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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기어 1권 (1)

2019.08.05 조회 603 추천 3


 #작가의 글 
 메탈기어를 쓰면서
 아직 작가란 말이 전혀 익숙하지 않군요. 사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자 한분 한분이 보여 주셨던 과분한 칭찬과 애정 어린 충고를 돌아보면 지금 내는 이 책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글을 읽어 주시고 리플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넉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저의 눈앞에는 많은 양의 원고가 쌓여 있더군요. 습작의 형식으로 쓰다 보니 저의 생각과 경험이 여과 없이 반영되었습니다. 생활하면서 느낀 수많은 잔상들, 여러 관계들에서 오는 괴로움, 제 자신에 대한 생각. 그런 생각들이 뒤섞여 들어갔습니다. 제가 지금 하지 못하는 것,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해 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것. 메탈기어는 그런 저의 욕망들이 주인공인 카인을 통해 투영된 글입니다.
 장르는 퓨전판타지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아는 지인은 아직까지 국내에서 SF란 장르 자체가 비주류문학이라고 하더군요. SF는 주로 영상매체를 통해 국내에 들어와 익숙해진 것이기 때문에 SF를 판타지소설로 표현하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이런 상황에서는 다분히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저의 소설을 출판해 주신 로크미디어의 직원들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여러 친구들과 선배님들, 응원해 주신 많은 동료들. 정말 저 하나를 위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생기는 고민들을 해결해 주시던 에프-월드 폴리모프의 작가님들, 출판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신 '환생'의 루아님. 항상 소설을 꾸준히 쓸 수 있게 다그쳐 주시던 飛雷神劍님, 밀리터리 분야가 약하다고 도와주신 고중장님 고맙습니다. 연재 초기부터 많은 댓글을 달아주신 검은묵시록님, 은영님, 아크골렘님 등등. 지면이 부족해 다 적지 못하지만 많은 분들이 리플을 통해서 저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마음만큼 표현하지 못해요. 부모님, 사랑합니다.
 끝으로 주인공인 카인이 걸어가는 길을 같이 지켜 봐주시기를 바라며 비록 부족한 글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써 보겠습니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2004년 10월 최은석
 
 
 
 #프롤로그
 2049년, 3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승전국 각가의 정부는 생존을 위한 지구 통합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생태계 파괴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결성된 지구 단일정부는 황폐한 지구 환경의 복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로 인해 많은 지구의 환경이 정화되었으나 원자폭탄에 의한 방사선 오염 구역은 레드존으로 편성되어 인간의 진입이 불가한 곳으로 설정되었다.
 그때부터 5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세계 인구는 260억에 육박했다. 이러한 심각한 인구증가는 한정된 자원을 가진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전 세계에 만연한 기아와 심각한 빈부격차는 질서와 가치체계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인구증가와 자원의 고갈로 골머리를 앓던 인류는 곧 무한 공간인 우주로 눈을 돌렸다. 상대성 이론 다음으로 위대한 발견이라고 일컫는 워프 이론이 2092년 4월 12일 체이레논 대학의 한 조그만 회의장에서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지구인은 본격적인 은하계(The Galaxy)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다른 행성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이주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는 200억 이하로 줄어들지 못했다.
 결국 지구대위원회는 지구의 깨끗해진 환경을 다시 더럽히고,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빈민과 행려병자를 모두 식민행성계로 강제 이동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180년부터 5개의 워프 디스트럽터의 권역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식민지 행성으로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다. 이는 전체 지구 인구의 40퍼센트가 이민선을 탈 때까지 계속되었다.
 2203년 지구의 북반구의 겨울.
 지구의 식민지인 다섯 행성 이외의 행성 레이트파인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지구함대 14대가 격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껏 우주 내에서는 상대할 적이 없다고 오만하기까지 했던 지구대위원회는 조사함대에서 보내온 마지막 자료를 분석하고는 경악했다. 무기와 전함의 수준이 지구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정찰을 나갔던 전함이 치열한 접전 끝에 그쪽 외계생명체를 포획해 왔다.
 서둘러 조사를 한 과학자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외계생명체는 여태껏 발견되었던 저능한 괴물 수준의 생명체가 아니라 놀랍게도 인간과 99퍼센트 흡사한 유전자 구조와 외모였던 것이다. 외형상 인간과 다른 점이라면 귀가 길다는 것 한 가지뿐이었다. 거기에 인간보다 뛰어난 뇌 활용을 보인 데다가 미지의 '능력'까지 있었다.
 이에 지구보안사령부는 인간도 외계생물에 대적할 만한 뛰어난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 예전부터 진행했던 유전자 연구를 바탕으로 비밀리에 유전자 변형연구소를 세웠고 이를 '키메라프로젝트'라 명명했다. 백여 명의 고급인력이 뽑혔고 막대한 자본이 이곳에 투여됐다.
 순수과학연구소로 위장된 이 연구소의 첫 업무는 외계생물의 심층 유전자 분석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간병기를 만드는 과업이 바로 '키메라프로젝트'의 목표였다.
 "흐음 여긴가? 내가 일할 곳이?"
 커다란 검은 반중력차가 도로 위를 살며시 흐르듯 멈춰 섰다. 검은색 안경을 낀 그는 온몸을 검은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반면에 따라서 내린 사람은 얼룩덜룩한 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비밀연구소의 입구로 들어서려 하자 플라즈마건을 든 경비병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의 신분증을 본 경비들은 얼른 플라즈마건을 허리에 차고는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검은 양복의 사내는 대충 인사를 받고는, 잰걸음으로 자신의 옆을 따르고 있는 군복의 사내에게 말했다.
 "선임 연구소장이 사고사를 당한 건 유감스러운 일이네. 내가 반갑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마땅히 업무인계를 해 줄 사람이 없으니 대위가 전체적인 연구소의 상황을 설명해 주게나.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려면 그 정도의 정보는 필요하겠지?"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13년 전 건립된 이 연구소는 대외적으로는 유령 회사인 론담 제약회사의 부설 연구소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은 사유지인 이곳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또한 연구소 양쪽에 산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때문에 연구소는 상업위성의 촬영에 노출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위치합니다."
 군복 입은 사나이는 작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설명했다.
 "현재 연구소에는 연구원, 경비병 및 관리직 인원을 포함하여 총 320명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내부 실험체 약 2천여 개체, DNA샘플은 약 10만 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법 크군."
 보고를 듣고 있던 검은 양복 사내가 연구소의 문 앞에 서자, 론담 제약의 마크가 달린 반투명한 유리문은 곧장 스르륵 양옆으로 조용히 열렸다.
 "혹시 가족 분은 없으십니까?"
 "왜 그런가? 난 가족은 없네만. 가족이 없어서 문제될 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이곳 연구소 직원들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외각지대에 기숙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직원 가족들에 대한 총괄적인 관리를 합니다. 직원 기숙사에는 도청기구 및 감시카메라가 건물 당 2백여 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전부 분석되어서 이쪽으로 보고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고위간부들밖에 없습니다."
 "사생활 감시라······. 혹시 내 사생활도 감시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소장님은 이곳의 총체적인 감독이시기에 모든 감시정보들은 소장님 컴퓨터로 모입니다. 그 정도의 권한인 분을 저희가 감시할 수는 없지요."
 고개를 끄덕인 검은 양복 사내는 연구소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바쁜 듯이 부지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은 양복 사내는 건물을 시찰하며 대위에게 긴 시간 설명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집무실에 들어선 신임 소장은 조금 피곤한 듯 큰 가죽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군복 입은 사나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단정히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장님. 저는 앞으로 소장님을 보좌할 사라 로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홍차 한 잔. 그리고 연구 결과에 대한 데이터 보고를 시작하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몸을 돌리는 사라를 소장이 불러 세웠다.
 "사라."
 그녀는 흔연스러운 얼굴로 부름에 돌아봤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
 "예, 저도요. 홍차는 카페인 없는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입맛이 바뀌지 않으셨다면 말이죠, 대령님."
 소장은 냉혹한 눈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사라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프로젝트
 
 "제프만 박사님. 성장촉진캡슐에 있던 B형들이 깨어났습니다."
 수정란 3백 개 중 제대로 깨어난 것은 고작 일곱 개체밖에 되지 않았다. 거의 검증된 수정란으로 태어나게 한다고 했지만 성장촉진과정에서 괴물이 되어 버린 다수의 유전자 이상 표본들은 전부 폐기 처리시켰다.
 "제프만 박사님. 교육 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할 작정이십니까? 과정이 힘들어서 중간에 도태되는 것도 많이 나올 텐데요. 고작 일곱으로 시작했다가는 한 개체도 완성작을 못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개체를 더 확보한 후에 진행하는 것이······."
 "일단 진행해. 시간이 없다. 언제 이 프로젝트가 종료될지 몰라. DNA수정팀에서 겨우겨우 만들어낸 7개체다. 더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걸 기다리다간 시간이 너무 걸려. 연구소엔 그렇게 예산이 남아돌지 않아."
 수석 연구원은 제프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달걀 모양으로 생긴 성장촉진장치로 다가갔다.
 그 안에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궁금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옆에는 여섯 개의 똑같은 장치들이 아이들을 품고 있었다.
 "좋아. 일단은 실험 결과를 성공으로 보고해. 상부에서는 일곱이든 열이든 성공했다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성장촉진장치 안에는 이제 깨어난 소년들과 소녀들이 성장액체 속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제프만 박사는 그들을 주시하며 안경 끝을 올렸다.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개체들의 신체능력을 알아내기 위해 연구실에서는 1년에 걸친 강한 신체의 측정에 들어갔다.
 육체를 극한의 상태로 몰고 가는 체력 검증과 실험체들의 초능력 유무 실험을 했다. 초능력 소유자들에게 이어지는 뇌수술 등은 실험체들을 속속 죽음으로 몰고 갔다.
 신체 측정에서 살아남은 10살 남짓한 육체 나이를 가진 실험체들은 수년간 계속되는 가혹한 훈련을 견디다 못해 숫자가 차례차례 줄어서 6년이 지난 지금은 남성개체인 B-021호 하나만 남게 되었다.
 B-021호는 깨어난 후 철저한 지능 및 성장 검증을 받았다. B-021은 범인을 몇 배를 넘어서는 체력과 근력을 보유한 이른바 '강화인간'이었다.
 더 이상 실험체를 잃어선 안 된다는 연구소 내부의 판단 아래 초능력억제장치를 단 B-021은 깊은 관심을 받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다른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B-021 역시 깨어난 지 고작 반 년 만에 지구공용어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의 지능이 있었다.
 연구원들은 먼저 현대의 컴퓨터 조작을 가르쳤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놀라운 속도로 지식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관찰하고는 연구결과가 상당하다면서 연구원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숨 막히는 교육을 끝마친 B-021은 결국 연구소 내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케이스가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B-021을 16살의 소년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여전히 카인은 인간보다 많은 능력을 가진 실험체일 뿐이었다.
 B-021은 학습에 열정적인 모습과 실험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연구원에게는 다루기 쉬운 존재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면에는 연구소에 대한 반감을 숨기기 위한 카인의 감정 조절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2100년 워프 엔진이 발명되고 나서 지구환경과 비슷한 5개의 행성을 발견했다. 이들 행성에는 몇 가지 지능동물이 존재했는데 총 20대로 구성된 탐사함대는 그곳들의 지능생명체를 완전히 제거했다. 이 사건은 인류가 범한 큰 죄악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나는 위험을 미리 제거함으로서 우리 인류가 안심하고······.'
 탁.
 카인은 이 연구소 소장이 썼다는 '신 우주정복사'라는 책을 덮어 버렸다.
 "어떻게 이런 책이 필독도서라는 거지."
 B-021호, 카인은 '신 우주정복사'를 슬쩍 밀어두고 대신 '초능력에 대한 현대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펼쳤다.
 '···레드임팩트(Red-Impact)라고 불리는 운석 추락은 엄청난 재난이었다. ···그때 방사능에 노출되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초능력을 얻게 되었는데 이 초능력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유전이 되어 오늘까지 이른다. 아직도 이 유전자 메커니즘은 규명되지 않고······.'
 카인이 그 부분을 읽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서재로 들어왔다. 실험체 감시원 빅터였다.
 "B-021호, 학습시간 한 시간 지났다."
 "예, 알겠습니다."
 감시원에 이끌려 도서관을 나가는 카인의 귀에서 초능력억제귀걸이가 덜렁거렸다.
 카인은 원래 있던 수용소로 보내졌다.
 카인이 기거하는 지하 수용소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괴물의 모습은 전부 다 있는 곳이었다. 팔다리가 두 쌍인 사람, 머리가 둘인 사람, 온몸이 초록색인 사람 그리고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생명체도 있었다.
 "쿠에엑~!"
 "쿠륵. 쿠에엑."
 "살···려···줘······!"
 카인과 감시원이 지나가자마자 감옥처럼 생긴 긴 복도 사이로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고급실험체로 분류되는 카인과는 달리 실험 실패작으로 분류된 존재들이었다. 인간 이하의 대접, 비참한 생활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실험체들. 지옥의 한 장면이었다.
 "들어가."
 탕.
 철문 문이 닫히고 카인은 독방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감시원이 돌아간 듯 기척이 없자 카인은 간이침대의 오른쪽에 안 보이게 매달아둔 주머니 속에서 자그만 암호해독기를 꺼내 들었다. 혹시나 이곳을 빠져 나갈 기회가 있을 때 사용할 암호해독기였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카인에게는 삶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해독기를 만지는 것은 잠자기 전에 일과가 되어 버렸다.
 "스헥, 스헥"
 "흐으으 흐으으."
 옆방에서 호흡이 힘든 실험체들이 거친 숨을 간신히 몰아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암호해독기를 다시 주머니 속에 잘 갈무리한 카인은 얇은 모포를 덮고는 간이침대에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꿈이다. 발버둥치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헤어나지 못하는 악몽.
 재생력 실험이었다. 카인은 마취제 없이 진행되는 피부 표본 채취를 감당해내야 했다. 절대 맨 정신으로는 이기기 힘든 실험들이었다.
