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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이계황제 헌터정복기[E]

이계황제 헌터정복기 1권 - 1

2019.07.31 조회 865 추천 11


 이계황제 헌터정복기 1권 - 1
 
 CONTENTS
 
 프롤로그
 1장 시작
 2장 전환
 3장 가족
 4장 어머니
 5장 라이센스
 6장 테스트
 7장 계약
 8장 C-2팀
 9장 복수
 10장 판매
 11장 홍지희(1)
 프롤로그
 
 
 2015년 7월 19일.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은 지구를 감싸고 있는 무엇인가가 부서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이 부서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나 뭔가가 부서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그 느낌과 동시에 자신들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깨어났다는 느낌도 받았다.
 전 인류가 이 기이한 느낌에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지구 전체가 하얀빛에 휩싸이며 잠시 동안 빛이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빛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조금 전 뭔가 다른 힘을 감지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순간까지만 해도 왜 이런 능력이 주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주어진 이유를 파악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동시에 같은 심상(心想)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심상에는 지구가 괴물에게 습격을 당하는 모습들이 나타나 있었다.
 심상 속에서 지금까지의 무기는 괴물에게 잘 통하지 않았고, 괴물을 막는 사람들은 기이한 기운을 사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그런 능력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 능력을 누가 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3년의 시간 동안은 지구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능력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3년 전의 사건을 한순간의 기이한 해프닝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것이 해프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3년 전의 그 일이 벌어지기 전부터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 3년 전의 일로 인하여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심상에서 벌어진 일이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부여받은 능력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아직 받은 능력을 현실로 발현하지는 못했지만, 능력을 부여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밤 꿈속에서 그 능력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3년이 지난, 2018년 7월 19일 지구 전역에 기이한 차원의 구멍이 나타났다.
 훗날 몬스터 홀이라 명명된 차원의 구멍은 나타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면서 다수의 몬스터를 뱉어내었다.
 괴물이라는 뜻의 몬스터라 이름 붙은 것처럼, 그 속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인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연히 몬스터들은 인간을 공격하였고, 인간을 살아남기 위해서 몬스터를 공격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기존의 인류의 무기들은 능력이 낮은 하급의 몬스터에게만 유효하였고, 중급 이상의 몬스터들에게는 전혀 효력을 보이지 못했다.
 그렇게 인류는 몬스터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자칫 인류 전체가 몬스터들에게 사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능력자들이 나타났다.
 능력자들은 3년 전 흰 빛과 함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로 몬스터 홀이 나타나면서 그들의 능력 또한 현실로 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이 능력자들이 사용하는 무공과 마법과 초능력들로 인하여 밀리고 있던 인류는 이제야 몬스터들과 해볼 만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몬스터와의 싸움은 방어전의 양상이었다. 하지만 몬스터에게서 나온 부산물이 지금껏 없었던 신소재라는 것을 파악한 인류는 더 이상 방어적으로 나서지만은 않았다.
 특히 몬스터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마정석은 에너지원으로의 사용부터 시작해서 그 이용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밝혀진 뒤로부터는 적극적으로 몬스터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몬스터 홀에 먼저 들어가서 몬스터를 모두 해치우면 홀이 사라지고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많은 능력자가 몬스터 홀로 들어가 몬스터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처리한 몬스터 홀은 홀의 코어와 함께 기이한 힘이 깃든 무구를 남긴다는 것을 안 뒤로부터는 능력자들은 경쟁적으로 몬스터 홀을 처리하였다.
 물론 몬스터는 위험하였고 몬스터 홀은 더 위험하였다. 실제로 능력자들을 먹어 치워 버린 몬스터 홀도 많았다.
 하지만 어차피 몬스터 홀은 두고 볼 수 없었고, 몬스터 홀에서 나오는 코어와 무구들은 너무도 강력한 힘을 주는 매력적인 동인(動因)이었다.
 이런 사실 덕분에 이제 인류는 몬스터를 방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몬스터를 사냥하게 되었고, 점차 몬스터에 의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체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인류와 몬스터는 서로 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죽고 죽이는 투쟁을 하였다.
 그렇게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1장 시작
 
 
 헤스티아 대륙의 알토 왕국의 왕궁 알티아는 평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화려한 왕궁이었다.
 하지만 지금 알티아는 그런 화려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에르하임 제국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이 알티아의 황폐한 모습은 알토 왕국이 에르하임 제국에게 패색이 짙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알티아의 내전(內殿)에는 알토 왕국의 국왕 일가가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금 알토 왕국의 왕좌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은빛 브레스트 메일에 붉은 망토를 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검은 머리 미청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는 초라한 알토 국왕 일가의 모습을 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왕족이라는 것들이 쥐새끼처럼 하수도를 통해서 도망치려 했다?”
 지금 알토 왕국 국왕 일가의 모습은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전포와 드레스는 어디 갔는지 평민이 입을 법한 옷가지와 얼굴에는 숯검정까지 칠해서, 그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들이 왕족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크윽. 스토른 공작과 길이 어긋난 것인가? 계획대로 되었다면 충분히 카슈타르 제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을 텐데···.”
 알토 왕국의 국왕 디테호른 1세는 분하다는 얼굴로 눈앞에 있는 에르하임 제국의 황제 칼스타인 폰 에르하임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칼스타인은 20대 정도로 보이지만 실상 40살이 넘은 중년인이었다. 강력한 마나의 힘이 그의 신체를 재구성하고 그의 노화를 막고 있는 것이었다.
 디테호른 1세의 말에 잠시 웃음을 짓던 칼스타인은 자신의 검은 머리를 슬쩍 쓸어 올리더니 검은빛의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길이 어긋나? 후후. 제이크, 가져오너라.”
 칼스타인은 무엇인지 가져와야 하는 것인지 말하지도 않은 채 옆에 서 있던 기사, 제이크에게 단지 가져오라는 말만 하였는데 제이크는 그런 칼스타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는지 재빨리 통로로 가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제이크가 양손으로 잡고 들고 오는 것은 누군가의 머리였다. 잘린 단면에서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 머리는 바로 디테호른 1세가 기다렸던 스토른 공작의 머리였다.
 스토른 공작은 부릅뜬 눈을 채 감지도 못한 것이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 디테호른 1세는 목이 잘린 스토른 공작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스··· 스토른 공작!!! 어··· 어떻게··· 스토른 공작은 그랜드마스터의 무인인데···.”
 “그랜드마스터지. 그게 왜?”
 디테호른 1세의 말처럼 알토 왕국의 수호자인 스토른 공작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그랜드마스터의 무인이었다.
 칼스타인 역시 그랜드마스터라 알려져 있지만, 디테호른 1세는 그보다 이십 년은 먼저 그랜드마스터에 오른 스토른 공작이 결코 칼스타인에게 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르하임 제국에 다른 그랜드마스터가 있었던가? 단지 마스터급이 왔다면 스토른 공작이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텐데···.”
 디테호른 1세 역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무인이었다. 비록 마스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 역시 무인이었기에 전투 상황을 예측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가 아는 스토른 공작이라면 칼스타인이 몇 명의 마스터와 함께 공격을 하더라도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틈을 노려서 칼스타인을 죽이거나 그에게 치명상을 가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충분하다고 믿고 있었다.
 “후후. 뭔가 잘못 생각하나 본데, 스토른을 해치운 것은 나 혼자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뭣이! 거짓말하지 마라! 스토른 공작이 그랜드마스터에 오른 것은 네놈이 마스터가 되기도 전이었는데 어떻게 너 혼자서···.”
 한 경지에 머무른 시간이 길다고 더 높은 무위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토른 공작은 천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시간에 그랜드마스터에 올라 수십 년간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알토 왕국을 수호하고 있었다.
 카슈타르 제국의 수호기사 루시안 공작이나, 제피로스 제국의 드라카스 원주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그를 일대일로는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했기에 디테호른 1세는 칼스타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네놈이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어. 어쨌든 오늘 이 알토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면 헤스티아 대륙 서북부의 정벌은 끝났다 할 수 있겠군. 오늘로서 친정(親征)도 끝인가? 자, 치워라!”
 칼스타인의 치우라는 말에 디테호른 1세 뒤에 서 있던 기사는 은빛 검을 꺼내어 들었다.
 디테호른 1세는 대화를 통해서 협상을 할 생각을 하였는데, 칼스타인이 단호히 자신의 목을 치려 하자 급하게 말을 꺼냈다.
 “잠깐!”
 디테호른 1세의 다급한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기사는 검을 빼어 든 채 칼스타인을 바라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칼스타인은 더 할 말이 없었고 더 궁금한 것도 없었다.
 “끝내.”
 “날 죽인다면···.”
 칼스타인의 냉정한 말에 디테호른 1세는 더 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뒤의 기사는 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휘익~!
 통~ 통~ 털썩~!
 “아악!!! 전하!!”
 “아바마마!!”
 디테호른 1세의 죽음에 그의 왕비와 공주는 비명을 질렀다. 왕비는 성정이 심약했는지 기절까지 하고 말았다. 다만 왕태자인 라도크 왕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 뿐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칼스타인은 그런 라도크를 잠시 흥미 있게 바라보았지만, 그 잠시가 끝이었다.
 이어서 그들의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다시 참수 지시를 내리려 하였는데, 조금 전 스토른의 머리를 들고 왔던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폐하, 토르셀 왕비는 몰라도 리토니아 공주는 잡아서 황실 직할 매화원(賣花園) 히야신스에 소속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매화원이라는 말에 리토니아 공주는 눈을 부릅떴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공주이긴 하지만 지금 제이크가 말하는 매화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에르하임 제국의 황실 직할 매화원 히야신스는 전쟁에서 패한 적대국의 귀족이나 왕족의 영애들을 성 접대부로 사용하는 일종의 공창(公娼)이었다.
 리토니아 공주의 미모와 출신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고급 창녀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제이크의 제안에는 그의 사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이크, 리토니아 공주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알토 왕국에는 후환을 남겨둘 생각이 없다.”
 조금 전 라도크 왕태자에게도 잠시 흥미를 느꼈지만 그냥 참수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하지만 제이크는 리토니아 공주를 취하고 싶었는지 다시 한번 칼스타인에게 말을 하였다.
 “폐하, 그럼 제가 데려가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런 제이크의 말에 칼스타인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싸늘해진 주변의 공기에 제이크는 몸에 닭살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랜드마스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스터급의 강자라 할 수 있는 제이크는 칼스타인의 눈빛에 마치 고양이 앞의 쥐가 된 느낌을 받았다.
 과거 그랜드마스터와도 잠시나마 상대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숨이 막히는 긴장감을 넘어서 제이크가 문자 그대로 숨이 막히고 있을 때, 칼스타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이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과거 인연이 있었다고 해도 계속 봐주진 않아. 선을 넘지 마라.”
 칼스타인이 입을 열면서 숨을 쉴 수 있게 된 제이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대답했다.
 “허억, 허억. 네, 네! 폐하! 죄송합니다!”
 그렇게 제이크에게 가벼운 경고를 한 칼스타인은 다시 포로를 잡고 있는 기사들에게 신호를 내려 참수를 집행할 것을 명했다.
 쉭! 쉭! 쉬익!
 툭~ 툭~ 투욱!
 세 개의 목이 떨어졌고, 세 구의 시체가 생겼다. 20대 초반의 아름다웠던 리토니아 공주 역시 한 구의 주검이 되고 말았다.
 디테호른 1세 및 그 직계의 죽음을 확인한 칼스타인은 제이크의 반대쪽에 있던 기사에게 명을 내렸다.
 “아토스. 알토의 모든 왕족을 지워라. 알토 왕국은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한 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구심점으로 봉기할 가능성이 커. 일단 직계는 지웠지만 만일을 대비해 놓는 것이 좋지.”
 “네, 폐하!”
 “그럼 난 돌아갈 테니 뒷정리를 하고 돌아오도록 해. 아, 임시 사령관은 블루 드래곤 군단의 단장 로바티스로 하고.”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말을 마친 칼스타인은 품속에서 특이한 문양이 음각된 다소 굵은 은빛 반지를 꺼내 왼손에 끼웠다.
 ‘1년 만에 이걸 사용하는군. 역시 돌아갈 때는 한 번에 가는 게 좋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칼스타인은 반지에 마나를 주입하였고, 막대한 마나가 주입된 은빛 반지는 칼스타인이 서 있는 대전의 바닥에 직경 1미터 정도의 마법진을 투사하였다.
 마법진을 확인한 칼스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시동어를 읊었다.
 “알라드 카라스 툼!”
 기이한 문양과 룬어로 이루어진 마법진은 칼스타인의 시동어에 엄청난 빛을 내뿜더니 그와 함께 사라졌다.
 
