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무사곽우 [E]

무사곽우 1권(1)

2019.08.05 조회 818 추천 7


 작가의 말
 
 
 
 
 꿈을 그린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항상 꿈을 꾸고 그 꿈을 그려내고 담아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저는 행운아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나아가 그 꿈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보여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꿈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합니다.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도 진하게 깨닫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을 다 버리고라도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글을 씁니다. 무협이란 두 글자 안에서 그냥 즐기는 사람들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과 같이 웃고 즐기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자 이렇게 오늘도 자판을 두들깁니다.
 보시는 모든 분들이 힘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답답한 세상 속에서 보기도 싫은 일도 많고 듣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책 속에서만큼은 잠시나마 그러한 일들을 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센스있는 압박을 가하는 청어람의 유경화 씨에게 감사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더운 여름 독자제현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序
 
 
 
 
 
 
 
 
 
 
 
 
 
 “어디 모셔두었더냐?”
 “큭··· 재주있으면 어디 한번 찾아봐라. 혹시 아나. 용왕님께서 어여삐 여겨······.”
 “닥쳐라!”
 퍼어억!
 한 사내가 뒤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결박당한 채 입고 있는 옷에선 피가 점점이 묻어 있었는데 사내의 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피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나이는 약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그의 두 눈은 원독에 가득 차 있었다. 흡사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사내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정반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 괜히 흥분할 것 없다.”
 “하지만 자 당주님, 이러다 소주님께서 변이라도 당하신다면······.”
 말을 하던 사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자 자 당주라 불린 사람이 입을 열었다.
 “흑선의 무리에게 휘둘릴 것 없다. 차분히 더 살피면 될 일이다. 우리가 이 배를 친 것은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고, 소주를 빼돌릴 상황은 되지 않는다. 어서 찾아봐라.”
 끼이이이!
 기이한 소리가 들리며 선채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왠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러자 결박당해 있는 사내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역시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였지만 자 당주의 모습은 결박당한 사내와는 많이 달랐다. 꽉 다물려진 입술은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사악해 보이진 않았는데, 결박당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크큭··· 좋아, 조금만 더 있으면 배가 가라앉겠구나. 네놈들 장영해(長永海)의 놈들도 같이 끌고 간다면 더욱더 좋은 일이겠지. 특히 너, 용해당(龍海堂)의 자운산(慈雲算)이라면 말이다. 크하하하!”
 “닥쳐라, 이놈! 어디서 감히!”
 퍼어억!
 곁에 있던 한 무사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려쳐 사내의 턱을 돌렸지만 사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진득한 비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죽일 놈! 정말 죽고······.”
 “잠깐!”
 다시금 손을 든 사내를 제지하며 자운산이 소리쳤다. 그러자 모두의 눈길이 그를 향했는데 자운산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당주님, 무슨 일이십······.”
 “쉿!”
 손가락을 입에 대며 자운산이 눈을 번뜩이자 그와 함께 같이 번뜩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결박당해 있는 사내였다.
 “뭐가 어떻다고··· 컥!”
 “······.”
 손대지 말라고 하던 자운산이 바로 발을 날려 사내의 목을 밟고 있었다. 그러면서 귀를 쫑긋거리던 순간이었다.
 “물러서라! 어서!”
 쉬이이잇!
 자운산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등 뒤에 메고 있던 장창을 뽑아 올린 그는 바로 갑판을 내려치고 있었다. 그러자 갑판 깊숙이 그의 장창이 박혔다.
 콰아악!
 “하압··· 찻!”
 꽈지지지직!
 자운산의 손이 휘저어진 순간 한 치가 넘는 갑판이 통째로 뜯겨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갑판이 부서져 나간 곳에서 한 아이가 보였다.
 “자··· 자 당주님.”
 “소주!”
 자운산은 손을 뻗어 아이의 옷을 잡았다. 이미 그의 허리 부근은 물이 차오르고 있었는데, 그만이 아니라 여러 아이들이 작은 공간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끌어올려라! 모두!”
 “예, 당주님!”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끌어올려졌는데, 아이들이 있던 공간은 배를 만들 때 목적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듯했다. 아니, 이런 흑선이라면 반드시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공간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소리로 해결한 것이었다. 자운산은 소주가 내는 작은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구출한 것이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히 공간이 깊지 않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운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소주에게 입을 열었다. 소주란 아이는 온몸이 젖은 채 사람들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고개가 돌려지며 그가 소리쳤다.
 “무슨 말을! 아녜요! 자 당주님, 안에 한 명 더 있어요! 그 아이가 우릴 구해주느라 발판 역할을 한 거예요! 어서요! 당주님, 어서요!”
 “······!”
 자운산은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곤 방금 아이가 있던 공간에 손을 밀어 넣자 물컹한 것이 만져지자 힘껏 손을 끌어올렸다.
 촤아아아아아!
 허공에 물이 튀며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손에 판자 하나를 꽉 쥔 채 허공으로 떠오른 아이를 보며 자운산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판자를 대어 발판 역할을 해줌으로써 여러 아이들을 살렸음을 말이다.
 “쿨럭··· 컥··· 쿨럭!”
 아이는 잔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정말로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소주는 살지 못했을 터이다. 운이 좋아도 너무나 좋은 상황인 것이다.
 “아이야, 정신이 드느냐?”
 “쿨럭! 네. 쿨럭··· 쿨럭······!”
 파리한 안색으로 보아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큰일이 날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고비는 넘긴 것 같았는데, 그러자 이번엔 자운산의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
 팔다리가 길쭉하고 두툼한 것이 꽤나 힘이 좋아 보이는 아이였다. 이제 열 살 정도. 구출된 소주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지만 골격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녀석, 네가 아이들의 발을 받쳐 주었구나. 왜 그랬더냐?”
 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자운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어느새 같이 왔던 수하들은 본선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가 힘이··· 제일 세니까요. 키도 제일 크고··· 쿨럭!”
 “···뭐?”
 뜻밖의 대답에 자운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주가 거래를 하거나 조건을 걸었다고 말이다. 한데 그것이 아닌 듯 보였다.
 “자칫하면 넌 죽을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 한 것이더냐?”
 자운산은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이는 쭈뼛거리더니 허리를 숙이며 갑판에 앉았다.
 “솔직히 그런 거··· 생각 안 해봤어요. 그냥 한 것이라······.”
 “···그냥?”
 자운산은 아이의 말을 되뇌었다. 그냥이라······. 하긴 물어본 자신이 바보였다. 이유가 있어야 움직이는 자신의 생활이 남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변질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냥 한 것이 정답이었다. 순간의 선택, 그 선택의 순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선택을 한다. 그중 대부분 이유 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에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더 많으니 말이다.
 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게 된다. 의인과 협사, 모사꾼과 악인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선택에 이유 따윈 없었다.
 이 아이의 선택은 협의(俠義)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죽음이 닥친 상황에서 자신이 아닌 남을 선택하는 그. 솔직히 남들에게 말하면 믿지 못할 소리였다. 어쩌면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작은 아이를 발밑에 깔아뭉개며 서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쿨럭······.”
 자운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고, 그러자 아이는 기침을 하며 자운산을 바라보았다. 잠시 주저하던 아이는 이내 입을 열었다.
 “우··· 곽우(廓優)라고 합니다, 어르신.”
 “곽우··· 곽우라······.”
 곽우라는 이름을 곱씹어보던 자운산은 싱긋 웃으며 아이를 일으켰다. 그는 아이를 부축하며 배를 떠나기 시작했는데 문득 그의 눈길이 결박당한 사내를 향했다.
 그리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자 장창이 허공을 빠르게 갈랐다.
 파아아앗!
 “······!”
 쥐눈을 한 사내가 부릅뜬 눈으로 바꾸고 있었다. 목이 달아나는 것 대신 꽁꽁 묶인 결박이 풀린 것인데, 그의 귓가로 자운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네놈은 흑선단의 조구(趙究)란 자이겠지.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오늘은 참아주마.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날이니 네 운이 좋음을 즐겨라.”
 “······.”
 조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정말로 자운산은 그냥 가고 있었다. 옆구리에 곽우라는 아이를 낀 채로 허공을 날아 본선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조구의 눈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가 가고 있는 본선, 그 본선의 돛에 새겨진 문양. 승천하는 용이 새겨진 문양이었다.
 
 
 
 
 
 1 운명
 
 
 
 
 
 
 
 
 
 
 
 
 
 
 “우와아!”
 절로 탄성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저 멀리 태양이 보이고 그 태양의 이글거림이 땅에 흐르고 있었다. 아니, 땅처럼 맞닿은 곳으로 흘려진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터이다.
 말갛게 떠오르는 태양, 그 아래 드넓은 대양의 번뜩임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 보석 같은 광경에 소년은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호아는 바다가 처음이구나. 그리도 좋으냐?”
 “그럼 당연하지! 누님이야 많이 봤는지 몰라도 난 처음인데! 우와아아아! 배다, 배!”
 호아라 불린 소년은 즐거운 탄성을 연신 터뜨리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마차의 창문에 얼굴을 내민 채 이곳저곳의 광경을 보기 바빴는데, 그러자 또 다른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도 참, 이곳에 수많은 배가 있는 것은 당연한 거야. 상해에 이만 한 배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지. 오호호!”
 “그러는 추국 누님도 배 처음 보잖아. 아니야?”
 호아는 뿌루퉁한 얼굴을 한 채 말대답을 했지만 목소리만 골난 목소리였지 눈은 전혀 아니었다. 초롱초롱 반짝이며 창밖의 풍경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그 배를 실컷 타게 될 터이니 너무 보채지 말거라. 장강을 따라 움직이기로 한 것 같던데, 그렇지 않아요, 언니?”
 “그래, 오하야. 마님께서 이미 조치를 취하셨다고 연락이 왔으니 아마 배가 정해지는 며칠간만 이곳에 있다가 움직이게 될 것 같아.”
 추국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하라 불린 사람과 그리 많은 나이 차이도 없어 보였는데 두 여인 다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물론 두 여인의 외모가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나 왠지 두 여인의 모습에선 단아함이 절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꽤나 지체있는 집안 사람들인 듯했다.
 “우아! 얼른 타보고 싶다! 꽤 오래 타지요, 누님?”
 “호호! 그래, 호아야. 적어도 보름 이상은 타게 될 것이라고 하더구나. 파양호까지 간다고 하니.”
 여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고, 호아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주고는 바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열두 살의 아이에게 보이는 지금 세상은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주의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마님이지만 이번엔 정말 신중하신 것 같군. 육로를 이용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뱃길이라······.”
 “어머님께서 생각이 있으신 것이겠지요. 언제 어머님께서 틀린 결정을 내리시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요?”
 “호호호, 그야 당연하지. 마님께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신중한 결정을 내리시는 것 같아서 말이야. 당대의 여협이신 화인당(花刃췟)께서 어찌 틀린 결정을 내리시겠어?”
 “후, 언니 입심은 점점 더 화려해지는군요. 어머님께서 무공이 늘기를 바라시지 입심이 늘기를 바라지는 않으실 텐데······.”
 “오호홋,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말이야.”
 추국은 화려한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라 불리는 여인은 그저 웃었는데, 하긴 이런 반응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녀 역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녀의 가문은 통째로 이사하는 중이었다. 아니, 더 쉽게 말하면 분가한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부친이 관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강서성 남창(南昌)의 부사(副司)에 오르면서 강소성에 있던 할아버님 댁에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집안의 경사이니 어른들께선 축하 일색이었지만 왠지 그의 아내는 그다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남편이 관직에 올라서가 아니었다. 조금은 머리 아픈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바로 그녀의 친가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명성을 가진 여인으로, 결혼하면서 금분세수를 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하나 세상은 그녀를 잊지 않고 그녀에게 화인당이라는 별호를 주었다.
 그렇게 좋게 끝나면 모두가 좋은 세상이지만 문제는 역시나 그녀의 친가였다. 친가에선 아직도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 싹이 보이는 무림인이 어린 나이에 강호를 등졌으니 좋아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그녀의 가문은 남편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뭐 그거야 솔직히 무시하고 살면 되지만 지금 현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외가 쪽은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외가가 있는 곳 역시 강서성 남창인지라 그들의 움직임은 외가에게 힘을 보태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족이 표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남편이 관부의 사람이 되었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세상일은 몰랐다. 그래서 육로를 버리고 해로를 택했다고 들었던 것이다.
 “마차의 속력이 확 줄어드는 것을 보니 다 온 모양인데?”
 “아······.”
 다가닥! 다각!
 히이이힝!
 상념을 접은 채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세상은 여전했고, 그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 동생도 여전했다. 이어 그녀의 귓가에 긴 말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그들이 탄 마차가 멈추었다.
 털컥!
 “어서 와라, 오하야. 여행은 괜찮았느냐?”
 “오랜만이군요, 장 총관님. 그간 별일 없으셨지요?”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나타나자 그녀는 반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노인 역시 주름이 가득 진 노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는데, 그는 바로 그녀의 집안일을 모두 책임지는 총관으로 장운(長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의 총관과 아가씨의 관계를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아가씨인 오하가 아니라 총관인 장운이 하대를 하는 듯했는데 그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말이 좋아 총관이지 호법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벌써 삼십여 년째 집안일을 도맡아 해온 사람이라 절대로 남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웃음이 얼굴에 아주 박혀 버린 듯 깊은 골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여인은 마차에서 내렸다.
 오하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차 안에서 본 햇살과 나와서 직접 받는 햇살은 정말 다른 것이었다. 바닷가의 햇살은 그냥 내륙에서 받는 햇살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막상 얼굴로 받아보니 그 차이가 너무도 확연했다. 아직 중천에 뜬 것도 아닌데 노출된 부분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허허허, 소저가 바로 화인당의 따님이시군요. 정말 화인당의 젊은 시절과 똑같습니다. 굳이 누가 연 소저인지 묻지 않아도 될 정도군요.”
 “······.”
 같은 늙수그레한 음성이지만 이번 음성은 상당히 힘이 실려 있는지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낯선 사람 한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 이런 늙은 정신을 봤나. 오하야, 여긴 이곳 장영해에서 나오신 분이니라. 인사드리거라.”
 “자인손(磁仁遜)이라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아, 위명이 자자한 장영해의 용사를 뵙는군요. 연오하(然悟?)라고 합니다.”
 연오하는 작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스스로를 자인손이라 밝힌 노인은 인자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허허, 고운 용모만큼이나 아름다우신 말씀이십니다. 아직 배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이곳에서 조금 계셔야 될 것 같습니다. 잠시 묵게 되실 곳을 마련하는 동안 조금 둘러보십시오. 아무래도 바다는 처음 보시는 것 같으니. 허허허.”
 허허롭게 웃으며 자인손이 말을 하자 연오하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다름 아닌 호아, 연호랑(然好浪) 때문이었는데, 인사는커녕 지금 여기저기 뽀르르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추국도 지금 그 옆에서 연호랑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사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자인손의 눈길은 바로 그 연호랑에게 가 있었던 것이다.
 
