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인디고스톰 [E](종료230728)

인디고스톰 1권(1)

2019.07.28 조회 462 추천 1


 Prologue: A Storm is Coming.
 
 
 
 폭풍은, 언제나 몰아치기 직전에는 고요한 법이다.
 그래서 청람의 폭풍이 몰아칠 때에 세상은 언제나 숨을 죽였다.
 그 속에서, 폭풍은 홀로 서있다.
 
 ***
 
 신 제국력 304년 5월 21일.
 키이이잉-!
 기묘한 구동음과 함께 검은 거인이 얼음을 지치듯 돌진했다.
 손에는 거검을 들고, 눈앞에 있는 푸른 거인을 향해.
 내찌른다.
 후웅!
 하지만 푸른 거인은 허리를 숙여 검을 피한 뒤, 그대로 뒤로 미끄러졌다.
 샤아아악!
 거리는 다시 30미터.
 검은 거인이 검을 회수하는 사이 또 다른 검은 거인 둘이 그 옆에 섰다.
 그들의 주변에는 쓰러진 강철 거인들이 원을 그리듯 널브러져 있었다. 반은 검고 반은 푸르다. 황야의 메마른 바람이 감아올린 모래먼지가 마지막 남은 푸른 거인을 매정하게 스쳐갔다.
 휘이이이······.
 푸른색으로 도장한 강철 거인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검은 거인들 역시 웅크러뜨리며 힘을 모았다.
 서로를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거인들. 잠깐 동안 보이지 않는 시선이 서로를 교차했다.
 키이이잉-!
 세 기체가 먼저 달려들었다.
 푸른 기체의 콧피트 유닛 속에서 훈련기를 조종하던 ‘케인 에르멘’은 가속을 시작했다.
 쉬이이이-!
 일견 무방비한 돌격. 거검을 들고 있는 세 기체와는 달리 그의 기체는 맨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속력으로 가속했다. 기체의 유효 가동 한계까지 남은 시간은 3.5초. 1대 3의 상황에서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케인의 표정엔 한 점 불안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담담한 확신 뿐.
 ‘마무리를 지어볼까.’
 케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카라랑!
 머릿속에서 수천 개의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파문을 그리며 세상의 색채가 반전했다.
 흰 것은 검게, 검은 것은 희게.
 자신과 공간 사이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시간이 뒤집어졌다.
 클락 디비전(Clock Division).
 반전된 색채의 세상에서 케인은 3초 동안 일어날 모든 일을 읽어냈다.
 그의 눈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았다.
 
 뒤따르던 두 기체가 좌우로 튀어나와 푸른 기체의 다리와 허리를 노렸다.
 정면에서 달려든 기체는 쓰러지려는 푸른 기체의 가슴에 거검을 때려 박았다.
 케인의 기체는 전신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케인은 과도한 충격에 내장이 진탕되며 피를 토했다.
 
 이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타날 미래이다.
 
 그리고 절대 도래하지 않을 미래이다.
 
 화아아악!
 푸른 바람이 검은 거인 사이를 누볐다.
  1초.
 최대 출력. 급가속. 좌우로 튀어나오려는 기체의 사이를 파고든다.
 2초.
 급선회. 손날을 펴서 휘두른다. 두 대의 제어 중추가 파괴된다.
 3초.
 전속 전진. 날아오는 거검의 날을 붙잡고 역으로 찔러 넣으면서 중심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검은 훈련기가 다리를 하늘로 향하며 나뒹굴었다.
 쿠웅!
 호되게 나가떨어진 검은 기체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검은 연기가 기체의 전투불능을 알렸다.
 ‘대응 완료.’
 기체의 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곡예와도 같은 조종을 성공시켰음에도 케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기판을 보았을 뿐이다.
 남은 유효 가동 시간 0.5초.
 승자의 미소도, 승리의 환호도 없었다. 단지 당연한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뿐.
 케인은 해치를 열고 기체 밖으로 나갔다.
 수십 기의 훈련기 사이로, 오직 하나의 푸른 거인만이 당당히 서있었다.
 오늘도 그는 전장에 홀로 남은 승리자였다.
 
 ***
 
 《제국 제 7 사관학교 28차 모의전투 결과 보고.
 청기군: 총 격파수 42기. 흑기군: 총 격파수 41기.
 청기군 잔여병력 1기. 흑기군 잔여병력 0기.
 청기군 승리.
 최후 생존기 – 4301번 기체(조종사: 케인 에르멘).
 ······(중략).
 ※케인 에르멘 생도에 대해.
 나이 21세. 남성.
 4중대 3소대 소속.
 총 28회의 모의전투에서 격파당한 횟수는 단 1회 - 303년 6월, 14차 모의전투에서 레인 레드릭 생도에게 일격을 허용.
 분석 결과 이와 같은 전과는 한없이 0에 가까운 확률이며, 유례없는 전과임.
 28회의 모의전투에서 기체 손상도는 극히 경미하며, 이는 기체의 성능을 완벽하게 파악한 효율적인 조종술을 익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
 ······(중략).
 출신과 이력에 대해서는 별도 첨부함.
 ······(중략).
 -제국 정보부 제 7과 <인덕션>.
 관계자외 열람을 엄격히 금함.》
 
 
 
 
 
 Indigo.01: 언터처블.
 
 
 
 신 제국력 304년 5월 22일.
 끼익······ 쿵.
 높다란 시계탑에 달린 커다란 분침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시침은 조용히 하늘을 가리키며 파트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 5분 전.
 이론 교육을 담당하게 된 교관 ‘호우반 겔린즈’는 이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도들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이지만, 수업에 관한 집중력은 아니니까.
 “흠흠.”
 강단에 선 늙은 교관의 헛기침 소리에 생도들은 잽싸게 교재 혹은 칠판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호우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강의를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블루 템페스트(Blue Tempest) 사건 당시, 각국의 아크게이너 활용 빈도가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재해로부터 주력 전술 병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운용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지요.”
 “교관님. 어째서 재해라는 단어가 붙은 겁니까?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업 종료 5분전에 손들고 질문하는 사람은 반역자나 다름이 없지만, 질문자는 태평하기만 했다.
 “아······.”
 “망할······.”
 생도들 사이에서 숨죽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질문한 동기를 대놓고 노려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특별했다.
 덕분에 호우반은 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케인 생도의 말대로, 재해라는 단어는 자연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말이지요. 하지만 블루 템페스트-짙푸른 폭풍의 경우에는 자연적이지 않아요. 분류를 할 때에도 슈퍼내츄럴 해저드(Supernatural Hazard)의 유일한 사례로서 들어가지요. 이러한 초자연적 위해를 가리켜 굳이 재해라는 분류를 취한 것은, 블루 템페스트의 본질이 자연 재해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지진, 해일, 화산 등과 같이 짙푸른 폭풍 또한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한 번 지나간 곳에서 모든 아크게이너(ArchGainer)의 게인 리액터(Gain Reactor)가 파손되었습니다. 예측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었지요. 저는 당시 제국 6철기단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호우반은 교탁 위의 교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교관의 모습과 창밖의 시계탑을 번갈아본 생도들은 저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법 연장 수업의 달인으로서 악명 높은 ‘늙은 사냥개’가 일찍 수업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이야기를 끊으면서!
 불신과 경악을 한 몸에 받으며, 호우반은 창가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있던 생도를 향해 말했다.
 “더 듣고 싶으면 나중에 따로 찾아오세요, 케인 생도.”
 “예, 교관님.”
 검은 머리에 흑진주같은 눈을 가진 남자 생도는 불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직하면서도 수려함을 자랑하는 외모 덕분에 그 몸짓은 한층 돋보였다.
 호우반은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생도들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칠게요. 다음 주까지 아크게이너 개발 역사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이만 마치겠습니다. 점심 맛있게들 드세요.”
 그의 마음이 바뀔 새라 한 생도가 일어나 재빨리 생도들을 정돈했다.
 “차렷! 교관님께 대하여 경례!”
 감사합니다-!
 강의실이 떠나가라 울려 퍼진 일사불란한 함성에 호우반은 생도들을 일별하고는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교실을 떠났다.
 대표로 경례를 한 생도는 더 이상 흥분을 참을 수 없게 된 동기들에게 외쳤다.
 “쉬어! 해산!”
 “우와아아아!”
 “가자!”
 “밥 먹자-!”
 생도들은 우당탕쿵탕거리며 평소의 체력훈련 성과를 시험하듯 질풍과도 같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던 생도 ‘케인 에르멘’은 아직 강의실에 남아있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뛰쳐나간 동기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호우반이 했던 이야기를 꼼꼼하게 필기한 뒤에야 공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를 맞춰 시계탑이 정오를 알렸다.
 데엥-! 데엥-! 데엥-!
 강의실 건물이 일제히 시끄러워지며 다른 강의실에서 나오기 시작한 생도들의 목소리가 케인 혼자뿐인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오늘은 뭐래?”
 “몰라. 난 오늘 외출이거든.”
 “망할 놈! 배터지게 먹고 죽어버려!”
 오늘은 제육일(第六日)이며,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오늘을 포함해 하루 한나절동안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다음 날 저녁까지 외출이나 외박도 허용된다.
 다음 주의 제일일(第一日)이 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유를 만끽하려는 생도들의 발걸음이 식당으로 몰리고 있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목의 단추를 하나 정도 푼 뒤, 케인은 자기 물건을 챙겨서는 강의실을 나왔다.
 덕분에 7강의실보다 늦게 끝난 강의실에서-이미 식사 순서가 뒤로 밀려 반쯤 포기한 얼굴로-걸어 나오던 생도들이 케인을 보게 되었다.
 “오늘 오후에, 어머.”
 “왜 그래? 아······.”
 “그래서 말이지, 어어? 왜 그래?”
 “쉬잇! 뒤, 뒤!”
 동기생에게 뒷덜미가 잡아당겨진 생도는 뭐지 싶어 뒤를 보다가 그곳에서 걸어오는 케인을 보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른 벽에 붙었다.
 여자 생도들은 저마다 몸을 움츠리며 숨을 죽였고, 남자 생도들은 긴장하면서 그에게 닿지 않도록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불가해한 침묵이 퍼져나가면서 뒤를 돌아본 생도들 역시, 케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흠칫하면서 좌우로 밀착해갔다.
 삽시간에 복도에는 말 한 마리가 달려갈 정도의 길이 확보되었고, 케인은 그 한가운데로 묵묵히 걸어갔다.
 “제길······ 또 혼자 남았다며?”
 “대체 몇 번이야? 마법이라도 쓰나?”
 “쉿. 들릴라.”
 우수한 동기를 바라보는 이들의 질시와 탄식, 푸념이 소리 없이 번져갔다.
 하지만 수십 생도의 온갖 시선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그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케인 에르멘.
 제국 제 7 사관학교 27기 생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었지만, 누구도 말을 걸거나 가까이 가려는 생도는 없었다.
 유일한 친구가 훈련 중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 이래, 케인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 외에도 3학년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많은 사건들이 그에게 살아서 전설이 된 별명을 붙였다.
 <언터처블Untouchable>
 절대 불가촉을 상징하는 생도는 경외와 경이, 질투와 질시로 만들어진 길 한 가운데를 조용히 걸어갔다.
 오직 혼자서.
 
