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기상, 기상!”
작업반장의 목소리와 함께 닭장과 같은 실내에 희미한 전등이 점등했다.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마치 좀비 영화의 인트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 그들이 모인 곳은 선안섬 염전. 전국에서 가장 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다.
태현은 재빠르게 주황색 바지를 입고 밖으로 뛰어나온다. 조금이라도 미적거리는 순간 개밥보다 못한 아침밥조차 얻어먹지 못한다.
민주주의.
만인이 평등한 사회.
성별, 종교, 신념, 인종에 따른 차별이 없는 사회.
살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
이 같은 말들은 이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노예 제도가 건재해 있다.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허울 좋은 사탕발림일 뿐.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자들은 그중에서도 최하층. 노비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에 해당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현의 몸이 염전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됐는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작업반장이 달려든 것.
“너 이 새끼. 빨리 안 일어나?”
반복된 노예와 같은 생활에 분노와 자존감과 같은 허울 좋은 감정들은 이미 증발한 지 오래였다.
태형은 잘 훈련된 똥개처럼 빠르게 일어나서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대열을 맞추고 서 있는 이들은 모두 같은 주황색 바지를 입고 있다.
주황색 바지.
선안섬의 낙인.
누구도 이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현대판 불가촉천민. 말도 걸어도 안 되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 * *
“그러니까, 니 부모 놈들이 죽었으니, 니가 돈을 갚아야 한다니까?”
시장 귀퉁이에 있는 ‘신용머니’ 사무실.
부모님이 사채로 허덕거리다가 죽게 만든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 태현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 그런. 제가 진 빚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현으로서는 직접 진 빚도 아닌데 물려받은 재산도 없이 빚만 떠안게 된 상황.
“그러니까.”
석강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리미리 상속 포기를 했어야 할 거 아냐? 이미 기한이 지났다니까? 아비 놈의 빚은 너라도 갚아야 할 것 아냐.”
“갚아야 할 빚이 얼맙니까?”
악질 사채업자 강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제법 책임감은 있는 녀석인가 보군.
“부모가 빌린 돈의 원금은 1억. 연이율 50%로 계산해서 원리금이 매달 420만 원, 10년 정도면 다 갚겠네.”
감정 없이 내뱉는 말들의 의미를 깨달은 태현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속 포기 기한은 통상적으로 3달. 이후에도 구제를 받을 방안은 있지만, 사실상 법정 다툼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원금 1억 원과 그 이자를 10년 동안, 원금 1억 원에 이자만 4억 원이 넘는다. 살인적인 이자율이다.
1년에 대강 5000만 원씩, 10년을 모으라는 말은 즉 갚지 못하면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혹시나 개인 회생이라도 신청하려거든 목숨 걸고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빌린 돈 안 갚고 편하게 살려는 놈들 여럿 보내 봤으니까 조언 차 말해 주는 거야.”
개인 회생 제도.
한 채무자가 평생을 일해도 못 갚을 정도의 채무에 시달린다면, 그 채무를 일정 부분 탕감해 주고 적절한 노동을 통해서 남은 채무를 갚아나갈 수 있는 제도.
즉 채무자에게는 희망과 같은 제도였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개인을 구조할 수 있는 법적 제도도 가진 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실제로 개인 회생이 받아들여지면 채권자들은 자신의 채무를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고, 적은 금액만을 회수하게 된다.
법 밖에서 사는 사채업자들은 어떻게든 개인 회생 제도를 신청하는 녀석들을 나락으로 빠트릴 다양한 방법들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서 부모님이 진 빚은 모두 갚도록 하겠습니다.”
“하, 이 녀석. 패기 하나는 마음에 드네. 그래, 이번 달 치부터 한번 갚아 봐라.”
호기롭게 빚을 갚겠다고 말했던 태현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태현은 열심히 땀 흘려 살면 행복한 미래가 있다는 따위의 말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
한 달에 알바를 5개씩 하며 부모님의 빚을 탕감하려 애써 봤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한 달에 400만 원이 넘는 이자. 법으로 정해진 이자율을 비웃듯이 상회하는 50이라는 절망적인 숫자.
결국, 느린 회수 속도에 참지 못한 사채업자들이 인간에게서 가장 많은 돈을 빠르게 회수할 방법을 택했다.
태현은 처음 6개월 중 4달 이상을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당시 보험 사기는 명확하게 판단할 만한 법적 근거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 맹점을 이용해서 태현은 초보 운전자들에게 몸을 던지는 행위를 반복했다.
“어이 아줌마. 우리 귀중한 아들내미 어쩔 거야?”
경차의 앞부분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고, 태현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당황한 아주머니는 전화기를 붙잡고 멍하니 얼어 있다.
강호는 운전석 유리창을 거칠게 쾅쾅 두드렸다. 깜짝 놀라 바라보는 아줌마의 동공이 흔들렸다.
“일······, 일단 병원부터 가야 하지 않을까요?”
“각오 단단히 하쇼.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자가 되기를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벌금형으로 끝나더라도 빨간 줄이 그어지고, 경찰서를 오가는 일은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보통은 조금의 대가를 더 치르더라도 완만히 합의하는 쪽을 선택했다.
“2000만 원이요?”
“아줌씨. 그럼 범죄자 되고 싶어? 살인자 자식들이라고 대대손손 손가락질받고 싶으면 그렇게 하쇼.”
그렇게 다른 사람의 등골을 뽑아서 탕감받은 원금은 약 4400만 원. 매달 갚아야 하는 원리금이 419만 원에서 185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 * *
“빨리 안 일어나?”
염전 일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노동이 아니었다. 하루에 4시간만 자며, 온종일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신장 한쪽 정도는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지만, 태현은 몸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섰다.
“반장님.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제발, 제발 하루만 쉴 수 없을까요?”
생기가 넘치며 사소한 행복에 감사해하고, 인간은 선하다고 믿던 태현. 그런 성격은 빛이 바래 무채색에 가까워진 태현의 머리 색깔과 지저분해진 피부처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뭐 인마? 너만 힘들어? 니가 쉬면 작업량은 누가 채워!”
작업반장의 눈이 번득였다. 태현은 자신에게 퍼붓는 무차별 폭행에 그저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그렇게 소금물 속에 처박힌 태현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다가는 괜한 불똥이 튄다. 원래 그곳에 처박혀 있는 쓰레기처럼 태현의 앙상한 몸이 서서히 줌아웃 됐다.
비릿하고 짜디짠 소금물이 태현의 한쪽 눈과 코를 뒤덮기 시작했다.
“이 새끼. 너 같은 새끼는 그렇게 처박혀 있는 게 어울려. 개만도 못한 놈.”
말을 내뱉고 작업반장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예들을 닦달하러 이동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작업반장은 태현이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에게 소금에 절여졌다는 말이 어울릴 수 있을까. 태현의 온몸은 모든 생기를 상실한 채 늘어져 있었다.
내 비록 이번 생은 이렇게 눈을 감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면,
다음 생에서는 필시 재벌의 삶을 살 것이다.
* * *
“허어어억.”
물속에 처박혀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태현은 미친 듯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도 짭짤한 소금 맛이 혀끝에 감도는 듯했다.
이상했다. 분명 태현의 마지막은 노예답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비루한 죽음으로 끝맺었다.
거칠게 숨을 내뱉던 태현은 주위를 훑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천장. 그리고 하늘색 바탕에 유치한 그림이 그려진 이불.
“태현아 일어났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이를 보자마자 태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채에 떠밀려 결국엔 생사도 알 수 없게 행방불명되었던 어머니.
그리고 화장실 욕조에서 부러진 카드로 팔목을 긋고 자살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최악이었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태현이 걱정스러운지 어느새 어머니가 곁에 다가와 태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악몽을 꿨나 보구나. 오늘 개학 첫날인데, 어서 정신 차리게 세수하고 아침 먹어야지.”
궁지에 몰리기 전의 어머니는 따뜻하고 온화한 말투를 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나는 회귀했다.
대한민국에서 최하층의 밑바닥으로 떨어졌던 내 인생에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
흔한 웹 소설의 설정처럼, 혹시나 또 다른 능력이 주어진 것은 아닌지 태현은 미친 듯이 자신의 몸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띄었다.
어머니의 머리 위에 홀로그램 같은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 정선화
성격: 온화하고 긍정적.
성공도: ?/100
특이 사항: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
성공도가 물음표라는 것은 다시 돌아온 이 시점에서 어머니의 미래가 불행으로 점철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원 녀석. 무슨 꿈을 그렇게 요란하게 꾸니.”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우직하고 맡은 바 일을 끝까지 해내는 성실한 아버지. 안경 너머로 사람 좋은 눈빛이 여실히 보였다. 예전에 보았던 절망적인 눈빛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국 식기 전에 빨리 식사하자. 아버지도 출근해야 하고, 너도 빨리 학교 갈 준비해야지.”
태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찌개에서 국자로 고기를 한가득 퍼 올리며 어머니가 말했다.
우습게도 최악의 삶을 살다가 돌아온 나는 세상을 향한 복수나 억울하다는 생각보다 식욕이 제일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새콤달콤한 김치찌개의 냄새가 코를 미친 듯이 자극하고 있었다.
따뜻한 쌀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멸치볶음. 사소해 보이는 밥상이지만 지난 3년간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던 태현에게는 그 어떤 밥상보다 진수성찬이었다.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미친 듯이 얼굴을 파묻고 먹는 걸 본 부모님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녀석 체하겠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다, 이놈아.”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걱정이라는 것을 태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게 세 그릇을 비워내자 태현은 이제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누나는 현재 고등학생이니 먼저 등교를 했을 터.
20년 만에 다시 학교라는 데에 가게 됐다. 거울에 비친 태현은 깡말랐던 자신의 마지막 모습과는 달랐다. 적당히 윤기 있는 머리카락에 멀끔한 피부, 또래에 비해 훤칠한 키를 가진 모습이었다. 달력을 보니 현재 연도는 1987년 2월.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해였다.
「신형 그룹의 부사장인 이경찬 회장이 불우이웃 성금 100억을 지원했습니다.」
「신형 그룹이 국가 우수 기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신형 그룹은 연신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발전의 1등 공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추악한 재벌 경영과 서민들을 말살하는 잔혹한 수법들이 담겨 있었다.
그 희생양 중 하나가 바로 태현의 가족이다. 일명 하청 업체에 대한 단가 후려치기 이후, 신형 측은 차일피일하며 아버지 회사에 제때 대금 결제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채에 손을 댄 아버지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었다. 그들을 기필코 씹어먹고 말 것이다.
신형 그룹. 염전 노예로 팔아넘긴 사채업자들. 그리고 돈이 없고 가진 게 없는 나를 하대하던 수많은 이들.
사채업자들 몰래 찾아간 국선 변호사도, 탈출해 도움을 요청하는 나를 외면했던 선안섬의 공무원도 나를 투명 인간처럼 취급했다.
가난한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대한민국 계급제의 최하층에 있었다. 그리고 최상위층에 있는 이들은 귀족처럼 서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노예로 태어났다면, 이번 생애는 귀족이 되어 주겠다.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게.
* * *
“여~ 김태현이 돌아왔구나.”
익살스럽게 농담을 건네는 녀석의 이름은 서현우. 녀석의 머리 위에 부가 정보들이 떠올랐다.
이름: 서현우
성격: 장난기가 많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함.
성공도: 80/100
특이 사항: 전형적인 금수저 가문. 재벌의 자식은 인성이 더럽다는 편견을 깨 주는 인물. 사교성이 좋으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좋아한다.
기억났다. 우리 집이 무너지기 전이었던 대학교 초반까지 현우 녀석과는 꽤 친근하게 지냈던 기억이 났다. 이후 무너지는 우리 집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냉정하게 거절하여 사이가 서먹해졌다.
수업은 듣지 않고 교과서 밑으로 미친 듯이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태현을 현우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인마, 독사한테 걸리면 너 죽어. 뭘 그렇게 적고 있냐?”
