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오홍련 [E]

오홍련 1권(1)

2019.08.01 조회 1,414 추천 11


 서장
 
 
 
 
 
 
 
 
 
 천하제일인 독고청.
 스물셋이란 어린 나이에 강호에 나와 무명을 널리 떨치고, 마흔이 되었을 때 준동한 마교를 두 주먹으로 때려잡았다. 마흔둘의 나이에 벌인 천마와의 일전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동네 꼬마 아이들이 ‘내가 독고청이고 너는 천마네, 마교네’ 하며 뛰어놀 정도였다.
 그 후 세상 모두가 그를 천하제일인이라 칭했으며 독고청은 하남 땅에 독고세가를 만들었다.
 그때 온 세상이 그의 아래에서 유래 없는 평화를 누렸다.
 그리고 팔십 년.
 독고청은 무려 세수 백이십이 되어서야 편안히 눈을 감았다. 증손자, 고손녀까지 모두 안아 본 뒤 어느 해가 지는 가을날 그의 거처에서 정좌한 채로 임종을 맞았다.
 “아버지, 증조부님께서 우화등선하셨습니다.”
 “우화등선? 그래?”
 독고청을 보는 늙수그레한 노인 독고평이 살쾡이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아들의 말을 받았다.
 독고평은 독고청의 손자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독고청이 오냐오냐하며 키워 왔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아들인 독고사혁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곱게 기른 턱수염과 중후해 보이는 인상, 대쪽 같을 것처럼 생긴 외모는 그가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중년인이라는 단적으로 나타내었다.
 독고평은 그런 아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가지런하게 꽂혀진 책들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침상 위로 눈이 갔다.
 “오, 이건가?”
 목침 밑에 놓인 한 권의 책.
 독고평이 한걸음에 침상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책을 펼쳤다.
 
 패천격(覇天擊).
 
 “오오―!”
 독고평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만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게 아무래도 원하던 것을 찾았기 때문인 듯했다.
 툭.
 바로 그때, 책 속에서 서찰 하나가 떨어졌다.
 
 평이 보아라.
 내 소싯적에 하룻밤의 기연을 얻어 하나를 얻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도 얻은 게 맞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심득을 담았으니 이것으로 어디 가서 맞지는 않을 것이다······.
 
 “허허, 명색이 손자가 십대고수인데 걱정도 참. 어디 가서 맞지 않을 정도라니······ 게다가 이야말로 신공절학인 것을! 오히려 천하의 그 무엇도 당하지 못할 텐데.”
 책장을 넘기는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칠십 년이란 세월이 가져온 그의 눈은 패천격이 진품이라고 확신을 보내고 있었다.
 패천격의 비급을 손에 쥔 독고평은 걸음을 재촉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사람들만 없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익혔을 기세였다.
 
 며칠 후.
 독고세가가 독고청의 임종을 천하에 알렸다. 동시에 거대한 장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인에 걸맞은 의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왜 하필 나야!”
 독고세가에서 십 년을 일한 상씨는 자신이 맡은 작업으로 인해 입술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독고청의 작은 집을 정리하는 것.
 독고세가는 장례에 맞춰 일꾼을 많이 고용했지만, 모두 힘쓰는 곳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상씨는 얼마 전 팔을 다쳤기에 독고청의 거처를 청소하고 같이 매장할 유품 정리하는 일을 맡은 것이었다.
 “왠지 찝찝하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 사람의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온몸이 오싹하고 싸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귀신 있는 거 아니야?”
 상씨는 스산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방 안에는 먼지만 잔뜩 쌓여 있었고, 사람의 온기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독고청이 죽은 이후, 이 집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서인 듯했다.
 “얼른 하고 가야겠다.”
 상씨는 평소보다 서둘러 일을 해 나갔다. 그러던 중, 이상하게 생긴 목침을 발견했다.
 “총명침? 이름도 있네?”
 무늬가 아름다워 잠시 살폈는데 옆면에 이름도 쓰여 있었다.
 “오! 예쁜데?”
 어느 장인이 만들었는지 몰라도 활짝 핀 연꽃 다섯 송이가 청아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풍겨 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듯했다.
 ‘허! 이런 것도 묻어 버리는 건가?’
 척 봐도 고풍스러우니 만물상에 내다 팔면 제법 돈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땅속에 들어가면 무용지물인데 산 사람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게 낫지!’
 묻을 거면 파는 게 나았다.
 
 결국 목침 주제에 이름을 가진 총명침은 하남의 한 만물상에 들어갔고, 그 후로 십 년간 주인이 없었다.
 
 ***
 
 “총명침이라······ 후후훗!”
 표국의 일로 하남성 개봉에 다녀오던 중년인, 단지명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는 표국의 호법으로서 이번에 큰 표물을 맡았다. 높은 금액을 책정했을 만큼 중요한 일이라 표국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확실한 단지명이 직접 표행을 다녀온 것이었다.
 단지명은 별호가 만권무영(萬拳無影)이었다.
 만권무영은 산서를 넘어 황하의 남북을 통틀어서도 알아주는 고수였다. 그의 손에 사라져 간 수적들이 물경 수백을 헤아릴 정도였다.
 또 악한 자는 용납하지 못해 세상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상대를 쓰러뜨렸다.
 그런 단지명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는 이유는 총명침이라는 목침 때문이었다.
 ‘이 아비가 너의 성취를 축하하고 앞으로 더 똑똑해지라는 의미에서······.’
 머릿속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선물하면서 해 줄 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였다.
 단지명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단선풍.
 단선풍의 나이 비록 열하나지만 예로부터 그 아이는 남달랐다. 항상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하면서도 엇나간 적이 없어 언제나 그를 웃게 만들었다.
 또한 하늘로 간 사랑스러운 아내와의 유일한 결실이면서도 그에게 분신과 다름없는 존재, 그게 바로 단선풍이었다.
 게다가 들어가기 어렵다던 서원에 열하나라는 어린 나이에 합격하였다.
 그런 아들에게 전해 줄 선물로 손에 든 총명침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속된 티가 없어 보이는 연꽃무늬. 그것도 무려 다섯 개나 돼서 은자 한 냥을 주고 산 게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색깔이나 무늬가 너무 고와 보는 것만으로도 목침에 서린 기품이 전해지는 듯했다.
 단지명의 만족감은 은자 한 냥이 오히려 헐값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아! 어서 집에 가고 싶다!”
 얼굴에 절로 조급함이 묻어났다. 단지명은 마음속으로 이미 산서성에 있는 집에 다다라 있었다.
 
 오 일 후.
 “아버지!”
 또래답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단선풍이 먼 길을 다녀온 단지명을 맞이했다.
 단지명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봇짐을 풀었다.
 “자, 네 선물이다.”
 “이게 뭐예요?”
 단선풍이 엉겁결에 천으로 둘러싼 목침을 받으며 물었다.
 “이번에 네가 서원에 합격한 기념으로 선물 사 왔다. 어디 한번 풀어 보아라.”
 새하얀 천 속에서 나타난 목침.
 한쪽 옆면에 총명침이라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고, 다른 면에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연꽃무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사 주는 거다. 총명침 베고 자서 더 똑똑해지라고.”
 “우와!”
 단선풍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마구 내뱉었다.
 화려하지 않으나 아름다웠다. 다섯 송이의 연꽃이 고고하면서도 청정했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는 느낌이었다.
 총명침이라는 이름이 달리 붙은 게 아닌 듯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단선풍이 아버지의 허리를 꼬옥 안으며 신나게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화아아―!
 단선풍의 손이 목침, 정확히는 목침의 연꽃무늬에 닿았을 때 그곳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다섯 연꽃무늬가 붉게 색이 오르고 있었다. 신비로워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또한 상서로운 기운과 청명함이 흘러나왔다.
 흙 속에 묻혀 있어도 그 청정함을 가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세상 어디에 있어도 절로 빛이 날 듯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좋은 일이 생기고 일이 척척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치 하늘의 어느 선녀가 성심성의를 다해서 목침 위에 수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이윽고 연꽃무늬에서 발하는 빛이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은은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미약하게나마 광택이 나 범접하기 힘든 고귀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단선풍 부자는 총명침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서로를 얼싸안고서 있었기에.
 
 그렇게 단선풍과 총명침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장 총명침
 
 
 
 
 
 
 
 
 
 어둠이 짙게 깔린 자시(子時:24시경) 무렵.
 산서성 북쪽 정양이란 마을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집은 여태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럽고는 끝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밤을 가르며 울려 퍼지는 또랑또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불 켜진 방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로 인해 풀벌레마저 숨죽인 듯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단선풍이었다.
 단선풍은 밤늦게까지 오늘 배웠던 부분을 복습하고 내일 배울 부분을 예습하는 중이었다. 학문에 뜻이 깊은지 저녁을 먹은 후 이렇게 호롱불 아래 한 시진째 앉아 있었다.
 그때 마당에서 인자하면서도 딱딱한 말이 전해졌다.
 “공부도 좋지만 이제 그만 자거라. 많이 늦었구나.”
 단선풍은 문을 열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아버지 단지명이었다.
 단지명은 단선풍이 열심히 하는 게 보기 좋았다. 하지만 벌써 자정이었다. 제대로 자야 내일을 준비하지 않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단선풍은 아버지의 말씀에 답을 하며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러면서 가만히 눈을 감고 방금 읽었던 부분을 되새겼다.
 ‘갈 길이 멀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향하는 단선풍이 한숨을 내쉬며 아쉽다는 심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아둔 책, ‘대학’에 슬쩍 눈길을 주었다.
 배우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그 큰 뜻을 모두 깨닫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책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침상에 총명침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오늘 낮에 사다 주신 선물이었다.
 단선풍은 총명침을 바라보며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그 무늬와 재질이 참으로 고급스러워 보였다.
 ‘연꽃이 아름답다. 고와!’
 은은하게 드러나는 붉은빛은 기품 있으면서도 잔잔한 매력을 흘렸다.
 게다가 그 무늬의 조각 하나하나마다 느껴지는 생동감은 어느 장인이 만들었는지 몰라도 실제 연꽃과 똑같거나 그보다 더 싱싱해 보일 정도였다.
 ‘비쌀 거 같은데······.’
 척 봐도 싼 물건은 아닐 거 같았다. 무슨 목침을 이리 고급스럽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단선풍은 그런 총명침을 귀중품 다루듯이 조심조심 만져 머리 밑에 두고 누웠다.
 잠들지 않고 누워만 있어도 꿀맛 같은 잠이 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섭게 꿈속으로 빠졌다.
 