 음머!
 “우워어어!”
 연호랑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서 이토록 큰 소를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집채만 하다는 말이 실감나고 있었다.
 눈알이 자신의 주먹만 한 소가 무려 백여 마리 넘게 보이는 광경은 정말 놀랍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이었다. 처음 보는 이 화려한 광경에 그는 정신을 놓고 있었고, 그러자 옆에서 추국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후, 호랑아! 그만 좀 해. 사람들이 다 너만 보잖아. 어서 와, 그냥.”
 아닌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 모두 큰 웃음을 지은 채 연호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연호랑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두 눈을 반짝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우와, 이건 진짜 크다! 와아아아!”
 아마도 이곳 상해를 중간 거점으로 해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소 떼인 듯했는데 연호랑은 어느 틈에 소 사이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바라보다 정말 큰 소 한 마리를 본 듯했다. 그는 장탄성과 함께 뽀르르 달려가 소 앞에 섰다.
 보통 소보다도 팔뚝 하나 정도는 더 큰 키를 지닌 소였다. 뿔도 날카로운 것이 보통 소와는 너무도 달라 보이자 연호랑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소의 코를 만지려 했다.
 “어어, 이봐, 꼬마야! 안 돼, 그 소는!”
 “에?”
 어디선가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소리가 귀청이 쩌렁할 정도로 울렸다.
 우워워워!
 “······!”
 말도 아니면서 마치 말처럼 앞발을 들어 올리자 연호랑은 기겁했다. 호랑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거대한 소의 앞발은 내려쳐지고 있었다.
 “우아악!”
 호랑은 너무나 놀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괴성만 질러대었지만 그건 더 커다란 소를 자극할 뿐이었다. 소의 앞발은 작디작은 호랑의 머리를 향해 그대로 내려쳐지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감히 미물이··· 물러나랏!”
 퍼어엉!
 크엉!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황소는 뒤로 튕겨지듯 물러나고 있었다. 연호랑의 몸은 어느새 추국의 품에 들어가 있었고 추국은 한 손으로 연호랑의 몸을 안아 든 채 너무도 가뿐하게 신형을 뒤편으로 훌쩍 옮기고 있었다.
 “괜찮아?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우와, 진짜 무서웠다. 황소가 날뛰다니.”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호랑은 가슴을 쓸어 내렸고 추국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사실 추국은 무공이 상당한 편이었고, 그랬기에 이렇게 의외의 상황도 잘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응?”
 그런데 이 상황은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의외 중에 의외랄까? 그녀의 눈이 다시금 날카롭게 빛나는가 싶더니 왼손에 다시금 내력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두두두두두!
 전방에서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소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 엄청난 압도감에 추국은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그것보다 이 소가 멀쩡히 달려오는 것이 더 놀랄 일이었다. 먼저 쳐낸 장력의 크기가 두 치 두께의 대문도 부서질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다시 일어난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희한한 일은 이 소가 다시 덤벼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아니, 무공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추국의 공격이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추국은 온 내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 한 방에 아주 소를 죽일 심산으로 말이다.
 “호아야! 추국 언니!”
 뒤편에서 연오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추국은 눈도 돌리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 소의 뿔에 자신과 연호랑 둘이 모두 죽게 될 순간이니 말이다.
 “추, 추국 누님!”
 연호랑의 두려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눈만 빛내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 그의 뒤에서 덤벼든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늘에 커다란 뭔가가 기울여지더니 자신이 온통 그 그림자에 가려진 것인데, 그건 누군가의 신형이었다.
 딱 보기에도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이는 사내였다. 어깨가 얼마나 넓은지 한눈에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추국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비켜요, 당신! 뭐 하는······.”
 채 그녀가 다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가더니 양손을 좌우로 크게 벌리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사내였던 것이다.
 순간 그녀의 눈에 그 사내의 옆구리로 뭔가가 비죽 튀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건 바로 날카로운 소의 뿔이었다.
 퍼어어어억!
 “학!”
 연호랑은 소리조차 제대로 못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이 사내의 몸을 뚫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옆구리를 스치듯이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처참한 광경을 볼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이이익!
 한데 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잠깐 들린 듯하더니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연호랑은 눈을 살짝 떴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을 안고 있는 추국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 믿기지 않는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연호랑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
 한 사내의 등이 보이고 있었다. 옆구리 어림에 황소의 뿔이 비죽 나와 있었고, 그 주위에 붉은 선혈이 보였지만 그리 많이 흐르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도 뚫어버린 게 아니라 살짝 스친 듯했다. 사내는 그렇게 상체로 소의 머리를 누르며 양손을 움직여 소의 두터운 목을 꽉 쥐고 있었다.
 “끄으응!”
 우어엉!
 소의 소리인지 아니면 사람 소리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에서 사내와 소는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연호랑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고개를 내밀어 조금 더 사내의 몸을 바라보았다.
 우두두둑!
 근육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사내의 몸이었다. 드러난 상박의 크기가 자신의 머리보다도 더 큰 우람한 사내였다. 천민들이나 입는 싸구려 마로 된 낡은 옷을 입은 채 어깨부터 잘라낸 민소매 옷을 입은 사내였다.
 다리도 두터워 그런지 꽉 끼는 옷이었다. 무릎까지 훌렁 말려 올라간 바짓단 아래로는 역시나 사람의 장딴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장딴지가 보였다.
 얼굴이야 소 등에 파묻고 있는 형국이니 도저히 알 길이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타지 사람은 아닌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는 이곳 항구 쪽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음을 알게 했던 것이다.
 “이놈! 그쯤 하고 순순히 굴엇!”
 우어어어엉!
 꽤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이내 또다시 황소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더 이상 소가 멋대로 구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꽉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다각다각! 푸르르릉!
 소가 갑자기 성질이 온화해져 그냥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지금도 움찔거리는 것이 뭔가 수를 내려는 것 같았는데 그걸 사내가 막고 있었다. 진정 무서울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사내였던 것이다.
 푸릉푸릉! 컥!
 드디어 사람들이 바라던 순간이 다가왔다. 황소가 무릎을 꿇으며 신형은 누인 것이었는데, 그러자 사내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었다. 재빨리 손을 옮겨 양손으로 뿔을 잡은 채 내리눌렀던 것이다.
 “뭣들 하십니까? 아저씨, 빨리요!”
 “어? 어, 그, 그래!”
 그가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와 밧줄로 소를 묶기 시작했다. 소는 삽시간에 꽁꽁 묶였고, 적어도 십여 명의 장정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당기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소리쳤다.
 “이놈! 이 우악스러운 놈! 어여 이리로 와! 못된 놈 같으니라고!”
 찰싹!
 우어어엉!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며 소를 몰고 가는 사내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지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별다른 일이 없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얼굴이었는데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었다.
 “거기 서요! 아무리 미물이라고 하나 사람을 상하게 하려는 놈이오! 내 그냥 둘 수 없으니 당장 서세요!”
 추국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음성엔 내력까지 깃들어 있어 상당히 멀리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으니 당연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리 좋은 얼굴들이 아니었다. 모두의 얼굴에 조금은 험악한 빛이 감돌 때였다.
 “강서성의 부사로 취임하시는 분의 자제 분이올시다! 이 일을 알게 되신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화가 닥칠 것이오! 어서 그 미물을 이리 데려오지 못할까!”
 “······.”
 강서성의 부사라는 말에 모두의 신형이 흠칫 멎었다. 특히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의 얼굴은 사색에 가까웠는데, 그때였다.
 “에후, 아저씨. 어서 가세요. 배는 반 시진 후에 출발합니다. 이리 헐겁게 굴다간 손녀 약값도 못 건져요.”
 “···아니··· 그게······.”
 “아, 어서요! 여기 이 소들이 가만있는 게 안 보여요? 대장을 가둬야 부하들이 움직이죠. 하하하하!”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낭랑한 웃음을 지으며 한 사내가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러자 소를 몰고 있던 사내는 요리조리 눈치를 보더니 비칠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추국의 눈썹은 하늘로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건 눈앞에서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꼴이니 말이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감히 본녀의 행차를 가로막느냐! 네놈이 정말 경을 치고 싶어 환장한 것이······.”
 “어디 계시오?”
 “···뭐?”
 추국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려다 이내 말을 돌렸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잠시 말을 접은 것인데, 그러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사대인 말이외다. 내 직접 만나 뵙고 상황을 말씀드리겠소. 강소성 제일의 투우(鬪牛)가 한 여인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어찌 가만있을 수 있소이까?”
 “뭐, 뭐라고?”
 추국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며 소리쳤다. 이자의 말대로라면 이 아이보다 저 소가 더 귀중하다는 것인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나타났는데, 그러자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말은 다친 사람 하나 없지 않느냐는 것이오. 사실 저 흑우는 이 고장의 자랑거리입니다. 저 소를 가진 사람은 이 상해 토박이로 장씨라는 사람입니다. 삼 년째 계속되는 가뭄에 일찌감치 농사는 실패하고 지금은 저 소 한 마리에 의지해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
 “자식도 다 죽고 남은 사람이라곤 손녀뿐입니다. 한데 그 손녀도 병에 걸려 급히 돈이 필요하다더군요. 이 강소성을 휩쓴 소를 팔려고 배에 싣는 사람의 마음도 좀 헤아려 주십시오. 제가 부사대인을 만나고 싶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자가 정말······!”
 추국은 기어이 손을 쓰려고 내력을 키워 올렸으나 결국 그녀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건 사내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젊었다. 삼, 사십대의 장한일 것으로 생각했건만 의외로 사내의 얼굴은 어린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피부가 검게 그을려 나이가 좀 있어 보인다 해도 이십대 후반은 절대로 안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여기 많이 보이는 사람들처럼 그는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뒤로 넘긴 상태였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 그의 피부는 강해 보이는 남자의 전형적인 표상처럼 보였다.
 얼굴 또한 사각형에 가까운 턱을 지녔고 전체적으로 눈, 코, 입의 윤곽이 뚜렷했다. 솔직히 잘생긴 미남형의 얼굴과는 거리가 있지만 호남이라 말할 수는 있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그 눈이었다. 덩치가 크니 무섭게 보일 수도 있건만 그의 눈은 매우 따듯해 보였다. 새하얀 눈알에 뚜렷한 검은 눈동자는 그의 모습을 마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주고 있었다.
 “오냐, 네놈이 무엇을 믿고 그토록 방자하게 구는지 한번 보자. 내 오늘 너를······.”
 “그만 해요, 추국 언니. 잘못은 우리에게 있어요. 공자 말대로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만 해요.”
 “하지만··· 오하야.”
 추국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연오하는 어느새 다가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공자께서 틀린 말을 한 것이 있나요? 게다가 이 공자는 지금 우리와 싸우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다만 사정을 좀 봐달라는 것인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것은 저도 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니··· 그게······.”
 “언니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이 공자님의 말을 들어보니 저 장씨라는 사람이 딱하기 그지없어서 그래요. 인의를 행하는 것이 바로 강호인이라 들었건만 언니 역시 한 사람의 강호인 아니에요? 저 넓은 바다와 같은 도량을 여인이라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언니 생각은 좀 다른가 보죠?”
 “아이고,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내가 잘못했다. 됐지?”
 추국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소리쳤다. 분명 그녀가 언니이긴 해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 일반적인 자매의 관계는 아닌 듯싶었다. 하나 친구처럼 부르다가도 또 달래고 어르는 서로의 모습을 보니 보통 이상의 친밀한 두 사람 사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그럼 이렇게 일은 마무리된 것이군요. 나머지는 소저의 화만 풀면 되는 것이구요. 그렇죠?”
 “뭐요?”
 추국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사내는 지금까지 말 잘해온 연오하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뭐, 이놈이 가진 것이 그리 특출난 것도 없고··· 있는 거라곤 유난이 튼튼한 이 몸밖에 없으니······.”
 “······.”
 “킁, 때리쇼! 딱 보니 무림인 같아 내 한 대만 맞아주겠소.”
 “뭐, 뭐라고?”
 갑자기 그녀의 앞에 왼 무릎을 꿇으며 사내가 말하자 추국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이건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뭘 어찌할지 몰라 시선만 움직이고 있었다. 연오하와 호랑, 그리고 장 총관까지 계속 시선을 돌렸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게 서 있었는데, 그때였다.
 “젊은이, 한데 왜 딱 한 대인가?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한 방에 자네를 떨구긴 힘들 것 같은데?”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장 총관이었다. 그는 벙글거리며 이 상황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는 듯했는데, 그러자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아, 그건 말입니다, 어르신.”
 뭔가를 말하려다 그는 잠시 눈을 돌려 추국의 얼굴을 보았다. 마침 추국 역시 사내의 입술을 주시하고 있었는지라 두 사람의 눈은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다. 하나 사내의 눈은 이내 추국의 손으로 다시 움직여지고 있었다.
 “이 소저, 아까 흑우를 한 방에 물러서게 만들더라구요. 에··· 눈으로 봤으니 몸은 사려야지요.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뭣? 어허··· 허허허··· 허허허허!”
 장 총관은 참으로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오후의 바닷가를 헤치며 그의 목소리는 멀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같은 웃음이 들려왔다.
 “뭐, 뭐 이런 무도한 자가! 닥치고 저리 가지 못해욧!”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추국은 소리쳤지만 사내의 말처럼 때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신형을 움직여 연오하의 뒤로 왔고, 그러자 연오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언니도 힘들어할 때가 있군요. 공자님, 그만 농을 거두고 일어나시지요. 제 언니가 성정이 좀 화끈하긴 하나 그리 큰 예를 받을 사람은 아닙니다.”
 분위기를 한순간에 농지거리로 만드는 그녀였다. 사내는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다 문득 자신의 눈앞에 또렷한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가 있음을 알았다.
 “연호랑이에욧!”
 “···응?”
 이번엔 사내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대관절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되질 않았는데, 이어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기 좀 구경하고 싶어요. 근데 좀 무서운 것도 사실이에요. 아저씨, 저 좀 여기 구경시켜 주시지 않으실래요?”
 “어라? 요 녀석 보게.”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겪고 있다는 듯 사내는 연호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호랑도 지지 않고 사내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서로 간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듯하더니 이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내가 무섭지 않으냐? 아까 소도 물리치는 거 봤잖아?”
 “그거야 날 구하기 위해서 그런 건데 왜 무서워요? 안 그래요, 아저씨?”
 “엉? 와하하하하! 그렇구나, 그래! 하하하!”
 사내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뻗어 아이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이내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어, 어, 왜 이래요?”
 “구경하고 싶다며? 진짜 구경은 지금부터야. 웃차!”
 사내는 그대로 일어서고 있었다. 무릎과 허리를 편 채 상체를 꼿꼿이 세우자 연호랑은 어느새 사내의 오른 어깨 위에 타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아!”
 연호랑은 커다란 소리를 질렀다. 이런 광경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그다. 지금 그의 눈엔 세상의 모든 정경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에요, 아저씨! 최고!”
 사내의 머리를 꽉 껴안으며 연호랑은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의 음성이 연호랑의 귀에 들려왔다.
 “아저씨라니? 욘석아, 아직 결혼도 안 한 사람이다. 내 이름은 우, 곽우(廓優)라고 한다.”
 “아, 그래요? 그럼 우 형! 됐죠, 우 형?”
 “뭐? 하하하! 그래, 좋아! 우 형 좋다! 가자!”
 “이야아아아!”
 성큼성큼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연호랑의 입에선 감탄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정박해 있는 배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싱거운 사내네요. 나 참, 우가 뭐야, 우가. 자기도 소라는 거야, 뭐야?”
 “풋.”
 추국의 목소리에 연오하는 소매를 들어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뜻도 되는 상황이었다.
 “우, 곽우라······. 좋기만 한 이름인 걸 왜 그래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연오하는 웃었다. 그러나 왠지 그녀의 기억엔 그가 힘이 좋았다는 것이 기억되지 않고 전혀 다른 것이 기억 속에 박히고 있었다.
 그의 웃음이었다. 시원하게 웃는 그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함박 드러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봤지만 그처럼 시원하게 웃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말이다.
 
