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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하드캐리 1권 (1)

2019.07.22 조회 453 추천 1


 # Prologue
 
 
 통산 안타 3118개.
 통산 도루 552개.
 통산 홈런 355개.
 전부 한 타자가 KBO에서 커리어 내에 세운 기록이었다.
 이 외에도 통산 타율 3할, 통산 출루율 4할, 통산 장타율 5할까지 기록하며 강타자의 조건인 3-4-5 라인을 완벽하게 그려냈고 그만큼 선수의 급을 책정하는 wRC+나 WAR은 최정상급 수준이었다.
 당연히 바로 신인왕을 탔고 리그 MVP도 몇 번 탔었으며 골든 글러브는 맡겨놓은 걸 찾아가는 수준이었다.
 커리어 내내 타율 3할은 늘 따라다니는 기록이었다. 한 시즌에 200안타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 매년 100개 이상의 안타는 기본으로 쳤다.
 누가 봐도 레전드 기록이었고 실제로 이 선수 등 번호는 은퇴 발표와 함께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그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 진짜로 못 할 줄은 몰랐음.
 - 솔직히 한 번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었나···.
 - 이 정도면 구단에서 반성해야죠.
 - 이거야말로 절대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임. 깰 수가 없다.
 
 그건 바로 우승이었다. 통산 3천 개 이상의 안타를 치며 언제나 강타자의 면모를 뽐냈지만, 우승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은 제법 있었지만, 번번이 무릎 꿇기 바빴다. 물론 포스트시즌 때도 기다렸다는 듯이 맹타를 휘두르며 존재감을 나타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야구는 팀 게임이었다. 혼자 아무리 잘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상대 팀은 말 그대로 한 명만 조심하면 되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타선은 용병 타자도 있어서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투수진이 문제였다.
 5점을 뽑아내면 6점을 내주고 6점을 뽑아내면 7점을 내주곤 했다. 더블스코어로 앞서고 있어서 오늘은 편히 가겠구나 하다가 다음 이닝에 바로 동점이 되어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중요한 투수들이 죄다 불만 지르기 바쁜데 타자들이 뭘 어쩌겠는가. 그만큼 FA로 영입도 많이 해봤지만 무슨 마가 꼈는지 오는 투수마다 죄다 불만 지르기 바빴다.
 그래도 정규시즌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단기전인 포스트시즌은 방법이 없었다. 시작부터 바로 홈런을 내주며 기선 제압당하기 바빴다.
 결국, 그렇게 그 선수는 단 한 번도 우승해보지 못하고 오늘 영구결번식을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 * *
 
 “이런 XX···”
 지금 마신 술기운 때문일까. 평소에 욕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지만, 오늘은 입만 떼면 욕하기 바빴다.
 분노가 제대로 스며든 목소리였다.
 “진짜로 못 할 줄은 몰랐는데···”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한탄도 섞여 있었다. 그는 잔에 담겨 있는 술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이름은 박용호였다. 야구선수로 한 팀에서 평생을 뛰다가 올해에 은퇴했다.
 그가 언제나 달고 다니던 등 번호는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 오늘 영구결번식을 진행하고 지금 술독에 빠져 있었다.
 박용호는 나이가 만으로 무려 45세였다. 일반적으로 야구선수가 아무리 길어도 40살 정도에 다들 기량이 꺾여서 은퇴한다는 걸 고려하면 제대로 롱런한 케이스였다.
 물론 그만큼 박용호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편이었다. 불혹을 넘겼지만 듬직한 그의 체격이 그걸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시즌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가끔 한두 번 마시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른 데 문제가 생겼다. 눈이었다. 이미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계속 나빠져서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고 어렵게 은퇴를 결심했다.
 구단에서도 뜻을 존중해주어 영구결번도 해주었다.
 뭐, 커리어를 보면 해주는 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힘내라, 용호야. 너는 정말 잘했잖아.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입을 열기만 하면 욕지거리를 내뱉기 바쁜 박용호를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말 거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몇 안 되는 친구인 전성찬이었다.
 지금 그들은 구단 회식을 마치고 2차로 포장마차에 온 상태였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구단에서 민감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우승에 대해서 욕설을 내뱉는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한 번은 할 줄 알았단 말이야··· 으허허허헝···”
 결국, 눈물까지 흘리는 박용호였다. 어지간히 한이 담겨서 그런지 마흔이 넘은 남자가 우는 모습이 희한하게도 꼴불견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도 이럴 줄 몰랐어··· 못 한다 못 한다 말만 들었지 설마 진짜로 못 할 줄이야···”
 친구는 그러한 박용호의 모습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계속 함께 잔을 기울이며 그를 달래주었다.
 “후우···.”
 눈물을 흘리고 나니 좀 진정된 것일까. 박용호는 이내 후련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잔에 담긴 술을 입안에 또 털어 넣었다.
 그는 그러다가 들을 수 있었다.
 “··· 용호야,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냐?”
 그건 바로 전성찬의 은은한 목소리였다. 그의 시선은 박용호를 향하고 있었다.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봐서···”
 이건 진심이었다. 제2의 인생은 천천히 생각해볼 요량이었던 터라 박용호는 그냥 멍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는데, 그는 그 순간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무슨 일을 하건 네 마음이긴 한데··· 슬슬 제수씨한테도 연락하는 게 맞지 않겠어?”
 전성찬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한 탓이다.
 그의 말은 자신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거야 그렇지··· 성찬이 네 말이 맞긴 한 데···”
 박용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두 눈은 전성찬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렇다. 박용호는 확실히 야구계에서는 최고의 선수가 맞았다. 성적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야구에만 한정된 이야기였다.
 가족 쪽으로 시선을 살짝 돌리면 박용호는 최악의 가장이었다. 오로지 야구에만 집중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계속 소홀했다.
 심지어 시간이 나는 날에도 혼자 야구장에 계속 나가 스윙을 돌리곤 했다.
 결국, 박용호의 아내인 유은하는 그 모습에 질린 나머지 딸인 박나래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여기에도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으니 그들을 떠나보낸 건 박용호의 탓이 컸다. 홧김에 그냥 가버리라는 말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내뱉을 때는 아차 했고 후회도 했지만, 너무 망설인 나머지 차마 사과하지 못해 결국 혼자만 한국에 남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박용호는 스스로 기러기 아빠 생활을 자초한 셈이었다.
 전성찬이 말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어쨌든 이제 야구는 끝을 맺었으니 가족에게 집중하는 게 맞는 것이다.
 그러려면 좌우지간 사과부터 할 필요가 있었다. 그야말로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뭐야, 왜 말을 망설여? 너 설마··· 아직도 고민하는 거냐?”
 말하자마자 박용호의 고해성사를 들을 줄 알았건만 아무 말도 없었다. 전성찬은 기가 차는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용호가 말했다.
 “아, 알아.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 이건 성찬이 너도 잘 알잖아.”
 “이 자식이 진짜···! 제수씨가 보살이다, 보살! 내가 제수씨라면 무조건 이혼했어, 인마!”
 박용호는 지질함의 극치를 보였고 결국 진성찬은 폭발했다.
 지금 전성찬의 말마따나 놀랍게도 유은하는 박용호에게 이혼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미국에 건너가서 육아에 힘쓰고 있었다.
 돈은 박용호가 많이 버는 만큼 꼬박꼬박 부쳐줬다. 그러나 외국에서 혼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부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해도 할 말 없었지만, 유은하는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박용호한테 소극적으로나마 애정을 표시해주곤 했다.
 그건 보살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어휴···”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박용호는 그냥 조용히 술 마시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 *
 
 덜컹
 “이런 XX···.”
 여전히 욕하기 바쁜 박용호였다. 친구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그는 거나하게 취했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집 앞에서 마신 덕분에 운전에 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우···”
 풀썩
 그러나 많이 마신지라 인사불성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박용호는 그냥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잠들고 말았다.
 
