
 “자. 마셔라.”
 “감사합니다.”
 체페슈는 시드에게 김이 올라오는 차 한 잔을 건넸다.
 수도원에서 재배하는 찻잎과 석청을 섞은 달짝지근한 차다.
 다른 수도사들이 들어올 수 없는 체페슈 개인의 방.
 그 안에 소년과 단둘이 앉은 원장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스승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드는 신난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내용] 입금
 [찾으신 금액]
 [맡기신 금액] *51
 [잔액] *621(체페슈 수도원)
 
 ‘벌써 51코인이나 회복됐네!’
 시드는 회복된 마나가 ‘입금’되는 걸 보며 싱긋 웃었다.
 잔액만으로도 자신의 용량을 한참 초과한 상태였다.
 첫 마법에 성공한 감각이 손끝에 남아있고, 서클의 힘을 느낀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댔다.
 게다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 소년은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헛기침을 한 체페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잖아 이놈아! 그렇게 성공할 거면 어젯밤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괜히 수도사들 앞에서 놀란 모습 보이게 하고 말이야!”
 “헤헤 죄송해요.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서.”
 소년은 허허 웃으면서 고갤 저었다.
 사실 어제라면 마나가 부족해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원장은 의심 없이 제자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 앞의 찻잔을 들며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다른 수도사들처럼 까까머리에 햇볕에 탄 까만 피부.
 디알로나 다른 수도사들은 시드가 게으르다 욕했지만 체페슈는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온 열다섯 소년의 진심을 말이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들이켠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그, 언제부터 가능했던 거냐? 파이어 볼은 누구한테 배웠고. 혹시 나를 놀려주려 계속 숨겨왔던 게야?”
 그의 표정에선 의심스러운 눈빛과 복잡한 기쁨이 느껴졌다.
 차를 홀짝이던 시드는 배시시 웃으며 잔을 내렸다.
 “원장님이 숨겨뒀던 책에서 읽었습니다! 마나를 어떻게 흘리는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적혀있던걸요?”
 “책에서 읽었다고? 겨우 그거뿐이야?”
 체페슈는 혀를 내둘렀다.
 제대로 된 마법 스승에게 배워도 일주일은 꼬박 걸릴 텐데!
 파이어 볼이란 책에서 나오는 글 몇 줄 읽는다고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승이 진심으로 놀란 걸 깨닫자 시드는 멋쩍게 머릴 긁었다.
 소년의 까맣게 탄 피부 위로 붉은 홍조가 드러났다.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고.”
 “허어! 기쁘지! 당연히 기뻐!”
 체페슈는 껄껄 웃으면서 탁상을 쳤다.
 한 모금 마신 잔이 찰랑이자 그는 깜짝 놀라 잔을 잡았다.
 잔이 잠잠해지고 둘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체페슈가 직감하는 건 몇 가지가 있었다.
 마법사 중엔 그릇의 크기가 늦게 성장하는 경우도 있고, 수도사 생활로 정신과 육체를 단련한 만큼 기본적인 마나가 성장했을 수 있다.
 시드는 아카데미 이야기를 기다리며 싱글벙글 웃었다.
 소년의 의지와 재능이 확고하다는 걸 확인한 체페슈도 더 말릴 생각이 없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겠다고 한 건 본인이 꺼낸 이야기 아닌가.
 “그래 좋다. 약속대로 아카데미에 입학시켜줘야지! 봄이 지나고 꽃잎이 질 때쯤 신입생을 모집하니 그때 넣어주마. 다만······.”
 “네?”
 진지해지는 분위기에 시드는 입에서 잔을 뗐다.
 스승이 걱정하는 건 소년이 가진 힘의 출처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스승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드는 심장이 덜컥이는 감각을 느꼈다.
 “혹시··· 흑마법이나 저주받은 물건에 손댔느냐? 솔직히 말해도 좋다. 아니, 솔직히 말해주렴.”
 
 * * *
 
 “흑마법이요?”
 “거기 손댄 이들을 봐서 안다. 대개 끝이 좋지 않지. 한순간 힘이 필요하다고 손대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거란다. 솔직히 말해주렴.”
 체페슈는 떨리는 눈동자로 소년을 응시했다.
 흑마법.
 힘의 출처가 잘못되었거나 시전자의 정신을 갉아먹는 불온한 마법을 말한다.
 흑마법사, 강령술사, 정신 조종 마법사 등 많은 종류를 포함하지만, 체페슈가 궁금한 건 시드가 보여준 힘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왕국에서는 흑마법을 반란에 버금가는 중범죄로 취급하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서. 솔직히 말해주거라.”
 그동안 노력해온 것이 빛을 발했다면 칭찬할 일이었다.
 그러나 절박한 순간 사람은 뭐든지 하게 된다.
 그것이 악마가 건넨 유혹일지라도.
 스승의 진지한 눈빛에 시드는 가슴팍의 통장을 의식했다.
 전날 밤 자신이 의심했던 것처럼 체페슈도 이 특별한 변화의 최악의 경우를 걱정했다.
 두근두근······.
 통장과 닿은 왼쪽 가슴으로 두근거림이 전해진다.
 우물쭈물하던 시드가 입을 여는 순간.
 체페슈는 크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농담이다 이놈아! 우리 수도원처럼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저주받은 물건이나 흑마법 서적이 있을 리 없지! 그냥 놀라서 해본 말이다. 놀라긴! 허허!”
 “원장님도 참 하하!”
 크게 웃은 체페슈는 미지근해진 차를 꼴깍 삼켰다.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던 시드도 달짝지근한 차를 머금었다.
 살짝 식은 덕분에 끈적한 뒷맛이 맴돌았다.
 찻잔을 깔끔히 비운 체페슈는 싱긋 미소 지었다.
 “수고했다. 정말로 수고했어.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정말 기쁘다 이 녀석아.”
 “제대로 된 스승이 없다니요. 체페슈 원장님이야말로 영원한 제 은사십니다!”
 “흐응?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나 같은 늙은 수도사는 까맣게 잊어버릴 거 같은데?”
 체페슈는 싱긋 웃으며 눈썹을 들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에 시드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내 체페슈는 뒤에 있던 서랍에서 낡은 양피지 뭉치를 뒤적거렸다.
 곧 먼지 피어오르는 종이 뭉치 속에서 누렇게 바랜 양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음··· 어디 보자, 여기 있다! 에이레나 심슨! 예전에 인연이 있었던 마법사인데, 아카데미의 교장이 이분이었을 게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분이었지.”
 “아카데미 교장이랑 지인이셨어요?”
 “왜. 수도사가 마법사랑 친해서 의문이야?”
 체페슈는 껄껄 웃으며 양피지의 먼지를 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묻혀있었는지 작은 방안으로 먼지가 휘날렸다.
 많이 낡았지만 잘 관리된 듯 빳빳한 종이.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글을 보자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미리 줬다간 읽어버릴 게 뻔하니 내가 가지고 있으마. 그럼 어디 보자. 네게 줄 선물이······.”
 “선물이요?”
 선물이라는 말에 시드의 귀가 쫑긋했다.
 특별한 마도구?
 마법을 강화할 수 있는 아티팩트?
 선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이, 체페슈는 서랍 속 구릿빛 열쇠를 꺼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시드도 익숙한 물건에 입을 벌렸다.
 “책방의 열쇠다. 우리 꼬마 마법사를 위해서라면 드려야지. 그런데 이거 없이도 잘만 들어가던 도둑고양이가 있었지?”
 “헤헤······.”
 장난스럽게 웃는 체페슈에 소년은 머릴 긁적였다.
 ‘도둑고양이’는 개구멍을 통해 책방을 들락거리던 시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다만 그 열쇠를 준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체페슈는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제자를 바라봤다.
 버드나무 이파리처럼 늘어진 수염이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중급 마법서는 세 번째 책장 뒤에 있단다. 에잉··· 생각해보니 이것도 다 알고 있던 거잖아!”
 “헤헤 죄송해요.”
 숨겨진 개구멍과 비밀 책장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던 소년.
 이 사실을 모르는 척해왔던 원장도 가슴이 후련해졌다.
 책방에 들어가는 걸 눈감아주던 것과 책방 열쇠를 주는 건 다른 의미였으니 말이다.
 수도원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한 명의 당당한 마법사가 되어라.
 이런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시드도 감사를 전했다.
 한 명의 마법사가 되려는 제자에게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으리라.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라 시드. 널 구해준 마법사처럼.”
 
