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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권

2019.07.17 조회 2,717 추천 24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권
 
 CONTENTS
 
 1장 데이터를 계승하시겠습니까?
 2장 여전히 맑은 눈망울
 3장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4장 좋은 경기는 이긴 경기뿐이지
 5장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라
 6장 세계 무대로!(1)
 
 
 프롤로그
 
 
 최후의 순간, 그에게 남은 건 후회뿐이었다.
 ‘바보 같이······.’
 확실히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이를 구한다고 도로에 뛰어들다니.
 낡은 축구공 때문에? 아니면 아이가 10살 남짓한 나이여서?
 모르겠다.
 그는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몸을 던졌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빠아아앙!
 시끄러운 경적에 온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섰다.
 차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전조등의 환한 불빛이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금방이라도 생의 불꽃이 꺼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이토록 허무하게?’
 허탈해하던 오솔은 문득 시간이 참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생사가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옆으로 걸음을 옮기면 이 따위 트럭,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빨라진 건 의식의 속도일 뿐,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눈앞으로 그의 일생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답답했던 어린 시절.
 멋대로 살았던 십대.
 축구를 시작하며 느꼈던 성취감.
 은사님을 외면했던 순간.
 사랑하는 이 앞에서 도망쳤던 때.
 어쩔 수 없이 프로가 되고, 악에 받쳐 뛰었던 시간들.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난 날.
 혼자가 되어 홀가분했던 시간들.
 혼자라서 미칠 것 같던 암야(暗夜)의 나날들.
 불을 밝히기 위해 열었던 파티.
 술과 미녀들.
 부와 영화.
 화려한 스타의 삶 그리고 어둠.
 모두가 떠난 어두운 밤. 오솔은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후회와 좌절로 점철된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그녀를 잡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았다.
 ‘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편린들이 가시가 되어 가슴 깊숙이 박혀 들었다. 가슴 절절한 후회에 몸서리치려는 순간, 죽음의 불빛이 그를 덮쳤다.
 1장 데이터를 계승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암흑 속에서 익숙한 글자가 떠올랐다.
 -사용자 오솔은 2019년 6월 7일 17시 14분, 32세의 나이로 사망하셨습니다.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나요? 혹시 후회만 가득했던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레전드 플레이어(Legend Player)'의 첫 번째 사용자에게 특별히 1회 한정, 회귀의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회귀?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아니, 새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니 모든 것이 익숙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축구 인생 2회 차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오솔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든 뒤집고 싶었다. 이제는 축구도, 그리고 인생도 제대로 써 나가고 싶었다.
 -1회 차 데이터를 계승하시겠습니까?(능력치는 10%만 가산되며, 스킬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또한······.
 ‘능력치를 계승할 수 있다고? 회귀로도 충분한데. 후후. 좋아, 그렇게 해줘.’
 예상치 못했던 회귀에 능력치 계승이라는 특전까지 있었다.
 -축구 인생 2회 차를 시작합니다. 행운을 빕니다.
 글자는 고운 입자가 되어 오솔을 향해 날아들었다. 입자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자는 그의 몸 구석구석 달라붙더니 스스로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 * *
 
 삐익!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 까 어둠 속에서 익숙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오솔은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앞에는 모래와 흙으로 된 학교 운동장이 펼쳐져있었다.
 “마크해. 마크!”
 “이쪽!”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축구공을 쫓고 있었다. 오솔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왜 그러니? 긴장해서 그래?”
 ‘이 녀석은······.’
 남자의 또랑또랑한 눈빛을 본 오솔은 곧바로 그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이름은 여민국.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였고, 같은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이 고1 때라는 건데······.’
 오솔은 어느샌가 처음 축구를 시작했던 2003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입단 테스트를 치렀을 때구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아이들이 이리저리 달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들은 나름대로 치열한 경합을 선보였으나 오솔이 보기에는 귀엽기만 했다. 사실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몇 달 전까지는 중학생이었다. 아직은 청년보다 소년에 더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만약 이 모든 게 꿈이라면 너무 아쉬울 것 같은데.’
 오솔은 발에 힘을 주며 땅을 밟았다. 단단한 흙의 감촉이 축구화를 통해 전해져 왔다. 축구화가 작아서 그런지 발이 아팠다.
 ‘아프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오솔을 덮쳤다. 고통이야 말로 다시 살아났다는 확고부동한 증거였다.
 “후후. 땀과 흙먼지, 고함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한참을 흐뭇하게 웃던 오솔은 이내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감상에 젖는 건 1분이면 충분했다. 이제는 다시 달릴 시간이다.
 오솔은 손바닥으로 오른쪽 귀를 덮으며 작게 속삭였다.
 “상태창 열람.”
 -‘레전드 플레이어(Legend Player)’ 2회 차를 시작합니다.
 ‘알았으니까. 빨리 상태창이나 보여줘.’
 -1회 차 데이터를 계승·적용 중입니다. 능력치 변동이 적용됩니다. 1회 차 능력치의 10%만 가산됩니다.
 오솔은 이전 생에서 공격수에게 필요한 능력치를 모두 90까지 올렸었다. 아마 해당 능력치가 전부 9씩 올랐을 것이다.
 -1회 차 스킬이 적용됩니다. 스킬은 가감 없이 기존 효과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킬? 내가 무슨 스킬이 있었더라?”
 상태창을 확인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내용조차 가물가물했다. 돈을 좇아 중동으로 떠났을 땐 이미 포인트로 올릴 수 있는 한계까지 능력치를 올린 상황이라 굳이 확인하지 않았고, 중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적어도 6년은 상태창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산 셈이다.
 -지속 스킬 ‘강건한 육체’가 발동합니다. 강인함에 +5 보너스가 붙습니다.
 이 스킬은 오솔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스킬이다. 효과는 강인함에 5의 보너스가 붙는 것으로, 강인함이 높으면 부상에 잘 당하지 않고, 설혹 부상에 당하더라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휴식 시 체력 회복도 빠르고, 육체의 노화 속도도 줄어드는 등 높으면 여러모로 건강에 좋았다. 게다가 그는 이 스킬 덕분에 운동선수의 가장 큰 적,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속 스킬 ‘천하장사’가 발동합니다. 힘에 +5 보너스가 붙습니다.
 이것 역시 원래부터 갖고 있던 스킬이었다. 효과는 말 그대로 힘이 세지는 거였다.
 오솔이 축구부에 들어오고자 한 것도 이 주체할 수 없는 힘 때문이었다. 어리석게도 당시 그는 죽어라 뛰고 나면 사고칠 기운도 없을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결정 덕분에 ‘시스템’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할 수 있었다.
 ‘구색을 맞춘 경기에서만 시스템이 발동한다니, 누가 알았겠어.’
 '레전드 플레이어(Legend Player)'는 그냥 공만 찬다고 발동하지 않았다. 22명의 선수와 주심과 부심, 90분의 경기 시간 등 정식 경기에 준하는 수준에서야 비로소 시스템이 작용했다. 덕분에 오솔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자신의 진짜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빨리 발견했으면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후후. 아서라 시스템에 회귀까지 했으면서 이 이상을 바라면 안 되지.’
 오솔이 가볍게 몸을 푸는 사이 시스템은 나머지 스킬을 빠르게 나열했다.
 -‘양반은 아무리 급해도 뛰지 않는다.’가 발동합니다.
 -주력이 50% 감소합니다.
 -‘아버님 페널티 박스에 붙박이장 하나 놓아야겠어요.’가 발동합니다.
 -낮은 활동량으로 인해 지구력이 50% 감소합니다.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야.’가 발동합니다.
 -패스가 50% 확률로 부정확해집니다.
 -‘모난 머리가 공 맞는다.’가 발동합니다.
 -헤딩이 50% 확률로 부정확해집니다.
 -‘게으른 천재가 진짜 천재지.’가 발동합니다.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이제 축구는 재미없어졌어.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가 발동합니다.
 -시합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스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가 발동합니다.
 -컨디션이 D등급(최대 70%)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습니다.
 “뭐, 뭐야?”
 -2회 차 난이도 조절을 위해 모든 필요 경험치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더불어 레벨 업 시, 포인트 지급이 기존 5개에서 3개로 감소합니다.
 -‘레전드 플레이어(Legend Player)’ 2회 차, 하드 모드(hard mode)를 시작합니다. 이번 생에는 부디 과거의 [후회]를 바로잡기 바랍니다.
 “하드 모드라고?”
 오솔은 그제야 1회 차를 ‘계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계승이란 단순한 능력치에 보너스를 주는데 그치는 게 아니었다. 전생의 실수까지 따라온다는 뜻이었다.
 “일단은 상태창부터 보여줘.”
 
 -오솔(오른발잡이)
 -신체 : 균형감각 66/ 힘 72(+5)/ 반응속도 63/ 순간속도 60/ 주력 68(50%↓)/ 점프력 50/ 지구력 66(50%↓)/ 강인함 90(+5)
 -기술 : 개인기 24/ 드리블 16/ 볼터치 24/ 슈팅 23/ 패스 13(50%↓)/ 헤딩 20(50%↓)/ 스로인 14/ 태클 15/ 일대일 마크 10
 K리그 선수가 대충 50언저리의 능력치를 가졌다고 보면 된다. 50보다 낮으면 K리그 후보 선수. 그보다 높으면 K리그의 주전 선수 수준이었다.
 오솔은 신체 능력 자체는 웬만한 운동선수를 능가했으나, 축구 기술 쪽은 아직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 수준이었다.
 -페널티는 능력치가 오를 때마다 차등해서 감소합니다. 그 외에도 상점에서 회복 물약을 쓰거나 ‘어떤’ 계기만 있으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따위로 페널티를 먹여놓고 복구할 방법이 있다고 하면 다냐? 젠장.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입부 테스트부터 끝내고 생각해보자.’
 스킬로 인한 페널티가 걸렸지만, 어쨌든 초기 능력 자체는 전생보다 높았다.
 오솔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전방으로 이동했다. 경험치는 평점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무조건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게 최고였다. 그가 페널티 아크로 향하자 미리 도착해있던 같은 편 선수가 의아한 듯 바라봤다.
 “뭐야? 포지션 겹치잖아. 다른 곳으로 가.”
 “뭐? 중앙보다는 사이드가 편하다고?”
 “내가 언제, 으아악!”
 오솔은 팀원의 옆구리를 살살 어루만져줬고, 그 친구는 너무 좋아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가, 갈게! 간다고!”
 “흐흐. 진작 그럴 것이지.”
 간단하게 원톱의 자리를 차지한 오솔은 미드필더진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헤이! 여기! 패스해!!!”
 파앙!
 오솔의 끈질긴 요구 끝에 마침내 공이 그에게 굴러왔다.
 한데 패스가 영 좋지 않았다. 패스를 한 친구가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녀석이라 그런지 힘이 약해서 공이 생각보다 느리고 짧았다.
 프로 무대에서 십여 년간 양질의 패스를 경험해왔던 오솔인지라 대뜸 불만부터 튀어나왔다.
 ‘쳇! 이따위 패스밖에 못하다니. 데쿠나 램파드였다면 딱 내 진행경로 앞에 갖다 놨을 텐데······. 이크!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공을 커트할 생각으로 수비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솔이 하도 요란하게 패스를 어필한 탓에 상대편도 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닷!
 결국 오솔과 수비수의 속도 경쟁이 벌어졌다. 오솔은 공을 차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이건 내 거야!’
 그러나 오솔의 의지와는 달리 그의 발은 느려터졌다. 50%나 감소한 주력 탓이었다.
 ‘추, 추월당한다!’
 파앙!
 결국 딱 한 걸음 차이로 공을 뺏기고 말았다. 짧은 거리를 달렸는데도 한 걸음이나 차이가 난다는 건 사실상 속도에서 경쟁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큰일이네. 이렇게 되면 나 혼자 기회를 만드는 건 힘든데······.’
 오솔의 속도도 문제였지만 같은 팀의 패스 실력도 좋지 않았다. 골을 넣으려면 작전을 변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까 사이드로 쫓아냈던 친구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이봐 이름이 뭐야?”
 “이, 이승훈인데, 왜?”
 “이제부터 내 바로 아래에 서서 공을 받으라고. 내가 수비수들을 등지고 있으면 바로 패스하고 수비 뒤로 우회해서 침투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2 대 1 패스를 하자고? 우린 한 번도 합을 맞춰본 적이 없잖아. 과연 말처럼 쉽게 될까?”
 “무슨 소리야?”
 오솔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미끼가 있어야 수비수들의 시선이 분산될 거 아니야. 너는 적당히 시선만 끌어. 골은 내가 넣어줄 테니까.”
 “······.”
 너무도 당당한 미끼 제안에 이승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울컥했으나 오솔의 덩치를 보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부 테스트는 잠깐이지만 학교생활은 3년이었다. 벌써부터 학년 짱(?)에게 찍힐 수는 없었다.
 “그럼 부탁한다. 미끼야.”
 이승훈은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의 공간으로 향하며 조용히 구시렁댔다.
 ‘어차피 미끼라고 부를 거면서 아까 이름은 왜 물어본 거야?’
 오솔의 작전은 간단했다. 중앙에서 최전방으로 단번에 공이 넘어오기 힘드니 중간에 연결점을 하나 놓는 것이다.
 패스가 부정확하고 약할 때는 지금처럼 긴 패스보다는 짧은 패스를 하는 편이 점유율을 유지하고 찬스를 살릴 확률이 높았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수비수의 시선을 끌어줄 미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능력치가 얼마나 깎였든 상관없어. 기회만 와라. 아직 전생의 득점 감각이 온전히 남아 있다.’
 
 * * *
 
 오솔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페널티 아크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최근 6년간 제대로 뛴 적이 없어서 필드에서 걷는 게 완전히 몸에 밴 상태였다.
 전생에는 이런 행동 때문에 ‘필드 위의 양반’으로 불리며 조롱을 당하기도 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대충해도 충분한데 열심히 뛰는 게 손해지.’
 중동과 중국을 오간 6년 동안 오솔은 제대로 몸을 움직인 적이 없었다.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그저 요식 행위였고, 밤에는 술과 여자, 파티에 몸을 맡겼다. 덕분에 컨디션은 항상 F등급에 머물렀다.
 아무리 정상급 선수라고 해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법이다.
 ‘평범한 경우에는 그렇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솔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는 이미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공격 관련된 모든 능력치를 90까지 올린 상태였고, 그러고도 수많은 포인트를 사용하지 못해 남겨놓고 있었다.
 포인트들은 능력치를 올리는 것 외에도 시스템 상점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컨디션 조절 물약이라는 걸 팔았다.
 ‘컨디션 조절 물약 하나면 만사 오케인데, 뭐 하러 컨디션을 조절하겠어.’
 컨디션 조절 물약은 자기관리를 귀찮아하는 사람에게 아주 적격인 물건이었다. 일단 물약을 마시면 당일 컨디션은 무조건 A등급이 됐기 때문에 물약만 있으면 경기 전날 밤새 과음을 해도 괜찮았다.
 컨디션 물약은 마약과도 같았다. 오솔은 물약을 사용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것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지급되는 포인트 수도 줄었으니까 거의 쓸 수 없겠지.’
 오솔이 딴생각에 빠져 가볍게 뛰는 사이, 그의 팀이 공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공은 수비진에서 천천히 중앙으로 그리고 이승훈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오솔은 수비수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방해 없이 공을 잡기 위해 적절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훈은 정면의 오솔을 발견하고 약속대로 공을 건네고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중앙 수비수 중 하나가 오솔에게서 시선을 뗐다.
 ‘좋아. 기회다!’
 오솔은 그 잠깐의 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수비수를 밀어내며 공을 마중 나갔다. 덕분에 수비수는 한 발 늦게 따라왔다.
 ‘단번에 돌파해주마.’
 오솔은 굴러오는 속도에 따라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고, 공이 왼발과 오른발 사이에 왔을 때 오른발 안쪽으로 공을 감싸며 방향을 전환했다.
 인사이드 리시브&턴(Inside Receive & Turn)이 끝났을 때, 오솔은 이미 우측 사이드로 달리고 있었다. 수비수는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오솔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휴. 하마터면 튕겨나갈 뻔했네.’
 성공적인 돌파에도 불구하고 오솔은 식은땀을 흘렸다. 개인기, 볼터치, 드리블 기술이 모두 낮아진 탓에 하마터면 공이 발에 맞고 튕겨져 나갈 뻔했다.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개인기를 시도했다가 스스로 발이 꼬여 뺏기는 경우,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민망해진다.
 ‘다행이야. 하마터면 돌아오자마자 이불킥을 할 뻔했어.’
 한편 돌파를 허용한 수비수는 재빨리 따라붙으며 몸싸움을 시도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큭! 이 녀석 뭐야?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수비수는 순간적으로 단단한 바위를 붙잡고 씨름을 하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현재 오솔의 힘은 스킬의 도움을 받아 77에 이르렀다. 컨디션 때문에 70%로 감소한다고 쳐도 K리그 주전 수준이었다. 거기에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의 몸싸움 경험이 합쳐졌으니 고등학교 1학년의 몸싸움 정도는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별다른 저항 없이 골 에어리어까지 접근한 오솔. 그는 바짝 긴장한 골키퍼를 확인하고 침착하게 공을 찼다.
 목표는 반대편 골대였다. 그런데 막 오솔의 발이 공에 닿는 순간, 반대편 사이드에서 쇄도하는 이승훈이 보였다. 수비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노마크 찬스였다.
 ‘바보 같긴. 내가 패스 같은 걸 할 것 같아? 그것도 이런 득점 찬스에서?’
 오솔은 이승훈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공격수의 본능이 첫 골은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발등이 공의 중심부를 강하게 때렸다. 정확도와 세기를 모두 갖춘 슈팅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속 스킬,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야.’가 발동합니다. 패스가 50% 확률로 부정확해집니다.
 뜬금없이 등장한 메시지와 함께 공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분명 반대편 골대를 보고 찬 슛이건만 가까운 쪽 골대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텅!
 결국 공은 골대에 맞고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니, 난 패스를 한 적이 없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공의 이동 경로 상에 같은 편이 도달할 가능성이 있으면 패스로 간주합니다.
 “아니, 뭔 이따위 판정이······.”
 오솔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멋진 돌파를 선보였습니다.]
 -개인기가 25로 증가합니다.
 -드리블이 18로 증가합니다.
 -돌파 성공으로 6%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현재 경험치 : 6.6%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시합 중에 보인 퍼포먼스 덕분에 능력치가 올랐다는 것이다.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개인기를 펼친 덕분에 개인기와 드리블이 각각 1개와 2개 씩 상승했다. 골을 놓친 것은 아쉬웠으나 덕분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솔의 돌파는 그게 끝이었다. 상대팀에서 그를 혼자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항상 둘 이상이 협력해서 수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솔의 몸싸움 능력은 둘을 상대로도 능히 버틸만한 수준이었으나, 그러면서 동시에 공까지 간수할 수는 없었다.
 ‘전생이랑 능력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그런지 적응하기 쉽지 않네.’
 동료들의 도움이라도 있었다면 조금 나앗겠으나 곁에 있는 공격수라고는 이승훈 한 명 뿐이었고, 그마저도 패스가 부정확해서 제대로 활용하기 힘들었다.
 결국 전반 남은 시간 동안, 오솔의 팀은 공격다운 공격도 못하고 내내 수비만 해야 했다.
 삐익!
 호각이 울리고 하프 타임이 돌아왔다. 그러자 전반전 내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뛴 미드필더가 오솔을 보며 소리쳤다.
 “야, 아무리 공격수라지만 너무 안 뛰는 거 아니야?”
 “뭐?”
 “너 하나 때문에 지금 남들이 몇 배로 뛰고 있잖아. 넌 월드컵도 안 봤어? 전방 압박을 해줘야지.”
 아직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기였다.
 공격진에서부터 강한 압박과 많은 활동량을 요구했던 거스 히딩크의 전략은 많은 축구팬을 감동시켰다.
 오솔에게 전방 압박을 요구하는 소년 역시 그런 축구팬 중 하나였다.
 ‘조그마한 게 어디서 아는 척이야?’
 오솔은 기가 막혔다. 압박이라는 건 혼자 많이 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공을 몰고 압박 타이밍을 정해서 해야 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최전방 공격수가 자리를 비우면 골은 누가 넣으라고? 오히려 내가 고립되지 않게 너희들이 더 올라와줘야 하는데 지금 그게 안 되고 있잖아. 그리고 압박이 뉘 집 개 이름인줄 아나본데, 그거 엄청 어려운 거야. 이렇게 급조한 팀으로는 할 수 없다고.”
 “웃기지 마. 뛰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지금?”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이런 젠장, 어린 애를 상대로 주먹질을 할 수도 없고. 으으. 참자.’
 아무리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도 지난 30년간 형성된 성격이 한순간에 변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오솔은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조용히 말했다.
 “압박은 포기해. 지금은 죽어라 뛰어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라인을 내리는 편이 더 나을 거다.”
 그러나 팀원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플레이만 본다면 오솔은 전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말을 꺼낸 미드필더는 중원에서 활발하게 뛰고 있었다. 그들이 봤을 때는 미드필더 쪽이 더 팀을 위해 뛰는 선수였다.
 ‘이런 바보 같은 놈들. 겨우 그 정도 전술 이해도로 축구를 한다고 하는 거냐. 지금?’
 오솔이 좀 심하게 걸어 다닌 측면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압박을 할 필요가 없어서, 혹은 압박을 해봐야 의미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지구력에 걸린 페널티 때문에 체력도 낮은 상황이라고. 어설픈 압박으로 체력을 소진시키느니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기회에 모든 체력을 쏟아 붓는 편이 더 나아.’
 오솔은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고자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축구부 감독은 오솔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흐음. 특이한 녀석인데? 전체적으로는 초심자처럼 어설프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그 나이 대에서 보기 힘든 플레이를 펼치고 있어.’
 사실 오솔이 그렇게까지 소름 끼치게 잘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못하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는 동년배는 물론이고 웬만한 프로선수 못지않게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위치 선정이 뛰어나. 설렁설렁 움직이면서도 제때 공격 찬스를 잡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저 오프 더 볼 움직임 덕분이지.’
 예측력인지 아니면 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솔이 적진에 홀로 고립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공간을 찾고 공격 찬스를 확보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다른 기술들이 어설픈 것에 비해 몸싸움만은 상당히 능숙해. 힘도 좋고 무게 중심도 낮아.’
 오솔의 몸싸움 능력은 타고난 신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낮은 무게 중심을 유지하면서도 제 속도를 낼 수 있는 건 모두 교과서적인 자세와 유연한 근육 덕분이었다.
 자세는 지난 10년간 프로무대에서 뛰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것이었고, 근육은 스킬의 도움이 컸다. 덕분에 오솔은 수비수가 붙어 있음에도 자유롭게 페널티 에어리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재능이 있군.’
 사람들은 축구선수로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할 때, 종종 절정의 골 감각이나 볼터치 능력을 보고 말할 때가 많았다. 마라도나부터 호나우두, 메시나 C. 호날두 등 흔히 신계에 있다는 선수들이 마치 공과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그렇게 생각하기 쉬웠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공에 대한 감각도 일정부분 타고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탁수 감독이 생각하는 재능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타고난 신체 능력이야 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기술은 꾸준히 연마하면 어느 정도는 커버가 가능해.’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익힌다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기술은 노력과 시간이 있으면 일정 수준 이상 올라서는 게 가능했다.
 반면 몸은, 신체 능력은 그게 불가능하다. 물론 체력을 키우거나 달리기 연습을 통해 속도를 높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근육의 질까지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알기로 오솔은 경기 전에 따로 몸을 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보면 몸에 부담이 가는 동작들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근육이 마치 야생 동물의 그것처럼 유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격 장면을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는데.’
 이 감독의 시선은 오롯이 오솔에게만 꽂혀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솔에게 패스가 이어지질 않았다.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의견 차이 때문인지 오솔에게 패스를 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팀원들에게 완전히 따돌림당한 오솔은 적진 한가운데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덕분에 경기는 지지부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이 자식들은 이길 생각이 있긴 한 거야? 겨우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패스를 안 해?’
 오솔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
 오솔은 공이 근처까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마침 5분쯤 지나자 다툼이 있었던 그 미드필더가 전방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패스할 곳을 찾던 미드필더는 상대편 선수가 붙자 공을 지키기 위해 몸을 틀었다.
 ‘지금이다!’
 오솔은 가볍게 뛰는 속도로 공을 향해 접근했다. 그러다가 웬만큼 가까워졌다고 느낀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공을 뺏어냈다.
 쿠당탕!
 기존에 공을 두고 다투던 두 사람은 오솔의 몸싸움에 밀려 나란히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윽! 뭐, 뭐야. 야! 같은 편한테 태클을 하는 게 어디 있어?”
 “원래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란다.”
 “그게 뭔 소리야!?”
 오솔은 황당해하는 동료를 뒤로하고 적진으로 달려갔다. 발끝으로 볼을 툭툭 건드리며 속도를 올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 * *
 
 “막아!”
 수비수들이 재빨리 따라붙었지만 태클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오솔의 발이 공의 좌우를 번갈아가며 언제든지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여지를 줬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아이스하키 선수가 스틱으로 퍽의 좌우를 번갈아가며 컨트롤하는 듯했다.
 ‘희한하군. 볼터치는 투박한데, 드리블 자체는 묘하게 익숙해 보여.’
 이탁수 감독은 아리송한 얼굴로 오솔의 돌파를 바라봤다. 초보자의 볼터치이자 드리블이었지만 또 사용하는 기술만 보면 상당히 고급 기술들이다.
 지금도 오솔은 인사이드 & 아웃사이드 (Inside & Outside)로 상대 미드필더 두 사람을 차례대로 돌파하고 있었다.
 이 기술은 빠른 방향 전환으로 수비수들을 현혹하는 기술로 오솔이 회귀하기 전에는 메시가 자주 사용하는 기술로 유명했다.
 물론 지금은 아직 메시가 데뷔하기 전이라 이탁수 감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11번, 라이언 긱스를 먼저 떠올렸다.
 ‘긱스라니······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군.’
 “뭐해? 막으라니까!”
 오솔은 어설프게 공을 몰았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몸싸움 능력을 앞세워 돌파에 성공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위험지역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파워풀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벌써 시간은 후반 70분에 이르렀고 체력도 많이 떨어져있었던 것이다.
 ‘제길. 지구력에 걸린 페널티만 아니었으면 90분 내내 뛰어 다닐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이 급해진 오솔은 순간적으로 상대 수비수를 속인 후 슛 동작을 취했다. 다행히 이번엔 전방에 아무도 없었다.
 뻐엉!
 발등을 떠난 공은 곧게 뻗어나가 빠르게 골대 모서리를 향했다. 그의 덩치만큼이나 무겁고 빠른 공이었다. 골키퍼는 힘껏 몸을 던졌으나 막을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는 표정이었다.
 텅!
 애석하게도 공은 골대를 맞고 위로 넘어가고 말았다.
 오솔은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 틈 사이로 뜨거운 숨과 함께 욕설이 흘러나왔고,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살짝 빗맞았다.’
 달라진 몸에 익숙해질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 바로 경기를 뛴 탓일까. 자꾸만 플레이가 엇나갔다. 방금 슈팅도 그가 원래 노렸던 곳보다 조금 밑에 맞았다.
 ‘하아. 큰일이네.’
 능력치 하락도 문제였으나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아까부터 혼자 뛰어다닌 탓에 체력이 평소보다 더 빨리 소모됐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두어 번의 전력질주면 체력이 몽땅 바닥나게 생겼다. 별 수 없이 오솔은 페널티 아크에 머문 채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10분 뒤.
 “어휴, 씨! 힘들어 죽겠네.”
 후반 내내 오솔을 따돌림 했던 선수도 마침내 푸념을 내뱉었다. 경기 종반, 대부분의 선수들이 잔뜩 지쳐있었다. 그중에서도 압박이랍시고 쉼 없이 뛰어다녔던 미드필더들의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이게 다 저 이국동 같은 놈 때문이야!”
 낯익은 이름에 오솔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찔끔하여 시선을 피하는 선수가 보였다.
 ‘이국동이라······ 이게 욕인가? 하하. 지금은 욕이겠네.’
 이국동은 이번 월드컵 전만 하더라도 차세대 한국 대표팀을 이끌 정통파 스트라이커로 인기가 많았으나 본선 23인 로스터(선발)에 탈락한 선수였다. 덕분에 그는 월드컵 멤버들이 군 면제 혜택을 받을 때 홀로 상무에 입대해야 했다.
 ‘가만 이거 나도 군대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잖아?’
 인생 1회 차에서는 솔직히 승승장구했었다. 21세의 나이로 참가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매 경기 득점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군 복무는 4주간의 기초 군사훈련과 프로팀 활동으로 해결했다. 이른 나이에 받은 군 면제 혜택은 그가 유럽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만약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게 늦어지면 어떻게 될까? 스물한 살의 나이에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면? 그래서 베이징에 못 가고, 군 면제도 받지 못하면?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농담이 아니라 이대로라면 국가대표는커녕 프로선수가 되는 것도 힘들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는 건데.’
 ‘레전드 플레이어’는 훈련과 일반 경기, 대회 등에서 경험치를 얻는데, 그중에서 가장 높은 경험치를 주는 건 대회였다. 그것도 유명한 대회일수록, 그리고 개인상을 많이 수상 할수록 더 많은 경험치를 얻었다.
 전생의 빠른 성장도 모두 전국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득점왕을 딴 덕분이었다. 전국대회에서 레벨 업 한 것을 바탕으로 프로무대에서 데뷔할 수 있었고, 프로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가대표가 되었다.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도 그렇게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당장 페널티가 너무 심해서 입부 테스트조차 헤매고 있지 않은가.
 ‘설마 입부조차 못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진 오솔은 운동장 한쪽에 앉아있는 감독을 바라봤다.
 이탁수 감독은 흰색 운동회 모자에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얼핏 보면 감독이 아니라 그냥 학교 체육 선생님으로 보일법한 차림이었다.
 오솔은 재빨리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누렇게 때가 탄 모자 아래로 호선을 그리는 입술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왜 웃는 거지? 젠장, 저 양반은 뭔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건 저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탁수 감독은 최대한 빨리 많은 골을 넣고 싶었던 오솔을 근 1년간 봉인하다시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을 보자 그 당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기초부터 다시!”
 “좋았어, 다시!”
 ‘그놈의 다시, 진짜.’
 진짜 3년간 다시라는 말을 이름보다 더 많이 들었다. 오죽하면 그 튼튼한 오솔이 ‘다시!’라는 환청이 자꾸만 들려서 이비인후과에 가봐야 하나 고민할 지경일까.
 하지만 기초를 중시한 이탁수 감독 덕분에 오솔은 3년간 드리블과 패스, 볼트래핑 등 꼭 필요한 기초들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다.
 1년간 출전 금지라는 요구와 질리도록 반복된 기초 훈련에도 오솔이 도망치지 않은 건, 자신을 축구부 장학생으로 밀어준 사람이 이탁수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3년 내내 편안히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이때는 설마 축구하는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줄 몰랐었지.’
 축구는 돈 먹는 귀신이었다. 일단 기숙사비에 축구화와 유니폼 등 개인용품 구입비, 저녁에 먹는 부식비는 기본이었다. 거기에 방학 동안 진행되는 훈련비와 감독에게 주는 지도비는 물론이고 대회 참가비까지 따로 내야했다.
 자잘한 것들까지 다 합하면 1년에 들어가는 돈만해도 기백을 훌쩍 넘겼다. 만약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오솔은 축구가 아니라 돈이 많이 필요 없는 다른 종목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거 큰일이네, 이러다가 장학생으로 못 뽑히면 완전히 망하는 건데······.’
 장승처럼 멀뚱히 서있던 오솔은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다시’와 ‘기초’를 좋아하는 양반에게 찍히지 않으려면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더불어 골도 하나 정도는 넣어야 했다.
 ‘빨리 레벨을 올려서 남들보다 성장이 빠르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해.’
 마침 이승훈이 공을 몰고 돌파를 시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우측으로 공을 옮기더니 미드필더와 2 대 1 패스를 주고받았다. 경기 막판인 것치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기회다!’
 오솔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20분 동안 가만히 있었던 덕분일까, 중앙 수비수 두 사람의 경계가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도 90분 가까이 뛰느라 상당히 지쳐 보였다.
 ‘그래. 나만 힘든 게 아니야. 이번 기회를 잘 살리면 돼.’
 오솔이 느려지고 약해진 만큼 수비수들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집중력을 조금만 더 끌어올리면 득점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 사이 이승훈은 측면 수비수를 어렵사리 제치고 코너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는 공을 따라가면서 고개를 들어 크로스할 곳을 살폈다.
 하필이면 전방에 콕 틀어박혀 있던 오솔과 눈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이 패스를 주지 않았다간 이승을 패스하게 될 것 같았다.
 ‘죽기 싫으면 패스해!’
 오솔은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아보내고 곧장 전방으로 쇄도했다. 그의 바람대로 이승훈의 발을 떠난 공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오솔은 좌우에서 엉겨 붙는 손들을 거추장스럽다는 듯 떼어냈다.
 “귀찮게 하지 마!”
 오솔은 수비수 둘을 질질 끌고 달렸다. 비록 주력이 낮고 체력이 떨어졌어도 아직 순발력과 힘은 건재했다. 그렇게 골 에어리어까지 접근한 오솔. 고개를 드니 공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너무 높잖아! 발리는 불가능 해. 어떡하지, 헤딩을 해야 하나?’
 오솔은 잠시 망설였다. 헤딩을 대체 언제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게다가 지금 그는 헤딩 시 50% 확률로 부정확해지는 스킬까지 갖고 있었다. 이대로는 머리를 갖다 댄다 해도 제대로 맞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솔은 일단 타이밍에 맞춰 몸을 띄웠다. 뒤에서 수비수가 살짝 몸을 밀치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몸의 균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명백한 반칙이었다. 그러나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플레이를 멈춰선 안 된다.
 오솔은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도 공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공이 이마에 닿는 순간, 최대한 고개를 틀어 공을 골문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공은 그가 원래 목표로 했던 지점보다 살짝 아래에 맞고 말았다. 공이 위로 붕 뜨는 게 느껴졌다.
 ‘빗나갔나?’
 한데 그때, 공중으로 높이 뜰 것 같던 공이 역회전에 의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묘한 포물선을 그리던 공은 멍청히 바라보는 골키퍼와 수비수를 비웃으며 먼 쪽 골대로 향했다. 골키퍼가 급히 몸을 날렸지만 야속한 공은 골대 모서리와 골키퍼 장갑 사이로 쏙 하고 빨려 들어갔다.
 “꼬오오오올!”
 그물이 출렁이는 걸 확인한 오솔이 괴성을 지르며 코너로 달려갔다. 그는 열심히 달려가서 팔다리를 대(大) 자로 뻗으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나 서 있기도 힘들었다.
 상대편은 물론이고 같은 편조차도 그런 오솔을 희한하다는 듯 바라봤다.
 “뭐야. 지가 무슨 안태환이야? 골든골 넣었어?”
 “참나, 백퍼 뽀록이구만. 엄청 좋아하네.”
 “그러게 누가 보면 엄청 잘해서 넣은 줄 알겠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오솔은 두 눈을 감고 상태창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골을 넣은 덕분에 경험치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80.6······ 84.7······ 89.2······ 95.1%
 “아오, 이게 여기서 멈추다니.”
 오솔의 입에서 한탄 섞인 불평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차오르던 경험치는 레벨 업의 끝자락에 닿지 못하고 95.1%에서 멈췄다.
 “후우. 괜찮아. 경기가 끝나면 또 경험치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땐 확실히 레벨이 오르겠지.”
 힘이 다 빠진 오솔은 비척거리며 일어나 센터 라인으로 복귀했다. 겨우 1~2분 남은 시간이었지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잖아.’
 이탁수 감독은 오솔의 집념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체력은 생각보다 안 좋았지만, 승부욕과 투쟁심은 합격점을 줘도 될 것 같았다.
 
 * * *
 
 쏴아아!
 뜨끈한 온수가 쏟아지는 좁은 샤워장, 뿌연 김으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그곳에서 오솔은 한쪽 귀를 막은 채 실실 웃고 있었다.
 ‘좋아. 레벨이 하나 올랐다.’
 
 [Level Up!]
 -보유 포인트 : 3 (포인트를 투자해서 능력치를 올리세요.)
 
