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에 나타난 게이트. 그와 함께 나타난 헌터.
그로 인해 바뀐 수많은 사람의 삶.
하지만 나는 그 '수많은 사람'에 포함되지 않았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영세 할인 마트 점원에게 게이트, 던전, 헌터, 몬스터같은 이야기는 먼 세상의 이야기요, TV 와 인터넷으로만 보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쭉 그런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오늘까지는.
“꺄아아악!!!”
우리 마트 단골 아주머니의 비명과 함께 사건은 일어났다.
비명을 들은 사람들의 눈이 그녀가 손을 뻗은 방향을 다시 향하자, 그 비명은 몇 배로 증폭되었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꺄아아악!”
나는 그들처럼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그러지 못할 정도로 놀랐을 뿐 그 심정은 다를 바 없었다.
누구라도 그 광경을 본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사람 머리 높이의 공간이 뒤틀리며, 사람의 손을 닮은, 훨씬 거대한 녹색의 무언가가 그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보였다면 말이다.
“게, 게이트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소리치자, 마트는 세일 행사 때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던져놓고 도망치는 주부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근처 고등학교 여학생. 그리고 엄마를 애타게 찾으며 울고 있는 어린아이까지.
[마, 마트 2층에서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고객 여러분은 서둘러 비상구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광경을 마치 영화관에서 재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주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여러분! 모두 비상구를 통해서 1층으로 도망치세요! 얼른!”
닫혀있던 비상구의 문을 열쇠로 열고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조금 전까지 공황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탈출구가 눈앞에 보이자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비상구로 빠져나간 걸 확인한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아니, 따르려고 했다. 빌어먹을 비상구가 기이한 뒤틀림과 함께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씨”
속에서 올라오는 욕지기를 내뱉으려던 순간, 눈앞의 게이트에서 아까와 같은 모양의 손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뉴스에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첫 번째 게이트가 발생하면 몇 분 이내로 그 공간이 던전화 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최하급으로 취급되는 몬스터라도 나 같은 보통 사람은 마주치는 순간 목숨이 위험했다. 만약 그 이상이라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에 나는 마트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달음박질쳤다.
달리기 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을 무시한 채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간다. 쿠당탕. 쇠와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텅 빈 마트를 가득 채운다.
여러 음식이 놓여 있는 식육품 코너와 가공식품 코너 사이로 빠져나가고, 가전제품 코너와 옷 코너를 지나 가장 가까운 출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좌절한다.
“아, 아아아아!!!”
세 번째. 아니, 어쩌면 인생 마지막으로 보는 게이트가 마트의 유일한 출입구에 있다니.
“안 돼···안 돼, 안 돼, 안 돼! 다른 문은?”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탈출구를 구상한다.
지하 주차장? 이만큼 던전화가 일어나면 전기가 끊겨서 갈 수 없다. 옥상? 비상구도 막혔고, 설사 간다고 해도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없다. 비상탈출구? 물건을 쌓아놔서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
죽음.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것이 눈앞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앞당겨 주려는 듯 게이트 너머로 털이 부숭부숭한 녹색의 근육질 팔 한 쌍이 튀어나왔다.
억지로라도 비집고 나오기 위해 힘을 주는 모습에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절망하여 울부짖는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데!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난 그저 평범한 마트 점원일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뭣?!”
비명 가운데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놀라 주위를 살피지만,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에 미쳐 환청까지 들리는 것인가? 그런 고민조차 잠시, 게이트 안에서 그 팔의 주인이 튀어나오자 무한한 공포가 나를 덮쳐온다.
마트 천장에 닿을 듯 높은 키와 펑퍼짐하고 톡 튀어나온 배. 무릎까지 닿을 것 같은 긴 팔과 돼지의 그것과 닮은 얼굴.
뉴스에서 딱 한 번 본 게 다였지만, 특징적인 모습 때문에 이름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크···!”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초보용 몬스터로 비웃음 받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몇 마리만 모여도 헌터들이 그 배. 아니, 배의 배는 몰려가야 겨우 퇴치할 수 있는 상급 몬스터.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벌레 죽이듯 간단하게 목숨을 거둬갈 수 있는 괴물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걸까. 주위를 둘러보던 오크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쿠, 콰악? 퀘크, 카락.”
