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서 하시겠습니까?
부고 전화였다.
수화기를 손에 쥔 채로 한참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동료가 물었다. 하지만 그 어떤 답도 줄 수 없었다. 또다시 ‘무슨 일이야?’라는 질문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무슨 일이다. 사실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 * *
성민우는 몸에 맞지도 않는 검은색 정장에 몸을 구겨 넣고 급히 장례식장을 찾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어두운 표정 지은 채 정승처럼 서 있었다.
“아이고, 어쩌면 좋니. 네 아버지 어쩌면 좋아!”
나이 59세, 이름 성태산. 나의 아버지······ 그가 돌아가셨다.
비통한 눈물이 여러 사람의 목을 찔러 가슴 아픈 소리를 자아냈다. 침통함이 가득한 장례식장의 분위기와 다르게 밝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영정을 멍하니 보았다. 언제나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와!”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뻔뻔한 자식아! 네 놈이 우리 형을 죽인 거야!”
“그게 무슨 억집니까, 우리 회장님이 뭘 했다고.”
장례식장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주저앉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어머니를 안쪽으로 모신 후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허무한 걸음을 옮겼다.
“꺼져! 꺼지라고!”
“무슨 무례입니까? 축구 관계자로 이렇게 찾아왔는데.”
그곳엔 작은아버지와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이 엉켜 있었다. 저들을 떼어 놓을 기운이 나지 않지만, 정리하지 않으면 조만간 몰려올 기자들까지 더해져 난장판이 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만 들 하세요. 고인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탭니까.”
민우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힘겹게 꺼내어 그들 앞에 툭 내려놓았다. 하지만 한껏 불만스러워진 감정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서로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손으로 상대의 멱살을 잡은 채 괴물 같은 얼굴로 온갖 욕설을 뱉고 있었다. 조금 나중에 와도 좋으련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양한 언론사의 기자들이 하나둘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마지막이 이렇게 더러워지는 건 싫다. 어떻게든 뜯어 놔야 하는데, 호흡이 제멋대로 들락거리고 심장이 정신을 놓았는지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잔뜩 일그러지며 핑하고 돌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데······.
쿵!
< 이어서 하시겠습니까? >
== == == == ==
“월드컵 본선 진출의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딱딱한 소리에 눈을 떴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편히 자지.”
안쓰러워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거지? 분명 조금 전까지 장례식장 앞에서 난장판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어머니도 통곡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냐는 말을 반복했었고······.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문장을 봤던 것 같다.
“에휴, 잘난 니네 아버지 어쩌면 좋니.”
“예? 아버지요.”
“그래, 협회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몇 시간째 이야기 중이야.”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 아버지가 목을 맸다는 그 일이 꿈이었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한축구협회는 전강수 감독을 경질했습니다.”
전강수 감독? ‘14년 월드컵을 위해서 선임했던 비운의 감독이다. 당시 축구협회는 빠른 움직임에 강력한 압박을 가미한 선이 굵은 축구를 사용하던 대표팀에게 패스 축구를 이식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선임했었다. 결과는 방송에 나온 그대로였지만.
아니······ 설마! 그럼 지금이 2012년 가을? 몸을 일으켜 달력을 찾았다. 역시 2012년 9월이다.
“그럼,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영정이 아닌 살아 있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코앞에서 보고 있다. 그것도 대한축구협회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이토록 밝은 아버지를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잊고 있던, 아니 잊을 수밖에 없던 모습이었는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는 어둠 그 자체였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온갖 비난을 감내하던, 마음이 너무 망가져서 껍데기만 남았던, 한없이 초라하고 서글픈 아버지였다.
어쩌면 기회가 왔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잘 잤냐? 넌 잘 거면 방에 들어가서 자지, 손님들 왔다 갔다 하는데 거실에서 그러고 있어.”
“알겠어요. 축협에서 온 거 맞죠?”
“그래.”
막아야 하는데.
“하지······.”
< 개입할 수 없습니다. >
대표 팀 감독직을 맡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성대가 마비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문장 하나가 떠올라 미친 듯이 반짝거렸다.
아버지는 놀란 내 표정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빛나는 문장이 보이는 것은 아닌가 보다.
“뭔 말을 하다가 말아.”
“대표 팀 감독, 할 생각이세요?”
“고민 중이다.”
“고민 많이 하셔야 해요. 한 번이라도 지면 탈락이잖아요. 그리고 축협엔 아버지를 감싸 줄 라인도 없어요.”
거절해야 한다는 뜻을 에둘러 말해 보았다. 아버지가 한마디를 하셨다. 이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해 주던 말이었다.
“나밖에 없어.”
나밖에 없어······.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바논에 가서도 엉망진창의 경기력을 보였던 대표 팀이다.
대표 팀의 중추를 담당해 줘야 할 유럽파 선수 대부분은 자신의 소속 팀에서 선발은커녕, 경기에 나가는 일도 드물었다. 유럽파를 제외하고 대표 팀의 핵심으로 손꼽혔던 선수들은 심각한 부상으로 이번 시즌을 통으로 날려 버리는 바람에 소집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대안으로 불리는 국내파의 기량은 이들과 견주기엔 너무나도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월드컵 예선 조 편성이 극악이었다. 한 번을 시원하게 이겨 본 적 없는 이란과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는 이라크, 최근 떠오르는 신예 선수를 바탕으로 유럽 축구와 유사해진 역대 최강의 우즈벡과 같은 조에 편성된 것이다. 세계의 어떤 명장이 오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월드컵 본선을 향한다는 건, 게임에서 한 번도 죽지 않고 지옥의 난이도를 격파하는 수준이었다.
“어째서요?”
“뭘 어째서야, 내가 최고니깐 그렇지.”
잠시 고민에 잠겼던 아버지는 추억 속에서만 볼 수 있던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절대로 수락해선 안 된다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먹통이 된 채 허공에서 반짝이는 눈부신 문장만 보일 뿐이었다.
* * *
며칠 뒤 아버지는 국가 대표 감독직을 수락했다.
“우리에게 월드컵이란 단순한 하나의 대회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본선 진출을 이루겠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한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불안함이 더욱 커졌다. 끝을 알고 있지만 보고만 있어야 하는 무력함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 ‘나밖에 없음’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
무슨 의도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빛으로 된 문장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정해진 답을 선택만 하게 만드는 잔인한 존재다. 도대체 왜 보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따라가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절대 이해할 수 없던 그 말을, 누가 봐도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에 제 발로 올라탄 이유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과거라면 충실히 따라가겠다. 허공에서 반짝이는 ‘예’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공간이 조각조각 뜯어져 온몸으로 쏟아졌다.
“어?”
아버지가 지휘봉을 잡았던 대한민국의 첫 경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해할 수 없는 선발 명단으로 논란이 파다했던 그 경기다. 아버지는 경기 내내 미간을 찡그리고 그라운드만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마치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역시나 엉망진창의 경기였다. 모두가 뽑아야 한다던 송한민은 역시 명단에 없었다. 아버지는 평소 독일에서 뛰는 그의 경기를 보며 앞으로 대표 팀을 이끌 대형 공격수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뽑지 않았다. 대한축구협회 때문에 선수 선발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연습 경기부터 저렇게 개입하다니. 불가능한 일을 맡겨 놓고 감독에게 자율권조차 보장하지 않은 대한축구협회에 화가 치밀었다.
“앞으로 보내라고! 앞으로!”
아버지는 수첩에 경기 내용을 적으며 선수들을 향해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하지만 볼은 번번이 끊기고 선수들 간의 동선을 뒤엉켜 조직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가 프로팀도 아닌 대학 축구팀이었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전반전의 끝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선수들은 터덜터덜 벤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테크니컬 라인에 서서 자신이 적은 수첩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에 전술 수정을 위해서 그러는가 보다.
“뭐야?”
그런데 순간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오직 아버지만 그 자리에 서서 수첩을 넘기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긴 한숨을 뱉음과 동시에 영상을 되감는 것처럼 먼지 하나도 빠짐없이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 드레싱룸으로 돌아가 세부 전술을 알리는 시점에서 되감기가 멈췄다.
도대체 이게 뭐지? 잔뜩 커진 눈동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타올랐다.
아버지는 조금 전에 치러졌던 전반과 전혀 다른 선발 명단을 불렀다. 그리고 새로운 선수들이 경기를 뛰기 시작했다.
< 다른 경기를 보시겠습니까? >
허공에 문장들이 한데 모여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주저할 것 없이 ‘예’를 보았다.
“아! 대한민국 위깁니다”
타슈켄트에서 열렸던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가 나타났다. K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제파로프를 중심으로 강한 압박과 높은 제공권이 강점인 팀이다.
제파로프가 볼을 탈취한 후 전방으로 빠르게 전개하고 있었다. 공격을 위해 상대 진영 깊숙이 올라왔던 대한민국은 역습에 당황하며 급히 몸을 돌렸지만, 높은 위치까지 올라와 버린 수비수들은 날렵한 우즈벡의 공격수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아, 대한민국 실점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날의 경기는 지루한 공방 끝에 대한민국의 한 골로 결판이 났었다. 공수가 엉망이지만 실점하지 않았다. 그래서 ‘늪 축구’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아버지가 추구하던 축구와 정반대의 것이었지만,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기의 세세한 부분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남은 전반이 1 : 0으로 끌려만 다니다 끝이 났다. 전혀 본 적 없는 전개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드레싱룸으로 들어가고, 경기장에 홀로 선 아버지가 한숨을 내뱉자 연습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포메이션,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경기를 봤다면 생각도 못 해 볼 미드필더의 조합, 같은 상대와 전혀 다른 경기 내용, 그것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대한민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월드컵 예선전이었다.
“시간을 돌렸던 거야? 그래서 나밖에 없다고 한 건가? 그럼 어째서 마지막 경기를 진 거야······.”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능력을 보았다. 불패의 감독, 그 수식어가 당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경기에서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리한 상황이 올 때까지 시간을 되돌렸으면 됐을 텐데 어째서?
< 마지막 경기를 보시겠습니까? >
주저할 이유가 없다. ‘예’라고 쓰인 글씨가 뜨겁게 빛을 발하며 모든 감각을 빨아들였다.
* * *
“격전지 테헤란에서 이란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대한민국 대표 팀,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이 태극 전사들에게 전해져 힘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 드디어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습니다.”
카를로스 케이로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알렉스 퍼거슨을 도와 오랜 시간 수석코치를 지냈었다. 이란 축구협회는 전략적인 전술에 능하다고 알려진 그를 감독으로 선임했고, 둘은 장기간 호흡을 맞추며 이란 대표 팀의 조직력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시아의 어떤 국가와도 대등하게 혹은 압도하며 싸울 수 있음에도 무리하게 라인을 올리지 않고 중원을 두껍게 하여 상대의 뒷공간을 노리는 전략은 상당히 높은 완성도를 보였다. 대한민국도 이를 느꼈는지 쉽게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의 능력이라면······. 어떤 수가 나왔다 해도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어떻게 무너지고 만 걸까? 무엇이 어긋난 걸까? 여러 의문을 품고 대표 팀의 구성원을 유심히 보았다. 앞선 최종 예선 세 경기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중앙 미드필더 조귀한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매번 경기가 끝날 때마다 언론에선 조귀한을 언급했었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조보관의 아들, 고려대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성골 중 성골이다.
“볼 줄은 좋지만, 발이 너무 느린 놈인데.”
조귀한을 중앙에 두면 패스의 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공격의 속도가 줄고 선수들이 중원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 수비 위치를 완전하게 갖춘 이란을 공략하기 어려워진다. 이란 역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대한민국의 양 사이드를 묶은 뒤 조귀한의 패스 길을 온몸으로 막아 냈다.
