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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왕, 귀환하다 1권

2019.07.23 조회 1,951 추천 12


 지옥왕, 귀환하다 1권
 
 
 목차
 
 프롤로그
 1장 다시 돌아오다
 2장 내 직업이 이상하다
 3장 첫 사냥
 4장 그 녀석은 내가 잡는다
 5장 다섯 별
 6장 거지 취급당하다
 7장 강매, 그리고 대면
 8장 첫 인연
 9장 천살행
 10장 동류(同類)
 11장 왕의 강림
 12장 봉인된 악마(1)
 
 
 프롤로그
 
 
 나는 남들과는 달랐다.
 외모가 특별히 유별나다거나, 머리가 좋다든가, 운동을 잘한다든가 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분명 나와 같은 사람들인데도 양들 사이의 늑대인 양, 초식동물 사이의 호랑이처럼, 그래 마치 종 자체가 다른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나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어디를 치면 상대방의 목을 단번에 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을 숨기고 살았다. 발톱을 숨기고 이빨을 감추며 그렇게 살았다. 그게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자연히 성격은 조용해졌으며 소심해졌다.
 그러던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나는 치료를 위해 최초이자 유일의 가상현실 게임인 ‘이세계(異世界)’에 접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로그인된 곳은 다른 플레이어라고는 한 명도 볼 수 없는 숨겨진 세계인 지옥 1층.
 로그인하자마자 눈앞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괴물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절제할 필요가 없네?”
 끼에에에에엑!
 그렇게 말하며 초보자용 목검을 괴물의 눈에 박아 넣은 나는 웃고 있었다.
 
 
 1장 다시 돌아오다
 
 
 무척이나 웅장하지만 장식물이 하나도 없어 삭막해 보이는 성안의 홀.
 쿠와아아아!!
 키에에에엒!!!
 사방에서 소리만 들어도 절로 비명이 나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괴한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홀 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홀은 적막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나라의 황제나 앉을 법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성과 그의 좌우로 두 명씩 시립해 있는 존재들.
 그중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연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을 한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벌써 20년이구나. 내가 이 지옥에 떨어진 지······. 밖의 시간으로는 한 4년 정도 지났겠군.’
 맨 처음 로그인될 때 튜토리얼에서 이 가상현실 게임 ‘이세계’는 밖의 시간과 5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얼핏 봤었다. 그 말은 즉 연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로 벌써 4년이나 지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이 지옥 같은, 아니, 이 지옥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걸었다. 식물인간 상태였기 때문에 로그아웃조차 할 수 없었다.
 로그인한 첫날부터 끝없이 널려 있는 괴물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괴물 같은 전투 센스가 없었다면 진작 갈가리 찢겨 괴물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엄청 죽였지······.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만, 상태창.’
 
 이름: 연
 성별: 남
 직업: 투신(鬪神)
 칭호: 지옥왕(地獄王)
 레벨: 1000
 근력 ---
 민첩 ---
 지능 ---
 행운 ---
 카리스마 ---
 통솔력 ---
 기감 ---
 위압 ---
 냉정 ---
 예술성 25
 초인지체(모든 스킬 숙련도 30% 즉시 상승 모든 능력치×1.5)
 지옥지체(모든 속성 항마력 70% 상승 모든 능력치×2)
 신체(神體)(인과율 조정(일정기준 초과 시 패널티 부과))
 지옥왕의 칭호(지옥의 모든 존재 지배 가능, 저승 간섭 가능)
 기타(금강불괴, 수화불침, 만독불침······.)
 포만감 ---
 
 연의 상태창은 대부분 ---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현상은 연이 레벨 1000을 달성하면서 바뀐 것으로 왜 그런 것인지는 연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스탯이 의미가 없어서 그럴지도······.’
 “왕이시여, 게이트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연이 그렇게 상태창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하는 도중, 양쪽에 시립해 있던 존재들 중 한 명이 연에게 보고했다.
 그 존재는 무척이나 기괴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는데 기형적으로 가는 팔다리와 그에 비해 무척이나 두꺼운 몸통, 그뿐만 아니라 온몸에 박혀 있는 눈과 입까지. 이 ‘괴’라고 불리는 괴물을 볼 때마다 연도 가끔 소름이 돋았다.
 “오, 드디어!!”
 그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쁜 목소리로 외치는 연.
 게이트란 바로 중간계 즉 보통 플레이어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여는 차원 게이트였다.
 원래는 처음 접속한 날 그곳으로 로그인이 돼야 했지만,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이곳으로 떨어진 그였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아니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지옥의 지배자가 되어 예전과 같은 목숨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흔한 나무 하나 없이 삭막한 풍경과 꿈에 나올까 무서운 기괴한 생명체들을 보는 거 자체가 고역이었다.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가끔 밤에 ‘괴’랑 마주치면 아직도 깜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키고는 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언제 벗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지옥에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연의 마음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을 절제하지 않아도 되니 기뻤을 때도 있었지만 20년 동안 싸움만 하면 그것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지요.”
 “그러지, 근데 얼굴 너무 들이대지 말고.”
 슬그머니 다가오는 괴의 얼굴을 살며시 밀어낸 연은 서둘러 발걸음을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게이트는 생각보다 작았다. 성인 남성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
 “그럼 가겠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연은 게이트를 보자마자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왕이시여, 의미 있는 중간계 여행이 되시기를······.”
 괴를 비롯하여 어느새 따라온 4명의 존재가 연의 뒤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아······.”
 여행은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그러나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의 의지로는 지옥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연은 그런 그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며 빛으로 일렁이는 차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 *
 
 자그마한 병실 안.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긴 생머리의 청초한 인상을 한 여성이 자신의 앞에 놓인 캡슐 안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사람을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김아라. 아라는 4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이세계’에 접속해 있는 그녀의 오빠 김한묵을 보고 있었다.
 4년 전, 불의의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한묵. 가상현실 게임이 식물인간의 뇌 각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을 들었던 아라는 한묵을 위해 그 당시 부모님을 설득하여 그때 당시 막 서비스를 시작한 ‘이세계’에 한묵을 접속시켰다.
 그러나 유저의 위치를 게임사가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자신 또한 이세계를 플레이하면서 그 안에서 한묵을 계속해서 찾아다녔다. 플레이어들이 처음 시작하는 곳부터 온갖 오지까지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다.
 그 덕에 방랑자라는 칭호까지 얻었지만 아라는 한묵은 결국 찾을 수 없었다.
 “휴우······ 게임 안에서라도 멀쩡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자신한테 잡혀 살았지만 그래도 착했던 오빠다. 이렇게 4년 동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착잡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빨리 좀 일어나라, 김한묵······ 안 그러면 네가 모아 놓은 야동 다 지워버릴 테니까.”
 그때였다.
 
 푸쉬이이익, 철컥.
 
 무언가 김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한묵이 들어 있던 캡슐이 열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설마!”
 진짜 그 소리에 반응할 줄은 몰랐던 아라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의사를 호출했다.
 캡슐이 열리는 경우는 두 가지였는데 캡슐 안의 생명유지장치로도 환자를 케어하지 못할 때와 환자가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였다.
 “끄응······.”
 무척 오랜만에 힘겹게 쥐어 짜내어지는 듯한 신음.
 “오빠!!”
 아직 다 열리지도 않은 캡슐에 바싹 달라붙어 한묵의 손을 잡는 아라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냐, 이거······.’
 한묵은 분명 지옥에서 게이트를 타고 중간계로 넘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환한 빛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조금 성숙해진 자신의 동생이 자신의 손을 잡고 펑펑 울고 있었다.
 ‘아, 깨어난 거구나.’
 지옥에서 20년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만에 깨어나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라야.”
 슬그머니 아라의 손을 잡으며 부르는 한묵.
 “응?”
 4년 만에 오빠에게서 듣는 자신의 이름이다. 감격한 마음으로 한묵을 바라보는 아라.
 “설마 내 뻐꾸기 폴더 이미 지운 건 아니지?”
 “······.”
 아라는 한묵이 그 타이밍에 일어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장 내 직업이 이상하다
 
 
 “아이고, 힘들다.”
 한묵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지 한 달이 흘렀다.
 한묵은 자신이 막 일어났을 때 일하던 도중 아라의 전화를 받고 달려오신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했다.
 자신을 보자마자 껴안으며 오열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옆에서 살짝 고개를 돌린 채 몰래 눈물을 닦으시는 아버지.
 평소에 무척이나 무뚝뚝하셨던 아버지의 눈물을 그때 한묵은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시큰해지는 코를 살짝 문지르며 한묵은 캡슐 안에 몸을 뉘었다.
 “드디어 접속하네.”
 이세계.
 단순한 가상현실 게임을 넘어서 이제는 한묵에게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게임.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메리트.
 그것의 의미는 다른 사람보다도 한묵에게 더더욱 커다란 것이었다.
 ‘덕분에 다시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기도 하고.’
 한 달만에 처음으로 접속하는 ‘이세계’다. 그동안 재활훈련이니 무슨 검사니 해서 정신없이 바빴다.
 생활 패턴이 자고 먹고 운동, 검사, 자고 먹고 운동, 검사의 반복이라 ‘이세계’에 대해 제대로 조사할 시간조차 가질 수 없었다.
 거기다가 게임접속에 대한 안정성 검사니 뭐니 하면서 통제하는 바람에 이제야 접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4년 동안 식물인간이었던 것에 비해 회복이 무척 빠르기도 했고.
 
 [가상현실 게임 ‘이세계’에 접속합니다.]
 [홍채 인식······. 완료.]
 
 한묵이 식물인간이었던 4년 동안 ‘이세계’의 위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전 세계 유일한 가상현실게임 ‘이세계’는 엄청난 현실감과 20억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게임 서버를 바탕으로 나오자마자 빠르게 주가가 치솟았다.
 다른 기업에서는 이 ‘이세계’의 기술력을 보고 몇십 년은 앞서가야 나올 만한 기술이라고 평가했으며.
 
 [계정 ‘연’으로 접속을 시작합니다.]
 
 ‘이세계’ 안의 생활 또한 제2의 생활권이라고 마저 불리면서 무척이나 중요해졌다.
 그에 따라 ‘이세계’의 랭커들은 전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정치적인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현금화, 아이템 거래도 무척이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말이다.
 
 * * *
 
 “후우! 크으! 이 상쾌한 공기! 역시 지옥이랑은 질이 다르네!”
 지옥은 항상 유황을 비롯한 각종 화학 물질로 인해 공기가 찌들 때로 찌든 것이 무슨 몇십 년 동안 스모그가 중첩된 것처럼 대기가 이루어져 있었다.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연은 생각했다.
 ‘내가 레벨 1000이니까······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겠지.’
 무려 게임 시간 20년 동안 쉬지도 않고 지옥에서 굴려서 만든 레벨이다.
 다른 랭커들의 레벨을 알진 못하지만 자신이 시작한 때가 ‘이세계’가 열린 초창기였으니 그때부터 쭉 올려온 레벨이 다른 사람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진 않을 것이었다. 이제 자신도 다른 유명 랭커들처럼 세계적인 셀럽이 될 일만 남은 것이다.
 “역시 중간계로 올라오길 잘했어, 상태창!”
 공기가 맑아 기분이 좋은 연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연
 성별: 남
 직업: 없음
 칭호: 없음
 레벨: 1
 근력: 1
 민첩: 1
 지능: 1
 행운: 1
 포만감: 100
 
 “······.”
 연은 잘못 본 거 같아 자신의 상태창을 한번 닫고 다시 열었다.
 
 이름: 연
 레벨: 1
 
 “······.”
 여전히 같은 상태창.
 “이거 아니지? 잘못 본거지?”
 계속 상태창을 열었다가 닫으며 현실부정을 시도하는 연.
 “으아아악! 아니, 이게 뭐냐고오오오!”
 초보자들이 시작하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현실부정과 동시에 소리 지르며 발광을 하는 연을 보며 다른 플레이어들이 머리에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지나가기를 10분여.
 연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20년 동안 지옥에서 뒹군 결과로 만들어진 연의 능력치는 없어지진 않았다.
 “아니, 이게 뭐가 다행이야. 쓸모 하나 없는데.”
 
 (시크릿 상태창)
 이름: 연
 성별: 남
 레벨: 1000
 직업: 투신
 칭호: 지옥왕
 ······.
 
 ‘이세계’에는 특이한 시스템이 있었다. 바로 ‘저승’.
 캐릭터가 사망하면 일정 시간이 지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활하는 다른 게임과는 다르게 ‘이세계’는 캐릭터가 죽으면 저승이란 또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플레이하면 다시 중간계로 부활할 수 있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시크릿 상태창이란 바로 저승에서 올린 능력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저승에서 올린 능력치는 특별한 방법이 아닌 이상, 중간계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아이템도 마찬가지.
 “아니······ 이게 대체······ 왜 지옥이 저승으로 취급되냐. 빌어먹을, 지들이 처박아 놓고 능력도 못 쓰게 하네.”
 ‘이세계’의 메인 활동 무대는 당연히 중간계다.
 저승에서밖에 쓸 수 없는 능력치는 그리 쓸모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랭킹 또한 중간계 레벨로 따지는 게 당연했고.
 “휴우, 그래도 나온 게 어디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시 지옥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던 연은 심호흡을 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레벨5 이전에는 초보자 사냥터 말고 다른 사냥터는 갈 수 없도록 해놨기에 연은 초보자 사냥터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세계’의 초보자 사냥터는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물론 나오는 몬스터는 몬스터라고도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귀여운 토끼나 다람쥐 좀 크면 사슴 등등이다.
 그렇다고 이 동물들이 선공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공격력도 낮다. 그런데 왜 악명이 높은가?
 바로 이 녀석들은 무척 재빠른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모든 능력치가 1인 초보자들에게는 얘들을 따라잡기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가 연은 부활로 처리되었기에 막 시작할 때 주는 초보자용 목검조차 없이 맨손으로 잡아야 했다.
 “쉽긴 한데 더 빨리 잡을 방법 없나?”
 자신의 앞에서 달아나는 토끼를 단숨에 한 손으로 낚아채며 중얼거리는 연······.
 아무리 능력치가 레벨1로 변해 버렸다고 하지만 1때부터 지옥에서 괴물을 잡아 죽였던 연이다.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게 다른 초보자들 입장에서는 잡기 힘들겠지만, 그것이 연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끼들이 너무 넓은 범위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 마리씩 잡는 방법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몰이사냥을 해서 잡고 있었지만, 게임 시간 20년 동안 만년 솔로 플레이만 해왔던 연에게는 그런 걸 생각할 머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한 마리씩 잡는 방법을 포기하고 더 효율적인 사냥을 하기 위해 평소에 쓰지 않던 머리를 돌리기 시작하는 연.
 그리고 10분 정도 지난 뒤, 더 이상 연의 모습은 사냥터에서 보이지 않았다.
 
 * * *
 
 “야, 그쪽으로 몰았어, 잡아!”
 “아오! 또 놓쳤어!”
 멍청한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여유롭게 따돌리는 토끼 24호는 오늘도 일부러 잡힐 듯 말 듯한 기술을 선보이며 플레이어들을 약 올리고 있었다.
 슬슬 이 짓거리도 질려갈 무렵, 토끼 24호는 사냥터 한 곳에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높이 솟아 있는 흙무더기를 볼 수 있었다.
 꼼지락 꼼지락.
 그 흙무더기의 위쪽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핏얼핏 보이고 정확하게 보이질 않았다.
 자신이 평소에 탐구심이 많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토끼 24호는 흙무더기를 향해 점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자신의 재빠른 뒷다리를 이용해 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토끼 24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흙무더기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갔지만, 흙무더기의 높이가 교묘하게도 토끼 24호의 눈높이로는 맨 윗부분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흙무더기 앞에서 잠깐 고민하던 토끼 24호는 결국 자신의 발동 걸린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습을 보이는 그것의 정체는······ 손?
 덥썩.
 이미 너무 가까이 다가간 토끼 24호는 그 손이 자신의 앞다리를 잡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쑤욱!
 결국 손과 함께 흙무더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마는 토끼 24호.
 “이게 훨씬 낫네.”
 퍼버버벅.
 흙무더기 안에서 음침한 목소리와 함께 가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흙무더기에서 다시 손이 돋아났다.
 그리고 1분 후 자신이 탐구심 많은 토끼라 자부하던 토끼 32호는 그 흙무더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호오······.”
 그리고 그러한 사냥 방법을 유심히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 * *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운 방 안, 방 안의 불빛이라고는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모니터의 빛이 전부였다.
 방의 입구에는 팀장실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고 방 안에서는 남자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레귤러가 드디어 중간계로 나왔습니다.”
 “뭐 이레귤러가? 그 녀석 지금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런 녀석이 이 시점에서 중간계로 나오면 밸런스 붕괴 정도가 아니라 밸런스 파괴라고 파괴!”
 “아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본체가 나온 게 아니라 화신체 형식으로 처리했으니 말입니다. 거기다가 본체와의 연결고리를 끊었으니 특별할 것 없는 일반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음, 그래도 불안한데······ 너 이레귤러가 싸우는 거 봤지? 난 보자마자 소름이 확 돋던데, 지구에도 그런 녀석이 있을 줄이야······. 아마 금방 치고 올라갈 거야.”
 “그래도 일단 시간은 벌지 않았습니까?”
 “그래. 일단 주시만 하자, 주시만. 하이고, 일거리가 하나 늘었네.”
 “예.”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 * *
 
 연은 마법사가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선택의 여지 없이 근접 직군을 할 수밖에 없었고 물론 잘 맞기도 했지만 더 이상 냄새나는 몬스터와 뒹굴면서 몸의 대화를 나누는 건 질색이었다.
 멀리서 우아하게 주문을 외워 손짓 하나로 적을 섬멸하는 마법사!
 생각만 해도 멋진 직업이다.
 물론 다른 원거리 딜러 직업도 많았지만 마법사만큼 화려하고 폭발력 있는 직업은 그렇게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희귀 직업, 전설의 직업 같은 히든 클래스로 전직을 하자니 정보도 없고 그런 걸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도 싫었다.
 노말 클래스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었고 실제로 플레이어들 중 최고라 일컬어지는 ‘다섯 별’ 중 4명이 노말 클래스였으니까.
 이 ‘이세계’란 게임에서의 히든 클래스와 노말 클래스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물론 레전더리 클래스는 좀 달랐지만.
 “자 그럼 마법사 길드로 가······ 어디지?”
 그렇다. 연은 마법사 길드가 어디인지 몰랐다.
 접속하기 전 클릭 몇 번만 해도 알 수 있는 장소를 귀찮다고 스킵한 채 들어왔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엄청 불친절해서 맵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원래는 편의를 위한 기능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는데 친구 추가나 귓속말 같은 필수적인 것들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플레이어들이 항의하여 겨우 생겨난 참이었다.
 “아 몰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무작정 도시 안으로 향하는 연.
 그리고 1시간 후.
 “아니! 대체 어디야!”
 한 나라에서 초보자들이 시작하는 도시는 딱 하나. 그렇기에 너무 넓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도 보았다.
 “음······ 어디 보자, 앞으로 두 건물 직진한 다음에 좌측으로 꺾어 30미터 정도 간 다음, 우측으로 20미터 전진 후에 거기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 데 그곳에선 왼쪽으로 돌면 돼요. 그다음 하얀색 건물 모퉁이를 돌아······.”
 “······.”
 물어보는 건 포기하고 혼자 찾아다녀 봤지만 보다시피 요 모양 요 꼴이었다.
 “마법사로서의 꿈은 여기까지군.”
 길드를 찾지 못해 직업을 포기하는 첫 번째 플레이어의 탄생이었다.
 “자네, 마법사가 되고 싶은 건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연.
 그곳에는 동양풍의 도포를 걸친 채 반들반들한 머리에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연을 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이세계’는 두 개의 대륙을 만들어 놓고 동대륙과 서대륙이라 칭했는데 몇 년 전, 대규모 퀘스트 이후 대륙 간의 왕래가 활발해져 서대륙인 이곳에서도 이런 복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네, 하고 싶은데 길을 몰라서······ 혹시 위치를 압니까?”
 눈을 빛내며 묻는 연.
 “그거야 알긴 아네만, 그런데 자네 꼭 마법사를 할 생각인가?”
 “음······ 그건 아닌데······.”
 원래 마법사가 되고 싶기는 했지만, 길을 헤매고 난 후 많이 사그라들었다.
 방금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연의 심정은 그냥 원거리 직업이면 된다고 타협한 상태였다.
 연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노인이 한 마디 덧붙였다.
 “마법사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직업이라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처음 시작하기 힘든 직업 중 하나지.”
 그렇다. ‘이세계’의 직업 중 마법사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직업을 꼽으라면 항상 최상위에 꼽힐 만큼 돈 먹는 하마 같은 직업이었다.
 마법서나 여러 아이템은 기본이고 마법 재료 등 여러 부수적인 요소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에 비해 돈에 많이 구애받는 직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 지금 마법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초반 자본을 빵빵하게 준비하고 시작하거나 길드나 마탑에 들어가 지원을 받거나 심지어 상인을 겸직으로 해서 플레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요?”
 돈이 많이 들어가면 연은 곤란했다.
 지옥에서라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여기서는 단 한 푼도 쓸 수 없는 상태다.
 사냥을 통해 얻은 토끼고기는 이미 포만감 때문에 먹어 치운 지 오래고 그렇다고 지원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네, 그래도 마법사를 할 생각인가?”
 “으음······.”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은 마법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짐을 느꼈다.
 그때 연의 눈앞에 보이는 궁수 길드.
 “좋아! 궁수다!”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궁수도 원거리 직업! 그렇게 연이 호쾌한 발걸음으로 궁수 길드로 향하려는 순간.
 “아니, 아니. 잠깐 자네, 혹시 노부가 주는 직업 할 생각 없나?”
 “네? 직업이라면······.”
 연은 노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도포를 보니 동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은 확실하다.
 인상을 보니 악 계열 직업은 아닌 거 같고 길드에서 전직하는 직업이 아니니 히든 클래스 같긴 한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제안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희귀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연의 눈길이 노인의 머리에 닿았다.
 “······.”
 “······뭔가.”
 “스님은 안 합니다.”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하는 연.
 “뭐? 난 스님이 아닐세!”
 “아니, 근데 머리가.”
 “아니 이건, 민 게 아니라 알아서 빠진 거야 빠진 거! 너도 내 나이 되어 봐! 빠지나 안 빠지나!”
 “아니, 아니면 아니지 왜 흥분을 하고 그러세요.”
 연의 염장을 긁는 말에 멋지게 기른 수염을 파들파들 떨던 노인은 흥분을 가라앉힌 뒤 다시 연에게 말을 이었다.
 “후우······ 큼, 아무튼 스님은 아니고 전투계열이야. 자네 보니까 적이랑 정면에서 붙어서 싸우는 걸 싫어하는 거 같던데 이 직업도 정면에서 싸우는 직업은 아니거든.”
 “오, 원거리 직업인가 봐요?”
 “물······ 론 원거리 기술도 있지. 어떤가? 해볼 텐가? 사실 아까 초보자 사냥터에서 자네 사냥하는 걸 봤는데 괜찮을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요? 돈은 많이 드나요?”
 “흘흘 장담하는데 돈은 거의 들지 않는다네.”
 “그런가요?”
 “그럼!”
 어차피 마법사는 이미 마음을 접었고 다른 원거리 딜러를 하려고 했는데 돈도 들지 않는 데다가 이렇게 직접 NPC가 찾아왔으니 무조건 희귀 직업 이상이다.
 연은 점점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좋습니다! 까짓거 뭐, 전사 계열만 아니면 되니까 하죠!”
 “오오, 잘 결정했네. 흠흠, 그런데 말일세. 이 직업으로 전직하면 한 가지 부작용이 생기는데 아주 조그마한 거라 괜찮을 걸세.”
 “부작용이요? 설마, 머리가 빠진다거나 하는······.”
 “그런 거 아냐! 계속 머리 쪽으로 이야기 돌리지 마!”
 아마도 노인은 머리가 콤플렉스인 듯했다.
 “그럼 뭔데요?”
 씩씩거리는 노인을 보며 더 이상 건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묻는 연.
 “단순히 말을 엄청 길게 하면 살짝 페널티가 들어가는 정도?”
 어차피 자신은 평소에도 말을 별로 하지 않았기에 그리 상관없었다.
 사실 이미 직업을 찾기 위해 몇 시간을 헤맸던 터라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럼 됐어요. 할게요.”
 연은 이때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자넨 이제부터 ‘진(眞)살수’가 되었네.”
 “진······ 뭐요? 살수? 어쌔신? 내가 아는 그 어쌔신?”
 “흠흠, 어쨌든 원거리 기술도 있고 전사 계열도 아니니까 난 거짓말 안 했네.”
 “아니, 이 할아버지가······.”
 그때였다.
 
 띠링.
 
 [‘진살수’로 전직하셨습니다.]
 [살 10식을 익히셨습니다.]
 [귀영심법을 익히셨습니다.]
 [암영을 익히셨습니다.]
 [그림자 이동술을 익히셨습니다.]
 [민첩이 2 오르셨습니다.]
 [직업에 대한 페널티로 말을 길게(대략 1.30초) 할 경우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하게 됩니다(중첩 가능).]
 [다른 직업으로 전직 불가]
 
 “뭐, 뭐야 이거······.”
 그래, 살수가 된 것까진 다 좋았다. 그런데 마지막 2개의 알림을 보는 순간, 연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 노부가 준 기술들을 익혀서 훌륭한 살수가 되길 바라네. 그럼 이만.”
 슈슉!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라지는 노인의 신형. 과연 살수답게 무척이나 은밀하고 신속했다.
 “자, 잠깐! 엄청 길게라며? 이게 어딜 봐서 조그마한 부작용이야! 이 사기꾼 영감탱이 어디 갔어? 이건 무효야 무효오오오오!!!!!”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으아아아악!!”
 연의 절규가 아까보다 더 웅장하게 도시에 울려 퍼졌다.
 
 
 3장 첫 사냥
 
 
 ‘빌어먹을 사기꾼 영감탱이!’
 연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노인을 씹었다. 연이 한 번에 말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29초.
 아무리 암살자라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암살자는 말할 권리조차 없는 천한 직업이라는 건가?
 솔플 인생 20년이다.
 이제는 진짜 다른 사람들과 파티 사냥도 하고 싶었고 길드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마치 알코올이 기화하듯 공기 중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아니, 일단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데 누구랑 파티 사냥을 하겠냐는 말이다!
 이건 필시 암살자는 과묵해야 한다는 편견을 가진 어떤 멍청한 개발자가 만들었음이 틀림없었다.
 “상태창!”
 연은 속에서 치솟는 울화를 억누르며 바뀌어 있을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연
 성별: 남
 직업: 진(眞)살수(희귀)
 칭호: 없음
 레벨: 5
 근력: 2
 민첩: 4
 지능: 3
 행운: 1
 포만감: 75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한 상태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능을 찍지 말걸.’
 당연히 마법사가 될 줄 알고 지능을 2나 올려놓은 게 후회가 되는 연.
 “스킬창!”
 연은 다음으로 스킬창을 열었다.
 
 살 10식
 환살(0.00%) 쾌살(0.00%) 영살(0.00%) 원살(0.00%) 류살(0.00%) 붕살(0.00%) 견살(0.00%)
 지살(0.00%)(환살, 쾌살, 영살······. 견살의 숙련도가 40% 이상일 때 사용 가능)
 천살(0.00%)(환살, 쾌살, 영살······. 견살의 숙련도가 70% 이상일 때 사용 가능)
 극살(0.00%)(환살, 쾌살, 영살······. 견살의 숙련도가 100%일 때 사용 가능)
 귀영심법(0.00%)
 암영
 그림자 이동술 (0.00%)
 은신 (0.00%)
 암영보 (0.00%)
 사안 (0.00%)
 
 “뭐야, 원래 직업을 얻으면 처음부터 스킬을 다 몰아주나?”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
 무슨 말을 못하겠다.
 이제 직업과 스킬을 얻었으니 써먹어야 할 때다.
 물론 사기당해 얻은 직업이기는 해도 스킬 구성을 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솔로 플레이에서만.
 ‘사냥터를 어디로 갈까나.’
 토끼는 이제 질렸고 경험치도 거의 주지 않았다. 조금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선 기술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20대에서 30대 정도인 몬스터를 잡아 볼까?’
 다른 유저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저거 미친 거 아니냐고 했겠지만 연은 자신이 있었다.
 물론 레벨 20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하지만 연에게는 결코 메꾸기 불가능한 차이는 아니었다.
 지옥에서 얻은 능력은 쓰지는 못해도 게임 시간으로 20년 동안의 실전 경험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연이 사냥터로 결정한 곳은 도시의 동쪽에 위치한 고블린의 숲. 이름 그대로 고블린들이 많이 출몰하는 사냥터였다.
 