 ‘그런데 뭘 올리지?’
 일단 가장 필요한 능력은 주력과 지구력이었다. 그중에서도 90분을 뛸 수 있게 해주는 지구력 쪽이 시급했다.
 패스와 헤딩도 문제였지만, 이건 아무리 높여봐야 50%확률로 빗나가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처럼만 뛸 수 있으면 공격 기술 쪽에 투자하는 편이 더 좋을 텐데. 후우. 하지만 그 양반이 가만두지 않겠지.’
 이탁수 감독을 떠올리자 어디선가 ‘다시’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으으. 역시 체력이 국력이다. 지구력에 투자해야겠어.’
 지구력에 투자하면 경기 시 체력도 소폭 상승하기 때문에 체력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능력치 하락도 일정 부분 방지할 수 있었다.
 
 -신체 : 지구력 69(48.2%↓)
 
 ‘오오! 페널티도 떨어졌잖아? 능력치가 오를 때마다 차등해서 떨어진다더니 이런 뜻이었구나.’
 오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레벨만 꾸준히 올릴 수 있다면 이깟 페널티 따위는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들어오는 경험치도 줄긴 했구나. 시합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생각하면 레벨이 하나 정도는 더 올라야 정상인데.’
 1회 차에는 골을 넣었을 때 한번, 경기가 끝나고 또 한 번 레벨 업을 했었다. 그러나 이번 2회 차에서는 하드 모드인 탓에 1레벨만 오르고 끝이었다.
 ‘흐음. 이제는 훈련으로 능력치도 잘 안 오르는데, 큰일이네.’
 ‘레전드 플레이어’에서는 반복되는 훈련만으로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전생에 처음 축구를 시작하고 3년 동안, 이탁수 감독의 훈련으로 꽤나 많은 효과를 봤었다. 특히 아예 문외한 수준이던 볼터치와 드리블 같은 것들은 조금만 배워도 능력치가 빠르게 올랐었다.
 ‘그때는 무슨 게임 캐릭터 키우는 기분으로 연습했었는데.’
 실력 향상이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 수치로 표시되기까지 하니 고된 연습도 즐거웠다. 그러나 초반 3년을 너무 힘들게 구른 탓일까, 오솔은 프로로 데뷔하고 나서는 이전처럼 열성적인 훈련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포인트의 맛을 본 상태라 훈련으로 얻는 경험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솔직히 한 달을 훈련해봤자 한 경기 뛰는 것만 못한데 누가 훈련을 하겠어.’
 말 그대로 오솔은 시합을 치를수록 강해졌다. 축구 신동이 축구 천재가 되었고, 나아가 대한민국 축구의 희망이 되었다. 그쯤 되자 누구도 오솔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을 비웃으면서 정작 본인은 땀을 흘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가 그에게 우월감을 심어줬다. 그러나 이러한 가파른 상승세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능력치가 90에 이르렀을 때 떠오른 알림창은 오솔로 하여금 한계에 봉착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90 이상은 포인트로 올릴 수 없습니다. 이 이상은 연습과 실전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겨우 스물세 살의 나이에 오솔은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연습을 해서 더 위를 노리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오솔은 레벨과 포인트, 시스템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는 고등학교 3년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정상급 선수들처럼 훈련하라니······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오르지 못하면 추락할 뿐이었다. 목표를 잃고 나태해진 오솔은 통제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누구라도 그를 잡아줄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 텐데 그 당시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짝! 짝!
 오솔은 과거의 후회를 떨치고자 두 볼을 강하게 두들겼다. 정신이 번쩍 돌았다.
 ‘그래, 후회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돌아온 거잖아. 꾸준히 노력한다면 이번에는 90 이상으로도 성장할 수 있을 거야.’
 
 * * *
 
 연습 경기가 끝나고 3일 후, 오솔은 감독의 연락을 받고 축구부를 찾았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여기는 진짜 오랜만이네.’
 오솔은 퀴퀴한 냄새에서 그리운 추억을 읽으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이전 생에서 뻔질나게 돌아다녔던 공간이라 감독 사무실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훤히 꿰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손잡이를 잡고 돌리던 오솔은 문을 열기 직전, 가까스로 노크를 할 수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하나와 의자, 작은 세면대와 구석의 침대가 전부인 황량한 공간이 나타났다. 오솔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탁수 감독과의 일대일 면담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어서 와라. 뭐라도 마실래? 주스랑 음료수 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넵!”
 오솔의 두 눈에 기대감이 가득 들어찼다. 체력에서 약점을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골까지 넣었으니, 이번에도 장학 헤택을 받을지 몰랐다. 한데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아무래도 널 정식 부원으로 받기는 힘들 것 같다.”
 “네?”
 오솔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입부에 실패할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양반은 실력보다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인데 갑자기 왜 이러지?’
 빠른 성장과 가능성을 보고 전액 장학금까지 추천했던 양반이 이번에는 입부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니?
 오솔은 기가 막혀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제가 입부 테스트에서 떨어졌다는 뜻인가요?”
 “그래, 솔직히 기본기가 부족한 것은 상관없는데 90분을 뛸만한 체력이 없다는 건 문제가 있다. 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경기에서 50분이 넘게 걷거나 서 있었더구나.”
 “그게······ 저는 공격수니까 아무래도 골을 노려야 하잖아요.”
 “아니, 그건 잘못된 플레이였다. 움직임이 없는 공격수는 수비수 입장에서는 막기 너무 쉽거든. 너는 몇 번의 위협적인 돌파를 보여줬지만, 결국 골은 동료의 크로스 덕분에 넣을 수 있었어. 그렇지?”
 “······네.”
 “결국에는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잖아, 맞지?”
 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체력은 운동선수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요소였다. 90분도 뛰지 못하는 선수는 한 사람 몫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널 받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내 생각인데, 한두 달 정도 임시 부원으로 활동하는 건 어떻겠니?”
 “네? 임시 부원이요?”
 “그래, 임시 부원.”
 “무슨 차이가 있죠?”
 "자잘한 차이야 많이 있지,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임시 부원은 시합에 나가지 못한다는 거다. 정식으로 등록된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대회나 타 학교와의 시합에는 나갈 수 없지.”
 시합에 나갈 수 없다는 소리에 오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정식 부원은 아니니까, 회비는 받지 않는단다.”
 회비라는 말에 오솔은 반쯤 감겼던 눈을 번쩍 떴다.
 ‘설마 이번에는 장학금을 못 받는 건가?’
 하긴 어느 누가 실력도 부족한 이에게 장학금을 주겠는가.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오솔의 위치는 예비 임시 부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그래도 당장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건 좋네.’
 “혹시 회비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회비는 매 달 50만 원 정도다. 합숙 훈련이나 대회 참가비는 나중에 계획이 나오면 알려주마.”
 ‘세상에 축구부 회비가 그렇게 비쌌었나?’
 단순 계산해서 회비로만 1년에 600만 원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숙소비나, 다른 부대비용은 제외한 값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오솔을 보며 이탁수 감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회비가 부담이 된다면 내 일을 좀 돕는 조건으로 깎아줄 수도 있다. 아침에 나와서 훈련장을 청소하거나 정리하면 20만 원까지 줄여주마.”
 “저어, 장학금은 받을 수 없나요?”
 이 감독은 오솔의 질문에 당황한 듯 말문을 잃었다. 그는 간절하게 바라보는 오솔을 보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어제 오후, 이탁수 감독은 점심식사를 막 마치고 교무실을 찾았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휴식 중인 김영은 선생이 보였다. 이 감독의 남자다운 얼굴 위로 긴장감이 흘렀다.
 ‘후우. 침착하자. 다른 일도 아니고 학생 때문에 대화하자는 거니까, 문제 될 것 없어. 그래, 이건 공적인 일이야.’
 그러나 애써 가라앉힌 긴장도 소용없었다. 저 작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보니 도로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큰 눈이 이 감독을 발견했다.
 “어머, 감독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실로폰 소리처럼 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흙먼지를 잔뜩 먹어 거칠어진 그의 목소리와는 너무 달랐다. 이 감독은 잠시 감격에 젖었다가 간신히 숨을 내쉬며 호흡을 조절했다.
 “아,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참 날씨가 좋네요.”
 “네. 봄이라 그런지 햇살이 참 따사롭네요.”
 “괜찮으시면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시간이요?”
 “아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선생님 반 학생에 대해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아······ 네, 누구 말씀이시죠?”
 김영은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지만, 이 감독은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알아차렸다 한들 눈치 없는 그는 단순히 ‘학생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겠지.’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김 선생님은 목소리도 참 예쁘구나.’
 “감독님?”
 “예? 아, 그렇죠. 다름이 아니오라 오솔 학생에 대해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서요.”
 “솔이가 왜요? 혹시 솔이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이제 축구부에 들일 아이니까 간단하게 이것저것 알아볼까 해서요.”
 김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솔이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김 선생은 오솔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커다란 덩치와 반항적인 눈초리, 그러나 때때로 보이는 허무함과 슬픔.
 오솔은 또래 아이들과 달리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그것이 이상했던 김 선생은 그의 중학교에 연락해서 그 당시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근방의 다른 학교 학생들과 크게 싸운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감독의 눈썹이 꿈틀댔다. 폭력이라니, 그가 가장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바로 폭력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 심하게 다친 사람은 없었대요.”
 “아니, 왜 싸웠답니까?”
 “상대 애들이 솔이의 가정사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고 했어요.”
 “가정사요?”
 “솔이네 아버님에게 문제가 있어요. 알코올 중독에 도박 중독까지 있다고······.”
 “으음.”
 “가계(家計)는 어머님이 식당 아르바이트 같은 걸로 꾸려나가신대요.”
 “하아. 그렇다면 집안 분위기도 좋지 않겠네요.”
 김 선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조금만 지도하면, 솔이가 금방 바른 길로 가리라고 생각해요.”
 “녀석을 좋게 보시는군요.”
 “애정이 필요한 아이예요.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속에는 상처가 많고 여린 아이죠.”
 “······여리다고요?”
 김 선생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학기 초에 솔이가 먼저 저를 찾아왔었어요. 무슨 일인가 했는데 대뜸 묻더라고요,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냐고.”
 “······.”
 “태권도나 유도가 먼저 떠올랐어요. 잘은 모르지만 테니스 부 같은 것보단 돈이 적게 들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건 배우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원 없이 뛰고 온몸의 힘이 소진되도록 달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축구부를 권했어요.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축구부에는 이 감독님이 계시니까, 분명 솔이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김영은의 맑은 눈망울이 이탁수를 가득 담았다. 신뢰가 가득한 눈빛에 그는 차마 ‘축구를 하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듭니다.’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짐짓 목소리를 깔며 답했다.
 “예, 저만 믿으세요. 저, 이탁숩니다. 제가 그놈, 멋진 축구선수로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2장 여전히 맑은 눈망울
 
 
 회상을 마친 이탁수 감독이 입을 열었다.
 “장학금이······ 만약 네가 그만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일부만 도와줄 수 있어. 어때 이 정도도 괜찮겠니?”
 오솔은 이 감독의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자신의 집안 사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회 차 인생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확실히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가 보다.
 “설명은 이것으로 됐고, 혹시 시간 있으면 내일 나올 수 있겠니?”
 “내일이요? 일요일에도 훈련이 있나요?”
 “원래는 없는데 너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훈련이 있다.”
 “너희요?”
 “그런 게 있다. 내일 와서 보면 알아.”
 다음날 아침, 오솔은 이리저리 발목을 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요일에 학교를 찾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이거 갑자기 너무 성실해지면 병나는데.”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는데 뒤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헉! 너는?”
 돌아보니 익숙한 듯, 낯익은 얼굴이 오솔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뭐야? 왜 사람 얼굴을 보고 놀라?”
 “······아니야, 아무것도.”
 오솔을 왕따 시키다가 몸통박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졌던 선수, 황태곤은 뜻밖의 만남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감독이 어제 말했던 ‘너희’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연습 경기에서 서로에게 불만이 있었던 두 사람이 나란히 임시 부원이 된 것이다.
 그렇게 아니꼬운 상대의 등장에 서로 불편해하는 사이 이탁수 감독이 나타났다.
 “일찍들 왔구나. 서로 인사는 했니?”
 “······.”
 “하하하. 아직은 어색한가 보네. 뭐, 괜찮겠지. 단 둘 뿐인 임시 부원이니까 같이 지내다 보면 금방 친해질 거다.”
 “저 말고도 임시 부원이 또 있었어요?”
 “그래, 심심하지도 않고 좋겠지?”
 이후 세 사람은 30분가량 몸을 풀고 나서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갔다.
 “간단한 훈련이야. 솔이가 여기 태곤이에게 패스를 하고, 태곤이는 내 수비를 제치고 골을 넣으면 되는 거지.”
 “공격 훈련인가요? 그럼 제가 공격수 할게요.”
 오솔은 주체할 수 없는 공격 본능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번에 보니까 너는 패스부터 익혀야겠더라. 내가 어떻게 차는지 알려줄 테니까 오늘 패스에 대해 잘 배워봐. 그리고 태곤이는 활동량은 좋은데 아직은 드리블이 어설퍼. 적극적인 수비는 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 있게 돌파해봐라.”
 오솔은 신중하게 패스를 시도했다. 무릎을 부드럽게 굽히며 발 안쪽으로 공의 중심부를 찼다. 이 감독이 봐도 자세 하나만큼은 훌륭했다.
 ‘그런데 왜 공이 흔들리는 거지? 그것 참 희한하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오솔은 둘에 한 번은 꼭 헛발질을 했다. 아무리 정확하게 공을 차도 소용없었다. 계속 패스만 하자 마침내 오솔도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지할 수 있었다.
 ‘이거 미치겠네. 왜 이리 제멋대로 날아 가냐?’
 그나마 다행히 스킬이 발동하지 않을 때에는 제법 괜찮은 패스가 나왔다.
 툭!
 오솔의 발을 떠난 공이 빠르게 굴러갔다. 이번에는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기에 공은 아주 부드럽게 황태곤에게 연결되었다.
 “좋아! 그런 식으로 침착하게 해.”
 패스가 연결된 이후에는 황태곤의 차례였다. 태곤은 공을 드리블하며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이크!”
 기세 좋게 몸을 날렸으나 공이 원래 목적지보다 더 멀리 굴러갔다. 별다른 수비 없이도 드리블 실수로 공을 놓친 것이다. 태곤의 얼굴이 빨개졌다.
 “방금은 몸이랑 공이 같이 갔어야지! 공을 차고 따라간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아직 드리블이 몸에 익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은 기본기 부족이었다.
 “이렇게 되면 공격을 실패한 거야. 자, 다시!”
 이 감독은 멀리 굴러간 공을 잡더니 오솔을 향해 찼다. 공은 빠르게 날아가 오솔의 키를 껑충 뛰어넘었다.
 “어라?”
 “뭐해? 전속력으로 달려!”
 오솔은 일단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속도를 높였다. 갑자기 뛰려니 짜증이 났지만 입부를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방금 일부러 세게 찬 건 아니겠지?’
 오솔은 속으로 아니겠지 하면서도 이탁수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서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불안감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공격 실패! 처음부터 다시!”
 뻥!
 공이 오솔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오솔은 손을 들어 올려 잡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 패스하니, 황태곤이 어설픈 드리블을 시도해서 상대뿐만 아니라 제 자신까지도 속여 버렸다.
 “어라? 공이 어디 갔지?”
 “연습이 안 된 기술은 실전에서 쓰는 거 아니야! 공을 뺏겼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뻥!
 이 감독이 찬 공은 마치 오솔이 패스한 듯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다.
 오솔은 그 공을 잡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뻥!
 “다시!”
 뻐엉!
 “한 번 더!”
 결국 체력이 약한 오솔이 먼저 숨을 헐떡거렸다.
 “헥헥.”
 “헉헉.”
 “어때 지난번 경기에서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본 기분이?”
 오솔은 당연히 힘들어 죽으려고 했고, 황태곤은 오솔의 무시무시한 눈빛 때문에 공격에 실패할 때마다 안색이 파리해졌다.
 “너희가 임시 부원인 이유는 각자가 지닌 단점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같은 팀이 어떤 심정으로 뛰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지.”
 “······.”
 “난 이 훈련으로 너희가 서로를 이해했으면 한다. 만약 너희가 팀플레이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날 바로 정식 부원으로 받아주마. 그러니 오늘 훈련의 의미를 한번 잘 생각해 보렴.”
 “······.”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뒷정리 잘하고 내일 보자.”
 이 감독이 떠나고 이제 운동장에는 오솔과 황태곤, 두 사람만 남았다. 오솔이 막 뭐라고 한 마디 하려할 때였다.
 
 -[훈련이 종료됩니다. 반복된 동작 연습으로 능력치에 변동이 있습니다.]
 -패스가 13에서 14로 증가합니다.
 -지속 스킬,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야.'에 변동이 생깁니다. 패스가 부정확해질 확률이 49.9%로 변합니다.
 
 ‘흐흐. 그래도 훈련이라고 능력치가 올랐구나.’
 갑자기 오솔이 음침한 미소를 짓자, 안 그래도 불안해하던 황태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야, 너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왜, 왜요?”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하긴,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지. 그보다 아직 해도 쨍쨍한데 우리끼리 조금 더 훈련하는 거 어때?”
 “감독님도 없는데······.”
 “야, 이번엔 너도 뛰어야지. 나만 뭐 빠지게 뛰고 끝내자고?”
 오솔은 아까 감독에게 당한 것을 갚아주기 위해 힘껏 공을 찼다.
 ‘패스가 제대로 되면 좋은 거고, 흐흐, 빗나가도 좋지!’
 “야, 다리 보인다. 좀 더 빨리 달려!”
 오솔의 사심 가득한 패스 미스가 반복되자 황태곤도 욱했는지 점점 더 멀리 공을 차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솔도 잔뜩 뛰어야 했다. 한쪽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이탁수 감독은 금방 친해진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이른 새벽. 오솔은 한 남자와 함께 동네를 돌고 있었다.
 “슈퍼에는 종류별로 20부씩 넣으면 돼요.”
 남자는 설명을 하며 한 뭉텅이의 신문을 슈퍼 앞에 배달했다. 오솔은 가게 이름과 부수를 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전임자를 따라다니며 신문 배달 일을 배우고 있었다.
 “이쪽 동네는 다 빌라 아니면 주택이라 시간이 좀 걸려요. 익숙해지면 300부에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오솔은 그 무게를 대충 가늠하고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충분히 들고뛸 수 있었다.
 ‘내친김에 돈도 벌면서 체력과 힘을 동시에 길러주지.’
 매달 들어가는 회비가 50만 원이었다. 코치일을 돕는다고 해도 20만 원이었다. 아직은 임시 부원일 때, 부지런히 돈을 모아놔야 했다.
 ‘그나저나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네.’
 새벽 알바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니 그만큼 수면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업시간에 잔다고 해도 누워서 편히 자는 것과 비교하면 피로 회복양이 천지차이였다.
 그럼에도 오솔은 계속 두 발로 뛰며 배달하기로 했다. 그는 95에 이르는 강인함을 믿었다.
 전임자를 따라다니는 3일간은 고생만 하고 일당도 없었다. 그 이후에는 언제 잤는지 모르게 일어나 새벽 배달을 나갔다.
 오솔은 오토바이를 타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남들보다 한 시간은 더 빨리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마침내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반복된 달음질로 지구력이 69에서 70으로 상승합니다.(47.6%↓)
 -Level Up!
 -보유 포인트가 3개 늘어납니다. 포인트를 투자해서 능력치를 올리세요.
 
 “하아. 하아. 그래. 내가 이래서 뛴다.”
 정말이지 가뭄에 단비 같은 레벨 업이었다. 오솔은 방금 얻은 포인트를 모두 지구력에 투자했다. 이제 지구력은 73(45.5%↓)으로 변했다.
 능력치가 올라갈수록 훈련 요구치는 더 늘어나겠지만 당장은 대안이 없었다. 일단은 90분간 뛸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체력은 조금씩 늘어갔으나, 오솔은 늘어난 체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만큼 빠르게 지쳐갔다. 매일 같이 새벽에 일어나 배달을 하고 동시에 훈련까지 진행하는 건 아무리 그라고 해도 무리였다.
 결국 하루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배달 중간에 체력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헉헉. 역시 수업시간에 자는 걸로는 한계가 있구나. 으으. 어떻게 하지?”
 이럴 때는 충분한 휴식만이 답이었으나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솔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러나 몸이 피로한 탓에 평소보다 배달 시간이 늦고 말았다.
 
 * * *
 
 “민주야, 아버지. 신문 좀 가져다드리렴.”
 “아, 나도 바쁜데.”
 여민주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칭얼댔다.
 “엄마는 지금 요리하고 있잖아, 네 오빠는 운동 나갔고. 지금 이 집안에서 누가 제일 한가해?”
 “음······ 아빠?”
 “잔말 말고 빨리 나갔다 와.”
 “쳇, 알았어요. 갈게요.”
 여민주는 책가방을 챙기다 말고 현관으로 향했다. 시간을 보니 벌써 6시30분이었다.
 7시까지 버스를 타야 하니, 씻고 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그냥 오빠가 조깅 마치고 올 때 들고 오면 되는 건데, 엄마는 꼭 나를 부려먹으려고 한다니까.”
 휘리릭.
 툭!
 막 현관문에서 신발을 신는데 신문이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민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알기로 지금쯤이면 이미 배달이 끝났어야 할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예쁘게 접힌 신문 뭉치와 저 멀리 골목길로 사라지는 배달원의 커다란 등판이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젖어 옷이 바짝 달라붙은 탓에 잘 발달된 근육이 뚜렷이 보였다.
 ‘우와. 등 근육이 장난이 아닌데?’
 여민주는 사춘기 소녀답지 않게 근육질의 남자에게 흥미가 많았다. 또래 친구들은 날렵한 인상의 아이돌 가수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오빠의 영향으로 탄탄한 몸매의 축구선수들을 더 좋아했다.
 ‘혹시 가난한 복싱 선수는 아닐까? 로키처럼 말이야.’
 그녀가 근육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이 그녀의 오빠, 여민국이 조깅을 마치고 돌아왔다.
 “뭐해, 신문 들고?”
 여민주는 잠시 민국의 전신을 훑었다. 기분 나쁜 시선에 민국이 눈살을 찌푸렸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하아. 비교된다, 진짜.”
 “뭐?”
 민주의 시선을 따라가니 나름 탄탄한 허벅지가 보였다.
 “오빠도 근육을 좀 키워야 하지 않아? 그래도 중앙 수비수인데 너무 마른 것 같아.”
 “아직은 이 정도가 딱 좋아.”
 “그래가지고 크레스포나 트레제게는 어떻게 막으려고.”
 “······그건 네 영웅, 말디니에게나 맡겨. 나는 지금 당장은 백운고를 넘는 게 중요하니까.”
 민주는 백운고라는 말에 손뼉을 쳤다.
 “맞다! 백운고 2학년에 그 선수가 있다고 했지? 이름이 뭐였지?”
 “고영주. 아마 올해부터는 주전으로 뛰겠지.”
 고영주를 입에 담는 여민국의 얼굴에는 각오가 잔뜩 서려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그런 선수 없어?”
 “말했잖아. 그 녀석은 천재라고. 천재가 그리 흔하겠어?”
 “왜, 신입생들도 많이 들어왔다면서. 그중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고영주는 차원이 달라.”
 고영주를 입에 담는 여민국의 두 눈에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한 때 같은 축구교실에서 수학(受學)하며 함께 공격진을 이끌던 사이였다.
 어렸을 때는 여민국이 더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그 나이 대에 한 살은 결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기에 그만큼 앞서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약간의 차이는 고영주가 브라질에 축구 유학을 갔다 온 다음부터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여민국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신체적인 차이가 좁혀지면서 실력 역시 빠르게 따라 잡혔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고영주는 마침내 중학교 레벨을 뛰어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는 나름 잘한다 하는 여민국조차 상대가 안 되었다. 그가 고교에 올라와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것도 고영주를 보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내가 영주를 막아야 하니 이것 참 상황이 고약하게 되었어.’
 확실히 고영주는 천재였고, 차세대 한국 공격의 핵심이 될 만한 선수였다. 그러나 여민국은 그를 막을 자신이 있었다.
 공격수의 길을 접고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포지션 변경 그리고 1년간의 담금질까지 고교에 올라와서 한시도 노력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이제 도내 첫 손에 꼽히는 수비수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도 수비라는 게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호흡을 맞춰왔으니까.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의사소통이 될 정도라고.”
 “그럼 이번에는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거야?”
 “······공격만 잘 풀린다면 말이지.”
 여민국은 현재의 공격진이 마음에 차지 않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던 중 문득 일주일 전에 치러졌던 입부 테스트가 떠올랐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무식한 돌파였지만 효과는 괜찮았지. 그래, 마치 파르마의 아드리아누를 보는 듯했어.’
 아드리아누는 올해 만 스무 살의 브라질 축구 선수로 지난 시즌, 세리에A를 누비며 17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친바 있다.
 ‘그러고 보니 덩치도 그렇고 플레이 스타일도 많이 닮았네. 수비 가담도 활발히 하고 좀 더 열심히 뛴다면 우리 학교의 아드리아누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여민국은 그가 축구부가 되지 못했다는 소식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됐어. 지나간 일에 마음 쓰지 말자.’
 여민국은 학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침 조깅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또 달려서 그런지 살짝 힘에 부치는 게 느껴졌다.
 ‘후우. 릴랙스 하자. 긴장 풀고, 릴랙스!’
 지난주 금요일에 체력훈련을 했었기에 오늘까지는 초과 회복(Super Compensation)을 위해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이탁수 감독은 주중에는 테크닉과 연습경기를 위주로 훈련을 진행했고 주말을 앞두고는 체력 훈련을 진행하며 선수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곤 했다.
 그는 중증의 피지컬 신봉자답게 체력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덕분에 청송고 선수들은 한 학년이 올라갈수록 몸이 점점 더 우람해지곤 했다.
 “다시!”
 서둘러 도착한 운동장에는 벌써 누군가 나와있었다. 여민국은 2년간 질리도록 들은 ‘다시!’라는 말에 몸을 잘게 떨었다.
 이 감독은 가능성이 보이는 제자일수록 잡아두고 더 오래 더 반복적으로 훈련을 시키곤 했는데, 오솔이 오기 전까지 지난 2년간은 여민국이 그 주요 대상이었다.
 ‘감독님? 아니, 감독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하늘은 온통 쪽빛 어둠으로 가득했다.
 파앙! 파아앙!
 사람의 얼굴조차 안 보이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 감독과 두 명의 임시 부원이 공을 차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음에도 여민국은 오솔을 알아봤다. 운동장을 거칠게 뛰어다니는 검은 그림자에서 아드리아누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수비수를 질질 끌고 다니며 긴 팔을 좌우로 뻗어 접근을 불허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전차 같았다.
 뻐엉!
 긴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공을 때렸고, 곧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대포알 같은 슈팅이 그물망을 갈랐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강한 슛이었다.
 
 * * *
 
 “후. 힘드네.”
 오솔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오늘따라 뛰는 게 버거웠다. 간신히 골은 집어넣었으나 덕분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개인기가 25에서 26으로 상승합니다.
 -드리블이 18에서 20으로 상승합니다.
 -볼터치가 24에서 25로 상승합니다.
 -슈팅이 23에서 24로 상승합니다.
 -경험치 상승 0.4%······ 6.4%
 
 이미 상당히 높은 신체 능력에 비해 기술 쪽은 초보자 수준이라 조금만 훈련해도 금방 상승했다.
 훈련을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 만에 1씩 올랐으니 이 정도면 하드 모드라는 걸 감안하면 꽤나 빠른 성장이었다. 심지어 드리블은 18에서 20으로 한 번에 두 개나 올랐다.
 “왜 그래 벌써 지친 거야?”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솔을 대답을 하며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현재 컨디션은 F+등급입니다. 전체 능력치 중 55%까지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바뀐 생활 패턴에 부족한 수면, 거기에 과도한 훈련이 합쳐져 컨디션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안 좋았다.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이제 주위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밝았다. 이탁수 감독은 오솔의 안색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녀석,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마무리하자.”
 “아니요. 더 할 수 있습니다.”
 “잔말 말고 빨리 스트레칭하고 마무리 운동 들어가. 너뿐만이 아니라 태곤이도 힘들어 보이니까.”
 돌아보니 태곤도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오솔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아침 일찍 일어나느라 피곤해 보였다.
 이래서야 더는 무리였다. 혼자 훈련할 수도 있었지만 여럿이서 실전처럼 하는 훈련보다는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지금은 혼자 훈련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쉬는 게 더 낫겠지.’
 결국 오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에 앞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운동을 갑자기 멈추면 혈류가 심장으로 돌아오지 않고 근육에 남아있게 돼 피로가 심해진다. 그렇기에 신체가 혈류의 변화에 적응하도록 3분 이상 강도가 낮은 운동으로 마무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몸을 풀고 있을 때, 오솔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속 스킬, '스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에 변동이 생깁니다. 컨디션이 D등급(70.1%)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습니다.
 
 “커, 컨디션이 올랐다?”
 오솔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컨디션만 회복된다면 레벨을 수십 개 올리는 것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설마 스트레칭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그날부터 오솔은 스트레칭 시간을 배 이상 늘렸고, 느리지만 조금씩 컨디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 * *
 
 우드득!
 오솔은 배달을 마치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후우. 그래도 지구력에 걸린 페널티는 꾸준히 떨어지고 있네. 그나마 다행이다.”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레벨을 올려서 프로 선수가 되어야 했다.
 ‘가만, 드리블까지 같이 하면서 배달할까? 그냥 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사고의 위험성만 배제한다면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체력 훈련을 할 때 항상 공을 대동하도록 했다. ‘육상 선수도 아니고 단순히 달리기만 하는 걸 굳이 훈련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자 상식이었다.
 오솔도 거기에 동의했다.
 ‘축구 선수라면 달리기 연습도 공을 몰면서 해야지. 후후. 기술 쪽은 능력치가 워낙 낮아서 조금만 훈련하면 금방 오를 거야.’
 그로부터 일주일, 오솔은 충분히 익숙해졌다는 판단에 축구공을 갖고 신문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통통!
 이른 새벽부터 축구공 튕기는 소리가 골목을 가로질렀지만, 가볍게 드리블을 하는 수준이라 주민들의 잠을 깨울 정도는 아니었다.
 “후후. 공기가 참 좋네.”
 아직은 미세먼지가 없는, 아니 일반인들은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를 시대였다. 비록 봄마다 황사 때문에 고생을 하긴 해도 2019년의 봄에 비하면 살만했다.
 “씁~ 하! 씁~ 하! 하하하. 좋다.”
 오솔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던 길인데 이제는 제법 수월히 올라가졌다. 모두가 컨디션 회복 덕분이었다.
 
 -컨디션이 D등급(71.8%) 이상 높아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고작 1.8%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오솔에게는 레벨을 하나 올리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이크! 이러다가 오늘도 늦겠는데?’
 드리블에 열중하다 보니 배달이 조금씩 늦어졌다. 마음이 급해진 오솔은 걸음을 빨리했다. 덕분에 공을 모는 소리도 조금씩 커져갔다.
 통토통!
 “응? 무슨 소리지?”
 여민주는 익숙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스르륵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소리를 쫓아 창문으로 향했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골목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여민주는 처음에 보고 멧돼지인 줄 알았다. 가끔 뉴스에서 멧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도심에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멧돼지라기엔 필요 이상으로 컸고, 두 발로 서서 달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정상이었지만, 저 덩치를 보고 있으자니 자꾸만 반달가슴곰이 떠올랐다. 다행히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보니 사람이 맞았다. 그리고 민주도 이미 아는 몸이었다.
 “아! 그 사람이다! 야프 스탐!”
 야프 스탐은 네덜란드 국가대표 수비수로 키가 190㎝ 넘는 거구의 축구 선수였다. 우람한 덩치와 깨끗한 민머리, 그리고 험상궂은 인상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민주는 AC 밀란의 광팬으로서 세리에A의 경기를 자주 챙겨봤기에 덩치 큰 사람 하면 곧바로 야프 스탐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등짝남에게 멋대로 야프 스탐이라는 별명을 붙인 상태였다.
 “어? 오늘은 축구공을 차고 있네?”
 그녀는 단잠을 방해받았다는 사실도 잊고 남자에게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아직은 발밑의 공을 다루는 모습이나 신문을 던져 넣는 모습 모두 어설픈 감이 있었다.
 ‘실업축구 선수인가?’
 남자는 프로 선수라고 보기에는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게다가 프로 선수였다면 이 시간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얼굴은 상당히 앳돼 보이는데.’
 여민주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뒷모습을 머릿속에 담았다.
 
 * * *
 
 축구부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토요일 오후, 오솔은 훈련 도구를 챙겨 한편에 마련된 풋살장으로 몰래 들어갔다.
 현재는 시합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연습으로 모자란 경험치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오솔이 이곳에 몰래 숨어 들어온 이유였다.
 뻥!
 철썩!
 혼자 하는 훈련이라 패스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가상의 적을 생각하며 드리블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혼자 할 수 있는 훈련 중 효율이 나오는 건 프리킥 같은 세트 피스뿐이었다.
 
 -슈팅이 24에서 25로 증가합니다.
 -경험치 상승 33.7%······ 34.7%
 
 “후우. 드디어 슈팅도 25까지 찍었네.”
 오솔은 새롭게 오른 능력치를 확인했다.
 
 -신체 : 힘 73(+5)
 -기술 : 드리블 21
 
 무거운 신문뭉치를 들고 다녔더니 힘이 하나 올랐고, 공을 차며 다녔더니 드리블도 올랐다. 시합에 비하면 연습으로 능력치가 오르는 건 너무 효율이 떨어졌다. 하지만 당장은 이 쥐꼬리만 한 능력치 상승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좋아. 일단은 잡다한 스킬부터 빠르게 30까지 올려놓자.”
 그렇게 오솔이 한참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맑고 통통 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혹시 아침에 골목에서 드리블 하던 분 아니세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솔은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듯했다.
 ‘여······ 민주?’
 오솔은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번 생에는 만나지 않길 바랐던 여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분 맞죠? 뒷모습이 완전히 똑같은데요?”
 “······.”
 “혹시 축구부예요? 우와. 신기하다. 우리 오빠가 축구부 주장이에요. 헤헤. 저는 여민주라고 해요.”
 오솔은 차마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과거였지만, 그리고 그녀에게는 자신은 이제 막 처음 만난 사람이겠지만······ 그렇지만 오솔에게 그녀는 미안함과 죄책감의 대상이었다.
 “저기요?”
 오솔은 그녀의 계속된 재촉에 결국 몸을 돌렸다. 여민주의 호기심 가득한 두 눈에는 심각한 얼굴을 한 거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솔은 그 눈망울을 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눈망울이라고······.
 ‘언젠가는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아. 너는 지금이나 10년 후나 변하질 않는구나.’
 민주의 변함없는 외모가 지난 10년의 세월을 떠올리게 했다. 엄청난 죄책감이 오솔을 짓눌렀다. 그는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고 싶어졌다.
 ‘도망······ 도망이라.’
 도망하니 문득 처음 그녀의 곁을 도망치듯 떠났던 날이 떠올랐다.
 
