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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권

2019.07.17 조회 4,362 추천 47


 꿈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권
 
 
 목차
 
 1장 프롤로그
 2장 이상한 꿈
 3장 카라스 마을
 4장 전투
 5장 투자
 6장 돌발 퀘스트
 7장 스킬과 장비
 8장 기묘함
 9장 마법
 10장 안개
 11장 돈
 12장 용병등록
 13장 대비
 14장 향수와 같은 차
 15장 자칭 초능력자(1)
 1장 프롤로그
 
 
 나는 자기중심적이며 손해를 싫어하는 계산적인 사람이다.
 덕분에 종종 배려심이 부족하다느니, 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항상 그만큼의 결과를 내왔기에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어느 정도 능력이 받쳐 주니, 사람들은 알아서 냉랭한 성격을 무뚝뚝하다고 포장해 주었다.
 어쩌면 제법 준수한 외모가 한몫한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서울에서 명문으로 통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고3 수험생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서울대에 입학했다.
 이후 대학 4년과 군대 2년, 약간의 휴식기를 더해 26살의 나이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기업에 취업.
 엄친아의 표본이자 내세울 것 없는 집안에서 나는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지훈씨 정말 답답하네. 그냥 시킨 대로 하면 되지. 왜 자꾸 토를 달아?”
 “그게······. 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이어서요. 이렇게 하면 더 빠르게 마무리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랫동안 선배들이 고수해온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거잖아?”
 “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더 나은 방법이 있으니 일부 수정을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으로······”
 “아주 잘나셨네. 그렇게 나랑 얼굴 붉히고 싶어?”
 “아, 아뇨.”
 “마지막 경고야. 지금 당장 자리로 쳐 돌아가서 그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료 정리해서 나한테 올려. 알겠어?”
 “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인생 최고의 결과물이자 타이틀이라 할 수 있는 직장은 탄탄가도의 연장선이 아닌 흙과 모래, 자갈로 가득한 오프로드였다.
 첨단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대기업의 내부는 군대만큼이나 비합리적이고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체된 집단이었다.
 상사들은 아랫 직원이 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으며, 누구 하나가 의욕을 보이면 귀찮은 짓 말라며 주의를 줬다.
 그런 주제에 부하가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는 잘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니 이 정도면 군대보다도 질이 나쁘다 볼 수 있다.
 성격 같아선 문제점을 하나하나 따지며 잘못을 지적하고 싶지만, 부모님의 기대와 이후 인생을 생각을 하면 분을 삼키고 직장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요?”
 “H케미컬은 지훈씨 담당이잖아! 이게 발뺌한다고 해결될 일이야? 무려 50억이 공중에서 사라졌는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고!”
 “잠시만요! 저는 그저 이메일로 날아든 거래 내역을 보고서에 추가했을 뿐입니다! 조작이 가능한 입장이 아니에요!”
 “그 보고서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니까!”
 “그게 무슨······.”
 “지훈씨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야! 나까지 문책을 피할 수 없게 됐잖아!”
 “보고서! 그 보고서 좀 보여주세요!”
 “됐고! 아마 계좌 확인도 하게 될 테니까. 찔리는 게 있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모두가 인내하는 만큼 아무리 회사가 엿 같아도 참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고 불합리란 단어에 동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 부족했을까?
 나는 입사 1년 5개월 만에 자금유출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해고를 당했다.
 황당한 건 내 급여 계좌로 조사당일 날 3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누가 봐도 수상하게 여길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사건은 추가적인 조사 없이 나만 독박을 쓰고 끝이 났다.
 “그러게 내가 말했지? 시킨 일만 하라고. 추가 고소 없이 퇴사조치만 하는 걸 감사히 여겨.”
 “이렇게 당하고만 못 끝냅니다. 두고 보시죠.”
 “지훈씨, 이 사건을 더 이상 키우려 하지 마. 자칫 50억 손실금에 대해 민사 소송이 들어 올수도 있으니까.”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내 말은 주제 파악을 하란 거지.”
 50억이 손실이 났음에도 회사는 이를 덮기 바쁘다.
 바보가 아니라면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회사 윗대가리에 의해 벌어진 일이란 걸.
 비자금 문제일 수도 있고, 뇌물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개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지훈씨라면 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저희와는 맞지 않는 듯하군요.”
 -면접 번호 101, 조지훈 님. 다음에 더 좋은 모습을 만나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본사에 입사지원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비란 단어와 거리가 멀었던 인생에 처음으로 맞이한 내리막길.
 우습게도 한번 내리막길에 들어서니,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1년 5개월만에 이름 높은 대기업에서 해고를 당한 이력은 낙인이 되어 아무리 사정을 설명하고 듣기 좋게 포장을 해도 면접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뭐야 이건?”
 그런데······.
 기약 없는 소모전에 서서히 지쳐가던 내게 예상치 못한 기적이 찾아왔다.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토끼 5마리 사냥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지도
 2장 이상한 꿈
 
 
 -스스스스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는 울창한 숲속.
 나는 맨발로 풀을 딛고 서서, 구름이 잔뜩 낀 음산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꿈?”
 내게 갑자기 몽유병이 생긴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은 꿈이 분명하다.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느닷없이 눈에 펼쳐진 광경이 이랬으니······.
 이게 말로만 듣던 자각몽이란 걸까?
 “그렇다면 꽤나 감사한 상황이네.”
 꿈인 만큼 부끄러운 짓을 저질러도, 악덕한 일을 저질러도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돼버린다.
 더구나 자각몽에선 내가 바라는 대로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니, 단 하루 동안은 신이 된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보통의 혈기 왕성한 27살의 남성이라면 예쁜 여자라도 불러 광란의 파티를 즐기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전 직장의 ‘팀장과 직속상사’의 얼굴뿐이었다.
 “개새끼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지만, 요 근래 내 성격도 참 많이 바뀌었다.
 나는 이 기회에 피의 복수를 꿈꾸며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길 바랐다.
 “······.”
 하지만 이야기로 들은 것과 달리 내 바람은 자각몽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그저 숲속에서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만이 더욱 귓가를 자극했다.
 “그럼 그렇지.”
 요즘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기에 나는 조소를 흘리며 숲속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잠에서 깰 때까지 죽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건 형편 좋은 자각몽이 아니라 악몽의 한 종류가 분명하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공허한 악몽.
 새소리는 물론,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데다가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스산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분위기가 이러니, 없던 공포심도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오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꿈이라 그런지 불빛 하나 없는 숲속임에도 생각보다 시야가 밝아서 주변 풍경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목적의식 없이 발걸음을 놀렸고 얼마 안 있어 황당한 장면과 대면했다.
 
 [얼룩 토끼]
 [흰 토끼]
 [검은 토끼]
 
 식물 빼곤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던 숲속에서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오더니, 그곳에 온갖 종류의 토끼가 뛰어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토끼의 머리 위엔 게임처럼 친절하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뭐야 이건?”
 영문을 모르겠다.
 그런데 황당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토끼 5마리 사냥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지도
 
 “게임이냐?”
 말 그대로 아무래도 이 꿈의 컨셉은 롤플레잉게임인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이 컨셉에 따라줘야 할 이유는 없다.
 귀찮게 토끼 잡겠다고 달려드는 것보다 토끼들 덕에 으스스한 분위기가 사라진 만큼 이곳에서 죽치면서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떨까 싶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니, 토끼 몇 마리가 주변을 배회하다 내게 다가왔다.
 -부시럭
 일반 RPG라면 단검이라도 쥐여줄 텐데, 맨손인 내가 이 녀석들을 사냥하려면 목을 비틀어야 한다.
 박애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구한 얼굴로 뛰노는 토끼의 목을 비틀 만큼 감정이 메말라 있진 않았다.
 
 [퀘스트 발생]
 [퀘스트 발생]
 [퀘스트 발생]
 [퀘스트 발생]
 
 하지만 꿈은 이런 내 행동이 내키지 않는지 눈앞에 홀로그램 메시지를 계속 띄우며 퀘스트를 종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깔끔히 메시지를 무시했다.
 이제 성질 죽이고 참는 것엔 도가 튼 나다.
 내가 장단에 어울려 주지 않자, 미저리 같은 메시지는 얼마 안 가서 사라졌다.
 어차피 이 꿈 자체가 내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일 테니, 쓸데없는 짓이란 것을 깨달은 게 아닌가 싶다.
 
 * * *
 
 “뭐야 대체.”
 이 이상한 꿈을 꾸고 10시간은 넘게 지난 것 같다.
 꿈속의 시간이 현실과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도무지 이 환경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에서 깨기 위해 온갖 난리를 피웠지만, 신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또 수 시간이 지나고,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토끼 5마리 사냥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지도
 
 잊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거 왠지······.”
 마치 잠에서 깨고 싶으면 퀘스트를 수행하란 것 같다.
 “쯧.”
 짧게 혀를 찬 나는 슬그머니 주변에 모여 있는 토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앞서 말했듯이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이 메말라 있진 않지만, 필요에 따라선 얼마든지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이다.
 내키지 않을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토끼의 목을 비트는 건 일도 아니다.
 더구나 이곳은 꿈속이 아닌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는 입고 있던 헐렁한 흰색 반팔티를 벗은 다음 끝을 묶어 포대 자루를 만들고 바로 근처에 있던 토끼들을 기습적으로 주워 담았다.
 토끼들이 내 손길이 닿으면 도망친다는 것을 겪어 봤기에 이렇게 무방비하게 모여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수를 확보해야 한다.
 “이런······.”
 그런데 아무리 내 움직임이 빠르더라도 짐승의 순발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겨우 두 마리를 확보했을 뿐인데. 토끼들은 순식간에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잡은 토끼 하나를 꺼내 들어 목을 비틀었다.
 
 [토끼 5마리 사냥 1/5]
 
 다행히 RPG게임처럼 두들겨 패서 HP를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룰은 없었다.
 따로 데미지 표시도 없고.
 하지만 토끼 목을 비틀 때 감각이 너무도 리얼해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숲 속의 기온은 초가을 정도의 날씨.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진한 풀 내음,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꿈 치곤 지나치게 생생했지만, 토끼 목을 비틀 땐 ‘이게 꿈이 맞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음.”
 내가 토끼를 죽이고 나서부턴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직 3마리를 더 잡아야 퀘스트가 완료되는데, 계속 10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다가가면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달려서 토끼를 잡기란 굉장히 힘들 것이다.
 나는 서바이벌 TV프로그램을 떠올리며 포대로 쓴 옷을 찢어 나뭇가지와 함께 올가미 네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토끼들을 그쪽으로 유인하니, 열에 하나꼴로 토끼가 걸렸고 생각보다 쉽게 사냥을 끝마칠 수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지도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지혜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지능이 1 향상됩니다.]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메시지들.
 어째서인지 보상이 하나 모자랐지만, 다음 날 꿈을 이어서 꾼다는 보장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내 관심사는 ‘이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뿐이다.
 “어?”
 잠시 후.
 세상이 암전되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눈을 떠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기괴한 숲속이 아닌, 익숙한 풍경을 가진 나의 자취방이었다.
 새롭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홀아비 냄새가 풀풀 풍기는 10평 정도의 원룸.
 “이상한 꿈이네.”
 혹시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 났던 꿈인지라 잠에서 깬 지금도 얼떨떨했다.
 “어?”
 보통 꿈을 꾸면 잠을 깊이 못 잔 것이라 하는데, 기지개를 켜니 세상에 이렇게 개운할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탁
 무언가가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지며 시선을 끌었다.
 “뭐지?”
 그것은 한 장의 카드였다.
 앞뒤면 모두 검은색 일통의 카드.
 크기는 신용카드보다 조금 컸으며, 재질은 플라스틱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하다.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나는 그것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때.
 
 [최하급 보상]
 
 검은색 카드에 느닷없이 황금빛 글귀가 새겨지고.
 
 [퀘스트 보상 카드는 급수에 따른 아이템과 능력치를 랜덤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뜬금없이 눈앞에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그에 기겁한 나는 카드를 던지고 말았다.
 “······.”
 욕실에서 씻고 나온 나는 여전히 책상 한 구석에 놓여 있는 검은색 카드를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게임처럼 퀘스트를 종용하던 이상한 꿈.
 그런데 그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 현실에서 나타났다.
 
 [최하급 보상]
 
 카드를 집어 드니 다시금 검은색 카드에 황금빛 글귀가 새겨지고 홀로그램처럼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이 얼마나 기괴한 상황인지.
 설마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걸까?
 “음.”
 정체 모를 물건.
 솔직히 얽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 카드가 내게 유해하지 않을 것이란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해치지 않아요’라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이내 나는 카드를 사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하도 비정상적인 일을 겪다 보니 매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상책만은 아니라 여기게 되었다.
 또한, 현재 상황이 어려운 만큼 일상과 거리가 먼 비일상에 관심이 가기도 했고.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결정했으면 남은 것은 행동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하급 보상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눈부신 순백의 빛이 작은 카드에서 폭사 되었다.
 “뭐, 뭐야?”
 그야말로 비상식의 극치.
 순백의 빛은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고 이내 폭죽처럼 터지며 반짝이는 빛 가루가 눈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등장한 것은 자그마한 종이 한 장.
 그것은 펄럭이며 천천히 떨어져 내렸고 나는 어렵지 않게 손으로 받아냈다.
 
 [1만 원을 획득했습니다.]
 
 녹색의 지폐를 손에 쥔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비현실적인 상황과 달리 보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상황.
 뭔가 대단한 것을 바란 건 아니지만 요란했던 이펙트를 떠올리면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진짜 돈이긴 한 걸까?”
 
 * * *
 
 -1만 원을 입금하시겠습니까?
 진짜 돈이네.
 황당한 루트로 얻은 만 원짜리 지폐를 ATM기에 입금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꽁돈을 얻은 것은 좋지만, 가볍게 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무려 꿈에서의 일이 현실로 이어진 것 아닌가.
 정말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상식을 파괴하는 상황.
 하지만 이것으로 바뀌는 것은 크게 없다.
 그도 그럴 게, 이 어처구니없는 기적으로 손에 넣은 것은 고작 만 원뿐이었으니.
 “설마 또 그 꿈을 꾼다던가.”
 괜히 희망적 관측으로 기적에 매달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말도 안 된다며 호들갑을 떨지 모르지만, 나는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던 만큼 빠르게 식었다.
 입사지원과 면접.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어제와 같다.
 
 [오늘 새벽 서울을 중심으로 달이 찌그러져 보이는 이상 발생. 이에 과학자들은 대기 불안정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니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집으로 향하던 중, 버스 정류장 전광판에서 흘러나온 뉴스 문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전광판 속에선 어두운 하늘 위의 달이 일몰 직전의 태양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신기하네.”
 그러나 나는 그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지금은 내 코가 석자였으니.
 당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기현상이 아니라 오늘 오후에 있을 면접이었다.
 
 * * *
 
 서초동의 한 호프집.
 “에휴······.”
 내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자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김정우’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 너라면 분명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단정한 정장 차림에 잘생긴 얼굴.
 정우는 고등학교 시절 여러모로 나와 비교가 되던 인물이다.
 다만 수능에서 삐걱거리는 바람에 3지망 대학을 가긴 했지만, 그곳도 충분히 이름값 높은 명문대였고, 지금은 잘나가는 금융회사 직원이다.
 “천하의 조지훈이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역시 사람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그런데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박우찬이란 이름의 친구가 시비를 걸듯 이죽거렸다.
 “야, 친구가 힘든데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그런 우찬이를 향해 정우가 미간을 좁히며 한소리 했고, 함께 자리한 멤버 중 유일한 여성인 이초희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혼자 너무 떨어지지 않아? 원래 이 멤버는 능력 있는 젊은이의 모임이란 느낌이었는데, 27살에 백수라니.”
 초희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넘겨 들을 수 없다는 듯, 곰 같은 덩치의 김인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넌 친구를 능력 따져가며 사귀냐?”
 “솔직히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이젠 어느 정도 따져야지. 레벨이 맞아야 같이 어울릴 거 아냐.”
 정우는 금융회사, 우찬이와 초희는 공기업에 다니며 인식이는 의사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이들에게 꿇리지 않는 명함을 갖고 있었으나, 지금은 한낱 백수에 불과했다.
 “웃기고 자빠졌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훈이에게 알랑방귀 뀌던 새끼들이.”
 초희와 우찬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고비 없이 잘난 인생을 나아가던 나로선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받아보는 냉대였다.
 얼마 전부터 두 녀석의 눈빛이 차가운 것 같다고 느꼈는데, 설마 모임에서 대놓고 무시할 줄은 몰랐다.
 그동안 우리 5명이 함께 다닌 이후로 서로를 무시하고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식이의 말대로 초희와 우찬이도 내게 있어선 다른 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친구였다.
 “야 인식아, 말은 바로 하자. 그동안 우리가 저 녀석 눈치 보면서 기분 맞춰주려고 얼마나 힘들었냐? 무슨 직장상사 비위 맞추는 것도 아니고, 왜 친구란 녀석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맞아, 툭하면 무시하고 깔보잖아. 아마 친구란 감정도 우리의 일방통행일걸?”
 작정한 듯 쏘아붙이는 우찬와 초희의 모습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왜 너흴 무시해?”
 맹세컨대 한 번도 그들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내 성격이 계산적이라 한들 친구들에게 조차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정도의 냉혈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식이는 조용히 내 어깨를 짚으며 초희와 우찬이를 향해 말했다.
 “그건 너희들 생각이지, 난 한 번도 지훈이한테 무시당한 적 없다. 그리고 녀석을 귀찮게 여긴 적도 없고.”
 우직한 인식의 대답에 정우도 두 사람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너희 지금까지 계속 그런 생각을 한 거냐?”
 인식이와 정우의 반응에 두 사람은 ‘이게 아닌데?’란 반응을 보였으나, 끝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씨발. 완전히 악당 된 느낌이네.”
 덕분에 술자리의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졌고, 초희와 우찬이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이만 갈게. 잘난 베스트 프랜드끼리 놀아라.”
 “야, 분위기 이렇게 만들고 가냐? 지훈이한테 사과해야지!”
 “됐고, 나중에 저 새끼 없이 보자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 * *
 
 초희와 우찬이가 떠나고 남은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두 친구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한 상황에 대해선 비참함보단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이 불합리한 상황은 절대 내가 못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었으니.
 그래서 오히려 독기 충만한 감정으로 반드시 꿇리지 않는 직장을 얻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의 상황을 비관하는 것보단 그편이 더욱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이 상태로 잘 순 없지.’
 나는 씻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건지 몸이 너무 무거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으으!”
 술을 꽤 마시긴 했지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시진 않았는데?
 더구나 오늘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아서 그다지 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몸은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과 따로 놀았고, 오래지 않아 허공에서 자석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앗!’하는 사이, 주변의 풍경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스스스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풀 내음 가득한 싱그러운 향기.
 이어서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고 시원함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마지막으로 시야가 트였는데, 어둠이 가시며 눈에 들어온 것은 따스한 햇볕을 머금은 푸름 가득한 숲속의 풍경이었다.
 “······.”
 낮과 밤이라는 점 때문인지, 느낌이 달랐지만 나는 그곳이 어제 꿈속에 등장한 숲이란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이란 게 있다면, 접속할 때 이런 느낌일까?
 후각, 청각, 촉각, 시각에 이어 완전히 몸의 통제권을 찾은 나는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3장 카라스 마을
 
 
 정처 없이 숲속을 배회하길 5분여.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설마 이 말도 안 되는 꿈을 어제에 이어서 다시 꾸게 되다니.
 그저 꿈일 뿐이라며 단순하게 여기기엔 보상으로 주어진 만 원과 꿈속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너무도 기이해서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내심 비일상을 바랬을지 모르지만, 설명 하나 없는 불친절한 상황은 기대감보다 불안감을 일으켰다.
 “혹시 외계인?”
 비상식적인 기현상에 대해 공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
 외계인 또는 신적인 존재의 장난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혹시 나 말고 이런 황당한 일을 경험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카라스 마을로 향하라.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신분증.
 
 “아······.”
 그리고 이 꿈이 어제의 연장선임을 확신케 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덕분에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어쩔 수 없지.”
 어제의 경험을 통해 퀘스트를 착실히 이행해야 잠에서 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만큼 내키지 않아도 지시에 따라야 한다.
 목적도 영문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장기 말로서 역할에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다.
 “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숲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카라스 마을이란 곳을 어찌 찾겠는가.
 잠시 서서 고민하던 나는 잊고 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맞다.”
 오늘 퀘스트의 보상이 두 가지인 것처럼, 어제의 보상도 두 가지였다.
 ‘보상으로 지도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지금 매우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보상에 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혹시 게임처럼 시야 한구석에 지도기능이 포함되어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며.
 그런데 아무리 눈을 굴리고 주변을 두리번 살펴도 지도의 ‘지’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까지 계속 주변을 배회했는데, 시선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란 생각에 지도를 떠올리며 입으로 내뱉었더니.
 “지도.”
 
 [지도가 펼쳐집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A4용지 크기의 지도가 떠올랐다.
 이로써 이 꿈엔 규칙에 따른 시스템이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평온의 숲]
 
 현재 내가 위치한 장소는 평온의 숲.
 지도상으로 베르트 산맥이란 곳 초입에 위치한 작은 숲으로 카라스 마을이란 곳까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친절하게 현재 위치가 지도에 표기된 덕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은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졸졸졸
 -짹짹
 밤에 봤던 으스스한 분위기와 달리, 햇볕이 내리쬐는 숲속의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으며 생명력이 넘쳤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속을 거니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연의 푸르름.
 대학을 졸업하고 부턴 계속 콘크리트 건물 속에만 처박혀 있던지라, 모처럼의 하이킹은 영문 모를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 들게 했다.
 “지도상으론 꽤나 가까워 보였는데.”
 숲속을 이동해서 그런지 제법 걸었음에도 거리 줄어드는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이대로라면 1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숲이 아름답고 하이킹 기분으로 걸어도 길 없는 울퉁불퉁한 숲속을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의 나는 맨발이어서 한걸음 내딛는데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렇게 걷고 걸어 출발지에서 카라스 마을까지 3분의 2지점을 이동했을 때.
 게임의 미니맵처럼 시야 한구석에 펼쳐놓은 지도에 이상이 생겼다.
 -부시럭
 멀지 않은 곳에서 찍힌 붉은 점.
 이어서 해당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를 발견한 나는 더없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고블린]
 
 1.2m정도의 신장과 인간에 가까운 외형.
 다만 코와 귀가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뾰족했으며, 듬성듬성 불규칙하게 자란 머리카락과 곰보투성이의 녹색 피부는 혐오감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흔히 RPG에서 슬라임과 함께 기본 몬스터로 분류되는 고블린의 등장이었다.
 평범한 꿈이라면 호기롭게 달려들겠지만, 이 꿈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생생한 감각은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엄청난 고통을 선물 할 게 분명하다.
 더구나 녀석이 맨몸이라면 모를까 손에는 조잡하긴 해도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손에 날붙이를 들고 있으면 위험하다.
 또한, 이 꿈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만큼 어떤 이상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
 지금은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킁킁.
 큰 코가 장식이 아니라는 듯, 녀석은 동물처럼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고블린은 그대로 서서히 지도에서 멀어졌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꼼짝없이 걸린 줄 알았는데?”
 잠깐이었지만, 손바닥은 땀범벅이 되었다.
 앞으로는 지도를 더욱 자세히 살피면서 이동해야겠다.
 하지만 이번 일로 꿈의 배경이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작은 소득이라면 소득.
 이러다가 나중에 몬스터 토벌 같은 퀘스트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무기로 쓸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나 적당한 크기의 나무가 형편 좋게 떨어져 있진 않았다.
 땅에 떨어진 나무 조각이라곤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게 전부.
 마음 같아선 날카로운 돌을 이용해 나무라도 베고 싶었지만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그래서 티를 벗어 주먹 크기의 짱돌을 넣고 묶어서 둔기를 만들었다.
 이런 무기를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손에 쥐고 휘휘 돌리면 다가오기 힘들만큼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어서 티셔츠로 만들어진 끈이 날붙이에 쉽게 끊어지지 않게끔 물을 적시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종목이 하이킹에서 서바이벌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엔 정장 차림이었는데?”
 이곳에서의 복장은 흰색 면 티에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
 더구나 무기화되어 있는 티셔츠는 어제 토끼 잡는다고 걸레로 만든 것이었다.
 이게 기이한 꿈속에서의 기본 복장인 걸까?
 뭐, 복장이야 아무렴 어떠하겠는가.
 지금의 당면한 문제에 비하면 그건 사소한 일이었다.
 
 [카라스 마을]
 
 그 후 조심하면서 이동하다 보니 목적지까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고블린을 만나고 1시간을 더 이동하고 나서야 숲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평온의 숲보다 지대가 약간 높은 언덕 위로 나무 방책이 둘려진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네.”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가 없어진 나는 마을을 향해 냅다 달렸다.
 그런데.
 -키에엑!
 등 뒤에서 가래를 끓는 포효와 함께 무언가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고블린 세 마리가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숲 안에서만 해도 지도를 잘 살폈었는데, 마을이 눈에 들어오면서 방심한 게 이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중 유난히 한 마리가 눈에 익었는데, 아무래도 처음에 발견했던 그 고블린인 것 같았다.
 후각이 좋아 보이는 녀석이 어째서 물러났나 싶었는데, 동료를 부르기 위해 돌아갔던 모양이다.
 게임에선 잔몹으로 취급되는 고블린이지만, 이곳에선 신중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 같다.
 한 마리만 해도 주춤거리게 만드는데, 맞서 싸우기엔 숫자가 너무 많다.
 내가 진짜 게임 속의 캐릭터도 아니고, 무기를 지닌 몬스터 3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달리는데 방해가 되는 짱돌을 뒤로 던졌다.
 -켁!
 운 좋게 한 마리가 그 돌을 맞고 자빠졌다.
 충분히 힘이 실리지 않은 만큼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 마리를 떼어 놓은 것만 해도 큰 성과라 생각한다.
 “여기요! 사람 쫓기고 있어요!”
 방책이 둘려져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몬스터가 활보하는 것을 보면 분명 마을을 지키는 군인 같은 것이 있을 거다.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마을을 향해 달려갔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쫓아오며 단검을 휘두르는 고블린은 약이 올랐는지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현실과 다름없는 감각의 꿈은 내 체력까지 정확하게 구현했는지, 서서히 무릎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끼익
 그때였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마을의 육중한 방책이 열리고, 손에 긴 창을 쥔 청년 5명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무래도 내 운이 다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덕분에 기세등등하던 고블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등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사, 살았다.”
 그리고 나와 녀석들의 거리가 벌어지자, 마을 쪽에서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당연히 표적은 도망치는 고블린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다리에 힘이 탁 풀리면서 주저앉자, 한국인과 외형이 크게 다르지 않은 청년이 다가와 물었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블린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화살에 사살되고 돌에 맞았던 한 마리는 살아남아 숲으로 도망쳤다.
 고블린을 상대로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꼴이 찌질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이 현상에 대해 파악된 것이 적은 만큼 게임 마인드로 설치는 것보단, 몸을 사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윽······.”
 허겁지겁 도망칠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발바닥이 상처투성이였다.
 이왕이면 신발도 줄 것이지.
 나를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게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인심이 꽤나 야박하다.
 마을을 향해 다가가니 수염을 산적처럼 기른 덩치 좋은 중년인이 다가와 물었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된 것인가?”
 “저도 잘······.”
 어정쩡한 대답에 그는 ‘흠’ 소리를 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미안하지만 신분증을 볼 수 있겠나? 신분을 확실히 확인해야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긴 내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데 그의 입장에서 신분증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신분증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적절한 판단력, 지능이 1향상됩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메시지.
 이번 퀘스트 보상에 신분증이란 것이 끼어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보상카드처럼 주변에 떨어진 물건은 없었다.
 혹시 이것도 지도와 같은 방식일까?
 메시지에서도 ‘신분증’이 아닌, ‘신분증 기능’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신분증을 떠올리며 손을 들었고, 손등위로 국기로 보이는 황금 사자기와 함께 여러 문자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케일론 왕국 신분증]
 이름: 지훈
 성별: 남자
 계급: 자유민
 생년월일: 1076년 5월 25일
 출생지: 국왕령 카르디아
 범죄경력: 없음
 [+]
 
 신비로운 관경에 방금까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반응을 살피던 중년인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법 신분증이라니, 실제로는 처음 보는군. 이거 의심해서 미안하네. 마을의 안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요구였으니 이해해 주면 좋겠어.”
 내겐 한글로밖에 보이지 않는 신분증.
 자동으로 번역이 되는 건지 아니면 이들의 사용문자가 한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이들과 나누는 대화부터가 내겐 한국어였으니, 그저 설정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제가 봐도 의심스런 인물인데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반갑네 지훈,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인 토레스라 하네.”
 이 사람이 촌장이었구나.
 “저야말로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토레스 촌장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쓸데없이 화려한 신분증을 없애려고 했는데, 신분증 하단 부근의 ‘[+]’표시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그것을 눌렀더니.
 
 [-]
 힘: 5 체력: 3
 민첩: 3 지능: 23
 마력: 1 운: 1
 
 게임처럼 스테이터스가 등장했다.
 따로 레벨은 없었지만, 수치화된 능력치를 보니 이곳이 정말 게임속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지능이 엄청 높구만, 어디 행정관으로 일했나?”
 “네?”
 “아, 미안하네. 함부로 봐선 안 되는 걸 아는데, 자네가 너무 대놓고 능력치를 보여줘서 불가항력이었어. 그나저나 능력치까지 표기해주다니 역시 마법 신분증은 좋구만. 우린 3년에 한번 지방행정청에서나 확인하는 게 다인데.”
 나는 능력치를 함부로 봐선 안 된다는 그의 말에 허공에 떠오른 신분증을 없앴다.
 “아무래도 어떤 사건에 휘말린 모양이군. 여관으로 안내하지, 그곳에서 좀 쉬시게.”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그는 몹시 호의적인 태도로 답했다.
 “걱정 말게나 우리 카라스 마을은 그리 야박하지 않으니. 그냥 마음 놓고 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어제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퀘스트를 깼으니 이제 슬슬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그의 뒤를 따르며 슬쩍 카라스 마을의 상태를 살폈다.
 건물 대부분의 지붕과 골조는 목조지만 벽면은 황토벽이다.
 판타지의 기본 요소인 중세시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
 그리고 겉에서 봤던 것과 달리 마을 내부가 제법 컸다.
 작은 시장에 상점들도 갖춰져 있고, 촌장이 안내한 여관도 제법 규모가 있어서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마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카라스 마을은 용병들이 자주 찾는 몬스터 사냥터 중 한 곳이지. 주변엔 고블린 뿐만 아니라, 오크와 놀도 등장하는 만큼 자네가 무사히 숲을 빠져나온 것은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네.”
 “꽤나 오래 숲속을 이동했음에도, 인기척을 느낀 적이 없는데요?”
 “그럴 수밖에. 그 숲으론 용병들이 들어가지 않거든. 자네가 들어온 곳이 마을의 서문인데, 용병들은 주로 동쪽의 협곡으로 사냥을 간다네. 그곳이 더 안전하고 사냥효율이 좋거든.”
 슬쩍 눈을 돌려 지도를 살피니, 카라스 마을 동쪽에 켄트협곡이란 곳이 위치해 있었다.
 여관 주인장이 길어온 물에 피범벅이 된 발을 닦고는 약초를 으깨 만든 약을 상처부위에 발라 주었다.
 이 마을과 아무 연고도 없는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다니.
 이것도 게임 같은 현재 상황에서 나를 실험하는 무언가가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한 상황일까?
 “일단 이걸 신고 있게나.”
 그가 건넨 것은 나무판에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흔히 쪼리라고 부르는 형태의 슬리퍼였다.
 더불어 상의는 둔기로 개조했던 티셔츠를 건네받아 입었는데, 다행히 구김만 심할 뿐 형태는 그대로여서 입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언제 꿈에서 깨어나는 거지?
 쉬라고 안내 해준 방에 앉아 얌전히 있던 나는 주인장이 나갔음에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선 촌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자네 혹시 셈법할 줄 아는가?”
 “네, 뭐······.”
 “역시! 높은 지능으로 봐서 분명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네.”
 갑자기 셈법을 논하는 그의 모습에 촌장이 무언가 부탁할게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올해 영주님과 관할 행정청에 진상할 상품 목록을 작성해야 하는데, 양이 좀 많아서 애먹고 있네. 괜찮다면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보상도 섭섭지 않게 하겠네.”
 그리고 이어진 상황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진상품 목록작성
 보상: 하급 보상카드, 은화 5개
 
 두 번째 퀘스트 발생.
 부탁이라고 해서 간단한 건지 알았는데, 설마 한 번 더 퀘스트가 발생할지는 몰랐다.
 혹시 시간제한이나, 하루 할당치가 있는 걸까?
 “마을에 시장이 있던데 상점 운영하시는 분들은 모두 셈법을 할 줄 알지 않나요?”
 “그렇지. 하지만 그들은 덧셈 뺄셈이나 할 줄 알지. 곱셈 나눗셈같은 고급셈법은 못하거든. 진상품의 분배는 영주성에 7할, 관할 행정청에 3할이네.”
 곱셈 나눗셈을 고급셈법이라며 거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대충 이곳의 교육 수준을 알 수 있었다.
 내 반응에 촌장은 다시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혹시 어려운 부탁인가?”
 그때서야 나는 촌장이 신분 확인 이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그는 내게 부탁할게 있으니, 살갑게 행동한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하죠. 하겠습니다.”
 이번 퀘스트는 처음으로 하급으로 분류 되는 것이 나왔는데, 최하급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최하급 보상카드가 만 원이었으니, 이건 3~4만 원쯤 하려나?
 아니, 처음에 분명 급수에 따른 아이템과 능력치를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무엇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보상을 기대하는 것 보니, 겨우 이틀 사이 이 현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오오! 고맙네!”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사람을 통한 퀘스트 여서 그런지 거절이 가능하긴 한 모양.
 그런데 거절을 한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원랜 마을에 거주 중이던 마법사 분께서 도와주셨는데, 여행을 떠나셨거든. 사설 행정원을 고용하려 해도 시기가 시기다 보니, 금액이 너무 비싸서 어렵더군.”
 결론은 생명의 은인이란 이점을 이용해 싸게 부리고 싶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곱셈 나눗셈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겠는걸?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하루 정도 쉬고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참 든든한 말이로군.”
 이어서 촌장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약 10분후 목탄과 얇은 나무판을 가져왔다.
 그곳엔 이들이 진상할 물품이 적혀 있었다.
 
 -밀 20㎞, 335포대
 [총용량: / 영주성: / 행정청: ]
 -보리 20㎞, 127포대
 [총용량: / 영주성: / 행정청: ]
 
 곡물부터, 약초, 가죽까지 이런 느낌으로 30여개 품목이 적혀 있었는데, 내겐 토끼를 잡는 것보다도 훨씬 쉬운 퀘스트였다.
 초등학교 수준의 문제.
 그럼에도 퀘스트 등급이 더 높다니,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닐까 쉽다.
 그리고 마을 촌장 정도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는 지적 능력이 뛰어나 촌장이 된 게 아닌 모양이다.
 “빈칸을 채워 주면 나중에 양피지로 옮겨 적겠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영주성과 행정청의 비율은 7:3이네.”
 그는 계산에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여분의 나무판자를 수북이 가져왔지만, 암산만으로도 충분한 문제였다.
 내가 5분이 지나지 않아, 빈칸을 전부 채워 건네주자 촌장은 멀뚱히 서서 바보처럼 눈을 껌벅였다.
 “이게 뭔가?”
 “계산 다했습니다.”
 “계산을 언제 했다는 거지? 내 눈엔 바로바로 빈칸을 채워 넣은 거로 보이는데?”
 “이 정도는 머리로 계산 가능합니다.”
 숫자와 문자, 단위 모두 한국에서 쓰던 것과 같아 막힘이 없었다.
 나는 촌장의 인상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수식을 포함해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그때서야 그는 내 말을 믿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냥 푼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긴 충분했다.
 “양피지를 먼저 행정청에 올리면 그곳에서 옳고 그른지를 판가름 해줄 테니, 일단 자네의 말을 믿도록 하겠네.”
 이상이 있을 수가 있나.
 이미 검토까지 한 번 더 한 건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그는 돈 주머니에서 은화 다섯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약속했던 보수네.”
 은화가 하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빈털터리 입장에선 너무도 감사한 상황이었기에 웃으며 은화를 받았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은화 5개를 획득했습니다.]
 [지혜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지능이 1 향상됩니다.]
 
 “그런데 만약 목록이 잘못 되었다면 자네를 신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주게나.”
 “알겠습니다.”
 “부탁을 한 사람이 엄포를 놓다니, 염치없는 짓을 할 수밖에 없군.”
 그의 입장에선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내뱉은 엄포일 것이다.
 “그럼 쉬게. 나는 이만 돌아갈 테니.”
 촌장은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방을 나선 후, 나는 지푸라기를 덮어 만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촌장에게 받은 은화를 살폈다.
 제법 잘 만들어진 매끈한 은화.
 야금기술이 중세 배경치곤 상당히 좋은 듯하다.
 “이제 슬슬 깨어날 때 되지 않았냐?”
 오늘만 두 번째 퀘스트 완료.
 촌장의 의뢰는 날로 먹은 느낌이 없잖아 있고 시간도 어제에 비해 얼마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현실과 다름없는 피로감과 통증에 오늘은 이만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여관 천장을 바라보며 이 상황을 초래한 무언가를 향해 불만을 담아 말했는데, 그것이 통한 건지 목표를 달성한 건지, 세상에 이변이 생겼다.
 -팟!
 꿈속에 들어설 때처럼 어둠에 물드는 세상.
 잠시 후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의 벽지무늬가 나를 반겨주었다.
 4장 전투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출처는 모르겠지만, 지극히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최하급 보상]
 [하급 보상]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는 지금 괴현상의 중심에 있다.
 그럼에도 불안감보단 은근한 기대감이 뒷골을 자극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스트레스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꿈속의 모험은 잊고 있던 동심을 자극하고, 그 모험의 대가는 현실로 이어진다니,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닌가.
 “좋아.”
 나는 두 장의 보상카드를 사용했다.
 