 * * *
 
 조금 열려있는 나무 창가.
 낡은 책방에서 휘날리던 먼지가 햇빛 사이로 반짝였다.
 책 읽을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는 만큼 소년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손을 옮겼다.
 “시스 누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누님이 말씀해준 기준으로 ‘라이트닝 볼트’는 100코인, ‘파이어 볼트’는 94코인을 소비하잖아요? 위력으로 따지면 파이어 볼트가 더 좋은데 소비하는 마나까지 적으면 사실상 상위 호환 아닌가요? 굳이 라이트닝 볼트를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시스 누님.
 ‘시스템’과 ‘누님’을 합친 시드만의 애칭이었다.
 아카데미 입학을 기다리며 서재에 출입한지 사흘째.
 가벼운 질문을 던질 정도로 소년은 통장에 익숙해져 있었다.
 말로만 ‘책방’이지 작은 책장 일곱 개밖에 없는, 심지어 빈자리가 더 많은 책방.
 시드는 그곳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혹자 왈 뛰어난 마법사의 소양은 독서에서 나온다는데, 그거 하나만큼은 자신할 정도였다.
 
 [전격과 화염은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격 마법의 장점은 위력에 있지 않습니다. 화염 마법은 불덩이라는 투사체가 존재하는 반면, 전격 마법은 목표까지 이르는 가장 짧은 거리를 쫓습니다.]
 
 “흠 복잡한데··· 그러니까 사용하는 즉시 위력을 발휘한다? 빠르다? 이런 건가요?”
 대부분의 마법 서적은 한 마법사의 일대기와 그의 연구를 다루고 있다.
 한 명의 마법사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성과를 열거하고,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즉 하나의 마법엔 한 명의 일생이 담겨있고 그렇게 한 권의 책이 된다.
 물론 이런 방법을 생략하고 간편하게 마법을 전수하는 ‘마도서’도 있지만, 그게 어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인가.
 때문에 시드 같은 풋내기가 마법 하나를 익히려면 두꺼운 책을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었다.
 막연한 말로 ‘이해할 때까지!’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의 시드는 머리가 좋다.
 다른 이들보다 ‘읽어서 이해하는 게’ 빠르다는 소리다.
 
 [라이트닝 볼트는 <파이어 볼트>나 <아이스 볼트>와 달리 투사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궤적을 파악해서 피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아하.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투사체 없이 목표에 곧장 작렬한다는 뜻이구나?”
 
 [그렇습니다.]
 
 “으흥. 또 하나 배웠네요. 전격 마법은 같은 위력이라도 피하기 더 어렵다.”
 친절한 스승을 얻은 덕분에 시드는 싱글벙글 독서에 집중했다.
 홀로 문장을 추리하는 것보다 통장의 조언을 들으면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벌써 책장 하나를 해치운 소년은 다 읽은 ‘전격 마법의 이해’를 제자리에 넣었다.
 비록 수도원에 남아있는 책들은 기본만을 다루었지만, 이런 ‘기본’이야말로 지금의 시드에게 가장 필요했다.
 그런데 다음 책을 고르자 품에 있던 통장이 목소릴 냈다.
 
 [고객님. 현재 고객님의 마법 이해도는 준수한 편입니다. 책만 읽어서는 마나 용량에 영향 줄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사용하심을 추천합니다.]
 
 “다른 방법이요?”
 통장의 조언에 관심이 갔다.
 그동안 막연하게 책만 읽었지 이런 조언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요?”
 
 [마나를 꾸준히 소비하는 것입니다.]
 
 “아아! 알고 있어요. 마나는 물길과 같다. 그 말씀이시죠?”
 마나는 물길과 같다.
 흔히 많은 마법사들이 말하곤 하는 비유였다.
 마나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 ‘물길’과 같아서 들어오는 것을 흘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담기는 게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이 비유가 절묘한 것은, 마나는 ‘제대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그릇이 커진다는 점이었다.
 큰물이 흘러 넓어진 물길처럼, 마법사의 그릇도 사용하는 마법에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
 그렇게 물길을 넓히다 보면 언젠간 큰 강이 된다는 것이 마법사들의 이론.
 그동안 마법에 ‘성공해본 적 없어’ 물조차 흘려본 적 없는 소년에겐 드디어 한 줄기 시냇물이 생긴 셈이었다.
 그리고 시드도 이 이론을 실감하던 참이었다.
 본래 ‘75코인’에 불과했던 그의 용량이 사흘 새 ‘81코인’까지 성장했다.
 물론 ‘6마나 코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덕분에 하루하루 성장하는 걸 느끼며 소년은 선물과도 같은 일상을 즐겼다.
 
 [내용] 잔액 확인
 [찾으신 금액]
 [맡기신 금액]
 [잔액] *281(체페슈 수도원)
 
 ‘흠 꽤 모였네. 오늘 밤엔 라이트닝 볼트를 연습해볼까.’
 책을 뽑아든 소년은 자리에 철퍽 주저앉았다.
 통장으로 표시되는 ‘잔액’은 281코인의 넉넉한 숫자.
 자정을 기준으로 보유한 마나의 ‘1%’를 이자로 쳐준다지만, 그 조금을 욕심내서 묵혀둘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소년이 해야 할 건 마나를 꾸준히 흘리고 소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물길’을 넓혀 자신의 용량을 키우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독서에 집중하는 소년이 못마땅한지 통장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현재 고객님의 성장 방법은 비효율적입니다.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심을 추천합니다.]
 
 글에 집중할 때마다 울리는 목소리에 소년은 인상을 구겼다.
 처음엔 과묵한 줄 알았더니 잔소리가 많았다.
 심지어 이 음성은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마나를 소비하는 건 계속하고 있잖아요. 뭘 어떻게 하라고요.”
 
 [마법사에겐 화염, 냉기 등 각각의 전문분야가 있습니다. 고객님도 하나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분야?”
 귀찮아지려는 찰나 통장의 이야기가 소년의 관심을 빼앗았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화염 마법사, 빙결 마법사, 심지어 흑마법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다양한 마법을 익히기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곤 했다.
 하나에 집중해 노하우를 쌓는 의미도 있지만, 자주 사용하는 분야엔 그만큼 마나의 변화도 익숙해지기 때문이었다.
 “흠 맞는 말씀이에요!”
 입술에 침을 바른 소년은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화끈하고 파괴적인 화염 마법?
 날카롭고 치명적인 빙결 마법?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단 하나.
 마법사의 꿈을 있게 만든 불타오르는 와이번뿐이었다.
 “그럼 전 화염 마법으로 할래요! 파이어 볼, 플레임 스트라이크! 캬 많기도 하다!”
 신난 시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여러 개 놓인 장난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것처럼 마냥 해맑았다.
 
 [화염 마법은 고객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흐응··· 왜요?”
 단칼에 잘라내는 말에 시드는 손을 내렸다.
 하고 싶은 걸 하지 말란 이야기에 풀죽은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졌다.
 
 [화염 마법은 소비하는 마나만큼 위력이 결정되는 정직한 마법입니다. 현재 고객님의 용량으로는 다른 마법사들과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끙.’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애초에 남보다 마나가 적은 시드가 정직하게 마법을 부려봐야 좋을 건 없었다.
 입술을 쭉 내민 소년은 짜증 반 기대 반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한테 어울리는 마법은 뭔데요.”
 시드는 가슴팍을 바라봤다.
 이러나저러나 마법의 길을 열어준 선물인데 그녀의 말을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저 ‘멋’ 자체를 상징하는 화염 마법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에 아쉬울 뿐이었다.
 
 [가입 약관에 따라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현재 고객님의 육체는 상당히 발달된 상태입니다. 이미 습득된 능력에 따라 기사나 몽크가 되면 상당한 효율을 발휘하리라 기대합니다.]
 
 “아니, 제가 되고 싶은 건 마법사라니까요!”
 뜬금없이 몽크가 되란 말에 시드는 목소릴 높였다.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통장은 태연하게 이야길 이었다.
 
 [농담입니다. 지금까지 수집된 개인 정보 및 기본기와 연계할 수 있는 마법을 도출합니다.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은 <매직 소드(Magic Sword)>. 매직 소드입니다.]
 
 * * *
 
 “매직 소드?”
 난생처음 듣는 단어지만 뭔가 알 것 같은 이름이었다.
 ‘소드’라는 이름으로 보아 뭔가 검과 관련된 것 같았고, 이름 앞에 ‘매직’이 붙어 마법 이름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의 목소리를 따라 시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을 깜빡이며 기다리니 통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나를 방출하며 고정하는 마법입니다. 현재 고객님이 보유하신 기본기와 유연하게 호환할 수 있으며, 해당 마법에 익숙해지면 여러 마법에 영향을 줄 거라 기대합니다.]
 