 * * *
 
 숲에 들어가자마자 연은 고블린 한 마리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고블린들은 무리 지어 다니는 게 정석이지만 아직 외곽지역이라 그런지 사냥하기 쉽도록 혼자 배치해 놓은 놈인 듯했다.
 ‘자 그럼 은신부터 하고.’
 연의 모습이 주위의 풍경과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숙련도가 0이어서 그런지 많이 어색해 보였다.
 마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 정도?
 그렇기에 연은 그냥 수풀 안에 엎드려서 숨을 죽였다.
 고블린은 다행히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고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그림자 이동술.’
 그림자 이동술이란 말 그대로 다른 물체의 그림자를 통해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스킬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이거 뭐냐, 바로 앞인데도 이동이 안 된다고?’
 2m도 채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이동하지 못하는 숙련도 0의 그림자 이동술.
 이걸로 고블린의 뒤로 이동한 다음 스킬로 크리티컬을 터뜨려 한 방에 끝낸다는 연의 계획은 처음부터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움직여서 고블린을 치려고 하면 이 형편없는 은신의 숙련도로는 들킬 게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연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고블린.
 ‘그러면 이제······.’
 “크륵?”
 고블린이 드디어 연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챘다.
 ‘먼저 선수를 치는 수밖에.’
 파앗!
 연은 순간적으로 암영보를 이용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는 연의 손에는 날카로운 돌 하나가 들려 있었다.(돈이 없어 무기를 구하지 못했다.)
 “키키킥!”
 하지만 20대 레벨의 고블린의 반사 신경은 연의 예상보다 빨랐다.
 연의 신형은 고블린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짓고 있는 고블린의 녹슨 단검은 이미 연의 목에 닿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연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그림자 이동술.
 슈욱!
 고블린의 단검이 연의 목을 가르려고 하는 순간, 연의 신형이 자신의 그림자로 빨려 들어가더니 고블린의 뒤쪽에 있는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크르륵?”
 순간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던 적이 사라지자 멍청한 표정을 짓는 고블린.
 뒤로 돌아간 연은 모든 물체의 급소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스킬 사안을 시전했다.
 ‘젠장할! 급소가 하나도 안 보여! 아오, 망할 영감탱이.’
 역시나랄까 이번에도 숙련도 문제였다.
 보이는 급소가 말 그대로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 대머리 노인을 다섯 번 정도 욕하며 결국 잘 알려진 급소 중 하나인 목을 노리는 연.
 쾌살.
 슈아아악! 푹!
 연의 휘두르는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지며 날카로운 돌이 고블린의 목에 박혔다.
 “끄에에에엑!”
 연은 ‘이세계’의 급소 시스템을 믿고 있었다.
 극도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이세계’는 급소를 공격하면 단순히 자신의 공격력의 2배나 3배의 데미지가 들어가는 기존의 크리티컬과는 달리, 적중하는 부위에 따라 즉사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물론 이 급소 시스템은 몬스터와 플레이어 둘 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레벨 5의 근력이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원래는 한 방으로 죽일 수도 있는 급소였지만 미약한 근력으로 인해 돌이 얕게 박혀 숨이 붙어 있는 고블린이 연을 돌아보며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 진짜!’
 저 돌이 조금만 더 깊이 박혔더라면.
 거기다가 지옥에 있을 때에 비해 천지 차이로 줄어든 능력치의 부조화로 마치 자신의 몸이 아바타를 조종하는 것처럼 익숙지 않았다.
 “꾸에에엑!”
 고블린이 바람이 세는 듯한 소리와 섞여 이상하게 들리는 비명을 지르며 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남은 마력으로는 기술 하나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고블린의 공격은 연의 눈에 뻔히 보이지만 지금 피하면 저 고블린에게 치명타를 먹이긴 힘들 것이다.
 그럴 바에는······.
 ‘살짝 받아 준 뒤.’
 츠츠츳!
 연의 신형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고블린의 단검을 오른쪽 어깨로 흘려 낸다.
 츠핏!
 그 와중에 연의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레벨 5인 연의 체력은 순식간에 50퍼센트 정도로 떨어졌다.
 ‘다시 급소에 꽂는다.’
 붕살(崩殺).
 살수의 기술답지 않게 속도가 느려지는 대신 더 파괴적인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스킬.
 그 기운을 담은 연의 손이 크로스 카운터처럼 뻗어지며 고블린의 목에 박혀 있는 돌로 향한다.
 푸아아악!
 마침내 고블린의 목에 끝부분만 남긴 채 깊숙이 박혀 들어가는 돌멩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피 대신 뿜어지는 금빛 가루.
 한 방만 잘못 맞아도 그대로 승천길이 열리는 급소를 두 대나 맞은 고블린의 최후는 뻔했다.
 “그르르륵.”
 쿠웅!
 마침내 숨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고블린.
 고블린의 시체는 곧 입자가 되어서 휘날리더니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녹슨 단검과 약간의 돈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만 남았다.
 “후우!”
 귓가에 울리는 레벨업 소리를 들으며 몸 상태를 체크 하는 연.
 ‘다시 시작하려니까 더 적응이 힘드네.’
 차라리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싸우면 더 괜찮았을 거라 생각하며 연은 앞으로의 고생길을 바라보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4장 그 녀석은 내가 잡는다
 
 
 쉬아악!
 고블린의 낡은 검이 연을 향해 무섭게 짓쳐 들어 왔다.
 “흡!”
 짧게 숨을 들이켠 연은 암영보를 이용해 옆으로 살짝 움직이며 고블린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었다.
 그러고나서 바로 고블린에게 달려들어 살 10식 중 하나인 환살(幻殺)을 시전했다.
 그러자 연이 들고 있는 녹슨 단검이 2개로 나누어지며 고블린의 급소를 정확히 노렸다.
 “케륵?”
 자신의 눈앞에서 하나의 단검이 두 개로 나누어지는 기이한 광경을 본 고블린이 팔을 이상하게 휘저었다.
 그러나 이미 연의 단검은 고블린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 과정은 단 2초로 이미 숙련될 대로 숙련된 솜씨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디어 20인가······.”
 연은 목표 레벨을 달성했다는 쾌감에 몸을 짧게 떨었다. 게임 시간으로 3일에 걸친 레벨업 기간. 그동안 재활훈련을 하는 시간을 빼고는 모조리 레벨업에 쏟아부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고블린들을 잡았던 터라 이 정도나 올린 것이었다.
 ‘끙, 그나저나 숙련도가 정말 안 오르는군.’
 스킬창을 열어서 숙련도를 확인해 본 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숙련도의 퍼센티지가 한 자릿수를 맴돌고 있다. 물론 첫술에 배부르기란 힘들지만 레벨에 비해 스킬 숙련도의 오르는 속도가 차이 났다.
 ‘그렇게나 골고루 펑펑 써댔는데 말이지.’
 사실 연은 특별한 경우였다. 보통은 레벨에 따라 스킬을 하나씩 받아가며 숙련도를 올리는 것이 정석인데 연은 처음부터 모든 스킬을 한꺼번에 받아버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노멀 클래스도 아닌 히든 클래스의 스킬이니 숙련도 올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쩝, 이러면 나중에는 죽어나겠군. 희귀 직업이라고는 해도 너무 안 오른단 말이지.’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올리기 힘든 스킬 숙련도이기에 나중에 90퍼 대에서는 얼마나 사용해야 오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스킬이 많았기에 고블린은 그나마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그 녀석’을 잡으러 가볼까.’
 사실 연이 미친 듯이 레벨업을 한 이유는 ‘그 녀석’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틀 전, 뭣도 모르고 그 녀석에게 덤벼들었다가 중간계 생활 이틀 만에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 ‘괴’랑 짝짜꿍을 할 뻔한 연.
 어찌어찌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지만 자신의 단검은 ‘그 녀석’의 질긴 가죽을 끝까지 뚫을 수 없었다.
 기본적인 공격조차 통하지 않자 도망을 선택한 자신을 쫓지 않고 뒤에서 께륵께륵 하면서 비웃고 있던 녀석의 면상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몬스터 주제에!’
 그래서 그 녀석을 잡기 위해 그때부터 모든 스탯 포인트를 근력에다 때려 박았다. 이것이 연이 생각한 그 녀석을 잡기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스펙.
 사실 어쌔신 계열 직업은 민첩에 많이 투자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복수에 눈이 먼 연의 머리에선 이미 그런 생각은 우주 저 너머로 날아가 있었다.
 ‘그 녀석’이 서식하는 곳은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연은 머릿속으로 전투에 대한 계획을 짜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귀욤아 힐! 힐!”
 남녀로 이루어진 3인의 파티 중 탱커 역할을 맡고 있는 남자 ‘오빠 믿고 딜해라’가 다급하게 자신의 뒤쪽에 있는 사제인 ‘귀욤공주’에게 외쳤다.
 “아, 알았어! 힐! 힐!”
 “아니 말로만 힐힐 거리지 말고 스킬 시전을 하라고!”
 “아 맞다 에헷, 깜빡!”
 자신의 머리를 콩하고 가볍게 때리며 깜찍한 척을 하는 귀욤공주를 보며 오빠 믿고 딜해라는 자신의 주먹으로 콩! 말고 쾅!! 소리가 나게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후우, 진짜 사촌 동생들만 아니었어도 진작 파티해산 했다.’
 전사, 사제, 궁수 이렇게 직업별로 짜인 밸런스는 좋았지만 자신 빼고는 실력이 좋지 않았다. 아예 기본적인 게임에 관한 지식조차 없었기에 거의 혹 두 개 달고 움직이는 기분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 파티를 승낙한 과거의 자신과 쓸데없이 넓은 오지랖을 탓하며 다음 고블린을 찾아 이동하려고 할 때, 궁수인 ‘강한친구 대한궁수’가 그를 불렀다.
 “형, 저 사람 혼자 아니야?”
 “혼자 사냥할 수도 있지, 뭘 새삼스럽게.”
 “아니, 저 사람 향하는 방향이 보스 존 아니야?”
 “뭐? 헐, 진짜네? 죽으러 가는 건가?”
 각 사냥터에는 한 마리 이상의 보스 몬스터가 존재했다. 보스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최소한 사냥터 적정 레벨대의 플레이어 5명 이상이 파티를 이루고 가야 겨우겨우 잡을 수 있는 게 보스 몬스터였던 것이다.
 물론 훨씬 높은 레벨 대의 플레이어는 혼자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플레이어가 굳이 저레벨대의 사냥터까지 와서 보스를 잡는 비효율적인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어이, 형씨! 그쪽은 보스 존이요! 혼자 들어가면 죽어요!”
 딱 봐도 아이템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게 자신보다도 레벨이 낮아 보였다. 오지랖이 발동한 오빠 믿고 딜해라는 혼자 보스 존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불렀다.
 “······.”
 그 말에 잠시 이쪽을 돌아보던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결국 보스 존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하, 진짜, 죽는다니까.”
 “형 어떻게 할 거야?”
 “뭘 어쩌긴 어째, 구하러 가야지.”
 “오! 나도 갈래! 나도 보스 구경하고 싶어!”
 쓸데없이 넓은 오지랖을 탓하면서도 오빠 믿고 딜해라는 결국 그 남자를 따라 보스 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은 보스 존에 들어와서 어느 정도 ‘그 녀석’이 사는 곳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은신을 시전했다.
 아까 전 누가 자신을 부르는 듯했지만, 괜히 대답했다가 능력치가 깎일까 싶어 바로 들어온 연이었다.
 그런 다음 은신 상태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인 암영보를 이용해 살며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척 없이 움직이는 게 장점인 기술인 암영보답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연의 신형.
 ‘그렇지! 저기 있었군.’
 전방 30m쯤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늘어지게 누워서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블린의 피부는 다른 평범한 고블린들과는 다르게 피처럼 새빨갰다.
 저 고블린이 바로 ‘그 녀석’, 고블린의 숲의 보스급 몬스터 홉고블린이었다.
 연은 15m 앞까지 접근한 다음, 홉고블린을 찬찬히 살펴보며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홉고블린의 감각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가가면 눈치챌 우려가 있었다.
 그때.
 “크륵! 인간, 계속 거기 숨어 있을 참인가?”
 연이 숨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서툰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건네는 홉고블린.
 ‘젠장, 대체 저 녀석 감각 범위가 어디까지야?’
 이미 눈치챈 이상 은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에 바로 풀었다.
 “크큭, 그때 그 인간이군.”
 홉고블린의 입가에 스멀스멀 비웃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 인간은 예전에도 자신에게 덤볐다가 철저하게 깨지고 꽁무니를 뺀 적이 있던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랑은······.
 “다를 거다.”
 암영보 최대 속도.
 파아앙!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는 연의 눈은 어느새 먹이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환살.
 연의 단검이 하나의 환상을 뿌리며 각각 홉고블린의 미간과 목을 노렸다.
 “크르륵!”
 하지만 홉고블린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배틀 엑스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두 개의 검을 한꺼번에 막아버렸다.
 챙!
 진짜는 미간 쪽이었는지 홉고블린의 이마 앞에서 막혀 있는 연의 낡아빠진 단검.
 “크응!”
 순간, 홉고블린이 단검을 쳐낸 다음 아무런 준비 동작도 없이 번개처럼 연의 목을 향해 도끼를 베어갔다.
 쳐낸 반동 때문에 튕겨 올라가 있는 오른팔. 그리고 이미 목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는 홉고블린의 시퍼런 도끼날. 도저히 제시간에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림자 이동술.
 연의 몸이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갔다.
 “키르륵! 또 그 같잖은 수작이냐!”
 홉고블린은 도끼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원을 그리듯 거의 한 바퀴를 돌며 그대로 자신의 뒤쪽까지 쪼개어 버렸다.
 채앵!
 예상대로 무엇인가 걸리는 소리가 나자 홉고블린의 입가에 괴소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 괴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캭! 뭐냐?”
 뒤를 돌아본 홉고블린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도끼가 쪼갠 것은 그 약아빠진 인간의 녹슨 단검이 아닌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색의 창이었다는 것을······.
 ‘그럼, 놈은?’
 홉고블린의 머리에 위험 신호가 미친 듯이 울리며 그와 동시에 빠르게 고개를 위로 젖혔다.
 푸아악!
 “키아아아악!”
 다음 순간, 홉고블린은 자신의 왼쪽 눈을 불로 지진 듯한 통증과 함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연은 그 상황에서 거의 동시에 두 가지 기술을 사용했다.
 하나는 그림자 이동술, 나머지 하나는 영살(影殺).
 영살은 근접한 상대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연은 예전에 자신이 그림자 이동술을 사용한 것을 홉고블린이 기억한다는 전제하에 영살을 사용하여 홉고블린의 그림자를 이용해 공격하는 심리전을 걸었다. 그런 다음 자신은 홉고블린의 위쪽에 있는 나뭇가지에 드리워진 잎사귀들의 그림자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림자 이동술을 사용하면 모든 물체의 그림자로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연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연은 마음속으로 사기꾼 영감탱이에 대한 평가를 개미 더듬이만큼 올려주고 뒤를 돌아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홉고블린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쾌살.
 푸아아악!
 녹슨 단검이 마침내 그 녀석의 왼쪽 눈에 박혀 들어갔다.
 ‘이런, 한 방에 보내지 못했다!’
 “키에에엑!”
 원래 연의 계획은 홉고블린의 눈을 통과해 그대로 뇌까지 직행으로 손상을 입힐 생각이었지만 역시나 낮은 공격력이 문제였다.
 홉고블린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나머지 한쪽 눈으로 연을 노려보았다. 고통으로 인해 이성이 거의 마비된 눈.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눈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회다.’
 훨씬 난폭해졌지만 분노로 인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상태. 공격패턴이 단순해져 오히려 연에게는 아까보다 훨씬 편한 상대였다.
 ‘광폭화 상태든 그냥 상태든 어차피 맞으면 한방이야. 한 대도 맞지 말아야 해.’
 연은 홉고블린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짝살짝 피하며 생각했다.
 “크어어어!”
 연이 잠깐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자, 눈이 뒤집힌 홉고블린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지 괴성을 지르며 맹수처럼 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홉고블린을 보면서도 마치 기운에 압도당하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연.
 8m, 6m, 4m······.
 그리고 2m.
 ‘바로 지금!’
 견살(見殺).
 상대방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설정을 가진 일종의 정신 공격인 견살이었지만 숙련도가 무척이나 낮았기에 상대를 아주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정도밖에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연에게는 충분했다.
 움찔!
 0.5초? 아니, 0.3초?
 순간적으로 홉고블린의 움직임이 무언가에 턱 걸리는 것처럼 정지했다. 거기에 이보다 더욱 적절할 수 없을 타이밍으로 치고 들어가는 연의 기술.
 붕살
 살 10식의 장점은 모든 무기나 심지어 맨손으로도 스킬을 펼칠 수 있다는 것.
 느리지만 파괴적인 기운이 담긴 연의 손이 그대로 홉고블린의 눈에 박혀 있는 녹슨 단검으로 향했다.
 “크르륵!”
 홉고블린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이건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본능적으로 배틀엑스를 치켜 올려 연의 손을 막았다.
 쾅!
 울려 퍼지는 굉음. 과연 암살자 계열의 스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연의 공격이 끝난 게 아니었다.
 류살(流殺).
 다른 기술을 시전하며 홉고블린에게 짓쳐 들고 있는 연의 왼쪽 다리.
 홉고블린은 방금의 공방으로 이성이 돌아왔는지 이번에는 다리를 잘라버릴 생각으로 도끼의 날 부분을 연의 다리에 가져다 대었다.
 도끼의 날이 연의 다리와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휘리릭.
 “······!”
 연의 발이 도끼의 날을 타고 그대로 쭉 올라갔다. 마치 일정한 형체가 없이 흐르는 물처럼.
 바로 류살이었다.
 고블린의 한쪽밖에 없는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붕살을 쓰지 않은 팔로 저 단검을 누르기엔 힘이 모자라 그렇다면······.’
 다리로 누른다.
 퍼어억!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연의 발끝이 눈에 박혀 있는 녹슨 단검을 눌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홉고블린의 육체는 이미 정지해 있었다.
 
 [레벨이 5 올랐습니다.]
 
 “후우······.”
 마력은 이미 바닥, 포만감도 제로, 체력은 단지 홉고블린의 무기와 부딪쳤다는 이유만으로 3분의 2가 닳아 있었다. 직접적인 타격을 한 번이라도 받았으면 지금 쓰러져 있는 건 바로 연이었을 것이다.
 
 [‘숲의 정령의 배틀엑스’를 획득하셨습니다.]
 [‘반응 속도의 장갑’을 획득하셨습니다.]
 [1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털썩!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홉고블린에게서 떨어진 아이템을 줍고 그대로 자리에 드러눕는 연.
 ‘좀 쉬어야겠다. 접속 종료.’
 연은 아이템을 확인도 하지 않고 그 상태로 바로 접속을 종료했다.
 
 * * *
 
 겁도 없이 혼자 보스 존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쫓아 보스 존으로 따라 들어온 ‘오빠 믿고 딜해라’는 전율했다.
 애초에 목적은 빠르게 남자를 구해 보스 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일단 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보스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남자와 홉고블린의 전투 장면을 본 순간, 오빠 믿고 딜해라의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형, 저 사람 빨리 구해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오빠, 빨리 구해서 나가자,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이는데.”
 게임과 전투에 대해 보는 눈이 아예 없다시피 한, 두 사촌 동생들은 보고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의 저 남자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싸우고 있는지.
 자신보다 민첩 등 스탯이 낮은 상대와 전투하여 공격을 피하거나 쳐내거나 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로 공격을 한 대도 맞지 않고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저 남자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는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태해 보여서 언제라도 공격을 허용해 죽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저 남자가 의도한 대로라는 것을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적의 공격이 휘둘러지기 전에 남자는 이미 그 경로를 예측하여 움직이고 있었고 그럼에도 달리는 민첩을 피하는 움직임을 최소화함으로써 커버하고 있었다.
 “저게······ 말이 돼?”
 “그러게, 홉고블린 저거 말도 안 되게 강해 보이네.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건가?”
 무심코 튀어나온 자신의 말에 멍청한 소리로 대답하는 강한친구 대한궁수의 말을 무시하고 오빠 믿고 딜해라는 그 남자의 전투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남자의 발이 홉고블린의 눈에 박힌 단검에 깔끔하게 명중하는 순간, 오빠 믿고 딜해라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헐, 저 사람 홉고블린 잡았어!”
 “와 대박! 운이 좋네, 어떻게 거기서 홉고블린이 딱 멈추냐. 어, 형 어디가? 설마 아이템 스틸하려고? 그건 비매너야, 형.”
 “저기요, 저희랑 파티사냥······.”
 슈욱!
 뭐가 그리 급한지, 바로 로그아웃해 버리는 그 남자, 자신을 아이템을 스틸하러 온 사람으로 착각이라도 한 건가?
 “하······ 친구추가라도 해야 했는데.”
 어쩌면 미래의 랭커가 될지도 모를 사람과 인연을 놓쳐 버린 그는 아쉬운 한숨을 토해내었다.
 
 * * *
 
 [접속을 종료합니다.]
 
 “아고, 고생했다 내 자신.”
 찌뿌둥함을 떨치려고 기지개를 켜며 캡슐에서 나오는 한묵. 아직 현실에서는 격한 움직임은 자제해야 했었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오, 한묵이 이제 나오냐?”
 그런 한묵을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한묵의 친구인 인욱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온 인욱은 성격이 조용했던 한묵의 얼마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한묵이 4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었을 때도 인연이 끊겨 버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계속 병문안을 와주고 곁을 지켜준 진정한 친구이기도 했다.
 “야, 근데 이 병실 담당하는 간호사 봤냐? 내 스타일이던데 한번 꼬셔볼까? 솔직히 나 정도면 눈빛만 보내도 첫눈에 반했어요! 하면서 넘어올 거 같은데 인정하냐? 빨리 어 인정하고 말해라.”
 “······.”
 그리고 살짝 똘끼도 있는 친구였다.
 “그건 그렇고, 레벨은 많이 올렸어? 너 접속한 지 한 3일 됐지? 10은 찍었으려나? 직업은 뭐야?”
 “······하나씩만 물어봐라.”
 한묵의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한묵이 4년 동안 ‘이세계’를 플레이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괜히 ‘지옥’에 있었다고 말해봤자 걱정만 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오키오키, 아무튼 직업이 뭐야?”
 “진살수라고 어쌔신 계열이야.”
 “어쌔신? 그거 별로 안 좋은 직업인데······ 멋있기는 하지만 너 사람들이 파티 안 끼워 주지?”
 “음······.”
 인욱의 말에 침음성을 흘리는 한묵. 물론 그 이유 말고도 자신은 파티 플레이를 하지 못할 이유가 더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다른 파티들도 어쌔신으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너 초보자 사냥터에서 렙좀 올리고 나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넘어와라. 우리 길드 가입하고 쩔 좀 받으면 괜찮겠지.”
 “그래, 생각 좀 해보고.”
 “짜식, 튕기기는······ 그건 그렇고 너 아까 올라온 동영상 봤어? 천강이랑 팔론 나오는 영상.”
 “천강? 팔론? 그게 누군데?”
 “야 미친, 너 ‘다섯 별’ 몰라? 랭킹 1위가 천강이고, 3위가 팔론이잖아.”
 한묵의 말에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 인욱.
 다섯 별.
 이 세계를 플레이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 위에 오롯이 빛나는 다섯 명의 인물.
 공식 랭킹 1위부터 5위까지를 칭하는 말.
 ‘이세계’가 오픈한 뒤로부터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절대적인 아성.
 그 한 명 한 명이 한 나라의 전력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초월자들이었다.
 물론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자들이었고 어떤 별은 자신의 나라에서 대통령과 동급으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을 모른다고 하니 인욱이 호들갑을 떨 수밖에.
 “아무튼 봐봐, 그 둘이 싸우는 영상이니까.”
 ‘오, 현재 랭커들의 싸움을 볼 수 있단 말이지?’
 인욱의 말에 한묵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폰으로 영상을 재생시켰다.
 
 
 5장 다섯 별
 
 
 어딘지 알 수도 없는 드넓은 황무지. 어찌나 황폐한지 몬스터조차 보이지 않는 그곳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찾느라 힘들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아성을 무너뜨려 주지.”
 먼저 입을 연 사내는 온몸을 회색 로브로 둘러싸여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드러난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시원스러운 미남의 사내였다.
 다섯 별 중 하나, 마법성(魔法星).
 마법사 랭킹 1위이자 ‘이세계’ 최고의 마법사 길드 ‘진리의 끝’의 수장. 서대륙에 있는 사대마탑 중 서쪽 마탑의 탑주, 마법의 선구자 등등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여러 개가 있었지만 팔론이 제일 좋아하는 호칭은 바로 이 마법성이란 단어였다.
 ‘이세계’가 오픈할 때부터 엄청난 자본과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해 본인을 다섯 별로 만들고 이끄는 세력 또한 최고로 만들었다.
 그러나 항상 그의 이름 앞에 거론되는 두 명의 이름, 권성(拳星)과 검성(劍星).
 세력조차 만들지 않고 개인의 무력만으로,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부숴버리며 올라온 두 명의 인물. 이 둘을 제쳐야만 자신은 진정한 최고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바로 자신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철탑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내가 그중 한 명인 권성이었다.
 우직하게 흔들림 없는 두 눈, 굳게 다문 입술, 잘 단련된 육체.
 권성 이천강을 칭하는 호칭은 다른 별들과는 달리 그리 많지 않았다.
 절대자
 이 한마디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까.
 부동의 1위, 권성 이천강은 팔론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와라.”
 파앗!
 천강의 말과 동시에 아무런 징조 없이 팔론의 주위로 수천 개의 얼음 화살이 생성되더니 천강을 향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자신을 향해 무섭게 쇄도해 오는 셀 수 없이 많은 얼음 화살들을 보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는 천강.
 마침내 얼음 화살들이 천강을 꿰뚫는다고 생각한 순간, 천강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팔론의 바로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불, 집중, 폭발.”
 푸화아앗!
 팔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확히 천강이 있는 곳에서 불꽃의 폭발이 일어났다.
 마법을 단위별로 쪼개어 퍼즐 조각 맞추듯이 속성의 조합만으로 마법을 발동하는 팔론의 특기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팔론의 바로 앞에 나타난 천강 역시 허상이었다.
 이동술의 최고봉이라는 이형환위를 자연스럽게 펼치며 팔론의 위에 나타난 천강이 팔론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붕(崩).
 “절대, 방어.”
 콰지지직!
 황급히 보호막을 친 팔론을 중심으로 반경 30m 정도의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절대라는 속성은 팔론으로서도 하루에 쓸 수 있는 수량이 정해져 있는 속성이다.
 그만큼 효과가 대단한 속성인데 절대라는 속성을 부여한 방어막이 천강의 주먹질 한 번에 가뭄에 논두렁 갈라지듯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다음번 공격에 무조건 깨진다. 그전에 수를 내야만 해.’
 팔론이 생각하는 사이, 천강의 공격이 이어져 들어왔다. 그 순간.
 〔속박〕
 팔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울림과도 같은 소리. 마법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용언(龍言)과 같이 말 그 자체로 세계의 법칙에 간섭할 수 있는 언령(言靈)이 ‘이세계’ 최초로 플레이어의 입에서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언령에 구속되어 그대로 허공에서 멈춰버린 천강의 신형.
 “3배, 벼락, 집중.”
 팔론이 허공에 정지에 있는 천강을 향해 벼락 세 개를 겹쳐 날렸다.
 자신을 향해 질주해 오는 푸른색의 번갯불을 보면서도 천강의 눈은 고요했다. 마침내 번갯불이 천강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천강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천강 주위의 공간이 물결치듯 급격하게 일그러지더니 결국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는 번갯불.
 “!!”
 팔론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대로 멈춰 있기에는 팔론의 앞에서 짓쳐 들어오는 천강이 너무나도 파괴적이었다.
 웬만한 공격은 몸으로 버티며 들어올 것을 알기에 방어 주문을 준비하는 팔론.
 “나는 맹세했다. 어느 것 하나도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래, 신마저도.”
 아발론(Avalon).
 주문 중에서도 전설급 이상의 주문은 속성을 추출하여 사용하기가 힘들었기에 직접 주문을 외워야 한다.
 하지만 팔론은 그런 주문마저도 간소화시켜 한 줄의 읊조림만으로 사용이 가능하게 했다.
 후아아아앙!
 팔론의 주위로 너무나 희미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금빛 보호막 하나가 생겨났다.
 주문이 실패한 것인가? 그것은 곧 드러났다.
 “파결(破結), 파천의 춤.”
 천강의 작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거대한 진동이 몇 차례 일어났다.
 그것은 춤을 추듯 아름답게 주변을 감싸며 퍼져나갔지만, 그 진동이 닿는 곳은 결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힌다. 가히 한 인간이 낸 힘으로는 볼 수 없는 위력.
 천지개벽!
 마치 폭탄이라도 연속으로 떨어진 것 같은 폭음이 사라진 후, 흙먼지가 걷히고 팔론의 모습이 드러났다.
 “쿨럭! 흐흐, 역시 대단해.”
 내상을 입었는지 입으로 피 대신 금빛 가루를 토해내며 말하는 팔론.
 “솔직히 놀랍다. 방금은 죽일 생각으로 펼친 건데 버텨내다니······.”
 천강이 우묵한 눈으로 말했다.
 “하하, 놀랐다니 기분은 좋군. 최근에 좋은 주문들을 몇 개 얻어서 말이야. 아직 못 보여 준 게 더 많긴 하지만.”
 “아니, 포기해라. 애초에 마법사 클래스가 나와 1 대 1이라니. 네가 불리한 싸움이다.”
 “불리한 싸움에서 이기면 더 기분이 좋겠지.”
 슈슉!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빛내며 공간이동으로 사라지는 팔론. 그와 동시에 천강을 중심으로 반경 50m의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간단한 타깃 지정 마법진과 위력 집중 증폭 마법진이다. 우선, 운석 낙하.”
 어디선가 드려오는 팔론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정확히 천강 쪽으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 일반 마법사들은 주문을 얻어도 무척이나 복잡하여 사용하기 힘들어하는 주문을 껌 씹듯이 간단하게 사용하는 팔론.
 쿠오오오!
 엄청난 속도 때문에 조금씩 타들어 가며 떨어지는 운석과 그 운석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천강.
 “륜(輪).”
 천강의 주먹이 위로 들어 올려지며 미약한 돌개바람이 운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운석에 휘말려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돌개바람.
 그러나 돌개바람과 운석의 만남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콰자자작! 쿠지지지직!
 역으로 돌개바람에 갈려 버리듯 산산이 조각나 버리는 운석.
 후두둑! 후두둑!
 천강은 돌가루가 떨어지는 마법진의 중심에서 눈을 반개한 채로 마치 다음 수가 있으면 더 꺼내 보라는 듯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역시나, 그럼 이것도. 물, 생성, 그리고 눈, 폭풍.”
 마법진 안으로 물이 쏟아졌는데 희한하게도 물은 마법진 밖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마법진 안에서 수위를 높여갔다.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치는 거대한 얼음 폭풍!
 드드득! 드드드득!
 얼음 기둥.
 마법진 안 전체, 반경 50m, 높이 20m가량의 넓적한 얼음 기둥이 순식간에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눈을 반개한 그 상태로 얼어버린 천강.
 “밖에서 깨는 것은 쉽지만 안에서는 어떨까?”
 얼어붙은 천강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하는 팔론.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콰지지직! 콰지직!
 “······!”
 얼음기둥에 점점 금이 가더니 천강의 눈이 완전히 떠지는 순간, 아까의 운석과 같이 산산이 조각나 버리고 말았다.
 “왜 시간을 끄는 거지?”
 그토록 엄청난 일을 했음에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우묵한 눈으로 팔론을 바라보며 말하는 천강.
 “하, 역시 알고 있었군.”
 팔론이 고개를 흔들면서 인정했다.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처음에야 너를 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목표가 달라졌다. 아마 이 공격으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
 여전히 말이 없는 천강을 보며 팔론은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언령에도 단계가 있었는데 팔론은 아직 말로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고위 단계의 언령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야 겨우 얻을 수 있었던 신화급 주문, ‘하데스의 시선’을 분석하고 접목시켜 어설프게나마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자신의 단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언령을 강제로 이끌어내기 때문에 실패하면 반작용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준비 시간이 길지만 그렇기에 동급의 경지 안에서 걸려들면 단시간 안에 풀 수 없는 성질의 것.
 이 주문마저 풀어버린다면······ 알 수 있으리라.
 〔죽어라〕
 다시 그 이상한 울림이 팔론의 입에서 나와 황무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세계 자체의 법칙에 간섭하여 상대방의 모든 결과가 죽음으로 귀결되게 만드는 마법의 최고봉!
 주문의 대상인 천강의 눈이 언령에 걸려들고 있다는 증거로 점점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아닌 건가?’
 주문이 걸려들고 있는 것은 분명 팔론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천강이 주먹을 내 뻗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무런 힘도 발산하지 않는 그냥 순수한 지르기. 점점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법칙에 대한 마지막 발악인 것인가?
 일로(一路).
 항상 자신은 길을 개척하여 나아갔다. 그 누구의 길도 따라가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따라오라 하지 않았다.
 독보(獨步).
 그렇기에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다른 이가 정해준 법칙 따위는······.
 콰지지지직!
 부숴버릴 뿐이다.
 무엇인가 갈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천강 주변을 비롯하여 황무지 전체에 내려앉았던 죽음의 법칙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팔론의 입에서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금빛 가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억! 커어억! 역시······.”
 불완전한 언령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죽지 않으면 반대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기술이기도 하다.
 자신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음을 본 팔론이 천강을 향해 말을 이었다.
 말을 하는 그의 눈에는 환희와 갈망, 그리고 열등감 등등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크흐, 역시였던가······. 축하한다, ‘지(地)’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그렇게 짧은 말을 마친 팔론의 몸이 천천히 금빛 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
 천강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에서 영상은 끝이 났다.
 
 
 6장 거지 취급당하다
 
 
 동영상이 끝난 후, 한묵은 영상 밑에 달려 있는 댓글을 살펴보았다.
 
 -이세계 지존 검사: 지. 렸. 다.
 -규니하니: 잠깐만요, 저 팬티 좀 갈아입고 올게요.
 -미래의 다섯 별: 저기 보이는 천강이 바로 한국 사람입니다. 크아! 국뽕에 취한다.
 -상큼달콤 과일소주: 저기 동영상 중반에 팔론이 말하니까 마법이 막 나가던데 도대체 뭔가요? 저도 마법사인데 왜 전 못하죠?:
 └Re: 그거 언령이라는 건데 가끔 NPC가 쓰는 걸 본 적 있어요, 님은 못 써요······. 님뿐만 아니라 지금 ‘이세계’에서 언령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팔론밖에 없을 걸요?
 -경훈: 아니,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저렇게 주먹 한 방에 부서지는 스킬인가요? 저거 마법사 전용 최상위 스킬 아니에요?
 └Re: 천강이라 가능한 겁니다. 따라 하면 안됩니다.
 └Re: ㅇㅈ.
 -쩌는 걸 보면 짖는 개: 왈왈왈왈! 왈왈왈왈!
 -Real wizard: Palon is good sorcerer. He is powerful!
 -민이: 윗분 영어 수준 보니 한국 사람 같은데 외국인 컨셉 ㄴㄴ.
 