이란은 비기기만 해도 최종 예선에 진출하지만, 대한민국은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 경기를 보는 이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라인을 지켜!”
아버지의 외침이 있었지만, 마음이 급한 선수들은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이란이 눈부신 속도로 역습을 펼치며 골을 만들어 냈다.
“X발!”
평상심을 잃지 않던 아버지가 수첩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욕을 뱉었다.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그는 전광판에 남은 시간을 눈으로 좇았다. 10분 정도의 시간, 완벽하게 수비로 내려앉을 이란을 상대로 두 골이나 뽑는 건 월드컵 4강에 다시 오르는 일만큼 어려웠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아버지는 시간을 되돌렸다.
하지만 조귀한의 선발 투입은 여전했다. 그를 빼고 경기를 해도 될 텐데······.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갈기갈기 찢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 족히 13번이 넘었다. 하지만 조귀한은 변함없이 필드 위에 올랐다.
도대체 왜?
“감독님!”
대한민국의 느린 공격 전개를 보며 인상을 쓰는 사이 테크니컬 존에 서 있던 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버지!”
< 개입할 수 없습니다. >
기억 속의 그 날도 그랬다. 아버지는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채 근처 병원으로 이송됐고 경기는 1 : 0으로 패배했다. 그렇게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의 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 * *
< 이어서 하시겠습니까? >
어둠 속에서 오직 저 문장 하나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 했지만 하나하나 부서지는 단어들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수 초간의 번쩍임 뒤에 모든 것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또렷한 의식 속에서 아버지의 능력이 피를 타고 세포 구석구석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세이브 축구의 능력이 초기화되었습니다. >
공간이 마치 깨진 유리처럼 조각나고 깜빡거리는 형광등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신이 들어?”
곁에 서 있던 큰아버지가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물었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아마 장례식장 앞에서 기절하는 바람에 응급실로 옮겨졌나 보다.
“아버지는?”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던 어머니에게 질문했다.
“진즉 보내드렸어. 네가 3일 내내 의식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남편도 보내고 아들까지 보내면 난 어떻게 살아.”
“어머니 손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확실히 살아 있네요.”
“그래, 그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아버지를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한계치에 달해서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조귀한······. 어째서 그 녀석을 빼지 않고 계속 쓰셨던 걸까.
“민우야? 진짜 괜찮은 거지?”
“전 괜찮으니 다들 들어가 쉬세요.”
짧은 시간 동안 깊게 생각했을 뿐인데 근심 어린 눈동자 여럿이 얼굴을 쿡쿡 찔러댔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정말 괜찮아요. 갑자기 정신이 들어서 그런지 조금 피곤한데 혼자 좀 쉴게요.”
“그래도 검사는 받아야지. 혼자 검사받고 그러면 더 힘들 텐데······.”
“선수 때 많이 겪어 봐서 혼자가 편해요. 들어가세요.”
그래도 있고 싶다는 가족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설득을 서너 번이나 반복한 끝에 혼자만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침대에 몸을 기대며 생각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실패할 수 없는 능력을 손에 쥔 채 쓰러져 버린 아버지가 너무 안타까웠다. 월드컵 탈락에 대한 온갖 비판과 비난을 정면으로 받고 축구계를 떠날 수밖에 없던 그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조귀한을 쓰지 않고, 속도를 살린 축구를 했다면 이란을 잡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비난이나 비판이 아닌 기적을 만든 명장으로 칭송받았겠지. 당연히 그럴 수 있었는데, 어째서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도 답을 해 줄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나저나 3일이나 구단과 연락이 끊겼다면 말이 많을 텐데, 날이 밝는 대로 연락을 남겨야겠다.
* * *
“그래서, 어디 큰 문제는 없고?”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듣기 좋은 음악이나 아름다운 새소리가 아닌 단장이자 친한 형, 양호열의 두서없는 거친 목소리라니.
침대에 기댄 채 무표정하게 그를 봤다.
“얼굴 보니 문제없는 갑네, 다행이다.”
“워낙 강골이라.”
“그래! 그거라도 있으야 우리 같이 돈 없고 백 없는 놈들이 여서 버틸 수 있는기라.”
“형은 백 있잖아요.”
“마! 내가 무신 백이고!”
“A랜드 사장 아들이 친구잖아요.”
“그건! 내가 백이 있음 너도 백이 있는 거다.”
호열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별다른 감정 없이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흔들림 없는 시선이 쑥스러운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생긴 것과 다르게 순수한 사람이다.
호열과 알고 지낸 지는 꽤 오래됐다. 내가 대표 팀에 불릴 정도의 실력이 없다는 걸 여실히 느꼈던 28살의 가을, 오른쪽 무릎 인대가 완전히 망가졌다. K리그에서 뛴다고는 하지만 선발과 후보를 왔다 갔다 하는 신세였기에 구단에서 1년 이상의 공백을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았다. 미래가 암울했다. 부상을 털어 낸다고 해도 새로운 구단을 찾아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그때 웃으며 다가와 준 사람이 호열이었다.
너무나 뻔뻔하게 선수로 재능은 없어 보이니 자신이랑 같이 코치나 하자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작 본인도 제대로 못 하면서.
“그건 그렇고, 니 그 지도자 라이선스 몇 급이고?”
“P요.”
“아이고야. 마 그럼 됐다.”
“왜요?”
“우리 팀 옮기자. 은제까지 대학리그에서 허우적대겠노. 마 우리 크게 가자.”
“어디 갈 데 있어요?”
“A랜드가 이번에 팀 만든단다. 시작은 K리그 챌린지.”
뜬 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였나 보다.
“형 친구가 도와 달라고 해요?”
“아마 그러지 않켔나? 거서 내 단장하고 너 감독하면 딱이다. 니도 코치 생활 오래 했잖아. 이제 감독 함 해 봐야지. P 라이선스면 아챔(아시아 챔피언스리그)까지 다이렉트네. 좋네!”
감독······.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울리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프로팀의 감독은커녕 코치 자리도 잡기 힘들었는데, 신생이라도 감독이 된다면 능력을 사용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
< 미션 : 자리를 구하라! >
반짝거리는 저 녀석이 무언가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션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할 거지? 내 말해 둔다.”
“네, 할게요.”
“좋네, 그럼 닌 언제 퇴원하는데? 뭐라도 할라믄 미팅이라도 해 봐야 하는데. 병원에 있음 그게 안 되잖아.”
“내일이라도 나갈 수 있어요.”
“알았다.”
어째 빈손으로 문병을 왔다 싶었다. 그래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 * *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고쳐 맸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벗고 다시 매기를 반복했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A랜드는 외국인 감독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외모부터 신뢰감을 주며 ‘한 번 써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생각의 씨앗을 뿌릴 수 있어야 했다.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노트북을 펼쳤다. 일주일 내내 A랜드의 감독으로 부임하면 어떤 축구를 펼칠지, 또 어떻게 구단 역사를 만들어 갈지 정리하고 면접자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PPT를 만들었다.
‘마, 그 녀석 말로는 2년 뒤에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되는 걸 원한다는데, 재미있는 축구보단 이기는 게 우선 아이겠나? 그래도 또 모르겠다. 1년은 챌린지에 있어야 한다 아이가. 1년 동안 재미도 만들라 할 수도 있고.’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호열의 조언이었다. 대기업의 신생팀이니 아무래도 재미보다는 결과가 중요하겠지. 재미없다고 욕을 먹어도 팀이 계속해서 이기면 팬들은 환호하니깐. 그래, 결과 위주로 팀을 이끌겠다고 말해야겠다.
준비를 마치고 A랜드 FC 임시 사무국이 있는 청평으로 향했다. 챌린지에 속한 팀 중에서 클럽 하우스를 가지고 있는 곳은 거의 없는데, 신생이라 그런지 외연부터 확실히 준비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클럽 하우스에 들어서니 짙은 갈색의 머리를 가진 외국인 남자가 보였다. 그의 옆에는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레빈의 비전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스치듯 들리는 말이 온 신경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클럽에서 고려하고 있다는 외국인 감독이 저 사람인가 보다. 긴장감이 일어 목이 따끔거렸다. 저들의 분위기가 꽤 좋아 보이니 미팅이 수월할 것 같지 않다.
“성민우 씨?”
사무국 앞에 섰을 때 사무국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이름을 물어봤다. 손에 들린 가방의 손잡이를 꼭 쥐며 ‘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시간 맞춰 오셨네요. 절 따라오시면 돼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따랐다. ‘사무국 회의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단정하게 서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는 직원이 무서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딱딱한 공기가 날숨을 뜨겁게 만들었다. 멋대로 뛰는 심장을 다독거리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따갑기 그지없다. 목을 가다듬고 손잡이를 잡았다.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자물쇠가 꽤 무겁다.
“어서 오십시오!”
# 자리를 구하라
이사장, 사무국장, 선수 운영팀장 그리고 호열이 회의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을 맞이하는 밝은 목소리의 인사가 들렸지만 경직된 분위기를 지우기엔 충분치 못했다.
“자! 자기소개부터 해 주시겠습니까?”
가운데 앉아 있는 사내가 힘 있게 말했다. 어느 기업이든 면접이 시작되면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막상 입을 열어 스스로 말하려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네. 나이는 35살이고, 서남대에서 전술 코치를 담당했습니다. 선수 생활은 수원에서 3년, 서울에서 5년, 인천에서 2년으로 프로팀 경력은 총 10년입니다. 코칭 경험은 고등학교에서 3년간 코치를 했고 이후로는 서남대에 계속 있었습니다.”
“선수 은퇴를 좀 일찍 했네요.”
“네, 부상이 심해서 선수로 복귀해도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었습니다.”
“서남대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네. 그런데 감독 경험은 없네요.”
가장 뼈아픈 지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신생팀이니 아무래도 감독 경험이 있는 사람을 선임하고 싶을 것이다. 안정감 있게 클럽을 정비한 후 리그에서 빠르게 치고 나가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감독 대행으로 서남대를 이끌어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됐다. 하지만 호열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의 갈등은 한여름의 물기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호열과 함께 서남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그때의 자세한 내용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본인의 축구 철학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이사장이 팔짱을 끼며 뭔가 그럴싸한 것을 달라는 눈으로 감정 없는 말을 내뱉었다. 준비한 자료를 꺼내 사람들 앞에 놓고 설치된 컴퓨터에 PPT 파일을 옮겼다.
손쉬운 먹이를 물어뜯으려는 살쾡이 눈빛의 면접관들은 발표를 위해 앞으로 나선 민우를 빤히 보았다.
긴장하지 말자. 목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면접을 위해 준비한 것을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이기는 습관이 중요하니 2년 동안 승리의 DNA를 심고 재미를 위한 축구를 조금씩 더하겠다는 내용을 이야기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플랜이네요.”
심드렁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다른 사람들은 꽤 흥미롭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지만, 이사장은 의자에 몸을 밀어 넣고 불편한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 호열의 백이라고 해서 나의 백이 되지는 않는가 보다.
“다른 분들은 질문 있으신가요?”
그 누구도 질문을 위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장은 그런 침묵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뜻대로 장내 분위기를 만드는구나. 민우는 숨을 삼키며 이사장을 주시했다.
“질문들 따로 없으신 거 같네요. 그럼 민우 씨 수고했습니다.”
“아, 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허무한 면접이다. 가타부타 결정 난 것 없이, 잘했다거나 못했다는 말도 없이 급한 불을 끄는 것처럼 후다닥 덮어 정리된 기분이다.