 산과 들, 그리고 강이 드넓게 펼쳐진 어느 산등성이였다.
 그 가운데 고풍스러운 정자 하나가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버드나무를 등진 채 한 폭의 산수화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자의 뒤로 보이는 곳엔 작은 폭포가 위치해 있어 청량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 정자의 앞에 단선풍이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와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어떤 그림을 통해서 본 기억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 터였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 틀림없었다.
 화폭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절경에서 신선들이 바둑 놀음을 한다지 않는가. 여기가 아니면 그럴 곳도 없었다.
 단선풍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계속 걸어 나가는데 발밑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돌을 밟아도, 흙을 밟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분명 꿈같은데······.’
 현실과 다른 감각.
 꿈속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갑자기 머릿속 한편에서 여기는 꿈속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확실하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모든 게 현실처럼 생생했다.
 ‘도대체가······.’
 단선풍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정자로 올라섰다.
 그러자 정자의 한가운데에 책 한 권이 생겨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있었다.
 “대학?”
 책 표지에 쓰여 있는 두 글자.
 이건 분명히 엊저녁에 읽고 또 읽던 그 책이었다. 서원에 들어간 이후 한 달여 동안 익혀 왔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던 그 책이었다.
 단선풍이 재빨리 몇 장을 넘겨보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송사를 처리함에 있어 나도 남과 같으나······
 
 “헉!”
 내용도 다르지 않았다.
 문장의 위치와 글씨마저 실제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책의 낡은 정도도 흡사했다.
 단선풍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책을 들고 있는 조막만 한 손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아무리 꿈이라 하지만 이렇게 똑같을 수가······.’
 현실에서 단선풍은 읽다가 어려운 곳은 책장을 반으로 접어 두었다. 한데 그런 사소한 것마저 똑같으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휘릭.
 책장을 마구 넘기며 살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실에서 쓰던 책 그대로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책에 이렇게 집념이 강했나?’
 평소에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뼛속에 사무쳤으니 꿈속에까지 나타난 듯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오전에 수업을 받고 그 이후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공부했기에 뇌리에 오래 남아 있을 만했다.
 ‘하긴······ 지난번 시험이 너무 어렵기도 했지.’
 서원에서는 매달 시험을 보는데 단선풍은 그곳에 들어간 후 며칠 전 처음으로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벽에 부딪혔다.
 서원에서 배우는 학문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천자문과 소학을 익힌 뒤 열하나의 어린 나이에 똑똑하다는 칭찬을 받으며 서원에 들어갔으나 그곳은 달랐다.
 나이로만 보면 제일 어린 단선풍보다 열 살 많은 청년들까지 다니는 곳이었으며, 햇수로만 따져도 사오 년씩 공부를 한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 비하면 단선풍은 이제 막 학문에 발걸음을 뗀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불철주야 노력을 해도 쉽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살펴볼까?’
 어차피 꿈이라면 긍정적이게 생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는 게 나았다.
 단선풍이 정자의 한쪽 난간에 기대어 서며 천천히 대학의 첫 장을 펼쳤다.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과 친함에 있으며······.”
 그렇게 꿈속에서 대학의 공부를 시작했다.
 
 ***
 
 다음 날 아침, 단지명과 단선풍은 형사표국의 식당 안에 마주 앉았다.
 남자 둘이 살기도 하거니와 단지명이 형사표국에서 일하고 있는지라 그들 부자의 아침과 저녁 식사는 여기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명은 아무래도 무공이 뛰어나 호법이라는 높은 직책에 있는 만큼 상당히 바빴다. 때문에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아 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또한 집안에 여인이 없는 터라 아들 단선풍 역시 표국 식당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점심 식사도 함께는 아니지만 이 식당에서 먹곤 했다.
 “선풍아, 오늘따라 유난히 혈색이 좋구나.”
 단지명이 맞은편에 앉은 단선풍을 계속 쳐다보다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선풍은 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의 어머니이자 단지명의 아내인 장원영은 원래부터 몸이 약했는데, 무리하게 단선풍을 낳은 뒤 급격히 쇠약해져 오 년 전 생을 마감했다.
 단선풍이 그런 어머니를 닮았기에 단지명은 아버지로서 항상 고민하고 걱정해 왔다.
 그 때문에 능력이 닿을 때마다 몸에 좋은 약재나 동물을 구해 와 아들에게 먹이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단선풍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래요?”
 단선풍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 자신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오늘 아침은 잠도 편히 깨고 공기도 상쾌했지.’
 일어나 기지개를 펼 때도 평소보다 몸에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아침에는 무기력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당연히. 정말 좋아 보여.”
 단지명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아침엔 얼굴에 핏기가 없었고 걸음걸이도 조금 불안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아들이 얼마나 씩씩했는지 봤었다.
 게다가 지금은 눈빛마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 달랐다.
 “헤헷, 다행이네요.”
 단선풍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몸에 기운이 넘쳐 즐거웠고, 아침부터 아버지의 걱정을 덜고 웃음을 드렸으니 이것도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머릿속마저 청명했다. 매일 아침마다 머릿속에 안개가 짙게 낀 듯 답답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머리 위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연의 공기가 그대로 스며드는 듯했다.
 머리가 가볍고 개운하며 맑았다. 활짝 트였다는 말 그대로였다.
 그러다 문득 단지명이 한마디 내던졌다.
 “그보다 네 성적표는 언제 나오냐?”
 순간, 단선풍의 얼굴이 굳었다.
 “한······사흘 후······쯤일 거예요.”
 목소리가 힘없이 기어 들어갔다.
 첫 달에 본 시험에서 좌절을 맛봤다.
 열심히 한다고 했건만, 시험은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수년간 학업을 계속했던 형들과 함께 치렀으니 성적은 더욱 바닥으로 향할 터였다.
 “괜찮다. 이번 성적을 계기로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단지명이 위축된 단선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이제 시작 아닌가.
 열한 살의 나이에 서원에서 높은 등수를 하는 건 세상에서 소위 천재라 불리는 몇 명만이 가능했다.
 오히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서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단선풍은 칭찬받을 만했다.
 하지만 들어간 건 들어간 거고, 성적은 성적이었다.
 여느 부모들처럼 단지명도 한 아이의 아버지다 보니 이왕이면 좋은 성적표를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얼른 밥 먹고 힘내라. 성적표는 신경 쓰지 말고.”
 시무룩해진 단선풍의 얼굴을 본 단지명이 아들의 밥 위에 맛있는 고기반찬을 얹어 주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홍경서원의 수업은 오전이었다.
 오후엔 집에 가서 일을 도와야 하는 사람도 있기에 수업이 없이 서원에서 개별적으로 공부하는 게 일과였다.
 단선풍은 아버지의 엄명으로 오후까지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쩌다 가끔은 집에서 쉴 때도 있지만, 가급적 아들이 계속 공부하길 원했다.
 단지명은 아들이 오후에 집에 오겠다는 말을 꺼낼라치면 ‘공부는 다 때가 있으니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라. 나는 그때 공부하지 않아서 후회가 많았다’며 늘 훈계했다.
 결국 단선풍은 서원에 남아 그 날의 복습을 하고 다음날의 수업을 준비했다. 물론 그마저도 실력이 벅차 허덕거릴 때가 많았지만.
 오늘의 일과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단선풍은 천천히 대학을 펴며 수업을 준비했다. 책을 보는 그의 눈이 어제와는 달랐다.
 ‘꿈속에서 이 책이 닳도록 봤는데······.’
 하지만 책은 어젯밤 책상에 두었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 다만 내용만이 머릿속에 가득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선명하게.
 ‘나, 참. 무슨 기억이 이렇게 또렷할까?’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분명 예전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도 못 하는 때가 많았는데 어제의 일은 단 하나의 빠뜨림도 없이 모두 생생했다.
 ‘말도 안 돼.’
 단선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꿈속에서 읽고 파악하고 해석한 것들이 머릿속을 마구 휘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구들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펴 보았는데 꿈속에 나타난 것과 한 구절도 틀린 게 없었다.
 그 해석들마저도 틀리지 않을 거란 느낌까지 남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들었던 책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만히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믿기지 않는 일은 수업 중에 또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했다.
 “선풍아. 한번 이 부분을 해석해 보아라.”
 홍경서원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정진봉이 단선풍을 콕 집으며 물어보았다.
 정진봉은 단선풍을 비롯한 마흔일곱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는 현재 중원에서 사대 서원에 꼽히는 하남의 숭양서원에서 산학하고 온 자로 원래부터가 낙향하여 고향의 후배들을 가르치는 게 그의 목표였다.
 단선풍은 꿈속에서 수십 번이나 읽고 풀었던 그대로 해석해 나갔다.
 “앎을 깊이 함이 사물을 구명함에 있다는 것은, 나의 앎을 깊이 하려면 사물에 대하여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음을 말한다. 사람 마음의 영명함이······.”
 단선풍의 말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단 한마디의 막힘도 없었다.
 곧 그의 대답이 끝나자 정진봉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거의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어. 정말 준비를 많이 해 왔군.”
 “헉!”
 “저걸?”
 주변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단선풍이 지적을 받은 적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정진봉의 정확하다는 평은 오 년간 서원에서 산학한 사람들마저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조용, 조용!”
 정진봉이 학생들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장하다는 듯이 단선풍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번 해석은 아주 훌륭했다. 여러분도 선풍이처럼 예습을 착실히 하도록.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부분은 방금 들었던 대로······.”
 그렇게 수업이 계속 흘러갔다.
 ‘헉! 이럴 수가!’
 단선풍도 그 자신에게 놀랐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기에 꿈속에서처럼 했는데 그게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선풍은 이어지는 수업 내용에서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대학만 예습해 왔다. 서원에서 학문도 배우고 예악도 배우는 등 다양한 수업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수업 시간.
 특히 대부분이 알 수 없는 말투성이던 산학이나 음악 과목마저 단 하나도 남김없이 이해하고 기억해 버렸다. 듣는 그대로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한 번 들어서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머릿속에 모두 기억이 되었다. 나중에 곱씹어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서 막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단 한 번이었다.
 수업 내용이 모두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런 경험은 결코 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총명침을 베고 자서 총명해진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왠지 그런 것 같았다. 아니, 이것밖엔 답이 없었다.
 