 그 밖에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댓글들. 올라온 지 2시간 만에 조회 수는 벌써 3,000만이 넘어가고 있었다.
 “미쳤네, 미쳤어. 야 봤냐? 봤어? 처음에 팔론이 얼음 화살 수천 개 만드는 거? 네가 아직 ‘이세계’를 잘 몰라서 별로 안 놀라는 거 같은데 그거 진짜 어려운 거다?”
 “그래? 그건 그렇고 ‘지의 경지’란게 대체 뭐야? ‘이세계’에 그런 시스템도 있었어?”
 “아, 너 한계 레벨 모르냐?”
 “한계 레벨?”
 인욱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묵.
 “아나, 나 설명충 극혐하는데······ 내가 특별히 설명해 주니까 잘 들어라.”
 한묵은 인욱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세계’는 여타 다른 게임과는 달리,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퀘스트를 완수하여 경험치를 얻는다고 레벨을 무한정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상위 직업을 얻기 위해 전직 퀘스트를 하는 것처럼 레벨을 올리기 위한 ‘자격’이란 것이 존재했다.
 레벨 299에서 300, 399에서 400, 그리고 499에서 500 이런 식으로 백자리가 바뀔 때마다 존재하는 구간을 한계 레벨이라고 칭했으며 이 구간에서 레벨을 올리려면 무척 특별한 방식을 취해야 했다.
 바로 각성, 무협지에서는 깨달음이라 불리는 그것. 특수한 직업의 플레이어나, 비전투계열이 아닌 이상, 누구나 적용되는 벽.
 혹자는 그 직업에 대한 이해도를 뇌파를 통해 시스템이 감지하여 다음 레벨로의 길이 열릴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도 했으며, 다른 전문가는 ‘이세계’의 밸런스를 조절하기 위하여 메인 시스템이 일정량의 숫자만큼의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그 직업에 대한 숙련도가 뛰어나다고 판단하면 돌파시켜 준다고 주장했다.
 워낙에 많은 주장이 난무했기에 한계 레벨을 넘기 위한 정석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이세계’를 만든 회사, ‘GODS’만이 그걸 알뿐.
 보통은 300레벨을 돌파하면 마스터라 일컬었고, 전 세계에서 돌파한 사람이 4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400레벨에 들어선 사람들을 일컬어 ‘40인의 왕’이라 칭했다.
 그리고 마침내 500레벨을 돌파하여 명실상부 초월자의 반열에 든 5명의 인물, ‘다섯 별’이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에 의해 한계 레벨에서 더 이상 레벨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GODS’에 이런 차별정책 따위 당장 없애라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GODS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밖에 가상현실게임을 상용화할 수 없으니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다섯 별’ 5인은 오랫동안 500레벨대인 ‘인(人)’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 동영상에서 말했든 드디어 랭킹 1위 권성 이천강이 600레벨대 ‘지(地)’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 알려진 것이다.
 “그 이상의 경지는?”
 인욱의 설명을 다 듣고 한묵이 질문했다.
 “나도 몰라. 자신이 직접 그 경지에 들어서거나 한계 레벨을 찍으면 다음 경지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경지? 한계 레벨? 나한테도 그런 게 있었나?’
 게임 시간 20년 동안 정신없이 싸우기만 해대다 보니 저절로 레벨이 1000을 찍었다.
 ‘뭐야, 지옥은 한계 레벨 같은 게 없는 건가? 생각해 보니, 뭔가 막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물론 싸우다 보면 금방금방 사라졌기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야 아무튼 이거 영상 한 번 더 보자. 진짜 한 10번은 돌려봐도 되겠다. 정말 굉장하지 않냐?”
 아니, 만약 자신이 지옥왕으로서 중간계로 강림한 상태라면······.
 “너무 쉬운데?”
 한묵은 인욱이 듣지 못하도록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 * *
 
 다시 ‘이세계’로 접속한 연은 홉고블린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확인하기 위해 바로 확인창을 켰다.
 
 [숲의 정령의 배틀엑스(희귀)
 공격력 25~50
 내구도 100/100
 제한 근력 15이상
 옵션: 근력 +2.
 숲속에서 자신의 반경 20m 안에 있는 생명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설명 숲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도끼. 숲에 있을 때에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호오, 초보자용 보스치고는 괜찮은 옵션이네?’
 아마 홉고블린은 이 도끼의 옵션을 빌어서 자신을 감지한 것 같았다.
 
 [반응 속도의 장갑(마법)
 방어력 5
 내구도 50/50
 제한 없음
 옵션: 반응 속도를 30% 상승시킨다.
 설명: 어느 마법사가 자신의 느린 반응 속도를 한탄하며 만든 장갑.]
 
 ‘쓸 만한데? 이건 내가 껴야겠다.’
 그리고 금화 10골드. 이세계에서는 동화, 은화, 금화를 화폐 단위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0브론즈가 1실버, 10실버가 1골드였다.
 ‘그래도 보스급이라 그런가? 짭짤한데?’
 연은 감정을 마친 후, 자신이 입고 있는 무기와 옷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주는 기본 옷, 그리고 녹슨 단검 하나.
 ‘아······ 장비 좀 맞춰야겠다.’
 장비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낀 연은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그동안 고블린을 사냥하여 번 돈까지 합하면 20골드 정도 되니까 간단한 무기와 옷 정도는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모자라면 도끼를 처분해도 되고 말이다.
 
 * * *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옷가게부터 향하는 연.
 딸랑.
 연이 들어서자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점원이 마중 나왔다.
 “어서 오세······ 어디서 이런 거지가. 여기는 옷가게라 너 줄 밥 없으니까 썩 꺼져!”
 “어, 나 돈 있는······.”
 타악!
 연이 밖으로 떠밀리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문.
 “이런.”
 확실히 지금 연의 꼬락서니는 당장 거지로서 일을 시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NPC 같았는데······ NPC도 손님을 내치나 보군. 뭔 쓸데없이 이런 것도 리얼하냐. 뭐, 아직 옷가게는 많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연.
 “나가!”
 탁!
 “꺼져!”
 타악!
 “뭔데 이 거지는?”
 타아악!
 “난 거지가 아니란 말이다아!!! NPC 주제에 사람 차별하지 마!!!”
 NPC 비하 발언을 하며 연은 절규했다.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으아아아악!”
 거기에다 능력치도 깎였다.
 누가 자신을 공격한 것도 아닌데 까닭 없이 뒷목이 당겨오는 것을 연은 느낄 수 있었다.
 살짝 빈혈기도 돌아 자리에 주저앉는 찰나.
 땡그랑!
 그때 연의 앞으로 떨어지는 은화 한 닢.
 그 순간, 연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동전을 집으며 위를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10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연을 동정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힘내요, 거지 아저씨.”
 “······.”
 너무나도 해맑은 목소리로 치명타를 먹이는 꼬마.
 땡그랑 땡그랑.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연의 주위로 수많은 동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쯧쯧 젊은 사람이 딱하기도 하지.”
 “이거라도 받게나. 일자리 필요하면 철물점으로 오게나.”
 무척이나 따뜻한 초보자 도시의 인심.
 “으아아아아! 난 거지가 아니라고오!!!”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지옥왕이자 투신이였던 연.
 그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7장 강매, 그리고 대면
 
 
 ‘이세계’에는 신비하고 특별한 일들이 많다.
 그중 하나는 ‘이동하는 잡화점’이라고 불리는 상점도 존재했다. ‘이동하는 잡화점’은 다른 말로는 ‘인연 상점’이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한 군데에 정착하지 않고 건물 자체가 서대륙과 동대륙 전체 도시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인연이 닿은 사람에게만 물건을 파는 상점이었다. 당연히 상점 안의 물건들은 그 자체가 최상품.
 하지만 무한정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과 인연이 있는 물품만을 보관료라 불리는 적은 금액을 지불하고 가져갈 수 있었다.
 지금 그러한 내력을 가진 ‘이동하는 잡화점’이 연의 눈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세계’가 오픈한 뒤로 지금까지 본 사람이 1,0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상점. 물론 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잡화점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저건······. 잡화점인가? 아까 지나갈 땐 못 봤던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연의 차림새는 꽤나 바뀌어 있었다. 초반의 우여곡절을 거치고 결국 옷가게에 들러 물품을 사게 되었는데 자기 딴에는 암살자는 검은색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상의 하의 신발 등등을 온통 검은색으로 통일하여 구입해 버린 연이었다.
 물론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방어력도 좋지 않고 옵션도 없는 기본 아이템이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지금까지 사냥해서 획득한 잡템들을 팔아서 챙긴 돈을 합치자, 연의 수중에는 25골드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무기를 하나 장만하러 가던 도중, 딱 눈앞에 잡화점이 보인 것이다.
 ‘잡화점이면 복면도 팔지 않을까?’
 이왕 암살자 계열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거 확실하게 암살자 콘셉트로 가고 싶었던 연은 줄곧 복면이야말로 암살자들의 로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적을 처단한다. 생각만으로도 멋있는 장면이지 않은가.
 끼이이익.
 그러한 생각을 하며 잡화점의 문을 여는 연의 머리에서는 무기를 사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고이 접혀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았는지 불편한 소음을 내며 열리는 문을 뒤로하고 잡화점 안으로 들어서자 곧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흘, 오랜만의 손님이로군. 그래, 무얼 찾으시는가?”
 그곳의 주인은 마치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마냥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웃음소리가 왠지 모르게 자신을 이 직업으로 전직시킨 사기꾼 영감과 비슷하다고 느껴진 연은 괜히 기분이 불쾌해졌다.
 “복면.”
 맨날 1.30초를 세어 가면서 말할 수 없었기에 그냥 안전하게 말을 짧게 끊는 연.
 “복면을 찾는 건가? 근데 아직 젊어 보이는데 말이 너무 짧은 거 아닌가?”
 “죄송.”
 노인이 은근히 연을 나무랐지만 이건 연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흘흘, 말을 길게 하면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가 보구만.”
 “······.”
 노인이야 그냥 해본 말이었지만 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인연이 닿은 물건밖에 가져갈 수가 없는 곳이라서······. 자네도 이곳을 발견한 거 보니 인연이 있긴 한 모양인데, 어디 보자······.”
 우뚝!
 연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며 연을 찬찬히 살펴보던 노인이 갑자기 멈춰 섰다.
 “자네, 설마 귀영심법을 익혔나?”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노인이 연에게 물었다. 그 말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연.
 “그렇다면 복면보다는······. 잠시만 기다리게.”
 노인은 연을 놔두고 잠시 뒤 편에 있는 창고로 들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아무런 표정도 없고 문양도 없이 밋밋해 보이는 검은색 가면을 하나 내왔다.
 그리고 그걸 연에게 내미는 노인.
 “······?”
 “보관료는 25골드네.”
 연은 노인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다가 곧 노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걸 사라는 건가?’
 연은 이딴 멋없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다 비싸기까지 한 가면은 필요 없었다.
 “복면!”
 고개를 흔들며 다시 복면을 요구하는 연.
 “허, 이걸 왜 거부하나. 이게 복면보다 훨씬 더 좋은 건데?”
 “복면을 달라!”
 어이없어하며 노인이 말하자 연은 더 길게 말하며 자신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명했다. 물론 말 길이는 잘 조절했다.
 “아니, 이게 자네와 인연이 닿은 물건이라니까? 전설적인 인물이 쓰던 걸세. 일단 사용해 보게나.”
 전설적인 인물이 쓰던 것. 그 말은 이 가면이 전설급 아이템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이미 살수는 복면이란 로망에 꽂힌 연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복. 며. 언!”
 “끄응. 할 수 없구만.”
 복면이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기세로 소리치는 연을 보며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보이지도 않는 속도의 빠르기로 연의 손에 가면을 쥐어주었다. 거기에다 곧바로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연에게서 25골드를 빼 왔다. 그리고 나선 연을 가게 밖으로 밀어내더니 문을 잠갔다.
 “잘 가게나!”
 물론 인사는 잊지 않았다.
 “······.”
 눈 깜짝할 새에 가면을 강매당하고 문밖으로 쫓겨난 연은 몇 초 동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신의 손에 들린 밋밋한 가면과 굳게 닫힌 잡화점의 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곧이어 상황을 파악했다. 이것은······.
 “야 이런!! 미친 날강도 영감탱이가!!! 내 돈 내놔!! 복면이라도 내놔아!!!!”
 잡화점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지만, 이미 귀신 씻나락 까먹듯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잡화점.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으아아아악!”
 남은 것은 오직 쓸데없는 가면 하나와 능력치가 하락했다는 메세지뿐이었다.
 한편, 어느새 차를 준비해 온 ‘이동하는 잡화점’의 주인은 그것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신을 죽인 자’의 맥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흘흘, 이것도 운명인 게지······.”
 그 말을 끝으로 잡화점 안은 차 마시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 *
 
 망연자실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연.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은화 몇 푼밖에 되지 않았다.
 ‘씨발, 이 직업을 선택한 후로 잘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어떻게 된 게 ‘이세계’에서 만나는 노인네들은 다 사기꾼에 날강도란 말인가.
 ‘여기가 무슨 무협지 안이야? 뭐 ‘노인과 어린아이를 조심하라’ 이런 거야?’
 그러나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연에게는 바로 홉고블린에게서 얻은 유일 등급의 아이템이 있었으니까. 어차피 암살자인 자신이 끼기에는 좀 그렇고 팔아야 하는 물건이었기에 바로 처분하기로 했다. 그때.
 “저기,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그때까지 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성인 것 같았는데 하얀 로브로 온몸을 꽁꽁 둘러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불쌍해 보였으면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할까, 라고 푸념을 속으로 하면서 연은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음? 초보자 도시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연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얼굴 모를 여자가 꽤나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로브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장신구는 절대 이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세계’ 까막눈인 연도 알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쑥!
 대뜸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무식하게 생긴 배틀엑스를 꺼내 드는 연.
 “헉!”
 여인은 연이 갑자기 도끼를 꺼내 들자 경계하며 뒤로 살짝 물러섰지만, 다음에 연이 하는 말을 듣고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사달라.”
 “푸흡!”
 연의 말투에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연도 여인이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유일 등급 아이템.”
 도끼를 가리키며 말하는 연.
 “말투가 왜 그래요? 원래 그래요?”
 여인은 도끼보다 연의 말투에 관심을 보였다.
 “이거 사주면.”
 ‘이거 사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매한 범위였기에 끊어서 말하고 다시 여인에게 도끼를 들이미는 연.
 ‘아 진짜 답답하네.’
 “이거 사주면 대답해 준다고요? 그럼 한 번 감정해 볼 테니 잠깐만 저한테 주시겠어요?”
 연은 군말 없이 도끼를 내밀었다.
 도끼를 쥔 채 잠시 침묵하고 있던 여인은 다시 연에게 도끼를 건네며 말했다.
 “홉고블린 잡으셨나 봐요? 저도 예전에 잡을 때 고생 좀 했었는데······. 도끼 자체는 꽤 쓸 만한 옵션인데······. 숲에서만 쓸 수 있는 게 안타깝네요. 거기다가 저는 정령사라서 이런 무기가 필요 없어요.”
 ‘그걸 왜 지금 말하냐.’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고 여긴 연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그래도 돕는다고 했으니 살게요. 선물하면 좋아할 거 같은 지인이 있거든요. 이 정도면 30골드 정도면 될 거 같은데 괜찮나요?”
 30골드!
 유일 등급이지만 그래봤자 초보자 도시에서 나오는 보스몹이고 이미 ‘이세계’가 런칭한 지 4년이 지나는 시점이다. 그래서 거의 팔리지도 않는 도끼였지만 연이 하도 불쌍해 보였기에 시세보다 높게 쳐서 사겠다고 말한 여인이었다.
 사실 그 정도의 돈은 여인에게는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금액이기도 했고.
 여인의 말에 연은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돈만 있으면 무기 하나 정도는 장만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중에 가진 돈이 없어서 은행에서 찾아야 하는데 같이 은행까지 가실래요?”
 여인의 물음에 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은행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여인, 에일린은 원래 이곳이 활동지역이 아니었지만 이번에 새로 시작한다는 자신의 지인을 만나기 위해서 초보자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래부터 성격이 오지랖도 넓었고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기에 연의 특이한 말투에 흥미를 느끼고 시간도 보낼 겸, 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연.”
 “오호, 희귀한 이름이네요. 보통 한 글자 이름은 ‘이세계’ 초창기 사람들이 다 가져갔을 텐데. 운이 좋으시네요. 전 에일린이라고 해요.”
 설마 그 초창기의 사람이 지금까지 초보자 도시에서 활동하리란 것을 생각지도 못하는 에일린.
 “······.”
 “어라? 안 놀라네요? 보통 사람들은 제 이름 들으면 놀라던데.”
 연의 무덤덤한 모습이 의외라는 듯이 에일린이 말했다.
 “······?”
 하지만 연은 진짜 왜 놀라야 하는지 몰랐기에 눈으로 물음표를 만들며 에일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르면 됐어요. 옷차림 보니까 암살자 계열 같은데 홉고블린 사냥에 받아주는 파티가 있었나 봐요?”
 연의 반응에 에일린이 피식 웃더니 다른 걸 물었다. ‘이세계’에서 암살자 계열은 파티사냥을 하지 못하는 걸로 유명한 직업이다. 그런데 파티사냥을 해야만 잡을 수 있는 홉고블린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연이 신기했던 것이다.
 “혼자 잡았다.”
 “풋, 허세는 자제해 주시죠.”
 자신조차 초보자 시절에는 파티사냥으로 잡았던 홉고블린이다. 자신의 옆에 있는 인물이 랭킹 1위 천강이나 랭킹 2위 유검이 캐릭터를 지우고 다시 만들어 초보자 시절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한 말이었다.
 홉고블린은 초보자들을 상대로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보스였으니까.
 연도 굳이 그걸 증명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그걸 인정하든 안 하든 자신이 잡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주로 에일린이 물어보고 연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은행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 중앙 광장을 지나갈 때였다.
 “여기 이 가게는 지금부터 ‘유검’님께서 모조리 빌리기로 했으니 다 나와주면 고맙겠다!”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8장 첫 인연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중앙 광장과 인접해 있는 한 식당이었다. 식당의 주인도 플레이어로서 초보자 도시에서는 꽤나 맛집으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식당이기도 했다.
 “유검? 그 ‘다섯 별’ 중 하나인 유검?”
 “그래, 맞다!”
 다섯 별 중 한 명이자 랭킹 2위, 모든 검사의 우상. ‘다섯 별’들 중에서도 이천강과 함께 이천(二天)이라 불리는 명실상부 ‘이세계’의 최강자.
 “대체 누가 유검인데요?”
 “이분이다!”
 사람들의 물음에 자신들이 유검의 호위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운데 있던 인물을 슬쩍 보여 주었다. 확실히 생김새나 차림새가 유검과 비슷해 보이긴 했다.
 자기 딴에는 마치 절대자처럼 세상을 오시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어색한 티가 났다. 거기다가 조금만 생각해도 저 유검이 사칭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진짜 ‘다섯 별’이 겨우 맛집 하나 차지하겠다고 자기 이름을 팔고 다니진 않을 거라는 것이다.
 “아니,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왜 ‘다섯 별’이 초보자 도시까지 와서······ 컥!”
 식당에 있던 사람 중 한 플레이어가 계속 따지고 들자 자칭 유검의 호위대 중 한 명이 플레이어의 뒷목에 팔을 턱하고 걸쳤다.
 “이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뭐?”
 그러고는 속삭이듯 조용히 플레이어에게 말하는 남자.
 “중요한 건 우리는 지금 이 식당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는 거고 거기다가 그럴 힘도 있다는 거야. 도시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경비대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10분 정도 걸려. 그 10분 사이에 우리가 너를 저승으로 보낼 수 있을까, 없을까? 유검은 처음부터 그냥 명분일 뿐이야. 만약 소문나도 우리 대신 욕먹어줄 명분.”
 “······.”
 마치 꿀이라도 먹은 듯 입을 다무는 플레이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호위대의 남자가 다시 소리쳤다.
 “여기 이 친구도 더 이상 불만 없는 거 같은데 어서들 나와!”
 자칭 유검 친위대들도 진짜 고레벨 플레이어에 비하면 레벨이 그리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명 한 명이 초보자 도시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레벨이었다.
 겁에 질린 식당 안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한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경비대에 신고하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지만 잘못하다 찍혀서 초보자 시절부터 게임에서의 생이 꼬일까 봐 망설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유검을 사칭하다니······ 뭐 하는 사람들이죠?”
 에일린이 호위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 그냥 갔으면 좋겠는데.’
 연은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리기 싫었지만 물주가 에일린이었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놔, 넌 또 뭐냐?”
 한창 잘 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새로운 방해꾼이 나타나자 인상을 팍 쓰며 에일린을 향해 말하는 호위대.
 “유검을 사칭한 죗값은 치러야지.”
 “어디다 대고 사칭이란 거냐?”
 “휭휭아.”
 말을 무시하며 바람의 하급정령을 소환하는 에일린.
 “휭휭이? 그게 네 정령 이름이야? 푸핫, 이름 꼬라지 하고는.”
 “압축.”
 차가운 눈빛의 에일린의 말에 따라 구슬 크기로 바람의 정령이 압축되었다. 그 상태로 손바닥을 비웃는 사내의 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가져다 댄 다음 말하는 에일린.
 “폭(爆).”
 쾅!
 그 순간, 사내의 배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뒤로 30m 정도 튕겨 날아가더니 그대로 건물에 처박혔다. 움직이질 않는 것을 보니 그대로 기절한 것 같았다.
 “뭐, 뭐야? 어떻게 하급 정령 따위로 이렇게 할 수 있지?”
 경악하는 호위대와 다른 플레이어들. 정령사의 기본 중의 기본인 하급정령, 레벨 5 때부터 바로 소환할 수 있는 약하디약한 정령이 저 정도의 파괴력을 낸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덮쳐!”
 악역의 고정 레퍼토리인 말을 내뱉으며 호위대가 에일린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이미 에일린의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봤자 부질없는 짓. 퐁퐁이 소환.”
 바람의 정령이 소환되어 있는 손의 반대 손을 펼쳐 물의 하급 정령을 소환한 에일린.
 “회전.”
 에일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휘돌기 시작하는 바람과 물의 하급 정령. 그리고.
 “바람과 물, 그리고 향연.”
 속삭이는 듯한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양손에서 회전하고 있던 정령들이 튀어나가더니 합쳐져 이내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었다
 슈아아앙!
 “젠장할, 대체 뭐야! 겨우 하급 정령 따위로!”
 그들은 필사적으로 소용돌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다음 울려 퍼진 에일린의 말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찌릿아, 전기 세례.”
 에일린의 손에 나타난 작은 전기의 정령이 그녀의 말에 따라 팟! 하고 사라지더니 있는 힘 없는 힘을 써가며 소용돌이를 막고 있는 호위대의 뒤에 나타나 전기충격을 가했다.
 지지지직!
 쿠콰아앙!
 “으아아아아악!”
 전기충격과 동시에 그들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물의 소용돌이.
 그렇게 에일린이 자칭 유검호위대를 요리하고 있을 때, 우연히 호위대 중에 에일린의 공격범위에 걸려들지 않은 전사 한 명이 연에게 다가왔다.
 “야, 너 저 여자 일행이지?”
 “아닌데?”
 전사의 물음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연.
 “······거, 거짓말! 내가 아까 둘이 같이 오는 거 봤어!”
 ‘아니 그럼 왜 물어봤냐.’
 연이 한심하게 쳐다보자 발끈했는지 전사가 콧김을 푹 쉬더니 곧바로 연에게 달려들었다.
 “너라도 죽여야겠다!”
 파아앗!
 
 * * *
 
 도시 안에서 사람을 죽이면 곤란했기에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며 유검호위대를 조지고 있던 에일린은 옆쪽에서 고함과 함께 전사 한 명이 연에게 달려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일행이 더 있었다니, 이미 늦었어!’
 자신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전사가 자신의 기술인 차지를 사용하여 연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림잡아 보기만 해도 연과 전사의 레벨 차이는 3배 이상. 정통으로 맞으면 한 방에 사망할 수도 있는 차이다.
 전사가 다가오는 걸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연. 에일린의 눈에는 그 모습이 전사의 속도가 너무 빨라 반응하지 못했거나 PK를 처음 겪어본 나머지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제발, 한 방에만 죽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며 연 쪽에 정령을 보내려는 찰나, 연이 한 발자국 움직였다.
 다리를 길게 뻗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빠르게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걷듯이 움직인 단 일보(一步).
 그러나 그 일보로 인하여 돌격하던 전사는 목표의 위치를 수정하려다 중심을 잃었으며.
 “어엇!”
 연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쾅!
 전사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머리부터 넘어가려 하자 그 힘을 역이용하여 전사의 머리에 언제 주웠는지 모를 건물 파편을 가져다 대는 연.
 도시 안이라고 투구조차 쓰지 않았기에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돌에 맨머리를 가져다 박은 꼴이 되어 버린 전사였다.
 “······!”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에일린은 속으로 경악했다.
 상대방보다 힘이나 속도가 뛰어난 것도 그렇다고 스킬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발자국. 상대방의 속도와 기술의 범위, 무게중심의 위치까지 완벽하게 인지하고 움직인 한 발자국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초보자 맞아? 부캐 아냐? 아니, ‘이세계’는 부캐가 없는데······ 아니, 있다 해도 저 정도의 감각은 타고나야지만 가능해. 대체 뭐야 이 사람······.’
 생각에 잠긴 에일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연. 끝났으면 빨리 가자는 의미였다.
 “끄으응.”
 그때 모조리 널브러져 있는 유검 친위대 중 한 명이 깨어났다. 바로 자칭 유검이라 칭한 플레이어였다.
 “대체 어떻게 사칭이란 걸 안 거지. 절대자 특유의 표정까지 흉내 냈는데.”
 에일린을 바라보며 묻는 가짜 유검. 그때 자신의 역할 마친 휭휭이(바람의 하급정령)가 장난을 치며 에일린의 로브를 건들고 지나갔다.
 벗겨지는 후드, 그와 동시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빛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그와 대비되는 도톰한 붉은 입술. 마치 조각과도 같은 얼굴이란 것이 이런 얼굴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만한 미모였다.
 “어, 어?”
 순간 중앙 광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건 에일린의 미모에 놀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검은 절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으니까.”
 “‘다섯 별’ 정령의 지배자, 에일린!!!”
 그리고 다음 순간, 광장은 폭발적인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 * *
 
 ‘다섯 별’이자 랭킹 4위, 정령의 지배자, 정령왕의 선택을 받은 자 등등 모두가 지금 연 자신의 옆에서 다시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에일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후드 벗고 다니면 좋겠는데, 안 되겠지?’
 겨우겨우 중앙 광장을 빠져 나온 후, 다시 정체를 들킬세라 더더욱 로브를 꾹 두르고 있는 에일린을 보며 연은 생각했다. 연도 남자인지라 그 정도의 미인을 계속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 발끈해서 또 사고치고 말았네요. 나 여기 있는 거 알면 우리 길드에서 찾으러 올 텐데······ 하필 거기서 유검을 사칭하는 사람을 만나서.”
 “······.”
 “여전히 놀란 눈치가 아니네요?”
 의외라는 듯 말하는 에일린.
 “무얼 말인가?”
 “보통 ‘다섯 별’을 만나면 놀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제 나라 영국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어딜 가도 인기 만발인데.”
 “사인 받아야 하나?”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는 데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라서 의외라는 거죠.”
 에일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연도 에일린이 ‘다섯 별’이라는 것에 충분히 놀라고 있었지만 말 길이의 제한 때문에 무슨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다섯 별’이란 존재를 방금 전 접속하기 전에 처음 알았던 연이 에일린의 팬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건 그렇고 우리 친구 추가할래요?”
 “음? 저?”
 “네, 님이요.”
 에일린의 말에 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신의 레벨은 이제 25. 초보자 중에 상 초보자나 다름없다. 그런 자신에게 ‘다섯 별’ 중 하나가 친구를 맺자고 하는 것이다.
 ‘대체 왜? 친추한다고 무슨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현실에서 아는 사이도 아닌데······ 설마 내 시크릿 상태창이 보이는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풋, 그 표정 되게 웃기네요.”
 멍청하게 변한 연의 표정을 보며 에일린이 풋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그쪽이 재밌어서 친구 추가하는 거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
 자신이 얼마나 재밌길래 무려 랭킹 4위가 친구등록을 한단 말인가, 연은 언제 한번 자신도 모르는 남을 재밌게 하는 재능이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럼 등록하는 거죠?”
 “알겠다.”
 물론 연이야 손해 볼 것 없었기에 당연히 등록했다.
 ‘아까 그 움직임······ 절대 게임 시스템으로 커버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야. 우연이라기엔 타이밍이 너무 정확했어. 고레벨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아. 일단 친구등록 해놓고 나중에 다시 알아봐야겠어.’
 ‘다섯 별’ 중 하나가 연에게 관심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9장 천살행
 
 
 은행에 들른 에일린은 연에게 도끼값을 지불한 후,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지인을 만나러 떠났다.
 그 후 연은 그 돈으로 장검 하나와 단검 서너 개 그리고 단궁 하나를 구입한 후 곧바로 다음 사냥터로 이동했다.
 연이 향한 사냥터는 초보자 도시의 졸업 사냥터라 알려진 진녹의 숲. 오크들의 출몰이 가장 잦다고 하는 사냥터였다.
 ‘으음, 저래서는 어떻게 사냥할 수가 없겠는데.’
 연이 보고 있는 것은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고 있는 오크들. 고블린들과는 달리 숲 외곽 쪽부터 무리를 지어서 다니고 있었다.
 오크의 최소 레벨은 50. 아직 한 마리조차 상대하기 벅찰 것 같은 연에게 처음부터 무리와 상대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리였다.
 ‘이렇게 해볼까?’
 품에서 아까 구입한 단궁을 꺼내는 연. 곧바로 시위를 매긴 후,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오크들 중 하나를 향해 스킬을 발동시켰다.
 원살(遠殺).
 원살은 멀리 있는 적을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죽일 수 있게 도와주는 스킬로서 숙련도는 사냥하는 틈틈이 돌멩이 같은 것들을 던져가며 올려놓았기에 7퍼센트를 넘기고 있었다.
 피유웅 팍!
 “켁!”
 쏜살같이 날아가 정확히 오크의 엉덩이골 사이로 들어가 박히는 화살. 무성한 수풀로 인해서 시야가 확보된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에 연으로서는 노릴 수 있는 선택지가 오크의 항문밖에 없었다.
 “크륵, 꺼어어억! 꺼어!”
 자신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숨이 막힐 듯 비명을 지르는 오크에게서 처절한 고통이 전해졌다.
 동료 오크들도 그 처참한 광경에 범인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취익, 감히 어떤 놈이 우리 동료에게 화살로 똥침을 놓은 거냐?”
 ‘정확도가 좋군. 좋아, 두 번째 간다.’
 이내 오크들이 정신을 차리고 적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두 번째 시위를 당기고 있는 연. 그런 연의 눈에는 화살이 날아오는 쪽을 경계하는 오크들의 앞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원살.
 피유우우웅, 파악!
 “!!!!!”
 !!!!!!!!!!!
 “······.”
 순간, 연과 오크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끄어어엉어억!”
 곧이어 화살을 맞은 오크가 엄청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비명의 밑바닥에 깔려 느껴지는 왠지 모를 슬픔.
 항문에 화살이 박힌 오크마저도 그 오크를 바라보며 불쌍하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연의 시야로는 오크의 엉덩이 부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크들이 화살을 경계하며 뒤를 돌아보는 나머지 부득이하게 앞부분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아, 좀 미안한데.’
 같은 남성으로서 화살을 맞은 오크에게 동정을 느끼는 연.
 “취익, 이런 잔인한 놈!!”
 오크들은 동료 두 명의 처참한 몰골에 분노를 토하며 범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그들의 한쪽 손은 조용히 자신들의 그곳(?)을 가리고 있었다.
 부상당한 오크들을 지키느라 남아 있는 경계병 오크 한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흩어져서 연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연이 노리는 상황이었다.
 은신.
 연의 모습이 순식간에 주위 배경으로 녹아들어 갔다. 아직도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숙련도가 조금 올라갔기에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연은 부상당한 오크가 있는 쪽이 아닌 흩어져서 자신을 찾고 있는 오크들을 노리기로 했다.
 아무리 부상병이라지만 오크는 오크. 거기다가 싸우고 있을 때 다른 놈이 비명을 지르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들키는 것이었다.
 연은 나무 위로 올라가 그중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오크 쪽으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연이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건너뛸 때마다 약간의 소음이 생겨났지만 일부러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 등 숲속에서 나는 소음이 생길 때만 이동하였기에 오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우뚝!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오크가 갑자기 멈춰 섰다. 바로 그들이 정해놓은 행동범위의 경계인 듯했다. 다른 동료들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겠다는 그들만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크륵, 크륵.”
 가는 동안 계속 뒤져보아도 수상한 놈이 보이지 않자 오크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취익, 이쪽으로 간 건, 취익! 아닌 거 같군.”
 오크 특유의 진부한 콧소리를 내며 다시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뒤로 돈 순간.
 스윽 푹!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 그리고 무엇인가 자신의 목을 꿰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각이 오크가 느낀 마지막 감촉이었다.
 오크에게 계속 따라붙으며 숨을 죽이고 있던 연. 마침내 오크가 행동범위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계속 체크하고 있던 오크의 숨소리에서 긴장이 풀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의 숨소리로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지옥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
 취익, 취이익.
 마침내 오크의 숨소리에서 짙어지는 방심의 기색이 뒤를 도는 동시에 최고조에 달했을 때.
 완벽한 타이밍의 그림자 이동술.
 바로 앞에 오크의 커다란 뒤통수가 보였다. 아무리 무기를 바꿨다곤 하지만 아직 한 번에 목을 베어 버리기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쾌살.
 ‘찌른다.’
 푸욱!
 깔끔하게 들어가는 연의 검에 목이 꿰뚫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방에 즉사하는 오크. 겨우 제대로 된 무기를 가졌단 이유만으로 연에게 일어난 변화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차이가 상당했기에 단번에 오르는 레벨.
 ‘역시, 고블린 하고는 경험치가 비교도 안 되네.’
 연은 오크가 주는 경험치를 흡족하게 받아먹으며 다음 타깃을 정하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슈슉!
 암영보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 올라간 연의 신형은 예전보다 확실히 빠르고 은밀했다. 다른 오크가 무리에 합류하면 처리하기 힘들었기에 빠르게 움직이는 연.
 그런 연의 눈에 일행에게로 되돌아가고 있는 오크 한 마리가 보였다. 딱 봐도 방금 자신이 처리한 오크보다 강해 보였다. 그러나.
 ‘그래봤자 오크지.’
 연에게는 똑같은 사냥감일 뿐.
 은신.
 스스스스.
 암영보에 은신을 더하자 연의 모습이 한층 더 은밀해지며 오크에게로 접근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오크의 신형.
 “크륵?”
 그러나 이 오크는 아까의 오크와는 확실히 달랐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서만 들리지 않는 풀벌레 소리로 인해 이상한 느낌을 받은 오크.
 ‘아까 그 무리의 대장 격인 거 같은데.’
 연은 더 이상 움직이면 위치를 들킬 것 같았기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쥐새끼, 나와라.”
 그리고 한동안 숨어 있는 연과 경계하는 오크 사이에 묘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움직이면 분명히 들킨다.’
 정면 싸움은 연에게 한없이 불리했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러는 사이, 다른 오크들은 동료들과 합류하고 말 테니까.
 그렇다고 위치를 드러내 치고받고 싸우자니 자신의 레벨과 살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저 대장 오크의 무식한 글레이브에 한 대라도 맞는 즉시 빈사 상태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방법을 하나 생각해낸 연.
 ‘이렇게 하면······.’
 영살.
 슈슈슛!
 오크의 뒤에 있던 나무에 비친 그림자에서 검은색의 단검 2개가 튀어나오더니 대장 오크의 급소를 노렸다.
 “취익! 그쪽이냐!”
 마침내 위치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는지 힘차게 콧김을 내뿜는 동시에 뒤로 돌며 단검들을 막아내는 대장 오크. 그리고 그 순간, 연이 오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암영보 최대 속도.
 파아앙!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지는 연의 신형.
 그러나 대장 오크도 만만하지 않았다. 자신을 공격한 것이 단순한 단검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뒤로 돌아 연을 견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취익, 이런 잔재주를!”
 이미 연은 오크에게 상당히 근접해 있었지만 접근전은 오히려 오크의 특기. 대장 오크는 속으로 이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글레이브를 휘저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견살.
 “이건······!”
 완벽한 타이밍에 순간적으로 마비되는 대장 오크의 몸.
 류살.
 그 틈에 연의 검이 오크의 목을 향해 부드럽게 나아갔다.
 “크르르!”
 뒤늦게 마비가 풀려 황급히 연의 검을 막아가는 대장 오크, 그러나.
 스스스.
 “!!!!!!”
 스가악!
 연의 검이 그대로 오크의 글레이브를 타고 넘어가 오크의 두꺼운 목 반절을 베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푸화악!
 “취잇!”
 목에서 쏟아지는 금빛 가루를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앞에 있는 연을 견제하려는 대장 오크. 하지만 이미 연의 모습은 그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 이동술.
 방금 전 대장 오크는 뒤쪽에서 공격이 들어 올 때 분명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확인했다. 분명 이번에도 자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뒤를 확인할 터, 그렇기에 자신은.
 ‘왼쪽으로 이동한다.’
 연의 신형이 대장 오크의 왼쪽 나무의 그림자에서 돋아났다. 정확히 오크의 옆 시야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
 “취, 취익?”
 연의 예상대로 대장 오크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뒤를 확인하려 했고, 연은 드러난 오크의 반대쪽 목덜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쾌살.
 사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나머지 반절의 목이 베어지는 대장 오크.
 이제 남은 오크는.
 “네 마리······.”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연은 금빛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오크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헉, 헉! 취익! 헉!”
 자랑스러운 누카쿠 부족의 오크 케리크는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숲속을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귀신······ 취익, 귀신이 틀림없어.”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비롯한 10마리의 오크들은 이 일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 * *
 
