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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1권

2019.07.18 조회 2,627 추천 16


 케미 1권
 
 목차
 프롤로그
 1장 만에 하나
 2장 어느 화학 회사 인턴의 하루(1)
 3장 어느 화학 회사 인턴의 하루(2)
 4장 올드 스틸(1)
 5장 올드 스틸(2)
 6장 눈꽃의 세레나데(1)
 
 +++
 
 프롤로그
 
 
 화학은 도처에 깔려 있다.
 나무가 자라고, 눈송이가 생기고, 불꽃이 타는 모든 과정은 화학 공정이 진행되는 실험실과도 같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부분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딴 걸 알아서 뭐해?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아왔고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현상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알약 하나로 인생이 뒤바뀌기 전까진 말이다.
 
 
 1장 만에 하나
 
 
 AN 종합병원 본관.
 택시에서 막 내려선 청년의 눈초리엔 긴장이 가득했다. 병원의 입구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그는 아침에 받은 문자를 조심스레 확인해 보았다.
 [KG화학 건강 보조제 1상 임상 시험 : 12월 9~10일 양일간, 4층 약학지원 센터]
 청년은 후, 하는 심호흡과 함께 어깨를 한껏 뒤로 젖히며 당찬 기세로 문을 지났다.
 그러길 고작 3초.
 자동문을 넘어선 청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러오자 가뜩이나 졸이던 맘이 바짝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얌마, 한정우. 쫄 거 없어. 그냥 영양제 먹고 돈 챙기는 간단한 일이라고.’
 로비에서 마주친 안내직원이 어디가 불편한지를 묻는 듯한 시선을 건네 왔다. 정우는 괜찮다는 듯 엷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 얼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상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사이, 정우는 은빛 광택이 있는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스물 중반의 건장한 청년.
 살집 없는 몸매에 키는 큰 편.
 눈동자는 대체로 갈색.
 오늘 참여하려는 임상 테스트의 모집 요강 일부분이기도 했다. 구직사이트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보았던 공고. 문제는 그 아래 있던 추가 조건이었다.
 
 [일주일 이상의 혼수상태를 경험해 본 적 있을 것.]
 [불면증, 과다 수면증이 번갈아 온다.]
 [가끔 보이지 않는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 든다.]
 [한 번도 겪지 않은 일이 이미 겪은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 많다.]
 
 십여 개의 조건 특이한 조건 중 하나와도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는지도 모르겠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을 뽑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난······.’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딩동.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데 “잠시만요!”라고 급히 외치며 달려온 한 남자가 있었다.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 눈길을 던지던 정우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과 비슷한 체격에 다소 창백해 보이는, 모집 요강의 외형 조건에 들어맞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정우를 보고 물었다.
 “혹시 임상 시험 가시나요?”
 “네? 아, 네.”
 “휴, 다행. 여기가 맞았어.”
 추운지 양손을 겨드랑이에 넣고 몸을 움츠리던 남자가 곁눈질로 정우를 한 번 쓱 훑었다. 그러곤 물었다.
 “처음이죠?”
 “예?”
 “초짜들은 보통 쫄아서 오거든요. 임상 시험. 솔직히 꺼림칙한 단어잖아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그렇죠.”
 남자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고혈압약을 테스트하러 갔는데 먼저 설사약을 먹이고는 러닝머신 위에서 종일 뛰라고 하더군요. 몸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 극한 상황에서의 혈압 변화를 체크해야 한다나.”
 “끄, 끔찍한 체험이네요.”
 “에이, 이건 약과예요. 발기 촉진제였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야동을 틀어주면서 자위를 하라고······.”
 “자, 자위요?”
 “주사기로 뽑아줄까? 아니면 스스로 뽑을래? 하는데 그럼 뭐라 그래요. 간호사한테 해 달라 그러면 바로 잡혀갈 테고.”
 “······!”
 “암튼 돌아다니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게 다 있어요. 그래도 이게 제법 돈이 돼요.”
 말하자면 이 남잔 임상 시험계의 스페셜리스트 같은 거였다. 진정하라고 조언을 하는 건지 불안을 더 부추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딩동.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복도로 나서니 대여섯의 참여자들이 더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만큼 쫄아 있는 사람 많잖아?’
 잔뜩 얼어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 틈에서 정우도 이내 자리를 잡고 잠시 뒤에 있을 임상 시험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정우 씨?”
 “네.”
 호출과 함께 들어선 방 안은 이름 모를 의료 기구가 늘어선 과학 실험실 같은 공간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두리번거리는 정우의 옆으로 한 여성이 다가왔다.
 “KG화학 선임 연구원 문채은입니다. 닥터 문이라고 불러 주세요.”
 깔끔하게 묶어 올린 머리만큼이나 똑 부러지는 목소리를 가진 상대였다.
 “우선 이쪽으로.”
 이런 장소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미모를 갖춘 연구원이 말을 붙여오자 정우는 살짝 놀란 채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테스트는 여기에서 진행될 거예요.”
 닥터 문의 손짓이 향해 있는 탁자 위에는 ‘AF-12’라는 코드명이 적힌 손가락만 한 앰풀과 주사기가 놓여 있었다.
 정우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먹는 게 아니라 주사를 맞는 거였어요? 건강 보조제잖아요.”
 당황한 정우의 물음에 닥터 문은 냉정히 대꾸했다.
 “투여 방법은 약관에 명시되어 있었을 텐데요. 본인이 동의서에 서명한 것 맞아요?”
 글자가 빽빽했던 종이 수십 장이 언뜻 정우의 머리를 스쳤다. 꼼꼼히 읽긴 했지만,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전문용어들은 기억에 거의 없었다.
 정우처럼 놀란 참여자가 또 있었는지 닥터 문은 사무적인 태도로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지원자마다 테스트 방법이 달라요. 체내 수용 가능성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투여 방식을 다양화해야 하거든요. 크림, 반창고, 물약, 에어로졸, 좌약······.”
 ‘좌약?’
 주사 정도는 매우 양호한 거였다.
 닥터 문은 카트 위의 의료 기구 중에서 혈압 측정기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기본적인 검사부터 할게요. 부작용이 다른 병증으로 인한 것인지 파악해 둬야 하거든요.”
 “부작용이라면······?”
 순간 닥터 문의 표정 속에는 ‘이게 백만 원을 거저먹는 일은 아니란 뜻이죠’라는 듯한 기색이 어렸다.
 그 뒤로는 정우에게도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혈압과 심전도 체크, 키와 몸무게 같은 외형적인 크기 측정은 학창시절 날 잡아 하던 신체검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분 뒤.
 “현재시간 16시 05분. 대상자 한정우 씨에게 ‘AF-12’ 희석 용액 투여를 시작하겠습니다.”
 닥터 문이 주사기를 정우의 팔뚝에 가져갔다.
 정우는 약간의 따끔함과 함께 주사기 속에서 0.1㎎의 액체가 신속하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됐습니다.”
 “벌써요?”
 투여 용액이 적아서 그런지 독감 주사를 맞는 것보다 더 간단했다.
 “407호 입원실에서 대기해 주세요. 12시간의 진행 반응을 지켜봐야 하니까 신체에 무리가 가는 움직임은 자제하시고요.”
 정우는 팔에 알콜 솜을 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나서는데 임상 시험계의 스페셜리스트인 그 남자가 정우에게 알은척해 왔다.
 “안에 어때요?”
 “별거 없네요.”
 “그죠?”
 정우는 탁자 위에 뾰족한 알약 형태의 새로운 ‘AF-12’가 세팅되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딱 봐도 어딘가의 구멍에 쏙 들어갈 법한 모양새다.
 ‘······파, 파이팅.”
 407호에는 정우 이전에 약을 투여 받은 대상자 몇몇이 한가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대충 눈인사를 나눈 뒤에 빈 침대에 누웠다.
 ‘별거 아니잖아.’
 잔뜩 얼어서 병원에 들어섰던 일이 무색할 만큼 아무런 사고도 생기지 않았기에 도리어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백만 원을 챙겨 떠난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잠시 후.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도중 한 남자가 들어섰다. 가랑이 사이에 무언가를 끼운 듯 엉거주춤하게 걷는 모양이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여어~ 한정우 씨!”
 그가 당연한 듯 옆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정우에게 말을 붙였다.
 “닥터 문 장난 아니죠?”
 “네, 성격이 상당히 딱딱하시더라고요. 약간 무서울 정도로.”
 “아니, 진짜 예쁘지 않아요? 나 연고 발라주는데 아주 살살 녹는 줄 알았다니까~”
 마치 팔에 연고를 바른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를 보며 정우는 턱을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 안다. 그러나 별말은 않겠다.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남자가 수다모드로 돌변했다.
 “닥터 문 말이에요. 간호사한테 살짝 물어보니까 현직 의사라네. 그런 여자가 있긴 있어. 이쁘고 공부 잘하고. 이 회사 임상은 앞으로 무조건 지원해 봐야겠어. 혹시 알아? 번호 딸 수 있을지.”
 “이런 알바를 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까요?”
 “크, 정곡을 찌르네. 정우 씨 보기보다 현실적이야. 그래도 저런 여신이 있는데 KG화학의 임상은 꼭 지원해 봐야지 않겠어?”
 자신도 저 남자처럼 임상 시험계의 스페셜리스트였다면 닥터 문 같은 미인과 함께하는 테스트를 즐기며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더했다가 간이 쫙 오그라들지도 모르고.’
 병실 안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밍밍한 간이 된 병원 식으로 저녁까지 먹고 나니 시간은 훌쩍 흘러 밤이 됐다.
 그동안 KG화학의 마크를 단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들어와 간단하게 혈압을 체크한 것이 전부였다.
 ‘응?’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병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옆의 남자는 물론이고 한창 이야기 중이던 다른 참여자들까지 죄다 눈을 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0시. 이제 잘 시간이긴 했다.
 정우도 곧 졸음이 몰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자자. 내일까지 안정을 취하라고 했으니까.’
 눈을 감았음에도 금방 올 것 같았던 졸음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11시, 12시가 되고. 새벽 1시가 되도 말똥말똥했다.
 ‘······이상하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심심한 것도 심심한데, 배까지 출출했다. 거기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기이할 정도로 적막이 흐르는 이 병실이었다.
 어떻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흔한 코골이도 없이 조용할 수 있는 건지.
 ‘에휴.’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그 때, 갑자기 병실의 문이 열렸다.
 달칵.
 안이 너무 조용했던 탓일까? 정우는 그도 모르게 휴대폰을 가슴에 올리고 숨을 죽였다.
 혼자만 눈을 뜨고 있다가 안정을 취하라는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고 알바비가 깎인다면 그것도 낭패니까.
 흰 가운을 입은 남자 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다 곯아떨어졌네.”
 “이 정도면 거의 코마 상태 아닌가?”
 “항상 느끼는 건데, 이 단계에서 병실에 들어서면 꼭 집단 자살의 현장을 보는 기분이야. 으스스해.”
 정우의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대화였다.
 “어쨌든 이번에도 실패인 거지?”
 “그러게. 닥터 문 또 실망하겠는걸.”
 “약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우리야 별일 안 하고 돈 받아서 좋긴 하지만.”
 “신약이란 게 만 개 만들면 하나 성공할까 말까라니까.”
 꼬르륵.
 하필 주린 배가 신호를 보내왔다.
 “어? 지금 소리 못 들었어?”
 “어느 쪽이야?”
 대화하던 이들이 두리번거리는 것을 실눈으로 흘깃 본 정우는 기왕 들킨 거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저기요.”
 불쑥 일어서자 들어선 이들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편의점 좀 잠깐 내려가서 컵라면 좀 먹어도 될까요? 출출해서 잠이 잘 안 오네요.”
 멋쩍게 웃으며 배를 쓰다듬는데 안색이 변한 두 사람이 새파랗게 질려 뛰쳐나가 버렸다.
 ‘왜 저리 놀라?’
 그보다 무서운 것은 두 남자가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병실 안의 다른 참여자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소름이 끼친 정우는 옆자리 임상스페셜 리스트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어깨를 살짝 흔들었으나 단잠에 빠진 남자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득 든 불안감.
 돈을 이상하게 많이 주는 임상 시험. 불법시술. 부작용. 코마에 빠진 환자들을 빼돌려 장기라도 밀매하려는······.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스치던 그때였다.
 사슴 서너 마리가 복도를 우당탕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앞서 뛰쳐나간 두 명의 남자와 낮에 마주쳤던 미모의 연구원이 방 안에 들어섰다.
 “닥터 문?”
 “정말 깨어 계셨군요.”
 문 앞에서 멈춘 닥터 문은 정우를 빤히 살펴보더니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이어 함께 온 남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돼요.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남자들이 꼭 다문 입술로 묵례를 하고 돌아갔다.
 닥터 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정우에게 다가왔다.
 “잠깐 얘기 좀 하시겠어요?”
 “이 사람들 왜 안 깨는 거죠?”
 “수면유도 약물을 섭취했으니까요.”
 “네?”
 정우는 ‘그럼 저는요?’라는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닥터 문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AF-12’를 구성하는 단백질 세포의 한쪽은 강력한 수면 유도제. 다른 쪽은 특정 지식 정보를 입힌 화합물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 같은 이중 구조를 취한 이유가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타깃하기 위함이죠. 다만 저도 실제로 반응을 보이는 표본을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어요. 만 명 중 하나일 것으로 예측됐거든요. 석 달 동안 이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는 참여자뿐이었던 터라. 대응이 매끄럽지 못했던 점 사과드릴게요.”
 전혀 예상 못 한 변명에 반쯤 얼이 빠진 정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죄송한데, 닥터 문. 제가 전공이 인문계라서요.”
 “교양 수업도 안 들었어요?”
 “······들어야 했을까요?”
 닥터 문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상식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주었다는 태도를 보였다.
 정우는 그런 반응에 순간적으로 욱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엄청 후회되네요. 경영학과 학생이 왜 약학 관련 수업을 듣지 않았는지.”
 “분자생물학이에요.”
 “그니까요!”
 정우가 작게 으르렁거리자, 닥터 문도 그녀 나름 갑갑했던지 갑자기 양손을 펼쳐보였다.
 “‘AF-12’는 두 개의 분자가 거울처럼 마주 보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이런 걸 키랄성, 혹은 광학이성질체라고 하죠.”
 손가락을 서로 거울에 비친 것처럼 까딱거리는 동작.
 “원리는 간단해요. 손이 서로 비슷하게 생겼어도 왼손 장갑이 오른쪽에 맞지는 않잖아요. 이분들에겐 수면 성분이. 한정우 씨에겐 지식 정보 성분이 작용한 거죠.”
 분명 한국어를 듣는 중이나 알쏭달쏭하기만 한 설명이 계속됐다.
 “키랄성 모르세요?”
 “키랄은 모르겠고, 그냥 막 지랄하고 싶은 기분이긴 합니다.”
 “······.”
 뜬구름 잡는 얘기가 계속되자 정우는 골치가 지끈 쑤셨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왜 전부 재워 놓고, 전 깨어 있게 한 건데요?”
 “그건 한정우 씨 본인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요?”
 “이 여자가 진짜!”
 자신은 내내 심각한데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닥터 문에 정우는 끝끝내 폭발했다.
 “사람 가지고 놉니까? 제가 맞은 주사에 수면유도 성분이 담겼다는 건 그렇다 쳐요. 광학이성질체? 지식 정보를 입힌 화합물? 나 참. 말이 됩니까? 정보를 분자 수준으로 기록하는 건 유전공학에 생물학에 게놈 프로젝트까지 건드려야 하는 기술이에요. 게다가 유전 암호화된 지식을 역으로 이해하려면, 머릿속에 염기서열 분석기라도 없는 한 불가능하다 이겁니다.”
 “보통은 불가능하겠죠.”
 “맞아요, 불가능. 유전 암호라는 게 RNA를 거처 아미노산 서열로 번역되잖아요. 운반 RNA가 아미노산을 붙드는 복잡한 분자 인식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정우는 멈칫했다.
 “······이딴 말이 왜 내 입에 쫙쫙 달라붙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끄집어낸 이야기에서 이전까지는 결코 몰랐었던 지식이 자연스레 언급되는 것에 정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아시겠어요, 하는 닥터 문 표정에 주사를 맞았던 부위를 쳐다본 정우. 팔뚝을 타고 시작된 작은 떨림이 전신을 뒤덮었다.
 “이게 대체······.”
 마치 전문 서적이 머릿속에 탑재한 것처럼 지식이 신경을 타고 자동으로 전달되는 이 상황. 정우는 결코 이전에 화학과 관련된 수업 따윈 들어본 적 없었다.
 “저한테 뭘 한 건가요?”
 “보이는 그대로요.”
 정우에게 실제로 효과가 나타났음을 확인한 닥터 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남의 지식을 그냥 주사기에 담아서 전달하는 게 가능하다고요?”
 “정확히 그 방법은 아니지만, 개념은 비슷해요.”
 이게 무슨 미친 소리. 정우는 반사적인 코웃음 치면서도,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정우 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지식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에요. 서점에 가면 누구나 꺼내서 볼 수 있는 책 수준의.”
 닥터 문이 밖을 가리켰다.
 “차가 준비된 응접실에서 남은 얘기를 마저 할까요?”
 
 AN병원의 VIP전용 라운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닥터 문이 서류 가방을 올렸다. 안에서 약병을 꺼낸 그녀는 뚜껑을 열어 간이 탁자 위에 알약 하나를 올렸다.
 투명한 캡슐에 싸여 있는 새파란 젤리 덩어리를 본 정우는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이게 뭔데요?”
 “낮에 투여받은 ‘AF-12’의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희석용액보다 훨씬 안정적인 지식을 공급받을 수 있죠. 아, 영양적인 측면도 훌륭하고요.”
 잠시 파란 알약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던 정우의 안색이 변했다.
 무언가 특정한 인물을 찾는 것 같았던 모집 요강. 이건 결코 평범한 임상 시험이 아니다.
 “그래서요? 이 위험한 알약을 저한테 먹여서 무슨 일을 하려는 겁니까? 이, 인체 실험? 설마······ 해부?”
 “위험하다니요. ‘AF-12’는 100% 안전해요. 혹시 모를 부작용이 걱정되신다면 법무팀을 통해 모든 약리 부작용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겠다는 증서도 첨부해 드리겠어요.”
 “보증이나 마나, 전 이렇게 소름 끼치는 경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
 “정우 씨를 고용하고 싶군요.”
 “······뭐라고요?”
 잘못 들었나 싶었다.
 “KG화학에 입사해 주세요, 한정우 씨.”
 당장에라도 라운지를 뛰쳐나갈 것 같은 정우의 기세를 단번에 누그러뜨리는 마법과도 같은 제안.
 “이 임상 시험은 KG화학의 연구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연구원을 고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됐어요. 연봉은 계약서에 명시해 놓았으니 확인해 보세요. 단, 직급은 인턴부터 시작이에요. 티오도 없는 데다 한정우 씨의 과거 경력이 이 계통과 무관하니까요.”
 고용. 입사. 연봉.
 대학 졸업 1년 차 정우에겐 참으로 가슴 설레는 단어들이 아닐 수 없었다.
 입사 면접으로 바쁘게 보낸 올 한해. 결국엔 취업이라는 큰 벽을 넘지 못한 자신.
 사실 이 일도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취준생 대열의 합류를 앞두고,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찾아본 아르바이트 아니던가?
 정우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릿빠릿 돌아갔다.
 자고로 협상이란 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에 주도권이 있기 마련.
 KG화학 같은 큰 기업에서의 고용제안이지만 계약직이라면 경력 쌓는 의미 외에는 없을 터.
 정우는 닥터 문이 내민 서류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계약직이요? 그럼 제 미래는요? 그쪽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줄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십니까?”
 사실, 내년 취업 시즌에 취직 못 하면 시간은 남아돈다.
 ‘저 바쁩니다’라는 기세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자 닥터 문이 고심하는 듯 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이 보였다.
 괜히 찔러본 거 아닌가 싶어 정우는 가슴을 졸이며 닥터 문의 대응을 기다렸다.
 “물론 한정우 씨의 사정을 고려치 않은 제안이긴 해요. 어쩔 수 없군요.”
 ‘나 너무 세게 나갔나?’
 “제시된 연봉에서 20%를 더 올려 드리죠. 이게 저희 쪽에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에요. 저희가 필요한 건 ‘AF-12’를 실제로 흡수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당신은 그걸 방금 입증해 보였고요. 그러나 명심하셔야 해요. 일의 특수성 때문에 적응 못 하고 조기에 발을 빼면, 법무팀에서 손해배상청구를 들어갈 거예요. 중단된 임상 시험을 다시 시행하기 위한 비용까지 전부.”
 힘들다는 말보다 20% 상승이라는 말에 정신이 팔린 정우의 시선이 계약서로 향했다.
 “아직 수락한 건 아니지만······.”
 연봉 조항을 찾아 눈을 돌리던 정우는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1억.
 ‘이, 인턴으로 들어오라며!’
 연봉이 자그마치 1억이었다.
 거기에 20% 증가면, 한 달에 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월급을 받게 된다.
 이건 회사에 막 입사하는 초짜가 받을 금액이 아니었다. 아무리 화학적 지식을 약을 통해 공급받는다고 해도 대체 왜? 큰 기업이면 석박사들이 널려 있을 것 아닌가?
 “이 파란 약 말이에요. 안정적인 지식 공급이라는 게 무슨 말이죠?”
 “말로 설명한다고 이해가 갈까요?”
 닥터 문이 파란 알약을 손에 쥐고 정우에게 내밀었다. 일단 한 번 드셔 보시라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본 정우는 갈등에 빠졌다.
 ‘먹어 말아?’
 계약서의 연봉 조항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위기고 소름이고 돈 앞에선 장사 없다. 그렇게 정우는 파란 알약을 받아 들었다.
 물도 없이 꿀꺽, 정우는 파란 알약을 삼켰다.
 10여 초 흘렀을까?
 “헛.”
 대범하게 버텨보려 했으나 뱃속을 파고드는 맹렬한 열기는 정우는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왜 이러죠? 펄펄 끓는 물을 삼킨 거 같아요.”
 “약을 흡수하며 생기는 단순 열화학 반응이니 놀랄 것 없어요.”
 캡슐 속에 담겨 있던 분자 덩어리 하나하나가 제 갈 길을 찾아 몸 전체로 흩어지는 과정. 그것이 신경망을 타고 고스란히 감각으로 전달되는 경험은 새롭다 못해 기묘했다.
 어느 순간 뱃속에서 계속되던 뜨거운 기운이 사라졌다.
 “어때요?”
 닥터 문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소감을 물어왔다.
 ‘이게 무슨 보약 먹고 힘이 불끈 솟는 것으로 보이나?’
 특정 정보가 담긴 DNA 분자가 몸 곳곳에 퍼졌다. 전신에 세포 단위의 화학 네트워크망이 구성된 것이다.
 이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나자빠진 자신의 머릿속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했다.
 “잘 모르겠네요. 모르는 지식이 떠오르는 것 같긴 한데, 큰 체감은······.”
 대답하던 정우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마치 정밀한 현미경을 눈앞에 들이댄 것처럼 닥터 문의 뺨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기분. 투명하고 깊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들 것 같은 느낌 때문일까?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초점을 맞추던 정우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나아지긴커녕 그녀의 피부가 더욱 세밀하게 관찰된 것이다.
 이건 단순히 시력이 좋다는 것으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정우는 착시라고 상식적인 정리부터 하려 했다.
 ‘뭐야?’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빨려 들어가듯 확대되던 닥터 문의 피부가 이제는 대형 TV 화면을 보는 것처럼 시야의 전부를 차지해 버렸다.
 그것이 영화관의 스크린 크기로 정우의 시선을 압도할 듯이 밀려들었을 때.
 ‘아······.’
 정우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피부결이라는 거대한 대지 위에서 바라본 하늘.
 그곳에 별처럼 빛나고 있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어떤 원자의 핵이 아닐까 하는 정보를 깨달았을 때는, 이것이 ‘AF-12’의 복용 때문에 벌어지는 괴상한 현상이란 사실조차 망각하게 됐다.
 생에 처음 하늘 위로 뻗은 미지의 공간에 도달했던 우주 비행사의 심정이 이럴까?
 그사이, 닥터 문이 다른 문서를 꺼내 정우 앞에 내밀었다.
 “이건 보안 관련 약관. 천천히 읽어 보세요. 다 읽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을 짚어 드리죠.”
 닥터 문의 접근.
 덕분에 그녀의 피부가 더더욱 광활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한정우 씨?”
 피부 위에서 계속 빛나고 있던 별 위로 [Fe]라는 철의 원소 정보가 덧입혀졌다. 그 옆으로 산소의 원소, [O]가 접근하더니 서로의 궤도를 사이좋게 공전하기 시작했다.
 원소별. 아마도 저걸 이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한정우 씨. 왜 그러세요? 제 뺨에 뭐라도 묻었나요?”
 갑자기 골똘히 자신만을 쳐다보는 정우의 눈길에 닥터 문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듭된 그녀의 부름에 정우는 매우 작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반투명하게 희석되며 현실의 세계와 이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으음.’
 퍼뜩 정신을 차린 정우가 황급히 대답했다.
 “닥터 문 피부에 이상한 게 보여서요.”
 “뭐가 보이는데요?”
 “Fe, O······.”
 “뭐라고요?”
 뾰루지라도 찾았다는 건가, 닥터 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게 말이죠.”
 두 개의 별이 보여준 신기한 결합은 시작일 뿐이었다. 피부결 위의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별이 존재했다. 이 원소별들은 저마다의 궤도를 갖고, 일정한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Fe’와 ‘O’의 궤적은 산화철 같네요. ‘Si’는 ‘O’ 두 쌍과 어울리고 있으니 이산화규소? ‘C’가 둘 ‘H’가 넷 ‘O’가 세 개면······ 글리코산?”
 정우는 우선 보이는 결합부터 말했다. 대답을 듣고 있던 닥터 문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건 화장품 성분 아닌가요?”
 “화장품이요?”
 정말 우주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저 원소별들이 빛나는 것으로 인해 닥터 문의 피부결도 새하얗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아, 알겠어.”
 닥터 문의 얼굴 윤곽선을 따라 겹쳐 보이는 화학적인 정보의 물결. 정우는 그것을 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교통 안내판을 보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산화철과 이산화규소가 눈 옆의 주름에 달라붙어 빛을 산란하고 있네요. 이야, 굴곡을 감쪽같이 가려주네.”
 주름 방지 크림의 화학작용을 마치 화장품이 아닌 것처럼 돌려 말하는 정우의 이야기에 닥터 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안 발랐거든요!”
 “다 보이는걸요.”
 “보긴 뭘 봐요? 몰랐던 지식이 마구 떠오른다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한정우 씨가 주말 반납하고 이틀 동안 야근한 여자의 피부 상태를 알아요?”
 한 듯 안 한 듯한 화장 기술. 절대 티 나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닥터 문은 의외의 정곡을 찔리자 난처한 듯 눈썹의 떨림을 보였다.
 이때 정우의 관심은 닥터 문의 반응이 아닌 다른 세계의 반응에 쏠려 있었다.
 “봐도 봐도 신기하네.”
 나직이 중얼거리는 정우를 보며 닥터 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죠?”
 “글쎄요. 이건 닥터 문이 더 잘 알아야 하는 부분 같은데요?”
 “누구나 한정우 씨처럼 ‘AF-12’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정우는 글리코산 입자들이 피부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고도는 광경을 구경하며 닥터 문에게 물었다.
 “이 약에 담긴 유전자 지식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죠?”
 “어느 분자생물학 권위자의 개인적 지식이라 할 수 있어요.”
 “닥터 문 같은?”
 “아뇨. 전 화학자가 아니라, 관련된 일을 하는 의사일 뿐이에요. 그래도 그 지식의 주인이 아주 특별한 화학자라는 사실은 맞아요. 보통 사람과는 참 많이 다른 분이죠.”
 이렇게 말하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한 번 만나 뵙고 싶네요. 이 약의 소스 제공자.”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약관대로 활동하고 성과를 내면 그뿐. 계약서부터 제대로 확인하세요.”
 “회사에 안 계세요?”
 “타인의 사정을 설명해 줄 의무는 없어요. 한정우 씨가 그 사정을 이해해 줄 필요도 없고요.”
 딱 잘라 거절한 닥터 문의 예의 사무적인 어투에 정우는 재차 물어볼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느꼈다.
 정우는 그녀의 뺨에 집중해 있던 눈길을 거뒀다. 그리고 환상처럼 보였던 원소별의 궤적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화학자의 통찰력?’
 분자생물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새로워지는 경험. 단지 그것만으로 이 순간 정우의 심장은 크게 요동쳤다.
 설명할 순 없지만, 무언가 대단하고 놀라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닥터 문.”
 “네?”
 “사인 어디 어디 하면 될까요?”
 펜을 든 정우는 일단 보이는 서명란에 사인부터 했다.
 “자세히 안 읽어 봐요?”
 “차차 보면 되니까요. 뭐, 노예 계약은 아닐 거잖아요. 아니지. 저 노예 된 건가요?”
 “아까는 새가슴처럼 굴더니.”
 “그러게요. 약을 먹었더니 간이 커졌나?”
 정우는 기왕 닥터 문의 숨겨진 주름에 관심을 가진 거, 떠오르는 지식을 토대로 한마디 덧붙였다.
 “피부가 거칠어지는 문제라는 게 빛을 산란하는 효과만으로 커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황폐해진 피부 대지, 아, 아니지. 노화된 각질을 제거할 수 있는 산성 촉매를 추가하면······.”
 콰직.
 플라스틱 펜의 뚜껑이 부스러지는 소리에 정우가 멈칫했다.
 “거기까지 하세요.”
 고운 살결은 여자의 자존심. 전에 없던 닥터 문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정우는 헛기침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입사지원서, 기밀유지 서약서, 계약과 관련된 수백 개의 약관.
 끝이 없을 것 같던 문서 확인을 끝마친 뒤, 최종 사인만을 남긴 채 정우가 물었다.
 “일은 언제부터 해요?”
 “가능한 한 빨리 나와주셨으면 해요.”
 정우는 계약서의 끝부분에 나와 있는 조항 하나에 시선을 던졌다.
 
 [이 계약은 사인한 그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이해가 부족해 다시 곱씹어봐야 할 약관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하루라도 먼저 나가야 하루라도 빨리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상관없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안 피곤하겠냐는 닥터 문의 눈길. 정우는 주말 이틀을 야근했다는 그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월요일이니 깔끔하게 가죠.”
 정우는 최종 계약서에 멋들어지게 사인을 끝낸 뒤 닥터 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아홉 시까지 출근하면 될까요?”
 사인을 꼼꼼하게 살핀 닥터 문은 그것을 서류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여덟 시.”
 “네?”
 정우는 잘못 들었나 싶어 물었다.
 “벌써 새벽 다섯 시고, 집에 다녀오려면 시간이 엄청 빠듯······.”
 “인턴이 정시 출근하는 회사 보셨어요? 근무한 곳은 다르지만, 제가 인턴 때는 집에 간다는 개념이 더 이상했었죠.”
 그녀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정우는 ‘도장 쾅, 상황 끝’이라서 태도가 돌변한 건 아닐 거라고 미심쩍은 위로를 해보았다.
 “늦기 전에 태워 드릴게요.”
 칼같이 정리를 끝낸 닥터 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우는 탁자에 수북하게 쌓인 계약서를 전부 챙겨 들고 황급히 닥터 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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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de : AF-12
 case : 화학자의 통찰력
 research : 작용하면 뇌의 신경세포가 분자생물학 권위자의 DNA에 맞춰 재구성된다. 지식, 감각이 큰 영향을 받는다.
 
 
 2장 어느 화학 회사 인턴의 하루(1)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새벽.
 아담한 외형의 승용차 한 대가 AN병원을 출발해 한적한 강변북로를 달려나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정우는 차 내부의 장식들을 살펴보며 조금 놀라고 있었다.
 ‘닥터 문, 취향이 의외로······.’
 핑크색 시트에 꽃잎무늬 핸들커버. 앞 유리 근처에 자리 잡은 귀여운 캐릭터 인형이 차체의 흔들림에 맞춰 앙증맞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정우는 닥터 문을 흘끔 보았다가 그녀의 얼음장 같은 온도를 감지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인간미 없음과 여성성은 서로 다른 차원의 화학반응인 걸까?
 “한정우 씨.”
 운전 중이던 닥터 문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정우는 살짝 긴장했다.
 “특별 채용이라 한정우 씨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거예요. 채용 배경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지 않겠어요?”
 “아니요.”
 “아니라면······.”
 “실력으로 입을 다물게 해야죠. 한정우 씨에겐 그럴 능력이 있고요.”
 강하게 윽박지른 것도 아닌데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닥터 문. 약관에서 기밀유지 부분을 아직 제대로 숙지 못해서 그런데. 이 계약에 관한 모든 사실이 회사 안에선 비밀이란 거죠?”
 “꼭 지켜 주셔야 해요. 특히 ‘AF-12’에 관한 건 전부.”
 “그럼, 경영학과 졸업 예비생이 어떻게 전문 연구원 뺨칠 정도의 화학 지식을 알고 있는지를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해요?”
 “천승국 박사님께 배웠다고 하세요.”
 “천승국?”
 “KG화학에선 그거면 충분해요.”
 뭔가 중요한 이름 같았으나 닥터 문은 더는 말하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정우는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AF-12’에 담긴 지식의 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대화가 멈추자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렇게 채 1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띠리리릭.
 정우의 휴대폰 벨소리가 적막을 깼다.
 ‘홍지숙 여사’라는 이름에 습관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댄 정우가 말했다.
 “엄마?”
 -한정우. 안 들어 올 거면 문자라도 남겨야 할 거 아니야? 너 혼자 사는 집이니?
 “아니, 그게······.”
 -에이, 엄마. 형이 외박하고 말 없는 거면 그냥 술 실컷 먹고 어디서 자빠져 잔 거겠지. 장사 한두 번 해?
 어머니의 성질 돋은 목소리에 동생 녀석의 깐죽거리는 목소리까지 연타로 들려왔다.
 -정우 너 술······ 야, 한정찬. 엄마가 물병에 입대고 마시지 말라고 했지!
 -알았어. 이씨, 등 때리지 말라고!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정우는 행여 이것이 닥터 문의 귀에 들어갈까 봐 눈치를 살펴야 했다.
 “엄마. 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집에서 얘기해.”
 -얘가, 얘가. 너만 일 있니? 어디서 바쁜 척이야. 엄마 오늘 새벽 시장 갔다 바로 식당 문 열거니까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
 “알았어.”
 -참. 재활용 쓰레기 밖에 내놔. 마당에 한가득 쌓였더라.
 “알았다고.”
 -근데 이 새벽에 전활 받네. 정우 너? 혹시 아침까지 술 처먹고 지금 개 된 거 아니지?
 “아니라고!”
 뚝.
 전화가 끊겼다.
 통화를 마친 정우의 표정은 억울 그 자체였다. 닥터 문이 흘끔 의문의 시선을 보내왔다.
 “지, 집이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어색한 웃음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어제만 해도 약 먹는 알바를 해서 돈을 벌 거라고 차마 얘기할 수 없었을 뿐이다. 임상 시험이 뭔지 잘 모르는 홍 여사를 이해시키려다 자칫 등짝에 불이 났을 테니.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당분간은 그냥 알바 시작했다고 둘러대야겠어.’
 빌라와 단독주택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산동네 앞으로 닥터 문의 차가 멈췄다. 정우는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려 꾸벅 인사했다.
 “태워줘서 고마워요.”
 “한정우 씨.”
 내리려는 정우에게 닥터 문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임상 시험 보수에요. 따로 건네줄 시간은 없을 듯해서.”
 “아.”
 부우웅―
 차가 떠났다.
 봉투 안의 오만 원권 스무 장을 확인한 정우는 그제야 병원에서의 일이 확실하게 실감 났다.
 ‘잘 된 거겠지?’
 계약서에 나와 있는 기간은 1년이었다. 제대로 못 하면 잘릴 수도 있다는 약관도 얼핏 보았다. 협상에 임하는 닥터 문의 태도로 보건대 연봉이 높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진짜 죽을 것 같은 일 아니면 최대한 버텨보자고.’
 잘 만하면 다달이 월급이 쌓이겠지만, 학자금 대출에 어머니가 식당을 열며 낸 빚까지 해결하면 그리 많이 남진 않을 터였다.
 그래도 마음 한편이 뿌듯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사회인 대열에 운 좋게 참여하게 됐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정우는 휘파람을 불며 집이 보이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끼릭.
 낡아빠진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손바닥만 한 마당이 정우를 반겼다.
 태어나서 쭉 살아온 작지만 정겨운 이층집. 담벼락 옆의 좁은 골목길에서는 동네 백수 형에게 담배를 처음 배웠고, 삼거리의 가로등 밑에선 은실이와 첫 뽀뽀도 했었다. 지금은 다들 이사 나가서 소식도 모르지만.
 끼기긱―
 감상에 빠져 있기 무섭게 찬 바람이 불어 대문이 덜렁거렸다.
 ‘어후, 소름 끼쳐. 이건 WD 좀 뿌려야겠어.’
 정우는 총총걸음으로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나왔어.”
 신문지 위에 무말랭이가 잔뜩 쌓여 있는 거실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부엌도 불이 꺼진 거로 보아 벌써 시장에 간 모양.
 “찬아!”
 동생 방에서도 기척이 없었다. 오늘부터 기말이라더니 일찍 등교한 듯했다.
 “알바비를 이렇게 벌어왔는데 자랑할 사람이 없네.”
 막상 집에 들어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좀 허전해졌다. 아무리 좁은 집이라도 서로 부대끼고 사는 게 좋은 거라는 훈훈한 생각을 하다, 부엌 의자에 휙 하니 걸려 있는 추리닝 앞에서 정우의 동작이 멈췄다.
 “이 자식이 또 내 걸······.”
 정우는 분을 삭였다.
 평소 같으면 동생이 등교하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 기어코 뒤통수를 올려붙였겠지만, 이젠 달라져야 할 때다. 오늘부터는 취업 준비를 빙자한 백수 형이 아니라 성숙한 직장인 형이니까.
 ‘직장인.’
 출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정우는 도로 기분이 좋아져 피식 웃고 말았다.
 