태현에게는 학교 수업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5년 안에 자신의 집안은 무너져 내리며 천애 고아가 되는 운명. 이제는 지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 중 중요한 사건들을 미친 듯이 노트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이용해야 했다. 어떻게든 가진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종국에는 신형 그룹을 칠 것이다.
“야야. 재밌는 거 있으면 나도 같이하자. 심심하다고.”
팔꿈치를 툭툭 치는 현우. 참 걱정 없어서 좋겠다고 순간 욱할 뻔했지만, 이 녀석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놈이다. 한번 미끼를 던져 볼까.
“중학교의 마지막 해를 하얗게 불태워 보고 싶지 않니?”
유치하디 유치한 태현의 도발에 항상 따분한 것을 못 견디던 현우는 거침없이 콜을 외쳤다.
* * *
학교 수업이 마칠 때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잠실이었다. 당시 국가에서 진행하는 배팅이 아닌 사설 배팅이 음지에서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니가 갑자기 꿈에서 우승 결과를 모조리 봤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진짜 못 믿겠으면 만 원만 가지고 재미로 해 봐도 좋아.”
사실 당시 물가로 일개 중학생이 만 원을 용돈으로 쓰기에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서현우였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녀석이 아니었다.
내가 택한 첫 번째 방법은 사설 스포츠 도박. 일반적인 사람들은 불법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이미 세상 밑바닥을 보고 온 내게는 그런 도덕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거 하다가 걸리면 우리 아버지한테 나는 죽는데. 건전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거라고 배웠단 말이야.”
“하. 천하의 서현우가 언제부터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들었나. 그럼 졸업 후에 미국에서 고등학교도 다니고 착실하게 회사 후계자로 크면 되겠네.”
서현우가 가장 싫어하는 것.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이다. 얼굴을 바라보니 새하얗게 질린 것이 진짜 싫기는 싫나 보다.
사설 스포츠 도박에서 베팅의 경우 기본적으로 배당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단순히 승리하는 팀을 점쳐서 2배의 이익을 얻는다면, 같은 돈으로도 여러 경기를 동시에 맞추면 10배 혹은 50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이야! 맞췄어!“
미친 듯이 신나게 소리를 지르는 서현우. 태현은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역시 아직 어린애는 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베팅을 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결과는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내 목적을 위해서 행하는 일에 현우까지 끌어들이기 위해선 자극제가 필요하기에 직접 참관을 오기로 했다.
1987년 K리그는 실업팀을 제외하고 프로 축구팀만으로 구성하여 본격적인 프로 축구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만큼 어떤 팀이 어떤 스코어로 이길지 종잡기는 어려웠기에 배당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골 개수와 우승팀을 연계해서 모두 맞춰 냈다. 그 외 다른 결과까지 종합했을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배당률은 2400%. 즉 1만 원으로 24만 원을 만들어 냈다.
당시 평범한 가정의 대명사였던 태현의 가정에서 몇만 원이라는 거금은 과분했다. 현우와 수익금을 나눠 가진 태현은 그 종잣돈을 어떻게 불릴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수학 시간.
태현은 여전히 노트에 필기가 아닌 다른 것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한 세상을 미리 살아 봤다 한들 역사와 주식 그리고 경제의 흐름까지 통달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기득권들은 그러한 정보들을 일반 서민들이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린 나이로 되돌아온 다음부터 이상하게도 세세한 기억들이 모조리 떠올랐다.
애초부터 없던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친구가 투자해서 성공했던 이야기들. 어디 땅이 폭등한 이야기들. 주식으로 대박이 났던 이야기들. 분명 듣자마자 별 관심이 없어서 잊혀야 하는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참 태현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또 현우가 눈치 없이 어깨를 톡톡 치며 귓속말을 건넸다.
“자, 이제 다음은 무엇인가. 예언가 선생.”
“다음이라니?”
“이렇게 돈을 불려 나갔으면 다음 계획이 있을 거 아냐? 자그마치 400만 원이야.”
당시 짜장면 가격이 700원 안팎인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큰 금액을 긁어모을 수 있었던 셈이다. 개인 정보를 도용하는 것에 대해 크게 민감하지 않은 시기라 가능했던 일.
“글쎄, 이제부터는 혼자 해야 할 것 같아. 일반적인 길이 아니거든.”
현우는 냉정하게 끊어 내듯 말하는 태현의 태도에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방금 겁나 어른같이 말했어.”
“흠, 그래. 이 형님은 이제 위험한 길을 가야겠으니, 너는 네 살길을 찾거라.”
짐짓 장난치듯 말하는 태현의 말에 현우가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다시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아니. 아무래도 너랑 같이 다니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알려 주라. 다음 계획은 뭐야?”
앞으로 태현이 가려는 길은 험난하고도 다사다난한 길이 될 것이다. 다들 꿈꾸는 평범한 직장. 평범한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길.
하지만 리스크가 크기에 더 달콤한 열매들을 먹을 수도 있는 길. 어린 중학생에게 함께 하자고 하기에는 너무 잔혹한 선택이었다.
“글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서 돈이 없는 서민들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더 낮은 대우를 받고 있어.”
과거 자신의 경험을 입밖에 내뱉을 수 없기에 태현은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여러 책에서 읽어 보니 가난한 자들은 정말 힘들 삶을 앞으로 헤쳐나가야 해. 학교란 무엇이지? 왜 똑같은 교육을 받고 고등학교에 가고 보충 수업을 해야 하지? 그럼 정말 행복해질까?”
쉽게 말한다고 풀어서 말했지만, 중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너무 철학적이고 난해한 말들이었다.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던 현우는 갑자기 어려운 말들과 사색적인 말들이 쏟아지자 멍하게 있다 반문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니는 것이 전부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그래. 날 따라오는 것은 네 자유야. 나는 이 세상을 비틀어 보려고 해. 대다수를 가난으로 몰아가는 이 시스템 속에서 나는 탈출할 거야.”
“오. 멋있는데······.”
* * *
“다시 말해 보렴”
평소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도 태현을 아끼는 아버지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제 이름으로 주식 계좌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태현이 최근 들어 돈 굴러가는 것에 관심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그 어린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주식이 뭔지는 알고 있니? 함부로 손대면 패가망신할 수도 있단다.”
“네! 책에서 읽었는데 제가 응원하고 싶은 회사를 조금씩 사 모으는 거라고 들었어요.”
지극히 어린애의 입에서 나올 법한 대답에 아버지는 조금 안심했다. 어디 책에서 주식 성공 신화 같은 걸 봤을 수도 있다.
“흐음. 우리 태현이가 돈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가 보구나. 다만 주식으로 큰돈을 벌겠다는 것은 투기꾼이 되기에 십상이니 주의해야 한다.”
“네! 당연하죠. 궁금해서 제 용돈 모은 거로 한번 해 보려고 해요. 응원하고 싶은 기업이 있거든요.”
* * *
“34번 손님. 2번 창구로 와 주십시오.”
인근에 있는 증권사를 방문한 태현과 아버지. 태현의 아버지는 주식이나 부동산 등 투자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작은 회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착실하게 피땀 흘려 일하면, 자신의 가족들이 행복해진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그런 일들이 과거에는 가능했었다. 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태현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았다. 성실함은 더는 미덕이 아니었다. 절약과 저축만으로는 절대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들만의 리그에 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녀석. 뭔 생각을 그리하냐?”
“네? 아, 너무 좋아서요.”
“그래그래. 학교 공부 열심히 하고 헛된 돈을 바라면 안 된다.”
아버지다운 말씀이었다. 아버지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네. 당연하죠.”
해맑게 웃는 태현의 얼굴을 보던 아버지는 순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철없이 놀기에도 바쁜 나이인데. 말없이 태현의 머리를 쓱쓱 괜히 문질렀다.
“헤헤. 아빠 나 아이스크림 사 줘요.”
아버지는 동네 슈퍼에서 태현이 가장 좋아하는 막대가 두 개 달린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 * *
학교 뒤 한산한 언덕에 현우와 태현은 벌러덩 누워 있었다. 높다란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밝은 태양 빛이 그들의 볼을 간지럽혔다.
“자 스텝 투를 알려 줄게. 미리 말하지만 언제든지 발을 빼고 싶으면 빼도 돼. 너와 나는 아마 사는 세계가 달라질 테니까.”
지금 태현은 현우의 든든한 배경이 필요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큰돈을 만지고 귀족 세계에 진출할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일반인들에게 목숨이 단 한 개뿐이라면, 부자들에게는 부활할 수 있는 코인이 열 개 혹은 백 개씩 주어진다.
그들은 더 실패할 수 있고 더 성공할 수 있으며 그 위치를 공고히 다지게 된다.
“일단 우리는 주식이라는 게임을 할 거야. 주식이 뭐냐면······.”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아버지가 하도 닦달을 해 대서 계좌도 있는걸.”
태현은 순간 맥이 빠졌다. 다행히 아버지는 어린애의 치기 정도로 생각하고 계좌를 만들어 주긴 했다. 하지만 이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이미 중학생이 주식 투자를 교양처럼 배우고 있었다.
“그럼 혹시 네 몫으로 아버지가 투자해 두신 것도 있니?”
서현우의 아버지.
항상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굉장히 계산적이다.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빠르게 파악하고 인간관계를 잘 이용하는 인물. 그렇기에 강력한 부를 이룩할 수 있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최우선 목표는 우리 아버지를 자살하게 했던, 그 개자식들을 박살 내는 거다.
“음, 아마 있을 거야. ‘신산전자’랑 ‘IG화학’이랑 그 외 몇 개가 유망하다고. 적어도 대학가기 전까지는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
이거다. 태현의 눈이 빛났다. 아마 서현우의 아버지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순수히 교육적인 목적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증여라는 명목하에 합법적 탈세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자식의 이름으로 넣어놨을 터.
당시에는 증여 신고를 매입 시점으로 했다면, 차후 차액에 대해서는 추징하지 않는다. 이후 법적으로 문제가 되어 이 부분도 모두 포괄 징수하게 된다.
대기업 재벌들이 자식에게 저점에 주식을 대량 매수한 후 작전 세력 개입 및 미리 준비된 호재가 터진 후 수십 배의 이익을 고스란히 증여세와 상속세도 내지 않는 편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법이 정해지기 전. 새로운 법이 제정되어 현재 불법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이전의 죄는 묻지 않는다.
“그럼 우리 한번 게임을 시작해 볼까? 부루마불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우리 돈을 엄청나게 늘리는 거야.”
“오. 재밌어 보인다. 어떻게? 이번에는 스포츠 경기는 아닐 거고.”
“부자들의 게임. 개미들의 지옥. 주식 전쟁에 우리도 참전한다. 아주 짧고 굵게.”
“주식 전쟁?”
“응. 스포츠 도박 베팅보다 몇 배로 더 재밌을 거야.”
* * *
3층으로 이루어진 호화 저택 집무실.
“서 회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냉철한 외모를 한 정 비서가 서류철을 회장에게 넘겼다.
“차명으로 들어 놓은 아드님의 주식 일부가 매도 처리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업 확장 계획을 검토하던 서현창 회장이 안경을 바로 세우며 프린트된 내용을 훑어봤다.
“어떤 식으로 움직였나? 허허, 이 녀석이 벌써 돈을 가지고 노는 취미가 생긴 것인가.”
서현우 명의로 된 주식의 평가손익은 총 3억 수익. 물론 회장의 돈이 장남인 서현우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단순히 가지고 놀기에 적지만은 않은 금액. 다만 나이를 고려해서 큰 금액은 아직 물려주지 않은 것 같다.
“OO현대 주식과 OO철강 주식이 각각 25%, OO건설 주식이 30% 매도 처리가 되었고, 매도된 금액은 출금하지 않고 상당히 공격적으로 종목들을 사 모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 보게.”