주어진 시간이 끝났기에 짐을 챙겨 면접실을 나서려 했다.
“민우 씨, 아버님 일은 안타깝게 됐습니다.”
이사장의 마무리 인사치곤 달갑게 와닿지 않았다.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할 때 호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정하라는 뉘앙스를 전했다.
“네,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답을 하고 면접장을 나섰다. 하지만 뒤따라 나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마도 자기들끼리 회의를 진행하려나 보다.
감독직을 얻고 싶어서 조바심을 냈지만, 막상 면접이 끝나고 나자 감독직의 갈망보다는 준비한 것을 다 쏟아냈다는 후련함이 밀려왔다.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고 사람 하나 없는 복도를 지나 건물 현관을 향해 계속 움직였다. 문득 이곳에 들어서기 전 마이클 레빈이 구단 관련자들과 좋은 분위기로 나갔던 것이 떠올랐다.
“하, 뭔 시작도 못 하고 빙빙 돌게 생겼네.”
후련함이 지나가니 좀 더 잘할 걸 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어차피 외국인 감독을 뽑을 생각 같은데 뭐하러 쇼했나 싶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창가에 앉아 멍청하게 창밖만 바라보았다. 한숨도 심심찮게 나왔지만 그뿐이었다.
< 미션 : 경쟁에서 승리하라! >
“뭐야, 씨······.”
갑자기 눈앞에 빛으로 된 문장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그런데 내용이 이상하다. 경쟁에서 승리하라니, 도대체 뭘 승리하라는 거지? 저 녀석은 예고도 없이 나타나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나 보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 싶어 액정을 보니 호열이 형이라고 큼지막이 표시되었다.
“어, 형.”
“고생했다.”
“고생은 뭘, 면접 본 게 어딘가 싶네.”
“그래, 내 마음 맴치론 마, 널 딱 쓰자! 이래 하고 싶은데 그게······ 좀 쉽지 않네. 미안타.”
“미안할 게 뭐 있어. 어디든 경험자 쓰고 싶어 하는데.”
“마, 그래도 끝난 게 아이다.”
“응?”
“이사장도 네가 아깝다고 생각하나 보다. 다음 주에 레빈이랑 너랑 불러가 시험 본단다.”
“시험? 무슨 시험?”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일단 시험 보고 결정한다니까네 할 수 있는 데까지 함 해 보자. 힘내라!”
무슨 말인지 다시 한번 물어보려 했지만, 성격 급한 호열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건 이걸 두고 나온 문장이었나? 뭔가 깃발을 꽂아 놓고 ‘여기까지 뛰어와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길은 알려주지 않지만. 그런데 해내면 뭐 좋은 게 있나? 일단 문장이 나타난 대로 결과를 만들면 알게 되겠지.
길게 숨을 뱉으며 다음을 생각했다. 아직 기회가 남았다.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는 걸 테니······ 무슨 준비를 하지? 감독 경험이 없다는 게 이럴 때 조금 치명적이긴 하다. 그래도 할 수 있다.
* * *
“총 30명의 선수 중 각 15명씩 선발하여 3일간 훈련을 진행하세요. 훈련이 끝나면 하루 쉬고 다음 날에 대항전을 가지겠습니다. 그 경기를 잘 해내시는 분을 A랜드 FC의 감독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사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레빈과 민우를 불러 놓고 마지막 테스트를 설명했다.
“자! 이제 선수 명단을 사진과 함께 올릴 테니 각자 잘 선택하세요.”
아직 제작 중인 구단 홈페이지를 대형 스크린에 올렸다. 거기엔 선수들의 얼굴과 이름, 포지션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상세히 살피기보다 빠르게 훑어보았다. 야심이 큰 구단이라 그런지 공격적 투자로 꽤 이름있는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름값이 실력으로 직결되는지 의문이다.
“선수 선발은 두 분이 상의하신 후 정리해서 최종 명단을 제게 주시면 됩니다.”
이사장은 재미있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 장난 가득한 웃음을 보였다.
“그럼,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그가 나가고 레빈과 단둘만 남게 됐다. 지도자 공부를 한다고 영어를 해 두긴 했지만, 외국인과 직접 대화하는 건 너무 오래전 일이라 말이 잘 나올지 모르겠다.
“적당히 나눠요.”
레빈이 어색한 억양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A랜드 FC에서 감독직을 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웠나 보다.
“네, 네. 그러죠.”
“저, 한국어 아주 쪼끔 해요. 영어도 섞어 써요. 오케이?”
소통의 고민이 한순간에 해결됐다. 며칠간 적으로 대할 사람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킨다.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혀 봐야겠다.
* * *
“하, 니 이래 골라서 괜찮겠나?”
호열은 민우가 고른 선수 명단을 보더니 한참 동안 인상을 썼다. 선수들을 영입할 때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이라 어디가 문제인지 바로 눈에 들어오나 보다.
“어차피 잘 아는 선수도 없으니, 훈련하면서 어떤 녀석들이 있는지 파악해 봐야죠.”
“마, 그래도 이름 있는 애 뽑아야지. 키퍼 용광이는 왜 안 뽑았는데?”
“글쎄, 부상이 마음에 걸려서?”
“참나, 썩어도 준치다. 후보보다 백배 낫다. 마! 3일 가지고 애들 파악이나 하겠나? 적당히 맞춰 놓고 볼 젤루 잘 차는 놈이 해결하는 걸 기다려야지. 돌겠네. 니 떨어질라고 환장했나?”
“세상에 떨어지려고 경쟁하는 놈이 어디 있어요.”
“그래! 마! 아이고야. 답답하다. 답답해.”
어차피 레빈도 조건은 똑같다. 서로 선수에 대한 이해가 높지 못한 상태니까······. 아닌가?
“레빈은 뭐 따로 선수 정보를 받고 그래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
“사전에 우리가 어떤 팀이고 어떤 선수가 있다고 미리 알려줬으니 여까지 온 거다. 막말로 여가 무슨 프리미어리그도 아니고, 1부리그도 아닌 2부리그 팀에 무슨 메리트가 있다 오겠나. 삐끗 실패하면 개망신인데. 정보를 주고 할 만하다 이래 생각하게 해야 오지 않겠나.”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동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서글서글했던 아니 자신만만했던 미소가 그런 의미였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주사위는 던졌고 결투에 쓰일 패는 손에 쥐고 있다. 어떻게든 이것들을 잘 정리해서 필승 족보로 만들어야 했다.
“형,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뭔데? 듣고 나서 판단할게.”
“내가 뽑은 애들 정리된 파일 있죠?”
“당연히 있지. 요즘 마, 스카우트 리포트는 기본이다.”
“그것 좀 정리해서 줘요.”
“그래, 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도움 되는 정보라곤 체력 정도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것보단 낫지 싶었다.
경쟁의 방아쇠는 당겨졌다. 서로 손에 쥔 선수들의 기량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테니, 상대에 맞춰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형,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더 할게요.”
“뭔데?”
“레빈, 전에 어느 팀에서 감독직을 했는지와 감독했을 당시 지휘했던 경기 영상을 구해 줬으면 해요.”
“벤쿠버 화이트울브스. 영상은 홈페이지에 안 있겠나. 아님 유튜브에 검색해 보던가.”
“고마워요, 형.”
“이제 좀 할 마음 생긴갑네. 잘 해봐라.”
“처음부터 할 마음이었어요.”
호열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에서 꼭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져 코를 찡긋거릴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호열과의 대화를 멈추고 바로 집으로 이동했다.
“벤쿠버 화이트울브스, 벤쿠버······.”
다행히도 벤쿠버 홈페이지에 풀 영상이 있었다. 레빈이 주는 느낌만 놓고 보면 패스와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다.
“응?”
벤쿠버의 경기 스타일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더블 볼란치를 두어 중앙을 두껍게 한 뒤 전방의 역량 좋은 4명의 선수를 이용해 골을 만들어 내는, 조금 답답한 방식의 경기를 보여 주었다.
보통 더블 볼란치를 쓰면 수비수를 지키기 위해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고 옆에 박스 투 박스 스타일의 선수를 두어 자신의 진영에서 상대 진영까지 볼이 효과적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그런데 벤쿠버의 볼란치는 둘 다 내려앉은 상태에서 수비만 하기 바빠 보였다. 그로 인해 2선과 3선이 멀어지고 미드필더 지역을 상대에게 내주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힘겹게 사이드로 볼이 전달되어도 도와주는 선수가 없어 무리한 드리블과 무의미한 크로스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뒷공간이 많이 생기는 팀을 상대할 땐 효과적인 역습을 통해 골을 만들었다. 자칫 뻥축구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조직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실리적인 역습 축구라.”
공간을 누가 먼저 잡느냐의 싸움이 될 것 같다. 뽑은 선수 중에 다리가 빠르고 드리블이 좋은 친구 하나 있으면 딱 맞을 텐데. 일단 호열에게 받은 데이터를 살펴본 후, 훈련 때 선수들의 움직임을 점검하면서 어떻게 할지 정리해야겠다.
한 골 싸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 * *
“안녕하십니까!”
15명의 선수가 훈련장에 일렬로 서서 민우에게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호열은 그 모습에 피식하며 웃었다. 민우는 그를 보면서 새우 눈을 했다.
아직 감독직을 얻은 것이 아니기에 코치진을 따로 두기 어려워 호열에게 함께 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었다.
“앞으로 3일 동안 잘 부탁합니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으니 더블 세션으로 오전과 오후 모두 훈련하겠습니다.”
선수들은 알겠다는 답을 한 뒤 가벼운 러닝을 시작했다. 그 사이에 호열이 가지고 온 선수들의 리포트를 살펴보았다. 일단 자신이 원하는 빠르고 드리블이 특기인 선수를 찾았다.
최고백, 전에 있던 소속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고 있었다. 속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드리블이 좋다고 적혀있다.
조천수, 어린 선수라는 것과 발이 빠르다는 것 이외엔 따로 기술된 것이 없다.
다른 선수들을 둘러봐도 따로 기록할 정도의 드리블과 스피드가 눈에 띄는 선수는 없나 보다. 저 둘을 최대한 활용해서 경기를 만들어 가는 수밖에.
삐익-
호열이 부는 호각에 맞춰 러닝을 마치고 목을 축이던 선수들이 한데 모였다. 민우는 손에 들린 리포트 뭉치를 내려놓고 그들 앞에 서서 선수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혹시 이렇게 힘을 주고 있으면 멋대로 나타나는 빛의 문장이 선수들의 정보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그 능력들이 다 꿈인 건 아니겠지.
“오늘은 기본적인 트레이닝 세션을 진행할 겁니다.”
능력은 능력이고 훈련은 훈련이다. 선수들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능력을 아무리 사용해도 이길 수 없다.
콘과 사람 크기의 장애물을 놓고 패스와 드리블 구간을 정한 다음, 작은 크기의 골대에 공을 차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짰다.
키퍼를 제외하곤 포지션 순서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일단 체크해 두었던 최고백과 조천수를 눈여겨보았다.
“리포트가 엉망은 아니네.”
“응?”
혼잣말을 호열이 들었다. 리포트 작성을 저 양반이 했나 보다. 두 명의 선수 외에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서너 명 더 있었다. 선수 시절 마주했던 녀석도 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훈련 첫날이 막을 내렸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선수들의 움직임을 되짚어 보며 실제 경기에서 써먹을 법한 전술을 생각했다. 4-3-3, 4-3-2-1, 3-5-2 등 현재 주로 사용하는 포메이션을 놓고 적당한 포지션에 선수들을 넣어 보았으나 만족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디테일을 더한 움직임을 가져가기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역시 4-4-2를 기초로 해야겠다.