 * * *
 
 월요일 아침의 지하철 1호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렸던 정우는 가까스로 방금 도착한 전철에 발을 올렸다.
 “휴. 까딱하면 놓칠 뻔했어.”
 준비는 곧바로 했지만, 부랴부랴 정장을 찾아 빳빳하게 다리느라 조금 늦어졌다.
 ‘이 정도 스타일이면 눈치 안 봐도 되겠지?’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입었던 나름 고가의 슈트였다. 전철 유리창을 거울삼아 옷맵시를 가다듬던 정우의 시선이 소매에 멈췄다.
 “아나, 먼지가 아직도 붙어 있어.”
 꼼꼼하게 털어낸 뒤 무심코 도어 옆의 손잡이를 붙잡던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정전기가 일었다.
 “앗 따거.”
 멍한 상태로 당해 버린 터라 아픔이 더했다. 가뜩이나 히터 빵빵하게 틀어 건조해진 전철 안에서 면 위로 손바닥을 마구 비벼 버리다니.
 정우는 찌릿한 감각이 남아 있는 손에 입김을 호 불었다.
 ‘어라?’
 손끝에 시선이 머문 정우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갑자기 지문의 굴곡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손끝이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눈과 손 사이에 고배율의 현미경을 들이댄 듯한 느낌.
 [-]기호가 반투명하게 덧입혀진 수많은 별이 손 위에서 저마다의 궤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기에 은은한 빛이 어린 먼지구름 같다고 느껴졌다.
 ‘무슨 가상현실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먼지별 무리는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자신의 손에 마지못해 머물러 있는 눈치였다.
 다시 전철의 금속 손잡이를 붙잡으니 자유를 갈망하던 먼지별 무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옮겨 버렸다.
 ‘가라, 가. 괜히 왕창 몰려다니면서 정전기 일으키지나 말고.’
 손잡이를 타고 올라간 먼지별은 이내 전철 내부의 금속 표면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텅텅 비어버린 손으로 공기 중의 먼지별이 휘감듯 모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은 영혼이 자유롭나? 그냥 막 싸돌아 돌아다니네.’
 누가 보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 전자와 대화를 나눈다는 행위 자체가 어째 정신 나간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정우는 관심을 끊고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이번 역은 종로3가, 종로3가역입니다.
 전철이 멈춰 섰다.
 환승역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먼지별보다 더 기세 좋게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정우는 이동하는 대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붙잡고 몸을 문 옆으로 바짝 기댔다. 그 와중에 전철 곳곳에서 먼지별 무리가 마구 엉키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어떤 사내의 손에는 금방이라도 스파크를 일으킬 것 같은 전하의 응집이, 어떤 여인의 스웨터는 스치기만 해도 바스락거릴 것 같은 자유 전자의 춤사위가.
 ‘이크.’
 방금 같은 따끔한 정전기 충돌은 사절이었기에 정우는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덕분에 문 근처에서 칸과 칸 사이의 통로까지 밀려났다.
 너무 깊은 곳에 서 있으면 내릴 타이밍을 놓칠 수 있기에 남은 역의 숫자 파악부터 했다.
 ‘여덟 정거장? 파고드는 건 조금 있다 해도 되겠어.’
 흔들리는 전철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구석의 손잡이를 붙잡으려던 정우는 멈칫했다. 그리고 손끝에 머문 녀석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또 당할 거 같아? 얼른 사라져 버렷!’
 정우는 잠깐 사이 사람들과 스치며 대량 발생 된 먼지별을 마구 흩뿌려 떨쳐냈다.
 그렇게 1초쯤 지났을까?
 손을 떠나버린 먼지별이 청소기에 빨려가듯 더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상한 흐름.
 정우는 그것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전철의 통로 쪽에서 시선을 멈췄다.
 처음 발견한 건 A4 문서의 하얀 뒷면이었다. 뒤이어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문서 너머로 언뜻 비치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무척 예뻐 보여 정우는 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드러난 건 아담한 이마와 눈썹뿐이지만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광채가 났다.
 ‘어?’
 먼지별의 이상한 흐름이 집중된 곳은 그녀의 겉옷이었다.
 사방의 자유 전자가 쏟아지듯 달라붙는 현상으로 인해 자신이 몰고 온 먼지별도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워, 너무 많이 몰렸어.’
 일촉즉발의 정전기 포화상태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독서 삼매경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양으로 짐작해 보건대, 그녀가 금속에 손을 댄다면 아까 자신이 느꼈던 따끔함보다 대략 3배는 아픈 정전기를 맛보게 될 것이다.
 꼭 자신이 날려버린 먼지별 때문이라곤 할 수 없지만, 정우는 도의적인 책임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여성치고는 지나치게 예쁜 분위기를 풍겨서라는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암. 정전기 월드에서 저건 데프콘 1단계 상황이야. 몹시 위험하다고.’
 위기의식과 함께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정우는 짧게 헛기침해야 했다.
 덜커덩덜커덩.
 전철은 고요하고 익숙한 소음을 내며 한가롭게 선로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
 정우는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에 신경을 쏟았다.
 뇌세포에 각인된 화학 정보와 시신경이 결합해 벌어지는 분자생물학자의 독특한 통찰력이 이내 ‘정전기 폭탄 외투’의 분자 구조를 확대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섬유 위로 사슬처럼 얽힌 원소별 별자리가 정우의 시야에 떠올랐다.
 ‘CO······ NH······ CH······ 이렇게까지 촘촘한 아마이드 결합이라면 마찰에 의한 전하의 응집이 생길 확률이 높아.’
 소재가 나일론계통이라는 것. 여성들이 스타킹을 신으면 정전기 때문에 치마가 자꾸 달라붙는 현상과 어느 정도 흡사했다.
 ‘그래도 정전기 폭탄까지 될 이유는 없어. 가만. Na······ O······ Si?’
 섬유의 분자 구조 사이사이에 달라붙은 투명한 화합물을 발견한 정우의 눈이 빛났다. 근처를 지나던 먼지별이 이 화합물에 달라붙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렸다.
 ‘너였냐?’
 자유 전자를 손쉽게 사로잡은 저 화합물의 이름은 규산나트륨. 이것이 옷에 잔뜩 붙어 이온반응이 알칼리 쪽으로 맹렬하게 치우쳐 버린다면, 자유 전자를 유혹하는 훌륭한 촉매가 된다. 거기에 섬유 분자 구조에 관여해 옷을 더 뻣뻣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당연하게도 ‘정전기 폭탄 외투’가 될 수밖에.
 ‘이온 중화가 우선이겠어. 규산나트륨이라면 당장 물만 뿌려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정전기 데프콘 1단계를 5단계로 낮추는 이 해답을 처음 보는 상대에게 어떻게 제시해 줘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문서에 집중하고 있던 그녀가 힐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헛.’
 쌍꺼풀 없는 크고 또렷한 그녀의 눈이 자신을 향했다. ‘왜 자길 빤히 보고 있던 거지?’라는 듯한 시선.
 “아, 그······.”
 비록 화학적 세상에 빠져 있었을지라도, 실례가 될 정도로 집중해서 쳐다본 것 또한 사실이기에 정우는 당황했다. 그러다 상대의 손을 가리켰다.
 “정전기 조심하세요.”
 “네?”
 “지하철에서 내리면 겉옷에 물 좀 뿌리고 탈탈 털어 주시고요. 어우, 옷이 너무 뻣뻣······.”
 역에 정차한 통에 사람들의 다급한 이동이 시작됐다. 정우도 거기에 휘말려 사람들 틈 속으로 밀려났다.
 ‘뭐라는 거야?’
 송보영은 낯선 남자의 말에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그러고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리저리 살펴봤으나 만원 전철 속에서 스치듯 만난 사람을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잉―
 신경 끄고 다시 문서를 보려는데 가방 속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회사 선배 이동길이었다.
 -쏭!
 “네, 선배.”
 -어디야? 출근 중?
 “지하철이요.”
 -보영이 니가?
 “뮌헨에선 매일 타고 다녔어요.”
 -서민 코스프레 시작한 거 보니 이제 슬슬 경영에 진지하게 손을 대라는 할아버님의······.
 “선배.”
 송보영의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갔다.
 “잡담할 거면 그만 끊어요. 저 바빠요.”
 -어헛! 기다려봐. 대박 사건이 있어.
 송보영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뭔데요?”
 -방금 인사과장 만났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잖아. 연구소에 낙하산 특채 들어온대.
 “연구원 모집이야 종종 있는 일 아닌가요?”
 -놀라지나 마. 무려 천승국 박사가 직접 꽂아 넣은 거래.
 전화 너머에서 이미 놀라지 말라는 경고를 했지만, 송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 박사님요? 안식년이라고 육 개월째 깜깜무소식이셨잖아요. 언제 오셨데요?”
 -아차차. 내가 그것까진 못 물어봤다. 인사과에 가서 더 캐볼까? 그러고 요 앞 카페서 브런치나 하면서 얘기······.
 “됐어요.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자, 잠깐! 쏭······.
 뚝.
 휴대폰을 가방에 도로 넣은 송보영은 아까부터 읽고 있었던 A4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차세대 바이오 코드]
 
 천승국이 독일 하이델베르크 생화학 센터에 재직하던 무렵 작성한 이 논문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파격적인 이론이었다.
 ‘천 박사님이 직접 스카웃한 사람? 이따 꼭 찾아가 봐야겠어.’
 어쩌면 천승국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일자 더더욱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보영은 논문의 다음 단락을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덜컹거리는 전철의 흔들림에 반사적으로 벽에 손을 댄 그녀는 따다닥, 하는 정전기 스파크가 일어 화들짝 놀라야 했다.
 “아우······.”
 팔꿈치가 저릿할 만큼의 아픔이 찾아왔다.
 소리가 제법 컸던 탓에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움찔해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학생?”
 “괜찮아요, 할머니.”
 이런 와중에도 학생으로 봐주는 것에 송보영은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뭐, 따지고 보면 아직 학생 신분일 나이긴 하다.
 스물여섯이면 대학원생이라 해도 되지. 그러나 어엿한 연구원 된 지 벌써 1년이 다 됐다.
 걱정해 주는 할머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송보영은 따끔한 충격을 받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내가 이래서 겨울이 싫다고.’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바라보다 방금 들었던 말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그 남자가 이 사태를 예측하고 말해 줬다고?
 “말도 안 돼.”
 송보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사람들 무리 너머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에 방해를 받아야 했다.
 “으아아앙! 싫어! 집에 가자, 엄마.”
 “아, 거! 좀 조용히 시킵시다.”
 울고 있는 아이. 그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다른 승객들. 한 번 깨진 집중력의 틈을 파고드는 시끌벅적한 목소리는 한 역을 지나는 내내 계속됐다.
 송보영은 더는 읽을 수가 없겠다는 판단에 논문을 갈무리했다. 그냥 봐도 어려운 걸 억지로 보려니 머리만 아팠다.
 가방 안을 정리하려고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휴대폰에 이동길의 문자가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인사과장 말고 나한테 물어. 차 한잔하면서. 10시에 휴게실 OK? 참, 이건 낙하산 면상.
 인사 기록부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 함께 올라왔다.
 ‘어? 이 얼굴······?’
 
 정우는 계속 울고 있는 꼬마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다섯 살 정도 됐을까?
 “죄송합니다. 애가 아토피가 있어서.”
 끊임없이 사과하던 꼬마의 엄마는 애가 간지럽다고 자꾸만 팔을 긁어대자 그러지 말라고 나무랐다.
 꼬마는 울면서 긁고, 엄마는 흉터 생긴다고 못 하게 막고. 꼬마는 발버둥 치고, 엄마는 야단치고.
 ‘도돌이표라는 게 저런 거지?’
 정우는 전철 안의 분위기에 적응 못 하는 꼬마가 측은했으나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소음의 원인은 저 아이니까.
 “크흠!”
 두 모자 옆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노인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
 “아토피가 뭔 대단한 거라고. 애고 어른이고 공중도덕을 알아야지. 망할 정부 놈들은 도덕 교과서를 왜 없애가지고. 에잉, 쯧쯧.”
 그러며 신문을 있는 대로 크게 펼쳐서 보란 듯이 양옆의 승객들을 밀쳐내는 모습 또한 과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울던 꼬마는 다행히 울음을 그쳤으나 노인의 언성에 살짝 얼어붙은 표정이 됐다.
 정우는 별생각 없이 꼬마를 쳐다보았다가 먼지별이 꼬마의 머리 위쪽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면으로 된 털모자가 원인이리라.
 가뜩이나 아토피 때문에 괴로울 텐데 정전기라도 방지해 줘야겠다는 마음에 꼬마의 머리 위쪽으로 손을 뻗어 흔들었다.
 ‘훠이. 갈려면 옆에 있는 심술 노인네한테나 가버렷!’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먼지별이 손바닥에 휘감겼다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문제는 먼지별에 휘말려 노인의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이 반응을 보였다는 것.
 ‘이상한데? 어떻게 영향을 미친 거지?’
 원리를 궁금해하며 휘적거리던 손이 노인의 머리 위 허공쯤에 머물렀다. 손을 따라 노인의 머리카락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위로 뻗쳐 버렸다.
 “헐.”
 정우는 잘 못 봤나 싶어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노인의 뻗친 머리카락이 그것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
 신문을 보던 노인이 낌새가 이상해 고개를 올리자 정우는 얼른 손을 치웠다. 탁, 신문을 치고 불특정 다수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던 노인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후, 심장 떨려.’
 옆자리에서 얼어 있던 꼬마가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본 통에 정우는 입가에 손가락 하나를 붙이고 작게 “쉿.”하고 속삭였다.
 꼬마는 이것이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흔들었다.
 정우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자유로운 전자 영혼들이 왜 내 말을 들어? 내 손엔 규산나트륨도 안 묻었다고.’
 떠오르는 화학 지식에서 해답을 찾으려 궁리해 보았다.
 방금은 손바닥이 순간적으로 [+]극으로 대체됐다가 [-]극으로 변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다.
 공포 영화를 보고 머리가 쭈뼛 서는 것도 감각기관에 전달된 일종의 생체 전기 반응이니까.
 만약 이 전기 신호를 미세하게라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손바닥에 미세한 전하를 응집시킬 정도의 이온 유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디 한번.’
 손바닥을 쫙 펼치자 먼지별들이 회오리처럼 몰려들었다.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정우만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이걸 화학적인 감각 조절이라고 해야 하나?’
 분자의 세계를 엿보는 경험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뿐이지 정전기 마스터로서의 가능성을 보이는 이 감각 또한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충 이해를 끝낸 정우는 꼬마에게 눈을 돌렸다. 아토피 간지러움은 좀 가신 것 같은데,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길로 자꾸 흘끔거렸다.
 ‘실험 삼아 한 번 더 해봐?’
 정우는 스리슬쩍 노인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손바닥의 신경에 [+]이온이 밀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하를 담은 먼지별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들어 나노 세계에 바람을 일으키자 노인의 머리카락도 같이 반응했다. 때마침 전철 방송에서 광고 음악이 튀어나왔다.
 -나~나나~ 왓뚜와리와리~ 서울시청 앞, 좋은 이웃 치과······.
 ‘DOC와 춤을 인가?’
 의도한 것은 아니나 음악이 흥겨웠기에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고, 그로 인해 먼지별의 세상에 큰 폭풍이 휘몰아쳤다.
 노인의 머리카락이 얼쑤들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니들 한 춤 하는구나.’
 정우는 먼지별이 보여주는 자유 전자 댄스를 기특하게 바라보다가 노인이 고개를 휙 올리자 번개처럼 딴청을 피웠다.
 우연히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몇몇 승객들이 하늘로 뻗친 노인의 머리카락에 풉, 푸흡,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이 ‘뭔 소리야?’하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방금 있었던 심술 섞인 언행 때문인지 머리카락에 대해 얘기해주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역은 용산, 용산역입니다.
 “크흠!”
 내려야 하는지 노인이 신문을 접고 일어섰다.
 ‘나가서 거울 좀 보세요, 할아버지.’
 전철의 문이 열리고 노인이 사라졌다. 아마도 거리를 지나가다 웃음 꽤나 유발하리라.
 구경하던 꼬마가 싱글벙글 웃으며 정우를 보았다.
 “짜식. 이제 안 우네.”
 “응. 마술 재밌어.”
 “마술?”
 의도한 건 아니나 꼬마가 우러러보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정우였다.
 “헤헴. 형이 원래 이런 거 함부로 안 하는데, 특별히 보여 준거야.”
 꼬마의 눈에 반짝거리는 존경심이 일었다.
 “이름이 뭐니?”
 “은수.”
 “어디 가는 거야?”
 “엄마랑 이모 집 가. 맛난 거 먹을 거야.”
 대화 도중 꼬마의 엄마가 정우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꼬마는 낯선 전철 풍경에 적응했는지 한결 편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정우는 환승역 안내 음성을 듣고 꼬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난 여기서 내려. 잘 가 은수야.”
 “안녕.”
 문 쪽으로 걸어가 지하철 노선도를 살폈다. 시간을 보니 7시 45분.
 ‘환승해서 역 3개지? 게이트에서 치이면 늦을 수도 있겠어.’
 열리자마자 뛰어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정우는 갑자기 사나운 먼지별의 흐름이 느껴지기에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까의 ‘정전기 폭탄 외투’ 여인이 바로 옆에 접근 중이었다.
 ‘이런.’
 못 본 척 바깥에만 시선을 던지는데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앳된 얼굴이 정우를 당황케 했다.
 화장기 전혀 없는 수수한 외모. 예쁘건 예상대로였으나 나이가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그녀가 정우의 바로 옆에 섰다. 정우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저기요.”
 ‘응?’
 정우는 그녀의 부름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네, 댁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십여 분 전 쓸데없이 쳐다본 것을 따지러 왔다면 얼른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도중, 그녀가 뜻밖의 질문을 던져왔다.
 “어떻게 손만으로 정전기 유도 효과를 낸 거죠?”
 “네?”
 그녀가 입을 가리고 작게 속삭였다.
 “방금이요. 손으로 그 할아버지 머리카락을 막 움직였잖아요.”
 “아. 그게요.”
 전철이 서서히 느려졌다. 정우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이번에 내려야 해서. 설명해 줄 시간이······.”
 “저도 내려요.”
 “······그러시구나. 근데 제가 환승하러 빨리 가야 해서요.”
 “저도 환승해요.”
 정우는 순간 살짝 무서워졌다.
 ‘뭐지? 사이비 종교 막 그런 건가?’
 저 정도 미모로 ‘도를 아시나요?’하고 물어 온다면 그냥 끌려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사이 그녀가 물었다.
 “KG화학 중앙 연구소에 가는 길이시죠?”
 등골을 타고 전해지는 진짜 소름. 요즘 사이비는 신상까지 다 파악하고 접근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어떻게······.”
 “오해하지 마세요.”
 그녀는 외투 속에 넣고 있던 사원증을 휙 꺼내 내밀었다.
 ‘KG화학 중앙 연구소 송보영.’
 읽어 내려가던 정우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확실히 회사가 크긴 크다. 아무리 요 근처라지만 첫 출근길에 직장 동료를 만나다니.
 “아시겠죠?”
 이름표를 내리고 송보영이 빠르게 말했다.
 “인사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알아본 거니까 너무 놀라진 마세요. 저도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계약서 쓴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정우는 당황한 가슴을 추스르고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정우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낙하산 씨.”
 “······낙하산?”
 “아니에요?”
 “마, 맞아요.”
 닥터 문의 경고가 떠올라 정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부담되게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송보영. 잘해야 대학교 신입생 같은 외모인 터라 회사 직원이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닥터 문도 그렇고 KG화학은 여성 연구원을 뽑을 때 얼굴이 우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송보영이 물어왔다.
 “아까 저한테 정전기에 대해서 경고했죠?”
 “제가요?”
 “했어요, 분명.”
 치이익.
 전철 문이 열려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기 시작해 정우도 덩달아 밀려 나왔다.
 송보영도 당연하게 따라 내렸다.
 “어서 얘기해 봐요. 왜 그런 소릴 했는지.”
 환승 게이트를 걷는 길 위에서 송보영은 학구열이 가득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재촉했다.
 ‘그냥 잡아떼긴 힘들겠어.’
 원리는 간단했다. 자유 전자의 이동을 감지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뿐이니까.
 그러나 화학적인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른 이에게 이 경험을 납득시킨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먼지별이니 뭐니 했다간 초면에 정신 나간 취급을 받을 수도 있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사과가 어떤 색이고 어떤 형태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과 비슷할까?
 힐끔 ‘정전기 폭탄 외투’에 시선을 던진 정우가 말했다.
 “그 외투 말이에요.”
 정우는 송보영의 겉옷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규산나트륨이 잔뜩 달라붙어 있어요. 그래서 정전기가 과다하게 모였을 거예요.”
 “규산?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정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외투를 더욱 살폈다.
 “폴리카르복시산염에 광학 표백제, 제올라이트의 잔해도 보이네요. 가만, 이게 다 모이면 세척 작용을 하는 거 아니야? 아, 맞네. 세제였어.”
 이 말에 송보영의 큰 두 눈이 더욱 커졌다.
 “이봐요, 낙하산 씨. 제 옷에 세제 가루가 남아 있다는 건가요, 지금?”
 “뭐 눈에 띌 정도로 많은 건 아니고요.”
 “웃겨.”
 어이가 없다는 듯 정우를 쏘아보던 송보영이 외투를 툭툭 털자 흰 세제 가루가 허공에 풀풀 날렸다.
 “엄마야.”
 “어라? 안감에 더 많았네요. 어쩐지.”
 정우는 퍼즐을 풀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끔 빨래할 때 실수해요. 탈수 돌릴 때 세제 넣는다거나. 그럼 어머니한테 뒈지게 맞죠.”
 크게 상관하지 않는 정우의 기색에도 송보영의 동공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초조한 표정으로 정우의 눈치를 보았다가 가루가 떨어지는 부위를 쳐다보길 몇 차례.
 “세, 세탁소에서 이렇게······.”
 거짓말이라는 것이 티가 확 났다. 저건 드라이클리닝과 물빨래해야 할 것도 구분 못 하는 집안일 초보가 한 짓이 분명했다.
 “그 세탁소는 하나를 빨아도 세제 한 통을 전부 넣어 주는 곳인가 봐요. 장인 정신이 출중하네.”
 정우는 속으로 쿡쿡 웃다가 송보영이 찌릿하게 째려보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환승 게이트를 지나 9호선에 올라탔다. 1호선만큼 만원은 아니었기에 정우는 약간의 여유를 갖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손은요. 어쩌다 보니 정전기가 심해졌던 것 같아요. 일부러 유도한 건 아니었어요.”
 “그게 우연이었다 이거군요.”
 이것으로 호기심을 멈추나 싶던 송보영이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낙하산 씨는 천승국 박사님 추천으로 들어온 거죠? 제자라도 돼요?”
 닥터 문이 천승국 박사 핑계를 대라고 했기에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듣자 송보영의 눈빛이 그 어느 때 보다 반짝였다.
 “지금 어디 계시죠? 몸은 건강하신 거죠? 갑자기 휴가 떠나시고 그렇게 뵙고 싶어도 따로 찾아뵐 수가 없었어요.”
 “저도 소식은 잘 몰라요.”
 “왜요?”
 “글쎄요.”
 계약과 관련된 사항은 발설할 수도 없거니와 정말 몰랐기에 정우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비밀로 해두겠다?”
 송보영이 눈을 치켜떴다.
 “하나만 가르쳐 줘요.”
 “그렇게 보채셔도······.”
 “어디 계신지라도 말해 줘요.”
 “뭐, 어딘가에서 잘 계시겠죠.”
 계속 거절하자 송보영의 볼이 토라진 듯 점점 부풀어 올랐다. 둘러대기만 하는 정우에게서 소식을 들을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든 송보영이 “됐네요!” 하고 고개를 팽 돌렸다.
 “어쩜, 어쩜. 낌새가 이상했어. 그렇게 프로젝트 뽑아 달라고 어필해도 매번 자리가 없다고 발뺌하더니. 낙하산 제자로 그 자릴 채우겠다는 거 아니야? 아까 그 세제 얘기도 딱 박사님 스타일이고. 사람 엄청 당황하게. 아니, 누군 제자고 누군 무시래? 열 받는다, 진짜.”
 “······저기, 송보영 씨. 저 아직 옆에 있습니다만.”
 “들으라고 한 소리예요.”
 “왜 그걸 들어야 하는······.”
 “라이벌이니까.”
 뭐가 어떻게 라이벌인지 알아야 반응을 할 텐데.
 송보영은 이제 말 안 걸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난 거 맞나?’
 눈이 똥글똥글해서 그런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무섭기는커녕 귀여워 보였다. 뭔가 간식을 안 줘서 시무룩해진 애완 강아지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철이 여의도역에 도착했다.
 정우는 안내 전광판의 시계를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7시 57분. 인턴의 출근 리미트가 고작 3분 남았다.
 승강장에 내려선 정우는 송보영에게 급히 말했다.
 “서둘러야겠어요. 삼 분밖에 안 남았네.”
 “삼 분?”
 “출근 시간이요.”
 “출근은 아홉 시까지예요.”
 당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듯한 송보영의 표정. 정우는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라타 등을 돌렸다.
 “아니, 그게요.”
 인턴으로서 첫 출근에 대한 긍정적 인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던 정우는 그녀의 외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사람들을 스쳐 지나며 어느새 먼지별이 구름처럼 모여든 상태였다.
 “데프콘 1단계.”
 “뭐요?”
 에스컬레이터 손잡이에 손을 댄 송보영이 따닥, 하는 찌릿한 정전기 스파크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야. 또야 또······ 어어!”
 짜증 내며 손을 털어내다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그녀를 향해 정우는 그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딱.
 손과 손이 맞닿아 정전기가 찌릿하게 흘렀다.
 한 번 더 비명을 지른 송보영과 당황한 정우의 시선이 교차하며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 고마워요.”
 “별말씀을.”
 정우는 본의 아니게 꼭 붙잡아 버린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가 움찔했다. 자신의 손끝으로 그녀의 외투에서 흘러나온 자유 전자가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오지 마, 훠이.’
 재빨리 손을 뗀 정우가 말했다.
 “밖에 가면 일단 그 정전기 폭탄부터 해결하세요.”
 외투를 슬슬 털어내던 송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요.”
 “그리고 세탁은 전문가에게 맡겨요.”
 “것도 그래야겠······ 웃겨!”
 송보영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지이잉.
 정우는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려 꺼내 들었다. 닥터 문의 문자였다.
 -인사과에 연락해 두었으니 그곳부터 들러요.
 ‘칼 같네. 8시.’
 정우는 에스컬레이터 끝에 도착해 송보영에게 말했다.
 “빨리 들어가야 해서. 만나서 반가웠어요, 송보영 씨.”
 “낙하산 씨도요.”
 정우는 냅다 출구 쪽 계단으로 뛰었다.
 송보영은 그런 정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 *
 
 얼마 전에 신축한 듯한 으리으리한 쌍둥이 빌딩 앞에 선 정우는 입을 떡 벌렸다.
 KG화학.
 
 [국내 사원 14,000명. 해외 사원 11,000명의 글로벌 화학 기업. 배터리, 디스플레이 속 최신 소재부터, 생필품, 섬유, 건강 음료 같은 생활소재까지. KG그룹에서 생산하는 거의 모든 제품의 기초를 설계하는······.]
 
 인터넷으로 찾아본 KG화학의 기사를 떠올리며 정우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비를 지나 방문객 접수처 앞에 섰다.
 “한정우라고 해요. 오늘 처음 출근한 인턴입니다.”
 “신분증 주시겠어요?”
 빠르게 컴퓨터를 확인한 직원이 임시 출입증을 발급해 주었다. 경비원에게 내밀고 유리문을 통과했다.
 KG화학의 건물은 ‘East, West’ 두 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은 최첨단 시설이 밀집한 중앙 연구소가, 서쪽은 영업, 금융, 사업부가 밀집한 본사가.
 정우는 내부 구조도를 확인하고 인사과가 있는 7층으로 가기 위해 서쪽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가동 중인 엘리베이터 숫자만 10개.
 각자의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대기 중인 수십의 사람들 틈에 가만히 섞여 있자니 확실히 실감이 났다.
 ‘오늘부터 이 회사에 다니는 거야.’
 딩동.
 문이 열리자 정우는 힘차게 들어섰다.
 
 “구내식당은 사원증으로 결제하고 나중에 월급에서 차감되는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회사 내 편의시설 대부분을 사원증으로 이용 가능하시고요.”
 인사과 안에 자리한 넓은 미팅 룸. 그 끝에서 인사과 직원 하나가 정우를 앉혀두고 회사 시설 이용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건 연구동 출입카드. 사원증과 다르게 등급이 있고, 분실 시 시말서도 쓰셔야 하니까 관리에 각별히 주의해 주세요.”
 공채나 인턴쉽으로 뽑힌 이들 다수를 향해 하던 이야기지만, 오늘은 정우 단 한 명뿐이었기에 미팅 룸의 분위기가 사뭇 썰렁했다.
 “특이하네요. 보통은 인턴한테 연구동 출입까지 허락 안 하는데. 뭐, 특이하니까 특채로 뽑은 거겠죠?”
 직원이 씩 웃으며 사원증과 출입카드를 건네주었다.
 “더 궁금한 거 있으신가요?”
 “아니요.”
 “인솔자 호출할 테니 잠시만 앉아 계세요. 믹스커피?”
 “네, 감사합니다.”
 연구소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한 건 지난 새벽 닥터 문에게 들었었다.
 무슨 수업을 듣는 것처럼 거의 한 시간 동안. 잠이 안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연말까지 공채로 뽑은 연구원 연수 기간이니까. 그들이랑 어울려 분위기를 익혀 두세요.
 대부분 까먹었지만, 마지막 말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휴일을 빼면 대략 보름 정도의 기간. 아마도 이 시간이 ‘AF-12’를 복용한 채 KG화학의 연구 프로젝트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간이 되리라.
 