 2
 
 “먼 길··· 좋은 여행이셨기를 바랍니다. 허허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해주(海主)님. 아마도 저희를 의탁하신 부모님께서도 지금의 저희가 받는 대우를 보신다면 감사해하실 것입니다.”
 연오하가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자 노년의 사내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해주라 불리는 사내는 관에서나 볼만한 태사의에 몸을 실은 채 술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니, 대청에 작은 술자리가 열리고 있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연오하는 무엇보다 저 상석 위에 걸린 휘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승천하는 용이 아로새겨져 있는 휘장으로 사방 이 장이 넘는 커다란 보자기가 허공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이곳의 상징이었다. 휘장에 같이 새겨져 있는 세 글자는 이곳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장영해.
 십만 리 장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내들의 집단이었다. 거친 장강의 물살을 헤치며 교역을 하고 그 이문으로 살아가던 하나의 상인 집단이 바로 장영해였다.
 하나 세월이 흐르고 지금의 해주가 들어서면서 장영해는 변했다. 그저 하나의 상인 집단에서 무인 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해주는 그걸 가능하게 했다. 저 태사의에 앉은 백발의 노인, 장웅(長雄)이라는 별호를 가진 오각(吳覺)이란 이름의 노인이 바로 작금의 해주였던 것이다.
 “별말씀을. 저희의 일은 지금부터입니다. 자당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가솔 분들을 남창까지 안전하게 모셔달라고 말입니다.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오각은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그가 말하는 자당이란 바로 연오하의 어머니, 화인당 사희(砂熙)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연오하는 그저 살포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마님께서 말씀하실 때 저도 옆에 있었으니 이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아가씨, 적어도 한 달 반 이상 배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리 준비하시면 될 것입니다.”
 “한 달 반, 약 오십여 일··· 동안 말입니까, 총관님?”
 한 달 반이라는 말에 연오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꺼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배를 탄 적이 없는 사람이 한 달 반이나 배 안에 있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빠르게 간다면 그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시일이 걸릴 수도 있지요. 하나 염려 마십시오. 아버님과 자당께서 어떤 관계이신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가까운 사이임을 알 수 있으니 이 일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
 갑자기 들려오는 젊은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돌렸다. 장웅 오각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옆에 앉아 있는 한 젊은이가 입을 연 것인데, 그녀는 잠시 그의 모습을 살폈다.
 멋들어진 영웅건을 질끈 동여맨 사내였다. 왠지 영웅건 한가운데 박혀 있는 붉은 호박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사내였는데 전체적인 얼굴 형상은 오각을 비슷하게 닮은 것이 상당히 미남형이라 할 수 있었다.
 쭉 뻗은 검미에 오뚝한 콧날, 거기에 살짝 얇은 입술을 지닌 사내였다. 그 옆에 있는 장웅 오각의 젊었을 때 모습이라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잘생긴 청년은 싱긋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하, 이런이런, 제 소개부터 해야 하는 것을. 오진영(吳進營)이라 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허허허, 미욱하나마 내 아들 녀석이라오. 잘 부탁하외다. 아마 이 녀석도 이번 호송의 책임자 중 한 축을 맡게 될 것이오.”
 오각의 목소리에 연오하 일행은 모두 눈을 돌려 오진영을 바라보았다. 오진영은 역시나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중인들을 둘러보았는데, 문득 장운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더니 정말 멋진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이거 그냥 말로 축하드릴 일이 아닐 듯싶군요. 이 장 모가 한 잔 올립니다. 아울러 오 공자에게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그저 망둥이처럼 날뛰는 것만 좋아하는 놈이라오. 오히려 이 오 모가 부탁드리는 바이오.”
 “무슨 말씀을. 장 총관께서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세상을 깊게 보는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립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변하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연오하가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꽤 시간이 늦은 것 같습니다. 즐거운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군요.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녀는 그만 물러가도 되겠는지요?”
 “어허, 이런 결례가. 양가집 규수를 데려다 놓고 무림의 상례로 대했군요. 이 늙은이의 결례입니다. 물론입니다, 연 소저. 허허허.”
 그만 돌아가 쉬겠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오각은 인자한 웃음과 함께 손을 저었다. 그러자 연오하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이곤 신형을 돌렸다.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조용한 사람들이군요. 몸에 예절이 배인 사람들 같습니다. 뭐, 해가 될 것은 없겠지만 소주께서 같이 가신다니 조금 적적하시겠습니다.”
 그녀의 일행이 떠난 후 작은 목소리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꽤나 나이가 있는 여인의 목소리로 약간 살집이 있어 통통한 형상의 여인이지만 인상은 상당히 후덕한 것이 젊었을 적엔 상당한 미인이었던 듯했다.
 이제 삼십대 중반 정도? 여인은 입가에 술잔을 가져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귓가로 이번엔 오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 당주의 생각이 그렇다면 거의 틀림이 없겠지. 아마도 저 아이들은 정말 그냥 움직이고 있을 뿐이야. 물론 그 옆에 있는 두 명은 다르지만.”
 “두 명이라니요? 아버님, 그 옆에 있는 언니라 불리던 여인하고 장 총관이란 노인 말씀이십니까? 그리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인 듯합니다만······.”
 오진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비와 총관을 두고 이렇듯 이야기하는 것 같았으나 그가 보기엔 그리 대단한 사람들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말씀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그저 겉치레 인사였을 뿐이다. 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의례적으로 대한 것뿐이었지만 오각은 달랐다.
 “쯧쯧, 넌 그래서 아직 어린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출신이 대검문(大劍門)이란 것을 알면 그리 쉽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니라.”
 “···그 두 사람이 대검문 사람이란 말씀이십니까?”
 오진영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물론 의뢰인인 화인당 사희가 바로 대검문에서 총애를 받던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과 총관도 그곳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 의외였던 것이다.
 “그냥 대검문 출신이 아니지요. 언니라 했던 추국이라는 아이는 실은 대검문의 차기 육화(六花)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실 오하의 언니라기보다 그녀는 호위 역할이 옳을 것입니다. 언젠가 화인당 사희가 그 아이를 일컬어 자신의 큰애와 같다는 말을 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지요. 실질적인 사희의 첫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게다가 그 옆에 있는 장 총관 그 사람은 더욱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대검문의 장로급 인사였다는 것이 소문입니다. 물론 그 무공 또한 장로급에 걸맞게 강하다고 하더군요. 쉽게 볼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말을 던진 양 당주를 향해 오진영은 눈을 동글게 만들며 질문했다. 양 당주는 그저 싱긋 웃을 뿐 가타부타 더 이상 말이 없었는데, 문득 오진영은 다시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정말 말이 안 되는군요.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어째서 저희의 도움이 필요한지 말입니다. 본 해의 무공이 그리 경시할 수준은 아니다 하더라도 적어도 대검문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문도 수야 저희가 더 많지만.”
 “녀석, 화인당 사희가 아직도 대검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리 되겠지. 하나 지금의 사희는 그렇지가 않다. 무림에서 발 뺀 지 이십 년이 넘은 상황이야.”
 오진영의 말에 오각은 건과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러자 오진영은 오각을 바라보았고, 오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검문의 무공은 강하지. 그러나 그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성정 때문에 적이 많다. 그리고 그 적들이 지금 뭉쳐 대검문을 향하고 있지. 이런 상황에 한때 대검문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사람이 대검문이 있는 강서성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럼 적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지만 굳이 그 대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대검문으로 사희가 들어서는 것을 막고야 말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힘을 분산시켜야 하니 말이다.
 “한데 웃기는 것은 대검문도, 그리고 사희도 서로 다시 볼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희가 움직이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남편인 연혁진이 관직에 올랐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강서성이 부임지이니 참으로 웃긴 인연이지.”
 “허.”
 말을 들으며 오진영은 살짝 놀라워했다. 그 말대로라면 이것은 기구한 인연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사희란 사람이 어쩌면 고스란히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저 남편이 부임하게 될 곳으로 이사 가는 것뿐인데도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터였다. 참으로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사는 여인인 것이다.
 “더욱이 요즘 대검문을 위협하는 곳은 흑도 방파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문에 의하면 흑련(黑聯)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쉽지 않은 상황이야. 그러니 차라리 물길이 낫다고 보는 것이지. 아직 물에선 우리를 따라올 자가 없으니.”
 “그렇군요. 그나저나 흑련이라니··· 놀랍습니다. 그 단체가 실존하는 증거가 아직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오진영은 입을 열었고, 그러자 오각과 양당주는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닌 그저 즐겁다는 웃음이었다. 나이 어린 손자를 가르치는 노인의 웃음이랄까?
 “흑련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들 아직은 조용히 있는 것이지······. 아직 세상은 네가 모르는 것이 많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이제 나도 쉬어야겠구나.”
 “아, 예, 아버님. 그럼 소자는 이만······.”
 연회는 끝이 났다는 듯 오각은 손을 휘저었고, 그러자 오진영을 위시한 사람들 모두가 대청을 떠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대청은 텅 비게 되었고 남은 사람이라곤 그와 양 당주뿐이었다.
 “할 말이 있는가, 양 당주?”
 “그저 궁금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해주님.”
 심드렁한 오각의 말에 양 당주는 생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에겐 어떻게 해도 화날 일이 없었는데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오각은 그 미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재무를 맡고 있는 이 양화련입니다. 정체불명의 돈이 좀 많이 들어왔더군요. 그것도 정확하게 세 군데서 말입니다. 한데 그중 두 군데는 제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짐작할 수 있다고? 어디 한번 우리 살림을 맡고 계신 봉해당주의 식견을 들어볼 수 있을까나?”
 순식간에 흥미롭다는 얼굴을 만들며 오각은 양화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화련은 살포시 수줍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호호, 틀림없이 한 군데는 화인당 사희이겠지요. 그녀가 내놓은 돈이 황금 오십 냥입니다. 제가 알기로 연가의 돈이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마련한 듯싶습니다. 하나 그녀는 돈보다도 그 사람 자체의 명성을 보아 일을 수락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의 돈을 받으신 것이고요.”
 “그리고?”
 “그리고 또 한 군데는 황금 백오십 냥 정도. 분명 대검문일 것입니다. 비록 화인당이 그쪽과 연을 끊었다 하더라고 그쪽에선 마음이 쓰일 것입니다. 또 성정이 불같기는 해도 정이 많고 대쪽 같은 대검문의 특성이 그럴 것이고요. 아닙니까?”
 “역시··· 둘 다 틀림이 없네. 화인당과 대검문 둘 다 나에게 돈을 보내며 저 아이들을 부탁했지. 나로선 충분히 이득이 남는 장사이니 수락하지 않을 수가 없지.”
 순순히 그녀의 판단을 시인하는 오각을 보며 양화련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설마하니 대검문이 아직도 사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검문의 사희가 금분세수나 마찬가지로 강호를 떠난 것은 호사가들의 좋은 소재였다. 그녀는 막 피어나는 이십대 초반에 한 남자를 따라 강호를 떠났다. 그의 남편이 된 연혁진이란 사람으로, 연혁진은 그때 관직은커녕 그저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였던 것이다.
 당연히 대검문에서는 극렬히 반대했다. 물론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야겠지만 이건 좀 경우가 달랐던 것이 대검문에서 사희의 존재는 정말 후계자 급에 가까운 것이었던 것이다.
 대검문은 말 그대로 큰 대검을 사용한다. 그것도 고검(古劍) 이상의 두께를 가진 대검을 사용하는데 여인의 몸으로 이런 대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건 바로 여인의 내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소림 장문의 내력에 버금갈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사희의 무공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무림을 떠난다니 당연히 대검문에선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도 남을 일인 것이다.
 그런데 대검문에서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다라······.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자신들의 앞가림하기도 벅찰 텐데 말이다.
 “그럼 이제 남은 삼백 냥의 소재가 문제군요.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해주님. 이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자네의 짐작대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 생각이 어디를 지목할지 아십니까?”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물론 미소는 여전히 머금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그녀는 살짝 떨리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흑련··· 맞습니까?”
 “······.”
 그녀의 말에 오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이젠 흥미로운 얼굴을 만들 뿐이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네, 양 당주. 흑련에서 온 돈일세. 조건은 이번 항로와 출항 일자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지.”
 “···설마 그대로 하실 것입니까?”
 오각의 말에 양화련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알려지면 장영해는 심각한 도덕적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보게, 양 당주. 설마하니 내가 황금 삼백 냥에 내 모든 것을 다 넘길 것 같은가?”
 굳은 얼굴로 말하는 오각을 보니 그는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방하고 있었다. 양화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있어봐야 좋을 것이······.”
 “보낸다면 그건 흑련과 등을 돌리겠다는 뜻이겠지. 그리 쉽게 보낼 돈이 아닐세.”
 “······.”
 양화련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여차하면 흑련이 장영해를 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면 해주께선 어떤 생각을 하신 것입니까?”
 이도 안 되고 저도 안 되는 상황인지라 양화련은 눈을 좁히며 물어왔다. 그러자 오각은 결심한 듯 무거운 음성을 흘려내었다.
 “책임자가 자인손에서 내 아들놈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지. 난 그놈들이 원하는 정보를 줄 것이네. 아울러 내가 정보를 주었다는 것을 아들놈에게 알릴 것이야.”
 “예?”
 조금은 의외의 대답에 양화련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잘못 처신한다면 강호에서 이들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질 수 있었다. 상선의 호위로 먹고사는 이들에게 그건 치명적인 타격인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움직이면 저들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 삼백 냥은 출항 일자를 알려달라기보단 말을 들으라는 표시일 것이야. 그대로 말을 듣는 척은 해야겠지.”
 “······.”
 “대신 그 삼백 냥으로 가장 튼튼한 배를 사게나. 웬만한 일에는 까딱없는 놈으로 준비해 주게. 그 배를 타고 반드시 저 아이들을 호송할 수 있게끔 말일세.”
 “해주님.”
 양화련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의 배짱에 말이다. 이 사내는 말은 쉽게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내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대로 하는 것이 확실히 지금의 형세에선 최선이었지만 성공률은 현저히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천하의 흑련이 노린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지에 자신의 아들을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만일의 상황에 세상의 비판으로부터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나 다름없었다.
 “양 당주, 난 내 아들을 잃고 싶지 않네.”
 “······.”
 “다시 한 번 부탁하지만 부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배를 구해주게. 조금 시일이 걸리더라도 말일세. 그리고 그 삼백 냥에서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해주님. 명을 따르지요.”
 이제야 오각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것이 최선이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자 당주가 힘을 써주시면 더욱더 좋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만, 혹 말씀해 보셨습니까?”
 “음?”
 다시금 들려온 양화련의 목소리에 오각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양화련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지금 자 당주가 손 놓고 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화인당 사희가 나를 믿고 아이들을 맡긴 게 아닐세. 바로 자 당주를 믿고 맡긴 것이지. 내가 알기로 사희와 자 당주는 꽤 친한 사이로 알고 있으니.”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한시름 놓겠습니다. 자 당주의 성격으로 보아 그냥 보내진 않을 사람 같으니······.”
 오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자 당주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말이다.
 오늘날 이 장영해를 일구어낸 사람이 바로 그였다. 살림을 담당하는 양화련과 대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그는 이 장영해의 이대 실력자인 것이다.
 “그래, 절대 그냥 있을 사람이 아니지. 허허허.”
 왠지 건조하게 들리는 웃음이었다.
 