 “취익, 경계 똑바로 해라. 요즈음 이 일대에서 취익, 어떤 녀석이 우리 부족을 죽이고 다닌다고 들었다.”
 “안다, 그래서 경계조도 10명으로 취익, 늘린 거 아닌가.”
 “취익, 걱정하지 마라, 그딴 놈 따위 나타나면 취익, 내가 이 도끼로 머리를 쪼개주겠다.”
 “그럼 난 취익, 가슴을 부순다.”
 “취익, 그럼 난 팔······.”
 “난 다리······.”
 나타나지도 않은 적의 신체 부위를 자기들 멋대로 나누어 가지며 얼마나 걸었을까, 이 오크 무리의 대장인 케리크는 문뜩 자신들 열 명 중 한 명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취익! 잠깐! 왜 한 명이 없나?”
 “케리크, 취익, 또 너 자신을 빼고 센 거 아닌가?”
 “취익, 아니다! 분명 한 명이 빈다.”
 그때.
 타닥 스팟!
 “컥!”
 “뭐냐!”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케리크는 소리가 난 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피거품을 문 자신의 동료와 그의 목에 박혀 있는 단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짐작하여 쳐다보았지만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나무들과 흔들리는 수풀뿐이었다.
 “놈이다, 취익!”
 “원을 만들어 경계해라! 취이익!”
 갑작스러운 동료들의 죽음에 오크들은 당황하면서도 평소에 훈련을 받았던 대로 원을 만들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슈악! 서걱!
 “커어억!”
 원 안쪽의 그림자에서 무엇인가 솟아나더니 오크 둘을 한꺼번에 베어 버리고는 그대로 다시 숲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대체!”
 케리크를 비롯한 오크들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벌써 동료들이 4명이나 당했는데 흉수의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분명 누군가 다가오는 건 보지 못했는데······.
 “취익, 서, 설마 귀신인가?”
 “귀신? 취익, 나 귀신 엄청 무서워한다!”
 “귀신이다, 귀신은 내 공격이 안 통한다, 취익!”
 철저하게 오크들의 사각지대로 움직이면서 참살하는 적의 모습은 오크들의 공포를 유발했고.
 “취익, 진정해라, 귀신 따위가 여기 나타날 리······.”
 푸욱!
 “크르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동료들을 진정시키려 한 오크가 쓰러지는 것을 시발점으로.
 “취익! 살려줘!”
 “도망가야 해! 취이익!”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동료들은 물론 무기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오크들.
 “취익, 다들 진정하고 모여!!”
 케리크가 악을 지르며 다른 오크들을 모으려 해봤지만 이미 오크들의 귀에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적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한 동료들이 하나둘씩 당했고 마지막으로 케리크 혼자만이 남은 것이다.
 케리크는 더 이상의 도망은 소용없음을 느끼고는 멈춰 선 다음,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취익, 나와라! 비겁하게 숨지 말고, 취익, 나와서 싸워라!”
 케리크의 외침에 옆쪽의 나무에서 누군가가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취익, 인간?”
 케리크가 본 것은 시커먼 옷차림의 20대로 보이는 평범한 외모를 가진 남자.
 “취익, 저런 놈에게 우리 부족의, 취익, 자랑스러운 전사들이 모조리 당했단 말인가! 취이익! 인정할 수 없다!!!”
 흥분했는지 시뻘게진 두 눈을 하고 평소보다 숨을 크게 몰아쉬며 케리크는 그 남자에게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그런 케리크 앞에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
 푸우욱!
 남자를 향해 돌격하던 케리크는 자신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와 복부에 틀어박히는 걸 느꼈다.
 “창?”
 복부에 틀어박힌 물체를 확인하는 순간, 케리크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다가오는 은빛 섬광이었다.
 
 * * *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역시 듣기 좋은 소리야.’
 연은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를 베고 난 다음에 들려오는 레벨업 메시지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처음 진록의 숲에 들어온 후로, 게임 시간으로 2주일도 넘게 이곳에서 사냥했다. 그동안 연의 레벨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상태창.”
 
 이름: 연
 성별: 남
 직업: 진(眞)살수
 칭호: 없음
 레벨: 50
 근력: 22
 민첩: 28
 지능: 7
 행운: 1
 육감(六感): 4
 포만감: 67
 보너스 능력치: 0
 
 초반에 홉고블린을 잡겠다고 근력을 엄청 찍은 후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민첩에도 투자를 많이 해놓았다. 거기다가 일정한 행동을 하면 아주 아주 가끔 능력치가 오르는 것까지 포함해서 보여 주는 상태창이었다.
 그런데 연의 상태창에는 육감이란 새로운 능력치가 생겨나 있었다. 오크를 사냥하며 거의 상대의 공격을 예지하다시피 피하면서 싸웠더니 어느 순간, 알림음과 함께 육감이란 능력치가 생겨난 것이다. 아마 연도 모르는 시스템상의 특정 조건을 만족시킨 것 같았다.
 덕분에 상대방의 공격을 한결 더 피하기 쉬워졌으니 연으로서는 나쁠 건 없었다.
 ‘이제 경험치도 잘 안 오르네.’
 일반적인 플레이어한테야 이 정도 경험치가 보통이겠지만 연은 항상 자신보다 훨씬 더 레벨이 높은 몬스터만 잡아 왔으니 상대적으로 짜다고 느낀 것이다.
 ‘슬슬 좀 더 숲 깊숙하게 들어가야겠어.’
 점점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지금껏 외곽 쪽에서만 사냥하다가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연이 막 은신을 펼친 다음,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까아아악!”
 숲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기회다!’
 연은 비명이 들린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게임 안에서 이 정도의 비명을 지를 정도면 위급상황이 분명했다.
 강력한 몬스터에게 파티가 전멸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상태로 겨우겨우 대치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몬스터 또한 부상을 당한 상태일 거고 대치 중인 상대에게 신경을 쏟고 있을 터, 그 틈을 타고 뒤에서 모조리 싹!
 ‘뭐, 나 아니면 죽을 텐데 설마 거기서 스틸 한다고 따지겠어? 저긴가 보군.’
 그리 넓지 않은 공터에서 사제로 보이는 여성 플레이어와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오크 전사라고 예상되는 몬스터 2마리가 보였다.
 ‘치열하게 싸웠나 보네.’
 주위에 널린 채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오크 전사와 오크 주술사의 시체들, 그리고 여사제의 동료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의 시체가 보였다.
 오크 전사와 오크 주술사의 레벨은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 아마 여사제의 파티는 초보자 도시를 졸업할 수 있는 막바지 단계였으리라.
 “취익, 인간······ 감히 내 동료들을······.”
 둘밖에 남지 않은 오크 전사가 동료를 잃은 분노로 숨을 씩씩거리며 여사제에게 말했다.
 연은 지금 저 오크 전사에게 다가가면 자신의 은신으로는 금방 들킬 것 같았기에 조금 더 숨을 죽이며 천천히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화살!”
 강아지상의 귀여운 인상을 한 사제가 외치자 그녀의 주위로 금빛 화살 다섯 개가 생성되더니 오크 전사들에게 날아갔다.
 팅팅팅.
 “취익! 간지럽군.”
 “그걸 공격이라고 하는 거냐, 취익!”
 오크 전사의 강철 같은 근육에 닿은 화살들이 맥없이 주변으로 튕겨 나갔다.
 사실 성직자는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 언데드 계열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격력이 없다시피 한 직업이었다. 그렇기에 혼자서 자신의 레벨과 비슷한 몬스터를 잡는 것조차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이이익!”
 무척이나 분한지 여사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그만 죽어라, 인간!!”
 자신의 거대한 할버드를 들고 여사제에게 달려드는 오크 전사 중 하나.
 여사제는 삶을 포기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크 전사가 막 여사제를 쪼개려고 하는 순간.
 푸욱!
 단검 하나가 할버드를 휘젓고 있는 오크 전사의 손목에 박혔다.
 “크륵? 이건 뭐냐?”
 오크 전사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손목에 박힌 단검을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푸우욱!
 그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동료 뒤에 선 채 목에 검을 박아 넣고 있는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취이이익!!!!!! 감히 네놈이 카리취를!!!!”
 방금 죽은 오크 전사와 각별한 사이였는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연을 향해 달려드는 오크 전사. 이미 여사제를 죽여야 한단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젠장, 검이 안 빠져!’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한 듯 가만히 서 있는 연이었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다급했다. 오크 전사의 목 근육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사후경직이 일어나기 전인데도 검이 뽑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오크 전사의 시체가 금빛 가루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간 지금 앞에서 무섭게 달려오는 다른 오크 전사의 할버드가 자신을 금빛 가루로 만들지도 몰랐다.
 ‘할 수 없지.’
 연은 손에서 검을 놓은 후, 단검 4자루를 꺼내어 양손에 끼웠다.
 암영보 최대 속도.
 파아앙!
 그 상태로 오크 전사를 향해 빠르게 짓쳐 드는 연.
 “취익! 무기조차 놓다니, 네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오는구나!”
 앞에서 소리치는 오크 전사를 무시하며 연은 자신의 달려가는 속도를 추진력 삼아 단검을 날렸다.
 원살.
 파팟!
 평소보다 족히 2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단검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기에 오크 전사는 날아오는 단검 중 2개는 할버드로 쳐내고 나머지 2개는 가볍게 피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걸렸다.’
 연이 노리던 것이었다.
 단검을 막을 때 보여 주는 아주 잠시의 틈!
 그림자 이동술.
 연의 신형이 자신의 그림자로 빨려 들어가더니, 오크 전사의 뒤쪽에 위치한 그림자에서 솟아 나왔다. 그리고 바로 오크 전사가 피한 2개의 단검을 유려하게 움직여 양손으로 낚아채는 연.
 “!!!!!”
 오크 전사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지만 이미 연의 단검은 움직이고 있었다.
 쾌살.
 푸악!
 우악스럽게 오크의 등 근육을 찢으며 심장에 박히는 단검 하나. 그러나 오크 전사의 등은 무척 두꺼웠기에 심장까지 제대로 닿지 않은 단검.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붕살.
 사아악!
 심장 근처의 충격에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오크전사.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의 나머지 단검이 목에 위치한 경동맥을 정확히 갈라버렸다.
 쿠우웅!
 황금빛 가루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마침내 오크 전사의 육중한 몸이 쓰러졌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어라?”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던 여사제 한나는 갑작스러운 레벨업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건 금빛 가루를 휘날리며 사라지고 있는 오크 전사들의 시체들과 그 사이에 서 있는 까만색의 남자였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아!”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
 ‘아니, 왜 레벨이 안 오르냐.’
 연은 오크 전사를 두 마리나 죽였지만 오르지 않는 자신의 레벨을 보며 기분이 살짝 침울해졌다. 아마 자신이 막타만 쳐서 그런지 대부분의 경험치가 저 사제한테 간 거 같았다.
 “어,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이······.”
 “아니다.”
 습관인지 말끝을 늘어뜨리며 말하는 사제에게 연은 짧게 대답했다. 사실 길게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오크 전사 두 마리를······.”
 한나는 연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분명 엄청난 고수일 거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오크 전사 두 마리를 처리하지 않았는가.
 “기습으로.”
 ‘너희가 오크들을 거의 빈사 상태로 만들어서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하기엔 글자 수가 너무 많았기에 간단하게 대답하는 연.
 “네? 아~ 암살자 계열이신가 봐요오.”
 “그렇다.”
 “그건 그렇고 무척 과묵하시네요.”
 “······.”
 이것은 강제적인 과묵함!
 플레이어라고는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은 지옥에서 20년 동안 지내 온 연이다.
 다른 플레이어와의 대화는 당연히 연에게는 반길 만한 일이었지만 이놈의 직업이 문제였다. 대화를 하면 무슨 소용인가 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단답형밖에 없는데.
 연은 속으로 자신을 이 직업으로 전직시킨 대머리 사기꾼 영감탱이를 10번 정도 욕하면서 한나에게 말했다.
 “그럼 이만.”
 “잠깐, 잠깐 만요!”
 더 이상 희망고문을 받기 싫었기에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떠나려는 연을 한나가 붙잡았다.
 “저기, 혹시 저랑 같이 사냥하지 않으실래요? 사실 지금 저 말고 다른 파티원들이 모조리 저승으로 간 상황이라서요. 다시 중간계로 넘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서 그러는데······ 제가 뒤에서 힐이랑 버프 마구마구 걸어드릴게요오.”
 “음······.”
 연은 한나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자신은 전사와 같이 당당하게 힐을 받으며 싸우는 직업이 아닌 숨어서 적의 뒤통수를 갈겨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사실 연에게 힐은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 저승행인데 죽고 나서 힐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암살자와 성직자, 역시 둘만으로 사냥하기엔 조합이 맞지 않는다.
 “거······.”
 그런 이유로 ‘거절한다’라고 말하려는 연의 머리에 문뜩 아이디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좋다.”
 
 * * *
 
 누카쿠 부족의 오크 전사 투라크는 오늘도 어김없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요즈음 진록의 숲에서 오크만 전문적으로 학살하는 인간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평소보다 꽤 주의를 기울이며 순찰에 임하고 있는 그였다.
 “취익, 한심한 것들. 취익, 기합이 없어서 당하는 거다. 기합이!”
 그렇게 이미 당해버린 다른 오크들을 비난하며 걷는 도중, 투라크는 자신의 앞에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
 검은 머리에 새하얀 사제 복장을 한 귀여운 인상의 인간 여자였는데 혼자서 숲속을 헤매고 다니는 꼴이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취익, 혼자가 맞는 건가?”
 투라크는 여자에게 다가가기 전, 주변에 여자의 일행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기습을 당하면 혼자인 자신은 낭패인 것이다.
 “없나 보군!”
 다시 한번 여자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투라크는 그대로 뛰쳐나가 여자의 앞에 섰다.
 “크오오오!”
 “꺄아아아악!”
 제대로 겁에 질렸는지 자신을 보며 비명을 꽥꽥 질러대는 여자를 보며 만족감을 느낀 투라크는 흐뭇하게 웃으며 여자를 향해 말했다.
 “취익, 인간 여긴 왜······.”
 “꺄아아악!”
 “인간, 취익, 일단······.”
 “꺄아와악!”
 “아니 인간, 말 좀······.”
 “끼야아아악!”
 “취익, 그냥 죽어라! 인간!”
 온몸으로 대화를 거부하는 여자를 보며 투라크는 자신의 얼마 있지도 않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는 그대로 거대한 배틀 해머를 휘둘렀다. 그때.
 ‘으응? 뒤?’
 투라크는 뒤에서 자신이 망치를 내려치는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무엇인가 날아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투라크가 뒤를 돌아보자.
 스가아악!
 은빛 섬광이 몰아쳤다.
 ‘확실히 이게 편하긴 한데 말이야.’
 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나라고 자신을 밝힌 레벨 89의 견습 사제를 바라보았다.
 연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한나가 미끼가 되어 주의를 끈다. 그 사이에 연이 기습을 가하는 것이다.
 경험치는 나누어져 들어왔지만 혼자 사냥하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기에 이득이었다.
 한나도 자신이 미끼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꺼림칙했지만 들어오는 경험치가 워낙 짭짤하다 보니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응? 연, 나에게 할 말 있어?”
 연과 자신의 나이가 동갑임을 알게 된 한나는 자연스럽게 연에게 말을 놓았다.
 “그 비명 좀······.”
 “힝, 이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거란 말이야.”
 “······.”
 사제란 직업의 특성상 전위에서 싸울 일은 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후방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보호를 받으며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코앞에서 오크들의 흉악한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니 비명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대일로.
 그 비명 덕에 오크 전사들의 어그로를 전사 계열 직업 못지않게 끌고 있었지만 그 소리를 듣고 주변의 다른 오크 전사나 마법사가 오면 곤란했다.
 “너도 바로 앞에서 그 오크 전사 얼굴을 봤어야 해. 그건 진짜 못생긴 정도가 아니었다고오. 콧김을 푹푹 쉬면서 거기에다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으니까······ 우웩,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려고 해.”
 ‘나는 그 모습을 매일 본다만······.’
 연은 한나의 배부른 투정을 한 귀로 흘리며 다음 사냥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육감이란 능력치는 적의 공격을 예측할 때 편리하게 쓰였지만 멀리 있는 적을 감지할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기감과는 뭔가 다른 데 편리하단 말이야.’
 “저쪽.”
 연은 육감에 무언가가 걸리는 걸 느끼고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이야? 알겠어.”
 한나가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자 연은 뒤따라가며 은신을 사용했다.
 ‘연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
 한나는 걸어가면서 연이 싸우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적이 자신에게 온 신경을 기울일 때까지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적의 방심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귀신같이 캐치하고 나타나 정확히 급소를 타격해 일격으로 숨통을 끊는다.
 아무리 자신이 싸움에 관해 문외한이라지만 연이 보여주는 모습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암살자 직군이 다 연과 같이 플레이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이세계’의 인기 직업 판도는 바뀌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기 때문일까, 한나는 자신의 뒤에서 연이 속삭이듯 하는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멈춰.”
 위험했다. 분명 처음에는 다른 오크 전사들과 별다를 것 없는 기척이었다. 거기에다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훌륭한 사냥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존재감. 일부러 자신을 숨기고 적을 유인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 어? 이건······.”
 “너희들이군. 우리 부족을 죽이고 다닌다는 놈들이.”
 콧바람조차 섞이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 다른 오크 전사보다 1.5배는 더 커 보이는 덩치. 터질듯한 근육과는 반대로 이성적인 두 눈.
 오크 로드.
 진록의 숲의 보스급 몬스터. 분명 초보자 도시의 사냥터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오크 로드는 초보자들이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혼자서는 물론이고 초보자들로만 구성되었다면 파티조차 상대가 안 된다. 레벨 100을 넘어간 레이드 파티조차 겨우 잡았다는 말이 들려올 정도였으니.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나 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한나. 이건 안 된다. 아무리 연이라고 해도 이건 무리다.
 “숨어 있는 인간, 나와라.”
 오크 로드가 연이 숨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안 되나?’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나무 아래로 내려오는 연. 이건 위기가 맞았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저 무지막지한 녀석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이라도 살아야겠지.’
 한나를 오크 로드에게 내어 주고 자신은 암영보와 은신을 이용해 도망간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도 사제인 한나보다 자신이 살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가라.”
 그렇게 하기 싫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기가 싫을 뿐.
 한나의 앞에 선 채로 연은 두 손을 늘어뜨리며 싸울 준비를 했다.
 ‘까짓거 잡지 뭐.’
 지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신은 힘이 있음에도 항상 피하며 소심하게 살아왔다. 지금 이 몬스터 앞에서 등을 돌린다면 다시 전과 같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연, 하지만!”
 “가라.”
 한나도 이 상황에서 누가 살 확률이 높을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이세계’는 극도의 현실감 때문에 실제로 죽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연은 지금 자신에게 도망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기세.
 “그럼 조금만 버텨줘. 내가 사람들을 모아 올게.”
 그 말을 끝으로 한나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크 로드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모일까가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연이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 자신이 혼자서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오크 로드는 한나가 도망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 인간은 자신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저 녀석. 자신의 앞에서 겁 없이 살기를 뿌리며 서 있는 무심한 표정의 인간.
 오크 로드는 본능적으로 이놈이 경계해야 할 녀석이라는 걸 깨달았다.
 “긴말 할 필요 없겠지. 죽어라.”
 짤막한 말과 동시에 오크 로드는 연과의 거리를 그야말로 순식간에 좁히며 2m가 넘는 할버드를 휘둘렀다.
 연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할버드를 피한 다음, 다시 튕겨 들어가며 오크 로드의 가슴에 검을 내질렀다.
 쾌살
 일정한 형식 없이 빠르기를 대폭 상승시켜주는 기술.
 오크 로드는 의외의 빠르기에 놀랐는지 할버드의 뒤쪽 창 부분으로 황급히 연의 공격을 막았다.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마자 곧바로 오크 로드의 면상에 발차기를 먹였다.
 퍽!
 ‘이런.’
 “크크, 이런 약해빠진 발차기로 뭘 하겠다는 거지.”
 방금의 발차기로 오크 로드의 몸에는 검에 의해 공격력이 상승하지 않으면 생채기조차 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연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텁!
 “젠장.”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크 로드가 연의 발을 손으로 잡았다.
 곧이어 이어지는 오크 로드의 무릎 차기.
 퍼어억!
 “커헉!”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가는 연.
 할버드조차 쓰지 않은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인해 연의 체력이 반절 이상 사라졌다.
 ‘이런, 갈비뼈가 나간 거 같은데.’
 이 미친 가상현실게임은 뼈가 부러지는 것조차 재현해 놓았는데 연은 옆구리에서 전해져 오는 시큰한 통증을 느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통증 감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에 최대치로 올려놓은 것이다.
 “마무리다.”
 어느새 다가와 다시 한번 할버드를 휘두르는 오크 로드.
 ‘젠장, 쉴 틈은 줘야지!’
 그림자 이동술.
 피하기는 이미 늦었기에 연은 그림자 이동술을 이용해 오크 로드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휘둘러지는 검.
 류살.
 “흥, 잔재주를!”
 오크 로드는 갑자기 연이 자신의 뒤에서 솟아나자 몸을 바로 뒤로 돌리며 할버드로 전체를 보호했다.
 그러나 할버드를 타고 마치 뱀처럼 넘어오는 검.
 스르륵.
 “!!!”
 핏!
 목을 재빨리 젖혀 깊게 베이는 건 피했지만 생채기가 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인간, 괜찮은 기술이다.”
 오크 로드는 한 손으로 목을 누르며 연에게 말했다.
 ‘제길, 실패다. 이걸로 적어도 중상은 입혔어야 했는데.’
 이미 한 번 선보였으니 오크 로드에게 이 기술은 다시 먹히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제대로 상대해 주지.”
 오크 로드가 말과 함께 할버드를 고쳐 잡았다.
 연은 자신의 상태를 체크했다.
 체력은 이미 반절 이하, 저 할버드에 스쳐도 사망이다. 거기에다가 갈비뼈도 부러져 평소보다 거동이 힘들었다.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연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 * *
 
 한나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오크 전사 두 마리와 오크 마법사 한 마리에게 쫓기는 중인 그녀.
 걸 수 있는 온갖 축복마법을 걸은 탓에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는 중이었지만 곧 있으면 저 못생기고 흉악한 놈들에게 잡힐 운명이었다.
 “이 돼지 같은 놈들아! 내가 그렇게 좋아? 그만 좀 쫓아오란 말이야!!”
 “취이익! 인간 여자, 누가 너처럼 못생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가! 우리 오크 족 미인의 조건은 콧구멍이 드러난 코에 작은 눈, 큰 키에다가 불룩 튀어나온 배! 넌 여기에 하나도, 취익, 포함되지 않는다. 너같이 추한 여자를, 취익! 좋아한다는 건, 오크에 대한 모욕이다!!!”
 “······.”
 화가 난 오크 전사의 영혼을 담은 듯한 외침에 할 말을 잃고 달리던 중, 한나의 앞쪽에서도 일단의 오크 무리가 튀어나왔다.
 “이, 이런.”
 한나는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오크들뿐.
 “그 여자를 붙잡아, 취익!”
 한나가 오크들에 의해 붙들리자 오크 마법사가 양쪽에 오크 전사들을 대동한 채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가히 한나가 지금까지 본 흉측한 웃음 중 베스트3 안에 들어갈 만한 웃음이었다.
 “취익, 시간을 오래 끌 필요는 없겠지, 죽여라!”
 오크 마법사의 말과 함께 한나의 눈에 거대한 몽둥이가 빠르게 확대되었다.
 “연······ 미안해.”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질끈 감는 한나. 그때.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크의 콧김 소리도, 오크 마법사의 웃음소리도, 오크 전사의 괴성도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숲 전체가 얼어붙은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정적.
 “뭐지?”
 ‘사망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지 않자 한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엄청난 광경.
 자신의 주위에 있던 모든 오크가 모조리 금빛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환상적이다 못해 몽환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한나.
 죽음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오로지 ‘이세계’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 ‘이세계’를 가르는 차이점이기도 했다.
 휘날리는 금빛 가루를 하염없이 쳐다보던 한나는 금빛 환상의 가운데 누군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 * *
 
 암영보.
 암영보를 사용한 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빠르기로 오크 로드를 향해 쇄도하는 연.
 “오라!”
 그런 연을 보며 오크 로드가 호쾌하게 외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달려오던 연이 사라졌다.
 “흥, 어리석구나! 한번 사용한 수법이 또 통하리라 생각하는가!”
 오크 로드는 적이 사용하는 기술인 그림자를 통해서 이동하는 기묘한 수법을 떠올리며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챙! 챙!
 무엇인가 오크 로드의 할버드에 걸려 동강이 났지만 그것은 연이 아니었다.
 ‘검은 창? 그렇다면, 위!’
 오크 로드는 휘둘러가던 할버드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궤도를 수정해 자신의 머리 위를 베었다. 마치 하나의 동작처럼 자연스럽게 휘둘러지는 할버드. 그러나.
 후웅!
 베인 것은 오직 아무것도 없는 허공뿐.
 ‘없어? 설마······.’
 순간, 섬뜩한 느낌이 오크 로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느낌이 오자마자 급소를 방어하며 최대한 몸을 젖히는 오크 로드.
 푸우욱!
 하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는지 오크 로드는 자신의 복부 깊숙이 박히는 차가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연은 그림자 이동술 같은 기술은 쓰지 않았다. 사실 쿨타임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었다. 단지 달려가며 오크 로드의 앞에서 그대로 ‘은신’을 사용했을 뿐.
 평소라면 눈앞에서 사용한 은신 따위 바로 간파했겠지만 방금 전 그림자 이동술로 인해 목에 상처를 허용한 오크 로드는 눈앞에서 존재감이 옅어지는 연을 보고는 다시 한번 그림자 이동술을 사용한 걸로 여긴 것이다.
 연으로서도 이번 건 일종의 도박. 도박은 성공했으나.
 ‘제기랄! 급소를 뚫지 못했다!’
 거리를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그림자 이동술로 접근할 땐 공간이동처럼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기에 이런 경우의 딜레이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번 오크 로드는 급소를 방어할 시간이 생겼고 연은 결국 급소가 아닌 복부에 칼침을 먹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뒤로 빠지려 하는 연. 하지만 오크 로드는 무식하게 배의 근육으로 연의 검을 잡아 놓아 빠지지 않게 고정시켰다.
 곧이어 들어오는 강력한 어퍼컷!
 퍼억!
 “크윽!”
 연은 머릿속에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만 죽어라, 인간!!”
 오크 로드의 할버드가 그런 연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왔다.
 “후읍!”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검을 놓아버리고는 재빨리 뒤로 텀블링하며 거리를 벌리는 연.
 “취익! 전사가 검을 놓다니!!”
 몸에 상처가 늘어나자 화가 났는지 원래는 내뿜지 않던 콧김까지 푹 내뿜으며 오크 로드가 소리쳤다.
 ‘검도 없고 마력도 바닥이고······ 거기다 체력까지 간당간당한 데······.’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인간! 취이익! 네 검을 돌려주지!”
 오크 로드가 자신의 배에서 연의 검을 뽑은 후에 그대로 연에게 날렸다.
 맞을 시 그대로 꼬치가 되어버릴 것이 뻔했기에 연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콰앙!
 방금까지 연이 기대고 있던 나무에 반절 넘게 박혀 버리는 검.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용력이다.
 검에서 시선을 떼고 오크 로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이미 그 괴물은 연을 향해 코뿔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하, 이제 끝인가?’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며 쉬어야겠다는 비명을 토해냈다. 스킬은 마력 부족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나무에 박힌 검은 뽑히지도 않는다.
 “크오오오!”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오크 로드.
 ‘죽을 때 죽더라도 말이지······.’
 연은 품에서 단검을 하나 꺼냈다.
 ‘그냥 죽을 순 없지.’
 그러고는 그대로 달려오는 오크로드의 발등을 향해 던졌다.
 푹!
 무척이나 흥분했는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몸으로 때우며 무지막지하게 달려오는 오크 로드.
 “크하하! 그딴 공격이 인제 와서 먹힐 것 같나? 끝이다!”
 오크 로드의 할버드가 마침내 연에게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들어온다.
 ‘이게 첫 죽음인가?’
 과연 자신은 죽으면 저승으로 갈까, 지옥으로 갈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연은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츠츠츳 츠츠츳.
 꿈에 나올듯한 흉악한 웃음을 지으며 할버드를 휘두르고 있는 오크 로드의 목에 아주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곧이어 오크 로드의 웃음소리가 멈췄고.
 툭 툭. 데구르르.
 할버드가 힘을 잃는 것과 동시에 오크 로드의 머리가 말 그대로 돼지 멱 따이듯 몸에서 분리되어 땅바닥으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쿵!
 오크 로드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연은 그 뒤에 서 있는 사람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한나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흘흘, 또 보는구나.”
 “사기꾼 영감탱이!!”
 연을 전직시킨 노인이었다.
 
