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게임 마켓 1983[E]

게임 마켓 1983 1권

2019.07.23 조회 508 추천 5


 게임 마켓 1983 1권
 
 CONTENTS
 
 1장 허름한 게임 가게
 2장 장난감 회사
 3장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4장 스폰서 게임(1)
 5장 스폰서 게임(2)
 1장 허름한 게임 가게
 
 
 “그럼 이번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 모바일 쪽으로 방향을 잡는데 모두 이의 없는 거지?”
 ‘아니. 이의 있다. 망할 놈아······.’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마음속으로 말을 삼킨다. 빌어먹을······.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 최종 클라이언트 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베타 서비스 진행이 내년 3월이니까 적어도 2월 말까진 해야 하지 않겠어?”
 ‘뭐?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뒤엎고 다시 시작하라는데 고작 6개월 준다고? 장난하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대표이사란 녀석은 상석에 앉아 아까부터 코나 후비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녀석 대가리 속에는 2월에 게임이 말끔하게 나와서 한 달 정도 마케팅 한 뒤에 서비스 개시하면 돈이 막 굴러들어 올 줄 아나 보지?
 천만에 말씀이다.
 이번 프로젝트 무조건 폭망한다는데, 내 열 손가락 다 걸어도 좋다.
 그때 한 팀장이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거기 준혁 씨?”
 “네.”
 “뭐 불만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저기 한 팀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애초에 목표하던 기획이랑은 컨셉이 너무 다른데요. 이건 유저 과금 체계가 심각할 정도인데, 이렇게 게임을 출시하면 유저들에게 엄청 반발을 살 겁니다.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고요.”
 그러자 한규현 팀장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 프로젝트에 조금이라도 토를 달면 저렇게 한쪽 눈썹을 찡그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다.
 “그래서 준혁 씨 말대로 지난번 프로젝트 밀어줬잖아. 그거 결과가 어땠는지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아?”
 ‘씨발. 그것도 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다 갈아엎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다.
 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저기 한쪽 구석에서 코딱지나 파고 있는 대표이사가 알아들을 리도 만무하고, 한 팀장이 내 생각에 찬성해줄 위인도 아니니까.
 “너희도 잘 알고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게임 시장은 치킨 게임이야. 천년, 만년 갈 줄 알았던 PC 온라인 시장도 완전히 엎어지고, 지금은 무조건 모바일에 치중해야 할 때란 말이야. 한때 우리랑 비슷한 매출 수준이었던 넷블루 역시 모바일 게임 하나로 현재는 업계 5위로 순식간에 대기업이 되어 버렸어. 너희들은 이런 사례를 보면 뭔가 느끼는 게 없냐? 막 회사를 위해 어떻게 하면 대박을 터뜨릴지 고민이 안 돼?”
 “그렇지, 그렇지. 역시 한 팀장이 찰지게 말을 잘 하는구먼~”
 대표이사는 팀장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넷블루······. 그래 모바일 게임으로 부루마불 하나 베껴서 아주 돈을 쓸어갔지만 시즌을 거듭하면서 생겨난 더러운 과금 체제로 유저들이 다 떨어져 나갔지······.
 “그리고 우리 하청 기업이었던 게임타운도 요새는 분기마다 계속 신작을 쏟아내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우리 회사는 올해 전반기가 다 지나도록 신작 하나 낸 게 없어.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러자 이번에도 대표이사가 한 팀장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그렇지. 아주 좋아.”
 참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히다.
 그러니 맨 처음 기획대로 개발을 시작 했었다면 지난 4월엔 완성이 됐을 텐데, 자꾸만 이것저것 돈 뽑아낼 궁리로 기획을 건드리니 당연히 늦춰질 수밖에······.
 거기다가 이번엔 아예 모바일로 플랫폼 자체를 바꿔 버렸으니 작년 11월부터 해왔던 모든 업무는 허사가 되어 버렸다. 한 팀장은 옆에서 계속 맞장구를 쳐주는 대표 이사 덕분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까지 메인 디렉터를 맡아 주었던 강준혁 과장은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 당분간 고객 만족팀으로 부서를 옮기는 건 어때? 너 유저들이랑 농담 따먹기 하는 거 좋아하잖아?”
 “네? 뭐라고요?”
 “준혁 씨. 당신 만든 게임들은 너무 유저 친화적이야. 회사 입장에선 도저히 돈벌이가 안 되지. 우리가 무슨 자원 봉사자도 아니고 무료로 게임을 풀었으면 어떻게든 돈을 뽑아낼 궁리를 해야지 무과금 유저들한테 뭘 그렇게 아이템을 쳐 발라줘. 아무튼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직접 진두지휘 할 테니까. 준혁 씨는 다른 부서로 빠져 있어. 아님 평생 고객 만족팀에서 유저들이랑 놀던가.”
 아니······. 딱 봐도 거지 같은 결과물이 나올게 뻔한데, 네 녀석이 싸지른 똥을 나보고 치우라고?
 거기다 게임 기획이나 프로그램에 관해선 쥐뿔도 모르는 디자인 팀장이 이번 프로젝트 메인 디렉터라니······.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이번 프로젝트 담당자들의 표정이 팍하고 찌그러졌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을 해. 준혁 씨랑 같이 고객만족 팀으로 보내 줄 테니 가서 댓글이나 달던가.”
 한 팀장의 말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고객만족 팀으로 부서가 옮겨지는 것은 개발자에게 있어 가장 굴욕적인 처사였기 때문이다.
 
 * * *
 
 “아~ 씨발······. 과장님. 저 진짜 못 해먹겠습니다. 한 팀장 그 자식 밑에서는 같이 일 못 해요.”
 퇴근 시간.
 평소 나와 친분이 깊은 이 대리가 툴툴거리며 말을 붙였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후······. 부서 변경 마지막 날까지 야근이라니······.
 나는 책상 위에 내 소품을 박스에 정리한 뒤 제2개발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과장님 정말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물러나실 겁니까?”
 “말을 하면? 한 팀장이 들어 주겠어?”
 “그래도 최소한 발버둥은 쳐보셨어야죠.”
 “됐다. 나도 이젠 지쳤어. 지금 대표이사는 전 대표랑 마인드가 너무 달라. 아까 한 팀장 옆에서 하는 소리 못 들었냐?”
 “너무 하십니다. 과장님. 같이 좋은 게임 만들자고 절 꼬드겨서 데려오셨으면 디렉터 자리에 끝까지 버텨주셨어야죠.”
 “그럼 너도 나 따라서 고객 만족팀으로 갈래?”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미안하다.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하긴 과장님도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실 텐데, 저도 화가 나서 주제넘게 나댄 것 같네요.”
 “그래도 너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한 팀장이랑 조율 잘해서 다음 프로젝트 잘 이끌어 가고······.”
 “네, 알겠습니다.”
 “혹시 시간 되면 술이나 한 잔 할까?”
 “아, 요새 마누라 눈치 보는 중이라 이 시간에 술은 조금······.”
 “쩝. 그래 알았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들어가세요. 과장님.”
 이 대리와 헤어지고 회사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느껴졌다. 벌써 가을이 오려나? 나는 주차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회사 건물을 돌아보았다. 올해 나이 34살. 개발자 경력만 15년인데, 내일부턴 고객 만족팀 과장이라니······. 참 어이가 없다.
 게임 회사에 들어가면 내가 원하는 게임 마음 것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첫 입사 후 8년 간 다른 사람이 기획한 게임을 만들기 바빴고, 그것은 메인 디렉터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만드는 게임이 어떤 점에서 재밌는가에 대해 어필하기 보단 대표이사에게 이만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라고 설명해야 하고, 가장 적은 인력과 개발비로 몇 배 만큼의 수익을 증대 시킬 수 있다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야만 했다.
 결국 내가 만든 게임은 소위 대박을 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개발 중인 프로젝트에 이 사람 저 사람이 끼어들며 애초에 기획했던 형태와는 너무나 다른 결과물이 나와 버렸다.
 거기다 빠른 자금 회수를 위해 제대로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게임은 출시 후 연일 버그과 서버 불안정에 시달려야 했으니 당연한 결과지······.
 최근 모바일 게임의 트렌트는 무조건 스피드다. 빠르게 출시하고 딱 2주 정도 지켜 본 뒤에 뜰지 안 뜰지를 판단하고 바로 서비스를 접어 버리곤 했다. 뭐하나가 뜬다 싶으면 곧바로 그걸 베끼기 바쁘고 살짝 형태만 다른 게임이 출시되고 나면 서로 자기네 걸 베꼈다고 아우성치는 아비규환······.
 지금 나는 모바일 게임의 한국판 아타리 쇼크를 보는 듯하다.
 1980년대 미국의 게임 시장 주도했던 아타리 사는 게임계의 흑 역사 중에 하나다. 개발 툴을 공개한 뒤 너도 나도 게임을 만들어 찍어내자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게임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고 연일 쏟아지는 저급 게임에 정점을 찍은 것은 그 이름도 유명한 E.T였다.
 E.T가 개봉되고 난 후 그 해 크리스마스 시즌 발매를 맞추기 위해 단 5주 만에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괴작은 전량 리콜 사태를 맞으며 미국의 뉴멕시코 주 사막 한 가운데에 묻혀 버렸다.
 당시 30억 달러에 육박하던 게임 산업을 1억 달러로 줄여버린 아타리 쇼크······. 지금 모바일 게임 시장은 그때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을 테고 집 근처에서 술이나 한잔 할까?”
 주머니 속에서 차 키를 꺼내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올해 나이 34살. 아직까지 나는 미혼이다.
 ***
 솔로라 좋은 점이 이런 걸까? 집에 차를 대놓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2병을 깐 나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래 이런 날 술이라도 안마시면 어찌 버티겠어~ 킥킥
 나는 취기에 혼자 킬킬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내일부터는 이제 게임 개발이랑은 완전 동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겠구나. 빌어먹을. 어릴 때부터 동경해온 게임 기획자의 꿈도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뿅뿅뿅~ 그때 어디선가 귓가를 때리는 비트음에 나는 비틀거리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삐비삐삐비빕삐······. 마치 레트로 게임에서나 들을 법한 정감 어린 사운드······.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변은 모두 문 닫은 상점가들뿐이었다.
 뿅~ 뾰뵹~
 하지만 분명히 들린다. 이건 갤러그 미사일 쏘는 소리인데······. 너무나 추억어린 사운드에 나는 미친놈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쫒았다.
 뚱~ 뚱~ 이번엔 슈퍼마리지가 점프할 때 나는 효과음? 혹시 주변에 오락실이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오락실은 90년대 말에 거의 다 사라졌을 텐데? 혹시 게임 파는 가게가 주변에 있나 싶었던 나는 간헐적으로 울리는 비트음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 단조로운 비트음은 나에게 있어 오래된 팝송처럼 추억어린 효과음 이었다.
 그렇게 자정이 넘은 밤거리를 얼마나 헤맸을까? 어느 구석진 골목에 환하게 불이 켜진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브라운관 TV와 유리 진열대. 그 안에는 회색빛의 게임 카트리지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어서오슈······.”
 가게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젊디젊은 녀석이 왜 이리 표정이 죽을상이누? 무슨 일 있는가?”
 “그냥 회사 일에 좀 치여서요. 그런데 어르신 어디서 이 많은 레트로 게임을 모으셨습니까? 이 정도면 거의 박물관 수준인데요?”
 그도 그럴 것이 좁은 상가 안에는 온갖 게임 관련 상품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인기가 많은 차세대 게임은 전혀 없고 모두 8~90년대에 유행했던 레트로 게임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온 것처럼 묘한 흥분감에 사로 잡혔다.
 특히나 어릴 적에 클리어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닌자용검전 부터 파이널 프론티어, 드래곤 워리어의 카트리지들은 모두 먼지 하나 없이 새 것처럼 진열 되어 있었다.
 “끌끌끌~ 어때? 탐나나?”
 “이거 파시는 거 맞죠?”
 “물론 팔려고 내놓은 것들이니 사가는 사람이 임자지~”
 “얼만데요?”
 “개당 2천원만 주게.”
 “2······. 2천원이요!? 어르신 이런 물건들은 요새 인터넷에 올리면 개당 수십만 원도 받을 수 있어요. 특히 이거!!”
 나는 진열되어 있던 게임 카트리지 중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녀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한때 우정파괴 게임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패밀리의 근육맨. 이 황금색 패키지는 일본에서 딱 8개만 만들어진 초 레어 아이템이다.
 이게 최근에 일본 옥션 경매에서 낙찰가가 30만 엔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민텐도 여름 캠프에서 지급된 전 세계에 100개밖에 없다는 미니카 게임도 버젓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게임들은 경매 가격으로 따지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될 물건들뿐이었다.
 “자네, 게임을 좋아하는군.”
 “물론이죠. 그래서 제가 이 나이에도 게임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 게임을 만드나? 허어~ 그거 대단하군.”
 어제까지였지만요.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노인에게 배시시 웃어보였다. 노인 역시 그런 내가 마음에 드셨는지 주름살이 깊게 패이며 껄껄 웃으셨다.
 “아, 그립다. 이 시절에 나온 게임들 참 좋았는데······.”
 나는 한쪽에 꽂혀져 있는 카트리지 하나를 집어 올리며 쓴웃음 지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 민텐도 사장 ‘카와타 사토시’가 젊은 시절 만들어낸 명작. 벌룬 파이트였다.
 3개의 풍선을 이용해 공중을 날아다니며 상대방의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은 패밀리 시절 친구가 집에 놀러오면 밤을 새서 즐겼던 게임 중에 하나였다. 한번은 이걸로 친구랑 엄청 싸워서 한 달 동안 말도 안 붙이고 살았었는데······.
 ‘가속에 의한 관성’이라는 효과를 처음으로 적용한 게임. 그것은 이후 슈퍼마리지의 달리기 모션에서도 차용이 될 만큼 흥미로운 효과였다.
 “벌룬 파이트~ 그것 참 명작이지. 자네 보는 눈이 제법이야.”
 “조금만 구경 좀 해도 되겠습니까. 어르신?”
 “그렇게 하게나 어차피 손님도 없으니 천천히 둘러보게.”
 “감사합니다.”
 나는 비좁은 매장에 들어서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한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건?”
 나의 반응에 유리 진열대에 두 팔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도 묘한 웃음이 그려졌다. 내가 집어든 그것은 게임&워치라는 물건이었다.
 “와······. 내가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준혁 씨
 나는 내 손에 들린 게임&워치를 보물 다루듯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시초라 불리는 이것은 지금 민텐도 사가 만드는 휴대용 게임기의 롤 모델이라 볼 수도 있었다.
 “허허~ 마음에 드나?”
 “그럼요. 그런데 어르신 이 게임&워치는 처음 보는 모델인데요? 어릴 적에 부모님 졸라서 시리즈를 다 모은 적이 있어서 기억하는데, 이 모델은 처음 보네요.”
 “그야 그럴 수밖에······ 그건 전 세계에 딱 한 대뿐인 녀석이거든.”
 “네!? 딱 한 대라고요? 그렇게 귀한 물건이 어떻게 여기에······ 아니, 어르신 가게를 무시하는 건 아니고 단 한 대만 있다면 보통 민텐도 본사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있을 법해서요.”
 “누가 뭐랬나? 젊은이가 호들갑은~ 껄껄~”
 “아하하······. 그런데 정말 멋지네요. 전 세계에 딱 한 대뿐인 게임&워치라니······. 이거 한번 해볼 수 있나요?”
 “건전지는 들어가 있으니 바로 해볼 수 있지. 한번 해보게.”
 “아, 감사합니다.”
 나는 어르신의 허락에 곧장 뚜껑을 열고 게임을 켜보았다. 딩딩딩딩~~ 단조로운 비트음과 함께 게임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게임 화면을 잘 보기 위해 형광등 쪽으로 향했다. 스톱 애니메이션 기법의 게임&워치는 백라이트 기능이 없었기에 어두운 곳에서는 플레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회사원 게임-
 그것이 이 게임&워치의 이름이었다.
 게임&워치는 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니세코이 군페이의 작품이었다. 그 당시 게임이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완구 수준의 물건이었기에 동킹콤이나 카린의 전설, 드래곤볼 같은 어린이 취향의 게임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 녀석은 아이들 취향의 게임이라기엔 제목부터 수상한 물건이었다.
 “어떻게 플레이 하는지는 알겠나?”
 “딱 감이 오네요.”
 게임&워치는 개발부터 5~6세 어린이용으로 만들어 졌기에 플레이 방식이 극히 단조롭다. 좌우의 방향키와 확인 버튼 하나.
 게임은 회사원인 주인공이 바이어와 만난 후 책상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오너에게 결재를 맡는 시스템이었는데, 이 모든 액션은 한 칸 한 칸 움직일 때마다 캐릭터가 표시되는 스톱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좌우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바이어와 오너의 중계자 역할을 하는 것이 플레이 내용이었는데, 재밌는 것은 바이어와 만나는 시간이 딜레이 되거나 갑자기 오너가 자리를 비워 결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묘하게 게임의 템포를 조절해 주고 있었다.
 ‘이거 꽤나 잘 만들었잖아?’
 “자네 제법 센스가 있구먼~”
 “어릴 때 정말 많이 했었거든요. 대략적인 시스템은 이미 이해하고 있어서······. 그런데, 이 게임을 하다 보니 주인공 캐릭터가 꼭 저랑 같네요.”
 “직장인들이 다들 그렇지. 끌끌······.”
 “그러게요. 게임에서까지 이렇게 시달리니 우울하네요.”
 “그런가? 허허~”
 나는 어느 정도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뚜껑을 덮어 어르신에게 돌려 드렸다. 그러자 노인은 물끄러미 내가 내민 게임&워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네. 게임을 만든다고? 그럼 어떤 게임을 만들고 있나?”
 “지금까지 만들어온 건 PC용 온라인 게임인데, 요즘엔 하도 모바일 게임이 많이 나오다 보니 예전처럼 큰 그림을 그리긴 힘들어요. 무조건 플레이 시간은 5분 내외로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노가다 플레이를 강요하고 있죠······.”
 “그래도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란 게 아니겠나? 유저의 취향을 맞춰가는 거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패밀리가 유행했던 것처럼 지금도 콘솔을 이용해 패키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전 세계에 얼마든지 있지요. 공짜로 푼다고 유저들이 너도 나도 플레이 하진 않아요. 중요한 건 게임의 질입니다.”
 내가 지금 백발의 노인에게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람?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응어리가 한 번에 터져 나가는 것처럼 좀처럼 열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이 모바일 게임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저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선택권은 줘야지요. 매번 비슷비슷한 게임을 쏟아내면서 공짜니까 한번 해 봐. 대신 엔딩 따윈 없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으면 돈을 내. 이따위로 운영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요?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이죠······. 엔딩도 없는 쓰레기 같은 게임들이 세상에 넘쳐 나고 있다 구요.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돈이 안 되면 그냥 서비스를 종료하고 죄송하다. 한마디로 끝. 이게 말이나 됩니까?”
 “거······. 젊은이 말 한 번 잘 하네······.”
 “하아······. 하아······. 아닙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냐, 아냐. 나도 아주 간만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네. 그렇지 모름지기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런 신념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래도 어르신께 말씀 드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요.”
 “그래? 껄껄~ 이 봐 젊은이.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가 좋겠나?”
 “네? 아, 글쎄요. 별거 아닌데 거참 은근히 고민 되는데요? 그래도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1983년이 좋겠죠.”
 “왜 그런가?”
 “그야 아타리 쇼크가 끝나고 2세대 콘솔인 민텐도의 패밀리가 발매 되던 시기 아닙니까. 열정과 꿈으로 똘똘 뭉친 젊은 개발자들이 넘쳐 나던 시기니까요.”
 “그래? 허허~ 그렇군. 그 시대가 참 재밌었지. 어쩌면 진정한 게임이란 콘텐츠 자체가 막 꿈틀대던 시기이기도 하고~ 그러면 말이야. 정말로 그 시대로 갈 수 있다면 자네는 무얼 하고 싶은가? 지금처럼 또다시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
 나는 어르신의 말에 잠시 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다. 마치 체스를 두듯 상대방의 반응을 즐겁게 살피고 있는 어르신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아니요. 개발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허어? 어째서? 이제 게임이 싫어진 건가?”
 “아니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은 개발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요.”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만약 지금의 지식을 그대로 가지고 그 시대로 갈수 있다면 전 콘솔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의 민텐도와 센소니에 버금가는 콘솔 기업을 만들어 개발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하~ 스스로 오너이자, 개발자가 되겠다는 거로군? 좋은 생각이야~ 훌륭해.”
 “그런가요? 하하······. 하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런가? 허허~ 젊은이가 좋아하니 나도 참 오랜만에 즐거워지는군. 그래······. 맞아. 게임은 그런 거였지······."
 “어르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뭔가 여태 것 혼자 끙끙 않고 있던 게 풀린 기분이 들어요.”
 “왜? 벌써 가보려구?”
 “내일 또 출근해야 하니까요. 직장인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군. 나도 이제 그만 들어가 볼까? 시간이 너무 늦었어.”
 “지금 들어가시게요? 그럼 제가 가게 정리 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이 예의도 바르군. 그럼 저기밖에 있는 가판대 좀 안으로 옮겨 주겠나?”
 “네, 물론이죠.”
 나는 가게를 나서다가 무의식중에 내 손에 들린 게임&워치를 바라보았다. 아이쿠, 혹시 훔치는 걸로 오해 받으면 안 되니까. 가게 안에 놓아야지. 전 세계에 하나뿐이라던데 얼마나 소중하시겠어. 그렇게 고개를 돌린 순간······.
 “어······?”
 내 눈앞에는 굳게 닫힌 셔터가 보였다.
 “뭐지? 어르신? 어르신~!!”
 마치 꿈을 꾼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밝게 전등이 켜져 있던 게임 가게는 잠깐 내가 등을 돌린 사이 허름한 폐건물 상가로 변해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살짝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감각은 확실히 살아 있었다. 여우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분명 내 오른손에는······.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는 게임&워치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 *
 
 쏴아아~~
 집에 돌아온 나는 먼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쳤다. 대체 방금 전에 나에게 일어난 일은 무얼까? 그냥 내가 술에 취해 이상한 몽상을 한건 아닐까 싶었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거실 탁자에는 여전히 어르신에게 받은 게임&워치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네······.”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탁자 위의 게임&워치를 집어 들었다. 시간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라면 빨리 자는 게 좋겠지만, 황당한 일을 겪고 나니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달칵. 게임&워치의 뚜껑에 달린 경첩이 기분 좋게 열렸다. 지금도 휴대용 기기의 왕좌로 군림하고 있는 민텐도 3GS의 더블 스크린 채용은 바로 이 게임&워치의 디자인에서 가져 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할 정도였다.
 “확실히 간단하지만 재밌어. 그래 이런 게 바로 게임이란 거지.”
 띡. 띡. 띠딕. 단조로운 효과음이 거실에 울렸다.
 티비도 켜지 않고 어느새 나는 온 신경을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슬로우한 진행 방식이지만 점수가 10만 점에 이르자, 조금씩 스피드가 빨라졌다. 바이어는 자꾸만 약속시간을 딜레이 시키고 오너는 어딜 그리 뻔질나게 다니는지 자꾸만 자리를 비워대고 있었다.
 “여기 나오는 오너는 꼭 우리 회사 대표이사 같구먼, 킥킥.”
 곧이어 여유 있게 등장하는 바이어를 바라보면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새끼는 딱 봐도 한 팀장이네. 맨날 회의 시간도 제 멋대로 정하고 늦게 들어오는······.”
 질수 없지. 질 수 없어. 나는 손가락이 저릴 정도로 미친 듯이 주인공을 움직여 일을 날랐다.
 생전 처음 해보는 게임임에도 아무런 튜토리얼 없이 곧바로 게임에 적응해 나갈 수 있게 제작 된 레벨 디자인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삑삑삑!! 삑삑!! 삑! 삐비빅!!
 내가 놀리는 손놀림의 속도에 따라 효과음이 점점 빠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30만 점이 넘어 가고 게임속의 주인공은 이제 마치 분신술을 하는 홍길동처럼 좌우로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삐이이익······ GAME OVER.
 결국 부장의 잦은 자리 비움에 쌓여 있는 결재 서류를 넘길 수 없던 나는 결국 52만 점이라는 스코어를 세우고 게임을 종료 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 손가락 아파······. 지금 몇 시지?”
 자는 저릿저릿한 손가락 마디를 풀어내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 반!? 미친 이걸 내가 1시간 반 동안 하고 있었다고!?”
 좋은 게임은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다.
 게임에 집중하는 동안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느낌. 나는 황당한 기분에 쓰게 웃으며 게임&워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쪽 화면에 게임 스코어에 따른 랭킹 표시가 나와 있었다. 총 528,200점을 얻은 나의 랭킹은 3위였다. 2등은 80만 점. 1등은 90만 점. 이걸 어떻게 1등을 하냐~
 나는 확인 버튼을 누른 채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위쪽 화면에 다른 표시가 떠올랐다.
 -당신이 획득한 스코어를 급여로 환산합니다. 이번 플레이에서 당신이 얻은 급여는 5,282,000엔입니다.-
 “어라? 급여······? 아~ 맞다 이거 회사원 게임이었지. 스코어를 따면 그걸 환산해서 급여로 표시해 주는 거구나. 재밌네~”
 스코어 표시 아래쪽에는 누적 급여 표시가 있어 내가 플레이한 스코어에 따라 계속 플러스를 시켜주는 듯했다.
 “한 시간 반 만에 5천만 원을 넘게 벌었네. 허허~”
 비록 소중한 새벽 잠 한 시간 반을 투자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게임 안에서 부자가 된 기분에 취해 나는 게임&워치를 덮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게임가게에 있었던 일이 여전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게임에 집중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로감을 느낀 나는 곧 잠이 들었다.
 
 * * *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된 개발팀의 강준혁 과장입니다.”
 새로운 부서에서의 첫 인사.
 고객 만족 팀은 개발 부서와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직원들과 안면은 있지만, 딱히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업무 시간 내내 개발실에 틀어박혀 있던 나였으니. 아무래도 다른 부서의 직원들과 서먹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다.
 “우선 난 신경 쓰지 말고 평소에 하던 대로 일들 보세요. 저도 이곳에 적응을 좀 해야 하니까. 하하······.”
 그러자 좁은 사무실 안에서 직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좌천’이란 말도 들린 듯하다.
 좌천······. 그래 맞는 말이지. 개발실 팀장에서 고객 만족 팀 과장이면 변방의 귀향 살이나 마찬가지다.
 아직은 딱히 바쁠 게 없는 오전 업무시간.
 나는 앞으로 함께 지낼 직원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회사 밑에 커피숍에 들렀다.
 “아메리카노 8잔이요.”
 커피를 주문 한 나는 커피가 나올 동안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피 8잔에 36,000원이라. 웬만한 식비보다 금액이 더 나오네, 이번 달 잔고가 얼마나 남았더라?
 솔로 인생이지만 전세 대출금을 갚느라 월급이 들어오는 데로 빠져나가는 터라 커피값 36,000원도 크게 느껴졌다. 어쩌면 직원들에게 돌린 이 커피 때문에 난 며칠 동안 점심을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후. 잔고 확인을 위해 스마트 폰으로 통장 조회를 한 나는 ‘헉’ 하고 마른 숨을 삼켰다.
 “뭐, 뭐야 이거?”
 잔액 5,300만원?
 내 월급 통장에 5천만 원이 넘게 있을 리가 없는데? 뭐지, 신종 사기인가? 나는 서둘러 거래내역을 살펴보았다. 새벽 2시 32분. 입금자명. 게임&워치 52,820,000원.
 나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눈을 비벼 보았다. 하지만 통장에 들어온 금액은 정확히 어제 내가 클리어한 게임 스코어 점수와 같은 금액이었다. 단지 엔화가 원화로 바뀌었을 뿐.
 “저기~!!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종업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불렀는지 종업원의 표정에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나는 서둘러 커피를 받아 들은 뒤에 커피숍을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 되지 않았던 나는 잠시 벤치에 앉아 쉬었다.
 진정해라······. 강준혁. 지금 너에게 굉장히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하지만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한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커피를 들고 고객 만족 팀 사무실에 돌아왔다.
 “여기 커피들 마셔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같이 지낼 부서 직원들에게 손수 커피 한잔씩을 돌리자, 그나마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점심시간.
 부서 직원들 모두 식사를 가고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나는 가방에서 게임&워치를 꺼내들었다.
 출근할 때 어제 일을 떠올리며 챙겨 오긴 했는데, 막상 이렇게 다시 보니 굉장히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급여를 꽂아주는 회사원 게임이라 이거지?’
 달칵.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기 위해 게임&워치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삑, 삑, 삑. 조용 한 사무실 안에 단조로운 효과음이 울리고, 이내 나는 배고픔조차 잊어버린 채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라? 과장님 식사 안하셨어요?”
 직원의 목소리에 깜작 놀라 타이밍을 놓친 나는 결국 게임을 포기했다.
 삐비빅······. GAME OVER. 약 한 시간 가까이 플레이 한 결과 내가 얻은 스코어는 37만 점 이었다.
 “아. 나래 씨? 벌써 왔어요? 천천히 식사해도 되는데.”
 “충분히 천천히 먹고 왔는데요? 그런데 식사도 거르시고 괜찮으세요?”
 “전 괜찮아요. 잠깐 확인 좀 할 게 있어서······.”
 나는 게임&워치의 확인 버튼을 누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살짝 눈을 돌려 화면을 살피니 내가 클리어한 랭킹은 5위로 현재 스코어를 급여로 환산 중이었다. 자~ 그럼 어디 확인을 해볼까?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스마트 뱅킹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해 보았다.
 입금자. 게임&워치 37,453,000원.
 역시 맞았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시간 만에 3700만원을 벌어들이다니 웃음이 안 나오고 베기겠는가?
 거의 하루 만에 1억에 가까운 돈이 통장에 들어왔다.
 