 * * *
 
 때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날이었다.
 “나 엄마가 된대.”
 “뭐?”
 “이 안에 우리 아이가 있다고.”
 “내가 아빠가 된······ 다?”
 “이 안에 우리 아이가 있다니 너무 신기하지 않아?”
 “나, 난······.”
 “우리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자.”
 “······.”
 기쁘기에 앞서 덜컥 겁부터 났다.
 아빠가 된다? 어떻게?
 그날 오솔은 제대로 대답조차 못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힘겹게 돌아온 집. 다행히 집안의 독재자는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서 진탕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방 한 구석에는 소주병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술을 모두 뱉어낸 녹색 병에는 잘려나간 담배꽁초가 가득 들어 있다. 무척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오솔에게 소주병이란 저처럼 방구석을 뒹굴거나 혹은 펭귄처럼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었다. 양이 적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양이 많으면 개를 잠들게 하는 것이 소주였다.
 아! 한 가지 모습이 더 있었다.
 아주 가끔씩, 소주병은 가족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기도 했다. 깨진 유리조각을 따라 흘러내리는 알코올 방울은 굶주린 들짐승의 침 마냥 가족의 목숨을 위협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 나의 아이가 생겨?’
 오솔은 아빠가 되는 법을 몰랐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그저 폭력과 방임, 나태의 상징이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야!’
 아빠가 되는 법은 모르지만, 적어도 해선 안 될 짓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가족을 배신하지 않는 것, 사랑과 믿음으로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집안은 한시도 잠잠한 날이 없었다.
 “어떻게 하니, 솔아. 이 사람이 진짜 미쳤나 보다. 그게 어떤 돈인데 들고 나가.”
 오솔의 모친은 돈을 지키지 못했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급히 통장을 확인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500만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부친이 돈을 들고 갔을 곳은 뻔했다.
 도박장이다.
 역시나 3일 후 돌아온 부친은 혼자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쉽게 말해서 네 아버지가 우리한테 돈을 빌렸다 이 말이야. 빚을 졌다고, 이해했지?”
 “그게 어쨌다는 거죠?”
 “어쩌기는 이 도박쟁이가 무슨 수로 돈을 갚아, 네가 대신 갚아야지. 너 프로축구 선수라며? 그럼 돈 많이 벌겠네.”
 홀로서기는 물론이고 겨우 월세 살이를 벗어나나 했던 희망도 모두 박살이 났다.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은 지긋지긋한 현실 앞에서 너무도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미안해.”
 오솔은 여민주에게 이별을 고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눈망울이었건만 도저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날의 참담한 이별 이후, 오솔은 조금씩 술을 입에 대고 연습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실력은 점점 늘어났고 버는 돈도 그에 맞게 늘어났다.
 그래, 모두 시스템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도박중독을 끊지 못했고, 오솔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가족들과도 아예 연락을 끊어 버렸다.
 에이전트를 통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간간히 일정량의 돈을 쥐어줄 뿐, 몇 년간 간단한 안부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오솔은 상하이의 호텔에서 우연히 여민주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안녕. 솔아.”
 “민주야······.”
 그녀의 옆에는 다부진 표정의 소년이 서 있었다. 이제 겨우 10살 남짓한 나이임에도 곧고 당당한 눈빛이었다. 아이는 제 엄마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대한아, 인사해야지.”
 “누군데요?”
 “응, 엄마 친구야.”
 “안녕하세요! 오대한이라고 합니다!”
 “옳지, 이제 삼촌한테 가보렴.”
 아이는 1층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솔의 눈동자는 아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좇았다.
 저렇게 뛰는구나. 웃음소리가 참 밝고 경쾌하다. 녀석, 축구는 좀 하려나?
 “어떻게······.”
 “부모님이랑 오빠 도움을 좀 받았어. 부족함 없이 자랐으니까 걱정하지 마.”
 “미안해.”
 “뭐가 미안하니, 그날 헤어지자는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사라진 거?”
 책망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한없이 담담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에서 너에 대한 기대는 이미 예전에 접었다는 뜻이 전해졌다.
 오솔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부 다.”
 “적어도 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그랬어? 같이 노력이라도 해봤으면 얼마나 좋아. 힘들어서 도망칠 거면 적어도 아이가 ‘엄마. 아빠.’거리며 옹알이하는 거는 보고 가지, 밤새 울며 떼쓰는 거, 웃으며 걸음마를 떼는 거는 보고 가지······ 아니, 최소한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은 봐야 하는 거 아니니? 태어나 처음 맞는 세상인데, 꼭 그렇게 아빠 없이 눈을 뜨게 해야 했니?”
 민주의 맑은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똑같은 10년의 세월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오솔이 현실을 애써 회피하고 외면할 때, 그녀는 고개를 들고 꿋꿋이 이겨내 왔다.
 미혼모에 편모 가정이었지만 부족하지 않게 키웠다. 호텔을 뛰어다니는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라곤 전혀 없었다.
 “미안해. 미안······ 정말 미안해.”
 오솔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는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미 민주와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무책임한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부재를 아이에게 남기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빠아아앙!
 차도로 굴러가는 축구공과 열 살 남짓한 아이를 발견하고 몸을 날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죄책감, 미안함, 그리움, 후회.
 온갖 종류의 감정이 그를 차도로 달려들게 했으나 마지막에 그의 뇌리를 채운 것은 오로지 후회, 후회뿐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 * *
 
 “몇 학년이세요? 혹시 1학년? 아니면 선배님?”
 “아······.”
 따뜻하고 정감 어린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을 만나기 전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오솔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은 걸 참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슨 낯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겠는가.
 ‘그래, 차라리 나랑은 안 엮이는 게 나아.’
 이번 생에는 달라지리라 마음먹었으나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영 자신이 없었다.
 ‘이번엔 진짜 잘해줄게.’라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번엔 나 말고 다른 좋은 놈 만나.’가 더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내 말 안 들려요?”
 그러나 민주는 오솔이 무시한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꿋꿋이 아이를 낳고 훌륭히 가르친 여자였다. 보통 내기일리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솔의 옆에 바짝 붙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마치 금맥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였다.
 “오늘 새벽에도 그쪽 모습을 봤어요. 드리블을 하면서 신문 배달하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설마 그 사람을 여기서 딱 마주칠 줄이야. 헤헤.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누굴까 계속 궁금했는데, 이렇게 딱 만나다니.”
 오솔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써 무시하려해도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됐다.
 제 멋대로 움직이는 표정이 영 어색했다. 그는 모진 가정환경 때문인지 행복할 때 그리고 즐거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오솔은 상대에게 날을 세우는 것에는 익숙해도 누군가를 아무런 경계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는 서툴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여민주를 대하기 어려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밑도 끝도 없는 호의와 사랑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때의 오솔은 알지 못했다.
 “우와. 전에는 스탐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가투소를 더 많이 닮은 거 같네요.”
 오솔은 순간적으로 감상에 젖었다. 저것도 전생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의 몸싸움 실력을 보고 감탄하며 내뱉은 표현이 저것이었다.
 
 -우와! 너 가투소랑 플레이 스타일이 완전히 판박이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당시 그는 유럽 축구에 무지했다. 그래서 가투소가 누군지 몰랐다. 그게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민주는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야. AC 밀란의 중원을 책임지는 살림꾼이지. 활동량도 엄청나고 얼마나 파워풀한지 몰라!
 
 그녀의 입에서 온갖 미사여구가 튀어나왔다.
 얼굴은 물론 이름도 잘 모르는 선수였으나, 기분이 좋았다. 길거리의 거지도 잘생겼다는 이탈리아 사람을 닮았다고 하니, 칭찬이라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찾아본 젠나로 가투소 (Gennaro Gattuso)는 얼굴에 털이 수북이 난 털보 중에 털보였다.
 “가투소 몰라요? 작년에 월드컵에서 8번 달고 뛰었었는데. 그 선수 진짜 잘생겼어요.”
 물론 면도를 한 모습은 상당히 잘생겼다. 치렁치렁한 머리와 털을 잔뜩 기른 모습도 마초적인 멋이 있었다. 그러나 빈말로도 오솔과 닮았다고 하긴 힘들었다.
 “가투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면도기를 얼마나 안 쓰는 지도 다 아니까, 그만 놀려.”
 “앗! 드디어 대답했다. 헤헤.”
 민주는 혀를 빼물며 밉지 않게 웃었다. 오솔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녀와 얘기하다 보면 자꾸만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곤 했다.
 “가투소가 싫으면 스탐이라고 불러줄까요? 스탐은 어떤 선수냐면······.”
 “대머리잖아.”
 “스탐은 단순한 대머리가 아니에요!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데.”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머리를 자라게 할 순 없지.”
 “그건 그렇죠. 히히! 그보다 그쪽만 말을 놓는 건 뭔가 불공평하지 않아요? 이름이랑 나이를 알려줘야 저도 말을 놓죠.”
 “······.”
 “오케이. 정식으로 자기소개 할게요. 아까 말했듯이 제 이름은 여민주예요. 1학년 7반.”
 ‘제기랄.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잖아.’
 오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솔. 1학년 3반이야.”
 그는 말을 마치면서 단순한 친구사이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솔이 재잘거리는 여민주를 옆에 두고 훈련 도구를 정리하는 사이 여민국이 나타났다. 안쪽에서 나오는 걸 보니 감독을 만나고 온 모양이다. 그는 동생과 오솔이 같이 있는 걸 보더니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둘이 같이 있었구나. 잘 됐네. 마침 감독님이랑 솔이, 네 얘기를 했었는데.”
 “제 얘기요?”
 “응, 한번 가봐. 감독님께서 찾으시더라.”
 오솔이 떠나자 민국은 재빨리 동생을 붙들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내가 오늘 아침에 말했었던 그 사람 기억나? 야프 스탐.”
 “야프, 뭐? 아~ 그 신문 배달원?”
 “응.”
 “그게 저 녀석이었다고?”
 여민국은 오솔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동시에 새벽 훈련까지 한다니, 이는 웬만한 열정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었다.
 “짜식. 그래도 열심히는 하네.”
 
 * * *
 
 며칠 후, 정식 부원이 된 오솔과 태곤은 수업 시간에도 훈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연습 시간이 거의 세 배가량 늘어난 덕분에 오솔의 능력치도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음······.’
 이탁수 감독은 제자들의 훈련을 지켜보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주저 없이 움직이던 펜이 멈춘 건 오솔의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이 감독은 펜은 살짝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오솔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에는 갖가지 장단점과 함께 그의 버릇부터 선호하는 플레이 스타일까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성장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테크닉도 꾸준히 늘고 있고, 놀랍게도 신체 능력도 점점 나아지고 있어.’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상승했고, 그 모습은 얼핏 ‘오솔이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팀워크와 활동량을 늘리는 훈련이었다. 그러나 팀워크는 의식을 바꾸거나 동료의식을 길러야하기 때문에 단시간에 익히긴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필드에서 어슬렁거리는 습관 역시 단번에 고치기 어려워 보였다.
 “팀워크와 활동량이라······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 * *
 
 이탁수 감독은 호각을 길게 불어 선수들을 모았다.
 “자, 모두 집중! 슬슬 몸도 다 풀었을 테니 이제부터 전술 훈련을 진행하겠다. 유효 슈팅을 기록하거나 골을 넣으면 공격 측이 1점, 반대로 공을 빼앗거나 일정 시간 동안 막아내면 수비 측이 1점을 얻는다. 공격은 자유롭게 진행하면 되고, 코너킥이나 프리킥, 스로인 등은 없다.”
 삑!
 짧은 호각소리와 함께 전술 훈련이 시작되었다.
 중앙에서 공을 잡고 선 미드필더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을 패스할 곳을 찾았고, 중앙과 측면 공격수는 공간을 향해 뛰며 패스 루트를 만들었다.
 한참을 뛴 끝에 공격수에게 공이 닿았다. 그러나 수비진의 빠른 압박과 커버로 안쪽으로 파고들진 못했다. 결국 공격수는 빗자루에 쓸려나가듯 외곽으로 밀려났다.
 삐익!
 “방금 같이 하면 수비 측이 1점을 얻는 거야. 자 이제 각자 연습을 시작하자.”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냥 플레이를 한 번만 보여주고 끝이었다. 2·3학년들은 이 같은 훈련이 익숙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1학년들은 생소한 훈련법에 곤란해 하고 있었다. 황태곤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승훈에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글쎄. 그냥 재주껏 뛰라는 뜻 아닐까?”
 “2 대 1 패스나, 측면 돌파 같은 것도 되나?”
 “제한은 없다고 하셨잖아. 되겠지.”
 오솔은 남몰래 슬쩍 웃었다. 확실히 같은 장소에서 연습을 하니, 슬슬 10년 전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전술 훈련에 대한 것도 있었다. 수 없이 반복한 훈련이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전진 패스와 마무리 훈련이네.’
 미드필더는 압박을 벗어나서 적절한 패스 루트를 선택해야 하고, 공격수들은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미드필더는 탈압박 능력과 시야를 기를 수 있고, 공격수도 역시 공간을 찾는 넓은 시야와 오프 더 볼 움직임을 기르게 된다. 이와 반대로 수비수들은 일대일 마크와 압박, 커버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이 같은 훈련은 수비수 숫자를 늘리면 공격의 난이도가 올라가고, 반대로 동수가 되면 수비 난이도가 올라간다. 때문에 인원을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훈련은 공격에 더 주안점을 뒀는지 동수로 진행되었다.
 ‘동수로 훈련하면 각각의 기량에 따라 기회를 잡느냐 마느냐가 결정되지.’
 숫자가 같다는 말은 항상 일대일 상황이 전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가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시범을 보였던 선수들 중 공격수의 실수가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방금은 정면을 고집할 게 아니라 측면으로 주고 수비 뒷공간으로 돌아가거나, 여의치 않으면 미드필더에게 빠르게 리턴 패스를 하고 다른 공간을 찾아갔어야 했다.
 방금처럼 이도 저도 못하고 공을 질질 끌다가 기회를 날려버리는 건 실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다음은 이승훈, 공격수 자리에 서라.”
 “네!”
 “그리고 황태곤, 넌 중앙 미드필더다.”
 “네!”
 감독은 빠르게 공격 팀을 짜고 곧바로 수비 팀을 불렀다.
 “오솔!”
 “네!”
 “중앙 수비수다.”
 “네?”
 “빨리 자리로 이동해.”
 “하하. 농담이시죠? 아, 오늘이 만우절이던가?”
 “만우절은 어제고 농담 아니다. 어서 자리로 들어가.”
 이 감독의 단호한 태도에는 장난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감독 특유의 카리스마가 흘러나왔다.
 “설마 진짜로 절 수비수로 쓰겠다는 거예요?”
 “그래. 당분간은 수비수로서 훈련을 할 거다.”
 “아니, 어째서······.”
 “이유는 뛰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다. 잔말 말고 어서 훈련 시작해.”
 오솔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감독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심지어 학교와 틀어졌을 때도 자신 뜻대로 밀고 나갔던 양반이었다. 자신의 요구쯤 묵살하고도 남았다. 오솔은 이승훈의 뒤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야. 네가 대신 수비하겠다고 해. 원래부터 꿈이 수비수였다고, 홍명문처럼 되는 게 네 소원이라고 말해 봐.”
 “말도 안 돼. 그런 말을 믿으실 리 없잖아. 괜한 짓 하지 말고 감독님 말 들어.”
 “오솔! 훈련에 집중해!”
 딴짓을 하고 있으니 대번에 감독의 호통이 떨어졌다. 결국 오솔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비수로 뛰어야 했다.
 “젠장. 이게 다 뭔 짓이람.”
 그렇게 시작된 전술 훈련, 오솔은 이승훈을 쫓아 정신없이 뛰어야 했다. 그러나 매 번 빛보다 빠르게 돌파당해 슛을 허용하곤 했다.
 10년의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수비수로 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비수로 뛰는 동안에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삑!
 그나마 다행히 체력적인 문제는 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설픈 플레이나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감독이 호각을 울려 플레이를 멈췄기 때문이다. 이때 감독은 실수하기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선수들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없었는지를 살피게 했다.
 “그렇게 바짝 붙을 거면 아예 상대방이 돌 생각을 못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여야지!”
 “일단 상대가 돌아서면 적절히 거리를 조절해. 명심해 항상 공격수가 한 발짝 먼저 움직인다!”
 “마크가 비었잖아. 놓치지 마!”
 “마크하는 선수만 신경 쓰면 어떻게 해. 앞에서 돌파당할 때를 대비해서 커버할 준비도 해야지.”
 -태클 22/ 일대일 마크 21
 -경험치 58.7%
 수비 능력이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러다가 진짜 수비수가 되는 거 아니야? 이거 불안한데.’
 오솔은 수비수로 뛰고 싶지 않았다.
 남들을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하고, 항상 상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야하는 포지션. 89분을 잘 뛰어도 1분을 실수하면 대역죄인 취급을 받는 포지션. 그게 수비수였다.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솔직히 공격수에 비하면 몸값도 낮았다.
 최대한 빨리 성공하고 싶은 오솔 입장에서는 별로 걷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미 10년이나 되는 공격수의 경험이 있었다. 수비수가 되면 이전의 경험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결국 오솔은 훈련 중간에 쉬는 시간을 이용해 감독을 찾아갔다.
 “감독님. 뛰면서 생각해 봤는데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뭐가 아니라는 거냐?”
 “완전히 재능 낭비라고요. 솔직히 여기 있는 누구보다 제가 더 공간을 잘 찾는 거 아시잖아요. 저라면 아까 시범 보인 선수처럼 형편없이 밀려나지는 않았을 걸요?”
 옆에서 한창 연습에 매진하던 최도영이 오솔을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그는 방금 오솔이 지적했던 시범 중에 형편없이 밀려난 공격수였다.
 이를 눈치 챈 이탁수 감독은 다른 선수들에게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오솔을 끌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오솔은 불퉁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를 알려주세요. 무작정 수비수로 뛰라고 하는 건 단순히 괴롭히는 걸로밖에 안 느껴져요.”
 “흠······ 이건 나중에 확실할 때 말해주려고 했는데, 미리 알려주마. 조만간 백운고와 연습 시합을 잡을 예정이다.”
 “그런데요?”
 “현재 백운고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은 2학년 고영주지. 누군지 알고 있니?”
 “네.”
 “고영주를 너와 민국이가 같이 막게 할 생각이다. 지금 이 훈련은 네가 수비수로서 얼마나 뛸 수 있는지 보는 것이고.”
 “그 말은······.”
 “네가 수비수로 뛰겠다면 다음 연습경기의 선발 출장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지.”
 “······.”
 오솔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수비수로 뛰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경기에 출장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시합에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두 배 혹은 세 배는 더 빠르게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 양반이 무슨 꿍꿍이지? 원래는 1학년에게 기회를 안 주던 양반인데.’
 이탁수 감독에게 1학년은 기초 훈련과 체력 훈련을 병행하며 전술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여린 소년에서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는 시기인 만큼 조심했던 것이다.
 혹시나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전국대회가 끝나고 가을쯤 연습 경기에 투입했다. 3학년이 졸업할 때쯤에야 1,2학년으로 세대교체를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1학년에게 출전 기회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 제 포지션은 완전히 수비로 굳혀지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나도 네 최적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라고 생각해. 하지만 당분간은 수비수로 뛸 필요가 있어.”
 딱딱하게 굳었던 오솔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수비수로 완전히 변경하는 게 아니라면 한두 달 수비 훈련으로 경기에 출장을 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날 믿고 따라줬으면 좋겠다. 수비수로 뛰다보면 배우는 게 많이 있을 거야.”
 “경기에 내보낸다는 약속은 확실한 거죠?”
 “당연하지.”
 이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공격수를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활동량도 늘어날 거야. 일단은 이렇게라도 해서 필드에서 어슬렁거리는 습관을 고쳐야 해.’
 필드 위에서 오솔은 굉장히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미리 공격의 흐름을 읽고 남들보다 한 발 먼저 빈 공간을 찾아낸 덕분에 적게 뛰고도 더 많은 찬스를 잡곤 했다.
 하지만 이런 정적인 모습은 상위 레벨로 갈수록 좋지 않았다. 지금의 플레이가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억지로라도 오솔의 두 다리를 바쁘게 만들어야했다.
 이 감독은 오솔의 퀭한 눈가를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슬슬 신문 배달도 그만둬라. 회비라면 내가 감독 재량으로 면제해줄 테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라도 한 숨 더 자도록 해.”
 “회비 면제요? 전 아직 보여준 것도 없는데 진짜 면제가 됩니까?”
 “그래, 그······ 뭐더라? 그래, 장학금. 내가 널 추천했으니까 돈 걱정은 말고 열심히 뛸 생각만 해라.”
 “아!”
 “그럼 이제 수비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했겠지?”
 납득하지 않았어도 어쩔 것인가. 시합 출전과 장학금 혜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준다는 데.
 “네, 열심히 할게요.”
 결국 오솔은 일시적인 포지션 변경에 동의했다.
 
 * * *
 
 “야! 1학년 너, 일로 와봐.”
 그 날 저녁, 오솔은 식사 후 일단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학교 뒤편 으슥한 공간, 일부 학생들이 몰래 담배를 피우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 그곳에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무리를 짓고 서 있었다.
 오솔은 무시하고 가려했으나 몇몇 낯이 익은 얼굴을 보고 걸음을 돌렸다. 오늘 하루 동안 훈련하면서 한 번쯤은 봤던 얼굴들이었다. 축구부 선배들이 분명했다.
 ‘다섯인가? 꽤나 많네.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나 본데······.’
 건장한 덩치의 2학년 선수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오솔을 째려봤다. 물론 그래 봐야 오솔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솔직히 작다리를 짚고 바닥에 침을 뱉는 모습이 위협은커녕 우습기만 했다.
 ‘한심하긴, 그걸 위협이라고 하는 거냐?’
 오솔은 전생에 리오 퍼디난드와 네마냐 비디치 사이에 끼어서 원톱으로 뛴 적도 있었다. 190㎝에 가까운 두 거구와의 몸싸움에도 기죽지 않았던 그가 겨우 180㎝ 남짓한 소년들에게 겁을 먹을 리 없었다.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볼까?’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를 까닥거리자 놈들의 눈썹이 꿈틀댔다. 역시나, 곧바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너 이 새끼, 미쳤구나? 주머니에 손 안 빼?”
 “햐~ 이거 듣던 대로 싸가지가 바가지네.”
 “이 새끼가 선배님 말씀하시는데······ 눈깔 안 깔아? 확! 그냥.”
 “풉! 크큭.”
 오솔은 끝까지 참으려고 했으나 너무 구수한 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우, 웃어?”
 노골적인 비웃음에 앉아있던 이들까지 모두 일어나 오솔을 감쌌다. 정면에는 전술 훈련 때 오솔에게 비웃음을 당했던 공격수가 섰다. 그는 압도적인 숫자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오솔의 발 앞에 침을 찍하고 뱉었다.
 “너 아까 낮에 뭐라고 했냐? 응?”
 “낮에? 글쎄, 기억이 안 나네. 내가 뭐라고 했는데?”
 대놓고 한 반말에 선배들의 말문이 막혔다. 하늘 같은 선배들이고, 인원도 많았다. 보통은 바짝 졸아야 정상인데, 오히려 반말을 찍찍 뱉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실력 형편없다고 한 거?”
 “그래, 이 새끼야.”
 “하지만 그게 팩트잖아. 아, 팩트가 뭔지 모르려나?”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하, 참! 어이가 없네. 너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냐?”
 “어떤 상황인데?”
 오솔이 팔을 들어 올리자 주위에서 흠칫하며 물러났다. 오솔은 ‘왜 그래?’라는 표정으로 한 차례 기지개를 켰다.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몇몇이 얼굴을 붉혔다.
 뚜둑! 뚝!
 오솔은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먼저 힘을 쓰진 않겠지만 상대가 먼저 덤벼든다면 적당한 수준에서 받아칠 생각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시선이 그의 팔뚝으로 향했다. 웬만한 어린아이 얼굴만 한 주먹이 붕붕 돌아가고 있었다.
 ‘이 새끼 주먹이 왜 이렇게 커.’
 ‘5 대 1인데 안 무섭다는 거야? 아니, 지가 무슨 표도르야? 진짜 붙자고?’
 ‘이런 씨! 무섭잖아!’
 “이, 이게 선배님 말씀하시는데 꼬박꼬박 말대꾸하네.”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 따위 듣지 않는다.”
 오솔은 어디선가 들어온 대사를 치며 선배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성급한 놈 하나가 지레 겁을 먹고 달려들었다.
 퍼억!
 아악!
 놈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왔던 것보다 더 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대자로 뻗은 놈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렸다.
 “기, 기절했잖아? 이런 미친놈. 선배를 쳐?”
 “먼저 달려들어 놓고 뭔 소리야? 그리고 저것도 봐준 거다. 내가 진짜로 치면 저 정도로 안 끝나.”
 “윽······.”
 “뭐해? 안 덤벼?”
 선배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하나 나서지 못했다.
 “후우. 싱거운 놈들. 앞으로는 나 귀찮게 하지 마라. 안 그래도 고등학교 다시 다니느라 짜증나 죽겠으니까.”
 오솔은 충분히 겁을 줬다는 판단을 하고 몸을 돌렸다. 덤벼드는 놈에게는 본 떼를 보여주겠지만, 저렇게 겁에 질려있는 놈들을 상대로는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새끼들이 어딜 주제도 모르고 덤벼? 전생에 내 별명이 벌꿀 오소리(Honey Badger)였다. 이놈들아.’
 벌꿀 오소리는 오솔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보고, 한국 네티즌들이 지은 별명이었다. 그의 이름과 발음도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별명으로 굳어졌다.
 벌꿀 오소리는 족제비과 동물로 지구에서 가장 겁 없는 동물로 유명했다. 안하무인격인 오솔에게 딱 맞는 별명이었다.
 
 * * *
 
 한편 오솔이 떠나간 자리에는 일을 주도했던 최도영을 비롯한 친구들이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선배라는 위치와 숫자로 기를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오솔 한 사람에게 당하고 말았다.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게 무슨 뜻일까?”
 “헉! 설마, 소년원?”
 “맞네. 사고 친 거 아니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닐 이유가 뭐가 있겠어.”
 “서, 설마. 유학을 갔다 왔을 수도 있잖아.”
 “네 눈엔 쟤가 외국에서 공부했을 놈으로 보이냐?”
 “절대 아니지. 배웠어도 야쿠자들한테 살인 기술 같은 거나 배웠을 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최도영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갔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방금 전 오솔의 눈빛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알 수 없는 과거까지 존재하니 더욱더 무서웠다.
 “그거 확실해?”
 “우리야 모르지. 그렇지만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건 그 두 가지 경우 외엔 없지 않나?”
 “가만 그럼 우리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다.”
 “아! 그래서 아까 자연스럽게 반말을 한 건가?”
 여러모로 오해가 쌓이고 있었다.
 
 * * *
 
 “아우 씨. 야, 좀 그만 뛰어라. 넌 힘들지도 않냐?”
 오솔은 이승훈을 따라붙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수비 훈련을 시작한 지 벌써 사흘 째, 새삼 알게 된 사실은 이승훈의 체력이 상당히 좋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입부 테스트에서 막판까지 빠른 몸놀림을 보여줬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뭐 여기까지는 좋았다. 앞으로 3년 동안 호흡을 맞춰야 할 사이였으니, 동료가 체력이 좋다는 건 오솔에게도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은 오솔이 이 녀석을 마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원톱처럼 움직여. 상황을 봐서 밑으로 내려와서 미드필더와 연계하거나 아니면 사이드로 빠져서 공간을 만들어라.’
 이승훈은 이탁수 감독의 지시를 떠올리며 쉼 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오솔의 마크가 소홀해지면 곧바로 공을 받아 돌파를 시도했다. 이제 막 수비의 기초를 익히는 중인 오솔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에잇! 또 놓쳤네.”
 훈련은 매일 같은 식으로 반복되었다.
 초반에는 오솔이 이승훈을 힘으로 몰아붙여서 공은 털끝 하나 못 만지게 하다가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상황이 역전되는 것이다.
 오솔의 걸음은 느려지고 점점 이승훈을 제때 마크하는 게 힘들어졌다. 이때부터는 이승훈의 꽁지를 쫓기에 바빠진다.
 “헥헥. 야! 이 미친놈아. 너처럼 뛰었다간 전반전 끝나기도 전에 바로 퍼지겠다. 페이스 조절 좀 해.”
 “후우. 후우. 나는 괜찮으니까 네 걱정이나 해. 너는 그러다가 숨이 넘어가겠다. 그래 가지고 풀타임 출장을 할 수 있겠어? 설마 중앙 수비수인데 교체로 들어가려고?”
 “망할 미끼 주제에······.”
 “그럼 미끼를 쫓는 넌 물고기겠네? 나 잡아 봐라~ 하하하!”
 이승훈은 농담과 함께 통쾌하게 웃어 재꼈다. 두 사람은 같이 훈련을 하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 상태였다. 둘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서로 쫓고 쫓기며 구수한 욕을 주고받는 모습은 ‘친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헥헥. 잠깐, 이러다 진짜 죽겠다. 잠깐만 쉬었다가 하자.”
 한참을 쫓아가던 오솔이 결국 앓는 소리를 냈다. 벌써 훈련을 3세트나 끝냈다. 중간에 1분씩 쉬었다고 해도 근 27분가량을 죽어라 뛰어다닌 셈이다. 덕분에 체력이 금방 바닥나버렸다.
 오솔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심장이 갓 잡아 올린 물고기 마냥 펄떡거려서 고통스러웠다.
 ‘하아. 하아. 이거 몇 번만 더 반복하면 지구력이 또 오르겠다.’
 사실 축구 선수라고 90분 내내 달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걷거나 서서 보낸다.
 통계에 따르면 걷는 게 37분 48초, 서 있는 게 17분 6초다. 조깅하듯 뛰는 15분 18초까지 합치면 가볍게 움직이는 시간이 약 70분이다.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시간은 고작 20분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이 중에서 전력으로 달리는 시간은 고작 54초······ 1분도 안됐다.
 오솔이 설렁설렁 걸어 다니면서도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여기에 있었다. 그는 뛰어난 예측력으로 미리 공간을 선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수비수로 뛰게 된 이상 방법이 없었다. 공격수가 뛰면 마크하기 위해 죽자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똥개 훈련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내가 이거 보고 참는다.’
 
 -레벨 업! 포인트를 투자하세요!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에 능력치가 올랐는지 훈련 중간 레벨 업 소식이 들렸다. 만약 이런 가시적인 성과조차 없었다면 못 버텼을 것이다.
 ‘한번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볼까?’
 
 -[Level Up!]
 -오솔(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7%)
 -지구력 74(45.8%↓)
 -패스 25(48.2%↓)/ 헤딩 23(49.4%↓)/ 태클 27/ 일대일 마크 29
 -컨디션이 D+등급(73.4%)
 -경험치 17.4%
 
 왼발 숙련도 증가가 유독 돋보였다.
 오솔은 전생에 왼발 숙련도를 90%까지 올려서 사실상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었다. 그가 가진 득점력의 비밀 중 하나가 바로 능숙한 양발 사용이었다.
 양발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선수는 플레이에 여유가 생긴다. 단순히 생각해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셈이었고, 공을 처리하는 속도도 배로 빨라진다.
 한쪽 발만 쓰는 건 싸울 때 한 손만 사용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협 소설도 아니고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간 뒤지게 맞기 십상이다.
 물론 아르옌 로벤처럼 달인의 수준에 오른 선수들은 예외로 둬야 한다. 속칭 월드클래스는 한쪽 발만 가지고도 상대를 농락할 수 있었다.
 ‘발은 두 개니까, 둘 다 잘 쓰면 좋지. 굳이 하나를 고집할 필요가 있나.’
 오솔은 약발의 숙련도를 머릿속에 새기며 레벨 업으로 얻은 포인트 3개를 모두 지구력에 투자했다.
 
 -지구력 77(43.7%↓)
 
 이제부터는 90분 게임도 충분히 뛸 수 있었다. 마침내 체력이 고등학교 선수 수준으로 올라온 것이다.
 “후우. 이제야 비로소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것인가.”
 오솔은 구슬땀을 닦아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훈련으로 성과를 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까마득했었는데······ 후후. 이게 노력의 참맛이구나.’
 시스템의 도움이 없다곤 못하겠으나, 그래도 단순히 포인트만 투자하는 게 아니라 직접 뛰고 기술을 익히는 데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있는데 이승훈이 다가와 다시 슬슬 성질을 긁어댔다.
 “뭐해? 벌써 퍼졌어? 한 세트 더 남았는데 벌써 포기하는 거야?”
 “내가 힘들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너는 죽이고 간다.”
 약이 바짝 오른 오솔이 이승훈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 정도로는 날 못 잡아요. 조금 더 힘내 봐.”
 “그 입 좀 다물고 훈련하면 안 될까? 인간적으로 심장보다 귀가 더 아플 지경이다.”
 “왜, 때릴 꼬야? 한번 때려 봐! 때료 봐!”
 “안 되겠다. 오늘 그 혀를 뽑아야겠다.”
 “하하하. 어디 한번 해보라고.”
 이승훈은 술래잡기하듯 도망치며 쉼 없이 떠들어댔고, 덕분에 오솔은 악으로 깡으로 1세트를 더 뛸 수 있었다.
 
 
 3장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최도영은 친한 일진들과 모여 담배 피우고 있었다.
 “진짜야?”
 “그래, 중학교 때 나름 유명한 놈이었다네. 힘이 얼마나 센지 사람을 양손으로 들어서 던진다더라.”
 “그래서 싸우다가 소년원에 갔다 온 거야?”
 “아니?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뭐 1년 꿇어다느니 그런 얘기는 없었어?”
 “어. 제 나이 맞대. 흐흐흐. 그게 더 웃기지 않냐? 그 얼굴로 고1이라니.”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사이 몇 명이 더 합류했다. 최도영은 담배를 건네주며 물었다.
 “왔냐? 뭐래?”
 “1학년들한테 물어봤는데 친구들이랑 문제없이 어울린다고 하더라. 장난 같은 것도 잘 받아주고, 생각보다 착하다는데?”
 “이거 뭐야, 우리 설마 뻥카에 당한 거냐?”
 친구 중 하나가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누가 그 녀석이 새벽에 신문 배달하는 걸 봤다고 하더라?”
 “신문 배달?”
 “응, 공을 차면서 배달하는 게 신기해서 기억에 남았대. 얼굴 보여주니까 확실하다더라.”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한다고?”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카악. 퉤!”
 일진 중 하나가 가래침을 거하게 뱉으며 한쪽 입꼬리만 슬그머니 올렸다. 최도영은 급히 물었다.
 “무슨 소문?”
 “아니, 그 새끼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소문이 있었거든. 초등학교 동창이 들었다는데 걔네 아빠 집에 처박혀서 술만 마시고, 집은 엄마가 식당 일하면서 먹여 살린다더라.”
 “그래?”
 몇몇 축구부 선배들은 오솔의 가정사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했으나 최도영은 달랐다.
 최도영은 집안이 부유했다. 그 덕분에 축구부에 많은 지원금을 내며 주전 자리를 확보한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돈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 꼿꼿한 감독 새끼도 돈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 하잖아.’
 나이가 어릴 때는 잘 모른다. 당장은 돈보다는 주먹이 더 먹히는 시기니까. 그러나 성인이 되고 사회에 나가면 돈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곧 힘이 된다.
 고등학생은 소년이자 청년인 시기였다. 최도영은 치기 어린 어린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추악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X도 없는 놈이 감히 날 가지고 놀았다 이거지?’
 그는 아버지의 재력, 힘이 곧 그의 것인 양 행동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 오솔은 그야말로 뭣도 없는 병신일 뿐이었다. 게다가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니 완전 막 나가는 인생도 아니었다. 이러면 더 무서울 게 없었다.
 ‘가만, 돈도 없다는 새끼가 무슨 수로 축구부에 들어왔지? 축구부 회비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최도영은 이번 주에 집에 가면 엄마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후우. 역시 식후땡이 최고다. 존나 달다.”
 “갑자기 기분 좋아 보인다?”
 “어. 별거 없는 놈이란 걸 알았으니까 이제 어떻게 괴롭혀야 할지 고민할 일만 남았잖아. 흐흐.”
 “가만 보면 이 새끼 완전 악마라니까?”
 “진짜, 나중에 이런 놈이 군대 선임이면 어떻게 하지?”
 “그럼 니들은 나한테 다 죽는 거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난 군대 빠질 거니까.”
 최도영은 낄낄대는 무리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날의 치욕을 갚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댔다.
 