“주식에 투자하는 흐름으로 봤을 때 얼핏 보면 굉장히 초짜 같고 운에 기대는 듯한 매매 기법을 보입니다. 다만 너무 과감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움직이는 것이던가. 혹은 너무 잘 알아서 리스크를 감내하고 베팅을 걸어 보는 것이던가. 양날의 검 같은 상황입니다.”
“어차피 자식에게 물려준 돈. 너무 큰 손실이 나지 않는 이상 그냥 지켜만 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 * *
태현은 앞으로 몇 년 안에 다가올 가장 큰 사건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뜨겁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에 좋은 장소.
첫 번째는 주식의 초호황기. 어떤 것을 해도 모두 성공하던 시기. 취직자리는 넘쳐나서 직후 꿈의 기업이라 불리던 곳에서 제발 와 달라며 대졸자들을 모셔 가던 시기.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고 했던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던 대한민국 경제는 그대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최악의 금융 위기.
태현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네 가족은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중산층이라 자부하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소규모 공장도 경제 호황을 맞아 제법 규모를 키우며, 30평대 아파트로 이사하는 호사도 누렸었다.
그리고 행운이 찾아왔다. 규모가 커진 아버지의 공장에 달콤한 제안이 들어왔다. 한국 경제 성장의 1등 공신이자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신형 그룹에서 자사의 물건을 납품해 줄 공장들을 대거 영입한 것이다.
하지만 달콤함은 잠깐이었다. 신형 그룹에 납품하게 되어 가졌던 비싼 고깃집에서의 가족 외식. 그리고 바로 겹치는 기억은 온통 암울한 색으로 점철되었다.
최악의 경제 위기가 찾아오면서 신형 그룹은 아버지가 납품을 위해 준비해 놓은 기계들을 모두 매입하지 않겠다며 꼬리를 잘랐다. 현금이 꽉 막히는 바람에 처리하지 못한 어음은 모두 부도 처리가 되었다.
중고로라도 기계를 처분하려 했지만, 전국이 절망적인 시기였다. 납품 대금과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감당하기 위해 아버지는 결국 신용머니에 손을 내밀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어머니와 누나는 그 이후 행방불명.
위기가 찾아오기 전이 가장 큰 기회라고 했던가. 어쩌면 남들에게 피눈물을 흘리는 거대한 리스크는 태현에게는 신분을 탈바꿈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기회가 될 것이다.
* * *
“나는 많이도 안 바라. 6 : 4 어때?”
태현이 별것 아니란 식으로 가볍게 말을 던졌다.
“7 : 3으로 하자. 사실상 네가 수익을 거의 다 만들어 준 것이랑 다름없으니까.”
현우가 연신 오락기 버튼을 연타하며 가볍게 말했다. 현우가 내뱉은 말은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다.
푼돈이라면 10%의 비중이 큰 차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우의 계좌에는 꽤 많은 투자 금액이 들어 있다. 그중에 위험 부담을 줄이고, 자산 관리인의 눈에 크게 띄지 않기 위해서는 30% 내외의 현금으로 운영해야 했다.
1억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률은 최소 500%. 기억하기로는 10000%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돌아서 갈 여유는 없다.
“콜.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혹시나 문제 생기면 다 내가 책임질 테니 맡겨만 둬.”
“그래. 그래. 아씨, 이게 안 깨지네.”
현우는 번번이 마지막 라운드에서 죽고는 했다. 현우가 하고 있는 게임은 나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작 ‘나클죠’. 파란 쫄쫄이를 입은 주인공이 홀로 갱단을 박살 내는 단순한 스토리였다.
다만 여태껏 횡 스크롤 게임과 다르게 타이밍이 중요한 게임이었다. 웬만한 게임들은 동전을 밀어 넣고 여러 번 시도하면 깰 수 있었지만 나클죠는 달랐다.
나클죠의 주인공이 주먹을 찌르는 것과 회수하는 것. 그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어 연타해야 클리어할 수 있었기 때문. 적재적소에 강력한 잽을 파팍 꽂아 넣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중에서 마지막 스테이지의 보스는 안드로이드로 이루어진 녀석. 한 번 클리어하더라도 되살아났다. 현우가 매번 죽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가끔 세상엔 돈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기는 했다.
태현이 능숙하게 좌우로 빠르게 회피한 후 연타를 먹이자 안드로이드가 재로 변하며 사라졌다. 현우가 새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태현을 바라봤다.
‘훗 아직 이 공략법은 이 세상에 이를 때지.’
어느새 주위에 몰려든 오락실 인파가 북적거렸다.
“와. 처음으로 클리어했어.”
“나클죠 마지막 단계를 클리어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태현은 현우와 함께 오락실을 나왔다. 그러자 뒤에서 있던 코흘리개가 게임을 이어서 했다. 나클죠는 엔딩을 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스테이지가 시작되기 때문.
고수들은 쿨하게 마지막 스테이지를 깨고 다음 타자를 돈이 없어 구경만 하는 아이들에게 양보해 주곤 했다.
“자 이제 가볍게 수익을 냈으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조오치. 돈 버는 거 별거 아니구만! 나도 스스로 부자가 될 수 있구나! 아 물론 너 덕분이지.”
태현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다소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자수성가란 나처럼 가진 것 없고 백 없는 애들이 하는 거란다. 너는 실패해도 실패할 수가 없어. 대기업 회장의 자식이니까.
“아 근데 태현아. 그 정 비서가 요새 나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관심이라니?”
“요새 하시는 일 잘되길 바란다면서 평소와 같지 않게 껄껄 웃더라니까.”
“아아 별거 아닐 거야. 학교 공부나 잘하라는 거지, 뭐”
생각보다 빠르게 눈치를 채고 있다. 지금까지 소소하게 수익을 올리는 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일부러 미끼를 던져 본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될 게임을 정 비서와 서 회장이 눈치채는 순간. 두 가지 갈림길에 설 것이다.
믿지 않아 기회를 날리던가.
나를 포섭하던가.
* * *
“밥 먹자, 태현아.”
여느 때처럼 평범한 저녁 밥상. 항상 아버지가 고된 일을 마치고 나면 함께 저녁을 먹곤 했다. 별것 아니지만 소소한 행복.
“자 우리 태현이가 좋아하는 갈비찜이다.”
태현에게 어머니가 고기 한 덩어리를 집어서 밥에 얹어준다. 태현이 옆을 보자 아버지가 묵묵히 신문을 보며 식사를 하고 있다.
이름: 김기석
성격: 무뚝뚝하나 성실한 타입.
성공도: 50/100
특이 사항: 책임감이 있어 자신의 사업을 잘 이끌어갈 인물. 다만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머리 위에 뜬 홀로그램을 본 태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분명 처음 아버지의 성공도는 65였다. 15포인트나 하락했다는 것은 어쩌면 위기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것. 조금 더 분발해야 했다.
“허허. 아들은 요새 하는 게 잘 안되나 봐?”
“아 그거요? 하하 책에서 본 거랑은 매우 다르네요.”
아버지가 개설해 준 주식 계좌. 그때 당시는 아들과 가족의 돈이 동일시되던 때였다. 어머니가 용돈을 보관하는 것도 부기지수.
하지만 아버지가 가끔 살펴보는 계좌는 바지 계좌일 뿐이다. 바지 계좌의 수익률은 현재 -7%. 본 계좌는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고 있었다.
태현의 명의로 조회를 한다면 서브 통장까지 모두 나오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힘을 숨길 때이다.
“너무 낙담하지 말아라. 어차피 좋은 대학을 나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니.”
아버지는 전형적이며 좋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저것들은 정답이 아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이 좋은 삶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네 아버지 공부 열심히 할게요.”
태현의 성적이 최근 몰라보게 올랐기에 아버지도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최근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 추세에 발맞춰 신형 그룹도 중소기업 육성에 이바지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한강의 기적에 이어 한국의 저력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연신 자극적인 내용의 뉴스가 티브이에서 흘러나왔다. 국민의 어깨 역시 높아진 시기. 수출도, 나라 경제도 모두 탄탄대로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여보, 이번에 사업 확장은 잘돼 가고 있죠?”
“그럼. 그럼. 여기저기서 빨리 물건 좀 만들어 달라고 난리야. 좀 커다란 곳에서 정기적으로 납품만 맡으면 우리 집도 인생 펴는 거야.”
아니다. 독이 될 것이다. 고도의 성장세인 대한민국 경제가 파탄이 나면서 절반에 가까운 대기업들이 모조리 부도가 나고 최악의 경제 위기가 찾아온다.
그 당시 이혼이라던가, 누군가 자살했다던가 행방불명이 됐다든가 하는 불행은 흔한 스토리 중 하나일 뿐. 지옥의 시대였다.
* * *
“회장님.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성인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정 비서가 말했다.
서 회장은 의자를 돌린 채 바깥 풍경을 보며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정 비서가 옅게 다시 인기척을 내자 서 회장이 돌아앉았다.
“그래. 한번 읽어 주게.”
“지난번 투자 방식은 여전히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현금화하고 공격적으로 다시 투자한 데의 수익률이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어느 정도지?”
흥미로운 얼굴로 서 회장이 물었다. 어린아이가 운영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 자신을 닮아서 돈 계산에 빠른 것인가.
“다시 말해 보게. 얼마라고?”
“수익실현 한 금액은 1억. 재투자한 종목들의 현재 가치는 약 11억 4600만 원. 거의 1200%에 가까운 수익률입니다.”
“일반적인 펀드 매니저의 수익률이 어느 정도인가?”
“보통은 이렇게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제대로 운영을 한다면 300% 내외입니다. 요즘 같은 호황장에서는 물론 500% 이상 수익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초보에게는 말도 안 되는 수익률입니다. 급등주식이나 테마주를 노리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정도 수익을 낼 순 없습니다.”
“허허. 이 무슨 일인가. 10억이 넘는 수익을 단지 어린애가 만들어 냈단 말인가?”
정 비서가 다시 서류철을 넘기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투자 방식입니다.”
“공격적인 투자 방식이라고 언급했지 않는가?”
“네 그런 부분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과감합니다. 사람은 잃는 것에 대한 공포감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수조 원대의 자산가가 아닌 이상 억 단위의 돈을 투자하는 데 이렇게 과감하게 투자한다는 것은······.”
정 비서가 잠시 말을 끊는 참에 귀 기울이고 있던 서 회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 회장의 인내가 바닥나기 전에 정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마치 작전주와 급등주를 훤히 알고 투자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 부분에서 아드님께서 직접 투자했다는 것에 약간 의문점이 드는 찰나 두 번째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계속 말해 보게.”
“마치 모든 자본금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듯이 30%의 자금만 운용한 점. 그 30%에 해당하는 원금 수익률이 1200%에 달하는 점. 그리고 주식을 매도하기 전 70%에 해당하는 주식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서 회장의 눈이 번득였다. 미친 듯한 수익률에 이어서 딱딱 짜 맞춘 듯한 투자 비율과 증여된 주식. 누가 봐도 대신 투자를 해 주고 70%의 이익금을 먹는 모양새가 아니던가.
“주식이 이동한 경위 파악 및 증여세 신고 기록을 뽑아 놓도록 하게.”
이 정도라면 자신을 떠보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을 뽐내는 수준이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그리고 지금 당장 서현우를 불러 오게.”
* * *
기한증권 사무실
“고 대리, 그 소식 들었나?”
김 팀장이 고 대리에게 물었다.
“어떤 거 말입니까?”
“최근 한 녀석이 작전주에 가담하고 수익을 기가 막히게 냈다는데.”
“네네. 저도 얼핏 주워 들었습니다.”
“근데 그 규모가 1억으로 10배 넘게 수익을 냈다는 말이 있네.”
“10배요? 그럼 돈이 얼마야. 미친 거 아닌가요? 작전 친 건 아니구요?”
“작전은 아닐 걸세. 그놈 나이가 중학생이니까.”