 5분 뒤.
 “한정우 씨?”
 직원이 건네준 믹스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정우는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말끔한 슈트 차림의, 딱 봐도 학생 시절 공부 좀 했을 것 같은 안경잡이 사내가 문 앞에 서서 싱긋 웃었다.
 “입사 축하. 난 이동길. 중연 1팀 팀장이지.”
 중연이라 함은 중앙 연구소를 줄여 부르는 말. 정우는 부장급의 인사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에 놀라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긴장한 정우를 향해 이동길이 인사과의 문을 가리켰다.
 “갈까?”
 “네.”
 엘리베이터로 걷는 길.
 이동길은 인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신입을 탐색하듯 살피다가 말했다.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 없어. 신입이 누군지 궁금해서 직접 와본 거니까. 그것보다 이력서에 전공이······ 경영학이던데.”
 “아, 네.”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경험은 있고?”
 “아니요.”
 “화학 계열사 인턴십 같은 건?”
 “겨, 경험 없습니다.”
 “개인 연구나 특허 실적은? 해외 연수? 관련 자격증은?”
 계속해서 정우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잠시 한숨을 쉰 이동길이 물었다.
 “그럼 뭘 할 줄 알지? 뭐라도 하나는 있을 것 아니야.”
 이동길의 눈빛에 담겨 있는 의구심. 닥터 문의 경고처럼 특채로 인한 곱지 않은 시선의 한 부분이리라.
 “전공하진 않았지만, 분자생물학 관련 공부는 해왔어요.”
 천승국 박사의 전공이기도 하고, 어차피 그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변명해야 하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이동길이 고개를 돌렸다.
 “세포 생물? 유전체?”
 “그렇게까지 학구적인 분야는 아니고요. 따지자면 ‘분자 인식’ 쪽이라고 해야겠네요.”
 “아, 분자 인식을 개인적으로 공부만 하셨다?”
 정우는 이동길이 피식 웃는 것이 비웃음인지 허탈함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정우 씨. 오해 말고 들어. 우리 연구소는 분위기가 무척 자유로워. 대부분 직장 상사가 아니라 선후배로 지내지. 프로젝트 하나 길게 가면 막 일 년씩 얼굴 부딪히고 지내야 하니까.”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안으로 들어선 이동길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유로움에는 책임이 따라요. 밥값 못하는 동료?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연구원을 굳이 안고 갈 이유가 없잖아.”
 이동길이 목이 잘리는 손동작을 해 보였다.
 “내 생각은 그래. 천 박사님이 인사 갖고 장난치실 분이 아니란 건 알아. 그렇다고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을 타부서에 신뢰 가는 연구원으로 소개할 수는 없는 법이지.”
 동의를 구하는 듯한 이동길의 표정에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그러니, 다음 주에 있을 공채 연구원 아이디어 기획평가에서 한정우 씨의 매력을 좀 어필해 줬으면 하는데.”
 “기획평가요?”
 난데없는 제의에 정우가 눈을 크게 뜨자 이동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반문했다.
 “왜? 못하겠어? 뭐, 다른 신입이야 가을에 들어와서 석 달 이상 준비하긴 했지. 자신 없는 건 이해해.”
 정우는 여기서 거절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야?”
 “혹시, 기획이 채택되면 실제 프로젝트로 발전하기도 합니까?”
 “물론이지.”
 “그럼 해야죠. 일하려고 이 회사 들어온 건데.”
 위축되어 보이던 신입이 도리어 당당하게 대답해오자 이동길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스쳤다.
 “자신 있나 봐?”
 “그런 건 아니고요.”
 ‘해봐야 안달까?’
 딩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오케이. 수락한 거로 알고 연수 담당자에게 얘기해 둘게. 자율성이 보장되는 만큼, 리스크는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밖으로 나서던 이동길은 로비에서 동관으로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기태야!”
 정우 또래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이동길을 발견하고 민첩하게 반응했다.
 “선배니임!”
 한달음에 달려온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적힌 이름은 배기태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오늘도 씩씩하구나.”
 “선배님 보니까 힘이 막 납니다! 하하.”
 “아부는 적당히 떨고.”
 “네엡!”
 배기태는 사회생활 정말 잘할 것 같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저런 태도는 참고해야지.’
 정우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배기태를 살폈다.
 이정길과 신이 나서 떠들던 배기태가 정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분은?”
 “정우 씨, 이쪽은 공채 수석 배기태. 기태야, 이쪽은 한정우. 오늘부터 네 옆자리 쓸 인턴이다.”
 “인턴이요? 아하, 곧 방학이니 KG화학도 인턴십을······.”
 “아냐, 우린 그런 거 안 해. 바빠서.”
 이동길은 정우를 보며 묘하게 웃더니 말했다.
 “한정우 씨만 특별 채용이지. 말이 인턴이지 너희와 다를 바 없는 입장. 잘 데리고 다니면서 기본적인 걸 알려 줘.”
 “걱정 마십시오.”
 “난 브런치 약속 있어 잠깐 밖에 간다. 정우 씨는 기태 따라가고.”
 이동길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로비로 걸어나갔다.
 배기태는 사라지는 이동길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반가워요, 정우 씨. 중연 사무실은 2층에 있어요.”
 배기태는 계단 쪽을 가리키고 걷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계약직 특채라니 신선하네요. 실례지만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명운대요.”
 “명운대?”
 배기태가 ‘세상에 그런 대학이 있나?’라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듯하자 정우는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설명해 주었다.
 “있어요, 수도권 저 외곽에.”
 “무슨 전공 하셨는데요?”
 “경영이요.”
 당연히 화학과의 익숙한 분야 중 하나가 튀어나올 것을 예상했던 배기태가 흠칫했다. 갑작스러운 특별 채용, 비전공자의 연구소 배정. 이건 백 퍼센트 회사 고위층의 입김이 들어간 인사라는 판단을 끝마친 배기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네, 맞습니다. 낙하산.”
 대답을 듣자마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배기태.
 ‘너무 당당했나?’
 얘가 사장 아들이라도 된다면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라는 속마음이 배기태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우는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얼른 말했다.
 “그냥 후배로 편하게 대해 주세요, 선배님.”
 “선배? 그렇겠죠? 제가 선배죠?”
 떨떠름하게 수긍한 배기태는 갑자기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쯤 되고 보니 지하철에서 먼저 회사 동료를 만나 일찌감치 한 방 먹은 것이 큰 도움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우는 본의 아니게 상대를 침묵시킨 채 계단을 올랐다.
 ‘오.’
 2층에 도착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반투명의 외벽이 정우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복도를 따라 한층 전체가 이 외벽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한쪽은 온갖 화합물의 반응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기초 소재 센터’가, 반대편에는 파티션으로 칸칸이 구성된 크고 작은 사무실이.
 “이쪽이에요.”
 사무실 구역으로 이동한 배기태는 그중에 가장 작고 비좁아 보이는 장소 앞에 멈춰 섰다.
 독서실 수준의 초라한 책상 십여 개가 붙어 있는 이곳이 바로 연구소의 최말단이 사용하는 개인 공간인 모양이었다.
 “빈 책상 아무거나 쓰세요. 그리고 주간 회의 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배기태는 그냥 쉬고 있으란 말을 남기고 급히 사라져 버렸다.
 정우는 텅 빈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두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미 출근한 듯한 흔적이 보이는 다른 책상도 보였으나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회의는 몇 시지?’
 기껏 일찍 왔지만 이렇게 느긋한 분위기일 줄이야. 눈치를 봐야 할 선배도, 인사를 나눌 다른 신입도 없었다.
 무료하게 앉아 있던 그때, 사무실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 다 왔어. 아침부터 휴게실은 왜?”
 곱슬머리의 남자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누군가와 통화하며 한쪽 의자에 외투를 걸던 남자는 정우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해왔다.
 정우도 엉겁결에 인사하는데, 남자가 “뭐?”하고 놀란 눈이 되어 정우를 재차 보았다.
 “알았어. 갈게.”
 남자가 사무실 밖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얼마 뒤, 또 한 명이 사무실에 들어왔다가 문자를 확인하더니 정우를 흘끔 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출근한 공채 연구원이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지길 몇 차례. 정우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휴게실에서 내 험담이라도 하나?’
 친절함은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따돌림을 받는 것도 사양이었다.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할 텐데, 이거 인사할 기회도 없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휴게실로 달려갈 공채 연구원이겠거니 싶어 정우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 어디 간 거지?”
 귀에 쏙 들어오는 여성의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했기에 정우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래도 낙하산 씨는 있네.”
 “송보영 씨?”
 정전기를 몰고 다니던 외투 대신 연구원을 상징하는 새하얀 가운을 걸친 송보영이 정우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나머지는 어디 있어요? 거의 다 출근했다고 들었는데.”
 “아마 휴게실에 있을 거예요.”
 “가서 몇 사람만······ 아니다. 한 명이면 충분하겠네. 따라와요.”
 송보영이 손짓하자 정우는 ‘어딜요?’라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주간 회의 준비해야죠.”
 “제가요?”
 “아니요, 제가요. 낙하산 씨는 그걸 돕는 거고요.”
 송보영이 양팔로 짐을 나르는 동작을 해 보였다. 정우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얼굴이 되어 송보영을 따라나섰다.
 사무실 구역의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며 정우가 물었다.
 “송보영 씨도 다음 주 기획평가 준비하세요?”
 “기획평가? 제가 왜요?”
 “공채 아니셨어요?”
 송보영이 픽 웃었다.
 “왜 이래요, 일 년 선배한테.”
 “아······.”
 “제가 종종 오해받아요. 너~무 어려 보여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송보영.
 “인형 같이 생겼다고 천 박사님이 놀리곤 하셨죠.”
 그녀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에 시선을 던진 정우는 감히 몰라뵀다는 얼굴이 되어 “그러시구나”라고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참, 작년 기획평가 일등이 누구 게요?”
 “······보영 씨?”
 “정답! 그때 천 박사님이 제 칭찬을 막막~”
 자기가 천승국과 더 친하다는 어필을 계속해오는 송보영.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해맑은 눈웃음을 지었다.
 ‘으음.’
 아침의 지하철에서는 경황이 없어 크게 생각지 못했으나, 천승국이라는 인물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정도를 넘어선 듯 보였다. 처음 본 자신에게 라이벌이니 뭐니 윽박지를 정도로.
 “그러고 보니, 오늘부로 연구소에서 가장 막내는 공채가 아니라 정우 씨네요. 바통 터치가 빠른 감이 있지만, 공채들도 석 달 동안 무척 고생했으니까.”
 “고생이라면 어떤······.”
 “있어요, 그런 게.”
 송보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어 앞으로 걸어나갔다.
 
 
 3장 어느 화학 회사 인턴의 하루(2)
 
 
 정우가 송보영을 따라 도착한 곳은 비좁은 공채 사무실보다는 훨씬 규모가 큰 공간이었다. ‘연구 1실’이라는 공식 명패까지 붙어 있는.
 ‘좋네. 개인 자리도 넓고. 정식 연구원이 되면 이런 곳을 사용하나?’
 안에 들어간 송보영이 문서가 잔뜩 쌓인 책상 위에서 파일 하나를 들고 나왔다.
 “주간 회의 자료거든요. 70부 복사해서 연구동 회의실에 올려놔요. 그리고······.”
 사무실 안으로 고개를 돌린 송보영이 외쳤다.
 “승주 선배! 오늘 무슨 예비 실험한다고 했죠?”
 “금속 센터 새 프로젝트.”
 “맞다.”
 손가락을 튕긴 송보영이 말했다.
 “도구실에서 헴펠이랑 연결관, 비커 열 개. 기계실에서 전기분해 장치랑 가스 저압 분출 장치 챙겨요. 저장고에서 촉매용 마그네슘, 칼슘 샘플도 챙기고요.”
 정우는 막 입대한 이등병들이 주로 짓는 표정인 ‘잘 못 들었습니다?’가 되어 송보영을 보았다.
 “서둘러 줘요. 회의 삼십 분 남았으니까.”
 “삼십 분이요?”
 그 안에 다 할 수 있는 일인 것인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데 송보영이 어서 움직이라고 손을 휘저었다.
 “전 추가 자료 정리해야 할 것이 남아서. 고생해요, 낙하산 씨.”
 쿵.
 안락해 보이던 연구 1실의 문이 닫혔다.
 ‘이러려고 날 데려온 거 맞지?’
 정신없이 쏟아진 송보영의 지시. 복사기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 준비해야 할 도구 목록은 벌써 가물가물했다.
 다시 묻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일단 복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우는 사무실 구역을 헤매기 시작했다.
 ‘여기가 선임 연구원 전용실. 여긴 시청각실, 여긴 비품······.’
 비품실 근처에서 복사기 두 대를 발견한 정우는 곧장 그 앞에 섰다. 송보영에게 건네받은 문서의 클립을 제거하고 첫 장을 복사기에 넣었다.
 [70]을 입력하고 복사 버튼을 누르자 문서는 간단히 뽑혀 나왔다. 별말 없이 착착 쌓여가는 종이에 그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하긴. 막내의 고생이란 게 심부름밖에 더 있겠어?’
 회의용 복사 자료를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내용이 머리에 들어왔다.
 월요일 아침의 주간 회의라는 건, 지난 한 주 동안 연구소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를 두고 연구원들끼리 성과를 평가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 같아 보였다.
 연구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니 금방 적응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정우는 다음 장을 복사기에 넣고, 세부 자료에 시선을 던졌다. 복사하는 시간 동안 관심 있게 읽어 내려갔다.
 
 9시 25분.
 연구동 외각의 화합물 창고를 헤매다 겨우 샘플실을 발견한 정우는 예비 실험에 필요한 촉매제들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밖으로 나왔다.
 “여기 있었네요.”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은 낭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송보영이다.
 “어디 열어보시죠.”
 아이스박스 안에 담긴 샘플을 검사하듯 훑어본 송보영이 놀랐다는 듯 정우를 보았다.
 “제대로 다 챙겼네. 적응이 꽤 빠르시네요, 낙하산 씨.”
 “선배님의 신속 정확한 지시 덕분입니다.”
 정우는 ‘신속 정확’이라는 단어를 힘줘 발음한 뒤, 묵직한 아이스박스를 낑낑거리며 들기 시작했다.
 적잖게 힘들어 보이는 데도 별 불만이 없어 보이는 그를 다시 봤다는 듯 쳐다보던 송보영은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장점이 아니라 단점을 봐야지.”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타박하는 그녀.
 앞서 걷던 정우는 피식했으나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후우.”
 정우는 회의실 근처의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아이스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졸졸 뒤따라오던 송보영에게 물었다.
 “선배님. 그 낙하산이란 소린 계속하실 건가요?”
 “듣기 싫어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돌려서 얘기할 수도 있지 않나 해서요. 입사한 건 입사한 거고, 선배님께 제가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니.”
 “줬거든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던 송보영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정우의 이마를 흘끔 보았다가 미안했던지 한발 물러섰다.
 “아, 앞으로 줄 게 분명하니까 그러죠. 천 박사님은 여러 명이랑 일 안 하시기로 유명하거든요. 그쪽이 제자니까, 전 불리하죠.”
 “어쨌거나 지금은 연구소에 안 계시잖아요.”
 맞는 말이었기에 송보영은 더 변명 못 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시 아이스박스를 든 정우는 기초 소재 센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쪽 벽면이 탁 트인 유리창으로 되어 실험실의 전경을 두루두루 관찰할 수 있는 곳. 지방 연구소와의 화상통화 시스템까지 갖춰진 이 방은 중앙 연구소의 핵심 지휘소 역할도 겸하는 장소였다.
 안에 들어온 송보영이 회의실을 한차례 훑었다.
 “준비를 다 했네······.”
 정갈하게 쌓여 있는 회의 자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세팅된 예비 실험도구. 삼 개월 전 비슷한 일을 하며 버벅대던 신입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월등한 행동력이었다.
 정우는 샘플까지 탁자 위에 올려두고 송보영을 돌아보았다.
 “선배님.”
 감탄하고 있던 송보영이 갑작스러운 부름에 움찔해 정우를 보았다.
 “왜, 왜요?”
 “이제 곧 아홉 시 반인데 사람들이 안 옵니다. 따로 호출해야 해요?”
 “아, 그건요.”
 정우의 눈치를 살피던 송보영은 갑자기 가운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사실 회의는 10시에요.”
 “네?”
 “주간 회의 준비를 어떻게 막내한테 다 떠넘겨요. 제대로 못 하면 선배로서 위엄을 보여주려고 했더니만, 어쨌든 미안요. 이거 마시면서 푹 쉬어요. 남은 삼십 분 동안.”
 황당하다는 정우의 표정을 본 송보영은 애교 섞인 눈웃음과 함께 손에 든 캔커피를 흔들었다.
 “아니, 이렇게 빨리 준비할 줄 누가 알았나.”
 골탕 먹이려는 기운을 어느 정도 감지하긴 했기에 정우는 짧은 한숨을 쉬며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재차 실험 준비 상태를 확인한 송보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네요. 어디서 연구소 생활 좀 하셨나 봐요?”
 “그냥 눈치껏 했을 뿐인걸요.”
 “눈치만으로 이렇게까지 못하죠. 낙하산 씨는 천 박사님을 어디서 만난 거예요? 하이델베르크 연구소? 대전 화학연?”
 “글쎄요.”
 “아니, 이것도 말 못 해요?”
 눈을 찌릿 흘기는 송보영에 정우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럼, 이만.”
 “회의가 코앞인데 어딜 가요? 막내 자리는 저쪽.”
 회의장 구석의 간이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종용하는 송보영에 정우가 물었다.
 “선배님은 일 없으세요?”
 “없어요. 낙하산 씨가 다 했잖아요.”
 “아하.”
 정우는 계속 천승국에 대한 질문에 시달릴 것 같아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송보영의 표정을 보았다.
 뭐든 열심히 할 것 같은 밝은 기운. 옆에만 있어도 왠지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질투도 질투지만, 단지 천승국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당연히 실력이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천승국을 신뢰하기에?
 달칵.
 곤란해하던 중에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가 배기태를 필두로 공채 연구원 여섯 명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저건 저거대로 난감하네.’
 휴게실에서 자신의 험담을 했을 그들이기에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일어서는데, 옆에 있던 송보영이 바로 알은척을 했다.
 “후배님들!”
 들어서던 공채 연구원이 전부 송보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회의 준비 중이시죠? 뭐 도와 드립니까?”
 성큼 다가선 배기태의 물음에 송보영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쉬어요. 여기 낙하산 씨가 다 끝냈으니까.”
 송보영이 낙하산이라고 대놓고 말하며 정우를 가리키자 배기태의 안색이 변했다.
 “아······ 그······ 한정우 씨가요?”
 정우는 배기태와 눈이 마주쳤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 저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얘가 사장 아들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안 선 듯 보였다.
 정식 대면은 처음이기에 정우는 일단 다른 선배들에게 인사부터 했다.
 “처음 뵙습니다. 오늘부터 인턴으로 중앙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한정우라고 합니다.”
 사원증에 조성환이라는 이름이 쓰인 곱슬머리의 통통한 남자가 정우에게 물어왔다.
 “기태한테 들었는데, 정우 씨 전공이 경영이라고······ 진짜예요?”
 “네.”
 “혹시 정책 기획팀이나 총무 복지팀 같은 곳으로 지원했어요?”
 뭘 하는지도 모르는 부서기에 정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인적 자원팀?”
 “아니요.”
 “아니면?”
 “일단은 정식 연구원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대답에 조성환뿐만 아니라 다들 말문이 막힌 얼굴이 됐다.
 정우는 속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알약을 먹은 탓에 충만해진 화학지식으로 충분히 도움 드릴 수 있다고 밝힐 수도 없지 않은가.
 여기선 뻔뻔해지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어느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신입 사원 남자 주인공에 빙의되어 희망찬 포부를 밝혔다.
 “중앙 연구소의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연구원이 되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여, 열심히 해봐요.”
 조성환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정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송보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낙하산 씨 경영 전공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첫 만남부터 내내 궁금증을 달고 다니던 그녀가 똥그란 눈을 들이대며 여지없이 질문 공세를 시작해왔다.
 “복수 전공? 천 박사님과 연구 프로젝트로 만난 사이?”
 정우는 턱을 긁적였다.
 회의는 아직 27분이나 남았다. 침묵으로 버틸 수밖에. 이후 정우는 최대한 송보영의 시선을 회피하며 조용히 캔커피만 홀짝였다.
 
 * * *
 
 U자형 탁자에 임원급 연구원들이 둘러앉았다.
 “주간 회의 시작합니다.”
 간이의자에 오밀조밀 모여 앉은 선임, 주임, 일반 연구원들도 정우가 복사해 온 회의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정우는 일반 연구원들 틈에서 특유의 열정 가득한 눈망울로 회의 자료를 검토 중인 송보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쉬는 동안 최대한 침묵을 지키며 그녀와 공채 연구원들이 떠드는 것을 듣다 보니, 정우는 몇몇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테면, 송보영이 있던 연구 1실은 중앙 연구소의 에이스들이 사용하는 곳이라는 것.
 그녀는 독일에 있는 유명 대학의 석사 출신 연구원이었다. 물론, 다른 공채들의 출신 대학도 만만치가 않았다.
 ‘명운대를 모른다고?’
 코피 터져가며 공부해 겨우 들어간 인서울 대학이건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이름을 몰랐다.
 나름대로 역사 있는 곳이라고 보는 사람마다 설명을 덧붙이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1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동길이 발언을 시작하자 벽면에 PT 자료가 떠올랐다.
 “저희 팀이 진행 중인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는 재생에너지 연구소에서 변환 효율 18.1%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국내 2위의 기록이죠. 향후 효율을 3% 더 끌어올려 세계 순위권을 노려볼 계획입니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갔다. 연구 진행에 대한 의문점 문의, 새 의견을 제시하거나 토의하는 것까지. 그야말로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저희 3팀의 중질나프타 유동층 접촉분해 공정은······.”
 어제까지만 해도 외계어로 들렸을 전문 연구진들의 용어가 어머니 잔소리처럼 귀에 쏙쏙 박히는 이 상황. 정우는 그도 모르게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신도 이제는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일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있다.
 ‘쫄지 말자고.’
 십여 분 뒤. 4팀장 정상식 책임 연구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KG식품 사업부에서 의뢰한 ‘천연의 맛이 나는 조미료에 관한 연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PT 화면에 정우도 무척 익숙한 조미료 제품들이 잔뜩 올라왔다. 어머니의 손맛을 내는 ‘다시다’ 같은.
 “연구진은 소비자들이 다양한 식품첨가물에 의한 인공적인 맛에 불쾌감을 느낀다고 판단, 미각에 방해를 주지 않는 유형의 향미 증진제를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결과로 나온 식품첨가물의 화학식들이 화면에 나왔다.
 “새로운 뉴클레오타이드 화합물을 적용한 제품으로 평가단의 테스트를 받은 결과, 타사의 제품보다 인공적인 맛이 덜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팀과 마찬가지로 무난하게 보고가 끝나나 싶었는데, 갑자기 상석에 앉아 있던 연구원이 마이크를 붙잡았다.
 “연구는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정작 KG식품에서는 까였다고 했지?”
 “마, 맞습니다.”
 이 질문에 정상식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건 결과랑 상관없이 생각해 볼 문제야. 의뢰자가 납득 못한 프로젝트를 과연 성공했다 자평할 수 있을까?”
 중후하게 회의실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이 안에 있는 그 어떤 연구원보다 상위직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가 입을 열자 지식인들의 모임 같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청문회장 느낌으로 돌변했다.
 정우는 가운에 적힌 그 사람의 이름표를 보았다.
 신윤석 수석 연구원.
 ‘아······.’
 아까 공채들이 나누던 대화가 얼핏 떠올랐다. 연구소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에 관한 이야기. 신윤석은 회사로 치면 이사급의 인사였다.
 신윤석이 슥, 회의실을 훑어보다 공채들이 앉아 있는 곳까지 시선을 던졌다. 정우도 그 틈에 앉아 있었기에 그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어후, 무표정.’
 연륜 있는 연구원의 근엄함이 담겨 있어서인지, 정우는 마주 보는 것만으로 상당한 중압감을 받았다.
 “공채들. 이유를 알겠어?”
 주간 회의란 것은 경험 없는 연구원에겐 배움의 장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고민하던 배기태가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제일제당이나 풀무원 같은 라이벌 회사의 제품에는 글루탐산 소듐이 베이스로 들어가지만, KG식품은 뉴클레오타이드를 씁니다. 자극적인 맛이 덜해서 아니겠습니까? 소비자가 찾는 건 MSG이지 천연재료가 아니니까요.”
 “배기태 연구원. 카이스트 나왔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타당한 분석이군. 다른 사람 또 있나?”
 “식품첨가물을 줄인 덕분에 단맛분자의 친화성이 약해져 오히려 감칠맛은 떨어진 것이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어. 이름이······.”
 “조성환입니다.”
 조성환도 연이어 의견을 피력했다. 저마다의 화학적 전공지식을 이용해 풀이하는 분위기가 되자 다른 공채들도 앞다퉈 발언을 이어 나갔다.
 ‘연수 평가 기간이라 그런지 다들 치열하네.’
 순서대로 가다 보니 자연스레 일곱 번째 앉아 있는 정우에게도 신윤석의 시선이 쏠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물음에 이동길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들어온 인턴입니다, 신 박사님.”
 “인턴?”
 정우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한정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자네도 뭔가 말하겠나?”
 별 기대 않는 신윤석의 눈길에 정우는 고개를 흔들려고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학적 지식이 다른 공채가 말한 것 이상의 의견을 더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응?’
 무의식중에 PT 화면에 시선을 돌린 정우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4팀이 새롭게 만들었다던 조미료의 화학식이 갑자기 원소별 여러 개가 이어진 별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해서였다.
 ‘이 통찰력은 그냥 화학이면 다 가능한 거냐?’
 3D 영상처럼 PT 화면 위를 떠다니는 별자리들.
 ‘저건 응고 억제제, 저건 보존제, 식용 색소, 항산화제, 금속제거제······.’
 식품첨가물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성단을 이뤄갔다. 말하자면 조미료 속에 있는 우주라고 해야 할까?
 이상한 것은 이것들이 뭉쳐 구성된 은하계의 궤도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라는 것이었다.
 별과 별, 태양계와 별자리가 마구잡이로 충돌해 빛을 잃어가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흡사 블랙홀처럼 모든 균형을 허물어뜨리는 존재,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었다.
 ‘이런 걸 자꾸 현실과 겹쳐서 보다 보면 헛것과 진짜를 구분 못 할지도 모르겠어.’
 공간이 뒤집혀 버린 은하계를 코앞에서 바라보는 상태. 정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여 현실과의 괴리감을 좁혔다.
 “의견이 없나 보군.”
 “아니요.”
 신기한 광경 속에서 엿보인 화학적 신호를 따라 정우는 그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신입들의 뼈아픈 지적에 침울해 있던 정 팀장은 이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정우를 보았다.
 “어이, 인턴. 연구는 성공적이었단 말 못 들었어?”
 “그래요? 이상하네요. 저러고 성공할 수는 없는 건데.”
 PT 화면을 가리키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정우에 다른 책임 연구원들이 껄껄 웃었다.
 “정 팀장. 인턴이 아직 뭘 잘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
 “거, 당당한 태도는 맘에 든다.”
 이미 저기압이 되어버린 정 팀장이 정우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디 한번 말해봐, 인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있을 거 아니야.”
 정우는 보이는 그대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첨가물 간의 상호작용이 불안정해요. 저 뉴클레오타이드가 끼어들어서 말이죠.”
 정 팀장이 ‘후’ 하는 탄식을 삼키며 물었다.
 “우리가 4주 동안 개발한 새 화합물이 문제라고?”
 “결과물 자체는 훌륭하지만, 구성비라고 해야 할까? 다들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있네요.”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게요.”
 모두가 주목하게 되자 정우는 돌이킬 수 없겠다 싶어 일단 일어났다.
 “잠깐 저 PT 화학식 좀 만져 봐도 될까요?”
 정 팀장은 이 말에 신윤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신윤석은 정우를 한차례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팀장이 정우에게 손짓했다.
 “해봐.”
 정우는 PT를 조작 중인 연구원 옆에 서서 빠르게 화학식 수치를 조정해 입력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기에 정우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인간이 맛의 정보를 인지하는 것도 지극히 화학적인 반응일 뿐이잖아요. 예를 들어, 식당에 가서 제육볶음을 주문했다고 치면요.”
 정우는 어머니의 식당에서 실제로 팔고 있는 메뉴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고기가 프라이팬에서 자글자글 익는 소리,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냄새, 먹었을 때 양념에서 나오는 풍미, 고기 자체의 육즙, 살살 녹는 식감까지. 보통은 이걸 다 합쳐 맛이라 하죠.”
 타다닥.
 ‘효소 분해 쇠고기 분말은 농도를 진하게. 농축 미트향은 입자가 더 곱게 퍼지도록, 탈지대두랑 콘글루텐은 흡수가 빠르게······.’
 모든 화합물 결합식의 수치 조정이 끝났다.
 “조미료란 건 이 전부를 인공적으로 흉내 내는 지극히 화학적인 반응물이고요. 자, 보세요.”
 새로운 화학식과 함께 허공에 떠오른 조미료 속 우주는 뉴클레오타이드 블랙홀과 함께 있으면서도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정우는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식품첨가물들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결국 이 맛을 결정하는 화학구조를 어떻게 혀끝에 제대로 반응시키는가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걸 누가 몰라? 그래서 이 식은 뭔데?”
 “제육볶음에 넣으면 훨씬 맛이 좋아질 인공 조미료입니다.”
 맛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분자 구조의 효율적인 재구성. 그것이 정우의 시선에는 매우 간단한 것으로 나타나는 중이었다.
 “네가 그냥 즉흥적으로 끄적인 거로 그걸 어떻게 보장할 수 있지? 소비자가 천연의 맛을 원한다기에 그것과 비슷한 맛을 만들었어. 평도 긍정적이야. 이게 시작부터 잘못이라고?”
 정우는 보이지만 정 팀장은 볼 수 없는 정보. 실제로 결과물을 봐야 판단이 가능한 상대에게 정우는 순간적이지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사과의 형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화학물질은 화학적이니까 인체에 해롭고, 천연 물질은 원래부터 위험성이 없으니 마냥 좋고, 이건 화학 혐오론자나 할 법한 마인드······ 아, 정상식 팀장님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야, 인턴!”
 정 팀장이 언성을 높인 덕분에 회의실이 삽시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분위기가 삭막해지자 정우의 옆에 앉은 공채들의 안색이 변했다.
 “재밌는 소릴 하는 친구군.”
 그 정적을 깬 것은 신윤석이었다.
 정우는 신윤석을 쳐다보았다가 멈칫했다. 내내 무표정이었던 사람이 웃자 그것만큼 섬뜩한 것도 없었다. 가뜩이나 인상이 밝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기에.
 정 팀장이 열불 난 얼굴을 하고 신윤석을 보았다.
 “들으셨죠, 신 박사님. 얘 한다는 소리.”
 “정 마땅치 않으면 샘플을 만들어 테스트해 보면 그만 아닌가?”
 “하룻강아지 인턴이 작성한 겁니다. 정식 프로젝트를 뭐로 보고······.”
 신윤석의 눈이 빛났다.
 “인마, 정상식!”
 날벼락 같은 외침에 정 팀장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너 연구 몇 년 했냐? 하룻강아지 주제에 무슨 의견 제시야? 내 말이 맞아. 네 말은 틀리고.”
 “서, 선배님?”
 “네가 KG식품에서 까인 걸 내가 이렇게 검증 없이 따진다면, 뭐라고 대답할래?”
 피식 웃는 신윤석을 보며 정 팀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리고 곧장 4팀의 연구원에게 고개를 돌려 지시했다.
 “당장 샘플 만들어 와.”
 정 팀장이 분을 삭이며 말했다.
 “검증까지 10분 걸립니다. 그동안 다음 안건 진행하고 있죠, 신 박사님.”
 고개를 끄덕이는 신윤석을 지켜보며 정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박사님 성격 어마어마하시네.’
 정색하는 것과 웃는 것 사이의 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다른 연구원들은 신윤석의 저런 언행에 익숙한지 옆자리의 공채들처럼 안색이 시퍼렇게 물들지는 않았다.
 
 이후, 새 프로젝트에 관한 토의와 예비 실험이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내내 화합물 저장실에서 벌어지고 있을 합성 작업에 쏠린 상태였다.
 책임 연구원의 주관하에 진행된 예비 실험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옆에 앉아 있던 조성환이 걱정된다는 듯 정우에게 속삭였다.
 “정우 씨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프로젝트 팀장님들 자존심 장난 아니야. 더 열 받으시기 전에 미리 사과부터 하는 게 어때?”
 “제가 틀린 게 아닌데도요?”
 듣고 있던 배기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끼어들었다.
 “정우 씨가 무슨 천재라도 돼? 아니, 어떻게 화학식 한 번 보고 그 구성비를 바꿀 생각을 한데?”
 “한 번 본 건 아니고요. 복사할 때 회의 자료 보면서 대충 확인은 했어요.”
 “그게 무슨······.”
 뭘 믿고 저리 자신감 넘치는 건지, 배기태는 혀를 찼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 걱정된 조성환이 정우를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정 팀장님만 문제가 아니에요. 신윤석 박사님까지 관심을 두고 있잖아. 중연에서 가장 까다로운 선배님을 꼽자면 신 박사님이 단연 탑이라고. 수석 연구원한테 까이면 그걸로 연구소 생활은 막장 되는 거지.”
 정우는 걱정하지 마시라는 듯 엷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결과는 모를 일이지만, 틀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있었다.
 ‘이 정도 능력도 없다면 어차피 계약대로 활동 못 해서 잘릴 걸 뭐.’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가 한쪽에 앉아 있던 송보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반짝이는 눈으로 관심 있게 주시 중이었다.
 ‘음.’
 문득, 자신에게 가장 까다로운 인물은 천승국 박사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어 보이는 저 여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왔나보다.”
 조성환이 고개를 쭉 빼 들고 센터 안쪽 창문을 바라보았다. 예비 실험이 정리되어 가는 가운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가져왔습니다.”
 4팀 연구원의 손에 들린 소형 아이스박스에 너나 할 것 없이 시선이 몰렸다. 박스가 탁자 위에 올라가고, 갈색의 고운 가루가 담긴 시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 조미료 샘플을 손끝으로 찍었다. 바로 혀끝에 대고 맛을 보았다.
 “어때, 정 팀장? 맛 좋아?”
 미묘해 보이는 표정이 된 정 팀장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아 거, 말 좀 해봐.”
 다른 책임 연구원들이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얼굴로 앞다퉈 탁자로 달려들었다. 저마다 맛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길 몇 번째.
 “이거 되게 익숙한 맛인데?”
 “맞아. 그냥 평소 먹던 양념 인걸?”
 “희한하네, 이거만 뿌려도 고기 맛이 괜찮을 거 같은······.”
 한 책임 연구원이 정 팀장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이스박스에서 기존의 샘플을 꺼내 맛을 본 다른 책임 연구원은 ‘으웩’ 하고 혀를 내밀다가 정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저, 정 팀장. 이게 맛이 없는 건 아니야. 좀 심심하고 느끼해서 그렇지.”
 “아니.”
 정 팀장은 정우를 보았다.
 “그렇게 느끼는 게 맞아.”
 “마, 맞다고?”
 결과가 거의 정해지자 모두의 이목은 자연스레 공채들 틈에 앉아 있는 정우를 향하게 됐다.
 “거기, 인턴.”
 정우는 정 팀장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 어떻게 알고 수정한 거야?”
 이 물음에 정우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토록 수준 높은 연구원들에게 ‘조미료 우주와 블랙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을 순 없지 않은가.
 정우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가, 감이겠죠?”
 정 팀장은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거의 4주 동안 계속해 온 작업이기에 결과물을 접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편안하게 혀끝을 자극하는 맛. 이것은 MSG의 표본이자 라면 스프에 버금가는 마법의 가루였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고작 인턴이 어떻게 이런 센스를······.”
 사실상 패배 선언에 주변의 책임 연구원들이 놀란 얼굴이 됐다.
 정상식은 인정한다는 얼굴로 정우를 보았다.
 “네가 바꾼 화학식으로 새롭게 샘플 만들어서 KG식품에 보내겠어. 만약 채택되면, 프로젝트 참여 연구원에 이름을 올려주지. 이걸로 내 짜증 퉁 치자고.”
 “정 팀장. 이게 그 정도야?”
 “미쳤다. 입사하자마자. 얘 누가 특채로 올린 거야?”
 회의장이 점점 시끄러워지자 상석에 앉아 있던 연구원 중 하나가 말했다.
 “자자. 회의 끝났으니 이렇게 몰려 있지 말고 다들 일터로 움직이자고.”
 “김 박사님. 30일 걸린 정 팀장 연구 결과를 30초 만에 방향 수정했다고요, 저 인턴이.”
 “새삼스럽게 왜들 이래? 그러니 협력해서 연구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런 상황 천 박사 있을 때는 익숙했잖아.”
 웅성거리는 그들 틈에서 신윤석이 일어섰다.
 그가 이동하자 모여 있던 연구원들이 물살 갈라지듯 흩어졌다. 신윤석을 보조하며 옆에서 함께 움직이던 이동길이 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정우의 근처까지 걸어온 신윤석이 우뚝 멈춰 고개를 돌렸다.
 “한정우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다음 주에 바로 기획평가에 참여한다고?”
 “그건······.”
 정우는 이동길과 눈이 마주쳤다. 이동길이 씩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네, 참여합니다.”
 “기대되는군.”
 신윤석이 정우의 어깨를 툭 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공채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 정우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 * *
 
 중앙 연구소의 점심시간은 정우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품위 있고 여유로웠다.
 운동기구가 갖춰진 사내 헬스장이나 스쿼시 코트에서 건강을 관리하는 연구원도 있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북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티타임을 갖는 연구원도 보였다.
 물론 정우는 정식 연구원들처럼 고상하게 점심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처지였다.
 방금까지 잡일만 하다 겨우 풀려났기에.
 ‘연구소 일이라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아우, 목 땡겨.’
 주간 회의가 끝나고 3팀 선배에게 끌려가 정우가 한 일은 원심 분리기 안에서 회전 중인 시약을 내내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10초 단위로 상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보조 업무. 전문 지식보다는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교대해 주기 전까지 눈알 빠지게 체크만 해야 했다.
 “튀김 하나 주세요.”
 밥과 국. 먹을 만한 반찬을 식판에 담은 정우는 식당 안의 빈자리를 찾아 눈을 돌렸다.
 