 [최하급 보상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하급 보상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마치 사행성 기운 충만한 모바일 게임의 랜덤 박스처럼 화려한 이펙트를 뽐내며 두 개의 보상이 나타났다.
 
 [5만 원을 획득했습니다.]
 [마력이 2증가합니다.]
 
 “응?”
 최하급 보상으로 5만 원을 얻고 하급보상으로 능력치인 마력을 2얻었다.
 마력이야 아직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만큼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지만, 놀란 것은 같은 등급임에도 최하급 보상 카드에서 5만 원이 나온 것이다.
 어제는 만 원 오늘은 5만 원.
 아무리 랜덤이라곤 했으나 가격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나?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5만 원을 벌다니.”
 나쁘지 않다.
 아니, 매우 좋다.
 덕분에 일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것 아닐까란 글러 먹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 오늘을 합치며 하루 3만 원씩 번 셈.
 일당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지만, 만약 꿈이 계속 이어진다면 보상도 점점 커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매달리는 것은 나답지 않으니.
 그저 재밌는 부수입 정도로 여기기로 했다.
 “음······. 상태가 좋은데. 발바닥의 상처도 없고.”
 어제도 그랬지만, 그 꿈을 꾸고 일어나면 몸 상태가 굉장히 좋다.
 더불어 고블린과의 추격전으로 다쳤던 발이 멀쩡한 것으로 보아 꿈속의 부상은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꿈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몸을 사릴 것이다.
 그리고 확인할 게 하나.
 “신분증.”
 그건 바로 꿈속에서 사용 가능한 기능이 현실에도 적용되는지 여부였다.
 “안되네.”
 그러나 신분증을 포함해 지도는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았다.
 상승된 능력치는 지혜와 마나에 집중된 만큼 현실에 적용되는지는 확인 불가능하다.
 현재로선 꽁으로 얻은 돈과 자고 일어날 때의 개운한 느낌만이 보너스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그래도 회색의 도심에서 떠나는 모험이라니.
 각별하지 않은가.
 물론 수상쩍고,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나에게 이러는지는 몰라도 크게 불만은 없다.
 “목적이 궁금하긴 하지만······.”
 이걸로 무속인을 찾아가겠는가, 목사를 찾아가겠는가.
 이 현상에 대해 조사를 해도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얻긴 힘들 것이다.
 “밥이나 먹자.”
 오늘은 딱히 일정이 없다.
 일정이 없는 날에는 보통 근처 도서관 처박혀 있는데, 오늘은 집에서 서바이벌 관련된 정보를 모아봐야겠다.
 
 * * *
 
 
 [5만 원을 입금하시겠습니까?]
 
 혹시 몰라 보상으로 얻은 5만 원도 이상 없는 지폐인지 확인하기 위해 은행에 들렸는데, 역시 사용에 문제가 없었다.
 정말 신기하다니까.
 “어라, 이게 누구야?”
 그리고 그대로 용무를 마치고 은행을 벗어나는데, 등 뒤에서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평생 잊혀지지 않을 얼굴이 위치해 있었다.
 “박 팀장님.”
 그는 바로 내 전 직장상사이자, 항상 나를 고깝게 보던 박상호 팀장이었다.
 아마 내부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야, 지훈씨가 사당동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설마 이 시간에 은행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이 시간에 그 복장으로 은행 온 거 보면, 아직 취직 못했나봐?”
 이죽대는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능력이 딸리면 성격이라도 좋던가. 질투를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성과도둑질을 정의로 알고 계신 팀장님 덕분에 이 꼴이죠.”
 더 이상 직장상사도 아닌데, 말을 가릴 필요가 없다.
 신랄한 대답에 박팀장의 눈꼬리가 꿈틀거렸지만, 이내 가소롭다는 듯이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뭐, 지훈씨가 제법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긴 했지. 그럼 뭐하나, 나는 여전히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지훈씨는 잘린 입장인데. 직장 생활은 능력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능력 있는 거라고?”
 “그렇군요. 앞으로도 계속 개처럼 윗대가리에게 꼬릴 흔들면서 사시면 되겠어요.”
 백수와 유명 대기업 실무팀의 팀장.
 비교가 되지 않는 위치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필욘 없다.
 그의 직급이 나를 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래, 그렇게 말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해. 앞으로도 계속 힘들 테니까. 입사하고 1년 반 만에 내부 비리로 잘린 사람을 어느 기업이 채용해주겠어?”
 잔뜩 흥분해서 내키는 대로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다지 통쾌하단 기분은 들지 않았다.
 말로써 그를 쏘아붙였다고 환희에 물들만큼 내가 느낀 모욕감은 작지 않았으니.
 그의 언성이 높아진 바람에 우린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나는 이 이상 박팀장을 상대하는 게 바보같이 느껴져서 헛웃음과 함께 걸음을 옮겼고, 그는 내 등을 향해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차라리 눈높이를 낮추는 게 어때? 공장 아니면 공사현장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무 말이나 내뱉는 꼴을 보니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다.
 화낼 사람은 난데, 자기가 왜 난리람?
 “음.”
 그렇게 은행을 나서는 와중에 한 가지 의문이 생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얼굴이 새빨개진 팀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는 거예요?”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나를 귀찮게 했던 박팀장.
 신입 때 말대답을 몇 번 한 적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의를 보일 정도는 아니다.
 “······.”
 내 물음에 그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입 주제에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무시하듯 쳐다보는데 좋은 대우를 받을 리가 있나. 주제 파악을 해야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미간을 좁히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나를 밀치고 지나갔다.
 “뭐야, 저 병신.”
 가해자가 왜 피해자인 척을 하는 거지?
 좀처럼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회사의 시스템을 이해한 후로 대놓고 상사에게 불만을 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만을 표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르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 초희와 우찬이도 비슷한 말을 했지.”
 어제 술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뜬 두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내가 툭하면 자신들을 무시하고 깔봤다는 말.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몇몇 상대방이 이렇게 느꼈다면 내 잘못일까?
 아니면 그들의 자격지심이라 해야 할까?
 나로선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보상으로 저주 능력 생기면 좋겠네. 저 새끼 좀 괴롭히게.”
 
 * * *
 
 오늘도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니 꿈속 판타지 세계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어제 고블린과의 추격전에서 다쳤던 발바닥이 현실에선 멀쩡했으나, 이곳에선 상처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촌장이 발라준 약초가 효과가 있었는지, 통증이 없고 상처도 딱지가 져서 걷는 데 이상이 없었다.
 오늘은 꿈속에서 여러 가지를 조사해볼 생각이다.
 더는 이 상황이 일시적인 것이라 볼 수 없는 만큼, 원리를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꿈속에서 최대한 얼마만큼 머물 수 있는지.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잠들 거나 깨어나면 이쪽의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등······.
 확인할 게 많다.
 -똑똑
 “지훈 군, 일어났는가.”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카라스 마을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어서 촌장이 여관방에 들어섰다.
 내 얼굴을 확인한 촌장은 어째서인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젠 의심해서 미안하네, 오늘 마침 여행 가셨던 마법사님께서 돌아오셨더군. 그래서 진상품 목록을 보여드렸더니, 이상 없다고 하셨네.”
 “다행이군요.”
 아마도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미리 짜여 있던 것 아닐까?
 그런데 마법사란 존재에 관심이 갔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촌장을 보며 물었다.
 “마법사는 셈법에 강한가요?”
 그는 내 물음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반응을 보였다.
 “마법사는 존재 자체가 학자라 할 수 있네. 이런 벽촌의 주민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분이지. 그리고 마법이 수학이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자네처럼 보는 것만으로 계산이 가능하시더군.”
 마법이 수학과 관계가 깊다?
 더더욱 관심이 간다.
 학교에서 배운 많은 과목 중에서도 내가 가장 자신 있던 게 수학이었으니.
 “혹시 마법사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마법이란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물음에 촌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함부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네. 마법사는 존재자체가 귀족이나 다름없거든.”
 그런 것치곤 촌장이 마법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 것 같은데.
 극진한 말투로 보아 친구 같은 건 아닌 것 같고, 촌장의 위치가 생각보다 높은 걸까?
 뭐, 안된다는데 굳이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다.
 더구나 나는 외부인이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촌장이 물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호의도 하루 이틀이지, 그가 계속 나를 보살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촌장의 물음은 몸 상태가 나아졌으면 할 일을 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일단 며칠 이 마을에 묵어도 될까요. 당장 정해진 목적이 없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러게나. 오늘까지는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도록 하지. 대신 내일부턴 값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게. 어찌됐든 이 여관도 상업시설이니.”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후 나는 촌장과의 대화를 통해 화폐 단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에선 철화, 동화, 은화, 금화, 백금화가 쓰이며 철화 10개가 동화 1개, 동화 10개가 은화 1개, 은화 10개가 금화 1개와 같다.
 화폐를 이루는 금속의 가치가 모두 다른 만큼, 고액화폐에는 여러 금속을 섞어 값을 유지한다.
 덕분에 금화는 금보다 동(구리)의 함유량이 훨씬 더 높아서 말이 금화지, 금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긴 힘들었다.
 참고로 화폐 중 합금이 아닌 것은 동화뿐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자유롭게 있게나.”
 “감사합니다.”
 어제 촌장 퀘스트를 수행하고 받은 은화 5개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일반적으로 평민이 한 달 동안 고된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으니.
 여관의 1일 이용료가 식사포함 동화 3개임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2주일을 넘게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고블린 5마리 사냥
 보상: 하급 보상카드, 도축 스킬
 
 나는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발생한 퀘스트를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처음으로 스킬이 보상으로 걸린 퀘스트.
 하지만 그 퀘스트의 난이도는 이제까지와 전혀 달랐다.
 무기를 든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라니.
 “솔직히 이런 때가 오리라곤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닥치니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이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꿈속에서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절대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퀘스트가 형편 좋게 바뀌진 않을 터.
 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해야 할 일과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이김에 퀘스트를 안 하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부터 알아봐야겠네.”
 일단 이 꿈은 현실과 비교해서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 비율이 없다.
 어제와 그제, 나는 똑같이 7시간을 잤지만 첫째 날은 10시간 넘게 꿈속에 갇혀 있었고, 둘째 날은 4~5시간 정도를 꿈속에 머물렀다.
 더불어 내가 현실에서 활동한 15시간 동안 이곳은 겨우 10시간 정도가 지난 것을 보면, 시간의 공통성을 찾긴 힘들었다.
 퀘스트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시스템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촌장처럼 주민을 통해 받는 것이다.
 아직 퀘스트 완료 후, 꿈속을 벗어나는 조건은 확실치 않지만, 이는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을 둘러봐야지.”
 단순히 관광처럼 여기저기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수집이 주목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제 촌장이 건네준 슬리퍼를 신었다.
 발바닥에서 통증이 밀려왔지만, 걷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다.
 여관은 식당을 겸하고 있었는데, 1층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제는 워낙 경황이 없다 보니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손님 대부분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용병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판타지와 다른 것이 내 신분증에 명시된 케일론 왕국이란 국가의 국민들이 동아시아인과 외모가 흡사해서 억지로 서양 판타지에 동양인을 그려 넣어 놓은 느낌이었다.
 “어디 가시게요?”
 나를 발견한 여관 주인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네, 잠시 마을 좀 둘러보려고요.”
 “식사는 안 하셔도 되겠어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세요.”
 웃으며 배웅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유럽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활기찬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흐읍, 후······.”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은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바람까지 살살 불어오니, 상쾌함은 배가 된다.
 거리를 오가는 주민들이 힐끔힐끔 나를 살폈다.
 아무래도 자신들과 미묘하게 다른 복장 때문인 듯한데, 새하얀 면티는 회색과 베이지색 투성이인 주변 복장에 비해 유난히 튀었다.
 내가 입고 있는 면티는 어제까지만 해도 반쯤 걸레였는데, 현실로 돌아 갔다 오니, 새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시장이 저쪽이었지.”
 마을은 제법 구색이 잘 갖춰져 있다.
 거리는 오물 없이 깨끗하고, 사람이 다니는 길과 마차길이 구분되어 있으며, 대장간을 포함해 필요한 것을 갖출 수 있는 상점들이 시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늘 받은 퀘스트가 퀘스트다 보니 나는 가장 먼저 대장간을 찾아갔다.
 지금은 꿈속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는지,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를 시험할 생각이다.
 때문에 지금 당장 사냥을 떠나지 않겠지만, 어차피 나중엔 퀘스트를 수행할 수밖에 없을 테니, 무기를 미리 장만하여 사용법을 익힐 셈이다.
 “어제 고블린에게 쫓겨 왔다는 사람이군.”
 대장간 주인은 내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무기 좀 보려고요.”
 “하긴 그 꼴을 당했으니. 좋아, 마음껏 구경하게. 모름지기 남자라면 무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한쪽에 진열된 무기들을 살폈다.
 
 -대거 / 30㎝ / 0.4㎏ / 5동화
 -숏소드 / 60㎝ / 1.2㎏ / 2은화
 -롱소드 / 90㎝ / 2㎏ / 5은화
 -브로드소드 / 80㎝ / 1.7㎏ / 4은화
 -레이피어 / 85㎝ / 1㎏ / 3은화
 -시미터 / 85㎝ / 1.5㎏ / 5은화
 -바스타드소드 / 125㎝ / 3㎏ / 1금화
 -클레이모어 / 160㎝ / 4.5㎏ / 2금화
 -투핸드소드 / 190㎝ / 7㎏ / 4금화
 
 검은 규격화된 9종을 판매하고 있었으며, 무게와 길이, 형태에 따라 가치가 달랐다.
 하지만 검은 리치가 길면 너무 무겁고 짧으면 그만큼 위험하니, 초보인 내가 다루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기로 쓴다면 아무래도 가벼우면서 리치가 긴 창이 낫지 않을까 싶다.
 
 -자벨린 / 100㎝ / 1㎏ / 5동화
 -숏스피어 / 150㎝ / 1.5㎏ / 1.5은화
 -롱스피어 / 200㎝ / 2㎏ / 2은화
 -글레이브 / 200㎝ / 2.2㎏ / 3은화
 -버디슈 / 200㎝ / 2.5㎏ / 4은화
 -크로스 스피어 / 200㎝ / 2.5㎏ / 5은화
 -포사르 / 200㎝ / 2.5㎏ / 5은화
 -보어스피어 / 200㎝ / 2.5㎏ / 5은화
 -파르티잔 / 200㎝ / 2.5㎏ / 5은화
 -트라이던트 / 200㎝ / 3㎏ / 5은화
 -할베르트 / 200㎝ / 3.5㎏ / 1.5금화
 
 의외로 창의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창은 창촉의 형태에 따라 분류가 됐는데, 창대는 요청에 따라 더 짧게 자르거나, 더 길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속이 장검이나 양손검에 비해 덜 들어가기 때문인지 가격도 준수한 편이었다.
 물론 준수하단 것도 검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지, 결코 싼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서 평민이 고된 노동을 해야 한 달에 5실버를 벌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무기값이 굉장히 비싸다고 할 수 있다.
 “따로 공격력 같은 게 매겨져 있진 않구나.”
 게임처럼 공격력이 매겨져 있지 않을 것을 보면, 극히 현실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이라 볼 수 있겠다.
 개인의 능력치는 표기가 돼도,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긴 토끼를 죽일 때, 데미지 표기 없이 목을 꺾어 즉사시킨 것을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무장만 잘 갖추면 어린아이 체격인 고블린을 상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다.
 물론, 무장을 충분히 갖출만한 금액이 내겐 없지만.
 지금 내 돈으로 할 수 있는 무장은 잘해봐야, 숏스피어 아니면 롱스피어 정도에 나무 방패를 곁드는 수준일 것이다.
 방어구는 무기 이상으로 값이 나갔으니.
 “신중파구만.”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대장간 주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예 검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무기를 다룰 줄 모르면 무조건 리치가 긴 게 유리하지. 하지만 젊은이들은 기사에 대한 로망이 워낙 강해서 그다지 창을 선호하지 않거든.”
 “기사도 말 위에선 창을 쓰잖아요?”
 “마창과 일반적인 전투용 창은 다르지. 아무래도 창은 기사보단 병사의 전유물이란 인상이 강하니.”
 로망보다 중요한 게 목숨 아닌가.
 나는 당연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경비대 녀석들도 짬밥만 처먹으면 창 대신 검을 들고 다녀. 지들이 무슨 기사라도 되는 양 착각한다네. 이런 시골에선 변변한 오러 심법도 익힐 수 없으니, 과시용에 지나지 않지.”
 오러심법?
 혹시 내가 예상하는 그것일까?
 “오러 심법이 뭔데요?”
 “응? 기사가 신체를 강화하고 무기 위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기술 아닌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반응.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오러 심법을 배우는 게 어렵나요?”
 “그렇지, 오러심법을 배우기 위해선 가전 심법을 보유한 검가를 찾아가거나,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네. 오러심법은 보물과도 같아서 사사로이 전수를 할 수가 없거든.”
 무협의 문파 시스템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자연적으로 오러를 깨우치는 사람은 없어요?”
 “없진 않지. 오러 심법에는 어쨌든 개발자가 있으니. 스스로 오러를 깨우친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검호들이라 할 수 있네.”
 묻는 대로 나불나불 정보를 토해내는 그의 존재는 아주 만족스럽지만, 서서히 눈빛에 의심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물러나야 할 때임을 느꼈다.
 “숏스피어 아님 롱스피어 사고 싶은데, 만져 봐도 됩니까?”
 “물론이지.”
 이후 의심이 짙어지는 일 없이 그는 뒷짐을 진 채 물러났다.
 “창대가 평범한 나무로 보이지만, 여러 종류의 나무를 두루말이처럼 돌돌 말아 접착제로 붙인 것이네. 덕분에 탄성도 좋고 쉽게 부러지지 않지. 우리 카라스 대장간의 무기는 저렴해도 대충 만드는 물건이 없네. 그래서 전투로 먹고 사는 용병들도 자주 애용하지.”
 확실히 검은색으로 코팅이 된 창대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자부심이 넘치는 주인장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진지하게 창을 살폈다.
 -부웅
 1.5미터의 숏스피어는 짧은 만큼 안정감이 있었다.
 다만 양팔을 넓게 벌리고 잡으니, 생각보다 짧게 느껴져서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2미터의 롱스피어는 너무 길어서 컨트롤이 힘들었다.
 “대략 170~180정도의 길이가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럼 숏스피어(1.5은화)는 봉을 긴 것으로 교체하거나, 롱스피어(2은화)는 잘라야 한다.
 창대 교체 비용을 포함해도 숏스피어가 3동화 정도 더 쌌는데, 그 정도 차이면 창날이 더 긴 롱스피어가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정했는가?”
 대장간 주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롱스피어 창대를 20㎝ 잘라 주세요. 바로 가능한가요?”
 “물론이지.”
 결국 나는 조금이라도 공격면적이 큰 롱스피어를 선택했다.
 “자벨린은 필요 없나? 하나 사서 투창연습이라도 하지?”
 자벨린은 화살을 크게 키워 놓은 것처럼 봉 끝에 짧은 촉이 달려 있다.
 찌르기, 베기가 가능한 숏스피어, 롱스피어와 달리 투척용으로만 사용하는 무기였다.
 투척용이면 휴대하기 불편한 창보다 차라리 단검이 나을 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롱스피어 하나만 구매를 했다.
 “은화 두 개네.”
 “여기요.”
 순식간에 재산의 4할이 날아갔다.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전투 연습을 위해 구매하긴 했어도 아까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나막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신발까지 구매하면 지출은 더 늘어 날 것이다.
 부디 신발은 싸면 좋겠다.
 “다 됐군. 자, 한번 잡아보게.”
 나는 대장간 주인장이 건넨 롱스피어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20㎝ 차이임에도 확실히 2m짜리 롱스피어에 비해 다루기가 편했다.
 “좋네요.”
 그에 주인장은 피식 웃으며, 잠시 떼어놓은 창대의 폼멜을 절단 부위에 부착한 후, 짧은 못을 박아 고정을 했다.
 덕분에 창이 자르기 전처럼 깔끔해졌다.
 “그다지 여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창날 집은 보너스로 주지.”
 공짜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감사합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그가 건넨 나무로 만든 창날 집을 챙겼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잘 가게.”
 지금은 손해 보는 것이 없더라도, 나중에 어떤 패널티가 발생할지 모르는 만큼, 내게 닥친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먼저 꿈의 중심사건인 퀘스트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만약 꿈속에서 내려진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첫 번째 조사 내용이다.
 “······.”
 나는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남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촌장에게 부탁해 경비대에서 창의 기본 사용법을 배웠고, 꾸준히 연습한 결과 이젠 제법 그럴싸하게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주구장창 창만 휘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일주일 동안······.
 “씨발.”
 나는 짧은 욕설과 함께 여관 뒤뜰에서 휘두르던 창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도 그럴 게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은 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이젠 돈도 1실버 밖에 안 남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면 3일은 더 여관에 묵을 수 있지만, 이 정도면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는 이상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돈마저 낭비하는 짓.
 이제 슬슬 나서야 할 때였다.
 “어쩔 수 없지.”
 퀘스트 완료를 위해 고블린을 사냥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코르크와 천을 덧대 만든 신발의 끈을 조인 후, 얼마 전 안면을 익힌 목수의 집으로 했다.
 “의뢰한 물건 찾으러 왔나?”
 “다 됐나요?”
 “그럼,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그는 크고 작은 나무판 여러 개를 건네주었다.
 얼핏 보면 뭐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양새.
 “좋네요.”
 그것은 방어구였다.
 나무 방패와 나무 헬멧, 배와 등을 보호할 큰 나무판과 손등과 손목을 보호할 작은 나무 판까지.
 허술하기 그지없는 장비다.
 근육질의 오크나, 인간을 상대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블린의 공격이라면 나무판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양새는 별로여도,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 이것들을 마련했다.
 “정말 그걸 뒤집어쓰고 숲속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목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내겐 영업용 미소였지만 그의 입장에선 성격 좋은 청년의 안일함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말렸다.
 “아무리 재산이 중요하지만, 사람 목숨이 먼저 아닌가. ‘평온의 숲’은 ‘켄트 협곡’만큼은 아니어도 몬스터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 곳이라네. 마을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어.”
 나는 몬스터 사냥을 위해 미리 밑밥을 깔아 놓았다.
 목수가 재산 어쩌고 하는 이유는 나중에 숲속을 들어가기 위해 짐을 그곳에 두고 왔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카라스 마을에서 몬스터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구역은 평온의 숲과 켄트 협곡이 있다.
 용병들이 선호하는 켄트 협곡은 몬스터들의 부락이 많아 분대 단위로 뭉쳐 다니는데다가 출현빈도도 높아서 시간 대비 사냥 효율이 좋은 장소다.
 반면 평온의 숲은 협곡에서 낙오된 몬스터들이 둥지를 틀고 있어서 몬스터의 수가 협곡보다 적다.
 하지만 초원 형태의 협곡과 달리, 은폐할 장소가 많아 기습의 우려가 있고, 시야의 제약이 심해 몬스터의 접근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위험한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탐색의 어려움과 기습 걱정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다.
 ‘내겐 지도 기능이 있으니까.‘
 지도는 몬스터가 일정 거리에 접근을 하면 붉은 점으로 표기가 된다.
 때문에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내가 기습을 하면 했지, 당할 일은 없었다.
 “이거야 원, 고집이 세구만. 머리가 좋은 자네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그런데 혹시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나 촌장의 잠자리가 좋지 못할 거네.”
 나는 1동화를 지불하고 인정 넘치는 그의 배웅을 뒤로 했다.
 지도 기능이 있더라도 당연히 몬스터 사냥이 쉬울 리는 없다.
 그래서 아무리 대비를 했다고 한들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꿈일 뿐이라며 가볍게 생각하고 싶지만······.’
 지나친 현실감에 요 며칠 사이 이것이 정말 꿈이긴 한 걸까란 의문이 들었다.
 내게 닥친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이것이 꿈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행동 같았다.
 그래서 이 현상을 또 하나의 현실로 염두하고 더욱 조심하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운다만, 방법이 있다면 싸우고 싶지 않았다.
 
 * * *
 
 -카라스 마을 서문, 평온의 숲 방향.
 “외부인인 자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지만,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돈이 필요하면 차라리 마을에서 일을 찾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촌장의 제안에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한 돈 문제라면 촌장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낫겠죠. 하지만 저는 숲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촌장은 내가 숲에서 잃어버린 짐 중에 중요한 물건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을 벌어 용병을 고용하면 편이 낫지 않은가. 자네가 열심히 일해서 갚는다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네.”
 이 마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최근 서울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많은 것이 부족해도 정이 가득한 이곳이 진짜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촌장의 말에 따를 수는 없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퀘스트 완료이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죄송합니다.”
 “정말 고집이 세구만.”
 고블린 사냥을 마음먹은 후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다.
 ‘시스템적인 퀘스트 외에 촌장의 의뢰처럼 주민 퀘스트를 완료하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여기저기 들쑤시고도 다녔지만, 따로 퀘스트가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퀘스트를 한 번에 하나밖에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고.
 주민 퀘스트란 것도 목록으로 정해진 시스템일 수도 있다.
 결국,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위한 방법은 지금으로써 고블린 사냥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촌장의 만류에도 기어이 마을을 나섰다.
 무사히 돌아오라며 손을 흔드는 그를 뒤로 하고, 예전에 고블린에게 쫓겼던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수풀이 우거진 자연을 마주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평온의 숲]
 
 지도에 표기되는 현재 위치가 바뀌고, 햇빛이 나무에 가려져 주변의 색감이 어두워졌다.
 나는 몬스터의 등장에 대비해 지도를 유심히 살피며 조심조심 전진해나갔다.
 지금의 장비로 내가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는 고블린 뿐이다.
 무기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이 조잡한 방어구로 고블린 이상의 몬스터에게 달려드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짓이다.
 그래서 만약 고블린 사냥이 생각보다 수월하다면, 그것으로 돈을 벌어 장비를 마련할 예정이다.
 앞으로 발생할 퀘스트는 이보다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으니.
 “!!!!!”
 얼마나 숲속을 거닐었을까.
 지도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점에 얼른 몸을 숨겼다.
 거리는 대략 200m.
 표적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 고블린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만약을 위해 다리 걸기용으로 구매한 밧줄을 근처에 묶어두곤 맨발로 밟으면 피부에 깊숙이 파고드는 스파이크를 바닥 여기저기에 깔았다.
 
 [고블린]
 
 처음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는 목표인 고블린.
 나는 여관식당에서 얻은 토끼 간이 담긴 작은 나무통을 열어 녀석을 유혹했다.
 -킁킁
 피냄새가 녀석에게 닿았는지, 고블린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몬스터들을 끌어들일까, 얼른 토끼간이 담긴 통을 밀봉했다.
 녀석과의 거리 50m.
 30m, 20m.
 그리고 거리가 10m까지 좁혀졌을 때.
 진흙과 풀로 냄새를 지운다고 지웠음에도 사람의 채취가 느껴졌는지, 녀석이 움찔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여지를 두지 않고 날카롭게 번뜩이는 창끝을 앞 새우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키악!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하나.
 ‘과연 고블린은 무장한 인간이 달려들면 호기롭게 맞설까?’
 참고로 내가 생각한 정답은 ‘도망친다.’였다.
 ‘좋아!’
 녀석은 내가 바란대로 기겁하며 도망쳤다.
 지난번에 내 냄새를 맡고도 동료들을 끌고 온 것을 보면 1:1로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덩치가 작은 만큼 고블린이란 몬스터는 성격이 신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블린이 달아난 장소는 내가 방금 함정을 설치한 곳이었다.
 팅!
 나무 사이에 걸어둔 밧줄을 못 보고 다리가 걸린 녀석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넘어지는 고블린을 여기저기 설치된 스파이크들이 반겨주었다.
 -푹!
 -키에에엑!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고블린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5장 투자
 
 
 역시 현실이나 다름없는 세상이라 그런지 게임처럼 사냥된 몬스터가 사라지며 드랍템을 남기는 것이 아니었다.
 -크르르!
 살겠다고 끝까지 발버둥 치는 고블린의 처절한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그에 손에 꽉 쥔 창대를 비틀며 더욱 깊이 찔러 넣었고, 등 한가운데를 찔린 녀석이 꿈틀대다가 축 늘어졌다.
 “기분 더럽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찜찜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형이라서 더 불편한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몬스터 사냥에 충격을 먹고 더는 못 하겠다든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창을 뽑아 들고, 확인 사살을 위해 다시금 고블린을 찔렀다.
 “죽었군.”
 누군가는 나를 보며 냉정하다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다잡은 몬스터라고 방심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조잡한 녹슨 단검]
 등급: 일반
 무게: 0.3㎏
 길이: 21㎝(검신 14㎝)
 
 “괜찮은 크기네.”
 고블린을 사냥하여 얻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은 바로 녀석들의 무기다.
 간혹 인간들에게 빼앗은 돈주머니를 갖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다곤 하지만, 내가 사냥한 고블린의 소지품이라곤, 녹슨 단검뿐이었다.
 고블린의 살과 뼈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먹을 수도 없다.
 그나마 부산물 중 가죽은 싼값에 팔 수 있지만, 가죽을 벗기는 요령이 없어서 단검 하나만 챙겼다.
 대장간에서 비슷한 크기의 대거가 동화 5개 가격인 반면, 이건 동화 1개는 받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조잡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날이 잘 벼려져 있고 무장이 빈약한 내겐 나쁘지 않은 보조 무기였다.
 ‘피 냄새가 퍼지기 전에 자리를 옮겨야지.’
 나는 설치해 놓은 함정들을 해체한 후, 빠르게 해당 장소를 벗어났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도축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지혜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지능이 1 향상됩니다.]
 [근접 무기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힘이 1 향상됩니다.]
 [상처 없는 완벽한 첫 실전. 모든 능력치가 1 향상됩니다.]
 
 처음이 어렵지 경험이 쌓이면 점점 쉬워진다는 것은 사냥에도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휴······.”
 철저하게 단독으로 다니는 고블린만을 노린 결과 3시간 만에 고블린 다섯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다.
 힘: 5 -> 7 체력: 3 -> 4
 민첩: 3 -> 4 지능: 23 -> 25
 마력: 3 -> 4 운: 1 -> 2
 무기를 들고 싸우는 첫 전투라 그런지, 퀘스트 완료에 따른 능력치의 상승이 도드라졌다.
 이 정도면 현실에서도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스킬 습득으로 인해 신분증에 스킬 목록이 추가됩니다.]
 
 능력치를 포함해 스킬까지 신분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니, 마법 신분증은 게임의 상태창처럼 사용되었다.
 
 -도축(액티브 / LV-)
 
 물론 시스템은 불친절하기 그지없지만······.
 나는 설명 하나 없이 진짜 목록만 표기되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 사용조건이나 방법은 실험해 보면 알겠지. 마침 눈앞에 고블린 시체도 있겠다.’
 마지막 5마리째가 되었던 고블린의 시체를 내려 보며, 손을 뻗었다.
 “도축.”
 스킬이 사용되는 모습을 연상하며 명령어를 내뱉자, 몸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고블린 시체가 분해되기 시작했다.
 
 [고블린 가죽]
 [고블린 뼈]
 [고블린 살]
 [고블린 이빨]
 
 그리고 채 1초가 지나지 않아, 몬스터 부산물이 후두둑 떨어지며 쓰레기처럼 쌓였다.
 “드랍템 같네.”
 핏물이 줄줄 흐르는 부산물 더미는 고어틱하지만, 편의성은 점점 게임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나는 고블린 부산물 중에 돈이 되는 가죽만 챙기고는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지금 잠에서 깨어나면, 다음번엔 고블린의 시체 옆에서 나타나게 될 테니.
 그런데 꽤 긴 시간을 이동하고, 결국 숲을 벗어났음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수행해야 할 퀘스트가 하나 더 있는 걸까?
 “오오, 자네 무사히 돌아왔군!”
 내가 마을을 향해 다가오자, 망루를 지키고 있던 경비대 사람이 알아보고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냄새를 지운다고 온몸에 진흙을 발라서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는데, 바로 알아봐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이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
 갑자기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2020.05.15.
 AM 07:25
 꿈속에서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보냈음에도, 이곳은 겨우 7시간 남짓 흘러 있었다.
 아무래도 길게 머물 거나, 짧게 머물 거나, 깨어나는 시간은 비슷한 모양이다.
 ‘꿈에서 깨는 조건이 퀘스트인 건 확실한데, 깨어나기까지의 시간 차이가 왜 이렇게 많이 나는지 모르겠네.’
 첫날엔 숲속에서 퀘스트를 깨고 몇 분 안 있어서 바로 깨어났는데, 둘째 날엔 퀘스트를 두 개나 수행하고 촌장과의 대화가 끝난 다음에야 깨어났다.
 그리고 오늘은 퀘스트를 깨고 1시간 정도 이동하여 마을에 도착한 다음에야 꿈에서 깼는데, 공통점이 보이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이제 겨우 4개의 퀘스트를 깼을 뿐이니, 모든 것을 파악할 순 없지.”
 정확한 건 이 상황을 초래한 신이나 외계인 같은 것들이나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지금도 TV보듯 내 상황을 살피며 팝콘이나 처먹고 있을지도 모르니.
 -틱!
 그런데 그때.
 머리맡에 놓여 있던 보상카드가 저절로 바닥에 떨어졌다.
 “······.”
 덕분에 한참 동안 말없이 카드를 내려 보던 나는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혹시라도 제 생각이 불경하다고 벌은 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성격이 이러거든요. 그리고 이 상황에 놓이면 누구라도 화가 날 겁니다. 전 오히려 얌전한 편이죠.”
 진짜.
 혼자 뭐라는 건지.
 괜히 쫄아서 변명하는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나는 짙은 한숨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하급 보상카드를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컨디션은 최상.
 퀘스트를 깨고 나면 산소 방에서 잔 것처럼 몸이 아주 개운했다.
 “운동 시작해야겠네.”
 의외로 힘들지 않았던 고블린 사냥.
 그러나 앞으로 이보다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만한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운동하면 능력치에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일까진 따로 정해진 일정이 없으니 바로 오늘 시작해야겠다.
 ‘하지만 그전에.’
 보상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검은색 카드에 금빛의 글자가 새겨지고, 눈앞에 보상카드를 사용할 것이냐는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파앗!
 고개를 끄덕이자 화려한 순백의 빛이 원룸을 뒤덮었다.
 “오오!”
 그런데 어찌 지난번보다 이펙트가 더욱 요란한 느낌이 든다.
 뭐지?
 보상이 랜덤인 만큼 당첨도 있는 걸까?
 
 [A조간 신문을 획득했습니다.]
 
 기대감 가득했던 내 표정은 산산이 부서졌다.
 “미친!”
 와락 인상을 찌푸린 나는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신문을 낚아채 바닥에 내팽개쳤다.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있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물끄러미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힘들게 얻은 보상인데, 뭔가 다르지 않을까?’
 헛된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하급이 아닌, 하급이란 점과 유독 화려했던 이펙트를 떠올리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어?”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2020년 06월 10일 수요일]
 
 그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신문으로.
 약 한 달 뒤의 기사가 담긴 미래의 정보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어 책상 위에 펼쳤다.
 
 [K대 캠퍼스서 연쇄 살인 사건 발생. 경찰 CCTV를 확인했지만, 사건 발생 전후 1시간 동안의 영상이 저장 안 돼 수사가 난항.]
 
 신문엔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사건 사고부터.
 
 [올림픽 대표 평가전서 일본을 3:0로 완파. 쿠보는 완전봉쇄됐으며, 이강인은 펄펄 날았다.]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스포츠 기사.
 
 [상장폐지 직전까지 갔던 T화학. 반도체 신소재 개발과 S전자의 대대적인 투자로 주가 폭등. 한 달 전과 비교해 10배에 가까운 성장을 보여······.]
 