 ***
 
 총명침을 얻은 지 나흘이 지났다.
 단선풍은 잠에서 깨어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목침 표면에 고고하게 피어 있는 붉은 연꽃 다섯 송이. 어찌나 생생한지 색상은 연분홍에서 짙은 붉은빛이 고루 번져 있었고, 실물이 아님에도 향기가 날 것만 같았다.
 그 연꽃들은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데 단선풍은 왠지 모르게 더 친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총명침을 베고 잔 첫날부터 어젯밤까지 모두 자신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낮에 집중했었던 것들이 모두 기억되었으며, 꿈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책이면 책으로, 선생님이 말씀했던 건 문구로 변하여 끊임없이 꿈속을 헤집었다.
 그것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그러했다.
 단선풍은 자신이 천재가 아니란 걸 알았다.
 천자문을 떼는 것도 보통의 친구들처럼 몇 달이 걸렸고, 소학을 익히는 것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른 친구들이 뛰어놀 동안 열심히, 꾸준히, 진득하게 공부했을 따름이었다. 그 시간들이 쌓이다 보니 열하나의 나이에 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건 달랐다.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고 불철주야 노력하여 가까스로 뒤처지지 않을 뿐이었다.
 ‘이건 정말 보물이다. 보물.’
 총명침을 얻고 난 후 처음으로 수업을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불과 네 번을 더 경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총명침의 엄청난 효능이라는 것을.
 한 번 듣고 알며, 한 번에 기억해 버린다. 총명침으로 인해 꿈속에서만이 아니라 낮에도 두뇌의 능력이 올라간 듯했다.
 총명(聰明)이란 말 그대로였다.
 어려운 것도 하룻밤만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꿈속에서 무한 반복을 하게 되고, 그게 다음 날 하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제는 수업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막힘이 없을 정도였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이나 이럴 듯싶었다.
 “훗!”
 단선풍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어 버렸다.
 세상에 목침 하나 베고 잤다고 평범한 사람이 천재가 될 수 있겠는가.
 한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이없지만 사실이었다.
 ‘게다가 온몸에 기운도 넘치고······.’
 아버지가 아침마다 하신 말씀이 그저 듣기에나 좋은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단선풍 본인도 느낄 수 있었다.
 손끝과 발끝까지 항상 힘이 넘쳤고,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달리는 데 쉽게 지치지 않고, 예전보다 적은 힘으로도 돌을 더 멀리 날릴 수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강해진 이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추측이 가는 거라면······.
 ‘이것도 총명침의 효능인가?’
 모든 게 총명침을 베고 잔 이후에 생긴 변화이니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선풍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하핫.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네. 세상에 이런 물건이 어딨어?’
 자신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총명침은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단선풍이 행여나 깨질세라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손길로 총명침을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챙기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를 준비했다.
 하지만 도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런데 오늘······ 성적표가 나오잖아. 으아! 망했다.’
 
 ***
 
 “이보게, 단 호법.”
 “무슨 일이십니까?”
 단 호법이라 불린 단지명이 그에게 다가오는 중년인을 반겨 맞았다.
 그 중년인은 단지명이 몸담고 있는 형사표국의 국주인 곽제산이었는데, 배가 볼록하고 눈 꼬리가 살짝 처졌으며 볼살이 통통해 누가 봐도 인자하다고 말할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애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오는 날 아닌가? 지난달에 시험 본 거 오늘 결과 발표한다던데?”
 곽제산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곽보균이었는데 올해로 열여섯이란 나이였으며, 벌써 키가 육 척이 넘고 체구가 좋아 몸은 어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곽보균 역시 홍경서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곽제산이 여러 방면의 선생들을 초빙해 개인 교습을 받았던 터라 어느덧 서원에 들어간 지 삼 년째에 접어든 상태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어라? 자네 아들이 말 안 했었나?”
 단지명은 곽제산의 말에 그제야 단선풍이 말한 사흘 후가 오늘임을 알았다. 한동안 잊고 지낸 모양이었다.
 “말이야 진즉에 들었지요. 다만 잊고 있었을 뿐.”
 “허허, 그렇게 중요한 걸 까먹어?”
 곽제산은 이미 지난 이 년간 매달 이맘때쯤 곽보균의 성적표를 받았다. 성적표는 아이의 성취도를 살펴볼 수 있는 지표이자 앞으로 어떤 진로를 택하는 게 나을지 판가름할 중요한 것이었다.
 물론 곽보균은 아마도 표국을 물려받겠지만.
 “뭐, 그래 봤자 어디 곽 공자만 하겠습니까? 이번에 간신히 서원에 들어간 아이인데요.”
 단지명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핫, 그게 아니야. 선풍이가 얼마나 훌륭한가. 성실하고 착하고 붙임성 있으며, 어린 것이 얼마나 똑 부러져. 게다가 공부도 열심히 하니 일이 년 안으로 내 아들을 따라잡을 걸세. 오 년의 시간 차이도 노력하는 사람은 못 당하지. 암!”
 “그저 국주님이 좋게 봐 주시는 거지요. 사실 선풍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곽제산의 말에 단지명이 흐뭇해 하면서도 아직은 아니라는 듯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부족한 거? 듣자 하니 선풍이가 밤늦게까지 책을 보며 잔다더군. 항상 책을 끼고 살고. 그런 자세만 있다면 순식간에 자신의 그릇을 다 채우고도 남아. 게다가 열한 살에 서원 들어가기가 어디 쉬운가? 그것도 홍경서원을!”
 “과찬이십니다.”
 단지명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곽제산은 쉽게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저 내 아들이 자네 아들의 반이라도 좀 닮았으면 좋겠네. 이놈은 성적 좀 나온다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구한 날 기방을 들락날락거리니······ 열여섯이라면 사내가 뜻을 세우고 거기에 정진해도 모자랄 나인데 말이야.”
 “곧 길을 찾을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곽제산은 자신의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 입에서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
 단지명은 그런 곽제산을 보더니 오후에 가지고 올 성적표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선풍아. 그저 꼴지만 면해라.’
 
 “성적표다!”
 “이번에도 양자흠이다!”
 “또 양자흠이 일등이야?”
 “작년부터 연속 오 회째 일등이라며?”
 수십의 학생들이 홍경서원 내 게시판 앞에 모여 있었다.
 홍경서원은 항상 서원 내 게시판에 상위 다섯 명의 이름과 답안지를 게시하는데 오늘도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그중 맨 윗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양자흠이라는 십칠 세의 청년이었다.
 단선풍이 선생님인 정진봉에게서 성적표를 받아 나오며 게시판 앞을 지나쳤다.
 그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은 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상위권의 순위표였다.
 
 일등 양자흠 팔십이 점.
 이등 고일기 칠십일 점.
 삼등 강······.
 
 단선풍도 양자흠을 알았다.
 그는 열넷의 나이에 서원에 들어와 이 년 동안 실력을 쌓았으며 작년 가을부터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 서원 내에서도 양자흠은 이미 다른 학생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은연중에 알려져 있었다.
 단선풍 역시 평소의 그를 바라보며 그가 아니면 일등은 없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시험의 결과 역시 자신의 생각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등과 무려 십일 점이나 차이가 났다.
 단선풍은 순위표를 오래 보지 않았다.
 곧장 걸음을 옮겨 옆에 있는 다른 게시판으로 갔다. 그곳엔 정진봉 선생이 직접 쓴 답안지가 걸려 있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정진봉의 유려한 문체로 일목요연하면서도 반론할 여지가 없을 만큼 뛰어난 답이 쓰여 있었다.
 그 옆으로 예(禮), 악(樂), 수(數) 과목의 선생님들이 작성한 답안지가 자리를 나란히 차지했다.
 정진봉인 쓴 서(書) 분야까지 총 네 과목이 홍경서원에서 가르치는 것이고 서원은 매달 한 번씩 전 과목 시험을 치러 이렇게 답안지와 순위표를 게시했다.
 “허, 이러니 어렵지!”
 “이걸 어떻게······.”
 답안지를 보는 학생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답을 보자마자 자신들이 어디서 실수했고, 틀렸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단선풍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 아깝다!’
 단선풍은 정진봉이 쓴 답안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엊그제 밤, 지난번에 풀었던 문제를 떠올리며 답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총명침을 얻고 난 후라서인지 시험을 치렀을 때와는 사뭇 다른 답안이 도출되었는데, 정진봉의 답 역시나 엊그제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아직 배우지 못한 서책들은 어쩔 수가 없어 자신의 것과 다른 부분이 좀 있었다.
 하지만 흐름이 같아 상당한 점수는 받았을 터였다.
 ‘으으! 내가 지금 아는 만큼 그때도 알았더라면!’
 후회는 항상 늦는다.
 그렇다고 단선풍이 그 당시 열심히 안 했던 게 아니었다. 다만 며칠 전 총명침이 생겼고 그 덕을 톡톡히 봤기에 아쉬운 마음이 큰 것이었다.
 