 "카인 형, 내 실험이 오늘 마지막이래······."
 한 사람이 카인의 곁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그의 몸은 거의 만신창이 수준이었다. N-12. N형으로 시작하는 실험체 중 마지막 남은 개체였다.
 "마지막? 설마! 실험이 끝나려면 한 달은 남았잖아!"
 "형··· 걱정해줘서 고마워."
 예정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카인을 위해 빙긋이 웃음을 지어 주는 N-12는 군데군데 피부조직이 떼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비틀.
 카인이 힘없이 쓰러지는 그를 안아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여기로 보내면 어떡해!"
 카인은 이를 갈았다.
 "치료 장치에 순서가 밀렸대. 이제 폐기해 버릴 실험체에 그런 배려는 사치겠지."
 카인과 N-12는 누구보다도 오래 같은 방은 써서 형제처럼 정이 든 사이였다.
 "악···아···아."
 N-12의 신음소리가 방구석에 울렸다.
 "조금만 참아.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자."
 카인은 N-12의 호흡이 희미해지는 걸 느껴다.
 "싫어, 재생되면 다시 실험대에 누워야 하는 걸. 싫···아악!"
 카인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N-12의 손을 꽉 잡았다.
 "헉헉, 카인 형, 알지. 모두 처음엔 나더러 완벽한 결과물이라고 했던 거······."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아니라··· 내가 완벽한 결과물이었어. 신체능력도 지능도··· 뭐, 초능력에서는 떨어졌지만··· 모두 나더러······, 윽!"
 "N-12!"
 N-12의 귀에서 뜨거운 붉은 액체가 흘러 나왔다.
 "···고작 노화유전자 하나 때문에 형한테 밀리다니······. 크크."
 백발이 성성한 N-12는 뼈가 앙상한 80대 노인처럼 보였다.
 "형, 내가 지어준 형 이름말이야. 카인······.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잘 지은 것 같아, 후후."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내 침대 밑에 보면···윽, 작은 주머니가 있을 거야. ···원래 음악 듣는 기계인데··· 내가 암호해독기로 개조했어. 카인 형··· 내 마지막 선물이야. 형은 꼭 탈···출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힘들잖아. 그만 말······."
 N-12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N-12··· 정신 차려! 안 돼! 안 돼!"
 팍!
 아무것도 없을 법한 공중에서 뭔가가 부딪치는 걸 느끼며 카인은 꿈에서 깨어났다.
 "휴··· 또 그 꿈이었나."
 흥건히 젖은 시트에서 일어서자 등 뒤에 땀으로 붙은 옷이 끈적거렸다. 이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여겼건만······. 힘들었다. 카인은 잠시 전의 생생했던 꿈을 떠올렸다. 꿈이라는 걸 자각하고 나서도 악몽이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N-12······.
 그는 아직도 자신의 동생이자 첫 번째 가족이었다. 잔인하게 죽어간······.
 아직 새벽 4시. 경비원들도 꾸벅꾸벅 졸 시각이었다. 카인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땀으로 축축한 이불에 몸을 뉘었다.
 연구소 관리부장의 호출이 있었다. 두 명의 감시원은 카인을 양옆으로 팔짱을 끼고는 연구소로 데려갔다.
 "데려왔나?"
 "옛! 관리부장님."
 큰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서 돌아보는 뚱뚱한 몸매의 관리부장은 카인을 의자에 앉게 시켰다.
 "곧 우리연구소는 폐쇄된다. 그러니 이곳의 뒷정리를 도와줘. 너 정도면 서너 명 몫은 해낼 수 있겠지. 미리 말해 두는데 허튼짓할 생각은 마. 여긴 전자식 폐쇄구역이니까."
 순간 카인은 희망이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연구소에서 정리를 도와주다보면 분명 탈출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 시스템이야 구멍이 있을 거고.
 "예? 실험체에게 정리를 맡긴다니요? 아무리 지금 경비병 손마저 빌릴 만큼 정리가 급하다고는 해도······."
 그때 카인을 데려왔던 감시원이 딴지를 걸고 나섰다.
 카인은 무표정하게 감시원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여간 애가 타는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다시 수용소로 끌려가면 다시 기회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B-021이 도망치기라도 하면 모두 제 책임이 되는······."
 "쯧쯧, 저놈 귀걸이가 뭔 줄 아나? 단순히 초능력억제귀걸이인 줄 알았나. 저건 반경 5미터 안을 완전 날려 버릴 수 있는 소형 폭탄이야. 거기에다가 추적시스템까지 걸려 있고.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거나 연구소 안을 벗어나면 바로 '쾅'이니까 탈출해도 상관은 없지. 저놈은 신경 끄고 딴 실험체들이나 신경 쓰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데려가 봐."
 카인은 감시원과 같이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관리부장에 있던 연구소 위치도를 최대한 눈으로 외웠다.
 그날부터 바로 연구소 정리에 들어갔다. 카인은 커다란 짐을 운반하거나 정리를 도와주면서 연구소 구석구석을 살폈다. 연구소 중심부에 배치되어 있는 실험체 수용소에서 나오기는 쉬웠다. 하지만 막상 연구소를 빠져 나가기가 힘이 든 것이다. 군데군데 보이는 경비병들은 카인이 의지를 조금씩 꺾었다.
 "이번에 완전히 성공한 실험체가 무지 예쁘다며?"
 "그래, 여자라고 하던데, 쩝······. 소장이 애지중지하는 애가 아니면 어떻게 건드려볼 만도 한데."
 "아서라 아서. 너 이상한 전염병 같은 게 옮으면 어쩔래? 아니면 네 피부가 괴물처럼 변할 수도 있잖아."
 "크~ 하긴 그래."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실험이 완전히 끝나서 모두 정리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신체적으로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나보다 완전한 결과물이 나왔다니 나 역시 폐기처리 되겠군.'
 비참한 실험체의 말로. 그건 바로 소각로였다. 하나하나 해부되고 조사하다 결국에는 고깃덩어리로 변해서 소각해 버린다. 카인으로서는 결코 사양하고픈 죽음이었다.
 "어이. B-021, 뭐해? 빨리 도와주지 못하고."
 "예, 알겠습니다."
 "얼른 얼른 일하라고! 소각로에 처넣어 버리기 전에!"
 "킥킥, 저 떠는 것 좀 봐."
 '웃고 떠들어라. 나는 꼭 여기를 탈출하고 말 테니까.'
 카인은 마음을 감추고 열심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자 처음에는 미로처럼 느껴지던 길들이 이제는 중요 시설의 지리가 어느 정도 보였다. 구석구석 숨겨진 감시카메라와 폐쇄 구역 등. 연구소는 정말 철저한 통제 아래에 관리되고 있었다. 직원 인증카드가 없으면 어느 문도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급선무는 귀에 달린 이 귀걸이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귀걸이폭탄을 해체하는 것은 관리부장의 권한이었다. 연구소를 벗어나는 것은 그 후의 이야기였다.
 '기회는 오늘 오후 관리부장의 방을 정리하는 한 번뿐이다. 기회를 잘 살려야 해.'
 카인은 수용소 안에서 음식쓰레기 같은 밥을 먹은 후 감시인의 감시를 받으며 수용소 밖을 나왔다.
 "A-10부터 40까지의 모든 실험체를 소각처리하고 왔습니다."
 "저녁에는 다음 A-41부터 60까지 실험체를 정리해. 쯧, 무슨 실험체들이 이리도 많은지."
 "무려 20년 가까이 진행된 프로젝트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 결과물이 많을 수밖에요."
 "그렇긴 하지. 음, 자네들 수고했는데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쏘기로 하지. 모두 나가자고."
 "역시 부장님이셔~. 옛! 이것만 정리하고 끝내요. B-021! 너 이거 모두 정리해라. 아참 경비병. 너, 이 녀석 잘 감시해."
 '젠장 기회인가 싶었는데 혹이 하나 붙었네.'
 "부장님 가시죠. 후식은 제가 내겠습니다."
 관리부장을 포함한 여섯 명의 직원들은 이내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젊은 경비병은 여전히 문 앞에 서서 대기했다. 기절시키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공격을 당하려는 순간 경보를 울리기라도 한다면 탈출은 고사하고 바로 죽음일 것이다.
 카인은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집기를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자··· 이 서류는 예산철에 넣고. 음······.'
 커다란 상자에 집기를 정리하다보니 여러 물건 가운데서 어떤 광택이 번뜩였다. 파일을 줍는 척하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작은 과일 깎는 칼이었다. 경비원이 잠시 한눈파는 사이 카인은 얼른 옷 안쪽에 칼을 꽂아서 들어나지 않게 숨겼다. 다행이 경비원도 눈치 못 챘는지 눈빛에 변함이 없었다.
 칼은 플라즈마건에 비하면 장난감이지만 건 같은 무기는 숨기고 다닐 수 없었기에 이 상황에선 칼은 좋은 무기였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귀걸이였다.
 '젠장,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데!'
 카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신상기록을 폐기시켜 놔야 했다. 그래야 귀걸이에 달린 폭탄과 추적 장치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이 집기마저 다 정리하고 나면 여기 관리부장실과는 영영 인연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소각로를 생각하니 입 안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카인이었다.
 "아잉, 매튜~."
 갑자기 들어온 사람은 옆 실험실의 간호사 나나코였다. 아마 저 경비병과는 연인 사이가 맞을 것이다. 기억에서 저 둘은 종종 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왜 그래? 나 지금 근무 중이야."
 "어라, 얘는 저번의 귀여운 아이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실험체들은 얼굴은 다 귀여웠어. 그지? 아차, 이게 아니지. 매튜, 어제 오늘 연락도 없고 왜 그래? 벌써 싫증난 거야, 그런 거야? 나나코 섭섭해지려고 해."
 "지금 바빠. 다음번 업무교대까지 기다려 주면 안 될까?"
 나나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이 손가락을 입술에 물고는 짓궂게 물었다.
 "진짜 단 5분도 안 되는 거야? 잠시 이야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자 경비원은 잠시 마음이 약해지는지 땀을 삐질거리더니 이내 허락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그럼 5분만이다. 야, 너 B-021!"
 "예."
 "장소 이탈하지 마. 빠져 나가거나 도망치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여기서 정리나 열심히 해. 잠시 나갔다가 올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윽고 간호사와 경비원이 나간 후 관리실내에 사람은 카인 혼자뿐이었다. 카인은 행운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얼른 관리부장의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B-021호···B-021······.'
 관리프로그램에서 B-021을 검색하자 곧 자신의 신체자료와 사진 그리고 귀걸이에 대한 제어화면이 떴다. 관리프로그램의 상위메뉴에는 사망폐기메뉴가 있었다. 카인은 그 항목을 선택했다.
 「암호를 입력하십시오.」
 카인은 겨드랑이 안쪽에 숨겨 들여온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너만 믿는다."
 카인은 암호해독기를 컴퓨터 잭에 연결했다.
 띠딕.
 암호기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핫, N-12 고맙다!'
 「8*******」
 카인은 암호를 풀어내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89A*****」
 "빨리 좀 풀어라. 제발."
 「암호를 입력하십시오.」
 카인은 인기척에 귀 기울이며 암호해독기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어서!"
 「암호를 입력하십시오. 입력 시간이 초과되면 암호가 변경되고 보안 담당자에게 연결됩니다.」
 카인은 뜻밖의 메시지에 사색이 됐다.
 '담당자에게 연결이라니!'
 「89A7****」
 '어서 풀어 내!'
 「입력 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암호가 변경되었습니다. 보안 담당자에게 연결됩니다.」
 카인은 놀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암호해독기도 에러라고 뜨면서 작동이 멈추었다.
 곧 생경한 목소리가 책상에 장착된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관리부장님, 스미스입니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카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관리부장님?'
 "경비병 메튜 창입니다. 사무실 정리를 하다가 컴퓨터를 잘못 건드렸네요, 하하하."
 '나 참, 이게 오늘 몇 번째야! 알았습니다. 컴퓨터는 이쪽에서 종료하겠습니다.'
 "아니, 곧 관리부장님이 오실 거라서 종료하실 필요는 없······."
 인터폰에 초록불이 꺼짐과 동시에 컴퓨터도 꺼졌다.
 "하······."
 카인은 앞이 캄캄했다. 말문이 막혔다. 이제 이 연구소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모든 실험체가 그러했듯 자신도 소각로에서 한 줌 재가 될 것이다. 카인은 발가락부터 서서히 두려움에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띠···띠···띠···띠.
 카인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음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지?'
 책상 구석에 있던 손바닥만 한 휴대용 손목컴퓨터에서 나는 소리였다.
 「관리부장님의 주컴퓨터 접근 암호가 변경되었습니다. 변경된 암호는 R95668Z9입니다. 18:16:47」
 관리부장이 실수로 놓고 간 모양이었다.
 카인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그 컴퓨터에서 주컴퓨터로 접속을 시도했다.
 "이야기 고마웠어. 다음에 내가 선물 하나 사줄게."
 "하하······. 일만 방해 안 된다면 말이지."
 "그럼 오늘 저녁에 또 봐."
 관리소장실로 들어온 경비병은 짐을 다 챙겨 휑한 사무실을 만족스런 얼굴로 바라보며 카인에게 물었다.
 "아무 일 없었지?"
 "일은요, 무슨."
 주위를 둘러보던 경비병은 아무 이상을 발견 못했는지 다시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는 피곤한 듯이 하품을 했다. 이로써 일단은 탈출을 위한 초석은 밟은 것이다. 카인은 밝은 표정으로 짐을 옮겼다.
 카인은 수용소의 독방에 들어앉아서 일단 내의를 찢어 끈을 만들었다. 그 끈으로 칼을 잘 묶어 허벅지에 매달았다. 언제라도 찌르고 도망갈 수 있게 했다. 관리부장 실에서 복사해온 자신의 DNA자료가 든 메모리칩 역시 주머니에서 안 빠지게 깊숙이 넣었다.
 '남은 것은 연구소 밖을 빠져 나갈 인증카드인가.'