 제국 제 7 사관학교에는 단 하나의 식당이 있다.
 생도나 교관은 물론이고 사관학교의 수뇌부도 모두 이곳에서 차별 없이 같은 음식을 먹으며 식사를 한다.
 수용 가능 인원 500명인 식당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배식대가 둘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배식대에는 각각 1번 배식대, 2번 배식대라는 몰개성한 이름이 붙어 있는 것도 나름의 단점이라 할 만하다.
 학교 밥이나 군대 밥에서 맛을 기대하긴 힘들고, 어차피 같은 부뚜막을 사용하는 이상 1번이든 2번이든 똑같은 맛이라는 사실에선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한창 나이의 생도들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두 배식대 사이에 맛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 믿는 생도들이 많았다.
 느긋하게 식당에 도착한 케인이 보게 된 것은 그러한 탓하기 어려운 믿음에서 비롯된 일상적인 행사였다.
 “자자, 1번 배당률이 1.7배! 2번 배당률은 0.7배! 골라잡으라고!”
 식당 입구에는 칠판과 책상이 놓여 있었고, 뚱뚱하지만 붙임성 좋은 얼굴을 한 생도가 싱글벙글 웃으며 앉아있었다.
 어느덧 사관학교의 전통이 되어버린 배식대 내기였다.
 칠판에는 지금까지 어느 배식대가 얼마나 많은 점수를 땄는지 나타내는 도표까지 그려져 있어 제법 본격적이었다.
 그 앞에선 수많은 생도들이 어느 쪽으로 갈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디가 우세해?”
 “오늘은 2번이라는데? 해리스 씨가 그쪽에 있대.”
 “오, 그래? 그 사람 반찬 나눠주는 솜씨가 끝내주지. 나도 오늘은 2번에 걸어볼까.”
 “근데 쥐넨 씨도 2번에 있대.”
 “······제길!”
 월급을 받지만 돈 쓸 기회가 별로 없는 생도들에게 이러한 내기는 좋은 오락거리였다.
 학교 측은 애초에 생도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있는데다가 거액이 아닌 자잘한 돈이 오갈 뿐이라서 별다른 제제를 걸지는 않는다.
 유일한 문제라면 내기를 하려는 생도들로 식당 입구가 막힌다는 것 뿐.
 사실, 케인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얼마나 걸 거야?”
 “은화 2닢. 오늘은 감이 좋으니까, 1번에 걸어볼까.”
 “아서라. 그놈의 감, 제대로 맞은 적이 있냐?”
 “시끄러워요.”
 케인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살짝 젓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길을 여는 방법은 간단했다.
 케인은 바로 정면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메이. 비켜줬으면 하는데.”
 “알아서 비켜가, 아······!”
 땋은 머리를 한 여자 생도, 메이는 짜증을 내려다 케인의 얼굴을 보더니 얼굴을 화악 붉혔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내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와 케인을 한 가운데에게 두고 지름 3미터는 될법한 사람의 원이 그려져 있었다. 케인을 본 다른 생도들이 서로를 밀쳐가며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 으······!”
 메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어디로 비켜야할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급기야 거무죽죽하게 변해갔다.
 참으로 다채로운 안색을 표출하던 동기생을 묵묵히 바라보던 케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어.”
 “아, 아?”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으리라.
 케인은 무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식당에 들어갈 때쯤 거의 실신 직전에 다다른 메이에게 친구들이 달려들었다.
 “뭐래? 뭐라고 했어?”
 “세상에, 메이 너 괜찮니? 어머, 이 땀 좀 봐!”
 “셀딘! 너 왜 이딴 곳에다 줄을 세우는 거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여러 소란을 뒤로하고, 케인은 세척대에서 손을 씻고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소란과 후덥지근함, 진한 음식 냄새.
 생도들은 끼리끼리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주말 계획이나 수업, 훈련, 연애 등등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지만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는 화제들을 나누고 있었다.
 배식 확인을 위해 명부에 사인을 해야 하기에 케인은 중앙에 선 줄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식사 시간의 집중력은 수업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어느 정도냐면 바로 뒤에 케인이 서 있어도 알아채지 못하는 생도가 대다수일 정도였다.
 ‘좋군.’
 케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 동기생은 주변을 살피며 어느 쪽에 더 사람이 많은지를 세고 있었다. 손에 종이쪽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배식대 내기를 건 것이리라.
 그렇게 순번을 기다리고 있자니, 일단의 무리가 괄괄하게 웃으며 케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말이지, 그때 젝스가······.”
 “크하하! 그 녀석이야 늘 그렇지!”
 “제니도 그랬지 않나?”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에 다부진 몸. 거기에 전투 체육을 했는지 상의를 벗은 채 근육질을 자랑하는 세 생도가 낄낄거리며 저만치 앞 열로 향하고 있었다.
 케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이 들고 있는 상의에 붙어있는 배지를 확인했다.
 ‘1중대, 인페르노(Inferno)로군.’
 붉은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며 힘껏 달구어진 강철과도 같이 백열하는 1이라는 숫자를 감싸고 있었다.
 3학년이 된 27기 생도는 4개의 중대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가장 활달하고 불꽃같은 기질을 가진 생도들을 모아둔 중대가 바로 1중대였다.
 인페르노라는 명칭은 1중대의 별명이며, 동시에 ‘파벌’의 이름이기도 했다.
 물론 1, 2, 3중대가 각각 파벌을 결성하고, 남은 4중대에 소위 ‘떨거지’들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케인에게는 한 치의 유감도 없었다. 설령 그가 4중대 소속이라고 해도 다른 생도에 비해 하등 꿀릴 건 없었다.
 출신 중대가 어찌 되었든 개인 성적 상위 20명이 졸업 직후에 아크게이너를 배정받게 되며, 케인은 현재 종합 순위 12위였다.
 따라서 파벌에 속한 이들이 으스대며 다니든, 땀내 나는 우정을 과시하든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다.
 “야! 좀 비켜봐!”
 “혼자 밥 먹는 놈도 있냐?”
 “우리가 좀 바쁜데 양보 좀 하지?”
 ······그에게 피해가 없는 이상은.
 조금 전 지나쳐간 1중대의 3인방은 한 생도를 앞에 두고 위협을 하고 있었다. 서른 명 정도를 무시하고 앞에 서려는 것이다.
 “아니, 그······ 줄을 서야······.”
 타깃이 된 유약한 외모의 안경을 쓴 남자 생도는 당황하면서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동기생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삼인방은 기다렸다는 듯 괄괄하게 웃어댔다.
 “줄? 서려고 하잖아! 하하하!”
 “네가 비켜주면 우리가 설 수 있는데?”
 “아 좀 비켜봐 좀. 양보 몰라?”
 안경 쓴 생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도와달라는 듯 앞에서 생도들을 나누고 있던 교관을 보았지만, 눈이 마주쳐도 교관은 모른 체 했다.
 생도들이 자율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한다는 말은, 바꿔 말해 무슨 일이 생겨도 생도가 알아서 해결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세 생도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빨리 비키라고!”
 “페달 주제에, 밟히고 싶어서 그래?”
 “밟히고 싶어 좀이 쑤시냐? 좀 밟아줘?”
 안경 쓴 생도는 4중대였다.
 멋들어진 이름이 붙어 있는 다른 3개 중대와는 달리, 4중대는 전통적으로 ‘페달’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남들의 발판이 되어 밟히는 이들이란 뜻으로.
 케인은 소란이 생긴 곳부터 자기 앞까지 있는 생도들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전원이 4중대였다. 그들은 모두 눈을 내리깔고 있거나 시선을 돌리며 같은 중대원을 외면하고 있었다.
 대신 타깃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쪽과 알면서도 눈을 돌리는 쪽. 레인, 너는 이런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나?’
 케인은 이곳에 없는 유일한 친구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젓고는 대열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너라면 이렇게 했겠지.’
 케인은 삼인방에게 향했다.
 세 사람은 아예 타깃을 포위한 채 더욱 노골적으로 굴고 있었다.
 “너만 비키면 다들 좋잖아.”
 “그러게 말이지.”
 “밥 좀 늦게 먹는다고 안 죽어.”
 삼인방은 케인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왜소한 안경 생도를 위협했다.
 보통 이 정도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페달의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왜소한 체격의 생도는 반쯤 울먹이며 외쳤다.
 “싫다고! 내가 왜 비켜야 하는데!”
 약자의 반항은 힘이 없기에 가련하다. 무력함은 동정을 살지언정 현황을 바꿀 수는 없다.
 삼인방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게 죽으려고 환장했나!”
 셋 중 제일 체격이 큰 생도가 안경 쓴 생도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생도는 새빨개진 얼굴로 멱살을 잡은 두터운 손을 빼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왜 비켜야 하냐고? 몰라서 그러냐?!”
 굵은 팔뚝이 막 손에 든 것을 던져버리려 할 때였다. 그 사이의 공간을 가르듯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쯤 하지.”
 “넌 또 뭐, 읏?”
 세 사람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냥 서 있을 뿐이었지만 케인에게서 풍겨오는 기세는 그들의 움직임을 묶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삼인방 중에서 밤색 머리의 생도가 입을 열었다.
 “케, 케인. 왜 그러는 건데?”
 “줄이 밀린다.”
 “그건 얘가 안 비키니까······.”
 “줄 서.”
 케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철의 장벽과도 같은 기세가 할 말을 대변했다.
 주먹을 내린 체격 큰 생도는 한층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케인 에르멘.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너보다는 잘 안다. 게르엔 말튼.”
 덩치 큰 생도, 게르엔은 어깨를 움찔했다.
 케인이 모든 생도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전부터 팽배했다.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그게 뭐 어쨌다고!’
 게르엔은 케인을 쏘아보았다.
 “지금 인페르노에게 시비를 걸겠다는 거냐?”
 “줄 서라는 말이 시비였나?”
 “우리를 방해했잖아!”
 “그럼 너도 나에게 시비를 걸었군.”
 케인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이 서 있던 곳을 가리켰다. 딱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비어있는 공간을 보며, 게르엔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게르엔은 손에 든 생도를 내려놓고는 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줄 서.”
 “이게 진짜!”
 게르엔은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했다. 그 때 양 옆에 있던 동기들이 얼른 그를 말렸다.
 “게르엔, 참아!”
 “야야, 그러지 마.”
 비슷한 체격이 두 사람이나 달라붙자 게르엔도 과연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난폭하게 소리쳤다.
 “이거 놔! 저 자식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게르엔은 평소부터 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인의 체격은 딱 평범한 수준이었고, 얼굴 역시 고생을 모르고 자라난 귀족가 아들처럼 곱상하기만 했다. 거기에 사교성이라는 것을 모르듯 도도함을 넘어 고고하기까지 한 태도와 말투, 마치 홀로 다른 공간에 있는 양 풍겨오는 분위기가 늘 거슬렸다.
 어제 있었던 훈련 결과도 그렇다. 세 훈련기를 상대로 혼자서 덤벼들어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모두 쓰러뜨렸다.
 강하지만, 그렇게 강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인은 날뛰는 게르엔을 바라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일렀다.
 “다행이군.”
 “뭐가!”
 “나도 그러니까.”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게르엔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려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도 너 마음에 안 들거든?>
 게르엔에게는 케인이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자식아아-!”
 눈이 뒤집힌 게르엔은 마구 팔을 휘둘렀고, 그를 잡고 있던 두 생도는 엉겁결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 직후, 고삐 풀린 성난 황소처럼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근육덩어리가 케인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케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게르엔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할 시점에는 이미 행동에 들어가 있었다.
 분노를 담은 주먹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갈랐다.
 후웅!
 주먹을 전부 뻗었을 때 케인은 게르엔의 오른편에 서있었다.
 “느려.”
 “이 새끼가아-!”
 게르엔은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서는 케인을 향해 무차별로 주먹과 발길질을 날려댔다.
 참고로 그는 중대 격투술 대회 우승자였고, 흥분했다고 해서 실력이 죽을 정도로 어설프게 배우지는 않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과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이 케인을 압박해 들어갔다.
 휙! 후웅! 팟! 촤악!
 중단, 정권, 수도치기, 끊어 차고 니킥.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닿지 않았다.
 어제처럼.
 케인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풋워크와 위빙만으로도 게르엔의 공격을 모조리 피했다.
 몸을 젖히고, 반걸음 물러나고, 옆으로 숙인 뒤, 오른쪽으로 반 보.
 피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의 움직임에 딱 맞춰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게르엔은 미칠 것 같았다.
 ‘왜, 왜 맞지 않는 거냐!’
 케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조금만 더 하면 분명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약이라도 올리듯 케인은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만 했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모두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케인은 클락 디비전을 사용해 그의 움직임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케인은 작년도 전체 격투술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인재였다.
 닿지 않는 것이 당연할 정도다.
 “그아아아-!”
 하다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뻗친 게르엔은 기성을 지르며 케인을 향해 호랑이가 먹이를 덮치듯이 달려들었다.
 휘잉!
 그리고 날았다.
 “어······?”
 눈앞의 풍경이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일순간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닥과 천장과 멍한 얼굴의 동기들이 불규칙적으로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엉덩이에서 엄청난 충격이 닥쳐왔다.
 쿠웅!
 “으으윽?!”
 호되게 나뒹굴게 된 게르엔은 신음을 흘렸다.
 엉덩이부터 떨어진 덕분에 큰 상처는 없어도 미골에서 치밀어오는 충격에 머리가 다 띵할 정도였다.
 “게르엔!”
 “괜찮냐?”
 두 친구가 놀라며 다가오는 모습에 게르엔은 얼얼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케인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털고 있었다. 그는 게르엔을 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머리는 좀 식었나.”
 식다 뿐이랴. 싸늘해질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허공에서 몇 바퀴나 돌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달려드는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받아넘긴 것이겠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 어.”