 * * *
 
 그날 퇴근 전. 나는 새하얀 봉투를 들고 대표이사실을 찾았다.
 “들어 와.”
 끼이익.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비좁은 사무실 가죽 의자에 앉아 코를 후비던 대표이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강 과장? 무슨 일이야?”
 “대표님.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뭐!?”
 “역시나 고객 만족 팀은 저와 잘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어차피 어제 부로 이동된 부서니까. 인수인계 할 필요도 없겠죠? 그러니 바로 사표 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이, 강 과장. 자네 지금 이번 인사 건에 불만 있다고 시위하는 거야?”
 “아니요. 그랬으면 어제 당장 그만뒀겠죠. 그냥 하루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 회사에 더 이상 비전이 없어 보여 내린 결론입니다.”
 “뭐라고? 허~ 이거 참.”
 “지난 15년 동안 다닌 회사입니다. 대졸은 아니었어도 아등바등 여기까지 올라오긴 했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네요.”
 “알았다. 알았어. 강 과장. 원하는 게 뭐야? 다시 개발실로 부서 이동 시켜줘?”
 “아뇨. 그냥 퇴직을 원합니다.”
 “이 사람. 아주 작정을 하고 왔구먼.”
 “네. 그만두고 싶습니다.”
 “대체 나가서 어디로 가려고? 그래 봤자 이 바닥에서 자네 게임 반겨줄 만한 곳은 이제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그래서 제가 한번 게임을 만들어 보려고요.”
 “뭐라고?”
 그것이 15년간 몸담았던 회사 대표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 * *
 
 “자~ 그럼 이제 시작 해볼까?”
 회사를 그만두고 5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뜨거운 물로 사워 후에 몸과 마음을 가능한 편하게 릴렉스 시켰다.
 난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잠시 동안 마음을 다 잡으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부드럽게 움직인다.
 좋아~ 시작하자.
 달칵.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은 채 나는 게임&워치를 손에 들었다.
 오늘 내가 노리는 것은 이 망할 게임의 1위 탈환이었다. 모든 끝장을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나였기에 지난 5일 동안 거의 내내 이 게임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현재 내 통장 잔고는 약 200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와 있었다. 어젯밤 랭킹 2위를 탈환했지만 아쉽게 1위 점수와 300점이 모자랐던 탓에 야밤에 괴성을 질러 대었다.
 나의 비명에 깜짝 놀란 아래층 사람이 초인종을 누를 정도였으니까. 내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겠지?
 “후우······. 할 수 있어.”
 긴 한숨과 함께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지난 5일 동안 지겹게 봐왔던 회사원 게임이 시작되었다.
 우선 시작은 가볍게 삑. 삑. 삐빅.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내 손가락은 춤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50만 점 따위는 가볍게 돌파해 나가고, 문제는 80만 점부터였다.
 이 빌어먹을 바이어와 오너는 마치 게임 속의 주인공을 일부러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지.
 이제 85만 점. 5만 점만 더 얻으면 1위 탈환이다!! 삐비비빅. 삐비빅. 삑삑. 삐비비빅. 삐비빅.
 내 평생 이토록 하나의 게임에 집중해 본적이 있을까? 실 급여가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게임에 대체 1위를 하게 되면 뭐가 나올지 너무나 궁금했다.
 랭킹 표시의 1위 옆에는 왕관이 그려져 있었는데, 정말 뭣도 아닌 그 왕관이 너무나 탐이나 미칠 지경이었다.
 안 돼지. 안 돼. 잡생각은 하지 말자.
 여기서부턴 작은 실수 하나로 곧바로 게임오버에 이어지니까. 기계처럼 정확하게 이동시켜 포인트를 벌어내자!!
 삐빅. 삑! 삑삑삑!! 89만 점.
 좋아!! 얼마 안 남았어!!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미친 듯이 게임에 몰두했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포기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니까!!
 삑! 삐비빅!! 야이 오너 이 개새끼야!! 어디 갔어!!!
 삐비비빅!! 바이어 이 미친놈아 빨랑 안 튀어와!! 으아아아!!!
 뚜두두둔 뚜둔~!!!
 넘었다······. 넘었어. 90만 2천점······ 그래 1등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 할 순 없지. 아예 999,999점을 찍어 주마!!
 이미 1위를 탈환했어도 나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이젠 숨조차 쉬는 것도 잊은 단계.
 지금 버튼을 두드리는 게 내 손가락이 맞는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스코어에 9가 찍힌 그 순간······.
 뚜두두두두두두······. GAME CLEAR.
 “응? 클리어라고?”
 게임&워치에 클리어가 어딨어? 에라 모르겠다~
 “푸하~~~”
 나는 소파에 몸을 뉘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깼다. 끝났어······.”
 뚜두두둔 두둔~!! 경쾌한 효과음 소리에 게임&워치를 바라보니 흑백 디스플레이에 폭죽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하하. 이렇게 보니 정말로 게임이 끝이 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 게임을 깨버렸다면 이제 더 이상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했네!?
 “에이······. 이미 200억이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돈이지······.”
 거기서 1억 더 얹어 봤자 거기서 거기다. 아무튼 클리어 한 보람이 크니까 됐어.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디스플레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컬러······?”
 그렇다. 스톱 애니메이션을 표현해 주던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가 싹 하고 컬러풀한 디스플레이로 바뀐 것이다.
 “뭐야 이게? 아직 뭐가 더 남은 건가?”
 그 순간 새하얀 화면 위에 한 가지 문구가 떠올랐다.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연도를 정해주세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게임 가게의 어르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봐 젊은이.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가 좋겠나?’
 설마 그때 그 대화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나는 잠시 동안 화면에 깜박거리는 연도 표시를 움직여 보았다.
 그 시작은 1983년. 미국에서 시작된 아타리 사의 몰락부터 시작 되고 있었다. 83년도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한 시대를 이끈 아타리 기종의 몰락과 동시에 일본에서 새로운 희망이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민텐도 사가 개발한 패밀리였다.
 재밌는 것은 연도 표시를 움직일 때마다 그 해에 주목을 받은 게임계의 유명 인사들이 하단부 화면에 표시 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개발자도 있었고, 고인이 된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그중에 지금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임&워치의 창시자인 니세코이 군페이를 찾아보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민텐도 3GS의 조작 방식이 떠올라 버릇처럼 하단부 화면을 터치하자, 화면 가득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 페이지가 떠올랐다.
 “터치인식이라니. 아예 기기 자체가 최신 트렌드로 바뀌어 버렸네?”
 나는 손가락으로 하단부의 소개 페이지를 슥슥 넘기던 중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1983년 당시 그의 스케쥴 표였다. 각 도시의 이동 경로와 시간까지 자세히 기록 된 터라 만약 그 시대로 가더라도 그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는 일종의 네비게이터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이거 잘만 사용하면 우연을 가장해 엄청난 인물들을 만나 볼 수도 있겠는데?
 사실 돌아갈 수 있다면 조금 더 게임 산업이 안정화된 슈퍼 패밀리 시대가 좋긴 하겠다만, 게임이란 컨텐츠의 르네상스 시대를 느껴보고 싶었던 나는 노인에게 이야기 했던 대로 1983년의 시대에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당신이 가고 싶은 나라는 어디입니까? 기기 하단 부의 마이크에 대고 말씀해 주세요.-
 “마이크?”
 화면에 표시된 명령에 따라 기기 밑을 유심히 살펴보니 좌측 하단 부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하긴 지금 게이머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패밀리의 컨트롤러에는 마이크가 달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패밀리에서 마이크를 지원 하는 게임은 거의 없었지만, 분명 기능은 달려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잠시 게임&워치의 마이크에 대고 후 하고 바람을 불어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신건지 잘 모르겠네요.-
 마치 스마트 폰의 음성 인식 시스템을 보는 듯하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일본.”
 -일본의 어느 도시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도시라······. 민텐도 본사는 교토에 있지만, 만약 그 시대로 간다고 해서 당당하게 본사에 쳐들어갈 수는 없겠지?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방법은 한 가지. 차후 민텐도사의 중역이 될 사람과 우연을 가장해 만나도록 하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게임&워치의 질문에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도쿄”
 -1983년 일본 도쿄로 설정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분명 1980년대는 민텐도의 천하지만 90년대로 넘어가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모든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게 좋겠지? 하지만 너무 젊게 설정해 버리면 되려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군대를 전역한 만 21살.”
 -일본 나이 21세로 맞춰졌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래.”
 -그곳에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일단 아타리 쇼크로 인해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곳에서 일을 크게 벌려봤자. 나를 지지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선은 민텐도를 이용해 인맥을 넓혀 보자.
 “한국인 취업준비생.”
 -습득하고 싶은 외국어를 두 가지 선택해 주세요.-
 “영어, 일본어.”
 이정도만 해도 일본에서 살기에 큰 무리는 없겠지?
 -모든 설정을 마쳤습니다. 이제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함께 1983년 도쿄에 거주하는 21세 한국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질문 사항이 있으시다면 마이크를 사용해 물어보실 수 있습니다.-
 어라? 잠깐. 어쩌지? 정말 여기서 내가 동의해 버리면 1983년으로 날아가 버리는 건가?
 나는 깜박거리는 YES와 NO의 표시등 사이에서 고민에 휩싸였다.
 그나마 미혼이기에 돌봐야 할 가족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떠올리니 쉽게 YES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내가 1983년으로 가게 되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당신이 과거에서 현재 이 시간으로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그때 당신은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선택? 무얼 선택해야 한다는 거지?”
 “과거로 시간여행을 거쳐 온 당신과 지금의 당신 중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선택하셔야합니다.”
 ‘과연. 1983년에 23살인 채로 2015년에 돌아오면 55세니까. 완전히 늙어 버리잖아!!’
 나는 잠시 어지럼증을 느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쩌지? 잠시 게임&워치를 앞에 두고 망설이던 나는 핸드폰을 들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동안 신호음이 울리고 반가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이니?”
 “네, 어머니······.”
 아무것도 모른 채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반응에 괜스레 목이 메어왔다.
 “잘 지내시죠?”
 “그럼~ 아빠가 술만 안 마시면 아주 잘 지낼 텐데 말이다.”
 “아버지는 요새도 약주 많이 드세요?”
 “말해 뭐 하니. 내 입만 아프지.”
 “여전하시네요.”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니? 우리 아들이 전화를 다하고?”
 “저 사실 지난주에 회사 그만뒀어요.”
 “뭐? 왜? 무슨 일 있었어?”
 “음······. 그냥 좀 새로운 일을 해보려 구요. 잘 될지 모르지만, 당분간 여행을 좀 다녀올까 해요.”
 “여행 좋지. 그래 네 나이도 34살인데, 알아서 잘 결정했을 거라 믿는다.”
 “고마워요. 어머니. 아~ 있다가 통장 확인해보시면 돈이 좀 있을 거예요. 이번에 퇴직금 받은 걸로 좀 많이 넣었어요.”
 “그래? 그냥 뒀다가 여행갈 때 쓰지 그러니?”
 “아녜요. 15년 동안 다닌 회사라 그런지 퇴직금이 좀 나와서 충분할 거 같아요.”
 “그래, 고맙다. 매달 용돈 보내주는 것도 고마운데, 아들~ 여행 조심히 다녀오고 돌아오면 집에 한번 들러~ 맛있는 거 해줄게······.”
 “네, 어머니······.”
 “올 때 며느리도 데려오면 더 좋고~”
 “하하. 노력해 볼게요.”
 “그래······. 우리 아들 여행 잘 다녀오렴······.”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더 이상 통화했다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킬 것 같아, 나는 어머니께 몸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내게 선택지가 있다면 그때 가서 생각을 해보자.
 과연 과거에서 돌아온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다를지. 어떤 걸 이루고 돌아올 것인지······.
 나는 모바일 계좌로 어머니께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송금해드렸다.
 너무 많은 돈을 보내면 오히려 불안해하실 테니 적당히 금액을 떼어 보내드린 나는 이윽고 게임 &워치의 확인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게임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시대로······. 스마트 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조차도 없는 시대지만, 가장 빛나던 그 시기로 조금 긴 여행을 다녀오자······.’
 “부모님. 제가 돌아올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게임&워치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 부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방 거실의 모든 사물이 2D 도트로 표시가 되며 마치 레트로 게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와······. 신기한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트 덩어리는 마치 벽돌처럼 나를 향해 쏟아져 날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개야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점차 그 수가 많아지자 피할만한 공간이 없었다. 어? 어어?
 “으아아아!!!”
 2장 장난감 회사
 
 
 날아오는 도트 덩어리에 쫄아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삐리리리리~
 -잠시 후 우에노. 우에노로 향하는 열차가 들어올 예정입니다.-
 “아?”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한 지하철역에 서 있었다. 난데없이 소리를 지른 탓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이런 나 정말 와버린 거냐? 1983년으로······?”
 멀리서 들어오는 전철은 오래된 한국영화에서나 보아왔던 꾀죄죄한 모양의 그것이었다.
 아무런 디자인도 없이 오로지 교통수단만을 위해 투박하게 제작된 열차는 잠시 후 내 앞에 멈춰서 더니 문이 열렸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내 주변의 일본인들은 이내 나를 무시한 채 전철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5년과는 판이하게 다른 촌티 나는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에 현실 적응이 어려웠지만, 나는 서둘러 그들과 함께 전철에 올랐다.
 나리타 국제공항이라······. 1983년에도 나리타공항이 있었구나. 신기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아까부터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일본인들의 눈빛이 더욱 가느다랗게 떠졌다.
 “흠흠······.”
 너무 튀는 행동은 하지 말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일단 가방을 메고 있군. 혹시 필요한 것이 들어 있을까 싶어 등에 맨 백팩의 지퍼를 열어보았다.
 일본 비자 도장이 찍힌 여권과 함께 JBC 도쿄은행의 통장 하나. 그렇지 돈이 중요하지. 나는 내가 가진 재산을 확인하기 위해 통장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표시된 금액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2015년에 있었던 200억 가량의 돈은 고스란히 지금 시대로 옮겨져 있었다.
 “출발이 빵빵한데? 이정도면 아예 회사를 차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 시기에 섣불리 회사를 차리는 것은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경력을 쌓아야 해.
 차후에 누구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나는 여권과 통장을 다시 가방 안에 넣은 뒤 안쪽을 좀 더 살펴보았다. 그러자 묵직한 느낌의 플라스틱 기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나와 함께 시공을 초월해서 날아온 게임&워치였다.
 “그래도 너와 함께 오니 든든하구나.”
 나는 슬쩍 미소 지으며 가방 안에서 게임&워치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전철에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작은 기계로 옮겨졌지만 이내 관심을 돌렸다.
 사실 전철 안에는 이미 나와 비슷한 게임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플레이 하고 있는 것은 1980년 최초로 출시된 게임&워치 BALL이었다. BALL 역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굉장히 간단한 게임 방식을 차용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화면에 표시된 볼을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겐 그것마저도 훌륭한 게임이었다.
 물론 내가 가진 회사원 게임이 그것보다 훨씬 진보된 시스템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들이 가진 게임&워치와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금방 관심을 꺼버린 듯했다.
 달칵. 일단 자세한 연도를 확인하기 위해 게임&워치를 펼쳐 들었다. 기기 이름에서 대변하듯 이 모델은 당연히 시계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1983년 6월 15일.-
 일본에서 패밀리가 출시되기 딱 한 달 전이로군······. 딱 좋은 시기다. 덜컹거리던 전철은 이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밖으로 나와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런 2015년에 살다 보니 이런 클래식한 느낌도 나쁘지가 않구나······.
 그러고 보니 1983년이면 내가 원래 82년생이니까 태어나고 다음해였어야 했는데, 바로 23살이라니······. 살짝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제 나이보단 11년이 젊어졌기에 퉁치기로 하고, 낯선 이국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삶. 이번엔 좀 재미있게 살아보자~!!
 
 * * *
 
 그 후로 한 달 동안 나는 일본에 놀러온 관광객처럼 살았다. 도쿄의 풍경은 1990년대 서울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긴 그 당시엔 우리나라보다 유행이 10년은 앞서갔다고 하니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지도······.
 “흐음~ 그래도 휴대폰이 없으니 심심하긴 하네······.”
 아 그러고 보면 현재 일본은 헤이세이가 아닌 쇼와 시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굉장히 또 느낌이 다르네? 나는 길거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은 채 아키하바라 역에 도착했다.
 아직 오타쿠 문화가 발생하기 전이라 그런지 메이드 카페도 코스프레도 없는 순수한 전자상가의 모습에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2013년에 방문했던 아키하바라는 어딜 가나 게임 포스터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건물에 가득 그려져 있었고, 몇 걸음마다 게임이나, 만화책을 판매 하는 상가들이 즐비한 정신없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PC 관련 제품(그것도 퍼스널 컴퓨터.)이나 소형 라디오.(라고 해봤자 머리통만 한 크기였지만) 그리고 테이프가 들어가는 주먹만 한 크기의 워크맨이 진열되어 있었다.
 “패밀리 출시 행사는 아직 인가? 분명 오늘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말 아키하바라를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게임 콘텐츠 사업도 활성화되기 전이었기에 2000년대처럼 게임 전문 매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게임 가게나 차려볼까?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지? 고작 민텐도에서 물건이나 떼어다 팔려고 여기까지 시간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다면 게임 가게 어르신이 날 뭐라 생각 하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만난 그 어르신은 ‘신’이란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져 가는 게임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모든 트렌드를 읽고 있는 나라면 먼 훗날 다시 맞이하게 될 2015년에 보다 멋진 게임을 유저들에게 선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얼 해야 할까? 나는 우선 패밀리의 발매 정보를 얻기 위해 게임&워치를 꺼내 들었다.
 -민텐도사의 패밀리. 1983년 7월 15일 출시······.-
 “오늘 맞는데······.”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묘한 비트음이 울려왔다.
 “어라? 방금······?”
 뿅······ 뿅······.
 찾았다!! 나는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을 던져 넣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먼 훗날 게임 중고 거래 기업 ‘소프트맙’이 들어설 곳이었다.
 지금이야 조그만 상가들이 줄지어 있지만 90년대 후반이 되면 줄지어 빌딩이 들어서게 되겠지.
 그렇게 난 아타리의 뒤를 이어 1980년대를 주름 잡을 위대한 게임기를 만났다.
 하지만 한 가지 깨는 점이 있다면 그 위대한 게임기의 첫 판매점이 길거리 좌판일 줄은 몰랐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딱 봐도 전문 판매직원이라기 보단 민텐도 본사 직원들이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홍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열의와는 정 반대로 대중들의 반응은 엄청나게 썰렁했다. 그래도 게임&워치를 발매한 민텐도라면 초반부터 어느 정도 불이 붙을 줄 알았는데, 이건 기대랑은 완전 정반대네······.
 그만큼 아타리 쇼크가 남긴 게임 산업 붕괴는 어마어마했다.
 물론 초창기 아타리사에서 오픈소스 툴로 누구나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장을 형성했을 때는 모두가 반겨했지만, 그것도 잠시 눈앞의 이익만 노리고 채 완성 되지도 않은 저질 게임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유저들의 반응은 급속도로 식어갔다.
 하지만 그 여파가 이렇게 빨리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까지 미치고 있을 줄이야······.
 “어서 오세요~ 저희 민텐도사에서 직접 만들어낸 차세대 8비트 게임기 패밀리입니다. 모두 한번 즐겨보세요~”
 나는 좌판에서 호객행위 중인 한 사원 앞에 다가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물론 내 앞에는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다소 투박한 디자인의 패밀리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많이 팔리나요?”
 “네? 아, 손님 어서 오세요. 일단 한번 플레이 해보시겠어요? 이번에 저희 민텐도에서 새로 개발한 최신형 8비트 게임기입니다.”
 왜 이렇게 8비트라는 단어가 웃기지? 나는 직원이 건네주는 컨트롤러를 받아 들었다. 헐······. 컨트롤러 줄이 너무 짧아!!
 2015년대의 콘솔은 블루투스 무선 기능이 활성화되어 멀리서 소파에 앉아 게임을 즐기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지만, 패밀리 초창기 모델은 게임기 본체에 1P와 2P 컨트롤러가 강제로 결합되어 있었다.
 결국 브라운관 TV 근처에서밖에 게임을 즐길 수 없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이따위로 만들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구조네.
 하긴 이 때만해도 이 녀석이 전 세계로 7천만대 가까이 팔려나가게 될 괴물 머신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 했을 테니까.
 단순히 게임&워치가 흥행하자, 그 이윤으로 제작된 제품이라 민텐도조차 초기에는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모양이다.
 패밀리는 총 3개의 게임과 함께 런칭 되었는데, 뽀빠이와 동킹콤 시리즈 2개뿐이었다.
 이 시기에도 NEGA 라던가 CAMCO 등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다수 존재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게임 센터용 기판을 제작하고 있던 터라 신생 콘솔인 패밀리는 아무 곳에서도 신경을 써주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대나 팔렸나요?”
 “아, 그게, 아직 한 대도······.”
 허~ 지금 시간이 오후 1시가 다되어 가는데 아직 한 대도 안 팔렸다고?
 “이게 지금 얼마죠?”
 “네. 14,800엔입니다.”
 비싸다. 1983년에 14,800엔이라니······. 하긴 검증 안 된 1세대 콘솔에 이정도 금액을 덜컥 주고 살 리가 만무하지.
 나는 일단 야외에 비치된 조그만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러자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동킹콤 좀 틀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카트리지 삽입구에 동킹콤 카트리지를 꽂아 넣고는 전원 버튼을 올렸다.
 빰빠바바밤~ 빰밤~ 피코 피코. 화면 아래에는 빨간 모자를 뒤집어쓴 이탈리아인 마리지가 거대한 쇠망치를 들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게임 방식은 위에서 킹콩이 던지는 나무통을 피하거나 망치로 부수며 꼭대기까지 올라가 킹콩을 물리치면 끝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좌우로 마리지를 움직여 점프를 시도하였다.
 통나무를 하나씩 넘을 때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오오······.”
 뾱뾱. 띠용~ 띠용~ 점프의 효과음 소리에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오오~!!”
 손쉽게 첫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고 나니 민텐도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굉장히 잘하시는데요?”
 “게임 센터에 많이 해봐서 그런지 금방 적응 했네요. 패밀리랑 같이 뽀빠이랑 동킹콤도 구입하겠습니다.”
 “저희 민텐도 패밀리의 첫 구매 고객. 감사합니다~!!”
 내가 이 전설의 게임기의 첫 구매 고객이라니······. 참 기분이 묘하군. 그때 한 직원이 카메라를 들고 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겠습니까?”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사진 한 장이라~ 나쁘지 않은데? 그때 내 등 뒤로 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도 저거 사줘~!!!”
 “안 돼. 타카시 잠깐 구경만 한다고 엄마랑 약속했잖니?”
 “그래도······. 내가 저 형보다 더 잘할 수 있단 말야~!!”
 어쭈? 꼬맹이가 아주 당찬데?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토시유키 타카시예요.”
 토시유키 타카시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가방 안으로 게임&워치를 숨긴 채 토시유키란 사람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아!! 그렇구나. 이 녀석이 설마 훗날 타카시 명인이라 불리게 될 최초의 프로게이머인가?
 1994년 출시되는 원더보이라는 게임에서 스피드 클리어의 달인이 될 슈퍼 플레이어.
 나는 유심히 아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게임 좋아하니?”
 “네!! 완전 좋아해요!!”
 “그래? 그럼 내가 너에게 선물할게. 저기 이 아이 것도 같이 하나 더 주세요.”
 그러자 타카시의 어머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말렸다.
 “저기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으니 받아주세요.”
 나는 민텐도 직원이 가져온 게임기 하나를 타카시에게 안겨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밌게 해라.”
 “형 고마워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저기, 고객님 사진은?”
 “첫 구매 기념사진은 이 아이랑 찍어주세요. 나중에 민텐도에서 이 아이에게 더 감사한 일이 생길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그런 일이 있을 테니 알아두세요.”
 나는 그날 민텐도의 좌판에서 게임&워치 몇 가지를 더 사들고 내가 머무는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호텔에서 주는 아침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는 패밀리 박스를 손에 들은 채 웃고 있는 소년의 사진이 작게 실려 있었다.
 
 * * *
 
 패밀리의 런칭 행사로부터 며칠 뒤.
 나는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묵직한 내 가방 안에는 몇 가지 종류의 게임&워치가 들어 있었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군······.”
 꼬르륵······ 열차 시간 맞추려고 아침을 거르고 나왔더니 배가 고프다.
 2015년 때야 출근 때문에 아침 굶는 게 다반사였는데, 이곳에 온 후로는 호텔에서 꼬박 조식을 챙겨 먹다 보니 버릇이 된 건가?
 남들이 보기에 한 달이 넘도록 호텔에 사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금은 1983년.
 모든 물가 수준이 엄청 내려가 있었고, 내가 묵고 있는 4성급 호텔만 해도 2015년에 비교하면 하루 숙박료가 모텔 대실료보다 저렴했다.
 “그래도 교토로 가게 되면 슬슬 집을 구하긴 해야 할 텐데, 막상 호텔을 나가자니 귀찮고······.”
 이미 교토의 호텔을 예약해둔 터라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도쿄역을 거니는 중이었다.
 그때 내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길목에 도시락을 파는 식당가가 줄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칸센은 안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지. 좋아~ 그럼 남은 시간에 도시락이나 하나 사야겠다.’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식당가로 걸음을 옮겼다.
 6~70년대의 경제 활성화를 거치며 버블 경제의 혜택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얼굴에 활기에 넘쳐 있었다.
 세계 경제 순위 2위에 빛나는 자부심이 느껴졌지만, 나에겐 그저 전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전범국이라는 인상만 강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뉴스를 틀 때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히로시마 피폭에 대한 피해를 호소하며 징징대는 꼴이 너무 보기 싫었다.
 참 2011년에는 후쿠시마 원폭 피해도 있었지······. 그러고 보면 일본은 방사능이랑 참 인연이 깊네. 아주 그냥 정들겠어.
 “어서 오세요~ 손님 무슨 도시락을 드릴까요?”
 “여기서 가장 인기 좋은 게 뭔가요?”
 “저희야 새우랑 치킨 도시락이 제일 많이 나가죠~”
 새우랑 치킨이라. 역시 1980년대에도 치느님의 인기는 여전하군.
 나는 인상 좋은 아주머니에게 300엔 동전을 내밀며 치킨 도시락을 주문했다. 그러자 뒤이어 다가온 한 중년의 남성이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저도 치킨 도시락 하나 부탁드립니다.”
 “아, 고객님 죄송하지만 치킨 도시락은 방금 이 분이 마지막 걸 구입하셔서 금방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얼마 정도 걸리죠?”
 “한 10분 정도인데 괜찮으세요?”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 사람 설마······.
 “아, 그럼 기차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이 집 치킨 도시락이 그렇게 유명한가?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눈앞의 남자에게 더 관심이 가고 있었다.
 신칸센 안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이건 생각지 못한 우연인데?
 “저기 괜찮으시면 제 걸 양보해 드릴게요.”
 “네? 아~ 아닙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사실 새우냐 치킨이냐 망설이던 차여서 아주머니. 치킨 도시락은 이 분에게 주시고 전 새우로 주세요.”
 “아,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저희 새우 도시락도 정말 맛있어요. 제가 서비스로 새우 하나 더 넣어 드릴 게요~”
 “감사합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 WIN WIN 하는 방향으로 도시락 값을 지불했다.
 “아,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남자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신칸센 탑승장으로 달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간이 만만치가 않네? 우선 나도 빨리 가야겠다!! 그렇게 잠시 후. 나는 신칸센에 오르는 플랫폼에 도착해 있었다.
 “A-17, A-17. 여기다.”
 탑승칸을 확인한 나는 살짝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기차에 올랐다.
 교토까지 3시간 반 동안 편하게 갈수 있는 비즈니스 석은 내부가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 자리를 찾아 다가가자 창 측 좌석에 낯익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기. 옆에 좀 앉겠습니다.”
 “아, 네 그러······. 어!?”
 “아,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이거 재밌는 우연이군요. 자, 어서 앉으세요.”
 나에게 자리를 권하는 이 남자는 니세코이 군페이 씨······.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의 아버지이자, 2015년까지 민텐도 휴대기기를 왕좌로 이끈 겜보이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나는 살짝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 이 모든 건 미래에서 가져온 게임&워치로 군페이 씨의 위치를 파악한 뒤 티켓 창구에서 그의 옆자리를 부탁한 내 계획 중에 하나였다. 도시락 집에서 만난 건 정말 우연이긴 했지만, 덕분에 그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까 도시락 집에선 정말 감사했습니다.”
 한 번의 호의에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는 건 역시 일본인답다.
 잠시 후 열차가 출발하고 우리는 사이좋게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한 입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계속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통에 먹다가 사례 걸릴 뻔했다.
 자판기에서 구매한 녹차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딱히 할 게 없던 나는 슬슬 작전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가방 안에 게임&워치를 꺼내는 것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 내가 꺼낸 게임기는 BALL이었다.
 그러자 게임&워치를 만들어낸 창시자답게 군페이 씨는 흐뭇한 눈으로 내손에 들린 게임기를 바라보았다.
 자기 자식 같은 게임기를 온 국민이 즐겨주고 있으니 즐겁기도 하겠지.
 뾱. 뾱. 화면 안의 작은 공이 왔다갔다거리자 작은 비트음이 객실 내에 울렸다.
 “죄송합니다. 시끄러우시죠?”
 나는 재빨리 볼륨 키를 내리며 군페이 씨에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계속해도 괜찮아요.”
 자기가 만든 게임기를 플레이하고 있어서인지 군페이 씨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역으로 그에게 게임&워치에 대한 불평을 쏟아냈다.
 “이왕 휴대용으로 만들 거라면 이어폰 잭 정도는 넣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네? 아, 하긴 그렇군요. 확실히 공공장소에서 사운드를 즐기려면 이어폰 잭이 필요한 거 같긴 하네요.”
 “그쵸? 아무리 게임이 화면으로 즐기는 거지만, 사운드도 중요한 거잖아요.”
 군페이 씨는 나의 불평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는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그 기계를 쓰면서 다른 불편한 점은 없나요?”
 “아주 많죠.”
 “그, 그렇게 많아요??”
 “우선. 기계 자체가 비효율, 비양심적이에요.”
 “네?”
 나를 바라보던 군페이 씨의 표정이 팍하고 구겨졌다.
 “전 민텐도사의 게임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게임&워치를 전부 구입했고 얼마 전에 발매한 패밀리도 출시 당일 아키하바라에 가서 구매했죠.”
 “아? 감사합니다.”
 “네? 왜 아저씨가 감사하다고 하세요?”
 “아? 아, 아닙니다. 말이 잘못 나왔네요. 계속 해보세요.”
 군페이 씨는 굉장히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 안에서 세 가지의 게임&워치를 꺼내 들었다. 물론 그 안에 2015년에서 가져온 게임 워치는 없었다.
 “정말 모두 가지고 계시는군요.”
 “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발매한 GUNMAN 조차 이어폰 잭이 없어요. 이건 서부극의 카우보이가 주인공인 만큼 총을 쏘는 효과음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는데, 이거 한번 소리 없이 무음으로 플레이 해보셨나요?”
 “아, 아뇨······."
 “한번 플레이 해보세요.”
 군페이 씨는 내가 건넨 GUNMAN을 받아 들은 뒤에 소리 없이 플레이를 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에게 게임기를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BALL이랑은 다르게 박진감이 확 떨어지네요.”
 “그렇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만든 건지 원······.”
 자기 자식 같은 게임기를 신랄하게 까대니 군페이 씨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게임기 한 대당 하나의 게임밖에 즐길 수 없다는 점이죠.”
 “아······?”
 “카트리지 교환 시스템은 70년대 아타리 때부터 시작했으니 나온지가 꽤 된 기술인데도 게임&워치는 출시하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카트리지 시스템을 차용 안하고 있죠. 이건 게임과 함께 기계까지 같이 판매해서 판매 단가를 올리려는 개수작으로밖에 안 보여요.”
 “개······. 수작? 하지만 스톱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동작표현이 불가능해서······.”
 “그게 바로 마지막 문제점이죠. 그렇기 때문에 게임들이 다 비슷해요. 스톱 애니메이션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단순히 빠른 조작의 노가다를 강요하죠. 그래서 이 게임은 끝이 없어요. 그냥 플레이어가 죽으면 끝이죠. 간단히 시간 죽이기엔 좋지만 성취감은 제로라는 겁니다.”
 “성취감이 없다고······?”
 군페이 씨의 안색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이쿠······. 너무 채찍질만 했나? 그럼 이제 슬슬 당근을 줘볼까?
 군페이 씨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훔치며 애써 나에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1941년생인 그는 1965년 민텐도에 취직하여 여러 가지 완구 제품을 만든 사람이었다.
 민텐도는 우리가 흔히 명절에 자주 즐기는 화투를 최초로 만들어낸 곳으로 트럼프 카드역시 일본에서 가장 먼저 수입해온 카드 회사로 유명하다.
 신입이었던 군페이 씨는 그곳에서 일정한 크기로 카드를 자르는 설비기계를 점검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업무가 너무 단순하여 자투리 시간에 남은 부품을 이용해 만든 장난감이 지금도 기념품 장난감 가게에 가면 자주 보이는 울트라 핸드였다.
 지그재그로 이루어진 철재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쥐면 앞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장난감을 완구점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걸 만든 게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낸 건 내 나이가 서른이 될 즈음이었다.
 그가 만든 게임&워치는 정확히 말해 게임기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화면이 달린 장난감을 만든 것이었다. 스펙이나 효율성보단 아이들이 즐겁게 갖고 놀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꽤나 유저층이 넓어져 지금은 전 국민의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게임&워치의 성공으로 회사에서도 칭찬 일색이었을 테고, 어딜가나 자기가 만든 게임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흐뭇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를 만나 자기가 만든 물건이 가루가 되도록 까이자, 심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장난질은 여기까지하고······.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만 손보면 엄청난 물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어떤 부분을 손보면 좋겠습니까?”
 “우선 스톱 애니메이션 방식의 이 액정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좀 더 다양한 게임을 즐기기 위해 유동적인 표시가 가능한 디스플레이와 카트리지 방식을 채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가방에서 공책 한권을 꺼내 연필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1989년에 출시될 민텐도 겜보이의 원형 디자인이었다. 군페이 씨는 내 손에서 그려지는 휴대용 겜보이의 입체도면을 바라보며 점점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 잠깐······. 이 액정 뒤에 비어 있는 거대한 공간은 무엇입니까?”
 “카트리지를 넣을 공간입니다.”
 “아, 그럼 이 밑은 전원부와 스피커군요. 컨트롤러는 지난주에 출시한 패밀리와 같고······. 아? 그런데 왜 버튼이 수평이 아니고 사선으로 넣은 거죠?”
 “실제로 게임&워치를 플레이 하는 중에 느낀 건데, 일직선 배열보다는 사선 배열이 플레이하기가 더 쉬워요. 버튼을 잘못 누르는 경험도 적고요.”
 “과연······.”
 “만약에 게임&워치의 뒤를 따르는 새로운 형식의 휴대용 게임이 제작이 된다면 이러한 형태가 좋을 것 같네요.”
 “4:3 비율의 유동 표시 액정화면에 카트리지 교환 방식이라······. 하지만 이걸로 과면 몇 가지나 게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민텐도는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닙니다. 모든 직원이 게임 개발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이러한 기기를 만들면 적어도 몇 년 동안 꾸준히 게임이 나와 줘야 할 텐데요?”
 “민텐도는 지금처럼 동킹콤 같은 상징적인 게임만 몇 개 내주면 됩니다. 이 기기의 수요가 지금의 게임&워치만큼 늘어나게 된다면, 아마 현재 아케이드 쪽에 주력하고 있는 대부분의 게임 회사들이 서로 게임을 출시하기 위해 몰려들 테니까요.”
 “아,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건······.”
 “물론 그들로부터 로열티를 얻어내는 거죠. 소프트 판매 수익의 절반을······.”
 “아~!!”
 군페이 씨는 감탄사와 함께 무릎을 탁 내려쳤다. 벌어진 그의 입은 다물어질 줄은 몰랐고, 연신 식은땀을 훔치며 연습장에 그려진 도면을 살피고 있었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그 도면은 미래와의 조우와 다름없는 혁신 그 자체였으니까.
 “놀라워······.”
 판매 수익의 절반이면 거의 폭리나 다름없는 로열 티지만, 아직 아무도 뛰어들지 않은 휴대용 시장에 대해선 얼마를 부르든 부르는 게 값이다.
 그만큼 경쟁 기기가 생기기 전에 시장의 선점은 중요한 것이었다. 아마 90년대로 들어서면 NEGA와 반자이 사에서 독자적인 휴대용 콘솔을 제작하게 되겠지.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본래 89년에 등장해야 할 이 물건의 탄생이 조금은 앞당겨질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교토로 향하는 동안 새로운 휴대용 콘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제법 친해졌다.
 군페이 씨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크게 놀라워했다. 너무나도 능숙한 일본어 발음에 일본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희 열차는 곧 종점 신오사카, 신오사카 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열차 도착이 가까워지자 군페이 씨는 굉장히 아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강 군. 혹시 교토에 머무른다면 어디에 있을 건가?”
 “글쎄요? 일단은 호텔에 머물며 관광지나 다녀오려고요. 도쿄는 딱히 볼게 없었는데, 오사카는 먹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고 들어서 기대가 되네요.”
 “그래? 확실히 오사카 지역 사람들이 훨씬 붙임성도 있고, 맛있는 것도 많지. 혹시 말이야. 호텔이 정해지면 이쪽으로 전화를 주지 않겠나?”
 나는 군페이 상이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 들은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선 약간의 액션이 필요하긴 하지. 군페이 씨는 내 반응에 활짝 웃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바로 그 게임&워치를 만든 니세코이 군페이라네. 오늘 강 군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점이 많아. 그래서 꼭 다시 한번 강 군과 만나고 싶다네. 우리 회사는 교토에 있으니 언제든 편할 때 연락 주게.”
 “아, 제가 니세코이 씨를 몰라 뵈고 큰 실수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냐, 오히려 오늘 강 군을 만난 게 나에게 큰 행운이었어. 덕분에 맛있는 치킨 도시락도 먹었고 말이야~ 하하~”
 “그렇다면 조만간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네.”
 “네, 그럼~”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각자의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 쬐는 오사카역을 빠져나온 나는 미리 짐을 부쳐둔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이곳에서 한 달을 넘게 생활했어도 통장의 20억 엔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예치한 금액의 은행 이자 만으로도 내 통장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마냥 이자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아~ 빨리 신용카드가 보편화 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맨날 현금 들고 다니니 귀찮아 죽겠네······.
 