 직원들은 인증카드를 목에 걸고 달고 다녔다. 그 직원용 인증카드를 입수하는 게 지금의 목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소장이 다시 메모리인증카드를 발급할 일은 신규직원을 받는 것뿐이었다. 폐쇄조치가 내려진 곳에 신규직원이 올 리 만무했다.
 '마지막인 내일 소장실 정리. 그 사이에 카드를 재발급할 만한 일이 생겨야 하는데. 아니면 직원이 잃어버리거나······.'
 항상 갖고 다니며 문을 열거나 하는 열쇠 같은 역할이었기에 자연적으로 잃어버리거나 손상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잠깐 직원의 인증 카드가 손상되는 경우라면?'
 결국에는 인위적으로 손상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칼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무슨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뚜벅뚜벅.
 카인은 감시원이 지나가는 소리에 얼른 누워 자는 척했다. 감시원은 카인의 독방 앞 복도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시작했다. 카인은 실눈을 조심히 뜨고는 감시원을 관찰했다.
 감시원의 가슴에는 메모리카드가 목줄에 달린 채로 있었다. 목줄이라. 목줄······.
 순간 카인의 머릿속엔 저 목줄을 잘라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목줄을 잘라낸다면? 칼로 재빨리 그어내면 잘라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인간의 눈은 자신의 목을 보지 못하는 구조니까. 빠르고 정확하게만 움직인다면!'
 감시원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자, 곧 다시 감시초소로 걸어갔다.
 슥- 팅~.
 날이 선 칼은 줄은 아주 가볍게 끊어냈다. 물론 줄도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쌈지라서 조금 가벼웠지만 메모리카드는 조금 더 무거워서 더 잘 끊어지리라.
 4시간에 걸친 노력으로 이제 거의 다섯에 네 번 정도는 스치듯이 줄을 끊을 수 있었다.
 '기회는 내일 한 번.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지금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탈출을 위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경비원이 인증카드를 재발급 받는다고 해도 소장이 암호를 풀어놓고 어디론가 자신을 제외하고 나가 있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인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순간적으로 그만한 계기가 될 것을 찾아낸 것이었다. 생각을 마저 정리한 후 긴장이 풀어진 카인은 쓰러지듯 잠을 청했다.
 연구소의 창문에서 보이는 하늘은 맑았다. 연구소 지하에 위치한 수용소에서는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실험체들은 하늘 볼 자격도 없다는 건가.'
 어느 때보타 신경이 날카로워야 함에도 카인은 오히려 두려움 앞에서 감상에 젖는 자신을 발견했다.
 "뭐해 빨리 안 올 거야?"
 카인은 서둘러 감시원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쯤이었나?'
 2층 화장실에는 화장실 전체의 환경 조정을 위한 컴퓨터가 달려 있었다. 여기 연구소는 각각의 화장실 물품 하나하나 마저 전자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걸 조종하는 컴퓨터가 있었다.
 카인은 나흘 전에 이 화장실을 우연히 이용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전체 화장실 및 연구소 메인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었다. 관리부장의 암호를 알아낸 이상 여기서 모든 컴퓨터를 원격조종할 수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소장의 컴퓨터 침입까지는 무리였다. 소장의 권한은 연구소 내에서는 신. 모든 인사관리와 실험체의 생명박탈여부까지 모든 권한을 다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윽, 저기······."
 "왜? 무슨 일이야?"
 "저기. 배가 갑자기 아파서··· 지금 윽······."
 카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호흡을 참았다. 카인은 잠시 호흡을 참으니 얼굴이 벌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씨, 못 참겠어?"
 "예, 죄송합니다."
 "빨리 들어갔다 와. 내 인내심이 바닥을 기기 전에."
 카인은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잉~ 탁.
 감시인은 문이 닫혔으니 들어오진 않을 것이었다. 화장실은 밀실이니 안심할 테니까.
 일단 들어가서 한 5초 기다린 후 카인은 팔뚝에 입술을 대고 바람을 불었다. 입술과 팔뚝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푸드드득.
 "거참. 급했나 보네. 야, 그냥 시간도 많으니까 천천히 하고 나와! 그 정도까지는 인색하지는 않으니까."
 카인은 화장실 벽면에 있는 패널을 빼어냈다. 패널 속에는 카인이 저번에 발견한 제어컴퓨터가 있었다. 카인은 관리부장의 이름을 치고는 암호를 입력했다.
 「연구소 제어프로그램 가동.」
 일단 목걸이를 끊더라도 소장을 밖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필요했다.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한 항목을 찾던 중 화재관리부분에 이르렀다.
 '화재발생이라면 소장도 밖으로 튀어나가겠지.'
 화재를 일으킬 수 있을 만한 항목은 없었다. 단지 '화재발생 모의훈련'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일단 그 항목으로 들어가자 시간 조절설정과 훈련범위조정이 나타났다. 카인은 장소를 연구소로 맞추고 시작 시간을 정했다.
 「변경완료.」
 화면상에는 신호 대기 표시가 들어왔다. 그다음 카인은 전체관리모드로 들어가서 특별경계모드를 준경계모드로 변경시켰다. 그래야 탈출이 쉬울 듯했다.
 카인은 패널을 닫고 물을 내린 뒤 손을 씻었다.
 "다 됐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빨리 올라가기나 해."
 이윽고 감시원은 등을 돌리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실험체인 자신 때문에 카드가 필요한 반중력 엘리베이터의 이용이 불가능해서 4층까지 부득불 걸어 올라가야 했다.
 90킬로의 거구인 감시원은 긴 복도와 많은 계단 때문에 힘이 드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카인은 조용히 과도를 빼어내서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게 손목에 숨겼다. 긴소매인 실험복은 칼을 숨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좀 쉬었다가 가자."
 "예,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카인은 공손한 척 두 손을 모아서 칼을 살짝 잡았다.
 저 멀리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때다.'
 "저기 오른쪽 복도에서 오시는 분. 혹시 소장님 아니십니까?"
 "어디?"
 감시인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려 사람그림자를 보는 사이 카인은 수백 번을 연습한 과도를 휘둘렀다.
 슥.
 줄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메모리 카드를 발끝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받은 후 발로 대리석모퉁이에 대고 그냥 살짝 긁었다. 돌에 긁혀 메모리의 인식 부분이 부셔져 나가는 느낌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뭐야. 그냥 부속관리실 직원이잖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이놈의 시키. 제대로 보고 다녀 헷갈리잖아."
 화재경보 시간을 30분 뒤로 해놨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니, 이게 뭐지?"
 카인은 자신이 밟은 인증카드를 집어 들었다.
 "제가 밟은 것 같은데 이거 혹시 인증카드 아닙니까?"
 순간적으로 자신의 인증카드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감시원은 정말 열 받았는지 카인의 복부를 강타했다.
 "큭."
 갑작스런 공격에 입술을 깨문 카인의 입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 자식!! 정말 가지가지하는구만. 내 인식카드를 밟아서 망가뜨려? 확, 이 녀석 바로 죽여 버려, 씨! 이거 만드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줄 알아!"
 감시원은 부서진 인증카드에 당황스러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4층을 올라갈 때까지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포기한 듯이 소장실의 호출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여자 비서의 얼굴 화상이 홀로그램으로 인식기 앞에 떴다.
 「누구십니까?」
 "소장님이 명령하신 실험체를 데려왔습니다."
 「왜 인식카드로 안 열었죠?」
 갑자기 호출해서 화가 났는지, 약간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시원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답했다.
 "실험체가 제 인식카드를 밟아서 망가뜨려서 말이지요."
 「흥. 변명은 무슨······. 재발급은 소장님의 허락을 맡아야 되는 건 아시죠? 아마 소장님도 참 좋아하실 거예요. 바쁜데 아주 잘 됐다고요.」
 "······."
 이윽고 소장실의 문이 열리면서 감시원과 카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소장실은 관리부장의 집무실과는 상대가 안 되게 넓고 으리으리했다.
 진한 원목가구와 매끄러운 대리석의 조화가 이 연구소 내에서 소장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 주었다.
 날렵한 체형의 소장이 자신의 물품들을 하나둘 조심스레 상자에 담고 있었다.
 "소장님 B-021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저기 저 훈장과 상장 있지? 옮겨서 저 박스 안에 집어넣어. 모두 귀중품이니까 흠집 안 나게 조심해서 옮겨야 해."
 대령 정도의 경력은 대단한 건지 훈장과 메달만 해도 상당한 숫자였다. 그 속에는 '신형탄두무기개발유공', '외계유전자연구유공' 등 상당히 큰 스케일들의 훈장들이 많았다.
 "저기. 소장님······."
 신경질적인 소장의 눈초리에 잠시 움찔한 감시원은 이내 다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기. 제 인증카드를 이 녀석이 망가뜨렸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문들을 통과할 수 없어서 그런데. 다시 발급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잔뜩 긴장한 감시원은 원망하는 표정으로 카인을 쳐다봤다. 최소 3개월 감봉은 각오해야 했다. 소장은 다른 건 몰라도 보안을 위해 인사채용과 인증카드 관리만큼은 본인이 직접 했다. 인증카드를 잃어버리고 소장실에 다녀온 동료들은 하나같이 풀이 죽어서 돌아왔다.
 갑자기 소장은 차가운 표정을 거두고 비웃음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앞으로라······. 그런 게 있을까."
 몸을 돌리며 소장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카인은 똑똑히 들었다.
 '이미 프로젝트가 끝났기 때문에 그런가?'
 카인은 잠시의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리 오게. 자네 등록번호가 몇 번이지?"
 "예, 제 번호는 5-367-ED입니다."
 "그건 용케 안 잊어버리고 기억하고 있군."
 소장과 감시원은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소장은 뒤의 전자금고에 가서 버튼을 눌렀다. 전자금고는 '삐-빅'하는 전자음을 내면서 열렸다. 그리고 금고 안에서 은빛 케이스를 꺼냈다. 거기에는 아까 잘라낸 인증카드와 같은 종류의 것들이 쭉 꽂혀 있었다.
 "뭐 더 부셔 버려도 돼. 어차피 내일이면 모두······."
 소장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으로만 말했다. 끝. 나. 니. 까.
 "내일의 연구소 패쇄 말이군요."
 마지막 선고를 들은 기분으로 카인의 마음은 마지막 관문에 집중되었다.
 '꼭 해내야 한다. 꼭! 반드시. 이대로는 개죽음이다.'
 "너 뭘 그렇게 훔쳐보는 거지?"
 계속 시계를 힐끔거리던 카인은 소장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아, 아닙니다."
 소장은 천천히 카인을 훑어보면서 다가왔다.
 소장에게는 다른 관리자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섬뜩함에 가까운 그 무엇.
 소장의 차갑고 긴 손가락 하나가 카인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아깝긴 하지만 쓸모는 없겠지."
 카인은 소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소장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궁금하지 않나? 네가 왜 만들어졌는지?"
 그 질문에 카인의 눈동자가 이내 차갑게 굳었다.
 삐이이~ 삐이이~ 삐이이~.
 「화재발생! 화재발생!」
 조명이 붉은 빛으로 바뀌면서 경보음이 울렸다. 드디어 카인에게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빨리 대피하세요, 소장님. 화재경보입니다."
 모든 문이 개방되고 붉은 빛이 섞인 조명은 더욱 밝아졌다. 그리고 소장과 감시원 그리고 비서인 사라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화재발생! 화재발생!」
 "빨리 내려가란 말이얏!"
 "비켜! 비켜!"
 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밑은 아수라장이었다.
 카인은 얼른 소장의 자리로 갔다. 다행히 소장의 컴퓨터는 켜져 있어서 부팅 암호를 넣을 필요는 없었다. 책상 위의 홀로그램 상으로 일단은 소장의 관리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리고 인사관리항목을 열었다.
 홀로그램에 인사기록철이 떴다. 카인은 새 임용관리에 들어가서 직원입력에 들어갔다.
 「인사데이터를 넣어 주십시오. 신체데이터 수치 그리고 DNA 수치가 필요합니다.」
 복사해둔 자신의 메모리칩이 필요한 때가 왔다. 카인은 메모리칩을 소켓에 넣고는 저장항목을 눌렀다.
 「새인물등록 저장완료. 인물의 권한설정을 해 주십시오.」
 카인은 자신의 권한을 최고권한자(Top Administer)로 설정했다. 마스터(Master) 설정은 모든 연구소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설정이 안 되고, 그 하단 항목으로 설정했다. 관리부장의 권한과 같은 급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숨겨놓았다.
 「속성 : 숨김. 다른 항목은 앞의 설정과 동일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장 및 정상적 이용을 원하시면 인증카드를 넣어 주십시오.」
 카인은 금고에서 빼낸 인증카드를 넣고 홀로그램상의 완료버튼을 눌렸다.
 「저장완료.」
 이로서 모든 준비 작업이 끝난 것이었다. 안도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메모리인증카드 자리 하나가 비는 것을 숨기기 위해 다른 카드들의 간격을 약간씩 벌려놓았다. 역시 얇아서 하나가 빠져도 별로 티나지 않았다.
 카인은 다른 기기를 원래대로 놔두고는 소장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소장실을 급히 빠져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컴퓨터 오류라니. 변명은 무슨 그따위로 대고 있어!"
 모든 일이 해프닝으로 밝혀지자 다시 돌아온 소장은 책임자를 문책하고 있었다.
 "B-021."
 "예! 소장님!"
 "내 방에서 아까 왜 늦게 나온 거야!"
 "좁은 입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입구가 좁아서 많은 인원이 밀려 대피하는데 10분 이상이 걸렸다는 점은 카인에게 상당히 유리한 알리바이였다.
 "그 사이에 도망가지는 않았으니 칭찬을 해줘야 할까. 나 같으면······. 아참, 넌 연구소 밖으로 나가면 폭발하지. 내가 깜빡했군."
 소장은 농담조로 말했지만 카인은 섬뜩해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저 소장님 제 인증카드 좀··· 만들어 주시는 게······."
 감시원의 말에 소장은 흔쾌히 긍정했다.
 "그래, 만들어줘야지. 우리 감시원도 수고하는데 말이야."
