引
井蛙不可以語於海者이나 而知空深이라.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의 넓음을 모르나 하늘의 깊이를 안다.
序
‘나무가 있구나.’
청명(淸明)은 산마루에 있는 작은 공터에 앉아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그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관찰하던 청명은 이제 시선을 옮겨 산등성이 전체를 바라보던 참이었다.
험준한 능선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사부작사부작―
부드러운 미풍에 산마루 아래의 수해(樹海)가 일렁거렸다. 가슴을 적시는 맑은 소리에 청명은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그냥 나무가 아니로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있다.’
세수 백오십을 바라보는 늙은 청명은 눈을 감았다.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자리가 불편해 아예 누워버린 청명은 수해의 일렁임을 들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 구국, 국―
어디선가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청명이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자 학 한 마리가 서서 부리로 날개를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청명은 미소를 지으며 학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학도 날개 훑던 것을 멈추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늙은 도인의 모습이 신기한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학은 곧 관심을 잃고 다시 날개를 지분거렸다.
청명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도명(道名)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어느새 바람이 멈추었다. 청명의 늘어진 볼과 수염을 부드럽게 감싸던 바람이 사라졌다. 낡고 헤진 도포가 가라앉아 껄끄럽게 느껴졌다.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이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수해의 일렁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구나. 바람은 이미 멈추었으나 구름은 흘러가고 나무는 흔들리는구나.’
한참 날개를 지분거리던 학이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청명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청명은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이제 알겠구나. 본시 바람도 없고 나무도 없는 것을.’
청명은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
* * *
청명이 눈을 떴을 때는 제법 긴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청명은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꿈에서 자신은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배경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다. 처음으로 바뀐 배경은 전쟁터였다.
청명은 마귀들을 보았다. 그 마귀들은 부리부리한 눈에 하늘로 솟구친 눈썹을 한 천상의 장군들에 의해 토벌당하고 있었다. 울룩불룩 근육질의 천군(天軍)들이 자신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청명이 붙잡히기 직전에 배경이 바뀌었다.
잠시 귀에 이명이 느껴졌다. 눈앞에서 뭔가가 휙휙 지나가더니 어느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청명은 잠시 멍해 있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뀐 배경을 바라보았다.
구름 위에서 예쁜 선녀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도 재밌게 하는지 끼리끼리 모여 가가호호 웃는 것이 동네 아낙들 같다. 하지만 예뻤다. 가끔 춤을 추는 선녀도 있었다. 청명은 그들을 더 바라보고자 했으나 또다시 주위가 바뀌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인들이 구름 위에 터를 잡고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노인들은 반갑게 웃으며 청명을 바둑판으로 불렀지만 바둑을 모르는 청명은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바뀐 주위에는 아름다운 집들과 궁궐이 있었다. 궁궐을 한번도 보지 못한 청명은 탄성을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명이 멀리 떨어진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신기한 듯 바라볼 때 눈앞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직은 올라올 때가 아니다, 이 녀석아! 내려가서 기다려!”
노인의 호된 꿀밤에 청명은 정신을 차렸다. 그때야 깨어난 것이다.
청명은 그것을 그저 꿈일 뿐이라 생각하고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바라보다가 잠이라도 들었나 보구나.’
“응차!”
노인네답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키려던 청명은 자신의 몸이 멀쩡하자 의아함을 느꼈다.
‘본래 몸을 움직이려면 여기저기가 아파야 정상인데?’
몇 해 전인지도 모를 옛날부터 쑤셔오던 허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굽힐 때마다 시리던 무릎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개운한 것이 새로 태어난 듯했다.
청명은 일어나 팔다리를 제멋대로 움직여 보았다. 온몸에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만 같았다.
“응?”
의아함을 느낀 청명은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주물러 보았다.
손을 내려다보니 주름이 없었다. 얼굴을 만져 봐도 제멋대로 자라 있던 하얀 수염이 만져지지 않았다. 심지어 옷마저도 파란색과 흰색이 선명한 새 도복(道服)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것 참.”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던 청명의 귓가에 학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국, 구국, 구국―
학이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정겹고 반가웠다.
“그래, 너도 아직 여기 있었구나.”
학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학이 주시하는 곳에는 늙은 노인의 시체가 있었다.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긴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으리라.
그 시체는 바로 잠들었다고 생각한 자신의 몸이었다.
청명은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道)를 얻어 육신의 껍데기를 벗은 것이다. 꿈에서 본 것은 선계(仙界)인 것이 분명했다.
잠시 시체를 바라보던 청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꿈에서 보았던 천상의 궁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올라갈 때가 아니었다.
어째서 자연지도(自然之道)를 깨달았고 탈각(脫殼)을 이루었는데도 선계에서는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그때, 청명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아직은 선계에 오를 수 없으니라.”
청명이 뒤를 돌아보니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
“허허, 그래. 오랜만이지?”
“사부님!”
십칠, 팔세 정도의 소년 모습을 한 청명이 달려가 노인의 품에 안겼다.
“허허, 이 녀석.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너도 이제 많이 늙었거늘.”
“나이야 많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본 것이 벌써 백 년이 넘은걸요. 사실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는데.”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끼, 이놈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토록 말했거늘! 말을 벌써 잊으면 어쩌자는 게야? 나도 아직 기억하고 있거늘!”
“헤헤.”
잠시 헤헤거리며 웃던 청명이 어리광을 부리듯이 칭얼대기 시작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산중 수련만 하고 화기가 든 음식도 먹지 않았어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외로웠지만 모든 것이 같음[萬物一如]을 알았어요. 말을 잊었지만 나도 잊었구요[忘我之境], 모든 것이 없음으로 해서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有生於無].”
“그래, 네가 도를 얻었더구나.”
청명이 계속해서 말했다. 모처럼 어리광을 부리니 기분이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모두 다 스승께 해드리고 싶었다.
“세상이 두루 통함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도 알아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저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할 테지만 도는 알 것 같아요[不成知道].”
“그래, 그래. 태상노군(老子)께서는 도를 얻은 사람일수록 어수룩한 바보 같다 하셨지.”
“그리고.......”
청명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선계(仙界)에 오를 수 없음도 알아요.”
노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그렇단다. 아직 인세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더구나.”
노인이 아직까지도 품에 안겨 있는 청명을 떼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너는 선계에 오를 수 없단다. 아니, 네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올랐다고 말하여도 무방하지만... 아직 때가 아닌 게지.”
청명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그런가요? 선계에 오르면 인연의 끈이 다하여야 하는데 왜 저는.......”
“그리 궁금해하는 눈으로 보지 말거라. 네 말대로 인연이 아직 다하지 않았음이니. 하니 듣거라. 원시천존(原始天尊)께서 네게 내린 명이 있느니라.”
“사자(使者)로 오신 건가요?”
“그래, 그렇단다.”
그제야 청명이 몸가짐을 바로 한 다음 고개를 숙여 읍했다. 준비가 끝나자 노인이 준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원시천존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자연의 도를 깨달아 그 뜻을 알고 또 그것이 너와 다르지 않음을 알았으니 그 깨달음이 깊도다. 하나 아직 인간지도를 깨닫지 않았음이니 그것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선계에 오르리라. 비록 인간지도를 깨치지 않은 선인이 선계에 오른 바가 적지 않으나 너의 소임은 적덕선(積德仙)이요, 인중선(人中仙)이라. 그 소임을 이룰 때까지는 선계에 오름을 불허(不許)하노라. 그러하니 네가 비록 자연지도를 깨달았다 해도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고 인간지도를 배워 오너라. 그를 위해 명을 하달하니 너는 듣고 명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제일, 너는 평범하게 살아라. 어떤 사람이 되어도 무방하나 다만 평범하게 살아라. 제이, 너는 인간에 대해 배우거라. 인간에 대해 하나도 남김없이 배워 그에 대해 궁리하여라. 제삼, 너의 뜻한 바가 있거든 나의 명을 좇지 말라. 다만 그 뜻을 깨닫기 전까지는 마땅히 명을 좇으라. 세 번째 명을 가장 중시하여 진정으로 나의 명을 좇지 아니 할 때에 너는 선계에 오르리라.”
“...예.”
청명은 아직 의문이 가시질 않았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인간지도를 배웠다 말하기는 힘들다만 그래도 선계에서 뵌 적덕선께서 가장 참된 선인인 줄은 알고 있단다.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닐 터인데 네가 어찌 그 길로.......”
“괜찮아요.”
마음을 정리한 청명이 안심하란 듯이 웃어 보였다.
“무언가 뜻이 있으시겠지요.”
노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라면 잘해낼 것으로 믿는다. 마음을 편히 먹거라.”
말을 마친 노인이 이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거 너무 오래 끄는 게 아닌가 모르겠구나. 명을 받았으니 서둘러 내려가거라. 비록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시간은 고작해야 흐름일 뿐이니 흘러흘러 흐르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될 터. 어차피 이리 된 바 인세의 향취나 마음껏 맡고 오너라.”
“버, 벌써... 가시게요?”
“그럼. 머지않아 다시 만날 것을 뭐 그리 아쉬워하느냐. 서둘러 내려가거라.”
“그래도.......”
청명이 아쉬운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만난 지 반 각도 되지 않았는데.
“이놈! 벌써부터 게으름만 늘었구나! 세상을 떠돌 일만 해도 쉽지 않거늘!”
“네에.......”
마지못해 대답한 청명이 여전히 어물쩍거리자 노인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 학이 너를 마중 나왔으나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렸구나. 기왕에 내려온 것, 세상에 내려갈 때 타고 가려무나.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무당에 들러 청허자(淸虛子)에게 속히 올라오라 전하거라. 그놈도 늦장이 꽤 심하더구나.”
“저... 그럼... 무당으로 갈까요?”
“그리하여도 좋겠지.”
청명이 다시 한 번 노인의 품에 안겼다. 아직 세상에 대해 잘 모를 테니 말 심부름을 핑계로 사문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떠나라는 스승의 배려인 것이다.
청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다시 뵈어요.”
노인도 청명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몇 번 다독거려 주고는 곧 포옹을 풀었다.
청명은 노인을 안타까운 눈으로 한 번 더 바라보고는 학에게 다가갔다.
“자, 마중 나왔다니 고맙다. 날 무당까지 데려다주겠니?”
국, 구국―
학이 널찍한 날개를 쫙 펼쳤다. 청명이 학의 등에 올라타자 곧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청명은 마지막으로 스승의 모습을 눈에 넣어보고자 했으나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제1장 사제지정
제1화 하계(下界)로 내려오다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
균현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영기 넘치는 산이 하나 위치해 있다. 이 산의 모양은 마치 종 위에 향로가 서 있는 듯한데 이름은 태화(太和), 혹은 무당(武當)이라 한다.
도교에서는 이 산을 일컬어 상제(上帝)가 직접 다스리는 땅이라 하여 오래 전부터 성지로 여겼다. 그와 더불어 산의 영준함에 취한 도인(道人)들이 하나둘씩 모여 드디어 무당산에 도관을 건축했으니 그때가 당(唐)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 산의 이름이 당금 강호에 드높게 된 것은 대종사 장삼봉의 대(代) 이후였다.
장삼봉은 소림사 출신의 승려였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 세상을 떠돌았다. 어느 날 장삼봉은 무당산에 당도하여 세 개의 봉우리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를 삼봉이라 칭하고는 무당파를 세워 제자들을 길러냈다.
장삼봉은 당금 강호에 검선(劍仙)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그 이름이 드높아 살아 있는 신선으로 추앙받곤 했다.
심지어 황제조차 그를 가까이하기를 원했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무당산에 거대 건축물을 만들어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아홉 궁과 서른 네 개의 도관, 일흔 두개의 암묘로 이루어진 이 건축물은 총 서른세 개의 군(群)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관(道館)이었다.
그 크기가 황제의 궁과 비슷한데, 무려 십이 년이란 세월을 넘어 이루어진 대역사(大役事)이기도 했다.
* * *
안개가 휘감긴 무당산 칠십이 봉.
주봉인 천주봉(天主峰) 아래에는 태화궁(太和宮)이 위치해 있다. 금전(金殿) 바로 아래에 위치한 궁으로 이곳은 무당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사제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침중한 음성으로 장문인 현평 진인(玄平眞人)이 말했다. 흰 수염을 곱게 기른 것이 퍽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이나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것은 마치 젊은이와 같았다.
현평 진인은 차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현평 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당금 강호에 무당의 장문인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거늘 이 일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 운혜(雲慧)를 어찌해야 좋을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 아이를 내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무당의 품에 안긴 아이를 어찌 내쫓을 수 있을꼬. 그것도 마도(魔道)의 무리들에게.”
장문인의 사제이자 진인의 칭호를 하사받은 현성 진인(玄成眞人)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어찌하여 당금 강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곳이 마교(魔敎)의 분타라는 사실은 확실한가?”
“예. 무림맹에서 여덟 목숨의 희생을 바탕으로 확인하였다 합니다.”
현평 진인이 또다시 침묵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평 진인은 드디어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들었다.
“총회합을 열겠네. 준비해 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현평 진인이 다시 말했다.
“여유를 두지 말고 빠른 시간 안에 준비해야 할 것일세.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예, 그리 준비하겠으니 사형은 너무 걱정 마십시오.”
현성 진인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허, 그보다 사부님께 문안 인사는 올리셨습니까?”
사제가 뜬금없이 사부님 이야기를 꺼냈다. 급작스레 화제를 돌리는 것을 보니 너무 심려치 말라는 부드러운 응원을 하는 것일 게다.
현평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허허, 벌써 십오 일째 발걸음을 못했다네. 아마 보자마자 죽이려 하실지도 모를 일이야.”
“그러게 제때에 문안 인사를 드리셔야지요. 자칫하다가는 제가 장문인 자리를 물려받겠습니다.”