 * * *
 
 일주일 후, 이탁수 감독은 오솔과 여민국을 함께 불렀다. 이제는 오솔도 어느 정도 수비의 기초를 익힌 상태였으니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어서들 와라. 너희 둘을 같이 부른 이유를 알겠니?”
 “최근에 솔이가 수비 훈련을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같이 훈련하라는 뜻 아닙니까?”
 “맞다. 곧 백운고와 연습경기를 할 생각인데 거기서 솔이를 포함한 수비진을 꾸리고 싶다.”
 오솔을 주전으로 기용한다는 말에 여민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록 연습경기였지만, 백운고와 고영주는 그가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상대였다. 그런 상대에게 최상의 전력으로 붙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아쉬워할 것 없다. 연습경기는 말 그대로 연습경기일 뿐이니까.”
 “······이렇게 갑자기 팀을 짜면 호흡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여민국은 조심스럽게 호흡 문제를 거론했다. 오솔의 수비력이나 기초적인 체력도 걱정이었지만, 그는 수비진의 리더로서 팀워크를 맞추는 것에 먼저 생각이 갔다.
 중앙 지역은 골이 터지기 쉬운, 소위 위험 지역이라 조금이라도 커버가 늦거나 마크를 놓치면 적에게 실점의 기회를 내주고 만다. 이를 막으려면 수비진 전체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수비진의 유기적인 움직임은 프로 선수들도 최소한 두 달은 투자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고,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적어도 반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훈련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상대해야 하는 팀은 도내 1순위 팀이었다. 여민국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탁수 감독은 차분히 설득에 들어갔다.
 “민국아. 넌 프로에 도전할 생각이지?”
 “그렇습니다.”
 “지금의 넌 축구부 최고참이지만 1년 뒤 프로 팀에 들어가면 다시 막내가 되는 거야. 게다가 지금은 지난 2년간 호흡을 맞춰온 동료들이 있지만, 프로팀에서는 널 뺀 나머지 수비수들이 몇 년간 호흡을 맞춰온 상태겠지.”
 “······그렇겠죠.”
 “프로의 세계에선 호흡을 맞출 시간이 없었다는 변명 같은 건 통하지 않아. 무조건 실력이다. 기존의 수비수들보다 널 넣는 게 더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해.”
 여민국은 어린 나이임에도 커맨더 수비수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빠른 상황 판단과 예측력으로 발휘하는 커버 능력은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러나 프로에 올라가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한 수비수들이 즐비했다. 적어도 10년은 더 뛴 존재들인데 상식적으로 그들의 판단력이 여민국보다 못할까?
 결국 판단력 같은 것들은 프로가 된 후에는 더 이상 장점이 되지 못한다. 신인 시절에는 경험보다는 젊음을 바탕으로 한 체력 그리고 힘을 내세워야 했다.
 ‘혹은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판단력을 보이거나.’
 이 감독은 여민국이 자신의 장점을 보다 날카롭게 갈고 닦았으면 했다. 구멍이나 다름없는 오솔을 커버하려면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고민해야 했고 더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솔의 수비 합류는 여민국에게도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이것도 다 좋은 경험이 될 거다.”
 “네, 알겠습니다.”
 여민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번에도 감독의 판단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여민국은 오솔과 같이 훈련장으로 돌아가며 물었다.
 “우리 팀전술에 대해 알고 있니?”
 오솔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어떤 포메이션을 쓰는지 각각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 훤히 꿰고 있었지만 함부로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현재 우리 팀은 3-4-3 시스템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지난번 월드컵에서 대표팀 전술과 흡사하다고 보면 돼.”
 ‘알지. 당신이 딱 홍명문 역할이잖아.’
 3백의 중앙에서 서서 두 명의 스토퍼(Stopper, 저지하는 자) 뒤를 받치는 게 여민국의 역할이었다. 그는 스루패스 차단과 협력 수비, 수비 지휘 등에 능해 몇 년 후 포스트 홍명문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너는 내 오른쪽에 서서 수비를 하게 될 거야. 상대 공격수에게 붙어서 적극적으로 몸싸움하고 라인을 올리지 못하게 막는 역할이지.”
 수비 조정은 여민국이 도맡아 한다. 덕분에 오솔은 생각이란 걸 접어두고 상대 공격수만 쫓아다니면 되었다.
 복잡한 스위칭 플레이나 2 대 1 패스 같은 걸 당하면 금방 돌파되겠지만, 이후의 상황은 모두 여민국이 커버할 것이다.
 “사실 너는 한 사람만 제 힘을 못 내게 하면 돼.”
 “고영주 말이군요.”
 “그래, 백운고의 에이스.”
 오솔에게 주어진 역할은 간단했다. 고영주에게 바짝 붙어서 그가 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혹은 공을 받더라도 쉽게 돌아서지 못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다.
 충분히 통할만한 작전이었다. 이미 오솔의 몸싸움 능력은 고등학교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고영주라고 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백운고는 전통적으로 4-4-2 시스템을 사용하지. 아마 고영주는 투톱 중 하나로 출전할 거야.”
 4-4-2와 3-4-3이 붙었을 때 관건은 누가 주도권을 잡고 몰아치느냐에 있었다.
 3-4-3은 수비에 몰리게 되면 측면 미드필더가 밑으로 내려와 사실상 5백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공격으로 전환할 때 스피드나 파괴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만다.
 물론 4-4-2도 수세에 몰리면 괴로워지는 건 마찬가지다. 3-4-3은 진형의 특성상 4-4-2보다 패스 코스를 만들기 쉬웠다.
 그래서 4-4-2 시스템에서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뛰어야 한다. 자연히 체력적인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물고 물리는 싸움이었다.
 이탁수 감독은 선수들의 체력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었고, 반대로 백운고 감독은 선수들의 기술 훈련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전술에서도 갈려서 청송고는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데에 반해 백운고는 선수 개개인의 개인기가 뛰어나 전체적으로 탈압박에 능했다.
 압박과 탈압박의 싸움에서는 결국 더 잘하는 놈이 이기게 되는데, 지금까지는 백운고가 더 좋은 성적을 거둬왔다.
 양 팀의 역대 전적을 보면 약 4 대 6 정도로 청송고가 살짝 밀리는 형국이었다.
 “올해부터 고영주가 플레이 메이커로 활약할 테니, 이전보다 더 막기 힘들어질 거야.”
 “쳇! 수비할 생각만 하니까 안 되는 거죠. 내가 공격수로 뛰면 다 해결될 일인데, 너무 뺑 돌아가네요.”
 전생에 백운고는 오솔 한 사람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났었다. 오솔같은 전천후 공격수에게 4-4-2 전술은 구멍이 송송 뚫린 치즈와 같았다.
 라인을 올린 탓에 넓게 펼쳐진 수비 뒷공간은 냅다 달리기 좋았고, 수비수와 미드필더 사이의 공간(1.5선)은 공을 갖고 재주를 부리기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비만 해야 하니 자연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으으. 그래도 이번만 수비로 뛰면 되니까 참자.’
 그날부터 오솔은 3백의 일원이 되어 호흡을 맞춰나갔다. 이전 생에 ‘다시!’라는 말이 딱지가 되어 앉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민국의 ‘나가! 들어와!’가 귓가에 윙윙 맴돌았다.
 “공을 잡고 돌지 못하게 막아!”
 “일단 공을 줬으면 섣불리 달라붙지 말고 저지만 해!”
 “상대방을 사이드로 몰아. 중앙에는 공격수가 하나 더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수비 훈련 중에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상대를 자연스럽게 사이드로 모는 행위였다.
 고영주가 양발을 두루 잘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오른발잡이다 보니 왼발 사용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중앙으로 파고들지만 못하게 막으면 투톱의 연계를 막는 것은 물론이고 부정확한 컨트롤에 따른 실수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측면 미드필더가 협력 수비를 하러 내려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상대 측면 미드필더는 우측 공격수가 내려와서 맡는다.
 사이드에 있는 선수들의 체력 부담이 가중되지만 꾸준히 해왔던 피지컬 트레이닝 덕분에 이 같은 활동량은 후반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오솔이 막 훈련을 시작할 때였다.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야! 1학년!”
 “······.”
 오솔은 마주 선 공격수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말을 걸지?’라는 표정이 아니라 ‘누구지?’에 더 가까운 얼굴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잊은 버린 것이다.
 “그 얼굴은 뭐야? 설마 내 얼굴을 잊은 거냐?”
 “아아. 이제 생각났다. 그때 날 귀찮게 한 녀석이군.”
 “녀, 녀석? 귀찮게 해?”
 “왜 뭐 할 말이라도 있냐?”
 “이런 건방진 새끼······.”
 최도영은 이를 악물고 오솔을 노려봤다. 그러나 곧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솔이 분노 조절을 도와줬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젠장! 어디 나한테 탈탈 털리고 나서도 그따위 태도가 계속되는지 보자.’
 “패스해!”
 최도영은 오솔의 수비가 형편없는 걸 알고 패스를 요구했다. 힘으로는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축구 실력이라면 자신이 월등히 높다고 생각했다.
 오솔과 직접 부딪힌 적이 없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쉬웠다. 겉으로 보기에 오솔은 패스도 형편없고, 헤딩도 엉망인 데다 스피드나 체력도 안 좋은 편이었다.
 ‘축구는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이 곰탱아.’
 최도영은 오솔을 비웃으며 공을 잡았다. 역시나 오솔은 한 걸음 늦게 따라붙었다. 그는 쾌재를 부르며 상체를 한차례 흔들었다. 상체 페인팅으로 방향 전환을 속이고 돌파하려는 속셈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쿠웅!
 “억!”
 최도영은 덤프트럭에 치인 듯한 충격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돌아보니 공은 어느새 오솔의 발밑에 가 있었다.
 “바, 반칙이잖아! 이 새끼 이거 아주 죽으라는 듯이 박네. 야, 너희들도 봤지?”
 그러나 심판을 보고 있던 3학년 선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칙 아니니까 어서 일어나.”
 “반칙이 아니라고요?”
 “응, 심지어 손도 안 쓰더라. 방금 너 저 녀석 가슴으로 부딪힌 거에 당해서 나가떨어진 거야.”
 최도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정하고 몸을 날린 느낌이었는데, 그냥 와서 몸만 붙인 거였다니······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뭐야, 너무 쉽잖아?’
 오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흙먼지를 먹으며 멍하니 앉아있는 최도영의 모습이 볼만했다. 이놈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몸싸움 능력이 영 별로였다.
 다 같은 훈련을 받았음에도 개인 능력에 이만한 차이가 난다는 것은 그가 방심을 했다거나 혹은 그만큼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뜻이었다.
 열이 받은 최도영이 다시 덤벼들었으나 오솔은 이번에도 역시 쉽게 그를 막아섰다.
 ‘뭐지? 수비하기 너무 쉬운데?’
 오솔은 왜 이리 수비하기 쉬운지 생각하다가 마침내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쳤다.
 ‘이 자식······ 거의 안 뛰잖아?’
 이승훈이 사이드로도 갔다가 거의 미드필더까지 내려가는 둥 바쁘게 움직였다.
 달리 최도영은 오솔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공을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이 오면 오솔과 부딪쳐 바닥을 뒹굴기를 반복했다.
 오솔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대처하기가 너무나도 수월했다.
 ‘가만, 이거 어째······.’
 뭔가 익숙한 스타일이었다. 오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딱 나잖아?'
 최도영은 공간 침투 능력이 거의 없고 몸싸움이 형편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딱 오솔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오솔의 마이너 버전이랄까?
 ‘그럼 나도 이렇게 수비하기 쉬웠다는 건가?’
 오솔은 자신의 공격 스타일이 얼마나 허접한 것인지 깨닫고는 할 말을 잃었다. 만약 그에게 전생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리고 시스템이 없었다면 그도 최도영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불쑥 위기감이 느껴졌다. 1회 차 인생에서는 이런 스타일로도 세계무대에서 먹혔기에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이번 생은 하드 모드라 레벨 업도 느리고 포인트도 줄어들었어. 심지어 페널티 때문에 백 퍼센트 전력을 내지도 못해.’
 느려진 달리기 속도 때문에 상대 뒷공간을 파고드는 것도 힘들고, 드리블 실력도 수비수를 제치기에는 부족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까지의 플레이 스타일로는 주전을 확보하기 힘들어 보였다.
 ‘제기랄. 어떻게 해야 하지?’
 10년의 경험, 그것을 바탕으로 갖게 된 절정의 공간 침투 능력. 그러나 느려진 발과 투박해진 발재간 때문에 그 모든 걸 제대로 써먹질 못하고 있었다.
 “크헉! 이런 괴물 같은 놈.”
 그 와중에 최도영은 어깨를 세우고 들어오다가 도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덤비더니 종내에는 제풀에 지쳐서 주저앉는다.
 오솔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스타일은 몸싸움에서 밀렸을 때 자신의 플레이를 선보이기 힘들었다. 언젠가 오솔도 몸싸움에서 대등한 상대를 만나게 되면, 이것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게 분명했다.
 “이 새끼가······.”
 최도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오솔이 대놓고 딴 생각을 하는 게 느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돌파가 통하지 않아 답답해 죽겠는데, 거기에 무시까지 당하자 겨우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거지새끼가 감히 날 무시해?”
 거지새끼라는 말에 오솔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알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난하단 걸 알고 하는 말 같았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돈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네?’
 오솔은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축구를 하다보면 이보다 심한 말을 듣는 게 일상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는 그를 흔들 수 없었다.
 ‘그리고 돈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않거든.’
 학창 시절에는 그저 축구를 계속할 수 있는 돈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후에 프로가 되고 광고를 찍다 보면 부(富)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전생에 두고 온 돈만 해도 수백억이었다. 당장 돈이 없다고 해서 움츠려들 거나 창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실력의 유무였다.
 “나야 돈이 없을 뿐이지만 너는 실력이······ 아니지, 이건 재능이라고 해야겠네. 넌 재능이 없잖아.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매번 노가리만 까니 실력이 그 모양이지. 쯧쯧.”
 “뭐? 이런 개새······.”
 “재능은 돈으로 살 수 없어. 그리고 그건 노력도 마찬가지지.”
 어째 자문자답하는 느낌이었다. 오솔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기술을 배우든지 아니면 공부라도 해라. 아, 공부도 안 되려나? 에이, 됐다. 넌 그냥 대충 살아라. 어차피 집에 돈도 많다며?”
 “가, 감히 나한테 그따위 말을 지껄였단 말이지?”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니 잘 새겨들어. 지금처럼 괜히 축구한답시고 주전 자리 하나 차지해서 민폐 부리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집가서 푹 자라. 그게 우릴 도와주는 거다. 솔직히 너 제대로 할 마음도 없잖아. 그러면서 뭘 얻겠다고 굳이 이 뙤약볕에 나와서 고생을 하고 있냐?”
 “······두고 보자. 언젠가 오늘 일을 후회할 거다.”
 “후후. 후회라면 이미 질리도록 했다. 이제는 더 이상 후회할 일 없으니 걱정마라.”
 오솔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끊었다. 이 이상 영양가 없는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실력과 경험치를 늘려놔야 했다.
 ‘너무 형편없이 당하면 쪽팔리잖아. 적어도 출장하기로 한 이상 기본은 해야지.’
 
 * * *
 
 “거지같은 놈! 버러지 같은 새끼!”
 최도영은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두 눈을 번뜩였다.
 “어떻게 하려고?”
 “몰라. 납작 엎드리면 적당히 하다가 봐주려고 했는데, 이젠 안 되겠어. 다시는 축구부에 발을 못 딛게 해야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무시를 당한 것도 그렇고, 상대의 말에 제대로 반박조차 못했다는 사실도 견디기 힘들었다.
 “야. 저녁 훈련 째라. 그 기분으로 무슨 훈련이냐. 오늘 같은 날에는 나가서 한 잔 해야지.”
 “야 이 새끼야. 이 와중에 또 술을 찾냐? 그리고 네가 사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한 잔 이야? 어차피 얻어먹을 놈이.”
 “새끼, 기분 풀자고 해도 말이 많아.”
 최도영의 막말에도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성격은 더러워도 그는 이 무리의 물주였다. 아무래도 대하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케이, 가자! 오늘은 훈련이고 뭐고 안 되겠다. 일단 스트레스부터 풀고, 내일부터 그 새끼 완전히 조져버릴 거야.”
 “그래, 그래.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빨리 가서 술이나 빨자.”
 최도영은 무리를 이끌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행인들은 그들에게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기분이 좀 풀렸다. 그가 웃는 걸 본 친구 하나가 앞서 가는 여자 하나를 가리켰다.
 “야. 저 앞에 괜찮지 않냐? 저기 3시 방향.”
 “진작부터 보고 있었어, 인마. 캬~ 다리 죽인다.”
 “한번 작업 걸어볼까?”
 “좋아. 피부도 하얀 게 딱 내 타입이다.”
 일행 중 그나마 번듯하고 가장 말발이 되는 이가 후다닥 뛰어가 말을 걸었다.
 최도영은 오늘은 어느 술집을 뚫을까 고민하며 여성의 뒤태를 감상했다. 여자는 키가 제법 커서 얼핏 모델 느낌이 났다.
 ‘그래, 어차피 오솔 그 새끼는 평생 여자도 못 만날 거야. 얼굴도 무슨 범죄자처럼 생긴데다가 땡전 한 푼 없으니까. 흐흐흐. 돈도 없는 놈이 무슨 여자를 만나겠어.’
 한데 작업이 순탄치 않았는지 여자가 친구 놈을 피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자기야!”
 여자는 반가운 인사말과 함께 막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사람에게 팔짱을 꼈다.
 “쳇! 임자 있는 년인가 본데?”
 “야. 우리가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잠깐 놀자는 건데 임자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흐흐. 하긴, 상관없지.”
 불량한 무리들이 여자와 새로 나타난 남자를 둘러쌌다. 그들은 적당히 위협을 하고, 그게 안 통하면 무력행사까지 할 생각으로 손목을 풀었다. 그러나 정작 여자를 데려오라던 최도영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이놈 졸라 크잖아?”
 “그러게 이거 사람 맞아? 꼭 프로틴을 먹인 소처럼 생겼는데?”
 오늘 최도영과 같이 나온 무리는 축구부가 아니었다. 단순히 최도영에게 기생해서 유흥을 즐기려는 녀석들뿐이었다. 그래서 눈앞의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몰랐다. 여자가 남자의 팔뚝을 잡고 말했다.
 “솔아. 미안해. 너무 무서워서.”
 “괜찮아.”
 두 사람은 오솔과 여민주였다. 그들은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이고도 태연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솔이야 그렇다고 쳐도 여민주는 정말 대단한 깡이었다.
 ‘하긴 그러니 전생에서도 먼저 다가온 거겠지.’
 오솔의 인생에서 먼저 다가와준 여자는 여민주가 유일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지 못했다. 정식으로 사귀고 나서 물어봤을 때도 그녀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힘을 좀 쓰기로 했다. 돈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누군가 그녀를 괴롭히는 꼴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냐?”
 “와. 대놓고 연애하네? 이거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어?”
 “운동 좀 했나 본데, 그런 프로틴 근육이랑 실전 근육은 다르다. 아가야. 괜히 여자 앞이라고 폼 재지 말고 꺼져라.”
 "풋!"
 오솔은 최근 들어 많이 웃는다고 생각했다. 개그맨 시험장도 아니고 어디서 자꾸 이런 놈들이 튀어나와 웃기려 드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 웃어? 허허. 겁나 어이없네. 야, 웃기냐? 웃겨?”
 오솔이 실소를 터트리자 무리 중 하나가 그에게 손바닥을 날렸다. 아마도 뺨을 치려는 의도 같았다.
 오솔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상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곤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상대는 그리 마른 몸도 아니었는데 너무도 쉽게 떠올랐다.
 “아아악! 이거 놔, 이 새끼야!”
 “잘못하면 어깨 빠진다. 힘 바짝 줘라.”
 “뭘 보고만 있어 이 새끼들아!”
 멍하니 보고만 있던 놈들이 발작적으로 달려들었다. 한 놈은 오솔의 옆구리를 노리고 발을 들어 올렸고, 다른 놈은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날렸다.
 오솔은 쥐고 있던 손목을 놓고 고개를 살짝 숙여 주먹을 피했다. 동시에 옆구리에 닿은 발은 그대로 겨드랑이에 끼워 속박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주먹질한 놈의 머리를 잡고 옆으로 내던져 버렸다.
 쿠당탕!
 놈은 발길질을 한 녀석과 한 몸이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돌아보니 뒤늦게 달려들려다가 주춤거리는 녀석이 둘이나 보였다. 그중 하나는 슬쩍 여민주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얘 건들면 진짜 어디 하나 부러진다고 생각해라. 그땐 진짜 안 봐준다.”
 여민주를 보던 놈이 급히 눈알을 바닥에 깔았다. 넘어진 놈들이 감싸 쥔 부위들이 벌겋게 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손가락 자국,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었다.
 '이게 봐준 거야?'
 도저히 덤빌 생각이 안 들었다.
 “빨리 꺼져. 다시 얼쩡거리면 진짜 다 죽는다. 참, 그리고 너!”
 오솔은 무리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지적당한 놈은 총구에 겨눠진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오솔은 놈의 길게 늘어진 노란 머리카락을 보고, 짧게 명령했다.
 “머리 좀 깎아라, 새끼야. 네가 무슨 요크셔테리어냐? 에휴.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오솔에게 외모를 지적당한 놈이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으나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떠났다. 상황이 끝나고, 여민주는 오솔의 옆구리를 슬슬 만지며 물었다.
 “솔아. 괜찮아?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아, 아니. 괜찮······ 그, 그만 좀 만져.”
 “어머 미안. 혹시나 멍들진 않았나 싶어서. 잠깐 벗어볼래? 내가 확인해줄게.”
 “뭘 벗어? 됐어, 멀쩡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심판 몰래 옆구리에 팔꿈치를 찍어대는 놈도 있는 게 축구판이었다. 이 정도 타격이야 애교 수준이었다. 그래도 여민주의 입장에선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학교 사람들 같던데 괜찮을까?”
 “혹시나 학교에서 귀찮게 하면 말해. 안 그래도 학교 다니기 싫어하는 것 같던데 좀 도와주지, 뭐.”
 “헤헤. 박력 터진다, 야.”
 ‘하아. 이게 아닌데. 왜 자꾸 친해지고 있는 거야?’
 오솔은 자꾸만 거리를 좁혀오는 여민주를 밀어내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 * *
 
 “참, 너 오빠랑 같이 수비수로 뛴다며?”
 “응.”
 “역시 내 안목도 괜찮지? 내가 처음부터 야프 스탐이라고 했잖아. 딱 보니까 수비도 잘 할 것 같더라고.”
 “······난 이번 경기만 뛰고 다시 공격수로 돌아갈 거야.”
 “왜? 수비수가 어때서? 우리 오빠도 중학교 때까지는 공격수였어. 수비수로 전환한 것은 청송고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제 겨우 2년이 지난 거지.”
 확실히 여민국의 재능도 보통이 아니었다. 수준급 공격수에서 단 2년 만에 도내 최고 수준의 수비수가 되었으니 말이다.
 “감독님이 매일 같이 개인 연습도 도와주시고, 전술 자료도 많이 구해다 주셨다고 하더라고. 요즘에는 감독님의 사랑을 너한테 다 뺏겼다고 서운해 하던데?”
 “그거 미안하네.”
 “됐어. 오빠가 서운한 건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너에게도 재능이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감독님이 매일 새벽 훈련을 시키는 거 아니겠어?”
 재능이야 당연히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재능이······.
 “그러니까 공격수로 안 뛴다고 서운해 하지 말고 열심히 해. 헤헤. 그리고 난 수비수도 좋아. 터프하고 멋있잖아.”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닌데?”
 “새침하긴!”
 여민주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오솔은 그녀의 장난스러운 타박이 싫지 않았다. 간지러운 웃음소리는 요정의 장난 같고, 입가의 미소는 달빛을 머금은 듯 포근했다. 맑고 고운 눈동자가 지금처럼 자신만을 바라볼 때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여민주는 한동안 눈을 맞추더니 서서히 두 눈을 감았다. 영롱한 눈빛이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밤하늘의 별빛이 구름 뒤로 숨듯이, 황록색 반딧불이가 숲 속 깊이 들어가듯이 그렇게······.
 오솔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소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살며시 실눈이 떠졌다. 그녀는 오솔의 멍한 표정을 슬쩍 보더니 입을 달싹였다. 작고 동그란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그 와중에 앵두를 연상케 하는 붉은 빛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안 해?”
 “어?”
 “어······ 그러니까 안 하냐고.”
 결국 그녀의 한 마디에 오솔의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거리를 둔다느니 나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느니 따위의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오솔이 다가오는 걸 본 여민주는 실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뒷목을 감싸 안았다.
 ‘아!’
 분명 처음이었는데도 무언가 그립고도 반가운 기분이었다.
 
 * * *
 
 “진짜 처음 맞아?”
 “진짜라니까?”
 “그런 것치곤 너무 잘하던데? 흐으음. 의심스러워.”
 이번 생은 처음이 맞았다.
 ‘이거 너무 잘해버렸나?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전력을 다해버렸네.’
 다행히 이쪽 스킬은 페널티가 없었는지 본래의 실력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덕분에 여민주는 키스가 끝난 직후, 봄날 피어오르는 새싹처럼 웃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렇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진짜 아니야. 맹세할게."
 “알았어. 믿어줄게.”
 여민주는 그 말을 끝으로 모든 의심을 털어내고 환하게 웃었다.
 오솔은 그녀의 입술을 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아까는 생각 없이 입술을 부딪쳤는데 생각해보니 지금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미성년자였다.
 물론 오솔도 지금은 고1이었지만 정신은 서른둘의 아저씨였다. 회귀를 한 탓에 동갑이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띠동갑보다 더 많은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정신연령이 비슷하겠지.’
 여민주의 사려 깊은 행동과 말투는 서른둘의 오솔보다 더 성숙하다고 느껴졌다. 어찌 보면 이제야 더 말이 잘 통하는 듯했다.
 ‘그래, 19금만 조심하자.’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혀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민주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오솔은 혹시나 전생처럼 실수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입맞춤 이상은 하지 않고 일부러 거리를 뒀다.
 여민주는 그럴수록 그가 더 좋아졌다. 스킨십에 집착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의외로 순수하고 순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솔이 쑥맥도 아닌 게 일단 했다하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했다.
 ‘이건 뭐지? 연애 만렙이 경험을 숨김도 아니고.’
 어쨌든 그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안심이 된다. 든든하고 듬직하다. 그래서일까. 여민주는 만날 때마다 괜히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어제 체력 훈련했다더니 진짜 근육이 딱딱하게 뭉쳤네. 이 팔뚝 좀 봐.”
 “아니, 어제는 하체 위주로 했는데.”
 “어머 정말?”
 허벅지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게 영 수상쩍다. 오솔은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그래도 몸이 전체적으로 굳은 거 같아. 내가 안마해줄까? 나 진짜 잘하는데.”
 “아, 아니.”
 여민주는 거절은 거절한다는 태도로 오솔을 자리에 앉혔다. 널따란 등판으로 돌아간 그녀는 완만한 구릉처럼 솟아오른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오솔은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느라 입술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스템창이 불쑥 튀어나왔다.
 
 -지속 스킬, '스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에 변동이 생깁니다. 컨디션이 D+등급(77%)로 상향 조정됩니다.
 
 ‘커, 컨디션이 올랐다고?’
 그것도 소수점 몇 퍼센트가 올라간 게 아니라 한 번에 몇 퍼센트가 올라가 버렸다.
 오솔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랐다. 스트레칭과 준비운동으로 꾸준히 컨디션을 올리긴 했지만 이렇게 급성장하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뭐지, 어떤 것 때문에 오른 거야? 서, 설마 안마 때문인가?’
 오솔은 여민주가 안 보는 틈에 제 허벅지를 잡고 이리저리 주물러댔다.
 ‘어라? 이번에는 왜 컨디션이 오르지 않지?’
 “아, 뭐야. 거기도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왜 벌써 시작해?”
 “여, 여기까지 하려고 했단 말이야?”
 “뭐 어때, 순수한 의도로 도와주려는 건데.”
 “눈빛은 전혀 순수하지 않다만······.”
 “흐음. 뭔가를 기대하셨나요?”
 “아니거든!”
 
 -컨디션이 D+등급(78%)로 상향 조정됩니다.
 
 컨디션이 또 올랐다. 이번에는 안마가 아니라 그냥 여민주와 대화만 했는데 오른 것이다. 자세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으나 여민주가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민주랑 같이 있을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네.’
 여민주는 여러모로 인생의 길잡이 같은 여자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을 가득 채웠던 미안함이 그녀를 향한 애정으로 변해갔다.
 ‘이번 생에는 꼭 같이 있자.’
 
 -컨디션이 D+등급(79%)로 상향 조정됩니다.
 
 사실 컨디션에 걸린 페널티는 전생에 술과 파티 등 방탕한 생활과 더불어 피폐해진 정신 상태의 영향이 컸다.
 축구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 못지않게 축구 외적인 환경을 컨트롤하는 것도 중요했다.
 만약 연인과 헤어지거나, 빚에 시달린다면 제 컨디션으로 뛰기 불가능할 것이다. 의욕도 줄어들고 맥이 탁 풀리는 느낌 때문에 열정을 불태우기도 힘들다.
 반대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면 컨디션이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컨디션이 C등급(80%)로 상향 조정됩니다.
 
 여민주와 만나고 단 며칠 만에 오솔의 컨디션은 C등급까지 회복했다.
 
 * * *
 
 최도영은 교실 뒷자리에 틀어박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난주, 오솔에게 패거리 전체가 당하고 나선 늘 이런 상태였다.
 기세에서 한 번, 축구 실력에서 또 한 번, 그리고 싸움에서 진 것까지 총 세 번이나 패배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
 그 분노의 근원에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다. 상대의 압도적인 힘에서 무력감이 느껴지고, 그런 상대와 벌써 몇 차례나 부딪친 상황이 걱정이었다.
 “천하의 최도영이 이게 무슨 꼴이람.”
 덕분에 축구 훈련을 할 때마다 그놈의 눈치를 보느라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 그의 18년 인생에서 이처럼 답답한 생활은 처음이었다.
 "우라질!"
 그러나 개차반 같은 성격은 꾹꾹 누른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눈치를 보기 시작한 지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최도영은 슬슬 뭉개졌던 자존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답답해서 죽을 거 같아. 그놈을 쫓아내든지 아니면 내가 나가든지 결단을 봐야겠어.”
 그러나 힘으로는 오솔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축구 실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때 급식소 앞에서 대기 중인 여자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희고 고운 피부에 크고 동글동글한 눈이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일전에 오솔과 같이 있었던 여자가 분명했다. 얼굴이 예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었다. 조심스럽게 근처에 다가가니 그녀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주야. 너 진짜 걔랑 사귀어?”
 “누구? 헉! 설마 오솔?”
 “응, 정식으로 ‘이제부터 1일이다!’ 이런 건 없었는데, 같이 밥 먹고 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
 사실은 키스부터 시작했으나-그것도 본인이 재촉해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우, 좀. 그렇지 않니?”
 “맞아, 네가 너무 아깝다.”
 최도영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여자와 오솔은 전혀 안 어울렸다. 이 둘보다는 차라리 미녀와 야수 쪽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무섭지 않아?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인상이 좀······ 다가가기 어렵잖아.”
 “아니야. 우리 솔이가 얼마나 순둥인데.”
 “순둥이라고?”
 “내가 손만 잡아도 막 허둥지둥 대면서 부끄러워한다니까. 후훗. 귀여워.”
 “귀여워?”
 여민주와 대화하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뒤에서 몰래 듣던 최도영도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순둥이에다 귀엽다니, 그 로랜드 고릴라 같이 생긴 놈이?’
 최도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여자도 정상은 아니었다.
 “걔가 또 얼마나 성실한지 몰라. 매일같이 운동에 신문······ 아니, 시간을 쪼개서 알바도 하고, 공부는 별로 안 하지만 아무튼 착해. 잘하는 것도 많고. 그러니까 니들도 괜히 안 좋은 소문 같은 거 함부로 퍼트리고 다니지 말아줘.”
 “진짜 좋은가 보다. 완전히 푹 빠졌네. 그런데 걔 축구 잘해?”
 “응, 엄청 잘해. 오죽하면 장학금 받으면서 다닌다니까.”
 ‘장학금? 무슨 장학금?’
 여학생들은 이후로도 계속 수다를 떨었으나 최도영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온통 신경이 그리로 쏠린 탓이다.
 ‘어떻게 그딴 실력으로 장학금을 받는다는 거지?’
 최도영의 집에서는 매달 축구부에 많은 지원금을 주고 있었다. 축구부의 발전을 위해서 내는 자발적인 지원금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를 주전으로 꽂기 위한 뇌물이었다.
 이탁수 감독은 받을 수 없다고 극구 거절했지만 학교 측에서는 그들의 지원금을 기꺼이 받았다. 그래서 감독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낸 지원금이 장학금으로 바뀌어 꼴도 보기 싫은 놈에게 가고 있었다니,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최도영은 놈이 공짜로 부활동을 한다는 점도 싫었고, 그걸 자신이 도와주고 있다는 건 더 싫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점을 물고 늘어지면 놈을 축구부에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 사이즈가 나오는데?”
 그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엄마?”
 
 * * *
 
 “흐흐흐.”
 오솔은 ‘이 미친놈은 뭐야?’라는 표정으로 최도영을 바라봤다. 놈은 아까부터 주변을 얼쩡거리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씩 혼잣말로 ‘많이 즐겨둬라.’라든지 ‘역시 돈 없는 놈들은 남한테 빈대 붙는 거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다니까.’ 따위의 말을 뱉고 있었다.
 무시하려 했으나 자꾸만 말을 걸어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한편으로는 과연 저러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 모기도 아니고 왜 이리 얼쩡얼쩡 거려?”
 역시나 놈은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모기, 얼쩡얼쩡······ 하아. 넌 방금 축구부에 붙어있을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찬 거야, 인마.”
 “뭐?”
 “우리 엄마가 벌써 행정실에서 따지고 있으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엄마? 너 무슨 마마보이냐?”
 “흐흐흐. 마음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이제 다 끝났으니까. 너 같이 돈도 없는 놈이 무슨 축구냐, 축구가. 재능? 하하. 재능이고 뭐고 한국에서 선수로 뛰려면 돈부터 있어야지.”
 “······.”
 “아직도 모르겠냐? 네가 받는 장학금, 그게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 쯧! 건방진 놈. 남의 고혈이나 빼먹는 주제에 잘난 척 설교나 하고 말이야. 흐흐흐. 그래도 몸뚱이 하나만큼은 튼튼하니 다행이다. 나중에 막일이라도 하려면 그거라도 좋아야겠지.”
 장학금이란 말에 오솔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아직까지 남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 그가 받는 장학금은 온전히 이탁수 감독의 재량에 따른 선택이었고,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띠리리링!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흐흐. 여보세요. 응. 엄마, 어떻게 됐어?”
 오솔은 바짝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마음 같아서는 최도영의 웃는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일단은 결과를 확인한 다음에 손을 쓰기로 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들었는지 최도영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모습에서 그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는지 느껴졌다.
 “엄마, 그게 말이 돼요? 장학금이 없다니?”
 “행정실에 확인해 보니까 여기에는 축구 장학생 제도 같은 건 없다는데? 도내에 장학금을 주는 곳은 백운고 밖에 없대.”
 “어라? 그럼 어떻게······.”
 오솔은 더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최도영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야, 당신 누구야? 도영아?”
 “방금 뭐라고 했냐고요? 장학금이 뭐라고요?”
 “자, 장학금이 없다고······ 아니, 그보다 넌 뭔데 우리 아들······.”
 오솔은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정실로 뛰어 들어갔다.
 벌컥!
 작은 사무실 안에는 행정실 직원과 오솔의 담임, 김영은 선생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 선생은 갑자기 나타난 오솔을 보고 당황한 듯 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솔아. 여긴 어쩐 일이니?”
 “하아. 하아.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뭐, 뭘······.”
 “제가 뭘 좀 잘못 들은 거 같아서 확인 좀 하려고요. 우리 학교에 축구 장학생 제도 있죠? 그, 왜 학생에게 축구부 회비나 대회 출전비 같은 거 지원해주는 거 있잖아요.”
 “······.”
 김 선생이 대답을 못하자 오솔은 행정실 직원을 바라봤다. 직원은 잠시 김 선생의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나인-테일드 폭스에서 지원하는 곳은 백운고뿐이고, 우리 학교는 따로 지원받는 곳이 없어. 당연히 축구 장학금 같은 것도 없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K리그도 조금씩 지역 초중고와 연계하여 유소년 팀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각 구단에서는 유소년 팀 선수를 위해 레슨 지원도 해주고 잘한다 싶으면 해외 유학도 보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있었고, 장학금 지원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통은 초중고 한 곳씩만 유스팀으로 지정해서 지원을 해줬고, 동시에 두 곳을 지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오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장학금이 없다니 말이나 되는가. 이번 생은 물론이고 이미 전생에도 3년이나 장학금을 받으며 축구를 해왔는데.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김 선생이 오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솔아······.”
 “선생님, 이게 무슨 소리죠?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요. 장학금이 없다니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나왔다는 거죠? 혹시 저만 면제를 받은 건가요?”
 “······.”
 “일단 선수로 등록되면 면제는 안돼요. 어떻게든 입금은 되어야 하죠.”
 이번에도 대답은 행정실 직원이 대신했다.
 
 * * *
 
 “하아. 하아.”
 운동장에서 행정실로 그리고 다시 감독실로 전력으로 달린 덕에 숨이 헐떡였다. 그러나 오솔은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네 사정을 알고 감독님께서 자비로 감당하셨어. 너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결국 이렇게 한 달 만에 들키고 말았네······.’
 
 “젠장! 어째서, 어째서!”
 
 ‘혹시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말하지 않으신 거야. 동정하는 걸로 오해할까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네가 축구에만 집중하길 바라셨어.’
 
 ‘그래도······ 그래도 전생에는 말해줄 수 있었잖아요!’
 오솔은 금방이라도 울부짖을 것 같은 얼굴로 내달렸다. 문득 전생에 봤던 이탁수 감독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 건강해라. 솔아. 항상 부상 조심하고.’
 