 소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서 아무 의심 없이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카인은 감시원의 꾸지람을 더 들은 뒤 수용소로 들어왔다.
 수용소 안은 이미 조용했다. 매일 수용소에서 실험체들의 방이 비워졌다. 나흘 만에 거의 모든 수용소 안의 생물이 비워졌고 그에 따라서 관리 인력도 줄게 됐다. 수십 명에 이르던 감시원이 지금은 고작 네 명으로 줄어 있었다. 다시 한쪽 구석방에서 실험체들이 쇠고랑에 묶여서 끌려나오자 남은 실험체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쯧쯧, 저렇게 앉아 있는 저 녀석도 내일이면 폐기될 게 뻔한데, 안됐어. 다른 것들은 몰라도 저건 사람하고 똑같이 생겨서 폐기할 때 좀 징그러울 것 같아."
 감시원 하나가 카인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 순간 다른 복도에서 그 감시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감시원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빅터 어차피 저놈은 내일이면 끝나니까 우리도 파티에 가자고. 자네 구역에서는 저놈밖에 안 남았잖아. 여기만 잘 잠그면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소곤거리는 소리였지만 조용했고 이미 청각도 일반 인간의 수준은 넘어섰기 때문에 카인에게는 지나치게 잘 들렸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 고생도 오늘로 끝인데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나. 자식놈들한테도 지구영주권을 준다니 이제 우리가 무슨 걱정이야.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일만 남은 거라고."
 "그렇지, 하하하."
 "소장이 준비한 이벤트가 굉장하다고 입소문이 자자하던데 자네는 뭐 들은 거 없어? 소장이 관리부장에게 하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기대해도 된다더구만."
 "지금 가서 열심히 마셔보자고. 이 연구소의 끝을 위해서!"
 "좋아. 끝을 위해서!"
 둘은 마음이 맞았는지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 연구소 내 연회장이리라.
 대략 10분 정도를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자신 혼자인 것만 같았다.
 카인은 결심을 하고 일어섰다. 카인은 감시원이 자신을 빼내 줄 때 하는 것처럼 인증카드를 전자자물쇠근처에 댔다.
 삐빅.
 전자자물쇠에서 소리가 나더니 열렸다.
 감시원 없이 이 복도를 걸어 나오니 상당히 생소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카인은 비어 있는 감시원의 컴퓨터를 검색했다. 이미 최고권한이기 때문에 카인은 거의 모든 비밀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다.
 먼저 연구소 도면을 검색했다. 구석구석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안 달린 곳은 보안이 유지되는 관리실과 감시카메라가 모인 상황실 그리고 최고의 보안이 유지되는 소장실이었다. 얼핏 수용소 내 감시카메라를 검색하니 카인, 자신의 위치에도 감시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카인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감시카메라가 아주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기에 운 좋게 아직 들키지 않은 것이었다. 카인은 얼른 다른 구획의 감시카메라의 화상과 링크시켜서 마치 다른 구획을 같이 검색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 놨다. 잠시는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한 곳을 집중적으로 촬영하지 않고 수백 대의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면서 표시되기 때문에 똑같은 장면이 2번 나와도 쉽게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연구소 도면을 다시 보니 구석구석 환기통이 연결되어 있었다.
 제일 바깥과 가까운 곳이 남직원 탈의실에 연결되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머리에 도면을 완전 숙지하고는 책상을 밟고 환기구로 올라갔다.
 좁지 않아 기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수용소 내의 혼탁 한 공기가 몰리는 곳이어서 환기구 안에는 많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서 환기구 밑의 사무실로 위치를 판가름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재채기가 나오려고 해 카인은 코를 막고 힘들게 기어갔다. 다행히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환기구는 좁아서 몸을 대고 올라가기가 쉬웠다. 등과 무릎과 팔을 대고 몸의 체중을 지탱하면서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손과 등에 땀이 맺혀서 잘 미끄러지지 않았다. 카인은 한 층을 다 기어 올라간 다음 도면상으로 외운 사무실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남직원 탈의실로 향했다.
 남직원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모두 술 마시러 간 듯했다. 카인은 조용히 환기구 뚜껑을 올리고는 조용히 내려왔다.
 탁.
 카인은 먼지가 하얗게 앉은 옷을 휴지통에 처박고는 탈의실의 직원 옷함을 인증카드로 열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놔두고 간 평상복이 있었다. 카인은 그중에서 움직이기 편한 반바지와 반팔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복도조차 사람이 없어서 한산했다. 카인은 아주 태연하게 비상구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삐빅.
 문이 열렸다.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쳤지만 카인은 아까 도면에서 확인한 감시카메라의 반경을 확인하면서 조심히 비상구까지 나왔다. 그 비상구는 주차장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차들은 전부 스포츠카 형태의 무동력 부양자동차였다.
 상온 초전도체를 이용하는 이 차들은 얇은 전자기 판이 깔린 도로밖에는 다니지 못한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카인이 어떤 차 앞을 지날 때 갑자기 차에 시동이 걸렸다. 카인은 순간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차량이라고 보고 그 차 트렁크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지금 연구소를 빠져나가려는 차는 분명 외부차량일 거야.'
 카인은 오늘 소장이 연구소에서 먹고 자고 하는 감시소 직원과 당직들을 제외하고 전부 송별회에 참가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트렁크 안으로 깊숙이 몸을 감췄다.
 "뭐야? B-021이 없어져!"
 "죄, 죄송합니다. 송별회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만······."
 "몇 시에 없어진 걸 발견했나?"
 "대략 오후 7시쯤이었을 겁니다. 와보니 문은 그대로였는데, 그냥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나 누군가가 데리고 갔나 싶어서 1시간 정도 찾아봤지만 없었습니다."
 "이런 쓸모없는!"
 쾅! 우당탕.
 소장의 발길질에 90킬로의 거구가 넘어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 그러자 약간 화가 풀리는지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연구소를 빠져나갔다면 적어도 귀걸이가 폭발했겠지.'
 소장은 그래도 미심쩍은지 다시 한 번 컨트롤러를 눌러서 등록된 모든 귀걸이를 폭발 시켰다. 아마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사라, B-021의 현재 상태를 확인해."
 비서는 잠시 자신의 손목컴퓨터를 만지더니 이내 사망이라는 표시가 뜨자 소장에게 말했다.
 "현재. 귀걸이는 폭파되었고, 기지 내에서 사망했습니다."
 "흠. 알겠다. 내 허락 없이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아주 큰 대가를 치러야 하지, 바로 목숨이라는 것. 누구든 말이야······."
 소장은 비서에게 물었다.
 "참, 직원들은 전부 다 모였나?"
 "예, 오늘 결근자도 없었기 때문에 전부 다 가족들과 함께 대강당에 마련된 송별회장에 모일 예정입니다. '그것' 역시 준비되어 있고요."
 사라는 '그것'이라는 대목에서 간교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준비가 되었단 말이지. 음. 빅터, 자네도 얼른 가보게나 가족들이 기다릴 테니."
 "예?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변한 소장의 태도에 어리둥절하던 감시원은 얼른 대강당으로 향했다.
 빅터가 나가고 나자 소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B-021이 있던 곳에 문이 고장 나지 않고 그대로였다고? 흐음. 그럼 내부자의 소행인가?'
 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카인은 어둠 속에서 두 명이 걸어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 친구,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내친김에 부탁 하나 더 함세. 도시로 나가는 길에 이것 좀 이민선단의 레이드 부장에게 전해 주게. 급한 서류니까 말이야."
 "이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닌가. 하룻밤도 안 재워 주면서. 하여튼 자네만 만나러 오면 심부름꾼이 된 기분이라니까. 다음 휴가 때는 자네가 날 만나러 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친구는 흔쾌히 가방을 받아들었다.
 "미안하네. 내일 아침 레이드 부장의 이민선단이 출발한다는 걸 오늘 알았지 뭐야. 시간이 없어서 그래. 오늘 놓치면 그 친구 두 달 동안은 만날 길이 없다고."
 "알았네, 알았어. 송별회한다고 모두 모였던데 어서 들어가 봐. 자네 처가 기다리겠네."
 순간적으로 내부가 환해지며 트렁크가 열렸다. 다행히도 둘은 서로 이야기한다고 안쪽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트렁크에 가방 하나가 넣어지며 트렁크 안은 그대로 어둠으로 침잠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카인은 참았던 긴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송별회장에는 대략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 포함해서 3백여 명 정도가 모여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흰색의 천이 깔려 있는 테이블마다 다과와 맛깔스런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아빠 이것 좀 드세요."
 "그래, 너도 많이 먹어라."
 여기저기서 즐거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긋지긋한 연구소에서 다른 사무소로 배치 받게 된 직원들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게다가 가족들과 같이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게 됐으니 더더욱 만족한 얼굴들이었다.
 수십 개의 라운드 테이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회의실 가운데는 케이크 탑이 서 있었다. 케이크 6단이 차곡차곡 올려져 있었는데 맨 위에는 엄청 큰 선물상자가 잘 포장되어서 올려져 있었다.
 케이크 탑의 금속장식이 회의실의 밝은 조명아래 번쩍이고 있었다.
 우웅~덜컹. 우웅~덜컹. 우웅~털컹.
 밖에서 격벽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파티의 막간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소장의 언질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장님 어디계십니까? 이벤트 시작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관리부장은 소장이 파티에 안 보이는 것을 보고는 손목컴퓨터를 이용해 통신을 연결했다. 관리부장의 시계는 저녁 8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이벤트 말인가? 걱정하지 말게나. 이미 다 준비해놨으니.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시작할 걸세."
 소장이 무중력 자동차의 좌석에 앉은 채 홀로그램 상으로 보이는 관리부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언제 말입니까? 혹시 저 위에 있는 큰 선물상자에 저희들의 선물이 들어 있습니까?」
 소장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
 "어찌 알았나? 역시 내 밑에서 일하더니 눈치가 늘었군."
 「하하하,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소장은 얼굴에 웃음을 짓더니 관리부장을 응시했다.
 "선물을 얼른 풀어보게. 이제 이벤트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않나?"
 관리부장은 시각을 확인했다. 시계는 21시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거기 사다리를 가져와!"
 관리부장은 왠지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불안감은?
 이윽고 2개의 사다리를 펴고는 두 명이 낑낑대면서 들었지만 들기 힘들었다.
 "왜 그래? 무거워?"
 "적어도 백 킬로는 나가는 것 같습니다."
 직원 중의 한 명이 조명장치용 천장크레인을 이용해서 선물상자를 내렸다.
 "도대체 뭐기에 이렇게 무거운 거야?"
 관리부장은 선물상자의 금속 박지를 벗겼다. 그리고는 종이 박스를 개방했다. 상자 안에는 카운트가 매겨지면서 돌아가는 원형 금속 물체가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직원이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BTX, 금속융합폭탄. 이 정도면 연구소 열 개쯤은 우습게 날려······!"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던 관리부장은 손목컴퓨터에 대고 절규하듯 외쳤다.
 "소장님!!!!"
 관리부장을 화면에서 지운 소장은 연구소 회의실 감시카메라와 연결되어 있는 차의 통신 채널을 열었다. 이미 회의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서로 구석으로 몸을 피하려고 서로를 밀치고 밟고 하는 꼴이 지옥이 따로 없었다.
 "꺄악!!"
 "문은! 문은 왜 안 열리는 거야!! 살려줘~!!"
 소장은 징그러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옆에 앉아 있던 여비서도 동조하듯 웃음을 던졌다.
 "누가 말했던가? 필요 없는 사냥개는 버리는 법이라고."
 바로 앞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던 아름다운 인형이 움직였다. 얼굴에 표정과 얼굴색의 변화가 없어 인형과 착각할 만한 소녀였다. 희디흰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다. 이 세상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엄청난 미모의 소녀는 아직 15살의 나이임에도 눈에 확 뜨이게 아름다웠다. 푸른빛 도는 긴 머리와 소녀의 흰 얼굴은 차 안의 백색조명과 어울려 더욱 그 모습을 신비롭게 했다.
 "마더, 저 모습을 보니까 어떤 기분이 드니?"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바로 그게 지켜져야 할 비밀이지. 앞으로 이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파벌의 존립 여부가 불투명해지겠지."
 "예, 알았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비서가 입을 가리고 그 의미에 대하여 웃었다.
 "사라. 물론 너도 우리 파벌의 감시자가 아니었다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겠지."
 "알고 있습니다, 소장님. 물론 보고는 염려치 마십시오. 공적은 확실히 올려드릴 테니까요."
 소장은 만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신은 용서치 않는다. 우리 진보적 군부정책이 앞으로 정권을 잡을 때 이 키메라프로젝트는 좋은 카드가 될 것이다. 크하하하!"
 홀로그램 상에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하얀빛과 함께 검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쾅!
 대략 10킬로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차 안에까지 폭발로 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런, 하필 내가 출장 중인 날에 연구소에 사고가 나다니 안타까운 일이군."
 푹신한 좌석에 기댄 소장은 미소를 지으며 피처럼 붉은 포도주 한 모금을 음미했다.
 
 
 
 #이민선단
 지구연합정부는 2180년대 20년 계획을 잡고는 이주계획을 발안했다. 빈민촌과 가난 때문에 주민세를 면하려고 주민등록을 안 했던 신원 비확실자와 범죄자 등을 우주식민지로 보내서 적응 및 생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부자들을 위해 빈곤자들을 식민지로 쫓아내려는 소수를 위한 악법이라는 여론이 들끓었으나 며칠 못 가서 수그러들었다.
 즉각 군부와 여러 사회단체에서 동조 의견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주자들의 인권보호와 생계유지비용창출 등 여러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주자들의 현실은 외계 생명체에 대한 방패막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주자들의 50퍼센트가 외계생명체 때문에 죽거나 다친다는 통계는 정부의 통제 아래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어이 레이드 부장, 여기 전출자명단이네."
 레이드라고 불린 양복 차림의 입은 사나이가 말했다.
 "어라. 월급이 많아서 전출신청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적구만."
 "그럴 수밖에. 누가 이 우주전쟁 통에 죽고 싶겠나? 자네야 외계 전함을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상관없지만, 딴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느끼니 별 수 없지. 오히려 월급이 적더라도 안전하게 지구에서 사는 게 낮지."