 게르엔은 멍하니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의 두 친구 역시 괴물을 보는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았다.
 케인은 삼인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거기 서라.”
 서라니? 이미 멈춰있는데?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세 사람은 케인이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케인은 줄곧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그리고 게르엔을 던졌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대기열의 맨 뒤로 오게 되었다.
 “야······ 줄 서자.”
 “마침······ 딱이네.”
 두 친구의 멍한 목소리에 게르엔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식당에서 있었던 일은 그 날 오후가 될 무렵 사관학교 전체로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1중대의 격투술 우승자가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는 사건쯤은 지난 2년 동안 케인의 전설을 실시간으로 봐왔던 생도들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중점을 두는 부분은 다름이 아니다.
 1중대가, 인페르노가 과연 어떤 대응을 취할까.
 “파벌의 이름을 걸고 덤빈 건데, 하필이면 상대가 언터처블이었으니 본전도 못 찾았네.”
 “불꽃도 잠시나마 풀이 죽겠군. 그러게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이름값 하는 거지. 벌써 사고를 치냐.”
 분수대에 앉아있는 생도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케인을 보며 쑥덕거렸다.
 제복의 옷깃에 붙어있는 배지에는 숫자 2를 칭칭 감고 있는 검은 뱀이 그려져 있었다.
 2중대, 섀도우 스네이크를 뜻한다.
 다른 파벌의 문제였기에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인페르노는 어떻게 나올까?”
 “글쎄. 자존심 구겨지는 일이긴 해도, 상대가 언터처블 케인이라면 그냥 구설수에 오르고 말겠지.”
 “나라면 오히려 언터처블의 전설을 깨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울 것 같은데?”
 “금화 1,000닢의 부수입과 함께?”
 섀도우 스네이크의 생도들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현재 케인에게는 금화 1,000닢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 동기생을 사냥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언터처블의 전설을 깨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금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주최 측에 생도의 1개월 치 월급인 금화 20닢을 내고 신청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그것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규칙은 무척이나 심플하다.
 도전자는 무슨 수를 써도 좋다. 단지 케인을 ‘건드리면’ 이긴다. 기회는 단 한 번. 재도전하고 싶으면 금화 20닢을 더 내야 할 것. 후불도 받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성공한 역사는 없다.
 무엇보다도 작년 한 생도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30명을 끌어모아 케인을 덮쳤었지만, 훌륭한 파산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30명이 모였지만 케인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한 이 사건으로 언터처블 케인의 이름은 더욱 공고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까 슬슬 금화 1,000닢은 거뜬히 넘겼지 않나? 참가비가 상금에 포함된다고 그랬잖아.”
 “지금까지 몇 명이나 덤볐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50명 이후로는 세는 사람이 없을걸.”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지 그러세요? 그림자 속에 숨은 영민한 뱀 오라버니들.”
 분수대에 있던 생도들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등 뒤에는 어느새 한 여성 생도가 서 있었다.
 적갈색의 곱슬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날카로운 눈매의 여성 생도는 생긋 웃었다.
 “그걸 알아보는 게 여러분의 본업이지 않나요?”
 의미심장한 미소와 170에 다다르는 키, 그리고 블라우스의 앞섶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육감적인 몸매.
 2중대 생도들은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무엇보다도 과도하게 짧은 치마를 입은 채 탐스럽고 하얀 다리를 과감하게 내놓고 있는 대담한 여성 생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아스, 카드렐······!”
 한 남성 생도의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에 시아스 카드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아보시네요.”
 그녀의 블라우스 깃에는 1중대의 배지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여타 1중대 생도들과는 달리 불꽃의 색이 자주색이었다.
 섀도우 스네이크의 생도들은 마른침을 삼키다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 한 남성 생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지?”
 “다른 건 아니에요. 단지 4중대의 케인 씨에게 볼 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당연히, 숨어서 엿듣는 뱀을 치우기 위해서지요. 뱀은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하지만, 오라버니들은 다를 것 같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아스는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신체 일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포즈였지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면 2중대에서 전출당해야 할 것이다.
 꺼지지 않으면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뜻에 2중대 생도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음······ 뭐 그렇다면야.”
 “이만 실례할게.”
 “이야기 잘 나누도록 해.”
 그들은 마치 도망치는 뱀처럼 부리나케 케인의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시아스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코웃음을 치고는 곧바로 케인에게 향했다.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걸이,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긴 다리가 매력적인 선을 유감없이 자랑한다.
 살랑거리는 치마 아래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검은 반바지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하지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여성의 상징이 걸음걸음마다 부드럽게 요동치며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다.
 27기 생도 중에서 미모로 치자면 항상 수위에 오르는 생도, 시아스 카드렐은 케인 앞에 서서 도발적으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몸을 굽혔다.
 “케인 에르멘 씨. 표지만 봐도 졸음이 올 것 같은 책 말고 날 좀 보겠어요? 눈이 확 떠질 텐데.”
 신학서를 읽고 있던 케인은 책을 덮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블라우스의 틈새로 터질 듯한 앙가슴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즈로, 시아스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케인의 표정에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1중대 부중대장 시아스 카드렐.”
 “어머, 기억해주시니 기쁘네요. 거기에다 단지 얼마 안 되는 직함까지. 혹시 저 좋아하세요?”
 “자주색 불꽃. 두 명밖에 없는 부중대장의 표식이지.”
 “호오, 저도 나름 유명인이었군요. 그럼 우리 중대장 배지는 무슨 색인지 아세요?”
 “파란색. 용건은 그것뿐인가?”
 시아스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자타 공인 제 7 사관학교의 7대 미녀에 들어가는 자신이 이렇게 서비스(?)를 하고 있음에도 케인은 목석처럼 굴고 있다니. 그녀는 퉁명스레 말했다.
 “물론 아니에요. 점심시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요.”
 “잊었다.”
 케인은 즉답했다.
 이 이상 해 줄 말이 없다는 듯 단호한 대답에 시아스는 똑바로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아!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내버려두라는 뜻이지요?”
 “그래.”
 “호오, 과연. 게르엔이 무시당했다고 덤빈 것도 이해가 가네요. 정말로 인페르노를 적으로 돌릴 생각인가요?”
 케인은 팔짱을 낀 시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짝 위로 올라간 눈꼬리와 짙은 갈색의 눈동자에는 싸움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시선이 조금 밑을 향했다.
 가슴을 받쳐 올리듯 낀 팔과 팔꿈치를 감싸는 듯한 손은 전투태세 완비를 뜻한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손대려다간 화상을 입게 될 불꽃 그 자체였다.
 케인은 다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 있나?”
 “뭐라고요?”
 “1중대 107명 전원이 덤비려면 금화가 아니라 금괴가 필요할 텐데.”
 잠시 그 뜻을 생각해본 시아스는 이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흐음, 확실히 셀딘 오라버니는 같은 파벌이라고 해서 참가비를 면제해주진 않지요. 불쌍한 게르엔 씨. 덕분에 이번 달에는 쫄쫄 굶게 생겼다고요. 자업자득이라서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당신과 대화할 계기를 만들어줘서 칭찬하고 싶을 정도네요.”
 “용건은.”
 쇳덩어리 같은 사람이네. 시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귀밑머리를 한 번 정돈한 뒤 천천히 케인에게 다가갔다.
 오른손을 케인의 어깨에 얹고, 체중을 싣는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케인은 앉은 채로 버텼고, 시아스는 눈웃음을 치며 그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올렸다.
 남자를 반쯤 올라탄 매혹적인 자세로, 시아스는 천천히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필요해요.”
 “누가.”
 “불민한 우리 오빠가.”
 케인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인페르노의 중대장인 ‘하라신 카드렐’은 시아스의 오빠였다.
 남매가 나란히 입학한 케이스는 그렇게 드물지 않지만 카드렐 가문의 남매는 둘 다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경우다.
 이들 남매는 27기 생도 중에서 제일 먼저 파벌을 만들고, 그것을 지금까지 유지해왔다.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자들이 이제 와서 자신을 필요로 할 리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진작 손을 뻗어왔으리라.
 “왜.”
 “후우······ 짐작해보시겠어요?”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혀서 조금 거슬렸지만, 케인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시아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생도들을 살펴보았다.
 지나친 이성 교제를 금하는 사관학교 규정상, 이들의 모습은 제도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커플쯤으로 보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분수대 주변에 있던 생도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케인은 찾던 것을 찾았다. 분수대 주변에 있던 생도들의 배지 중에는 장미꽃으로 숫자 3을 새긴 것이 많았다.
 “장미화관의 주인 때문이로군.”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네요. 그 배경은?”
 “이번 주에만 4명이 3중대로 전출을 갔으니까.”
 “······싱거울 정도네요.”
 제 7 사관학교의 생도 중대는 규정상 전출과 전입이 자유로운 편이다. 그리고 3중대는 생도 중대 중에서 제일 많은 수를 자랑하며,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어떤 파벌보다도 자유로운데다가 온화하다 알려졌다.
 3중대, 라비앙로즈.
 육체전을 자랑하는 인페르노와 정보전을 주력으로 삼는 섀도우 스네이크와는 궤를 달리하는 파벌이었다.
 평화와 화합.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온건한 모토를 가진 파벌이었다. 전출을 희망하는 생도가 생겨도 이상하진 않을 테지만 타 중대로선 인력을 빼앗기는 셈이었다.
 “목적은.”
 “3중대의 망할 년이 뭘 꾸미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숫자가 늘어나면 좋은 일이 많긴 하니까요.”
 “다시, 목적은.”
 “아, 우리요? 당신을 끌어들임으로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불꽃을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언터처블 인페르노. 멋지지 않아요? 저로서는 개인적인 흥미도 있고요.”
 “흥미라.”
 시아스는 케인의 양어깨를 잡은 채 살짝 상체를 뒤로 밀며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긋하게 속삭였다.
 “예전부터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아까 제 이름을 말하셨을 때는 두근거렸다고요. 어때요? 이 사관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을 기회라고 보는데.”
 남녀 구분하지 않고 생도를 받는 제 7 사관학교의 특성상,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 것을 물론이고 졸업 후에는 제국군에 복무할 수 있으며 잘하면 배우자까지 구할 수 있다.
 실제로 졸업식과 결혼식을 동시에 올린 생도들도 적지 않으며, 그들의 모습은 중앙동 현관에 장식되어 있을 정도였다.
 남자로서, 사람으로서 이러한 제의는 솔직히 솔깃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절하지.”
 “흐응······ 이유는요?”
 “무리를 지을 생각은 없으니까.”
 “고고하시네요. 그럼 저는요?”
 “거절하지.”
 파벌과 관계없이 사귀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케인은 단칼에 거부했다.
 시아스는 잠시 도끼눈을 떴다가 이내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이유가 짐작이 가네요. 중대를 바꾸지 않아도 좋아요. 저도 굳이 오빠나 1중대를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거고요. 둘 사이에 장애물이 많지만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다.”
 “그럼 뭔가요?”
 케인은 자신의 목 뒤에 깍지를 낀 채 반쯤 안겨있는 자세로 있는 시아스의 양어깨를 잡아 천천히 밀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어려.”
 “······이래 봬도 18살이라고요!”
 “관심 없다.”
 제국법상 성인은 남녀 모두 21세로 규정하고 있다.
 제 7 사관학교는 4년에 한 번 생도를 받기에 입학 가능한 생도의 나잇대가 16세~20세로 넓은 편이었다. 시아스는 16살에 오빠와 함께 입학하여 올해로 18세가 되었다.
 시아스가 발육이 좀 남달라서 그렇지, 아직 그녀는 미성년자다. 그녀가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유도 나이가 어리다는 부분이 한몫을 한다.
 그리고 케인은 올해로 21세가 되었다.
 시아스는 볼을 부풀리며 케인에게서 떨어져선 예의 도발적이며 호전적인 팔짱을 꼈다.
 “이제 막 성인 됐다고 너무 재지 말아요! 3년 따위, 금방 가니까!”
 “그때라면 생각해보지.”
 무심하게 대답하면서 케인은 신학서를 펼쳤다. 반납이 오늘까지였기에 여유 부릴 틈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아스는 양손을 늘어뜨리며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언터처블임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에휴,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생각 바뀌면 말씀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지.”
 “그만 가볼게요. 아, 맞다. 호우반 교관님이 교관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점심시간 이후부터 기다리시는 것 같더라고요.”
 시아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힘없이 몸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갔다.
 신학서에서 시선을 뗀 케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시아스를 보다가 책을 덮고는 눈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드물게도 낭패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터처블이라고 해도 가끔 한 방 먹는 일은 있는 모양이었다.
 