 “오호 뭔가 그럴싸한 마법인데요? 설명만 들어도 유연할 거 같아요!”
 그럴싸한 발언에 시드는 고갤 끄덕였다.
 잠시 자신이 아는 ‘무언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문분야가 될 마법이라니!
 어린 기사가 처음 검을 얻는 것처럼, 소년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바빴다.
 “그럼 여기에 있는 책 중에 매직 소드와 관련된 게 있나요?”
 
 [확인되었습니다. 두 번째 책장. 위에서 셋, 왼쪽에서 열한 번째 책입니다.]
 
 “알았어요!”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두 번째 책장으로 향한 시드는 통장이 말한 ‘매직 소드’ 책을 찾았다.
 자신과 맞는 마법을 소개해준다니, 그보다 설렐 수는 없었다.
 “아홉··· 열··· 열하나! 찾았다!”
 시드는 책 사이로 검지를 끼워 넣어 낡은 책을 꺼냈다.
 그동안 책방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자기도 모르던 책이 존재할 줄이야.
 마침내 자신의 ‘전문분야’가 될 마법을 꺼낸 소년은 자신만만하게 책을 펼쳤다.
 곧 페이지 위로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어?”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통장의 설명을 들었을 때 스쳤던 아주 작은 위화감.
 그건 역시 평범한 위화감이 아니었다.
 “철권 책이잖아요! 우리 수도사들이 매일 수련하던 그거!”
 
 [철권을 기본으로 마나를 날카롭고 단단하게 연마합니다. 그 기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아 이게 뭐야, 뭐 대단한 걸 기대했더니만!”
 시드는 허탈한 숨을 뱉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수도사와 멀어져 마법사의 길을 가나 했는데 처음으로 추천받은 마법이 매직 소드, 그러니까 철권의 변형이라니!
 허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치 15년의 수도사 생활을 쉽게 청산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년은 곁눈질로 책을 살핀 뒤 옆구리에 끼웠다.
 이내 책방을 정리한 시드가 ‘철권 책’을 들고 나서니 통장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습득하지 않으시는지요. 저는 고객님과 어울리는 마법을 추천한 것뿐입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기본은 다 아는데, 원장님한테 물어보려고요. 그게 더 편하겠네.”
 운명에 굴복한 소년은 멋쩍게 웃었다.
 처음이야 뭐 익숙한 철권으로 시작하더라도, 통장의 말마따나 마나 운용에만 익숙해지면 언제든 다른 마법을 배우면 되었다.
 시작부터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자고 생각하던 중 뜻밖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냐. 하루 종일 어디 있나 했더니 책방에 처박혀있던 거냐?”
 ‘이런.’
 소년은 한숨이 나오는 걸 참고 고갤 들었다.
 이렇게 단둘이 마주 하는 걸 바라지 않았는데.
 행복한 미래만 상상하느라 잊고 있었던 벽.
 디알로의 등장이었다.
 “후우 덥다, 더워. 누군 시원한 그늘 아래서 책만 보는데.”
 디알로는 땀방울과 엉킨 흙을 털어냈다.
 까만 피부 위로 흙과 뒤엉킨 땀이 번들거린다.
 체페슈와 안토니오를 제외하면 수도원에서 가장 맏형 되는 남자.
 비록 마법이라는 뜬구름 쫓는 막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지만, 악한 인물은 아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그래 수고 많으셨다.”
 막내의 공손한 인사에도 그의 대답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시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기며 침을 삼켰다.
 고개를 높게 들어야 닿을 만큼 어마어마한 체급 차이.
 그동안 식사 시간에 잠깐 마주쳤을 뿐 잘 피해왔는데.
 소년의 심장은 요동쳤다.
 “어허.”
 시드가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려 하자 디알로는 성큼 발을 옮겼다.
 겨우 한 걸음 옮겼을 뿐인데 그의 거대한 덩치 탓에 소년은 갈피를 잃었다.
 마치 태산 하나를 떡하니 던져놓은 것 같았다.
 “비켜주세요. 원장님 뵈러 가야 해요.”
 “왜. 또 일러바치게?”
 의문형으로 올라간 목소리에서 따가운 악의가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부탁했음에도 디알로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잔뜩 일그러진 인상만이 소년을 향할 뿐이었다.
 ‘하아.’
 사실 직접 얻어맞은 적만 없지 이런 시선은 계속 겪어왔다.
 물론 철없던 소년의 잘못이 아주 없다곤 할 수 없었다.
 마법사와 비교하며 수도사를 비하한 일, 마법을 선보이겠다며 멀쩡한 항아리를 깨먹은 일.
 그야말로 사고뭉치처럼 벌여온 일이 잔뜩 쌓여있으니 말이다.
 “물었잖아. 책방에 숨어있었냐고. 이젠 대답도 안하냐? 어?”
 으르렁거림 섞인 숨소리가 울렸다.
 2미터에 육박하는 남자의 위압감은 다 큰 성인일지라도 위협으로 느낄 정도였다.
 오히려 덩치가 두 배 이상 차이 나는데 버티는 시드가 용할 정도였다.
 이런 묵직한 위협에도 시드는 침착하게 답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책방에 있어도 좋다 하셨어요. 형님도 보셨잖아요. 제가 파이어 볼을 쏜 거.”
 갈피 잃은 시선이 본당의 종에 닿았다.
 어서 점심시간 종이 울려서 이 답답한 시간이 끝나길.
 소년은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다.
 물론 종이 울린다 해서 남자가 물러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시드는 그를 응시했다.
 곧 디알로의 머리 위로 표시되는 마나가 눈에 들어왔다.
 
 [2,374]
 
 2,374마나 코인.
 수도사들의 맏형답게 디알로의 마나는 시드가 하루 종일 모아도 안 될 숫자였다.
 물론 체페슈가 보여준 십만 단위를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는 아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던 중 목소리 하나가 울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통장의 목소리다.
 
 [현재 디알로의 마나 용량은 2,374마나 코인. 고객님이 하루 이상의 마나를 모은 뒤 <마나 번(Burn)> 피해를 입히면 손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네?’
 땡! 땡! 땡!
 “점심시간입니다! 모두 모이세요!”
 식사 담당 머피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고요한 산중으로 일과를 마친 수도사들이 모여들었고, 디알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아무튼 조심해라. 수도원 물 흐리지 말고.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까지 조용히 처박혀있어. 가능하면 내 눈에 띄지 말고. 크흠.”
 그는 태산 같은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쩌면 밉상 같은 막내를 괴롭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형님 눈에 띌 생각 없었거든요?’
 시드는 코끝을 찡그리며 공룡 같은 남자를 응시했다.
 이내 거대한 체구가 멀어지고 나서야 소년은 숨을 뱉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시드는 가슴팍을 흘겨봤다.
 방금 통장이 말했던 ‘마나 번’이라든지 ‘죽인다’는 단어가 맴돈다.
 “하아, 앞으로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형님을 죽여서 얻을 게 뭐 있다고 그러세요.”
 시드는 종 울린 본당으로 향했다.
 아무리 소년이 철없고 디알로와 불편한 관계라 한들, 소년은 그의 목숨을 원할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아주 어린 시절에야 몇몇 낯간지러운 상상을 하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실제론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마나 번’이라는 건 무슨 마법이에요? 강력한 마법인가요?”
 보통 치명적인 저주나 강력한 마법이라 해도 누군갈 해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잘 갈린 검을 들더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마나를 하루만 모으면 디알로를 죽일··· 아니, 제압할 수 있다?
 해보고 싶어 물어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마법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이었다.
 
 [<마나 번>이란 타인의 마나를 증발시키는 마법입니다. 잘 발달한 마나는 생명력과 깊게 연관되어있으니, 마나를 증발시키는 건 생명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숙련도에 따라 효율이나 제약은 있으나, 마나를 가진 존재를 상대할 때 이보다 좋은 마법은 없습니다. 일종의 현금 박치기 같은 개념입니다.]
 
 “현금 박치기요?”
 
 [터프하다는 뜻입니다.]
 
 “아하.”
 대충 수긍한 소년은 고갤 끄덕였다.
 화염 계열의 마법은 아니지만 불길로 태워버리듯 화끈하고 폭력적인 면이 있었다.
 게다가 마나를 증발시키는 건 마법사가 가진 능력을 제한한다는 소리기도 했다.
 개인의 능력을 제한시키며 생명력에 영향을 준다니.
 그보다 사기적인 마법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마나를 무한대로 저장할 수 있는 통장이 있는 만큼, 마나만 충분하다면 ‘마나 번’은 일격필살의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마나 번 책은 수도원에 없는 거 같고. 아카데미에 가면 찾아봐야겠어요. 그리고······.”
 말을 잇던 시드는 입을 닫았다.
 주변에 누가 있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누굴 죽이네 마네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디알로는 분명한 악의를 갖고 고객님을 위협했습니다. 혹시 용서하시는 겁니까?]
 