 "무슨 소리야? 우리는 이민선이지 전함이 아니라고. 우린 전투 근처도 가지 않아. 230대가 넘게 이민선을 운용하는데 그중에 재수 없게 외계 전함에 걸린 이민선은 이제까지 겨우 2척밖에 없었어. 디스트럽터 권내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그나저나··· 이번에 지원자가 적어서 인사과장이 화내겠는걸."
 "도시 녹지과에 가봐. 지구에서 일할 수 있다고 지원자가 몰렸어. 거기서 탈락된 인원들을 잘 설득하면 한두 명쯤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나야 뭐 건설부에서 이미 러브콜이 와서 확답을 받았으니 상관이 없네만."
 "뭐, 나는 내일 출발하니 내 후임자가 알아서 하겠지. 그럼 난 가네!"
 "어이, 두 달 후에 건강하게 보자고~."
 레이드 부장과 사내는 곧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차가 멈추는 걸 느낀 뒤에 누군가가 트렁크를 열었다. 이미 카인은 트렁크 깊숙하게 숨어서 물건으로 온몸을 가렸기 때문에 다행히 들키진 않았다. 가방을 꺼낸 그는 트렁크를 닫지 않고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확실히 간 것을 확인하고는 카인은 트렁크에서 빠져 나왔다.
 주위는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었다. 이미 공해기업들은 외곽 식민지별로 다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공해는 지구에서 거의 사라졌다. 차가 세워진 주차장 저 멀리 사람들의 군집이 보였다.
 카인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 숨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민선은 언제 출발하는 거야?"
 "몰랐어? 내일 한다던데."
 길이 아닌 잔디밭으로 걸어와도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이들은 이민선단에 타는 빈곤자들이었다. 모두 허름하고 낡은 옷을 입고 있어서 카인과 거의 구별이 가지 않았다.
 '이민선단이라······. 이민선단에 탈 수만 있다면 지구를 벗어날 수 있어.'
 직원들은 사람들을 하나씩 분류하고 있었다. 임시 등록증을 들고는 한 집단씩 묶어서는 셔틀버스로 이동을 시켰다. 줄은 의외로 빨리 줄어들어서 카인의 차례가 금방 돌아왔다.
 "음? 너는 이곳에 있을 얼굴이 아닌 거 같은데? 어디 출신이야?"
 짐도 하나 없이 맨손으로 서 있는 카인이 의심쩍었는지 직원이 찬찬히 카인을 뜯어보았다.
 꽤 큰 키였지만 햇볕 한 번 못 본 것 같은 하얀 얼굴엔 아직 소년의 느낌이 남아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청회색 머릿결과 강인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빈민촌 부랑자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힘이 서려있었다.
 카인이 굳은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자 직원은 통신기를 꺼냈다.
 "이봐요, 여기 P-3구역입니다."
 통신기로 담당자를 부르는 것을 보니 엄청 귀찮아질 것 같았다.
 '젠장, 이런 건 피해야 되는데. 어쩌지!'
 카인은 저도 모르게 칼에 손이 갔다.
 "아, 제 손자입니다."
 아까부터 뒤에서 있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말했다. 금속제 목발을 짚고 있는 것을 보니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전혀 안 닮았는데 정말 친손자요?"
 "제 아들의 처가 창녀 출신이라서요."
 "영감도 참, 애 듣는데 돌려 말하지······."
 이윽고 직원은 통신기로 담당자를 다시 호출했다.
 "담당자님 아닙니다. 일행을 찾았습니다."
 그러고는 뒤의 할아버지와 한 데 분류를 했는지 어떤 집단에 집어넣었다.
 "이제 여러분들이 갈 곳은 32호 이민선입니다.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세요. 야, 에드, 인솔해."
 에드라고 불린 직원은 셔틀버스를 부르더니 이민자들을 그곳에 태웠다.
 셔틀버스에 올라탄 직원은 딱딱한 어투로 무시하듯 말했다.
 "자, 여러분들이 생활할 곳은 32호 이민선 10블록입니다. 한 달 동안 같이 생활할 사람들이니 인사나 나누세요. 그럼 이민선에서 지킬 기본적인 수칙들을 불러 주겠습니다. 이민선에서도 다시 가르쳐주겠지만 지금 외워놓지 않으면 몸이 조금 고달플 거요."
 존대를 해 주지만 고압적인 직원의 말투에 다들 버릇이 없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카인은 자신을 데리고 탄 할아버지를 보았다. 한쪽 다리가 완전 의족이었다.
 현대 의학 기술로 체세포를 복제해 팔다리의 재생은 가능했다. 하지만 치료비가 비싸기 때문에 부유층 사람들에게만 시술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그냥 의족을 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파거슨이라고 한다. 얘야, 네 이름은 뭐냐?"
 "카인. 카인입니다."
 잠시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는 곧 카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카인이라··· 성서 창세기의 최초의 살인자의 이름 아니냐. 좋지 않은 이름이구나."
 "그래도 이름이 없는 것보단 낫겠죠."
 표면적인 대화를 나누던 카인과 할아버지에게 직원이 인식표를 나눠주었다. 번호를 보니 두 사람은 같은 방이었다.
 직원이 다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생활할 방은 거기에 적힌 방입니다. 주의할 사항은 구역 안을 절대 이탈하지 말 것. 이탈할 시에는 안전을 책임 못 집니다. 제 말 알아 들으셨습니까!"
 "예~에."
 불성실한 대답에 얼굴을 찡그리던 직원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사람들을 차례로 내리게 했다. 사람들에 휩쓸려 정신없이 셔틀버스에서 내린 카인은 자신이 타게 될 이민선을 올려다봤다. 이제 카인은 이 지구를 떠나게 된 것이다.
 수십 광년을 순식간에 워프하는, 책에서만 보아왔던 우주선을 막상 처음 대했을 때 카인은 기대감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선은 그야말로 구닥다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려 20년 전의 수송선을 개조해서 사용한다는 설명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 자, 어서 올라가."
 우주 공항의 정식출발 초전도레일이 아닌 그 옆의 예비출발 초전도레일에 우주선이 올려져 있었다. 책에 의하면 가장 기본인 워프도달속도에 이르기 위해 길게는 5킬로에 이르는 긴 초전도레일이 필요했다. 워프 거리에 따라 기본워프 도달속도 또한 각각 달랐다. 1차로 여기에서 레일 위에서 워프를 한 뒤 지구 위 무중력상태에 이른 뒤 며칠 간 속도를 가속시킨 후 2차 워프를 실시,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이었다.
 1차 워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초전도레일이 가장 중요한데, 정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예비레일 위에서 출발한다고 하니 카인은 골치가 아파왔다.
 대략 5백에서 6백 명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이민선에 올라탔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는구나.'
 카인은 생각했다.
 밖에서 볼 땐 카인이 타는 이민선이 제일 작아 보였지만 이민선 안은 보기와 달리 꽤 컸다.
 카인은 처음 타 보는 이민선 내부를 찬찬히 구경했다.
 거대한 고철 돔 같은 이민선의 내부는 상당히 더럽고 지저분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실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선전하고 너무 틀리잖아."
 "이 쾌쾌한 냄새는 뭐야!"
 카인은 자신이 지내던 지하 수용소를 생각하면서 이곳이 활기차고 신선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위잉~. 철컥- 철컥-.
 차례로 차단벽이 닫혔다.
 카인은 할아버지를 대동하고는 10블록으로 향했다. 10블록은 우주선 상단부에 있었다. 제일 마지막 구역이었기 때문에 방이 많이 남았다.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은 더 좋은 곳에서 지내기 위해 번호를 무시하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카인 역시 할아버지의 짐을 메고 일단 임시식당과 화장실이 가까이에 있는 방을 잡았다. 카인은 일단 이래야 제일 편할 것 같았다. 조금 지나고 보니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식당과 화장실이 가까우니 할아버지가 편할 것이었다.
 '10블록 24창고라. 아마 이 이민선을 나갈 때까지 내가 지낼 곳이 되겠지.'
 처음으로 자신이 지낼 곳을 선택한 카인은 낯선 주변을 구경하느라 피곤함에도 정신이 맑아졌다.
 "모두 조용~! 조용!"
 여승무원은 어수선한 이곳을 조용하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시끄러워서 그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쾅!
 여승무원은 마침내 인내력이 다 됐는지 플라즈마 핸드건을 꺼내더니 천장을 향해 쏴 버렸다.
 그 시끄럽던 말소리가 싹 멈추면서 두려운 눈으로 모두 그 직원을 응시했다.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예!"
 뚜벅뚜벅.
 여승무원의 구두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중에서 구역장을 정합니다. 구역장은 여기 관리를 맡을 것이며, 구역장을 특별대우를 해줄 겁니다. 하실 분 없습니까?"
 특별대우라는 소리에 5명 정도가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총을 무서워하는 건지 나오는 폼이 어기적거렸다. 갑자기 가만히 있던 옆의 할아버지가 카인의 등을 떠밀었다.
 "나가거라."
 "예?"
 "얼른 나가거라. 이런 일은 기회가 된다. 일을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짐짝 취급은 받지 않겠지."
 카인 역시 할아버지의 말에 긍정을 하고는 앞으로 나왔다. 일단 구역장이라니까 특별대우는 확실히 해 주겠지.
 마지막으로 한 명이 더 나오자 총 10명이 되었다.
 "이중에서 글을 모르는 사람은 도로 들어가 주십시오."
 대충 6명이 망설이더니 빠져 나갔다.
 남은 이민자를 훑어보더니 다시 승무원이 말을 걸었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분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앞으로 나온 사람은 약간 어눌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카인밖에 없었다.
 "흐음, 두 명이나 있다라··· 너!"
 여승무원은 갑자기 손가락으로 카인을 가리켰다.
 "예······."
 "네가 제일 똑똑해 보이니까 네가 구역장을 맡아. 그리고 그 옆은 부구역장을 하세요. 구역장, 이름이 뭐지?"
 가까이 보이는 그녀의 생김새는 자부심강한 젊은 미녀. 그런 느낌이었다.
 "B, 아니 카인입니다."
 "그래, 카인. 이제 10구역의 인원을 파악하고 위치를 이 컴퓨터에 기록해서 가지고 와. 할 수 있겠지?"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민자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는 카인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이런 이민자들 사이에서 끼여 있을 얼굴이 아닌데. 하여튼 좋아. 오늘 저녁에 밥 먹고 나를 찾아와서 전해줘. 그리고 부구역장 아저씨도 도와주세요."
 "예."
 심하다 심을 정도로 뒤로 질끈 동여맨 금발머리와 가는 은테 안경이 그녀를 깐깐하게 보이게 했다. 다르게 말하면 아주 도도해 보였다.
 "불성실하게 일할 경우 바로 다른 사람에게 구역장과 부구역장의 자리를 넘겨 버릴 테니 그렇게 아세요."
 "예. 알겠습니다."
 "카인, 1시간 뒤에 출발이니 전원 제자리에 앉혀. 저녁까지 시킨 일 마무리하는 거 기억하고."
 여승무원은 휙 고개를 돌려 곧 승무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올라가 버렸다.
 「곧 워프를 시작합니다. 모두 자리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모두들 자리에 앉아서 불안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밖을 볼 수 없었으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출발합니다. 자리에서 이동하지 마십시오. 다칠 위험이 있습니다.」
 우우웅······.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오더니 몸이 뒤로 많이 쏠렸다. 점차적으로 가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스스슥. 쿵!!
 여기저기서 짐들이 미끄러지고 충돌을 일으켰다. 짐이 넘어지고 몸이 뒤로 쏠리는 것에 놀라 여러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앙앙 엄마~!"
 "괜찮아, 괜찮아."
 점차적으로 뒤로 몸이 더욱 쏠렸다. 가속 속도를 더욱 붙이는 것이었다.
 「워프시작 10초 전. 9. 8. 7. 6. 5. 4. 3. 2······.」
 온몸과 벽들 그리고 모든 물체가 빛을 뿜어내는 것 같이 환해지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카인은 가속이 없어지자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워프완료. 탑승자들은 개인 업무를 보셔도 좋습니다.」
 안내용 멘트가 나온 후 다시 블록 안은 워프에 이리저리 나뒹군 짐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으로 부산해졌다.
 이민선에 탄 후 막막한 앞날과 현실감 없는 환경에 머리가 복잡해지자 카인은 일부러 여직원이 시킨 일을 하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카인은 10구역 배치도에 입력을 마쳤다.
 "조사 끝났습니다. A구역 24명. B구역 22명 총46명이네요. 그리고 배치도는 이게 맞죠?"
 카인은 자신이 만든 배치도를 부구역장에게 핸드컴퓨터의 홀로그램으로 보여 주었다.
 "맞겠지, 뭐. 자네가 알아서 보고해."
 부구역장은 어눌한 면이 있었다. 상당히 답답해 보였지만 그래도 순박하게 보였다.
 "그럼 이걸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핸드컴퓨터의 함선지도대로 여승무원 대기실로 찾아갔다.
 이민자들이 지내는 창고 쪽 부분만 낡고 후졌을 뿐. 직원이 다니는 통로는 깨끗하게 리모델링 되어 있었다. 주위를 살피면서 걸어가니 금방 여승무원 대기실에 도착했다.
 '음··· 이름이? 이름을 들어둘 걸 그랬나? 뭐 분위기 상 이름을 물어볼 수 없었으니까.'
 컴퓨터의 주인을 확인하니 '마리 앤 타일러'라고 나왔다. 구석구석을 뒤지던 카인은 마리라고 음각되어 있는 대기실을 찾아서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왕."
 아까와는 달리 왠지 무방비한 얼굴에 머리를 푼 마리라는 여승무원이 빵을 문 채로 우물거렸다. 안경 하나 벗었을 뿐인데 처음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사람이 달라보였다.
 "아까··· 같은 사람?"
 "그런 말은 여자에게 건 실례다, 아이야."
 왠지 아이란 소리에 울컥하는 카인이었다. 카인이 자세히 보니 처음에 20살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이제 고작 18살 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구역장이지?"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는 다 했어?"