 * * *
 
 맴~ 맴~ 맴~ 맴~
 ‘아오······. 시끄러. 잠 좀 자자······.’
 맴~~ 맴맴~ 맴~
 빌어먹을 매미 새끼들.
 잠시 후 호텔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이불을 걷어 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1983년 8월 17일 한 여름. 연간 기온 중 가장 정점을 찍는 폭염의 기간이었다.
 그래도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은 지어진지 얼마 안 된 신식이라 그런지 방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나라와 고베, 교토 지역의 관광 명소를 실컷 즐긴 나는 지갑에 넣어 두었던 한 사람의 명함을 꺼내 보았다.
 “한 달 동안 즐길 건 다 즐겼고, 이제 슬슬 전화를 걸어볼까?”
 나는 니세코이 씨에게 받은 명함을 손에 쥐고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차라라락 소리와 함께 숫자가 적힌 다이얼이 원래자리로 돌아가고 잠시 기다리자, 상냥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민텐도 휴대용 장난감 개발 파트입니다.”
 “아, 실례합니다. 혹시 니세코이 군페이 씨가 계신가요?”
 “니세코이 님이라면 자리에 계십니다만,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
 “한국인 유학생 강준혁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심심한 기분에 목재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니 방 안에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흥분에 가득한 니세코이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반가움에 가득 차 있었다.
 “강 군!? 자넨가? 이 사람아 왜 이제야 전화를 한 건가.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 그거야 내 마음이지. 다음 날 홀랑 전화 걸어서 만나자고 하면 무게감이 떨어져 보이잖아.
 “잘 지내셨나요? 여기 저기 좀 둘러보느라 연락이 늦었습니다.”
 “자네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은 오사카 니혼바시 근처에 있는 리쿠텐 호텔에 묵고 있어요.”
 “잘 됐군. 안 그래도 내일 오사카 쪽에 볼일이 있어 가볼 참인데 잠깐 볼 수 있나?”
 “그러죠. 어디서 볼까요?”
 “자네가 묵고 있는 호텔 연락처 좀 알려주겠나? 내가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주지.”
 “네,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오니 호텔 프론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은 니세코이 씨와의 전화 연결이었다.
 “강 군. 한 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이네만, 혹시 시간이 괜찮은가?”
 “네, 그런데 어디서 뵐까요?”
 “장소는 걱정 안 해도 되네. 지금 자네 호텔로 가고 있으니까.”
 “네!?”
 “어제 자네 전화를 받고 한숨도 못 잤다네, 바로 오늘 두 명의 천재가 만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돼서 말이야.”
 두 명의 천재? 누구랑 같이 오는 건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나는 호텔 로비에 앉아 군페이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약속에 철저한 사람들답게 얼마 안 있어 호텔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내렸다. 한명은 익히 알고 있는 군페이 씨였고, 그를따라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군페이 씨와 함께 호텔로 들어왔다.
 “강 군~!!”
 “니세코이 씨~ 안녕하셨어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그래 오사카 여행은 잘했나?”
 “네. 역시 도쿄보다 볼게 많더군요.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아, 그렇지. 어이 쿠마모토. 인사하게 일전에 내가 이야기한 신칸센의 그 청년일세.”
 “안녕하십니까. 쿠마모토 시게루라고 합니다.”
 “쿠마모토 시게루 씨!?”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치자 쿠마모토 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절 혹시 아세요?”
 “아, 죄송합니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동킹콤을 만든 디렉터 분 아니세요?”
 “네. 맞아요. 동킹콤을 즐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악수를 청하는 쿠마모토 씨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세상에 전설의 디렉터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군페이 씨를 엮어서 민텐도에 들어갈 때까지는 힘들 줄 알았는데, 설마 군페이 씨가 여기로 데리고 올 줄이야······.
 쿠마모토 시게루. 비록 게임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슈퍼마리지라는 콧수염 난 배관공 캐릭터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카린의 전설과 동물의 마을. 폭스스타 등 민텐도를 대표하는 이 모든 게임이 앞으로 이 사람에게서 탄생할 작품들이었다.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쿠마모토 씨.”
 “군페이 형님이 무조건 꼭 만나보라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쿠마모토 시게루 씨는 내가 살던 2015년에는 62세의 나이로 꽤나 딱딱 이미지였는데, 1983년에서 만난 그는 갓 서른을 넘긴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였다.
 “자~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기도 뭐하니, 자리를 옮기지. 조금 이르지만 점심 식사라도 함께하는 건 어떤가?”
 “네, 그러죠.”
 호텔에서 나온 우린 근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간단한 식사를 주문한 뒤 나는 미소와 함께 쿠마모토 씨에게 말을 걸었다.
 “현재 미국 아케이드 시장에서 동킹콤이 엄청난 인기라던데 축하드려요.”
 “저도 이렇게까지 제가 만든 게임이 성공할 줄은 몰랐네요. 민텐도 미국지사에서 게임센터에서 돌릴 롬 기판 하나를 요청했는데, 마침 제가 한가했던 터라 간단히 만들어 본건데······.”
 그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지.
 1980년 미국 아케이드 시장에 진출해 있던 민텐도는 게임센터에서 가동 시킬 새로운 롬 파일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익이 날지 안 날지도 모르는 사업에 쓸데없는 인력을 소모 시킬 순 없다’라고 해서 차출된 것이 바로 당시 민텐도 내에서 별로 일거리가 없던 쿠마모토 씨였다.
 공학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선 완전히 문외한 이었지만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고 도트를 찍어내는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었기에 간단한 레벨 디자인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킹콩에게 붙잡혀간 미녀를 구해내는 동킹콤이었다.
 그 게임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 어마어마한 흥행을 불러 일으켰고 침체기로 들어서던 아케이드 시장에 한줄기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동킹콤의 플레이 캐릭터였던 마리지를 소재로 한 마리지 브라더스가 출시되었고,
 그리고 1985년······. 대망의 슈퍼마리지가 패밀리에 등장하며 민텐도는 아케이드 사업을 철수하고 오로지 가정용 게임기 산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00명의 범재보다 1명의 천재라는 사상으로 시작된 민텐도의 게임 사업을 2015년까지 먹여 살릴 능력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80년에 출시한 동킹콤의 후속작은 언제쯤 개발 예정인가요?”
 “사실 거의 다 제작이 완료 되었고, 곧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요? 혹시 어떤 게임인지 여쭤 봐도 되나요?”
 아직은 게임에 대한 저작권이 빈약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쿠마모토 씨는 자신이 개발한 게임에 대해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살짝 발상을 뒤집어서 전작의 동킹콤에서 미녀를 구하던 주인공 캐릭터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봤습니다.”
 역시 지난달에 출시한 패밀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벌써 완성이 되어 있었군.
 군페이 씨는 그런 우리들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쿠마모토 씨의 마리지 브라더스는 동킹콤과 같이 하나의 스테이지 안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버섯 병사와 거북이를 물리치는 2인용 게임이었다.
 나는 쿠마모토 씨와 마리지 브라더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중 그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그런데, 말이죠. 쿠마모토 씨.”
 “네. 마리지 브라더스에 대해 뭔가 의문점이라도 있나요?
 “아뇨. 사실 이미 출시를 앞두고 있는 완성 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이 마리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네요.”
 “다음 작 말씀이십니까? 아직 이 새로운 게임이 유저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차기작 준비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상대적으로 차기작의 발매 텀이 길었던 1980년대. 2015년에서는 하나의 게임을 만드는 도중에도 이미 신규 IP를 제작하는 마당이었기에 쿠마모토 씨의 여유 있는 발언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껴졌다.
 “마리지라는 캐릭터는 현재 제가 보기엔 동킹콤을 거치며 굉장히 친숙한 이미지가 되었죠. 따라서 당신이 만든 마리지 브라더스는 어느 정도 중박 이상을 치게 될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차기작에는 이 마리지라는 게임에 새로운 방식을 적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새로운 방식이요?”
 쿠마모토 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군페이 씨는 마치 ‘시작되었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묘한 미소와 함께 안경을 쓸어 올렸다.
 
 * * *
 
 횡스크롤. 화면이라는 사각의 틀에서 구원할 마법의 단어. 2015년에는 흔하디흔한 플레이 방식 중에 하나지만 지금은 1983년이다.
 이 시기의 모든 게임들은 모니터라는 사각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모든 플레이의 시작과 끝은 한 화면에 표시가 되어야만 했고, 그것은 그 유명한 겔러그와 동킹콤도 마찬 가지였다.
 마치 인류가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기듯이 나는 여기서 게임 계의 큰 변화를 줄 발자국을 남기려 하고 있었다.
 “배경을 스크롤시키는 겁니다.”
 “네? 뭘 한다고요?”
 처음엔 쿠마모토 씨와 군페이 씨는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단번에 횡스크롤 방식을 이해 하긴 힘들겠지.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쿠마모토 씨 앞에 놓고 펜을 들었다.
 “자. 보세요. 이 사각틀이 게임이 표시되는 디스플레이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 쿠마모토 씨의 마리지가 서 있죠. 그리고······.”
 나는 펜을 화면 바깥으로 뻗어 내며 길게 줄을 그었다.
 “그리고 이게 스테이지입니다.”
 “아!!!”
 그 순간 쿠마모토 씨는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군페이 씨는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우리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그렇군요!! 맞아요. 꼭 시작과 끝을 한 화면에 표시할 필요가 없지요. 마치 영화관의 영사기를 돌리듯 길다란 배경을 옆으로 흘리며 캐릭터가 마치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로군요.”
 역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는 것이 이런 걸까? 단지 힌트만 주었을 뿐인데, 쿠마모토 씨는 단번에 횡스크롤의 개념을 이해 해버렸다.
 “군페이 형님. 형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강준혁 군은 천재에요!! 천재라고요!!”
 “이······. 이 봐 시게루 군. 난 아직 무슨 얘기인지 도통 모르겠네. 모니터 밖으로 삐져나온 이게 스테이지 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화면 밖에 스테이지를 어떻게 보여주느냔 말일세······.”
 그러자 쿠마모토 씨는 조금 더 군페이 씨가 알기 쉽게 설명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군페이 씨는 입이 쩍 벌어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자넨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이건 지금까지 생각해온 게임의 틀을 완전히 바꿔버리는군.”
 “이걸로 플레이어는 좀 더 게임 안에서 모험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쿠마모토 씨는 내가 그려낸 횡스크롤 방식을 보며 주문을 외우듯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지? 잠시 동안 그는 무언가를 상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쿠마모토 씨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 차기작에 대한 간단한 구상을 해보았습니다.”
 벌써? 그 짧은 시간 안에 차기작이 떠올랐다고? 쿠마모토 씨는 탁자에 놓인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정신없이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벽돌과 물음표 상자. 버섯과 깃발······. 그것들은 차후 슈퍼 마리지에 등장 할 기본 소스가 되는 아이템 들이었다.
 “공주를 구하는 마리지입니다.”
 “공주?”
 “지금까지 공주를 구하는 건 기사였지만, 마리지는 현대인입니다. 현대인을 대변하는 그가 버섯 왕국의 공주님을 괴물에게서 구출해내는 거죠.”
 쿠마모토 씨의 말에 군페이 씨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호오······. 이번에도 재미있는 발상이로군. 계속 해보게······.”
 “우선 마리지라는 캐릭터는 배관공입니다. 항상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일을 하죠. 그러니 괴물은 음······. 차갑고 축축한 느낌의 파충류 형태가 어울릴 듯하군요. 이 괴물이 버섯 왕국에서 공주를 납치해 가고, 우연히 버섯 왕국에 떨어진 현대인 마리지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며 적과 싸우는 겁니다.”
 뭐야 이 사람. 그 짧은 시간에 게임 하나 다 만들었네? 과연 천재는 천재구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쿠마모토 씨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30년 동안 게임계에 커다란 임팩트를 주게 될 희대의 명작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군페이 씨는 흥미로운 미소를 띠우며 쿠마모토 씨에게 물었다.
 “그럼 그 괴물과 공주 캐릭터도 이름이 있어야겠군.”
 그러자 쿠마모토가 나에게 물었다.
 “강 군. 강 군이 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 뭐가 있습니까?”
 “저요? 글쎄요.”
 그 순간······. 지금까지 일본을 돌며 돈까스나 덮밥 같은 느끼한 것들만 먹다 보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이 하나 있었다. 뜨끈한 뚝배기 안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고깃국······. 거기에 밥 한 공기를 딱 말아서 김치 한 조각 올려 먹으면~ 캬~~
 “국밥이요.”
 “쿡팟?”
 “국. 밥. 이요.”
 “굽. 박?”
 아무래도 둘 다 받침이 있는 글이다 보니 일본인이 발음 하긴 좀 힘들겠지······. 그러자 몇 번 국밥을 발음해보려고 노력하던 쿠마모토 씨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강 군의 아이디어가 추가된 작품이니 파충류 괴물 이름은 쿳파로 하죠.”
 뭐라고!? 야 인마. 그렇게 쉽게 결정하는 거냐!? 그리고 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30년 동안 마리지한테 고통 받아야 할 악당인데!! 그러자 옆에 있던 군페이 씨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공주 이름은 뭘로 할 텐가?”
 그때 때마침 식사 후 디저트를 내오던 여종업원이 과일을 올리며 말했다.
 “후식으로 나온 복숭아입니다.”
 그러자 핑크빛으로 물든 복숭아를 바라보던 쿠마모토 씨가 입을 열었다.
 “피치 공주라고 하면 되겠네요.”
 이것이 앞으로 30년간 괴물 쿳파에게 납치 될 운명을 가진 피치 공주의 탄생이었다. 뭐가 이따위야~!!!
 
 * * *
 
 그로부터 2주가 흐르고, 나는 정장차림으로 민텐도 본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하아······.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군. 지난 두 달 동안 잘도 쉬었으니까,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볼까?”
 길게 한 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본사 건물로 들어섰다. 9월 이지만 아직도 폭염이 지속 되던 탓에 정장을 입기엔 더웠지만, 본사 건물 내부는 한기가 들 정도로 냉방이 엄청났다. 아직 냉방병에 대한 별다른 주의가 없던 시기라 그런지 거의 최저 온도로 냉방을 가동 시키고 있었다.
 “추······. 추워!!”
 “무슨 일로 오셨나요?”
 로비에 있던 안내 직원이 건물에 들어온 나에게 물었다.
 “아, 니세코이 씨와 쿠마모토 씨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왔습니다만······.”
 “아? 그렇다면 혹시 강준혁 님이 되시나요?”
 “네, 맞아요.”
 “한국인이시라고 하길래 걱정했는데,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음, 강준혁 씨는 이번에 특별 면접 대상이라 사장실에서 직접 면접을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네?”
 인사과나 그런 게 아니고 사장실에서 직접 면접을 본다고? 민텐도 사장인 카마우치 씨랑?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직원에게 재차 물었다.
 “사장님께서 직접 면접을 보신다구요?”
 “네, 저희 민텐도는 카마우치 사장님이 직접 한 분 한 분 면접을 보고 그에 맞는 부서로 배속시키고 있습니다.”
 게임회사라기 보단 장난감 회사로서의 이미지가 더 부각되어 있던 민텐도는 아직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진 않았다. 나는 데스크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기 전 나는 살짝 마른 침을 삼킨 뒤 가슴을 진정 시켰다. 이것도 면접이라고 떨리긴 하네······.
 “들어가 보세요.”
 직원이 문 안쪽으로 공손이 손을 내밀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 테이블에 나를 앉힌 후 물었다.
 “흠······. 자네가 한국에서 왔다는 강준혁 군인가?”
 “네, 그렇습니다.”
 “군페이 군과 시게 군이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자네를 꼭 데려오고 싶다고 나에게 사정하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나는 사실 게임이란 매체가 그리 탐탁치는 않네만, 그들이 이야기하길 앞으로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에 게임 산업이 큰 축을 맡게 될 것 같다고 하더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이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뭔 질문이 이리도 많은 거냐?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질리기가 않기 때문이죠.”
 “질리지가 않는다?”
 “하나의 기기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가 있고요.”
 “게임기 하나로 혼자서 질리지 않게 놀 수 있다라······. 재미있군. 하지만 장난감이란 모름지기 쉽게 질려야 새로운 물건이 나가지 않겠나?”
 “게임기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뭐?”
 “장난감을 어른들이 갖고 놀진 않지요. 이미 일본은 많은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게임을 즐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게임 센터에만 해도 아이들을 데리고 게임 하러온 어른들이 많이 있죠. 그만큼 게임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아우르는 산업이 될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아타리 쇼크로 70년대와는 달리 게임 산업이 침체되고 있는 와중에 현재 우리가 게임 산업에 뛰어드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군.”
 “모두가 물러설 때 오히려 한 발짝 다가가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허? 나보고 오히려 이 지옥 바닥에 뛰어들어보라고?”
 “아무도 뛰어들지 않았으니 뛰어들기만 한다면 민텐도의 독점 시장이 될 겁니다.”
 “독점이라~ 하하 그거참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소리군.”
 카마우치 사장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어 제쳤다.
 “군페이 녀석 말대로 자네 참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나이가 어리지만 마치 미래를 꽤 뚫어 보는 것처럼 확신이 담긴 목소리야.”
 카마우치 사장의 말에 나는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닌가 보군. 나이가 들면 시력을 잃어도 혜안을 얻는다더니······.
 “하지만 말이야······. 일본 내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조그만 섬나라에 갇혀 있는 인구보다 미국 시장에서 통해야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있지.”
 “민텐도는 현재 미국에 지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게임 산업보다는 장난감 산업에 더 주력하고 있지. 현재 미국의 게임 시장은 아타리 쇼크의 타격으로 완전 죽은 사업이 되어 버렸어. 현재 어떤 완구점에서도 우리 패밀리 게임기를 받아주질 않고 있단 말이지.”
 미국 역시 1980대에는 게임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보다 장난감 가게에서 게임기를 매입하여 판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즉 아무리 훌륭한 게임기라도 장난감 가게를 뚫지 못하면 진열해 놓고 팔 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게임기가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요.”
 “뭐!? 게임기를 게임기가 아니라고 하고 팔라고? 자네가 아직 젊어서 뭘 모르나 본데, 그런 짓은 상품 판매 규정에 위배되는 짓이야.”
 “박스 안에 대충 앞뒤로 움직이는 로봇이라도 하나 끼워 넣고 장난감이라고 파세요.”
 “뭐······?”
 나의 대답에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던 카마우치 사장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해외 영업부냐? 지금 당장 내 방에 올라와서 신입 사원 데려가.”
 그래서 난 그 날로 게임 개발 파트도, 그렇다고 콘솔 제작 파트도 아닌 민텐도 사의 해외 영업 파트에 배속 되었다.
 이거 뭔가 좀 꼬여가는 기분이 드는데?
 야 인마들아!! 나 게임 개발자라고!! 너희 지금 큰 실수 하는 거야!!
 
 * * *
 
 그다음 날.
 나는 민텐도 사에서 제공해 준 기숙사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흐음······. 호텔보다 별로긴 하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숙박시설이라~
 나쁘지 않은데?
 무엇보다 회사도 가깝고, 살짝 사육당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건 그냥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자.
 1980년대 회사 업무의 시작은 국민체조부터 일 줄이야······. 지금 나는 회사 사옥 앞의 마당에 서서 구령에 맞춰 체조를 하고 있었다. 설렁 설렁 하려고 해도 주변 직원들이 너무나도 열심히 하는 탓에 나 역시 뻣뻣한 자세로 체조를 따라 하였다.
 “오늘도~!! 힘차게!!”
 “와아아아~”
 마지막 구호를 마치자 민텐도의 직원들은 마치 적진으로 돌격하는 병사들 마냥 뜀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미치겠네······.”
 나는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1980년대는 개인주의보다는 단체주의 사상이 중시되는 묘한 시대였다.
 
 * * *
 
 “사장님. 어째서 강 군이 해외 영업 파트인 겁니까? 제가 추천했으니 당연히 휴대용 콘솔 제작 파트에 넣어 주셨어야죠······.”
 “아니 군페이 형님. 형님이 강 군 만나보라고 해놓고 자기 개발 파트로 쏙 빼가려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대화를 나눠 보니 강 군은 게임 소프트 개발 파트로 와야 합니다.”
 “시끄러!! 모든 면접은 나를 통해 내가 적임이라고 생각하는 부서에 배속시킨다. 강준혁 군은 무조건 해외 영업 파트야. 저 녀석 이력서에도 특기가 영어로 되어 있었다고, 더구나 이놈은 미국 시장에서 크게 한방 먹여줄 녀석이란 말이다!!”
 민텐도를 이끌어갈 세 우두머리가 나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내 부서가 해외 영업 파트로 발령이 나자 공고문을 본 군페이 씨와 시게루 씨는 동시에 사장실로 득달 같이 올라와 나를 데려가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웠다.
 “야 이 자식들아!! 내가 사장이라고!!”
 카마우치 씨는 사장의 호통에 결국 군페이 씨와 시게루 씨는 조용히 입 닫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구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가 원하는 부서에 배속시키겠다고 싸우고 있는데 당사자 입장에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지만 계속 이 상태로 둘 수도 없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저도 한마디 해도 될까요?”
 “뭐? 신입 사원이 윗사람들 얘기하는데 깡도 좋군. 좋아 어디 얘기나 들어보자.”
 “계속 이 상태면 결론이 안날 것 같아서 간단히 교통정리를 해드리려는 거죠.”
 “교통정리? 이 녀석 비유가 좋은데? 하하~”
 카마우치 사장은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 결단이 빠른 남자였다.
 “우선 니세코이 씨. 일단 저는 이미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의 초안을 전부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픽을 유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와 카트리지 시스템만 있다면 이미 다음 휴대용 기기로서의 골자는 완벽합니다. 성능은 현재 8비트 패밀리 수준은 어려울 테니 최소한 의 사양으로 우선 판매가에 중점을 두어 보세요. 현재 패밀리 가격이 14,800엔이니 적어도 그보다는 저렴해야 사람들도 납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단돈 1,000엔이라도 금액을 낮출 수 있는 방향이 있다면 그렇게 진행을 해보세요.”
 “흠······. 확실히 그렇겠군. 카트리지 시스템은 우리 쪽 인력을 사용하면 되겠고, 그렇다면 유기 표현 디스플레이 단가를 얼마에 맞추느냐가 관건이군.”
 “일단 제작이 들어가면 대량 발주가 예상이 되니 공개 입찰을 해보세요. 그편이 좋은 물건을 좀 더 저렴한 단가에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카마우치 사장은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놈 보소? 나이도 어린 게 경영에 빠삭한데?”
 나는 카마우치 사장을 향해 빙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다음은 사장님. 저를 해외 영업부에 배속 시켜주신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패밀리를 미국 시장에서 성공시켜 보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 하라는 말씀은 마세요.”
 “뭐라고라?”
 “현재 패밀리는 일본에서도 시작 단계입니다. 미국에서 통할만한 타이틀이라고는 동킹콤 하나뿐입니다. 이대로라면 미국인들에게 그저 ‘동킹콤 머신’으로 불리며 다른 타이틀은 팔려나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혼자 기계와 소프트를 독자 공급하고 있지만, 조금만 기다리시면 분명 아케이드 쪽 게임 회사들도 우리 패밀리에 눈길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죠. 그래서 시게루 씨가 필요한 겁니다. 현재 시게루 씨가 구상 중인 타이틀은 아마 발매와 동시에 대히트를 기록할 녀석으로 생각됩니다. 현재는 그 타이틀에 주력하여 최단 시간 내에 발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기판 제작을 먼저 해서 미국의 게임 센터에 공급을 하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미국 시장에서 패밀리를 판매할 때 엄청난 무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 내 교통정리는 여기서 끝.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민텐도 사장질 하면서 이렇게 따박따박 말로 치고 들어오는 직원은 처음 본다. 어이 군페이. 한국인들은 원래 이래?”
 “그, 글쎄요?”
 “성격 하난 시원해서 좋구만~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시게루. 오늘부터 강 군 데리고 그놈의 마리진지 머시긴지 그것 좀 빨리 만들어 봐.”
 “네, 알겠습니다~!!”
 시게루 씨는 사장의 결정에 만족한 듯 힘차게 대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같이 만들어 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릴 전설의 게임을······.
 
 * * *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뭔가 잘 안 되세요?”
 “아, 강 군 마침 잘 왔어. 새로운 마리지 게임에 횡 스크롤 도입은 괜찮은데 말이야. 뭔가 움직임이 좀 어색해 보이지 않아?”
 “아~ 그래요?”
 시게루 씨와의 공동 작업은 나에게 있어서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미 슈퍼마리지에 대한 기본적인 진행 구조는 시게루상과 나의 아이디어로 인해 미친 속도로 제작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벌써 며칠째 시게루 씨는 비어 있는 스테이지에서 마리지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고심하고 있는 정답에 대해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굳이 알려주진 않았다.
 마치 수능 시험 답안지를 손에 쥔 채 테스트 중인 학생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정답을 공개하면 슈퍼마리지가 더욱 빨리 제작이 될 수 있었지만, 나는 지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
 “시게루 씨. 패밀리 게임용 데모 디스크가 도착했는데요?”
 “아, 지금은 좀 바쁘니 거기 테이블 위에 놓아두세요.”
 여전히 마리오의 움직임에 대해 연구 중이던 시게루 씨는 직원이 가져다준 소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타리 쇼크를 교훈 삼은 민텐도는 양질의 게임을 판매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패밀리에 출시될 게임들을 검수하고 있었다. 검수는 개발부서인 우리가 직접 플레이를 해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여 합격이 되면 카트리지로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는데, 2015년에 비유를 하자면 어플리케이션을 만든 제작사가 앱스토어에 출품하기 전 검수 받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다.
 나는 바쁜 시게루 씨를 대신해 테이블 위에 놓인 소포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는 HEG 연구소 라는 다소 묘한 이름의 회사명이었는데, 그 밑에 쓰여 있는 담당자 이름을 본 나는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왔다. 드디어 왔어!!’
 카와타 사토시라는 담당자 이름에 나는 서둘러 소포를 뜯어보았다. 조그만 플로피 디스크에 쓰여 있는 게임 이름은 ‘벌룬 파이트’였다.
 그래 난 지금까지 이것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강 군? 왜 그래······?”
 “시게루 씨 우리 기분 전환 겸 이거 검수나 같이 해볼래요?”
 “그럴까? 아~ 진짜 도저히 모르겠네······ 분명히 조작하는 대로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데, 왜 횡스크롤만 씌우면 이렇게 이질감이 느껴질까?”
 “너무 깊게 생각는 것보다 이거라도 하면서 잠시 머리 좀 식히죠~”
 “이런 기분에 쿠소(쓰레기) 게임 하게 되면 더 기분 잡칠 것 같은데?”
 “그래도 어차피 검수는 하셔야 하잖아요.”
 나는 시게루 씨와 함께 탁자에 앉아 HEG 연구소에서 보내온 플로피 디스크를 틀어보았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타이틀 화면이 등장하자 우린 기본적으로 아래위로 십자 방향키를 움직여 보았다. 1P, 2P로 나뉘어 있는 게 둘이서도 즐길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음~ 첫 느낌은 나쁘지 않은데? 시작해 봐.”
 나는 2인용 모드에서 스타트 버튼을 눌러 게임을 시작했다. 잠시 후 화면에는 3개의 풍선에 매달린 파란색 과 빨간색 캐릭터가 양쪽 끝에 놓여 있었다.
 “보기엔 평범한데?”
 나는 살짝 A 버튼을 눌러 캐릭터를 공중에 띄워 보았다. 그러자 캐릭터는 마치 정말로 풍선에 매달린 것처럼 살짝 날아오른 뒤 착지했고, 연속으로 버튼을 누르자 뽈뽈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주어진 화살로 몰려오는 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슈팅 게임이군······.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움직이기가 어렵지?”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마치 정말 풍선에 매달린 것처럼 조작이 쉽지 않은데요?”
 “왜 방향키를 눌러도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 거야!? 으아~~”
 팡~!! 결국 적에게 부딪힌 시게루상의 캐릭터는 풍선 하나를 잃고 말았다.
 “풍선 하나를 잃으니 조작이 더 어려워졌잖아~!!”
 팡~~!! 하지만 나는 요리조리 적들을 피해 다니며 화살로 적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어릴 때 많이 해봤기 때문에 조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벌룬 파이트의 묘미는 버튼을 연타해서 캐릭터를 높이 띄우는 것보다 적절한 시기에 풍선버튼을 이용해 통통 튀기듯 움직이는 것이 포인트였다.
 “강 군은 조작이 어렵지 않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하는 거야?”
 시게루 씨의 물음에도 나는 그저 웃으며 캐릭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날린 화살이 빗나가며 시게루 씨의 마지막 남은 풍선을 관통했다. 팡~!! 삐로로로로······.
 “뭐야!? 아군 화살에도 맞고 터지는 거야? 이런 게 어딨어!!”
 “음~ 저 같은 경우엔 오히려 더 재밌는데요?”
 “뭐!? 안 돼!! 강 군~!! 오지 마!! 오지 마아~!!!”
 팡~!! 팡~!! 나는 시게루 씨가 쏘아대는 화살을 요리조리 피한 뒤 몸통을 부딪쳐 풍선을 터뜨렸다. 그 결과 눈 깜짝할 새에 시게루 씨는 GAME OVER가 되었다.
 “야, 한판 더해. 아군을 죽이다니 치사한 놈.”
 이게 바로 벌룬 파이트의 묘미지······. 그 날 오후 우리 개발 파트 사람들은 돌아가며 벌룬 파이트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군의 풍선을 터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 묘한 재미를 주고 있었다. 결국 게임은 적을 무찌르는 대신 공격해 들어오는 아군 캐릭터를 피해 누가 살아남느냐가 관건이 되어 버렸다.
 “아~ 이거 진짜 재밌는데? 조작감만 조금 손보면 훌륭한 게임이 되겠어~!!”
 개발 부서 직원 중에 하나가 벌룬 파이트를 즐기며 감탄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전 오히려 이 조작감 덕분에 게임의 재미가 배가 되는 느낌인데요?”
 그러자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던 시게루 씨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조작은 불편한데 말이야. 굉장히 자연스러워. 정말 실제로 풍선을 조작하는 느낌이랄까? 왜 이런 거지?”
 그 순간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빠르게 버튼을 연타했다. 그러자 풍선에 매달린 캐릭터는 재빨리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시게루 씨의 눈이 번뜩였다.
 “가속계?”
 드디어 알아 내셨군······. 그러나 함께 있던 개발진들은 시게루 씨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지 못하고 있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캐릭터의 움직임에 가속도를 도입한 거야!! 그래 맞아. 속도가 정점에 올랐을 때 반대 방향으로 키를 입력하면 당연히 관성에 의해 튕겨 나갈듯한 느낌이 들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이 조작이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은 거야. 이런 세상에 설마 관성 작용을 프로그래밍 해내다니. 이 게임 만든 곳이 어디지!?”
 “HEG 연구소의 카와타 사토시라는 분인데요??”
 “지금 바로 찾아가 봐야겠어. 강 군 나랑 같이 좀 가지.”
 이번엔 카와타 사토시를 만나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인데? 나는 시게루 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외투를 챙겨 입었다.
 
 * * *
 
 카와타 사토시. 내가 1983년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 별세한 이 남자는 2002년부터 민텐도의 4번째 사장이 될 사람이었다.
 민텐도의 CEO이자 게임 개발자로서 그는 2000년대 자만에 빠진 민텐도를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었고, 또한 민텐도를 영원한 휴대기기의 강자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낸 벌룬 파이트와 달의 카비, 파더라는 작품은 민텐도 게임 중 명작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시게루 씨와 함께 수많은 게임을 만들어낼 인물이었다.
 “그런데, 시게루 씨. 이거 주소를 보니 도쿄 치요다구에 사무실이 있는데요!?”
 “상관없어 저녁에 신칸센으로 이동하자!!”
 시게루 씨는 그동안 마리지를 조작하며 자신이 고민했던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나는 열의에 찬 그의 뒤를 따라 교토 역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약 6시간 뒤인 오후 11시······ 우린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오는 신주쿠 역 앞에 서 있었다.
 “그냥 일찍 자고 내일 올 걸 그랬나?”
 “그러게 말입니다······.”
 때론 누군가의 열의가 사람을 이토록 생고생시키기도 하는구나······.
 
 * * *
 
 다음 날. 호텔에서 밤을 지새운 우린 아침 일찍 HEG 연구소라는 소프트웨어 개발 사무실을 찾았다. 쿠마모토 시게루 씨를 사로잡은 벌룬 파이트의 제작 사무실 치고 굉장히 딱딱한 분위기인 이곳은 주로 전자계산기나 복사기에 들어가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이었다.
 “누구를 찾아 오셨다고요?”
 “카와타 사토시라는 분인데 혹시 안계시나요?”
 “카와타? 카와타······ 어이, 혹시 카와타 사토시라는 사람이 우리 사무실에 있나?”
 사무실 직원으로 보이는 덩치큰 남자가 옆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무를 보고 있던 직원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 시간제 아르바이트생 있잖아요.”
 그러자 덩치 큰 남자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제 아르바이트 생 이라고? 그럼 이곳의 정식 직원도 아니라는 말이군. 고개를 돌려보니 시게루 씨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라고요?”
 “네, 아마 오후 2시쯤 출근할 겁니다.”
 “아, 그럼 저희가 오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럴 거면 정말 오늘 아침에 출발할 것을 뭐 하러 어제 밤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우리는 사무실을 빠져나온 우린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2시까지 어디 가서 시간을 때운담? 그때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우리를 스쳐 지나 HEG 연구소 사무실로 향했다. 어라? 방금 그 사람은 굉장히 낯이 익은데······?
 5:5 가르마의 점잖아 보이는 인상은 내가 기억하는 2015년 그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저기 혹시 카와타 씨!?”
 “네??”
 “카와타 사토시 씨 맞아요?”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찾았다!! 시게루 씨는 잠시 나와 카와타 씨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와타 씨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 민텐도에 벌룬 파이트를 보내주신 카와타 사토시 씨 맞으세요?”
 “아~ 그게 벌써 그쪽에 갔나요. 하하~ 어땠어요? 재밌었나요?”
 굉장히 점잖은 이미지지만 톡톡 튀는 경영 센스 덕에 카마우치 사장의 가족, 혈통이 아닌 외부인 최초로 민텐도의 사장을 역임하게 될 카와타 사토시. 이렇게 차후 민텐도를 이끌어 갈 24살의 천재를 또 한명 만나게 되었다.
 