 단선풍 사십오 등 서 육 점 악 사 점······.
 
 성적표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름 뒤에 전체 등수가 쓰여 있고 그 뒤로 네 개의 분야마다 자신이 받은 점수가 나와 있었다.
 뭐 하나 특출 난 게 없었다.
 네 과목 모두 각각 이십오 점이 최고점이었는데 자신의 것은 모두 한 자리 점수라는 것만 빼고는.
 ‘이걸 어떻게 아버지께 보여 드리지?’
 이게 첫 성적표라 기대를 많이 하셨을 텐데 그의 머릿속엔 벌써부터 실망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했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선풍아! 시험 어땠어? 흐흐.”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가온 사람은 곽보균이었다. 그는 형사표국주의 아들로 이미 키가 육 척을 넘어 단선풍이 고개를 들고 쳐다봐야 했다.
 “히히! 내 등수 봤냐?”
 
 사등 ······.
 오등 곽보균 육십사 점.
 
 단선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낸 시간이 적지 않았고, 곽보균이 골목대장을 하던 시절, 단선풍은 어지간히 장난을 당했었다.
 그 당시 단선풍은 싫다고 해도 힘의 논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곽보균에게 당하곤 했다.
 칼싸움을 해도 곽보균이 천하제일인 독고청 역할을 하면 단선풍은 천마가 되어 매일 땅바닥을 굴러야 했고, 숨바꼭질한다면서 툭하면 산속에 그 혼자 두고 집으로 내빼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밤이 가까워져서야 간신히 마을에 돌아오곤 했다.
 “이 형님은 이번에 오 등을 하셨다. 에헴! 저 성적표에 이름이 올라가 있단 말씀이지!”
 곽보균이 힘껏 콧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더니 단선풍의 머리 위로 슬쩍 고래를 내밀어 그의 성적표를 힐끔 쳐다보았다.
 “푸핫! 사십오 등? 이번에 두 명이 시험을 안 쳤으니 네가 꼴찌구만, 꼴찌.”
 곽보균이 고소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어 젖혔다.
 단선풍은 그런 곽보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괜찮다. 괜찮아. 모름지기 사내라면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움화화화!”
 어깨를 토닥이며 하는 말이 어째 격려해 주는 것 같은데 그 안에는 놀리는 투가 여실히 담겨 있었다. 그건 여덟 살 먹은 동네 꼬마 아이도 느낄 만큼 티가 났다.
 하지만 곽보균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어서 공부해서 날 따라와라. 너라면 한 십 년은 걸리겠지만 말이야.”
 곽보균은 고개 숙인 단선풍을 보고 한껏 으스대었다.
 어른에 필적하는 체구를 가진 곽보균이 오 척이 채 안 되는 단선풍에게 선심 쓰듯이 말을 내뱉으며 웃었다. 그 모습은 단선풍이 아닌 그 누가 봐도 비열해 보인다고 할 터였다.
 “하하핫! 아버진 저런 놈의 어디를 배우라는 건지 모르겠네.”
 얄미운 짓만 실컷 한 곽보균이 단선풍에게서 멀어지며 혼잣말을 흘렸다.
 단선풍은 그런 곽보균을 보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제길! 총명침이 한 달 전에만 있었어도!’
 절대 곽보균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은 그였다.
 
 저녁노을이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출 때였다.
 단선풍이 침상에 오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는 ‘다음에 이보다 높으면 된다. 고생했구나’ 라는 말로 단선풍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바로 옆에선 형사표국의 국주가 어깨를 쫙 편 채 아들의 성적을 넌지시 모두에게 전하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어깨가 더욱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평소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달 시험은 내가 더 잘해야겠다.’
 방법이 없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총명침이 있었다.
 이미 몇 차례 경험했고, 그 능력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일찍 자야 돼!’
 어차피 꿈속에서 공부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 동안 하는 게 나을 터였다.
 꿈속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혼자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효율도 어마어마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걸 기억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리하여 단선풍은 굳게 마음을 먹은 채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려는 것이었다.
 총명침은 그런 단선풍의 마음을 아는지 눕자마자 잠에 빠지게 해 주었다.
 곧장 늘 공부를 하던 풍경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위치해 있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한 곳이었다.
 한데 이전 꿈들과는 달았다.
 ‘헉!’
 예전까지는 책 한 권이 달랑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에 더해 금(琴)과 퉁소까지 있었다. 그곳엔 음악을 배우면서 참고했던 책자도 함께 있었다.
 ‘게다가······.’
 한쪽 옆으로는 산학을 배울 때 쓰는 책도 보였으며, 대학과 더불어 시경까지 생겨난 상태였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하늘은 자신의 편인 게 분명했다.
 “좋았어!”
 단선풍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많이 놓여 있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뜻했다. 그것은 곧 더욱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계속 이렇게만 된다면 이번 시험부턴 문제없어!’
 꿈속에선 못하는 게 없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될 때까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더 빨리 잠들었으니 더 오랫동안 공부할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힘내자. 아자!”
 찬란한 결과가 벌써부터 보이는 듯했다.
 단선풍이 곧바로 정자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기필코 곽보균을 누르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거라는 굳은 다짐을 위해 오늘도 공부를 시작했다.
 
 총명침은 믿는 만큼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는 모양이었다.
 
 
 
 
 
 2장 전설의 시작
 
 
 
 
 
 
 
 
 
 단선풍은 총명침으로 많은 것을 이뤄 냈다.
 지난 보름간 홍경서원에서 배우는 네 과목 모두의 진도를 따라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충분한 범위를 예습하여 수업을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에 부족하여 서원의 장서각에 있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읽었던 부분은 하루 안에 모두 이해하고 깨우치는 일을 시작한 상태였다.
 지금의 속도라면 자신보다 오 년 먼저 서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을 듯했다.
 마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 듯 책이나 음악, 산학 등 필요한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자연스럽게 단선풍에게로 녹아든다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엔 빌려 온 책이 너무 신나고 재미있어 결국 자정이 넘어서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지낸 시간은 일찍 자던 때랑 똑같았다.
 꿈속의 시간은 현실과 다른 듯했다.
 옛날에 귀신에게 쫓기는 꿈을 꿀 땐 두 시진 정도 시달렸지만, 태원으로 놀러 갔다 오는 꿈에선 사흘이나 지낼 수 있었다.
 실제로는 둘 다 네 시진씩 잔 것에 불과하나 꿈속에서는 이렇게 차이가 났다.
 꿈속에서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잠을 길게 잘 필요가 없잖아.’
 그 생각이 든 이후 꿈속에 몇 권의 책이 나타나든 그 날 생겨난 분량은 그 날 해치울 수 있었다.
 꿈속에서 한 시진을 보내든, 열 시진을 보내든 상관없이 일어나면 똑같이 동이 틀 무렵이었다.
 오히려 자정이 넘어서 자도 아침에 피곤한 느낌이 없었다.
 총 두 시진을 자든, 네 시진을 자든 상쾌하고 활기찬 기분으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현실이 그러하다 보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정 무렵, 습관적으로 자던 때 그냥 마음 편히 자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자정이 가까워진 무렵, 단선풍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 다루듯 총명침을 어루만지더니 서서히 자신만의 무릉도원인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라?’
 단선풍은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바로 달려가지 못한 채 주변을 훑어보았다.
 오늘도 역시 눈앞에 선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 정자가 있는 것도 그러했고, 정자 안에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놓여 있는 것도 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데 분위기가 달랐다.
 심장이 기이하게 떨렸는데 평소에는 전혀 받은 적이 없던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멀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었다.
 정자의 한가운데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스러우면서 기품 있어 보이고, 신기하게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청아한 향이 나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세상의 어느 장인이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인세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면서도 화려하고 동시에 우아하면서도 청초한 느낌을 주는 연꽃들이 탁자 테두리를 따라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꽃이 마치 떠받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꽃 문양의 한가운데에 비단으로 만든 책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단 역시 연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실물도 이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이건 뭐지?’
 단선풍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벌렁거리다 못 해 곧 몸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극한의 속도로 타오르는 걸 느꼈다.
 온몸의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는 자신의 몸이 펑 터져서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손이 저절로 비단 책에 가까이 갔다.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은 떨림에도 불구하고 저 책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당연히 펴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머릿속엔 이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건 운명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니, 단지 느낌이 아닌 확신이었다.
 스르륵.
 단선풍이 책을 열었다.
 펼친 게 아니라 열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애초에 책인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비단이 책 모양으로 한 번 접혀 있던 것뿐이었다.
 ‘제원무록(諸元武錄)?’
 단선풍이 여태까지 보았던 책들 중 이런 이름을 가진 것은 없었다.
 단연코 이런 책은 없었다.
 그 내용은 더했다.
 펼쳐진 비단의 가운데 접힌 선을 기준으로, 양쪽의 상단에 신필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 용사비등한 필체의 열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제원오묘 기화승천(諸元奧妙 氣化升天).
 종극제원 만공무위(終極諸元 滿空無爲).
 