 * * *
 
 따다다다닥!
 순간, 연의 눈앞에 별이 반짝이며 머리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으윽······.”
 ‘죽을 뻔했다, 진짜 죽을 뻔했다고!’
 체력이 간당간당한 상태에서 노인의 꿀밤 같지 않은 꿀밤으로 요단강 직전까지 다녀온 연.
 “흘흘, 사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니, 누가 당신 제자냐?’
 이미 전직을 시켰기에 편하게 연을 대하는 노인.
 연은 전직시키자마자 튄 노인이 가르친 것도 없으면서 사부라고 말하자 기가 막혔지만, 입 밖으로 내면 다시 맞을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다.
 “연, 아는 분이야?”
 연과 노인의 대화를 듣고 한나가 연에게 물었다.
 “아, 이 영감······.”
 “흘흘, 내가 이놈 사부라네.”
 연의 말을 가로막으며 재빨리 말하는 노인.
 “아, 안녕하세요오. 다시 인사드릴게요. 전 연의 친구 한나라고 해요.”
 NPC라지만 연의 사부라고 칭하는 노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에 한나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사실 ‘이세계’의 NPC는 인공지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명 한 명이 사람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이렇게 대해도 어색함이 없었다.
 “괜찮은 처자로구먼. 역시 구해주길 잘했어. 아, 근데 노부가 제자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만 비켜주겠는가?”
 “아, 네!”
 한나가 자리를 비키자, 노인이 연에게 말했다.
 “그새, 엄청 성장했구나. 전직한 지 별로 안 된 것 같은데 이 정도라니.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
 가볍게 자기 자랑을 하며 노인이 말을 이었다.
 “노부가 이렇게 자넬 찾아온 이유는 물건 하나랑 임무 하나를 건네기 위해서네. 사실 전직할 때 건넸어야 하네만······ 흠흠, 그때 마치 급한 일이 있어서 흠흠.”
 연이 자신을 째려보자 민망한지, 연달아 헛기침하는 노인.
 “일단 제한은 잠시 풀어주지. 이제 말해도 되네.”
 “가나다라마바사, 살어리살어리랏다,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오! 진짜네?”
 지금까지의 과묵한 이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동안 못한 말을 다 해야 한다는 듯 단어들을 토해내는 연.
 “아니, 잠깐 자네 그 ‘반짝반짝 눈이 부셔’란 말······ 설마 내 머리 보고 욕한 건가?”
 “······.”
 여전히 자신의 머리에 콤플렉스가 있는 노인이었다.
 “큼큼, 아무튼 이걸 받게나.”
 가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연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노인이 재빨리 검 하나를 던져 주었다.
 “이건 뭡니까?”
 “자네 검일세.”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시린 빛을 뿜어내는 것이 명검의 반열에 드는 검인 것 같았다. 연은 일단 챙기기로 하고 문뜩 떠오르는 게 있어 노인에게 강매당한 가면을 보여주었다.
 “혹시 이 가면이 뭔지 아십니까? 저랑 인연이 있는 거라 하는데, 그럼 직업 관련된 것이 분명해 보여서.”
 “엥? 이건······ 자네 이걸 어디서 얻었나?”
 연이 내민 가면을 살펴보던 노인이 살짝 놀라며 연에게 되물었다.
 연은 노인의 물음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다 하겠다는 듯이 최대한 자세히 주위 풍경까지 묘사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서 뭐라고 했냐면······.”
 “그만, 그만 말해! 귀가 아픈 느낌이군. 자네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웠나. 끄응, 이러면서 어떻게 살수를 한다는 건지.”
 ‘네가 시켰잖아, 미친 영감탱이야!’
 노인의 말에 울컥한 연은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번에 맞으면 진짜 골로 갈 것 같았기에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부당한 현실에 연은 절규했다.
 “크흠, ‘거쳐 가는 자’인가 보군.”
 “그게 뭡니까?”
 “대충 주인을 찾을 때까지 보관하고 있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으면 될 걸세. 그 가면은 좋은 거니까 잘 사용하도록 하고. 말이 다른 데로 샜군. 노부가 자네에게 온 이유는 검을 주는 것도 있었지만 한 가지 업(業)을 지어주려고 온 것이네.”
 “업?”
 노인의 생뚱맞은 말이 의아해하는 연.
 “자네, 이 세상에 죽여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죽이다니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모든 생물은 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네가 지금까지 사냥한 몬스터들은 뭔가?”
 연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노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음······.”
 “진지하게 대답해 보게나. 노부는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걸세.”
 “음······ 몬스터들 정도?”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우리에게 해를 끼치니까?”
 ‘당연히 레벨 업이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말하는 연.
 “그렇지, 물론 이득이 되기 때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니까 죽이는 것이지. 그렇다면 말일세. 인간 중에서도 주위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그건······.”
 현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묻는 노인.
 “힘들겠지. 그런 자들 또한 자네가 말하는 ‘우리’란 울타리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말일세.”
 “그렇죠.”
 “그러한 자들은 우리 ‘진살수’들은 ‘악업을 쌓은 자’라고 부른다네. 그리고 ‘진살수’의 진정한 업은 그러한 사람들을 죽여 그 업을 지워 내는 것이라네.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진살수가 대신해 주는 것이지.”
 연은 노인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형벌이란 게 이미 있지 않습니까?”
 “물론 형벌이 존재하지. 하지만 자네의 세계는 모르겠지만 여기 이 세계의 형벌은 취약하고 불공평하다네. 하지만 우리의 살행은 공평하지. 평민도, 귀족도, 왕도, 설사 신이라도······.”
 ‘자네의 세계?’
 연은 ‘자네의 세계’라고 말하는 노인에게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지만 일단 끊지 않고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우묵한 눈으로 잠시 연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잇는 노인.
 “그리고 진살수가 살행을 하는 건 진정한 의미의 구원도 겸하고 있지. 사람은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 그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많은 악업을 쌓은 자는 ‘지옥’으로 간다네.”
 “!!!”
 연은 살짝 놀랐다. 이 노인도 지옥의 존재를 알고 있다.
 악업을 쌓은 자가 죽어서 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은 연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자신은 얼마나 악업을 쌓았으면 ‘이세계’에 태어날 때부터 지옥으로 간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연.
 “악업을 쌓은 자가 진살수의 손에 죽으면 그 업이 정화되지. 그러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다시 환생할 수 있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처단자인 동시에 구원자도 되는 거라네.”
 
 [직업 퀘스트 ‘천살행(千殺行)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악업을 쌓은 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건 모두 자네에게 달렸네. 자네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며 판단하게나. 여기 남아서 자네를 가르쳐 주고 싶지만······. 노부가 진짜 바빠서 말이야. 나중에 다시 보세나.”
 슈욱.
 자신의 할 말을 끝마친 노인이 연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번에도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네. 천살행이라······ 이건 또 뭔데, 몬스터 말고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건가?”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아니, 이 영감탱이! 풀리면 풀린다고 말을 해주고 가야지!’
 그렇게 연은 ‘이세계’에서 첫 번째 퀘스트를 받았다.
 
 
 10장 동류(同類)
 
 
 어느 한적한 산 중턱, 주변의 풍경과 무척이나 잘 어울려 마치 그림처럼 지어진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살선(殺仙), 서대륙에 다녀온 겐가?”
 마치 칼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이 막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흘흘, 그렇다네.”
 노인은 온화한 인상에 청수하게 기른 수염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는 벗어져 있었다.
 바로 연에게 직업을 준 노인이었다.
 “또 그 이방인을 보고 오는 건가? 아끼는 녀석인가 보군.”
 “아직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끼고 말고 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단지 그 녀석이 싸우는 모습이 무척 흥미로워서 말이야. 검선(劍仙) 자네도 보면 분명 흥미를 가질 걸세.”
 노인, 살선은 검선이라 불린 중년인의 물음에 연을 생각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정을 주지는 말게나. 이방인들이 우리 세계를 ‘이(異)세계’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와 그들은 다르니까.”
 “알고 있다네.”
 잠시 살선을 바라보던 검선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옥’ 건은 기억하는가?”
 “지옥에서 여기 중간계로 차원 게이트가 열린 사건 말인가? 당연히 기억하지. 노부가 그것 때문에 서대륙에 건너갔던 것 아닌가.”
 살선이 검선의 말에 그때 일을 상기시켰다. 분명 ‘지옥’에서 중간계로 대규모의 차원 이동이 감지되었고 그 당시 서대륙의 ‘수호룡’들은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기에 자신이 직접 확인을 하러 갔었다.
 하지만 그곳에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분명 신급 게이트가 열린 걸 감지했는데 말이야······ 뭐 그 덕분에 그 녀석을 발견했지만.’
 “당분간 그 건은 중지네. 동대륙에도 일이 터졌거든.”
 “무슨 일인가?”
 그 뒤로 오두막 안에서 심각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 * *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한묵은 식물인간이 되기 전 항상 그렇게 생각했고 ‘지옥’에서 빠져나온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죽는다.
 그렇기에 자신은 항상 조심 또 조심을 해왔다. 혹시라도 실수로 인간을 죽이지 않도록. 만약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회에서 제외된다면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음을 알기에.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태어난 것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또는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는 것인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알려줄 수도 없었다.
 물론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기에 아무에게도 이런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운전 중인 인욱에게조차도······.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본래 성격과는 다르게 의외로 규정 속도에 맞춰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던 인욱이 한묵을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 병원에 있어야 할 한묵이 인욱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이유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 * *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네? 벌써요?”
 “네. 저도 믿기 힘들지만······ 정상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환자분 회복속도가 상식을 뛰어넘었어요. 허락해 주신다면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뇨, 그건 사양할게요.”
 무려 4년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는 사람이 한 달 반 만에 퇴원하게 되니 어이없어하는 가족들.
 “오빠, 나 몰래 뭐 좋은 거 먹었어?”
 “아니, 맛없는 병원 밥밖에 안 먹었다만.”
 “큼큼.”
 한묵의 말에 헛기침하는 의사.
 “한묵아, 의사 앞에서 병원 밥이 맛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런 한묵을 어머니인 이봉선이 살짝 나무랐다.
 “아닙니다, 어머니. 제가 헛기침한 건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너무 공감하는 터라······.”
 “아······.”
 의사의 말에 살짝 침묵이 맴돈 진료실을 빠져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욱이 한묵과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
 “인욱이구나.”
 “한묵이 이제 퇴원하는 거예요?”
 “그래. 다행히 얘가 예전부터 몸 하나는 튼튼하긴 했지.”
 “오, 잘됐다! 그럼 혹시, 제가 이번 주말에 여행을 가게 되는데······.”
 인욱의 말은 자신의 여행에 한묵을 같이 데려가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한묵이 식물인간이었던 동안 곁을 항상 지켜온 인욱이었던지라 완전히 신뢰하고 있던 아버지, 김수훈은 곧바로 허락했다. 하지만 이봉선은 아직 한묵이 걱정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인욱의 설득력 넘치는 결정타 한마디에 봉선도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 * *
 
 다시 차 안.
 “그래서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간다고?”
 “그러니까, 전주에 기린봉이란 곳이 있거든. 그곳에 선린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 스님이 아는 분이라서······.”
 그렇다. 한묵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절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한묵의 어머니 이봉선은 절에서 요양 좀 하다 오겠다는 소리에 허락하고 만 것이다.
 ‘아니, 무슨 어울리지도 않게 절이냐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어 버린 강제 템플스테이행. 물론 여행가는 건 그동안 누워만 있었던 한묵도 분명 반길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여행 가서도 강제로 묵언수행을 하게 생겼으니 울화가 치밀 만도 했다.
 절이라는 걸 안 한묵은 가지 않으려 했지만 오히려 가족들이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우리만 가는 건 아니야. 사정이 있어 같이 출발하진 않지만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한 일행이 있거든.”
 “일행?”
 “보면 안다.”
 
 * * *
 
 “아니, 봐도 모르겠다만.”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 미리 와 있었는지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을 보며 한묵이 인욱에게 말했다.
 “너 기억 안 나? 쟤들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잖아.”
 ‘아니, 고등학교 동창이고 뭐고, 네가 지옥에서 20년 동안 있어봐라. 기억이 나나 안 나나.’
 솔직히 한묵은 인욱을 처음 봤을 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을 쳐다보았었다.
 “너희 왜 이렇게 늦게 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커다랗지만 푸른빛이 섞여 차가운 느낌을 주는 두 눈. 섬세하게 솟은 콧날 아래로 도톰하게 올라온 분홍빛 입술까지.
 전체적으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묘하게 관능적인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 기억난다.’
 정세린.
 같은 반이 한번 된 적 있었기에 목소리를 듣고 기억할 수 있었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접근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분명 연예 기획사에서 제의도 많이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다고 들었고.’
 자신과는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워낙에 인기가 많았기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에이, 너무 그러지 마. 쟤들이 짐이 많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런 세린의 옆에서 말하는 갈색 웨이브의 머리의 부드러운 눈매의 여자는 고등학교 시절 세린의 단짝이었던 한예솔인 것 같았다.
 “우리가 늦었나? 아, 좀 늦었네. 미안하게 되었다.”
 능글거리는 인욱의 말에 세린은 그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듯 쳐다보다가 한묵을 보며 물었다.
 “오랜만이네. 인욱이한테 소식은 들었어. 몸 괜찮아졌다며?”
 “어? 그래. 많이 좋아졌어.”
 자신에게 바로 말을 걸지 몰랐기에 살짝 당황하며 말하는 한묵. 같은 반일 때의 둘은 하루에 한마디 하면 많이 하는 것일 정도로 접점이 없던 사이였다.
 소심한 성격의 한묵은 세린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세린도 굳이 그런 한묵에게 먼저 말을 걸 성격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짐부터 풀자.”
 절의 주지 스님한테 인사를 하고 온 인욱이 각자의 방을 알려주며 말했다.
 “인욱아.”
 “응?”
 “대체 이 여행구성원은 뭐냐. 너 쟤들이랑 원래 이렇게 친했어?”
 방으로 들어와 짐을 풀던 한묵이 인욱에게 물었다.
 “아, 얘기 안 해줬나? 나 길드 있는 거 알지? 거기 창립 멤버가 나랑 저 둘이야. 그 전까지는 그냥 가끔 연락만 하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같이 길드를 만들게 되었거든. 그 뒤로 가끔 이렇게 같이 여행 다닌다. 원래는 다른 길드원들도 같이 다니는데 이번에는 다들 시간이 안 되나 봐. 저 둘은 너도 아는 사람이니까 너도 데려온 거고.”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예전부터 발이 넓었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인욱을 쳐다보는 한묵.
 “점심 먹으려면 시간 좀 남았으니까 여기 기린봉 한번 올라갔다 오자. 그렇게 높지 않아서 별로 안 걸린다더라. 그리고 점심 먹고 나서 한옥마을 구경하러 가고.”
 “산도 타냐?”
 “왔으니 타야지.”
 “난 환잔데?”
 “그럼 여기 있을래?”
 “아니다, 가자.”
 이미 자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걸 알고 있는 한묵은 결국 인욱을 따라 기린봉을 오르기로 했다.
 세린은 긴 운전으로 인해 피로했는지 오전에는 잠깐 쉬겠다고 했고 예솔만이 한묵과 인욱을 따라 산을 올랐다.
 “와, 쟤 원래 저렇게 날아다녔어?”
 한묵이 저만치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 예솔을 보면서 인욱에게 말했다.
 “헉, 헉! 너 몰랐냐? 예솔이네 집 예전부터 도장으로 유명한 곳이잖아. 쟤 싸움도 무지막지하게 잘해. 그리고 사실 절도 예솔이가 가자고 해서 온 거다.”
 옆에서 숨이 차는지 헐떡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가 등산 가자고 말한 주제에 제일 먼저 포기를 외치려고 하는 인욱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묵은 생각했다.
 ‘몸놀림이 괜찮네. 폭발적인 움직임도 가능할 거 같은데.’
 아깐 스치듯이 본 게 전부라 몰랐는데 다시 보니 예솔은 무척이나 잘 단련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압축된 근육이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땐 티가 나지 않아 사람들이 잘 모를 뿐.
 “근데 너 그거 봤어? 저번에 새로 올라온 ‘다섯 별’ 영상. 랭킹 4위가 초보자 도시에 떴다는 데?”
 “어? 나 그거 봤어! 에일린 완전 멋지더라! 걸크러쉬 그 자체!”
 인욱의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저 멀리서 다가오며 예솔이 말을 받았다.
 “에일린 정도 되면 현실에서도 캐릭터의 영향을 많이 받겠지?”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난 그 옆에서 실시간 라이브로 봤다만······ 어?’
 그 자리에 있었던 자신에게는 그리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었기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
 갑자기 인욱과 예솔이 주고받는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묵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이 상식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이 현상은······.’
 그때 한묵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하나의 글.
 -‘이세계’를 플레이하면 뇌에 영향을 주게 되어 게임 속의 캐릭터에 관한 것이 어느 정도 현실로 반영된다. 물론 체력이나 근력 등 직접적인 영향은 불가능하지만 암기력, 동체시력, 반사 신경 등 분명히 향상된 것을 관측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치가 뛰어날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어떤 이유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2년 전에 발표되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논문의 내용 중 일부다.
 ‘지옥왕’이었을 때 모든 능력치가 ---로 변하기 전, 자신의 능력치 가운데 제일 높았던 건 분명 기감(氣感)이었다.
 현실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감각인 기감을 한묵은 무척이나 잘 활용했고 그렇기에 기감은 다른 능력치보다 압도적인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물론 자신의 존재 자체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산을 타던 한묵에게 어느 순간부터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함께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실처럼 감기듯 온몸에 걸리는 감각.
 처음에는 단순히 바람에 날아온 거미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온몸에 걸릴 정도로 날아오는 거미줄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눈에 보여야 한다.
 그러나 보이는 건 전무.
 마침내 한묵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손을 휘젓자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실 같은 것들이 휘감아 들어온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각은······ 분명.
 지옥에서 처음 기감을 얻었을 때였다.
 
 * * *
 
 게임 동화 증후군.
 가상현실게임 ‘이세계’가 나온 후로, 새로이 생긴 증상.
 현실과 비슷한 가상현실게임 ‘이세계’를 플레이하는 중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함으로써 현실과 가상현실 간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승호는 지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검술 도장의 사범이었던 그는 ‘이세계’에서도 레벨 337의 검사를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였다.
 그리고 그는 ‘이세계’를 단순히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이세계’를 처음 플레이한 날은 다시 태어난 날과도 같았다.
 푸르고 높은 하늘 사이사이 떠다니는 뭉게구름, 거친 촉감이 생생히 느껴지는 건물들, 풀 냄새가 느껴지는 숲까지.
 그러나 그중 가장 그의 마음에 닿았던 건 한 명 한 명이 실제 사람과 같이 그들만의 삶이 존재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NPC들이었다.
 ‘이곳은 현실이야. 또 다른 세계가 틀림없어.’
 그 뒤로 승호는 미친 듯이 ‘이세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NPC와 만나 결혼도 했다. 자식은 낳을 수 없었지만, 입양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영양분을 섭취하는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 시간을 ‘이세계’ 안에서 보냈다.
 그에게는 ‘이세계’가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가족에게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들이닥쳤다.
 그러고는 그의 아내와 아이를 죽이고 사라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퀘스트니까.
 승호의 분노는 예정된 것이었다.
 “죽인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부활이 가능한 ‘이세계’ 안에서 죽이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의 아내와 아이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안겨주어야 했다.
 단서는 오로지 검은 머리카락에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리더라는 것.
 그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어······ 음······.”
 한묵은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낯설었다.
 물론 아까 기감을 느낀 것도 무척 낯선 상황이었지만 지금 한묵이 낯선 것은 기감 때문이 아니었다.
 “······.”
 바로 자신의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걷고 있는 세린 때문.
 특유의 시릴 듯한 미모를 가진 세린은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더욱 어색했다.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인욱과 예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 차라리 몬스터랑 싸우는 게 낫겠다.’
 이렇게 된 건 1시간 전.
 한묵 일행은 오전 등산을 마치고 절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차를 타고 한옥마을로 이동했다.
 “다들 점심 조금만 먹었지? 한옥마을은 길거리 음식이 메인이란 말이야.”
 “그럼! 난 그래서 아예 굶었잖아. 배고프니까 빨리 먹으러 가자.”
 인욱의 말에 예솔이 대답했다.
 “난 별로······.”
 “난 속이 좀 울렁거려서.”
 한묵은 기감에 모든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입맛이 별로 없었고 세린은 속이 별로 좋지 않은지 음식보다는 한옥마을 특유의 풍경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토네이도 감자부터 시작하자.”
 “좋지!”
 한묵과 세린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인욱과 예솔은 영혼의 듀오를 만난 것처럼 맨 앞에 있는 길거리 음식부터 말 그대로 쓸어 담으며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 같이 좀 가······ 지?”
 평일도 그렇지만 특히 주말의 한옥마을은 전국에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다. 그렇기에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얘네 어디 갔어?”
 금방 일행과 떨어져 버리게 된다.
 ‘아니, 하필 얘랑 둘이 남았냐고······.’
 지금껏 자신을 감추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살아온 한묵이다. 그런 한묵에게 거의 처음 본 거나 다름없는 사람과 단둘이 걷고 있는 상황은 무척이나 난감했다.
 그렇다고 세린의 성격상 먼저 살갑게 말을 걸어오진 않을 거 같았고.
 
 ‘세린이? 걔 알고 보면 친해지기 쉬워. 의외로 농담하면 잘 받아주거든. 그리고 놀리면 반응이 바로 와서 재밌어.’
 
 한묵은 아까 전 인욱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세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앞만 보며 걸어가는 세린.
 한묵은 그런 세린에게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글을 떠올리며 말을 걸었다.
 “흠흠,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먹는 김밥이 뭔 줄 알아?”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세린이 한묵을 쳐다봤다.
 “참치마요.”
 “······.”
 순간 2도 정도 내려가는 주변 온도.
 그와 동시에 왠지 모르게 세린의 눈빛이 아까보다 차가워졌다.
 ‘미치겠네, 잘 받아준다며!’
 자신의 한심한 유머 감각의 문제인지도 모르고 괜히 애꿎은 인욱을 탓하는 한묵.
 애초에 세린과 친해지는 건 인욱과 같은 인싸에게만 가능한 것일까.
 이제는 거의 숨이 막힐 듯한 상황에 도달했기에 결국 한묵이 인욱에게 SOS를 보내려고 휴대폰을 꺼낸 찰나였다.
 “저거 한번 해볼래?”
 세린이 한묵에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 * *
 
 한옥마을은 유명세에 비해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즐길 만한 건 꽤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한복을 입기 체험이었다.
 그렇기에 한옥마을에서는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한묵과 세린도 그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괜찮은데?’
 보통의 한복보다는 통이 좁은 개량식 한복을 입은 세린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거기에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해두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양반집 규수 같아 보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제대로 끌고 있었다.
 ‘물론 본판이 이쁘니 뭘 입어도 괜찮겠지만.’
 한묵도 한복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아니, 왜 난 하인이냐?”
 전형적인 마당쇠 차림의 옷차림. 거기다 머리에 띠까지 둘러 누가 봐도 양반집 여식과 수행하는 하인으로 보였다.
 세린은 평소에도 한복을 입어보고 싶었는지 아까보다 많이 표정이 풀린 상태였는데 가끔 한묵을 볼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았다.
 “그냥 대놓고 웃어라. 그렇게 고개 돌리고 웃으니까 더 기분 나쁜 거 알아?”
 “큭큭, 아, 미안해. 왜 거기서 너한테 그런 옷을 풉!”
 미안하다고 하면서 한묵을 바라본 세린은 다시 한번 터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풀려서 다행이긴 한데······.’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한묵이 있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의 비명이 터지듯 울려 퍼졌다.
 “뭐지?”
 비명이 들린 곳으로 세린과 함께 서둘러 걸어가자 사람들이 한 남자를 빙 둘러싼 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여자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어서 그년 데려와!!”
 “아니, 저 미친놈이, 검은 머리에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한 둘이냐고!”
 여성 한 명의 목에 칼을 겨눈 채로, 주변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자 한 명.
 거기에 반응하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은 다양했는데,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 차마 접근하지 못하고 천천히 설득해 보려는 사람. 심지어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질로 잡혀 있는 여자는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던지 패닉인 상태로 ‘살려주세요’만 반복하고 있었고, 인질범은 눈이 시뻘게진 것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음······.”
 한묵은 지금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라도 있는 것인지 침음을 흘리며 살짝 몸을 떨고 있는 세린을 보고 살짝 팔을 잡아 주었다.
 세린이 한묵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보낼 때, 한묵의 눈에 남자의 뒤에서 살금살금 접근하고 있는 예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왜 네가 거기서 나와?’
 모양새를 보아하니 남자를 제압하고 여자를 구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냥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걸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라고 주장하는 외국의 히어로라도 되는 양 굳이 나서는 예솔이 한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그나저나 생각대로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에 생각보다 인질범의 감각이 상당한지 계속해서 인질을 끌고 이동하며 예솔에게 거리를 내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 나서기 싫은데······.’
 분명 이대로 가다간 예솔이 무리하게 인질범에게 돌진할 것이 뻔했고 그러면 인질이 상해를 입을 것이다.
 인질로 잡힌 여자야 자신과는 상관없지만 예솔은 일행이었기에 곤란해지기라도 하다면 이번 여행에 상당한 타격이 갈 것이 틀림없었다.
 ‘한번 사용해 볼까?’
 그 상황에서 한묵은 아까 전 얻었던 기감을 떠올리고는 슬쩍 바닥에 있던 엄지손톱만 한 돌멩이를 집었다.
 그러고는 인질범이 아닌 허공을 향해 휙 하고 던졌다.
 “너, 갑자기 뭐 하는 거······!!”
 자신의 팔을 잡을 때부터 계속 의식하고 있었던 세린만이 한묵이 돌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감.
 ‘이세계’의 고레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획득해야 한다고 알려진 능력치.
 기감은 단순히 대기 중에 흐르는 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기를 의지대로 통제하여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
 그것이 진정한 기감이다.
 허공으로 날아가던 한묵이 던진 돌이 마치 강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갑자기 공중에서 뚝 떨어졌다. 떨어지는 장소는 정확히······.
 인질범의 칼을 든 손.
 따악!
 “큭!”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떨어진 돌멩이에 반응하지 못한 인질범의 손에서 칼이 잠깐 느슨해졌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예솔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파앗!
 예솔의 압축된 근육에서 폭발적인 움직임이 나오며 인질범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쿠웅!
 예솔의 왼발이 진각을 밟는다. 곧이어 오른손으로 곧게 뻗치는 정권!
 콰앙!
 평범한 퍼억 소리가 아닌 흡사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이 쾅 소리가 나며 인질범의 몸이 튕겨 나갔다.
 “헐?”
 “우와! 방금 봤어? 저 남자 한 방에 제압하는 거?”
 “저 여자, 뭐야? 사람이 날아갔어!”
 “와! 이거 조회 수 100만 각이다!”
 곧이어 예솔을 향해 이어지는 사람들의 환성.
 “쿨럭!”
 예솔의 일격에 날아간 승호는 기침을 하며 뼈가 부러졌는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런 그의 눈에는 한 명의 여자가 비치고 있었다.
 “찾았다, 저년이야.”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 검은 긴 생머리. 자신이 들었던 인상착의와 같았다.
 아내와 아이를 죽인 그년이 틀림없었다.
 “네년은 반드시 죽인다!!!”
 더 이상 생각을 하기도 싫었고 할 수도 없었다. 복수도 못 하고 잡혀갈 바에 진실이 어떨지라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여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승호는 세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린아!”
 갑자기 일어나 칼을 들고 세린을 향해 뛰어가는 인질범을 예솔은 막을 수 없었다.
 ‘분명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줬는데!’
 지금 세린의 곁에 있는 사람은 오로지 머슴 차림을 한 한묵뿐. 예솔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묵은 무술은커녕 운동 자체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조용한 학생이었다.
 거기에 비해 인질범은 움직임을 보니 분명 무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기습이 아니었다면 한 번에 제압하지 못했을 만큼.
 ‘너무 늦었어!!’
 마침내 세린과 한묵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인질범이 칼을 휘두르려고 할 때.
 한묵이 움직였다.
 한 대.
 툭.
 “어?”
 스치듯이 가볍게 발끝이 인질범의 정강이 중 한 부분을 치고 지나가자 무게중심을 잃고 인질범이 휘청거린다.
 두 대.
 툭.
 휘청거리는 인질범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손이 스치고 지나간다.
 반응하지 못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왜 쓰러지고 있는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스르륵.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하게 치켜 떠진 눈동자가 서서히 감긴다.
 풀썩.
 서서히 넘어가며 결국 땅바닥에 닿는 인질범의 몸뚱이.
 “대체······.”
 무척이나 빠르고 가벼운 움직임이었기에 예솔은 그 공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건 자신뿐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인질범이 휘청거리다가 쓰러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상대의 호흡, 동선, 범위, 같이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파악한 뒤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저런 건 자신의 아버지조차 힘들었다.
 과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고등학교 때 그녀가 알던 한묵이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체 저건······ 뭐야?”
 예솔은 넋이 빠진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솔이 생각한 것과 달리 인질범을 제압할 때 한묵은 무척이나 망설이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어떻게 하면 제압할 수 있을 것인지가 아닌.
 ‘어떻게 하면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였다.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수백 가지의 방법을 억누르며 제압만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세계’와는 달리 현실의 인간은 너무나 연약했기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지옥에서의 수많은 전투경험이 도움된 것일까 마침내 한묵은 현실의 첫 전투에서.
 ‘됐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 * *
 
 한묵 일행이 머무는 선린사의 뒤편 공터.
 해도 뜨기 전, 그곳에서 한묵과 예솔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시작하자.”
 “아니, 뭘 시작해?”
 예솔의 뜬금없는 말에 대답하는 한묵.
 대체 이 해도 안 뜬 한밤중에 무엇을 시작하자는 말인가.
 “좋아, 그럼 나부터 간다.”
 “아니, 잠깐 일단······ 아, 오지 말라고!”
 
 * * *
 
 한옥마을에서의 납치범 사건 후, 한묵 일행은 경찰의 협조 요청으로 인해 경찰서로 향했다.
 직접 제압하기도 했고, 목격자로서 여러 가지 증언해야 했었기에 경찰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더구나.”
 “아뇨,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경찰서장의 말에 예솔이 대답했다.
 “하하, 아버지는 잘 계시고?”
 “네, 여전하세요.”
 이런 사건에 경찰서장이 직접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예솔의 아버지와 경찰서장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예솔의 얼굴도 볼 겸 해서 온 것이었다.
 사실 예솔의 도장은 수많은 군인과 경찰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으로도 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도 경찰이나 군인들을 많이 알 수밖에 없었다.
 ‘아니, 경찰서 오는 건 좋다 이거야······.’
 하하 호호하며 이야기하는 경찰서장과 예솔을 바라보며 한묵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옷은 갈아입게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다. 한묵은 지금도 여전히 머슴 차림 그대로였다. 아까 정신이 없었기에 미처 갈아입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
 한옥마을 안에서야 별로 어색하지 않은 복장이었겠지만 분명 경찰서에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었다. 원래 입었던 옷은 한복 대여점에 고이 모셔져 있어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송곳처럼 자신을 찔렀다. 다른 직원들은 물론 조서를 쓰러 온 다른 목격자들이나 범죄자들까지 모든 사람이 한묵을 한 번씩 훑어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갔다.
 아웃사이더 인생 24년 중 제일 많은 시선을 받고 있는 한묵!
 ‘아니, 이런 식의 주목은 싫다고!’
 한묵의 옆에 앉아 있던 인욱은 아까부터 아예 대놓고 낄낄거리고 있었고 세린은 무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한묵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보다 너도 한복이잖아!’
 “거기, 방자야. 물 좀 떠오너라.”
 “야······!”
 인욱이 자칫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한묵에게 말했다.
 그 말에 울컥한 한묵이 인욱에게 따지려는 찰나.
 “뭐 해, 어서 떠오지 않고?”
 세린의 어시스트가 들어왔다.
 “······.”
 한묵은 다음에도 한복 대여점에서 자신에게 이 옷을 건네준다면 무조건 찢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 * *
 
 전주로 내려온 첫날부터 많은 일이 있었기에 한묵 일행은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시간이 지나,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한묵은 누군가 인욱과 자신이 잠든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이 밤에 누구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인기척이 갑자기 한묵의 앞에서 멈추더니 팔을 톡톡 건드리기 시작했다.
 “한묵아, 일어날 수 있어?”
 곧이어 들려오는 조용한 음성.
 “한예솔?”
 아직 어두워 얼굴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예솔의 목소리였다.
 “맞아, 잠시만 시간 좀 내줄래?”
 무슨 시간을 이 새벽에 낸단 말인가.
 정말 어제부터 한묵을 귀찮게 하는 예솔이었다.
 ‘무슨 일이지?’
 예솔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한묵.
 ‘어제 내가 그 인질범을 제압한 일 때문인가? 그걸 제대로 봤어?’
 예솔이 한묵을 데려온 것은 절 뒤편의 한적한 공터.
 “여기는 왜?”
 “사실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예솔의 말에 한묵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말하고 싶은 거? 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뭘까? 이런 한적한 곳에서 남녀 둘이 만난 상태로 할 말이라면······. 설마, 고백? 고백인가? 설마, 어제 내가 한 일 때문에 반해서 나에게?’
 연애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묵의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는 행복 회로!
 이미 한묵의 머릿속에는 예솔이 ‘나는 강한 남자가 좋아!’라고 외치며 고백하고 있었다.
 “흐흠!”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는 한묵.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에 24년 동안 모태솔로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드디어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인가!
 “응? 왜 그런 헛기침을 하는 거야? 어찌 됐든 말할게, 나랑······.”
 “아니, 거기까지.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고 아무리 네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해도 천천히 알아보는 시간을······.”
 예솔의 말을 끊으며 흑역사가 될 만한 헛소리를 내뱉는 한묵.
 “무슨 이상한 소리야. 너 잠 덜 깼어? 다시 말할게, 나랑 싸우자!”
 “그래, 네 마음······ 응?”
 