 * * *
 
 칼스타인이 나타난 곳은 에르하임 제국의 황도 칼리움의 황궁이었다. 다만, 대응 마법진을 감추기 위해서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자신과 궁정 마법사만이 아는 비밀 공간이었다.
 가로세로 20미터 규모의 정사각형 형태의 방에 선 칼스타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돌아왔군.”
 칼스타인은 오늘은 이곳에서 1년간 야전에서 묵은 피로를 풀고 내일 황궁으로 복귀할 생각을 하였다.
 지금 간다면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쉬려고 마음먹고 있는 칼스타인의 기감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감을 느낀 칼스타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방과 연결된 비밀 통로를 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오셨군요!”
 수석 황궁 마법사 엘리니크였다.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하늘색 로브에 수정 지팡이를 짚으면서 오는 눈부신 금발 머리의 마법사 엘리니크는 칼스타인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40대의 마법사였다.
 1년 만에 복귀하는 칼스타인에게 엘리니크는 조용히 다가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현하였다.
 엘리니크의 예를 받은 칼스타인은 격의 없이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역시 자네일 줄 알았지. 이곳은 자네와 나밖에 모르니 말이야.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하자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폐하는 에르하임 제국의 황제이십니다. 과거의 인연이 있다 해서 제가 편하게 폐하를 대할 수는 없지요.”
 강경한 엘리니크의 발언에 칼스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후. 그 고집은 여전하군.”
 칼스타인이 자신의 고집을 꺾는 듯한 모습을 하자 엘리니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는 내일이나 오실 줄 알았더니 오늘 바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통신마법을 통해서 전황을 전달받았기에 친정의 결과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알토 왕국까지 끝났기 때문에 자신이 제작했던 공간 이동 반지로 칼스타인이 복귀할 것은 엘리니크 역시 예상하고 있었지만, 오늘 바로 칼스타인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빨라도 상황이 정리되는 내일 정도 복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뭐, 다 끝난 상황에서 내가 있어 봤자 밑에 애들이 불편하기만 하지, 안 그래?”
 “불편한 걸 아셨으면 친정을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아는 녀석이 그렇게 물어? 내가 친정을 안 했으면 이번 북부 3개국을 정벌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칼스타인의 반문에 엘리니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칼스타인의 말처럼 그가 없었다면 이번 정벌은 힘들었을, 아니, 불가능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 긴 하지요. 폐하를 제외하고는 3개국의 수호기사를 상대할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 그러니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이지. 뭐 싸우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느껴지더군.”
 “뭐가 말입니까?”
 “라이트 소더가 그랜드마스터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경지라는 것을 말이야.”
 칼스타인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능가한 라이트 소더였다.
 아직 타국, 아니, 제국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칼스타인의 수석 마법사이자 친구인 엘리니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요. 만일 폐하께서 라이트 소더가 되시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친정을 막았을 것입니다.”
 “하하. 그랬겠지. 네 성격이었다면 말이야.”
 칼스타인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엘리니크였다. 엘리니크만이 칼스타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고, 그를 신뢰하는 칼스타인의 성격상 아마 엘리니크가 필사적으로 친정을 막았다면 그의 말처럼 친정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무사히 복귀하신 걸 뵈었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내일 대전에서 뵙겠습니다.”
 엘리니크는 칼스타인이 내전(內殿)으로 들지 않고 이 비밀 공간에 머무를 듯한 모습을 보이자, 무슨 일인지도 묻지도 않고 바로 상황을 파악하였다. 둘이 쌓아온 시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엘리니크의 말과 행동에 칼스타인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고.”
 그렇게 엘리니크까지 보낸 칼스타인은 갑옷을 벗고 간단히 샤워를 한 후 편안한 심정으로 자리에 방의 한쪽에 있는 침대에 누웠다.
 아직 잠을 자기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1년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기에 묶은 피로를 풀기 위해서 자리에 누운 것이었다.
 사실 라이트 소더에 이른 만큼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이 없긴 하지만, 칼스타인은 적절한 수면으로 신체와 정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수면이 부족하면 신체의 밸런스도 떨어지고, 명확한 판단이나 사고를 하는 것도 방해받기 때문에 전장에서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최소한의 수면을 취하곤 하였다.
 그렇게 칼스타인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채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 * *
 
 수면을 취하던 칼스타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주위가 완전히 깜깜하고 아무것도 심지어 자신의 몸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뭐지? 꿈인가?’
 정기신(精氣身)을 완벽히 통제하는 경지에 있는 라이트 소더답게, 칼스타인은 평소 전혀 꿈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칼스타인은 자신을 믿었고 자신의 본능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신체를 잃은 영혼의 상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칼스타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극도로 단련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칼스타인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외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어둠에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천천히 외부를 관조하던 칼스타인은 이내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혼이 머문다는 상단전이군.’
 라이트 소더에 이른 이후 관조를 통해서 자신의 몸 내부를 다 살펴본 적이 있었기에 지금 있는 곳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상단전과 다른 것은 자신의 상단전은 눈부시도록 빛나는 흰색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인데 반해, 이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몸에서 혼이 떠난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그래도 몸이 살아 있는 것인가? 어차피 주인도 없는 방인데 상황 파악을 위해서라도 일단 장악해 봐야겠군.’
 만일 칼스타인이 라이트 소더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자신의 혼으로 다른 사람의 육체를 장악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칼스타인의 경지는 그것이 가능하였다. 어두운 상단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칼스타인은 자신의 영혼으로 이 육체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영육의 끈이 이 신체와 이어졌기에 다른 몸으로 이동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육체의 상단전은 칼스타인의 영혼에 의해서 점점 밝아지더니 드디어 완전히 어둠이 사라졌다.
 칼스타인 원래 육체의 눈부신 흰빛을 내는 상단전과는 전혀 다른 칙칙하고 탁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곳에 어두운 곳은 없었다. 칼스타인이 육체를 장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칼스타인은 이 육체에 남긴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영혼이 떠나서 그런지 뇌의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이 일부 손상되어서 그런지 완전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칼스타인은 이 육체에 담긴 대부분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 것인가··· 자살을 택하다니 나약한 영혼이었군.’
 칼스타인이 들어온 몸의 주인은 이수혁이라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아니, 자살을 시도했을 때는 17살로 10대의 청소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수혁은 원래부터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의외로 마나 잠재력 테스트에서 매우 높은 결과를 받아, 세계 능력자 협회의 능력자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잠재력에 비해서 실재로 발현되는 능력은 형편없었다. 다만, 유래를 찾기 힘든 우수한 잠재력의 소유자라 학교 측에서는 많은 편의를 봐주었는데 그것이 동료들의 시샘을 샀고, 그 결과는 이수혁의 왕따로 이어졌다.
 안 그래도 심약한 성격의 이수혁은 왕따를 통해서 멘탈이 가루가 되도록 부서졌다.
 이수혁은 아카데미를 그만두려 하였지만 일단 높은 잠재력 때문인지 아카데미에서도 웬만해서는 이수혁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부모님 또한 이수혁이 아카데미에 남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 출신의 헌터들은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우수한 인맥을 통해서 좀 더 좋은 조건과 자리로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수혁의 부모님은 이수혁이 이런 왕따를 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아카데미에 적응을 못 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만일 이런 극한 상황인 것을 알았다면 이수혁을 아끼는 부모님의 성정상 당연히 아카데미를 그만두게 하였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수혁은 2년을 버텼다. 15살에 입학한 이수혁이 17살이 된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5년제로 3년만 더 버티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이수혁은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렇게 이수혁이 버티면서 동기들은 단순 괴롭힘으로는 이수혁이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좀 더 강한 자극을 주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 * *
 