 * * *
 
 “으아아아! 어떻게 20년 넘게 뛰었는데 우승 한 번을 못 하냐! 이러기도 어렵겠다!”
 꿈이었다. 꿈이라는 생각이 든 건 정신이 갑자기 또렷해진 점도 있었지만, 주변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분한 마음은 여전하여 박용호는 허공에 대고 연신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사자후가 따로 없었다.
 “하아···”
 하지만 박용호는 의외로 금방 조용해졌다. 지금처럼 아무리 난동을 부려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고 스스로 안쓰러운 탓이었다. 체념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했다.
 그때였다.
 “용호야,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냐?”
 박용호를 향해 돌연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당연히 우승이죠!”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꿈이었고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근엄한 느낌이라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로 변함없이 우승에 대한 갈망을 나타냈다.
 하지만 박용호는 좌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완전 웃긴 놈이네. 너 오늘 은퇴한 놈이잖아?”
 목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한 까닭이었다.
 아픈 곳을 제대로 찌르는 느낌이었다.
 “으윽···!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기회가 오면 할 수 있거든요!?”
 박용호는 발끈하여 외쳤다. 어차피 이제 은퇴했으니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박용호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오호, 그렇단 말이냐? 정말로 기회가 오면 우승할 수 있어?”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이죠! 내가 얼마나 잘했는데! 자신 있다고요!”
 그래도 움찔한 것은 잠시였다. 박용호는 금방 자신 있게 외쳤다. 어차피 조금 전에 들은 말마따나 이제 은퇴한 상태였으니 걸릴 게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박용호는 듣게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네게 기회를 주마. 19살은··· 바로 시작이니 조금 힘들겠군. 17살로 돌려주지.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적응도 될 거고, 어때?”
 “네···?”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니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꿈이라는 건 알았지만 너무 조건이 좋다 보니 박용호는 멍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어떠냐니까. 돌려줘, 말아? 뭔 남자 녀석이 이렇게 기개가 없어? 너 야구는 도대체 어떻게 했냐?”
 “도,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질타하는 목소리에 박용호는 고개를 숙이며 외쳤는데, 그는 그러다가 아차 했다.
 “자, 잠깐만요! 취소, 최소! 안 되겠어요! 하지 마세요!”
 뒤늦게 가족의 존재를 상기한 것이다.
 아내인 유은하야 노력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딸인 박나래는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유은하와 다시 만나도 그 부분은 솔직히 확답이 어려워서 박용호는 빨리 손사래 치며 외쳤으나 거기에서 그가 듣게 된 목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이 말을 명심하거라, 용호야. 네가 얻고자 하는 건 다 얻을 수 있을 거다.”
 박용호의 의식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그 말을 듣는 걸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아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이 신음의 주인공은 바로 박용호였다.
 곤히 잠들어 있던 그는 깨자마자 끙끙거렸다. 구단 회식에 이어 친구인 전성찬과도 술을 퍼마셨으니 숙취에 시달리는 게 당연했다.
 “아이고, 머리야···.”
 원래 술은 몸 관리 때문에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었으며 그래서 그런지 주량도 약했다.
 그러나 어제만큼은 정말 술독에 빠지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 말 그대로 들이부었는데, 그게 너무 지나쳤던 듯싶었다.
 ‘···맞다, 이젠 신경 안 써도 되지.’
 그러다가 박용호는 문득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어제 은퇴해서 백수와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오늘도 경기를 준비하겠지만 자신은 이제 선수가 아니었다. 그저 돈깨나 모아놓은 백수에 불과했다.
 ‘음··· 뭔가 좀 허무한데···’
 매일 치열하게 살아서 그런지 지금 상황이 영 익숙하지가 않은 박용호였다. 그는 벌러덩 드러누운 채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에휴,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래도 충격은 잠시에 불과했다. 은퇴는 불혹인 40살을 넘길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니만큼 어느 정도 대비가 된 것이다.
 ‘보자, 그래도 전화는 하는 게 맞겠지···.’
 박용호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살짝 좌우로 젓고는 핸드폰을 찾았다.
 어제 잠결에 옷은 다 벗어 던졌는지 속옷 차림이었다. 옷가지는 죄다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박용호는 그 옷가지를 뒤적여 핸드폰을 찾았는데,
 ‘어라? 왜 없지···?’
 그는 난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뒤져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잃어버린 건가?’
 이런 경우에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다.
 2차까지 막무가내로 달려서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꽤 컸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핸드폰은 말 그대로 연락만 하는 용도였고 연락처도 몇 개 없었으며 중요한 사람들의 번호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박용호는 짧게 아쉬움을 느끼고 집 전화를 찾아서 수화기를 들었다.
 곧 그는 번호를 입력했다.
 국제 전화였다.
 ‘우선 얘기 좀 해봐야겠지···. 쩝, 어떻게 말하지?’
 술을 잔뜩 퍼마시긴 했지만, 기억은 났다. 전성찬의 말마따나 아내인 유은하에게 연락은 해볼 생각이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많은 만큼 무조건 저자세로 나갈 것이고 사과 역시 할 생각이었다. 아마 똑같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될 듯했다.
 제2의 인생은 천천히 정할 계획이었다. 현역 때 고졸로 입단하여 국제대회에서 국위선양을 통해 군 면제까지 받아 FA 권리를 무려 4차까지 행사해서 돈은 여유가 많았다.
 거기에 박용호는 고민 끝에 해외 진출하지 않은 만큼 구단을 향한 충성도도 어마어마하여 사실상 등한시를 당하는 게 맞을 터인 4차 FA 계약 때도 무려 4년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보장 3년에 옵션으로 1년 추가였지만 그 옵션은 당연히 다 채워서 4년을 다 뛰고 나왔다.
 게다가 소속 구단은 빅마켓이었고 언제나 준수한 성적을 낸 만큼 돈을 두둑하게 챙겨주어 주머니 사정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아무튼, 번호를 입력한 박용호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화기를 통해 없는 번호라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 까닭이었다.
 ‘어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들의 번호는 늘 외우고 다녔다. 그건 당연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 보니 박용호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번호를 다시 입력했으나···
 “없는 번호입니다.”
 그 결과는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게 믿을 수 없는 사실만을 전해주고 있었다.
 ‘어우, 술기운 때문에 맛이 간···?’
 가족의 번호를 틀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박용호는 그 사실에 살짝 자괴감을 느끼며 어제 지나치게 많이 마신 술을 탓했는데 그는 그러다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엥?’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들고 있는 전화기가 엄청난 구식인 까닭이었다.
 옛날에 잘 쓰다가 고장 나서 바꾼 것이었다. 굉장히 오래 썼던 것이니만큼 기억이 생생했다.
 문제는 분명히 버렸던 그 전화기가 지금 집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고 상태 또한 매우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아직도 취했나?’
 어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만큼 그쪽으로의 가능성을 고려해 봤다. 사실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덜컹
 “아이고, 힘들다~”
 집에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엄마? 반찬 주러 오셨나?’
 박용호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색했다. 어머니였다.
 “웬일로 오셨대, 엄마? 아직 반찬 있는···.”
 반색하면서도 현관으로 나가 손사래 치려고 했다.
 혼자 살았고 직업상 집에서 밥 먹는 경우가 거의 없어 냉장고에 반찬이 많이 남은 상태라 그런 것이었다.
 “···엥?”
 하지만 박용호는 현관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웬 반찬? 아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된 여파였다.
 젊었다. 너무 젊었다. 나이가 일흔을 넘어 새하얗던 머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따금 전화를 걸어 늙는 게 싫다고 푸념하던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대신에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뭐지?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박용호는 혼란을 느꼈다. 술기운에 의한 착각으로 치부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평소에 술을 물처럼 마시고 살았어도 지금 같은 착각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잠깐, 이게 웬 술 냄새야?”
 어머니가 돌연 킁킁거리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한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 냄새 좀 많이 날 거야. 어제 친구랑 2차까지 달려서···.”
 박용호는 지금처럼 풀어진 모습을 남한테 보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머쓱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는데,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술!? 이게 미쳤나!?”
 짜악!
 “꾸엑!?”
 어머니가 언성을 높이더니 냅다 자신의 등을 후려갈겼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45살이 고작 술 좀 마셨다고 부모님께 타박받다니···
 “왜, 왜 그래! 어제는 마시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잖아!”
 그런 만큼 박용호는 목소리를 높여 항변했으나,
 “이게 정말 미쳤나-!”
 짜악!
 “끄아악!”
 그 대가는 엄청났다. 어머니가 눈이 홱 돌아가더니 다시 한번 박용호의 등을 때렸다.
 “아, 진짜 왜 그래, 엄마! 아프···!”
 지금까지 자신이 청렴결백하게 지내긴 했지만, 집에서 딱히 음주를 금지한 것도 아닌지라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박용호였는데 그는 그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
 맞는 과정에서 현관 쪽에 걸린 거울을 본 것이다.
 그 안에는··· 누가 봐도 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도대체 뭐지···?’
 박용호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 믿기 어려운 현실에 마주한 상태였다.
 그건 바로 자신의 현재 나이가 17살이라는 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나이만 어려진 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게 거기에 맞춰서 돌아간 상태였다. 집의 전화기가 구식으로 돌아갔고 어머니도 젊어지셨다.
 게다가 천천히 둘러보니 집도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 옛날에 가족들이 함께 거주하던 집이었다.
 모든 게 28년 전 그대로였다.
 ‘이건 꿈인가···?’
 보통 이런 경우는 꿈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으니 꿈이라고 보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박용호는 그쪽으로 쉬이 결론을 내지 못 하고 있었다. 꿈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부분도 있었지만, 자신이 잠들기 전과 상황이 완벽하게 이어진 까닭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잠들었던 그 상황과 지금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덕분에 어머니한테 엄청나게 혼이 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 그저 술만 마시고 잤을 뿐인데 모든 게 옛날로 돌아가다니··· 혹시 마약인가? 누가 내 술에다가 몰래 탔나?’
 하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는 박용호였다.
 그러나 그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약도 말이 안 되지. 이건 환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생동감이 넘쳐도 너무 넘친 것이다.
 ‘음··· 분명히 뭔가가 있을 텐데···’
 곧 박용호는 신중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시간이 제법 지나서 그런지 정신이 또렷해진 상태였다.
 “이거 완전 웃긴 놈이네. 너 오늘 은퇴한 놈이잖아?”
 “윽!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기회가 오면 할 수 있거든요!?”
 “오호, 그렇단 말이냐? 정말로 기회가 오면 우승할 수 있어?”
 “물론이죠! 내가 얼마나 잘했는데! 자신 있다고요!”
 “그래? 그렇다면 네게 기회를 주마. 19살은··· 바로 시작이니 조금 힘들겠군. 17살로 돌려주지.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적응도 될 거고, 어때?”
 ‘설마···? 꿈이 아니었나?’
 문득 꿈에서 누군가와 나누었던 묘한 대화를 떠올리는 박용호였다.
 술을 많이 마셨으니 필름이 끊길 법도 했고, 실제로 그랬는데 이상하게 그 기억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에이,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소설도 아니고···’
 그러다가도 박용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면서 박용호는 벌러덩 뒤로 드러누우며 무의식중에 자신이 입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엇···? 이게 뭐지?’
 그는 그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주머니에서 묘한 감촉이 느껴진 것이다.
 왜 갸웃했냐면 입을 때는 분명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서였다.
 아무튼, 박용호는 그걸 꺼냈다.
 주머니에 있던 건 은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뚜껑으로 여닫는 식이라 안을 열었고 그걸 보는 순간 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GOOD LUCK. 이번에는 반드시 우승.>
 그 안에 이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꿈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박용호는 목걸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꿈이 아닐 수도 있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이번에는 반드시 우승하자!’
 곧 박용호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지만 우승을 노리기에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것도 만회할 수 있어!’
 그리고 되돌릴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물론 그건 소원해진 가족들과의 관계였다. 우승을 위해서는 또 야구에 미쳐야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실력이 좋았으니 여건이 훨씬 나았다.
 그러다가 박용호는 다시 한번 침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 그나저나 나래는 어쩌지?’
 가족에 대한 걸 떠올리니 딸인 박나래 역시 떠오른 것이다.
 지금이 28년 전의 시대라는 건 그녀의 존재는 지워졌다는 게 되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황급하게 취소를 외쳤건만 그건 너무 늦었던 듯싶었다.
 바로 그 순간 박용호는 볼 수 있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건 다 얻을 수 있다.>
 뒤쪽을 돌려서 보니 한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동시에 박용호는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말을 명심하거라, 용호야. 네가 얻고자 하는 건 다 얻을 수 있을 거다.”
 그건 바로 의식을 잃기 마지막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필름이 끊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만취한 상태였는데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또렷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래하고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미안해, 나래야. 아빠가 이번에는 엄마한테 잘하고 너도 꼭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숙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박용호였는데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덜컹
 “박용호, 이 자식 어딨어! 넌 오늘 진짜 죽었다!”
 회사에서 어머니한테 연락을 받았는지 퇴근한 아버지가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며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국, 박용호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한테도 무지막지하게 혼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그마저도 거짓말로 들통이 나서 엄청나게 혼나고 말았다.
 