“그래, 차라리 나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구먼. 이 자리도 귀찮은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현성 진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역시 너무 큰일을 마주해서인지 흥이 안 난다.
“내일은 문안 인사를 꼭 드리도록 하십시오. 피곤하실 터이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리하게나.”
길게 읍하고 사제가 물러나자 현평 진인이 다시 차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오 년 전, 강호에 대란(大亂)이 일어났다. 근 이백여 년간 고요했던 마교가 마침내 발호(跋扈)한 것이다. 정파에는 백오십 년 만에 무림맹이 결성되었고, 사파에는 사도맹이 결성되었다.
다행히 소림의 공진 성승(孔眞聖僧)의 희생으로 사천 땅에서 마교를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피해는 참으로 컸다. 만여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의 피를 흘린 끝에야 강호는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칠 년 뒤, 무림맹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여인은 아이를 가진 임부(姙婦)였고, 도착하자마자 무림맹주에게 안내되었다. 하지만 여인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아(女兒)를 낳고는 사망한 것이다.
그 갓난아이를 놓고 무림맹의 명사들은 긴 시간 동안 갑론을박을 펼쳐야 했는데, 결국 수많은 논의 끝에 무당에서 여아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 아이가 바로 운혜.
장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어두운 태화궁에 고요가 깃들었다.
* * *
장문인이 상념에 빠져 있던 그 시각 우진궁(遇眞宮)에서는 야행인이 비조처럼 날고 있었다.
우진궁 아래에 위치한 태청관(太淸館)을 향해 한 발만 잘못 미끄러져도 험준한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게 되는 담이 이어져 있는데 야행인은 그 위를 평지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표홀한 신법으로 나아가던 야행인이 낭떠러지 밖으로 몸을 날린 것은 젊은 순찰 도사가 나타났을 때였다.
젊은 순찰 도사는 타판(打板)을 들고 담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워낙 긴 담인지라 그가 사라질 때까지는 긴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동안 야행인은 난간에 매달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순찰 도사가 사라지자 야행인은 다시 비조처럼 달려나갔다.
야행인이 향하는 곳은 태청관(도사들이 묵는 숙소), 그중에서도 별관이었다. 도사들의 대부분은 남자로 본관을 쓰지만 좌측의 별관은 몇 안 되는 여도사들이 쓴다.
야행인이 발걸음을 멈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운혜사고가 머무는 곳.
숙면을 취하는 운혜의 앞까지 야행인은 무리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사실 운혜의 자는 모습은 숙면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몸을 대 자로 쭉 뻗은 채로 침상 위의 이불은 이미 발 아래로 굴러 떨어진지 오래다. 입가에는 침이 말라 허옇게 눌어붙어 있었고, 머리는 여기저기 떡져 제멋대로 뻗쳐 있다.
숙면이라기보다는 쾌면이랄까? 아주 속시원히 자는 모습이다.
야행인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내려간 것이 몹시 기분이 좋을 때나 나오는 표정이었다.
‘흐흐흐,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신나는구나. 오늘 일이야말로 내 일생의 가장 큰 과업이라 할 만하느니!’
뭐가 그리 좋은지 야행인은 벙긋벙긋 웃었다. 자는 모습을 이렇게 봐도 예쁘고 저렇게 봐도 예쁘니 마음이 흡족했다. 하지만 잠자는 여도사를 구경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버렸다.
딱― 딱―
기상을 알리는 타판 소리가 들렸다. 태청관에 머무는 도사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앞의 여도사가 깨어날까 야행인의 마음도 급해졌다. 하지만 여도사는 시끄러운지 베개로 귀를 막으며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
“우우웅.......”
야행인이 안심한 듯 웃었다. 하지만 목표한 일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야행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여도사를 주시하며 검을 쥐었다.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흠칫.
살기를 느끼고 깨어난 운혜의 눈빛은 긴장으로 얼룩져 있었다.
반 각 후 태청관.
“침입이다!”
“태청관이다! 장문인께 보고해!”
“태청관이 박살났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갓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이던 도사들은 재빨리 일어나 검을 쥐었다.
운자배 최고의 검수 운풍자(雲風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며 여차하면 검을 빼어 들 수 있도록 자세를 편하게 했다. 그리고 경공을 펼쳐 사고가 난 태청관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악!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사부님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잘 자는데 살기라니!”
새된 여성의 악 쓰는 소리가 들렸다.
악을 쓰며 검을 날리는 여인의 모습을 보니 다행히 위험한 일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여인의 검에서 뻗어져 나오는 사상검(四像劍)의 검로(劍路)를 보아하니 상대가 좀 위험해 보인다.
곧 늙수그레한 소리가 뒤따라 퍼졌다.
“아니, 너는 머지않아 강호로 나갈 것이 아니냐! 그때에는... 으악! 무슨 짓이냐! 사부를 죽이려고?”
짓쳐들어 오는 검날을 피하느라 목소리가 급격하게 끊겼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어디 계속 말해보시죠!”
“그야말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거늘 그때를 대비한 훈련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어이쿠! 이것은 오행검(五行劍)이 아니냐!”
운혜가 검을 들어 직선으로 찌르며 외쳤다.
“이런 사부가 어디 있어요! 잘 자다가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야행인, 아니, 이제는 복면을 벗은 노도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너, 임신했냐? 어이쿠! 수염이 잘리려고 한다, 이놈아! 이건 기사멸조(欺師蔑祖)야!”
주위의 도사들은 어느새 키득키득 웃으면서 장내의 다툼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일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저 기묘한 사제의 대결은 언제 봐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에잇, 기사멸조는 무슨! 훈련이라면서요! 훈련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요! 어디 이것도 받아봐요!”
“어이쿠! 어이쿠!”
노도인은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었지만 슬쩍슬쩍 피하는 것이 자못 여유로워 보인다. 오히려 얼굴 가득 재미있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것이 운혜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었다.
노도인이야말로 전대의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이자 장문인의 사제인 현무 진인(玄武眞人)인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흥이 돋았다.
“운혜 사고(師姑)! 거기서는 오행만합(五行萬合)! 그 초식이 가장 합당합니다!”
“아니야, 이 바보 같은 황우자(黃雨子)야! 거기서는 가장 간단한 횡소천군이 적격이거든!”
“에이, 운형(雲形) 사숙께서도 뭘 잘 모르시네? 그러면 사조님이 돌아가시잖아요.”
현무 진인이 분노했다.
“네 이놈들! 지금 네놈들도 기사멸조의 행위란 것을 저지르는 것이렷다! 어이쿠! 진짜 횡소천군으로 베면 아니 된다!”
황우자가 키득키득 웃었다.
태청관에 머무는 유일한 황자배 도인인 그는 뛰어난 검수였다. 다만 성격이 진중하지 못하고 가벼워 주위의 한숨을 독차지하는 문제아이기도 했다. 그와 죽이 잘 맞는 운형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무당을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키득키득 웃던 황우자는 현무 진인의 분노를 무시하고 결전에 계속 훈수를 두다가 현무 진인의 뒤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새였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그 크기가 커 보였다.
“운형 사숙, 저거 아무리 봐도 새 같은데... 이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아요?”
“시끄러! 조용히 해라! 저걸 봐라. 극성의 유운신법(流雲身法)이 펼쳐지고 있잖냐! 하나라도 더 봐둬야지!”
“아니, 근데... 점점 더 크기가 커진단 말입니다! 등 뒤에... 뭐가 매달려 있는데요?”
“도대체 뭔데... 응?”
아니나 다를까, 현무 진인의 등 뒤로 커다란 학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 등 뒤에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안력을 좀 돋우어봐요. 저는 아직 내공이 일천해서... 어, 어? 보인다!”
“저거, 사람 같은데?”
“에이, 신선이 아니구서 무슨 학을 타고 와요! 근데 진짜 사람 같네?”
사람 맞다. 그리고 무당을 향해 다가오는 것도 맞았다. 그 사실을 장문인이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봐도 사람 같구나. 허허, 기사로다. 무당에 복이 오려나?”
황우자는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침입이라고 외치며 장문인을 모셔오라고 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리도 빨리 도착했단 말인가? 인기척 또한 느끼지 못했다.
“제자 황우가 장문 진인을 뵈옵니다.”
“제자 운형이 장문 진인을 뵈옵니다.”
뒤이어 수많은 인사가 이어졌다.
무당의 제자들이 겸허한 눈으로 장문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장문인이고 자시고 서로 간에 검을 나누느라 바쁜 사제는 여전히 칼질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진 지 오래다.
“아무래도 사람 같은데.......”
“소년이다. 나이가 어려.”
현평 진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선동(仙童)일지도 모르겠다.”
운혜와 현무 진인을 제외한 모두가 침묵했다.
“사부님은 정말! 제가 놀라서 죽어버렸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네가? 네가 설마? 곧 죽을 놈이 사부에게 칼질을 해?”
“이이익!”
“허허허, 화내는 모습마저도 깜찍한 것이 자라면 천하제일미가 되겠다.”
“말 돌리지 말아요!”
침묵 속에서 더 더욱 두드러지게 들려오는 둘의 소란에 현평 진인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들도 몸가짐을 좀 단정히 하는 게 어떻겠냐? 기인(奇人)이 본 파를 방문하실지도 모른단 말이다!”
음성에 노기가 섞인 것이 태청관을 부순 일이 아무래도 맘에 걸렸는가 보다.
운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수많은 현자배 도인 중에서도 장문인의 성격이 가장 꼬장꼬장한 것이다.
‘헉! 삐쳤다!’
하늘 같은 장문인의 심기를 재빨리 알아차린 운혜가 잠시 버벅거리더니 어떻게든 화를 면해보고자 애교를 부렸다. 검은 이미 거둔 지 오래다.
“헤헤, 장문 사백, 저... 이게요... 어떻게 된 거냐면요.......”
뒤따라서 현무 진인도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현평 진인을 바라보았다. 사형은 무서운 사람이다.
“험험, 사형.”
“둘 다 가까이 오너라!”
둘 다 가까이 왔다.
현평 진인은 애교를 부리는 운혜와 멋쩍게 헛기침을 하는 사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제, 설명해 보게.”
“헤헤, 장문 사백, 그게요.......”
“넌 조용히 해라.”
“네에.......”
한마디로 운혜의 변명을 막아버린 현평 진인이 냉엄한 눈으로 현무 진인을 바라보았다.
현무 진인은 눈을 굴렸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인데?
“험, 사형, 그게 말이오, 강호에 나가면 이런 저런 일이 많지 않소? 그래서 그런 일들을 미리 체험하게 해주려고....... 그러니까 경험이 중요하니까... 내 말은.......”
알 것 같다. 잘 자고 있는 운혜에게 말썽꾸러기 사제가 살기(殺氣)를 뿌린 것일 게다. 장난 삼아 했다지만 운혜는 무인(武人). 살기에 놀라지 않을 턱이 없다.
현평 진인이 크게 한 소리를 하려던 찰나 황우자가 경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 옵니다! 곧 내려올 것 같은데요!”
잠시 다가오는 학과 사제를 번갈아 보던 현평 진인이 이를 뿌드득 갈며 말했다.
“너희들은 추후에 그 죄를 논할 것이니 두고 보자.”
그사이 학은 점점 사람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학은 등 뒤에 올라탄 소년을 배려해서인지 부드럽게 날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에 날갯짓까지 부드러운 것이 등 뒤의 소년에게 적잖이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청명은 학의 배려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음,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인사를 하고 내 소개를 한 다음 잠시 머물겠다고 하면 되나? 아니, 소개가 먼저고 인사가 나중인가?’
청명은 고민하고 있었다. 무려 백사십여 년 만에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니 어떻게 첫 만남을 이끌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확실히 내 소개가 먼저인 것 같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학을 타고 내려오면 이상할 테니까.’
이상한 게 아니라 괴상한 거지만 어쨌든 청명의 고민은 계속됐다.
‘하지만 인사를 먼저 하지 않으면 예의가 바르지 않다고 볼 텐데. 분명 인사부터 하는 것 같은데.......’
밑의 사람들도 고민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저기... 장문 진인, 아무래도 학 뒤의 저것은 사람이 맞는 듯합니다.”
“나도 아네.”
현평 진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지금은 사제와 운혜 사질에게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학을 타고 날아오는 사람의 정체가 가장 문제이지 않은가! 야수맹의 조련사들이 동물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했는데 그놈의 잡종들일까, 아니면 그냥 맘씨 좋은 학이 지나가던 사람을 태워줬을까? 아니면... 정말 신선일까? 제자라고 있는 것들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고작 사람이 맞다는 소리라니....... 자신도 눈이 있어 그쯤은 알고 있다.
곧 학이 완전히 내려올 터, 그렇게 되면 무당의 장문인인 자신이 어떻게 말이라도 걸어봐야 한다. 하지만 워낙 신비로운 등장이니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주위의 도사들은 벌써부터 웅성웅성대고 있었다.
“신선이다! 신선님이 우리 도관에 오셨다!”
“아니야. 저건 선동이라고.”
“응?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숙?”
“수염이 없잖아.”
현평 진인도 주위의 웅성거림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혹시 정체를 추측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하지만 오히려 수심만 더 가득해졌다.
‘정말 신선이라면 존댓말을 써야 하는가? 하지만 아니라면? 혹여 운혜를 노리고 온 마교의 인물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보다 꽤나 어려 보이는구나. 반로환동(返老還童)일까? 설마 정말 선동은 아닐 테지.’
어느새 학이 비행을 멈추고 착지했다. 그리고 한쪽 날개를 부드럽게 내리자 십칠, 팔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학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가라앉고 고요함이 좌중을 지배했다.
현평 진인은 자신이 앞에 나서야 될 시점임을 깨달았다.
‘자아, 일단 예법에 따라 정중히 맞이하자. 어떤 기인인지는 모르나 무례해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틀림없이 반로환동일 터, 인상이 선해 보이는 것이 악인(惡人)은 아닐 게다.’