 통장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서운한 말투였다면 자신을 걱정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마법과 정보를 알려주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정을 붙이고 의지한 만큼 통장의 비인간적인 발상에 실망한 것이다.
 “애초에 죽일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솔직히 내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고······.”
 멋쩍게 웃는 머릿속으로 과거 일들이 스쳤다.
 지금이야 철도 들고 사고도 줄었지만 그동안의 잘못을 사과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둘의 관계가 개선될 리 만무했다.
 쌓이고 쌓인 실수와 어린 날의 객기.
 그렇게 엉킨 관계를 풀려면 용기와 노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무튼 알았죠?”
 
 [확인했습니다.]
 
 아직 인간적인 감정이 부족한 누님이지만 언젠간 진심이 통하는 날이 오리라.
 시드는 싱긋 웃으며 옆구리에 끼웠던 책을 들었다.
 디알로와 마주하며 땀이 났는지 책은 살짝 눅눅해져 있었다.
 
 * * *
 
 “후읍!”
 작은 창가로 햇빛이 드리우는 책방.
 양반다리로 앉은 시드는 무언가에 집중하기 바빴다.
 곧 소년의 손을 타고 푸른색 마나가 출렁거리더니, 날카로운 끝을 만들어 솟아올랐다.
 모양을 만들고 견고히 하는 과정에서 소년의 이마는 땀으로 젖었다.
 “후아!”
 집중을 푸는 것과 동시에 마력의 검이 무너졌다.
 잠시 숨을 돌린 시드는 싱긋 웃으며 머릴 긁적였다.
 “이제 좀 괜찮죠?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거 같아요.”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방출되어야 합니다. 현재 고객님의 매직 소드는 매우 불안한 상태. 그래도 철권의 기본이 있어 습득과 사용이 빠르다고 판단됩니다.]
 
 “칭찬이죠?”
 비록 파이어 볼이나 볼트 마법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통장이 추천한 대로 매직 소드는 큰 피로감을 동반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나가 적은 시드에게 딱 맞는 마법이었다.
 필요할 때 잠깐 만들었다 불필요할 때 없애는 과정이 반복됐다.
 심지어 저장된 마나에 손댈 것 없이 시드의 순수한 마나로도 ‘마법의 칼날’은 손위에 손쉽게 자리했다.
 덕분에 이틀 동안 모은 3,942의 코인이 통장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내용] 잔액 확인
 [찾으신 금액]
 [맡기신 금액]
 [잔액] *3,942(체페슈 수도원)
 
 “후우.”
 반복된 훈련으로 저릿한 손을 털며 시드는 숨을 뱉었다.
 체페슈와 안토니오가 물품을 사러 내려간 날이었다.
 아마 늦은 밤이 될 때까지 둘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런 날이야말로 책방에 처박혀 다른 수도사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터였다.
 다시 한 손으론 매직 소드를 만들며 다른 손으로는 책장을 넘겼다.
 그러던 중 책방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나가주십시오! 여긴 수도사밖에 없는 조용한 곳입니다!”
 
 수도사 머피의 목소리였다.
 이런 일이 흔치 않은 만큼 시드는 나무로 된 창틀 사이로 고갤 내밀었다.
 거친 수염과 흉포한 무기로 무장한 남자들.
 머피를 비롯한 다른 수도사들이 그들과 대치하던 중이었다.
 시시덕거리며 수도원을 둘러보는 꼴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창틀에 바짝 붙은 소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산적인가?”
 