 더불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보물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최고의 보상.
 로또 번호라도 실려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것을 어떻게 활용 하냐에 따라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4번의 퀘스트.
 4번째 보상.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할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돈을 불리기 위한 투자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너무 무리한 짓은 하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비록 내가 무직자 신세지만, 그동안 쌓아온 신뢰 덕분에 아버지는 별말씀 없이 통장을 털어 7천만 원을 내주셨다.
 마음 같아선 대출까지 받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란 것도 있고 이유를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여기에 내 원룸 전세 보증금으로 대출을 받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합치면, 1억2천만 원까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월급 통장의 3천만 원을 떠올렸다.
 내가 회사에서 잘리는 데 결정적 계기를 작용한 돈이자, 마치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방치하고 있던 돈.
 그것까지 더하면 1억5천만 원이 된다.
 “정우냐?”
 -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부탁이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
 나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친구인 정우와 인식이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두 친구 녀석은 흔쾌히 돈을 빌려줬는데, 각각 2천만 원이란 거금을 선뜻 내놨다.
 덕분에 두 녀석은 정말로 날 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더욱 잘해줘야겠다.
 참고로 현재 사이가 틀어진 초희와 우찬이에겐 연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락해봤자, 좋은 꼴 보지 못할 테니.
 총금액 1억9천만 원.
 일반 서민이 급하게 마련한 금액치곤 상당한 액수였다.
 나는 빠르게 움직여 바로 주식계좌를 개설하고 T화학 주식을 사들였다.
 “내가 설마 이런 불나방 같은 짓을 하게 될 줄은······.”
 평생 주식같이 불안정한 시장에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부모님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박박 끌어모은 금액.
 만약 신문이 잘못됐다면 날 믿어준 사람들의 신뢰를 안고 망하는 거지만, 애초에 잘못된 정보라면 보상으로 내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후······.”
 장이 마감되고 적정가에 주식을 모두 확보한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T화학의 현재가는 9,200원.
 그런데 신문에는 89,000원까지 오른다고 표기가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신문엔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한 달 동안 가장 큰 이익을 내는 것은 단연 T화학에 대한 정보였다.
 “미래에 대한 정보를 또 얻을 수 있을까?”
 하급 보상이 이 정도라면, 중급, 상급보상에서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 어느 수준일지 가늠이 안 된다.
 하지만 지난번 하급 보상과 명백히 다른 이펙트를 보면 미래에 대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보상이 등급에 맞게 랜덤으로 주어진다고 하지만, 정작 보상을 받는 사람이 나 혼자면 진짜 랜덤인지 알 수도 없잖아?”
 
 * * *
 
 예상치 못한 보상으로 일정이 변경되었지만, 나는 오늘 하기로 한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진짜 최근에 운동한 적이 없습니까?”
 “네. 그동안 바쁘게 지내서요.”
 “그런 것 치곤 근육량이 상당하신데? 체력도 준수하고요.”
 동네에서 가장 좋은 시설을 자랑하는 헬스장에 가입한 나는 트레이너의 지시에 따라 상태 테스트를 받았다.
 약 30분에 걸친 테스트가 끝난 다음, 트레이너가 보인 반응에 퀘스트를 수행하고 얻은 능력치가 현실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할 것 없이 밋밋하고 평범했던 몸 여기저기에 근육이 더해진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근력이 겨우 2가 증가하고 체력과 민첩이 1씩 증가했을 뿐인데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편했다.
 “뭐, 좋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혹시 트레이닝에 대해 요구사항 있나요?”
 “보여주기식 근육보단, 근력과 체력, 순발력을 고루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내 대답에 트레이너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도 우락부락한 근육보단 보기 좋게 균형 잡힌 체형을 갖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코스를 짜보도록 하죠.”
 어차피 백수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 아니겠는가.
 나는 강도 높은 코스를 짜고,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2시간에 걸친 PT가 끝나고 나니 온몸이 무겁고 기진맥진했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고 인근 주짓수 도장에서 심야반까지 끊었다.
 창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국내에선 창은 너무 마이너 했고, 우슈에 창술이 있긴 하지만, 실전성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경비대에서 기본이라며 배운 찌르기, 베기, 치기, 막기 네 개 동작을 혼자 연습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분명 엊그제까지만 해도 꿈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겨우 3일째가 되었을 뿐인데 생각이 바뀌었다.
 만족할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지만, 더는 꿈속의 퀘스트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미 2억 가까운 돈을 끌어 모아 투자한 만큼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 당연했다.
 헬스 2시간에 이어 주짓수 도장에서도 2시간을 운동하고 나니, 시간은 심야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창 연습이라도 더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젠 모험을 떠날 시간이다.
 -털썩
 집으로 돌아와 깨끗이 씻고, 침대에 누운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자.”
 어제 고블린과 피 말리는 실전을 겪었음에도 기대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두 개다 나완 거리가 먼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런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보다.
 기대감이 모험 때문인지, 단순한 보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도 어김없이 꿈속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 * *
 
 “정신이 드는가?”
 이젠 익숙해진 감각과 함께 눈을 뜨니 회색 천막에 연습용 창들이 줄지어 놓인 경비대 휴게실이 보였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죠?”
 얼굴이 눈에 익은 경비대원이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심력 소모가 상당했던 모양이야. 마을에 들어서니 긴장감이 풀린 거겠지.”
 시간이 고작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역시 현실과 이곳의 시간 흐름은 제멋대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온몸에서 텁텁한 냄새가 풍겼다.
 고블린과의 전투를 위해 냄새를 지운다고 몸에 풀과 진흙을 비볐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여관에 들르기 전에 빨래터에서 씻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래야겠네요.”
 “보아하니, 고블린을 몇 마리 사냥한 것 같던데.”
 “5마리요.”
 “무모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싸울 줄 아는군.”
 싸움을 안 해본 일반인이라도 충실히 무장을 하면 고블린에게 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실전은 이론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숲속에 들어가 이렇게 무사히 사냥을 마칠 수 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지도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원하던 짐은 찾았는가?”
 “아뇨, 그래서 내일 낮에 다시 숲에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어떤 퀘스트가 나오던 일단 고블린 사냥으로 돈을 모을 생각이다.
 “그렇군. 아무쪼록 몸조심하게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경비대에서 풀려난 나는 지도에서 가리키는 빨래터로 향했다.
 빨래터엔 많은 아낙네들이 빨래를 치대고 있었다.
 “그럼 정산하러 가볼까.”
 아낙네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씻은 나는 대충 물기를 털어낸 후 시장으로 향했다.
 “오, 살아서 돌아왔군.”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대장간.
 나는 그곳에서 고블린 단검을 처분하기로 했다.
 “고블린 무기는 광물값밖에 쳐주지 않네. 그래도 매각하겠다면, 개당 철화 9개씩 쳐주도록 하겠네. 사실 이것도 많이 쳐주는 거야. 고블린의 무기는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거든.”
 비록 그가 장사치지만 고객을 상대로 장난을 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 나는 밀당 없이 바로 매각했다.
 그렇게 얻은 것이 4.5동화.
 목숨을 걸고 싸운 것 치곤 싼 느낌이지만, 그래도 여관비 이상을 벌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일반 아르바이트로 하루 3동화 이상을 버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잡화점.
 그곳에서 고블린 가죽 1개를 매각했는데, 점주가 상태가 굉장히 좋다며, 4철화를 쳐주었다.
 만약 고블린 가죽까지 모두 챙길 수 있었다면, 오늘 하루 수익이 6.5동화가 됐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사냥이 익숙해진다면 더 많은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테니, 벌이는 많아질 것이다.
 현재 내 전 재산은 1.4은화.
 이중 1은화를 투자해 철판이 덧대진 가죽 건틀렛을 마련하기로 했다.
 창을 내지를 때 앞에 위치한 손을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스파이크를 몇 개 더 사자, 숙소비용으로 쓸 3동화밖에 남지 않았다.
 “완전 하루살이네.”
 ‘하루살이’라니, 지금의 내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지칭 같다.
 여관으로 향하기 전 항상 창 연습을 하던 공터로 향했다.
 그사이 해는 뉘엿뉘엿 베르트 산맥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붉은 노을을 향해 찌르기 연습하길 10여 분.
 드디어 오늘의 퀘스트가 발생했다.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고블린 50마리, 홉고블린 5마리 사냥.
 보상: 하급 보상카드 2장, 전투 스킬.
 6장 돌발 퀘스트
 
 
 토끼 피냄새를 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고블린 3마리.
 그런데 고블린들은 자신을 유혹하던 피 냄새가 네모나게 깍둑 썰린 간임을 발견하곤 당황했다.
 이것이 유인임을 알아챈 고블린들은 얼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뒤를 노리며 거침없이 달려든 나의 창에 한 마리가 그대로 꿰뚫렸다.
 동료가 당하자 나머지 두 녀석은 흥분했다.
 아마 이쪽의 장비가 충실했다면 도망간다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방어구는 철판이 더해진 건틀렛과 방패를 제외하면 나무로 만들어진 빈약한 것이었고, 녀석들 딴엔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위협적으로 소리치며 단검을 휘둘러왔다.
 “그래야지.”
 나는 녀석들의 눈높이로 묵직한 창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그 창엔 ‘즉사’한 고블린이 꼬치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도축.”
 동시에 창이 가벼워지고, 눈앞에 분해된 고블린 사체가 옅은 빛과 함께 흩어졌다.
 그렇게 크지 않은 이팩트지만, 흩어지는 고깃덩어리와 피가 더해지니 시야를 가리기엔 충분했다.
 -푹!
 이젠 완전히 손에 익은 창을 휘둘러 한 녀석을 추가로 꿰뚫고, 나머지 녀석을 향해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빠득!
 오른팔엔 철판이 더해진 스몰쉴드가 걸려있다.
 덕분에 고블린과 스몰쉴드가 요란하게 부딪혔고, 상대적으로 골격이 약한 고블린에게서 위험한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고블린은 정확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면 즉사하는데, 움직이는 표적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리기는 쉽지 않다.
 덕분에 첫 번째 고블린과 달리 두 번째 녀석은 즉사하지 않고 창에 꿰뚫린 채 바둥거리고 있었다.
 -푸악!
 그래서 나는 녀석을 밟은 채 창을 뽑아 들었다.
 거칠게 창이 뽑혀 나오자 두 번째 고블린은 그대로 쇼크사.
 쉴드 차지에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바닥에서 캑캑대던 세 번째 고블린까지 깔끔하게 창으로 정리했다.
 고블린 세 마리를 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초.
 이젠 고블린 사냥보다, 준비와 유도가 더 오래 걸릴 정도다.
 사실 이렇게 신중하게 굴지 않더라도 두세 마리 잡는 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스스로가 정한 규칙이었다.
 항상 냉정하고, 무조건 안전하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베스트라 생각되는 상황이 아니면 이길 가능성이 높더라도 싸우지 않았다.
 방어구라도 좋으면 모를까, 지금의 빈약한 장비로 방심하다간 순식간에 골로 갈 테니.
 신중하긴 해도 전투가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히 고블린의 사냥속도가 빨라졌다.
 오늘 하루 동안 사냥한 고블린이 20마리가 넘으니, 웬만한 초급 용병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고블린: 50/50, 홉고블린: 0/5]
 
 덕분에 퀘스트에서 지정한 머릿수는 이미 예전에 채웠다.
 하지만 나는 돈을 모으기 위해 계속 고블린을 사냥하고 있는 상태다.
 홉고블린은 오크에 비견되는 강적이니, 퀘스트 완료를 위해선 충실하게 장비를 갖춰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고블린 단검과 가죽을 챙긴 나는 한쪽에 숨겨 놓은 짐가방에 담았다.
 해가 지기까지 꽤 긴 시간이 남았음에도 전투를 끝내는 이유는 마력소모 때문이다.
 전투 스킬이 아님에도 실전에서 잘 활용하고 있는 도축은 액티브 스킬이다.
 MP가 따로 표기되진 않지만 도축은 분명 소량의 마력을 소모했고, 방금 전 전투로 마력의 잔량이 완전 제로가 되었다.
 마력 수치는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대충 머릿속에 퍼센트로 떠올랐는데, 재충전 시간이 상당히 길다.
 그래서 마력이 떨어지면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전투를 끝냈다.
 따로 도축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냥을 이어갈 순 있지만, 그 경우 고블린을 쓰러뜨려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단검뿐이다.
 그래서 비효율적인 전투를 이어가기보단 마력이 떨어지면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허, 대단하군. 아무래도 자넨 사냥 쪽으로 재능이 있는 모양이야. 이대로 용병이 되는 거 어떻겠나?”
 “나쁘지 않죠.”
 고블린 50마리와 홉고블린 5마리 퀘스트를 받고 5일째.
 이젠 카라스 마을의 촌장도, 경비대도 평온의 숲을 오가는 나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용병들이 찾지 않는 서쪽 숲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에 대해 고마워할 정도다.
 대장간에 들러 짐을 내려놓자, 마침 손님으로 있던 용병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여기 있네,”
 나는 고블린 단검 23개를 처분하고 2은화 1철화를 받았다.
 여기에 고블린 가죽 23장을 처분하면 1은화 가량이 생기니, 하루 벌이로는 상당한 수준이다.
 “이제 슬슬 제대로 된 방어구를 갖출 때가 되지 않았나? 돈 좀 모았을 텐데?”
 대장간 주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좀 더 모아서 나중에 좋은 걸로 한 번에 장만하려고요.”
 현재 내가 소지한 금액은 모두 8은화 정도.
 5일 동안 모은 것 치곤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오늘 하루만 3은화를 모았으니, 며칠만 더 고생하면 준수한 수준의 방어구를 풀로 갖출 수 있다.
 “고블린을 상대하기엔 지금 장비가 딱이거든요. 은밀하고 또 만만해 보이니까.”
 “요즘 혼자 숲속에 들어가시는 분이죠? 그러다가 몬스터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우리의 대화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한 용병이 끼어들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겐 지도 기능이 있는 만큼, 뒤치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중무장을 했다가 몸이 무거워지면, 지금까지의 전투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방어구를 사도 중요부위만 철판을 덧댄 가죽 갑옷을 살 생각이다.
 며칠 동안 전투를 하며 느낀 점은 동료가 없다면 장갑을 두껍게 해서 몸으로 맞부딪히기보단,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났다는 것이다.
 “대신 석궁 좀 볼 수 있을까요?”
 내 고집을 꺾지 못한 용병은 어깨를 으쓱이며 동료들과 수근댔고, 주인장은 순순히 세 종류의 석궁을 꺼내 내려놓았다.
 “보조 무기로 쓸 테니, 휴대하기 편한 걸 원하겠지?”
 말을 안 해도 알아서 원하는 것을 찾아주니 편하다.
 그의 말대로 석궁을 찾은 이유는 기습 후 도망치는 고블린을 더 편하게 처치하기 위함이었다.
 “보조용이면 이걸 추천하고 싶군. 다른 것들에 비해 사거리는 짧지만, 그래도 100미터까진 무리 없이 날아가고, 볼트(석궁화살)를 건 채로 활 부분을 접을 수 있지. 이렇게.”
 3개의 석궁 중에 그가 추천한 것은 가장 작은 석궁으로 활 부분 펼쳐도 채 40㎝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 석궁의 가장 좋은 점은 역시 휴대성.
 날개 부분을 접으면 자그마한 몽둥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탁! 팅!
 아래 부분에 위치한 핀을 잡아당기면 활이 펼쳐지고, 방아쇠를 당기면 팽팽히 당겨진 시위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튕겨졌다.
 가장 큰 단점은 휴대가 용이한 만큼 자동 장전 기능이 없다는 것.
 크기 축소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어차피 보조용 아닌가. 난사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맞는 말이다.
 미리 장전해놓고 필요할 때 한발씩 쏘는 게 내가 바랐던 것이니.
 “그거 하나 주세요.”
 
 * * *
 
 -팅!
 -케엑!
 빠르게 쏘아진 석궁의 볼트가 그대로 고블린의 어깨를 관통한다.
 관성에 의해 고블린은 앞에서 자석으로 당긴 것처럼 붕 떠오르더니, 처참히 바닥을 뒹굴렀다.
 나는 창을 뽑아 들고 빠르게 달려가 바닥을 기는 녀석의 등을 꿰뚫었다.
 석궁이 손에 익자 사냥은 훨씬 더 쉬워졌다.
 보조용으로 급하게 쏘는 만큼 명중률이 뛰어나다고 할 순 없지만, 원거리 공격 수단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유용했다.
 그래서 오늘 마을에 돌아가면 석궁을 하나 더 마련할 생각이다.
 자동석궁도 나쁘진 않지만, 차라리 바로바로 쏠 수 있고 휴대가 쉬운 석궁 두 개를 소지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홉고블린 위치를 파악해볼까?”
 이번 퀘스트를 위해 투자한 시간이 10일.
 비로소 원하던 금액을 채운 나는 장비를 맞추기 앞서, 타켓의 존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숲속 깊이 들어왔다.
 평온의 숲에는 놀, 오크 등 고블린보다 위험한 몬스터들도 존재한다.
 이미 고블린을 사냥하면서 수차례 녀석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안전을 위해 싸우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그나마 늑대나 곰처럼 후각이 극도로 발달한 짐승류가 적어서 다행이다.
 몬스터들도 후각이 좋지만, 역시 짐승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어서 아직까지 선공을 허락하는 일이 없었다.
 “그나저나 깊이 들어온 것 치곤 몬스터가 적네.”
 홉고블린의 신체 능력은 오크에 못 미치며 놀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오크와 비슷한 선상에 놓는 이유는 높은 지능 때문이다.
 초보 용병들이 고블린에게 당했다면 그 뒤엔 반드시 홉고블린이 있다.
 장비가 충실한 용병들도 종종 당할 정도니, 준비를 더욱 충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난이도가 벌써 이렇게 높으면, 나중엔 어떻게 되려나. 걱정이네.”
 고블린 5마리를 사냥한 다음에 바로 고블린 50마리와 홉고블린 5마리 사냥이라니, 난이도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차라리 다른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능력치를 높이고, 전투 관련 스킬을 손에 넣고 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
 그렇게 속으로 불만을 표하며 이동하길 10분여.
 -콰아앙!
 갑자기 숲속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폭음에 기겁하며 몸을 숙였다.
 “뭐, 뭐야?”
 조용하던 숲속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황을 살펴야 할까? 아니면 일단 도망치고 볼까?’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튀자.”
 신중한 성격의 내가 저런 곳에 몸을 들이밀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근처에서 카라스 마을의 마법사 고든이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를 지원하며 몬스터를 소탕하라.
 보상: 하급 보상카드 2장, 마법사 고든과의 친밀도
 실패 패널티: 카라스 마을에서 추방
 
 “미친.”
 시스템은 내 생각과 달리 여기선 모험을 해야 할 때라는 듯, 강제성을 띈 돌발 퀘스트를 발생시켰다.
 패널티가 있는 퀘스트는 처음이다.
 그리고 퀘스트를 수행하는 와중에 중복으로 나타난 것도 처음.
 이번 일로 시스템 퀘스트는 나를 정해진 스토리 라인에서 움직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인지 외계인지 뭔지 모를 녀석이 그려 놓은 스토리의 결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젠장!”
 마법사라면 엄청 강하다는데, 내 도움까지 필요한가?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폭발음이 들려온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분주히 움직이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지도에 점점 많아지는 붉은 점 때문.
 대충 잡아도 고든이라 표기된 이름 주변의 붉은 점이 30개가 넘어 보인다.
 또한 고블린만 있는 게 아니라 홉고블린, 놀, 오크까지 있는 만큼, 위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피하기 힘든 돌발 퀘스트가 발생할 줄 알았으면, 장비를 미리 맞춰두는 건데.
 나는 이번 일로 신중한 것도 좋지만, 강해질 계기가 있으면 무조건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타탁!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퀘스트의 패널티가 패널티인 만큼 피할 수는 없다.
 함정을 잔뜩 설치해 나만의 안전 구역을 만들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고블린 세 마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고든에게 정신이 팔린 바람에, 뒤에서 접근한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젠 완전히 모양새가 잡힌 찌르기에 한 마리가 창에 꿰뚫려 즉사하고, 나는 바로 도축을 사용하며 주춤거리는 두 번째 녀석을 횡으로 벴다.
 즉사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지만,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고블린에게선 전의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창으로 시끄럽게 구는 고블린의 목을 찍고는 도망가는 마지막 녀석에게 석궁을 발사했다.
 석궁의 볼트는 고블린의 뒤통수에 깔끔하게 틀어박혀서 순식간에 고블린 세 마리가 정리되었다.
 콰아앙!
 다시금 울려 퍼지는 폭발음.
 시선을 돌리니 나무들이 쓰러진 곳 사이로 푸른빛이 감도는 배리어를 두른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힐끔 이쪽을 향했지만, 나는 자리를 벗어나며 석궁에 볼트를 걸었다.
 -크오오오!
 고든도 자신을 향해 그레이브를 휘둘러 오는 오크로 인해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못했다.
 종이 다른 몬스터끼리는 동료 의식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강력한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인지, 고블린도, 놀도, 오크도 고든을 향해 적의를 쏟아내고 있었다.
 “어쩌다 이 난리를 일으킨 건지.”
 고든이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사방에서 무기를 휘둘러오는 몬스터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것 같진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퀘스트의 동시 완료를 목표로 고든에게 정신 팔린 홉고블린을 우선적으로 노려야겠다.
 나도 실리를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퀘스트 자체가 그것을 위한 걸지도 모르지.”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가장 안정적으로 사격할 수 있는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다.
 군 면제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 남성 중 사격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적은 고블린들을 닦달하고 있는 덩치 좋은 홉고블린.
 거리는 약 50미터 정도.
 손에 쥔 게 소총이라면 못 맞추는 게 바보 수준의 난이도다.
 비록 무기가 소총이 아닌 석궁이고 볼트가 공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사전 연습에서 영점과 거리에 따른 볼트의 궤적을 숙지해놓았다.
 -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볼트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홉고블린의 뒤통수에 틀어박혔다.
 -키에엑!
 홉고블린이 고블린보다 튼튼한 가죽과 골격을 갖고 있다고 해도, 석궁의 볼트를 튕겨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고블린 50/50, 홉고블린: 1/5]
 
 아무리 휴대용이라 해도 근거리에선 철갑옷조차 뚫는 것이 석궁 아니던가.
 동료가 죽자 다른 홉고블린과 고블린들이 당황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에 다른 몬스터들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눈앞에 작렬하는 불꽃에 다시금 어그로가 고든에게 향해졌다.
 고블린 부대는 동료를 죽인 자를 찾겠다고 난리였지만, 폭발로 인한 연기와 다양한 몬스터가 섞여 풍기는 냄새 때문에 나를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나는 석궁에 볼트를 건 다음, 다시금 홉고블린을 노렸다.
 -팅!
 운이 좋다.
 이번에도 머리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표적이 마지막 순간에 움직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볼트는 홉고블린의 짧은 목을 관통했다.
 녀석이 켁켁 소리를 내며 발악적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고블린 50/50, 홉고블린: 2/5]
 
 그리고 두 번째 홉고블린이 카운트되자.
 -키에에엑!
 내가 숨어 있는 수풀을 몇몇 고블린들이 정확하게 가리켰다.
 볼트가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준은 아니다.
 결국, 그렇게 내 위치가 탄로 나고,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내 뒤를 쫓아오는 적의 수는 고블린 8마리에 홉고블린이 1마리.
 호기롭게 맞서기엔 위험한 숫자였다.
 나는 미리 만들어둔 함정 구역을 향해 이동했다.
 함정이라고 해봐야, 스파이크에 발걸이 밧줄이 다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함정 구역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후우우욱!
 그 이유는 바로 마법의 불꽃이 방심한 고블린들 틈새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위협적인 폭발음이 고막을 자극한다.
 나는 이것이 기회임을 느끼고 바로 몸을 돌렸는데, 예상대로 고블린들의 상태가 심각했다.
 가장 큰 장애물인 홉고블린은 피부가 벗겨진 흉측한 상태로 신음을 토하고, 고블린 세 마리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나머지들도 부상이 심해 보였다.
 그 와중에 몸을 일으키는 홉고블린을 보니 확실히 인간과 다른 야만스러움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석궁에서 발사된 볼트가 녀석의 미간에 틀어박히고, 나는 고통에 빌빌대는 고블린들을 무참히 사살했다.
 
 [고블린 50/50, 홉고블린:3/5]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죽이기만 하면 퀘스트는 카운트가 되었다.
 덕분에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던 몬스터 무리를 앞에 두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거 어쩌면 꿀 퀘스트일지도 모르겠다.
 
 * * *
 
 -푹!
 에너지 탄에 머리를 맞고 비틀거리는 오크.
 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등에 창을 찔러넣었다.
 “큭!”
 그러나 마초 몬스터인 오크의 내구력은 홉고블린이나, 놀을 가볍게 상회에서 상당한 반발력이 팔로 전달 되었다.
 근육질 오크는 등에 창을 꽂은 채로 몸을 뒤틀었다.
 거친 풍압과 함께 위협적으로 쇄도하는 글레이브.
 나는 창에 미련을 두지 않고 무기를 버린 채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으니.
 -따다다닥!
 번개라고 하기엔 무안한 전기 공격 마법.
 감전된 오크가 새파란 스파크를 튀기며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어댔다.
 그사이 여유롭게 석궁에 볼트를 채운 나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쿵!
 덩치 좋은 오크가 뒤로 넘어가고.
 지도에 더 이상 표시되는 붉은 점이 없자 쑥대밭이 되어버린 숲속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사는 나중에 하세.”
 보니까 마력도 거의 다 떨어진 것 같던데, 고든은 지치지도 않는지 덩치가 큰 오크 시체에 다가가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마법은 위력적이지만, 신체 능력이 형편없어 그가 낑낑대며 칼질을 하는 게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해당 오크를 향해 도축을 사용해 주었다.
 이미 여러 차례 위급 상황에서 도축을 사용한지라, 이제 와서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고맙네.”
 그리고 그는 얼른 분해된 시체 더미 속에서 붉게 물든 구슬을 찾아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숲에서 돌연변이 오크를 발견한 것까진 좋았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나는 뚱한 표정으로 악수를 건네오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마법사 고든이라 하네. 케일론 왕립 마탑에 소속된 정규 마법사지.”
 “지훈이라고 합니다. 자유민 신분으로 피치 못하게 카라스 마을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응? 아아, 자네가 촌장이 말한 그 청년이고만. 진상품 목록작성을 도와줬다지?”
 “네, 뭐.······”
 “도와줘서 정말 고맙네. 지훈군이 없었다면 나는 위험했을 거야. 이거 큰 빚을 졌군.”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판단력과 순발력이 돋보였던 혼전 속의 전투. 지능과 민첩이 1 향상됩니다.]
 
 추가로 메시지가 뜨진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고든의 눈빛에 호감이 가득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 친밀도 수치가 표기된다면 MAX에 가깝지 않을까?
 고든과 관련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하급 보상카드 두 장에 능력치 2개를 추가로 확보하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홉고블린을 4마리밖에 사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마리만 더 있었으면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나? 고민 있어 보이는데?”
 귀족이나 다름없는 신분이라 들었지만, 내가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일까?
 그는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런 고든의 모습에 나는 혹시나란 생각으로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홉고블린을 한 마리 더 잡아야 하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런가? 그럼 내가 발 벗고 도와주지. 서치 한 번에 바로 찾아낼 수 있으니.”
 은근히 도움을 기대하긴 했지만, 흔쾌히 나서주니 그를 고깝게 여겼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갖고.”
 그리고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홉고블린을 찾아낸 고든의 도움으로 10일 동안 나를 이곳에 묶어놨던 퀘스트를 손쉽게 완료할 수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피 튀기는 전투의 연속, 높은 투지. 힘과 체력이 1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마력방출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드디어 손에 넣은 전투 스킬.
 나중에 고든 없는 곳에서 사용해봐야겠다.
 대충 이름만 들어선 마력을 활용한 공격력 증가 효과가 아닐까 싶은데, 현실에서도 사용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서치와 고든의 현혹 마법으로 홉고블린을 유인한 것까진 좋은데, 시체 투성이가 된 사냥터에 홉고블린과 쫄병 고블린의 시체가 더해지니, 더욱 건들기 힘든 규모가 되었다.
 하지만 몬스터 시체는 돈이된다.
 특히 이번엔 홉고블린, 놀, 오크 등 제법 돈이 되는 몬스터의 수가 적지 않아 이대로 방치하고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일단 도축을 활용해 돈이 되는 것부터 챙기기로 했다.
 “자네 뭐하는 건가?”
 내가 열심히 부산물을 분류하자 고든이 물었다.
 “마을로 옮기려고요.”
 혹시 이것들은 독식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그가 평민 위의 존재라지만, 나는 정당하게 자신의 지분을 주장할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고든은 껄껄 웃으며 손짓했다.
 파앗!
 “어?”
 그에 숲속을 피로 물들인 몬스터의 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고든은 자신의 팔찌를 가리켰다.
 “아공간 아티펙트네.”
 “대단하네요.”
 “스승님의 유품이지.”
 덕분에 가볍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거 받게.”
 1시간의 이동 끝에 도착한 카라스 마을.
 또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는 것 아닐까 걱정이 들 때, 그가 내게 묵직한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뭔가요?”
 “몬스터 사체 값이네. 실험용으로 내가 매입하지.”
 그곳엔 금화 4개와 은화 11개, 동화 25개가 들어있었다.
 오크나 홉고블린 등의 사체가 포함되어 있다 해도 지나치게 많았다.
 이 정도면 모든 사체를 사고도 남을 양이었으니.
 “그냥 받게. 감사함의 표시기도 하니.”
 덕분에 고든에 대한 내 평가가 더욱 상향 조정되었다.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돈주머니를 챙겼다.
 덕분에 예정보다 더욱 수준 높은 장비들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7장 스킬과 장비
 
 
 최근 현실보다 꿈속에 머무른 시간이 길어서인지, 내 방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젠 목재와 황토가 더해진 여관방의 천장이 더 익숙할 지경.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스트레칭을 했다.
 “역시 개운하네.”
 꿈속에서 강제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은 누군가의 수법에 놀아나는 느낌이라 불쾌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의 상쾌함과 보상카드를 보면 불만이 절로 누그러졌다.
 나는 머리맡에 놓여 있던 4장의 하급 보상카드를 집어 들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노력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는 건 오히려 현실이 아닌 꿈속이네.”
 꿈속에서 죽임을 당해도 이상이 없다면 마음이 더 가벼울 텐데, 그건 시험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급 보상]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불필요한 생각을 떨쳐낸 나는 기분 좋게 보상카드를 사용했다.
 이번에도 당첨 같은 녀석이 껴있으면 좋겠는데.
 보상을 한 번에 4개씩이나 까본 것이 처음인지라 기대감이 상당히 컸다.
 -파앗!
 연달아 터지는 새하얀 빛.
 
 [20만 원을 획득했습니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처음엔 꿈만 꿔도 현찰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이 좋다고 여겼지만, 지난번 엄청난 보상을 얻고 나니, 이 정도는 꽝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이것도 나쁘지 않은 건데, 역시 사람의 욕심이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는 듯, 강화된 특별한 이펙트가 발생했다.
 “당첨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쥐며 환호했다.
 그런데 그 이펙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달아 발생했다.
 
 [액티브 스킬 도약을 습득했습니다.]
 [패시브 스킬 직감을 습득했습니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물질적인 보상은 아니었다.
 세속적인 보상을 바란 입장에선 김이 샜지만, 이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당장의 이득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이게 더 나을 것 같다.”
 유일한 물질적 보상인 5만 원짜리 네 장을 지갑에 찔러 넣은 나는 현재 상태를 체크했다.
 
 힘: 7 ->8 체력: 4 ->5
 민첩: 4 ->7 지능: 25 ->26
 마력: 4 운: 2
 
 능력치 상승률은 이렇다.
 현실에선 신분증이 활성화되지 않지만, 이 정도는 굳이 신분증을 안 봐도 기억하고 있다.
 퀘스트 완료로 능력치 4개가 상승하고 보상카드로 민첩 2를 추가 획득해 능력치가 6개나 상승했다.
 맨 처음 힘이 5, 민첩과 체력이 3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대로 가다간 슈퍼맨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더구나 민첩은 처음에 3이었던 것에 비해 무려 2.3배나 증가한 상태니, 모르긴 몰라도 운동선수에 비견되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조금 있다가 공원이나 한 바퀴 달려봐야겠다.
 “이어서 스킬.”
 
 도축(액티브 / LV-)
 마력방출(액티브 / LV1)
 도약(액티브 / LV 확인 못 함)
 직감(패시브 / LV 확인 못 함)
 
 마력방출을 얻으면서 알 된 것인데, 스킬은 종류에 따라 레벨이 정해져 있다.
 도축은 무레벨의 스킬이고 마력방출은 1, 나머지 두 개는 신분증을 열어야 확인할 수 있다.
 스킬 레벨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높아지는 것인지, 처음부터 정해진 등급인지 모르지만,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리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현실에서의 스킬의 사용 가능 여부였다.
 어제는 깜박하고 도축으로 실험하는 것을 잊었는데, 오늘은 반드시 확인을 해봐야겠다.
 만약 현실에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면 초능력자나 다름 없다.
 “뭐, 능력치가 적용되는 것을 떠올리면 이미 반쯤 초능력자라 할 수 있나?”
 가볍게 세수를 하고 모자에 마스크까지 눌러쓴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현재 시간 8시 30분.
 더구나 내가 사는 곳이 사당동이다 보니, 많은 직장인들을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출근한다고 바삐 움직이는 인파 속에 홀로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게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 개척자가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힐끔 나를 훑고 지나가는 몇몇의 시선이 불쾌하고, 저 무리에서 벗어난 것 자체가 타의에 의해서라지만, 나는 지금 아주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약 20분 동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남성역 인근의 까치산 공원.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치곤 굉장히 크고 수풀이 우거진 산인지라, 숨어서 무언가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더구나 평일 출근 시간대라서 그런지 사람이 적어서 산 전체를 전세를 낸 느낌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 수풀에 가려진 제법 아늑한 공터를 발견한 나는 풀내음 가득한 공기를 들이켰다.
 상승된 능력치 덕에 산길을 오르고도 힘들다는 느낌이 없었다.
 가볍게 손과 발을 풀어주고, 몸을 뒤튼 나는 맑은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 거렸다.
 “도약.”
 순간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고.
 있는 힘껏 점프를 하자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수목들의 모습.
 낮은 나무들의 높이를 넘어 까치산 아래 위치한 사당동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헙!”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은 높이.
 하지만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게 될까 입을 틀어막았다.
 중력을 무시하며 뛰어오른 높이는 대략 10~15미터 정도.
 나는 현실에서 스킬이 사용 가능하단 사실에 놀라기보다, 서서히 자유 낙하를 하고 있다는 상황에 기겁했다.
 몸은 점점 지면을 향해 가속도를 더해가고, 땅이 눈앞까지 다가오자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쿵!
 “응?”
 그런데.
 묵직한 충격음이 들렸지만 예상했던 고통이 없어 눈을 떠보니, 아무렇지 않게 두 발이 땅을 딛고 있었다.
 “하, 하하.”
 도약 스킬은 점프뿐만 아니라, 착지에 대한 대비까지 되어있던 것이다.
 다행이다.
 하긴 점프 뛰고 난 후 내 몸을 가누질 못하면 쓸모없는 반쪽짜리 스킬이긴 하지.
 “좋은데?”
 스킬을 현실에서 쓸 수 있는 사실도 기쁘지만, 당장 이것을 활용하면 꿈속에서의 생존율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도약이란 게 점프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뛰면 돌격으로도 사용할 수도 있어서 응용성이 뛰어났다.
 창을 쥔 상태로 앞으로 도약을 한다면 무게와 속도가 더해지니 따로 스킬을 쓰지 않더라도 상당한 공격력을 보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사용해 볼 것은 이번에 퀘스트를 깨고 얻은 공격용 스킬, 마력방출이다.
 ‘마력방출.’
 -스스스.
 스킬을 사용하니 머릿속으로 마력을 신체 어느 부위로 출력할지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는 오른손을 택했고, 그 즉시 푸른빛의 기운이 주먹을 감쌌다.
 “이게 마력인가?”
 고든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위력이 궁금해 굵직한 나무에 정권을 지르니.
 -빠악!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나무에 주먹 자국이 깊이 새겨졌다.
 뭐, 한 번에 나무가 부러진다든가, 구멍이 뚫리는 등의 극적인 효과는 없었지만, 힘으로 휘두르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지속효과는 대충 10초 정도인가.”
 또한 마력방출은 단발성 스킬이 아닌, 지속성 스킬이라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다만 여러 가지 장점 속에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력의 소모가 너무 크단 것이었다.
 내가 보유한 마력으로 도축 스킬은 최대 16번까지 사용할 수 있다.
 도약의 경우 도축과 마력 소비량이 같았으며 마력방출은 약 3배를 소비했다.
 “마력을 높여야겠다.”
 현재 내 마력 수치는 4.
 수월한 전투를 위해서라면 더욱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보통 퀘스트를 완료하면 진행 방식에 따라 보너스 능력치가 주어진다.
 소모가 크다고 아끼지 말고 전투 스킬을 적절히 사용하면 마력도 상승할 것이라 생각한다.
 “어째 초인이 된 것 같네.”
 스킬까지 더해지니, 완전히 평범함과 거리가 멀어졌다.
 지금은 마치 헐리우드 영화 속 슈퍼히어로가 된 느낌이다.
 물론,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버릇처럼 내뱉는 정의란 단어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말이다.
 “직감은 뭔지 모르겠네. 패시브라는 건 항상 실행되고 있다는 거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느껴보려 해도 딱히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다.
 이름만 봐선 위기 상황에서 유용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나는 도약 스킬의 거리 조절과 마력방출의 연계를 연습하곤 신체 능력 확인을 위해 근처 농구장 코트를 뛰었다.
 “빠르긴 한데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네.”
 민첩이 처음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고 해서, 100미터를 16초에 뛰던 내가 8초 정도로 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육량이 두 배 많다고 펀치 기계 점수가 두 배 높게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다지 실망하진 않았다.
 애초에 이럴 거라 예상했으니까.
 그런데 앞으로 능력치가 제한 없이 치솟는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
 헬스 트레이너는 자신이 짜놓은 코스를 너무도 쉽게 수행하는 날 보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제보다 근육이 더 붙은 느낌인데요?”
 트레이너의 물음에 나는 애써 태연하게 반응했다.
 “어제 운동한 게 효과가 있던 거 아닐까요?”
 “아뇨, 아뇨. 하루 만에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보긴 힘들죠.”
 “그러면 운동기구에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오늘이 더 편하게 느껴지네요.”
 “그런가?”
 겨우 힘이 하나 올랐을 뿐인데,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는 트레이너의 모습에 아무래도 번지를 잘못 찾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능력치는 계속 오를 테고, 그에 따라 근력과 체력도 점점 늘어갈 텐데, 전문가의 눈을 속이기란 힘들 것 같다.
 단순히 현실에서 근력 운동을 하면, 꿈속에서 능력치에 영향을 주는지가 궁금했었는데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상승하는 능력치로 인해 시험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결국, 일정보다 빠르게 운동을 마친 나는 회원권을 해약하고 규정에 따른 금액을 환불받았다.
 그리고 혹시 트레이너가 피해를 볼까 봐, 그의 문제가 아닌 개인 사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차라리 타격기를 배우는 게 났겠어. 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전투에 도움이 되겠지.”
 그래서 나는 집 근처에 위치한 무에타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실전용으로?”
 “네.”
 “자네 건달인가?”
 “아, 아뇨.”
 체육관은 생각보다 작았는데, 관장이 챔피언 출신이고 많은 프로선수들을 배출한 곳이라 한다.
 관장의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훑어봤고, 이어서 내게 허락을 구한 뒤 어깨와 허벅지 등을 만졌다.
 “균형이 잘 잡혀 있는데? 따로 운동했나?”
 “네, 뭐······. 남들 하는 만큼은요.”
 “좋아, 그렇게 강함을 원한다면 특별과외를 해주겠네. 그런데 우린 따로 실전용으로 구분해 놓은 것은 없어. 대신 선수 코스로 하드하게 운동시켜주지. 그러면 되겠나?”
 관장의 말에 나는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팡! 팡!
 “오, 금세 요령을 터득하는군. 힘도 제대로 실려 있고.”
 보통 일주일은 기본스텝과 펀치 연습만 시킨다고 하는데 내가 빠르게 습득을 해서인지, 관장은 스트레이트와 원투펀치까지 알려주었다.
 미트를 끼고 만족스런 반응을 보이는 관장의 눈빛에 이채가 깃들었다.
 덕분에 나는 원투펀치 응용에 이어 원투쓰리포까지 배울 수 있었다.
 원래는 딱히 운동신경이 좋다고 볼 수 없는 몸이지만, 능력치가 높아져서인지, 체육관의 관장조차 관심을 보일 만한 몸이 되어있었다.
 “힘도 힘이지만, 동체 시력과 신체 반응 속도가 굉장히 좋아. 이건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군.”
 능력치의 힘은 근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당연.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는 민첩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헬스를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대신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알찬 시간을 보낸 나는 상쾌한 표정으로 주짓수 도장에 향했다.
 그리고 주짓수 도장에서도 높아진 능력치 때문인지, 어제보다 더욱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 * *
 