 이탁수 감독은 그 말을 끝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모두 오솔의 잘못이었다.
 그가 감독님을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송고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팀 전체가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며 필드 전 구역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팀의 에이스가 된 오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상대를 압박하는 대신 골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그가 빠진 자리는 나머지 열 명의 선수가 힘겹게 메워야했다.
 자연히 다른 선수들의 부담이 심해졌다.
 이탁수 감독은 몇 번이고 오솔을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말로는 알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감독은 지역예선에서 오솔을 빼는 초강수를 놓기에 이르렀고, 당연히 오솔은 반발했다.
 당장 눈앞의 성적에 목말라했던 학교 측과 학부모들은 오솔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감독은 오솔이 생각을 바꾸기 전까지는 결코 출전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감독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솔에게는 힘든 일도 아니었다. 마음만 달리 먹으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솔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이라는 ‘재능’ 때문에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 정도 ‘배려’는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결국 팀을 떠난 것은 이탁수 감독이었다. 최후의 순간 그는 마지막 변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쫓겨나듯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는 떠나면서 ‘장학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강해라 라는 말. 그것뿐이었다.
 오솔이 회귀한 이후에도 장학금 제도가 있다고 확신한 것은 그러한 사연이 있었다.
 타탓!
 감독실 근처까지 오니 마침 밖에 나와 있는 이탁수 감독이 보였다.
 “흐아암!”
 길게 찢어지는 입과 나른한 하품, 가늘게 접힌 눈가에는 살짝 눈물도 맺혀있었다. 영락없이 동네 백수의 몰골이었다.
 “헉, 헉.”
 “오, 솔이야. 오솔! 흐흐. 왜 그렇게 뛰어와. 무슨 급한 일 있냐?”
 이름을 갖고 말장난을 하는 걸 보니 아재는 아재였다.
 “헉. 허억.”
 “일단 숨 좀 돌려라. 물 한 잔 줄까?”
 “어째서······.”
 “응?”
 오솔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기다시피 엎드렸다. 무릎이고 손바닥이고 온통 엉망이 되었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왜 그러셨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 왜 그러니?”
 오솔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건한 육체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울컥 흘러넘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목이 잠겨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절규는 그의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왜?’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정말 어리석었어요.’
 오솔은 그간의 사정도 모르고 이탁수 감독이 쫓겨났을 때 일말의 후련함을 느꼈었다. 아니, 더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좋아했었다.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까맣게 잊고 그저 시스템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편협하고 오만한 플레이 스타일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고 아꼈던 은사님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습게도 회귀하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오솔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시스템의 힘이 아닌 그들의 사랑과 관심 덕분에 축구 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제가 어리석었어요. 진짜 중요한 걸 모르고 보이는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김영은 선생은 뒤늦게 도착해 이 감독에게 사실이 밝혀졌음을 알렸다. 이탁수 감독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오솔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끄응! 버티지 말고 일어나 이놈아. 팔 아파 죽겠다.”
 이탁수 감독도 상당한 근육질이었음에도 산만한 덩치의 오솔을 들어 올리는 건 힘들었다. 계속된 재촉에 오솔은 머뭇거리며 일어서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한층 더 엉망이 된 얼굴이 보였다.
 “감독님······.”
 “왜? 축구가 하고 싶으냐?”
 “예?”
 “슬램덩크 몰라?”
 분위기를 깨는 농담에 김영은 선생의 손바닥이 감독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탁수 감독은 멋쩍은 표정을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지금의 분위기가 간지러워서 억지로 농담을 던진 모양이다. 그래도 농담이 한차례 지나간 덕분에 두 남자의 얼굴에서 어색함이 많이 가셨다.
 오솔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감독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잘못하긴 뭘 잘못해. 됐어, 넌 지금 잘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러셨다는 거 다 압니다. 저 그렇게 어리지 않습니다.”
 “짜식. 알면 그냥 모른 척 축구나 하지 뭘 이렇게 오두방정을 떨어?”
 “앞으로 달라질 거예요. 이제야 비로소 다시 태어난 기분입니다.”
 “오버 하기는······.”
 오솔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 * *
 
 며칠이 지나고 오솔을 비롯한 1학년들만의 훈련 시간, 감독도 선배들도 없는 탓에 모두들 설렁설렁 몸을 풀고 있었다. 물론 여러 의미로 새로 태어난 오솔만은 예외였다.
 “방금은 나한테 주고 이 뒷공간으로 파고들어 갔어야지. 내가 중앙 수비수를 끌고 나왔잖아.”
 “그런가? 그런데 여기서 패스가 올까?”
 오솔은 입부 테스트에서 이승훈의 크로스를 믿고 뛰었던 것을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믿고 뛰어야지. 로빙 스루가 올 수도 있고, 내가 중간에서 방향만 바꿀 수도 있잖아.”
 “좋아. 다시 한번 해보자.”
 원톱으로 있던 오솔이 밑으로 내려오거나 사이드로 빠지고, 그렇게 생긴 공간으로 이승훈이 파고들었다.
 비록 이승훈이 우려했던 대로 패스가 이어지진 않았으나 나쁘지 않았다.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을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원하는 플레이를 펼쳤는가?’였다.
 “후우. 잠깐 쉬었다가 하자. 저기 미끼······ 아니지, 승훈아. 가서 스포츠 음료 좀 사 오자.”
 “······이젠 이름으로 부르네?”
 “뭘 그리 놀라?”
 “근 한 달 만에 듣는 이름인데 그럼 안 놀라겠냐?”
 “내가 그랬나?”
 “그래.”
 오솔은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뒤늦게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미안하다. 입부 테스트 때부터 내가 실수를 많이 했지?”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해. 됐어. 다 지난 일인데.”
 “고맙다, 진짜.”
 나이가 어릴 때는 작은 일 하나에도 쉽게 토라지고 싸우기 쉬웠지만, 반대로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한층 더 친해지기도 쉬웠다.
 이승훈 역시 오솔의 진심을 느꼈고,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을 모두 잊었다.
 “어우 닭살. 그렇게 미안하면 나중에 너도 내 미끼 해줘. 아까 연습한 것처럼.”
 “그럼. 언제든지 해줄게. 이제 우리는 한 팀이잖아.”
 “너 진짜······ 어디서 닭살 멘트만 공부하다 왔냐? 연애하더니 애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됐네.”
 “확! 이게 진지하게 말해줘도 지랄이네 아주.”
 “음~ 이제 한결 낫다.”
 “크크, 병신.”
 “뭐, 병신아. 흐흐.”
 욕설이 오고 가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한편 그 시각, 이탁수 감독은 오랜 숙적인 백운고의 오영진 감독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달칵!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긴, 새로 들어온 애들 가르친다고 정신없어. 이 감독도 그렇지?”
 “하하. 괜찮은 선수가 많이 들어왔나 보네요.”
 “매년 똑같지, 뭐. 그나저나 나는 이 감독만 보면 부러워 죽겠어. 아! 나는 언제쯤 내 마음대로 팀을 운영할 수 있을까?”
 “저는 오히려 감독님이 부러운데요. 프로 구단 유스 팀이라 지원도 빵빵하고, 성적에 대한 압박감도 덜하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확실히 프로 구단 유스 팀은 다른 고등학교 축구부와 달리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덜했다. 팀의 성적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성장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래서야 내가 감독인지 유소년 축구교실 선생인지 구분이 안 간다니까.”
 “제 앞에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매번 그렇게 우는 소리를 하시지만 그래도 해마다 전국대회 본선에는 진출하시잖아요.”
 “이크, 쏘리 쏘리!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
 “새 피를 수혈한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잖아요. 슬슬 연습 게임이나 한번 하자는 거죠.”
 “연습 게임? 흐흐. 그거 좋지.”
 오영진 감독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탁수 감독은 대충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벌써부터 고영주를 자랑할 생각에 웃음이 나오시나 봐요?”
 “이 감독. 내가 봤을 때 자네는 감독 말고 점쟁이를 했어야 해. 어쩜 사람 마음을 그리 잘 꿰뚫어 보나?”
 “감독님은 도박 같은 건 절대 하지 마세요. 왜 지는지도 모르고 계속 돈을 잃을 타입이십니다.”
 “나한테 축구만 한 도박이 어디 있겠어. 난 이걸로도 충분히 즐거우니 걱정 마시게.”
 “아무튼 조만간 한 게임하는 겁니다.”
 “오케이. 구체적인 날짜를 고민해 보자고.”
 오솔은 등교를 서둘렀다. 오늘은 그토록 고대하던 백운고와의 연습경기 날이었다.
 “오늘 시합이 끝나면 또 레벨이 오르겠지?”
 오솔은 중얼거림과 함께 오른쪽 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상태창을 부르자 익숙한, 그러나 변화된 능력치들이 보였다.
 
 -오솔(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13%)
 -신체 : 균형감각 66/ 힘 73(+5)/ 반응속도 63/ 순간속도 60/ 주력 68(50%↓)/ 점프력 50/ 지구력 78(43%↓)/ 강인함 90(+5)
 -기술 : 개인기 29/ 드리블 26/ 볼터치 28/ 슈팅 28/ 크로스 13/ 패스 31(36.1%↓)/ 헤딩 31(47.7%↓)/ 스로인 14/ 태클 31/ 일대일 마크 32
 -‘스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컨디션이 B등급(90%)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컨디션의 상승이 눈에 띄었다. 여민주와 다시 만나면서 80%까지 회복했던 컨디션은 이탁수 감독과의 일을 계기로 80%의 고지를 깨고 순식간에 90%에 이르렀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전술을 익히거나 훈련에 매진할 때마다 1%씩 빠르게 상승했던 것이다. 어찌나 빠른 변화였는지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했던 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이제는 다시 90%에 막혀서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지만 처음 회귀했을 때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전체 능력치의 90%면 평상시에 컨디션 조절만 잘 하면 경기에서 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패스 관련 스킬도 많이 변했어.”
 오솔의 태도가 바뀌면서 동시에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점점 변화했다. 그는 1학년들끼리 자율 훈련을 할 때는 공격수로 뛰었는데, 이제는 이전처럼 게을리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압박도 가하기도 했고,
 이승훈이나 다른 선수들에게 패스를 하거나 스스로 미끼가 되는 등 미래에 완전체 원톱이 해야 할 역할들을 하나둘 익혀나갔다.
 그렇게 달라진 플레이 스타일 때문일까 아니면 팀워크가 상승했기 때문일까? 그날부터 패스 관련 페널티도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정확히 10%를 끝으로 멈췄다. 그 이상은 다른 조건이 더 필요해 보였다.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내 몸 같네.”
 전력의 90%를 회복한 덕분에 온몸에 힘이 흘러넘쳤다. 원래부터 사기적인 몸싸움 능력은 더욱더 강해졌다. 이제는 무려 유럽의 선수들과 대등한 수준이었다.
 그 외에 다른 능력치도 눈부시게 빠른 성장을 보였다. 정상적인 성장으로는 불가능한, 막말로 약이라도 먹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속도였다.
 
 * * *
 
 청송고 축구부는 시합에 앞서 몸을 풀고 간단히 호흡을 맞추는데 집중했다. 시합 전에는 너무 과격한 훈련은 피하는 게 상식이었다.
 훈련이 지속되는 동안 최도영은 오솔을 피해 슬쩍슬쩍 자리를 옮겼다. 지난번에 오솔의 손아귀 힘을 맛본 후 계속 저런 상태였다.
 오솔은 축구부 내에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얌전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당장 들이받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으나 그랬다간 자비를 선뜻 내준 감독님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두고 보자고 내년에 돈으로는 막지 못할 활약을 보여줄 테니까.’
 최도영이 얼마나 많은 돈을 학교에 내든 상관없다. 내년에 전국대회 본선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면 아무도 오솔을 빼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축구 선수에게 대회에서 입상하는 건 그 자체로 좋은 경력이 된다. 같이 뛰는 다른 동료들은 최도영이 아닌 보다 실력 있는 선수가 같이 뛰길 원할 것이다.
 실제로 전생에 이탁수 감독이 오솔을 빼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반대한 것은 학교가 아닌 학부모 측이었다.
 그들은 아들이 더 좋은 경력을 바탕으로 프로나 대학 축구에 진출하길 바랐다.
 ‘3학년이 되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2학년 때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소용없다. 설혹 이후에 몇 경기 뛴다 해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솔과 비교되어 더 초라해질 뿐이었다.
 
 * * *
 
 충분히 몸을 풀고 맞이한 오후. 백운고의 선수들이 작은 버스 두 대에 나눠 타서 학교에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린 선수들의 검은색 체육복 위로 꼬리 7개 달린 여우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자신들이 나인 테일드 폭스의 유소년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시커먼 남정네들 사이로 희고 고운 피부의 청년 하나가 내려섰다. 외모가 너무 곱상해서 귀공자 느낌이 났다.
 솔직히 말하면 한 번도 흙바닥을 뒹굴어본 적 없을 것 같았다.
 곧 양 팀의 감독이 악수를 나눴다.
 “어서 오십시오. 이거 저희 쪽에서 갔어야 했는데.”
 “아니야. 멀어봐야 얼마나 멀다고. 버스가 있는 쪽이 왔다 갔다 하는 편이 낫지.”
 프로 구단의 유스팀답게 버스도 있고 여러모로 지원받는 게 많아 보였다. 이탁수 감독은 잠시 부럽다는 표정을 짓다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자, 여기는 오늘 우리와 연습 게임을 할 백운고의 오영진 감독님이시다. 인사드려라.”
 “안녕하십니까.”
 “오, 그래. 다들 신수가 훤하니 잘생겼네. 아이고. 민국이도 보이네. 이젠 3학년이겠구나?”
 “네, 강녕하셨습니까?”
 “오냐. 잘 지낸다. 흐흐. 어째 민국이가 우리보다 더 어른스럽다. 대화하다 보면 헷갈려.”
 “저도 민국이한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 올해도 쉽지 않겠구먼. 자 그럼 우리 애들도 인사해야지. 얘들아!”
 백운고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워크맨을 들으며 딴 곳을 보고 있던 고영주만 홀로 떨어져 있었는데, 선배에게 꿀밤을 맞고 뒤늦게 끌려왔다. 그 모습이 영 허술해 보였다.
 백운고 선수들도 이탁수 감독에게 인사를 건네고 슬슬 흩어져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오전에 따로 준비 운동을 했겠지만 버스를 타고 오면서 몸이 조금씩 굳었을 것이다.
 오솔도 괜히 한 번 더 스트레칭을 하며 근육과 긴장을 풀었다.
 “수비수는 처음이라 그런지 좀 떨리네.”
 각성 이후 오솔은 서서히 팀원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를 인정한 것은 같은 라인에서 리드하던 여민국이었다. 아무래도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입장이다 보니 변화를 눈치채기 쉬웠다.
 ‘뒤는 나한테 맡겨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커버해줄 테니까, 믿어!’
 이전에는 오솔을 그저 돌봐줘야 할 갓난아기 정도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한 사람 몫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한 팀이라는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민주랑 사귀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도 거품을 물며 반대하려나?’
 전생에는 여민국이 졸업한 이후에 사귀었기 때문에 직접 부딪힌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솔과 만난다는 소식에 질겁하며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축구 실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엉망이라며 악평을 쏟았다나?
 이후에 오솔이 실수를 저지르고 여민주 곁을 떠나갔으니 그의 평가는 생각보다 정확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후로 국가대표에서 만날 때마다 나한테 이를 갈았었지.’
 오솔은 자신보다는 작은, 그러나 제법 굳건한 여민국의 등을 보며 약속했다.
 ‘이번에는 도망도 실망도 시키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 시작은 이번 연습 시합이 될 것이다.
 
 * * *
 
 양 팀은 시작 전 마주 서서 악수를 주고받았다. 마침 오솔의 상대는 고영주였다.
 고영주는 눈을 맞추기 위해 한참 고개를 올려야 했다.
 “우와. 키 진짜 크시네요.”
 “딱히 키만 큰 건 아닌데······.”
 “음?”
 고영주는 진영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무슨 뜻인지 깨닫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삐익!
 전반전 시작과 동시에 선수들은 제 포지션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라이벌 팀답게 공은 중원에서 왔다 갔다 할 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아직은 서로 탐색전만 벌일 시기였다.
 고영주는 잠깐의 여유를 틈타 여민국에게 물었다.
 “아, 빵 터졌네. 형, 저 사람 누구예요? 작년에 못 본 것 같은데······.”
 “솔이? 이번에 들어왔어. 1학년.”
 “엥? 진짜 1학년이에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놀랍네요.”
 “오늘, 네 전담 마크맨이니까 자주 마주치게 될 거다.”
 여민국은 그 말을 끝으로 수비진으로 물러났다. 그리곤 오솔과 다른 수비수 사이에 서서 수비 간격과 라인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여민국이 라인을 끌어올리자 청송고의 압박이 강해졌다.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청송고가 서서히 점유율을 높이기 시작했다.
 “헛!”
 고영주는 그 모습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다가 누군가 뒤에 붙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키 말고도 여러 가지가-손이나 발, 덩치 등이- 큰 오솔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네가 내 전담 마크맨이라면서? 어디 그만큼 실력도 따라주는지 볼까?”
 마침 백운고에서 공을 뺏어 고영주에게 패스했다.
 오솔은 온몸으로 고영주를 압박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영주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공을 잡고선 곧장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그러나 좌우 어디로 방향을 틀어도 오솔의 단단한 근육에 가로막혔다. 조금의 공간만 있다면 재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오솔은 그 작은 틈조차 내주지 않았다.
 
 
 4장 좋은 경기는 이긴 경기뿐이지
 
 
 ‘엄청난 중량감이잖아? 어떻게 이렇게 꿈쩍도 안 하지?’
 사실 오솔의 어설픈 실력으로는 공을 잡기 전에 가로채거나 깔끔한 태클로 걷어내는 건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피지컬을 이용한 강한 압박뿐이었다.
 어찌 보면 고육지책에 불과한 수비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이게 먹혔다.
 고영주는 오솔을 등진 상태에서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측면 미드필더가 협력 수비를 위해 내려오기 전에 백패스를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쿠웅!
 고영주는 리턴패스를 생각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으나 오솔에게 막혀 더는 들어갈 수 없었다.
 오솔은 아예 공을 보는 걸 포기하고 고영주만 쫓아다녔다.
 달릴 때는 무조건 어깨를 붙여서 속도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고, 고영주가 공을 잡았을 땐 직접적으로 공을 노리는 태클보다는 몸싸움으로 균형을 잃게 만드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고영주를 강풍에 휘청거리는 버드나무처럼 만들면 여민국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다가와 공만 쏙 빼갔다.
 고영주는 은은히 아려오는 어깨를 만지며 여민국에게 물었다.
 “아이고 아파라. 형, 이 터미네이터는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글쎄······ 터미네이터니까 미래에서 왔겠지?”
 여민국은 오솔이 뜨끔할만한 농담을 던지곤 중앙으로 빠졌다.
 고영주는 놀라서 움찔거리는 근육을 풀어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힘에서 밀리니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90%로 올라온 오솔의 피지컬은 일개 고등학생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고영주가 오솔과 마주 선 상태에서 공략에 들어간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지금처럼 오솔을 등진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가 원톱이 아닌 투톱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도 포스트 플레이 능력이 다른 재주에 비해 많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야. 좀 살살 하자. 어차피 연습 게임이잖아. 나는 다치기 싫다고. 지금 다치면 여름에 있을 전국대회에 못 나간단 말이야.”
 “지금 최대한 살살하고 있는 거야. 그 증거로 아직 네 유니폼이 멀쩡하잖아.”
 자신이 진심으로 힘을 쓰면 너 같은 건 곧장 땅바닥에 처박힌단 뜻이었다.
 “이거 살벌하네.”
 “걱정 마. 살려는 드릴게.”
 “더 무섭잖아!”
 오솔은 아직은 자신만 아는 유행어를 던지고는 고영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덕분에 백운고에서는 고영주에게 섣불리 패스를 보낼 수 없었다. 아직 초반이었으나 오솔의 존재감은 두드러졌다.
 ‘솔직히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두드러지는 스타일이지.’
 이시기의 한국은 180㎝ 중반만 되어도 대형 공격수라고 말하는 실정이었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데 186㎝라는 건 이미 존재만으로 반칙에 가까웠다.
 게다가 키뿐만 아니라 중량감까지 같이 갖춘 탓에 그야말로 인간 탱크, 걸어 다니는 통곡의 벽처럼 느껴졌다. 감히 그가 있는 쪽으로 공을 보내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건 진짜 t-800 같은데? 미치겠네. 이런 놈을 어떻게 상대하지?’
 사실 고영주도 키는 컸다. 거의 180㎝에 다다른 키 덕분에 지금껏 체격으로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K리그에서나 겪을 법한 몸싸움을 미리 겪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버티는 게 고작이라니 너무 심하잖아?’
 고영주는 이를 악물고 버텨봤으나 소용없었다. 상대는 닻이라도 내렸는지 꿈쩍도 안 했다.
 백운고 공격의 핵심이 봉쇄당하자 백운고의 공격도 점차 무뎌져 갔다. 다른 공격수를 이용하거나 좌우 측면으로 돌파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왕성한 활동량과 압박이 특기인 청송고에게 금방 공을 뺏길 뿐이었다.
 ‘그래도 틈이 없는 건 아니야.’
 오솔의 몸싸움이 비록 위협적이긴 했지만 결정적인 태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있었다.
 오솔 하나만 보면 돌파하는 게 불가능은 아니었다. 물론 혼자서는 무리였지만, 혼자서 안 되면 같이 하면 된다.
 2 대 1 패스를 한다거나 절묘한 스루패스를 펼치면 순간이지만 오솔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덩치보다 더 조심해야 할 건 뒤의 민국이 형이지.’
 기껏 오솔을 벗겨내 봐야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여민국 때문에 페널티 박스의 잔디를 밟기도 전에 공을 뺏기고 만다.
 ‘젠장, 또 야!’
 이 짓을 두어 번 반복하고 나면 알게 된다. 방금은 자신이 돌파한 게 아니라 상대가 준비한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임을.
 ‘어디 두고 보자고.’
 오솔과 여민국 콤비에게 막히길 수차례, 결국 고영주는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격수라기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더 어울리는 위치까지 갔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더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숫제 미드필더들과 같은 라인에 위치했다.
 “그만. 더는 따라가지 마!”
 “쳇!”
 여민국은 중원까지 따라가려는 오솔을 급히 막았다.
 오솔 혼자 따라가 봐야 중원에는 패스 코스가 많아서 금방 돌파당할 게 뻔했다. 게다가 너무 멀어지면 여민국이 적절히 커버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더불어 스피드가 느린 것도 문제였다. 오솔은 아직 주력에 50%의 페널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처럼 수비 라인에서 버티는 거라면 모를까 공간이 생겨서 스피드 경쟁이 붙으면 오솔은 높은 확률로 패배할 것이다.
 “좋아. 이제야 편히 공을 받을 수 있겠네.”
 고영주는 공을 받고 부드럽게 돌아섰다. 드디어 청송고의 수비진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속절없이 당하며 쌓인 울분을 되갚아줄 차례였다.
 공을 몰고 센터 서클을 넘어서자 오솔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오솔은 거리 조절에 특히 신경 썼다.
 상대는 자신보다 빠르고, 공격하는 입장이라 한 발 먼저 움직인다. 당연히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떨어져야 했다.
 고영주는 그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안녕! 흐흐. 이번에는 등 뒤에 질척이던 때와는 느낌이 좀 다를 거야.”
 공은 고영주의 발에 꼭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상체는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공에 닿는 발 부위도 쉼 없이 바뀌었다. 나름 프로에서도 먹힐 법한 발재간이었다.
 덕분에 오솔은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상대의 페인팅에 속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수비 경험이 일천해서 상대가 어느 타이밍에 돌파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보통 일대 일에서는 대비하고 있는 수비수가 공격수보다 더 우위에 있었지만, 이렇게 개인 기량에서 차이가 나면 아무 소용없었다.
 '이런. 자칫하면 뚫리겠다.'
 여민국은 위험한 상황임을 눈치 채고 재빨리 커버하러 왔다. 고영주는 침착하게 공을 몰고 나갔다. 그는 태산처럼 서 있는 오솔을 오히려 방패막이 삼아 그 뒤의 여민국을 피했다.
 “이봐. 1학년! 다음에 만났을 땐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좀 덤벼보라고.”
 고영주는 놀리는 말과 함께 좌측 사이드로 달려 나갔다. 깜짝 놀란 오솔이 급히 따라붙으려 하자 달리다 말고 왼발 발뒤꿈치로 공을 툭하고 쳤다.
 공은 몸의 진행 방향과 반대로 흘러갔다. 국내에선 백숏으로 알려진 힐 찹(Heel Chop)이란 개인기였다.
 제대로 속은 오솔은 관성에 의해 앞으로 끌려갔고, 고영주는 그대로 방향을 전환해 중앙으로 뛰었다.
 그러나 노마크 상태도 잠시, 곧바로 중앙을 커버하고 있던 여민국이 달려들었다.
 ‘움직이는 수비수만큼 제치기 쉬운 것도 없지.’
 아마 여민국은 지금이 태클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막 개인기를 써서 균형이 흩어졌을 테니 쉽게 뺏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힐 찹은 그리 어려운 기술이 아니었다. 몸에 익으면 방향 전환 속도도 빠르고 몸의 균형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영주는 이 기술 하나만큼은 눈감고도 펼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그야, 내가 먼저 공을 잡는다는 뜻이지.’
 고영주가 먼저 공을 잡았다. 그리곤 우측으로 바디 페이트를 넣었다. 오른쪽으로 달리는 와중에 넣은 페인트라 여민국도 깜빡 속아 넘어갔다.
 막 여민국의 몸이 우측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고영주는 공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옮기며 그대로 왼쪽으로 치고 나갔다.
 팬텀 드리블(Phantom Dribble) 혹은 라 크로케타(La Croqueta)라고 부르는 개인기였다.
 파바박!
 운동에너지가 오른쪽으로 쏠린 여민국, 그 틈에 훤히 열린 왼쪽 공간으로 돌파하는 고영주.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수비수가 알아서 비켜 주는 것 같았다.
 오솔이 뒤를 돌아봤을 땐 마침 여민국이 돌파당하고 있었고, 여민국이 뒤를 돌아봤을 땐 고영주는 이미 무주공산이 된 공간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앞을 막는 건 잔뜩 긴장한 표정의 골키퍼 한 사람뿐이었다.
 툭, 철썩!
 너무도 쉽게-혹은 쉬워 보이는- 골이 들어갔다. 전반 36분 만이었다.
 인상적인 돌파와 마무리까지 선보인 고영주는 탈춤을 추는 듯한 골 세리머니를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얄미웠다.
 “어때? 이 정도면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지?”
 오솔에게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쿨한 척했으나 전반전 내내 당했던 게 속에 쌓였던 모양이다.
 
 * * *
 
 ‘이런······ 생각보다 빠르게 간파됐군.’
 이탁수 감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확실히 고영주는 천재과였다. 벤치에서 지시가 없었음에도 선수가 스스로 해법을 찾아냈다.
 자신이 급조한 작전이 허접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18살의 어린 선수가 제법 경험이 많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도 유연하고······ 나중에 제법 좋은 선수가 되겠어.’
 투톱에서만 활약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 원톱 중심의 팀에선 중용되긴 힘들어 보였지만, 측면 공격수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포지션을 훈련한다면 나중에 뛰어난 플레이 메이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캡틴은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네.’
 이탁수 감독은 사전에 말해 놓았다. 전반은 주장인 여민국이 알아서 대처하라고. 자신은 하프 타임부터 작전지시를 하겠다고. 그는 고영주가 그랬듯이 여민국도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내놓길 바랐다.
 ‘어찌 보면 감독은 경기를 준비하는 역할에 불과해. 즉각적인 전술 변화나 선수 교체도 결국엔 미리 연습한 대로 바뀌는 것뿐이니까.’
 축구는 야구처럼 경기 중간에 사인을 보내고 작전을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사 한다 해도 아주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경기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든지 작전 타임 같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가 예상외의 변화를 보였을 때 감독이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필드에 있는 선수들이 알아서 대처를 해야 했다.
 그 역할은 보통 주장이나 각 포지션을 리드하는 선수들이 맡았는데, 청송고에서는 여민국이 외에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기억해내라 민국아. 다 훈련 중에 겪었던 상황들이다.’
 작전 본부에서 아무리 멋들어진 작전을 짜더라도 결국 최전선에서 병사들이 믿는 건 야전사령관의 판단이었다.
 이탁수 감독은 제자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기대하며 재개되는 경기를 지켜봤다.
 ‘백운고의 포메이션이 4-4-2에서 4-5-1에 가깝게 변했다.’
 여민국은 미간을 좁힌 채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좌우를 둘러보니 이제 막 수비 기술을 익힌 오솔과 지난 2년간 같이 호흡을 맞춘 3학년 수비수가 보였다.
 ‘결국 우리 중 한 사람이 올라가야 해.’
 이대로라면 중원에서 수적 열세에 놓이고 만다. 중원에서 반드시 한 사람은 노마크가 되는 상황이었고, 그 대상이 고영주가 되었을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고영주를 이렇게 자유롭게 놔둬서는 이길 수 없어.’
 게다가 수비진에서도 비효율이 생긴다. 여민국과 오솔을 포함한 세 명의 수비수가 겨우 한 명의 공격수만 마크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올라가야 하지?’
 역시나 문제는 오솔이었다. 고영주를 일대일로 마크하려면 그만한 속도와 스킬을 두루 갖춰야 하는데 당장은 여민국밖에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올라가면 수비진에는 오솔과 3학년 수비수 둘만 남는다. 오솔은 아직 판단력이 형편없었고, 다른 수비수 역시 누군가를 리드한 적이 없었다.
 ‘솔이를 빼고 수비수나 수비형 미드필더를 넣어야 하는데.’
 하지만 경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36분이었다. 벌써 누군가를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선수의 부족한 실력도 문제였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기용한 감독의 잘못도 지적받게 된다. 교체는 할 수 없었다.
 ‘과연 둘이서 할 수 있을까?’
 오솔과 동료 수비수가 나란히 선 모습이 영 불안했다.
 “올라간다!”
 다급한 경고 덕분에 길게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전방을 살펴보니 고영주가 공을 몰고 올라오는 게 보였다. 여민국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솔아, 여기서 수비하고 있어.”
 여민국은 아예 오솔을 배제하고 혼자서 고영주를 막아섰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뚫린다면 또다시 골이 들어갈 것이다.
 ‘내가 막아야 해!’
 뒤가 없다는 생각에 여민국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번에는 아까 당했던 것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와 고영주 사이를 가로막는 장해물도 없었다.
 아까는 오솔에게 막혀 태클 타이밍을 뻔히 보고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몸을 날려서 태클을 할 생각이었다.
 고영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히죽거렸다.
 “드디어 형이랑 일대일로 붙게 됐네요.”
 “너무 웃지 마라. 징그럽다.”
 “너무하네. 이 웃음을 좋아하는 소녀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고영주는 그 말과 함께 헛다리를 짚으며 상대를 현혹시키려 했다. 좌우로 빠르게 오가는 두 다리는 일전에 안수찬 사장의 부실한 스텝 오버와 차원을 달리했다.
 ‘왜 수비수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겨우 2년 훈련한 걸로 저를 이길 수는 없다고요, 형.’
 탓!
 고영주는 여민국의 중심이 한쪽으로 향했다고 느끼고 칼을 빼들었다.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공과 몸이 동시에 앞으로 나갔다.
 공은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고영주를 따라갔다. 놀라운 드리블 실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민국은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합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몸을 날렸다. 풀떼기 하나 없는 흙바닥을 길고 탄탄한 다리가 빠르게 가로질렀다.
 고영주의 몸에 딱 붙었다고 느껴졌던 공이 쏙 하고 빠져나왔다. 고영주는 여민국의 허벅지에 발이 걸려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공은 다시 청송고 소유가 되었고, 여민국과 고영주는 사이좋게 흙투성이가 되었다.
 “퉤퉤. 아우. 설마 거기서 태클이 들어올 줄이야.”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축구했다 싶지?”
 “형이 비정상인 거예요. 이런 곳에서 슬라이딩 태클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도 연습 경기에서······.”
 고영주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여민국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 덕분에 막히고 말았다고.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민국이 상대에게 속은 척 페인트를 넣었다는 점이다.
 보통 공격수와 수비수가 일대일로 붙게 되면 공격수가 상대를 속이기 위해 애를 쓴다. 반면 수비수는 가만히만 있어도 동료가 도와주러 오기 때문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를 저지하고 패스를 뒤로 돌리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수비수도 상대를 속일 때가 있었다. 한쪽으로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면 그만큼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여민국은 공격수 출신이라 그런지 수비할 때 가만히 기다리기보다는 이런 식의 페인트를 먼저 걸어서 상대의 플레이를 유도하는 걸 더 좋아했다.
 이는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쉽게 구사하기 힘든 수비 방법이었고, 덕분에 여민국은 짧은 수비 경력에도 불구하고 도에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물론 여민국이 수비로 전환한 후 처음 붙게 된 고영주는 아직 모르는 사실이었다.
 “연습 시합도 시합이야. 살살할 생각은 없다.”
 고영주에겐 안타깝게도 여민국의 승부욕은 이제 막 불이 붙었을 뿐이었다. 이후 여민국은 고영주의 전담 마크맨이 되어 운동장을 누볐다.
 고영주가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많이 활동했기에 여민국도 자연스럽게 수비형 미드필더처럼 움직였다.
 오솔은 한참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나도 공격수로 뛰고 싶다.”
 불끈 욕망이 샘솟았다. 공격수로 뛰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수비수로 뛰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알겠다. 실제로 많은 것을 느끼고 페널티도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자신은 공격수가 아니면 안 됐다.
 거대한 벽을 억지로 뚫어내고 좁은 틈을 찾아 골을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역할이요, 사명이었다.
 삐익!
 여민국의 놀라운 수비 덕분에 전반전을 1 대 0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솔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공격수로 뛰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고, 벤치 주변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자신의 교체를 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주전 수비수도 몸을 푸는구나, 쯧. 여기까지인가?’
 처음부터 오래 뛸 거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수비수였으니까. 먹히면 계속 쓰이고 아니면 교체되리라 예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전반이라도 다 뛴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뛰고 싶다.’
 한번 불붙은 의욕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옮겨 붙은 불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울화였는지 아니면 눈부시게 빛나는 두 청년에게서 옮겨 붙은 것인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심장이 계속 뛰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솔의 눈빛을 읽었는지 이탁수 감독이 그를 따로 불러냈다.
 “그래, 수비수로 뛰어보니 어떠냐?”
 “동료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그게 끝이냐?”
 “그리고······ 분했습니다.”
 이탁수 감독은 잠시 제자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됐다.”
 교체인가 싶어 오솔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후반전에는 네가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여줘라.”
 후반전에도 출장한다는 말에 숙였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막 오솔이 크게 대답하려는데, 이탁수 감독이 먼저 선수들에게 입을 열었다.
 “후반전에는 선수 교체가 있다. 신입생들도 좀 뛰어 봐야지. 김태원, 이승훈, 황태곤이 들어가고 최도영······ 이 나온다. 포지션은.”
 오솔이 최전방 원톱이었다. 우측 날개로 이승훈이, 그 밑을 받쳐주는 오른쪽 미드필더는 황태곤이다. 이승훈의 빠른 다리로 우측을 공략하고, 활동량이 좋은 황태곤이 공수에 걸쳐서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배치였다.
 3학년 수비수 김태원은 오솔 대신 중앙 수비수로 들어가고, 원톱에 있던 최도영은 아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탁수 감독은 여민국을 가리켰다.
 “상대는 이제 4-5-1에 가깝다. 덕분에 우리도 4-3-3에 가깝게 변해버렸지. 주장은 이곳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지금까지처럼 고영주를 막는다. 그리고 상황을 봐서 공격에 가담해라. 고영주는 따라오지 않을 거다.”
 고영주가 따라오지 않으면 공격에서 수적 우위에 서게 된다. 설혹 따라온다고 해도 상대 공격의 시작점을 뒤로 물리는 것이니 나쁘지 않았다.
 물론 위험요소도 있었다. 고영주가 전방에 남아있고 상대가 수비에 성공한다면 그때는 비수처럼 날카로운 역습이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 골 지고 있다. 위험을 좀 감수하더라도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새롭게 출진하는 선수들과 오솔, 여민국까지 모두가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중 2, 3학년의 각오가 특히 대단했는데, 모두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백운고에게 막혀 전국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탁수 감독은 선수들의 각오를 확인하고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라면 이런 방법은 쓰지 못했겠지만······.’
 맞불을 놓으면 불길이 더 센 쪽이 다 잡아먹게 되어 있고, 서로 창을 내질러도 창이 긴 쪽에서 먼저 찌르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청송고와 백운고의 싸움이 그러했다. 백운고가 딱 한 치 정도 더 강하다고 해야 할까?
 ‘백운고를 상대로 민국이를 공격적으로 돌리지 못한 이유지.’
 청송고가 도내 1, 2위를 다툰 것은 모두 여민국 덕분이었다. 탄탄한 수비와 더불어 공격수 출신답게 적극적으로 공격에도 가담하는 플레이 스타일은 청송고의 전력을 몇 배나 증가시켰다.
 그야말로 리베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덕분에 청송고는 백운고를 제외한 모든 팀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백운고를 상대로는 여민국을 앞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백운고의 공격력은 여민국이 수비에만 전념해야 겨우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몇 번 공격에 가담해 봤지만, 여민국이 빠지면 금방 실점의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제는 붙어볼 만하다.’
 오솔의 성장세가 뚜렷했다. 전생에 밥 먹고 축구만 한 사람처럼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덕분에 오솔의 등장으로 기존의 공격수-최도영-로는 불가능했던 폭발적인 공격이 가능해졌다.
 이제 창의 길이는 대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여민국까지 가담하면 상대보다 더 날카로운 창날을 보유하게 된다.
 ‘동시에 찌르면 누가 더 치명상을 입느냐의 싸움이 되겠지.’
 이탁수 감독은 만약 이번 경기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당장 이번 해 전국대회에서 오솔과 여민국의 콤비로 본선 진출을 노릴 생각이었다.
 