 “용해당(龍海黨)과 봉해당(鳳海黨)이라고요? 거 참, 이름도 희한하네.”
 “허허, 그러나 그 희한한 이름들이 오늘날의 장영해를 만든 것이란다. 모든 수적을 물리치고 이 장강의 운송에 있어 패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두 당의 당주들이 해낸 것이지.”
 추국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배정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인데 역시나 이야기의 소재는 이곳 장영해에 관한 것이었다.
 “솔직히 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아까 그 해주란 사람은 몰라도 소주란 자의 무공은 제 아래로 보이던데 누가 누굴 지켜주겠다는 것인지. 나 참, 진짜 여기가 그토록 강한 곳이에요? 마님께서 오하와 호랑의 안위를 맡길 정도로요?”
 추국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고, 장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까 대청에서 본 사람들의 면면으로 본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 무공으로 따지자면 여기 사람들은 그리 높지 않을 수도 있단다. 구대문파에 비한다면 거의 한 가문의 무공 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정도겠다. 굳이 여기 무사들의 평균을 이야기하자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를 맡긴다고요? 총관님,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에 추국은 발끈했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자신들의 목숨을 맡긴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장 총관은 그런 추국을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네었다.
 “만일 그것이 뭍에서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장강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물에서라면 이들은 구대문파도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다. 마님께선 그 점을 높이 사신 것이야.”
 “설마요.”
 추국은 한쪽으론 수긍이 가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물이라지만 고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등평도수(登萍渡水)까지야 아니더라도 물을 건너는 고수들을 간간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물이라고 그리 큰 제약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여기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넌 물을 너무 업수이 여기는 것 같구나. 그럼 그 고수들이 왜 물에서의 싸움을 꺼리겠느냐? 그토록 무공이 강해 물에서도 제약이 없다면 말이다.”
 “······.”
 장 총관의 목소리에 추국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건 장 총관의 말이 맞았다. 무림인들이 물을 꺼리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었던 것이다.
 그냥 물을 건너는 것과 물에 올라가서 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희의 생각은 옳았다. 최소한 이 장강에서 장영해는 소림이 부럽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네 어머니가 이 장영해에 우리를 기탁한 것은 해주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란다. 이곳엔 그보다 더욱더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
 “그런 분이 계십니까? 혹시 아까 그 여자 분이신가요? 봉해당주라는?”
 대청에서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인상이 남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연오하는 대뜸 그녀를 떠올리며 물어본 것인데 장 총관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친구는 그곳에 없었단다. 젊은 시절 일신의 무공만으로 소림의 십팔나한과 동수를 이루었던 친구이지. 일설에는 소림의 장문인과 겨루어 동수를 이룬 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거야 소문이니 알 수 없는 일이고.”
 “여기에 그런 고수가 있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추국이 입을 열자 장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전각의 대문을 지나자마자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바로 저 친구란다. 이곳의 용해당주이며 과거 네 어머니와 막역한 사이이신 분이지. 인사드리거라, 오하야. 자운산 대협이다.”
 “······.”
 연오하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꼿꼿이 허리를 편 채 각기 장창으로 보이는 병기를 들고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오하라고 합니다.”
 연오하는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누가 보면 조금은 과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개를 숙였지만 상대를 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눈앞에서 자신들을 기다린 사내의 기도는 무공을 하지 못하는 그녀가 봐도 느껴질 정도로 여태껏 봤던 그 누구보다도 대단했던 것이다.
 “허허, 어서들 오시오. 자운산이라고 하오이다.”
 “먼저 뵈었었지요? 이분은 제 형님이라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시라 아까 대청엔 안 나가셨지요.”
 두 명의 노인이 서 있었지만 두 사람 다 허리가 꼿꼿한 것이 절대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본 자인손이라 밝힌 사람이었고, 처음 보는 이가 바로 자운산이란 사람이었다.
 희끗한 백발이 인상적인 사람으로 백발만 아니면 사십대의 장한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단정한 흑색 무복을 차려입은 채 한 손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창을 들고 있는 사내였다.
 그 장창을 본 순간 추국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있는 자인손 역시 장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등평창호(等坪槍號) 자운산 대협에 일회창사(一回槍士) 자인손 대협이셨군요.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추국은 포권을 말아 쥐며 공손히 예를 취했고, 그러자 자운산이라 불린 사람은 조용히 웃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추국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어인 말씀을······. 화인당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에게는 두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다 했소이다. 그중 한 아이가 남달리 무공에 욕심이 있다 하더니 욕심 정도가 아니구려. 일류고수를 상회하는 실력이라······.”
 “···과찬이십니다.”
 추국은 가슴이 덜컹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눈에 그의 무공 수위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상대는 고수였다.
 아니, 그보다 추국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별호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이 장영해에서 최고수는 바로 이 두 사람일 터이다.
 “과연 젊을 때의 화인당의 모습을 빼어 닮았구나. 허허, 내 그동안 세월이 이리도 흐른 것을 몰랐건만 자네를 보니 알겠구나.”
 “어인 말씀이십니까. 제 눈에는 아직도 정정한 분이 눈앞에 계시옵니다.”
 “허허, 확실히 말재주는 다르구나. 젊었을 때의 화인당이면 이리 이야기하지 않았을 텐데.”
 옛일을 생각하는 듯 그는 잠시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어스름한 하늘 사이로 하나둘씩 보이는 말간 별들을 보니 잠시 후면 해가 사라질 것 같았다. 자운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자당께선 자네들의 신병을 부탁했고 난 약속을 했네. 해서 내 오늘 그 약속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왔네.”
 “자네가 같이 가준다면 이 늙은이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고맙네.”
 장 총관은 노안 가득 주름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자운산은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호위할 무인이라면 솔직히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겠지요. 저 아가씨에 일위검(一位劍) 장운 대협이라면 말입니다. 전 배에 타지 않습니다.”
 “네?”
 장 총관을 비롯한 일행은 자운산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잘못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그 배에는 이 친구가 탈 것입니다. 그건 이미 알고 계실 테지요?”
 “아,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주란 사람도 탑승할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자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이 친구란 바로 자신의 아우 자인손이었다. 그리고 소주 오진영이 탑승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별로 놀랄 일은 없었다.
 “저보다 더 쓸 만한 사람이 있어 그자를 보내려고 합니다. 아직 조금 부족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
 왠지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을 꺼려 하는 듯한 모습에 연오하 일행은 눈을 살짝 좁혔다. 그러자 이번엔 자인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마침 저기 오는구먼. 어서 오너라, 이 녀석아.”
 자인손의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곳엔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한데 그 사내의 등엔 뭔가 달려 있었다.
 아니, 뭔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녀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호아야.”
 널찍한 뒷등에 기대어 자는 사람은 바로 연호랑이었다. 쌔근거리며 자고 있는 아이를 추국은 재빨리 안아 들자 그제야 메고 온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사부님. 워낙 왕성한 호기심을 지닌 아이라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 잘했다, 우아야.”
 넉넉한 웃음과 함께 그가 가리킨 사람은 바로 곽우였다. 그 커다란 몸으로 밤공기를 가르며 나타난 것이다.
 “이 녀석이 여러분과 같이 가게 될 것입니다. 허허, 뭣들 하느냐. 어서 인사부터 하거라.”
 “예, 사부님.”
 곽우는 공손한 모습으로 신형을 돌렸고, 이내 자신을 보는 연오하 일행에게 입을 열었다.
 “이미 한 번 뵈었지만 다시 인사드리지요. 곽우라고 합니다.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여러분을 파양호까지 모실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원하게 웃으며 곽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왠지 모르지만 연오하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한 사내의 웃음을 봤을 뿐인데 말이다.
 “연오하, 다시 인사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연오하도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얼마 전 대청에서 보여준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이 담겨져 있는 따뜻한 웃음이었던 것이다.
 
 
 
 
 
 2 오우도
 
 
 
 
 
 
 
 
 
 
 
 
 