 “유빈아, 요즘 이수혁은 어때?”
 “뭐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겠지, 나 같은 퀸카가 그런 찐따를 상대해 주고 있으니 말이야.”
 짙은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김유빈은 스스로 퀸카라 말한 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괜찮은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말을 건 박창수도 김유빈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크크크. 그럼 디데이는 언제야? 이제 웬만큼 기분이 올라온 것 같은데 말이야.”
 “뭐 그래도 한 달은 채워야 안 되겠어?”
 “한 달이면 이틀 뒤네. 크큭, 애들 불러 모아야겠어. 아니다, 그 찌질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겨서 두고두고 써먹어야지.”
 “하여튼 나 한 달 동안 고생했으니까, 약속했던 건 지켜야 해.”
 “그래 기본 오백만 원에, 만약 그 자식이 자퇴하면 천만 원 더 줄게.”
 뚱뚱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통통한 것보다 좀 더 살이 찐 몸을 가진 박창수는 이수혁을 괴롭히는 데 가장 앞장선 동급생이었다.
 박창수가 이수혁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별것도 아닌 이유였다.
 박창수는 동기 중에서 자신의 마나 잠재력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수에서는 이수혁이 가장 높은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자신이 2등인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박창수의 입장에서는 이수혁만 나가면 기수에서 자신이 가장 높은 잠재력을 가진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박창수가 이수혁을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기하는 것에 불과하였는데, 이수혁이 심약하다는 것을 알아챈 박창수가 약간의 괴롭힘과 왕따를 시키면 이수혁이 스스로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동기가 이수혁이 괴롭힘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박창수가 생각한 괴롭힘은 동기 중 가장 예쁘고 인기가 많은 김유빈을 이수혁에게 접근시켜 사귀는 것처럼 행동한 뒤 그를 차버려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이었다.
 ‘만일 그 찐따가 자퇴해서 천만 원을 받으면, 이번 학기 학비하고 생활비는 해결되겠네. 그 녀석에게는 쬐끔 미안하긴 하지만 더 모질게 해서 꼭 자퇴를 시켜야겠어.’
 김유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창수는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김유빈에게 은근히 말했다.
 “유빈아. 이수혁 건 말고 전에 말한 건 생각해 봤어?”
 “뭐? 아··· 그건 됐어.”
 “아직 돈이 아쉽진 않나 보네.”
 “돈이 아쉬워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박창수가 지금 말하는 것은 일종의 계약 커플을 제안한 것이었다. 박창수는 김유빈의 외모가 탐이 났고, 김유빈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이용하여 제안한 것이었는데, 김유빈은 그것을 거절한 상태였다.
 다만, 돈이 필요한 김유빈은 이수혁을 괴롭히는 것은 동참한 상태였다.
 이수혁을 괴롭히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도 않았고 2년간 방관자로서만 있었기에 죄책감도 별로 없었다.
 ‘너 같은 돼지하고 계약 커플 할 정도까지 내가 급이 떨어지지 않았어! 차라리 외모만 따지면 그 찐따가 낫지!
 실제로 이수혁은 큰 키에 훤칠한 얼굴까지 그 심약한 성격만 아니면 인기까지 있을 얼굴이었다.
 ‘그리고 여기만 졸업하고 나면 너 따위 돼지가 아니라 제대로 된 헌터를 물어서 결혼할 거야.’
 박창수가 조금만 더 잘생겼다면 고민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박창수는 전혀 김유빈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단호한 김유빈의 대답에 박창수는 예의 느물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물러섰다.
 “뭐, 아직은 안 급한가 보네. 흐흐, 알겠어. 어쨌든 이번 일이나 잘 부탁한다.”
 “그래, 일 끝나면 돈이나 제대로 입금해.”
 
 * * *
 
 시간은 흘러 이틀이 지났고, 드디어 디데이가 된 그 날 김유빈은 이수혁에게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 남을 것을 이야기하였다.
 이수혁은 한 달간 거의 연인처럼 친하게 지낸 김유빈이 자신에게 고백할 것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다.
 김유빈과 지내면서 괴롭힘 또한 없어졌기에 이수혁에게는 김유빈이 구세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구세주나 다름없는 김유빈이 고백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분위기를 보아 오히려 이수혁은 자신이 먼저 고백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심약한 이수혁의 성격으로 봐선 정말 큰 결심을 한 것이었다.
 모두가 퇴실하고 강의실에는 김유빈과 이수혁만이 남아 있었다.
 김유빈이 약간 떨리는 말투로 이수혁에게 뭔가를 이야기 하려 하자, 이수혁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 유빈아. 이런 건 남자가 해야 한대. 우리 사귀자! 한 달 동안 너무 고마웠어, 나 같이 찌··· 찌질한 애도 너와 같이 있으니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워! 지금의 난 네게 부끄러운 남자지만, 앞으로 노력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할게!”
 이수혁의 입장에서는 정말 큰 결심을 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김유빈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고백이었다.
 “뭐? 풋··· 얘가 뭐라는 거니. 난 이 연극을 어떻게 끝낼까 싶어 망설였는데, 뭐라고? 사귀자고? 내가 너 같은 찐따랑 왜 사귀냐? 이게 다 박창수가 너한테 잘해줬다가 멀어지면 돈을 준다고··· 아. 이런 이야기까진 할 필요가 없겠네. 어쨌든, 한 달간 너한테 맞춰준다고 힘들었어. 앞으로는 아는 체하지 말자. 그 말 하려고 남으라 한 거야. 그럼 잘 가.”
 박창수의 돈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눈치도 없는 이수혁이 사귀자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김유빈은 흥분해서 하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까지 해버렸다.
 ‘쓸데없는 말을 했네. 뭐 어때. 이제 말 붙일 것도 아닌데.’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김유빈이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이수혁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물만 흘리던 이수혁은 주섬주섬 가방을 싸더니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수혁에게 더 이상 삶의 희망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계속 있는 것보다, 한 번의 희망을 보았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훨씬 큰 충격이었다.
 지금 이수혁의 마음에는 유서 같은 것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20층 건물의 아카데미의 옥상에 올라간 이수혁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멍하게 하늘만 보다가 옥상의 난간을 넘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뒤에서 뭔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현재 이수혁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저 너무 힘들어요.’
 
 * * *
 
 여기까지가 이수혁의 뇌리에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 불쌍한 한 영혼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뇌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라이트 소더의 정신력을 가진 칼스타인은 몸에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도 부분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 기억은 바닥에 떨어져 전신 골절에 내장이 터져, 즉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수혁의 몸에 생긴 일들에 관한 기억이었다.
 20층 높이에서 일반인이 떨어진다면 즉사가 당연하였다.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모를까 이수혁은 높은 잠재력에도 아직 마나를 다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수혁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이수혁의 몸은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때 이수혁의 명치 부분에서 기이한 기운이 솟아나더니 몸의 상태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내장 파열부터 골절까지 그 기운은 완치까지는 아니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지장이 없도록 이수혁의 몸을 치료해 나갔다.
 하지만 변수는 이수혁의 마음, 아니, 영혼이었다. 이수혁의 영혼은 이미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상태라 몸이 치료되기 전에 영혼이 떠나가 버린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영혼과 육체의 끈 때문에 육체가 살아 있다면 영혼이 육체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수혁의 경우에는 투신했을 때의 부상이 생명을 잃을 정도의 부상이라 일시적으로 영육의 끈이 끊겨 있었고, 이미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린 영혼은 그때 승천해 버렸다.
 그렇게 영혼은 이미 승천해 버린 상태라 뒤에 육체가 치료된다 해도 다시 영육의 끈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육체는 살아 있는데 영혼이 사라져 버린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쩐지 몸은 죽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영혼이 없는 것이 이상하더라니··· 그럼 이 육체는 내 것이 된 것인가? 그렇다면 내 원래 육체는 어떻게 된 것이지?’
 이제 칼스타인의 영혼이 이 몸에 안착했기 때문에 이수혁의 몸은 칼스타인의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문제는 칼스타인 자신의 원래 몸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영혼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원래 몸에는 영혼이 비어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즉, 자신의 원래 몸은 칼스타인이 오기 전 이수혁의 몸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 힘은 분명 [신의 흔적]이다. 여기도 신의 흔적이 있었군. 그런데 이 멍청한 녀석은 그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어. 그 힘만 제대로 활용한다면 일순간에 그랜드마스터급의 마나를 갖출 수 있을 텐데. 쯧쯧.’
 이수혁을 살린 그 기이한 마나는 칼스타인이 너무도 잘 아는 마나였다. 일명 신의 흔적이라 불리는 그 마나는 극도로 정련된 정신력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하는데, 보통은 죽음의 순간에 발현되었다.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 그런 정신력이 발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스타인이 있는 헤스티아 대륙에서는 [또 다른 생명]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였다.
 어쨌든 칼스타인 자신도 각성한 신의 흔적을 잘 갈무리하여 엄청난 마나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 수련을 통해서 그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며 대륙 최강의 자리 중 하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신의 흔적이 제대로 남아 있다면 이 몸을 단숨에 그랜드마스터급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신의 흔적은 그랜드마스터 급의 마나를 갖게 해주는 것이지 그랜드마스터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그랜드마스터를 능가하는 라이트 소더의 경지에 있는 칼스타인은 마나만 있다면 그랜드마스터가 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몸을 복원하고 유지하느라 지금 이 몸에 남아 있는 신의 흔적은 극히 일부밖에 남지 않았군.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의 마나가 원래 있던 곳의 마나와 성질만 같다면 자연의 마나를 대거 흡수해서 회복시킬 수도 있을 텐데···.’
 10년간 식물인간의 상태로 있었던 이수혁의 몸은 너무도 쇠약해 있는 상태였다. 아마 신의 흔적에서 나온 잔여 마나가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칼스타인은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 5식 보명결(保命結)을 통해서 충분히 자연기를 흡수한 뒤 이 몸을 치료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지금 이수혁의 몸을 통해 느껴지는 이곳의 마나가 칼스타인이 원래 있던 곳의 마나와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헤스티아 대륙의 마나는 마치 공기와 같았다. 숨을 쉬고 바람을 맞듯이 너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느껴지는 마나였다.
 하지만 이수혁의 기억에 지구라 불리는 이곳의 마나는 칼스타인이 느끼기에는 마치 물과 같았다.
 물속에서 숨을 쉬듯이 너무도 불편하고 거북했고, 움직이려면 마나가 방해를 하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 물과 같은 마나가 당연한 마나의 성질이라 생각하겠지만, 칼스타인에게는 너무도 불편하고 거북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칼스타인이 라이트 소더라 해도 도저히 헤스티아 대륙처럼 마나를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라이트 소더 정도나 되니 불굴의 정신력으로 억지로나마 소량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 만일 칼스타인이 지금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 정도의 마나를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일단 몸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몸에 조금 남아 있는 신의 흔적으로 바디 체인지부터 해야겠어. 마나는 내가 이곳의 마나에 적응만 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이 허약한 몸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군. 이 몸의 기억을 보니 이곳에도 몬스터들이 존재하는데 말이야. 그런 괴물들을 상대하려면 이 몸으로는 불가능하겠지.’
 그렇게 결심을 한 칼스타인은 온몸에 남은 미량의 신의 흔적을 모으고 모은 다음 강제로 바디 체인지, 즉 환골탈태를 시작했다.
 만일 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환골탈태는 물론이고 상중하 단전을 꽉꽉 채우는 엄청난 마나를 소유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환골탈태를 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단전에 마나를 남긴다 해도 미량에 불과할 것이 자명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득~ 우드득~
 이수혁의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며 무술을 배우기 위한 가장 좋은 골격의 모양으로 몸이 바뀌고 있었다.
 삐쩍 마른 몸에 살도 붙기 시작했고, 꺼칠꺼칠하던 피부도 뽀송뽀송하게 바뀌어 갔다.
 그렇게 이수혁의 몸은 정상인, 아니, 훌륭한 무도인의 몸으로 바뀌어 갔다.
 몇 시간이 흘러 이수혁, 아니, 칼스타인의 주위에는 그의 몸에서 나온 악기로 썩은 내가 났다.
 악취에 칼스타인은 씻고 싶었지만 강제로 환골탈태를 진행하느라 너무 기력을 소비하였기에 일단 좀 쉬고 싶었다.
 원래 몸이라면 몇 년 동안 잠을 안 자도 괜찮을 것이지만, 이 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칼스타인은 잠이 들었다.
 