 
 # 폭풍우 치는 산
 
 
 쿠구궁······.
 수도원이 자리한 높은 산 날씨는 언제나 변덕스러웠다.
 아침까지 맑던 하늘엔 두꺼운 먹구름이 드리우고,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하늘은 매섭게 울부짖었다.
 슬쩍 하늘을 쳐다본 무리들은 요란하게 웃기 바쁘다.
 “뭐야. 여긴 남자밖에 없어? 그것도 다 꼬맹이들이네!”
 “케헤헤! 거 비 좀 피합시다, 자비로운 수도사님들!”
 “······.”
 디알로는 불청객들을 둘러봤다.
 도끼와 검.
 투박한 장비로 무장한 그들은 산적이 분명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수도원까지 흘러온 모양이었다.
 시드는 창살 뒤로 몸을 숨긴 채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요란한 날씨만큼이나 요란한 일이 터질 모양이었다.
 “짐들 풀어라. 오늘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다.”
 산적들 사이에서 수염이 빽빽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허리춤에 찬 롱소드와 뒤로 넘긴 올백머리는 꽤나 멋스러웠다.
 디알로와 마찬가지로 단단한 체구를 자랑하는 남자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눈에 그가 리더임을 깨닫고 디알로도 그를 노려봤다.
 역시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알아서 꺼지쇼. 댁 같은 놈들 하루 이틀 보는 거 아니니까.”
 디알로의 위협에 다른 수도사들도 고갤 끄덕였다.
 실제로 도적떼가 몇 번 쳐들어 온 적 있고, 다친 오크처럼 위험한 몬스터가 접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쫓아낸 게 디알로였으니 수도사들이 당당할 만했다.
 평범한 사람이 맨손으로 오크를 쥐어 팬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역시 디알로의 근육은 단순한 과시용이 아니었다.
 “오호?”
 빽빽한 수염의 남자가 디알로를 훑었다.
 한 40대 초반쯤 되었을까?
 산적 두목은 허리춤의 술병을 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는 여유로운 팔자걸음으로 디알로 주변을 거닐었다.
 불곰 같은 남자가 묵직한 힘줄을 드러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에서 병을 뗀 두목은 음흉하게 웃었다.
 “흠, 수도원에서 썩긴 아까운 몸인데. 어때, 내 밑으로 들어와 한탕 해보지 않겠어? 딱 봐도 산적 체질이구먼!”
 “파하하! 맞습니다, 두목님!”
 민소매인 수도복 너머로 보이는 두꺼운 이두박근과 바위 같은 가슴 근육.
 누가 이 남자를 수도사라 생각하겠는가.
 일개 산적 두목이 보기에도 그의 근육은 탐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익숙한 이 장면에 시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 아저씬 이제 죽었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었다.
 겁 없는 도적이 디알로를 도발하고, 오크도 때려잡는 매서운 주먹이 작렬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고삐 풀린 황소처럼 디알로가 춤추기 시작하면 도적들은 하늘로 떠오르기 바빴다.
 이게 불과 1년 전 이야기였으니 시드는 여유롭게 이 장면을 지켜봤다.
 “푸하하!”
 “우리 형님을 뭐로 보고!”
 시드와 같은 생각인지 수도사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특히 가장 말 많은 머피가 깐족대며 앞으로 나왔다.
 삐쩍 마른 수도사의 등장에 두목의 눈썹이 올라갔다.
 “우리 형님이 누군지 알아? 무려 기사 지망생이었다고! 너 같은 산적은 형님 주먹 한방이면 그냥······.”
 채앵!
 짧은 찰나.
 머피의 이야기는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산적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검집을 떠났고, 부끄럼 많은 속살을 숨기고자 다른 장소를 찾는 순간 디알로의 팔이 머피를 잡아끌었다.
 검을 휘두른 산적과 머피를 구한 디알로.
 머피는 디알로의 팔에 붙잡혀 오줌을 지렸다.
 이 모두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흠.”
 살짝 베였는지 디알로의 어깨에선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산적 두목도 그의 엄청난 반응속도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그의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음흉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자리했다.
 휘익! 휙! 서억!
 날카로운 검이 허공을 갈랐다.
 머피를 뒤로 던진 디알로는 산적의 검을 피했다.
 한 걸음 물러나 검을 피하고, 두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검을 든 자와 들지 않은 자의 싸움이지만 그 광경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어어······?”
 갑자기 벌어진 싸움에 수도사들은 웃음기를 잃었다.
 이내 여유로운 산적 두목과 마찬가지로 다른 산적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기사 지망생이었다고? 우리 두목은 진짜 기사였어! 푸하하하!”
 검을 돌려 자세를 고친 두목은 디알로와 눈을 맞췄다.
 다행히 주변을 둘러싼 무리는 수도원을 덮칠 기색이 없었다.
 그저 단순한 유흥거리로 여기며 지켜볼 뿐이었다.
 “크흠, 방금 내 부하가 소개했듯 이 몸은 기사 출신이다. 이름은 로워크! 로워크 파웰이라고 들어 보셨는가? 이런 산중에 후배님을 만나 기쁘다! 그런데 보다시피 산적질 시작한 지는 좀 됐어. 알다시피 나라꼴이 정상은 아니잖아?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지.”
 “······.”
 나비 날갯짓처럼 팔랑거리는 검 솜씨는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눈앞의 산적이 비범한 인물임을 깨닫자 디알로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분위기가 자기 쪽으로 흘러오는 걸 알았는지 로워크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우리 산채가 왕국한테 털려서 말이야. 괜찮은 곳을 물색하다 너희 수도원이 띄었어. 아아 그래, 기사 후배님이라니까 이렇게 할까? 내가 이기면 수도원을 내놓고, 네가 이기면 순순히 떠날게. 우리 부하들도 기사 부하라고 한 명예하거든? 아마 끼어들거나 약속 어기는 일은 없을 거야.”
 털북숭이 남자의 음흉한 눈빛이 흐른다.
 디알로도 그의 눈을 의식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불안한 하늘처럼 수도원엔 불안한 기운이 흘렀다.
 “이래 봬도 우리는 한 명예한다고!”
 “기사님의 부하래 푸하하하! 그러면 우린 종자가 되나?”
 로워크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산적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인지, 산적들은 지켜만 볼 뿐 끼어들 기색이 없었다.
 명예를 떠나 자기 두목이 디알로에게 질 거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다.
 “혀, 형님? 어떻게 하죠? 우리도 싸워야 하나요?”
 “그,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수도원을 저 산적 놈들에게 준다고?”
 겁에 질린 수도사들은 디알로 뒤에 숨어 눈치를 살폈다.
 그들 모두 철권을 사용할 순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없으니 싸움에 나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디알로는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다른 수도사들은 전력으로 쓸 수 없었다.
 “좋다! 내가 이기면 잔말 말고 꺼져라! 안 꺼지면 그렇게 해줄 테니······.”
 코끝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이 위협하는 곰을 보는 것 같았다.
 머피를 구하느라 살짝 베인 어깨를 보고 디알로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간단한 격투 자세를 잡으니 로워크의 눈썹이 올라갔다.
 “저, 후배님? 검 필요 없어? 하나 줄까?”
 “후읍!”
 싱거운 농담은 필요 없다는 듯 무섭게 거리가 좁혀졌다.
 상체를 숙인 디알로는 미끄러지는 가물치처럼 거릴 좁혔다.
 곧 산적 두목의 턱 아래 웅크러진 몸이 들어갔고,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디알로의 폭발적인 주먹이 작렬했다.
 후욱!
 묵직한 타격음 대신 날카로운 바람이 스쳤다.
 로워크는 턱을 젖혀 주먹을 피했다.
 교전을 시작한 둘은 바람 같은 공방을 주고받았다.
 로워크의 품으로 파고든 디알로의 주먹이 턱과 복부, 그리고 옆구리를 노렸다.
 적당한 거리를 주어 검을 휘두르게 두지 않고 단숨에 끝장내려는 심산이었다.
 후욱! 훅 훅! 후욱!
 통나무처럼 두꺼운 팔뚝이 허공을 갈랐다.
 철권까지 두른 위협적인 공격이지만, 허공을 갈랐다는 건 로워크도 여유롭게 피했다는 소리였다.
 일개 산적 두목임에도 전직 기사라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로워크는 가벼운 몸놀림을 선보였다.
 창문 너머로 훔쳐보던 시드가 땀을 쥘 정도였다.
 새액!
 로워크가 뒷걸음질 치고 디알로가 주먹을 당기는 순간.
 그 사이로 검이 흘렀다.
 짧은 찰나 디알로의 가슴엔 기다란 절창이 새겨졌다.
 산적 두목은 여유로운 눈으로 그의 상처를 훑었다.
 그 순간 거기 있는 모두가 확신했다.
 디알로는 로워크를 이길 수 없다는 걸.
 후욱!
 크게 휘두르는 주먹 아래 로워크의 머리칼이 스쳤다.
 사실 아까부터 그의 팔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기사 후배’인 디알로를 농락하는 듯 말이다.
 “후우! 후!”
 디알로의 부푼 뺨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두꺼운 턱 끝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그의 눈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우습게 생각한 것과 달리 눈앞의 상대가 노련함을, 그리고 자신의 실력으로는 답이 없음을 실감한 것이다.
 “뭐야. 끝이야?”
 주먹을 쥔 디알로가 물러서자 로워크는 길을 내줬다.
 길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산적 특유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결국 무언가 결심한 듯 디알로는 이를 악물었다.
 “모두 도망쳐! 산 아래로 뛰어라, 어서!”
 “예?”
 “형님?”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에 수도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뒤늦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수도사들은 산 아래로 내달렸다.
 오직 굳건한 수호신처럼 주먹을 내민 디알로만이 열다섯에 이르는 산적 무리와 대적할 뿐이었다.
 “흥.”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그와 달리 로워크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살짝 흐트러진 머릴 넘기며 싱긋 웃었다.
 도망치는 수도사를 가리키며 로워크는 고갤 기울였다.
 “말했잖아. 난 기사라고.”
 “두목님! 수도사를 죽이면 재수가 없답니다!”
 “그럼 뭐가 있는지 좀 볼까?”
 싱거운 싸움이 끝나자 산적들은 수도원으로 흩어졌다.
 이런 수도원에 값진 물건이 있을 리 없지만, 일단 손에 넣으면 뭐가 있나 둘러보는 게 버릇이었다.
 그중 눈치 없는 산적 하나가 디알로 곁에 붙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서있는 사내 옆으로 산적의 음흉한 목소리가 흘렀다.
 “수도원 잘 쓸게! 고맙다 아가씨!”
 콰직!
 두꺼운 공성추에 얻어맞은 것처럼 산적 하나가 사라졌다.
 본당 근처의 공터.
 사라졌던 산적은 얼굴이 짓뭉개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산적들은 입을 벌렸고, 로워크는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하여간 내가 센 거지 너희들이 센 게 아니라니까······.”
 “다 덤벼라 도적놈들아!!!”
 콰광!
 깊은 산중으로 우레 같은 호통이 작렬했다.
 그 목소리에 답하듯 어둑하던 하늘도 맹렬한 울음을 토해냈다.
 작은 빗방울이 어깨에 떨어지고, 핏방울과 엉킨 빗물이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다칠 염려가 있는 수도사들을 도망시킨 만큼 디알로는 죽음을 각오했다.
 실제로 주먹 한방에 산적 하나를 보낼 만큼 이 남자는 만만치 않았다.
 그저 로워크가 너무 강했을 뿐이다.
 “이 망할 놈이 수도사라고 봐주니까!”
 “두목님! 이놈은 반병신 만들어서 팔아버리죠!”
 동료를 잃은 승냥이들이 으르렁거렸다.
 디알로를 둘러싼 산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고 서성거렸다.
 평원의 곰을 둘러싼 승냥이 떼처럼 쭈뼛쭈뼛 나서지 못하는 게 인상 깊었다.
 산적 두목도 이 모습이 안타까운지 숨을 뱉었다.
 “아서라. 얘 세다.”
 “으아아!”
 두목의 충고에도 겁 없는 산적이 달려들었다.
 도끼를 든 산적이 뒤를 잡았으나 오뚝이처럼 일어난 주먹이 면상을 뭉갰다.
 곧 다른 산적의 검이 옆구리를 향하고, 껑충 뛰어오른 거한(巨漢)은 다릴 벌려 그들을 차냈다.
 눈 깜짝하는 사이 세 명이 쓰러졌다.
 빠각!
 “끄악!”
 거대한 들소에게 들이받힌 것처럼, 한 대 맞은 산적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단숨에 세 명을 해치운 디알로는 얇은 소나기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맹렬한 사자의 기세처럼 그의 시선은 로워크만을 향했다.
 오직 이 남자만이 자신의 상대라고 말하는 듯했다.
 두근두근······.
 시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소나기 속에 눈빛을 부라리는 남자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얼굴 붉히고 위협까지 가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형제였다.
 다른 수도사들을 도망시키고 홀로 목숨을 걸 만큼 장렬한 남자였다.
 어떻게 그런 남자를 미워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산적 두목의 실력을 똑똑히 본 만큼,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드는 초조한 눈빛으로 창살을 붙잡았다.
 통장과 닿은 맨살 아래.
 작은 심장이 쿵쾅댔다.
 “형님······.”
 