 
 아무리 봐도 고수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사내보단 저 옆에 있는 훤칠하게 생긴 사람이 더 고수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저 두 사람보다 고수는 따로 있었다. 저 덩치 커다란 곽우의 스승 자인손 말이다.
 “아무리 봐도 그냥 우리끼리 가는 게 나을 듯해요, 총관님. 이건 뭐 애들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헛헛, 그럼 지금 준비된 배를 버리고 가자고? 우리의 호송을 위해 장영해가 쓴 돈이 얼만지 알면서 그러느냐? 물경 금 삼백 냥이 넘는 거금이다. 그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조용히 있거라.”
 남들이 본다면 그야말로 정다운 조손 간의 모습이었다. 볕이 잘 드는 마루 아래 나란히 앉아 세상을 보는 듯이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추국과 장운은 조손 관계가 아니었고, 두 사람의 눈길 역시 한곳에 딱 머물러 있었다. 바로 곽우와 오진영에게 말이다.
 곽우와 오진영은 서로 초식을 교환하면서 무공 연마를 하는 듯했다. 보통 무공 연마라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조용히 하는 것이 상례지만 이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어 보였다.
 초식이라는 것이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단순했다. 뭐, 횡소천군이라는 말조차도 이 두 사람에겐 고급스러운 표현이었다. 이건 그냥 서로 치고받는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차라리 치고받는 것이라면 보기라도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 몸만 살짝살짝 움직이며 발을 구르는 것이 전부였다. 저게 무슨 무공 연마가 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추국으로선 황당할 따름이었다.
 “에후, 노는 꼴들 하고는. 그나저나 총관님, 진짜 우리 위험한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그냥 가도 별일 없을 것 같습니다만.”
 “보이는 것이 조용하니 마음까지 조용하다, 이거냐? 딴 건 몰라도 너희들이 위험한 것은 확실하다. 이미 흑련에서 너희들을 잡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는 말이 있더구나.”
 “흑련에서요? 아니, 도대체 왜 우리를 가지고 난리치려고 하나요? 우리가 흑련에게 무슨 해를 끼쳤나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추국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궁금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건 저도 솔직히 궁금합니다. 어머님께서 대검문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저희를 핍박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제아무리 흑도라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습니다.”
 “왔느냐?”
 연오하였다. 아마도 방에 있다가 이 두 사람의 대화가 궁금하여 나온 듯한데, 그러자 연오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방 안에 있다 보니 두 분의 대화가 들리더군요. 마침 궁금하기도 해서 나온 것입니다. 해서 묻는 것입니다만··· 총관님.”
 “······.”
 연오하의 말에 장 총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는 연오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는데, 연오하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머님께서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대검문의 편을 드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장 총관은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고 역시나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 부인을 하지 않으니 긍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는 바가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총관님, 이제 그만 사실을 말해주세요. 작금의 상황이 어찌 되는 것인지 말입니다.”
 연오하는 정말로 어느 정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장 총관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이런 상황 속에서 그 정도 추측을 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바보 같은 일이었다.
 “네 말이 맞구나, 오하야. 네 어머니는 지금 대검문을 돕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물론 대검문은 아가씨께서 돕는 것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리 미워도 혈족이 아니냐?”
 “···역시 그렇군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나 짐작했던 바다. 그녀의 어머니인 화인당 사희는 대검문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하면 총관님, 아무래도 그에 관한 지식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현재 강호에 관한 것들을 좀 들었으면 해요.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러자꾸나. 이젠 비밀도 아니니 들려주마.”
 장 총관은 일단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 휘도는 형국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강호의 사건이었다. 대검문과 흑련의 대립이 가장 중요했다. 특히 강소성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다.
 강소성은 기이하게도 거대 문파가 없었다. 이 말은 호남이라는 지방의 중요성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강소성은 척박한 땅도 아니었다. 오히려 파양호 때문에 유동 화폐량이 상당해 살기가 괜찮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문파는 없어도 군소 문파는 거의 난립 수준인 곳이 강소성이었다. 게다가 흑도 문파가 상당수 포진된 곳이라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문제는 그 와중에 대검문이 정도를 표방하며 마찰이 상당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사음회(私音會)라는 곳이었는데, 소금 밀매로 상당한 부를 축척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파양호 주변의 상권을 사들이다시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대검문이 운영하는 여러 점포와도 마찰이 일어났다.
 그렇게 두 집단 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돈의 힘이 세상을 움직인다 해도 대검문은 상당한 문파인지라 쉽게 꺾이지가 않았고, 이는 사음회가 새로운 세력을 끌어 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이 바로 흑련이었다.
 “사상 최대의 흑도 연합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큰 세력이 흑련이지. 솔직히 흑련이 사음회의 손을 잡은 것이 이상할 정도인데, 어쨌든 그로 인해 대검문은 상당히 위축되었단다.”
 “흥. 그 빌어먹을 놈들이 옳다구나 하고 덤빈 것이지요. 파양호에서 나온 돈줄 좀 쥐겠다는 것 같은데 대체 백도문파들은 뭘 하는지······. 사파 놈들이 이리 득세를 하는데.”
 추국은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도 소위 정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기에 그저 넋두리에 불과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정파가 한 개의 단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였고 거의 불가능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그 정의만을 좇는 것은 정파가 아니었다. 정의를 좇되 어떠한 사람에게도 피해가 가선 안 되었다. 그것이 진정한 협의라 여겼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파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십상이었고, 결국 이는 각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데만 급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파끼리의 단결은 거의 요원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흑도는 달랐다. 간단한 단 하나의 정의에 의해 결정이 된다. 즉,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가려지는 것이므로 생각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사상처럼 그들 사이에서 영웅이 튀어나왔다.
 흑야도제(黑夜刀帝) 야우연. 바로 현 흑련의 련주가 바로 그였다. 한 자루의 도를 들고 각 흑도 문파를 병합해 오늘날의 흑련을 만든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흑련이 지금 강서 땅을 노리고 있었다. 노른자위일지도 모르는 그 땅을 말이다. 그리고 그 땅에선 지금 대검문만이 외롭게 싸우고 있고 말이다.
 “주인께서 아시면 난감할 일이지만 마님은 이미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러니 흑련에서 아가씨와 도련님을 노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빌어먹을 사음회 놈들도 사람을 고용했다는 소문이 들리고요.”
 “흥. 올 테면 오라고 하세요. 그깟 흑도 놈들, 하나도 두렵지 않으니. 너도 걱정 말아. 저 두 바보보다는 내가 훨씬 나을 테니.”
 “언니는 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해요. 보기에도 상당해 보이는데 어찌 그래요?”
 “너도 참, 저게 상당하긴 뭘. 저게 바보 놀음이지 무슨 무공 수련이야?”
 슬쩍 눈을 돌려 곽우와 오진영을 바라보다 추국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고 연오하는 그런 추국을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러자 두 여인이 하는 모양을 본 장 총관이 입을 열었다.
 “헛헛, 꼭 병기를 들어야만 무공이더냐? 보아하니 두 사람 다 상당한 수준의 가영대련(假影對鍊)이구나. 저 정도라면 짐이 되지는 않을 듯싶은데?”
 “에? 오하야 무공을 몰라 그런다 치지만 총관님까지 왜 그러세요? 아, 저게 무공인가요?”
 콧방귀를 뀌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마도 저 두 사람에게 단단히 실망한 모양이었다. 하나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저런 무공 수련 방법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머리털 나고 이곳에서 처음 봤던 것이다.
 “가장 적은 내력으로 빠르게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방법임을 몰라서 그러느냐? 저건 초식의 좋고 나쁨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 대련 시에, 특히 처음 시작하자마자 보이는 상대의 동작을 미리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상당히 좋은 수련 방법이지.”
 “상대의 움직임을 읽는다구요?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군요. 실전의 변수가 얼만큼인데 저런 어이없는 방법으로 가능한가요? 그것도 거의 땅에서 발을 떼지도 않은 채 말이에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듯 추국은 입을 열었다. 장 총관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는데, 본인이 그렇게 여긴다면 그냥 놔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생각을 바꿔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냥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땀을 흘릴 수 있다니··· 내가 보기엔 생각보다 어려운 듯한데?”
 무공에 대해 잘 모르는 연오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자 추국은 웃었다. 그녀는 신형을 홱 돌리며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떤 일이든 반 시진 이상만 하면 땀은 절로 흘러. 난 차라리 혼자서 연공이나 하렵니다.”
 추국은 빠르게 신형을 놀려 뒤뜰로 사라졌고, 연오하는 그저 피식 웃었다. 악한 아이는 아니지만 추국의 고집은 상당했다. 특히 무공에 관련된 것이라면 말이다.
 또 연오하 자신이 무공에 관해선 거의 백지이기에 논쟁이 될 수가 없었다. 연오하는 잠시 고개를 돌려 포구 쪽을 바라보다 이내 작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한데 총관님, 이 녀석은 또 바다로 나갔나요?”
 “허허허, 호랑이가 아주 이 상해에 살 작정을 했나 보구나. 아마 지금쯤 자인손이란 친구와 포구를 돌아보고 있을 게야.”
 “후, 나참. 전 들어가 볼게요, 총관님.”
 연오하는 고개를 흔들며 방을 향해 움직였다.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서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들어가 책이나 한 줄 읽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허허, 그렇게 하여라. 난 조금 볕을 즐길 테니.”
 차분히 대답을 한 후 그는 고개를 돌려 곽우와 오진영을 향했다. 추국은 별것이 없다 했지만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지금 저 두 사람이 하는 짓은 가영대련 중에서도 그 깊이가 상당한 축에 속했다.
 가영대련은 그야말로 거짓 대련. 수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놀이와도 같았다. 수련이든 놀이든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기준인데, 가영대련의 제일 큰 기준은 바로 태극이었다.
 무당에서 들고 나와 유명해진 태극은 마치 무당파의 것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태극은 만물의 근원이었다. 주역에서도 밝힐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의 원리일 뿐이다.
 하나가 차면 하나가 비고 또 하나가 비면 하나가 찬다. 그렇게 세상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이는 음과 양의 원리로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원리를 적용한 것이 가영대련이었다.
 한 사람이 공격을 하면 또 한 사람은 수세로 돌아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가영대련은 맞공격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로 공세로 돌아서는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살짝살짝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저 대련의 특징이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서도.
 “흐음, 그나저나 저 덩치는 의외인데? 이거 평가를 다시 내려야겠는걸.”
 슬며시 움직이는 곽우를 보며 장 총관은 눈을 좁혔다. 왠지 움직임이 아주 능숙해 보였는데, 저만한 덩치에서 나올 수 있는 유연함이 아니었다.
 “도는 아닌 것 같고··· 장창을 다루는 친구인가? 아차, 저 녀석의 스승이 장창을 다루지? 하하하!”
 장 총관은 다시 눈을 돌렸다. 흥미가 일어나는 친구이지만 일단 그에 관한 것은 나중에 살펴야 했다. 지금은 다른 곳에 더 흥미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고마운 친구로군. 아주 열심히 일을 수행하니.”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로 곽우와 오진영이었다. 장 총관은 이들이 여기서 저 대련을 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무공 수련이었다. 온 정신을 이곳에 집중한 채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저것뿐이었다. 주위의 상황 속에서 연오하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슷, 스슷.
 “훗··· 후훗!”
 곽우는 빠르게 몸을 놀렸다. 그의 양손은 마치 장창을 쥐고 있는 듯 양손을 둥글게 말아 앞으로 내지르고 있었고, 그러자 오진영은 반 족장 옆으로 움직이며 손을 흔들었다.
 “쉿.”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그는 오른손을 흔들었고, 검이 휘둘리는 것을 안 곽우는 어깨를 틀며 장창을 잡아당겼다.
 슷.
 아마도 이 동작에 오진영의 검은 막혔을 터이고 곽우는 다음 공격을 노리면 될 것이다. 하나 그걸로 끝이었다. 가영대련은 여기까지였다. 이렇게 서로 번갈아 가면서 공격을 하고 또 맞대응을 하는 것이 가영대련의 진짜 목적이었던 것이다.
 “후, 이봐, 곽우. 언제까지 이렇게 할 거야?”
 “왜, 진검 승부라도 하자는 거야?”
 오진영의 목소리에 곽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서로가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신체적인 조건은 달랐다. 키부터 머리 하나 정도 곽우가 크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진영은 고개를 위로 살짝 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손님맞이가 더 급한 게 아닌가 싶어서.”
 “물론 그렇기는 한데··· 추국이란 여인과 저 장 총관님도 보통 이상이라서.”
 “보통이 넘지, 사실은.”
 곽우의 목소리에 오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두 사람은 경호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물론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손님이니 우리가 지켜야지. 더욱이 부탁도 받았잖아. 도와준다고. 그러니 네가 가봐. 혹 잘못되면 그 후에 내가 가지.”
 “얼래? 왜 내가 가?”
 곽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왠지 장난기 어린 그의 목소리였는데, 그러자 오진영 역시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 잊는 것 같으니 내 다시금 인식시켜 주지. 내가 장영해의 소주거든? 말 좀 듣지?”
 “역시 치사한 놈이야, 넌. 꼭 안 될 것 같으면 그걸 내세우는데······.”
 곽우는 양 볼 가득 바람을 집어넣은 채 발을 움직였다. 오른발을 반 족장 정도 옆으로 벌리는 듯하더니 발을 세워 땅을 찍었다.
 티이이잉!
 그러자 바닥에서 무언가가 튕기듯 허공으로 올라왔고, 곽우는 오른 손바닥을 벌렸다가 꽉 쥐었다.
 타악!
 휘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육중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운데 곽우는 휘날리는 먼지를 뒤로하며 신형을 돌렸다. 돌아선 그의 오른손엔 상당한 길이의 장창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뭐, 억울하면 네가 우리 아버지 아들하든가. 그것도 쉽지 않거든.”
 “일없네, 이 사람아. 효도는 자네나 많이 하시게.”
 곽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냥 앞으로 움직이는 것인데도 그의 몸은 상당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 우람한 몸이 문제였다.
 “조심해, 곽우. 이곳까지 들어온 놈들이면 꽤 한다는 뜻이니.”
 “아아!”
 곽우는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리곤 좌우로 흔들다 이내 점점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장영해에서 연오하 일행을 위해 마련한 작은 초옥으로 장영해에서 오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장영해 안에서 살면 좋겠으나 그곳은 시끄러운 곳이라 아무래도 밖에서 따로 기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당연히 그만한 경비는 세웠음에도 지금 불손한 자들이 주위를 휘둘러 치고 있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적의를 가진 것은 불문가지였던 것이다.
 
 “음? 자네가 가보려고?”
 “저기 있는 저 인간이 딴에 소주랍시고 명령을 내려서요. 아무리 그래도 객인데 나서게 할 수는 없다면서 말입니다.”
 “호오!”
 장 총관은 뭔가 흥미로운 것을 봤다는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러자 곽우는 씨익 웃으며 흘끔 시선을 뒤로 던졌다.
 “뭐, 숫자가 좀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리 힘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을 대비해 이곳에서 아가씨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물론 만일의 상황엔 저놈도 올 겁니다.”
 “그 정도쯤이야. 그럼 한번 실력을 보겠네.”
 “하핫, 실력이라고 할 것도 없어서리······.”
 밝게 웃으며 곽우는 왼손으로 뒷덜미를 긁고 있었다. 잘 그을린 얼굴에다 하얀 이가 보이니 더욱더 이가 희어 보였는데 왠지 그 웃음이 가슴속 깊이 남고 있었다.
 스읏.
 거구임에도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그에게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안정된 보법임은 틀림이 없었고, 이는 곽우의 무공에 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게 했다. 장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옮기고 있었다.
 “희한하게 맘이 쓰이는 놈이야. 헛헛.”
 장 총관의 신형 역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피리리리링!
 “후우우!”
 귓가에 살랑거리는 피리 소리 같은 소리를 들으며 추국은 살짝 웃었다. 언제 들어도 마음이 참 편해지는 소리라 생각하며 그녀는 손을 거두었다.
 탓.
 그녀의 왼 손바닥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길이는 약 한 자 정도에 두께는 두 치 정도 되는 무게추가 그 손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작은 철추(鐵錐)였다.
 그 맨 뒤에 아주 작은 철선 하나가 매달려 있었고, 그 철선은 추국의 오른손 손목에 연결되어 있었다. 추국의 성명절기가 바로 이 추곤법(錘棍法)이었던 것이다.
 원래 그녀가 어릴 때는 이런 기형 병기가 아니라 고검을 가지고 무공을 수련했지만 나이가 들고 또 대검문을 나서면서 병기도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포승줄에 단봉을 매다는 기형 병기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어느 정도 무게도 있어 그간 쓰던 대검과 비슷했지만 강호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보니 아무래도 살상보다는 포박이나 혹은 위협만 하는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추국으로선 제일 무난한 병기였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 추곤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빙빙 돌리면서 나는 소리도 위협적이지만 그 위력 또한 대단했다. 강호에서 좀 한다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해도 추국은 자신있었던 것이다.
 “······.”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추국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는데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확 들고 있었다.
 물론 말로 이야기하기는 좀 힘들었지만 그녀는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이 뭔지 말이다. 온몸이 따끔거리는 이 감각이.
 “청하지 않은 손님이니 대접이 소흘하다 원망 마라!”
 피리리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추국의 손에서 번갯불이 튀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흑추(黑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것으로 정확히 사 장 너머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노리고 있었다.
 빠가각!
 파라라라랑!
 상당한 내력이 실렸는지 흑추는 그대로 나무에 두 치 정도 틀어박혔고, 그러자 꽤나 굵은 나무가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흥! 어두운 밤도 아니고 밝은 대명천지에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핑, 파아앙!
 추국은 일갈과 함께 오른손을 잡아당겼고, 그러자 흑추는 다시 되튕겨 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왼손과 오른손을 흔들어 마치 실패처럼 포승줄을 감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자는 모두 다섯 명. 모두 다 판박이처럼 흑의를 입고 박도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마치 부챗살이 펴지듯 쫙 퍼져 날아오고 있었다.
 추국은 그 모습에 작은 웃음을 띠었다. 이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 공중에서 이렇게 멍청하게 일직선으로 날아온다는 것은 자동으로 표적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피리리리링!
 추국은 약 일 장 정도로 포승줄이 줄어들자 더 이상 감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손목을 움직여 줄을 잡은 채 빠르게 머리 위로 휘돌렸고, 한순간 그녀의 허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좌아앗!
 왼발을 길게 뻗으며 먼지구름을 살짝 일으키는 가운데 그녀의 신형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추국은 그 회전력을 배가시키며 오른 손가락을 살짝 놓았다.
 파아아아앙!
 그녀의 손에서 다시금 흑추가 튀어나갔고, 이번에 나간 것은 거의 두 배가 넘는 속도로 튀어나갔다. 목표는 제일 먼저 오는 흑의인의 미간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고 있었다.
 흑의인은 빠르게 오른손을 밀어 올리며 장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흑추를 튕겨내려는 것이지만 그건 오히려 추국이 바라는 바였다. 흑추는 그리 만만하게 튕길 수가 없는 것이다.
 카아아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불꽃이 일었다. 흑추는 튕겨지기는커녕 그 궤적을 거의 바꾸지 않은 채 날아갔는데 추국은 오른발을 올리며 포승줄을 잡아당기려 했다. 이제 다음 목표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한데,
 차라라랑!
 “······!”
 제일 앞에 있던 사내의 움직임에 추국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움직임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장검을 밀어내며 신형을 땅에 내리누이고 있었다.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렇게 밀어낸 것이다. 즉 흑추를 튕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낸 것이고, 이는 흑추의 힘을 이용해 공중에서 신형을 바꾸려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상당한 무공을 지닌 자들인 것이다. 조금은 안일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그녀는 신형을 뒤로 날렸다. 어느새 다른 네 명의 흑의인들이 땅에 내려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땅에 내려선다면 바로 다음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추국은 어금니를 꽉 물며 흑추를 휘돌렸다.
 휘이이이잉!
 신형은 뒤로 물러서지만 그녀의 손에서 발출된 흑추는 앞으로 폭사되고 있었다. 목표는 역시 제일 먼저 땅에 내려서는 사내, 정중앙에서 자꾸 추국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추국의 판단이 살짝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사내의 발은 땅에 닿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슷, 파아아앙!
 “······!”
 추국의 눈에서 기광이 피어올랐다. 역시나 사내는 내려서자마자 바로 신형을 날려 덤벼들었다. 한데 그 동작이 참으로 기이했던 것이다.
 날아오르는 동작은 마치 학의 그것처럼 빠르고 유연했으나 튕겨 올라가는 동작은 뱀의 그것과도 같았다. 마치 추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동작이다.
 사내는 그렇게 날아오르더니 이내 허리를 틀었다. 그리곤 추국이 날린 포승줄 위에 왼발을 올려놓았다.
 탓!
 추국의 오른손에 걸린 감각이 기묘했다. 흑의인의 몸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국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검술은 둘째 치더라도 내가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럼 추국도 이제 그냥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차아앗!”
 쉬이잇, 촤라랑!
 일갈을 내뿜으며 그녀는 포승줄에 내력을 주입한 후 크게 휘둘렀다. 포승줄은 살아 있는 뱀처럼 휘날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흑의인의 신형이 다시금 움직였다.
 사삿.
 포승줄이 허공으로 크게 너울지는 순간 그 탄력을 이용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추국은 포승줄이 자유로워지자 바로 회수하려 했는데, 그 순간이었다.
 “제길!”
 그녀는 다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첫 흑의인에 너무 신경을 빼앗긴 나머지 사람들의 움직임을 놓치고 있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이미 땅에 내린 상태로 이차 도약을 하고 있었다.
 파파파팡!
 부챗살처럼 쫙 퍼져 있던 그들이 덤벼들자 추국은 눈을 치켜떴다. 이젠 수세로서 승부를 볼 상황이 아니었다. 더 험악한 상황이 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뒷발에 힘을 준 채 오히려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촤락!
 아주 흐릿한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추국은 오른손을 좌우로 크게 흔들며 포승줄을 휘둘렀다.
 휘리리리링! 카가가각!
 부챗살처럼 다가왔던 네 사람 중 양 끝에 있는 자들을 만나지 않기 위한 계책이었다. 전방에 있는 두 사람은 검을 휘둘렀지만 그건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포승줄이 크게 너울대어 이를 막기 위한 동작이었던 것이다.
 그사이에 그녀는 이 네 사람을 완전히 지나칠 생각이었다. 이어 허리를 숙이며 오른손을 힘껏 뒤로 잡아당기자 줄이 팽팽해지며 흑추가 날아왔다.
 피리리리링!
 내력이 담긴 병기가 휘둘러지는 상황이니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부지불식간에 네 사람은 허공으로 뛰어올랐고, 흑추는 허공을 갈랐지만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쭉 펴며 오른손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흑추가 그녀의 오른손을 축으로 빠르게 돌았다.
 공중으로 신형을 띄운 네 사람을 향한 공격이었고, 한껏 내력을 담은 공격이었다. 그야말로 회심의 일격. 이것으로 그녀는 승기를 잡을 수 있음을 의심치 않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파라라랑, 콰각!
 “······.”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반 장여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포승줄이 감겨져 있었는데 그건 먼저 떠올랐던 흑의인의 검집이었다. 포승줄은 검집에 단단히 감겨져 있는 상태였고 검은 이미 그녀의 목젖을 향하고 있었다.
 쉿, 빠앙!
 양손으로 줄을 잡아 팽팽하게 만든 후 그녀는 흑의인의 검을 막으려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왠지 이번엔 조금 자신이 없었다. 흑의인이 지금껏 보여준 무공으로 볼 때 내력에서도 그가 우위에 서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줄이 잘리며 그녀 역시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피하기에도 늦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응?”
 왠지 하늘이 깜깜해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직 해도 중천이니 절대 어두워질 턱이 없었건만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귓가에 강렬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콰아악! 쩌어어엉!
 “큭!”
 순간적으로 들린 큰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눈을 돌려 상황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느껴지던 팽팽한 감각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줄을 당겨 흑추를 회수하며 어두운 그림자의 정체를 보았다.
 그건 상당한 크기의 검이었다. 두께만 해도 두 치가 넘을 정도였는데 넓이는 한 뼘을 훌쩍 넘겨 두 뼘이 조금 안 될 정도였으니 어두워지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었다.
 또한 길이도 오 척이 넘어 도무지 검이라고 말하기가 힘든 병기였다. 그 거대한 검에 흑의인의 검이 막히자 그녀는 눈을 들어 그 거대한 검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검의 끝에 긴 막대기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길이도 반 자 이상 되는 길이로 비죽 나와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차··· 창?”
 그건 검이 아니라 창이었다. 그리고 그 창대라고 생각되는 곳을 잡고 있는 손이 있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힘있게 잡고 있었는데, 그 손을 따라 그녀의 시선이 움직일 때였다.
 “생각보다 대단한 손님이 오신 모양이군. 웬만하면 뉘신지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소이까?”
 낭랑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오고 있었고,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곽우라는 허우대 튼실한 인간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어느 틈에 뒤에 나타나 자신을 도와준 것이다. 하나 그녀로서는 그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힘은 좀 있어도 무공은 그다지 대단하다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복면을 하고 온 사람이 어찌 이름이 있을까. 양해해 주게.”
 문득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흑의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을 흑의로 둘러싼 채 눈만 빼꼼히 내놓은 사내였는데 왠지 그의 목소리는 전혀 사악하게 들리지 않았다.
 “청하지 않은 사람이 검을 들고 와 양해해 달라······. 그것도 이상하군요.”
 곽우는 눈을 빛내며 사내를 바라보았고, 이내 사내의 눈과 마주하게 되었다. 사내의 눈에선 차분한 빛이 흘러나왔고 그 눈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역시··· 무리였나?”
 키키킥.
 창날과 장검이 맞닿은 곳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곽우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한 것이지요!”
 파아아앙!
 오른발로 넓은 검신을 차올리자 사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곽우는 그 힘을 그대로 밀어 올리며 창대를 지면과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물경 일 장여에 이르는 그의 장창이 허공에 떠올랐지만 그 창은 미동조차 없었다. 곽우는 그 거대한 창을 오른손만으로 잡아 올리면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쉽진··· 않을 것입니다.”
 살짝 웃으며 곽우의 입술이 열리자 그의 시원한 목소리가 세상에 나오고 있었다. 이어 그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허공에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네.”
 