 5번째 맞이하는 여행.
 현실에선 겨우 5일째지만, 이곳에서 오늘로 20일째다.
 그래서 거리를 오가면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었고, 마법사 고든을 도와주었단 이야기가 퍼졌는지 모두가 큰 호감을 표해왔다.
 “이게 누구야. 고든님을 구해준 카라스 마을의 은인이 아닌가.”
 또한, 대장간에 들어서자마자 거창한 인사를 건네오는 주인장의 모습에 입꼬리를 씰룩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든님께서 많은 존경을 받고 계신가 봅니다. 여기 오기까지 어찌나 사람들이 붙잡던지.”
 20분에 걸친 촌장의 격려는 학창시절 영양가 없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하지, 고든님은 우리 마을의 상징적인 분이시거든. 자네처럼 목숨을 구원받은 이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 겸손하시지.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이야.”
 확실히 보답이라며 돈주머니를 챙겨주던 그의 모습에서 권위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감사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알며, 괜한 체면치레를 하지 않는 것이 고든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물론 대책 없이 일을 크게 벌이는 조심성 부족한 인물이란 인상도 있지만 말이다.
 “참, 아침 일찍부터 많은 용병들이 자넬 찾더군. 알고 있나?”
 용병들이 날?
 어째서?
 “자네, 도축 스킬 보유자라면서?”
 주인장의 물음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법사 고든에게 들켰던 내용.
 위급 상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입장이 아니었던지라, 전투 중에 도축 스킬을 남발했었다.
 그런데 그런 기이한 능력에도 고든이 아무 의문을 표하지 않던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던 차다.
 “그것 때문이지. 도축 스킬이 어디 흔한가? 사냥의 신 다이에나님을 모시는 신전에 거액의 기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스킬인데. 용병들이 눈독 들이는 게 당연하지.”
 도축 스킬이 존재했었구나.
 하긴 마법과 수많은 이능니 존재하는 세계인데, 내가 너무 지구의 상식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응? 자넨 그것도 모르면서 스킬을 얻은 건가?”
 “원해서 얻었다기보다, 우연히 손에 넣은 거라서 이걸로 딱히 무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
 “호오, 운이 좋은 케이스군.”
 대장간 주인은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용병쪽 길로 나아갈 생각인 것 같던데, 잘된 것 아닌가. 도축 스킬만으로도 서로 모셔 가려 난리인데.”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용병들에게 몬스터의 부산물을 수집하는 것은 꽤나 큰 제약이라고 들었다.
 사냥터에서 몬스터의 가죽을 벗기거나 뼈를 분리하는 데 빼앗기는 시간이 상당하고, 피냄새를 풍기며 한 장소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 수습하기 편하고 돈이 되는 중요부위만 챙기거나 시체를 통으로 옮기는 수단을 쓴다.
 어찌 됐던 비효율적인 것은 분명하다.
 반면 도축이 있다면 시간도 돈도 더 챙길 수 있는 만큼, 용병들이 도축 스킬을 선호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용병이라.’
 고든 때처럼 몬스터 사냥을 함께할 동료가 있다면 퀘스트의 난이도는 대폭 하향될 것이다.
 “관심이 있군. 원한다면 괜찮은 녀석들로 소개해줄 수도 있네만.”
 “용병 등록을 해야 하죠?”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하는 편이 좋지. 그래야 보상에 대한 분배나 다른 용병과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길드에서 중재해 줄 테니. 용병 등록은 어렵지 않네. 우리 마을에도 작지만 지부가 있긴 하거든.”
 분명 관심은 있지만 지금 당장 다른 용병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다.
 일단 이번에 맞추게 될 장비와 새로 얻은 스킬에 익숙해져야 하니.
 “역시 신중파고만. 하긴 자네 같은 스타일이 용병업계에선 오래 살아남지. 자네의 생각을 존중하네.”
 대장간 주인은 두터운 손으로 내 등을 탕탕 두들기곤 따라오라는 재스쳐를 취했다.
 그가 나를 안내한 곳은 매장 뒤쪽에 있는 작업실이었다.
 “자넨 사이즈가 표준이니, 바로 착용할 수 있는 게 꽤 될 거야. 혹시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면 맞춤 제작을 해주지. 다만 그 경우엔 값이 표준 장비보다 3할 정도 비싸진다는 것을 알아두게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동성이 높은 경량 갑옷 위주로 살폈다.
 “지금 예산이 2금화 정도던가?”
 원래는 2금화로 가죽에 브레스트 플레이트가 더해진 갑옷을 살 생각이었지만, 고든 덕분에 예산이 상당히 늘어나 굳이 기존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고급품으로 분류되는 장비들을 살피자 주인장이 의아하단 반응을 보였다.
 아마 주인장 딴엔 내 자금 사정을 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돌발 퀘스트의 보너스가 존재했다.
 “어제 고든님께 지원을 받았거든요. 지금은 7금화 정도입니다.”
 “오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
 소지금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비용을 장비 마련에 사용할 생각이다.
 어제 일로, 스스로를 강화할 계기가 있으면 무조건 강화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을 반짝인 대장간 주인은 그럼 자기네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장비를 추천해 준다면서 묵직한 나무 상자를 꺼내왔다.
 그리고 그가 꺼내 든 것은 검푸른 레더아머와 광택이 없는 쥐색의 브레스트 플레이트가 더해진 갑옷이었다.
 디자인은 내가 사려고 했던 오크가죽 갑옷과 같았으나, 여러모로 비범해 보이는 장비였다.
 “트롤과 리자드맨의 가죽을 덧대 만든 복합소재에 철보다 4배 비싼 흑철로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만들었지. 아마 이보다 뛰어난 물건은 쉽게 보기 힘들 거네.”
 더불어 갑옷은 세트로 흑철로 된 각반과 건틀렛도 세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얼만가요?”
 “원래 판매가는 8금화네. 하지만 자네는 마을의 은인이기도 하니 7금화에 내주지. 이거 공임비도 제대로 못 챙긴 가격이네.”
 일반 철로 된 풀 플레이트아머가 5금화임을 생각하면, 가죽 갑옷 주제에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주인장이 추천한 갑옷에 매료된 나는 길게 고민할 것 없이 그것으로 결정했다.
 “좋은 선택이네. 이 녀석이 드디어 임자를 만나는군.”
 가죽 갑옷은 활동성을 중시하는 용병들이나 입는 방어구다.
 그런데 이 마을을 찾는 용병들은 대부분 등급이 높지 않았고, 그들에게 8금화나 하는 갑옷은 상당한 사치품이었다.
 대장간 주인장은 마을의 은인이라 싸게 준다고 했지만, 사는 사람이 없어서 절하된 가격에 넘긴 것 아닐까란 의심이 들었다.
 “조정할 것도 없이 딱 맞는군. 불편한 데 없나?”
 “좋네요,”
 제대로 된 방어구를 걸치고 나니, 이젠 제법 사냥꾼티가 났다.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놀 30마리 사냥
 보상: 하급 보상카드 2장, 자동 회복 스킬
 
 ‘그럼 오늘도 힘내 볼까?’
 8장 기묘함
 
 
 보통 ‘놀’이라 하면 늑대인간의 하이에나 버전이라고만 생각되는데, 이쪽 세상의 놀은 이미지가 상당히 다르다.
 놀은 이족보행 중형 몬스터로 덩치와 질량에선 오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다만 전신이 근육으로 이뤄진 타고난 전사 오크와 달리, 놀은 살이 뒤룩뒤룩 찐 덩치 큰 돼지란 점이 다르다.
 대가리는 하이에나지만 몸은 사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
 더구나 지능까지 낮아서 덩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오크보다 질 떨어지는 몬스터로 인지된다.
 -다다다닥!
 그런데 딱하나 오크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녀석들의 돌진이었다.
 평소엔 이족보행으로 느릿느릿 돌아다니지만, 사냥감을 발견하면 짐승처럼 네발로 달려온다.
 막상 돼지가 달리면 상당히 빠른 것처럼, 녀석의 돌진 만큼은 무기를 쥔 채 달려오는 오크나 홉고블린 등과 비교가 안 된다.
 “읏차.”
 하지만.
 그런 무식한 돌진은 짐승들에게나 통하지, 철저한 준비를 거친 사냥꾼에겐 통하지 않는다.
 나는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놀 3마리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당겼다.
 그에 40㎝ 간격으로 엮어놓은 자벨린(투척용 창) 6개가 날카로운 강철 촉을 번뜩이며 사선으로 세워지고, 자기 몸무게를 못 이긴 놀들은 알아서 창을 향해 몸을 찔러 넣었다.
 -푸욱!
 -쿵! 쿠쿵!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놀 두 마리가 자벨린에 꿰뚫려 바닥을 뒹굴었다.
 “쉽네.”
 그렇게 손짓 한 번에 두 마리를 아웃시킨 나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마지막 놀을 향해 석궁을 겨눴다.
 -팡!
 무섭게 날아드는 볼트를 마주 달려오면서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크어어어!
 볼트는 녀석의 어깨 깊숙이 틀어박혔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여전히 달려드는 마지막 놀을 발걸이 밧줄과 스파이크가 반겨주었다.
 -쿠당탕탕!
 그리고 온몸에 스파이크를 단 채 으르렁거리는 녀석을 주무기인 롱스피어로 마무리.
 아주 깔끔하게 전투가 끝이 났다.
 만약 한 마리가 더 많거나, 첫 번째 함정에서 두 마리가 살아남는다면, 직접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근접 전투를 어려워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력방출과 도약 스킬이 생기고 나서부턴 조금씩 전투에 재미를 붙여가는 중이니까.
 물론 흉악한 면상을 가진 몬스터와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것은 담이 커야 하지만, 나는 상대방의 외견에 위축될 만큼 겁이 많지 않았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자동회복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높은 공격 성공률. 민첩이 1 향상됩니다.]
 [스킬에 대한 높은 이해도. 마력이 1 향상됩니다.]
 
 “좋아! 마력!”
 이번 퀘스트는 이전까지와 달리 겨우 이틀 만에 끝이 났다.
 난이도는 분명 홉고블린 5마리가 포함된 고블린 사냥보단 높겠지만, 장비와 스킬,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 데다가 대비를 잘한 만큼 쉽게 퀘스트를 완료했다.
 지금이라면 오크 사냥 퀘스트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마을로 돌아가자.”
 나는 놀 3마리의 가죽과 이 세계에서 약재로 많이 쓰인다는 쓸개를 챙겼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만큼 가죽의 크기가 고블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여서 지게나 다름없는 가방을 짊어지니, 완전군장 이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한두 번 정도는 더 싸울 수 있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다.
 마력에 여유가 있다고 괜히 욕심부리다가 사냥터 한복판에서 잠이 깨기라도 하면, 다음 날 어떤 문제가 생길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퀘스트 완료 후에는 무조건 안전 구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응?”
 그런데 그때.
 미니맵을 체크하며 빠르게 숲을 벗어나던 나는 신체의 이상을 깨닫고는 크게 놀랐다.
 “마력이.”
 놀랍게도 마력이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로 차오르는 것이었다.
 물론, 퍼센티지로 따지면 20초에 1%정도지만, 비교의 기준이 되는 기존 회복 속도가 워낙 느렸기에 이 정도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속도였다.
 “자동회복 때문인가?”
 예전엔 마력이 떨어지면 그냥 복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회복속도면 33분 만에 마력을 모두 채울 수 있단 뜻이니, 앞으로의 전투 스타일이 바뀔 수밖에 없다.
 스킬을 아낄 필요가 없는 만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고, 그만큼 사냥의 효율과 속도도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도축(액티브 / LV-)
 마력방출(액티브 / LV1)
 도약(액티브 / LV-)
 직감(패시브 / LV1)
 자동회복(패시브 / LV1)
 
 스킬창을 열어보니, 자동회복에도 레벨이 존재했다.
 그 말은 스킬이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리고 마력 회복이 아니라 자동회복이란 포괄적인 이름이 지어진 걸 보면 스킬 효과가 이 정도로 끝은 아닐 것 같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스킬이네.”
 잠시 후 마을에 도착한 나는 놀의 가죽 더미에 말을 잃은 경비병을 뒤로한 채 시장으로 향했다.
 “진짜, 말이 안 나오네요. 당신 고블린 3마리에 쫓겨온 사람 맞아요?”
 “아무래도 사냥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재능이란 단어로 치부해도 될 만한 수준이 아닌데요?”
 “하하.”
 “고블린까진 그러려니 했지만, 놀을 고블린 수준으로 사냥해오니······.”
 잡화점의 주인인 메리란 이름의 젊은 여성은 고개를 내저으며 놀 부산물을 처리한 돈 6은화 4동화를 내게 건네주었다.
 “저야 도축 스킬로 다듬어진 질 좋은 가죽을 얻을 수 있어서 좋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지 걱정이네요.”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에 메리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잡화점을 나섰다.
 이어서 여관방으로 돌아와 씻은 다음 침대에 누우니 기다렸다는 듯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계속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여관에 돌아와 누워야지 잠에서 깨는 것 같네.’
 그리고 나는 보상카드의 내용물을 기대하여 판타지 세상에서 벗어났다.
 
 * * *
 
 -안녕하십니까. SBN 아침 뉴스입니다. 먼저 해외 사건 사고 소식을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젯밤 12시경, 일본 홋카이도 오비히로 시에서 묻지 마 살인 사건이 발생해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사상자가 무려 13명에 달하며, 피해자들은 단 한 명도 생존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으며, 어째서인지 해당 지역의 CCTV가 범행이 발생한 20분 동안 정지한 데다가 목격자도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시민들은 계획된 테러가 분명하다며, 해당 지역에 출입한 외국인들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경찰에 성토하고 있습니다.
 
 적막감을 깨고자 TV를 켰는데, 나를 반겨준 것은 더없이 흉흉한 뉴스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도로 TV를 껐다.
 “별일이 다 있네.”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그냥 거기까지.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두 장의 하급 보상카드를 집어 들었다.
 “응?”
 그런데 문득.
 방금 뉴스의 내용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데자뷰처럼 말이다.
 -펄럭.
 내 시선은 자연히 방 한구석에 접혀 있는 A조간 신문으로 향하고, 그것을 펼치자 가장 자극적인 기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K대 캠퍼스서 연쇄 살인 사건 발생. 경찰 CCTV를 확인했지만, 사건 발생 전후 1시간 동안의 영상이 저장 안 돼 수사가 난항.]
 
 얼마 전 보상으로 얻었던 미래의 신문.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주 후에 발생할 일이었다.
 “······.”
 작동을 안 하는 CCTV.
 목격자 없는 대량 살인 사건.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뭐야, 이거.”
 동일범?
 아니면 정말 계획된 테러?
 보도된 자료만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어차피 진실은 범행을 일으킨 자들만이 알고 있을 테니.
 하지만 이 정도면 관련성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마치 나보고 사건을 해결하라는 것 같네.”
 영화나 만화 속 주인공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특수한 힘이 내게 주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마땅히 정의를 구현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순진하게 내뱉고 다닐 만큼 착하지 않다.
 내가 양팔을 뻗어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의 몇안 되는 친우와 가족이라면 모를까,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아주 이기적인 사고방식.
 그러나 애초에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 신문의 기사를 처음 봤을 때도 학생들을 위해 직접 나서야겠단 생각보다, 경찰에 위험해 보이는 거동 수상자가 있다는 정도의 신고만 해놓을 생각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이니까.”
 만약 동일범이라면 나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사람을 무분별하게 살인하는 사이코들과 엮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득보다 실이 컸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신문을 덮은 나는 바로 보상카드를 사용했다.
 
 [체력이 2 증가합니다.]
 [운이 2 증가합니다.]
 
 내가 너무 야박하게 굴어서일까?
 보상도 어중간했다.
 스텟이 오른다면, 힘이나, 마력, 민첩이 좋은데······.
 특히 운은 어디다 써먹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처음 내 운이 겨우 1이었는데, 이젠 4가 되었다.
 그럼 4배 더 좋은 행운이 들어온다는 걸까?
 “몰라, 운동이나 하자.”
 힐끔 접어둔 신문을 바라본 나는 애써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 *
 
 내가 열심히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꿈속 세상은 ‘뮤’라는 단 하나의 대륙이 존재하며, 이 뮤 대륙은 ‘하이랜드’와 ‘미드랜드’, ‘이블랜드’ 3개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이랜드는 드래곤을 비롯한 엘프, 드워프, 수인족 등 다양한 유사인종이 태초의 자연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미드랜드는 12개의 국가가 서로를 견제하며 전쟁이 끊이질 않는 인간들의 영역이다.
 이블랜드는 불길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악마 종을 비롯해 다양한 괴물들이 둥지를 틀고 있으며, 뮤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몬스터들의 고향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하이랜드, 미드랜드, 이블랜드는 대협곡과 죽음의 사막으로 막혀 있어, 서로의 영역에 왕래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때문에 땅은 하나로 이어져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3개의 영역을 별개의 대륙으로 보고 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3개의 영역 중 가장 강성한 힘을 갖고 있는 곳은 하이랜드도, 이블랜드도 아닌, 인간들이 다스리는 미드랜드란 점이다.
 보통 이런 세계관에서 인간은 위에서 맞고 밑에서 맞는 동네북과 같은 신세인 게 일반적인데, 드래곤이나 악마종이 포함된 두 영역보다도 강성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미드랜드가 두 대륙에 비해 강성한 이유는 특별한 게 아니다.
 바로 쪽수와 신성력의 존재 때문이었으니.
 하이랜드의 드래곤은 지상최강의 생명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막강하다.
 오죽하면 드래곤 한 마리의 전력이 국가에 버금간다고 하겠는가.
 다만 그 막강한 드래곤은 이제 겨우 4마리밖에 남지 않았으며, 나머지 유사종족도 수가 꾸준히 줄어들어, 미드랜드의 인구수 대비 1/10000도 안 된다고 한다.
 또한 이블랜드의 언데드 군단은 상당한 숫자와 강력한 힘을 자랑하지만, 인간 문명 깊숙이 뿌리를 내린 교단의 신성력 앞에서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건 말이 좋아 뮤대륙의 중심 세력이지, 따지고 보면 하이랜드의 쇠퇴와 이블랜드의 약점 덕분에 어부지리로 머리를 차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코, 미드랜드가 잘난 것이 아니었다.
 “귀찮네.”
 평소처럼 사냥이나 할 것이지, 이제와서 뜬금없이 꿈속의 세계관을 설명하게 된 이유가 뭐냐면.
 바로 이 황당한 퀘스트 때문이다.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뮤대륙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라
 보상: 하급 보상카드, 전투보조 스킬
 
 어렸을 때부터 특기를 물어보면 공부라 답할 자신이 있을 정도로 친근한 분야였지만, 아무래도 역시 꿈속에서까지 공부를 하고 싶어 할 정도로 미쳐있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지금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점에서 사 온 ‘뮤대륙의 지리사’란 책을 읽고 있는 상태다.
 처음엔 소설책 읽는다는 감정으로 시작했으나, 지리사란 책이 재미가 있을 리 만무.
 이제 즐거움이란 느낌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거의 기계식으로 머릿속에 뮤대륙에 대한 정보를 때려 박고 있다.
 신이란 존재는 나를 완전히 이 세상에 정착시키려는 건가?
 정말 맥빠지는 퀘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어느 수준까지 이해를 해야지 끝나는 거야?”
 퀘스트 내용이 너무 애매한 거 같다.
 “카라스 마을이 소속된 영지는 아드리안 백작령. 케일론 왕국 최대의 곡창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업이 크게 발달한 영지.”
 이러다가 미드랜드의 귀족 가문을 전부 외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전투보조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지혜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지능이 1 향상됩니다.]
 [끈기 있는 인내심. 체력이 1 향상 됩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퀘스트는 하루를 넘기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나는 두터운 뮤대륙 지리사에 이어 읽던 ‘뮤대륙의 정세’를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
 힘: 8 체력: 7->8
 민첩: 8 지능: 26->27
 마력: 5 운: 4
 [-]
 도축(액티브 / LV-)
 마력방출(액티브 / LV1)
 도약(액티브 / LV-)
 직감(패시브 / LV1)
 자동회복(패시브 / LV1)
 전투보조(패시브 / LV1)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이젠 제법 스킬창이 풍성해졌다.
 전투보조 스킬은 패시브여서 사냥을 해야지만 용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직감처럼 이름만 그럴싸한 스킬이 아니길 빈다.
 단순히 레벨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직감 LV1’은 평소와 다른 점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레벨이 오르면 달라질 가능성은 높지만, 나는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을 선호하는 편이다.
 “오, 추가 퀘스트 없이 이대로 끝이야?”
 혹시 싶어 침대에 누우니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꿈에서 깨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따분하지만, 오늘이 가장 쉬웠던 퀘스트가 아니었나 싶다.
 
 * * *
 
 퀘스트를 완료하고 얻은 보상 카드에서 능력치로 힘 2를 얻은 나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터넷으로 뉴스를 살피던 중,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T화학 반도체 신소재 개발. 과연 어려운 기업 사정을 타파할 계기가 될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질까 애써 잊었던 내용을 상기시켜주는 반가운 기사였다.
 나는 T화학의 현재 주가를 확인했고 9,200원에서 14,000원까지 상승한 것을 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50%가 넘는 상승.
 약 2억의 투자금이 3억까지 불어났다.
 아직 많은 사람들은 뉴스 기사를 신뢰 못 하겠는지, 주가가 자잘하게 파도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분명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좋아, 좋아.”
 오늘은 여러모로 시작부터 좋은 느낌이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창 연습을 위해 만 원주고 구매한 당구채를 가방에 넣곤 버릇처럼 까치산 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던 나는 잊고 있던 오늘의 일정을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오후 1시에 면접이 잡혀 있었다.
 꿈을 꾸며 뮤대륙을 오가기 전만 해도 내가 가장 공들이는 큰일이 취업이었는데, 솔직히 요즘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꿈만 꿔도 큰 이득을 현실에서 얻을 수가 있는데, 굳이 평범함을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더구나 꿈속에 많은 위기가 도사리는 만큼, 그 위기가 현실에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내겐 ‘꿈속에서 죽임을 당한다면?’이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압박이었다.
 덕분에 내가 갑자기 돌연사를 하더라도 주식에 넣어 놓은 돈을 현금화할 수 있게, 방 안에 부모님을 향한 유서 아닌 유서를 남겨 놓은 상태다.
 재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만약을 대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 내 현실이었다.
 그동안 엄청난 퀘스트 보상에 마음을 빼앗겼으나, 엄연히 이는 정상과 거리가 먼 비정상이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자.”
 잠시 후, 까치산에 도착한 나는 완전히 전용석이 되어버린 으슥한 수목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당구채를 조립해 몸에 익숙해진 찌르기 연습을 실시했다.
 “오늘까지만 면접을 보자.”
 그런데 만약 이번 면접까지 떨어진다면 운명이라 생각하고 취업에 목을 매지 않을 생각이다.
 아예, 취업의 지옥에서 벗어나 내키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좋겠지.
 얼마 후면 충분히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자본금이 생길 테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창 연습을 이어갔을까?
 갑자기 뒷목을 자극하는 듯한 불쾌함에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리고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한 나는 크게 당황해야 했는데.
 “뭐야, 이거.”
 어느새 가시거리가 1m도 안 될법한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있던 것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다곤 하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낄 때까지 이상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구나 방금까지 뚫어져라 주시하던 당구채 끝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니, 내가 이상하다기보단 주변이 이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괴함.
 현실이 만화나 영화 속이었으면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마음 같아선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드니, 발걸음을 옮기기가 불편했다.
 꿈속에서처럼 지도 기능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그때였다.
 -팟!
 
 [지도가 펼쳐집니다.]
 
 현실에서 사용할 수 없던 인터페이스가 어째서인지 작동한 것이다.
 
 [사당동 까치산 공원]
 
 그리고 그 지도는 현재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해 냈다.
 “무슨.”
 덕분에 나는 벙찐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움도 잠시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모든 이상의 시발점은 갑자기 나타난 안개부터다.
 이 안개가 주변의 환경을 뮤대륙처럼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가에 대해선 짚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것도 신의 변덕 같은 걸까?
 대체 그 무언가는 내게 뭘 바라는 걸까?
 
 [케일론 왕국 신분증]
 이름: 지훈
 성별: 남자
 계급: 자유민
 생년월일: 1076년 5월 25일
 출생지: 국왕령 카르디아
 범죄경력: 없음
 [+]
 
 어김없이 펼쳐지는 신분증과 능력치, 스킬 창들.
 지도에선 명확하게 현재 위치를 까치산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지금 내가 딛고 선 이 땅이 서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기이함의 끝을 달리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키에에엑!
 가래 끓는 익숙한 포효와 함께 갑자기 눈앞에 조잡한 단검이 나타났다.
 그에 기겁한 나는 뒤로 몸을 굴리며, 당구채에 마력방출을 사용해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빠아아악!
 -켁!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힌 당구채는 사정없이 부서지고, 동시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치직!
 열어 놓았던 지도기능에 노이즈가 생기고.
 이내 아날로그 TV가 꺼지는 것처럼 축소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전에 사방을 뒤덮었던 안개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짹짹.
 한가로이 노니는 참새들의 지저귐.
 평화롭기 그지없는 까치산 공원의 녹음 속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부러진 당구채에 묻어 있는 새파란 피를 바라보았다.
 9장 마법
 
 
 “분명 고블린이었어.”
 내가 지금까지 잡은 고블린이 몇 마리인데, 그것도 모르겠는가.
 하지만 나를 공격하고 또 내게 반격을 당한 고블린은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고블린의 피가 묻은 당구채를 바닥에 꽂은 나는 이마를 짚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뭔가 이상이 생기는 건지 알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낀 위기감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뮤대륙에서의 모험이 위험하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꿈속의 세상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위협이 꿈을 넘어 현실에까지 닥친다면, 지금까지 고수해온 삶의 방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
 이거 아무래도 한가하게 면접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앞으로는 현실에서도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된 무기를 갖춰야겠어.”
 여유를 잃은 나는 도검소지증이나, 불법 무기 개조 같은 것을 따질 생각을 안 했다.
 총이나 폭탄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국에선 개인이 구하기란 불가능한 물건들.
 굳이 총이 없더라도 내겐 스킬이란 능력들이 있으니 제대로 된 냉병기만 주어진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든 나는 서울에 있는 대장간을 검색하고 있었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걸까?”
 아니,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대응이었다.
 뭐든지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것이 신변의 안위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더욱.
 “방금 중턱에 희뿌연 연기 같은 게 껴있지 않았나?”
 “그러게, 그새 없어졌네?”
 빠르게 산을 내려가던 중 들려온 두 중년인의 대화.
 산책을 온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방금의 이변이 나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안개에 다른 사람이 말려들었다면 분명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 * *
 
 “손잡이에서 나사 형태로 분리할 수 있는 양날 검?”
 “네, 그리고 중심은 5밀리 정도의 두께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서울엔 지금도 맞춤 제작이 가능한 대장간이 꽤나 남아 있었다.
 그중 규모가 작지만 주인의 솜씨가 좋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간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주인에게 물었다.
 “제작 가능할까요?”
 “이런 걸 어디에 쓰려고?”
 “캠핑용이요.”
 내 대답이 수상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주문의뢰를 무시할 생각이 없는지 별다른 말없이 답했다.
 “요리와 토목용 외에 칼은 날 길이가 14센치를 넘길 수 없네. 그래도 괜찮겠나?”
 마음 같아선 30㎝ 이상으로 만들고 있지만, 확실히 선을 긋는 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스 마을의 대장간 주인이라면 반갑게 웃으며 응대를 할 텐데, 서울에선 두 눈 가득 의심을 품고 바라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뭐, 그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요구가 평범치 않은 데다가 대답도 수상쩍으니.
 “대신 똑같은 규격으로 두 개 만들어주세요. 칼의 나사 부분은 길게 만들어주시고요.”
 “날을 양쪽으로 세워야 하고, 두께와 특수한 형태 때문에 값이 조금 나가네. 개당 30은 받아야겠어.”
 비싼 건가?
 싼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대장간이 자랑하는 강철은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 부러지지 않고 이도 잘나가지 않지. 대충 만든 무쇠 칼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의 안색을 보니, 가격을 깎긴 힘들어 보였다.
 “좋습니다. 혹시 오늘 중으로 제작 가능할까요?”
 “아무리 빨라도 내일까지밖에 안 되네만.”
 “그럼 내일까지 부탁드립니다. 튼튼하게 만들어주세요.”
 “맡겨주게나.”
 창을 만들고 싶다고 대장간에 말하면 만들어 줄 리가 없다.
 내가 그것으로 사고라도 치면 제작자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생각 한 것은 대장간에서 칼날 제작하고 창대는 아예 카본공업사를 찾아가 만들어 달라고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값이 비쌀 수밖에 없으나, 이왕이면 제대로 된 창을 만들고 싶었다.
 계약금으로 20만 원을 걸고 대장간을 나선 나는 호신 장비를 판매하는 업체를 찾아가 방검복과 방검장갑, 방탄모를 구매하고 삼단봉과 경찰 허가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가스총도 구했다.
 가뜩이나 없는 생활에 부담스런 지출이지만, 고블린의 단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 덕분에 이런 행동이 오버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구매한 장비들을 쓰지 않고 허튼 소비로 끝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직감 스킬이 작용한 건지, 단순한 추측인지는 몰라도 절대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카본을 다루는 공업사에서 삼단으로 분리할 수 있는 1.7m 길이의 튼튼한 봉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뮤대륙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튼튼한 창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 * *
 