“형,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오늘 고생했어요.”
오랜만에 고생했으니 저녁을 먹으며 소주나 한잔하자고 꼬드기는 호열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술 자료, 논문 등을 꺼내 놓고 4-4-2 전술을 연구했다. 아리고 사키가 만들었던 밀란 제네레이션부터 최근 주목받고 있는 디에고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까지. 25년 가까이 개발, 발전된 전술들을 세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민우는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네.”
그래도 아무런 소득 없는 연구는 아니었으니 훈련을 나가기 전 두 시간이라도 잠을 청하는 게 좋겠다.
* * *
“오늘은 골키퍼 훈련을 부탁할게요.”
호열에게까지 전술 훈련을 설명할 시간이 없기에 따로 일을 주었다. 그리고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불러서 4명씩 팀을 만들었다. 어떤 훈련이 진행될지 알 리 없는 선수들은 눈만 끔뻑이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뿐이다.
“라인 잡기와 공수 간격 유지, 삼각 대형 만들기를 할 겁니다.”
선수들은 쉼 없이 움직이며 패스를 주고받았다. 라인과 간격을 유지한 채 자신의 진영에서 상대 진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연습을 시작했다.
“옆의 선수 확인하고! 앞뒤 보고! 계속 움직여야지!”
처음에는 위치 확인이 안 돼 우왕좌왕했지만 30분 정도 반복하니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뤘다.
“누구야!”
움직이는 선수들의 훈련 지도를 하던 와중에 호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 새끼 잡아!”
훈련장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흉악해졌다. 공을 차던 선수들은 발을 멈춘 채 소리가 요동치는 곳을 응시했다. 훈련 중이던 골키퍼와 호열은 달아나는 괴한을 뒤쫓기 시작했다. 다른 훈련을 하던 선수들도 저들과 함께 괴한을 뒤쫓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불청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하는 훈련이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지. 호각을 입에 물고 배를 단단하게 만들어 있는 힘껏 불었다.
삐익!
그 소리에 소란스럽던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이상한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훈련에 집중합시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선수들을 다독이며 반복하던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훈련장에 괴한은 왜 나타난 거지?
* * *
“왜겠냐?”
호열이 마시던 컵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니 정말 못 봤나?”
“못 봤어요. 아! 뒷모습은 조금 봤어요.”
“외국인이다. 외국인.”
“외국인이 여길 왜 와요?”
“스파이! 와, 이런 답답이를 봤나. 마 레빈 쪽에서 보낸 사람이다.”
잊고 있었다. 상대의 전술 전략을 미리 알아서 대응책을 만든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도 레빈의 경기 영상을 봤던 거고, 생각해 보면 레빈은 성민우라는 사람이 감독했던 경기 영상을 찾아보기 힘들 거다.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던 적이 없으니깐. 감독 대행 때도 영상에 남은 경기는 없었다.
어떤 경기를 펼칠지 알 수 없으니 탐색 조를 만들어 보냈나 보다.
“저쪽은 어떻게 하고 있대요?”
“모르지. 마, 자기랑 함께 했던 코치들 잔뜩 데리고 와서 진짜 감독처럼 하고 있다는 것만 들었다.”
“보고 간 사람이 내용 전달하면 웃기겠네요.”
“왜?”
“혼자서 선수들 데리고 패스 연습하고 있다고 말할 테니깐요.”
“아, 맞네. 그거 천만다행이네. 그런데 니 뭐 따로 준비한 건 없나? 이제 훈련 하루 남았다. 우리도 마 스파이 그런 거 보내고 해야 안켔나?”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쪽에서도 우리가 뭘 들고나올지 모르니 결국 제일 잘할 수 있는 전술을 가지고 올 거예요.”
“말하는 뽐새를 보니 뭔 생각이 있는 갑네. 알았다.”
보여준 것도 없이 말만 했을 뿐인데, 호열은 한시름 놓은 것처럼 한 컵 가득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켰고 속이 뚫린 듯 큰 소리로 숨을 뱉었다.
내일은 조금 더 주변 경계를 해야겠다. 상대를 무너트릴 수 있도록 최고의 방법을 연습시켜야 하니까.
* * *
마지막 훈련의 오전에는 전술 훈련의 세부적인 부분을 다듬어갔다. 어차피 상대는 수비를 중심에 두고 롱패스로 뒷공간을 노릴 것이다. 공격을 위해 상대 진영 깊은 곳까지 올라갔을 땐 공을 빼앗기지 않고 차분하게 패스하며 수비들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게 중요하다.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 농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략이지만 축구에서도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선수들이 얼마나 소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지만.
“의도적으로 왼쪽에 집중하라고! 단순하게 패스만 주고받지 말고 중앙과 왼쪽을 번갈아 가면서 찔러야지!”
선수들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의도적으로 반대편에 고립시켰던 드리블러에게 많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포인트지만, 상대를 끌어오기까지 볼을 지켜야 한다는 어려움이 크다.
“주위를 싹 둘러보고 왔다. 이상한 애는 없는 갑다.”
호열이 주변을 탐색하고 돌아와 상황을 알려 주었다.
“좋네요. 오늘은 좀 예민하게 봐야 하는데.”
“그런데, 들리는 첩보에는 점마들 패스 연습만 줄창 한다 카던데.”
패스? 레빈의 축구 스타일이라면 패스 연습에 시간을 많이 쏟을 이유가 없는데······.
“재미있는 축구 하겠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그러나.”
그러고 보니 호열은 레빈의 면접을 코앞에서 봤다. 아마 그도 나처럼 어떤 축구를 할 것인지, 어떻게 클럽을 성장시킬 것인지 같은 감독으로 가지는 청사진을 펼쳤을 거다.
재미있는 축구, 그렇다면 수비에 치중한 축구는 아닐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공격 위주의 축구를 할 텐데······. 순간 이사장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경기를 잘 해내시는 분을 A랜드 FC의 감독으로 모시겠습니다.’
꼭 이길 필요가 없다는 건가? 이기지 않아도 감독의 철학이 보이는 게 중요한 건가? 3일 안에 자신의 색을 입히는 게 중요한 게임인 건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데?”
옆에 서 있던 호열의 목소리에 생각의 꼬리가 끊어졌다.
“이기는 생각. 축구는 이겨야 재미있잖아.”
“맞다. 무조건 이겨야지. 이겨야 팬이 생기지.”
그래, 생각해 보면 면접 때 이야기한 축구 철학도 승리하는 경기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나 자신을 믿고 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가 어떤 축구를 들고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준비한 것을 플랜 A로 두고, 플랜 A를 바탕으로 플랜 B를 만드는 수밖에.
“집중해! 집중!”
지루한 반복 훈련으로 늘어지는 선수들에게 크게 소리치며 원래의 계획대로 차분하게 진행했다. 이제부턴 누가 효과적으로 선수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었는지의 싸움이다.
* * *
“역시 낡은 축구나 하고 있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코치.”
레빈은 전력 분석관이 가지고 온 영상을 통해 민우가 시행했던 훈련 2일 차의 모습을 보고 있다.
“4-4-2로 나오겠어. 땅따먹기 게임이라.”
“그러면 저희는 4-3-3으로 가면 되겠네요.”
“아니야. 저 낡은 한국 감독에게 선진 축구가 뭔지 보여 주자고.”
자신의 코치와 이야기를 나눈 레빈은 입꼬리를 잔뜩 끌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 * *
가득한 구름에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의 경기 당일이 찾아왔다.
“비 내리면 골치 아픈데.”
민우는 우두커니 서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일찍 한 골을 넣고 뒤로 물러서서 두 줄 수비를 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삐빅-
알람이 울렸다. 임시 드레싱룸으로 선수들이 모일 시간이다. 오늘 경기의 선발과 방향성, 어떻게 임해야 할지 이야기하려니 긴장감이 차올랐다. 가슴을 꾹 짓누르는 숨을 천천히 뱉으며 차분함과 냉정함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고민했던 걸 잘 풀어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 저장하시겠습니까? >
며칠 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빛의 문장이 구름처럼 나타났다. 호흡을 정돈하며 차분하려 노력했는데, 저것 때문에 수포가 되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아버지도 매번 이런 일을 겪으신 걸까? 그런데 어떤 걸 저장하시겠냐는 거지?
반짝거리는 문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글씨가 변했다.
< 저장 중입니다. >
저 녀석도 무슨 컴퓨터처럼 읽고 쓰는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 저장이 완료되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드레싱룸에서 대화를 진행하면 자동으로 저장되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점을 저장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항상 같은 지점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경기가 완전히 끝나고 돌리지 않았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숨을 길게 뱉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읽고 선수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명확하게 말해야 하니까.
밤새 정리했던 것을 살펴본 뒤 임시 드레싱룸으로 향했다. 선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 뒤 경기에 나설 11명을 불렀다. 기본 포메이션은 4-4-2, 하지만 투톱에 놓인 조천수가 오른쪽 사이드로 빠지면 중앙 미드필더를 보는 최고백이 최전방으로 올라서고 기존의 톱 자리를 담당하는 안지만이 왼쪽으로 이동해 4-3-3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수비 시에는 다시 제 위치로 이동해 4-4-2를 이루고 두 줄로 수비진을 구축하라고 일렀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이미 훈련을 통해 여러 번 반복했던 거니 몸이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뛰어 주십시오.”
“네!”
힘찬 대답과 함께 14명의 선수가 그라운드를 향해 뛰었다. 그러나 안지만은 우두커니 서서 민우를 보았다.
“질문 있습니까?”
“둘이 있으니 그냥 편하게 부를게요. 형, 나 최전방 스트라이커잖아. 그런데 왜 사이드로 빠지라고 하는 거야?”
길지 않았던 현역시절에 같은 팀에서 뛰었던 지만이다. 그때는 갓 데뷔해서 말주변도 없고 쑥스러움도 많이 타던 선수였는데, 지금은 팀 내 고참이 되어 제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발이 느리니까.”
“발이 느리면 오히려 전방에서 볼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사이드에서 공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거기선 최고잖아. 연계도 좋고.”
“다시는 수비형 스트라이커네 뭐네 그딴 소리 듣기 싫어. 부탁 좀 할게, 형.”
수비형 스트라이커, 정말 지만에게 딱 맞는 별명이다. 그에겐 안타까운 별명이지만.
“나야말로 잘 부탁해.”
입가에 미소를 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드레싱룸을 나갔다. 길게 숨을 마시고 뱉으며 가슴을 뜨겁게, 머리를 차갑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후, 자! 한번 해 볼까!”
* * *
“재미있는 수를 들고나오셨네.”
벤치에 앉은 민우는 레빈이 만든 팀의 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4-1-4-1, 특히 1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수비와 미드를 넓게 커버할 수 있는 선수를 두어, 중원에서 언제든 수적 우위를 가지고 가겠다는 그의 다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공격수, 아마 전방에서 골을 노리는 포쳐거나 밑으로 내려와 양 사이드로 공을 보내주는 펄스나인 중 하나겠지. 일단 상대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시작하네요. 어떻게들 하시려나.”
구단의 부장과 팀장들을 끌고 스탠드에 자리한 이사장은 각 진영을 살피고 있었다.
삐익!
호각이 울리고 레빈의 팀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공이 미드필더에게 넘어가기 무섭게 양 사이드에 위치한 선수들이 상대 진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패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황한 민우의 팀은 허둥지둥했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오는 공격수를 놓치고 말았다.