 * * *
 
 “아~ 그러니까, 버튼을 입력 할수록 캐릭터 이동을 더욱 빠르게 한 뒤에 플레이어가 역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강제로 반응을 느리게 하여 과부하를 거는 게 포인트였군.”
 프로그래밍은 현실의 움직임을 숫자로 환산하는 것과 같다. 만약 마리지가 1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면 2초 뒤에는 2의 속도, 3의 속도로 속도를 올린다.
 그 상태에서 점프를 하게 될 경우 현재 스피드 수치와 점프력의 수치를 합산하여 점프 했을 때의 거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중도에 역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숫자 3에서 –1로 곧장 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가 숫자 4부터 차례로 3, 2, 1, 0 –1 이것이 관성에 대한 사토시의 기본 설명이었다.
 “이제야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군. 카와타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네. 그리고 자네가 만든 벌룬 파이트 말인데, 혹시 우리 회사로 들어와 함께 제작해보는 건 어떤가? 분명 좋은 작품이 될 거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단은 HEG 연구소에 남아 있는 일이 있어서요.”
 “그래? 정말 아쉽군. 하지만 언제든 생각이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게.”
 시게루 씨는 카와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시게루 씨는 어서 돌아가 마리지의 움직임을 완성시키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로서 슈퍼마리지를 만들어낼 모든 요소는 충족 되었다. 제작은 곧 완료 되겠지만 카트리지 생산 기간이 있으니 아마 슈퍼 마리지는 1984년 초 즈음 출시하게 되겠지?
 본래라면 85년도에 나왔을 작품인데, 1년 정도 앞당겨지게 되었구나······.
 군페이 씨의 휴대용 겜보이 역시 예상보다 빨리 출시가 될 듯하고, 이곳에 내가 온 이후로 내가 알던 역사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 되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인지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 * *
 
 “다들 수고했다. 슈퍼 마리지 완성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198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비디오 게임 최초의 횡스크롤 게임 슈퍼 마리지가 완성이 되었다. 지난 9월에 출시된 전작 마리지 브라더스는 둘이서 즐기는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이번 슈퍼 마리지에 거는 기대감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동킹콤과 마리지 브라더스 덕분에 패밀리 역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불티나게 팔린다는 소식에 카마우치 사장도 크게 기뻐했다. 오죽하면 개발팀 축하 파티에도 직접 찾아와 저렇게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을까?
 “이봐 시게루 이번에 자네가 만든 게임은 얼마나 팔릴 것 같나!? 응? 100만 개!? 200만 개?? 으하하하~~”
 전 세계적으로 1000만 개가 나갈 녀석입니다. 나는 속으로 빙긋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사장님. 저 혼자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솔직히 강준혁 군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슈퍼 마리지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 그렇지. 이~봐 강 군~!! 어디에 있어!?”
 “여기 있습니다.”
 “옳지, 옳지~ 그래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카마우치 사장은 벌써부터 얼큰하게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듯 내게 달려왔다.
 “크하하~ 어디서 이런 보물 같은 사원이 들어와서 나를 기쁘게 해주는 거냐~!!”
 크~ 이정도면 완전 주정뱅이가 따로 없군······. 나는 술 냄새를 풍기며 들러붙는 카마우치 사장과 살짝 떨어지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강 군······. 그를 만난 건 우연이었습니다. 그때 만약 신칸센에 오르기 전 도시락을 사기 위해······.”
 “시끄러 군페이!! 그 말은 내가 백번도 더 들었다!!”
 민텐도 입사 후 3개월. 나는 1983년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개발실 직원들도 매우 친절 했고, 나에게 적대감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일을 하다 보니 돈쓸 시간이 없어서 통장의 잔고는 계속해서 차오르는 중이었다.
 만사가 형통하니 걱정이 전혀 없군. 이대로 분위기 좋게 연말을 보내고 1984년을 맞이하자~ 그때 내 옆에 있던 카마우치 사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준혁 군.”
 “네. 사장님.”
 “이제 총 들려줬으니까. 미국 가야지?”
 “네······?”
 3장 미국 시장을 공략하라
 
 
 그로부터 약 한 달이 흐르고······ 1984년 1월 25일. 나는 슈퍼 마리지의 카트리지 생산 작업을 시게루 씨에게 일임한 뒤 군페이 씨와 함께 미국에 와 있었다.
 “아오!!! 씨발!!! 추워!! 적어도 겨울은 보내고 여길 보내던지. 카마우치 개새끼야!!”
 “음? 강 군? 지금 뭐라고?? 얼핏 사장님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한국말로 혼잣말 좀 했습니다.”
 나는 눈에 파묻혀 잘 굴러 가지도 않는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뉴욕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 * *
 
 끼이익······.
 우린 민텐도 미국지사에서 예약해 준 허름한 호텔에 들어왔다. 샤사삭······.
 뭐지? 방금 바닥에 뭐가 기어간 거 같은데?
 아니 일본에서 온 본사 직원 숙소를 이딴 곳에 잡아두다니. 카마우치 사장이 조금 제멋대로긴 해도 직원들 복지는 신경 쓰는 편인데······.
 내 옆에 서 있던 군페이 씨 역시 표정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미국 호텔은 다 이런가? 일본에 비해 너무 시설이 좋지 않군······.”
 “그럴 리가요. 여기 사람들이라고 숙박업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장 싼 숙소로 예약한 거겠죠”
 “에이, 설마······. 미국 지사를 담당하는 야마시타 씨는 카마우치 사장님의 사위일세. 그런 분이 설마 우리를 이렇게 대접했을까?”
 “아무튼 군페이 씨. 전 여기서 못 자요. 우리 호텔을 옮기죠.”
 “뭐!? 하지만 다른 곳에 숙소를 잡으면 회사 돈이 아닌 사비로 해야 할 텐데?”
 “저 그 정도 돈은 있거든요? 우리가 여기서 몇 달을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여기서 계속 생활해요!?”
 결국 나는 군페이 씨를 잡아끌고 호텔 앞에 서 있던 택시에 올랐다.
 “Please take me to the best hotel around here.”
 “Yes. sir~”
 “이봐, 강 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가달라고 했어요.”
 “뭐!? 이, 이봐······. 강 군. 정말 괜찮은 거야?”
 잠시 후 우린 휘황찬란한 조명에 빛나는 거대한 호텔 앞에 서 있었다. 확실히 변두리에 있던 호텔과는 달리 번화가엔 온통 신년을 축하하는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 같군······.
 “그래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잘 만하겠지?”
 “여긴 너무 비싸 보이는데? 어? 강 군!? 강 군!!”
 뒤에서 들려오는 군페이 씨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당장 추워 뒈지겠는데, 돈은 이럴 때 쓰는 거지. 혹시나 해서 환전 많이 해오길 잘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호텔 로비를 지나 프론트에 다가가자 푸른 눈동자의 금발 미인이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How may I help you, sir?”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손님?)
 “I'd like a room please.” (방을 빌리고 싶은데요.)
 “Did you make a reservation?” (예약은 하셨나요?)
 “No. I didn't.” (아니오.)
 “Ok. would you like a single or double?” (알겠습니다. 방은 싱글과 더블 중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I'm staying for a month. I'd like the best room you have.” (한 달 정도 머무를 생각입니다.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주세요.)
 “Yes. sir~” (알겠습니다. 손님~)
 군페이 씨는 멍하니 내 곁에 서서 우리의 대화 내용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 한 달!? 강 군 혹시 지금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한 달 동안 쓴다고 한 게 맞나?”
 “네······. 일단은 최소 한 달 잡고 상황을 봐서 늘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출장을 온 거지 놀러온 게 아니라고!!”
 “누가 뭐랍니까. 일은 일이고, 휴식은 휴식이죠. 잘 쉬어야 일도 열심히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스위트룸을 빌리다니······.”
 “헉······. 군페이 씨 설마 싱글 룸에서 저랑 한 침대에 주무시려고 하셨어요!?”
 “아니, 내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프론트 직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에게 열쇠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Thank you. Happy New year~”
 나는 열쇠를 받아들며 프론트 직원에게 인사를 건넨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 참. 이거 사장님께는 뭐라고 보고 해야 하나?”
 “군페이 씨야 말로 걱정도 태산입니다. 회사 경비 말고 내가 내 돈으로 호텔에서 묵겠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1983년 뉴욕 최고의 호텔의 스위트 룸 가격은 하룻밤에 149달러였다. 물론 한 달로 치면 450만원 이라는 어마 어마한 금액이긴 하지만, 그 정도 금액쯤이야. 내 통장의 예치금 수수료조차도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마음 편히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강 군은 한국인이라 잘 모르나 본데, 일본 사회에서는 말이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중요하다네······ 이런 고급 호텔에서 묵었다고 하면 일본에 있는 직장 동료들은 분명 놀고먹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흔히 일본인에게는 혼네 (본심) 와 타테마에 (겉으로 드러내는 마음)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본심은 무슨 꿍꿍인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점잖고 배려가 깊은 척을 한다고 할까? 그만큼 겉과 속이 다른 민족이라 그런지. 일본인은 주변 시선에 참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
 “일만 잘 처리하고 가면 되지. 뭐 하러 피곤하게 그런 것까지 따진 답니까?”
 아~ 몰랑. 거의 15시간을 날아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도 귀찮아!! 어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 * *
 
 “강 군. 역시 돈이 좋긴 좋구만~”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난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군페이 씨의 첫 마디였다. 어제 그렇게 찡찡거리며 따라 오더니 결국 푹 자고 일어나 한다는 소리가 저건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를 던져두고 곧장 샤워 룸으로 향했었기에 방 한구석에는 여전히 내 캐리어가 나뒹굴고 있었다.
 슬쩍 반대편을 바라보니 군페이 씨의 짐은 일본인답게 정갈하게도 정리 되어 있었다. 사람이 치사하게······. 여유가 있으면 내 캐리어도 좀 똑바로 놔주지.
 
 * *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군페이 씨는 호텔 로비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흡연에 대한 규제가 약했던 1980년대에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고 로비로 나오자, 나를 본 군페이 씨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우선 미국 지사 사무실로 가볼까?”
 “그러죠.”
 우리는 택시에 올라 민텐도 미국지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 * *
 
 “아,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다는 군페이 씨와 강준혁 군인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야마시타 지사장의 첫인상은······. 폐인 그 자체였다. 이른 시간 임에도 사무실에선 아무런 활기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무엇보다 야마시타 씨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위스키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왔다.
 “당신들이 미국에 왔다고 해서 변할 건 아무것도 없어. 이미 미국 시장에서 콘솔 게임 사업은 완전히 끝물이니까.”
 그의 말에는 아무런 희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도쿄대까지 나왔다던 카마우치 사장의 사위는 미국 사무실에서 완전히 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이유에는 아타리사가 남긴 게임 산업 붕괴 현상도 있었지만 컴퓨터 산업이 번창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게임기는 자녀의 학업을 망치지만, 컴퓨터는 자녀를 대학에 보내드립니다.-
 오늘 아침 호텔 신문에 실려 있던 한 컴퓨터 회사의 마케팅 광고. 그것은 겨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콘솔 시장의 숨통을 완벽히 끊어 내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나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는데, 카마우치 사장은 민텐도가 일본에 출시하기 이전부터 미국에 승부수를 띄우고 있었다. 일본에서 7월 15일에 출시했던 패밀리는 이미 미국에서 4월부터 판매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게임 산업이 완전히 죽어 버린 탓에 전자제품이나, 장난감 회사. 어디에서도 패밀리를 받아 주지 않았고, 단 한 대도 팔리지 못한 패밀리는 창고에 그대로 쑤셔 박혀 있었다. 처음엔 열의에 차있던 야마시타 씨도 점점 자신감을 잃어 매일 술을 마시는 모양이었다.
 여기선 더 있어 봤자 이득 될 게 없겠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 군? 어디로 가려고?”
 “일단 시장 조사를 해봐야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몸소 체험해보러 갑니다.”
 “큭큭······. 그래 어디든 가 봐~ 아 참,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 반창고라도 사가는 게 좋을 걸? 괜히 가게주인 신경 건드려서 두들겨 맞으면 그거라도 붙이라고. 킥킥킥~”
 “일단 야마시타 씨. 샘플용 패밀리 하나만 가져갈게요.”
 “마음대로 해.”
 “어이, 강 군. 나도 함께 가세나~!!”
 미국지사 사무실에서 나온 우리는 또다시 택시를 타고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가게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이 변했군.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야.”
 “완전 폐인이나 마찬가지던데요?”
 “카마우치 사장이 엄청 신뢰하던 젊은이였는데, 어쩌다 저런······.”
 실패는 사람을 점점 소심하게 만든다.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며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일수록 단 한 번의 실패에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다. 바로 현재의 야마시타 씨처럼······.
 
 * * *
 
 “내 가게에서 당장 나가!!!”
 “사장님 그러니까 잠깐 얘기라도~”
 “꺼져~!! 내 가게에 게임기 따위 들고 오지 마!!”
 반응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것은 전자제품 상가든 장난감 가게든 모두 마찬가지였다. 친절했던 사장님도 상자에서 게임기를 꺼내는 순간 무슨 귀신 보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장 집어넣으라고 소리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이거 참······. 야마시타 군의 말이 사실 이었군. 설마 이토록 문전박대를 당할 줄이야······.”
 주인장에게 멱살까지 잡혔던 군페이 씨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게임 산업 자체가 완전 망가졌구나······. 이러면 살짝 작전을 바꿔야겠는데? 나는 일단 지하철 코인 라커에 패밀리를 숨겨둔 뒤 맨손으로 장난감 가게를 살피러 다녔다.
 일단 영업사원인 티를 내지 않고 장난감을 구경하자, 적어도 가게 직원들에게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가게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가게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는 게임 카트리지 더미를 발견했다.
 “저건 뭔가요?”
 “아, 아타리용 게임 카트리지입니다. 재고가 너무 많이 남아서 개당 1달러에 팔고 있어요.”
 헐······. 1달러면 하나에 천원 꼴이라고? 천원이면 카트리지에 들어가는 반도체 생산 단가도 안 나오겠다. 진짜 얼마나 추락한 거냐. 장난감 가게 사장들이 치를 떨 만도 하군. 나는 군페이 씨와 함께 여러 곳의 장난감 가게를 살펴보았지만 모두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거 참······.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군.”
 “그러게요. 우선 배고픈데 우리 뭐 좀 먹으면서 생각할까요?”
 나는 택시에 올라 이번에는 가장 비싸고 맛있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나처럼 능숙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던 군페이 씨는 혀를 차며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자네는 툭하면 가장 비싼 것부터 찾나? 사람은 자고로 아껴야 잘 사는 거야.”
 “그럼 중간에 햄버거 가게에 내려드릴까요?”
 “어? 아, 아니야. 같이 가세.”
 어차피 따라올 거면서 애초에 그런 말을 말던가.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역시 예상을 웃도는 시장 침체가 일어나고 있군. 카마우치 사장에게 로봇 장난감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비집고 들어가기 힘이 들겠어······.
 그때 뒷좌석에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택시 기사가 말을 건네었다.
 “당신들은 일본인인가?”
 “저는 한국인, 그리고 왼쪽은 일본인이에요.”
 “한국? 한국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본 사람도 있다는 거지?”
 “제가 일본인입니다.”
 어설픈 영어로 군페이 씨가 대답하자 택시 기사는 웃으며 군페이 씨에게 물었다.
 “오~ 사무라이~~!! 일본인은 아직도 길거리에 칼을 차고 다니나!?”
 “풉······.”
 아직 해외여행이 활발한 시기는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80년대에는 저런 오해가 종종 있곤 했다. 한국을 모른다는 택시 기사의 말에 조금 씁쓸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이슈가 없으니 당연한 걸까? 적어도 88년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 완전 쩌리 취급을 당하겠네······.
 하지만 웃자고 한 소리에 군페이 씨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왠지 자신이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는지 군페이 씨는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반박했다.
 “지금은 20세기입니다. 일본은 더 이상 칼을 차지 않고, 미국과 동등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택시 기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 미안. 그냥 조크였어. 조크. 킥킥”
 그러나 군페이 씨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칼 차고 다니면 너흰 다 총 들고 다니냐.”
 거참 중년의 남자가 뒤 끝 보소. 그런데 맞는 말이긴 하다. 일본도나 닌자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상징인 것처럼. 미국하면 말을 타고 달리는 카우보이가 떠오르니까. 가만? 총? 카우보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같이 추억의 게임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최초로 가정용 TV를 이용해 사격 게임을 즐겼던 ‘오리 사냥’이라는 게임이었다.
 이거다!! 이거야!!
 
 * * *
 
 “총을 만들어 달라고?”
 부드러운 쇠고기 스테이크를 잘라내던 군페이 씨가 칼질을 멈추며 나에게 물었다.
 “네. 전자총 좀 만들어주세요.”
 “전자총?”
 군페이 씨는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는 듯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연습장을 꺼내어 대충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그림으로 그려주는 게 쉽구나······.
 “요렇게 생긴 총입니다. 다행히 우리 패밀리에는 전원 공급이 가능한 외장 포트가 있으니 이용하면 될 거 같아요. 브라운 관 티비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화면에 표시되는 과녁이 떨어지는 겁니다.”
 본래라면 본체에 달려 있는 패드가 고장 났을 경우에 사용하는 비상 포트였지만 아무튼 이렇게 따로 설계 해두었으니 이걸 사용을 해야겠지······ 군페이 씨는 나의 설명에 구미가 당기는지 스테이크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바싹 다가왔다.
 “총을 쏘는 새로운 컨트롤러라 굉장히 흥미롭군. 그런데 이건 어떤 방식으로 조작 되는 거지?”
 “그건 군페이 씨가 생각하셔야죠.”
 “뭐라고······?”
 자고로 새로운 전자기기의 탄생은 아이디어 한 스푼과 공돌이를 갈아 넣으면 만들어지는 법이거든. 솔직히 나도 어떤 방식으로 브라운관 TV에 총을 쏘면 그 안에 타격 판정이 생기는지 몰라. 하지만 내가 어릴 적 분명 플레이 해봤고 원래 당신이 실제로 만들었던 물건이니 어떻게든 만들어 주시겠지~
 
 * * *
 
 그로부터 삼일 후. 나는 군페이 씨와 국제공항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 시장의 돌파구는 그 총입니다. 군페이 씨. 부디 일본에 돌아가서 힘내 주세요.”
 “강 군에게 이야기를 듣고 계속 생각해 보았는데, 대충 실마리가 잡힐 듯도 해. 전자총이 완성 되면 곧바로 연락 하겠네. 그런데, 그 과녁을 맞히는 프로그램은 누구한테 맞기지? 시게루 군에게 맡길까?”
 “아뇨. 지금은 카트리지 검수도 해야 해서 시게루 씨도 바쁠 거예요.”
 “그럼 누구한테 맡기지?”
 “그건 제가 여기서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뭐!? 여기서 만들겠다고?”
 “시장 조사도 하면서 설렁 설렁 만들어보죠 뭐······ 데모가 완료 되면 국제 우편으로 보내 드릴 테니 시게루 씨랑 같이 완성해 주세요.”
 “설렁설렁? 진짜 자네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말만 꺼냈다하면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튀어나오니 종잡을 수가 없어~”
 “칭찬이라 듣겠습니다.”
 “물론 칭찬 일세. 자네를 만나고 회사 생활이 점점 재밌어지는군. 그럼 부디 야마시타 씨를 도와 미국 시장을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그렇게 군페이 씨를 떠나보낸 나는 잠시 후 홀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민텐도 미국 지사 사무실로 향했다.
 조용한 사무실 문을 벌컥 얼어 젖히자 안에서 위스키를 따르고 있던 야마시타 씨가 깜짝 놀라 술을 흘렸다.
 “거~ 사람 조심조심 좀 다닐 수 없나?”
 “어차피 테이블에 앉아 술이나 퍼마시는 주제에 바쁜 직원한테 잔소리까지 하진 마세요.”
 그러자 야마시타는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서 술만 퍼마신다고 창고에 쌓여 있는 저 게임기들이 하나라도 나가겠습니까? 어떻게든 활로를 열어 봐야죠.”
 “나라고 뭔들 안 해본 줄 아나!? 어느 매장에서건 물건을 깔아 줘야 마케팅이라도 해보지 이건 아예 되지가 않는 사업이야!! 미국에서 콘솔은 끝났어. 기기 마진을 최대한까지 낮춰서 물건을 준다고 해도 다들 콧방귀만 뀔 뿐이라고!!”
 “그럼 기기만 받아 주면 돈 준다고 해봤어요?”
 “뭐?”
 “그냥 진열만 해도 진열비로 돈을 줘봤냐고요.”
 “미친놈아!! 그저 매장에 물건을 깔뿐인데, 왜 우리가 돈을 줘야 하는데!?”
 “깎아줘도 안 받아주면 돈을 주면 되죠. 어차피 기계 하나 팔아봐야 14800엔에서 1800엔 남겨 먹을 뿐이에요. 우리가 고작 1800엔 벌자고 미국까지 와서 이 짓거리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선은 게임기가 판매 되어야 카트리지가 나가서 수익을 창출하죠. 그리고 그렇게 게임기에 대한 인식이 안 좋으면 이름을 바꿔버려요. 이건 게임기가 아니라고!!”
 “뭐? 게임기를 게임기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고 팔아!?”
 “음······. MINTENDO Home Entertainment System······ 줄여서 M.H.E.S. 어때요?”
 “민텐도 홈 엔터테이먼트 시스템······?”
 “일단 게임 콘솔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 보자고요.”
 그리고 민텐도 미국지사 MHES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 * *
 
 “드디어 야마시타 녀석이 제대로 일을 벌려보려는 모양이군. 그래~ 그래야 내 사위답지.”
 당신 사위 술과 대마초에 꼴아서 폐인 꼴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직접 전화통 붙잡고 이러고 있지······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서 야마시타 사장님과 묘책을 짜본 결과. 저희는 새로운 지사명으로 미국 시장을 재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좋아~ 좋아. 지사명이야 엎어치나 매치나 민텐도인건 민텐도 인거지. 그래서 어떻게 공략하려는 건가.”
 “다행히 지난주에 출시가 완료된 슈퍼 마리지가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으하하~ 그것뿐인가? 슈퍼마리지와 함께 동킹콤과 전작인 마리지 브라더스가 세트로 나가고 있어!! 기기 견인 효과까지 더불어 지금 공장이 풀가동 중인데도 모자랄 지경이지.”
 “그렇군요. 전 일본의 돈을 다 긁어모을 기세로군요~”
 “역시 강 군은 비유법이 좋군~ 그래 네 말대로 아주 다발로 긁어모으고 있지~ 창고에 물건 좀 더 만들어 놓을 걸 매우 아쉬워하는 중이라네.”
 “잘 됐네요~ 그럼 저희 미국 지사 창고에 있는 기계를 가져가 주세요.”
 “뭐라고!? 그걸 왜??”
 “M.H.E.S.로 새롭게 스타트하는 시기에 이전과 똑같은 기계를 들고 영업할 순 없지 않습니까? 미국인의 취향을 맞춰 새롭게 기계를 디자인 하겠습니다.”
 “뭐!? 야, 인마. 이미 완성품이라 공장에서 찍어 내기만 하면 되는데, 디자인을 바꾼다고??”
 “야마우치 사장님. 그동안 게임&워치와 패밀리의 성공으로 보유 자금도 엄청 나실 텐데, 미국 시장을 노리신다면 투자를 하셔야죠. 현재 패밀리의 디자인은 미국시장에서 너무 좋지 않은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동양인 표준에 맞춰져 있기에 컨트롤러 크기도 너무 작아요. 조금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끄응······. 그래도 뭔가 생돈 나가는 기분인데······.”
 “제가 지금까지 사장님께 실망 시켜드린 적은 없지 않습니까. 절 믿고 여기로 보내주셨다면 지원 사격을 해주셔야죠.”
 “크으······. 알았다. 그럼 일단 미국 창고에 있는 물량은 전부 회수 하지. 어차피 일본에서는 기기가 모자라서 못 팔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야마시타 사장님과 합의한 거긴 한데······.”
 “또 뭔가?”
 “미국에서 저희 패밀리를 진열해 주는 매장에게 진열비를 주기로 했습니다.”
 “진열비? 그게 뭔가?”
 “간단히 저희 물건을 매장에 깔아 주면 그 위치에 따라 소정의 감사비를 드리는 거죠. 한 달 동안 가게 전면이면 1000달러를 후방이면 300달러.”
 “뭐? 매장에 물건을 깔아주는 것만으로 돈을 주자고? 그건 또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미친 발상이냐!?”
 “하하······. 사장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물론 이걸 계속해서 하자는 게 아니고 딱 2달만 이벤트 식으로 해보죠. 마침 군페이 씨에게 들어보니 전자총 문제가 해결되어 생산 단계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예전에 제가 말씀 드린 컨트롤 로봇은 이미 완성된 거죠?”
 “그래. 다 완성 됐다. 네가 만들었다는 전자 사격 게임 역시 평이 매우 좋아. 요즘 휴게실에 가보면 전 직원들 모두 즐기고 있더군.”
 “그럼 미국판 모델에는 그 로봇와 전자총도 같이 세트로 넣어서 포장해 주세요.”
 “뭐? 그러면 14800엔에 단가를 맞추기가 힘든데?”
 “괜찮아요. 미국에서는 199달러에 팔 거니까요.”
 “뭐!? 149달러에 팔아도 안 나가던걸 오히려 가격을 올리겠다고?”
 “149달러에 팔아도 안 나간 이유는 진열을 못해서 안 나간거지 결코 기계의 퀄리티가 나빠서 안 나간 건 아니죠.”
 “끙······. 이거 참. 그렇게만 팔린다면야 진열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것 같긴 한데······ 어쩌지······.”
 “사장님······.”
 “응? 자꾸 그렇게 나 부르지 마. 또 네 녀석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두렵다.”
 “총을 들려 보내주셨으면, 총알도 같이 주셔야죠. 그냥 눈 딱 감고 시원하게 쏘세요.”
 “으······. 진짜 준다 줘!! 대신 너 실패하면 다시는 일본 땅 못 밟을 줄 알아라······.”
 헹~ 실패하면 한국 땅 밟아야지~
 
 * * *
 
 내가 미국에 온지도 어느새 4개월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달 사장님과 통화 후 창고 안에 있던 케케묵은 패밀리는 전량 일본으로 회수가 들어갔고, 오늘 오전 새롭게 디자인 된 M.E.S라는 녀석이 들어왔다.
 이전의 패밀리는 딱 봐도 카트리지를 세로로 꽂아서 즐기는 게임기 이미지였던데 반해, 새로 디자인 된 녀석은 마치 컴퓨터 디스켓처럼 널찍한 카트리지를 전면부에 밀어 넣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또한 좁은 일본 가정집과는 다르게 넓은 거실을 즐기는 서양인 취향에 맞춰 컨트롤러 줄을 더 길게 늘이고 크기도 키웠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디자인 되었군. 그런데 이렇게 겉모습을 바꿨다고 사람들이 믿어줄까?”
 “어차피 전 모델은 쳐다도 안 봤을 정도니까 괜찮을 거예요.”
 야마시타 씨는 지사명을 바꾸고 새롭게 시작하는 동시에 술과 대마를 끊었다.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패밀리를 전부 치우고 나자, 야마시타 씨는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아무래도 팔리지 않는 부진 재고를 떠안고 있던 게 야마시타 씨에겐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것 같다.
 “자~ 그럼 이제 새롭게 공략을 하러 가볼까요?”
 나는 샘플용 M.E.S 머신을 들고 야마시타 씨를 향해 웃어보였다.
 
 * * *
 
 잠시 후 우린 뉴욕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 토이월드 앞에 서 있었다.
 “이거 원 또 멱살 잡혀 끌려 나오는 건 아닐지······.”
 야마시타 씨는 벌써부터 긴장했는지 넥타이 끈을 느근하게 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일전에 험한 꼴을 당해봐서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설마······. 이번엔 잘 될 거예요.”
 딸랑~~ 가볍게 정문을 밀어 젖히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들이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딱 봐도 영업사원 티가 나는 복장이었기에 잠시 후 담당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떤 일로 오셨죠?”
 “안녕하세요. 저희는 M.H.E.S라는 업체 쪽 사람입니다. 새로운 장난감을 개발하여 오너와 상담을 하고 싶은데요?”
 “M.H.E.S? 처음 들어보는데?”
 “이번에 새로 미국에 등록한 일본계 회사입니다. 움직이는 로봇과 전자총 장난감을 개발했지요.”
 그러자 매니저는 전자총에 대해 살짝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전자총? 저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취급합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장난감을 판매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니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전자총을 꺼내어 보였다. 회색빛깔의 투박한 권총은 아무리 보아도 위협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가져온 총은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흐음······ 일단 오너실로 모시겠습니다.”
 뭔가 미심쩍은 표정의 매니저는 우리를 데리고 가게 안쪽의 사장실로 안내했다. 좋아,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다. 사장실 안에는 전형적인 미국인 체형의 뚱뚱한 남자가 서류뭉치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인데도 그는 마치 한여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스미스? 그 사람들은 누군가?”
 “그게 새로운 장난감을 개발했다는 M.H.E.S라는 업체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장난감? 장난감이 다 거기서 거기지. 새로울 게 뭐가 있나?”
 굉장히 퉁명스레 반응하는 오너에게 나와 야마시타 씨는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일본인인가? 재미있군. 그래도 노란 원숭이 녀석들이 장난감 하나는 잘 만드니까.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을의 입장이었던 우리는 테이블 위에 새로운 장난감을 올려두었다.
 “로봇? 그리고 총? 이게 뭐가 새로운 장난감이라는 거지?”
 “이것들은 여기 있는 기계에 연결하여 사용하는 전자동 장난감입니다.”
 “기계? 뭐야 이거? 이거 혹시 게임기 아냐?”
 “아뇨. 이것은 홈 엔터테이먼트 컴퓨터입니다.”
 “컴퓨터라고?”
 “네 이걸 이용해 이 로봇을 움직일 수 있고, 총을 쏠 수 있죠. 잠시 연결을 해볼까요?”
 “흐음······. 일단 해 봐.”
 사장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면 나를 던져 버릴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야마시타 씨 역시 긴장했는지 무릎을 세운 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선 외부 포트에 로봇을 연결시키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패밀리 패키지에 포함된 로봇은 별도의 카트리지 없이 조작이 가능했기에 나는 곧장 컨트롤러를 쥐고 로봇을 조작해 보았다. 다행히도 카마우치 사장은 내가 처음에 알려준 힌트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로봇에 팔을 만들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능도 추가 해두었기에 나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전자총을 들어 올려 보았다.
 로봇의 양팔이 집게처럼 좁혀지며 전자총을 집어 올리자 그것을 지켜보던 사장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호오······. 재미있군. 그런데 그 총은 뭐지?”
 “아, 이것은 TV를 사용해야 하는 총인데요.”
 “TV!? 왜 장난감 주제에 TV를 사용하지? 이거 게임기 아냐?”
 “아뇨. 이건 가족끼리 즐겁게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된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내가 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게임은 게임인데 게임이 아니라고 하니······. 홍길동 호부호형하는 소릴 하고 앉아 있군. 사장이 굉장히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슬슬 눈치를 봐가며 사장실 한구석에 있는 TV에 케이블을 연결했다.
 행여 카트리지를 꽂는 걸 보이면 확실히 트집 잡힐 것 같았던 나는 미리 게임기에 카트리지를 꽂아둔 상태였다.
 외부포트에서 로봇을 제거 하고 전자총으로 바꿔 낀 나는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TV에서 덕헌트 (오리사냥) 라는 문구가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사장과 매니저의 표정은 심히 불편해 졌다.
 불안했던 나는 전자총의 방아쇠 부분을 딸각거리며 빨리 메인화면이 넘어가길 바랐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에는 녹색의 수풀이 그려진 화면이 등장하자 사장의 이마에 핏대가 굵어졌다.
 “이거 게임기 맞잖아!!”
 타앙~!! 그 순간 나는 TV 화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그러자 화면 안에 날아오르던 오리 한 마리가 꽥하고 떨어졌다.
 “어? 뭐야 방금??”
 피요오오옹~ 타앙~ 펑~!! 피유우웅~ 타앙~ 펑~!! 화면 안에 날아가는 오리들은 내 전자총에 의해 차례차례 추락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저 총으로 TV안의 오리를 떨어뜨릴 수 있는 거지?”
 물론 이해할 수가 없겠지.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마치 4D영화를 처음 체감한 것과 같은 충격일 것이다. 전자총의 총구에선 아무것도 발사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한발 한발 TV 속의 오리를 상쾌하게 격추 시키고 있었다.
 사장과 매니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내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군페이 씨는 천재야. 단기간 안에 아주 훌륭한 걸 만들어 주셨군.
 일본에 돌아간 군페이 씨는 게임에 사용하는 새로운 컨트롤러를 위해 밤을 새워 수많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그는 TV화면의 주사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만들어 낸 전자총은 단 한순간이지만 TV의 주사율을 강제로 조작할 수 있었다.
 전자총의 방아쇠를 당기면 화면 전체가 일순간 깜빡이며 검은색이 되는데 워낙 순간이라 사람의 눈으론 확인이 불가능 했다. 그리고 날아오르는 오리의 오브젝트를 흰색으로 표시하며 전자총이 하얀색 오브젝트를 인식하게 만들도록 제작 되었다.
 이게 뭔 말이냐고? 사실은 나도 몰라. 아무튼 전자총에 티비를 강제로 제어하는 기능을 넣어 날아가는 오리를 인식 시키는 거라는데, 군페이 씨도 이걸 성공하고 오죽 기뻤으면 시차 생각도 안 하고 새벽에 전화 해 생난리를 치셨으니······.
 그때 작동 방식에 대해 뭔가 주저리주저리 하셨던 것 같긴 한데, 잠결이라 나도 잘은 모르겠더라······. 그냥 아~ 드디어 만들어졌군. 하고 다시 잠이 들긴 했지만······.
 “확실히 재미있는 장난감이군.”
 “마음에 드시나요?”
 “그래. 하지만 말이야.”
 토이 월드 사장은 두꺼운 시가에 불을 붙이며 히죽 거렸다. 대놓고 사람을 무시 하는 듯한 표정을 읽은 나는 이 계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눈이 빠른 그는 M.E.S의 카트리지 뚜껑을 열어젖히며 안에 들어 있는 덕헌트의 게임팩을 확인했다.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이건 누가 봐도 비디오 게임기야. 장난감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뒤에 어떻게든 우리 매장에 이걸 납품하려는 모양인데, 아무튼 좋아~ 우리 가게에 받아주지.”
 토이 월드 사장의 말에 야마시타 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하지만······.
 “단, 덕 헌트 전용 머신으로 만들어줘. 다른 카트리지는 필요 없으니까. 그럴싸한 게임 하나 끼워주고 나서 나중에 쓰레기 게임들을 유통 하려는 너희 속셈을 내가 모를 거 같아?”
 덕헌트 전용 머신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판매로 부가 수익을 노리는 콘솔 사업에서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민텐도는 게임의 퀄리티 유지를 위해 모든 게임을 본사에서 검토 후에 출품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걱정하시는 것 같은 저급 게임은 저희 기기에 출시 될 수 없을 겁니다.”
 “웃기지 마!!”
 결국 나와 야마시타 씨는 점원들의 손에 이끌려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저희와 계약하고 싶으면 덕 헌트 전용 머신을 만들어 오세요. 저희 토이 월드는 더 이상 게임 콘솔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매니저는 M.E.S가 담긴 박스를 거칠게 바닥에 던져두고는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아오······. 삭신이야. 아무튼 미국 놈들 힘도 좋아. 수틀리면 같은 사람이고 뭐고, 그냥 길바닥에 내동댕이 치는구먼······.
 “역시 힘들군······. 사람의 인식이란 게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역시 배떼지 부른 매장부터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
 “배떼지? 그게 무슨 말인가?”
 “배가 부른 녀석들이란 한국말입니다. 아무튼 장소를 옮기죠. 여긴 더 이상 볼 거 없으니.”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컨트롤러를 정리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토이 월드를 떠나기 전 나는 뒤돌아 매장 입구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돼지 새끼. 두고 봐라. 제발 우리 매장에 물건 좀 넣어 달라고 벌벌 기게 만들어 줄 테니까······.”
 