 * * *
 
 하나 지금의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이도 있었다. 졸지에 1학년에게 제 포지션을 뺏긴 최도영이 그랬다.
 ‘진짜 날 뺀 거야? 아무리 연습 경기라고는 하지만 날 빼고 그 자리에 저 자식을 넣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전술 지시가 끝나고, 후반전에 교체 투입 될 선수들은 운동장에 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한가해진 벤치, 최도영은 감독을 향해 인상을 썼다.
 제법 도전적인 눈빛. 아니, 너른 마음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이탁수 감독이 보기에도 싸가지 없는 눈빛이었다.
 “최도영, 할 말 있어?”
 “······왜 절 교체했는지 모르겠네요. 바꿀 거면 차라리 저 쓸데없는 오솔이 놈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잠시 따라와라.”
 이탁수 감독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팔짱을 꼈다. 그 권위적인 자세에서 최도영을 보는 시선이 영 곱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교체의 이유가 궁금하다고?”
 “네, 아무리 연습 경기라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 저는 주전이 보장되어야 하잖아요. 게다가 다른 놈이라면 모를까 제 자리에 1학년 나부랭이를 넣다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주전 보장이라······.”
 이탁수 감독은 말을 끊고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솟았지만 아직 어린 학생에게 감정을 그대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역시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네?”
 “네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들으니 정말······.”
 그러나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참기 힘들었다.
 “······정말 기가 찬다.”
 “예?”
 “내가 널 왜 교체했을까? 방금 네가 한 말에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반대로 묻고 싶구나. 넌 무엇 때문에 뛰고 있는 거냐?”
 “전······.”
 “한 줄 적어 넣을 소개글과 대학교 추천장 때문이지?”
 지금 이탁수의 눈동자에는 제자를 향한 애정 대신 경멸이 가득 담겨있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덕분에 불같이 화를 내진 않았지만, 그 대신 까맣게 타고 남은 감정의 찌꺼기가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익!”
 최도영은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평소 우습게 여기던 감독에게 무시의 눈길을 받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들끓는 속마음과 달리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스승에 대한 예의로?
 설마, 그딴 건 없었다. 단지······.
 ‘빌어먹을 왜 저렇게 보는 거야?’
 그래, 저 눈이다.
 이탁수 감독의 두 눈.
 그곳에는 어느덧 경멸이 아닌 다른 것이 서려있었다.
 현실의 벽 때문에 신념이 무너졌을 때의 심정, 구겨진 자존심과 불현듯 찾아온 자괴감 그리고 더 날아오를 수 있음에도 문턱에서 주저앉아야 했던 제자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정말이지 많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물론 최도영은 이탁수 감독의 심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다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눌려 그 지랄 맞은 성질을 꾹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이탁수 감독은 곧 모든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징징거리지 마라. 그렇게만 하면 네가 그렇게도 원하는 추천장, 얼마든지 써줄 테니까.”
 “······.”
 “원래 선수기용은 감독의 전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네가 멋대로 자신하고 결정하지 마라. 선발 원칙이 뭐냐고? 다른 건 몰라도 승리에 관심 없는 선수는 뽑을 생각 없다. 그러니 기대하지 마라.”
 재능만 넘친다고 해서 그 선수가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비유였지만 감독과 틀어져서 태업을 벌이는 경우도 있고, 없어져야 할 일이지만 승부조작에 가담해서 원하는 결과에 맞춰 뛰는 선수도 있었다.
 이탁수가 느끼기에 최도영이 하는 짓은 위에 서술한 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연습 경기이지만 전국대회 본선 진출을 가늠할 수 있는 경기다. 설렁설렁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 감독은 잔뜩 얼어있는 최도영을 그대로 버려두고 벤치로 돌아왔다. 황량한 흙바닥에 오래된 교실 의자가 몇 개 놓여있다. 어설프게 마련된 벤치였으나 그 앞에서 서자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자신에게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 같은 건 없어. 내게 좋은 경기는 이긴 경기뿐이다.’
 그는 의자 앞에 서서 준비운동에 한참인 선수들을 바라봤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호흡을 맞추는 제자들의 모습에 그제야 팔에 힘이 빠졌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악바리 근성을 보여줘라, 얘들아.’
 마침 전장에 선 투사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솔은 이승훈과 공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후반전에는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자.”
 “알았으니까 인상 좀 풀어라. 누가 보면 진짜 때리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그것도 좀 땡기네.”
 “······뭐라고 농담을 못하겠네.”
 “농담한 거야.”
 “농담이면 좀 웃으면서 하라고!”
 오솔은 이승훈의 충고를 받아들여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자, 농담 받아라.
 “아무튼 골(Goal)을 때려 넣든 골(骨)을 쪼개 놓든 둘 중 하나는 해야겠어. 흐흐.”
 “이런 살벌한 놈······.”
 이승훈은 한층 살벌해진 농담에 질색했다.
 삑!
 “자, 선수들 모이세요!”
 양 팀 선수들은 심판의 지시에 따라 포메이션을 맞춰 섰다. 청송고의 선 공격이었다. 오솔과 이승훈은 킥오프를 위해 센터 서클에 들어섰다.
 고영주는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 수비수 아니었냐?”
 “때로는 중앙 수비수, 때로는 전담 마크맨, 하지만 내 진짜 정체는······.”
 “설마 큐티 허니?”
 “정답! 이 아니고, 최전방 공격수다.”
 이승훈은 두 사람의 만담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젠장. 갑자기 나란히 서 있는 게 무지 쪽팔리기 시작했다.’
 삐익!
 다행히 경기는 곧장 시작됐다.
 오솔은 시작 전 장난스럽던 모습은 모두 날려버리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짧은 시간에 집중력을 끌어올렸는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고영주는 재빨리 경고를 날렸다.
 “조심해요! 이 녀석 보기보다 힘이 세요!”
 “보기에도 충분히 세보여!”
 백운고 선수들은 고영주의 경고에 맞춰 오솔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제법 덩치가 큰 중앙 수비수 두 사람이 좌우에서 어깨를 맞대자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순간적이나마 오솔의 움직임을 거슬리게 할 정도는 되었다. 안 그래도 발이 느려진 상황이었기에 개인 돌파는 요원해 보였다.
 ‘이거 정말 쉽지 않겠네. 중앙이 꽤나 두터워.’
 수비수 두 사람을 등지고 정면을 보니 두 명의 미드필더가 경호원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서 보면 두 명의 중앙 수비수와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가 사대천왕처럼 서서 네모난 박스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솔은 그 안에 꼼짝없이 갇힌 형국이었다. 혹시나 공이 오더라도 말 그대로 사방에서 압박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안타깝지만 그의 현재 테크닉으로는 그들의 압박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개인기가 부족한 공격수도 나름의 생존법이 있다. 특히 오솔처럼 체격이 좋고 키가 큰 선수는 상대가 압박을 가하기도 전에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를 헤딩이나 발리슛으로 처리해서 공격을 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헤딩은 확률이 많이 떨어져. 발리도 제대로 차기에는 개인기 수치가 너무 낮아.’
 이럴 때는 의외성을 띤 플레이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솔아!”
 때마침 그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황태곤이었다. 그는 측면에서 중앙으로 공을 몰고 오다가 대각선의 오솔에게 패스했다. 입부 테스트 때 오솔을 앞장서서 왕따를 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플레이였다.
 ‘좋아.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패스는 오솔의 좌측면으로 굴러왔다.
 공을 잡으러 이동하자 순간적으로 세 사람이 달라붙었다. 황태곤을 쫓아오던 측면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 그리고 중앙 수비수였다.
 오솔은 순식간에 짓쳐들어오는 선수들을 보면서도 여유로웠다. 다년간의 경험과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말의 뻔뻔함 덕분이었다.
 ‘원래 공격하다 보면 10번 중에 5번은 뺏기고, 2번은 슈팅이 빗나가게 되어있어.’
 나머지 3번은 유효 슈팅을, 그중에 한둘 정도는 골로 연결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을 실패하는 건 꽤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물론 기회를 함부로 날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반대로 ‘잘해야 돼!’라며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솔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몰라. 쓰벌!’
 오솔은 공을 받는 척 흘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180도 틀었다. 앞선 연기가 자연스러울수록 상대를 속이기 쉬운 보디 페인팅이었다.
 ‘헛! 여기서 돈다고?’
 뒤에서 따라오던 수비수는 그만 깜빡 속고 말았다. 앞서 부딪혔던 오솔의 파워가 뇌리에 깊이 박힌 탓에 접근하면서 저도 모르게 몸싸움을 대비한 탓이었다.
 사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오솔의 개인기만 아니었다면 잠깐 버티는 사이 협력 수비로 공을 쉽게 뺏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으면 상대의 재빠른 방향전환에 대처할 수 없다는 단점이 생기고 만다.
 ‘이, 이런······.’
 수비수가 급히 옷을 잡아당겼으나 오솔을 막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놔라. 여자 친구 있다.”
 수비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번 농담도 별로였나 보다.
 오솔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진입했다. 옷이 길게 늘어났음에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수비수는 판단을 잘못했다. 그를 막을 거였으면 아예 손을 쓰거나 다리를 걸었어야 했다. 덕분에 오솔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1초 남짓한 아주 잠깐의 노마크 찬스가.
 ‘선택을 주저해선 일류가 될 수 없지!’
 오솔은 주저 없이 슈팅을 시도했다.
 발을 크게 휘두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달리면서 차는, 드리블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슈팅 자세였다. 나쁘지 않았다. 파워는 좀 부족하겠지만 슈팅 타이밍을 속이기에는 좋았다.
 뻥!
 공은 높이 뜨지 않았다. 그러나 코스가 좋았다. 먼 쪽 골대를 향해 빠르게 굴러갔다. 골키퍼가 막기 어려운 공이었다.
 팅!
 ‘이런 빌어먹을!’
 또 골대에 맞았다. 골대를 맑게 울린 공은 왔던 곳을 그대로 거슬러 왔다.
 오솔은 연어를 잡으러 강물에 뛰어드는 알래스카 불곰처럼 공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살짝 뜬 공, 걷어내기 위해 발을 갖다 대는 수비수, 엎어진 자세를 바로잡는 골키퍼의 모습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다시 수비수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다리 그리고 축구화를 향했다. 축구화 밑바닥,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한 스터드가 유독 크게 보였다.
 이게 왜 이리 크게 보일까?
 ‘난 왜 또 몸을 날린 거냐?’
 오솔은 스터드에서 다시 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은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우당탕!
 공을 향해 몸을 날린 두 사람이 무섭게 엉켜 들었다.
 공은······.
 공은 터치라인을 넘어가 있었다. 코너킥······ 아니, 골킥인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청송고 선수들, 가까이에 있는 백운고 선수들과 이탁수 감독까지 오솔에게 달려갔다.
 ‘치명적인 부상! 이후 오솔은 2년의 재활을 거쳤으나······ 에이, 재미없다.’
 오솔은 멀쩡한 얼굴로 일어났다. 눈썹 위로 살짝 긁힌 자국이 나있었지만 비교적 양호했다. 모두 마지막 순간 백운고 수비수가 발을 뺀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스터드에 긁혔는데 피부만 까졌다니······ 실로 태노쓰급 육신이었다.
 ‘이럴 땐 나도 내가 무섭구나. 후우. 이제 6개의 보석만 찾으러 가면 되는 건가? 아니, 회귀했으니 타임 트래블 젬은 이미 있는 건가?’
 놀란 가슴을 농담으로 가라앉히는 사이,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들려왔다.
 
 -‘모난 머리가 공 맞는다.’에 변동이 생깁니다. 헤딩이 42% 확률로 부정확해집니다.
 
 헤딩에 걸려있던 페널티가 한번에 5%나 줄어들었다.
 ‘설마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펼쳐서 올라간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런 페널티가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전생에 헤딩을 기피한 탓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해도 단번에 5%라니, 설마 위험도에 따라서 변동이 더 커지나?’
 확실히 방금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심하면 두개골 골절도 올 수 있었고, 눈 쪽에 부딪쳤으면 실명이나 시력 저하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래서야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자주 써먹긴 힘들겠군.’
 아쉽지만 오솔에게는 몸이 곧 재산이었다. 나중에 여민주와 알콩달콩 살려면 오래오래 건강해야 했다.
 그때 이탁수 감독이 다가와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솔아. 괜찮아? 어때, 잘 보여? 이게 몇 개 같냐?”
 “손가락을 그렇게 피니까 꼭 닭발 같네요.”
 “뭐?”
 “세 개라고요. 아주 잘 보이니까 걱정 마세요. 저는 멀쩡합니다.”
 “휴. 조심해 이놈아!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간이요? 맞다. 감독님, 술 끊으세요. 영은 쌤은 술 취한 남자, 별로 안 좋아합니다.”
 “뭐, 뭣?”
 이탁수 감독은 갑자기 거론된 김영은 선생의 이름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천기누설을 조금만 더 하자면, 고백할 때는 무조건 제정신에 하세요. 술기운에 질렀다간 두고두고 고생하실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튼 전 괜찮으니까 빨리 나가보세요. 감독이 필드에 너무 오래 들어와 있는 거 아니에요.”
 오솔은 기껏 걱정돼서 들어온 이탁수 감독을 도로 쫓아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후반전에 들어서 거세게 공격하는 청송고와는 달리 백운고는 공격이 시들시들해졌다. 공격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고영주가 설렁설렁 뛰고 있기 때문이다.
 ‘골도 하나 넣었고, 굳이 이런 흙바닥에서 민국이 형이랑 엎치락뒤치락할 필요는 없겠지.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손해니까 말이야.’
 고영주는 혹시나 공이 오더라도 무리한 개인 돌파보다는 패스를 돌리며 틈을 찾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그는 주로 1학년들이 많이 있는 좌측을 공략했다.
 이에 맞서 청송고는 더 많이 뛰는 걸로 응수했다. 중원의 미드필더는 물론이고 이제는 수비형 미드필더처럼 움직이는 여민국이 특히 많은 활동량을 선보였다.
 오솔도 수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는데, 주로 최전방에서 공을 좌측으로 모는 역할을 했다. 공격 전개 단계에서부터 고영주와 먼 쪽으로 공을 유도하는 것이다.
 비록 전반부터 수비수로 뛰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당장은 팀에 기여하려면 이것밖에 없었다. 오솔의 이런 움직임은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수비가 안정화됐어. 슬슬 올라가라, 민국아!’
 이탁수 감독과 뜻이 통했는지 여민국은 슬그머니 공을 몰고 미드필드 지역으로 올라갔다.
 고영주는 여민국을 따라가지 않고 전방에 남았다. 미약한 수비력을 보태느니 역습을 준비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덕분에 청송고는 중원에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여민국이 우측으로 향하자 좌측 미드필더가 수비로 내려앉으며 공수 밸런스를 맞췄다. 그렇다고 해도 공격에 가담한 선수가 일곱이고 수비는 겨우 세 명이었다.
 꽤나 공격적인 배분이었다. 만약 공격이 막히면 여민국을 제외한 3명의 수비수로 고영주를 포함한 두 공격수를 막아야 했다. 여민국은 침착하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했다.
 ‘중간에 인터셉트를 당해선 절대로 안 돼. 골라인을 나가더라도 일단은 마무리까지 가져가자.’
 공격의 끝을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상대의 역습을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무척 중요했다. 골킥이든 골키퍼 키핑이든 상관없이 상대가 주춤하는 사이 공격을 했던 팀에서는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턴제 RPG 게임에서 공격을 마치고 턴을 넘기기 전, 캐릭터를 방어 태세로 전환하는 행위와 같았다. 실컷 때리고 마지막에 가드까지 올리는 것이다.
 ‘그럼 강펀치를 한 방 날려 보자고.’
 여민국이 센터 라인을 넘어서자 오솔과 이승훈, 황태곤의 1학년 트리오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비수를 끌고 우측 아래로 내려오는 오솔과 중앙의 빈틈으로 파고드는 이승훈, 마지막으로 우측 사이드 깊숙이 파고드는 황태곤. 세 개의 패스 코스가 모두 전진 패스였다.
 ‘녀석들, 의욕 만땅이구나.’
 신입생이라 좋은 점도 있었다. 바로 백운고라는 이름에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 이런 모습을 혹자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백운고의 주전 선수들과 청송고 1학년들은 호랑이과 강아지만큼의 실력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강아지가 꼭 호랑이에게 진다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생존과 진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강아지가 호랑이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야생의 들개에서 어느덧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의 친구로 그 위치가 격상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호랑이는 대부분-야생의 호랑이들을 제외하면- 사냥 본능을 잃고 동물원 구경거리로 전락한 신세였다.
 이걸 두고 강아지가 호랑이를 이겼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글쎄 비약인지 삐약인지는 대보면 알겠지. 그러니 너희들의 패기를 보여줘 봐, 병아리들아.’
 여민국은 힘껏 공을 걷어찼다.
 오솔은 수비수를 끌고 나오기 직전, 이승훈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찡긋하고 온몸에 닭살이 돋을법한 윙크를 선보였다. 이승훈의 얼굴이 구겨진 신문지처럼 변했다.
 ‘윽. 눈 버렸다.’
 이승훈은 차라리 인상을 팍팍 쓰던 시절의 오솔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빈 공간으로 침투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연습 때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렇게 미안하면 나중에 너도 내 미끼 해주면 되잖아. 아까 연습한 것처럼 말이야.’
 ‘그럼. 언제든지 해줄게. 이제 우리는 한 팀이잖아.’
 ‘좋아. 그럼 작전을 짜보자.’
 당시 둘이 한참을 고민해서 나온 작전 신호가 저렇게 윙크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비위가 상하잖아!’
 뻥! 하는 공을 차는 소리가 잡념을 뚫고 뇌리에 박혀 들었다.
 이승훈은 달리면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여민국의 패스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으로 낮고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오솔은 중간에 공을 잡아채려는 것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중앙 수비수는 습관처럼 급히 따라붙었다. 그 뒤로 마치 개기일식처럼 이승훈의 모습이 겹쳐졌다.
 ‘패스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그럼 아예 패스를 안 하면 되지!’
 오솔은 공을 받는 척만 하고 가랑이 사이로 공을 흘려보냈다.
 공은 빠르게 그를 지나쳤고, 뒤에서 달리고 있던 이승훈은 불쑥 튀어나온 공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부드러운 볼터치 덕분에 공이 슈팅하기 딱 알맞은 위치에 놓였다. 공이 반드시 온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컨트롤이었다.
 뻐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공이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반 24분, 간신히 동점골이 터졌다.
 “나이스 슛!”
 “패스 죽였어요, 선배.”
 “내 센스 있는 플레이도 좋았지?”
 오솔의 자화자찬에 이승훈은 순간적으로 속이 불편한 티를 냈다.
 “됐고, 윙크 당장 그만둬. 나 진짜로 속이 불편해서 중간에 토 나올 뻔했어.”
 “그럴 때는 한번 토하고 나면 괜찮아지는데, 어떻게······ 좀 도와줄까?”
 “······그냥 지금처럼 하자.”
 두 친구는 농담과 함께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득점을 기뻐했다. 하나둘 몰려든 청송고 선수들 덕분에 그들의 주변에는 어느덧 네댓 명의 선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솔은 주변을 둘러싼 시큼한 땀 냄새와 후끈한 열기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하. 이것도 나쁘지 않네.’
 오솔이 코끝이 시큰한 느낌을 받고 있을 때, 이제는 너무도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패스가 부정확해질 확률이 35.1%로 줄어듭니다.
 
 패스 페널티가 또 1% 줄어들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야.’ 스킬을 극복하는 방법은 동료들과의 팀워크 상승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스킬명에서 벌써 스포일러가 있었네. 이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나도 참 눈치 없다.’
 오솔은 조만간 다른 스킬도 분석하기로 다짐하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이탁수 감독이 보였다. 크게 박수를 치는 은사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승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온몸의 피로가 싹 가셨다.
 방금까지는 죽어라 뛰어다닌 탓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돌아보니 어느덧 가슴 곳곳에는 뻐근함 대신 뿌듯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즐거운 소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구력 감소량이 42%로 변합니다.
 
 ‘역시 지구력은 죽어라 뛰는 수밖에 없구나.’
 정확히는 페널티 박스 밖의 활동량이 높을 때 감소하는 거였지만, 오솔로서는 대충 때려 맞출 수밖에 없었다.
 
 [Level Up!]
 -보유 포인트 : 3 (포인트를 투자해서 능력치를 올리세요.)
 
 ‘오늘, 완전히 날이구나. 이렇게 연달아 대박이 터지다니.’
 그야말로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하기는 일렀다.
 “아직도 20분 넘게 남았어! 다들 긴장 풀지 마!”
 여민국은 긴장이 풀어진 선수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려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능력치 상승과 페널티 감소에 살짝 정신이 나가 있던 오솔도 다시 경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풀어진 분위기는 쉽게 조여지지 않았다. 아직 1학년이자 직접 골을 넣은 이승훈은 특히 붕붕 떠 있었다.
 “헉!”
 그래서일까, 백운고의 측면 수비수는 너무도 쉽게 이승훈을 제쳐냈다. 뒤늦게 달라붙는 황태곤도 2 대 1 패스로 농락하다시피 지나쳤다.
 백운고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팀이라 이처럼 청송고가 한순간이라도 조직력을 잃으면 지금처럼 금방 위기를 맞이하곤 했다.
 “젠장!”
 여민국은 급히 커버에 나섰다. 이대로 상대를 내버려두면 아무런 저항 없이 골라인까지 올라오고 말 것이다. 그건 고영주를 프리로 놓는 것 못지않게 위험했다.
 그러나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당장 수 싸움부터 밀리고 있었다. 네 명의 공격수를 여민국을 포함한 단 세 사람의 수비가 막아야 했다.
 황태곤이 뒤늦게 따라붙었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공은 여민국 마저 농락하며 중앙의 고영주에게 굴러가고 있었다.
 고영주는 막 달라붙는 수비수 하나를 너무도 수월히 지나치더니 20여 미터 남짓한 공간을 노마크 상태로 내달렸다.
 “막아!”
 누군가의 간절한 음성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 * *
 
 그리고 한 달 후······.
 “달려, 영주야!”
 전국대회 본선 진출을 결정짓는 청송고와 백운고의 경기에서 모두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면이 나왔다.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단독 돌파를 이어가는 고영주의 모습과 바짝 긴장한 채 앞으로 튀어나오는 청송고의 골키퍼.
 이날 백운고의 마지막 역습은 연습 경기에서 봤던 고영주의 쐐기골을 꼭 닮아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건 스코어였다.
 3 대 2.
 오늘은 연습 경기 때와 달리 청송고가 3 대 2로 백운고를 앞서고 있었다.
 “넣어!”
 백운고 감독의 입에서 애끓는 소리가 나왔다. 본선 진출이 걸린 너무도 중요한 경기였다.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뻥!
 그러나 애석하게도 고영주가 찬 공은 골키퍼는 물론이고 골대까지 가뿐히 넘어갔다.
 골라인 아웃이었다.
 “아!”
 경기장 곳곳에서 탄식과 환호가 엇갈렸다.
 백운고의 에이스, 고영주는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고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봤다.
 이는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그러나 연습 경기가 아닌 본선 진출전, 동점 상황이 아닌 1점 뒤진 상황이 문제였다. 지나친 부담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고 말았다.
 “마, 마지막 기회가······.”
 삑, 삑! 삐이이익!
 결국 경기가 종료되도록 스코어는 변하지 않았다. 오영진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졌다. 변명의 여지없이 지고 말았어.”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 만만치가 않네요.”
 “그래, 이 감독도 수고했어. 그리고······ 참 좋은 선수를 길러냈어. 아니, 좋은 선수들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는 이탁수 감독의 메모지에 적혀 있었다.
 청송고 VS 백운고
 오솔 ? 7 / 61
 고영주 ? 23 / 68
 여민국 ? 43(PK)
 그리고 그해 여름.
 청송고는 마침내 백운고를 꺾고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고영주를 품은 백운고는 우승 후보라고 불러도 무방했는데, 그런 그들을 청송고의 전사들이 무찌른 것이다.
 모두들 다윗이 골리앗을 꺾고 올라왔다고 생각했다. 우승 후보가 하나 줄었다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팀도 있었다.
 그들은 내심 고영주도 별거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청송고와의 대전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정반대로 백운고보다 더한 상대가 튀어나왔다.
 바로 오솔을 위시한 청송고 선수들이었다.
 각지의 스카우트들은 백운고를 꺾고 올라온 청송고를 주목했다.
 “고등학생이 리베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다니 정말 놀라운 걸? 게다가 공수 밸런스도 좋은데?”
 스카우트의 평가대로 대회 초반에는 여민국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공수에 걸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팀을 이끄는 모습에서 고등학생답지 않은 카리스마가 엿보였다. 흔히 말하는 보스 기질이 있는 선수였다.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잘만 다듬으면 괜찮은 수비 자원이 되겠어. 마침 내년에 졸업이라니 대회가 끝나고 한번 접촉해봐야겠군.”
 그러나 여민국을 쫓아 경기를 보러 온 스카우트들은 32강과 16강을 거치면서 조금씩 오솔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지날 때마다 눈에 띄게 발전하는 선수가 눈에 밟히지 않는다면 스카우트라는 명함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스카우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런 선수가 왜 이제야 보이는 거지?’
 사실 오솔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덩치만 유달리 크고 많이 뛰는 선수에 불과했었다. 그나마 돋보이는 건 공중 볼 경합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심 정도랄까?
 아니, 투쟁심이라기엔 좀 이상했다. 하는 행동만 봐서는 오히려 위험한 경합을 즐기는 듯했다.
 ‘방금 머리끼리 부딪히지 않았나?’ 싶어서 보면 오솔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히 일어나 실실 웃어댔다. 상대는 부딪힌 곳에 볼록하니 혹이 나 있는데 말이다.
 스카우트는 메모지에 ‘투쟁적이며 몸싸움을 즐김. 그러나 부상의 위험이 있는 플레이는 지양할 필요가 있음.’이라고 적어 넣었다.
 오솔을 단순히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평가한 것이다. 하긴 아무리 눈이 날카로운 이라고 해도 오솔이 왜 웃는지는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헤딩이 32% 확률로 부정확해집니다.
 
 헤딩 페널티는 경합 과정에서 과도한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1%씩 감소했는데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2에서 5%가량 감소하기도 했다.
 오솔은 바로바로 들어오는 보상에 눈이 멀어 높은 공만 보면 반드시 따내겠다는 각오로 몸을 날렸다.
 연습 경기 이후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낮은 공에는 머리를 대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Level Up!]
 
 꾸준한 전국대회 출장으로 경험치도 많이 쌓여서 그 사이 레벨이 세 계단이나 상승했다.
 오솔은 때가 왔다고 느끼고 그렇게 얻은 포인트를 모두 헤딩에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41로 상승한 헤딩 능력치. 게다가 페널티는 20%대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헤딩할 때마다 뇌세포가 너무 많이 죽는 거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죽는 수만큼 자고 있던 뇌세포가 깨어나길 기대해보자.’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맞이한 8강전, 오솔은 상대팀의 영공(領空)을 시종일관 장악하며 융단폭격에 들어갔다.
 가끔가다 공이 엉뚱한 곳으로 튀기도 했으나 그 횟수는 처음 헤딩 연습을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많지 않았다.
 오솔의 득점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확실한 무기 하나가 생긴 덕분이었다. 그렇게 넣은 골은 더 많은 경험치를 불러왔고, 레벨은 다시 한번 상승했다.
 선순환의 시작이었다.
 ‘너무 쉽다.’
 한번 탄력을 받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페널티를 걷어내자 1회 차에서 계승한 능력치가 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솔은 전생에는 2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밟았던 고지를 이번에는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타고난 몸싸움 능력에 공간을 읽는 눈 그리고 헤딩 능력이 합쳐지자 오솔은 순식간에 고교 최고 수준의 타깃형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헤딩도 하다 보니까 재밌네. 이런 걸 왜 그리 싫어했는지······.’
 신이 나서 그런지 아무리 뛰어도 힘들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 그리고 돈을 위해 억지로 했었던 축구가 지금은 너무 재밌었다. 그리고······.
 
 -주력 감소량이 49%로 변합니다.
 
 경기 중 뛰는 시간이 걷는 시간 대비 일정 비율을 넘어섰을 때, 마침내 주력에 걸려있던 페널티가 1%씩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오솔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도 위력적인데 여기에 속도까지 돌아온다?
 이는 그야말로 달리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한층 강해진 오솔은 8강에서도 그리고 4강에서도 골을 넣었다.
 그리하여 도달한 대통령금배 결승전, 이제 구단 관계자들의 관심사는 오솔이 어떤 퍼포먼스를 보일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당장 수비수가 급한 구단에서는 오솔보다 여민국에 더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스카우팅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니, 실패라기보다는 여민국의 수비 능력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정확히는 ‘수비’ 능력만 볼 수 없었다.
 철썩!
 골망이 흔들리는 소리에 골키퍼의 멘탈도 과자 마냥 바사삭 깨져나갔다.
 “제기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4 대 0.
 같은 결승팀끼리 하는 시합이라고는 믿기 힘든 스코어와 경기력이었다.
 속도가 붙은 오솔은 보다 빠르게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공중 볼 경합에서 승리를 거뒀다. 심지어 이제는 달리기도 제법 빨라져서 수비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플레이도 종종 선보였다.
 이런 선수가 이제 겨우 1학년이라니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결국 결승전 MOM(Man of the match, 한 경기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를 펼친 선수에게 주는 상)도 오솔의 차지가 되었다.
 공수 조율에 중원에 올라와 중거리 슛까지 성공시킨 여민국도 돋보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트트릭(Hat-trick,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세 골 이상을 넣는 일)을 터트린 공격수에 비하면 빛이 바랬다.
 
 그날 저녁 올라온 스포츠 기사의 제목은 ‘청송고의 클로제, 오솔. 고교 축구를 제패하다!’였다.
 오솔은 헤딩으로 8강과 4강에서 한 골씩, 그리고 결승에서 머리로 두 골, 오른발로 한 골을 넣었다.
 기자는 총 다섯 골로 득점왕과 우승 트로피를 모두 차지한 오솔을 독일팀의 ‘고공 폭격기’ 미로슬라프 클로제에 빗댄 것이다.
 클로제는 1년 전에 있었던 한·일 월드컵에서 머리로만 5골을 넣으며 팀을 결승전까지 끌어올린 사내였으니 참으로 절묘한 비유였다.
 
 * * *
 
 “이야. 우리 클로제 성님 오셨네.”
 “까분다, 진짜.”
 오솔은 이승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1학년들 틈에 끼어 앉았다.
 오늘은 청송고 축구부가 전국을 제패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모름지기 이런 날에는 먹고, 마시고, 즐겨야 했다.
 “그래서 빌린 곳이 삼겹살집이라니······.”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너무 짰으나 정작 선수들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심지어 후보 명단에도 못 들었던 녀석조차 싱글벙글했다.
 오솔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우승의 주역은커녕 조연도 될 수 없었는데 무엇이 그리 즐거울까.
 ‘단순히 같은 팀이라서? 흐음······ 동료라 이건가?’
 물론 찌그러진 얼굴을 펴지 못하는 최도영 같은 이도 있었다.
 만약 오솔의 기용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했다면 무슨 소리를 지껄였을지 훤히 보였다.
 ‘됐다. 이제는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놈인데 괜히 귀찮기만 하지.’
 오솔은 말 그대로 최도영을 무시했다.
 이미 대회를 치르기도 전에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그 보상으로 막대한 경험치까지 얻었으니, 그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솔은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깃덩이를 보며 상태창을 띄웠다.
 
 -오솔(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16%)
 -신체 : 균형감각 67/ 힘 73(+5)/ 반응속도 64/ 순간속도 61/ 주력 70(45.2%↓)/ 점프력 52/ 지구력 90(30.3%↓)/ 강인함 90(+5)
 -기술 : 개인기 36/ 드리블 34/ 볼터치 36/ 슈팅 34/ 패스 36(21.6%↓)/ 헤딩 44(27.4%↓)/ 스로인 14/ 태클 32/ 일대일 마크 34
 
 우승 보상으로 전체 능력치가 1씩 추가로 올랐다. 그러나 이미 90에 다다른 강인함 수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역시 90이상은 훈련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주장! 어서 오세요. 감독님은요?”
 “응, 누굴 좀 만나고 오신다네. 우리 먼저 먹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어.”
 여민국은 탁자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간단한 축배사를 읊었다. 그동안 고생했다느니, 너희가 자랑스럽다느니 따위의 말들을 하고는 곧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재밌게도 그들의 잔에는 소주나 맥주 같은 주류가 아닌 사이다가 담겨 있었다.
 이런 사이다 중독자들!
 오솔은 질색한 표정으로 콜라를 찾았다. 콜라를 챙긴 후 은근슬쩍 여민국 옆에 앉았다.
 “참,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갑자기 누가 찾아와서······.”
 “혹시 그 찾아왔다는 사람이 구단 관계자인가요?”
 여민국의 활약과 그가 3학년이라는 사실, 결승전 직후 누군가 찾았다는 걸 종합하면 구단 관계자 외에는 답이 없었다.
 “맞아. K리그 팀이었어.”
 “진짜예요, 주장?”
 “우와, 대박!”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니 다 들린 모양이다. 프로 구단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에 1, 2학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민국은 순식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 선수, 그것도 K리거가 된다는 건 모든 축구 선수들의 소망이었다.
 흔히 K리그 수준을 낮춰 보기 쉬운데, 실상은 같은 나이대의 선수 중 오직 1% 정도만 K리그에 입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입단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서 주전을 따내고 성공하는 게 입단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든 프로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제 곧 졸업을 앞둔 3학년 선수들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들도 친구라고 웃는 낯으로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는 했지만 마음 한편으론 씁쓸한 기분이 들 것이다.
 ‘설마 했는데, 이게 이렇게 되나?’
 어쩌다 보니 고영주와 백운고가 누렸어야 할 영광을 오솔과 청송고가 다 채가게 되었다.
 ‘전생에는 분명히 대학에 진학했었는데 말이야.’
 여민국은 그곳에서 경력을 이어가며 K리그로의 진출을 모색했었다.
 ‘지름길로 가게 된 셈인가?’
 오솔은 나름대로 전생의 속죄를 했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속이 편안해졌다.
 ‘뭐 고영주는 1년 더 남았으니 상관없겠지. 게다가 프로팀 유스니까 완전히 나가리 되진 않을 거야.’
 다른 곳은 몰라도 나인 테일드 폭스는 고영주를 특별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브라질로 유학까지 보내준 자원을 잊어먹고 있을 리 없었다.
 “전부 몇 군데에서 연락 왔어요?”
 “두 곳 정도가 꽤 길게 얘기를 했었어. 다른 곳도 있긴 했는데 그냥 연락처만 받아가더라.”
 지금 K리그는 드래프트제가 폐지되어 자유선발을 실시하던 시기였다.
 이 빌어먹을 드래프트제는 오솔이 졸업할 시기인 2006년에 다시 부활했다가 2015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흥. 나를 겨우 연봉 5천에 부려먹다니. 못된 놈들 같으니.’
 오솔이 한참 이를 갈고 있을 때 이탁수 감독이 식당에 들어왔다. 그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중간에 김영은 선생님이라도 만났나 싶을 정도였다.
 이후 즐거운 회식이 이어졌다.
 이승훈과 황태곤은 누가 더 많이 먹느냐를 두고 겨루기 시작했고, 여민국은 구단 관계자들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하나 썰을 풀었다.
 “솔아.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
 이탁수 감독이 작게 속삭였다. 오솔도 마침 바람을 쐬고 싶었기에 기꺼이 따라나섰다.
 “오늘 네 경기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분이 계셨다.”
 이탁수 감독은 거두절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곤 곧장 결론을 향해 나아갔다.
 “협회에서 나왔다고 하시더라.”
 