 * * *
 
 콰광!
 하늘은 참아왔던 벼락을 내려쳤다.
 번쩍이는 섬광 아래 그림자 진 얼굴은 마치 살아있는 악귀를 연상시켰다.
 이미 네 명을 잃고 기가 죽어버린 산적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바빴다.
 “으으··· 이 자식 괴물이야! 그냥 오거 자식이라고!”
 “이런 미친······!”
 사방에 널브러진 동료들.
 뒤늦게 상황을 판단한 산적들은 쭈뼛쭈뼛 멀어졌다.
 가늘던 빗줄기가 굵어지고 디알로의 어깨와 가슴에선 핏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응시하는 모습에 로워크는 잊고 있던 기사도를 떠올렸다.
 ‘흐음.’
 한 마리의 사자.
 무리를 지키려 갈기를 부풀린 사자처럼 남자는 굳건하게 서있었다.
 총을 든 포수 앞에서도 용맹한 사자는 물러나지 않는 법이다.
 숨을 뱉은 로워크는 고갤 저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 뭐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피를 볼 생각은 없었고, 약한 부하들은 알아서 거를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널 탓할 생각은 없다는 거다?”
 달래듯 말하는 어조에선 애정마저 느껴졌다.
 어느새 로워크 주변까지 물러선 산적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이런 모습이 용맹한 디알로와 비교되어 두목의 한숨을 자아냈다.
 “······.”
 디알로는 쥐고 있던 오른팔을 당겨 왼팔을 내밀었다.
 얕은 줄만 알았던 상처에선 빗물과 뒤엉킨 피가 흘렀다.
 두꺼운 근육으로 틀어막았던 혈관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물러설 기미가 없자 로워크는 숨을 뱉었다.
 “얌마! 기사 후배라니까 봐주는 거야! 너도 나처럼 기사에 회의감을 가지고······. 하아, 됐다. 내 밑으로 오지 않아도 좋아! 수도원만 내주면 그냥 보내줄게! 선배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덕도 보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
 털북숭이가 실실 웃으며 팔을 벌렸다.
 디알로를 자극하고 무시한다기보다 진심으로 아까워하는 게 느껴졌다.
 벌린 팔뚝 사이엔 작은 흉터들이 보이고, 목 언저리까지 새겨진 칼자국은 그가 몇 번이고 생사를 넘나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목숨도 살려주고 그냥 보내준다는데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목격자인 수도사들이 도망치는 것도 봐주고, 부하 넷을 뭉갠 남자를 존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디알로는 미동하지 않았다.
 이마에 도드라진 핏줄만이 튼튼하게 요동칠 뿐이었다.
 우악스러울 정도로 답답한 성질.
 이게 그의 장점이자 단점인지도 모르겠다.
 “이 수도원은 나와 내 은인의 집이다. 너희 같은 산적들이 점거하게 둘 수 없어!”
 굵직하게 울리는 소리에 산적들은 침을 삼켰다.
 굵어진 빗방울이 이마와 콧등을 때렸지만 사내의 눈빛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우직한 면이 산적들에겐 공포로 다가왔으리라.
 “하아··· 내 체면도 생각해주라. 그렇게 나오면 못 봐주잖아······.”
 로워크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한숨에 주변에 있던 산적들이 물러섰다.
 커다란 들소가 달려갈 길을 열어주듯.
 로워크와 디알로 사이엔 굵은 빗방울밖에 남지 않았다.
 그 순간 짧게 도약한 두목이 디알로를 향해 달렸고, 디알로 역시 주먹을 당겼다.
 콰광!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빗방울을 갈랐다.
 주먹 내지를 틈도 없이 매서운 칼날이 디알로를 베어냈다.
 서로 뒤엉켜 원만한 곡선을 그린 두 남자는 서로를 지나쳐갔다.
 쿵!
 마침내 태산 같던 남자가 주저앉았다.
 비장한 최후에 슬퍼하듯 하늘이 쏟아내던 빗줄기도 거세졌다.
 로워크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뒤를 훑었다.
 “들어가자. 짐들 옮겨.”
 “두목님 심기 건드리지 말고 빨리빨리 해.”
 열한 명의 산적들은 쓰러진 동료와 짐을 들고 수도원으로 들어섰다.
 무력하게 길을 내주며 디알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평생을 지켜온 수도원이 산적의 소굴이 되었다.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던 본당, 철권을 연마하던 훈련장 등이 천천히 그의 눈에 담겼다.
 ‘하아······.’
 굵은 빗방울 속.
 뜨뜻한 숨을 뱉던 그의 눈으로 무언가 들어왔다.
 본당 너머 책방.
 모든 수도사들이 도망칠 때 책방에 숨어 도망치지 못한 막내였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에도 디알로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순간 주변을 살핀 남자는 숨을 삼켰다.
 창살을 쥔 시드가 주먹을 부들대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숨. 어. 있. 어.’
 천천히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선명한 단어가 떠올랐다.
 소리 없이 동생을 숨긴 남자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솨아아······.
 그 순간 시드는 가슴속 무언가가 폭발하는 걸 느꼈다.
 매섭게 윽박지르던 폭언과 시선이 바깥의 빗줄기처럼 씻겨 내려갔다.
 형제란 그런 것이다.
 치고받고 싸워도 서로를 가장 먼저 챙기게 되는 것.
 당장 놀리고 괴롭혀도, 어디서 맞고 오면 방망이를 들고 쫓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비장한 사내를 보며 시드는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다.
 곧 소년의 작은 입술 사이로 담담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님. 저한테 미친 생각이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요?”
 
 [말씀해보십시오. 가능성을 계산해보겠습니다.]
 
 * * *
 
 “모두 동작 그만!”
 “으잉?”
 “뭐야.”
 짐 풀던 산적들의 시선이 향했다.
 비가 쏟아지는 문밖.
 웬 당돌한 소년 하나가 서있는 게 아닌가.
 공터에 있어야 할 거한은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웬 감자를 닮은 소년만이 자기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감자 같은 꼬맹이는 뭐야. 안 꺼져?”
 로워크가 인상을 찌푸리자 물기를 닦던 산적이 나섰다.
 수도복으로 몸을 닦는 로워크의 모습이 시드의 눈에 들어왔다.
 “얌마! 지금 너희 수도원 뺏긴 거 안 보여? 아저씨들 피곤하니까 조용히 나가르르르르르르르······!”
 툴썩!
 산적은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쓰러졌다.
 디알로에 이어 두 번째 변수가 나타나자 짐 풀던 산적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장 안쪽 본당 걸상에 걸터앉은 로워크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수도복으로 몸을 닦던 로워크는 대충 손을 저었다.
 “그냥 조용히 있을래? 비도 오니 나가라고는 안 할게.”
 “들었지? 그냥 조용히 있다 나가르르르르르르······!”
 툴썩!
 방금 전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고도 배운 게 없는지 겁 없이 나서던 산적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지자 모든 산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엔 장난을 친 줄 알았는데 두 번이나 같은 일이 벌어지자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곧 자리에 있던 산적들이 무기를 쥐었다.
 여덟 명의 성인 남성이 주변을 둘러쌌음에도 소년의 눈빛은 미동하지 않았다.
 오직 산적 두목 로워크만을 담담히 응시할 뿐이었다.
 “저기 아저씨 오라 하세요. 그쪽들은 관심 없어요.”
 “이 겁대가리 상실한 꼬마가!”
 휘익!
 투박한 도끼가 날아들자 시드는 몸을 굴렸다.
 엉거주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텅 빈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이미 두 명을 보내버린 소년의 비밀 무기가 작렬했다.
 “라이트닝 볼트.”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인 목소리에 짜릿한 스파크가 튀었다.
 시드의 손과 엉덩이 사이로 시퍼런 불꽃이 튀고, 찌릿한 감각이 닿자 산적은 허탈하게 쓰러졌다.
 툴썩!
 “어?”
 “어어?”
 세 번째 동료까지 쓰러지자 산적들은 입을 벌렸다.
 소년의 양손 위에 떠오른 마법진.
 그리고 얼핏 들었던 목소리는 마법을 사용하는 영창이 분명했다.
 처음 두 발은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거다.
 “이 자식 마법사야!”
 “마법사다!”
 “뭔 수도원에 기사랑 마법사가 다 있어!”
 “마법사?”
 부하들의 설레발에 로워크의 시선이 향했다.
 시드 같은 풋내기 마법사에도 산적들이 놀라는 이유는 있었다.
 소년의 매서운 마법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라이트닝 볼트! 라이트닝 볼트!”
 파직! 파직! 파지직!
 “끄악!”
 신나게 쏘아대는 마법에 선명한 섬광이 번졌다.
 이따금 열린 문밖으로 번개까지 내려치면 이 장면은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시드가 근접에서 마법을 난사하자 산적들은 허둥지둥 흩어졌다.
 테슬라 코일이 전류를 내뿜듯 소년의 볼트 마법이 산적들을 추격했다.
 빗물에 젖은 데다 장비를 벗은 이들은, 소년의 작은 마법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라이트닝 볼트!”
 파직, 파직!
 