“중학생이요? 말도 안 됩니다. 차명으로 한 건 아닐까요?”
“진위를 모르니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한번 그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 * *
OO증권 VIP실 입구
“서현우 님, 들어오세요.”
역시 부자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응접실부터 뭔가 특별히 보였다. 본인만 부자라는 자각이 없을 뿐, 이미 증권사와 은행사에서 서현우는 유명인사다.
“저, 도련님. 죄송하지만 VIP실은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옆에 계신 분과는 어떤 관계 시죠?”
“아. 제 절친한 친구입니다. 친구가 함께 들어가지 못한다면, 저도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조리 있게 대답하는 서현우. 태현은 새삼 친구 한 놈은 잘 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현우의 대답에 직원은 굉장히 당황한 듯 급하게 어디론가 무전을 날렸다.
“예,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네 친구분도 함께 들어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마련된 응접실. 그곳에서는 서 회장의 기업과 관련된 일을 대표로 맡아서 처리하는 세무사가 깔끔한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해당 주식의 70%를 친구분께 증여하고 싶단 말씀이시죠?”
“네, 지금, 이 시간에 증여하고 싶습니다.”
“주식을 갑자기 매수한 후 수익도 나지 않은 채 증여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순간 어린 서현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현우는 차분히 말했다.
“제가 일일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세무사님!”
표정이나 행복한 것이 아버지를 똑 빼닮았다.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는 듯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와 행동.
“아,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당황한 세무사는 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방식은 보통 대기업 회장들이 자식에게 증여할 때 세금을 탈세하기 위해 하는 방식일진데. 어찌 이리 어린아이가 알고 있단 말인가? 아버지가 처음 계좌를 만들어 줄 때 그 짧은 사이에 배운 것일까.’
“아 그리고 하나 지켜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도련님.”
“제 아버지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계좌는 제게 증여한 것. 어떻게 사용하든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처리하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태현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부분 내용을 자신이 미리 알려 줬다고 하지만,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영락없는 귀족가의 자제였다.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회장님께 보고드리는 것도 제 의무 중 하나입니다.”
예상에 없던 대답에 현우가 당황하려는 찰나 태현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개인의 재산 이동 여부를 본인 동의 없이 제공하는 것이 합법적인가요?”
세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회장 아들까지야 어린 나이라 해도 자신의 밥줄이 달려있으니 참아 주지만, 이 녀석은 또 뭔가.
“합법은 아닙니다만······.”
“그럼 현우 말대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세. 무. 사. 님.”
“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 * *
“회장님, 말씀드린 자료 모두 모아왔습니다.”
태현의 공작은 사실 어설픈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세무사가 입을 다문다 해도, 서 회장 정도의 능력이면 쉽게 그 내역을 알 수 있을 터.
다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드님도 호출하였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잠시 후 집사가 문을 열어 주자 현우가 응접실로 걸어 들어갔다.
“앉으렴.”
현우의 앞에는 간단한 다과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현우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집사를 잠시 불러세웠다.
“오렌지 주스로.”
“네, 도련님.”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는 서현우. 그런 아들을 보는 회장의 눈이 미묘하게 움직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 아들이 맞구만.”
“네, 아버님.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서현우도 이미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불려 나가는 것. 오히려 칭찬을 들을 일이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현우가 친구를 참 잘 뒀나 보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김태현의 계좌로 주식 총합 46000주가 증여되었더구나.”
이 말에는 현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재미로 시도했는데 너무 스케일이 커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 제가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를 벌 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김태현이라는 친구의 얼굴은 한번 봐야겠구나.”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 회장이 말했다.
“다음번엔 네 친구를 소개해 주지 않겠느냐. 궁금하구나.”
# 도약을 위한 발판
“누나, 할 말이 있어.”
3살 터울의 친누나. 화려하고 예쁘다는 평을 들을 외모는 아니지만 단아하고 정돈된 외모. 고등학교에 간 이후 제법 인기도 있다고 들었다.
“응 태현아, 잠시만 하던 거 다 끝나가거든.”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누나를 태현이 담담히 쳐다본다. 누나의 머리 위에 홀로그램이 떠 오른다.
이름: 김서아
성격: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함. 가족을 무척 아낌.
성공도: 90/100
특이 사항: 대한민국에서 촉망받는 인재상.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행복한 미래를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음. 하지만 세상은 그리······
누나의 상태창은 무언가 남들과는 다른 점이 보였다. 일단은 가장 중요한 성공도였다. 보통 일반적으로 성공도는 50~70선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누나의 경우는 90. 하라는 대로 해서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누나의 성공도가 이렇게 높다는 것은. 태현과의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것.
그리고 처음으로 상태창이 완결형이 아니다. 불안하게 찍힌 점 세 개가 괜스레 맘에 걸린다. 하지만 이제 우울한 생각만을 하며 안주할 시간이 없다.
태현이 깊은 생각에 잠시 빠지는 동안 누나가 과제를 마무리 지었다.
“자~ 우리 꼬마 태현 님. 무슨 고민이 또 있으실까요?”
피식.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어허. 누나를 비웃고 그러면 못써.”
하긴, 누나의 눈에는 여전히 나는 중학생 코흘리개로 보일 테지.
“초코우유 사러 가자.”
“그래 콜. 우유는 동생이 사는 거지?”
“와, 날도둑이 따로 없네.”
딸랑.
가게에 들어서자 카운터 뒤에서 누워서 티브이를 보던 아주머니가 이불을 걷고 부스스 일어났다.
“아휴 우리 예쁜 남매들 또 왔네. 초코우유 사러 왔어?”
“네 아주머니 초코우유 두 개 주세요.”
결국 늘 그렇듯 계산은 누나가 했다. 서아 입장에서는 동생을 골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태현은 어릴 적 자주 들리던 슈퍼의 풍경이 새삼 생경하다. 손님이 없을 때는 주인아주머니는 누워서 티브이를 보다가 자주 잠들어 있곤 했다. 어린 기억에 몰래 군것질거리를 도둑질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요 녀석들도.
어느새 ‘해피’와 ‘콩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 무릎에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요 녀석들도 잘 있었구나. 진짜 오랜만이다. 이 슈퍼도 나중에는 여러 편의점들이 들어오면서 사라지게 되겠지.
가끔은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는 게 서글플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다. 타인 모두를 신경 쓰다가는 부자가 될 수 없다.
“야. 김태현이. 너 요새 좀 이상하다?”
“응? 뭐가.”
“너 요새 왜 이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아?”
“아아. 그런 건 아니고 철이 좀 들었다고나 할까.”
“자. 그럼 철든 우리 동생님 고민을 한번 들어 볼까나.”
누나가 털털하게 슈퍼 앞에 있는 평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두워진 밤하늘. 이때는 여전히 별들이 밝았구나.
“나 고등학교 안 가.”
“응응”
“뭐?”
초코우유를 쪽쪽 빨아 먹던 서아가 당황해서 우유를 튀기며 반문했다.
“아씨 더럽게. 다 묻었잖아.”
“아이고 그래쪄여. 누나가 닦아 줄게.”
서아가 티셔츠 소매로 태현의 얼굴을 닦아준다. 이미 정신연령은 다 큰 어른인 태현은 조금 낯부끄럽지만, 왠지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래. 천천히 설명해 봐.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유가 뭔지.”
“누나는 어떻게 살고 싶어?”
“나? 나야 좋은 대학 가서 우리 가족들 행복하게 살면 그게 최고지. 멋진 남자 만나서 시집도 가고 우리 가족처럼 알콩달콩 가족도 꾸리고.”
“그렇구나. 누나는 그렇게 쭈욱 나아가. 나는 아마 다른 길을 가야 할 것 같아. 공부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건 아냐. 검정고시를 봐서라도 고등학교 졸업은 꼭 할게.”
“너 농담이 아니구나.”
“응. 나는 일반적인 길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학교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어. 단순히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냐.”
“흐음.”
서아는 단순히 치기 어린 투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지한 답변에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럼 학교에 가지 않고 네가 하고 싶은 건 뭔데?”
“누나랑 크게 다르지 않아. 다만 나는 돈을 많이 벌 거야. 학교에서 알려 주는 공부보다는 현실 세계의 공부를 하는 거야. 더 많이 겪어보고, 더 많이 벌어낼 거야.”
“일단 알겠어. 부모님한테는 당연히 비밀이겠지?”
“응 아직까진!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니 때가 되면 내가 말씀드릴 거야. 반대하진 않는 거야?”
“솔직히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많아. 내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 다만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거면 충분히 고민해 본 문제인 것 같으니. 응원하지는 못해도 반대하진 않을게. 꼭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김서아.
누나는 그랬다. 자신이 믿는 신념이 뚜렷하게 있더라도 누구의 말이라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자세.
상대방을 포용하려는 능력이 높은 편이었다. 그런 성격이 성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터인데. 어쩌면 그런 부분이 태현과의 합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
* * *
“정 비서!”
“네,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그 김태현이란 친구는 언제쯤 도착하는가?”
“금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6시까지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서 회장은 신문을 펼쳐 들었다. 신문에는 계속해서 서 회장의 아현 그룹과 1, 2위를 다투는 신형 그룹의 이야기가 도배되다시피 했다.
두 마리의 용이라 불리며 아현 그룹과 신형 그룹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주도한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다만, 신형 그룹이 문어발식 확장 및 과감한 투자로 인해서 일인자 자리를 굳혀가는 형세.
“정 비서, 지난번 쇼핑몰 관련 사업 진척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저······. 그게.”
“시간 끌지 말고 정확히 보고하게.”
“건설 허가 부분에서 공무원과 조금 마찰이 있습니다. 추측하기로는 신형 쪽에서 아무래도 방해 공작을 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두 그룹 모두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대형 쇼핑몰 건설을 앞두고 부지선정 및 확장에서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
“통과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그게 확답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공무원들을 접촉하고 있지만, 신형 측의 기세가 만만찮습니다. 빠르게 사업을 재검토하고 다른 쪽을 선정할······.”
쾅.
쨍그랑.
서 회장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을 내리치는 순간 물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신형 그룹에 칼자루를 내주자는 것인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서 회장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졌다. 나름 양심적인 경영을 유지해 온다고 생각했지만, 냉정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좋은 미덕이 아니다.
철저히 안면몰수 하고, 기업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신형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순간 서 회장은 어쩌면 제 아들의 친구가 타개 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일인자의 자리를 내준다는 위기라 해도, 얼굴도 보지 못한 중학생 나부랭이한테 기업의 미래를 기대하다니.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서 회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태현이 친구인 서현우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아 네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태현이와 현우가 요새 부쩍 친한 것 같아서 오늘 저녁에 초대해서 식사하려고 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네네 태현이 불러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전화 바꿨습니다. 김태현입니다.”
“아, 그래 네가 태현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다.”
밝은 음색이지만 단단한 느낌. 목소리만으로 모든 걸 파악할 수 없지만 뭔가 다른 점이 있다. 서 회장은 특유의 촉으로 파악했다.
“네 현우 아버님. 저녁 같이 먹자고 한 건 현우한테 전해 들었어요. 댁까지 어떻게 가면 되나요?”
“아 걱정하지 마라. 기사를 보냈으니 시간에 맞춰 도착할 테니 타고 오면 된단다.”
“네 그냥 편하게 밥만 먹고 오면 되죠? 헤헤.”
나이에 맞게 웃어 보이는 태현. 하지만 서 회장은 자신의 촉이 맞는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일반적인 중학생의 대화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을 살짝 떠보는 듯한 느낌.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는 철저한 존대.
“그래그래. 좋아하는 요리로 준비해 놓으마.”
“와. 감사합니다.”
잠시 후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태현이 문을 열었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비서가 웃음을 띠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 회장님 비서 정현성입니다. 댁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름: 정현성
성격: 충성심이 높으나 기회를 잘 잡는 성격.