 마리는 입에 든 빵을 완전히 씹어 삼킨 다음 그대로 꿀꺽 삼켰다.
 "예."
 카인은 마리에게 핸드컴퓨터를 내밀었다.
 "오호, 빨리 했네. 좋아, 좋아."
 돌아서는 마리에게서 아주 시원한 향기가 났다.
 마리는 컴퓨터를 탁자에 놓더니 풀어 헤친 머리를 뒤로 묶었다.
 "구역장은 담당구역을 책임 져야 하는 거지. 물론 책임이란 이 구역 내의 모든 분쟁을 조정해야 되는 건 물론이고 배당되는 물자의 보급 등등 여러 가지를 나서서 해야 해. 그리니까 절! 대! 간단한 게 아니야."
 여자가 담담한 얼굴로 긴 머리를 쓸어 올려서 묶는 모습이 카인에게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뭘 그렇게 봐?"
 마리는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카인에게 뭔가를 던졌다.
 카인은 엉겁결에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운동신경 좋은데. 함내 생활에 대한 설명서니까 읽어둬. 그리고 너 열여덟, 열아홉?"
 태어난 지는 고작 6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성장 액 속에 담겨서 10살 정도까지 성장한 카인으로서는 16세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열여섯 살입니다."
 "잘 부탁 해, 구역장 씨. 아무래도 한 달간 계속 얼굴을 봐야 할 테니까. 에휴, 난 이제 건방진 상사들에게 올려야 할 보고서나 작성해야겠다."
 마리는 카인이 조사해 온 데이터를 분석해서 아까 작성하다만 인원보고서에 추가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참 수치와 씨름하던 마리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카인이 여전히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
 "왜? 뭐 더 할 말 있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안 가고?"
 "가란 말씀을 안 하셔서······."
 "뭐?"
 마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잠시 카인을 쳐다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너 참 재밌는 애구나. 그래, 이제 그만 가봐."
 카인은 왜 마리가 웃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 후 마리라는 여승무원은 카인을 자주 불렀다. 일거리는 늘었지만 모포나 간식 등 여러 가지를 얻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카인은 불만이 없었다.
 마리는 여전히 머리를 꽉 틀어 올리고, 안경 쓴 모습으로 업무를 보았다. 카인이 안경을 벗는 게 더 낫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당하기 싫다는 이유에서 계속 나이 들어 보이는 안경까지 쓰고 다녔다.
 카인은 그날도 마리에게 얻은 여러 음식을 품에 앉은 채로 창고의 방으로 가고 있었다. 저 멀리 복도에서 9구역의 문제아인 스미스 패거리가 카인과 동행인 할아버지를 툭툭 치며 끌고 가고 있었다.
 스미스 일행은 사실 건달패 중에서도 질이 나쁜 축에 속했다. 이번 이민자들 사이에서 낀 것도 단지 전재산을 가지고 가는 이민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볼까 해서 선택한 길이었다.
 구역장을 지원자로 뽑아 버린 9구역 담당 직원 때문에 스미스는 9구역의 구역장이 되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스미스는 10구역의 구역장인 카인에게 자신의 패에 들어오라고 협박했다. 자신들의 창고로 끌고 가 카인을 여러 번 위협해 봤지만 어려보이는 카인은 의외로 배짱이 두둑해서 몇 대를 맞아도 우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오히려 10구역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자기보다 어린 카인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것이 분했던 스미스는 그 복수를 하기 위해 오늘 카인의 할아버지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었다.
 "거기 서!"
 카인은 음식을 던져두고 파거슨 할아버지를 끌고 가는 스미스 패거리를 쫓아갔다.
 쾅!
 카인은 9구역의 창고 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스미스!"
 카인이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목발을 손에 든 채로 자세를 잡더니, 갑자기 스미스 패거리가 팔 다리를 잡으며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다.
 구경하던 주위의 9구역 사람들은 갑자기 스미스 패거리들이 쓰러진 것에 대해 의문스러워했다. 하지만 동체시력이 좋은 카인은 스미스패거리에게 날아가는 수십 개의 목발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미 며칠을 같이 지냈지만 카인과 할아버지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 모르는 게 많은 게 아니라 아는 게 없다는 게 옳았다.
 카인은 묻는 말 이외에는 나서서 말하는 게 익숙지 않았고, 할아버지 역시 같은 태도라 대화가 오간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비틀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할아버지!"
 카인이 쓰러진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파거슨은 많이 힘든지 희게 샌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갑자기 무리해서 움직인 것이 쓰러진 주원인인 것 같았다. 카인은 할아버지를 업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카인은 물수건으로 할아버지 이마에 식은땀을 닦아드렸다.
 마리에게서 얻어온 해열제와 피로회복제를 할아버지를 잠시 깨우고는 입에 넣어드렸다.
 "으음."
 카인은 오랫동안 할아버지 머리에 맺힌 땀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할아버지는 점차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
 '만일 할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신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연구소를 도망친 날 다시 잡혔을지도 모른다. 지구를 떠나 이렇게 멀리 도망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말을 안 했지만 자신을 실험재료가 아닌 한 명 인간으로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눈빛은 카인에게 큰 힘이었다.
 '할아버지가 심어준 안정감, 포근함······. 그런 감정을 잃는다면 난 어떻게 될까······.'
 카인은 생각하기도 싫은 생각에 눈물이 울컥했다. 카인은 눈물을 참으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다.
 어느새 카인의 꿈은 N-12호와 처음 만났던 연구실 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성장액에 들어가 있었으니 실제 몸의 나이는 나보다 많겠네?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되지?"
 N-12는 약간은 오만하면서도, 그것이 밉지 않은 예쁜 소년이었다.
 "그래."
 "훗, 드디어 형이 생겼다."
 N-12는 연구실을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카인이 느껴지는 행복감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주변은 연구소의 오래된 수용소 내부로 변해있었다. 장난스럽던 N-12의 모습은 어느새 삭아진 할아버지의 얼굴로 변하며 침대에서 떨고 있었다.
 "N-12. 일어나봐!"
 "헉···헉··· 이제는 더 이상 앉아 있질 못하겠어."
 입술을 깨문 카인은 이내 일어나서 항생제로 향했다. 거의 구겨진 얇은 알루미늄 통에서 항생제 반쪽이 떨어져 나왔다. 항생제가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카인의 눈앞에는 하나의 커다랗고 투명한 통이 놓여 있었다.
 검시되어 잘려진 머리······. 그것이 선홍빛 보존액 속에 담겨져 있는 N-12호의 머리였다. 카인은 뒷걸음 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그 순간 N-12호의 늙은 머리에 달려있는 눈이 번뜩 떠졌다. 그리고는 절대 말을 할리 없는 보존액 속의 N-12호의 머리가 입을 열어 말했다.
 "살ㆍ아ㆍ남ㆍ아ㆍ."
 "으악!"
 카인은 놀라서 깨어났다.
 할아버지가 이불을 카인의 어깨에 덮어 주고 있었다.
 "조금 더 자거라,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헉헉, 할아버지······."
 파거슨은 주름진 거친 손으로 카인의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쁜 꿈을 꾼 게로구나."
 두려움에 질려 있는 카인은 아무 말도 못했다. 아직도 눈앞에 N-12호의 끔찍한 잔상이 남아있었다.
 "괜찮은 게냐?"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파거슨은 목발을 내려놓더니 간이 의자 대신 갖다놓은 푹신한 박스에 앉았다.
 "예전에 한 고아가 있었단다."
 그는 카인의 눈빛을 읽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족도, 친척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정말 천애고아였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살기가 더 힘들었다. 다섯 살 때부터 한 끼 먹을 것을 찾아 하루 온종일 돌아다녀야 했지. 빈민촌의 여러 패거리들과 전전하는 동안 손버릇도 나빠지고 결국 소년의 티도 벗기 전에 구치소에 들락거렸다······."
 카인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 듣고 싶니?"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매우 아픈 날이 있었지. 며칠 굶은 상태였고.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 없는지라 훔칠 수도 없었지. 구걸하러 나갈 수조차 없었다. 그땐 정말 이렇게 누워서 죽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누가 날 거두어 준거야. 빈민촌을 호기심에 구경하러 왔다가, 도망치는 자신의 개를 잡기 위해서 들어온 그 사람이······. 나에겐 정말 운명 같은 만남이었지."
 탁한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명의 은인인 이 사람을 진심으로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사람은 유명한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훌륭한 검객이었어. 검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아까 할아버지가 그런 뛰어난 검술을······."
 "필사적으로 배웠다. 이 길이 나의 길이라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시고 도장 계승권을 두고 암투가 벌어졌어. 나는 그분이 세우신 곳이 이권다툼으로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거기를 나왔다. 그리고 바로 군에 지원을 했지."
 "군이요? 연구소를 지키는 그런 사람들이요?"
 카인은 물었다.
 "아니, 그런 사설 경비병 말고 진짜 우주전투에 참가하는 군인 말이지. 그때는 군인이 되어 우주로 나간다는 것이 엄청 부러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공을 세우면 신분도 보장받을 수 있었고. 메탈기어에 탄 나는 당시에 꽤나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
 "메탈기어가 뭐예요?"
 "2족 보행 로봇이란다. 아직 한 번도 못 봤니?"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12미터의 키를 가진 아주 커다란 로봇이란다. 거기에 타고 있으면 세상 무서울 게 없었지."
 희미한 미소는 지으며 젊은 날을 회상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내가 승승장구할 때는 파거슨 대령님, 파거슨 대령님하면서 칭송을 받았지. 하지만 준장 승진 전에 나갔던 마지막 전투에서 음모에 휘말렸단다. 나를 시기하는 다른 파벌의 소행이었어. 간단한 작전에 투입된 나는 적에게 누출된 정보로 인해서 크게 지고 말았다. 내 부대원들은 거의 전멸해지. 그 전투에서 난 다리를 잃었다. 작전 실패로 돌아와 보니, 난 어느새 적의 첩자로 몰려 있었지."
 할아버지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군사재판이 끝난 후였어. 난 메탈기어를 타고 우주전쟁에서 공을 세운 시간보다 더 오래 감옥에서 지냈다."
 할아버지는 다가와 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민선을 타기 전에 두려움에 떨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너를 보니까 굶주림에 힘들었던 내가 생각나더구나."
 "전 쫓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생각할 틈도 없이 서둘러 나와 버린 카인의 말에 할아버지는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웃음 지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정말 쫓기고 있지 않습니다, 전 정말······."
 카인의 눈이 두려움으로 일렁거렸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요."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카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퍼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니라 아파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괜찮다. 괜찮다. 때로는 태어난 게 형벌일 때가 있다."
 카인은 울음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너도 많이 힘든 삶을 살았구나. 내가 도와주겠다. 네가 강해지도록 내가 받았던 도움을 너에게 주고 싶구나."
 파거슨은 가슴으로 울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록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삶이지만 은혜를 갚고 갈 수 있다면 그리 나빴다고 할 수는 없겠지.'
 "으득, 그 자식들. 감히 이 마리님 구역에서 싸움을 걸어와?"
 10구역 담당직원인 마리가 9구역 담당직원인 빈스에게 스미스 패거리를 징계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빈스는 모른 척했다. 스미스 패거리들이 자신들이 빼앗은 돈을 뇌물로 넣은 것이었다.
 마리는 열 받아 두 눈을 부릅떴다. 마리보다 직위가 높은 9구역 담당자는 오히려 스미스가 크게 다쳤다며 파거슨을 징계하라고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마리는 주먹을 꾹 쥔 후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탁.
 "움직이지 마라!"
 파거슨의 목발이 카인의 발목을 쳤다.
 카인은 할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검술은 동양검술의 중국계통이라고 했다.
 오래된 무협영화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무공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카인은 믿어 주는 척했다. 할아버지는 기술들이 실전이 되서 지금은 단지 검을 쓰는 기술만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말했다.
 "일단 기본적인 자세부터."
 카인은 파거슨의 지도 아래 함선의 재료창고에서 구해온 막대기를 가로로 빠르게 허공을 베었다.
 "아냐. 아냐. 속도는 고르게. 하지만 동작은 깔끔하게 해!"
 카인은 파거슨의 지도에 따라 마음 비우고 지도에 따랐다.
 대략 일주일이 지나자 기본 동작 면에서는 군더더기가 없다고 파거슨은 카인을 칭찬했다.
 마리는 함장실 앞에서 면담신청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9구역 담당직원 빈스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 옆에 앉았다.
 "정말 스미스 일을 보고할 거야? 그냥 덮어두자고. 우리끼리 고자질해서 득 되는 게 뭐가 있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스미스가 감옥에 가면 자신이 뇌물을 받은 것도 들통 나기 때문에 빈스는 마리가 정말로 함장에게 보고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스미스는 분명 폭력범이에요. 지금도 스미스 부하들이 계속 이민자들 주머니를 털고 있잖아요. 우리 구역에서도 얼마나 항의가 많은 줄 알아요! 식민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감옥으로 이송되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전 지금 고자질하는 게 아니라 신고를 하는 거예요."
 딱 부러진 마리의 태도에 빈스도 슬슬 열 받았다.
 "그래, 맘대로 해. 근데 이건 알아둬. 스미스를 감옥에 보내면 카인이란 녀석도 감옥에 가게 될 거라고!"
 카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리는 깜짝 놀랐다.
 마리와 카인은 같이 일을 한지 어느덧 3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로 만날 기회가 많아서 두 사람은 어느덧 누나, 동생 하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카인이 여기서 왜 나오죠? 스미스를 때린 건 파거슨 씬데! 물론 파거슨 씨는 정당방위였고요."
 "몰라서 물어. 오늘 아침에 카인이란 놈이 스미스랑 친하게 지낸 사람들을 모두 아작 냈단 말이야! 못 믿겠으면 의무실에 가봐. 다친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
 "뭐라고요!"
 놀란 마리는 서둘러 의무실로 달려갔다.
 9구역 담당직원 말처럼 스미스를 따라다니면서 돈을 뜯어내던 인간들이 하나같이 깁스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이 부러져 말이 아니었다.