“무, 무슨···?”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 희망적인 착각이 산산조각이 나는 건 뒤에서 두 번째 오크가 튀어나왔을 때였다.
눈앞의 오크만큼. 아니, 더욱 큰 키와 끔찍한 외견을 가진 오크를 확인한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돌려 마트 안쪽으로 달려갔다.
“콱, 퀙큭칵칵크락!”
“퀘쿠콕 크락크락!”
“칵? 쿠키칵 카크카락!”
도망치는 먹이를 먼저 잡는 놈이 머리를 먼저 먹는다. 이런 이야기라도 하는 걸까.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두 오크는 내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쫓아오기 시작했다.
놈들이 따라올 수 없도록 사람 두 명도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매대 사이로 도망쳤지만, 놈들의 힘은 고정된 매대로도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4층으로 이루어진 매대는 놈들이 지나오는 길 그대로 부서지고, 망가졌다.
이곳에서 일하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무너진 적도, 무너질 거라는 생각도 한 적 없었던 매대가 겨우 지나가는 것으로 간단하게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 마트에 있는 무엇으로도 놈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걸.
그렇게 실감한 순간 빠져나가는 다리 힘. 우당탕탕! 쌓아놓은 행사용 특가 푸딩 사이로 넘어진 나는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미끄러지는 바닥과 씨름한 끝에 몸을 앞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고.
눈앞의 현실에 절망한다.
푸르릉, 크르릉.
바로 앞에서 콧바람을 뿜어내고 있는 두 오크. 지독한 냄새의 침을 흘리며 다시 보기 싫은 흉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도망친 이유는 놈들이 좀 더 맛있게 먹게 해주려고 양념을 묻혀준 것에 불과했구나.
“나, 나는-”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 상상한 적도 없는 형태의 죽음이었지만, 마지막 말 하나만큼은 멋들어지게 하고 싶었다.
“나는 그냥 마트 점원이라고!”
아, 끝났다.
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선택한 걸까. 아무도 듣지 못한다고 내뱉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나 자신의 멍청함에 저주를 내리고 싶었던 것도 잠시, 나를 향해 뻗어오는 네 개의 팔에 눈을 꼭 감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사, 살려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고객분들은 당신을 죽이려는 게 아니니까요.」
“어?”
아까의 환청과 똑같은 목소리에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나를 향해오던 녹색의 손은 사라졌고, 눈앞에 있는 것은 검은 정장을 입은 노인뿐.
주위의 환경도 마트와는 달랐다. 투명한 공간에 그와 나, 둘만 있는 상황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혹시 조금 전 말은 어르신께서 하신 겁니까?”
「네, 맞아요. 제가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말투라기보단 기계음에 가까운 그 목소리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가 바로 다시 폈다.
방금의 그 광경이 환각이었든, 현실이었든, 눈앞의 이 사람은 그런 상황을 벗어나게 해준 분이었다.
잘 대할 순 없어도 최소한 그의 신경에 거스를 일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감사합니다.”
「네? 무엇이 말인가요?」
“절 오크에게서 도망치게 해주셨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 두 마리 오크의 점심밥이 되었을지도 몰랐거든요.”
나의 말에 노인은 눈에 띄게 이마를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아차, 농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사과하려던 찰나 그의 입이 열렸다.
「이해를 못 하셨나 보군요. 전 당신을 고객분들에게서 도망치게 한 게 아닙니다. 잠시 교육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을 뿐이죠.」
“네? 교육이라니 그게 무슨···.”
노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나는 그가 뻗은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아래로 향했고, 투명한 바닥 너머로 커다란 녹색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비명과 함께 노인에게 외쳤다.