성공도: 75/100
특이 사항: 충성을 바치는 성격이나, 기회가 된다면 빠르게 변절할 수도 있는 자이다.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적절한 당근을 준다면 상당히 유용하다.
흐음. 현재는 서 회장의 밑에서 얻어먹을 부분이 많다는 것인가. 빠르게 스캔을 해 보니 깔끔하게 단정된 머리카락과 피부색, 액세서리 등을 보니 잡일을 진행할 때 상당히 유용한 인물일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네, 아저씨. 반갑습니다.”
“차로 가시죠. 바로 밑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입구로 내려가자 검은색 고급 세단이 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민형 아파트 앞에 고급 외제 차라. 상당히 언밸런스한 광경이었다.
정 비서가 문을 열어 주자 널찍하고 고급스러운 실내가 드러났다.
“와.”
이건 청년 김태현이 봐도 감탄했을 터. 차의 실내에 냉장고와 스크린부터 없는 게 없었다.
‘이것이 부자의 세계구나.’
“도련님과는 사이가 각별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네. 저희야 초등학교 때부터 워낙 친했으니까요.”
“투자에 굉장한 자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책에서 본대로 한번 따라 해 봤어요. 전 게임에서도 돈 버는 걸 제일 좋아하거든요.”
사소한 잡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서회장의 저택 앞이었다. 실내에서 버튼을 눌리자 거대한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대문을 지나서도 넓은 정원을 지나서야 차는 멈췄다.
“태현아!”
현우가 반가운 얼굴 반. 염려하는 얼굴 반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옆에서는 정 비서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대기하고 있었다. 태현이 현우에게 다가갔다.
“혹시 어디까지 알고 계셔?”
“거의 다 알고 계신 것 같아. 세무사 측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파악하셨나 봐.”
“괜찮아. 작전대로만 하자.”
흠흠.
둘의 귓속말이 이어지자 정 비서가 인기척을 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1층은 바닥이 온통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있고 고급스러운 문양의 카펫이 계단을 향해 깔려 있었다.
셋은 영화에서만 보던 것 같은 거대하고 고급스러운 계단을 따라 식당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똑똑
“서 회장님. 도련님과 친구인 김태현 군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 위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양식 요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끝에는 서 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 회장의 인자한 웃음 위에는 날카로운 눈빛이 감춰져 있었다. 보통의 인물들은 서 회장의 눈을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녀석 보게? 눈을 안 피하는군.’
* * *
늦은 시각. 태현의 방.
‘예상보다는 빠르지만, 미끼를 물었어. 서 회장이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는 것은 순수한 호의는 아닐 터.’
내 최종목표는 우리 가족 전체를 몰살시킨 신형그룹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용머니도. 염전 작업반장 그 개X식도 기필코 박살을 낼 터이다.
다만 국내 1, 2위를 다투는 부와 권력을 모조리 가진 신형 그룹을 밑바닥부터 올라가서 무너트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 정도의 인내력은 없다.
1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라이벌 기업을 일인자로 만들어서 무너트리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그편이 빠르다. 태현은 후자를 선택했다.
‘필시 서 회장은 경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서 회장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제일 빠른 방법은 실력을 보여주는 방법뿐.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으며, 신임을 얻어야 한다.’
회귀한 다음부터 태현은 이상하리만큼 기억력이 향상되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는 지나간 기회들. 의미 없는 사건들이 이번 생에서는 강력한 발판이 될 터이다.
이번에 쓸 무기는 정해졌다.
* * *
주안중학교 하굣길.
교문을 지나 내리막길에 평상복 차림을 한 사내 둘이 태현과 현우를 유심히 지켜보다 다가간다.
“혹시 김태현 군 맞습니까?”
태현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스킨해 보았다.
이름: 고진성
직업: 기한증권 펀드 매니저
성격: 승진욕이 뛰어난 인물.
성공도: 65/100
특이 사항: 기한증권 펀드 매니저로 근무중. 제법 괜찮은 실력을 인정받아 향후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나쁘지 않은 프로필이라고 태현은 생각했다. 빠르게 스캔을 끝낸 태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제가 태현인데요. 무슨 일이세요?”
“아아 반갑다. 아저씨도 투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태현 군이랑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
“아. 혹시 어떤 얘기요?”
“얼마 전에 OO주식을 매도한 게 네가 맞니.”
“네 그렇긴 한데요. 저도 잘 모르고 한 거예요. 제가 자주 쓰는 제품이 거기 회사에서 나오거든요!”
고진성 대리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던가.
“그럼 그 자금은 어디서 난 거니?”
“흠흠. 무례하시네요. 옆에 저는 보이지도 않나 봐요?”
서현우가 조금 삐졌다는 티를 감추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너는 그.”
“서현우입니다.”
“아현 그룹의 서현우?”
“저희는 조금 바빠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더 할 말 있으면 명함으로 연락드릴게요.”
똑 부러지는 현우의 말에 고진성 대리는 급하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두 장 꺼내 한 장씩 내밀었다.
“응응 그래. 앞으로도 투자에 관심이 많으면 우리 회사랑 꼭 좋은 연이 닿으면 좋겠다. 연락 기다리마.”
사실 고진성 대리가 이 둘을 찾아온 것은 회사 측의 결정은 아니었다. 아무리 큰 수익률을 냈다 한들 어디 회사가 입증되지 않은 개인의 실력을 믿고 영입을 하겠는가.
다만 기회를 놓치기 싫어하는 고진성 대리는 이들의 트레이딩 방식에서 묘한 낌새를 눈치채고 접촉해본 것이다. 처음 대면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고진성 대리와 짧은 대화를 뒤로한 채 둘은 학교 뒤편 언덕을 올랐다. 인적이 드문 커다란 느티나무 인근. 평범한 장소지만 이곳이 그들의 아지트다.
“어때? 나랑 하는 게임은.”
지금까지는 현우가 말 잘 듣는 동생처럼 묵묵히 자신을 따라와 주었다. 그런데 태현은 조금 궁금해졌다. 아무리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른다지만, 현우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까.
언덕에 걸터앉아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서현우. 검은 새 떼가 파란 하늘 구석을 물들이고 있다.
“태현아, 저기 새들 보여?”
“응. 보이지.”
“너는 저 새가 되고 싶은 거구나.”
역삼각형 모양의 새떼에서 가장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새가 있다. 가장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새일 터. 가정환경의 영향일까. 역시나 빠른 눈치를 지니고 있다.
“다 알고 있었구나.”
“응 게임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너와 나는 정말 다른 것 같아. 난 선두가 되기 싫어 발버둥 치며 살았는데. 넌 저 앞쪽에 서고 싶구나.”
“응 무리 속에서. 아니 그 무리에도 못 끼고 뒤처지는 삶은 이제 질려.”
“이제 질린다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고.”
현우는 태현이 가끔 세상을 다 살아본 것처럼 얘기한다고 생각했다.
“네 짐작대로 이건 게임이 아니야. 하지만 또 게임이기도 해.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계급은 존재하거든.”
“계급이라니?”
“이 자본주의에서 네가 있는 위치는 최상위권. 즉 귀족의 위치야.”
“그럼 너는?”
“불가촉천민.”
“불가촉······ 천민?”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더 하위로 떨어진다면 서민의 끝. 노비보다 못한 위치. 누구든 하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거야.”
“지금도 너와 나는 같은 위치에 있는 거 아냐? 오히려 네가 앞서가는 거 같아.”
역시 온실 속에서 자란 티는 벗어날 수가 없다. 나락으로 떨어져 보지 않은 자는 절대로 느껴보지 못한 감정.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삶. 소모품. 인간 이하의 취급.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조만간 아버지께서 나를 호출할 가능성이 커. 나는 너와 동등해지고 함께 가기 위해서. 내 능력을 입증해야 할 거야.”
“왜 그래야 하는데?”
“가진 자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싸우고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거든.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야.”
‘너랑 나랑 똑같은 나이인데.’라는 속마음이 현우의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아버지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거야?”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 * *
“그래 들어오게.”
저 녀석이 바로 김태현이군. 간도 크게 내 아들놈의 돈을 이용해서 막대한 수익률을 냈다는 놈. 서 회장의 입장에서 1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돈이었다. 다만 아들에게 준 돈을 저런 새파란 녀석이 함부로 만진 것은 다른 문제. 서 회장의 입은 인자하게 웃고 있지만, 눈빛은 냉정히 가라앉아 있었다.
저 녀석이 진짜 물건일까.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일까.
이제부터 그 껍질을 벗겨보아야 할 것이다.
“도련님 친구분께선 여기 앉으면 됩니다.”
테이블의 양쪽 끝에는 서 회장과 김태현. 그 가운데는 서현우가 앉아있다. 그들의 앞에는 냅킨과 식기, 수저가 세팅되어 있었다.
“자자. 음식이 식기 전에 일단 들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회장님.”
“그래. 그래. 예의가 바른 아이구나.”
세 명의 앞에는 간단한 샐러드와 스프. 스테이크와 해산물 요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현에게는 이런 양식 요리는 비싸서 자주 접해보지 못한 요리. 특히 어린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던 것들이다.
태현의 조금은 엉성한 나이프 질에도 고기는 부드럽게 썰렸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웰던으로 잘 익힌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태현은 감탄했다. 고기의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서회장이 입을 열었다.
“입맛에 맞는지 잘 모르겠구나. 그래 김태현 군은 언제부터 투자에 관심이 많았는가?”
‘아오. 식사부터 하자더니. 이 영감탱이가.’
필시 심리전일 것이다. 미묘하게 불편한 순간에 말을 건다. 그것도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본격적인 질문을. 태현은 살짝 불편했던 속마음을 숨기고 음식을 꼭꼭 씹고 나서 대답했다.
“아 어릴 때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연히 접한 주식투자 책들을 읽고 저도 해 보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정 비서가 서 회장의 잔에 와인을 따르자 서 회장이 입을 축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투자 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와인을 머금고 있을 때 태현이 갑자기 기습적으로 입을 열었다.
“서 회장님은 쇼핑몰 사업은 잘되고 있으신가요?”
‘허허. 이놈 보게나. 나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인가?’
“하하. 내가 어떤 사업을 하는지도 관심 있게 보고 있구나.”
“네 그냥 신문을 보다 보니 알게 됐어요. 아현 그룹은 대한민국 일류 기업이잖아요. 헤헤.”
립 서비스는 두 종류가 있다. 상대방이 칭찬이라는 것을 모르게 은연중에 치켜세워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립 서비스인 것을 알면서도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것. 이번의 것은 후자다.
“일류 기업이라. 글쎄다.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꼭 그리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오가는 대화 속에 서현우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따라가느라 바쁘다.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현우는 여전히 아버지가 조금 불편했다. 모든 것을 지원해 주지만 그 속에는 묘한 압박과 기대감이 존재했다.
꿀꺽.
서 회장이 소리 내어 와인을 삼키더니 차분한 눈빛으로 김태현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녀석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진담인가.
푸흡
하하핫하하하하.
서 회장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저런 새파란 애송이 녀석을 보았나. 감히 누가 누구를 만들어.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해서 아현 그룹을 일궈온 자신이다. 그 누구의 손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웃음을 멈춘 서 회장이 입을 열었다.
“투자는 배포 있게 잘하더니. 말하는 것에는 허세가 끼어 있구나. 어른을 상대로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단다.”
“회장님께서도 많이 알아보시고 저를 부른 게 아니시던가요.”
이미 식사는 멈추었다. 태현의 그릇에는 한 조각을 제하고는 새 음식과 다름없는 스테이크가 놓여있었다.
“내가 너 같은 어린아이를 뭐를 보고 믿겠느냐? 말해 보아라.”
“저를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제 실력을 믿으시지요.”
“네 실력이라. 현우의 돈으로 산 주식 70%를 네가 양도받은 것으로 전해 들었다. 그 돈으로 실력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회장님.”