 * * *
 
 한묵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예솔을 보며 생각했다.
 ‘미치겠네.’
 지옥에서 빠져나온 이후 더 이상 소심하게 살지 않겠다고는 다짐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잘못하다가 죽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에.
 예솔이 익힌 무예는 백제 시대 때, 뫼의 싸울아비라 불리던 자로부터 내려온 고(古)무예. 그때는 전란의 시대였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실전 무술이 발달했다.
 예솔의 아버지는 뫼의 싸울아비의 계승자로서 도장을 물려받았고 제자들을 불러 가르쳤다.
 그러나 실전 무예를 그대로 가르치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살기를 빼고 자기 자신을 단련할 수 있도록 수정한 다음 가르쳤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계승은 계속되어야 했기에 자신의 직계 가족에게만큼은 온전한 뫼의 싸울아비의 무예를 가르쳤다.
 물론 예솔이 익힌 무예는······.
 ‘빠르다!’
 후욱!
 온전한 뫼의 싸울아비의 무예였다.
 한묵은 빠르게 뻗어 오는 예솔의 오른쪽 주먹을 슬쩍 피하며 무릎 차기로 견제했다.
 하지만 어느새 주먹을 회수한 예솔은 한묵의 무릎 차기를 옆으로 살짝 몸을 트는 것으로 피하면서 동시에 다른 주먹을 휘감아 돌리며 한묵의 가슴을 노렸다.
 “하앗!”
 낭랑한 기합이 울려 퍼진다.
 그 정도는 예상하던 반응이었기에 상체를 뒤로 젖히며 예솔의 주먹을 피하는 한묵.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릎 차기를 하느라 뻗어진 발로 예솔의 무릎 관절을 살짝 건드려 균형을 무너뜨렸다.
 흔들리는 예솔의 신형.
 한묵은 그것을 확인한 동시에 허리를 튕기듯 상체를 세우며 그 반동을 이용해 주먹을 내질렀다.
 반동으로 인해 더욱 거세진 공격을 예솔은 왼쪽 어깨를 뒤로 빼며 한묵의 주먹을 최대한 충격을 줄이면서 받아 내었다.
 텁!
 그리고 곧바로 두 손으로 한묵의 팔을 잡고서는.
 “으랏차!!”
 시원한 기합성과 함께 한묵을 엎어치기 자세로 날려 버렸다. 분명 예솔은 한묵보다 신장이 작았지만 압축된 근육이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탁!
 공중에서 균형을 잡고 착지하는 한묵.
 그 모습을 본 예솔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역시······.”
 ‘아침부터 이게 뭐야 대체.’
 귀찮다는 듯 예솔을 바라보는 한묵.
 “역시 넌······ 왜 지금까지 그런 실력을 숨기고 다닌 거야? 내가 본 고등학교 때의 넌 운동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었어. 그런데 지금과 어제 보여주었던 그 움직임······ 결코 3, 4년 운동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니, 보통사람은 평생을 가도 그런 건 못해.”
 예솔이 한묵에게 물었다.
 어제 한묵이 보여주었던 움직임이 진짜 한묵의 실력이라면 자신이 질 거라는 것은 이미 불 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한묵에게 싸우자고 말한 건 오로지 한묵의 실력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은 마음 하나였다.
 “그냥, 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차마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하지 못하는 한묵.
 “그런 재능을 가지고 그런 말을······ 좋아, 네가 여기서 나를 이기면 더 이상 너에게 싸우자고 하지 않을게.”
 “그거 듣기 좋은 말인데?”
 파앗!
 한묵이 말이 끝날 때쯤 이미 한묵의 신형은 예솔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예솔의 말을 듣고 적극적으로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예솔은 그런 한묵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정권을 내질렀다.
 뫼란 산을 뜻한다. 그만큼 뫼의 무예는 굳건함과 무거움을 지향하는지라 상당한 근력을 필요로 하는데 여자인 예솔에게는 엄청난 불평등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꾸준히 단련해 온 단단히 압축된 근육과 공격 하나하나에 회전력을 가미함으로써 부족한 근력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 공격을 몸을 살짝 수그려 어깨 위쪽으로 흘린 한묵은 그대로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다.
 한묵의 내지르는 힘에다가 예솔의 힘까지 더해진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주먹.
 후웅!
 예솔은 고개를 최대한 옆으로 꺾어서 공격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지만 귓가에 울리는 바람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그러나 한묵의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미 예솔의 옆구리 쪽으로 한묵의 발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하긴 늦어!’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예솔은 재빨리 한묵의 발이 날아오는 쪽으로 몸을 붙여 공격을 미리 받아냈다.
 그로 인해 타격점이 흔들려 줄어든 충격.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묵을 향해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그때, 한묵의 눈이 빛났다.
 투욱.
 “어?”
 자신의 옆구리에 닿는 충격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느낀 예솔. 아무리 타격점을 피해서 맞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약했다.
 ‘설마······ 속임수!’
 허초라고도 불린다.
 그 사실을 이미 예솔이 깨달았을 때는 늦은 뒤였다.
 한묵은 공격을 가볍게 피한 후, 그대로 예솔의 오른팔을 잡고 땅바닥으로 메쳐 버렸다. 아까 한묵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공격.
 파악!
 생각보다 약한 충격음. 예솔의 낙법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한묵이 그리 힘을 주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이겼지? 그럼 이제 그만······.”
 귀찮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만하자고 예솔에게 말하려는 한묵의 머릿속으로 정말 문뜩 하나의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은 연약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열 명이 모이건 백 명이 모이건 자신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토끼가 100마리가 모인다고 해도 호랑이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약간이지만 예솔은 달랐다.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이면 위협은 될 것 같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호신술을 익힌 토끼 정도?
 자신이 생각하기엔 분명 인간은 연약하다.
 하지만 태어나길 약하게 태어난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예솔이 익힌 것과 같은 실전 무술들.
 예솔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예솔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따라서 점점 더 위로 올라가다 보면 결국.
 동류(同類).
 자신과 같은 종은 아닐지라도, 자신과 비슷하게 겨룰 수 있는.
 자신이 한 방 한 방을 조심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그래······ 그러한 동류를 만날지도 모른다.
 한묵의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졌어.”
 한묵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예솔.
 그녀로서는 아직 부족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져 버린걸.
 “근데 더 싸우고 싶지?”
 그때 한묵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응? 당연한 거 아니야?”
 한묵의 말에 의아해하며 되묻는 예솔. 아까까지 싸우기 싫어하던 한묵이 지금은 마치 다시 싸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내가 이기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이기면 말해줄게.”
 “오케이. 이 기술을 받아 내면 이긴 걸로 해줄게.”
 한묵의 말이 기꺼웠는지 예솔은 말과 동시에 아까와는 다른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큰 기술을 준비하는 거 같은데? 저런 기술을 기다려 주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파앙!
 한묵의 신형이 파공성을 내며 앞으로 쏘아졌다.
 쉐에엑!
 곧이어 아까보다 빠르고 날카로워진 발차기가 예솔에게 날아들었다.
 “아, 진짜! 좀 기다려 주지!”
 예솔은 아까보다 빨라진 한묵의 몸놀림에 놀라면서도 몸을 낮춰 피한 다음, 곧바로 한묵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를 향해 로우킥을 날렸다.
 그 공격을 피하려 한발로 살짝 뛰어오르는 동시에 발차기를 하느라 들어 올린 발을 그대로 내려찍기로 전환하는 한묵.
 예솔은 한묵의 공격을 몸을 크게 옆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피한 후, 아직 땅에 발이 닿지 않아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한묵에게 뒤돌려 차기를 먹였다.
 퍽!
 ‘역시 파워가 상당해.’
 두 팔을 교차시켜 발차기를 막은 한묵은 팔이 살짝 저리는 걸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거리를 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예솔.
 몸을 낮추며 뒤로 빠지는 한묵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해 들어가더니 그대로 강력한 회전을 가미한 펀치를 한묵의 얼굴에 날렸다.
 맞으면 에누리 없이 턱뼈가 나갈 것 같은 공격에 한묵은 고개를 뒤로 젖혀 공격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건 속임수였던 듯 너무나 부드럽고 빠르게 이어지는 예솔의 앞차기.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기에 한묵은 두 손을 밑으로 내려 앞차기를 막아갔다.
 그때.
 “걸렸어!”
 예솔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앞차기를 하느라 올라가던 발이 우뚝 멈추더니 그대로 다시 밑으로 내려간다.
 쿠웅!
 그대로 이어지는 진각!
 ‘뭐야, 2단으로 속였어?’
 “흐아압!”
 원래는 진각에서 오는 힘을 온몸의 근육으로 증폭시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이 기술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회전력이 가미된 새로운 형태로 태어났다.
 진각으로 인해 대지로부터 올라오는 힘. 이어서 발목을 회전시켜 힘을 증폭시킨다. 다음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에 의한 손실 없는 힘의 전달.
 그것을 허리의 회전에 의한 또 한 번의 증폭. 배와 가슴의 근육을 통해 어깨까지 도달한 힘은 거기서 회전으로 인해 한 번 더 증폭된다.
 그리고 손목의 회전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증폭!
 산 부수기
 예솔의 아버지는 이걸 십수 번 증폭시킬 수 있지만 자신은 아직 4번이 한계였다.
 후우우웅!
 한묵의 머리에서 처음으로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건 자신에게도 충분히 위험하다!
 물론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예솔은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여 산 부수기를 사용했겠지만 한묵은 충분히 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예솔은 이 싸움에 대해 제대로 만족을 하지 못할 터, 그럴 바엔.
 ‘정면으로 박살 낸다.’
 아직 자신의 근력은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일반인 수준.
 그렇다면 기감을 이용한다.
 한묵의 생각과 동시에 발목이 살짝 돌아갔다. 거기에서 자그마한 기의 실들이 생겨나 한묵의 발목에 휘감기더니 소용돌이처럼 변해 그대로 다리를 타고 한묵의 상체로 올라왔다.
 타고 올라오는 동안 거세진 기의 소용돌이가 한묵의 팔꿈치에 도착하는 순간, 한묵의 오른팔이 뒤로 젖혀지는 것을 완료했다.
 그때 이미 예솔의 주먹은 한묵에게 거의 다 도달한 상황.
 파아앙!
 한묵의 팔꿈치에서 마치 제트엔진처럼 모인 기의 일부가 방출되었다.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가는 한묵의 주먹. 그리고 그것보다 더 빠르게 나머지 기의 실들이 한묵의 주먹을 감쌌다.
 순식간에 예솔의 주먹 앞에 도달한 한묵의 주먹!
 “!!”
 파아앙!
 날카롭게 공기가 터지는 소리 뒤로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방금 그건······ 또 뭐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예솔은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멈춰 있는 한묵의 주먹을 보면서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의 상황이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훨씬 빨랐고 자신의 페이크에 속은 한묵은 제대로 된 자세조차 잡지 못하고 뒤늦게 주먹을 뻗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한묵의 주먹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뻗어 오더니 오히려 자신의 공격을 튕겨 내버리고 정확히 눈앞에서 멈췄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움직임을 도와준 것 같았어.’
 “뭐긴 뭐야, 네가 진 거지.”
 예솔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한묵.
 “그건 나도 알아. 그거 말고 너 마지막에 보여줬던 그 움직임······ 그런 게 가능해?”
 “어, 가능해.”
 “어떻게?”
 한묵의 바로 나오는 대답에 예솔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너도 게임 많이 하다 보면 될걸?”
 한묵의 말에 예솔의 부드러운 눈매가 샐쭉하게 변했다.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핑계를 대도 좀 그럴듯하게 대야지. 그리고 너 게임 한 달도 안 한 거 알고 있거든.”
 “아니, 진짠데.”
 한묵은 억울했다. 게임 시간을 속인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자신은 기감을 게임에서 얻은 것이다.
 “그건 됐고 부탁이 뭔데? 너무 무리한 부탁은 안 돼.”
 예솔이 손을 휘휘 젓더니 다시 한묵에게 물었다.
 “너희 아버지를 뵙고 싶은데.”
 “엥?”
 뜬금없는 부탁에 예솔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가능하지?”
 “어······ 음, 가능하긴 한데 왜 갑자기 그런 부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탁에 당황하며 이유를 묻는 예솔.
 “너 그 무술, 너희 아버지에게 배운 거라며?”
 “맞아, 너도 배우고 싶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한번 뵙고 싶어서.”
 예솔의 아버지를 통하면 이러한 종류의 실전 무예를 익힌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다고 한묵은 생각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기대가 되었다.
 그 사람은 얼마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
 한묵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씨익 웃음이 걸렸다.
 
 * * *
 
 새벽의 일이 끝난 후, 그 뒤로의 일정은 순탄했다.
 그리고 전주에서의 모든 관광을 끝마치고 돌아갈 때는 다 같이 같은 차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한묵 일행의 모습은 처음과는 달리 어색함이 많이 사라졌다.
 “한묵아 너 그냥 초보자 도시에서 사냥하지 말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넘어와.”
 운전을 하던 인욱이 문뜩 한묵에게 말했다.
 “그래, 넘어와. 우리가 키워줄게.”
 인욱의 말에 맞장구치며 말하는 예솔.
 “난 바빠.”
 거기에 차가운 목소리로 세린이 말했다.
 “쟤 또 저런다, 세린아, 난 길드마스터고 넌 길드원일 뿐이야. 그러니까 넌 내 말을 따라야 하······.”
 인욱이 길드마스터의 권위를 세우고자 근엄하게 말했지만
 “그럼 길드 탈퇴하지 뭐.”
 “지만······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찌 세린 님께 명령을······ 뜻대로 하십시오.”
 길드의 최고 전력이 바로 세린이었기 때문일까 1초 만에 추락하는 길드장의 권위.
 마치 집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가장의 얼굴이 저럴까 하는 표정으로 찌그러져 있는 인욱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한묵이 말을 꺼냈다.
 “어딘데?”
 노인에게 천살행을 받은 뒤로도 한나와 계속 진록의 숲에서 사냥했던 한묵은 안 그래도 레벨이 꽤 올라 슬슬 사냥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초보자 도시에서는 높은 사냥터가 없었고, 그러던 차에 인욱이 제안을 한 것이다.
 “엘리멘탈 시티. 우리 길드가 있는 도시야.”
 
 
 11장 왕의 강림
 
 
 연이 떠난 지옥의 성안
 ‘괴’라고 불리는 존재가 연이 통과한 게이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괴여 또 게이트를 보고 있는가?”
 연의 옥좌 양옆에 시립해 있던 4명 중 한 명이자 지옥의 서열 3위, 파멸의 군주라 불리는 만타로스가 연이 떠난 게이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괴를 향해 말했다.
 “그냥 지나가다 들렀을 뿐이다.”
 괴는 여전히 게이트를 향해 수많은 눈 중 대부분의 눈을 고정시킨 채 일부분의 눈만으로 만타로스를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괴의 눈은 게이트가 아닌 과거의 일을 좇고 있었다.
 왕이 오기 전.
 누군가에겐 억겁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괴는 지옥에서 절대자 중 하나로서 군림했다.
 그 누구도 그의 아성을 침범할 수 없었으며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지언정, 그보다 위로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료했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존재의 의미를 잊으며 살아가던 도중.
 왕이 지옥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자신이 의식하기에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였기 때문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나 괴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큼도 못한 시간 만에 무지막지한 속도로 성장한 왕은 마침내 몇 년 전, 자신과 비슷한 존재 중 하나였던 지옥군주와 그의 세력을 단신으로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자칭 지옥의 군주라 칭했지만 실제로는 지옥 일부만을 지배하고 있던 지옥군주를 무너뜨린 왕은 곧바로 다음 행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왕의 행보는 무척이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지옥의 대통합.
 홀로 세상을 부술 만한 힘을 가지지 않은 이상 누구도 이루지 못할 꿈이라 생각한 일.
 하지만 왕은 단 2년 만에 지옥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8군주 중, 4명을 격멸하고 나머지 4명을 굴복시킴으로써 결국 지옥을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혼자서.
 괴는 자신을 찾아온 왕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을 때를 잊지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
 머리가 멍해지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괴는 생각 했다.
 이분이다. 이분이야말로 진실로 지옥을 지배할 ‘지옥왕’에 어울릴 만한 분이라고.
 “그런데 괴여. 혹시 왕께서 지옥을 통합하려고 결심하게 된 이유를 알고 있나?”
 “그게 무슨 말이냐?”
 그때 연에게 굴복했던 군주 중 하나인 만타로스가 괴의 상념을 깨웠다.
 “왕께서는 대통합 이전에 이미 신에 다다른 존재셨다. 때문에 지옥왕의 자리에 앉자마자 신계에서 ‘투신’이란 직위를 받았지.”
 “그건 알고 있다.”
 왕의 그 모습에 괴가 따르기로 결심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말일세. 신의 격을 가진 존재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게이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지. 지옥을 예를 들면 지옥 전역에서 자원을 긁어모아야 할 만큼.”
 “네 그 말은······.”
 떨리는 괴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만타로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네. 왕께서는 처음부터 중간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통합을 하셨다는 말일세.”
 “헛소리.”
 만타로스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괴는 그 말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연이 ‘지옥왕’에 오른 후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중간계로 향할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어라.’
 였으니까.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는 건 아닐까.
 ‘왕이시여······.’
 게이트를 보는 괴의 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 * *
 
 “50골드입니다.”
 ‘미친, 뭐가 이렇게 비싸!’
 연은 지금 엘리멘탈 시티로 넘어가기 위한 텔레포트 게이트 위에 서 있었다.
 노인에게 천살행이란 퀘스트를 받은 이후, 쭉 진록의 숲에서 한나와 함께 오크 사냥을 계속했기 때문에 연의 레벨은 이미 70대를 넘겼다.
 슬슬 경험치가 잘 오르지 않기도 했고 한나의 파티원들도 부활했기에 나중에 같이 사냥하자는 약속을 남긴 채 연은 엘리멘탈 시티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좀 깎을······.”
 “안 됩니다.”
 시장도 아닌데 에누리를 시도하려는 연의 말을 사전에 차단한 채 게이트 직원이 방실방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실 이 텔레포트 게이트는 운영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다섯 별’ 중 한 명인 팔론이 길드 마스터로 있는 최고의 마법사 길드 ‘진리의 끝’에서 각 도시의 지부마다 편의를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직접 설치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유지비용도 다 진리의 끝에서 부담해야 했는데 이렇게 비싸게 받고도 유지비를 빼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아······.”
 50골드면 지금까지 연이 번 돈의 반절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금화를 내밀자, 여전히 웃는 얼굴의 직원이 재빨리 돈을 건네받는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아니, 이미 즐겁지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연의 신형은 초보자 도시에서 사라졌다.
 “오!”
 크다.
 진리의 끝 엘리멘탈 지부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연이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이었다. 초보자 도시도 넓었지만 엘리멘탈 시티에 비하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크기, 인구, 세련된 건물.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엘리멘탈 시티.
 연이 시작한 국가인 세이룬 왕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마치 미국의 뉴욕과도 같은 곳.
 갓 레벨 100을 넘은 플레이어가 사냥할 만한 곳부터 고레벨들의 사냥터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었으며 온갖 중요한 퀘스트가 존재했기 때문에 세이룬 왕국에서 수도 스타폴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도시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도시로 나오려고 하는 건가?’
 멍하니 있으면 금방이라도 인파에 휩쓸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갈 것 같았기에 연은 곧바로 인욱이 찾아오라고 알려준 길드하우스 위치 정보를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이 건물에서 왼쪽으로 돌고, 그다음은 두 블록 직진한 다음 이 건물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여기다!’
 벽이 나왔다.
 ‘젠장할, 설명을 해주려면 제대로 해주던가.’
 절대 자신이 길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연.
 그 후로 몇 시간을 미아처럼 도시 안을 헤맨 뒤, 겨우 연은 길드하우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결국 길을 못 찾은 연이 인욱에게 도움 요청을 보내 직접 인욱이 데리고 온 거였지만.
 “넌 길치가 틀림없어. 어떻게 여길 못 찾냐.”
 인욱의 팩트폭력을 들으며 연은 길드하우스의 간판에 쓰여 있는 길드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푸른 달.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원래는 인욱이 자기 멋대로 ‘세계 최강 카로스(인욱의 게임 닉네임)와 그 외’라고 지으려다가 세린에게 얻어맞고 바꿨다고 했다.
 소수 정예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길드원은 20명 남짓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수로 이런 대도시에 번듯한 길드하우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 잘나가는 거 같기도 했다.
 길드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나머지 길드원들은 자리를 비웠는지 세린밖에 보이지 않았다.
 “응? 왜 너밖에 없어?”
 인욱이 혼자 남아 있는 세린을 보면서 의아한 듯 물었다.
 “나머진 다 레이드 뛰러 갔어. 난 직업 퀘스트 때문에 남아 있는 거고.”
 세린이 인욱과 함께 들어오는 연을 보며 눈인사를 했다.
 “오 잘됐다. 연 너 지금 레벨이 몇이야?”
 “72.”
 “뭐? 야, 형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말해라. 너 게임 시작한 지 이제 20일도 되지 않았잖아.”
 인욱이 연의 말에 다 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부터 우리가 키워줄 테니까 잘 받아먹어라.”
 “그 우리에서 나는 빼주길 바라.”
 인욱의 말에 세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뭐, 세린이 너 감히 길드 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냐!”
 “권위는 무슨 그리고 애초에 네가 멋대로 정한 거잖아.”
 “크흑!”
 완벽한 세린의 무시에 인욱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연은 대충 길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실세는 따로 있구나.’
 “필요 없다.”
 연은 처음부터 도움 같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도움을 받으며 레벨을 올리다 보면 실전 감각이 무뎌져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것을 연은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은 지금도 충분히 폭렙 중이었다.
 “어라, 무슨 일이냐? 분명히 보자마자 ‘지존님들 한 번만 키워주세요!’ 하면서 매달릴 줄 알았는데.”
 “······.”
 마음 같아서는 인욱의 말을 받아치고 싶었으나 그놈의 제한 때문에 꾹 눌러 참는 연.
 그때 갑자기 세린이 일어나더니 길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가?”
 “직업 퀘스트하러.”
 “잘됐다. 세린이 혼자 힘들 거 같으니 한묵이 네가 가서 도와줘.”
 말이 도와주라는 것이었지 사실은 가서 경험치나 좀 먹고 오라는 소리였다.
 “그런 곳에 얘를 데려갔다간 바로 죽을 텐데?”
 “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싫어, 안 그래도 힘든데 짐까지 맡으라고?”
 울컥.
 세린의 말에 뭔가 속에서 울컥함을 느끼는 연.
 세린의 레벨은 386으로 거의 400대를 바라보는 레벨이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연이 짐이 맞지만 연은 괜한 오기가 치솟았다.
 “가자.”
 “뭐? 하······ 맘대로 해 하지만 난 너까지 보호하지 못하니까 알아서 살아.”
 “알았다.”
 냉정한 세린의 말에 연이 짧게 대답했다.
 “그래, 연! 그 자세야. 최대한 살아남아서 경험치 쪽쪽 빨아 먹고 와라. 엄청 짭짤할 거······ 켁!”
 옆에서 싱글거리며 말하는 인욱이 꼴 보기 싫었는지 로우킥을 먹인 세린이 먼저 길드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갔다 오마.”
 “그래, 저렇게 말해도 세린이 쟤 의외로 마음이 여려서 잘 보호해 줄 거야. 내가 여기로 오라고 해놓고 같이 가지도 못하고 미안하다. 요즘 너무 바빠서 그래.”
 그래도 길드장이라고 처리할 일이 많았기에 당장 시간을 뺄 수 없었던 인욱은 연에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니다.”
 “근데, 한묵아.”
 “······?”
 “너 왠지 모르게 과묵해진 거 같다. 착각인가?”
 “······.”
 세린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연이 따라온다고 해서 싫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직업은 다른 클래스와는 달리 무척 특별했다.
 전설 클래스 ‘공간의 지배자’.
 ‘이세계’에서 일반 클래스와 히든 클래스의 직업의 차이는 별로 없지만 전설 클래스만큼은 예외였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 퀘스트도 무척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했는데 지금 가는 곳 또한 ‘죽은 용사들의 평원’이라고 하는 최소레벨 370 이상인 초고레벨 사냥터 중 하나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연이 죽으면 어쩌나 싶어 떼어 놓고 가려고 한 것이다.
 결국 연의 변덕으로 같이 가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세린은 같이 전주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때 그 돌.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갑자기 뚝 떨어졌어.’
 세린은 자신의 살짝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는 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음?”
 그때 세린의 눈에 비치는 연의 옷차림.
 아무런 방어력도 없는 기본 검은색 천 옷이다. 저런 옷으로 지금 자신이 가려는 사냥터에 갔다간 1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일단 옷부터 사자.”
 세린은 초보자의 보모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골이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 * *
 
 게임 ‘이세계’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많은 직업이 존재한다.
 도시에서 그 직업 관련 건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전직할 수 있는 일반 클래스부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고 특수한 시련을 겪거나 인연이 닿아야만 얻을 수 있는 히든 클래스까지.
 아이템과 비슷하게 직업도 희귀 도에 따라 제일 흔한 노멀(보통)부터 희귀, 유일, 전설까지 등급이 나누어져 있는데 솔직히 유일 등급까지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신화도 있다고 전해지지만, 신화 직업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설 등급의 클래스들은 특별했다. 그만큼 발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발견했다고 해도 전직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시련의 난이도는 극악을 달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대륙별로 각각 네 개씩만 존재한다고 전해지는 최고 등급의 클래스가 존재했는데 서대륙은 4대 용사의 전승, 동대륙은 4대 신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용사와 신공의 후예에게는 항상 대적자가 있게 마련. ‘이세계’에도 그 법칙은 성립하고 있었고 현재 그중 하나가 엘리멘탈 시티로 들어오고 있었다
 “휘유, 여기는 항상 활기 차단 말이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렁거리는 걸음으로 엘리멘탈 시티를 향해 걷고 있는 남자는 도시의 수많은 인파를 보며 휘파람을 불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긴가? 용사의 전승 중 하나인 ‘공간의 지배자’가 있는 곳이······.”
 
 * * *
 
 ‘오, 괜찮은데?’
 연은 장신구가 없다는 자신의 말에 세린이 일단 쓰라고 건네준 아이템들을 감정하는 중이었다.
 
 [메른의 목걸이 (희귀)
 방어력 5
 내구력 100/100
 제한 없음
 옵션 지능 +5
 24시간에 한 번 ‘무한의 마나’ 사용 가능
 설명 모험가 메른이 젊었을 적 사용했던 목걸이, 세트가 모이면 특수한 효과가 생긴다.
 무한의 마나: 5초간 기술을 사용할 때 마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메른의 팔찌 (희귀)
 방어력 5
 내구력 100/100
 제한 없음
 옵션 민첩 +5
 24시간에 한 번 ‘번개처럼’ 사용 가능
 설명 메른이 젊었을 적 사용했던 팔찌, 세트가 모이면 특수한 효과가 생긴다.
 번개처럼: 5초간 공격속도 200% 향상]
 
 [메른의 반지 (희귀)
 방어력 5
 내구력 100/100
 제한 없음
 옵션 근력 +5
 24시간에 한 번 ‘딜레이 파괴’ 사용 가능
 설명 메른이 젊었을 적 사용했던 반지, 세트가 모이면 특수한 효과가 생긴다.
 딜레이 파괴: 5초간 모든 스킬의 딜레이를 소멸시킨다.]
 