 
 5장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라
 
 
 협회에서 선수를 찾을 이유는 많지 않았다.
 “내년에 있을 19세 이하 AFC 축구 선수권 대회에 네가 참가할 수 있을지 물어보더구나.”
 여기서 AFC는 아시아 축구 연맹을 의미했다. 즉 협회에서 오솔을 청소년 대표로 뽑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경기를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서 걱정하고 있더라.”
 2004년에 있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시아 전역에서 총 46개국이 참가하여 16개 팀을 뽑아 본선을 치른다. 여기서 19세라는 제한은 만 나이를 의미했다. 보다 정확한 규정은 만 15세 이상 19세 이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에서 제한에 딱 맞춰서 만 19세의 선수들을 선발하곤 했다. 이 나이 때에는 한 살만 지나도 큰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AFC U-19 대회는 내년에 있었으니 지금은 만 18세인 선수-고등학교 3학년-들을 주축으로 삼는 추세였다. 당연히 2살이나 더 어린 오솔을 뽑는 건 여러모로 모험에 가까운 짓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뭐라고 하긴, 경기 안 봤냐고 물어봤지.”
 이탁수 감독은 그 말과 함께 악동처럼 웃었다. 오솔은 3~4일 간격으로 치러진 토너먼트를 결승까지 풀타임 출장했다. 체력적인 면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솔이는 웬만한 성인 선수들보다 체력이 강하다. 2년 선배들이랑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협회 관계자는 이탁수 감독의 확신에 강한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 나중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겠다는 말과 함께.
 ‘청소년 대표팀이라니······.’
 오솔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서 두 눈을 끔뻑였다. 전생에서도 뽑히지 못했던 청소년 대표팀 소집을 페널티가 범벅인 2회 차에 들어가게 되다니, 믿기 힘들었다.
 전생에서는 2학년이 되어서야 주전으로 뛰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때는 이미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기 늦은 시기였다.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는 9월 말에 개최되기 때문이다.
 이 대회에서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오솔은 한 번도 소집 요청을 받지 못했었다. 청소년 대표팀은 새로운 멤버를 들이는 대신 기존의 우승 멤버를 유지하며 조직력을 다지는 선택을 했다.
 마침 이탁수 감독도 비슷한 얘길 꺼냈다.
 “알고 있지? 19세 이하 AFC 대회에서 우승하면 내후년에 있을 FIFA 대회 본선에 갈수 있다는 거.”
 오솔의 두 눈에 욕심이 가득 깃들었다. 20세 이하의 FIFA 월드컵이라면 이 나이 때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유일한 대회였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으려는 스카우트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오겠지.’
 이번 대회는 특히 더 심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그’ 선수가 나올 테니까.
 전 세계 유망주 1위, 차후 신계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선수이자 살아있는 전설.
 리오넬 메시 (Lionel Messi).
 메시 역시 이 대회에서 87년생의 어린 나이로 출전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나라고 못하란 법은 없지.’
 
 * * *
 
 오솔은 적당히 먹다가 회식자리를 빠져나왔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런지 저녁이 늦었음에도 그리 춥지 않았다.
 ‘청소년 대표팀에 소집되면 2주 정도는 집을 떠나야 하는데, 괜찮을까?’
 오솔은 이번에 전국대회를 하기 전, 엄마와 여동생에게 축구를 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다만 아버지에게는 의도적으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지난번 생과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긴, 원체 자식들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상관없겠지.’
 이번에도 대회 때문에 집을 2주간 떠나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솔은 아버지를 떠올리자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덕분에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졌고, 약속 장소에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솔아!”
 오솔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멀리서 여민주가 마주 웃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에게는 근심·걱정을 지워주는 초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방금 나왔어.”
 오솔은 여민주와 함께 공원을 걸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가로등불에 꼬인 날파리마저 별빛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향기를 쫓아 옆을 보니 앙증맞은 정수리가 보였다.
 왜 사람 머리에서 꽃향기가 날까? 이 아이는 살아있는 꽃이라도 되는 걸까?
 “대회도 우승하고, 득점왕에 기사까지 났네. 이제 인기 많아지는 거 아니야?”
 “인기? 딱 한 번만이라도 그래 봤으면 좋겠다. 고영주는 벌써 팬클럽도 있는 거 같던데.”
 “난 그 사람 비리비리해서 싫던데, 그리고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부러워할 것 없어. 그것보다 인기 많아졌다고 나중에 한눈팔면 안 된다!”
 “걱정 마. 그럴 일 없어.”
 오솔의 대답에는 영 힘이 없었다. 연인에게 사랑을 약속을 하는 말투도, 그렇다고 안심시키고자 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미래를 알고 있는 자의 우울감에 가까웠다.
 ‘빌어먹을 외모 지상주의!’
 오솔은 혹여 놓칠세라 여민주의 손을 꼭 잡았다. 여민주는 아까보다 더 환히 웃으며 그의 두꺼운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 * *
 
 무더위가 한 풀 꺾인 9월의 어느 날.
 오솔과 여민국은 나란히 서서 파주 NFC(National Football Center, 축구국가대표팀 트레이닝 센터)에 들어섰다. 재밌게도 나이가 더 많은 여민국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고, 반대로 오솔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시설이 좋네. 아니, 여전히가 아니라 이때부터라고 해야 하나?’
 “우와!”
 여민국의 입은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천연잔디로 된 6개의 축구장을 보곤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여기서 훈련을 받나봐. 시설 좀 봐. 진짜 좋다.”
 그는 잔디구장에서 연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잔뜩 신이나 보였다. 그에 반해 오솔은 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내부로 향했다. 안내를 맡은 직원은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곤 방으로 안내했다. 같은 학교임을 배려했는지 둘이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오솔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군. 따로 애송이들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겠어.’
 두 사람은 간단히 짐을 풀고 강의실로 향했다. 제법 서둘렀음에도 이미 반 이상이 도착해 있었다.
 앞줄에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고영주의 모습이 보였다. 연령대별 대표팀에서 빠진 적이 없다더니 안면이 있는 선수가 많은 듯했다.
 반면 오솔과 여민국은 이번이 첫 소집이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별 수 없이 남들과 조금 떨어져 앉았다.
 달칵!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이어지는 구둣발 소리에 웅성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양복을 차려입은 평균 정도의 신장을 가진 마른 남자가 정면에 섰다. 그러자 강의실은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 반갑다. 나는 19세 이하 대표팀을 맡은 최주혁이라고 한다. 편하게 감독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이 중에는 이전부터 날 아는 이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번이 처음인 선수도 있을 것이다.”
 최주혁 감독의 시선이 고영주 쪽과 오솔 쪽을 천천히 오갔다.
 “앞으로 2주 동안 체력과 기술, 전술 훈련과 실전 연습을 할 예정이니 잘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길 바란다. 참, 우리가 뭘 목표로 하는지 먼저 알려주마.”
 감독은 목표를 언급하며 살짝 표정을 굳혔다. 덕분에 원래도 진지했던 인상이 한층 더 진중해졌다.
 “우리의 목표는 내년에 있을 AFC U-19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 그리고 내후년에 있을 FIFA U-20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다소 비현실적인 목표에 막 모인 선수단이 웅성거렸다. 아니, 정확히는 새롭게 합류한 선수들만 어수선한 모습을 보였고, 기존의 멤버들은 익히 알고 있다는 듯 감독의 포부를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축구 교실처럼 하하호호 훈련하는 날은 많지 않을 거다. 난 이기기 위해 훈련할 것이고,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선수에게 다음은 없다.”
 초장부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새로 소집된 선수 대부분이 바짝 긴장한 채 각을 잡고 앉아있었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오솔을 제외하면 말이다.
 ‘음? 저 녀석은?’
 감독이 바라보자 오솔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하품을 한 건 미안했지만 이건 엄연히 생리현상이었고, 소리도 안 냈고, 입도 가렸으니 나름 예의는 다 차렸다.
 ‘오솔이라고 했던가? 고작 16세의 나이로 고교 득점왕에 오른······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이군.’
 아니,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온몸에서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겁이 없다고 하더니. 두 살 차이고 뭐고, 이길 수 있다는 건가?’
 감독은 대단한 패기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거뒀다. 그는 짧게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자! 이제 짐 좀 풀다가 저녁을 먹도록 해라. 이동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부터 훈련을 진행하겠다.”
 감독은 밥 이야기를 꺼내며 처음으로 웃었다. 푸근한 미소가 보는 사람까지 편안하게 했다. 할 땐 하고 쉴 땐 쉬는 스타일 같았다.
 감독이 나가고 선수들도 하나둘씩 자신들의 방에 돌아갔다. 그들을 따라 오솔과 여민국도 방으로 가려할 때였다.
 “너희들 청송고 맞지? 이번에 우승한.”
 오솔이 돌아보니 네 명의 선수가 나란히 서 있었다. 거만한 표정과 팔짱이 너무 대놓고 악당임을 표시하는 것 같아서 당혹스러웠다.
 ‘일전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거 같은데?’
 오솔은 기시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는 그걸 달리 이해했는지 자신의 소개를 시작했다.
 “반갑다. 영신고의 성지훈이다.”
 놈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여민국은 아는 이름인지 ‘아!’라며 감탄사를 뱉었다.
 영신고의 성지훈.
 이 이름은 오솔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학교를 결승에서 아주 뭉개버렸다면서?”
 전국대회 결승에서 만난 그 팀이 영신고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없었다.
 “흐흐.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를 잘 골랐더라? 영국 유학만 아니었어도 내가 상대해줬을 텐데 말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고교시절 영국에서 1년 간 축구 유학을 했다는 건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성지훈은 FC 화랑 워리어스의 유스팀에 소속된 선수였는데, 영국 유학 역시 프로 구단에서 지원을 해준 돈으로 갔었다. 약 1년에 이르는 기간을 구단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차후 성지훈이 프로에 입단할 나이가 되었을 때 FC 화랑 워리어스와 우선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권리를 받는 거래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다른 곳에 입단했지.’
 졸업 후, 성지훈은 FC 화랑 워리어스가 아닌 다른 팀으로 갔고, 이를 두고 계약 위반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다.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K리그에서는 우선협상권이 법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점과 그가 아직 자유계약 신분이라는 점을 들어 ‘법적인 문제는 없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까지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드래프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대형 신인, 성지훈의 이적을 두고 벌어진 영입 전쟁은 K리그 모든 구단이 얽혀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게 되었다.
 이후 과열된 이적 시장에 부담감을 느낀 K리그 구단들은 프로축구연맹과 논의 끝에 드래프트제를 부활시키게 된다.
 선수 영입에 드는 돈을 담합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결론이 나온 이면에는 오솔의 존재도 크게 작용했다.
 이미 성지훈으로 한번 홍역을 치른 구단들은 또 다른 대형 유망주, 오솔을 누가 갖던지 되도록 싼 가격에 영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누구 한 선수의 잘못이라기 보단 연맹과 K리그 구단들이 생떼를 부린 결과였다.
 성지훈은 오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건들거렸다.
 “리버풀 알지? 거기 유스팀에서 1년을 구르고 왔더니 영 피로가 쌓여서 말이야. 이미 선수 등록도 끝나서 출전도 불가능하고, 그리고 내가 나름 해외판데 이런 국내 대회에까지 나가는 건 뭔가 형평성이 안 맞잖아? 흐흐.”
 그는 꼭 자랑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아이 같았다.
 “아무튼 한여름에 뛴다고 고생했다. 파주에는 처음 왔을 텐데, 천천히 구경하다 가.”
 느긋한 말투에서 두 사람을 무시하는 뉘앙스가 가득 담겨있었다. 동시에 은연중 자신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오만이 엿보였다.
 ‘성지훈이라······ 그럭저럭 만능에 가까운 선수지.’
 성지훈의 능력치를 육각형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거의 원에 가깝게 나온다. 공격수에게 필요한 기술력, 체력, 신체적 능력치가 고루 뛰어나고 성격은 좀 거만해도 나름 열심히 훈련했기에 정신적인 면도 문제 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통할만큼 큰 원이 아니라서 나중에 망하지만······.’
 재능의 한계랄까? 아니면 특출 난 장기가 없어서?
 국가대표 팀에서의 준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유럽에 진출한 성지훈은 커리어 내내 벤치만 달구다가 별다른 활약 없이 다시 K리그로 돌아오게 된다. 대충 무난무난 열매를 먹은 능력자라 할 수 있겠다.
 “그래, 반갑다.”
 여민국은 비꼬는 말투를 인지했음에도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성지훈은 ‘생뚱맞게 무슨 악수야.’라고 중얼거리더니 무리와 함께 떠났다.
 여민국은 내민 손이 민망했는지 팔을 그대로 들어 올려 목을 긁적거렸다.
 오솔은 한 숨을 내쉬었다.
 “진짜 나이 속인 거 아니에요? 요즘 10대 중에 첫인사로 악수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시합하기 전에 매번 하잖아.”
 “그건 상대팀이랑 말 섞기 싫어서 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면 서로 악력을 겨뤄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네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방금 그건 왠지 욕 같은데요?”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진짜 종잡을 수가 없구나.”
 역시나 욕이었다.
 
 * * *
 
 오솔은 짐을 마저 풀면서도 계속 인상을 썼다. 미운 놈이 싫은 짓만 한다고, 성지훈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팀을 분열시키기나 하고 말이야.’
 파벌이 달리 파벌인가. 저들끼리 뭉쳐서 밀어주고 끌어주면 그게 파벌이지. 게다가 성지훈 패거리에 합류하는 조건은 너무도 비정상적이었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처럼 아는 사이여서, 친해져서, 잘 통해서 뭉쳐 다닌다고 하면 그래도 좀 이해해줄 텐데······ 성지훈, 이 또라이 같은 놈은 유소년 팀에 속한 선수 혹은 프로 데뷔를 약속받은 선수 따위를 기준 삼아 소위 잘 나가는 엘리트 집단을 만들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파벌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오솔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이질감을, 그 이질감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까지······.
 당시 올림픽 대표팀은 주전 선수들과 백업 선수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얼마나 분위기가 안 좋았냐면 같이 훈련을 진행하면서도 말을 안 섞을 정도였다.
 그때 당시 병역 문제가 코앞에 닥쳤던 오솔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성지훈의 파벌을 깨트렸다.
 
 ‘다시는 내 앞에서 주전이니 백업이니 하며 편 가르지 마라. 어차피 내 기준에서 보면 니들은 다 쩌리거든? 어디서 한 시즌에 스무 골도 못 넣는 것들이 나대고 있어? 허튼짓 말고 나한테 패스나 잘해라. 그럼 내가 알아서 메달까지 다 따줄 테니까.’
 바로 자기 외의 모든 선수들을 깔아뭉개는 것이었다. 그 발언 이후 성지훈을 비롯한 주전 선수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구겨졌다.
 그러나 아무도 오솔을 어찌하지 못했다. 오솔은 당시 K리그를 그야말로 씹어 먹고 다녔다. 그를 뺀 공격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오솔이 속한 후보팀이 그 외의 베스트 11과 싸워도 5 대 0으로 이길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쓰기 힘든 방법이지.’
 그때야 이미 실력도 보여줬고, 인지도도 있었으니 ‘니들이 뭐 어쩔 건데?’라며 막 나갈 수 있었다.
 오솔의 입지가 워낙 확고해서 감독도 쉽게 자르지 못하는 시절이라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이제 막 첫 소집된 애송이에, 다른 선수들에 비해 두 살이나 어렸다. 실력을 보인 것도 겨우 전국대회 다섯 경기가 전부였다.
 아직은 검증이 더 필요했다. 전생의 경험은 남들이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오솔의 경험이 적다고 여길 것이다.
 공식적으로 오솔은 축구를 시작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건 좋지 않아.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전력으로 부딪쳐도 모자란 상대인데 팀이 분열된 상태에서 만난다? 그랬다간 참패밖에 남지 않을 거야.’
 어쩌면 전생처럼 16강에 가기도 전에 주저앉을지 몰랐다.
 ‘눈꼴시지만 일단은 내버려두고, 감독 눈에 드는 것에 집중하자.’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꾹 참으며 입지를 다지는 것 외에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여민국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참, 아침에 민주가 너 잘 부탁한다고 하던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 너희 둘이 뭐 있어? 혹시 사귀냐?”
 “컥! 커험.”
 “뭐야, 이 반응은? 둘이 진짜 사귀어?”
 오늘 아침, 여민주는 갑자기 오솔을 챙기라는 말을 했고, 여민국의 ‘왜?’라는 물음에 ‘남자 친구니까!’라고 아주 당당히 대답했단다.
 여민국은 당시에는 동생의 헛소리 병이 다시 도졌다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오솔과 같이 방에 있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헛소리치곤 좀 심하다 싶더니, 진짜일 줄이야.”
 “장난으로 만나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민주를 아프게 하는 일도, 슬프게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오솔은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진심을 보일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여민국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됐어. 나보고 무슨 악수냐고 하더니, 너야말로 오그라들게 뭐 하는 거야. 너희들 연애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난 참견할 생각 없으니까.”
 “엥?”
 오솔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생에는 무조건 헤어지라며 딴지를 놓았으면서, 이번에는 갑자기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니?
 실상은 여민국도 내심 그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오솔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진 못했다. 다만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여민국의 응원은 거기까지였다.
 여민국의 여행가방 안쪽에서 ‘솔이♡에게’라고 적힌 비닐 팩이 나온 것이다. 그곳에는 아버지께서 드시는 피로 회복제를 비롯한 비타민 그리고 견과류 등 각종 먹을거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더불어 여민국이 챙겨놨던 옷가지 몇 벌이 보이지 않았다. 공간이 없다고 멋대로 빼버린 모양이다.
 “뭐 이런 어이없는······.”
 “어? 이거 제 꺼 맞죠? 하하. 형님, 배달 감사합니다.”
 오솔은 은근슬쩍 형님이라는 호칭을 붙여버리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물건을 쏙 빼갔다. 그러곤 쪽지에 적힌 대로 당장 견과류부터 챙겨 먹었다.
 “딸은 나중에 커서 다 도둑이 된다더니······.”
 여민국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 * *
 
 다음날은 훈련에 앞서 체력 점검이 있었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점검 전까지 약 한 시간 정도 준비 운동을 하며 선수들 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긴장한 얼굴로 몸을 푸는 신입들과 달리 성지훈 패거리는 한 곳에 모여서 밝은 얼굴로 떠들어 댔다. 그들 무리 중엔 고영주가 제일 어려 보였다.
 ‘87년생은 나 혼자고, 86년생은 고영주를 포함해서 고작 8명.’
 팀의 주축은 85년생 선수들이었고, 성지훈 패거리는 이미 주전으로서 입지를 다진 상태였다.
 성지훈 일당은 그까지 총 5명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이미 프로 구단과 구두 계약을 끝낸 이들이었다.
 86년생인 고영주를 제외한 4명이 주로 몰려다녔는데, 그중에서도 성지훈과 타깃형 스트라이커인 이상현은 특히 친해 보였다.
 사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높은 공이나 크로스가 오면 이상현이 머리로 받아 성지훈에게 패스하는 것이 대표팀의 주요 전술이기 때문이다.
 ‘주요 전술이라기보단 사실상 그 방법밖에 못쓴다는 쪽에 더 가깝지만······.’
 현재 청소년 대표팀의 전술은 4-4-2 플랫(flat, 미드필더 네 사람이 일자로 길게 서는 형태)이었다.
 전술의 특성상 두 명의 미드필더만으로 중원을 장악해야 했기에, 감독은 중앙 미드필더로 많은 활동량을 선보이는 선수들을 선발했다.
 문제는 이들이 활동량과 체력은 남달리 뛰어났지만, 반대로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은 많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결국 경기가 진행될수록 중앙에서 풀어가는 모습은 사라지고 양 측면을 돌파해서 공을 올리는 식으로 공격이 단순화되곤 했다.
 ‘당장은 꾸역꾸역 이기고 있지만 글쎄 이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아시아에서 성적이 나온 이유는 바로 이상현, 성지훈 투톱이 아시아 팀을 상대로는 꽤나 위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공이 오면 193㎝의 큰 키를 자랑하는 이상현이 헤딩으로 공을 따낸다. 그러면 성지훈이 그 공을 받아서 어떻게든 마무리한다가 현재 청소년 대표팀의 전술이었다.
 상당히 허술한 계획이었다. 일단 전술 중간에 ‘어떻게든’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벌써 불안했다.
 ‘이제 겨우 1년 남았는데 이 정도밖에 안된다니, 처참하네.’
 전술 자체는 처참했지만 어찌 되었든 AFC U-19에서는 먹힐 법한 전략이었다. 단순하다고 해서 위력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아시아권에서 193㎝의 장신 공격수라는 건 존재만으로 전술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니 FIFA 대회에 가서 죽을 쑤지.’
 타 대륙 선수들과 붙는 순간 장신이라는 점은 큰 장점이 되지 못했다. 그쪽에는 만만치 않은 키를 가진 수비수가 널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깃형 스트라이커라면 최소한 그런 선수들과의 경합에서 이겨낼 수 있는 몸싸움 능력과 점프력, 위치 선정 그리고 헤딩 능력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이상현은 그나마 키와 덩치는 아시아에서 수위권에 드는 수준이었으나, 헤딩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 선정 능력은 절망적이었다.
 지금은 일부러 공을 높이 찼기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 공 속도가 더 빨라지면 낙하지점을 못 찾고 헤매다가 공을 놓치곤 했다.
 ‘결국 높이라는 장점을 뺏기는 순간 끝나는 거지. 경쟁자가 허접한 걸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청소년 대표팀이 겨우 이 정도 수준인 걸 아쉬워해야 하나?’
 오솔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체력 점검에 들어갔다. 30미터, 50미터에 이어 100미터 달리기까지 마치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최주혁 감독은 기록지에 적힌 수치를 보고 오솔의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30미터는 그나마 괜찮은데, 50미터 100미터는 너무 느리군. 역시 다리보단 타이밍을 읽는 눈이 뛰어난 거였어.’
 다리가 느린 건 이미 전국대회 경기 영상을 보며 확인했던 사항이었으나 직접 눈으로 보자 또 느낌이 색달랐다.
 경기를 보면 오솔은 순간적으로 노마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의 뒤로 돌아가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저 큰 덩치가 일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경험이 많을 리는 없고, 타고난 감인가?’
 최주혁 감독은 오솔이 타이밍을 읽는 감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뭐, 달리기는 느려도 상관없지. 중요한 건 몸싸움과 점프력이니까.’
 어차피 현재 전술에서도 역습을 나가는 건 성지훈과 양 날개뿐이었다.
 현재 청소년 팀에서 타깃형 스트라이커는 달리기 속도보다는 헤딩과 수비 가담이 중요했고, 오솔은 그 기준을 충분히 충족하는 선수였다.
 이윽고 점프력 측정 시간이 되었다. 단신부터 시작해서 장신으로 측정 순서를 정했는데, 뒤로 갈수록 선수들 사이에 은연중 경쟁심이 피어올랐다.
 “자, 다음은 여민국!”
 “네, 후우우. 합!”
 팟! 쿵!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전자 기기에 기록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중 가장 높은 숫자가 나왔다.
 184㎝의 여민국이 신기록에 도달하자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신입이라고 우습게 봤던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여민국은 뿌듯함을 느끼는 동시에 특별 훈련을 도와준 이탁수 감독에게 감사했다.
 전국대회가 끝난 후부터 그의 스승은 따로 시간을 내서 개인 피지컬 운동까지 지도해주었다. 덕분에 짧은 훈련 기간이었음에도 지금 여민국의 몸에는 제법 많은 근육이 붙어 있었다.
 이제 곧 졸업하는 제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스승은 많지 않았다.
 “다음, 오솔!”
 이제 드디어 오솔의 차례였다.
 오솔은 심호흡을 하며 몸을 풀었다. 현재 점프력 수치는 52. 여기에 10%의 감소를 감안하면 약 47이다.
 감소한 수치로도 충분히 프로 선수급 운동 능력이었으나, 좀 더 집중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고 싶었다.
 ‘그래야 한 경기라도 더 뛸 거 아니야.’
 오솔은 각오를 다진 후 순간적으로 온몸의 힘을 응축해서 폭발적으로 뛰어올랐다.
 파앗! 쿵!
 역시나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키와 덩치에 비하면 꽤나 높이 뛴 편이었다. 1학년이라고 우습게보던 선배들의 눈에도 긴장감이 깃들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닫고 경계심을 품은 것이다.
 최주혁 감독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선수들과는 좀 다른 부분에서 놀랐다.
 ‘여유가 있다?’
 점프를 하며 떠오를 때와 공중에 머물렀을 때 그리고 내려앉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여유가 느껴졌다.
 ‘뭐지?’
 궁금증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착각이겠지 싶으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첫날 훈련은 체력 측정과 준비 운동이 전부였다.
 최주혁 감독은 선수들을 해산하고 재빨리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곤 곧장 청송고 대 영신고의 시합을 확인했다.
 “그래, 저거구나!”
 영상 속의 오솔은 높이 뛰어올라 공에 머리를 맞추고 있었다. 뛰기 전부터 공에 시선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은 물론이요. 딱 필요한 높이만큼만 뛰는 센스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균형 감각이야.”
 오솔은 공을 끝까지 보다가 머리에 맞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틀었다. 두 팔과 다리가 휘둘러지는 반동으로 공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은 물론이며 그 파워와 속도까지 그대로 유지했다.
 마치 머리로 공을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과장이 좀 섞였지만 그 정도로 파워풀한 장면이었다.
 최주혁 감독은 그에게서 얼핏 네덜란드산 헤딩 머신, 패트릭 클루이베르트(Patrick Kluivert)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역시 방금 그건 전력을 다한 점프가 아니었어.”
 아니, 전력을 다하긴 했다. 다만 그 목적이 단순한 높이뛰기가 아니었기에 여유가 있어 보였던 것뿐이다.
 오솔의 점프는 다른 선수들처럼 더 좋은 기록을 얻기 위한 점프가 아니었다. 보다 목적에 충실한 점프. 즉, 헤딩을 하기 위한 점프였다.
 “공이 날아왔다면 바로 헤딩할 수 있었을 거야.”
 체력 측정에서도 헤딩 상황을 염두하고 플레이를 하다니, 그만큼 실전에 가까운 헤딩 연습이 몸에 익었다는 뜻이다.
 최주혁 감독은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런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 지지부진한 공격 전술에 해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 * *
 
 최주혁 감독은 다음날 바로 크로스-헤더 훈련을 시작했다. 한 시라도 바삐 오솔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덕분에 성지훈을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훈련은 이충호 코치가 대신했다.
 성지훈은 머리 높이로 오는 공을 멋진 발리슛으로 연결하고는 땀을 닦았다.
 “좀 더 다양한 크로스를 시도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시선이 절로 향했다. 저 멀리에서 오솔을 비롯한 선수들을 가르치는 감독의 뒷모습이 보였다. 쭉 이어지던 시선은 측면에서 돌파를 시도하는 선수에게 향했고, 성지훈은 곧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 표정을 봤는지 이충호 코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저기 저놈 때문에요. 저 쪽발이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아······ 우주원?”
 이충호의 눈이 막 크로스를 올리는 청년에게 향했다. 조금은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몸놀림은 날렵했고, 크로스는 정확했다.
 “감독님이 꼭 뽑아야 한다고 우기는데 별 수 있냐.”
 “아무리 우리가 청소년 대표라고 해도, 나라를 대표하는 건데 왜 저런 놈을 뽑는 건지······.”
 “그래도 반은 한국인이잖아.”
 “한국보다 일본에서 산 기간이 더 길잖아요.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선배님.”
 성지훈이 이충호 코치를 부르는 호칭이 묘하다. 코치님이 아닌 ‘선배님’이었다.
 “사람들 있을 때는 코치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코치님. 그런데 진짜로 저런 놈에게 뛸 기회가 돌아가는 건 아니겠죠?”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감독이 하도 불러서 확인해보자고 우겨서 소집한 거야.”
 “죄송해요. 저놈이랑 같은 훈련장에서 숨을 쉰다는 게 짜증이 나서, 괜히 투정을 부렸네요.”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은 컨디션을 끌어올릴 생각만 해라. 협회에서 너한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지?”
 이충호는 성지훈의 어깨들 두어 번 토닥여주더니 다시금 훈련을 진행했다.
 한편 최주혁 감독이 있는 곳에서는 쉴 틈 없이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원아. 이리 와 봐라.”
 최주혁 감독은 진전이 없는 훈련에 우주원을 불러들였다. 오솔의 헤딩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려고 했는데, 우주원이 높게만 차는 바람에 확인하기 힘들었다.
 “주원아. 높은 공도 좋지만 낮고 빠른 크로스도 시도해보고, 휘어지는 크로스도 좀 차 봐. 잘 차는 놈이 왜 그렇게 똑같은 공만 올리는 거야?”
 “그, 그렇지만······.”
 우주원은 말까지 더듬으며 움츠러들었다. 최주혁 감독이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음에도 소용없었다. 그는 교무실에 불려온 아이처럼 기가 죽어있었다.
 그럼에도 감독이 끝까지 대답을 기다리자 조금씩 작은 입술이 벌어지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하지만 지금 우리 팀 전술은 높은 공이 필요하잖아요.”
 “······지금은 훈련 중이니까 조금 더 다양한 시도를 해도 된다. 전술은 고정적인 게 아니야. 네가 잘하면 너를 중심으로 짤 수도 있어. 그러니 네 실력을 다 발휘해 봐.”
 최주혁 감독은 잘 달래서 다시 돌려보냈지만, 우주원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우주원은 문득 저번 소집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우주원은 빠른 발놀림과 정확한 킥으로 J2 리그 더스파구사쓰 군마에 막 입단한 상태였다. 빠르고 정확한 크로스는 그의 주특기였다.
 위력적인 크로스에 최주혁 감독은 연신 ‘나이스!’라고 외치며 더 다양한 크로스를 요구했고, 우주원은 그 요청에 따라 더 열심히 크로스를 올렸다.
 그때부터 주전 공격수 이상현은 공을 놓치고 헤매기 시작했다. 그 많은 크로스 중에 이상현이 헤딩을 해낸 건 비교적 높고 느린 공 뿐이었다.
 ‘됐다! 인정받았어!’
 비록 공격수의 머리에 맞는 건 없었지만 크로스 자체는 뛰어났다. 최주혁 감독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뿌듯했었다.
 성지훈을 비롯한 패거리가 밤늦게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밤 이후.
 우주원은 높은 크로스 외에 다른 것을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공도 이전처럼 빠르게 올리는 대신 속도를 조절해서 받기 쉬운 형태로 찼다.
 그 결과 경쟁력을 잃었고, 주전에서 밀려났다.
 감독은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했지만, 코치의 ‘컨디션 문제가 있나 봅니다.’란 말에 뭐라 묻지 않고 넘어갔다.
 나름 배려였을 것이다. 어린 선수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축구를 하는 데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이 우주원의 두 번째 소집이었다. 동시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뻥!
 “하아. 10분만 쉬었다가 하자.”
 최주혁 감독은 답답함을 토해내고 휴식을 선언했다. 선수들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휴식을 취했다.
 우주원은 감독에게 상담을 해볼까 생각했으나 감독은 이미 다른 선수들의 훈련을 봐주러 가고 없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제 실력을 발휘해야 감독님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음에도 겁이 나서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잘만 되던 크로스가 여기만 오면 똥볼이 되고 만다.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공을 차려고만 하면 자꾸만 그날 일이 떠올랐다.
 우주원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네.”
 자괴감에 하는 혼잣말이 아니었다. 소리는 옆에서 들렸다.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거대한 덩치의 선수가 보였다. 오솔이었다.
 우주원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상대가 한 살 어린 선수건 뭐건 간에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그의 사과에 그나마 오솔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그러나 독설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런 실력으로 잘도 대표팀에 들어왔네. 어떻게 크로스 하나 제대로 못하냐?”
 “미, 미안해.”
 “말은 왜 또 그렇게 더듬어?”
 “그, 그게 내가 아직 한국어가 익숙지가 않아서······.”
 “틀리면 틀리는 대로 말하지 뭘 더듬고 있어. 기분 나쁘니까 그냥 말해.”
 “어······ 미안.”
 기가 죽어서 일까, 사과가 입에 붙어 있었다.
 “그나저나 왜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거야? 외국에서 살다왔어?”
 “지금 일본에서 살고 있어.”
 “아~ J2리그에서 뛴다는 애가 너였구나.”
 “응.”
 우주원은 자꾸만 들리는 반말이 신경 쓰였으나 오솔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중간부터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프로로 뛰는 사람이 크로스가 그게 뭐야. 더 잘 찰 수는 없어?”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날 저 머저리랑 같은 수준으로 보고 그 따위 크로스를 올리는 거면 당장 때려치워. 기분 나쁘니까.”
 오솔의 손가락은 멀대 같이 큰 이상훈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주원은 깜짝 놀라 오솔의 손을 가렸다.
 “조, 조심해.”
 “뭘 조심해. 저런 놈은 한 트럭이 와도 내가 이겨. 조심해야 하는 건 오히려 저놈들이지.”
 “그래도 저 형들을 건드리면 안 돼. 우리 팀의 핵심이란 말이야.”
 “핵심은 개뿔. 핵 암 덩어리들이구만.”
 우주원은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으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저 넷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연령별 대표에서 떨어진 적 없댔어. 청소년 대표로 계속 뛰고 싶으면 저들에 맞춰서 플레이하는 수밖에 없어.”
 “후후. 이제야 속마음을 실토하네. 결국은 겁이 난다는 거지?”
 “으, 응. 미안해.”
 “말 더듬는 건 그쯤 하랬지? 더듬는 건 나중에 네 부인한테나 하고, 일단은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크로스를 올려봐. 만약 쓸만하면, 내가 지켜줄 테니까.”
 마음에 안 들면 무시하겠다는 말이었지만, 우주원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아는지 모르겠는데, 나 이중국적자야. 한국이랑 일본.”
 “그래? 그런데?”
 “그러니까······ 어머니가 일본 분이시거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실은······.”
 오솔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됐어.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으니까.”
 “······응.”
 “다만, 거지같은 차별, 무시, 혐오에는 지지 말라고 하고 싶다. 혹시나 뛰게 될지 모르지만 나중에 유럽에 가면 여기보다 훨씬 더 심한 대우를 받게 되거든.”
 “······.”
 “굴하지 말고 실력으로 이겨내.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야.”
 오솔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10년의 경험도 덩달아 담겨 있었으니 더 그렇게 느껴졌다.
 우주원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흐흐. 뭘, 나도 혼혈이니까 하는 말이야.”
 “진짜? 너도 혼혈이었어?”
 “그래, 인간과 신의 혼혈이지.”
 “······.”
 “일명 반인반신. 나는 곧 신계에 들어선다.”
 우주원의 눈동자에서 신뢰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갑자기 방금까지 위로받았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 * *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크로스-헤더 훈련을 시작했다.
 우주원은 이전보다 나아진 돌파를 선보이며 우측면을 내달렸다. 반인반신 드립 때문에 약간의 실망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솔의 진심 어린 충고가 마음에 와닿은 덕분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따뜻한 말을 해준 덕에 용기가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크로스는 1차 소집 때처럼 최선을 다했다.
 뻐엉!
 골대보다 살짝 높이 뜬 공은 중앙에 가까워짐에 따라 날카로운 각도를 보이며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노마크 상태로 몸을 띄운 오솔이 있었다.
 파앗!
 흑표범처럼 날렵하게 튀어 오른 오솔, 그는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순식간에 공을 따냈다. 실로 놀라운 반응 속도였다.
 
 -지속 스킬, ‘모난 머리가 공 맞는다’가 발동합니다. 헤딩이 28.2% 확률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합니다.
 