 교관들 사이에서 케인의 평판은 호의적이다.
 쓸데없이 소란을 일으키기도 않고(그 중심에 서 있긴 하지만) 훈련이나 수업에는 항상 집중한다. 붙임성이 없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지만, 케인 에르멘은 촉망받는 우수한 생도였다.
 교관실에 들어와서 경례를 붙이는 케인을 보는 호우반의 시선이 상당히 부드러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생도 케인 에르멘. 호우반 겔린즈 교관님의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음. 이쪽에 앉으세요.”
 안경을 끼고서 서류를 들여다보던 백발 교관의 손짓에 케인은 반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호우반은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두며 빙긋 웃었다.
 “생활은 좀 어떤가요, 케인 생도.”
 “평범합니다.”
 다른 생도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혀를 내두르고 말 발언이었다.
 케인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는 교관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하기에 호우반은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야기할 내용이 그리 밝진 않았기에 금세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케인 생도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에요. 곧 있으면 레인 레드릭 생도의 1주기거든요.”
 “그렇습니까.”
 케인의 표정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평소에도 별 표정의 변화가 없기에 이 정도의 변화만 해도 놀라운 수준이리라.
 호우반은 사관학교에서 인생 최대의 불행 중 하나를 맞게 된 생도에게 최대한 자상하게 말했다.
 “전체 조례에서 약식으로 진행하게 될 예정인데, 케인 생도의 의견을 몇 가지 참고하고 싶어서 그래요.”
 “개인적으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레인이 죽었다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피붙이처럼 함께 자라난 친구였으니까요. 조건을 보고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사관학교 생활에선 더없이 귀중한 존재였을 테고요. 레인 이외에 다른 친구는 없나요?”
 “고향에 한 명 있습니다.”
 사관학교에는 없느냐고 물어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호우반은 자신의 질문에 완곡한 형태로 대답을 거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우반은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요. 교관 회의에서는 케인 생도가 최대한 절차를 간략하게 해주길 희망했다고 말하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케인 생도. 언젠가는 귀관에게도 받아들여야 할 날이 올 거예요. 삶이란 얻고 잃는 것을 반복하는 법이니까요. 익숙해져야만 해요.”
 “유념하겠습니다.”
 “그럼 가 보세요. 생각 같아선 블루 템페스트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닐 테지요. 나 역시 좀 바쁘고요.”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케인은 경례를 한 뒤 교관실을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며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어 벽면을 바라보았다. 한 면을 가득 메운 석벽에는 생도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있는 레인의 이름을 보았다. 그의 이름에는 두 줄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몇 없는 사망자의 표식이었다.
 “레인······ 이제 곧 1년이다.”
 그는 케인에게 있어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7살 때부터 에르멘 가문의 저택에서 함께 살게 된 이래 피붙이보다 더 끈끈한 유대를 자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성격은 정반대였다.
 레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주변에선 언제나 훈훈한 공기가 떠다녔고, 사람과 친해지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적극성과 쾌활함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가.
 함께 자라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형제였다. 자신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던 유일한 이해자였고, 좋은 경쟁자였다.
 그러한 친구를 잃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던 친구가 사라짐으로써 케인은 그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위한 1년이었다.
 ‘말두아 왕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1년 동안 그를 기린다지. 아직 네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지만, 네가 없는 1년 동안 나도 그들의 관습을 따라보았다. 네가 그곳에서 왔기에.’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남쪽에서부터 레인을 데려왔다고 했다. 제국의 남쪽에는 말두아 왕국이 있기에, 케인은 그들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이제 곧 끝나려 한다.
 “너라면 알겠지. 내가 지금까지······ 많이 참았음을.”
 조용히 살기란 힘든 법이다. 그것도 주변에서 끊임없이 건드리려 든다면 더더욱 그렇다. 케인의 경우에는 돈까지 걸렸으니 정도가 더했다.
 “얼마 안 있으면 너를 위한 시간이 끝난다. 그 뒤에는 나를 위해 살겠다. 그러니 조금만 더 지켜봐 줘. 친구.”
 케인은 레인의 이름에 손을 얹고는 짧게 묵념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걸음이었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서류를 보던 호우반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교관실은 1층에 있었고, 케인이 밖으로 나가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케인의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생도들이나 그가 가려는 길에 있던 생도들이 흠칫하며 물러나는 모습은 이제 일상 풍경과도 같았다.
 ‘언터처블 케인. 본인은 알지 모르겠지만, 그 별명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누구에게도 관여하지 않고, 누구하고도 상관하지 않기에 그는 환영과도 같다. 이곳에 있지만, 그는 언제나 현실에서 이탈해 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환영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에 없는 것은 건드릴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언터처블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제 슬슬 현실로 눈을 돌릴 때가 되었을 테니까요. 나는 그 날을 기대하고 있어요.’
 따사로운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던 호우반은 순간 움찔했다.
 평범하게 걸어가던 케인이 갑작스럽게 날아든 화살을 그대로 낚아채고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빤히 바라보았던 것이다.
 “뭐······ 그 날도 머지않겠군요.”
 늙은 교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Indigo.02: 폭풍을 움직이는 방법.
 