 송보영은 ‘잘 먹었다’라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구내식당 출입구로 걸어 나왔다.
 오늘의 일거리도 벌써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 시켜주는 즐거운 시간. 콧노래를 부르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데 휴대폰이 울려 귀에 댔다.
 -쏭!
 “네, 선배.”
 -밥 안 먹었지? 내가 스파게티 죽여주게 하는 맛집을 찾았거든.
 이동길의 음성에 송보영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 됐다.
 “저 점심 먹고 나오는 길이에요.”
 -벌써?
 “밥이야 5분이면 뚝딱이죠.”
 -그렇게 빨리 먹으면 배 나와.
 “선배.”
 -미안, 미안. 하하.
 송보영은 복도를 걷다가 구내식당 안쪽에서 식판을 들고 움직이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주간 회의가 끝나고 책임 연구원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도통 말을 붙여볼 수가 없었던 인턴, 한정우였다.
 -아침에 브런치도 못했잖아. 커피나 같이할까?
 “저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식사 맛있게 하세요!”
 -어이, 보영······.
 뚝.
 휴대폰을 내린 송보영은 구내식당 입구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우는 된장국을 한 숟가락 맛본 뒤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가 구내식당의 백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진달까. 고급스러운 문화 공간 같은 이곳의 분위기도 맛에 한몫하는 느낌이었다.
 ‘여긴 매일 점심이 이럴 거 아니야?’
 메뉴를 고르는 고민조차 필요 없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오던 그때, 정우의 앞에 식판 하나가 탁 하니 놓였다.
 “혼자 먹고 있었어요?”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가 반대편에 막 앉은 송보영을 발견하고 경계하는 얼굴이 됐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닙니다, 선배님.”
 “따라 다닌다고 오해하고 그러지 마요. 난 그냥 낙하산 씨가 혼자 있길래. 밥은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 거니까.”
 송보영이 방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밥을 한 움큼 퍼서 입에 넣은 그녀는 정우를 보며 생글생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색해. 많이 어색해.’
 공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둘이 마주 앉아 식사라니. 그녀의 속셈은 대강 짐작이 갔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천승국에 대한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자 정우는 얼른 먹고 일어나려고 수저를 바삐 놀렸다.
 “저기······.”
 아니나 다를까, 송보영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발동을 걸었다. 정우는 곤란해지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천 박사, 네? 뭐가요?”
 기습적인 부름에 타이밍을 놓친 송보영이 눈을 급히 깜박였다.
 “선배님은 왜 그렇게 천 박사님과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건데요?”
 정우는 ‘어디 이유나 들어봅시다’라는 눈길로 송보영을 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한국에서 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그건 반드시 천 박사님일 거예요.”
 노벨상이라니, 너무나 먼 세계에 있는 단어를 언급해서인지 정우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상 받을 때, 공동 연구자 최대 3명까지는 같이 수상할 수 있는 거 아시죠?”
 “이제 알았네요.”
 송보영은 천승국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난 얼굴이 됐다.
 “천 박사님이 발표한 논문 중에 몇 개는 독일 화학계에서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정도라고요.”
 “미스터리?”
 “이론 자체를 이해 못 하는 학계 관계자가 더 많다 이거죠. 그래도 전 다 읽었죠. 제가 국내 유일일 걸요?”
 에헴,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송보영이 말을 이었다.
 “일부분은 원리를 파악하기도 했고요.”
 “대단하십니다.”
 정우의 칭찬에 활짝 웃는 송보영. 그 사이 정우는 하나 남은 튀김을 입에 넣고 재빨리 우물거렸다.
 ‘됐어.’
 송보영 혼자 떠들게 하겠다는 생각은 대충 들어맞았다. 이제 인사하고 자리를 피하면 되겠다 생각하던 정우는 속이 안 좋은 듯 가슴을 콩콩 치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어디 불편하세요?”
 “네? 전혀요.”
 하고 대답한 뒤 우읍, 헛구역질하는 송보영의 모습은 무언가 체하기 직전의 상태처럼 보였다.
 “식당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시나 봐요.”
 “아닌데요? 저도, 천 박사님도 이 식당 밥 얼마나 좋아하는 데요. 자주 같이 먹었어요.”
 “그러셨구나.”
 억지로 밥을 뜨는 기색의 송보영.
 “입맛 없으시면 굳이 다 먹을 필요······.”
 말하던 정우는 멈칫했다. 송보영의 입술이 순간 현미경을 들이댄 듯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해서였다.
 ‘이건 또 왜 이래?’
 특별한 화학반응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주간 회의에서 식품첨가물 별자리를 잔뜩 목격한 탓인지 그와 비슷한 형태의 잔해가 눈에 띄었다.
 “렌티오닌이네.”
 “뭐가요?”
 “입에 묻은 거요.”
 송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식 먹다가 묻을 수도 있죠!”
 냅킨을 들어 입을 쓱, 닦아낸 송보영은 아무것도 묻어서 나오는 게 없자 눈썹을 바짝 치켜들었다.
 “놀려요, 지금?”
 “이상하네. 렌티오닌이면 표고버섯 향인데 선배님 가져온 반찬엔 그런 게 없어요.”
 정곡을 찔린 송보영이 움찔했다.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안다고.”
 “오이 알코올도 있네. 오이 무침도 안 먹었잖아요? 혹시······ 점심 또 먹는 거예요?”
 정우의 질문에 표정관리 못 하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송보영.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정우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송보영은 자신과 대화를 하려고 일부러 식판을 들고 온 것이다.
 “배, 배가 고파서 그런 거거든요?”
 그녀의 어설픈 대답에 정우는 쿡 웃었다가 입을 가렸다.
 “미안해요. 일부러 알아차리려고 한 건 아니에요.”
 “웃겨.”
 입을 꾹 다문 채로 자신을 흘겨보는 송보영의 모습에 정우는 자꾸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녀가 다시 숟가락을 놀려 밥을 뜨려 들자 정우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먹어요. 체할라.”
 “됐거든요?”
 저렇게 꾸역꾸역 먹게 놔두는 것도 아니다 싶어, 정우는 빈 자신의 식판을 치우고 송보영의 식판을 뺏어 들었다.
 “한 그릇 더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뭐하는 거예요?”
 “더 먹고 싶으면 새로 퍼오시던가요.”
 송보영은 그녀의 숟가락을 손에 든 채로 정우가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정우는 깔끔하게 식판을 비워 낸 뒤에 배를 두드렸다.
 “아, 잘 먹었다.”
 “낙하산 씨.”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던 송보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제가 먼저 밥을 먹은 건 지나가다 봐서 알 수 있다고 쳐요. 그런데 어떻게 반찬까지 정확히 짚은 거죠? 여기 어디에 감시 카메라 같은 거 달아 놨나?”
 “입에 묻은 거 봤다니까요.”
 “제 말이요. 어떻게? 방금 그거. 진짜 천 박사님 같았어요.”
 정우는 식판 두 개를 겹쳐서 정리하며 말했다.
 “천 박사님께 배운 저만의 노하우를 굳이 선배님께 밝힐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것도 라이벌인데. 그 뭣이냐 노벨상 연구. 최대 3명밖에 티오가 없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급격히 시무룩해지는 송보영. 생글생글 웃다가 깜짝 놀랐다가. 참 버라이어티한 매력의 선배였다.
 ‘정전기 외투를 탄생시킨 빨래 실력도 그렇고. 이상하게 웃기는 재주가 있어.’
 본의 아니게 포식한 정우는 슬슬 움직여야 할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여기서 더 있다간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잘 먹었어요, 선배님.”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송보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섰다.
 “낙하산 씨, 오후에는 뭐 해요?”
 “3팀 선배님들이 계속 보조해 달라고 하셨어요. 교대로 1시간씩.”
 “그거면······.”
 내내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화합물이기에 송보영은 따로 불러낼 시간이 없단 것을 깨달았다.
 천상 내일 다시 기회를 노려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정우는 목을 주무르며 자동 분석기 안에서 빙빙 돌고 있는 액체를 바라보았다.
 디스크처럼 생긴 트레이 위에서 돌고 있는 저 혼합물은 석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경질 올레핀을 더 잘 분해하기 위한 촉매였다.
 ‘그니까 이 올레핀으로 플라스틱을 만든다 이거지?’
 어제라면 존재도 몰랐을 과정을 환하게 꿰뚫고 있는 지금, 연구라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반복 작업은 하품만 유발할 뿐이었다.
 회전이 일정 속도에 이르자 원심력에 의해 검체 파트로 넘어간 촉매가 곧바로 반응해 결과물이 모니터에 수치화되어 나타났다.
 그것을 받아 적은 정우는 다시 10초를 기다렸다. 도중에 5분여마다 한 번씩 반복해 온 하품도 다시 했다.
 ‘지루하다. 지루해.’
 오후 내내 이러고 있다 보니 목디스크라는 것이 뭔지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우 씨.”
 분석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생했어.”
 “교대 차롄가요?”
 “퇴근 시간이니까 이제 가 봐도 돼.”
 3팀, 접촉분해 촉매 개발부의 연구원은 정우가 기록해 놓은 통계표를 훑어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인계할 것도 없겠어. 혹시 전에 이 실험해 봤어?”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눈치껏······.”
 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 실험은 세포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화학 정보를 굳이 떠올려보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센스 정말 좋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 앞으로도요?”
 정우의 반문에 연구원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음.’
 실제로 참여해서 실적 올릴 것이 아니라면, 이런 보조 업무는 최대한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려고 연봉 1억을 받으며 연구소에 들어온 건 아니니까.
 “갑니다, 고생하세요.”
 정우는 밖으로 나와 크게 기지개를 켠 뒤, 아침에 가방을 두었던 그 닭장 같던 사무실로 움직였다.
 ‘아우, 피곤해.’
 그래도 무리 없이 연구소 생활에 스며들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함이 느껴졌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공채 몇몇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다들 자신의 책상에서 공부하듯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퇴근이 아니라 야근할 기센데? 아, 기획평가 준비하는구나.’
 정우도 다음 주에 같이하기로 했기에 별 고민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대학 4년 내내 필기를 담당했던 구식 노트북을 꺼내 책상에 올렸다.
 “어라.”
 꽂을 콘센트가 있을 리 만무한 썰렁한 책상. 복도로 이용하던 곳에 칸막이만 달아 놓은 임시 사무실이기에 따로 전기를 빼 올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내건 배터리가 없다시피 한 건데.’
 정우는 한숨을 푹 쉬고, 최신형의 노트북으로 빵빵하게 작업 중인 공채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방법은 없고, 집에 가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는데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퇴근 시간이죠? 잠깐 봐요.]
 닥터 문이었다.
 정우는 가방을 챙겨 사무실 입구에 섰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배님들!”
 활기찬 외침에 공채들이 고개를 돌렸다. 냉담한 반응들.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조성환이 짧게 인사를 건넨 것이 전부였다.
 ‘차차 나아지겠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정우는 닥터 문이 근무하고 있다는 10층의 버튼을 눌렀다.
 의약 바이오 센터.
 KG화학에서도 최근에 신설되어 공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정보가 사내 홈페이지 대문에 걸려 있었다.
 ‘고령화 사회, 종합 메디컬 케어 시대를 선도하는 연구소라고 했었지?’
 10층에 도착해 내려서니 복도 저편에 닥터 문이 서 있었다. 퇴근을 준비 중인지 가운이 아닌 사복 차림인지라 새벽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머리끈을 풀은 탓에 긴 생머리가 닥터 문의 어깨 옆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정우는 그녀를 불렀다.
 “닥터 문.”
 단아해 보이는 눈썹 아래, 한없이 깊어 보이는 지적인 눈빛이 정우를 향했다. 정우는 눈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으며 그녀 앞에 섰다.
 “어서 와요.”
 “와, 이 따듯한 인사. 회사 들어와 처음 받아보네요.”
 닥터 문은 ‘무슨?’이라는 표정이 되었다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바로 용건을 말했다.
 “연구동 출입카드 받았죠?”
 “네.”
 “그걸로 천승국 박사님 개인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게요?”
 정우는 안주머니에서 붉은색의 카드를 꺼냈다.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가보면 알 거예요. 천 박사님이 진행 중이거나 계획하던 연구자료가 다 있을 테니. 앞으로 퇴근하면 그곳에 가서 확인하고 숙지해 두세요.”
 “설마, 제가 대신 그 연구를 진행······.”
 “맞아요. 적응 기간 끝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제대로 이해해 두세요.”
 닥터 문은 정우가 내려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정우가 따라 타려 하자 닥터 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전 내려가야 해서. 정우 씨가 갈 연구실은 25층에 있어요.”
 “닥터 문은 같이 안 가요?”
 “제가 왜요? 전 의사지, 화학자가 아니에요. 의약 쪽 연구 프로젝트를 하게 된다면, 어쩌면 같이 진행하게 될지도 모르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정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방금 닥터 문이 야근은 기본 전제로 깔고 일을 던져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차 없네.’
 계약서 사인이 이미 끝나서 일을 막 시키는 건 아닐 거라고······ 정우는 또다시 미심쩍은 위로를 해보았다.
 
 * * *
 
 삐빅.
 카드를 대자마자 불투명한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정우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천승국 박사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초 소재 센터에 있는 각종 실험실의 축소판 같은 방 안의 광경이었다.
 ‘이것이 임원급 연구원이 사용하는 개인 공간이란 말이지?’
 넓고도 넓었다.
 반대편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전공 서적들이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사무 공간이 보였다.
 접대하기 좋아 보이는 광택 나는 가죽 소파, [천승국 수석 연구원]이란 명패가 올려져 있는 원목 책상, 무척 편안해 보이는 사장님 스타일 의자까지.
 정우는 잠시 사장님 의자에 몸을 기댔다.
 “와우.”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안락감이 정우의 등과 엉덩이를 감쌌다. 이래서 비싼 의자를 쓰나 보다 싶었다.
 ‘컴퓨터도 있고. 공채 사무실에서 기획평가 준비할 게 아니라 여기서 해야겠어.’
 정우는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쭉 밀어 캐비닛 쪽으로 움직였다. 열어보니 천승국 박사의 개인 연구를 기록한 서류가 한가득했다. 그중에 가장 최근 날짜가 적힌 문서철을 꺼내 손에 쥐었다.
 ‘만능 인자 프로젝트?’
 화학 지식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생경한 단어를 포함한 제목이었다. 게다가 서류 안에는 빈 백지뿐이었다. 개요만 정하고 시작조차 안 한 모양.
 문서가 만들어진 날짜는 올해 6월이고, 이후의 기록은 없다. 천승국 박사가 안식년을 떠난 것도 그즈음일 터.
 숙지해야 할 연구 정보가 산더미같이 많았기에 정우의 관심은 이내 다른 문서로 향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정우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벌써 밤 10시였다.
 ‘첫날부터 무리할 필욘 없잖아.’
 어젯밤에 잠을 전혀 안 잤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일은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책상에 잔뜩 쌓여 있던 서류철을 캐비닛 안에 다시 넣으려는데, 한 서류에서 쪽지가 뚝 떨어졌다.
 “응?”
 집어 들고 바로 읽어 내려갔다.
 
 [‘AF-5’를 이용한 유기화합물의 제작은 신중히 진행해야 한다. 이것이 초래할 획기적 화학반응은 일부만으로도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백지뿐이었던 연구기록, ‘만능인자 프로젝트’ 서류철에 꽂혀 있던 쪽지였다.
 ‘AF-5?’
 새벽에 자신이 먹은 파란 알약과 비슷한 코드명을 본 터라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능인자라는 용어는 다른 화학 정보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먹은 것 말고 다른 알약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걸까?’
 천승국 박사의 연구실을 나오면서 정우는 크게 하품했다. 공백으로 남아 있는 연구기록에 대해 고민해 보기에는 당장 익히고 외워둬야 할 다른 연구들이 흘러넘쳤다.
 “아으, 뻐근해. 일단 퇴근부터 하자고.”
 첫 출근이 설렜던 것만큼, 첫 퇴근도 가슴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맥주 한 캔과 함께 고된 하루를 곱씹어보는 일.
 직장생활을 하며 갖는 소소한 일상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의 일이니까.
 정우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늘은 잠이 무척 잘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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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de : AF-12
 case : 정전기 마스터
 research : 손바닥 신경섬유에 전기 신호를 보내 이온반응을 촉진 시키면, 자유 전자의 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4장 올드 스틸(1)
 
 
 삐비빅―탁!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곧바로 꺼버린 정우는 눈을 껌벅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젠장. 또 설쳤어.”
 KG화학에 입사한 지 5일째.
 갑작스럽게 직장생활이 시작된 탓인지 수면 사이클이 엉망이 된 느낌이었다. 어제까지 내내 야근을 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잔인한 닥터 문.’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만 버티면 낮에 실컷 잠을······ 아. 닥터 문, 설마 이번 주도 주말에 출근하나?’
 차마 물어보질 못하겠다. 고개를 저으며 정우는 방문을 열었다.
 어릴 때는 신나게 뛰어다녔으나 지금은 몸을 살짝 움츠려야 하는 비좁은 계단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맛있는 냄새.’
 시장기를 자극하는 향기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부엌에서 한창 요리 중인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고 있어?”
 “무국.”
 “소고기 듬뿍 그거? 오예!”
 “너 말고 찬이 먹으라고 끓이는 거야. 남은 시험 잘 보라고.”
 말은 저래도 요리할 때 손이 큰 거로 유명한 ‘지숙 식당’의 주인이었기에 국 안에 고기가 부족할 리는 없었다.
 “얘는 이번에 몇 등이나 할라나.”
 정우는 식탁에 놓인 물병을 손에 들었다. 막 입에 대려는데 홍지숙이 바람처럼 다가와 어깨를 매섭게 올려붙였다.
 “입대고 먹지 말라고 했지.”
 “아! 아직 안 마셨다고.”
 “먹지 마!”
 정우는 물병을 빼앗기고 허탈한 표정이 되어 식탁에 앉았다.
 “너무하네. 나 수능 준비할 때는 풀뿌리만 먹였잖아.”
 “뒤에서 5등 하던 걸 뭘 예쁘다고 잘 먹여? 그리고 너. 비싼 돈 들여 대학 보내놨더니, 지금 뭐 하고 있는데?”
 “으음······ 알바?”
 천연덕스럽게 반문하는 정우에게 홍지숙이 손에 쥔 달걀을 휙 던지려 들었다. 정우는 곧바로 양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전했다.
 “난 반숙으로.”
 “가서 찬이나 깨워와. 불러도 안 일어나.”
 “알았어.”
 어머니는 예전부터 공부 쪽으로 싹수가 보이는 똘똘한 작은 아들부터 챙기는 습성이 강했다.
 정우는 요 며칠 사이 자기도 꽤 똑똑해진 거 같다고 얘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걸 겨우 참았다.
 1층의 동생 방문을 열고, 방바닥에 엎어져 있는 동생을 발가락으로 쿡 찍었다.
 “야, 일어나.”
 “으음.”
 “빨리 안 나오면 네 달걀 형이 다 먹는다.”
 정찬이 이 소리에 고개를 불쑥 들었다.
 “먹지 마. 형 밥에 침 뱉을 거야.”
 “눈이나 뜨고 말해.”
 경쟁 심리를 자극해 한 번에 깨우는 방법은 오늘도 주효했다. 하품하며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정찬이 정우를 보며 물었다.
 “형 요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말했잖아. 알바가 빡세.”
 애늙은이 같은 동생의 외모는 정우의 친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잘 먹어서 그런지 키도 비슷했다.
 대충 추리닝을 걸친 정찬이 정우를 보며 물었다.
 “용케 안 그만두네. 페이가 센가? 나 겨울방학 때 펜타와치 스킨박스 질러줄 정도는 돼?”
 한 달 뒤에 받을 월급을 떠올린 정우는 의미심장한 얼굴이 됐다. 게임 아이템 정도야 얼마 든지다.
 “잘 보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내 옷 입지 말고. 주말에 내 방 청소, 거실 청소 싹 하고.”
 “그거면 된다고? 웬일? 꼭이다!”
 “속고만 살았나.”
 거래를 끝마친 우애 좋은 형제가 부엌에 들어섰다. 홍지숙은 밥과 국을 차례로 떠서 식탁에 올리며 두 아들에게 말했다.
 “공짜 아닌 거 알지?”
 “암, 알죠. 이 큰아들이 나중에 다 효도로 갚을······.”
 “이번 시험 5등 안에 들 거 같아. 상범이랑 준철이 다 못 봤더라고.”
 정우가 말하던 도중에 정찬이 끼어들었다.
 “5등?”
 홍지숙은 한눈에도 담긴 소고기의 양과 질이 다른 국그릇을 작은아들 앞으로 들이밀었다.
 정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국을 호로록거리는 정찬을 보았다.
 “우리 가문에서 5등이 말이 되냐? 뒤 말고 앞에서?”
 “그래.”
 “엄마, 얘 누구 닮은 걸까? 엄마는 아닌 거 같······.”
 국자를 움켜쥐는 홍지숙을 본 정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찬이 무심히 정우를 보며 말했다.
 “나는 모르겠는데 형은 아빠 똑 닮았잖아. 아빠처럼 사고치고 다니는 것까지.”
 “이 자식이.”
 이럴 때 집 나간 불량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정우는 할 말이 없어졌다. 붕어빵인 건 사실이니까.
 불량 청소년까지는 아니었어도 아버지를 닮아 노는 걸 즐기던 자신이 고3 때 겨우 정신 차린 것에 비하면, 동생은 그야말로 모범생 그 자체. 집안의 귀염둥이였다.
 그래도 반숙한 계란 프라이를 밥공기 위에 챙겨주는 홍지숙의 2순위 애정에 정우는 히죽 웃으며 밥을 먹었다.
 ‘한 달 만 기다려 보셔. 깜짝 놀랄 테니까.’
 
 정우는 현관 앞에 놓인 거울을 보며 옷을 살폈다. 한 벌로는 부족해 이틀 전 급히 주문한 새 정장과 와이셔츠 여러 벌로 임상 시험으로 받은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
 “다녀오겠습니다!”
 마당을 지난 정우는 기운차게 대문을 밀었다.
 열리자마자 끼기긱 울리는 소음 때문에 길가를 쓸고 있던 앞집 아저씨가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우야, 그 문 어떻게 안 되냐? 네 엄마 새벽에 시장 갈 때마다 귀신 나오는 거 같아.”
 “죄송해요. 주말에 기름칠 싹 해놓을게요.”
 정우가 조심스레 대문을 닫는 사이, 앞집 아저씨가 정우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쫙 빼입었네. 면접 가?”
 “알바요. 추워져서 정장 스타일 목도리도 하나 장만했어요. 어때요? 매칭이 괜찮나요?”
 앞집 아저씨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됐어. 보는 눈은 있으시니.’
 지금이야 퇴직해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앞집 아저씬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정년퇴직할 만큼 회사에 다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전혀 몰랐었다.
 “참. 담 달 반상회에서 제가 고기 쏠 거니까, 기대하세요.”
 “진짜?”
 “맨날 얻어먹을 수만 있나요. 소주는 아저씨가 사시고요.”
 “캬, 좋지.”
 손을 흔들어 보인 정우는 그대로 언덕을 한달음에 내려갔다.
 ‘이제 4주, 아니지 3주만 버티면 첫 월급이야.’
 대기업에 다니는 사원답게 구색을 갖추려다 보니, 아직까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다음 달에 뭘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신형 태블릿, 명품 선글라스, 고가의 시계가 정우의 눈앞을 왔다 갔다 했다.
 ‘아서라. 일단 집안에 쌓인 대출금부터 갚자고.’
 당장 낼모레 무슨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는 연구소 업무. 길게 보고 지출계획을 짜지 않으면 짧은 행복 뒤 긴 우울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
 ‘그래도 선물 정도는······.’
 자신이 사온 신상 패딩에 깜짝 놀란 어머니와 동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정우는 씩 웃었다. 일단은 이 동네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날이 머지않았다.
 
 덜커덩.
 정우는 전철 손잡이를 붙잡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따뜻하게 몰려오는 히터 바람에 취해 잠시 꿈나라를 방문해 버렸다.
 ‘어디지?’
 대충 보니 용산쯤을 지나는 것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환승역 직전에 정신을 차렸다.
 휴, 안도하며 사람들에게 치여 망가진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그러다 전철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응? 여기는 서는 곳이 아닌데?’
 -손님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한강철교 상부 구조물 일부가 떨어져 레일을 가로막은 관계로, 현재 서행하고 있습니다.
 전철 기관사의 방송에 탑승객들이 웅성거렸다.
 -구조물은 빗물받이로서 다리 상태와는 무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레일 위의 구조물을 걷어내는데 5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손님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정우는 놀라서 전철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으나 다리가 보일 리 만무했다.
 ‘하필이면.’
 의정부 방면은 쑥쑥 지나가고 있는 걸 보니 큰 문제는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웹서핑을 하며 5분을 보냈다.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전철이 다시 움직이자 불안해하던 손님들도 이내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전철은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인지 평소보다 느릿하게 한강철교 위를 지났다.
 정우는 대체 어디가 떨어진 건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빗물받이 추락이라······.’
 관심 있게 지켜본 탓일까? 요 며칠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 갑작스럽게 정우를 찾아왔다.
 한강철교 상단부 철제 구조물에 현미경을 들이댄 듯 시야가 크게 확대됐다.
 페인트가 칠해진 구조물의 표면이 영화관 스크린 크기로 다가오자, 매끄러운 연둣빛 막으로 둘러싸인 철의 대지가 정우의 눈앞에 펼쳐졌다.
 ‘어우, 움직이는 와중에 이러니 어지러운데?’
 휴대폰으로 VR이라는 가상현실 영상을 체험해 봤을 때 와 비슷한 멀미. 정우는 메스꺼움을 느끼는 와중에 확대된 세계를 살피며 화학적 정보를 가늠해 보았다.
 기름처럼 대지 위에 달라붙어 있는 저 연둣빛 막은 페인트였다.
 물방울을 그대로 튕겨내 버리는 페인트의 코팅 기능 때문에 철의 대지를 흠집 내는 화합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덜커덩- 덜커덩.
 전철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탓에 정우가 보고 있던 소규모 세상에도 흔들림이 찾아왔다.
 정우는 큼지막한 볼트가 박혀 있는 부분이 심한 진동으로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돌렸다가 그 부분이 한 단계 더 확대되는 것을 보았다.
 ‘자유 전자 네놈들, 거기서도 말썽이냐?’
 이제는 동네 친구 같기도 한 먼지별이 보였다.
 볼트와 철제 프레임 사이를 신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주변의 대지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는 저것은 그야말로 이 구역의 정신 빠진 녀석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볼트가 63빌딩 크기라면 자유 전자는 한 줌의 모래알 수준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저렇게 몇십 년은 난리를 부려도 볼트 표면을 갉아먹기 힘들었다. 산에 가서 삽질한다고, 산이 당장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크게 걱정할 건 없어 보여.’
 그만 봐야겠다고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돌리던 정우는 반대편 창문을 보았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저곳 볼트의 표면은 상당히 마모되어 거칠어져 있었다.
 ‘제법 위험하지, 저거?’
 만약 저쪽 구조물이 떨어진다면 의정부 방면 전철이 멈춰 버릴 것이다. 그럴 확률은 낮겠지만, 자신이 퇴근할 때 문제가 발생하면 또 기다려야 했다. 밤이라 더 오래 기다릴 수도 있고.
 정우는 전철 출입구에 붙어 있는 ‘서울 메트로 고객센터’ 전화번호에 눈길을 던졌다.
 ‘음.’
 고민을 거듭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가 가고 자동 응답 음성이 나왔다. 안내를 따라 기타 상담원 연결을 누르자 대기해 달라는 신호가 왔다. 전철이 늦어져 고객들 항의 전화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서울 메트로 상담원 김호정입니다.
 이윽고 통화가 연결됐다.
 “다름이 아니라요. 한강철교를 지나고 있는데 상단 구조물에 균열이 보여서 말이에요.”
 -네네, 균열 말씀이십······ 네에?
 “볼트가 철제 프레임과 금속 전위차가 커서 부식이 심해진 것 같아요. 빗물받이가 또 떨어질 수도 있는데, 이거 점검 좀 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저 고객님. 그 위치를 정확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한강철교 남단 끝부분이었어요. 의정부 방향 전철이 지나는 위쪽에요.”
 정우는 기억나는 위치를 상세하게 밝혔다. 상담원이 신상을 물어보기에 이름도 말해주었다.
 -감사합니다, 한정우 고객님.
 “별말씀을요.”
 -그런데 아까 말씀해 주신 원인 한 번 만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게요, 전자는 음전성이 강한 금속에서 약한 거로 움직이는······.”
 재차 설명해 줘도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사실 상담원도 황당하긴 할 것이다.
 다리 위의 특정 구조물이 녹 때문에 위험하다고 전화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었을 테니까. 장난 전화라고 안 여기면 다행이다.
 ‘할 도리는 했어.’
 어쨌든 시민 의식을 지켰다는 것에 정우는 나름 만족하며 환승역에 내려섰다.
 
 * * *
 
 KG화학 중앙 연구소의 금요일 아침.
 연구 1실의 문이 열리고 책임 연구원 오승주가 걸어 들어왔다.
 “잠시만 주목해 줘.”
 그의 음성에 자리에 앉아 있던 연구원 십여 명이 고개를 돌렸다.
 “전자 소재 센터에서 선임급 2명이 필요하다네. 연말 휴가로 결원이 생겼대. 정희랑 윤재가 가줘. 주말까지만 고생해라.”
 두 선임 연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길수 팀장님 전언이야. 금속 센터 새 프로젝트 연구원 계속 선발 중이니까 연구 1실에서도 지원해 달라고······.”
 일정에 해당 사항이 없는 연구원들은 이내 관심을 끊고 각자의 일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입구 쪽 의자에 앉아 있던 송보영도 오늘은 논문을 한가득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었다.
 “보영아.”
 “에잇.”
 그러나 오승주의 부름에 곧장 일어서야 했다.
 “너 여름에 ‘준결정 코팅’ 연구 참여했었어? 코레일에서 의뢰받았던 거.”
 “네, 선배.”
 “지금 시청에서 그 연구자 찾고 있어. 무슨 부식 관련 세미나 있단다.”
 “저를요? 박 팀장님은요?”
 “새 프로젝트로 정신없으시잖아. 아, 그리고 철도 공사 김 본부장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
 어쨌든 바로 움직여야 할 상황이기에 송보영은 열던 가방을 도로 닫아 어깨에 걸었다.
 “공채 몇 명 데려가. 선배가 밖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줘야지.”
 “그럴까요?”
 오승주의 지시에 송보영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 저 사람 누구지?”
 “중연 신입인가?”
 복도의 휴식용 의자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정우는 지나가던 타부서 연구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건넸다.
 ‘신경 쓰지 말고 지나가세요.’
 자판기 옆 콘센트 하나를 차지하고 고물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이 상황.
 창피하긴 했지만, 공채 사무실에서 넋 놓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낮에는 천 박사의 연구실을 이용할 수도 없고 말이다.
 정우는 복도 끝에 있는 공채 사무실 쪽 동향을 한차례 살폈다. 오전에 공채를 소환하러 온 선배 연구원은 아무도 없었다.
 ‘일이 없으니 이렇게 여유가 있네.’
 다시 집중해서 작업을 이어 나갔다.
 월요일 밤부터 어제까지. 정우는 남는 시간 틈틈이 천 박사의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닥터 문의 지침을 따라, 일단은 실적을 빠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부터 손을 댈 생각이었다. 다음 주의 기획평가는 그 시작점이 될 테고.
 타다다닥.
 발표자료 초안을 작성해 가고 있던 도중, 정우의 뒤편에서 불쑥 끼어든 머리 하나가 있었다.
 “뭐해요?”
 정우는 흠칫했다. 화, 수, 목을 출근하는 동안 거의 마주치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던, 자칭 라이벌의 동그란 두 눈이 한 뼘 너머의 거리에서 자신을 향해 있었다.
 “오호, 합성수지? 기초 소재 센터 프로젝트를 노리나 봐요?”
 노트북 화면의 자료를 유심히 훑어보는 송보영. 뽀얀 그녀의 뺨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 정우는 슬쩍 멀어지며 대답했다.
 “고민 중이에요.”
 “어떻게, 작년 1등 의견 좀 줘요?”
 쌍꺼풀 없는 송보영의 큰 눈엔 여전히 생기가 넘쳐흘렀다.
 “공짜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없던 얘기로 하죠.”
 생긋 웃는 송보영의 입매를 따라 보조개가 부드럽게 맺혔다.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내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정우는 본능적으로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리자. 저건 호의가 아니라 꿍꿍이가 있는 미소라고.’
 송보영의 기세에 휘말리면 매우 귀찮아짐을 되새기며, 정우는 노트북을 탁 덮었다.
 “자판기 커피 드시러 오셨어요?”
 “아니요.”
 정우는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앞으로 폴짝 나선 송보영이 웃으며 말했다.
 “짐 챙겨요, 갈 데가 있으니까.”
 “어딜요?”
 “좋은 곳이요.”
 “선배님한테만?”
 정답이라고 외칠 것만 같은 송보영의 표정. 연구 1실 막내인 송보영의 위치로 미뤄보건대 몸을 쓰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어째 조용히 넘어가나 했어.’
 정우는 자판기 옆에서 노트북 코드를 뽑아 가방에 넣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송보영이 딱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직도 공채들이 낙하산 씨 차별해요? 제가 한마디 해줄까요?”
 “오해 마세요. 그냥 공채 사무실 자리가 불편해 나온 거니까.”
 “에잇. 한마디 해줘야겠다.”
 송보영이 공채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괘, 괜찮다니까요!”
 정우는 가방을 어깨에 걸고 얼른 뒤따라갔다. 자고로 따돌림의 문제란 것은 본인이 해결해야 깔끔한 법이다.
 “선배님······.”
 “후배님들!”
 말리기도 전에 송보영이 복도에서 안쪽을 향해 외쳤다.
 “시청 세미나 행사에 파견 가야 하는데 함께 갈 사람 있어요?”
 ‘뭐?’
 순간 낚였음을 깨달은 정우는 우뚝 멈춰 섰다.
 ‘말려들지 말자. 이 선배 페이스는 정상인의 범주가 아니야.’
 공채 사무실 안은 송보영의 부름에도 조용했다. 콕 집어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기에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듯했다.
 “다들 바쁜가 보네.”
 코앞으로 다가온 기획평가 준비에 바쁜 그들이었다. 다음 주까지 보조 업무는 최대한 안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 기운을 감지한 송보영이 지나가듯, 그러나 소리 높여 말했다.
 “가는 길에 작년 기획평가 1등의 노하우를 들려주려고 했더니. 필요 없음 말고요.”
 공채들이 이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자, 선착순 한 명! 하나, 둘······.”
 송보영이 카운트를 세기 무섭게 공채 6인이 벌떡 일어나 뛰어들었다. 몸싸움 끝에 선두를 탈환한 배기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접니다, 제가 1등!”
 “오케이. 나머진 탈락.”
 배기태가 ‘꺄오!’ 하는 괴성을 지르며 동기들을 향해 어깨춤을 춰 보였다.
 “선배님, 한 사람 더 안 됩니까?”
 “3등까지만요!”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공채 사무실을 지켜보던 정우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눈이 마주친 송보영이 웃으며 말했다.
 “낙하산 씨, 운 좋은 줄 알아요. 이런 세미나 아무나 참석 못 하니까.”
 “그 좋은 기회, 공채 선배님들께 양보해도 됩니까?”
 기회다 싶어 던져봤으나 송보영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늦었네요. 이미 같이 간다고 보고 올렸거든요.”
 말려들지 말자고 결단을 내린 지 1초 만에 도로 말려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정우. 더욱더 잠자코 있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녀 옆에 섰다.
 부러워하는 동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로 신나서 나오던 배기태가 정우와 마주치고 멈칫했다.
 “정우 씨도 가요?”
 “그렇게 됐습니다.”
 송보영이 “출발!”을 외치고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배기태도 별말 없이 뒤를 따르고, 정우도 소극적인 태도로 따라붙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벌써 피곤해.’
 정우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부디 오늘 하루가 길게 느껴지지 말아야 할 텐데.
 
 외벽에 KG화학의 마크가 그려진 쌍둥이 빌딩 앞 도로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송보영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택시 불렀어요. 3분 뒤에 온다네요.”
 콜택시를 기다리던 중, 배기태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정우에게 말을 붙여 왔다.
 “정우 씨, 아침에 안 보이던데······.”
 “휴게실 근처에 있었어요.”
 “난 또. 정 팀장님 프로젝트 간 줄 알았죠.”
 “4팀장님이요? 주간 회의 뒤에 얼굴도 못 뵌 걸요.”
 까칠했던 정상식의 얼굴이 떠오르자 정우는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네. 성환이가 4팀 명단에 한정우 씨 이름 올라갔다고 했는데.”
 “그래요?”
 “그날 바꾼 조미료 샘플 채택됐잖아요. 소식 못 들었어요?”
 오늘 처음 듣는 것이기에 정우는 잘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리어 송보영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KG식품이 오케이했다고요? 진짜?”
 송보영이 정우를 보았다.
 “어떻게?”
 “저도 잘은······ 뭐, 어떻게든 된 거겠죠. 바꾸기는 제대로 바꿨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정우에 송보영이 분개한 얼굴로 손가락질했다.
 “저저, 자신감 넘치는 거 봐.”
 “자신감이 아니라······.”
 “거기 식품부 사람들 얼마나 깐깐한지 모르죠? 클라이언트가 반려시킨 팀 단위 프로젝트를 한 사람의 힘으로 수습했다는 건, 성과만 따져도 정말 대단한······.”
 송보영은 의도치 않게 정우를 칭찬한 꼴이 되자 순간 당황한 기색이 됐다.
 ‘이게 아닌데’라는 눈빛으로 말을 흐리다 정우와 눈이 마주친 그녀.
 “······4팀장님의 결단력. 한 번 까인 연구를 식품부에 또다시 들이댄, 그 과감한 열정이 대단하시다 이거죠.”
 칭찬인지 욕인지.
 “맞다. 이럴 게 아니지. 배기태 씨, 이리로.”
 송보영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찔렸던지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약속한 대로 기획평가 노하우를 말해줄게요. 자신만만한 낙하산 씨는 아마 필요 없을 거예요.”
 승부욕이 깃든 눈빛이 된 송보영이 배기태와 함께 저만치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작년 1등이고, 이쪽은 올해 수석이네.’
 본의 아니게 연구소 차기 에이스 둘에게 견제 비슷한 걸 받는 느낌이었다. 그다지 대결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말이다.
 찜찜한 예감.
 ‘아니야. 시청 간다잖아. 설마 뭔 일이 있겠어?’
 