 때애앵!
 정말 멋진 장면이었으나 아쉽게도 공은 골대에 맞고 라인을 나가고 말았다. 멋지게 질러 놨는데, 정작 헤딩이 빗나간 것이다.
 “자, 잘했어!”
 오솔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러다 곧 자신이 말을 더듬었다는 걸 깨닫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주원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한국에 와서 거의 처음으로 웃는 것이었다. 내내 꽉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아!’
 최주혁 감독은 우주원의 표정을 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이들은 아직은 어린 선수들이었다. 그렇기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 쉽고, 그에 따라 실력도 천차만별로 변화한다.
 ‘내 불찰이구나.’
 다행히 이번 훈련을 통해 우주원이라는 우측 날개를 되찾았고, 동시에 오솔의 반응 속도가 얼마나 뛰어난 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의 경로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수비수의 시선을 피해 움직이는 센스도 발군이었다. 무엇보다 달리는 타이밍을 잡는 능력이 기가 막혔다.
 오솔은 간신히 공에 닿을 수 있는 타이밍에 움직였다. 덕분에 수비수는 뒤꽁무니만 보다가 헤더를 내주기 일쑤였다.
 오솔을 막기 위해서는 그와 대등한 수준의 예측력이 필요해 보였다.
 ‘보면 볼수록 타이밍 읽는 센스가 돋보인다. 이 정도면 라인 브레이킹(오프사이드 선상에서 수비 뒷공간으로 침투하는 것)도 잘 하겠는데?’
 최주혁 감독이 제대로 보았다. 지난 10년간 오솔의 주특기가 바로 이 라인 브레이킹이었다.
 비록 순간 속도, 주력, 볼터치 같은 능력치는 회귀와 동시에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이 타이밍을 읽는 능력만큼은 시스템이 아닌 오솔이 몸으로 익힌 기술이었다.
 뻥! 파앗! 철썩!
 이윽고 재개된 훈련에서 오솔은 아까와 같은 코스로 들어온 크로스를 멋들어지게 골로 연결했다. 단순한 연습이었음에도 절로 시선이 갔다. 그만큼 파괴적인 모습이었다. 오솔도 오솔이지만 똑같은 코스로 공을 보낸 우주원의 능력도 돋보였다.
 “더 빠르고 날카로운 공은 없어?”
 그러나 오솔은 만족하지 못한 듯 우주원을 몰아붙였다.
 “같은 코스로만 차지 말고, 내 움직임이랑 수비수의 위치를 보면서 차란 말이야. 공 컨트롤은 되면서 머리를 못 써서 B급 선수 취급을 받고 싶어?”
 오솔의 요구는 간단했다. 수비수와 골키퍼가 없는 지역 그러면서 공격수만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공을 올리라는 것.
 ‘말로는 진짜 간단하네.’
 그게 쉽게 되면 우주원이 지금 J2리그에 있겠는가, 유럽에서 뛰고 있지. 그러나 오솔은 이해하질 못했다.
 “그게 뭐가 어려워? 아니, 어려워도 계속해봐야지 미리 포기하고 고개만 젓고 있을 거야?”
 훈련이라서 좋은 점은 그래도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주원은 미리 수비수와 골키퍼 위치를 기억하고 돌파에 들어갔다. 다행히 수비수가 한 명뿐이라 빈 공간이 많이 보였다.
 ‘별명이 청송고의 클로제라고 했지?’
 그는 아예 상대를 월드클래스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공을 찼다. 난해하고 엉뚱한 공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솔은 그 모든 공에 어떻게든 머리와 발을 갖다 댔다. 우주원은 상대가 조금은 무리다 싶은 공까지 모두 받아내자 슬슬 신나기 시작했다.
 ‘어디 이것도 받아낼 수 있어? 이것도?’
 훈련이 진행될수록 우주원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 * *
 
 그날 밤, 우주원의 방에 성지훈 패거리가 쳐들어왔다.
 “야. 쪽발이! 너 잠깐 나와 봐.”
 우주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오솔이 그의 어깨를 누르곤 대신 일어났다.
 “야. 쪽팔리니까, 좀 적당히 해라. 우리 지금 재밌게 놀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뭐, 쪽팔려?”
 87년생의 건방진 언행에 성지훈 일행의 눈초리가 살벌하게 변했다. 덕분에 우주원은 타깃에서 벗어났지만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우주원은 괜히 자신 때문에 오솔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였다.
 “그래, 이 새끼들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쪽발이 타령이야.”
 “이 새끼가 안 되겠네. 막내라고 봐줬더니 정신 못 차리고 막 기어오르는구나?”
 성지훈의 말에 이상현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족히 7㎝는 더 큰 인간이 내려다보니 확실히 위압적이었다.
 “왜? 계급장 떼고 한 번 붙어볼까? 억울하면 나가든가. 뭣하면 4 대 1로 붙어도 괜찮아.”
 “이런 미친놈!”
 이상현은 큰 발을 들어 앞발차기를 시도했다. 사람 좀 차 본 듯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오솔은 옆으로 살짝 피하며 발을 옆구리에 끼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한쪽 발로 버티려던 이상현은 금방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너는 원피스도 안 봤냐? 발로 먹고사는 놈이 발길질을 함부로 하면 쓰겠어?”
 오솔은 이상현의 발등에 난 털을 한 움큼 잡고 뜯어냈다.
 “아악!”
 “조용히 해, 자식아. 누가 보면 발목이라도 비트는 줄 알겠네.”
 이상현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보려 했으나 오솔에게 걸린 이상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성지훈 패거리는 주춤거렸다. 힘이 가장 센 이상현이 너무도 쉽게 제압당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건방진 놈 같으니, 선배들한테 이러고도 멀쩡할 줄 알아?”
 “실제로 난 멀쩡하잖아? 내 생각에는 앞으로도 멀쩡할 것 같은데?”
 “너 따위를 담가버릴 방법은 많아!”
 “그럼 후환을 없앨 겸 지금 당장 니들 병실로 보내버려야겠네.”
 “이런 미친놈.”
 성지훈 일당은 한차례 달려들었으나 오솔은 가볍게 날린 손바닥으로 그들을 모두 넘어뜨렸다.
 ‘주먹까지 썼다간 진짜로 큰일 나니까, 조심해야지.’
 너무도 쉽게 제압당하자 그들은 쉽게 덤비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들이 비록 다년간의 운동으로 다져진 몸들이었으나, 실전 싸움을 겪은 적은 거의 없었다. 반면 오솔은 이런 상황에 꽤나 익숙해 보였다.
 ‘젠장. 설마 반항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진심으로 치고받으면 아무리 성지훈이라고 해도 문제가 될 공산이 컸다. 그는 오솔에 비해 잃을 것이 많은 처지라 아무래도 일을 키우기가 꺼려졌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작전상 후퇴였다.
 “건방진 놈! 두고 보자!”
 “너무 싸구려 악당처럼 말하는 거 아니냐?”
 우주원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괜찮을까?”
 “괜찮아. 오늘 감독님 얼굴 못 봤어? 웃느라 광대까지 떨리셨잖아. 우리에게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기회를 주실 거야.”
 “그럴까?”
 “그럼. 이제는 진짜 축구 실력으로 붙으면 되는 거야. 실력으로 붙으면 우리가 저들에게 꿇릴 것 없잖아?”
 실력으로만 붙는다면 우주원도 자신이 있었다. 현재 주전으로 뛰는 우측 미드필더는 발만 좀 빠르다 뿐이지 크로스 실력은 영 어설펐기 때문이다.
 오솔은 다시 앉으며 물었다.
 “그보다 구할 수는 있는 거야?”
 “그, 그거? 안 돼. 아무리 일본이라도 성인 확인은 칼같이 한다고.”
 “내가 두 번이나 도와줬는데 그거 하나 못 구해 주냐?”
 “설사 산다고 해도 공항에서 걸릴걸? 그럼 무슨 쪽이야. 절대 안 돼.”
 “으으. 악키의 초기작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도대체 나도 모르는 av배우를 어떻게 아는 거야. 게다가 막 데뷔한 신인을······.”
 오솔은 한참을 더 조르다가 잘 시간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 * *
 
 파주 NFC에 입소한 지 사흘이 지나고, 이제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은 둘로 나뉘어 훈련을 시작했다. 최주혁 감독의 입에서 각각의 명단이 밝혀졌다.
 “A팀은 성지훈, 이상현, 오웅수······ 이상 14명이고, B팀은 여민국, 고영주, 우주원······ 그리고 오솔까지 마찬가지로 14명이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A팀에 속한 이들은 명백히 밝은 얼굴이었고, B팀이 된 선수들은 실망한 티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선수 구성상 A팀에는 85년생 주축 선수들이 많았고, 86년생인 고영주를 제외한 성지훈 패거리가 모두 속해있었다.
 반면 B팀은 기존의 85년생 후보 선수들과 86년생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A팀이 1군이었고, B팀이 2군이었다.
 우주원은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가 역시나 하며 실망했다. 하긴 겨우 하루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주전이 되길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A팀은 기존 전술대로 여기 이충호 코치가 훈련을 감독할 예정이고, B팀은 내가 맡아서 새로운 전술을 훈련할 생각이다. 일주일 뒤에 연습 시합을 해서 평가할 예정이니까 열심히 훈련하길 바란다.”
 주전 선수들은 기존의 전술에 익숙할 테니 백업 선수들을 활용해서 새로운 전술을 테스트해보겠다는 뜻 같았다.
 좋게 보면 팀 전술을 시험하고 새로운 선수를 찾고자 하는 의미였지만, 나쁘게 인식하면 단순히 주전팀의 연습 상대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주전과 비주전의 차이 때문에 B팀이 경기력에서 밀릴 게 분명했다.
 성지훈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이충호 코치를 쫓아가며 물었다.
 “선, 아니지, 코치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어제 갑자기 감독이 팀을 나누더니 연습 시합을 하자고 하더라고. 뭔가 새로운 전술을 훈련해보고 싶다나?”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겠죠?”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하지만 설령 어떤 의도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기면 해결될 일이야. 저쪽은 후보들에 급조된 전술이니까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다.”
 확실히 전술을 몸에 익히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한 팀으로 오래 활동한 선수들도 아니고, 대표팀 소집으로 방금 모인 선수들에게 전술을 가르치는 건 더 어려웠다.
 실력과 전술 숙련도 등을 고려하면 A팀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성지훈도 잔인하게 웃을 수 있었다.
 ‘흐흐. 그 건방진 놈을 깔아뭉갤 좋은 기회구나.’
 그는 천지분간 못하는 신입에게 레벨의 차이를 보여줄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났다.
 
 * * *
 
 한편 최주혁 감독을 따라온 B팀 선수들은 새로운 전술과 포메이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번에 최 감독은 기존의 4-4-2가 아닌 4-3-3을 꺼냈다. 원톱 자리에 오솔을 넣고, 우측 날개로 우주원을, 좌측 날개는 고영주를 낙점했다.
 “솔이는 중앙에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도록 하고, 주원이는 클래식 윙어로서 측면을 파고드는 플레이를 펼쳐라. 그리고 영주는······.”
 사실 고영주는 윙어로 뛴 적이 거의 없었다. 소속팀에서 투톱 중 세컨드 스트라이커처럼 뛰면서 자유롭게 움직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측면 자원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영주는 측면에서 이렇게 중앙으로 들어오는 역할이다. 전방에서의 플레이메이킹은 네가 도맡는다. 여기서 뛰는 게 영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익숙해지면 기존의 자리보다 더 편할 거다.”
 한 마디로 바르셀로나의 호나우지뉴처럼 뛰라는 주문이었다. 적응만 할 수 있으면 확실히 고영주 같은 타입이 더 힘을 쓸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민국이는······.”
 최 감독의 말이 진행될수록 여민국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민국 역시 포지션 변경을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이번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어줬으면 좋겠다.”
 사실상 새로 구상하는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여민국이었다.
 물론 전방에서 공격을 전개하며 찬스를 만들어내는 고영주나 우주원도 중요했다. 그리고 훌륭한 마무리를 선보여야 하는 오솔의 존재도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후방에서 수비를 보호하고, 동시에 공격의 토대를 쌓아야 하는 여민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다고 할 수 있었다.
 “공수에 걸쳐서 팀의 균형을 잡고, 수적 우위를 점하는 역할이다. B팀의 주장이자 전체적인 전술의 핵심이고, 이걸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여민국은 본래 공격수였다가 수비수로 전환했기에 공수에 두루 능했다. 라인 컨트롤이나 커버하는 걸 보면 전술 이해도도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패스도 준수하고, 체력적으로도 준비된 선수야. 포지션에 조금만 익숙해져도 지금의 A팀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여민국은 감독의 확신에 찬 눈빛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역할 그리고 중심을 잡고 팀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 있는 자리였다. 이것은 그가 너무도 잘하는 일이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최 감독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팀을 만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수비형 미드필더로의 전환은 여민국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일반적인 중앙 수비수로 계속 출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수비 라인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원체 출중해서 나중에는 제법 준수한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지금 보유하고 있는 공격적인 재능은 그대로 썩히게 된다. 그건 너무도 아까운 일이었다.
 중앙 수비수란 말 그대로 중앙을 단단히 지키는 역할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4백 체제에서는 중앙 수비수의 공격 가담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는 좀 더 높은 위치에서 서서 공격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여민국의 재주를 100% 발휘할 수 있었다.
 제대로 적응만 한다면 말이다.
 
 * * *
 
 ‘그야말로 멋지게 적응했군!’
 최주혁 감독은 필드 위를 누비는 여민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는 영리한 선수였다. 포지션을 변경한 지 고작 일주일만에 제법 수비형 미드필더처럼 뛰고 있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며칠간은 등 뒤에 공격수를 놓고 플레이하는 걸 어색해했다. 그러나 작은 발상의 전환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가만, 이건 후방에 있다뿐이지 사실상 공격수로 포스트플레이를 펼치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
 여민국은 공격수일 때의 경험과 수비수로서의 경험을 두루 활용하며 포지션에 적응해 나갔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나이스 인터셉트!”
 여민국은 성지훈에게 향하는 패스를 중간에 가로채더니 그대로 공을 몰고 올라갔다. 그러곤 틈이 보였다 싶은 순간, 벼락처럼 중거리 슈팅을 시도했다.
 “놔둬!”
 아쉽게도 공은 골대를 빗나갔다. 그러나 공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은 수비진에게 경계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전방에 있던 오솔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 인간도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거 아니야? 아니면 회귀를 했거나. 인간적으로 이렇게 빨리 적응을 하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달라진 포지션에 대부분의 선수들이 부침을 겪는 걸 생각하면 여민국의 적응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한 칸 더 위로 올라갔을 뿐인 우주원도 타이밍을 봐서 침투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민국은 아예 처음 서는 위치에서 맹활약 중이었다.
 최주혁 감독은 그 활약을 지켜보며 씁쓸히 웃었다.
 ‘예상대로군.’
 지난 일주일, A팀과 B팀은 각각 7 대 7 실전 연습을 하며 훈련에 몰입했다.
 A팀은 여전히 어떻게 하면 성지훈의 뒤를 받쳐줄 수 있을지 고민했고, B팀은 새로운 전술을 몸에 익힌다고 바빴다. 특히 B팀은 수비 훈련에 많은 공을 들였다. 성지훈이 중심이 된 청소년 대표팀의 약점을 공격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번 연습 시합으로 기존의 전술과 선수기용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아니, 성지훈을 비롯한 선수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우치고 변하길 바랐다.
 비록 B팀을 이끌고 훈련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A팀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았다.
 “천천히 해. 천천히!”
 A팀 골키퍼가 공을 수비진에게 굴렸다.
 오솔은 빠르게 접근해, 수비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공은 쫓기듯이 사이드로 굴러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솔과 우주원이 같이 압박에 들어갔다.
 결국 측면 수비수는 공을 다시 골키퍼에게 돌려야 했다. 골키퍼는 반대쪽 수비수에게 공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나 공은 후방에서만 돌뿐, 쉽게 전진하지 못했다.
 플레이메이커의 부재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뻥!
 결국 장거리 패스가 나왔다. 중간에서 설계해줄 인물이 없으니 아예 중간을 건너뛰는 것이다. 이것은 A팀의 대표적인 공격 패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아니, 이걸 두 가지 패턴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긴 패스로 일단 이상현의 머리에 공을 맞춘 후 성지훈이 마무리하는 전개는 측면에서의 크로스에서 이상현 헤더 그리고 성지훈의 마무리.
 시작만 다를 뿐 일맥상통했다.
 확실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공격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지훈이를 위한 팀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상현이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크다.’
 고생은 이상현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하고 그 과실을 성지훈이 따먹는다고 해야 하나?
 물론 헤딩으로 떨어트린 공을 어떻게든 득점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성지훈도 제 역할을 다 한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득점력을 활용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들을 희생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파앗!
 이상현이 높이 뛰어올랐다. 193㎝의 장신이 점프까지 하자 너무도 수월히 공을 따낼 수 있었다. 그러나 B팀은 애초부터 이상현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잘했어!”
 성지훈은 헤딩 타이밍에 맞게 침투했으나 어느새 공은 밑으로 내려온 여민국의 차지가 된 후였다. 이로써 벌써 세 번째 인터셉트였다.
 ‘너무 뻔히 보이는 수야.’
 이상현을 활용한 공격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하나는 공격 루트가 단조로워서 예측력이 뛰어난 선수에게 쉽게 가로막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수비수가 붙게 되면 위력이 크게 반감된다는 점이었다.
 이번에 최주혁 감독이 공략한 포인트는 전자였다.
 수준급 예측력으로 뛰어난 커버링을 선보였던 여민국에게 이상현과 성지훈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누구보다 연계하기 쉬워야 할 두 명의 공격수들이 따로 떨어진 섬처럼 고립되기 시작했고, 덕분에 A팀의 공격은 지지부진해졌다.
 ‘수비는 이쯤 하면 됐고, 이제 공격수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 지 구경해볼까?’
 최주혁 감독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여민국을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30미터 넘게 전진하고 있었다. B팀의 중앙 미드필더 두 사람은 좌우로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으로 여민국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완전히 노마크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대처법을 발견하지 못한 건가?’
 여민국은 속으로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봤다. 전방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오솔과 중앙으로 깎아 들어오는 고영주 그리고 측면으로 돌아들어가는 우주원의 모습이 보였다.
 파아앙!
 여민국의 선택은 측면의 우주원이었다.
 오솔에게 단번에 패스하기는 힘들었다. 두 줄의 수비 층을 뚫고 동시에 골키퍼에게 걸리지 않을 위치에 공을 보내는 건 지금의 그로선 불가능했다.
 고영주도 마찬가지, 상대가 크게 물러서서 2선과 3선의 거리가 좁혀진 상태에서는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에는 사이드가 정답이었다.
 ‘역시 시야가 뛰어나다. 수비수로 썩히기에는 아까운 재능이야.’
 패스만 조금 더 갈고닦으면 충분히 국가대표 팀에서도 뛸만한 재능이었다. 후방에서 빌드업이 되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드물다는 점에서 보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최주혁 감독을 아마 모를 것이다. 전생에 여민국이 어떠했는지.
 전생에 대학 축구팀에 들어간 여민국은 그곳에서 전형적인 중앙 수비수로 키워졌다.
 안타깝지만 4백과 수비형 미드필더의 흐름 속에서 리베로가 설 자리는 없었다. 나중에는 3백이 다시 유용한 전술 중 하나로 대두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한참 뒤의 일이다. 이 시기에 3백 그리고 리베로는 말하자면 구형 카세트 같은 존재였다.
 결국 여민국은 보다 수비에 특화된 선수가 되었고, 청소년기에 쌓았던 공격적인 재능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나고, 여민국은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로 뛰어난 수비수가 되었으나 그가 공격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그랬던 여민국이 오솔의 회귀와 함께 달라졌다. 대통령금배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계기로 청소년 대표팀에 소집되었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이 한 사람의 운명을 뒤바꾼 것이다.
 “나이스 패스!”
 최주혁 감독이 감탄하는 와중에도 경기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우주원은 수비수 뒤로 돌아가는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라인을 깨트렸다. 수비 뒷공간으로 달리며 페널티 에어리어를 봤을 때, 하필이면 오솔과 딱 눈이 마주쳤다. 오솔이 도발적인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좋은 발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꾸 B급처럼 굴래?’
 우주원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분명 전에 들었을 때는 칭찬이라고 생각했던 말이 갑자기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일말의 오기가 불쑥 솟아올랐다.
 ‘내가 이것 하나 못 찰 줄 알고?’
 우주원은 속도를 조금씩 줄였다. 발걸음이 짧아질 때마다 한 호흡씩 힘이 비축되었다. 아주 작은 기운이었고,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양이었으나 크로스에 임팩트를 줄 수만 있다면 뭐라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바로 간다!’
 크로스를 올리기 직전, 우주원은 오솔에게 눈빛을 보냈다. 건방진 후배를 닮은 아주 다부지고 씩씩한 눈빛이었다.
 뻐엉!
 달리는 자세 그대로 차올린 공은 토성의 고리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 사선으로 기울어져 급격히 휘어져 들어갔다.
 오솔조차도 낙하지점을 찾기 어려운, 아주 날카로운 궤도를 그리는 공이었다. 그러나 오솔은 언제나 그렇듯 답을 찾아냈다.
 파앗!
 중원에 자리한 세 명의 수비수 틈에서 오솔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나머지 수비수들은 모두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우주원의 크로스가 흡사 난해한 수학 문제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정은 골키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튀어 나가지도, 그렇다고 자리를 잡지도 못하고 그저 바보처럼 눈동자만 굴려댔다.
 그러다가 공이 오솔의 머리를 찾아가는 순간, 본능적으로 무릎을 움찔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머리에 닿았다고 판단한 순간, 공은 어느새 골대의 빈틈을 파고들고 있었다.
 철썩!
 그렇게 골이 터졌다.
 여민국의 스루패스와 우주원의 논스톱 크로스 그리고 오솔의 헤더까지······.
 A팀 수비수 전원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지켜보던 모두가 전율을 느꼈다.
 오솔은 우주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달려들었다.
 “내가 신계에 오르겠다고 했지? 하하하! 정말 멋진 크로스였어!”
 신계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메시와 호날두.
 오솔의 반인반신 드립은 그들처럼 되겠다는. 아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겠다는 각오를 나타낸 말이었다.
 우주원 역시 벅찬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도 될 수 있을까? 루이스 피구(Luis Figo)처럼 전설적인 선수가.”
 우주원의 입에서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윙어, 루이스 피구의 이름이 나왔다. 비록 2002년 월드컵에서는 송진우의 밀착 마크에 당해 별다른 활약을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윙어 중 한 사람이었다.
 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네가 내 날개(Wing)가 되어주면, 나는 네 발톱이 되어 줄게.”
 “독수리처럼?”
 “아니, 드래건이다! 크큭. 내 오른발에 갇힌 흑염룡이 꿈틀거리는구나. 드디어 봉인을 풀 때가 되었는가?”
 “역시 중2병이······.”
 
 * * *
 
 “뭐 이런 어이없는 일이······.”
 성지훈이 허탈하게 웃으며 자기 진영으로 돌아갈 때, 오솔이 비웃음 가득 담아 말했다.
 “전에는 두고 보자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하실까? 흐흐. 겁을 먹은 거야, 아니면 원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이런 건방진 새끼······ 운 좋게 한 골 넣었다고 바로 입을 털어?”
 실실 쪼개며 약을 올리던 오솔은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소꿉장난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살벌하고도 박력 있는 모습에 성지훈의 입이 자동으로 닫혔다.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는지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오솔은 입가에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아니면 지금처럼 천천히 구경해도 좋고, 내가 관광버스 하나는 제대로 태워줄게. 이 허접 쓰레기들아.”
 “이익!”
 성지훈의 주춤 했던 기세가 다시 살아났다. 오솔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덕분에 오솔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가리느라 고생했다.
 ‘역시나 멍청한 놈이었어. 겨우 이따위 도발에 넘어오다니.’
 인종차별적인 욕설은 물론이고 가족을 걸고 들어가는 패드립까지 치는 곳이 축구판이었다.
 오죽하면 2006년 월드컵에서 지단이 마테라치에게 박치기까지 했겠는가. 그가 무슨 박치기 공룡도 아니고······.
 오솔은 거칠게 살아오기도 했었고, 축구판에서 10년 넘게 굴렀기 때문에-심지어 그중 3년은 중국에서 뛰었다.- 이런 종류의 도발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이미 도가 텄다.
 ‘이로써 수비는 한 층 더 쉬워지겠지.’
 이상현은 큰 키와 헤딩만 빼면 워킹데드나 나름 없었다. 거기에 성지훈까지 흥분해서 제 플레이를 못한다?
 ‘그럼 경기 내내 당하기만 하다 끝나는 거지, 뭐.’
 지금처럼 좁은 울타리에만 갇혀 편 가르기에만 몰두한다면 성지훈 패거리는 금방 도태되고 말 것이다.
 
 
 6장 세계 무대로!(1)
 
 
 이후에 경기는 너무도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성지훈의 흥분으로 그나마 기대할만했던 투톱의 호흡도 어그러진 것이다.
 전방에서 힘없이 공을 뺏겨대자 후방의 선수들도 급격히 페이스를 잃었다. 기계라 할지라도 잠시 쉬며 기름칠할 시간을 줘야 하는데, 지금 A팀 선수들은 벌써 몇 십 분간 수비만 반복하고 있었다. 자연히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골이 들어갔다.
 “완전히 무너졌군.”
 벌써 세 번째 득점이었다.
 오솔의 헤딩으로 한 골, 여민국의 중거리 슈팅이 튀어나온 걸 우주원이 마무리해서 또 한 골, 마지막으로 코너킥 상황에서 여민국의 러닝 점프 헤딩골까지······.
 경기가 끝났을 때 A팀의 수비진은 그야말로 영혼까지 갈린 듯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반면 B팀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
 사실상 오솔과 우주원, 여민국의 활약 덕분에 이긴 것이었지만, 꼴도 보기 싫은 성지훈 일당이 탈탈 털리는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낀 것이다.
 팀 케미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최주혁 감독의 쓰게 웃으며 자축을 하는 B팀 선수들을 훑어봤다.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소득만 있던 건 아니었어.’
 그의 시선은 특히 고영주에게 닿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고영주는 이번에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단순히 기회가 없었다는 게 아니었다. 측면에서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헤맸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중앙과 측면을 쉼 없이 오갔던 선수가 측면에서 뛸 줄 모른다니 말이다.
 단순히 한 칸 옆으로 이동하면 되는데 그게 어렵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에서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것과 측면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것은 단순히 운동의 방향만 바뀌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의 목적부터 방향까지 모든 것이 반대였고, 이를 능수능란하게 적용하는 건 웬만한 전술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힘들었다.
 ‘결국 영주는 영락없이 지훈이 백업으로만 써야 하는 건가?’
 계륵(鷄肋), 그야말로 계륵이었다.
 당장의 분위기로 봐서는 오솔과 성지훈은 동시에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 4-4-2 포메이션을 들고나간다면 투톱은 무조건 이상현-성지훈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오솔과 고영주의 투톱을 쓰는 것도 메리트가 없었다. 그보다는 여민국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리고 오솔을 원톱으로 세우는 편이 더 나았다.
 안정적인 수비력과 다채롭고 파괴적인 공격력을 둘 다 얻게 되는 길이니 굳이 고영주를 쓴다고 기존의 4-4-2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고영주는 성지훈의 백업 이상의 쓰임은 없게 된다.
 ‘영주의 발재간이 아깝긴 하지만······.’
 발재간은 고영주가 더 뛰어날지 몰라도 공격수로서 갖고 있는 득점력은 성지훈 쪽이 더 좋았다.
 성지훈은 체격이 더 크기도 했고, 거기다 드리블 실력이 아주 엉망인 것도 아니었다.
 ‘당분간은 이것저것 시험을 해봐야겠군.’
 최주혁 감독의 고민은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고민은 차라리 행복한 일이었다. 이전처럼 꽉 막힌 변기 마냥 답답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 * *
 
 2003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다시 그 눈이 녹아갈 때쯤 청송고 축구부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민국이 그들의 주장이 떠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네가 주장이라니 세상 말세다.”
 “감독님이 내 리더십을 주의 깊게 보신 거지. 네 지랄 맞은 성격까지 다 받아주는 넓은 마음은 덤이고.”
 새로운 주장, 이승훈이 콧대를 높였다. 이제는 주장이니 오솔도 함부로 하지 못하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천방지축 날뛰던 오솔이 여민국에게는 유독 약했기에 하게 된 추측이었다.
 “그래? 그럼 어디까지 받아주나 한번 제대로 지랄해 볼까?”
 “······님아. 자제 좀요.”
 “짜식, 까불고 있어.”
 “그나저나 대표팀은 그 후로 어떻게 됐어? 개학 전에도 소집했었다면서.”
 오솔은 벌써 두 번째 소집 요청을 받고 갔다 온 길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우주원과 여민국도 함께 있었다.
 A팀에서는 오솔에게 탈탈 털렸던 수비수 하나가 탈락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이제 K리그 팀 FC 도깨비(Goblin)에 입단한 여민국이 들어갔다.
 이번 소집에서 최주혁 감독은 여민국에게 많은 힘을 실어줬다. 팀의 중심을 성지훈에서 여민국으로 바꾸려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4-3-3을 A팀에도 적용해서 오솔, 성지훈, 이상현 세 공격수를 번갈아 기용하기도 했다.
 리그 개막을 기다리는 K리그 팀, 대학팀, 실업축구팀 세 곳과 연습 경기를 가졌는데, 오직 오솔만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자연히 성지훈은 불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감독이 미쳤나? 4-4-2로 잘 나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4-3-3으로 바꿔서 이 난리를 치는 거지?’
 원톱에 서게 되면서 성지훈의 파괴력은 반 이하로 뚝 떨어지고 만다.
 이상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냥 걸어 다니는 백보드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때부터 성지훈은 이충호 코치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선배님, 이건 문제가 좀 있는 거 아닙니까? 쪽발이 새끼가 계속 발탁되는 건 그렇다고 쳐도 갑자기 원톱이라니요. 이건 대놓고 절 쳐내겠다는 뜻이잖아요.”
 “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단순히 연습을 하는 걸 가지고 태클을 걸 수는 없으니까.”
 “만약 제가 선발에서 제외되면요?”
 “걱정마라. 만약 그렇게 되면 보다 확실하게 압박할 테니까.”
 그러나 우려대로 최주혁 감독은 오솔을 원톱으로 기용해서 평가전에 들어갔고, 오솔은 그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한국 축구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충호 코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폰을 꺼내 ‘위원장님’이라고 저장된 번호를 꾹 눌렀다.
 “예, 선배님.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예? 아, 벌써 연락을 받으셨군요. 아닙니다. 저야 물론 우리 대(大) 영신고(高) 후배를 챙겨주고 싶었죠. 그런데 이 감독 놈이 말을 안 듣습니다. 갑자기 무슨 고집이 생겼는지 이상한 놈들을 싸고도는데, 진짜 말이 안 통합니다.”
 “·······.”
 “예, 예. 그럼 제가 언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편하실 때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학연으로 얼룩진 끈끈한 대화가 오간 결과, 최주혁 감독은 늦은 밤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게 되었다.
 “예, 기술위원장님.”
 “어, 최 감독. 잘 지냈는가?”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거두절미하고······ 내, 듣자 하니 최근에 전술에 다양성을 좀 주고 있다면서?”
 “그것이······.”
 “아니,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네. 전술이나 선수 선발은 감독의 재량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다양한 전술을 시험하는 거 좋지.”
 “네.”
 “다만, 조금 더 멀리 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말이야.”
 “······.”
 최주혁 감독은 왠지 뒷말을 알 것 같았다.
 “물론 감독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대회도 중요하겠지, 그게 다 성과 아닌가. 하지만! 유소년 축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유소년 축구의 목적이 뭔가, 차기 국가대표 감을 길러내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자네 힘든 거, 내가 다 알아. 나도 예전에 3년 정도 청소년 대표 맡았던 적이 있었어. 위에서는 당장 성적을 내라고 난리지, 한편에서는 성적에 연연하기보다는 선수들의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해대지. 아주 정신없었지. 쯧쯧.”
 모 대통령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떠오르는 멋진 꼰대 짓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는가? ‘아, 그때 내가 좀 더 멀리 봤어야 했는데, 내 소견이 너무 좁았구나.’ 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 그때 선수들을 믿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투자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여기서 그가 언급한 ‘선수들’은 그의 까마득한 고교 후배 ‘성지훈’과 K리그 구단에서 차기 선발로 키우는 유망주들을 뜻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허허. 이거 늙은이가 너무 말을 많이 했군. 나이 먹으면 괜히 걱정만 늘어서 말이야. 들어주느라 고생했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먼.”
 “아닙니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래, 다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언제까지 유소년만 할 건 아니지 않은가. 멀리 봐야지. 멀리.”
 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의 통화는, 그렇게 당근 끄트머리를 살짝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최주혁 감독에게는 당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직전에 날아온 채찍질에 온몸이 쓰라렸기 때문이다.
 그는 솟구치는 모멸감을 내리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공격에 오솔, 수비에 여민국을 중심으로 한 베스트 일레븐이 한순간에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녹아 없어졌다.
 “젠장······.”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종이 뭉치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기술위원회에서 정리해서 준 선수 정보지였다. 그 최상단에는 성지훈의 얼굴과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다.
 
 * * *
 
 그렇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들의 요구대로 하는 수밖에······.
 청소년 대표팀의 전술은 다시 4-4-2 플랫으로 돌아갔고, 선발은 이상현과 성지훈의 것이 되었다.
 최주혁 감독이 오솔 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을 계속 대표팀에 부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민국 역시 구단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비진에 들어온 여민국의 존재는 수비의 안정감과 기습적인 스루패스를 더해줬다. 아주 약간이나마 팀 전력이 상승했다.
 ‘제기랄! 분명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팀인데······.’
 그러는 사이 2004년도 대통령금배 전국대회가 열었다. 오솔은 다시금 청송고의 전사들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번에도 득점왕에 이어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주장으로 출전한 이승훈은 결승전에서 멋진 크로스로 오솔의 헤딩골을 돕고 외쳤다.
 “어때? 그 우주원인지 우주 깽깽이인지 하는 애보다 내가 낫지?”
 오솔이 우주원의 크로스와 비교하며 쉼 없이 그를 갈군 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어쨌든 덕분에 오솔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그는 이미 작년의 성지훈, 이번 해의 고영주를 능가하는 고교 최대어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러나 고교에서의 성공과는 달리 청소년 대표팀에서 오솔은 쓸쓸히 벤치를 지키는 신세였다.
 ‘이번 대회까지 뛰었으면 못해도 레벨이 한두 개는 더 올랐을 텐데, 아쉽네.’
 대한민국 19세 이하 대표팀은 9월 말, 태국에서 열린 AFC U-19 대회에서 내내 4-4-2 전술을 선보였다. 그리고 퍽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승에서 중국을 만나 가뿐히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대회전까지만 해도 이상현 대신 오솔을 써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성지훈이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터트린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는 언론이고, 네티즌이고 모두 같은 의견을 쏟아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오솔보다는 대학 축구를 씹어 먹고 있는 성지훈을 위해 팀을 짜야한다고 말이다.
 이에 대한 축구 커뮤니티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고교 대회랑 성인 대회는 레벨이 달라. 뭐, 오솔이가 고교를 평정했다고? 그래서 뭐? 성지훈은 역대 연령별 대회를 전부 제패하고 올라온 놈이야. 그리고 지금은 대학 리그까지 뼈 채 씹어 먹고 있다고! 무엇보다 결승전에서 해트트릭 터트리는 거 안 봤냐?]
 [맞는 말이야. 솔직히 오솔은 거품이라고 본다. 완전히 보글보글이라고! 이놈의 거품 때문에 이 차가 티콘지 벤츤지 분간이 안 가! 내 생각에 오솔이는 잘 쳐봐야 써니타 수준이다.]
 [ㅇㅇ. 얼굴은 확실히 흉기차더라.]
 [솔직히 87년생들이 심각하긴 하지. 거의 인재 절벽 수준이라니까. 메시가 태어날 때 87년생들의 재능을 다 가져간 게 분명해. 아니면 이렇게까지 인재가 없을 수 있겠냐?]
 
 여민주는 관련 글에 하나씩 비추를 박고, 오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남자친구를 응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응. 솔아, 뭐해?”
 “나? 지금 상태ㅊ······ 모, 몸 상태를 좀 확인하고 있었어.”
 “몸 상태는 왜?”
 “별거 아니야. 그냥 일상적인 거야.”
 여민주는 오솔의 목소리가 밝은 걸 느끼고 배시시 웃었다. 겨우 18살,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을 나이임에도 그녀의 남자친구는 흔들림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신념에 찬 모습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악동 같은 모습도 좋지만, 이렇게 듬직한 것도 멋있어.’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였지만 그녀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 컨디션은 어때? 괜찮아?”
 “응, 현재 89.6퍼센트 정도야.”
 “묘하게 구체적인 수치네? 그런데 뭐 피곤한 일 있었어? 왜 100프로가 아니야?”
 “어? 내가 89퍼센트라고 했나? 하하······. 잘못 말했어. 99.6퍼센트야. 거의 100퍼센트지. 그러니까 걱정 마.”
 “······알았어. 그건 그렇고 언제 시간 돼? 내가 보러 갈게.”
 여민주는 고기라도 좀 사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속을 잡았다. 오솔의 집이 풍족하지 않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이처럼 용돈을 모아서 가끔씩 고기를 먹으러 가곤 했다. 그녀 나름의 내조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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