 아크게이너.
 ‘위대한(Arch) 획득자(Gainer)’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전술병기를 설명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먼저 전신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를 생각하면 상상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제 그 기사의 몸집을 20~40미터 크기로 불리면, 흔히 일컬어지는 아크게이너의 기본적인 형태가 완성된다.
 흉부에는 한 명의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콕피트 유닛(Cockpit Unit)이 있으며, 탑승자는 이곳에서 아크게이너를 조종하게 된다.
 이 거대 인간형 탑승 병기는 도입 이래 모든 전장에서 전력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으며, 지금의 전쟁은 아크게이너를 빼놓고선 성립할 수가 없을 정도다.
 전신에 갑옷을 두른 거대한 거인.
 이를 조종하는 이에게 줄 가장 적당한 이름으로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크게이너를 조종하는 자가 곧 ‘기사’였다.
 그리고 <제국 제 7 사관학교>는 바로 이러한 기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군사 교육 기관이었다.
 “근데 나는 여기가 마음에 안 들어.”
 노인 특유의 가래가 끓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제국 제 7 사관학교의 학교장 ‘기시엔 젠 발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교장실이었고, 사관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하기엔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대남작(大男爵)님.”
 상대가 싫어하는 칭호를 일부러 부르는 것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한 방편이리라.
 대남작이라 불린 노인은 콧방귀를 뀌며 기시엔에게 말했다.
 “보면 알잖아. 기사로 만들어 주겠답시고 애들 끌어모아서 결국에는 깡통에 넣고 통조림으로 만들겠다는 꼬락서니가 말이야.”
 “기사가 말을 타고 전장을 질타하던 시대는 옛날에 끝났습니다. 지금은 아크게이너를 조종하는 이들만이 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칭호이지 않습니까.”
 “하! 명예?”
 “그리고 그 명예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유일한 대남작인 마이스터 이사누스이십니다.”
 마이스터(Meister) 이사누스.
 제국 유일의 대남작.
 아크게이너에 관련된 이들에게 이 이름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14살이었던 이사누스는 현재 모든 아크게이너에 적용된 2세대형 개념을 확립했다. 그리고 7년 뒤, 그는 최초의 실전형 2세대 아크게이너를 만들어냈다.
 혼자서 아크게이너 개발사를 써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천재 공학자였다.
 다만 좀 괴팍하다.
 아크게이너를 만든 공으로 작위를 받았고, 이후 거듭된 발명으로 승작의 기회가 생겼지만, 본인은 극구 남작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작보다 높은 작위를 내린다면 타국으로 망명하겠다는 소리에 대륙이 들썩였던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대남작이란 작위는 황제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는 가장 큰 증거이리라. 실제 대우는 후작과 준하지만, 명칭은 어디까지나 남작이니까.
 이사누스는 쭈글쭈글한 얼굴에 더욱더 주름을 잡았다. 이 표정이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 기시엔으로선 알 수 없었다.
 “이봐, 기시엔. 지금 시대에 기사는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야. 자네도 잘 알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기사는 많은 이들에게 있어 우러름 받는 이들입니다.”
 “크할할할! 물론 지금도 기사를 우러러봐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 어쨌거나 사람 죽이는 깡통을 보려면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하니까.”
 “현실적인 비평이시군요.”
 기사를 양성하는 제 7 사관학교의 교장이자 제국군의 장군인 기시엔의 입장에선 동의하기 힘든 평가이기도 했다.
 아크게이너가 지금과 같은 주력 병기로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사누스의 덕분이니까.
 하긴 지금 3세대 기체를 개발 중인 이사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거에 만들었던 2세대는 마음에 안 찰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술가들이 흔히들 가지고 있는 자기혐오와 비슷한 감정일지도 모르지. 때론 토로하고 싶기도 하실 것이고.’
 기시엔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고, 이사누스는 옛 제자를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네 눈에는 내가 옛날 작품을 보며 부끄러워 미치다 못해 전부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미친 예술가처럼 보이겠지?”
 기시엔은 순간 뜨끔했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흰소리하지 마. 자네는 옛날부터 거짓말을 할 때면 오른쪽 눈썹이 움찔거린단 말이야. 지난 40년 동안 아무도 안 알려주던가?”
 “······어쩐지 아내가 저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습니다.”
 “똑똑한 아내로군. 계속 사랑하시게.”
 “한데 그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전에도 그러신 적이 있고요. 그렇게 보이기 싫으셨다면 애초에.”
 “각설하고. 아무튼, 말이야, 내가 만든 깡통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사관학교의 교육 과정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오른쪽 눈썹을 만지작거리며 항변하던 기시엔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크게이너의 최고 권위자가 하는 말이었다.
 “어떤 부분입니까?”
 “저걸 보면서 아무런 느낌도 안 드나?”
 이사누스는 깡마른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생도들이 연병장을 뛰어다니며 공을 차거나, 삼삼오오 모여 카드 게임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주말을 맞이한 사관학교의 평범한 광경이었다.
 “뭐가······ 이상합니까?”
 “이런 빌어 처먹을. 진작 자네를 파문했어야 했는데.”
 이사누스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구시렁거리고는 교장실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기시엔은 스승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옆에 섰다.
 먼저 스승이 입을 열었다.
 “시계탑에서 오른쪽으로 해서 한 무리. 보이나?”
 “보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급수대 뒤쪽으로 한 무리. 보이겠지? 마지막으로 식당가는 길목에 있는 한 무리까지. 이게 뭔지 알겠나?”
 “생도들이 모여 있군요. 그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망할 놈. 알면서 모른 체를 하는 거냐, 아니면 보면서도 모르는 거냐?”
 이사누스의 말투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고, 사관학교 학교장이자 제국군의 장군은 옛날을 추억했다. 이쯤 되면 굳이 공식 칭호로 부를 필요가 없으리라.
 “스승님. 사람이 무리는 짓는 거야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인류의 전통 아닙니까.”
 “그럼 그 무리가 서로 반목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으렷다?”
 “그리고 스승님은 그러한 편 가르기가 강철검을 전설의 보검으로 여기던 시절 전부터 시작된 인류의 보편적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억력은 좋구나. 근데 그걸 아는 놈이 저걸 그냥 보고서 내버려 두는 게냐? 단순한 편 가르기가 아니라 아예 파벌이 생겼는데?”
 기시엔은 이제야 그의 스승이 무엇 때문에 말을 꺼낸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제 7 사관학교의 전통입니다.”
 “너 지금 입으로 방귀뀌냐?”
 “······진짭니다. 생도 육성 방안 중에 하나입니다.”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다 이거야? 그렇다면 헛소리가 아니라 개소리겠지. 어디 한번 짖어봐.”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 개 취급을 받을 줄을 몰랐군. 기시엔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일단 이 사관학교가 4년에 한 번 신입생도를 받는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덕분에 한 번에 지원하는 생도의 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도요. 그래서 생도 개개인의 성적을 매겨 우수한 순서대로 아크게이너를 배정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지랄 맞기 그지없지. 행복은 성적순인 게냐? 안 그래도 서로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할 게 뻔한데, 그걸 부채질하는 꼴이로군.”
 기시엔은 이사누스가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몇 마디 단서만으로 사관학교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이쯤 되면 어디까지 짚어낼지 호기심이 생길 정도다.
 “경쟁은 필요한 인재를 찾는 데 있어 가장 손쉽고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먹고 살기 막막한 빈민가의 아이들부터 시작해 내로라하는 명가의 자제들까지, 정말 다양한 계층의 자식들 중에서 기사를 뽑는 겁니다. 계층 따윈 상관없으니 각자 알아서 노력해야겠지요.”
 “못 본 사이에 정말로 개가 되었군. 잘도 짖는다. 인간이 그렇게 고상한 동물인 줄 아느냐? 노력하는 것보단 남을 깔아뭉개는 게 더 쉽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사관학교 수뇌부는 일부러 생도 사이에 파벌을 조장했습니다. 기사는 군인이고, 군인에게 전우애는 필수품입니다. 서로가 뭉쳐야만 하니까요.”
 “얼씨구? 굶주린 늑대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갑자기 지고지순한 인류애에 눈뜨라는 말이냐? 거 잘하면 종교 하나 만들겠구나. 슬로건은 뭐냐?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이 정도?”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이게 제법 효과가 있습니다.”
 경쟁대상을 전우로 여겨야 한다.
 이런 상호 모순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관학교가 취한 방식은 실로 간단했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전술 과제를 무차별로 폭격한 것이다.
 생도들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을 방패로 쓰기 위해서라도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쟁하는 와중에도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에 슬슬 익숙해질 무렵, 전술 과제를 전략 과제로 바꾼다. 단순하게 보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해야 할 인원의 규모가 커지는 셈이지만, 집단의 필요성은 공고해진다.
 “이렇게 2학년이 끝나면 이런 집단도 어느 정도 형태를 잡게 됩니다. 이것을 3학년에 들어와 중대 단위로 편성하면 대체로 정리가 되지요. 이번 27기 생도들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집단을 명확한 형태로 만들면, 그때부터는 경쟁의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어느 집단에서 더 많은 우수 생도를 내느냐는 자존심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사누스는 더욱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결국에는 힘자랑이로군. 개인이 무력하다는 걸 억지로 알려준 다음에 집단을 꾸리게 해 각자의 적을 만든다, 이 말이냐? 어찌 되었든 전우들이 생기는 셈이로군.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교활할 정도야. 한데,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라니요······?”
 “생도 중대는 총 4개가 편성되었다고 했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보이는 파벌은 3개뿐이야.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다는 건가? 어디 실내에 처박혀 사이좋게 놀고 있을 거라는 말은 집어치워.”
 그 대목에서 기시엔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스승이 대체 어디까지 짐작할 수 있을지를 살짝 궁금해했지만, 아마도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던 모양이다.
 이사누스는 제자의 표정을 보고는 얼굴에 주름을 잡았다. 이번엔 비웃음이 분명했다.
 “경쟁에선 언제나 도태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무시 받을 수밖에 없고. 잔혹하고 비정한 경쟁에서 탈락자를 만들고, 남은 이들 중에서 독기 가득한 우수자를 골라내는 게로군. 좋구나.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하지 마라, 더러운 놈아.”
 “스승님. 전술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버려야 하는 건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항상 말했지? 사람을 제일 나중에 버리라고! 저 꼴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너 내가 왜 정치판에 안 들어가는지 몰라서 그러냐?”
 기시엔은 할 말이 궁했다.
 이사누스는 서로 편을 갈라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정계에 투신하지 않았다. 한데 제자가 악다구니장을 만들었으니 화를 낼 법도 하다.
 기시엔은 진땀나게 고민했다. 스승의 관심을 돌릴 방법이 없을까.
 순간 그는 어떤 생도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 생도의 출신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은 생도도 있습니다.”
 “응? 또 뭘 짖어대려고?”
 “그게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도태된 집단이 생겼지만, 그 안에서도 모든 생도가 결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생도가 있습니다.”
 “킁. 황족이라도 입학했냐?”
 “이번 기수에는 고관대작이나 유력자의 자제가 많긴 하지만, 제가 말하려는 생도는 다릅니다. 그는 에르멘 자작가의 후계자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잠시 눈을 찌푸렸던 이사누스는 기시엔이 바라던 반응을 보였다.
 이사누스는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했다.
 “그 친구의······ 아들이라고?”
 “그렇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해야 할까,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현재 가장 유명한 생도 중에 하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독특한 별명을 가지고 있지요.”
 “독특한 별명?”
 기시엔은 창밖을 보다가 때마침 1층에서 걸어 나온 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나오는군요. 저 생도입니다. 케인 에르멘. 언터처블이라고 불리고 있지요.”
 “언터처블이라고? 어쩌다 그런 붙임성 없는 별명이 붙었을꼬?”
 이사누스는 눈을 깜빡거리며 케인을 보았다.
 비스듬하게 보이는 옆얼굴은 그가 알던 어떤 인물보다 훨씬 섬세했지만,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이사누스는 케인의 얼굴에서 어떤 사람을 겹쳐볼 수 있었다.
 기시엔은 스승의 옆에 서면서 푸근한 시선으로 케인을 바라보았다.
 “모친을 닮아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군. 한데······.”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생도들이 케인을 피하고 있었다. 재앙, 재해, 재액 등 불길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피하는 몸짓으로 딱 적당하리라.
 제국의 유일 대남작은 제자에게 저게 무슨 현상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입을 쩌억 벌려야 했다. 케인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날아오던 화살을 잡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화, 화살을 잡아?!”
 기시엔은 때마침 설명하기 좋은 상황이 되었는지라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언터처블이라는 별명의 의미를 짐작하시겠습니까?”
 “헐, 확실히 재미있긴 하군.”
 기시엔은 안도했고, 덕분에 그의 스승이 평소보다 더 기묘한 눈빛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열망의 가득했음을.
 