 * * *
 
 칼스타인이 잠에서 깨어난 곳은 원래의 몸이 있던 헤스티아 대륙이었다. 정확히 에르하임의 황궁 칼리움에 있는 비밀의 방, 즉 어제 잠이 든 곳이었다.
 어제 이른 시간에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스름 해가 떠오르려 하는 새벽인 것을 보니 상당한 시간이 흐른 듯해 보였다.
 “어?”
 잠에서 깬 칼스타인은 그답지 않은 경호성을 내었다. 잠이 들 때만 해도 원래 몸을 걱정하였는데 이렇게 잠에서 깨어보니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지? 이곳의 몸은 그대로 있는 것인가? 아니, 다시 잠을 잔다면 또 그쪽으로 영혼이 이동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잠을 안 자야 하는 것인가?’
 라이트 소더에 오른 만큼 잠을 자지 않는 시간을 극도로 늘릴 수도 있었다. 그랜드마스터만 하더라도 한 달은 잠은 안 자도 끄떡없기에 만일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1년, 아니, 평생 잠을 안 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신체와 정신의 밸런스는 다소 흐트러지겠지만, 어제와 같은 위험에 처한다면 충분히 고려할 방법이었다.
 사실 그가 필요한 수면 시간은 몇 분이면 충분하였다. 일주일에 몇 분 정도의 수면이면 거의 100%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몇 분의 수면에도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아예 수면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 스트레스와 리스크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2장 전환
 
 
 칼스타인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왜 자신에게 이런 문제가 생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부터 하고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야의 전문가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이자 수석마법사인 엘리니크였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칼스타인은 손에 낀 반지에 마나를 주입하여 통신마법을 열었다.
 [폐하,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이 자고 있을 시간이기에 엘리니크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엘리, 어제 그 방으로 와. 긴히 의논할 말이 있어.”
 엘리는 그가 황제가 되기 전 친우인 엘리니크를 칭하던 말이었다. 황제가 된 이후 엘리니크가 그를 깍듯이 황제로 모시면서 이 호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 칼스타인은 엘리라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바뀐 호칭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낀 엘리니크는 잠시 멈칫하다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 폐하 지금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엘리니크가 비밀의 방으로 오는 데는 불과 1분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황실 수석 마법사라 황궁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왔는지 분신과도 같은 수정 지팡이도 없이 로브만 챙겨 입고 온 엘리니크는 바로 칼스타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말이야···.”
 엘리니크는 칼스타인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존재였다.
 엘리니크에게 비밀을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칼스타인은 거리낌 없이 지금 그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한참 동안 칼스타인의 설명을 들은 엘리니크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엘리니크는 칼스타인에게 말을 건넸다.
 “폐하가 더 잘 아시겠지만, 지금 제가 간단히 마나 스캔을 해본 결과 폐하에게는 방금 말씀하신 상황과 관련된 어떠한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은 상태이십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점검해 보았고, 엘리니크의 마나 스캔 또한 느낄 수 있었던 칼스타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영구히 수면을 취하지 않는다는 쪽을 생각하는 것은 최후 중에서도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일단 제가 조치를 취해 보겠습니다. 강력한 결계를 펼친 침대를 만들어 어떤 식이든 외부의 마법이 개입할 여지를 막아보려고 합니다.”
 “음··· 외부의 마법이었다면 내가 깨지 않을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야.”
 “그것은···.”
 칼스타인의 말대로 라이트 소더에 이른 그가 자신의 몸에 피해를 주는 외부의 마법에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당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 일단 그 침대를 만들어 와봐. 거기서 잠을 청해보고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다시 생각해 보지.”
 “네, 알겠습니다. 폐하.”
 엘리니크가 다시 비밀의 방에 온 것은 그가 방을 나선 지 이틀만이었다. 그동안 칼스타인은 수면에 들지 않고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빈손으로 방에 들어온 엘리니크는 자신의 아공간을 열어서 다소 심플해 보이는 침대를 꺼내었다.
 지금 방에 있는 화려한 침대와 비교해 보면 초라하다 할 만큼 소박한 모양의 침대이지만 이 침대를 만드는데 사용된 비용은 웬만한 영지를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침대의 프레임 전체를 마법 전도율이 가장 좋다는 진금 골드릴로 하였고, 정사각형 형태의 프레임의 네 모서리에는 주먹만 한 최상급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거기에 9서클 대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새긴 마법 결계라면 부르는 것이 값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대단한 물건이었다.
 “폐하, 볼품은 없지만 한번 누워보시겠습니까? 누워서 폐하의 마나만 마법진으로 흘리면 침대에 새긴 결계가 발동하는 방식입니다.”
 엘리니크의 말에 칼스타인은 침대에 누워 결계를 발동시켰다. 칼스타인의 마나에 침대 프레임에 박힌 네 개의 마정석이 반응하는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든 마법적인 그리고 물리적인 침입을 막는 결계가 발동하였다.
 “일단 내가 잠에 들어볼 테니 한번 봐주게.”
 “네, 폐하.”
 칼스타인에게 자신의 몸과 정신을 조절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기에 잠에 들겠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잠에 빠졌다.
 그리고 칼스타인의 영혼은 다시 그의 원래 몸에서 사라졌다.
 
 * * *
 
 다시 정신이 든 칼스타인은 바로 자신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칼스타인의 영혼은 이수혁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역시 안 되는가? 후우··· 일단 여기 상황을 알아봐야겠군.’
 이미 한번 장악한 몸이라 별도의 다른 과정은 필요 없이 칼스타인은 이수혁의 몸을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지난번 이수혁은 10년간의 식물인간 상태로 허약해진 신체라 몸을 움직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이제 환골탈태까지 마쳤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일단 칼스타인은 마나를 한 번 돌려 몸 상태를 파악한 후, 침상의 바로 앞에 있던 거울을 보며 이제 자신의 몸이 된 이수혁의 몸을 확인하였다.
 칼스타인은 이 몸의 겉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라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수혁의 몸은 칼스타인이 시전한 환골탈태를 통해서 상당히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영혼에 신체가 일부나마 동기화되어 그 외모조차 칼스타인의 원래 외모와 다소 비슷해진 상태였다.
 물론 완전히 다른 외형이었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나 환골탈태를 하기 전에도 왠지 둘의 모습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흐음. 이 녀석의 몸은 내 원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한데? 어색하지 않아서 좋군.’
 칼스타인은 이수혁의 몸이 바뀐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기에 원래 그의 몸이 그랬다고 생각하며 만족하면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 그렇지. 이곳에는 [카르마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했던가?’
 이수혁의 기억 속에는 지구에는 카르마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일정 이상의 마나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면 만 18세의 나이가 될 때 일명 카르마 시스템이라는 것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카르마 시스템을 통해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카르마 포인트라는 것으로 마법이나 무공, 마나 수련법까지 구매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 이수혁의 몸은 만 18세가 훌쩍 넘었기에 충분히 시스템에 접속할 권한이 있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시스템 접속]!’
 칼스타인이 마음속으로 접속을 외치자 마나에 민감한 자신이 아니라면 알아차리기도 힘든 극미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더니 어디론가 그의 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기본 정보]
 이름 : 이수혁
 등급 : DB
 카르마 포인트 : 10/10
 상태 : 정상
 