 여러 장비를 마련하고 무에타이 도장과 주짓수 도장에서 강도 높은 운동을 마치니 어느새 하루가 끝이 났다.
 거칠게 움직이고 나서야 느껴지는 충족감.
 위기감을 땀으로 씻어낸 나는 어느새 면접에 대한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밤늦게 침대에 눕기 전 어머니에게 면접 잘 봤냐는 전화가 와서야 그것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어머니께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제가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에 어머니는 무리하지 말라며 작게 웃으셨으나,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지금껏 속 한 번 썩인 적이 없는 아들의 불합리한 상황이 매우 안쓰러우신 모양이다.
 이번에 T화학의 주식을 무사히 정리하면 주변에 자랑할 수 있게 뭐라도 해드려야겠다.
 똑똑.
 현실에 대한 생각은 이만 접어놓고······.
 오늘도 뮤대륙으로 돌아온 나는 카라스 마을 외곽에 위치한 저택으로 향했다.
 그 저택은 마을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외견을 갖추고 있었는데, 내가 노크를 하자 시녀로 보이는 여성이 나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고든님을 뵙고 싶어서요. 전에 고든님께서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거든요.”
 “아, 혹시 지훈 님이십니까?”
 “네.”
 고든이 말을 해놓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마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덕분인지는 몰라도, 시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반갑게 웃어 보이며 나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내게 아무렇지 않게 금화를 건네줄 때 알아봤는데, 역시 마법사란 족속은 돈이 많은 모양이다.
 어쩌면 지난 퀘스트로 얻은 가장 큰 보상은 금화가 아닌 고든이란 상류층의 인맥일지도 모르겠다.
 “주인님께 지훈 님의 방문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시녀가 내온 차와 쿠키를 마시며 고든을 기다렸다.
 차도 그렇고 쿠키도 그렇고, 소금이 아까워 고기에 간도 제대로 안 하는 카라스 마을에선 좀처럼 맛보기 힘든 고급품이었다.
 물론, 이곳의 고급품이라고 해봐야 한국의 기성품에 비해 좋다는 느낌이 없지만 말이다.
 “오, 지훈군! 어서 오게!”
 시녀가 사라지고 오래 걸리지 않아 고든이 바로 나타났다.
 그는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고든님.”
 “자네가 방문해주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왔는가. 안 그래도 서운해서 오늘 직접 자넬 찾아가 볼 생각이었네.”
 그땐 그냥 예의상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퀘스트 보상으로 그의 친밀도가 걸려 있었으니, 평범한 것은 아니겠지만.
 또 내가 찾아온 것도 그 친밀도를 활용해 무언가를 실험하기 위함이었다.
 “실은 고든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 무언가,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들어주지.”
 “무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지한 내 태도에 그는 자신의 밋밋한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들어보지.”
 오늘 내가 실험해볼 것.
 그건 바로.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마법을?”
 스킬을 퀘스트나 보상이 아닌 자의로 익힐 수 있는가다.
 “음······.”
 어차피 꿈속에선 퀘스트를 깨지 않는 이상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머무를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을 단련하여 강해질 수 있다면, 현실에서의 안정성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루의 현실을 위해 꿈속에서 수일, 수십 일을 머무르는 건 주객전도가 되는 것 같지만, 이보다 빠르게 현실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의로 내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이었으니까.
 “부탁드립니다!”
 나는 곤란해 하는 그의 입장을 고려치 않고 부탁을 밀어붙였다.
 만약 그가 마지 못 해 허락을 한다면 성공이고, 끈질긴 부탁에 불쾌함을 드러내며 거절을 해도 손해 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란 점과 이 세계의 시스템이 인증한 친밀도란 게 있으니, 기대해 볼 만 하지 않을까?
 “마법은 마탑의 허가 없이 함부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고든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인생 선배들이 많이 그러지 않나.
 사람의 말은 언제나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라고.
 “대신 자네가 정식으로 내 제자가 된다면 손쉽게 해결되는 일이기도 하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든을 바라보았고,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제자가 되겠는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나는 속으로 환호하며 낼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이죠.”
 자리에서 일어난 고든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따라오란 식으로 턱짓을 했다.
 그의 제자가 되기로 한 이상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에 나는 토를 달지 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자넨 마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고든은 나를 2층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마력으로 심장 부근에 서클이라는 마법기관을 만들고 그 서클을 활용해 마력의 성질을 변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가 듣고자 하는 대답은 마법의 공격력이나, 종류를 뜻하는 것이 아닐 거다.
 분명 원리를 물은 것이겠지.
 “그 외엔?”
 “마법사가 수식에 강하다는 이야기를 촌장에게 들은지라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연산능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법의 문외한일뿐더러 애초에 이 세상 사람도 아닌지라, 상식적인 부분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서클에 대한 이야기도 어제 퀘스트를 위해 공부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 짧은 대답이.
 정확하게는 ‘연산’을 짚은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흥미를 표하며 물었다.
 “그럼 그 연산이란 것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나?”
 정확한 정답을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니, 나는 부담 없이 지구의 지식을 활용하여 대답을 이어갔다.
 “세상이 이루는 설정값이 있는데, 그것에 간섭해서 수치를 변환하는 방식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것 아닐까요? 그 변환된 수치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마법이 되어 구현되는 거고요. 연산은 그 설정값을 원하는 형태로 변환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 것이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일 아닌가.
 세상은 신이 짜놓은 프로그램이고, 우리 인간들은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인형 같은 존재라는 거.
 그래서 반쯤 농담으로 내뱉었는데, 내 말을 들은 그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허, 이거 참 놀라운데? 마법을 모르는 일반인이 내뱉을 말한 생각이 아니야. 어디서 마법을 배운 적 있는가?”
 정답이었냐?
 오히려 답한 내가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접근 방식이 난폭하지만 정확하게 핵심을 짚고 있어.”
 그리고 우리는 그의 연구소로 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
 책상에 난잡하게 놓여 있는 실험용 도구와 영문모를 도형이 그려진 종이 더미까지.
 상상으로 그리던 마법사의 방 그 자체였다.
 “자네의 말대로 마법이란 세상의 법칙에 간섭하여 작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지. 때문에 마법사는 기사들처럼 싸우기 위한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진리를 탐하는 학자인 것이네.”
 나는 세상의 체계나 진리 따위보다 강해지기 위해 마법을 배우는 처지라, 성직자스러운 그의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의욕 가득한 스승의 모습에 맞장구를 쳐줄 줄 아는 것도 제자의 도리라 생각한다.
 “멋지군요. 부디 저도 스승님을 따라 진리를 엿볼 수 있는 마법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마법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자네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군.”
 이어서 그는 책장에서 무언가를 찾으며 마법의 전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마법은 태초에 신들께서 자신들을 대신할 중간계의 관리자로 드래곤을 임명하면서 지상에 전파되었네.”
 마법은 신에게서 드래곤으로.
 드래곤에서 엘프와 드워프, 인간 순으로 전달이 되었다고 한다.
 악마종은 애초에 ‘드래고니안’이라 불리던 드래곤의 파생된 종으로 진리보단 마법이 가져오는 파괴력에 매료되어 타락을 선택한 종족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고든은 마법이 기적을 행하는 힘인 만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악마종을 숭배하는 흑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며 경고를 했다.
 “서클은 마법사에게 세상의 법칙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주네. 당연히 서클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마법사의 권한도 커지게 되지. 그래서 마법사가 되기 위한 제 1관문은 역시 서클을 만드는 것이야.”
 그는 원하는 책을 찾았는지, 먼지가 잔뜩 낀 양장책을 털어 내게 건네주었다.
 “이건 틈나는 대로 읽는 것이 좋을 거네. 마법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서클을 만드는 게 어렵나요?”
 “자질이 있으면 쉬울 것이요, 없다면 어렵겠지. 일단 서클을 만들기 위해선 마력의 존재를 느낄 필요가 있다네.”
 마력을 느낀다?
 마나라 칭해지는 외부의 마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이미 느끼고 있다.
 그래서 도움이 될까 싶어 손위로 스킬인 마력방출을 사용하니, 그는 크게 움찔거리며 놀라움을 표했다.
 “마력방출? 그걸 어디서 배웠나?”
 “어디서 배웠다기보다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니 어느새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퀘스트 때문이지만, 사실대로 밝힐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자연 터득이라고?”
 더없이 눈을 크게 뜬 고든은 내 명치 부근에 손을 얹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미 전신의 마나로드가 뚫려 있군! 빚을 갚고자 시작한 일인데, 생각지도 못한 보석을 제자로 들였어!”
 환희로 가득한 모습을 보니, 상황이 꽤 좋은 모양이다.
 그는 씩 미소를 지으며 내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고든은 키가 178인 나보다 10㎝는 작았다.
 덕분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보는 자세가 되었는데,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고 있으니 꽤나 부담스러웠다.
 “덕분에 귀찮은 일들은 생략할 수 있게 되었군. 그럼 길게 잴 것 없이 바로 서클을 만들어 볼까?”
 고든의 반가운 말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인간이 최대로 만들 수 있는 마법 서클의 개수는 9개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인간으로서 9서클까지 오른 인물은 마법제국 위스워드를 건국한 초대 황제 한 명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위스워드의 초대 황제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란 것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출생과 가족, 마법을 가르친 스승에 대한 정보가 전혀 존재치 않았으며, 이점은 당시에도 많은이들이 의문스럽게 생각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 증거로 꼽히는 것이 위스워드의 황가는 드래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레드 아이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9서클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선례가 불분명하기에 오랫동안 미드랜드 마법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주요 이슈였다.
 현재 미드랜드에 존재하는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는 겨우 9명뿐이며, 이 중 겨우 한 명만이 8서클을 달성했을 뿐이다.
 이 정도면 그냥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어차피 자신이 9서클을 달성할 게 아닌 이상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 생각한다.
 마법사는 서클에 따라 수습마법사(1~2), 정식마법사(3~4), 고위마법사(5~6), 대마법사(7~8)로 분류가 된다.
 참고로 내 스승인 고든은 4클래스 마법을 사용하는 정식마법사다.
 ‘서클’과 ‘클래스’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데, 서클은 경지 그 자체를 뜻하지만, 클래스는 사용 가능한 마법의 등급을 뜻한다.
 그래서 고든이 마법의 대명사인 파이어볼을 사용하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다.
 ‘4서클의 마법사 고든이 3클래스의 파이어볼을 사용했다.’라고.
 “믿기지 않는군.”
 잠시 생각이 샛길로 샜는데, 나는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부담스런 시선을 던지는 고든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흘려야 했다.
 “빠, 빠른 건가요?”
 심장 부근에서 강하게 회전하는 무한의 띠.
 고든은 내 물음에 그걸 말이라 하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빠른 정도겠는가? 3일 만에 1서클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네. 물론 자네는 마력방출까지 사용하는 특수 케이스긴 했지만, 이 건 마법에 대한 자질이 엄청나다고밖에 볼 수 없군.”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나는 그저 고든이 시킨 대로만 해서 뭐가 어렵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거면 1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자넨 셈법에 강하다고 들었으니, 1클래스 마법 정돈 금방 익힐 걸세. 이거 제자가 순식간에 스승을 따라잡는 거 아닐까 겁이 날 정도군.”
 말은 그렇게 했으나 고든의 표정에서 질투심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든에게 가장 기초마법인 라이트의 공식을 배웠고,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풀 수 있는 수준의 난이도여서 어렵지 않게 마법을 숙지할 수 있었다.
 -팟!
 눈앞에 떠오른 빛의 구슬.
 서클 생성에 이어 문제없이 마법까지 사용되자,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으로 실험은 성공했다 볼 수 있다.
 바로 퀘스트와 보상카드 없이 스킬을 습득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실험이 말이다.
 “연산속도가 상당하군. 지능 수치가 높을 때 알아봤지만, 자넨 마법사에 특화된 인물이야.”
 연산이라 칭하는 것이 뭐한 수준의 계산이지만, 연신 나를 치켜세우는 고든의 모습에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겸손함을 유지했다.
 “좋아, 방심하지 않는 태도도 중요하지.”
 이어서 나머지 1클래스 마법을 배우기 위해 고든과 마주 앉았는데.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1서클을 달성했습니다.]
 [마력이 3 향상됩니다.]
 [지능이 1 향상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메시지.
 그리고 ‘설마?’란 생각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건 꿈에서 깨어날 때 느끼는 감각이었다.
 “지훈군?”
 “자, 잠시 잠을······.”
 당황한 고든을 진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뱉은 마지막 말과 함께 정신이 그대로 페이드아웃했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나를 반겨 준 것은 10평 정도의 남자 내음이 가득한 원룸의 풍경이었다.
 “원래 퀘스트는 오크 30마리 사냥이었는데······.”
 경지 달성도 퀘스트 취급이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서클이 느껴지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퀘스트 완료로 현실에 돌아온 게 아니다 보니, 언제나처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보상카드 개봉행사가 없다.
 요즘은 보상카드를 개봉하는 게 하루의 낙이었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오!”
 평소와 다름없이 까치산 공원에서 운동하고, 식후 대장간을 들리니 의뢰했던 창날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본공업사에서 창대를 수령 하여 조립하니, 아주 매끈하고 잘생긴 창이 완성되었다.
 “퀄리티 좋네.”
 다만 뮤대륙의 롱스피어와 달리 이건 날이 짧아서 베기 용으론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날의 공격면적이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다 보니, 이전 전투 방식을 고수하면 베기가 아니라 타격기가 될 가능성이 컸다.
 거리를 재는 연습을 하면 베기 공격을 못 할 것도 없지만, 깊은 상처를 내기 힘들어 보인다.
 차라리 아예 카본 복합재의 탄력을 이용한 타격 공격을 연계기로 사용하는 게 편하지.
 한눈에 보기에도 이 창은 찌르기 용도로 만들어졌단 이미지가 강했다.
 “이게 어디야.”
 창의 완성도는 카라스 마을 대장간 제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휴대성.
 창대가 삼단으로 분리할 수 있다 보니, 어느 가방에도 들어갈 수 있다.
 삼단봉과 가스총은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고, 창은 방탄모, 반검복과 함께 백팩에 소지하고 다닐 생각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대비가 갖춰지니,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여기에 공격용으로 써먹을 수 있을 만한 마법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 일터.
 어서 밤이 되면 좋겠다.
 
 [중국 충칭시, 괴물 출현? 헤프닝인가, 진실인가.]
 [어제 오전 11시경, 중국 충칭시 장수구 외곽 마을에서 믿기 힘든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것은 바로 괴물이 나타나 가축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것. 그에 공안당국은 해당 신고를 농담으로 치부하며 웃어넘기려 했지만, 주민들이 대거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결국 공안의 특수부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현장에 도착한 특수부대가 주변은 샅샅이 수색했지만, 수상한 생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신고를 우습게 여길 수만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마을 곳곳에 남겨진 가축들의 사체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축의 사체엔 대형 맹수의 이빨 자국 같은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결국, 공안을 대신해 군부대가 나서 마을 주변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는데, 현재까지 별다른 이상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일각에선 사육장에서 탈출한 곰이 야생화된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중국에선 값비싼 쓸개와 발바닥을 목적으로 곰을 사육하는 농장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은 괴물이 분명했다며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려 했으나, 모든 사진에 노이즈가 껴서 무엇하나 제대로 확인되는 것이 없었다.]
 
 무에타이 도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주짓수 도장으로 이동하던 중.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살피다가 관심을 끄는 해외 토픽을 발견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스크롤을 내릴수록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지 아니면 조작인지 알 순 없지만, 요즘 계속해서 이상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만약 이 사태가 내가 예상한 그것이 맞다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 * *
 
 첫 번째 서클을 완성하고 나는 일주일도 안 돼서 1클래스 마법을 모두 익혔다.
 사실 서클을 생성하는 것이 어렵지, 해당 클래스의 마법을 익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법은 정해진 값이 있고, 대입 공식에 좌표를 입력해 그 값이 나오도록 맞춰야 한다.
 그리고 문제만 푸는 것이 아니라 서클을 활용해 마력을 가공해야 하는데, 1클래스 마법들은 난이도가 낮아서 손쉽게 클리어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이런 나를 향해 고든은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내 입장에선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하면 대학 졸업증을 반납해야 한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고든에게 4클래스 마법의 난이도를 물었는데, 지금 내 수준으로 도저히 풀기 힘든 수식이 나열되는 것을 보며 말을 잃어야 했다.
 아무래도 마법은 클래스 간의 격차가 굉장히 큰 모양이다.
 공학 계산기가 있다면 손쉽게 풀 수 있겠지만, 이곳에선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1클래스 마법을 마스터했습니다.]
 [마력이 1 향상됩니다.]
 [지능이 1 향상됩니다.]
 
 또?
 그런데 뮤대륙은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수련만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1클래스 마법 마스터란 빌미가 생기자마자 현실로 돌려보냈다.
 “전엔 퀘스트를 안 깰 거면 돌아갈 생각 말라는 식이었으면서. 이젠 퀘스트 안 깰 꺼면 꺼지라는 건가?”
 1클래스 마법의 위력이 미약하다곤 해도, 충분히 전투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앞으로는 쉽게 마법의 실력을 높여가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내가 영문모를 존재의 버프에 지구의 지식을 갖고 있다곤 하지만, 가볍게 서클을 늘려갈 수 있을 만큼 마법이 만만할 리 없으니까.
 스스로가 강하다고 자부심을 갖고 안전을 확신하기까지 분명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자꾸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원랜 뮤 대륙에 몇 달씩 머무르며 마법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이 방식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 빌미가 생길 때마다 돌려보내 진다면, 차라리 퀘스트를 병행해서 보상을 얻는 것이 빠르게 전투능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퀘스트 보상이 구미가 당기긴 하지.”
 나는 지금 뒤로 미뤄놓은 퀘스트를 떠올렸다.
 등급: 하
 내용: 오크 30마리 사냥
 보상: 하급 보상카드 3장, 신체 내구력 증가
 무려 하급 보상카드 3장이 주어지고, 신체 능력치를 높이는 옵션이 보상으로 걸려 있다.
 이것보다 마법이 최우선이라 생각을 했지만, 자꾸 이렇게 현실의 시간을 소비하게 하면 방법을 바꿔야 한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
 
 * * *
 
 9번째 꿈, 뮤대륙에서 40일째.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 향상됩니다.]
 
 10번째 꿈, 뮤대륙에서 47일째.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 향상됩니다.]
 
 “안 되겠네.”
 혹시 싶었는데 역시나.
 내가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마법 수련에만 집중하자, 2서클을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뭔가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꿈은 나를 현실로 쫓아냈다.
 덕분에 1클래스 마법을 마스터하고 나머지 이틀 동안 뮤대륙에서 16일을 머물렀음에도 손에 넣은 것이 거의 없었다.
 결국 꾸준히 강해지기 위해선 퀘스트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11번째 꿈, 뮤대륙 생활 48일째.
 나는 어쩔 수 없이 오크 사냥을 위해 창을 챙겼다.
 “오크 사냥?”
 마법 스승인 고든은 왜 굳이 그런 일을 하냐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법이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 하지만, 머리가 답답할 땐 실전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그런데 너는 딱히 마법훈련이 막히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같이 생활하다 보니, 나를 대하는 고든의 말투가 편해졌다.
 걱정 가득한 그의 물음에 미소로 답했다.
 “전 수습 마법사이기 전에 사냥꾼이잖아요.”
 끝내 고든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고, 괜히 무거운 짐을 짊어 다니지 말라며, 내게 아공간 팔찌를 빌려주었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서인진 몰라도 요즘 따라 부쩍 엄마 같아진 고든이었다.
 “흐웁. 후······.”
 오염되지 않은 카라스 마을도 공기가 좋지만, 역시 피톤치드 가득한 숲속에 비할 바는 아니다.
 평온의 숲에 들어선 나는 맑은 공기를 폐부에 가득 채우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반쯤 타의에 의해 사냥을 나섰지만, 나는 불만을 토하기보단 모처럼의 전투를 즐기기로 했다.
 이김에 전투보조 스킬이 뭔지 시험하고, 실전에 마법을 섞어봐야겠다.
 
 [놀]
 
 그러나 오크는 새로운 전투 방식을 실험하기엔 너무 부담스런 상대.
 녀석들 앞에 나서기 전에 예행연습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타다다닥!
 나는 맷돼지처럼 매섭게 달려오는 놀 3마리를 주시했다.
 “그리스!”
 그리고 녀석들이 공격사정권에 들어온 순간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스는 바닥의 마찰계수를 0에 가깝게 만드는 마법.
 그에 맹렬히 달려들던 놀 3마리는 빙판을 디딘 것처럼 미끄러졌다.
 -쿠당탕탕!
 워낙 무식한 돌진이다 보니,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놀들이 내 앞까지 주욱 밀려왔고.
 ‘마력방출.’
 나는 그 녀석들을 향해 푸른빛으로 물든 창을 찔러넣었다.
 마력방출의 지속효과는 단 10초.
 그런데 그 10초면 바닥에서 빌빌대는 돼지 세 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깔끔하게 세 마리를 처리한 나는 만족스런 감상평을 내뱉었다.
 “좋은데.”
 그저 좋은 정도겠나?
 군더더기 없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전투 그 자체였다.
 내 전투 스타일은 일반적인 마법사와 전혀 다르다.
 나쁘게 말하면 잡캐.
 좋게 말하면 마법사의 약점을 커버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냥 창만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는 스킬까지 보유하고 있는 만큼 1서클의 마법사가 쉽게 잡지 못할 놀을 이리 간단히 처리한 것 아니겠는가.
 연달아 스킬을 사용하면 마력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젠 마력도 예전보다 2배 이상 높아졌고 자동 회복 스킬까지 있어서 스킬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없었다.
 -켁!
 “이 정도면 예행연습은 충분하겠지.”
 이후 놀을 7마리 더 사냥한 나는 뜸 들일 것 없이 오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숲속을 뒤지고 다녔을까.
 
 [오크]
 
 나는 원하던 사냥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전투 스킬이 없다면 도저히 붙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몬스터.
 게임에선 약체 몬스터로 분류가 되는 오크지만, 뮤대륙에서의 오크는 타고난 전사이자 전투를 좋아하는 괴물이었다.
 신장은 인간과 비슷.
 그러나 질량은 인간의 두 배 이상이다.
 더구나 그 질량은 대부분 근육으로 이뤄져 있으니, 마초란 단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 몬스터다.
 -꿀꺽
 놀과 달리 오크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긴장시키는 포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평가해서 지금의 내 상대는 아니었다.
 지금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오크는 두 마리.
 -척
 나는 석궁을 꺼내 한 녀석을 겨눴다.
 10장 안개
 
 
 기습공격의 표적이 된 오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오히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덩달아 녀석을 향한 석궁의 조준 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오늘따라 유독 커 보이는 대가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크아아악!
 석궁을 떠난 볼트가 오크의 왼쪽 눈에 틀어박혔다.
 이왕이면 뇌에 구멍을 내는 편이 좋았을 텐데,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명을 내지르는 오크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고, 나는 도약 스킬을 사용해 섬전처럼 달려들며 창을 찔러넣었다.
 녀석의 남은 오른쪽 눈이 내게 향했을 땐 이미 창은 목젖에 파고든 후였다.
 -컥!
 몬스터라도 인간형이면 목을 꿰뚫리고 무사할 리가 없다.
 바로 창을 뽑아든 나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바둥거리는 오크를 뒤로하고, 글레이브를 꺼내 들며 달려드는 두 번째 녀석에게 몸을 날렸다.
 “라이트.”
 -큭!
 마법을 배경으로 한 만화나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법.
 일명 ‘눈뽕’이다.
 라이트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나는 구슬형태로 만들어 지속성을 띠게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일시에 빛을 터뜨려 섬광탄처럼 사용하는 방식이다.
 동료들이 있다면 절대 못 쓰는 기술이지만, 나는 솔로다 보니 누군가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푹!
 방심한 상태에서 눈을 당한 녀석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도약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나를 피할 수는 없다.
 이번에도 내 창은 정확하게 목을 꿰뚫었고, 무기를 떨어뜨린 채 켁켁 거리는 녀석에게서 물러났다.
 어차피 저 상태론 오래 못 산다.
 괜히 근처에서 알짱거렸다가 발목이라도 잡히면 아작날 수 있으니 조심했다.
 언제나 방심은 금물, 안전제일이다.
 
 [오크 처치 2/30]
 
 녀석들은 그렇게 2분을 못 넘기고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고든에게 받은 아공간 팔찌에 오크 사체를 담았다.
 오늘은 딱 15마리만 잡을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마법 수련을 한 후, 나머지 15마리를 사냥할 예정이다.
 “8일 만에 뮤 대륙에서 쫓겨나진 않겠지.”
 예전엔 무조건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서라도 이쪽에 길게 남고 싶었다.
 
 * * *
 
 11일 차, 뮤 대륙 56일째.
 나는 일부러 오크 사냥 퀘스트를 단 한 마리만 남겨둔 채, 눈치 싸움을 벌이듯 은근슬쩍 마법을 수련했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 향상됩니다.]
 
 그런데 이런 내게 마치 허튼수작 말라는 듯 잠에서 깨버렸다.
 분명 예전에는 10일 이상도 머무르곤 했는데······.
 아무래도 퀘스트를 내려주는 시스템(아마도 신)은 퀘스트 수행 의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기회에 확실히 선을 그어 버린 거고.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기간을 알게 된 것은 좋지만, 뭔가 내 뜻대로 되는 것 없이 꼬이는 느낌이라 앞으로 시스템을 상대로 잔머리 굴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8일이라는 기간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면 되니, 필요한 시행착오인 것 같다.
 그나저나 쫓아내면서 꾸준히 마력을 보너스로 주는 것을 보면 웃기다.
 혹시 마법훈련을 안 한다면 어떤 항목으로 쫓아낼까?
 궁금하긴 하지만 더 이상 시험해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켁!
 
 [오크 처치 30/30]
 
 그리고 12일 차, 8일을 가득 채워 마법을 수련한 후 오크 사냥을 나선 나는 현실 시간으로 6일 만에 퀘스트를 완료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완벽한 전투. 압도적인 승리. 모든 능력치가 1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신체 내구력이 증가합니다.]
 [앞으로 체력 수치에 따라 신체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이후 마을로 돌아와, 고든이 내어준 방에서 잠이 든 나는 그대로 현실에 돌아왔다.
 원룸에서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퀴퀴한 냄새.
 이거 어째 운동을 시작한 후로 방안에 홀아비 냄새가 더욱 강해진 것 같다.
 디퓨저라도 사다 놔야 하나?
 “현실에서 하루 머물고, 뮤대륙에서 8일을 머무니, 뭐가 현실인지 모르겠네.”
 뮤대륙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컨디션이 최상으로 조정이 된다.
 가벼운 몸으로 기지개를 켠 나는 오랜만에 손에 들어온 보상카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역시 이 시간이 있어야지.
 이번에 오크 퀘스트를 완료하고 얻은 하급 보상카드 3개를 집어 들었다.
 
 [하급 보상]
 
 언제나처럼 검은색 카드에 금색의 글귀가 새겨지고.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오른다.
 ‘사용한다.’
 이어서 내가 사용 의사를 밝히면.
 새하얀 빛이 폭사하며 눈이 내리는 듯한 이펙트와 함께 보상이 나타난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태그호X어 까레라 칼리버5 데이데이트를 획득했습니다.]
 [액티브 스킬 관통을 습득했습니다.]
 
 민첩이 2 오른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머지 두 개 보상도 왠지 좋은 것 같다.
 딱 봐도 공격 스킬로 보이는 관통은 사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있다가 공원에서 몰래 실험해 봐야지.
 “그런데 태그호X어는 시계 말하는 거 맞지?”
 나는 유일한 현물보상으로 허공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검은색 가죽 상자를 잡았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니.
 “진짜 시계네.”
 은색 바디에 검정 판, 금색의 지침이 고급스러움을 뽐내는 스위스제 고급시계가 들어있었다.
 “이젠 보상으로 별게 다 나오네.”
 시계 끈은 가죽이어서 따로 조정할 필요 없이 바로 착용 가능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왼쪽 손목에 채웠고, 나머지 구성품을 살펴보다가 보증서가 눈에 띄었다.
 
 [S백화점 본점 2020.05.24]
 
 그것엔 파란색의 스탬프와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필기체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설마 신이 개런티 카드에 도장 찍고 날짜까지 직접 기재한 건 아니겠지?”
 가치로만 따지면 미래 신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건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보상이었다.
 누군 태그호X어가 명품시계가 아닌 고급시계 라인이라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명품 중 명품이었다.
 친구들은 하나씩 비싼 시계를 갖고 있지만, 나는 이런 걸 쓸데없는 돈 낭비로 여겼기에 살 생각 자체를 안 해봤다.
 그런데 막상 차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품격이 올라간 느낌이랄까?
 운동을 나서기 위해 트레이닝복을 입으면서 괜히 소매를 걷었다.
 “근사하네.”
 참고로 내가 투자한 T화학의 주식 가치는 4배 가까이 불어난 상태인데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다.
 원래 자랑과 거리가 먼 성격이지만 시계란 녀석은 아무래도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각종 장비가 담긴 무거운 백 팩을 짊어진 나는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
 출근하는 시민 사이를 역행하여 공원으로 향하는 것도 완전히 익숙해졌다.
 그리고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는 시민들도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단 표정이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공원을 향하니, 눈에 띄는 것이 당연했다.
 -지잉.
 그렇게 까치산 공원에 도착해 막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태그호X어에 시계 포지션을 빼앗긴 스마트폰이 모처럼 존재감을 나타냈다.
 [오늘 치맥 ㄱ?]
 그건 얼마 전 내게 2천만 원을 선뜻 빌려주었던 정우의 메시지였다.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지금은 운동에 전념하고 싶다.
 친구들은 나중에 주식을 정리하고 돈을 갚으며 감사함을 전할 때,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미안 다음 달 10일까지는 힘들 듯. 대신 10일 날 만나면 내가 거하게 쏠게. 빌린 것도 갚고.]
 [아쉽네. 알았다. 대신 그때 단단히 뜯어 먹을 거다.]
 [ㅋㅋ 그래]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고.]
 [ㅇㅇ]
 어째 당부가 부모님 같다.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멘 채 까치산 공원의 길게 이어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 *
 
 그건 아침 운동을 마치고 식사를 위해 공원을 내려오던 중 발생한 일이다.
 -스스스
 새로 얻은 관통 스킬의 효율성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콧바람을 흥얼 거리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새하얀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미친.”
 기겁한 나는 얼른 가방을 내려놓으며, 보조 기능 활성화했다.
 ‘지도.’
 
 [사당동 까치산 공원 입구]
 
 이번에도 역시 현실에서 사용 불가능했던 지도가 눈앞에 떠오르고 주변에 적을 표시하는 붉은 점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얼른 가방에서 창을 꺼내 조립했다.
 10여 초 만에 뚝딱 완성된 창을 쥐고 방검복과 방탄 헬멧, 방검 장갑까지 착용했다.
 트레이닝복 위로 해당 복장이 갖춰지니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지금은 멋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괴물만 나오지 마라.”
 나는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는데.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누, 누구 없어요!”
 “여기요! 여기 사람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안개가 이렇게.”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분명 아무것도 표기가 되지 않던 지도에 갑자기 흰색 점 5개가 찍혔다.
 “······.”
 나 말고도 말려든 사람이 더 있다는 뜻.
 이어서 그 다섯 명은 서로 소리치며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다.”
 지금 이 꼬라지로 나서면 괴한 취급 받기 딱 좋다.
 그렇다고 방치 하자니, 지난번처럼 이들도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저들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이 시각 산행을 했던 모든 사람에게 의심이 닿을 수밖에 없는 노릇.
 또 그렇게 되면 가장 큰 의심을 받을 만한 인물로 내가 지목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꺄악!”
 “뭐, 뭐야, 씨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크아아악!
 시민들 근처에 돌연 붉은 점 두 개가 생겨난 것이다.
 들려온 피어를 봐선 오크가 분명하다.
 ‘젠장!’
 결국, 나는 도약 스킬을 사용해 달릴 수 있는 최고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했다.
 구름 속을 달리는 것처럼 습기 가득한 안개가 뺨을 스치고.
 문득 얼굴을 가려야겠단 생각이 들어 베일 마법을 사용했다.
 원랜 몬스터의 시야를 가리는 용도로 쓰려 했던 마법인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곧이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안개 속에서 그나마 시야가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태풍의 눈처럼 안개의 중심이란 게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안개로 이뤄진 작은 원형 돔은 부자연스러움의 극치였다.
 기겁한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등빨 좋은 오크.
 그중 한 녀석을 향해 손짓을 했다.
 ‘매직 미사일, 관통.’
 쏜살같이 날아가는 매직 미사일에 관통력을 높여주는 스킬이 버프로 작용.
 마법에 가속도가 더해지며 푸른빛의 매직 미사일이 한밤에 쏘는 예광탄처럼 길게 궤적을 남겼다.
 표적은 멀리 떨어진 오크다.
 녀석은 배 나온 중년 남성을 향해 글레이브를 휘둘러 왔다.
 -퍽!
 -크아아악!
 매직 미사일이 그대로 오크 광대뼈에 구멍을 냈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녀석은 얼굴을 감싸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근육질의 오크가 난동을 피우니 얼마나 무섭겠는가.
 사람들은 영문모를 상황에 도망치고 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그리스 마법으로 넘어뜨렸고, 비교적 가까이 위치했던 오크의 목에 창을 찔러 넣었다.
 -쿠당탕.
 “큭, 뭐야 바닥이.”
 “5월에 빙판이라고?”
 잠깐의 방심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투 상황에서 동료의 이상에 시선을 빼앗겼던 오크는 덩치 큰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능력치가 11에 달하는 힘을 잔뜩 머금은 창이 별도의 스킬 없이 오크의 목을 완전히 관통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뿔뿔이 흩어지면 더 위험합니다.”
 그리고 창을 뽑아 들자 오크는 푸른 피를 뿌리며 거목처럼 쓰러졌다.
 그리스 마법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바닥과 하나가 된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도망치려고만 했고, 그로 인해 계속해서 땅바닥에 키스를 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광대뼈에 구멍이 뚫려 눈알이 쏟아질 것 같은 오크를 향해 다가갔다.
 녀석은 잔뜩 흥분해서 글레이브를 휘둘러왔다.
 그러나 가볍게 회피한 나는 창에 관통 스킬을 더해 내질렀다.
 -퍽!
 간단한 동작이지만 창은 오크의 팔을 관통한 것도 모자라 배를 뚫고 등까지 삐져나왔다.
 역시 관통 스킬의 효과는 대단하다.
 비록 소모되는 마력의 양을 무시할 순 없지만, 공격 한방 한방이 일격 필살의 힘을 머금게 된다.
 마력방출과 함께 쓰면 그 질기다는 오우거나 와이번의 가죽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수차례 전투를 통해 지난번 손에 넣었던 전투보조 스킬의 효과를 알게 됐는데, 그것은 회피와 공격이 좀 더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전투 동작 보조 스킬이었다.
 덕분에 전문가가 봐도 지금의 내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보일 것이다.
 “쯧.”
 사람들을 구하긴 했지만,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래도 말려든 사람들은 잘못이 없으니, 화를 누르며 안갯속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네? 네! 고, 고맙습니다.”
 베일 마법으로 얼굴을 가린 나는 누가 봐도 수상한 인물이다.
 하지만 도움을 줬기 때문인지, 단순히 겁을 먹은 건진 몰라도 사람은 내 물음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그리스 마법을 해제하니 그들은 알아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내게 말은 못해도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저도 무슨 상황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애매한 대답에 아까 오크에게 공격을 받을 뻔했던 중년의 사내가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런 복장을 하고 있냐’는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지난번엔 고블린 한 마리와 싸우고 난 후 바로 안개가 사라졌었는데, 이번엔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오크 두 마리를 처치했다고 해서 안전해졌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에 무슨 총 같은 걸 쏘지 않았나요? 복장도 그렇고 경찰이신가요?”
 매직 미사일의 푸른빛이 꽤 눈에 띈다고 생각했는데, 혼란통에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닙니다.”
 시민은 남자 둘에 여자 셋.
 여자들은 일행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비교적 젊은 축에 속했고, 남자 중 한 명은 중년, 나머지 한 명은 아직 군대도 가지 않은 듯한 새파란 청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웅덩이를 만든 오크 사체에 겁을 먹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중년 남성은 연장자의 책임감인지, 진짜 겁이 없는 건지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럼 뭐하시는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답할 이유가 없는 나는 그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했다.
 “핸드폰이!”
 그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인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던 여성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예상된다.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고, 안테나에 사용 불가 표시가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오크의 사체를 포함해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는데, 무엇하나 선명하지 않고 노이즈가 잔뜩 낀 이상한 이미지가 저장이 되었다.
 미래신문에서 보았던 묻지마 살인이나, 일본, 중국에 있던 사건과 흡사한 상황이다.
 “시, 싫어.”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자, 특히 여성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
 그중 주부로 보이는 30대 여성은 왠지 귀찮은 짓을 저지를 것처럼 보여서 성격에 맞지 않는 말을 내뱉어야 했다.
 “저는 은거 기인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저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니 너무 걱정마세요.”
 “여기서 나가면 안 되나요?”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는 공간은 여기뿐이에요.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이동해서 괜히 위험을 자초할 필요 없죠. 여러분을 지키며 싸우는 건 쉬운 게 아닙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마음은 그렇지않는지, 그녀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진짜 히어로 흉내는 체질이 아니다.
 성격이 다른 사람을 구슬려야 하는 것도 귀찮고.
 “어?”
 
 [퀘스트 발생]
 등급: 중
 내용: 몬스터에게서 서울 시민들을 보호하라.
 보상: 중급 보상카드, 안전가옥
 
 현실에서 발생한 뜬금없는 퀘스트.
 아니, 이곳은 서울이라기보다 뮤대륙과 비슷한 환경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퀘스트까지 발생할 줄은 몰랐다.
 내가 갑자기 움찔거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며 무슨 일 있냐고 물어왔다.
 “괴물들이 또 나타난 것 같아요.”
 “네?”
 아직 지도에는 표기가 되지 않았지만, 퀘스트 내용을 보면 분명 몬스터가 또 나타날 것이다.
 “절대 떨어지면 안 됩니다. 혼자 살자고 도망치면 죽는다고 생각하세요.”
 긴장감이 감도는 말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겁을 먹었고, 지금까지 애써 마음을 추스르던 젊은 청년이 울상이 돼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울음은 금세 여성들에게까지 전염이 됐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방에서 가스총과 삼단봉을 꺼내 중년인에게 쥐여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를 중심으로 10여 개 넘는 붉은 점이 찍혔다.
 -키에엑!
 -쿠엑!
 오크면 나조차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퀘스트는 내가 깨지 못할 난이도는 주지 않겠다는 듯, 사방에서 들려온 포효 소리는 고블린과 놀의 것이 섞여 있었다.
 분명 오크도 있었지만, 전부가 오크인 것보단 훨씬 나은 상황이다.
 하지만 어두운 안개 속에서 몬스터들에게 포위되었단 사실은 일반인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공포.
 내 당부가 있었음에도 몇몇은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진짜 이런 짐덩어리들이 있나.
 “아저씨, 사람들 못 도망치게 하세요. 지금 여기서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나마 지시가 통하는 중년인은 엉덩이를 들썩이는 청년의 손을 잡으며, 그 못 미더운 녀석에게 가스총을 건네주었다.
 손에 무어라도 쥐니까 안심이 되는지, 청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지켰다.
 붉은 점 세 개가 우릴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아마 놀의 돌진이겠지.
 엎드린 놀의 높이는 대충 80~90㎝ 정도.
 나는 지도에 시점이 표기되는 것을 나침반처럼 이용해 붉은 점을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매직 미사일, 관통.’
 한 방향마다 두 방 씩.
 총 6개의 푸른 빛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케에엑!
 “자, 장풍. 아니, 지풍?”
 중년인은 무협지를 즐기는지, 내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음 같아선 마법을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힘을 보전하고 이들을 지키기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운 좋게 다가오던 붉은 점 세 개 중 하나가 그대로 사라지고, 나머지 두 마리는 안개를 뚫고 나오며 뒹굴었다.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놀 한 마리가 내 발 앞에 멈춰 서고.
 있는 힘껏 녀석의 머리를 향해 창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시민들 앞에서 쓰러진 다른 놀을 향해 도약으로 달려들었다.
 “맙소사, 경공이라고?”
 가볍게 안개 내에 들어온 놀 두 마리까지 처리한 나는 제 2파를 대비했다.
 “세상에 진짜 무공이 있었어.”
 다른 사람들도 내 이능에 놀랐지만, 특히 중년인의 반응이 컸다.
 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착각에 빠진 중년인에게 말했다.
 “제가 마중을 나가서 괴물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처리하는 편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얌전히 계세요.”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로부터 이들을 온전히 보호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자리를 지키며 싸우기보다 위험해도 나 혼자 안개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네, 대협!”
 뭐라는 건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인데 묘하게 기분이 업된 듯한 중년인을 뒤로하고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나마 안개가 옅던 중심 부근과 달리, 결계처럼 사방을 드리운 안개 속의 가시거리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마력방출.’
 -키엑?
 창에 푸른 빛이 맺히고, 지도를 나침반 삼아 붉은 점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마력방출의 효과인 푸른 기운 덕분에 창이 가까워지자,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적의 실루엣이 보였다.
 덕분에 창끝에 변화를 줘서 적에 따라 정확한 타격을 할 수 있었다.
 -켁!
 고블린 세 마리와 오크 한 마리를 제거하고.
 반대편의 붉은 점이 시민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바쁘게 몸을 날렸다.
 득달처럼 안개를 뚫고 나와 자신들의 머리 위를 날 듯이 건너 뛰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땅에 착지를 하니, 오크가 한 마리가 약속한 것처럼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흡!”
 그에 마력방출과 관통스킬을 중첩으로 사용해 정석적인 찌르기를 내질렀다.
 절묘하게 가슴과 목, 머리를 가린 글레이브 때문에 공격할만한 약점이 보이지 않아, 스킬을 믿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깡!
 기대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듯, 내 창은 앞을 막아선 오크의 가슴을 글레이브 채로 꿰뚫어 버렸다.
 -고고고
 적지 않은 충격음이 안개 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그리스 마법을 사용해 손쉽게 창을 뽑아 들었다.
 “크으! 검기(창기)까지! 대협!”
 시끄러운데 좀 닥쳐 줄 순 없을까?
 나는 중년인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보낸 후 연이어 안개를 뚫고 나온 고블린들을 사냥했다.
 놀 3마리와 오크 2마리, 고블린 7마리를 사냥하니 붉은 점이 3개밖에 남지 않았다.
 -키에에엑!
 매우 순조로워 보이는 퀘스트 진행.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미친.”
 지금까지 내가 없앤 붉은 점의 두 배만큼, 새로운 붉은 점이 지도에 생겨났고, 그 중엔 처음 들어보는 굵직한 포효소리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스킬을 남발하다 보니, 마력은 어느새 4할이 사라진 상태.
 몇 번에 걸쳐 몬스터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만큼, 앞으로는 속도보다 효율을 따져가며 싸워야 한다.
 이 경우 시민들의 위험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지만, 적절히 속도와 효율 사이에서 밸런스 조절을 하면 되겠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놀들의 진행 방향을 향해 그리스 마법을 사용했다.
 