 이렇게 3개를 받았는데 메른의 반지 같은 경우는 연에게 무척 좋은 옵션인 디스트로이 딜레이가 달려 있었다.
 다른 직업군은 기술을 쓰기 전, 자세나 주문, 수인 등을 맺어서 기술을 발동시키지만 자신의 기술들은 그런 것 없이 오로지 딜레이만 지나면 발동할 수 있는 즉발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무한의 마나’와 함께 쓰면 무척 좋은 콤보가 나올 것 같았다.
 이 아이템들로 인해 자신은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거 주는 거 아니니까 쓰고 돌려줘.”
 “······.”
 물론 자신의 것이었다면.
 ‘먹고 튈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간 아이템은커녕 분노한 세린에게 목숨마저 잃을 거 같았기에 연은 그 생각을 고이 접어 넣었다.
 “여긴가?”
 “그래.”
 준비를 마친 연과 세린이 도착한 곳은 분명 나무하나 없는 하늘이 뻥 뚫린 평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음울해 보였다.
 확 트인 평원이 음울해 보인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이곳 위 하늘에만 먹구름이 잔뜩 끼어 날씨가 무척 흐렸고 발목까지 자란 풀들은 이상하게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수백 년 전, 마족과의 전쟁 때 수많은 영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곳, 죽은 용사들의 평원.
 연은 노인에게 받은 뒤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검인 ‘무명(無名)’을 꺼내 들었다.
 직업 퀘스트 천살행의 진행도에 따라 성장한다는 설정을 가진 검이라 아직 별다른 옵션은 없었지만 기본적인 공격력이 좋은 터라 연은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
 -살아 있는 자······ 죽어라.
 음울하게 평원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공격이 연과 세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해!”
 물론 세린이 외치기 전에 육감으로 미리 공격을 감지하고 몸을 굴리는 연.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흙먼지가 일어나며 공격의 여파가 닿은 곳의 땅거죽이 그대로 뒤집혀 버렸다.
 ‘장난이 아닌데?’
 다크 히어로.
 이곳 죽은 용사들의 평원에서 제일 기본적인 몬스터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이다.
 ‘이건 스쳐도 한방이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연은 뒤로 물러나며 곧바로 은신을 사용했다.
 “그대로 계속 숨어 있어. 내가 이 녀석을 처리할 때까지.”
 연에게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지는 세린의 신형.
 엄청 빠르게 이동하거나 은신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변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공간을 찢으며 사라지더니 다크 히어로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빠르구나.
 세린이 앞에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기운으로 감싼 검을 휘두르는 다크 히어로.
 하지만 세린의 공간이동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세린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듯 일렁이더니 그대로 세린을 삼키고는 다시 다크 히어로의 뒤에서 뱉어냈다.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
 단절(斷切).
 세린의 손을 따라 허공에 한 줄기 선이 그어졌다.
 다크 히어로는 본능적으로 맞받아치면 안 된다고 느꼈는지 몸을 움직여 세린의 공격 사정권 안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속으로 손을 움직이는 세린.
 그리고 어느 순간.
 턱!
 세린의 손이 다크 히어로의 갑옷에 닿았다.
 그 순간 세린의 입가에 아름답게 그려지는 호선.
 “공간 수축.”
 와직!
 세린의 그 말이 시동어였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세린의 손이 닿은 곳이 시작점으로 주위 공간이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던 다크 히어로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무, 무슨 크아아아악!
 임펙트 있는 등장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허망하게 사라지는 다크 히어로.
 ‘아니, 저거 사기잖아, 무슨 급소도 아닌데 몬스터가 한 방에 죽냐고!’
 자기한테는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지거나, 좀 더 강하게 휘두르는 그딴 기술들을 주고 세린한테는 저런 사기적인 기술을 준단 말인가.
 ‘똑같이 돈 내고 하는데 사람 차별하나. 그래놓고 말도 못 하게 해놓고. 하, 진짜 말이라도 풀어줬으면 좋겠다.’
 처음 지옥에 떨궈놓을 때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 이걸 보니 더욱 운영자들을 까고 싶어지는 연이었다.
 그 뒤로도 세린은 무리하지 않고 사냥터 외곽 지역에서 한 명씩 흩어져 있는 다크 히어로만을 안정감 있게 처리했다.
 혼자였다면 좀 더 평원 깊숙이 들어갔겠지만, 연이 신경 쓰였기에 오늘은 그냥 안전하게 사냥하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경험치를 받아먹을 수 있었지만 무척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도와주고 싶은데 절대 나서지 말라고 하니······ 공격은 안 통해도 시선 정도는 끌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심심해 죽겠네. 무슨 이벤트 같은 거 안 하나?’
 그때였다.
 피이잉!
 연은 자신의 육감으로도 인지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무엇인가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행운.
 머릿속으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런, 피해!”
 연은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세린의 허리를 낚아채며 재빨리 그림자 이동술을 이용해 자리에서 벗어났다.
 사람 하나를 더 데리고 이동하는 것은 혼자서 이동하는 것보다 마력 소모가 3배 정도 심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쿠아아아앙!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일까. 방금까지 연과 세린이 서 있던 곳은 반구형 모양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다.
 “뭐, 뭐야?”
 그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 세린이 재빨리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벅, 터벅.
 음울한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온몸을 칠흑과 같은 갑옷으로 감싸 붉은 눈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노래처럼 들려오는 불길한 음률.
 그것의 주위로 수많은 망령이 울부짖으며 그들의 주인을 찬양했다.
 추정 레벨 400 이상.
 죽은 용사들의 평원의 보스급 몬스터.
 “왜 이런 외곽에 저런 게······.”
 ‘아니, 이런 이벤트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죽음의 군주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 *
 
 정교한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진 멋들어진 검은 갑옷을 입고 자신보다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죽음의 군주는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고요히 연과 세린 앞에 섰다.
 -그대, 용사의 전승자여. 그대를 보기 위해 본 군주가 친히 이곳으로 왔도다. 부디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노라.
 정확히 세린을 바라보며 말하는 죽음의 군주.
 “어떻게 보스 존을 벗어 난거지? 버그인가? 일단 연 넌 숨어.”
 “알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의 레벨로는 무조건 방해가 될 것이 뻔했기에 연은 잠자코 은신을 시전했다.
 -선공을 양보하도록 하지.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지.”
 세린의 말과 동시에 그녀의 주위로 투명한 검들이 생겨나더니 그대로 죽음의 군주를 향해 쏘아졌다.
 -호오, 탐색전인가.
 죽음의 군주가 말을 마치며 대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정확히 날아오는 투명한 검의 숫자만큼의 검은 기운이 대검에서 튀어 나가더니 정확하게 검들을 향해 날아갔다.
 “도약!”
 그러나 투명한 검들은 검은 기운에 닿기 직전, 세린의 외침에 따라 사라져 버리더니 그대로 죽음의 군주 눈앞에 나타났다.
 -잔재주로구나.
 키잉.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살짝 발을 구르는 죽음의 군주. 거기에 따라 그의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생기더니 날아오는 검들을 모조리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어차피 시간 끄는 용도에 불과한 것. 어느새 세린은 입으로 주문을 읊조리며 죽음의 군주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세린의 클래스 ‘공간의 지배자’.
 분명 마법사 계열 클래스지만 위력적인 공격이 대부분 근접해서 상대방의 신체에 접촉해야만 발동하기 때문에 무척 까다로운 클래스였다.
 그렇기에 세린은 기술의 숙련도를 올리는 동시에 자신의 기술에 관해 수많은 연구와 시도를 거쳐 다양한 콤보를 만들어 내었다.
 ‘방심하고 있을 때 한 방에 끝내야 해. 지금 못 끝내면 무조건 죽어.’
 톡.
 세린의 손이 죽음의 군주의 갑옷에 닿는 동시에.
 “······그러므로 나는 바란다, 무한한 속박을.”
 세린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티이잉.
 기묘한 울림이 세린의 손을 중심으로 죽음의 군주에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웅웅웅.
 그 울림에 닿는 곳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점차 세력을 넓혀가 나중에는 결국 죽음의 군주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크, 크으윽! 이건!
 “내가 전승자인 걸 알면서도 기술에 대해 방비는 하지 않은 모양이지? 걸린 이상 이미 소용없어. 공간 수축.”
 빠르게 다음 주문을 외우며 세린은 거침없이 진동하는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죽음의 군주의 투구에 가져다 대었다.
 -이, 이건!!!
 와짝!
 죽음의 군주의 머리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죽음의 군주.
 “후우!”
 정말로 천운이었다. 죽음의 군주가 방심하지 않고 선공의 양보 없이 달려들었더라면 쓰러진 건 세린 자신이었을 것이다.
 “끝난 건가?”
 연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며 세린에게 물었다.
 “그래, 지금까지 이 기술을 급소에 맞고 살아 있는 몬스터는······.”
 푸욱!
 연에게 말하는 세린의 복부를 관통하며 뚫고 나오는 대검.
 -꽤, 아프더군.
 그런 세린의 뒤에서 피처럼 붉은 안광을 뿌리는 죽음의 군주가 서 있었다.
 “연······ 도망······ 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엄청난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세린.
 복부가 대검으로 관통된 부상이다. 쉴 새 없이 금빛 가루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본 연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급속도로 머리가 식는 것을 느끼며 연은 지금 이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절대 앞에 있는 이 빌어먹을 놈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하는데 혼자서 도망칠 순 없다. 자신은 세린을 데리고 가야만 했고 세린은 지금 죽음의 군주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상태.
 그렇다면 접근한다.
 “후우.”
 연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무한의 마나.
 번개처럼.
 딜레이 파괴.
 아까 전 세린에게 받은 장신구의 모든 기술을 발동시킨다.
 그림자 이동술.
 연의 신형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죽음의 군주 앞에 있는 세린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싸울 때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놈이로구나.
 곧바로 연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죽음의 군주.
 그림자 이동술.
 자신의 민첩으로는 저 공격에 반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상하여 피하면 그뿐.
 다시 한번 그림자 이동술이 펼쳐지며 연이 죽음의 군주 뒤로 돌아갔다.
 쾌살.
 곧이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휘둘러지는 연의 검.
 스각!
 갑옷의 틈 사이로 정확히 공격을 베어 넣는다.
 세린이 보았다면 그 정교함에 경악할 만한 움직임!
 -큭!
 죽음의 군주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연은 이미 다시 그림자 이동술을 사용하여 죽음의 군주 앞으로 되돌아간 상태로 쾌살을 날리고 있었다.
 스각!
 ‘번개처럼’의 효과로 강화된 쾌살이 다시 한번 갑옷 사이로 정확히 들어가 유효타를 먹인다.
 -이런 버리지 같은 놈이!!
 연에게 농락당한 죽음의 군주가 소리를 지르며 온몸에서 엄청난 기파를 폭발하듯 발산했다.
 ‘됐다.’
 온몸으로 기파를 발산하게 되면 미세하지만 분명 약간의 틈이 나게 된다. 그리고 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림자 이동술.
 연은 그림자 이동술을 이용하여 세린을 챙긴 다음.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튀는 거지!’
 5초가 지날 때까지 최대한 그림자 이동술로 거리를 벌려놓은 다음, 암영보를 사용해 미친 듯이 달리는 연.
 -크아아악! 이 비겁한 녀석! 도망가지 마라!
 ‘아니, 그 힘 가지고 나하고 싸우는 거 자체가 비겁한 거야.’
 뒤에서 상당히 분노한 죽음의 군주의 외침이 들려 왔지만 연은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그 상태로 얼마나 달렸을까.
 피이잉!
 연은 문뜩 자신의 육감에 걸리는 섬뜩한 느낌에 세린을 안고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렀다.
 콰광!
 곧 연이 있던 자리에 박히는 한 자루의 대검.
 그리고 그 검은 주인도 없는 데 스스로 뽑히더니 다시 연을 노리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이런 젠장할! 처음부터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괜한 치기로 인해 세린과 같이 가기로 한 과거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고 생각하며 연은 다시 세린을 안고 암영보를 사용해 검을 피했다.
 스각!
 ‘크윽! 젠장!’
 스치고 지나간 것도 아니다. 검이 지나갈 때 일어나는 파동에 살짝 닿은 것뿐인데 체력이 3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 버렸다.
 아까 세린이 건네준 포션을 재빨리 세린과 자신의 입으로 털어 넣는 연.
 ‘출혈이 너무 심해. 포션을 마신다고 해도 구멍 난 독에 물 붓기야. 빨리 신전에 가야 하는데.’
 연이 세린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죽음의 군주가 어느새 소환한 연기로 이루어진 말을 타고 나타났다.
 -드디어 잡았다, 쥐새끼.
 스르르 떠오르며 저절로 죽음의 군주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대검.
 “이런······.”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연의 눈은 열심히 활로를 찾고 있었지만 모든 감각은 이미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만 죽어라.
 죽음의 군주의 대검에 서려 있는 검은 기운이 점점 압축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압축되다 못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검화(劍火).
 지금의 연의 수준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초고위급 기술.
 ‘끝인가······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죽인다.’
 연은 그렇게 다짐하며 세린을 한번 슬쩍 보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게 타오르는 검이 연의 목을 막 치려는 순간.
 “필드명, 성지(聖地), 개방.”
 죽음의 군주 뒤쪽에서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문뜩 들려오더니
 갑자기 검은색 풀로 뒤덮여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던 평원에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파아앗!
 그리고 이내 온갖 부정하고 사악한 것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대지가 죽은 용사들의 평원 한복판에 생성되었다.
 -이건 또 뭐냐!
 당연히 사이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던 죽음의 군주에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죽음의 군주와 내뱉은 말과 똑같이 생각하며 연은 필드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오우, 이미 죽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직 살아 있었네?”
 연청색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연청색 눈을 가진 쾌활해 보이는 사내가 웃으며 서 있었다.
 -넌 누구냐?
 “몬스터한테 이름을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성스러운 사슬.”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쇠사슬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죽음의 군주의 온몸을 속박했다.
 치이익!
 -크으윽! 이 정도로는 안 된다!
 마치 고기 굽는 것처럼 쇠사슬이 닿는 곳마다 연기가 나는 죽음의 군주가 재빨리 대검을 휘둘러 사슬을 잘라 내었다.
 그와 동시에 이어지는 공격.
 -막아 봐라, 서클 오브 데스!
 “죽음의 동그라미? 이름 진짜 유치하다.”
 -죽음의 원이다!
 “그거나, 그거나~”
 죽음의 원이 사내에게 닿으려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형.
 -네놈도 공간이동이냐!
 슈슉.
 분노한 죽음의 군주 뒤에서 사내가 나타나더니 그대로 죽음의 군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거 알아? 이미 필드 안의 모든 게 내 의지대로 움직인 다는 것을······.”
 -이놈이!
 사내는 죽음의 군주가 휘두르는 검격을 피해 뒤로 슬쩍 빠지더니 그대로 외쳤다.
 “어디 보자, 기술이······ 대지여 그를 묶어라, 속박의 십자가, 신성의 말뚝, 성스러운 사슬.”
 딜레이조차 존재하지 않고 연달아 쏟아지는 기술.
 사내의 말에 따라 갑자기 땅이 솟아나 죽음의 군주를 감싸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느새 그의 뒤에 생겨난 황금빛 십자가에 죽음의 군주의 손과 발을 뚫고 지나간 말뚝이 박혔다.
 마지막으로 온몸을 칭칭 감는 성스러운 사슬.
 -크아아아악! 네놈! 어떤 저주받을 신의 종이더냐!
 “뭐, 신의 종까지는 아니고 내 능력 중에 생성한 필드의 속성에 맞는 기술 열 개를 랜덤으로 주는 것이 있거든.”
 -뭐, 뭐?
 당황하는 죽음의 군주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며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운이 좀 좋은 편이거든? 그래서 이런 기술이 걸렸어.”
 -······?
 “천벌.”
 -뭐? 아, 안 돼, 그 기술은! 안 돼!!
 알고 있는 기술인지 죽음의 군주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의 몸을 속박한 신성마법들은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불현듯 열리기 시작하더니 죽음의 군주 주위에 은은한 빛을 띤 글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이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축복의 노래.
 마침내.
 크슈우우우우웅.
 한 줄기의 빛이 열린 하늘에서 죽음의 군주를 향해 떨어졌다.
 -제, 제발! 끄아아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소멸해 버리는 죽음의 군주.
 ‘굉장하군.’
 자신과 세린이 그렇게 노력을 해도 죽일 수 없었던 죽음의 군주를 저리 쉽게 소멸시킬 줄이야.
 물론 상성이란 것이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저 정도의 인물이 흔치 않다는 것을 ‘이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연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연의 앞에 있는 사내는 무척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필드 마스터 일렉.
 레벨 400을 돌파한 40인의 왕 중 하나.
 필드를 자신이 원하는 속성과 지역으로 바꾸는 것은 그의 성명 절기나 다름없는 기술이었다.
 “헤이, 괜찮은 거야?”
 “덕분에.”
 연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는 세린에게 한병의 포션을 더 먹인 후, 일렉을 보며 말했다.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나 몰라?”
 “모른다.”
 다섯 별조차 몰랐던 연이 40인의 왕을 알 리가 없었다.
 “이런, 더 분발해야겠는걸?”
 “은혜는 나중에 갚지.”
 세린의 상태가 너무 위급했기에 연은 일단 신전으로 향하려고 세린을 안았다.
 “브라더, 잠깐, 잠깐만.”
 “뭔가?”
 “그 여자는 놓고 가.”
 “뭐?”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의아해하며 말하는 연.
 “어, 음······ 그러니까 내 직업이 좀 특이해서 말이야. 이 직업의 본래 주인이 4대 용사를 무척 싫어했거든.”
 “4대 용사?”
 세린이 4대 용사의 전승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모르는 연에게는 무척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래, 그래서 직업 퀘스트가 용사들의 전승자들을 모두 한 번씩 죽이는 거란 말이야. 3명은 이미 죽였고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연은 슬쩍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 죽어줘야겠어.”
 그림자 이동술.
 일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의 신형은 이미 그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쾌살.
 완벽한 타이밍의 기습!
 카앙!
 그러나 일렉의 목걸이가 반짝이더니 반투명한 보호막이 생성되어 그대로 연의 검을 튕겨내 버렸다.
 “오우, 살벌한데? 하긴 자기 일행을 죽인다는데 순순히 내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전혀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젠장할!’
 대체 오늘 하루 동안 ‘젠장’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내뱉는 건지.
 연으로서는 평생 처음이라 할 정도의 무력감을 오늘 연달아 느끼고 있었다.
 지옥에서는 항상 혼자였기에 몰랐다.
 그렇지만 여긴.
 지금 당장 자신의 옆에는 지킬 것이 있었고 자신의 눈앞의 적은 너무나도 강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길 수 있겠지만 그 시간 동안 적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부술 것이다.
 그동안 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자신은 지옥에서 갈고 닦은 힘을 사용할 수 없었고 당장의 적은 강하다. 한 번 죽으면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적이 이번 한 번이 아니라면?
 더욱 빠르게 힘을 길러야 한다.
 지옥에서 살기 위한 투쟁을 할 때처럼.
 연은 자신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 지금 주먹 쥔 거야? 그래서 어떡하려고? 한 번 더 덤비게?”
 일렉의 말에 조용히 쳐다볼 뿐인 연.
 “하하, 지금은 너무 일러, 브라더. 뭐, 앞으로도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
 연이 대답이 없자,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렉이 말을 이었다.
 “그 여자도 한계인 것처럼 보이는데 슬슬 마무리 짓자고. 아, 맞다! 브라더, 내가 이번에 새로운 필드를 하나 개방했거든? 이 필드는 무척 특이하게 중간계에 있는 필드가 아니라 굳이 따지면 저승 쪽 필드라서 말이지.”
 “······.”
 “그래서 말이야. 시크릿 능력치도 사용할 수가 있다네. 정말 신기하지 않아? 나 시크릿 능력치도 꽤 높은 편이라 훨씬 강해지는 거라고! 이 정도면 거의 ‘다섯 별’도 상대할 수 있을걸?”
 일렉의 말에 연의 눈이 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아,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조금 흥분해서 말이야. 아무튼 내가 이 필드를 중간계 최초로 브라더에게 선보이는 거야. 영광으로 알도록 해.”
 일렉은 잠시 스킬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외쳤다.
 “특수 개방, 필드명······.”
 씨익.
 연의 입가에 불길한 웃음이 걸린다.
 “지옥.”
 그 순간.
 세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 * *
 
 GODS 본사의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팀장실.
 “팀장님!! 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난번 팀장과 밀담을 나누던 사내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뭔데? 아니, 일단 숨부터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해 봐.”
 “그, 이레귤러, 후우, 이레귤러가.”
 팀장의 말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을 정리하는 듯한 사내.
 “이레귤러? 이레귤러가 왜?”
 “이레귤러가 본체로 중간계에 강림했습니다.”
 “미친, 그걸 왜 지금 말해!
 사내의 말에 벌컥 소리를 지르는 팀장.
 “아니, 팀장님이 숨부터 가라······.”
 “됐고, 수호룡들이랑 칠선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봐. 아니, 대체 그것들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계약을 맺어 놓은 건데.”
 “진정하십시오. 그나마 다행히도 불완전한 강림입니다.”
 “그러겠지! 완전하게 강림하면 그 순간, 세계가 붕괴할 텐데, 그러면 네가 세계가 붕괴하였습니다! 이러면서 뛰어왔겠지.”
 팀장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어렸다.
 중간계는 이미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구축된 세계. 그렇기에 조금의 충격만으로도 밸런스가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중간계에 강림하지 못하게 미리 다른 신들과 계약을 맺어 놓았건만······.
 “그새 새로이 생길 줄 몰랐지······.”
 팀장의 허탈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 * *
 
 ‘이세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륙마다 비밀리에 그 대륙을 수호하는 존재들이 있다.
 서대륙에는 4개체의 수호룡이라 불리는 용들이 그것이었고 동대륙에는 칠선(七仙)이라 불리는 수호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륙을 관조하고 있던 수호룡 중 하나 화룡왕 이그니스는 갑작스러운 세계의 진동에 목을 길게 빼고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그니스, 자네도 느꼈나?
 그때 다른 수호룡 중 하나인 지룡왕 발크리드가 이그니스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그래, 이건 틀림없이 신이 강림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야.”
 이그니스의 말에 발크리드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분명히 다 막았다고 했었는데 어찌 이런······ 진정 신이라면 우리 둘만으론 안 되네. 지금 동대륙에서 칠선 중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모두 오고 있다고 하니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같이 가 보세나.
 “그러지.”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을 마친 이그니스는 근원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신이기에 이렇게······.”
 소름 끼칠 정도의 광폭함이 느껴진단 말인가.
 
 * * *
 
 “하아······.”
 대지에서 올라오는 너무나도 익숙한 유황 냄새를 맡으며 연은 나른하게 숨을 내뱉었다.
 
 [시크릿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개방됩니다.]
 
 이런 메시지가 들려오기 전부터 이미 연은 알고 있었다.
 기감이 열리며 순식간에 대륙 전체를 뒤덮는다.
 그에 따라 인지 범위 또한 확장되어 서대륙 전역의 모든 움직임이 연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보통 인간의 머리로는 받아들이는 순간 터져 버릴 정도의 정보량이지만 연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이었기에.
 서대륙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4개의 개체가 자신을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고 동대륙 쪽에서도 그런 존재감을 가진 개체들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 또한 느껴진다.
 불완전하게 되찾은 힘이었지만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과 해방감에 연은 가만히 서서 그 기분을 만끽했다.
 “뭐야? 원래 특수 개방은 이런가?”
 일렉은 필드 ‘지옥’을 여는 순간, 느껴지는 대지의 떨림에 순간 움찔했다.
 지금까지 필드 개방을 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감각이다.
 ‘대지가 떨린다기보다는 마치······.’
 세계 자체가 떠는 듯한 느낌이랄까?
 “뭐, 그만큼 이 기술이 대단한 기술이란 거겠지? 브라더 어때, 엄청나지 않아? 보통 플레이어들은 이 ‘지옥’이란 게 존재하는지도 모를 거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굉장했던지 일렉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는 연을 향해 말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거야? 그렇게 놀라워하다니 기쁜걸? 그래도 봐주진 않을 거야. 내가 아직 특수 개방은 익숙지가 않아서 말이야. 빠르게 갈게?”
 “······.”
 여전히 연이 말이 없자 일렉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삐죽거리며 빠르게 기술을 외웠다.
 “지옥수(地獄獸) 소환.”
 그와 동시에 지옥에서만 서식한다고 알려진 지옥수들이 일렉의 앞에 소환되었다.
 보기만 해도 비명이 나올듯한 소름 끼치는 외견을 기본적으로 장착한 괴수들을 일렉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한번 쳐다보고는 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죽여라.”
 이제 지옥수들이 저 과묵한 녀석을 찢어발기고 곧이어 용사의 전승자의 목숨 또한 취하리라.
 그르르륵.
 끼이이잉.
 그러나 곧 일렉은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범접할 수 없다는 듯 거리를 둔 채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마치 자신들의 왕에게 경배하듯.
 모든 지옥수가 연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뭐야? 이것들 왜 이래? 소환자는 난데 왜 저 녀석한테 고개를 조아려? 이거 버그 아냐?”
 그런 지옥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소리치는 일렉.
 그때 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눈빛과 그에 반해 입가에 걸려 있는 희미한 미소.
 일렉은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떨리기 시작하는 일렉의 몸.
 ‘떨어? 내가?’
 조건만 맞으면 ‘다섯 별’조차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레벨 100도 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저런 초보자를 보고 떤다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쓸모없는 것들! 돌아가!”
 재빨리 지옥수를 역소환한 일렉은 계속해서 떨리는 자신의 몸을 애써 무시하며 바로 다음 주문을 외웠다.
 이깟 놈을 상대로 소비하는 시간이 아까웠기에 단번에 지옥 필드가 생성됨에 따라 얻게 된 기술 중 최강의 기술로 끝낸다.
 자신의 능력들은 랜덤 뽑기가 많았기 때문에 일렉은 행운 능력치를 상당히 올려놓았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경우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 운은 지금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만타로스의 멸화(滅火).”
 신화급 주문 만타로스의 멸화
 지옥의 8군주 중 하나로 거의 신에 가까운 힘을 지녔다고 알려진 만타로스의 힘을 빌린 주문으로 존재 자체를 태운다고 알려진 불.
 그 불이 중간계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주문은 아직 팔론조차 사용하지 못해.’
 화르륵 푸화하학!
 주문에 따라 새끼손톱만 한 조그만 검은색 불덩어리가 연의 가슴팍에 생성되더니 곧이어 순식간에 확장되어 이내 그를 삼켜버렸다.
 ‘허, 저런 기술이 있을 줄이야.’
 일렉은 그 불길을 보며 생각했다.
 기, 즉 마나는 마치 공기처럼 중간계 어디든 존재한다. 기본적인 마법은 마나를 사용하여 발현할지언정 마나 자체가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만타로스의 멸화는 그러한 법칙이 우습기라도 한 듯 마나 그 자체 태우며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공간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그 근처의 공간은 마치 불길처럼 심하게 일렁거리고 있다.
 그렇기에 일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 앞에서 건방진 눈으로 쳐다보던 녀석은 죽었다고.
 그래서 연에게서 눈을 떼고 세린을 향해 다가가려 할 때였다.
 “어딜 봐?”
 흠칫.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에 일렉이 고개를 돌리자 연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불속에서 걸어 나왔다.
 “살아······ 있어?”
 심지어 그을린 자국조차 없다. 만타로스의 멸화란 기술 자체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은 모습.
 “그럼 내가 이런 쓸모없는 기술에······.”
 연이 조용히 말하며 한 발을 내딛자 공간 자체가 접히며 일렉의 바로 앞으로 연의 신형이 당겨졌다.
 “죽겠냐?”
 “허억!”
 조금만 얼굴을 내밀면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에 연이 나타나자 일렉이 놀라며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대, 대체 너 뭐, 뭐야?”
 아직 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구 소름이 끼치며 말을 듣지 않는 몸. 그리고 그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너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격이 너무나 떨어지기 때문에 수호룡이나 칠선처럼 직접적인 압박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먼저 공격했으니 내가 널 죽여도 상관없겠지?”
 “무, 무슨!”
 어느새 공중으로 들린 무명이 시린 빛을 발했다.
 “아, 맞다. 이 기술도 중간계 최초야, 기대해도 좋아.”
 생긋 웃으며 말하는 연.
 쫘아악!
 마치 종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
 그리고 눈앞을 가득 메우는 푸른색 빛이 일렉이 사망하기 전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곧 죽겠네.’
 세린은 극심한 체력의 저하로 인해 계속해서 깨어났다가 기절했다가를 반복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며 생각했다.
 이미 신전에 가도 늦은 상태.
 방금 전 깨어났을 때 본 광경은 연청색의 머리칼의 건들거리는 사내가 죽음의 군주를 계속 몰아붙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린이 깨어나서 보고 있는 광경은 바로.
 ‘응? 저건······?’
 연이 그 사내를 푸른색 빛과 함께 갈라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린은 곧이어 들려오는 ‘사망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아쉽네.”
 일렉이 사망하자 빠르게 소멸하는 자신의 힘을 느끼며 입맛을 다신 연은 세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사망하여 점점 금빛 가루로 화하고 있는 세린.
 “흠······.”
 계속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던 거대한 존재감들도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에 도착할 것 같았다.
 물론 싸우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그들과 마주친다면 그것보다 곤란한 일을 겪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 이건 왠지 사용할 때마다 중2병 같아서 사용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
 곧이어 연이 세린을 바라보더니 평소와는 다른 기이한 울림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공격을 받지 아니하였다.>
 세계에 자신의 말을 새김으로써 세린이 공격을 받은 사실을 지운다.
 <그러므로 너는 다치지 아니하였다.>
 마찬가지로 다친 사실도 지운다.
 <고로, 너는······.>
 공격을 받아 다친 원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죽지 아니하였다.>
 인과율 조정.
 화아악!
 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새하얀 빛이 세린을 감싸기 시작한다.
 연이 신격을 획득한 후 익힌 기술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2장 봉인된 악마
 
 
 죽은 용사들의 평원.
 “이미 늦었군.”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사내가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네, 이그니스. 우리가 동대륙에서 오는 걸 기다리느라 늦었나 보구만.”
 이그니스의 말에 그 옆에 서 있던 백발을 허리까지 기른 선풍도골의 노인이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애초에 우리 수호룡들이 전부 움직일 수 있었다면 자네들까지 부를 일은 없었을 거다. 동대륙 일도 바쁠 텐데 이곳까지 계속 오게 해서 미안하군.”
 “그런 말은 하지 말게. 무려 신이 강림한 사건이네. 우리도 오는 게 당연한 거지.”
 이그니스의 말에 저번에 연의 사부와 같이 이야기했던 중년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검선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럼! 애초에 다 우리가 사는 곳을 지키고자 하는 일인데 그런 구분이 무슨 필요인가. 그것보다 남은 흔적들을 살펴보게나. 여기, 이곳에서 지옥 군주 중 한 명인 만타로스의 힘이 사용된 것 같은데······.”
 “지옥? 지옥 말인가? 설마······.”
 어느새 갈색 머리의 청년으로 모습을 바꾼 지룡왕 발크리드의 말에 선풍도골의 노인, 월선(月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급 게이트!”
 “맞네.”
 월선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는 발크리드.
 “그 당시 살선이 직접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들었네. 아마 그때 중간계로 올라와서 계속 힘을 감추고 지내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잠깐 방출한 거 같네만, 그리고 다시 모습을 감췄고.”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지옥에는 신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물론 50년 전에 들은 정보이긴 하지만.”
 발크리드의 말에 이그니스가 이상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본인도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은 모르지만, 예전에 듣기로는 신에 가까운 무력을 지닌 존재는 여럿 있어도 신격을 획득한 존재는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사이, 8대 군주 중 하나가 신격을 획득하고 중간계로 나왔다 이 말이로군.”
 “그리고 그 군주는 만타로스일 확률이 높고.”
 일리 있는 추측에 수호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검선의 시야에 묘한 것이 들어왔다.
 “이건······.”
 왜 지금까지 이걸 보지 못했을까.
 시선을 두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자그마한 흔적.
 그러나 일단 그것이 시야에 잡히자 검선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말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응? 검선 자네 왜 그러나?”
 월선이 그런 검선을 눈치채고 검선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경악.
 “허, 이럴 수가······ 이런 게 되는 건가?”
 다른 두 용도 이내 그 흔적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미세하게 명멸하는 푸른빛 사이로 보이는 마나의 흔적.
 “만타로스가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아니, 만타로스가 아닐세. 이건, 그의 속성과는 너무나도 달라.”
 그 흔적을 따라 머릿속으로 기술을 복원시켜 본 검선이 곧이어 중얼거렸다.
 “이런 것도 가능할 줄이야. 한 수 배웠군. 이름 모를 신이여.”
 말을 마친 검선의 눈이 시리게 가라앉았다.
 