 ***
 
 바깥으로 걸어 나온 케인은 중앙동 근처에 흩어져 있는 생도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여기가 마음에 안 들어.’
 학교생활이 달가운 학생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하지만 제 7 사관학교만큼은 예외라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케인은 조금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눈은 따사로운 정오의 햇살 아래 하하호호 웃고 있는 생도들의 즐거운 한 때를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굳어만 갔다.
 ‘서로를 짓밟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멋대로 관계 지으려 하고, 사람을 움직이려고 한다. 너희는 햇빛 아래에 있지만, 웃고 떠드는 그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생각해본 적이나 있나?’
 케인의 관점에서, 제 7 사관학교는 파렴치하다.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척’하며 지켜본 결과 얻은 결론이었다.
 어느 집단이든 약자란 존재한다. 그리고 약자를 대하는 방법에서 집단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선 약자를 한 우리에 몰아넣고 그들을 필요할 때에 발판으로 삼는다. 그 사실에 죄의식을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당연시 여기고 있다.
 철저하게, 실력만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뒤처지면 도태되고 따돌림받아 묻혀 버리고 만다.
 사관학교 측에서는 이것을 효과적인 교육 방식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러한 풍토 아래에서 길러진 생도들은 서로를 전우나 친구로 보는 대신 사라져도 좋은 희생양으로 보고 있었다.
 케인은 그러한 사실을 직접 귀로 들었다.
 「죽은 건 딱하지만, 이걸로 자리 하나는 비는 셈인가? 일찍 탈락해주니까 그나마 다행이로군.」
 「그건 그러네. 아크게이너의 조종간은 그래 봐야 스무 개 남짓이니까 말이지. 등수 하나 올랐나?」
 「쳇. 녀석이 있었다면 좀 더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1년 동안 공을 들였다고.」
 「다른 애들이나 찾아보자. 슬슬 파벌에 들어가야 하니까. 이대로 있으면 페달밖에 더 되겠어?」
 「에휴, 그래야지. 나도 밟히기는 싫으니까. 차라리 지금 죽어줘서 다행이네. 쯧.」
 레인이 사고를 당한 후, 그림자 속에서 키득거리던 동기들의 목소리는 한동안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가 지적하는 것은 하나였다.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선 그들을 비열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쟁이라는 구도 속에서 더 우월한 사람이 사라지면, 누구라도 안도할 것이다. 우수한 라이벌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슬퍼할 인격자의 모습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한 장면일 뿐이다.
 한데 이러한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누구인가?
 그러고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과거의 악습을 되풀이하는 파렴치한 이들이 누군가!
 케인이 본 제 7 사관학교는 제국 동량의 요람이 아니었다. 서로를 먹이로 보는 승냥이떼를 길러내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뒤집어주겠다. 더 이상 이 학교에 페달이란 이름이 흘러다니게 하지 않겠다.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제도가 허상임을 알려주겠다!’
 준비는 거의 끝났다. 다른 생도들이 그를 피하고, 멋대로 덤벼들고, 아무 생각 없이 접촉을 시도하는 동안에도 그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케인은 새파란 분노를 갈무리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필요한 인원, 예상되는 시간 등 그의 머릿속은 여러 이름과 각종 숫자 등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부턴 하나둘 접촉을 시작해야겠지. ······근데 어떻게 해야 평범하게 말을 걸 수 있더라?’
 오랜 시간 사람을 대한 적이 없으니 일단 그 방식부터 고민하는 것이 그답다 할 수 있으리라. 예상외로 어려운 문제였기에 케인은 고심했다.
 덕분에 그는 한발 늦게 이상을 감지했다.
 찌이이잉-!
 금속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그의 뇌리를 울렸다. 그의 눈에 푸른빛이 감돌며, 그 순간 그의 의식이 몸을 벗어났다.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볼 수 있었다.
 
 오른쪽. 화살이 날아온다.
 고무촉. 관통력은 없지만, 근거리 사격이다.
 옆구리에 명중. 갈비뼈가 부러지고, 신음을 지를 새도 없이 무너지는 케인 그 자신.
 