 2
 
 “우리 목숨을 노리고 온 사람들인가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장영해를 직접 노렸다는 말인데, 설마 장영해의 본진 주변에서 장영해를 노릴 수는 없겠지요. 그것도 저 다섯 명으로 말입니다.”
 연오하의 목소리에 장 총관은 나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작은 창을 통해 상황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문득 연오하는 걱정스런 목소리를 다시 내었다.
 “그간 별로 느낌이 없었는데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군요. 정말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라······.”
 연오하의 표정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대변하듯 양손을 꽉 쥐며 살짝 떨고 있었다. 장 총관은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가 괜히 이곳에 아가씨와 도련님을 맡기신 것이 아니란다. 이곳은 그저 뱃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곳 같은 느낌이지만 실상 이들의 실력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야.”
 “네. 그건 곽 공자의 모습을 봐도 잘 알겠군요. 보통 무공을 가지신 분이 아닌 듯싶습니다.”
 수긍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곽우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곽우는 지금 마치 전설 속의 관운장이 현신이라도 한 듯 무섭게 다섯 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 녀석 덩치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요. 힘만 센 무식한 놈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곽우 저 녀석의 무공은 상당합니다.”
 “허허, 이젠 오 공자가 직접 우리를 보호하려 하는 것인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연오하와 장 총관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멋들어진 영웅건을 머리에 쓴 한 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장영해 해주 오각의 아들 오진영이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버님과 용해당주께서는 장영해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셔야 하는 관계로 저와 곽우 저 친구가 여러분의 호위를 맡았습니다. 아, 물론 자인손 부당주께서도 저희와 같이 함께하십니다. 아마도 지금은 연호랑 그 아이를 보호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진영은 멋들어진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연신 곽우의 신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비록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상당히 긴장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저희를 위해 이토록 힘써주시는 데 대해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한데 곽 공자님을 저대로 놔두셔도 괜찮을까요?”
 연오하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러자 장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곽우라는 친구가 무공이 좀 있기는 해도 다섯 사람 모두를 아우를 수는 없어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조금은 모자란 듯하니 지금이라도 여기 있는 오진영이나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오진영은 전혀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놔두어도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저들은 곽우 저 친구를 뚫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가 가진 장창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
 밑도 끝도 없는 그의 자신있는 목소리에 장 총관은 눈을 좁혔지만 이내 다시 원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데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 여유로운 장 총관에 비해 옆에 있는 연오하는 왠지 모를 떨림이 전해져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이 무슨 감정인지 아직 그녀는 알지 못했다.
 
 까라라랑!
 세 개의 검날을 동시에 튕겨내고도 곽우의 장창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곽우의 장창이 가진 무게를 감안한다면 다섯 개의 검날이 모두 튕겨진다 해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곽우는 달려나가는 탄력을 멈추지 않은 채 손목을 틀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장창이 하늘로 치솟으며 예의 흑의인의 가슴을 노렸다.
 흑의인은 내려서면서 검날을 한껏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몸동작으로 봤을 때 내려서는 힘을 이용해 휘두르려는 것 같았는데 곽우는 침착하게 창대를 찔러 올리고 있었다.
 쩌엉! 차라라라랑!
 낭랑한 소리와 함께 곽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른손으로 전해져 오는 이 막대한 힘은 상대의 무공 정도를 알게 해주었다. 이 정도라면 자신보다 훨씬 위였던 것이다.
 사내는 처음에 한 번 진짜로 격돌을 한 후 그대로 검을 흘려 곽우의 창신을 타고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곽우는 오른발을 크게 구르며 뒤로 신형을 날랐다.
 파아아앙!
 어쨌거나 그는 장창을 주 무기로 하는 사람. 거리를 벌릴수록 좋았던 것이고 상대 역시 그걸 잘 아는 듯했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바로 발을 구르며 다시 곽우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절대 거리를 주려는 심산은 없어 보였던 것이다.
 피리리리링!
 흑의인의 검은 좌우로 빠르게 휘둘려지고 있었다. 연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할 수 있는 얇은 검인 듯 보였고, 그만큼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곽우는 그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장창을 휘돌렸다.
 휘이이이잉!
 시원한 바람 소리와 함께 곽우는 다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날아오는 그의 검을 향해 밀어낸 것인데 흑의인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방금 허공에서 밀어 내리던 상황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뭔가 달랐다. 특히 오른팔에 전해져 오는 이 감각은 무언가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 전처럼 느껴져야 할 강렬한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키리리리리!
 전혀 힘을 준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자의 검은 곽우의 장창에 이끌려 한쪽으로 크게 휘어진 것이다. 그러자 곽우의 온몸에 기이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차가운 감각이면서도 작은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듯한 느낌. 참으로 오랜만에 그러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건 제대로 된 살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준비한 것은 살기뿐만이 아니었다. 순간 곽우의 눈앞에 화려한 검화가 피어올랐다.
 스파라라라랑!
 물경 다섯 개 이상의 검이 허공에 피어오르자 곽우의 미간에 작은 골이 파였다. 허초에 환검이라······. 역시 보통이 아닌 상대였다.
 문제는 이 다섯 개의 검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곽우는 손을 움직여 장창의 중간 부근을 잡았다. 크게 원으로 휘돌려 다섯 개의 검을 한꺼번에 날리려 한 것이었다.
 마치 바람개비처럼 휘돌려 막으려 한 것이었으나 흑의인은 다섯 개의 검을 몰고 그대로 들이치고 있을 뿐이었다. 곽우는 팔을 올리며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쉬이이잉!
 곽우의 손에서 크게 창날이 휘돌고 바람 소리가 돌자 다섯 개의 환검이 차례로 부서져 나갔다. 그러고 마지막 검날이 곽우의 장창에 부서져 나간 순간 그의 가슴에 한 자루의 검이 들이닥쳤다. 진검은 이것이었던 것이다.
 
 “저 바보가 잘난 척은!”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보이자 추국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지금 연오하의 옆에 다가와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곽우는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고 생각했듯이 실력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직 네 명의 다른 흑의인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 한 명만으로도 벅차게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정말 어이없는 것은 저 마지막 한 수였다. 상대는 정석으로 먼저 치고 그다음 허초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어 환검을 사용했는데 그건 바로 변초였다. 가장 조심해야 될 상황인 것이다.
 저 다섯 개의 검을 모두 쳐내는 것, 그것은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건 인간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한 초식으로 애당초 처음부터 실체 따윈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손목을 오른쪽으로 틀어 막는다. 즉 왼쪽에서 오는 것부터 크게 원호를 그리며 밀어내는 습성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 점을 이용한 것이 이 초식의 맹점이었던 것이다.
 곽우가 장창을 돌려 막는 순간 그건 허초가 되니 허공을 가를 것이고, 이어 그 허초가 들어왔던 공간에 진검이 들어올 것이다. 그건 바로 이 환검이라는 것, 아니, 환초라는 것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을 모르고 곽우는 지금 막으려 하고 있었다. 환초도 모르는 자를 지금 믿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냥 온 자신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저런 멍청한······!”
 추국은 오른손을 들어 철추를 날리려 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누가 누구를 지키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될 듯했으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녀는 더 이상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총관님!”
 “잠시 기다리거라, 추국아.”
 그녀의 오른손을 지그시 누르며 장 총관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본인이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추국을 말리는 것뿐이었다.
 “총관님, 왜 그러세요? 이러다 저자, 크게 다······.”
 말리는 장 총관을 향해 입을 열던 추국이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파아앗!
 상대의 검이 곽우의 가슴을 가르고 있었다. 아니, 완전히 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깊은 상처를 남길 만한 가르기였다. 깊이도 그렇고 옆으로 틀어버린 검날의 각도를 봐도 충분히 그렇게 보였다.
 곧 허공에 붉은 피가 안개처럼 피어오를 것이고, 그럼 곽우는 쓰러질 터였다. 적어도 흑의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내려서는 발걸음을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뒤편의 모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으니 말이다.
 “······.”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쓰러진 곽우의 신형을 타고 넘어야 하건만 곽우의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곽우의 몸이 갑자기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가슴 어림만 살짝 흐릿해지고 있었는데, 그러자 복면 속의 눈이 커졌다.
 “환영!”
 자신의 검초처럼 곽우 역시 흐릿한 환영을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상체만 보이는 환영이었다. 진짜 곽우의 몸은 약 반 족장 정도 옆에 있었던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흑의인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검 앞에 곽우의 거대한 장창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공세를 멈추었으니 당연히 수세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다.
 쩌어어엉! 촤촤촤촤촤!
 어깨가 쩌릿할 정도로 강렬한 타격에 흑의인은 뒤로 일 장여를 넘게 물러서고 있었다. 아니, 그와 같이 온 흑의인들이 뒤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정말 몹쓸 꼴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대형, 괜찮소?”
 “······.”
 대형이라 불린 사내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움직여 뒤에 있는 네 사람을 좌우로 흩뜨려 놓고는 곽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완전히 한 방 먹었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스으으읏.
 검은 복면을 풀어 헤치며 사내가 입을 열자 곽우는 눈을 좁혔다. 드러난 복면 속에선 꽤나 차분한 얼굴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뒤쪽에 도열해 있던 다른 자들도 복면을 벗었다.
 생각보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이들을 보니 사람을 살해하기 위해 온 사람들 같지 않아 보였는데 문득 곽우의 귓가에 다시금 대형이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인 것 같군. 이곳 하구 쪽에서 잔일로 먹고사는 우명산(友皿算)이라 하네. 여긴 내 아우들일세. 같은 어버이 밑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서로가 깊은 정을 가져 우명이란 성을 갖기로 했지. 각기 진(進), 현(賢), 문(雯), 상(想)이란 이름을 쓰네.”
 “······.”
 스스로를 우명산이라 밝힌 사내의 얼굴을 보며 곽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뒤편에 서 있는 사내들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었는데 소문대로 대단한 우의를 지닌 사람들 같았다. 의리를 위해 성을 버리고 같은 성을 만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제 보니 명성이 자자한 오우선생(五友先生)이셨군요. 소생, 아직 강호의 경험이 미천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길······.”
 장창의 날 부분을 밑으로 가게 만들며 곽우는 포권을 했다. 그러자 우명산은 쓴웃음을 지었는데 오우선생이라 칭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 곽우가 신경 쓴 것이었다.
 그와 그의 사형제들은 오우도(五友盜)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장강 일대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로서 오늘은 이곳에 볼일이 있어 나타난 것이었다.
 “강호의 경험이 미숙하다는 말은 곧이듣기 힘드네. 상변신(像變身)의 묘법을 깨우친 듯한 사람이 경험이 미숙하다라······. 역시 자 대협의 직계제자답군그래. 인정하네, 곽우.”
 우명산은 말을 하면서도 손을 좌우로 살짝 벌렸고,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네 명의 사내가 조금씩 간격을 벌렸다. 여차하면 모두 다 덤비겠다는 심산을 보여주듯 말이다.
 “그야말로 과찬이십니다. 한데 듣기론 오우선생들께서는 비록 물건의 주인은 바꿀지언정 그 주인의 목숨은 탐하지 않는다고 들었건만 아무래도 그 말이 틀린 모양입니다. 진정 그러하십니까?”
 곽우는 서글서글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명산의 이마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곽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의 사정이란 것이 참으로 간특하여 때론 본인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도 있는 법,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 생각하길 바라네.”
 “······.”
 곽우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발을 뒤로 빼 비스듬하게 섰다. 말이 이렇게까지 된다면 남은 것은 또 한 번의 격돌뿐이었다. 곽우의 몸동작을 본 우명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의 격돌로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주겠네. 그 한 번이 실패한다면 이대로 물러가지.”
 피링.
 검날을 허공에 튕기며 우명산은 입을 열었고, 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도적이지만 이 우명산은 자신의 말을 지킬 사람이었던 것이다.
 