 * * *
 
 주황색 택시 한 대가 일방통행 도로를 따라 한쪽에 멈춰 섰다.
 “공기정화 과제를요?”
 “처음부터 수익성보다 공공이익에 대한 목표를 설정했던 것이 차별화됐던 거였죠. 서울시가 인구 밀집도가 엄청나잖아요. 황사, 미세 먼지, 에어로졸 입자······ 기사님, 감사해요.”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계속해서 작년도 기획평가 얘기를 이어 나가고 있는 송보영과 배기태. 정우는 조용히 뒤를 따르며 둘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제가 제안한 집진 필터를 보신 천 박사님이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 하셨죠. ‘좋은 자세야. 입자의 크기가 차이를 만드는 거지.’ 한 번에 제 연구의 핵심을 알아보시다니, 진짜 감동이었죠.”
 “말씀 중 죄송한데, 천 박사님이시라면······?”
 “아, 공채 후배님은 가을에 와서 잘 모를 거예요. 신윤석 박사님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전설적인 분 있어요. 지금은 안식년 휴가 중.”
 이렇게 얘기하던 송보영이 흘끔 정우를 쳐다보았다. 정우는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대화 나누시라는 손동작을 해 보였다.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송보영은 배기태에게 계속해서 1년 전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우는 시달리는 것보단 둘만 떠드는 것이 차라리 긍정적인 거 아닐까 생각하며 시 청사를 찾아 눈을 돌렸다.
 덕수궁 근처에 자리한 15층의 건물.
 쭉 뻗은 돌담길이 풍기는 고풍스러움과 높이 솟은 빌딩의 현대적인 멋이 잘 조화된 이곳은 ‘서울시 서소문청사’라는 이름이 붙은 시청의 별관이었다.
 청사 안으로 들어가자 세미나 안내정보가 바로 보였다.
 
 [시설 계획과 공공 구조물 보완·보수 세미나 / 2층 회의장]
 
 생소한 부서가 주관하는 생소한 주제의 세미나였다.
 ‘1년 차 선배에 공채까지 끼여서 올 정도면 아주 대단한 건 아니겠지.’
 어쨌거나 공공시설 관리에 대한 심도 높은 토의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해지는 정우였다.
 “다 왔네요. 올라가죠.”
 노하우 전수라 칭하고 결국엔 천승국 박사와의 인연 자랑이었을 뿐인 대화가 끝나고, 송보영이 성큼 앞장섰다.
 2층에 올라서자 방문객을 접수 중인 공무원들이 보였다.
 “KG화학에서 왔어요.”
 다가간 송보영이 소속을 밝혔다. 시청 공무원은 송보영의 얼굴을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책임자 맞으세요?”
 “네, 맞아요.”
 너무 젊어 보여서인지 시청 공무원이 못 미더운 눈치를 보였다.
 “아무리 봐도 학생 같으신데······.”
 나이로 보나 늙어 보이는 순위로 보나 뒤에 서 있던 배기태가 가장 위였기에 시청 공무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배기태는 헛기침을 했고, 정우는 그것이 재밌어 쿡 웃었다.
 송보영은 사원증을 꺼내 시청 공무원에게 내밀었다.
 “박길수 팀장님은 못 오셨고요. 제가 철도 공사랑 진행한 준결정 코팅 프로젝트 2순위 연구자 맞아요.”
 “아······.”
 “화장을 별로 안 하고 다녀서 자주 오해를 받긴 해요. 어리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송보영. 앳된 외모에서 풍기는 가녀린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똑 부러진 말투에 시청 공무원이 살짝 당황한 것이 정우에게도 느껴졌다.
 “KG화학은 12번 자리입니다.”
 시청 공무원은 간이 이름표를 건네주면서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회의장 안에 자리한 사각의 큰 탁자에 송보영이 자리를 잡았다. 공무원에게 받은 이름표를 목에건 그녀가 정우와 배기태를 돌아보았다.
 “뒤쪽에 편하게 앉아 있어요.”
 정우는 간이의자에 앉으며 송보영에게 물었다.
 “철도 공사 프로젝트는 무슨 말이에요?”
 “올여름에 진행한 연구에요. 극단적인 부식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코팅제를 찾고 있었거든요. 페인트 위에 덮어씌울.”
 “부식방지제?”
 “네. 선로, 다리 구조물 전반에 사용할 수 있는 코팅제였어요. 물론, 철도 공사는 결과에 대만족했고요.”
 송보영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인 뒤 고개를 돌렸다.
 자료를 꺼내 뒤적거리며 세미나를 준비하는 송보영의 모습은 아까처럼 마냥 어려 보이지 않았다. 지적인 연구원의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해 정우는 눈을 한차례 의심해야 했다.
 ‘진지할 때는 진지하네.’
 송보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우는 가방을 옆에 내려놓기 위해 잠시 등을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아닙니다.”
 갑자기 지적으로 보여서라는 대답을 할 순 없기에 정우는 헛기침했다. 송보영은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아쉽게도 그때 천 박사님이 없던 때라 다른 칭찬은 못 들었어요. 그렇다고 무시할 생각 마요. 센터장님도 만족하셨고, 제가 충분히 기여해서 성공시킨 프로젝트니까.”
 이 여자는 뭐든 천 박사로 이어진다. 무시는커녕 어느 정도 감탄하고 있었기에 정우는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잠시 후.
 회의장 안에 자리를 잡은 인원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우는 근처에 앉은 몇몇 사람의 직책을 눈여겨보며 두근거림을 느꼈다.
 유명 대학의 건축학과 교수, 철도 공사 기술 본부장, 대형 건설 회사와 선박, 물류 창고 회사의 중역까지. 하나같이 직책이 높은 전문가투성이였다.
 ‘이 지성인의 향기.’
 이런 학구적 분위기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이 모습을 찬이 놈이 봤어야 했는데. 형이 이렇게 멀쩡하게 사회생활하고 있다고 말이다.
 ‘반에서 5등이 뭔 대수라고.’
 정우는 해본 적 없는 순위기에 질투는 좀 났다.
 회의실 중앙으로 한 공무원이 다가왔다.
 사십 대 초반에 안경을 쓰고 있는 그는 마이크를 톡 건드려 소리를 확인해 보더니 곧장 입을 열었다.
 “세미나 시작하겠습니다. 아직 외부에 계신 분들은 서둘러 입장해 주십시오.”
 발언권을 가진 십여 명의 전문가들이 중앙 탁자에 모두 둘러앉았다. 그중에 가장 어리다 할 수 있는 송보영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오십 대의 연륜 있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저는 사회를 맡은 시설 계획과 양기철 주무관입니다. 이 자리를 찾아 주신 각계의 관계자분들께 시장님을 대신해 감사를 전합니다.”
 양기철의 인사를 시작으로, 시청 도시 계획국의 상임 고문 황수곤 교수가 기조연설을 이어 나갔다.
 “······녹은 다리를 무너뜨리고, 창고에 쌓아둔 자재를 못 쓰게 만들고, 집을, 차를, 연료 탱크를 낡게 만드는 자연계의 암세포 같은 존재입니다······.”
 정우는 연설을 들으며 모두에게 나눠준 세미나 주제에 대한 자료를 훑어보았다.
 서울시에서 한 해 동안 녹과 관련한 보수공사 때문에 입는 손실액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 이것을 막기 위해 구조보강 공사를 하고, 수많은 부식방지제 투입하고, 페인트칠을 반복한다.
 이건 반대로 말하면 건축회사나 KG화학 같은 곳에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 모델이기도 했다.
 “이어서 한강 교량 종합 관리 실태 조사에 대한 발표를 듣겠습니다.”
 양기철의 말이 끝나자, 교량 안전과의 이상석 과장이 일어섰다.
 “보시는 것처럼, 한강 위의 다리 중 22개는 서울시에서, 8개는 타 기관에서 관리 중입니다. 보수 우선순위에 있는 교량부터 보시겠습니다.”
 정우는 빔프로젝트에 쏘아진 화면 속에서 오늘 아침에 지나간 한강철교에 대한 부분을 눈여겨보았다.
 ‘그 연둣빛 페인트는 유진케미칼 거였네.’
 KG화학만큼이나 익숙한 회사명이었다. 아무래도 경쟁사의 화학제품이다 보니 들어간 비용과 효과에 대한 정보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의응답 시간이 있겠습니다. 자유발언 해주세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신을 건축과 구조공학 교수라고 밝힌 강영태였다.
 “이 과장님. 내년에도 우선순위 다리 몇 개에만 페인트를 칠하고 말 겁니까?”
 “금년보다 예산을 증가시키지 않을 방침이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에서 보완할 예정입니다.”
 “답답하네요. 습한 곳에 칠해진 부식방지제의 수명은 길어봐야 1년입니다. 여름철 장마 길게라도 와 봐요. 잠수교는 바로 녹이 생길 걸요? 문제가 생긴 모든 다리를 일일이 보수할 예산조차 없으면서, 무슨 관리를 한다는 건지.”
 정우는 시작부터 시청에 적대적인 의견을 밝히는 강 교수를 보고 살짝 놀랐다. 까다롭게 따지는 것이, 저 시청 직원 땀깨나 흘릴 것 같아 보였다.
 “장기적인 관점의 구조적인 개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고성능 강재로 한 번에 보완하면, 향후 30년은 너끈히 버틸 텐데. 그 30년 동안 들어갈 예산이면 차고 남지 않겠어요? 국민의 피 같은 세금 낭비도 덜하고.”
 “······시에서는 모든 의견을 수렴 중입니다.”
 “특히 저 한강철교. 볼 때마다 걱정됩니다. 94년도에 개통한 다리를 자꾸 칠만 한다고 버팁니까? 아닌 게 아니라, 오늘도 뭐 떨어졌다면서요?”
 강 교수의 질문에 반대편에 앉은 철도 공사의 관계자에게 사람들이 시선이 몰렸다.
 “코레일 기술 본부장 김대철입니다. 아침의 사고는 바로 수습했고,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요?”
 “구조적인 결함보다는 철도 이동량 증가로 인한 내구성 약화가 원인이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강철교는 이번 KG화학과의 합작으로 연구한 코팅제를 새 부식방지 체계로 채택······.”
 코팅제 이야기가 나오자 송보영의 눈이 반짝였다.
 “김 본부장님. 제 말의 논지는 그게 아닙니다. 부식의 위험을 잔뜩 안고 있는 걸 칠만 한다고 튼튼해지냐 이겁니다.”
 “그건······.”
 “KG화학 연구원 송보영입니다.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송보영이 마이크에 입을 대고 끼어들었다. 상당히 젊은 외모의 그녀가 입을 열자 탁자 외부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얘기해 보세요.”
 강 교수는 어떤 논리든 반박해 주겠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얼굴로 송보영을 보았다.
 ‘워, 압박감 장난 아니야.’
 정우는 구경만 하는 데도 긴장감이 들었다. 강 교수가 시청 직원에 철도 공사 관계자까지 연이어 입을 다물게 만든 광경을 목격한 터라 송보영이 조금 걱정됐다.
 송보영이 준비한 자료를 펼쳐 들었다.
 “이번 연구에서 나온 결과물은 테플론보다 매끄럽고 스테인리스강보다 단단한 준결정 코팅제입니다. 최소 기대 수명도 1년이 아니라 3년. 제작비용은 그 절반. 강영태 교수님의 우려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상당한 비용 감소를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준결정? 처음 듣는 소리.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는······.”
 “네, 사실 맞아요.”
 비웃음을 흘리는 강 교수의 말을 자르는 송보영의 타이밍은 시기적절했다.
 “KG화학 중앙 연구소의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해서 성과를 확인한 프로젝트거든요. 이미 미국방부 부식 관리국에선 군사시설 전반에 활용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생긋 웃어 보인 송보영이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마지막 말을 이었다.
 “최신의 화학 공정으로 만든 화합물은 강자재 만큼이나 신뢰할 만한 기초 소재랍니다.”
 그녀의 의견에 시청 쪽 공무원도, 건설, 선박 회사, 타 기관의 관계자들도 관심을 표하며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 원.”
 잠시 말문이 막힌 강 교수는 사실상 의견 개진을 중단했다.
 철도 공사 본부장이 송보영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송보영은 ‘엣헴’하고 어깨를 으쓱한 뒤, 정우를 흘끔 보았다.
 어때요, 하는 눈빛.
 정우는 작게 박수를 쳐주었다.
 ‘꽤 하잖아? 전문가들 틈에서 주눅도 안 들고.’
 에이스들만 있다는 연구 1실에 있는 송보영이다. 자신과는 달리 열심히 공부하며 차근차근 쌓아왔을 화학 지식의 수준이 보통이 아닐 것은 당연한 일.
 옆자리 배기태는 송보영의 발언 내내 감탄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여겨보고 있었다.
 사회자 양기철 주무관이 입을 열었다.
 “더 이야기할 것이 없다면 다음 질의응답으로······.”
 “잠깐만요.”
 그렇게 한강철교를 두고 오고 간 설전이 송보영의 우위로 마무리되나 싶던 그때, 마이크에 손을 올린 한 사람이 있었다.
 “철교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세련된 양복을 빼입은 마흔 중반의 남자가 좌중을 돌아보았다. 정우는 이름표를 보고 흠칫했다.
 유진케미칼 연구 센터장.
 KG화학 쪽은 일반 연구원이 파견 온 것에 비하면, 경쟁사인 저쪽은 상당한 거물 인사가 세미나에 참여했다.
 “윤재길입니다. 반가워요, 강 교수님. 작년엔 저랑 싸우셨는데 올해는 예쁜 아가씨랑 그러시네요. 역시 파이터야.”
 강 교수가 ‘끙’하는 표정으로 윤재길의 시선을 외면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윤재길의 한마디에 회의장 안 사람들의 집중도는 단번에 그에게 향했다.
 윤재길은 기세를 몰아 빔프로젝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준비해온 사진부터 보시죠. 이 과장님, 부탁해요.”
 슬라이드 쇼에 녹슨 철로와 기둥, 고가도로 밑의 부식된 강철빔 같은 흉한 모습이 차례로 이어졌다.
 “이건 몇 년 전이고, 이건 저희 유진케미칼의 녹 제거제로 깨끗이 닦아낸 뒤, 페인트를 칠하고 일 년이 지난 현재의 모습입니다.”
 한강철교의 부분 사진이 화면에 나타났다. 연둣빛 페인트가 싹 칠해져 있는 깔끔한 다리의 모습들. 그것을 보며 윤재길이 가볍게 운을 뗐다.
 “보시다시피 외관상 완벽히 녹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내부는 어떨까요? 유진케미칼에서 자체적으로 정밀조사 한 결과 만여 개의 리벳 중 0.1%만 느슨해졌을 뿐, 녹은 전혀 발생하진 않았습니다.”
 윤재길은 철도 공사 본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도권 지하철과 철도의 수많은 이동량. 엄청난 진동을 동반한 충격이 매일 반복되는 와중에도 말이죠. 본부장님께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멀쩡한 철교 위에 새 코팅제를 더한다는 건 예산 낭비 아닐까요?”
 “안전을 위한 것이니 과한 투자가 낭비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안전성 평가에서 다른 다리보다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고 해도요?”
 김대철 본부장은 이 부분에서 논란이 가중될까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쪽 예쁜 아가씨.”
 윤재길이 자꾸만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자 송보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까 미 부식 관리국을 얘기하던데. 그곳이 생겨난 모태가 일화는 아시나요?”
 “그건······ 잘 몰라요.”
 송보영은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뉴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재 구조물. 자유의 여신상이 녹 때문에 붕괴될 뻔한 이야기를 모른다?”
 유들유들 송보영이 모르는 부분을 파고드는 윤재길의 말투는 능숙하다 못해 토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전 세계 부식 전문가들이 자유의 여신상에 있던 녹을 제거하고 복원할 때 사용한 방법. 저희는 그것을 따라 작년 한강철교에 대공사를 진행했고, 현재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전철이 운행 중입니다.”
 윤재길은 송보영이 반박 못 할 논리를 펼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유진케미칼의 아연 페인트는 말이죠. 무려 나사에서 개발한 특허를 빌려온 것입니다. 아주 습하고 염분 많은 지역인 하와이에서도 성능을 인정받았죠. 생산 가성비 때문에 이젠 저희 쪽으로 발주를 넣는 바이어가 훨씬 많습니다.”
 회의장 관계자들은 이번엔 유진케미칼의 자료를 심도 있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송보영은 제대로 된 의견을 잇지 못했다. 자사의 코팅제에 관한 연구만 진행했을 뿐, 상대 회사 제품이 가진 장단점 파악은 전혀 준비하지 못했기에.
 “준결정 코팅제. 좋습니다. 싸고. 그런데. 한강철교에는 안 맞죠. 여긴 부식이 이미 한창 진행 중인 곳이고. 저희 유진케미칼 같은 전문 기업의 토탈 관리가 필요한 장소라 이겁니다.”
 최초 강영태 교수로부터 시작된 토의가 두 회사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질 기미가 보이자, 양 주무관이 마이크를 붙잡았다.
 “진정하시고, 건설적인 의견 제시를 부탁드립니다.”
 “건설적이라고 하시니 더 궁금해지네요. KG화학은 이 중요한 자리에 왜 이렇게 경험 없는 연구원을 보낸 건지. 적어도 선임급은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말씀이 심하시네요.”
 “사실을 얘기한 것을 심하다 몰아붙이면 저야 할 말이 없습니다.”
 양손을 들고 졌다는 몸동작을 해 보이는 윤재길에 송보영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시종일관 여유 있는 모습의 윤재길. 토론경험의 클래스가 다름을 입증해 보인 그에게 정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사 제품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보니 정말 가차 없구나.’
 덕분에 송보영은 자신을 흘겨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함이 잔뜩 담긴 눈빛이 되어 있었다.
 ‘별수 있나. 저쪽이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닌······ 응?’
 프로젝터 화면에 보이는 한강철교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우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낯선 화학식과 함께 갑자기 원소들의 별자리가 입체 영상처럼 떠오른 까닭이었다.
 회의장 전체를 둥둥 떠다니는 소우주의 모습은 주간 회의 때와 매우 흡사했다. 더불어 상당히 재밌는 분자 화합물도 눈에 띄었다.
 ‘어쩌지?’
 탁자 아래로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하는 송보영의 모습에 정우는 턱을 긁적였다.
 이것이 승패를 나누는 세미나는 아니지만, 그녀의 패배는 KG화학의 패배.
 ‘에라 모르겠다.’
 정우는 손을 번쩍 들었다.
 “주무관님. 질문이 있습니다.”
 양 주무관이 정우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발언하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한강철교 관리에 대한 책임은 시에 있나요, 아니면 철도 공사에 있나요?”
 “그건 왜 묻습니까?”
 “저기 저 사진이요.”
 정우는 한강철교 한 부분이 클로즈업되어 있는 슬라이드 속 화면을 가리켰다.
 “비둘기 똥이 묻으면 과연 누가 닦아야 할까, 궁금해서 말이에요.”
 너무도 비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와서일까, 회의장 사방에서 피식거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송보영은 화들짝 놀라 정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느냐는 무언의 항의에 정우는 손을 살짝 들어 진정하라는 동작을 해 보였다.
 양 주무관은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음······ 그······ 비둘기 배설물 같은 건 안 보입니다만.”
 “있어요.”
 “어디에?”
 정우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환상 같은 원소별들의 궤도가 하나로 뭉쳐지더니, 마치 비둘기를 형상화한 별자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저 파닥거리는 분자······ 아, 강한 산성 성분으로 흠집이 난 부분을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어요. 유진케미칼의 페인트도 뚫어버린 비둘기 똥이죠.”
 정우가 스크린 쪽으로 걸어가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찍었다. 마침내 화면 구석에서 손톱 크기의 아주 미세한 흔적을 발견한 양 주무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를 보았다.
 “저걸 어떻게 찾았습니까?”
 “화학적 추론이죠. 화학자거든요, 제가.”
 어쨌든 정우의 말이 사실이라 판단한 양 주무관은 처음 질문에 대답했다.
 “철도가 지나는 부분이라 철도 공사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위쪽에 일반인이 건드릴 수 없는 전선도 많고. 서울시는 예산 보조만 해주고 있죠. 그런데 이걸 물은 이유가 뭡니까?”
 “그건요. 비가 오지 않는 한, 저기 묻은 비둘기 똥은 못 치우잖아요. 페인트로 강력한 보호막을 친다고 해서 철이 가진 본연의 성질을 억누를 수도 없으니까요.”
 “본연의 성질?”
 “산소와 미치도록 결합하고 싶어 하는 애정 말이에요. 아연 페인트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원소를 살아 있는 개체처럼 말하는 동화 같은 논리에 몇몇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엔 윤재길도 있었다.
 “이거 유머 감각이 출중한 청년이네.”
 정우가 은근슬쩍 유진케미칼의 페인트를 깔보는 발언을 하자 질 수 없다 여긴 윤재길이 곧바로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비둘기 배설물? 설마 그 정도 방비 못 할까. 그리고 화면에 보이는 정도의 흠집은 충분히 예상해서 세 겹으로 칠합니다.”
 “세 겹인 부분도 있는데, 아닌 곳도 있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지?”
 “봤으니까요.”
 출근길 전철에서 목격한 연둣빛 대지를 떠올리며, 정우는 발언을 이어 나갔다.
 “볼트가 조여지는 부분. 나사와 철제 프레임이 맞물린 곳. 이곳은 아예 페인트가 없죠.”
 “거긴 칠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유진케미칼의 토탈 관리엔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볼트는 다리 구조물 아닌가요?”
 윤재길이 코웃음을 쳤다.
 “우린 리벳과 볼트 부분 조사만 보름을 했습니다. 연결부를 자세히 본 적도 없는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 겁니까?”
 “지나가다 봤어요.”
 “거짓말.”
 정우는 납득 못하는 상대를 보며 똑같이 갑갑함을 느꼈다.
 ‘어떻게 풀어서 얘기하지?’
 고민하던 정우는 윤재길의 턱 쪽에 시선이 머물렀다.
 현실과 별자리처럼 보이는 화합물이 마구 혼재되어 보이는 탓일까, 정우는 직관적으로 턱에 묻은 것을 읽어냈다.
 “어제 과음하셨나 봐요.”
 “뭐?”
 술 마신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윤재길의 눈빛에 정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턱에 토한 게 조금 묻었어요.”
 묻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턱을 닦아내던 윤재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친구.”
 “에틸알코올에 비사볼렌 화합물이 보여서 말이에요. 향이 상당히 고급진 느낌인데. 비싼 양주 드셨나 보죠?”
 윤재길이 농담하지 말란 눈빛으로 정우를 쏘아보았다.
 “장난하는 거지?”
 “장난은 아니고요. 가만······ 시트르산에 아스코르브산도 섞여 있네. 아우, 신맛. 안주는 오렌지? 라임? 과일 안주에 독한 양주라. 속 버려요, 그거.”
 윤재길은 당혹스러운 눈빛이 됐다. 술을 마신 사실은 우연히 맞췄다고 해도, 성분까지 저렇게 정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치 분자를 본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저 녀석의 말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소리.
 이건 그만큼 화학적 지식에 자신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언행이었다.
 “날 깔보는 거냐 지금?”
 “전혀요. 걱정하는 겁니다.”
 윤재길은 약이 바짝 오른 나머지 정우에게 소리치듯 따졌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요. 오늘 아침에 빗물받이가 떨어진 한강철교 현장을 목격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나 할까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금속이 오랫동안 맞닿아 있으면 접촉 부위에 녹이 발생하는 건 아시죠?”
 “설마 갈바니 부식을 모르겠어, 내가!”
 “아시네요.”
 “상식 아닌가! 상식!”
 윤재길은 대화를 나눌수록 미묘하게 열이 받는 정우의 논리에 살짝 열이 뻗친 채로 되물었다.
 “그래서? 멀쩡한 나사에 녹이 생겼다는 그쪽 목격담만으로 뭘 입증할 수 있는 건데?”
 “어떤 볼트는 성분 구성이 미묘하게 달라 보였어요. 대충 전위차가 0.1볼트 정도 나는 것 같은데, 천천히 진행되면 십 년은 버티겠죠. 하지만 이게 강풍에 번개에 바람을 맞다 보면······.”
 “웃기는 소리.”
 “제가 개그에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닌데, 의외네요. 웃긴 얘기 잘못하면 저희 어머닌 손에 든 국자를 그냥 던지시거든요. 어릴 때 여기 잘못 맞아서 흉터도 있어요.”
 정우가 머리를 살짝 내려 뒤통수를 보이자 여유 있게 토론에 임하던 윤재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이 자식이······.”
 내내 여유 있던 윤재길이 욕이 나오기 직전의 표정이 되자 한쪽의 강 교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환상처럼 보이던 분자우주 속 별자리가 희미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정우는 말했다.
 “일단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 주무관님, 자리에 가도 되겠죠?”
 “그러세요.”
 정우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송보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소곤거리듯 물었다.
 “무슨 짓이에요?”
 “걱정 마세요. 사실만 얘기했으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정우가 도로 자리에 앉자, 송보영은 잔뜩 긴장해 있었는지 콩닥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 스톱!”
 그러나 이대로 질 수 없다고 여긴 윤재길이 가만있지 못했다.
 “할 말만 쏙 하고 빠지면 다야?”
 “자자. 진정하고 의견을 말씀하세요.”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감정적인 토론은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우는 윤재길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어차피 제가 본 걸 안 믿으시니,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그쪽이 몽골리안급 독수리눈이라고 갖고 있다 이건가? 대체 소속이 어디 길래?”
 “KG화학 인턴 한정우입니다.”
 “이, 이, 인터언!”
 고작 인턴에게 농락당했다고 여긴 윤재길이 거칠게 언성을 높였다.
 정우는 상대의 격렬한 반응에 실제로 대꾸할 말이 없어져 버려 입을 다물었다. 정확한 현상을 말해도, 이해를 못 하면 어쩔 수 없는 법.
 ‘소통이란 건 상호작용이니까.’
 어쨌거나 송보영과 KG화학이 무시당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진 않는 것 같아 정우는 나름 만족했다.
 “그만, 그만!”
 양 주무관이 손을 들었다.
 “앞으로 윤재길 센터장님은 발언 자제해 주십시오. 동호건설 관계자분들 의견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서울시에서 보완해야 할 공공 구조물이 한강 다리 하나뿐이 아니기에 세미나는 이내 다른 지역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돌아온 정우를 향해 배기태가 반쯤 얼어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우 씨, 저 사람 누군지는 알고 대들었어요?”
 “유진케미칼 센터장이잖아요.”
 “학회에 얼마나 영향력이 큰 박사님인데. 아무리 경쟁사라도 관계 나빠져서 좋을 거 하나 없어요.”
 “그래요?”
 앞으로 화학계에서 두루두루 덕망을 쌓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정우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더 황당한 배기태는 고개를 절래 내저었다.
 송보영은 슬쩍 정우를 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토의 중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청 별관에서 진행된 세미나는 오후 2시가 돼서야 끝났다. 각자 짐을 챙겨 돌아가는 와중에 단연 화제가 된 것은 ‘윤재길이 KG화학 인턴과 토의하다 빡이 돌았다’라는 이야깃거리였다.
 “낙하산 씨.”
 가방을 멘 송보영이 정우에게 다가왔다.
 “이러려고 따라 왔어요?”
 “제가 따라온 게 아니라, 선배님이 끌고 온 건데요?”
 “그게 그거죠.”
 정우가 일어서자 송보영이 머리 하나는 큰 그를 홱 올려다보았다.
 “아까도 그래요. 어쩜 그리 천 박사님을 닮은 건지. 부러워 죽겠네, 정말.”
 “그렇게 똑같아요?”
 “아주요. 내가 그 화학적 말빨 얼마나 배우고 싶었는데.”
 정우는 하도 천승국에 대해 듣다 보니, 이젠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도 보고 싶어지네, 그분.’
 송보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먼 산을 보듯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KG화학의 위상을 지켜 준 점은 참고할게요.”
 새초롬한 표정으로 칭찬인 듯 칭찬 아닌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우는 씩 웃고 말았다.
 
 “제길, 쪽팔려.”
 윤재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웃고 떠들고 있는 건너편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KG화학. 눈엣가시 같은 국내 1위 업체. 아주 근소한 차이로 매번 2위를 마크하는 유진케미칼로서는 다른 업체보다 더더욱 지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오늘 세미나에선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그것도 유진케미칼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보수 분야에서 말이다.
 지이잉.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던 윤재길은 품속에서 휴대폰이 울려 손에 쥐었다. 비서의 전화였다.
 “어, 왜?”
 -일 났습니다, 센터장님.
 “뭔데?”
 짜증 섞인 윤재길의 물음에 조심스러운 비서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게······ 20분 전에 한강철교에서 또 구조물 추락 사고가 있었답니다.
 “뭐라고?”
 윤재길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철교 아래쪽을 지나던 차량 2대가 파손됐고 기사까지 나고 있습니다.
 “망할. 그렇게 대비했는데······.”
 유진케미칼의 자랑인 토탈케어 시스템에 흠집이 가버릴 사건이었다.
 “이러면 철도 공사에 할 말이 없어지잖아. 가뜩이나 내년도에 우리 페인트 대신 새로 개발한 코팅제 쓰겠다고 통보받은 마당에. 당장 안전 점검팀 소집해!”
 -이상한 연락도 받았는데요. 오전에 서울 메트로 고객센터로 이 사태를 미리 경고했던 승객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상 위치가 추락 지점과 똑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위치를 예상해?”
 -연락처를 받아 놓긴 했습니다만······.
 “당장 번호 불러봐. 이동 연구차 대기시켜 놓고.”
 윤재길은 바로 번호를 입력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아, 실례합니다. 저는 유진케미칼의 윤재길 센터장이라고 합니다.”
 -어? 왜요?
 “네? 왜라니요······?”
 윤재길 앞으로 휴대폰을 들고 있는 정우가 다가왔다.
 “그러니까, 왜 저한테 전화를 거셨냐 이거죠.”
 “그야 아침에 한강철교를 지나며 신고하셨다기에······.”
 휴대폰에 대고 말을 하던 윤재길의 동작이 그대로 굳어졌다.
 “다, 다, 당신!”
 “센터장님 성격 특이하시네요. 코앞에 있는데 직접 말을 하시지. 저희가 세미나에서 뻘쭘한 사이가 됐긴 해도, 이건 좀······.”
 이 순간, 저 한정우라는 라이벌 회사의 인턴이 세미나에서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윤재길은 돌아버리고픈 심정이 됐다.
 “무슨 일인데 전화하셨어요?”
 어이도 없고, 쌓인 울분도 있고, 도무지 믿겨 지지도 않는 이 상황에 윤재길은 반쯤 입을 벌리고 정우를 바라봤다.
 “맞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아무 말이 없는 윤재길에 정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됐다.
 “낙하산 씨.”
 정우의 뒤를 따라 송보영이 걸어왔다.
 “왜 안 나가고 서 있어요?”
 “윤 센터장님이 전화하셔서요.”
 송보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전화? 싸우자고? 같이 때려줄까요?”
 “그건 아닌 거 같······ 네? 사람을 왜 때려요?”
 “아니, 저 박사님. 성질이 더러워 보이고 그렇잖아요.”
 “들리겠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윤재길이 정우를 향해 말했다.
 “한정우 씨라고 했죠?”
 “네.”
 “잠깐 나 좀 봅시다.”
 