현평 진인이 앞으로 나서자 학을 타고 내려온 소년이 현평 진인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무량수불, 어떤 기인이......?”
“안녕하세요?”
말이 끊겼다. 게다가 정체를 물으려는 찰나에 상대가 인사를 하니 왠지 모르게 무뢰배가 된 느낌이다. 본래는 강호의 예법대로 ‘어떤 기인이 본 파를 방문하시었소?’라고 물어보려 했던 것이니 크게 실수한 것도 아닌데.
현평 진인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녕합니다. 그쪽은......?”
현평 진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육십 년간 도를 닦아오면서 마음의 평정을 항상 유지해 왔는데 너무 당황한 탓이다. 아무리 당황했다고 하지만 ‘그쪽은?’이라니. 갑자기 현평 진인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청명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이쿠! 역시 내 소개부터 해야 하는가 보다.’
“예, 저는 무당의 십육대 제자로 도명은 청명이라 합니다.”
무당의 십육대 제자? 현평 진인은 침묵했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인데 십육대 제자에 청 자 돌림이면 자신의 사부 배분이다. 정말 반로환동한 전대(傳代)의 기인이란 말인가!
장문인이 말이 없자 청명은 자신이 뭔가 실수했다고 생각하고는 의기소침해졌다.
“아, 물론 저는 안녕하고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끝의 ‘안녕하고요’는 들리지도 않았다. 청명의 얼굴색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후였다.
도인들의 소란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가제일문(道家第一門)이라 불리는 무당파에 학을 타고 내려온 신비의 소년은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벌써부터 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괜히 따갑게 느껴져 청명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져만 갔다.
“그렇다면... 역시 반로환동하신 겝니까?”
“예? 아, 예. 그렇지요. 하지만 반로환동했다기보다는 새 육체를 입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해요.”
청명은 반로환동이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잠깐 버벅거린 다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새 육체를 입었다 함은?”
“육신을 벗었지만 원시천존께서 명을 내려 잠시 인세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요. 이 육신은 그래서 새로 주셨나 봐요.”
시해선(屍骸仙)!
현평 진인은 충격을 받았다.
보통 신선이 될 때는 속세의 범인들이 상상하듯 학을 타고 천상 선녀들의 춤추는 것을 감상하며 유유자적 올라가진 않는다. 도문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그런 경우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 외에 실제로 벌어진 바가 없어 허황되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보통 도를 깨달은 사람은 육신만 남기고 평화롭게 떠나는데 그를 시해선이라 부른다. 육신을 벗고 선계로 등선하는 것이다.
지금 소년은 자신이 그 단계를 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육신은......?”
“아, 저기 취란봉(取爛峰) 아래에 있어요. 그곳에서 생활했었거든요. 그래도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소년은 몸을 뒤적뒤적거리더니 작은 거울과 도장을 꺼냈다. 그리고 패검하고 있던 검을 끌러 장문인에게 공손한 태도로 그것들을 넘기더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저... 이건데요... 좀 낡았네요.”
“으음.......”
현평 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것은 삼보(三寶)로 무당의 제자가 되었을 때 받게 되는 세 가지 보물이다. 정식 제자가 되었을 때 이것들을 받게 되는데 배분과 도명이 적힌 도장과 거울, 검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소년이 건네준 도장에도 ‘무당파 제십육대 전인 청명자 인(印)’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울에 적힌 글귀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웅성거림은 더 더욱 심해졌다.
“들었어? 신선이래. 신선이 되신 우리 태사조님이 내려오신 거야.”
“우리 무당에도 검선(劍仙)이 나는구나!”
“검선이라......! 검선!”
도사들은 벌써부터 기뻐하는 눈치였다. 일단 본 파의 인물이 맞는 듯하니 예를 갖춰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는 도사도 있었다.
현평 진인이 눈썹을 꿈틀댔다. 사숙 되시는 것이 정확하다면 예를 취함이 마땅하나 만약 아니라면?
현평 진인이 주변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갈(喝)! 선실(仙室)에서 소란스레 굴다니! 모두 입을 다물라!”
“.......”
주위가 조용해지자 현평 진인이 청명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더 하문(下問)하시기 전에 일단 태화궁으로 가시지요, 사... 숙.......”
“네.”
“운풍은 들으라.”
“하명하시지요, 장문 진인.”
“청명 사숙을 장문인실로 모셔라. 사숙을 대함에 있어 예의를 잃지 말도록 유념하고.”
운풍자가 공손히 읍하고는 청명을 불러 태화궁으로 향했다.
청명은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는 수많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수그린 상태였다.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트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산골에서 갓 올라온 순박한 소년이었다.
현평 진인이 그 모습을 주시하며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사제,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장문 사형께서는 삼보를 보셨을 터, 사형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현평 진인은 잠시 고민했다.
그 도장은 잔뜩 낡아 있긴 했지만 분명히 무당의 것이었다. 근래에는 자신이 직접 주재하여 내리는 삼보이니 그 모습을 몰라볼 리가 없다. 하지만 혹여 진실이 아닐 경우를 대비해 제자들의 인사를 막은 것이다.
“진짜 같았네.”
“그럼 진짜겠지요.”
현평 진인이 ‘이런 실없는 놈을 봤나’ 하는 시선으로 사제 현무 진인을 바라보았다.
“...자넨 삼보만 믿자는 겐가?”
현무 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학을 타고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이라면 모르되 삼보를 지니고 있는 데다가 지금은 안개가 끼기 시작하잖습니까?”
“안개?”
그러고 보니 오늘 무당산에 안개가 없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오전의 하늘이 기묘할 정도로 맑았던 것이다. 사시사철 안개가 낀다는 무당산에서는 희귀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명이 청명이라 하셨지요?”
“그러했지.”
정말 도명처럼 맑은 하늘이었을까? 그가 인세에 강림하자마자 평소처럼 안개가 끼는 것을 보니 과연 신비로운 일이다.
현평 진인과 현무 진인은 말을 잃었다.
잠시 뒤 현평 진인이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총회합 때 논할 주제가 하나 더 늘었구먼.”
“총회합이라니요?”
“으음, 나중에 말해줌세, 일단 가서 다시 그분을 뵈어야겠으니. 역시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구먼.”
“험, 그럼 그리하시지요.”
현평 진인이 사제를 잠시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현무 진인은 떠나는 현평 진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더 큰일이 나타나니 역시 오늘의 사고는 바로 잊혀지는구나. 다행히 꾸중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자네는 있다가 운혜와 함께 찾아오도록 하게.”
현무 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장문인실에서는 청명이 멋쩍게 서 있었다.
운풍자는 장문인의 선방에서 조용히 읍하고는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라고만 하고 나가 버렸다. 그는 앉아서 쉬라는 건지 서서 쉬라는 건지 말을 해주지 않았다.
청명의 고뇌가 또다시 시작되었다.
‘편히 쉬라는 뜻은 말 그대로이니까 앉아도 되지 않을까? 음,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알기로 빈객이 먼저 앉는 법도는 없다던데.’
청명은 과거에 마음을 보내어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때 예의가 바르고 엄격한 장소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손님이 먼저 자리에 앉는 법이 없었다. 다만 주인이 자리를 권할 때에야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예의와 속세의 법들을 무시하겠으나 자신은 인간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러니 어찌 예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약 반 각 동안이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청명은 예의보다는 일신의 편안함을 택했다.
‘그래, 편히 쉬라고 했으니 자리에 앉아도 될 거야. 게다가 나는 원래 손님도 아니잖아? 장문인이 오시거든 다시 일어나면 되겠지.’
사실 장문인 앞에서 앉아 있는 제자가 더 버릇없는 것이지만 그것까지는 알 턱이 없는 청명이었다.
청명은 장문인이 늘 앉아 차를 마시는 의자를 꺼내어 자리에 앉았다. 밖의 소란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에휴!”
그때 현평 진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 사숙.”
청명은 당황했다.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장문인이 들이닥치다니 어지간히 운도 없다.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난 청명은 고개로 읍하면서 장문인에게 말했다.
“자, 장문인, 그러니까 제가 먼저 앉은 것은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편히 쉬라 하기에.......”
“아, 사숙, 앉아 쉬셔도 괜찮답니다. 응당 그리하셔도 무방하고말고요.”
현평 진인이 너그럽게 말하자 청명의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앉아도 되는 거였어!’
그래도 약간 부끄러운지 청명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왠지 오늘은 하루종일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잠시 몇 가지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자리에 앉은 현평 진인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예, 물론이고말구요. 뭐든지 여쭤, 아니, 하문하세요.”
“아, 예. 그럼... 사승 관계가 어찌 되시는지요?”
청명이 잠시 버벅거리더니 곧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승 관계가... 아, 사부님이 누구냐는 거구나. 황허(黃虛) 사조의 제자이신 일현 진인(日玄眞人)께서 제 사부님이셨어요.”
“일현 진인이라 하시면......?”
강호 문파로서의 무당 제자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현평 진인이다. 검을 들고 강호를 횡행하는 무당의 제자들은 도사이면서 동시에 무인이며 자신 또한 도문의 장문인이면서 강호 문파의 문주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지 않고 도가 전통의 연단(煉丹)과 선술(仙術)에 매진하는 도사들에 대해서는 미진한 감이 적지 않다. 삼십삼 군 건축물에 칠십이 개 암묘로 이루어진 이 넓은 도문에는 숨겨진 기인도 많았는데, 그들도 무당의 제자이긴 하지만 그쪽까지 모두 알기는 힘든 것이다.
“예, 취란봉 아래에 있는 운현관에서 연단을 하시다가 뜻을 달리하시고 서예로서 도를 이루신 분이신데요, 한... 두 갑자 전에 등선하셨어요.”
현평 진인은 새삼 놀란 듯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 소년이 진짜 신선의 경지라면 당연히 그 연배가 적지 않을 것인데 외모에 치우쳐 마냥 어리게만 보았던 탓이다. 갑작스레 두 갑자(약 백이십 년) 전의 이야기가 나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럼 사백께오서는 연세가......?”
“아, 저는 영락(永樂) 13년에 태어났대요.”
영락제(永樂帝)가 몇 대 전 황제였더라?
현평 진인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한... 백삼, 사십 년쯤 전의 황제 같다. 이쯤 되면 도첩(道牒)을 뒤져 보지 않는 이상 확인하기도 힘들게 됐다.
“그러하시군요.”
현평 진인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아 이내 새로운 질문을 꺼내어 들었다.
“그러하시면... 무공은?”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만약 무로서 도를 이루었다면 그야말로 무당의 홍복이다. 검선의 출세인 것이다.
“예, 무공은 일초 반식도 모르는데요.”
“.......”
부끄러운 듯이 청명이 말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청명의 모습에 장문인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험험.”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잔기침이 나와서.......”
“아, 예. 그러시군요. 저... 그럼 등이라도 두드려 드릴까요?”
신선이 등을 두드려 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잠시 장문인은 ‘그래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고픈 유혹과 싸워야 했다.
“아, 괜찮습니다. 이미 가라앉았습니다. 한데 선계에 오르셨다면 어찌 인세에 다시......?”
“원시천존께서 한 가지 명을 내리셔서요.”
현평 진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시천존의 명이라.......
“여쭈어도 될는지요?”
“네. ‘자연지도를 깨달았으나 인간지도를 배우지 못했으니 인세를 경험하고 오너라’ 하고 쫓아내셨어요.”
“험, 험.......”
현평 진인이 민망해했다. 쫓겨났다는 어감이 그다지 좋지 않은 탓이다.
“역시... 등 두드려 드릴까요?”
벌써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두드릴 채비를 갖추는 청명이었다.
* * *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아직 식전인데다가 오전 일과도 치르지 않았으니 마땅히 금언(禁言)해야 될 텐데 오늘의 일로 모두들 흥분한 모양이었다.
“운형 사백, 역시... 본 파의 기인이 맞겠지요?”
“그런 것 같다. 학을 타고 나타나서 삼보를 들이밀며 자신이 십육대 전인이라고 말하는데 거짓일 리가 있겠느냐!”
“으하하핫! 그럼 이번에 우리 무당파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날리겠군요?”
황우자가 신나게 웃었다.
황우자의 아버지는 사천의 거부로서 그 넘치는 재력으로 자신의 모든 아들을 명문에 입문시켰다.
장남은 무당파, 차남은 화산파, 막내는 점창파에 입문했는데 실제로 출가한 건 장남인 황우자뿐이었다.
출가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속세의 인연이 남은 탓에 가끔 형제들과 만나게 되는데 만나기만 하면 누구의 사문이 최고인지 늘상 치고받게 되었다.
게다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독주였건만 어느샌가 화산파 출신의 동생이 영약 쪼가리를 처먹고서는 맞먹고 있다.
하지만 이제 확실하게 굳히기 한 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화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진짜 신선이 예 있는데 감히 어딜.”
“이놈, 황우야! 그리 경박하게 말하다니! 도를 공부하는 처지에 다름이 어디 있겠느냐?”
“...사숙도 화산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잖아요?”
“음, 그야 그렇지만.......”
운형자도 사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화산보다야 무당이 낫다. 암, 그렇고말고.
단순한 운형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진짜 신선이 탄생하다니! 우리 무당파가 최고로구나!”
“그렇지요? 으하하핫!”
두 사질이 잔뜩 흥이 나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운혜가 말했다.
“화산이 좋을지도.......”
“뭐라고요?! 사저는 어찌 그리 말하는 겁니까?”
“그래요! 도고께서는 너무하십니다!”
서른 줄에 다다른 운형자와 이십 줄에 다다른 황우자가 동시에 눈에 불을 켰다.
하지만 운혜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잠에서 너무 급박하게 깼나? 다시 졸음이 온다.