 “참 뻔뻔한 놈이군요. 결국 사람 죽이러 와서 한다는 소리가 저도 대장부라 이건가?”
 추국은 한쪽 입술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는데 말이 거칠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결국 그들은 여기 있는 사람을 죽이러 왔다는 것을 시인했으니 말이다.
 “하나 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오우도 저들이 그간 남의 물건을 탐한 적은 많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만을 탐해왔습니다. 그리고 곽우 저 친구의 말처럼 그간 사람의 목숨을 탐한 적은 없습니다. 정말 이상하군요.”
 “흥,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지요?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이랍니다, 공자. 전 우리의 목숨이 과연 몇 푼일지 그것이 더 궁금하군요.”
 이미 기분이 틀어진 추국의 입에선 좋은 말이 나올 턱이 없었지만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왔다고 하는데 좋은 말이 나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총관님.”
 “무슨 일이냐, 오하야?”
 하나 추국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든 말든 연오하는 전혀 듣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오직 한곳에 머물러 있었고, 그곳은 곽우가 있는 곳이었다.
 “아까 저 사람이··· 상변신의 묘법이라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지요?”
 “아, 그것은······.”
 연오하는 장 총관의 말에 귀를 쫑긋거리며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러자 장 총관은 웃었다. 왠지 이 연오하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저 곽우란 친구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그가 옆에 있을 때면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지만 그가 사라졌을 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상변신이라는 말 자체도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무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그녀이기에.
 “별것 아니에요, 아가씨. 그저 상반신을 빠르게 흔들어 상대방의 공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숙련되면 누구나 다 하는 건데 저 도적놈이 괜히 사람 부추기는 겁니다. 방심하라고요.”
 “허!”
 입을 열려던 장 총관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란 것은 분명 그 맛이 존재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상변신이라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변신은 아주 힘든 수련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단순히 피하는 것이라면 상변신이란 말이 나올 것 같더냐? 그저 피하는 것에 불과한 것에 이름을 붙일 정도로 세상 인심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추국아?”
 “······.”
 추국은 장 총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녀는 장 총관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상변신이라는 것, 그리 쉬운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만 해도 상변신을 제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어렵고 고된 길이 상변신을 익히는 것이었던 것이다.
 “일단 상변신을 익히려면 자신의 키보다 두 배 정도 높은 천장에 실을 늘어뜨리고 거기에 작은 돌을 매달게 되지. 그리곤 그 돌을 밀어버린단다. 하면 그 돌은 묶여 있으니 빙글빙글 돌게 되겠지?”
 “······.”
 “그럼 상변신을 익히려는 사람은 그 아래 서게 됩니다. 그리곤 양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허리만 가지고 그 돌을 피하게 되지요. 일단 시작은 그렇게 합니다.”
 연오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렇다면 그리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한데 왜 상변신이란 말에 추국이 발끈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녀는 추국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무공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실력만큼이나 그녀의 자존심은 상당했고,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자존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인정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싫은 것이다.
 “그리고 점점 그 실의 길이를 짧게 만든단다. 한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실의 길이가 짧아지기는 하지만 언제나 돌은 피하는 사람의 가슴에 위치하게 되지. 그건 그만한 크기의 작은 발판을 놓고 다시 피하는 연습을 하기 때문이란다.”
 “에?”
 연오하의 머릿속에 곽우가 같은 것을 놓고 연습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다. 왠지 조금 우스운 듯했지만 이어진 장 총관의 설명에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 훈련의 끝은 천장과 머리가 거의 맞닿을 때까지 하게 된단다. 하나 그렇게까지 한 사람은 나도 본 적이 없지. 하나 그 정도까지 익히게 되면 날아오는 물체를 반사적으로 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상변신이지요. 아무리 빠른 공격이라도 더 빠르고 신속한 동작으로 피하게 되는 법이란다.”
 “그렇군요.”
 말을 듣다 보니 정말 대단한 공부였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렇게 보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생각 외로 끈기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러한 공부는 거의 하지 않지. 워낙 어렵고 지겨운 수련이라 말이야. 또 그보다 훨씬 효과적인 수련 방법으로 신법이 발달하니 굳이 할 필요가 없게 된 것도 한 원인이지. 하나 상변신의 묘법을 터득하면 어떤 보법도 부럽지 않단다.”
 “혹시 모르지요. 저 곰탱이 같은 인간이 그저 속성 과정을 거쳤는지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여전히 추국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장 총관은 그저 씨익 웃었다. 이 정도로 이야기한 것만 해도 추국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속성이란 없습니다. 저 곽우라는 녀석을 알게 되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오진영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는 살짝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서 동료의 험담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총관님의 말처럼 그렇게 수련해 온 녀석입니다. 뭣 하러 그따위 것을 수련하느냐고 그냥 나와 같이 상승 무공을 수련하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며 이 길을 걸어온 녀석입니다.”
 “······.”
 “더욱이 저놈은 거기서 만족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움직임에 있어선 세상 그 누구도 저 친구를 따라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조금만 더 보시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화가 난 목소리이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강한 신뢰감이 서려 있었다. 과연 어떤 것이 그로 하여금 저 곽우란 사람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장 총관의 뇌리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움직임에 있어선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은 오만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상변신이 좋은 수련법이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수련하는 수련법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순간 곽우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본 순간 장 총관은 입을 딱 벌렸다. 그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풍우번신(風雨륙身)! 설마 선풍선법(旋風旋法)을 익힌 것이었나?”
 좀처럼 감정의 변화가 없던 장 총관의 얼굴에선 여과 없는 놀람이 내비치고 있었다. 지금 곽우가 보여주는 저 신법은 상변신의 묘법을 넘어선 것이었다. 아니, 그저 묘법이라는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저 신법은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신법이었다. 선풍선법, 그건 바로 그가 한때 몸을 담았던 대검문의 신법이었다. 상변신의 묘법을 극성으로 익히다 보면 깨닫게 되는 무공이었던 것이다. 물론 극성으로 익힌다 함은, 뼈를 깎는 고련을 포함하고 있고 말이다.
 
 네 개의 검이 동시에 곽우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우명산이 잠시 곽우의 주위를 끄는 사이 뒤에 있던 네 명이 합공을 한 것인데 우명산은 성공이라 생각하고 이미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네 명의 협공이 보여주는 위력이 대단했고 그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의제 네 명은 그와 별다른 실력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아주 약간의 차이로 그가 대형이 된 것이었으니 이 네 사람에게 맡겨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검을 휘돌려 다른 곳을 향하려 했다. 목표는 이 곽우가 아니라 저 뒤에 있는 모옥 안에 있으니 말이다.
 스스슷!
 부채꼴처럼 모여 있다가 어느 틈에 자신의 앞으로 줄지어 늘어서는 의제들을 보면서 우명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우명산은 이번 공격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진오격(聯進五擊)이라는 한 수였다. 강한 무공을 지닌 적을 만나면 쓰는 진법 같은 초식이지만, 다수로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인지라 웬만하면 거의 쓰지 않는 수였다.
 그러나 오늘은 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그의 의제들은 알아서 늘어서고 있었다. 맨 앞부터 진, 현, 문, 상이 서 있었는데 네 사람은 차례로 곽우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키링!
 우명진은 아주 평범한 초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것은 그저 눈속임일 뿐이었다. 상대는 장창을 사용하는 사람. 그 장창의 공격 거리까지 좁혀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위해 우명진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가장 단순하지만 큰 동작으로 곽우를 향해 찔러간다. 그럼 곽우는 당연히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쉬이잇!
 곽우의 장창이 곧장 우명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하자 우명진은 더욱더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현란한 검광을 만들어내었다. 연검에 가까운 그의 검날이 허공에 휘둘려지자 곽우의 두터운 장창에 부딪쳤다.
 카라라라락!
 아니, 부딪쳤다기보다는 쓸린다는 표현이 맞을 터이다. 당연히 그의 검날은 장창을 이겨낼 수가 없었고,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하나 이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제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뒷머리를 타고 우명현이 날아올랐고, 우명문은 왼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키리리리릭!
 그들의 검은 커다란 곽우의 장창을 타고 훑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이 공격은 그 속도가 우명진보다 배는 빠른 속력이었다.
 그러자 곽우의 장창이 변하고 있었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한 번에 모든 공격자를 쓸어버리려 하고 있었고, 그러자 우명현과 우명문의 움직임이 다시 한 번 변했다.
 “하압!”
 “찻!”
 카라라락!
 두 사람은 내력을 한껏 끌어 올리며 곽우의 장창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상대의 병기를 봉쇄하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은 충실히 행해지고 있었다.
 곽우의 장창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눌러지고 있었다. 그러자 우명진은 우측으로 신형을 옮겼다. 이제 끝을 봐야 했다.
 다음 공격은 우명상이 직선으로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이 끝나면 저 뒤에 있는 자신이 확실히 공격을 마감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연진오격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스슷!
 우명산은 눈을 부릅떴다. 곽우의 신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여기저기로 쭉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듯하더니 한순간 그의 모습이 아주 잠시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자 곽우가 다시 나타났다. 한데 그 위치가 조금 달라져 반 족장 이상 앞으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 그런 것들이 가슴을 내리누르더니 이내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사사사사사!
 바람. 그저 한줄기 바람 같았다. 아주 작은 실바람이 아니라 거대한 용권풍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곽우의 신형은 아주 기이하게 흔들리며 네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피리리링!
 “······!”
 우명산은 입을 딱 벌렸다. 곽우의 신형이 회오리처럼 휘도는 듯하더니 네 개의 검날이 모두 옆으로 비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의 눈앞에도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박인 순간 그 앞에 한 사람이 스쳐 가고 있었다.
 시시싯, 차아아앙!
 이어 귓가에 들리는 짤랑한 소리에 우명산은 흠칫 놀라며 검을 들어 올렸지만 너무 늦었다. 그의 왼 어깨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올려져 있었다.
 “······.”
 그것은 곽우의 장창이었다. 창날이 어깨 위에 얹어져 있었고 허공에선 작은 반짝거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카카칵!
 그건 의제들의 검이었다. 내리누르던 현과 문의 검으로 그들의 신형은 이미 좌우로 튕겨져 나간 상태였다.
 내력에서도 그는 의제들을 이긴 것이다. 우명산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이것이 무슨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나는 것은 단 한 가지. 온몸을 둘러싼 이 거센 바람뿐이었다. 오른손을 떨어뜨리며 우명산은 입을 열었다.
 “졌네. 완전히.”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우명산을 보며 곽우의 장창이 거두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뒤로한 채 앞으로 걸었다.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사람들은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곽우의 고개가 살짝 돌려지며 입술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우명 대협께 묻겠소이다. 정말로 그대들은 이들의 목숨을 노리고 온 것이오?”
 “······.”
 곽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우명산은 고개만 떨굴 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만 떨굴 뿐이었는데, 곽우 역시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바로 시선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흔히 침묵은 긍정을 의미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곽우도 십분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 경우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는 것을 곽우 역시 알고 있었다. 강한 부정이 긍정을 말하듯, 정반대의 상황 역시 있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는 길, 배웅하지 못함을 용서하시죠.”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곽우의 신형도 움직이고 있었다. 곽우의 뒤편에선 다섯 명의 사내가 멍한 얼굴로 신형을 추스를 뿐이었다.
 