 * * *
 
 그곳은 어느 흡연실이었다.
 거기에는 다수의 남성이 저마다 입에 담배를 문 채 열심히 구름을 만들기 바빴다.
 “어, 박 기자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선배님··· 아, 제가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전부 기자였다. 그런 만큼 서로 친분이 있어 담배를 피우며 편히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헉···! 헉···! 박용호 지금 대타로 나온답니다!”
 누군가가 돌연 흡연실로 뛰어오더니 이와 같은 말을 외친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기자들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이런 XX! 오늘은 그냥 쉰다며!”
 “야이 식빵! 누구 놀리냐, 지금!”
 “아놔!”
 장초고 나발이고 죄다 버리고는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간 것이다.
 그렇게 밖에 나온 기자들이 향한 곳은 바로 야구장이었다.
 “와~!”
 “안타! 안타!”
 그곳에서는 지금 고교야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9회 말에 팽팽하게 동점으로 맞선 가운데에 2사 만루 상황이었고 공격팀에서는 대타로 박용호를 내보낸 상태였다.
 “바, 박용호···!?”
 “박용호다!”
 그러자 야구장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저 고등학생 한 명이 대신 타격하러 나온 게 전부인데 야구장에 있는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 수비하는 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고,
 “진짜로 나왔네···.”
 “연장은 가지 않겠다는 것 같은데···.”
 기자들도 동일했다. 그들은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타석으로 향하는 박용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자신을 응시하면 긴장할 법도 한데 박용호는 조금도 그런 기색 없이 타석으로 들어서서 천천히 스윙을 연습했다.
 “선배님, 저 학생이 그렇게 잘 칩니까?”
 기자 중 한 명이 옆에 있는 기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에 흡연실에서 오랜만에 선배와 만나 불을 붙여준 사람이었다.
 “뭐야, 너 모르냐? 쟤 진짜 장난 아니야. 잘하는 것도 있지만 기복이 아예 없는 수준이라··· 잘 봐, 분명 이번에 끝내기 홈런 친···”
 따악!
 대답하던 기자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박용호가 상대 투수의 초구를 공략하여 좌측으로 엄청난 타구를 날려 보낸 것이다.
 그 타구는 라인 드라이브로 빨랫줄처럼 쭉쭉 뻗어 나갔다.
 “우와아아아~!”
 “넘어갔다!”
 그대로 담장을 넘어갔다.
 경기의 끝을 알리는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이었다.
 “···다니까. 저놈은 진짜야.”
 기자는 여유롭게 베이스를 도는 박용호를 보며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후배 기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야구장을 응시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 * *
 
 “와~!”
 “역시 박용호 선배님이십니다!”
 “최곱니다, 최고!”
 한편, 박용호가 속한 고교 야구팀은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상황이었다.
 오늘 경기가 워낙 치열했고, 2사 만루가 된 순간 상대 팀이 굉장히 잘 던지는 투수를 마운드에 올려서 연장을 각오했었는데 대타로 나온 박용호가 초구를 만루 홈런으로 연결해 끝내주었으니 분위기가 좋은 것은 당연했다.
 여담이지만 이건 정말 대단한 게 오늘 박용호는 마지막에 대타로 나온 걸 보면 알 수 있듯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었다.
 그래놓고 대타로 나와 끝냈다.
 그야말로 모두가 존경 어린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됐고, 다들 정리나 똑바로 해라. 난 먼저 좀 가서 씻을 테니까.”
 박용호는 가볍게 손짓으로 응수하는 게 전부였다. 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감독조차도 그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 했다. 선발로 나올 때는 몇 번으로 나가고 싶으냐고 감독이 라인업 카드를 작성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물어볼 정도였다.
 그런 만큼 박용호는 짐을 챙겨 홀로 유유자적하게 라커룸으로 향했다.
 ‘이제는 꽤 익숙하군···’
 라커룸에 나온 박용호는 그제야 고요한 느낌이 들자 속으로 생각했다.
 45살의 아저씨에서 17살로 돌아오고 나서 무려 2년의 세월이 흘렀다. 막연하게 꿈으로만 생각했던 현실은 이제 통산 3천 개가 넘는 안타를 쳐낸 게 오히려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2년이 흐르는 동안 박용호는 승승장구했다.
 모든 게 과거와 같았다. 야구는 초등학생 3학년 때 시작했고 돌아온 순간부터 계속 야구부에서 두각을 나타내 지금은 말 그대로 고교야구를 평정한 상태였다.
 자그마치 20년이 넘도록 KBO의 1군 무대에서 살아남은 그 경험이 어디에 가겠는가.
 더군다나 온갖 분야에서 엄청난 기록을 남기며 레전드로 불렸고 지금은 체력이 팔팔한 고등학생이었으니 최강 그 자체였다.
 박용호의 고교야구 성적은 미친 수준이었다. 타율은 6할을 넘었고 출루율과 장타율은 그 이상이었으며 OPS는 무려 1.5를 돌파했다.
 여기에 정말 놀라운 점은 피삼진이 0개라는 점이었다. 박용호는 고교야구에서 3년을 뛰는 동안 단 하나의 삼진도 당하지 않았다.
 이 점은 언론에서도 크게 주목받아 기자들은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박용호가 타석에 나왔다 하면 모든 걸 제쳐놓고 보러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만큼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는 건 기본이었다. 올해로 고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고교야구도 마지막이었다.
 이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프로 무대로 진출만 하면 되었다.
 거기에 대학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곧장 1군 프로 무대에서 뛰어도 된다고 평가받는 최고의 유망주가 굳이 대학에 가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대학들은 제발 와달라고 했지만, 박용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여전히 한곳에 고정된 상태였다.
 <GOOD LUCK. 이번에는 반드시 우승.>
 바로 우승이었다. 제발 우승 한 번만 해보는 게 박용호의 소원이었다.
 그런 만큼 박용호는 과거로 회귀하고 나서 얻게 된 정체불명의 목걸이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 늘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목걸이에 애착이 생겼다. 자신이 바라는 목표가 새겨져 있는 만큼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든 것이다.
 ‘음, 얼른 씻고 나가야지···.’
 잠시 여러 생각에 잠겨 있던 박용호는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샤워실로 향하려는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아··· 바, 박용호 선배님, 오늘 경기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후배 한 명이 라커룸으로 들어오더니 황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것이다.
 올해 야구부에 입부한 1학년이었다. 아무래도 1학년이다 보니 청소 같은 잡일을 주로 담당했고, 지금도 오늘 사용한 야구공을 담은 바구니를 품에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어, 그래. 너도 수고했어.”
 후배의 인사에 대수롭지 않게 인사하는 박용호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샤워실로 향하려고 했다.
  헌데 거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네, 저, 저는 그럼···”
 쿠웅
 “앗···!”
  까마득한 대선배이자 야구부를 먹여 살리는 수준의 박용호와 인사를 주고받은 게 어지간히 긴장된 것일까. 후배는 얼른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만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와르르
 “으, 으앗···!”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에 담긴 공이 죄다 쏟아지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라커룸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제법 먼 거리에 있던 박용호의 발에도 야구공이 닿을 정도로 그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후배는 그 광경에 어쩔 줄 모르다가 황급하게 박용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허겁지겁 공을 주워서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같이 치우자. 이런 건 둘이서 하는 게 더 빨라.”
 박용호가 이렇게 말하고는 후배처럼 야구공을 주워서 바구니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 모습은 결코 꾸며낸 게 아니었다.
 “제, 제가 다 하겠습니다! 선배님은 하지 않으셔도···!”
 후배는 그 광경에 식겁했다. 그냥 3학년도 아니고 박용호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박용호는 그런 그를 향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그냥 얼른 같이 치우자니까. 이거 다른 애들이 보면 또 난리 난다.”
 박용호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공을 주워 바구니에 넣었고 그건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라커룸에서는 공 치우기가 진행되었다.
 “저··· 박용호 선배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후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박용호를 향해 감탄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뭐, 내가 좀 그렇긴 하지.”
 후배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으스대는 박용호였다. 내용물은 무려 40살을 넘었지만, 겉모습이 19세였으며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만큼 약간 얄미웠지만, 그럭저럭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박용호는 그러다가 듣게 되었다.
 “하하, 선배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그냥 올해까지만 할까 싶어요.”
 그것은 자신감이 크게 모자란 후배의 목소리였다. 야구부에 입부하고 나서 백업은커녕 주야장천 잡일만 하다 보니 많이 위축된 듯싶었다.
 그런데 후배는 그 순간 놀라운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 야, 그건 안 되는데. 너 야구 그만두면 절대로 안 돼.”
 박용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후배의 푸념이 의외였는지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후배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다 보니 그저 머쓱한 표정만 짓는 게 전부였다.
 박용호가 말했다.
 “야구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내가 보기에 넌 자질이 있어. 열심히 하면 기회는 분명히 온다. 그걸 놓치지만 않으면 돼.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잖아. 그런 녀석이 야구부에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딱딱한 느낌이었지만, 가식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 열심히 할게요. 그··· 이런 말씀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저희 아버지 보는 느낌이었어요, 헤헤.”
 “이 자식이 기껏 좋은 말 해줬더니만···. 아무튼 감독님도 너 좋게 보는 눈치시니까 열심히 해라.”
 “네, 선배님! 그럼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둘 다 말을 나누면서도 열심히 공을 주운 덕분에 라커룸은 금방 정리되었고, 박용호와 후배의 대화 역시 훈훈하게 끝을 맺었다.
 그렇게 후배는 공을 담긴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이번에는 쏟지 않게 조심했다.
 ‘설마 저 자식이 저렇게 생각했었을 줄이야···.’
 박용호는 후배가 나간 문을 보며 당혹을 금치 못했다.
 박용호가 지금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그와 함께 공을 주운 후배는 미래에 KBO 유격수 역사에 한 획을 긋기 때문이었다.
 입단 당시에는 삐쩍 마른 몸이라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여 몰라보게 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장타력을 갖춘 유격수로 커서 최고가 된다.
 해외 진출까지 성공적으로 다녀와, 원소속 구단에서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여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렀었다.
 그걸 보던 박용호는 입맛만 다셨다. 같은 학교 출신이 다른 팀에서 레전드로 남았으니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크크크···! 절대 안 놓친다!’
 지금 박용호로서는 당연했다. 그는 이제 미래를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모두한테 뒷정리를 맡겨놓고 먼저 급히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 이런! 늦으면 안 되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용호는 라커룸의 시계로 시각을 확인하고 얼른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오늘 중대한 약속이 있는 만큼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서였다.
 