 [내용] 출금
 [찾으신 금액] *147(라이트닝 볼트)
 [맡기신 금액]
 [잔액] *3,112(체페슈 수도원)
 
 [잔액] *2,965(체페슈 수도원)
 
 [잔액] *2,819(체페슈 수도원)
 
 “끄악!”
 “악 따가워!”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품 안의 통장이 번쩍였다.
 서클과 연결된 통장의 ‘잔여 마나’가 정상적으로 출금되었다는 뜻이었다.
 출력을 최대로 높인 라이트닝 볼트에 산적들은 피식피식 쓰러졌다.
 물론 한방에 기절하지 않는 산적도 있었지만, 짜릿한 섬광이 비칠 때면 물에 젖은 산적들은 허무하게 무너지기 바빴다.
 이게 바로 마법의 힘이다.
 어린 소년도 성인 남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
 “라이트닝 볼트!”
 “끄아악!”
 여덟 명의 피라미가 쓰러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로워크와 마주한 시드는 주먹을 내밀었다.
 취기가 올라 콧등이 붉어진 두목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질 만큼 둘의 체급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너. 마법 어디서 배웠어.”
 “라이트닝 볼트!”
 문답무용.
 시드의 마법이 번쩍인다.
 여타 다른 산적들처럼 쉽게 쓰러지리라 기대한 것과 달리 로워크는 인상만 찡그릴 뿐, 마법을 맨몸으로 감내했다.
 젖은 몸이 다 마른 것도 아니고 장비를 걸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로워크는 털레털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턱을 들고 위아래로 훑는 모습이 위압감이 풍겼다.
 “전쟁 중엔 자주 봤지. 평생을 수련한 검사가 풋내기 마법사한테 쪽도 못 쓰고 쓰러지는 꼴. 물론 마법이 발전하는 만큼 방어할 수 있는 수단도 늘어났지만, 아쉽게도 우리 애들은 그런 게 없어. 난 아니지만.”
 “아이스 볼트!”
 캉!
 맨손을 휘두른 로워크는 주먹만 한 얼음 덩어리를 튕겨냈다.
 투사체가 존재하는 마법은 쉽게 막을 수 있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팔자걸음으로 걸어온 로워크는 시드를 내려다봤다.
 붉은 콧잔등 위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졌다.
 “평생 개고생해서 검만 휘둘렀는데 풋내기 마법사한테 죽으면 폼이 안 살잖아? 안 그래?”
 
 [173,400]
 
 ‘마나 보유자였어?’
 시드의 눈에 로워크의 마나가 들어왔다.
 비록 체페슈에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 마나를 보유했다면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곧 로워크의 롱소드가 높이 올랐다.
 이윽고 무신경하게 휘두른 검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깡!
 “어?”
 털북숭이 산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당히 상처 입혀 전의를 잃게 하려 한 것과 달리, 귓가에 들린 건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무수히 많은 검을 맞대온 그에겐 무엇보다도 익숙한 소리였다.
 그리고 묵직한 롱소드 아래 두 팔로 검을 막은 소년이 있었다.
 푸른 마나를 검처럼 만든 소년은 롱소드를 막았고, 곧바로 그의 가슴을 노렸다.
 서억!
 방심하던 찰나, 그의 가슴엔 한 뼘 정도의 작은 상처가 생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반격이다.
 “오?”
 “형님의 상처 하나 갚았다!”
 일부러 디알로와 같은 모양으로 공격했는지 로워크의 시선이 향한다.
 이런 첩첩산중에서 마법을 수련해 부하들을 쓰러뜨린 것도 대단하지만, 마나를 이용해 검을 막고 반격까지 한 건 감탄이 나왔다.
 이 꼬맹이.
 범상치 않은 녀석이다.
 “허어··· 이 수도원 도대체 뭐 하는 데야?”
 
 * * *
 
 솨아아······.
 ‘후우.’
 놀란 로워크와 달리 시드의 시선은 열린 문에 닿아있었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밖을 보며 소년은 침을 삼켰다.
 분명 이 짜릿한 습격 외에도 둘이 준비한 무기는 아직 남아있었다.
 
 [날씨가 점점 사나워집니다.]
 