 * * *
 
 야마시타 씨와 나는 결국 뉴욕 상점가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장난감 가게에 들렀다.
 중심가와는 달리 지나다니는 행인 조차 한적한 거리였기에 매우 조용한 분위기인 이 가게의 이름은 ‘토이 박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 가게는 점원도 없이 사장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M.H.E.S 라는 회사의 영업 담당들인데 새로운 장난감을 납품하러 왔는데요······.”
 그러자 카운터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는 다음 달에 문을 닫을 예정인데, 괜찮으세요?”
 “문을 닫으신다고요?? 어째서······.”
 “실은 최근에 번화가 쪽에 장난감 가게가 많이 생긴 탓인지 저희 쪽에 손님이 많이 줄어서 가게 운영이 어렵거든요······.”
 “아, 저런······. 현재 저희는 아직 아무 장난감 가게와도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한번 봐주시기라도 하시는 건?”
 “그건 어렵지 않죠. 안으로 들어오세요.”
 토이월드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친절함에 나와 야마시타 씨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따로 사장실은 없었기에 우리는 가게 한 구석에서 토이 월드에서 시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봇과 덕헌트를 시연해 보았다.
 “아, 굉장히 새로운 조작 방식이네요. 하지만, 게임······. 이군요?”
 역시나 덕 헌트의 조작은 흥미를 당겼지만, 게임이라는 것에 토이 박스의 사장님도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그로 그럴 것이 토이박스의 매장 절반은 아타리 사의 게임 카트리지로 가득 차 있었다.
 “저도 게임을 좋아하지만, 보시다 시피 아타리 게임을 너무 신용한 탓에 가게 운영이 더욱 어려워졌거든요. 그래서 선뜻 이 기계를 매입한다는 게 두렵습니다.”
 “그 마음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 M.E.S는 결코 아타리와 같은 불행을 안겨드리지 않을 겁니다.”
 나는 준비해 왔던 가방에서 슈퍼 마리지와 마리지 브라더스를 꺼내 들었다. 사실 토이월드에서 분위기가 좋다면 밀어보려고 가져온 녀석들이었는데, 시연해 볼 기회조차 없이 쫓겨난 탓에 이곳에서 처음 시연 해볼 수 있었다.
 토이박스의 사장님은 기본적으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순식간에 슈퍼 마리지의 시스템에 적응하며 횡 스크롤 형태의 새로운 진행 방식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이 게임은 곧 미국 지역의 게임센터에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이 정도 퀄리티의 게임이라면 분명 미국에서도 통할 것 같습니다. 특히 기존 아케이드처럼 화면 안에 묶여 있지 않다는 점이 대단하네요. 완전히 새로운 방식입니다!!”
 토이박스의 사장님은 마치 아이처럼 슈퍼 마리지를 즐기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타리에서······. 이런 게임이 나왔더라면 내 가게도 계속해서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이제와 슈퍼 마리지를 만난 게 억울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야마시타 씨조차 안쓰러운 표정으로 토이박스 사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게임을 좋아하시는군요. 만약에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면 저희 민텐도의 게임기를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어요. 또한 이 게임기를 매입할 만한 자금도 없고요.”
 “좋아요. 사장님. 그럼 저희가 사장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저희 민텐도의 M.E.S를 무상으로 100대 지급해드리지요. 그리고 이 가게의 월세 3개월분도 선 입금으로 미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야마시타 씨의 표정에 경악이 스치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이봐······. 강 군. 아무리 이곳 사장님의 사정이 딱하다고는 하나 무상으로 기기를 100대나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나는 야마시타 씨의 말을 뒷등으로 흘려버리며 멍하니 컨트롤러를 붙잡고 있는 토이 박스의 사장님에게 재차 설명했다.
 “저희 민텐도에서는 저희 기기를 쇼윈도에 전시해 주는 것만으로도 1000달러의 인센티브를 지급해드리는 제도를 시행중입니다.”
 “강 군!! 그건 아직 카마우치 사장님의 결재가 안 떨어진 사항이야!!”
 “하지만 사장님의 사정이 있으시니 그보다 더 높은 3개월 치의 월세를 인센티브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3개월 동안 이 가게 쇼 윈도우는 저희 민텐도에서 관리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 가게를 3개월 더 운영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군요. 좋아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야 당연히 오케이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당장 이 가게에 저희 기계를 들여 놓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민텐도 M.E.S 모델의 역사적인 첫 계약이 성사 되었다. 그리고 2주 뒤 일본에서 넘어온 슈퍼 마리지는 새로운 진행 방식 덕분에 빠른 속도로 미국 게임 센터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 * *
 
 “위······. 윌슨 씨······. 거기 좀 잡아 주세요.”
 “미스터 강. 여기 말인가!?”
 “네~!! 거기 맞······. 으우아악!!!”
 쿠당탕~!! 퍽 와르르르······.
 “헉!! 미스터 강!! 괜찮나!?”
 “괘······. 괜찮아요. 괜찮아. 아으······.”
 “아직 젊어서 쌩쌩하구먼, 나라면 뼈가 부러졌을 거야~ 하하하~”
 토이박스에 민텐도의 M.E.S를 전시해 놓은 지 한 달째. 나는 토이박스 가게 앞 쇼윈도에 현수막을 거는 중이었다. 쇼윈도에 있던 다른 모든 장난감은 치워버린 나는 M.E.S 하나만을 프리미엄 모델처럼 전시해 놓은 뒤 슈퍼마리지의 플레이영상과 함께 아이템 박스라던가 벽돌 모양의 모빌을 공중에 걸어 두었다.
 마치 슈퍼 마리지의 스테이지를 연상 시키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오우~!! 슈퍼 마뤼지~!!”
 지나가던 꼬마 아이가 쇼윈도 안에 TV를 가리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그에 호응하듯 ‘이예~!!’라고 외치며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꼬마는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현수막을 걸고 나서 토이박스의 사장인 윌슨 씨와 함께 가게 내부로 돌아오니 창고 안에서 재고를 정리 중이던 야마시타 씨가 구슬땀을 흘리며 나오고 있었다.
 “벌써 정리 다 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미스터 윌슨. 추가 200대. 모두 넣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라도 드세요.”
 윌슨 씨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는 야마시타 씨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웃어 보였다.
 “지사장님도 밑에 직원들 시키면 되지 굳이 나와서 고생을 하십니까.”
 “아냐 아냐, 강 군 덕분에 이제야 조금씩 활로가 열리게 됐는데, 나만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지. 지난 8개월 동안 어두침침한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이젠 진절 머리가 난다네. 차라리 이렇게 몸을 움직이니 일하는 기분이 들어 좋구만~”
 야마시타 씨는 처음 만난 그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첫인상은 완전 폐인이더니 이제야 좀 사람다워졌네. 나는 피식 웃으며 음료수를 삼켰다.
 딸랑~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꼬마아이와 함께 온 엄마가 우리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밖에 보이는 M.E.S 라는 물건을 여기서 취급하나요?”
 “어서 오세요~ 고객님. 방금 물건이 입고되어 바로 구매 가능 하십니다~!!”
 사람이 달라진 건 야마시타 씨뿐만이 아니었다. 윌슨 씨 역시 민텐도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일조하여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본래 게임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손쉽게 조작법을 알려 주었고, 그로 인해 매장에 들리는 손님 대부분은 그에게서 M.E.S를 바로 구입해갔다. 초도 물량 100대는 슈퍼 마리지가 아케이드 센터에 들어섬과 동시에 하루 만에 동이나 버렸다.
 윌슨 씨는 아예 자기 매장의 절반을 우리 물건으로 채워 넣었고, 우리는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 조그만 가게에서 초도 물량 천 대 가까이 M.E.S를 팔아 제끼고 있었다.
 그때 시연대에서 슈퍼 마리지와 덕헌트를 플레이 하던 꼬마가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외쳤다.
 “Mommy, I wan't that pleeeeaaaase!” (엄마 나 저거 사줘!!!!!!)
 그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만큼 슈퍼 마리지는 M.E.S를 구매하는 고객마다 필수로 구매해 가는 타이틀이 되었고, 덕헌트와 함께 마치 쌍두마차처럼 미국 시장에서 M.E.S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지금 엄마를 조르는 저 아이를 보니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군······. 진정 게임을 좋아한다면 저 아이도 언젠가 훌륭한 개발자가 될 수 있겠지······. 나 역시 그래왔으니까.
 
 * * *
 
 작은 틈.
 꽁꽁 얼어붙은 미국의 게임 시장에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M.E.S는 뉴욕의 한 작은 장난감 가게를 시작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윌슨 씨는 아예 덕헌트를 거리 밖으로 꺼내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료 시연을 펼쳤다. 그러자 처음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전자총을 손에 들고 신나게 TV에 대고 쏘기 시작했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덕 헌트는 직관적인 플레이 방식 때문인지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근처의 게임 센터에서는 슈퍼마리지의 기판마다 사람들이 들러붙어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미국 내에 슈퍼 마리지는 금세 민텐도의 상징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미국의 오리지널 캐릭터인 뽀빠이보다 마리지를 더 익숙해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몇몇의 가게로부터 M.E.S의 수주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마우치 사장에게 부탁한 전시 인센티브는 2달만 진행하기로 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카마우치 사장을 설득하여 M.E.S를 최초 전시하는 매장에 한에 무조건 두 달간 인센티브를 지급해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또한 직원들에게 충분이 게임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따로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매뉴얼도 작성해 넘겨주었다.
 처음에는 작은 임대 사무실이었던 민텐도 미국 지사는 조금 더 평수를 넓혀 쾌적한 사무실로 이사를 하였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던 나는 엘리스라는 여자 비서를 채용했다.
 그녀는 게임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물건을 납품하고 장난감 가게와 딜을 하는데 능숙한 면이 있었다. 어차피 이 시대에서 게임이란 매체는 신종사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면접에서 가장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 시장 조사를 위해 함께 가게를 둘러볼 때면 항상 수첩과 펜으로 무언가를 메모하는 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시장 조사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엘리스 씨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제안했다.
 “과장님. 매장에 물건을 납품하고 진열을 가게에 맞기니 가게마다 전시하는 스타일이 너무 다른 것 같아요. 조금 통일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가게 전면에 진열한다고 해놓고는 인센티브만 챙겨가는 매장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직접 관리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저도 최근에 매장이 늘어가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확히 보셨네요. 비서님.”
 “배송 기사님들에게 따로 교육을 해서 물건을 납품하면 곧장 진열까지 해드리는 게 저희도 가게도 편할 것 같긴 한데······.”
 “그럼 또 배송 기사님들 사이에 불만이 생기겠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매장 진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진열 후에도 지속 적으로 관리될 수 있어야 하니 따로 매장을 꾸며주는 관리팀을 만드는 게 좋겠네요.”
 그 이후로 우리 상품을 받아주는 매장엔 납품과 동시에 직원들이 직접 매장에 방문하여 가게의 디스플레이를 도와주었고, 각종 캐릭터 상품으로 매장을 예쁘게 꾸며 주었기에 그 반등 효과로 장난감 업계 사이에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어느 정도 자본이 투입되었지만, 민텐도에서 물건을 받아주기만 하면 인센티브는 물론 가게까지 예쁘게 꾸며 준다는 소문이 업계에 퍼지며 발주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일단 매장에 M.E.S를 들여 놓는데 성공 하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빠르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타리 쇼크로 주춤했던 미국 콘솔 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려대는 사무실에 있기보단 평상복 차림으로 시장 조사를 나가는 걸 좋아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거리의 장난감 가게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슈퍼 마리지와 M.E.S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군데. 이 거리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인 ‘토이 월드’에서는 아직 민텐도의 M.E.S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 버텨보겠다. 이거지?’
 
 토이 월드는 이곳 말고도 다른 도시에서도 거대한 점포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체인점이었다. 덩치가 큰 만큼 사람도 많이 찾는 곳이었기에 모든 장난감 회사는 이곳에 물건을 들여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토이 월드가 직접 장난감 회사에 수주를 넣는 일은 드물었고 보통은 영업 담당이 직접 샘플이나 카달로그를 들고 찾아가 물건 발주는 부탁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잠시 토이월드의 매장을 둘러본 뒤에 슬쩍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네······.”
 가게안의 모습은 반년 전에 비해 더 호화로워진 분위기였다. 영화에서 보던 장난감 왕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랄까? 하지만 가게 안에서는 여전히 비디오 게임 코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하군.”
 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가게를 살피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장난감을 고르고 있었는데,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나조차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아이가 엄마 손을 흔들며 물었다.
 “마미~ M.E.S랑 슈퍼 마리지는 어디 있어요?”
 “글세······. 워낙에 매장이 넓다 보니 잘 모르겠네? 그래도 이렇게 큰 매장이니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우선 점원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어라? M.E.S를 사러 온 고객인가 보구나. 가게 한편에서 장난감을 살펴보던 중 호기심이 동한 나는 아이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저기, 이곳에 슈퍼 마리지를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기를 팔고 있나요?”
 아이 엄마는 M.E.S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자 가게 점원은 살짝 안경을 치켜 올리며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음? 내가 알기로 토이월드에는 민텐도 기기가 들어가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 점원은 무엇을 소개해 주려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매장 직원이 안내한 곳은 가게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아타리 사의 부진 재고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현재 저희는 미국 최대의 게임회사인 아타리의 콘솔기기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트리지 역시 개당 1달러 수준에 판매하고 있지요. 기기 가격이 비싸고 아직 게임이 많이 나오지 않은 M.E.S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저 새끼가 지금 고객을 호구로 보나? 나는 기가 차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때 엄마 손을 잡고 있던 꼬마아이가 직원에게 물었다.
 “저는 M.E.S를 원해요. 덕헌트랑 슈퍼 마리지가 하고 싶다고요.”
 “꼬마야~ 어차피 게임은 다 비슷한 거야. 민텐도 역시 게임 회사니 조금만 기다리면 아타리 전용으로 카트리지를 내어줄 거란다.”
 “어? 정말요?”
 “누가 망해버린 아타리 2600 기기에 저희 슈퍼 마리지를 발매해 준다고 했나요?”
 결국 참다못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란 점원은 휘둥그레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물거렸다.
 “누······. 누구세요?”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아이 어머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M.E.S 기기를 판매하고 있는 본사 직원입니다. 아이가 원하는 게임과 기계는 여기 점원이 추천하는 아타리 사에는 발매 계획이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3블럭 정도 내려가시면 토이박스라는 작은 장난감 가게가 있어요. 그곳에서 이 명함을 보여 드리면 가게 사장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이 엄마는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아이와 함께 매장을 나섰다. 그러자 나 때문에 고객을 놓친 점원은 나를 노려보며 따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뭔데 남에 가게에 와서 손님을 채갑니까?”
 “그러는 당신은 뭔데 근거 없는 소리로 손님을 현혹 시킵니까?”
 “뭐라고? 이 노란 원숭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지금 제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여긴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나요?”
 점원의 호통에 내가 더 큰소리로 외치자, 주말에 가게를 둘러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로 전에 나와 야마시타 씨를 내동댕이쳤던 스미스라는 직원이 서둘러 다가와 우리를 진정 시켰다.
 “무슨 일인가? 제이슨”
 “이 사람이 제가 응대 중이던 고객에게 다가와 다른 가게를 알려주며 그쪽에서 물건을 구매하라고 유도했습니다. 이건 명백한 영업 방해입니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스미스 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안녕하세요. 스미스 씨 잘 지내셨나요?”
 “M.H.E.S 직원이었던?”
 “기억력이 좋으신데요? 그때 딱 한번 봤었는데”
 “성함이 미스터 강이셨죠?”
 “네, 맞아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사장님이 다시 보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 좀 내주실수 있나요?”
 얼씨구······? 내가 그 인간을 왜 다시 봐야 하지? 나는 잠시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스미스 씨에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제가 현재 미팅이 잡혀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급하시면 저희 M.H.E.S 사무실에 연락을 주세요.”
 ‘너희가 과연 머리 숙이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말이지~’
 나는 스미스 씨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준 뒤에 매장 문을 나섰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 결국 토이 월드에서 연락은 없었다. 아마도 아타리의 부진 재고를 털어내느라 고객 눈탱이 치기만 바쁜 거겠지······ 그럴수록 기업은 신용을 잃어가게 마련인데, 토이월드의 사장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백치인 모양이다.
 
 * * *
 
 한번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면 내 책상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이 넘쳐흘렀다. 대부분 신규 입점 매장의 인센티브와 진열비에 대한 계약 서류들이었는데, 엘리스가 결재 서류를 시간대별로 차곡차곡 모아 책상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면 검토후 사인을 마치는 게 본사에서 주된 업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님. 이건 어느 고객한테서 온 문의 사항인데 읽어 보시겠어요?”
 “음? 고객한테서요?”
 “최근에 제품의 판매 가격이 매장 마다 판이하게 다르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어요.”
 “그럴 리가요. 저희가 관리하는 매장에서는 무조건 정찰제를 도입하고 있는데?”
 “그게 물건 수급이 부족해서 프리미엄 현상이 일어나고 있나본데요?”
 “하아, 이런 너무 잘 팔려도 탈이군.”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객에게서 온 편지를 펼쳐 들어 보았다.
 -M.H.E.S 영업 담당자님께-
 저는 게임을 좋아하는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는 슈퍼 마리지를 너무나 좋아해요. 언제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슈퍼마리지와 마리지 브라더스. 그리고 덕헌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고 종종 조르곤 합니다.
 이 세상에 아이를 이길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아이의 학업이 걱정 되지만,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바람에 지난주에 토이월드에서 M.E.S를 구매했습니다.
 잠깐만 토이월드에서 M.E.S를 샀다고? 이게 뭔 소리야. 뭔가 좀 이상한데?
 아시다시피 토이월드는 굉장히 규모가 큰 장난감 매장으로 다양한 회사의 물건을 취급하기로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신용도도 높은 편이에요. 하지만 그곳에서 M.E.S를 구입한 저는 너무 높은 가격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전자총과 로봇이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299불라는 가격은 너무 높게 잡혀 있는 것 같아서요.
 299불라니······. 2~30불도 아니고 100불을 더 붙여 팔았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편지를 자세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워낙 졸라서 사주긴 했지만, 제가 알기로 M.E.S의 가격은 199불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격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지 매장 직원에게 물었지만,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다른 상가들 역시 M.E.S를 판매하고 있었지만, 가격은 토이월드와 비슷한 수준이었어요.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M.H.E.S에서 이 부분을 확실히 조사하여 더 이상 소비자들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관리를 부탁드립니다.
 “하아······. 미치겠네······.”
 “저도 읽어 봤는데, 정말 화가 나더군요. 어떻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회사에서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죠?”
 “돈이 되니까요······.”
 “네?”
 “전 일단 여기 적혀 있는 토이월드 매장에 좀 다녀올게요. 엘리스는 일단 현재 각 매장으로 출고 준비 중인 모든 기기의 배송을 일시적으로 중단해 주세요.”
 “과, 과장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태가 해결 될 때까지 재고 수급을 멈추란 말입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회사 앞에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 토이 월드 매장으로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제의 토이 월드 체인점 앞에 선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Good afternoon, Ladies and gentleman. Welcome to Toyworld! A land full of joy and wonder.” (안녕하세요. 고객님 즐거움이 가득한 토이월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환영은 개뿔 용팔이 같은 새끼들이!!”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환영 인사를 건네는 직원을 향해 한국말로 대답하자,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네?”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한 뒤에 영어로 물었다.
 “M.E.S를 사러왔는데요. 여기서 팔고 있나요?”
 “아~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점원은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카운터로 안내했다. 잠시 후 카운터 밑에서 M.E.S게임기를 꺼내든 점원은 밝은 미소로 원하는 게 이게 맞냐고 물었다.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에 가격을 묻자,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299불입니다.”
 “······이 새끼가 장난치나?”
 “네?”
 나는 안주머니에서 명함 꺼내서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점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 명함을 살펴보다가 M.H.E.S라 쓰여 있는 사명을 발견하곤 두 눈을 꿈뻑 거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확 목젖을 후려갈길까보다.
 “보시다시피 민텐도 직원 강준혁 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199불에 판매하는 M.E.S가 왜 여기서 299불에 팔고 있는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의외로 점원의 표정은 담담했다.
 “저희가 매입해온 물건에 대해 얼마들 받던 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
 어라? 지금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를 판에 이 뻔뻔한 태도는 뭐지?
 나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물건을 정가보다 100불을 넘게 받고 팔고 있는데, 상관이 없다니요!!”
 “저희가 귀사에 물건 발주를 요청한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팔고 있는 물건은 모두 이 근처의 가게에서 199불에 매입한 물건입니다. 우리는 그걸 다시 고객에게 판매하는 것일 뿐이고요. 당연히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이윤은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저희 쪽에 발주요청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카달로그를 들고 저희 쪽과 가격 협상을 하셨어야지요.”
 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뭐 이딴 놈들이 다 있냐······ 카운터가 시끄러워지자 매장을 관리하는 점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여기 이분이 M.H.E.S 직원인가 본데, 저희가 이 기계를 299불에 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래? 거기 남자 분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면 다른 고객들에게 폐가 되니 그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점장이고, 점원이고 양심을 팔아 치웠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자꾸 행패를 부리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조용히 돌아가도록 하죠. 대신 그냥은 안 넘어갈 테니 두고 보세요.”
 “뭐~ 마음대로 해보세요.”
 점장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분 나쁘게 웃어보였다. 잠시 그들을 번갈아 노려보며 가게 문으로 향하자 뒤에서 나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숭이 새끼가 주접 떨기는 어차피 아무 짓도 못할 거면서~ 하하~”
 그래, 이렇게 나왔다 이거지? 나는 가게 손잡이를 움켜쥔 채 힘껏 밀어 젖혔다. 토이 월드······ 내가 맹세코 미국에 있는 동안 너희 매장을 전부 문 닫게 만들어주마······.
 뿌드득. 악다문 입안에 비릿한 피내음이 느껴질 정도로 나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 * *
 
 “음!? 패키지 디자인을 또 바꾼다고?”
 “네. 지금 도안의 빈 곳에 대문짝만하게 가격을 박아 넣을 겁니다.”
 그러자 야마시타 씨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이봐. 이게 무슨 아이들이 먹는 과자 부스러기도 아니고, 무슨 패키지에 가격을 고지하나······.”
 “전자 제품에는 소비자 가격을 고지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아니······. 물론 그런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단가 조정 때마다 패키지를 교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리고 뭐요?”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시장이 커지고 있고, 토이 월드 쪽에서도 일반 가게에서 기기를 사들이는 것뿐이니 우리랑은 상관없지 않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되면 미국 게임 시장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요. 100불을 올려 파는 것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데, 100불이면 카트리지가 2개입니다. 우리도 손해라고요.”
 “아······. 그렇지, 그렇지······.”
 이 새끼 동경대 나왔다더니 완전 허당이네? 카마우치 사장 사위에 지사장이랍시고, 대우 좀 해줬더니 이딴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니, 대 실망이다. 그때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엘리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현재 출고 대기 중인 물건들은 어떻게 할까요? 소매점에서 언제 물건이 도착하느냐고 문의가 계속 오는데······.”
 그러자 야마시타 씨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수금이 완료된 품목들이니까, 서둘러 출고시키세요.”
 “네, 알겠······.”
 “출고시키지 마세요.”
 내 말에 엘리스는 화들짝 놀라 결재 서류를 끌어안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수금 했던 돈 전부 다시 매장에 돌려주고, 계약 위반 시 위약금도 같이 전달해 주세요.”
 “가······. 강 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부터 단 한 대의 M.E.S도 제 허락 없이는 출고 될 수 없습니다. 엘리스 씨는 즉시 포장업체 문의 해보고, 현재 패키지 디자인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199불이라는 가격을 고지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엘리스는 내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지사장실 문을 나섰다. 그러자 야마시타 씨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에게 물었다.
 “강 군 대체 어쩔 생각이야. 물건을 납품하는 회사 쪽에서 거래를 틀 생각은 않고 도리어 끊어버리다니!?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차피 수요는 충분합니다. 현재 시장에 뿌려져 있는 M.E.S로는 한 달도 못 가서 전부 사라질 거예요.”
 “그다음엔?”
 “우리는 물건이 바닥나는 한 달 동안 민텐도 멤버십 클럽을 만들 겁니다.”
 “멤버십 클럽?”
 “정식 루트로만 우리기기를 판매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가맹점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단 하나의 게임기로 거대한 토이 월드를 고립시키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다음 날 나는 우리 M.E.S를 가장 먼저 받아준 토이 박스의 사장 윌슨 씨를 찾아 갔다. 전후사정을 들은 윌슨 씨는 나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토이월드의 횡포가 심하긴 심하지. 비단 M.E.S 뿐만 아니라 인기 있는 장난감 역시 무조건 돈으로 사재기해서 나중에 비싸게 올려 받지······. 소비자들은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구입하는 셈이고······. 그런데 가맹점? 그건 대체 뭔가??”
 “윌슨 사장님처럼 저희 M.E.S에 협조적인 사람들만 모아서, 하나의 클럽을 형성하는 겁니다. 저희 본사와 직통 라인으로 유통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죠.”
 “아~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멤버십에 가입된 가게 중에 만약 토이 월드에 기기를 대주는 것이 적발될 경우. 더 이상 그 가게와 거래를 트지 않을 생각입니다. 재고로 남아 있는 기기는 모두 회수하여 다른 멤버십 가게에 분배될 것입니다. 또한 월별로 판매 순위에 따라 특별 인센티브를 차등 지급할 예정이에요.”
 “그러면 우리야 정말 좋지~!!”
 윌슨 씨는 나의 제안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이거 아직 본편은 시작도 안했는데 너무 좋아하시는데? 이러다가 다음 이야기 듣고 까무러치시는 거 아냐? 같이 시장조사를 나와 있던 엘리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장님께 제안을 드릴게 남아 있습니다.”
 “음?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 돕겠네.”
 “지금 가게를 정리하시고, 저희 민텐도 프리미엄 매장 1호점의 점장님이 되어주세요.”
 “뭐라고······?”
 
 * * *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은 참 편리한 역할을 한다. 때마침 토이월드의 맞은편에 임대 건물이 비어 있던 터라 계약은 순조로웠다. 어마어마한 인력을 투입시켜 단기간에 심플한 화이트톤으로 인테리어를 마친 우리는 일본에서 동킹콤과 마리지의 캐릭터 상품을 대거 공수하여 민텐도 캐릭터들도 꾸며진 예쁜 전용 매장을 만들었다.
 카마우치 사장은 기존에 장난감을 만들어 내던 공장 라인으로 캐릭터 사업에 뛰어들었고, 슈퍼 마리지의 흥행에 힘입어 캐릭터 상품 역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열쇠고리부터 인형에 이르기까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악세서리와 장난감 지식을 모두 동원 해 일본에 요청했으니 앞으로 품목이 점점 늘어나겠지?
 시장은 이미 M.E.S의 재고가 모두 동이 난 상태라 어딜 가도 기기를 구할 수가 없어 난리가 난 상태였다. 지난 한 달 동안 홍길동처럼 여기저기 쏘다니며 협조적인 업체만 컨택한 결과 매장 개수는 예전보다 적어졌지만, 각 점포의 충성도가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이렇게 예쁜 가게를 가져보다니······. 정말 꿈만 같군. 내가 강 군을 만난 건 진짜 행운이야.”
 “사장에서 점장으로 직위는 강등 되었지만, 수입은 훨씬 나을 거예요.”
 야마시타 씨는 내일 오픈을 준비 중인 프리미엄 매장을 바라보며 입이 떡 벌어진 상태로 윌슨 씨에게 물었다.
 “뉴욕 한가운데에 이만한 규모의 프리미엄 매장이라니······. 윌슨 씨 굉장히 부자셨군요······.”
 “네? 아니요~ 이게 다 미스터 강······.”
 나는 윌슨 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윙크를 보냈다.
 “미스터 강을 만난 인연 덕분이죠~ 하하하~”
 사실 이 프리미엄 매장에는 내 자본이 대거 투입되었다. 카마우치 사장에게 부탁하여 회사 돈으로 매장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 짠돌이에게서 돈을 뜯어내기란 쉽지 않을 테고, 또 뉴욕 한가운데에 내 매장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미래에도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투자하기로 했다. 물론 나는 외국인이기에 윌슨 씨와 공동명의로 소유권을 내었고 증인으로 엘리스를 세웠다. 적어도 미국에서 이 두 명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길 건너편에는 불편한 심기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토이월드 직원들과 사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일부러 활짝 웃어 보이며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침을 탁 뱉은 뒤에 매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봅시다. 당신들이 원하는 돈지랄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 * *
 
 프리미엄 1호점의 오픈은 그동안 쟁여 두었던 모든 재고를 폭발시키는 순간이었다. 오픈 2주전부터 신문에 거대한 광고를 한 탓에 기다렸던 고객들은 모두 프리미엄 매장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와 엘리스 역시 윌슨 씨를 도와 매장에서 판매직을 겸해야 할 정도였다.
 길게 늘어선 행렬을 따라 계속 해서 결제를 해주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길 건너 토이월드의 점원 스미스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고객한테 눈탱이를 치던 제이슨도 보였다.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M.E.S를 구입하러 오셨나요?”
 “네. M.E.S 100대를 주문하려는데요?”
 “아~ 100대요? 그런데 고객님 이거 안 보이세요?”
 나는 턱짓으로 슬쩍 옆에 있는 작은 팻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저희 M.E.S는 보다 많은 유저 분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한 분당 최대 2대까지만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물건을 안 팔겠다는 말입니까?”
 “아뇨~ 팝니다. 대신 한 사람당 딱 두 대까지 만요. 스미스 씨도 저희 민텐도 게임의 팬이실지도 모르는데, 판매를 안 할 순 없지요.”
 “크으······. 일단 두 대를 주시오. 다시 찾아오지······.”
 “하루에 두 대씩이니 매일 오시겠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카운터 뒤에 쌓아둔 M.E.S를 꺼내어 카운터에 올려두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398불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지만 패키지를 본 스미스 씨의 돈을 건네줄 생각조차 못하고, 상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언제부터 상자에 이런 게 쓰여 있었지?”
 -M.E.S는 199불입니다. 그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하셨다면 고객님은 사기를 당하신 겁니다. 만약 그런 매장이 있다면 아래 연락처로 신고해 주세요. 곧바로 차액을 지급해 드리고, 매장에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저희 민텐도는 고객님들의 편입니다.-
 문구 아래에는 패키지에 대문짝만하게 199불이라 쓰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미스 씨에게 물었다.
 “저기 손님? 구입하실 건가요? 뒤에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는데······.”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가!!”
 “안 살 거면 꺼져. 병신아.”
 한국의 욕은 참 신비하다.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어감만으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달까?
 결국 스미스와 제이슨은 M.E.S의 구입을 포기하고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국 내의 소비자 단체가 토이 월드를 상대로 들고 일어섰다. 우리의 대대적인 광고 효과로 인해 분개한 고객들이 법원소송과 토이월드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 역시 초기 대안으로 소송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미국 내 인지도가 높은 대기업을 상대로 고소했다간 가뜩이나 미국 내 신생 기업인 민텐도의 이미지에 좋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대신 패키지에 가격과 문구를 넣어 소비자를 자극시키자는 내 생각이 멋지게 들어맞았고,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토이월드는 미국 시민들의 힘으로 신용도가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쌤통이다. 이 자식들~
 