“키퍼 나와! 각 좁혀!”
상대 공격수에게 공이 떨어지자마자 민우가 소리쳤다. 그것을 들은 키퍼는 주저 없이 몸을 날려 공을 끌어안았다. 다행스럽게도 공격은 무위에 그쳤다.
“준비를 이렇게 해 놓고선 살살하자니, 재미있는 양반이네.”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이래서 아버지가 항상 수첩을 들고 있었구나. 매 순간을 기록해 두었다가 어떻게 대처할지 그림을 다시 그려야 했을 테니.
공격을 찾아온 우리 팀은 수비 진영에서 공을 돌리며 차분하게 빌드업을 시작했다. 레빈의 팀은 무리해서 달려들기보단 그들의 진영으로 물러나 상대의 공격 패턴을 지켜보았다. 시작부터 쥐고 있던 모든 패를 공개할 필요는 없다.
“무리하지 말고 포지션 지키면서 정공법으로!”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는지 공을 접고 사이드로 가려던 최고백은 앞에서 수비를 달고 뛰는 지만의 머리를 향해 패스를 넣었다. 그러나 보기 좋게 커트! 자유의 몸이 된 공을 상대가 잡을 뻔했지만, 다리가 빠른 천수가 투지를 가지고 소유권을 되찾아 왔다.
차분하게 공을 돌리며 수비의 빈틈을 찾으려 애썼지만, 공격 전술의 완성도가 높지 못해 상대의 벽을 뚫지는 못했다. 짧은 시간 안에 저 정도의 수비 조직력을 갖추다니. 레빈도 무게만 잡는 그저 그런 감독은 아닌 듯싶다.
“간격 유지해! 길을 막아야지!”
공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적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양쪽 풀백이 높게 올라와 사이드를 흔들고 오른쪽 미드필더가 중앙으로, 중앙 미드필더가 전방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포지션이 바뀌며 선수들의 움직임과 패스의 규칙이 급격하게 변하자, 미리 위치를 잡고 있던 수비수들이 우왕좌왕했다.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서 수비를 섞어 버리겠다? 쉽지 않네, 마이클 레빈.”
팔짱을 낀 채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레빈을 보았다. 그 얼굴이 언제 일그러지나 한 번 두고 보자.
서로가 위협적이긴 했지만 큰 소득 없이 공방은 30분간 이어갔다. 저쪽은 자신이 데리고 온 코치진과 모여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바꿀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수첩에 지금까지의 특이 사항을 정리하며 혼자 외롭게 싸울 뿐이다.
남은 15분 준비한 걸 써먹을 때가 됐다.
“몰아!”
지금까지는 주문했던 대로 선수들이 왼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공격했다. 아마 수치화한다면 왼쪽이 70%, 중앙 20%, 오른쪽 10%. 이렇게 나올 것이다. 그로 인해 상대는 왼쪽보다 오른쪽에 신경을 덜 쓸 테고.
“움직여!”
기존의 움직임보다 속도를 높여서 공격을 전개했다.
“어?”
하지만 레빈의 선수들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최전방에 있는 공격수부터 강하게 압박을 가하며 빌드업 과정 자체를 막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압박에 당황한 민우의 팀은 공을 앞으로 보내지 못한 채 횡으로만 이동하며 패스의 길을 찾기 바빴다.
“도와줘야지! 기다리지 말고 붙어줘!”
민우는 선수들을 향해 힘껏 소리치며 움직임을 독려했지만, 선수들은 크게 당황한 나머지 그 말이 귀에 꽂히지 않았다. 결국, 상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채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의 빠른 역습이 이어졌다. 수비를 위해 전방에 머물렀던 선수들이 급히 몸을 돌렸지만, 속도가 붙은 레빈의 선수들을 잡기엔 역부족이다.
레빈의 선수들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암사자처럼 잔인하게 치고 달려 페널티 박스를 뜯어냈다. 경험이 부족한 어린 수비수는 다급하게 태클을 시도했지만 성급한 판단이다. 공격수는 가볍게 그를 제치고 키퍼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강력한 슛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탄식처럼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관중석에 있던 이사장이 밝은 얼굴로 일어서서 손뼉을 치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감독 경력 10년을 고스톱 치듯 따낸 사람은 아니었다.
레빈은 전반 30분 동안 힘을 비축했다가 마지막 15분에 강하게 몰아친다. 기억해 두자.
삐익!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선수들은 터덜터덜 드레싱룸으로 이동했다. 레닌은 내 쪽을 보며 피식거리곤 자신의 드레싱룸으로 향했다. 그 비웃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두고 보자. 경기를 기록했던 수첩의 첫 페이지를 열고 내용을 읽으며 상황을 떠올렸다.
“감독님?”
벤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수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말을 붙였다.
“아, 들어가 있어요.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럴싸하게 둘러댄 후 수첩에 시선을 붙였다. 초반의 기습, 중원의 수를 늘려서 무리하지 않는 수비, 공격 시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 움직임의 형태를 바꿔 수비에 혼란을 가중, 30분 이후 압박의 강도를 높여 공을 빼앗았을 땐 역습으로 골을 노렸다.
이런 전략을 어떻게 무너트릴 수 있을까? 수를 아끼지 않고 초반부터 치고 나가야 할까? 수비와 공격의 전술이 다르다. 속도의 싸움으로 가지고 가야 할까? 시작부터 압박을 강하게 넣어서 끊임없이 괴롭히는 방법을 사용할까? 우리 팀 선수들의 체력이 받쳐 줄까? 코치의 경험은 많지만, 감독으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확신을 가지고 가장 좋은 수를 골라 밀고 가는 뚝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시간을 되돌리지? 이대로 드레싱룸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후반전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항상 이 타이밍에 시간을 되돌렸다. 지금 해야 하는데······. 저장을 한다고 했으니 불러오기를 생각해야 하나?
< 저장하신 내용을 불러오겠습니까? >
맞았다. 눈앞에서 움직이던 작은 먼지가 그 속도를 줄였다. 빛이 바삭하게 자신의 몸을 태우고, 살기 위해 뛰던 심장은 이상하리만큼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근!
피부가 붉게 오르다가 하얗게 변했다.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 영혼의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
그런 것도 있었어? 이 알 수 없는 시스템은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떨어지던 먼지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레싱룸으로 들어갔던 선수들이 뒤로 걸어 그라운드로 나온다. 손끝이 빛에 의해 바스러지고 시야가 새하얗게 변한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하는 게 매우 힘들다. 그냥 편하게 짠하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니, 아버지는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건가.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쓰러진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기다려라, 마이클 레빈, 다시 한번 붙어 보자!
* * *
“웩! 우에엑!”
민우는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 내는 중이었다.
< 영혼의 에너지가 1SP 남았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알았다. 알았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세면대에 섰다. 얼굴색이 창백하다. 이렇게 힘들게 과거로 돌아오는 거라면 앞으로 생각 좀 해봐야겠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온 다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싱룸이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과거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속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타종 시 종을 때리는 거대한 당목으로 배를 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드레싱룸이 아닌 화장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후.”
수도꼭지가 싫은지 맹렬하게 쏟아지는 물을 세면대에 가득 받았다. 어지러운 정신을 빨리 다잡고 드레싱룸으로 가서 어떻게 경기할지 이야기해야 한다.
거울 속에 성민우를 보았다. 반쯤 풀린 눈이 서 있는 것도 힘들다고 시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들어줄 생각 따윈 없다. 물속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찬 기운이 피부를 박박 긁어 아프게 만들었다.
“하!”
얼굴을 꺼내 다시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풀린 눈이었지만 생기가 살아난 느낌이다. 뺨을 양손으로 찰싹찰싹 두어 번 때리고 다시 물속에 밀어 넣었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 * *
“늦어서 미안합니다.”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훔쳐냈지만 젖은 머리칼까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수들은 45분 전에 봤던 그대로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여러분은 연습했던 그대로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 주시면 됩니다. 최선을 다해 싸워 주십시오.”
여우처럼 수를 세며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시작부터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 철저하게 싸워야 이길 수 있다. 일단 기습을 노리자.
“시작과 동시에 상대가 롱패스를 차고 뛰어올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아크 정면에서 공을 탈취해 똑같이 해 주면 됩니다. 고백은 볼을 잘 다루니까 사이드로 뛰어가는 천수에게 최대한 정확한 패스를 주세요. 지만은 공만 기다리지 말고 시작부터 계속 붙어주고. 가지고 있는 체력을 다 쏟아부어 봅시다!”
시작되면 벌어질 상황을 알려 주자 선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여러 번 깜빡였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가 보다. 이해를 못 해도 상관없다. 경기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파이팅이나 한 번 외치고 나갑시다!”
“네, 네!”
몇몇 선수가 우렁차게 답을 하자 다른 이들도 따라 했다. 민우가 한가운데로 나서 손을 앞에 놓고 다른 이들을 둘러 보았다. 우물쭈물하던 선수들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하나, 둘, 셋, 파이팅!”
“파이팅!”
* * *
“살살, 부탁해요.”
경기 전 레빈과 악수를 하며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살살 같은 엄살을 천연덕스럽게 비추는 걸 보면 정말 여우다.
삐익!
역시 휘슬과 함께 상대는 롱패스로 길게 차고 나왔다. 조금 전에 들었던 내용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몇몇 선수들이 놀란 눈으로 내 쪽을 봤다.
“뭐해! 멍하니 있지 말고 움직여!”
같은 경기를 반복한다고 해서 벤치에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다. 테크니컬 라인에 서서 전보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에 반응한 중앙 수비수는 재빠르게 아크 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상대 공격수가 공을 잡기도 전에 헤딩으로 클리어했고, 공은 고백의 앞으로 보기 좋게 떨어졌다.
“뛰어!”
천수가 곧바로 튀어 나갔다. 우리 진영으로 쇄도하던 레빈의 선수들이 다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속도가 붙은 천수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시간을 돌리기 전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백은 천수의 동선을 보고 침착하게 패스를 밀어 넣었다. 공이 수비수 사이를 가로지르며 아름답게 뻗어갔다.
천수와 상대편 골키퍼 사이에서 공이 움직임을 멈췄다. 지만은 수비수가 천수를 마크할까 싶어, 함께 뛰어들어 다른 이들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슛! 때려! 때려!”
민우는 키퍼보다 먼저 공을 잡은 천수를 보자마자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것을 들은 천수는 인프런트로 공의 정면을 정확하게 때렸다. 공을 향해 슬라이딩하던 키퍼의 손을 지나서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예리한 슛!
“골!”
전반 3분, 민우의 팀이 선제골을 쟁취했다.
“대박, 진짜 말하는 그대로네. 감독님 어떻게 아신 거예요?”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벤치에 있던 선수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하······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코를 실룩거리며 적당히 둘러댈 말을 고민했다.
“치밀한 분석을 통해 얻은 결과물입니다.”
“와, 그 짧은 시간에. 정말 대단해요.”
놀람을 금치 못하는 선수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감독님! 진짜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다 하겠습니다!”
골을 넣고 달려온 천수와 함께 몇몇 선수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그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등을 도닥이며 모든 걸 쏟아부어 뛰어달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심판은 휘슬을 불어 시합 재개를 알렸고 모두가 그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한 골 먹은 거야! 테이크 잇 이지(Take it easy)!”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레빈이 테크니컬 존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진정하라고 말하는 본인이 가장 흥분한 것 같았다. 좀처럼 쓰지 않던 영어도 뱉는 걸 보면.
“그래! 이제 한 골이야! 침착하게 움직여! 한 골 더 가자!”