서 회장을 부른 후 태현이 잠시 침묵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서 회장의 무표정한 얼굴에 파동이 생기려는 찰나.
“베팅 한번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하. 건방지기로는 하늘 무서운지 모르는 녀석이구나. 당돌하기도 한 게. 대화하는 것도 꼭 투자방식을 빼다 닮았구나. 정말 다 알고 대화를 주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던져보는 것인가.’
평소의 서 회장이었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코웃음 치며 진즉에 태현을 대문 밖으로 내쫓았을 터.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만을 중요히 여겼다.
다만 미묘한 촉이 서 회장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저 당돌한 표정을 하는 아이의 자신감 이면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촉.
“그래. 어떤 베팅인지 말이나 한번 해 보아라.”
“제가 드릴 제안은······.”
* * *
쏴아아아아.
목욕탕에서 태현이 등줄기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20분째 맞고 있었다. 베팅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패를 일부 공개하며 시작한 베팅. 회장의 신임을 얻기까지는 3년이 남았다. 그동안 자신의 집안의 내실을 다지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뚝
쏟아지는 샤워 물줄기 밑은 상념 하기의 최적의 장소다. 갑자기 물줄기가 멈추는 바람에 태현이 고개를 돌렸다.
“가끔 보면 진짜 아저씨 같다니까.”
심심했던 현우가 물줄기를 잠근 것이다. 태현은 버릇처럼 같이 사우나실로 들어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현우와 함께 온탕으로 들어갔다.
“현우야. 난 이제 중학교 3학년을 마지막으로 정규 교육은 끝이다.”
“고등학교에 안 가겠다고? 어째서?”
“그건 말하자면 길어지고. 이대로 인연을 끝내기는 싫어. 서 회장님이랑 약속한 부분도 있고. 3년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 볼 생각이야. 그 과정에는 불법적인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너는 끼어들지 마.”
“흐음 일단 알겠어. 도울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고.”
중학생 3학년 둘이서 목욕탕에서 나누기엔 다소 진지한 얘기들. 주위에 있던 아저씨들은 ‘요새 애들은 따라가기 힘들어.’ 따위의 말을 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도움 한번 받아도 될까?”
“어떤 건데?”
“나랑 같이 잠복근무를 좀 해야겠다.”
태현과 현우가 향한 곳은 서울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복권 판매소.
1등 당첨이 7번이나 나온 명당자리다. 수백 명이 넘는 인파가 ‘띠띠 복권’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복권이라도 사게?”
“글쎄. 큰 뜻이 있단다. 일단 기다려 봐.”
태현의 눈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상태창을 훑어본다고 정신이 없었다.
높고 낮은 성공도 속에서 유달리 높은 성공도를 가진 사람이 보였다.
성공 확률 95%.
특이 사항: 큰 거액을 단기간에 얻게 됨.
태현은 그 남자에게 접근해 은밀히 거래를 시도했다.
'이 남자가 복권이 당첨될 확률은 100%에 가깝다.'
* * *
“아빠. 엄마. 나 오늘 그동안 모은 용돈으로 재밌는 거 사 왔어요!”
간만에 가족 모두가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는 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고등어의 고소한 냄새가 정겹다.
“우리 태현이가 뭘 샀나 한번 볼까?”
태현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띠띠 복권 2장. 당시 다양한 종류의 즉석 복권이 발행되고, 소중한 세수확보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매주 구슬을 뽑아 추첨 결과를 알려 주는 띠띠 복권.
1등 당첨금은 3억 원이었다. 언제까지나 태현이 수익을 얻고 있는 것을 숨길 수는 없는 법.
“허허. 녀석 참. 저번 주식놀이 때도 그렇고. 돈에 관심이 많긴 많나 보구나.”
“너, 이놈. 공부는 안 하고 이상한 거에 바람 들렸구나.”
서아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가져갔다.
딱.
“서아야.”
“네. 어마마마.”
뻘쭘해진 서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우리 집은 항상 아버지가 먼저 식사를 시작하신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존중하는 방식 중 하나.
“그래그래. 헛바람 들지 말고 밥이나 먹자꾸나.”
아버지가 식사를 시작하자 조용하던 분위기는 수저 소리와 국물을 떠먹는 소리. 티비소리와 어우러져 복닥복닥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추첨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특유한 멘트와 함께 이주의 추첨이 진행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복권은 총 2장. 올해의 복권은 이월이 되어 1, 2등 합산 금액은 4억 원가량.
띠띠 복권의 추첨번호는 총 7자리. 내가 가진 두 장은······.
2351521, 2351522
회귀를 했지만, 아쉽게도 복권 당첨 번호는 기억이 나지 않아, 이런 편법을 통해 성공도가 극도로 높은 사람의 복권을 거액을 주고 구매했다. 그 직장인 아저씨는 처음에는 태현을 별 미친놈 다 보겠네 하는 눈빛으로 보다가 현찰로 3000만 원을 건네자 미련 없이 복권 2장을 넘겼다.
“자 번호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2! 3! 5! 1!”
당첨 번호를 부르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마마마, 오늘 고등어가 굉장히 잘 굽혔사옵니다.”
서아가 능청스럽게 엄마의 요리 실력을 칭찬했다. 어머니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 예. 따님마마 많이 많이 드시옵소서.”
“여보 잠시만.”
무뚝뚝하던 김기석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태현아 너 그 복권 다시 한번 보자꾸나.”
태현의 손에 들린 복권의 번호는 2351521과 끝자리만 다른 두 장이었다.
“그다음은 5!”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놀란 어머니의 시선도 복권으로 향한다. 7자리 중 5자리가 일치했다.
“마지막 전 자리는 2! 오늘의 행운의 당첨자는 누가 될 것인가.”
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모님의 뒤로 가서 뚫어지라고 복권을 쳐다보았다.
“자! 잠시 광고 보고 오겠습니다.”
한동안 네 가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긴장감을 뚫고 태현이 말했다.
“누나. 나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
며칠 전 초코우유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던 날 태현이 뜬금없이 말했다.
“누나 그거 하고 싶은 일 있잖아. 미국에서 공부하면 더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 맞지?”
서아는 경영학 전공을 희망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을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가능하다면 더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게 유리한 법. 하지만 그건 그저 욕심일 뿐. 당시 그들의 형편으로는 유학은 꿈도 못 꿀 선택이었다.
“그렇긴 하지. 난 아무 욕심 없다! 여기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헤헤 그럼 혹시나 내가 큰돈 생기면 누나 꼭 유학 보내 줄게.”
“풉. 복권이라도 당첨돼야겠구먼. 네네 잘 부탁드립니다. 동생님. 꼭 유학 보내 주세요.”
“어어. 안 믿네. 내가 요새 겁나 감이 좋아졌어. 막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니까.”
“아이고. 빨리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세요. 많이 자야 돼지꿈이라도 꿀 거 아닌가요. 동생님.”
“아오. 진짜 당첨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의미 없는 농담들이 현실이 될 줄 서아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망의 마지막 자리는 바로!!!!!
바로!!!!
1입니다!! 축하합니다.”
다시 이어지는 정적
복권을 잡은 아버지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태현은 이미 예정된 결과였지만,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이어 2등 당첨자는 앞자리 수가 모두 동일합니다!
마지막 자릿수는 바로 2! 기적의 연속 당첨자입니다. 행운을 잡은 럭키 가이는 누가 될 것인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먼저 정적을 깬 건 누나 서아였다.
“여, 여보! 이게 무슨 일이래요.”
“아니? 잠시. 잠시만 다시 확인해 봐.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는 너무 엄청난 현실을 차마 믿지 않는 쪽을 택했다. 서아는 밥숟가락을 집어 던지더니 소파 위를 방방 뛰었다.
“우리 태현이 최고다!”
“아이고. 우리 이제 인생 편 거에요?”
온 가족이 한 시간가량 온갖 야단법석을 피운 후에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김기석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입을 열었다.
“자. 그래도 당첨자는 태현이니까. 이 돈은 태현이 의지대로 사용하는 게 맞겠다. 다들 동의하지?”
어머니와 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현아, 이 돈으로 뭘 하고 싶으냐?
돈의 사용처는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 우선은 우리 가족은 분당으로 이사를 한다. 앞으로 예정된 큼직한 호재 중 하나는 분당 신도시.
“일단 우리 이사 가요!”
‘미래의 분당은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상 최고급 미친 집값 상승률을 보인다.’ 부동산이 더 폭등한 지역은 있을 수 있지만, 직접거주를 하기에는 분당만 한 곳이 없다.
녹지 재생 산업 등을 필두로 강남까지 뻗어 있는 고속도로가 완비되고 각종 공원이 즐비한 곳으로 발전될 곳.
“하하하. 복덩이 아들래미 덕분에 이사까지 가게 생겼구나. 장하다.”
역시 복권은 무뚝뚝한 아버지도 들뜨게 한다. 예전 생에서 콩가루처럼 철저히 완전히 박살 났던 우리 집안을 위해. 이 정도 작은 행복쯤은 누려도 괜찮다.
“네 아빠. 근데 이사 갈 집은 제가 골라도 돼요? 아빠 말대로 전 요새 돈 버는데 관심이 진짜 진짜 많거든요.”
“그, 그래?”
김기석은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을 했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이 복이 굴러들어 온 게 네 덕분인데 어디든 좋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직접 골라보거라.”
“감사합니다! 아 참. 이거 사실 제가 너무 하고 싶다고 졸라서 어떤 아저씨가 대신 구매해 준 거에요! 미성년자는 구매가 안 된다고 혼났거든요. 아버지가 대신 수령해 주세요. 헤헤.”
“알겠다. 수령한 후 네 몫으로 남겨두마.”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서아와 태현.
“요 녀석. 무슨 꿍꿍이야.”
서아가 막대 아이스크림을 연신 핥아 먹고 있는 태현을 툭툭 치며 묻는다.
“흠흠. 다 동생님의 깊은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 알려고 해도 다칩니다. 누님”
“어허. 남매끼리 벌써 숨기는 게 생긴다 이거지? 이래도 말 안 하나 보자.”
서아가 왁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 태현의 옆구리를 미친 듯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뭐 하는 짓이야. 다 커서.”
“어? 그래도 말 안 해? 이러다가 우리 태현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떨어지게 생겼네.”
“항복. 항복.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가장 핵심인 부분을 제외하고 그저 촉이 좋았다. 책에서 봤다. 꿈에서 좋은 기운이 들었다 등의 터무니 없는 근거를 들어서 분당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태현은 서아에게 설명했다.
“흐음. 이걸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봐야 하나.”
“일단! 거기는 시골이라서 공기도 좋고, 풍경도 좋아! 나름대로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 점점 발전하기도 할 거고. 지금 사는 곳보다는 훨씬 더 좋을 거야.”
“그렇단 말이지. 그럼 집은 같이 보러 다니는 거다! 꼬맹이 혼자서 또 빨빨거리고 설치고 다니지 말고.”
“예 누님 마마. 알겠사옵니다. 이사 후 내년 원서 넣을 미국 대학교나 알아보시지요”
* * *
당첨금 수령 및 세금을 제하고 남은 금액으로 분당 신도시 핵심지역의 아파트를 매입하고, 누나의 유학비를 대기에는 조금 부족한 돈.
주택을 담보로 절반가량을 대출을 끼고, 공급 평수 34평대 신축 아파트로 잔금을 치른 이사 당일
“이야 아아. 엄청나게 넓네요. 여보.”
“허허. 이거 가장이 되어서 내 힘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우리 복덩이 덕분에 이렇게 넓은 집에 또 살아보겠네.”
기석과 선화는 아들의 선택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을 보고는 믿어보기로 했다. 중3이 되던 해부터 이상하게 어른스러운 행동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묘한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
‘분당 신도시가 곧이어 발표가 나기 시작하면 호가는 미친 듯이 상승한다. 대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하면 12층의 입지는 가장 전망이 좋고 햇살이 잘 드는 로열층이 될 터. 최소 향후 10배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핵심 지역 특성상 굳이 매도할 이유가 없다.’