 이 열여섯 글자를 시작으로 하여 셀 수 없는 글자가 비단을 빼곡히 채웠다.
 ‘무슨 말이지?’
 단선풍은 생전 처음 보는 글자들로 인해 머릿속이 뿌옇고 혼란스러웠다.
 제원은 뭐고 기화승천은 또 무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총명침의 영향으로 인해 요즘 상상 이상의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 본 것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달리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계속 읽어 나가는 수밖에.
 
 제원(諸元)은 모든 것의 근본이자 으뜸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제원에서 시작되어 제원으로 귀일하니······.
 
 단선풍이 서서히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아무리 살펴도 그 뜻을 모르니 눈에 보이는 건 그저 글자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화아악―!
 갑자기 세상만물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제원무록이란 이름을 가진 이 비단천만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글자들이 줄을 지어 공중으로 붕 솟아오르더니 쏜살같은 속도로 단선풍의 미간에 빨려 들듯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파앗!
 그와 동시에 단선풍의 눈에 붉은빛이 일렁였다. 영혼마저 쪼개 버릴 듯이 선명한 빛이 정수리 쪽으로 뻗쳐 나왔다.
 쏴아아―!
 마치 세상에 붉은 번개가 쳐 번쩍이는 것처럼 정수리에서 솟아나온 선홍색의 맑은 빛이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었다. 그러고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품안에 두려는 듯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
 단선풍이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올라온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에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왔으나 그로 인해 온몸에 충만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어도 무엇인지는 알았다.
 제원무록이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이해할 수 없지만 온몸에서 전해지는 너무 오묘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계속 만끽하고 싶었다.
 옆에서 본다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단선풍이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지금 그를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단선풍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물결의 기운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선천의 기운······.”
 그저 느낌만으로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제원무록에 기록된 선천의 기운이란 말이 이를 일컫는 게 틀림없었다.
 그와 동시에 총명침을 얻은 이후 자신의 신체에 활력을 북돋워 준 것이 이 선천의 기운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푸른 물결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정자 위에 올라선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유입되어 온몸을 채우고 또 채웠다.
 동시에 몸 안에서는 그것이 돌고 돌며 신체 곳곳으로 흘러가 어디 한곳이라도 부족하지 않고, 과하지도 않도록 골고루 퍼져 나갔다.
 그럴 때마다 손끝 발끝까지 온몸이 모두 극한의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헉!”
 하지만 단선풍의 놀람은 이에 그칠 수 없었다.
 정자 바깥의 세상.
 신선들이 노닐 것만 같은 이 선경 자체가 그러한 선천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제원무록······.”
 이른 새벽 어느새 잠에서 깬 단선풍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총명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무(武)’라는 글자가 들어가니 무공비급인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권장지각을 어떻게 쓰고 펼치는지에 관해선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선천의 기운이 어떤 것이며 후천의 기운은 무엇인지 말하며 세상의 생성 원리와 이치에 관해서만 불가의 선문답처럼 큰 뜻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맨 끝엔 이렇게 덧붙여져 있었다.
 
 이것을 터득한다면 길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 이게 끝이라 여기지 말고 제원무록에 일로매진한다면 길은 저절로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은 곧 이 다음에 권장지각이 나온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알쏭달쏭한 제원무록을 풀어야 이것을 기반으로 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단선풍은 총명침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의 무공에 대한 지식은 얕았다.
 지금 나이의 반밖에 되지 않는 다섯 살 때에는 아버지인 단지명이 그가 익힌 무공을 알려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단선풍의 어머니이자 단지명의 아내였던 장원영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아들 단선풍이 장원 급제한 뒤 아버지에게 가서 인사를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마지막 유언이라 하기 전에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한 두 사람이 그들의 부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장원영의 가문은 무가 아닌 문으로 크게 이름 날린 곳이었고, 그녀의 고조부가 한림학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부친이 정이품의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오르고 백부가 국자감을 이끄는 제주(祭州)가 되면서 그 세를 크게 떨치고 있었다.
 단지명이 이렇게 쟁쟁한 집안의 막내딸과 사랑을 나눴으니, 가문의 반대가 심했던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의 도피를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선풍이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한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단지명 역시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단선풍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단선풍은 아직까지 단지명에게서 무공조차 물려받을 시간이 없었다.
 그저 열셋의 나이가 되어도 문으로써 성공할 싹이 보이지 않으면 그때 무공을 전수하겠다고만 했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단지명의 의형제들은 무공의 입문이 너무 늦지 않느냐고 했으나 단지명 역시 그의 스승을 열다섯에 만나서 시작했기에 다 방법이 있다고 할 뿐이었다.
 단선풍이 이런 사실까지 알 리는 없었지만.
 “근데 정말 무공인가?”
 자신에게 제원무록이 이어졌다.
 무공을 익힌 적도 없고,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나 보고 들은 것은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경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 무공비급에 어떤 내용이 다루어지는 것인지 더더욱 알지 못했다.
 “물어보면 혼내실 텐데······.”
 단선풍이 가장 가까운 조력자인 단지명을 떠올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에 곽보균이 무공 사부를 들여 무공을 익힐 때 자신도 옆에서 그것을 따라하다가 난생처음으로 아버지의 서릿발 같은 준엄하고 무서운 눈빛을 보았다. 영혼을 송두리째 옭아매는 듯한 느낌에 겁을 먹었었다.
 그때 어머니인 장원영이 단선풍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단지명은 열셋이 될 때까지 무공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평상시로 돌아갔다.
 결국 지금 단선풍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별로 없었다.
 ‘나 혼자서 알아볼 수 있을까?’
 사실 아버지조차 총명침을 베고 잤더니 총명해졌다는 말을 그저 아들의 귀여운 아부로 받아들일 뿐이었는데, 꿈속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다만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이 잠에서 깬 지금도 모두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동시에 몸 안을 가득 채운 선천의 기운이란 것도 이제는 실제로 느낄 수가 있었다.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단선풍이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몇 걸음 걸어 보며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몸 안에서 활력이 솟아 넘쳤다.
 꿈속의 선경과 달리 현실에선 그 기운이 희미했지만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힘을 주고 머리를 맑게 해 주며 눈이 더 시원해져 멀리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선천지기라······.”
 제원무록의 내용이 다시금 머릿속을 헤집었다.
 비단의 좌측에 쓰여 있던 선천의 기운, 선천지기는 사람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북돋아 주고 의지를 고취시키며 힘과 능력을 배가시켜 준다고 되어 있었다.
 이것이 제원의 시작이며 근본이라고 했다.
 과연 실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혈색도 안 좋고, 기분도 항상 가라앉아 있던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다 쾌활하고 자신감 넘치며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총명침을 베고 잔 뒤에 일어난 일이었고, 정확히는 몸속에 선천지기가 유입되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선천지기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요, 행복의 시작이었다.
 단선풍이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총명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날 아침, 단지명은 아침식사 도중에 단선풍에게서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 어, 그래. 뭔진 모르겠다만······.”
 단선풍은 그저 미소 짓고만 있었다.
 