 
 5장 올드 스틸(2)
 
 
 서소문청사 앞으로 걸어 나온 직후, 윤재길은 방금 비서에게 들은 사고에 대해 상세히 전해 주었다.
 정우는 아침에 본 빗물받이가 기어코 떨어졌다는 것에 놀랐다.
 “같이 가줄 수 있겠습니까? 급히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럽니다.”
 정우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요······.”
 멀리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하는 송보영과 배기태를 보며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업무 시간이고, 파견 나온 처지라서요.”
 “업무에 지장이 간다면, 그걸 방해한 만큼의 사례도 하겠습니다. 연구 센터 차량 금방 도착하니까.”
 이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례요?”
 “연구 컨설팅비에 준하는 비용을 지불하죠. KG화학 중연 소장님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니 충분히 양해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깐깐해 보이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꿨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사고의 사안이 심각하기 때문이리라.
 정우는 ‘연구 컨설팅’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 몰랐으나 잠깐 도와주고 아르바이트처럼 돈을 버는 것 아니겠나 싶었다.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은데. 가만, 컨설팅비면 얼마를 준다는 거지?’
 일단 윤재길에게 양해를 구한 정우는 송보영에게 걸어갔다. 잔뜩 궁금해하는 표정의 송보영이 곧장 정우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 나눈 거예요?”
 “도와달라네요.”
 “지금? 뭘요?”
 “한강철교에 사고가 터졌는데 저한테 조언을 받고 싶다나 봐요.”
 옆에서 듣던 배기태는 귀를 의심해야 했다.
 “저, 정우 씨에게요?”
 유진케미칼의 핵심인사가 KG화학 인턴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건 대사건이었다.
 한쪽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윤재길을 확인한 배기태는 할 말을 잃었다. 정작 정우의 표정은 심드렁했기에 배기태는 등골에 소름마저 돋아났다.
 정우가 송보영에게 물었다.
 “저희 복귀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죠?”
 “퇴근 전까지만 가면 돼요.”
 “그럼 수락할까요? 중연에 따로 말씀해 주시겠다고는 했는데. 차도 올 거고.”
 “당연히 해야죠. 한강철교는 KG화학에도 중요한 시설이에요. 철도 공사와 내년도 사업을 원만히 이어가려면 관련 문제는 성의껏 도와줘야 하는 게 원칙이고요.”
 송보영은 이 말을 함과 동시에 정우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낙하산 씨를 인솔하기 위해 저도 꼭 옆에 붙어 있어야 하겠죠.”
 “괜찮아요. 제가 세 살 어린애도 아니고.”
 “어머, 출근한 지 5일밖에 안 됐잖아요. 인턴은 선배가 챙겨야죠.”
 마치 배려하는 척, 따라오고 싶다는 욕구를 은근슬쩍 내비치는 송보영에 정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챙겨주셨던 거죠? 왜 전혀 몰랐을까.”
 송보영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잔말 말고 가요.”라고 속삭였다. 부끄럽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사이, 서소문청사 앞으로 흰색의 대형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지붕에 통신 설비까지 장착된, 척 봐도 특수한 목적을 가진 차랑 같아 보였다.
 배기태의 눈이 커졌다.
 “저거 유진케미칼 이동 연구소잖아? 일이 제대로 터졌나 봐요?”
 타사의 첨단 장비를 구경하는 경험 또한 흔치 않기에 배기태도 슬쩍 정우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정우 씨. 그 차에 혹시 자리 남는지 좀······.”
 윤재길이 “갑시다!”라고 버스 앞에서 소리치자 정우는 배기태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바로 뛰어갔다.
 “아, 배기태 씨.”
 송보영이 배기태를 불렀다.
 “먼저 가서 오 선배에게 세미나 잘 끝났다고 보고 해줘요. 나머진 제가 다녀와서 상세히 얘기한다고도 전해 주시고요.”
 “선배님, 저도 챙겨주시면 안 될······.”
 “낙하산 씨, 같이 가요!”
 얘기를 채 듣지도 않고 이미 정우를 따라가 버린 송보영을 보며 배기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치이익―
 대형 버스의 문이 열리고, 먼저 올라탄 윤재길이 정우와 송보영을 손짓해 불렀다.
 “들어들 와요.”
 정우는 외부의 문짝까지 밀폐처리가 된 특수 장비 차량에 한 발을 내디디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차도 있네.’
 내부는 실험 장비와 기계장치가 꽉 들어찬 간이 연구실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오밀조밀 배치된 고가의 장비를 구경하며 정우는 버스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이미 자리를 잡고 서 있던 서른 초중반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인사하는데 돌아오는 상대의 시선이 싸늘했다.
 “이 외부인들은 누구죠, 센터장님?”
 “어, 주 팀장. 이번 사고 수습에 도움을 줄 사람들이야. KG화학에서 왔지.”
 “KG화학?”
 여성은 놀란 얼굴이 되어 윤재길을 보았다. 유진케미칼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만한 일이 벌어진 마당에 라이벌 회사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한정우 씨. 이쪽은 유진케미칼 토탈케어 팀장 주하나.”
 정우의 뒤편에 서 있던 송보영까지 꾸벅 고개를 숙였으나 주하나는 듣는 듯 마는 듯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주 팀장. 바쁘니까 한강철교 자료부터 띄워.”
 모니터에 지난 10월에 실시한 한강철교 안전점검 결과가 나타났다. 주하나는 X-선으로 촬영된 철제 프레임 사진 중 사고가 일어난 남단 부근의 구조물을 띄운 채로 말했다.
 “오후 1시 40분경, 볼트가 풀려버린 빗물받이가 강변북로 쪽으로 떨어졌어요. 길이는 10미터가량이고, 느슨해진 볼트가 풀어지며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금속 피로도와 내성 실험에 대한 결과값을 살펴보던 윤재길은 정우를 돌아보았다.
 “아침에 발견한 곳이 여기 맞습니까?”
 “잘 모르겠네요. 일반 사진은 없나요? 되도록 선명하게 나온 거.”
 정우의 질문에 주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육안으로 뭘 확인할 수 있다는 거죠?”
 “저도 봐야 알 거 같아요.”
 주하나는 얘 대체 누구냐는 눈빛으로 윤재길을 보았다.
 “해줘. 저 친구 보통 실력이 아니야.”
 이윽고, 고해상도 사진이 화면에 나타났다.
 정우는 화면을 지켜보다 자유 전자들이 날뛰던 볼트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부분. 언제 사진인지 몰라도 부식이 아침보다는 덜 진행되어 있네요.”
 “부식? 빗물받이가 떨어진 건 철도 물류 운반 증가로 진동을 동반한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예요.”
 “그럴 리가요? 이 사진에서는 아니지만, 볼트가 상당히 손상되어 있던걸요.”
 “이봐요. 내구도 테스트 자료를 보세요.”
 까칠하게 쳐다보는 주하나에 정우는 굳이 싸울 필요 없겠다는 생각에 한발 물러섰다.
 “이런 다리 관련 전문가신가 봐요?”
 “보이는 그대로. 그러는 당신은요?”
 “저야 딱히 전문가라고 할 순 없지만요.”
 주하나는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을 눈치였다. 묵묵히 서 있는 윤재길은 어디 한 번 주하나를 설득해 보라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이럴 때는 화학적인 소통이 가장 큰 문제야.’
 정우는 윤재길을 흘끔 보고 세미나에서 효과적으로 먹혔던 그것을 떠올렸다. 이제는 조금 자신감이 붙고 있었다.
 ‘어디 한번.’
 가늘게 눈을 뜨고 주하나의 얼굴을 살폈다. 일반적인 화장품 성분, 음식물, 빵가루, 커피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리고 발견한 특이한 분자 구조. 누군가의 타액이었다.
 “뽀뽀 좋아하시나 봐요.”
 “뭐라고요?”
 정우의 눈에 마치 고양이처럼 다리와 꼬리를 가진 귀여운 분자가 나타났다. 앞발을 핥는 듯한 동작을 선보이는 녀석을 보며 정우가 말했다.
 “입이랑 뺨에 고양이 침이 잔뜩 묻었네요.”
 주하나는 안색이 변해 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출근 직전 현관에서 키키, 토토와 부비부비한 사실을 저 남자가 알 리가 없었다.
 “남의 일을 그렇게 제멋대로 때려 맞추지 마세요.”
 자사의 토탈케어 시스템에 구멍이 있다고 주장하던 남자에게서 나온 추측이기에 주하나의 시선이 더 날카로워졌다.
 “두 마리인가 봐요. 라이소자임 효소가 미묘하게 달라요. 한쪽이 좀 더 활발한 활동을 보이네요. 얘네 성격도 그런가요?”
 “그건······.”
 주하나가 ‘대체 어떻게?’라는 눈빛으로 정우를 보았다.
 “화학적 추론, 센스. 뭐 그런 거죠.”
 저 밑도 끝도 없는 추론을 주하나가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자 윤재길은 피식 웃었다. 문득 그는 한정우의 저 현란한 화학적 식견에 안 말려들 수 있는 화학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 팀장. 혼자 산다더니만.”
 고양이와 매일 키스를 나누는 33살의 딱한 노처녀를 애처로워하는 듯한 윤재길의 시선에 주하나가 당황했다.
 “오해 마세요, 센터장님.”
 “오해 안 해. 그냥, 주 팀장에 고양이라니 예상 밖이라서.”
 주하나는 한숨을 삼켰다. 단지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일이 더 좋아서 이렇게 지내온 것뿐이지만, 나 외롭지 않다고 변명을 계속하고픈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그게 오해시거든요?”
 “아, 미안, 미안.”
 들키고 싶지 않은 개인적 취향이 직장 상사 앞에서 까발려진 주하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정우를 쏘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안 거죠?”
 “저만의 화학적 노하우까지 라이벌 회사 팀장님께 알려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다시 저 다리 얘기로 돌아가서······.”
 주하나가 잠시 주의를 뺏긴 틈을 타, 정우는 빠르게 말했다.
 “유진케미칼의 조사 자료가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현상에 대해선 그럴듯한 설명이에요.”
 분자 세상을 엿보는 눈을 통한 직관적 논리가 아닌, 최대한 이쪽 세상에 알맞은 언어로. 정우는 그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학적 지식을 한 번 걸러 의견을 이어 나갔다.
 “좋은 식재료를 쓴다고 해서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진다고 보장할 순 없어요. 손맛부터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타이밍이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자료나 화학식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그것이 꼭 완벽한 구조물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잠깐 마우스 좀.”
 정우는 아예 주하나에게서 마우스를 받아 화면을 자유롭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가 아침에 본 바로는 몇몇 볼트와 빗물받이 간의 금속 재질에 큰 차이가 있어요. 전위차가 큰 볼트. 아닌 볼트. 당연히 큰 볼트 쪽은 부식이 심해지겠죠.”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볼트의 외형.
 “어디 일반인도 쉽게 찾을 법한 변형이 있을 법한데······.”
 정우는 한동안 사진을 훑더니 손가락을 탁 튕겼다. 한 부분을 최대한 확대한 뒤에 그것을 마우스 포인터로 가리켰다.
 “제가 감지한 화학반응은 이거에요. 모든 볼트가 똑같은 금속 성분을 가진 건 아니라는 거.”
 색의 차이가 살짝 있는 두 개의 볼트가 화면에 나타났다.
 “자요.”
 화면을 본 주하나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무척 진지해진 눈빛이 되어 윤재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단순 스폴링으로 색이 달라 보이는 건 아닐까요?”
 윤재길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기에 바로 대답했다.
 “이 정도 다리에 사용하는 볼트가 외부 부식으로 표면이 벗겨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올해 공사에 우리가 코팅제를 안 바른 것도 아니고.”
 “그렇겠죠. 그렇다는 건······.”
 주하나와 윤재길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볼트 제조공정에서 문제가······.”
 “애초에 철 함유량이 다른 불량 볼트가 섞여 있던 거지.”
 주하나가 키보드를 두드려 볼트를 제공한 업체를 찾기 시작했고, 윤재길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철도 공사 기술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삐 움직이는 두 사람을 보며 송보영이 정우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낙하산 씨.”
 “왜요?”
 “찾은 거예요, 원인?”
 “원인이야 아침에 찾았고. 저 두 분이 이제 납득하신 거죠.”
 “자랑은. 치.”
 이제 상담비인지 컨설팅비인지만 계산하면 되겠다 싶어 정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버스에 올라탄 후부터 매우 얌전해진 송보영도 가만히 정우의 옆에 서서 윤재길과 주하나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기다림이 무료해진 정우는 송보영에게 물었다.
 “천 박사님 말이에요. 평소에 연구소에서 무슨 일 하셨어요?”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뭐요?”
 “주간 회의에서 매번 기발한 의견으로 팀장님들 깜짝 놀라게 하고, 수석 연구원급 프로젝트를 두루두루······ 아, 궁금하면 낙하산 씨도 비밀 하나 내놔요.”
 “안 물어본 거로 하겠습니다.”
 “다 들었으면서!”
 그때였다. 통화 중이던 윤재길이 갑자기 큰 목소리를 냈다.
 “기자회견이요?”
 당황한 표정이 된 윤재길은 휴대폰을 양손으로 붙잡고 작게 속삭였다.
 “원인이야 찾아서 분석 중이죠. 전수 검사 하려면 최소 보름은 있어야 결과물이 나옵니다. 지금으로써는 무리······.”
 가만히 서 있던 정우를 돌아본 윤재길이 말했다.
 “······기다려 보세요. 한정우 씨, 혹시 문제 생긴 볼트를 현장에서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까?”
 “아마도요.”
 “시간은 어느 정도나?”
 “다리를 걸어서 지나가는 정도면 되지 않겠어요? 한, 30, 40분?”
 타자를 치고 있던 주하나의 동작이 굳어졌다. 누군 보름을 예상하고 정신없이 계획 짜고 있는데 고작 30분이라니. 윤재길도 신음을 꾹 참더니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그리로 가겠습니다. 입구에서 뵙죠, 본부장님.”
 통화를 끝마친 윤재길이 정우를 보았다.
 “한정우 씨. 용산역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우는 송보영을 돌아보았다. 송보영은 기자회견이라는 말에 일이 더 커졌다는 것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아요. 중연에 보고는 했으니까.”
 송보영이 허락하자 정우는 윤재길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볼트 찾는 건 컨설팅과는 무관한 일 아닌가요?”
 “일이 성공하면 토탈케어팀 보름치 운영비에서 10%를 떼 드리죠.”
 컨설팅 비용에 운영비까지. 자고로 거래는 흥정이 기본이다.
 “그 정도 가지곤 조금······ 날도 춥고. 한강 위를 걷다가 칼바람에 목감기도 올지 모르고.”
 “15%. 외부 용역에 이 정도 배분이면 최고로 대우해준 겁니다.”
 얼만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짭짤하리란 생각은 들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보영도 있고, 여기서 ‘정확히 얼마 더 주실 건데요?’ 라고 없어 보이게 물어보는 것도 좀 그러니까.
 “가죠.”
 “용산역에서 코레일 점검팀의 안내를 받으면 바로 한강철교에 진입할 수 있을 겁니다. 케이블 기자들이 조금 나와 있다는데 혹시 인터뷰 같은 걸 요청할지도 몰라요.”
 “인터뷰요?”
 
 용산역 정문.
 계단 위쪽에 설치된 간이 단상 앞으로 기자 십여 명이 서 있었다. 케이블 방송사의 차량까지 주차된 것이 8시 뉴스 급은 아니더라도 토막 뉴스 정도의 파급력은 되어 보이는 사고현장 같아 보였다.
 정우는 창밖을 살피다가 불쑥 가슴 아래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송보영의 뒤통수에 움찔 놀랐다.
 “와, 진짜네. 낙하산 씨 TV 나오겠어요. 연구 1실 선배들도 아직 나온 적 없는데.”
 함께 밖을 살피던 송보영의 탄성에 정우는 살짝 긴장한 채로 물었다.
 “KG화학의 이미지에 누를 끼치면 안 되겠죠?”
 “당연한 걸 뭘 물어요. 천 박사님은 몇 번 나오셨는데 완전 멋졌거든요? 기자들한테 강단 있게 그냥!”
 ‘강단 있게?’
 여기서도 천승국과의 비교다.
 “한정우 씨, 내립시다.”
 윤재길의 음성에 정우는 버스 문으로 다가갔다.
 치이익―
 문에서 내리자마자 모여 있던 관계자들이 다가왔다. 세미나에서도 만났던 시청 공무원과 철도 공사 직원도 눈에 띄었다.
 윤재길은 양기철 주무관을 보며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무관님. 저희가 손해를 봐가며 관리 중인 다리가 몇 갠데, 이렇게 압박을 주십니까?”
 “시장님이 관심을 두고 계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임기 초년이라 모든 사고에 민감하시니까요. 그리고 본부장님께 들었는데, 방법 찾으셨다면서요?”
 “제 힘은 아니고. 여기. 이 친구 덕분입니다.”
 양기철은 정우를 보았다. 세미나 때 윤재길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었던 그 청년임을 깨닫고 놀란 얼굴이 됐다.
 “한정우 씨 맞죠? KG화학의.”
 “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양기철이 정우의 손을 두 손으로 정중히 붙잡고 흔들었다. 뒤이어 다른 관계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강철교 운행이 혹시라도 중단되면 서울시 대중교통이 마비되어 버립니다. 오늘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철저하게 검사해 주십시오.”
 상당한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양기철의 말이었다.
 철도 공사 김 본부장과 인사를 나눈 뒤 옆으로 다가온 송보영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기대감이 섞인 표정으로 정우를 보았다.
 정우는 턱을 긁적였다.
 ‘이거 살짝 쫄리네. 괜히 한다고 그랬나?’
 
 * * *
 
 연구 1실에 앉아 있던 오승주는 공채 배기태의 이야기에 눈이 커졌다.
 “한강철교?”
 “네, 그 문제를 도우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때마침 한쪽의 평면TV에서 관련 뉴스가 속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볼륨 좀 높여봐!”
 
 《뉴스채널 JVN》
 “주말을 앞둔 오늘, 한강철교에서 두 번의 구조물 추락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오전에는 지하철 지연 사태가. 오후에는 강변북로 위로 떨어져 이를 피하려던 차량 2대가 파손됐습니다.”
 앵커의 음성과 함께 사고 피해자 인터뷰 화면이 나타났다.
 -전철이 지나가고 나서 다리 밑을 주행하는데 시커먼 게 차 앞으로 떨어졌어요. 놀라서 운전대를 꺾었죠.
 “더 자세한 이야기는 현장에 있는 기자를 연결해 알아보겠습니다. 손승호 기자.”
 「네 손승호입니다. 이곳은 코레일과 서울시로부터 한강철교 보수공사를 위임받은 유진케미칼의 측의 안전 관리팀이 나와 있는 현장입니다. 유진케미칼은 이 철교 외에도 전국 스무 곳에 달하는 교량을 종합관리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진케미칼이 언급되자 다른 연구원들도 관심을 보이며 TV 앞에 모여들었다.
 “다리 보수 저거 저쪽 주력 사업이잖아. 토탈케어였나?”
 “맞아. 거기 팀장 꽤 유명해. 화학연에 갈 수 있었는데도 유진케미칼을 선택했지.”
 “설마 네 동기 주하나? 완전 히스테리녀라며?”
 “그래도 예뻐서 대학 때 인기 많았어.”
 오승주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좀 해봐. 저기 우리 애들도 있을지 모른다고.”
 “예? 우리 애들이 왜요?”
 마침 화면에 늘씬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하나다.”
 
 「······관계자의 인터뷰가 시작됐습니다. 현장중계 들어보시겠습니다.」
 -우선 불의의 사고로 피해를 본 차량 운전자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시 당국과 철도 공사와는 별개로 유진케미칼에서도 성심성의껏 보상을 진행할 예정이며, 아울러 이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조속히 점검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부실한 안전점검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가 큽니다. 이에 대한 대책은 있으십니까?」
 -다행히도, 전문가를 초빙해 신속한 처리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문가라면 어떤 분입니까?」
 -직접 만나보시죠. 한정우 씨.
 -네? 저요? 아, 아. 이 마이크에 대고 하면 되나요? 안녕하세요, KG화학의 한정우입니다.
 
 “저, 저거······ 우리 인턴 아니냐? 주간 회의 때 그.”
 “야, 뒤에 보영이도 보이잖아.”
 “쟤들 저기서 뭐해!”
 
 -점검 과정은 간단합니다. 특정 빗물받이에서만 벌어진 부식 현상이니까요. 한 번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유진케미칼 측에서 두 달에 걸친 전수 점검으로도 못 찾은 곳을 한정우 씨는 찾을 수 있다 이 말씀이십니까?」
 -뭐, 솔직히 자신은 없네요.
 「또 이런 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 취지의 말씀이십니까?」
 -못 찾을 자신이요.
 
 순간, 연구 1실에 서 있던 모든 연구원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 * *
 
 ‘안전제일’이란 녹색 마크가 붙은 보호 모자를 눌러쓴 점검팀이 한강철교 경부선 라인 위에 올라섰다.
 선두의 사내가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치익.
 “본부장님. 철교 진입하겠습니다.”
 -A라인, 앞으로 1시간 동안 열차 간격 10분으로 조정했으니까, 7분 이동하고 3분 대기로 가.
 “알겠습니다.”
 철도 공사 점검 팀장이 모두에게 외쳤다.
 “노량진역에 진입할 때까지 돌아갈 수 없으니까 주의해 주십시오! 다들 제 신호에 맞춰서 출발하겠습니다!”
 정우는 난간을 밟고 다리 외곽 부분에 올라섰다.
 총 네 개의 선로를 따라 한강 너머로 쭉 뻗어 있는 철교.
 ‘낡아 보여서 그런가? 오래된 길을 걷는 느낌이야.’
 전철을 타고서만 지났던 선로를 발맞춰 걷고 있는 이 순간의 풍경은 정우에게 낯설면서도 새로운 기분을 들게 했다.
 저 멀리 넘실거리는 한강의 물 또한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에취―!”
 등 뒤에서 크게 재채기를 한 송보영의 목소리에 감상에서 깨어난 정우는 이번엔 현실적 문제와 맞닥뜨렸다.
 “경치는 좋은데 춥네요, 여기.”
 정우의 말에 코가 빨개진 송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아침엔 그렇게 안 쌀쌀했는데. 저녁 다 돼가니 더 추워. 으으.”
 “굳이 안 따라오셔도 됐는데.”
 “낙하산 씨가 가는데 어떻게 안 가요. 그래도 내가 선밴데.”
 “감기에 걸려도요?”
 “걸려도요.”
 제 책임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젓던 정우는 그 뒤에서 올라오는 주하나 팀장이 큼지막한 패딩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혼자만 쏙 준비했어.’
 얇은 정장 차림의 송보영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복장이었다.
 “선배님.”
 막 난간에 올라선 송보영이 정우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이거라도 둘러요.”
 정우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송보영에게 내밀었다.
 “낙하산 씨는요?”
 “춥기야 춥죠. 근데, 선배님은 지금 코가 떨어져 나갈 거 같아 보여요.”
 아직 온기가 붙어 있는 목도리를 건네받은 송보영은 무심히 한강을 살피고 있는 정우의 등을 보았다가 픽 웃었다.
 “이제 보니 낙하산 씨, 천 박사님하고 다른 점이 있었네요.”
 “다른 점?”
 “쪼~금 자상한 편이랄까?”
 정우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목도리를 착용 중인 송보영을 보았다.
 “콧물은 묻히지 마시고요. 신상이니까.”
 “우, 웃겨! 안 묻혀요!”
 앞장서 걷기 시작한 점검 팀장을 따라 모두 이동을 시작했다.
 약 7분 후, 전철 한 대가 지나갔다.
 철제 사다리를 타고 다리 아래쪽 안전지대에 대기하고 있던 정우는 상부 구조물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가 볼트 부분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았다.
 ‘휴, 잘 보이네.’
 시장님 눈치 안 봐도 되겠다는 생각에 정우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주 팀장님.”
 정우는 고성능 카메라를 들고 있는 주하나에게 말했다.
 “저쪽 좀 찍어주세요.”
 “어디요?”
 “저기······ 아, 제가 찍을게요. 셔터만 누르면 되죠?”
 대포알 렌즈가 달린 DSLR을 손에 쥐고, 이때부터 정우는 볼트의 부식이 의심되는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노량진역 역무원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고, 코끝이 루돌프처럼 붉은 여인 하나가 들어섰다.
 달달 떨고 있던 그녀는 따듯한 전기난로가 보이자마자 후다닥 달려가 얼굴을 들이댔다.
 “으, 온기. 살 것 같아.”
 “지금 복귀한 겁니까?”
 대기 중이던 윤재길의 물음에 송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행은요?”
 “복도에서 기자들 마주쳐서 대답하고 있어요.”
 소란스러운 바깥쪽에 시선을 던졌던 윤재길이 송보영에게 물었다.
 “점검 결과는 어떻답니까?”
 “세 군데 정도 위험해 보인데요. 10일 정도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아우, 귀 떨어질 뻔했네.”
 “불량 볼트는 총 5개였다 이건가? 사실이라면 수습은 간단하겠군.”
 윤재길이 안도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송보영은 얼얼한 뺨과 귀를 비비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년도에 저희 준결정 코팅제 투입되면, 앞으로 3년은 걱정 없을 거예요. 볼트 사이사이에도 스며들 수 있을 만큼 입자크기를 조정했으니까.”
 “자신만만하군요.”
 “제가 개발······ 까진 아니고, 엄~청 많이 기여했거든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인 송보영은 활짝 웃는 것으로 세미나때 다 못했던 자랑을 확실히 끝마쳤다.
 “KG화학의 신제품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봤자 유진케미칼의 페인트 업계 순위가 흔들리진 않을 테지만요.”
 “두고 보세요!”
 윤재길은 일도 잘 마무리됐고, 오전 세미나에서의 껄끄러운 충돌도 정리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회의장에선 제가 좀 심했습니다, 송보영 씨.”
 “이젠 예쁜 아가씨라고 안 부르시네요?”
 아쉽다는 얼굴을 한 송보영을 본 윤재길이 되물었다.
 “아깐 그 호칭 싫어하지 않았나요?”
 “그때는 센터장님께 한 방 먹어서 열 받았던 거였고요. 예쁜 건 예쁜 거니까. 칭찬은 겸허히 수용해야죠.”
 발랄함의 온도가 범상치 않은 그녀의 말투에 윤재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은 새파란 나이의 저 연구원이 가진 화학에 대한 열정은 과하다 못해 마구 흘러넘쳐 보였다.
 옆에서 구경만 해도 그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로.
 윤재길은 그것이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맨날 까칠하고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주 팀장과 주로 일을 해온 입장에선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다음 토론에서는 안 져요.”
 “얼마든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라는 말에 한정우 씨도 포함된 겁니까?”
 “그건······.”
 “그렇다면 조금 신경이 쓰이네요. 그 청년만큼 화학적 직관이 뛰어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흠흠, 저는 봤죠.”
 궁금해하는 윤재길의 눈길에 송보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리기에 송보영은 윤재길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여보세요?”
 -쏭. 어디야?
 중연의 선배 이동길의 목소리였다.
 “역 사무실이에요.”
 -우리 팀이랑 연구 1실하고 조인트 해서 회식 가고 있는데 복귀 이리로 해. 승주 선배도 여기 있다.
 “바로요?”
 -한정우도 데려와. 물어볼 거 있으니까.
 
 역무원 사무소 앞.
 기자 다섯이 정우를 둘러싼 채로 녹음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세 곳 말고는 당장 위험이 없다 이겁니까?”
 “네.”
 “확실한 겁니까?”
 “확실해요.”
 그걸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기자들의 눈길에 정우의 옆에 서 있던 주하나가 입을 열었다.
 “발견한 위험요소를 토대로 2차 정밀 검사가 야간에 있을 예정입니다. 통행량이 없는 시간대에 바로 공사할 수 있도록 준비도 끝내 놨습니다. 자사의 토탈케어 시스템을 활용해 긴급한 위험은 대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향후 꾸준한 안전점검을 통해······.”
 주하나는 틈틈이 토탈케어의 장점을 어필하며 간접 광고까지 하는 능숙함을 보였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건가? 와- 무섭네, 이 여자.’
 인터뷰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용산역에서처럼 방송 카메라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우는 한결 편한 기분으로 기자들을 대했다.
 “한정우 씨. 녹에 대한 전문가로서 이번 사태에 대한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줄 이야기 하나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제가 그런 전문가는 아니거든요.”
 수첩을 들고 뭐든지 받아 적을 기세로 서 있는 기자들. 가만 보니 뭔가 기사가 될 만한 화젯거리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아 보였다.
 ‘사고 안 난다니까 다들 실망한 눈치야.’
 실망한 것으로 따지면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용산역에서는 경황 중이라 잘 몰랐는데 이름난 신문사는 전혀 안 보였다.
 나중에 친구들이나 찬이 놈에게 자랑하고 싶어도 ‘나 인터넷 신문란 13페이지쯤에 요만큼 나왔다’라고 말하긴 좀 웃겼다. 기껏 오버해서 인터뷰도 했는데 말이다.
 정우는 사무실에 들어갔던 송보영이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을 보았다. 이제 시간 없다고 손짓해 보이는 그녀.
 “기자님들.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한정우 씨! 끝으로 한 말씀만 더!”
 그다지 할 말이 없기에 거절하려던 정우는 옆에서 내내 자사 제품을 자랑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는 주하나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돈 받고 도와준 거. 진짜 녹 전문가인 척해봐?’
 정우는 이번 사고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화학적 정보를 떠올려보았다. 금방 몇 가지 비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 오래된 철은 말이에요. 대부분 부식된다는 약점을 갖고 있어요. 한강철교를 구성하는 금속은 튼튼하지만, 사실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거든요. 빨리 늙고, 약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죠. 페인트로 화장한다고 주름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철교를 살아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정우의 화법에 주하나와 인터뷰 중이던 기자들도 귀를 솔깃하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낮에 떨어져 나간 볼트는 그중에서도 자유 전자의 활발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할 만큼 나약해진 거였죠. 태풍, 추위, 더위. 세상 풍파라는 게 맨몸으로 견디긴 힘들잖아요.”
 주하나는 인터뷰 중이던 기자들이 죄다 정우의 말을 받아 적거나 녹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 다가온 송보영이 시계를 가리켜 보였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부식에 대해서 다시 말하자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시계를 멈출 방법은 있어요. KG화학에서 개발한 준결정 코팅제 같은 게 있다면 말이죠. 이제 진짜 가볼게요. 주 팀장님, 고생하셨어요.”
 정우는 모두에게 인사하고 송보영을 따라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지금 한정우 말, 타이틀 뽑아낼 거 꽤 되지 않아?”
 “화학자라는 게 의사나 판검사랑은 느낌이 다른데 묘하게 전문적이네.”
 “KG화학 연구원이라고 했지? 젊어 뵈는데 상당히 말을 잘해.”
 걸어나가던 송보영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정우에게 작게 물었다.
 “준결정 프로젝트 광고까지 한 거예요?”
 “주 팀장님도 그러더라고요. 잘했어요?”
 “무척이요.”
 “웬일로 칭찬을 다 하시고. 어? 설마?”
 정우는 송보영이 차고 있는 목도리를 가리켰다.
 “묻혀 버린 거죠? 기어코. 쯧쯧. 빨래해서 돌려······ 아니다. 빨래 못 하지.”
 “아, 아니거든요!”
 역 안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정우와 송보영의 앞으로 걸어온 사내가 있었다.
 “가시는 겁니까?”
 윤재길이었다. 정우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에 주하나를 가리켰다.
 “발견한 것에 대해선 다 얘기해 뒀어요. 맞다, 그 운영비는 어떻게······.”
 “정밀 검사 끝나면 정상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굳이 한 번 더 확인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좌번호라도 드릴까요?’라는 얘기를 하려다 윤재길의 다음 말에 신음을 삼켜야 했다.
 “저희 경영 지원팀이나 KG화학 재무팀 다 퇴근 시간일 테고, 내일은 주말이니, 월요일에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아······ 괜찮아요.”
 ‘회사로? 그 15%가 내 돈이 아니구나.’
 윤재길이 주겠다던 컨설팅비와 운영비 일부분은 따져보면 한정우의 이름으로 받을 수가 없는 돈이었다. 업무 시간에 개인의 사적인 수입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죽 쒀서 개, 아니, 회사 줬네.’
 정우는 씁쓸한 얼굴로 윤재길에게 말했다.
 “가볼게요, 센터장님.”
 “한정우 씨.”
 “네?”
 “KG화학에서 인턴 기간 끝나면 유진케미칼도 고려해 보세요. 제가 적극 추천하겠습니다.”
 “그건······.”
 갑작스러운 스카웃 제의에 옆에 있던 송보영의 눈이 커졌다.
 윤재길에게 인사하고 역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송보영이 다급히 정우에게 물었다.
 “인턴 끝나면 진짜 갈 거예요?”
 갈 수도 없고, 당장은 가고 싶지도 않았다. 정우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살포시 장난기가 발동했다.
 “라이벌 하나 사라지는 건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만.”
 송보영은 아직도 차고 있는 목도리에 손을 올렸다가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어요. 지금은 낙하산 씨가 저보다 쪼오끔 위에 있다는 거. 분하지만 배울 건 배워야죠.”
 “누가 가르쳐 준대요?”
 “췟.”
 볼이 부풀어 오른 채로 먼저 걸어가 가버리는 송보영.
 ‘저 선배는 삐지면 귀엽단 말이지.’
 길가에 서서 택시를 부른 송보영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참, 회식 있으니까 따라와요.”
 “회식?”
 
 * * *
 
 여의도 근처의 상가 지역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계산하고 내려선 송보영은 거리를 둘러보더니 ‘돼지의 종말’이라는 간판이 붙은 치킨 호프집을 가리켰다.
 “저기에요, 회식 장소.”
 뒤따라 내린 정우가 물었다.
 “제가 껴도 되는 자리 맞아요?”
 “그럼요. 동길 선배가 낙하산 씨를 콕 집어 불렀어요.”
 “아하, 팀장님이 부르셨다니 신뢰가 가네요.”
 송보영이 멈칫했다.
 “무슨 신뢰요?”
 “이상하게 따라오라고만 하면 제가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 선배님이 계시거든요, 연구소에.”
 “어머?”
 “어? 혹시 그 선배님이세요?”
 찔리냐는 정우의 눈빛에 송보영은 시선을 회피한 채로 호프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우는 뒤따라 들어가다 고소한 튀김옷 냄새를 맡고 시장기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저기 계시네요.”
 안쪽의 널찍한 테이블에 대략 이십여 명의 인원이 둘러앉아 있었다.
 ‘죄다 연차가 높아 보여.’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식은 중앙 연구소의 간판 프로젝트팀과 연구 1실 에이스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정우는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선배들이 전혀 없기에 그대로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인턴 한정우입니다!”
 잔뜩 힘을 준 인사에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뉴스에 걔 맞지?”
 “맞아, 그 인턴.”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1팀장 이동길이 손을 들었다.
 “송보영! 한정우 데리고 얼른 튀어 와!”
 “가요, 낙하산 씨.”
 졸지에 이동길과 동석하게 된 정우는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옆에는 연구 1실의 실장인 오승주까지도 함께 앉아 있었다.
 ‘날 왜 부른 걸까? 공채들도 없잖아.’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동길은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쭉쭉 출세해 온 상류층 인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다.
 이동길이 자리에 앉은 정우를 향해 물었다.
 “소주? 맥주?”
 “아, 빈속이라서······.”
 “그럼 맥주만 받아 둬. 우리 회식은 술 마시라고 강요하고 그런 거 안 하니까 주량껏 조절하고. 보영이는? 폭탄?”
 “배 좀 채우고요. 일단 저도 맥주만.”
 탄산 주스나 마셔야 할 것 같은 외모의 송보영이 한 대답에 정우는 흠칫 놀랐다.
 잔에 콸콸 채워지는 맥주를 멍하니 보던 중 이동길이 물어왔다.
 “보영아. 유진케미칼과 협력 업무는 잘 끝냈어?”
 “네.”
 “내가 윤재길 센터장님을 좀 아는데, 대충 해선 안 됐을 텐데?”
 이건 정우를 보며 한 물음이었기에 정우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 한 게 아니라서요.”
 이동길은 ‘헛’하는 웃음을 흘리더니 소주를 한 모금 넘기고 옆자리의 오승주를 보았다.
 “승주 선배 생각은 어때요? 아까 진짜 놀라셨잖아요.”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서른 후반의 사내가 정우를 한차례 보더니 무심히 대꾸했다.
 “잘하고 왔다잖아.”
 “와, 쿨하셔. 이 인턴이 실수 크게 했으면 그거 보낸 승주 선배도 시말서 각 아니셨나요?”
 정우는 시말서란 소리에 당황했다. 오승주는 소주잔을 내려놓더니 이동길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인턴 놀라게 쓸데없는 소릴. 보영이가 어련히 케어했겠지. 연구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
 송보영은 이 소리에 창밖의 먼 곳을 보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말은 보살핀다고 해놓고 정우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으니까.
 “한정우 씨. 오해 말고 들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이동길의 눈길에 순간 냉정한 빛이 맴돌았다.
 “오늘 정우 씨가 한 행동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어. 기자회견에서의 그 터무니없는 장담은 그렇다 치고, KG화학의 이름을 걸고 하는 행동에는 적어도 그 당위성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해. 그런데 내가 본 정우 씨 모습에선 그게 없었어.”
 “책임 못 질 일은 하지 말아라 이 말씀이시죠?”
 “그렇지. 이해가 빨라서 좋아. 앞으로 이런 일 할 때는 신중해 줬으면 싶어.”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찌 됐건 오늘 윤재길과 일을 잠시 해본 것으로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미세한 세상을 보는 이 눈이 있는 한, 뭘 하든 자신감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
 ‘나는 편안히 볼 수 있는 걸 저들은 못 봐.’
 이건 화학자에겐 엄청난 힘이다.
 