 [능력 정보]
 신체 능력 : DS
 정신 능력 : X(측정 불가)
 마나 능력 : DD
 
 [기술 정보 (타입: 무투형)]
 혼원무한신공(SS) 17/92
 
 ‘호오. 이런 식인가? 그런데 정신 능력은 측정 불가군.’
 영혼의 힘과 관련된 정신 능력은 측정 불가라 표시되어 있는데 자신이 타 차원의 영혼이라 측정할 수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지고한 경지라 할 수 있는 라이트 소더이기 때문에 측정할 수 없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능력 등급은 FF부터 SSS까지 있다고 하는데 시스템이 본 이수혁의 몸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
 만일, 정기신이 모두 경지를 뛰어넘는 제대로 된 환골탈태를 하였다면, 충분히 S급의 신체나 마나 등급이 나왔을 것이나, 지금 칼스타인이 시전한 환골탈태는 부족한 마나로 인하여 신체의 회복만을 간신히 도모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체에 제대로 된 마나가 깃들여 있지 못해 환골탈태를 했음에도 신체등급은 D급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나마 칼스타인이 환골탈태를 시전 했기에 이 정도 상태가 나온 것이지 칼스타인이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이었다면 이 몸은 F만이 가득한 상태창이 나왔을 것이었다.
 다만, 이미 신체는 준비되었기에 신체에 걸맞은 마나만 충원이 된다면 신체 등급 역시 빠르게 올라갈 것이 자명하였다.
 ‘그런데 기술 정보에 있는 혼원무한신공은 무슨 의미이지? 기술이라··· 내가 이 몸을 얻고 사용한 기술은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뿐인데··· 설마, 이곳에도 같은 방식의 마나 연공법이 있다는 것인가?’
 거기다가 표시된 숫자가 17/92이다. 이수혁의 기억상 각 숫자는 숙련도와 이해도를 의미하는데 앞의 숫자는 숙련도, 뒤의 숫자는 이해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 숫자는 100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숙련도가 17인 것은 이 몸으로 아직 대주천 한 번 못했기 때문에 칼스타인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해도가 92인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칼스타인은 이미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의 극의를 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뭐지? 혼원무한신공과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그렇군, 혼원무한신공의 완성을 100으로 보면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에는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이군. 흥미로운데?’
 라이트 소더의 경지까지 오르긴 하였지만 칼스타인은 자신이 가진 무공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에 빠진 내용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이미 빠진 그대로 완성하였고 그로 인해 라이트 소더까지 되었기에, 빠진 부분을 채운다 하더라도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칼스타인은 궁금증을 머릿속 한쪽으로 밀어 넣고 시스템의 다른 부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점 오픈].’
 그 말과 동시에 전방에 상태창은 사라지고 수천 개의 목록이 가득 차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의 옆에 화살표가 있는 것이 아래로 더 많은 목록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칼스타인이 언급하는 상점은 상태창에 나와 있는 카르마 포인트를 사용해서 이능을 구매하는 상점이었다.
 상점의 목록에는 옆에 숫자가 명시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이 능력을 구매하는 데 쓰이는 포인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목록의 소모 포인트 중 가장 큰 것이 10인 것으로 보아 목록은 지금 칼스타인이 획득한 카르마 포인트를 기준으로 목록을 보여준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기억 속에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군.’
 자살하기 전의 이수혁은 직접 카르마 시스템에 접속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정보는 인터넷이나 책자로 얻은 정보가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칼스타인이 실제 시스템에 접속해서 확인한 것과 그의 기억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각 능력의 이름에는 간단한 설명들이 달려 있었는데 어차피 하급의 능력이 그런지 설명만을 보고 지금 당장 구매할 능력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다른 기능들을 좀 더 살피던 칼스타인은 시스템에 대한 개략적인 파악을 마치고 접속을 해지하였는데, 그때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았던 악취가 칼스타인의 코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칼스타인의 주변에는 지난번 그가 환골탈태를 하면서 남긴 악기가 남아 있어 상당한 악취가 흐르는 상태였다.
 잠시 상태를 살피고 카르마 시스템을 확인해 본다고 그 냄새를 의식하지 않았는데, 시스템 접속을 푼 순간 악취가 의식되며 냄새가 느껴진 것이었다.
 3장 가족
 
 
 ‘이틀이나 지났을 텐데 이런 것도 치워주지 않는가?’
 칼스타인은 헤스티아 대륙에서 이틀을 보냈기에 당연히 이곳도 이틀이 지났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수혁의 기억 속에 병원이라는 곳은 매일매일 환자를 관리해 주는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악취에 불쾌해진 칼스타인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순간, 자신의 병실로 많은 사람이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음? 이제 온다는 것은 여기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지금 사람들의 보여주는 다급한 기운은 마치 이제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흐음.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인가? 돌아가면 파악해 봐야겠군.’
 일단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서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칼스타인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처럼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벌컥~!
 우르르르~
 흰 가운을 입은 세 명의 의사와 파란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간호사가 허겁지겁 칼스타인의 병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수혁의 상태를 보자마자 경악하는 표정으로 경호성을 내었다.
 “헉!!”
 “어··· 어떻게···.”
 “이럴 수가···.”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뼈만 남은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이수혁의 몸이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에 의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자가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 환자가 이수혁 환자 맞는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얼굴도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렇지만, 저기 팔에 달린 인식표를 보면 확실히 이수혁 환자가 맞습니다. 저 인식표는 파손되거나 하면 자동 인식될 것인데 어제 그런 일도 없었고요.”
 의사들은 이수혁의 몸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뒤에 있던 한 간호사가 그런 의사들을 바라보다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기··· 각성을 한 게 아닐까요?”
 각성이라는 말이 나오자 의사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 각성이야! 각성을 한 것이었군.”
 “각성을 하면 이렇게 몸이 바뀌기도 하는가?”
 “그럼, 어떤 사람은 몸을 강철로 바꿀 수도 있다는데 이런 변화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의사 중 한 명이 처음 각성이라는 말을 꺼냈던 간호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김 간호사는 어떻게 각성이라는 것을 알았나?”
 “아, 친구 중에 능력자 전용 병원으로 들어간 친구가 있어서 종종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어쨌든 저 친구로서는 축하할 일이야. 조만간에 정신을 차릴 테니 주의 깊게 살펴보고 보호자에게 연락하여 이 상황을 알려주게나.”
 간호사에게 말을 마친 의사는 칼스타인의 몸에서 나오는 악취에 코를 잡더니 옆에 의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각성할 때 원래 저런 악취가 나는 건가? 이거 참 참기 힘든 악취로군.”
 “그러게 말이야. 나도 각성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모르겠군. 어쨌든 김 간호사, 어서 저 침구류도 갈고, 환자 옷도 갈아입혀 주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의사들이 나가고 간호사의 지시를 받은 남자 간호조무사가 새로이 들어와서 이수혁의 옷을 갈아입히려 할 때 이수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할 테니 두시죠.”
 “아, 일어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일단 두고 가시면 제가 갈아입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수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칼스타인은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하며 남자 간호사에게 반 존댓말을 하였다.
 그것은 지금 자신이 다른 세계에 있어서기도 하였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만일 자신이 헤스티아 대륙에 있는 본신의 능력을 갖고 이 세계로 온 것이라면 충분히 황제의 위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나, 지금 칼스타인은 약하디약한 이수혁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위엄은 힘에서 나오는 것인데 칼스타인은 지금 이 몸으로는 그런 위엄을 보일 자격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에 칼스타인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다.
 과거 전쟁에서 패한 몰락 귀족 출신으로 노예생활부터 용병 일까지 해본 칼스타인은 오래된 귀족이나 왕족들이 갖고 있는 불필요한 권위의식 따위는 없었다.
 지금은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고, 현재 그의 몸 상태로는 고개를 숙여야 할 때였다.
 칼스타인에게 옷은 건네준 간호조무사는 다시 의사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병실을 나섰고, 옷을 들고 세면장으로 들어간 칼스타인은 샤워를 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일단 잠을 자면 다른 곳을 이동하는 것 같군. 첫 번째 생각했던 문제는 이동한 동안의 비어 있는 몸이었는데, 이틀이나 헤스티아에 있었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군. 시간 문제는 돌아가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고···.’
 만일 헤스티아 대륙으로 귀환하였는데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칼스타인은 이동한 동안 다른 차원의 시간은 멈춰 있거나 아주 느리게 흐른다는 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설이 맞다면 일단 그가 고민했던 비어 있는 몸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가 이 이수혁이란 녀석의 몸인데, 어떻게 해야 하려나? 만일 이 약해진 몸에서 내가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된다면 내 영혼은 다시 헤스티아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만,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몸 역시 원래의 몸 정도까지 단련할 필요, 아니, 반드시 단련해야겠군.’
 칼스타인의 말처럼 이수혁의 몸으로 죽었을 때 본신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별다른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칼스타인은 이수혁의 몸 또한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단련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비록 환골탈태는 하였지만 이수혁의 상태는 칼스타인의 기준으로 너무나 약하고 약한 상태였다.
 몸이야 그나마 환골탈태를 해서 나쁘지 않았으나, 마나의 수준은 너무도 미약해 무한의 마나를 펑펑 써대던 칼스타인에게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주었다.
 더군다나 성질이 다른 이곳의 마나는 칼스타인이 빠른 속도로 본신의 힘을 되찾는 것까지 방해를 하고 있어 그 답답함은 더 컸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수혁을 맞은 것은 의사들이 아니라 병원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수혁의 어머니 박정아였다.
 “수혁아!!”
 박정아는 다소 달라진 이수혁의 외모에 잠시간 의아함을 느꼈으나, 찬찬히 칼스타인의 얼굴을 살펴본 뒤 이수혁임을 확신하자 칼스타인을 끌어안고 오열을 하며 울었다.
 이미 이수혁의 인생을 다 본 칼스타인은 박정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통해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내리고 있던 손을 들어 같이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이수혁의 손길에 박정아는 더 통곡을 하며 울면서 말했다.
 “흑흑흑··· 수혁아, 미안하다, 흑흑··· 미안해···.”
 “전 괜찮아요. ···어머니.”
 이수혁의 몸을 하고 있었기에 어머니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박정아와 다른 쪽을 바라보는 칼스타인은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10년만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나 어머니와 상봉을 한 아들의 눈빛은 아니었다.
 칼스타인이 이수혁의 기억을 갖고 있긴 하였지만, 박정아는 이수혁의 어머니였지 칼스타인의 어머니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 *
 