 * * *
 
 “으음······.”
 세린은 자신의 눈을 강렬하게 때리는 햇빛을 느끼며 살며시 일어났다.
 그러자 보이는 익숙한 길드 하우스의 풍경.
 “뭐야, 난 이미 죽었는데······.”
 자신이 정신을 잃을 때 들은 ‘사망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가 환청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쩡한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세린이 중얼거렸다.
 “얘가 일어나자마자 헛소리를 하네. 너 기억 안 나? 하여간 ‘이세계’는 게임이 너무 현실적이야.”
 세린의 말을 옆에서 열심히 서류정리를 하던 인욱이 대답했다.
 “무슨 기억?”
 게임에서조차 일을 하는 인욱이 불쌍해 보일만도 하건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대답만을 요구하는 세린.
 “너 연에게 업혀 왔잖아. 연말로는 신전에서 치료받고 바로 온 거라는데······ 어휴, 네가 연을 보호해 줘야 하는데 오히려 업혀 오면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진작 내 말을 잘······ 켁!”
 은근슬쩍 자신을 놀리려는 인욱의 정강이를 습관적으로 걷어찬 세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직 죽음의 군주는 내 능력 밖이야.”
 “끄아아악! 내 다리! 사람 죽는다!”
 세린은 온갖 엄살을 다 피우는 인욱의 정강이를 한 대 더 걷어 차준 후, 물었다.
 “그런데 연은 어디 갔어?”
 “끄윽, 연? 아까 무게 잡으면서 ‘난 강해져야 한다.’ 그러더니 나갔어. 레벨이라도 올리러 갔나 보지 뭐.”
 “벌써 나갔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연을 떠올리는 세린.
 고등학교 때는 그저 조용하고 소심해 보이기만 했던 학생이었다. 인욱같은 친구가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러나 이번에 전주에서 다시 보게 되었을 때부터 예전 모습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남들보다 말수가 적었지만 소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눈빛이 달라졌달까? 그리고 무엇인가.
 ‘신비로워.’
 현실에서 인질범을 잡을 때 공중에 있던 돌을 손도 안 대고 움직인 것부터, 자신조차 버틸 수 없었던 죽음의 군주로부터 사람 한 명을 업고 무사히 도망쳤다. 거기다가······.
 ‘마지막 그 장면.’
 자신이 본 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죽음의 군주조차 가지고 놀던 유들거리는 인상의 사내를 일격으로 갈라버리는 장면.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 건지 무척이나 모호했다.
 하지만 지금 세린은 그것보다 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데······.”
 받을 상대가 없는 세린의 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 * *
 
 “레벨 200 이상 전사 플레이어 한 분 구합니다!”
 “영웅급 이상 대범위 공격 주문 가능한 법사 구해요!”
 “잡템들, 상점보다 조금 더 비싸게 삽니다!”
 “유일 등급 중에서 최상급인 클레이모어 떨이 처분합니다! 한 번씩 보고들 가세요!”
 엘리멘탈 시티의 중앙 광장은 마치 시장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활발했다.
 ‘와, 사람에 치인다 치여.’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연.
 길드에서 당차게 ‘난 강해져야 한다’라고 말하고 나온 것치고는 무척 초라한 몰골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야 사냥터가 나오는 거지? 무슨 놈의 게임이 미니맵도 없냐고.’
 이제는 연도 자신이 길치라는 것을 슬슬 자각하고 있었다.
 ‘하, 지도라도 하나 가지고 나올걸.’
 길드에 세린을 눕히자마자 급하게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세린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욱에게 ‘난 강해져야 한다’는 되도 안 되는 말을 내뱉고는 길드에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템 때문이지만.”
 혹시라도 일어난 세린이 ‘이제 아이템들 반납해’라고 할까 봐 허겁지겁 나온 것에 불과했다.
 ‘이건 절대 먹튀가 아니야.’
 그냥 그저 다시 돌려달라고 말하기 전까지만 쓰는 것뿐.
 그리고 세린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세린을 살려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무려 신격의 권능을 사용하면서!
 물론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용했기에 그만한 페널티가 따라붙어야 했지만, 어차피 지금 자신의 능력치에 붙는 것도 아니고 곧 봉인될 시크릿 능력치에 붙을 것이기에 마음 놓고 쓴 것이었다. 이제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다시는 쓸 일이 없을 능력이기에.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던 연의 귀에 날카로운 소프라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진짜 왜 계속 쫓아오는 거야!”
 꽤 커다란 외침이었기에 연을 비롯한 다른 플레이어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보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그 여자와 대치하고 있는 무리.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색깔을 맞춘 듯 태양 빛을 담은 루비 같은 눈동자에는 한가득 짜증이 담겨 있었다.
 “아니, 그걸 네가 몰라서 묻는 거냐? 네가 원한의 숲에서 우리에게 한 짓을?”
 “아, 그거······.”
 이제야 그 일이 기억난다는 듯이 여자, 헬리아는 난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긁었다.
 원한의 숲.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고스트 타입의 몬스터들이 많이 출몰하는 사냥터다.
 체력은 낮지만 보통의 물리 공격은 무시하는 놈들이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다른 사냥터보다 아주 까다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헬리아의 직업은 일단 마법사 계열이었기 때문에 전사 직군보다는 비교적 쉽게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손길.”
 끼에에에엑!
 “와, 진작 여기서 사냥할걸. 잡기도 쉽고 경험치도 짭짤하잖아.”
 정확도만 높다면 낮은 체력 때문에 금방금방 죽는 몬스터들이었기에 헬리아는 여기야말로 자신의 인생 사냥터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유령 기사.
 유령마를 타고 다니는 유령 기사. 당연히 일반 물리공격은 모조리 씹고 어지간한 마법까지 자신의 몸을 흩어지게 함으로써 피해 버리는 아주 까다로운 놈이다.
 역시나 유령 기사는 헬리아의 공격을 모두 피하며 그녀의 체력을 야금야금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크흐흐······ 목숨을 내놓아라.
 몇 개의 문장을 반복하며 요리조리 피하는 유령 기사는 여간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아 진짜! 좀 맞아라! 바람 칼날! 어둠 창!”
 마침내 치열한 전투 끝에 유령마를 쓰러뜨리고 유령 기사의 체력도 반절 이상 깎았을 무렵.
 -나의 말 루시오의 죽음을 너 역시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2페이즈가 시작되며 유령 기사의 신형이 흩어졌다.
 “또 뭐야? 큭!”
 -크흐흐.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헬리아의 뒤에서 소리 없이 영체가 뭉쳐 유령 기사의 신형을 이루더니 그대로 일격을 가하고는 다시 흩어졌다.
 “정말 골 때리네!”
 그 전까지 공격을 피할 때만 흩어지던 놈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츠팟츠팟.
 마침내 자신의 체력이 15% 남짓 남았을 무렵, 드디어 폭발하는 헬리아.
 “······모든 걸 찢어발겨라, 후우, 후우, 이젠 못 참겠다. 이것도 한번 피해 봐라, 작열의 바다!”
 화아아악!
 영웅 등급 주문 작열의 바다.
 그 순간, 주문을 외운 그녀를 중심으로 엄청난 고열의 화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끄어어어!
 피할 곳이 없는 범위 공격이었기에 유령 기사는 그 일격을 맞고 소멸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세계’는 극도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숲에서 불마법을 쓰면 당연히 불이 붙고 커다란 불로 번질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몬스터들에게도 데미지를 입힐 수 있겠지만 문제는 숲에는 플레이어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숲에서는 불마법을 쓰더라도 대인 공격용 정도로만 쓰는 것이 플레이어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내려오는 불문율이었다.
 “뭐, 뭐야!”
 “어떤 미친놈이 숲에서 불마법을 사용한 거야!”
 “미쳐 버리겠네, 완전 작정하고 질렀어, 이거!”
 “끄아아아! 살려줘!”
 플레이어고 몬스터고 할 것 없이 살기 위해 하나 되어 불꽃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극한의 트롤링!
 “이런······.”
 정작 불을 지른 범인은 이미 빠져나와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말이다.
 강제로 단체 저승 투어를 하게 된 플레이어들은 기필코 불을 지른 범인을 잡아 죽이기로 다짐했고 지금에서야 부활하여 헬리아를 쫓았던 것이다.
 
 다시 현재.
 “아하하······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헬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살며시 뒤로 돌리며 사뿐사뿐 몇 발짝을 걷더니.
 “???”
 타다닥!
 그대로 튀기 시작했다.
 “잡아!!”
 그 뒤로 우르르 쫓아가기 시작하는 피해자들.
 그런데 방향이······.
 ‘왜 이쪽으로 오지?’
 연이 헬리아가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서려 할 때였다.
 “뒤를 부탁해!”
 “???”
 처음에는 누구를 보면서 한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곧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몰리기 시작했다.
 “나?”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멍청하기 반문하는 연.
 하지만 그 물음을 받아줄 사람은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저 녀석, 공범인가?”
 “당연히 아니겠지, 딱 봐도 시간 끌려고 하는 거잖아. 빨리 쫓기나 하자고.”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봐야지.”
 헬리아를 쫓던 플레이어 중 일부가 연을 향해 다가왔다.
 “이보슈.”
 그중 어깨너비가 연의 두 배만 한 전사가 연에게 말을 걸었다.
 “······?”
 “당신 저기 도망가는 녀석과 공범 이유?”
 “아니다.”
 “흠, 그럼 일주일 전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슈?”
 당연히 연은 전혀 관련이 없었기에 할 말이 아주 많았다.
 일주일 전 이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도 나고 설명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걸 1.5초 이내에 말할 자신은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페널티를 감수하고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연의 입으로 나온 소리는.
 “아, 어 음······.”
 단어로 완성되지 못했다.
 “이 자식! 얼버무리고 있어!”
 “공범인가!!”
 순식간에 연의 지위가 자식으로 격하되며 피해자들이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미 극도의 분노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에게 연의 얼버무림은 무척이나 수상쩍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런, 씨부럴.’
 지금 와서 변명해 봤자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얼굴들이다.
 “잡아!”
 ‘하, 인생······.’
 그림자 이동술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간 후 재빨리 튀기 시작하는 연.
 ‘그 여자, 보이기만 해봐라.’
 습관적으로 대머리 사부를 욕하는 동시에 연은 그 여자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붉은 머리와 루비색 눈동자.
 기필코 잡아서 오해를 푼 후.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다 받아낸다.’
 연의 눈이 빠르게 헬리아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 * *
 
 “후우, 후우! 드디어 찾았다!”
 도시 안에서 평생 이렇게 다시 뛰게 될 일이 있을까.
 ‘은신’과 그림자 이동술을 적절히 써가며 피해자들을 따돌리는 동시에 헬리아를 추적하던 연은 자신의 패시브 스킬 ‘길치’까지 발동하는 바람에 만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외형이 살짝 바뀌었기 때문에 눈에 튀는 붉은 머리카락과 특유의 걸음걸이를 보고 운 좋게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너!!”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앞을 틀어막는 연.
 헬리아를 부르는 연의 입에서는 자연히 울분에 찬 목소리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응? 넌······ 누구?”
 “너 대신 쫓긴 사람이다!”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헬리아의 대답에 연은 뒷골이 급속도로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시간 안에 말하느라 랩 하듯이 빠르게 말하는 자신의 처지 덕에 더욱 우울해졌다.
 “왜 이렇게 말이 빨라? 래퍼야? 음······ 아, 너 어제 그! 용케 따돌렸네?”
 “다른 할 말은?”
 마음속으로는 ‘그게 할 소리냐!’를 외쳤지만, 연은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헤헤, 미안하게 됐어. 그때는 어떻게든 따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유언 잘 들었다!”
 어차피 잡기 전, 말 한마디 들어준다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이었기에 헬리아의 호흡을 끊으며 튀어나가는 연.
 “자, 잠깐만 할 말이!”
 헬리아의 레벨은 200대 초반.
 딱 봐도 자신보다 100 이상 차이 날 것 같은 초보자가 자신을 향해 무작정 달려드니 그녀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주문을 외웠다.
 “화염구.”
 화르륵.
 가장 기본적인 마법이지만 그개서 빠르게 발동이 가능한 화염구 3개가 헬리아의 앞에 생성되더니 그대로 연을 향해 쏘아졌다.
 제일 기본적인 불 마법 중 하나라지만 탱커 계열도 아닌 저런 초보자가 이걸 맞고 멀쩡할 리가 없다.
 적당히 제압해놓고 자신의 제안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헬리아.
 그렇게 쏘아지는 화염구들을 보면서 연은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류살.
 달려가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연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대로 휘둘러지더니 이내 화염구들을 하나씩 살짝 건드리면서 지나가기 시작한다.
 툭, 툭, 툭.
 “!!!!”
 그러자 방향이 미세하게 꺾이면서 연을 스쳐 지나가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구체들.
 콰아앙!
 이내 뒤편에 있는 건물 부딪힌 다음 폭발하며 굉음을 토해내었다.
 헬리아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런 게 된다고?’
 화염구는 민감한 폭탄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충격만 가해져도 그 자리에서 터져 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보통의 플레이어들은 피하거나 막는 것을 선호하게 마련이었다.
 저런 기예를 가능하게 하려면 타고난 감각과 뛰어난 힘 조절이 필수조건인데······.
 ‘뭐 하는 녀석이지?’
 헬리아가 그걸 보며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이미 헬리아의 코앞에 도달해 있는 연.
 속도조차 줄이지 않고 달려오는 연의 모습에 헬리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반응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쾌살.
 죽이는 게 아닌 제압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다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연의 검.
 그 섬뜩한 일격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헬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던전, 던전 어때!”
 헬리아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연의 검이 딱 헬리아의 허벅지 바로 앞에서 멈췄다.
 “던전?”
 순간 솔깃해지는 연의 귀.
 던전.
 일반적으로 계속 몬스터가 생성되는 사냥터와는 다르게 던전은 일회성으로, 발견하고 한 번이라도 클리어하면 그것으로 끝인 사냥터를 일컬었다.
 당연히 몬스터도 계속 생성되지 않았고.
 그 대신 보상이 무척이나 짭짤하고 일반 사냥터보다 경험치도 배 이상 많이 획득할 수 있어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 백 퍼센트 확실한 던전이야. 너도 던전이 얼마나 수익이 나는지 알고 있잖아. 저번에 원한의 숲에서 발견했어.”
 “음······.”
 원한의 숲에서 사냥 가능한 레벨이 최소 150이니까 그곳에서 나온 던전도 레벨 150 이상의 난이도라는 이야기다.
 지금 연의 레벨은 70대 후반.
 연이 그 던전을 자신이 클리어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헬리아가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한 명 정도 더 데려가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방금 네 실력 보니까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거기다가 내가 너에게 미안한 게 있기도 하니까. 어때? 이걸로 퉁 치자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연을 향해 손을 내미는 헬리아.
 “좋다.”
 그 손을 보며 살짝 망설였지만, 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처럼 폭렙을 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거기다가.
 ‘던전을 클리어한 후에 피해자들에게 넘겨도 상관없겠지.’
 아직 복수를 생각하는 연이었다.
 
 * * *
 
 원한의 숲 깊숙한 곳. 어느 거대한 나무 앞
 헬리아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연은 ‘여기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헬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저 얼굴이 가짜라는 말이지?’
 ‘이세계’는 장애가 있어서 변경을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형변경이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에 머리 색깔이나 눈동자 색깔 정도를 빼고는 현실과 똑같은 모습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세계’ 안에서 마법이나 아이템 등을 이용함으로써 외모를 변경할 수는 있었는데 헬리아의 얼굴도 아이템을 이용해서 변경한 것이라고 했다.
 연은 던전을 탐험하려고 도시에서 준비하던 도중, 원한의 숲 피해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은 복면을 쓰는 것에 비해 손가락을 몇 번 까딱 거리는 것만으로 쉽사리 외모를 바꾸는 헬리아를 보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란다나 뭐라나.
 “아, 여기다! 대지 폭발!”
 콰아아앙!
 “으아악!”
 쾌활하게 여기다! 라고 외치며 밑도 끝도 없이 연의 옆에 있던 나무에 마법을 날리는 헬리아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리는 연.
 ‘이게 미쳤나, 죽을 뻔했어!’
 사실은 던전을 찾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일 자리를 찾고 있던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이곳이야. 저번에 불이 나서 탈출하던 도중에 이 나무가 쓰러져 있는 걸 봤는데 그 밑에 이런 철문 하나가 보이더라고.”
 정확히는 ‘불이 나서’가 아니라 ‘불을 지르고’겠지만 연은 굳이 따지지 않고 조금 전까지 나무가 있던 자리에 존재하는 철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땅에 수평으로 있는 걸 보니 지하로 향하는 거 같은데.’
 “가자.”
 그르르릉!
 연이 철문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사이, 곧바로 헬리아가 철문을 밀어젖혔다.
 그 순간.
 
 [숨겨진 던전 ‘고대 악마의 신전’을 발견하셨습니다.]
 [최초 발견자인 두 분이 던전 안에서 사냥할 시 경험치와 아이템 드랍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메시지와 동시에 오르는 레벨.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이런 발견 경험치만으로도 오르는 듯했다.
 ‘시작이 좋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연이 헬리아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끼리릭! 쿵!
 저절로 닫히는 철문.
 화르르륵!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던지 좌우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횃불들이 동시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검은 뼈다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불길해 보이는 검은색의 뼈들이 스스로 모이더니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검은 해골 전사야. 악마의 힘을 받아서 강화되었다고 설명에 나와 있었어. 플레어.”
 화르르륵!
 연에게 설명하며 침착하게 헬리아가 마법을 쏘아 보냈다······.
 “이 정도면 나 혼자서도 될 거 같으니까 일단 보기만 해.”
 그렇게 말하며 헬리아가 십여 마리의 검은 뼈다귀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데?’
 헬리아의 말대로 일단 그녀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연은 마법사치고는 나쁘지 않은 움직임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딱딱딱!
 몰래 헬리아로 뒤로 돌아가는 검은 해골 전사 하나가 연의 눈에 들어왔다.
 그 해골 전사가 막 헬리아에게 칼을 휘두르려 할 때.
 원살.
 콱!
 그 검은 뼈다귀를 향해 날아가 정확하게 눈구멍에 박히는 연의 단검.
 끼리리릭.
 이내 그 해골 전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단검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 연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그대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 마리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연은 자신의 검 ‘무명’을 뽑아 들고 검은 뼈다귀를 향해 마주 달려가기 시작했다.
 “연! 너 뭐하는 거야!”
 당황하며 외치는 헬리아.
 처음에는 연의 믿을 수 없는 센스를 보고 일단 영입을 하긴 했지만, 그 후에 연의 레벨이 100도 넘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뒤로 그녀는 이번 던전에서 연을 전투에 참여시킬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레벨 100을 넘고 안 넘고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다.
 한 방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순식간에 체력이 없어질 정도의 차이가 해골 전사와 연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에 헬리아에게 지금 연의 모습이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딱딱딱.
 사정거리에 연이 들어오자마자 뼈로 된 칼을 휘두르는 검은 해골 전사.
 물론 연은 해골 전사의 어깨가 돌아갈 때부터 그 움직임을 예상하였기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칼을 피했다.
 그러나 그런 연의 얼굴을 반기는 검은 뼈로 이루어진 무릎차기.
 ‘반응은 빠르네.’
 그림자 이동술.
 이대로 피한다면 몸의 균형이 무너질 게 뻔했기 때문에 연은 재빨리 해골 전사의 그림자를 통해 뒤로 이동했다.
 이어서 휘둘러지는 공격.
 쾌살.
 스각!
 ‘생각보다 쉬운데?’
 예상외로 쉽게 목이 베어지는 검은 해골 전사를 보고 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 오크 전사보다도 쉽지 않은가.
 그때.
 “조심해!”
 다른 해골 전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헬리아의 외침과 동시에 목이 잘린 해골이 그대로 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흐읍!”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땅바닥으로 눕히는 연.
 삭!
 해골의 칼이 그런 연의 머리칼을 살짝 자르고 지나갔다.
 “방심하지 마. 이런 녀석들은 목이 잘린다고 죽지 않아. 데미지는 입겠지만 급소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차근차근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그냥 피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마무리 짓고 갈 테니까.”
 지옥에서는 언데드 개념의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연의 실수였다.
 헬리아가 연에게 충고하는 사이, 다시 자신의 머리를 끼운 검은 해골 전사가 연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딱딱딱!
 특유의 듣기 싫은 이빨 부딪치는 소리.
 급소란 개념이 없는 언데드는 급소가 밥줄이나 다름없는 연에게 상극과도 같았다.
 그대로 피하면서 헬리아에게 맡겨도 괜찮겠으나,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는 것을 연은 느꼈다.
 자르는 게 통하지 않는다면.
 “부숴주지.”
 암영보.
 연의 눈이 시리게 빛나며 앞으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아까보다 빨라진 연의 움직임에 놀라면서도 검은 해골 전사는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뚝!
 갑자기 딱 그 자리에 멈춰서는 연의 신형.
 후웅!
 그런 연의 코끝을 살짝 스치고 해골 전사의 뼈로 된 칼이 지나간다.
 “!!!!!”
 그리고 칼이 지나가자마자 다시 연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지며 아직 칼을 휘두르고 있는 상태인 해골 전사의 품으로 그대로 파고 들어갔다.
 ‘일단 하나.’
 콰직!
 해골 전사의 오른팔 관절에 정확히 틀어박히는 연의 단검.
 덜컥덜컥!
 단검에 걸려 구부러지지 않는 오른팔을 보며 해골 전사는 불리하다고 느꼈는지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영살.
 콰악!
 해골 전사의 그림자에서 검은색 창이 나오더니 그대로 발등을 뚫으며 움직임을 봉쇄한다.
 ‘둘.’
 콰직!
 그사이 정확한 타이밍으로 해골 전사의 왼무릎 관절에 박히는 연의 단검.
 딱딱딱!
 자신의 움직임이 봉쇄당하자 뒤로 물러나는 것을 포기하며 해골 전사가 왼팔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셋.’
 콰지직!
 하지만 그러 움직임은 이미 연의 예상 안.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피하며 휘두르느라 쭉 뻗어진 왼쪽 팔의 관절에도 단검을 박아 넣는다.
 ‘마지막 넷.’
 콰드득!
 이미 세 개의 관절이 봉쇄당한 해골 전사에게 나머지 하나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덜컥 덜컥 덜컥 덜컥!
 팔다리의 모든 관절이 굽혀지지 않아 뻣뻣하게 경련하는 해골 전사를 연은 무표정하게 쳐다보다가.
 붕살.
 콰앙!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부숴버림으로써 마무리 지었다.
 
 [레벨이 2 올랐습니다.]
 
 “너······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어느새 모두 처리했는지 연의 뒤에서 헬리아의 질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말인가.”
 “방금 보여준 그거. 어떻게 적의 칼이 너의 코앞에서 지나갈 것을 알았던 거야? 거기다가 그 보법, 어떻게 칼이 눈앞으로 지나가자마자 바로 보법을 발동할 수 있었지? 분명히 스킬마다 고유의 발동 시간이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네가 사용한 그 보법은 발동 시간이 없는 종류의 스킬이야?”
 조금 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쏟아내듯 질문을 하는 헬리아.
 “아니, 있다.”
 그런 헬리아의 물음에 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제한 다음 바로 발동.”
 “뭐? 그게 무슨······ 이런 미친!”
 헬리아는 마침내 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은 발동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법을 취소하자마자 바로 발동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해골 전사의 칼이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기 전 이미 다시 보법을 발동해 놓은 상태였고 칼이 지나가자마자 발동 시간이 충족되며 바로 튀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조금이라도 보법이 빨리 발동했다면 그대로 연의 머리가 잘렸으리라.
 “뭐 이런 괴물 같은······.”
 화염구를 흘려보낼 때부터 느낀 거였지만 이 녀석은 정말 괴물이었다.
 ‘왜 이렇게 놀라지?’
 그렇게 놀라는 헬리아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는 연.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동 시간을 숙지하고 자신과 적의 간격을 파악하여 이용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한 명은 놀라고 한 명은 의아해하며 둘은 던전의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빛의 신 루.
 태초의 빛에서부터 탄생했다고 전해지는 신.
 원래 중간계를 지배하던 고대의 악마와 천 일 밤낮을 싸운 끝에 악마를 봉인한 후.
 세계의 주신(主神) 자리에 올라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창세의 신 중.
 
 * * *
 
 “으아아아!”
 “젠장하아알!”
 마치 멈추는 순간이 죽음인 것 마냥 연은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런 연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헬리아.
 그리고 달리는 그들의 뒤로 통로를 가득 메우는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1시간 전.
 검은 해골 전사들을 처리한 후, 연과 헬리아의 앞에 나타난 것은 칙칙한 갑옷을 입은 데스 나이트 2기였다.
 데스 나이트들은 연이 나설 것도 없이 헬리아 혼자서 시원하게 처리했는데 그때 연은 헬리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유일 등급의 직업 크림슨 메이지.
 쉽게 말하면 전투 전문 마법사로서 멀리서 마법을 쏘아 보내는 것에 특화된 일반 마법사와는 달리 근접전에도 무척 능했다.
 장점은 일반 마법사에 비해 주문을 외우는 속도가 훨씬 짧다는 것이었고 단점은 극히 일부의 마법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전투에 관련된 마법밖에 익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그 극히 일부의 마법 또한 자기 자신밖에 적용되지 않았고.
 데스 나이트들을 처리한 후, 그 둘은 끝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가?”
 불안한 듯 묻는 연.
 “그래, 괜찮다니까? 내가 던전 하루 이틀 와보나. 아까 그 검은 갑옷 녀석들, 분명 보스 룸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인 수문장 같은 거라니까? 그러니까, 이 길은 그저 보스 룸까지 이어지는 중간 다리 같은 거야. 봐봐, 더 이상 몬스터도 안 나오잖아.”
 “음······.”
 연의 물음에 자신 있게 헬리아가 대답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 헬리아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연은 연신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는 자신의 육감 때문에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여차 일이 생기면 방패막이로 삼으려고 헬리아의 뒤에서 슬금슬금 움직이는 중이었다.
 꽤 걸어가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직사각형의 통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슬슬 연도 마음을 놓고 있을 무렵.
 딸깍!
 앞서 가던 헬리아의 발밑에서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
 “설마······.”
 쉬쉬쉬식!
 헬리아의 신음과 동시에 양쪽 벽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화살 세례!
 “으허헙!”
 “흐익!”
 헬리아는 두 다리를 활짝 벌리며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올라 화살을 피했고 연은 숨을 들이켜며 두꺼비처럼 추한 모습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휴우, 깜짝 놀랐······.”
 딸깍!
 헬리아가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한걸음을 내딛자마자 들려오는 청명한 소리.
 “······.”
 쏴솨솨솨!
 이번에는 천장이 열리며 그대로 장창들이 쏟아져 내렸다.
 “히익! 얼음 방패!”
 “미치겠네, 정말!”
 헬리아가 마법으로 멋지게 창들을 막는 사이, 연은 이번에도 추한 모습으로 벽에 착 달라붙어 겨우 창들을 피해낼 수 있었다.
 “어? 이상하다, 수문장까지 지나쳤는데······.”
 “죽을 뻔했다!”
 대책 없이 함정에 걸려대는 헬리아를 향해 연이 소리쳤다.
 “헤헤, 미안 나 탐색 마법 못 쓰는데······ 연, 너 함정 탐지나 해제 그런 거 못 해?”
 자신도 못하는 주제에 뻔뻔하게 연에게 요구하는 헬리아.
 “난 도적이 아니다.”
 “아니, 암살자나 도적이나 둘 다 음침한 건 마찬가지인데 왜 못하는 거야. 쓸모없잖아, 그 직업.”
 ‘자기도 반쪽짜리 마법사 주제에!’
 갑자기 쏟아지는 팩트 폭력에 속으로 울컥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탐색이나 기관 해제 같은 여러 스킬을 지니고 있는 도적은 암살자에 비해 무척이나 인기 있는 직군이었다.
 새삼 자신을 이 직업으로 꾀었던 사기꾼 사부를 원망하고 있을 때.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출발 하자.”
 “잠깐!”
 연은 또다시 무작정 발을 내딛으려는 헬리아를 재빨리 손으로 막았다.
 “응? 왜 그래?”
 그렇게 물어오는 헬리아를 무시한 연은 여기저기 떨어져 내린 창들 가운데 하나를 주워 헬리아가 막 발을 딛으려고 한 곳을 향해 던졌다.
 탁! 찰칵!
 쉬아앙!
 창이 바닥에 닿자마자 묘한 기계음과 함께 천장과 바닥에서 동시에 솟구치는 칼날들.
 “······.”
 “······.”
 “좋아, 내가 하려고 했던 거야.”
 “언제?”
 잠시의 침묵 후.
 헬리아가 뻔뻔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화살과 창들을 줍기 시작했다.
 “너도 빨리 챙겨. 계속 이런 식으로 전진할 테니까.”
 “······.”
 아무튼 그 방법으로 인해 훨씬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연과 헬리아는 곧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것 같은 석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 저기 봐!”
 “보스룸인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음각이 문 전체에 새겨져 있는 걸로 보아 척 봐도 ‘난 무언가 있다’는 분위기를 풀풀 뿜어내는 문.
 “좋아, 단숨에 가자고, 바람의 날개!”
 휘이익!
 바람과 함께 떠오르며 단숨에 헬리아의 신형이 문 쪽으로 날아갔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쓰란 말이다!!”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절규하는 연. 진작 썼으면 함정들을 넘어가서 이런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아, 깜빡했어. 그리고 어차피 이건 전투용 마법이 아니라 나밖에 적용이 안 돼. 너까지 매달리면 가라앉을걸?”
 “······.”
 연이 뒤에서 마지막 남은 함정들을 제거하며 다가오는 동안 헬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열기 시작했다.
 “뭐가 있을까나~”
 그르르릉.
 신나게 석문을 밀어젖히는 헬리아의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바위?”
 그것도 둥글둥글하고 매끈한 표면을 자랑하고 있어 아주 잘 굴러가게 생긴 바위다.
 “하하, 설마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고전적인······.”
 그그그그.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그러나 점차 빨라지며 바위는 헬리아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이런 썩을······.”
 헬리아의 얼굴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파밧!
 “응?”
 아까 날아가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헬리아를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연.
 “연, 뛰어어어!”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곧바로 연의 의문은 해소되었다.
 헬리아의 뒤를 따라 무지막지하게 굴러오는 거대한 바위.
 정확하게 통로를 채우고 있어 빠져나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부딪치는 순간 쥐포가 될 게 틀림없어 보이는 위용!
 “야, 이 트롤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헬리아의 트롤 짓에 결국 한 맺힌 외침을 쏟아내며 같이 달리기 시작하는 연.
 암영보 최대 속도 전개.
 “어떻게 된 건가!!”
 “나도 몰라, 문을 열었는데 저게 있었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연의 눈빛에 살짝 찔린 헬리아가 눈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무슨 이런 황당한 던전이······ 지금까지 연은 보스룸을 열면 바위가 나온다는 던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점점 가속을 붙여가는 바위.
 “좀 부숴봐!”
 다급하게 연이 헬리아를 향해 외쳤다.
 “저런 걸 부수려면 적어도 유일 등급 정도의 주문을 외워야 하는 데 이런 상황에서 그 정도로 정신을 집중······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반딧불 폭탄!”
 펑!
 헬리아가 주문을 사용하자 그녀의 발밑에서 자그마한 불덩이가 생성되더니 그대로 터졌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쭉 나아가는 그녀의 신형.
 “어? 같······.”
 펑!
 “이······.”
 펑!
 “가!!!!”
 펑!!
 연이 한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헬리아.
 “이런 제기랄!”
 계속해서 자신의 엉덩이에 닿는 바위의 감촉을 느끼며 연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달리고 또 달렸다.
 바위에 닿는 마찰 때문인지 엉덩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연.
 ‘아니, 여기서 바위에 깔려 죽으면 이게 무슨 개죽음이냐고!’
 그리고 마침내 연이 거의 깔리기 직전!
 “······모든 것을 부숴라, 피해! 거인의 망치!”
 앞에서 헬리아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연은 이미 최대한 몸을 숙이고 앞으로 슬라이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의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헬리아의 마법!
 “흐압!”
 콰지지직! 쿠콰콰쾅!
 마침내 연의 뒤쪽에서 마법에 직격당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몸을 최대한 웅크려 무차별적으로 튀는 파편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연.
 ‘또 죽을 뻔했어!’
 자신이 조금만 늦게 슬라이딩했다면 저 바위를 부술 마법이 자신의 얼굴에 직격했을 것이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건지, 이 정도면 헬리아가 암살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진짜로 나 죽이고 던전 혼자 먹으려고 하는 거 아냐? 하긴, 처음부터 수상했어.’
 던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놓고 마법을 날리지 않았는가!
 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헬리아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 난 당연히 네가 피할 거라 예상했지.”
 “······.”
 계속되는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돌리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헬리아.
 “어쨌든 문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 뒤로 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문 안쪽은 거대한 반구형의 공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끔찍하고 잔인한 그림 대신 악마의 신전답지 않은,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신을 숭배하는 그림들이 벽면 한가득 음각되어 있었다.
 ‘왜, 악마의 신전에 이런 그림이······ 아니, 애초에 악마의 신전은 뭐야. 악마도 신전이 있어? 마전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문뜩 연의 머릿속으로 드는 의문.
 “아, 대체 뭐야? 보스는 어디 가고 이런 구닥다리 그림들만 잔뜩 있는 거야. 누가 이미 다녀갔나? 아닌데, 우리가 최초라고 했는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끝에 들어온 곳인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자 헬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벽화의 얼굴 부분에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응?”
 그런 헬리아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연은 곧이어 공동의 중앙에 높이 솟은 제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동 안이 어두웠기에 처음에는 볼 수 없었던 칠흑색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제단.
 그 제단은 무척 높았기 때문에 지금 연과 헬리아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윗부분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호오, 오랜만의 손님이로군. 여길 어떻게 찾은 거지?”
 제단 위에서 잔뜩 쉰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연, 위에 누가 있나 봐. 보스 아니야? 빨리 올라가 보자!”
 “허허, 성질 급한 아가씨로고.”
 헬리아의 말이 공동을 울리자 곧이어 위쪽에서 들려오는 혀를 차는 소리.
 “누군지 몰라도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본 교주에게 신경을 쓰기보단······.”
 헬리아의 말에 대답하는 의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
 후웅!
 마치 거세게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소리가 연과 헬리아의 바로 위, 허공에서 들려왔다.
 “그것들에게 신경을 써야 할 걸세.”
 노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허공이 일렁이더니 튀어나오는 무언가.
 저것은······.
 “천사?”
 새하얀 한 쌍의 날개를 퍼덕이며 끊임없이 성스러운 기운을 방출하는 존재들.
 공중에 떠 있는 두 구의 인형은 누가 봐도 천사처럼 보였다.
 ‘왜 뜬금없이 악마의 신전에서 천사가 나오지?’
 아니, 그것보다 천사가 몬스터로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제일 아래 계급의 최소 레벨이 250.
 빛의 신 ‘루’의 신령한 사자라고 알려진 천사는 보통 플레이어의 편에서 퀘스트를 도와주는 NPC와 같은 존재였기에 몬스터로 등장한다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모험심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왔구나.
 -그 결과는······.
 두 명의 천사는 연과 헬리아를 향해 서로 번갈아 가며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죽음뿐이니라.
 이내 순백의 성스러운 검을 뽑아 들었다.
 “천사가 보스라니······ 타락 천사는 몰라도 천사들이랑은 싸워본 적 없는데······.”
 헬리아의 그 말을 끝으로 마침내 천사들과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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