“거기는 바보들이 없잖아!”
“.......”
운혜는 한마디로 두 사질을 침묵시키고는 졸음을 쫓으며 아까의 사조(?)를 생각했다.
‘어려 보이는데... 많아봐야 내 또래? 음, 뭐, 상관없겠지. 성격이 사부님 같지만 않다면야. 그보다 요즘 들어 잠이 늘었네? 시시때때로 자고 싶어. 아, 졸려.’
운혜가 입을 막고 몸을 돌리고는 하품을 했다. 동료 도사들에게 입 안을 보이는 건 규율에 어긋난다.
‘잘까... 말까.......’
운혜는 모처럼 규율을 어기고 농땡이를 치기로 했다.
‘그냥 자버리지, 뭐.’
운혜는 몰래 숨어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우진궁 뒤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우진궁으로 쭐래쭐래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청명은 장문인의 끝없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도첩을 놓고 과거의 사승 관계를 조사하면서 그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청명은 열두 살 이후로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야 했다.
그런 조사가 끝나고 나자 이번에는 깨달음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경전의 이곳저곳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청명은 구십 년 전부터 펴본 일이 없는 경전의 내용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잊어버린 구절이 더 많았다.
현평 진인은 잠시 청명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나 뒤에 나눈 대화로 청명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모르겠어요.”
어째서일까? 현평 진인은 이 허탈한 대답을 듣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도첩에 적힌 일현 진인의 글을 청명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도를 모르겠다[不知道]’라고 쓰여 있었다. 사부의 대답이 그대로 제자에게 이어진 꼴이니 재미가 있을 만도 했다.
곧 현평 진인이 말했다.
“저의 스승님이 며칠 전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뭔데요?”
현평 진인이 사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며칠 내로 문파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인데 그 복을 가져온 사람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거라’라고 하셨지요.”
“아, 네. 그렇군요.”
“모른다고 대답하거든 너보다 훨씬 지체 높은 사람이니 머리도 들지 말고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런저런 경전의 이야기도 지루했고 옛날에나 알던 사람들을 기억해 내라는 장문인의 압박에 지쳐 가던 청명은 건성건성 대답하고 있었다.
장문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청명이 물었다.
“어... 누구한테 공경해야 되는데요?”
현평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사숙... 아니, 사백 말씀입니다. 누가 뭐래도 신선이시니까요.”
현평 진인이 서둘러 말을 고쳤다. 사부님보다 배분이 높으니 엄연히 사백이라고 불러야 한다.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 그제야 앞에 나눈 대화들을 기억해 낸 청명이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뭔가가 생각난 듯 머리를 탁 쳤다.
“아! 혹시 스승님의 도명이 청허이신가요?”
“예. 제 사부님께서 청허 진인이십니다.”
“잘됐다!”
“예?”
현평 진인이 의아한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제가 전할 말이 있었거든요. 선계에서 얼른 올라오라는 전언을 보냈어요. 청허 진인에게요. 늦장이 심하다고도 하셨어요.”
“.......”
스승께서도 도를 깨달으셨구나.
현평 진인은 자부심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 말을 직접 전했다간 ‘날더러 빨리 죽으라는 것이냐!’ 하고 호통 치실 것이 뻔했다.
“...직접 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네.”
장문인과의 대화는 곧 운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사백께서는 언제든지 하문하셔도 된답니다.”
“제가 학이랑 하늘에 떠 있을 때 본 건데요, 밑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도명이 어떻게 돼요?”
현평 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 사제인 현무... 자와 그 제자인 운혜입니다.”
하마터면 현무 진인이라고 말할 뻔했다. 본시 배분상 어른의 앞에서는 진인의 칭호를 잘 붙이지 않는다.
장문인의 말을 들은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늙은 쪽이 현무자인가요?”
“예.”
“그럼 저는 운혜 사손과 인연이 있군요.”
현평 진인이 깜짝 놀란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운혜라면 앞으로 열릴 많은 일들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아이다. 당금 무림의 제일 기밀이라 할 만한데 신선이 확실한 사백께서는 무슨 연유로 그 아일 찾을까? 그것도 인연이 있다고 말하니 꼭 부부 관계를 말하는 듯하다.
“인연이라 하심은?”
“네, 같이 살아야 돼요.”
“.......”
신선이 혼인도 하던가? 아니, 그보다 운혜는 도사란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현평 진인이 무례를 무릅쓰고 물어보았다.
“저... 혼인이라도 할 계획이신가요?”
말하고도 민망하기 짝이 없다. 신선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당금 강호에서 그 아이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혼인이란 말에 청명은 얼굴을 붉혔다.
“아니요. 혼인이라니요. 저는 그런 말이 아니었는걸요.”
“그럼......?”
“잠시 인간 세상을 돌아다닐 텐데 같이 돌아다닐 인연이라서요.”
현평 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함부로 무당 밖을 나갈 수 없다. 한데 세상을 돌아다닐 인연이라니....... 현평 진인은 일단 말을 돌리기로 했다.
“무당을 떠나신다구요?”
“예.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러 갈 거예요.”
“언제쯤으로... 계획하고 계신지요?”
현평 진인이 말했다.
그 질문에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전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청명이 이마를 찌푸리며 끙끙댔다.
“그, 글쎄요....... 언제 떠나지요? 언제 가야 될지 모르겠어요.”
“아직 계획하신 바가 없다면 잠시 무당에 머물다 가시지요. 상청궁(上淸宮)에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이 많으니 말상대가 부족하지는 않을 겝니다.”
청명이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청허 진인에게 말을 전하라는 스승의 배려를 생각해서라도 잠시간은 무당에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엄하신 원시천존의 명이 있으니 금방 떠나야 할 것도 같다.
청명의 상념을 뚫고 현평 진인이 말했다.
“...그리고 며칠 내에 총회합이 있을 예정입니다. 사백께서는 본 파의 장로 배분이시니 참석하시어야 합니다.”
청명은 마음을 정했다. 총회합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총회합이 뭔가요?”
“현 자 배분 이상의 진인들은 모두 참석하는 문파의 최고 회의입니다. 문의 가장 큰 중대사는 그곳에서 결정되는 바가 많지요. 특히 이번에는 사백을 소개시켜 드리는 자리가 되기도 할 겝니다.”
청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개요?”
“오랜만에 본산에 내려오신 것이니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셔야지요.”
한마디로 밖에서 서로 몰라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소리다. 얼굴은 당연지사 익혀두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이치들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백께 설명해 주자 그제야 청명이 ‘알았어요’ 하고 웃는다.
이제 청명뿐 아니라 현평 진인 역시 피로를 느꼈다. 도첩을 뒤져 보느라 피곤했던 탓도 있지만 오늘의 일이 적잖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처럼 피곤해 본 것도 몇 년 만인지 모른다.
“저, 이제 밤이 깊었으니 사백께서는 쉬시지요.”
“네!”
여태껏 차분차분 대답하던 청명이 쉬라는 말에 신이 난 듯 대답했다.
그동안 청명의 눈에 지루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을 생각하며 현평 진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표정 하나하나가 저리 솔직하니 이제껏 붙잡은 자신이 민망해진다.
“운풍은 거기 있느냐?”
현평 진인이 태화궁 밖을 바라보며 외쳤다.
“예, 제자 여기 있습니다.”
“사백께서 쉬실 자리를 안내해 드려라. 본 파의 어른이시니 마땅히 상청궁(上淸宮)으로 안내해 드려야 할 것이다.”
“제자가 명을 받듭니다.”
현평 진인이 청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쉬시지요. 제자가 자리를 안내해 드릴 겁니다.”
“네, 그럼 내일 뵈요.”
“.......”
청명이 ‘드디어 탈출이다’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청명이 읍하고 방을 빠져나가자 현평 진인은 태화궁 밖을 바라보았다.
“허허헛, 당대에 신선을 뵈었으니 나도 복이 꽤 많구나.”
오늘의 일은 정말 신비로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복잡한 면도 있어 심기를 몽땅 소진해 버린 느낌이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이 있다.
“밖에 사제가 서 있으렷다!”
현평 진인이 다시 밖을 바라보며 외쳤다.
곧이어 죽을상을 한 현무 진인이 쭈뼛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노인이 하는 행동은 마치 벌 받기 싫어하는 꼬마 같다.
“운혜는 어디다 두고 자네만 오는가?”
냉엄한 목소리로 현평 진인이 말했다. 현무 진인이 여전히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 운혜 고것이 오전부터 아예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저기 샅샅이 뒤졌거든요? 근데도 안 보여서.......”
“뭐라?! 그래서 아직 운혜를 못 찾았단 말인가?!”
현평 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설마 무당에 누군가가 침입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운혜를.......
현평 진인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음, 청검대(靑劍隊)를 소집하게. 운혜를.......”
현평 진인의 말을 끊고 현무 진인이 말했다.
“아이구, 사형.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까 운형이 말하기를 우진궁 뒤 죽림에서 자고 있을 거랍디다. 그래서 가봤는데 역시 거기서 자고 있더군요.”
“으음.......”
현평 진인은 운혜의 소재를 파악했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잠을 자고 있단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자고 있단 말인가?”
“예, 장문 사형. 계속 잠만 잔 듯합니다.”
“그렇다면.......”
“.......”
현무 진인은 현평 진인의 상념에 찬 모습을 바라보며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현평 진인의 심사를 익히 짐작하는 탓이다.
잠시 침묵하던 현평 진인이 더 생각할 것이 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손을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현무 진인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침묵이 깊어가는 태화궁 위로 별이 빛났다.
* * *
운혜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청명이 태화궁을 나선 지 한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밤이 깊을 때까지 잠을 잔 것이다.
운혜는 크게 하품을 했다.
“으하아암― 무진장 잤잖아? 아아, 잠은 잘수록 늘어난다더니 또 자고 싶네.”
운혜는 우진궁 뒤편에 있는 죽림에 누워 있었다. 산의 차가운 기후 덕분에 몸이 싸늘히 식어 있었지만 운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운혜가 일어난 자리는 살짝 얼어 서리가 앉아 있었다.
사람이 누워 있던 땅에 서리가 앉아 있다니!
본래라면 체온 때문에 언 땅도 녹아 있어야 할 터이다. 하지만 운혜는 잠에서 갓 깨어난 탓인지 별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 졸려!”
“많이 졸려요?”
운혜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학을 타고 내려왔던 소년이 운혜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아, 사조님.......”
“많이 졸려요? 아까부터 쭉 잤죠?”
“아, 네. 너무 졸려서.......”
운혜는 당황했다. 사조께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다. 어머, 그러고 보니 예를 갖추지도 않았다.
“무당파 십팔대 전인 운혜가 사조님을 뵙습니다.”
“아, 네. 무당파 십육대 전인 청명이 사손을 뵙습니다.”
“.......”
청명이 운혜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운혜는 사조님께서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배분이 높은 어른이 어린 제자에게 저런 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놀리지 마세요. 졸립다구요.”
운혜가 조금은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청명은 청명 나름대로 당혹 속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어, 어... 인사하는 걸 몰라서 그대로 따라했는데 이게 아닌 모양이다.’
당황한 청명이 버벅대자 운혜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사부님은 더한 장난도 하시는걸요.”
운혜는 청명이 장난을 쳐놓고는 미안해서 저렇게 당황한 것으로 착각했다. 청명은 그 오해를 깨주고 싶었으나 능력이 안 됐다.
“아, 저... 제가 인사하는 걸 잘 몰라서.......”
“더는 놀리지 마세요.”
“.......”
청명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놀린 것이 아닌데 자꾸 놀린다고 한다. 왠지 서운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청명은 곧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운혜가 말했다.
“저, 근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청명이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운풍자를 따라 상청궁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장문인과 있을 때는 지루하고 피곤하더니 장문인과 헤어지자마자 피곤이 달아나 버리는 것을 느낀 청명은 할 일도 없고 심심해져 상청궁의 노도인들과 대화를 하려 했다. 하지만 노인들이라 그럴까? 잠이 깊게 든 노도인들이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혼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던 청명은 심심함에 몸부림치다 도관들을 구경하기로 결심하고는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우진궁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냥... 어쩌다가 오게 됐어요.”
운혜는 잠시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이어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운혜가 공손히 읍하고 사라지려고 하자 청명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잠깐만요!”
운혜가 걸어가다 말고 몸을 돌려 의아한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랑 더 있으면 안 돼요? 심심한데.”
“심심하시다니요?”
“헤헤, 사실 저는 열두 살 이후로 사람을 만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니까 좋아서요.”
그랬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장문인과의 대화도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하니 기뻤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전의 소동을 생각하면 역시 장문인과의 대화는 지루한 축에 속했다.
운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열두 살이요?”
“네. 저는 일곱 살 때 사부님을 따라 산중 수련을 떠났다가 등선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어머! 그럼 뭘 먹구요?”
“벽곡단을 먹다가 다 떨어져서 쑥이랑 물이랑 약초들이랑... 뭐... 그런 것만 먹었어요. 고기도 먹어본 적이 없는걸요, 뭐.”
청명이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과연 신선이라더니 어릴 적부터 속세와 떨어진 생활을 해왔구나.’
운혜는 갑자기 청명이 불쌍해 보였다. 자신은 몇몇 사질과 숨어 뱀을 고아먹는 것이 취미였다. 사부님께 걸린 적도 많았지만 사부님은 그 모습을 보고 빼앗아 먹기에 바빴기 때문에 죄책감은 없었다. 그 맛있는 고기를 한 번도 먹지 못했다니.......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스승님께서 파랑 마늘을 좀 길러두셨거든요. 그래서 파랑 마늘은 매일매일 먹었어요.”
청명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도문에서는 향채인 파와 마늘 등 향이 진한 채소를 금하고 있는데 그것을 매일 어겼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운혜는 그 이야기를 듣게 되자 청명이 더 불쌍해 보였다. 자신은 파를 곁들인 멧돼지 구이를 먹어본 적도 있었다.