 * * *
 
 그로부터 다시 4개월이 흐르고, 점점 늘어가는 멤버십 가맹점 덕분에 점심조차 먹을 시간이 없던 나는 늦은 시간 사무실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따르릉~~ 그때 퇴근을 앞두고 있던 엘리스가 전화를 받더니 나에게 물었다.
 “저기 강준혁 부장님. 토이 월드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는데요?”
 “음?? 잠시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긴 제 발로 걷어찬 게임기가 미국에서 1년 동안 대박 히트를 치고 있는데, 더 이상 매입을 안 하고 베기겠어? 오히려 이 정도까지 버텼으면 오래 버틴 거지. 나는 콜라 한 모금으로 씹고 있던 햄버거를 삼킨 뒤 전화를 받았다.
 “네, M.H.E.S의 강준혁입니다.”
 “미스터 강? 혹시 날 기억하나?”
 낯익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되물었다.
 “누구시죠? 그렇게 들어선 잘 모르겠는데요?”
 “미국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와 가장 많은 점포수를 운영하는 토이 월드 사장. 톰 왓슨일세.”
 “아~ 안녕하세요. 톰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실은 음······.”
 톰 사장은 자신이 이렇게 굽히고 들어가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만 말을 어물거렸다. 안 그래도 식사시간을 방해 받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라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이제 곧 다른 매장 계약 건으로 나가봐야 해서요. 별일 아니면 끊겠습니다.”
 “아니, 저기!! 잠깐!!!”
 “뭡니까.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세요.”
 “그게 계약을······.”
 “아~ 드디어 토이 월드에서 저희 물건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이거 참. 뉴욕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에서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어흠~ 흠~ 알아주니 고맙군.”
 어쭈? 조금 띄워줬더니 이것 봐라? 톰 사장은 잠시 헛기침을 한 뒤에 나에게 물었다.
 “우선은 300대 정도 주문을 넣고 싶은데, 언제까지 가능하겠나?”
 “아~ 300대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최소 납품은 500대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시나본데, 저희는 가맹점에만 물건을 납품하기 때문에 멤버십 클럽에 등록을 해주셔야합니다.”
 “이 봐. 미스터 강. 지금 나한테 민텐도 멤버십인지 뭔지에 가입을 하라고? 토이 월드가 미국 곳곳에 얼마나 많은 점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가!?”
 “알고 있죠. 그리고 4개월 전에 소비자 보호 단체에 고발당해서 벌금도 깨나 물으신 것도 알고 있고요. 현재 사업이 좀 휘청휘청 하시죠?”
 “크으.······.”
 “일단 저희도 다른 업체들과 함께 규정해 놓은 사항이기에 가입은 필수입니다. 어떻게, 멤버십 가입을 하시고 500대 발주를 하시겠어요?”
 “좋아······. 그럼 그렇게 하고 500대를 주문하지. 지금 주문하면 언제쯤 받을 수 있나?”
 어쭈? 이번엔 명령조까지? 영어에 경어와 평어에 큰 경계는 없지만, 그래도 상대방을 예우하는 단어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톰 사장의 단어 선택은 마지 자기 부하 직원에게 오더 내릴 때 쓰는 듯한 명령조였다.
 “흐음······. 죄송하지만 사장님. 현재 다른 매장에서 주문이 쇄도해서 좀 기다리셔야 할듯합니다. 적어도 석 달 정도는 걸리겠는데요?”
 “무슨······. 석 달씩이나, 그럼 크리스마스 시즌을 넘겨 버리잖아!!!”
 “그렇죠······. 애석하지만, 저희는 신용을 중요시하는 회사라 아무리 작은 매장의 약속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저희 역시 뉴욕에서 가장 큰 장난감 매장인 토.이.월.드의 크리스마스 시즌 납품을 놓치게 되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 그러고 보니 한 달 뒤면 크리스마스네, 벌써 내가 이곳에 온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구나. 그동안 민텐도의 패밀리는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일본과 미국시장은 거의 점령하고 있었다. 뒤늦게 게임 산업이 아직 죽지 않은 걸 눈치챈 NEGA에서 신형 게임기 NEGA 디스크의 제작이 발표 되었지만, 이미 게임 시장 자체는 민텐도의 패밀리가 휩쓸고 있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기······. 미스터 강. 정말 미안하지만, 어떻게든 본사에 연락하여 추가 주문을 넣어 줄 수는 없는가? 부탁이네······.”
 “흐음······ 그런데 사장님. 제가 정말 죄송한데요. 지금 저희 멤버십 클럽 규정을 확인해보니 고객에게 물의를 일으킨 매장에 저희 M.E.S를 납품할 수가 없게 되어 있군요.”
 “뭐······. 라고······?”
 “거듭 죄송하지만 뭐 아직 계약서를 작성한건 아니니 그냥 없던 일로 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나중에 토이 월드의 신용을 회복한다면 그때 다시 연락을 주세요~ 그럼 감사합니다.”
 “저······. 저기!!”
 왓슨 씨는 내 말에 떨리는 목소리로 뭔가 말을 꺼내는 듯싶었지만, 나는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미쳤냐? 내가 너희 때문에 얼마나 열이 뻗쳤었는데, 사과 몇 마디 했다고 물건 주게?
 이미 신용도가 바닥을 쳐 수장되기 일보 직전인 기업에 재고를 넣어줄 필요는 없지.
 “부장님도 대단하시네요. 그래도 아직까지 내수 시장에 토이 월드의 입김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인데 그걸 단칼에 거절하시다니······.”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뭐 다시 회생할지 모르지만, 미국 시민들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기를 바라야죠~”
 “정말 부장님같이 무서운 사람은 처음이네요. 지사장님이라면 금방 지난 일을 잊고 일단 돈이 될 테니 물건을 보내줬을 텐데, 부장님은 그렇지 않네요. 같은 동양인이라도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인가?”
 금발의 미인인 비서 엘리스 씨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텐도 미국지사인 M.H.E.S는 1년 만에 미국시장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다. 그 덕분에 회사 규모도 커져 나는 반년 전 부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영민한 비서 엘리스는 가맹점을 총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엘리스 씨.”
 “네, 부장님.”
 “지난 6개월 동안 저를 쫓아다니면서 고생 많이 하셨죠?”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정말 부장님만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하하~ 그거 칭찬이죠?”
 “음~ 반 정도는요? 호호”
 “제가 일하는 걸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오셨으니, 아마 제가 자리를 비워도 잘하실 수 있겠네요.”
 “그럼요~ 물론이죠.”
 “그럼, 엘리스 씨께서. 내년부터 저를 대신해 부장 좀 해주세요.”
 “네······? 뭐라고요!?”
 “전 다시 일본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NEGA에서 새로운 게임기를 개발해서 곧 출시를 앞두고 있거든요.”
 “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일본으로 돌아가신다니요. 그럼 미국 지사는 어쩌고요!?”
 “당신이 있으니까. 저도 마음 편히 가는 겁니다.”
 “부장님!!!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안 되는 게 어딨어. 1년 동안 느끼한 햄버거만 먹으며 고생만 실컷 하고, 그리고 내가 지금 일본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 *
 
 “강 군. 그······. 정말 가려는 건가?”
 “하하~ 저도 출장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네요. 처음 여기 왔을 때는 한 달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크리스마스까지 보내고 가게 될 줄이야.”
 공항으로 가는 길. 야마시타 씨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며 내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강 군 덕분에 이만큼 해왔다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아쉬워서 그래······.”
 “이미 기초공사는 잘 닦아 놨으니, 미국에서는 걱정 없을 겁니다. 윌슨 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고······.”
 “윌슨 씨가 많이 서운해 할 거야.”
 “그렇겠죠? 하하~ 뭐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자주 연락하지.”
 공항에 도착하니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부장님!!!”
 “엘리스 씨?”
 “야 이 나쁜 자식아!! 말도 안하고 이렇게 갑자기 일본에 가버리면 어떡해!!!”
 헐······? 지금 쟤가 나보고 뭐라는 거야?
 “엘리스 씨 어디 아파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떨렁 승진만 시켜놓고 일본으로 가버리면 나 혼자 어떡하라고!!”
 눈물에 화장이 번진 엘리스는 나에게 달려와 가슴을 퍽퍽 쳐대었다. 몇 대 맞아 주던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뒤 곧바로 입술을 덮쳤다.
 “흡!!”
 “어, 음······. 저기 강 군······? 허허······.”
 야마시타 씨는 볼을 긁으며 잠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렇게 짜릿한 키스를 마친 뒤 엘리스의 볼을 감싸 쥐며 말했다.
 “잘 있어요. 비서님~ 혹시 휴가 받으면 일본에 놀러 와요. 내가 맛있는 식사 대접할 게요~”
 “안녕히 가세요. 부장님······.”
 나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마친 뒤 티켓을 들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미국인들은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고, 창피했던 나는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 문으로 들어갔다.
 아~ 이거 참. 금발의 미녀와 찐한 키스도 해보고 좋은데~? 미국에 온 보람이 있었어~!!
 
 * * *
 
 1985년. 이 시기는 게임 역사상 참 특별한 시기 중에 하나이다. 본래는 슈퍼 마리지가 발매되었던 해.
 그러나 내가 1년 앞당겨 출시한 바람에 조금 김이 새어버린 감이 있지만, 이 시기에 무엇보다 빛났던 것은 바로 RPG게임의 진화였다.
 흔히 TRPG라 불리며 테이블 위에서 주사위를 굴리던 놀이에서 벗어나 진정한 판타지 세계를 모험하는 RPG가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었던 것이 바로 이 1985년이었다.
 “어서 오게, 강 군~!!”
 “이 녀석 미국 물 좀 먹었더니 더 훤칠해진 것 같은데!?”
 내가 소속되어 있던 주식회사 민텐도는 패밀리의 대히트와 함께 장난감 회사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진정한 게임 회사로 거듭났다. 회사 규모도 더욱 커지고, 건물도 새로 들어서 있었다.
 “와우······. 회사가 엄청 커졌네요?”
 “그렇지? 모두 우리가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
 군페이 씨는 흐뭇한 미소로 새하얀 민텐도 본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우리 뒤에서 앙칼진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훌륭한 인재를 모은 내 혜안 덕분이다. 이놈들아~!!”
 “아~ 카마우치 사장님. 안녕하세요.”
 “너 이 녀석 회사에 왔으면 사장인 나에게 빨리 와서 보고를 해야지.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는 거야? 듣자 하니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최고급 호텔에서 아예 전세내고 살았다면서!!”
 “사장님. 그건 제 사비로 충당하지 않았습니까?”
 “얼씨구 이놈보소? 1년이 지나도 네 녀석 말버릇 하난 여전 하구나.”
 “하하, 그런가요? 아무튼 건강해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인마~ 나 아직 안 죽었거든? 난 2000년까지 사장질 해먹을 거야~!!”
 그래요. 당신은 2002년까지 사장질을 하시더라고요. 그때 군페이 씨가 안경을 쓸어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사장님께 진언했다.
 “저기 사장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는 1999년 지구가 멸망할거라고······.”
 “야~이 미친놈아!!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음······. 역시 공돌이는 센스가 부족하군.
 4장 스폰서 게임(1)
 
 
 “그래서 가고 싶은 부서는 정했나?”
 “네, 저는 차세대 콘솔 개발 파트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카마우치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군페이 씨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에 그런 부서가 있었나?”
 “아, 현재 휴대용 겜보이 진행을 맡고 있는 제가 파트장이긴 한데, 강 군은 그럼 내 밑으로 오고 싶다는 건가?”
 “아뇨. 제가 말씀 드리는 건 패밀리의 뒤를 이를 차세대 거치기 개발 파트입니다.”
 카마우치 사장은 나의 대답에 기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음!? 패밀리의 후속기? 그건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한창 잘나가는 게임기인데 벌써 후속기를 만들 순 없잖나?”
 “물론 지금 당장 만든 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NEGA라는 경쟁사가 나타났고, 그들이 NEGA 디스크를 출시하면 강력한 하드웨어를 강점으로 내세울 겁니다. 그렇기에 슬슬 생각은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컴퓨터의 발전 속도도 빨라지고, 그렇게 되면 패밀리는 민텐도에 있어 한순간의 영광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흐음······. 후속기라. 하긴 강 군 말도 맞는 말이야. 시대에 맞춰 강력한 하드웨어를 개발해야 게임의 퀄리티도 올라갈 테고······.”
 “맞습니다. 사장님. 그래서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부탁드린 겁니다. 그곳에서 차세대 콘솔을 제작하며 게임 개발도 함께 하겠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군페이.”
 “저도 강 군과 같은 생각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게임 산업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회사들이 요 근래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어요. 그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지금 차세대기 제작을 생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진행을 하지.”
 “네. 감사합니다.”
 어라? 생각보다 쉽게 말이 통했네? 저 짠순이 카마우치가 곧바로 승낙도 다해주고? 아무래도 미국 시장 공략에 성공한 것이 회사 내에서 내 입지를 꽤나 세워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개발 부서의 부장으로써 일본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때는 1985년 내 나이 23살이 된 해였다.
 
 * * *
 
 “시게 씨. 혹시 드래곤 워리어 해보셨어요?”
 시게 씨는 쿠마모토 시게루를 줄여 부른 별명이다. 그는 요새 한 게임의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몰라, 인마.”
 퉁명스러운 그의 목소리는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걸 뜻했기에 그에게 질문을 했던 사원은 뻘쭘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커피를 마시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누가 보면 굉장히 버릇없는 자세라고 욕하겠지만, 미국 시장에 활로를 개척하고, 차세대 거치기 개발 파트 부장을 맞고 있는 나를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어쭈? 이 녀석 주머니에서 손 안 빼? 미국 물 거하게 먹더니 아주 자세가 남달라졌어? 미스터 강?”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하다. 이놈아.”
 “하하, 개발실엔 어쩐 일이세요?”
 “시게 녀석 좀 보러왔지.”
 그러나 시게루 씨는 카마우치 사장이 온 것도 모른 채 모니터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시게루 씨를 향해 카마우치 사장은 넉살 좋은 표정으로 물었다.
 “야, 시게야 너도 드래곤 워리언지 뭔지 그 게임 해봤냐?”
 그러자 시게루 씨의 눈썹이 꿈틀 거리더니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몰라 이놈아!! 드래곤 워리언지 뭔지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고 지랄들이야!!”
 “······.”
 카마우치 사장은 마치 금붕어처럼 입 주변을 뻥긋 거리며 벙 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 젊은 녀석들을 부장에 앉혀 놨더니, 회사가 미쳐 돌아가는구먼······.”
 “아, 사장님!?”
 “내가 아무리 프리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지만, 요새 내가 너무 편하게만 대해줬지?”
 “아,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다가······.”
 시게루 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사장님께 사과를 드리고 있었다. 질투심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더니 드래곤 워리어라는 게임 하나가 시게루 씨를 미치게 하는 구나.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 근래 나는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게임업계의 역사가 미묘하게 틀어졌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본래 내가 알던 흐름이라면 시게루 씨의 카린의 전설이 드래곤 워리어보다 세달 정도 먼저 나왔어야 했는데, 드래곤 워리어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이야······.
 슈퍼 마리지의 횡 스크롤 시스템이 1년 먼저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게임 장르의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넓어졌다. 그로 인해 드래곤 워리어는 단 5개월 만에 제작을 끝내 버리고, 시리즈 최초의 1탄을 출시해버린 것이다.
 드래곤 워리어가 출시된 날. 나 역시 하루 연차를 써서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다녀왔다. 패밀리의 성공과 네가 디스크의 활약으로 아키하바라는 요새 전자 제품과 게임기가 짬뽕이 되어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피닉스라는 일본 게임 회사에서 민텐도 패밀리용으로 출시한 드래곤 워리어는 출시 전부터 게이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만큼 출시 당일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도 그럴게 여태까지 게임이라면 단타 위주의 아케이드 형식을 띄고 있었는데, 슈퍼 마리지 역시 횡 스크롤이라는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게임 장르의 저변을 넓혔지만, 엄밀히 말해 아케이드 액션의 한 축에 속해 있던 슈퍼 마리지는 ‘완벽히’ 새로운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드래곤 워리어는 발매와 동시에 일본 최초의 RPG게임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사실 시게루 씨 역시 같은 시기에 일본 최초의 RPG라는 타이틀을 위해 초록 모자를 뒤집어 쓴 요정을 테마로 게임 하나를 만들고 있었는데, 문제는 본인의 욕심이 화를 불러 일으켰다.
 스토리에 너무 이것저것 쑤셔 넣는 바람에 제작 기간이 길어 진 것이다. 처음엔 요정족 소년이 공주를 구하는 심플한 내용이었지만, 어디서 삼각형 세 개가 뭉쳐진 트라이포스인지 뭔지 희한한 엠블렘을 만들어 내더니 그것에 대한 세계관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제작 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로······. 6개월에서 9개월로 점점 늘어만 갔고, 그 틈에 피닉스 사는 ‘공주를 구하는 용사’라는 심플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로 게임 하나를 뚝딱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바로 드래곤 워리어였다.
 
 * * *
 
 “끙······. 아, 짜증 나······.”
 나는 휴게실에 있던 시게루 씨에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네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시게 씨? 그러게 뭘 그리 스트레스 받아요~ 이제까지처럼 편하게 제작하면 되지.”
 “아~ 땡큐.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드래곤 워리어가 주목 받을수록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최초의 RPG장르~!! 탐났었는데······.”
 “욕심도 과합니다. 드래곤 워리어 덕분에 지금 다른 게임 회사들은 난리도 아니에요. 요새는 아케이드가 아니고 패밀리나 NEGA 디스크용 게임만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도 많이 생겼더군요.”
 “드래곤 워리어가 대박을 치고 있으니, 비슷한 RPG 작품들이 엄청나게 파생되겠지? 아~ 그러면 내가 만드는 카린의 전설도 그 안에 묻혀 버릴 거 아냐~~!!!”
 ‘카린의 전설’은 현재 시게 씨가 제작 중인 게임의 제목이었다. 정작 주인공 이름은 엘크라는 녀석인데, 붙잡혀간 공주 이름을 게임 타이틀로 붙이다니 뭔가 게임 제목에서도 유저들에게 수수께끼 내는 걸 좋아하는 시게 씨다운 성격이 묻어나 있었다.
 나는 그의 외침에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던져보았다.
 “그럼 그 안에서 다시 최초를 만들어 봐요.”
 “음? 그게 무슨 말이야?”
 “가령 RPG긴 RPG인데, 슈퍼 마리지처럼 필드에서 직접 적이랑 부딪혀 싸우는······. 굳이 장르를 붙여 보자면 액션 RPG? 뭐 그런 거라면 확실히 눈에 띄지 않을까요?”
 “좋아!! 강 군!! 그거 좋아!! 완전 좋아!! 딱 내 스타일이야!! 역시 넌 천재야!!”
 아, 네······. 감사합니다. 시게루 씨는 단숨에 캔커피를 비워 버리고는 개발실로 달려갔다. 어휴~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양인가보군······.
 휴게실에 혼자 남아 있던 나는 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드래곤 워리어도 카린의 전설도 일본 게임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끌 녀석들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 * *
 
 역시나 내 예상대로 드래곤 워리어의 발매이후 일본 게임 업계는 RPG의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기존 액션 게임과는 다르게 장대한 모험을 그리고 있는 RPG장르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좋아하는 장르였고, 그로 인해 패밀리의 판매량은 더욱 늘어 NEGA 디스크는 시장 어디에도 발붙일 만한 틈이 없었다.
 고사양 차세대 게임기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지만, 모든 게임 회사는 이미 보급이 깔릴 대로 깔린 패밀리를 선호했고, NEGA 디스크는 몇몇의 자사 게임으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껄껄껄, 역시 NEGA 따위는 우리 민텐도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 하는군.”
 요 근래 자신감이 폭발한 카마우치 사장은 연일 오르는 주식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군페이 씨 역시 웃으며 카마우치 사장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드래곤 워리어가 1위입니다. 덕분에 다소 침체 되었던 패밀리의 판매량이 다시 한번 크게 늘었습니다.”
 콘솔이란 참 묘하다. 막말로 지금 시기의 콘솔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기계 장치였다. 내가 살던 2015년처럼 인터넷을 이용해 게임을 다운로드 할 수도 없기에 콘솔의 판매는 무조건 소프트와 묶여서 나간다는 공식이 성립되었고, 그것은 곧 민텐도에 얼마만큼의 로열티 수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제 시게루의 카린의 전설을 취재해간 게임 잡지 기자도 극찬하며 기사를 잘 써준다고 하니, 기대가 되네요.”
 “시게 녀석이 이번에도 제대로 한 건 터뜨려 주겠지. 그런데 게임 잡지라······ 요새는 그런 책도 생겼나?”
 “네, 게임 업계 소식이나 신작이 출시될 때마다 마케팅으로 활용하기가 좋을 듯합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아 매월 발행하는 부수가 꽤 되는 듯하더군요.”
 인터넷이 없다 보니 새로운 정보는 잡지를 통해서만 공유되는 아날로그 시대. 나 역시 PC통신이나 인터넷이 활발해지기 전에는 매월 게임 잡지가 출시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추억이 있었다.
 “그럼 이번 카린의 전설에 그 잡지 회사를 이용한 새로운 마케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음? 강 군.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내가 말을 꺼내자, 사장님과 군페이 씨가 두 눈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카마우치 사장은 또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오는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때마침 그 패미통신이라는 잡지가 다음 달 카린의 전설 카트리지 생산이 시작 되고 1주일 후가 발행일이더군요.”
 “오~ 강 군도 그 잡지에 대해 알고 있었군. 그래서?”
 “이번 카린의 전설은 저희 민텐도에서도 기대가 큰 타이틀이니 프리미엄 전략을 짜보는 건 어떨까요?”
 “프리미엄 전략? 어차피 찍어내면 똑같은 게임인데? 차별화 시킬 게 있나?”
 “초회 생산 500개분은 카트리지를 황금색으로 한다거나······.”
 그러자 군페이 씨가 먼저 탄성을 내지르며 대답했다.
 “아!! 카트리지 색상을 바꾸자는 건가?”
 “같은 게임에도 희귀성을 두는 거죠. 패미통신 기자에게 실물을 먼저 보이면 그것에 대한 기사를 써줄 테고, 그로인해 카린의 전설을 기다리는 유저들의 기대감을 증폭 시키는 겁니다.”
 “같은 게임이지만, 초회 생산분 카트리지에 특별한 컬러를 도입시킨다. 그거 괜찮은데요. 사장님?”
 “나쁘지 않아. 한데 500개는 너무 수량이 적은 게 아닐까? 적어도 1만 개 정도는 해야······.”
 “아뇨. 딱 그 정도 수량이 좋습니다. 두고 보세요~”
 이것이 바로 2015년까지 게이머의 호주머니를 털어갈 ‘한정판’ 마케팅의 시작이었다.
 카린의 전설의 발매일인 1985년 12월 17일 아침. 시게루 씨와 나는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도착해 있었다.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 씨 역시 오후에 행사장을 둘러보러 오신다고 하셨으니 슬슬 출발했겠군······ 내 옆에는 수면 부족으로 퀭한 표정의 시게루 씨가 연신 하품을 쩍쩍 해대고 있었다.
 “강 군. 과연 기대만큼 잘 나갈까? 벌써 몇 번째 게임 출시를 하고 있지만, 항상 발매일 전 날에는 잠을 잘 못 자겠더군.”
 “지지난 달에 카린의 전설에 대한 패미통신 기사도 잘나가서 시장 반응은 좋은 것 같던데? 일단 한번 가볼까요?”
 내가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시게루 씨는 살짝 불안 한 표정으로 내 뒤를 쫓았다. 일부러 토요일로 발매일을 맞춘 우리는 역을 빠져나와 지정된 행사장으로 향했다.
 “토요일인데 왜 이리 한적하지? 막 사람들로 붐벼야 하는 거 아닌가?”
 “시게 씨······. 지금 토요일 오전 9시거든요? 이 시간에 사람이 붐빌 리가 있나요?”
 “아, 그런가? 역시 그런 거지? 하하~”
 이 사람 아주 정신 줄을 놔버렸군. 나는 잠시 찡그린 얼굴로 시게 씨를 바라보다가 다시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아키하바라에 들르니 게임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매장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행사장 역시 아키바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게임 전문 매장이었다. 슈퍼 마리지와 드래곤 워리어 같은 양질의 게임 덕에 아키바 거리는 더 이상 아타리 쇼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게임이 성행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갓난아이의 태동을 느끼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렇게 얼마 쯤 걸었을까······. 거의 행사장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기이한 풍경과 마주했다. 토요일 오전 7시. 보통이라면 텅텅 비어 있어야 할 스트리트에 젊은 남자 몇몇이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신주쿠의 가부키쵸 라던가 시부야라면 조금은 이해가 가는 풍경이지만, 술집 하나 없는 이곳에 주저앉은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까지 받을 수 있을까? 한정 수량이 500개라던데······.”
 “바~보. 민텐도가 설마 여기 매장 한군데에 500개를 다 풀겠냐? 전국에 이미 뿌려졌겠지. 그나마 행사장이니 200개정도는 들어올 거 같은데, 그 정도로 우리까지 받기엔 턱도 없지. 그러니까 내가 어제 저녁부터 와서 기다리자고 했잖아!!”
 “나라고 신작 게임 출시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 줄 알았겠냐!?”
 뭐지 한정 수량 500개? 그럼 카린의 전설을 사러 온 건가? 그런데 왜 행사장이랑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이러고 있지? 골목 끝 쪽에서 중얼 거리는 녀석들을 지나친 나와 시게루 씨는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가······. 강 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아마도 저랑 같은 생각 중이신가 보네요.”
 대박이다. 행사장까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안보일 지경이었다.
 아무리 줄서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이라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카린의 전설 판매는 오후 2시부터 시작이라고!!
 “가, 강 군. 나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 부축 좀 해 줘.”
 “정신 차리고 빨리 와요. 행사장 직원들도 시게 씨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길고 긴 행렬을 지나 판매점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행렬 맨 앞에 대기 중인 내 또래의 남자 손님에게 물었다.
 “추운 날씨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민텐도 직원 강 준혁이라고 합니다만, 혹시 언제부터 기다리셨나요?”
 “어제 오전 10시부터 기다렸습니다. 하하······ 패미통신 기사를 보고 이번 카린의 전설 초회 한정판이 너무나 갖고 싶어서······.”
 세상에 12월 강추위에 24시간을 기다렸다고!? 환장 하겠네······.
 “열의에 감사드려요. 제가 사장님께 따로 말씀드릴 테니, 이따가 괜찮으시면 기념 촬영 한 장 부탁드립니다.”
 “아, 네~!! 혹시 옆에 계신 분이 쿠마모토 시게루 씨인가요!? 동킹콤 때부터 완전 팬입니다. 이번 카린의 전설도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자 시게 씨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카린의 전설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 * *
 
 시간이 흐를수록 행렬은 점점 길어지더니 오후에 접어들자 행사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두가 카린의 전설을 구매하러 온 유저들이라니 정말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이 현상은 방송국까지 귀에 들어가 지금은 취재를 나온 기자가 시게 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행사장 앞에 혼란을 막기 위해 행사 도우미 몇 명을 대동해 곳곳 마다 피켓 배치시킨 뒤 돌아오자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 씨가 행사장에 도착해 있었다.
 “야, 인마~!! 강 부장!!”
 입이 귀에 걸린 카마우치 사장이 덩실덩실 춤을 추듯 나에게 달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응!? 방금 연락 받았는데, 오사카와 교토, 그리고 후쿠오카까지 카린의 전설 판매가 장난 아니라는군. 오늘 하루 만에 초도물량으로 준비한 3만 개가 전부 나갈 기세라고!!”
 하~ 진짜 내심 기대는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보통 일반적인 타이틀. 거기다 신작일 경우에 초도 카트리지 생산 수량은 보통 5천 개 정도로 잡는다.
 그리고 그것을 매장에서 모두 소화하기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는데, 이번 카린의 전설은 우리 민텐도에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거는 타이틀이었기에 한정 수량 골드 색상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보았다.
 메인 디렉터는 이미 마리지 브라더스와 슈퍼 마리지등으로 민텐도 게임의 간판스타가 된 쿠마모토 시게루였기에 유저들의 기대심리가 증폭 되었고, 패미통신 역시 게임계의 트렌드를 소개하는 최초의 잡지사로서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 호화로운 특집 기사를 내었다.
 그렇게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카린의 전설은 출시 전부터 많은 화제를 낳았고, 드래곤 워리어의 붐이 조금 사그라들은 틈을 타 엄청난 반등 효과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대망의 오후 2시······.
 행사 매장에 카린의 전설 오프닝 송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차례차례 대기표를 들고 와 게임을 구입해가기 시작했다. 행사장에 준비한 150개의 황금 카트리지는 이미 행사 개시 15분 만에 동이 나버렸다.
 물론 행사 개시 전에 고지해두었기에 큰 혼란은 없었지만 아쉬워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러자 계산대를 지켜보던 카마우치 사장 역시 유저들과 함께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봐. 그러니까 내가 한 1만 개 정도 준비하자고 했잖아.”
 “아뇨. 만약 1만 개를 준비했다면 결코 이런 효과는 보지 못했을 겁니다. 한정판이라는 그 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니까요.”
 “강 군······. 넌 무슨 만능선수냐? 처음엔 콘솔 하드 기획자인줄 알았더니, 게임도 만들고, 미국에 보내봤더니 영업을 다하질 않나, 거기다 이젠 마케팅까지 하고 있군. 아, 그러고 보니 군페이 녀석이 여기 행사장에서 무슨 발표를 한다며? 사장인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군페이랑 진행한 게 대체 뭐야?”
 카마우치 사장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모른 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나와 군페이 씨, 그리고 시게루 씨의 합작 프로젝트였는데 카린의 전설에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일 걸로 예상한 나의 치밀한 계획 중에 하나였다.
 “앞으로 한 시간 뒤에 발표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 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면 행사장 내부에는 ‘3시 33분 최초 공개’라고 쓰여 있는 문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유저들은 저마다 3이라는 숫자가 카린의 전설에 나오는 3개의 보석을 암시하는 거라며 벌써 후속작이 나오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었다.
 이미 카린의 전설을 구매한 사람들 역시 3시 33분에 대한 궁금증으로 쉽게 행사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러 큰 행사장을 잡아 놔서 다행이군······.
 우리는 어제 아침부터 장장 28시간을 대기한 첫 번째 구매 고객에게 시게루 씨의 사인이 들어간 게임 타이틀과 마리지 캐릭터 인형등 소정의 사은품을 지급하였고 함께 기념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렸던 3시 33분. 행사장에 있던 군페이 씨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잠시 행사장 내부가 어두워지는 듯싶더니 준비 된 작은 단상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뭐야? 뭐지!?”
 게임을 구입하던 사람들마저 수군거리며 단상을 바라보자 군페이 씨가 슬쩍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흠······. 우선 저희 민텐도사의 카린의 전설을 구매하러 오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새로운 휴대용 기기의 탄생을 알려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군페이 씨의 발표에 행사장은 금세 사람들의 환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군페이 씨 앞에 있던 한 유저가 외쳤다.
 “휴대용 기기? 설마 새로운 게임&워치를 발표하는 건가요?”
 “오~ 눈치가 빠르신데요? 바로 맞췄습니다.”
 군페이 씨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녹색의 게임&워치 기계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카린의 전설를 테마로 한 게임&워치 기계였다. 그러자 내 곁에서 단상을 지켜보던 카마우치 사장이 말했다.
 “뭐야? 저건 내가 이미 승인해 준 건이잖아. 이게 무슨 나조차 놀랄 깜짝 발표라는 거냐? 물론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는 완전 빅뉴스긴 한가보군. 반응이 나쁘진 않네~”
 “글쎄, 잠깐만 더 기다려 보세요.”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의 군페이 씨는 새로운 게임&워치를 펼쳐 보이며 유저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직 프로젝터가 없던 시기여서 그런지 앞에 있는 유저들에게 간단히 기기를 만져보게 하던 군페이 씨는 다음 달 패미통신에서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될 것이라고 소개를 마친 뒤 다시 품 안에 게임&워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러분께 깜짝 발표가 남아 있습니다.”
 군페이 씨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뒷주머니에서 묵직한 기계 하나를 꺼내 들며 외쳤다.
 “세계 최초로 카트리지 교환 방식을 채용한 휴대용 콘솔 겜보이입니다.”
 “우와아아아!!!!!!!!!!”
 “이건 아직 개발 중인 새로운 휴대용 콘솔 모델의 프로토 타입입니다. 휴대용 게임기지만 뒤쪽에 게임 카트리지를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하나의 기계로 수많은 게임을 교환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스피커와 이어폰 방식 둘 다 채용하여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즐기며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습니다.”
 “우와아아아!!!!!”
 “이 기계는 흑백 디스플레이지만 여러 그래픽을 유기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만들어진 이 카트리지를 이용해 플레이를 해보겠습니다.”
 군페이 씨는 미리 만들어진 데모용 카트리지를 기기에 꽂은 채 단상 앞에 있는 한 소년에게 보여 주었다.
 “슈퍼 마리지다!!! 슈퍼 마리지에요!!”
 소년은 흑백의 작은 화면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슈퍼 마리지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게임 안의 화면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지······. 진짜다. 정말 슈퍼 마리지가 돌아가고 있어!!”
 비록 뒤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앞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에 자기도 보고 싶다 아우성 치고 있었다. 군페이 씨는 그러한 유저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겜보이를 다시 뒷주머니에 넣었다.
 “내년 연말을 목표 제작 중인 이 겜보이 역시 다음 달 패미통신에서 자세한 정보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저희 민텐도의 깜짝 발표회를 마치겠습니다.”
 “으우와아아아아아아!!!!!!!”
 발표회는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발표장을 떠나면서도 충격이 채가시지 않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박이라는 소리만 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분 하나가 이벤트 회장 뒤편으로 달려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우와아앙~ 군페이 이 귀여운 새끼~!! 어디에 있어!!”
 아마 가장 감동 먹은 사람은 카마우치 사장인 듯싶었다.
 