 * * *
 
 다행히 그 이후 제 3파는 없었다.
 결국 나는 안전하게 시민들을 보호해냈고, 이제 적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네가 보스냐?”
 하지만 문제는 그 적이 범상치 않은 녀석이란 것이다.
 “트롤이었군.”
 몬스터 사전에서 봤던 트롤의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대 몬스터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지어야 했다.
 전에 들었던 처음 들어보는 포효소리는 이 녀석의 것이었다.
 ‘더럽게 크네.’
 키 4미터.
 무게 1.2톤.
 트롤은 잘린 팔도 1분이면 새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회복력을 갖고 있으며, 뇌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머리를 날려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가죽도 상당히 질긴 편에 속해 방어력도 상당하며, 막강한 근력은 철제 방어구를 종이처럼 짓이긴다.
 나는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나타난 트롤을 향해 창을 겨누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껴 쓴 덕분에 현재 남아 있는 마력은 3할 정도.
 단 한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여유 있는 양으로 보이지만, 트롤은 상대해보지 못한 몬스터인 데다가 귀찮은 특성이 있어서 마력이 여유 있다고 승리를 확신하긴 힘들었다.
 게임의 보스 공략하듯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조심하면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압도적인 체격 차이에 긴장감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한 마리 남았다는 말에 안도했던 시민들은 안개를 헤치며 나타난 거인의 모습에 헛바람을 삼키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 인사부터.’
 창끝으로 녀석의 대가리를 겨눈 나는 관통스킬이 더해진 매직 미사일 다발을 날렸다.
 -쿠쿠쿠쿵!
 대가리가 워낙 크기에 빗맞히는 게 어려울 정도.
 총 여섯 발의 매직 미사일이 새파란 피를 튀기며 녀석의 머리에 구멍을 냈고, 트롤은 고통스러운 듯 소리를 지르면서 비틀거렸다.
 뒤에서 구경꾼이 된 시민들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트롤의 얼굴과 이마에 흉측하게 뚫린 구멍들이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며 빠르게 회복되자 망연자실한 표정들을 지었다.
 “미, 미친.”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겨.”
 자기들이 싸우는 것도 아닌데, 힘 빠지는 말은 말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방금 공격은 간보기용이었으니.
 매직 미사일론 큰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적어도 녀석은 고속회복이 있어도 고통 해소까진 없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것만 해도 큰 성과라 생각한다.
 트롤이 인간형인 만큼 신체 구조도 사람과 다르지 않을 터.
 그럼 공략법은 많았다.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생각 하게 된 나는 자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스.’
 일단 너무 크니 녀석을 눕히고 시작을 해야겠다.
 그리스 마법 한 번에 트롤은 보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요란하게 넘어졌다.
 -쿵!
 그런데 이런 대형종의 몬스터는 넘어뜨린다고 다가 아니다.
 압도적인 피지컬 차이 덕분에 허우적거리며 휘둘러오는 팔과 다리가 굉장히 위협적이었으니 말이다.
 변칙적으로 날아드는 공격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도약.’
 -후웅!
 발밑으로 녀석의 커다란 손이 바람 찢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트롤의 공격을 인지하고 손발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이 날아오른 나는 살기 가득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과 목, 명치, 낭심을 향해 관통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크아아악!
 눈과 목을 노린 매직미사일은 녀석의 손을 파고들었지만, 명치와 낭심을 노린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고통이 상당한지 트롤은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닥댔고, 훤히 드러난 녀석의 배를 향해 떨어지며 푸른 빛을 머금은 창을 찔러 넣었다.
 -쿵!
 가죽을 뚫고 살속 깊이 파고든 창.
 도약 스킬의 착지효과로 안정적으로 트롤의 몸 위에 내려선 나는 창을 뽑지 않고 그대로 온몸을 비틀어 뱃가죽을 길게 찢었다.
 상황 파악 못 하고 몸부림을 치는 트롤의 행동으로 갈라진 배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벌어졌다.
 덕분에 순식간에 내장들이 양옆으로 쏟아지며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출했다.
 덩치만 크지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우웩!”
 시민들에게서 들려온 구토 소리.
 하지만 더한 것도 많이 봐온 나는 이정도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후웅!
 악에 받친 녀석이 모기 잡듯, 손바닥을 휘둘러 왔다.
 그러나 나는 도약을 돌진으로 쓰며 가볍게 자리를 벗어났다.
 도약의 안정적인 착지효과는 이럴 때 큰 이점이다.
 나는 도약을 이동기로 쓰며 안정적으로 트롤의 몸을 탔고, 털이 잔디를 연상시키는 가슴에 도착하자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트롤을 죽이기 위해선 머리를 날리거나, 뇌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아쉽지만 내 공격수단으로는 일격에 뇌를 파괴하거나 목을 날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방법이다.
 나는 창을 찍어 내리며 가슴에 굵직한 구멍을 냈고, 그 구멍에서 지독한 냄새가 바람과 함께 새어 나왔다.
 애초에 내가 정한 표적은 다름 아닌 녀석의 허파였다.
 ‘워터.’
 뚫린 구멍에 공격력 없는 단순한 물이 작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무리 녀석의 덩치가 크다고 해도 허파 한쪽이 물로 가득 차는 것은 금방이었고, 트롤의 무서운 회복 능력은 물이 새지 못하게 스스로 구멍을 틀어막았다.
 다시금 날아드는 트롤의 손을 피해 부지런히 반대쪽 허파에도 같은 시술을 해준 나는 멀리 몸을 날렸다.
 -큭!
 그때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트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통스런 표정으로 ‘꺽꺽’ 댔다.
 삐져나온 내장으로 구멍을 메우지 못해 흉측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녀석의 복수는 시각적인 보너스였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지 자신의 가슴을 후려치며 바닥을 뒹구는 트롤은 완전히 전투 의지를 잃었다.
 아니, 전투를 이어갈 여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다.
 “악마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감상이 들려 왔지만, 무시하며 트롤의 발밑의 그리스를 풀었다.
 ‘덩치만 크지. 생각보다 쉬운데?’
 단순히 내가 잘 싸운 걸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면 사냥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한 번에 두 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지금 수준으론 절대 불가능하고 위험성은 오크와 차원이 다르지만 말이다.
 -저벅저벅
 여유롭게 녀석에게 다가간 나는 얌체처럼 창으로 밧줄처럼 복잡하게 엉킨 창자들을 잘랐다.
 손발은 잘리면 도마뱀 꼬리처럼 회복하면 그만.
 하지만 양쪽이 이어지는 창자의 중간을 끊으면 어떻게 회복할까?
 내가 봤을 때 다시 손으로 잘린 부위를 잇지 않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끊어진 창자는 녀석에게 엄청난 고통을 선사할 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꿈틀대기만 하던 녀석의 움직임이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지구에서의 첫 퀘스트. 모든 능력치가 1상승 합니다.]
 [중급 보상카드를 획득했습니다.]
 [안전가옥을 획득했습니다.]
 
 이어서 주변에 드리웠던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안개가 걷힌다!”
 “살았어! 살았어요!”
 그러나 지금 당장 원래대로 돌아가는 가면 내 처지가 난처할 수밖에 없다.
 “잠깐만 주무세요.”
 “대협?”
 나는 그들에게 수면 마법을 사용한 뒤, 가스총과 삼단봉을 포함한 장비들을 수습하고 얼른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 * *
 
 몬스터들의 사체는 안개와 함께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공원의 풍경이 나를 반겨 주었다.
 혹시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 있는 것 아닐까란 걱정을 했는데, 안개는 사람을 물리고 인지를 어지럽히는 기능이라도 있는지 한산하기만 했다.
 시간을 보니 분명 시간이 30분 정도 지나있었는데, 아무도 이상을 깨닫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지난번엔 안개를 인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찌 된 걸까?
 사람들은 안개가 걷히고 한참이 지나서야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사람이!”
 까치산 공원에 들어선 시민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5명의 남녀를 보고 기겁하며 달려왔는데, 그들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가방을 짊어진 채 반대쪽 길로 향했다.
 -대혀여엽!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까치산 공원에 울려 퍼졌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중급 보상]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원래대로라면 침대 머리맡에 있어야 할 보상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중급은 처음이네.”
 중급의 보상카드에선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감이 크다.
 이왕이면 강력한 스킬이나 지난번처럼 미래에 대한 정보가 나오면 좋을 텐데.
 
 [등기부 등본]
 
 그리고 보상카드와 함께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뭉치를 펼친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보상이 안전가옥이라 들었을 때 설마 했는데, 진짜로 집일 줄은 몰랐다.
 그냥 명칭만 비슷한 무언가라 생각했던지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유자 조지훈]
 
 토지와 건물 명의자는 모두 내 이름으로 되어있었으며, 근저당 내용 없이 깨끗했다.
 위치는 용산 삼각지역 부근이고, 토지 150여 평에, 건물이 1~2층 합쳐서 65평이다.
 그런데 굳이 ‘안전가옥’이라 칭해진 것 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등기부 등본만 봐선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용산에서 이만한 집이면······.”
 10억은 가볍게 넘지 않을까?
 “이게 웬 떡이냐.”
 11장 돈
 
 
 집으로 돌아온 나는 등기부 등본과 중급 보상을 고이 모셔 놓고, 급히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성능도 준수하고 하드도 SSD인데, 오늘따라 부팅 속도가 길게 느껴진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대기하다가 부팅이 완료되자마자 무섭게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타타탁!
 등기부 등본 발급.
 등기부 등본을 갖고 있음에도 굳이 인터넷 등기소까지 찾은 이유는 서류에 상상치도 못한 내용이 적혀 있던 걸 뒤늦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등기소에 들어가 용산 안전가옥의 주소를 입력하고, 등기사항 증명서의 유형을 선택하는 항목에서 모든 기록을 볼 수 있게 했다.
 이어서 발급 수수료까지 신속하게 결제를 하니, 나라에서 공증한 등기부 등본을 볼 수 있었다.
 
 [소유권 이전 / 2017.3.21 매매 / 소유자 김하나 / 거래가액 7,350,000,000원]
 [소유권 이전 / 2020.5.24. 증여 / 소유자 조지훈]
 
 그리고 그 내용이 보상으로 나온 등기부 등본의 내용과 일치한단 사실을 확인한 나는 말문이 막혔다.
 “······.”
 평범한 가족이 평생을 일해도 벌 수 없는 거금.
 7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너무 현실감이 없는 금액이라 환희보단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통이 크시군요.”
 증여자 김하나.
 성 빼면 하나님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이지만, 지금이라면 뭐든지 용서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려 시세가 70억이 넘는 단독 주택을 손에 넣게 됐는데, 어찌 불만을 표하랴.
 나는 없던 신앙심이 절로 생기는 것을 느끼며 원룸 천장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등기부 등본 소유자에 제 이름이 박혀 있는 것 보면, 세금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겠죠? 70억이 넘는 건물의 증여세와 취득세를 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세금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도 70억짜리 건물의 증여세면 수십억 할 텐데, 세금 어떻게 냈냐며 세무조사 들어오진 않겠죠?”
 설마 보상으로 쓰지도 못할 것을 줬겠냐만은 말도 안 되는 가치를 지닌 재산을 손에 넣게 되니 진정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국세청에 확인을 해보니, 모든 세금이 납부되었다는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부디 전능한 힘으로 나중에 세무조사한다는 뒷북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후우······.”
 나름 간이 큰 편에 속한다고 했는데,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걸로 대출받자.”
 막대한 재산이 생겼는데, 놀리면 안 되지.
 안전가옥으로 대출을 받아서 T화학 주식을 매입한다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현재 T화학의 주식은 나날이 눈에 띄는 성장을 거듭하며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었다.
 9200원이던 주식은 5만 원까지 올랐다.
 사람들은 이미 T화학이 최고점을 찍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앞으로 8만9천 원까지 더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랜 무직자면 담보대출도 빡세긴 하지만, 재산이 재산이다 보니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안전가옥의 상태 확인한 나는 빠르게 은행을 방문했다.
 마음 같아선 한시라도 빨리 새집을 구경하고 보상도 까보고 싶었지만, T화학의 주식은 지금도 오르고 있는 상태였으니, 바쁘게 움직였다.
 
 * * *
 
 “응? 무슨 일 있나?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군.”
 마법 스승 고든의 물음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좋은 꿈을 꿨거든요.”
 “꿈이라······. 뭐 지금 자네에겐 물질적 행복보단 정신적 행복이 수련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정확히는 극강의 물질적 행복을 느끼고 있는 상태지만, 굳이 제자를 위하는 스승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은행에 들렸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성공적으로 대출을 마친 나는 T화학 주식에 추가로 45억을 투입했다.
 재산이 받쳐 주니 조건은 은행에서 알아서 맞춰주었고, 그들에 의해 나는 무직자가 아닌 전업 투자자가 되어버렸다.
 전업 투자자라는 게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단 하루 만에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에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무사히 투자금을 회수한다면 대출금을 포함해 내가 보유하게 될 현금이 90억이 넘게 된다.
 내 한 달 전 상황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어마어마한 돈.
 그리고 나중에 미래에 대한 정보를 또 얻고 이 90억으로 투자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2층으로 가자꾸나.”
 “네.”
 나는 고든의 연구실로 향했는데, 각종 실험재가 놓여 있던 공간이 지금은 내 수련을 위한 자료들로 가득했다.
 마치 아이로 인해 집안의 풍경이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스승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아공간 아티팩트는 가격이 어느 정도 하나요?”
 “아공간 아티팩트?”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그는 자신이 아는 대로 답을 했다.
 “저장 규모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는데, 가장 작은 것도 백금화 100개 정도는 하겠지.”
 백금화 100개를 모으려면 대체 오크 몇 마리를 사냥해야 하는 거지?
 오크 30마리를 사냥하면서 금화 3개 정도를 모았으니, 단순 계산으로 오크 1만 마리를 잡아야 백금화 100개를 모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꾸준히 돈을 모으면 어떻게 되겠지만, 목표를 이루기까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것이냐?”
 “사냥 다닐 때 편하잖아요. 언제까지 스승님의 것을 빌려 쓸 순 없고요.”
 “그렇군.”
 고든이 돈이 많다고 한들 선뜻 백금화 100개의 아이템을 사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아마 뮤대륙에서 아공간 아티팩트를 구매하려면 자금에 여유가 있는 영주나 고위 상인이어야지 가능할 것이다.
 뜬금없지만 갑자기 아공간에 관해 물은 건 다름 아닌 새로운 스킬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것.
 
 [아이템 슬롯]
 
 내가 소지한 물건이라면 손수 꺼낼 필요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으로 ‘중급 보상카드’에서 얻은 새로운 스킬이다.
 현실에서 이것저것 실험을 해봤는데, 조립한 상태의 창을 슬롯에 등록하고 3단 분리한 다음 가방에 넣어 놓으면, 원하는 때에 언제든 온전한 상태의 창을 꺼내 들 수 있다.
 그리고 음식을 슬롯에 저장하고 사용하면 따로 손에 쥐고 먹는 것이 아니라 포장을 제외한 내용물이 그대로 몸에 흡수가 된다.
 만약 포션을 등록하면 별도의 모션 없이 약효가 몸에 스며들게 할 수 있으니 엄청난 효용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슬롯 수는 총 3칸.
 같은 종류의 아이템이라면 중복 저장이 되는 만큼, 얼마든지 전투에 활용할 수 있다.
 제대로 게임 같은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아이템 슬롯을 아공간이랑 조합하면 최고일 텐데.’
 적에 따라 즉시 무기를 변환하던가.
 소모성 무기(단검, 투창, 화살 등)를 끊임없이 꺼내 쓸 수 있고, 즉석에서 큼지막한 함정도 설치할 수 있다.
 아이템 슬롯은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좋지만, 역시 100% 활용하기 위해선 아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돈인가······.’
 현실에서 큰 재산을 손에 넣은 것은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구에서 통용되는 일로, 뮤대륙의 나는 아직 하루살이에 가까웠다.
 ‘이김에 돈이나 벌어볼까?’
 지금까진 뮤대륙에서 강해지는 것 외에 자의적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나는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는 포지션에 있다.
 발전된 지구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필요한 지식을 새로이 익혀 뮤대륙으로 옮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말이지 돈 냄새를 풀풀 풍기는 존재 아닌가.
 ‘힘을 꼭 수련을 통해서만 얻으란 법이 없지.’
 지구에선 돈이 곧 힘이다.
 그리고 그건 이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자본력만 갖춰진다면, 이렇게 힘들여 수련하는 것 외에도 강해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몸을 쓰는 스타일이 아닌데, 지금까지 너무 순진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집중 안 하나.”
 고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부랴부랴 수련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생활], [문화], [기술]······.
 나는 어느새 뮤대륙에서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카테고리별로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딴 생각을 해서일까?
 시스템은 차라리 퀘스트나 깨라며 새로운 임무를 내려주었다.
 
 [퀘스트 발생]
 등급: 중
 내용: 평온 숲 중서부 오크부락 토벌
 보상: 중급 보상카드, 케일론 왕국 표준 오러심법
 
 1서클의 원리가 성질변환이라면, 2서클의 원리는 결합이다.
 서로 다른 성질을 더해 더 강하고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게 만드는 것.
 심플 하면서도 당연한 원리였다.
 나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2번째 서클을 음미하듯 감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고 5주만에 2서클을 달성해 냈다.
 이에 스승인 고든은 마법의 천재가 나타났다며 펄쩍 뛰고 좋아했지만······.
 
 [2서클을 달성했습니다.]
 [마력이 5 향상됩니다.]
 [지능이 1 향상됩니다.]
 
 함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해당 메시지가 떠오르며, 현실로 돌려보내졌다.
 한참 동안 2서클의 존재감에 빠져 있던 나는 평소보다 10분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우선은 뮤대륙에서 돈이 될 만한 지구의 물건이나 정보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안전가옥이라 칭해지는 새 집에 대한 조사다.
 어제는 간단하게 안전가옥의 상태만 확인하고 왔는데, 범상치 않은 이름으로 보아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아침 운동이 먼저지.”
 왠지 까치산 공원에 가면 날 대협으로 부르던 아저씨가 죽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꺼려진다.
 아무리 얼굴을 가렸다지만, 사람의 느낌이란 우습게 볼 게 못 된다.
 긴가민가해도 갑자기 달라붙어 말을 걸어온다면 목소리로 들킬 수도 있고,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면 또 그것대로 수상하지 않은가.
 그냥 한동안 까치산 공원 근처를 가지 않는 것이 낫다.
 “이김에 안전가옥에서 운동해 봐야겠다.”
 이 원룸과 달리 안전가옥엔 높다란 널찍한 마당이 있다.
 그곳에서 창 연습을 포함한 아침 운동을 하면 될 것 같다.
 덤으로 간 김에 안전가옥에 대해 조사도 하고.
 -철컥
 나는 간단히 씻고 트레이닝복 차림에 묵직한 백팩을 멨다.
 그리고 언제나 가는 공원쪽 방향이 아니라, 집 앞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탄 나는 용산구 삼각지역으로 향했다.
 단독 주택과 저층의 상가건물들이 늘어선 주택가.
 딱히 부촌이란 느낌도 없고 겉으로 봐선 그저 평범하기만 한 동네인데, 알고 보면 만만해 보이는 낡은 건물이라도 간단히 10억이 넘는다고 한다.
 그전까지 집이나 토지를 사는 것이 먼 나라 이야기여서 신경을 안 썼는데, 오히려 재산을 얻고 나니 서울 중심에 집을 얻는다는 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평범하게 산다면 개인이 10억이 넘는 집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집 앞에 도착하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평범한 주택가에 어울리지 않는, 부촌에서나 볼법한 이 집이 어제 보상으로 얻은 안전가옥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문을 열쇠로 열었다.
 참고로 어제는 대문이 안 잠겨 있었고 키는 현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부 문은 도어락으로 되어있는데, 비번이 1234로 설정되어 있어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번호로 바꿔놨다.
 “앞으로 이 큰집을 어떻게 관리 할지.”
 일단 다음 달에 주식을 정리하고 나서 부모님을 모셔와 함께 살 생각이긴 한데, 두 분께 관리를 부탁하는 것도 웃기니, 아무래도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쫓겨나 직장을 구하지 못해 빌빌댔었는데,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과연 날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도 인간이고 쌓인 게 많다 보니, 자꾸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집을 보면 담장이 4미터는 될법한 높인데, 이는 1층을 지하로 해서 차고를 두고 대문을 열고 계단으로 올라와야 정원과 집이 나오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대지는 150평.
 건물은 1, 2층 포함 65평이고, 1층이 40평, 테라스를 낀 2층이 25평이다.
 방은 총 4개이며 개별욕실 2개, 공용욕실이 1개, 주방도 1~2층에 각 하나씩 2개가 있다.
 집의 전체적 컬러는 흑백 조합으로 딱 내 취향이었다.
 다만 보상은 어디까지나 집뿐이라는 듯, 빌트인 냉장고와 싱크대, 수납장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곧 거금이 생길 테니, 집에 맞는 가전제품과 가구들을 입맛에 맞게 구매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스윽 집을 한 바퀴 둘러 본 나는 정원으로 나왔다.
 “자세한 조사는 운동 후에.”
 외투를 정원 한구석에 벗어 놓고 카본 창대를 조립해 손에 잡아드니, 묘한 안도감과 함께 날카로운 감각이 살아났다.
 -훅! 훅!
 이후 찌르기와 베기, 치기, 막기, 네 개 동작을 연습했다.
 무기로 창을 고르고 난 후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습하는 케일론 왕국군의 기본 창술이다.
 각 동작을 10분씩 반복하며 3세트를 진행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포인트였다.
 단순히 힘만 휘두르는 수련이 아니어서일까?
 정해진 연습량을 모두 소화하고 나면 능력치가 높아졌음에도 언제나 땀범벅이 된다.
 “후우······.”
 상쾌한 표정으로 땀을 훔친 나는 수건 너머로 보이는 예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허······.”
 운동이 끝나고 시작한 본격적인 안전가옥에 대한 조사.
 아무리 찾아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나는 혹시라는 생각에 집 여기저기에 마력을 흘려 넣었고.
 -쿠쿵!
 1층의 작은방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드러난 계단을 황당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깊네.”
 그리고 차고 위치보다 더 깊이 내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벙커로밖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허······.”
 이런 걸 일반 주민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신이란 존재가 보상을 내려줄 때, 포함시킨 옵션이 분명했다.
 지하 벙커엔 침실과 화장실, 욕실까지 완비되어 있으며, 만약을 대비해 물탱크와 자가 발전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안전가옥이 예상보다 더 대단한 보상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런 게 보상으로 내려진 이유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써먹을 상황이 발생한다는 거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물음을 허공에 던졌다.
 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이런 걸 보상으로 걸었을까.
 심각한 표정으로 벙커를 둘러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모르니, 생필품과 비상식량을 채워놔야겠다.”
 
 * * *
 
 안전가옥에서 발견한 벙커의 의미를 곱씹다 보니,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끄악!”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덕분에 실수도 많았다.
 길을 다니며 여기저기 많이 부딪히고, 주짓수 도장에선 대련 중 상대방을 너무 심하게 떼어내서 다치게 할뻔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행히 상대가 낙법을 해서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긴 충분했다.
 “저 괴물새끼 진짜······. 봤어? 명철이 힘으로 떼어 내는 거?”
 “덩치는 평범한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거야? 명철이가 40㎏은 더 무겁겠구만.”
 비록 주짓수 도장 사람들은 상대가 다칠 뻔한 상황보다 110㎏이 넘는 덩치 좋은 인물을 힘으로 뜯어냈다는 사실에 주목했지만, 나는 너무 미안해서 그에게 연신 사과를 건네야 했다.
 “아, 아닙니다. 이런 것도 경험인 거죠.”
 명철이란 사내는 대인배답게 웃어넘겼지만, 그의 씰룩이는 입꼬리와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보면 어떤 기분인지 예상이 되었다.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사줘야겠다.
 아무튼 그렇게 기분 좋게 받았던 보상은 내게 걱정거리를 안겨주었고, 가뜩이나 생각이 많은 머리는 계속 최악의 사태를 그렸다.
 ‘몬스터들이 대대적으로 등장한다는 징조인가?’
 ‘아니면 전쟁?’
 무엇이 됐든 벙커를 사용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지만, 이유 없이 벙커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게 솔직한 생각이다.
 “지금까지 만약을 대비해 강해진다고 노력해왔는데, 이제 와서 안일하게 생각해선 안 되지.”
 내키지 않더라도 심리적 안정을 위해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을 터.
 그리고 문득 현실에서 큰돈을 벌게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 *
 
 현실 14일 차, 뮤대륙 64일 차.
 2서클을 달성하자마자 또 기절하는 바람에 고든은 서클 생성 알러지라도 있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건네왔다.
 그런데 나는 고든의 우스갯소리에도 기분 좋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까? 고든은 탁자 위로 턱을 괴며 말했다.
 “전에도 그런 표정을 지었지.”
 “네?”
 “내게 제자로 받아 달라며 찾아왔을 때가 딱 그 표정이었거든.”
 “······.”
 함께한 게 겨우 5주 정도지만, 계속 얼굴을 맞대고 지내와서일까?
 어렵지 않게 내 생각을 읽어낸 고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울리지 않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나도 그렇지만 고든도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단호한 그의 반응에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힘을 보태주십시오.”
 “너는 내게 부탁만 하는구나.”
 염치없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뮤대륙에서 알고 있는 인물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이 고든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일을 벌이려면 그의 도움이 필수였다.
 나는 부탁하는 입장임에도 흔들림 없이 그의 눈을 주시했고, 고든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사제지간이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계는 아니지. 자세히 들어볼까?”
 역시 내겐 한없이 자상한 고든 다운 대답이었다.
 그에게 고맙다며 묵례를 한 나는 고민한 계획에 대해 밝혔다.
 “다양한 사치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상회를 만들 생각입니다.”
 “상류층을 상대로 장사하겠다는 뜻이군.”
 뮤대륙에서도 인간들의 영역인 미드랜드는 확고한 신분 체계를 갖고 있는 세계다.
 미드랜드 경제력의 99%를 황족이나, 왕족, 귀족, 준귀족, 마법사, 상인들이 쥐고 있으며, 절대다수라 할 수 있는 일반 평민이 지닌 재산이라고 해봐야 단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로 돈을 벌고자 한다면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꼭 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 평민들보단 상류층을 상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귀족은 대부분이 헤프고 오만하며 자존심이 강한 존재들이기에 잘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벌 수단으로 귀족이 좋아죽는 사치품으로 정한 것이다.
 “사고방식이 위험해. 절대 귀족들을 얕봐선 안 된다. 목 날아가는 것은 순식간이니.”
 고든에겐 위의 생각과 달리 분명하게 순화해서 말했는데도 이런 반응이 돌아온 것을 보면 귀족의 위험도를 새로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명심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다시금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귀족들의 품위유지를 위한 노력이 대단하지. 그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상품만 준비된다면 단기간에 큰돈을 버는 것도 가능해.”
 “그렇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만한 상품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네게 그만한 아이템이 있느냐?”
 아이템?
 넘쳐서 탈이지.
 판타지의 단골 소재로 쓰이는 향 비누부터, 귀부인들이 좋아할 화장품, 악세서리, 잡화, 의류 등 가져와 쓸 것이 넘친다.
 어차피 이곳은 지구의 지적 재산권은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니만큼,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다.
 “네,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반응을 보니 기대가 되는군. 좋아, 그럼 물건들을 보여다오. 내가 보기에도 경쟁력이 있다 싶으면 아낌없이 힘을 보태주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중에서도 내가 기반을 잡기 위해 판매할 상품은 바로 기호식품들이다.
 아편전쟁의 계기를 마련했던 물품 중 하나인 발효차 ‘홍차’와 인디언에게서 유럽으로 전파된 파이프를 대체할 숙성연초 ‘시가’다.
 아무래도 사업 초기엔 제약이 많은 만큼, 큰 노동력과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돈벌이를 찾아야 했고, 그 결과 생각해낸 것이 이 두 가지의 기호식품이었다.
 두 개의 재료가 될 차와 담뱃잎의 존재 여부는 이미 확인한 바이다.
 파이프 연초가 주류인 담배는 말할 것도 없고.
 미드랜드의 차는 대부분이 볶거나 찐 다음 말려서 사용하여, 찻잎을 발효해서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없다.
 지구에서 과거 금처럼 치부되던 홍차의 가치를 생각하면 내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음, 뭔가 특이한 것 같지만, 특별하단 것까진 모르겠구나.”
 그게 돈이 되겠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고든의 모습에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크게 즐기진 않지만, 세계적으로 봤을 때 홍차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기호 식품이다.
 입맛이 지구와 닮은 만큼 뮤대륙에서라면 홍차의 향이 통할 것이라 확신한다.
 시가도 비슷한 이유고.
 무엇보다 이 두 개의 가장 큰 이점은 복잡한 공정을 거치지 않고, 상품생산이 가능하단 점이었다.
 “일단 내가 검증을 해봐야겠구나. 준비해 주겠지?”
 “알겠습니다.”
 제자의 말이기에 무작정 반대하진 못하고 먼저 상품을 보자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고든의 모습을 이견 없이 수긍했다.
 그의 입장에서 검증은 필수일 테니.
 큰 기대를 안 하는 고든의 모습이 놀라움으로 번지길 기대하며 나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잠깐.”
 “네?”
 아니, 나서려 했는데 고든이 갑자기 막아섰다.
 “사업한다고 마법 수련을 뒤로 미룰 생각은 말 거라.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물론이죠.”
 “그럼 됐다. 항상 마법 수련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만약 병행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도움을 끊을 테니.”
 그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능력 향상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은 만큼, 주객전도가 되어선 안 되겠지.
 
 * * *
 
 홍차 발효(산화발효)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가의 재료인 담뱃잎의 발효 숙성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볼 수 있다.
 홍차는 시들이기, 비비기, 발효, 건조를 거치는데, 아무리 오래 걸려도 3일이면 완료가 되는 공정이다.
 반면 시가는 담뱃잎을 건조, 발효숙성에만 일주일이 넘게 걸리고, 시가를 만든 후에도 추가 숙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최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고든에게 빠르게 보여 줄 수 있는 상품은 홍차뿐인데, 수차례 실패를 걱정했던 것치곤 첫 번째 결과물이 너무 좋아서 바로 상품화가 가능할 수준으로 보였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향도 지구에서 맡아 보았던 홍차의 것과 너무 비슷했고, 상쾌하면서 쌉싸름하게 입에 퍼지는 고급스러운 향은 ‘성공’이란 단어를 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또르르르
 하지만 상품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닌, 이 세상의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고든이 한다.
 더구나 그는 차를 즐기는 취미가 있으니 더욱 안성맞춤인 존재였다.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오리지널 홍차와 레몬 한 조각이 들어간 아이스티, 우유와 귀한 설탕이 들어간 밀크티를 만들어 건넸다.
 “허 참.”
 그런데 오리지널 티에 이어 마법으로 차갑게 식힌 아이스티와 부드러운 밀크티까지 모두 마신 그는 계속해서 황당하단 반응을 보여서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어떠십니까?”
 결국, 눈을 감아 버린 고든의 뜸 들이기를 못 이긴 나는 그에게 답을 종용했다.
 그에 고든이 천천히 눈을 뜨며 진지하게 답했다.
 “떪은 맛이 너무 강해. 제조 과정을 다시 돌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평가는 부정적이어서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어야 했다.
 나 자신은 나름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차를 즐기는 사람 입장에선 부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고든의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풍부한 향과 깊은 맛이 일품이군. 솔직히 찻잎이 발효과정을 거쳤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맛을 낼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네?”
 “떫은 맛이 줄어들면 금상첨화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도 상품 가치는 충분하겠군. 나라도 기쁘게 사 먹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그의 말은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더 없이 귀족적인 맛과 향이야. 이건 무조건 되겠어.”
 “그러시다면?”
 “그래, 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마. 모든 인맥과 자금을 활용해서라도.”
 “감사합니다. 스승님!”
 고든의 적극적인 참전 의사와 함께 뮤대륙에서 돈 벌기 계획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아, 스승님. 그전에 이거 작성 좀 부탁드립니다.”
 “이게 뭐냐?”
 “아무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지만 사업을 함에 있어서 지분관계는 명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약서입니다.”
 “······.”
 내 말에 고든은 ‘어쭈?’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흥정 없이 내가 건넨 종이에 바로 사인을 했다.
 “그런데 이런 걸 어떻게 개발해낸 것이냐? 다양한 음용 방법도 매우 흥미롭군.”
 그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지구에서도 우연한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홍차의 역사 아닌가.
 그래서 나는 지구에서 흔히 사용되는 운송과정의 썰처럼 보관에 실패하여 찻잎을 상하게 했는데, 버리기 아까워 다려 마시니, 향이 기가 막혔다고 답했다.
 “호오, 개발이 아니라 발견이란 것이군. 과연······.”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은 고든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퀘스트 발생]
 등급: 중
 내용: 평온 숲 중서부 오크부락 토벌
 보상: 중급 보상카드, 케일론 왕국 표준 오러심법
 오크는 이미 충분히 상대해보았고, 근래 2서클을 달성하며 새로운 마법을 익혔을 뿐 아니라, 능력치 상승도 컸던 만큼 아무리 오크 부락이라 해도 시간을 들이면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캉!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란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오크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던 중,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무심코 팔을 휘둘렀더니 화살이 건틀렛의 금속 부위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허!”
 그리고 연이어 날아오는 화살들을 본 나는 기겁하며 2클래스의 쉴드를 펼쳤다.
 -크아아악!
 -쾅!
 -투투퉁!
 “이런, 미친.”
 미친 듯이 쉴드를 두들기는 활과 글레이브를 보며 나는 이전 같은 방법으로 퀘스트를 공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뒤도 안 보고 도망쳤다.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자만했던 모양이다.
 오크가 아무리 무식하다지만 지능이 있는 몬스터였고, 그런 녀석들이 부락을 이뤄 생활한다면 연계 공격을 해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한다.
 무사히 도망쳐 나온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혀를 찼다.
 “퀘스트 난이도 욕 나오게 만드네.”
 어떻게 공략 방법이 없을까 머리도 열심히 굴려보고 노력했지만, 부락에는 궁수뿐만 아니라 상위종인 오크 전사에 주술사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결국 단독 공략은 포기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결국 내키지 않지만, 예전에 대장간 주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 번도 향한 적 없던 건물에 들어섰다.
 [용병 길드]
 솔로 플레이도 좋지만, 개인의 힘으로 공략이 힘든 퀘스트라면 타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애초에 퀘스트는 무조건 혼자 공략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 말이다.
 12장 용병등록
 
 
 카라스 마을의 용병길드는 거의 형식상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던데, 막상 안에 들어서니 이게 뭐가 작다는 건지 모르겠다.
 -웅성웅성.
 -하하핫!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점을 연상시키는 많은 테이블과 의자였다.
 보아하니 간단한 요기 거리와 술도 파는 것 같은데, 대낮임에도 많은 용병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용병들이 의뢰내용을 살피고 있는 게시판으로 시선이 향했다.
 카라스 마을이 시골이라도 길드 자체와 나라, 영주가 내려주는 공통 퀘스트가 있기에 게시판을 살피는 용병들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나는 오늘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창구로 향했는데, 은행을 연상시키는 풍경 속에 깔끔한 제복을 입은 여성 두 명이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지훈 님.”
 자기소개가 없었음에도 그녀들은 정확하게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외부인으로 고든의 제자가 된 덕에 나는 카라스마을에서 제법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이, 마주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용병 등록을 하고 자유 사냥을 함께할 파티원을 주선 받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용병 등록을 위한 신분증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의 요구에 나는 마법 신분증을 펼쳤다.
 