“저... 저도... 가끔 파를 먹어본 적이 있어요.......”
청명이 헤헤 하고 웃었다.
“장문인께 걸리면 혼나지요? 저는 사부님이 열두 살 때 등선해 버려서 혼낼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매일매일 먹었는데.......”
운혜가 보기엔 정말 헛된 자랑을 하는 청명이었다. 나는 혼나지 않고 그것을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이와 같은 치기인데다가 그 수준 차이가 워낙 크게 나는 것이다. 운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명은 계속 조잘조잘댔다.
“하지만 말할 사람이 없어서 좀 심심하긴 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나무를 바라보며 이름을 붙인 다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아니면 벌레를 잡아서 이름을 붙여서 대화해 보기도 하고....... 대답이 없어서 재미없지만요.”
청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장 친한 소나무의 이름은 송학이라느니 송학의 몸에서 버섯이 자라 몹시 아파 보이기에 자신이 그걸 떼줬다느니, 가장 친한 귀뚜라미가 있었는데 그 귀뚜라미는 일 년도 못 살고 죽어버려 삼 일씩이나 울었다느니 하는 잡다한 이야기였다.
운혜는 홀로 산에 살았을 청명을 생각해 보았다. 친구가 없어 나무에 이름을 붙였을 것이고 벌레를 잡아 키우면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혼낼 사람도 없는데 규율을 어긴다는 짜릿함에 파를 길러 먹었을 것이고, 정히 심심할 때는 재미없는 경전을 읽으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 없이, 심지어 사부도 없이 홀로 살았다는 사실에 운혜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저는.......”
“그래도요, 사부님이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 줘서 괜찮았어요.”
“그게 뭔가요?”
운혜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청명이 돌을 들어 바닥에 놓고 검지와 엄지로 그것을 퉁긴 다음 돌이 놓여 있던 자리부터 굴러간 자리까지 선을 죽 그었다.
“이렇게 한 다음에 요렇게 해서요, 세 번 만에 삼각형을 만들면 되는 놀이예요. 저는 지금도 이것만 하면 심심하지 않아요.”
운혜가 여섯 살 때 졸업한 땅따먹기 놀이를 즐겁게 시연해 보이는 청명이었다.
운혜는 웬일인지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자신이 감상적이 되었다는 생각에 운혜는 미소를 지었다.
“사조님, 같이 하실래요?”
“네? 어떻게요?”
“제가 세 번을 하고 사조님이 세 번을 해서 누가 더 큰 땅을 만드는지 시합하는 거지요.”
“네?”
청명은 쉽사리 이해를 못했지만 운혜가 몇 번 더 설명을 해주자 금방 놀이 방법을 깨달았다.
곧이어 둘의 경쟁이 이어졌다.
“운혜 사손, 그건 반칙이에요! 분명히 선이 다 이어지지 않았다구요!”
“어떻게요! 분명히 저 선까지 돌이 굴러갔잖아요!”
“아니에요! 돌이 선에서 새끼 손톱만큼이나 떨어져 있는데 자꾸 거짓말하실래요? 이번엔 운혜 사손은 삼각형을 만들지 못했다구요!”
“시끄러워요! 내가 이겼어요! 오호홋!”
웬일인지 치사해진 운혜였다. 운혜는 몰래 손가락으로 돌을 밀어 선까지 닿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구 우기는데 마음이 상쾌한 것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청명은 분한 마음에 시근덕거리고 있었다.
“치사해요!”
날이 밝도록 둘은 땅따먹기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제2화 의심하는 마음은 도(道)가 아닌 것을!
태청관에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변함없이 순찰 도사가 묘시를 알리는 타판 소리를 내었고, 잠에서 깬 도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소세하고 도복을 갖춰 입었다.
태청관의 몇몇 방이 수리 중이라 서로서로 끼어 잤던 도사들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잠을 편히 자지 못하면 사람은 불쾌한 법이다.
날이 새도록 땅따먹기 놀이에 열중했던 운혜와 청명 또한 묘시를 알리는 타판 소리를 들었다.
운혜야 도복 차림으로 노숙을 했으니 먼지만 털면 될 일이고, 청명의 도복은 예에 어긋나지 않는 깔끔한 상태였다.
어느새 친해진 둘은 함께 오전 일과를 보러 가기로 했다.
도사들의 아침은 대충 이렇다.
일단 일어나면 물을 마신다.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면 규율에 어긋난다. 물을 마시고 나면 소세하고 도복을 입은 다음 궁(宮)에 모인다. 이때에는 금언해야 하는데 말을 하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
태청관의 경우 우진궁에 모이게 된다. 우진궁에 모이면 서로 열을 맞춰 사열하고 제일 앞줄부터 삼청전(三淸殿:옥청 원시천존(玉淸 元始天尊)과 상청 영보천존(上淸 靈寶天尊), 태청 도덕천존(太淸 道德天尊)의 상이 놓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 삼궤구고―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기를 세 번 하는 것―를 한다.
운혜와 청명은 우진궁 뒤에서 눈치를 보다가 사람들이 모이자 재빨리 열 안으로 들어갔다. 새치기다.
주위의 도사들이 눈썹을 꿈틀대며 항의했으나 어차피 말도 못할 것, 무시하기로 했다.
청명을 알아본 도사들은 눈썹을 꿈틀거리긴커녕 공손해졌다. 신선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으니 공손해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규율을 하나도 모른 채로 살아온 기괴한 신선이었다. 당연히 도사들의 아침이 어떤지 모른다.
“운혜 사손, 배고파요. 밥은 안 먹어요?”
“.......”
운혜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양손을 허공으로 휘젓다가 입을 막는 시늉을 한다.
청명은 조용히 하라는 소린 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아, 운혜 사손, 말하면 안 돼요?]
운혜는 깜짝 놀랐다. 귀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음도 아니다. 진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확실하다. 청명 사조의 말이 마음속에서 그냥 떠올랐다.
운혜는 자신이 청명 사조의 말을 상상해 냈다고 생각하고는 조용히 침묵했다.
[배고파요, 운혜 사손. 이건 제가 한 말이니까 상상했다고 하지 마요.]
운혜가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았다. 서, 설마 사조님은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읽은 것일까? 어디, 다른 생각은.......
‘장문인 콧수염은 왼쪽이 더 길다.’
[와! 그래요? 똑같아 보이던데?]
운혜는 할 말을 잃었다. 신선이 하는 일이니 범상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을 읽은 것은 불쾌했다.
‘마음을 읽지 마세요! 그러면 안 돼요!’
냉정한 어투에 청명은 지레 놀랐다.
[네? 네,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청명은 의기소침해져서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것은 평범한 인간이 하는 행동이 아닌가 보다. 말을 하면 안 된다니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밥은 언제 줄까?
운혜 역시 고개를 숙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읽힌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머리 속에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상상도 있는 법. 그것을 누군가가 속속들이 안다면 당연히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불쾌함과 동시에 사조님께 화를 냈다는 사실이 미안해졌다.
운혜는 흘끗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주위에서 하는 것을 조심스레 보고 어설프게 따라하는 중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청명이 운혜를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운혜도 마주 웃어주었다.
삼궤구고가 끝나면 도사들은 조만공과경(早晩功課經:신선이 되기 위한 선행들을 적은 경전)을 읽는다. 약 반 각 동안 경전을 읊조린 후 도사들은 다시 사열하여 서로 마주 보고 길게 읍한 다음 식사를 하러 간다. 이때까지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식당에 도착하면 도사들은 자리에 맞춰 앉은 다음 물을 한 잔 마신다. 마시지 않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 그 다음에야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청명은 삼궤구고를 무사히 끝내고는 기쁜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혜가 여전히 입을 막는 시늉을 하자 크게 실망했는지 울상이 되어버렸다.
곧이어 운혜와 도사들이 경전을 읽기 시작하자 아주 예전에 읽었던 공과경을 기억해 낸 청명은 그것이 몹시 지루했음을 상기하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운혜가 그 모습을 훔쳐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경전을 다 읽고 식당에 도착했을 때다. 청명은 다시 한 번 소리내어 말해보려 했으나 역시 운혜가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청명은 이제 어찌 되었든 괜찮다는 표정으로 밥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크게 기대하고 있는지 얼굴에는 홍조가 띠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을 따라 물을 한 잔 따라 꿀꺽꿀꺽 마신 청명은 자신에게 다가온 밥을 보았다.
청명은 좌절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는 꼭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마음이 세상과 통해 있어 세상 일을 알려고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청명이다. 당연히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관의 밥은 고작해야 멀건 죽과 간단한 소채가 전부였다.
간소한 식단에 대단히 실망했지만 배가 고팠던 청명은 주섬주섬 젓가락을 들어 그것들을 입가로 가져갔다.
식사가 끝나면 점심까지는 연무하거나 경전을 공부하거나 연단을 공부한다. 대체로 사승 관계가 명확한 무당에서는 사부가 제자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운혜도 스승인 현무 진인을 찾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저는 이제부터.......”
“이제 말해도 되나요?”
청명이 신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운혜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된다.”
청명은 몸을 들썩이면서 즐거워했다. 수십 년 동안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가 어제 잠깐 대화를 나눈 것이 벌써부터 못내 그리웠던 것이다.
하지만 운혜가 곧 말을 끊었다.
“저는 이제부터 사부께 가보아야 한답니다.”
“말해도 된다!”
아랑곳 않고 즐거워하는 청명이었다. 운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이제부터 사부님께 가보아야 된답니다!!”
그제야 운혜의 말을 알아차린 청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사부님께요? 운혜 사손, 그럼 저는요?”
“음, 사조님은 신선이니까 어떻게 하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저는 할 일이 없는걸요.”
청명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럼 장문인을 뵙는 것은 어떠세요?”
“네? 음, 평범한 무당 제자는 장문인을 자주 뵙나요?”
“아, 물론 그건 아니에요. 보통은 장문인 뵙기가 하늘의 별 따기랍니다.”
“그럼 저는 안 갈래요.”
운혜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장문 사백이나 사부님 외에 신선을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평범한 무당 제자가 되기는 글렀다.
잠시 생각하던 운혜는 청명의 말 속에서 ‘평범’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발견했다.
“그런데 평범이라니요?”
“에... 원시천존께서 제게 인간 세상에 대해 배워오라는 명을 내리셨거든요. 제게 평범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어요.”
운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도사들은 평범하지 않은데요?”
“네? 도사들은 평범하지 않아요?”
“그럼요.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객점에서 점소이를 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하죠.”
청명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도사는 인간이 아닌가요?”
운혜가 다시 고민했다. 도사도 물론 인간이 맞았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하기엔 좀 이상한 감이 있다. 아무래도 검을 들고 강호를 횡행하거나 신선의 도를 닦는 사람이 평범할 리가 있겠는가.
“인간은 맞지만 평범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청명이 말했다.
“음, 인간이 사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구나. 나무도 베고, 농사도 짓고, 도사도 되고, 점소이도 되고. 그럼 뭐가 평범한 거지?”
“글쎄요. 농사천하지대본(農事天下之大本)이라 했으니 농사짓는 게 가장 평범한 것이 아닐까요?”
“그럴까요?”
운혜는 점점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부의 장난기에 지각한 사실이 추가되면 그날은 괴로운 날이 된다. 서두를 필요를 느꼈다.
“저, 사조님,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구요?”
청명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말하고서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제 뭘 한단 말인가? 당장 할 일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사람의 부류에도 여러 부류가 있으니 그 일들을 다 해보려면 앞으로도 고달프게 생겼다. 이런 부류의 사람도 경험해 봐야 하고 저런 부류의 사람도 경험해 봐야 한다. 하지만 평범해야 하니 어떤 부류의 사람을 경험해 보든지 일이 어렵게 됐다. 당장 도사만 해도 평범한 도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저기... 평범한 도사들은 지금 뭘 해요?”
운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원시천존의 명을 받았다고 하니 제대로 대답해 줘야 한다.
“도사들은 평범하지 않다니까요!”
“도사들도 인간이잖아요.”
운혜는 그제야 청명의 말을 알아들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평범함’이라는 단어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었다. 즉, 인간을 하나로 보고 그중에 도사가 특별하다 말했는데 사조님은 ‘인간’에 중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조님은 인간을 여러 부류로 놓고 그중 도사란 부류는 어떻게 해야 평범하냐고 묻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란 이처럼 무섭다. ‘평범한’ 인간이냐, 평범한 ‘인간’이냐.
운혜는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음... 지금쯤 사부를 모시는 제자는 사부께 가르침을 받고, 아직 사부를 모시지 못했으면 연무장에서 무공 훈련을 하거나 경전을 공부하지요, 사조님.”
“아, 그럼 그쪽으로 가면 되겠네요!”
운혜가 미소를 지었다.
“가시는 길은 아세요?”
“아니요. 전혀 몰라요.”
“여기가 태청관의 주방이니까 아까 올라갔던 우진궁으로 걸어 올라가신 다음에 궁에서 좌측 산길로 걸어 올라가시면 돼요.”
“아, 고마워요, 운혜 사손. 그럼 있다가 봐요!”
청명은 자신에게도 할 일이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와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잠시 청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운혜가 미소를 지었다.
곧 운혜는 몸을 돌려 사부의 숙소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는 조금 전 사조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인간은 하나일까, 여러 부류일까? 어떤 것이 평범하고 어떤 것이 특별할까?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사조님은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당연히 말을 내려야 하는데 어째서 계속 올리셨을까? 나는 왜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까? 왜 말리지 못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고분고분해졌지? 사조님과 있을 때는 말투가 차분해지고 침착해졌다. 세상에! 앞으로 날 말괄량이라고 부르는 놈은 눈알을 콕 찔러줄 테다! 그리고... 지각이다!