레빈의 신경을 건들 수 있는 단어를 골라서 외쳤다. 역시나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에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래, 그 얼굴이지. 자신감이 넘치거나 여유 넘치던 얼굴이 아니라.
골을 넣어 사기가 한껏 올라간 선수들은 전처럼 적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압박에 들어갔다. 상대가 공을 잡기 무섭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앞으로 쉽게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고, 실수를 유도해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이드! 나와야지!”
자신의 팀이 경기 내내 끌려다니는 것을 본 레빈은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붉게 오른 얼굴을 한 채 소리만 질러댔다. 상대의 스위칭 공격에도 공간을 지키며 파고드는 선수를 철저하게 막아 세우자 레빈은 마시던 물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좋아, 이렇게 상대를 묶었으니 추가 골을 넣고 전반전을 마무리하자.
“빠르게! 천수 보고!”
민우의 팀은 왼쪽을 강조하는 의도적 빌드업에 이어 빠른 패스로 상대의 움직임을 끌어냈다. 공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모이는 레빈의 선수들, 순간 중앙에 있던 천수가 오른쪽 빈 곳으로 달려나갔다. 레빈 팀의 수비수가 천수와 키퍼 사이의 공간으로 다급히 뛰어갔다.
지만은 자신을 마크하던 수비수가 떨어져 나가자 골대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천수는 무리한 드리블 대신 컷백으로 지만에게 공을 내줬다. 수비의 방해도 없고 키퍼조차 위치를 잃어버린 상황, 지만은 정확한 타격으로 여유 있게 골대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좋아! 골!”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하늘 높이 들고 흔들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이사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선수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환희에 가득 차 소리를 양껏 질러댔다. 누가 보면 월드컵 16강이라도 진출한 줄 알겠다.
같은 전술이라 해도 상황을 어떻게 끌어가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싶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레빈은 코치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대안을 요구하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게 냉철할 수 없었는데, 준비된 전략이 처음부터 어긋나자 모든 움직임이 엉성해졌다.
그는 전반이 끝나기 전에 한 골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 선수를 교체하고 작전 지시를 내리며 쉼 없이 소리쳤지만 죽어 버린 기세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그렇게 전반전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 * *
“3 : 0, 점수 차가 너무 벌어졌네요.”
“성민우 씨가 준비를 잘한 것 같습니다.”
회의실에 모인 책임자들과 이사장 사이에 냉기가 흘렀다.
“마이클 레빈이 여기서 체류하는 동안 들어가는 돈이 얼만 줄 아세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을 씹어 뱉는 이사장의 눈을 아무도 마주하지 못했다.
“레빈이 혼자 있던 것도 아니고 감독할 거라며 데리고 온 코치랑 분석관까지 합이 넷입니다, 넷! 그런데 혼자 감독한 팀에게 졌어요. 이런 사람을 단순히 외국인이라고 추천한 겁니까?”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숙이고 있다. 무거운 분위기를 한껏 움켜쥔 이사장의 한숨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입이라도 있으면 말을 해야지, 나 몰라라 하고 있고. 잘들 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추천하신 분은 레빈이 있는 호텔에 가서 직접 얼굴 보고 돌려보내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민우 감독 미팅 잡아요. 계약서는 3년짜리로 하나 준비하고.”
* * *
< ‘자리를 구하라!’를 달성했습니다. 10P가 지급됩니다. >
< ‘경쟁에서 승리하라!’를 달성했습니다. 12P가 지급됩니다. >
집에 돌아와 바닥에 누워있던 도중 빛의 문장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다른 내용은 얼추 알겠는데 포인트는 뭐지?
< 30P가 모였습니다. 상점을 여시겠습니까? >
상점은 또 뭐야? 궁금증은 계속 커지지만, 어차피 알려주는 건 없으니 ‘답정너’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겠다. 열겠다는 문자에 시선을 두자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상한 화면이 나타났다. 상점이라고 했지만 살 수 있는 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죄다 잠김, 잠김, 잠김······. 이 이상한 능력 녀석은 불친절의 끝이었다.
< 조금 더 친절한 안내 : 50P >
그 가운데 눈에 들어오는 문자가 있었다. 50P라고 적힌 걸 보니 달성하고 얻은 포인트로 살 수 있나 보다. 그럼 지금 보유 포인트가······ 없구나. 포인트를 얻으면 저 녀석부터 사야겠다.
< 멀미약 : 3P >
어? 멀미약? 능력을 사용할 때 오는 어지러움과 복통이 해결되나? 포인트를 얻으면 저 녀석도 사야겠다.
< 소울 포션 : 30P >
아! 이건 알겠다. 시간을 돌렸을 때 영혼의 에너지 어쩌고 했던 게 생각났다. 저걸 마시면 영혼의 에너지가 차겠지. 가격이 좀 있는 걸 보니 꽤 고급 아이템인가 보다. 저 녀석도 나중에 사야겠다.
아직 가려진 게 너무 많았지만 그래도 정보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모든 걸 다 끌어내서 100% 사용할 것이다.
지이잉-
진동으로 해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손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목소리를 들으면 다 알 테니까.
“네, 누구세요?”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저흰 A랜드 FC 사무국입니다. 내일 미팅을 했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자리를 구하라!’가 달성된 것처럼 감독이 된 모양이다.
그럼 돌풍을 일으키러 가 볼까!
# 비주류의 역습
「A랜드 FC 창단! 감독으로 성민우 전 코치 선임」
「故 성태산 감독의 아들 성민우 전 코치, A랜드 FC의 미래를 짊어지나?」
「A랜드 FC 잘한 선택인가?」
민우는 핸드폰을 들고 부지런히 엄지를 움직이며 기사를 확인했다. 마음에 드는 기사는 없었다. 각양각색의 헤드라인을 휘갈긴 스포츠 신문도 모두 읽어보았다. 감독 경험이 없다는 것이 이 세계 사람들에겐 물음표만 남겨 주나 보다.
“자, 들어가시죠.”
홍보 마케팅팀장이 다가와 프레스 룸으로 안내했다. 신생 구단이라 해도 있을 건 다 있었다.
“네, 오늘은 새로 감독을 맡게 되시는 성민우 감독님의 인사와 간단한 질의응답이 있겠습니다.”
짧은 안내가 끝나자 단상으로 올라가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생전 처음 겪는 수많은 시선인지라 묘한 긴장감이 등줄기부터 올라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고 셔터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지정된 자리에 서서 손바닥을 펼쳤다. 가려도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수의 기자들을 상대로 최대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들은 답 대신 카메라를 열심히 눌러댔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첫 감독직이라서 모든 게 새롭습니다. 구단도 새롭고, 그래서 신선한 기분으로 작은 약속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팬들이 기뻐할 만한 축구를 하겠습니다. 팬이 없으면 구단도 없으니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유럽의 유명 감독들처럼 위트 있는 인사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런 공식적인 자리가 처음인지라 혀가 굳어 딱딱한 말만 늘어놓았다.
“감독님의 축구 철학은 무엇입니까?”
드디어 기자의 질문이 시작됐다.
“이기는 축구입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안티 풋볼도 하실 겁니까?”
“수비 축구는 축구가 아닌가요?”
시비조로 걸어오는 질문에 유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바로 받아 버렸다.
“축구죠. 축구지만 팬들이 싫어하는 축구 아닙니까. 팬들이 기뻐하는 축구 하시겠다더니, 바로 말이 바뀌네요.”
“지금 말씀하신 기자님은 혹시 야구도 좋아하십니까?”
“아, 네. 뭐, 좋아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팀을 좋아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SK 좋아합니다.”
“아, SK. 그러시구나. 07년부터?”
순간 기자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흘렀다. 남모르게 집에서 야동을 보다 가족에게 들켰다 해도 저 정도의 표정은 아닐 거다.
“김성근 감독님이 팀을 잘 이끄셨죠. 자! 다음 질문을 받아도 될까요?”
몇 번의 문답이 오가자 들떠있던 장내 분위기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분위기 좋은 기자회견이 아닌 부서 간의 중요한 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 같았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기자 중 한 명이 손을 높게 들었다.
“신생 구단, 첫 감독직, 모든 게 새로운 팀인데 이번 시즌 목표가 무엇입니까?”
“모든 팀이 꿈꾸는 그겁니다. 우승.”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자신감에 저럴까 싶은 뉘앙스가 풍겼다.
“여러분의 반응을 보니 큰 기대감을 느낄 수 있네요. 그럼, 우리 모두 경기장에서 봅시다.”
더는 질의응답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남긴 후 프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기자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그들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실력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민우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사무실을 향했다.
* * *
“수석코치로 함께할 설명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이사장과 함께 서 있던 남자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성 감독님 도움 되시라고 성균관대에서 플레잉코치를 하던 명훈 씨를 불러왔습니다. 이름값도 있고 하니 크게 도움 될 겁니다.”
이름값이라는 말이 심장을 쿡 하고 찌르는 것 같다. 신생팀이기에 그럴싸한 간판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불쾌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슬근슬근 웃어 보이는 명훈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적당히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잡고 있던 명훈의 손에 조금씩 힘이 실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영국에서 뛰며 유명 감독하고도 일하시고 좋은 경험이 많을 테니, 선수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하지만 상대를 내려다보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실력으로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걸 들고 오는 이사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놀랄 정도로 능력 발휘를 해야겠다.
* * *
“그게, 그래 됐다.”
민우를 대하는 호열은 미안한 기색은 숨기지 않았다.
“여론이 좀 별로다. 마 그래서 니 대신 주목받을 사람이 필요했나 보더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론이 내게 좋을 리 없다. 저번 기자회견에선 대한민국 축구를 망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꺼내고 싶어 하는 기자도 몇몇 있었다. 분위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 뿐이지만. 그들에게 성태산과 성민우, 성씨 부자는 대한민국 축구의 적일 것이다. 기자뿐만 아니라 축구를 사랑하는 팬들도 그럴지 모르겠다.
반드시 그 생각을 뒤집어 버릴 테니 기다려라.
“뭐, 다 이해해요. 그럼 나머지 코치들은 어떻게 할 거래요?”
“음······ 설 코치 지인들로 채워 넣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안된다. 그렇게 하면 난 이름만 감독이니까. ‘바지사장’도 아니고 ‘바지감독’이라니, 그런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지.
“수석코치는 그렇다 쳐도 다른 코치는 안되죠.”
“내도, 일단 그래 말은 했다.”
감독 계약서에 사인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사안으로 싸우게 생겼다.
민우가 한숨을 뱉는 사이 호열은 손에 들린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용병 뽑아야 하는데 명단 대충 추린 거다.”
민우는 그것을 집어서 한 번 훑어보았다.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구나 했는데······. 하나의 에이전트에서 정리한 데이터였다.
“이거 우리 쪽 자료가 아니네요. 어디서 난 거예요?”
“설 코치가 있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호열이었다.
“형까지 왜 그래요.”
“그게, 그쪽 에이전트가······ 마, 용병 자료 좋게 가지고 있기도 하고. 2부리그에 오려는 용병이 많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좀 쉽게 좋은 선수 뽑을 수 있지 않을까. 내는 그래 생각한다.”
“무슨 말이에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두서없이 말을 뱉고 있다. 아마 이사장이 하는 행위를 알고 있었지만 나서서 막지 못한 미안함이 커서 그런가 보다.
“아니, 내 말은······ 미안타.”
“괜찮아요.”