 칼스타인이 들어오면서 정신을 차렸기에 더 이상 이수혁은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병원 생활을 청산한 칼스타인은 박정아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박정아는 생활이 곤궁했는지 차도 없었기에 둘은 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박정아는 칼스타인이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고 있기에 10년의 공백기 동안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 집으로 가는 내내 알려주었고, 칼스타인 역시 필요한 정보라 여겼기에 박정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박정아의 말이 잠시 끊길 때, 칼스타인이 놓치지 않고 박정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했던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안 오셨나요?”
 이수혁의 기억으로는 아버지 이철주와 어머니 박정아가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특히 이철주는 C급 헌터로 이 세계 기준으로 나쁘지 않은, 아니, 상당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였다.
 이철주 역시 자식 사랑이 지극했기에 10년 만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이수혁을 만나러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수혁의 질문에 박정아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래서 칼스타인은 다시 물었다.
 “혹시 몬스터 홀에 들어가신 건가요?”
 몬스터 홀에 들어간다면 그 규모에 따라서 몇 달까지도 홀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덧붙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박정아의 표정으로 보아선 답이 나왔다. 이어지는 칼스타인의 질문에 무언가 결심을 굳힌 표정을 지은 박정아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울음까지는 참지 못하였다.
 “수혁아··· 아버지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어··· 흐흐흑···.”
 박정아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말끝에 터져 나오는 울음까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혹시 사인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만일 이철주의 죽음에 복수 등이 엮여 있다면 자신이 박정아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아직은 몸이 미약하기 그지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칼스타인이 담담한 태도로 반문을 하자 박정아 역시 어느 정도는 안정을 찾았는지 그녀 역시 조용히 그 날의 일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말이다···.”
 박정아는 한참 동안 이철주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 싶어 말을 고르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났다. 하지만 칼스타인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배려였다.
 어쨌든 박정아가 말하는 이철주의 사인은 칼스타인이 걱정하는 것처럼 복수 등에 엮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B급 몬스터 홀에 들어갔다가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헌터에게는 흔하디흔한 죽음이었다.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슬픈 기색을 보인 칼스타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적응하고 힘을 찾을 때까지 이 여자의 집에서 몸을 의탁해야겠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산동네 아래에서 택시가 멈추어 섰다.
 “삼만칠천 원입니다.”
 택시기사의 말에 박정아는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어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택시를 내려서도 둘은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박정아가 살고 있는 곳은 차량이 집 앞까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수혁아. 깨어나자마자 이런 고생을 하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된 거예요? 예··· 전 집은 서울이었었잖아요.”
 현재 박정아의 집은 통일 한국의 개성시에 있었는데, 그 개성시에서도 박정아는 판자촌이라 할 수 있는 산동네에 월세방을 갖고 있었다.
 과거 이수혁의 기억에서 그의 집은 서울에 있었고 아버지 이철주는 헌터라는 직업답게 서울에서도 생활 수준이 상당히 괜찮은 편에 속하였다.
 C급의 헌터라면 상급 헌터라 할 수는 아니지만 한 번의 벽을 넘어 제 몫을 하는 중견급 헌터였다.
 보통 삼천만 원이상의 월 수익을 올리기에 그 생활 수준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 그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수입이 끊기다 보니··· 게다가 네 병원비도 만만치 않아서 결국 이리로 오게 되었어. 미안해···.”
 하지만 박정아의 말대로 이철주가 죽었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었다.
 주부로만 생활하던 평범한 일반인 박정아가 벌 수 있는 돈은 뻔했고, 그 돈으로는 이수혁의 병원비와 서울의 생활비를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비싼 수도권 쉘터의 거주 비용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고, 밀리고 밀려서 아마 이곳까지 왔을 것이었다.
 끼이익~!
 녹슨 철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온 박정아는 칼스타인을 쪽방 안에 두고 자신은 그 쪽방에 붙은 부엌으로 가서 서둘러 요리를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박정아는 조그마한 세 발 식탁을 하나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식탁에는 김치찌개 한 냄비와 쌀밥 두 그릇이 김을 모락모락 내뿜고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수혁이 네가 좋아하던 김치찌개야. 많이 먹으렴··· 다른 반찬이 없어서 미안하다···.”
 박정아는 지금의 집안 상황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에 계속 칼스타인에게 사과를 하였다.
 거듭되는 그녀의 말에 칼스타인은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김치찌개 한 숟갈을 떠먹었다.
 “맛있네요. ···어머니.”
 “그래? 다행이구나···.”
 칼스타인의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박정아는 그 눈물을 감추려는지 다시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칼스타인은 박정아에게 지난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다가 슬쩍 잠이 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아직 약해진 이수혁의 몸으로는 수마를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 * *
 
 눈을 뜬 칼스타인은 자신이 엘리니크가 만든 특수한 침대 위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마나를 주입해 결계의 작동을 중단하고 상체를 일으키자 옆에 있던 엘리니크가 칼스타인에게 물었다.
 “폐하, 안 주무십니까?”
 “자고 일어난 거야.”
 “네? 지금 눕자마자 일어나셨습니다만···.”
 엘리니크는 결계를 작동하자마자 결계의 작동을 멈추고 나온 칼스타인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칼스타인은 잠들기 전과 후의 머리맡에 둔 시계를 확인하였기에 확신하며 말했다.
 “영혼 이동을 한 동안 다른 곳의 시간은 가지 않더군.”
 저번의 수면 때는 원래 몸으로 돌아왔을 때 반드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원래 몸으로 돌아와서도 잠에서 깨지 않고 계속 수면을 취했었다.
 그러나 이번 수면에 들어갈 때에는 바로 잠에서 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잠이 들었기 때문에 원래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잠에서 깰 수 있었고, 그 결과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칼스타인의 설명을 들은 엘리니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폐하의 첫 번째 우려였던 영혼 이동을 한 동안 다른 몸의 상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영혼 이동을 결계로도 막을 수 없다면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더 생각해 봐야 하겠군요.”
 두 번째 문제라는 것은 지구에 있는 이수혁의 몸에서 칼스타인이 죽는다면 과연 영혼이 헤스티아로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이수혁의 몸에서 죽기 전까지는 확인해 볼 수도 없는 문제라 일단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 바로 생명에 위협이 되는 상황은 아니니 일단은 지구라는 곳에서 생활을 하며 신체를 단련해 봐야겠어.”
 “네? 해결 방법을 찾으실 때까지 당분간 수면을 피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지구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있더군.”
 칼스타인은 자신이 경험한 카르마 시스템에 대해서 엘리니크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이 혼원무한신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이야기하였다.
 “말씀하신 그런 것이라면··· 신이나 행할 수 있는 이적(異蹟)이라 할 수 있겠군요.”
 엘리니크 역시 9서클의 마법사이기에 칼스타인이 말할 것과 같은 시스템을 전 마나 사용자에게 심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궁극의 마법사라 불리는 마도황국의 10서클 마법사 라피스 원주조차도 그런 이적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일단은 지구에서 수련하면서 카르마 상점에서 혼원무한신공이라는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어. 그리고 그 지구라는 곳의 마나를 겪어보니 지금까지 내가 알던 마나가 마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더군. 마나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여지가 있었어. 어쩌면 그를 통해 막혀 있던 벽을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사실 칼스타인이 지구에 가려는 이유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무게감을 두고 있었다.
 혼원무한신공이 에르하임식 마나 연공법의 원형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라이트 소더의 경지에 오른 칼스타인에게는 그 원형이 크게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마나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경험은 지금 막혀 있는 경지를 올라갈 수 있는 주요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직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시군요. 일단 저도 제 나름의 차원 이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폐하께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음? 엘리니크, 반대 안 하는 거야?”
 보통 칼스타인이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면 언제나 반대 의견부터 펼쳤던 엘리니크였기에 칼스타인은 그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의아했다.
 “무(武)에 대한 폐하의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데, 어찌 제가 감히 그 길을 막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폐하를 도울 길을 찾을 뿐이지요.”
 역시 엘리니크였다. 엘리니크는 칼스타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하. 역시,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하하하.”
 칼스타인의 말에 엘리니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절 좋아해 주시는 것은 감사드릴 일이지만, 저는 아르피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이제 후사를 준비하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아. 또 그 소리야? 아직은 관심 없다니까?”
 칼스타인 역시 혈기 왕성한 남성이었기에 오는 여자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과거에는 용병대장, 지금은 황제라는 자신의 지위를 보고 접근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런 여성들과 서로 즐기며 한두 차례 몸을 섞는 것은 칼스타인 역시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녀들과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은 없었다.
 과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칼스타인은 결혼은 서로의 영혼이 통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여성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주의적인 여성관이었지만, 이미 라이트 소더에 올라 늙지도 않고 젊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칼스타인이었기에 무리한 생각이라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칼스타인은 엘리니크의 이런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아니었기에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한번 거부의 의사를 밝혔으나, 오늘 엘리니크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평소라면 폐하께서 아직 보령이 그리 많지 않으시니 넘어가겠으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 지구라는 곳에서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이 제국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 것입니다.”
 아직 제국의 기틀을 잡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제국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칼스타인이 사라진다면 엘리니크의 말처럼 될 가능성이 컸다.
 만일 황후나 태자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제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제국은 칼스타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엘리니크가 있다 해도 결국 제국은 수 개의 작은 왕국으로 쪼개어지고 말 것이었다.
 그제야 칼스타인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자신의 턱을 한 차례 쓰다듬더니 엘리니크에게 말했다.
 “흐음··· 그렇겠지··· 그래, 알겠어. 엘리. 네 말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럼 일단 회의를 소집할까요?”
 적극적인 동의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 말이라도 들은 것에 만족하는지 엘리니크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엘리니크의 태도에 쓴웃음을 짓던 칼스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음, 회의는 좀 더 미뤄보자. 일단 지구에 있는 몸을 최소한이라도 단련해 놓지 않으면 찝찝할 것 같아. 어차피 잠은 금방 들었다가 깰 수 있으니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찝찝한 기운만 해결하고, 정무를 보도록 하지.”
 지금도 지구에서는 하루가 지났지만, 이곳 헤스티아 대륙에서는 잠시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잠을 자고 깨어날 수 있는 칼스타인에게는 지구에서 십 년을 살아도 이곳에서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엘리니크 역시 그 상황과 칼스타인의 성정을 잘 알고 있기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 엘리니크의 말을 들은 칼스타인은 슬쩍 웃더니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 * *
 