태현의 기억 속에서 서울 경기권의 몇 지역은 부동산 절대 불패 신화를 몇십 년째 이어가고 있었다. 이 불패 신화는 IMF가 와도 어떤 위기가 와도 주춤할 뿐. 절대 망할 수 없는 투자 방식.
이제 보금자리를 안정시켰으니. 서 회장과의 배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년간 최대한 입지를 단단히 만들 것이다.
그 전에 할 중요한 일들이 있다.
* * *
일 년 후.
헉 헉헉.
아침 7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지만, 태현의 하루는 짧기만 하다. 인근 공원을 다섯 바퀴째 뛰고 있는 태현. 다시 태어난 지금. 허투루 보낼 시간은 없다.
태현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있다. SANY에서 만들어낸 CD플레이어. 과거의 태현이 가지고 싶은 물건 일 순위가 바로 워크맨이었다.
가정 형편 탓에 차마 사달라고 말은 못 했고 부러워만 했었다. 이후 휴대폰이 발전함에 따라 노래를 넣고 다니며 아쉬움을 달랬다.
별것 아닌 CD플레이어였지만, 태현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 과거에는 차마 허락되지 않았던 물건이다. 숨이 차는 와중에 귀속으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하지만 그 결과는 명확히 바뀌리라.
태현의 노력은 운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피부와 체형을 조금 더 가꾼다면 그것 또한 자신이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다행히도 또래보다 훨씬 키가 크다는 건 장점. 상류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 외모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삼 년 뒤. 자신의 직급과 위치. 재력을 인정받아 아현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많다. 앞으로 바쁜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충분히 키워 놓아야 했다.
한참 조깅을 하던 태현이 속도를 조금 늦추며 주위를 살펴봤다. 그사이 휑했던 산책로와 강변은 많이 정비가 되었다. 꽤 현대적인 느낌을 풍기는 깔끔한 공원. 그리고 양 산책로 사이로 가로지르고 있는 강줄기.
사람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겁이 나기 때문이다. 떨어질까 봐. 혹여나 잘못된 선택일까 봐.
때로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서 더 큰 손실이 나더라도 기꺼이 감내한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작은 손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한다.
선택한 주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서 회장은 필시 자신이 제안한 선택을 할 것이다. 다만 자신의 카드를 모두 이용하지 않고 한두 장 정도만 투자했을 것이다. 그 카드가 황금 카드가 될 기회는 태현이 만들어 주었다.
선택은 이제 서 회장의 몫.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린다면 태현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상승할 터. 분명 그대로 될 것이다.
* * *
“제게 베팅을 한번 해 보지 않겠습니까?”
베팅이라니. 감히. 대한민국 1, 2위를 다투는 자신 앞에서 16살짜리 꼬맹이가 입에 올릴 단어가 아니었다. 속마음을 숨긴 채 서 회장이 대답했다.
“그래 어떤 베팅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
“서 회장님께서는 아마 저를 건방지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드님에게 물려준 소중한 자금 일부를 안면도 없는 녀석이 마음대로 운영을 했으니까요. 거기다가 일부를 증여받기까지. 이 부분은 상의 없이 결정 드려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리겠습니다.”
서 회장이 기분 나빠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집고, 그 부분의 무례함에 대해서 가타부타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정중히 사과하고 들어간다. 다만 그 목적과 앞으로의 방향도 명확히 설명했다.
“제가 해 보고 싶은 것은 바로 가능성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훌륭하신 도련님과 회장님과 같은 생활을 저는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으로 조금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보셨던 것처럼 성공적인 투자였습니다.”
“흐음. 인제 와서 인정하는 것이냐.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는 걸?”
“네 맞습니다. 이 자리에서 모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이 바뀐 이유는?”
“아현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경제를 모두 휘어잡고 흔들 수 있는 일류 기업이 될 수 있게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이 녀석은 뱀의 머리가 아니라 용의 머리가 되려 하고 있구나. 잘못 쓰면 독이 되겠지만, 몸에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패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아직은 저는 어립니다. 경험도 많이 없습니다. 저를 믿지 마십시오. 제가 보여 드리는 현실들을 믿어 주면 됩니다.”
“달콤한 첨언은 그만하고. 본론을 말해 보아라. 원하는 바가 있을 텐데.”
“3년. 저에게 한번 베팅을 해 보시죠. 그 안에 재력도 위치도 경험도 모두 갖추어서 돌아오겠습니다.”
“원하는 것은?”
“아무쪼록 쇼핑몰 사업이 잘 성공하시길 바라며, 사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을 때. 제게 자본금을 지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 재밌는 친구를 두었구나. 현우야. 아버지는 네 친구가 마음에 들려고 한다.”
앞에서는 기분이 좋은 척 웃고 있지만, 서 회장은 쉽사리 태현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사소한 사건들을 예측하고, 결정적으로 쇼핑몰 부지를 차지할 방법들을 제시해 놓았다. 여기까지 진행이 된다면, 필시 자신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 * *
서아는 거실과 주방. 안방과 태현의 방.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까지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았다. 일 년 전 태현이 부여잡은 기적 같은 행운으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일 년 남짓 지난 사이 분당은 신도시 개발 발표가 난 이후 아주 조금씩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본격적인 개발은 1989년부터 90년까지. 그전까지 자본금을 최대한 확보해 놓아야 한다.
그사이 부동산업자와 개인 투자자들이 한 달마다 고공행진을 하는 분당으로 진입하기 위해 장사진을 펼치기도 했다.
단단한 지대를 갖춘 데다가 중심지에 위치한 대단지 아파트. 일 년 전에는 왜 이런 휑한 곳으로 이사를 왔는지 서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불과 일 년 사이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도시풍경은 그 어느 풍경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근사해졌다.
‘이제 이곳도 당분간 안녕이구나.’
작은 빌라에서 복닥거리며 살았던 기억들도 행복했지만, 물질적인 만족감은 분명 확실한 행복을 선사한다.
오늘은 서아가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보내는 밤이다. 내일은 예일대 학부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딸깍.
한바탕 조깅을 끝내고 온몸이 땀으로 젖은 태현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꽤 이른 시각
“어? 벌써 일어났네. 미국으로 떠나는 게 설레긴 하나 봐. 이런 아침부터.”
“너야말로 무슨 아침부터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냐. 여자라도 생기셨어?”
역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서아다.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한 중심에는 태현이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경제와 돈에 관심이 많았는지 사건의 흐름을 관통하는 직관이 가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이상하게도 이 누나는. 흠흠.”
태현이 또 무슨 허튼소리를 할지 안다는 듯이 신경도 쓰지 않고,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컵에 벌컥벌컥 따른다.
“누님이 말씀하는데 쳐다는 봐야죠. 우리 동생님?”
“아 예예. 떠나기 전 당부의 말씀이라도 하시게요?”
“사실 난 걱정 안 해. 너 하는 거 보면 오히려 미국에 떨어트려 나도 잘 살아남을 것 같아.”
복권이 당첨된 것은 요행이라 칠 수 있어도, 그 이후 자신이 얻은 행운을 불려 나가는 것은 순수한 태현의 실력이었다.
미친 듯이 운동과 자기관리에 전념하며, 남은 자산을 착실히 주식에 대한 지식을 쌓고 불려가는 모습을 본 가족들은 이제 태현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 년 간 태현이 모은 자산은 아파트를 구매한 금액과 서아의 유학비를 제하고도 10억가량. 하지만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금액이다.
주식에 좀 더 매진했다면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겠지만,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도 필요하다.
* * *
보글보글보글.
태현이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떠올릴 때만 항상 그립게 떠올랐던 것이 바로 이 보글거리는 소리다. 어머니는 웬만해서는 저녁 밥상에 꼭 찌개를 하나씩 올리곤 했다.
선안섬에서 돼지만도 못한 배급을 받으며 죽도록 일했던 날들이 순간 떠올라 태현의 목을 살짝 매이게 했다.
후루룩
“크. 어머니 역시 찌개 맛이 일품입니다.”
“아이고. 말투만 보면 네 아빠라 해도 믿겠다. 너스레 그만 떨고 밥이나 먹어. 당분간 우리 가족끼리 밥 먹을 일도 없겠구나.”
어머니가 서아를 바라보며 애틋한 눈빛을 보낸다. 서아가 손을 휘휘 젓는다.
“아이 참. 우리 정 여사님, 왜 또 이러실까. 누가 보면 팔려가는 줄 알겠어요. 예쁘고 멋진 따님은 미국으로 당당히 떠나고 싶네요. 오늘은 울기 없기다. 약속해.”
“그래그래. 다 좋아서 그러지.”
오늘 저녁은 근사한 레스토랑에 태현이 예약을 해두었지만, 누나가 한사코 예약을 취소시켰다.
“그래도 일 년 이상 못 보는데 이 정도 사치 정도는 괜찮아. 동생은 돈이 아주 많답니다.”
“누가 돈이 아까워서 그러겠니.”
“그럼?”
“그냥. 이제 일이 년간은 한국에 못 올 건데. 떠나 있으면 집에서 먹는 밥이 제일 그리울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태현도 그랬다. 부모님의 사업이 기울고 단란한 식사 시간도 사라졌다. 대학에 가서부터는 부모님의 기울어지는 가계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 미친 듯이 돈에만 매달렸다.
아버지가 자살한 후, 어머니와 누나가 어디론가 끌려 사라진 후. 항상 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따뜻한 밥이 고프곤 했다.
“태현아.”
“응?”
“손 안 뜨거워?”
“으아아. 빨리 말해 줬어야지.”
잠시 상념에 빠졌던 태현은 손가락이 국그릇에 닿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태현은 고통스러워했지만 셋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군.’
소소한 저녁 식사 시간이 마치고 방으로 향하던 태현은 아버지가 베란다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몇 년 전에 끊은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었다.
“아버지.”
“녀석 이제 컸다고 아버지라고 부르네. 부담스럽다 이놈아.”
“뭐 고민거리라도 있어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구나. 처음엔 네가 고등학교에 가길 바랐으나, 이렇게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것도 대견스럽기도 하고. 누나도 어느새 훌쩍 커서 내일이면 떠난다니까 좋으면서도 시원섭섭하다.”
웬일인지 기석은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터놓았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모습. 그만큼 태현을 의지하고 있다는 걸까.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룬다더니. 그런 걱정일랑 접어두세요. 아버지. 저도 이제 충분히 클 만큼 컸어요.”
어른스러운 척 아버지에게 위로를 건네는 태현.
“혹시 다른 고민이 있는 건 아니구요?”
“······ 다른 고민이라니? 그런 거 없다.”
“있으시군요.”
“없다니까.”
“회사 관련된 일이에요? 공장이 요새 잘 안 돌아가고 있어요?”
“사실, 너무 잘되고 있어서 불안하단다. 자식들도 공장도 뭔가 술술 풀리는 게. 얼마 전에는 신형물산에서 납품 제안도 들어왔단다.”
신형 그룹.
적어도 신형 그룹만은 안 된다. 온 가족을 박살 내놓은 원흉. 돈이 되기 위해서는 수백 만의 인간을 쥐어짜서라도 연료로 만들어 회사를 유지할 놈들.
절대로 막아야 한다.
“아버지. 신형 그룹은 안 됩니다. 물론 현재로서 회사를 유지하는 데는 신형 그룹과의 계약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어도 나중에는 독이 될 수도 있어요.”
“나도 너무 성급한 제안이라서 거절하고 싶지. 하지만 아무리 내가 차린 공장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달린 식구들도 많고.”
“계약 조건은요? 저를 꼭 데려가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도움이 될 거예요.”
“글쎄.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런 중요한 자리에 데리고 가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아버지.”