 * * *
 
 차라락.
 “룰룰루~”
 샤워를 끝낸 박용호는 그대로 이동했다. 그는 현재 콧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속은 45살인 주제에 정말로 10대 아이처럼 잔뜩 신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박용호는 지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앞둔 상태였다.
 그렇게 그가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바로···
 ‘확실히 지금은 세련된 느낌이군.’
 잠실 야구장이었다.
 오늘 자신이 경기를 치른 야구장보다 훨씬 더 컸고 고급스러웠다. 고등학생이 쓰는 곳과 프로 선수가 쓰는 곳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덤으로 박용호는 잠실 야구장을 보는 순간 감회가 새로운 걸 느꼈다. 자신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낸 홈구장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거의 신축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뭐, 그래도 지은 지는 꽤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잠실 야구장에 도착한 박용호는 밖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꽤 복잡한 구조였지만 그는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박용호가 향한 장소는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서울 트윈스 구단에서 쓰는 운영실이었다.
 당연히 그런 만큼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오늘 박용호는 예외였다.
 “혹시 박용호 학생···?”
 “어, 그래··· 아니, 안녕하세요.”
 ‘휴우, 위험했네.’
 박용호는 운영실 앞에 있는 양복 차림의 젊은 남성··· 보안 요원이 자신을 알아보며 말을 붙이자 거기에 응답하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하대하려고 한 탓이었다.
 속은 45살 그대로이다 보니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첫해에는 정말 많이 고생했다. 같이 지내는 학생들 나이가 자신의 딸과 비슷한데 오죽하겠는가.
 2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졌지만, 구단 쪽은 그 학교보다 더 오랜 세월을 보낸 곳이다 보니 아무래도 쉽지가 않았다.
 “잘 왔어요. 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미 도착하셨군요. 감사합니다.”
 다행히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박용호는 보안 요원이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마찬가지로 활짝 웃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똑똑.
 “팀장님, 박용호 학생 도착했습니다.”
 “어, 알겠네.”
 그리고 보안 요원의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 박용호 학생. 어서 와, 어서 와. 참, 오늘 끝내기 홈런 축하해야지. 아주 멋지던걸?”
 그는 스카우트 팀장이었고, 이름은 김기홍이었다.
 그냥 전형적인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박용호가 안으로 들어오자 오늘의 활약상에 대해 언급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 분도 지금은 머리숱이 풍성하셨구나.’
 박용호는 김기홍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는 김기홍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스카우트 팀장으로 나름 장수하다가 말년에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여담이지만 박용호는 김기홍의 아찔한 미래(?)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스트레스성 탈모로 무던히도 고생했다.
 지금은 자그마치 20년도 더 전의 세월이니만큼 멀쩡했지만, 그 미래를 아는 처지에서는 눈물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부분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고 싶었지만 끽해야 야구 좀 하는 게 전부인 고등학생의 말을 귀담아서 들을 리가 만무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갈지는 모르겠지만 팀장님의 머리가 오래 버텨주기를···.’
 그런 만큼 박용호는 그저 김기홍의 머지않은 안타까운 미래를 애도(?)하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첫인사를 대단히 반갑게 나누었지만, 김기홍과 박용호의 사이에는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한없이 편안한 박용호와 달리 김기홍은 머뭇거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적막감이 흐르던 방에서는 마침내 먼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우리한테 와줘, 박용호 학생.”
 그 사람은 김기홍이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박용호를 향해 말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음···. 글쎄요···.”
 박용호는 그러한 김기홍을 향해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약간 피하는 느낌의 대답을 했다.
 김기홍이 말했다.
 “확실히 박용호 학생의 실력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먹힐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그래도 박용호 학생이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가는 걸 추천하고 싶어. 그러는 편이 조건도 더 좋을 거야. 실력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가는 셈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마이너리그 거부권은 얻어두는 편이 좋거든.”
 그렇다. 현재 박용호는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구단··· 서울 트윈스와 갈등 아닌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지금 경기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잠실 야구장에 온 것도 그걸 위해서였다.
 곧 신인 드래프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서울 트윈스는 올해 1차로 신인을 제일 먼저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당연히 그 목표는 서울팜에서 가장 두드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박용호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미국 메이저리그였다.
 메이저리그 측에서도 박용호를 노리는 중이다. 뛰어난 실력의 선수는 아프리카까지도 날아가서 데려오는 그들이 어찌 박용호를 놓치겠는가.
 실제로 박용호는 지금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많은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신인이니만큼 마이너리그 거부권 같은 조항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김기홍이 전혀 모르는 속사정이 있었다.
 ‘내가 메이저리그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 팀장님이 아시면 기절초풍하시겠지?’
 그건 바로 이러한 박용호의 생각처럼 당사자인 그는 메이저리그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계약금을 포함한 보장 액수가 상당했고 매일 스카우트가 경기를 보러 오면서 관심도 나타내주어 거기에 혹한 적이 제법 있었다.
 메이저리그는 별들의 전쟁이라는 표현처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박용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저 서울 트윈스에서 우승 한번 해보는 게 꿈인 까닭이었다.
 KBO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뛰며 축적한 경험이 있었으니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먹힐 것 같기는 한데, 그건 무조건이 아니었으며 현지 적응의 문제도 있었고 만약에 갔다가 실패하면 서울 트윈스에 입단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그들이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박용호는 김기홍이 지금처럼 따로 만나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서울 트윈스에 갈 의향이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지금 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하며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냐면, 당연히 그럴 이유가 있어서였다.
 “제발 부탁이야, 박용호 학생! 우리 서울 트윈스에 와줘! 오늘까지 무조건 확답받겠다고 했단 말이야!”
 이제는 그냥 박용호를 향해 고개까지 숙이며 외치는 김기홍이였다. 그가 자신의 아들뻘이라는 걸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슬슬 말해볼까?’
 박용호는 그러한 김기홍의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 이야기를 꺼낼 절호의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솔직히 저도 팀장님하고 같은 생각이에요. 경험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메이저리그에 간다면 KBO에서 경험을 쌓고 도전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겠죠. 마이너리그 거부권을 따내면 훨씬 나은 거니까요.”
 “그, 그 말은···!”
 박용호의 말에 반색하는 김기홍이였다. 서울 트윈스로 오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김기홍은 그러다가 들을 수 있었다.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이처럼 조건을 제시하는 박용호의 목소리였다. 협상의 전문가처럼 차분한 느낌이었다.
 “조건···? 계약금이라면 10억까지 가능하단다. 혹시 그 이상을 바라거든 시간을 좀 더 주면···.”
 어지간히도 탐이 나는 것일까. 김기홍은 파격적인 액수를 언급했다. 그래도 먼저 패를 까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10억 이상의 돈도 지급할 의향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김기홍이 박용호에게서 들은 말은 꽤 뜻밖이었다.
 “아니, 계약금은 그렇게까지 필요 없어요. 적당히 주셔도 괜찮아요.”
 자신이 미래에 어떤 활약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만큼 모름지기 만 원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하는 게 계약금이거늘 그가 그냥 이렇게 말한 것이다.
 거기에는 박용호의 이어지는 말이 있었다.
 “그 대신··· 이 친구들을 2차 때 좀 뽑아주셨으면 해요.”
 스윽.
 이렇게 말한 그는 가방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어 김기홍에게 내밀었다.
 김기홍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쳤고,
 “이, 이 애들을 말이냐? 왜 그런 말을···?”
 그는 아연실색하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쪽지로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이름들을 목격하게 된 여파였다.
 다들 어느 정도는 지켜본 자원이었고 실제로 2명 정도는 구단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잠재력은 낮은 느낌이라 지명 순서는 낮게 갈 생각이었다. 뽑아도 그만, 안 뽑아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용호는 그들의 지명을 요구했다.
 “순서도 어느 정도 예상해서 적었어요. 그대로 뽑으시면 거의 다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이게 제 조건입니다, 팀장님. 만약에 그 애들 다 뽑아주시면 저는 계약금 적당히 받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나중에 연봉으로 다 타 먹으면 되니까.”
 박용호는 당황을 금치 못하는 김기홍을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보면 어이없는 조건이었지만 20년이 지난 미래에서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 녀석들만 데리고 가면 우승은 거의 확정이야···! 황금 드래프트에서 독점하는 거다!’
 그렇다. 지금 박용호가 김기홍에게 지명을 요구한 학생들은 모두 지금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다들 미래에 펑펑 터지는 자원이었다.
 세이브왕과 홀드왕, 다승왕에 타격왕, 홈런왕이 섞여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건 전천후로 활약하는 5툴 플레이어도 있었다.
 이건 박용호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세운 전략이었다. 그는 우승을 위해 좋은 자원을 쓸어갈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박용호가 뽑히던 해에는 꽤 많은 신인이 고루고루 터져서 황금 드래프트라고 불리곤 했다.
 바로 그 황금 드래프트의 주인공들을 서울 트윈스에서 절반만이라도 뽑는 데에 성공하면··· 아무리 야구에 만약은 없다고 해도 우승은 정해진 바와 다를 게 없었다.
 야구는 어차피 잘하는 놈이 잘하는 스포츠였으니까!
 “음···. 이건 좀···.”
 김기홍은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정해놓은 드래프트 순서를 대폭 수정해야 하는 만큼 아무리 팀장이라고 해도 결단을 내리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래에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만 지금은 박용호 하나를 위해 나머지 지명을 죄다 포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 말이다.
 “어려우신 건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박용호는 그러한 김기홍의 모습을 보는 순간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무리한 요구라는 건 본인도 잘 아는 만큼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 협상의 승자는 박용호였다.
 “아, 알았어. 이렇게 하지··· 박용호 학생의 요구대로 할게. 이 학생들을 순서대로 뽑겠어.”
 마침내 김기홍이 항복한 것이다. 그는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왜 이 학생들을···?”
 “직접 보니까 느낌이 남다르더라고요. 대성할 것 같아요.”
 “흠···?”
 김기홍은 박용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는 게 전부였다.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그럼 팀장님, 저는 이만···.”
 오늘의 용건은 다 끝났다. 계약금 협상이 남긴 했지만 그건 1차 드래프트 이후에 하는 게 맞는 만큼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용호였는데, 그는 그 순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부 데려오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 이 부분은 양해 좀 부탁해, 박용호 학생.”
 그것은 김기홍의 이와 같은 목소리였다. 드래프트의 특성을 고려한 내용이었지만 어느 정도 불신이 내재해 있기도 했다.
 박용호는 거기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나중에는 만족하실 겁니다.”
 그는 김기홍을 향해 여전히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 * *
 