 잠에서 깨어난 칼스타인은 박정아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들이라 여기고 있는 이수혁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잠이 든 것이었다.
 그녀를 조심스레 자리에 눕힌 칼스타인은 조용히 밖으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시간이라 주변은 깜깜하였는데, 칼스타인은 어둠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옥상의 가운데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헤스티아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자유로이 마나를 다룰 수 있었는데, 지구의 마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에 의념을 집중하기 위해서 가부좌의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그렇게 가부좌를 튼 칼스타인은 서서히 관조 상태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마나를 내부로 끌어들이며 서서히 대주천을 시작하였다.
 아직은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황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아지경에서 수차례의 대주천을 행하던 칼스타인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무아지경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왜애애애앵~ 왜애애애앵~
 “몬스터 출현 경고입니다. 몬스터 출현 경고입니다. 개성 121구역에 사는 거주자들은 신속하게 인근 대피소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개성 121구역에 사는 거주자들은 신속하게 인근 대피소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엘로우존이라 그런지 몬스터가 등장하는군.’
 이수혁의 기억에 지구인들은 지역을 몬스터의 출현 빈도에 따라서 크게 그린존, 엘로우존, 오렌지존, 레드존으로 분류하였다.
 간단하게 보면 그린존은 안전지대, 엘로우존은 준안전지대, 오렌지존은 준위험지대, 레드존은 위험지대라 할 수 있었다.
 일단 간단하게 구역별 특성을 말하자면, 그린존에는 몬스터 홀은 나오더라도 몬스터들은 나오지 않았다.
 나온 몬스터 홀 역시 정부소속의 마물 대응부에서 곧바로 해결해 주었다.
 반면 엘로우존은 간혹 경계를 뚫고 온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고, 몬스터 홀의 처리에도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다.
 운이 나쁘면 홀이 오픈되는 경우도 있어서 안전한 거주지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오렌지존은 몬스터를 조우할 확률이 상당히 높아 사람이 거주하기는 힘든 곳이며 단순 도로 정도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마지막 레드존은 언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곳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지역을 의미하였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블루 존이니 화이트존이니 블랙존이니 다양한 구분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앞에 언급했던 네 가지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구역들이었다.
 지금 칼스타인과 박정아가 살고 있는 개성 121구역은 개성의 외곽으로 엘로우존에 들어가는 지역이었다.
 자신 혼자라면 그 몬스터라는 것을 확인해 보고 헤스티아 대륙의 마물과 비교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행여 박정아가 마물에 당한다면 이 세상에서 순조롭게 자리 잡는 계획에 차질을 겪을 수도 있었기에 칼스타인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데리고 인근 대피소로 이동하였다.
 4장 어머니
 
 
 대피소 안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족히 수천 명은 될 것 같은 인원이었는데,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닌지 사람들의 얼굴은 다급함보다는 약간의 귀찮음과 짜증이 묻어 있었다.
 “여어, 박 씨. 여기가 이번에 깨어났다는 아들인가 보군요.”
 “아. 네. 수혁아, 인사드리렴. 저 위 파란 지붕에 사시는 김 영감님이셔.”
 김 영감이라 불린 남자는 70대 반 대머리 노인으로 러닝셔츠만 입고 대피소로 들어온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이수혁이라고 합니다.”
 “허허. 그놈 참 잘생겼다. 박 씨, 아니, 너희 어머니 말이다. 정말 고생 많이 했어. 네 병원비 댄다고 말이야. 네가 정말 잘해줘야 할 거야.”
 김영감의 말에 박정아는 당황하였는지 그의 말을 끊고 말을 건넸다.
 “아이. 영감님도 참. 수혁이 부담되게 뭐 그런 소리까지 하세요.”
 “허어. 할 이야기는 해야지. 동네 주민들이 다 알고 있잖아. 박 씨 고생한 거 말이야.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더 일하면서 번 돈의 대부분을 병원비로 털어 넣었으니 원···.”
 김 영감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더벅머리의 중년인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 그렇지. 사실 다른 사람들은 널 포기하라고 하기도 했어. 희망이 없다고 말이야. 말이 10년이지, 10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전례가 거의 없었으니 밑 빠진 독에 물 그만 부으라는 말도 많이 했지.”
 그의 말에 김 영감이 말할 때와 다르게 박정아는 날을 세운 목소리로 지금 말하는 남자를 불렀다.
 “최 씨 아저씨! 할 말 못 할 말 구분해 주세요!”
 “어··· 어··· 내가 또 말실수를 했나 보군. 미안하우, 박 씨.”
 최 씨는 박정아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자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빠르게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김 영감은 예의 그 허허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허허. 박 씨, 최 씨가 저렇게 말해도 악의는 없는 걸 잘 알잖는가. 자네도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휴··· 네, 영감님. 그래도 아이도 있는데 할 말 못 할 말은 구분해야지···.”
 박정아는 칼스타인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김 영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마나를 다를 수 있는 칼스타인은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둘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뭐, 당연한 일이었겠지.’
 이수혁의 기억 속에 있는 상식으로는 10년간의 식물인간이라면 이미 죽었다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닌 상태였다. 그런 이수혁을 10년간 뒷수발을 했다면 보통의 일은 아닌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대상은 이수혁이지 칼스타인이 아니었기에 칼스타인에게 다가오는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 칼스타인이 어릴 적 그의 어머니에게 느낀 모성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칼슈타인이 10살 무렵 전쟁에서 패한 에르하임 백작가는, 가문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처형을 당했고 어머니와 누나는 적국의 성노리개가 되고 말았다.
 당시 10살밖에 되지 않았던 칼스타인은 처형을 당하는 대신에 낙인이 찍힌 노예가 되었고, 8살의 여동생은 성노리개가 되는 교육을 받는 등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칼스타인의 어머니가 노예장의 성노가 되어 그의 환심을 산 뒤, 열쇠를 빼내어 칼스타인을 수용소에서 탈출시켰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미안하다였다.
 어머니 자신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칼스타인이 그런 상황에 놓이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결국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노예장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훗날 힘을 얻게 된 칼스타인은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고, 욕을 보인 모두에게 그들 스스로 죽음을 원할 정도로 절망을 안겨주며 척살하였지만, 그것만으로 쌓였던 칼스타인의 분노는 풀리지는 않았다.
 그 풀리지 않는 분노에 더 큰 원수을 처단하러 나섰던 것이 그가 왕국을 세우고, 제국을 세운 계기가 된 것이었다.
 지금 박정아의 행동을 듣고 나자, 칼스타인은 과거 자신의 어머니 헤미르의 모습이 잠시 겹쳐 지나가며 왠지 모를 감정에 젖어 들었다.
 ‘후우··· 기분이 이상하군···.’
 칼스타인의 분위기가 왠지 가라앉자 박정아는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세 시간여의 시간이 지나자 대피소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삐이~ 삐이~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 시간부로 상황은 해제되었습니다. 엘로우존으로 들어온 몬스터는 정부의 마물 처리반에 의해서 척살되었으므로 주민 여러분은 거주지로 돌아가셔도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상황은 해제되었으므로 주민 여러분은 거주지로 돌아가셔도 되겠습니다.”
 안내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주섬주섬 인사를 나누고 대피소를 벗어났다.
 박정아 역시 서둘러 대피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으면서 공장에 늦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허둥지둥 준비하여 출근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칼스타인의 아침밥은 놓치지 않고 차려놓았다.
 “밥은 꼭 먹어.”
 “어머니는요?”
 “난 늦어서 얼른 가 봐야 해. 더 늦으면 아마 김 반장이 일당 삭감할 거야. 식탁 위에 용돈 놔뒀으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사서 쓰렴. 그럼 엄마는 출근해.”
 지금 박정아가 출근하는 곳은 몬스터 사체 처리 공장이었다.
 몬스터의 사체는 일반적으로 고가로 매매되고 쓰임새가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예외적인 몬스터가 있었다.
 바로 F급의 몬스터였다. F급의 몬스터는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몬스터를 지칭하는 말로 일반 총기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 위협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위협적이지 않은 만큼 그 사체 역시 별로 쓸모가 없었다. 마나를 전혀 머금고 있지 못했기에 마나 물품의 재료로 쓸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개별적으로 상대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이 F급 몬스터를 처리하였고, 민간 헌터들에게도 F급 몬스터를 발견하면 처리할 것을 협조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몬스터의 사체는 싸게 사들여 그 뼈나 가죽을 추출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곤 하였다.
 지금 박정아가 근무하는 공장이 바로 이 F급 몬스터 사체 처리 공장인 것이었다. 당연히 일은 힘들었고 보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도시 내에 있는 잡다한 서비스직보다는 많은 돈을 주었기에 돈이 필요했던 박정아는 이 일을 한 것이었다.
 칼스타인은 박정아가 차려놓고 간 김치찌개와 달걀 프라이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흐음···.”
 지금이라도 잠이 들어 헤스티아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산해진미라 할 수 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라푼토 스테이크에, 라비스 구이, 몽테뉴 와인 등 일반인이라면 쳐다보지도 못할 음식들을 그의 말 하나면 대령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박정아가 꺼내 놓고 간 것처럼 무한한 애정이 흐르는 음식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칼스타인은 천천히 김치찌개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 헤스티아 대륙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그런 맛이라서 그런지 음식은 무척이나 맛이 있었다.
 “일단은 힘을 기르자. 과거 경지의 십 분의 일만 찾아도 굳이 이 여자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도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겠지.“
 이 세계에서 박정아의 위치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박정아의 그늘을 통해 이 세계에서 적응할 계획을 세우긴 하였지만,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박정아는 칼스타인이 적응할 때까지 시간을 주긴 힘들 수 있었다.
 그렇게 결심을 한 칼스타인은 지구에서 잠이 들어 헤스티아 대륙으로 돌아가면 바로 다시 잠이 드는 방식으로 한 달여 동안 지구에서의 수련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박정아는 10년간 아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주기나 하는 듯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칼스타인에 대해서 돌보아 주고 있었다.
 맹목적인 그녀의 헌신에 칼스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그녀의 모성애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도 칼스타인은 박정아가 공장을 간 사이 집의 뒷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그녀가 집에 올 시간 즈음 되어서 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평소에는 7시 반쯤 되면 집에 오는 박정아가 8시가 되어도 집에 오지 않았다.
 보통 늦는 일이 있으면 늦는다고 사전에 연락을 박정아였기에 칼스타인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산동네를 내려가 차량이 다니는 길까지 나왔다.
 그러나 별일은 없었던지 저 멀리 버스가 서고 버스에서 박정아가 내렸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아직 박정아는 칼스타인은 보지 못했지만 칼스타인은 대략 1㎞ 정도 거리에 있는 박정아가 내린 것을 확인하였다.
 그때였다. 그녀의 뒤 저 멀리서 무언가 기척이 느껴지더니 빠른 속도로 그녀가 있는 곳,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내린 정류장으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만일 칼스타인의 본신의 경지, 아니, 그랜드마스터급의 경지만 되찾았어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은 물론 선제적 대응까지 가능했을 것이지만, 아직 칼스타인의 경지는 너무도 미약한 상태였기에 단순히 무언인가가 나타났다는 것 정도까지밖에 파악하지 못하였다.
 “조심하세요!!”
 칼스타인은 경고의 말과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몬스터의 등장이 더 빨랐다.
 크르렁~!
 마치 공룡과도 흡사한 몬스터는 등장과 동시에 콧김을 뿜으며 사람들을 좌우로 훑어보았다.
 몬스터 도감의 기록으로는 ‘크로커랩터’라 알려져 있는 악어 머리를 한 체고 5미터 정도의 공룡 형태 몬스터였다.
 갑작스러운 크로커랩터의 등장에 버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박정아와 칼스타인이었다.
 박정아 역시 도망치려 하였는데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칼스타인을 보자 그에게 크게 외치면서 크로커랩터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혁아! 어서 도망쳐!!”
 병원에서 칼스타인이 각성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가 어느 정도 수준의 능력을 갖췄는지 박정아는 몰랐다.
 거기다 지금도 집에서 수련만 하는 것을 본 박정아는 칼스타인의 능력이 아직은 미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아는 칼스타인에게 도망치라는 말과 함께 잠시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 몬스터의 앞을 가로막았다.
 끝 모를 모성애가 빚어낸 결과였다. 자신의 목숨이야 어떻게 되든지 아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칼스타인은 어이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서, 왠지 모를 분노까지 생겨 화가 난 목소리로 박정아에게 외쳤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물러서!!”
 아직 자신의 경지는 찾지 못했으나 D급이라 알려진 크로커랩터 정도를 해치우는 것은 지금 칼스타인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박정아의 행동은 칼스타인이 보기에는 너무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박정아는 그런 상황을 몰랐다. 그리고 그녀는 이수혁의 어머니였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신체는 하급몬스터에게 당할 정도로 약할지 몰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어 하는 정신력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수혁아!! 제발 도망쳐!! 엄마 소원이야!!”
 칼스타인은 답답해하며 그런 그녀에게 다시금 외쳤다.
 “제가 해치울 수 있으니 어머니는 도망치라고요!!”
 그러나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는 박정아는 칼스타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지금도 크로커랩터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다 크로커랩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도망칠 줄 알았던 아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표정의 박정아는 몸을 돌려 칼스타인에게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크로커랩터의 손이 휘둘러졌고 박정아는 몸을 활처럼 휜 채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등에는 깊이 파인 세 줄기의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딱 보아도 치명상임이 분명할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박정아가 공중으로 떴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그 짧은 찰나 동안 칼스타인의 머릿속에 지난 한 달간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그에게는 미소를 지어주려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모성애를 보인 박정아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생명을 잃을 위기에 있지만, 여전히 칼스타인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표정만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칼스타인의 두 눈에 박혔다.
 이 모습은 과거 당신의 목숨을 바쳐 칼스타인을 살리려고 했던 그의 어머니 헤미르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아 보였다.
 칼스타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의 속 깊은 곳에서부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
 박정아를 먹어치우려고 그녀에게로 향하던 크로커랩터는 뜻밖의 거대한 마나 발현에 자신의 악어 머리를 들어 그것을 확인하려 하였다.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목격한 크로커랩터는 재빨리 몸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그 기운은 그의 움직임보다 좀 더 빨랐다.
 서걱~!
 악어 머리의 입을 중심으로 크로커랩터의 머리는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크로커랩터는 약간의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머리가 잘려 버린 상황에서 재생을 할 수는 없었다.
 크로커랩터의 머리가 잘릴 때 칼스타인의 귀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고 방송이 나왔다.
 