 회식 분위기는 오후 8시가 되자 깊게 무르익어갔다.
 정우의 옆에도 어느새 선임 연구원 선배들이 앉게 됐다.
 “주간 회의 때 정우 씨 얘기 정말 웃겼는데 말이야.”
 “정 팀장님 성질 장난 아닌데, 신 박사님 앞에선 깨갱이거든.”
 정우는 선배들을 따라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분위기에 취해 어물쩍 마시다 보니 한 네 병은 마신 듯했다.
 ‘회사 인맥은 회식이 시작이라더니.’
 올여름 취직에 성공한 대학 동기의 자랑 같은 푸념을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신을 견제부터 하던 공채들과는 다르게 중연의 선배들은 그다지 편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 유진케미칼과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사실이 꽤 신뢰할만한 연구원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야, 보영이 술 말고 있잖아. 누가 좀 말려. 저번에도 업혀 나갔잖아.”
 옆자리 선배가 송보영을 언급해 정우도 시선이 돌아갔다. 테이블 가운데쯤에서 여성 연구원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는 그녀는 꽤 마셨는지 양 뺨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네, 송보영! 노래 한 곡 하겠습니다.”
 “아무도 안 시켰다.”
 “한나, 두울~ 박자 주세요!”
 “조용히 마시자 이것아! 쪽팔린다.”
 정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보통은 술기운에 억지로 노랠 시켜서 막내가 발을 빼는 그림이 맞는 거 아닌가 싶건만, 저긴 선배들이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정우 씨. 기획평가 준비는 잘 돼가?”
 옆자리 선배의 물음에 반대편에서 시종일관 묵묵히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오승주도 관심 있는 눈길로 정우를 보았다.
 “그냥 간단한 아이템을 생각 중입니다. 아마도 합성수지 관련한······.”
 노트북에 정리해 두었던 연구 목록이 정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중연의 주력 업무라 할 수 있는 기초 소재 분야 쪽을 죄다 입력해 두었기에 정우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KG화학에서 제공한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제품 중에 흥미로운 게 많더군요. 침대 매트리스, 접착제, 자전거 안장, 스키 신발에 인공 심장판막까지.”
 “아, 심장판막. 그거 승주 선배님이 했던 프로젝트 아니었어요?”
 옆자리 선배의 말에 오승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우는 오승주를 보며 회식 내내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과묵해지는 스타일.
 이곳에서 가장 높은 연차의 선배가 저렇게 한발 물러서 있자 회식 분위기가 더욱 자유롭게 느껴졌다.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 술자리라니.
 옆자리 선배가 정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무튼, 잘 해봐. 근데, 나도 신입 시절 겪은 거지만, 회사 연구라는 것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만 있다고 프로젝트로 발전되는 게 아니라서. 윗분들은 보다 실용적인 걸 선호하니까. 안됐다고 너무 상처받지 말고.”
 “아이디어가 실제로 채택되는 경우가 흔치 않나 봐요?”
 “거의 없지. 난다, 긴다 하는 박사들 앞에서 공채가 무슨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시할 수 있겠어? 아, 그. 의약 바이오 센터 문채은인가 하는 연구원은 입사하자마자 자기 연구 바로 시작했다고 하더라고. 책임 연구원도 함부로 못 대할 만큼 똑 부러진다던데.”
 정우는 그건 저도 좀 알죠, 라는 눈웃음을 흘렸으나 옆자리 선배는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난 김에 정우는 닥터 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나와서 일해야 하느냐고.
 지이잉.
 -회사 규정에 특정 연구 때문이 아니면 주말 출근은 제한되어 있어요.
 ‘오호!’
 옆자리 선배에게 슬쩍 물어보니, 프로젝트 참여 중이 아닌 연구원은 공휴일에 연구소 안을 돌아다니는 게 오히려 눈치 보인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야 더 창의적인 결과가 나온다나 뭐라나.
 ‘생각보다 보람 있는 하루의 마무리야.’
 찜찜하게 출발했던 파견 업무. 부가적인 수입을 얻지 못했다는 것만 걸릴 뿐, 오늘 하루는 무척 유익하게 보낸 느낌이었다.
 정우는 싱긋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무심코 왼쪽을 쳐다보았다가 움찔했다.
 송보영이 언제 왔는지 바로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우, 깜짝이야. 노래하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정희 선배가 한 마디만 더하면 죽인다고 해서 피난 왔죠.”
 가운데 쪽 탁자를 보니 선임 연구원 심정희가 정우에게 ‘보영이 입 좀 막고 있어’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정우는 오븐에 구운 닭 날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배고프시죠, 선배님.”
 “아니······ 읍.”
 입에 그대로 물려주자 송보영의 눈이 커졌다. 성공적으로 미션을 수행한 정우는 심정희에게 오케이 사인을 해 보였다.
 날개 살을 오물거리던 송보영은 정우와 다른 선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아 빈 맥주잔을 탁자에 올렸다.
 “한 잔 줘요.”
 “많이 마시지 않았어요?”
 “오늘따라 술이 참 달아서. 그리고 저 술 세거든요?”
 그러며 사근사근 미소를 보내왔다. 아침엔 호의가 아니라 꿍꿍이가 있는 미소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냥 송보영의 천성인 듯싶었다.
 “제가 술 마실 때는 끝까지 치열하게 먹거든요. 괜히 어설프게 마시면 울적해질까 봐.”
 많이 마신 것에 비해 발음은 꼬이지 않았기에 정우는 맥주병을 들었다.
 콸콸 따르기 시작하자 송보영이 “어허!”하고 중간에 잔을 들었다.
 “소주 들어갈 자리는 남겨야죠.”
 “계속 소맥하게요? 진짜 술 세시네.”
 “정량으로 따라서 섞어 줘요.”
 “네네.”
 그렇게 소주병을 찾아 잔에 따르던 정우는 흠칫했다. 잔 속의 투명한 액체가 점차 확대되어 보이더니 안쪽 화합물이 보이기 시작해서였다.
 ‘소주 구성이야 간단하잖아.’
 알콜과 물이 대부분. 그렇게까지 흥미가 당기는 분자 구조가 아니었기에 관심을 끄려 했다. 그러나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는 화합물 하나의 움직임이 정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스파탐.
 단맛을 내는 인공 감미료.
 그것이 소주 안을 떠다니며 말을 걸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정우는 소주를 따르는 힘 때문에 잔 속 액체가 출렁여서 저 아스파탐 분자들이 흔들린 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화합물들은 멀쩡했다.
 ‘왜 이렇게 알짱대는 거야?’
 생각을 듣기라도 했을까?
 잔 안에 보이는 수많은 아스파탐 분자들이 일제히 진동했다. 마치 ‘너도 얼른 한잔해’라는 듯한 유혹의 떨림이었다.
 ‘여긴 선배들 많아서 필름 끊기면 안 돼. 내가 많이 취하면 살짝 개 흉내를 내거든. 아빠 닮아서.’
 그렇게 손끝으로 잔을 톡 건드려 의사를 전달하는 시늉을 하던 그 순간.
 아스파탐 분자 상당수가 몸을 진동하더니 거울에 복사되듯 반대 형태로 구조를 변형했다.
 ‘뭐, 뭐야?’
 “아이, 참. 왜 안 따르고 있어요?”
 송보영이 그 소주잔을 채가 맥주잔 위에 부었다. 휘휘 섞더니 바로 손을 치켜든다.
 “건배!”
 정우의 맥주잔에 잔을 부딪친 송보영이 소맥을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푸!’하는 비명과 함께 삼킨 걸 바닥에 뿜어버렸다.
 “아우, 이거 맛이 왜 이래? 뭐가 이리 써.”
 정우는 맥주랑 섞여 있는 아스파탐 분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자를 방금 실제로 움직였다고? 내가? 나 술 취했나?’
 아스파탐은 두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분되는 순거울상 이성질체중 하나다. 왼쪽형은 단맛을, 오른쪽형은 쓴맛을 낸다.
 지금 저 소맥 안에는 오른쪽형이 잔뜩 들어 있어 쓰디쓸 것이 분명했다.
 정우는 이 사실을 떠올리고 혹시나 싶어 송보영의 맥주잔을 다시 톡 건드려보았다. 구조가 변했던 아스파탐 분자들이 파르르 덜더니 도로 원상 복구됐다.
 ‘지, 진짜네?’
 송보영이 술을 뿜자 옆자리 선배가 질색하며 말했다.
 “보영아, 취했냐? 택시 타고 얼른 집에 가. 후배 옆에 두고 쪽팔리지도 않아?”
 “아니요, 선배. 술맛이 이상하잖아요.”
 “네가 이상한 걸 멀쩡한 술을 탓해.”
 “진짠데.”
 “여기 따라 봐.”
 송보영이 그녀의 술잔에 담긴 소맥을 옆자리 선배의 잔에 조금 따라 주었다. 그것을 마신 옆자리 선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맛만 좋구만.”
 “아닌데. 이상했는데······.”
 송보영도 다시 맛을 보았다.
 “어어? 안 쓰잖아?”
 “정신 나갔구나. 얼른 집에 가라.”
 정우는 그 광경을 보고 헛기침했다. 실제로 분자가 변형됐다는 증거가 저기에 있었다.
 ‘다시 한번.’
 검증 실험을 하기 위해 소주를 빈 잔에 따랐다.
 톡.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액체를 입에 머금었다.
 “크헙.”
 도저히 삼킬 수가 없는 씁쓸한 맛에 정우는 목을 붙잡았다. 술이 확 깬다.
 소주가 이런 독약 맛이면 우리나라 주류 업계는 쫄딱 망할 것이다.
 “낙하산 씨는 왜 그래요?”
 “아니에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송보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보았다.
 
 “모두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회식은 딱 10시에 끝났다.
 호프집 입구에서 서로 인사하며 헤어지는 와중에 송보영은 택시를 잡기 위해 길 위로 걸어갔다.
 “여, 쏭. 나 대리 불렀는데 가는 길에 내려 줄까?”
 이동길이 다가오며 말하자 송보영은 고개를 저었다.
 “선배. 할아버지가 신경 써달라고 부탁한 거 다 알아요. 그거 전부 다 부담만 되니까, 그만해요.”
 “와, 우리 쏭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뭐가요?”
 “회장님이 그런 말 한 건 맞는데, 내가 하는 짓은 신경 써주는 게 아니라 관심을 표하는 거잖아. 남녀 사이 그런 거. 못 느껴?”
 송보영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선배랑 저 10살 차에요.”
 “그럼 안 되나?”
 “연애는 세대 차이 안 나는 사람이랑 해야죠. 그리고 선배보다 제가 돈이 훨 많은데 뭣 하러 늙은 오빠를 만난대?”
 “헐, 정곡.”
 “당장은 연애 생각도 전혀 없고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동길은 슬쩍 꺼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자 입맛을 다셔야 했다.
 “너 취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을 못 하는 거 같아. 담에 얘기하자.”
 “그렇게 안 취했는데요? 중간에 술맛이 이상해져서 다 깼어요.”
 “됐어. 대리기사 왔네. 나 간다.”
 손을 흔들고 황급히 걸어가는 이동길의 모습에 송보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중연 선배들 틈에 서 있는 한정우를 발견했다.
 “정우 씨 인터뷰 진짜 웃겼어. 오 선배 그거 보고 얼굴 굳어지는 거 봤어야 했는데. 말은 안 해도 무지 걱정하는 눈치였다고.”
 “죄송했습니다. 강단 있게 하려다 보니.”
 “아냐, 아냐. 그런 패기 난 좋아. 중연에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연구원도 있어야지. 다들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스타일이다 보니 활동적이지가 못해.”
 송보영은 아직 목에 감고 있던 목도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돌려주지도 않고 있었다.
 “잘 들어가고. 기획평가도 잘 해봐.”
 “여러모로 도움 잘 받았습니다, 선배님!”
 깍듯이 인사하는 정우의 옆으로 다가선 송보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배들이랑 금방 친해지셨네요.”
 이 말을 들은 정우가 등을 돌려 송보영을 보았다.
 “아직 안 가셨어요? 아까 정희 선배님이 밖으로 쫓아내서 집에 가신 줄 알았는데.”
 “장난하신 거예요.”
 “아닌데. 장난하는 눈빛이 아니셨는데.”
 “나와서 싹싹 빌긴 했죠.”
 쿡, 하고 웃는 정우도 술을 좀 마신 터라 뺨이 붉었다. 송보영은 큼지막한 키의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말했던 그 이상한 선배 말이에요.”
 “아, 그분.”
 “혹시 또 어디 가자고 하면 안 갈 건가요?”
 정우가 피식 웃었다.
 “봐서요.”
 “참, 이거요.”
 송보영은 목도리를 풀어서 내밀었다.
 “따뜻하게 잘 썼어요. 나중에 커피 한턱 쏠게요.”
 “커피 좋죠. 다른 의도만 없다면요.”
 “아, 밥을 쏠까요? 그래야겠네.”
 “커피로 충분합니다.”
 “에잇.”
 송보영도 이젠 천 박사 얘기를 묻는 것을 반쯤은 포기 상태가 됐다.
 택시를 기다리는데 정우가 물어왔다.
 “맞다, 선배님. 준결정 코팅제. 그거 샘플 혹시 남는 거 있어요?”
 “그건 왜요?”
 “대문에 좀 칠하게요. 오래된 철문이라 심하게 부식돼서.”
 “중연에는 이제 없고, 청주 공장에나 있을······ 아니다. 집에 연구 삼아 가져다 놓은 거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그거라도 줄까요?”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택시가 길가에 멈춰서 경적을 울렸다.
 “주소 찍어주면 택배로 보내줄게요. 핸드폰 번호 알려줘요.”
 번호를 들은 송보영은 “갈게요” 하고 손을 흔들며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십니까, 손님?”
 “회기역 근처요.”
 휴대폰 주소록에 방금 들은 번호를 입력하고 ‘낙하산 씨’라고 이름 짓던 송보영은 이내 그것을 지우고, ‘한정우’라는 이름을 입력해 저장했다.
 ‘그러고 보니 동갑이지? 스물여섯. 세대 차이는 안 나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고 고개를 좌우로 휘저은 송보영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정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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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de : AF-12
 case : 분자소통 네트워크
 research : 체내 감각이 특정한 자극을 받으면(ex알콜), 손끝에서 다른 분자에 영향을 미치는 입자가 생성된다. 무색무취로 추정.
 
 
 6장 눈꽃의 세레나데(1)
 
 
 토요일 아침.
 정우는 눈은 감았으나 잠은 자고 있지 않은 상태로 거실에서 뒹굴뒹굴하는 중이었다.
 ‘휴무일이 좋긴 하다만······.’
 모처럼 여유 있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불규칙한 수면 사이클로 인해 이른 시간임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한 건 살짝 열이 받았다.
 마냥 놀 때는 졸리기만 하더니, 출근 좀 했다고 어째 이럴 수가. 어제보다 심하게 잠을 설친 것이 아무래도 그거 같았다.
 “일 중독. 출세를 위해 뒤도 안 돌아보는 그런 삶을 시작한 거지, 내가.”
 정우는 낯간지러운 말을 중얼거려보다 킥킥 웃고 말았다.
 달칵.
 “뭐라는 거야? 얼빠진 놈처럼.”
 부엌에서 들린 소리에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홍지숙이 하품하며 부엌의 불을 켜고 있었다.
 “아, 엄마. 좋은 아침.”
 “너는 왜 거실에 자빠져 있어? 어제 술 처먹고 들어와 거기서 잔 거야?”
 “많이 안 마셨다니까. 새벽에 잠이 안 와서 TV 좀 봤지. 엄마 나 배고프다. 시원한 국물이 땡기네.”
 “뭘 이쁘다고.”
 말은 저렇게 하면서 다듬어 놓은 콩나물을 꺼내는 것이 얼큰 시원한 해장국을 끓일 모양이었다.
 ‘역시 울 엄마가 최고야’를 외치며 다시 거실 바닥을 등으로 쓸어대며 빈둥거리기를 즐겼다. 그러다 머리맡에 둔 휴대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일찍 누구지?”
 닥터 문이나 송보영은 아니길 빌며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다행히도 초딩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놈의 짧은 문자였다.
 [자냐?]
 [안 자.]
 답문을 보내자마자 바로 전화가 왔다. 휴대폰에 ‘박수찬’이란 이름이 떴다.
 “어, 수찬아. 왜? 오늘 술 한잔하자고?”
 -술은 개뿔. 연말이라 바빠 죽겠구만. 너 알바 안 할래? 전에 일거리 있으면 연락하라 했잖아.
 “알바?”
 정우는 그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야 막막했던 시기고, 지금은 어엿한 직장이 생겼다.
 당장에라도 자랑을 한 바가지 늘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부엌 쪽 눈치를 본 정우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그럴 군번이 아니시다 이제.”
 -응? 일한다고?
 “일하지, 그럼. 주간에 야근까지 해가며 열심히 했으면 주말 하루쯤은 쉬어 줘야 사회인 아니겠어?”
 -면접 떨어졌다고 엉엉 울 때는 언제고. 뭔 일인데?
 “듣고 놀라지나 마.”
 KG화학에 다니는 건 나중에라도 알려질 테니, 정우는 알약에 대한 것만 쏙 빼고 입을 열었다.
 -와, 미친. KG화학에 입사했다고?
 “운이 좋았지. 나중에 이 형이 상세히 말해주마.”
 ‘한 1년 뒤쯤.’
 초중고를 전부 같이 다닌 탓에 알 거 모를 거 다 공유하는 친구긴 했지만, 비밀 엄수 약관을 어기고 모든 걸 밝힐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네. 나 오늘 영등포 TS에 무대 설치 도우러 가는데 같이 가려 했더니.
 “자재 옮기고, 의자 옮기고. 그 빡센 거? 야. 몸 그렇게 쓰는 건 원래도 사절이다.”
 -오늘 행사 대박이라고 해서 특별히 부탁한 거야. 연말 이벤트라 출연진 어마어마하다. 거 뭣이냐, 네가 좋다고 하던 걸프렌드도 있는 거 같고.
 정우는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고 했냐, 지금?”
 -걸프렌드.
 “유, 율희를 실물로 볼 수 있다고? 혹시 그 무대 설치 도우면 사인도 받을 수 있어?”
 -가능할걸? 매니저 눈치만 잘 보면 돼. 리허설 앞뒤로 일반인은 접근 못 해서 되게 여유 있거든.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잘하면, 같이 사진도 찍을 수 있어. 나 저번에 펑키라인이랑도 찍어서 단톡방에 올렸잖냐.
 “난리 났었지 그때. 네 옆에서 V하던 여자 진짜 예뻤는데. 부러운 놈.”
 -너 오소라 모르냐? 이 간첩 새끼.
 “취업 준비하느라 TV를 못 봐서 그런다.”
 -그 주제에 걸프렌드는 아네. 얘네 아직 신인이잖아.
 “사실 율희밖에 잘 몰라. 연예인 게시판 들어갔다가 직캠인가? 그거 보고 취향 저격당한 거라.”
 친구가 연예인 소리를 해대자, 정우는 가뜩이나 잠이 안 오는데 더욱 정신이 맑아졌다.
 아이돌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음에도 유일하게 돈 주고 앨범을 산 것이 바로 걸프렌드 1집이었다. 한방에 꽂혔달까?
 랜덤 포토카드에 율희 대신 다른 멤버가 들어 있어 눈물 흘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들이 살랑살랑 안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걱정근심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잘하면 사진까지?’
 돈 주고도 못 얻을 기회를 돈 받으면서 얻을 수 있다는 것. 당분간은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로 가면 되냐?”
 갈등은 길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짜식. 그럴 줄 알았다. 8시까지 영등포 TS 쇼핑몰로 와. 참고로, 이거 중간에 뛰쳐나가면 내 입장도 곤란해져. 무대연출 하는 형님이 진짜 깐깐하거든.
 “아무렴 율희가 온다는데! 기다려, 금방 간다.”
 
 오전 7시.
 정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토요일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는 넘쳐흘렀다.
 자리에 앉아 아직 어슴푸레한 창밖을 구경하다 보니 금방 무료해졌다.
 ‘맞다. 내 인터뷰 기사 나왔는지 검색해 볼까?’
 정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한정우’라고 입력하자 동명이인들이 쭉 나왔다.
 ‘으음······ 없네.’
 거기에 ‘KG화학’을 붙여보았다. 페이지를 한참 넘기고 나서야 이름 모를 신문사에서 쓴 토막 기사에 어제의 사고가 언급됐다.
 ‘찾았다!’
 
 【한편, KG화학의 한정우는 “금속의 수명은 시한부”라는 말을 남겨 부식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또 다른 기사.
 
 【어느 부식 전문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시계를 멈출 방법은 있다”고 말하며 녹에 대비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름의 언급은 없지만, 부식 전문가라는 호칭을 본 정우의 어깨가 들썩였다.
 ‘스샷 박아놔야지.’
 휴대폰의 그림 저장 기능으로 기사를 스크랩하고, 기사 아래 [잘 보고 갑니다]라는 댓글도 하나 남겼다.
 누군가에게 전문가로 언급되고 기사로 난다는 것. 확 알려진 건 아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러고 보면 딱 일주일 전이야.’
 영양제 먹고 100만 원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들떠 있었던 그 날. 이렇게 알약을 먹고 화학자 행세를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임상 시험계의 스페셜 리스트는 엉덩이 안 상하고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사 검색을 끝내고 딱히 할 일이 없어진 정우는 커뮤니티 사이트의 유머 게시판에 들어가 순위권 게시물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엽기 사진, 심쿵 고양이, 군대 썰, 연예인 굴욕 짤방 등을 보며 킥킥거리다가 오늘의 인기 9위를 마크 중인 게시글에 시선이 머물렀다.
 ‘응?’
 
 【1호선에 마법사가 산다】
 
 제목이 참 궁금해지는 게시글이었다. 들어가 보니 동영상이 자동 재생됐다.
 잠시 지켜보던 정우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신문을 보고 있는 한 노인과 그 머리 위에 있는 누군가의 손이 클로즈업된 영상.
 노인의 머리카락이 손을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는 모습에 경쾌한 음악까지 깔려 나왔다.
 ‘내 손이잖아?’
 고작 손뿐이고, 동영상 화질이 나빠서 노인의 얼굴조차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정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댓글을 보니 죄다 [ㅋㅋㅋㅋㅋ]로 도배됐다.
 
 -무슨 마술쇼 같은 거 하는 사람인가?
 -개신기. 자석 같은 걸 붙여놓은 거? 실 있는데 안 보이는 건가?
 -딱 보면 모름? 손바닥에 책받침 같은 거 숨겨서 비벼댄 거잖아.
 -할아버지는 무슨 죄래?
 -본문에 있잖아요. 아파서 우는 어린애한테 호통치고 혼자 신문 크게 보던 꼰대라고.
 -저 할아버지 번개 머리로 내리네. 헤어 센스 미쵸ㅋㅋㅋ
 
 정우는 언제 이런 걸 찍힌 건지 놀라며 글쓴이를 클릭해 보았다. 그러나 게시자도 유머글을 여러 개 퍼다 나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얼굴이 알려진 건 아니지만.’
 조회수가 아주 높다고 할 수도 없기에 크게 문제 삼을 만한 일은 아닌 듯 보였다. 정우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고개를 저었다.
 ‘애매해. 이걸 SNS에 올려 따봉을 받을 것도 아니고.’
 정우는 곧 신경을 끄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빌딩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아침 하늘이 보였다. 한겨울에도 맑고 포근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들게 했다.
 치직.
 버스 기사가 오디오의 버튼을 눌러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12월 16일, 아침을 여는 라디오. 연말 분위기는 충분히 만끽하고 계시죠? 노래 한 곡 듣고 시작하겠습니다. 이맘때면 음원차트에 항상 올라오는 시즌송. 윤이설과 친구들이 부릅니다. 겨울이 와요~
 
 귀에 착착 감기는 밝은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노래.
 무척 흥겨웠다. 특히 노래를 이끌어 가고 있는 메인 보컬의 목소리는 홀로 생기 넘치다 못해, 바로 옆에서 라이브를 해주는 것처럼 감미롭기까지 했다.
 ‘겨울 시즌송이라 했지?’
 이렇게 좋은 노래를 정우는 처음 들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근 2년간은 문화생활을 거의 못했다.
 그놈의 취업 준비가 문제. 극장에 가봤던 날짜도 가물가물했다. 그때 본 히어로 영화의 3탄 예고편이 버스 광고 모니터에서 막 재생 중이니까.
 ‘그래. 내년에는 여유 있게 좀 살아보자.’
 
 -가끔은 이런 날 뒤도 보지 말고 달려나가야죠. 흰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길 수 있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정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은 절대 안 올 날씨.
 왠지 이런 연말연시 분위기엔 펑펑 내린 눈 속을 걷고 싶은데 말이다.
 
 * * *
 
 8시의 TS 쇼핑몰은 아직 개장 전이었다.
 정우는 극장, 백화점, 레스토랑에 광장과 테라스가 어우러져 있는 종합 쇼핑몰 앞에서 친구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영등포 랜드마크라더니, 크긴 크네.’
 건물 앞 광장에 세워진 뾰족한 대형트리는 불을 밝혀져 있지 않지만 겨울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했다.
 “한정우!”
 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근육질에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한창 장래에 대해 고민하던 고3 시절, 자신은 무난하게 경영 대학을 택했고, 수찬이는 한예진인지 뭔지를 가서 무대연출을 전공했다.
 수입은 그저 그렇지만 재미있다는 말을 지난번 술자리에서 들었었다.
 정우는 다가온 박수찬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요즘 운동했나 보다. 몸매에 각이 져 있네.”
 “이게 바로 일 근육이란 거다. 그러는 너는 다크서클이 뭐 그리 심해?”
 “으, 티 나냐?”
 정우는 눈 아래를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5일 출근했는데 4일 야근했어. 피곤하니까 잠도 잘 안 오더라.”
 “미쳤네. 대기업은 원래 글케 일해? 인턴이라 막 굴리나?”
 “낙하산으로 들어간 거니까 열심히 해야지.”
 “와, 씨. 한정우가 웰케 정상인이 됐어.”
 박수찬의 반응에 정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에 드는 생각인데. 나 원래 똑똑했나 싶기도 해.”
 “지랄.”
 “언뜻언뜻 나오는 내 비범함에 놀라지나 마셔.”
 정우는 벌써 박수찬이 아침에 뭘 먹었고, 무슨 샴푸에 무슨 치약 성분을 사용했는지를 단번에 알아챈 상태였다. 이놈 놀랄까 봐 말을 안 할 뿐.
 ‘STAFF 임시 출입증’이라고 쓰여 있는 명찰을 정우에게 내민 박수찬이 안쪽을 손짓했다.
 “우리 이벤트 회사는 외부 알바 잘 안 쓰는데, 내가 너 경험 있다고 감독 형한테 샤바샤바 해놨어. 대학 축제 때 잠깐 하다가 때려치운 건 비밀로 하고.”
 “정말 율희 사인받을 수는 있는 거야?”
 “나만 믿어. 정 기회 없으면 감독 형한테 말해줄게. 나 센스 있다고 인정도 좀 받고 있거든.”
 “얼~ 그래 주면 땡큐고.”
 정우는 미리 준비해 온 내년도 다이어리 맨 앞장에 율희의 사인이 들어갈 것을 생각하자 벌써 가슴이 떨려왔다.
 “다른 연예인 사인은 필요 없어? TOT에 갓소년단에 마지막 게스트도 장난 아냐.”
 “글쎄? 잘 모르니까. 글고 남자 연예인은 사절이다.”
 “아우, 답답이. 오늘 누가 오는 줄은 아냐?
 “누구?”
 “국민 여동생 몰라? 윤이설.”
 정우는 어디서 들은 이름 같아 생각해 보니, 버스를 타고 오면서 들었던 노래의 메인 싱어였다는 걸 떠올렸다.
 “아, 노래 들어봤어. ‘겨울이 와요’였나?”
 박수찬이 이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언제 적 노랜데? 한정우가 연예인 고자였다니. 너 여기서 나랑 친한 척하지 마라. 쪽팔린다.”
 “짜식이 모를 수도 있지. 넌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운동복에 항균 처리하느라 다이페닐에테르, 싸이오비스페놀이 들어간 건 아냐?”
 “다이? 싸이? 강남스탈?”
 “말을 말자. 나도 화학 고자랑은 친한 척 안 한다.”
 “이게 정신이 나갔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투덕거리며 정우는 쇼핑몰 후문으로 향했다.
 
 정우가 도착한 건물 뒤편에는 음향장비와 조명 시설을 트럭에서 내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박수찬! 이거 무대 옆으로 옮겨놔!”
 “넵!”
 박수찬이 달리기에 정우도 따라 달렸다.
 검은 철제 가방에 담겨 있는 장비들. 이동용 카트에 잔뜩 싣기까지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수찬아. 우리 어째 작업 속도가 좀 빠른 거 같다?”
 “이게 시작부터 앓는 소리야. 2시 전까지 기본 세팅 마쳐야 해. 가수들 그전에 올 거거든.”
 정우가 카트를 밀고, 박수찬이 장비가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은 채로 이동을 시작했다.
 무대 스태프들이 오가고 있는 후문을 지나니 안쪽의 전경이 드러났다.
 아트리움이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탁 트인 채광창을 통해 건물 어디서든 시원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원형의 복합 쇼핑몰이었다.
 정우는 450평의 넓은 광장 한가운데에 시선을 던졌다. 무대를 위한 자잘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쇼핑몰을 방문하는 고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통제선을 보니, 대략 500여명 정도 앉을 간이의자도 놓아야 할 모양이었다.
 “여기 앉아서 보려면 티켓 사야 해?”
 “VIP고객 추첨이야. 일반인은 턱도 없지.”
 어차피 쇼핑몰 어디에서나 이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기에 구경은 할 수 있겠지만, 정우는 혹시 몰라 물었다.
 “공연할 때 나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그거 달고 있으면.”
 박수찬이 스태프 출입증을 가리켜 보였다. 정우는 목에 건 출입증을 보물단지 모시듯 쓰다듬었다.
 “윤이설도 모르는 간첩 주제에 뭘 그리 좋아해.”
 “얼마나 예쁜데 그래?”
 “이따가 라이브 직접 보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법석을 떠는지 알게 될 거다.”
 “못생기기만 해봐.”
 “검색해 보든지.”
 “시각, 청각적 충격을 위해 미뤄 두겠어.”
 앞쪽에서 움직이던 박수찬이 정우에게 멈추라는 동작을 해 보였다.
 “여기다 내려놓자. 참, 오늘은 내가 장비 정리 담당이라 트러스는 안 옮겨도 된다.”
 “오케이.”
 정우는 무거운 철제 버팀목을 옮기는 중인 다른 스태프를 보며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작년 여름에 날라봤다. 저건 무지하게 무겁다.
 “어이, 수찬.”
 한쪽에서 음향장비를 배치 중이던 감독이 고개를 들더니 박수찬에게 물어왔다.
 “옆에 걔가 네가 말하던 친구야?”
 “네, 감독님.”
 박수찬이 ‘저분이 감독 형님이셔’라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정우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한정우입니다.”
 “어, 그래. 난 오늘 총연출 김무진. 딱 보니 수찬이처럼 일 잘하게 생겼네. 장비 트럭에서 케이블 좀 가져다줄래?”
 “이것만 내리고 바로 튀어갔다 오겠습니다.”
 근 일주일간 연구소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생활한 탓에 몸에 밴 정우의 숙련된 굽신거림에 박수찬이 놀란 얼굴이 됐다.
 정우는 후다닥 밖으로 가서 케이블 상자를 찾아 감독 옆에 내려놓았다.
 “여기요.”
 “땡큐.”
 더 시킬 일이 없는지 김 감독은 별말 없이 옆의 음향 스태프와 함께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상자를 옮기고 있던 박수찬이 정우에게 무대 쪽을 고갯짓했다. 박수찬은 다가오는 정우에게 눈을 치켜들었다.
 “너 진짜 정신 차렸어? 웰케 빠릿해?”
 “누가 들으면 맨날 논 줄 알겠네. 내가 올해까지 취업 스펙 맞추느라 정신없어서 다들 못 알아챈 거뿐이야.”
 “와, 씨. 눈물 좀 닦고. 너랑 야자 땡땡이치고 피시방 달렸던 때가 어제 같은데.”
 정우는 씩 웃으며 남은 철재 박스를 무대 앞에 내렸다.
 
 기본 장비를 옮기는 작업은 근 4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사이 중앙의 원형 무대를 두르는 세트장 뼈대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
 스피커를 세팅 중인 스태프들을 가만히 구경하던 정우는 박수찬이 조심스레 박스 하나를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게 불꽃 터지는 기계야?”
 “어. 조심히 다뤄야 해. 장갑 끼고.”
 정우는 노동의 상징 면장갑을 손에 낀 채 긴장된 얼굴로 박스를 바라보았다.
 박스의 잠금장치를 열고 기계를 꺼낸 박수찬이 갑자기 “왁!”하고 소리치며 정우에게 그것을 들이밀었다. 순간 시뻘건 색이 아른거려 정우는 움찔해서 물러섰다.
 박수찬이 킥킥거렸다.
 “짜식, 쫄긴.”
 “이런 개······.”
 불꽃이 나온다던 기계는 붉은 천을 달아 놓고 공기를 쏘아 불꽃 흉내를 내는 간단한 구조였다.
 “저 위에 올려놔. 난 꽃가루 에어건 가져와야 하니까.”
 박수찬에게 건네받은 장비를 하나하나 무대에 가져다 두니 전기장치 스태프가 받아 곧바로 설치를 시작했다.
 정우는 이후 CO2 분출 장치에 포그머신까지 구경했으나 생긴 게 투박해서인지 그다지 무대에 대한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야, 이런 거로 정말 분위기가 살아?”
 발사대처럼 보이는 원통이 일렬로 붙어 있는 장비를 들고 오던 박수찬이 이 소리에 피식 웃었다.
 “나중에 빔이랑 조명 반짝거리고 음악 쿵쿵 울리면 난리나.”
 “모르겠다. 어두워져야 느낌이 올라나.”
 “이건 바로 느낌 올걸.”
 박수찬이 무대 앞쪽에 장비를 내려놓았다.
 “행사의 꽃. 폭죽.”
 “폭죽?”
 “이 안에 넣는 폭죽은 감독 형이 직접 세팅하는데, 장난 아니다. 입이 떡 벌어져. 이 계통에서 이걸로 행사 따내는 전문가거든.”
 이 소리에 정우의 시선이 천막 안에서 음향팀과 대화 중인 김무진을 향했다.
 “일단 버튼 누르면 스파크 제대로 튀는지만 확인하면 돼. 넌 좀 쉬고 있어.”
 이렇게 말하고 발사대 앞에 쪼그리고 앉은 박수찬이 손바닥만 한 통을 꺼냈다.
 “그건 뭔데?”
 “테스트용 화약. 성냥 성분 같은 거라던데.”
 통 안에서 나온 건 손톱 크기의 종이 뭉치였다. 박수찬이 그것을 찢어 발사대 안에 하나씩 넣었다.
 ‘응?’
 정우는 통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내용물에 시선을 던졌다가 일부분이 급격하게 확대되는 것을 느끼고 다가올 시각적 충격을 대비했다.
 처음 보인 것은 숯의 알갱이로 보이는 탄소의 원소별이었다. 그 주변을 떠다니는 고약한 냄새를 풍길 것만 같은 원소별은 황. 거기에 이따금 보랏빛 광선을 방출하는 특이한 별무리가 어우러져 있었다.
 ‘이건 화약계의 소우주구나.’
 박수찬이 가루를 넣고 버튼을 누르자 파삭, 하고 발사대로부터 작은 스파크가 연이어 튀었다.
 정우는 발사대 입구를 훑다가 이전에 폭죽을 터뜨렸던 흔적도 발견했다.
 뭉쳐 있다가 섬광과 함께 퍼지는 원소별 무리는 분수 불꽃의 형태를 닮았다. 다른 발사대에선 혜성처럼 꼬리를 무는 흔적을 남기는 화합물도 보였다.
 “오.”
 그것이 제법 멋져 보였기에 정우는 짧게 감탄했다.
 “뭘 이런 거 갖고 놀라. 이따가 불꽃쇼 직접 보면 너 깜짝 놀란다.”
 박수찬 때문에 감탄한 건 아니지만, 정우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아까부터 계속 신기해 해주니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나름 귀엽고 짠해서였다.
 “수찬아. 너 무대연출은 언제부터 할 수 있는 거야?”
 “아직 멀었지.”
 “벌써 한 3년 됐잖아. 난 언제쯤 콘서트 VIP석에서 친구 덕 볼 수 있는 거냐?”
 “배울 게 너무 많아. 특히 얘네. 무대 폭죽 연출은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기술이거든. 네까짓 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박수찬이 발사대를 가리켜 보이기에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워? 그냥 가루 슥슥 섞어서 넣으면 되는 거 아니야?”
 “돌았냐? 무대에서 화재 낼일 있어?”
 마치 폭탄이 될 것처럼 말하는 박수찬에 정우는 발사대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화재는 탈 게 많아야 나는 거고, 이건 소량의 완전연소잖아. 대충 보니 화약 베이스로 스트론튬에 플래시파우더, 아질산 셀룰로오스를 섞은 거 같은데. 이거 다 깔끔하게 불타오르라고 넣는 거야. 한 1초 빨간 불꽃이 튀어 올랐다가 마는 거.”
 “스······ 트론 뭐?”
 박수찬이 눈만 껌벅였다. 정우는 음, 하고 고민하다 짧게 정리했다.
 “무슨 가루가 어떤 역할인지 알면 어렵지 않다고.”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좋은 스승을 만나서 공부 좀 했어. 내가 인턴으로 뽑힌 이유지. 그리고 완전연소는 상식선 아닌가? 산소 충분히 공급하고 온도 유지하면 그을음이 안 나는 거. 그 있잖아. 가스레인지에서 불나는 것도······.”
 또 눈만 껌벅하기에 정우가 되물었다.
 “너 공통 과학 시간에 졸았어?”
 “매시간 졸았다, 인마! 지도 같이 자놓고는.”
 땀으로 젖은 옷을 펄럭거리며 천막으로 움직인 박수찬이 잠시 뒤 ‘폭죽’이라는 글자가 적힌 상자를 들고 나왔다.
 “이건 내가 연습하는 거거든. 중국산 폭죽.”
 “마트에서 파는 거잖아. 되게 볼품없는 불꽃 나오는 거.”
 “직구로 주문한 거야. 아주 싸구려랑은 달라.”
 정우는 아무리 봐도 값싸 보이는 폭죽 더미들에서 몇 개를 꺼내 발사대에 장착하는 박수찬을 보며 물었다.
 “뭐야? 연출 네가 안 한다며?”
 “리허설용이지. 행사 가수들이 리허설 때 폭죽 소리 적응 못 하면 본무대에서 움찔 놀라고 그러더라고.”
 “그래도 네까짓 게 막 해도 되는 거야?”
 “걍 아무 폭죽이나 끼워 넣으면 그만인 세팅이거든? 그리고 나 이 정도 경력은 된다고!”
 율희 사인도 자신 있게 받아준다고 했던 박수찬이기에 정우는 “쏘리.” 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암튼, 이것만 하고 점심 먹자. 3분만 기둘려.”
 “그래.”
 그렇게 발사대를 조작하고 있는 박수찬을 조용히 기다리던 정우는 상자 속 폭죽을 툭툭 건드려 보다가 뚜껑이 열려 있는 빈껍데기에 시선이 미쳤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화약계의 소우주가 보였다.
 ‘조금 싼마이 느낌이 나긴 하지만, 재료는 비슷하네.’
 정우는 박수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찬아.”
 “응?”
 “그거 발사대 하나만 내가 세팅해 봐도 돼?”
 “크, 해보고 싶냐?”
 “되는지 안 되는지만 보려고.”
 “뭘?”
 “있어 그런 게.”
 박수찬이 선심 쓴다는 듯 십여 개의 발사구 중에 3번이라고 쓰인 곳을 가리켜 보였다.
 “함 해봐. 요게 3번 출연자용이니까, 걸프렌드 리허설 때는 네가 단 폭죽 터뜨리는 거다. 쥑이지?”
 “오, 그럼 감사고.”
 “거기 보면 제일 비싼 연발······.”
 “박수찬!”
 그때, 간이 천막 안에서 박수찬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감독님!”
 “A형 연결 코드랑 마이크 어느 상자에 뒀냐!”
 “거기 박스 쌓아둔 곳에······.”
 박수찬은 안 되겠는지 정우를 돌아보았다.
 “갔다 올게. 여기 있어.”
 “응.”
 정우는 폭죽 상자를 뒤적거리다가 빈 통만 골라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화약계 소우주를 훑다가 같은 포장의 폭죽을 찾아 손에 쥐었다.
 과감하게 포장지를 뜯어버린 정우는 내부를 살펴보았다.
 실제 재료를 보자 더욱 확연하게 불꽃반응이 보였다.
 숯과 황이 연소하면서 질산칼륨을 뜨겁게 하고, 그것으로 방출된 산소가 불에 공급되는 일련의 과정.
 재료의 배합에 따라 반응속도도 천차만별, 포함된 금속 가루에 따라 색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얘네는 은색 로켓 스타일.’
 다른 포장지를 뜯었다.
 ‘얘는 청록색 파편.’
 알루미늄과 칼슘가루가 담긴 폭죽의 연소반응을 생각하자 화학식이 겹쳐지며 새로운 상호작용이 눈앞에 그려졌다.
 제일 큰 폭죽의 마개를 열었다.
 ‘이건 색색들이 다 있네. 연발탄인가? 좋아, 해보자.’
 대충 반응속도를 가늠해 본 정우는 연발로켓탄에서 도화선과 추진체를 빼 발사대에 장착하고, 종이 안에 담긴 가루들을 섞어 나머지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먼지별 네놈들은 가만히 있어.’
 손바닥에 적절히 [+],[-]이온 반응을 촉진 시켜 쓸데없이 날뛰는 자유 전자들을 멀리 보내 버렸다.
 슥삭슥삭. 조물조물.
 그려지는 새 반응식을 따라 나타나는 폭죽 이미지에 최대한 맞추다 보니, 상자 안 폭죽을 거의 다 개봉해 사용해 버렸다.
 달칵.
 마무리 짓고 발사대 뚜껑을 덮는데, 저 멀리 박수찬이 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던 정우는 폭죽 상자에 시선을 돌렸다.
 ‘다 썼나? 율희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만······.’
 속으로 변명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불장난을 처음 해보는 어린애의 호기심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근데 잘될까? 되겠지?’
 화학적 시각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에 그동안 오류란 것이 없었기에 정우는 어느 정도 자신했다.
 “설치했어?”
 박수찬이 다가오며 물었다. 정우는 상자를 얼른 닫고 한쪽으로 밀었다.
 “어, 대충······.”
 “가자. 배부터 채우고 일하자고.”
 다행히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박수찬을 따라가던 정우는 껍데기만 담겨 있을 폭죽 상자를 흘끔 보고 물었다.
 “수찬아. 저 폭죽 직구로 전부 얼마 주고 샀어?”
 “30만이었나?”
 한 5만 원이면 오늘 알바비로 줄 수 있으련만. 정우는 ‘다음 달에 꼭 갚아줄게’라고 다짐하며 속으로 사과했다.
 