 ***
 
 “형, 형도 선천지기 익혀요?”
 단선풍은 수업이 끝난 뒤 곽보균에게 물었다.
 제원무록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것을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다.
 제원무록은 자신만의 보물이니까.
 게다가 흔히 무공은 서로 나누는 게 아니며, 알려 주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단선풍 역시 이런 말을 곽보균과 칼싸움할 때 수도 없이 들었고, 그에 동감했다.
 세상에 무공을 공짜로 알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천하에 무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겠는가. 단선풍 역시 그것을 알고 있어서 제원무록을 떠벌릴 마음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내공이란 게 선천지기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제원무록에서는 분명 선천지기를 근본으로 길이 열린다고 했으니 무공의 근본이 되는 내공이라는 말과 어째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단선풍은 그게 가장 궁금했는데, 그의 주위에서 수 년째 무공을 익히고 있으며 아버지 이외에 쉽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곽보균뿐이었다.
 “선천지기라고? 어디서 또 들어 본 건 있구나? 풉!”
 곽보균은 단선풍이 똘똘한 눈으로 진지하게 물어 오자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형, 그게 뭐예요?”
 “선천지기? 나도 몰라.”
 “알아서 웃은 거 아니었어요?”
 “꼴찌야. 나라고 다 알고 있겠냐? 근데 선천지기란 말이 멋있잖아, 말이! 선천이라는 말만 들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존엄성이 느껴져. 넌 안 그러냐?”
 곽보균이 단선풍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찍으며 물었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너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거 아니야? 요즘 장서각에서만 살더니 이상한 걸 주워들었네. 혹시 미쳐 가는······ 아악!”
 곽보균은 말을 이어 나가다가 갑자기 단선풍의 귓가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조그만 단선풍을 데리고 장난치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귀가 멍멍한 단선풍이 눈에 힘을 팍 준 채 곽보균을 노려보았다.
 “뭐, 어찌 됐든 내가 오늘 사부님께 여쭤 보마. 어휴, 그렇게 보지 마라. 눈빛에 찔릴라. 훗!”
 “예, 알았어요.”
 곽보균이 단선풍을 놀리면서 몸을 돌려 휘적휘적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곽보균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외치고 있었다.
 “꼬맹아. 하지만 천하에 공짜는 없어. 내일 당과 사 와.”
 “으윽!”
 단선풍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세상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는 험한 이치를 깨우치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단선풍은 꿈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제원무록이 나타났던 곳은 그 전처럼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그저 정자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 안으로 선천지기가 들어와 쌓이고 쌓였으며, 들어갈 곳이 없을 것 같은 충만한 느낌이어도 계속 유입되어 축적되었다.
 이미 자리 잡은 선천지기들이 서로 합쳐져 압축되는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밀도로 빈틈없이 가득 찰 터였다.
 어쩌면 단선풍이 제원무록을 의식하지 않아도, 이해하지 못해도 머릿속에 들어온 것만으로 저절로 이 과정이 일어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선풍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총명침으로 인해 부쩍 높아진 기억력과 이해력, 그리고 책을 보면 즉시 깨우쳐 버리는 사고력을 바탕으로 제원무록을 열심히 살폈다.
 수십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여태까지는 아무리 어려운 것이더라도 하룻밤 이상 소모해 본 적이 없었다.
 하룻밤이 걸리는 것도 책이 두꺼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지 정말 난해하다고 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제원무록은 달랐다.
 읽어 나갈수록 점점 헷갈려 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어렵지 않았는데 제원무록만은 그 진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긴, 모든 것의 근본이라니까······.’
 제원무록은 며칠, 어쩌면 몇 달을 소모해야 깨우칠 수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총명침의 효능을 기반으로 해야 그나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총명침 안에서 존재했던 것이니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게 당연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총명침이 없었다면 제원무록의 한 글자, 한 문장이나 해석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아니, 그런 인연조차 닿지 않았을 터였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몸은 선천의 기운을 끊임없이 흡수했다. 제원무록의 이해가 부족한 건 마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단선풍이 무엇을 하든 저절로 몸에 쌓였고, 나날이 새로운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곽보균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선풍! 너 선천지기란 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그, 그냥 책에서······.”
 “하! 나, 참!”
 단선풍의 대답에 곽보균은 그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탈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 선천지기는 평범한 인간은 수련할 수 없는 거다.”
 “평범한 사람?”
 “그래, 이 똥강아지야. 네가 무슨 책을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선천지기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기운인데 우리가 그냥 숨만 쉬어도 그게 탁해지고 옅어져. 근데 중요한 건 이걸 수련할 수도 없고, 어디서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깨끗하게 만들 수도 없어.”
 말은 길었지만 줄이면 단순했다.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아예 없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곽보균은 단선풍이 멍한 표정을 짓자 이해를 못 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그, 뭐시냐, 아기가 무거운 돌에 깔리면 그 어머니가 갑자기 괴력을 발휘해 돌을 들어 올리고, 또 기필코 해야 할 의지가 있어서 오르지 못할 절벽 같은 것도 오르는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게 선천지기가 발휘되어서 그런 거다.”
 곽보균은 그 자신도 무공 사부에게 들은 말이었으나, 단선풍에게는 마치 자신이 아는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전해 주었다.
 “다만 신선들은 선천지기로 온몸이 구성되어 있대. 그래서 죽지도 않지.”
 단선풍은 곽보균이 덧붙인 말에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신선요?”
 “그래, 산신령 같은 거!”
 자신의 몸에 들어온 선천지기들이 뿜어내는 강한 생명력을 생각해 보면 그 말도 맞는 거 같았다. 몸속 구석까지 활력이 넘치니 어느 누구라도 오래 살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꿈속의 세상은 참 대단했다.
 분명 세상이 선천지기로 둘러싸인 것을 느꼈고, 그 양이 얼마나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자가 있는 그 장소도 신선들이 노니는 선경이 아닐까 싶었다.
 인세에는 존재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와 주변 환경. 처음 꿈을 꿨을 때만 해도 이곳은 무릉도원이 아닐까 여겼지 않은가.
 바로 그때, 자신의 상상을 처참히 깨부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 정보 값 내놔?”
 단선풍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당과 말이야, 당과!”
 단선풍은 어쩔 수 없이 조막만 한 손으로 품에서 당과 두 개를 꺼냈다.
 곽보균은 그것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낚아채 갔다.
 “역시 남의 돈으로 먹는 게 맛있네. 후루룹!”
 곽보균이 혀를 날름거리며 단선풍의 눈앞에서 추잡스럽게 먹어 대고 있었다.
 단선풍은 그런 곽보균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물었다.
 “그럼 선천지기는 내공이 아닌 건가요? 많이 달라요?”
 “일단은 그걸 내공으로 쓰는 사람이 없지. 하지만 내공으로 쓰게 된다면 엄청날 거다. 사람들이 익히는 심법으로는 후천지기를 수련할 수 있는데, 선천지기는 한 줌의 진기만으로도 후천지기의 수십 배에 달하는 힘을 낼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주 적은 양으로도 커다란 바위를 들지.”
 이미 당과에 빠진 곽보균은 그의 사부에게서 들었던 평소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자신의 지식인 것처럼 으스대듯이 대답해 주었다.
 “다만 어떻게 다시 채우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원하는 시간에 발휘되도록 하는 것도 문제야. 그래서 아무도 못 써.”
 단선풍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원무록에 나왔던 후천지기라는 말을 의도치 않았는데도 알게 된 것이었다.
 “형, 고마워요. 다음에도 종종 부탁드릴게요.”
 “흐흐. 마음대로. 나야 좋지. 하지만 다음엔 좀 비싼 거 먹을 거다.”
 곽보균은 자신과 멀어지는 단선풍을 보더니 이윽고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공부는 싫고 무공도 싫고······ 어디로 가는 게 좋으려나?”
 
 ***
 
 단선풍은 서원 옆 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선천지기라는 말에서 시작하여 제원무록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선천지기와 후천지기는 둘이 아니다. 선천이 후천이 되고 후천이 선천이 될지니, 선천과 후천이 상생하여 흐름이 생기고 그 흐름을 따라······.
 
 선천지기와 후천지기.
 제원무록은 이 두 개를 같이 취급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쓴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단선풍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무공에 입문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막혔다.
 선천이 후천이 되고 후천이 선천이 되는 것.
 그리고 흐름이 생긴다는 말.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차근차근 생각하면 되겠지. 조급해 하지 말자. 풀려 가고 있으니까. 히힛.’
 총명침을 얻은 후 처음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났으나 그곳을 곧 정복할 듯했다.
 게다가 정말 궁금했던 것, 즉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쓸 수 있다고 했으니 총명침을 믿고 계속 수련하면 될 터였다. 곽보균의 말로 유추해 보면 꿈속에서 받아들이는 선천지기의 양은 가히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후천지기를 토대로 삼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선천지기도 그에 모자를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선천지기가 그 양조차 더 많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의 온몸을 채운 선천지기.
 아버지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과 곽보균이 검을 수련하던 장면을 많이 본 것은 아니었으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형사표국의 실무자인 표사들이 수련하는 모습도 여러 차례 봤었다.
 그들은 전부 강하고 웅장했으며 멋있었다.
 천하제일인 독고청과 그의 졸개들도 강력한 무공으로 천마를 물리쳤던 게 아닌가. 어렸을 적 칼싸움 때문에라도 단선풍에게 강력한 무공은 이미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단선풍에게 선천지기와 제원무록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현재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총명침이 가져다 준 소중한 기회였다.
 “나도 곧 강해지겠지? 하하핫!”
 이 모든 게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랐지만, 단선풍은 왠지 모르게 설레고 있었다.
 