 * * *
 
 카린의 전설은 내 예상대로 엄청난 흥행을 일으켰다.
 행사장의 전경은 뉴스에 보도 되었고, 게임 매체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주제로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 될 정도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민텐도가 있었고, 1983년 7월 15일부터 판매한 패밀리는 3년 만에 전 세계 7천만대 가량이 판매되며 민텐도는 명실상부한 게임 왕국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일까? 거의 모든 게임 회사가 민텐도 패밀리용 게임을 제작하는 바람에 기존에 개발실 인력으로는 도저히 게임 퀄리티에 대한 검수까지 맡을 수가 없었기에 카마우치 사장은 특별히 인력을 더 늘려 1986년 2월. 퀄리티 검수부서를 만들었다.
 나 역시 3년 동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때론 게임 개발자로서 때로는 영업 사원으로서 민텐도를 대표하는 실권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실질적인 업무를 보는 부서는 차세대 콘솔 개발 부서였지만, 요즘 나는 그것보다 외근이 더 잦았다.
 “강 부장님 또 어디 가십니까?”
 “아, 잠깐 외근 좀 다녀올 게요~”
 아래 직원들에게도 항상 경어를 쓰는 나는 내가 속한 부서 말고도 회사 내에서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그것은 2015년 개발실에 틀어박혀 게임만 만들어 내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할까? 2015년에서 고객만족 팀으로 좌천됐던 나는 아직도 그때의 어색한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해. 그러려면 단 한사람이라도 내 편으로 만들고 회사 안팎으로 입지를 키워야지. 지금은 비록 카마우치 사장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와 대등한 조건에서 싸워야 할 때를 대비해야 해.’
 나는 최근에 뽑은 토요타 승용차를 끌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오사카의 한 게임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꽤나 규모가 큰 이 회사는 아케이드 게임을 주로 만드는 FOX SOFT였다.
 실은 지난달 여기서 발매한 슈팅 게임 하나가 굉장한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트윈디’ 나 역시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즐겁게 플레이하곤 했었지······. 트윈디는 기존의 슈팅 게임과는 분위기부터 매우 독특한 작품이었다.
 세상에 슈퍼 마리지가 등장한 이후로 횡스크롤 시스템은 다른 게임 에서도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혜를 입은 장르를 꼽자면 슈팅이랄까? 비행기를 주로 조종하는 슈팅 게임은 횡스크롤를 살짝 변형시킨 종스크롤 이용하고 있었다. 좌우가 아닌 위에서 아래로 배경이 내려오는 방식을 이용해 적군이 쏘아대는 탄막을 피해 날아다니는 상쾌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흔히들 슈팅 게임이라면 머릿속에 1945를 많이 떠올리는데, 그중에 트윈디는 조금은 독특한 세계관으로 유저를 사로잡았는데,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아닌 판타지 세계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2인 플레이까지 지원하여 여차하면 서로 합체 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게임 역시 벌룬 파이트처럼 아군끼리 싸움을 붙일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사일 파워업 시키는 아이템 역시 1P와 2P. 서로 다른 것을 모아야 하는데, 서로 원하는 아이템을 먹기 위해 상대방이 아이템을 먹을 때 미사일을 쏘아 방해할 수 있었다.
 적이랑 싸우기도 바빠 죽겠는데, 아군이 방해까지 해대니 몇 번 하다 보면 실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고 보면 그 때부터가 현피(현실 PK)의 시작인가?
 “이 게임 때문에도 친구랑 진짜 많이 다퉜었는데······.”
 나는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저으며 폭스 소프트 로비로 향했다. 폭스 소프트는 트윈디 이전부터 아케이드 게임을 전문으로 만들어온 회사라 그런지 80년대 회사 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큰 편이었다.
 오늘 내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폭스소프트의 개발실에서 기술 자문을 얻기 위해 개발자 한명을 보내주기를 원했고, 현재 민텐도 내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던 내가 시게 씨의 부탁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오늘 패밀리 게임 개발부서와 미팅이 있어서 왔는데요.”
 “아,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에 방문자 명단에 소속 회사와 성함. 연락처를 남겨 주시겠어요?”
 생각보다 까다로운 방문 절차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명록을 작성했다.
 데스크 여직원은 내가 건네준 명함을 복사해서 서류철에 보관한 뒤에야 나를 안내해 주었다.
 누가 보면 청와대라도 방문한 줄 알겠네······.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이렇게까지 보안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나?
 거대한 규모의 건물이지만, 회사내부 복도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다들 개발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모양인가 본데, 폭스 소프트는 직원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곳곳마다 천장에 CCTV를 설치해두고 있었다.
 “흐음, 폭스 소프트는 상당히 보안이 철저하군요.”
 “그렇죠? 그래서 저희 직원들끼리 ‘찰리와 초콜렛 공장’ 같다고 부르기도 해요. 사장님이 워낙에 보안에 철저하셔서 출퇴근 할 때 직원들 소지품에 디스켓 한 장이라도 있으면 난리가 나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잠시 후. 나는 로비 직원의 안내로 패밀리 게임 개발 부서에 안내되었다.
 그곳은 이곳까지 지나오며 보았던 아케이드 게임 개발실에 비하면 꽤나 구석진 자리에 규모도 작은 편이였다. 개발실 안에 들어가니 업무 중이던 4명의 개발자들이 일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기술 자문 요청으로 방문한 민텐도 차세대 콘솔 기획과 부장인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나름 그래도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자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건만 직원들의 표정은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강준혁? 그게 누구야······. 민텐도에 한국인 직원이 있었나?”
 “쿠마모토 시게루 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벌룬 파이트의 카와타 사토시 씨 정도는 보낼 줄 알았더니 민텐도도 너무하네······. 기술 자문을 얻을 수 있는 인력을 보내 줘야지, 콘솔 기획과 사람을 보내다니.”
 어라······. 나 지금 완전 무시당하고 있는 건가?
 4명의 직원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수군거린 뒤에 다시 자기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럼 전 이만.”
 로비에서 안내해 준 직원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이거? 분위기가 왜이래? 개발실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 던져진 나는 일단은 작업 중인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2015년에야 게임 하나 만들 때 몇 거대한 프로젝트에는 백 명 정도의 인원이 투입되기도 했지만, 1980년대의 게임 개발 환경은 코딩을 짜는 프로그래머 한명과 도트를 찍을 그래픽 디자이너, 그를 책임지는 디렉터를 겸한 팀장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한명은 배경이나 아이템의 도트를 찍어내는 보조사원. 뭐 이정도 랄까?
 “흐음······.”
 나는 잠시 헛기침과 함께 프로그래머의 코딩 화면을 힐끗 바라봤다.
 ‘코딩이 지저분하군······. 플래그와 판정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야.’
 다음으로 나는 캐릭터 일러스트 도트를 찍고 있는 디자이너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니터 안에는 회색 군복에 검은색 머리끈을 질끈 동여맨 캐릭터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쟁물인가? 하긴 작년에 람보2가 개봉한 뒤로 특전사 출신의 밀리터리물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긴 한데······.’
 그때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저기 이봐요. 강준혁 씨? 라고 부르면 되나? 전 요리모토라고 합니다.”
 “아, 그냥 편하게 강 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아무튼 강 군. 혹시 소프트 개발은 해보셨나요? 대표작이라던가······. 우리가 알만한 것들로?”
 “일단은 덕헌트(오리 사냥)는 들어보셨죠?”
 나의 대답에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하긴 전자총을 이용해 가정에서 건 슈팅 게임을 구현한 최초의 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때 사무실 한구석에 보조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거야 군페이 씨가 만든 전자총이 유명한 거지. 실상 오리가 날아다니는 구현은 초보 프로그래머도 할 수 있습니다.”
 얼씨구? 젊은 것이 대놓고 비아냥거리네? 그러자 팀장 역시 젊은이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하긴 그야 그렇지. 확실히 군페이 씨의 전자총은 대단했어.”
 헐······. 그 아이디어 제안도 내가 한 거구만, 사람들이 참 간사하네······ 할 수 없이 나는 슈퍼 마리지의 보조 디렉터를 겸임했다는 걸 소개에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슈퍼 마리지의 역시 횡 스크롤과 점프의 쾌감이라는 시게루 씨의 독특한 발상이 빛을 발했던 명작이죠.”
 젠장!! 그 횡 스크롤에 대한 기본적인 골자도 내가 알려줬거든!! 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사실 횡 스크롤이건 전자총이건 본래는 그들이 실제로 만들어 낸 것들이니까. 미래를 알기에 촉진제 역할을 한 걸 빼버리면 실상 내가 이룬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니 대체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보조 담당은 얼마나 잘난 녀석이 길래 내가 하는 말마다 태클인거야? 나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직원에게 물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아직 저는 제 이름 석자로 낸 게임은 없고 보조 디렉터 역할만 해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기술 자문을 답해드릴 정도는 가능하기에 시게루 씨 대신 오게 된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혹시 저로서도 정말 불가능한 기술 자문이라면 본사로 돌아가 시게루 씨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소.”
 팀장은 헛기침을 하며 프로그래머인 마사키를 불렀다. 28살의 마사키 씨는 목이 늘어난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배불뚝이였다. 나를 향해 안경을 치켜 올리며 힐끗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어이, 마사키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게임에 대해 설명 드리고, 자문 좀 드려봐.”
 “일단 이쪽에 앉아보시죠.”
 나는 사무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게임 기획서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종이 뭉치 위에는 -Never Die Soldier- 라는 다소 유치찬란한 제목이 쓰여 있었다.
 ‘확실히 람보의 영향을 제대로 받고 있는 모양이군. 이건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딱 감이 오네······.’
 내가 기획서에 관심을 보이자 마사키라는 프로그래머는 다소 진중한 표정으로 안경을 쓸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일단 우리가 만드는 게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드리죠.”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내 예상대로 그들이 만들고 있는 네버 다이 솔저라는 게임은 홀로 적진에 침투한 특수부대 출신의 용병이 전장을 휩쓸고 다니는 밀리터리 장르였다.
 그와 이야기를 하며 알게 된 내용이 몇 가지 더 있었는데, 우선 이 네버 다이 솔저라는 게임의 최초 기획안은 놀랍게도 저 사무실 구석에 있는 보조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아쉽게도 이 촌스러운 제목은 마사키 씨가 직접 지은 듯하지만······.
 이 무렵에는 보통 프로그래머가 게임 기획까지 겸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코딩 역량에 따라 게임을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역량을 알고 게임을 제작한다면 되도 않는 기획에서 쳐낼 건 쳐내고 빠르게 게임을 제작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독특한 게임성이 나오긴 어렵지······.
 잠깐 훑어본 기획서 역시 기본적인 게임 방식은 그냥 비행 슈팅 게임을 사람으로 바꾼 거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적이 쏴대는 총탄을 피해내며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무찌르면 그만인 단순한 게임 방식에 딱히 흥미가 일진 않았다.
 “사실 저는 밀리터리 매니아입니다. 그렇기에 네버 다이 솔저로 유저들에게 전장의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데 기술 구현이 어렵더군요.”
 마사키 씨의 기술 자문 내용은 어떻게 하면 화면 내에 수많은 오브젝트를 띄워 놓을 수 있냐는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다. 수많은 적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남는 용병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럼 나도 간단하게 대답해 줘야지.
 “무리입니다.”
 “네?”
 마사키 씨는 민텐도 직원인 내 입에서 너무 간단하게 답이 튀어 나오자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사키 씨가 기획하는 게임은 현재 패밀리로는 가동이 불가능합니다. 마사키 씨도 프로그래머라면 패밀리의 한계 범위를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 패밀리는 커스텀 CPU를 사용하여 어느 형식의 게임에서든 광범위하게 대응 할 수 있도록 제작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음원 재생까지 도맡아서 하고 있는 CPU이기에 그래픽 연산에 모든 힘을 쏟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물론 VRAM을 장착 하여 연산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고작 2KB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해소하기 위해 민텐도에 기술 자문을 요청한 게 아닙니까? 작년 말에 출시된 시게루 씨의 카린의 전설 역시 하나의 맵에 다양한 오브젝트를 띄워 놓으시던데, 민텐도에서 따로 독자 기술을 숨겨둔 건 아니신가요?”
 “아뇨. 저희 역시 패밀리의 초기부터 게임을 제작해 온 터라 노하우가 쌓인 거지. 딱히 저희 게임을 만들 때 기기 성능 제한을 풀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 카린의 전설에서 보여준 그 수많은 오브젝트들의 움직임은 뭡니까?”
 “그야······."
 나는 잠시 한 템포 말을 늦춘 뒤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눈속임이죠. 카린의 전설의 전투 맵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끊임없이 적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잘 헤아려 보시면 실제로 주인공과 싸우는 적의 수는 한정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공간을 비집고 나오려는 연출을 미리 깔아두어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의도된 연출이죠.
 그러다가 주인공이 적 하나를 없애버리면 그 즉시 연출 중인 오브젝트 하나를 적으로 바꿔치기 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연속으로 적이 등장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마사키 씨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 사람 정말 프로그래머 맞아? 생각이 유연하질 못 하군······. 할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또 하나의 힌트를 알려주었다.
 “꼭 적의 수가 많다고 전장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음?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전환 시켜야죠. 한정된 오브젝트를 이용해 플레이어에게 재미와 긴장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디렉터가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잠입? 이라던가······.”
 그 순간 이때까지 조용히 사무실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보조 직원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아이처럼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청년은 그때부터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대체 저 녀석은 누구지? 마사키 씨와 상담 중이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보조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그쪽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제 이름은 호우지마 히데키입니다.”
 뭐라고!! 당신이 호우지마 히데키라고!? 역시 폭스 소프트에 이미 근무를 하고 있었군. 그런데 카와타 씨도 그렇고, 호우지마 역시 보조 직원이라니, 천재 디렉터들의 시작은 원래 다 이렇게 시작했나?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마사키 씨에게 물었다.
 “혹시 브레인 스토밍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브레인 스토밍? 그게 뭐지? 캐릭터 기술 명인가?”
 대체 이놈은 뭐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네······. 내가 한심한 표정으로 마사키를 바라보자, 호우지마의 입에서 정답이 튀어 나왔다.
 “하나의 화제에 대해 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고, 그것을 종합하여 최선책을 이끄는 방식 말이군요.”
 “빙고~ 맞아요. 본래 게임을 만들 때는 다양한 의견을 들어두는 게 좋지요. 저희 민텐도 역시 시게루 씨와 함께 개발실에서 자주 하고 있구요. 카린의 전설도 브레인 스톰을 이용한 수많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작품이죠. 호우지마 씨 제가 말씀드린 잠입이란 요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멍하게 있던 그의 눈에 생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내가 살았던 2015년에 호우지마 히데키는 이미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한 게임 디렉터 중에 하나였다.
 냉전 시대에 단신으로 핵무기 개발국에 침투하여 수많은 경비를 뚫고 임무를 완수하는 ‘스네이크’라는 캐릭터는 풀 메탈 기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어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게 될 게임이었다.
 “적을 무찔러서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닌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오히려 적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게임의 백미가 되는 거죠. 아까 이곳에 오는 길에 복도마다 설치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를 보다가 생각난 건데, 적군의 기지에 잠입하여 병사와 감시 카메라를 피해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전달하는 방식은 어떨까요?”
 “굉장히 독특한 방식인데요? 적에게 들키지 않고 클리어 하는 게임이라~ 사실 저도 비슷한 느낌으로 게임 하나를 기획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준혁 씨가 이야기한 잠입이란 말에 깜짝 놀랐죠. 설마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러나 마사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헹~ 웃기고 있네. 그런 게임 방식이 재밌을 리가 없잖아. 남자라면 당연히 적에 맞서 싸워야지 호구처럼 피해 다니면 주인공의 멋이 떨어지잖아”
 아······ 그러신가요? 불의를 보면 제일 먼저 도망가게 생겨 가지고 가오 잡기는······.
 결국 이 밀리터리 게임에 대해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눈 결과 두 개의 게임을 제작하는 방향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 때만해도 2D 그래픽을 활용한 게임은 4~5명이서 석 달 정도 달라붙으면 게임 하나가 완성 될 만큼 제작 방식이 단조로웠기에 동시 작업이 가능했다.
 하긴 이벤트 컷 신이 있길 하나 3D 그래픽에 텍스쳐를 입히길 하나······.
 그냥 도트나 찍어서 오브젝트만 가동 시키면 땡이니까~
 거기다가 호우지마 씨는 그동안 홀로 구석에서 풀 메탈의 기본적인 시안을 만들어온 터라 일단 기회가 열리자 둑이 터지듯 다양한 기획안이 쏟아져 나온 것도 한몫했다.
 기획서란 프라모델 조립을 예로 들자면 일종의 조립 설명서와 같은데, 그가 제시한 기획서는 이미 풀 메탈의 기본 골자를 전부 완성한 상태였다.
 결국 팀장인 요리모토는 나의 조언과 호우지마의 열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장르인 잠입 액션 게임 풀 메탈의 데모 제작을 허락했다.
 그러자 메인 프로그래머였던 마사키의 입장이 난감해졌다.
 자신이 메인이였던 밀리터리 게임의 진로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자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도트 작업까지 완성된 게임인데 이대로 두기엔 아깝네······.
 “마사키 씨의 게임도 그다지 나쁜 기획안은 아니에요. 현재 람보2가 개봉 되고나서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마초적인 성향의 밀리터리 게임도 충분히 먹혀들어 갈 것 같습니다.”
 “그······. 그렇죠?”
 마사키는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기획안을 보며 어린 시절에 했던 게임 하나가 떠오른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대신 마사키 씨의 게임은 스케일이 큰 편이니 먼저 아케이드 시장을 노리기로 하죠. 한 가지 조건만 수락해 주신다면 제가 이곳에서 호우지마 씨와 마사키 씨의 초기 게임 제작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무슨······. 조건으로?”
 “타이틀 명을 좀 바꾸죠······ 네버 다이 솔저라니······. 너무 이름이 직관적이에요.”
 “그럼 뭐가 좋을까요?”
 “마사키 씨가 남자의 뜨거운 혼을 워낙에 좋아하시니. 흐음, 혼두라(魂斗羅)는 어떨까요? 먼저 성능 제약이 없는 아케이드 판으로 스케일을 크게 키워 만든 뒤에 패밀리용으로 이식을 해보죠.”
 “혼두라······. 혼두라라······. 어? 그거 괜찮은데요?”
 2015년. 어릴 때부터 게임 조금한다 했던 30대라면 모두가 기억할만한 명작. 우리가 어릴 때 흔히 람보와 코만도라 불렀던 전설의 게임 하나인 혼두라의 기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결국 늦은 밤이 돼서야 회의가 끝나고, 본사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들자. 나를 따라 개발실에 있던 모든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나 또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요새 기술 자문이 많아 외근이 잦지만, 개발실에 시게루 씨도 있고, 최근에 카와타 씨도 민텐도 소속이 되어 어느 정도의 질문은 전화로도 충분히 알려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준혁 씨 덕분에 새로운 장르의 게임과 기존의 게임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잡은 느낌이네요.”
 팀장인 요리모토씨는 거듭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잠시 후 나는 처음에 개발실에서 무시당했던 것과는 다르게 정문까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폭스 소프트를 떠나게 되었다.
 
 * * *
 
 1986년 가을 무렵 나는 너무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날도 회사에 출근 도장만 찍은 나는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물고 허겁지겁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야~!! 강 군. 오늘은 어디로 가냐!! 또 폭스 소프트인가 거기 가냐?”
 지난 한 달간 폭스 소프트에서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난 상태였다. 일단 호우지마에게는 잠입 액션 장르의 틀에 맞게 시게루 씨가 카린의 전설에서 사용했던 탑뷰 방식의 노하우를 전달해 주었고, 그렇게나 스케일을 주장하는 마사키 씨에게는 횡스크롤 스테이지와 종 스크롤 스테이지. 슈팅 스테이지를 포함해 여러 가지 액션을 활용할 수 있게 해두었는데, 아무래도 마사키 씨의 머리가 딸려 제작 기간이 좀 길어질 듯해 보였다.
 “오늘은 피닉스 소프트에 갑니다.”
 5장 스폰서 게임(2)
 
 
 “오~ 피닉스 소프트라면 드래곤 워리어의 제작사였지.”
 “네, 맞습니다. 다음 달부터 후속편 2탄의 카트리지 제작에 들어간다고 검수 요청을 해왔는데, 아무래도 콘솔 견인 효과가 있는 메이저급 회사다 보니 직접 가서 검수 확인을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시게 씨가 제안해서요.”
 “그렇지, 그렇지~ 그래야 3편도 우리 패밀리로 내줄테니, 얼굴 도장 찍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시게 녀석이 생각을 잘했군. 그럼 강 군. 잘 다녀오게나.”
 카마우치 사장은 매달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게임 제작사들의 로열티에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최근 민텐도 주식회사는 업종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더 이상 완구를 만드는 장난감 회사가 아닌 모든 생산 라인을 패밀리로 바꾸어 게임 회사로 전향한 것이다.
 이미 패밀리가 런칭하고 3년이 지난 지금 민텐도의 패밀리는 일본 내에 점유율 30%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하면 동네에 뛰어노는 꼬맹이들 셋 중에 하나는 패밀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너무나 큰 인기에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몇 가지 있었는데, 넘쳐나는 수요에 출고 후 일주일이면 몽땅 팔려나가는 패밀리는 지방의 도시에서는 꽤나 구하기 힘든 물건 중에 하나였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패밀리였지만, 그걸 잘 모르는 어른들이 비교적 구하기 쉬운 NEGA 디스크를 선물하곤 했는데, 그게 도리어 아이의 화만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현재 NEGA 디스크는 점점 늘어만 가는 반품 재고로 골머리를 안고 있었다.
 하긴 멀리 볼 거 없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께서도 그러셨지. 어른들 눈에는 둘 다 같은 게임기로 보이셨을 테니까.
 그 당시 NEGA 디스크를 선물 받았던 나는 황당함과 서러움에 게임기를 눈앞에 두고 눈물만 뚝뚝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민텐도의 패밀리를 사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부모님께서 사오신 건 국내 대기업이 정식으로 수입한 NEGA 디스크 국내버전. 겜보이였다.
 분명 내가 기뻐할 거라는 기대감에 비싼 돈 주고 사오셨을 텐데, 보여드린 게 짜증과 눈물뿐이라 이제 와서 생각하니 참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3년째. 문득 부모님이 그리워지네······. 잘 지내시려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카마우치 사장에게 인사를 마친 뒤 본사 건물을 나왔다. 피닉스는 도쿄에 회사를 두고 있어 신칸센으로 이동해야 했다. 내 차를 끌고 가기엔 운전하느라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 보통 장기출장에는 신칸센을 많이 이용하곤 했다.
 경제가 활성화 시기라 그런지 최근에 새로운 게임회사들은 대부분 도쿄에 적을 두고 있었다. 덕분에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는 나는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도쿄에 출장을 가는 편이었다.
 민텐도 본사를 도쿄로 이전하면 편하겠지만, 카마우치 사장의 증조부 때 세워진 민텐도는 1889년에 설립되어 이제 곧 100년을 맞이할 판국이었다.
 그런 회사의 사옥을 옮기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 신칸센에 오른 나는 평소와 같이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뒤 소화나 할 겸 열차 휴게실을 찾았다. 흡연을 즐겨하진 않지만 가끔 식후 연초로 한 대씩 태우곤 했는데, 왠지 모르게 신칸센에 오르면 꼭 담배가 태우고 싶어진단 말이야?
 아직 휴대폰이 나온 시기도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최근에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드래곤볼 역시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 1980년대의 유행과 흥행작은 딱히 신기할게 없었다.
 ‘부장님은 옷을 굉장히 잘 입으시는 것 같아요.’
 언젠가 본사 여직원 흘리듯 말을 꺼낸 적이 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미국에 있을 때 엘리스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내 기준에는 나름 2015년에 즐겨 입던 스타일대로 입었을 뿐인데, 센스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80대의 세일즈맨이라면 항상 각이 잡힌 검은 정장과 넥타이 차림이 정석이었는데, 나는 약간 밝은 톤의 세미 정장을 즐겨 입는 터라 어디서나 눈에 띄는 면이었다.
 카마우치 사장도 초반에는 다른 직원들과 맞춰 정장을 입으라고 지시 했지만, 최근에 외근도 잦아지고, 무엇보다 실적 위주로 사람을 대하는 카마우치 사장은 더 이상 내 옷차림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았다. 뭐 그렇게 요란하게 입는 편은 아니니까~ 다른 직원들도 미국 지사에서 일하다 와서 그런지 특별 케이스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고······.
 찰칵. 나는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른 아이할거 없이 모두 양손에 게임&워치를 손에 들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재 그들이 즐기고 있는 게임은 한 달 전에 발매한 카린의 전설 게임&워치 판이었다.
 휴대용 겜보이 프로젝트가 무사히 잘 마무리 된다면 아마도 카린의 전설이 게임&워치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겠지.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게임가게 어르신에게 받았던 게임&워치가 떠올랐다. 만일을 대비해 항상 들고 다니긴 하지만, 거의 플레이 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회사원 게임’을 플레이 하지 않더라도 통장엔 이미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될 만큼 돈이 있었고, 회사 내 중역들과 친분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인맥도 확장되어가고 있어 딱히 네비게이터 역할의 게임&워치를 플레이할 이유가 없었다.
 ‘심심한데 간만에 한번 플레이 해볼까?’
 카린의 전설 게임&워치와 색상만 다를 뿐이니 크게 눈에 띄진 않겠지······ 행여 들킨다 해도 민텐도 시험 기기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렇게 돈보다는 시간이나 때울 겸 게임&워치를 펼쳐 든 나는 잠시 후. 게임 화면을 바라본 채 멍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게임이······. 바뀌었어······.’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터치스크린과 3D화면 등 최신 트렌드로 모습이 바뀐 게임&워치의 화면에는 ‘스폰서 게임’이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시려면 스타트 버튼을 눌러주세요.-
 스폰서 게임? 전에 내가 즐겼던 회사원 게임과는 완전히 형태의 게임인데? 묘한 기대감 속에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간단한 프롤로그가 시작됐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이 게임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프롤로그 내용은 미래에서 타임슬립을 한 주인공이 넘쳐나는 자금으로 위기에 빠진 게임 회사의 경영을 지원한다는 줄거리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클릭할 시에 회사의 경영 상태와 자본금. 그리고 현재 개발 중인 게임 타이틀이 쓰여 있었다.
 시험 삼아 현재 내가 향하고 있는 피닉스 사를 클릭하자 드래곤 워리어 2 발매를 위한 마지막 검토 중이라는 표시가 떠올랐다. 회사 재정 상태도 매우 안정적이고, 직원들의 사기도 높다. 역시 메이저급 게임 개발사라 이건가? 직원들의 충성도도 높아 이직 권유는 거의 불가능 하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걸 보니 외교적인 사안으로 써먹을 만하겠는데?
 폭스 소프트의 풀 메탈의 개발 진척도는 52%에 달하고 있는 걸 보니 그럭저럭 순항중이군······. 호우지마 씨가 메인 디렉터로 발탁 되고 나서 확실히 개발속도가 빨라졌어······. 나는 다음으로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살폈다.
 -카와구치 디렉터의 킹즈 퀘스트. 5200개 판매 중. 현재 개발 중인 게임 없음.-
 5200개면 완전 적자군······. 트라이앵글 사의 희대의 명작인 파이널 프론티어를 만들기도 전인데, 출시한 게임들의 연이은 판매부진으로 회사 재정이 많이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 재정 상태를 살펴보니 차후에 출시될 파이널 프론티어에 마지막이라는 의미의 ‘FINAL’를 붙인 절박한 심정이 이해가 가는구나······. 내가 아는 미래에서 파이널 프론티어는 시대를 주도하는 호화로운 그래픽의 선두주자였다.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서 발매했던 파이널 프론티어 7의 테그 데모를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지······.
 모든 것에 ‘원조’란 참으로 대단한 효과를 지닌다. 최초로 패밀리용 RPG 게임을 만든 ‘드래곤 워리어’는 이미 국민 게임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고 현재 2탄의 카트리지 생산을 앞두고 있다.
 1편에서는 용사 혼자 공주를 구했다면 이번 2탄에서는 파티 시스템이 도입 되어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무찌르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전편과 시나리오가 이어져 이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전작에서 마왕을 무찌른 용사의 손자 손녀라니······ 1편을 즐겁게 플레이한 수많은 유저들이 2편의 발매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라면 출시가 되어도 드래곤 워리어2의 파급에 휩쓸려 묻혀버리겠군.
 사실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그들을 도울 수도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무릇 바닥을 쳐본 자만이 재도약의 기회를 얻는다고 하던가? 누군가의 만화처럼 추진력을 위해 무릎을 꿇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스폰서 게임이라······ 업계 정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니······ 이거 참 재밌는데?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이제 돈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 * *
 
 그날 오후 피닉스 사에 도착한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드래곤 워리어2 개발 파트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아~ 준혁 씨!! 반가워요~”
 폭스 코리아와는 다르게 피닉스의 개발실은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이미 개발도 모두 끝난 상태라 카트리지 제작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도 매우 한가했다.
 “이렇게 직접 검수를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고가 덜었네요.”
 “아닙니다. 드래곤 워리어 같은 경우는 저희 패밀리 매출의 견인 효과까지 겸하는 타이틀이다 보니 카마우치 사장님께서 흔쾌히 출장 검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민텐도에서 저희 회사를 신경 써주시는 게 느껴지는군요.”
 “물론이죠. 저희 역시 이번 드래곤 워리어2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이번에도 전국 게임 매장에 유저들이 줄을 서겠지요?”
 “그러고 보니 카린의 전설 때는 정말 진풍경이었습니다. 한정판 마케팅은 강준혁 씨 아이디어라고 들었습니다만,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시네요.”
 “과찬이십니다······. 하하······.”
 대체 이놈의 인사치레는 언제까지 할 거냐!! 결국 개발팀과 돌아가며 10분 정도 대화를 하고 나서야 검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운 타이틀곡과 함께 드래곤 워리어의 로고가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드래곤 워리어는 사운드 부분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하네요. 단조로운 비트음이지만 웅장함이 느껴집니다.”
 “그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시는 분께 직업 사운드 검수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카트리지 케이스의 일러스트도 지금 드래곤 볼을 연재중인 토리야마 씨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1편을 출시할 때부터 계속 토리야마 씨에게 캐릭터 일러스트를 맡기고 있지요. 아직까지는 게임화면에서 미려한 그래픽을 표현하기가 힘이 드니 최대한 유저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토리야마 씨에게 일러스트를 부탁드렸습니다.”
 이때만 해도 드래곤 워리어의 게임 그래픽은 매우 단조로운 컬러표현을 기용하고 있었다. 특히 1편의 용사는 필드에서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진 전사였으니까······ 그것은 2에 와서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마법 표현은 전투화면이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깜빡거릴 뿐이었고, 전투씬 역시 어두컴컴한 화면에 몬스터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어릴 때 드래곤 워리어 4를 처음 접해보았을 때 진짜 동화 속을 모험하는 기분이었는데, 아무래도 내 추억 보정이 좀 심했나보다.’
 나는 초기 캐릭터를 이름을 짓는 곳에서 ‘아아아아’를 클릭한 후 재빨리 게임을 시작했다.
 “준혁 씨는 용사의 이름을 짓는 것에 대해 별로 고민을 안 하시는군요.”
 용사의 이름이 ‘아아아아’가 된 것에는 너희들이 모르는 슬픈 전설이 있지······.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는 80년대에도 국내에서 드래곤 워리어를 즐기는 유저는 있었다. 흔히 보따리 상인이라고 부르는 업주들이 일본에서 패밀리와 게임 몇 개를 사들고 한국에 돌아와 큰 이윤을 남기고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게임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을 때. 우리가 게임 내용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게임팩에 그려진 그림이 전부였다. 91년이었나? 불법 복제인 해적판으로 국내에서도 드래곤 볼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을 무렵의 어느 날. 동네에 있는 게임 가게를 지나가던 길에 게임팩에 그려진 낯익은 일러스트 한 장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기억이 있었다.
 딱 보아도 드래곤 볼과 비슷한 느낌의 그림체에 한눈에 혹한 나는 그 날 밤 흥분과 기대에 잠을 설칠 정도였다. 드래곤 볼 캐릭터가 그려진 그 게임이 과연 어떤 형식의 게임일지 너무나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몇날 며칠 어머니를 졸라 겨우 구입한 드래곤 워리어는 나에게 대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RPG 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나는 액션 게임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당시에는 액션 장르만이 게임의 전부였다. 그게 사람이든 비행기든 자동차든 뭔가 움직여서 적을 부숴야 하는데, 이 게임은 마을을 왔다 갔다 하다가 밖에 나오면 몬스터와 싸우는 게 끝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어려워 필드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강한 몬스터에게 당해 금방 게임 오버가 되곤 했다.
 “뭐 이따위 게임이 다 있어!!”
 그 당시 굉장히 화가 난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드래곤 워리어4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멋진 일러스트에 배신당한 기분이 들어 짜증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나는 드래곤 워리어를 들고 다시 게임 가게를 찾았다.
 “이거 다른 게임으로 교환하고 싶어요······.”
 동네 PC 조립을 겸하는 게임가게 아저씨는 내가 내민 드래곤 워리어 4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잠시 후 아저씨는 흑백 프린터기를 이용해 무언가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게임 가게 안에 시끄러운 프린터 음이 꽤 오랫동안 울렸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 이만큼 프린터하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너에겐 그냥 공짜로 주마. 그 게임은 말이다. 아저씨가 지금까지 해본 패밀리 게임 중 가장 즐겁게 한 게임이란다. 하지만 아직 어린 네가 플레이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거야. 무엇보다 일본어를 모르니까. 하지만 이 공략집을 참고하면서 천천히 다시 해볼래? 그러면 네가 이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진짜 재밌는 게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아저씨에게 드래곤 워리어4의 공략집 한 뭉텅이를 받아온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패밀리에 드래곤 워리어를 꽂고 전원을 넣어보았다. 굉장히 웅장하고 멋진 타이틀 곡이 흘러나오고 나는 아저씨가 준 공략집을 대조하며 천천히 게임을 즐겨 보기 시작했다.
 먼저 이 게임은 레벨이란 게 존재했다.
 즉 무턱대고 마을 근처의 동굴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마을 주변에서 약한 몬스터를 잡으며 레벨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주변 몬스터를 잡는데 익숙해지면 동굴에서도 처음처럼 죽지 않고 버틸 수가 있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점점 강해지는 캐릭터. 그리고 마을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탑으로 향하는 전사의 이야기에 나는 금세 흠뻑 빠져들었다.
 드래곤 워리어 4의 이야기는 그 당시 RPG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옴니버스 식 스토리를 구현하고 있었는데, 1장은 전사 라이안. 2장은 산마리아 왕국의 격투가가 꿈인 공주님의 이야기. 3장은 무기상인 톨네코의 이야기. 4장은 무녀 자매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최종장인 5장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나오는 스토리였다.
 그중 5장 초반에서 용사를 살리기 위해 여자 친구가 마법을 이용해 용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뒤 대신 죽음에 이르는 스토리를 보고는 방에서 혼자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주인공 마을에 나오는 BGM이 너무나 슬퍼 가끔 게임을 플레이 하다가 폐허가 되어 버린 주인공 마을에 들러 한동안 가만히 있어 보기도 하고, 폐허가 된 공간에서 동료들과 주인공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빈약한 그래픽의 시대에는 그렇게 상상력으로 커버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는데······.
 아, 잠깐 이야기가 딴 곳으로 빠졌군······.
 아무튼 그렇게 일본어 까막눈이었던 시절에 주인공의 이름은 다들 ‘아아아아’로 통일 되었다.
 왜냐하면 일어의 첫 행 시작이‘아’로 시작했기 때문이지.
 어차피 무슨 글인지 읽지도 못하는데, 이름이 뭔 상관이었겠냐 만은······ 그때 개발실 문이 열리며 30대 초반 정도의 남성이 들어왔다.
 “아이쿠, 안녕들하십니까~”
 “아~!! 토리야마 선생님!! 오셨군요.”
 “드래곤 워리어 2의 검수를 여기서 한다고 해서 잠깐 들러 보았습니다.”
 음!? 드래곤볼 작가인 토리야마 씨가 왔다고? 나는 재빨리 패드를 탁자에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눈이 마주친 토리야마 씨는 단번에 내가 민텐도에서 나온 직원임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해왔다.
 “아~ 당신이 민텐도에서 나온 직원분이시군요. 성함이······?”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민텐도 내에서는 신규 콘솔에 관한 부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벌써 한 부서를 담당하는 관리자라니 대단하군요.”
 “작가님의 드래곤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사실 슬램덩크를 더 좋아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지. 1986년도에 토리야마 씨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상태였다.
 이후로 모든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맡게 되고, 나중에는 직접 캐릭터 검수까지 하게 될 그는 앞으로도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피닉스사와 인연이 깊었다.
 이런 인물도 하나 알아두면 나쁘지 않겠지? 토리야마 씨와 악수를 마친 나는 다른 개발자들과 함께 다시 검수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이미 1편이 대 히트를 친 마당이라 2편의 검수는 하나마나 상관이 없었다.
 민텐도의 검수란 이 게임의 버그까지 샅샅이 찾아내는 게 아니라. 이것이 게임으로 플레이할만한 틀을 갖추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파악이었기 때문이다.
 “버그는 다 잡으신 거죠?”
 그러자 메인 디렉터였던 유우지 씨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리지 생산 후 진행 불가 버그 있을 경우 전량 리콜 사태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어느 회사든 버그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전작에는 주인공 혼자였는데, 이번 작부터는 파티플레이가 가능 하군요. 덕분에 전투가 쉬워질 줄 알았는데, 적들이 상향 조정 되어 그런지 은근히 긴장감이 넘치네요.”
 “동료 개개인에도 스토리를 넣어 유대감을 더 높였죠. 아마 유저들도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역시 게임 개발자라면 유저를 먼저 생각해야지. 그 점에서 드래곤 워리어의 메인 디렉터 유우지 씨의 그런 면에서 굉장히 철저한 기획자였다.
 “패미통신 리뷰에서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으니 발매 후 대박 터질 일만 남으셨네요.”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지만, 과연 카린의 전설만큼의 진풍경을 연출 할 수 있을까요. 저도 그 때 현장에 있었는데, 정말 유저들의 반응이 어마어마하더군요. 특히 한정판으로 내놓았던 500개의 황금 카트리지는 암암리에 2~3만 엔에 거래가 되고 있다고 하던데 알고 계세요?”
 “몇몇 비양심적인 가게 사장들이 제때 물건을 판매 안하고 따로 빼놓은 거겠지요. 그런 매장은 적발과 동시에 저희가 납품을 아예 끊어 버리곤 하죠. 그 어떤 경우라도 유저를 엿 먹이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토리야마 씨와 유우지 씨는 내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 2시간 정도의 시스템 검수를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우지씨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나에게 물었다.
 “이렇게 직접 검수해 주시러 온 준혁 씨께는 실례 되지만 간단히 소감을 여쭤 봐도 될까요?”
 이 사람도 아까는 별로 기대 안한다더니, 검수 끝나자마자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어쩌자는 거야?
 “흐음······ 솔직히 말씀 드려도 되요?”
 “아, 네. 물론입니다.”
 “전작에 비해서 딱히 재밌는 점을 모르겠어요.”
 “네?”
 “음~ 물론 동료 시스템도 좋고, 배를 탈 수 있어서 바다로 나아가는 면도 새롭게 느껴지지만, 1년 동안 준비한 것에 비해 결과물이 풍성하진 않네요.”
 “아, 그런가요······.”
 “설마 3편에서도 2 주인공의 후손들이 나오진 않겠죠? 드래곤 워리어의 메인 스토리는 마왕을 무찌르는 용사의 이야기가 전부 인지라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흥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냥 드래곤 워리어를 재밌게 즐긴 게이머로서 첨언을 드리자면······. 음 스토리의 진행 방식을 옴니버스로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옴니버스 형식······?”
 “가령······. 모두가 기다린 3편의 이야기는 실은 1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 용사 전설의 시초와 같은 느낌으로?”
 “아!! 그것 괜찮네요~!! 비슷한 세계관이지만 마지막 엔딩을 기점으로 다시 1의 스토리가 이어진다!! 기발합니다~!! 아주 좋아요~!! 시게루 씨에게 들은 대로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참고가 되었습니다.”
 뭐야? 시게루와 유우지 씨가 서로 알고 지내온 사이였구나······. 사실 이번 출장 검수에 대한 최초의 의견도 시게 씨의 제안이었다. 다들 바쁜 시기라 내가 간다고 했을 때 묘한 표정을 짓더니만 이런 의미였군······.
 