 * * *
 
 “아우, 배불러.”
 정우는 나무 박스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쇼핑몰 행사장 안쪽의 비품창고구역인 이곳은 밖의 소란스러움과는 전혀 상관없이 무척 고요했다.
 “어떻게 이런 데를 찾았어?”
 “여기서 벌써 3번째 행사 뛰니까.”
 옆에 털썩 앉은 박수찬이 들고 온 캔커피를 내밀었다.
 “정우 너랑 간만에 노닥거리며 일하니 시간 빨리 가서 좋다.”
 “난 삭신이 쑤셔. 어휴, 그놈의 율희가 뭐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 건지.”
 “살랑살랑 안무가 끝내준다며?”
 “지금은 반반이다. 몸이 힘든데 무슨 아이돌이야.”
 “가수들 대기실에 오고 있대. 힘쓰는 건 거의 다 했으니까 리허설 때 잔심부름하면서 실컷 구경하면 된다.”
 “오케이.”
 정우는 뜨끈하게 데워진 캔커피를 뺨에 비비다가 물었다.
 “점심 몇 시까지야?”
 “1시 30분.”
 “국밥을 후루룩 마셨더니 여유 많네. 나 30분만 자자.”
 “여기서?”
 정우는 하품을 크게 했다.
 “말했잖아. 회사 야근 때문에 정신없었다고. 가끔 이상하게 졸릴 때가 있어. 잠깐만 기절하면 돼.”
 곧바로 눈을 감는 정우를 보며 박수찬을 혀를 쯧쯧 찼다.
 “그냥 자면 입 돌아가. 핫팩이라도 가져다주랴?”
 “어어. 땡큐. 우리 수찬이 일 잘해~”
 중얼중얼하는 것이 벌써 꿈나라로 가는 모양이었다. 박수찬은 고개를 저으며 창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핫팩 두 개를 흔들며 들어온 박수찬이 그것을 정우의 재킷 안쪽에 던져두었다. 정우는 몸이 흔들림에도 시체처럼 미동하지 않았다.
 “야근? 짜식, 정말 사회인처럼 사나 보네.”
 박수찬은 시계를 보다가 정우에게 말했다.
 “나 감독 형이랑 얘기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시간 되면 깨우러 올게.”
 곯아떨어진 정우는 대답이 없었다.
 
 ‘읏 따거.’
 정우는 눈을 뜨자마자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뜨끈함에 손을 더듬었다.
 핫팩 두 개가 강렬한 열기를 발산중이었다.
 “얌마, 박수찬. 나 데일 뻔했잖······.”
 사방이 휑한 것이 창고 안에 아무도 없다.
 정우는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둑하고 조용한 데다 칸칸이 비품 선반이 늘어선 창고 한쪽.
 아까는 너무 졸려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잘못 자다간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을 켜 보니 1시 15분. 다행히도 휴식시간이 끝난 건 아니었다.
 식어버린 캔커피와 핫팩 두 개를 남긴 친구 놈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근데 나 왜 이렇게 졸렸던 거지?’
 아까는 도저히 정신력으로 저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젯밤도, 그제도 불규칙하게 기절하듯 잠을 잤기에 정우는 이거 병이 아닐까 싶어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따로 아픈 곳은 없어. 지난주까지만 해도 안 이랬잖아.’
 ‘AF-12’의 부작용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닥터 문은 자신 있게 그런 거 없다며 피해 보상까지 거론했었다.
 정우는 오늘 일 끝나고 한 번 전화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캔커피를 손에 쥐었다.
 “차가워.”
 겨울엔 따뜻한 게 제맛인데, 라고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정우는 품 안에서 따뜻함을 마구 발산 중인 핫팩에 시선이 머물렀다.
 당연하게도 표면에서 열기를 내뿜는 화학적 원리가 순식간에 이해됐다.
 “곱게 갈린 철 가루와 산소의 결합이라······.”
 녹이 생기는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빠르게 일어나 반응열이 바로 느껴지는 것뿐. 곁들어진 소금과 활성탄이 산화 반응을 빠르게 가속하는 것도 한몫했다.
 정우는 손바닥을 보았다가 핫팩에 시선을 돌렸다.
 ‘얘가 보통 한나절 따뜻하지?’
 그 반응을 더 단축할 수 있다면 캔커피를 데울 정도의 열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정우는 실험 삼아 두 개의 핫팩 중 하나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얍얍. 모여라, 먼지별.”
 반쯤은 장난삼아 창고 내의 먼지별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 핫팩 쪽에 쏟아부었다. 어쨌든 이것도 자유 전자의 운동 에너지라고 미세한 전류가 사방에서 철가루를 폭격했다.
 ‘좋아, 좋아. 힘내!’
 염원이 닿았기 때문일까? 손바닥과 핫팩 사이를 회오리치듯 오가던 자유 전자들의 움직임이 더욱 들뜬 상태를 유지했다.
 “아뜨뜨.”
 정우는 손바닥에 점점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져 나무 상자 위에 올려놨다.
 “와. 되네.”
 단순히 느껴지는 것만으론 3, 4배는 뜨거워졌다. 난로 급으로 변해버린 핫팩에 위용에 감탄하며 정우는 캔커피를 그 위에 올렸다. 이 온도면 금방 데워지고도 남았다.
 “먼지별 니들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은 몰랐다. 기특한 것들. 그런데 말이다.”
 고생은 했지만, 정전기로 말썽 피우면 큰일이기에 정우는 칼같이 저 멀리 쫓아내 버렸다.
 강화된 초강력 핫팩 위에 3분만 더 올려두면 캔커피가 마실 만해지겠다 싶어 기다리는데, 창고 저편에서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박수찬이겠거니 싶어 고개를 돌리던 정우는 흠칫했다.
 친구가 아니라 등에 기타를 짊어진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문에 바짝 기대어 바깥쪽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후다닥 옆쪽의 비품 박스에 올라앉았다.
 ‘누구지?’
 전혀 이쪽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 낯선 여성에게 정우는 인기척이라도 내야겠다 싶어 일어섰다.
 그러나.
 별안간 시작된 그녀의 콧노래에 정우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달콤한 허밍을 따라 울려오는 호소력 짙은 멜로디.
 평소 음악을 많이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우에겐 무척 새로운 경험이었다.
 디링―
 그녀가 기타를 꺼내 반주를 덧입히자, 속삭이듯 들려오던 허밍은 이내 풍성한 화음이 되어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귀가 호강한다는 게 이런 거지?’
 정우의 청각을 마구 자극하는 낯선 여인의 음악 세상은 분자 세상을 지켜보던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는 허밍이 끝나자 ‘아’ 한 글자로만 다른 멜로디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음정을 바꿨다가 소리 크기도 조절하는 것이 꼭 목을 푸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수겠지? 하긴. 저렇게 부르는데 가수 안 하면 이상하지.’
 철제 선반 사이로 박자에 맞춰 까딱까딱하는 흰 운동화가 보였다.
 삽시간에 창고 안을 덮쳐온 음악의 매력에서 퍼뜩 깨어난 정우는 즉시 선반 옆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정우가 발소리를 내는데도 기타 연주에 푹 빠져 못 알아채고 있었다.
 새하얀 손끝으로 기타를 튕기는 한 여인의 고운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챙에 얼굴이 가려졌다. 얼굴이 얼마나 작으면 고작 턱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저기······.”
 정우가 입을 열자 뚝, 기타 반주가 멈췄다.
 모자 아래에서 깜짝 놀란 듯한 기색이 느껴져 정우는 황급히 말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점심시간이라 저쪽 나무 상자 위에서 자고 있었거든요. 혹시, 오늘 저녁 미니 콘서트 출연하시는 분인가요?”
 가슴에 차고 있던 스태프 표시를 들이대자 상대의 안도하는 듯한 한숨이 들려왔다.
 “제가 잠을 방해했군요.”
 여인의 말소리는 노래하던 목소리와 그 분위기가 똑같았다. 그만큼 산뜻하고 선명한 음성이었다. 정우는 이런 소리를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기분에 손을 휘저었다.
 “아뇨, 직전에 깼어요. 그리고 무슨 노랜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잘 들었거든요.”
 “······무슨 노랜지 모르세요?”
 “최근의 음악은 문외한이라. 아무튼, 바로 사라질게요. 연습 계속하세요.”
 라고 얘기하던 정우는 상대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기타 줄 부분이 빨려들 듯 확대되는 광경에 신음을 삼켜야 했다.
 ‘이 와중에?’
 구리와 아연이 탄력 있게 꼬아져 있는 사슬 구조의 선이 보였다. 이물질과 녹 방지를 위한 코팅까지 되어 지극히 화학적인 보호 효과를 성공적으로 달성 중인 줄들.
 정우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줄에 시선이 미쳤다. 습한 곳에 있었는지 중간의 한 부분에 몹쓸 먼지별들이 잔뜩 달라붙어 빠른 부식 반응이 진행 중이었다.
 ‘금방 끊어질지도 모른다 이거구나.’
 말 해줘야겠다 싶어 입을 열려는데 핫팩 위에 올려둔 캔커피가 옆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아차차.”
 정우는 나무 상자로 달려가 굴러가고 있는 캔커피를 손에 쥐었다. 뜨끈한 것이 적당히 데워진 것 같았다. 옷소매를 늘려 손바닥에 감은 채로, 핫팩도 함께 들어 올렸다.
 “제가 한 30분 누워 있어 봤는데 추워요, 여기.”
 그녀 옆에 있는 선반에 핫팩을 올려둔 정우는 물러서며 말했다.
 “저는 이제 필요 없어서. 델 수 있으니까 절대 맨손으로 건드리지 마세요. 보통 핫팩이 아닙니다, 저게. 한 2시간은 활성탄이 진동해서 산화 반응이 급격하게 진행······ 되는 거까진 알 필요는 없으시고요. 그럼.”
 정우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걸어나가는데 그녀의 모자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저기요.”
 “네?”
 “밖에 나가셔서 저 여기 있다는 얘기 안 해주셨으면 해요.”
 “아······ 그럴게요.”
 그녀가 누군지도 몰랐기에 정우는 알았다고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참, 그 맨 아래 기타 줄. 녹이 좀 생긴 거 같은데, 체크해 보세요. 다른 줄과는 다르게 코팅 대신 일차적인 가공만 되어 있네요.”
 달칵.
 복도로 나오니 저 멀리서 박수찬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푹 잤냐?”
 정우는 ‘쉿’ 하는 표시와 함께 광장 쪽의 출입구를 가리켰다.
 “뭐야? 왜 그렇게 조심하는데?”
 “안에 출연자 연습 중이다. 방해하지 마.”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노래 무지 잘 부르는 솔로 가수 같아.”
 옆에서 걸어가던 박수찬이 움찔했다.
 “오늘 출연자 중에 솔로는 윤이설뿐인데?”
 “그래?”
 정우는 비품창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 설마. 그렇게 유명한 가수면 왜 저 안에서 저러고 있겠어.”
 “얼굴 봤어?”
 “어두워서 잘 안 보였어. 뭘 얘기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맞다. 기타에 IS라고 적혀 있는 건 봤······.”
 “그게 윤이설 기타잖아!”
 출입구 문을 열며 박수찬의 탄식이 이어졌다.
 대스타의 실물을 보고도 못 본척한 멍청이라는 둥, 그렇게 가까이 가서 사인 하나 못 받았다는 둥, 아쉬움을 늘어놓는 친구를 보며 정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난 율희 사인만 받으면 돼.”
 캔커피를 따서 한 모금 넘기는 정우를 본 박수찬이 물었다.
 “그거라도 윤이설을 주지 홀랑 먹고 있냐. 내가 쏜 거잖아.”
 “이걸 어떻게 데웠는데 첨 본 여자한테 줘. 완전 뜨거워. 맛 좀 봐 볼래?”
 “내가 미친다, 미쳐. 스태프라는 게 연예인도 못 알아보고. 윤이설이 얼마나 황당했겠어.”
 
 그르릉~
 기타 스트링을 튕기며 오늘 부를 곡을 연습하고 있던 윤이설은 아까부터 훈훈한 온기가 느껴져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설마 저거 때문이야?’
 공연 스태프가 올려두고 간 핫팩. 신기하게도 따뜻한 난로처럼 이 공간을 데워주고 있었다. 핫팩을 보고 있다 보니 방금 나간 그 남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나 싶어 1번 스트링을 튕겨 보았다. 맑게 띠링 울리는 소리에 윤이설은 고개를 흔들었다. 1, 2번 줄이 자주 끊어지는 부분이긴 하지만, 줄을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녹이 슬겠는가.
 ‘나도 참.’
 그것보단 자신의 히트곡을 모른다고 하던 그 남자의 말에 욱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모를 수도 있다. 아무리 전국적으로 알려진 가수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릉―띠링.
 반주가 꼬였다.
 ‘나 정말 욱한 건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데, 기타 케이스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 문자 수신 신호가 반짝였다.
 -이설아.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매니저 지성재 실장의 문자였다.
 배정받은 대기실 바로 옆이 하필이면 TOT라 빠르게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데뷔한 7인조 걸그룹인 그녀들은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수준이 가히 가요계 탑이었다.
 ‘선배님, 선배님~’ 하며 자신 옆에 바짝 붙어 저녁까지 떨어지지 않을 것을 예상하면, 리허설 전에 이곳에서 목을 풀 수밖에 없다.
 -비품창고 쪽이에요. TOT 모르게 조용히 와요.
 답문을 보내고 재차 연주에 열중했다. 오늘 공연에서 최소 네 곡, 앵콜이 있다면 더 많이 부를 것이기에 여느 행사 때보다 집중력이 필요했다.
 똑똑.
 예의 바른 노크 소리에 연주가 멈췄다.
 “윤이설 있니?”
 문이 열리고 서른 후반의 날렵한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있네.”
 지 실장이 문을 닫고 윤이설이게 다가왔다.
 “아니, 이설아. 방해되면 TOT 애들을 보내면 되잖아.”
 그녀들에게 악의가 없는 것을 잘 알기에 윤이설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흔들었다.
 “선배가 그러면 안 되죠.”
 자신이 신인 때도 똑같았다. 좋아하는 선배님 옆에서 계속 노래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우리 이설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래서 지 실장님이 저 따라 다니면서 챙겨 주시잖아요.”
 “은근 나 악랄하다고 까는 거 같은데?”
 “설마요.”
 지 실장은 어두운 비품창고를 훑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윤이설을 이런 데서 연습시켜. 네 팬들이 알면 나 맞아 죽는다. 이렇게 추운······.”
 말을 하던 지 실장은 안쪽에 의외로 훈훈한 기운이 감돌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포근하네, 이 안. 이 쇼핑몰은 창고에도 난방 시스템이 있나?”
 기타 케이스 안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던 윤이설이 선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핫팩 때문일 거예요.”
 지 실장이 “이게?” 하고 손을 가까이 가져가다 화들짝 놀랐다.
 “뭐가 이렇게 뜨거워?”
 “그렇게 뜨거워요?”
 “미친 수준인데 이거?”
 “되게 특별한 핫팩이라고 들은 거 같긴 해요.”
 “누가? 팬이 줬어?”
 신기해서 핫팩에 손가락 대본 지 실장이 “으억!” 하는 비명을 질렀다.
 “아, 그거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대박 제품이야. 야외 촬영 때, 효과도 없는 미니 난로 잔뜩 늘어놓기보다 이걸 써야겠는데? 그 팬한테 물어봐. 어디서 산 건지.”
 윤이설은 아까 마주쳤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이름도 몰라요.”
 “너 공연할 때 오겠지.”
 “아뇨, 제 이름을요.”
 지 실장이 무슨 얘기를 하느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윤이설은 아까 그 남자의 인상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하는 말이 조금 독특했으나 눈빛은 선해 보이던 상대였다.
 남자. 호기심.
 언제부턴가 잊고 지냈던 말.
 ‘공연 스텝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나는 이 느낌, 싫진 않았다. 싱어송라이터에게 감성적인 자극은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강조하던 이상건 선배의 조언이 머리를 스쳤다.
 “지 실장님. 혹시 모르니까 기타 스트링 여분 좀 챙겨줘요.”
 
 * * *
 
 오후 2시, TS몰 미니 콘서트 리허설 현장.
 총연출 김무진이 확성기에 입을 댔다.
 “시작하겠습니다. 1번 출연자 불러 주시고. 음향팀, 조명팀, 무대 효과팀 제자리에.”
 십여 명의 스태프들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김 감독님!”
 세트리스트를 살피며 첫 곡을 준비하던 김무진의 옆으로 섭외 담당 스태프가 달려왔다.
 “걸프렌드 쪽에서 도착이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포공항에서 오는 중인데 중간에 교통사고가 난 지점이 있어서 엄청 밀린데요.”
 “도착 예정시간은요?”
 “40분 더 걸릴 거랍니다.”
 “그러면 일단 리허설은 윤이설 씨가 먼저 하는 거로 양해 구하세요.”
 침착하게 지시를 내린 김무진은 세트리스트 4번을 3번과 교체해 들었다.
 
 30분 뒤.
 8인조 남성 그룹 갓소년단의 칼군무가 한창인 리허설 무대.
 정우는 박수찬과 함께 무대 바로 아래 서 있었다. 스태프 전용 통신기를 머리에 차고 있던 박수찬은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왜 그렇게 웃어?”
 “나 이 장비는 처음 받아보거든. 감독 형이 친구 옆이라고 면 좀 세워 주신 거지.”
 딱히 콜은 오지 않는 통신기가 뭐 그리 좋은지 박수찬은 내내 신나는 표정이었다.
 “야, 내 면은? 율희 언제 오는데? 점심부터 기다렸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너 그래도 갓소년단 사인은 받았잖아. 리더 준호 인기 많다.”
 무대 위의 과격한 안무에 맞춰 CO2가 분사되어 정우가 움찔했다.
 “받고 싶어 받았냐? 지나가다 마주쳤는데 막 사인해 주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잖아. 네가 스태프는 친절해야 한다며.”
 “연예인들은 일단 옆에서 꺅꺅거리고 환호해 주길 바란다고. 율희 오면 꼭 그래라. 사진까지 기분 좋게 찍어 줄 테니까.”
 격렬하고 화려한 동작으로 딱딱 맞는 안무를 펼치는 무대 위 갓소년단에게 박수찬이 손을 들어 환호했다.
 스피커가 둥둥 울리며 고막을 때리는 가운데 이들의 두 번째 곡이 끝났다.
 피유우웅, 펑!
 폭죽 발사대에서 빈약한 불꽃 하나가 무대 상공으로 솟아올라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제 걸프렌드 차례야. 끝나고 무대 내려갈 때가 기회다.”
 “오케이.”
 정우는 드디어 율희의 실물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무대 뒤편을 주시했다. 그러나 갓소년단에 이어서 나타난 출연자는 정우가 기대했던 연예인이 아니었다.
 기타를 손에 쥐고 걸어 올라오는 한 여인.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수찬도 무대를 보더니 놀랐다.
 “윤이설 차례 아닌데.”
 밝은 곳에서 마주친 그녀는 어둑한 곳에서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스물 초반이나 됐을까? 수수한 복장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으나 군데군데 드러난 뽀얀 피부 탓에 조명이 없음에도 홀로 빛이 났다.
 “인형 같네, 진짜.”
 박수찬이 감탄하는 정우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짜식. 무대 바로 앞에서 윤이설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제 알겠니?”
 “율희도 실물을 보면 저 정도로 예쁠까?”
 “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사실 이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쉬쉬하며 이 이야긴 잘 안 꺼내는데······.”
 박수찬이 자세를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여자 아이돌 상당수가 화장빨이야. 화장이 아니라 변장 수준인 애들도 더러 있고. 그러나 윤이설은 다르지. 저 화장 안 한 얼굴을 봐. 광채가 그냥.”
 “화장했는데?”
 “무슨 소리야? 쌩얼이잖아.”
 정우는 윤이설의 뺨에 보이는 크림 성분을 조목조목 짚어 주려다 그만두었다. 애꿎은 친구의 환상을 깨버리는 것도 좀 미안하니까.
 그리고 윤이설의 피부 대지는 정말 화장이 필요 없을 만큼 고왔다.
 어쨌든 처음 들었음에도 감명받았을 만큼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기에 정우는 기대감을 안고서 무대를 기다렸다.
 기타를 잭에 연결한 그녀는 간단히 소리를 테스트해 보더니 바로 옆의 음향 스태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팅된 마이크 앞에 앉아 기타 몸체를 통통, 리듬감 있게 두드리자 스피커에서 경쾌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시작된 허밍.
 “어? 이 노래······.”
 “그래, 들어봤지? 얼굴은 모를 수 있다 쳐도 노래는 들어봤을 거야. 한국 사람이 그럼 안 돼.”
 “창고에서 부르던 그거네.”
 “미친. ‘다시 한번’도 처음 들었다고?”
 일상에 지쳤던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가사와 멜로디에 정우는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조명이 리듬을 따라 깜빡이고, 바닥에 연기도 자욱하게 깔렸다. 경쾌한 곡이긴 했지만, 잔잔한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기에 극적인 무대 효과가 추가되진 않았다.
 “이 음원은 사야겠어. 딱 나 같은 사회인을 위한 노래잖아.”
 “언제부터 일했다고.”
 “그래도 이젠 절절하게 공감하잖아. 너도 고생이 많다, 수찬아.”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라이브를 즐기다 보니 순식간에 3곡이 지나갔다.
 통제구역 외곽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쇼핑몰 고객들도 이 순간만큼은 광장의 무대 쪽으로 죄다 시선을 돌리고 윤이설의 음악을 감상 중이었다.
 세 번째 곡이 끝났을 때는 2, 3층 테라스와 외곽난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박수까지 쳤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움찔한 윤이설이 고개를 들고 꾸벅 인사를 하자 환호는 더 커졌다.
 당황한 윤이설이 마이크에 입을 댔다.
 “감사합니다. 쇼핑하는 분들도 계시니까 조금만 자제해 주세요.”
 “앵콜! 앵콜!”
 이에 질세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윤이설이 가늘게 눈을 뜨고 흘겨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셋리스트 아직 한 곡 더 남았는데 얼른 앵콜 부르고 들어가라시면······.”
 순수함이 느껴지는 농담에 듣고 있던 이들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시끌벅적 이어지던 환호를 가볍게 잠재운 그녀가 마지막 곡의 전주를 시작했다.
 박수찬이 듣자마자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거 가을에 나와서 히트한 곡이야. ‘어정쩡해.”
 “뭐라 그랬냐, 지금?”
 “제목 웃기지?”
 윤이설의 이번 노래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문 자신을 톡톡 튀는 가사로 표현한 곡이었다.
 앞서 들은 곡과 다르게 멜로디도 상당히 재밌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음 심심해. 친구를 불러? 걔는 수다쟁인데. 대체 뭘까요 내 마음~
 
 소소한 감성을 풍부한 사운드에 담아 지켜보는 관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힘. 정우는 이것이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윤이설의 위용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바로 실감했다.
 2절을 지나 후렴까지. 삽시간에 노래 한 곡이 끝났다.
 그리고 그 달아오른 분위기에 맞춰 연출석에 앉아 있던 김 감독이 무대 효과 스태프에게 폭죽 발사를 지시했다.
 [윤이설 씨 이때 폭죽 터뜨립니다. 놀라지 마세요.]
 무대 스피커 한쪽에 세팅된 출연자 전용 모니터에 문자가 올라갔다.
 -3번, GO!
 통신기로 그 소리를 같이 들은 박수찬이 “엥?” 하고 연출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우가 그것을 보고 같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정우 네가 세팅한 거 눌러 버렸······.”
 치이이익.
 심지가 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발사대의 뚜껑이 덜컥 열렸다.
 퍼버버버버―벙!
 엄지 크기의 로켓탄 열 개가 부채꼴 모양으로 한꺼번에 튀어 올랐다.
 그 난데없음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윤이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수찬은 그보다 놀라 경악했다.
 ‘제대로 되는 건가?’
 정우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딱 윤이설의 눈높이까지 튀어 오른 형형색색의 로켓탄이 각자 배합된 재료에 따라 반응을 일으켰다. 안에 심어둔 2차 심지를 따라 반짝거리며 타오르는 새로운 반응은, 알파벳 형상을 한 불꽃글자였다.
 [GIRLFRIEND]
 극히 짧은 순간, 깜찍하게 번뜩였다가 연기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글자.
 비뚤비뚤 위아래가 뒤집힌 알파벳도 있었으나,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너무도 화려했던 터라, 노래가 끝나 박수를 치려던 쇼핑몰 안 고객 전부 넋을 놓아버렸다.
 아직 연기의 잔해로 몇몇 글자가 남아 있는 것을 본 박수찬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 내렸다.
 “거, 걸프렌드?”
 “그렇긴 한데 D가 좀 엉켜서 O가 돼버렸어.”
 정우에게 고개를 홱 돌린 박수찬이 바로 쏘아붙였다.
 “야 이 미친······.”
 “잠깐 기다려 봐. 어? 왜 안 나오지?”
 “뭐가?”
 “아직 한발 남았다.”
 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늦게 반응해 튀어 오른 마지막 로켓탄이 있었다.
 퐁!
 소리까지 귀엽게 솟아오른 로켓탄이 [♡] 문양을 그리고 사라졌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통제선 밖의 쇼핑몰 고객들이 쿡쿡 웃어댔다.
 “저, 저게 뭐야······.”
 박수찬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발사대 근처로 걸어가 쭈그려 앉는 정우를 본 박수찬이 물었다.
 “뭔 짓 한 거냐, 너?”
 정우가 턱을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하트는 핑크로 하려고 했는데, 그 색은 도저히 조합이 안 나오더라.”
 “그걸 알고 싶은 게 아니잖아!”
 “내가 폭죽값은 담 달에 물어 줄게.”
 “뭘 물어?”
 “저거 하느라 깡그리 다 썼어, 미안.”
 삐빅.
 -야, 박수찬!
 딱히 콜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박수찬의 통신기로 무전 하나가 전해졌다.
 -당장 연출석으로 튀어 와!
 생에 첫 콜. 그것은 김무진 감독의 강제 호출이었다. 안색이 변한 박수찬이 연출석으로 황급히 달려가며 소리쳤다.
 “정우, 너 이 씨. 좀 있다 얘기해.”
 발사대 입구에 남은 화합물의 흔적을 살피던 정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중국산 탓은 아니야. 처음 만져 본 거라 완벽하지 못했어.’
 가루 한 알 한 알의 반응속도를 계산해 뭉치고 심지를 조작하는 건 몇 번 해봐야 능숙해질 것 같았다.
 ‘걸프렌드 앞에서 터뜨렸어야 제대로였는데. 하필 순서가 뒤바뀔 건 뭐람.’
 그렇게 혀를 차며 일어서던 그때.
 정우는 약간 얼이 빠진 것처럼 앉아 있던 윤이설과 눈이 마주쳤다. 모자가 살짝 위로 들려 그녀의 눈썹과 오밀조밀한 이마까지 훤히 보였다.
 ‘워······.’
 사람이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냐는 질문에 정우는 이런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도 존재한다고.
 “그 핫팩······ 맞죠?”
 윤이설이 정우를 알아보았다. 정우는 박수찬에게 내내 구박을 받았던 터라 얼른 대꾸했다.
 “맞습니다. 아까는 몰라 봬서 죄송했어요. 제가 윤이설 씨 팬······.”
 팬이라 자칭하기엔 너무 몰라봤다.
 “······오늘부터 팬입니다. 노래 진짜 최고였어요.”
 양손 엄지를 들어 보이던 정우의 시선이 윤이설의 기타로 향했다.
 “끊어졌네요.”
 “네?”
 “줄이요.”
 퍼뜩 정신을 차린 윤이설이 그녀의 기타를 내려다보았다.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설 선배님!”
 그사이 다음 리허설 준비를 위해 무대로 접근한 걸프렌드 멤버들이 윤이설의 주위로 하나둘 뛰어 올라왔다.
 “어, 얘들아. 안녕.”
 윤이설은 기타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정우! 너도 오래!”
 “나?”
 정우는 멀리서 들려온 박수찬의 목소리에 율희를 코앞에서 구경할 기회를 놓치고 연출석으로 움직여야 했다.
 지 실장이 윤이설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설아. 라이브 좋았어. 오늘 목 컨디션 최곤데?”
 “그 핫팩 준 스태프 이름 알았어요.”
 “그래? 내가 나중에 만나 볼게.”
 “그리고 기타가······ 저녁에 끊어졌으면 무대 망칠 뻔했네요.”
 “그래? 액땜 제대로 네. 내년엔 더 잘되려나 보다.”
 윤이설이 괜한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 실장은 바로 말을 이었다.
 “브랜드가 마틴 스트링 맞지? 우 매니저 시켜서 가져오라고 했어.”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윤이설의 눈길이 무대에서 멀어지는 정우를 따라 움직였다.
 
 음향장비가 일렬로 늘어선 간이 천막으로 들어온 정우는 김무진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 움찔했다. 박수찬이 자신에게 할 말 무척 많은 표정으로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어, 수찬이 친구. 그 폭죽 세팅 네가 했다며?”
 “네.”
 김무진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 무슨 세계 불꽃 축제 이런 거 나가고 그런 애였어? 여름에 한강에서 하는 거.”
 “아니요.”
 “무대연출과 나왔나?”
 “그건 수찬이만요.”
 정우가 자꾸 고개를 흔들자 김무진은 잔뜩 궁금하단 표정이 됐다.
 “무대연출 10년 하는 동안 그렇게 터지는 폭죽은 본 기억이 없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배웠다기보다는요. 폭죽이란 게 금속 화합물과 화약을 연소 폭파했을 때 생기는 빛이나 불똥 같은 것을 구경하는 물건이잖아요. 저는 그냥 가루의 연소반응을 계산해서 타는 속도랑, 불꽃반응을 적절히······.”
 김무진과 박수찬의 분위기를 살피니 씨알도 이해 못 한 것 같았기에 정우는 짧게 대답했다.
 “잘 계산된 화학 조합식에 입각한 폭죽이었어요. 제가 화학자거든요.”
 순간 김무진은 한예진에 화학과가 있나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수찬. 이 계통 일하는 친구라며?”
 “죄, 죄송함다!”
 박수찬이 고개를 푹 떨궜다. 김무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나 화내는 거 아니야. 신기해서 그런 거지. 폭죽 연출이란 게 양면성이 있거든. 그 화려함이 가수보다 주목받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관객들이 어설프게 느끼면 그것도 안 되는 거거든.”
 김무진은 막 리허설을 시작한 걸프렌드 쪽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 폭죽. 저 무대 끝나고 올라갔으면, 정말 끝내줬을 거야. 수찬 친구······ 아니, 한정우라고 했지?”
 “네.”
 “오늘 폭죽 연출 네가 해볼래? 그리고 글자 만들었던 폭죽 있잖아. 화학식인지 조합식인지 우리 회사에 알려 주면, 알바비 두 배, 아니, 세 배로 쳐 줄게. 여기 조명 연출 일당이 그 정도 수준이라고.”
 이 소리에 박수찬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서 수락하라는 듯한 친구의 눈길에 정우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고 말했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제가 일에 대한 보수는 정확하게 책정해야 한다는 주의라서요.”
 “말해봐. 협의해 줄 의향 충분히 있어.”
 “연출가에 준하는 보수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화학 조합식은 그냥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제가 수찬이에게 천천히 가르쳐 둘 테니까, 감독님이 나중에 수찬이에게 물어보세요.”
 김무진이 박수찬을 돌아보았다.
 “하긴. 이 녀석 경험 좀 쌓으면 어차피 폭죽 연출 맡길 예정이긴 했어. 좋아.”
 “하나 더. 수찬이 오늘 일당도 세 배 주세요.”
 “뭐?”
 “허공에 감독님 이벤트 회사 로고가 불꽃으로 피어오르는 것도 추가해 드리죠. ‘씽 컴퍼니’ 맞죠?”
 싹싹하게만 보였던 정우의 도전적인 제안에 김무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수찬아. 인제 보니 네 친구 완전 여우네.”
 박수찬은 “그러게요”라고 대답하며 정우에게 다가와 ‘얌마. 너 왜 그래!’를 소리 없이 소리쳤다.
 “까짓거. 그 정도 연출이면 대접해 줘야지. 씽 컴퍼니 전매특허를 훨씬 수준 높게 만들어 줄 화학자인데.”
 거래 성공. 정우는 이걸로 재미 삼아 친구의 폭죽을 홀랑 다 써버린 것을 한방에 만회했음을 깨닫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박수찬은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건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보았다.
 “정우도 이거 하나 받고.”
 김무진이 내민 것은 스태프용 통신기였다.
 “바로 일해. 수찬이 너는 내 트럭에서 폭죽 꺼내 정우 갖다 주고.”
 “넵!”
 지시를 받은 정우와 박수찬이 천막을 걸어 나왔다.
 정우는 흘끔 박수찬을 보았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징그러.”
 “정우야~”
 “하지 말라 했다.”
 “내 친구 한정우!”
 “야이! 느끼하게 부르지 말라고!”
 
 
 to be continued

댓글(2)

전격도    
끝까지 후회없이 읽을수 있는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8.10 16:03
g2***********    
글은매끄럽게잘쓰는데 슬데없는 오지랖 호구짓하는거 감내하면 볼만한 글
2019.09.18 20:05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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