참 알기 쉬운 양반이다. 생긴 건 상남자가 따로 없는데 얼굴이 발갛게 되어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은 소녀 같기도 하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일단 명훈이 어떤 포지션을 잡았는지 명확히 알 것 같다. 이름만 감독인 존재는 절대 될 생각이 없으니 그의 사람들로 코치진이 꾸려지는 건 막아야겠다. 용병은······ 리포트를 확인해 보는 정도는 나쁘지 않을지도.
“일단 용병 자료는 검토해 볼게요. 설 코치가 뭐라 하던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로 리스트 올려야 합니다.”
“알았다.”
“그리고 성호는 요즘 어때요?”
“성호? 갸는 왜?”
“실시간 분석력으론 최고잖아요. 그놈도 우리처럼 비주류여서 빛을 못 보는 거지.”
박성호, 그를 늘 생각했었다. 사람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불러 쓰겠다고.
성호도 짧긴 하지만 선수로서 프로 축구를 경험했었다. 심지어 1부리그에서. 물론 주전은 아니었다. 로테이션 선수로 쓰이거나 2군에 있거나 했다.
선수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호는 별다른 부상은 없었지만, 은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해왔던 경기 분석을 무기로 삼을 생각이었다. 스스로가 선수의 재능은 없지만, 지도자의 재능은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이 큰 난점이었다.
오랜 시간 단련한 분석의 눈과 선수로 겪은 현장의 경험을 더해 손에 쥔 무기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지만 사용해 볼 팀이 없었다. 뜻을 펴기 위해 받아 주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다니다 어렵게 한 대학의 분석관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성호는 민우를 만나게 됐다.
“연락처가 바뀌면 골치 아픈데.”
그의 성격상 바꿀 것 같지는 않지만.
호열이 나가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 앉아 휴대전화를 쥐었다. 박성호의 연락처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전자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연결 시간이 자비 없이 흘렀다.
“여보세요.”
언제 들어도 참 건조한 목소리다.
“오랜만이다.”
“아, 형.”
역시나 말이 길지 않다. 저런 면 때문에 성호는 뭘 믿고 저렇게 차게 구느냐고 사람들이 말하곤 했었다. 성격에 모가 난 건 아니지만 살가운 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그가 그렇게 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함께 일했을 때 성호는 늘 성실했었다. 지각도 없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자라게 한 적도 없었지만, 그러나 누구 하나 성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태생부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냥 하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사람, 어떤 이는 평균보다 조금만 나아도 박수를 받지만, 성호는 평균보다 훨씬 잘해도 당연한 일을 했다는 말을 듣곤 했다.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있다고 스스로 도닥거려도 그런 일이 쌓이면 지치기 마련이다.
“일 같이하자.”
말을 빙빙 돌릴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답이 없다.
“성호야? 응? 끊어졌나?”
“아니에요. 듣고 있어요.”
“아무 말이 없어서 끊어진 줄 알았다. 어때? 같이하자.”
“형, 절 부르면 형이 욕먹어요. 알잖아요.”
어조가 심히 딱딱하다. 그런데도 남 생각부터 하다니, 겉과 속이 참 다르다.
“잘하면 욕먹을 게 뭐 있어. 나 어디 있는지 알지? 내일 오전 11시까지 이리로 와. 그럼 끊는다.”
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욕먹는다는 말을 할 때 성호가 소속된 곳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지금 코치 중에 가장 필요한 건 성호다. 냉철한 분석과 간단한 정리, 지금 가진 나의 신비한 능력은 오직 전반만 보고 승부를 내야 한다. 발전하면 후반전도 가능하겠지만. 하프타임에 진행되는 온갖 대화를 통해 다양한 변수를 만들 수 있는 후반전은 어떤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두뇌라면 충분히 돌파구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름값이 없으니 명훈과 이사가 반대하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나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좋은 무기는 숨겨져 있는 법이지.
민우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호열이 놓고 간 용병 리포트를 집어 들었다.
* * *
“누굽니까?”
아니나 다를까, 연습을 주도하던 명훈이 성호를 보며 까칠하게 물었다. 그가 데리고 온 코치 두 명도 인상을 쓰며 성호를 보았다.
“저희와 함께 일할 코치입니다.”
민우는 너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단조롭게 받아쳤다. 그러자 명훈의 미간에 짜증 서린 주름이 가득 자리했다. 그래, 뭐, 사람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이 나는 법이지. 하지만 이제부터 그런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거야.
“저는 따로 전해 들은 게 없는데요.”
“그러실 수밖에요. 오늘 불러서 계약서 쓰고 바로 현장에 나온 거니깐요.”
“누구 마음대로 그런······.”
“제 마음입니다. 감독이 쓰고 싶은 코치 부르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아니,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전에 저희와 이야기를 좀 하셨어야 서로 혼선이 없지 않겠습니까.”
‘내로남불’이 따로 없는 재미있는 주장이다.
“음, 설 코치님은 저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오신 것 아닌가요? 그리고 저 두 분 역시 오늘 처음 뵙는데요.”
“그건······! 그건, 감독님이 직접 코치들을 찾아다니기 힘드실까 봐. 이름있고 실력 좋은 분들을 제가 직접 불러온 거 아니겠습니까.”
이름값, 저들은 그것이 지겹지도 않은가 보다.
명훈과 함께 있는 코치를 보면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 이름 한 번 날려본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실력도 그럴까? 그런 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박 코치님.”
“네.”
“훈련을 보셨는데 어떤 거 같습니까?”
성호가 민우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의중을 읽으려 노력했다.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의 차분한 분위기를 느낀 명훈과 다른 코치들은 박성호라는 사람이 신중하게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다.
“프리미어리그 출신이 계시니 최신의 훈련이 진행될 거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어서 놀랐습니다. 오히려 다른 K리그 클럽보다 낡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성호는 생각보다 더욱 예리하게 말을 꺼내 명훈의 목을 겨눴다.
“하! 당신 어디 출신이야?”
명훈의 뒤에 있던 코치 중 한 명이 격앙된 목소리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민우는 그것을 보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명훈이 손짓으로 코치를 불러 자중하라는 제스쳐를 보였다.
“어디서 일했는지 모르겠지만, 파워 트레이닝은 어딜 가나 비슷비슷합니다.”
최대한 차분하게 상황을 풀어 보려는 명훈을 보며 성호가 코웃음을 쳤다. 이 녀석, 자처해서 악역을 맡을 생각인가 보다.
“포체티노는 선수들이 감각적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 없도록 모든 트레이닝에 변화를 줍니다. 모리뉴는 훈련 시 항상 공을 달고 뛰게 합니다. 선수들이 공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기 위함이죠. 펩은 체력을 위한 훈련을 해도 전술적 움직임을 위한 동작을 마련합니다. 이 감독들 모두 전술의 반복을 지양하고요.”
“전술 뭐? 아니, 이분이 진짜 어디서 일한 적이 없네. 인터넷에서 주워 본 것 가지고 너무 확신하시는데?”
명훈은 노련하게 성호의 발언을 짓이겨버렸다. 하지만 성호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다.
“아, 설 코치님. 박 코치가 유럽에서 라이선스 따 온 건 모르시겠구나. UEFA A? UEFA B?”
“A까지 했습니다. 프로까지 하기엔 돈이 부족해서 못했습니다.”
“설 코치님은 자격증이······.”
민우의 발언에 명훈은 입을 닫았다. 이런 작은 갈등은 명분을 어떻게 쥐고 가느냐에 따라서 승자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역시나 뒤에 있던 코치들도 별다른 말 없이 명훈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이 이상 갈등이 이어지면 선수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이 갈 게 뻔하기에 이쯤으로 마무리 하고······.
“오! 다들 여 모여있네.”
타이밍 좋게 호열이 나타났다. 불편하게 시끄러운 상황은 이렇게 정리되나 싶었다.
“성 감독 사무실 갔는데 아무도 없어가. 이래 찾아왔어요.”
“네, 무엇 때문에 급하게?”
질문에 바로 답을 할 법한데, 호열은 두어 번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코치진을 한번 훑어보았다.
“다음 주! 마 FC 서울이 경기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호열의 한마디에 명훈과 그의 코치들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에 반해 성호의 입꼬리는 한없이 올라갔다. 이런 상황을 보면 모두가 알 것이다. 코치로 매력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여하튼 FC 서울이라······. 연습경기 상대로 꽤 무거운 상대가 걸렸다.
* * *
“하, 건방진 새끼. 어디 족보도 없는 게 운 좋게 들어와서는.”
명훈은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한 채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물통을 세차게 집어 던졌다. 함께 있던 코치들은 사방에 흩날리는 물방울을 피하려 했지만, 뭉텅이로 퍼지는 것에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선배, 진정해요.”
“후, 그래. 내가 진정해야지. X발.”
“맞습니다. 코치님이 화낼 필요가 있습니까. 곧 망신당할 텐데.”
다른 코치의 말에 명훈의 눈이 반짝였다. 일주일 뒤에 있을 FC 서울과의 일전이 민우의 형편없는 실력을 증명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위대함을 모든 이에게 알릴 기회로 보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뭐 나서서 할 게 있을까요? 알아서 박살 날 텐데.”
“그렇습니다. FC 서울은 지난 시즌 1부리그에서 3위까지 했던 팀입니다. 아무리 시즌 전이라고 해도 기본기가 우리랑 차원이 다를 겁니다.”
그들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박혔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활약하는 강팀인데 경험도 없는 감독이 신생팀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대량 실점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역시, 영웅은 늦게 나타나는 게 멋이지.”
“네?”
“뭘 되물어? 그냥 녀석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자고.”
감독이 무너지면 선수들이 누굴 보는지 지켜보자고. 젠장, 라이선스를 빨리 따야지.
* * *
“중원을 두껍게 한 뒤, 사이드 깊숙이 치고 달리는 직선적인 축구를 합니다.”
영상 회의실, 코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성호가 분석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명훈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성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자료를 빠짐없이 설명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걸 참 거창하게도 말씀하시네.”
“그만큼 중요한 거니깐요.”
코치 한 명이 비아냥대자 민우는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그래서 어떻게 뭘 하자는 겁니까?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놨으면 뭔가 대책을 가지고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스리백(3Back).”
민우의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 보죠?”
“아니, 사이드로 공을 돌려서 치고 온다는데 스리백을 쓰면 사이드 내주자는 것밖에 더 됩니까?”
얼마나 굳어진 사고방식인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듯 말하는 코치들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상대는 FC 서울입니다, 서울.”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매우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감독처럼 느껴지지 않아도 그렇지, 무슨 축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투 같아 불쾌감이 절로 들었다.
“강팀이죠. 우승 후보기도 하고. 전년도 리그 3위, FA컵 준우승을 했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3위 구단에서 강력하게 밀어주는 최용민 감독, 주포 데후얀은 이적했지만 스페셜리스트인 밀리나가 그대로 있고. 여기서 이 정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지 말아야 했지만, 민우는 짜증이 일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좀 더 성숙해져야 했는데, 수련이 더 필요하다.
“그 정도로 아시면서 스리백을 쓰자고 하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중요한 브리핑이었는데 집중해서 보지 않으셨나 보네요.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보면.”
“네?”
“박 코치님.”
“네.”
“서울의 영상을 다시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성호는 영상 클립을 찾아 스크린에 올렸다. 서울의 선수들이 중앙에서 볼을 탈취해 사이드로 주면 밀고 들어가 크로스를 올리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왔다. 하지만 크로스가 부정확했다. 중앙에 공간이 났을 땐 그곳에서 득점을 만들어 냈지만, 그렇지 못할 땐 어김없이 실패했다.