“저, 저건 오크잖아요! 몬스터! 설마 저희가 아직 마트 안에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아직 손님이 있는데 먼저 나가는 점원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저분은 고객이지, 몬스터가 아닙니다.」
“예? 고객이라니, 저 오크가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이제는 눈앞의 노인이 내 구원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힘은 있지만 미친 인간으로 보일 뿐. 하지만 노인은 오히려 그런 날 미친놈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본인은 마트 점원이라고. 그런데 고객분한테 그렇게 응대하고, 그러다 대답도 못 하고 도망치고, 마지막에는 판매하는 물건에 몸을 던지는 추태까지 부리다니. 마트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지키는 모습을 보고 당신을 믿고 일을 맡기려 했는데, 첫 업무부터 이런 모습을 보이면 저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다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어엇?!”
노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나는 천장이 녹아내리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노인은 지금 다시 나를 오크에게 보내려고 하는 거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가 미쳤든 안 미쳤든, 나를 살려줄 힘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죄, 죄송합니다! 고객에 대한 응대를 제대로 할 테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로요! 이번 한 번만 믿고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의심스러움이 담긴 노인의 목소리에 어떻게든 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1년 전 여섯 장짜리 돈가스를 반쪽만 들고 와서 환불하라고 언성을 높인 진상 고객을 상대할 때 보다 더 열성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첫 업무였던 만큼,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점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응대는 고객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제대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저 고객분들께 업무를 하러 가보실까요? 방금 있었던 일은 확실히 사과하세요. 우리 회사에 큰 누가 끼치지 않도록 제대로 말이죠.」
“아, 잠시, 잠시만요.”
바로 이 투명한 벽을 허물어버리려는 노인의 행동을 잠시 멈춘 나는, ‘진짜로 이 인간이 일하려는 마음이 있나.’ 하고 미심쩍어하는 표정의 노인에게 말했다.
“저도 저···고객분에게 제대로 된 응대를 하고 싶지만, 저분들과 저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있잖아요? 외국 손님은 외국어를 잘 알고 있는 직원이 응대하는 것처럼, 저 오크 고객님 같은 경우에는 저처럼 말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점원으로 이야기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작전의 방향을 ‘미친놈의 대응은 미친놈으로 한다.’로 바꾼 나는 최대한 미안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말이 안 통한다는데 어떻게 할까. 말이 통해야 응대도 하고, 물건도 팔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흠, 듣고 보니 당신 말도 맞네요.」
해냈다!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노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친놈이긴 했지만, 말은 통하는 미친놈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속으로는 환호성을 내지르면서도 겉으로는 미안함 반, 아쉬움 반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정말 아쉽네요. 저도 제가 불편하게 해드린 고객분에게 제대로 응대하고 싶었지만, 제가 배움이 부족한 탓에 이렇게 되어버릴 줄이야. 부디 제 일을 맡게 될 다른 점원분께 제가 고객분에게 얼마나 죄송하고, 미안한지 꼭 말해달라고 해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마트 밖으로-”
「아뇨, 직접 말씀하시죠. 그게 고객님에게도 더 좋으니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딱 하고 손가락을 마주쳤다.
띠링~
[번역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상품 주문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창고 소환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갑자기 내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에 놀라 나는 비명을 질렀고,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편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뭐야?!”
「고객 응대에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입니다. 본래 교육 시간에 가르쳤어야 했지만, 당신 같은 경우에는 특별 채용이라 지금에서야 받게 됐군요.」
“최, 최소한의 능력이요? 교육? 특별 채용?”
「네. 이제 그만 고객분들에게 가시죠. 시간을 멈춰놓은 상태라 더 기다리시지는 않으셨겠지만, 이미 많은 실례를 끼쳤으니까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노인의 모습과 함께 투명한 벽도 사라졌다.
큰 키의 오크를 아래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내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아래로 내려왔다.
여전히 푸딩으로 장식된 바닥으로 떨어진 나는 아까와 같은 광경을 다시 한번 마주했다.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두 마리의 오크를 마주친 상태 그대로.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건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윌리엄,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달려나가면 점원분이 놀라신다고.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레고리, 자네가 할 말은 아니지. 새로운 차를 찾았다면서 흥분하면서 제일 먼저 들어와서 점원분을 놀라게 해놓고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그리고 지금 누구 탓할 땐가? 일단 점원분부터 일으켜 세워야지. 아, 세탁비는 저희가 드리겠습니다.”
-오크의 대화가 마치 영국 신사의 대화처럼 들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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