 박용호와 협상을 벌인 끝에 그럭저럭 이견을 조율하는 데 성공한 김기홍은 그대로 운영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스카우트 팀에 그 결과를 전달했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팀장님.”
 “이미 다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엎는 거잖아요.”
 이처럼 그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제 신인 드래프트는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1차와 2차 사이에는 제법 차이가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싹 다 엎어야 하는지라 다들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로 인한 책임도 컸다. 겨우 학생 하나의 말만 듣고 미래가 불투명한 자원들을 대거 수거하는 셈이었는데, 이게 만약에 불발로 끝나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는가. 전부 스카우트 팀이었다.
 잘하는 학생을 뽑아서 실패할 경우 ‘그때는 그렇게 뽑는 게 당연했다.’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라 그나마 괜찮았지만 이미 싹수가 노랗던 학생을 뽑아서 실패하면 난리 날 수밖에 없었다. 뒷돈 이야기도 심상치 않게 오갈 게 분명했다.
 스카우트 팀에서는 불만이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셈이었다.
 “쩝, 다들 내키지 않는 건 알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박용호 학생이 오지 않겠다고 해서···”
 김기홍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지금의 말이나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이번 일이 결코 좋게 생각할 수가 없는 사안이라는 건 그 역시 잘 아는 부분이었다.
 박용호는 그 대신에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고 팀에 오겠다고 했으며 계약금 디스카운트도 괜찮다고 했으나 정말로 계약금을 헐값으로 줄 수는 없었다. 그가 고교 시절 동안 기록한 게 있었으니 말이다.
 “뭔가 이상한데요···. 이유도 없이 그런 걸 조건으로 걸 리 없지 않습니까. 혹시 그 학생들한테 뭔가 받은 건···? 친한 친구라던가요?”
 “그건 아니야. 서로 초중고 모두 출신 학교가 다르고 그만큼 지역 또한 달라. 접점이 전혀 없어. 그저 상대 팀으로 몇 번 만났을 뿐이지. 그래서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이 놀랐었다.”
 팀원 한 명의 의문을 나타내는 목소리에 고개를 젓는 김기홍이였다.
 이미 팀으로 돌아오기 전에 가장 먼저 찾아본 게 그 부분이었다. 정말 그런 의도라면 아무리 박용호라고 해도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답처럼 어디에도 사적인 친분은 없었다. 심지어 박용호하고 아예 안면도 없는 학생도 있어, 그가 그 학생 이름을 아는 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건 진짜 아닙니다···. 막말로 그 박용호 학생도 KBO 와서 성공할지 어떨지 모르는 판국에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그냥 박용호 학생 거르고 다른 학생들 뽑는 게···”
 “그거야말로 진짜 아니다.”
 “···예?”
 열심히 불만을 표출하던 팀원은 돌연 정색하는 김기홍의 목소리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김기홍이 바로 말했다.
 “사실 우리는 2차에서 죄다 망하더라도 1차에서 박용호 학생 한 명만 데려오면 성공이야. 박용호 학생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물론 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올해 드래프트에서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건 그 학생이 맞아.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고.”
 “그, 그건···.”
 팀원은 쏘아붙이는 듯한 김기홍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러는 건 그래도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고 싶어서야··· 쯧, 뭔가 없나···.”
 본의 아니게 팀원에게 역정 내는 꼴이라 되어서 그런 것인지 말끝을 흐리는 김기홍이였다.
 그렇게 그들이 있는 방에는 정적이 흘렀는데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팀장님,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팀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뭔데?”
 그의 말에는 김기홍이 시선을 보냈고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로 그쪽을 응시했다.
 손을 든 팀원이 말했다.
 “어차피 박용호 학생 한 명한테만 올인 하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박용호 학생··· 그 복권이, 정말 당첨 확률이 높은지라도 확인해보시죠.”
 모두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팀원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무언가 묘안이 떠오른 듯싶었다.
 
 * * *
 
 한편, 김기홍과의 면담을 끝낸 박용호는 밖으로 나와 자전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더는 야구장에 볼일이 없는 것이다.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이참에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가보려고 하겠으나 20년 넘게 질리도록 드나들다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박용호였다.
 차라락.
 그렇게 박용호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는데,
 ‘음···.’
 그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가 조금 전에 김기홍에게 주도권을 잡고 대화를 시도한 끝에 성공적인 결과는 끌어냈지만 이런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팀장님이 정말 내가 말한 대로 해주실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 봐도 무리한 조건이었으며 억지였다. 미래를 모르는 처지에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김기홍으로서는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랬다가 실패하면 옷을 벗게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약속은 했지만 그걸 뒤집는 건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런데 박용호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 순간이었다.
 “야~! 박용호!”
 갑자기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서 있는 신호등의 건너편이었다.
 박용호는 그쪽을 보는 순간 반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 성찬아!”
 그도 그럴 게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절친인 전성찬인 까닭이었다.
 손을 흔들어 전성찬을 향해 반가움을 표시한 박용호는 신호가 바뀌자 얼른 자전거를 몰아 그쪽으로 다가갔다.
 “학원 가는 거야? 아니, 이미 다녀오는 건가?”
 박용호는 전성찬을 향해 물었다. 그것은 지금 시각을 고려한 물음이었다.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었고,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으니 갔다가 오는 거라고 보는 게 맞는 것이다.
 그러한 박용호의 예상은 정확했다.
 “방금 끝났어. 얼른 집에 가려는데 웬 덩치 큰 놈이 보이길래 자세히 봤더니만 너였지 뭐야.”
 “하하, 내가 그렇게 덩치가 크냐? 나 별로 안 큰데?”
 박용호는 어깨를 으쓱하는 전성찬의 목소리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익살스러운 표현에 웃음이 나온 것이다.
 ‘그나저나 성찬이하고 이렇게 빨리 만날 수 있었을 줄이야···.’
 눈앞에 있는 전성찬을 보며 박용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박용호는 사실 지금 자신이 전성찬과 아는 사이라는 부분에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하고는 한참 뒤에 알아야 하는 사이였다.
 원래 전성찬은 에이전트였다. 그래서 박용호하고는 일로 알게 되었다. FA 자격을 얻은 박용호가 구단과 계약을 맺는 과정에 도움을 주면서 말이다.
 첫 만남은 일 때문이었지만 서로 나이가 동갑이라 금방 친해져서 불혹을 넘겼을 때는 죽마고우가 되었다.
 그래서 박용호가 회귀하기 전에 영구결번식을 마치고 구단 회식 이후에 전성찬과 같이 2차를 달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박용호와 전성찬이 사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터이니 미리 친해져서 나쁠 게 없는 만큼 박용호는 이동수업 등을 기회로 삼아 전성찬에게 접근하여 지금처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게 하나 더 있었다.
 “점점 더 나아지는 느낌이네. 잘 그렸다, 야.”
 그건 바로 전성찬의 꿈이었다. 그는 미래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에이전트가 되었는데 고등학생인 지금은 아니었다.
 그림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미술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그렇기에 박용호는 그냥 그림은 빨리 접고 경영 쪽에 일찍 뜻을 두라고 말할지 말지 고심하다가 그냥 하지 않는 쪽으로 정했다.
 굳이 그 부분까지는 간섭할 필요가 없었고 해서는 안 되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경험이 전성찬에게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하, 고마워··· 용호야, 너 혹시 지금 야구장 다녀오는 거야?”
 전성찬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서 그림을 쓱 뺏어다가 훑어본 박용호가 감탄하자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지금 그가 오는 방향에 잠실 야구장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애초에 그는 절친답게 박용호가 오늘 서울 트윈스와 협상을 벌인다는 부분도 꿰고 있었다.
 “어, 맞아. 지금 다녀오는 길이야.”
 “팀장님이 뭐라셔? 설마 진짜로 그 조건···.”
 “응, 받아들여 주신대. 명단도 드렸어.”
 “헐, 진짜? 말도 안 돼···.”
 “야, 날 데려가는 건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입을 떡 벌리는 전성찬의 모습에 자신감을 나타내는 박용호였다.
 뭐, 지금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듯 박용호는 자신이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 개입하는 걸 전성찬에게 말한 상태였다. 물론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미술에 뜻을 두고 있긴 했지만 좌우지간 에이전트 출신이었으니 도움이 되는 말을 바랄 겸, 어쨌든 친구였으니 해서 나쁠 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만큼 그 이유는 자신의 직감 같은 거로 대충 때웠다.
 공교롭게도 명단에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학생이 섞여 있어서 그럴 듯한 말을 꾸며내느라 진땀을 좀 흘리긴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박용호는 볼 수 있었다.
 “······.”
 그건 바로 사려 깊은 표정을 지은 채 침묵에 잠긴 전성찬의 모습이었다. 진지함마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어, 음···. 그게 그렇게 의외야?”
 그렇기에 박용호는 전성찬을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고 전성찬이 바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그쪽 일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아? 다른 구단들하고 눈치 싸움하려고 준비한 건데 죄다 엎어버리는 셈이니···.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 난색을 보이거나 시간을 좀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바로 승낙이라···.”
 ‘날카로운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박용호는 빠르게 요점만을 딱딱 짚어내는 전성찬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곁에서 4번 동안 FA 계약을 도와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전성찬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뭐, 널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그냥 감수할 수 있다는 걸지도··· 앞으로 야구 더 잘해야겠다, 용호야.”
 “에이, 여기에서 더 잘할 수가 있나.”
 이런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둘은 헤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혼자 남은 박용호의 모습에는 살짝 변화가 존재했다.
 ‘일리 있는 말이야···. 아무리 내가 탐난다고 한들 그 녀석들은 지금 B급조차 안 돼. 뽑는 것만으로도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따지고 보면 나 또한 긁지 않은 복권 중 하나다. 당첨 확률이 제법 높긴 해도 복권은 어디까지나 복권··· 이걸 구단 측에서 순순히 응할 리가 없는데···.’
 막상 전성찬과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이 알겠다는 뜻을 보이긴 했으나··· 각서를 쓴 것도 아니었으니 말을 바꾸는 건 언제든지 가능했고 무엇보다 구단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려웠다.
 애석하게도 김기홍의 입김은 팀장이라고 해도 가장 강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구단주가 최고였다.
 박용호가 이렇게 생각하던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갑자기 핸드폰에 전화가 온 것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김기홍이였다.
 