 [케일론 왕국 신분증]
 이름: 지훈
 성별: 남자
 계급: 자유민
 생년월일: 1076년 5월 25일
 범죄경력: 없음
 [+]
 
 마을 주민인 그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뒤쪽에서 술을 마시던 용병들은 작게 감탄사를 흘리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아무래도 마법 신분증 자체가 신체에 이식되는 아티팩트인 만큼, 값이 상당하고 또 귀했기 때문이다.
 힘: 12
 체력: 10
 민첩: 12
 지능: 34
 마력: 19
 운: 6
 이어서 능력치까지 체크한 여직원은 살짝 놀란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서류작성을 마쳤다.
 “그럼 지부장님과의 면담을 위해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지부장님. 길드 가입 희망자입니다.”
 “들어와.”
 2층 끝에 위치한 지부장실에 들어가니,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대머리 중년 남성이 파이프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창구 여직원들은 굉장히 친절했는데, 지부장에게선 서비스 의식을 단 한 줌도 느낄 수 없었다.
 들어온 지 한참이 됐는데도 쳐다도 보지 않고 괜히 위압감을 흘리던 그는 연초를 다 태우고 나서야 나를 바라보았다.
 “응? 이게 누구야. 고든님의 제자 아니신가.”
 “안녕하십니까.”
 “난 또 철없는 마을 청년 하나가 헛바람이 들어서 찾아온 줄 알았지.”
 어정쩡한 내 인사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설마 고든님의 제자가 용병 등록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그는 마법 수련은 어쩌고 용병 등록을 하러 왔냐며 의문을 표했다.
 “사냥꾼 체질이라서요.”
 “하긴 일주일에 한 번씩 혼자 숲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듣긴 했어. 요즘엔 오크도 잡아 온다며?”
 “네, 마법을 익힌 후부턴 꽤 쉽더라고요.”
 “아아, 그래. 1서클을 단 3일 만에 완성했다지?”
 역시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소문이 금방 퍼진다.
 어쩌면 고든이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녀서인 걸지도 모르고.
 “지금은 2서클입니다.”
 내 대답에 그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황당하단 반응을 보이며 되물었다.
 “마법을 배우고 한 달 만에 2서클이 됐다고?”
 “오늘부로 6주차입니다. 2클래스 마법은 아직 모두 익히진 못했습니다만 주요마법은 사용 가능합니다.”
 “마법이 배우기 그렇게 쉬운 거였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겠나?”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2클래스 마법을 캐스팅했다.
 실드, 파이어 에로우, 속성부여 등.
 연달아 5개의 마법을 보여주었다.
 “에로우 마법은 전 속성 사용 가능하고 바인딩과 커즈마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2서클 마법사를 수습 마법사라 칭하는데,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다고 해서 둘을 같은 취급을 해선 곤란하다.
 분명 1서클 마법만 해도 상당한 전투력 상승을 가져오지만, 2서클부턴 마법에 파괴력이 부여되고 본격적으로 방어마법을 사용할 수가 있다.
 덕분에 2서클 마법사만 돼도, 용병길드에선 상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역시 고든님이 괜히 외부인을 제자로 들인 게 아니군.”
 “운이 좋았습니다.”
 “자네 같은 인재를 내칠 순 없지. 바로 중급 용병패를 내주겠네.”
 검만 들어도 될 수 있는 초급 용병과 달리, 중급부터는 검증된 실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내 실력은 상급(소드익스퍼트, 3서클)이 되기엔 애매하고 중급이라기엔 능력치가 상당히 높은 어중간한 위치다.
 나는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도축 스킬 보유자였지? 서로 못 데려가서 안달이겠군.”
 이후 영양가 없는 담소가 오고 갔고, 약 30분이 지나서야 그에게서 풀려 날 수 있었다.
 “언제든 지부장실로 놀러 오게, 고든님의 제자라면 환영이니.”
 뭔가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피곤한 느낌이다.
 “그럼 파티원 주선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이사항 있습니까?”
 “평온의 숲 안쪽에 오크 부락이 있는데, 거길 토벌하고 싶습니다.”
 “음, 평온의 숲은 가시려는 분들이 별로 없는데요. 아무래도 기습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용병들은 대부분 동쪽에 있는 협곡을 사냥터로 선호한다.
 몬스터의 숫자도 많고, 엄폐할 공간이 적어서 예상치 못한 기습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200미터 내에선 몬스터의 위치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이 있거든요. 어떤 몬스터인진 알 수 없지만, 절대로 기습을 당할 일은 없습니다.”
 그녀는 처음 들어보는 스킬인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내가 허튼 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파티원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오크 부락 토벌이라 하셨는데, 혹시 규모를 알고 계십니까?”
 “대략 100마리 규모이고, 부락에는 오크 전사와 오크 주술사가 있습니다.”
 소규모 오크 부락치곤 나름 알찬 구성이다.
 이후 그녀는 알겠다며 명부를 살폈다.
 “아, 맞다.”
 그리고 괜찮은 인물들을 발견했는지, 주점을 살피다가 한곳 손으로 가리켰다.
 “저분들이라면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패수 1명, 근접전투원 2명으로 구성된 파티인데, 실력은 확실하죠.”
 그녀가 가리킨 곳엔 어쩐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3명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내가 분위기가 왜 저러냐고 묻자, 얼마 전 함께 다니던 고정 멤버 한 명이 대형 클랜으로 이적했다고 한다.
 그 멤버는 실력 좋은 레인저였고, 덕분에 사냥에 차질이 생겨서 저 상태라고 한다.
 구성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인원들이었다.
 “좋네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직원은 나를 데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바트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새로운 레인저입니까?”
 아직 용건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밝아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는 내 복장을 보고 궁수로 착각한 모양이다.
 품질 좋아 보이는 가죽 갑옷에 균형 잡힌 몸매는 누가 봐도 마법사로 보이지 않았으니.
 그에 여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여러분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이라서요.”
 그녀의 말에 바트란 사내는 눈에 띄게 흥미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살짝 열 받는데.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축 스킬을 지닌 2서클의 마법사분입니다.”
 “네?”
 “탐색 스킬도 지니고 계셔서 200미터 내에 있는 몬스터의 위치를 수시로 파악할 수 있답니다. 레인저 역할도 가능한 분인 거죠.”
 바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런 인물이 왜 이런 깡촌에 있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 마을 마법사인 고든님의 제자거든요. 파티 사냥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내 물음에 그들은 절도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더없이 공손히 인사를 건네오는 그들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 * *
 
 “으랴앗!”
 -쾅!
 방패수 바튼의 터프한 실드 차지에 오크가 뒤로 밀려나고 그 빈틈을 노리며 달려든 검사가 가볍게 목젖을 갈랐다.
 -스스스!
 하지만 그때.
 화살 3개가 그 검사를 노리며 날아들었고, 나는 실드를 펼쳐서 오크 궁수의 저격을 차단했다.
 “죽여!”
 바트는 적진임에도 미친놈처럼 소리치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지만, 요란한 바트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기저기 심하게 찌그러지긴 했지만, 비싼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바트는 전차나 다름이 없다.
 방패를 앞세우며 달려드는 그에게 화살은 통하지 않았으며, 기겁하며 도망치는 오크 세 마리를 보면 누가 몬스터인지 모르겠다.
 그의 터프함은 주요 활동처인 아스틸 남작령에서도 유명하다 들었지만, 과연 이걸 터프함이란 단어로 포장해야 할지 모르겠다.
 “바인딩!”
 나는 오크 궁수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빛의 밧줄을 만들어 다리에 걸었고, 나이스를 외치는 바트가 바닥에 주저앉아 끙끙대는 오크들을 차례로 날려 버렸다.
 이어서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근접전투원 두 명이 깔끔하게 마무리.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편하네.’
 바트의 전투 방식이 조금 과한 느낌이지만, 함께 싸우는 동료가 있다는 게 이렇게 편리한 건지 몰랐다.
 덕분에 토벌 지정이 된 오크 부락은 단 이틀 만에 외곽에서부터 붕괴되고 있었다.
 아마 오늘 중으로 오크부락 토벌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오크 사체를 도축하자, 그들은 끌고 온 수레에 돈이 되는 부산물을 담았다.
 “크, 역시 대박.”
 “도축 스킬을 지닌 마법사라니. 이런 축복이 어딨어.”
 전투가 끝나면 세 사람은 항상 내게 엄지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파티의 리더는 엄연히 바트였지만, 모두가 내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나도 한동안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이런 바트 일행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이제 부락 내부만 정리하면 되는 건가요?”
 할베르트를 무기로 쓰는 근접딜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크 부락에 다가갔다.
 오크 부락과의 거리가 200m 이내로 좁혀지자 내부의 상황이 지도에 표기가 되었는데, 무언가 이상을 깨달은 나는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시죠?”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붉은 점이 선명하게 찍힌 오크 부락에 유일한 흰점 하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렇다면 남자면 식량이요, 여자면 노리개겠네요.”
 가감 없는 바트의 감상에 나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
 얼마 안 있어서 그 흰점이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불편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 당한 것 같습니다. 신호가 사라졌네요.”
 몬스터를 죽이면 붉은 점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신호가 없어졌단 뜻이겠지.
 바트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락에 오크는 몇 마리나 있습니까?”
 “11마리입니다. 그 중엔 오크 전사와 오크 주술사도 포함되어 있어요. 주술사가 한 마리인 건 아는데, 전사는 몇 마리가 있는지 사전에 파악 못 했네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정도 규모면 전사는 많아 봤자 두 마리겠죠.”
 오크들은 부락 안에 똘똘 뭉쳐 있었다.
 아무래도 부락 밖에 나섰던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변이 생겼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오크들의 아지트는 부락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외부와의 경계가 되는 방책도 없고 숲속에 게르(몽골식 대형텐트)와 가죽 천막들이 줄지어 놓여 있을 뿐이다.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연기가 음침한 분위기를 살리고, 위협적으로 들려오는 피어가 위급함을 표현했다.
 분명 이곳은 오크의 부락이지만 꼭 패잔병의 야영지를 연상시켰다.
 “방어 부탁드립니다. 일단 마법을 난사해서 최대한 수를 줄여 볼게요.”
 내 말에 바트는 맡겨만 달라며 거대한 사각 방패를 퉁 내리찍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벽이나 다름없는 바트를 앞세운 채 천천히 전진했다.
 “만약 오크가 제게 붙어도 신경 쓰지 마시고 전투를 이어가세요.”
 “괜찮겠습니까?”
 분명 근접 전투도 가능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설 일이 없다 보니, 실력에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마법사가 몸으로 싸워봤자 얼마나 잘 싸우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걱정 마세요. 이 창은 장식이 아니니까.”
 아직 오크 전사와 주술사의 강함은 모르겠지만, 이정도 전력이면 질 거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2클래스 원거리 마법의 유효거리는 고작 100여 미터 정도.
 때문에 내 공격보다 적인 오크 궁수의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다.
 -투둥! 퉁! 퉁!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노리는지 화살이 정확하게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철판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져도 우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의 유효거리가 되자마자 지체없이, 아이스 에로우에 관통 스킬을 섞어서 사용했다.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많기 때문에 적을 직접 볼 순 없었지만, 내겐 지도기능이라는 훌륭한 나침반이 있기에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 불편함이 없었다.
 한 방 날리고 바로 캐스팅하고, 또 날리고 캐스팅하고.
 고정 좌표로 마법을 사용하다 보니, 마법은 거의 1초에 한 번씩 사용되었다.
 11개였던 붉은 점이 7개까지 줄어들고 이후 변화가 없자 마법을 멈추며 말했다.
 “이제 7마리 남았습니다만 마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군요. 아무래도 주술사가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그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바트가 물었다.
 “그럼 이제?”
 “덮치죠.”
 “하하!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잔뜩 흥분한 바트의 뒤를 따라 속보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녀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살아남은 오크 7마리는 인위적으로 세워진 토벽을 방패 삼아 숨어 있었다.
 토벽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얼음 화살.
 아무래도 오크 주술사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크르륵!
 주변을 가득 채우는 오크들의 위협적인 울음소리.
 이미 패색이 짙음에도 우릴 노려보는 오크들의 서늘한 안광은 투기와 살기로 가득했다.
 -크아아악!
 이어서 토벽이 먼지처럼 바스러지고 녀석들이 폭발하듯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바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덩치 좋은 오크 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심하세요!”
 당혹스러운 감정이 가득 담긴 외침.
 “오크 전사 4마립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한 내 경고였다.
 “이런 젠장!”
 기세 좋게 나서서 오크 전사 한 마리를 묶어놨던 바트가 짧게 욕설을 내뱉었고, 나머지 두 딜러가 당황하며 각각 한 마리씩 오크 전사를 맡았다.
 100마리 규모의 부락에 지도자격인 오크 전사 4마리와 오크주술사 1마리가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오크전사, 오크주술사가 포함된 나머지 4마리가 프리로 놓였다.
 -크에엑!
 비웃는 듯한 모습의 오크 주술사가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나를 가리키고, 오크 전사를 위시한 오크 두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파이어 에로우, 관통.’
 내 마법은 오크전사의 가슴 한복판을 노리며 날아들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토벽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 토벽은 방어 임무를 완수한 후 돌화살이 되어 내게 날아들었다.
 “제법인데. 실드.”
 주술사라고 무시했는데, 이건 완전 마법사나 다름이 없었다.
 흙과 관련된 스킬 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방어의 견고함과 공격력은 2클래스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쾅!
 오크 전사는 우리 중 가장 덩치가 좋은 바트와 비슷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바트는 오러심법이라도 익히고 있는 건지 자신이 상대하던 오크전사를 실드 차지로 밀어버리곤 내게 달려왔다.
 “일단 빠지죠!”
 그리고 근접 딜러 두 명이 일시적 후퇴를 요청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전력은 충분합니다. 오크 전사만 그대로 붙잡고 계세요!”
 이보다 더 위급한 상황에서도 혼자 살아남았는데, 지금은 백업까지 붙어 있지 않은가.
 이정도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건 결코 오기가 아니라, 확신이다.
 덕분에 멈칫한 바트는 밀려났던 오크 전사에게 다시 붙들리고 딜러 두 명은 입술을 씹으며 무기를 휘둘렀다.
 딜러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지금 당장은 싸우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도망쳐 버릴 것 같았다.
 ‘시간만 끌어주면 돼.’
 어차피 그들에게 동료애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데다가, 용병에게 중요한 것은 신의보다 목숨이었으니.
 “열심히 달려온 너희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오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도약 스킬을 사용해 높이 날아올랐다.
 흔히 RPG게임에서 단체 PVP를 하면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대상은 무조건 법사다.
 오크 주술사가 나를 노린 것처럼, 우리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적은 녀석인 것.
 그래서 나는 나머지 오크들이 달려들길 기다린 후, 홀로 남은 오크 주술사를 처리하기로 했다.
 -턱.
 5미터 높이로 멀리뛰기를 한 후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한 나는 당황한 오크들을 뒤로 하고 주술사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매직 미사일, 관통.’
 도약 스킬을 질주로 이용하니, 우리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토벽을 이용해 연이어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막아내는 녀석의 얼굴에 다급함이 걸렸다.
 “더블 캐스팅은 안 되는 모양이군. 애석하지만 아직은 나도 그래.”
 그 사이 우리의 거리는 1미터 이내로 좁혀지고, 나는 매직미사일을 날림과 동시에 창에 마력방출과 관통의 기운을 실어 내질렀다.
 -콰아앙!
 내가 동시에 두 가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녀석도 동시에 두 가지 주술을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와 녀석의 다른 점이라면, 이쪽은 마법 외에도 사용할 스킬이 많은 잡캐란 것이고, 녀석은 주술사란 특성에 충실하단 것이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창은 그대로 방어막을 뚫고 오크 주술사의 머리를 부셔버렸다.
 이능으로 만들어진 토벽은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머리를 잃은 주술사의 몸통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마법을 방해하는 녀석이 사라지니, 나를 향해 달려드는 오크들은 표적 연습용 상대밖에 되지 않았다.
 오크 두 마리는 다가오지도 못한 채 파이어 에로우에 사살되고, 씩씩대며 글레이브를 휘둘러온 오크 전사는 커즈 마법에 일시적으로 굳어 버리며 내 창의 제물이 되었다.
 “하핫! 대단하십니다! 제가 보기에 지훈 님 정도의 실력이시면 절대 중급이 아닌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오크 전사까지 처치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승리를 만끽했다.
 “저는 익스퍼트도 3서클 마법사도 아니니까요.”
 “아뇨아뇨, 개인 전투 능력은 익스퍼트 초급이나 3서클 마법사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설마 마검사, 아니 마창사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겨우 2서클에 오러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을 마창사라며 떠받들어줘 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체 수습하고 돌아가죠. 오크전사 가죽과 주술사의 마석은 꽤 비싸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아무래도 개체 수로만 보면 트롤보다 귀한 녀석들이니까요. 오크전사 가죽은 한 장에 은화 5개 정도고, 마석은 가격이 전부 다른데 최소 1금화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4명이 나눠도 상당한 수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더없이 기분 좋아 보였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하죠?”
 그러나 이어진 내 물음에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사고지만, 사람이 죽은 현장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
 “보통은 신분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유품만 챙깁니다. 사체가 어딨죠?”
 지도에 표기되었던 하얀 점을 떠올린 나는 오크 주술사 뒤쪽을 가리켰다.
 그에 세 사람은 내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지훈 님, 여깄습니다.”
 그리고 검사가 게르 뒤쪽을 가리키며 손을 흔들자,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봐도 케일론 인이 아닌 거 같죠?”
 “그러게 복장도 상당히 좋은데? 귀족이었나?”
 “처음 보는 양식의 복장이네요.”
 하지만 과다 출혈로 죽은 듯 시체는 팔다리가 끊겨 있었는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아무렇지 않게 사체를 살피는 세 사람과 달리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수많은 몬스터를 죽여 놓고 새삼스레 사체에 거부감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괜찮으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사체가 입고 있는 외투에 크게 박힌 문자 때문이다.
 퀘스트 덕인지 이곳의 문자와 언어를 한국말처럼 사용하고 있는 나지만, 뮤대륙 공용어와 지구의 언어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U.S.A.]
 
 그 문자는 이곳 사람들에겐 생소하고, 내겐 너무도 익숙한 영어였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파티 전투에서의 빼어난 활약. 힘과 민첩이 1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케일론 왕국 표준 오러심법을 습득했습니다.]
 [오러심법의 습득으로 운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1 향상됩니다.]
 13장 대비
 
 
 [중급 보상]
 원룸 침대에 걸쳐 앉아 검은색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작게 한숨을 토했다.
 “하아.”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매일이 기적의 연속.
 지금까지 내게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면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저쪽 세상에서 지구의 흔적을 접하게 될 줄이야.
 “엉망진창이네.”
 ‘U.S.A.’라 적힌 외투를 입은 사내는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린 민간인이었다.
 내가 그를 민간인으로 확신할 수 있던 이유는 품 안에서 발견된 수첩 덕분이다.
 그 수첩에는 안개가 잔뜩 낀 어두운 밤길,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발생한 기이한 사건에 대해 적혀 있었다.
 중간중간 약어와 필체를 너무 늘여 써서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많았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대략적인 번역이 가능했다.
 사내의 이름은 ‘존 로니스’ 캘리포니아에 거주 중인 30대 남성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도 모르는 숲속을 걷고 있었다고 한다.
 ‘존’은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자신이 인지를 못 했을 뿐 납치를 당했다고 여겼고, 부랴부랴 갖고 다니던 수첩에 해당 사실을 기록했다.
 다이어리에는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유언과 숲속을 헤맨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경계와 공포심으로 가득했던 글.
 하지만 첫날의 기록 이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것을 보면 오래지 않아 오크에게 사로잡혔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일어난 일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모습.
 ‘존’은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퀘스트 장소에 마련되어 있던 지구의 민간인.
 공교롭게도 존은 내가 퀘스트 진행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망했다.
 처참했던 그의 사체는 마치 나에게 긴장하라며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메시지 같았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이 나에게만 일어나란 법이 없지.”
 ‘세상이 선택한 유일한 존재.’ 이런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처럼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드디어 등장한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에 휘말려 뮤대륙으로 던져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
 즉, 안개가 발생하며 뮤대륙의 몬스터가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단 얘기였다.
 “대재앙의 전조일까?”
 뭔가 사건이 크게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나는 중급 보상을 개봉하지도 않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그동안 애써 확인해 보지 않았던 내용을 검색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들겼다.
 [꿈······.]
 뒤이어 ‘속 퀘스트’, ‘뮤대륙’이란 글자를 추가하려 했는데, 순간 손이 멈췄다.
 쓸데없는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만약 이 내용을 아는 다른 누군가가 있고, 또 그가 권력자라면 나 같은 사람을 찾으려 하지 않을까?”
 더불어 한국이나 미국 같은 국가기관에서 이미 이상을 파악하고 있지만, 괜한 논란을 막기 위해 은폐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키워드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는 꼴밖에 되지 않을 터.
 “바보 같지만, 황당한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니······.”
 덕분에 나는 검색을 그만두고 컴퓨터를 껐다.
 이젠 영화 속에서 등장할 법한 음모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오후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PC방에서 확인해봐야겠다.
 “그럼, 이제.”
 내 손은 자연히 중급 보상카드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보상을 확인하는데.
 -파앗!
 “어?”
 예상치 못한 현란한 이펙트가 터지며,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떴다.”
 이건 당첨의 신호다.
 나는 흰색의 빛가루가 아닌 금색의 빛가루를 흩날리며 떨어지는 물건을 손으로 잡았다.
 이어서 보상을 확인하는 순간 굳었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M석간 신문을 획득했습니다.]
 
 “좋아.”
 다시금 보상으로 미래의 신문을 손에 넣은 나는 뒤숭숭한 생각을 떨쳐내고 솔직하게 기뻐했다.
 석간신문의 날짜는 7월 20일.
 약 두 달 후의 정보가 실린 보물이었다.
 기분 좋게 신문을 펼친 나는 대문짝만 하게 기재된 기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갑작스런 가동 정지! 원자력 발전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어제 오후 9시경 고리 원자력 발전소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내 모든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지 사태가 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정지 30분 후, 전력 수급에 차질이 생기며 전국적으로 대정전이 발생. 많은 인명사고가 이어졌으며, 모든 행정체계가 마비되어 국민들을 패닉에 빠뜨렸다.]
 [약 8시간이 지난 오전 5시경, 마치 원자로는 원래부터 정상작동하고 있었다는 듯 가동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대대적인 원자로 정지사태와 갑작스런 복구는 상식을 벗어난 기이한 상황인 만큼 큰 의문으로 남았다.]
 [오전 11시. 정부의 발 빠른 대처로 행정체계는 대부분 복구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밤 원자로 가동 중지 사태가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 언론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소뿐만 아니라, 항공모함과 잠수함 등 핵분열 에너지로 움직이는 모든 장비의 가동이 중단되었었다고 한다.]
 
 M석간 신문에도 돈이 될 만한 경제정보가 담겨 있었지만, 메인을 장식한 기사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젠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비상전력 덕에 공항이나, 철도, 병원 등에 큰 재앙이 닥치는 일은 없었지만, 많은 시민이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교통사고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몇몇 시민들은 대정전의 혼란을 틈타서 약탈을 비롯한 범죄행위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군인들이 대대적으로 치안유지에 투입된 결과 비인간적인 사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상황에 비교하면 한국은 대정전 사태를 그나마 안전하게 넘긴 국가였다.
 중국과 미국, 의외로 일본도 밤새 범죄가 급증하여 난리였다고 한다.
 “이 사태를 인터넷에 기재하면 세계적인 대예언가가 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나서고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 행동은 관심종자나 하는 짓이고, 내겐 신변의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맞춰봤자 잡혀가기밖에 더하겠는가.
 심상치 않은 사태에 놀라긴 했지만, 내가 모두를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정부에 대정전을 예고해봤자 미친놈 취급만 받을 테고, 괜한 관심으로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사양이다.
 그저 이 사태로 내 인척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끔 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라 생각한다.
 “두 달 뒤의 국민 여러분 힘내십시오.”
 나는 말뿐인 짧은 응원을 마치고 경제 부분으로 관심을 돌렸다.
 주로 주식차트를 살폈는데, 따로 주목할만한 기사가 없어서, 하나하나 현재 주가와 비교하며 급등할 종목을 체크 했다.
 “H바이오.”
 2달 뒤의 정보임에도 이번에는 T화학 같은 대박 주가 없었다.
 가장 많이 오른 종목이 3.2배.
 신약 개발업체인 H바이오가 항암제라도 개발했는지 주가가 폭등했다.
 대정전 사태로 거의 모든 종목이 하락세를 기록했음에도 상승세를 기록한 몇 안 되는 종목이었다.
 “T화학처럼 말도 안 되는 상승률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이게 어디야. 단 두 달 만에 재산이 3배 넘게 늘어난단 뜻인데.”
 현재 T화학의 주식은 목표치의 70%에 다다른 상황이다.
 지금 한창 S전자에서 주식을 사들이고 있는지는 몰라도 상승 폭이 예상보다 가팔랐다.
 일단 H바이오의 상승치를 살피면서 T화학 주식을 미리 뺄지 말지를 결정하면 될 것 같다.
 경제면을 꼼꼼하게 살핀 나는 사회, 정치, 토픽까지 탐독했다.
 그러다가 토픽에서 이목을 끄는 기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부에 납치되어 인체 실험까지 당했다?]
 [황당한 주장을 펼치며, 이목을 끌고 있는 자칭 초능력자 박모씨는 10년째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험생.]
 [정신과 전문의들은 스트레스에 의한 정신착란 증세일 뿐이라며 병원 치료를 권했으나, 박모씨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것임을 대대적으로 예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
 그 박모씨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부에 대한 내 경계심을 높이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조심해야지.”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평소보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나 원룸을 나섰다.
 
 * * *
 
 이번에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케일론 표준 오러 심법’.
 기사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오러를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수련법으로 국가와 검가에서 애지중지하는 전략자산이다.
 서클이 심장에 위치해 있다면, 오러는 아랫배에 응축되어 있는데, 현재 느껴지는 크기는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로 굉장히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오러 포인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온몸에 퍼져 있는 마력과 질적으로 달랐다.
 오러는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변환하여 축적하는데, 마법에 사용되는 마력보다 조금 더 묵직하고 견고한 느낌이다.
 “후······.”
 감고 있던 눈을 뜬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들이키듯 기운을 수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용법이 자동으로 각인 된다는 점이 편하네.”
 오러심법을 손에 넣긴 했지만, 이 분야는 고든처럼 나를 지도해줄 선생님이 없다.
 하지만 역시 사용하지 못할 보상은 주지 않는다는 듯, 오러심법의 운용방법과 개요가 오랜 시간 수련한 것처럼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지금의 내 능력치는 마법 1~2서클 수준인 오러 유저 수준.
 적은 양이지만, 이 오러를 사용하면 신체 능력은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아직 익스퍼트처럼 외부로 기운을 형상화하지 못해도 더 뛰어난 순발력과 예민한 감각, 힘의 폭발력은 이전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수준이다.
 아직 내 오러 양으론 30분 정도밖에 힘을 유지 할 수 없다.
 하지만 꾸준히 오러의 크기를 키워가면 시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오러는 다른 스킬들과 달리 마법처럼 스스로 수련을 하여 힘을 키울 수 있으며, 그 수련방법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쩌면 스승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마법보다 익히기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딩동.
 아직 이사하지 않은 용산 저택에서 수련을 이어가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시계를 살폈다.
 [12:53]
 오러심법에 열중하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몰랐다.
 “네, 잠시만요.”
 가방에 분리된 창을 때려 박은 나는 얼른 대문으로 내려갔고, 1톤 트럭을 앞에 세워둔 택배기사님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조지훈 님?”
 “네, 맞습니다. 잠시만요.”
 이어서 나는 대문을 활짝 열었고, 그는 쉴 틈 없이 박스들을 내려놓았다.
 “택배기사를 오래 해봤지만, 한 집에 이렇게 많은 짐을 날라 보긴 처음이네요.”
 1톤 트럭에 들어있는 내용물 대부분이 우리 집에서 내려졌다.
 덕분에 나와 기사님은 한참 동안 박스를 날라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저흰 건당 수입이라 이런 경우는 행운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상 좋은 택배기사님이 떠나고 현관 입구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박스를 본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만약에 대비해 비상식량을 산다고 샀는데.”
 엄청 많네.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배송하긴 했지만, 과연 기사님은 이 많은 음식을 내리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나는 현관에 쌓여 있는 짐들을 안으로 옮겼다.
 현재 내 힘은 14, 체력은 12.
 처음 뮤대륙을 헤맬 때보다 힘이 3배, 체력은 4배가 증가하여 체질 자체가 바뀐 상황이다.
 덕분에 아무리 박스를 옮기고 옮겨도 별로 힘들다는 느낌이 없었다.
 집안에선 따로 보는 사람이 없으니, 좁은 벙커 입구로 물건을 내릴 때 플로트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을 사용하니, 박스 100여 개를 옮기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식품 창고로 보이는 곳에 차곡차곡 쌓인 비상식량들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꽉 채우려면 지금처럼 20번은 더 시켜야겠는데?”
 물론 굳이 다 채울 필요는 없지만, 식량창고의 크기를 보면 왠지 채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뭐랄까 이 창고의 크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 같달까?
 여길 가득 채우려면 적지 않은 돈이 깨지겠지만, 지금의 내겐 그렇게 큰돈도 아니었다.
 물은 워터 마법이 있으니 주문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내 부재를 대비한 최소한의 용량은 갖춰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보면 분명 뭔가가 터지긴 터지겠지.”
 그런데 신문을 통해 7월 20일날 대정전이 일어나 큰 혼란을 주긴 하지만, 그전까지 세상이 뒤집혀 생존을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진 안개만 조심하며 살면 된다는 뜻이다.
 “비상발전용 기름도 사둬야겠네.”
 이후 벙커를 나선 나는 훈련으로 흘린 땀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택배기사님 외에 집을 찾는 손님이 또 있다.
 다름 아닌 내 부모님들.
 원랜 조금 더 나중에 집에 대해 알릴 생각이었지만, 문득 그럴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모시나 지금 모시나, 달라지는 것은 집을 손에 넣게 된 과정의 변명 거리밖에 더 있겠는가.
 -솨아아
 사실 처음엔 나를 중심으로 사건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만큼 함께 있으면 부모님을 위험에 노출 시키는 것 아닐까란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일어난 일들처럼 내가 없는 데서 부모님께 문제가 생긴다면 속수무책이니, 최대한 붙어 있는 편이 오히려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너무 계산하지 말고 어차피 모실 거 빨리 모시자고 결정한 것이다.
 부모님이 2시 오시기로 했으니 곧이다.
 적어도 땀 냄새를 풍기며 그분들을 맞이할 수는 없지.
 
 * * *
 
 도착했다는 전화에 얼른 대문을 나서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리둥절할 모습으로 서 계셨다.
 “오셨어요?”
 “어? 어······. 그래.”
 “들어오세요.”
 부모님을 반갑게 맞이한 나는 두 분을 안으로 모셨다.
 “이 집 뭐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마당에 들어선 두 분은 으리으리한 주택을 보며 물었다.
 “제 집이에요.”
 “응?”
 가벼운 대답에 어머니는 그게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말 그대로 제 명의로 되어있는 집이고, 앞으로 두 분과 함께 살 집입니다.”
 당연히 지금의 상황이 납득하기 힘들다는 거 안다.
 하지만 부모님께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라고 알릴 수는 없으니, 거짓말을 하던가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집과 마당을 스윽 둘러보시더니,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 정도면, 부지면적만 150평은 되겠구나. 대충 평당 5천 언저리로 계산해도 70억은 그냥 넘을 텐데?”
 “70어어억?”
 어머니는 뜨악한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째려보시고, 아버지는 어서 설명하라며 턱짓을 했다.
 나는 집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가치를 몰랐었는데, 역시 인생 선배인 아버지는 보기만 해도 대충 견적이 나오는 모양이다.
 “시세에 밝으시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이자 어머니는 옆구리를 꼬집으셨고, 나는 대답 대신 등기부 등본을 보여드렸다.
 “증여? 이 김하나란 사람이 누군데? 아니, 그보다 세금은? 이 정도 집이면 증여세만 해도 최소 20억이 넘을 텐데?”
 “세금이 20억!?”
 “최소가 20억. 주택 증여세 비율은 모르겠지만, 30억이 넘을 수도 있어.”
 “3······. 30억.”
 연신 경악하는 어머니의 표정 때문에 진지한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웃음이 나올뻔했다.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어머니.
 나는 역시 심플하게 답했다.
 “세금 문제도 전부 해결됐어요. 국세청에 확인해 보셔도 되니까 안심하세요.”
 “아니, 세금 어떻게 해결했는데? 20~30억이 어딨어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만 너무 집요하게 물어와서 식은땀이 흐른다.
 아마도 두 분은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만, 이에 답해야 하는 내 입장은 표정은 웃고 있어도 속으론 곤욕스럽기만 했다.
 “벌었어요. 이번에 아버지께 빌린 돈이랑 이것저것 합쳐서 주식 투자했거든요.”
 “그걸 말이라고.”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고 이제 겨우 10일 정도 지났을 뿐이다.
 내 초기 투자금은 아무리 많아 봤자 2억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실 터.
 때문에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래. 세금은 둘째 치고, 이 집을 증여한 김하나란 사람은?”
 “저로 인해 대박 터진 분이요. 실상 그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도 자식인데, 지금 내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것쯤은 느끼고 계실 거다.
 아무리 부자여도 70억짜리 집을 턱 내놓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내가 계속 에둘러 답하자 아버지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 집이 문제가 될 가능성은?”
 “융자가 45억 있는데, 주식에 넣어 놓은 상태거든요. 지금 70억 넘게 불어난 상태라서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너, 참······.”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아버지는 이내 졌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나름 결론을 내린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내 손을 주무르며 걱정스레 바라보셨다.
 “무슨 불법적인 일 하는 거 아니지?”
 모두 나를 걱정해서라는 걸 알기에 이 상황이 전혀 귀찮지 않다.
 어머니다운 질문에 엄지손가락을 펼쳐 보인 나는 기분 좋게 답했다.
 “물론이죠.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그건 우리가 가장 잘 알지······.”
 평범했던 집안의 유일한 자랑거리.
 그런데 그 자랑거리가 처음으로 삐걱대나 싶었는데, 잠깐 못 본 사이 수십억, 아니 100억이 넘는 재산을 들고 나타났다.
 황당한 게 당연하다.
 이런 건 개인 능력을 운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가구와 가전제품만 들이면 되니, 내일이라도 이사 오시면 될 거에요.”
 인테리어는 이미 완벽하게 되어있고, 요즘은 가전제품도 당일 배송이 된다고 하니,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음······.”
 갑작스런 제안에 부모님께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얼마 안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혼자 살다가 우리랑 같이 살아도 안 불편하겠어?”
 “물론이죠.”
 “그래, 일단 우리도 정리할 게 있으니, 며칠 걸릴 거다.”
 “알겠습니다.”
 “이거 참. 황당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설마 우리가 이런 집에 살게 될 줄은.”
 어떻게 대충 잘 넘긴 것 같다.
 전적으로 부모님께서 날 믿고 대충 넘어가 주신 덕이지만 말이다.
 이후로 두 분은 곧 살게 될 곳인 만큼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하셨고, 최신 설비에 계속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집구경을 마치고 모처럼 부모님과 외식을 했다.
 그리고 전자제품 마트에 들러 집에서 쓸 가전기기들을 함께 정하고 가구점에서 침대와 식탁, 소파 등을 구입했다.
 부모님은 계속 집에 있는 것도 쓸만하다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 낡아서 교체하는 것이 좋은 수준이었다.
 “너무 무리한 거 아냐?”
 “이제 이 정돈 별로 무리도 아니에요.”
 오늘을 위해 약 3천만 원 정도를 찾아놨었는데, 가구사고 전자제품 사니, 순식간에 잔고가 바닥났다.
 역시 돈은 없어서 못 쓰는 것뿐이지, 있으면 허무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빠르게 소비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
 
 홍차는 제조법과 생산지에 따라 향이 모두 다르다.
 청사과를 연상시키는 풋풋함.
 들꽃을 연상시키는 싱그러움.
 벌꿀을 연상시키는 달콤함까지.
 이외에도 홍차는 종류에 따라 다양한 향을 지녔으며, 조합을 통해 새로움을 더할 수 있는 향수와도 같은 차이다.
 -홍차에 대한 감상, 출처: 나-
 “오.”
 “수도 태생 아니더냐? 왜 지방 백작령을 보고 그리 놀라는 것이야?”
 스승인 고든을 따라 카라스 마을이 소속된 영지의 수도인 아드리안 시에 도착했다.
 수많은 깃발이 펄럭이는 웅장한 성곽과 견고한 성문.
 그 안으로 붉은 지붕의 주택들이 줄지어 섰고 가장 중심에 위치한 성이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마치 판타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광경.
 입 밖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하하!
 -웅성웅성!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이 유럽스런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동양인(케일론인)의 생김새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국적인 풍경이 조금이나마 친숙하게 느껴졌다.
 “수도랑은 느낌이 전혀 다르죠.”
 “하긴.”
 사실 수도도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모르지만.
 “그나저나 창을 들고 사냥을 다닐 만한 체력이구나. 이 스승은 한 것도 없이 지치는데.”
 아드리안 시에 도착하기 위해 한나절 동안 꼬박 마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자동회복 스킬 때문인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고든은 스스로에게 힐을 사용한 후에도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했다.
 이렇게 앓는 모습을 보면 마차 안에서 마법에 대한 강의로 열정을 터뜨렸던 그분이 맞나 싶다.
 정말 스승이란 역할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마법사가 좋긴 좋네요. 줄이 저렇게 긴데 프리 패스라니.”
 나는 유유히 성문을 지나는 고든과 함께 이동하면서 등 뒤로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검문소를 힐끔 바라보았다.
 “왕립 마탑 소속 정식마법사에게 주어지는 사소한 혜택 같은 거지. 너도 이번에 마탑에 등록을 하고, 서클을 한 단계만 더 올리게 된다면 받게 될 혜택이다.”
 마법사 자체가 이 세상의 특권층이다.
 그리고 나는 무사히 그 특권층에 안착한 상태이고.
 “그렇군요.”
 지금부터 또래의 모두가 나와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고 해도, 자유가 제한되는 일반 평민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유리한 위치에서 서 있다.
 고든의 제자로 들어간 것은 내가 한 선택 중 최고의 한 수라 생각한다.
 “다 왔다.”
 도시의 대로변을 따라 이동하길 10여 분.
 거대한 원통형의 높다란 탑이 우릴 반겨주었다.
 