태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차분한 눈으로 기석의 얼굴을 응시했다. 기석은 갑작스러운 아들의 행동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가 부탁 같은 거 잘 안 하는 거 알잖아요. 신형 그룹과의 계약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형물산의 경우는 납품 후려치기로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많아요. 아마 신호 그룹의 계열사인 신형물산. 그리고 그 하청의 하청과의 계약일 확률이 높을 겁니다.”
양아치 같은 놈들. 생각보다 빠르게 놈들의 마수가 뻗쳐 오고 있었다. 절대로 니놈들이 대한민국을 삼키게 놔두지 않겠다.
* * *
타닥타닥.
모두가 퇴근한 후의 불 꺼진 사무실. 창가 구석에 있는 컴퓨터 한 대가 불빛을 내뿜고 있다. 그곳에서 미친 듯이 검색을 하고 있는 이는 고진성 대리.
일전 주식으로 큰 수익을 얻은 김태현에게 접근했다가 거절당한 후 그 일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한참 검색을 하던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뭐길래 그러세요?”
고진성 대리 옆에서 김 팀장이 신문을 읽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다.
“아 글쎄, 이번에 띠띠 복권 1, 2등 당첨자가 동일인이라네. ”
“그래요? 와 진짜 재수 한번 더럽게 좋은 놈이네요. 나는 그런 행운 안 굴러들어 오나.”
한숨을 푹 쉬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고진성 대리의 뇌리에 순간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잠시만. 당첨자 이름이 누구라고 했죠?”
“김기석이라는데.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 아들이 우연히 얻은 복권을 아버지가 대리 수령했다는 지라시가 돌더라고.”
김기석의 아들이라······. 흔한 뜬 소문일 뿐이지만 증권가에 도는 지라시는 가끔씩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날 저녁.
고진성 대리가 앉아 있는 자리 명패에는 김건호 팀장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주식으로 억대수익을 올린 김태현. 그리고 김기석의 아들이라······. 뭔가 구린 냄새가 났다.
‘불법이기는 하지만. 잠시 확인만 해보는 거니까.’
고진성 대리가 검색하고 있는 것은 김태현의 개인 거래 기록 및 가족 관계서. 물론 타인의 정보를 동의 없이 열람하는 것은 불법이다. 다만 유출하지 않고 자신만 알고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고대리는 판단했다. 유들유들한 김건호 팀장은 아마 걸려도 눈 감아 줄 것이다.
한참 동안 김태현의 거래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여전히 공격적인 투자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몸을 사리는 듯한 매매 방식. 그리고 티가 안 날 정도로 조금씩 아현 그룹의 계열사 주식을 사 모으고 있었다.
‘아현 그룹의 아들과 친분이 꽤 있는 것 같던데. 뭔가 결탁한 내용이 있는 걸까.’
고진성 대리는 태현이 김기석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흐음. 뭔가 구리긴 구린데. 꼬리를 꽁꽁 잘 숨겨뒀단 말이지. 복권을 대리수령을 맡긴 데다가 뭔가 큰그림이 있을 것 같은데. 친해지면 얻을 게 많을 것 같다.’
* * *
“몇 시 비행기야?”
“한 시 출발이야. 짐부터 맡기고 잠시 쉬다 보면 출국이겠네.”
의외로 서아의 짐은 단순했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에 백팩 하나가 전부. 태현은 일단 부모님에게는 누나의 유학 비용을 최대한 축소해서 말했다.
하지만 예약해 놓은 기숙사와 생활비 등은 그동안 모은 자본금을 통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 놓았다.
“참. 내가 아직 말을 못 한 게 있네.”
“무슨 말? 난 걱정하지 마.”
“아니.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처음에 네가 고등학교 안 간다고 했을 때. 솔직히 조금은 걱정됐어.”
“별걱정을. 난 이쪽이 더 재밌다니까.”
“그래도 아직은 한국에서 학력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고. 근데 그때 나한테 네 결심을 말해 주는 네 눈빛이 너무 반짝거리고, 열정이 넘쳐 보여서 차마 반대는 못 했어.”
“그래. 누나 덕분에 나도 한결 마음이 편했어. 결국엔 이렇게 잘 풀리기도 했고.”
“응. 그래서 이제야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누나가 먼저 앞에서 이끌어줘야 하는데. 덕분에 좋은 아파트로 이사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유학까지.”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누님. 유학비 만만찮은 거 알고 있지? 이 동생님이 한국에서 열심히 돈 모으고 있을 테니까. 훌륭한 사람 되면 동생님 힘들 때 꼭 도와줘야 해.”
“당연하지. 나 진짜 열심히 살 거야.”
어느새 택시는 공항에 도착했다. 태현과 서아는 티켓팅을 하고 캐리어를 맡긴 다음 서로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게 조금 서먹하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시간 다 됐네.”
“응”
풀어놓았던 백팩을 씩씩하게 등에 들쳐 메고 일어서는 서아. 눈가가 조금 촉촉해져 있다.
“나 이제 진짜 간다.”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잘 다녀와.”
“응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내년에 못 오면 그 내년에라도 꼭 올 테니까.”
“그래. 누나. 나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살 거야. 아무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게. 누구라도 우리를 알아볼 수 있게 더 높아질 거야.”
태현의 다짐에 서아는 그저 웃어 보였다.
‘이제 누나도 떠났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
태현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이년. 이 안에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켜야 한다. 어쩌면 짧다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태현에게는 다 생각해둔 부분이 있었다.
* * *
‘거참. 신기하단 말이지.’
사업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 비서는 분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불과 일 년 전 신형 그룹과의 대립으로 쇼핑몰 사업이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저 주식을 좀 할 줄 안다는 꼬맹이 말만 듣고, 그렇게 민감한 사항을 결정한다는 게 정 비서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태현이 예측한 방향대로 흘러가긴 했다.
‘거참 신기한 녀석일세. 초능력이라도 가진 것인가.’
정 비서는 작년 기억을 회상했다.
“회장님 태현 군이 남긴 노트를 검토해 본 결과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투자에 대한 조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말투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허허. 새파란 놈이 대한민국 1, 2위를 다투는 아현 그룹에 투자 방향을 제시한 다라······. 기가 찰 노릇이군.”
당시 아현 그룹의 경우 쇼핑몰 사업뿐 아니라 건설 분야에 있어서도 조금씩 신형 그룹과 라이벌 구도를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양 날개라 불리며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지만, 신형 그룹에 조금씩 밀리는 모양새.
둑에 금이 가듯. 처음에는 사소한 주도권 다툼이 결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면 2위의 자리로 확고히 밀려날지도 모른다.
그런 부담감과 자식에 대한 생각. 그리고 평생을 아현 그룹의 성장에 바쳐왔던 것들이 서 회장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듣는 데는 돈이 들지 않으니, 도대체 뭐라고 조언하고 있던가. 한번 들어나 보세.”
“네 브리핑하겠습니다. 조금 내용이 깁니다.”
안녕하세요. 서현우 아버님. 아현 그룹 회장님보다는 조금 더 친숙한 표현으로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투자 건을 계기로 아버님과 식사를 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저희의 만남이 일회성 만남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장 고민인 것은 신형 그룹과의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는 정보들이 의심쩍을 수도 있을 거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씩. 제 말들을 실험해 봐도 좋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투자 부분에 있어서 저의 감이 극도로 발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트를 보는 것도. 과거와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모두 중요한 재능이지만,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미지의 ‘촉’과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1987년 현재. 서 회장님의 자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올해는 주식에 집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재작년부터 증시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언론에서는 우려의 말을 내비치곤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진정한 가치투자를 하실 수 있는 시기입니다.
고점에 사서 개털이 될 거라 경고하는 말들이 넘쳐나지만, 수익률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옥석을 가리셔야 합니다. 아직은 가장 큰 축포가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논밭을 팔고 소를 팔아서 너도나도 밑천을 준비해 주식 시장에 덤벼드는 시기가 온다면, 산처럼 높아졌던 주식의 골짜기는 그 곱절로 깊어질 것입니다. 다만 그룹 차원의 자금은 이렇게 위험한 수익성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종목은 3가지입니다.
(중략)
그중 핵심인 부분은 신성전자입니다. 올해 재미를 봤던 종목들은 대부분 시총 상위 10위권일 겁니다. 은행 주식들은 사는 순간 고공행진을 지속했지만, 그중에 가장 알짜인 것은 현재 13위를 기록하고 있는 신성전자입니다.
이 주식은 여유가 있는 만큼 구매하시되 절대로 매도하셔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은 무조건 인력이 중심이 됩니다. 첨단산업은 더 발전할 여지가 많습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을 확률도 굉장히 높습니다. 이는 단단히 붙잡고 있다가 후계자인 현우에게까지 물려주시면 금상첨화입니다.
(중략)
제 주식에 대한 조언을 충분히 실험해 보시고, 돌다리까지 모두 두드려보시고 믿음이 생기신다면. 그다음은 쇼핑몰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금 고민하고 각을 세우고 있는 부지 매입을 중단하십시오. 그곳도 충분히 중요한 위치라고 현재는 생각할 수 있지만, 신도시가 건설된다면 분당 쪽을 잡고 있는 것이 향후 아현 그룹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직은 발표가 나기 전이나 이미 부동산업자들은 움직이고 있는 경향이 보입니다. 저 역시도 올해 분당으로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제 촉이 마음에 드셨다면 저를 믿지 말고 제 행동을 믿어주시고, 따뜻한 손을 내밀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는 남은 삼 년간 제 할 일을 하며 성장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태현 올림-
상당히 장문의 편지에 대해 브리핑받은 서 회장은 삼십 분이 넘도록 생각에 빠져있었다. 태현이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주식과 부동산. 둘 모두 그룹 차원에서 관리를 하고 있지만, 리스크 높은 투자는 자제하는 편이었다.
1억을 가진 자가 100%의 수익을 내면 1억을 번 것이다. 다만 자본금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높아진다면 더 안정적인 수익률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100억을 가진 자는 10%의 수익을 내어도 10억의 이익금이 생기는 것이다. 부자들은 더 안전하게 투자하여도 더 큰 돈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자본주의다. 부자가 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회장은 공격적인 투자에 더 망설이고 있었다.
“일단 투자 관련 자문위원들을 소집하도록 하게. 그 후에 행보를 결정하도록 하겠네.”
“네, 서 회장님.”
서 회장답게 역시 자신의 감이나 느낌만을 믿고 움직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액션을 보였다는 것은 작은 기대감은 있다는 것.
세상이 태현에게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전의 삶은 톱니바퀴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태현이 중심추가 되려고 하고 있다.
* * *
“이러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아무리 사장님의 아들이라지만 갑자기 참석을 요구하는 것은 신형 쪽에서 불쾌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신형과의 납품에 관한 미팅 첫날. 갑자기 태현이 함께 입장하겠다고 밝히자 팀장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큰돈이 달린 거래인데, 혹여나 신형 쪽에서 언짢아하며 거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허.”
잠자코 듣고 있던 김기석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장의 권위를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만. 이 녀석이 계약을 그르치기 위해서 참석한다는 말인가?”
“그,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럼 무슨 말을 하는지 똑바로 입장을 밝히게.”
“아무래도 우리 회사보다는 신형물산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지 않습니까.”
“그렇지.”
“신형에 물건을 납품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현재 줄을 서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는 저희가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의 아드님을 데리고 갔다가······.”
“갔다가?”
안 팀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사장에게 밉보일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만큼 이번 미팅은 중요하다.
“아드님이 출중하신 건 알겠지만, 사업이나 미팅 경험은 없을 터인데. 절대 나쁜 의도가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흠이 잡힌다면, 계약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번 납품 규모는 저희가 작년에 받은 수주보다 3배 이상입니다.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물론 안 팀장이 승진하고, 인센티브를 잔뜩 받을 기회이기도 하다.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경험 삼아서 참여해 보고 싶다고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아니, 불미스러운 일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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