 “라이트닝 볼트!”
 시드는 볼트 마법을 뿜었다.
 손에서 뿜어져 나온 전류는 로워크에게 적중했고, 다른 산적들처럼 피식 쓰러지지만 않을 뿐 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아무리 마법 저항이 높더라도 아픈 건 아플 테니 말이다.
 “흐읍!”
 로워크가 주춤하는 사이 소년의 몸이 파고들었다.
 다른 수도사들처럼 기본적으로 배워온 격투술.
 물론 도망친 수도사들도 같은 기술을 배웠지만, 배워서 아는 것과 실전에 뛰어드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검을 뽑는 것과 베는 것은 다른 것이니 말이다.
 후욱, 훅!
 시드는 꿀벌처럼 매서운 주먹을 내질렀다.
 디알로의 주먹이 롱소드라면 시드의 주먹은 숏소드에 가까웠다.
 짧은 거리를 왕복하며 빠르게 날아드는 주먹.
 이 주먹을 쫓으며 로워크의 눈은 가늘어졌다.
 턱, 서억!
 허공으로 날아든 주먹이 중간에서 붙잡혔다.
 이윽고 순식간에 날아든 검이 머리칼을 스쳤다.
 “흐읍! 흡!”
 전직 기사의 무자비한 공격이 들이쳤다.
 적당한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매서운 바람이 주변을 할퀴었다.
 정수리부터 동강내는 일격에 어깨에서 옆구리로 휘는 검무까지.
 묵직한 검풍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한 끗 차이로 빗나가고 있었다.
 열다섯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몸놀림덕분이었다.
 퍼걱!
 “읏!”
 ‘아차’하는 순간 본당의 두꺼운 촛대가 동강났다.
 최선의 거리를 유지하며 방어하고 있지만 로워크의 실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두 걸음, 세 걸음.
 단번에 좁혀지는 거리에 시드는 비 내리는 바깥을 향해 뛰었다.
 물론 로워크 역시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어딜!”
 “라이트닝 볼트!”
 “큿!”
 꾸준한 라이트닝 볼트가 이어졌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시드는 남자를 유인하며 슬금슬금 약을 올리고 있었다.
 본당의 장의자들이 마법과 검무로 흐트러지고, 매섭게 부서진 나무 파편이 휘날렸다.
 수도원장이 보면 경악하겠지만 이미 놀랄 일투성이니 몸을 사릴 필요는 없었다.
 “라이트닝 볼트!”
 “언제까지 반복할 셈이냐!”
 롱소드를 든 남자가 소리쳤다.
 다시 휘두른 검에 뒷걸음질하던 시드는 결국 비가 쏟아지는 문턱에 닿았다.
 원숭이처럼 요리조리 피하고 있지만 상대는 어린 소년.
 수도사 생활로 또래보다 좋은 체력을 가졌을지 몰라도 기사 출신의 남자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진지해진 로워크의 늑대 같은 시선이 소년을 향했다.
 “칫!”
 크게 소리친 시드는 공터로 내달렸다.
 잿빛 수도복이 비에 젖어 무거워지고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두꺼운 장대비가 얼굴을 때렸지만 소년은 물러나지 않았다.
 한숨을 뱉은 로워크도 걸치고 있던 웃옷을 벋은 뒤 맨몸으로 나섰다.
 따가운 빗줄기가 그의 몸을 맞는다.
 “겨우 말린 옷을 또 젖게 하긴 싫어서.”
 너털웃음 짓는 털북숭이가 빗줄기 속으로 들어섰다.
 어린 소년에게 진지해지는 건 싫었지만, 술기운도 식고 몸도 피로해져 당장이라도 쉬고 싶은 게 남자의 소원이었다.
 그는 롱소드를 어깨에 걸치고 눈살을 찌푸렸다.
 “후우··· 너도 그렇고 네 형도 그렇고. 이 수도원이 그렇게 소중하냐? 참 이상한 곳이구먼. 다른 수도원이었으면 목숨만 살려줘도 감사히 여겼을 텐데.”
 남자의 풍성한 가슴 털 위로 굵은 빗방울이 맺혔다.
 시드는 어둑한 하늘과 검 끝에 주목하며 거리를 벌렸다.
 계속 피하기만 해선 소년에게 더 불리할 텐데······.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도 소갈머릴 알 수 없으니 계속 어울려주는 데에도 지쳤다.
 “타핫!”
 다시 짧게 도약한 남자가 날아들었다.
 이전에 디알로를 베어 넘길 때처럼 바람같이 빠른 검이 반달 모양으로 파고들었다.
 보이지 않던 검풍은 베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선명하게 형태를 드러냈다.
 퍼억!
 “크윽!”
 검에 얻어맞은 시드가 붕 떠올랐다.
 팔위에 두꺼운 매직 소드를 둘렀음에도 로워크의 검은 묵직한 위력을 자아냈다.
 “라이트닝 볼트!”
 “끄윽!”
 검에 닿은 채 시드의 마법이 작렬했다.
 비에 젖은 롱소드를 타고 전류가 흐르자 로워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크게 문제 될 것 없어 버티고 있지만, 혈관을 자극하는 전기가 기분 좋지는 않았다.
 카앙!
 공중에서 날아든 검이 시드를 후려 팼다.
 손가락 한마디만큼 검이 들어오려는 찰나, 매직 소드의 탄력 있는 마나가 검을 밀쳐냈다.
 동시에 푸른 섬광이 비치면서 둘의 거리가 멀어졌다.
 ‘무슨 꿍꿍이지?’
 달아오른 체온으로 뜨뜻한 물방울이 몸을 타고 흘렀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싸움에 로워크는 슬슬 조바심을 냈다.
 몸을 거칠게 휘두른 만큼 그의 어깨와 머리에선 하얀 김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멀찌감치 밀려났던 소년도 일어나면서 그의 표정은 굳어졌다.
 “후우.”
 로워크는 비에 젖은 머리를 짜냈다.
 두꺼운 턱수염과 뒤엉킨 미역 같은 머리가 중년의 매력을 자아낸다.
 “야 인마! 내가 봐주고 있는 건 아냐? 내가 진심이었으면 넌 진즉에 죽었어!”
 어깨에 롱소드를 걸친 두목은 머리를 쓸었다.
 튼튼한 상체와 떡 벌어진 어깨.
 군더더기 없이 단단하게 자리한 복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부러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가 수도원을 빼앗고 디알로를 죽이려 한 만큼 시드의 머릿속엔 이런 감상이 없었다.
 그저 이 남자를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만 노릴 뿐이었다.
 “그러게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그러셨어요.”
 “허어!”
 디알로와 다른 형님들을 약 올리던 철없는 말버릇이 작렬했다.
 이 짤막한 말투에 로워크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적당히 상대하며 어울려준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배은망덕한 도발이 나올 줄 누가 알았으랴.
 다시 검을 고쳐든 산적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섰다.
 자고로 못된 아이에게는 매가 약이었다.
 “좋아. 수도사를 죽이면 재수 없으니 죽을 만큼 아프게 해주마.”
 솨아아······.
 거센 빗줄기 속에 검을 든 남자와 맨손의 소년이 맞붙는다.
 눈을 뜨기 힘든 날씨에 빗방울이 굵어지고, 검은 하늘엔 굵직한 천둥과 섬광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파하. 날씨 한 번 요란하구먼. 운 좋게 쉴 곳을 구했는데 귀찮게 이게 뭐야······.”
 거세지는 날씨에 산적의 시선이 먹구름을 향했다.
 산채를 잃어 방황하던 중 비 피할 곳을 점거하나 했는데 수도사 둘에 엉켜 비를 얻어맞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순간 시종일관 여유롭던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설마······.”
 “아저씨. 혹시 벼락 맞을 놈이라고 아세요? 죄가 많으면 벼락 맞는다던데.”
 소년에게서 나온 말에 그는 자신이 생각하던 게 사실임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내려치던 천둥과 높은 산 위로 떨어지던 벼락.
 소년은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자신에게 ‘벼락을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하하!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 놈이구먼!”
 이 사실을 깨닫자 로워크는 쥐고 있던 롱소드를 던져버렸다.
 물론 자신에게 벼락이 떨어지는 건 그야말로 ‘벼락 맞을 확률’이었지만 뭔가 뒤숭숭했기 때문이다.
 롱소드를 던진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야 이놈아. 그게 가능했으면 전장에서 벼락을 떨어뜨리는 마법사를 몇 번이고 봤을 거다! 6서클 마법사도 힘든 걸 네가 어떻게 한다고!”
 “그런데 검은 왜 버리셨어요?”
 “혹시 모르잖아! 네 말대로 난 죄가 많은 몸이고! 파하하!”
 크게 웃는 소리에서 남자의 호탕함이 느껴졌다.
 수도원을 빼앗으러 온 게 아니었다면 서로 좋은 인연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자세를 고쳐 잡은 시드는 주먹 하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한 팔은 하늘로, 한 팔은 복부로.
 다리를 조금 벌린 채 수도사의 권법을 보여주려는지 그 모습은 우습기까지 했다.
 설마 수도사답게 벼락을 기도하나 싶은 찰나, 소년의 입이 열렸다.
 “아저씨. 우리 형님한테 말한 것처럼 아저씨를 쓰러뜨리면 알아서 나가는 거죠?”
 “뭐?”
 소년의 짧은 질문에 로워크는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아까부터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말만 반복되는데, 의도적으로 시간을 끄는 듯한 이상한 위화감이 자리했다.
 과연 마법사 중 벼락을 떨어뜨릴 수 있는 이가 있었나?
 ‘체인 라이트닝’이나 ‘썬더 스트라이크’처럼 강력한 전격 마법은 본적 있지만, 자연의 번개를 다루는 마법사에 관해서는 듣도 보도 못했다.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소년의 꿍꿍이를 추리하면서 그의 생각은 깊어졌다.
 만약 눈앞의 소년이 번개를 부린다면 그건 엄청난 마법사의 탄생을 목격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죽는다면 비웃음 당할 개죽음은 아니리라.
 “좋다! 네가 날 쓰러뜨리면 군말 없이 떠나마! 사나이답게 약속은 지켜야지!”
 “좋아요! 덤비세요!”
 시원하게 말을 마친 로워크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벼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기다릴 셈인지 소년은 제자리에 서서 꼿꼿이 기다렸다.
 어차피 벼락이 떨어지는 걸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던 로워크가 거리를 좁혔다.
 ‘후우. 빨리 끝내자. 불길한 예감은 매번 들어맞는단 말이야!’
 로워크는 현역 때 감각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매번 이런 예감으로 목숨을 건져왔던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남자는 시드를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좁혀진 주먹이 소년의 배에 닿으려는 찰나.
 주변으로 섬광이 비쳤다.
 번쩍!
 주변이 통째로 밝아짐에 로워크는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전장의 검과 화살을 피하던 그의 눈에 하늘 높이 솟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높게 들어 올린 팔위로 하늘 끝까지 솟은 마나.
 어둑한 하늘과 두꺼운 장대비에 가려있던 마나는 번쩍이는 섬광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피뢰침처럼 마나를 늘어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매직 소드를 길게 늘어뜨린 소년은 아까부터 벼락을 유도하고 있었다.
 ‘아니······.’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오면서 그의 심장은 멈춘 듯했다.
 그리고 벼락을 불러온 소년은 의기양양한 눈으로 로워크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그 순간에 대한 감상을 남길 수 없었다.
 불빛이 번쩍한 순간 벼락은 이미 찾아왔으니 말이다.
 콰광!
 섬광이 비친 뒤에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수도원 본당 앞에 떨어진 벼락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잘 보였을 것이다.
 로워크가 설마 했던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
 사실은 번개를 부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피뢰침이 되어 번개를 ‘유도’한 것이지만 아무렴 어떨까.
 그의 눈에는 그런 마법사가 탄생한 것처럼 보였는데!
 
 [벼락 맞은 전격과 서클을 동기화시킵니다.]
 [동기화율 56%]
 
 ‘네?’
 그때 쓰러지는 시드의 귓가에 이상한 말이 울렸다.
 몽롱해지는 의식을 간지럼 태우는 통장의 목소리였다.
 
 [고객님의 서클과 전격 마법이 좋은 궁합을 보이고 있습니다. 깨어나기 전까지 충분한 동기화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기화율 58%]
 [동기화율 59%]
 [동기화율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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