“이 정도 보셨으면 이해하셔야 합니다. 만약 이해를 못 했다면······ 그건 좀 심각한 문젠데.”
일부러 끝말을 짧게 끊었다. 코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앙을 단단하게 만들어 공간을 내주지 않은 상태로 사이드에서 밀고 오는 공격을 받는다면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리란 사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감독님도 다 생각이 있으실 텐데. 그대로 하면 되지 않겠나요?”
“코치님들이 얼마나 함께 해주시냐에 달렸습니다.”
“제대로 알려만 주시면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말에 뼈가 있다. 제대로 알려 줘야 한다는 말과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말. 이상하게 말해도 그대로 전달하여, 망가져도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는 거다. 알려 주는 딱 그대로만 하겠다는 그 말.
“그럼, 제대로 알려드릴 테니 선수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만약 말의 왜곡이 생긴다면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고.
경기를 준비하기 위한 코치진 미팅은 균열의 불씨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명훈과 그의 코치들이 모두 나간 회의실에 성호와 민우, 단둘만 남았다.
“성호.”
“네. 말해요, 형.”
“스리백을 쓰려면 누굴 중심에 놔야 할까?”
“고성룡이 최선이에요.”
그의 말을 듣고 고성룡을 떠올렸다. 수비형 미드필더, 전 소속팀에서 사령관 역할을 했던 35살의 노장이다. 미들과 수비를 오가면서 라인을 잡아주고 선수들의 위치를 정리하기엔 최적의 선수다. 단지 체력적인 부담과 느린 발이 신경 쓰이지만.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네.”
“자료 준비할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알겠다는 답을 남기고 성호가 나갔다. 역시, 누구보다 먼저 불러서 곁에 두길 잘했다. 성호와 함께 그 잘난 이름값 높으신 양반들을 쾅쾅 눌러 버려야지. 정말 학연이나 지연이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이 바닥에 붙어 있겠나. 시작부터 명성이 빵빵한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콧방귀를 뀐 후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며칠간 보이지 않았던 화면이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 미션 : 압도적인 힘을 보여라! >
압도적인 힘? 그걸 경기에서 보이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보여 줄 생각이다.
책상 위에 올린 주먹으로 힘이 꾹 들어갔다.
* * *
“수비수로 시작하라는 말인가요?”
성룡은 쌍꺼풀 없는 눈을 깜빡거리며 민우를 봤다.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을 불러 놓고 한다는 말이 포지션을 바꿔서 뛰라는 말이니, 기가 찬다. 감독이라고 젊은 사람을 앉히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새로운 피라고 조금만 띄워주면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을 느끼니까 말이다.
“전 미드필더인데요? 15년을 같은 포지션에서만 뛰었습니다. 인제 와서 수비수를 하라뇨.”
“지금까지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은 건가요?”
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수비수를 하라는 말이다. 감독 결정전 때 운이 좋아서 한 번 이긴 거 가지고 저렇게 기고만장하다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흠, 다시 설명할까요?”
“아니요. 전 원래 하던 포지션에서 뛰다가 조용히 은퇴하고 싶어요.”
“그 포지션이 맞······.”
감독이 말을 하다 말고 숨을 삼켰다. 아마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이 무리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나 보다.
“그냥, 전술 훈련 때 봅시다.”
커피잔 속에 커피가 그대로 있었다. 물론 다 식어버렸지만. 차 한잔도 아까운 시간을 그대로 손에 쥐고 자신의 사무실로 발을 돌리는구나. 아무리 새로운 걸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 * *
민우는 훈련장 벤치에 앉아 코치들과 함께 뛰고 있는 성룡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꽉 막혀 있었다. 공격할 때는 원래 위치에서 수비를 보호하고 패스의 구심점이 되며, 수비할 때 밑으로 내려가 파이브백(5Back)을 구성하라는 전술적 움직임이 그렇게 싫은 걸까. 빌드업 때 미들에서 수비로 내려가 공을 받으면 사이드로 뿌리면서 상대 수비수를 좌우로 몰아가라는 말은 전혀 듣지도 않은 것 같다.
혹시 이것도 무명의 감독이라서 그런 건가? 이런 뻔한 이야기는 지겨울 법도 한데, 어딜 가나 있는 걸 보면 사람은 다 비슷한가 보다.
“감독님, 10분 쉬고 전술 훈련하겠습니다. 어떻게 원래 생각했던 그대로 시행할까요?”
성호가 벤치로 달려와 물었다. 그와 성룡을 번갈아 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기 싫다는 녀석을 억지로 시키는 게 맞는지 아니면 다른 선수를 찾아서 레지스터 역할을 줄지······.
“원래 준비했던 그대로 갑시다.”
단순한 선수와의 기 싸움이 아니다. 고성룡이 주장은 아니지만, 팀의 리더나 마찬가지다. 전통의 강호인 수원에서 오랜 시간 뛰었으며 K리그 우승을 경험한 선수기도 하다. 선수 대부분이 그를 인정하고 있으며 몇몇은 존경심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룡을 쥐고 가지 못하면 선수단 장악이 힘들어질 수 있다.
만약 성룡 자체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그때 다른 선수를 세우면 된다. 그건 선수 자신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니 리더십의 문제는 아니다.
삐익!
명훈이 호각을 불러 선수들을 불러 세웠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수비 전술부터 연습합니다.”
스리백과 포백(4Back)을 자연스럽게 오가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성룡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단순하게 위치와 간격만 이야기했다. 역시나 성룡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머리를 써보자. 우선 혼자만의 힘으로 수비를 보호하고 중원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머릿속에 남겨야겠다.
“천수! 고백!”
지난 경기에서 지시 사항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두 선수를 불렀다. 속도를 이용해서 성룡을 무력화시키고 그가 서 있는 지금의 위치에선 수비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축구는 패턴이다. 다양한 패턴을 연습한 팀이 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거다. 그리고 지금 펼쳐지는 공격 패턴은 서울이 즐겨 쓰는 방법의 하나다. 드리블러가 중앙에서 공을 받아 사이드로 빠지며 수비수를 끌어당기고, 다리가 빠른 선수는 중앙에 생긴 공간으로 침투하는 순간 3선을 가볍게 넘기는 깊은 패스로 찬스를 만들어 냈다.
“뒤로 움직여야지! 공 넘어가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간격이 벌어지잖아!”
아무리 갈등 상황이라 해도 축구인은 축구인이다. 선수가 훈련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니 코치들이 크게 소리쳤다. 혹시나 지시한 것도 제대로 안 해 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같은 패턴의 훈련은 계속됐고 성룡은 그 패턴에 너무나 무기력했다.
삐익!
이번에는 직접 호각을 불어 훈련을 멈춰 세웠다.
“고성룡!”
이름을 짧고 굵게 외쳐 지금의 문제가 바로 본인임을 각인시켰다. 성룡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그 자리만 고수할 생각이지? 상대가 오면 물러서서 중앙을 두껍게 하거나 달려들어서 수적 우위를 만들어 주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지.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몇 마디의 독설을 고명처럼 올릴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경험을 제대로 쌓았다면 이런 문제는 금방 인식할 거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번 시즌은 벤치만 달구다 끝날 것이고. 자신이 2부리그로 온 이유가 실력이 떨어져서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미친 듯 뛰어야 할 거다.
자! 고성룡, 어떻게 나올 거지?
“죄송합니다.”
그의 턱 근육이 볼록볼록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래도 성질을 죽여야 할 때는 아는 걸 보니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나 보다.
“시키는 대로 해. 잘하는 걸 더 잘하게 해주려고 길을 만드는데 왜 못하는 걸 고집하지?”
“그래도 늘 했던······.”
“나이가 35, 기동력이 떨어지니 공간을 선점하지 못하고 체력이 안 되니 빠른 녀석들을 따라가지도 못해서 간격만 벌어지지. 조금이라도 현명하면 20대처럼 공 찰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아, 아직! 뛸 수 있습니다.”
“아직 뛸 수 있는데 같은 패턴을 한 번도 막아 내지 못해?”
성룡은 말을 삼켰다. 훈련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주변의 눈치를 살핀 성룡은 입을 달싹이다 굳게 닫아 버렸다.
“왜? 아니야?”
“······ 죄송합니다.”
“코치들이 지시한 대로 움직여. 그것도 제대로 못 하면 너를 무리해서 쓸 이유는 없으니까.”
선수가 모두 있는 곳에서 문제를 확인시킨 후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건 성룡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의 다른 모든 선수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손에 들린 호각을 입에 물고 길게 불었다. 잠시 멈췄던 선수들이 자리를 찾아갔다. 그럼, 어디 욕먹은 노장의 분전을 지켜볼까.
* * *
“감독 그 사람,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사람 다 보는 앞에서 쪽을 주고.”
훈련을 마친 후, 성룡은 동료들과 샤워를 하고 있었다. 이제 갓 들어온 신인이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는지 흥분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몇몇 어린 선수들이 그에 동조했지만······. 그것이 마냥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건만 고집으로 버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룡은 분명 공이 사랑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소속팀에 확실한 자원으로서는 분류됐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벤치에 앉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확신하고 있었다. 1군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걸. 그래서 1부가 아닌 2부리그로 내려왔다. 용의 꼬리보단 뱀의 대가리가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젊은 감독이 그걸 꿰뚫었다. 지금까지 그라운드 위에 설 수 없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모두의 앞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보이고 말았다. 적당히 감추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선수로 남으려면 변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눈빛은 변하지 않으면 이 팀에서 살 수 없을 거라고 강렬하게 말하고 있었다.
“살려면 뛰어야지.”
“그렇죠. 살려면 뛰어야죠.”
같은 포지션을 두고 경쟁하는 한솔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뭐, 형이 안 뛰어도 제가 뛰면 되긴 하지만.”
“야! 너 형님한테 말버릇이······.”
“틀린 말 했나? 축구 선수가 경기장에서 걸어 다니는데 어떻게 이겨요? 개처럼 뛰어야 이기지. 성룡 형이 멈추면 다른 사람들이 두세 배는 더 뛰어야 하는데요.”
“그래도! 말을 좀! 썅!”
나를 둘러싸고 한솔과 다른 선수가 충돌했다. 샤워장을 살펴보니 실오라기 하나 두르지 않은 시커먼 녀석들이 가감 없이 감정을 표출했다.
민우의 말이 맞았다. 뱀의 머리가 되려 한 거지 앞뒤 꽉 막힌 못된 병장이 될 생각은 없었는데······. 이 현실에 안주하며 헛바람이 들었던 모양이다.
“미안하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로 얼굴을 가린 채, 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샤워장 안에 있던 모두의 소리가 멈추고 감정들도 숨을 죽였다.
“미안하다. 모범이 돼야 했는데.”
한솔에게 성을 냈던 젊은 선수가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성룡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눌려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지고, 모두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성룡의 쳐진 등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 * *
물끄러미 노트북을 보던 민우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하, 이건 또 뭐야.”
민우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오피셜] FC 서울, 박도영 영입」
국가 대표 10번이었던 사나이. 전성기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천재 공격수로 불렸던 선수다. 그리 빠르진 않지만 유려한 드리블로 좁은 공간을 부수고 들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데후얀을 대체할 공격자원으로 만점에 가까운 영입이다.
“골치 아파지네.”
이쪽은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상대는 질과 양을 늘리며 싸우러 오고 있다.
무엇 하나 쉽게 가는 일이 없구나. 이번 미션은 정말 쉽지가 않네.
민우는 자신의 목덜미를 긁적이며 서울 유니폼을 입은 채 웃고 있는 박도영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압도적인 힘을 보여라’라는 미션이 버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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