 “몬스터 출현 경고입니다. 몬스터 출현 경고입니다. 개성 121구역에 사는 거주자들은 신속하게 인근 대피소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개성 121구역에 사는 거주자들은 신속하게 인근 대피소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젠장!! 이제 경고 방송을 하면 뭐해!!’
 엘로우존이다 보니 비용문제 때문에 그린존처럼 실시간으로 몬스터의 감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의 탐지까지 길게는 일이십여 분의 딜레이가 발생하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무리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플라잉 샤이닝까지 사용한 칼스타인은 순간적인 탈력감이 들어 휘청거렸다.
 하지만 칼스타인은 개의치 않고 서둘러 박정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파악했다.
 이미 많은 피를 흘려 안색이 창백해진 박정아는 칼스타인이 지혈과 동시에 마나를 주입하자 정신이 들었는지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수혁··· 이니···?”
 “네, 어머니. 괜찮으세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쿨럭. 쿨럭. 나는··· 나는··· 괜찮···아··· 넌··· 괜··· 찮니?”
 이런 상황에서도 박정아는 칼스타인의 걱정을 하였다. 비록 자신이 이수혁인 줄 알고 보이는 애정이었지만, 그 무한한 애정에 칼스타인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도 괜찮아지실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지금 칼스타인이 보는 것은 박정아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품 안에는 이수혁의 어머니 박정아와 자신의 어머니 헤미르가 같이 있었다.
 그리고 칼스타인은 자신의 전 마나를 주입하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이렇게 보내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
 그렇게 마나를 주입하던 칼스타인이 마나 탈진으로 기절하며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소리였다.
 
 * * *
 
 “후우···.”
 칼스타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곳은 늘 그랬듯이 황도 칼리움의 비밀의 방이었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눈을 뜨자마자 지구로 돌아갔던 칼스타인이 한숨과 함께 일어나자 옆에 있던 엘리니크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칼스타인에게 물었다.
 “폐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엘리니크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칼스타인은 잠시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후우··· 일이라···. 일이 있었지···.”
 한 번 더 한숨을 내 쉰 칼스타인은 엘리니크에게 대강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칼스타인의 과거 상황을 알고 있는 엘리니크였기에 대강의 상황만 듣고서도 지금 지구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한 추론이 가능하였다.
 “그랬군요··· 그런 일이 계셨군요··· 그럼 아직 그녀, 아니, 어머니의 상태는 확인하시지 못하신 겁니까?”
 “그래, 일단 마지막 상태로 봐선 목숨은 붙어 있을 것 같은데. 돌아가서 확인해 봐야 알겠지. 마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되긴 처음이군.”
 무투술로 단전을 형성한 무인은 마법을 배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법사의 마나 서클과 무투술의 단전이 상충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몇몇 특수한 무술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런 무술로는 높은 경지에 오르기는 힘들었기에 유명무실하다 할 수 있었다.
 “음···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머니’를 지키실 것입니까?”
 “그래, 그녀가 내 어머니처럼 느껴진 이상, 그녀를 과거 내 어머니와 같이 대할 생각이다.”
 칼스타인의 말은 단호하였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엘리니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이내 한 가지 첨언을 하였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폐하 홀로 그 세계에서 자립하시는 것과 다른 일반인을 데리고 자립하시는 것은 그 차이가 매우 클 것입니다. 잘못하다가 그 ‘어머니’ 때문에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봤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내 마음이 그렇게 간 이상 난 내 마음이 가는 길을 지킬 생각이다. 내 마음이 가는 길을 따라 복수를 하였고, 왕국을 세웠고, 제국을 세웠다. 그것이 나의 삶이었고, 내 인생이었다. 난 내 마음이 가는 길을 저버릴 생각이 없어. 엘리니크.”
 냉정할 때는 한없이 냉정한 칼스타인이었지만,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가는 칼스타인의 모습은 불같은 열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특히,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기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특정인을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면 칼스타인은 무한한 애정을 그 사람에게 주었다.
 엘리니크 역시 그런 케이스였다. 그리고 지금은 죽은 프란츠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프란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당시에는 무리라고 할 수 있는 대륙 남부의 강자 크라서스 왕국과의 전쟁까지 하였으니, 칼스타인의 자기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엘리니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엘리니크는 그런 칼스타인의 모습에 마음을 맡겼고, 인생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 칼스타인의 모습은 그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러시군요. 폐하. 잘 알겠습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폐하를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엘리. 너를 믿는다. 저곳에서 내 몸은 아직 너무 약해. 과거 널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약한 상태야.”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믿는다. 엘리.”
 그렇게 엘리니크에게 말을 남긴 칼스타인은 다시 잠에 들어 지구로 돌아갔다. 서둘러 박정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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