 "봐, 정말이지! 이제 어쩔 거야. 이래도 함장님한테 보고할 거야!"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참에 이 사람도 징계 받게 할 생각이었는데, 카인 바보.'
 9구역 담당자는 의기양양하게 마리를 쳐다봤다.
 "10구역 구역장인 카인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스미스가 한 일은 새발에 피라고. 이제 서로 덮는 게 좋겠지."
 마리는 싸늘하게 9구역 담당자를 쳐다봤다.
 "이렇게 일이 커졌으니 보고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가 없게 됐군요."
 이렇게 말하며 휙 몸을 돌리는 마리를 9구역 담당자가 얼른 잡아 세웠다.
 "아니, 정말 보고를 할 셈이야!"
 "9구역 담당자가 이제까지 받은 뇌물을 다 돌려주고, 스미스 패거리를 특별관리대상으로 신고하면 좋게 넘어갈 수도 있겠죠. 잘 생각해 보시고 연락주세요."
 9구역 담당자를 등지고 이동레일에 올라탄 마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키는 일만 하는 순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카인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마리는 허리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카인은 파거슨의 지도로 검술을 맹연습 중이었다.
 "그 부분에서 스피드를 살려!!"
 "연계동작이 왜이래? 그 다음에는 감아서 올려쳐야지!"
 단계가 올라갈수록 파거슨의 지적은 매서워졌다.
 "빨리······. 쿨럭··· 아니다 계속해라."
 파거슨은 가르칠 때는 정정한 척했지만 카인이 보기에도 건강이 안 좋은 게 눈에 보였다.
 "할아버지 그만 쉬세요. 제가 혼자 연습할게요."
 "그래. 그럼 그래라. 나는 조금 쉬어야겠다."
 파거슨은 검술연습을 하던 창고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사방 20미터의 공간에 수십 개의 흔들리는 실에 동전만 한 과자표적이 달려 있었다. 카인은 긴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합-!"
 기합을 내지르며 과자표적들을 향해 목검을 뻗었다.
 '하나, 둘, 돌면서 셋, 넷.'
 팍! 팍! 팍! 파파파박!
 카인의 신체 움직임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이미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서 몸으로 바로 보고 과자를 치고 있었다. 한 번씩 검이 지나갈 때마다 검로에서는 과자의 비가 쏟아졌다.
 팍!
 온몸을 비트는 스텝으로 마지막 과자를 돌려 찌르기로 부순 뒤 한숨을 돌렸다.
 "휴우~. 이 정도면 오늘 연습은 됐을까나?"
 뽀스락.
 누군가 과자부스러기를 밟았다. 뒤를 돌아보니 마리였다. 마리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대단하다··· 카인."
 '윽. 만들어준 과자를 이렇게 쓴다면 엄청 화낼 텐데.'
 "대단해~ 대단해~."
 마리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카인은 머쓱해져서 고개를 긁적였다.
 카인이 스미스 패거리를 손봐준 일을 추궁하러 온 마리였지만 막상 역동적인 동작을 끝내고 땀에 절어 서 있는 카인을 보니 화는 멀리 날아가고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마리였다.
 띠띠띠.
 그때 마리의 핸드컴퓨터가 울렸다.
 "예? 10구역의 난간이 조금 이상하다고요?"
 수송선을 개조한 이 이민선은 오랜 기간의 항해로 인해 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에 일부 난간이 삐걱거리니 고쳐달라고 마리에게 부탁이 들어왔다.
 마리는 카인과 함께 10구역 4층으로 올라갔다.
 흔들흔들.
 난간은 사람이 많이 지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위태롭게 봉 하나에 의지해 걸쳐있는 수준이었다. 그 봉도 불안정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민선이 너무 오래 되서 고칠 곳이 한두 군데라야 말이지. 근데 여긴 좀 심하다."
 "통행금지 푯말을 붙여야겠군요."
 "훗, 너도 이제 조금 구역장 티가 나는데."
 마리의 말에 카인은 싱긋 웃었다.
 마리는 가져온 핸드컴퓨터에 전자펜으로 몇 가지를 쓴 후 이내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끼익.
 듣기 싫은 쇳소리가 모두의 귀를 찢어지게 울린 후 무언가 마리와 카인이 서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퍽퍽퍽.
 그것은 바로 천장에 매달려있던 거대한 철판이었다. 우연찮게도 오래되어 부식된 구조물이 마침 마리와 카인이 이곳을 둘러보고 있던 도중에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피해!!"
 카인의 괴물 같은 순발력은 마리를 고작 1, 2초 만에 떨어져 내리는 육중한 무게의 철판에서 피하게 했다. 하지만 몸을 날리기에는 통로가 너무 좁았다. 마리의 몸을 밀치면서 철판을 피한 순간 카인과 마리는 부서진 난간을 뚫고 4층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젠장!!'
 카인은 그 짧은 순간에 팔을 뻗어서 난간이 부서져 돌아 튀어나온 지지대를 잡을 수 있었다. 그 반동으로 인해 마리가 끼고 있던 안경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져 내린 안경알은 높이로 인해 그대로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까악!!"
 마리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카인과 마리는 공중 15미터 정도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상태였다. 마리는 공포심이 번져있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은 한눈에 보기에도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다.
 우드득.
 두 사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잠시 견디던 봉이 봉채로 부러져 떨어져 내렸다.
 "악!"
 마리의 비명소리가 긴 선을 그리며 그대로 바닥으로 꽂혔다.
 퍽!!
 카인은 15미터에서 떨어져 내리는 순간 마리를 안고 자세를 잡아서 바닥에 착지했다. 15미터에서 떨어진 충격은 마리와 카인을 엄청난 속도로 바닥을 구르게 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벽에 부딪쳐 둘은 멈춰 섰다.
 마리는 살며시 눈을 들어 자신과 그리고 자신을 안고 있는 카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이 무사한 것을 본 마리는 떨어져 내린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윽."
 카인의 팔은 마리를 보호하며 구르는 도중에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데군데 바닥의 요철로 인해 찢어진 상처도 눈에 띄었다. 물론 공중 15미터에서 방향을 바꾸는데 일조를 한 카인의 무릎과 발목도 온전치는 않았다.
 "어서 의무실로!!"
 서둘러 들것을 가져온 다른 사람이 카인을 들것에 싣고 의무실로 이동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카인.'
 마리의 두 눈은 걱정으로 흐려졌다.
 요즘 마리는 주위사람들에게 변했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예뻐졌다는 칭찬을 받는다는데, 카인이 보기에도 예전의 깐깐함이 거의 사라졌다. 카인의 충고대로 그동안 써왔던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벗고는 변형단백질 콘택트렌즈를 껴서 그런지 한층 귀엽게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줄기차게 안경 벗고, 화장을 옅게 하라고 했던 말은 씨도 안 먹히더니, 10구역에서 함께 당했던 사고 이후에는 카인의 말은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리는 요즘 카인에게 호감 있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왠지 카인은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아직 그런데는 익숙하지 않아 단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자 이번에도 손수 만든 과자. 이번 거는 절대! 부수지 마. 알았지?!"
 마리는 일이 있다고 바로 어디론가 갔고 카인은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겨드리기 위해서 임시 식당으로 향했다.
 진검의 하얀 검광이 번뜩였다.
 가가긱!
 "실패야. 하지만 이걸 가르쳐주기 위해서도 성공해야 해."
 두 번째 검이 쇠파이프에 작렬했다.
 가가긱! 팅.
 "실패··· 하아. 하아··· 하아······."
 털썩.
 파거슨은 갑자기 어지러워져 몸을 휘청하더니 풀썩 땅에 쓰러졌다.
 "아주머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밥 주는 로딘 아주머니가 싱글벙글하며 밥을 가득히 담아주는 것이었다.
 "으응, 오늘 내 아들 생일이야~."
 로딘 아주머니가 퍼 준 밥에는 좋은 기분까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카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양손에 식판을 들고는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자신의 방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모여 있었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저기 잠시만 비켜 봐요."
 파거슨 할아버지가 문턱에서 피를 토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할아버지!!"
 식판이 나동그라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안타깝지만 이미 늦으셨습니다. 전 장기에 암세포가 퍼져 있습니다. 이미 분리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정말 1년만 빨리 오셨어도 완치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왜 이제 오신 겁니까?"
 함선 안의 주치의가 말했다. 카인은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이 상태로 방치해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제길!"
 쾅.
 카인의 주먹에 치료실의 캐비닛이 찌그러졌다. 주먹질에 화가 풀려야 되는데, 오히려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자신의 피 마냥 아주 뜨거웠다.
 "하아앗!"
 할아버지의 진검이 카인의 손에서 휘둘러졌다.
 치캉!
 역시나 쇠파이프는 잘려지지 않았다. 단지 약간의 흠만 생겼을 뿐이었다. 그 정도 두들겼으면 일반 철검은 이가 나가거나 칼날이 뭉그러질 때도 됐지만 이 검은 멀쩡했다. 할아버지가 군에서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선물 받았다던 초고강도 합성 섬유체로 된 이 검은 극세밀 반도체 공법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강도는 뛰어났어도 날카로움은 그냥 일반 철검과 같은 수준이었다.
 치캉!
 역시나 이번에도 실패를 했다.
 검술자세나 연계공격 등은 다른 사람보다 현격히 높은 지능과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조건 등으로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경험과 감이 필요한 이런 것은 카인으로서도 금방 해낼 수가 없었다.
 '역시 수십 년을 수행한 검술인들이 할 수 있는 기술을 단지 한 달간 바짝 배웠다고 해낼 수 있는 없겠지. 하지만 해내고 싶다!'
 뎅그렁.
 "젠장!"
 답답한 마음에 카인은 칼을 내던졌다. 이건 베는 게 아니라 완전히 도끼질이었다. 단순히 검의 내구력을 믿고 휘두르는 도끼질. 주위에는 몇 천 번 휘두른 서투른 칼질에 걸레가 된 쇠파이프동강이 널려 있었다.
 "젠장!"
 카인은 주위에 굴러다니는 쇠파이프 조각을 걷어찼다.
 까강, 팅~.
 "하아······."
 분명히 한 번에 끊어 낸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베어낸다. 고작 얇은 철조각인 칼이 어떻게 쇠뭉치를 자른단 말인가······. 이성적으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믿고 있다는 생각은 카인을 이 일에서 포기 못하게 했다. 어서 이것을 해내는 것을 할아버지께 보여드려서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젠장! 무능력한! 필요할 때 아무것도 못하는!"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사각사각.
 마리는 파거슨 할아버지의 병실에서 보급창에서 가져온 사과를 깎고 있었다.
 "온몸이 둔한 게 역시 죽을 때가 되서 그런 게 아닌가? 아가씨?"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머리가 멍해. 분명히 가장 강한 진통제를 썼겠지. 그 극통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걸 보면 말이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아가씨. 카인······. 겉은 차가워도 속은 좋은 놈이야. 잘 대해줘. 쿨럭, 사람을 가장 그리워하는 놈이야. 아가씨가 잘 대해 줘야지. 안 그러면, 정말 위험한 녀석이 될 놈이야."
 "그렇진 않을 거예요."
 "···미안하지만 한 가지 부탁 이 있는데 내 방에 가면 큰 가방이 있어. 그 안에서 조그만 장식거울이 있는데 가져와 주겠나?"
 마리는 사과를 깎던 칼을 그대로 사과에 꽂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그 정도면 가져다 드릴게요."
 "고맙네."
 실제로 장식거울은 없었다. 없는 장식거울을 찾아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휴우 드디어 혼자가 되었나?"
 파거슨은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많은 동료들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죽음을 지켜봤다. 곧 다가올 자신을 죽음을 생각하며 파거슨은 회한이 담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사치스럽군. 이렇게 좋은 곳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 품에서 간다는 건······. 후후, 사치스러워."
 파거슨은 병실침대에 손을 짚더니 그대로 일어서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휘청.
 진통제의 효과가 강해서 그런지 몸이 제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하지만 정신과 눈만은 또렷했다. 파거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한··· 이것이 된다면 벨 수 있다."
 사과에 꽂힌 과도를 집어 들고는 자세를 취했다. 근육의 긴장을 풀고는 그리고는 목표가 될 링거액걸이를 노려보았다.
 "합!"
 칭~!
 평소 때처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 쇠가 스치는 깔끔한 소리가 나더니 과도가 철로 된 링거액걸이를 그대로 통과했다. 링거액 걸이는 그대로 떨어지더니 잘린 날카로운 단면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잘린 단면은 정말 매끄러운 금속광택이 났다.
 "해냈···군. 으윽!"
 파거슨은 갑자기 느껴지는 극통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쓴 힘 때문에 몸에 무리가 심하게 온 것이었다.
 "카인, 방법은······."
 파거슨은 점차적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겨우 추스르며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바닥에 피로 쓴 한 글자를 가까스로 남길 수 있었다.
 '결(Grain).'
 쉐에엑. 쉐에엑.
 할아버지의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공기가 주입되었다가 빠졌다. 심장박동을 나타내 주는 기계는 할아버지의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의사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이제 다시 는 깨어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할아버지가 카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철이 잘린 단면이 남아 있는 링거액걸이와 '결(Grain)'이라는 이해 못할 글자······.
 "결이라?"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너무 추상적이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결······. 나무의 결. 철의 결.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는 것일까? 카인은 할아버지의 병실에서 할아버지를 곁에서 지키며 방법을 고민했다.
 '할아버지 그렇게 쓰러지면서까지 저한테 말씀하려던 게 도대체 뭐예요? 제가 그걸 못 알아내면 어떡해요. 어떡해요, 할아버지!!
 카인은 식사를 하러갈 때도 생각에 잠겼다.
 '결. 할아버지는 침상에 누워 계시면서 무언가 깨달았고. 그 깨달음으로 링거액 걸이를 잘랐다는 것은 확실했다. 깔끔하게 대각선으로 잘려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링거액걸이······. 할아버지가 말한 결의 의미는 무엇일까?'
 카인은 링거액걸이를 보관해두고 있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링거액걸이를 잘 살폈다.