 
 # 어디 효도 좀 해보실까?
 
 
 달그락달그락
 어제는 토요일이었고 오늘은 일요일이라 주말이니만큼 박용호는 학교에 가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어제와 달리 경기도 없고 훈련도 없어 그는 현재 식탁에서 한창 밥 먹는 중이다.
 “아들, 이따가 잠깐 시간 좀 돼?”
 그러다가 박용호는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어제처럼 경기도 없고 야구부 훈련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던진 물음이었는데 어머니는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 나 오늘은 안 돼. 이거 먹고 나가봐야 해서.”
 박용호가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지극히 태연한 그 목소리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나타냈다.
 “나간다고? 왜? 오늘 스케줄 없지 않아?”
 박용호의 대답에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처럼 같이 나가려고 생각했는데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게 된 까닭이었다.
 박용호가 말했다.
 “갑자기 약속이 생겼어. 좀 걸릴지도 몰라.”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식사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삐끗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설마 또··· 이상한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가는 거 아니야?”
 어머니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이렇게 물은 것이다.
 그 눈은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였다.
 “아,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술은 무슨~”
 “나도 그렇게 믿고 싶은데, 전과가 있어서 그래.”
 ‘으···.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건가?’
 박용호는 어머니의 불신 어린 목소리에 식은땀을 흘렸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처럼 박용호는 회귀하고 나서도 변함없이 철저한 자기관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술은 물론이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식사도 저염식으로 신경 써서 먹는 편이다. 지금 먹는 식사도 그러했다.
 하지만 박용호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흑역사가 있었다.
 바로 회귀한 그 날 잔뜩 풍겨댔던 술 냄새였다. 누가 봐도 진탕 퍼마신 몰골이었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걸 또 거짓말로 모면하려다가 제대로 들키는 바람에 더 혼나 박용호는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진땀을 흘리기 바빴다.
 여담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그 사건을 의외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때 정말 크게 혼냈고 사내라면 한 번 정도는 그런 경험이 있어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 야구부에서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1차 드래프트 1번으로 유력하다고 틈만 나면 언론에서 스포츠 기자들이 다루곤 했으니 흠을 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어머니가 지금처럼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면 옆에서 슬그머니 화제를 전환하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오늘 거래처와 골프를 치러 나간 상태였다.
 “음···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애초에 오늘 가는 곳이 잠실 야구장이거든.”
 어차피 숨겨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박용호는 스스럼없이 오늘 자신의 일정을 밝혔다.
 “잠실에는 왜 또? 팀장님하고는 어제 만난 거 아니었어?”
 어머니는 그러한 박용호의 말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만나는 모습이 어쩐지 좋게 느껴지지는 않은 탓이었다.
 박용호가 말했다.
 “어··· 그, 선배님들 미리 만나러 가는 거야. 내가 서울 트윈스로 가는 건 기정사실이잖아. 그래서 팀장님이 자리 마련해주셨어.”
 아무리 픽이 유력하다고 한들 아직 뽑은 게 아니었으니 미리 인사까지 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애초에 사전접촉도 암암리에 허가되는 것이라 자주 만나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런 만큼 박용호의 지금 말은 즉석에서 꾸며낸 것이었다.
 목적지는 잠실 야구장이 맞았지만, 용건은 달랐다. 용건에 대해서만 숨기는 건 그게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닌 탓이었다.
 “그래~? 어이구, 장하다, 우리 아들. 이제 정말 프로가 되는 거구나~”
 아들이 프로 야구 선수가 된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어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다가 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돈 벌려고 가는 거니까 엄마가 이해 좀 해줘.”
 박용호가 갑자기 이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가는 바람에 무슨 뜻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
 
 잠실 야구장은 오늘 경기가 없는 날이라서 굉장히 한산했다. 잠실을 홈으로 쓰는 서울 트윈스가 원정 경기라서 지방으로 내려간 까닭이었다.
 이외에 똑같이 서울을 연고지로 써서 마찬가지로 잠실이 홈구장인 서울 베어스도 있긴 했는데 그들 또한 원정 경기라 오늘의 잠실 야구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잠실에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건 아니었다.
 “좀 어떤 것 같아? 괜찮나?”
 서울 트윈스의 선수단이 몇 명 와 있는 상태였다. 불펜 피칭을 위해서였다.
 이천 쪽에 2군 시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이제 부상이 다 나아 1군 복귀를 코앞에 앞둔 전력이었다. 오늘 불펜에서 마지막으로 컨디션을 점검한 다음 1군 엔트리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느낌은 괜찮습니다. 공을 던져봐야 알 것 같아요.”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풀던 선수 최윤호는 코치의 물음에 몸을 풀면서 대답했다.
 최윤호는 서울 트윈스의 필승조 불펜 투수였다. 원래는 미완의 선수로 만년 유망주 소리를 들었지만, 올해 드디어 포텐이 터져서 30경기에 나와 27이닝 3승 4패 9홀드 방어율 2.58로 대단히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게 활약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공교롭게도 최윤호는 1달 전에 투구하는 과정에서 강습 타구에 종아리를 맞는 부상을 당했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데미지가 없지는 않아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부상을 치료한 다음 다시 1군 진입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 서울 트윈스는 불펜이 불 지르기 바빠서 코칭스태프가 부상이 나았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복귀할 수 있을 듯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최윤호에게 불펜 쪽을 가리키며 말하려던 코치는 그 순간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스카우트 팀장인 김기홍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다행히 최윤호 선수도 이제 복귀가 코앞인 것 같군요.”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김기홍은 코치를 향해 살갑게 말하며 최윤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최윤호는 그런 그를 향해 코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 거의 접점이 없는 사이였지만 구단 직원이었으니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었다.
 “하하, 제가 뭘 했다고···. 지금 불펜 피칭하려는 것 같은데, 혹시 같이 좀 봐도···?”
 “물론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코치는 김기홍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구경꾼이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는 것이다. 고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이어서 코치는 스피드건을 꺼냈고 최윤호는 불펜 피칭을 시작했다.
 퍼억
 “나이스 볼~!”
 최윤호가 공을 던지자 불펜포수는 파이팅이 넘치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미트에 꽂히는 소리가 경쾌한 것으로 보아 재활은 성공적인 느낌이었다. 코치의 스피드건에도 만족스러운 구속이 찍히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금 묘한 광경이 있었다. 코치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는 점이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렇게 최윤호의 불펜 피칭이 진행되던 때 코치는 스피드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김기홍을 향한 목소리였다.
 “하하, 역시 티가 났던 것 같군요.”
 김기홍은 코치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의도가 빤히 보였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말해보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울 테니까요.”
 의외로 김기홍을 향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코치였다.
 뭐, 어차피 같은 구단에서 상생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서로 상부상조해서 나쁠 건 없는 것이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김기홍은 코치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말씀드리죠. 이따가 잠깐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조심스럽게 꺼내려고 했던 본론이었다.
 