 ***
 
 드디어 내일이었다.
 단선풍이 홍경서원에 들어간 후 두 번째 시험을 보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첫 번째 시험에선 사십칠 명 중 두 명이 시험을 안 치른 가운데 사십오 등이었다.
 실질적인 꼴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터였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둔 까닭이었다.
 아버지인 단지명이 사다 준 총명침으로 인해 목침 이름처럼 정말 총명해졌다. 그 와중에 꿈속에서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기이한 일까지 경험했다.
 이제는 자신 있었다.
 애초부터 천재라던 서원 내 일등 양자흠은 어떨지 몰라도 얄밉기만 하던 곽보균 정도는 충분히 꺾을 수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모든 수업을 앞지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서각에서 거의 백 권에 달하는 서책들을 독파했다.
 장서각에 오백여 권에 이르는 책이 있다지만 그것도 두세 달 이내로 모두 독파가 끝날 터였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겠지? 히힛.”
 단선풍이 잠자리에 들며 흐뭇한 얼굴로 총명침을 살살 어루만졌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이미 자기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라 벌써부터 아버지가 기뻐하실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러자 행복한 느낌이 저절로 일어나며 잠들기 시작하는 단선풍의 얼굴을 곱게 적셨다.
 ‘오늘도 이곳이구나!’
 단선풍이 웃으며 정자로 올랐다. 자기 전에 생긴 미소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꿈을 이루어 주는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지?’
 이렇게 멋있는 정자라면 당연히 이름도 있을 텐데 그동안 정자의 사방 어디에도 이름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처마 밑엔 현판조차 없었다.
 ‘뭐, 차츰 알게 되겠지.’
 단선풍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정자 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피부로 상쾌하고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선천지기였다.
 단선풍이 이곳에 올 때마다 그의 피로를 풀어 주고 힘을 불어넣어 주며 온몸에 활력이 돌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었다.
 ‘언제나 좋은 느낌이다!’
 마치 숲속의 공기를 들이마시듯, 코와 입으로 힘껏 선천지기를 들이마셨다. 물론 그런다고 공기처럼 마구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행동을 할 만큼 선천의 기운이 주변에 잔뜩 널려 있었다.
 단선풍은 정자의 중앙에 앉아 천천히 책을 골랐다.
 “오늘은 맹자(孟子)를 살펴봐야겠다.”
 이미 그 내용을 살펴보았으나, 내일 치르는 시험을 대비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단선풍은 갑자기 닥쳐오는 느낌에 책에서 눈을 뗐다.
 쏴아아―!
 정자의 천장에서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듯 막대한 기운이 자신에게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콰앙―!
 머릿속에서 벽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머릿속으로 막대한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이 모든 게 한순간이었다.
 천장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힘이 곧장 단선풍의 머릿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자신의 정수리 부근 구멍이 크게 뚫린 듯했다.
 ‘이, 이럴 수가!’
 알지만 막을 수 없었다.
 단선풍에게 쏘아지는 거대한 물줄기는 선천의 기운이었다.
 여태까지는 전신의 피부를 통해 몸 안으로 유입되었는데, 지금은 하루 동안 들어오던 양의 몇 배가 순식간에 정수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더구나 중요한 건 몸 안으로 들어온 기운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몸속은 이미 선천의 기운이 가득 차 있는데 그것들을 누르고 눌러 압축시키면서 계속 유입되고 있었다.
 이러다간 물을 담은 가죽 포대처럼 뚱뚱하게 변했다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억! 억!”
 단선풍이 말조차 내뱉지 못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두 눈이 빠질 듯이 튀어나왔고, 입은 턱이 빠질 정도로 열려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콰콰콰쾅―!
 갑자기 몸속 곳곳에서 둑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뇌리를 흔들었다. 그런 소리가 머릿속부터 배 안과 등 쪽, 팔과 다리, 심지어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손으로 꼽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다.
 쉽게 말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괴현상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곧이어 정수리로 들어오는 선천의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그곳들을 통과해 나가기 시작했다.
 머리 꼭대기에서 얼굴을 거쳐 배꼽에 이르고 낭심 근처를 지나갔다. 뒤이어 척추를 타고 수직 상승해 뒤통수를 시원하게 만들더니 정수리로 올라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수리로 올라간 선천지기가 새로 들어오는 기운과 합세해 더 큰 물결이 되어 맹렬하게 온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마치 큰 강에서 지류가 갈라지듯 정수리부터 시작한 거대한 흐름에서 선천의 기운들이 새어 나가 손끝과 발끝으로 뻗어 나갔다.
 “아―!”
 단선풍은 전신을 꿰뚫는 쾌감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 황홀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예전에 선천지기를 받아들일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뼛속에 있는 좁쌀만 한 알갱이마저 걸러 내고 선천의 기운이 자리 잡는 기분이었다.
 아니, 뼈는 물론이고 피부뿐만 아니라 털끝까지 선천지기로 재구성되는 듯했다.
 이 모든 게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선풍은 그렇게 몸 안에 생긴 거대한 물길이 수십, 수백 바퀴를 돌아 그 흐름이 일정해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렸다.
 기분이 몽롱했다.
 온몸을 관통한 시원하고 상쾌하며 즐거운 느낌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몸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고, 피부는 잡티 하나 찾기 힘들 만큼 깨끗하고 고왔다.
 자신의 살갗을 보면서도 이게 왜 이런지 의문을 가질 만큼 달라져 있었다.
 ‘어깨도 조금 넓어진 거 같은데?’
 단선풍이 온몸을 살펴보다가 예전과는 다른 어깨 넓이와 두께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나 덩치가 커진 것도 아닌데, 좁았던 어깨는 떡 벌어져 있었다.
 남들이 보면 잘 모를 차이였으나 단선풍은 자신의 몸인지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떡 벌어진 게 아니라 더 튼실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단선풍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살피는 와중에도 선천의 기운은 정수리로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원래처럼 온몸으로도 선천지기가 흡수되고 있으니 지금 받아들이는 양은 그 이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단선풍은 끊임없이 도는 무한의 고리를 얻었다. 그것도 선천지기로 이루어진.
 그 순간 문득 제원무록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선천의 기운이 너를 보호하고 후천의 기운이 너의 힘이 된다. 선천은 너의 창이요, 후천은 너의 칼이며, 선천이 네 갑옷이 되고 후천은 네 온몸을 덮는 방패가 되리라. 이는 곧 흐름을 이루어 선천과 후천이 다르지 않음을······.
 
 제원무록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구절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방금 있었던 일은 책 속의 흐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제원무록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겪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건가?’
 처음엔 그저 글자의 나열인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 생기는 변화로 한 문장, 한 구절씩 그 껍질을 벗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만으로 판단하는 건 조금 성급한 면이 없지 않지만, 단선풍으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후천은 어떻게 되는 거지?’
 곽보균에게서 들은 바로는 후천지기란 흔히 익히는 내공심법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것은 선천지기와 전혀 다르다고 했으며, 단선풍 자신은 선천지기를 익히고 있었다.
 한데 제원무록 상에는 선천과 후천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선천이 어떻게 창이면서 갑옷인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한 후천은 익히지도 않았고, 어떤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차차 알게 되겠지. 조급해 하지 말자.’
 어차피 때가 되면 자신에게 변화가 나타나리란 생각이 들었다. 짐작조차 못하던 ‘흐름’ 이란 말을 방금 전에 몸소 체험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천이 후천이 되고 후천이 선천이 되는’ 것도 언젠가 알게 될 터였다.
 
 그렇게 제원무록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었다. 단선풍이란 아이를 통해서.
 
 
 
 
 
 3장 괄목상대
 
 
 
 
 
 
 
 
 
 “헉!”
 단선풍은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보고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꿈속에서처럼 몸이 변해 있었다.
 피부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뽀얗고 매끄러웠다. 물방울이 피부에 닿아도 또르르 굴러갈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깨도 더 넓고 두꺼웠다. 척 봐도 탄탄하다는 느낌이 절로 전해졌다.
 게다가 살이 빠진 게 아닌데도 몸은 어제에 비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지 다리도 들어 보고 팔도 흔들어 보았으나 분명 그러했다.
 하지만 놀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단선풍은 자신의 몸이 변한 것에 어쩔 줄 몰라 서둘러 동경 앞으로 다가섰다.
 “어, 얼굴도!”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일단 전체적인 윤곽이 변했다.
 달걀처럼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그대로이나 유약해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눈빛이 전보다 더 맑으면서 깊어졌고, 콧날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오뚝하고 뾰족해졌으며, 턱 선은 일자로 쭉 빠져 전체적으로 진중해 보이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그러면서도 눈썹이 적당한 각도를 유지하고 눈매가 처지지도, 위로 솟구치지도 않아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 충분했다.
 이런 부분들이 한데 합쳐지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절로 미남의 기본을 갖추고 있었다.
 꼬맹이인데도 잘생겼다는 말은 기본으로 들을 게 분명했다.
 나이가 더 들면 얼마나 대단해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오 년만 지나도 전설의 송옥이나 반안과 비교해 볼 수 있을 듯했다.
 “이럴 수가!”
 단선풍이 자신의 얼굴임에도 불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옛 모습이 얼굴에 잔뜩 남아 있고, 아주 작은 부분들이 더 자연스럽게 변한 것뿐인데 전체적인 느낌이 달라지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본인의 얼굴이 맞았다.
 바로 그때였다.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선풍의 귀가 쫑긋했다.
 ‘아버지께서 어디 다녀오시는구나.’
 단지명이 아직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나 단선풍은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분명 단지명의 귀가는 예전엔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야만 알 수 있었다.
 ‘어머니께 다녀오신 건가?’
 단선풍은 이제 막 마당에 들어선 아버지에게서 산 냄새도 맡아 냈다.
 사실 이런 감각은 예전에는 느낄 수 없던 것이었다.
 지금은 꿈속의 괴사로 인해 귀가 밝아지고 후각도 발달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는 오감의 모두가 발달했으나 현재 단선풍은 자신의 신체와 외모의 변화로 인해 감각의 변화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무튼 단선풍의 추측은 정확했다.
 단지명이 이른 아침에 산속에 다녀올 일이라곤 어머니의 묘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단지명은 원래부터 먼 표행을 갈 때마다 아내의 무덤에 갔다 오곤 했는데, 오늘도 같은 이유였다.
 “아버지! 오늘 표행이 있으신가 봐요.”
 단선풍이 서둘러 방문을 열고 나가며 단지명에게 아침 인사를 겸한 말을 건넸다.
 “오!”
 단지명은 자신의 아들을 보자마자 탄성을 터뜨렸다.
 너무 달랐다.
 그동안 봐 왔던 아들이 아닌 듯했다.
 근골이 무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원래 자신의 아들은 척 봐도 체격이 부족했다. 평균에 못 미치는 신체 조건과 살짝만 힘 줘도 부러질 것 같은 팔뚝 때문에 걱정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사 집안 출신이었던 아내 장원영을 닮아 어쩔 수 없다 여기던 터였다.
 한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아들은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눈으로 슬쩍 훑어봐도 알 수 있었다.
 변한 게 분명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상체가 어느새 틀이 잡혀 있었고, 이는 튼튼한 하체에서 뒷받침되는 것이었다.
 “너······!”
 단지명이 말을 못 이루며 단선풍을 계속 살폈다.
 단선풍은 그런 단지명을 보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자신조차 겪고 나서 당황스러웠던 일인데 같이 살고 있는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결국 자초지종을 물을 게 뻔했다.
 ‘어쩌지?’
 단선풍이 이런 사소한 것에 고민하는 동안 단지명의 생각은 다른 곳에 닿아 있었다.
 단지명은 아들의 어깨를 만져 보고 허리를 돌려 보았다. 안정된 걸음걸이로 볼 때 허벅지와 종아리는 안 봐도 뻔했다.
 ‘얼마 전부터 몸이 부쩍 좋아지더니······ 이제는 무공을 익히는 데 타고난 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아무리 성장기라지만 하루가 다르게 이렇게······.’
 절로 침이 넘어갔다.
 너무 좋게 변해서 가슴속 깊이 숨겨 두었던 생각마저 저절로 되새길 정도였다.
 단지명은 다급한 마음을 못 이겨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성장기라지만 대단하다. 너······ 아버지의 무공을 배워 보는 게 어떠냐? 아니, 오늘 당장 시작하는 게 낫겠어.”
 단지명은 어서 빨리 아들이 자신의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에 단선풍과 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오늘 시험이에요. 그리고 무공은 열세 살이 돼서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렇지.”
 단선풍이 되새겨 준 약속으로 인해 단지명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단지명 자신은 어릴 때부터 공부와 담쌓고 살았기 때문에 학업으로 처갓집의 인정을 받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대신 아들이 제 어미를 닮아 똑똑함을 타고 났기에 그의 꿈을 이뤄 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건 죽은 아내와의 마지막 약속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그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휴······ 일단은 알았다. 그 이야긴 다음에 하도록 하자.”
 단지명이 마지못해 결론을 내리며 단선풍을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단선풍은 식당으로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에게 총명침을 말할 걸 그랬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단선풍은 지금 왠지 아버지를 속이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고 있었다. 사실을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총명침의 효능을 단지명이 알고 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총명침부터 설명해야 하며, 자신이 꿈속에서 겪은 일들과 제원무록의 일까지 모두 말해야 했다.
 그것들을 말한다고 단지명이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데 아버지의 입에서 성장기라는 말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한 번 참고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단선풍은 자신의 등을 감싸는 아버지의 한쪽 손이 계속 근골을 살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지 않아서 생긴 죄송함 때문인지 밥 먹으러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기를 잠시.
 곧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저기······.”
 “할 말이 있는 거구나?”
 단지명이 애써 욕심을 누르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무공을 가르치고 싶다는 욕망이 잔뜩 담겨 있었다.
 단선풍은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눈빛에 담긴 뜻을 보았다. 찝찝한 느낌도 있었고, 지금 단지명은 흥분 상태인 듯했다.
 단선풍은 어느새 상대방의 눈을 통해 감정을 읽는 초입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 본인은 모르고 있으나 이 역시 선천지기로 몸을 구성하고 제원무록을 익히는 과정에서 생긴 효능이었다.
 단지명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면 공부고 시험이고 모두 뒷전으로 한 채 이미 단선풍을 데리고 어디 산골짜기로 사라졌을 게 틀림없었다.
 즉, 단선풍은 자신이 공부한 성과도 기대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신과 함께한 약속마저도 깨뜨릴 터였다.
 결국 단선풍은 말을 돌렸다.
 “오, 오늘 시험 잘 보고 올게요. 기대하셔도 돼요.”
 “그래, 알았다! 기대하마!”
 단지명이 흐뭇하게 아들을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단선풍은 그제야 자신에게 드리워진 시선이 걷힌 것을 느끼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잘 말씀드리면 될 거야!’
 