운혜는 상념의 끝에서 지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유운신법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표홀한 움직임만 남기고 운혜가 사라졌다.
하지만 운혜가 깨닫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청명과 함께 있을 때 졸음이 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몸이 조금이나마 춥게 느껴졌다는 것을 말이다.
* * *
무당의 도관은 넓다. 때문에 각각의 도관들은 따로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연무장 또한 각 도관마다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각 도관을 책임지는 진인들은 장문인의 명을 받고 그 책임자가 각 도관의 제자들에게 명을 내리는 식의 체계가 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천주봉에는 금전과 태화궁, 우진궁과 자소궁 등 문파의 중추가 위치해 있어 장문인이 직접 책임자가 된다. 당연히 연무도 그 직전제자가 맡게 되어 있다.
제자들에게 기본공(基本功)을 가르치는 책임은 장문인인 현평 진인의 제자 운풍자가 맡고 있었다. 운풍자는 말수가 적고 과묵한데다, 무당제일검을 노리는 최고의 검수로 태극혜검을 사사받으리라 짐작되는 인물 중 일순위이다.
“모든 제자들은 마보를 취하라!”
근엄한 목소리로 운풍자가 말했다.
다른 곳이라면 속가제자라든가 아니면 도동들이 모여 있을 테지만 이곳은 문파의 심장부인지라 정식 제자들이 모여 있다. 대부분이 사승 관계를 맺고 있지만 운풍자에게 기초 무공을 배우는 것이다.
“마보, 반 시진 후 태극권으로 몸을 푼다.”
이른바 준비 운동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운풍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버틸 수 있었다. 저기 달려오는 사조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자, 잠, 잠시만요! 헉헉! 잠시만요! 헉!”
청명은 운혜와 헤어진 뒤 계속 달렸기 때문에 숨이 거칠었다. 너무 숨이 차 ‘잠시만요’ 다음에는 말을 잇지 못하겠다.
“숨부터 돌리시지요.”
“네! 헉헉......!”
차분한 목소리로 운풍자가 말했다.
어젯밤 사조를 상청궁으로 안내하고 온 그에게 장문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청명 사백께서는 본 파의 기인이거니와 그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된 바, 제자는 사백을 대할 때 예의를 갖추라’고 하셨다. 조만간 총회합 때 사조의 소개가 끝나면 정식으로 제자들과 인연을 맺게 될 것이다.
물론 일반 제자들은 벌써부터 그를 신선 사조라고 부르며 경외하고 있었지만 운풍자 자신은 조금 의심을 품고 있던 차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일. 운풍자는 근엄하게 말했다.
“제자들은 들으라! 사조께서 오셨으니 마보를 풀고 예를 갖추라!”
“무당파 십구대 제자들이 태사조를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도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장문인의 제자인 운풍 사숙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장문인께서도 태사조를 인정하신 것이 틀림없다. 무당에 신선이 탄생한 것이다!
도사들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검선이 연무하러 오셨으니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아, 네... 저는 십육대 제자인 청명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명이 고개를 숙이자 도사들이 민망해했다. 태사조 되시는 분께서 머리를 숙이다니.......
“사조께서는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저 아이들은 사손의 제자들이니 고개를 숙이셨다간 도리어 저들이 중죄를 저지른 게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럼 머리를 숙이지 않을게요.”
청명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풍자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사조께서는 어떤 가르침이 있어 제자를 찾으신 겁니까?”
“저도 무공을 배우려고요!”
청명이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할 일이 있다!
“저는 보통의 도사들이 하는 대로 무공을 익혀야 한답니다!”
그 말에 운풍자가 처음으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약간, 아주 야악간 미간을 꿈틀거렸다.
“무공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닙니까?”
“네? 저는 무공을 모르는걸요.”
“무공을... 모르신다고 하셨습니까?”
“네, 전 무공을 몰라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해맑게 말하는 청명이었다.
운풍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당의 제자라면 모든 무공은 모를지라도 태극권은 알아야 한다. 일반 도사들도 그것을 익히는 까닭이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 도사가 오랫동안 좌정하고 수련하면 엉덩이가 짓무르거나 척추의 뼈가 휘는 현상이 있는데 그를 방지하기 위해 장삼봉 조사께서 만드신 것이 태극권이다. 그런데 무공을 모른다니....... 의심이 조금 더 깊어졌다.
“하오시면... 어떻게 신선이......?”
“경전을 읽다가요. 사부님께서 태상노군(老子)께서 직접 저술하신 경전을 주셨거든요. 그것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등선했어요.”
말도 안 된다. 차라리 연단을 하여 불로불사의 선단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경전을 참오하다 깨달음을 얻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극히 드물다. 행함으로 도를 얻는 것이 참 도라 했거늘 어찌 읽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하지만 운풍자는 청명이 그 일부에 속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경전을 읽고 산마루에 앉아 늘상 나무와 바람과 안개를 바라보며 참오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때로는 행함보다 궁리함이 더 나을 때가 있는 것이다.
“음... 그러하시면... 무공을 익혀야 하신다면 이곳에서 연무하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럼 저쪽에 제자들과 함께 서시지요.”
“아, 네.”
운풍자와 청명의 이야기를 주워들은 도사들은 이미 실망할 대로 실망한 후였다. 물론 태사조께서 깨달음을 얻어 신선이 되셨으니 좋기야 했지만 아무래도 검선(劍仙)이 아닌 탓이다.
그 실망은 황우자가 제일 심했다.
‘에잇! 화산파의 멍청이한테 자랑할 수가 없게 됐잖아!’
몰래 청명을 흘겨보며 황우자가 생각했다.
‘무공을 배우지 않고 신선이 되다니....... 쳇, 기왕이면 좀 배우고 신선이 되면 좋잖아! 에이, 글렀네.’
[미안해요.]
황우자는 심장이 멎을 듯이 놀랐다. 마음에 ‘미안해요’라는 말이 새겨진 것이다. 얼른 태사조를 바라보니 태사조께서 자신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고 있다. 황우자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 설마 마음을......?’
황우자는 설마 ‘마음을 훔쳐본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것마저 읽힐까 저어되어 바로 청명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나도 참, 이상한 생각을 떠올렸구나. 그래도 사조님인데 불경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청명은 황우자가 화를 낼까 봐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미안해요’라고 말하긴 했다.
운풍자가 말했다.
“보통의 제자들은 자신의 무공 수위를 보여주고 나서 다른 무공을 수련합니다. 사조께서도 평범한 수련을 하길 원하신다면 제게 배우신 바를 펼치셔야 합니다.”
운풍자는 만약 태극권도 못한다면 그를 본격적으로 의심해 볼 참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수월히 응낙했다.
“아아주우 예전에 태극권을 배운 적이 있어요. 사부님이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것밖에 못하는데... 그거라도 할까요?”
‘아주’를 강조하며 청명이 말했다.
청명은 처음부터 운풍자의 마음에서 의심을 읽었다. 하지만 별로 괘념치 않았다. 그런 의심과 의혹은 도를 닦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은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예, 사조. 그럼.”
운풍자의 안내대로 청명이 중앙으로 나가 마보를 취했다.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운풍자가 오늘의 두 번째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다.
‘기세가... 없다.’
청명의 기수식에는 기세가 없었다.
무공을 배웠든 배우지 않았든 내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라면 진원지기가 있고 선천지기가 있는 법. 무공을 익혀 기세를 감춘다 해도 완벽하게 기세를 감출 수는 없다. 흔히 인기척이라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살수들은 훈련으로 그것을 감춘다고 하지만 무공이 높은 사람은 감춘 인기척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청명에게서는 기세가 없었다. 그런 경우는 흔히 말하듯 무공이 경지에 올랐거나.......
‘아니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운풍자가 보다 신중해진 눈으로 청명을 바라봤다.
청명이 태극권의 투로를 밟았다.
왼쪽 발을 축으로 오른발로 원을 그린다. 손목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양팔은 태극의 문양을 그린다. 기세가 없어서 그럴까? 청명의 태극권은 신비로웠다. 곧이어 마보를 풀고 왼쪽 다리를 뻗으며 오른팔로 원을 그린다. 양 손목은 부드럽게... 부드럽게.......
‘부드럽지 않잖아!’
황우자가 생각했다. 저건 장난도 아니고 완전히 엉망이다. 초기의 투로가 그럴듯해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 뒤의 투로는 엉망이다. 팔은 흐느적흐느적, 다리도 흐느적흐느적. 부드러운 게 아니라 무슨 연체동물 같다. 팔이 뻗는 것은 이곳저곳 찌르는 듯해 보기에도 추해 보였다.
‘혹시... 저기에 뭔가 굉장한 무리(武理)가 섞여 있진 않을까?’
황우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청명의 기묘한 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역시 얻을 게 없다.
‘내 무공이 경지에 오르지 못해서 그런가? 음, 뭐, 저게 진짜 태극권일 수도 있지.’
그런 생각 끝에 주위를 돌아보니 주변의 도사들도 그런 생각으로 청명의 태극권을 뜯어보고 있는 눈치다. 황우자는 피식 웃었다.
‘니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핫!’
하지만 황우자의 갸륵한 짐작은 완벽하게 틀렸다. 무리(武理)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태극권은 배운 후 꾸준히 연마하면 몸을 건강하게 해주지만 그것은 언제나 좌정하는 도사의 경우다. 청명의 스승인 일현 진인은 좌정하고 깨달음을 얻으나 누워서 깨달음을 얻으나 똑같다고 말했다. 청명은 탈각(脫殼)했을 때도 방만하게 누운 자세로 육신을 벗었다.
‘아아, 이게 아닌데?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청명은 잠시 동안 더 태극권을 시연했다.
‘그만둘까? 아아, 창피하다.’
청명은 드디어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운풍 사손, 나는 못하겠어요.”
“...예.”
운풍자는 청명의 태극권을 보고 더 많은 의혹을 가슴에 안아야 했다. 저게 과연 무당의 태극권이 맞는가! 하지만 의심은 조금 있다 해야 할 처지였다. 어쨌든 수련하러 오셨으니 슬슬 수련을 시작해야 했다.
“저... 패검하지 않고 오셨으니 수련용 목검을 따로 쥐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가서 목검을 고르십시오.”
운풍자가 좌측의 검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검대에는 송문고검 두 자루와 목검 여덟 자루가 꽂혀 있었다.
‘원래 저 정도면... 마보 세 시진, 달리기 서른 회, 그 이후에 태극권 연습 세 시진 감인데.......’
운풍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지은 세 번째 표정이다. 냉정한 무공 사부인 자신의 입장에서 저런 초보는 체력 훈련부터 다시 해야 했다. 하지만 일단은 사조님인지라 그냥 검을 들게 하기로 했다. 다른 제자들 앞에서 마냥 마보만 취하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청명은 검대에 가까이 다가가 목검들을 바라보았다.
“음... 저... 아무 거나 골라도 되나요, 운풍 사손?”
“네, 물론입니다.”
“음... 그럼... 이거요.”
정말 잘 골랐다. 중검(重劍)을 배울 때 쓰는 철심 박힌 자단 목검이다. 청명은 만족의 의미로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고는 검을 쥐고 들어올렸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잘 들리지 않는다.
“으으으읏! 으읏! 으읏!”
청명은 양손으로 검을 뽑으려고 애썼다. 아주 조금씩 검이 검대에서 뽑혀져 올라왔다.
도사들은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어제의 소동을 기억하는 도사들은 조금 실망한 상태였다. 학을 타고 날아온 반로환동의 고수가 검을 들고 강호를 횡행하는 것을 상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해서 청명을 미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보통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해 버리곤 하는 것이 사람인데 웬일인지 청명은 밉지 않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마침내 청명이 검을 다 뽑았다. 그리고는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며 운풍자에게 다가왔다.
“흐에에, 운풍 사손, 이거 너무 무거워요.”
“그 정도는 들으셔야 합니다.”
운풍자가 냉정하게 말했다. 사조라서 어느 정도 봐줄 수는 있으나 한 번 고른 무기를 제멋대로 바꾸는 것은 무인의 자존심에 용납할 수 없었다.
“운풍 사손, 하지만 너무 무거운걸요.”
청명이 울상을 지으며 칭얼댔다. 하지만 운풍자는 그 말을 무시하며 냉정하게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배분의 순서대로 열을 맞추어라! 줄을 다 맞추었으면 구궁검의 기수식을 취한다!”
배분이 높은 사람이 앞에, 낮은 사람은 뒤에 선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을 앞에 세워 뒤의 사람이 보고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훌륭한 수련법이 되었겠지만 오늘은 그런 배치가 좋지 않은 날이었나 보다. 청명이 제일 앞에 서버리게 됐다.
도사들이 열을 맞춰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청명은 검이 무겁다고 칭얼대면서도 눈치껏 자리를 찾아 제일 앞에 섰다. 열을 맞추고 나니 제법 자기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잠시 헤헤거리며 웃던 청명은 몹시 기대한다는 눈길로 운풍자를 바라보며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물었다.
“운풍 사손, 구궁검이 뭐지요?”
“...삼재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라!”
뒤편의 도사들이 키득거렸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운풍자가 저렇게 쉽게 말을 바꾸는 것을 보다니 역시 사조는 위대하신 분이었다.
“사조님께서는 저를 보시고 그대로 흉내 내시면 됩니다.”
“아, 네. 알았어요, 사손.”
운풍자가 검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천(天)의 초식이다. 그 다음에는 가로로 검을 베어나갔다. 지(地)의 초식이다. 마지막으로 검을 대각선으로 베어나간다. 인(人)의 초식이다.
물론 삼재검법에는 이것보다 많은 여러 가지 검로(劍路)가 있다. 모두 기본 공격술에 충실한 검로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이 세 가지 동작이다. 검을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인 것이다.