 * * *
 
 한편, 박용호는 앞서 어머니한테 말한 것처럼 집에서 나온 상태였다. 그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타고 잠실 야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약간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박용호가 자전거에 자신이 쓰는 야구 장비를 다 실은 상태라는 점이었다.
 보호 장비와 헬멧에 방망이까지 있었다. 출발하는 장소만 집으로 바뀌었을 뿐, 어제 잠실 야구장에 갈 때와 완전히 똑같았다.
 오늘은 경기가 없다는 걸 고려하면 이해가 쉽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뭐,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만···.’
 열심히 잠실 야구장 쪽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던 박용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오늘 박용호는 잠실에서 김기홍하고 또 만날 예정이었다.
 단, 그 목적은 어제와 달랐다. 박용호와 김기홍은 오늘 내기 아닌 내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 내기는 바로 타격이었다.
 어제 김기홍이 박용호에게 전화한 이유는 간단했다. ‘미안하지만 네 조건을 무조건 수용하기는 어렵다.’ 이게 전화를 건 그의 첫마디였다.
 박용호는 김기홍의 그 말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도 너무 쉽게 풀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미 친구인 전성찬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예상했었다.
 박용호가 김기홍한테 들은 말은 간단했다. ‘사실 우리 구단은 이번 드래프트에서 너 하나만 얻어도 이득이다. 그러니 그 실력을 직접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게 전부였다.
 김기홍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잠실 야구장에 와서 서울 트윈스의 투수를 상대로 타격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점이었다.
 물론 1군 투수는 아니었다. 배팅볼 투수였다. 그래도 아마추어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타격해서 안타성 타구를 만들어내면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게 김기홍의 말이었다.
 지금 군말 없이 잠실 야구장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박용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건 박용호한테도 마냥 나쁘기만 한 조건은 아니었다. ‘만약에 네가 내기에서 이긴다면 계약금으로 10억을 약속하겠다.’라는 김기홍의 말이 있었던 탓이다.
 어찌 보면 고교 야구 성적을 믿지 못해 직접 테스트하는 것이니만큼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 결과가 청신호라면 10억 정도는 기꺼이 투자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박용호가 집을 나오기 전에 어머니한테 했던 돈 벌러 간다는 게 바로 그 뜻이었다.
 게다가 김기홍은 2차 드래프트 순번에 대해 각서까지 써준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은 즉, 나중에 갑자기 말을 바꾸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한테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오히려 아주 좋아···.’
 박용호는 사실 전화로 김기홍의 제안을 들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우승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계약금 디스카운트를 먼저 말해서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그걸 만회할 수 있을뿐더러 확인사살까지 할 수 있었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설마 김기홍이 먼저 각서를 쓰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물론 박용호는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타격인데 왜 자신이 없겠는가.
 당장에 1군 필승조 투수와 맞붙어도 좋은 결과를 끌어낼 자신이 있었다.
 ‘어디 효도 좀 해보실까?’
 생각에 잠긴 채 무아지경으로 자전거를 몰다 보니 어느샌가 목적지인 잠실 야구장에 도착한 박용호였다.
 그는 근처에 자전거를 묶은 다음 야구 장비를 챙겨 씩씩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김기홍과 박용호의 만남은 금방 성사되었다. 박용호가 야구장으로 들어가니 어제 보았던 보안 요원이 맞이해준 것이다.
 그렇게 박용호는 그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이동했고 거기에서 미리 기다리던 김기홍과 만나게 되었다.
 어제 서로 만나 협상을 마무리 지은 만큼 오가는 말은 가벼운 인사가 전부였다.
 2차 드래프트 순서 변경에 대한 것이나 계약금에 관한 건 일언반구도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을 할 리 있겠는가.
 그런 만큼 오늘 김기홍과 박용호의 만남도 박용호 쪽에서 1군 투수의 공을 한번 쳐보고 싶다고 부탁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진짜 1군 투수는 다들 지금 정규 시즌에서 혈투를 벌이는 중이라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서 배팅볼 투수를 대신 섭외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핑계였다.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다르네···.’
 더그아웃에서 팔과 다리 쪽에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헬멧을 쓰며 타격을 준비하던 박용호는 문득 자기도 모르게 감회에 젖었다.
 잠실 야구장을 관중석이 아니라 그라운드에 내려와서 보는 건 영구결번식을 마치고 나서 처음이었으니 무려 2년 만에 보는 것이다.
 20년이 넘게 드나들었다고 해도 오래 안 봤더니만 그리운 느낌이 없지 않았다.
 뭐, 앞으로 전처럼 또 20년은 꾸준히 보겠지만···
 ‘그나저나 역시 넓기는 넓군.’
 여담이지만 잠실 야구장은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야구장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다른 구장이라면 넘어가는 타구가 잠실 야구장이라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어, 제4의 외야수 김잠실이라는 농담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현역 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고등학생으로 고교 야구장을 다니다가 와 보니 엄청나게 넓어서 어째 그때보다 더 넓어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물론 진짜로 그런 건 아니었다. 잠실 야구장의 넓이는 자신이 알던 그대로였다.
 ‘뭐, 금방 익숙해지겠지.’
 어차피 적응 문제였고 이제 또 제집처럼 드나들 터이니 익숙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기에 박용호는 금방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마지막으로 가방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냈다. 현역 때 쓰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가장 잘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박용호는 그대로 타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김기홍이였다.
 “멋지구나. 우리 유니폼도 잘 어울리겠어.”
 “하하, 감사합니다.”
 박용호는 김기홍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은퇴할 때까지 입었던 유니폼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모호한 것이다.
 심지어 박용호는 유니폼 판매 부동의 1위였다. 언제나 잘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가끔 FA로 영입한 선수들이 기대감을 한 몸에 받아서 치고 올라온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다들 금방 실력이 바닥을 찍는 바람에 1위까지는 올라서지 못했다.
 팬들이 성적이 나쁜 선수를 좋아하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좌우지간 프로는 실력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그럼 이제 해보아라. 난 멀리서 보고 있을 테니까.”
 김기홍은 이 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가까이 있는 건 위험했으니 물러나는 게 맞는 것이다.
 “흐음, 저 학생이 바로 그 박용호···”
 김기홍이 물러난 곳은 코치가 있는 자리였다. 최윤호의 불펜 피칭은 조금 전에 끝이 나서 그는 그냥 더그아웃에 있었다.
 그러다가 김기홍이 다가오자 중얼거린 것이었다. 지방 쪽 팀도 아니고 서울팀 코치가 박용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협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치님.”
 김기홍은 코치의 목소리에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가 배팅볼 투수 한 명을 빌려주었으니 당연했다.
 코치도 흔쾌히 수락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배팅볼 투수라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선수를 빌려달라고 하는 만큼 처음에는 난색을 나타내다가 박용호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끄덕였었다.
 “뭘요. 이런 건 도와야죠. 그리고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합니다.”
 “거래··· 라고요?”
 코치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는 김기홍이였다. 자신은 딱히 지급한 게 없으니 그런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금방 코치가 대답했다.
 “그렇잖습니까. 미래의 자원을 미리 구경하는 셈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코치의 두 눈은 박용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기대감이 서린 눈빛이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김기홍을 보내고 타석에 선 박용호는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자신을 향해 공을 던져줄 배팅볼 투수와 포수를 향한 인사였다.
 그런 다음 배트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왼손잡이라 그 방향은 왼쪽이었다.
 곧 박용호는 늘 그랬던 것처럼 타격 자세를 취했다. 20년이 넘는 동안 한결같았던 자세 그대로였다.
 “그래, 잘 부탁한다.”
 “잘 부탁해.”
 투수와 포수는 박용호를 향해 인사하고는 마찬가지로 자리를 잡았다.
 곧 초구가 던져졌다.
 퍼억
 박용호는 초구를 치지 않았다. 그냥 보기만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휙
 “치기 쉽지 않지? 쟤가 배팅볼이긴 해도 꽤 빠르거든.”
 포수는 받은 공을 투수에게 던져주며 박용호를 향해 말했다. 그가 스윙조차 하지 못 하자 위축되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박용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 어디로 보낼까?’
 그는 지금 타구를 보낼 코스를 선택하는 중이다.
 1군 투수들을 상대로 자그마치 3천 개가 넘는 안타를 쳤는데 고작 배팅볼 투수한테 겁을 먹겠는가.
 게다가 본인한테는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에이스라고 불리는 고등학생이 더 잘 던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배팅볼을 던지고 있는 것이리라.
 ‘좋아···. 역시 기선제압에는 그것만 한 게 없지.’
 오래 걸리지 않아 생각을 정리한 박용호였다. 곧 그는 투수를 주시했다.
 박용호는 안타성 타구를 만들기만 하면 이기는 거지만 이번 내기를 제안한 김기홍을 포함한 지금 잠실 야구장에 있는 서울 트윈스의 모든 관계자에게 자신이 어떤 복권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줄 요량이었다.
 휙
 곧 투수의 두 번째 공이 던져졌다.
 역시 초구와 똑같은 포심 패스트볼이었고 코스는 아주 정직하게 한가운데였다.
 그러나 이번 결과는 처음과 확연하게 달랐다.
 따악
 박용호가 타격을 시도한 것이다. 공을 가격한 그의 배트로부터는 경쾌한 소리가 퍼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부드러운 스윙과 후속 동작은 하나의 예술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타격을 마친 박용호의 자세는 배트를 쥔 한쪽 손을 그냥 놓는···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독특한 포즈로 이어졌다.
 터엉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홈런이었다. 그것도 잠실 야구장에서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중앙을 훌쩍 넘겨 위쪽에 있는 스크린을 때리는 초대형 홈런이었다.
 그 순간 잠실 야구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광경을 보게 되다 보니 누구도 쉬이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 * *
 
 박용호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 그의 방망이는 용암처럼 활활 불타올랐다.
 박용호는 배팅볼 투수의 공을 맞받아쳐서 중앙 담장을 넘긴 걸 시작으로 밀어치는 총알 같은 타구도 생성했고, 우측으로 당겨서 또 담장을 넘기는 홈런까지 쳐냈다.
 모든 타구 속도가 150km를 넘어갔다. 당연히 전부 정타였다.
 타구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공을 던지는 배팅볼 투수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중에 자신의 앞쪽에 안전용 그물망을 끌고 와서 설치할 정도였다.
 그러한 박용호의 맹활약을 멀리서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워후~ 장난 아닌데?”
 그는 바로 최윤호였다. 불펜 피칭을 마친 그는 잠시 직원용 휴게실로 나와 쉬는 중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또 하자는 코치의 의견이 있었다.
 최윤호는 원래 계획이 그냥 불펜 피칭만 하고 끝이었던 터라 갑작스러운 휴식 제안에 의아함을 느끼다가 타석에 박용호가 등장하자 왜 코치가 그런 말을 한 건지를 깨달았고 지금은 그걸 구경하며 즐기는 중이었다.
 웬 고등학생 하나가 툭 튀어나와 아무리 배팅볼을 친다고는 해도 수위타자급 타격을 보여주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휴식을 즐기던 최윤호는 이내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 있었냐, 최윤호.”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를 말이다.
 그러나 최윤호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셨습니까, 선배님.”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선배인 까닭이었다.
 지금 최윤호 앞에 나타난 사람은 올해로 나이 서른인 이철이였다.
 서울 트윈스 마무리투수였고 엄청난 실력에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카리스마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이철의 별명은 야생마였다. 워낙 멋진 투구폼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카락이 길어서였다.
 마무리투수인 그가 왜 지금 원정길에 따라가지 않고 서울에 있는 것이냐면 징계로 출전정지를 받은 까닭이었다.
 딱히 사고를 쳤다거나 최윤호처럼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던진 공이 볼로 선언되자 스트라이크존에 걸치지 않았는지 물어봤는데, 불만을 표시한 것도 아니고 단지 물어봤다는 이유로 심판이 퇴장과 함께 상벌위원회를 열어 벌금과 함께 10경기 출전 금지를 징계를 때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징계가 풀릴 때까지는 그냥 잠깐 서울에서 쉬는 중이었다.
 이철은 워낙 잘 던져서 이기는 상황이면 8회에도 심심치 않게 마운드에 올라가곤 했으니 이참에 푹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게 서울 트윈스 팬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여담이지만 이철의 최후는 45세까지 FA를 4번이나 선언하며 뛴 박용호와 달리 비참했다.
 원체 불같고 직설적인 성격이다 보니 구단에 찍혀서 갑자기 트레이드를 당한 것이다.
 평생을 서울 트윈스에 바쳤던 만큼 이철 본인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고 결국 그는 트레이드가 되자마자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모든 야구팬의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자신의 동료였던 서울 트윈스의 선수들을 향해 공을 던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젊어 서비스 타임이 꽤 남았는데 잔여 연봉까지 포기하며 일찍 은퇴를 선택한 것이니만큼 그 말은 진심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때문에 서울 트윈스 팬들은 당시에 난리가 나서 잠실 야구장까지 찾아와 시위했었다.
 그래도 박용호는 그 덕을 본 케이스였다. 그 사건 이후로 여러 문제가 같이 터지는 바람에 구단의 프런트가 물갈이되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부터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결국 우승은 못 했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무튼, 이철은 성격 때문에 구단하고는 사이가 약간 애매했지만 그래도 동료 선수들하고는 괜찮았는데,최윤호는 예외였다.
 ‘에잉, 또 검사받으라고 하시겠구만···’
 원래는 그럭저럭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는데 부상을 입고 난 후부터 계속 이철이 심상치 않다며 빨리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을 한 까닭이었다.
 다친 건 종아리였다. 팔은 멀쩡했다.
 그런데 번거롭게 검사를 받으라고 하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오늘 불펜 피칭도 괜찮았는데 말이다.
 “병원 안 갑니다, 선배님~ 오늘 바로 내려가서 1군 들어갈 겁니다.”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니다 보니 미리 딱 잘라서 말하는 최윤호였는데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네 공으로는 저 학생조차도 상대할 수 없어, 최윤호. 빨리 병원 가는 게 좋을 거다.”
 이처럼 이철이 무심한 표정으로 민감한 발언을 내뱉은 까닭이었다.
 “···선배님,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렇기에 최윤호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의 두 눈은 명백하게 이철을 노려보고 있었다.
 “······.”
 이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홀로 팔짱 낀 채 조용히 최윤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당당하던지, 그 모습은 자신이 무슨 틀린 말을 했냐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보여드리죠···. 이번에는 진짜 그냥 못 넘어갑니다.”
 어지간히도 화가 난 것일까. 최윤호는 노기 띤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이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분노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 * *
 