 화아아악!
 의식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의식과 시간의 흐름이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케인은 대응책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했던 일이기에 어찌 보면 기계적이기까지 했다.
 ‘회피하면 다른 사람이 맞는다. 잡아야 한다.’
 무예를 수련한 이들이 들으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지만, 케인에겐 가능했다. 화살이 날아오는 궤도와 속도를 이미 파악한 이상 필요한 것은 찰나를 잡아채는 반응속도뿐이었다.
 물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클락 디비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들여 노력한 결과로서.
 오른팔이 환영처럼 움직였다.
 몸은 움직이던 그대로, 시선의 방향은 변함없이. 손은 화살의 궤도를 그러쥘 위치로 향했다. 옷 속에서는 그의 팔 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풀었다.
 준비는 끝났다.
 ‘와라.’
 화살은 주인의 부름을 받은 충견과도 같이, 그의 손안으로 날아갔다.
 파앗!
 화살은 갓 잡힌 물고기마냥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음······.”
 손아귀가 얼얼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힘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다.
 케인은 손에 잡힌 화살대를 펜대 돌리듯 빙글빙글 돌리다가 흘깃 바라보았다.
 검은색, 정교한 세공. 감촉만으로 봐도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암살용 화살이었다. 못해도 한 발에 금화 10닢은 줘야 하리라.
 “이번엔 돈 좀 썼군.”
 클락 디비전은 그가 의도해서 발동하는 방식과, 그의 주변에 위협이 닥쳤을 때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이번에는 후자였고,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응이 완벽하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당사자의 평가일 뿐이다.
 “저것 좀 봐······.”
 “세상에,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주변의 생도들이 웅성댔다. 이미 묘기를 넘어 신기(神技)에 가까운 케인의 재주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눈앞에서 보는 것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른 법이다.
 케인은 수군거리는 생도들을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입을 다물게 한 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둥근 수풀 안쪽에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케인은 주저하지 않고 수풀로 향했다.
 ‘이만한 실력을 가진 생도라면······.’
 50걸음이 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그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윽고 수풀 앞에 도착한 그는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혹은 꼼짝도 못 하는-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저격수의 이름을 불렀다.
 “3중대 2소대 젝스 안달튼.”
 “예엡!”
 젝스는 교관의 호출을 받은 양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경우 케인이 자신을 어떻게 특정했는지는 의문사항이 될 수 없었다.
 오늘도 훌륭하게 자신의 전설을 지켜낸 청년은 암살용 화살을 들어 올리며, 군데군데 잔가지와 이파리를 매단 채 자체위장을 한 꼴로 서 있는 동기에게 말했다.
 “잘못하면 사람 죽는다.”
 “그, 그래서 촉도 고무로 바꾸고 그랬는데······.”
 “근거리에서 급소에 맞으면 고무촉이라도 죽어.”
 “다, 다음부턴 조심······.”
 “옆에 있는 건 션 그리악인가?”
 “어, 으응······.”
 션은 천천히 양손을 든 채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형적인 항복자세였고, 떠는 모양새를 보면 결단코 케인을 방심시켜 기습할 의도는 없는 모양이었다.
 케인은 젝스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아담한 신장의 생도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션이 젝스와 친하다는 건 1학년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보 같은-혹은 진짜 바보인-동기 덕분에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두 사람은 레인과 친했기에 케인도 간접적으로나마 친분이 있는 셈이었다. 진심으로 레인의 사건을 유감스러워하던 이들이기도 했다.
 케인은 겁에 질린 토끼 같은 눈을 한 양 갈래 머리의 여성 생도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잘 길들여라.”
 “어? 아, 응. 알았어.”
 “저기, 지금 제가 무슨 버릇없는 애완견이 된 것 같습니다만······.”
 젝스는 볼멘소리로 항변하려 했지만, 케인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화살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선 부러뜨렸다.
 빠직!
 젝스는 금화 10닢이 삽시간에 쓰레기가 되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악력이 얼마나 센 것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눈에 석궁의 제조원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의 소유자가 저 화살이 얼마나 비싼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케인으로선 드물게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설마 내가 벌집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젝스가 긴장하든 경악하든 케인은 부러뜨린 화살을 내밀었다. 젝스가 그것을 받아들자, 그는 진중한 어투로 충고했다.
 “쓰레기 버리는 날은 내일이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뚜벅뚜벅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젝스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절규했다.
 “마, 말도 안 되에에!”
 션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고, 주변에 있던 생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터처블 케인>의 전설에 새 항목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케인은 자신을 상대로 도박을 거는 것에 큰 불쾌감이 없었다. 다만 조금 전에는 상념을 방해받아 조금 짜증이 난 것이다.
 심란한 마음에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던 케인은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구석진 자리를 찾아왔다.
 툭 튀어나온 기둥 덕분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였고, 케인이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애용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후우······.”
 그는 좁은 책상에 신학서를 놀려놓고는 딱딱한 의자에 걸터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희미한 노란 빛이 천장을 밝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보이지 않는 탄식을 토했다.
 ‘이러한 학교지만······ 나는 기사가 되어야 한다.’
 7년 전, 케인의 아버지이자 세습 3대째의 가주인 ‘하이든 비엔 에르멘’ 자작이 타계하면서 저택에는 제국 정부의 인장이 박힌 최고장이 날아왔다.
 《작위 및 봉토 몰수 예정 안내서》
 무감정하고 몰개성한 제목을 가진 최고장은 케인에게 23세까지 제국 정부에 기여하고 있음을 증명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국의 봉토 세습은 3대까지만 인정되며, 에르멘 가문은 케인의 증조할아버지가 당시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일어난 가문이었다.
 4대째 가주인 케인은 에르멘 가문에게 내려진 작위와 장원을 물려받기 위해서 제국의 공무원이 되거나 그에 준하는 사회기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케인은 기사가 되기로 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온 터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가족이나 다름없는 레인 역시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비록 양자 입양이 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에르멘 자작가의 혈육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레인에겐 참으로 그답다 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
 「너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내가?」
 「아니, 내가.」
 그렇게 말하며 함께 사관학교의 문턱을 넘었던 이는 혼자서 가버렸다.
 이뤄질 수 없는 약속과 지켜야만 하는 것을 남긴 채.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냉엄한 현실은 그에게 ‘엄밀하게 말해 찾아낼 수 없다고 표현해야 옳다’고 지적했다.
 레인이 만난 사고는 블루 템페스트와도 같은 미증유의 재해였다.
 땅이 갈라지고 산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 하필이면 그곳이 제 7 사관학교의 훈련지였고, 하필이면 그곳에서 훈련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운이 나빴던 것은, 그 장소에서 훈련 중이던 레인이 갈라진 땅속으로 떨어졌고, 그 직후 수십 톤은 될 법한 토사가 밀려들어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널 구할 수 있었을까?’
 레인은 우수한 생도였다. 어느 정도냐면, 누군가 그를 질시하여 사고를 가장하거나 혹은 사고를 핑계 삼아 그를 ‘묻어버리기로’ 작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정에 불과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제 7 사관학교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생도들 사이에 온갖 암투와 간계가 난무하고 있으니까.
 사고 직후 찾아온 제국군 감찰단의 진상 조사에서 사고로 결론 내린 것은, 케인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그 이후 그가 보고 들은 동기들의 반응에서, 극단적인 가능성의 여지가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에 이미 벌어졌던 일에 가정을 더 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허무뿐.
 차라리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게 다시금 생각을 정리할 때,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학서를 앞에 두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신의 은총이라도 갈구하는 걸로 보이는군.”
 그는 불쾌감을 느꼈다. 오늘은 상념이 방해받아야 하는 날이던가.
 케인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깡마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얼굴 잔뜩 주름을 잡으며 웃고 있었다.
 평범한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모양새는 도심지 공원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이곳은 제 7 사관학교였다.
 이래 보여도 군사시설이고,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구십니까?”
 “이런, 날 기억 못 하나? 클클, 기사가 되려면 교양부터 쌓아야 할 것 같은데.”
 노인은 휘적휘적 걸어와서는 제멋대로 케인의 반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몸짓과 들은 적 있는 말투에 잠시 기억을 되짚던 케인은 이내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케인은 벌떡 일어나며 경례를 붙였다.
 “27기 생도 케인 에르멘이 마이스터 이사누스 지벨 트레이스레이 대남작님을 뵙습니다.”
 “빠르군. 2년 전에 잠깐 봤는데 그걸 기억하나?”
 “상당히 인상적인 만남이었기에 기억이 바로 났습니다.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런 이런, 딱딱하구만. 재미없게시리. 앉게.”
 케인은 드물게도 긴장감을 느끼며 착석했다.
 현재의 강철의 거장이 왜 이곳에 있는가에서 시작해, 어째서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회오리를 쳤다.
 그러다 문득, 기사 후보생에게 있어 몰라선 안 되는 인물이 왔음에도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케인은 주변을 흘깃 돌아보았다.
 너른 열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생도들의 학습욕구는 치열한 경쟁열과 맞물려 언제나 최고조였고, 주말이라고 해도 열람실의 자리는 절반 정도가 차있었다.
 하물며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가 있는데도 열람실이 텅 비었다?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의아한가? 내가 여기 있는 게.”
 이사누스는 피식 웃으며 질문을 던졌고, 케인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결국, 그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이 상황은 의구심이 듭니다.”
 “상황?”
 “대남작님께서 이곳에 계신데도,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이 나이쯤 되면 주변에서 사람 치우는 요령 한두 가지 정도는 익히고 있는 법이야. 신경 쓰지 말게. 그건 그렇고, 재미있나?”
 톡톡.
 신학서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묻고 있으니 응당 책에 대한 물음이리라. 케인은 신 제국 초기에 출간된 신학서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해 경외심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똘똘한 대답이로군. 하긴, 이 책은 신학자 중에서도 제법 생각 있는 작자가 쓴 거니까. 개인적으로는 신보다는 악마에 관심이 더 많지만 말이네.”
 “악마 말씀이십니까?”
 “아아, 그래.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원하는 것을 건네준 뒤 영혼을 취하는 방식은 영적인 거래이지 않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목표를 위한 수단과, 수단을 위한 노력 사이를 잇는 가장 훌륭한 브로커겠지.”
  “중개라는 말은 중간 개입의 줄임말이라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입에는 불필요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강철의 거장이 왜 일견 무가치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대부분의 천재는 괴짜이며, 그들은 범인(凡人)이 이해하기 힘든 영역에서 사고를 한다.
 그리고 이사누스는 괴짜 중의 괴짜였다.
 케인의 대답에 이사누스는 미소 지었다. 군대식 말투만 아니었다면 좀 더 부드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케인 에르멘 생도. 그렇다면 자네 역시 그러한 개입이 불필요하다 여기고 있다는 뜻인가?”
 “어떠한 개입 말씀이십니까?”
 “세상에는 많은 중개인이 있지 않나. 건축가가 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를 만든다면, 결혼 중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지. 악마도 마찬가지야. 목적과 노력 사이에 일직선으로 뚫린 다리를 놓지. 원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달콤한 제안이 아닐까? 통행료가 후불이라는 점이 또 매력적이고.”
 “마이스터 이사누스께서 악마숭배자였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크헐,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네가 불사를 탐해 계약이라도 맺을까 봐? 뭐,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내가 악마라도 나 같은 고객을 받을 것 같진 않군.”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용건은 무엇입니까?”
 케인은 침착하게 응대하기로 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2세대 아크게이너의 아버지가 주변을 물리고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일단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악마에 관해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애먼 생도 하나를 붙잡았을 리는 없다.
 이러한 반응에 이사누스는 가래 끓는 목소리로 웃어댔다.
 “크카카카카! 제국을 통틀어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세 사람도 되지 않을 걸세. 설령 황제라도 말이야. 흐음, 과연. 남이 상관하는 것도, 남에게 상관하는 것도 하지 않아서 언터처블인가. 그럴싸하군.”
 “학생들 사이의 가십을 모으시는 중이라면 적당한 인물을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생도였다면 뭐가 됐든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할 텐데, 자넨 그렇지 않군. 혹시라도 비위를 잘 맞추면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해서 당장 아크게이너 한 기 내어줄 수 있는 노릇 아닌가?”
 “대가는 후불입니까?”
 “푸헐헐헐헐헐!”
 이사누스는 폭소를 터뜨렸다. 케인은 그런 식으로 기체를 받아봐야 악마와 계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국군에서 전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있는 아크게이너를 임의로 타인에게 내주실 수 있을 정도라면, 그런 기사가 한두 명쯤 나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클클클······! 그리고 현재 그런 기사는 아무도 없다, 이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런 기사를 찾고 있다면 어떨까?”
 “예?”
 일견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가 살짝 움찔하는 모습은 이사누스를 즐겁게 했다.
 그는 케인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 3세대 기체를 개발 중이다. 기체명은 ‘화이트 스톰’. 기존의 2세대와 비교하면 실례가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월등한 기체지.”
 말하면서 이사누스는 툭 던지듯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케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둘둘 말린 종이를 향했다. 그것이 화이트 스톰의 설계도라는 걸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사누스는 설계도를 활짝 펼쳐 케인에게 보여주었다.
 “보면 알겠지만, 괴물이지. 내가 만들었다는 것 자체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야. 이 시점에서 한번 유추해보겠나?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유추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마저도 쩔쩔매는 상대가 바로 이사누스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 7 사관학교에 있는 누구라도 당장에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케인은 강철의 거장을 바라보았다. 아크게이너의 권위자는 끓어오르는 화산의 용암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타고 싶지 않나?”
 유혹이다. 지독한.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일순 케인의 눈에 이사누스가 계약을 주선하는 악마처럼 보였다 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7년 전.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아가듯 세상을 떠난 날, 케인은 새빨갛게 물든 어두운 방 안에서 묵묵히 눈물 흘리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녹아내리듯이 퍼져나가는 태양의 눈물이 하늘을 물들이며 검붉은 황혼이 내려앉는 지평선 위를, 거대한 그림자가 묵묵히 걸어갔다.
 어디로 향하는지, 왜 그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태양을 쫓아서 방랑하는 여행자처럼, 무감정한 태도로 걸어가는 강철의 거인.
 기사를 향한, 아크게이너를 향한 동경을 처음 품었던 날이었다.
 상속을 위해서, 라는 구실은 레인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케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다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필요가 아닌 욕심.
 그 날의 기억이, 전혀 새로운 개념의 기체, 화이트 스톰의 설계도를 보는 순간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 순간 케인의 눈동자에 내려앉은 감정을 열망이라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에는 예의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는 그냥 기사가 되면 족합니다.”
 “경계하는 게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제의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상황이 의심스럽다는 점이야 인정 한다만.”
 “이대로 있어도······ 제 목표는 이룰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군. 클클, 그럼 이쯤에서 내가 왜 네게 말을 걸었는지를 알려줘야겠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사누스는 설계도의 어느 한쪽을 톡톡 두들겼다. 글씨가 적혀 있는 작은 네모 칸이었는데, 그것을 읽던 케인의 어깨가 일순 흠칫했다.
 《기본 구동계 설계자: 하이든 비엔 에르멘》
 ‘아버지가······?!’
 왜 아버지의 이름이 이곳에 적혀 있는 것인가. 하물며 이사누스와 관계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름에 찌든 깡마른 손가락이 천천히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설계도의 맨 밑, 오른쪽 구석. 보통은 보지 않고 지나가 버릴 수도 있는 부분에는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디자이너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초기 디자인: 에이브릴 블리만》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케인은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남지 않아 멸문 처리된 블리만 가문은, 어머니의 친정이었다.
 “알겠느냐? 네가 이드와 이브의 아들이라면, 한 번쯤 이야기를 걸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네가 나의 옛 부하들의 혈육이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카하핫! 당연히 들어본 적 없겠지. 가족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니까. 보는 대로, 네 아비는 속을 만들고, 네 어미는 형태를 결정했다. 지금의 너처럼. 성격은 하이든을 닮았지만, 외양은 어머니를 닮았더군.”
 어머니 에이브릴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케인이 3살 되던 때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하이든은, 14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다만 그전까지 자주 저택을 비웠으며, 길게는 몇 달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잦은 외유를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야 그 진실을 알게 될 것 같았다.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사누스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대남작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폭풍의 주인을 찾고 있다. 여기의 학교장인 기시엔은 내 제자였고, 괜찮은 인재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온 찰나에 너를 보게 되었다. 너는 스스로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널 주목하고 있지.”
 대표적으로 제국 정보부 7과가 그러하다. 이사누스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 불러도 될 집단이 진작부터 제 7 사관학교를 주목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경악의 기색을 채 지우지 못한 케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좋은 인재라면 선점해야지. 그렇지 않나?”
 “그래서, 저를······?”
 “크흘흘흘······ 네 녀석도 후보 중 하나라고 해두마. 분명 네 녀석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지만, 지금과 같은 기회를 무조건 건네주기에는 어중간해서 말이야.”
 현재 케인의 개인 성적 순위는 12위였다. 이대로 순위를 유지하면 졸업 후에 곧바로 아크게이너에 탈 수 있는 정기사(正騎士)의 자격을 얻게 되기에 나름 자부할 수 있는 성적이지만, 그의 앞에는 11명이나 버티고 있었다.
 화이트 스톰의 기사 자격은 12위에게 주어질 기회치고는 지나치게 큰 셈이다.
 이사누스는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녀석이 이곳에서 어영부영 시간만 보낼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지난 1년 동안의 기록과 소문만 들어도 알 수 있어. 지금은 그저 자숙 기간일 뿐이야. 그렇지 않나?”
 “······.”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사누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애초에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눈앞의 상대는 희대의 괴짜이지만 불세출의 천재다.
 천천히 설계도를 돌돌 말아 품속에 갈무리한 뒤, 제국 유일의 대남작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케인을 보았다.
 “기회를 마련해주마. 최고가 되어라.”
 “최고······?”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기사가 되려고 한다지? 그렇다면 이참에 완벽하게 상속받아 보아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에이브릴이 그려내고 하이든이 뼈대를 세운 유산을. 네게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여라.”
 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강철의 거장이 개발하였지만, 그 외장과 뼈대는 부모가 만든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것 역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사누스는 젊은 청년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하이든이 놀라는 모습과 굉장히 닮았다. 지금은 죽고 없는 옛 부하의 흔적을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찢어발기는 강맹한 폭풍도, 그 중심의 눈은 고요하기 그지없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힘의 한가운데는 평온할 정도로 조용해. 물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세상을 온통 뒤엎으며 악다구니를 쓰던 놈들을 닥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폭풍도 바람이 되어 흩어질 뿐이다. 네 부모가 만든 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너는 폭풍의 눈이 될 수 있겠느냐?”
 “저, 저는······.”
 “흘흘, 아직 확신이 서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라. 최고가 되어 누구도 너에게 뭐라 할 수 없게, 차마 두려워서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라. 그리하면, 너는 알게 되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폭풍을 움직이는 방법을.”
 이사누스는 중절모를 고쳐 쓰고는 몸을 돌렸다.
 툭, 저벅. 툭, 저벅······.
 지팡이가 바닥을 짚으며 발걸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점점이 이어지며 희미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케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펼쳐 보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주먹을 쥐었다.
 