 [케일론 왕립 마탑 아드리안 지부]
 
 오늘 이곳에서 마법사 등록을 하고, 지부장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다.
 아드리안 지부의 지부장은 6클래스의 고위마법사이자 남작 위를 가진 귀족으로 고든과 친분이 깊은 인물이다.
 바로 고든의 사숙이자, 죽은 그의 스승을 대신하는 후원인이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우리가 판매할 홍차를 유통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줄 동아줄이기도 하다.
 14장 향수와 같은 차
 
 
 “왕립 마탑의 주인은 탑주님이 아닌 국왕폐하시다. 때문에 영지전이 발생해도 신전과 함께 절대 침범해선 안 되는 금역이 마탑이지. 추후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러블이 발생한다면 마탑 지부로 향하거라. 왕립 마탑을 공격하는 것은 폐하에 대한 반역을 뜻하니 함부로 널 해하지 못할 것이다.”
 유용한 팁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카라스 마을에 머물고 있지만,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보상을 통한 능력치 상승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고든과 같은 4서클이 될 수도 있고, 퀘스트 수행을 위해 다른 지역을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팁은 최대한 알아두는 것이 좋다.
 “그만큼 국왕폐하께서 마법사들을 위한다는 뜻이지. 비록 위스워드 제국처럼 엄청난 자금지원이 따르진 않지만, 제도적 대우는 그에 못지않단다.”
 왕립마탑의 정식마법사(3~4서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위나 다름없으며 서임을 받은 기사와 같은 항렬에 위치한다.
 또한 5서클의 고위마법사가 되면 단승 남작위가 주어지며, 6서클이 되면 3대 세습이 가능한 남작 위와 영지가 주어진다.
 그리고 6서클의 고위마법사는 국왕파로서의 정계진출이 수월한데, 평민이 대귀족이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고든의 사숙은 6서클의 고위마법사이므로 언제든 정계에 진출할 자격이 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마법사가 정치에 빠지는 순간 성장은 멈춘 것이나 다름없지만.
 “어? 고든님 아니십니까?”
 영지군이 아닌 왕립 방위군 소속의 병사가 지키는 입구를 통과해 마탑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고든을 알아보고 반가움을 표했다.
 “오, 세라드 군 아닌가. 반갑네.”
 내가 보기엔 고든이나 세라드라 불린 사람이나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군’이라 칭해지는 것 보면 고든의 항렬이 더 높은 모양이다.
 “전에 위스워드 제국으로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돌아온 지 꽤 되었네. 지금은 카라스 마을에서 이놈을 제자로 거둬 열심히 마법을 가르치고 있지.”
 그러면서 고든은 나를 인사시켰다.
 “반갑습니다. 세라드님. 지훈이라고 합니다.”
 “그, 그래. 반갑네.”
 세라드는 애매한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았는데, 아마도 처음들인 제자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보통은 어린이들이 마력을 더 잘 받아들이기 때문에 마법사가 제자를 들인다면 어중간한 나이보다 어린 것이 선호했다.
 “5주만에 1서클을 넘어 2서클까지 만든 천재지. 내 자랑일세.”
 그러나 이어진 고든의 말에 그는 두 눈을 번쩍 떴고, 주변을 지나치던 다른 마법사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농담을 그리······.”
 “내가 그런 실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던가.”
 “세상에 진짭니까?”
 소탈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고든의 눈빛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진짜 능력치에 따른 시스템의 보조 때문인지 몰라도 2서클 달성이 어렵다는 생각을 못 해봤던지라, 이렇게 치켜세워줘 봤자 부끄러울 뿐이다.
 “원래부터 마력방출을 자연적으로 터득해 사용했다는군. 그 덕분에 더 수월했던 것이고.”
 “마력 친화력만으로 서클이 높아지진 않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세라드는 새삼스레 감탄사를 터뜨리며 다시 봤단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여유롭게 영업용 미소로 응대했다.
 “제자를 마탑에 가입시키고 싶은데, 도와주겠나?”
 “물론이죠. 자네 이쪽으로 오게나.”
 당번제인지 아니면 담당인지는 몰라도 그가 1층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모양이다.
 창구 직원이 있었지만, 그는 직접 서류를 건네오며 내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다.
 “그거면 되네.”
 서류작성은 오래 걸리지 않아 끝마쳤고, 세라드가 창구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선물일세.”
 그리고 나는 직원으로부터 검은색의 천 뭉치를 건네받았다.
 뭔가 싶어 펼치니, 고든과 세라드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로브였다.
 “마탑 로브는 원래 사비로 구입해야 하는 개인 물품이지만, 고든님의 제자가 왔는데, 인사만 나눌 순 없지.”
 정확한 값은 모르겠지만. 꽤나 고급스런 물건을 선뜻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힐끔 고든을 바라보니, 받아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어서 내가 바로 로브를 걸치자 세라드는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편하고 따뜻해서 좋긴 한데, 로브 끝이 치렁치렁해서 전투 중엔 절대로 못 입을 것 같다.
 “이런, 제가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지부장님 만나고 가실 거죠?”
 “그래, 긴히 상의드릴 게 있거든.”
 “얼른 올라가 보세요. 내려오신 다음 또 이야기 나누죠.”
 
 우린 세라드를 뒤로 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지부장과의 만남을 위해 상층부로 향했다.
 뭔가 마법적인 도구가 우릴 위로 보내주나 싶었는데, 순수하게 계단을 타고 걸어서 이동했다.
 마법으로 엘리베이터를 만들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예산 문제일까?
 덕분에 한참 동안 계단을 올랐고, 고든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꼭대기인 지부장실에 도착할 때쯤엔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걸 괜히 걸었다며 한참 동안 호흡을 정리했다.
 -빨리 들어와!
 지부장실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었을까?
 안에서 노년 남성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왕국에 얼마 되지 않는 6서클의 고위마법사답게 바로 외부의 이상을 느낀 모양이다.
 “네!”
 그에 항상 여유롭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고수하는 고든이 군인처럼 빠릿빠릿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긴장해야 했다.
 지부장실에 들어가니, 나를 반겨준 것은 백발이 성성해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보이는 나이든 남성이었다.
 딱 봐도 얼굴에 한 성깔 한다고 쓰여 있는 그의 이름은 ‘랜디 크리스토퍼’ 남작.
 내가 뮤대륙에 오고 처음으로 만난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비록 5작위 중 가장 밑이지만, 평민은 감히 바라볼 수 없는 힘을 지녔으며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 지배를 하는 측의 인물이다.
 더구나 그는 6서클의 고위 마법사.
 미드랜드의 어느 국가를 가든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능력자였다.
 2서클만 돼도 전투에 큰 도움이 되는데, 6서클이면 얼마나 강할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숙님.”
 “처음으로 제자를 들였다지?”
 고든의 인사에도 그는 본론부터 꺼냈다.
 성질이 급한 건지, 불필요한 인사치레를 싫어하는 건진 몰라도, 고든은 익숙하게 웃어 보이며 내 등을 두드렸다.
 “지훈이라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리스토퍼 남작님.”
 그리고 남작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을 배운지 5주밖에 안 됐다고?”
 “그렇습니다.”
 “분명 재능이 있어 보이는군. 지적 능력도 나빠 보이지 않고.”
 담담한 그의 칭찬에 감사를 전하려던 찰나.
 호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남작의 모습에 나와 고든은 크게 움찔거려야 했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오러를 터득한 거지?”
 아무래도 고위마법사쯤 되면 자세히 안 살펴도 느껴지는 모양이다.
 고든은 바로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물론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닌지라 미리 고든에게 밝혔지만, 신기하단 반응을 보일 뿐 남작처럼 극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마법보다 먼저 배운 것입니다. 최근에서야 오러 포인트가 개화했······.”
 “서클과 오러의 공존은! 많은 위험성을 띈다. 마검사에 대한 로망으로 많은 이가 그런 뻘짓을 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역사와 함께 사라졌지.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나!?”
 말투가 원래 이런 걸까?
 강약 조절도 정도가 있지, 호통 뒤에 진지하게 말하고 또 호통 뒤에 진지하게 말하니, 화가 났다기보다 ‘괴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서클과 오러의 불균형으로 인한! 밸런스 붕괴다.”
 그건 고든도 몰랐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클이나 오러포인트나 신체를 강화하는 새로운 기관인데! 그것이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가 있나.”
 언제까지 저런 말투를 사용하는 거지?
 더없이 심각한 표정의 고든과 달리, 남작의 말에도 나는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이 녀석의 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서클은! 최대가 3개다. 4서클 이상을 만들기 위해선 오러 또한 ‘유저’가 아닌! ‘익스퍼트’ 수준에 올라야 하지.”
 “허······.”
 “5서클이 되기 위해선 중급 익스퍼트 수준을! 6서클이 되기 위해선 상급 익스퍼트 수준을!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선 최상급 익스퍼트까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뭐하러 스스로 제한을 두냔 말이다. 하나에만 매진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거늘!”
 마법사와 기사의 경지 수준을 간단히 비교 설명하자면 이렇다.
 수습마법사(1, 2서클)=수습기사(오러유저)
 정규마법사(3, 4서클)=정규기사(익스퍼트 초급, 중급)
 고위마법사(5, 6서클)=고위기사(익스퍼트 상급, 최상급)
 대마법사(7서클)=마스터(오러블레이드, 오러실드)
 대마법사(8서클)=상급마스터(플라잉 소드)
 그랜드 위저드(9서클)=그랜드 마스터(스피릿 소드)
 한자와 영어가 혼재되어 있지만, 뮤대륙의 명칭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기하면 이 정도가 한계다.
 서클의 숫자가 바로 경지를 뜻하는 만큼 등급을 나누기 편한 마법사와 달리, 기사의 경지는 유저와 익스퍼트,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4가지로밖에 분류가 안 된다.
 그 4가지를 마법사의 등급과 맞춰서 분류한 것이 바로 위에 표기된 방식인 것이다.
 즉, 남작의 말은 서클을 높이기 위해선 적어도 한 단계 밑의 오러 등급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
 괜히 욕심부리다가 재능만 낭비하게 생겼다고 훈계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황한 고든의 물음에 남작은 혀를 차며 답했다.
 “몸의 밸런스가 붕괴되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유리 몸이 될 거야.”
 “맙소사······.”
 아무래도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고든이 받은 충격도 큰 모양이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안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겐 퀘스트가 있지 않은가?
 “걱정마십시오. 스승님. 반드시 양립해 보이겠습니다.”
 “너······.”
 나는 일반적인 뮤대륙 인들과 확연히 다른 입장에 놓여 있다.
 보상으로 계속 능력치가 상승할 테니, 퀘스트를 수행해나가다 보면 충분히 해결될 문제라 생각한다.
 애초에 오러도 마법을 익힌 상태에서 얻은 보상이 아닌가.
 신이란 존재가 나를 엿 먹이고자 했으면 이보다 더한 기회도 많았다.
 “오만한 녀석이군!”
 남작은 이런 내 태도에 호통을 치다가 곧 표정을 바꿔 재밌다는 듯 입꼬릴 말아 올렸다.
 남작은 참 변화무쌍한 얼굴의 인물이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아. 마검사는 흔치 않은 샘플이니 관찰할 맛이 있겠어.”
 정확히는 마창사인데.
 “사숙님!”
 “시끄럽다.”
 짜증 섞인 고든의 반응에 남작은 호통 없이 평범하게 말을 이었다.
 “설마 내가 관찰만 하겠느냐? 그래도 사손인데 최대한 도움을 주려 하겠지.”
 남작은 내게 다가오라며 손짓을 했다.
 힘: 14
 체력: 12
 민첩: 13
 지능: 35
 마력: 20
 운: 6
 그는 내 몸 상태를 꼼꼼히 체크 했는데, 자체적으로 능력치까지 확인하곤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을 배우면서도 신체 단련을 잊지 않은 모양이군. 아까 말 한대로 당장 3서클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어.”
 그리고 남작은 내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왔다.
 “무예 쪽 스승은?”
 “지금은 안 계십니다.”
 “좋아, 그럼 내 가문의 기사를 스승으로 붙여주마. 그를 통해 오러를 단련토록 해라.”
 그럼 나야 좋지.
 역시 사람은 인맥이 있어야 하나 보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요. 감사합니다. 사숙님.”
 “네 역할이 크다. 가르침에 있어서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할 거야.”
 앞선 호통들과 달리, 알고 보면 꽤나 인자한 인물인 걸까?
 남작의 당부에 고든은 순순히 알겠고 답했다.
 “그럼 꺼내봐. 사업 아이템 가져온다며.”
 얼떨결에 내 체질에 대해 신경이 쏠렸는데, 원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고든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아공간에서 잘 포장된 갈색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이게 무어냐?”
 “제자가 개발한 홍차입니다. 이것을 유통하는데 힘을 보태주십시오.”
 남작은 진지하게 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굳이 내게 유통을 부탁하는 것 보면 평범한 차가 아닐 터. 그렇다면 원하는 판매처는 당연히 귀족들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말을 길게 안 해도 알아채 주니 좋다.
 “그럼 사치품의 일종인데.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차를 귀족들에게 팔긴 어렵지. 결국 내가 직접 나서서 홍보까지 해야 한다는 뜻인가?”
 아무리 돈이 썩어나는 귀족이어도 불필요한 낭비는 하지 않는다.
 결론은 누군가가 나서서 귀족들의 흥미를 끌어줘야 한다.
 남작의 날카로운 눈빛에 고든은 긴장하며 티세트를 꺼냈다.
 “일단 드셔보시고 평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태도의 고든.
 남작은 유리병을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멘트가 잡상인 같아. 만약 우리가 사숙질 지간이 아니었다면 바로 쫓아냈을 거다.”
 가감 없는 말에 고든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어서 그가 직접 차를 우렸는데, 나는 옆에서 우려진 차를 이용해 밀크티와 아이스티를 만들었고, 일전에 고든에게 냈던 것처럼 홍차 3종 세트를 남작에게 건넸다.
 “흠.”
 방안을 가득 채우는 홍차의 향기로움.
 시각을 자극하는 붉은 빛 음료가 남작을 반긴다.
 범상치 않은 향 덕분인지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의 표정도 변했다.
 랜디 크리스토퍼 남작은 차에 꽤나 까다로운 인물이라 들었다.
 그런데 홍차의 향만으로 일변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성공을 예감케 했다.
 -후룹.
 오리지널 홍차를 입에 가져다 댄 남작은 두 눈을 부릅뜬다.
 “무슨······.”
 이어서 그는 코를 킁킁대고, 홍차를 입에 머금은 채 쩝쩝거리기도 하며 홍차의 향을 느꼈다.
 -탁.
 어느새 찻잔을 가득 채운 홍차가 바닥을 드러내고 찻잔을 내려놓은 남작은 아이스티에 이어 밀크티까지 맛을 봤다.
 “······.”
 모든 차를 마시고.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진짜, 네가 개발했다고?”
 “그렇습니다.”
 실은 지구에 사는 누군가지만, 나는 뻔뻔하게 답했다.
 “상상 이상으로 범상치 않은 녀석이구나.”
 그리고 남작은 지금까지 흥미를 보이지 않던 갈색 병의 뚜껑을 열며 마약하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풀잎에서 어찌 이런 향이 난단 말이냐.”
 답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감탄에 따른 독백이었다.
 그는 예쁘게 말린 홍차잎을 적셔 펼쳤고, 그것이 찻잎이란 것을 알아채자 크게 놀랐다.
 “그렇군, 홍차는 찻잎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야. 찻잎을 다른 무언가에 절인 후 말린 건가?”
 마치 새로운 마법 연구에 빠진 듯 홍차를 연구하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찻잎을 발효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진 않았는지, 결국 답을 요구했고, 고든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고든이 그를 믿는다면 알려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건 평민의 힘으로 간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찻잎을 발효한 겁니다.”
 “치즈를 만들 때의 그 발효?”
 “조금 다릅니다. 그건 외부 작용에 의한 후발효고, 홍차는 자체적 성분을 산화시켜 발효하는 것입니다.”
 “음······.”
 이 세상의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마법사인 이상, 산화 작용이 뭔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내부 성분을 산화시키는 것으로 찻잎의 향이 크게 변한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추가 50점.”
 “네?”
 뜬금없이 점수를 매기는 영문모를 행동에 나는 의아함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서의 네 평가 말이다. 100점 만점에 50점으로 시작해서 30점까지 떨어졌었는데, 80점으로 단숨에 내 제자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뭔 개소리야?
 황당했지만, 겉으로 표정을 숨기고는 후한 평가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나의 사숙조이긴 하나, 친분이 깊은 것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예전에 고든이 했던 당부도 있고 일단 귀족은 무조건 조심할 필요가 있으니.
 “어떻습니까. 사숙님?”
 평가를 요구하는 고든의 물음에 크리스토퍼 남작은 진지하게 답했다.
 “차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 같은 사람에겐 황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예상하긴 했지만, 후한 평가에 가슴이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
 “이 홍차 잎을 분쇄하여 판매하면 안 되겠나?”
 “보안 유지를 위해서 말입니까?”
 “그래, 말귀를 잘 알아듣는군. 제조법이 복잡하지 않다면, 누군가가 금세 흉내를 내겠지.”
 뮤대륙엔 ‘지적 재산권’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뭐, 대한민국도 얼마 전까지 해적판 책이 버젓이 유통되고, 중국은 최근까지 밥 말아 먹고 있는 개념인데, 뮤대륙은 오죽하겠는가.
 크리스토퍼 남작이란 훌륭한 빽이 뒤에 있긴 하지만, 더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나 타국에서 홍차를 만들어 판매한다면 대응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잎 형태가 향을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자연스러운 맛을 내지만, 분쇄차도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까요.”
 찻잎을 분쇄하면 향이 더 강해지고 빨리 우려낼 수 있다.
 때문에 지구에서도 밀크티나 과일을 첨가한 아이스티를 만들 때 대부분 분쇄된 잎을 사용한다.
 오리지널 티로 즐기는데도 크게 문제는 없고.
 “그럼 분쇄차로 시음을 해볼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남작은 홍차 잎을 즉석에서 분쇄했고, 고든은 그것을 받아 홍차를 우려냈다.
 “이것도 좋군.”
 “전 오히려 이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향이 훨씬 짙군요.”
 난 그래도 잎 형태가 더 나았지만, 두 사람 모두 분쇄된 찻잎에도 만족스러워했다.
 랜디 크리스토퍼 남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발 벗고 나서주지. 이거라면 누구에게 내밀어도 부끄러움이 없겠어.”
 “감사합니다!”
 “대신, 사업에 나도 좀 껴주겠나?”
 “······.”
 홍차가 성공을 거둔다면 유통만 해도 마진이 상당할 텐데, 아예 지분참여를 원하는 남작이었다.
 솔직히 내키진 않지만,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고 예상했던 바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남작은 더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추가 20점.”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그의 자체 평가 100점을 달성했다.
 분명 제자가 80점이라 하지 않았나?
 “또 뵙겠습니다.”
 “그래, 언제든지 찾아 오거라.”
 이후 수익 분배에 대해 지분을 나눈 결과 내가 5, 두 사람이 2.5씩 나눠 갖기로 했다.
 덕분에 마탑을 나설 땐 지부장인 그가 직접 나와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나는 마탑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고든과 함께 카라스 마을로 돌아갔다.
 이렇게 웃으며 사이좋게 보낼 거면 처음에 왜 그렇게 호통치고 무게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 크리스토퍼 남작은 괴짜이면서 차를 좋아하고, 돈 냄새를 잘 맡는 노인으로 기억되었다.
 그래도 분명 귀족이라는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은 큰 성과였다.
 
 * * *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마법을 이용한 백업과 근접 전투의 적절한 균형. 힘과 마력이 1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기감을 습득했습니다.]
 
 “이야, 일주일에 하루 이틀밖에 안 되지만, 지훈 님과 함께하는 사냥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트롤을 이렇게 쉽게 처리하다뇨.”
 열심히 손을 비비며 아부를 떠는 바트 일행.
 나는 안개 속에서 싸웠던 강적인 트롤을 도축하며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지금보다 페이스 올리긴 힘들 겁니다. 이것도 스승님께서 겨우 허가해주신 거니까요.”
 뮤대륙에 머물 수 있는 8일 중 마지막.
 내겐 그날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날이다.
 “에이, 어찌 이 이상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충분합니다.”
 그러면서 세 사람은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 자체가 준 귀족이다 보니 내색은 못 해도 상당히 불편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마을로 돌아가죠.”
 마법으로 트롤의 피를 한데 모아 나무통에 담고, 가죽과 함께 고든에게 빌려온 아공간 팔찌에 때려 박았다.
 이번 퀘스트는 트롤을 10마리 사냥하는 것.
 창과 자체 스킬로만 싸운다면 용병들이 있다 해도 힘들었겠지만, 마법과 오러가 더해지니 오크부락 퀘스트보다도 쉽고 빠르게 완수할 수 있었다.
 “퍼슨님.”
 내 부름에 뒤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팔짱을 풀며 나란히 따라왔다.
 “역시 전투 수행능력이 상당하십니다. 괜히 주군께서 아끼시는 분이 아니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기사는 바로 크리스토퍼 남작이 보낸 무예 스승이자, 호위 기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퍼슨이었다.
 용병의 뒤를 기사가 호위라며 따라다니다니 상황이 우습게 됐다.
 바트 일행이 특히 곤욕스럽겠지만, 나는 이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뒤를 받쳐 주는 기사가 있다는 것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으니까.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지훈 님께선 마법보다 무예 쪽으로의 재능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경비대에서 배운 창법 4개 동작을 영리하게 사용하시더군요.”
 크리스토퍼 남작이 들으면 경을 칠 평이다.
 그는 은근히 내가 무예의 길을 선택하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뮤대륙에서 쌓아온 인맥을 모두 잃는다.
 절대 그럴 순 없지.
 나는 지금 방식에 꽤 만족하고 있으니 말이다.
 8일을 쪼개 낭비하는 시간 없이 아주 알차게 보내고 있다.
 마법을 배우고, 오러를 배우고, 퀘스트를 수행하고, 홍차와 시가까지 제조하고 있으니.
 이중 대부분의 시간이 마법 수련을 위해 쓰이고 있지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굉장히 바빴다.
 크리스토퍼 남작이 홍차 제조를 위한 노예를 보내준다고 했으니, 그들이 도착하면 시간적으로 조금은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같은 인간을 노예로 부린다는 것이 불편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남작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을에 도착해 부산물을 처리하고 정한대로 수입을 분배한 고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늘 수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졸려서 좀 자야겠어요.”
 “그러시군요. 그럼 깨시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죠.”
 그리고 방에 들어온 나는 고든에게 받은 2클래스 마법책을 펼쳐 들었다.
 요즘은 정상적으로 퀘스트를 완료하면 침대에 누워야 잠이 든다.
 물론 안 자고 버티면 또 쫓겨나겠지만, 날 위한 배려인진 몰라도 시스템은 안전 구역으로 돌아온 후 간단히 씻고 누울 시간까진 주고 있다.
 나는 그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미뤄 놨던 2클래스의 마지막 마법을 숙지하기로 했다.
 한 클래스의 마법을 마스터하면 퀘스트를 완료한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아 잠에서 깨어나는데,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하루를 보내는 건 사양이다.
 그래서 퀘스트와 같이 한 번에 완료하기 위해 일부러 제일 쉬운 부분만 남긴 채 2클래스 마스터를 미뤄왔다.
 이어서 짧은 마지막 수식을 암기하자,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2클래스 마법을 마스터했습니다.]
 [마력이 2 향상됩니다.]
 [지능이 2 향상됩니다.]
 
 * * *
 
 뮤대륙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왔음에도 지구로 돌아온 순간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모두 풀려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중급 보상]
 
 퀘스트 완료에 따른 보상카드.
 손에 쥐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었다.
 이사 준비를 위해 너저분해진 원룸의 중심에 서서 보상카드를 들어 올린 나는 기도하듯 말했다.
 “중급 보상 개봉.”
 -파앗!
 언제나 봐도 화려한 보상 이펙트.
 눈 부신 빛이 시야를 자극하지만 그 외엔 이번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 보상은 현물이 아니었다.
 
 [액티브 스킬 마력탐색을 습득했습니다.]
 
 스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당장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니.
 비록 이번 보상으로 얻은 ‘기감’과 ‘마력탐색’ 스킬은 전투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보조 스킬들도 유용하게 쓰고 있는 만큼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패시브 스킬인 기감은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당장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마력탐색은 액티브 스킬인 만큼, 바로 확인가능하다.
 ‘마력탐색.’
 나는 바로 마력탐색 스킬을 사용했다.
 그에 소량의 마력이 소모되고 음파 같은 작은 마력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탐색 결과 없음]
 
 이런 느낌이구나.
 마력 장이 훑고 지나간 구역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나를 제외한 마력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이어서 라이트 마법을 조금 멀리 띄워 놓고 탐색을 사용하니.
 
 [좌 35도 / 거리 4.1m]
 [이외 탐색 결과 없음]
 
 예상대로 라이트 마법의 위치를 탐색해 냈다.
 잘만 하면 유용한 것 같긴 한데, 중급 보상카드에서 나온 스킬치곤 조금 애매한 느낌이다.
 “아.”
 그런데 그때.
 불현듯 마력탐색의 유용한 활용법이 떠올랐다.
 항상 뮤대륙을 오가며 궁금해했던 것.
 그건 바로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또 있을까?’란 의문이다.
 그런데 이 마력탐색을 사용하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력탐색의 사정거리는 대략 300미터 정도.
 이걸 이용해 인구 밀집도가 높은 구역 여기저기를 다니며 마력탐색을 사용하면?
 “확실히······”
 시험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15장 자칭 초능력자(1)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 나를 제외하고 마력을 지닌 이를 만나게 된다면 현 상황에 대한 확답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응?”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마법을 캔슬 하려던 찰나.
 나는 마력탐색 실험을 위해 띄어 놓았던 라이트 마법을 보며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어째 평소보다 마법의 존재감이 강한 것 같다?
 내가 1클래스 마법을 한두 번 사용해 보는 것도 아니고 극적인 수준의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 마력의 흐름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혹시 기감이란 스킬의 효과인가?”
 아니 그것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직감 스킬은 꽤나 오랫동안 효과를 느끼지 못했는데, 근래 들어서야 직감이 뒤통수가 따끔한 수준으로 위기를 알려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효과가 애매한 직감과 달리, 이름이 비슷한 기감 스킬은 변화가 확실했다.
 단순히 마력이 예민하게 느껴지는 건지 또 다른 효과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잘하면 마력 컨트롤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후욱.
 가볍게 손을 내젓는 행동에 라이트 마법이 사라지고, 나는 냉장고를 열어 미리 사놓은 우유와 시리얼바를 챙겨왔다.
 정말 간소한 아침식사.
 하지만 혼자 사는 남자들이 대체로 이렇지 않을까 싶다.
 
 -약 2주 전부터 용의자를 추정하기 힘든 살인 사건과 행방불명 사건이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요.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인의 치밀함을 봐선 공통된 세력의 테러 행각이 아니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적막감을 깨기 위해 켠 TV.
 그런데 첫 뉴스부터 자극적인 내용으로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수사 전문가들은 이것이 대대적인 테러를 위한 예행연습일지도 모른다며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에선 외부순찰을 대폭 보강하는 한편 거동 수상자에 대한 시민 여러분의 자발적 신고를 바라는 홍보활동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내 입장에선 요즘 일어나는 실종과 살인 사건과 일전에 중국에서 가축을 공격했던 괴물 소동도 안개에 의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어느 곳에서도 안개의 ‘안’자도 거론하지 않았다.
 맨 처음 까치산 공원에서 고블린과 조우했을 때의 안개는 일반인들도 인지했는데, 마치 점점 기능을 개선하는 것처럼 은밀함을 더해가고 있는 중이다.
 -다음 소식입니다. 브라질 동부 마세이오에서 오로라가 관측되어 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로라는 태양풍의 플라즈마가 지구로 진입을 하면서 대기의 공기와 반응해 빛을 내는 현상인데요. 주로 위도 60~80도의 극지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은 남위 10도로 오로라를 볼 수 없는 환경에 속하여······.
 이번엔 이상 현상까지?
 세상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데, 위기감을 표하는 사람은 또 없는 걸까?
 이러다가 두 세계가 연결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후 뉴스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고, 나는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오늘은 꽤 바쁘다.
 새집에 가구와 가전제품을 설치하러 기사분들이 방문할 테고, 자금에 여유가 생긴 만큼 주식을 일부 정리하여 쇼핑과 함께 모처럼 차량 구입도 알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 추가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한창 외출을 할 저녁 시간에 맞춰 인구 밀집 구역을 돌아다니며 마력탐색을 해봐야겠다.
 
 
 * * *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네, 사용에 불편함이 있으시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어제 부모님과 함께 골랐던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모두 도착했다.
 이런 대형 상품들을 주문 다음 날 바로 설치를 해준다니, 역시 우리나라의 배송서비스가 최고인 거 같다.
 설치기사들이 모두 떠나고, 나는 마당에 쌓여 있는 추가 주문한 비상식품들을 벙커에 때려 넣었다.
 이후 말끔하게 단장하기 위해 샤워를 했다.
 깔끔하게 면도도 하고 모처럼 머리에 왁스도 발랐다.
 용무를 마치고 욕실을 나서니, 스마트폰에 안 읽은 메시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돈을 벌써 갚는다고?]
 [무리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친구 사이에 무슨 이자야?]
 [야야야야!]
 [이게 뭐야? 왜 3천만 원을 입금해?]
 [야 ㅈㅈㅎ 뭐해?]
 [지훈아, 이체 잘못된 거 같은데? 나한테 3천만 원 입금됐어.]
 메시지를 읽으며 옷을 챙겨 입던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돈 잘 썼다. 너희들이 준 자금 덕분에 많이 벌었어. 천만 원은 이자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마.]
 원래 10일에 돈을 갚을 생각이었지만, T화학의 주가는 이미 목적 치에 80% 가까이 오른 상태고, 거기서 친구들이 빌려준 2000만 원을 묵혀봤자, 전체에 비하면 큰 이익이 아니라 생각했다.
 정우와 인식이가 잘나가고 있긴 해도 사회 초년생인 만큼 생활이 여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둘 다 집안 사정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 빨리 갚는 편이 친구도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 생각했다.
 [야, 그래도 이자가 천만 원은 너무 많지.]
 [이자는 됐어, 천만 원 돌려줄 테니까, 계좌 불러.]
 나를 위하는 건지, 단순히 정직한 건지, 욕심도 낼법한데 둘은 선뜻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신경 쓰지 마, 이자로 천만 원만 주는 게 미안할 정도로 벌었으니까.]
 [그래?]
 [응, 그리고 나 직장 안 구하려고. 그냥 전업 투자자로 살란다.]
 [주식?]
 [ㅇㅇ]
 [너라면 뭘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너무 욕심부리진 마라, 주식 위험하잖아?]
 [ㅇㅋ 걱정마.]
 이후로도 두 녀석과 이자를 돌려주네 마네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냥 내 성의를 받기로 했다.
 [고맙다. 안 그래도 살짝 쪼들렸거든.]
 [실은 나도.]
 친구들의 반응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역시 빨리 돌려주기로 결정한 게 잘한 일 같다.
 [돈을 빌린 내가 제일 고맙지.]
 [나중에 좋은 정보 있으면 알려줘라.]
 [지금 알려 줄까?]
 [ㅋㅋ 지금 말고]
 훈훈하게 메시지로 대화를 마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용산 집을 나섰다.
 이제 배달 올 것도 없으니, 모처럼 개인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다.
 나는 평소와 같은 트레이닝복 차림이 아니라, 모처럼 면바지에 셔츠를 챙겨 입었다.
 지금부터 백화점이나 자동차 매장을 들릴 예정인데, 아무리 그래도 트레이닝복 차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가 입고 있는 옷 모두가 SPA브랜드긴 하지만, 꽤 단정해졌다.
 몇몇 졸부들은 일부러 시선을 끌기 위해 너저분한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명품샵을 활보하며 자기가 왕인 양 행동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역시 제정신이 박혀 있으면 장소에 따라 복장을 맞추는 게 기본 매너라 생각한다.
 정 옷이 없으면 모를까.
 나는 압구정에 유명한 명품 백화점에 들려, 개인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브랜드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차라리 트레이닝복 차림이 나았을까?
 이 복장으로 백화점 명품관에 들어가니, 여직원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뭐랄까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고 크게 불친절하지도 않은데, 응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달까?
 아무래도 이런 곳이 처음이다 보니 도움이 필요한데 멀찍이 떨어져 보고만 있는 게, 마치 방관자 같았다.
 팔 생각이 없나?
 “여기요.”
 “네.”
 직원은 내가 부르고 나서야 마지못해 다가왔다.
 “어머니 핸드백 하나 사드리려고 하는데요. 중년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상품 좀 추천해 주시겠어요?”
 “이 상품과 이 상품, 이 상품이 인기 있습니다.”
 설명이 그게 다야?
 “······.”
 나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그저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무슨 문제 있냐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나는 이것저것 들어보며 어머니께 어울릴만한 상품을 스스로 고민했다.
 그러나 내 고민이 길어지자, 여직원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져갔다.
 이럴 거였으면 그냥 부르지 말걸 그랬네.
 별로 도움도 안 되는데.
 쓸데없이 직원과 실랑이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갑질을 하고 싶지도 않다.
 대체 무슨 생각에 이렇게 행동을 하는 건지.
 가끔 명품매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자신이 명품이라도 된 것마냥 착각한다곤 하던데, 그녀도 그런 부류일까?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한번 거슬리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세 개 전부 사죠.”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나긋나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전부 합쳐서 1250만 원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
 만약 그녀가 나를 도발해서 과소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괜히 안 해도 될 소비를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지갑도 보고 싶은데요.”
 “네,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친절해진 직원.
 덕분에 비싼 가방을 고를 때와 달리 지갑은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고를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만회하겠다는 듯 비굴해 보일정도로 과한 친절을 베풀어 와서 맥이 풀릴 지경이다.
 사람의 태도가 이리 바뀌다니 역시 돈이 좋긴 좋은 것 같다.
 해당 브랜드의 남성용 지갑은 나와 아버지의 취향에 맞지 않아서 어머니 것만 구입하고, 총 1340만 원을 썼다.
 사치품을 위해 처음으로 써보는 거금.
 하지만 지금 갖고 있는 재산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다.
 돈을 벌었으니, 한 번쯤은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록 대부분이 구매한 물건 모두가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었지만 말이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이후 쇼핑백을 주렁주렁 달고 매장에 들어서니, 어딜 가든 직원들이 반겨 주었다.
 “이거 주세요.”
 “이걸로 할게요.”
 물건을 구매할 때 가격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지갑과 함께 아버지에게 어울릴만한 시계를 알아보러 다녔고, R렉스 요트마스터 금장에 꽂혀 그것을 구매했다.
 백화점에서 무려 5천만 원이란 거금을 사용했지만, 그중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은 70만 원짜리 지갑 하나가 전부였다.
 뭐, 지금부터 값비싼 차를 보러 갈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마력 탐색.’
 나는 잊지 않고 꼬박꼬박 마력탐색을 사용했다.
 [탐색 결과 없음]
 하지만 아직까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자동회복 스킬 덕분에 계속 이동하면서 마력 탐색을 해도 크게 마력이 줄지 않았다.
 그리고 소모속도를 회복속도가 쫓아오지 못해도 잠깐만 쉬면 되니 앞으로는 지속적인 마력탐색을 버릇 들려놔야겠다.
 “아이고 사장님 어서오십시오.”
 이어서 오프로드 차량으로 유명한 L드로버에 방문했다.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스포츠카면 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다면 아무래도 오프로드 차량이 좋다고 생각했다.
 L드로버는 튼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오프로드에 특화된 차량.
 그중에서도 레인지로버다.
 처음엔 C딜락 에스컬레이드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레인지로버를 선택했다.
 나는 오래 고민할 것 없이 바로 레인지로버 2020년 최상위 모델을 구입 했다.
 덕분에 프로모션을 포함하고도 2억 6천이 넘는 거금을 쓰고 말았지만, 견고하고 육중한 몸체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졸부로 보겠지.”
 저가 브랜도 옷에 명품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비싼 외제차를 사는 모습이 딱 로또에 당첨된 철없는 청년으로 보일법했다.
 “뭐, 졸부가 맞긴 하지.”
 나는 딜러들의 환대를 받으며 매장을 나섰고, 순간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지훈이?”
 톤 높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
 나와 얼굴을 트고 지내는 젊은 여성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이초희?”
 바로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어울리던 친구 중 하나인 이초희.
 일전에 술자리에서 나를 향해 불평을 토해냈던 그 여자애다.
 그런데 이초희가 어느 남성의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그 남자도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박우찬.”
 이걸 끼리끼리 논다고 해야 할까?
 이초희와 함께 나를 아니꼽게 여겼던 친구 녀석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 사귀었냐?”
 내 물음에 둘의 시선이 빠르게 손에 쥔 쇼핑백을 훑더니 뒤에 위치한 자동차매장으로 향했다.
 “너 로또됐냐?”
 물음에 물음으로 답을 해오는 우찬이.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로또는 무슨.”
 뭐, 엄연히 따지면 로또나 다름없지만.
 “둘이 그런 관곈지 몰랐네. 나중에 보자. 나 갈게.”
 
 
 to be continued

댓글(6)

borislee    
선발대 시작하겠습니다!
2019.07.31 21:44
섭썹    
강력추천 세일하기전에 다봤던건데 재밌어요
2019.08.01 17:47
borislee    
4권까지 읽었는데 킬링타임 용으로 괜찮네요. 잘 보고 갑니다!. 전 이 작품과 전혀 무관한 순수 독자이며, 요즘 번들로 일괄 할인 후 대여하는 작품들 구입하고 난 후에 실망하고 후회한 경험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2019.08.02 12:31
norangugu    
10권까지 읽었는데 괜찮습니다
2019.08.07 00:20
캐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2권까지 순삭하고 댓글 답니다. 무엇보다 요즘 주어 동사 매칭부터 시작해서 어처구니 없는 수식이 난무하는 쓰레기 문장들이 판을 치는데, 이건 신경에 거슬리는 이상한 번역투 같은 것도 없고 전반적으로 무난해서 끝까지 읽기에 무리가 없을듯.
2019.08.14 15:40
캐이    
음..5권부터 징조를 보이더니 6권부터는 dog판이 됩니다
2019.08.1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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