 ‘후우, 이 정도면 만족하셨을 것 같은데?’
 배팅볼 투수를 상대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타격하던 박용호는 슬쩍 멈추면서 생각했다.
 이미 내기에서는 이긴 지 오래였다. 두 번째 공에 안타성 타구를 홈런으로 장식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내기는 조건 자체가 공 5개를 보는 동안 1개 이상 안타성 타구를 생성해내는 것이었는데 무려 4개나 쳤고 그중 2개는 홈런이었다. 아무리 배팅볼 투수라고 해도 드넓은 잠실을 넘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박용호의 계산은 정확했다.
 짝짝짝
 “정말 대단하구나, 용호야. 손뼉 치지 않을 수가 없어.”
 김기홍이 손뼉 치면서 다가와 말한 것이다. 활약이 어지간히도 인상 깊었는지 그의 옆에는 서울 트윈스의 코치도 함께 다가와서 손뼉 치고 있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이 학생이 꼭 우리 팀에 왔으면 좋겠어요.”
 “하하, 알겠습니다.”
 ‘역시 합격이군.’
 코치와 김기홍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박용호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만 보이도록 엄지를 슬그머니 치켜세우는 김기홍의 손짓을 본 것이다.
 그 행동에 담긴 의미는 하나였다. 합격이었다.
 이제 2차 드래프트는 자신이 바라는 차례로 뽑힐 것이고, 계약금도 10억을 확보하게 되었다. 2차 드래프트에 관련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 5억 정도로 예상했었던 만큼 엄청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게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어차피 프로는 결과다···. 뽑을 때는 말이 많겠지만 나중에 그 녀석들이 펑펑 터지면 혜안을 지녔다면서 스카우트 팀 전체 주가가 오를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팀장님.’
 죄다 그럴 만한 실력을 지닌 재목들이었으니 참고 기다리면 되었다. 훗날 약점으로 대두되는 투수진을 위주로 보강하는 선택을 했으니 이제 또 점수 주는 거 아니냐며 불안에 떠는 날도 안녕이었다.
 무엇보다 신인 드래프트는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아무리 1라운드라고 한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선수도 있었다.
 아니, 은근히 많았다.
 가장 어이가 없는 건 스카우트 팀장이 ‘이 선수는 머지않아 우리 팀의 대들보가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 신인이 1군은커녕 2군에서조차 공을 한 번도 던지지 않고 은퇴했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 오는 바람에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 스카우트 팀장은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게 김기홍은 아니었지만 꽤 씁쓸한 결말이라 말이 많았었다.
 아무튼, 신인 드래프트는 이런 식이었다. 김기홍이 박용호가 정한 순번대로 뽑으면 말이 나오긴 하겠지만 과정이 투명했으니 그건 잠시에 불과할 것이고 몇 년이 지나면 분명 재평가를 받을 것이며 이내 추앙받게 되리라.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학생들만 골라서 뽑았으니 말이다.
 ‘다들 보통이 아니니 우리 팀에서도 한 3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속으로 청사진을 그려보는 박용호였다. 20년이 넘도록 계속 도전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 우승에 대한 것이라 그런지 그는 만면에 웃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이익
 굳게 닫혔던 불펜에서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다들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고,
 ‘엇···.’
 박용호는 순간 움찔했다. 나타난 사람이 요즘 서울 트윈스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최윤호인 까닭이었다.
 ‘최윤호 선배! 최윤호 선배잖아!’
 최윤호는 당연하게도 박용호가 잘 아는 선수였다. 그는 짧고 굵게 살다가 그라운드를 떠난 선수였다.
 최윤호는 고졸로 입단해서 만년 유망주 소리를 듣다가 뒤늦게 꽃을 피웠었다. 하지만 공을 너무 많이 던지는 바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서 재활을 반복, 결국 은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안타까운 건 그 부상을 당사자인 최윤호가 억지로 숨겼었다는 점이었다. 1군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박용호는 당시 최윤호의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잘만 관리했다면 롱런하면서 팀에 보탬이 되었을 재목인데 너무 빨리 떠나보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박용호는 최윤호의 옆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더 놀랐다.
 ‘이, 이철 선배님···!’
 그가 바로 이철인 까닭이었다.
 서울 트윈스의 영원한 자존심으로 남은 이철을 박용호가 어찌 모르겠는가.
 애초에 박용호는 어렸을 때 서울 트윈스의 팬이었다. 이철을 보고 야구를 시작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야구를 그와 같은 팀에서 뛰어 설렜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인연은 구단의 악행 때문에 한없이 짧았고, 포지션도 같은 투수가 아니었던지라 자주 인사도 못 했다.
 ‘반드시 막아야 해···!’
 그렇기에 박용호는 그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다 알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일개 선수가 그걸 어찌 막느냐고 하겠으나 그래도 해볼 생각이었다.
 자신은 앞으로 어찌 되는지를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건 엄청난 무기였다.
 “어, 윤호 나왔구나. 너도 봤지? 올해 우리 1차로 들어올 예정인···”
 코치는 최윤호가 밖으로 나오자 박용호에게 관심이 생긴 것으로 판단, 그를 소개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가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코치님. 이 학생을 상대로 공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최윤호가 도중에 말을 잘라먹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의 시선은 박용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왜 갑자기 그런···?”
 “아니, 이철 선배님께서 자꾸 저한테 병원 가서 정밀 검진받으라고 하지 뭡니까. 저는 정말 멀쩡한데 말이죠. 게다가 제 공이 이 학생한테조차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음?’
 얼떨결에 가운데에 낀 꼴이 되자 멋쩍게 서 있던 박용호는 눈을 빛냈다. 최윤호의 말을 듣던 코치가 몹시 당황하는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정말 찰나였지만 확실했다. 그는 검진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움찔했다.
 그렇다 보니 코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는데, 최윤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까 보니까 너 진짜 잘 치더라. 지금은 이철 선배님 때문에 덤비는 거지만, 솔직히 나도 널 상대로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아. 그러니까 우리 한번 대결해보자.”
 이 상황에서 박용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쩌다 보니 배팅볼 투수에 이어 최윤호하고도 맞붙게 된 박용호였다. 그는 배트를 들고 타석에 자리했다.
 여담이지만 김기홍은 지금 상황에 만세를 불렀다. 1군 필승조를 상대로 박용호의 실력을 시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배팅볼 투수한테 쳤던 것처럼 치는 족족 정타를 만드는 건 힘들겠지만 어쨌든 뜻밖의 수확인 셈이었다.
 ‘으음···.’
 그러나 김기홍과 달리 박용호는 죽을 맛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쳤으니 당연했다.
 물론 최윤호는 공략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대단한 투수들하고도 많이 싸워봤는데 왜 못 치겠는가.
 자신은 난공불락으로 불리던 투수도 3안타 이상을 치며 무너트린 적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에이스 킬러라는 별명도 생겼었다.
 문제는 지금 최윤호와의 관계였다.
 필승조로 맹활약하는 만큼 앞으로 계속 보게 될 터인데 막내 후배가 선배의 공을 아무렇지 않게 쳐낸다?
 실력이 좋고 말고를 떠나서 찍히기 정말 좋았다. 웃긴 사실이었지만 선후배였으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최윤호가 별 볼 일 없는 투수라면 모를까, 1군 필승조답게 영향력이 상대할 터이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박용호는 이번에 적당하게 칠 생각이었다.
 1군 필승조를 상대로 실력을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까지는 좋았지만, 그 상대가 같은 팀의 선배라는 게 굉장히 껄끄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김기홍은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루키가 1군 필승조를 상대로 아까 치던 것처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좋아! 간다!”
 아무튼, 그렇게 최윤호를 상대하게 된 박용호였다. 그는 박용호가 타석에 들어서자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박용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최윤호가 초구를 던졌다.
 퍼억
 “나이스 볼~!”
 아까 배팅볼 투수와 마찬가지로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포수는 파이팅을 외치며 그 공을 다시 최윤호에게 던져주었다.
 그런데 그걸 본 박용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뭐지? 공이 좀···.’
 구위가 기대 이하였다.
 움직임이 밋밋했다. 깨끗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했다.
 속도는 그럭저럭 나오는 느낌이었지만 노린다면 얼마든지 장타를 뽑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상을 입는 시기가 지금쯤인 것 같은데···? 설마 이미 이상이 있는 건가?’
 최윤호의 미래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지금의 상황에 혼란을 느끼는 박용호였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승부에 임했다. 치기 좋은 공이 계속 시야에 들어오다 보니 배트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박용호는 그러다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휘익
 스윙하는 과정에서 배트를 놓친 것이다. 억지로 헛스윙해서 나온 실수였다.
 “하하하!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져와!”
 “죄, 죄송합니다~!”
 최윤호는 그 모습에 만족감을 느꼈는지 너털웃음을 지었고 박용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외치고는 배트를 가지러 갔다.
 ‘부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치기 좋게 느껴지는 최윤호의 공을 떠올리며 걱정 깊은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박용호는 그 순간 경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철 선배님···.’
 공교롭게도 배트가 날아간 방향이 딱 이철이 서 있는 곳이었다.
 배트는 그의 앞에 떨어져 있었다.
 스윽
 이철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주워서 박용호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
 오랜만에 보는 이철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넋을 잃고 있던 박용호는 그가 배트를 건네주자 공손하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너 왜 똑바로 안 하냐?”
 박용호는 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제대로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들었으니 당연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우선 시치미를 떼보는 박용호였으나 그는 다시 위축되고 말았다.
 “내가 모를 것 같아?”
 이철이 대놓고 이렇게 말한 탓이었다.
 특유의 카리스마가 어찌나 엄청나던지 눈빛이 레이저를 쏘는 느낌이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박용호는 배트를 가지러 온 게 전부였으니 오래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최윤호 선배님은 이미 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인 건가?’
 설마 일부러 치지 않고 있다는 걸 이철한테 들켰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 보니 박용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막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선배의 비위고 나발이고 팀 미래를 생각한다면 최윤호를 빨리 병원에 보내야만 했다.
 그는 누가 봐도 부상이었다. 공을 받는 포수도 코치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지···!’
 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끝낸 박용호는 다시 타석에 자리했다.
 그의 두 눈은 타격을 향한 본능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끝은 최윤호를 향해 고정한 상태였다.
 “하하~! 그럼 또 가볼까?”
 휙
 최윤호는 박용호가 타석에 돌아오자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결과가 확연하게 달랐다.
 따악
 박용호가 배트를 번개처럼 휘두른 것이다.
 그의 배트에 걸린 최윤호의 공은 커다란 아치를 그렸고 누구도 다시 볼 수 없었다. 담장을 훌쩍 넘어간 까닭이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박용호가 전력을 다해 최윤호가 던지는 공을 공략한 것이다.
 그 결과는 전부 장타였다.
 쳤다 하면 박용호의 타구는 담장으로 날아가기 바빴다.
 그 넓다는 잠실 야구장이 탁구장처럼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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