세 동작 다음으로 찌르기를 시범 보이면서 운풍자는 마무리를 지었다.
청명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쉽군요! 금방 할 수 있겠어요!”
“네, 사조께서도 이 무공은 연마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과연 그럴까?
“이이익!”
양손으로 힘있게 검을 쥔 청명이 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검이 너무 무거웠다.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따라서 검도 부들거린다.
부들부들거리면서 올라간 검은 머리 위로 올라가기도 전에 곧 쾌속한 속도로 내려갔다. 팔에 힘이 다해 검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검이 내려왔으니 천의 초식에는 충실한 셈이었다.
“와아! 됐다!”
청명은 스스로가 뿌듯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 보자. 두 번째는 옆으로... 으이이이잇!”
기묘한 기합 소리를 내며 청명이 검을 들어올렸다. 가슴께로 검을 곧게 뻗는데 이번에도 역시 부들부들거린다. 게다가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손에 땀이 차 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닦고 다시 해야 할 듯하다.
“저... 잠시 땀 좀 닦고 해도 될까요?”
당연히 안 된다. 하지만 운풍자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러십시오.”
청명이 검을 놓고는 손에 찬 땀을 도복에 닦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운풍자는 오늘의 표정 변화 중 가장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약간 벌린 것이다. 그것은 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청명의 가슴께에서 일(一) 자로 떠 있었다.
“저... 저... 저거.......”
“황선자(黃扇子)야, 너도 보았느냐?”
“저... 떠... 있었지요, 황우 사형?”
“응. 내가 본 건 그랬어. 격공섭물(隔空攝物)일까?”
“그럴까... 요......?”
근력도 없고 내공도 없어 보이는 사조님이 검을 공중에 띄워놓고 도복에 땀을 닦고 있었다.
황우자가 말했다.
“나... 생각해 보니까 아까 사조님께서 나한테 전음을 쓰신 거 같아.”
황선자가 ‘우와’ 하고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황우자를 바라보았다.
“진짜요?”
“응.......”
“그럼 무공을 할 줄 아시는 거로군요?”
“그런가 봐.......”
황우자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뒷말은 그저 생각으로 남겨놓기로 한 것이다.
‘그래, 전음이었을 거야, 아마.’
사람들이야 어찌 되었든 청명은 땀을 다 닦고 다시 검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들고 옆으로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기묘한 기합을 넣으면서.
“으에엣― 으잇!”
장내의 모두는 말을 잃었다.
* * *
운혜는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조님과 함께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왠지 피곤이 몰려온다. 그냥 드러누워 자버리고 싶었으나 눈앞의 현무 진인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험, 험, 그러니까 네 말은 어제 오전의 그 난리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쭉 잠만 잤다 이것이렷다?”
“그렇다니까요. 세 번이나 말했잖아요.”
운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현무 진인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에이, 미녀는 잠꾸러기라더만 넌 미녀가 아니잖느냐? 진짜 하루종일 잤다고?”
“...미녀가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그걸 노골적으로 말하는 건 심하잖아요!”
현무 진인이 경박해 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잘 알고 있구나! 넌 미녀는 아니지!”
“어제는 뾰로통한 것도 귀엽다고 장차 천하제일미가 될 것이라고 해놓구서.”
“그거야 빈말이지. 네가 칼을 날리고 있었잖느냐.”
“오늘도 날려 버릴까 보다.”
“.......”
현무 진인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현무 진인은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심각해진 상태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 운혜의 나이는 묘령에 가깝다.
본래 묘령의 운혜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은 팔세 때부터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무당의 장로들은 개정대법으로 그 일이 일찍 터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그 시도 역시 불완전해 십오세까지만 막아내어도 대성공이라고 했었다.
묘령까지 무사히 자라기에 대견하게 여겼건만.......
“하긴 그만큼만 해도 감사할 일이지.”
현무 진인이 읊조렸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아니다. 여하튼 어제 푹 잤다고? 허헛, 한창 자랄 때는 원래 잠이 쏟아지는 법이지.”
“그러게요. 정말 미녀가 되려나? 지금도 졸려요.”
현무 진인이 짐짓 자랑스레 말했다.
“나는 네 나이 때 오 일간 깨지 않고 잠만 잔 적도 있었지! 그래서 이렇게 피부가 좋은 것이 아니냐!”
운혜가 피식 웃었다. 현무 진인의 피부는 전형적인 늙은이의 피부다.
“피부가 좋긴, 쭈글쭈글한 피부가 좋기도 하겠다.”
“무어라?”
“아니에요. 됐어요.”
쭈글쭈글한 피부가 좋기도 했던 현무 진인은 분노했다. 하지만 워낙 조용히 말한 데다가 금방 아니라고 부정하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때 운혜가 뭔가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는 현무 진인에게 말했다.
“참, 어제 장문 사백께는 다녀오셨어요?”
“응. 네가 없어서 나만 혼났지만 무사히 넘겼.......”
말을 하다 말고 현무 진인이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나만 꾸중 듣지 않았느냐! 둘이 저질러 놓고 나만 왔다고 사형의 잔소리가 두 배가 되었단 말이다!”
현무 진인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듯 탐스럽게 자란 흰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 둘이 혼날 거 하나만 혼났으니 잘됐네요.”
“그게 아니야! 이 나이에 면벽까지 할 뻔했어!”
“그러고 보니 면벽은 안 하셨네요?”
“본래라면 해야 되지만 배분이 좀 되니까... 아, 그리고 너도 벌은 안 받게 됐다. 나한테 검을 날린 것은 무공 훈련으로써 절대 기사멸조가 아니라고 잘 해명했느니라.”
현무 진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운혜는 자신이 벌을 듣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왠일인지 어린 시절부터 같은 죄를 저질러도 자신은 꾸중을 받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끼 식사를 못하거나 마보를 반 시진 한다든가 하는, 벌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눈 한 번 깜짝하면 지나갈 만한 사소한 벌만 받았다.
생각해 보니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말괄량이가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뱀을 고아 먹은 것을 들키고도 꿀밤 두 대로 사건이 마무리된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을 부럽게 바라보던 운형 사제가 다음날 똑같은 죄로 걸렸는데 그는 꿀밤 두 대를 기대했겠지만 실제로는 면벽 칠 일을 받았다.
“음, 음, 잘됐네. 꾸중도 없고.”
잘됐다고 몇 번을 중얼거린 운혜가 졸린 눈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다. 그리고 조심스레 현무 진인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현무 진인은 긴장했다. 설마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버린 것이 아닐까?
“저기... 혹시요.......”
“응? 무엇이냐? 말해보거라.”
운혜가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한 시진만 잘게요.”
현무 진인은 안심했다. 아직은 모르는구나. 그럼 그렇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벌써 알았으려구.
“그래? 졸리면 자야지. 다음부터는 내게 말하지 않고 자도 된다. 네가 내공이 부족하길 하냐, 초식이 부족하길 하냐. 하핫!”
현무 진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흰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는 신선 같은 모습으로 ‘하핫!’ 하면서 웃으니 왠지 경박해 보인다.
“...사부님, 참 멋져 보여요.”
“응? 내가 좀 그렇지? 제자를 이렇게 편히 대해주는 사부는 나밖에 없을 것이니라.”
생각해 보니 저것이 자는 것을 허락해 줬다고 아부하는 듯하다. 현무 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부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럼 저 자러 갈게요.”
운혜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돌렸다.
현무 진인이 ‘아부 같은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운혜는 조용히 읍하고는 기지개를 켜면서 걸어가 버렸다.
현무 진인이 뒤에서 말을 걸었다.
“운혜야, 춥진 않느냐?”
운혜가 의아한 듯 몸을 돌려 현무 진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왜요?”
“그냥. 여자는 몸이 냉하면 안 좋다고 하더라.”
운혜는 피식 웃었다.
“춥진 않아요. 덥지도 않고.”
말을 마친 운혜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운혜가 태청관으로 걸어갈 때까지 현무 진인은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 * *
연무장은 아직도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분명히 무공이 없다 했다. 하늘 같은 사조―혹은 태사조―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그 말대로 따지자면 검을 허공에 띄운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것이 무공이 아니라면 신선의 선술(仙術)일까?
모두의 머리 속에 가득했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운풍자였다.
“사조님, 혹시 그것은... 선술입니까?”
그때까지도 무거운 검을 들고 낑낑대던 청명이 잠깐 신음을 내뱉더니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운풍자를 바라보았다.
“운풍 사손, 선술이라니요?”
“방금 검을... 허공에 띄운 것 말입니다.”
청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아, 그거요? 별거 아녜요. 너무 무거워서 땅에 내려놓고 땀을 닦기가 싫어서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들어올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냥 잠깐 공중에 둔 거예요.”
별게 아니긴. 굉장한 별거다.
제자들이 모두 침묵한 가운데 검을 공중에 띄운 것이 잘못인가 보다 하고 생각한 청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운풍자가 다시 말했다.
“다시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뭘요?”
“아까 검을 공중에 띄우신 것 말입니다.”
“아아......!”
청명이 여전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운풍자를 바라보았다.
“그저... 신기해서 말입니다.”
청명은 ‘그게 신기한가?’ 하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곤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눈동자가 순진무구하게 빛났다.
“아, 보통 이런 걸 잘 못하나요?”
그 눈길을 받은 운풍자는 잠시 저런 순진한 눈망울을 의심한다는 것이 죄가 되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저것은 정말 선술인가? 만약 아니라면 무공을 숨기고 무당에 잠입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으리라.
“네, 그렇습니다. 보통은... 못하지요.”
격공섭물을 보통 사람이 한다면 이곳이 바로 선계일 것이다. 당연히 보통 그런 건 아예 못한다.
“그럼 다시 보여줄게요.”
청명이 검을 다시 공중에 띄우려고 들어올렸다. 변함없이 오지게 무겁다.
“이... 이잇! 우, 운풍 사손, 이거 무거운데... 꼭 이걸로 해야 돼요?”
운풍자가 도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사조님께 검을 빌려 드리도록. 가벼운 걸로.”
황우자가 나섰다.
“태사조님, 제 검을 쓰시지요.”
청명이 ‘고마워요’ 하고 인사한 다음 검을 들어올렸다. 팔에 근력이 하나도 없는지 보통의 송문검도 무거워한다. 하지만 무거워하는 것일 뿐 청명은 아까보다 수월하게 검을 들어올린 다음 공중에 놓고 손을 뗐다.
역시 검은 일(一) 자로 떠 있었다.
“이거 봐요, 증사손. 저 잘했지요?”
청명이 황우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아이와 같은 치기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는 것이다. 눈에서 초롱초롱한 빛이 쏟아져 나온다.
황우자는 잠시 청명을 향해 웃어준 다음 운풍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사조께서 상승의 진기를 사용한 것일까?’
황우자가 바라본 운풍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사숙께서도 느끼지 못하셨나 보군.’
운풍자가 말했다.
“그럼 혹시... 그 검을 제 등 뒤로 보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기어검(以氣馭劍)!
검을 허공에 띄워 손을 대지 않고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전설 속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할 수 있어요. 잘 봐요.”
황우자는 청명이 검을 손으로 가리키며 ‘날아가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 상상과는 달리 청명은 그저 검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검이 사라졌다.
“으으음.......”
운풍자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검의 예기가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진다. 놀랍게도 검은 사라졌다가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난 것이다.
도사들은 실망이 싹 사라지며 흥분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느꼈다. 아닌 줄 알았는데 검선이 맞다.
“검선.......”
황우자가 신음처럼 읊조렸다. 곧 뿌듯함이 가슴 가득 차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아우이자 화산파의 바보는 이제 할 말을 잃게 됐다.
그때, 누군가가 청명에게 물었다. 황우자가 바라보니 자신의 사제인 황선자다.
“혹시 호풍환우(呼風喚雨)는 할 수 있으세요?”
그 말을 들은 주변의 도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황선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잘했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질문을 다 하다니, 참 기특한 녀석이다.
이번에도 도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약간 곤란한 표정이었다.
“저.......”
“모, 못하시나요?”
황선자가 긴장된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호풍환우가 뭐지요?”
청명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무공 같은 것의 이름일까 봐 다시 물어본 것이다.
황선자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말 그대로 비를 부르고 바람을 부르는 건데요.......”
청명이 그제야 해맑게 웃었다.
“아아, 네. 그런 거요? 그런 거라면 할 수 있지요.”
좌중의 모든 도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전설 속의 이야기가 사실이구나! 평생 우려먹어도 질리지 않을 구경거리가 생겼다.
“보여주십시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운풍자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저 이야기대로 정말로 호풍환우한다면 사조든 아니든 간에 신선임은 확실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더 의심할 이유가 없다.
운풍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안개 낀 무당산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운풍자는 청명을 바라보았지만 청명은 별다른 행동 없이 그저 미소를 짓고는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도사들도 청명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를 뿌린다. 동시에 바람도 불었다.
“비, 비다!”
“저, 정말 부른 거야? 이걸?”
좌중에 다시 한 번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운풍자는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비를 맞으며 침묵하고 있었다.
“.......”
운풍자가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아무 빛도 없었다. 순진해 보이던 초롱초롱함도, 연무를 방해했을 때처럼 미안함이 느껴지는 빛깔도 없었다.
운풍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들었다. 왜 나는 저분을 믿지 못했을까?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모두가 믿어도 적어도 나는 한 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모두를 위해서, 모두가 속을까 봐 경계했던 것이다. 수상했으니까. 내자불선(來者不善)이니까. 의심할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에 아직 도를 품지 못해 의심을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슬픈 일이다. 당연히 의심을 하다니! 나는 도대체 무엇을 공부한 것인가!
운풍자가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무당파 제십팔대 제자 운풍이... 사조님을 뵈옵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청명이 운풍자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날의 연무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도사들은 연무는커녕 비도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운풍자는 청명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한 직후 장문인에게 가버렸다.