 ***
 
 홍경서원이 자랑하는 당대의 석학인 정진봉 학사는 학생들의 시험을 감독하면서 남들이 알 듯 모를 듯하게 한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처음 한 달은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하고 수업의 속도도 못 따라오는 줄 알았으나 이번 달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습과 복습에서 그 성과가 단연 돋보이는 건 물론이고, 발표 때마다 느낀 뛰어난 이해력과 통찰력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학생은 지난 한 달간 서원의 장서각에 있는 책들을 무서운 속도로 독파했다.
 남들은 열 번을 읽어도 그 참뜻을 파악하려 애쓰는데, 유독 이 학생만은 한 번만 열심히 보고 넘어갔다.
 어지간하면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수업 시간마다 선생인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기에 은연중에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공정한 시험을 위해 감독을 자처하고 나섰고, 그의 시선은 주변을 살펴보지만 의식은 계속 한 학생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 학생은 바로 단선풍이었다.
 정진봉은 단선풍의 옆을 수차례나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그가 물 흐르듯이 써내는 답을 흘깃거리며 살폈다.
 그러고는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모를 만큼 고개를 조금씩 끄덕였다.
 슬쩍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여러 번 되풀이되면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
 단선풍이 작성한 내용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정답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분명 이번 시험도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많은 서적을 통달해야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폭넓은 사고력과 허를 찌르는 통찰력은 책 몇 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단선풍이 배운 것 내에서는 절대 다가설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게다가 더욱 특별한 건, 단선풍이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붓을 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곧 모든 문제에 막힘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이제 고작 열하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원의 내로라하는 인재들도 헤매는 것을 보는 즉시 풀고 있었다.
 ‘이 아이, 천재였던가?’
 정진봉이 내심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은 바뀔 리 없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전 소년의 모습에서는 유추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물론 눈앞의 단선풍은 확실했다.
 그가 봐 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손에 꼽히는 대학사들은 원래 눈빛부터 달랐다. 지독히 책을 많이 읽고 오랫동안 성찰하여 눈빛이 그윽하고 생각이 깊었다.
 이건 정진봉이 불혹을 넘기면서 얻은 지론이었고 지금까지 이에 벗어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 부분에 있어선 정진봉 그 자신마저도 아직 부족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한데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은 벌써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크게 못 느꼈으나 학업에 열중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언가 깨우침을 얻은 현자처럼, 깊으면서도 고요한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앞의 소년은 총명함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자신의 지론과 맞아 떨어졌다.
 ‘벌써 다른 과목 성적들이 궁금해지는군.’
 어느새 정진봉은 단선풍의 첫 한 달이 서원에 들어와 적응하는 기간이었다고 여기며, 그를 자신의 수제자들 반열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있었다.
 
 단선풍은 시험을 보면서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하! 쉽다, 쉬워! 다 공부한 것들이야!’
 낮에도 하고, 꿈속에서도 했다.
 게다가 갑자기 명석해진 두뇌는 모든 걸 기억했고, 나이를 뛰어넘은 사고력이 그 뒤를 받쳤다.
 부족한 건 없었다.
 ‘하하하하!’
 단선풍이 기쁜 마음에 드러내 놓고 시원하게 목청을 터뜨리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속으로만 웃었다.
 지난번 시험과 전혀 달랐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문제를 알았고, 그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책을 붙잡고 읽으면 이해가 되었고, 계속 기억이 났다.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날 또 공부를 하고,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일련의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 한 달이 되었고, 그 평가를 맞이했다.
 지금 이 순간.
 단선풍은 한 달의 노력이 모두 보상받는 듯 극한의 희열이 몸을 관통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던 이전의 자신을 떠올리자니 절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아, 나도 하면 되는구나!’
 비록 총명침이 있어 생긴 결과였지만 자신의 노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또, 총명침은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니 더 발전할 자신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히히히!’
 더 똑똑하고 더 훌륭한 자신의 미래 모습을 생각하자니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의 단선풍은 모를 테지만, 이런 마음가짐이 앞으로 더욱 열정을 불태우고 최선을 다하는 밑바탕이 될 터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데 왠지 아까부터 기묘한 느낌이야!’
 오늘 아침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바람이 통하는 듯 시원하고 맑았으며 그 흐름에 막힘이 없었다.
 시험 문제를 보는 순간 답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관련된 많은 문장, 내용들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 그 문제를 낸 의도까지 짐작되고 있었다.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니 정답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이치가 되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단선풍의 놀람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문제를 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별도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지금도 선천지기가 들어오고 있다!’
 일상생활 중에선 선천지기를 찾기도 힘들었다. 공기 중에 그 양이 적은 건 물론이거니와 곳곳에 흩어져 있어 발견해도 그뿐이었다.
 지금은 꿈속의 정자에 있는 게 아니며, 세상에 선천지기가 가득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지기가 정수리를 통해 유입되었다.
 그 양은 미약하더라도 정수리로 유입되어 몸 안에 생성된 거대한 흐름에 보태졌다.
 막힘없이 흐르는 그 물결은 한시도 쉬지 않았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어제 정수리가 열리면서 생긴 일이었다.
 정확히는 백회혈(百會穴)이 열린 것이었다.
 백회혈이 열려 선천지기가 유입되고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물길이 끊임없이 온몸을 휘감았다.
 결국 단선풍은 가만히 있어도 몸속에 선천지기가 쌓이게 된 것이다.
 ‘그렇구나! 선천의 기운이 날 보호한다는 게······.’
 제원무록의 구절 중 하나가 또 몸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딱히 보호한다고 이름 붙이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하지만 작은 출발이라도 시작은 시작이었다. 단선풍은 그동안 총명침과 제원무록으로 많은 걸 느꼈기에 이마저도 곧 엄청나게 변할 터였다.
 결국 단선풍은 자신의 변화에 놀라기 바빠서 스승인 정진봉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시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단선풍은 첫 시간에 이어, 음악과 산학, 예절의 과목마저도 막힘없이 끝마쳤다.
 음악 시간엔 실제 연주로 뭇 학생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들었으며, 다른 두 시간 역시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데 중요하면서도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 그 모든 수업 시간에 정진봉이 참관하러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서원을 대표하는 학사로서 시험에 감독으로 들어온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진봉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단선풍에 대한 관찰.
 그의 결론은 자신이 낸 시험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단선풍의 모습을 더 보고 싶은 게 진짜 속마음이었다.
 과연 단선풍이 어떻게 시험을 치르는지, 어떤 식으로 답을 써 내려가는지 그 모든 걸 자신의 눈에 담기 위해, 자신의 역할이 모두 끝났음에도 다른 과목마저 참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과목의 평가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더했다.
 ‘천재다, 천재! 저 아이는 분명 하늘이 내리신 게 틀림없어!’
 
 ***
 
 성적 게시 하루 전.
 홍경서원의 선생들이 유례없는 고득점자로 인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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