 * * *
 
 교토로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나는 옆자리의 남자가 곤히 잠든 틈을 타 게임&워치를 열어보았다. 스폰서 게임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각종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토리야마 님과 지인 관계가 생성 되었습니다.-
 -유우지 님과 지인 관계가 생성 되었습니다.-
 -유우지 님의 호감도가 3포인트 올랐습니다. 10포인트 달성 시 교우 관계가 랭크 업 합니다.-
 젠장 맞을 무슨 미연시 게임이냐!!
 남자한테 호감도가 상승하다니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사람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역시나 군페이 씨와 시게 씨가 친분 관계 중에 제일 높은 랭크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죄다 남자들뿐이네.’
 하긴 80년대에 여성 프로듀서가 몇이나 있겠냐만은······. 나는 입맛을 다시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 카마우치 사장의 얼굴에서 페이지를 멈추었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얼굴 옆에 말풍선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2015년에 스마트폰에서 즐겨 사용했던 카톡의 상태 메시지를 보는 것 같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카마우치 사장의 말풍선을 클릭해보았다.
 -강준혁은 능력이 뛰어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녀석이다. 너무 키워줘선 안 되겠어.-
 그렇군······. 이 말풍선은 상대방이 나에게 느끼는 감정을 코멘트화 시킨 건가? 재미있군. 그나저나 아침엔 웃는 얼굴로 보내주더니 속으론 이런 생각을 감추고 있었다니,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일본인답네······.
 나는 게임&워치 가방에 넣어 둔 뒤에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한국인인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들에게 있어선 그냥 외국인 노동자 중에 한명일 뿐일 테지······. 나 역시 그 점은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카마우치 사장의 코멘트를 읽어도 그렇게 놀랍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아직 발톱을 드러낼 순 없지. 조금만 더 참아 보자······.
 
 * * *
 
 우리가 알고 있는 CD라는 매체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사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1986년에도 CD는 존재했다. 아직 보편화가 안 되어 있을 뿐이지······.
 오사카에 위치한 덴덴 타운이라는 전자 상가 거리.
 한 레코드점에서 열린 CD 음질의 청음회를 방문한 나와 군페이 씨는 밝은 조명아래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동그란 디스크를 바라보았다.
 “허어~ 이게 바로 콤팩트 디스크라 불리는 물건이로군. 빛깔이 참 곱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군페이 씨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CD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콤팩트 디스크라······. 확실히 LP에 비하면 콤팩트하긴 하지만, 마이크로 SD카드나 USB에 익숙해 있던 나는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사실 별 관심도 없었는데, 군페이 씨가 새로운 매체는 될수록 빨리 접하는 게 낫다고 강제로 끌고 오는 바람에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었다.
 “아, 네······. 참 신기하네요.”
 “자네는 이 기적 같은 물건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나? 이런, 이런 젊은 사람이 감정에 이리 메말라서야. 흠흠~ 아무래도 내가 보충 설명을 해줘야겠군.”
 으악!! 공돌이 군페이 씨의 제품 설명이 시작됐다!! 낌새를 느낀 나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CD라는 물건은 말이지. 다른 말로 광학 디스크라고도 하는데, 기존에 카세트 테이프나 LP 같은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원음을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지.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잡음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음질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오디오 규격이라네. 수명이 무려 100년이라지······. 정말 대단하지 않나?”
 ‘100년은 얼어 죽을 부족한 용량 때문에 20년도 못가서 휴대용 저장매체의 등장에 사장될 위기에 처할 텐데······. 하지만 음악 CD로서는 꽤나 수명이 길게 가긴 하겠구나······.’
 하지만 군페이 씨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물건은 우리 일본의 센소니와 네덜란드 회사 필립스가 공동 개발한 녀석이지. 현재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제품을 밀어내고, 새로운 음반 매체로 부상 중이야. 한 번에 녹음할 수 있는 시간은 총 74분이라네.”
 “음······. 좀 애매하네요. 60분도 아니고 왜 하필 74분이죠?”
 그러자 군페이 씨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지······? 그냥 한번 물어봤을 뿐인데, 괜히 물어본 듯한 느낌이 든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강 군. 현재 CD의 규격은 지름 12cm로 나와 있다네. 하지만 최초로 필립스가 제안한 CD의 크기는 11.5cm였다네. 더 콤팩트해질 수 있었지. 또한 60분을 조금 초과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시간도 적당했고 말이야.”
 “그런데 왜 시간을 늘렸죠?”
 “그건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때문이지.”
 “CD의 용량이 클래식 음악 때문이라고요?”
 “물론 기존의 60분의 시간으로도 기존에 LP에 수록된 모든 음악을 담을 수 있었지만, 센소니의 부사장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하나의 디스크에 넣고 싶다고 제안했지······ 그 당시 베토벤 9번 교향곡 중에 가장 긴 연주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건 그 유명한 카라얀의 지휘였고 말이야.”
 “그래서 카라얀의 연주 시간에 따라 CD의 재생시간이 정해졌다는 말인가요?”
 “맞아~!!”
 흐음······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군. 안타까운 건 딱히 몰라도 상관없는 정보인 게 문제지만······ 아무튼 그래서 청음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죄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었구나······. 군페이 씨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잠시 음악을 들어보고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군.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은 오디오 매체지만, 저장 방식을 변환하면 데이터를 인식시킬 수 있는 장치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용량이 무려 650MB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하······. 네. 650메가 용량이라니, 엄청나네요······.”
 “강 군이라면 굉장히 놀라워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별로군. 실망이야······.”
 그거야 당신 같은 공돌이에게나 혁명이지······. 2015년에는 테라바이트를 이용한다고 이 사람아······. 나는 좌우로 고개를 내저으며 군페이 씨에게 식사나 하자고 청했다. 그때 CD를 유심히 살펴보던 군페이 씨가 중얼거렸다.
 “이 매체로 게임 카트리지를 대신해볼까?”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나는 군페이 씨의 말에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내려앉았다. CD를 사용하는 건 적어도 2세대가 더 지나야 보편화 될 텐데, 처음 디스크를 보자마자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러나 군페이 씨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용량의 낭비가 심하군. 거기다 기기 단가도 높아질 테고······.”
 “그, 그러네요······. 하하······.”
 패밀리의 게임은 고작해야 4MB정도······. 아직 스케일이 큰 게임을 만들기에는 콘솔의 성능이 따라주지 않는 시대였다. 만약에······. 군페이 씨의 지금 이 생각이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면, 민텐도는 절대 쓰러뜨릴 수 없는 괴물 같은 기업이 되어버렸겠지······.
 
 * * *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흘러 카트리지 생산이 끝난 드래곤 워리어 2의 발매일. 나는 시게 씨와 함께 민텐도를 대표해 발표 회장을 찾았다. 도쿄의 행사장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카린의 전설이 발매 되었을 때와 꽤나 유사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다시 도쿄를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운데?”
 최근에 개발 업무를 쉬고 있는 시게 씨는 길게 늘어선 행렬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카린의 전설이 발매 되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시게 씨와 함께 행사장에 들어서자 인터뷰 중이던 유우지 씨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왔다.
 “준혁 씨와 시게루 씨가 함께 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행사장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역시 드래곤 워리어가 국민 RPG게임이란 걸 실감하겠네요.”
 “시게루 씨의 카린의 전설에 비하면야 아직 멀었죠······. 하하”
 또 나왔다!! 이놈의 끝도 없는 덕담 인사!! 가만히 있다간 또 10분간 저 인사를 계속 들어야 하기에 나는 적정선에서 먼저 치고 들어갔다.
 “초도 물량은 어느 정도로 잡으셨나요?”
 “에······. 전작이 약 150만 개 정도 팔려 나갔으니까, 50만 개 정도로 뽑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반응을 지켜보고 카트리지 추가 생산을 하려고요. 소프트 가격은 전작과 동일하게 5,500엔으로 했습니다.”
 민텐도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서드 파티의 작품들은 민텐도에서 나오는 게임보다 가격이 높게 설정 되어 있는 편이었다. 최근에 카마우치 사장이 민텐도 카트리지의 로열티를 올리는 바람에 다른 회사들의 소프트 가격이 조금 올라간 편인데, 피닉스는 가격을 그대로 유지했구나······.
 “드래곤 워리어 정도면 5,900엔 정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격을 올리지 않아서 놀랐어요.”
 “솔직히 회사 내부에선 가격을 조금 올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전 편을 즐겨주신 유저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있고 해서 힘들게 결정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좋은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후. 드래곤 워리어의 웅장한 타이틀 음악과 동시에 행사장이 오픈하자, 밖에 줄지어 있던 사람들이 카운터로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러분 순서를 지켜주세요~!! 4군데의 카운터에 한 줄씩 서주시기 바랍니다~!!”
 대기표와 게임 타이틀을 교환하고 계산을 마친 사람들은 어서 빨리 플레이 하고 싶은지 뒤도 안 돌 보고 행사장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저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카운터 뒤에 있던 나는 빙긋 웃으며 드래곤 워리어 카트리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토리야마 씨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종이 케이스 안에는 간단한 메뉴얼이 들어 있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고정대 안에는 검은색 카트리지가 곱게 박혀 있었다.
 “저도 하나 계산해 주세요.”
 “아, 준혁 씨도 구입해 주시는 겁니까?”
 “저도 이 게임 팬이라서요. 게임을 즐길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사두려고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계산을 마치고 행사장을 둘러보던 중 묘한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니 행사장 바깥쪽에 한 남자가 매장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깡마른 체형에 콧수염이 인상 깊던 그 남자는 드래곤 워리어 행사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쳇······.”
 “음······?”
 저 남자 약간 낯이 익은데······. 설마!?
 파이널 프론티어의 디렉터 카와구치 히로노부!? 나는 행사장과 멀어지는 남자를 잡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카와구치 씨!!”
 역시나 이름을 외치자,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트라이앵글 사의 카와구치 히로노부씨 맞죠!?”
 “절 아세요?”
 “킹즈 퀘스트의 디렉터 분 아닌가요?”
 “마, 맞긴 한데······ 어떻게 절······?”
 “저는 민텐도 직원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전에 패미통신에 실린 게임 디렉터 소개 코너를 봤어요.”
 “아, 그렇군요······.”
 그제서야 카와구치 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 대한 경계를 풀며 입을 열었다.
 “역시 잘 나가는 제작사의 출시 행사에는 민텐도 직원도 직접 나와 축하해 주는군요.”
 “아, 뭐 그야 드래곤 워리어의 파급력이 워낙에 크니까요. 하하~”
 “그에 비해 제가 만든 킹즈 퀘스트는 이제 겨우 6천 개 정도가 나갔는데, 민텐도에서 서드 파티의 로열티를 올리는 바람에 완전히 적자를 보았죠.”
 “아, 그래요?”
 “아, 그래요?? 뭡니까. 그 불쾌한 대답은 지금 저를 놀리는 겁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한데 그 로열티를 제가 올린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저한테 화를 내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크윽······.”
 카와구치 씨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게 억울한지,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사실 최근에 카마우치 사장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는 추세긴 하다.
 멋대로 카트리지 생산 단가를 높인 것도 모자라 생산 수량까지 멋대로 상향하다 보니, 최근에 게임 회사는 게임이 뜰지 안 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초도 수량 1만 개를 찍어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카와구치 씨가 만든 킹즈 퀘스트가 발매 3개월이 지나도록 6천 개 정도가 판매된 거라면 더 이상 팔리긴 어렵다.
 지금도 새로운 신작이 쏟아져 나온 마당에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게임은 금세 잊히게 마련이니까······. 트라이앵글은 나머지 4천 개의 부진 재고를 떠안고 적자 폭탄을 맞았겠지······.
 아타리 쇼크를 잊기 위해 양질의 소프트를 제공하는 건 좋지만, 민텐도의 독점 시장은 게임 회사에게는 별다른 이득을 얻기 힘든 구조가 되어 있었다.
 “트라이앵글 사의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원래 초도수량은 2천 개로 잡고 팔리는 것에 봐서 더 늘리려고 했지만, 민텐도에서 받아주질 않더군요. 덕분에 우리 회사는 지금 망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이런······. 혹시 그럼 현재 개발 중인 게임은 없습니까?”
 “하나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본사에서 게임 사업을 완전히 접으려는 추세라······.”
 뭐라고!? 안 돼!! 당신이 파이널 프론티어를 만들어야 내 계획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다고!! 카와구치 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게임이 있었는데······.”
 “마지막이라······. 어떤 장르를 생각해고 계시죠?”
 “일단은 RPG입니다. 사실 오늘 드래곤 워리어를 구입해 참고해볼까 했는데, 행사 오픈과 동시에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가는 드래곤 워리어를 보니······. 솔직히 기가 질려 버렸어요. 새로운 게임을 만든다 해도 이미 국민 게임이 되어버린 드래곤 워리어를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들더군요.”
 “무리에요. 카와구치 씨가 지금 어떤 게임을 만든다 해도 ‘현재’ 유우지 씨의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를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저긴 이미 3편의 제작이 들어갔거든요.”
 “크윽······. 그 말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임마저 반드시 드래곤 워리어에 패배할 거라는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네, 맞아요. 그만큼 ‘현재’ 일본에서 파급력이 가장 큰 RPG게임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2등석은 비어 있습니다. 우선은 거기부터 노려보는 게 어때요?”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카와구치 씨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방금 전 행사장에서 구입한 드래곤 워리어2입니다.”
 “이걸 왜 저한테······?”
 “카와구치 씨가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나본데, 저는 분명 ‘현재’로서 드래곤 워리어를 이길 수 없다고 했지.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적이 만든 게임이 얼마나 훌륭한지. 배울 점은 배우셔야죠.”
 “됐습니다. 어차피 차기 작품의 개발 승인도 나지 않을 텐데요······.”
 “그 부분도 제가 대표님을 만나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쉬시는 동안 플레이 해보세요. 아~ 그리고 이거 클리어 하시면 반납하셔야 되요. 저도 오늘 사서 아직 플레이 안 해봤으니까.”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와구치 씨에게 억지로 쇼핑백을 들려주고는 다시 행사장으로 향했다.
 
 * * *
 
 며칠 후. 나는 도쿄에 있는 트라이앵글 사를 찾았다. 주소지 하나로 겨우겨우 찾아간 트라이앵글은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한 4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1층에 붙어 있는 낡은 전단지에는 사원모집 공고가 붙어 있었는데, 무려 시급이 1500엔에 해당했다.
 평균 도쿄의 아르바이트 시급이 480엔에서 500엔인데 반해 3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시급에 나는 깜빡 놀란 나는 다시 한번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시급을 1500엔이나 줄 만한 회사로 보이진 않은데······.’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2층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골판지 박스들이었다.
 ‘설마······. 이것들은?’
 불길한 예감에 옆에 있는 박스를 살짝 열어 보니 게임 타이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팔리지 않고 회수된 타이틀 들이구나······. 세상에 뭐가 이리 많아?’
 나는 박스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개의 박스를 옮기며 틈을 비집고 사무실 앞에 선 나는 잠시 옷차림을 정리한 뒤 노크를 해보았다.
 “들어오세요.”
 끼익······. 경첩에 기름칠도 하지 않았는지 기분 나쁜 소리가 문틈에서 새어 나오고, 사무실 안으로 한걸음 들어 선 나는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자들에 또 한 번 기겁하게 되었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어볼 거면 출입구에 상자들 좀 치워두지 그랬어!? 나는 다시 한번 상자들 틈을 가로지르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 그게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그러자 안쪽에 앉아 있던 40대 정도의 남자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아~ 오늘 오기로 했던 면접생이로군. 이쪽으로 와요.”
 면접생? 이건 뭔 개소리야!? 하지만 상자 틈 사이에 끼어 버린 나는 미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 아니 그게······.”
 “사무실이 좀 복잡하죠? 곧 정리될 테니까, 안심하고 이리 와요.”
 그게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되도 않는 트라이앵글 사무실 안에서 사장인 쿠도 씨와 마주 앉아 면접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면접생인 척해서 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 좀 해볼까?
 “반갑습니다. 저는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사장을 맡고 있는 쿠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강준혁이라고 한국인 유학생입니다.”
 “한국인?”
 “네, 그런데요? 뭔가 문제라도?”
 “아닙니다. 유학생 면접은 저도 처음이라 조금 당황한 것뿐입니다.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이곳에 오래 계셨나요?”
 “네, 뭐 그럭저럭 3년 정도?”
 “과연······. 그런데 준혁 씨. 프로그래밍은 조금 하실 줄 아십니까? 저희가 뽑고 있는 인력은 패밀리용 게임을 제작할 프로그래머를 모집 중인데······.”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전단지에서 보았던 시급 1500엔이 사실인가요?”
 그러자 쿠도 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흠~ 역시 뭔가 꼼수를 숨기고 있나 보군.
 “아······. 네, 하하 시급 1500엔 말이군요.”
 “다른 곳보다 월등히 시급이 높던데······?”
 “물론 가능합니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한다면요.”
 “조건이요?”
 “준혁 씨가 만든 게임이 5만 개 이상 팔려 나갈 때 인센티브 지급으로 충분히 1500엔. 아니, 그 이상의 시급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뭐······. 라고?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일단 게임을 만들어서 팔아본 후에 수익금을 분배해주겠다는 건가?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 5000개도 안 팔린다고 하면요?”
 “그럴 경우엔 급여 지급이 조금 힘이 드는데······. 준혁 씨는 자신이 만든 게임에 자신이 없나 보군요?”
 이거 봐라? 살짝 속을 긁어서 어떻게든 꼬드겨 보겠다는 거냐?
 “그럼 인센티브를 제외하고 기본 시급은 얼마입니까?”
 “280엔입니다.”
 지랄하고 앉아 있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주무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면접 자리에서 이런 태도는 굉장히 예의 없는 태도이지만, 내가 진짜 면접 보러 온 것도 아니고, 회사 상태 좀 보러 온 것뿐인데 이건 사장 마인드부터 완전 썩어 문드러졌네······.
 “저기 쿠도 씨······. 사실 전 면접 보러온 사람이 아닙니다.”
 “네? 그럼······?”
 나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쿠도 씨에게 건네주며 다시 인사를 드렸다.
 “민텐도 차세대 콘솔 개발 부서를 맡고 있는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미······. 민텐도 직원!?”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쿠도 사장님를 만나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왔는데, 본의 아니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네요.”
 “아니, 민텐도 직원분이 왜 이곳에······?”
 나는 대답 대신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상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상자들은 트라이앵글 소프트에서 개발한 저희 패밀리 게임들입니까?”
 “네······. 맞습니다. 아직 흥행작은 없지만, 벌써 패밀리로 4번째 타이틀인 킹즈 퀘스트까지 발매했지요.”
 타이틀을 4개나 만들고 흥행작이 없으니, 이렇게 재고를 떠안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어째서 게임 개발 사무실에 사장 혼자 달랑 있는 걸까?
 “그런데 다른 직원 분은 없나요? 평일인데 왜 사장님 혼자 계시는지?”
 “원래라면 킹즈 퀘스트를 만든 카와구치라는 기획자 겸 프로그래머가 있었지만, 최근에 출근을 안 하고 있네요.”
 “왜죠?”
 “그게, 킹즈 퀘스트가 생각보다 팔리지가 않아, 급여가 조금 밀려 있는 상태라······.”
 첩첩산중이군. 답이 안 보이네······.
 “그런 상황인데, 아르바이트를 또 뽑으신다고요?”
 “일단은 게임을 만들어야 수익이 생길 테니까요. 아니 그런데 정말 무슨 일로 저희 회사를 찾아오신 겁니까?”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쿠도 사장에게 내가 찾아온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제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사장님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저를요?”
 “현재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해서요. 저희 패밀리 타이틀을 4개나 제작해 주셨지만, 히트작이 없으니 기술 자문을 조금 해드리려고 찾아와 보았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제가 게임 개발 쪽은 문외한이라 기술 자문을 얻기에는 좀······. 이럴 때 카와구치 녀석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은 게임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신다는 말씀이세요? 그런데 소프트 회사의 사장님이란 말입니까?”
 “하하,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게임 소프트를 만들 수 있는 인재를 모아 개발비만 대고 있는 거죠.”
 이 사람 완전 마인드가 도둑놈 심보인데? 그러니까 지는 가만히 앉아서 직원들이 게임 하나 만들면 카트리지 제작비용만 대준다는 거 아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게임 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해 보였나?
 “지금 쿠도 사장님이 말씀하신 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알고 계십니까?”
 “네······?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건 카마우치 사장 역시 비슷하게······.”
 “쿠도 사장님은 돈이 많으신가 봐요? 적어도 한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면 아래 직원들이 만드는 게임이 시장성이 있는지 없는지 검토는 해보셔야죠. 지금 사무실 곳곳에 꾸역꾸역 쌓여 있는 카트리지들 보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게임 사업이라는 게 한방에 대박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나만 터져주면 지금까지 손해 봤던 것들 전부 메우고도 남지 않겠어요? 피닉스 사의 드래곤 워리어처럼.”
 맙소사······.
 게임 개발이 무슨 전철역 앞에 빠칭코도 아니고 터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저 자세는 대체 뭐냐? 더 이상 이야기 했다가는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아······.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두 눈을 감았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게임&워치로 살펴본 결과. 트라이앵글의 재정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였기에 나는 허심탄회하게 말을 던졌다.
 “사장님 제2 금융권에 빚 있으시죠?”
 “······!?”
 정곡을 찔린 건지 쿠도 사장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사실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보유 자본은 마지막으로 출시한 킹즈 퀘스트 이전부터 무너져 있었다. 쿠도 사장은 거의 로또 당첨의 심정으로 제 2금융권에서 빚까지 내어 킹즈 퀘스트의 카트리지를 제작 했지만, 결국 흥행에 실패하여 이번에도 재고를 떠안게 된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사무실에 쌓여 있는 재고만 파악해도 딱 답이 나오는데요? 이런 상태에서 차기작을 제작할 여력이 남아 계신지도 의문입니다.”
 “그게······.”
 “왜요. 제 2금융권이 막히면 사채라도 쓰시려고요?”
 “헉······.”
 “사장님. 제가 보기에 그건 정말 아니라고 보는데······.”
 결국 쿠도 사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잠시 동안 그를 내버려둔 채 사무실을 살펴보았다. 사무실의 상태를 보면 그 회사의 사풍을 느낄 수 있지······.
 거대한 카트리지 생산 공장까지 떠안은 채 수많은 직원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민텐도의 본사. 그리고 비교적 자유로운 가족 같은 분위기의 피닉스 소프트.
 군대처럼 직원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폭스 소프트 등등 수많은 게임 회사의 풍경이 그려졌다. 그중에 트라이앵글은 내가 둘러본 회사 중 가장 최악을 달리고 있는 부실기업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회사지······.’
 나는 쿠도 사장의 표정을 잠시 지켜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장님.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대화의 주도권은 이제 나에게 완전히 넘어 왔다. 대출 빚에 허덕이며 침울한 표정의 쿠도 사장은 이미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회사를 저한테 넘기시죠.”
 “뭐라고요?”
 “어차피 쿠도 사장님은 더 이상 게임 소프트를 개발할 여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회사를 넘긴다는 건 조금······.”
 “이건 어때요? 트라이앵글 소프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제가 대신 갚아드리지요. 그리고 쿠도 사장님에게 삼천만 엔을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사······. 삼천만엔 씩이나!?”
 3천만 엔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3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980대에 3억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지. 내가 알고 있기로 현재 트라이앵글이 지고 있는 은행 빚이 2천만 엔 정도니까. 약 5천만 엔에 회사 하나 꿀꺽하는 셈이지.
 “하지만 민텐도 직원에다 유학생인 당신에게 그만한 돈이 있나요?”
 “돈은 있지요. 대신 회사를 차리는 게 유학생 신분으로는 너무 까다로워서요.”
 “허어······.”
 사실 1980년대의 일본으로 왔을 때 나는 두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나이를 너무 젊게 설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제 갓 일본에 유학을 왔다고 설정한 점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에 나는 20억 엔이라는 돈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왜냐고? 첫 번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일본에 거주하는 기간이 짧아 사업자를 낼 수 없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새로운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5년 이상 일본에 거주해야 하는 사항이 있었고, 관련 업체에 종사 경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다 사업 아이템 역시 일본 정부가 승인을 내줄지 말지도 미지수였기에 이제 갓 21살의 한국인 유학생인 나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덜렁 사업 승인을 내주지 않을게 뻔했다.
 ‘어차피 당장 콘솔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아타리 쇼크를 거친 시기에 한국인이 일본에서 설립한 기기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런 준비 없는 시작은 패망의 지름길이지······. 우선은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군페이 씨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를 이용해 우선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게임업계를 일으킬 민텐도에 입사한다.
 생각보다 입사 기준이나 공채가 까다롭지 않은 시기여서 그런지 일단 게임&워치의 흥행으로 어느 정도 민텐도 내에 입지가 있는 군페이 씨와 친해지자, 입사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시게루 씨를 데려온 건 나에게 있어 커다란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 둘 덕분에 카마우치 사장에게 어느 정도 신용을 얻게 되었으니까······.
 이로써 나는 관련 업체 종사자라는 신분을 얻었고,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런데······. 이놈의 카마우치 사장이 뜬금포로 나를 미국으로 날려 보낼 줄은 몰랐다.
 결국 미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민텐도 내에서 군페이 씨와 시게 씨에 버금가는 핵심 인물이 되었고, 조금은 방향이 수정되었지만 결국 신형 콘솔 기획까지 하게 되었다.
 신형 콘솔 개발 부서는 현재는 기기 스펙 상한선에 대해 시장 조사 중이었는데, 역시나 기존 패밀리를 만들어낸 인력 중에 고급 엔지니어가 선출되어 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즉, 가장 핵심 기술을 제대로 빼낼 부서를 내 스스로 만들어 그 자리에 앉아 버린 것이다. 만약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 씨 시게 씨와 함께 포커를 두고 있다면 내손에 들려 있는 카드는 로열 스트레이트에 버금가는 패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어때요?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십니까? 사장님이라면 그 돈으로 지금과 비슷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지 않나요?”
 “조······. 좋습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저희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준혁 씨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 조건이요?”
 내 말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가는 쿠도 사장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동안 재정 때문에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나 보군.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서류 작성 후에 어디 해외로 여행 좀 다녀오시겠어요? 음~ 한 1년 정도? 아, 그에 대한 여행 경비 역시 제가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가······. 갑자기 해외는 어째서······?”
 “카게무샤라고 아시죠? 사실 쿠도 사장님께서 앞으로 1년 정도는 유령 사장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무사.
 에도 시대 때 적의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영주와 똑같은 옷차림과 생김새를 가진 가짜 영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만약에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를 양도 받을 경우에는 외국인이라도 상관없다.
 단지 일본 내 거주 기간이 5년이 넘으면 돈으로 살 수 있으니까.
 
 * * *
 
 1987년 1월. 나는 골판지 박스로 가득 차 있던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사무실을 말끔하게 치워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사무실 앞에 걸어두었다.
 -펜타곤 소프트-
 나는 기존에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에서 점 두 개를 더 찍어 오각형이란 뜻의 펜타곤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반듯하게 걸어진 사명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밀린 임금을 지불해 줬으니,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때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누구신지?”
 고개를 돌리니 카와구치 씨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혹시 드래곤 워리어 행사장에서 만났던 민텐도 직원 분?”
 “안녕하세요. 카와구치 씨.”
 “여긴 어떻게······?”
 “기술 지원을 나왔습니다. 트라이······. 아니지. 펜타곤 소프트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와드리려고요.”
 “쿠도 사장님은 안에 계신가요?”
 “아~ 사장님은 당분간 해외여행을 떠나신다고 해서······. 실질적으론 카와구치와 저 둘 뿐입니다.”
 쿠도 사장은 지난달에 지급한 선금으로 채무를 정리하고, 함께 변호사를 만나 계약 서류를 작성한 뒤 유럽으로 떠났다.
 “뭐라고요??”
 “그래서 당분간은 카와구치 씨가 이 펜타곤 소프트를 맡게 되셨습니다.”
 “제가요······?”
 카와구치 씨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볍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뒤따라온 카와구치 씨는 달라진 내부 인테리어에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정말 트라이앵글 소프트입니까?”
 “아뇨. 펜타곤 소프트입니다. 상위 사회를 조장하는 삼각형이 아닌 사장과 사원 모두가 동등한 오각의 틀 안에서 개발자 입장으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 내는 곳이죠. 물론 당분간 이곳을 맡아 주실 분은 메인 디렉터인 카와구치 씨입니다.”
 “쿠도 사장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그게 좀 길어질 듯하네요······. 한 1년?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걸리려나?”
 “저는 단지 밀린 급여가 입금돼서 회사 사정이 조금 나아졌나 찾아왔을 뿐인데······.”
 “기존에 있던 악성 재고는 전부 처분했습니다. 이제 펜타곤으로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낼 여력은 충분히 있다고 하더군요. 어때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보고 있었던 판타지 게임. 이곳에서 한번 만들어 보시는 건 어때요? 저 역시 있는 힘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네?”
 “새로운 게임의 제목을 파이널 프론티어라고 정했습니다. 게임 기획자로서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실어 보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그렇게 게이머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시대의 명작이 그 탄생을 알렸다.
 
 
 to be continued.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