 신 제국력 304년 5월 23일.
 제칠일의 아침은 언제나 실내 점호로 시작한다.
 일주일에 하루 반밖에 없는 휴일이고, 당직 교관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생도들의 아침 시간을 빼앗으려 하진 않았다.
 하나 오늘은 달랐다.
 생도들은 기상하자마자 중대별 소대단위로 대연병장을 향해 꿈지럭거리며 걸어가야 했다.
 “뭐야? 뭔데?”
 “교장님 전체 점호.”
 “씨이, 제칠일에 뭐하는 짓이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옛말이 진짜라면 교장인 기시엔은 영생을 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너른 대연병장을 가득 메우는 불평을 반주삼아 4중대 3소대를 마지막으로 모든 생도가 도열했다.
 총인원 428명.
 입학 당시보다 349명이 줄었지만 4개 중대 13개 소대가 네모반듯하게 도열한 모습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다만 한쪽 다리를 삐뚜름하게 해서 서 있거나 대놓고 지휘대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생도들이 있을 뿐이었다.
 “야야, 최소한 주머니에서 손은 빼라.”
 “귀찮지? 나도 귀찮아. 표정 풀어.”
 “야, 젝스 너······ 아니, 됐다.”
 교관들 역시 주말에 일하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평소였다면 불호령을 내렸을 부분에 대해서도 설렁설렁 짚고 넘어갔다. 어쨌든 군인도 사람이고 주말에는 쉬고 싶으니까.
 생도와 교관의 불만을 온몸으로 맞게 된 기시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제칠일에 일부러 생도들을 모아놓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당직 교관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당직 교관은 익숙한 태도로 생도들을 차렷시킨 뒤,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학교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마지못한 기운이 섞여 있다고는 하나 400이 넘는 인원이 한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압권이었다. 기시엔은 경례를 받고는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용건만 짧고 간단히 말하겠다.”
 대연병장의 상공을 떠도는 거대한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기시엔은 자신이 꺼낸 말이 어쩔 수 없는 마법의 문장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부연했다.
 “오늘은 진짜다.”
 생도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생겨났다. 정말로 오늘은 훈화라는 이름의 정신공격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기시엔은 그러한 반응을 무시하기로 했다.
 “귀관들도 잘 알고 있는 마이스터 이사누스 대남작이 3세대 기체의 개발을 시작했다. 시험기의 이름은 화이트 스톰이며, 대남작은 전속 기사가 될 인재를 우리 사관학교에서 뽑고 싶다 하였다.”
 정말 짧고 간결했다. 어느 정도냐면 생도들이 환호해야하나 아니면 경악해야하나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술렁거림은 더욱 커졌고, 교관들은 생도들을 단속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기시엔을 바라보았다.
 3세대 기체 개발이라니, 소문만 무성하지 않았던가.
 그게 사실이라고?
 “참고로 말하지만, 사실이다.”
 우와아아아아-!
 폭발과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신형 기체도 아닌 3세대 기체라고 한다. 아예 처음부터 차원이 다른 기체에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기사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있어 이보다도 더 큰 기회가 있을까.
 휘파람과 열띤 고함, 개중에는 자기 이름을 외치는 생도도 있었다. 생도들은 자기들 중에서, 428명 중에서 한 사람이 차세대 주역이 될 기체의 전속 기사가 된다는 말에 통제 불능이 될 지경으로 기뻐했다.
 기시엔은 손을 휘저어 생도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생도들은 점호가 길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몇 번 더 환호성을 지른 다음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귀관들도 생존귀환 훈련이 폐지되고 중대 전술 훈련으로 대체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이스터 이사누스는 곧 시작하게 될 이 훈련의 결과를 보고, 가장 우수한 전과를 거둔 중대에서 영예의 생도를 선출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생도들 중 3/4이 다시금 환호성을 질렀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4중대의 생도들은 눈에 띄게 좌절하고 침울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라앉아 늪지와도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오직 케인만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서 있었다.
 ‘기회가 왔다.’
 휘이이······!
 세찬 돌풍이 대연병장의 환호를 휩쓸어내듯이 실어 날랐다.
 무언가의 전조처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Indigo.03: 전설이 사라진 자리.
 
 
 
 신 제국력 304년 5월 24일.
 《이사누스 지벨 트레이스레이 대남작, 3세대 아크게이너 화이트 스톰을 개발 중이라 선언!》
 《시험기의 기사로는 제 7 사관학교 소속 생도 중에서 선발!》
 제국군 군사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기사에 제 7 사관학교 4중대 생도들은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성적이 나쁜 생도들로 구성된 4중대는 우수한 성적은커녕 훈련에서 전멸 판정을 받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게 고작이리라.
 “이번 한 번만 어떻게 할 수 없을까?”
 4중대의 중대장 생도, 라크만 비트레는 우울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자리한 부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폐품을 면한 낡아빠진 책상과 금방이라도 사분 오시 될 것 같이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은 다섯 생도는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거나 흥미 없다는 듯 방만한 태도를 취하는 간부 생도들을 보며 라크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왜 내가 회의를 하자고 했을까.
 “어차피 뭘 해도 안 될 거잖아. 말하는 것도 낭비야.”
 두 다리를 책상에 올린 채 삐딱한 자세로 앉아있던 갈색 머리의 청년이 상체를 흔들었다. 끼익끼익하는 소리는 의자의 내구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한센. 그래도 이번이 큰 기회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렇지. 하지만 우리하곤 상관없어. 페달이잖아? 어차피 파벌에서는 우수한 전공을 위해 우리부터 노릴 거라고. 최단 시간 전멸은 불가피하단 말씀.”
 부중대장인 한센은 이죽거리며 남의 일인 양 말했다. 그 모습에 라크만은 화내지 않기로 했다. 말하는 태도는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말이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어제 학교장이 선언한 내용 덕분에 아침부터 사관학교에선 팽팽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각 파벌은 그나마 있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벌써부터 훈련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준비는 해야 할 것 아냐. 보급 신청도 해야 하고.”
 제 7 사관학교의 훈련 준비는 매우 독특하다.
 생도들은 각자가 준비해야 할 개인 물품은 물론이고 중대에서 사용할 장비까지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훈련용 기체에서 시작해 하다못해 칫솔까지 보급 신청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전투 준비 역시 생도들이 해야 할 중요한 전술 과제인 셈이다.
 하지만 4중대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센은 양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올리며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지금 가봐야 아무것도 못 얻어. 어차피 파벌 놈들이 자기네들 신청 끝날 때까지 우리가 손도 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쳇, 한두 번 당하나?”
 “조금이라도 노력해야지! 안 그러면 또 지난번 훈련처럼 폐기 직전의 물건만 받아온다고!”
 라크만은 생도 중대가 발족하고 처음으로 중대 대항 훈련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각 파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라크만을 비롯해 4중대 간부 생도들이 하려는 모든 행동을 절묘하게 방해했다.
 간신히 보급 신청을 해서 남은 물건을 받아왔지만, 완전 군장을 할 경우 그대로 패잔병 혹은 탈영병으로 보이게 될 정도의 저급품들뿐이었다.
 심지어 모자란 물건마저 있었다.
 “최소한······ 숟가락은 챙기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3소대장 생도가 한탄하듯 말했다. 라크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에이리. 그건 네 책임이었잖아. 그리고 애초에 훈련용 보급품에 숟가락이 부족했단 말이야.”
 “외부에서 사오려고 해도······ 방해받았어.”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는 덕분에 어둡게만 보이는 에이리의 어조는 그보다 더 어두웠다.
 소대원에게 제대로 숟가락이 지급되지 않아 식사 때마다 애로사항을 겪고, 생나무를 깎아 어떻게든 보충했지만, 덕분에 소대원 절반이 식중독에 걸렸던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한센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말이지, 훈련준비 기간에 간부들이 다 모여서 한숨만 쉬고 있다는 게 이미 글러 먹은 거 아냐? 다른 중대는 지금 열심히 훈련기 정비다 작전 계획 수립이다 보급 신청이다 해서 바쁜 몸이신데.”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을 한가득 메운 한숨의 합창이 현실을 긍정했다. 지금부터 뭘 하려고 해도 파벌이 손을 써서 방해할 것이 분명하며, 인정하긴 싫지만, 중대의 질이 너무나도 떨어지는 탓에 뭘 해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기에 결국 중대장이 된 라크만은,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결국, 페달은 페달이었다. 밟히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후우, 뭔가 말하려 해봐야 소용이 없겠지. 다들 해산해. 젠장. 어차피 우리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훈련이니까.”
 “과연 그럴까. 라크만 비트레.”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생도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 입구에 케인이 서 있었다.
 “어······?”
 “언제?”
 생도들은 케인이 여기 있다는 것보다도 저 낡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는 것에 더욱 크게 놀랐다. 라크만은 그것만으로도 그의 재주를 크게 칭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실례하지.”
 케인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회의실로 걸어 들어왔다.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것인지 문은 소리 없이 닫혔고, 찰칵하며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
 위태위태한 균형을 자랑하며 서 있는 기다란 책상의 상석에는 라크만이 서 있고, 그의 오른편에는 부중대장 생도 둘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왼편에는 소대장 생도들이 앉아 모두가 케인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 중 한센이 살짝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넌 여기 무슨 일이야?”
 “중대 회의에 중대원이 참가할 수 없는 이유가 있나.”
 “하? 중대워언? 지금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언터처블 케인 씨? 누가 들으면 중대 운영에 참으로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들리겠습니다만?”
 “너보다는 많다, 한센 아리우스.”
 “뭐야?!”
 와당탕!
 한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거나 걱정하지 않았는데, 실제로도 한센은 씩씩거릴 뿐 케인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라크만은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고개를 저었다. 한센이 다른 어떤 중대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다혈질인 주제에 새가슴이기 때문이었다.
 “앉아, 한센.”
 “······쳇!”
 혀를 차며 자리에 앉는 한센의 이마엔 식은땀이 한두 방울 삐져나와 있었다. 내심 라크만이 말려준 척을 해서 적잖이 안도했다.
 촌극이라면 촌극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촌스러운 연극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적어도 4중대는 한센처럼 남들에게 훤히 보이는 허세를 부리는 생도도 적지 않았다.
 케인은 무심하게 한센을 보다 라크만에게 시선을 던졌다.
 “훈련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지?”
 “계획 수립 중이야. 그보다 개인 전투 준비는 끝냈어?”
 “지금은 줄이 짧더군.”
 케인은 확인 도장이 찍힌 보급 신청서를 들어 펄럭여 보였다. 줄이 짧기보다는 다른 생도들이 급히 다른 중요한 용무를 떠올리면서 자리를 비켜준 덕분이지만, 어쨌든 개인 물품 신청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거 다행이군. 그나마 한 명은 제대로 전투 준비를 한 셈이니까.”
 “흥! 그건 그렇겠지. 저래 보여도 4중대의 유일한 랭커니까.”
 한센은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 개인 성적 20위 안에 들어간 이들을 랭커라고 부르는데, 졸업 이후 곧바로 아크게이너를 조종할 수 있는 이들이기에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나 4중대의 유일한 랭커인 케인은, 그 정도가 더했다.
 “8순위만 올리면 너도 랭커다, 한센.”
 “하! 그걸 올릴 수 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한센, 가만히 있어. 그보다 케인.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어?”
 “나는 처음부터 용건을 밝혔다만.”
 라크만은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고는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신(諸神)이여, 아무나 나 좀 돌봐줘.
 “훈련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었지? 보다시피 회의 중이야.”
 “보다시피?”
 케인은 일부러 회의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라크만의 뒤에 있는 칠판은 낡다 못해 닳아서 벽과 크게 다름없는 역할 외엔 아무것도 못 하게 된 지 오래였다. 책상이 낡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위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센은 콧방귀를 뀌었고, 다른 이들은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에이리가 작은 목소리로나마 말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잘 알잖아.”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우리에겐, 같아······.”
 뭘 해도 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이든 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유쾌한 순환. 벗어날 수 없는 고리 속에 남는 것은 자포자기와 한숨뿐이었다.
 라크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잖아. 4중대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한센의 말대로 지금까지 아무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이렇게 나서는 건 뭔데? 3세대 기체가 타고 싶어서?”
 평소에 중대 운영에 관심이라도 가졌다면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인은 누가 뭘 하든 상관없다는 오오라를 풀풀 풍기면서 일체의 참견을 하지 않았다.
 한센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라크만을 거들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