 깨끗하게 잘린 단면.
 '어떻게 이렇게 베어낼 수 있을까?'
 두 개를 붙여 보려고 하던 자신의 눈에는 그 2개의 합쳐지는 부분에서 약간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보이는 뭉툭한, 그래서 두 개를 합쳐보면 처음에는 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만 나무를 도끼질을 할 때 나뭇결대로 친다는 걸 읽었는데······.'
 카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나뭇결대로 치면 훨씬 잘 갈라진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도끼질의 전문가는 그 결을 한눈에 찾아 단 한 번에 통나무를 갈라 버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강철파이프도 그런 결이 있다면 잘라낼 수 있어.'
 카인은 주위에 굴러다니던 쇠파이프 큰 걸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단단히 고정하고는 할아버지의 진검을 들었다.
 쇠파이프에는 어제 카인이 칼질 아닌 칼질로 크게 흠이 생긴 곳이 있었다. 거길 노린다면?
 카인은 자세를 잡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흠을 노리자!'
 "하아압!"
 데뎅~ 텅텅.
 실패였다. 하지만 감이 어느 정도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굴러간 쇠파이프를 들고는 바닥에 고정시켰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꼭 성공시킨다!'
 "하아아앗!!"
 쇠파이프의 파여진 홈에 검을 집중시켰다. 검신에 무언가 묵직하게 걸리는 느낌이 났다. 카인은 그 느낌 그대로 베어냈다.
 뗑그렁.
 뒹구르르르.
 "잘랐다······."
 두 개로 나누어진 쇠파이프의 윗부분이 날카로운 단면을 보이며 바닥을 굴렀다. 마침내 성공한 것이었다. 잘려진 단면은 거울처럼 매끈했다.
 모든 물체는 완벽하지 않다. 어디든 약점이 있다. 할아버지가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던 것이다. 카인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해냈다는 감격을 마음껏 느꼈다.
 훗날 이것이 검술의 전부가 아니고 또한 흠 없이도 철 파이프 정도는 잘라낼 실력자들은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일로 카인은 자신이 쏟아 부은 노력과 땀만큼 성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 기뻐하세요. 저 해냈어요!"
 카인은 잠시 몸을 추스른 후 할아버지의 병실로 잘려진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갔다.
 "할아버지! 저 성공 했······!"
 병실의 문을 열자 그때 마리가 눈에 눈물을 달고는 튀어나왔다. 잠시 카인의 얼굴을 눈물 그득한 눈으로 보더니 그대로 뒤로 나가버렸다. 카인은 불길한 느낌에 병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에게 흰 천이 덮여 있었다.
 "10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임종 순간에 당신을 찾았는데. 안타깝습니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할아버지? 장난치지 마세요. 제가 해낸 걸 알고 그냥 장난으로 누워 계시는 거죠? 어서 일어나세요. 지금 제가 이렇게 성공해서 왔잖아요. 에이,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할아버지, 이제 제가 보살펴드릴게요. 아주 잘요··· 가족도··· 손자도 필요하시잖아요. 절 그냥 놔두고는 가실 수 없···잖···아···요······."
 점점 슬픔으로 목이 메어와 호흡이 힘들어지던 카인은 결국 울음을 토해냈다.
 "우아아아아!!!"
 카인은 창고에 처박혀 서럽게 울었다.
 "카인."
 마리였다.
 "왜······? 무슨 일이에요?"
 카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미 눈물로 퉁퉁 부은 자신의 눈을 마리에게 들키긴 싫었다.
 "할아버지가 베개 밑에 두셨던 편지야. 청소부가 발견해서 주더라. ···카인 너에게 보낸 거니까 읽어봐. 카인, 이럴 때 일수록 몸을 바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얼른 기운 차리고 나와."
 카인은 이미 할아버지의 죽음에 구역장 일을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부구역장인 아저씨가 대신해서 일에는 차질이 없었다. 카인은 그런 신경을 쓸 기력이 없었다.
 카인은 편지봉투를 찢었다. 그 안에는 짧은 글이 들어있었다.
 '카인아.
 아마 네가 이 글을 본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구나. 괜찮다 카인아. 사람은 언젠가는 먼 길을 떠나야 할 운명이란다.
 난 마지막 작전 실패 때 이미 접어야 했을 목숨이었는데 신의 안배로 살아서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카인. 너의 이름은 성경의 최초의 살인자의 이름이라고 언제 한 번 그랬던 적이 있지? 그래서 신에게 버림받은······. 하지만 아니다. 카인.
 신께도, 나에게도 카인 너는 결코 버려진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앞부터 너와 관계를 맺을 사람에게도 버려질 존재가 아니지. 넌 아주 소중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괜히 풀 죽지 말고 언젠가 나에게 보여 주었던 웃음을 계속 보여 주길 바란다. 마리에게도 잘해 주고! 너에게 하는 것을 보니 손자 며느릿감으로는 딱 이더구나.
 울지 마라, 카인. 슬픔은 슬픔을 낳는단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라!! 그리고 그럴 만한 힘을 길러라.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네가 당당하고 자유롭게 웃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하늘에서도 너를 지켜보마. 건강해야 된다, 카인. 그럼 잘 있어라.
 너의 할아버지가.'   
 "에이···할아버지. 이렇게 말해 버리면 울 수조차 없잖아요······."
 눈물을 닦고 일어서야 한다. 당당하게 사는 것. 그게 할아버지가 바라는 일일 테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니까.
 
 
 
 #추락
 2급 우주항공사인 렛시는 이틀 연속 당직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어제 생일파티 때문에 승무원들은 거의 술에 취해 뻗었다. 술을 못 마시는 그녀만 이렇게 함교에서 당직을 서게 된 것이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피한 것은 자신이었다.
 "아앙. 피곤해~."
 렛시는 요즘 늙어 가는 것인지 얼굴에 주름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렛시는 지구에서 출발할 때 챙겨 온 얼굴 주름에 좋다는 과일 팩을 얼굴에 발랐다.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팩을 얼굴에 바르는 도중 일부가 레이더 화면에 튀었다. 조그만 팩의 물방울은 밝은 레이더 화면에서 빛을 발했다.
 "이런. 비싼 건데 이러면 혼나겠지."
 그녀는 옷소매로 그냥 슥 닦았다. 팩이 끈적끈적해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한참을 지우고 있는데 아까 튀었던 점 옆의 조그만 점이 눈에 띄었다. 그 거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작은 점은 이윽고 두 개에서, 다섯 개. 다섯 개에서 열 개가 되더니 순식간에 수십 개, 수백 개로 늘어났다.
 "세상에 뭐!? 뭐야!!!"
 수송선 내부는 잠의 주기를 위해 지구의 시간과 맞게 밤에는 조명을 거의 제한하고 낮 시간에는 환하게 켜놓았다. 그런데 지금은 밤 시간인데 갑자기 모든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적함대 발견!! 적함대 발견!! 전 승무원은 제 위치로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장님 및 항공사들은 모두 조종실로 모여 주십시오. 비상 상황입니다.」
 전 구역에 밝은 조명과 함께 붉은색 조명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렸다.
 급히 달려온 50대 여성 함장이 렛시에게 물었다.
 "적의 전함숫자는?"
 "초대형 항모 전함 2대 그리고 일반 전투순양급 외 2백 대입니다. 적군의 1개 함대 자체가 이동해 온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민선단의 방위병력은 고작 전투순양급보다 낮은 초계구축함 10대가 전부였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깨트리는 것이 방어해 내는 것보다 쉬울 정도였다.
 "적항모 및 예하적전함에서 전투기 외 전투로봇 사출··· 예상 숫자는 약 4천 기입니다!!"
 레이더담당인 1급 항공사 존은 거의 절규하듯이 외쳤다.
 "지금 곧장 워프 엔진을 가동해라. 워프담당 렛시는 지금 당장 워프 가능한 곳을 찾아내라. 얼마나 빨리 워프를 하는가에 우리의 생사가 달려 있다!"
 "라저!"
 현재속도에 의한 워프가능 지역은 변방뿐이었다. 거의 대부분은 안전지역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원래 목적지가 적진과 교전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제7식민행성 아브라가 가능합니다. 워프 좌표 송신하겠습니다."
 쿠쿵~!!
 "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이민선 한 대가 적의 모선에서 방출된 주포에 직격했다. 내부에서는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리라.
 "적함의 주포 사정거리 안에 진입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전멸이 불가피합니다."
 워프··· 워프만이 살길이다.
 "워프 준비시간은 얼마나 남았나?"
 "대략 10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전멸하고도 남아!! 쉴드 전개해. 이 워프속도를 유지하고 최대한 버틴다!!"
 이민선의 포탑 10개가 차례대로 적전함을 목표로 돌아갔다. 구식 플라즈마포 쌍구 10개는 적의 전투병기를 잡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함을 잡기는 불가능했다.
 "초계구축함 밀라노 격침! 탈출슈트가 방출되었습니다."
 "이민선 41호 격침!"
 "20호, 112호, 43호 격침!"
 레이더에 나타난 아군표시는 점차적으로 줄었다. 주포의 공격이 끝나자 전투기 및 전투로봇의 망과 충돌했다.
 "쉴드 붕괴!! 쉴드 재생산할 전력이 워프엔진가동으로 모자랍니다."
 쉴드가 없어졌으니 이제 로봇이 들이닥칠 것이다.
 "전투로봇이 함대 침입을 시도 중입니다. 외부 철판은 30초 내로 융해됩니다. 곧 내부로 침입합니다."
 전투로봇은 말 그대로 살인기계였다.
 "9호 포탑 붕괴. 내부 승무원 3명 사망했습니다."
 "2호 포탑 붕괴. 내부 승무원 1명 사망했습니다."
 함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최대한, 워프엔진 가동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제발······."
 투둥투둥투둥!!
 플라즈마포탑이 연발로 불을 뿜었다.
 플라즈마포의 직격에 잠시 멈칫하던 전투로봇은 곧 폭발했다.
 치이익~펑~!!
 승무원 생활 20년 만에 처음 쏘아보는 플라즈마포에 란드는 전율을 느꼈다.
 "에잇, 터져라!!!"
 퉁! 퉁퉁퉁!! 퉁퉁!!
 콰쾅 쾅쾅쾅!!
 신나게 로봇을 터뜨리던 란드는 네 발 달린 로봇보다 3배는 더 큰 인간형 로봇이 자기를 노려보는 것을 느꼈다.
 "죽어!!"
 퉁! 퉁! 퉁!
 터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 인간형로봇은 플라즈마포를 간단한 회피동작으로 피한 뒤 그대로 허리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아악!"
 빛을 뿜는 검이 지나간 후 플라즈마포탑은 잠시 조용하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인간형 로봇은 포탑이 터진 구멍 속으로 침입했다.
 챠킹~!
 뎅그렁. 구르르르.
 짧게 한 번 쳐서 흠을 만든 다음 검을 회수해서 철을 가른다. 카인은 3일 밤낮으로 연습한 결과 이제 몸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한 번에 강한 철 같은 금속을 자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파악!
 평소에 이곳에서 하나밖에 켜져 있지 않던 조명이 갑자기 다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적함대 발견!! 적함대 발견!! 전 승무원은 제 위치로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장님 및 항공사들은 전부 다 함교로 모여 주십시오. 비상 상황입니다.」
 스피커에서 여자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민선이 위험한 듯했다. 카인은 칼을 챙겨들고 10블록으로 향했다.
 퉁퉁!!
 쿵~!!! 쿵~!!
 이민선 내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충격이 왔다.
 지직. 지지직···팍!
 전압이 불안정한 듯 어두워졌다가 밝았다가하던 전등이 전압을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나가 버렸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쿵.
 "꺄아아악!!"
 이쪽과 연결된 반대쪽의 5블록의 통로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카인이 연결통로로 들어가자 피 냄새가 확 끼쳐왔다.
 "무슨?"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피바다··· 그 이외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시신이 즐비한 천지······. 한편의 지옥도였다.
 "살려······."
 아까 비명을 지른 여자였다. 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입에도 피를 뿜고 있었다. 그리고 하반신은··· 없었다. 징그러운 장이 꿈틀거리며 삐져나와 있었다.
 "너무···아파······."
 툭.
 여자는 눈빛이 풀리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비이잉!
 옆에서 기계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위험을 몸으로 느꼈다. 그 순간 카인은 그 자리에서 몸을 날렸다.
 쾅!
 강철벽이 녹아 내렸다. 카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인간 정도의 높이를 가진 4족보행 무인 전투병기인 드라군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기이잉!!
 빨간 눈 같은 곳에서 빛이 모인다고 생각되더니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플라즈마탄이었다. 카인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관찰한다고 설쳤다가는 그대로 죽을 판이었다.
 "없애 주마, 고철덩어리!"
 카인은 드라군의 볼 수 없는 사각지대로 근접했다. 그것을 감지한 드라군도 뒤로 기체를 날렸다. 하지만 카인은 드라군이 검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기 전에 일검을 날렸다.
 키캉~!
 제법 큰 흠집을 내면서 안테나처럼 보이는 것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드라군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았는지 그대로 돌진해 왔다.
 쿵쿵쿵쿵!
 널려 있는 시신을 짓이기면서 돌진해온 드라군은 그대로 카인이 있는 자리를 들이박았다.
 쿠쿵!
 카인이 있던 자리에서 벽의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빠르다!"
 가까스로 자리를 피한 카인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봇의 빨간 눈이 파란색으로 바뀌면서 카인에게로 플라즈마탄이 여러 발 날아왔다. 아무래도 한발씩 쏘면 카인이 용케 피해 버리니까 넓은 곳을 쏴서 한발이라도 맞추려고 그런 것이었다.
 피피피핑.
 플라즈마에 맞은 시신들이 터지면서 생긴 자욱한 피보라가 로봇을 덮쳤다.
 위이잉···위이잉.
 카인은 피보라로 인해 로봇이 잠시 오동작하는 동안에 벽을 딛고는 드라군의 위로 점프했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체중을 실어 머리 부분으로 보이는 부분을 그대로 위에서 밑으로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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