 
 
 
 
 3 출항
 
 
 
 
 
 
 
 
 
 
 
 
 
 
 자박자박.
 긴 회랑을 걸으면서 장호각(長浩刻)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잘못된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뭔가가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물론 사실 무시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하나 뭔가 뒷목을 살짝 잡는 듯한 느낌, 그런 찜찜함이 드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찜찜함이 지금 장호각 자신을 이 회랑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왠지 이 사안은 그가 혼자 처리할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바로 이 회랑의 끝에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를 만나기 위해 온 길이었다.
 “아직도 경단화(硬斷靴)를 신고 있나? 이곳에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는 정보가 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이 근방 백 리 안쪽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흑룡의 깃발 아래 세상을 오시하는 대인이십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장호각이 결연한 표정으로 소리치자 사내는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역시 자네는 재미가 없어. 농담 한마디 받아주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경단화는 제 목숨과도 같은 것. 이놈의 밥줄이 농담이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됐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사내는 손을 휘휘 저으며 지루한 표정을 지었고, 장호각은 씨익 웃었다. 그가 대인으로 모시는 이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물론 이것이 장호각 자신이 하는 농담의 표현이었고 말이다.
 경단화라는 것은 그가 신는 신발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권각술을 성명절기로 삼는 자신이었기에 양 주먹의 수갑과 신발에 쇠를 넣어 갑주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움직일 땐 따가운 소리가 나는 것이었는데, 그가 대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 점을 가지고 농을 걸어온 것이었다.
 “오우도 놈들이 쓸데없이 나섰습니다. 아무래도 사음회 이놈들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군요. 정리를 좀 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우도라고?”
 오우도라는 말에 그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공중의 한 점에 시선을 던졌는데 그러던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정말 오우도가 그곳에 나타났나? 전문 살수들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아마 그놈들이 용호검(龍虎劍)에 관한 소식을 입수한 모양입니다. 당연히 그 정보는 사음회 놈들이 흘렸겠지요. 이로써 보물을 지닌 것이 세상에 알려진 꼴이니까요.”
 “그러니까 자네 생각은 지금 차도살인지계를 실행했다, 이건가? 그 사음회의 오초악(吳超岳) 그자가?”
 씨익 웃으며 사내는 장호각에게 의견을 물었고, 장호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추가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간에 사음회로선 대검문이 눈엣가시가 되지 않습니까? 더욱이 비록 연이 끊어졌다 해도 한때 대검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여인의 자식들입니다. 조금만 상황을 꾸민다면 더 이상 그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대검문의 신경이 분산될 테니까요.”
 “······.”
 “실제 알아본 바로도 지금 대검문에서는 화인당 사희의 자식들에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일단 아직까지 대검문과 사음회가 전면전은 없었다 하더라도 한 꺼풀 밀리고 나간 것은 확실합니다. 사음회로서는 크게 득을 봤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호오, 많은 생각을 했군그래.”
 짝짝짝!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박수를 치며 그는 웃었다. 그러자 장호각은 실눈을 떴는데, 이 사내의 이런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제 생각이 틀렸다면 수정을 부탁드립니다, 대인. 아무리 봐도 전 제가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장호각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생각은 확고했고 틀림이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사음회주인 오초악이라 해도 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틀렸다기보다 너무 단정적이라 그런 것이라네. 이미 결과를 다 찍어버리고 상황을 짜 맞춘다면 너무 웃기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지 않나? 그리고 그 늙은이가 그런 머리를 썼다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더욱이 오우도라고 하지 않았나?”
 “······.”
 “비록 물건을 훔치는 쥐들이긴 하지만 그리 아쉬운 게 없는 자들이야. 한데 어떻게 오초악이 움직였을까? 비록 강서성에선 좀 잘나가는 사람들일지 몰라도 사건이 일어난 곳은 상해. 그것도 상해에선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장영해의 앞마당에서 말이야. 난 왠지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의 말이 끝나자 장호각은 목울대를 크게 넘기며 침을 삼켰다. 확실히 일리있는 말이었고, 그의 말대로 될 수도 있었다. 너무 쉽게 판단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다.
 “하면 대인, 이 사안을 보고할까요? 지금 보낸다면 내일 오전이면 총단에 닿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본 련과 사음회의 연합이 잘못······.”
 “그따위 놈들이 본 련과 잘못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실 련주님이 아닐세. 흑련이란 이름이 그깟 사음회 따위에게 흔들릴 이름인가?”
 장호각은 흠칫 놀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과 함께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기도에 눌려 버린 것이었다. 장호각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잠시 긴장했다.
 “그만 여기서 떠나야겠다. 이제 그들도 움직일 테니 우리도 움직여야겠다. 준비하도록 해라, 장호각.”
 “알겠습니다, 대인. 아니, 흑룡당주님.”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장호각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 한 장면만 봐도 그가 얼마나 흑룡당주라는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는지 잘 나타나 있었는데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 흑룡당주라는 사람은 말이다.
 흑련의 흑룡당을 맡고 있는 흑룡당주 고주완(高周完). 한 자루의 묵도를 지니고 세상을 오시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한빙마도(寒氷魔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자박자박!
 따가운 소리를 내며 장호각은 신형을 움직였다. 이제 흑련이, 아니, 흑룡당이 움직일 때가 된 것이었다. 또 한 번 강호에 한빙마도의 이름이 걸리면서 말이다. 상상만으로 장호각의 마음은 벅차오르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머리를 쓴 거지?”
 장호각이 사라지고 난 후 고주완은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사음회라는 이름 따윈 애초에 없었다. 그저 강서성에 들어서는 발판, 아니,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숨기며 위협을 받느니 차라리 드러내 놓고 해보잔 말인가? 적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 속으로.”
 웅얼거리던 그는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탁, 시리링!
 낭랑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칙칙한 도 하나가 잡혀 서서히 그 도신을 드러내었다. 검은색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칙칙한 도신 하나가 그 형상을 드러냈는데 고주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그 도를 쓰다듬었다.
 “적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는다라······. 훗.”
 우우우웅!
 그저 살짝 흔든 것뿐인데 그의 검에선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주완은 오른손을 길게 뻗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원하던 바다!”
 파아아앗!
 그의 손이 채 다 뻗기도 전에 한줄기 바람이 전방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 바람의 아래 작은 실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실선은 바닥을 지나 그 위에 놓인 화강석 다탁 위에도 작은 실금을 남기고 있었다.
 시링, 타탁!
 언제 손을 썼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고주완은 도집으로 묵도를 돌렸다. 이어 그의 신형이 움직였다. 장호각이 먼저 나갔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마저 떠난 회랑엔 더 이상 인기척은 없었다. 다만 하얀 화강석 다탁만이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쩌어엉! 쿠쿵!
 육중한 파공음과 함께 다탁은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잘려진 그 단면은 얼굴을 비추면 보일 정도로 매끈한 모양이었다. 탁자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 단면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하얀 얼음이 서리고 있었다.
 
 * * *
 
 탁.
 “좋은 차로군. 오랜만에 이런 차를 맛보게 되는구나.”
 “대접할 것이라곤 이런 것뿐입니다. 송구한 마음은 오히려 제가 더하지요.”
 장운의 목소리에 자운산은 어진 목소리를 내었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있어서 장운 역시 이를 느끼곤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그럴 리가. 이런 보통 찻잎으로 이렇듯 깊은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는 중일세. 과연 자네는 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선인의 도를 깨우치는 데 있어선 나보다 한걸음 더 나선 듯하이.”
 “과찬입니다, 총관님. 아니, 일위검 장운 대협. 오랜만에 이 이름을 불러보는군요.”
 “허허허, 듣는 나조차 어색하군. 일위검이라······. 그 이름으로 불려본 지가 대체 언제인지······.”
 정말 오래전의 옛 생각을 하는 듯 장운은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고개를 들어봤자 보이는 것이라곤 어둑한 낮은 천장뿐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보는 것은 천장이 아니라 저 옛날의 추억이니 말이다.
 “한때 대검삼우(大劍三友)의 막내셨던 분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른 분들은 모두 별래무양하신지요.”
 “허허, 염려 덕분인지 두 대형은 정정하네. 그나저나 자네야말로 건강해 보이니 기쁠 따름이야.”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살짝 웃었다. 하나 왠지 그 미소는 조금씩 쓸쓸해 보이는 것이 아마도 지나간 세월에 대한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허허허, 장영해는 날로 번성하는구먼. 하나 난 지금의 내가 더 좋은 것 같으이. 골치 아픈 일은 다 잊고 싶으니.”
 “천하의 그 누구도 일위검이 다시 강호에 나선다면 긴장할 것입니다. 대검문에서야 특히 더 그렇겠지요. 지금이라도 가문의 보호자로서 대검문에 가신다면······.”
 “그깟 호법 따위가 그리웠다면 애초에 대검문을 나오질 않았을 것이네. 난 지금도 이 자리가 좋아.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
 자운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노인은 지금이라도 대검문으로 들어간다면 상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대검삼우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대검문을 세울 때 이들 대검삼우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대검문의 영역을 모두 만들어놨으며 지금 현재 대검문의 무공 체계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삼인검(三忍劍) 우경(優警), 이명검(二明劍) 윤포(玧包), 그리고 일위검 장운이 바로 그들이었다. 명호에 삼, 이, 일이 들어가 장운이 첫째 같지만 실은 우경이 첫째이고 윤포가 둘째, 장운이 셋째였다.
 우경과 윤포는 현재 어디에 있는지 묘연한 상태였다. 아마도 장운과는 연락이 닿는지 모르지만 대검문에선 애가 닳아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그건 그들 이야기이고, 이 두 사람은 바람이 되어 세상을 주유하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고 대검문도 새로운 무공을 탄생시키며 더 나은 무공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이들 세 사람의 무공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당시 이들의 무공은 일파의 장문인도 소흘히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용서하시길.”
 “용서라니, 그럴 일은 없네. 다만 궁금한 것은 있지. 대답해 줄 수 있나?”
 “···곽우 그 아이의 무공에 관한 것이겠군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장운을 보며 자인손은 살짝 웃었다. 언젠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설명을 해야 되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 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물론 해드려야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곽우는 대검문의 무공을 익혔습니다. 선풍선법을 익히고 있지요.”
 “정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째서 그 아이에게 대검문의 신법을 익히게 한 것인가? 그것도 오래전에 나왔던 원형 같은 생각이 들던데. 그저 신법이 필요했다면 상변신의 묘법으로 충분한 것을······.”
 장운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곽우의 무공을 봤을 때 놀람이 극에 달했었다. 물론 그 놀람은 선풍선법이라는 대검문의 신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 선법 모양이 요즘 새로이 바뀐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많은 변화를 거쳐 당금 대검문의 선풍선법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 연공 방법에 문제가 좀 있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다.
 선풍선법은 대검을 사용하는 사람, 즉 중병기를 다루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낸 보법이었다. 중병기를 사용하는 만큼 몸 전체의 움직임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위력을 배가하기 위해 원형의 움직임을 응용한 것인데 상변신의 묘법은 선풍선법을 익히기 위한 전 단계였다. 묘법만을 익히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는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검문에서는 선법을 익히지 않고 있었다. 이환보(理環步)라는 응용된 동작을 익히고 있는데 간단하게 원형의 움직임만을 꿰어놓은 보법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선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실 곽우는 지금 당장 대검문에 가도 그 보법 하나만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선법의 원형. 과거 세 분께서 처음 만들어낸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중병기 운용의 기본 보법이지요. 우아의 힘은 보셨다시피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 확실히 힘은 대단하더군. 그 창만 해도 삼십 관이 넘어 보였으니.”
 장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곽우의 장창은 정말 두터웠고 사실 창이라 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거대한 대검에 긴 자루를 달았다는 표현이 더 맞으니 말이다.
 “제가 아는 한 세상에 우아보다 힘이 센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 중병기를 잘 다루는 아이이지요. 해서 전 그 보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뿐입니다, 어르신.”
 자운산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자 장운은 조금은 어이없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물론 장운으로서는 여기서 끝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럼 보법은 그렇다 치고 내력은 어찌 된 것인가? 내 보기엔 내력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던데······.”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었다. 이건 자신뿐만이 아니라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내공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 아이에게 전 내력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토납법 정도는 가르쳤지만 호흡법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 아이는 그 단점을 쓸어낼 수 있을 정도의 육체적인 힘을 타고난 아이입니다.”
 “······.”
 자운산의 목소리에 장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전혀 예상한 답이 아니었다. 그냥 육체적인 힘이 강하기에 내력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만 그가 아는 자운산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강한 사람이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후, 이 사람,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군. 그런 이유를 대면 내가 납득할 것 같나? 자네와 사희 두 사람이 강호를 움직일 때부터 지켜본 사람이 나일세. 내가 아는 자운산은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닌걸.”
 “하하하!”
 조금은 어색한 자인손의 웃음이 허공에 울렸다. 확실히 조금은 궁색한 변명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였다. 자인손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비록 무공에 관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제 그릇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내력을 가르치고 그에 관련된 무공을 가르친다면 저 아이는 지금보다 나아져 있겠지만 그것이 한계입니다. 저 아이는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가르쳐야 합니다.”
 “자네의 무공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장운은 어이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물론 최고는 아니지만 준걸 이상의 인재였다. 한 자루의 장창으로 세상을 호령하고 지금도 세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건 겸손이 지나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어르신. 그 아이··· 좀 봐주시겠습니까?”
 “내가 그 아이를 가르치란 말인가?”
 상당히 뜻밖의 제안에 장운은 계속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 아이의 무공 스승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 늙은이를 놀리는 것이라면 그만 하게. 난 이제 내 한 몸 지키기도 급급한 사람일세. 이런 사람이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가?”
 손사래를 치며 그는 거부 의사를 밝혔고, 자운산은 찻잔 너머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결과가 올 것 같아서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막상 확언을 듣고 나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자네는 지금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가? 그 오우도인가 하는 친구들이 온 이유를 알고 싶어 나를 초청한 것이 아닌가 묻는 것일세.”
 “물론 그 이야기도 해야지요, 어르신.”
 자운산의 눈이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었는데 사실 그건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자운산도 나름대로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 말이다.
 “강호에 연오하와 호랑이 나왔다고 할 때부터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용호검 때문이 아닙니까?”
 “흠, 역시 알고 있었군그래.”
 예상했던 것이라는 듯 장운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긴 그가 모른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패천검에 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놀랐습니다. 그 옛날처럼 용호검을 강호에 가지고 나오게 하다니··· 허허, 정말 그 사람답습니다.”
 “풋, 그래, 정말 웃기는 녀석이지. 고집스럽기도 하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용호검에 관한 기억이 그 둘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장운은 조금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오랜만에 한번 볼 텐가?”
 “아뇨. 괜찮습니다. 반갑기야 하겠지만 좋지 않은 기억도 같이 있으니 말입니다.”
 “허허, 그럴 테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어두워진 시간. 이젠 돌아가 쉬어야 했다. 이제부터 여정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출발이 내일이라고 들었네. 그렇지?”
 “네, 어르신. 그렇습니다.”
 간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한 장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없이 신형을 돌려 방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자운산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지켜야 할 것은··· 오하와 호랑이겠지요?”
 “······.”
 장운의 신형이 멈추어졌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터였다. 과연 곽우를 비롯한 일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 물건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지켜야 하는지가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아는 자운산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괜히 묻는 것이었다. 확답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 그렇지 않네.”
 “······.”
 “나와 추국도 있다네. 우리 목숨도 같이 지켜줘야 할 것이야.”
 “훗.”
 작은 농담에 자운산은 웃었다. 그 웃음을 잠시 바라보던 장운은 미련없이 방을 나서고 있었다.
 장운이 방을 나가고 일각 정도 되었을까? 자운산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탁자에 앉아 있었다. 한데 그의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소?”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한 명이 아니라 무려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그들은 바로 오우도였다.
 “확증이 필요했소이다. 다섯 분의 도움엔 감사드리오.”
 오우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운산의 말에 호응했는데 오우도와 자운산은 상당히 친밀해 보였다. 문득 자운산의 귓가에 우명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 필요도 없는 일이었소. 귀하의 제자 분 무공은 정말 무섭도록 놀라웠소이다. 이대로 강호에 나선다고 해도 충분히 그 무위를 떨치고도 남을 정도였소. 물론 그것이 우리가 나선 이유는 아니지만.”
 우명산은 잠시 이전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다시 생각을 해봐도 정말 멋진 움직임이었다. 여태껏 그가 본 것 중 가장 멋들어진 신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우린 그만 가보겠소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없어 보이니······.”
 “도움에 감사하오이다. 나중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소. 다섯 분의 도움에 다시금 감사드리오.”
 자운산의 환한 웃음을 뒤로한 채 다섯 사람은 신형을 돌렸다. 그들도 장운처럼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 갔다.
 사람들이 다 사라진 후 자운산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제 정말로 조용한 사위 속에서 혼자 찻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 위로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