청명은 신경도 쓰지 않는 일이었지만 운풍자는 스스로의 의심과 의혹, 믿음에 관해 생각하다가 사조께서 사조임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결국 장문인께 죄를 고하러 직접 찾아가 버렸다.
운풍자가 사라지고 남은 제자들은 대무당의 제자답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연무에 몰입하기는커녕 태사조를 둘러싸고 흥분을 풀어내기에 바빴다.
“태사조님! 태사조님! 어떻게 하면 신선이 될 수 있나요? 아니지. 무공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이기어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태사조님, 대단하십니다!”
“강호에 나가시는 것은 어때요? 훌륭한 강호인이 되실 수 있어요!”
“태사조님, 때가 되면 언제 한 번 더 보여주세요. 호풍환우한다는걸요. 기왕이면 제 동생 앞에서 보여주면 더 좋고요.”
마지막 말은 황우자의 말이었다.
청명은 증사손들에게 둘러싸여 그만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너무 어지러워. 한 명씩 말해주면 좋겠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니 좋은 일이었다. 그동안 할 말이 있어도 들어줄 사람을 찾지 못해 말을 잃고 살았는데 신선이 되고 보니 말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되었다. 과연 신선이란 좋은 것이다.
청명이 웃으며 말했다.
“네. 언제 시간이 된다면 동생 앞에서 한 번 더 보여줄게요.”
“감사합니다, 태사조님! 정말 감사합니다!”
황우자가 뛸 듯이 기뻐했다. 영약 같은 걸 먹어봤자 문파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니 동생은 할 말이 있어도 못하리라.
청명이 황우자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직접 보여주셔도 되잖아요?”
“네?”
황우자가 얼빠진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직접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백오십여 년 후에. 자신이 신선이 된다는 조건 하에 말이다. 지금은 당연히 할 수 없다.
“에이, 제가 그걸 어떻게 합니까? 태사조님쯤 되니까 하실 수 있는 거지요.”
“우하핫! 황우자가 호풍환우할 때가 되면 저는 천지창조를 할 수 있을걸요?”
어느 황자배 도사의 농담에 주위가 모두 웃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청명은 갑자기 심각해진 모양이다.
“아, 저... 보통 사람은... 그걸 할 수 없나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이 행한 것이라면 자신은 벌써부터 원시천존의 명을 어긴 셈이 된다. 평범하게 살아야 하는데....... 특별함을 보여선 안 되는데.......
“당연히 할 수 없지요! 신선님이시니 할 수 있는 겁니다!”
황우자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청명에게는 치명타였다. 아니, 그럼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린 거잖아!
“헛! 정말로 보통은 바람을 부를 수 없나요?”
“그럼요. 보통은 할 수 없지요.”
청명은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저기... 황우 증사손, 미안해요.”
“네?”
황우자가 멍청하게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어요. 그 약속은 취소할게요.”
“무슨 소린지......?”
청명이 약간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청명의 분위기를 파악한 도사들은 하나둘씩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황우 증사손의 동생에게는 다음에, 다음에 보여줄게요. 지금은 할 수 없어요.”
청명이 의기소침해져서 말했다. 그리고 곧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하나씩 눈을 마주쳐 가며 인사를 했다.
“저... 황우 증사손, 황선 증사손, 그리고 또... 여하튼... 저는 가볼게요.”
아직 이름을 모르는 도사들이 많았다. 그냥 한꺼번에 인사를 하기로 한 청명은 도사들을 바라보며 길게 읍한 다음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빗속을 뚫고 가는 청명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저기... 이 비는.......”
황우자가 사라지는 청명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황우자의 목소리를 들은 청명이 걸어가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하늘을 바라보는 시기에 맞춰 비가 멈추더니 먹구름이 서서히 떠나갔다. 다시 해가 비추고 안개가 끼었다.
다시 한 번 펼쳐지는 신선의 호풍환우에 모두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아... 다시 해가......!”
“이건... 정말... 정말로......!”
하지만 도사들의 감탄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청명은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앗! 큰일이다! 비를 그치게 해버렸어! 또 평범하지 않게 됐다!’
청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는 말끔하게 떠서 청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3화 순음지체(純陰之體)
청명이 호풍환우와 평범한 인간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 운남성(雲南省) 외곽에 위치한 염마산(炎魔山)에서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황 냄새가 가득한 그곳 염마산은 바로 마교(魔敎)의 본산이 위치한 곳이었다.
마교(魔敎)!
그 이름은 당금 강호인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아직도 강호인들은 이십오 년 전의 혈사를 잊지 못했다.
그때에 멸문당한 문파의 제자들은 문파를 재건하며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그때에 살해당한 피해자의 가족들은 분루를 삼키며 가슴에 한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교에서도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마교의 교주인 파월천마(破月天魔) 갈문혁(蝎文爀)이 성승(聖僧) 공진 대사(孔眞大師)와 함께 양패구상했고, 부교주 마중마(魔中魔) 설현귀(雪玄鬼)도 정파의 연합 공격에 밀려 사망하고 말았다.
심지어 십이당주 중 네 명의 당주를 제외한 모든 당주가 사망했으니 멸문의 화를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큰 피해를 입은 곳이 바로 마교였다.
어찌 그 피해뿐일까.
무공이라고는 일초 반식도 모르는 순수한 교도들은 마교라는 이름 아래 사냥당하듯 척살당했고, 십만대산의 바로 코앞까지 정파의 세력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와 아낙들과 아이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슬픔 속에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도대체 정(正)이 무엇이관데! 마(魔)가 무엇이관데!
양쪽 모두의 피해는 너무나 컸다.
마교 본당(本堂).
긴 회랑에 십이 인이 부복하고 있었다. 회랑 상석에는 태사의가 놓여 있었는데 흑마(黑魔) 서중희(曙重喜)가 근엄한 표정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당금 마교의 교주인 그는 갈문혁의 무위를 뛰어넘었다 평가받는 역대 최강의 교주다. 하지만 그 무위만큼이나 잔인한 손속 때문에 마교도조차 그를 두려워하였다.
긴 회랑의 상석에 위치한 태사의 옆에서 간사하게 생긴 중년인이 크게 외쳤다.
“보고하라!”
긴 회랑의 좌우에 시립해 있던 마교의 열두 당주가 긴장된 눈으로 서중희를 바라보았다. 서중희의 한마디에 자신들의 생사가 갈릴 수도 있음이니 그 말 하나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서중희가 아니라 태사의 옆의 교수(敎首)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서중희의 말을 대신 전할 뿐이다.
제일 먼저 비화당주(秘花堂主) 마현희(馬弦姬)가 앞으로 나가 오체투지하고 머리를 땅에 세 번 박았다. 어떤 사내라도 현혹시킬 수 있을 만한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한 비화당주는 그야말로 서시가 부럽지 않은 미녀지만 서중희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른 당주들은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비화당주 마현희가 교주를 배알하오이다.”
“.......”
서중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에 떨며 서중희를 바라보던 비화당주가 잠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서중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第一), 음화신녀(陰和神女) 갈희연(蝎喜緣)의 행방.”
낭랑한 목소리로 비화당주가 말했다.
당주들의 시선이 비화당주에게 날아가 꽂혔다. 아니, 교주께서 비밀리에 직접 내린 명이라기에 무슨 명인가 했더니 바로 저런 것이었구나! 알고 보니 교주는 음화신녀를 찾고 있었다.
“일(一), 하남성 정주(河南省 鄭州), 무림맹의 금역(禁歷), 무림맹주 남궁현우(南宮賢優)의 모옥. 확인 실패.”
서중희의 눈에서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二),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남궁세가(南宮勢家). 확인. 갈희연 ... 무(無).”
비화당주가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삼(三),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 무당산(武當山). 확인... 실패.”
“그렇다면?”
처음으로 서중희의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비화당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서중희의 심중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것이 더 두려웠다. 저런 무미건조한 얼굴로 사형을 언도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 장소 가운데 한 장소를 확인했습니다. 곧 나머지 두 장소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화당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합비에 잠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가서 난동을 부리는 게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마교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는 노릇. 이번의 잠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남궁세가에서는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리라.
비화당주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 마주한 문제는 그따위 것이 아니다. 바로 저 앞에서 형형한 안광을 빛내고 있는 교주가 문제인 것이다.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비화당주가 땅에 엎드려 머리를 쿵쿵 찧었다. 서중희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한 달.”
“...존명!”
비화당주가 머리를 찧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저것은 분명 나머지 두 곳을 확인하는 데 한 달의 기한을 더 준다는 소리일 것이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다음.”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서중희가 말했다.
비화당주가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가자 회랑에 도열하고 있던 무리 중 볼품없이 늙은 노인이 걸어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세 번 찧었다.
“염화당주(炎火堂主) 귀곡자(鬼曲子)가 교주를 배알하오이다.”
다시 서중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마당주는 조금 더 자신있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제이(第二), 소집령. 일(一), 본산의 남아 십칠 명, 본산의 여아 이십육 명 소집. 이(二), 중원의 남아 백이십이 명, 여아 백사십칠 명 소집.”
서중희가 피식 실소를 지었다.
“소집이 아닐 텐데?”
늙은 노인이 헐헐 웃음을 지었다.
“...송구하오이다, 교주. 헐헐.”
늙은 노인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은 타 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 새로 들일 제자들을 모집하는 데 서중희의 이름은 너무나 무겁게 작용했다. 염마산의 본당이 염라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팽배하게 나돌아 모두들 자식들을 꽁꽁 감춘 것이다.
중원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근에도 과거처럼 고아나 양민의 자식들을 모았지만, 많은 수의 아이가 모이지 않아 결국에는 납치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교주는 그것을 꼬집고 있다.
“그만. 염화당주의 노력은 잘 알았어. 그리고.......”
서중희가 무미건조한 몸짓으로 턱을 괴고는 턱짓으로 염화당주를 가리켰다.
“네가 호북으로 가. 가서 비화당을 도와줘. 음화신녀가 있는지 알아봐야 되니까.”
“존명!”
염화당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호북까지 먼 길을 떠나야만 한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누가 뭐래도 무당파는 당금 천하제일검파이니 무당의 도사들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밥숟갈을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서중희가 말했다.
“다음.”
“환희불(歡喜佛)을 불러 올려라!”
서중희의 눈치를 보며 태사의 옆의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당주들이 회랑 끝의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뚱뚱한 스님이 나타났다. 얼굴에 살이 덕지덕지 붙고 눈이 작은 스님이 앞으로 걸어와 서중희 앞에 부복했다.
“아미타불, 속하를 부르셨소이까?”
“아미타불이라고 하지 마. 어울리지 않는다.”
서중희가 보기만 해도 눈꼴 시리다는 듯이 말했다. 환희불이라 불린 중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더 보고 있기도 싫군. 가서 무림맹주를 암살하고 와. 괜찮으면 그 아들 목까지 따와.”
“...존명!”
“나가봐.”
서중희가 손을 휘휘 저었다. 환희불이 파리한 얼굴로 뒷걸음질쳐 빠져나갔다.
“저 자식은 살아 돌아와도 죽여. 그 일은 석마당주가 해.”
근육질의 거한 석마당주가 웃으며 부복했다. 사실 환희불은 실제로 특명을 받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교의 여자들조차 간살하는 그의 행동을 못마땅해한 교주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명을 내린 것이다. 그저 자결하라고 말해도 될 것을 명분이 없어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서중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한다. 모두들 나가보도록.”
교주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미륵 현세! 광명 천하!”
당주들이 그 자리에서 부복하며 구호를 외치고는 회랑을 빠져나갔다.
“멍청이들.”
서중희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말해도 저 멍청한 녀석들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음화신녀를 잡아오지도, 마교의 무인이 될 동량들을 구해오지도 못했다.
‘간단한 심부름도 못하는 녀석들.’
서중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양강지기가 끓어오른다. 당주들이 없으니 마음껏 발산해도 괜찮으리라.
서중희의 몸에서 열기가 솟아올랐다.
‘음화신녀 갈희연.......’
어느새 서중희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옷이 조금씩 타 들어가고 눌어붙는다. 옷이 타는 냄새가 회랑을 뒤덮었다.
‘찾아야 한다.’
서중희가 손을 들어 폈다. 손바닥에서 불꽃이 화르륵 타오른다. 서중희가 주먹을 쥐자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꼭.’
서중희의 눈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당주들은 회랑 밖으로 나서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으하! 죽는 줄 알았네! 제길, 교주 눈길만 봐도 오줌이 찔끔찔끔 새어 나오니 내 간이 이렇게 작은 줄은 몰랐소이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사내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키가 구 척이 넘어 보이는 것이 거인과 같은 형색이다.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것이 청명이 선계에서 보았던 천군을 닮기도 했다.
“이보게, 석마당주(石魔堂主), 자네만 그런 것이 아니야. 이러다가 내가 내 명에 못 죽겠구먼.”
청수해 보이는 중년인이 따라 말을 이었다. 마치 문사와도 같은 모습이나 얼굴에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바로 지화당주(知火堂主) 영진(永進)이었다.
“그러게 교주님이 너무 강해도 문제라니까요. 저러면 도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내치는 대로 죽게 생겼잖습니까!”
“...그나마 다행이에요.”
비화당주 마현희가 말했다. 그녀 역시 긴장했는지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풍만한 여인의 몸이 땀에 젖어 있자 음탕한 상상이 절로 일어나는지 석마당주 조성욱(趙晟頊)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그게 뭐가 다행이란 말이오? 본좌가 하마터면 그대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날 뻔했거늘.”
비화당주가 석마당주를 흘겨보았다.
“시끄러워요. 제가 다행이라는 것은 환희불을 처단한 방식 때문이에요.”
“헐헐, 역시 그렇지? 교주가 그래도 막무가내는 아니니 다행이야. 아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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